마태복음 28장 해석

28

구세주가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시작되어 승천하심으로 마감되는 신성한 역사의 장엄한 부분에 우리가 와있다. 여타 인간의 희망과 바람 같이 그 당시 국가의 희망과 바람은 그들이 기대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 속에서 이제 실현되고 있다. 이스라엘을 구속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많은 사람들, 그들의 슬픔이 재단장되어지고, 자기들이 바라는 축복을 만끽하리라고 생각되어 자기들의 지도자로 주님을 따랐던 많은 이들의 착각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들의 희망을 매장했던 그 무덤 속에서 어떤 분이 일어나시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 측면의 자유가 아닌 영적 자유의 정복자로서, 일시적 왕국이 아닌 영원한 왕국의 통치자로서의 측면에서 이다. 이 위대한 사건, 주님의 부활, 죽어야만 하는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이 부활은 이미 거행되었다. 일어나신 구세주에 관한 지식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을까? 어떻게 그들의 눈이 장엄한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의 심정이 그 진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들의 마음이 이 위대한 구원을 선포하도록 준비되어졌을까? 이런 저런 등등에 대해서 결말을 짓는 이 본문은 그것을 밝히 알게 하고 있다.
1.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가장 높은 측면에서 표현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육 일은 주님께서 구속의 일을 하시는 동안 거쳐가게 되는 상태들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말해지는 안식일은 엄청난 일이 완성되어 주님이 들어가신 쉼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유대교의 한 주간과 더불어 노력과 시험에 관한 주님의 생애는 마감되고, 유대교의 안식일 동안 무덤에서 쉬셔야 했다는 것, 그리고 새 주일의 첫 날 아침에 죽음에서 일어나셔야 했다는 것, 그리하여 이 주일이 기독교의 안식일, 주님의 날로 성별되었다는 것 등등은 매우 적절한 섭리라 생각된다. 옛 교회의 처방이 마지막 안식일을 맞이하고 새로운 교회의 처방이 거의 도래하는 때에 두 마리아가 무덤을 보기 위해 왔다. 십자가를 마지막까지 지켜 본 이들, 무덤에 처음 달려온 주님의 여 제자들은 말씀 안에서 영원히 우리의 시선을 끌게 되고 교회에서 존경되어야 하는 모형, “인간에게 거절당하고 경멸 당한” 주 예수를 향한 애착어린 헌신의 모형으로 기억되리라 본다. 여인들이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예수의 시신이 놓인 무덤을 보러 감이란 우리가 정신적으로 희미한 상태, 시험에 아직 빠져 있는 동안에 사랑이 중심이 되어있으되 희망은 무덤이 된 상태의 신성한 말씀을 보러가는 거듭나는 심정 속에 든 순수하고 열렬한 애착을 완벽히 그려주고 있다. 이 애착은 헌신의 순례 여행, 죽은 자 때문에 슬퍼하고 그 시신이 보존되기를 바라서 향료를 발라보겠다고 바라지만 그런 꿈은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이다.
2. 그러나 그들이 무덤에 당도했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그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격동으로 땅이 흔들리는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것은 틀림없다. 이 새롭고 전혀 기대 못한 광경이 그들 시야에 펼쳐졌고, 그 광경에는 기이한 감정과 기쁜 감정이 그들 속에서 혼동되어 교차했을 것이다. 이제 이 구절에 있는 특이한 여건이 담고 있는 영적인 취지를 생각해 보자. 지진은 교회 속의 상태, 세상 자체에 크나큰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예언의 말씀, “땅이 흔들려 전율했다. 지축이 그 정상을 벗어나는 것, 땅이 제자리에서 이동했다”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누가 천사였을까? 천사가 천사일 수 있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파생되듯, 말씀 안에 있는 천사는 주님 자신에 속하는 어떤 속성(attribute)을 뜻한다. 본문의 천사는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돌을 굴려낸다는 표현적 용도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어느 천사도 돌을 굴리기 위해 필요하지 않았을 것쯤은 누구나 아는 당연지사이다. 그 이유는 죽음에서 일어나신 주님께서 무덤을 폭발시켜 열리게 하신다 던가 혹은 무덤을 막은 돌에 구애받지 않고 나오실 수 있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구어져 있는 방을 들어가 제자들을 만나신 기록을 참조해보면 위 생각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무덤을 막은 돌이 말씀의 글자를 표현한다는 것, 말씀은 반드시 밀폐되어져서는 안된다는 것, 주님이 부활이라는 권능과 영광으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말씀의 글자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록 부활에 관한 자연적 이유가 불충분하게 여겨진다 해도 충분하고도 남는 영적 이유를 볼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천사가 돌을 제거해주기 때문이다. 이 천사는 신성의 권능 자체를 표현한다. 주님 말고 어느 누가 말씀의 봉인을 떼어 열리게 할 수 있을까? “힘센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자격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고 또 땅 아래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새 노래를 불렀다. ‘당신(어린양)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계시록 5:2,3,9). 그런데 돌을 굴려낸 천사는 굴려낸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다. 글자 안에서 안식하면서 가르치는 말씀 속의 영의 권능이 돌 위에 앉아 있는 천사로 의미되고 있다. 이는 마치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셔서 사마리아 여자를 가르치셨던 모습과 비슷하다.
3. 이 천사는 영광을 입으신 주님 자신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처럼 빛났고 옷은 눈같이 희었다.” 모습은 뭔가를 암시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모습(countenance)은 마음 또는 내면에 있는 것, 뾰족히 말해서 사랑과 선함에 관련된 것들을 상징한다. 모습이란 단어는 얼굴 같은 신체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전체 인물(person)에 관련된 모든 것을 뜻한다. 모습은 선을 뜻하고 겉옷은 선을 싸고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본문의 천사가 말씀의 권능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듯 이 천사의 모습은 말씀의 천적 수준의 의미, 그의 의복은 영적 수준의 의미, 그가 앉았던 돌은 글자적 수준의 의미를 각각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서 그의 모습은 번개같이 빛난 것으로, 그의 의복은 눈 같이 흰 것으로 말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모습이 내면의 사랑을 표현하는 바, 이 사랑은 천적 수준의 진리의 빛으로만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진리는 번개처럼 태울 뿐만 아니라 번쩍거리는 빛이기도 한 반면 영적 진리는 상대적으로 눈 같이 흰데 그 이유는 천적 진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랑의 따뜻함이 없기 때문이다.
4. 천사의 이런 면모는 두 부류의 사람, 즉 무덤을 지킨 경비병과 무덤을 보러 온 여인에게서 너무나 다른 결과를 빚어냈다. 경비병들도 지진을 느꼈고 누구도 열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그 돌이 굴려내져지는 것을 보았다. 그 반면 여인들은 돌이 굴려내려진 그 결과와 충격이 가신 후 천사가 평화롭게 돌 위에 앉아 있는 광경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경비병들이 타파된 옛 교회를 표현하고, 여인들은 새로운 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이 광경을 본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떨다가 까무러쳤다.” “떨다”란 이해성 측면에서 결과 된 변화를, “까무러쳤다”란 의지 측면에서 결과 된 변화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힘은 이해성에, 생명은 의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경비병이 느낀 두려움, 겁을 먹음이란 의지와 이해성에 공통되는 애착이다.
5. “그 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는 줄로 안다.” 여인도 두려워 했으나 사랑이 동반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 두려움까지도 결국은 던져져야한다. 이 여인들이 예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천사는 알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분을 찾는 이들은 평화라는 답을 받을 것임은 틀림없다. 설사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을 찾는다 해도 그들은 일어나신 그분을 발견하리라.
6. 그러므로 천사는 이렇게 말을 잇고 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이 얼마나 기쁜 소리인가! 이 경건하고 대담한 여 제자들에게만 기쁜 게 아니라 전 시대 모든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는 기쁜 소리 아닌가! 예수의 탄생이 만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으로 발표되었는데 그분의 부활은 어떠할까? 물론 탄생과 부활에 대한 대답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분의 탄생은 그분이 오시어 자기들의 나라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따랐던 이들까지 포함해서 기쁨이 된 소식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분의 탄생과 부활을 연결해서 보지는 못했다. 그들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두 번째 계시라 할 수 있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스도가 고통 받으시어 영광을 입으실 필요성에 관해 씌어있는 모든 예언서의 말씀을 믿는데 너무나 느린 게 인간의 심정 상태이다. 어찌됐든 여기에도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고통 받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신성화 되신다. 이는 체험에 의해서만 배워질 수 있는 진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일어나기 위해서 그분과 더불어 고통 받아야 한다. 사실 제자들의 경우 그들은 부활의 권능을 알기 전에 자신을 일으켰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주님이 과거 말씀하신대로 일어나셨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런데 “전에 말씀하신대로…”라는 이 말은 이 여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참으로 주님의 영이 작동될 경우 그분께서 당사자에게 말해둔 것은 어떤 사항이든 막론하고 모두 기억을 되살리는 쪽으로 가져다 놓게 하신다. 거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다고 여인에게 말해지는 한편, 그들은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도록” 초청되었다. 그분이 누우셨던 “장소”란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복종하게 만든 창피스런 상태(the state of humiliation)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분, 즉 구속자가 누우셨던 곳을 보는 때란 말씀을 보는 때 이루어진다. 이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그분 스스로 겪어가신 고통, 시험, 죽음을 찬찬히 생각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그분을 따라서 고통의 광야로, 시험의 게세마니로, 죽음의 십자가를 따라간다. 이 때 우리는 그분이 견뎌내신 것들을 자세히 보게 되고 그분이 치루신데 대한 우리의 평가가 얼마나 졸렬했었던지 고백할 수밖에 없고 오로지 불완전한 우리로서는 그분께 존귀와 영광만을 드릴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가 말씀에로 초대되어 들여다 보면 주님께 우리를 위해 종속되게 해주신 창피한 우리 상태가 말씀 안에 묘사된 것을 보게 되면서 동시에 가르쳐지는 바, 그분이 그런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분께서는 모든 허약함, 모든 유한함을 벗어 버리시어 완전하게 신성화 된 인성으로 일어나셨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7. 그런 다음 천사가 이렇게 여인들에게 말했다.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려라.” 여 제자란 의지 측면의 애착을 표현하는데 이 애착을 통해 주님의 사랑은 맨처음 흐른다. 남 제자란 이해성 측면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진리를 감지한다. 이렇게 남,녀라는 성별 속에도 섭리의 배열이 있다. 애착들은 시련의 상태에서 주님의 사랑의 영향 아래 잡혀있는다. 그래서 이해성이 설사 의심의 구름에 덮여있어 그 의혹에 거의 압도된 상태라 해도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그 이해성에 빛을 운반해주어 신앙과 확신이 회복되게 한다. 천사는 그녀들에게 말을 더 잇고 있다. “당신들 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터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오 하고 알려라. 나는 이 말을 전하러 왔다.” 갈릴래아란 이방인에게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주님께서 부활 후 거기에 가셨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그분이 받아들여져 인정될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마음과 비슷한 것,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이방인의 세계는 집합적으로 있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형성하고 영적 마음의 외형을 이루는 교회를 말한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옷입으신 후 신성화 되게 하신 마음도 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죽으셨다 살아나신 후 그분은 갈릴래아로 가셨던 것이다. 거기에 제자들도 가기를 그분은 바래신다. 그 이유는 인간 거듭남은 주님께서 신성화 하심의 형상과 결과이기 때문에 주님이 가시는 곳, 거기에 주님의 제자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보다 먼저 가신다. 그분은 주님 쪽으로 향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 부활하신 이후 까지 에서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고 있다. 그분의 부활은 그분이 일어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일어남은 거듭나는 심정 속에서 매 순간마다 존재한다. 이렇게 일어나시는 심정을 지니는 사람들을 생활의 선 쪽으로 인도해 가신다. 거기 생활의 선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그분을 뵙게 된다.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이들만이 그분의 진리가 진리인 것을 알게 되기 떄문이다.
8.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떠난다 또는 간다는 말은 어떤 의도나 지침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 빨리 행한다는 것은 충만 되게, 확실하게 행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시간은 상태를 의미하는 바, 이로부터 빨리, 급하게 등등은 애착과 생각의 현재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확실하고 가득한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기 위해 달려감이란 알게 하려는 애착을 의미한다.
9.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 그 여자들을 향하여 걸어 오셔서 ‘평안하냐?’하고 말씀하셨다.” 기쁨에 넘쳐 달려가는 여 제자들을 만나시는데 있는 신성한 목적은 그분이 정말 다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보게 해서 더 보증시켜주시려는 것, 그래서 그들이 이 기쁜 소식을 형제들에게 알려주되 자신들의 체험으로 확증된 사실로서 확실히 알릴 수 있도록 하여 예수 자신께서 일러 준 말 그대로를 전하도록 배려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너무나 급작스런 상황 변화로 뛰는 가슴을 안고 있는 이 여인들이 가진 사실, 즉 사랑하는 주님, 나의 구세주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확실히 붙잡았는지 가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들의 귀로 생생하게 들었으니 그들의 감정에 어떤 변화가 산출되었을까? 영적 측면의 건강, 구원하는 건강, 이는 병걸려 고통 하는 인간 존재가 있는 곳 어디서든 그분의 거룩한 입술로부터 흘러나오는 첫 인사는 “평안하뇨?” 이다. 이 사랑 많은 제자, 기쁨이 넘치고 있는 제자가 “그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하였다”는 것은 과히 이상한 일 일 수 없으리라. 혹자는 이 구절을 놓고 생각하기를, 그녀들은 그분 앞에 엎드렸을 뿐이지 그분의 몸에 기댄 것은 아닐 거라고 말한다. 이 대목과 요한복음에서 “나를 붙잡지 말아라”고 마리아에게 이르신 말씀과 일관된 관계를 갖도록 이해할 필요는 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성경의 글자 의미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타당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글자라는 것은 영(내용)을 운반해 주는 도구로서 고안되어 있는 것임을 확실히 한다면, 글자 상의 완전한 일치만이 말씀에서 영감을 얻는데 절대적 증거로서 간주하지 않게 되고, 더불어 글자 자체의 힘은 정의로운 가르침을 꼭 수반하는 게 아님도 이해하게 된다. 글자들이 가져다 주는 것 중 확실한 것은, 말들은 그 말로부터 감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감명은 사실에 대한 절대적 본성이랄 수는 없고 관계적인 의미 수준으로서 영적 의미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런 생각에서 예수의 발을 붙든 모습은 이제 신성화 하신 그분의 인성에 있는 신성한 자연적 수준의 원리를 수단으로 그분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분께 엎드림(경배함)은 자기들의 가장 순수한 애착의 근본을 그분께 돌리는 상태를 뜻한다.
10. 이제 그녀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도 천사가 일러준 말과 거의 비슷하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구절은 더 높거나 더 다른 품성에 대한 것, 더 높은 원리로부터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천사의 말과 주님의 말은 서로 다른 바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를 그분의 형제라고 부르시고 있다. 이 말은 매우 심오한 진리, 용기를 주는 진리, 위로하는 진리를 표현해 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인성을 입으시고 신성화 시킴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다는 것, 우리 뼈 중의 뼈, 우리 살 중의 살이 되셨다는 것까지 표현하고 있다. 창조자 스스로 창조물의 형태를 입으셨다. 그래서 비록 그분이 모든 불완전함, 유한한 것을 벗으셨다 해도 그분은 인간된 모든 것을 보유하셨다. 따라서 하느님이실 뿐아니라 최고의 사람이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인간성을 신성으로 만드신 신성한 인간이시므로 주님은 진실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인간이신 것이다. 이로부터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어서 그분의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제자는 믿음을, 형제는 사랑으로 연결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추상적 의미에서 형제는 사랑의 원리를, 제자는 믿음의 원리를 말한다. 본문의 경우 한 사람이 제자이자 형제로 동시에 불리고 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뵈옵되 형제로서 초청되어 그분과 더 가까운 연결로 밀접한 관계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핀 제자와 형제 관계와 유사한 대목은 종과 친구의 관계에 관한 언급이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요한 15:15).
11-15. “여자들이 떠나간 뒤에 경비병 중 몇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가 그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대성직자들에게 낱낱이 보고하였다.” 원로들이 모였지만 부활이 거행되었다는 경비병의 말을 뒤집을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경비병에게 돈을 주어 매수해서 자기들이 잠든 사이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위 이야기들이 퍼져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아무 필요 없다. 이것들은 글자적 주석들에서 발견해 볼 수는 있다. 이런 사실은 불신앙의 힘이라는 우울한 실례를 표현하고 있다. 불신앙자는 증거 부족을 변론으로 때워보려 한다. 인정되어 있는 증거에 반대하는 불신앙의 결정적 예들이 있다.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 신앙과 불신앙은 목적에 대한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우리 눈에 보이는 목적, 즉 그를 작동하게 하는 통치하는 사랑에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교회의 큰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신앙은 선행밖에 그것의 바탕이 되는 게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선행(charity) 또는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항의 본보기가 유대 지도자와 예수와의 관계에서 기이하게, 마음 아프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사항들이 실어다 주는 교훈은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지 모른다. 이런 사항들이 말해주는 바, 불신앙의 바탕은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 이해성밖에 더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제아무리 명백한 증거라 해도 심정 속의 악을 치워내는 데는 무력하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슬픈 관계가 심정에 창피함을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까? 본문에 등장하는 악의에 찬 유대 통치자들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상속받아 있는 악과 거짓들에 대한 모형 된다는 것, 우리 속 이것들은 신성한 자비를 통해 받게 되는 선과 진리를 배척하려고 한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해야 한다. 자기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것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위대한 진리를 실험적으로 조금이나마 확신 되어가는데 있어서 신실한 자들은 자기 내부로부터 봉기하는 반대에 꾸준히 마주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심정 자체에서 그분이 일어나시는 것을 반대한다는 말이다. 이 본문 주위의 역사적 부분의 세세한 고찰은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 스웨덴보리의 저술의 경우도 모독의 죄에 관련된 어떤 문단의 경우 세세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천사들은 그런 범죄에 관한 것은 말 자체도 떨려서 생각조차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16.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는 대목에 있는 유용한 내용들을 살피기로 하자. “열 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이 만남을 역사적으로 순서를 가려 본다면 이 만남은 부활 후 첫 만남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마태는 오직 한 가지 만남만을 기록하고 부활 후 가장 많은 제자가 모였던 때인 승천에 관련된 만남 등등을 다 기록하지 않고 복음서를 마감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는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이 보여준 것 같이 몇 가지 사건들에 속하는 주변 여건을 한 가지 만남의 사건 안에 모두 가져다 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글자 주의자들이 대단한 관심을 두고 있는 역사적 정밀함을 건너뛴 것으로 사료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만나셨다. 갈릴래아, 여러번 살핀 바와 같이 주님 안에 있는 신성화 된 자연적 수준의 원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인간 측면일 경우 거듭난 자연적 원리를 말한다. 이 바탕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은 만난다. 이 만남은 예수께서 이미 언급해 두셨던 유일한 만남이다.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마태 26:32). 그리고 이 만남은 산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사랑이 주님과 인간이 결합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 사랑은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원리라는 것을 표현한다. 하나를 이루게 하는 사랑에 관한 자연적 원리란 무엇일까? 주님 스스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해놓으셨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리라” (15:10). 자연적 수준의 원리, 비록 순서로 보면 꼴찌에 해당되지만 그렇다고 중요도에 있어서 꼴찌라는 말은 아니다. 연속되는 순서에는 두 가지 사항이 있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위대한 것인데 그것은 모두 첫째와 마지막째에 해당되는 것에 있다. 선한 모든 것이 목적이 되어 시작할 때 첫째가 되고, 그 시작이 선용으로 종결될 때 마지막째에 해당된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만나셨을 때 이 만나는 장소를 통해 이런 표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모든 종교는 삶에 연관되고, 종교의 생명(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17. 주님과 제자가 갈릴래아 산에서 만난 것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아마 그들이 지닌 한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그늘에 내려놓고 더 높은 견해, 더 높은 동기가 새벽같이 그들 심정과 지성에 당도했으리라 본다.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절하였다.” 이 경배도 타 복음서와의 기록과 차이점이 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차 설명한 바 있어 재차 여기서 확대해 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주님의 신성은 완벽하게 증거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이 구절을 떠받치기 위해 들이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살펴볼 게 있다. 이 구절에 고용된 단어들은 마태복음 18장 26절에서와 같은 예배, 인간이 갚아야 할 예배 종류를 표현한다는 것, 사도행전 10장 28절에서와 같은 예배, 고르넬리오가 절하자 베드로가 반색하여 사양한 예배 종류를 표현한다는 것, 요한이 경배를 천사에게 하려할 때 그가 거절하면서 예배는 하느님께만 돌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표현된 경배(계시록19:10)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천군 천사를 포함 누구의 예배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다 (계시록 5, 6장 참조). 이 구절에서나 다른 구절에서나 경배를 받는 점에서 인간과 천사가 거절한 그 존경은 인간 예배의 최고 대상이 하느님뿐이심을 실제 인정하는 대목들이다. 진정한 기독 교회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는 바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오로지 예수만이 진정한 하느님이시오 영원한 생명 되심을 알고 있다면 예배의 최고되신 분이 그분이심은 당연한 귀결이라 본다. 모든 이 각자는 자기 상태에 따라 주님을 예배한다. 본문의 제자들이 드린 경배의 품성이 어떠했든지 간에 기독교 제자들에 의한 예배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이다. 이 본문에서도 가장 중요시해야 할 사항은 제자들이 예수께 드린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이 어떤 분이시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드리게 되는 예배의 품질일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생각과 애착의 참 근본 되시는 분에 실지로 존경을 보내는 것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예배드린다 란 섬긴다 이다. 예배를 받는 분의 뜻대로 행하는 가운데, 다시 말해서 선에 관한 모든 애착과 감지한 진리를 말과 행동에서 사용할 때만이 진실로 예배드린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경배드릴 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얼른 추정되는 것은 그 때에 열 한명의 제자만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열 한 제자 중 토마 외에는 믿기를 보류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이 의심자는 우리가 신실하게 예배드릴 때 조차에서도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어떤 의심들을 표현한다. 이 의심이란 진리와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루려는 것에 모순되는 우리 속에 든 것들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이것은 지적 측면만이 아니라 애착 측면 역시 포함하여 이르는 말이다.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따라 붙어 다니는 의심들, 이것은 우리의 심정과 삶에서 주님이 승천하실 때, 또는 우리 영혼과 몸에서 신성화 되실 때만이 떨쳐질 수 있다.
18. 이렇게 제자들이 주님을 경배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계실 때 엎드려 경배하는 동안 예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고 쌍방의 관계에서 생각하면 매우 교훈적이다. 이 광경은 이런 구절을 상기시켜준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 (야고보 4:8). 가까움(nearness)이란 상태의 근접(proximity)이다. 진정한 예배란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자신을 더 가까이 당기는 것인데 이때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기 때문에 더욱 근접된다. 이렇게 근접된 제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이 구절은 참으로 가장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높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하고 유일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통치자이시라는 진리를 이 구절은 가르쳐주고 있다. 다시 말해 영적 우주, 물질적 우주, 모두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말이다. 사실 이 진리가 귀중한 이유는 이 구절에 포함된 내용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 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시다는 것, 더 설명하면 영원하신 신성은 신성한 인성을 수단으로, 신성한 인성 안에서 모든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말이다. 예수의 입술로 선포된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감명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따랐고, 그분이 시험 당하시는 동안에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다. 이제 그분과 더 가까워지게 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가진다는 것도 말하시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상태, 그분께 공감하는 우리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시는 예수께서는 우리가 사는 두 세계, 여기서의 세계, 차후 저 세계 모두에서 통치자가 되신다는 데서 이 구절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의 가치가 있는가를 알게 해준다. 이 구절은 얼른 보면 불일치 한 것이 있는 듯 여겨지지만 이에 대해 더 해야 할 말이 필요할까? 예수만이 모든 권한을 소유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은 독립된 신성한 권능을 소유하신다는 말일까? 라고 의문을 던질는지 모른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당사자의 생각 바탕에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신성한 두 번째 인물(person)이든가 단지 인간이라는 둘 중 어느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신성한 인물도 이런 권능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일 경우 더욱이 이런 권능을 지닐 수 없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 측면의 권능이 그분의 인성 측면에 주어졌다는 원리에서 이해한다면 위 주님의 선포를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인간성은 여느 인간의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몸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 이는 육을 입으실 때 하늘로부터 발표되었다. 신성의 성전이 된 몸은 지극히 높은 이의 권능으로 잉태됨으로 동정녀의 태내에서 준비되고, 같은 권능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이 인성은 신성 자체가 거하는 장소가 되도록 신성에 의해 건설된 성전이었다. 그런고로 이제 신성의 권능은 인간 안에 계신다. 마치 우리 영혼의 힘이 몸 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권능은 현존하실 때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있는 바, 이 힘이 우리와 친척 관계를 지니게 된다. 이 외에도 이 대목에는 또 다른 일반적 진리가 들어 있다. 하늘과 땅은 천국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를 영적으로 의미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 두 개의 원리와 두 개의 상응하는 부분 즉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늘인 내적 인간, 그 사람 안에 있는 땅인 외적 인간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두 부분 모두에서 권능을 가지시고 있다. 이 안에서 그분이 소유하고 있는 권능은 육을 입으시기 전, 그 두 부분의 주체되었던 권능과 대비되어진다. 하느님께서 육을 입으시기 전, 인간 안에서의 신성한 권능은 하늘을 통해 간접적으로 역사되었고, 인간은 천사를 통해 조절되었다. 그 이유는 천사가 인간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신성화 하신 이후 신성한 권능은 하느님이 거하시는 인간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역사하는 바, 그분은 인간과 더 직접적으로, 더 친밀하게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주님 자신에 의해 규율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주님은 인간으로서의 천사보다 더 가까웁게 계신다. 이 가까웁다는 말은 공간 차원에서의 가까움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본성 차원에서의 가까움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천사들 같은 수준 즉 영적 수준에서 인성을 가지고 있으실 뿐만 아니라 인간들과 같은 수준 즉 자연적 수준에서의 인성도 가지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자연적 수준의 인간성을 말할 경우 이는 신성-자연성, 우리의 것과 흡사한 인성, 그러나 창조물과 달리 완전한 창조자의 인성을 뜻한다고 언제나 이해해야 하리라.
19. 그분이 신성화 하심으로 획득하신 권능에 관해 가르치시고 이제 그들의 행동 속에 있게 될 것들에 관한 권한 위임을 전달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그리고 모든 나라들을 가르쳐라.” 이 제자들이 처음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려 파견될 때,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다만 이스라엘 백성중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는 것이었다 (마태 10:6).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온 나라들에 가라고 명령 받고 있다. 이 두 가지 위촉된 사항은 그들이 서 있는 두 가지 다른 조건과 일치하고 있다. 그들이 쏟아야 할 첫 번째 노력은 내적 측면에 부여되는 것이고, 이제 수여된 내적 측면이 외적 측면에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들이 위임받은 임무는 모든 나라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나라(nations)란 자연적 측면에서는 이교도들을 뜻하나 영적 측면에서는 선한 상태에 있는 이들, 특히 단순한 선을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들만이 진리를 바라는 마음, 진리를 받을 수 있는 빈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의미에서 나라란 선을 원리로 하는 내적 외적 또는 자연적 수준의 지성을 의미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이 선을 원리로 하는 또는 영적 수준의 지성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우리 자신 안에 진리를 받아야 하는 선이 있다는 것, 이 선에 진리가 공급되어야 그 선에 불이 밝혀져 계발되고 올바르게 인도된다는 것, 그래야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 까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의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해야만 영적 선으로 만들어져 구원해 주는 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되고 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나라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는 것이다. 이 구절이 기독인의 신앙을 받는 모든 이, 또는 기독 교회로 입장한 모든 이에게 있게 되는 전형적인 세례식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말이다. 우리가 기독교의 성례식으로서의 세례, 기독 교회가 집행하는 세례는 여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없으리라고 본다. 교회의 교리 뿐만아니라 주님의 말씀에서도 선포하는 바, 세례는 영원한 의무라는 것, 기독 교회에 소개되는 표시로서, 동시에 천국에 있는 교회와 연결을 맺는 표시로서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 더불어 물로 세례를 받는다란 진리를 수단으로, 진리의 영으로 거듭나아 가겠다는 결심에 대한 기념의 표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례는 물세례의 대칭형(antitype)이요 목적에 해당되는데 거듭남 속에서 씻어내는 것이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져 왔다. 위 세 가지는 한 분 신성한 존재에 관한 세 가지 이름들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본성에 있는 세 가지 구분되는 원리 또는 본질되는 요소를 말한다. 아버지란 본질 되는 신성(Essential Divinity), 아들은 신성한 인성(Divine Humanity),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신성한 실행(Divine Operation)이다. 조화를 이루는 느낌을 주는 용어로 말하면,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 아들은 신성한 지혜, 성령은 신성한 권능이다. 훈육되는 이들은 세 이름으로 세례 받게 되어있다. 말씀 속에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의 이름은 그 인물이나 사물의 품질을 뜻한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본다면 위 명령에 있는 교훈의 취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사랑, 하느님으로부터의 지혜, 하느님으로부터의 힘을 받아 거듭난다는 말이다. 이런 공식에 있는 의미를 더 자세히 알려면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인간의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유한한 본성 또는 자질을 하느님의 완전한 본성으로 채우거나 대체해서 신성한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분의 모양(likeness)대로 창조된 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이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형상(image)대로 창조된 바, 하느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다. 더불어 인간은 행동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의지에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성에 지혜를, 그의 말과 행동에 하느님의 일을 담아야 거듭나진다. 사랑 외에 어떤 것도 심정이 세례 받게 할 수 없고, 지혜 외에 어떤 것도 이해성이 세례 받게 할 수 없고, 진정 거룩한 삶(길) 외에 어떤 것도 사랑과 지혜의 원리를 명백하게 할 게 하나도 없다. 이것 만이 영혼의 세례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몸의 어느 부분이 되게 하리라.
20. 제자들이 나라들을 가르치고, 또는 그들을 세례하고,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준수해야” 한다. 그분이 저자되신 모든 것, 그분의 모든 말씀, 그분의 가르침에서 명령된 모든 것을 행할 때만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해진다. 주님이 위촉한 이 임무의 집행은 세례와 가르침에 뒤이어 있게 되는 여건 여하에 의존된다. 가르치는 것은 세례에 앞서 있는 것, 세례는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이다. 먼저 원리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두 번째가 그 가르침에 대한 의무이다. 다시 말해 먼저 내적 측면의 가르침이 있고, 뒤를 이어 외적 측면의 가르침이 있다. 더욱이 세례를 유발시킨 가르침은 그 원리로 세례가 있게 한 의무의 가르침인데, 거듭나는 삶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그 삶에 거룩함을 존속시키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누가 9:62). 마지막 약속은 신실한 자들에게 얼마나 격려를 주는지! 그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막 떠나시는 찰나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도 우리는 실상과 가상(real and apparent), 영적인 것과 육체적 현존 사이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이런 사항은 그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가르침들 속에서 주님 자신에 의해 그 차이를 적나라하게 서술해 놓으셨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신실한 사람들을 떠나시되 그들에게 또 다른 위로자,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심과 동시에 그들이 쓸쓸해 있도록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너희에게 온다고, 영에 관해 이렇게 말하신다. “그분(진리의 영)이 너희와 함께 계시며 너희 안에 계신다” (요한 14:17). 제자들이 받는 힘의 진짜 근원은 자기들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이다. 이 현존을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교회의 끝 날까지 그분의 백성과 더불어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구원하시는 현존이 약속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의 세상(the world)은 글자 자체로만 보아도 인간 행동의 무대, 인간의 거주지로서의 세상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는 시대(the age), 종교적인 처방(religious dispensation), 마지막이 의미하는 완료(consummation)를 뜻한다. 개인적 측면인 각 교인에 관련시켜 말한다면, 자기 시대의 끝이란 종말에 보존되는 이들과 더불은 삶의 마지막이다. 그 이유가 신실한 사람이 죽게 될 경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관을 주시기 떄문이다. 사실 주님은 모든 이의 마지막에서도 함께 현존하신다. 그분은 어떤 이로부터도 그분의 현존을 결코 철회 않으신다. 이 마지막 절을 원어의 글자대로 직역하면 더 인상적이고 더 위로받게 된다. “나는 시대의 완료가 있을 때까지, 모든 날들을 너희와 더불어 있으리라. I am with you all the days, even unto the consummation of the age.” 그분은 그분의 교회와 함께 계시면서 그분의 백성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진리로 계발시켜 주시기 위해, 그분의 사랑으로 감화되도록, 그분의 능력으로 받쳐주시기 위해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교회가 하강국면에 들어서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계속 같이 하시되 그 교회가 그분을 거절하여 끝을 맺을 때까지이다. 그래서 그 교회 스스로 자기들에게 끝을 내리게 된다. 교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가 거룩한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았었다 해도 그가 타락 쪽으로 기울고 세상의 비천한 요소 쪽을 선택해도 주님은 그의 상태가 스스로 끝을 맞이할 때까지 언제나 그와 함께 해주신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삶이 그분의 영의 영향을 받고, 말씀 속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성별되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아는 바 여기서의 우리 여정이 완료 된다 해도 흔히 말하는 파멸의 끝장을 보는 게 아니라 그분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되는 그분의 집이 우리의 집이 되리라.
아멘. 이 단어는 비록 원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교회의 응답으로서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첨가되는 경우가 많다. 예수가 시간 안에서, 영원 안에서 우리의 몫이 될 것이라는 이 신성한 약속의 성취를 확고히 하기 위해 바라고 기도하고 노력을 경주하자.

마태복음 27장 해석

27

1. 베드로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킨 이른 아침, 불신앙의 고집불통의 인간인 유대 지도자들은 정당하신 분을 살인자로 어떻게 몰아 부칠 수 있을까 작당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모든 대성직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대성직자란 의지 속의 악, 백성의 원로란 이해성 속의 거짓, 그들이 음모함은 예수라는 인물 안에 있는 천국적 선함을 파괴시키려 결탁하는 것을 뜻한다.
2. “그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우리의 악한 애착이 말씀을 억누르고 좌지우지하려 들 때 우리는 예수를 결박하는 것이 된다. 자기 고집과 자기 지혜에 말씀 속의 지혜를 복종시키려들 때가 이런 경우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결박해 끌고 가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다. 로마 사람과 이방 사람, 빌라도는 자연적 이성 또는 자연적 수준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서도 알 수 있는 바, 빌라도는 유대인보다는 품성면에서 더 나은 특성을 지녔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사악한 음모에 도구가 되도록 자신을 빌려주고 있다.
유대교 의회는 예수는 죽어 마땅하다고 이미 선포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한 터라 성직자들은 예수를 죄인으로 판결하게끔 로마 정부를 유인해낼 수 있는 계략을 궁리해내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선 예수를 그에게 끌고 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결박했다는 것은 부활 이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다음의 말씀, “네가 젊었을 때에는 자기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나이를 먹으면 그 때에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요한 21:18) 라는 구절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의미와 형체를 표현해준 행동이었다. 비록 이 인용 구절이 베드로의 죽음을 자연적 차원에서 말했지만 그럼에도 그 구절의 영적 의미에는 교회의 끝에 있는 신앙의 상태(condition)를 묘사해놓고 있다. 신앙은 젊은 시기에 자유로웠다. 그러나 노령기의 신앙은 결박된다. 즉 이해성은 순종 쪽으로 환원되어져서 교회가 뜻하는 방향으로 이끌릴 뿐이다. 예수를 결박한 것은 말씀 자체가 인간 의지에 복종 당하는 쪽으로 가져다 놓기 위해 묶는 것을 표현한다.
3.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유다 역사의 귀착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성직자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었다.” 유다의 역사는 베드로의 역사와 대조된다. 두 사람이 회개한 결과와 그 본성은 얼마나 다른지! 베드로의 회개는 겸손했고 새 사람이 되었고, 유다의 회개는 자살을 초래했다. 유다와 베드로는 각자가 표현해 준 품성 뿐만 아니라 개인적 역사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유다는 유대 교회를 표현했고 베드로는 기독 교회를 표현했다. 유다의 회개는 후회할 필요가 있는 회개를 표현했다 (고린도후 7:10). 유다의 회개는 주님께서 심정을 굳게 하고 이해성을 어둡게 한데 반대되는 전환(conversion), 모독을 수단으로 해서 이어지는 전환, 영혼 위에 더 큰 정죄만을 있게 하는 전환이었다. 유다가 만들게 된 위의 고백, 또는 돈을 되돌리는 행동은 상태의 변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계시 차원이다. 은전 서른 닢을 되돌림은 유대 교회가 악한 용도에 충당함으로 모독되어버린 진리를 그 교회에 되돌리는 것이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돈 같아서 악한 자가 소유하던, 선한 자가 소유하던, 또는 선한 용도에 사용했던, 악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그 자체는 언제나 동일하다. 교회가 종말을 맞이할 때, 또는 개인이 심판받을 때 진리의 지식은 이 법,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가진 듯 보이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에 의거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다.
4. 유다가 고백했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이는 교회의 상태가 폭로되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교회 자신의 입이 그 교회가 말씀을 위반하고 모독한 바 주님을 배반했다고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다. 이런 유다의 고백에 대성직자와 백성의 원로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 이 사람들은 예수의 순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피의 대가를 지불했는 바 그 피를 흘리기로 작정했다. 이들의 무가치한 대리인은 자기 질문을 자기 속에로 되돌려야만 했을 뿐이다. 거짓 이해성이 빛의 미광을 꿰뚫으려 시도할 때 오히려 악한 의지에 반항한 결과만 된다는 것, 발견하는 것이라곤 무시당하는 것, 아무 보상도 없다는 것, 스스로 뒤로 넘어져 깨지는 것뿐이다.
5. 대성직자와 백성의 원로들에게 돈을 되물릴테니 예수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응낙하지 않자,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이해성 안에서 모독된 진리가 의지 안에 결박되고 정죄당해 있는 신성한 진리를 해방시킬 수 없다. 그 진리는 성전에 내동댕이쳐져 임자 없는 보물이 되고 말 뿐이다. 유다가 자기 손으로 목매달아 죽었는지, 양심의 가책에 희생자가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후자의 견해는 사도행전 1장 18절에 있는 유다가 죽는 모습에 대한 서술을 지지하여 있어진 것 같다. 복음서가 기록한 유다의 죽는 방법은 어쨌든 교살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게다가 이는 영적 의미가 요구하는 전부이다. 그 이유가 목매달아 죽음, 교살, 질식케 함, 이런 모두가 암시하는 바 이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연결을 끊음, 동시에 양쪽 모두 파괴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목은 우리 마음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사이를 연결시키는 매체를 의미한다. 유다가 목매달았다는 것은 유대 교회에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결합이 깨어졌고, 이로 인해 그 교회는 깡그리 파괴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6. “대성직자들은 그 은전을 주워들고 ‘이것은 피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되겠소’ 하였다.” 신명기 23장 18절의 모세의 법이 위 구절과 똑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법에 근거해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성직자가 유다에게 주었던 그 돈은 피의 값이었다. 이 돈은 예수를 죽게 하는 사악한 목적을 수행하라고 주어졌다. 이 주님의 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유대인들은 악을 위해 주님의 피가 흘려지게 했다. 주님께서는 이를 선을 위해 허용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을 말하게 되는 그분의 피흘림은 세상에 대해서는 생명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값은 유대교의 헌금궤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명령되어져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죽음을 손에 넣음으로 대성직자가 세상의 구속을 획득하는 대리인까지 되고 싶지 않았었듯이 주님의 피값에 대한 마지막 처리 방안에서도 그들은 타인이 주님의 구원을 담는 그릇을 표현한 행동을 자신들도 모르게 해냈다. 다음 구절에서 언급된다.
7.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옹기장이의 일은 거듭나는 일을 의미한다. 이는 예레미야 18장 4절로부터 명백하다. “신성한 명령에 따라 이 예언자는 녹로를 돌리며 일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옹기장이의 집에 내려갔다.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다가 제대로 안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창조자의 손에서 근원된 모든 사람 각각은 훼손된 그릇이다. 그러나 재 창조자의 손으로부터 오는 모든 이 각각은 또 다른 그릇, 옹기장이에게 좋게 비쳐지게 만들어진 그릇이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그분의 형상으로 새로워졌다. 주님의 피값으로 유대인에 의해 주어진 은전(silver)이 옹기장이의 밭을 사도록 주어졌다는 것이 표현해주는 바, 진리는 유대 교회에 밝히 알게 나타났다는 것, 그런데 그 교회는 그 진리를 주시게 된 참 취지를 파괴되도록 뒤집었다는 것, 그래서 이제 그 진리가 이방인들에게로 넘겨져 과거 유대인들이 고집부려 거절했던 거듭남의 수단으로 이방인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옹기장이의 밭이란 거듭나기를 바라고 그럴 능력을 보유한 이방인 교회를 말한다. 이런 생각은 옹기장이의 밭을 구매해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말에도 포함되어있다. 매장의 첫 번째 의미는 부활이다. 이는 죄의 죽음에서 정의의 삶으로 가는 부활이다. 유대인들이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매장지로 삼게 된 그들의 의도는, 저주받은 도구는 저주받은 용도에 충당되어야 한다는 것, 버림받은 자나 결격자의 매장지를 설비해두어 자기들의 육체와 방황자의 것과 혼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 이런 등등의 의도가 거기에 깔려 있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피값이 위와 같이 경멸된 용도에 바쳐진다는 것은 이 얼마나 강한 표현이 있는지! 낯선 자는 예수 안에서 친구를, 그분의 피에서 구원을, 그분의 부활에서 생명을 발견한다. 주님의 피값은 그분의 공로와 정의이다. 유대인이 무가치하게 여기고 경멸하는 것들이 낯선 사람(stranger), 즉 천국에서 자기 집을 발견하려 애쓰면서 지상 위에 있는 영적인 체류자가 되는 사람에게는 귀하고 귀한 것들일 뿐이다.
8.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아겔다마(Aceldama), 옹기장이의 밭이 얻은 이름이다. 이 이름은 역사적으로 연계해보면 격렬한 폭력을 생각나게 하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생각나게 한다. 구세주의 피의 의미로 납득되는 모든 것은, 기독인의 체험에서 실감되는 것 같이 “피의 밭”에 표현되어져 있다. 이런 측면, 주님의 시험, 고통, 죽음, 저런 측면, 그분의 저항, 승리, 그분의 생명, 이런 모든 것이 그분의 피의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그분의 피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이다. 기독인이 그분의 진리를 통해 고통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그는 그분의 승리와 생명도 공유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다” (로마 6:5). 그러므로 피의 밭은 거듭남의 밭이고 언제나 그렇게 계속 존재할 것이다. 복음서 기자가 “…오늘날까지”라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밝히 알게 한다는 말이다. 말씀의 경우나, 주님의 경우나 오늘(today)은 영원이다. 영원과 영원함에 관심을 두고 말할 경우 “오늘날”이란 시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상태에 관련 맺고 있다. 주님의 피값으로 매입되어진 거듭남의 상태는 끝이 없는 세계, 영적 낮선 사람에게 가능할 것이다.
9-11.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정한 한 사람의 몸 값, 은전 서른 닢을 받아서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대로 옹기장이의 밭값을 치렀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옹기장이의 밭을 구매한 것은 예언의 성취였다. 이런 곤란함에 대한 설명은 많이 제공되어왔다. 노블(Noble)은 이렇게 생각헸다. 이 예언의 주제는 예레미야, 슬퍼하는 예레미야에게 소속되어야 적절할 것같이 보이나 이 말씀은 즈가리야의 입에 놓여졌다. 이는 이 예언이 있어야 할 올바른 위치를 할당하는 복음서 기자의 영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원문은 비록 통째로는 아닐지라도 위와 같이 고대 사본에서 발견된다. 우리로 그럴듯하게 합당한 추측 쪽으로 기울게 하는 생각들이 있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원래 예언자의 이름이 없었을 것이고 이런 식,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것이 성취되었다”로 읽혀지고,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초기의 어떤 복사자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성직자들이 “모여 의논해서” 협의된 사항이 한 세기 전 영감된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예언이 글자라는 세부사항에서까지 성취되도록 결과되었는데 대성직자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놀랠만하다. 그분을 평가한 값 은전 서른 닢은 유대 백성이 주님을 판정한 값이 매우 적은 가치였음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성직자들에게 미움을 당했다. 대성직자와 유다가 주님의 몸값을 흥정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유대 백성이 주님과 그분의 구속하심에 관한 그들의 최대 평가가 삼십이란 상징적 숫자로 무의식적으로 있어졌다. 30이란 숫자는 말씀 어디에서 등장하든 비교적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된 이스라엘 후손이 주님의 공로와 구속해주심을 평가할 경우 그 가치가 매우 적었다. 이런 유다에 관한 주변 모습을 기록한 뒤 복음서 기자는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진 예수께로 되돌아가고 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자 총독은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은 인정함의 한 가지 답변 형체이다. 주님께서 상대방의 판단을 자기 편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그분의 주장을 설명하거나 조정하려 드시지 않았다. 그분은 왕이셨다. 그러나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분은 일시적일 뿐인 왕이 아니셨다. 그분은 유다 왕국으로 표현된 교회의 영적 유대인의 왕이셨다. 주님은 왕과 성직자로 불리신다. 그분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는 왕이시고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는 성직자이시다. 진리는 통치하고 선은 섬긴다. 그분이 유다인의 왕이라 불리실 경우 이는 선에 바탕을 둔 진리를 의미한다. 솔로몬의 왕국 이후 두 왕국이 있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교회에 있는 신성한 진리의 정부 형태를, 유다 왕국은 교회에 있는 신성한 선의 정부 형태를 표현했다.
12-14. 주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셨으나 “대성직자들과 원로들이 고발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성직자는 유대인이였고 빌라도는 이방인이었다. 유대 교회 안에서 신성한 진리의 소리는 이제 영원히 침묵 속에 파묻혔다. 이방인들, 새로운 교회를 형성할 이방인들, 신성한 진리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 비록 그들이 아직은 이 소리를 직접 들을만한 능력은 못가졌다 해도 그들에게 발표된다. 유대인의 부정적인 상태는 그들 사이에 있어질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소리를 잠잠해지게 했고, 이방인의 긍정적인 상태는 비록 그들이 아는 한도 만큼에서 이지만 그들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대성직자와 원로들이 예수를 고발해댈 때 빌라도는 그 고발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을 질문했고 또한 긍정적인 대답으로 인정되었다. “빌라도가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 죄목을 들어서 고발하고 있는데 그 말이 들리지 않느냐?’ 하고 다시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총독이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단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학식이 있는 비신앙자가 말씀을 고발할 때, 또는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를 고발하는 견해를 신앙자가 갖고 있을 때 의심으로 인해 혼란을 일으키는 바 즉각적이고 직선적인 대답을 요구하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가 빌라도이다. 그러나 그 대답이 허용되지 않았을 경우 더욱 당황해질 것인 바 “총독이 매우 이상하게 여긴”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위 주님처럼 말씀도 비신앙자의 도전을 응낙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으로 자기 스스로 신념을 가져보도록 유보하신다. 마치 자기 구원은 자신이 닦도록 유보되는 것과 같다. 이런 신념은 두려움과 떨림을 가진 부분이다. 빌라도가 아직 자신을 위해 수행해내지 못한 교훈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보게 되리라.
15-17. “과월절에 총독은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로마 정부가 유대 신하들에 하사하는 한 개의 특전을 사용함에서 이 백성들이 예수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여실히 나타난다. 어쨌든 이런 특전은 잘 사용할 경우 백성이라는 집단이 오히려 성직자들의 목적을 좌절시켜 버릴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 당시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빌라도는 모여든 군중에게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하고 물었다.” 이 특전은 백성들에게 죄 있음과 순진, 악과 선 중 하나를 자유로이 선택할 기회를 부여했다. 그들은 악한 자를 선택하고 선한 자를 거절했다.
18. 빌라도가 이렇게 제공한 이유는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 온 것이 시기함 때문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바 그들이 예수를 놓아달라고 외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시기함(envy)은 열정 중에서 지독하게 나쁜 종류의 하나이다. 미워함(hatred)은 과실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시기함은 우수함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시기함은 이유도 없는 미워함이다. 예수를 시기함은 그분이 성직자적 측면에 바탕을 둔 반감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선하셨기에 백성들의 눈은 악했다. 이는 유대 통치자가 예수를 미워한 마지막 형체이다. 이는 진리뿐만 아니라 예수로 체현된 선을 이유도 없이 반대하는 가장 깊고 심각한 반대를 함축한다. 시기함은 가장 나쁜 종류의 혐오함, 가장 깊게 뿌리 박은 혐오함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습니다’ 하고 당부하였다.” 이 꿈은 메시아에 관련되어서 직무를 수행하려는 사람에게 높은 데로부터 오는 몇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신성한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금 그의 아내는 빌라도에게 부정한 판결을 할는지 모르는 어떤 행동을 자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하는 줄거리가 있다. 어둠의 권세가 예수를 대적하도록 인간 행동의 추세를 완전히 한쪽 방향으로 몰아 거의 승리한 듯 여겨질 정도로 예수만이 홀로 이 마지막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분을 박해했다. 유다는 그분을 배반했다. 베드로는 그분을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도망했다. 무관심한 로마인들은 그분을 죽이려드는 그분의 적들의 손 안에서 장단을 맞추고 있다. 악한 세계의 축적된 사악함을 위엄과 온유로 견뎌내는 영웅의 도덕적 장관을 보여주도록 온갖 음모를 궁리하느라 인간 재능이 자기 힘을 남용하고 있다. 아마 자연적으로 이와 비슷한 경우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주님께서 경합하셔야만 했던 영적 요소들의 자연계에서의 형태이다. 이로부터 그분은 인류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게 되었다. 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죄 아래 포함되기는 마찬가지라는 성경 자체의 진리를 본보기화한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아직 적이 되어있는 동안이라 해도 그분의 아들이 죽음으로 하느님과 재회하게 된다는 것까지 아울러 예증되어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죄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유대인은 계시라는 명백한 빛에 죄를 지었고 이방인들은 전통이라는 것, 간접적인 전달로 이루어진 희미한 빛에 죄를 지었다. 이방인에게는 진리를 사모하는 애착이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각이 있었다. 진리에 대한 이 애착이 빌라도의 아내이다. 진리의 탁월함을 희미하게 지각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빌라도 같은 이방 세계의 지성은 의지의 더 나은 애착의 영향하에 행동할 만큼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방인들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본성이 세상의 구속이 축출되는 대이변에서 한 몫을 해야 할 필요성은 의심할 바 없다. 이런 이방인의 인간성이 빌라도로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견뎌야 했던 고통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짓기에 목말라하는 유대인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양심이 이방 세계 안에 있음을 보여 준다.
20-23. 빌라도가 예수이든 바라빠이든 석방할 자를 선택하라고 백성에게 유보하자, “대성직자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죽여달라고 요구하게 하였다. 총독이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놓아 달라는 말이냐?’ 하고 묻자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소리질렀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예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자 모두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이 백성들은 바라빠를 석방하고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빌라도가 더 묻는다. “‘도대체 그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으나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이 백성들의 선택이 장엄한 선택의 기회라는 수준에서 생각해 볼 때 빌라도가 제공한 선택의 말은 마치 과거 모세가 했던 말을 연상하게 해준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선, 죽음과 악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생명을 선택하라. 너와 네 자손이 살리라.” 이런 생명과 선이 개인적으로 주님에게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분이 지금 그들 앞에 서있다. 바라빠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담겨있다. 거기에는 죽음과 악이라는 주님과 반대되는 것들이 있다. 죄 없는 구세주보다 살인자를 사악하게 더 선호한 것은 선보다 악을, 생명보다 죽음을 선택한 셈이다.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라는 것은 그들 심정 속의 악은 찬양되어야 하고 선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정의와 덕행이라는 원리를 뒤집은 유대인들 안에 들어 있음직한 위와 같은 광기서린 본성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공통된 본성이어서 상속받고 있는 바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영적 차원에서 그런 모습의 재현이 우리로부터 서도 재현될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상념해야 한다. 내적 인간이 악을 의도한다면 외적 인간이 이를 수행하는 것은 그 얼마나 쉬운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한 개의 공통된 목적 아래 연합되고 한 개의 목적에 의해 활동되는 바 그 목적이 악한 것일 경우 그 선택은 악일 수밖에 없어 선은 뒤로 처지고 만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놓아주시오”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는 외침, 자신 스스로 영적 질서에 역행하는 이들의 외침, 선 대신 악을, 악 대신 선을 놓는 이들, 빛을 위해 어둠을, 어둠을 위해 빛을 놓는 이들의 아우성소리이다.
24. “빌라도는 그 이상 더 말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가 보였으므로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빌라도의 이 행동은 의로운 사람을 죄 있다고 하는 범죄에 자신은 깨끗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상징적 방식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비유적 의미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비유적 차원에서 자신이 결백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손을 씻는 것이 영적 차원일 경우, 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생명이 악으로부터, 영혼이 죄 있음으로부터 순수해지는 것이다. 물은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고 손은 의지가 행동 안에서 명백히 나타나듯 힘에 대한 상징물이다. 시편 기자가 읊는다. “야훼여, 손을 씻고 죄 없는 몸으로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겠습니다” (26:6). 이 구절에서 씻는 행위는 순수함을 단순히 주장하는 게 아니라 순수해지는 행동을 표현한 것이다. 빌라도는 진리 없이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충직할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선함 없이 진리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쉽사리 짓눌린다. 단순히 선 가운데 있는 이교도들은 더 문명화된 이웃들 속에서 미덕보다는 악덕을 더 빨리 배운다. 그 이유는 그들의 본성이 악에 기울려들기 때문 뿐만 아니라 악덕과 미덕의 품성이나 구분을 지어주는 총명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의로운 사람으로 보았으나 그를 죽이려드는 결정된 목적을 수행하도록 시기하는 유대인에게 그를 내어주었고 대신 자신이 허용한 범죄 행위에 자신은 무죄함을 손을 씻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에 법도 그의 양심도 동의하지 않는다.
25. 빌라도가 무고한 자의 피를 보는데서 한발 뒤로 물러선 반면 유대인들은 그 반대였다. 총독이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라고 말하자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이 얼마나 끔찍한 저주인가! 이 얼마나 꼼꼼하게 성취된 일인가! 유다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정의의 거룩한 분을 협잡꾼으로 계속 취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메시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있다고 계속 찾고 있고, 다른 나라 보다 자기 나라가 더 우월하다고 자찬하고 있다. 왜 유대인들이 위 구절 같이 범죄의 책임은 저와 자기 자손들에게까지 전가한다고 했을까? 죄가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내려온다는 것은 이런 영적인 법칙, 심정에서 확증된 악은 그 심정에서 파생되는 모든 애착과 생각 안으로 내려오고야 만다는 영적 법칙을 표현하고 있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주었다.” 이제 예수께서 당하시는 모욕은 죽음으로 종결될 때까지 계속된다. 육을 입은 말씀으로서의 예수를 취급한 일련의 모든 줄거리는 씌어있는 말씀이 유대인의 손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씌어진 말씀이 취급당한 것을 표현해 준다는 측면에서 주님이라는 인물에 가해진 잔인한 무례함과 조롱을 이해하는데 그 관계 측면에 신성함이나 그 힘이 덜한 듯 여겨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씌어진 말씀과 육을 입은 말씀의 본체, 즉 씌어진 말씀은 신성한 지혜가 계시된 것이고 육을 입은 말씀은 신성한 지혜가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될 때 위 주제가 이해될 수 있고 그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된다. 그분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행하는데 실패한 것을 인간을 위해 해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인간이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 율법, 즉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오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는 바 그분의 삶은 씌어진 말씀이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그분의 삶은 실제의 계시였다. 그분의 생애 (그분의 가르침까지 포함해서)는 유대 교회에 있는 잘못들에 대한 살아있는 논박이고 그 속의 악에 대한 살아있는 책망과 정죄하심이었다. 이런 바탕에서 주님께서 유대인의 수중에서 당한 일들은 말씀이 취급받은 사례를 표현했다. 그분께서 유대인들의 악이 초래한 결과를 참아내심은 그들의 죄악상을 짊어지시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주목해둘 것은, 주님의 마지막 고통은 로마인에 의해 합법적으로 가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유대인들은 형법을 다룰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에 의해 고뇌 받은 셈이다. 그 이유가 예수께서 참아내신 그 모든 것의 발상지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에 관해 이미 언급하신 대목이 있다. “그들이 나를 이방인에게 넘겨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리게 할 것이다” (마태 20:19). 이방인인 로마인이 조롱과 채찍질을 했다 해도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당하신 무례함의 많은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죄가 있다. 이에 관해 우리가 읽었는 바, “빌라도는…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여기서 언급된 채찍질과 십자가형은 일반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종류를 표현하고 있다. 이에는 두 종류, 즉 진리에 거짓이 반대하는 것, 선에 악이 반대하는 것이 있다. 십자가형은 악에 의해 선이 파괴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의미되는 까닭은 채찍에 달린 끈이 거짓을 의미하고 십자가를 만든 나무는 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두 가지 무거운 처벌 형태가 있다. 돌로 쳐죽이는 것과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다. 전자는 거짓을 가지고 파괴하는 것을, 후자는 악을 수단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27. “총독의 병사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전 부대원을 불러 모아 예수를 에워쌌다.” 병사의 순수한 의미는 진리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같이 그 반대적 의미일 경우 진리를 공격하는 것, 그 자체 악의 거짓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병사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진리가 거짓에 넘겨져 복종 당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일부가 아닌 전부가 복종 당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전 부대원이 예수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예수를 끌고 간 총독 관저란 모든 거짓이 집합된 이해성을 의미한다.
28.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기고 대신 주홍색 옷을 입혔다.” 은총의 주님이 불경한 놀림감이 된 이런 사실은 너무나 가슴 아픈 사항이지만 이를 통해 놀린 자들의 인간성 안에 깊이 잠긴 부패함,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우리도 한 몫 책임져야 하는 인간적 부패함을 깊이 상고해보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또한 그 당시 존재했던 말씀에 관계되는 인류의 영적 상태, 많든 적든 모든 자연적 인간의 상태까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기회가 된다.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를 표현한다. 병사들이 예수를 발가벗김이란 말씀에서 글자를 박탈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글자에서 그 의미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 다음 자기 자신들의 의미로 대체하는 것이 “주홍색 옷을 입힌”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주님에게 주홍색 옷을 입힘으로 그들은 왕권적 차원에서 조롱을 해 모욕을 가했다. 진실로 주님은 왕이시다. 그 이유가 진리가 왕이기 때문이다. 정녕 그분은 유일한 왕(the king)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유일한 진리(the truth)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주님을 욕되게 하고자 가한 놀림감의 왕권은 진리를 비웃는 것, 진리 대신 거짓으로 채우는 것이다.
29. 이 외에 또 놀림감을 삼고자 가한 짓이 있다.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은 수많은 기독교 화가들로 하여금 온순함의 고통을 그려내는데 그 착상을 제공했다. 고통이 제공하는 자연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가 가치 비중에서 적을 리 만무하다. 말씀에서 “가시”는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을 따르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땅이 타락한 인간 때문에 저주된 후 생산한 첫 번째 산물이 가시이다. 지금 이 가시가 사람의 아들의 이마에 꼭 맞는 왕관이 되어 놓여져 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출생된 원리의 쾌거였다. 사람의 아들의 머리는 말씀에서 계시되었고 주님에게서 명시된 바 같이 첫 번째 원리 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왕관은 지혜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지혜보다 자기 감각적 총명이 더 우월하다고 으쓱댈 때, 이런 불경한 조롱으로 영광을 돌릴 때 우리는 사람의 아들에게 가시로 엮어 관을 씌우게 된다. 병사들은 왕권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분의 손에 갈대를 쥐게 했다. 갈대(reed)는 영이 없는 말씀의 글자를 상징하는 바 갈대는 매우 특별한 상징물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군중들이 세례자 요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을 표현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렇게 보여주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말씀의 글자는 교리라는 갖가지 바램의 놀림감이고 인간 견해의 모든 호흡이 그 안에 스며든다. 사람의 아들의 머리가 첫 번째 원리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는 반면 그분의 손은 마지막 번째 원리에 있는 신성한 진리, 즉 말씀의 글자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말씀의 최말단 의미 안에서 신성한 진리는 그 충만함과 권능으로 있는데 이 충만과 권능이 “손”으로 상징되고 있다. 최말단(ultimate)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주님의 왕권(sceptre)이다. “당신 나라의 왕권은 정의의 왕권입니다” (시편 45:6). 그분의 왕권만이 참되고 직바르고 공정하게 지배한다. 최말단의 진리는 주님의 힘의 지팡이이다. 이를 가지고 그분은 적들 가운데서 왕권을 행사하신다 (시편 110:2). 그러나 왕권의 표시로 사람의 아들의 손에 갈대가 쥐어진 모습은 실현성 없는 권능의 형체를 지닌 신성한 말씀을 뜻한다. 따라서 갈대는 그분에게 있는 권능 대신에 말씀 위에 놓인 인간의 권능을 상징한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 확인된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 하고 떠들며 조롱하였다.” 좋은 의미일 경우 유다인은 주님을 사랑함을 통치 원리로 삼는 교회를 표현한다. 이럴 경우 유다인의 왕 되시는 주님은 심정과 생활을 통치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유다인의 왕이라고 예수에게 경의를 표하여 불경하게 놀린 것은 주님을 사랑함, 그분의 말씀을 존경함이라고 말하되 심정 안에는 그에 대한 경멸과 미움밖에 없는 것을 표현한다.
30. “그리고 그에게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얼굴에 침을 뱉는 행동은 경멸에 관한 가장 결정적인 표현이다. 모세의 법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떤 사람이 죽은 자기 형의 아내를 취하기를 거절할 경우 형수는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라(신명기 25:9)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영적 의미는 이러하다. 결혼의 법칙을 따르기를 거절하는 사람, 다시 말해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법칙을 거절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내적, 외적 측면 모두에서 순수한 선함과 진리가 결여될 것이라는 뜻이다. 주님의 얼굴과 머리는 사랑과 지혜 측면에서 말씀 즉 가장 깊은 측면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는 것은 말씀에서 계시되었고 예수라는 인물로 나타난 바 되었으며 삶으로 그 본보기를 보여준 신성한 선함과 진리라는 가장 높고 가장 순수한 원리에 가해진 폭력과 경멸을 표현한다. 이미 살핀 바대로 갈대는 영이 없는 말씀의 글자를 상징한다. 갈대로 주님의 머리를 때렸다는 것은 영에 반대되게 글자를 돌렸다는 짓, 말씀의 내적 측면과 상반되게 외적 측면을 틀어 놓은 것을 뜻한다. 이는 신성한 질서를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짓이다.
31. “이렇게 희롱하고 나서 그 겉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도로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러 끌고 나갔다.” 주홍색 도포를 벗기고 주님의 옷을 입힌 모습이 마치 병사들이 빼앗은 것을 도로 주고 그들이 했던 짓을 원상태로 돌린 듯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잔인한 행동 순서 중 한 부분을 끝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은 또 다른 순서, 더 큰 잔인함을 개시하고 있다. 조롱하는 대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분은 두 번째로 옷이 벗기워져 그들이 찢어 나눠 가지게 된다. 주님 자신의 옷을 그분 위에 입힌 것은 오로지 말씀에서 영적으로 중단된 것을 자연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런 종류의 모독에 말씀을 복종케 한 다음 저런 종류의 모독에 또 다시 복종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러 끌고 나갔다.” 끌고 나간 것은 오류들이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악들이다. 주님이 끌려 나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은 십자가로 가는 어두운 단원 중 하나를 표현하는 바 이를 통해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시험 가운데로 인도되시는 것, 이 시험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에서 근원 되었다는 것, 자연적 의지가 그분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육체라는 바깥쪽 측면만 볼 경우 그분은 로마 병사에 의해 끌려갔다. 그러나 이런 바깥 모습은 내면이 끌려감에 대한 원형이요 그것의 결과일 뿐이다. 여기에 어둠의 모든 권세가 구속자와 구속하심이라는 대 역사를 뒤집겠다는 마지막 야망의 성공 여부가 걸린 위기 속으로 그분을 밀어붙이고 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러 끌고 감에서 새로운 매체가 소개되고 있다.
32. “그들이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네레 사람을 만나자 그를 붙들어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원래 이런 형벌의 집행은 진지 밖 멀리 떨어진데서 거행되었는데 여기서도 그와 비슷했다. 예수에 관한 이런 사실은 신약 성경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 13:12). 이런 실제가 있게 된 이유는 진지와 성읍이 천국을 의미하고 성 밖은 지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대한 처벌이 성문 밖에서 집행된 것은 성문 밖이 영적인 영원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성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주님의 죽음이 지닌 표본적 특성과 일치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어 우리가 그 저주로부터 구속되도록 하셨다” (갈라디아 3:12). 비록 주님께서 성 밖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셨지만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것은 성 안에서 였는데 그 당시 예루살렘 성 안은 사악함으로 꽉 차있었던 것과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모독된 의미에서 이해해 보건대 주님께서 성 안에서 정죄 당하시고 성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신성한 진리 측면의 그분이 교회 안에서 내적으로 정죄당하고 외적으로 십자가형을 받은 것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을 마음에서 정죄하고 생활에서 십자가에 못박는다. 죄인이 형 집행을 당할 때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었다. 주님도 이런 관례에서 면제받지 못했다. 요한이 이 주님에 관해, 그분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 밖을 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만이 이 짐을 진 자로서 시몬을 언급하고 있다. 처음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메시고 가시다가 뒤에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강요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해보는 것은 납득되는 말이다. 기록된 사실이 눈에 띄도록 차이를 지닌 데에도 영적 이유가 있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가장 높고 가장 심오한 상태, 즉 그들이 그분 안에, 그분이 그들 안에 있는 심오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바 몸소 십자가를 지신 분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세 복음서만 시몬을 언급하는 것도 타당하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은 천사들이 보기에 영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인간이 보기에 육체적으로 업신여긴 노동을 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시몬이 “예수를 뒤따르면서” 십자가를 메고 갔다고 표현했는데, 그 이유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영적으로 해야하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시몬이 십자가를 멘 모습은 거듭남으로 주님을 뒤따라야 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영적 노동에 대한 바깥쪽 표시이다. 이런 사항이 위 상황에서 표현된 진리라면 왜 신성한 명령이 미리 있어 가지고 제자 중 누구 하나가 선택되어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강제하지 않았을까? 그분 스스로 공언한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님의 마지막 고난에서 그분은 세상을 표현한 로마인들에게 정죄당하고, 교회를 표현한 유대인에게도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축복된 말씀 속의 진리를 표현한 제자들로부터 서도 버림받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그분의 마지막 시험이 어느 정도 격렬한지를 표시하도록 있어진 것, 즉 그분께서는 악의 모든 권세의 공격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 반대해야 하는 선의 모든 힘마저 없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분은 버팀목 한 개는 가지고 계셨다. 지금 그분은 그분 스스로 말하셨던 참 상태 안에 계신 것이다.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16:32). 이제 참으로 아버지마저 버리는 시각이 다고 오고 있다. 그야말로 사람의 아들만이 홀로 있는 때가 오고 있다. 이런 위기, 그야말로 끔찍한 공포가 아직은 도달되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시험이 있어져서 인간 구속이 완성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뒤따르는 키네레 사람 시몬과 함께 그분의 수난을 보며 주님을 뒤따라야 하리라. 십자가를 짊은 반칙이라고 말한 시몬 베드로와 십자가를 짊어진 시몬 사이에 일치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섭리적 결과일 것이라는데 의심치 않는다. 제자들 중 하나인 시몬은 신앙을 표현했다. 더 나아가 시몬 베드로는 교회 내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 반면 키네레 출신 시몬은 이방인에게 있는 믿음, 교회 밖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키네레는 가나안 지역 밖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시몬에 관련된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 시몬이란 이름은 그가 처음 새 소식을 받고 첫 제자가 되었을 때의 이름이었고 베드로란 이름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키레네 사람 시므온은 새 소식, 복음의 진리로 훈육받기 전의 더 멀리 위치한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믿음, 그리고 심정이 단순한 사람들의 신앙을 표현한다. 시몬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근거가 있다. 그는 마가에 의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말해지고 있고(마가 15:21), 사도 바울이 시몬의 두 집안 식구에 대해 높이 칭찬했기 때문이다. “뛰어난 주님의 일꾼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로마 16:13). 그리스도의 자연적 십자가를 메었던 그가 영적 십자가까지 메었고, 십자가형을 당한 갈보리산까지 갔던 것보다 더 거룩한 산까지 주님을 따라갔다는 것은 생각만 해보아도 벅찬 가슴을 안겨준다.
33. 십자가를 메고 가는 여행이 끝나는 장소가 “골고다,” 갈보리라 불리는 곳, “해골산”이라 불린 곳이다. 지역 명 자체가 말해 주는 바대로 그곳은 범칙자들이 고통 받도록 지정된 사형 집행지였다. 이 산이 그 산 모양새로부터 명명되었다는 어떤 학자의 의견은 타당치 않은 듯 생각된다. 이 장소는 생명 자체이신 그분을 죽게 만드는 교회의 상태를 상징한다. 인간의 신체 부분 중 두려울 정도로 기묘하게 만들어진 머리 부분이 흉칙하게 된 상태가 텅빈 두개골, 해골인 바 이는 생명 있게 하는 영적 내용물이 텅 비어 버린 말씀을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와 관련된 말씀이 생명도 권능도 없는 상태, 죽은 글자뿐인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골고다 또는 갈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지독하게 황폐된 상태의 교리, 그리고 주님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박는 교회 내지 교인, 그럼에도 회개하는 죄인의 경우 죽음이 끝나고 생명이 시작되는 것까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서 주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거기서 그분은 부패된 본성 속의 생명을 내려놓으시기 위해, 악한 심정 속의 갖가지 형상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위해 자신을 죽게 하셨던 것이다.
34. 골고다에 이르자 “그들은 쓸개를 탄 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시고 마시려하지 않으셨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이나 진행되는 동안 범죄자에게 그들의 신경 감각이 무뎌지게 하는 것을 먹도록 관용을 베푸는 것이 그 당시 관습이었다. 이럴 경우 그들은 고통의 강도가 완화된 듯 느낀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덜 느끼게 해주는 인간적 수단을 거절하셨다. 이에는 영적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주님에게 가해진 모든 것, 주님이 행하셨던 모든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신포도주(vinegar)는 그 신맛 때문에 거짓된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쓸개(gall)는 그 쓴맛 때문에 악한 것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쓸개를 탄 신포도주를 마시기를 거절하신 것은 우리에게 이런 사항을 가르치시고자 의도하신 것이다. 악과 혼합된 거짓된 것은 그분과 함께 응낙될 수 없다는 것, 또는 악과 거짓이 하나를 이룬 이들은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쓸개 섞은 신포도주는 거절하셨지만 신포도주만은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마침 거기에는 신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시어 히솝풀대에 꿰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셨을 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28-30). 이 예언이 특별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리고 매우 특별하게 성취된 예언이다. “그들은 내 음식으로 쓸개를 주었고, 내 목마름에 신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다” (시편 69:21). 위 예언과 그 성취가 오로지 역사적 연결과 목적만을 가졌다고 상상해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분의 양식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마치는 것인 바 그분은 마시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주님의 자연적 목마름은 신성한 목마름의 바깥쪽 표현,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바람에 대한 외향의 표현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 이유가 이 바람이 무한한 사랑의 바람이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사랑은 그분 내에 거하신 아버지이셨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모든 그분의 바람, 말씀들, 일들의 근원이었다 (요한 5:30, 14:10). 갈증이 멎도록 제공된 신포도주를 받으신 뒤 이제 다 이루었다! 라고 선포하신 것은 그 얼마나 합당한지! 참으로 그분의 마지막 음료수는 신포도주이었다. 그 이유가 신포도주가 상징한 것이야말로 세상과 교회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전멸했고 오류와 거짓은 도처에서 득세했다. 그런 바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포도주 외 아무것도 없었다. 쓴 쓸개를 섞지 않은 신포도주가 제공되었을 때 자비로 주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셨고 그것이 그분의 타고 있는 목마름을 누그러뜨렸다. 오류 가운데만 있을 경우 그들이 오는 것을 거절치 않겠다는 위 사건의 의미는 잃은 창조물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바람이 그 얼마나 강렬한지! 지성 속의 잘못들이 시치미 떼는 위선으로부터, 부패된 심정의 계획적인 악으로부터 자유로워 있다면 그 잘못은 인간과 주님 사이를 갈라지게 하는 절대적 원인은 아니다는 것이 위 사건의 의미에 더불어 담겨있다. 악한 의도가 없을 경우 종교적 잘못은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 순수해짐을 위한 바람의 기초가 되어 준다. 이 바람은 종교적 잘못으로부터 부정적인 품성과 하느님과 분리시키려는 힘까지 제거해줄 뿐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수단까지 만들어 준다. 그 이유가 종교적 원리는 있을는지 몰라도 거기에 순수한 종교적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순수해져야 한다는 바람이 신포도주로 적셔진 해면을 죽어가는 구세주의 입술에 갖다 대는데 수단이 된 히솝(hyssop)으로 의미되고 있다. 레위기를 보면 이와 같은 의미에서 히솝의 사용이 명령되고 있다. “그리고 성직자가 진단해 보아서 그 문둥병 환자가 병이 나았으면 그를 정하게 하는 예식이 필요한 것으로 살아있는 정한 새 두 마리와 송백나무와 진흥 털실과 우슬초(히솝) 한 포기를 가져오도록 지시를 내린다” (14:4).
35.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놀라운 일은 주님의 십자가형에 관련된 대부분의 세부사항들은 예언의 특별한 주제가 되어왔다는 점이다. 위 구절에 관련된 예언은 그분의 적들에 의해 작업되었고, 이것은 예수가 메시아이시다는 역사적 진리를 확증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이보다 더 수준 높은 증거가 주변 상황 자체의 영적 의미 안에서 제공되고 있다. 이는 교회가 말씀을 취급하는데 대한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마태가 인용한 시편의 경우 십자가형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사건 중에서 그 묘사함이 특유하게 세세하다. 시편 22편 18절을 읽어보자. “겉옷은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를 뽑습니다.” 마태 자신은 속옷과 겉옷을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인용한 예언적 구절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 행한 모든 것은 유대 교회가 말씀을 다룬 태도를 표현했는 바 위 구절의 행동은 가장 의미 심장하다.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바깥쪽, 즉 글자적 의미를 표현했고 속옷은 안쪽, 즉 영적 의미를 표현했다.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가짐은 유대 교회가 말씀의 글자 의미 속의 진리를 흩트러 버렸다는 것을 표현했다. 사실 이 행위는 병사들에 의해 있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 그들은 유대인의 목적을 수행한 도구였는 바 병사는 그 교회 안에 있는 호전적인 원리를 표현한다.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모습과 비슷하게 유대교 자체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제각기 진리라 주장하는 것 때문에 서로 으르렁댄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닌 진리라는 것은 한결같이 오류가 다양해진 것일 뿐이다. 이리하여 말씀은 조각조각 나서 흐트러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 속의 진리의 나뉨과 흐트러짐에 한계를 그어놓으셨다. 그렇지 않고 말씀이 모두 파괴되어졌다면 구원의 사업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쪼개질 수 있는 것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에 한해서이다. 그 이유가 글자 속의 진리들은 대부분 가상적 진리(apparent truth)이어서 여러 가지 해석들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들은 다양할 뿐 아니라 불일치 되는 의견들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가상적 진리가 아닌 순수한 진리, 또는 진짜 진리들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들은 쉽게 바뀌거나 사악하기도 한 인간 해석에 시달리지 않고 또한 인간의 해석들이 내적 진리들 사이를 이간시켜 서로 흩어지게 할 수도 없다. 모든 진짜 진리들 각각은 서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고 모든 진리는 한 개의 대단히 큰 나뉠 수 없는 전체 진리를 형성하여 연합되어 있다. 이것이 통솔로 된 주님의 옷이다. 글자 의미가 제아무리 찢기고 찢겨도 내적 의미는 영원히 하나로서 보존된다. 이것은 찢어 나뉘지 않지만 제비뽑아 결말을 짓는다. 제비뽑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해당된다. 제비뽑기는 교회에 관한 하늘의 이런 처방에서 저런 처방으로 바뀌어가도 교회 자체가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교회의 처방은 사라져도 교회는 결코 죽지 않는다. 처방들은 말씀 글자 속의 진리가 썩고 나뉨으로 부패되다가 죽고 만다. 종교의 내적 측면에서 생생하게 있는 교회는 결코 죽지 않아 어떤 마음들 안에 통째로 보존되어 옛 것이 온전히 쇠망될 즈음 새 나무의 씨로서 뿌려진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지상의 교회에 의해 뒤집히고 파괴되었더라면 천사와 인간 사이의 연결도 전달되어 그 갱신 역시 불가능 했었으리라.
36. 주님의 적들은 자기들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십자가에 못질하는 작업을 끝내고 “거기 앉아 예수를 지키고 있었다.” 자연적 차원에서 볼 경우 이는 죄인을 누가 끌어내려 살려줄까 하여 보초를 서는 것에 불과하다. 영적 차원일 경우 이 구절도 또 다른 더 깊은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앉아 있음은 의지의 상태를 뜻한다. 경계함은 이해성의 상태를 뜻한다. 예수의 살인자가 그분을 못박고 “앉아 있음”이란 십자가로 표현된 것, 말씀 전체를 모독하고 파괴하고 흡족해하는 확정된 의지의 상태, 그 결과 모든 참된 선함에 직반대 되도록 확인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이 예수를 지키고 있음”이란 말씀을 모독해 버린 상태로 말씀이 간직되도록 이해성이 경계하는 것, 행여 누군가가 자기 힘으로라도 말씀의 모독된 부분을 제거하려 애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37. “그리고 예수의 머리 위에 죄목을 적어 붙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의 왕 예수’ 라고 적혀 있었다.” 이 팻말을 작성하는데 유대인과 빌라도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유대인들은 “자칭 유다인의 왕”이라고 바꿔 써달라고 빌라도에게 건의했으나 빌라도는 “한번 썼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여 그들의 의견을 묵살해버렸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십자가에 이 진리의 관을 쓰도록 설비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고통의 상징물로서 그분의 십자가를 보는 한편 십자가라는 고통과 분리될 수 없는 거룩한 열매, 영광의 희망과 승리의 약속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하셨다. 유대인과 빌라도의 의견 차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즉 이방인이 유대인의 죄목으로 진리를 적고, 유대인은 그 죄목이 진리이기를 부정하는 의견 차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 팻말 자체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라는 주님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왕은 진리를 의미하고, 유다인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다인의 왕이란 자아와 세상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이들의 심정을 통치하는 천적 수준의 신성한 진리를 말한다.
38. “그 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그 하나는 예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달렸다.” 이 두 강도는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갈라 세우는 심판에서의 양과 염소가 표현한 것 같이 선행(charity)이 있는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과 선행(charity)이 없는 신앙 가운데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이 구절에 관하여는 마태복음에서는 더 이상 살필 수 없으나 차후 더 살핀다.
39, 40. 이제 주님께서는 시험의 또 다른 시리즈, 또 다른 모욕 행위를 견뎌 가신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분께 욕을 했다.” 대성직자와 원로들, 율법학자들이 그분을 조롱했다. 강도들도 다른 이들이 말한 것을 되풀이했다. “지나가던 사람”은 거짓 가운데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대성직자는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강도들은 거짓과 악 모두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제 그들을 분리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이 세계의 자녀들이 신성과 영적인 것에서 잠깐 지나치는 반짝거림보다 더 확연히 보여주는 듯 여겨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미친 듯 몰두하는 것은 어디서나 쉽게 관찰된다. 이렇게 해서 만족을 얻는 사람들은 신성과 영적인 것을 두고 욕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물론 입으로 내뱉지 않는다 해도 대체로 심정 안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본문의 “지나가던 사람들”이다. 더불어 이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었다.” 물질화된 납득력에 의해 빛이 어둡게 될 때 빛의 자녀가 빛 자체에 대해 소유한 슬기로움보다 이 세대에서는 자기가 더 슬기롭다고 하여 최고의 경멸을 퍼부으려는 전조에 해당되는 표시가 “머리를 흔든” 모습이다. 비신앙자의 이런 표시는 진리에 지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바 그들의 논쟁이 이 구절에 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여기서 주님께서는 독선자, 무종교자, 무법자에게 공격당한 듯 보인다. 마치 모든 가능한 매체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그분의 신념을 흔들고 그분의 영을 뒤엎어 자포자기의 궁지로 몰아 부치는 듯 보인다. 위 구절 같은 논쟁, 유대교 비신앙자들이 사용한 위의 논쟁은 모든 무신론자가 사용했던 것, 또한 모든 세대에 걸쳐 부정적 상태의 인간 마음에 있는 자연적 수준의 암시와 같은 종류들이다. 이 논쟁을 주창하는 자이든 써먹는 자이든 그들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십자가의 필요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믿는 게 없다. 이런 마음에 주님의 주장과 그분의 목적은 완전히 모순된 주장과 목적인 듯 여겨지게 존재해야만 한다. 그분은 신성한 권능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가장 절대적인 인간의 약함을 내보이신다. 그분은 신성한 영광을 역설하신다. 그러나 공적인 수치와 격하된 지위를 노출시켜 주시고 있다. 가장 높은 미덕을 증거하시나 악행자로 죽으신다. 왕에게의 충절을 요구하셨는데 가장 미천한 신하로 취급됨에 복종당하고 있다. 그분 스스로 삼 일 만에 성전을 짓는다고 선포하시는데 그분 자신의 몸을 십자가로부터 해방되게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로부터 내려올 수 없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셨고 죽은 자까지도 살리셨는데도 자신은 살리실 수 없다. 이런 대비는 육적 마음과 영적 마음 사이에 있는 타락된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대비로부터 발생된다. 육적인 자연적 마음은 영적 냉대함, 수치스러움, 굴욕, 죽음에 복종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리고 육적인 자연적 마음은 그런 것들 모두를 통과하신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싫어하고 필요성 자체조차 느낄 수 없다. 예언자들 같이 구세주도 그분의 백성에게 하나의 표시였다. 그분께서는 잘난체하는 사람이 스스로 경멸해댄 것을 그들을 위해 몸소 행하시러 오셨다. 그분께서는 그 자체 매우 들떠있고, 잘났다 자찬하고, 명예를 게걸스럽게 소유하려드는 자연적 마음을 그분이 짊어지셨고, 생명을 지닌 사랑 안에서 그런 것들이 창피하도록 만들어 겸손해지게 하시고 그것들을 불명예스럽게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으시러 오셨다. 동시에 이런 못박는 수단들에 의해서만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재회할 수 있다는 것,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에 순종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 위에 있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높였던 바 그분을 경멸하고 짓밟았기에 주님께서 그것을 질서대로 놓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와 같은 게 그분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한 수단밖에 더 아니다. 그것들은 영광에 비해 한 토막에 불과한 사건들이다. 참된 드높임이 그것들에서 일어났다. 자연적 인간의 진짜 영광은 영적 인간에게 존경받는 종이 되어 있을 때 겨우 존재할 수가 있다. 섬기도록 창조된 것이 통치한다고 해서 존경받아질 수는 없다. 육체가 영혼을 통치함으로 존경받을 수 있을까? 폭음, 폭식, 폭주 같은 것이 존경될 수 있을까? 세상이 천국을 경멸함으로 존경받아질까? 물질이 영을 부정함으로 존경받아질까? 자연이 하느님을 부정함으로 존경받아질까? 성전은 그분의 적들이 파괴하게된 그분의 몸, 그분의 인성이다. 주님을 고발한 자들이 거짓을 진리에 맞댄 자들을 표현했듯 그들은 그분께 반대되는 거짓 고소를 반복하고 있다. 또한 성전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원리를 표현한다. 참으로 이 원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경멸되고 모욕당했다. 그들이 신성한 인성을 생각하면 코웃음쳐 부정한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면 즉각 반박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이의 제기는 십자가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심정 속의 자연적 수준의 언어밖에 더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실력을 즉각 보이라고 주님께 도전장을 던졌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고통 받으신 게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서, 신성한 선의 측면이 아닌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의 신성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자연적 인성 측면에서 겪으셨다.
41-43. 대성직자와 원로, 율법학자들에서 우리는 교회의 자녀를 본다. 이들이 지껄인 조롱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을, 자아 사랑의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이 그분의 사랑의 신성한 선에 반대하는 경멸을 본다. 이들이 말한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살리는구나?” 그분이 타인을 살리셨다면 자신도 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을 살려낼 수 없다면 어떻게 타인을 살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자체는 비록 그 응용이 잘못되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타인을 거듭나게 하시듯 자신을 신성화 시키셨다. 거듭남과 신성화 하심이라는 두 일은 서로 불가분의 연결 관계에 있다. 이런 일이 구원으로 의미된다. 더 나아가 구원은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결과 되고 구속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결과 된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선으로 만드심으로 구세주가 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권능만이 자기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그 착각 속에 대성직자와 지나가던 사람들의 오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찾느라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던 방법에 상반되었다. 주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게 되면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끌어당기리라.”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승강이 이런 높여짐, 이 신성화 하심을 표현했다. 그러나 대성직자라든가 지나가며 욕을 지껄였던 사람 같이 이들은 지상으로부터 주님께로 끌어 당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께서 자기들이 있는 땅으로 내려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가 모두 이러하다. 자연적 인간은 세상 너머로 자신을 들어 올리라는 종교를 바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세상적 바람과 입맛에 맞도록 내려오기를 바란다. 더구나 자연적 인간은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거나, 세상을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하는 수단으로 자신이 들려지는 것, 고통을 통해 영광에 도달하는 것,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그분이 십자가에서 선뜻 내려와 이스라엘의 왕임을 스스로 보여 주셨더라면 그를 믿었을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자연적 인간의 눈에서 통치권과 고통 받음 사이에 무슨 교류가 있을까? 대성직자가 말한 많은 부분이 시편 22편에서 한마디, 한마디 똑같게 발견된다. 이런 사항은 문맥의 연결 관계상 주의를 기울여 볼만하다. 8절을 읽어보자. “야훼를 믿었으니 구해주시겠지. 마음에 들었으니 건져 주시겠지.” 이어서 이렇게 읊고 있다.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셨다…” 이 구절이야말로 주님께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당하신 신비에 대한 열쇠에 해당되고 또 한편 자연적 인간이 그분의 그런 과정을 숙고하지 않고 납득도 못하는데 대한 이유도 제공한다. 새로운 출생은 고통을 허용하는 신성한 섭리가 내다보는 마지막에 해당된다. 의로운 자에게 허용된 고통은 산고를 겪는 여자와 같아서 분만의 시간이 다가오면 대단한 슬픔을 겪지만 아이가 출생되자마자 방금 까지 있었던 모든 고통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이다.
44.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두 강도는 심판 때의 양과 염소 같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38절에서 이미 말했다. 이런 의미 파악은 누가복음(23:39)에 근거하는 내용이다. 거기서 강도 중 하나는 그분께 욕을 퍼부었으나 다른 하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자비를 간구했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는 처음에 두 강도는 모두 구경꾼의 욕설에 가담했다가 그중 한 명은 십자가에서 마음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한 마디 거들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참회한 강도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똑 같은 죄를 짓고 있다가 갑자기 동료를 나무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잠깐 사이에 상태가 완전히 뒤바뀌는 있음직하지 않은 일을 너그럽게 봐주고 덮어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복음서 기자는 그 상황의 일반 조건을 언급하고 저 복음서 기자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언급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일관된 논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영적 의미는 한 가지 사건의 완전한 기초를 공급하는 관계가 요구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영적 의미를 보기 위해 우리는 이 두 강도가 죄인의 두 계층을 표현한다는 것, 하나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것, 다른 하나는 거짓 가운데 있으나 악 가운데는 있지 않은 죄인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차원의 의미에서 볼 경우 두 강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표현한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 두 강도의 처음 상태, 둘 다 죄 아래 포함되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의 경우, 그들의 두 번째 상태, 이방인들이 주님을 인정하고 장차 그분의 교회가 되도록 승낙되었고, 불신앙을 고집한 유대인의 경우 선택된 지위를 몰수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하여 유추해서 보는 시각도 있다. 복음서는 거듭나는 일의 진보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만 가지고는 그런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여기서의 주제는 빛과 어둠이 아직 갈라지지도 않은 때, 처음 국면만이 다뤄지기 때문이다.
45. 실제의 어두움이 죽어 가는 구세주를 에워싸는 것만 가지고는 고난 받는 그분의 영혼이 당하는데 충분치 않았는지 자연계의 태양이 자기 얼굴을 감추어 암흑이 내려 눌러 두려움과 삭막함의 정경이 깔리고 있다. “낮 제6시부터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제9시까지 계속 되었다.” 이 자연적 어둠은 예언서에서 자주 반복되어 말했던 영적 어둠의 형상밖에 더 아니다. “그 날이 와서 대낮에 해가 꺼지고 백주에 땅이 캄캄해지거든 모두 내가 한 일 인 줄 알아라 –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아모스 8:9). 십자가가 서 있는 주변에 깔린 어둠은 교회 전체에 퍼져버린 거짓과 그 거짓으로부터 파생된 악의 상태를 상징해 준 것이다. 어둠이 뒤덮고 있던 세 시간이란 그 교회 상태가 보편적일뿐 아니라 충만된 마지막 상태에 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어둠이 제6시(열 두 시), 즉 정오에 있어졌다고 해서 그 교회가 절정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두워져 버린 태양이란 정의의 태양이다. 십자가로부터 비쳐진 정의의 태양이 그들의 눈과 심정을 닫히게 해서 어둠을 가져온 것이다. 바깥쪽 현상은 주님의 내향의 상태에 관한 그림자에 불과한 바, 이 어둠은 구세주께서 고통 받으신 목적이 자포자기로 인해 극에 달한 큰 어둠의 공포를 상징했다. 따라서 이 어둠은 그분의 마지막 시험의 최극점, 육을 입은 말씀 조차도 양보함 없이 견뎌낼 수 있는 내향적 고통의 최대한의 한계를 상징하고 있다.
46. “제9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이 외침은 깊은 경외심을 일으키게 하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 상태야말로 우리가 자기 아무리 이해해본들 불완전에 머물 수밖에 없고 제아무리 체험으로 감지한다 해도 그 실감은 대단히 미력한 수준에 그치고야 마는 상태이다. 앞의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줄거리를 통해 아는 바, 그분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심지어 그분께서 충성을 맹세한 제자들과 친구들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서도 버림받고 있다. 그분 자신이 사람일 뿐 아니라 하느님이 되시는데 어떻게 주님이 하느님께 버림받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 외쳐 부른 하느님과 주님 안의 하느님은 다른 어떤 분이었을까? 한가지 진리만이 이런 의문, 저런 질문에도 충분한 답이 된다. 주님은 두 개의 구분되는 본성, 즉 신성과 인간성은 한 분 인물(person) 안에서 하나 되어 계신다. 인간 본성 측면만이 고통 당할 수 있고 버림받는다는 측면을 가질 수 있다. 간혹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은, 신성한 인물로서의 아들이 신성한 인물로서의 아버지에 의해 버려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인간 본성 측면이 굴욕의 상태에 있을 때 인성 측면이 신성 측면에 의존되어 있었는 듯, 때로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을 풍겼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같이 신성은 인성 안에 거하신다. 위와 같은 주님의 모습은 그분의 인간 체험에서 자연적이고 필요한 부분에 해당된다.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체험 해가셨다는 것을 우리가 상념해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적 체험으로 그분은 모든 인간적 의식과 감각까지 가지셨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경우 우리가 지독한 고난과 깊은 시험의 상태에 있을 경우 마치 하느님께 자신이 버림받지나 않았는지 느낄 때가 있지 않을까? 그분의 고난은 우리의 것과는 아주 다른데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게 틀림없고 고난 중에 어떤 원조자도 없도록 설비하셨을 것이다. 어떤 이들의 경우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해도 신성이 그분 내에 마치 우리 영혼이 육체 안에 있듯 계셨으리라는 것이다. 맞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이는 우리가 육체의 감각을 따라 말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 아닐까?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면서도 영혼의 불멸에 이의를 제기하고 부정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자각, 즉 알아챔은 실제와 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시험을 예로 들어 말해도 이와 비슷하다. 신성한 도움이 퇴각한 듯, 신성 그 자체가 우리를 버린 듯 여겨질 수도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하신 말들은 시편 기자 자신이 고난의 상태에 있을 때에 말해졌던 것인데 그와같이 해서 주님은 인간적 고통을 견뎌내시고 그것을 성결시키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시편 22:1). 극한 상황의 시험은 자포자기까지에 이른다. 이런 극한적인 시험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결합하는 결과를 갖는데 필요하다. 이 결합은 인간이 하느님과 결합하는데도 필요하다.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결합이 거듭남이고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이 구원이다. 주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의 하나 됨은 인간 안에서 이런 작업이 진행되는 것에 대한 위대한 모형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듯 주님은 신성화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위대한 주제를 두고 (진정한) 교회에 관한 저술(the writings of the church)은 가장 자신 있는 어조로 이렇게 간략히 말한다. “신성화 하심은 주님의 인성이 아버지의 신성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 하나 됨은 십자가의 수난을 수단으로 성공적이고 항구적으로 결과를 보았다. 실제의 하나 됨이 십자가의 수난으로 충분히 결과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수난은 그분께서 지상에 거처하시는 동안 수행해 가신 시험 중 마지막에 해당되고 결합은 시험을 수단으로 결과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험 안에서 인간은 외관상으로는 자신 홀로 남겨진다. 이렇게 남겨져 있다 해도 그것은 외관 차원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시험 안에서 하느님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원리로 그와 가장 가깝게 현존하시어 그를 격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이 시험을 정복할 때 그는 하느님과 가장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는다. 이런 경우가 주님이 아버지와 하나 됨이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동안 주님 홀로 내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분이 외친 말과 과거에 그분이 하신 말씀으로부터 명확하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요한 10:18). 이로부터 명확해지는 또 하나,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 측면에서는 고통 받지 않고 인성 측면에서만 받았다는 것, 그 고통 때에 가장 친밀하고 가장 완성된 하나 됨이 결과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이렇게 예증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인간이 육체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의 영혼은 고통 받는 게 아니라 단지 슬퍼할 뿐이라는 것, 이겨낸 후 눈에서 눈물을 닦듯이 하느님께서 그 슬픔을 제거해주신다는 것이다. 주님이라는 한 인물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 됨은 속죄 또는 재회라는 일이었고, 이를 통해 인간도 하느님과 속죄 또는 재회하는 것이다.
47. 주님의 절규가 있자, “거기에 서 있던 몇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분을 잘못 이해했다. 이와 같은 것이 자연적 인간이다. 이들은 말씀 속의 신성을 인간 사상으로 바꾸고 하느님을 신뢰함 대신 인간을 신뢰함으로 대체시켜 주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다. 어쨌든 엘리야 자체만 생각한다면 그는 씌어진 말씀을 표현한 인물이다. 그러면 잘못 이해한 이 구절이 영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예언자들이 말씀 안에서 표현한 생명 있는 원리를 이미 죽은 원리로 보는 실수, 생명과 권능은 그것을 상징화한 바로 그 표현물로부터 파생된다고 상상하는 실수인 것이다.
48. 말씀 속의 인물들에 대한 그릇된 생각으로 상징화된 거짓 원리들은 어떤 이들과 더불어서는 잘못이라는 수준에서,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신념이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릇된 생각은 이해성 측면에서만 있을 수 있거나 의지 안에서도 그러할 수 있다. 악 가운데 있지 않고 잘못이라는 수준에 있는 이들이 “그 중의 한 사람은 달려가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저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목을 축이라고 준”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미 살폈던 바대로 주님께서는 쓸개를 탄 신포도주를 제공받았을 때 마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렇게 혼합된 것을 마신다는 것은 거짓이 악과 하나 되어 원리가 된 것을 지닌 이들을 수용하겠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경우 쓸개 없는 신포도주가 제공되고 그분은 그것을 마신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잘못 가운데 있되 악 가운데는 있지 않은 이들은 열납 하시기 때문이다. 신포도주로 적셔진 해면(sponge)이 갈대에 놓여졌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나 관념들이 비고의적인 잘못 해석으로 말씀의 글자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으로부터 배우는 바, 이 신포도주는 주님이 “목마르다”고 말하실 때 제공되었다. “목마르다”는 그분의 표현은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심을 표현하고, 신포도주를 받으심은 사람들의 잘못이 악에 뿌리를 두지 않고 있다면 설사 그 잘못된 것이 주님 자신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다 포함해서 모든 것을 수용하심으로 최말단에 이르기까지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뜻과 권능을 표현하고 있다.
49. 그러나 주님께 적극적인 사랑을 전혀 보이지 않는 다른 계층이 소개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어떤 가냘픈 바람, 즉 자신의 구원마저도 바라지 않고 있고, 더 나아가 타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일하려는 행동마저 방해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 두시오.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17장을 보면 엘리야가 산에 주님과 함께 나타나서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셔야 할 그분의 죽음에 관해 그분과 대화했다. 그러므로 앞에서 확인한 일이 되지 못하게 엘리야가 막으려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 납득된 것에 불과하다. 씌어진 말씀이 이기심 속의 생명을 구해줌으로 구원이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잘못이 위 구절이 뜻하는 의미이다. 그 이유가 자기 생명을 아끼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나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50. “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누가는 주님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두 복음서의 두 기록을 위에다 나란히 기재해 본 것은 늘 반복적으로 언급해왔던 것, 두 개의 구분된 주님의 품성, 진리와 선 사이의 구별,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과 의지 측면을 구별해 설명하려 해서이다. 전자는 인간성의 지적 원리에 관계되고 후자는 의지적 원리에 관계된다. 전자는 버림받은 바 된 느낌을 표현하고 후자는 확신하는 바 된 느낌을 표현한다. 전자는 두려움을, 후자는 사랑을 표현한다. 전자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성에 말하는 형식이나 후자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전자에서는 신성한 진리를, 후자는 신성한 선을 표현하고 있다. 비록 마태가 누가와 다르게 기록한 듯 해도 마태 역시 똑같은 생각을 운반해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큰 소리(loud voice)를 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직역하면 “예수께서 위대한 소리(great voice)을 지르셨다”가 된다. 이 단어 “위대함(great)”이 말씀에서 사용되면 이는 선함 또는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위대한 소리는 사랑의 소리이다. 이 구절의 진짜 정감 있는 감정은 한계 없는 신뢰가 가득한 사랑을 풍긴다. 이 소리에 이어 “그분은 영혼을 양도하셨다.” 그분의 영을 위탁할 분의 손에 되돌리셨다. 그리하여 구세주는 돌아가셨다. 주님에게서 소멸된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어버린 죽음 자체였다. 우리는 자연적 죽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주님께서 오신 것은 자연적 죽음을 없게 하시려는데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자연적 죽음은 인간 타락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적 죽음, 인간이 금지된 과일을 먹음으로 초래시킨 죽음을 폐지시키러 오셨다.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입으심으로 주님은 이 죽음에 복종하게 되었다. 더 강한 표현을 쓰면 그분은 이 죽음을 취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은 본질적 차원의 죽음이다. 이것은 육체가 고통 받는 자연적 죽음 속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죽으셨다.” 이는 생명을 축출해내지게 하는 위대한 죽음이었다. 이 죽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견뎌내시느라 고투하신 죽음인 것이다. 자연적 죽음, 그 자체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 죽음은 그분에게는 그렇게 격렬한 인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옥에서 근원되고 지옥에서 생명을 얻는 영적 죽음, 주님으로 죽음을 거치게 하고야만 영적 죽음에서 주님은 어둠의 모든 권세에 저항하고 정복하셔야만 했다. 그 이유가 지옥과 이 죽음은 똑같기 때문이다. 위 사도는 이렇게 위 구절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 한번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으로 살고 계신다” (로마 6:10). “그분은 영을 양도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 영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다. 그 다음 육체가 죽음에서 일어나셨을 때 온통 하느님으로 사셨다. 그 이유가 그분의 인성은 온통 신성으로 태어나셨고 신성과 하나 되어 생명 자체가 되셨고 그분처럼 죄에 대해 죽는 모든 이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51.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구속과 신성화 하심의 일을 마치셨을 때 이 신성한 일의 결과가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폭으로 찢어졌다.” 이는 의미를 담기 위해 있어진 기적임이 분명하다. 성전은 주님의 몸을 상징한다. 휘장 안에 거하신 신성은 주님의 몸 안에 거하신 감추어 놓인 신성이었다. 주님이라는 한 인물 안에 내재하여 감추어 놓였던 영원한 신성은 죽음이 죽어야할 그 인성이라는 휘장을 찢었을 때 육을 입으셨던 그 장엄한 목적이 성취되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인 교통이 열렸다. 우리가 직접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비록 주님의 인성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 매체라 해도 그것은 신성-인간, 그것은 신성과 인간성, 즉 하느님과 인간을 서로 서로 가장 직접적이고 친밀하게 구원하는 관계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사건은 참으로 성전과 성막의 예배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간에서도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히브리서를 읽어보자. “성막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두 번째 장소 즉 가장 거룩하다고 불리는 이 장소는 일년에 한번씩 자신과 백성들의 잘못들을 위해서 들어가되 피 없이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성령이 보여주시는 것은 천막 성전의 앞 칸이 그대로 있는 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아직 열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성직자로 오셨다. 그분이 성직자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하신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단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당신 자신의 피로서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하셨다” (히브리 9:2, 3, 7, 8, 11,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우리는 마음 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는 최고의 성직자가 계신다. 우리의 마음에도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신앙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가자” (히브리 10:19-20). 휘장이 찢어짐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화 하신 것을 상징하였다.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의 첫 번째 원리부터 최말단 원리에 이르기까지 송두리째 영원히 신성화 하심으로 이 신성한 일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성전 휘장의 찢김은 말씀의 글자라는 휘장을 찢으신 것, 내적 의미에 접할 기회를 허락하신 것, 예식적 예배라는 휘장이 찢김으로 내적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인간 마음에 있는 가상(appearance)이라는 휘장이 찢기는 방법으로 내적 인간이 열려진다는 것, 이렇게 해서 자연적 존재 상태에서 영적 존재가 된다는 것, 등등을 표현하고 있다. 교회 상태가 온통 변화함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졌다.” 땅은 교회를 뜻하고 흔들림은 교회가 완전히 뒤집힘을 뜻한다. 주님의 강림에 의해 결과된 교회 상태의 변화는 과거 이런 처방에서 저런 교회의 처방으로 바뀐 교회의 변화와는 아주 다르다. 이전에 존재한 교회들은 표본적 교회(representative church)였는 바, 그들은 그늘에서 진리를 보았다. 말씀이 육을 입으신 이후 교회는 실질적인 수준이어서 빛 가운데서 진리를 보았다.
52, 53.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결과가 더 이어진다.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무덤이 열리고 성인들이 부활한 것은 물질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 사건이다. 위 구절은 주님께서 끝마치신 일의 두 결과를 그려주고 있다. 무덤이란 주님의 오심으로 해방되기를 기다리면서 갇힌 상태에 있는 영계의 중간 영역에 있는 어떤 장소를 말하고 있다. 이 영들은 죄수들, 예언서에서 종종 언급되는 죄수들, 즉, 구속자가 형무소 밖으로 내보내줄 죄수들이다.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죽음과 무덤은 정치적 또는 영적으로 죽어 매장된 이들의 상태를 뜻한다. 에제키엘 37장 12절을 읽어보자.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거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이 구절은 글자적으로 볼 경우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관계되고 있다.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이는 영계에 있는 똑 같은 사건과 관계되고 이를 복음서가 참고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주님 스스로 언급하신 대목이 요한복음에 있다. “내 말에 놀라지 말라.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5:28, 29). 본문은 일어난 성인들이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일어난 성인들의 얼마 정도가 환상의 예루살렘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계와 관계된 것이고 거기서 실지 거행되어 무덤이 열리고 성인들이 일어나고 그들이 거룩한 성에 나타났다는 것은 영들의 세계 중 보다 낮은 땅으로부터 온 신실한 사람들이 해방되어 천국으로 승강됨을 의미하고 있다. 이 부활은 주님이 끝마친 일이 설비해둔 것, 그분의 일의 마지막 째의 원인에 해당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신성화 하심으로 있어지는 구원이라는 결과가 묘사되기 위해 성인들만이 부활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물어올 수 있다. 어떻게 본문의 경우 성인들이 죽고 매장되어 있다 라고 말해질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죄를 짓고 죽은 이들이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불릴 수 있을까? 영적 의미에서 어떤 인물(person)은 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의 영적 부활은 그의 자연적 마음에 있던 진리와 선함이 영적 마음으로 들어 올려져 거룩한 원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들이 “사람”이다. 자연적 마음 안에서 이런 원리들은 죽어있고 매장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영적 마음으로 들려질 때 그 원리들은 생명과 자유를 획득한다. 영적 부활이 언제나 암시하는 바는 참 인간성 속에 이런 요소들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물론 싹틈(germ)의 수준에서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 매장된 자들이 그들에게 공포하는 신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언제나 상상되어진다. 그러므로 요한복음(5:25)에서 이렇게 말해진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54.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지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방인인 이 군사들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지독하게 거절했던 주님을 구세주로 이제 영접하게 될 이방 세계를 표현한다. 위 구절 같이 로마인들의 고백에 포함된 것은 매우 불완전한 사상을 지녔다고 보이는데 이는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 주위를 감돈 신성한 기운의 힘은 감동적이기 쉬운 마음에 비상한 감명을 생산해주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인정함은 예수의 신성한 품성에 관한 참된 지식을 필수적으로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위 본문에 함축된 것은 오로지 그들은 신성한 아들 관계라는 그들 자신의 생각에 의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신념에 얻어맞은 듯 느낀 것뿐이다.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을 그들이 들었는데 이 사건에서 그들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고 이해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명백히 해주는 관사가 “하느님”과 “아들” 앞에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마인의 고백과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6)과는 다르다. 베드로가 고백할 때 사용된 언어는 명백한 형체를 가지고 있어 그 형체는 명확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 이방 군인들의 위와 같은 희미한 언어는 이방 세계에 널리 흐트러진 일반적인 희미한 빛을 더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모든 이방인의 마음에서 이 신성한 진리를 처음 지각할 때의 상태도 표현하는 것 같다.
55, 56.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 외에 거기에는 그 광경에 더 깊은 흥미를 가지고 쳐다 본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또 거기에는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께 시중들며 따라온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배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헌신한 여인들이고 이들의 품성은 거룩한 페이지에서 영예의 빛을 영원히 발하고 있다. 남자들과는 달리 이 여인들은 무언의 구경꾼이었다. 그러나 침묵이라는 단어는 그녀들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최고로 적절하다. 그래서 그녀들은 헌신한 심정의 느낌과 애착을 스스로 표현하고 있다. 백인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이방인의 교회의 지적 측면의 원리들을, 여인들은 이방인 교회의 의지 측면의 원리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들은(이방인의) 갈릴래아(2:22)로부터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세 마리아는 세 가지 수준의 애착들,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을 표현한다. 그들은 주님을 섬겼다. 섬김(ministering)은 심정 속의 애착이 일하는 것이고, 봉사함(serving)은 이해성 속의 생각이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할 때 주님을 섬기게 된다.
57, 58. 또 다른 경건하게 섬김을 행한 사람이 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태아 사람인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였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청하자 빌라도는 내어 주라고 명령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했다. 요셉은 두 번째의 니고데모였다. 그도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유대인을 두려워해서 은밀히 장례를 치루었다 (요한복음 19:38). 니고데모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초기에 그분께서 공적으로 가르치셨던 권능 있는 진리 중 얼마를 배우고자 밤중에 은밀히 찾아 왔었다. 비공식적 수준의 제자인 이 두 사람이 그분의 장례식을 치르려고 나타난 것이다. 요셉이 무덤을 준비하는 한편 니고데모는 향을 준비했다. 이 경건한 두 사람은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고 무덤에 안장했다 (요한복음 19:38-42). 열 한 제자 중 어느 한 명도 이 장례식에 참석치 않았다. 여인들만이 그분이 누우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건한 장례를 위해 그 의무를 다할 두 사람이 유대교에서 개종되어 주님의 제자로서 섭리적으로 보존된 것이다. 이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이 구절과 관계가 깊은 바 그에 관해 살펴보아야 하리라. 요셉에 관한 성경의 첫 묘사는 그가 부자라는 것이다. 그는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지식에서도 부자였다. 그는 아리마태아 출신이었다. 이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라마와 동일한 지역이 아닐까하고 생각되어왔다. 누가복음 23장 51절을 보면 그곳이 “유대인들의 동네”였던 것만은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교회 속 진리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암시해 준다. 그 밖의 그에 관한 기록도 이와 일치하고 있다. 그는 올바르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을 한 일이 없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던 사람이었다 (누가 23:50). 다른 제자들의 경우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예수의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자가 될 거라는 그분에 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금인데도 요셉은 아직도 그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든 온유함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그분의 시신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항이 명백히 보여주는 바, 비록 그의 이해성이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도록 열려지지는 않았다 해도 그의 심정은 주님의 사랑의 힘 아래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주님의 시신을 묻는 경건한 의무가 그분을 공개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사람에 의해 수행되었어야만 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세력이 있거나 부유한 유대인이라 해도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어줄 수 없느냐고 감히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적들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분의 친구에 의해 매장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자연적 수준의 이유가 더 이상 없다 해도 영적 이유가 더 있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분의 시신은 제자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요셉이나 니고데모 같이 그분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에 의해 매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매장은 부활을 의미한다. 옛 사람의 거절은 새 사람으로의 부활을 위해 매우 가까운 친구같이 선구자 역할을 하므로 꼭 필요하다. 옛 것이 반드시 죽어야 새 것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서간에서도 발견하는 바, 두 개의 구분된 생각, 두 개의 구분된 거듭나는 행동들이 주님의 매장과 부활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로마 6:4, 5). 다시 그는 말한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서 율법의 계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로마 7:4). 그러므로 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는 그들 자신이 실지로 유대교와 연결되어 있고 기독교와는 잠재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신을 매장함은 어머니로부터의 인간성의 잔여물을 벗어내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옛 교회 처방에 속했던 이런 잔여물, 새 처방이 아닌 것들을 벗어내는 것도 의미했다. 그러므로 옛 것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무덤에 그분의 시신을 놓음으로 위와 같은 의미를 상징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옛 처방에 속했어도 한편 그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아울러 상징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옛 것에 속한 듯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새 것에 속한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이런 매체 역할을 통해 주님께서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신다는 것까지 우리로 알게 해준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위와 같이 유대교라는 과거와 기독교라는 미래 사이에만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그와 같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서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공식적으로 제자 되었던 두 사람도 그분의 부활에서 그분을 영접하는 공식적인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의심치 않는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이 경건한 장례식을 끝낸 후 더 이상 그들에 관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래 구절에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59.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고운 베로 쌌다.” 군인들이 나누어 가진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글자를 표현했다. 요셉이 그분의 시신을 감은 고운 베도 말씀의 외적 측면을 표현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주님이 일어나셨을 때 무덤에 그것들이 남겨져 있었다 (요한 20:6). 그러므로 그것들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정도밖에 더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이해해야만 한다. “고운 베는 사도들의 정의이다” (계시록 19:8). 그 이유가 고운 겉옷으로 의미되는 순수한 진리들은 생활에서 선을 획득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두른 깨끗한 고운 베는 유대교에 존재했던 말씀 글자 속의 진리,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 진리에 초래한 더럽힘에서 깨끗해 있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했다. 깨끗한 고운 베는 요셉이 준비했고 향료는 니고데모가 가져왔는 바 이 둘은 주님께서 외적 교회에 속한 이들로부터 받으시는 선의 애착과 진리의 이해성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고 있다. 경건한 유대인의 정성으로 장례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불경한 손으로 그들의 회칠한 무덤 중 하나에 안장되었을 것인 바 이는 더 한층 심한 모독의 행동밖에 안되어 부활이 아닌 저주를, 생명이 아닌 죽음을 표현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신실한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가 받은 할례는 글자가 아닌 말씀 속의 영으로 심정이 정결해지는 할례를 받은 사람,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느님의 칭찬을 받는 심정의 할례자였다 (로마 2:19).
60. “요셉은 바위를 파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그분의 시신을 모셨다.” 예수께서 새로운 탄생을 일으키시게 되는 이 새 무덤은 주님께서 누우신 말씀 자체를 표현했다. 그럼에도 그 무덤은 요셉 소유의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이 무덤은 유대인에 의해 더럽혀지고 모독되어왔던 그대로의 말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과거 생활상 같이 심정이 순수하고 생활이 거룩한 사람에 의해 납득되어지는 그대로의 말씀을 표현한다. 이 바위란 신성한 진리를 상징한다. 바위를 파서 만든 요셉 소유의 새 무덤은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가 영접되도록 새로이 준비된 거듭나는 마음도 표현한다. 심정이 순수할 경우 이 구절에 관련되어 실감되는 측면도 있다. 현재에서조차 예수는 새로이 십자가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가 모독하는 거룩한 말씀 속 하나 하나의 진리에서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있다. 그러나 요셉의 행동 같은 부분도 있다. 요셉 같은 사람들은 상처받은 진리를 모셔다가 순수한 생각이라는 “깨끗한 고운 베”로 두른 뒤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애착을 상징하는 새 무덤, 깊은 회개로 있어진 새 심정이라는 새 무덤에 그 진리를 눕힌다. 이런 경건한 의무를 다하는 이들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요셉은 시신을 모신 다음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이 돌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를 표현했다. 돌은 진리를 의미하고 단어 “크다(great)”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큰 돌이란 선함에 바탕을 둔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큰 돌로 입구를 막은 무덤에 계신 주님이란 글자적 의미를 수단으로 덮여져 보호받는 주님, 이쪽의 처방에서 죽으셨는데 그렇다고 저쪽의 처방에서 아직 살아나시지 않은 주님을 표현했다. 요셉은 경건한 의무를 다 마치자 “그는 거기를 떠났다.” 그는 주님께서 쓰시고자한 용도에서 자기 할 일을 완수했다. 이제 아마도 그는 의로운 분의 십자가형을 당한 시신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희망을 안장한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느낌을 가졌을는지 모른다. 이제 하느님께서 인성을 신성화 하셔갔던 이전의 모든 단계에서와 같이 그분만이 홀로 역사하셔야 한다는 심정으로 그 무덤을 떠났으리라.
61. 십자가형을 바라보았던 두 마리아가 주님의 장례를 지켜보고 있다. “그 때에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이 두 여인은 사랑과 진리의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애착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여인들은 앉아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자세는 내면의 상태, 결심이 선 의도를 의미하는데 이 구절의 경우 심정에서 그분이 부활하신다는 희망으로 주님께 헌신된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사실 본문의 여인들이 실지 이런 희망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되기 힘들다. 그 당시 형편으로는 희망이 그들 심정을 채우고 있었다기보다는 자포자기로 채워진 어둠의 때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이 존재한 그곳에 모든 것도 있는 법이다. 이는 때가 차면 하느님의 섭리가 길이 트이게 하듯이 뭔가 발생할 것이다.
62-66. 신약 성경 역사에서 뾰족이 서있는 위와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가 우리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주님의 경건한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장례 절차를 밟아 이미 꺼져버린 희망으로 간주되는 그분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고 침묵만 흐르는 그 무덤을 떠났다. 제자들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에 관련된 모든 두려움을 그분을 죽였다고 해서 다 떨치지 못했다. 제자들에게는 못 믿겨울 정도로 지독하게 다 잊어버린 듯 되어버린 그분의 말씀, “삼 일만에 나는 다시 일어나리라”를 유대 지도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그들 세대에서는 더 똑똑하다. 그러므로 다음 날 대성직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설명한 다음 그의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물러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다.” 그들이 돌을 봉인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말씀에 가한 짓들, 글자를 뒤집고 그 속에 영이 있음을 부정함으로 주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봉인했다는 것을 뜻한다. 봉인한다는 것은 말씀에 고용된 한 가지 모양새인데 이는 닫는 것, 감추는 것, 알려짐을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승천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 “그 때가 가까웠으니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아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거꾸로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돌을 봉인했을 뿐 아니라 경비병까지 세웠다. 이는 그들이 대단히 염려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해서 였다

마태복음 26장 해석

26

앞 장까지의 강연으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공생애를 결말지으셨다. 그분께서는 군중의 마음이 그분을 받을 수 있는 자세에 있을 때에 설교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마지막 심판은 확실히 있음을 선포하심으로 공생애를 마감하셨다. 크게 나누어보면 지금까지는 그분의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연설하신 것이고 이제는 그분의 안쪽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그분 스스로 강연을 계속 하시고 있다.
1, 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모두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알다시피 이제 이틀만 있으면 과월절이 되는데 그 때에는 사람의 아들이 잡혀가 십자가형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과월절은 과거 에집트에서 첫 번째 아들을 죽이는 재앙이 덮치던 날 밤에 이스라엘 가문의 집은 건너가게 하시어 살려주신 주님의 자비를 표시하듯 기억하도록 해주시려고 제정된 기념일이다. 이 마지막 재앙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는 수단이었고 이 사건의 의미가 과월절로 표시되고 있다. 주님께서 유대인의 과월절 대신 제정한 성만찬은 이제 완성하신 위대한 구속에 대한 표시요, 그분께서 완성하신 구속을 수단으로 신실한 사람들은 과거 에집트에 노예가 된 신세보다 더 지독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짐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주님께서도 과월절 기념을 준수하셨는데, 그 이유는 에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은 그분이 완성하신 구속하심을 예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시고 있다. “이틀만 있으면 과월절이라는 것을 너희도 알고 있다.” 둘이란 숫자는 결합(conjunction)을 의미하는데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악과 거짓의 결합을 뜻한다. 본문의 “둘(이틀)”이란 숫자는 주님 측면에서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하나 됨(union)을, 유대 교회라는 측면에서는 악과 거짓의 결합(conjunction)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주님의 경우는 인성의 신성화 하심을, 유대 교회는 정죄되기 위해 준비가 완료됨을 뜻한다. 주님이 배반당하고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사건은 위 두 측면을 동시에 완성되게 하는 과정이다. 이런 모습은 배반과 십자가형이라는 두 가지 행동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이틀” 뒤라는 날짜 기간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거짓 원리에 해당되고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함은 악한 원리가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3, 4.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분의 죽음에 관해 말씀하실 때 다른 쪽인 유대교 회의장에서는 어떻게 그분을 잡아 죽일까 모의하고 있다. “그 무렵 대성직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파라는 대성직자 관저에 모여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만은 피하자고 하였다.” 이 구절은 시편 2편 1,2절의 예언이 성취되게 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세상과 교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속한 모든 권력들이 유대인과 로마인들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은 최고의 선과 진리 되시는 분으로서의 주님을 거슬러 담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지니신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표현하는 게 말씀인데 이 말씀에 정반대되는 상태로 유대인과 로마인들이 사건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대성직자의 관저는 유대 종교의 멤버들이 회합하는 곳이고 대성직자 가야파는 이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다. 회의의 우두머리는 그 회의의 품성을 말하는 바 이 교회 회의장 자체가 표현하는 것은 그 교회의 품성과도 일치한다. 따라는 이 회합 내지 그 교회는 지독하게 부패됨, 또는 완전하게 황폐된 상태를 암시한다.
관저(palace)는 여느 집과는 구별되는 집이다. 그래서 관저는 의지와 구별되는 마음 측면인 지성을 의미하는데 이 절에서는 특별히 교회의 지적인 원리를 의미한다. 생각들이 모여서 선하든 악하든 뭔가를 잘 협의하는 곳이 이해성이라는 곳이다. 인간의 이런 특성과 관저가 지닌 의미는 본문 같은 사건을 통해 더 실감나게 암시되고 있다. 본문에서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체포할까 궁리할 뿐 아니라 흉계를 꾸며서 죽이려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는 유대 교회 안에서 말씀에 반대되지 않으면서도 말씀을 뒤집고 파괴하는 계략을 궁리하는 생각을 표현하는 모습이다.
대성직자, 그는 회의장을 주도하는 인물인 바 우리의 관심이 더 특별히 집중된다. 자기에게 부여된 공적 지위와 타락된 자신의 품질과 하나 되게 한 성경의 인물 중 하나가 가야파이다. 가야파에 관한 더 흥미있는 언급은 요한복음 11장 49-52절에 있다. “그 해의 대성직자인 가야파가 그 자리에 와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이 말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성직자로서 예언을 한 셈이다. 그 예언은 예수께서 유다 민족을 대신해서 죽게 되리라는 것과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전능하신 분께서 불어넣은 영감으로 이런 위대한 진리를 발표했음에도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모의한 것이다.” 마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능하신 분에 대한 환상을 경험했던 발람이 장엄한 진리를 내뱉으면서 동시에 악마의 행동을 저지르려하고, 축복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명령받았음에도 저주할 구실을 모색하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가야파의 흉계는 과거 발람이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에 내려진 하늘의 운명을 거슬러 마법을 사용해 보려했던 것보다 “야곱에게서 솟은 한 별,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한 왕권 되신” 예수를 향해 효과가 더 큰 술책을 썼다. 그러나 그분의 섭리는 이쪽은 못하게 하고 저쪽은 하도록 허용하는 유익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가야파 시절 때의 신성한 섭리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방법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대성직자 가야파가 유대 교회를 표현한 모형이요, 이 교회는 지적으로 계발되었으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썩어있는 이중성, 이해성 측면에서는 하늘의 빛으로부터 말하고 그 빛을 보고 있지만 의지 측면에서는 지옥의 불로 달구어져 행동하는 불일치된 모습의 모형임을 어느 누가 간파하지 못할까?
5. 유대 종교 회의가 예수를 잡아넣기로 결정을 보자 곧이어 그들은 예수를 잡는 적절한 때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도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만은 피하자’고 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과월절 기간에 잡히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구절은 자신들이 나서는 것보다 더 사악하고 교묘한 계책인 배반자를 내세우는 것, 유다의 배반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과월절은 주님이 구속해주심에 대한 예징이고 이 절기에 죽여 먹게 되는 과월절 어린 양은 주님 자신에 대한 모형이었다. 과월절 기간에 주님의 죽으심이 있는 것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어린 양이 죽으러 끌려오듯 주님 역시 죽으시러 끌려오시는 모습 또한 적절하게 잘 어울리고 있다. 그럼에도 유대 성직자들은 많은 군중이 모인 과월절에 예수를 붙잡는 것을 피하려하고 있다.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군중들이 예수께 적대감을 종종 가지긴 했었다 해도 이 구절의 경우 그들의 통치자가 증오한 것처럼 증오하지 않고 있고 그들의 성직자들처럼 계책을 강구하지도 않는다. 이 통치자들은 파라오와 그의 하인들 같아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려는 신성한 의도를 분쇄해보겠다고 궁리한다. 한편 본문의 주님을 따르려하는 군중들은 과거 이스라엘 후손들이 에집트를 빠져나갈 때의 뒤범벅된 군중들과 비슷한 수준의 상태이다.
6. 주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꾀하는 유대 교회의 지도자와는 매우 다른 모습, 온유와 아름다움으로 꽉 채운 장면이 이제 전개되고 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 베다니아는 라자로가 사는 곳인데 라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은 이방인들 세계에서 주님의 교회가 일어남을 예징해놓은 사건이다. 이와 비슷한 게 위 본문이다. 주님께서 시몬의 집에 머무르시고, 거기서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되는 사건은 이제 유대인들에 의해서 거절된 주님을 이방인들이 사랑으로 영접하게 될 것을 표현하고 있다.
7.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계셨을 때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시몬이 주님을 향한 신앙을 상징하는데 비해 본문의 여인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상징한다. 요한복음 12장 3절을 참조하면 이 여인은 라자로의 자매되는 마리아였다. 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청종했던 여인, “실제 필요한 꼭 한가지,”(누가 10:42) 즉 예수 사랑을 자기 삶의 전부로서 선택한 경건한 영혼들을 상징하는 여인이다. 위와 대등한 모습이 본문이요 구세주에게 값진 헌물을 바치는 마리아를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고도 있다. 마리아의 위와 같은 경건한 행동은 의미심장한 행동 중 하나이다. 기름 부음은 과거 표현적 차원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으로 엄숙하게 실시되었던 행사이다. 세부적으로 볼 때 기름부음은 왕의 즉위나 성직자가 임직할 때에 채용된 의식 행위이다. 부어진 기름(unction)은 주님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예징이다. 첫째, 예수는 진실로 주님의 기름부은 자이시다. 예수께 부어진 기름은 신성한 사랑 그 자체요, 거룩한 기름은 그 상징물이다. 둘째 의미에서, 거룩한 기름은 형제간의 사랑에 대한 상징물이다. 이 사랑을 시편 133편에서 읽어보자.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형제들이 하나 됨은 형제간의 사랑을 수단으로 시멘트 같이 굳어진다. 마리아가 가져온 귀중한 향유는 구세주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상징한 물건이다. 인간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하는 게 사랑이듯 인간이 주님과 하나 되는데도 사랑은 필수이다. 사랑은 사랑을 위해 얼마나 대가를 치렀는지에 비례해 귀중해진다. 다시 말해 자아를 부정하고 헌신적인 섬김을 바치는 행동의 얼마를 가지고 사랑을 구입하느냐와 같은 말이다. 그런 다음 얼마만큼의 비용이 치러진 사랑이었든, 치른 그 사랑의 가치에 비례해서 지혜와 체험이 보태져 풍요해진다. 마리아는 옥합 안에 담긴 향유를 가져왔다. 순수한 사랑으로 채워진 진정한 믿음, 이것이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부은 향유가 담긴 옥합(상자)이다. 예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 드리는 사람의 경우 마리아 같은 헌신의 경건한 행동을 언제나 본받는다. 주님의 “머리”가 상징하듯 천적 수준에서 그분과 결합하기를 원할 경우 그들은 그분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다. 요한복음(12:3)에서는 마리아가 그분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복음서를 일치시켜 보려고 주석학자들은 추측해서 말하기를 마리아는 아마도 그분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두 복음서가 불일치하는 데에도 이유 하나가 있다. 머리는 첫 번째 가는 원리를 의미한다. 이 원리로부터 그보다 낮은 원리들이 차례로 파생되어간다. 발은 가장 낮은 원리를 의미한다. 이 원리는 그보다 높은 원리를 모두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머리에 기름붓는 것과 발에 기름붓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머리이든 발이든 그 각각은 전체 인간이 성별되어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전자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된다는 측면에서, 후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경우 발에 기름부었다고 말해지고 있는 이유는 그의 복음서는 가장 위대하게 충만됨 속에서의 거듭남, 즉 첫째가 마지막 안에,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것 안에 담겨 있는 거듭남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8. 사랑스럽고 경건한 마리아의 행동이 그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서 칭찬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분개하여 ‘이렇게 낭비하다니!’ 하였다.” 이 구절은 그분을 따르는 여인들보다 제자들이 주님께 덜 헌신적이고 덜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가 매우 다른 품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기도 하다. 여자는 애착으로부터 더 행동하고 남자는 지성으로부터 더 행동한다. 비록 남자와 여자는 두 품성을 동등하게 소유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두 품성은 인간 모두의 필수되는 요소이다. 마리아와 제자들의 차이점은 각자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쉽게 이해되리라 본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충동은 고상하고 관대한 행동을 하도록 해주나 분석해서 재보는 자질이 돌출하면 심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잉태된 충동을 낭비적인 것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때로 후자의 경우가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현 모습에서 후자는 전자보다 흥미가 덜해질 때가 많다. 이런 연유로 성경에서 교회는 개인적 차원일 경우 여인으로 표현된다. 여인은 이해성이 아니라 의지,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 해당된다. 사랑은 교회를 구성하는 생명이고 이것이 시온과 예루살렘의 딸, 어린 양의 신부와 아내로 상징되고 있다. 교회의 진정한 멤버 되는 모든 사람은 위 두 요소, 사랑과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사랑이 진정한 예배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의 참 예배의 은총은 그의 영혼이 구세주와 하나 되는 것이다. 지성, 진리, 마음 등등이 홀로 있을 경우 그것 안에는 헌신적인 것, 결합되게 해주는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자아 숭배 쪽으로 기울기 쉬어서 분해와 분단만을 창출하기 십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의 제자들은 분리된 상태에서의 신앙이 주는 영향력에 너무 많이 노출된 마음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내놓는 값진 봉헌을 칭찬하려 하기보다는 반대하는 측면에서의 신앙을 표현해 준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2장 4-6절을 보면 가리옷 사람 유다가 여인의 행동에 대해 낭비라고 격조 높게 불평한 제자라고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고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라고 기록해두었다. 한 시리즈의 앞에 있는 사항이 시리즈 전체의 품성을 말해준다는 규칙에 의거 생각해본다면 위 두 본문 모두에 관한 것은 자아 사랑과 사리사욕이 생각 측면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지적 측면의 교회 상태에 대한 표현인 것을 알게 된다. 교인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해도 그가 신성한 예배의 지적 측면만을 취할 경우, “이렇게 낭비하다니… 거룩 자체 되시는 그분께 값이 나가는 기름을 붓고자 앉아 있는 이 예배 시간과 예배를 위해 소비되는 물질을 판다면 더 많은 것을 얻어 더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라고 불평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더 고상한 감정으로부터 진행되는 행동들, 마치 주님 자신으로부터 있어진 행동들, 즉 자아로부터서는 덜 행동하고 주님 측면에서 이루어진 행동도 자주 있을 수 있다. 주님께서 의로운 사람의 행동으로 지목하신 행동을 생각해보자.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그런 행동이리라.
9. 여인과 제자 사이의 차이점은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의 차이점이기도 한데 이 절이 이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 향유를 팔면 많은 돈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말했다.” 여인은 주님을 먼저 생각했고 제자들은 이웃을 먼저 생각했다. 천적 수준에서는 주님이 첫째이나 영적 수준에서는 이웃이 먼저이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경건한 묵상이나 기도를 바치느라 왜 이렇게도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가? 왜 그런 시간이나 정력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바치지 않는가? 하느님은 이런 형식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지 않을까? 인간이 공들여 찬양한다고 그분을 드높여지게 할 수 없지 않는가?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기는 길이 아니냐?” 이런 질문들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사랑의 가장 높은 형체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온다. 이웃을 향한 참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인간을 사랑할 때만 존재한다.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양식인 한줌의 밀가루를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을 베풀기 전에 이렇게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들도록 하시오” (열왕기상 17:1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좋은 수확을 거두려면 햇곡식을 먼저 그분께 바치도록 요구하셨고 이삭은 가난한 백성을 위해 줍지 말도록 명령하셨다. 왜 이러했었을까? 곡식을 주신 분을 인정함은 주신 선물을 성결하게 하고 동시에 그 곡식의 사용을 더 유익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데 있다. 제자들은 향유를 팔면 많은 돈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제자의 생각과 유사한 내용을 주님께서 말하신 대목이 있다. 제자를 지망한 부자 청년에게 먼저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다. 이 때의 청년이 지닌 재산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장애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나가는 본문의 향유는 주님을 잘 모시려고 사둔 향유이다. 그런데 이 향유를 다시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돈으로 주라는 것이 제자들의 의견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봉사하는 방법으로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여인은 교회 특히 이방인들의 교회를 표현하는 바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신 분으로서의 주님과 가진 게 너무 부족한 가난한 사람 중간에 위치하는 교회로서 생각된다.
10.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주님께서 여인의 선한 일에 참견하신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행동이 그분께 선한 일을 한 것으로 판정되느냐를 되물어 보는데 집중해보자.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은 교회가 사랑을 통해 주님의 신성한 인성과 결합을 추구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예수께 드린 선한 일을 그녀 자신에 국한해본다면 교회 쪽 부분에서 받아 지닌 그분의 사랑을 되바침으로 주님과 하나 됨을 뜻한다. 영적 수준이 그 수준에서 천적 수준을 판단할 경우 천적 수준을 괴롭히게 된다. 게다가 영적 수준의 영을 천적 수준의 영에 주입하려 고집할 때 더욱 괴롭힌다. 더 높은 것에 더 낮은 것이 작동하면 그 작동 자체부터 더 높은 것에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다” 라고 주님이 말하셨다. 이 구절은 다음에서 살피게 되리라.
11. 주님께서 경건한 일을 하고 있는 이 여인을 성가시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언제까지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에는 두 종류가 있고 궁핍에는 많은 수준이 있다. 먼저 자연적 측면에서의 가난이 있다. 이 가난은 이세상의 물건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분배된 몫이 매우 적어 발생된 경우이다. 둘째로 영적 측면에서의 가난이 있다. 이는 천국의 부함을 가지고 있다하나 매우 적게 가진 경우이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경우 여러 가지 부류들이 있다. 자신이 가난한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부자라고 착각하여 영적으로 부유해질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감지해서 진정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또한 타인들의 인격 안에는 풍부히 있지만 자신에게는 없어 발생한 가난이 있는가 하면, 자기 내부에서 가난해지게 하는 자질을 지녀 자신 속에 가난해질 가능성을 항시 소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의 것들은 많든 적든 우리와 늘 함께 존재하는 가난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언제나 가지고 있지 못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심정이라는 그분의 영, 사랑과 자비라는 그분의 영, 자제하고 용서하는 그분의 영, 등등과 같은 예수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지 못한다. 그분이 거주하시는 천국적 품위와 미덕이 우리와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될 경우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면 사랑과 헌신을 향한 우리의 애착이 쏟아 붇는 때를 맞이한다. 마치 본문의 여인이 귀중한 향유를 사용할 적기를 맞아 머리에 쏫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 이 모습은 왕의 은덕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팔방으로 애쓰는 신하로서 예의를 갖추는 모습, 심오한 존경의 표시를 그림 한 장으로 그려놓은 셈이다.
12. 주님께서 말을 이으시고 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장례란 부활을 상징한다. 육체가 죽어 매장될 때 영혼은 진짜의 삶, 완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님의 부활은 그분의 신성화 하심(glorification)이었는 바 이 의미가 그분의 장례에 포함되어 있다. 천사들은 죽음이나 장례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생명과 부활만을 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가 천사의 언어로 통역될 경우 죽고 있음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고 있음이라는 말로 바뀐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셨는 바 주님께서는 거기에 무슨 뜻을 담으셨을까? 누구나 다 익히 아는 바, 예수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은 자라 해서 그리스도라 일컬어졌다는 것이다. 여호와로부터 예수께 부어진 거룩한 기름은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 “신성한 인성 측면에서 주님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가 되셨다. 그 이유가 임신된 때부터 신성한 사랑의 선 자체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 자체로 만드셨다. 더구나 그분의 인성을 신성에 하나 되게 하는 방법으로 인성까지 신성한 사랑의 선으로 만드셨다.” 예수가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였듯이 예수는 천국과 교회의 기름부은 자가 되시었다. 교회에 의해 기름부어짐은 주님에 증여한 선물을 그분께 되돌려 드릴 때 있어진다. 다시 말해 사랑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분께 사랑을 되돌릴 때 있어진다는 말이다. 주님의 경우 이런 사랑은 그분의 인성이 신성화 되심으로 완성된다. 신성화 하심이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이제 막 이루어지려는 시기이므로 주님께서 “이 여인이 내 장례를 위해 향유를 내 몸에 부었다”고 말하신 것이다. 즉 그분의 인성이 거룩함 자체로 승화되시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다. 이런 주제가 우리의 실제에서 어떻게 되는 지도 살펴보자. 즉 우리 자신 안에서 있게 되는 그분의 부활과 신성화 하심에 대해서이다. 그분의 인성이 우리 안에서 신성화 하시려면 신성으로부터 온 사랑을 수단으로 가능하다. 그래야 우리가 사랑하고 경배 드리는 진정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사랑이야말로 그분의 은택을 깊이 느끼는 제자가 그분의 머리에 붓는 향유인 것이다. 더불어 이 모습은 예수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는 원천되시는 분임을 심정으로 인정한다는 표시이기도하다.
13. 이제 주님께서는 이 여인에 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되리라.” 이 구절은 글자대로도 성취되었다. 위 여인의 행위가 불멸의 명성을 얻고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게다가 위 약속 안에는 또 다른 약속까지 담고 있다. 이 여자에 대한 기억은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 안에서도,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심정 속에서도 있어지리라는 말이다. 위 구절의 주님의 언어에는 또 다른 의미도 암시하는 듯 보인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봉사에 대해 일시적일 뿐인 지상의 보상을 약속하는 게 주님이 주인 되는 교회의 특질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에 대한 기록은 드높은 저곳에 있다. 영적 의미에 의거하면 “세상”이란 내부의 세계 즉 인간 마음을 뜻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든지,” 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밝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어느 마음이든지, 혹은 구원해주는 진리가 열납 되는 어느 마음에서든지 진리는 선 쪽으로 인도해준다는 것이 알려진다. 더구나 알려지되 기억하게 된다. 이는 내적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행동들은 외적 인간 안에도 새겨져야 한다는 말이다.
14. 구세주를 향한 감미로운 사랑의 이야기에 향유를 낭비했다고 불평한 주범격이되는 사람의 반역적인 사건이 곧바로 전개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목할 뭔가가 깊이 놓여 있으리라 생각된다. 주님께서는 앞 절의 여인의 행동은 주님의 장례를 위해 그분의 몸을 방부 처리하는 것이라고 말하셨다. 이런 주제에 마치 덜 깬 잠을 흔들어 깨우는 기사가 이어진다. “그 때에 열 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성직자들에게 갔다.” 유다의 품성이나 행동들을 지극히 평범한 성경의 언어로 받아들여 우리의 뭔가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유다의 품성이나 행동보다 더 극렬한 불법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가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항은 익히 알기 때문이다. 유다라는 이름은 인간성의 최하위를 표현하게 되었다. 본보기 차원이 아닌 유다의 행동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피할 수 없게 한 인간 타락의 극치에 대한 모형이 되고 있다. 그분으로 죽게 한 진짜 악은 그분의 부활이 설비해둔 것에 대조를 이루는 악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이방인의 교회를 표현하고 이 여인의 행동은 표현적 측면에서 이 교회가 죽음으로부터 주님을 이제 영접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반면, 유다는 유대인의 교회를 표현하고 이 교회는 이제 주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해 그 교회가 그들의 해방자로 오랫동안 갈망해온 오로지 한 분이신 주님을 죽이게 되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유다는 기독 교리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위의 유대교 같은 품성까지 표현해준다. 더 나아가 모든 시대의 교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었고 있게 될 위의 유대교 같은 원리 내지 요소들까지 망라해서 표현해주고 있다. 유다는 인간 본성의 원리 중 최하위 내지 가장 타락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뱀이 머리 역할을 했던 세상의 마지막 시대, 순진의 배반자, 죽음을 부르는 자의 마지막 째를 표현하고 있다. 악의 절대적 지배와 전혀 다른 측면이 같은 무게를 지니고 대조적으로 출현되고 있다. 마지막 죽음은 첫 번째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죽음이 정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수단으로 예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지닌 자들을 정복하시어 인간 타락이 막고 있던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여셨다. 생명과 불멸함이 복음에 의해 우리에게 잘 보이도록 빛 가운데 놓여졌고 이제 부활로 실현되어지고 있다. 결국 위에 열거한 끝에 달한 악 조차도 악의 지배를 뒤집을 역사를 실행하는데 따른 허용된 수단에 불과했다. 유다가 표현해준 인간 본성 속의 원리란 감각적이고 육적이라 불리는 원리, 사도들의 서간문에서 종종 거론되는 육욕적인 것들, 타락된 인간 상태 즉 영적 차원에 반감을 내세우는 인간 본성에 있는 잡다한 것들을 말한다. 이런 원리들은 인간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향해서는 죽기를 작정하고 반기를 치켜든다. 이것이 심정 속에 있는 유다여서 그분을 배반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 이런 육욕적인 원리들은 그분을 엎어 버리는데 더욱 만전을 기하기 위해 부패하고 뒤집혀 있는 교회의 권세나 원리들과 동맹 관계를 추구한다. 마치 유다가 대성직자와 손잡고 움직이는 모습이다.
15.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하고 물었다.” 이 구절과 이 뒤의 유다 역사를 합쳐 생각하면 그는 자아 사랑에 의해 움직였다기 보다는 예수를 미워함으로 작동된 것처럼 나타난다. 그는 모든 악의 뿌리인 격렬한 탐욕이 먹어치우도록 자신을 내던진 듯 나타난다. 그렇게 해서 그의 탐욕이 그의 최고되는 친구까지 먹어 배를 채우도록 자진해서 움직였는 듯 보인다. 그의 질문이자 목적은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이다. 어떻게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위 같은 흥정이 가능했었을까? 자기가 인정한 종교 원리를 탐욕과 이기심에 희생물로 삼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되 또다시 배반하는 격이 아닐까? 이것은 돈을 천하게 사랑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또 다른 탐욕인 지식을 야비하게 사랑하는 경우이다. 생명 내지 삶의 수단이 물질계에서는 돈으로 말해지듯 영혼에서는 지식이 그것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진리와 선함은 생명의 원리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팔려진다면 그 지식은 생명 대신 죽음의 수단이 되고 만다. 유다가 주님을 판 값, 대성직자가 주님을 죽이기 위해 구매한 값은 유대 교회가 그분이 구속하시고 구원해주시는 그분의 공로에 매우 적은 가치만을 부여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다.” 위에 암시된 내용과 관련해 볼 때 “서른”이란 숫자는 매우 적음을 의미하고 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옥토에 뿌려진 씨의 결실이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세 가지 수확 중 삼십 배는 가장 적은 양의 생산량에 대한 측정치로 사용되고 있다. 유다와 유대교의 성직자들은 개인적으로 볼 때 주님이나 그분의 일에 어떤 평가를 내렸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쳐준 값은 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 그 값은 주님과 그분의 구속에 대해 내려진 일반적인 평가가치가 된 셈이다. 이 “은전 서른 닢”은 세상의 구세주에 내려진 가격이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더 나은 값을 매기고 있을까? 만일 더 나은 값을 매긴다면 과연 얼마나 매길까? 각자 생각해 볼일이리라.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상태(state)와 상응되는 자연계의 시간인 그 “때”란 유대교가 종지부를 찍는 가능성을 뜻한다. 개인의 삶과 관련해 볼 때 진리와 선을 적의 수중에 넘겨줄 기회를 찾는 마음의 상태란 마음 안에서 이기심 내지 인간 자아가 극도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 중 하나이고 인간 원리를 극단적으로 파괴하는 쪽으로 치닫는 것 중의 하나도 뜻한다.
17-30. 이제 우리는 복음서 역사 중 매우 중요한 부분, 즉 주님께서 제자들과 과월절 음식을 잡수시는 사건, 그리고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는 부분을 살피게 된다. 옛 예식에 참석하시는 때에 새 예식을 제정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면서도 매우 시기 적절하다. 유대인의 과월절은 기독인의 성찬식에 그림자가 되도록 제정된 기념일이다. 다시 말해 과월절은 허상의 수준에서 행해졌다는 말이고 성만찬은 실상을 기념하도록 제정되었다는 말이다. 에집트의 노예된 신세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것은 지옥의 노예된 상태에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섭리에 대한 예징(type)이었다. 과월절 어린 양, 이 양의 피를 문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라서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가문의 집을 건너가는 사건은 하느님의 어린 양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 그리고 과월절 어린 양의 고기를 그들이 해방됨을 기념하는 축제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혼의 양식이 되도록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주는 사람의 아들의 고기에 대한 예징이었다. 물론 자연계에서의 주님의 몸에 있는 살과 피가 위의 특수성을 직접 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말씀들이 영이고 생명이다. 주님의 살과 피가 영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래에서 자세히 살핀다. 어쨌든 과월절 어린 양이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도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다…” (고린도전 5:7).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어디에다 차렸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과월절은 때로 무교절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이 축제기간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도록 명령되었기 때문이다. 이 축제는 칠일동안 거행되었는데 이스라엘 달력이 첫 달로 삼은 그 달의 십사 일에 시작되어 이십 일에 끝났다 (출애굽 12:1-14). 이스라엘 달력이 시작하게 되는 그 해는 주님의 구속이 시작하는 해를 표현하는 바 인류의 영적 역사에 신기원이 시작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과월절은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과월절은 신성한 존재와 인류가 결합하는 것도 표현했다. 주님과 인류의 결합은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을 수단으로 결과가 있어지는 바, 위 천적 원리와 영적 원리가 과월절에 먹게 되는 누룩 없는 빵으로 표현되어졌다. 빵은 모든 양식 즉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에 속한 모두를 뜻한다. 이 두 수준에 속한 것들이 불순함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누룩 없는 빵이 표현한다. 그 이유가 누룩은 악과 거짓을 의미하고 이로 말미암아 천적이거나 영적인 원리들이 불순해지고 모독되기 때문이다.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가문에서 잘라 버리라고 까지 명령하여 금지시킨 것은 천적, 영적 원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모독되는 것을 예방하시기 위해서였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 내지 영적 수준의 원리에 속하는 것을 모독하는 사람은 피할 수 없이 멸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의 첫 날은 칠 일의 축제기간 중 첫 날에 해당되는 바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뜻한다. 이제 주님 자신 측면과 관련해 생각해보자. 그분에게 무교절로 표현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이란 십자가의 고통으로 완성되어지는 신성화 하심에 관한 마지막 상태 또는 그 과정이 충만됨을 뜻한다. 주님의 신성화 하심은 연속적인 일 일 뿐 아니라 성공적인 일이기도 했다. 이 일은 하나 하나 구분되기도 하지만 연속적인 등차로 진보되어갔다. 그래서 그 마지막 단계 내지 등차에 이제 막 진입하시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제자에게 말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 왔는지 모른다” (누가 22:15). 초자연적인 영광으로 바뀌게 하는 그분의 어두운 대단원, 시련, 시험, 고통 등등에 공통된 쓰라림이 과월절 어린 양의 고기와 함께 먹게 되는 쓴 나물로 뾰족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주님의 경우나 거듭남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 된 사람의 경우나 등차만 다를 뿐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이 그분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어디에다 차릴까요?” 제자들이 주님이 계시지 않은 채로 과월절 음식을 먹는다거나, 이 축제가 그분의 것임을 알고 먹는다거나 모두 가능하다. 어쨌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잡수시지 않으면 이 축제는 그분의 것이 아닌 바 우리 영혼은 그분과 결합하지 못한다.
18. “어디서?” 라는 제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성 안에 들어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 사람더러 ‘우리 선생님께서 자기 때가 가까웠다고 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을 지내시겠다고 하십니다’고 말하여라.” 누가복음 22장 7-12절을 참조하면 제자들은 어떤 집을 향해 곧바로 간 것은 아니고 그들이 성 안에 들어갔을 때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고 있다. 예루살렘 성은 순수한 의미 측면에서 교회 속의 교리를 표현한다. 이 성 안에 있는 집은 진정한 모든 교리가 포함하는 선을 표현해주고 있다. 제자들이 과월절을 기념하게 될 집 쪽으로 인도된 것은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따라감으로 이루어졌다. 이 모습이 표현적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바, 이는 만일 우리가 진리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간다면 우리는 선함에 관한 원리를 소개받고 또한 선한 상태에도 머물게 되리라는 것이다. 물은 진리를 상징하는 바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이란 교회의 진리로 훈육받아 영적 총명을 소유한 사람에 대한 모형이다. 주님의 모든 기적들이 지닌 의미에는 중요한 교훈들이 있지만 이를 깊이 살피지 않은 위의 사항 정도만 가지고도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집주인에게 “우리 선생님께서 자기 때가 가까웠다고 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댁에서 과월절을 지내시겠다고 말하라”라는 집주인으로서는 대단히 황당할는지 모를 말을 전달했다. 누가복음의 경우, 이에 대해 말하기를, 제자들이 따라 들어 간 집주인을 그 집의 선한 사람(good man of the house)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집주인은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음 또는 이해성이 의지와 하나 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을 영적 의미로 보면 진리가 표현한 것을 그분으로부터 받아 적듯 직접 받는 것 즉 내향으로의 지각(perception)을 의미한다. 주님이 전달한 “자기 때”란 과월절 음식을 잡수시는 때를 말하는게 아니라 진정한 과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시는 “때”를 말하고 있다. 추측컨대 집주인이 위 주님의 “때”를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위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특별히 있어질 특혜에 감추어 놓였을 뿐이다. 단지 그분의 말씀 자체가 권능을 가졌다는 것, 더 나아가 영적으로 가르치는 권능을 당연히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충분한 납득이 있어지리라 본다. 장소가 상태를 표현하듯 시간이라는 “때”도 상태를 표현하는 바 그분이 죽게 되시는 때란 그분이 영화하시는 때를 뜻한다. 가깝다(near at hand)란 근접된 상태를 뜻한다. 이를 보다 실감나게 우리와 연관해 생각해본다면, 주님의 때가 우리에게 가까웠다란 그분의 신성화 하심이 우리의 거듭남에서 주님을 실감하는 바로 그 때이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우리의 심정과 삶에서 죽어있던 상태에서 일어나 다시 태어나지게 되는 때를 말한다. 이해성의 지각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을 집주인에게 전달함으로 의미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신성한 사랑을 받는 그릇으로서 의지가 동의한 상태도 의미하고 있다. 더불어 사랑을 통해 주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까지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 보라고 말하시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분이 그 집에서 묵으시겠다고 하셨는 바, 이는 그분의 뜻일 따름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시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주님의 뜻에 호의적일 경우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더 헤아려볼 어떤 것도 더 필요치 않다. 그분의 뜻은 위 구절, “내가 제자들과 더불어 네 집에서 과월절을 지내겠다”는 말에 표현되어있다. 이미 여러 번 주목해 살핀 바, 주님께서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장소는 의지 부분이요, 여기서 인간과 결합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제자들을 인도해간 집주인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 안에 표현되어있다. 그 집에서 주님은 제자들과 과월절 음식을 잡수신다. 제자란 인간 마음 안에서 주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을 표현하는 바 제자들이 집에서 과월절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선함과 진리에 관한 인간 마음 속의 모든 원리가 의지 안으로 승강될 때 그분과 교통되고 선함들이 자기 것 되어져서 사랑과 믿음에 관한 모든 원리가 그분과 결합되는 것을 말한다.
19.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과월절 준비를 하였다.” 이 복음서에서는 이 구절의 제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누가복음의 경우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언급해주고 있다. 이들은 진리와 선함 또는 신앙과 사랑을 표현해주는 제자들이다. 그 외의 제자들이 세부적 측면에서의 진리나 선함에 관한 원리를 표현하는 반면 이 두 제자는 일반적 측면에서 표현한다. 이 두 제자, 이 두 원리가 과월절을 기념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들은 주님과 천국을 확실히 받을 수 있게 마음을 준비시켜 준다. 더불어 심정 안에서 사랑과 평화의 그분의 왕국에 관한 원리를 확증되게 한다.
20. 과월절을 기념함, 주님께서 죽음에 앞서 제자들과 갖게 된 마지막 식사에 관해 살피게 된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과월절과 주님의 성만찬에 있어서 구분되는 점에 관해서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두 사건의 영적 차원에서의 취지를 잠깐 더 살펴보자. 과월절은 구속해주시는 주님의 일을, 성만찬은 구원해주시는 주님의 일을 취급하고 있다. 이를 달리 말해보면 전자는 개혁(reformation)에 관한 일을, 후자는 거듭남(regeneration)에 관한 일을 취급한다. 전자가 후자에로 건너가면서 후자 안에서 전자가 완성되고 충만함을 발견한다. 따라서 위 두 개의 위대한 표현적 차원의 축제에서 매우 깊이 있고 영원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더 위대함이 덜 위대함을 포함하듯 주님의 성만찬은 과월절이 지닌 모든 의미를 담고 있다. 참으로 기독 교회의 이 거룩한 예식은 과거 이스라엘 교회에 소속되어 온 모든 축제와 제물로 표현된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교회의 의식 전체가 성만찬의 거행으로 체현되고 있다. 이스라엘 교회에서 씻는다는 예식은 세례라는 예식으로 체현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식에 관한 법들이 폐지되었다 해도 그 법이 요약되어 기독 교회의 기념 예배를 형성함으로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의미에서 저녁(evening)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루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1장 참조).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모인 저녁은 새로운 날의 시작, 구원의 날의 시작이었다. 유대 교회에서의 이 저녁은 밤의 시작이었다. 그 이유는 그 교회는 여명을 여는 어떤 아침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있어서 이 저녁은 가장 어둡고 가장 비참한 시험이 덮치는 밤의 시작인 저녁이었고 이 저녁은 초자연적인 영광인 그분의 부활을 뜻하는 아침에 앞서 있다.
21. 이 절은 위 사항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마디는 그분이 겪으시는 단계 중 가장 어두운 단계, 더 나아가 제자 중 한 사람의 행동에 관한 어두운 측면까지 언급된다. “같이 음식을 나눌 때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제자 중 하나가 저지르는 범죄 자체에 관한 것보다 그들이 과월절 음식을 먹는 도중에 왜 주님께서 이런 범죄를 밝히셨는가에 대해서 살피려한다. 위 문단에서 저녁이란 단어가 상반되는 상태를 표현했듯 축제 역시 그렇게 표현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월절 음식을 먹은 것은 그들과 에집트 사람 사이의 완전한 분리 또는 마지막으로 있는 분리, 즉 홍해까지 추격한 에집트 군대가 몰사되는 심판이 거행되었음, 그 다음 홍해 저편에 건너가 그들이 자유로워졌음을 상기하게 한다. 이와 비슷한 분리와 심판이 이제 유대 교회에 막 내려지고 있다.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섞여 있던 상태에서 서로 갈라지고 있다. 전자는 구원되고 후자는 거절되어지고 있다. 불의한 사람이 유다로 표현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는 유대교를 표현한다. 의로운 사람은 유다 외의 제자들로 표현되고 있다. 유다의 속성이 면모를 드러내는 때도 과월절에서 였다. 그래서 그의 반역이 미리 예고되고 신성한 진리로 있게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이 유다 위에 발표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그는 즉각 나가서 대성직자에게 스승을 넘겨주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사건 이후에서도 유다와 그 외 제자들의 역사는 그들 각각이 표현하는 품성이 어떠한지를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다. 이 배반자, 과거 에집트 군대가 몰사했듯 멸해지고 그 외 사람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같이 그들이 정의를 건설하기에 앞서 시련을 통과했다.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 중 하나가 배반하는 데에는 독특한 타당성이 있다. 진짜 제자와 가짜 제자를 구분되게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전자는 선행(charity)을 바탕으로 한 신앙을 원리로 삼아 행동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선행이라는 바탕이 없는 믿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따라서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선행(charity)이 없는 믿음(faith without charity)이라는 원리이다.
22. 제자 중 하나가 배반한다고 말하시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었다.” 걱정(sorrow)은 시험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괴로워 죽을 지경에” 이르는 시험을 우리를 위해 받으셨는 바 우리의 걱정을 짊어지셨다고 말해진다. 이런 걱정은 자기를 검증하게 한다. 시험 받음에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 즉 시험 받음에서 악이 흥분되어지고 따라서 악의 면모가 우리에게 밝혀져 추방할 수 있게 되는 바, 시험은 우리의 거듭남에 꼭 필요하다. 제자들이 근심한 결과 주님께 묻는 언어 형체는 매우 인상적이고 교훈적이다. 각자가 주님께 물어보되, “배반자는 누구입니까?” 라고 묻지 않고 “주님, 배반자가 저입니까?, Is it I?” 라고 했다. 참된 자기 검증은 일반적 측면에서 있는 게 아니라 세부적 측면에서 있게 됨을 “주님, 제가 배반자입니까?” 라는 질문 자체의 형식이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로 죄의 올무에 걸리도록 시험 있게 하는 악이 어떤 것인지를, 그 악이 우리 속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탐색하는 게 자기 검증이다. 이런 검증은 우리 고유의 이성이나 추론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고 오로지 위로부터 비추이는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주님 한 분만이 우리 마음 속에 꼭꼭 숨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꼭꼭 숨겨 놓은 악을 밝혀 드러나게 하실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 개개인이 그분을 쳐다보며 “주님, 그것이 저입니까?” 라고 말해야 하리라.
23. 이런 질문에 주님은 직접 답하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과월절에 사용된 본문의 그릇은 쓴 소스(bitter sauce)를 담아 놓는데 사용되었다. 과월절 음식은 먼저 이 쓴 소스에 담가 먹었다. 이런 의식에서 사용된 쓴 나물은 시험의 쓰라림을 의미함은 이미 살핀바 있다. 단어 담금(dip)은 세례를 베풂(baptize)을 뜻하는 것들로부터 파생되어있고 세례에는 시험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있다. 유다의 손과 예수의 손이 같은 그릇 안에 동시에 있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다가오는 시련에서 전자는 괴로움이고 후자는 고통을 참아낸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는 모습이다. 손이란 힘, 권능을 상징한다. 유다의 손은 지옥 자체의 권능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 이유가 유다가 적신 빵조각을 받아먹을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 접시에서 각자의 빵을 적신다는 것은 우정에 있는 친근성을 암시하는데 시편 41편 9절을 읽으면 알 수 있다. “…흉어물 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누군가와 빵을 먹는다는 것은 선을 수단으로 누군가와 교제함을 말한다. 물론 위선으로 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는 조장된 선함이요, 속이 빈 고백을 뜻할 뿐이다. 유다로 표현된 유대인의 측면에서 그들이 주님과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성경)을 소유해서 읽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우정 관계의 표현에서 보면 그들은 무리를 지어 하느님의 집을 거닐며 서로를 즐겁게 하는 담소를 하고 자기들 교회가 외적 지식을 풍부히 갖고 있으면서 예배한다는 것에 기쁨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분을 향해 내향으로는 반역하려는 상태에 있었다. 예수께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들 스스로 보여주었다.
24. 주님께서 계속 이으신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미리 예견된 바, 메시아는 그 땅의 사람들에게서 퇴박 당하리라는 것이다 (이사야 53:3, 다니엘 9:26). 이렇게 예견되듯 신성한 지혜와 자비가 무한한 선인 주님을 죽음에 놓이게 허용했다 할지라도 그 음모를 꾸민 이들의 범죄 자체의 무게가 덜해질 수는 없다. 사악함이 유다의 머리와 유대 교회 위에 되튀어 올라앉았다는 것이 유다의 행동으로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 더불어 유다가 더 표현하는 것은 진리를 배반하되 교묘한 방법, 즉 자신 스스로 주님의 제자라고 고백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진리를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 목적에 종노릇하게 만들려 추구함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파멸되게 하는 쪽으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영원한 파멸인 “화, woe”가 그들의 목을 매어 달고 있다. 그야말로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이 말씀은 자연적 측면이 아닌 영적 측면에서의 출생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진짜 모독자는 하늘로부터 태어났으되 스스로 하늘의 생명을 파괴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태어나지 않는 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25. 주님께서 배반자가 되고야 마는 사람을 향해 심하게 말했을 때, “그 때에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그것이 저입니까?’” 자신이 이미 스승을 배반할 의도를 굳히고 있는데 버젓이 위와 같이 물어온다는 것은 능청스러운 일인 듯 보일지 모른다. 예수께서도 그의 의도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계신다. 아마 이 본문을 통해 유다는 그가 표현하는 사람들이 지닌 이중적인 마음 상태를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진리 안에 있으면서 악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의 심정을 헤아리시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알고 있으나 믿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그들 생활에 아무 영향도 끼쳐주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내향적인 생각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연유로 유다가 주님께 묻고 주님이 대답하시는 모습은 어처구니없는 장면 같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긴요하게 필요한 형상인 것이다. 자기 검증을 실시하되 그 검증에서 악이 잠복해 있는 곳을 찾지 못한다면 헛된 검증, 실시할 필요도 없는 검증에 불과하다. 악이 잠복된 곳에 빛을 비추어 진리의 빛에 놓이게 해야 악은 선에서 분리될 수 있다. 본문의 사건에서는 읽을 수 없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유다는 빵을 받은 뒤에 곧 밖으로 나가” 자기 목적을 이루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 측면에 관련해 볼 때 유다는 인간 본성에 있는 육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바 이것이 악의 뿌리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천하고 일시적일 뿐인 충족을 위해 구주와 자기 구원을 팔아버리는 게 탐욕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만찬의 제정을 살핀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셨다.” 성찬, 예배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이 의식은 우리를 구속해 주신 주님의 자비를 영구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의 백성이 거듭나 구원받도록 그분 자신을 주시는 수단을 표현하도록 제정되어졌다. 이 의식은 과월절을 대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성찬은 과월절의 만찬과 똑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즉 빵과 포도주는 어린 양과 쓴나물 대신 받게 된다. 성찬을 제정하심에서 주님은 그분의 몸을 빵이라, 그분의 피를 포도주라 부르셨다. 그러나 구세주의 몸과 피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물질적일 수 없다. 만일 물질적인 몸과 피라면 이것은 영혼에 의해서 받아질 수 없고, 영적 생명을 지탱시켜줄 수 없다. 따라서 주님의 몸과 피란 언어의 비유적 형체이다.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물질적이지 않다. 그 인성은 신성화 하시어 신성으로 만드셨다. 그러나 그분이 지상에서 가지셨던 물질적인 몸과 피에 상응하는 신성한 원리들이 그 안에 담겨있다. 이 신성한 원리란 선함 자체와 진리 자체이다. 이것들이 주님의 참 인성을 구성하고 기독인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그분의 몸과 피이며 이것을 먹고 마시지 않고는 어떤 인간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인성 안에 있는 신성한 원리에 관한 상징물이다. 빵과 포도주가 육체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듯 신성한 선함과 진리는 혼(soul)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빵은 살 또는 몸과 같은 의미를, 포도주는 피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성찬의 요소로서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도록 지정하셨고 주님 스스로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러면 외관에 속하는 성찬에 있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영이 내향으로 작동하여 주님으로부터 선함과 진리를 영적으로 열납 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이 되고 있을까? 두 세계의 연결은 상응(correspondence)을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상응을 수단으로 지상은 천국과, 자연계의 것은 영계의 것과, 인간은 천사와, 몸은 영혼과, 모든 것이 주님과 연결된다. 우리가 매우 경건하고 성심껏 성찬식에 참가한다면 우리의 헌신은 거룩함으로 덮여진다. 사실 이것 없이 진정한 예배는 존재할 리 만무하다. 거룩함이 우리를 휩쌀 때 우리는 주님과 천국에 더 직선적인 연결을 이루고 빵과 포도주에 상응되는 것인 신성하고 천국적인 원리를 받는 능력을 더욱 완전하게 갖추게 된다. 다시 말해 외적 측면의 인간까지도 내적 측면의 인간과 더욱 완전한 상응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러면 더 낮은 수준이 더 높은 것으로부터 감화를 받으면서 감화된 정도 만큼 더 높은 수준이 보다 낮은 수준 안에 담기게 된다. 이렇게 성찬을 경건하게 받으면 천국으로부터 내려 오는 진정한 빵이 심정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이상의 성찬에 대한 일반 견해를 가지고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주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는 행동을 가지고 그분은 그분 자신에 관련된 것, 즉 그분의 인성은 들어 올림으로 그분의 신성과 하나 된다는 것, 이런 승강을 수단으로 인성은 성스러워진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행동으로 그분께서 보여주신 것은, 그분의 거룩해지신 인성은 그분의 자녀가 간절히 원한 빵을 나누어(impart) 주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빵을 두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성한 예식은 사람의 아들의 승강과 하강 양쪽을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인성의 신성화 하심과 그 신성화 하심이 인간의 마음에 성령으로 내려오심을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몸과 빵은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의 인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받아 먹으라” 하신 말은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선을 우리가 실감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즉 주님께서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되 제자들 스스로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값을 치름도 없이 주시는 것을 적극적인 태도로 받음으로 주님과 협동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받은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상의 음식은 먹어야만 육체 안으로 들어와 몸을 지탱시켜주듯, 천국의 양식을 선용(use)한다면 우리 것 삼을 수 있어 영혼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27, 28. 빵을 떼어 주신 다음,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다.’” 이 구절의 보다 특이한 모습에 주목해보자. 주님께서 들어 올리신 것이 포도주가 아니라 잔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물론 이 잔 속에 포도주가 들어 있지 않다고 우겨댈 사람은 하나도 없고 물론 포도주 잔인 것은 틀림없으나 글자의 표현은 보다 특이하게 “잔”을 언급하고 있다. 포도주를 담는 그릇인 “잔”은 내적인 것을 담는 외적인 것을 의미한다. 주님 측면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 “잔”은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진리라는 참 그릇이 신성으로 만들어졌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를 말씀 측면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주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나 백성을 가르치시되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직접적으로는 결코 전달 않으시고 글자를 수단으로, 글자 안에서 그분의 영을 주시는 방법으로 가르치실 것을 함축해놓고 있다. 주님께서 빵을 그분의 살이라 하셨듯 포도주는 그분의 피라 부르시고 있다. 비록 포도주가 그분의 피에 대한 상징물이라해서 포도주에 대한 상징성이 끝난 게 아니라 포도주와 피는 제각각 상징하는 게 더 있다. 두 물질은 비슷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의미를 더불어 지니고 있다. 포도주는 영적 수준의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고 피는 천적 수준의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다. 이와 마찬가지가 “빵”과 “몸”에도 적용된다. 이런 이중적인 상징이 성찬 안에 내포된 이유는 성찬은 전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천적 수준과 영적 수준 모두에서, 그리고 그분께 되돌려야 할 인간 쪽의 사랑(reciprocal love)까지 모두 표현되도록 배려하신 섭리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피를 두고 “새 계약의 피, the blood of the new testament”라 부르셨다. 유언(testament)이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재산을 전하는 수단이다. 계약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조건이 설정되어 그 조건에 대한 쌍방의 동의이다. 이런 동의가 주님의 피에 있는 새로운 계약, 그분의 신성한 진리에서의 새로운 계약이 지닌 성격이다. 새 계약은 옛 계약과 다른 점이 있다. 옛 계약은 돌판에 씌어진 법으로 되었으나 새 계약은 심정에 새겨지는 법이다 (예레미야 32장 33절). 그러므로 성찬 예식은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찬을 값있게 받는 이들은 그가 하느님의 자녀요 하늘 나라의 상속자됨을 증거하고 봉인되며 표를 해두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계약의 피에 관해 그것은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다”고 말하셨다. 그분께서 받으시는 고통 중 마지막인 십자가에서의 피흘리심은 그분께서 창조물을 위해 참아내신 모든 것에 대한 간결하고도 강하게 표현된 어구로 전체를 위해 놓여져 있는 말씀이다. 첫째로 주님의 고통은 어둠의 권세를 극복하고 인성을 완성하는 수단이었다. 둘째로 이런 고통은 그분의 창조물을 완전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그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시험당하는 창조물을 건져내시기 위해 그분 스스로 시험받으셨다. 그분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해지고 있고, 계시록 7장 14절의 경우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런 모든 구절은 비유적 언어이다. 주님의 피를 물질 수준에서 이해한다 해도 그분이 흘리신 피가 의미하는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만 우리의 깨끗해짐은 가능해지고 죄라는 죽음과 고통이라는 시험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리하여 죄가 제거되고 삭제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 양의 피로 자기 옷을 빤 사람들이요 이들이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계시록 7:14). 환난은 주님의 제자들을 순수하게 하는 수단이다. 기독인이 환난을 겪어 얻는 효과는 구세주 스스로 통과해 가신 환난의 결과이다. 주님의 피에는 영적 수준의 의미가 당연히 있다. 물질적인 주님의 피는 그분께서 신성화 시키신 몸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상징한다. 이 피는 제자들이 죄에서 깨끗해지고 영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마셔야만 하는 사람의 아들의 피이다. 이런 의미가 다른 측면에 적용해도 무효화되는 것도 아니다. 여타 다른 측면들도 이런 피의 의미의 범주에 있거나 그 의미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은 성령 강림 때에 그분의 영을 내어 흘리시기에 앞서 필요한 예비적인 수단이다. 주님께서 흘리고 지금도 흘리시는 거듭나는 영은 그분의 인성 측면에서이다. 거듭나는 영의 측면은 사실 그분이 신성화 하신 때까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새 계약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죽으시어 구속하시는 인간 숫자를 가리키는 말일까? 구속의 보편성은 너무나 넓어서 위와 같은 의견도 가능할 수도 있게 성경에 선포되어져 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 주님의 피가 뿌려지는 “많은 사람들”이란 뿌려지되 드넓게 모든 심정들에 뿌려진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 숫자는 신성한 권위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받게 될 사람의 숫자를 예견하시지만 그 숫자가 얼마가 되리라고 결정하시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가능하면 인간 모두가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본다면 만일 구원이 그분의 의지가 원하는 대로라면 구원 못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류를 향한 주님의 바램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에 표현되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29. 잔을 돌리신 뒤 “‘잘 들어 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의 열매를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글자대로 생각해보면 이 구절은 그분께서 지상에서 제자와 함께 잡수시는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말하고 그들과 다시 함께 할 잔치는 천국에서 있어진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진리인가! 이 얼마나 위로를 주는 약속인가! 지상의 마지막 만찬은 천국의 영원한 잔치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이런 체험은 저 세계에만 전적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아버지의 왕국은 천국 뿐만 아니라 교회에,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지닌 교인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과 일치되도록 주님께서 본문에서 잔도 아니요 포도주도 아닌 포도나무의 열매 라는 단어로 언급하시고 있다. 그 이유는 포도주는 영적 진리를, 포도나무의 열매는 천적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롭고 더 높은 상태에 도달할 때 포도나무의 열매는 새롭게 존재한다. 이런 상태란 사랑이 통치하는 정부 형태요 이것이 그분의 아버지의 왕국으로 의미되고 있다.
30.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 올리브산으로 올라갔다.” 생명과 영광되시는 주님께서 비천한 그분의 추종자들과 예루살렘 이층 방에서 찬송을 부르신 것이다. 과거 천사들이 과거 온 백성에게 있어야할 큰 기쁨의 소식인 그분의 탄생을 알렸을 때도 찬송을 했다. 위 구절의 경우 그들의 노래는 완성되어 가는 그분의 구속을 노래한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만찬은 이제 구속의 끝을 맺는 일에 참가하심을 기념했기 때문이다. 이 찬송은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지상과 천국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영원히 더욱 울려 퍼져갈 것이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는 것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일까? 인간 언어에는 두 가지 요소, 즉 소리와 음절이 있다. 소리(sound)는 애착의 표현이고 음절(articulation)은 생각의 표현이다. 본문의 거룩한 노래에도 위 두 요소가 존재한다. 참된 찬송은 “고귀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완전한 음악”이다. 구속하심이 신성화 하심이라는 형체를 자아내는 주제야말로 이 얼마나 장엄할까!
우리가 예를 갖춰 주님의 신성한 일을 직시하면서 거룩한 애착이 지닌 열정을 가지고 발음해야 하는 그 생각은 무엇일까? 죄와 그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행동하시고 고통 받으셨던 불가사의한 주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닐까? 우리를 끔찍한 구덩이에서 끌어내시고 우리의 발이 반석 위에 굳건히 서게 하시고, 우리의 가는 길을 건설해 주신 그분, 그리하여 하느님을 드높일 수 있게 우리의 입에 새로운 노래를 놓아주신 그분을 노래해야 한다. 이런 주님을 찬양하려면 심정 속에 있는 멜로디로 노래해야만 한다. 진정한 하모니, 애착들로 이루어진 음악이 자리 잡고 있는 심정은 천사의 노래와 분명히 하나를 이룬다. 주님과 제자들이 찬송을 불렀을 때 그들은 올리브산으로 올라갔다. 여느 어떤 산에 비해 이 산은 신성한 사랑, 천국적인 사랑을 상징한다. 주님께서 앞서 가시고 제자들이 따라간 위 구절의 모습이 우리를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가 그분의 구속하시는 원리, 선함과 진리에 관한 생명 있는 원리를 심정과 이해성에 받게 될 때 그분의 구속하심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상태로까지 승강되게 하신다.
31. 이런 사랑은 주님의 고통과 죽음에 있는 신비를 제자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그분이 갖는 결과를 제자 자신의 것이 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시기를 ‘오늘 밤 너희 모두는 나를 버릴 것이다…’” 만찬을 나누면서 제자들이 지닌 최고의 애착이 주님을 향해 솟구친 지금, 위 주님의 발표는 얼마나 충격적이였을까? 이런 충격을 주는 제자들의 결함을 말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얼마나 온유하신지! 위의 “흩어지는” 사건은 제자 자신들이 방황하겠다고 결정했다기보다는 신성한 목자를 잃어야하는 예언의 성취라고 보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즉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말 목자의 보살펴 주심에 오로지 의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충격이 있을 때 자기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제자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이는 진정한 모든 제자에게 대체로 있어지는 시련의 모형이다. 반복해서 말한 바, 세상에서 주님의 삶의 역사는 우리 안에서 있어지는 그분 삶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의 신성화 하심 같이 우리는 거듭나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유대인이 주님을 취급한 모습은 유대 교회가 말씀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즉 말씀을 비틀고 왜곡하고 심지어 파괴해버리기까지 했던 행동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행동까지도 영적 차원에서는 우리 각자 속에 그에 상당하는 양상이 놓여있다. 우리의 악한 본성 속에는 아직도 과거 이스라엘의 부패된 후손들이 육을 입은 말씀에 저지른 큰 악들처럼 이런 반역적인 열정의 근원이 들어 있다. 주님께서 “오늘 밤 너희 모두는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깊은 시험의 밤, 즉 악의 권세가 인간 심정에 든 어둡고 부패된 열정을 휘저어 영혼에 있는 사랑과 진리의 참 생명을 죽이는 원인이 되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제자란 선함과 진리에 관한 애착들을 뜻한다. 우리 속 이런 애착 안에 주님이 거하신다. 이런 애착들이라 해도 악의 권세가 선함의 권세를 누르고 봉기하면 일시적이지만 주님을 버리는 결과도 초래한다. 이런 양상을 주님께서 덧붙인 말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의 구절이 상응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신성한 사랑 측면에서 목자이시고 그분의 양떼의 양이란 선행(charity)의 애착이다. 사랑이 강타를 얻어맞으면 이 사랑이 거하는 애착은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시험이 덮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사랑함은 헛된 일인 듯 여겨지고, 이웃을 향한 애착과 지각 역시 그것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서 지탱시켜줄 중심세력이 사라진 듯 여겨질 때 인간 속의 이 두 사랑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서로 서로로부터 모두 흩어지고 심각한 시련이 불어 닥친다. 주님이 예견해서 말하신 이런 시험의 결과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겠다는 제자들 위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2.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해두신 이 시련은 그것과 동시에 십자가형을 포함해서 모든 고통들로 더 확대되어져간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어떤 약속, 희망에 관한 말 한마디도 없이 그들을 방치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실 것임을 그들 마음에 심어 주셨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일어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는 기독교의 제자들에게 주는 희망과 약속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일어날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죽는다는 말은 자신 속에서 그분의 죽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그분과 그분의 나라에 관해서 육적으로 관조함을 내버릴 때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 된다. 그가 그분과 그분의 나라를 영적으로 관조할 때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일은 새로워지는 모든 심정과 지성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신 후 제자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갈 것이라고 말하시고 있다. 목자 되시는 그분이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하되 양떼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갈 것이라는 말은 그분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진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기독 제자에 관계시켜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심정에서 일어나시면 그분은 먼저 선함과 진리의 원리들에 가시어 인도해내 자연적 마음의 애착과 생각들에 옮겨 놓으시어 우리로 그분 자신을 명백히 알게 해주신다. 이러면 자연적 마음도 거듭나지는 바 인간 전체가 새로워진다.
33.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결함을 드러내고야 말리라고 위와 같이 말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자만이 시련의 원인이 되고 시련을 부르고 있다. 주님께서는 각자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게, 경험으로 겸허해짐을 가질 수 있도록 단련 받는 것을 허용하신다. 우리가 시험받아 지기 전까지는 자기 경험으로 의식해서 알게 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심정에 악이 들어있는 줄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께 헌신과 열정을 바치겠노라고 결심했으나 아직 그 결심이 단련을 거치지 않은 제자들의 공통된 신념을 표현한 셈이다.
34. 다시 주님께서는 곧 되어질 일을 예견해 말해주시되 제자 전체를 향해서가 아니라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지목해 말하시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는 그분을 모르노라고 한번도 아닌 세 번씩 부정했다. 닭이 우는 새벽이란 시험의 밤에 뒤이어 오는 빛과 사랑의 새로운 상태가 개시됨이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함은 완전한 부정을 함축한다. 이를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관련해 생각하면 베드로의 부인은 시련의 어두운 때에 자기 구세주로서의 주님에 대한 그의 신앙이 거의 낙망될 상태에 있는 기독인의 시험을 표현한다. 베드로가 부인함과 이를 주님이 예견하심은 교회의 상태와도 관련되고 있다. 특히 유대 교회를 넘어 기독교라는 처방에까지 이르러 관계된다. 베드로는 믿음의 원리를 표현하고 밤과 아침은 옛 교회의 끝과 새 교회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 밤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상태에서 신앙이 지독하게 기대를 저버리는 것, 천상천하의 하느님이 주님이시다는 것까지도 부정해버릴 정도로 실패하고 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35.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위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 역시 주님께 신실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결점에는 고의적인 것, 악의 같은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가리옷 유다의 행동과는 매우 다르다. 그들이 실패한 것은 그들 속에 악한 원리가 너무 강해서였다기보다는 선한 원리가 너무 미약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들의 예수 사랑은 신실했지만 미약했다. 그 이유가 그들의 예수 사랑은 영적 차원보다는 자연적 차원에 더 치중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능력에 신뢰를 두었던 바 그 결과는 자기 약함의 표출 뿐이었다. 그러므로 대단히 필요하고 유용한 교훈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수와 더불어 죽는다는 것은 자아와 세상을 죽이는 것, 우리의 악한 본성을 송두리째 십자가에 자진해서 못박는 것이다. 희생이 우리에게서 요구될 때 먼저 신실하게 생각해 볼 것은 시련이 와있다 해도 그 희생으로부터 우리를 움츠리게 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쇠약함은 교회 속의 베드로만에 국한된 약함이 아니다.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부정하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죽기를 약속했다. 그럼에도 즉각 그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자신에 큰 신뢰를 둔 사람은 가장 두드러진 실패를 하고 만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과 함께 죽을 준비가 미처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적 측면에서 본다면, 열 한 제자가 자기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주님의 예견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철저히 자기 약속을 어기고 마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인 듯 비칠 수 도 있다. 아예 그들은 주님의 예견과 그분의 경고가 전혀 없었던 일인 듯 보이기까지 한다. 진리가 기억 속에만 있을 때 이 진리는 전혀 없는 듯 보이는 것이다. 역경과 시련은 마음의 관조로부터 진리를 제거한다. 진리가 심정에 뿌리를 내렸을 때만이 제아무리 시험이 와도 우리에게 쓸모 있는 진리가 된다. 그러나 어둠의 시간 동안에서 비록 진리가 기억으로부터 사라진 듯 보여도 만일 믿음의 선한 바탕이 보존되고 있다면 심정 속의 신앙이 이해성 속의 신앙을 계승할 때 회개라는 열매를 산출한다.
36. 이제 우리는 주님의 생애 중 대단히 장엄한 대목에 속하는 사건을 접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라는 곳에 가셨다.” 게쎄마니는 장엄한 측면에서 갈보리를 능가한다. 이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통은 정신적 측면이고 십자가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다. 게쎄마니는 “착유기, oil press” 라는 뜻이다. 이 동산에서 겪는 주님의 고통을 이 동산의 이름만큼 잘 표현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올리브 기름을 짜는 착유기도 포도즙틀(winepress)처럼 시험을 상징한다. 아마 말씀에서 어둠의 권세와 싸우시는 주님, 어둠을 정복하시는 주님을 묘사하기 위해 채용된 어느 표현적 상징성도 이 문단에 버금갈 수 없을 것이다. 이사야 63장 1-4절을 읽어보자. “에돔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보스라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위엄찬 옷을 입고 위세를 펼치며 저벅저벅 걸어온 이분은 누구신가? ‘나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이다.’ ‘어쩌다가 당신 옷에 붉은 물이 들었습니까? 당신 옷은 마치 포도주틀을 밟다가 물든 것 같군요.’ ‘나는 혼자서 술틀을 밟아야 했다. 나의 백성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노여워, 나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나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원수 갚을 날을 정하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복수할 해가 왔는데…’” 올리브 기름틀은 포도즙틀보다 더 깊은 시험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주님에 관련해 볼 때 포도 나무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올리브 나무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올리브 기름틀을 밟는 이들은 신성한 사랑에 직접 반대되는 어둠의 권세, 가장 비참한 종류의 시험을 일으키는 어둠의 권세이다. 이와 같은 시험이 주님께서 게쎄마니에서 견뎌내신 시험의 품성이다. 예수께서 게쎄마니에 오심이 함축하는 바,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인류를 가장 깊게 미워함에서 오는 어둠의 권세가 일으키는 시험의 상태로 들어가시는 것, 지옥이 가능만 하다면 신성한 일의 완성을 방해하려고 구속자에게 가하는 가장 큰 그들의 권세를 발휘하는 상태에 그분께서 진입하신다는 것이다. 이 동산에 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하고 말하셨다.” 주님께서 “여기 앉아 있기를” 바랜 제자들이란 이런 교인들, 즉 주님께서 지금 견디어 내셔야만 하는 시험 같은 것, 내면의 시험에 주님과 함께 진입할 수 없는 교인을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있어야 하는 곳에 “앉아” 있기를 바랐다. 이는 그들이 훨씬 더 자비롭게 지도할 수 있는 상태에 확고부동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셨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받는 시험에 그분과 함께 갈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어디를 가시더라도 그분을 따라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이 있기를 바래신 그곳에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더 높고 더 내면에 속하는 장소를 준비하고 있으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여기 앉아 있어라”는 말씀에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분이 받는 시험처럼 그분의 기도하심도 그들의 구속과 구원에 그 목적이 있으셨다.
37.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정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반면,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이 세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있도록 선발하셨다. 이런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그분이 변모하셨던 때이다. 그들이 변모하신 영광의 그분에 관한 목격자로 선택되었었듯 지금 그들은 깊고 깊은 그분의 굴욕에 관한 관찰자로 선발되었다. 그들이 이렇게 선발된 이유는 이미 17장 1절에서 살핀 바 같이 영적 측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종교의 세 가지 위대한 필수 요건, 믿음, 선행, 그리고 선한 일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중요한 때가 있을 경우 주님과 동행하도록 선택되었는데, 이는 종교의 위 세 본질을 지녀야 주님과 더불어 그분이 체험하신 깊이와 높이로 들어간다는 것, 각 개인의 마음 안에서 위 세 원리들이 주님과 더 직접 연결되게 해준다는 것, 위 원리들이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직접 받게 하는 그릇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배려에서였다. 이 세 제자들의 면전에서 “예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싸이셨다.” 십자가가 서있는 땅에까지 내려와 그곳을 컴컴하게 할 마지막 가장 어두운 시험의 구름이 사람의 아들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주님의 강림으로 그분을 대적하려고 이동했었던 지옥이 곧 이뤄질 주님의 구속과 신성화 하심의 완성을 가능만하면 막으려고 최하위의 깊이까지로 이동했다. 최하위의 지옥이 최고의 천국과 반대되듯, 가장 지독한 악은 가장 위대한 선과 반대되고, 자연적 마음의 가장 낮은 애착은 영적 마음의 가장 높은 애착과 반대된다. 이런 반대되는 두 세력 간의 다툼에 있는 시험은 삶의 완전함이 증가할수록 더 격렬해진다. 더 수준 낮은 상태들, 더 수준 낮은 악들이 자연적 마음에서 활성화되고, 세력이 각기 더 증가할수록 그 싸움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주님은 진실로 사람이셨는 바 그분의 시험도 여느 인간 본성의 범주에 있기에 그분의 시험도 여느 인간 존재의 시험에 있어지는 법칙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분이 지닌 인성은 무한이시고 영원한 완전인데 비해 우리의 인성은 유한하고 영원 쪽으로 진보한다. 따라서 그분의 시련들은 우리의 시련보다 무한하게 더 격렬하다. 이 시험의 본성 뿐만 아니라 그 격렬함은 이 구절에서 사용된 언어에서도 무시무시함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번민, to be very heavy”으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대상으로부터 파생되는 쾌락의 손실을 암시한다. 주님께서 느끼신 공포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덮친 “심한 두려움” 같이(창세기 15:12), 신성한 빛의 차단으로 생산되는 시험이라는 결과를 표현한다. 이는 마음의 내적 측면으로부터 하강되듯 이루어진다. 그 반면 번민(heaviness)은 기쁨의 박탈을 표현하는데 마치 사람들이 느낀 깊은 슬픔, 세상이 자신에게 텅빈 듯 나타날 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자신에게 즐거움을 제공해주지 못하기에 야기되는 슬픔 같은 것을 표현한다.
38. 시험이 더 증가되고 있다. “…그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라고 말하신다…” 주님이 받는 시험의 본성이 이 구절에서 이해될른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절의 표현이 어느 인간의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험의 격렬함은 모든 인간 납득력을 넘어있다. 그 이유는 이 시험의 목표가 인류를 향한 사랑이고, 이 사랑 자체는 신성이기 때문이다. 죽게 된다는 느낌이 그분을 덮칠 때 그분께도 번민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의 공포가 아니다. 극도로 번민할 것은 영혼 측면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분의 영혼은 신성 자체인데 어떻게 그분의 영혼에 번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번민했던 영혼은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영혼 또는 생명이 아니고 어머니로부터 상속된 영혼이다. 이것은 그분의 내적 인간에 관한 것이 아닌 외적 인간에 관한 영혼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말하신 이런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내 양을 위해 목숨을 내려놓는다…” (요한복음 10:15, 마태복음 10장 39절 참조). 우리가 아는 바 신성은 시험될 수 없고 슬퍼할 수 없으며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실지로 죽게 되는 주님 안에 있는 것, 그분께서 내려놓겠다는 목숨은 인간적인 원리, 어머니 쪽에서 상속된 목숨, 타락되어 있는 것, 유한한 것들이다. 그분이 시험에서 체험한 근심, 거듭나는 사람이 견디어 내는 근심은 어머니 쪽이 아닌 아버지 쪽, 옛 사람이 아닌 새 사람, 육체 쪽이 아닌 영혼, 외적 인간이 아닌 내적 인간에 근원을 두고 있다. 자연적 인간은 시험을 모른다. 그러므로 악에 저항하는데서 발생되는 근심도 없다. 시험 속의 괴로움은 악에 대항하는 사랑이 공격받는데서, 옹호해야할 대상을 잃을까 하는 염려에서 야기되어진다. 단순한 인간이 시험에 저항하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영혼에 근심을 만드는 것을 잃을까, 급기야 죽으면 어쩌나 하는 위험을 생각하는 대상은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런 근심도 실지로 이 영혼까지 침입하지 못하고 단지 육체 안의 영혼에 국한된다. 하느님에 속한 것, 진실로 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눈동자처럼 악으로부터 서는 움츠러든다.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고통 받지 않으나 육체가 고통당할 때 영혼은 슬퍼한다. 이와 마찬가지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경우이다. 악과 시험은 내적 인간을 꿰뚫어 나가지 못하나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마치 영혼이 몸 안에 있듯 하기에 슬픔을 비끼지 못한다. 시험이 생산하는 근심과 번민은 내적 원리로부터 진행되는 외적 느낌들이다. 주님의 영혼이 한층 격렬해져 번민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셨듯 세 제자에게 말하셨다. “여기서 머물러라.” 더 첨가하신다.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선택된 이들조차도 그분의 번민을 얼마큼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이 제자들은 시험 중에 계신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지만 그분의 곤경에서 그분의 동반자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 즉 그들 속의 최선의 가장 완전함을 넘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여기 앉아 있어라,” 그리고 “여기 머물러라”는 거듭남에서 주님을 따르는데 진보해 가는 법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 제자에게 말하셨다.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watch with me.” 깨어있어라 는 것은 이해성이 영원에 관한 관심에 깨어 있게 하라는 것, 영혼을 위협하는 위험한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것에는 좀 더 특별한 게 있을 것은 자명하다. 즉 내가 깨어있는 동안 깨어 있어라. 내가 깨어 있는 것 같이 깨어 있어라. 그분을 목표로 하여 덮친 시험은 그분의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시험으로 덮친다. 그 교회가 위험에 참여했듯 위험을 만나고 피하는데 요구되는 불침번서기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분의 제자들이라면 어떻게 그분과 함께 깨어 있을까? 주님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우리 너머에서 계속 깨어 있으신다. 깨어 계신 그분의 섭리가 사탄의 음모를 비켜갈 수 있게 해주는 바 우리는 그분의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역사에 그분과 더불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잘 감시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도 그분과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할 때 그분은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다.
39. 세 제자들에게 거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지시하신 뒤,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게쎄마니에서의 주님의 깊은 시험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여기서는 그 시험에 관한 세부사항으로 들어가 살피기로 하자. 그분께서는 “땅에 엎드리셨다.” 엎드림은 매우 깊은 굴욕(humiliation)을 표현하는 자세이다. 이 부끄러운 심정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텅비게 해서 하느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채워질 수 있게 한다. 순전히 인간 측면이라면 이 부끄러워함과 그 결과는 기껏해야 불완전함에 머물고 최대한 확대해 보았자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 우리는 그분의 완전함의 그림자밖에 더 되어질 수 없다. 그분의 부끄러움은 그분의 드높여지심이 더 위대한 만큼 같이 더 깊다. 이 깊이의 정도가 얼굴을 땅에 대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가 얼굴(face)은 마음의 내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땅에 엎드리는 것이 인간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표현하는 자세이다. 얼굴을 땅에 댄다는 것은 내면의 부끄러움을 의미한다. “기도하시기를, 오 나의 아버지, 가능하시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이 잔이 십자가의 고난을 두고 하신 말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 주님의 고통이라는 이 잔은 고통의 한 형태인 잔인한 자연적 죽음을 납득한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자연적 죽음은 이 잔 그 외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잔이 담고 있는 쓰디쓴 내용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셔버려야 하는 잔 속의 내용물은 영적 죽음이었다. 이 영적 죽음은 그 안에 인간 고통의 모든 악, 특히 시험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 타락으로 도입된 모든 비참함, 영적, 자연적 세계 모두에 존재해왔던 모든 비참함이 이 잔 안에 담겨있다. 마리아의 아들로서, 유전적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고통의 바탕 자체를 그분 위에 얹으셨다. 이 유전적 본성을 통해 모든 지옥은 그분을 짓눌렀다. 그분은 이런 지옥의 권능과 경합을 벌려야했다. 지옥의 공격에 구실을 주는 인간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분께서는 죽이셔야만 했다. 이런 모든 것이 죽어감으로 그분은 그것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것이 그분께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 그분 앞에 놓였던 잔이었다. 그분의 기도 대목, “아버지여 가능하시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에 우리는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분께서는 마지막 고난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고 그에 대해 제자들에게 반복해 말하셨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대단히 침착한 평온함으로 그 사건을 내다보셨고 말해오셨다. 그런데 막상 그 사건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분을 섬뜩하게 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광폭한 죽음을 내다보는 주님의 체험과 인간의 체험 사이에 어떤 유추될만한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고결하고 순진한 분이 평온의 얼굴로 죽음을 보고 있다. 어쨌든 주님의 체험이 무엇이어야만 했을까? 그분이 가지시는 번민과 평온의 바탕은 인간의 것과 매우 다르다. 영적 죽음을 걱정하는 인간의 시련과 번민 만이 주님의 시련과 번민의 참 형상으로 제공될 수 있다. 그분의 걱정은 그분 자신의 생명을 잃는데 따른 걱정이 아니라 온 인류의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걱정, 창조의 마지막 원인이 좌절되지 않도록 하려는 걱정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번민, 걱정이다. 이 걱정은 주님께서 입으신 인성이 이 큰 시련을 맞는데 너무 약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제자에게 말하셨듯 그렇게 느끼셨다. “영은 간절하나 육이 약하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는 시험으로 고통받고 계셨다. 격렬한 시험의 최고 절정은 자포자기이다. 즉 다투어야 할 대상 또는 목적의 자포자기이다. 시험 속에서 우리는 자아에게 저항해야 한다. 그럼에도 저항하는 그 속에 자아에 속한 어떤 것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 교통하는 능력을 마치 우리 것인냥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용함에도 우리 자신에 속한 듯 여기는 어떤 것이 있다. 자포자기란 이런 능력이 땅에 엎드러지는 것, 우리에게는 저항할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 적의 힘이 우리를 덮치면 당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을 덮어 버리는 큰 어둠의 공포이다. 이 공포는 희망을 억누르고 자포자기에 희생먹이가 되게 내던진다. 이것이 주님께서 게쎄마니에서 통과해 가신 상태, 그분께서 기도하실 때,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라는 절규의 상태이다. 그러나 참으로 한 가지 조건이 딸려있다. 그분의 기도는 절대적이 아닌 조건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도덕적 가능성의 범주일 경우에서 면제를 요청했을 뿐이다. 그분이 절대적 면제를 요청했다면 절대적으로 실패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육은 약하나 영은 강함을 보게 된다. 이런 대조됨은 주님의 기도에서 이어지는 말씀,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는 대목에서 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된다. 우리는 인간적 의지와 신성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심사숙고해보아야 할 중요한 게 놓여있다. 인간성 속의 의지는 마지막 시련에서 움츠러짐과 동시에 신성에 속한 최고의 의지에 온통 복종시킨다. 주님 안에는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 자체 안에 육과 영,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있었다. 영 그 자체는 뜻하려 하나 육의 약함이 영에 반대되게 작용하고 영의 뜻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래도 영은 육에 있으면서 바랄 수 있는 것과 가능할 수 있는 것, 인간적 의지와 신성한 의지 사이를 구분지어 주고 완화시키고 조절하는 역할을 계속 담당하고 있다. 주님께서 말하신 많은 언어들이 기독인의 지혜와 체험의 보편적 언어가 되어 있다. 위 구절은 그것들 중 하나이다. 더구나 가장 표현이 강한 언어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영적 시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위 주님의 기도 구절은 자신의 상태와 의무에 관한 참 언어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육의 약함과 영의 강함, 반역하려드는 육의 강함 그러나 모든 것에서 최상이 되시는 그분의 의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영의 강함이 육보다 더 강하다는 것까지 한꺼번에 다 표현하고 있다.
40. “기도를 마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제자들이 잠들었던 사건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변모하실 때(누가 9:32)이고 또 하나가 지금인데 우리가 주목해둘 게 있다. 그들이 변모하심의 장관과 시험받으심의 장엄함에 무관심했다고 판단해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른다. 이 잠듦은 분명 초자연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운행된 신성한 기운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주님이 신성화 하신 후 요한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가 죽은 자같이 되어 그분의 발 아래 쓰러진 것과도 비슷하다. 세 제자들의 이 잠듦이 초자연적이었던 만큼 거기에 영적 의미도 충분히 들어있다. 깨어 있음에 반대되는 잠듦은 영적 상태에 대칭을 이루는 삶의 자연적 상태를 의미한다. 주님이 깨어있는 반면 세 제자들이 꾸벅 꾸벅 졸거나 잠이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은 외적 수준의 상태에 머물고 있어서 주님의 상태인 내면의 상태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으로 주님이 바라시는 바, 그분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 같이 되었으면 하는 것, 가능하다면 최고 높고 가장 깊은 상태를 체험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와 더불어 깨어있어라”고 말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이 잠든 것을 보고 조용히 타이르셨다. 이는 그들이 그분과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협동하는 상태에 있어야 할텐데 라는 그분 사랑의 바람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 부드럽고 정감 어린 나무라심이 베드로에게 있어졌다. 이는 신앙이 자연적 수준으로 있을 경우 마음은 그 신앙을 떠받쳐 줄 불침번이 될 수 없고 제자들을 주님 안에 계속 있게 해주도록 깨워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한 시간도 나와 더불어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물으신다. 시간은 상태를 상징한다. 그래서 주님이 고통 받는 이 시간은 그분이 깨어있는 상태 그 자체, 무시무시한 시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깨어 있음 그 자체이었다.
41.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권고하신다. “시험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켜보고 기도하라.”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지켜볼 수 없다면 이렇게 그분을 따르도록, 즉 이해성으로 지켜보고 심정으로 기도함으로 시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 받을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어가지 않게 지켜보고 기도하는 것은 제자 된 사람의 의무이다. 참으로 시험은 필요한 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의 상태에 유익한 걱정을 가지는 것, 즉 시험은 위험을 동반하지만 시험에 용감히 대처하면 결코 위험한 것만은 아니라는 두 가지 확답이 똑같이 필요하다. 시험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자세로 자신을 서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서 있게 해야 하는 이유, 즉 이 위험을 지켜보고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주님께서 설명하신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육의 약함은 위험의 바탕이요 염려의 기초이다. 육(flesh)은 자연적 마음 전체, 애착과 욕구까지 포함된 자연적 마음 전체를 표현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자연적 애착과 욕구는 지상에 속한 것이기에 자연적 마음은 약하다. 영은 영적 마음, 영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모든 애착을 말한다. 이 영적 마음은 본성 자체가 주님의 뜻을 기쁘게 행하고 기꺼이 그분의 뜻을 받든다. 그러나 무르고 현혹되기 쉬운 인간 본래의 본성은 세상과 자아의 유혹에 언제나 쉽게 기울고 만다.
42-44. “예수께서 다시 가셔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시니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지쳐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제자들을 그대로 두시고 세 번째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본문 기록대로 본다면 주님께서는 두 번째, 세 번째도 다시 가시고 되돌아오시고 “같은 기도”를 하셨다. 기도의 반복은 구분되는 많은 시련 또는 시험 같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게다가 그분이 투쟁하신 많은 일에 포함된 사실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숫자 셋은 충만한 것, 완성된 상태라는 목적까지 진전된 것을 의미한다. 시험을 거치는 이 세 행동들, 과거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같이 시험이 가득 찼음, 그분께서 유혹자를 이겨내심으로 완전해지셨음, 시험을 수단으로 구속이 완성되고 그분의 인성이 충분히 신성화 하시는 목적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인내하셨음을 표현하고 있다. 더불어 여기에는 또 다른 진리도 표현하고 있다. 주님께서 시험에서 극복하신 어둠의 왕국은 세 겹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등차와 대비되는 지옥으로 내려감도 세 가지 구분되는 등차가 있다. 주님께서는 어둠의 모든 왕국을 정복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 왕국의 정복을 시험의 세 가지 시리즈를 수단으로 점진적으로 정복하셨다. 이것이 그분의 세 가지 시험들이다. 이렇게 하시어 그분께서는 계속적으로 지옥을 정복하시면서 계속적으로 천국을 여셨다. 그러므로 기도하시러 동산의 깊은 쪽으로 세 번 가셨고 천국과 교회를 표현하는 제자들에게 세 번 되돌아오신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지옥을 닫아 거신 만큼 천국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오늘 날 우리 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거듭남으로 지옥의 형상인 바깥쪽 인간에 있는 악들을 정복한 만큼 천국의 형상인 안쪽 인간이 열린다.
45. 주님께서 세 번의 기도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돌아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자고 쉬거라’…” 누가복음(22:46)의 경우 질문 형식으로 “왜 너희는 자고 있느냐?”로 표현되고 있어서 어떤 학자의 경우 본문의 구절에 대한 의미가 누가복음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서는 신성한 영감을 받아 교회 또는 인간이 각기 다른 상태, 거듭나는 삶의 각기 다른 단계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표현상의 차이가 어떤 내적 불일치를 포함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을 이으신다. “자, 때가 왔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간다는 것은 유대교회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모독된다는 표시이다. 주님이 진리 또는 말씀으로 취급될 때 그분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말씀을 취급한 것 같이 주님을 취급했다. 가까이 온 때란 교회의 종말에 관한 상태 또는 그 때, 교회의 불법 수준이 꽉 차는 바로 그 때, 위선이 폭력의 도구가 되는 그 때이다.
46.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말하신다. “일어나 가자.” 제자들이 잠든 것은 외적이고 희미한 수준의 상태를 표현했다. 그에 비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영적 승강, 죄와 어둠에서 일어나는 것을 언제나 표현한다. 사도들의 이런 권고와 같다. “자고 있는 너를 깨워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일어남”은 심정 속의 애착이 승강하는 것을 특별히 더 의미한다. 이는 느낌(feeling)의 승강이 아니라 선함의 상태가 더 낮은 수준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승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자” 라고 말하신 것이다. 그 이유가 “간다, to go”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 본문의 경우 선함이라는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 선함을 사랑하는 상태로부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로 제자들이 일어나 가야 한다는 주님의 바람이 표시되어 있다. 주님께서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 이런 순간에 위 주님의 말씀 “일어나 가라”는 얼마나 꼭 필요한 말씀인가! 배반자(betrayer)란 우리 속에 있는 썩은 심정이다. 시련의 때일수록 저질인 이기심의 세력 확장을 상쇄하려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이식해놓은 선과 신앙이 잠에서 깨어나 행동을 해야 함이 그 얼마나 절실할 것인가!
47.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 두 제자의 하나인 유다가 다가 왔다. 그를 따라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몰려왔다.”여기서 유다가 열 두 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열 두 제자는 교회를 표현한다. 추상적 의미로 볼 경우 인간 안에서 교회를 구성해주는 모든 원리를 표현한다. 집합적으로 볼 경우 열 두 제자는 주님의 신비적인 몸을 표현한다. 그러나 주님의 신비로운 몸은 그분 자신의 몸에 관한 형상이다. 주님이 시험받고 고통 받는 것은 그분의 제자들 속에서 그 형상, 그 유추되는 것들로 담겨있다. 주님의 인성 안에는 예언서에서 “뒤꿈치, heel”라 부른 것, 뱀이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가장 수준 낮고 가장 공격받기 쉬운 부분이 있다. “열 두 제자 중 하나”에 해당되는 유다는 사탄이 제자들, 즉 유아 수준의 교회에 상처를 입히는 뒤꿈치에 해당된다. 유다는 주님의 신비적인 몸, 인간 안에 있는 육체의 원리(corporeal principle, 유형에 관한 원리, 물질에 관련된 원리)를 표현한다. 뱀이 물게 되는 “뒤꿈치”는 주님 자신의 몸에 있는 같은 원리, 육체의 원리를 표현한다. 이것이 왜 유다가 제자로 뽑혔으며 왜 주님을 팔아 넘겼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주님의 뒤꿈치 또는 그 분의 인성 중에서 육체에 관한 원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그분의 시험이 갖는 최고 강한 수준이다. 그리고 이는 타락된 인간 본성 속의 육체적인 원리가 뒤집혀진 상태가 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원리를 표현한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원리를 통해 주님은 지금도 계속 배반당하고 이런 원리는 우리가 그분을 배반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 41편 9절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흉허물 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유다에 관해 이미 말했던 또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유대 교회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교회는 지독하게 물질주의적이고 육적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유대 교회에 있게 된 육적인 것들은 유아 수준의 기독 교회에서, 개개인 안에서, 주님 자신 안에서 구속이 결과 되고 있을 때 동시적으로 작업되고 있다.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가 유다에 뒤딸려 보낸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들은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원리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에 두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많은 생각과 애착들을 표현한다. 그들이 지참한 칼과 몽둥이란 진리와 선함 자체이신 주님을 대항하는 도구로서 사용된 거짓과 악들을 의미한다.
48, 49. 불충한 적과 한패가 되어 행동하는 유다가 짐짓 사랑하는 친구인체 가장하고 있다. “배반자는 그들과 미리 암호를 짜고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붙잡아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께 다가 와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면서 입을 맞추었다.” 시편 2편 12절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그분이 성내시고 너희가 길에서 망하게 된다.” 유다의 키스는 반역하는 키스, 위조된 애정이었다. 유다의 키스는 모든 위선을 대표하는 위선, 흉내된 사랑을 가지고 순진을 배반하는 대표 격의 위선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천국적인 수단을 동원해 지옥적인 목적을 성취해 보려하는 사탄과 같은 것이다. 유다의 키스는 유다를 따라 온 무리들에게 보내는 신호가 되고 있었다. 이는 모든 덕행이 종말을 고하는 표시였다. 이는 거짓이 진리의 입술 위에 현혹시키는 오염된 키스를 날인하는 것, 죽음이 진리를 영원히 침묵시키겠다는 표시이다. 이와 같은 것은 세상의 빛이 자신이라고 선포하신 그분을 파괴함으로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악마적 음모를 의도적으로 꾸미는 이들의 목적에 해당된다. 유다의 키스는 신성한 이름을 허울 좋게 존경하는 표시, 그분의 말씀을 극히 형식적으로 존경하는 표시일 뿐, 이 명분 아래에서 신성한 뜻과 영원한 진리의 원리를 극악하게 미워하고 있다. 무리들이 예수를 손으로 꼼짝 못하게 붙잡는 것은 그 당시의 사제들이 율법의 영을 위반하면서 그 글자에서만 존경을 표시하는 것, 그리하여 백성까지 율법을 위반하게 이끌고 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50. 유다가 그에게 키스했을 때, “예수께서 ‘친구여, 무엇 하러 왔는가?’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된 단어 친구는 두 가지로 다시 번역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애정이나 관심 있음을 함축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전자는 친구라는 단어에 적절하나 후자는 동료(companion)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이 구절에서 유다에게 사용된 단어는 정감이 덜 한 쪽인 바 공동 번역 같이 “이 사람아”로 번역함이 더 타당할는지 모른다. 영적으로 친구란 선행(charity)의 선 가운데, 믿음의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동료는 믿음의 진리 가운데 있으나 선행(charity)의 선 가운데 있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을 지킨다면 너는 내 친구이다.” 유다와 유다가 표현한 것들은 주님을 알게 하는 믿음의 진리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하나 그들은 주님을 배반하는데 그 지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분에 대해 잘 아는 자들만이 그분께 직접적으로 잔인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어째서 왔느냐?” 이는 뭔가 탐색하는 질문, 우리의 행동 속의 동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인도해주는 질문이나 여기에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질문에 이어 “무리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붙잡았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려했던 경우는 여러 번 있었는데 오직 이번 경우에서만 성공했다. 이번 경우는 비록 제자 중 하나가 배반했기에 성공리에 예수를 붙잡은 듯 비쳐질는지 모른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조롱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한 것은 미움이 아닌 흉내된 사랑에 의해서, 반대되는 자들이 아닌 배반한 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꽤하여 왔던 행동이요 이것이 예수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찰나에 이르고 있다.
51. “그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성직자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다.” 이 사람은 베드로였다(요한 18장 10절). 믿음의 품위를 표현한 사도가 충직한 사람의 하나로 행동한 듯 보이고, 진리의 칼이 진리 자체를 방어하는데 사용된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단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행에 실지로 위반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칼은 스승의 신성화 하심을 위해 허용된 수단을 패배시키는데 사용되었다. 참으로 베드로가 악을 의도한 것은 아니나 지식을 수단으로 갈피를 못 잡은 부절제한 열정으로부터 행동되었다. 이런 열정은 좋은 쪽으로 의도했다 해도 그 결과는 악 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경우가 베드로의 행동이다. 예수께서 대성직자의 권위를 감내하셨는 바 제자들은 유형의 무기로 대성직자의 종의 행동을 억제하려해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지상의 무기로 방어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베드로가 자른 종의 귀를 치료해주셨다(누가 22:51). 말코스의 귀가 잘라짐에도 영적 의미는 담겨있다. 귀는 지각, 청종, 순종을 상징하는 신체기관이다. 오른쪽 귀는 선함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성직자가 임명될 때 제물의 피가 그의 오른쪽 귀에 발라졌다(출애굽기 29:20). 이는 지각하는 자질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쪽으로 성별되어진다는 표시이다. 대성직자의 종의 귀를 자름은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서는 지각하는 능력이 파괴되고 이와 더불어 모든 영적 들음과 순종도 파괴된다는 표시이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부패된 교회를 음녀로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네 코와 귀를 베어갈 것이다” (23:25)). 이는 교회의 불순한 사랑들이 선함과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을 박탈할 것이라는 뜻이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집은 화살통 같이 교리를 의미한다. 교리는 진리가 신성한 자비의 의도(purpose)와 반대되어 사용되어 왔을 경우 넣어 두어야 하는 곳이다. 그 이유가 거기는 칼이나 화살 같은 날카로운 도구라는 측면에서의 진리를 안전하게 보관해주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심정 속의 적과 맞설 때 이 장소로부터 진리를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운동에서 주님의 직속 제자가 칼을 사용해 방어한 일은 베드로의 이 사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또 신성한 저자의 뜻에 거슬러 칼이 사용된 것이 여타 다른 예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을 방어하려고 신앙이 칼을 들이대는 어느 경우가 있었던지, 있게 되든지 간에 그분의 명령은 “네 칼을 칼집에 넣어라” 일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라는 경고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대의(cause)에 사용된 육욕적인 칼에 의해 망한다. 이 구절을 영적으로 살펴보자. 진리를 잘못 응용함으로 해서 정작 거듭나는 쪽으로 자신을 이끌 시련을 감내하기를 거절함으로 오히려 거듭남의 진보에 방해를 받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조건, 상황에 자신이 받을 운명, 혜택, 이익 배당금 같은 것들이 의존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조건을 자신이 거절함으로 생명을 거절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은 망한다.
53. 적들의 의도가 꺽여지는게 보기 좋은 듯 주님께서 여기셨다면 아마 그분 스스로 신성한 능력을 잠깐 보이시어 쉽게 압도해버렸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간구한다면 열 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라고 베드로를 나무라시고 있다. 열 두 군단은 온 천국 군대를 뜻한다. 이보다 더한 것이 전능하심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심으로 이런 권능을 획득한다고 말하시고 있다. 그분 속의 신성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54.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셨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신비에 관해 아직은 몰랐다. 이 열정적인 제자에게 이 말씀을 발표하신 주님은 베드로 같은 상태의 사람, 지식 없이 열정으로부터 행동하는 미래 시대의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시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신 후에까지도 제자들은 말씀이 이 주제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부활하신 다음 취한 첫 행동의 하나는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경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주시는” 일이었다 (누가 24:26). 이제 이와 같은 일이 영원히 제자들의 체험 속에 있게 되었을 것은 의심치 않는다. 영광의 길은 고통을 통해 열린다는 것을 성경은 풍부하게 예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 본성은 이런 고통스런 수단 없이 목적을 성취하기를 바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없다면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55. 그분이 죽어야 한다는 주제를 두고 제자들에게 조용히 일러 주신다음 “무리를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 무리들은 훔치지도 않은 것을 되찾기 위해 오신 그분을 강도나 도둑으로 취급하고 있다(시편 69:4). 그들은 그분을 성전에서는 붙잡지 못하고 동산으로 사람을 보내 붙잡아 오게 했다. 성전은 그분의 권능이 앉은 곳이고 게쎄마니는 그들의 세력이 앉은 곳이다. 그분은 권능을 단지 보이기만 하심으로 그분의 아버지의 집에 들어앉은 벌받을 장사꾼들을 모조리 쫓아 내셨다. 여느 인간도 결코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을 말하신 그분이 성전에서 가르치신 바 그분의 적들의 신경을 누그러뜨려 긴장감이 완전히 해체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성전은 그분의 인성이 성별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해준다. 세상을 떠나 생각한다면 성전은 그분의 인성에 대한 모형이다. 거기에 그분의 신성이 더 직접적으로 거하신다. 이에 비해 광야와 게쎄마니는 그 인성의 부분 중 외면을 표현하고 거기에는 허약함이 상주하고 시험이 둥지를 틀고 있다. 누가가 기록한 이 구절의 경우 주님의 말씀에 더 첨가된 게 있다. “…이제는 너희의 때가 되었고 암흑이 판을 치는 때가 왔구나.” 이 시각은 밤이었고 게쎄마니라는 장소도 어둠에 속한 것이다. 그 이유가 시간과 장소는 상태를 적절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세상 권세와 지옥의 권세가 목적이 성취되도록 일시적으로 권세의 힘이 상승했고 주님께서는 이를 허용하신 것이다.
56.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물론 예언들은 이 사건을 위해 준비된 것이지 이 사건이 예언을 위해 일으킨 것은 아니다. 주님의 경우 모든 예언이 완성되었고 모든 약속이 수행되었다. 더 포괄적 견해에서 생각해보면 그분이 신성화 하시는 수단으로서 그분의 역사에서 거행된 모든 것은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로 말씀 안에 씌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는 가운데 거행되는 모든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로 말씀 안에 씌어져 있다. 주님이 받으시는 시험까지 매우 세세하게 말씀은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그분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했던 짓들이 글자에도 부분적으로 계시되었지만 영으로는 완전히 벗겨져 놓여있다. 제자들이 시련의 막바지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난 사실도 이미 예언되어있었다. 주님께서 선포하셨듯 즈가리야서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었다. 유대인이 주님을 붙잡는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영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말씀 속의 선과 진리들은 교회 속의 선과 진리로부터 어떤 지지도 받지 않았다. 시험이 극에 달할 때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은 분리된 듯 나타난다. 마치 주님과 제자들이 그분의 마지막 격렬한 시련을 당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분리됨은 의지와 이해성 또는 선함과 진리 모두에서 발생된다. 이것이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57. “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아 대성직자 가야파의 집으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는 율법학자들과 원리들이 모여있었다.” 최고의 선과 진리 되신 그분이 가장 깊은 악과 거짓들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유대교의 최고 재판소(Sanhedrin)란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에 반대되는 통치하는 악과 거짓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에 존재한 위의 원리까지 표현한다. 주님이 가야파와 율법학자, 원로들에게 끌려가심이란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교회를 지배한 악하고 거짓된 원리들, 말씀을 뒤집고 모독한 원리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됨을 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58. 주님께서 무리들에게 무례하게 붙잡히고 제자들이 달아나고 그분이 끌려갔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랐다.” 이는 어린 교회가 비록 시련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기에는 너무 불안정하다해도 아직 신앙을 수단으로 그분과 먼 거리를 두고라도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내면적 의미에서 외적인 것과 시험 가운데서 내적인 것과의 관계가 이와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는 “대성직자의 관저에까지 가서 일의 결말을 보려고 안으로 들어가 경비원들 틈에 앉아 있었다.” 예수의 종과 대성직자의 종이 함께 있다. 적들이 버젓이 있는 그 속에 그들의 친구 인 냥 하여 잠복해 있다. 이는 제자들의 품성, 그들이 표현한 원리를 놀라웁게 본보기화 하여 놓고 있다. 진리와 거짓은 외적 인간 또는 외적 교회 안에서는 함께 있는다. 그러나 그 둘은 거기서 서로 적이라고 공개하지 않고 서로 연관 있는 듯 여겨지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베드로는 사건의 결말을 보는 것만을 바래고 있다. 그의 신앙은 결말에 기대를 하고 있으나 그 결말로 인도하는 시련이 닥치면 바싹 오그라지는 믿음이다. 이제 시련이 시작된다.
59. “대성직자들과 온 의회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에 대한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거짓 증거를 찾는 것은 영적 의미에서는 거짓이 진리요, 진리가 거짓이고, 악이 선이요 선이 악이라고 선포하고 타인도 이를 인정하라고 설득해대는 것,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이다. 의회가 예수께 대한 거짓 증거를 찾는 목적은 그분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유대 통치자와 백성들이 주님께 행한 모든 것은 어떻게 교회가 말씀을 취급하게 되는 가를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품던 의도, 그분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부패된 교회의 마지막 행동, 즉 진리의 왜곡, 그 결과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을 표현했다.
60, 61. “많은 사람이 와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이렇다할 증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사람이 나타나서 ‘이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다.” 신명기(17:6)에 이런 법이 있다. “그 사람을 죽이려면 두 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죽일 수 없다.” 이 말씀이 법제화된 이유는 누구도 의지나 이해성, 또는 생활의 어느 한 가지 자질만이 악할 경우 죽음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것, 이 자질들 중 둘 또는 셋이 하나 되어 악할 경우 죽음에 처해지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다. 요구되는 “두” 증인이란 의지와 이해성, 또는 악과 거짓이다.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이 천국을 만들 듯 그 반대의 것의 하나 됨은 지옥을 만든다. 주님을 모함하는데 두 거짓 증거 그 이상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이 “…나는 성전을 헐 수 있고…”라고 말씀하신 것을 트집잡아 고소했다. 이것에서도 그들은 그분의 말인 “이 성전(this temple)을 헐고 사흘만에 그것을 세울 것이다”를 왜곡시켜 증언했다. 이 증언은 그분의 말을 엎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신성한 진리의 왜곡을 표현했다. 진리의 왜곡은 말씀의 선포 위에 왜곡된 것을 쌓아둠으로 야기된다. 이 목적은 진리 대신 오류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62. 대성직자는 이 고소가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대성직자가 일어나 예수께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이렇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할 말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이 구절이 언뜻 주는 인상은 대성직자가 예수께 말할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주었는데 말이 없자 왜 고발하는 소리에 대꾸가 없느냐고 참다못해 묻는 듯 보인다. 이 의회가 거짓 증거를 확보했음에도 대성직자는 마치 예수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어 아량을 베푼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진리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심정을 지닌 이들, 아예 진리에 반대되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려놓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말씀이 그 자체를 위해 말해보도록 기꺼이 아량을 베푸는 듯 하는 심정 상태와 위 사건은 모양새가 비슷한 것이다.
63, 64.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께서 거짓 증거에 아무런 대꾸가 없음으로 마치 그 거짓 증거가 옳다고 지지하는 듯 여겨지기까지 할는지 모른다. 또는 그분이 주장해보아야 아무 소용도 닿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침묵했다고 가정해 볼는지 모른다. 그분이 침묵한 데에는 이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육을 입은 말씀되시는 분으로서의 주님은 말씀에 씌어진 그대로 행동하셨다. 말씀은 무익하고 비성실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말씀 속의 증언이 확신이나 신념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정해버린 사람들에게 말씀 자체는 진리를 두고 변론해대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말씀의 글자는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수호하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가는 칼이다. 뒤집혀질 수 없었던 진리들이 모독되어질 것이고 인간의 정죄함을 증가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항에 대한 말씀의 호소는 침묵이다. 불길한 심문에 말씀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이 되신 그분은 부당한 재판관과 왜곡된 고발자 앞에서 벙어리되셨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야 53:7). 대성직자가 호소하는데도 예수께서는 대꾸가 없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분명히 대답하여라.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셨다.” 왜 주님께서는 이 질문에는 답하셨을까? 그것은 지금 거짓 고발을 인정하든가 부정하든가라고 묻지 않고 위대한 진리, 그분이 그리스도이었는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은 그 자체 영원하고 불변할 수 없는 진리임을 선포하고 마치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듯 말씀의 근원이 신성임을 선포하고 있다. 주님께서 말을 계속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보다 “더 나아가, 그 외에도”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라고 내 자신을 고백할 뿐 아니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네 스스로 그것을 고백하고야 말도록 하는 때가 오고 있고, 또한 인간적 약함으로 너희 앞에 지금 나타난 사람이 신성한 권능 안에서 너희에게 밝히 알리는 때도 오고 있다” 라고 바꾸어 다시 말해 볼 수도 있다. 주님께서 이 구절에서 거론하신 사건은 일반적 의미에서 볼 경우 그분의 재림이다. 두 번째 오심에 관해 말해지는 바,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요 그분을 찌른 자도 볼 것이다.” 주님의 이 강림은 심판하러 오심이다. 그러나 이는 교회의 종말에서 자연적 세계에서가 아닌 영적 세계에서이다. 이 때 거기서 그분께서는 악한 자와 선한 자가 분명해지게 하실 것이다. 대성직자를 향해 발표된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 진리, 가야파를 수단으로 교회에 소속된 모든 이들에 대한 보편적 진리인 바 이 주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의미가 놓여 있다. 위 주님의 말씀 중 일부는 이미 24장을 살필 때 설명했다. 주님께서 구름 안에서 오심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 글자 조차에서 그분 자신을 밝히 알게 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소개된 주님의 말씀에는 두 개의 세부사항이 첨가되어있다. 그분이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심이란 그분의 인성이 이제 막 신성이 되어 인간 구원을 위해 전능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분이 하늘의 구름 안에서 오심은 그분이 이제 그분의 말씀을 여시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인간에게 그들의 구세주로서의 그분 자신에 대해 더 명확하게 밝히 알려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요점은 이러하다. 악한 자에게서 까지도 그분이 드높여지시고 밝혀진 상태를 보리라는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이 오신 후에 그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 있는 그분에 관한 예언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 이는 말씀의 영적 의미가 밝히 알려질 때이다.
65. 주님께서 이런 선포와 인정을 하셨을 때, “대성직자는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을 모독했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방금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소?” 옷을 찢는다는 것은 진리의 파괴 때문에 통곡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모독죄를 범했다고 말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에 어긋나게 말했다는 것, 다시 말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truth divine)에 어긋나게 말했다는 것 외 달리는 그가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성직자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신성함을 부정하는 심정을 지닌 사람은 말씀 자체의 증언 안에서 그들의 부정함에 관한 확증을 발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66. 대성직자가 의회에 판결을 호소하고 있다. “‘자,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하고 묻자 사람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고 아우성쳤다.” 이는 의지가 이해성에 대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이는 협의해 보자는 게 아니라 확증하라는 것이다. 유대 평의회의 이런 행동은 그들이 오랫동안 꾀했던 행위의 지적인 끝장, 이런 결과를 보고자 갖가지 수단을 동원한 행위의 지적 종말이다. 이 의회의 판결은 말씀 안에 신성이 있다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고로 그들 사이에 있는 교회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까지 포함되고 있는 셈이다. 모독 죄를 지은 것은 바로 그들인 것이다. 이 범죄는 다음 구절에서 한층 더 명백해진다.
67.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또 어떤 자들은 뺨을 때렸다.” 이 모습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은, 유대 국가는 오로지 외적 상태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수난에 관해 말씀에서 언급되어진 모든 것은 천국의 비밀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바와 같이 복된 일을 수행하고 지혜를 말해준 사람에게 적대 행위를 자초해 큰 악행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들 중 가장 높은 자라는 사람이 순수하고 거룩한 존재에 본문 같은 무례하고 모욕적인 것을 제공했다. 그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고 심정이 완악했던가! 이런 행위들은 영적인 악에 관한 진정한 상징물이다.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가장 깊이 있게 반대하는 경멸을, 주먹으로 쳤다는 것은 신성한 선함에 반대하는 가장 심도있는 미움을, 손바닥이나 갈대로 그분을 때린 것은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더 완벽하게 거절하는 폭력이라는 악들을 표현하고 의미한 것이다. 주님께 저지른 이런 세 가지 폭력 행위는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삶으로부터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거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68. 그분을 경멸한 자들이 “‘그리스도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히어 보아라’ 하며 조롱하였다.” 누가(22:64)는 그들이 그분의 눈을 가리워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그분을 때린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히라고 강요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조롱을 했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조롱자나 비신앙자는 유대인들처럼 먼저 진리의 눈이 보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때린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히라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신앙이 응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경우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이 불가능한 행동을 요구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허용해주신다. 예수께서는 누가 때렸는지 아셨지만 알아 맞추려하지 않으셨다. 그저 침묵만을 지키셨다. 그들은 불신앙 속에 푹 잠겨 있었다. 그분이 입을 열으셨다면 그들에게 정죄하는 건수만 더 제공했을는지 모른다. 주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오늘날에도 행하신다. 사람들이 진리에 거슬러 귀를 막고 있을 경우 그분께서는 알아 맞혀주시는 일을 거절하신다.
69-74. 유대 의회에서 시련을 겪으시는 그분으로부터 복음서 기자는 베드로의 신앙이 시련을 겪는 쪽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 “그 동안 베드로는 관저 안의 바깥뜰에 앉아 있었는데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의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거기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오며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 당신의 말씨만 들어도 알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이 사도는 주님의 시련을 목격했고, 거짓 증언을 들었으며 그들이 판결하는 엉터리 소리를 듣게 되었고 순진하시며 은혜만을 베푸시는 스승에 덮어씌우는 모욕들을 보았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확고부동한 상태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의리 있는 본성과 불같은 성미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뭔가 열정있는 증명을 보이려고 일시에 쏟아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의아할 정도이다. 그가 주님을 보호하려고 칼을 사용했을 때는 꽤 준비된 마음이었는데 이젠 자기 혀로 그분을 부정하는데 준비된 마음을 지금 가지고 있다. 이 제자와 그의 주인 사이의 대비된 모습은 얼마나 놀랍고 동시에 교훈적인지! 제자들을 두고 친구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버린 예수, 그분의 적들에 의해 부당한 정죄를 당하고 잔인한 대접을 받은 예수, 그는 분개함이나 어떤 두려움을 하나도 나타내지 않은 채 모두에게 배반당하고 있다. 그 반면 스승의 고결한 본보기를 간직한 베드로인데도 행여 누가 자기가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라고 알아볼까 해서 간담이 서늘하여 타인이 흘낏 보기만 해도 그의 마음은 섬뜩해 오그라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보기로 주시어 주님에 관해 배우는 목적을 위해 곰곰이 생각해보되 이 때가 어둠의 권세가 판을 치는 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의 처신도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 22:53). 세상과 지옥의 권세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예수를 덮어 누르되 그분은 장엄한 고결하심으로부터 꼼짝 않고 계신다. 이는 그분 안의 인성이 인성의 가장 높은 도덕적 완전함만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원리 하나로 그 모든 것을 다 떠맡고 계신 것이다. 어쨌든 위 사건에도 영적 의미가 있다. 베드로의 대담한 거짓 맹세는 신앙 홀로 있을 경우의 믿음의 속성, 더욱이 믿는 자의 눈앞에 주님이 보여주신 본보기를 확실히 쥐고 있는 때 조차에도 신앙 홀로 이다면 드러내고야 마는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은 교회의 마지막 때에 있는 믿음의 속성을 표현한다. 세 번 부인함은 신앙 홀로 안에 감추어 놓인 실제적인 완전한 부정을 표현한다. 이는 기울고 있는 교회, 또는 시효가 만료되는 교회에서 그 종교의 겉에 나타나는 마지막 형체이기도 하다. 닭이 운다는 것은 옛 교회의 끝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다. 이 시작은 인간이 회개로 신앙을 회복하고 순수한 심정으로 주님을 향할 때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교회가 우리 안에 형성되어 있는 동안의 우리 자신과 관련을 맺고 있다. 베드로에 관련된 사실은 옛 사람과 그의 자연적 수준의 신앙이 죽을 때, 새 사람과 영적 수준의 신앙이 진실로 살아 있기를 시작할 때,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지는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간에 차이가 있는 듯 하면서도 유사한 처지에 있는 세 가지 것, 의지 안에서의 믿음의 시련, 이해성 안에서의 믿음의 시련, 생활에서의 믿음의 시련을 위 베드로의 사건에서 보게 된다. 첫 예에서, 베드로는 대성직자의 관저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예에서 그가 현관에 서 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의지와 이해성의 상태를 그려주고 있다. 집에 관련해 생각해보면 관저(palace)는 이해성을 상징하나, 현관(porch)을 관련시켜 생각하면 그 관저는 의지를 상징한다. 의지는 관저와 비슷하다. 대성직자가 관저에 주재하듯 통치하는 사랑이 주재하는 곳이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성은 관저 안으로 인도하는 현관이다. 의지는 안쪽이고 이해성은 바깥쪽이다. 앉아 있음은 의지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 반면 서 있음은 이해성의 상태를 표현한다. 베드로는 처음에 관저에서, 그 다음 현관에서 고발당했는데 이는 처음에 의지 측면에서, 그 다음 이해성 측면에서 있게 된 시험을 뜻한다. 그 다음 베드로는 애착을 표현하는 처녀에 의해 고발되고 있다. 첫 번째 하녀는 의지 속의 애착을, 두 번째 하녀는 이해성 속의 애착을 암시한다. 두 하녀에 의해 베드로가 고발됨은 시험이 마음 자체의 그런 애착에서 근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 번째 고소는 베드로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 사람들은 자연적 마음속의 모든 생각과 애착들을 표현한다. 그들의 고발은 바깥쪽 생활에 관계되는 시험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맨 처음 예수께서 갈릴래아의 예수라고 불리고, 두 번째에는 나자렛의 예수라고 불리고 있다. 갈릴래아는 행정구획상 주 또는 도(province)에 해당되고 나자렛은 시(city)에 해당된다. 전자는 의지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후자는 이해성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지목하고 있다. 세 번째 고발에서는 예수가 거론되지 않으나 베드로가 예수를 따른 사람 중의 하나로 단순하게 고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머리로 두고 형제애를 형성한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지목되고 있다. 어쩌면 평화를 어지럽히는 종교적 선동 단원 중의 하나로 간주 당했을는지 모른다. 이는 자연적 마음과 바깥쪽 삶에 소속된 생각과 느낌이 더욱 무분별하게 집합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베드로의 부인은 고발이 진행될 때마다 부정하는 강도가 더 격렬해졌다. 처음에 그는 단순히 부인하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면서, 세 번째에는 저주하여 맹세했다. 단순한 부정은 의지에 속한다. 그 이유가 의지 측면에 있는 모든 것은 그렇다와 아니다만 있기 때문이다. 이해성은 맹세를 가지고 확증한다. 그 이유는 맹세가 확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하고 맹세함은 추론의 범주가 아닌 열정(passion)의 범주에 들어간다. 기독 제자는 베드로 같이 주님 또는 그분의 선과 진리를 실지로 부정하는 죄를 짓는데 까지 시험에 꺾이는 상황은 겪지 않는다. 베드로의 죄, 성경의 여타 인물들의 죄같이 기독 제자가 유혹되어지는 죄를 표현한다. 베드로의 추락을 통해 우리를 추락하게 하는 우리 속 경향성을 관조하도록 배려하시고, 시험에 빠진 우리를 도웁기 위해 주님께서 시험받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시험에서 버티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가르쳐주시고 있다. 베드로의 시험은 비교적 외적 측면에 속한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은 비교적 외적 인간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은 아직까지는 주님에 대해 사적인 애착 차원에서 헌신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에 지상 왕국을 회복하실 분으로서 그분을 사랑했다. 따라서 주님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자기 개인의 희망과 포부에 속하는 목적이 송두리째 뒤엎어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참으로 기독 제자도 베드로의 이런 자연적 견해와 바람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영적이고 영원한 왕국에 희망과 포부의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영원한 삶과 영광은 기독 제자의 시험과 그 속의 투쟁의 목적이 된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째 모른다고 말했던 “바로 그 때에 닭이 울었다.”
75. 구세주가 예견하셨던 말들이 베드로의 마음 안으로 돌진하여 그의 심정을 꿰뚫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이 애처로운 사건은 그렇게도 심지가 굳은 사도의 품성 안에 진실로 어린 아이 같은 어떤 것을 밝히 나타내고 있다. 갑작스런 옛 생각, 통절한 양심의 가책, 성미급한 통회, 참으로 조급한 부주의, 부정함, 이런 등등은 성인에 속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린 아이들에 더욱 걸맞은 것들이다. 그가 관저에서 어찌되어 가는가를 보려고 기다린 길고 슬픈 시간 동안 그의 기억과 양심은 깊이 잠들어 버렸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신이 죄지었다는 어떤 구분되는 느낌을 닭이 울기 전까지는 갖지 못했다. 이는 베드로가 새로운 교회의 첫 열매되었다는 것, 그와 새로운 교회는 영적 삶의 유아기에 있었다는 논리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 교회 상태를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위 구절은 매우 놀랄만하고 교훈적이기도 하다. 닭의 울음은 밤이 지났고 하루가 밝는다는 발표이다. 베드로의 마음에서 진리가 망각된 것은 교회를 닫히게 하는 도덕적 어둠이었고, 그의 양심이 자각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깨트린 새로운 빛의 결과였다. 기독 제자의 삶에서도 이와 유추되는 상태들이 경험된다. 시험의 밤이 영혼 위에 어둠의 휘장으로 뒤덮어 어떤 광선도 들어와 마음을 안내하고 격려 못하도록 할 때 예언도 언약도 어떤 소망도 실패해 극도의 자포자기 만이 분출된다. 그러나 밤의 끝은 낮의 밝아옴이다. 아침의 영향은 빛이 실지 보이기 전에도 이미 느껴진다. 그리고 그 자체에 부응하는 확신과 변화를 생산한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을 회상했을 때,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그는 대사제의 관저로부터 나갔다. 이는 시험의 상태와 현장에서 나갔다는 말, 이는 억제 받은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통렬하게 울었다. 통렬함(bitter)은 있을법한 죄들 때문에 있어지는 회개의 눈물이다. 운다(weeping)는 이 단어를 눈물을 떨어트린다는 말과 구분지어 볼 때 죄에 대한 가장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즉 심정과 이해성으로부터 직접 흐르는 눈물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우리 심정이 주님의 사랑에 얼마나 상반되는지, 우리의 이해성이 그분의 진리에 얼마나 모순되는 지를 즉각 표현하고 있다. 이 영혼은 슬피 우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쓰라리게 슬피 울었다. 이는 깊은 바탕에 도사린 악은 생명의 모든 기쁨을 거두어 간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회개의 눈물이 더 쓰면 쓸수록 거듭나는 삶 속의 기쁨은 더 달고, 시험과의 투쟁에 이어지는 그 평화는 더 단단히 다져진다.

마태복음 25장 해석

25

본 장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오심으로 있게 되는 심판에 관한 강연의 연속이다. 더구나 이 강연의 최종적인 부분 모두는 심판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본 장은 세 가지 다른 형태를,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로 표현하고 있다. 양과 염소의 경우는 엄격히 볼 때 비유라 볼 수 없으나 그 모양새는 비유적 스타일로 이어지고 있다. 주님께서 전달하신 다른 비유에서와 같이 이 비유들도 아름다움, 풍요로움, 교훈적 지혜들로 구별되어지고 있다.
세 비유를 살피기에 앞서 심판에 관한 일반적 주제와 세부적 주제에 관해 잠깐 언급해 두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그 이유가 많은 사람들이 심판에 관한 두 가지 주제를 구분해서 충분히 살피지 않는 것 같고 아마 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은 이유에서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확신하는 바, 사람은 죽은 뒤 영혼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즉각 들어간다는 것, 그럼에도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심판된다고 믿는 것도 보편화되어 있다. 이 마지막 날이란 흔히 세상의 종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씀 속 영적 의미에 관한 계시, 영계의 본성과 질서에 관한 계시는 위 두 가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사상이 서로 재회하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종교계가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고 이해해왔던 것, 제24장 3절에서 이미 살폈듯이 이는 교회의 종말, 또는 종교적 처방의 마감이다. 세상에 몇 개의 처방이 있어왔듯이 몇 개의 일반적 심판이 있어왔다. 동시에 각각의 처방이 만료될 때 심판도 있었다. 그 이유가 심판은 하나의 처방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새 처방이 시작하도록 준비하기 때문이다. 본 장에 기술되고 있는 심판은 주님께서 예견하신 심판으로 이는 그분께서 건설하신 처방의 마지막에 거행된다. 이 심판은 최후 심판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가 이 처방은 종지부를 영원히 찍는 마지막이기 때문이고, 이 처방에 관한 심판은 일반적 심판의 마지막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두 번째 강림에 있게 되는 교회는 모든 처방 중에서 월계관에 해당되는 영원히 지속될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후 어떤 일반적 심판도 거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개개인으로 죽은 뒤 즉각 심판된다. 일반적 심판이 거행될 수 있는 것은 세부적인 심판의 정상적 발생이 방해되는 여건이 존재할 때 뿐이다. 어떻게 이것이 있는지 이제 설명해보자. 영계 전체는 크게 세 개의 구역으로 구성되고 있다. 천국과 지옥은 세 구역 중 두 개에 해당되고 이 두 구역은 상태나 위치가 정반대이다. 이 두 구역 사이에 세 번째 영역이 있다. 이 영역은 위치적으로 생각해보면 천국과 지옥 중간에 있다. 그 이유가 이곳의 거주자는 상태 측면에서 천국과 지옥 상태의 중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처소이다. 그러나 중간 영역, 즉 영들의 세계라 불리는 이 영역은 자연계를 떠난 모든 사람의 임시 체류지이다.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제각각 자기들의 영원한 거처를 정하기 전 그곳을 통과한다. 이곳에서 모든 영들은 궁극적 거처를 준비한다. 이 준비란 선한 자의 경우 천국에 들어가기 전 자기들에게 붙어있던 악들을 떼어내고, 악한 자의 경우 지옥에 갈 수 있도록 자기들에게 남아있던 선이 분리된다. 영들의 세계에 체류해야하는 시간은 선이든 악이든 분리되는 것이 얼마나 쉽느냐 또는 어렵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태, 즉 진보의 정해진 질서이다. 일반적 심판을 일으키는 것은 정해진 심판의 질서가 일시 정지되는 것, 그 상태가 어지럽혀진 것이다. 영들의 세계에 들어 온 이들 안에 있는 선과 악이 정상적으로, 발전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방해하는 여건이 조성된 것은 땅 위 교회의 하강함으로부터이다. 그 결과, 즉 분리가 결과 될 수 없는 이들은 중간 영역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데, 개별적 심판이 사전에 성취될 수 없었던 모든 이들은 그들의 처방이 완료될 때, 일반적 심판이 거행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른다. 지상을 떠난 영의 마음에 선과 악이 혼합된 채 있는 한, 악한 영과 선한 영이 섞여 있듯, 지상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사회에 살고 있듯 모두 섞여 머무른다. 그러나 특별한 신성의 작용이 위 같은 영들의 마음에 있는 선과 악을 분리할 때, 이는 당연하고 꼭 필요한 결과로서 있어져 선한 영과 악한 영은 서로 분리되어 각기 천국과 지옥으로 건너간다. 이것이 본 장에서 취급되는 심판, 모든 심판이 반드시 거행되는 영들의 세계에서 있어지는 심판이다. 이 심판은 세상 시작 때부터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있어지는 심판이다. 영들의 세계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섞여 있는 모습이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묘사되는데 이 비유에서 언급된 “추수철”은 세상 끝날 이라 불리는데 직역하면 시대의 종말이라 불리고 이는 영적으로 교회 종말을 뜻한다. 주님께서 육을 입으신 때에 거행된 일반적 심판은 홍수로 묘사된 사건 이후 개시된 노아적 처방에 있어졌다. 이를 계승한 처방이 이스라엘 교회라 불리는데 엄격하게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스라엘 교회는 일반적으로 교회라 할 수 없고 표현적 교회 또는 교회의 그림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시간을 연장한 것, 시간이 다 찰 때까지 앞의 처방이 연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이 처방에 소속되었던 선한 자와 악한 자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 같이 추수 때까지 영들의 세계에서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는 바 이들에게 주님의 첫 강림 때의 일반적 심판이 수행되었다. 이 심판은 주님께서 어둠의 권세를 정복하고 인성을 신성화 하시는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결과 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이 두 작업은 중간 영역에 있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분리를 위한 준비 사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비유로 기술된 것 외에도 이 작업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말해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사셨다. 이리하여 그분은 갇혀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이다” (베드로전 3:10-20). 갇혀 있던 영들은 노아적 처방 하에 있었다. 그들이 갇혀 있었던 곳은 영영 구원되지 않는 지옥을 뜻하는 게 아닌 바 이는 중간 상태, 일시적 거주지임에 틀림없고 이곳에 주님께서 구속을 선포하셨다. 이 영들은 예언자 즈가리야(9:12)에 의해 말해진 희망 있는 죄수였고, 구속자가 해방시켜주는 포로된 자, 옥에 갇힌 자(이사야 61:1, 42:7)였다. 이와 일치되게 사도신경은 초기 믿음의 한 조목을 서술하고도 있다. 주님께서 죽으시사 지옥, 즉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일컬어진 명칭인 황천(Hades), 중간 상태의 영역에로 내려가셨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을 받아들인 갇혔던 영들은 그분이 승천하실 때 천국으로 운반되었는 바 이렇게 씌어있다. “당신께서 포로들을 사로잡아 높은 곳에 오르시니…” (시편 68:18). 주님께서 황천으로 내려가신 뒤 승천하는 전체 주제가 사도 바울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라 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 가셨습니다” (에페소 4:8-10).
주님의 첫 오심에서 거행된 심판에 관한 성경의 묘사는 우리로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서 거행된 심판에 관한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두 번째 오심에서의 심판에 관한 환상이 계시적 예견자에게 표현되어졌는 바,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또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또 죽은 자들이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다.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죽음과 지옥도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놓았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hades)이 불바다에 던져졌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이다” (계시록 20:11-14). 이 구절의 지옥(hades), 또는 황천은 불바다와는 다른 어떤 장소인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일시적 거처였던 것도 분명하다. 이 중간적 세계가 악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말씀 안에서 가끔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황천(hades)이 심판 때에 불바다에 던져졌다는 사실 만에 국한해서 관심을 둔다.
이 장에 기록된 모든 비유 안에는 공통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이끌고 있는 요점이 있다. 선한 자와 악한 자는 한 무리, 또는 한데 섞여 있어 서로가 반대되는 품성을 어떻게 지녔는지 구분 안 되고 있다. 이것이 먼저 우리에게 표출되고 그 다음 심판이 온다. 심판의 첫 결과는 선한 자를 악한 자와 구별해 분리하는 것, 즉 어리석은 처녀로부터 슬기로운 처녀를 나누는 것, 불성실한 종으로부터 성실한 종을 가르는 것, 염소와 양을 구분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결과는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제각기에 적절한 장소를 할당하여 마지막 거처로 인도하는 것이다.
1. 심판이란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를 위에서 살폈다. 이제 그 심판을 기술한 비유들을 살펴보자. 열 처녀의 비유는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훈도하시기 위해 남겨놓은 많은 이야기 중 우리에게 대단한 매력을 풍기는 것 중 하나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폈듯이 일반적 심판에 관해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세부적 심판이 덜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이유가 개별적 심판은 각 개인에게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개인 차원의 응용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라 판단된다. 어쨌든 신성의 모든 작용은 일반 차원이든 세부 차원이든 그 자체에 있어서는 똑같다. 보다 작은 것은 보다 큰 것에 대한 형상, 또는 요약이다. 같은 묘사가 모두에 응용된다. 열 처녀의 비유도 이와 같다.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처녀는 교회를 상징한다. 게다가 교회가 순수한 상태이든 부패된 상태이든 모두를 상징한다. 시온의 처녀 딸과 예루살렘의 처녀 딸들은 교회에 대한 다른 호칭들이고 이스라엘의 처녀 딸들의 경우는 추잡한 짓까지 했다 (예레미야 18:13). 이럴 경우의 처녀들은 부패된 상태의 교회나 교인을 표현하게 된다. 이 비유에서 교회를 표현하기 위해 처녀들이 등장한 이유 중에서 우리로 관심을 가지게 하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장에서 주님이 채용한 세 비유들은 똑같은 사건을 묘사하는데 그렇다고 똑같은 생각을 단지 다르게 거론했다고는 상상해볼 수 없다. 각 비유에서 의미된 것은 상징된 것만큼 다르다. 세 비유는 세 가지 다른 개인적 차원의 계층에 관련된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열 처녀들은 선함 측면의 원리에 애착을 가졌거나 선함의 원리에 반대되는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진리 측면의 원리에 애착을 가졌거나 그에 반대하는 애착을 가졌던 사람들이고, 양과 염소는 실생활에서 선함과 진리가 잘 응용되었거나 그렇지 않았던 부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렇게 식별해보면 비유들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 관련된다고 이해될 것이다. 열 처녀가 있었다. 자연적 의미에서 열이란 숫자는 불분명한 숫자를 의미한다고 생각될는지 모르나 영적 의미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계시와 창조 모두에서 이 숫자는 신성한 법칙의 결과라는 증거를 낳고 있다. 신성한 질서의 모든 법칙은 십계명 안에 집행되어 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법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두 개의 일반적 가르침으로 요약되어 있다. 마치 십계명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두 돌판에 새겨진 것과 같다. 비유에 있는 처녀들의 숫자는 영적으로 이해해 볼 때 분명히 구분되고 교훈을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녀들이 숫자상으로 열이었는데 이는 무한정한 숫자로서 심판되어질 모든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신성한 법칙에 관한 지식으로 훈육되어왔던 모든 사람, 그래서 결혼식장으로 신랑과 함께 들어가기 위해, 즉 구세주와 함께 하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준비할 기회, 수단, 능력을 가졌던 모든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의 세부 항목 중 하나는 열 처녀 모두 “저마다 등불을 가졌다”는 것이다. 빛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등불(lamp)이 여기서 채용되는데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빛 자체를 상징해준다. 빛은 진리의 상징물이라고 널리 인식되어 있는데 이는 지적 측면의 빛을 두고 말하는 상징물이다. 등불이 마음을 계발하는 진리의 상징물이듯이, 말씀 자체도 상징하는데 이로부터 모든 진정한 계발이 근원된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입니다” (시편 110:105).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바 말씀을 소유했다는 것은 이교도로부터 주님의 가시적인 교회임을 독특하게 구별해주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증거도 없이 그분 자신을 계시게 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더욱이 계시라는 직접적인 빛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허용하는 증거 중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길에 빛을 얻게 하는 등불로 말씀을 만드는 것은 책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바로서의 말씀이다. 말씀 속의 진리는 우리의 기억에 새겨 있거나 심정에 새겨진 만큼에서만 우리의 길을 안내해주는 등불이 될 수 있다. 비유는 열 처녀 모두 등불을 가졌다고 가정해 말하고 있다. 처녀들이 표현한 사람들 각각은 저마다 마음에 영향을 준 일반적 진리를 가지고 있는 수준에서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비유는 처녀들이 저마다 등불을 “가졌다”고 말함으로 시작되고 있다. 등불을 가진다는 것은 말씀 속의 진리를 납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수단으로 그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까지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 또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교회의 원리 측면에서 얼마간의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세부사항은 열 처녀 모두 서로 닮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감이란 사전에 소유했던 말씀이 정신적으로 납득되고 개인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어갈 때, 사람들이 구속자요 구세주로서의 주님께 실지이든 형식적이었든 나아옴으로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와 같은 것, 한 마디로 종교 생활의 시작을 묘사한 것이다.
2. 모든 사람이 말씀을 소유했고,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지식도 지녔고 그에 대한 믿음도 소유했지만 처녀들은 품성면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 이유가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기” 때문이다. 아마 서로 정반대되는 것을 표현하는데 위 구절은 대단히 확실하다. 성경 언어에서 슬기로움과 미련함은 지성의 예리함과 둔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덕과 악행을 뜻한다. 성경에서의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이다. 우리는 때로 지혜와 지식을 혼동해 생각하나 사실 그 둘은 완전히 다르다. 지혜는 지식을 실제에로 변형시킨 것이다. 지식은 우리에게 생명과 행복의 길을 가르치고, 가르쳐진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슬기로운 자이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가를 아는 사람이 스스로에 어떤 불행(misery)을 자초하도록 행동하고 있다면 그는 슬기로운 사람일 수 없고 단호히 잘라 말하면 어리석은 자이다. 지혜가 지식 없이 있을 수 없으나 지식은 지혜 없이도 있을 수 있다.
3, 4.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어리석다고 말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신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똑같이 진리의 등불은 가졌으나 슬기로운 사람만이 사랑의 기름을 가졌다. 여기에 슬기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큰 구분이 있다. 화려한 재능, 대단한 영리함, 불타는 열정 같은 것을 슬기로운 자는 어리석은 자보다 불거지도록 주장해대지 않을는지 모른다. 지성의 매사에서 영적으로 미련함이 영적으로 슬기로움보다 강하게 빛나기까지 할는지 모른다. 지적인 명민함은 지혜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리석음과 양립할 수 없다. 이는 비유의 미래 부분에서 더 명백하게 보여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둘 것은 성경 어디에서 기름이 거론되든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성경 모두에서 사랑이 종교의 본질임을 불변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요한 1서 4:16). 만일 기독인의 사랑이 신성한 사랑의 품안에 거할 수 있게 한다면 이런 천국적 품위가 결여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5. 열 처녀가 만나러 간 그 신랑은 즉각 오지 않았다.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이 모습이 자연계에서 있었든지 영계에서 있었든지 간에 관계없이 귀감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건네주고 먼 길을 떠났다가 이윤과 함께 그 달란트를 받으러 되돌아오되 오랜 시간이 걸렸을 때 같이 신랑은 결혼식에 손님들을 초대해놓고 더디 오고 있다. 그분이 더디 오심, 또는 그분을 기다림(tarrying)이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과 실지 영계로 들어가는 것 사이의 간격, 인생 기간이고 이 때 우리는 천국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실감한다. 이 중요한 기간 동안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는 서로 간에 구별되지 않은 채 살고 있고 다 함께 졸기도 하고 잠들기까지 한다. 이런 서로에게 공통된 조건은 의미심장하다. 삶의 외적 상태가 조는 것으로 의미되고, 깨어 있음은 내적 상태를 뜻한다. 이 세계에서의 삶은 잠든 것과 같은데 이에 비해 영계의 삶은 깨어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영이 인간의 진짜 사람인데 육체 안에 머무는 동안 그 사람은 의지와 이해성 모두에서 비교적으로 우둔해 있고 희미한 상태에 있다. 이것이 비유에서 졸다가 잠든 모습이다. 이것은 교인의 형식에 치우쳐 있든 진짜 교인이었든지 모두 똑같이 부수되는 상태 또는 조건이다. 다시 말해 두 개의 다른 상태의 마음을 똑같은 외적 조건이 덮고 있다는 말이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밤중은 마지막의 때이다. 한밤중의 소리란 새로운 시작의 발표이다. 교회의 말기, 특별한 상태의 끝이 성경에서 밤으로, 특히 한밤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유대 교회의 한밤이 당도하자 이 비유에서 같이 똑같은 취지의 큰 소리가 만들어졌었다. 그것은 요한의 선포,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었다. 개개인의 인생 마지막도 이와 같다. 준비해오던 날들이 마감되었을 때, 한밤중의 소리가 크게 있어 신랑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우리는 그분을 만나러 나가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특사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로 네 육체를 떠나라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도록 부르신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시간을 떠나 영원으로 건너갈 때 우리는 새롭고 더 높은 존재 상태를 의식하여 깨어난다. 물질계의 몸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든 조건이 제거되면 영혼은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이전에 믿음의 문제로 언제나 부상했던 영계가 이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이 되어 있다. 이런 깨어남이 얼마나 다른지! 이런 직접적인 결과는 의지와 이해성 모두의 자질이 활동하도록 불리우는 것이다. 이것이 처녀들이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는 모습이다. 일어남은 의지와 애착을 서술한 것이고 등불을 챙김은 이해성과 생각을 서술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조차도 애착이 극도로 흥분되면 정상적 감정을 넘어 격앙된 느낌으로 진입한다. 빛을 가져오느라 진력한다. 우리가 영계에서 깨어나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한밤중의 외침이 들릴 경우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이 우리에게 있어질 수 있을까?
8. 이제 숙명적인 진리가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에서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들이 챙겼던 등불은 꺼져가나 죽는 심지에 공급할 기름이 없었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세상에 거처를 두고 있는 동안일 경우 우리는 참된 것 같이 보이는 가공된 사랑, 진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이는 지식을 사랑함 같은 것을 가지고도 믿음의 등불이 죽지 않도록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계, 이곳은 지상적 대응이 아무 소용없는 그곳, 가짜 근원의 샘이 말라버리는 곳, 참된 영적 사랑을 지니지 않은 믿음의 등불은 점차 꺼지고야 마는 곳이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가진 것을 보고, 정작 자기들을 위해 획득했었어야 했던 것을 그들로부터 바라고 있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자들은 궁핍한 동료의 요청을 거절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적선하는 일이 여기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아무도 결코 자기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라” (시편 49:7-9). 슬기로운 자가 아는 바, 제아무리 큰 선함을 자신이 지녔다 해도 구원을 위해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 게다가 선함은 그것이 크든 작든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이 많은 충고로,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네 쓸 것을 사는 게 좋겠다” 고 말해준다. 천국적인 기름은 선물을 받듯이 공짜로 획득될 수 없다. 그 기름은 반드시 값을 치루고 사야만 한다. 그런데 기름을 파는 사람이 누구일까? 신성한 존재 그분 자신이 사랑과 선함의 유일한 저자이시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와서 사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신성한 질서의 법칙들이 거룩한 기름을 팔도록 위촉되어있다. 그 법칙들은 우리가 그 기름을 구매할 수 있는 값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회개의 일을 해야 하고, 정의의 열매를 생산해야 한다. 이 법들은 거룩한 진리들이고, 이 진리는 그 진리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함의 기름이 산출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가서 사야만 한다. 그 이유가 비록 주님께서 값없이 돈을 지불함이 없이 주신다 할지라도 그 기름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아 사랑을 싹 쓸어 내는 이들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그분의 사랑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 미련한 처녀들이 자리를 비운 때에 신랑이 왔다. 또는 그분이 오시는 때 그들이 자리를 비웠다는 이 표현은 그분과 그들 사이에 비슷한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 그 결과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분과 함께 입장했다. 주님과 함께 결혼식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장소 차원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 뿐 아니라 상태 차원에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내적 마음에 관한 상태, 거기서 선함과 진리가 결합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내적 인간 속의 천국에 정의로운 자와 함께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기서 사랑과 믿음의 하나 됨 안에서 그들과 영원히 거주하신다. 그분이 천국적이고 영원한 결혼 안으로 그들과 함께 들어가셨을 때,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교란시킬 수 있는 외적인 모든 것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 문은 영영 잠구어진다. 정의로운 자를 위해 문은 안쪽에서, 불의한 자를 위해 문은 바깥쪽에서 잠긴다. 어리석은 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긴 문은 그들 마음 속의 문이다. 세부적으로 볼 때 이 문을 수단으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의 교통이 있는다. 그 이유가 영적 마음은 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천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일 경우 이 문은 결코 절대적으로는 닫혀 있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실한 회개로 열려질 수 없을 정도로 닫혀 있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이 문에 서서 두드리시고 하느님이 두드리는 이 문은 인간이 반드시 열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상의 경우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 심정 속의 이 문을 열지 않았던 사람은 저 세상에서 열 수 없다. 내적 인간 쪽으로 열리는 문이 닫혀져 있을 경우 자연적 마음은 어둠과 죽음 속에 놓여있게 된다. 내적 마음으로부터 오는 모든 빛이 차단될 경우 야기되는 바깥쪽 마음의 어두움은 성경에서 사악한 자들이 심판으로 내던져지는 “바깥 어두운” 곳, 본문의 경우 천국 결혼의 영광으로부터 닫혀져 처녀들이 꺼진 등불을 가진 채 있어야 할 그곳이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공통된 소원사항이듯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행복의 거처가 천국이라고 믿는 사람, 즉 교회에 소속된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소원이다. 따라서 천국에의 입장을 허가 받는다면 그것은 행복을 영원해지게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국이 내적 인간의 천국으로 간주된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그 문은 저 세계에서까지도 주님에 의해서 열려져야 할 것이라고 악한 자는 희망한다.
12. 그러나 주님께서 어리석은 처녀에게 대답하신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너를 모른다.” 악한 자가 하느님을 모르는 거나 하느님이 악한 자를 모르는 거나 그 경우가 비슷하다. 물론 악한 자가 지적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은 구원하는 수단으로서 알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주님도 그들을 아신다. 하느님 측면에서 주님은 악한 자를 아신다. 그러나 구세주 측면에서 그분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올라 있지 않다. 그들은 구원받는 지식이 없다. 그들은 그분이 육을 입으신 것, 구속하시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다. 그들에게 그분의 자녀라는 표시가 없다. 주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도 손에도, 심정에도, 생활에도 씌어있지를 않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이 그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이름이 천국에 씌어 있지 않는데 어떻게 거기서 그들이 알려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주님 안에 있지 않고 주님은 그들 안에 있지 않는다. 이런 상황의 피할 수 없는 결과는 거기에 상호 교류의 바탕이 없다는 것, 결합하는 수단이 없다는 것, 오로지 큰 구렁텅이만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어 완전한 분리, 영원한 분리만이 있어질 뿐이다.
13. 이 얼마나 엄숙한 경고인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지켜보고 있어라.”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는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현존에로 불리울 때까지 심판을 위해 준비할 기회를 갖는다. 우리의 준비는 준비함을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게 하는 사건을 직접 납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위험의 표시를 보지 못할 때라 하더라도 우리는 지켜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는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 지켜 경계하면 그 노력이 헛될 리 만무하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감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기겁하고야 말 것이고 그 동안의 근심과 노력마저 헛되진다. 그러므로 경계하라. 어쨌든 영적인 파숫군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고야 말 사건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고 그 사건을 납득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마 납득하고 있다면 그 납득 자체가 우리를 위험에서 보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노출시켜 줄 것이다. 침입자를 대비해 준비한 이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경계한다. 적을 두려워하게 되는 이유는 준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키고 경계한다는 것은 우리의 집을 질서 가운데 정착해놓고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고 우리가 아는 그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기다림에서 주님이 오시어 우리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얼마나 복될까!
14-30. 달란트의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와는 달리 또 다른 국면에서 수습 기간 중인 우리의 삶과 마지막 결정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이 비유는 이 세상 이후 우리를 기다리는 상태의 본성을 잘 생각해 보게 하는 빛을 던지고 있다. 이 본성에 따라 우리는 미래의 행복 또는 비참함이 결과 된다. 이 비유가 이런 교리를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즉 모든 인간 존재는 주님에 의해 각자에게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것, 각자는 부여받은 능력을 선용하든 악용하든 각자 스스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용 역시 각자의 자유로운 결정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분명한 바, 자유로운 결정, 그밖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도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져있다. 그가 구원되어진다면 주님은 그 사람의 구원의 유일한 저자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상인들이 주님의 종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라고 하여 되돌리고 있다. 물론 처음에 받았던 것과 벌어들인 나중의 것 모두가 주님께 되돌리고 있다. 영적 의미의 빛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들 앞에 또 다른 마음의 계층, 또는 앞의 비유에서 처녀들은 하늘 왕국의 원리 중에서 의지와 애착의 대상인 사랑의 원리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표현했고, 이 비유에서의 종들은 하늘 왕국의 원리 중에서 이해성과 생각의 대상인 진리의 원리를 좋아하거나 반대하는 것들을 표현해놓고 있다.
14. 이 비유에서 맨 처음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이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는 모습으로 비교되고 있는데 대해서이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창조물을 어떻게 취급하시는가에 관련해서 두 가지 중요한 세부사항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 영원한 행복을 붙잡기 위해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은 주님만으로부터 값없이 선물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값없이 받은 선물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 선물은 자신의 것이 되게 마지막으로 그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소속된 것 모두가 주님의 것이어야 마땅하다고 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언제나 지니고 있었다해도 주님께서는 그것들이 그분으로부터 나온 것이 결코 아닌 듯 확증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각각의 종들이 받은 달란트가 주인, 즉 구세주에 의해 주어진 줄거리에서 명백해지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인간이 세상에 거처를 두는 동안 그는 자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어 모든 것은 외관에 의거 그는 자신의 주인 내지 스승이 되어 있어 정작 그가 가진 모든 것이 파생된 참 존재와는 독립적으로 행사하도록 섭리된다는 것이다. 신성한 현존에 관해서 우리는 감지되는 지각이 없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가 바깥쪽 외관 만에 의해, 우리의 감각이 말해주는 대로 판단할 뿐이라면, 또는 계발된 이성이나 계시의 증거 없이 우리의 의식이 암시하는 대로 판단할 뿐이라면 우리는 일반적인 하느님의 존재 여부까지 의심을 갖게 된다. 이런 사항은 우리 주위에서 실지로 많이 목격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종의 주인이 “먼 길을 떠난다”는 말에 위 사항이 담겨 가르쳐지고 있다. 거룩한 말씀의 많은 곳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어떤 행동이나 진행이 실제로는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로 생산된 외관임에도 주님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다. 천국 또는 넓은 측면에서의 영계는 주님의 더 직접적인 현존이 있는데 이곳은 자연계와 비교해볼 때 “먼 나라”이고 바꾸어 자연계는 영계가 “먼 나라”에 해당된다. 그러나 특이하게 인간은 자연계와 영계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소유하도록 창조되어있다. 죽은 뒤에 갖게 되는 인간의 혼 또는 영적 부분은 그의 영계이고 그의 몸 또는 자연적 부분은 그의 자연계이다. 이를 더 세분해보면 그의 영적 부분은 두 개로 된 영역, 즉 주님 스스로 거주하시는 가장 깊은 영역과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허락한 덕택에 소유한 자유와 합리성, 그래서 주님이 거하시는 영역으로 나뉘어있다. 이것들은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는 자질들이다. 창조의 질서에서 가장 깊은 영역은 주님에 의해 맨 처음 형성되고, 이를 받는 그릇 차원에서 그 보다 수준 낮은 마음의 영역과 몸이 형성된다. 인간이 자기 존재를 처음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은 마음의 수준 중 제일 하급이다. 주님께서 영혼의 가장 깊은 속에 언제나 현존하시어 남아있지만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 그분은 인간으로부터 퇴각하신 듯, 말하자면 “먼 나라로 가신 듯” 여긴다. 따라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은 이런 본성의 세계에 서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왔는 바 언젠가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때이지만 인간은 장사하도록 달란트를 부여받는데 자기 재능의 사용이 선용이냐 악용이냐에 따라 그의 영원한 삶은 행복과 불행으로 갈라진다. 주님께서 재산을 맡긴 이들이 그분의 종이라 불리고 있다. 특히 이 종들은 “자기” 종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이 비유가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 최소한 주님과 더 직접적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신성한 계시를 소유함으로 주님께 소속되어 있다고 형식적으로라도 고백하는 이들과 더 관계되기 때문에서이다. 한 마디로 하느님과 자기와 더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이들은 성경에서 흔히 등장하는 종(servant)이라는 자유인이 아닌 매인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주인의 재산인 바 그의 모든 소득, 그가 부여받은 재능까지도 모두 주인 자신인 것 같이 주인에 소속되어 있다. 영적 의미에서 종들은 진리를 소유한 교회 내의 사람들, 더 뾰족이 말해서 잘 사용하면 자유의 상태인 선의 상태에 도달하게 해주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진리를 소유한 교인을 말한다.
15. 주인이 준 재산이 달란트(talent)로 구성되고 있다. 이 달란트가 각기 다른 세 종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이 비유가 교회 멤버라고 고백하는 사람과 더블은 신성한 섭리(economy)를 묘사하고 있는 바 수많은 교인이 셋으로 한정되어 묘사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이유가 이 숫자는 완성함(completeness)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숫자는 영적 계층의 사람들, 진리를 수용하고 있는 이들에 잘 적용될 수 있는 숫자이다. 이들은 말씀 어디에서나 언급되는 종이라는 단어로 더 특별히 의미되고 있다. 종들은 각기 다른 달란트를 받고 있다. 달란트란 납득해서 직바르게 사용하는 능력과 함께 주님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더 많은 지식들이, 혹 어떤 이에게는 보다 적은 지식이 할당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구절의 언어는 실제보다는 오히려 외관만을 표현하도록 채용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영향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충만되도록 제공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받아지게 되는데 수용량은 수용력에 의해서만 한정될 뿐이다. 이를 모든 사람 각자는 자신의 습관이나 생활 방법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해서 자기 스스로 획득한다. 그러므로 무한한 지혜의 보물 창고로부터 어떤 이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꺼내간다. 그런데 이 달란트를 본문 같이 주님께서 주신다고 말해질 경우 이는 각자가 가져가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세 종에 관한 의미와 같이 달란트의 숫자 역시 각기 구분되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숫자 역시 외관과 실제(내용)와는 아주 다르다. 숫자는 양보다는 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숫자가 더 크다고 더 나은 어떤 것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각 숫자의 의미는 각기 표현하고자 의도된 품질을 지닌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다섯 달란트는 유아기, 어린 시절, 젊은 시절 동안 이루어진 것들로 인간 마음 안에 저장되도록 아껴두신(remains)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두 달란트는 젊은 시절을 지나면서 가르침을 받고 배워 획득한 선과 진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을 지식으로 소유하고 있다. 한 달란트는 진리만을 의미한다. 이 진리는 성년기에 거의 접근했을 때에 있어지는 어느 정도 선택이라는 움직임에 의해 획득된다. 그래서 이것들은 기억 안에 저장되어 있다. 이것들은 인간 개개인이 획득하는 모든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상태들은 인생의 이런 시기동안 주님의 섭리로 형성되고 이어지는 후기 삶에서 거듭나는 삶에 진입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 각자가 소유하도록 선물되고 있다. 영적으로만 이해해 본다면 달란트는 단번에 모두 수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점진적으로 주어진다. 하느님께서 선과 진리를 수여하시고 인간이 그것들을 획득하는 시기는 유아기로부터 성년 초기까지 광범위하다. 게다가 지식의 획득, 아껴 저장하심 모두가 뒤섞여 진행된다.
16, 17.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주님께서 수여하신 달란트는 장사하라고 주어지고 있다. 장사함(trade)에 달란트의 참된 가치가 놓여 있다. 무한한 지혜가 하늘 나라의 본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채용한 모든 비유에서 우리 안에 언제나 표출하고 있는 한 가지 주요한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이란 우리 앞에 언제나 표출되어야 하는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들을 진지하게 사용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열렬한 기도, 성실한 탐구, 꾸준한 노력, 참고 견디는 노동 등등이 당연히 함유되어 있다. 이것들은 축복을 붙잡는 것, 보물을 발견함, 목적지에 도달함, 포도를 수집함, 풍요한 수확을 거둠 등등 같은 목적의 달성을 기약하고 있다. 수습받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전체 의무가 주님의 한 단어 “노동, labour”에서 표현될는지 모른다. 하느님께서 수단과 힘을 주신다. 인간은 그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에 인간의 위대한 의무가 존재하고 여기에 그의 구원도 의존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것 이상 더 인간을 위해 해주실 수 없다. 인간은 달란트를 사용하되 스스로 덜 사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주신 분에게 증가 분을 더 붙여 되돌려야 한다. 창조물이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구원해 줄 수 없다는 하느님 편에서의 말이나, 나는 할 수 없노라고 인간 편이 말하나 결과는 똑같아진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 그가 했다면 달성하리라는 것 또한 의심할 바 없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취급하신다. 한 마디로 쌍방은 자유 행위, 자유 계약(free agent)이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free will)를 주신 분이신데 어찌 주신 것과 반대되게 강요하거나 행동하실 리 만무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모순이요 모순된 것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다. 결국 돌아가는 귀결은 우리는 반드시 자기 달란트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달란트로 장사해야만 한다. 달란트로 상징된 것, 이 지식은 우리의 의무에 관한 지식이다. 동시에 그 의무를 행하는 능력이다. 우리의 의무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 정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고 하느님과 함께 겸손히 사는 것이다. 영적 삶은 자연적 삶과 분리된 게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일을 행하는데 주님의 원리를 채용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것, 장사를 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사실을 여기서도 마주친다. 복 주시는 그분의 섭리가 보시는 바 모든 사람은 자기 필요에 충분한 달란트를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받는 달란트는 그 소유자가 하느님을 향해 부유하게 만들어지도록 활용되도록 요구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총애 받는 종들의 얼마만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에게 수여된 달란트를 크게 활용한 슬기로운 종은 행복하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다섯 달란트를 번 사람, 두 달란트를 번 사람, 모두 신성한 자비를 선용해서 선행과 믿음이라는 생명 있는 삶을 수단으로 총명과 지혜를 그들 스스로 획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게 있다. 위 두 종은 각각 자기에게 수여된 달란트로 삶을 시작했을 때와 맞먹는 액수를 장사로 벌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 교훈적인 진리가 놓여있다. 종들이 장사를 함이란 인간이 지닌 지식을 실제에다 놓이게 하는 의무와 노동이라는 인간의 부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의 종교를 생활 속의 종교로 만들어야하는 의무 수행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노동이고, 그 결과는 생명을 참다웁게 획득한다. 우리의 위대한 땀흘림은 내적 인간에 외적 인간을 조화시키는데, 자연적 마음을 영적 마음에, 말과 행동이 생각과 애착과 하모니를 가지게 하는데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총명과 열정, 인내라는 것들을 수단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물리치게 되는 모든 악은 불일치하게 하는 각종 요소나 원리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실시한 선은 안쪽 인간과 바깥쪽 인간 사이에 하모니를 건설한다. 이런 두 길, 즉 악행을 중단하는 것과 선행을 배워가는 진보적 방법을 계속 이행해 가노라면 우리의 원리들은 우리의 기질(habit)로 탈바꿈한다. 충실하게 활용한 우리의 달란트는 또 다른 달란트를 벌어들인다. 이 소득이야말로 굳건하고 영원한 소득이다. 그 이유가 실제 응용에 놓였던 것이 확증되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남아 있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 만일 이 한 달란트가 하느님의 영적 선물을 받기 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로 제한된 수용력을, 그리고 하느님이 수여하시는 선물 중 가장 작은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해본다면 땅에 묻었다 해도 하느님의 선물이 수여된 목적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로 이해되도록 의도된 듯 여겨질지 모른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도 다른 종이나 마찬가지로 주인이 올 때까지 지참하고 있도록 허용되고 있다. 다른 종처럼 그도 장사해서 두 배로 불릴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원한 삶을 얻는 능력과 수단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고 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한 조건은 모두에게 똑같다는 말이다. 한 달란트란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 각각에게 가르치는 진리를 상징하는 바, 모든 사람은 자기 능력 안에 그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능력은 당사자에게 언제나 주어져 있으면서 그 진리에 선함을 더해 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전부이고 동시에 각자가 구원받는 필요 조건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 종은 한 달란트를 활용하는 대신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춰두었다. 누구이든 이 나태한 종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 즉 그는 하느님께서 영적이고 영원한 사용을 위해 그들에게 수여한 수단과 달란트를 개선하는데 게으른 사람에 대한 모형이다는 것이다. 영적 의미는 이 의미에 더 큰 교훈을 얹고 있다. 땅, 이미 여러 번 살폈던 것 같이 인간의 지상적, 자연적 마음을 상징한다. 이 구절에서의 이 상징은 대단히 교훈적이다. 사실 이 종은 방탕한 아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 버리듯 주인의 달란트를 낭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보존해서 원 주인에게 되돌리기 위해 땅에 묻었고 그 달란트는 반환하는 때까지 안전하게 남아 있었다. 이 종은 교회에서 진리의 지식을 키워가되 어떤 영적 차원의 사랑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실용적인 목적이 있어서도 아닌 단지 자랑거리 차원에서 진리를 알고 즐기는 교인들에 대한 모형이다. 진리의 함양, 또는 진리를 수용하는 자연적 마음의 함양이 땅을 “파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이 종이 땅을 팠다는 것은 자연적 마음을 갈고 닦는 목적이 오로지 지상적일 뿐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종은 어떤 한 개인의 품성만을 두고 거론되는 말은 아니다.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진리의 빛에 경탄하면서도 그들의 심정은 그 진리의 도덕적 특출함이나 그 힘의 영향에는 무덤덤해 자기와 아무 관련없는 듯 되어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또는 진리를 지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 그런데 그 이상의 발전이 없는 경우, 그들은 한결같이 “주인의 돈을 감추고” 있는 셈이다. 돈이 상징하는 것이 지식인 바 위 사람들이 지식을 숨긴 것도, 지식에 게으름을 핀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인간은 자기 주님의 것인 달란트를 감추어 놓이게 할까? 그들이 소유한 한 달란트가 그분의 것임을 심정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이다. 주님의 달란트에 있는 영적 가치를 비영적 삶으로 가리울 때, 하느님의 자녀가 선한 일을 해서 그 일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영광을 받도록 사람들 앞에 빛을 드리우지 않을 때이다.
19. 그러나 셈을 하는 날이 드디어 오고 있다. 이 부분은 주인의 신뢰에 충실했던 종과 불충실했던 종의 예에서 보여주었던 대목과 비슷하다. “오랜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상의 인간에게 할당된 가장 긴 시간까지도 불확실하다는 것, 시간의 짧음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영적으로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주님이 심판하러 오시는데 있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분께서 오래 참으셨음을 말한다. 수습기간 동안에 해당되는 이 세상의 우리들 삶은 길던지 짧던지 할지라도 그분의 틀림없는 지혜는 이 세계에 있어야 할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을 측정하신다. 그분의 실패 없는 사랑은 우리가 통과해 가는 모든 상태를 보살핀다. 지켜 감시하는 신의 섭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언젠가 셈을 하는 우리의 때에 우리로 하여금 즐거움과 영원한 행복을 실감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오랜 시간”이란 주님과 함께 우리가 노력하는 시기,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 자극하고 그분의 지혜로 인도해주며 그분께서 위촉한 특사로 하여금 우리를 도와주게 해서 회개함과 거룩함이라는 경지로 끌어올린다. 주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각자의 달란트를 배가할 여유를 준 시간만큼 오래 걸려 우리도 자기 달란트를 지니고 셈할 때가 온다. 셈을 함(reckoning)이란 모든 사람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호된 시련(ordeal)이다.
20. 주인이 종들과 셈을 시작하자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자기가 소유한 것, 자기가 획득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의 진짜 주인은 하느님이신 바 인간은 소유자로 간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원리를 강력하게 못박아 놓는 부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존경받는데 있어서 질투하시고, 마땅히 받아야 할 그분의 몫을 챙기신다고 여겨질 수 있고 또한 여기고 있도록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위와 같이 요구하시는 참된 이유는 그분께서 존경받으려면 그분의 창조물로부터가 아니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완전해지는데, 인간이 축복을 증가시켜 가는 수단이 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선물과 그것의 획득이 축복이다. 그 이유가 이 축복만이 우리를 그 축복의 참 근원이신 주님과 연결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영적 선물은 하느님의 사랑과 빛이 영혼 안으로 흘러 내려 드리우는 통로인 바 인간은 그것들을 통해서만 모든 선의 제자로서의 그분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충성한 종의 결과에서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셈을 하시러 오시는 이유이다. 참으로 우리를 영원한 세계에서 더 직접적으로 그분의 현존을 가져오도록 엄숙하게 방문하심으로 우리가 생각지 못한 “그 날과 그 시간”에 모든 이 각각에게 오시고 있다. 이 오심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사건이듯 최종 결산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깊고 장엄한 수준에서 우리의 흥미가 놓인 대목 중 하나이다. 비유에서 주인은 먼저 달란트를 개선시킨 종들과 계산하고 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 벌어들인 증가분과 함께 원금을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그 전부가 주인의 것이라고 해서 되돌리고 있다. 이는 재물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을 주신 분이 주인이라는 것, 획득된 재산의 원주인이 그분 이시다는 것까지 인정하고 있다. 이는 자기가 한 일들에 대한 공적을 주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함의 모든 공적은 그분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이다. 이 중대한 실용적 진리는 장사해보라고 맡겨진 원금을 두 배로 불리는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말했었다. 이미 말했듯이 이 증가는 선함을 만드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진리를 사용할 때, 선행(charity)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신앙을사용할 때 이루어진다.
21. 장사해서 달란트를 배가시켰다는 말은 마음 안에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삶 안에서 재생산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는 성실하고 충분되게 생산되었다는 것까지 암시하는데 이것이 주님의 인사말에서 표현되어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착함은 의지 부분의 품질이고 충성은 이해성의 품질이다. 전자는 선행을, 후자는 믿음의 특질이 소속된다. “잘 하였다”는 칭찬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착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위로이다. 더구나 보상이 따르고 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이 세상 삶 속에서 확증된 선함과 진리의 원리들은 저 세상 삶에서 더 많이 배가되고 더 드높여진다. 이것은 이 구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일반적 교훈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보다 특별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미 살핀 바대로(20:16) 적음과 많음은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의미가 이 구절의 경우에서 응용될까? 이미 살핀 바는 종들이 달란트를 받고 그것 가지고 장사한다는 것은 진리를 받고 그 진리 가지고 선함을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선함이 획득되었을 때 그 획득은 더 풍요로운 진리의 용적을 주고 더불어 더 높은 종류의 진리까지 부여한다. 다른 구절에서 살폈듯, 진리의 두 가지, 즉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가 있고 그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가 있다.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는 진리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지혜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선함이 무엇이며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지식의 빛이 아니라 사랑의 빛 또는 슬기롭게 사랑하게 하는 진리, 그러므로 인정이 많은 행동들, 계발된 선행(charity)의 행위들이다. 이 비유 속의 종들에 대한 보상 내용이 지혜의 진리를 지닌 선함이라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표현된 말에서 나타난다. “주인님, 금화 하나를 열 개로 늘렸습니다…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금화 하나를 다섯 개로.. 다섯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누가 19:16-19). 말씀 어디에서이든 고을(city)은 이해성과 관계되고, 그리고 진리, 이해성의 그릇이 되어 있는 교리와도 관계된다. 많은 것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된 종은 자기의 더 낮은 애착과 생각 모두를 통치하고 관리하도록 선물되었는 바 이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완전히 복종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사항 외에도 다른 한 가지 보상이 이 종에게 수여되고 있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는 주님께서 거듭나는 사람에게 만드실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이다. 우리 주님의 기쁨이란 그 자체 드러나 명백해지는 기쁨이다. 종이 주인의 기쁨을 나눈다는 것을 마음에 응용하는 세부 측면에 일치시켜 보면 이는 내적 인간의 기쁨과 그의 영적 애착을 외적 인간과 그의 자연적 애착에 나누어줄 때이다. 그 이유가 마음의 두 부분이 하모니와 하나 됨을 가져올 때 모든 내적 기쁨이 외적 기쁨과 즐거움에 내려와 기독인의 기쁨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기쁨이 인간에게 내려 오면 그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나눌 준비를 갖춘다.
22, 23.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에 관해 말했던 내용과 같은 바 이 구절은 생략한다.
24, 25.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왔다.” 이 종도 다른 종들 만큼이나 당당하게 주인 앞에 나서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성실함이 부족했다는 어떤 죄의식도 고백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기 손에 맡겨둔 주인의 돈을 되돌려 드리는데 남보다 더 충실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주인의 완고한 품성까지 곁들여 생각해보면 자기가 결정한 행동은 대단히 정당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으신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구절은 자연적일 뿐인 인간이 모든 선의 저자, 자비로우신 주님을 어떻게 보는 가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 종도 자신이 향유하는 모든 축복이 주님으로부터 근원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그분을 완고하신 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 보고 있는 심정은 사랑의 영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 자아와 세상 사랑 같은 주님의 영에 반대되는 사랑에 푹 잠겨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께서 선행과 신앙이라는 열매를 요구하신다고 알고 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선행과 신앙이 자기들 마음에 결여된 근본 원인은 자기들 마음에 그런 특질을 선물 받지 못해서라고 둘러대어 주님 탓으로 삼아 자신을 정당화한다. 순수한 선행과 신앙이 우리 본성에 이식되지 않았다는 것, 더욱이 우리 본성은 출생을 수단으로 순수한 선행과 신앙에 반대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이와 나란히 진실 된 것은 순수한 선행과 신앙을 획득하는 수단들이 제공되어 있다는 것, 달란트가 주어져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획득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한 달란트 받은 종같이 오로지 자연적 경향성에 따라서만 삶을 영위해 갈 경우 그들은 결코 순수한 선행과 신앙을 획득하지 못한다. “두려워해서”라는 본문의 단어는 위와 같이 자연적일 뿐인 사람이 갖는 내향적 느낌, 그들이 주님을 생각할 경우 자신의 상태와 그분의 속성 사이에 너무나 대립적임이 의식된 결과로 갖는 내향적 느낌이다. 가서 주인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수여된 고상한 자질들을 단지 자연적일 뿐인 목적과 대상에 종속하게 만듦으로 해서 자연적 인간의 썩은 것 안에 가두는 것이다.
26, 27. 그런데 주인은 종이 한 말,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는 분으로 평가한데 대해 어떤 불쾌함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그가 그렇게 주인을 예상한 것을 인정하여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수행하지 않은 의무를 지적하고 있다. “주인은 그 종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사람인줄을 알고 있었다면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 주었다가 내가 돌아 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구절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는 바, 주님을 섬기는 의무는 자연적 인간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 바깥쪽 측면에 속하는 것에만 몰두해서 순수하고 드높은 선행과 믿음의 원리를 획득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해도 순종의 단순한 동기로부터 서라도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서 상 받기를 기대한다면 하느님의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다. 단지 상 받기를 원해서 선을 행하는 것, 비록 이것이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 해도 이는 가장 수준 낮은 동기이다. 그래도 이런 동기로부터서 인간은 미력하나마 참된 선 같은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다. 만일 그가 하느님의 법에 순종하되 신실했다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할는지 모르고 결국 천국의 입장은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간단히 말해 처음에 하느님이 두려워 그분을 섬기는 의무를 실천했지만 나중에는 그분을 사랑해 섬기는 쪽으로 끝맺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일 두려움을 몰아내는 완전한 사랑을 달성하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최고의 목적이신 그분에게 두려움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노예적 요소를 몰아낸 사랑의 수준은 달성하리라.
28. 달란트를 배가시킨 종들은 수고한 그 이상의 것을 다스리게 했는 한편 게으른 종에게서는 오히려 주어졌던 것마저 빼앗고 있다.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어떤 능력이든 적극적이면 증가되고 게으르면 미약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반 법칙이다. 영적 선물 역시 이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자기 자질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게으르다면 그 자질은 미력해지거나 아예 타락되어진다. 만일 자기 지식을 게으르게 사용한다면 그 지식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지식의 사용은 타인을 가르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자신에게 응용하는데 있다. 또한 타인의 이해성과 교통하는 것이 지식의 사용이 아니라 자신의 심정에 응용하는데 있다. 만일 종교적 지식이 응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우리로부터 거두어질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우리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영적 수용력 또는 그것을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잔존할 수 없는 것이다. 선이 없는 곳에 진리가, 사랑 없는 곳에 신앙이 존재될 수 없다. 진리에 잘못을 저지른 지식을 가지고 저 세계에 입장하는 사람, 믿음에 잘못을 저지른 신념을 가지고 저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에게는 가지고 간 어떤 것의 껍데기조차도 없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기 달란트를 두 배를 불린 사람들, 자기가 지닌 진리에 선함을, 자기 믿음에 선행(charity)을 추가한 사람들은 자기의 수용 능력을 크게 했으므로 한없는 증가분으로 그 용적을 채워 풍요로워질 것이다. 한 달란트가 불충한 종으로부터 거두어져서 열 달란트를 지닌 사람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칭찬받았고 두 배로 불렸는데 그에게는 빼앗은 한 달란트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15절에서 이미 살핀 바대로 다섯은 둘보다 덜 충만되고 덜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둘은 동등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고 두 달란트 외에 더 벌어들인 두 달란트란 생활의 원리가 되어 획득한 선과 진리 또는 선행과 신앙을 의미한다. 선행과 신앙이 실제로 하나 됨이 천국 결혼을 구성한다. 그러나 숫자 다섯은 선과 진리가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참으로 남아 있는 선과 진리가 결함 있는 상태, 즉 올바른 교육 같은 것을 한정되게 받았으나 그런 데로 그것을 잘 즐겨 사용하는 상태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는 것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비록 남아 있는 선과 진리에 결함이 있다 해도 구원받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선과 진리가 충만되는 상태가 열이란 숫자로 의미되고 있다. 다섯으로 의미되는 상태, 비록 불완전하지만 저 세계에서는 충만되고 완전해질 것이다. 이런 상태는 지식을 수단으로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해서 진리를 오직 지적 측면에서만 흠양한 달란트, 지식을 받아 쥘 수 있는 달란트, 즉 한 달란트가 열 달란트를 지닌 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29. 언뜻 보기에 역설 같이 극과 극을 이룬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어진다. 선을 가진 사람은 진리로 풍요로워질 것이나 선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박탈당한다. 누가복음 8장 18절의 경우, “있는 것”이란 말이 “가진 줄 알고 있는 것”이라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악하고 불성실하게 진리를 가지면 언뜻 보기에만 진리를 소유한 듯 여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억 안에 그것을 가지고 있을 뿐 심정 속에 없다. 기억은 마음의 창고일 뿐이다. 재물을 쌓아 둔 “곳간,” 죽음은 그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그 곳간을 갈취한다. “오늘 밤 네 목숨을 너에게 요구된다면 이런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천국의 위대한 법칙, 참으로 생명의 위대한 법칙은 선을 가진 만큼 진리를 가지고, 선행(charity)을 실현한 만큼 믿음도 가진다는 것이다. 선과 선행은 진리와 신앙 없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다. 이교도가 이에 대한 예가 될 것이다. 계시된 진리의 지식 없이, 그러므로 복음서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도 없이 그들에게 할당된 지식의 팽창 만큼에서 선행과 덕행을 실천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저 세상에서 이와 같은 사람은 그들 선함에 진리가 더해지고 신앙이 그들의 선행에 추가될 것이다.
30. 이렇게 판결되고 있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이 언어에 관한 의미는 이미 언급했다. 악한 자를 내던지는 어두운 곳이란 그들 자신의 마음의 어둠이다. 그 마음에는 구원하는 진리의 빛이 꺼져 있어 왔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지녔던 빛은 지식의 빛일 뿐이다. 해가 만들어져 궁창에 놓이기 전 땅을 향유했다고 말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빛에 앞선 일시적인 빛인바 일시적인 것은 영원한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본문은 어둠을 말하되 “바깥” 어두운 곳이라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어둠은 무식해서 있어진 어둠이 아니라 잘못해서 있어진 것, 왜곡된 진리의 어둠, 빛이 어둠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안의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야말로 오죽이나 하겠느냐!” “거기에서 이를 갈며 슬퍼하리라.” 이는 선과 진리가 없고 품행과 지적 생활에 악과 거짓이 현존함으로 야기되는 고통의 쓰라림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엄숙한 교훈을 발견한다. 생명과 죽음의 강한 어조가 우리 앞에 장착되어있다. 우리로 즐기도록 한 자비에 충실하다면 살 것이고 불성실하고 무익하다면 죽음뿐이다.
31-46. 이제 또 다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그분께서 전달하는 비유 중 아주 감명적인 것 중의 하나가 우리 앞에 전개된다. 전능하고 공정한 재판관에 의한 마지막 심판은 꼭 있어진다는 것은 계시록이 사람의 자녀에게 발표하는 가장 엄숙한 훈계 중 하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본성 속에 고통은 대단히 싫어하고 쾌락은 대단히 즐기는 본성을 슬기롭게 심어두셨다. 이 나뭇가지에 그분께서는 기독인의 삶이 전진해 가면서 우리를 안내하고 자극하는 종교적 두려워함과 희망을 접목하신다. 이것 없이 마음으로 깨어 있고 적극성을 띄우도록 한다는 것은 의지이든 이해성이든 어떤 힘도 있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두려워함과 희망 없이 천국과 지옥의 교리에 깨어 있을만한 흥미가 존재할 수 없고, 그 결과 천국이든 지옥이든 결정하는 심판에 관해서도 아무런 흥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 육체 안에 존재했을 때 행했던 대로,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심판 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심판 좌석 앞에 모두 나타난다는 것, 우리는 이 비유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호된 시련의 본성을 알게 된다.
31. 우리 앞에 표출된 광경은 최고의 장엄함과 엄숙함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바깥쪽 영광이 우리의 감각에 영향을 주는 바 이를 수단으로 마음에 영향을 주는 내향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다. 주님이 오시는 이 영광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의 광채이다. 그러나 주님의 영으로 두 번째 오심의 영광은 육으로 오신 첫 번째 오심의 겸비함과는 대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다. 이 이름은 육을 만든 말씀으로서의 주님, 인간의 납득력에 숙박하는 신성한 진리를 묘사하고 있다. 이 진리를 수단으로 인간은 구속되고 구원되는 바 이를 수단으로 인간은 심판된다는 말이다. 주님은 아직도 사람의 아들이지만 이 사람의 아들은 지금 신성화 된 사람의 아들이다. 그분은 영광에 싸여 오신다. 과거 첫 강림의 광경 같이 몇 사람의 시시한 제자들에 둘러 싸였던 대신 이제 그분은 거룩한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으시다. 이 천사들은 제자들과 전혀 다른 종족이 아니라 제자 자신들, 영화한 제자들이다. 모든 천사를 거느린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천국을 소유하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천사”란 천국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분은 천사들을 거느리실까? 천사들은 인간을 심판할 수 없고 인간을 심판하는 그분을 도울 수도 없다. 천사들을 거느려야 이 재판소가 장엄해지고 위엄이 있게 되는 것일까? 오히려 천사들 때문에 위엄이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함께 하면 심판 받는 자들 위에 내려 비칠 초월적인 영광에 그늘을 주는 역할을 해서 그 영광의 빛을 온건하게 해줄 것이다. 그분은 천국을 통해 오신다. 그분은 천국을 수그리게 하여 내려오시는데 이 모두는 천사적인 마음의 유한한 지각이 그분의 영광에 그늘지게 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분이 앉으시는 “영광의 왕좌”는 그분의 심판이 온건해지도록 의도되어있다. 그 이유가 천국이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와 같은 진리로 심판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들어가 살아야 할 왕국, 또는 자기들이 축출당해야 할 왕국의 법에 따라 심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2. 그분께서 영광의 옥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민족(nation)들이란 선 또는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 마치 백성(people)이 진리 또는 거짓 가운데 있는 이들을 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의 경우 민족들이란 선하든 악하든 심판 받아야 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여 암시하는 단어이다. 이들이 “그분 앞에 불려졌다.” 이는 육체적으로 모든 사람을 그분 앞에 가져다 놓는 자연적인 생각 차원보다 더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영적 차원의 생각이란, 그들의 상태가 그분의 용모의 빛으로 명백하게 만들어지도록 탐색하는 그분의 진리의 직접적인 점검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신성한 재판관의 첫 조치는 “서로를 갈라놓는” 것이다. 선한 자와 악한 자는 심판 때까지 뒤섞여 있다. 심판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그들을 두 개로 크게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 분리가 어떻게 결과 되어 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었다. 그 방법이란 그들의 내면의 품성들을 드러내 보여지게 하는 것이다. 각 개인들은 서로의 관심이 공통되는 한, 또는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문제로 하나 되어 있는 한, 공동 사회를 이루어 살 수 있다. 이들은 설사 종교적으로 불일치 되고 있다 해도 사업이나 쾌락을 얻는데 잘 조화를 이루어 행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영적 차원의 문제에서 계속 함께 할 수 없다 해도 세상적 차원의 문제에서는 잘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장 친한 자연적 친구여서 영원히 잘 지낸다 해도 각자의 마음이 다른 수준인 더 높은 계단에로 올리어지면 불일치 되거나 분리될 수 있다. 이런 경우가 심판에서의 경우이다. 그들의 내면, 영적 사항이 주재하는 곳, 영원한 관심사가 통치하는 내면이 열려질 때, 그래서 그들이 자연 도덕이 아닌 영적 존재들로 서로 모여질 때 그들의 필수적인 결과는 서로 서로 분리되는 것이다. 본문의 경우 주님께서 그들을 갈라놓는다고 말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신성한 진리가 그들의 내면이 보여지게 해서 분리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마치 목자가 양을 염소로부터 갈라놓듯 그들을 갈라놓으신다.” 여기서 주님은 목자이시고 그분의 백성은 양들이다. 그분의 백성에 관련하여 진열되는 그분의 품성이 사랑일 때 “목자”로 표현된다. 서로에 대해, 그분에 대해 사랑으로 이해될 때 “양”들이라 불리워진다. 양은 선행이라는 품위를 원리로 삼는 이들을 상징한다. 이와 반대되는 품성에 있는 이들이 염소로 불리우고 있다. 염소는 신앙 가운데 있는 이들의 타입(type)을 뜻하나 이 구절의 경우 염소는 선행(charity)이 없는 믿음 만에 있는 이들을 나타내고 있다. 염소는 교회의 창백함 내에 살았던 이들, 믿노라고 고백은 했지만 생명을 주는 선행(charity)이 없어 죽은 믿음만을 지녀왔던 이들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는 세상의 심판자로서 언제나 장착되어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구분되는 또 다른 인물이 아니다. 그 이유가 신약 성경에서의 예수는 구약 성경에서의 여호와와 같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는 온 땅의 심판자라고 선포되고 있다. 심판이라는 신성한 작업에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광을 또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구분해 볼 것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 아버지는 어떤 사람도 심판하지 않고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위임했다고, 그 이유가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이다. 아버지는 신성(Deity)의 요소 중에서 사랑이 원리로 작동될 때, 아들은 신성 중에서 지혜 또는 진리가 원리로 작동될 때라고 우리가 이해한다면 복음서에서 선포되는 의미, 즉 모든 심판은 신성한 선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결과 된다는 것이다. 신성한 선이 사람을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2장 16절에서 말해지는 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신다.” 참으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심판하신다 (사도행전 17:31). 이런 이유가 모든 심판은 말씀이 육을 만드심을 수단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속하셨다 (요한 1:10). 세상을 구원하고 정결하게 하심도 여기서 제외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보내기 때문이다. 신성한 선이 이루는 모든 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되어지고, 신성한 사랑이 이루는 모든 것은 지혜를 수단으로 된다는 것, 모두에는 똑같은 법이 작동할 뿐 또 무엇이 있을까?
33. 양과 염소라는 두 계층이 갈라서고 난 뒤 그들의 품성에 대한 더 결정적인 표시가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은 선과 진리를 표현한다. 심판자의 오른편에 있는 이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왼편에 있는 이들은 선이 없이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이다.
34. 이제 심판 자체에 관한 더 흥미있는 주제가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해둘 것은 주님이 자신을 두고 왕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왕이란 단어는 사람의 아들과 영적 차원에서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은 인간에 관련한 경우 사람의 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신성한 진리를 나타내준다. 왕의 품성은 그분이 앉으신다고 말해진 왕좌와 상응되고 있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란 그분의 사랑의 복을 받은 사람들, 자기 심정에 그분의 사랑이 내재하는 사람들, 그 사랑으로부터 결과 되는 축복을 향유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왕국을 상속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에 함축된 것은, 자기 심정에 하느님의 사랑을 내재하고 있는 이들은 그분의 나라 즉 하느님의 진리를 그들이 이해성에 상속되듯 받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그 진리의 정부가 그들 안에 건설된다는 것이다. 이 왕국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근접된 의미 측면에서 볼 경우 이는 “세상”이 의미한 것이 교회 인 바 교회 창설 때부터 준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님은 세상 창조 때부터 죽임을 당하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럴 경우 글자대로 직역하면 기독 교회의 창설 때부터 죽임을 당하셨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교회 자체의 창설 때부터 정의로운 자를 위해 개인적으로 준비되어져 있다. 그렇다고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이유가 우리 “안에서” 준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밖 어느 장소에 설비되는 것 보다 덜한 신성한 설비도 아니다. 그 이유가 그것은 우리 안의 생명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상속분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주님의 선물, 전적으로 그분이 일하신 덕분이다.
35, 36. 아버지의 복을 받았다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치하하시고 그들이 복 받는 이유,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된 배경을 보여주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꾸준히 만나는 선포는 육체 안에서 있어진 행위에 따라 심판된다는 것이다. 위 구절의 말씀, 심판의 진행이 묘사된 이 구절에서도 행해진 일밖에 더 다른 어떤 언급도 없다. 모여 있는 군중은 자기들이 믿었던 것에 따라서도 아니고 그들이 느꼈었던 것에 따라서도 아니고 오로지 그들이 했던 일에 따라 심판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신앙과 느낌이 제외된 것은 아니다. 신앙과 사랑 없이 선한 일이 있어질 수 없다. 진실로 선하다는 모든 일은 신앙과 사랑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한 대로 심판한다는 말은 그것을 생산하게 한 신앙과 사랑에 의해서도 동시에 심판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애착의 전체가 우리의 일 안에 집약되어 있다. 거기서 생각과 애착은 충만 되어 있다. 그것들은 지상에 살고 있었을 때 고정되어 우리의 항구적이고 개인적인 품성을 형성한다. 이런 품성의 가장 단순한 수용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한정된 조건에 관련하여 복된 자가 함유하는 선행(charity)의 일에 관해 아름답게 요약해 발표하시고 있다. 이 구절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고통과 슬픔에 있는 영혼을 보살피는 더 높은 선용에 관련된다 할지라도 더 큰 의미를 내세워 더 작다는 의미 내지 수준에 있는 선용을 묵살시켜도 된다고 상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다시 말해 육체 측면의 선행(charity)이 영혼 측면의 선행으로부터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영적 수준의 선행(charity)을 원리로 삼고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동료의 영적 궁핍만을 보살펴 줌으로 기독인의 사랑에 관한 전체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꿈꾸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동정심의 발휘를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에로 넓혀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지는 모든 재난을 줄여 가는데 필요한 사랑의 노동에서 우리의 할당분을 맡는 것은 우리에게 과해진 의무이다. 그러나 선행(charity)의 자연적 수준의 일까지도 유효하게 행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영적 수준의 선행(charity)이 무엇인지를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본문의 주님의 언어에 담긴 영적 의미를 살피면 알게 된다. 영적 의미에서 굶주림이란 애정으로부터 선을 바래는 이들, 목마름이란 진리를 바라는 이들, 나그네가 된 자란 지식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나그네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타국으로부터 왔던 이들이다. 헐벗었음이란 자기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정의의 옷으로 입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병들었음이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병든 상태임을 느낄 수 있어 마음과 영혼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갇혔음이란 죄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 또는 시련과 시험으로 고통 받고 있어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를 자기 삶으로 체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살피는 것이 영적 차원의 선행(charity)의 일이다.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의지가 선과 더불어, 이해성이 진리와 더불어 어느 정도라도 만족하는 바람을 성취하는 것, 무지한 상태에 지식을 주는 것, 정의의 길을 벗어난 상태가 정의의 길로 인도되는 것, 병든 애착이 치료받는 것, 갇힌 상태의 생각들이 자유를 얻는 것, 이런 등등의 일들은 마치 영혼이 육체보다 더 중요하듯 자연적 수준의 선행(charity)의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선행(charity)을 타인에게 수행해 보기 위해 독자적으로 그것을 실시하는 데는 반드시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 위와 같은 상황에 대해 빚지고 있는 바 위 주님의 말씀에는 이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의무까지 동등하게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위 단어를 추상적 의미로 살필 경우 개인적으로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각해야 한다. 그 이유가 배고픈 자가 선을 갈망하는 사람인 한편 배고품은 선을 바람 그 자체이기 때문이고, 목마름은 진리의 바람이고, 나그네 됨은 가르침을 바람이고, 헐벗고 병듦은 우리 스스로서는 선이나 진리를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함이고, 갇혀 있음은 우리가 거짓에 온전히 소유당해 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경우이든 우리 이웃의 경우이든 위 주님의 말씀에 담긴 아름다움과 힘(force)을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을 때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다. 영적 궁핍을 우리가 느끼는 것, 그 궁핍을 채우려는 우리의 바람은 주님으로부터 있어지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것에서 그분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또는 이웃의 영적 궁핍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주님 자신에게 행해지는 선행(charity)의 행동이다. 주님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 우리의 이웃이다. 그분은 모든 영적 형제애의 근원이시다. 인간은 자기 안에 그분이 내재하는 한 우리의 이웃이요 형제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인간이라는 개체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이다. 이 말은 마치 선한 자만이 우리의 이웃이어서 그들만을 사랑하고 보살펴야 하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우리는 악한 자를 사랑하되 악 때문이 아니라 선을 받을 수 있는 능력 때문이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선행은 그들이 악으로부터 선 쪽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선이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의 행동들이 우리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천국적 특질을 강화시키려는 쪽에 있는 만큼에서 우리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있게 된다. 이런 특질, 이런 품위가 우리 자신과 타인 안에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갇혀 있는 한 그 필요의 충족을 보살피는 것이 기독교적 선행(charity)의 의무이다. 배고픔에 양식을 공급하고, 보호를 위해 옷을 입히고, 치료를 위해 약을 공급하고, 시험당할 때에 위로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런 행동들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양들이라고 주님께서 말하신 선행(charity)의 행위들이다.
37-39.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자기 탓으로 삼을 만한 공적을 의로운 자가 부인하는 이 구절은 참된 정의로움에는 공적에 관한 어떤 생각도 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의도되어있다. 선한 자는 일의 위대함, 중요성, 그 가치 등등을 생각하지 않는다. 선한 자의 관심은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 뿐이다. 이들은 주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선을 행한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선함을 위해 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선이 그분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선을 행하면 그분을 더 부자 되게 하고 그분의 영광이 더 큰 영광이 되게 하는 듯이 그분에게 선을 행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언제 저희가 주님께서 궁핍 하신 것을 보고 그것을 채워드렸습니까?”
40. 자기들이 행했던 선의 공적을 부인하지만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얼마나 이 안에 자비로운 겸비가 있는지! 그분의 창조물을 두고 형제로 부르신 것이 얼마나 한 사랑인가! 그분이 연약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셨다는 것, 그분께서는 굶주리시기도, 목마르시기도, 모든 인간 고통의 극치를 견뎌 내시기도 하셨던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제 신성화 하신 가운데 계신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분의 형제가 궁핍하다고, 고통 받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주목해볼 것은 주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을 두고 그분이 신성화 하실 때까지 형제라고 직접적으로는 결코 부르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분이 부활하신 뒤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가서 그분께서 그분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승강했노라고 말하라고 이르셨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주님은 부활하시기 전보다 그 이후 더 진실로 충만 된 사람이셨기 때문이다. 제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 충분히 거듭나아 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신성화 하시고 제자들이 거듭나게 되면 신성화 하시지 않고 거듭나지 않았을 때의 서로의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에 있을 수 있다. 이 구절의 주님의 언어에는 이보다 더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신성화 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께서 그분의 형제로 인정하는 진실 된 형제가 되어진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이다”라고 그분께서 말하셨을 때 위 설명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심판에서 인식된 형제는 모두 가난하고 궁핍하다. 선행(charity)의 이런 대상은 그들을 형제로 만드는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선한 노동은 주님의 인물 안에 있는 선함 자체가 견뎌낸 궁핍함이나 고통 밑에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다음 주님께로 되돌아가서 더 강화되고 더 자유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진짜 선행(charity)의 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막연히 그분의 형제라고 말하신 게 아니라 형제 중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하신다. 그 이유가 진짜 선함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유한 사람은 자기 안에 거듭남의 바탕, 선함을 저장할 수용력, 구원될 바탕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선행(charity)의 실시를 더 넓히면 우리에게 지극히 작더라도 진짜 선함을 우리에게 열리게 하는 바, 새로운 영적 영향 하에 행동하는 기독교적 박애 정신으로 꾸준히 선행(charity)을 실행해가야 하리라고 말한다면 그 보다 더 값진 게 있을까? 그분 자신이 기독교 선행(charity)을 실시할 대상 중의 하나라고 선포하셨는 바 주님께서는 기독교 선행(charity)의 행동 중에 가장 비천한 직책에 어떤 품위를 새겨 주실까?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는 왕 중의 왕 되시는 분이 그분의 형제라고 부르시기 위해 겸비하게 말씀하셨는 바 우리의 선행(charity)을 위해 어떤 대상을 뜻하셨을까?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충심으로 부르는 사람이 아니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의 거리를 거닐고 계신다면 그분께서 영예로 생각하는 선행, 그분의 머리마저 기댈 곳조차 지니지 않아 슬픈 사람의 필요를 보살피는 것이 복되다고 느끼는 것이 선행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는 슬퍼하는 인간성, 괴로워하는 인간성, 덕이 높은 고통자 안에서 그분을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진짜 선을 베풀 수 있는 형편인데도 이를 보류한다면 신성한 사람은 우리 가운데서 걸으시되 아직 인정하지 못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맴돌고 있으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증하여 알고 있어야 한다. 선이 우리의 대상이어야 한다. 마치 주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같이 말이다. 우리는 그분을 영적으로 모방할 뿐 아니라 자연적으로 모방해서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헐벗은 자는 입히고, 무지한 자는 가르치고, 병들고 갇힌 자를 방문해야 하리라. 그래서 이런 기쁨의 인사를 받아야 한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41-45. 주님의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발표되는 말씀은 오른 편과 얼마나 대조적인지!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었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 구절은 세부 사항을 굳이 살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앞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의 경우에 칭찬된 사항과 단순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염소가 꾸지람을 받고 있는 것은 그가 악을 행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소 부류의 사람들은 도덕적 삶은 잘 해왔지만 영적 삶을 잘 해온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영성이 없는 도덕성은 천국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영성의 결핍, 이에 대한 주님의 위 구절의 언급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형식이 암시해 주고 있다. “내”가 주렸을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을 잘 보살펴(minister) 주었을는지 몰라도 그 인간 안에 있는 주님을 잘 섬기지(minister) 못했다.
위 주님의 발표하시는 태도가 더 심각한 듯 여겨진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바, 신성한 심판들은 인간의 상태를 밝히 알게 하는 것, 그 상태의 결과를 밝히 알려주는 것 뿐이라는 점이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발표한 저주(curse)는 그분으로부터 진행된 저주(anathema)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부패함에서 발생하는 황폐함(blight)이다. 신성한 진리인 그분의 말씀은 감추어 있어오던 것을 드러내 있게 하고 모든 것을 명백하게 만드신다. “나로부터 떠나라”는 문장 역시 결과에 관한 발표일 뿐이고 그 결과의 원인은 이미 사악한 자 자신 안에 있어 왔었다. 영혼의 상태가 생명의 중심으로부터 가까웁느냐 멀어지느냐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각자의 상태에 따라 의로운 자는 주님께 나아 오게 되고 불의한 자는 그분으로부터 떠나간다. 떠나간 그들이 영원한 불 쪽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지녔던 불태울 뿐인 사랑들, 욕망, 미움, 복수, 불결한 모든 것의 사랑 안에 침몰되는 것일 뿐이다. 이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악마란 악 가운데 자신을 고정시킨 이들에 대한 또 하나의 이름이다. 그의 졸도들이란 악마로부터 진행되어 나오는 원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악마는 지옥을 인격화 해서 부른 것이다. 마치 이 악마가 거주하는 영원한 불이 타락한 인간 영혼의 요소와 고뇌인 악한 사랑의 모양새인 것과 같다.
46. 정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반대되는 결과, 영성과 세속성의 반대되는 국면이 결말로서 우리 앞에 장착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처벌과 그 처벌에는 끝이 없음이 영원한 생명에 반대되어 여기에 놓여 있다. 둘 다 성서의 교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둘 다 변할 수 없는 법, 이 세상의 삶에서 확증되어 왔던 상태들은 영원히 바뀔 수 없이 남아있다는 법칙의 결과라는 것도 의심할 바 하나도 없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처벌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가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도 악한 존재라는 그들 자신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처벌로부터 구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아픔이 타오르는 것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보다 더 저 세상의 고뇌는 악한 자에게서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만큼이나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와 반대로 거룩함과 행복함은 하나 되어 있다. 단어 “생명”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한 것이다. 근원적인 상태에서의 생명(life)이란 마음과 몸의 모든 힘이 건전한 상태로부터 발생하는 순수한 즐거움의 느낌이다.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은 영계에서 살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것들이요 이것이 우리 안에 있었어야 한다. 이것이 천국인 반면 그 반대는 지옥이다. 선택이 우리의 손아귀에 있는 동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참된 선행(charity)의 일을 했었던 사람은 복 있다. 우리가 즐거움으로 단을 거두겠다면 우리는 여기서 정의의 농사를 지었어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우리가 그분의 오른편에 서도록 이미 허가해주시고 있다. 그쪽에서 기쁨의 이 답례를 받게 해주시고 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마태복음 24장 해석

24

1.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표현했던 교회 속의 끔찍한 부패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 전달하신 뒤,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얼마쯤 걸어 가셨을 때…” 이는 주님의 마지막 성전 방문, 성전에서의 마지막 떠나심이다. 이 짧은 주님의 행동, “성전을 나오시어 떠나셨다”는 말에 담긴 것은 얼마나 엄숙하고 의미심장한지! 이는 유대인의 집이 황폐된 채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주는 표시이다. 그분은 유대인들의 집의 영광이 되어 계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성전을 떠나심은 과거 이스라엘 군대가 하느님의 궤를 빼앗겼을 당시 “이가봇, 영광은 떠났다” (사무엘상 4:21)라는 상황과 똑같게 되었다. 위 행동이 상징하는 것, 이 행동에 이어지는 예언적 강연은 유대 교회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첫 강림으로 시작되는 교회, 즉 기독교회의 상태까지 묘사하고 있다. 종교의 본질되는 원리를 구성하는 교회 자체는 이 처방이 사라지고 저 처방이 도래해도 결코 죽지 않는다. 기독교회는 영구히 계속될 것이나 유대 교회가 사라져버린 뒤 형성된 그 처방은 종말을 맞게 되고 또 다른 처방이 그 교회를 계승하게 된다. 육으로 오시는 첫 강림을 계승한 것이 영으로 오시는 둘째 강림이다. 참으로 타당한 일은 기독 교회가 한 개의 처방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때로부터 교회와 인류의 진보는 위쪽을 향해가고 있다. 인류 타락으로부터 육을 입으심에 이르기까지에서 교회와 세상은 치료약의 투여를 더 이상 지연할 수 없는 지독하게 부패되는 지경까지 점차 하강되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바 교회는 구분되는 여러 수준으로 기울어 졌다는 것이다. 그중 첫 처방은 아담으로 불리고 아담으로 개시되고 있다. 둘째 처방은 노아로, 셋째 처방은 이스라엘로 불린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는 진짜 교회라기보다는 교회를 표현하는 수준, 껍데기에 가까운 교회로서 장차 오게 될 교회의 그림자였다. 이 교회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척한 채 생각하면 그 교회에는 교회의 진짜 품성을 소유하는 두 개의 처방들이 있었다. 만일 이 교회가 두 개의 구분된 처방에 의해 내려왔다면 승강하는 것도 두 개의 처방으로 있어져야 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타당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현 경우일는지 모른다. 신약 성경은 주님의 첫 오심을 기록하는 한편 두 번째 오심을 약속해놓고 있다. 교회나 인간성의 진보는 어떤 의미에서 순진과 지혜에서 이탈된 상태에서 원 위치로의 귀환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도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드리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는 교회와 인간의 드높은 상태를 표시함으로 시작했던 때와 같이 끝나고 있다. 이와 꼭 같은 모양새를 수단으로 계시록의 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있다. 이 새 땅에 생명수의 강을 지닌 파라다이스가 있고 거기에서 생명 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 낙원에는 다른 점이 있지만 바뀌어진 상태와 인간의 조건에서는 모순된 게 없다. 둘째 에덴은 동산과 도성을 하나 되게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지혜에 과학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 나무는 먹기에 좋은 과일만을 맺는 게 아니라 치료하기에 좋은 잎까지 생산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이제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치료로 회복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세상의 종말과 동일시하는 게 보통의 생각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성경의 의미를 잘못 납득한 결과일 뿐이다. 성경이 예견하는 종말이란 교회의 종말이다. 이에 관한 지식은 기독 교회의 첫 처방에 속한 멤버들에게는 섭리적으로 감추여 있었으나 이제 사건 그 자체가 종말을 밝히 알게 하기 때문에 이제는 알려지고 있다. 이런 기독 교회에 관한 처방을 참고할 때 우리는 종말에 관한 경이로운 예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처방 중 하나는 교회의 하강과 그 끝장을 취급하고 처방 중 다른 하나는 교회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다. 그래서 이 처방들은 가장 깊은 흥미와 가장 위대한 중요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문제들을 직바르게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자비의 도구로 땅 위 그분의 교회에 관련하여 주님의 섭리적 역사로 있는 왕국의 가장 깊은 신비들 중 얼마큼은 볼 수 있으리라.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얼마큼 가셨을 때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와서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며 보시라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성전에 관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 있어진 것은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교회를 면밀히 조사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면밀한 조사는 심판에 앞서 실시된다. 주님께서 교회를 떠나실 경우, 이는 그분이 그 안에 더 이상 거하실 수 없을 만큼 성소가 모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이런 교회에 되돌아오실 경우 이는 심판자로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진리를 완벽하게 거절할 때 진리는 심판관으로서밖에 더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의 오심의 크나큰 목적이 구원함에 있지만 오신 이유의 둘째가는 목적은 심판을 위한 것이다 (요한 9:39).
2. 제자들이 그분께 성전 건물을 보라고 하시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거룩한 구조물의 운명을 말하신다. “저 모든 건물들을 잘 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기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 얼마나 엄숙하고 장엄한 표현인지! 자연적 사실보다 영적 사실이 더 강하게 담겨 있다. 성전의 돌들이란 교회를 구성하는 진리들, 집합적으로 볼 때 종교적 교리 체계를 건설하는 진리들을 상징한다. 교묘하게도 본문의 성전은 인간 지혜로 골격을 짠 교리적 진리 체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니라 헤로데가 지은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성전은 하나 된 상태의 교회의 원리, 유대 성직자들이 공들인 상태로서의 하나 된 교회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헤로데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달리 천국에서 파생된 형체,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 같은 것을 더 이상 표현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성전이 거기서 완전한 듯, 견고한 듯 서있다. 그러나 그분의 손이 그 성전을 만질 때 인간 창조의 것들은 그 창조 본래의 것들로 환원된다. 그 성전의 돌들은 무너져 내려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흩어짐의 결과란, 비록 교회의 요소는 보존된다 해도 교회의 통일성은 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 시대에서도 발견된다. 기독교 성소가 황량한 가운데에 낱개로 많은 진리들이 보존되고 더 이상 전체를 형성한 통일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사이의 연결은 깨어져있고 진리 사이의 묶음(unity)은 파괴되어져 있다. 우리는 수많은 세부적 진리들을 볼 수 있고 또한 각 진리에 감복할는지 모르나 진리들의 병합된 상태, 병합된 진리가 창출하는 아름다움, 기도의 집, 하느님이 그분의 이름을 새긴 장소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즉 돌들의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않고 다 무너져 내렸다.
3. 성전의 운명에 관한 위와 같은 일반적 선포 후에 주님께서는 “올리브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성전이 파괴된다는 일반적 모형과 연결되는 사건들의 시리즈를 상세하게 밝히 알려 주셨다. 성전이 파괴됨에 관한 첫 예견은 제자들에게 발표되었다. 이 산에서의 그분의 강연은 몇 사람의 귀에만 말하셨던 것같이 나타나고 있다. 마가(13:3)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아만이 들었던 것으로 여겨지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의 높은 품위를 표현하는 바 이는 그런 품위를 지닌 자들만이 왕국의 더 깊은 신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들만이 일반적인 납득에 와닿는 진리 속의 세부사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올리브산에 앉으셨다. 산 자체는 사랑이라는 원리를 뜻한다. 올리브는 천적 수준의 원리를 의미하는 바 올리브산이란 천적 수준의 사랑, 즉 모든 사랑 중 가장 천국적인 사랑, 즉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올리브산에 앉으신 예수와 관련되므로 본문의 경우 신성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그 산에 앉으셔서 “말씀하시는” 바 이로부터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의 가장 깊은 속으로부터 근원된 신성한 지혜의 가장 높은 진리들을 말하시는 주님에 관한 표현을 가지게 된다. 주님의 말씀이 이런 수준인 바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리라. 참으로 모든 미래를 보시는 분, 보시는 모든 미래를 슬기있고 복된 섭리로 다루시는 그분인지라 그분의 사랑과 지혜는 모두 무한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그분께 개인적으로 왔다.” 그래서 그분도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말하시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베일 안에 그분과 함께 들어가 탄식과 슬픔, 비통이 씌어 있는 책을 열어 보는 특전이 주어지고 있다. 주님께서 예견하신 성전이 파괴됨에 관한 일반적 취지를 알아챈 제자들이 그분께 묻는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제자들은 이 주제를 이해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일의 때와 징조만을 묻고 있다. 시간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시간은 영적으로 서술될 수 없고 자연적인 것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세상과 육체에 관련되듯 상태는 교회와 영혼에 관련된다. 교회의 품성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상태에 관한 지식들이다. 제자들이 알려고 물은 것은 주님이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의 징조에 관해서였다. 무엇이 이런 징조일까?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 안에 진열되어있다. 그리고 영적 진리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자연계의 상징적 언어 안에서 밝히 알려진다. 그러므로 상응(correspondence)은 “주님의 오심에 관한 징조”이다. 누가(21:11)가 그런 것들을 이름 짓듯이 상응은 하늘로부터 오는 징조이다. 그 이유가 상응은 천국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징조들이 해로, 달로, 별로 말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교회를 통치하는 원리인 사랑, 믿음, 지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표를 하는 상태들이 징조로, 계절, 날들로, 햇수들로 지적되고 있다. 징조에 해당되는 상응을 수단으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본성을 알 수 있다. 말씀의 올바른 해석의 수단이 되는 상응을 수단으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이 개인적 차원의 오심이 아니라, 진리 자체되신 그분을 밝히 알리고 인간의 심정과 지성이 진리 자체로서의 그분을 지각하고 영접하는 그분의 오심, 한마디로 영 안에 오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똑같은 수단으로 더 배우는 바, 그분의 오심은 세상의 종말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의 종말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 구절의 “세상”은 지구라는 물질적 구조를 뜻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 시대, 은 시대와 비슷한 것, 세상의 역사 안에 있는 어떤 시대, 시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끝남”이란 직역하면 시대 또는 종교적 처방의 시효가 종료됨을 뜻한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세상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 지니는 진정한 의미이다. 히브리 9장 26절을 읽어보자.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번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죄를 치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절을 더 읽어보자.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해석 차원이 아닌 번역 차원에서 의문이 있다. 주님이 오셨던 때의 종말은 유대 교회 시대 또는 유대 교회 처방이라는 것의 종말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해줄 뿐 이 문단도 물질적인 세상의 종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사도들이 살았던 시기는 그들에게 닥쳐온 시대의 종말이었다. 주님의 재림에 관련된 종말도 초림 때와 같은 종류이다. 이것을 묘사한 언어 역시 똑같다. 재림 때와 초림 때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준다고 말을 한다면 어떤 합당한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그분의 초림으로 마침표를 찍은 종말이 교회의 종말이었다면 그분의 재림으로 마침표를 찍는 종말 역시 교회의 종말일 것이 틀림없다. 자신이 소속된 교회의 처방이 종말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교인된 당사자로서는 너무 힘든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자기들 교회에 대한 하늘의 처방이 종료되었다거나 종료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첫 기독교회라는 처방이 종말을 가진다는 사실은 번역 차원이 아닌 일관된 해석 차원의 단순한 바탕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두 번째 오시겠다고 약속했다. 이 오심은 시대의 종말을 수반하여야 한다. 이 종말은 그분의 첫 오심의 시기, 시대의 종말밖에 더 다른 어떤 것이 있어질 수 있을까? 첫 시대의 종말과 두 번째 시대의 시작은 첫 강림의 처방이 끝을 맺고 둘째 강림의 처방이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종말과 시작이 다른 “징조들” 또는 형상들로 묘사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해,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것 대신 창조되는 등등으로 서술되고 있다. 따라서 하늘의 발광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교회의 빛, 즉 교회를 계발하고 지탱시키는 수단인 사랑과 믿음, 지식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재창조된다는 표현은 속박 안 된 이성과 상식만이 해석을 줄는지 모른다. 어떤 지혜가 이 땅을 파괴하고 또 다른 땅을 창조할 수 있을까? 물질적인 땅은 그 자체를 없애고 다른 땅이 요구될 만큼 책임도 없고 부적합했던 적도 없다. 그러나 도덕적 세계, 오히려 도덕적, 종교적 시대가 책임이 있어 또 다른 더 나은 것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옷처럼 옛 것을 입힐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교회, 결코 죽지 않는 몸이 요구하는 사항에 적합한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할는지 모른다. “정의로운 사람이 거주하는 새 땅”의 약속이 이와 같은 것이리라.
4. 세상 끝날 때와 주님께서 오실 때에 관한 제자들의 문의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 조심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에 관한 문제들에 흥미를 갖는데 대단히 필요한 사항이다. 최소한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나라에 관련된 것들 만큼에 극히 필요한 것이 “조심”이다. 더 좁혀 생각하면 그분의 처음 오심보다 두 번째 오심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더 더욱 “조심하여라”일 것이다. 제자란 교회의 선과 진리를 원리로 삼는 이들을 말한다. 추상적 의미에서 제자란 그 원리 자체이다.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시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선포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가능만 하면 뽑힌 자를 현혹하려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 자체가 교묘히 설명되어 인간이 사랑하고 실제에 잘 사용할 수 있는 쪽으로 가면서 진리의 품질과 능력은 잃어버리어 실지로 거짓이 되고 만다.
5. 사기꾼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의 품성을 기술하신다.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제2세기쯤에 어떤 자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등장하긴 했지만 이는 위 구절의 “많다”에 해당되지 않는다. 어찌됐든 그런 것은 주님이 의미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의 이름”은 그분이 경배되는 수단을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그분의 품성, 예수는 신성한 선으로서의 그분의 품성을 표현한다. 거짓 그리스도란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교리, 진리로 외관을 씌운 거짓들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는 왜곡된 모든 체계가 거짓 그리스도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는 그리스도는 그 안에 신성한 모든 것, 구원해 주는 모든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순수함과 완전함 자체이다. 거짓 그리스도는 진리의 왜곡, 기독교 신앙 속의 원리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에서 복되게 하는 품성과 구원하는 능력을 박탈한다. 이런 거짓 그리스도일 경우 이는 세상에 널리 있어왔고, 널려 있다는 것은 재삼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 거짓이고 사기이다. 그리스도가 죄인의 구원을 위해 가르친 위대한 진리들을 빼내고 흥미위주의 인간 사상으로 대신 채운 교리들, 왜곡된 기독교 신앙 형체들이 많은 사람을 현혹한다. 그 이유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교리에 물들어 버렸고 지금도 계속 그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기독 신앙의 부패한 것들, 특히 그리스도의 품성 측면에서 썩어진 것들이 기독교회 안으로 일찍이 도입되어졌다. 하느님의 머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그리스도에 하향 등급을 매겨 그분을 수단으로 하는 구원의 교리는 부패에 비례해 고통 받았다. 다음 절에서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이 그 결과이다.
6.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물질계가 아닌 교회에 관한 것인 바 이는 지상의 나라들 사이에 있게 되는 정치적 전쟁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멤버와 당파들에 관한 영적 전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으로 자연적인 전쟁들도 영적 불일치로 야기되기도 하지만 성경의 영적 의미와 관계되는 전쟁은 어디까지나 자연적 전쟁과는 별도로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회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은 견해의 전쟁이었고 그 뒤 고난의 전쟁이 왔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하시는 “전쟁과 전쟁 소문”이다. 교회의 초기 시대 역사에 친숙한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분쟁과 싸움이 심화될 때 그에 따른 폭력과 비참함에 놀라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교회 내 단순하고 신실한 사람들은 이런 참담한 싸움에 충격 받고 썸뜩해 하며 상상하기를, 이런 뒤집힘과 찢어짐은 주님께서 예견하신 마지막 종말의 징조일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께서 말하신 종말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파별로 찢겨 가는 것을 보게 되어 신실한 사람이 지닌 기독 신앙의 진리 안의 신앙이 파괴되거나 미혹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말아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야 말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말하신 것은 이런 사건을 당황하지 말고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훈계하신 이유는 당황하게 하는 시기의 첫 암시는 진리가 가르치는 것들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견해와 느낌이 발생함으로 해서 진리에 관한 토론과 논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선과 진리에 대해 심각히 반대되거나 위험스러운 수준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교회가 기울기 시작할 때 “이런 일이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다른 견해들이 있다 해서 진리를 파괴하는 도덕적 종말이나 교회의 종말은 아니라는 말이다.
7. 더 심각한 재난이 위 사건으로부터, 위 사건에 이어 발생한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염병과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의 영적 의미에서 민족(nation)이란 악을 사랑하는 사람, 추상적으로는 사랑의 대상인 악 자체를 뜻한다. 나라(kingdom, people)란 오류나 거짓을 신봉하는 사람들, 추상적으로는 믿게 되는 오류 또는 거짓을 뜻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종교의 교리에 관한 단순한 견해의 전쟁, 그것 때문에 한탄하는 것만 아니라 선에 악이 대들고, 이런 악이 저런 악을 향해 싸우고, 거짓이 진리를 향해서, 거짓이 거짓과 다투게 되는 현실을 말한다. 여기에는 종교와 교회를 구성하는 선과 진리의 원리에 관해 논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기독 원리를 어느 정도까지는 거절해버리고 그에 비례해서 악과 오류로 대신 채워 넣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싸움의 필수되는 결과가 기근과 염병, 지진이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해지는 상황이 기근으로, 악과 거짓이 떼지어 몰려드는 상황이 염병(pestilence)으로, 교회의 상태가 변하여 정반대가 되는 상황이 지진으로 각각 의미되고 있다. 도처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런 모습이 교회 내 여러 가지 부분들에 존재한다는 것, 비록 전체는 아닐지언정 부분적 변화가 교회 상태에서 거행된다는 말이다.
8. “이런 일들은 다만 슬픔의 시작일 뿐이다.” 위의 사항들은 뒤집힌 교회의 첫 번째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선하고 참된 것을 더 이상 알려하지 않고 선하고 참된 것을 두고 서로 논쟁하고, 이 논쟁으로부터 교리 속에 오류를, 생활 속에 악이 자리잡게 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이런 상황은 교회의 슬픔, 종교의 슬픔, 영혼의 슬픔의 시작일 뿐이다. 슬픔이 모시고 다니는 것이 죄이다. 이 죄는 정의이건 진리이건 어느 하나에 반대되어 있다. 교회의 슬픔을 더 서술해보면 종교적 부패의 진행과 그 첫 단계를 더 알 수 있다. 맨 먼저 사람들은 선과 진리에 관해 토론하면서 어떤 왜곡된 원리를 채택하고 그것 가지고 경합을 벌린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진리를 무기력하게 해서 자기들 원리와 실제를 좋아하는 쪽으로 진리를 구부리기 위해 선과 진리를 뒤집는다. 전쟁으로 의미된 이런 종교적 토론 내지 논쟁은 기독교회 초기에 일어나고 그에 따라 크나큰 쓰라림과 표독스러움이 노출된다. 이는 역사가 풍부히 증거해 주고 있다. 빵이나 물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기근”이 오는 것은 실패할 수 없다. 그 결과 치료 불가능한 마음의 병이 번져버린다. 그리하여 견해와 원리 모두에서 격동과 혁명이 뒤따른다.
9. 교회 하강의 둘째 상태와 그 슬픔이 묘사되고 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에 처하게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제자란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천국 원리인 선함과 진리가 인간의 논쟁과 말다툼 때문에 그 원리의 지각이 흐릿해져 처하게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에 고통을 가하고 죽이고 미워하는 것은 제자들로 표현된 영적 원리가 뒤집히고 부정 당하고 업신여겨지는 것을 뜻한다. 민족(nation)이란 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영적 원리를 미워하고 이 미워함이 세력을 가지어 교회 내에서도 이런 반감이 우세해진다는 말이다.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민족들에게 미움을 당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살 것이라고 말하시고 있다. 선함과 진리를 미워하는 교회 내의 사람들은 교회 원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종교적 원리이기에, 그분이 요구하는 예배와 순종을 통해 그분께로 인도하려 하기에 미워한다. 참으로 선함과 진리를 미워하는 모든 미움은 선함 자체요 진리 자체, 말씀과 교회에 있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미워함에 근본을 두고 있다.
10. 더 말씀하신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미움 받고 박해받는 결과이다. 만일 말씀이 밝히 알려주는 바와 같이, 주님에 관련되는 바와 같은 선함과 진리의 원리가 박해받는다면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 비틀거릴 것은 틀림없다. 제자들, 또는 말씀 속의 진리는 교인의 선생이요 안내자이다. 이런 도움이 교인에게서 박탈될 때 교인들은 돌에 걸려 넘어지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말씀은 우리 발에 등불이요 우리 길에 빛이다. 말씀의 가르침이 갖가지 오류로 희미해질 때 교인들은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죄짓도록 유인될 뿐만 아니라 죄짓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배반하고 미워한다.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이 참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의 결과요 동시에 그런 종교로 직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의 결과이듯, 상호간의 미움은 오류의 열매 중 하나요, 그 오류가 원인되어 넘어지고 만다.
11. 배반과 미워함에 따라 붙는 게 거짓과 사기이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가 여기 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자란 설교자, 추상적으로는 가르쳐지는 교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자란 거짓 선생, 거짓 원리들을 뜻한다. 진리이신 주님이 실지로 부정되고 그 대신 거짓 그리스도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 각종 오류가 번성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주님의 신성을 진정으로 인정하려면 그분의 인성이 신성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부정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라는 인물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성한 인물로 간주되던가 아니면 유한한 존재로 전락되고 만다. 이와 같은 거짓 추구가 인간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둔 진정한 믿음, 정의로운 생활로부터 부추겨 이간질하는데 실패할 리 만무하다.
12.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오류가 증가하는데 악의 증가가 없을 리 만무하다. 악이 팽배하면 사랑은 차디 참으로 입혀지고 만다. 여기서 말해지는 사랑이란 선행,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오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은 행위 없이 믿음만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갈 때 덕행은 빛을 잃어가고 그 결과 선행은 차디찬 것으로 입혀지고 만다. 참된 신앙이 없으면 진짜 선행도 있을 수 없다. 순수하게 영적 의미에서 이는 많은 진리들이 사랑 또는 선행(charity)이 결여된다는 것, 고로 생명 있게 하는 모든 것이 결여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럴 경우가 닥치면 심정에 선행(charity)이 없고, 이해성에는 신앙이 없게 된다. 주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근원이고 생활의 거룩함은 위 두 사랑의 반석이다.
13. 썩은 것이 좋은 것으로 팽배된 추세를 피하고 실용적인 종교의 삶을 끌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주님께서 격려의 말씀이 있는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고뇌의 끝장은 교인 개개인의 체험에서 응용될 수 있는 고뇌여야 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 진리가 뒤집히는 것을 보는 이들은 그 뒤집힘에 동의하지 않고 더구나 그 왜곡된 교리가 악한 생활을 부추김으로 해서 고통 받는다. 마치 인간이 주변의 우세한 어떤 신조 같은 것에 동조하지 않음으로 고통 받는 것과 같다. 부패 속에서도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부패에 맞서 투쟁해야만 한다. 인내는 선처하는 행동에 필수이다. 시험의 와중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인내이다. 시련은 약속 안에 당연히 수반되는 과정이다. 곤경의 때에 하느님에 대한 의무, 충실함에 실패하는 것은 가능성이 다분할 뿐 아니라 걱정되는 사항이기도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영향력이나 본보기를 지니고 있어도 쉽게 낙망하는 바 신앙과 덕행의 약점들이 우리 주위를 싸돌고 있는 바 얼마나 더 빨리 쉽사리 자빠지고 마는가?
14. 앞에서 주님이 지적했던 것과 매우 다른 종류가 이제 발표되고 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만일 이런 말들이 지독한 파괴와 그 결과 교회의 끝, 다음 절에서 언급하듯 황폐의 흉측함 같은 시대에 적용한다면 맨 먼저 인정되는 시대로 로마 제국의 콘트탄틴 대제, 제3세기 초를 신약 성경이 지목한다고 생각해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끝, end” 그리고 “마지막 날, the last days”은 종종 시간의 긴 간격을 명시한다. 교회의 역사 중 끝의 시작을 형성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완성을 형성한 또 다른 시대도 있었다. 끝의 시작은 콘스탄틴의 통치에 소속되고 있다. 그의 권력과 영향을 수단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인 기독 종교가 로마 세계에 두루 전파되었다. 그리고 끝의 완성은 우리들 시대,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시대, 수많은 선교나 성경 학회를 통해 성경의 글자가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고 생각되는 시대일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 일컬어진 “끝의 때,” “마지막 날”은 로마제국을 통한 이름뿐인 기독 종교의 고백이 정착됨으로 표를 한 것, 그것의 종교는 성경의 실질적 팽창,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같이 복음이 전파된 상태로 점철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정도의 대단히 간략한 역사의 증거만 가지고도 대단히 놀랄만한 징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두 번째 오심, 영적인 나타남을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들, 즉 로마 제국에서의 기독교의 건설과 지구 전체에 성경이 퍼져감이 끝 날의 징조이되 세상 끝 날이 아닌 교회 끝 날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첫 사건의 경우 진실 된 것은 더욱 없다. 콘스탄틴 대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자마자 아리우스의 파괴적 교리를 정죄하기 위해 318명의 감독들이 니가야에서 대 회의를 개최했다. 이 때 아리안 이교도가 완전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교리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주도하는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세 가지 따로 따로의 인물이라는 신에 관한 논리를 고안하였다. 이런 관념은 신들의 3인조(a trinity of gods)라는 생각과 구별되어질 수 없다.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로 굳힌 이 끔찍한 곡해가 다음 절에서 언급되듯 거룩한 곳에 선 흉측한 우상인 것이다.
15.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 들어라).” 성경의 언어에서 거룩한 곳이란 성전의 안쪽 부분, 신성한 현존이 직접 앉는 곳으로 생각되는 장소를 뜻한다. 물론 이것 역시 기독 교리 내지 예배의 가장 거룩한 부분을 표현적으로 의미한다. 거룩한 장소에 흉측한 우상이 선다는 것, 또는 황폐해지게 만드는 혐오하는 것이 선다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순수한 것을 파괴하는 어떤 원리가 도입된다는 것 외에 더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교회의 가장 깊은 교리, 교회의 거룩한 장소를 차지하는 것은 그 교회의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다. 이 거룩한 장소에 역겨운 것이 서 있는다는 것은 참된 것 대신 하느님에 관한 왜곡된 관념이 중심 교리에 도입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것과 걸맞는 것을 역사에서 발견하고 현재에도 보고 있다. 이것은 신성한 본성이 세 개의 분리된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기독교회 안에 도입되었을 때 있어진 것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지도자급에 의해 정통 교리라고 포고되었다. 이것은 니가야 회의에서 처음 결과 되었는데 이 회의 이전에는 이런 교리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환영했던 교리였을 뿐이었다. 그 뒤 이것이 교회의 믿을만한 교리라고 선포되면서 지금까지 세력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이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인 바 좀 더 살피는게 상책이라 생각된다.
흔히 우리가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신앙의 의식서, 비록 그것이 사도들에 의해 작성되지 않았다 해도 이 신조는 기독 교회에 존재해왔던 신조의 형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록 확연한 구별이 있도록 그 신조가 시도한 게 없고, 성경의 언어에 거의 가까워서 일반적 진리밖에 표현된 게 없어 기독교의 순수 진리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영원으로부터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또는 하느님의 머리를 지닌 세 인물에 관해서도 언급되는 게 없다. 신성한 삼위 일체의 세 가지 불가결한 요소,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부르는 요소에 관한 이 신조의 단어들은 이러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대목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아들에 관한 언급은 없고 독생자라는 것, 시간 안에 태어나신 것만 거론하고 아버지, 아들, 성령의 구분되는 개인적 성격에 관해서 아무 말도 없다. 이 신조에 의거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여호와에 의해 동정녀를 도구로 해서 꾸며진 인성이다. 신성한 본질은 나뉠 수 없는 바, 여호와 자신이 그 인성 안에 존재한다. 마치 영혼이 몸에 머무르는 것 같다. 이러기 때문에 시험과 고통의 과정을 통해 인성 그 자체가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모습을 갖추도록 꾸며진 인성의 측면과 신성한 본질은 쪼개질 수 없다는 원칙에서 인성 안에 여호와가 계신다는 측면 둘 다에서 합당한 이름이다. 이런 모든 것이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신앙 의식서 안에 함축되고 있고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이 신조의 교리는 하느님의 말씀 속의 순수한 교리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독 교회가 이 신조 속의 신앙을 단순하게 고수하는 한, 순수한 취지에 일치 않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한 이 신조는 세상에 있는 주님의 순수한 교리에 관심 있는 신앙 내지 교리일 것이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교리가 재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교리 중 일부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를 최고의 하느님 수준에서 완전히 떼어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성이 강탈 당하는 주제를 설명하려는 논식에 대항해 그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 제2세기 초에 Praxeas라 이름 불러지는 어떤 선생이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 일 뿐이다는 것, 또는 한 분 하느님이 각기 다른 품성 또는 그 관계에서 본 것일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저술 중 어느 하나도 존재하는 게 없는 바, 그가 주장한 것,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한 인물이라고 본 일반적 사실 외에 더 세세한 그의 소견은 알기 곤란하다. 만일 그가 주님의 인성이 점진적으로 신성화 해 가셨다는 이 중요한 교리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지식 수준이 낮아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한 것, 즉 아버지 자신, 신성이 십자가에서 고통 받았다는 논리를 계속 유지해왔다면 그도 아주 중요한 세부 항목에서 정도를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한 인물 즉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 한 분 하느님이라는 그의 교리는 단순한 기독인들의 느낌과 일치 했는 바 기독교 세계에서 두루 인정받는 평탄한 길에 있었다. 한 때 기독 교구의 주요 감독으로 간주되어 온 로마 교황조차도 그 자신 Praxeas를 좋아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Praxeas는 머지 않아 카르타고의 능변있는 장로, 그러나 거칠고 암울한 성미를 지닌 Tertullian의 광폭한 반대에 봉착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따로 따로의 개인적 인물이라는 그의 관념이 아주 적극적이다 보니, 그는 Montanus의 괴물 같은 이단(heresy)을 껴안았다. Montanus는 자기 자신이 인물로 있는 성령, 구분된 인물로서 성령이 자기 안에 거주한다고 꾸며대는 광기를 지녔다. Tertullian의 열렬한 표현 덕분에 그는 더욱 교회의 중요한 신부 중 하나로 존경받아졌다. 로마의 감독도 Praxeas를 후원하던 것을 철회했고 Praxeas는 이단으로 간주받기 시작했다. 사실 더 큰 이단인 Tertullian은 더 총애를 받아가서 기독교회에서 정통파의 표준으로 채택되다시피 했다.
하느님의 머리를 지닌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세 인물이라는 관념을 추켜든 Tertullian의 교리는 그 시대에 널리 퍼져갔지만 그렇다고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약 삼백 년 후 Arius가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따로 구분되는 개인적 인물이라는 관념에 매료되었는 바 그는 그리스도가 진짜 신성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결말이 나도록 추구했다. 그가 보았던 바는 만일 아버지와 아들이 두 인물이라면, 그리고 각각이 하느님이다면 두 하느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위대한 진리, 하느님은 존재하되 한 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면서 이것과 하느님의 머리를 지닌 두 신성한 인물에 관한 관념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이 대비되는 두 개념을 잘못된 방법으로 풀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한 인물이므로 예수는 한 분 하느님이 인간 본성에서 명백히 나타나신 것이라고 추론하는 대신, 그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는 하느님과 구분되는 인물이므로 예수는 하느님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생각, 즉 성경이 증언하는 바 같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구속되어졌다. 예수는 창조된 모든 존재 중 첫 번째에 해당된다. 이 존재에 권능이 위임되어 위대함으로 입혀졌고 특별 우대해서 하느님이라 불리웠을 뿐이라는 것을 창안했다. 근대에 이르러 Arius의 이런 교리를 따르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창조된 창조자에 관한 위와 같은 관념이 추론의 폭력을 휘둘러 주님의 신성에 대한 근대의 부정자들은 그분이 창조자임을 부정하고 그는 단지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믿고 그것을 주장할만한 성경 구절을 들추어 거기에 억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참으로 주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근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속성에 대해서이든 그분이 이미 존재했음을 부정한다. 이런 짓은 초기 신성의 반박자들도 감히 도전하지 않았던 성경의 아주 명백한 증거에 대칭되고 그 대담성도 너무할 정도이다. Arius, 근대의 예수 인간론자(humanitarian)들 같이 비합리적인 그의 교리는 몇 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정통 교리라고 일컬어지도록 반복적으로 위협했었다. 이 교리의 수용이 제지된 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니가야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골격을 이루어 요약된 교리는 니가야 신조라 불리우는 유명한 신조가 되었다. 니가야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fathers)은 Tertullian의 관념, 즉 삼위일체의 세 본체는 구분되는 인물이라는 Tertullian의 주장에 흠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 이것이 Arius에 의해 부정된데 대해 더 뾰족이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했던 바 그들은 아들의 품성이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고, 또는 예수가 영원한 자식 됨의 신분(sonship)을 채택하는 주장을 펼쳤다.
16. 방금 위와 같은 큰 악이 행해져 감을 보게 될 때의 주님의 방향이 이 구절에 있다.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위에서 살폈던 교리를 받아 확증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진정한 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런 역겨운 짓을 금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랑의 상태에 자신을 쏫아 붓는 사람, 아버지의 신성에서 아들의 신성을 나누지 않는 사람, 설사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방법적 논리가 아무리 엉성했다 해도 단순함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함을 계속해 온 사람들에게 차라리 교회는 존재한다. 위 구절은 뒤집혀진 교회의 부패상을 목격했다고 간주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방침이다. 이들은 교리 속의 진리가 어둑컴컴해 있을 때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성경의 언어에서 산으로 피신함이란 사랑이라는 원리에 은신처를 두는 것, 그리하여 영혼의 깊숙한 곳을 잘 계발하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에워싼 도성, 각종 오류와 부패함으로 괴롭히는 도성 안에 자신을 가두어 놓아서는 안된다. 이들은 교회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이단이라는 적들의 포위 공격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이런 공격으로 떠들썩한 와중에서 멀리 떨어져 서있으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보호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사랑과 선행이라는 높은 품위를 연마해 가야한다. 이럴 때 이들은 주님에 의해 그분의 참 제자임을 인정받게 되어 세상에서 그분의 새 교회라는 첫 열매를 맺도록 승인되고 하늘에 있는 그분의 나라에로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승강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 숫자는 대단히 많다. 세상에 널려진 수많은 교회들이 고백해대는 그대로의 교리를 정밀하게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운 사람들은 종교의 선 안에서 성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성소, 즉 하느님을 경건히 모시는 행동 안에서 그들은 심정을 쏟아 부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을 향한 자선의 행위에 그들의 손을 뻗칠 것이다.
17. 더 말씀하신다.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오지 말라.” 이 주님의 권고는 글자대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흔히 상상하는 것은 이 구절은 성급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대화의 모양새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모양새는 각기 상응 또는 영적 유추성을 지닌다. 집이 마음을 상징하는 바, 집 꼭대기, 지붕이란 마음의 가장 높은 자질 또는 수준을, 집안은 마음의 보다 낮은 자질 또는 수준을 말한다. 집 꼭대기란 이웃을 사랑함 또는 선행(charity)이 있는 의지를, 집안은 신앙 또는 진리가 있는 의지이다. 위 주님의 권고를 영적으로 이해하면 선행(charity)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믿음의 상태에로 내려오지 말라는 것이다.
18.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밭에 있는 사람이란 믿음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그의 옷이란 믿음의 진리들이다. 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믿음의 선으로부터 믿음의 진리로 퇴각하는 것, 다시 말해 선한 생활로부터 속이 빈 고백, 이름뿐인 기독 신앙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위 세 가지를 종합해 생각하면 선의 상태로부터 진리의 상태로 움추러드는 것, 또는 심정 속에 있던 종교가 지적 수준의 종교에로 수축되는 것이다. 위 세 경우는 말씀에서 구분지어 자주 표현하는 등급에도 나타나있다. 이런 표현은 글자 의미에서도 희미하나마 식별할 수 있다. “말씀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묘사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부류, 이웃을 향한 선행(charity) 가운데 있는 부류, 진리를 사랑하는 부류가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부류가 유다에서 산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이고, 이웃을 향해 선행(charity) 가운데 있는 부류가 지붕에서 세간을 꺼내러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며, 진리로 선하게 사는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부류가 밭에서 자기 옷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세 부류는 세 등급의 땅 위 주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동시에 하늘에 있는 그분의 나라에서도 확실히 구분되는 세 나라를 형성해준다.
19.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이 구절에 자연적 의미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는 것은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씀에서 인간의 영적인 것이 그의 자연적 출생에 비교하는 것보다 더 흔히 사용되는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참으로 그 둘 사이에는 완전한 유추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이를 가진다는 것,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은 영적 삶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임신은 거듭나는 삶의 단계 또는 상태에서 선이 내적 인간 안에 수태되는 때, 그러나 외적 인간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단계, 다시 말해 종교가 마음 안에는 있지만 아직 생활 단계에는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자궁에 아이를 밴다는 것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임신하는 것이다. 젖을 먹인다는 것은 순진이 천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영적 진리로 물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상태가 불행하다는 말일까? 이 불행은 처벌이 아닌 고뇌의 불행이다. 현 주제는 이런 상태를 존재하게 한 곤란의 시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자연계에서 출생이 있을 때 고통이나 위험이 따르듯 영적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진통을 겪는 여인의 고통은 영적 출산에 있게 되는 고통을 아주 잘 표현한다. 사실 영적 삶에 있게 되는 고통, “노동”의 시기는 우리의 종교 또는 종교 원리가 결실을 보는 시기, 마치 내적 측면에 임신된 것이 바깥 측면에서 존재를 하게 되는 시기, 마음에 있던 것이 삶에 옮겨지는 시기이다. 이것은 가장 적당한 상황인데 거기에 괴로움이 있다면 분명 거기에는 가장 적절치 못한 조건이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주변에서 적절한 가르침이나 좋은 본보기를 목격함으로 격려 받는다 해도 우리의 종교를 생활에, 자기 원리를 실제에 옮겨 놓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더군다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죄짓도록 각처에서 포위 공격을 받을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어째서 젖을 먹이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는 말일까? 만일 악한 때여서 우리의 원리가 출생하기 힘들다면 설사 태어난다 해도 그 원리가 유지 존속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특히 출생 초기인 신생아라는 수준일 경우 너무 연약하고 민감한 바 냉혹하다거나 궁핍하다는 상황을 견디어 낼 수 없다. 때로 어머니의 사랑조차도 유아들의 생존을 언제나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 등장하는 단어 피난(flight)으로 상징된 것과 연결되어 이런 상태들은 많은 고뇌하는 속성을 파생한다.
20. “겨울이나 안식일에 도망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도망(flight)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명시하고 있다. 또한 선한 자들이 세상의 환난으로부터 도망가서 쉬고 있고, 그 반면 사악한 자들이 이 환난에서 도망치되 또 다른 환난을 만나는 때, 또는 삶의 마지막 시기까지 의미한다. 그러므로 피난은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두 개의 상반되는 상태에 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피난은 선으로부터 후퇴함, 또는 악으로부터 탈출함을 명시한다. 그래서 도망함이 선과 순진으로부터의 후퇴를 나타낼 경우 그것은 모독의 죄를 포함하게 되고 이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이다. 그 반면 도망함이 악으로부터의 탈출을 뜻할 경우 이는 해방이고, 새로운 시작의 전주곡에 해당된다. 두 경우 모두에 이 구절 같은 주님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여름과 그 뜨거움은 사랑의 상징물이고 겨울과 그 차가움은 사랑의 결핍을 상징한다. 사랑이 없다면 거기에는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겨울은 이런 교회의 상태, 즉 진리의 빛은 있으나 사랑의 따뜻함이 없는 교회를 말한다. 사랑의 따뜻함은 생명 있는 종교의 필수요소인 바 그 반대는 그 종교의 완전한 종말이다. 안식일, 이는 거룩한 상태에 관한 성별된 상징물이지만 반대적 의미일 경우 그럴싸하게 거룩한 상태, 속이 거룩하지도 않은데 겉만 거룩한 상태, 심정 안에 경건함이 없는데 태도나 몸짓만이 거룩한 상태를 의미해준다. 이것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교회 또는 종교의 마지막 상태를 그려주고 있다. 교회의 종말이라고 말한다고 그 종말이 공개적인 불신앙, 사악함, 불손함 같은 것의 팽배로 자연계의 교회가 문을 닫는 상태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종말은 형식상의 종말 같은 부류일는지 모른다. 그 반대인 실질상의 종말은 종교의 바깥쪽 모양새가 대단한 세력을 지닌 듯 보여질 경우에 있어질 수 있다. 한 마디로 전능자의 눈에 비쳐지는 그대로의 교회 차원에서 교회의 종말 여부는 판가름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빛은 풍부하나 겨울의 빛만 풍부해서 열기가 없는 경우, 경건함으로 가득 차 있으나 안식일의 형식적 경건만 있고 일상 생활의 거룩함이 없는 경우도 있다. 만일 교회가 선함과 순진으로부터 후퇴하고 있다면 교회의 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실마리가 다 없어지지 않도록, 장차 새로운 교회가 형성될 수 있는 그루터기라도 남아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결과에 대한 것은 22절에서 살필 것이다. 한편 분노를 피해 도망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도망함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있지 않도록, 다시 말해 너무나 차가운 심정 상태도 아니고, 너무나 뜨거운 상태도 아닌 상태에서 있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21. “그 때가 오면 무서운 재난을 겪을 터인데, 이런 재난은 세상 처음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없을 것이다.” 가장 큰 선은 가장 큰 남용이 될 수 있고, 가장 큰 축복은 가장 큰 저주로 바뀔는지 모른다. 보다 높은 질서, 보다 깊은 내면에 속하는 진리들은 과거 이스라엘 교회에 밝히 알려진 것보다 기독교에 더 많이, 더 깊이 알려졌는 바 거꾸로 될 경우 더 왜곡되고 더 모독할 수 있다. 이런 재난은 세상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것보다 가장 크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영적으로 교회를 뜻하고 처음이란 첫 번째 때가 아니라 첫 번째 상태를 뜻한다.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은 영적으로 교회의 첫째가는 원리와 마지막 번째의 원리들이고 마지막 째의 것이 첫 번째보다 더 모독되어졌다. 타락한 교회의 때와 상태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병행한다. 그렇다고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때가 아니라 상태들이다. 교회가 끝을 맞는 것은 마지막 원리가 부패될 때 뿐이다. 원리들이 남아 있는 한 그 기초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리의 그루터기마저 붕괴된다면 교회의 건설과 유지는 파멸로 빠진다. 따라서 이런 마지막 상태는 첫 상태보다 더 악화된 편이다. 마지막 고뇌는 이전의 다른 모든 고뇌가 축적된 것이다. 이 마지막 때의 고난은 여태껏 있던 것보다 클 뿐 아니라 있게 될 것보다도 크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의 약속, 즉 더 이상 종말은 있지 않다는 것, 계시록에서 표현된 바 같이 더 이상 죽음이나 저주, 슬픔이나 울음이 없다는 것, 한 마디로 더 이상 고뇌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 이유가 이전의 것이나 상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님이 창조하실 새 천국과 새 땅 만이 그분 앞에 남아 있게 된다. 교회의 마지막 처방은 모든 처방의 왕관이어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22. 더 좋은 날이 시작하기 위하여 나쁜 날들은 짧아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완벽한 종말, 즉 누구든지 다 죽어야만 하는 하늘의 처방은 없다는 것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 오히려 신성한 자비가 장치해둔 질서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교회의 종말은 성급히 있게 될 것, 또는 앞당겨질 것이라는 말이 틀림없다. 교회의 종말은 도래되는 것이지 허용되어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교회의 종말이 앞당겨지지 않는다면, 그 날이 짧아지지 않는다면 어느 육체도 살아 남을 리 만무하다. 그 이유는 어느 것도 남아있지 못하고 다 살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육체(flesh)란 영적으로 선의 원리를 뜻하고 개인 차원에서 보면 선에 관한 어떤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기울고 있는 모든 교회는 그 교회에 속해 있는 선한 것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심판이라는 과정을 수단으로 종말을 맞이함으로서 옛 그루터기로부터 잔존한 선한 나머지(사람)들이 장차 새로운 교회를 산출하는 씨(germ)로서 보존되어진다. 선한 어떤 자투리를 지닌 이들이 “뽑힌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해 나쁜 날들이 “줄여질 것이다.” 뽑힌 사람들이란 그들의 공과를 헤아려봄도 없이 무작정 어떤 숫자가 뽑힌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리라. 하느님께서 뽑은 사람들은 그들이 뽑힐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뽑으신 것이다. 인간은 제가 뽑혔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선했기에 뽑힌 것이다. 뽑힌 자는 선한 자이고 선한 자는 뽑힌다. 그들을 위해 고생의 기간이 짧아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을 함께 모아 거두어 그들로부터 새 왕국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3. 뽑힌 자라고 환난을 거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시작에서 봉기했었던 악들과 비슷한 악들이 교회의 말기에도 그 세력을 떨친다. 주님께서 오실 때 어떤 징조가 있게 되느냐고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을 때 그분께서 경고하신 첫 징조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의 이름을 내세우며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경우 그분께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셨다. 제5절과 이 구절의 그리스도는 약간의 차이점은 있으나 우리가 꼭 주목해두어야 할 차이점은 없고 “그 때에 어떤 사람이 ‘자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는 내용은 주목해야할 것이다. 여기, 저기라는 단어는 가까이, 조금 더 간격을 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란 내적인 것을, “저기”란 외적인 것을, 장소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회의 상태를 취급할 경우 “여기, 저기”란 교회의 내적, 외적인 것, 교회의 교리와 예배에 관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라고 말할 때 믿지 말라는 권고에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내적 차원에서이든, 외적 차원에서이든 발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교회가 부패될 때 그 교회의 교리나 예배 안에 더 이상 진리가 존재 않는다는 것, 그 교회의 내적 측면인 본질 차원에서이든, 외적 차원인 형식 측면에서이든 어느 측면에도 더 이상 진리는 없다는 말이다.
24. 거기에 진정한 그리스도가 더 이상 있지 못하다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란 왜곡된 진리들이고 거짓 예언자란 왜곡된 진리로부터 형성된 교리와 그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들이 제9절에 언급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많은 이들이 내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하면서 주의 이름을 내세우며 등장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 이유는 교회 하강의 시작에서 거짓들이 강세해지나 그 말기에는 왜곡된 진리들이 강세해진다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왜곡된 진리, 뒤집혀진 진리는 단순한 잘못, 실수, 오류보다 더 현혹시키고 더 위험한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은 “큰 표시와 이상한 일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 할 것이다.” 표시와 이상한 일(sign and wonders)은 가짜 그리스도가 자기 가르침을 믿게 하려고 사람들을 유인하는데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교리를 타인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고안된 수단들이란 설득과 감화이다. 이해성 측면에서 설득하고 의지 측면에서 감화시킨다. 먼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에 호소하고 그 다음 그들의 탐욕에 호소한다. “표시”는 이해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이상한 일”은 의지에 영향을 준다. 표시(sign)는 확신시켜주는 수단은 아니고 설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표시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셨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해성이 소경이 되게 하거나 추론 능력이 상실되게 하거나 신앙을 지각 못하게 하는 능력은 발휘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기적이나 경이로운(wonder) 일은 수행하셨다. 그 이유가 기적은 의지에 경외로움이라는 느낌을 전달하면서도 인간의 합리적 능력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거짓 그리스도나 예언자들이 이상한 짓이나 표시될만한 일을 해대는 목적은 타인으로부터 이성과 자유를 거두어 자기들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감내하도록 그들의 의지와 이해성을 만들려는데 있다. 파렴치한 인간들은 훈련되지 않은 마음들, 특히 고정된 원리로 균형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파렴치한 인간 대부분은 종교를 자동차의 엔진 같은 역할을 하도록 내세우고 있다. 이런 영향력이 판을 칠 때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는 진짜인 순수한 선함이라는 원리이다. 이 원리를 가진 이들이 뽑힌 자들이다. 이들을 부추겨 유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의 필수 요소를 선함에 두고 이를 바탕으로 마음이 건설될 경우 이는 악에 대항하는 최고의 방패이다. 물론 선함이 진리를 수단으로 그 자체가 방어된다는 것은 진정이다. 그러나 순수한 선함에는 진리의 현존, 즉 진리가 체현된 삶이 이미 포함되어있다.
25. 선함은 거짓 그리스도의 사기 치는 가르침에서 보호되는 최선의 방패인 동시에 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바탕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유익한 경고를 주신다. “보라 내가 전에 말해두었다.”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야 진리를 받는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내적으로 받는다. 이것이 “내가 전에 말했다”는 구절로 의미되고 있다. 시간에 관련된 자연적인 생각은 영적 생각에서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시간은 장소와 마찬가지로 상태(stat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 모두가 상태를 의미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장소 또는 공간은 의지 측면에서의 상태를, 시간은 이해성 측면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시간은 진리의 상태에, 공간은 선의 상태에 관계된다. 전(before)과 후(after)는 여기(here)와 저기(there), 그리고 앞(before)과 뒤(behind)와 서로 관계되는 말이다. 전(before)은 내적 측면에, 후(after)는 외적 측면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전에 말했다”는 것은 내적 경로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마음의 내적 부분에 받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받는 사람들은 각종 기괴한 일로 유혹하려드는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26.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광야에 나타났다’ 해도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 해도 믿지 말아라.” 저기와 여기라는 단어와 비슷한 것이 광야와 골방으로 의미되고 있다. 여기와 저기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뜻하듯, 골방과 광야는 의지와 이해성, 또는 선과 진리와 관계되는 것을 뜻하고 있다. 진리가 황폐된 교회는 광야라 불리운다. 인간 이해성을 말할 때도 이와 같다. 참으로 교회 내에 진리가 황폐해 있던지, 인간 이해성이 그러하든지 똑같은 비중을 갖는다. 그 이유가 교회를 이런 지경으로 되게 하는 것이 교인의 이해성이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 선이 황폐되었다고 말하든 인간 의지가 썩었다고 말하든 똑같다. 그 이유가 교인의 의지 또는 심정에 있는 선이 황폐되었기에 교회가 그런 지경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을 고하는 교회는 선과 진리 모두에서, 의지와 이해성 모두에서 황폐되는 바 진리는 여기이든 저기이든 그 안에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도덕적 원리라는 골방에도, 교회의 지적 사상이라는 광야에도 계시지 않는다. 이런 교회의 도덕적 원리들은 각종 추잡함으로 가득 차 있어 주님 사랑의 순수한 선이 들어갈 수 없다. 이런 교회의 지적 원리들은 황폐함과 무익함뿐인 사막이고, 거기에는 뱀 같은 종류만 서식할 수 있을 뿐 양떼가 풀을 뜯을 수 없다. 이것이 교회의 케이스이듯 거기에 있는 말씀도 마찬가지 형편이어서 말씀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설된 한도에서만 말씀이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이런 골방을 들여다본다면 무엇을 보게 될까? 이해되지도 않는 이상한 것들뿐이다. “그것들을 믿지 말라”는 주님의 권고는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또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속성은 서로서로, 끼리 끼리의 타협이다. 재회가 없는 싸움만을 가져오고 있다. 믿음만의 원리가 교회를 사막화 되게 하지 않을까? “네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뽑힌 자들”이 믿음의 행동에 의해 구원된다는 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까? 교회이든 종교이든 이런 주장이 팽배해질 때 그리스도의 강림은 가까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진실로 이런 날들이 줄어들지 않으면 누가 살아 남아 있겠는가?
27. “동쪽에서 번개가 치면 서쪽에서 번쩍이듯이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올 것이다.” 주님의 이런 오심은 미래의 장엄한 강림을 뜻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처방의 시작을 형성하고 뒤 구절로 더 나아가면 구름들 안에서 그분은 오심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구절의 오심은 교회 하강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옛 처방에서의 오심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오심은 그분께서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는 글자적 표현에 의해서가 아닌 모든 사람 안에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 복음서에서 자주 언급된 바 있는 그분의 오심,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꾸준히 오시고 있다. 그분의 오심에 관한 본질, 똑같은 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영접함에 관한 본질은 교회 상태에 따라 다르고 그분의 말씀이 그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서 묘사된 교회 말기에 그분을 영접함과 그분의 오심에 관한 본성은 글자가 지니는 상응으로부터 그것의 품성과 결과를 끌어내 볼 수 있다. 신성한 연설자께서 이 본문에서 채용한 모양새는 갑작스런 번득거림으로 그분이 나타난다는 생각을 표출시킨다. 이 나타남은 한순간 지평선에서 번득거린 섬광, 그러나 그 순간 사라져 이전 보다 더 심오한 어둠이 깔린 듯 여겨지게 하는 나타남이다. 교회 말기, 어둠과 죽음이 팽배해진 그 때에 거행되는 주님의 오심은 정말 이와 같은 종류이다. 다시 말해 그 때에는 계속되는 어떤 영적 빛도, 지속적인 영적 생각도, 군림하는 어떤 영적 애착도 없다는 말이다. 군림하는 상태란 애착들의 죽음, 지성의 어둠이다. 복음이 전파됨으로, 또는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또는 얼마간의 흥분된 원인이 있어 마음이 동요되어 마음의 자질들이 일깨워지고 빛이 드리울지 모르나 그것도 한순간에 불과하다. 마음이 빛을 가지고 않고 있다면, 생명 자체가 없다면,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인 것들은 어떤 외적 매체가 움직이고 설득하는 대로에 맞추어진 것일 뿐이다. 세상이 마음 안에 들어오고 대신 종교가 마음밖에 있게 되면 그 종교적 상태들은 감정의 수준, 상상의 수준에 머문다. 물론 활력을 주는 감명이나 관념이 전달될 수 있고 마음에 품을 수도 있다. 번개가 동쪽에서 나와서 서쪽까지 번쩍일는지 모른다. 동쪽으로부터 오는 천국적인 빛은 마음 안에서 흥분된 선행(charity)의 느낌을 통해 영혼에 번쩍거리는 밝음을 줄는지 모르나 선행과 상반되는 이기심이 득세하는 서쪽에서는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번개는 진리에 관한 천국적 빛의 상징물이다. 이 번개가 출현한 곳, 동쪽이란 사랑과 선행이다. 서쪽은 때로 거룩한 상태의 계속과 종결이지만 여기에서는 반대적 의미인바 시작된 선이 무력해지는 것을 말한다.
28. 이제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글자를 읽으면서도 느껴지도록 시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 구절은 죽음과 황폐함의 형상을 얼마나 저절로 표현하는지! 교회가 황폐해진 곳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 시체와 독수리로 묘사되고 있다. 교회의 몸은 죽어 있다. 다시 말해 교회 스스로가 창조한 사막에서 타락되어 있다. 시체가 제공되는 가금류들의 연회장에서 독수리는 자기 몫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죽은 몸으로 표현된 교회 상태에 더 설명을 추가할 필요가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의 여백에 더 그려볼 어떤 것은 있다.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게 독수리라 해도 이 새가 지닌 의미 때문에 주님께서 독수리를 사용해 말하셨을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독수리(vulture)는 나쁜 의미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독수리(eagle)는 한 때는 좋았다가 뒤집어지고 모독되어버린 교회 안에 있는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되어져 있다. 독수리는 마음의 합리적 원리와 상응된다. 이 원리는 진실되거나 왜곡되었거나 하는 어느 한쪽일는지 모른다. 인간은 동기가 자신을 자극하는 데에 따라 진리이든 오류이든, 선이든 악이든 어느 쪽이든 좋아해서 추론할 수 있다. 이성(reason)은 고상한 자질이다. 이것이 진리와 정의를 섬기는데 고용될 경우 진리와 정의를 특출하게 후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타락되어 육정과 사리사욕의 노예가 될 경우 전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던 만큼이나 강하게 유해해진다. 이성이 선을 섬길 때 독수리의 날개 같아서 새로워진 마음을 드높인다. 그러나 악을 섬길 경우 썩은 고기 냄새를 맡은 독수리 같아서 먹이를 포획하느라 성급히 땅에 내려온다. 이 경우가 본문의 경우 아닐까? 이론을 캐기 좋아해서, 단지 추론만을 위해서 말씀 주위에 모여드는 것, 말씀을 신성한 생명이 담기지 않은 죽은 글자로 취급하는 것, 오늘날 수많은 성경 비평물들은 독수리가 죽은 시체에 모여들 듯 영혼 없는 몸같이 성서를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말씀이 죽은 글자로 간주되고 취급될 때 교회와 종교는 어떻게 잘 되어갈 수 있을까? 그 이유가 말씀이야말로 교회와 종교 모두에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29. 이제 끝이 오고 있고 이로부터 시작이 오고 있다.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릴 것이다.” 이 구절의 예언은 아마 가장 중요한 예언일 것이다. 이 구절 뒤에 이어지는 단어들과 연결해 생각하면 이 단어들은 이 구절의 후편에 속하고 신약 성경이 취급한 미래에 관한 가장 중대한 사건을 미리 말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이 있는 만큼에 비례해서 이 대목의 중요함도 고조되리라.
이 예언적 선포가 기독교의 수세기 동안에 만들어 졌다는 생각은 이 예언의 가장 단순한 글자적 납득이 전달할 수 있는 것만큼에서만 있어져 왔다. 이렇게 생각되어 왔다. 이 발표에서 예견된 사건은 물질계의 종말, 대 이변을 묘사한다고 상상해 온 것이다. 이런 관념이 성행했던 것은 아마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이유가 어떤 사건이라 해도 그 사건이 성취되기 전에 완벽히 이해될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미래적인 사건이 발표될 경우 사용되는 언어는 신앙자가 접근할 경우 그의 신앙이 보존되도록 해주고 아울러 그 정확한 본성은 감추이도록 의도적으로 골격이 짜여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가 신성에 접근하되 볼 수 없고 다 지난 후 그나마 뒤쪽에서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지금까지의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처방의 마지막에 관한 모든 예언, 그리고 주님의 오심이 새로운 처방을 건설하시는데 따른 모든 예언까지 소유하고 공부했었지만 그 사건의 정확한 본성에는 아주 무지해서 그 사건이 자기들 눈 앞에서 발생되었을 때 그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라고 인식하기를 거절했다.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기독인들이 배워야 하는 바, 기독인들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 관련된 예언을 명확히 이해하여 믿는데 덜 적극적이다거나,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사람의 주장을 보다 긍정적으로 검사해보려는데 소극적이거나 이런 것들이 실제의 성취를 수단으로 공공연히 발견되는데도 미온적 자세를 취하는 데서 탈피해야 할 것 같다. 만일 기독인들이 성경 중심적이고 이치에 맞는 어떤 과정을 한번 채택해본다면 위 같은 범주를 벗어나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할는지 모른다. 그런 과정이란 이런 것이다. 신약 성경의 예언의 비슷한 형태를 구약 성경의 예언에서는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채택할 것이다. 그 결과 구약 성경에 있는 예언이 신약 성경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 신약 성경에 결코 글자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까지도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바빌론의 멸망에 관련된 이사야의 예언에서(13:10),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의 별들과 삼성성좌는 빛을 잃고 해는 떠도 침침하게 만들리라. 해는 구름으로 덮고 달도 빛을 잃게 하리라.” 이런 구절이 글자대로 성취된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요엘 예언서(3:1-5)의 경우 더 강하게 우리를 설득해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예언은 유대 교회의 종말 때와 관련이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자(2:17-21).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와 정밀하게 똑같은 모양새를 지닌 예언이 본문에 있다. 글자대로 해석을 시도한다면 마지막 날은 세상 마지막 외에 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도들이 우리를 명확히 이해시켜 주는 바,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의 “마지막 날들” 이라는 것이다. 해와 달의 소멸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빛의 소멸 외 더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요엘의 예언이 영적 성취만을 가졌듯이 주님의 예언 역시 영적 차원의 성취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게 가장 타당해진다. 어쨌든 예언의 글자대로의 성취는 불가능하다는 것만큼은 납득되었으리라. 자연적 수준의 의미를 부여해 해석을 시도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 예언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살펴보자.
해는 성경의 많은 장소에서 언급되고 있고 언제나 사랑의 상징물로 등장한다. 해가 이런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해는 열을 수단으로 지상의 만물을 받쳐주는 생명 있게 하는 속성에 관련되기 때문에서이다. 몸이 열로 따뜻함을 지니듯 마음은 사랑으로 훈훈함을 가진다. 달은 감지할 정도의 열을 주지 않지만 빛을 주고 있고 그나마 해로부터 받은 반사된 빛을 준다. 빛이 진리를 상징하는 바, 달은 믿음의 원리나 진리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성경에서 언제나 채용되고 있다. 별은 달빛보다 더 약한 빛을 우리에게 주는 바 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을 나타낸다. 이런 발광체들의 상징적인 본성, 그리고 거의 정확한 의미는 계시록 12장의 문단에서 수집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이 여인은 교회를 상징한다. 이 여자가 태양을 입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품위를 얻은 교회를 표현한다. 이 여자가 달을 밟고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 위에 교회가 안주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 여자가 열 두 개의 별이 달린 관을 쓰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지혜와 총명은 성경 안에서 밝히 알리는 진리와 사랑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재림 때에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주지 않고, 별은 하늘에서 떨어지리라”고 선포하시어, 그분의 재림 때에 교회에는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을 것임이 태양이 어두워진다로, 교회가 그분에 관한 참된 모든 신앙을 상실함이 달이 그 빛을 주지 않는다로, 말씀에서 파생되는 진리에 관한 순수한 모든 지식들이 추방되는 것이 별이 하늘에서 떨어짐으로 각기 의미되어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똑같은 목적으로 계시록 6장에서도 말해지고 있다. “여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내가 보니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처럼 검게 변하고 달은 온통 핏빛으로 변하였다. 별들은 마치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무화과나무의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졌다.” 여기서도 의미는 똑같으나 한 가지 다른 것은 달이 빛을 주지 않는 단순한 경우로 말해지지 않고 핏빛이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피는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진리가 왜곡됨을 의미하는 바, 달이 이렇게 변한다는 것은 왜곡된 신앙이 참된 신앙 대신 건설되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거의 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곳이 제8장에서 네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이다.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으며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의 삼분의 일도 마찬가지로 빛을 잃었다.” 이상의 모든 경우가 같은 언어로 함축하는 공통점은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들, 교회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말씀에서 파생된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의 상태들이 명백해짐에 관한 상태들이다. 하늘의 발광체들은 빛과 열의 근원이다. 이 빛과 열이 땅에 관계되듯 교회에 관계되는 빛과 열은 영적 원리들, 즉 사랑, 신앙 그에 관한 지식들이다. 성경에서 해는 사랑을, 달은 믿음을, 별은 그에 관한 지식들을 상징한다. 주님은 교회의 모든 생명과 빛의 장엄한 근원이시다. 그분은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 지식을 통해 교회와 교통하신다. 주님의 생명과 빛의 교통을 차단하고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인간 마음뿐이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는 이유는 교회나 인간 마음이 부패한 까닭에서이다. 자아 사랑이 하느님 사랑을 차단한다. 왜곡된 관념이 믿음의 빛을 가로막는다. 사랑과 믿음에 관한 지식에 무관심함은 그 원리가 실패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말해지고 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두 큰 빛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으셨다고 우리는 읽는다. 이는 하늘로 의미되는 마음의 내적 측면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승강하는 것을 묘사한 비유적 형태이다. 하늘로부터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내적 인간에서 외적 인간에로 영적 지식들이 강등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영적 지식이 자연적 지식과 다를 바 없는 수준에 놓이는 것, 지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지상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함을 뜻한다. 이러면 하늘의 권능이 흔들려진다. 그 이유가 영적 사항들이 자연적 목적을 위해 사랑되어지면 하늘의 기초가 제거되고 천국 원리들은 그 공고함과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
30. 교회의 모든 짜임새,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 모두가 뒤흔들리고 기우뚱거릴 때, 그 때야 말로 신성한 권능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진력하시어 그 견고성을 회복하실 때이다. 발광체가 어두워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 안에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두 번째 강림하신다는 장엄한 발표이고, 지금까지 교회들이 찾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발표이다. 이 큰 사건은 불확실하거나 꾸준히 기대하는 상태에 지상의 교회들이 있도록 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의 의도였던 것 같이 보인다. 깨어 경계함(watchfulness)이 요구된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는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왔던 요점이다. 실재와 기대 사이의 첫 번째 큰 차이점은 주님의 오심이 개인적인 어떤 인물의 오심이 아니라 영 안에 오신다는 것, 이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보게 된다면 그분이 오신다는 주변 묘사 역시 전체적으로 그 의미가 바뀐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볼 수 있게 오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물질계의 구름 안에 오실 수도 없다. 그분의 오심에 수반되는 주변 환경이 글자적 해석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면 그분이 오심 역시 글자대로의 해석에 따른 상상과도 전혀 달라야 타당할 것이다. 예견된 어느 한쪽 부분이 영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면 나머지 부분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문의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그분의 강림에 관한 참 본성도 우리에게 밝히 알게 할 것이다. 주님이 개인 자격으로 오시지 않고 영과 권능 안에서 오신다면 그 오심이 어떻게 거행될까? 그분은 사람들의 영과 심정 안에 오실 수 있다. 참으로 이 오심은 실재적인 실제이며 구원의 강림이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이 오심이 있다 해도 어떤 매체를 통해 결과 되어야 하는데 그 매체는 말씀이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 알리시고 있다. 그분의 거룩한 영은 그들의 심정 위에 작용하지만 진리의 영은 진리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구원할 수 있게 작용할 수 없다. 이 진리의 말씀은 주님의 오심이 거행되는 매체이다. 그분이 나타나실 하늘의 구름이란 글자 의미로 있는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 의미가 구름에 비유되고 형상화되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내면의 영적 의미를 마치 구름이 태양의 밝음을 가리우듯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 구절들, 주님의 정의가 구름 안에 있다라든가, 그분의 진리가 구름에 와 닿고 있다든가, 그분께서는 구름을 그분의 병거로 만드신다든가, 구름은 그분의 발 아래 있는 먼지이다든가 하는 등등에서 구름은 말씀의 글자 의미임을 뜻해주고 있다. 말씀은 신성하게 영감 되어 있는 책이요, 상응의 법칙에 따라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구절의 표현들은 한낱 풍유적일 뿐이고 확실치 않은 숭고한 말씀들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신성한 계시의 참된 본성을 보는 이들만이 영적 의미가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이런 일반적인 사실을 서술해보아도 주님의 오심은 자연적 수준이 아닌 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오심은 말씀의 가르침 내지 말씀을 매체로 해서 결과가 있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이제 글자그대로 읽어도 그 중대함이 느껴오는 이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 때에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것과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지만 거기에는 연결을 이루는 사항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는 먼저 언어 기교상의 구분을 서술한 다음 설명을 추가해보자.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sign)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이고, 사람의 아들은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이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있고 둘째로 진리로서의 주님이 있다. 전자는 우리 자신 밖으로부터 주님을 알게 해주고, 후자는 우리 자신 안에서 주님을 알게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 영(the Spirit)으로서의 주님 자신을 표현하신 대목, “그분은 너희와 더불어(…with you) 계시고, 너희 안에(…in you) 계실 것이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있고 신성한 진리는 우리 안에 있다. 전자는 진리 자체는 아니고 진리의 표시이다. 진리에 관한 표시는 진리 자체에 대한 선구자(precursor)에 해당된다. 이런 준비는 시험이라는 고난 없이 준비가 완료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마음이 겸허해지고 순수해져 진리를 충만되고 완전하게 영접하는데 꼭 맞게 되려면 시련이나 번민을 수단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나타나면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교회 내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통곡함이란 그들이 첫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건너가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환난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새로운 모든 진리는 영적 시련을 유발한다. 그 이유가 새로운 진리는 마음의 옛 상태들을 휘저어 제거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위 구절은 순수하게 영적 의미만으로 본다면 더 알기 쉽다. 이 의미에서 민족(tribe)들이란 선과 진리 자체에 관한 원리를 뜻하고 땅(earth)은 이런 원리가 있게 되는 자연적 마음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서 나타날 때,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하늘이라는 영적 마음 안에서 처음 지각될 경우, 다시 말해서 영적 마음 안에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유입(influx)되거나, 영적 마음이 그 신성의 영향을 받는 경우 자연적 마음은 혼란을 일으키고 슬퍼함의 원인이 제공되어 통곡하는 나날은 그 상태가 뒤집어질 때까지 이어지는데, 상태의 뒤집힘은 사람이 아들이 올 때 거행되어 그분의 오심을 마음이 영접한다. 주님의 오심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관한 유추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짚어 살피고 넘어가야 하리라 본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먼저 그분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한 진리로 만드셨다. 이를 달리 표현해보면, 그분은 먼저 그분의 인성을 거듭나게 했고 그 다음 신성화 하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분은 먼저 인성을 신성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으로 만드셨다고 말해도 된다. 똑같은 내용을 또 달리 말할 수 있다, 그분은 먼저 인성을 천국적으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으로 만드셨다 등등으로 풀이해 이해를 넓혀 볼 수 있다. 이런 사항들은 통곡이나 시험의 쓰라림 없이 결과 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그분께서 그분 스스로 이런 사항을 직접 수행할 수 없다 해도 아직도 그분께서는 그분의 교회와 백성 안에서 수행해가고 있으시다.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실 수 있기 전에 먼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셔야 한다. 이런 것과 상응되는 발전 단계는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계속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서 계속되는 것을 먼저 본다. 우리는 세상에서 명백히 나타나는 모든 새로운 진리 안에서 사람의 아들의 표시를 본다. 이는 종교적인 모든 새로운 진리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과학 등등에 있는 모든 진리를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런 모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분의 오심에 관한 표시이다. 물론 본문에서의 경우 땅의 민족들이 슬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가 권능 있는 모든 변화는 “피와 불과 짙은 연기” 같은 것 없이 결과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설명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로서 오신다. 그래서 그분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말씀 안에 오신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 마음의 내적 측면처럼 하늘로 의미되고, 말씀의 외적 의미는 하늘의 구름으로 의미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에서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온다”는 것도 이미 설명했다. 그분은 글자 의미 안에 오신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로부터 모든 교리가 끌어 올려지고 확증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되는 순수한 의미는 주님을 그분의 교회와 인간 마음에 실어 나르는 참다운 수송 수단이다. “그분은 구름을 병거삼으신다.” 병거란 교리를 뜻한다. 말씀의 글자로부터 오는 올바른 해석으로 추론된 교리는 더 높은 수준의 모든 지식에 필수되는 그릇이요 매체이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되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신다. 이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가 지니는 고유성(property)이다. 영적 의미를 밝히 알린다(계시)는 것은 주님의 두 번째 강림의 본질적이고 특출한 모양새 중의 하나이다. 글자라는 구름은 참으로 그분이 오실 때 사용되는 병거이고 그분의 오심에 나타나는 큰 영광과 권능은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을 확실히 구분지어 주는 탁월한 품성이다. 육으로 오신 첫 번째 오심은 연약했다. 영으로 오시는 두 번째 오심은 권능이 함께 하고 있다. 첫 번째 오심은 겸비함 가운데 오셨고, 두 번째 오심은 영광이 함께 하고 있다. 말씀의 영적 의미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 의지를 더욱 거듭나게 하실 수 있고, 그 사람은 영적 선함을 원리로 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가 “권능”으로 의미되고 영적 의미는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 이해성이 계발되도록 더 많은 빛을 주시어 거듭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영적 진리로 행동하는 바 이것이 “영광”으로 의미되어 있다. 구름이 신성한 위엄인 권능과 영광으로 싸여있는데도 구름은 그분의 발 아래 있을 뿐이어서 우리는 글자라는 구름밖에 신성한 말씀의 내적 의미인 권능과 영광으로 두루 감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 이유가 어느 누구도 말씀의 영적 의미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용될 수 없고 오로지 글자 의미의 순수한 교리 가운데 있는 이들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의 영적 의미가 글자의 한쪽에 놓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중요함이나 거룩함이 감소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영적 의미는 글자 의미에 더 힘을 실어주고 더 드높여지게 한다. 주님의 영광이 그분의 처소인 성전을 가득 채우듯 영적 의미의 영광은 그 처소인 글자라는 성전을 가득 메운다. 지상의 인간은 글자를 통해서만 영적 의미에 다가가 볼 수 있다.
31.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대 이변을 동반할거라 는 세상에 널리 퍼진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주목해두어야 한다. 그분이 오신 뒤의 첫 번째 행동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영적으로 이해하면 이 묘사는 대단히 높은 표현이다.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교회의 종말이 오고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말씀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시러 오신다. 그러므로 있어지는 첫 행동은 남아 있는 신실한 자, 뽑힌 자, 즉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힘을 수단으로 붙잡을 수 있는 영적 원리를 자기 속에 지닌 이들, 그래서 주님의 울 안에 모을 수 있는 이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천사들이 이런 복된 일에 고용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천사는 대리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주님의 대리인으로 일하는 동안 신성한 속성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나팔이란 말씀 속의 진리를 상징한다. 천사들은 그들의 하늘에 관한 표현물도 된다. 이로부터 인간들이 그분의 교회 안으로 끌어당겨지고 평화의 끈과 그분의 영에 관해 통일된 느낌과 생각을 갖고 있게 된다. 이 모아짐이 제아무리 다양해도 그 의미는 변경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은 천국의 모든 것이요, 천국적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 그들 속의 근원과 본질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한다. 주님께서 큰 나팔 소리를 지닌 천사를 보낸다는 것은 말씀 속 진리를 수단으로 천사를 통한 그분의 유입이다. 이런 진리들은 교회와 나라에로 끌어당긴다. 축제를 선포하거나 흩어진 멤버들을 거룩한 집회에 불러모으려고 이스라엘 교회에서 사용된 나팔은 말씀 속 거룩한 진리에 관한 모형이다. 이를 수단으로, 하느님의 소리를 수단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은 한군데 모아진다. 본문이 말하는 바 이 자녀들은 사방(four winds)으로부터,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에서 불러진다고 했다. 하늘 이 끝으로부터 뽑힌 자를 부른다는 것은 천국의 어떤 것을 지닌 모든 자를 부른다는 말이다. 네 방위, 또는 사방이란 갖가지 종류와 수준을 표현한다. 이는 동, 서, 남, 북으로 의미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방으로부터 이들은 유대인들이 반역적으로 내던져버린 나라에로 오게 된다.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모아진 이들이란 선함 측면의 모든 수준, 즉 가장 내면에서 가장 외면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선함 측면에 있는 이들이고,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모아진 이들이란 진리를 가장 명확히 아는 수준으로부터 가장 희미하게 아는 수준에 걸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수준에 있던, 사랑의 수준이 어떠하든, 선과 진리의 실제가 어떤 수준에 있던 그것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초대되고 천국의 문이 되어주는 주님의 교회 안에로 영접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방(four winds)이란 말을 하셨고, 동시에 하늘 이쪽과 저쪽 즉 하늘의 끝(extreme)에 관한 말을 하셨다. 이 두 가지는 자연적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고 심지어 동일하다고 까지도 말해버릴 수 있지만 그 둘 사이에도 차이점이 있다. 바람(wind)은 삶 중 지적 측면의 영(spirit)을 상징하고 하늘(천국)은 삶의 의지적 측면을 상징한다. 그래서 두 단어는 각각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에 적용된다. 이제 위에서 살핀 바를 개인 차원에서 이해해두자. 각 개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오심은 거듭남의 시작을 말하고 뽑힌 자를 사방에서 모으심이란 선에 관한 애착과 진리를 지각하는 모든 것을 모으신다는 것이다. 이 모으심은 꼭 하나인 최고의 대상을 향해 방향을 맞추고 있을 때, 한 개의 목적을 두고 자신이 통치될 때만 결과 되어진다. 그 한 개의 대상은 주님이어야 하고 그 한 개의 목적이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32. 이제 주님의 영광스러운 오심의 첫 열매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우리는 생명, 생생함, 약속에 관한 그림을 가진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교회를 그리되 열매 맺는 나무,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이든, 포도나무이든, 올리브나무이든 세 나무 중 어떤 나무로 그려지든 이보다 더 일반적이면서도 개별적인 형상은 없을 것 같다. 이 세 나무는 모든 교회들, 모든 교인들을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이라는 세 개의 품성으로 구별지어 상징해준다. 무화과나무가 되돌아 간 삶의 첫 표시를 상징한다는 것은 과히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이유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승강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 앞에 존재하고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 이전에 존재한다. 비록 두 번째 강림에 있게 되는 교회가 모든 교회의 월계관이고 에덴에 처음 심겨진 생명의 나무가 그 강둑에서 자라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해도 그 교회의 생명은 가장 겸허하고 가장 공통적인 형체로부터 발달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표시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는다는 것이다. 나무의 가지는 인간 안에 있는 애착을 상징한다. 그 이유는 마치 가지가 나무 줄기로부터 나오듯 애착은 의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의지가 애착을 생산하는 것은, 마치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과 같고 애착이 생각을 생산하는 것은 마치 가지가 잎을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은 애착과 생각을 상징한다. 애착이 피어나는 것, 생각이 열리는 것이 위 간단한 비유의 자연적 생각 안에 표현된 영적 생각들이다. 가지들이 연해졌다고 비유는 말하고 있다. 무엇이 가지를 연해지게 할까? 따스함과 땅의 이슬 아닐까? 이것 자체는 온화한 영향과 새롭게 하는 힘 아래서 애착이 연해지고 생각이 펼쳐지는 되돌아오는 사랑과 믿음의 표현물이 아닐까? 이와 똑같은 상황은 육체와 각 기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외적 교회에서 이 아름다운 비유는 놀라울 정도로 본보기화 되어 있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이미 거행되었다. 이백 오십여 년 전 유일한 소리, 그러나 명백하고 고요하나 엄숙한 소리, 마치 천사의 나팔 소리 같은 소리가 무시무시하나 기쁜 소식의 소리로 심판이 거행되었다는 것, 첫 강림의 하늘 처방은 종료되었고 두 번째 강림이 시작되었다고 기독교인의 귀에 발표되었다. 사람의 아들은 참으로 밤중의 도둑 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인정되지도 않은 상태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의 정착된 자연주의(naturalism)의 죽은 듯한 고요함을 휘젓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자고 일어나고 사고 팔고” 하였다. 그러나 옛 것들은 사라졌고 모든 것은 새로워가고 있다. 새 영향력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진리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 원인에 무지해서 새로운 힘이 있다면 이 세상 안에 작동하고 있어야 하고 새 생명의 표시가 눈에 보여야한다고 말한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는다. 인간의 애착은 새로운 자극을 받았고 그들의 생각은 새 방향을 받았다는 말이다. 진실로 이런 정신적 활동은 자연계 측면에서 뚜렷하게 명백히 나타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활동은 얼마나 위대한지! 그 결과는 얼마나 비범한지! 지식이 증가되었고 과학이 진보했고 발명과 발견의 속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래서 언어의 수송, 표현, 집합 방식들이 과거와는 너무나 판이하다. 이런 정도로 새로워진 것은 자연계 내지 자연계의 거주민에 해당된다. 어쨌든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인정한다면 그 인정 자체는 더 높은 사항에 관한 약속을 준다. 세상 주변의 변화 자체가 우리에게 여름을 가져오지 않지만 최소한 겨울은 지났고 여름이 가깝다는 정도는 말해주고 있다. 세상 주변의 변화 자체는 무화과나무의 잎, 그것도 고작 싹이라는 수준의 잎밖에 더 아니다. 어쨌든 잎이 돋는 과정은 오고 있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 더 큰 아름다움이 진열되고 더 큰 결과도 생산될 것이다. 비록 인간 마음이 자연적 측면에서만 발달했다고 생각된다 해도 꼭 그쪽 측면에서만 발달되었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측면도 어느 정도 더불어 발달되었다. 종교계에 성행하기 시작한 보다 더 자유스러운 견해와 더 큰 포용력이 증가되기를 바래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 등등이 발달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봄의 표시오 여름을 약속하는 것들이다. 봄은 나무들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때이다. 여름은 열매를 생산하는 때이다. 이런 계절은 오겠지만 그렇다고 무화과의 때는 아니다. 이것은 총명의 때이나 그 총명 뒤에는 세력 있는 이기심이 있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을 돌볼 목적으로 타인을 돌본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서는 조금만을 베풀고 자신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일반적인 행복에 일치하는 것보다 더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 여름은 정의의 열매를 생산해서 인간이 선을 실컷 맛보도록, 그리고 인간이 서로 공통되는 가족의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삼는 형제가 되도록 해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모든 사람은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 것이다” 라고 주님께서 지적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증거도 생산해 줄 것이다.
33.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비유의 사용 방침을 알려 주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이 모든 일에는 해와 달이 어두워진 것,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것, 무화과나무의 싹이 트는 것 등등이 포함된다. 이런 모든 것을 본 이들은 그것들을 영적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런 모든 일을 영적으로 식별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이런 위대한 사건과 변화가 문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다가옴(nearness)은 시간과 공간 차원이 아니고 상태 차원에서의 다가옴이다. 상태의 근접은 “이런 모든 일”이 우리 자신 안에 있을 때로 이해하는게 적절하리라 본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문들을 수단으로 영적 사항들은 안으로부터 들어가고 자연적 사항들은 밖으로부터 들어간다. 그래서 이 문은 자연적 마음에 있는 문들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지고 하나의 교회를 만들게 될 때 선과 진리들이 거듭난 마음의 수준에로 입장하는 허가를 처음 얻는 곳이 자연적 마음이기 때문이다.
34. 이런 것의 다가옴이 이 절에서 다른 형체로 표현되어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이런 저런 모든 예언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역사적 의미 측면에서 “이 세대”로 의미된 것은 유대인의 종족이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의 약속이란, 유대 종족은 두 번째 강림하는 때까지 존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이 약속은 글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이를 좀 더 역사 사건에서 들추어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그들은 18세기 동안 국가적인 존재를 가지지 않았고 전 세계의 흩어졌으며 박해도 받았다. 이런 특이한 백성의 소멸을 방지하려는 섭리는 히브리 성경의 보존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보존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책도, 구약 성경의 계시의 언어도 잔존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이 세대”를 영적으로 이해해보면 세대란 거듭남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의 약속은 이러하다. 이런 모든 일은 거듭나는 가운데, 거듭남에서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 거듭남은 거듭남에 상응되는 상태가 실현되어야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35. 이 때로부터 주님은 이런 사건이 확실히 있을 것임을 말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29절을 설명할 때 우리가 살핀 바, 해와 달의 어두워짐이 글자대로 성취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과 비슷한 예언이 진즉 성취되었다는 것, 물론 그 성취는 물리적 우주에 존재하는 질서를 뒤집는 것 없이 영적 차원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사야 51장 6절에서 이 구절과 유사한 예언이 육을 입으시는 때 인간 구속의 일과 연결되고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 구절의 적용을 첫 강림의 때로 초점을 맞추면 이 예언은 비유적인 말투의 외관을 가진다. 이 예언서의 다른 문단은 이런 관점을 확증시켜 준다. 같은 예언서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65:17). 이 예언은 주님이 육으로 오시는 때 이방인을 부르시는 것과 관계되는데 그것도 이 예언이 영적인 성취만을 받았을 경우이다. 참으로 하늘과 땅은 교회의 모양새들, 즉 하늘은 교회의 내적 측면, 땅은 교회의 외적 측면이다. 이 예언이 교회와 관계되고 있다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거의 절대적으로 확실해진다.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 (이사야 65:18). 이렇게 예언이 교회를 향해 있다는 것이 명백한데 아직도 이 예언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것을 선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종교적 상황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건이 이 예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과학이 신학을 돕기에 이르렀다. 과학은 우주의 안전성 등등을 증거해주고 있다. 어쨌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고 말하신 것은 교회에 종말이 올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형성하는 영원한 진리는 남아 있어 인류를 위한 희망의 확실한 바탕이 되어준다는 것과 맞먹는 말씀이다. 간단히 말해서 말씀이 교회의 종말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를 갱신하신다는 약속,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약속이다. 본문에서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하신 그분께서 요한에게 미래 사건에 관한 환상을 보여주시어 이렇게 기록하게 하셨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그 이유가 처음의 땅은 사라졌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이사야서의 경우 예루살렘을 그분의 즐거움, 그 시민을 그분의 기쁨으로 창조하시고 있다. 그 이유가 요한은 하느님께로부터 새 하늘을 통해 새 땅에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화려한 환상이 미래 영광스러운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36. 다시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관한 주제로 되돌아오시어 영원한 분 안에 감추어 놓이신 것을 말하시되 “그 날과 그 시간은 천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내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시간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상의 마지막 시간이 아니라 마지막을 맞는 교회의 상태가 이 본문에서 주님이 다루시는 주제이다. 왜 주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이라고 언급하셨을까? 그 이유가 “날”은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를, “시간”은 교회의 세부적인 상태, 또는 교회 안의 각 개인의 특별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어느 인간도, 어느 천사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마가복음(13:32)의 경우 그 때를 모르는 대상의 범위에 “아들”도 포함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도 모르는 사람 중의 하나로 언급하시는 바, 이 대목에는 비밀스럽고 거룩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속삭이듯 말하신다. 어쨌든 오시기로 된 당사자가 자기가 올 날을 모른다는 것은 타당성있는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는 대답만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이 대목 역시 주님의 말씀을 육의 차원이 아니라 영의 차원임을 가르치시는 게 아닐까? 아버지만이 마지막 때를 알고 있는 이유는 신격(godhead)의 원리와 아버지라는 명칭이 지닌 의미로부터 찾아진다. 아버지는 무한한 그분의 사랑이고, 아들은 무한한 그분의 지혜이고, 천사와 사람은 두 무한한 속성에 응답하는 유한한 속성이다. 그렇다면 왜 무한한 지혜이신 아들이 그 때를 알지 못할까? 혹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이 지식을 소유할 참 사람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르는 이유가 “때”라는 속성, 즉 종말에 있게 되는 교회 상태의 본성에서 발견되어진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말하신 바, 그분은 그분을 아는 이들은 알고 모르는 이들은 모른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논리가 유한한 존재에도 적용된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인간도 천사도 모른다고 말해질 경우 이는 교회의 종말에 그 교회에는 진실 된 인간적인 것, 천사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고, 그 교회는 일반적으로든 세부적으로든 모두 내적, 외적 측면의 전부가 파괴되리라는 말도 된다. 이는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선포와 유추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천사는 하늘의 거주민이고 사람은 땅의 거주민인데 이들의 존재가 중단될 경우 진실로 인간적이고 천사적인 마음의 지각을 위한 바탕이 없다는 것, 참으로 진실 된 인간적이거나 천사적 원리의 수용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천국과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를 거절한다면 거룩한 사람과 천사가 그들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는 셈인 바 거기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 않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했다. 이 간결한 선포가 우리를 가르치는 바, 세상에 오게 되는 종말에는 교회 또는 교인의 마음에 어떤 진리나 지혜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신성한 지혜가 인간으로부터 알거나 획득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 남아 있을 모든 것, 또는 인간 마음 안에 남아 있을 모든 것은 선 또는 사랑에 관해 얼마간의 남겨진 것뿐이라는 말이다. 이 남아있는 것이야말로 신성한 사랑과 선함과 어떤 연결이 존재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남은 것을 수단으로 신성한 아버지는 그들을 영적으로 아시게 된다. 주님께서 또 다른 복음서에서 또 다른 형체로 위 내용을 가르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복음 21:22).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다. 선 또는 선행에 관한 얼마간의 남겨두심이 교회의 말기 즉 주님의 재림 때까지 보존되고, 진리 또는 신앙은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37. 이상 우리가 살펴 온 똑 같은 진리가 이 구절에서도 취급되고 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교회의 황폐가 여기서 기술되고 있다. 노아는 영적 교회, 또는 진리나 지혜를 원리로 삼는 교회를 뜻한다. 이에 비해 아담은 천적 교회, 또는 사랑이나 선함을 원리로 삼는 교회를 뜻한다. 교회의 상태가 노아에 빗대어 언급된 것은 교회가 진리 측면에서 황폐되어 진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과의 비교는 없는 바 교회가 선에 관한 측면에서는 황폐되지 않고 계속 얼마간은 남아 있을 것도 더불어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참으로 천적 수준의 남아 있음은 유아 시절에 저장되고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바 이의 파괴는 최후에 해당된다. 만일 이것이 파괴된다면 교회의 회복 내지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그런 불가능이 있다면 “그 날과 그 시간”을 아는 자는 아들도 아니고 아버지까지도 아닐 것이다. 더불어 교회는 “그 날과 그 시간”에 영원히 절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을 주시는 하느님, 그분의 자비에는 실패라는 게 없다. 그분의 자비는 아주 미미한 선한 것도 영원히 보존되게 하시고 장차 신성한 사랑이 지상에 새로운 종자를 형성하게 한다. 첫 기독교회의 종말의 상태가 노아 때로 비교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첫 기독 교회는 고대 교회와 유추되기 때문이다. 기독 교회는 고대 교회를 싸고 있던 천을 벗긴 격이다. 그 이유는 기독 교회의 원리가 고대 교회의 표징물로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추가 본문의 경우 거꾸로 되고 있다. 그 이유가 기독 교회의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 노아 시대는 고대 교회 시대가 아니라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 전인 태고 교회의 마지막 때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조화는 기독교의 과정에서 기독교 이전의 것이 도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금방 사라진다. 첫 번째 교회는 고대 교회와, 두 번째 교회는 태고 교회와 각각 유추된다. 기독 교회의 황폐된 상태는 태고 교회의 황폐한 상태에 비교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아 때”라 불리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영적 근원을 암시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것은 황폐함 뿐만 아니라 약속도 암시하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 노아는 위로(comfort)라는 뜻이다. 노아가 시험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질 수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바 홍수가 의미하는 시험에 이어지는 위로함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에, 고대 교회의 첫 번째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의 오심도 같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위로자로서 오신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는 악을 정죄하고 선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38. “노아 때”로 의미된 상태의 본성이 묘사되고 있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다.” 먹고 마심이란 악과 거짓을 자기 것 삼았다는 것, 장가들고 시집감이란 악이 거짓과 결합했다는 것이다. “장가들고 시집갔다”는 말은 악과 거짓이 상호적으로 바래고 활동하는 것을 흥미롭게 표현한 말이다. 악은 왜곡된 것에 장가들고, 왜곡된 것 자체는 악한 것에 시집간다. 이것이 지옥적인 결혼, 악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의지와 지성의 하나 됨, 심정과 머리의 하나 됨이다. 또한 이것은 악을 뜻하고 행하는 바 심정과 손의 하나 됨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노아는 두 번째 교회를 생산할 싹틈으로서 첫 번째 교회에서 구원하여 남겨진 자이다. 방주는 노아를 홍수 동안에 보존해준 수단이다. 이 방주는 옛 것으로부터 새 세상으로 그를 운반해준 셈이다. 교회를 안전하게 해주는 방주, 교인을 안전히 지켜주는 방주,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외에 더 다른 게 있을까?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듯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사나운 비바람을 피할 은신처를 지을 재료를 얻는다. 사악한 자의 경우 이에 대해 비웃고 그들 자신을 말씀에 의지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던 날”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이 분리되던 날, 즉 정의가 사악함에서 분리될 때이다. 그리하여 신실한 사람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지극히 높은 분의 보호 아래 놓여지게 되는 때이다.
39.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악한 자는 닥치는 심판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홍수는 영적으로 이해하면 거짓의 범람이다. 이 범람이 첫 교회를 멸망으로 끌어갔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 구절은 기독 교회의 종말이 홍수로 있어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하늘의 처방 또는 “세상”의 종말은 불로 있어진다고 선포되어있다. 불은 사랑을 상징하는데 악한 사랑을 수단으로 첫 강림의 교회는 살라진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라는 구절은 악한 자가 자기 재난의 시기를 모르고 있다는 것과 관계된다. 악한 자가 열심히 사고 팔면서 쾌락을 즐길 때 재앙이 덮친다고 말씀은 언제나 말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도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를 언제나 준비하면서 깨어 경계하고 있는 게 악한 자와 다른 점이다.
40, 41. 그분이 오시면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드러내진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각 두 쌍은 모두 완벽히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게 분명하다. 밭에 있는 두 사람은 일부는 선한 것, 일부는 악한 것에 속한다.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사람은 일부는 진리인 것, 일부는 거짓된 것에 속한다. 이 두 사람은 어떤 인물들이 아니라 두 부류을 말한다. 이 두 부류는 말씀 어디서나 취급된다. 즉 의지로부터 더 행동하는 이들과 이해성으로부터 더 행동하는 이들이다. 특히 두 번째 언급된 부류는 우리의 관심을 고조시킨다. 그들은 “맷돌을 갈고 있었다.” 갈고 있음(grinding)이란 조회함 또는 조사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지적 측면의 작용을 암시하고 있다. 맷돌을 갈고 있는 둘이란 같은 교리 안에 있는 둘, 그러나 생활에서는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이들, 그의 주변 여건은 교리와 삶이 일치할 수도 있는데 교회의 타락된 상태, 기우는 상태에 더 협력하는 쪽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 인간의 진짜 상태, 마지막 그의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생활이다는 것이다. 같은 교리라 할지라도 인간에 따라 반대되는 사랑, 즉 악한 사랑과 선한 사랑 어느 쪽의 사랑을 습득하여 유지 지탱해 갈 수 있다. 이것이 맷돌을 갈고 있는 사람이 “여인”이다는 것에서 암시해주고 있다.
42. 주님께서는 시대의 종말과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 관해 직선적인 어조를 사용하시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우리에게도 전달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길잡이가 되는 엄숙한 교훈 중 하나이다. 먼저 훈계와 경고가 한꺼번에 담긴 말씀이다.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지켜보고 있어라.” 영적으로 경계함(watchfulness)은 행동 차원만이 아닌 상태 차원, 의무 측면 뿐만 아니라 원리 측면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경계함, 또는 지켜봄은 목적에의 헌신, 목적이 실현된다는 확신을 꾸준히 간직하는 것, 그 목적을 확고히 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 등등을 다 포함해서 이르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는 믿음의 선 가운데 있는 상태, 믿음에 의거한 생활과 진리의 상태를 말한다. 믿음의 선이란 믿음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 지켜보고 있음, 경계하고 있음 등등의 말은 모두 준비(각오)가 되어 있음(preparedness)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어느 시간에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서이다. 교회의 마지막, 삶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는 우리에게서 감추여 있다. 그럼으로 인해 지켜 경계하는 일을 어떤 특별한 지식이 못하게 하거나 무능력하게 만드는 바, 우리는 그 일을 일반적 지식에 의해 준비해가도록 영향력을 받게 된다. 그분이 교회 종말에 오신다거나 또는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 각각에게 오신다는 경고는 우리로 주님의 연설을 더 잘 새겨듣게 하는 실용적인 장점을 지닌다. 우리 각 개인의 마지막 날과 그 시간과 관련된 신성한 섭리는 대단히 슬기롭고 자비로워서 우리들로부터 그것들은 감추여 있게 하는데 그런 이유는 우리로 언제나 준비를 갖추고 잘 감시하게 할 목적 때문이다. 우리는 경계함이라는 단어를 흔히 적의 접근을 발견해서 쫒아버리는 것을 연상하지만 본문의 경우 이는 그분을 만나서 친구로 환영하는 것을 연상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 자체는 피할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가능만 하다면 비켜가길 원한다. 비켜가려고 해보아야 쓸데없는 짓이라면 가장 슬기로운 행동은 그 사건에 대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주님이 어느 시간에 오실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를 아는 것만으로 우리는 언제나 준비해야 하리라.
43. 그러나 이 구절의 말씀은 앞 구절을 무효화시키는 듯 보이게 할는지 모른다.“ 만일 도둑이 밤 어느 시간대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지켜보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이 먼저 생각들게 하는 것은 도둑이 언제 올지를 집주인이 알고 있는 듯 여기게 하는 점이다. 어쨌든 이는 인간이 해야만 하는 것에 관한 묘사라기 보다는 인간이 늘 하고 있어야 하는 것에 관한 묘사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늘 그 죽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시간이 접근할 때까지 지켜보는 일은 생각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위 구절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도 결심한다. 종교에 헌신하겠다고 사업이나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는 결심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계획들은 잘못된 견해와 그럴 듯 여긴 느낌의 돌출된 결과일 뿐이다. 이는 여느 일반 사람들의 생활이 주는 즐거움이나 의무에서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인 바 오류에 해당된다. 사실 평범한 사회 생활 자체는 종교적 덕행을 세련되도록 실습하는 지정된 곳이다. 종교는 생활 깊숙이 주입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이유가 삶, 인생 여정은 천국으로 가는 방법을 실제로 배우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적극적인 유용함을 추구하는데서 찾아진다. 지상 생활을 천국적 목적에 맞춤으로 그 생활 자체를 성별되게 하는 것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천국에서의 삶은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살아지는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는 천국에서 살게 될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어쨌든 본문의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주님께서는 도둑이 들어오는데 관해 말하실 때 “hour”를 사용하시지 않고 “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 구절을 영어로 표기해보자. “If the good man had known in what watch the thief would come” 구약 성경 시대에서 “watch”는 네 시간(four hours)이었다. 그러므로 “a watch”는 “an hour”이라는 단어보다 더 넓은 시간대 즉 더 일반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시간 단위이다. 더불어 경계함, 또는 지켜봄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느낌은 지적 측면 또는 진리 측면의 상태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켜봄(watchfulness)은 선에 종점을 가진 진리, 의지 안에 바탕을 둔 지성이다. 그 반면 악한 자에게 있어진 지켜봄이란 선이 없는 진리, 육욕에 바탕을 둔 지성이다. “도둑이 언제 올는지 알고 있어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집주인”이란 위의 선한 자, 선함을 위해 진리를 소유한 사람의 상태이다. 위의 번역, 뚫고 부순다(…broken up)는 단어를 더 직역하면 파헤친다(dug through)인바 이 직역이 주는 느낌은 지적 행동이다. 그 이유가 판다(dig)는 것은 조사, 탐구, 발굴하는 것 등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다는 이 단어는 뿌리고 거두기 위해 땅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면을 수단으로 뭔가를 휙득하기에는 너무나 게을러 훔침을 수단으로 하려고 집을 부수는 것을 두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지키는 사람이 집이 뚫리지 않게 하려면 어떠한 태도여야 할 것인지 상상될 것이다. 그의 지성은 그의 마음을 탐색해 가는 상태에 계속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마음을 상징하는 이 집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획득한 지식을 거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44.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이 구절에서 “지켜보라”가 “준비하라”로 대체되고 있다. 지켜봄이 이해성 측면을 더 강하게 암시하는데 비해 준비함은 의지와 선함 측면을 더 부각되게 해준다. 지켜봄은 준비를 갖추기 위한 길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선함을 위해서 존재한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준비된 사람임을 발견할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지식을 신실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그 지식이 가르치는 미덕까지 완성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이 준비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목표로 삼아야 할 상태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람의 아들이 오는 시간이 막상 닥쳤을 때야말로 우리가 그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이 준비는 그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 그때 가서는 실감하리라.
45. 이제 주님께서는 위 가르침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이 문단에서 지켜 경계하는 사람이 주인이 맡긴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준비한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반면 주인이 더디 오겠지 하며 동료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놀면서 그분이 맡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종은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자는 칭찬을 받고 후자는 질책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신성한 직유(divine simile)를 찬찬히 살펴보자.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 종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우리는 하느님을 잘 섬기도록 창조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데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발견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섬김이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집주인을 섬기는 일, 동료 종들 즉 가족이나 교인 모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 구절의 종(servant)은 영적 측면에서 볼 때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과 관계되는 명칭이다. 이 종들이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에 따라 착한 종도 되고 악한 종도 된다. 이 종은 주인의 다른 종들을 다스리도록 되어있다. 집이란 교회이고 다른 종이란 교회 멤버들이다. 교회의 “한 종”이란 목사이고 그의 직무는 교인에게 적절한 교훈을 주는 것,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확대시켜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 각각은 “한 종”이다. 그 이유가 믿음의 식구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 형제들을 보살피는 일은 모든 교인 각자에게도 할당된 의무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각자는 자기 이웃에 봉사함을 수단으로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그분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남보다 진리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가리키는 삶의 방향과 품질에 관해서 더 봉사할 수 있다. 이렇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 세계에서 그에게 할당된 장소는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곳이리라. 이렇게 비유의 일반적 교훈은 표면 가까이 놓여있다. 이 비유의 특색 있는 의미를 개인의 마음에 적용하면 각자의 심정과 내면 삶에서 역사되는 것과 그 상태를 보여준다. 내적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인, 종, 다른 종”을 발견해 볼 수 있다. 내적 인간은 주인이고 외적 인간은 종이다. 더 내면적으로 볼 때 내적 인간 안에 있게 되는 선의 원리가 주인이고 외적 인간에 있어지는 진리의 원리는 종이다. 다른 종, 또는 식구들은 선함에 관한 애착과 진리의 지각이다. 한 종이 다른 종들을 다스리도록 주인에 의해 임무가 부여되었다. 다른 종 또는 식구들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 인 바 진리가 그것들을 다스린다. 그 이유가 진리의 임무는 질서를 생산하고 유지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선이 통치력이라 불리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또 다른 표현으로 의지는 이해성을 수단으로 통치한다. 선 또는 의지는 자기 스스로, 또는 직접 진두에 나서서 통치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선은 단지 애착일 뿐이고 의지 역시 눈이 먼 추진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식별과 판단은 진리와 지성에 소속되어있다. 한 마디로 통치와 질서가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은 법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애착과 생각을 질서 안에 가져다 놓고 질서 있게 관리해 가기 위해 선은 반드시 진리를 채용해야 하고, 의지는 이해성을 고용해야 한다. 통치는 보다 높은 것이 능동적인 힘으로서 보다 수준 낮은 것을 수동적 도구로 해서 실시되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 도구로서의 종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고 책임 있을 이유도 없는 바 칭찬이든 책망이든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은 서로 구분되어진다. 이 둘은 인간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부분들이지만 그 둘은 구분된 뜻과 행동을 가지고 있다.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렇다고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다. 외적 인간은 일종의 (실험실에 있는) 시약(re-agent)같아서 내적 인간의 것을 재연할 수 있지만 때로 내적 인간에 반대되게 작동할 수도 있다. 따라서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일 수도 있고 “악한 종”도 될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바 같이 마음의 두 부분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일종의 중간 영역(intermediate)이 있다. 이 존재는 우리도 의식한다. 이 중간 영역에서 우리는 각자의 마음과 품성, 선하고 나쁜 것, 참되고 거짓된 것 양쪽 모두를 헤아리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일까? 외적 인간이 스스로 내적 인간의 뜻에 복종할 때, 그리하여 내적 인간의 의도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자연적 애착과 욕구를 다스려가면서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때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종”이 될 것이다. 특히 본문의 “양식(meat)”은 자연적 애착과 욕구를 받쳐주는데 필요한 선을 뜻한다. 그럼에도 이 선은 마구잡이로 획득해 나누어준 선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먹여져야 하는 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내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인성은 그 인성 속에 내재하시는 신성의 뜻을 행함으로 먹여진다. 달리 표현하면 그분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뜻을 행함으로 먹여진다. 이와 같이 우리의 외적 인간의 애착들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또는 자연적 수준의 것이 영적 수준의 것에 충실하고 슬기롭게 종속됨으로 먹여진다. 위촉받는 “한 종”은 자기 때에 맞추어 “다른 종들”에게 양식을 주어 자연적 수준의 것이 진리에 의거 행함으로 선을 만들도록 하는 것, 달리 표현하면 식별력을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이 바래고 사랑하는 대로 식별해가기 때문이다.
46. “주인이 돌아 올 때에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복있는 종이다.”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에게 발표되고 약속하는 축복은 그의 성실과 지혜의 결과이다. 내적 인간의 뜻에 순종하여 외적 인간의 애착과 지각을 다스리고 제 때에 양식을 먹인 결과로 우리의 두 본성이 하모니를 이루고 하나 되어졌다. 이 하나 됨 자체가 복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하나 됨은 마음을 고요와 평화, 행복한 상태로 진입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연적 차원에서 내적, 외적 인간은 완전히 반대되어있다. 이 반대 됨은 무질서와 재난의 원인이다. 반대 됨이 제거될 때 그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회복되어 신성한 축복이 받아들여진다. 축복은 주인이 돌아와 그렇게 행했음을 발견할 때 약속되었다. 본문의 줄거리에서 비쳐지는 바, 주인은 집에 없었고, 종만 집에 남아서 전 식구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듯 여겨진다. 이는 우리의 자연적 인간은 자기가 결정한 것을 하든지 말든지 자유로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모습이다. 더불어 주인이 올 때까지 주인의 지시를 꾸준히 이행해 가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47. 이런 사람에 대한 심판의 결과가 이어진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 됨에 관해 말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셨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신성과 인성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관계와 같이 서로 관계된다. 주님 안에서 성취된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도 결과 될 수 있는 것에 관한 장엄한 대형(prototype)에 해당된다. 신성화 하심을 수단으로 주님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속성을 소유하셨 듯, 거듭남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모든 자질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외적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소유는 위촉받아 붙잡고 있는 상태인 바 진정한 소유권은 내적 인간이고 내적 인간의 명령에 따라 사용되는 것이다. 내적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진리, 그에 따른 기쁨과 즐거움, 모두는 외적 인간 스스로 선용하는 성실의 보상으로 향유하게 된다. 적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 역시 성실히 처리해갈 수 있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해 같은 기쁨을 누리리라.
48. 그러나 외적 인간의 반대적 측면이 위와 대비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악한 종이라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한다.” 사악하다고 평가받는 종의 경우가 여기서 말해지고 있다. 이 종도 성실한 종이나 마찬가지로 집주인이 집관리를 맡겼고, 주인이 되돌아 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오는 때가 늦을 것을 생각하면서 주인이 자기에게 베푼 신뢰를 남용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 그러나 실지로 위선자라 불리는 교인이 위의 악한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이 종은 자연적 수준의 인간 타입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종은 우리 속의 두 가지 차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종교적인 습관과 형식에 잘 훈련되어진 외적 인간, 그래서 영적 삶의 질서가 바깥쪽으로만 일치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구절의 경우 그의 내적 인간이 질서 있는 외적 인간에로 흘러들어 그 외적 인간에 필요한 힘을 주고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참으로 이 종은 일반적으로는 외적 인간을, 세부적으로는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명시하고 있는 바 이럴 경우의 악한 종이란 외적 인간 안에 진리의 품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선과 상응되지 않는 진리였을 때를 말한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형태 중 첫 번째가 “주인이 더디 오겠지”라고 심중에 말하는 대목에서 부상하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중얼거린 이 말은 은밀히 의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이 “생각”은 자기 소원의 소산이다. 심정 안에서의 소리는 의지로부터 솟아난 생각이고 자기 바람을 말한 것이다. 더디 옴(delay)은 꾸물거림(procrastination)이라는 것보다 그 강도가 더한 경우이다. 시간은 상태를 상징하는 바 서두름이나 지체함은 확실함과 불확실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하셨을 때 그분께서 시간적으로 곧 오리라는 것이 아닌 확실히 오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주인이 더디 오려니 라고 악한 종이 말한 것은 그의 주인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자기의 불신뢰를 은밀히 굳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종의 말에 포함된 영적 생각, 영적 상태이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그의 불신앙은 내적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내적 인간에 상응되는 모든 것에 의심을 갖는 것, 교회와 천국, 말씀과 주님의 내적 측면 모두에 결국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결과가 다음 절에 기술되고 있다.
49.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할 것이다.” “다른 종, fellow-servant”이란 동등하게 종속되는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나쁜 상태로 규율되고 불일치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로 놓여져 있다. 사람들이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 진리가 진리들끼리 일치하는 것은 대단히 이상적이다. 우리가 악한 상태일 경우 그 악한 만큼 우리가 소유한 진리는 다투게 된다. 이는 무신론자, 특히 계시된 종교는 모순된 체계라고 생각하는 무신론자에게서 발견되는 노골적인 극도의 모습이다. 다소 표면상의 형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악이 좌지우지하는 모든 마음 안에서도 진리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역력히 나타난다. 악이 뒤집어엎은 통치하는 진리는 다른 진리들을 때린다. 모든 사람을 향해 대적하려드는 이스마엘족의 손과도 같다. 진리가 침묵 속에 주저앉거나 거절당할 때 악과 거짓의 탐식이 있어진다. 이것이 “술친구와 먹고 마시는” 악한 종의 모습이다. “술친구”란 거짓을 흡입하는 악들, 그리하여 진리와 더욱 반대되게 하고 이 악한 종의 행동지침은 진리의 거짓화밖에 더 달리는 표현 해볼 수도 없다.
50.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인이란 내적 인간을 의미하는 바 악한 자의 경우 그 사람에 적당한 내적 인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주인의 옴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할까?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내적 측면은 상이하지만 어쨌든 모든 인간은 내적 인간을 가지고 있다. 악은 참된 내적 측면을 닫히게 하여 마치 그것이 존재 않는 듯 만든다. 이것이 “주인이 더디 오려니”라고 종이 심중에 말한 것에 해당된다. 선의 저자되신 분, 행복을 나누어주시는 그분의 오심이 실로 지연되는 이유는 외적 측면을 규율하고 있는 악 자체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꼭 오신다. 설사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저 세상에서라도 꼭 당도하신다. 그 이유는 심판은 내적 측면이 열림으로, 모든 생명이 기록된 내적 기억의 책이 펴짐으로, 행동을 있게 한 목적이 밝히 드러남으로 결과 되기 때문이다. 말과 행위가 외적 기억 안에 씌어지는 동시에 그 동기는 내적 기억 안에 새겨진다. 이것이 열려질 때, 즉 외적 인간 안에서의 행위와 모든 기록된 말들이 설명될 때 주님은 오신다. 그가 그분을 찾지 않는 날에 오신다. 그 이유가 영의 내적 기억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그 봉인을 떼고 그 속에 담긴 것을 밝힐 때까지 내면의 기록은 침묵 속에 남아 있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내면의 상태가 밝히 드러나 완결될 때 자기 악을 확인하게 된다.
51. 내 주인은 더디 오겠지 라고 생각해 처신한 종에 대한 주인의 판결이다. “주인은 그 종을 자르고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보낼 것이다.” 조각조각 자른다(cutting asunder)는 표현은 심판의 결과, 또는 내적 측면이 열려 형식적이고 사기 뿐인 제자로부터 참되고 선한 것들을 떼어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형식에 불과한 종교 품성만을 지닌 이들은 바깥쪽으로만 선과 진리를 옷입고 있는 바 이는 거짓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어 예언자인냥 치장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바깥쪽 치장을 벗기면 그들은 본연 그대로의 자신, 악한 종의 품성이 적나라해진다. 그들이 갖고 있던 선과 진리, 사랑과 믿음이라는 우수한 품성은 그들의 외적 측면에서 부착되었을 뿐 그들의 본질적 품성과 하나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선자, 모독자들이 있는 곳이 그들의 지정석인 바, “거기에서 그는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슬피 움(weeping)은 악으로부터 발생하는 재난이고 이를 갊은 거짓으로부터 야기되는 재난이다. 슬피 움은 심정의 통곡이고 이를 갊은 지성의 눈물이다. 사실 이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슬피 우는 게 아니라 실망에 따른 분노 때문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악으로 꽉 찬 의지가 꼼짝 못한 탓에, 뒤집기만 하고 사기만 쳐왔던 이해성의 오류가 투명해진 탓에 슬피 우는 것이다. 악과 거짓은 자기 스스로 자기 벌을 가져온다. 저 세상에서 이는 당연한 이치 아닐까?

마태복음 23장 해석

23

바리사이파 사람의 간계를 깨트리시고 사두가이파 사람의 오류를 논박하시고, 그분께서 인간 사이에 건설하러 오신 신성한 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 중 얼마를 지혜의 보물 창고에서 꺼내 주셨다. 이제 주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위 두 파의 품성을 가르쳐 주시고 그들이 겉치장한 거룩함 안에 감추어 놓은 죄들, 거꾸로 된 합리성으로 그럴듯하게 치장한 오류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 뒤 그분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품성이 무엇인지 꼬집어 주시고 부패한 그 품성의 결과에 대해 발표하신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군중과 제자는 새로운 사람 또는 새로 된 만큼의 사람 속에 있는 내적, 외적 원리들을 표현한다. 그 반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옛 사람 또는 아직 덜 갱신된 만큼의 사람 속에 있는 내적, 외적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 두 원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반대된다. 어쨌든 이런 의미의 일반적 응용은 개인 차원에서 찾아보는 게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2, 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말한다.” 앉음(sitting)은 의지 측면, 서 있음은 이해성 측면에 속하는 자세이다. 누군가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그 의지를 소유하는 것, 또는 그의 의지가 자리잡은 삶의 목적이나 사랑에로 진입해 소유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 모세와 관련되어 모세의 자리에 그들이 앉은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들은 모세가 표현했던 율법을 가르치고 집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목적을 도모하기 위해 가르쳤고 집행했을 뿐이다. 율법의 진짜 목적은 하느님을 영광되게 하고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영예와 이득 외 더 다른 목적도 없이 가르치고 집행한다. 이럴 경우 인간의 뜻이 통치하고 하느님의 진리가 그 뜻을 섬기게 된다. 이럴 때조차, 다시 말해 선함이 인간의 발에 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또는 진리에 아무런 공감을 보이지 않는 때일지라도 때로 진리를 열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백성에게 이렇게 훈계하신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따라가야 하나 그들이 보인 본보기는 금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준수함의 수준 있는 구분이다. 비록 그들의 입술을 통해 진리가 전달되고 있다 해도 진리는 참되다. 그들이 입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여 인도해 간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이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가르침이 그들의 삶보다 더 나을 때 진리는 수용하고 악은 배척 하는 게 우리의 의무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지키고 실행하라고 요구하셨다. 이는 진리를 이해성과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말과 일에서 그 진리를 명백해지게 하라는 것이다.
4. 주님께서는 율법의 권위를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해주신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닭하려 하지 않는다.” 유대 성직자는 율법의 부담을 안겨주는 의무들만 가지고는 흡족치 못해서 율법의 교훈을 다시 세밀하게 구별하고 예식 준수를 더 배가시키는 수단으로 자신들은 질머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만들어 타인의 어깨 위에 얹어 놓았다. 사실 성직자의 의무는 누군가가 그의 불가결한 삶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도웁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불필요한 짐까지 만들어 짊어지게 했고, 타인이 그것을 지고 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런 식의 짐을 지워 놓지 않았을까? 때로 명확한 우리의 의무조항에 게을러지도록 불필요한 규정으로 짐을 만들어 우리 어깨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확실히 요구되는 의무에 게을러지도록 사소한 것들로 마음을 가득 메운다. 우리는 정말 용의주도해야 하는 의무에 게을러지도록 비합리적인 걱정 근심으로 삶을 짓누른다. 어찌됐든 이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행동이 영적으로 무엇을 함축하는지 살펴보자. 바리사이파 사람은 일종의 영적 십장(taskmaster)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벽돌에 관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강요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짚도 주지 않고 벽돌을 구워 내라고 다그쳤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들은 호의적인 사람들을 오류로 비비꼬고 사기 치는 겉 모양새를 수단으로 자기들 권능 아래 있도록 발버둥치는 기생충 같은 영을 표현한다. 그들의 요구 사항은 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영혼의 영적 생명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워 놓은 짐은 무겁고 괴로운 것들이다. 그 이유가 그 짐은 외관으로는 멀쩡하고 괜찮은 듯 여겨지지만 내향으로는 악과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와 이해성 모두의 생명을 압박한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은 그것들이 모두 악과 거짓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 위에 짐을 놓는다. 그 이유가 사람은 선과 진리라는 영적 원리를 의미하고 이 선과 진리가 진실로 인간답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내려 누르고 압박해버리려는 그들의 바람이 “사람들의 어깨에 짐을 얹어 놓았다”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어깨는 가장 큰 힘, 즉 의지와 지성이 합쳐져서 나오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짐을 멘 사람들의 어깨는 그 짐을 메도록 조장한 사람의 손가락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가장 큰 힘과 가장 적은 힘의 대조를 보이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 타인의 어깨에 얹은 짐에 대해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바리사이파 사람이 표현한 것, 위선적인 것들은 타인의 의지와 지성, 온 힘이 자기들에게 종속되기를 바라되 그들에게 자발적인 도움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바꿔 말해 하느님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쾌락자들은 경건함과 거룩함을 바깥쪽으로 보이기 위한 것밖에 더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 성구함은 성경의 어떤 문구를 적은 양피지 같은 것을 넣은 작은 가죽 상자인데 이것을 손이나 이마에 묶어 두었다. 이런 관습은 포로로 잡혀가던 시기 까지 에서는 존재했던 것 같이 여겨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관습은 모세의 명령, 즉 “…이것을 너희 손에 새긴 표나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기념물처럼 여겨 야훼의 가르침을 되뇌어라” (출애굽기 13:9) 라는 모세의 명령을 준수하겠다고 해서 파생되어졌다. 기다란 술(fringe)은 이스라엘 백성이 옷자락에 달았는데 이는 주님의 명령을 상념하여 지키려는 수단이었다 (민수기 15:38). 이런 형식들은 내향의 원리에 대한 바깥쪽 표시였을 뿐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종교의 내향적 영은 좁히고 줄이는 반면 바깥쪽 형체는 확장하여 더 커지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구 넣는 갑도 더 크게 만들고 옷자락의 술도 더 길게 했다. 그들이 더 크게 한 성구함이란 선의 바깥쪽 형체를 의미한다. 성구함을 붙여 놓은 손이란 그 손이 수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들이 더 크게 한 옷자락이란 말씀의 외적 의미를 포함하는 외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들의 겉옷은 일반 진리를, 그 옷자락은 최말단 진리를 의미한다.
6, 7.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옷자락을 크게 만든 사람들 같이 보다 상급에 속하는 신성한 의무 수행으로 명성을 얻기보다는 자기들 자아 사랑이 만족되는 보다 실체적인 어떤 것을 찾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지고 있다.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란다.” 다시 여기서 우리는 통치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야할 것 같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자리, 종교적으로도 높은 자리, 높은 자리라면 모두 차지하고 싶은 야망으로 꽉 차 있다. 그래서 공적 존경과 존엄을 표시해주는 칭호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사실 영적으로 볼 때 잔치(feast)란 선의 교제, 회당은 진리의 교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잔치 석상이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자기들의 자아 의지와 자아 사랑을 천국의 선과 진리에 은근히 주입시켜 자기들이 드높여지는데 한 가지 수단으로 활용하려드는 것이다. 장터, 즉 선들이 팔리고 사들여지는 장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고 거기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상급의 지혜가 칭송하고 덕망 있다는 신용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가 특출할 뿐만 아니라 독단적으로 권위 있는 자로 인정되어 랍비, 스승, 선생이라 불리워지기를 강렬하게 바란다.
8, 9. 그 다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신다.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가장 평이한 말투로 영적 진리를 표현하여 보여준 예들 중의 하나이다. 이 본문이 사회에서 흔한 관계, 선생과 학자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을 주님께서 뜻하신 게 아니다. 박사나 선생인 사람들이 그렇게 불리고 그렇게 불러주는 것, 더욱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선생이고 하느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선생은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선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진리와 선함 안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어 있다 해도 주님만이 이런 천국적 원리의 저자요 근원되신다. 선생과 학자는 같은 계열이다. 모두 하늘로부터 같은 계열의 선물을 받는 그릇이다. 단지 그릇의 크기나 시간 관계에서 이쪽이 저쪽보다 더 우수할 뿐이다. 한 분만이 모든 사람의 선생이다. 가르침을 받는 모든 사람은 형제이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 자체를 표현한 이름이다. 진리 자체 말고 누구로부터 우리가 진리를 받을 수 있을까? 주님이 위 선포로 진리의 모든 권위는 그분께만 소속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외 누구에게서도 진리에 대한 권위를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에 관련된 문제들에 권위자 되신다. “율법과 증언하는 것”은 기독인의 증거가 되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런 최말단의 테스트에 모든 교리적 주장은 가져와 놓여진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의거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선생 되신다면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아버지 되신다는 것은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특별히,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가 그분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바 이 때야말로 그분만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누구를 두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까?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Spirit)에서 태어난 것은 영(spirit)이다. 따라서 인간적 도움이 있어 우리의 두 번째 출생이 있어지게 되었다 해도 그 인간적 도구가 새 생명의 저자는 아니다. 생명이신 그분만이 우리를 생명 있게 만들 수 있는 바 그분께만 그 영광이 소속되어 있다. 무한인 그분의 사랑이 생명이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되면 그 생명은 영원하다. 이 세상에서 선생 되는 사람을 선생이라 부르는 것, 아버지 되는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부르는 게 타당하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을 놓을 때 죄가 범해진다. 순수한 영적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신성한 선과 진리의 자리에 인간적 선과 진리를 놓을 때, 그리고 무한하신 분, 영원하신 분께만 속하는 권능을 인간적 권능으로 돌릴 때 죄가 범해진다.
10. 앞 구절과 비슷한 듯 여겨지는 훈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말씀 안에는 번복되는 의미 내지 구절은 없다. 이 구절의 금지 조항도 구분된 의미가 있다. “너희는 스승들(masters)이라 불리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참으로 한 가지 차이가 있다. 8절에서 제자들에게 랍비라 불려서는 안된다고 했고 이 구절에서는 스승이라 불려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똑같은 취지라 해도 랍비는 스승보다 더 큰 중요성과 위엄을 스승이란 칭호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하는 바 신성한 진리 자체에 더 직접 반대되어 진다. 그리고 “스승”이란 단어가 “스승들”이라는 단어로 고쳐져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전체로서의 진리에 관한 게 아니라 개별적인 진리들, 분리된 어떤 한 개의 진리들,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진리는 전체가 아닌 미미하다고 여기는 작은 진리 하나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 모든 지식과 지혜는 그분의 소유임을 주장해야 한다.
11. 우리가 타인에 의해 섬김을 받고 칭송되어도 그것이 우리를 위대해지게, 또는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분께서는 삶에서 수행되어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를 전달하셨다. 이 진리는 세상의 조건과 실습에서 온전한 혁명을 해내게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구절의 요구는 위대한 원리, 즉 “너희는 먼저 그분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에게 더해지리라”는 말씀과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일의 유용함(usefulness)이 첫째이고 그 일에 대한 보상은 두 번째이다 그러면 그 일의 결과에 걱정이 있을 수 없다. 수고함으로 명예나 드높여짐을 구하지 말라. 우리가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 직무 수행의 혜택이 타인을 위해 얼마나 유용한지, 유용하도록 추구하고 두 번째로 자신에게도 유용하도록 강구해야 할 것이다. 위 구절이 제자를 향해 발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교회의 모든 멤버, 그리고 각 교인 안에 있는 교회의 원리를 향한 발표라고 생각되는 바 이로부터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원리가 그 자체 가장 위대하다는 것, 이 원리가 우리의 품성을 가장 우수하게 개선시켜 준다는 것, 또는 우리를 최고로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원리란 사랑의 원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인간을 사랑하는 것밖에 더 어떤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사랑의 위대함은 유용함(쓸모 있음, use)에 존재하고 유용함으로부터 발생된다. 마치 육체 속의 심장과도 같다. 유용함은 가장 위대한바 가장 공들여야 하는 원리이다. 통치자 그러나 모든 사람의 종이다. 이는 창조자가 지적하셨고 구세주가 가르친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측량이다.
12. 위대한 만큼 겸허해야 한다. 겸허함(humility)은 낮은 지위를 차지하는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심정 상태를 잘 가꾸어 가는데 있다. 그래서 겸비한 상태는 자아에 소속된 것을 포기함에 있게 된다. 자기 본위는 자기를 드높이는 것이다. 자기 포기가 겸비함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자기를 높이려 들 때 자아 자체가 깍아 내려져 그 인간 전체의 등급이 저질이 된다. 그러나 자아가 가장 낮은 자리에 앉게 될 때 그 자아는 겸손해져 드높여진다. 그 이유가 자아 사랑 자체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에 종속되고 종노릇함으로 순수해져 품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이 자기 고유의 자아(selfhood)를 잘라 버릴 때 주님께서는 새롭고 천국적인 자아(selfhood)를 주신다. 인간의 자아는 그의 내적 생명, 그의 의식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생각과 애착의 복합체, 그가 “나(me)”라고 부르는 실지의 그 사람 자신이다. 이것은 본성적으로 악이다. 그러나 그것이 종속되는 만큼에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새 자아를 주신다. 이러면 그는 새로운 생각과 애착을 가진 새 피조물이 되고, “나(me)”는 또 다른 더 높은 생명을 의식하게 된다. 신성한 권능이 자연적 자아가 파괴된 그 위에 세운 이 새로운 자아는 원래의 자아가 박탈되든지 그 반대로 번창하든지 하는 때보다 더 진정한 자아이다. 인간의 자아가 주님의 것으로 더 완전하게 될수록 그의 자아는 더 완전한 자기 고유의 자아로 된다. 그의 의식적인 자아는 드높여진다. 그의 자유와 합리성, 그의 지각과 기쁨은 더 높은 질서에 있다. 그것들이 자연적이였지만 이제 영적 수준이다. 그것들은 지상적이었지만 이제 천국적이다.
13. 위와 같은 것은 섬기는데서 참된 위대함을, 겸손함에서 진정 드높여짐을 발견한 사람들의 행복의 체험이다. 그러나 신성과 천국에 속한 어떤 것보다 자아를 드높이려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의 체험은 불행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참된 삶은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을 그 자체 낮추어서 하느님 아래,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데 있는 반면 왜곡된 삶은 하느님에 속한 모든 것을 자아에 종속시키고 자아를 섬기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위선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바깥쪽으로는 삶을 거룩하게 만들지만 내향으로는 모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주님께서 묘사하신다. “너희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늘 나라를 닫아 놓고 있다…” 개인 한 명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자연적 마음은 세상의 형상이고 그의 영적 마음은 천국의 형상인데 이것이 그의 하늘에 해당된다. 이런 하늘이 악에 의해 닫혀져 있다. 특히 위선이라는 죄에 의해 잠구어져 있다. 닫혀진 대상인 “사람들”이란 말씀 속의 진리들, 특히 이미 습득해서 자연적 마음 안으로 들어와 있는 진리들, 거기서 자연적 목적을 섬기도록 간직된 진리들이다. 주님께서 더 말을 이으신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들어가게 하지도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을 못 들어가게 한다.” “자기 자신, themselves,” 이것을 구성하는 요소인 그들의 생각과 애착들, 그들은 이것들을 자연적 세계를 넘어 영적 세계로 결코 들어올리지 못하는 바 그들의 애착과 생각 속에 있는 말씀 속의 진리, 즉 그들로 하여금 위쪽을 향해 추구하도록 해주는 진리마저 들어 올려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진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내려 왔고 다시 천국으로 승강되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도록 고안되어 있다. 자연적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이 진리들이 거기로 들어가라고 방치해 두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진리를 받는 그의 수용성은 자연적이고 죽은 상태로 남아 있는다. 더욱이 그 자체 거룩한 진리들마저 모독되어있다. 그 이유가 그 진리들이 악한 목적에 도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이런 상태는 화를 입는 범주에 소속된다. 그의 마음이 선함과 진리를 내향으로 신실하게 받는 그릇이 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 원리가 그들 가슴에 실어다 주는 축복에 문을 닫아 버린다.
14. 그들이 범하는 악, 그들이 배척한 축복은 위의 사항만이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과부들의 집을 몽땅 삼켜버리는가 하면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늘어놓는다.” 과부란 선 안에 있되 진리를 바래는 사람들을 뜻한다. 추상적으로 볼 때 진리를 바래는 선이다. “과부의 집”이란 선이 체재하는 의지, 자질 자체, 또는 선의 원리를 받쳐주는 수단까지 뜻한다. 그 이유가 집은 과부가 거주하는 장소 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산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과부의 집을 삼켜버린다는 것은 선을 사랑하고 행하게 하는 참 능력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 위선이 이러하다. 위선은 의지에서 모든 선을 박탈하고 심지어 선을 도모하려는 모든 능력까지 박탈한다. 그 이유가 위선은 선 자체 뿐만 아니라 아껴놓은 선까지, 선이 의지하는 참 자질까지 파괴하기 때문이다. 과부의 집을 삼켜버린다는 것에 연결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늘어놓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을 조롱하고 인간을 현혹시키는 행동, 그것이 단 한 번의 행동이라 해도 그보다 더 모독된 게 있을까? 긴 기도를 수단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과부에게 사기를 쳐 그녀들의 가산을 강탈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이렇게 설명된다. 이해성이 의지에 노예가 되어있을 때 이해성은 가장 아리따운 외모로 가장 지저분한 행위들을 장식해준다. 이런 겉치레가 커질수록 타락함도 더 깊어진다. 타인의 심정을 훔치는 사람은 자기 심정도 다 먹어 치운다. “이 때문에 너희는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더 비참한 처벌을 그 영혼으로 피할 수 있게 해주시려는 배려에서의 경고이다.
15. 위선자들에 대한 또 다른 책망이다. 이런 죄의 결과는 더 큰 화를 입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이 책망은 누군가를 개종시키되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어떤 특별한 신조를 위해 개종하게 하려는 종파적인 영이나 그런 열정을 심하게 견책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의 전파를 정죄하시는 게 아니라 특정한 신조의 세력과시를 위해 타인을 개종시키려는 것을 정죄하시고 있다. 영적 측면에서 이 구절에는 더 실용적인 의미들이 담겨있다. “바다와 육지”란 진리와 선에 관한 말씀의 글자 의미이다. “누군가를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는 것은 어떤 진리가 자아 사랑을 지지하도록 뒤집으려고 말씀 전체를 수색하는 것이다. 개종시키는 목적은 이외 한 가지 더 있다. 자기들 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런 이중의 속성은 개종자를 악하고 거짓됨 모두에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위 구절에 두 겹의 품성이 함축되어 있는 이유는 거짓을 출생시키는 악이 지옥이고, 지옥의 자식이란 악에서 출생된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6-19.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법학자의 행동을 책망하시되 이제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이다. “너희 같은 눈 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들은 지적으로 눈이 멀어 있다. 그들은 일시적일 뿐인 이익에 관계된 것들을 보는 데는 재빠른 시각을 가졌지만 영원한 복지에 관계되는 것은 식별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속성을 지닌 이들이 눈먼 인도자들이다. 이런 영향을 받고 있는 이해성은 눈이 먼 상태로 인도할 뿐이다. 이렇게 언급하신다. “너희는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하니 이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황금이냐? 아니면 그 황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전이냐? 또 너희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하니 이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그 예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제단이냐?” 이 말씀으로부터 나타나는 바, 성전 또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 것도 아니나 성전의 황금 또는 제단의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백성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인간의 재간으로 이런 불법적인 하찮은 것들이 고안될 수 있는지 상상해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유대의 학식 있다는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지킬 조항들을 얼마나 복잡하게 얽어놓고 그들이 지키기에 너무 힘들게 했는지 만큼은 여실히 알게 해준다. 어쨌든 위 말씀의 세부사항이 우리를 위해서는 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우리 영혼에 흥미 있는 더 깊은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말씀 안에 있는 “맹세함”은 영적으로 진리를 확증함을 뜻한다. 그러면 확증은 어디로부터? 라는 의문이 있게 된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언급된 것들의 영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즉 맹세하거나 맹세한 게 아니다 라는데 따른 대상의 영적 의미이다. 성전은 신성한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이 인성은 그분의 몸이라는 성전, 특히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다. 제단은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이런 연유로 성전과 제단은 가장 거룩한 대상물이고 성별되는 모든 것의 근원도 된다. 성전과 제단이 그분을 표현했듯 모든 확증도 그분으로부터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증인되신다. 그분은 진리뿐만 아니라 믿음의 저자이시고, 선 뿐만 아니라 사랑의 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과 제단을 두고 맹세해야 한다. 성전에 있는 금을 두고 맹세하고, 제단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와 선보다 등급이 더 낮은 어떤 것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을 확증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해 이는 무한하신 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을 유한한 것 안에서 발견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 거룩하지 않는 어떤 것에 신뢰를 두면서 거룩함 자체이신 그분께 우리가 신뢰한 그것이 거룩해지게 해달라고 의뢰하는 것이다. 성전의 금은 성막의 금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막의 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빠져 나올 때 차용해 지참했던 것을 헌납함으로 있어진 금이다. 성전의 금이 거룩해진 것은 제단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의 금, 제단의 예물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은 신성한 선과 진리에 의하지 않고 기껏해야 성전과 제단 덕분에 거룩함을 입은 물건을 두고 선과 진리를 확증하는 것이다. 덜 나은 것으로 선과 진리를 확증하는 사람은 더 나은 것들을 배척한다. 그러나 더 높고 더 나은 것으로 선과 진리를 확증하는 사람은 덜 나은 것까지 포용한다.
20-22.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며…” 최고의 권위는 그 권위와 하모니를 이루게 하면서 그 아래 등급의 권위를 포용한다. 주님께서 더 이으신다.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다.” 위 사항은 마치 더 수준 낮은 것을 두고 맹세하되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을 포용한 듯 여겨지게 한다. 따라서 주님의 선포 안에 담긴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전보다 덜한 어떤 것을 두고 맹세함이란 신성보다 덜 권위가 있는 것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몸인 성전을 배척하듯 그 안의 신성을 배척한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을 인정함은 그 안에 내재하는 신성까지 인정한다. “아들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를 가진다.” 똑같은 원리로 하느님의 옥좌로서 하늘을 인정함은 그 위에 앉으신 그분도 인정하는 셈이다. 하느님의 옥좌로서의 하늘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분의 정부는 거기에 그 진리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하늘은 말씀의 영적 의미도 아울러 의미하고 그 안의 신성한 의미는 그분의 옥좌이고 신성 자체는 그 위에 앉으신 그분도 의미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함은 말씀 속의 영성과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전을 두고 맹세함은 주님의 신성, 즉 그분의 인성이 신성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말씀의 신성과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이외 누구를 두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모두 진리와 선함을 주님과 말씀에서 찾고 자기 심정과 삶의 원리로 만들 수 있는 확증 또한 주님과 말씀에서 찾는다.
23.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또 다른 악이 화있을 것을 발표하신다.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예식에 관한 율법은 꼼꼼히 준수하려 했으나 품행에 관한 율법의 준수는 소홀히 했다. 주님께서 이런 행동을 정죄하셨지만 그렇다고 그분께서는 그 반대로 품행에 관한 율법을 준수하고 예식에 관한 것을 소홀히 하라고 사람들을 가르치시지는 않았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품행에 관한 율법은 본질이고 예식적 율법은 형식이다. 형식은 본질을 배격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본질은 형식을 배격하지 않는다. 중요한 사항을 이행하는 사람은 덜 중요한 사항이라 해서 미결된 채로 방치하지 않는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사람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에 관련된 행동을 생략할는지 모르나,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사람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잊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 없어도 경건함은 있을는지 몰라도 경건함 없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 이해성 안에는 총명과 정의가, 심정 안에는 사랑의 자비가, 행동 안에는 신앙 또는 진리의 일이 있어야만 종교라 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소양을 갖춘 종교인은 사람을 섬기기에 앞서 하느님께 경건함을 먼저 보낸다.
24. 더 나아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렇게 불리운다.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찮은 것에서 선행을 사랑했듯 악행도 하찮은 것에서 미워했다.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과 일치 않는 어떤 것을 허용하거나 행할 경우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육 일 동안의 생활 속에서 자기 이기심을 게걸스레 채우느라 급급해한 것은 죄라고 생각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주도하는 사랑은 우리로 이기심에 눈멀게 하고, 명예를 사랑함은 정작 우리를 인도하는 대상도 아닌 사소한 것을 부풀려 그럴싸하게 명분화 하려든다. 이런 내용 말고도 주님의 위 말씀에는 내적 측면의 의미가 더 있다. 하루살이와 낙타를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로서 생각해 볼 때 둘 다 불결하다. 날개달린 곤충인 하루살이는 생각 측면의 목적물, 짐승인 낙타는 애정 측면의 목적물을 의미한다. 전자는 이해성에, 후자는 의지에 소속된다. 우리가 사소한 잘못은 꼼꼼히 따지고 내면의 악, 더 흉측한 악은 적당히 넘겨갈 때, 타인의 사소한 생활 습성도 죄악으로 날랜 비판을 서슴지 않으면서 정작 자기 속의 악은 관대하게, 당연하게, 심지어 하나도 없는 듯 자기 반성을 할 때 우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이 된다.
25. 위와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 같은 행동과 가르침의 원인에 대해 듣게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잔과 접시의 안과 밖이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다. 내적 인간에는 원리들이 있고 외적 인간에는 규율이 있다. 내적 인간 안에 동기가 있고 외적 인간 안에 행동이 있다. 규율을 중시하나 원리를 무시하는 사람, 행동은 조심하나 그 동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밖은 깨끗하게 하지만 안은 부패되고 불결한 채 방치하는 사람이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이런 다른 점은 이해성과 의지, 선하고 참된 것에까지 넓혀 생각할 수 있다. 잔(cup)은 이해성이다. 그 이유가 잔은 진리 측면을 암시하는 포도주 또는 여타 액체를 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접시는 의지이다. 그 이유가 선을 의미하는 음식을 담기 때문이다. 겉은 깨끗한데 속이 더러운 잔이란 말은 올바르게 하면서 나쁜 것을 생각할 때이다. 겉은 깨끗한데 속이 더러운 접시란 행동은 올바르게 처신하는데 나쁜 것을 의도할 때이다. 우리가 생각 속에서 믿지도 않는 것을 입술로는 습관적으로 내뱉을 때, 우리가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을 바깥 생활 측면에서는 매우 좋아하는 듯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 아마 겉은 깨끗하면서 속은 착취와 탐욕, 즉 악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닐까?
26. 이렇게 훈계하신다.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이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를 훈계하신다. 내부가 깨끗함은 밖의 깨끗함을 더 확고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즉 정신적 삶, 영적 삶이 순수해지는 것은 동기에 속한 것이 순수해지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삶의 목적이 바뀌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의 전체 역시 바뀌지 않고 있다. 그의 목적이 지닌 그대로가 그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 각자가 지닌 삶의 목적은 자연적 수준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아와 세상 사랑이다. 인간은 이런 목적을 악덕한 삶과 대화, 뿐만 아니라 품위 있는 삶을 수단으로 추구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만일 이런 목적들이 마음에 남아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설사 외모가 반듯해 보이고 그의 삶이 존경받을 정도라 해도 본질적 변화는 결과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 행동 뿐만 아니라 동기 속의 악을 제거하는 것, 내뱉는 말, 뿐만 아니라 생각으로부터 서도 거짓을 제거하는 것, 인간의 눈으로 점검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이 보시는 견지에서 내면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게 우선 순위라는 말이다. 우리가 내적 측면만을 보살필 필요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기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행동은 저절로 잘 되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금물이다. 동기도 중요하지만 행동도 중요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비록 행동이 선하고 목적이 악할 경우 그 목적이 선해지고 행동이 악해질 수 없다. 우리가 나쁜 목적을 성취하려고 선을 행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우리는 선한 목적을 섬기도록 악을 행할 수 없다. 악들이 우리의 삶을 볼꼴사납게 계속 만드는 동안 추한 삶 뒤에는 악한 동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답해볼는지 모른다.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권면하시는 것은 외형적으로 깨끗하게 보이는 것의 안쪽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지 바깥쪽의 깨끗함은 오로지 눈이 보이는 수준뿐이다. 바깥쪽 선함은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에 의해 생산되고 유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압력이 제거될 때는 언제든지 선은 사라지고 악이 심정 속 그 원천으로부터 생산될 뿐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바깥쪽이 깨끗할 수 있는 것은 안쪽의 깨끗함으로부터 서만 가능하다. 외적 깨끗함과 내적 깨끗함이 거행된 이후라 해도 이는 구분되는 신성한 일이다. 이에 관해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표징적으로, 그리고 구두로서 가르치셨다.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안이 깨끗하다 해도 우리는 계속 밖을 깨끗이 하도록 요구되어지고 있다. 안과 밖이 깨끗해짐은 주님에 의해서만 결과 된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요한 13:8).
27, 28. 바리사이파 식의 상태 중에서도 더 험한 형상이 이렇게 말해지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여기서 표현된 모양새가 말해주는 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내적, 외적 측면 모두는 불결하다는 것, 생체가 죽어 있다는 표시인 음침함을 감추게 하거나 덜 암울해지게 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갱신되지 않은 본성이 지닌 음산함을 감추이게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외적 측면의 표면을 덮은 색깔, 마치 내적 측면이 매장되어 있는 무덤을 칠한 색깔은 단지 바깥쪽으로 아름답게 나타날 뿐임을 알게 해주고 있다. 외형의 선은 무덤에 금칠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 살 수 있는 날이 몇 달 남지 못했는데 우리의 상태가 죄 뿐이라면 나의 상태는 죽음과 썩은 것밖에 더 보여지는 게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얼마나 찔끔해 할 수밖에 없을까! 그 다음 악들은 무덤 같이 거짓으로 꽉 차 있다는 것, 이 거짓이 죽은 사람의 온갖 불결한 생각과 바램들이다는 것을 환히 알게 될 것이다. “죽은 사람의 뼈”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그 이유가 “사람”이라는 표현은 진리들을 의미하는 바 죽은 사람이란 선이 박탈된 진리, 생명이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뼈란 진리에 관한 지식들 또는 과학물이다. 뼈가 생명체의 기관으로서 육체의 아름다운 골격에 해당되지만 그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고 뼈만 남아 있다면 죽었다는 것만 확인되게 하듯, 진리의 지식은 살아있고, 숨쉬고 행동하는 신앙과 사랑의 몸이 건설되는 기초 역할에 충당되어야 한다. 이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영적이고 영원한 죽음에 관한 유령 같은 증거밖에 더 되는 게 없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29, 30. 또 다른 화가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떨어지고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놓고는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떠들어댄다.” 예언자의 무덤을 단장하는 일은 짐짓 그들의 공적을 경건히 인정하는 듯, 그리고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행동에 찬동하지 않는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구절은 심정을 보시는 주님께서 그들의 양심에 말하시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내향적인 증언에 호소하시는 것이고 겉으로는 경건한 행동인 듯 보여도 그것은 위선을 갖고 놀아나는 것임을 폭로하시고 있다. 그들의 여타 다른 선행처럼 이 구절의 행동도 자기들은 선조들이 살육한 예언자의 친구 되고 의로운 자와 한 부류라는 것을 타인에게 현혹시키려 있어진 것, 따라서 예언자나 의로운 자가 공경 받듯 자기들도 공경 받아야 함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려드는 처세에 불과하다.
31.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그들의 양심은 자기들을 고발한 진리에 대한 목격자가 되고 있다. 이 규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되 먼저 아버지에게 가서 그를 묻게 해달라고 허락을 얻으려 했을 때, “죽은 자가 장례를 치르게 내버려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마음에 떠올려 보아야 할 것 같다. 죽어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기 죽음을 묻어야 한다. 그들은 생명 있는 그분의 메시지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서 죽어버린 특사에게는 존경을 보내고 있다. 이 구절의 영적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는 세부사항들의 영적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예언자와 의로운 자란 진리와 선함에 관한 원리들이다. 유대 백성의 조상이 예언자를 죽였고 이 백성들이 그들의 무덤을 세웠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볼 때 무덤은 생명 또는 천국을 의미하고, 반대 의미로는 죽음 또는 지옥을 의미한다. 먼저 무덤이 생명 또는 천국을 의미하게 된 까닭은 천사들이 죽음에 관한 어떤 생각도 가지지 않는 터에 무덤을 두고도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덤을 놓고서도 생명의 계속, 즉 부활을 지각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영혼의 측면에서는 다시 일어나고 육체의 측면은 매장되기 때문이다. 매장이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에 거듭남 역시 의미해준다. 그 이유가 거듭남은 인간의 첫 부활인데 그의 옛 사람 측면이 죽는 만큼 새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듭남으로 인간은 죽은 자로부터 살아있는 자가 되어간다. 이와 같은 것이 무덤에 관련된 의미이다. 그러나 위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무덤은 죽음 또는 지옥을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사악한 자는 생명에로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악한 자와 관련해 무덤이 거론될 경우 천사들은 지옥밖에 더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지옥이 무덤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위해 세운 묘지, 의로운 사람을 위해 장식해 놓은 무덤은 반대적 의미를 가진다. 예언자들이 사악했던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조상에게 살육 당한 예언자를 위선적으로 존경을 하여 종교적 밑천을 삼으려는 목적이 사악했던 것이다. 참으로 그들의 “조상”이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악들이다. 그리고 그 조상의 “후손”되는 그들이란 이런 근본적인 악에서 파생된 거짓을 의미한다. 악들이 죽이고 거짓들이 던져버리고 매장한다. 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같이 선과 진리를 거절하여 무덤 안으로 던지고 그 무덤을 장식해 놓는다. 예언자의 무덤을 만드는 것이란 파괴해버린 진리 위에 거짓 관념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거짓 관념은 진리의 외관을 띄우고 있다. 죽은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 외관으로 비쳐지게 하면서 짐짓 그 예언자를 묻는 이들, 자기들에게 그 경의가 되돌아오게 의도할 뿐이다.
32. 조상의 행동을 탓하면서 자기들이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의 피를 보는데 가담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언하면서 지금 저들의 눈 앞에 있는 예수의 피를 마지막으로 보려고 음험한 계획만을 늘어놓고 있다. 이에 관해 그들은 진실로 격렬하게 주님의 말씀,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는 것을 완성하게 된다. 이 말씀에도 우리를 위한 교훈은 들어 있다. 거짓 원리가 악으로 충전될 때 후손은 선조들이 하던 짓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때로는 왜곡된 관념 안에 좋은 것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악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안간 힘을 다 쏟는 거짓 원리란 예언자를 살인한 자의 후손 속에 든 품성이다.
33. 그들의 심정과 목적을 아시는 분이 주님이신 바 이제 무시무시한 정죄의 언어가 발표되고 있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선과 진리의 원리가 내적 인간 안에서 파괴되고 그 원리의 묘가 세워지고 그 무덤이 바깥쪽 인간 안에서 장식될 때 인간은 의지와 이해성 모두에서 완전히 감각적이 된다. 그 애착은 뱀 같고 그의 생각들은 독사의 족속들로부터 파생될 뿐이다. 이것은 지옥의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위의 끔찍한 단어가 함축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34.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들의 품성 상태만을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장차 그들이 해야 할 짓들, 그들 조상이 옛 하늘 처방의 예언자를 죽였듯 새로운 하늘 처방의 예언자에게 똑같이 행동할 것임을 말하시고 있다. “나는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영적으로 예언자란 교리 속의 진리이고, 현자란 교리 속의 선, 그리고 학자란 앞 둘에 관련된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 시대 때의 경우 이런 교리들이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원리, 그분을 증언하는 원리를 말한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 “나는… 너희에게 보낸다” 라고 말하시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들 후손이 죽인 예언자는 예수께서 보낸 사람이었다. 인류 측면이든 개인 측면에서 이든 공히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내가 일하고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진실이다. 이런 연속되어 일하심은 순종하는 자녀 뿐만 아니라 불순종의 자녀와 더불어서도 공히 존재한다. 신성한 사랑은 우리의 초기 삶에서 특별히 더 역사하고 신성한 지혜는 성숙된 삶에서 더 뾰족이 역사한다. 사랑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은 지혜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과도 같다. 여호와께서 보낸 예언자와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예수께서 보내는 예언자와 현자를 죽이는 것과 같다. 이런 죄악상에 관해 주님께서 이렇게 묘사하신다.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매단다…” 유대인들이 죄인을 처벌하는 제일 가는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돌로 쳐죽이거나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다. 전자는 거짓을 수단으로 해서 진리의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을 표현하고 후자는 악을 수단으로 선의 생명을 잘라버리는 것을 표현한다. 이 두 종류가 본문에서 “죽이고 십자가에 매단다”로 의미해지고 있다. 주님께서 더 이어 말하신다. “…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이 동네로부터 저 동네까지에서 박해할 것이다.” 이것은 악에 관한 진실이다. 악은 영적 생명의 원리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매달고 어떤 원리는 박해하고 조롱한다. 심정과 이해성이 영적 원리를 거절해버리면 “죽이는” 것이다. 삶의 규칙에서 함께 나눌 게 하나도 없는 바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전체적으로 거절해버리지 않았다 해도 그 심정과 이해성이 영적 생명의 원리들을 미워하고 있다면 이는 “박해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회당과 동네”는 교리를 의미한다. 전자는 내적 측면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고 후자는 외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반대적 의미를 뜻할 경우 악과 거짓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조롱(채찍질)한다는 것은 교회 속의 모든 교리에 있는 진리를 뒤집는 것, 온 동네에서 박해한다는 것은 교회 속의 모든 교리에 있는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진리를 언제나 미워하고 영원히 반대만 하려드는 것이다. 이 문단을 시리즈로 생각해서 각 세부사항을 들춰본다면 발견하는 바, “죽인다”는 것은 “예언자”에 해당되는 교회의 모든 교리에 있는 진리에 관계되고,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현자”로 의미된 교리 속의 선과 관계되며, “조롱함”은 “학자”로 표현된 말씀과 관련되고 있다. 따라서 죽이는 것은 소멸하는 것, 십자가형은 파괴하는 것, 조롱함은 뒤집는 것, 온 동네를 뒤져 박해함은 왜곡된 교리로 온갖 것을 다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선과 진리라는 천국 원리에, 말씀 자체와 구원해주시는 모든 원리가 진행되어 나오는 그 근원인 그분께 모든 수준에서 적대감을 갖고 반대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35. 이렇게 말하시어 결론 맺으신다. “마침내 무죄한 아벨의 피로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바라키야의 아들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흘린 모든 무죄한 피값이 너희에게 돌아 갈 것이다.” 무심코 읽게 된다면 이 구절은 한 세대의 죄값을 또 다른 세대에게 물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문단 전체를 합당한 관점에서, 설사 글자 의미 그대로에서 일 지라도 주님께서 발표하시는 그 세대가 그들 조상의 죄짓는 일을 마저 다 하라는 것,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벌 값을 완전히 물으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주님의 선포에는 간단한 위 생각 말고 영적 의미, 이 문단이 꼭 암시하고자 하는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영적 의미에서 아벨은 선행(charity)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 추상적으로는 이런 선 자체를 뜻한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카인은 믿음만이 구원받는 조건 내지 수단이라고 우겨대면서 선행(charity)의 선을 경시하고 급기야 그 선을 살해하는 이들을 뜻한다. 즈가리야는 교리의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 추상적으로 교리 속의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 고로 위 두 사람의 피는 모든 선과 진리의 소멸을 의미하게 된다.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즈가리야를 죽임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철저히 주님을 거절함을 뜻한다. 그 이유가 성전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제단은 신성한 선의 측면에서의 주님을 뜻하는 바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란 선과 진리 모두에서라는 것을 의미해주기 때문이다.
36. 주님께서 “분명히 말해둔다.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이 세대에 내리고야 말 것이다”라고 말하셨을 때 그분의 이 말씀은 유대 교회와 더블은 하늘 처방의 모든 시리즈가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첫 교회에서 시작된 하늘의 처방 시리즈가 점진적으로 하강되다가 유대 교회의 종말로 소멸되었다. 사랑과 믿음이라는 생명체 속의 혼(soul)이 첫 아담에게 호흡되었는데 그것이 정의롭고 신실한 사람의 피흘림에서 소진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대는 첫 세대가 시작한 것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37. 이런 파멸이라 해도 무한 자체이신 분이 그 파멸을 예방해 보려는 애쓰심도 없이 끝장을 본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유대교 뿐만 아니라 온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을 가리키면서 선포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수사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거룩한 말씀의 이 문단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가! 어느 인간도 결코 말한 적이 없는 말씀이시다.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느 인간도 그분만큼 느끼고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경이로운 발표는 얼마나 온유하고 사랑이 넘쳐흐르는지! 이 구절은 신성의 품성을 나열해주고 그 품성이 인간을 다루는데 얼마나 감촉이 부드럽고 동시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는지 저절로 느끼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이 구절을 좀 더 가까이 접근해서 과감하게 들여다보아 더 세세하게 검사해보자. 예루살렘이 그분께서 보낸 특사들을 돌로 치고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인 사랑 있는 지혜의 안식처 아래에 그분의 자녀를 끌어당기시려고 애쓰심을 중단한 적이 없으시다. 주님께서는 여호와로서 행하셨고, 예수로서 하셔야만 했던 일은 “잃은 것을 찾아 구해주시는” 것이었다. 여호와 되신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온유하게 돌보심을 표현하는데 같은 언어를 이렇게도 사용하시고 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 말씀에 있는 비유적 표현 모두는 상응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린 새가 파닥거림, 어미의 부드럽고 포근한 날개의 안식처에 방황자를 모으시는 염려해주심 등등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형상들의 시리즈를 표현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표현해준 형상만큼이나 미약하게 그것들은 그분의 무한성과 전능하심,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포옹하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날개란 보존과 방어를 상징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한 지혜를 수단으로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위의 독수리 날개 같이 훈련시키신다. 육을 입으신 이후 이런 형상의 표현은 더욱 두드러졌고 더욱 위로하는 의미심장함이 담겨있다. 주님께서 말씀 또는 지혜가 육을 만드셨을 때 그 인성 안에서 우리는 “임마누엘아, 그가 날개를 펴서 네 땅을 온통 덮으리라” (이사야 8:8) 라는 표현 같은 날개의 펴짐을 본다. 시편의 경우 이렇게 읊고 있다.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몸을 숨기는 자…” (36:7). “…당신께 이 몸을 숨기렵니다. 이 태풍이 지나기까지 당신의 날개깃 그 속에 이 몸을 숨기렵니다” (57:1). “나를 도와주실 일 생각하면서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 (63:7). 유대인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날개 아래 모이기를 거절했다. 허나 우리는 그 부름에 선뜻 응낙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를 초대하는 그분의 보호하심과 돌보아주심 아래 우리 자신이 있게 해야 하리라.
38. 그분이 모아 보시려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은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 말하신다. “네 집은 황폐해져 버림받으리라.” 글자대로 볼 때 이 집은 성전이다. 그 이유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 조상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던 곳”과 관련된 집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이 황폐해짐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수준의 황폐됨이다. 예루살렘이 공략되고 성전이 파괴됨은 정치적 결과들이나 그 결과가 무시무시한 표현으로 상징되었듯 유대 교회의 황폐해짐은 혹독하고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악의 영적 응용을 개인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본문의 “집”은 마음을 상징한다. 영적인 것, 천국에 속한 모든 것이 마음 안에서 모조리 파괴될 때, 그 마음에 머무시던 주님도 내쫒기게되어 황폐함이 주권을 쥐게 된다. 악과 왜곡된 것이 마음을 황량하게 한다. 그것들은 선하고 아름답고 행복 되게 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뿐이다.
39. 구세주께서 결론을 맺으신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되다’ 하고 너희 입으로 찬양할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밖에 더 다른 의미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곤란을 야기하는 글자 의미로는 아예 진입하지 않고 글자 속에 있는 영적 의미만을 살피고 넘어갈 것이다. 위 주님의 선포는 이런 위대한 교훈이 담겨있다. 악이 주님의 진리를 지각하는 이해성을 소경되게 하는데 비해 선은 영혼의 구세주로서 오시는 주님에 관한 복된 환상을 볼 수 있게 지적인 눈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란 신성한 사랑의 권능과 영으로 오신 신성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내재하기 전에는 이 평화의 특사를 두고 “복되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너를 끌어 당겨주시지 않으면 어느 인간도 나에게 오지 못한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보지 못하는 한 가지 원인은 우리가 사랑의 심정으로 그분을 보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이다. 사실 우리는 그분 자신의 이름으로 그분이 오신다고 보고 있을 뿐 주님 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다고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을 진리로서 간주할 뿐 선으로서 간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리만으로 예수를 보는 사람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복된 분으로 찬양하고 환호하여 불러지고, 다시 그분께서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은 그분이 선 자체이신 분으로 우리에게 보여질 때 뿐이다. 이런 차이가 있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이 진리 가운데만 있을 경우, 또는 우리가 지적 측면에서만 주님을 발견하려 할 경우 우리는 진리 측면의 주님만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찾을 경우, 또는 자신 안의 선과 사랑으로부터 그분을 찾을 경우 우리는 선함과 사랑으로 속이 꽉 채워져 있는 진리로서의 주님을 보게 된다. 이런 태도로 주님을 주시하는 사람은 복있다. 참으로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있다”고 찬양해도 되리라

마태복음 22장 해석

22

1. 본 장의 시작이 비록 새 주제로 열리고 있다 해도 이는 성전에서 시작된 주님의 강연의 계속이다. 앞 장은 포도원을 세우고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세내준 집주인의 비유로 끝맺고 있다. 본 장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왕의 비유로 시작된다. 이 비유의 도덕적 교훈(moral)은 앞의 비유와 대단히 비슷하다. 초대된 이들이 참석하기를 거절한다. 그래서 거절되어진다. 다른 사람이 초대되고 그들이 오고 영접되어진다. 거절한 사람들, 그래서 선택받음을 상실한 이들은 유대인들이다. 와서 뽑힌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다. 두 비유의 도덕적 교훈은 비슷하지만 다른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서로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인간의 지적 측면의 삶에 더 관계되고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행동 측면의 삶에 더 관계되고 있다. 포도원은 포도를 생산하고 이 포도로부터 포도주의 생산까지를 암시하는 바 이는 영적 진리를 상징한다. 결혼이 잔치(dinner)로 축하되고 있는데 이는 영적 선을 상징한다. 음료수와 음식은 이해성과 의지를 위한 자양분을 상징한다.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교회와 천국이 결혼으로 상징되는데 이보다 더 높은 상징의 표현은 없다. 결혼은 하나 됨(union)의 가장 높은 상징인데 이는 형체로나 수준에서나 공히 가장 높은 상징이다. 결혼은 천국을 구성하고 더 없는 행복을 준다. 결혼은 두 영혼(soul)의 하나 됨이고 그러하도록 창조되어있어 각각은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하는 것을 다른 영혼 안에서 발견하는 바, 하나 됨은 완성된 삶과 완전한 행복에 필수요소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영혼은 모든 존재 속에 있는 두 필수요소를 인격화 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완전함과 행복의 두 필수요소, 선하고 참된 것, 지성과 자유 의지의 두 필수요소를 인격화 한 것이다. 천국과 교회, 그 자체로만 본다면 선함과 진리의 하나 됨밖에 더 없다. 이런 하나 됨은 누군가가 천국에 거주할 수 있기 전, 누군가가 교회의 참 멤버이기 전 그의 마음 안에 미리 존재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천국과 교회 안에 있으려면 천국과 교회가 우리 안에 존재해야 한다.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왕의 비유 같은 하늘 나라”에 소속되려면 그는 반드시 자기 안에 선함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 사랑과 믿음의 천국 결혼이 있었어야 한다. 왕이 잔치를 베풀어준 아들이란 예수이고, 아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된다. 주님께서는 신성으로부터 인간 안에서, 인간을 수단으로 그분의 교회와 신부와 아내로서 언약이 맺어지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입으시고 신성화 하신 인성은 신성한 결혼식에서 신랑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타락한 인간, 타락한 교회가 실제 결합하려면 하느님이 인성을 통해 그 교회에서 태어나 신성화 하심으로 올려져 신성한 본성과 하나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결혼 잔치를 마련한 아버지가 어떤 왕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두 호칭, 아버지와 왕은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표현하는데 이는 신성한 본성 안에서 하나 되어 존재한다. 이 비유는 이런 사항이 비유의 목적과 본성과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고, 사랑과 지혜의 신성한 결혼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하게 본질적으로 존재하듯 인간 안에서도 존재하게 하려는 것,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 이 결혼이 존재하게 하고 이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 안에도 그 결혼이 있게 하여 구원받고 행복을 만드는 게 육을 입으신 목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는데…” 이는 고대 관습에 일치되고 있다. 손님들은 결혼이 거행되기 훨씬 전부터 초대되어 있다. 결혼식 날이 다가오고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면 잔치에 참석하라고 종들을 보내 통보한다. 이런 점에서는 상징성이 사실과 정밀하게 상응한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훨씬 전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종, 예언자들을 수단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다가오는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초대해 놓았다. 이 초대는 유대인들에게 있었고, 그들을 통해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어졌다. 날짜가 정확히 고정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결혼은 확실히 있을 것이라고 선포되어 있었다. 시간이 다 차서 신랑이 나타났을 때 결혼식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을 부르러 그분의 종, 사도들을 파견했다. 초대에 따른 결과, “…그들은 오지 않았다.” 심정이 자만으로 가득 찬 이들은 초대장을 받아 들고 결혼식 때가 오기를 갈망하지만 정작 축복된 그 때가 오면 결혼식장에 오는 것만큼은 지독하게 마음 내켜 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어떤 것이 통상적인 우리의 경험 안에도 있다. 즉 열심히 갈망하여 기대했던 사건이나 기회가 정작 현실로 자신 앞에 나타나면 내가 언제 기다렸었느냐는 듯 무관심을 표명하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가 자연적인 경우일진대 영적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초청을 거절했다. 그 이유가 예수의 왕국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화스러운 자연계의 것들로 둘러싸인 왕과 왕국을 찾았는데 예수의 왕국에는 비천함과 희미함밖에 더 볼 수 없었다. 정신적 차원의 웅장함은 그들에게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과 지혜의 하나 됨이 엄숙히 이루어지는 결혼식, 자비와 평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결혼식, 정의와 진리가 서로 부둥켜안는 결혼식, 손님을 접대하는 탁자에 영혼의 자양분과 만족을 채워주는 결혼식, 이런 등등으로 이루어진 결혼식에 와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행동 결정은 유대인에게만 특이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세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만 충실하게 되면 위와 같은 모양새를 표출한다. 예수의 종교는 너무 순수하고 비세상적이어서 자연적 마음에는 씁쓸한 입맛만 켕기게 할 뿐이다. 우리는 이런 것 모두를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만일 우리 안에 자연적 인간의 원리밖에 든 것이 없다면, 우리 내부라는 조그만 세계 안에 “대성직자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로 상징되는 원리밖에 없다면, 우리 역시 억지로 둘러대는 유대인처럼 믿지 못하고 아예 믿어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로지 자연적일 뿐인 만큼 복음의 복된 초청은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다. 그러나 그분의 초대를 거절하는 때라 해도 신성한 자비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신성한 본성에 상존하는 선함과 진리의 풍부함, 인내하심에 관한 놀랍고도 정감어린 예를 발견한다. 앞의 비유에서 같이 이 비유에서도 우리는 두 번째 메시지와 두 번째 특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두 비유 공히 첫 번째의 것과 두 번째의 것은 그 품성이 구분된다. 두 번째 통보는 지적 측면이 아닌 의지 측면에 더 호소하고 있다. 이는 손님들이 단순히 결혼식에 참석하라는 전달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준비가 완료된 만찬에 참석하라는 전갈이다. 임금은 할 바를 다 마무리 지어 준비된 만찬에의 초청자들이 응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이 설비되었다는 말일까? 한 마디 단어 만찬(dinner)으로 먼저 표현하고 있다. 만찬이란 주님께서 인간과 함께 거하실 수 있는 선행(charity)의 선을 의미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한다는 것은 사랑을 수단으로 연합하는 것, 결합을 뜻한다. 결혼 축제는 주님께서 육을 입으심으로 설비된 선들, 그분 자신과 그분의 자녀 사이가 복된 연합과 결합을 수단으로 일궈진 선들이다. 이런 선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진행되고, 인성의 신성화 하심이 준비가 완료된 축제이고 이 축제는 기꺼이 초대에 응하는 손님을 위해 언제나 준비 완료되어 있다. 그런데 만찬 자체가 “소와 살진 짐승을 죽여서”라고 묘사되고 있다. 소(oxen)는 자연적 애착의 선을 상징하고, 살진 짐승(fatling)은 순진의 선을 상징한다. “죽임”이란 단어는 제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제물로 바침이란 거룩하게 만듦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내재하는 신성 쪽으로 그분께서 입으신 인성 속의 자연적 애착과 순진을 거룩하게 만드시어 성결되게 하셨다. 이제 그분의 자연적 애착과 자연적 순진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 생명 있고 생명을 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제공되어져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고 말하신 게 아닐까? 그분 안에는 모든 충만함이 내재한다. 모든 것의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 그래서 언제나 신성의 부름은 “잔치에 오라”는 것이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자연적 인간은 복음이 그에게 제공한 선과 진리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아예 돌아서서 그의 의지는 악 쪽으로, 그의 이해성은 거짓 쪽으로 돌아선다. “어떤 이는 농장으로,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갔다.” 이는 천국의 사랑과 생명에 상반되는 터무니없는 세상의 사랑일 뿐이다. 우리가 부름을 경멸하는 것은 세상 사랑을 손으로가 아닌 심정으로 헌신적으로 하는 것인 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 안에서의 결과는 원인을 위해 놓여져 있다. 즉 노동은 사랑을 위한 것이다. 이런 순서를 잘못 이해함으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생활의 직접적 의무를 단념함으로 천국을 추구하려든다. 이것은 세상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증거도, 수단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 세상 삶에 소속된 것들을 중시하느라 신성하고 천국적인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인간사의 실상이다.
6. 심정과 지성이 천국적인 것들에서 돌아서서 지상의 것들에 몰두 할 경우 더 지독한 불법이 있어진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부름을 거절하는 것만 가지고는 흡족치 않아 세상에 자신을 던져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단어 남아있음(remnant)을 덕행과 관계해 생각하면 이는 선함과 진리의 남아있음을 의미하고 이것이 마음 안에서 깨어날 때 거듭남의 시작이 있고 더욱 깨어날 때 거듭남은 더욱 진전을 이룬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선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악도 남아 저장되어 있다. 남아있는 것들은 각자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저장된 것인데 사람마다 양이나 질은 천차만별이다. 어쨌든 이 남아있는 것들을 통해 고운 마음씨는 거듭나아지고, 나쁜 마음씨도 부름받거나 그 부름을 듣게 된다. 이 때 악 쪽으로 돌아서면 그들 스스로 선함과 진리의 남아있는 것들을 파괴한다. 이 파괴 과정에서 악 쪽으로 돌아선 마음씨는 주님의 종들을 붙잡고 때리고 죽인다. 사악함이 결과를 본 것은 선과 진리의 파괴인데, 모든 악한 것들도 그 자체 스스로 당한다. 폭력의 세 가지 행동은 참되고 선한 모든 것의 완전한 거절을 그려내고 있다. 종을 “붙잡는 것”은 의지 안의 천국의 진리에 대한 폭력이고, “때렸음”은 이해성 안에 있는 천국의 진리에 대한 폭력이고, “죽였음”은 생활 안에 있는 천국의 진리에 대한 폭력, 소멸시킴이다.
7. 절멸 하려드는 악한 상태는 심판을 자초한다. 자신 안에 있는 천국의 진리를 파괴한 이들은 파괴한 진리가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로 변하게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초청받은 사람들의 범죄, 그들이 이미 초대에 응하겠다고 수락되었던 터에 자기들을 향한 진리로 무장되어있다. 칼집에서 나온 칼인 그들의 죄는 자신들을 자르고 정의의 법 위에 남겨있던 더러운 흔적이 다 닦아질 때까지 칼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보복의 법칙, 이는 영적 삶이나 영계에서는 완전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 법칙이 마음 안에서 앙심 품은 정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용과 반작용은 동등하다는 것, 이런 실제의 균형은 모든 것의 보존에 필요하다는 것, 이런 것들이 질서의 법칙에 의한 단순한 결과이다. 임금은 잔치에 오라고 초청된 자들이 종들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들었다.” 듣는 작용(hearing)은 의지와 더 직접 교통하고 보는 것은 이해성과 더 직접 교통된다. 그래서 왕이 그런 사실을 들었다란, 범해진 악은 신성한 지혜에 대한 범죄일 뿐 아니라 신성한 사랑에 대한 범죄, 진리에 상반될 뿐 아니라 진리의 선에도 상반되는 범죄라는 것을 함축하는 묘사이다. 왕이 파견한 군대란 주님의 말씀과 그 나라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이 진리에 반격하는 악과 거짓을 복종시키고 천국의 거주민, 또는 천국 원리에 가한 폭력의 힘을 무능하게 한다. 왕의 군대는 이 살인자들을 죽이고 동네를 불살랐다. 소유하는 모든 것, 삶에 관계되는 모든 것, 의지와 이해성 모두 안에 있는 것들이 파괴된다는 것, 삶 또는 교리에 관계되는 모든 진리가 제거된다는 것, 그래서 죽음만이 의지를 지배하고 황량함만이 이해성에 있게 된다. 이는 자기에게 제공된 구원을 거절하면서 생명의 수단과 생명의 저자에 극도의 증오를 품은 마지막 결과이다. 이런 모습은 개인이라는 차원이 아니고 교회 차원이라면 현 시대에서도 어느 정도는 드러내지기도 한다. 이런 종말이 유대교를 압도했고, 그 교회의 범죄와 황폐됨이 비유의 자연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런 경우는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왕국으로 부름을 거절하고 메시아 자신까지 죽였을 때 발생되었다. 그 결과 그들 사이의 교회는 끝장이 나고 주님께서는 또 다른 백성에게 방향을 돌리셨다.
8, 9. “그래서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큰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복음은 자유롭게 모든 이에게 구원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이 비유, 이 구절보다 더 명백하게 공포되는 곳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자비심은 실망함이라는 것들로 시큼해지고 마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죄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신성한 자비는 그렇지 않다. 사실 이 비유는 마치 신성한 자비심이 인간의 악의와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더 부각되는 듯, 다시 말해서 죄악이 많을수록 은총도 더 많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설계된 듯 비치기도 한다. 하느님의 선함과 지혜는 얼마나 풍부한지! 우리가 그 깊이를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미미한 수준에 그칠 뿐이다.
10. 초청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거절하자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상징적 차원에서 처음에 초청된 사람들의 자리를 채우도록 불리운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다. 이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 대신에 눈에 보일 수 있는 교회를 형성하기에 알맞는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그들은 진리에 무지하나 진리를 받는데 있어 비호의적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왕은 종들에게 새 손님을 찾도록 큰 거리에 나가도록 명령되었다. 큰 거리(highway)란 글자대로 직역하면 길들의 길들(ways of ways), 두 개 이상의 도로가 만나는 장소(라틴어로 compitum), 또는 시골 사람들이 동네의 축제를 벌이기에 안성맞춤인 광장같이 툭터진 넓은 도로, 많은 사람을 가장 빨리 만날 가능성이 있는 도로를 말한다. 중심 되는 장소, 여러 길이 한데 모아지는 장소, 수많은 보급품이 쏟아지는 이런 장소는 합리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 마음 안에 수많은 생각들이 집합하는데 어떤 생각은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또 어떤 생각은 영적 마음으로부터, 또는 세상으로부터, 천국으로부터 들어온다. 그러므로 합리적 마음은 “나쁜 것과 좋은 것” 모두 있는 곳이다. 인물 차원에서 이를 생각해보면 이방인들이란 계시의 빛이 없던 이들이다. 그들은 자연의 빛, 또는 이성의 빛과 함께 말씀의 반사된 빛과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의 영적 도움을 받아 삶을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그들이 잔치에 초대될 당시 지적이고 도덕적일 뿐인 진리의 큰 거리에 있었다. 그들의 결함이 어떠했든 그들은 기쁘게 잔치에 응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결혼식장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입장한 사람에 대한 비유의 언급은 매우 놀랄만한 바 거기에 교훈이 없을 리 만무하다. 결혼식에 초대를 받고 응낙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더 있다는 말이다.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손님들은 각자의 의상을 차려입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임금이 손님을 위해 준비해둔 옷을 걸쳐야만 한다. 우리는 자기 것의 정의로움으로 천국적 결혼식에 입장되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정의로 옷입고 있어야 입장된다는 말이다. 그분의 정의만이 유일한 진리요 그분의 정의만이 구원받게 하는 정의이다. 그 이유가 모든 우리의 정의는 그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정의가 우리의 썩은 것들을 덮어 가려준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정의는 정의를 살아내지 않으면 획득될 수 없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정의롭다.” 우리가 행함으로 획득한 정의가 인간 고유의 정의인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자아 정의(self-righteousness)와 그리스도의 정의 모두는 정의를 행함으로 획득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란 하나는 자아로부터 정의를 행동함으로 획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정의를 행함으로 획득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이 실습 또는 연마함도 없이 올바른 생각과 애착, 말과 일들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거나 귀속시켜 주시지 않는다. 정의의 영(the Spirit)과 권능으로 그분께서는 올바른 것을 뜻하고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작업하신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뜻하고 행동한 정의는 그분의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이 그 정의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정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파생되지 않기 때문에 정의로움을 자신의 공적으로 돌려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 영광을 그분께 되돌려야 한다. “야훼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다만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그 영광은 당신의 사랑과 진실로 말미암은 것이 옵니다” (시편 115:1). 세부적 의미로 이해해보자. 결혼 잔치에 온 손님들이란 합리적 마음 속의 생각과 애착들이다. 임금이 손님을 보러 들어감이란 생각과 애착 안으로 신성한 진리가 유입됨이다. 손님들이 객실에 모여 있고 임금이 그 방에 들어간 목적은 “보기”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신성한 진리는 우리의 생각과 애착의 품질을 지각할 수 있게 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고 분리해서 좋은 것은 영적 빛을 받게 하고 나쁜 것은 바깥 어둠에 내던지게 해준다. 이것은 모든 인간 마음 안에서 결과 되는 심판이다. 이 심판은 신성한 진리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된다. 모든 일들이 제각각의 수준에서는 그 자체 동일하듯 선한 인물이든 나쁜 인물이든 각 사람에게 거행되는 심판도 그 자체 위와 동일한 바 동일한 결과를 가진다. 신성은 진리의 빛 안에서 현존하시어 밝히 알게 한다. “그 이유가 명백해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빛이기” 때문이다 (에페소 5:13). 내향의 품성을 밝히 앎은 선한 사람을 빛의 충만함으로 가져다주고 악한 자는 깊은 어둠 안에 놓여 있게 한다.
12. “그를 보고 ‘친구여,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물으실 경우 이는 자기 검증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이다. 자기 검증은 자신의 상태에 올바른 평가를 갖게 하는 수단이다. 저 세상에는 서로 위배됨이 없는 상태와 장소의 일치가 존재한다. 천국적 상태가 없으면 천국적 장소도 없다. 내부에 천국이 없으면 밖에도 천국은 없다. 주님 스스로 이런 법칙의 위반이 가능해질 수 없도록 하시고 또 모든 영혼이 그것을 보도록 해주신다. 이 세상에서이든 저 세상에서이든 상반되는 신앙으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치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궤변이 진리의 빛으로 꿰뚫어지고 밝혀져 제거되면 자기 스스로 죄를 깨달은 영혼은 할 말이 없다. 저 세계의 경우 악한 자가 자기 죄를 인정하거나 납득하거나 할 때까지, 그는 지옥에도 자기 거처를 두지 못한다. 다시 말해 악한 자가 자기의 악한 모습을 보고, 그 악은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방법 외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지옥에로 보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엄격하고 인상적인지! 그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가!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아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사물의 조건에 일치되게 사악한 자는 지옥에로 던지는 것으로 성경에 표현하셨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 그들은 지옥의 거처로 곤두박질치듯 던져지는 것처럼 나타난다. 진짜 진리가 존재하는 동안 악한 자는 자신을 지옥으로 던진다. 오히려 악 자체가 지옥으로 그들을 깊숙이 내려박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들이 곤두박질치는 모습은 그들의 거꾸로 된 마음 상태의 상징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악의 황폐해짐에도 단계가 있다. 이를 비유로 밝히고 있다. 이 단계로 그들에게 붙어 있는 가상적인 선과 진리가 천천히 송두리째 박탈된다. 손이란 내적 인간의 힘을, 발은 외적 인간의 힘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손과 발은 자유롭다. 저 세상의 경우 악한 자의 손과 발은 묶여있다. 이 세상의 경우 외적 인간이 선을 행하면서 내적 인간은 악을 뜻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이 세상의 외적 질서의 보존, 그리고 인간 개혁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다. 저 세상의 경우 개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그럴싸한 상태라는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내적 측면이 뜻하는 것과 똑같이 외적 측면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악한 내적 측면은 그 자체에 종속되게 외적 측면도 가져다 놓는다. 이런 종속관계는 묶여있다. 의지 속의 선이 박탈되어 악에 종속되면 이해성 속의 진리도 박탈되어 거짓 속에 침몰된다. 이것이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기는” 모습이다. 이런 거짓에도 두 종류, 두 가지 수준이 있다. 하나는 의지에 근원을 둘 경우와 또 하나는 이해성에 근원을 둘 경우이다. 지적 측면의 거짓은 어둠이고, 자발적 측면, 즉 의지 측면의 거짓은 바깥 어둠이다. 전자는 진리의 부정이고 후자는 진리의 뒤집음이다. 전자는 빛을 차단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빛을 어둠으로 돌리는 경우이다.“ 그래서 만일 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큰 어둠이겠느냐!” 이는 영적 어둠의 상태요 그 상태에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표시요 상징이나 단순한 고통의 괴로움만이 아니다. 저 세상에서 사악했던 자들이 슬피 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게걸스러웠던 이기심의 좌절, 만족을 모르는 포부의 좌절로 인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들이 섞여 있다. 그들의 눈물은 과거 알렉산더의 눈물, 세계를 정복하다보다 더 정복할 세계가 없을 것 같아 흘린 눈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이를 갈고 있다. 이런 이를 갊은 과거 격노한 유대인이 스테반을 향해 “이를 갈며” 돌진했던 모습 같은 것이다. 슬피움(weeping)은 의지의 상태를 표현하고 이를 갊은 이해성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의지는 바람이 저항받을 때 슬피운다. 생각함이 반대 의견에 부딪칠 때 이해성은 이를 간다. “이를 갊”이란 거짓들이 서로 계속 논박하는 것, 결과적으로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계속하는 말다툼이다. 이런 말다툼은 지옥 밖에서 들을 경우 이를 가는 소리로 들린다. 천국의 진리가 그들 안으로 흘러들 때 이를 갊으로 실지 변해진다.
14. 주님께서는 이렇게 타이르심으로 비유를 끝맺으신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초대받은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초대된 마지막의 손님이 선택되었는 듯한 식인 상대적인 숫자 개념만으로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대체로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만일 숫자 개념을 고집한다면 그 숫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초대된 손님을 전체로서 간주해야할 것이다. 이런 소견이라면 그것은 인류 전체를 말한다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어찌됐든 성경의 숫자는 양이 아닌 질을 의미한다. “적은 사람, the few”란 선행으로 사는 사람들, 선행(charity)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고, “많은 사람, the many”이란 선행(charity)이 없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입장한 손님은 어떤 한 명의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어떤 계층의 사람들, 즉 일을 하지 않는 신앙을 가진 계층을 두고 한 말씀이다. 정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천국에 입장될 수 없다.
15. 주님의 위 비유에서 유대인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들어있는 바 이는 그들을 무마하기보다는 오히려 격앙시킨 대목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행위 없는 명목상의 종교자들을 표현하고, 그것이 의인화되어 있다. 그래서 공정한 분을 향해 분노를 끊이고 있는 적들 안에서 관찰되는 것과 같은 게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반대되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사랑에 반대함이 위 구절에서 “물러감, going”으로, 주님의 진리에 반대함이 “궁리함, talking counsel”으로,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는 것”은 진리를 뒤집고 파괴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 이를 성취하고자…
16.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주님의 제자는 교회의 모든 원리들을 표현하는 바 바리사이파 사람의 제자는 교회를 배척하고 파괴하는 모든 원리들을 표현한다. 특히 이 제자들은 거짓 원리들, 헤로데 당원으로 의미되는 친척 관계의 악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수의 말 가운데서 트집을 잡아보도록 파견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존경하는 척 말을 꺼내고 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종종 진리가 그 진리를 부정하는 심정을 지닌 이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한다. 주님은 참으로 참되시고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진리요 길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선하시어 사람들을 진리와 선함 쪽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사람의 겉모양에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적 선함을 개의치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인간적일 뿐인 진리에도 무관심이시다. 그분은 개인이라는 인물에 개의치 않으신다. 글자대로 그분은 인간의 얼굴을 쳐다보시지 않는다. 똑 같은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얼굴을 쳐다보지만 주님은 심정을 쳐다보신다. 얼굴은 이해성을 의미하고 심정(heart)은 의지를 의미한다. 주님은 얼굴, 이해성, 인간의 총명과 신앙 쪽을 쳐다보시지 않고 인간의 선함과 사랑, 심정을 들여다보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사기 치는 바리사이파 제자들의 입이 어쨌든 진실을 발표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진리를 말하고 서술한 것은 다른 의도, 즉 진리를 왜곡시켜 볼까 해서, 진리의 말들을 가지고 거짓을 증명해 볼까 해서 의도된 진리의 발언이다. 이제 큰 질문을 던진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저희들의 목적이 성취되길 희망했다.
17.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이 얼마나 교묘한 올가미인지는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 질문은 골격이 잘 짜여져 있어 부정을 하든 긍정을 하든 그들이 원하는 목적이 성취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질문이다. 만일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한다면 유대 백성의 미움을 살 것이고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대답한다면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셈이다.
18-22.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답변에 경탄을 하지 않을 자 누가 있을까?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복음을 전파하러 내보낼 때 하신 말씀,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한다” 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완벽한 본보기이다. 이 답변으로 주님의 적들은 패배의 잔을 확실히 마셔야 했다. 그들의 교묘한 술책은 좌절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입술은 침묵으로 굳어졌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술책을 깨버리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이 사악한 시도는 세상이 소유할 수 있는 지혜 중 가장 대단한 교훈을 가상적이지만 포획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는 말씀은 신성의 정부와 인간의 정부의 신하로서의 인간의 전체 의무를 묘미있게 표현한 격언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 종교는 하느님께 순종을 하는 의무와 우리가 사는 지상의 정부에 지지를 보내야 한다는 의무를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가 지상의 나라를 수단으로 우리는 질서의 원인을 유지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하느님은 영적 질서의 저자이시고 지상 질서의 저자되시므로 그분께 순종과 섬김을 바치기 때문이다. 입술에는 찬양을, 마음 속에는 악의를 품고 짐짓 곤란한 문제를 내밀려고 예수께 오는 바리사이파 제자와 헤로데 당원의 모습이 영적으로 뜻하는 바, 이들은 위선적으로 예배하는 이들, 바깥쪽으로는 말씀을 공경하면서 내향으로는 말씀을 믿지 않고 미워하며 말씀 속 거룩한 진리를 뒤집으려 은밀히 노력하는 이들, 진리가 자기들의 악들을 까벌리고 질책하기에 내심으로는 말씀을 증오하는 이들을 뜻한다. 그들이 말씀 안에서 뭔가를 찾을 경우 그들은 내적 인간의 정부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외적 인간의 규율에 관한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동전의 형상과 그 위에 적힌 이름이 카이사르라고 인정시키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고 말하심이 뜻하는 바, 외적 인간은 이 세상의 형상과 표제에 관계되고, 세상을 위해 창조된 것인 바 외적 인간은 도덕과 시민생활이라는 세상의 법칙에 의해 규율되고 그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내적 인간은 천국의 형상에 관계되고, 천국을 위해 창조된 것인 바 천국적인 생명, 영적 삶의 법칙에 복종해서 규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는 구절이 뜻하는 바, 위선적으로 예배하는 이들, 말씀의 내적 측면을 거절하는 이들은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23-30. “그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정해 준 법에는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하고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칠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그 당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인간은 불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동등하다. 이는 위 논쟁으로부터 명백하다. 그 이유가 위 논리는 남편들을 위해 아내들을 다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므로 영혼의 불멸이라는 교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끌어내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의미를 헤아려 적절한 교훈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부활의 부정은 거듭남을 부정하는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부활은 거듭남을 의미한다. 거듭남은 죄의 죽음으로부터 정의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참으로 부활의 부정은 거듭남의 부정을 포함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없었어야 한다. 이 교리의 긍정 또는 부정은 다른 교리의 긍정 또는 부정을 함축한다. 영적 사두가이파 사람이란 영이 없다고 말하는 자, 고로 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지금 예수께 와서 진리가 자기들의 견해를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으니 모세의 말도 믿지 않는 게 아닐까? 어쨌든 거듭남은 무엇일까? 이는 천국적 결혼, 선과 진리가 인간 마음 안에서 하나 됨이다. 그런고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결혼에 관련된 것을 추켜들어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일곱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면 그 여자는 일곱 남편 중 누구의 아내가 될까? 거듭남의 원리 중 하나를 살펴보자. 천국 결혼에서 모든 선은 그 선에 알맞는 진리를, 모든 진리는 그 진리에 적절한 선을 가진다. 이 결혼은 선과 진리가 서로 간에 실지로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에 비례해서 천국적일 뿐이다. 만일 어떤 선과 어떤 진리가 있는데 상호 관련이 없다면 외적으로는 합쳐진 듯 보일는지 몰라도 이 둘은 진실로 하나된 것이 아닌 바 선한 애착과 올바른 생각이라는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그 둘로부터서도 어떤 유용함과 행복도 남기지 못한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외적으로 하나 되었다가 둘로 분리됨이 진짜 하나 됨이 있기 전, 반복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를 표징 하도록 표본 되는 교회, 유대 교회에서 어떤 남자가 대물릴 자손도 없이 죽을 경우 남자와 제일 가까운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해서 대를 잇게 하는 법이 있었던 것이다. 사두가이파 사람이 제안한 사건의 경우는 한 여자가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영적 의미에서의 일곱은 어떤 숫자가 아닌 어떤 특별한 품질을 뜻한다. 일곱은 완전한 것, 거룩한 것을 뜻한다. 일곱 남편을 가졌다가 결국 자식 없이 죽은 그 여인이란 여러 종류 또는 여러 수준의 진리들이 붙었던 어떤 선 그러나 그 선과 진리 사이에 진짜 하나 됨이 없었는 바 그들의 결혼으로부터 영적 소산이 없었던 선, 진정한 결혼의 열매 되는 사랑과 지혜의 일이 없는 선을 표현한다. 이런 종류의 선은 위선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이 선은 자연적 선행(charity) 또는 덕행의 열렬한 감정일는지 모른다. 이런 감정은 뭔가 쓸모 있다는 여러 가지 계획과 계속적으로 결혼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 모두 지혜롭지 못하고 동시에 선한 결과가 열매 없는 채로 처진다. 그런 모든 것의 끝은 기만되고 좌절된다. 그 감정 자체도 결국 죽게 되고 감정의 집인 그 심정은 실망과 좌절로 굳어져 있게 된다. 지혜를 배우려하는 대신 체험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음만을 증가시키기만 한다면 우리의 애쓴 수고는 무익으로 끝나고 만다. 사실 우리의 마지막 상태는 현 상태의 더 완전하고 더 완성된 형체일 뿐이다. 만일 영혼이 지상에서 약혼(betroth)했다면 천국에서 결혼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선이 진리에 대해 진정한 사랑을 지상에서 가지지 않았다면, 또는 지상에서 진리가 선에 참된 사랑을 가지지 않았다면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활해도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결혼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만일 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이 여기서 결과 되지 않는다면 이후 저기서도 결과 될 수 없다. 지상에서 의지와 지성 사이의 열매 없는 결혼들 중 어떤 하나가 영으로 사는 저 세상에 가서는 최소한 한 개라도 마지막의 열매를 맺은 결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성경을 몰라서 그릇된 생각을 한다. 그 이유가 나무가 넘어지면 그대로 드러눕고 마는 것이 신성한 진리의 변경할 수 없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상태는 일시적인 상태들의 계속밖에 더 아니다. 천국적 상태는 지상적 상태의 계속일 뿐이다. 지상에서 천국적 결혼이 없었다면 저 세상에서도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권능을 몰라서 그들은 잘못 되어있다. 신성한 사랑 그 자체, 비록 이 사랑은 선과 진리의 정당한 하나 됨을 드높이고 축복한다. 그렇다고 거짓을 참된 것으로, 악을 선으로 바뀌게 할 수 없듯 지옥적 결혼을 천국적 결혼으로 바뀌게 할 수 없다. 지상에서 새 삶을 가져 복된 부활을 이룬 사람들, 그래서 복된 자들을 위한 천국에 거처를 둔 사람들은 거기서 하느님의 천사들 처럼 있게 된다. 천사 -인간은 천국적인 결혼 안에 미리 존재한다. 그 이유가 사랑과 지혜의 하나 됨이 천사 또는 천사적 상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에게는 결혼하는 것, 즉 시집가는 일도 장가드는 일도 없다. 이해성이 의지와, 의지가 이해성과 새로이 하나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상호간의 하나 됨이 그 나름대로 이미 완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62장 4절에서 이렇게 언급되고 있다. “….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임’이라, 너의 땅을 ‘내 아내’라 부르리라. 그 이유가 야훼께서 너를 사랑해 주시고 너의 땅의 주인이 되어 주시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주목해 볼 것은, 부활은 한 전체 인간에 관해서 이해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부분 속에서, 거듭남의 매 단계에서 있어진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진리가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 마음으로 승강될 경우 이것이 부활이다. 이리하여 모든 원리는 자연적 몸을 벗어 던지고 영적 몸을 입는다. 그러므로 기독인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일어난다. 이런 과정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 마음으로 승강된 모든 원리는 각각의 진리와 각각의 선들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있다. 이 하나 됨은 승강됨의 필수 조건이다. 자연적 마음에 들어 온 진리는 그 진리로 살아낼 때만이 그 진리에 걸맞는 선과 결합되어 영적 수준으로 승강된다. 따라서 결혼은 자연적 마음 또는 지상 위에서 거행될 뿐 영적 마음 또는 천국에서는 거행될 수 없다. 그러므로 들리워진 원리들은 결혼이라는 것,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없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 이유는 선함과 참됨의 하나 됨은 천사가 되기 위한 천사적인 원리에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에서의 결혼이라는 주제를 놓고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조금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위 본문을 두고 많은 사람의 경우 주님께서는 천국에 결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신다고 가정하고 있다. 천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렇다고 천국에 결혼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지상에서 참된 결혼이 존재했던 이들 외에 천국의 참된 결혼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남,녀라는 구분은 본질적으로 영혼 속에 있는 바 이는 영적이고 영원하듯 거기에도 성별의 하나 됨이 있다. 천국에서 결혼은 가장 높은 완전함과 축복으로 존재한다. 하늘 나라는 결혼에 비유된다. 그래서 결혼은 천국의 가장 완전한 타입(type)이요 천국의 실상을 가장 완전하게 알게 한다.
31, 32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은 영혼의 불멸에 관해 직선적으로 계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에 관한 어떤 증거가 구약 성경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위 구절에 인용하시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붙은 떨기에서 선포하셨을 그 때, 이미 위 세 열조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 주님께서는 이 사항을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시고 있다. 이 열조들은 인간 측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나 하느님 측면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원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말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죽은 자에게 하느님이 되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은 육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영을 두고 하는 말임을 우리는 이쯤해서 지각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위 세 열조들의 몸은 무덤 안에 있고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 승강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 죽은 상태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일어남, 몸으로부터 영혼의 빠져나옴, 등등이 부활인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되어 인간 안에 있는 세 원리, 천적, 영적, 자연적 원리이다. 이 세 원리들은 거듭남으로 해서 인간 안에 형성되어지고 그럼으로 해서 생명 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 않은 상태, 거듭나지 않은 존재로서의 인간 속의 것은 실상 죽은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원리들의 하느님이시다. 그 이유가 영적 원리만이 그분으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고 그분의 것이 우리 속에 있기에 우리는 그분과 연결되어 우리의 하느님도 되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자연적 원리의 하느님은 아니다. 이런 것은 생명 자체되는 그분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더 특별한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은 선의 애착과 진리의 지각의 하느님이시다. 그 이유는 그것 안에 그분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가 받은 바깥쪽 지식의 하느님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런 지식은 세상에서의 존재를 위한 것인 바 우리가 영적으로 살게 되어 시간과 공간이라는 영역을 넘어 승강할 때 육체나 마찬가지로 벗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33. “이 말씀을 들은 군중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글자대로 당연히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분께서는 부활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셨고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부활을 알게 하는 구절이 구약 성경 안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 새로운 빛을 그 성경 구절로부터 끌어내 비추어 주셨다. 위 놀람은 경탄을 함축한다. 군중은 인간 마음 속의 단순한 애착과 비비꼬이지 않은 생각들을 표현한다. 이런 탄복함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보통의 느낌과 상식이 천국 진리의 입장을 닫히게 하는 게 아니라 닫히게 하는 것은 감정과 자기 철학이다.
34-36.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진리가 자기 진리를 확신시키지 못할 때 굳어지고 만다. 진리가 침묵하고 있을 때 조차에서도 인간의 이런 자질이 저런 자질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만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자연적 이해성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연적 의지를 표현한다면 이것의 말문이 막혔을 때 저것의 봉기는 어떠할까는 자명한 것이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둘만 있을 경우 서로 적수가 되어 있지만 주님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상태에서 그분의 파괴가 목적이 될 경우 바리사이파는 사두가이파가 굴복당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바리사이파가 모여 있는 모습은 애착과 생각들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서로 더 가까이 연결된 것과 같다. 그들이 율법 교사를 앞세운다. 이는 마치 마음이 논박하기 위해 지식을 끌어내는 것과 같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 만일 정직하게 의도되었다면 헛됫 질문도, 하찮은 문의도 절대로 아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있어서, 말씀의 명령을 비켜갈 수 있게 할 만한 질문에 말씀이 답을 해달라고 간청하려는 시도로 해서 진리를 “떠보는” 때가 있지 않았을까? 본문의 율법교사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바깥쪽 경의를 표했듯 우리 역시 말씀을 형식적으로 존경했던 때가 많지 않았을까? 어쨌든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신성한 진리라는 주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런 호칭으로 주님을 불렀다는 것은 이렇게 말한 것과 대등하다. “당신은 진리 자체이시고 가장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질문을 당신께 하는 것은 당신의 권위를 인정해서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답변을 듣게 되어 자기에게 유익하게 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위 구절은 대단히 중대한 질문이 장착된 구절 중 하나이다. 따라서 어느 인간도 권위 있게 말하지 못한 내용을 그분께서 직접 말하신 꼭 기억해야만 하는 계시의 구절이리라.
37-40.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하느님을 사랑함과 인간을 사랑함은 모든 종교의 본질이요 모든 계시를 총괄한다. 하느님과 인간은 우리의 애착이 방향을 두고 있어야 하는 유일한 대상, 우리의 섬김을 돌려야 할 유일한 대상이다. 이 두 사랑은 우리의 모든 목표를 배출하고 모든 우리의 능력을 채용한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육체 안에서 심장과 폐의 관계 같이 계시와 종교 안에 존재한다. 이 두 사랑은 생명을 주는 원리여서 여타 다른 원리들은 이 원리에 생명의 유무를 의존한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걸려있다.” 다른 가르침, 말씀 속의 진리들은 두 계명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데 비해 세부적이고 특수적일 뿐이다. 모든 교훈은 이 두 계명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와서 그 계명으로 귀환한다. 마치 태양의 광선 같이 이 두 계명은 그 근원을 밝히 알게 하는 한편 무작정 그분께로 귀환하는 게 아니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면서 돌아간다. 그분의 목적,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지상을 아름다움으로 옷입히고, 열매가 풍성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함은 인간을 사랑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느님과 인간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인간의 사랑 안에서 명백해질 때 사랑되어진다. 하느님을 사랑함은 엄격히 말해본다면 이는 개인적 차원의 애착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을 구성하는 특질에 대한 애착이다. 하느님은 선함 자체요 진리 자체이시다. 이것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을 사랑함이란 이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을 행하는 것은 그분의 선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말하는 것은 그분의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만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종교의 큰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악은 하느님과 반대되는 죄이다 라는 수준에서 악을 금하는 것, 선은 그분의 뜻에 일치한다 해서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첫째가는 위대한 계명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뜻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존경하는 것이 우리 품성 중에서 첫째가는 위대한 특출함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온 심정으로, 온 영혼으로, 온 지성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랜 것만큼 자신도 타인에게 행할 때 우리는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못지 않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가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선함 자체로서 사랑해야한다. 우리는 이웃을 선함 자체의 형상으로서 사랑해야한다. 이웃 안에 있는 선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다. 그 이유가 선이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안에 하느님의 선함을 가지고 있는 만큼에서 우리의 이웃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그 사랑함은 그 사람 안에 있을는지 모르는 선을 위해서, 그가 지닌 선이 많든 적든 간에 그 선이 증가되어 완전해지기를 바라서 이다. 어린 아이의 응석을 무분별하게 받아줄 때 그 아이를 망치듯이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되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어떤 개인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를 미워한 셈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를 사랑하되 그의 선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는 말이다.
41-46.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앞 문단의 질문자에게 하느님을 사랑함을 가르치시면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에게 그들의 마음이 끌어 내지도록 노력하신다. 그분의 질문,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금방 그분께서 말해오셨던 주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계명 중의 첫째 계명과 성경 속의 모든 교리 사이에는 중요한 연결이 있다. 어떤 점에서 그 둘은 아주 동일하다. 마가가 이 사건을 기록한 대목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심정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지성을 다해서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라고 답한 것을 발견한다. 위대한 계명인 위 질문은 사랑해야하는 최고의 대상, 뿐만 아니라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정녕 이스라엘에 그들의 한 분 주님으로 믿고 사랑하라고 가르쳐져 온 하느님이셨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볼 때 위 사항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 라고 물으신다. 이를 수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위대한 교리, 그 결과 그분의 유일한 신성에 관한 위대한 교리가 결정되어졌었고 결정되어지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위 질문을 물으신 주님의 목적은 예수가 유한한 존재의 아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그들이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뒤집어주시려는데 있다.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러면 다윗이 영 가운데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고 다윗이 읊지 않았느냐?’” 주님께서는 사두가이파 사람의 말문을 막았을 때처럼 바리사이파 사람의 입도 다물어지게 했다. 그 이유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를 즉각 지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어진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는 자연적 마음에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이 개인적인 어떤 아들로서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러나 적절히 이해해 본다면 위 질문은 그분의 정체가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에서 입으시고 신성화 하신 인성이 하느님의 아들인 바 위 질문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라는 것, 육체와 영혼이 하나되어 있듯 본질적 신성과 하나 되어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문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답변과 친밀한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분은 참으로 온 심정을 다해 사랑되어져야 할 하느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사랑이 생명이신 존재를 보게 된다. 그분은 아버지를 우리 눈에 보이게 가져다 놓았다. 그분은 볼 수 없는 신성을 보일 수 있게, 납득할 수 없는 신성을 납득할 수 있는 신성이 되게 하셨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 생각에 더 가까이 오셨고, 오시고 있다. 더불어 우리의 애착이 더 다감하게 느끼게 하시고 있다. 그래서 기독인은 유대인보다 훨씬 더 완전하게 한 분 하느님을 온 심정과 영혼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느님, 세상이 그분 자신과 재회하게 하신 하느님이 믿는 자들에게 진실로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의 신성에 대해 위와 같은 주님의 논증은 완벽하다. 그래서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독인의 이 위대한 교리를 보다 더 상세하게 파악하고 이해해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귀중한지 모른다. 이 교리의 내적 의미를 더 추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주님에게는 실제의 이중성이 있는데 위 문단, 인용된 시편이 그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 이중성의 본성이 번역에서 잘 보존되고 있지는 않다. 시편의 원어에서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은 똑같이 주님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다. 원어로는 “여호와가 내 하느님(Adon)에게 말하시기를…” 라고 읽어진다. 여호와는 신성한 사랑 측면에서의 주님의 이름이고 아돈(Adonai)은 신성한 지혜 측면에서의 주님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지혜가 사랑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가 사랑의 모든 힘은 지혜를 수단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적들은 지혜의 주권 밑에 놓여진다. 그 이유가 지혜를 수단으로 신성한 사랑은 모든 비질서를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말해지는 “굴복(subjugation)”은 일반적일 뿐 아니라 특수적인 측면 모두를 망라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주님의 인성의 권능 아래 자연과 어둠의 권세가 굴복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인성이 인간 본성을 입으신 것이 “아돈(Adonai)”이라고 특수하게 말해졌다. 이는 말씀이 육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말씀이 육이 되신 것은 말씀의 적들이 복종하도록, ,그리고 그분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 적들이란 어둠의 권세, 인간 본성 중 말씀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는 고집 센 측면의 힘을 말한다. 육 안에 계신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그분 자신을 신성화 하셨다. 이 위대한 일의 양 측면 모두에서 그분께서는 적들을 그분의 발판이 되게 하셨다. 그분은 모든 것이 그분을 따르도록 환원시키셨다. 그분은 이와 같은 일을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을 향한 것들을 향해 행동하셨듯 지금 인간 안에서 그렇게 하시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적이란 그분의 신성한 통치의 규율에 봉기하는 악들, 질서를 거꾸로 되게 하려는 마음의 힘들이다. 거듭남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이런 적들이 그분의 발판이 되게 하시어 그분의 규율이 우리의 심정과 영혼 안에 건설되어지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모든 생각들이 복종됨으로 이 건설을 마무리하신다. 이런 사항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될 때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깨닫는다.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그분의 신성의 권능, 또는 그분의 신성한 인성의 권능이 우리의 의식 세계와 양심 안에서 느껴진다. 이런 거듭남의 체험 속에서 모든 의문은 침묵되고 주님의 답변은 모든 것을 완성한다. 그리하여 진리와 잘못된 것 사이의 모든 논쟁, 선과 악 사이의 모든 다툼도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