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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표현했던 교회 속의 끔찍한 부패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 전달하신 뒤,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얼마쯤 걸어 가셨을 때…” 이는 주님의 마지막 성전 방문, 성전에서의 마지막 떠나심이다. 이 짧은 주님의 행동, “성전을 나오시어 떠나셨다”는 말에 담긴 것은 얼마나 엄숙하고 의미심장한지! 이는 유대인의 집이 황폐된 채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주는 표시이다. 그분은 유대인들의 집의 영광이 되어 계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성전을 떠나심은 과거 이스라엘 군대가 하느님의 궤를 빼앗겼을 당시 “이가봇, 영광은 떠났다” (사무엘상 4:21)라는 상황과 똑같게 되었다. 위 행동이 상징하는 것, 이 행동에 이어지는 예언적 강연은 유대 교회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첫 강림으로 시작되는 교회, 즉 기독교회의 상태까지 묘사하고 있다. 종교의 본질되는 원리를 구성하는 교회 자체는 이 처방이 사라지고 저 처방이 도래해도 결코 죽지 않는다. 기독교회는 영구히 계속될 것이나 유대 교회가 사라져버린 뒤 형성된 그 처방은 종말을 맞게 되고 또 다른 처방이 그 교회를 계승하게 된다. 육으로 오시는 첫 강림을 계승한 것이 영으로 오시는 둘째 강림이다. 참으로 타당한 일은 기독 교회가 한 개의 처방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때로부터 교회와 인류의 진보는 위쪽을 향해가고 있다. 인류 타락으로부터 육을 입으심에 이르기까지에서 교회와 세상은 치료약의 투여를 더 이상 지연할 수 없는 지독하게 부패되는 지경까지 점차 하강되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바 교회는 구분되는 여러 수준으로 기울어 졌다는 것이다. 그중 첫 처방은 아담으로 불리고 아담으로 개시되고 있다. 둘째 처방은 노아로, 셋째 처방은 이스라엘로 불린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는 진짜 교회라기보다는 교회를 표현하는 수준, 껍데기에 가까운 교회로서 장차 오게 될 교회의 그림자였다. 이 교회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척한 채 생각하면 그 교회에는 교회의 진짜 품성을 소유하는 두 개의 처방들이 있었다. 만일 이 교회가 두 개의 구분된 처방에 의해 내려왔다면 승강하는 것도 두 개의 처방으로 있어져야 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타당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현 경우일는지 모른다. 신약 성경은 주님의 첫 오심을 기록하는 한편 두 번째 오심을 약속해놓고 있다. 교회나 인간성의 진보는 어떤 의미에서 순진과 지혜에서 이탈된 상태에서 원 위치로의 귀환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도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드리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는 교회와 인간의 드높은 상태를 표시함으로 시작했던 때와 같이 끝나고 있다. 이와 꼭 같은 모양새를 수단으로 계시록의 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있다. 이 새 땅에 생명수의 강을 지닌 파라다이스가 있고 거기에서 생명 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 낙원에는 다른 점이 있지만 바뀌어진 상태와 인간의 조건에서는 모순된 게 없다. 둘째 에덴은 동산과 도성을 하나 되게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지혜에 과학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 나무는 먹기에 좋은 과일만을 맺는 게 아니라 치료하기에 좋은 잎까지 생산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은 이제 먹는 것 뿐만 아니라 치료로 회복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세상의 종말과 동일시하는 게 보통의 생각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성경의 의미를 잘못 납득한 결과일 뿐이다. 성경이 예견하는 종말이란 교회의 종말이다. 이에 관한 지식은 기독 교회의 첫 처방에 속한 멤버들에게는 섭리적으로 감추여 있었으나 이제 사건 그 자체가 종말을 밝히 알게 하기 때문에 이제는 알려지고 있다. 이런 기독 교회에 관한 처방을 참고할 때 우리는 종말에 관한 경이로운 예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처방 중 하나는 교회의 하강과 그 끝장을 취급하고 처방 중 다른 하나는 교회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다. 그래서 이 처방들은 가장 깊은 흥미와 가장 위대한 중요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문제들을 직바르게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자비의 도구로 땅 위 그분의 교회에 관련하여 주님의 섭리적 역사로 있는 왕국의 가장 깊은 신비들 중 얼마큼은 볼 수 있으리라.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얼마큼 가셨을 때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와서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며 보시라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성전에 관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런 기록이 있어진 것은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교회를 면밀히 조사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면밀한 조사는 심판에 앞서 실시된다. 주님께서 교회를 떠나실 경우, 이는 그분이 그 안에 더 이상 거하실 수 없을 만큼 성소가 모독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이런 교회에 되돌아오실 경우 이는 심판자로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진리를 완벽하게 거절할 때 진리는 심판관으로서밖에 더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의 오심의 크나큰 목적이 구원함에 있지만 오신 이유의 둘째가는 목적은 심판을 위한 것이다 (요한 9:39).
2. 제자들이 그분께 성전 건물을 보라고 하시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거룩한 구조물의 운명을 말하신다. “저 모든 건물들을 잘 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기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 얼마나 엄숙하고 장엄한 표현인지! 자연적 사실보다 영적 사실이 더 강하게 담겨 있다. 성전의 돌들이란 교회를 구성하는 진리들, 집합적으로 볼 때 종교적 교리 체계를 건설하는 진리들을 상징한다. 교묘하게도 본문의 성전은 인간 지혜로 골격을 짠 교리적 진리 체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니라 헤로데가 지은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성전은 하나 된 상태의 교회의 원리, 유대 성직자들이 공들인 상태로서의 하나 된 교회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헤로데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달리 천국에서 파생된 형체,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 같은 것을 더 이상 표현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성전이 거기서 완전한 듯, 견고한 듯 서있다. 그러나 그분의 손이 그 성전을 만질 때 인간 창조의 것들은 그 창조 본래의 것들로 환원된다. 그 성전의 돌들은 무너져 내려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흩어짐의 결과란, 비록 교회의 요소는 보존된다 해도 교회의 통일성은 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 시대에서도 발견된다. 기독교 성소가 황량한 가운데에 낱개로 많은 진리들이 보존되고 더 이상 전체를 형성한 통일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사이의 연결은 깨어져있고 진리 사이의 묶음(unity)은 파괴되어져 있다. 우리는 수많은 세부적 진리들을 볼 수 있고 또한 각 진리에 감복할는지 모르나 진리들의 병합된 상태, 병합된 진리가 창출하는 아름다움, 기도의 집, 하느님이 그분의 이름을 새긴 장소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즉 돌들의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않고 다 무너져 내렸다.
3. 성전의 운명에 관한 위와 같은 일반적 선포 후에 주님께서는 “올리브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성전이 파괴된다는 일반적 모형과 연결되는 사건들의 시리즈를 상세하게 밝히 알려 주셨다. 성전이 파괴됨에 관한 첫 예견은 제자들에게 발표되었다. 이 산에서의 그분의 강연은 몇 사람의 귀에만 말하셨던 것같이 나타나고 있다. 마가(13:3)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아만이 들었던 것으로 여겨지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의 높은 품위를 표현하는 바 이는 그런 품위를 지닌 자들만이 왕국의 더 깊은 신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들만이 일반적인 납득에 와닿는 진리 속의 세부사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올리브산에 앉으셨다. 산 자체는 사랑이라는 원리를 뜻한다. 올리브는 천적 수준의 원리를 의미하는 바 올리브산이란 천적 수준의 사랑, 즉 모든 사랑 중 가장 천국적인 사랑, 즉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올리브산에 앉으신 예수와 관련되므로 본문의 경우 신성한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그 산에 앉으셔서 “말씀하시는” 바 이로부터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의 가장 깊은 속으로부터 근원된 신성한 지혜의 가장 높은 진리들을 말하시는 주님에 관한 표현을 가지게 된다. 주님의 말씀이 이런 수준인 바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리라. 참으로 모든 미래를 보시는 분, 보시는 모든 미래를 슬기있고 복된 섭리로 다루시는 그분인지라 그분의 사랑과 지혜는 모두 무한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그분께 개인적으로 왔다.” 그래서 그분도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말하시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베일 안에 그분과 함께 들어가 탄식과 슬픔, 비통이 씌어 있는 책을 열어 보는 특전이 주어지고 있다. 주님께서 예견하신 성전이 파괴됨에 관한 일반적 취지를 알아챈 제자들이 그분께 묻는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제자들은 이 주제를 이해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일의 때와 징조만을 묻고 있다. 시간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시간은 영적으로 서술될 수 없고 자연적인 것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세상과 육체에 관련되듯 상태는 교회와 영혼에 관련된다. 교회의 품성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상태에 관한 지식들이다. 제자들이 알려고 물은 것은 주님이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의 징조에 관해서였다. 무엇이 이런 징조일까?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것들 안에 진열되어있다. 그리고 영적 진리들은 상응을 수단으로 자연계의 상징적 언어 안에서 밝히 알려진다. 그러므로 상응(correspondence)은 “주님의 오심에 관한 징조”이다. 누가(21:11)가 그런 것들을 이름 짓듯이 상응은 하늘로부터 오는 징조이다. 그 이유가 상응은 천국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징조들이 해로, 달로, 별로 말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교회를 통치하는 원리인 사랑, 믿음, 지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표를 하는 상태들이 징조로, 계절, 날들로, 햇수들로 지적되고 있다. 징조에 해당되는 상응을 수단으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본성을 알 수 있다. 말씀의 올바른 해석의 수단이 되는 상응을 수단으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이 개인적 차원의 오심이 아니라, 진리 자체되신 그분을 밝히 알리고 인간의 심정과 지성이 진리 자체로서의 그분을 지각하고 영접하는 그분의 오심, 한마디로 영 안에 오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똑같은 수단으로 더 배우는 바, 그분의 오심은 세상의 종말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의 종말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 구절의 “세상”은 지구라는 물질적 구조를 뜻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 시대, 은 시대와 비슷한 것, 세상의 역사 안에 있는 어떤 시대, 시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끝남”이란 직역하면 시대 또는 종교적 처방의 시효가 종료됨을 뜻한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세상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 지니는 진정한 의미이다. 히브리 9장 26절을 읽어보자.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번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죄를 치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절을 더 읽어보자.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해석 차원이 아닌 번역 차원에서 의문이 있다. 주님이 오셨던 때의 종말은 유대 교회 시대 또는 유대 교회 처방이라는 것의 종말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해줄 뿐 이 문단도 물질적인 세상의 종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사도들이 살았던 시기는 그들에게 닥쳐온 시대의 종말이었다. 주님의 재림에 관련된 종말도 초림 때와 같은 종류이다. 이것을 묘사한 언어 역시 똑같다. 재림 때와 초림 때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준다고 말을 한다면 어떤 합당한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 그분의 초림으로 마침표를 찍은 종말이 교회의 종말이었다면 그분의 재림으로 마침표를 찍는 종말 역시 교회의 종말일 것이 틀림없다. 자신이 소속된 교회의 처방이 종말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교인된 당사자로서는 너무 힘든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자기들 교회에 대한 하늘의 처방이 종료되었다거나 종료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첫 기독교회라는 처방이 종말을 가진다는 사실은 번역 차원이 아닌 일관된 해석 차원의 단순한 바탕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두 번째 오시겠다고 약속했다. 이 오심은 시대의 종말을 수반하여야 한다. 이 종말은 그분의 첫 오심의 시기, 시대의 종말밖에 더 다른 어떤 것이 있어질 수 있을까? 첫 시대의 종말과 두 번째 시대의 시작은 첫 강림의 처방이 끝을 맺고 둘째 강림의 처방이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종말과 시작이 다른 “징조들” 또는 형상들로 묘사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해,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것 대신 창조되는 등등으로 서술되고 있다. 따라서 하늘의 발광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교회의 빛, 즉 교회를 계발하고 지탱시키는 수단인 사랑과 믿음, 지식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재창조된다는 표현은 속박 안 된 이성과 상식만이 해석을 줄는지 모른다. 어떤 지혜가 이 땅을 파괴하고 또 다른 땅을 창조할 수 있을까? 물질적인 땅은 그 자체를 없애고 다른 땅이 요구될 만큼 책임도 없고 부적합했던 적도 없다. 그러나 도덕적 세계, 오히려 도덕적, 종교적 시대가 책임이 있어 또 다른 더 나은 것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옷처럼 옛 것을 입힐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교회, 결코 죽지 않는 몸이 요구하는 사항에 적합한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할는지 모른다. “정의로운 사람이 거주하는 새 땅”의 약속이 이와 같은 것이리라.
4. 세상 끝날 때와 주님께서 오실 때에 관한 제자들의 문의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 조심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에 관한 문제들에 흥미를 갖는데 대단히 필요한 사항이다. 최소한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나라에 관련된 것들 만큼에 극히 필요한 것이 “조심”이다. 더 좁혀 생각하면 그분의 처음 오심보다 두 번째 오심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더 더욱 “조심하여라”일 것이다. 제자란 교회의 선과 진리를 원리로 삼는 이들을 말한다. 추상적 의미에서 제자란 그 원리 자체이다.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시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선포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가능만 하면 뽑힌 자를 현혹하려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 자체가 교묘히 설명되어 인간이 사랑하고 실제에 잘 사용할 수 있는 쪽으로 가면서 진리의 품질과 능력은 잃어버리어 실지로 거짓이 되고 만다.
5. 사기꾼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의 품성을 기술하신다.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제2세기쯤에 어떤 자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등장하긴 했지만 이는 위 구절의 “많다”에 해당되지 않는다. 어찌됐든 그런 것은 주님이 의미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의 이름”은 그분이 경배되는 수단을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그분의 품성, 예수는 신성한 선으로서의 그분의 품성을 표현한다. 거짓 그리스도란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교리, 진리로 외관을 씌운 거짓들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는 왜곡된 모든 체계가 거짓 그리스도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는 그리스도는 그 안에 신성한 모든 것, 구원해 주는 모든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의 순수함과 완전함 자체이다. 거짓 그리스도는 진리의 왜곡, 기독교 신앙 속의 원리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앙에서 복되게 하는 품성과 구원하는 능력을 박탈한다. 이런 거짓 그리스도일 경우 이는 세상에 널리 있어왔고, 널려 있다는 것은 재삼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 거짓이고 사기이다. 그리스도가 죄인의 구원을 위해 가르친 위대한 진리들을 빼내고 흥미위주의 인간 사상으로 대신 채운 교리들, 왜곡된 기독교 신앙 형체들이 많은 사람을 현혹한다. 그 이유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교리에 물들어 버렸고 지금도 계속 그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기독 신앙의 부패한 것들, 특히 그리스도의 품성 측면에서 썩어진 것들이 기독교회 안으로 일찍이 도입되어졌다. 하느님의 머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그리스도에 하향 등급을 매겨 그분을 수단으로 하는 구원의 교리는 부패에 비례해 고통 받았다. 다음 절에서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이 그 결과이다.
6.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물질계가 아닌 교회에 관한 것인 바 이는 지상의 나라들 사이에 있게 되는 정치적 전쟁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멤버와 당파들에 관한 영적 전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으로 자연적인 전쟁들도 영적 불일치로 야기되기도 하지만 성경의 영적 의미와 관계되는 전쟁은 어디까지나 자연적 전쟁과는 별도로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회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은 견해의 전쟁이었고 그 뒤 고난의 전쟁이 왔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하시는 “전쟁과 전쟁 소문”이다. 교회의 초기 시대 역사에 친숙한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분쟁과 싸움이 심화될 때 그에 따른 폭력과 비참함에 놀라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교회 내 단순하고 신실한 사람들은 이런 참담한 싸움에 충격 받고 썸뜩해 하며 상상하기를, 이런 뒤집힘과 찢어짐은 주님께서 예견하신 마지막 종말의 징조일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께서 말하신 종말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파별로 찢겨 가는 것을 보게 되어 신실한 사람이 지닌 기독 신앙의 진리 안의 신앙이 파괴되거나 미혹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말아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야 말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말하신 것은 이런 사건을 당황하지 말고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훈계하신 이유는 당황하게 하는 시기의 첫 암시는 진리가 가르치는 것들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견해와 느낌이 발생함으로 해서 진리에 관한 토론과 논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선과 진리에 대해 심각히 반대되거나 위험스러운 수준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교회가 기울기 시작할 때 “이런 일이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다른 견해들이 있다 해서 진리를 파괴하는 도덕적 종말이나 교회의 종말은 아니라는 말이다.
7. 더 심각한 재난이 위 사건으로부터, 위 사건에 이어 발생한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염병과 지진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의 영적 의미에서 민족(nation)이란 악을 사랑하는 사람, 추상적으로는 사랑의 대상인 악 자체를 뜻한다. 나라(kingdom, people)란 오류나 거짓을 신봉하는 사람들, 추상적으로는 믿게 되는 오류 또는 거짓을 뜻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종교의 교리에 관한 단순한 견해의 전쟁, 그것 때문에 한탄하는 것만 아니라 선에 악이 대들고, 이런 악이 저런 악을 향해 싸우고, 거짓이 진리를 향해서, 거짓이 거짓과 다투게 되는 현실을 말한다. 여기에는 종교와 교회를 구성하는 선과 진리의 원리에 관해 논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기독 원리를 어느 정도까지는 거절해버리고 그에 비례해서 악과 오류로 대신 채워 넣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싸움의 필수되는 결과가 기근과 염병, 지진이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해지는 상황이 기근으로, 악과 거짓이 떼지어 몰려드는 상황이 염병(pestilence)으로, 교회의 상태가 변하여 정반대가 되는 상황이 지진으로 각각 의미되고 있다. 도처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런 모습이 교회 내 여러 가지 부분들에 존재한다는 것, 비록 전체는 아닐지언정 부분적 변화가 교회 상태에서 거행된다는 말이다.
8. “이런 일들은 다만 슬픔의 시작일 뿐이다.” 위의 사항들은 뒤집힌 교회의 첫 번째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선하고 참된 것을 더 이상 알려하지 않고 선하고 참된 것을 두고 서로 논쟁하고, 이 논쟁으로부터 교리 속에 오류를, 생활 속에 악이 자리잡게 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이런 상황은 교회의 슬픔, 종교의 슬픔, 영혼의 슬픔의 시작일 뿐이다. 슬픔이 모시고 다니는 것이 죄이다. 이 죄는 정의이건 진리이건 어느 하나에 반대되어 있다. 교회의 슬픔을 더 서술해보면 종교적 부패의 진행과 그 첫 단계를 더 알 수 있다. 맨 먼저 사람들은 선과 진리에 관해 토론하면서 어떤 왜곡된 원리를 채택하고 그것 가지고 경합을 벌린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진리를 무기력하게 해서 자기들 원리와 실제를 좋아하는 쪽으로 진리를 구부리기 위해 선과 진리를 뒤집는다. 전쟁으로 의미된 이런 종교적 토론 내지 논쟁은 기독교회 초기에 일어나고 그에 따라 크나큰 쓰라림과 표독스러움이 노출된다. 이는 역사가 풍부히 증거해 주고 있다. 빵이나 물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기근”이 오는 것은 실패할 수 없다. 그 결과 치료 불가능한 마음의 병이 번져버린다. 그리하여 견해와 원리 모두에서 격동과 혁명이 뒤따른다.
9. 교회 하강의 둘째 상태와 그 슬픔이 묘사되고 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에 처하게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제자란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천국 원리인 선함과 진리가 인간의 논쟁과 말다툼 때문에 그 원리의 지각이 흐릿해져 처하게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에 고통을 가하고 죽이고 미워하는 것은 제자들로 표현된 영적 원리가 뒤집히고 부정 당하고 업신여겨지는 것을 뜻한다. 민족(nation)이란 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영적 원리를 미워하고 이 미워함이 세력을 가지어 교회 내에서도 이런 반감이 우세해진다는 말이다.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민족들에게 미움을 당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살 것이라고 말하시고 있다. 선함과 진리를 미워하는 교회 내의 사람들은 교회 원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종교적 원리이기에, 그분이 요구하는 예배와 순종을 통해 그분께로 인도하려 하기에 미워한다. 참으로 선함과 진리를 미워하는 모든 미움은 선함 자체요 진리 자체, 말씀과 교회에 있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미워함에 근본을 두고 있다.
10. 더 말씀하신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미움 받고 박해받는 결과이다. 만일 말씀이 밝히 알려주는 바와 같이, 주님에 관련되는 바와 같은 선함과 진리의 원리가 박해받는다면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 비틀거릴 것은 틀림없다. 제자들, 또는 말씀 속의 진리는 교인의 선생이요 안내자이다. 이런 도움이 교인에게서 박탈될 때 교인들은 돌에 걸려 넘어지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말씀은 우리 발에 등불이요 우리 길에 빛이다. 말씀의 가르침이 갖가지 오류로 희미해질 때 교인들은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죄짓도록 유인될 뿐만 아니라 죄짓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배반하고 미워한다.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이 참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의 결과요 동시에 그런 종교로 직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의 결과이듯, 상호간의 미움은 오류의 열매 중 하나요, 그 오류가 원인되어 넘어지고 만다.
11. 배반과 미워함에 따라 붙는 게 거짓과 사기이다. “그래서 거짓 예언자가 여기 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자란 설교자, 추상적으로는 가르쳐지는 교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짓 예언자란 거짓 선생, 거짓 원리들을 뜻한다. 진리이신 주님이 실지로 부정되고 그 대신 거짓 그리스도가 그 자리를 차지할 때 각종 오류가 번성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주님의 신성을 진정으로 인정하려면 그분의 인성이 신성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부정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라는 인물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성한 인물로 간주되던가 아니면 유한한 존재로 전락되고 만다. 이와 같은 거짓 추구가 인간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둔 진정한 믿음, 정의로운 생활로부터 부추겨 이간질하는데 실패할 리 만무하다.
12.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오류가 증가하는데 악의 증가가 없을 리 만무하다. 악이 팽배하면 사랑은 차디 참으로 입혀지고 만다. 여기서 말해지는 사랑이란 선행,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오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은 행위 없이 믿음만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갈 때 덕행은 빛을 잃어가고 그 결과 선행은 차디찬 것으로 입혀지고 만다. 참된 신앙이 없으면 진짜 선행도 있을 수 없다. 순수하게 영적 의미에서 이는 많은 진리들이 사랑 또는 선행(charity)이 결여된다는 것, 고로 생명 있게 하는 모든 것이 결여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럴 경우가 닥치면 심정에 선행(charity)이 없고, 이해성에는 신앙이 없게 된다. 주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근원이고 생활의 거룩함은 위 두 사랑의 반석이다.
13. 썩은 것이 좋은 것으로 팽배된 추세를 피하고 실용적인 종교의 삶을 끌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주님께서 격려의 말씀이 있는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고뇌의 끝장은 교인 개개인의 체험에서 응용될 수 있는 고뇌여야 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 진리가 뒤집히는 것을 보는 이들은 그 뒤집힘에 동의하지 않고 더구나 그 왜곡된 교리가 악한 생활을 부추김으로 해서 고통 받는다. 마치 인간이 주변의 우세한 어떤 신조 같은 것에 동조하지 않음으로 고통 받는 것과 같다. 부패 속에서도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부패에 맞서 투쟁해야만 한다. 인내는 선처하는 행동에 필수이다. 시험의 와중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인내이다. 시련은 약속 안에 당연히 수반되는 과정이다. 곤경의 때에 하느님에 대한 의무, 충실함에 실패하는 것은 가능성이 다분할 뿐 아니라 걱정되는 사항이기도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영향력이나 본보기를 지니고 있어도 쉽게 낙망하는 바 신앙과 덕행의 약점들이 우리 주위를 싸돌고 있는 바 얼마나 더 빨리 쉽사리 자빠지고 마는가?
14. 앞에서 주님이 지적했던 것과 매우 다른 종류가 이제 발표되고 있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만일 이런 말들이 지독한 파괴와 그 결과 교회의 끝, 다음 절에서 언급하듯 황폐의 흉측함 같은 시대에 적용한다면 맨 먼저 인정되는 시대로 로마 제국의 콘트탄틴 대제, 제3세기 초를 신약 성경이 지목한다고 생각해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끝, end” 그리고 “마지막 날, the last days”은 종종 시간의 긴 간격을 명시한다. 교회의 역사 중 끝의 시작을 형성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완성을 형성한 또 다른 시대도 있었다. 끝의 시작은 콘스탄틴의 통치에 소속되고 있다. 그의 권력과 영향을 수단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인 기독 종교가 로마 세계에 두루 전파되었다. 그리고 끝의 완성은 우리들 시대,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시대, 수많은 선교나 성경 학회를 통해 성경의 글자가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고 생각되는 시대일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 일컬어진 “끝의 때,” “마지막 날”은 로마제국을 통한 이름뿐인 기독 종교의 고백이 정착됨으로 표를 한 것, 그것의 종교는 성경의 실질적 팽창,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같이 복음이 전파된 상태로 점철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정도의 대단히 간략한 역사의 증거만 가지고도 대단히 놀랄만한 징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두 번째 오심, 영적인 나타남을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들, 즉 로마 제국에서의 기독교의 건설과 지구 전체에 성경이 퍼져감이 끝 날의 징조이되 세상 끝 날이 아닌 교회 끝 날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믿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첫 사건의 경우 진실 된 것은 더욱 없다. 콘스탄틴 대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자마자 아리우스의 파괴적 교리를 정죄하기 위해 318명의 감독들이 니가야에서 대 회의를 개최했다. 이 때 아리안 이교도가 완전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교리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를 주도하는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세 가지 따로 따로의 인물이라는 신에 관한 논리를 고안하였다. 이런 관념은 신들의 3인조(a trinity of gods)라는 생각과 구별되어질 수 없다.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로 굳힌 이 끔찍한 곡해가 다음 절에서 언급되듯 거룩한 곳에 선 흉측한 우상인 것이다.
15.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자는 알아 들어라).” 성경의 언어에서 거룩한 곳이란 성전의 안쪽 부분, 신성한 현존이 직접 앉는 곳으로 생각되는 장소를 뜻한다. 물론 이것 역시 기독 교리 내지 예배의 가장 거룩한 부분을 표현적으로 의미한다. 거룩한 장소에 흉측한 우상이 선다는 것, 또는 황폐해지게 만드는 혐오하는 것이 선다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순수한 것을 파괴하는 어떤 원리가 도입된다는 것 외에 더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교회의 가장 깊은 교리, 교회의 거룩한 장소를 차지하는 것은 그 교회의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다. 이 거룩한 장소에 역겨운 것이 서 있는다는 것은 참된 것 대신 하느님에 관한 왜곡된 관념이 중심 교리에 도입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것과 걸맞는 것을 역사에서 발견하고 현재에도 보고 있다. 이것은 신성한 본성이 세 개의 분리된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기독교회 안에 도입되었을 때 있어진 것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지도자급에 의해 정통 교리라고 포고되었다. 이것은 니가야 회의에서 처음 결과 되었는데 이 회의 이전에는 이런 교리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환영했던 교리였을 뿐이었다. 그 뒤 이것이 교회의 믿을만한 교리라고 선포되면서 지금까지 세력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이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인 바 좀 더 살피는게 상책이라 생각된다.
흔히 우리가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신앙의 의식서, 비록 그것이 사도들에 의해 작성되지 않았다 해도 이 신조는 기독 교회에 존재해왔던 신조의 형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비록 확연한 구별이 있도록 그 신조가 시도한 게 없고, 성경의 언어에 거의 가까워서 일반적 진리밖에 표현된 게 없어 기독교의 순수 진리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영원으로부터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또는 하느님의 머리를 지닌 세 인물에 관해서도 언급되는 게 없다. 신성한 삼위 일체의 세 가지 불가결한 요소,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부르는 요소에 관한 이 신조의 단어들은 이러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대목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아들에 관한 언급은 없고 독생자라는 것, 시간 안에 태어나신 것만 거론하고 아버지, 아들, 성령의 구분되는 개인적 성격에 관해서 아무 말도 없다. 이 신조에 의거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여호와에 의해 동정녀를 도구로 해서 꾸며진 인성이다. 신성한 본질은 나뉠 수 없는 바, 여호와 자신이 그 인성 안에 존재한다. 마치 영혼이 몸에 머무르는 것 같다. 이러기 때문에 시험과 고통의 과정을 통해 인성 그 자체가 신성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모습을 갖추도록 꾸며진 인성의 측면과 신성한 본질은 쪼개질 수 없다는 원칙에서 인성 안에 여호와가 계신다는 측면 둘 다에서 합당한 이름이다. 이런 모든 것이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신앙 의식서 안에 함축되고 있고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이 신조의 교리는 하느님의 말씀 속의 순수한 교리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독 교회가 이 신조 속의 신앙을 단순하게 고수하는 한, 순수한 취지에 일치 않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한 이 신조는 세상에 있는 주님의 순수한 교리에 관심 있는 신앙 내지 교리일 것이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교리가 재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교리 중 일부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를 최고의 하느님 수준에서 완전히 떼어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성이 강탈 당하는 주제를 설명하려는 논식에 대항해 그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 제2세기 초에 Praxeas라 이름 불러지는 어떤 선생이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 일 뿐이다는 것, 또는 한 분 하느님이 각기 다른 품성 또는 그 관계에서 본 것일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저술 중 어느 하나도 존재하는 게 없는 바, 그가 주장한 것,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한 인물이라고 본 일반적 사실 외에 더 세세한 그의 소견은 알기 곤란하다. 만일 그가 주님의 인성이 점진적으로 신성화 해 가셨다는 이 중요한 교리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지식 수준이 낮아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한 것, 즉 아버지 자신, 신성이 십자가에서 고통 받았다는 논리를 계속 유지해왔다면 그도 아주 중요한 세부 항목에서 정도를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한 인물 즉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 한 분 하느님이라는 그의 교리는 단순한 기독인들의 느낌과 일치 했는 바 기독교 세계에서 두루 인정받는 평탄한 길에 있었다. 한 때 기독 교구의 주요 감독으로 간주되어 온 로마 교황조차도 그 자신 Praxeas를 좋아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Praxeas는 머지 않아 카르타고의 능변있는 장로, 그러나 거칠고 암울한 성미를 지닌 Tertullian의 광폭한 반대에 봉착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따로 따로의 개인적 인물이라는 그의 관념이 아주 적극적이다 보니, 그는 Montanus의 괴물 같은 이단(heresy)을 껴안았다. Montanus는 자기 자신이 인물로 있는 성령, 구분된 인물로서 성령이 자기 안에 거주한다고 꾸며대는 광기를 지녔다. Tertullian의 열렬한 표현 덕분에 그는 더욱 교회의 중요한 신부 중 하나로 존경받아졌다. 로마의 감독도 Praxeas를 후원하던 것을 철회했고 Praxeas는 이단으로 간주받기 시작했다. 사실 더 큰 이단인 Tertullian은 더 총애를 받아가서 기독교회에서 정통파의 표준으로 채택되다시피 했다.
하느님의 머리를 지닌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세 인물이라는 관념을 추켜든 Tertullian의 교리는 그 시대에 널리 퍼져갔지만 그렇다고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약 삼백 년 후 Arius가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따로 구분되는 개인적 인물이라는 관념에 매료되었는 바 그는 그리스도가 진짜 신성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결말이 나도록 추구했다. 그가 보았던 바는 만일 아버지와 아들이 두 인물이라면, 그리고 각각이 하느님이다면 두 하느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위대한 진리, 하느님은 존재하되 한 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면서 이것과 하느님의 머리를 지닌 두 신성한 인물에 관한 관념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이 대비되는 두 개념을 잘못된 방법으로 풀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한 인물이므로 예수는 한 분 하느님이 인간 본성에서 명백히 나타나신 것이라고 추론하는 대신, 그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는 하느님과 구분되는 인물이므로 예수는 하느님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생각, 즉 성경이 증언하는 바 같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구속되어졌다. 예수는 창조된 모든 존재 중 첫 번째에 해당된다. 이 존재에 권능이 위임되어 위대함으로 입혀졌고 특별 우대해서 하느님이라 불리웠을 뿐이라는 것을 창안했다. 근대에 이르러 Arius의 이런 교리를 따르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창조된 창조자에 관한 위와 같은 관념이 추론의 폭력을 휘둘러 주님의 신성에 대한 근대의 부정자들은 그분이 창조자임을 부정하고 그는 단지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믿고 그것을 주장할만한 성경 구절을 들추어 거기에 억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참으로 주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근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속성에 대해서이든 그분이 이미 존재했음을 부정한다. 이런 짓은 초기 신성의 반박자들도 감히 도전하지 않았던 성경의 아주 명백한 증거에 대칭되고 그 대담성도 너무할 정도이다. Arius, 근대의 예수 인간론자(humanitarian)들 같이 비합리적인 그의 교리는 몇 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정통 교리라고 일컬어지도록 반복적으로 위협했었다. 이 교리의 수용이 제지된 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니가야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골격을 이루어 요약된 교리는 니가야 신조라 불리우는 유명한 신조가 되었다. 니가야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fathers)은 Tertullian의 관념, 즉 삼위일체의 세 본체는 구분되는 인물이라는 Tertullian의 주장에 흠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영원한 존재라는 것, 이것이 Arius에 의해 부정된데 대해 더 뾰족이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했던 바 그들은 아들의 품성이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고, 또는 예수가 영원한 자식 됨의 신분(sonship)을 채택하는 주장을 펼쳤다.
16. 방금 위와 같은 큰 악이 행해져 감을 보게 될 때의 주님의 방향이 이 구절에 있다.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위에서 살폈던 교리를 받아 확증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진정한 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런 역겨운 짓을 금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랑의 상태에 자신을 쏫아 붓는 사람, 아버지의 신성에서 아들의 신성을 나누지 않는 사람, 설사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방법적 논리가 아무리 엉성했다 해도 단순함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함을 계속해 온 사람들에게 차라리 교회는 존재한다. 위 구절은 뒤집혀진 교회의 부패상을 목격했다고 간주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방침이다. 이들은 교리 속의 진리가 어둑컴컴해 있을 때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성경의 언어에서 산으로 피신함이란 사랑이라는 원리에 은신처를 두는 것, 그리하여 영혼의 깊숙한 곳을 잘 계발하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에워싼 도성, 각종 오류와 부패함으로 괴롭히는 도성 안에 자신을 가두어 놓아서는 안된다. 이들은 교회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하는 이단이라는 적들의 포위 공격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이런 공격으로 떠들썩한 와중에서 멀리 떨어져 서있으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보호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사랑과 선행이라는 높은 품위를 연마해 가야한다. 이럴 때 이들은 주님에 의해 그분의 참 제자임을 인정받게 되어 세상에서 그분의 새 교회라는 첫 열매를 맺도록 승인되고 하늘에 있는 그분의 나라에로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승강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 숫자는 대단히 많다. 세상에 널려진 수많은 교회들이 고백해대는 그대로의 교리를 정밀하게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운 사람들은 종교의 선 안에서 성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성소, 즉 하느님을 경건히 모시는 행동 안에서 그들은 심정을 쏟아 부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을 향한 자선의 행위에 그들의 손을 뻗칠 것이다.
17. 더 말씀하신다.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오지 말라.” 이 주님의 권고는 글자대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흔히 상상하는 것은 이 구절은 성급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대화의 모양새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모양새는 각기 상응 또는 영적 유추성을 지닌다. 집이 마음을 상징하는 바, 집 꼭대기, 지붕이란 마음의 가장 높은 자질 또는 수준을, 집안은 마음의 보다 낮은 자질 또는 수준을 말한다. 집 꼭대기란 이웃을 사랑함 또는 선행(charity)이 있는 의지를, 집안은 신앙 또는 진리가 있는 의지이다. 위 주님의 권고를 영적으로 이해하면 선행(charity)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믿음의 상태에로 내려오지 말라는 것이다.
18.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밭에 있는 사람이란 믿음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그의 옷이란 믿음의 진리들이다. 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믿음의 선으로부터 믿음의 진리로 퇴각하는 것, 다시 말해 선한 생활로부터 속이 빈 고백, 이름뿐인 기독 신앙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위 세 가지를 종합해 생각하면 선의 상태로부터 진리의 상태로 움추러드는 것, 또는 심정 속에 있던 종교가 지적 수준의 종교에로 수축되는 것이다. 위 세 경우는 말씀에서 구분지어 자주 표현하는 등급에도 나타나있다. 이런 표현은 글자 의미에서도 희미하나마 식별할 수 있다. “말씀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묘사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부류, 이웃을 향한 선행(charity) 가운데 있는 부류, 진리를 사랑하는 부류가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부류가 유다에서 산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이고, 이웃을 향해 선행(charity) 가운데 있는 부류가 지붕에서 세간을 꺼내러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며, 진리로 선하게 사는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부류가 밭에서 자기 옷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세 부류는 세 등급의 땅 위 주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동시에 하늘에 있는 그분의 나라에서도 확실히 구분되는 세 나라를 형성해준다.
19.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이 구절에 자연적 의미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는 것은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씀에서 인간의 영적인 것이 그의 자연적 출생에 비교하는 것보다 더 흔히 사용되는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참으로 그 둘 사이에는 완전한 유추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아이를 가진다는 것,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은 영적 삶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 임신은 거듭나는 삶의 단계 또는 상태에서 선이 내적 인간 안에 수태되는 때, 그러나 외적 인간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단계, 다시 말해 종교가 마음 안에는 있지만 아직 생활 단계에는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자궁에 아이를 밴다는 것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임신하는 것이다. 젖을 먹인다는 것은 순진이 천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영적 진리로 물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상태가 불행하다는 말일까? 이 불행은 처벌이 아닌 고뇌의 불행이다. 현 주제는 이런 상태를 존재하게 한 곤란의 시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자연계에서 출생이 있을 때 고통이나 위험이 따르듯 영적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진통을 겪는 여인의 고통은 영적 출산에 있게 되는 고통을 아주 잘 표현한다. 사실 영적 삶에 있게 되는 고통, “노동”의 시기는 우리의 종교 또는 종교 원리가 결실을 보는 시기, 마치 내적 측면에 임신된 것이 바깥 측면에서 존재를 하게 되는 시기, 마음에 있던 것이 삶에 옮겨지는 시기이다. 이것은 가장 적당한 상황인데 거기에 괴로움이 있다면 분명 거기에는 가장 적절치 못한 조건이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주변에서 적절한 가르침이나 좋은 본보기를 목격함으로 격려 받는다 해도 우리의 종교를 생활에, 자기 원리를 실제에 옮겨 놓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더군다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죄짓도록 각처에서 포위 공격을 받을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어째서 젖을 먹이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는 말일까? 만일 악한 때여서 우리의 원리가 출생하기 힘들다면 설사 태어난다 해도 그 원리가 유지 존속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특히 출생 초기인 신생아라는 수준일 경우 너무 연약하고 민감한 바 냉혹하다거나 궁핍하다는 상황을 견디어 낼 수 없다. 때로 어머니의 사랑조차도 유아들의 생존을 언제나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 등장하는 단어 피난(flight)으로 상징된 것과 연결되어 이런 상태들은 많은 고뇌하는 속성을 파생한다.
20. “겨울이나 안식일에 도망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도망(flight)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명시하고 있다. 또한 선한 자들이 세상의 환난으로부터 도망가서 쉬고 있고, 그 반면 사악한 자들이 이 환난에서 도망치되 또 다른 환난을 만나는 때, 또는 삶의 마지막 시기까지 의미한다. 그러므로 피난은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두 개의 상반되는 상태에 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피난은 선으로부터 후퇴함, 또는 악으로부터 탈출함을 명시한다. 그래서 도망함이 선과 순진으로부터의 후퇴를 나타낼 경우 그것은 모독의 죄를 포함하게 되고 이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이다. 그 반면 도망함이 악으로부터의 탈출을 뜻할 경우 이는 해방이고, 새로운 시작의 전주곡에 해당된다. 두 경우 모두에 이 구절 같은 주님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여름과 그 뜨거움은 사랑의 상징물이고 겨울과 그 차가움은 사랑의 결핍을 상징한다. 사랑이 없다면 거기에는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겨울은 이런 교회의 상태, 즉 진리의 빛은 있으나 사랑의 따뜻함이 없는 교회를 말한다. 사랑의 따뜻함은 생명 있는 종교의 필수요소인 바 그 반대는 그 종교의 완전한 종말이다. 안식일, 이는 거룩한 상태에 관한 성별된 상징물이지만 반대적 의미일 경우 그럴싸하게 거룩한 상태, 속이 거룩하지도 않은데 겉만 거룩한 상태, 심정 안에 경건함이 없는데 태도나 몸짓만이 거룩한 상태를 의미해준다. 이것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교회 또는 종교의 마지막 상태를 그려주고 있다. 교회의 종말이라고 말한다고 그 종말이 공개적인 불신앙, 사악함, 불손함 같은 것의 팽배로 자연계의 교회가 문을 닫는 상태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종말은 형식상의 종말 같은 부류일는지 모른다. 그 반대인 실질상의 종말은 종교의 바깥쪽 모양새가 대단한 세력을 지닌 듯 보여질 경우에 있어질 수 있다. 한 마디로 전능자의 눈에 비쳐지는 그대로의 교회 차원에서 교회의 종말 여부는 판가름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빛은 풍부하나 겨울의 빛만 풍부해서 열기가 없는 경우, 경건함으로 가득 차 있으나 안식일의 형식적 경건만 있고 일상 생활의 거룩함이 없는 경우도 있다. 만일 교회가 선함과 순진으로부터 후퇴하고 있다면 교회의 소멸이라는 단계에 이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실마리가 다 없어지지 않도록, 장차 새로운 교회가 형성될 수 있는 그루터기라도 남아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결과에 대한 것은 22절에서 살필 것이다. 한편 분노를 피해 도망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도망함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있지 않도록, 다시 말해 너무나 차가운 심정 상태도 아니고, 너무나 뜨거운 상태도 아닌 상태에서 있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21. “그 때가 오면 무서운 재난을 겪을 터인데, 이런 재난은 세상 처음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없을 것이다.” 가장 큰 선은 가장 큰 남용이 될 수 있고, 가장 큰 축복은 가장 큰 저주로 바뀔는지 모른다. 보다 높은 질서, 보다 깊은 내면에 속하는 진리들은 과거 이스라엘 교회에 밝히 알려진 것보다 기독교에 더 많이, 더 깊이 알려졌는 바 거꾸로 될 경우 더 왜곡되고 더 모독할 수 있다. 이런 재난은 세상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것보다 가장 크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영적으로 교회를 뜻하고 처음이란 첫 번째 때가 아니라 첫 번째 상태를 뜻한다.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은 영적으로 교회의 첫째가는 원리와 마지막 번째의 원리들이고 마지막 째의 것이 첫 번째보다 더 모독되어졌다. 타락한 교회의 때와 상태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병행한다. 그렇다고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때가 아니라 상태들이다. 교회가 끝을 맞는 것은 마지막 원리가 부패될 때 뿐이다. 원리들이 남아 있는 한 그 기초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리의 그루터기마저 붕괴된다면 교회의 건설과 유지는 파멸로 빠진다. 따라서 이런 마지막 상태는 첫 상태보다 더 악화된 편이다. 마지막 고뇌는 이전의 다른 모든 고뇌가 축적된 것이다. 이 마지막 때의 고난은 여태껏 있던 것보다 클 뿐 아니라 있게 될 것보다도 크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의 약속, 즉 더 이상 종말은 있지 않다는 것, 계시록에서 표현된 바 같이 더 이상 죽음이나 저주, 슬픔이나 울음이 없다는 것, 한 마디로 더 이상 고뇌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 이유가 이전의 것이나 상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님이 창조하실 새 천국과 새 땅 만이 그분 앞에 남아 있게 된다. 교회의 마지막 처방은 모든 처방의 왕관이어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22. 더 좋은 날이 시작하기 위하여 나쁜 날들은 짧아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완벽한 종말, 즉 누구든지 다 죽어야만 하는 하늘의 처방은 없다는 것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 오히려 신성한 자비가 장치해둔 질서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교회의 종말은 성급히 있게 될 것, 또는 앞당겨질 것이라는 말이 틀림없다. 교회의 종말은 도래되는 것이지 허용되어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교회의 종말이 앞당겨지지 않는다면, 그 날이 짧아지지 않는다면 어느 육체도 살아 남을 리 만무하다. 그 이유는 어느 것도 남아있지 못하고 다 살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육체(flesh)란 영적으로 선의 원리를 뜻하고 개인 차원에서 보면 선에 관한 어떤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기울고 있는 모든 교회는 그 교회에 속해 있는 선한 것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심판이라는 과정을 수단으로 종말을 맞이함으로서 옛 그루터기로부터 잔존한 선한 나머지(사람)들이 장차 새로운 교회를 산출하는 씨(germ)로서 보존되어진다. 선한 어떤 자투리를 지닌 이들이 “뽑힌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해 나쁜 날들이 “줄여질 것이다.” 뽑힌 사람들이란 그들의 공과를 헤아려봄도 없이 무작정 어떤 숫자가 뽑힌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리라. 하느님께서 뽑은 사람들은 그들이 뽑힐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뽑으신 것이다. 인간은 제가 뽑혔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선했기에 뽑힌 것이다. 뽑힌 자는 선한 자이고 선한 자는 뽑힌다. 그들을 위해 고생의 기간이 짧아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을 함께 모아 거두어 그들로부터 새 왕국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3. 뽑힌 자라고 환난을 거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시작에서 봉기했었던 악들과 비슷한 악들이 교회의 말기에도 그 세력을 떨친다. 주님께서 오실 때 어떤 징조가 있게 되느냐고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을 때 그분께서 경고하신 첫 징조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의 이름을 내세우며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경우 그분께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셨다. 제5절과 이 구절의 그리스도는 약간의 차이점은 있으나 우리가 꼭 주목해두어야 할 차이점은 없고 “그 때에 어떤 사람이 ‘자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는 내용은 주목해야할 것이다. 여기, 저기라는 단어는 가까이, 조금 더 간격을 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란 내적인 것을, “저기”란 외적인 것을, 장소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회의 상태를 취급할 경우 “여기, 저기”란 교회의 내적, 외적인 것, 교회의 교리와 예배에 관한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라고 말할 때 믿지 말라는 권고에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내적 차원에서이든, 외적 차원에서이든 발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교회가 부패될 때 그 교회의 교리나 예배 안에 더 이상 진리가 존재 않는다는 것, 그 교회의 내적 측면인 본질 차원에서이든, 외적 차원인 형식 측면에서이든 어느 측면에도 더 이상 진리는 없다는 말이다.
24. 거기에 진정한 그리스도가 더 이상 있지 못하다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란 왜곡된 진리들이고 거짓 예언자란 왜곡된 진리로부터 형성된 교리와 그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들이 제9절에 언급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많은 이들이 내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하면서 주의 이름을 내세우며 등장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 이유는 교회 하강의 시작에서 거짓들이 강세해지나 그 말기에는 왜곡된 진리들이 강세해진다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왜곡된 진리, 뒤집혀진 진리는 단순한 잘못, 실수, 오류보다 더 현혹시키고 더 위험한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은 “큰 표시와 이상한 일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 할 것이다.” 표시와 이상한 일(sign and wonders)은 가짜 그리스도가 자기 가르침을 믿게 하려고 사람들을 유인하는데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교리를 타인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고안된 수단들이란 설득과 감화이다. 이해성 측면에서 설득하고 의지 측면에서 감화시킨다. 먼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에 호소하고 그 다음 그들의 탐욕에 호소한다. “표시”는 이해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이상한 일”은 의지에 영향을 준다. 표시(sign)는 확신시켜주는 수단은 아니고 설득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표시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셨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해성이 소경이 되게 하거나 추론 능력이 상실되게 하거나 신앙을 지각 못하게 하는 능력은 발휘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기적이나 경이로운(wonder) 일은 수행하셨다. 그 이유가 기적은 의지에 경외로움이라는 느낌을 전달하면서도 인간의 합리적 능력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거짓 그리스도나 예언자들이 이상한 짓이나 표시될만한 일을 해대는 목적은 타인으로부터 이성과 자유를 거두어 자기들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감내하도록 그들의 의지와 이해성을 만들려는데 있다. 파렴치한 인간들은 훈련되지 않은 마음들, 특히 고정된 원리로 균형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파렴치한 인간 대부분은 종교를 자동차의 엔진 같은 역할을 하도록 내세우고 있다. 이런 영향력이 판을 칠 때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는 진짜인 순수한 선함이라는 원리이다. 이 원리를 가진 이들이 뽑힌 자들이다. 이들을 부추겨 유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의 필수 요소를 선함에 두고 이를 바탕으로 마음이 건설될 경우 이는 악에 대항하는 최고의 방패이다. 물론 선함이 진리를 수단으로 그 자체가 방어된다는 것은 진정이다. 그러나 순수한 선함에는 진리의 현존, 즉 진리가 체현된 삶이 이미 포함되어있다.
25. 선함은 거짓 그리스도의 사기 치는 가르침에서 보호되는 최선의 방패인 동시에 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바탕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유익한 경고를 주신다. “보라 내가 전에 말해두었다.” 선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야 진리를 받는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내적으로 받는다. 이것이 “내가 전에 말했다”는 구절로 의미되고 있다. 시간에 관련된 자연적인 생각은 영적 생각에서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시간은 장소와 마찬가지로 상태(stat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 모두가 상태를 의미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장소 또는 공간은 의지 측면에서의 상태를, 시간은 이해성 측면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시간은 진리의 상태에, 공간은 선의 상태에 관계된다. 전(before)과 후(after)는 여기(here)와 저기(there), 그리고 앞(before)과 뒤(behind)와 서로 관계되는 말이다. 전(before)은 내적 측면에, 후(after)는 외적 측면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전에 말했다”는 것은 내적 경로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마음의 내적 부분에 받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받는 사람들은 각종 기괴한 일로 유혹하려드는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26.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광야에 나타났다’ 해도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 해도 믿지 말아라.” 저기와 여기라는 단어와 비슷한 것이 광야와 골방으로 의미되고 있다. 여기와 저기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뜻하듯, 골방과 광야는 의지와 이해성, 또는 선과 진리와 관계되는 것을 뜻하고 있다. 진리가 황폐된 교회는 광야라 불리운다. 인간 이해성을 말할 때도 이와 같다. 참으로 교회 내에 진리가 황폐해 있던지, 인간 이해성이 그러하든지 똑같은 비중을 갖는다. 그 이유가 교회를 이런 지경으로 되게 하는 것이 교인의 이해성이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 선이 황폐되었다고 말하든 인간 의지가 썩었다고 말하든 똑같다. 그 이유가 교인의 의지 또는 심정에 있는 선이 황폐되었기에 교회가 그런 지경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을 고하는 교회는 선과 진리 모두에서, 의지와 이해성 모두에서 황폐되는 바 진리는 여기이든 저기이든 그 안에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도덕적 원리라는 골방에도, 교회의 지적 사상이라는 광야에도 계시지 않는다. 이런 교회의 도덕적 원리들은 각종 추잡함으로 가득 차 있어 주님 사랑의 순수한 선이 들어갈 수 없다. 이런 교회의 지적 원리들은 황폐함과 무익함뿐인 사막이고, 거기에는 뱀 같은 종류만 서식할 수 있을 뿐 양떼가 풀을 뜯을 수 없다. 이것이 교회의 케이스이듯 거기에 있는 말씀도 마찬가지 형편이어서 말씀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설된 한도에서만 말씀이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이런 골방을 들여다본다면 무엇을 보게 될까? 이해되지도 않는 이상한 것들뿐이다. “그것들을 믿지 말라”는 주님의 권고는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또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속성은 서로서로, 끼리 끼리의 타협이다. 재회가 없는 싸움만을 가져오고 있다. 믿음만의 원리가 교회를 사막화 되게 하지 않을까? “네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뽑힌 자들”이 믿음의 행동에 의해 구원된다는 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까? 교회이든 종교이든 이런 주장이 팽배해질 때 그리스도의 강림은 가까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진실로 이런 날들이 줄어들지 않으면 누가 살아 남아 있겠는가?
27. “동쪽에서 번개가 치면 서쪽에서 번쩍이듯이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올 것이다.” 주님의 이런 오심은 미래의 장엄한 강림을 뜻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처방의 시작을 형성하고 뒤 구절로 더 나아가면 구름들 안에서 그분은 오심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구절의 오심은 교회 하강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옛 처방에서의 오심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오심은 그분께서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는 글자적 표현에 의해서가 아닌 모든 사람 안에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 복음서에서 자주 언급된 바 있는 그분의 오심,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꾸준히 오시고 있다. 그분의 오심에 관한 본질, 똑같은 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영접함에 관한 본질은 교회 상태에 따라 다르고 그분의 말씀이 그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서 묘사된 교회 말기에 그분을 영접함과 그분의 오심에 관한 본성은 글자가 지니는 상응으로부터 그것의 품성과 결과를 끌어내 볼 수 있다. 신성한 연설자께서 이 본문에서 채용한 모양새는 갑작스런 번득거림으로 그분이 나타난다는 생각을 표출시킨다. 이 나타남은 한순간 지평선에서 번득거린 섬광, 그러나 그 순간 사라져 이전 보다 더 심오한 어둠이 깔린 듯 여겨지게 하는 나타남이다. 교회 말기, 어둠과 죽음이 팽배해진 그 때에 거행되는 주님의 오심은 정말 이와 같은 종류이다. 다시 말해 그 때에는 계속되는 어떤 영적 빛도, 지속적인 영적 생각도, 군림하는 어떤 영적 애착도 없다는 말이다. 군림하는 상태란 애착들의 죽음, 지성의 어둠이다. 복음이 전파됨으로, 또는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또는 얼마간의 흥분된 원인이 있어 마음이 동요되어 마음의 자질들이 일깨워지고 빛이 드리울지 모르나 그것도 한순간에 불과하다. 마음이 빛을 가지고 않고 있다면, 생명 자체가 없다면,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인 것들은 어떤 외적 매체가 움직이고 설득하는 대로에 맞추어진 것일 뿐이다. 세상이 마음 안에 들어오고 대신 종교가 마음밖에 있게 되면 그 종교적 상태들은 감정의 수준, 상상의 수준에 머문다. 물론 활력을 주는 감명이나 관념이 전달될 수 있고 마음에 품을 수도 있다. 번개가 동쪽에서 나와서 서쪽까지 번쩍일는지 모른다. 동쪽으로부터 오는 천국적인 빛은 마음 안에서 흥분된 선행(charity)의 느낌을 통해 영혼에 번쩍거리는 밝음을 줄는지 모르나 선행과 상반되는 이기심이 득세하는 서쪽에서는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번개는 진리에 관한 천국적 빛의 상징물이다. 이 번개가 출현한 곳, 동쪽이란 사랑과 선행이다. 서쪽은 때로 거룩한 상태의 계속과 종결이지만 여기에서는 반대적 의미인바 시작된 선이 무력해지는 것을 말한다.
28. 이제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글자를 읽으면서도 느껴지도록 시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 구절은 죽음과 황폐함의 형상을 얼마나 저절로 표현하는지! 교회가 황폐해진 곳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 시체와 독수리로 묘사되고 있다. 교회의 몸은 죽어 있다. 다시 말해 교회 스스로가 창조한 사막에서 타락되어 있다. 시체가 제공되는 가금류들의 연회장에서 독수리는 자기 몫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죽은 몸으로 표현된 교회 상태에 더 설명을 추가할 필요가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의 여백에 더 그려볼 어떤 것은 있다.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게 독수리라 해도 이 새가 지닌 의미 때문에 주님께서 독수리를 사용해 말하셨을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독수리(vulture)는 나쁜 의미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독수리(eagle)는 한 때는 좋았다가 뒤집어지고 모독되어버린 교회 안에 있는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되어져 있다. 독수리는 마음의 합리적 원리와 상응된다. 이 원리는 진실되거나 왜곡되었거나 하는 어느 한쪽일는지 모른다. 인간은 동기가 자신을 자극하는 데에 따라 진리이든 오류이든, 선이든 악이든 어느 쪽이든 좋아해서 추론할 수 있다. 이성(reason)은 고상한 자질이다. 이것이 진리와 정의를 섬기는데 고용될 경우 진리와 정의를 특출하게 후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타락되어 육정과 사리사욕의 노예가 될 경우 전에 유익하게 사용되었던 만큼이나 강하게 유해해진다. 이성이 선을 섬길 때 독수리의 날개 같아서 새로워진 마음을 드높인다. 그러나 악을 섬길 경우 썩은 고기 냄새를 맡은 독수리 같아서 먹이를 포획하느라 성급히 땅에 내려온다. 이 경우가 본문의 경우 아닐까? 이론을 캐기 좋아해서, 단지 추론만을 위해서 말씀 주위에 모여드는 것, 말씀을 신성한 생명이 담기지 않은 죽은 글자로 취급하는 것, 오늘날 수많은 성경 비평물들은 독수리가 죽은 시체에 모여들 듯 영혼 없는 몸같이 성서를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말씀이 죽은 글자로 간주되고 취급될 때 교회와 종교는 어떻게 잘 되어갈 수 있을까? 그 이유가 말씀이야말로 교회와 종교 모두에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29. 이제 끝이 오고 있고 이로부터 시작이 오고 있다.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릴 것이다.” 이 구절의 예언은 아마 가장 중요한 예언일 것이다. 이 구절 뒤에 이어지는 단어들과 연결해 생각하면 이 단어들은 이 구절의 후편에 속하고 신약 성경이 취급한 미래에 관한 가장 중대한 사건을 미리 말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이 있는 만큼에 비례해서 이 대목의 중요함도 고조되리라.
이 예언적 선포가 기독교의 수세기 동안에 만들어 졌다는 생각은 이 예언의 가장 단순한 글자적 납득이 전달할 수 있는 것만큼에서만 있어져 왔다. 이렇게 생각되어 왔다. 이 발표에서 예견된 사건은 물질계의 종말, 대 이변을 묘사한다고 상상해 온 것이다. 이런 관념이 성행했던 것은 아마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이유가 어떤 사건이라 해도 그 사건이 성취되기 전에 완벽히 이해될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미래적인 사건이 발표될 경우 사용되는 언어는 신앙자가 접근할 경우 그의 신앙이 보존되도록 해주고 아울러 그 정확한 본성은 감추이도록 의도적으로 골격이 짜여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가 신성에 접근하되 볼 수 없고 다 지난 후 그나마 뒤쪽에서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이다. 지금까지의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처방의 마지막에 관한 모든 예언, 그리고 주님의 오심이 새로운 처방을 건설하시는데 따른 모든 예언까지 소유하고 공부했었지만 그 사건의 정확한 본성에는 아주 무지해서 그 사건이 자기들 눈 앞에서 발생되었을 때 그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라고 인식하기를 거절했다.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기독인들이 배워야 하는 바, 기독인들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 관련된 예언을 명확히 이해하여 믿는데 덜 적극적이다거나,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사람의 주장을 보다 긍정적으로 검사해보려는데 소극적이거나 이런 것들이 실제의 성취를 수단으로 공공연히 발견되는데도 미온적 자세를 취하는 데서 탈피해야 할 것 같다. 만일 기독인들이 성경 중심적이고 이치에 맞는 어떤 과정을 한번 채택해본다면 위 같은 범주를 벗어나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할는지 모른다. 그런 과정이란 이런 것이다. 신약 성경의 예언의 비슷한 형태를 구약 성경의 예언에서는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채택할 것이다. 그 결과 구약 성경에 있는 예언이 신약 성경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 신약 성경에 결코 글자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까지도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바빌론의 멸망에 관련된 이사야의 예언에서(13:10),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의 별들과 삼성성좌는 빛을 잃고 해는 떠도 침침하게 만들리라. 해는 구름으로 덮고 달도 빛을 잃게 하리라.” 이런 구절이 글자대로 성취된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요엘 예언서(3:1-5)의 경우 더 강하게 우리를 설득해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예언은 유대 교회의 종말 때와 관련이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자(2:17-21).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와 정밀하게 똑같은 모양새를 지닌 예언이 본문에 있다. 글자대로 해석을 시도한다면 마지막 날은 세상 마지막 외에 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도들이 우리를 명확히 이해시켜 주는 바,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의 “마지막 날들” 이라는 것이다. 해와 달의 소멸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빛의 소멸 외 더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요엘의 예언이 영적 성취만을 가졌듯이 주님의 예언 역시 영적 차원의 성취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게 가장 타당해진다. 어쨌든 예언의 글자대로의 성취는 불가능하다는 것만큼은 납득되었으리라. 자연적 수준의 의미를 부여해 해석을 시도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 예언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살펴보자.
해는 성경의 많은 장소에서 언급되고 있고 언제나 사랑의 상징물로 등장한다. 해가 이런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해는 열을 수단으로 지상의 만물을 받쳐주는 생명 있게 하는 속성에 관련되기 때문에서이다. 몸이 열로 따뜻함을 지니듯 마음은 사랑으로 훈훈함을 가진다. 달은 감지할 정도의 열을 주지 않지만 빛을 주고 있고 그나마 해로부터 받은 반사된 빛을 준다. 빛이 진리를 상징하는 바, 달은 믿음의 원리나 진리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성경에서 언제나 채용되고 있다. 별은 달빛보다 더 약한 빛을 우리에게 주는 바 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한 지식을 나타낸다. 이런 발광체들의 상징적인 본성, 그리고 거의 정확한 의미는 계시록 12장의 문단에서 수집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이 여인은 교회를 상징한다. 이 여자가 태양을 입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품위를 얻은 교회를 표현한다. 이 여자가 달을 밟고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 위에 교회가 안주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 여자가 열 두 개의 별이 달린 관을 쓰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지혜와 총명은 성경 안에서 밝히 알리는 진리와 사랑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재림 때에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주지 않고, 별은 하늘에서 떨어지리라”고 선포하시어, 그분의 재림 때에 교회에는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을 것임이 태양이 어두워진다로, 교회가 그분에 관한 참된 모든 신앙을 상실함이 달이 그 빛을 주지 않는다로, 말씀에서 파생되는 진리에 관한 순수한 모든 지식들이 추방되는 것이 별이 하늘에서 떨어짐으로 각기 의미되어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똑같은 목적으로 계시록 6장에서도 말해지고 있다. “여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내가 보니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처럼 검게 변하고 달은 온통 핏빛으로 변하였다. 별들은 마치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무화과나무의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졌다.” 여기서도 의미는 똑같으나 한 가지 다른 것은 달이 빛을 주지 않는 단순한 경우로 말해지지 않고 핏빛이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피는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진리가 왜곡됨을 의미하는 바, 달이 이렇게 변한다는 것은 왜곡된 신앙이 참된 신앙 대신 건설되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거의 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곳이 제8장에서 네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을 때이다.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으며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의 삼분의 일도 마찬가지로 빛을 잃었다.” 이상의 모든 경우가 같은 언어로 함축하는 공통점은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들, 교회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말씀에서 파생된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의 상태들이 명백해짐에 관한 상태들이다. 하늘의 발광체들은 빛과 열의 근원이다. 이 빛과 열이 땅에 관계되듯 교회에 관계되는 빛과 열은 영적 원리들, 즉 사랑, 신앙 그에 관한 지식들이다. 성경에서 해는 사랑을, 달은 믿음을, 별은 그에 관한 지식들을 상징한다. 주님은 교회의 모든 생명과 빛의 장엄한 근원이시다. 그분은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 지식을 통해 교회와 교통하신다. 주님의 생명과 빛의 교통을 차단하고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인간 마음뿐이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는 이유는 교회나 인간 마음이 부패한 까닭에서이다. 자아 사랑이 하느님 사랑을 차단한다. 왜곡된 관념이 믿음의 빛을 가로막는다. 사랑과 믿음에 관한 지식에 무관심함은 그 원리가 실패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말해지고 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두 큰 빛을 만드시고 그것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으셨다고 우리는 읽는다. 이는 하늘로 의미되는 마음의 내적 측면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승강하는 것을 묘사한 비유적 형태이다. 하늘로부터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내적 인간에서 외적 인간에로 영적 지식들이 강등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영적 지식이 자연적 지식과 다를 바 없는 수준에 놓이는 것, 지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지상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함을 뜻한다. 이러면 하늘의 권능이 흔들려진다. 그 이유가 영적 사항들이 자연적 목적을 위해 사랑되어지면 하늘의 기초가 제거되고 천국 원리들은 그 공고함과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
30. 교회의 모든 짜임새,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 모두가 뒤흔들리고 기우뚱거릴 때, 그 때야 말로 신성한 권능이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진력하시어 그 견고성을 회복하실 때이다. 발광체가 어두워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 안에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두 번째 강림하신다는 장엄한 발표이고, 지금까지 교회들이 찾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발표이다. 이 큰 사건은 불확실하거나 꾸준히 기대하는 상태에 지상의 교회들이 있도록 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의 의도였던 것 같이 보인다. 깨어 경계함(watchfulness)이 요구된다. “깨어 있으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는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왔던 요점이다. 실재와 기대 사이의 첫 번째 큰 차이점은 주님의 오심이 개인적인 어떤 인물의 오심이 아니라 영 안에 오신다는 것, 이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보게 된다면 그분이 오신다는 주변 묘사 역시 전체적으로 그 의미가 바뀐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볼 수 있게 오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물질계의 구름 안에 오실 수도 없다. 그분의 오심에 수반되는 주변 환경이 글자적 해석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면 그분이 오심 역시 글자대로의 해석에 따른 상상과도 전혀 달라야 타당할 것이다. 예견된 어느 한쪽 부분이 영적으로 이해되고 있다면 나머지 부분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문의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그분의 강림에 관한 참 본성도 우리에게 밝히 알게 할 것이다. 주님이 개인 자격으로 오시지 않고 영과 권능 안에서 오신다면 그 오심이 어떻게 거행될까? 그분은 사람들의 영과 심정 안에 오실 수 있다. 참으로 이 오심은 실재적인 실제이며 구원의 강림이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이 오심이 있다 해도 어떤 매체를 통해 결과 되어야 하는데 그 매체는 말씀이고 그 안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 알리시고 있다. 그분의 거룩한 영은 그들의 심정 위에 작용하지만 진리의 영은 진리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구원할 수 있게 작용할 수 없다. 이 진리의 말씀은 주님의 오심이 거행되는 매체이다. 그분이 나타나실 하늘의 구름이란 글자 의미로 있는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 의미가 구름에 비유되고 형상화되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내면의 영적 의미를 마치 구름이 태양의 밝음을 가리우듯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 구절들, 주님의 정의가 구름 안에 있다라든가, 그분의 진리가 구름에 와 닿고 있다든가, 그분께서는 구름을 그분의 병거로 만드신다든가, 구름은 그분의 발 아래 있는 먼지이다든가 하는 등등에서 구름은 말씀의 글자 의미임을 뜻해주고 있다. 말씀은 신성하게 영감 되어 있는 책이요, 상응의 법칙에 따라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구절의 표현들은 한낱 풍유적일 뿐이고 확실치 않은 숭고한 말씀들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신성한 계시의 참된 본성을 보는 이들만이 영적 의미가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이런 일반적인 사실을 서술해보아도 주님의 오심은 자연적 수준이 아닌 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오심은 말씀의 가르침 내지 말씀을 매체로 해서 결과가 있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이제 글자그대로 읽어도 그 중대함이 느껴오는 이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 때에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것과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지만 거기에는 연결을 이루는 사항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우리는 먼저 언어 기교상의 구분을 서술한 다음 설명을 추가해보자.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sign)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이고, 사람의 아들은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이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있고 둘째로 진리로서의 주님이 있다. 전자는 우리 자신 밖으로부터 주님을 알게 해주고, 후자는 우리 자신 안에서 주님을 알게 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 영(the Spirit)으로서의 주님 자신을 표현하신 대목, “그분은 너희와 더불어(…with you) 계시고, 너희 안에(…in you) 계실 것이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있고 신성한 진리는 우리 안에 있다. 전자는 진리 자체는 아니고 진리의 표시이다. 진리에 관한 표시는 진리 자체에 대한 선구자(precursor)에 해당된다. 이런 준비는 시험이라는 고난 없이 준비가 완료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마음이 겸허해지고 순수해져 진리를 충만되고 완전하게 영접하는데 꼭 맞게 되려면 시련이나 번민을 수단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나타나면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란 선과 진리 안에 있는 교회 내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통곡함이란 그들이 첫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건너가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환난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새로운 모든 진리는 영적 시련을 유발한다. 그 이유가 새로운 진리는 마음의 옛 상태들을 휘저어 제거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위 구절은 순수하게 영적 의미만으로 본다면 더 알기 쉽다. 이 의미에서 민족(tribe)들이란 선과 진리 자체에 관한 원리를 뜻하고 땅(earth)은 이런 원리가 있게 되는 자연적 마음을 뜻한다.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시가 하늘에서 나타날 때,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하늘이라는 영적 마음 안에서 처음 지각될 경우, 다시 말해서 영적 마음 안에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유입(influx)되거나, 영적 마음이 그 신성의 영향을 받는 경우 자연적 마음은 혼란을 일으키고 슬퍼함의 원인이 제공되어 통곡하는 나날은 그 상태가 뒤집어질 때까지 이어지는데, 상태의 뒤집힘은 사람이 아들이 올 때 거행되어 그분의 오심을 마음이 영접한다. 주님의 오심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관한 유추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짚어 살피고 넘어가야 하리라 본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먼저 그분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한 진리로 만드셨다. 이를 달리 표현해보면, 그분은 먼저 그분의 인성을 거듭나게 했고 그 다음 신성화 하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분은 먼저 인성을 신성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으로 만드셨다고 말해도 된다. 똑같은 내용을 또 달리 말할 수 있다, 그분은 먼저 인성을 천국적으로 만드셨고 그 뒤 신성으로 만드셨다 등등으로 풀이해 이해를 넓혀 볼 수 있다. 이런 사항들은 통곡이나 시험의 쓰라림 없이 결과 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그분께서 그분 스스로 이런 사항을 직접 수행할 수 없다 해도 아직도 그분께서는 그분의 교회와 백성 안에서 수행해가고 있으시다.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실 수 있기 전에 먼저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셔야 한다. 이런 것과 상응되는 발전 단계는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계속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서 계속되는 것을 먼저 본다. 우리는 세상에서 명백히 나타나는 모든 새로운 진리 안에서 사람의 아들의 표시를 본다. 이는 종교적인 모든 새로운 진리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과학 등등에 있는 모든 진리를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이런 모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분의 오심에 관한 표시이다. 물론 본문에서의 경우 땅의 민족들이 슬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가 권능 있는 모든 변화는 “피와 불과 짙은 연기” 같은 것 없이 결과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설명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로서 오신다. 그래서 그분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말씀 안에 오신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 마음의 내적 측면처럼 하늘로 의미되고, 말씀의 외적 의미는 하늘의 구름으로 의미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에서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온다”는 것도 이미 설명했다. 그분은 글자 의미 안에 오신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로부터 모든 교리가 끌어 올려지고 확증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되는 순수한 의미는 주님을 그분의 교회와 인간 마음에 실어 나르는 참다운 수송 수단이다. “그분은 구름을 병거삼으신다.” 병거란 교리를 뜻한다. 말씀의 글자로부터 오는 올바른 해석으로 추론된 교리는 더 높은 수준의 모든 지식에 필수되는 그릇이요 매체이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되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신다. 이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가 지니는 고유성(property)이다. 영적 의미를 밝히 알린다(계시)는 것은 주님의 두 번째 강림의 본질적이고 특출한 모양새 중의 하나이다. 글자라는 구름은 참으로 그분이 오실 때 사용되는 병거이고 그분의 오심에 나타나는 큰 영광과 권능은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을 확실히 구분지어 주는 탁월한 품성이다. 육으로 오신 첫 번째 오심은 연약했다. 영으로 오시는 두 번째 오심은 권능이 함께 하고 있다. 첫 번째 오심은 겸비함 가운데 오셨고, 두 번째 오심은 영광이 함께 하고 있다. 말씀의 영적 의미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 의지를 더욱 거듭나게 하실 수 있고, 그 사람은 영적 선함을 원리로 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가 “권능”으로 의미되고 영적 의미는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 이해성이 계발되도록 더 많은 빛을 주시어 거듭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영적 진리로 행동하는 바 이것이 “영광”으로 의미되어 있다. 구름이 신성한 위엄인 권능과 영광으로 싸여있는데도 구름은 그분의 발 아래 있을 뿐이어서 우리는 글자라는 구름밖에 신성한 말씀의 내적 의미인 권능과 영광으로 두루 감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 이유가 어느 누구도 말씀의 영적 의미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용될 수 없고 오로지 글자 의미의 순수한 교리 가운데 있는 이들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의 영적 의미가 글자의 한쪽에 놓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중요함이나 거룩함이 감소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영적 의미는 글자 의미에 더 힘을 실어주고 더 드높여지게 한다. 주님의 영광이 그분의 처소인 성전을 가득 채우듯 영적 의미의 영광은 그 처소인 글자라는 성전을 가득 메운다. 지상의 인간은 글자를 통해서만 영적 의미에 다가가 볼 수 있다.
31.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대 이변을 동반할거라 는 세상에 널리 퍼진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주목해두어야 한다. 그분이 오신 뒤의 첫 번째 행동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영적으로 이해하면 이 묘사는 대단히 높은 표현이다.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교회의 종말이 오고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말씀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시러 오신다. 그러므로 있어지는 첫 행동은 남아 있는 신실한 자, 뽑힌 자, 즉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힘을 수단으로 붙잡을 수 있는 영적 원리를 자기 속에 지닌 이들, 그래서 주님의 울 안에 모을 수 있는 이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천사들이 이런 복된 일에 고용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천사는 대리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주님의 대리인으로 일하는 동안 신성한 속성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나팔이란 말씀 속의 진리를 상징한다. 천사들은 그들의 하늘에 관한 표현물도 된다. 이로부터 인간들이 그분의 교회 안으로 끌어당겨지고 평화의 끈과 그분의 영에 관해 통일된 느낌과 생각을 갖고 있게 된다. 이 모아짐이 제아무리 다양해도 그 의미는 변경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은 천국의 모든 것이요, 천국적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 그들 속의 근원과 본질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한다. 주님께서 큰 나팔 소리를 지닌 천사를 보낸다는 것은 말씀 속 진리를 수단으로 천사를 통한 그분의 유입이다. 이런 진리들은 교회와 나라에로 끌어당긴다. 축제를 선포하거나 흩어진 멤버들을 거룩한 집회에 불러모으려고 이스라엘 교회에서 사용된 나팔은 말씀 속 거룩한 진리에 관한 모형이다. 이를 수단으로, 하느님의 소리를 수단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은 한군데 모아진다. 본문이 말하는 바 이 자녀들은 사방(four winds)으로부터,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에서 불러진다고 했다. 하늘 이 끝으로부터 뽑힌 자를 부른다는 것은 천국의 어떤 것을 지닌 모든 자를 부른다는 말이다. 네 방위, 또는 사방이란 갖가지 종류와 수준을 표현한다. 이는 동, 서, 남, 북으로 의미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방으로부터 이들은 유대인들이 반역적으로 내던져버린 나라에로 오게 된다.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모아진 이들이란 선함 측면의 모든 수준, 즉 가장 내면에서 가장 외면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선함 측면에 있는 이들이고,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모아진 이들이란 진리를 가장 명확히 아는 수준으로부터 가장 희미하게 아는 수준에 걸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수준에 있던, 사랑의 수준이 어떠하든, 선과 진리의 실제가 어떤 수준에 있던 그것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초대되고 천국의 문이 되어주는 주님의 교회 안에로 영접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방(four winds)이란 말을 하셨고, 동시에 하늘 이쪽과 저쪽 즉 하늘의 끝(extreme)에 관한 말을 하셨다. 이 두 가지는 자연적으로 보면 거의 비슷하고 심지어 동일하다고 까지도 말해버릴 수 있지만 그 둘 사이에도 차이점이 있다. 바람(wind)은 삶 중 지적 측면의 영(spirit)을 상징하고 하늘(천국)은 삶의 의지적 측면을 상징한다. 그래서 두 단어는 각각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에 적용된다. 이제 위에서 살핀 바를 개인 차원에서 이해해두자. 각 개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오심은 거듭남의 시작을 말하고 뽑힌 자를 사방에서 모으심이란 선에 관한 애착과 진리를 지각하는 모든 것을 모으신다는 것이다. 이 모으심은 꼭 하나인 최고의 대상을 향해 방향을 맞추고 있을 때, 한 개의 목적을 두고 자신이 통치될 때만 결과 되어진다. 그 한 개의 대상은 주님이어야 하고 그 한 개의 목적이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32. 이제 주님의 영광스러운 오심의 첫 열매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우리는 생명, 생생함, 약속에 관한 그림을 가진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교회를 그리되 열매 맺는 나무,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이든, 포도나무이든, 올리브나무이든 세 나무 중 어떤 나무로 그려지든 이보다 더 일반적이면서도 개별적인 형상은 없을 것 같다. 이 세 나무는 모든 교회들, 모든 교인들을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이라는 세 개의 품성으로 구별지어 상징해준다. 무화과나무가 되돌아 간 삶의 첫 표시를 상징한다는 것은 과히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이유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승강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 앞에 존재하고 영적 수준은 천적 수준 이전에 존재한다. 비록 두 번째 강림에 있게 되는 교회가 모든 교회의 월계관이고 에덴에 처음 심겨진 생명의 나무가 그 강둑에서 자라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해도 그 교회의 생명은 가장 겸허하고 가장 공통적인 형체로부터 발달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표시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는다는 것이다. 나무의 가지는 인간 안에 있는 애착을 상징한다. 그 이유는 마치 가지가 나무 줄기로부터 나오듯 애착은 의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의지가 애착을 생산하는 것은, 마치 나무가 가지를 뻗는 것과 같고 애착이 생각을 생산하는 것은 마치 가지가 잎을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은 애착과 생각을 상징한다. 애착이 피어나는 것, 생각이 열리는 것이 위 간단한 비유의 자연적 생각 안에 표현된 영적 생각들이다. 가지들이 연해졌다고 비유는 말하고 있다. 무엇이 가지를 연해지게 할까? 따스함과 땅의 이슬 아닐까? 이것 자체는 온화한 영향과 새롭게 하는 힘 아래서 애착이 연해지고 생각이 펼쳐지는 되돌아오는 사랑과 믿음의 표현물이 아닐까? 이와 똑같은 상황은 육체와 각 기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외적 교회에서 이 아름다운 비유는 놀라울 정도로 본보기화 되어 있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은 이미 거행되었다. 이백 오십여 년 전 유일한 소리, 그러나 명백하고 고요하나 엄숙한 소리, 마치 천사의 나팔 소리 같은 소리가 무시무시하나 기쁜 소식의 소리로 심판이 거행되었다는 것, 첫 강림의 하늘 처방은 종료되었고 두 번째 강림이 시작되었다고 기독교인의 귀에 발표되었다. 사람의 아들은 참으로 밤중의 도둑 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인정되지도 않은 상태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그들의 정착된 자연주의(naturalism)의 죽은 듯한 고요함을 휘젓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자고 일어나고 사고 팔고” 하였다. 그러나 옛 것들은 사라졌고 모든 것은 새로워가고 있다. 새 영향력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진리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 원인에 무지해서 새로운 힘이 있다면 이 세상 안에 작동하고 있어야 하고 새 생명의 표시가 눈에 보여야한다고 말한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는다. 인간의 애착은 새로운 자극을 받았고 그들의 생각은 새 방향을 받았다는 말이다. 진실로 이런 정신적 활동은 자연계 측면에서 뚜렷하게 명백히 나타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활동은 얼마나 위대한지! 그 결과는 얼마나 비범한지! 지식이 증가되었고 과학이 진보했고 발명과 발견의 속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래서 언어의 수송, 표현, 집합 방식들이 과거와는 너무나 판이하다. 이런 정도로 새로워진 것은 자연계 내지 자연계의 거주민에 해당된다. 어쨌든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인정한다면 그 인정 자체는 더 높은 사항에 관한 약속을 준다. 세상 주변의 변화 자체가 우리에게 여름을 가져오지 않지만 최소한 겨울은 지났고 여름이 가깝다는 정도는 말해주고 있다. 세상 주변의 변화 자체는 무화과나무의 잎, 그것도 고작 싹이라는 수준의 잎밖에 더 아니다. 어쨌든 잎이 돋는 과정은 오고 있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 더 큰 아름다움이 진열되고 더 큰 결과도 생산될 것이다. 비록 인간 마음이 자연적 측면에서만 발달했다고 생각된다 해도 꼭 그쪽 측면에서만 발달되었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측면도 어느 정도 더불어 발달되었다. 종교계에 성행하기 시작한 보다 더 자유스러운 견해와 더 큰 포용력이 증가되기를 바래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 등등이 발달의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봄의 표시오 여름을 약속하는 것들이다. 봄은 나무들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때이다. 여름은 열매를 생산하는 때이다. 이런 계절은 오겠지만 그렇다고 무화과의 때는 아니다. 이것은 총명의 때이나 그 총명 뒤에는 세력 있는 이기심이 있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을 돌볼 목적으로 타인을 돌본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서는 조금만을 베풀고 자신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일반적인 행복에 일치하는 것보다 더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 여름은 정의의 열매를 생산해서 인간이 선을 실컷 맛보도록, 그리고 인간이 서로 공통되는 가족의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삼는 형제가 되도록 해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모든 사람은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 것이다” 라고 주님께서 지적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증거도 생산해 줄 것이다.
33.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비유의 사용 방침을 알려 주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이 모든 일에는 해와 달이 어두워진 것,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것, 무화과나무의 싹이 트는 것 등등이 포함된다. 이런 모든 것을 본 이들은 그것들을 영적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런 모든 일을 영적으로 식별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이런 위대한 사건과 변화가 문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다가옴(nearness)은 시간과 공간 차원이 아니고 상태 차원에서의 다가옴이다. 상태의 근접은 “이런 모든 일”이 우리 자신 안에 있을 때로 이해하는게 적절하리라 본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문들을 수단으로 영적 사항들은 안으로부터 들어가고 자연적 사항들은 밖으로부터 들어간다. 그래서 이 문은 자연적 마음에 있는 문들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지고 하나의 교회를 만들게 될 때 선과 진리들이 거듭난 마음의 수준에로 입장하는 허가를 처음 얻는 곳이 자연적 마음이기 때문이다.
34. 이런 것의 다가옴이 이 절에서 다른 형체로 표현되어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이런 저런 모든 예언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역사적 의미 측면에서 “이 세대”로 의미된 것은 유대인의 종족이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의 약속이란, 유대 종족은 두 번째 강림하는 때까지 존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이 약속은 글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이를 좀 더 역사 사건에서 들추어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그들은 18세기 동안 국가적인 존재를 가지지 않았고 전 세계의 흩어졌으며 박해도 받았다. 이런 특이한 백성의 소멸을 방지하려는 섭리는 히브리 성경의 보존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보존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책도, 구약 성경의 계시의 언어도 잔존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이 세대”를 영적으로 이해해보면 세대란 거듭남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의 약속은 이러하다. 이런 모든 일은 거듭나는 가운데, 거듭남에서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 거듭남은 거듭남에 상응되는 상태가 실현되어야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35. 이 때로부터 주님은 이런 사건이 확실히 있을 것임을 말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29절을 설명할 때 우리가 살핀 바, 해와 달의 어두워짐이 글자대로 성취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과 비슷한 예언이 진즉 성취되었다는 것, 물론 그 성취는 물리적 우주에 존재하는 질서를 뒤집는 것 없이 영적 차원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사야 51장 6절에서 이 구절과 유사한 예언이 육을 입으시는 때 인간 구속의 일과 연결되고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 구절의 적용을 첫 강림의 때로 초점을 맞추면 이 예언은 비유적인 말투의 외관을 가진다. 이 예언서의 다른 문단은 이런 관점을 확증시켜 준다. 같은 예언서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65:17). 이 예언은 주님이 육으로 오시는 때 이방인을 부르시는 것과 관계되는데 그것도 이 예언이 영적인 성취만을 받았을 경우이다. 참으로 하늘과 땅은 교회의 모양새들, 즉 하늘은 교회의 내적 측면, 땅은 교회의 외적 측면이다. 이 예언이 교회와 관계되고 있다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거의 절대적으로 확실해진다.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나는 ‘나의 즐거움’ 예루살렘을 새로 세우고 ‘나의 기쁨’ 예루살렘 시민을 새로 나게 하리라.” (이사야 65:18). 이렇게 예언이 교회를 향해 있다는 것이 명백한데 아직도 이 예언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것을 선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종교적 상황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건이 이 예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과학이 신학을 돕기에 이르렀다. 과학은 우주의 안전성 등등을 증거해주고 있다. 어쨌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고 말하신 것은 교회에 종말이 올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이는 교회를 형성하는 영원한 진리는 남아 있어 인류를 위한 희망의 확실한 바탕이 되어준다는 것과 맞먹는 말씀이다. 간단히 말해서 말씀이 교회의 종말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를 갱신하신다는 약속,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약속이다. 본문에서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하신 그분께서 요한에게 미래 사건에 관한 환상을 보여주시어 이렇게 기록하게 하셨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그 이유가 처음의 땅은 사라졌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이사야서의 경우 예루살렘을 그분의 즐거움, 그 시민을 그분의 기쁨으로 창조하시고 있다. 그 이유가 요한은 하느님께로부터 새 하늘을 통해 새 땅에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화려한 환상이 미래 영광스러운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36. 다시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관한 주제로 되돌아오시어 영원한 분 안에 감추어 놓이신 것을 말하시되 “그 날과 그 시간은 천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내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시간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상의 마지막 시간이 아니라 마지막을 맞는 교회의 상태가 이 본문에서 주님이 다루시는 주제이다. 왜 주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이라고 언급하셨을까? 그 이유가 “날”은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를, “시간”은 교회의 세부적인 상태, 또는 교회 안의 각 개인의 특별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어느 인간도, 어느 천사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마가복음(13:32)의 경우 그 때를 모르는 대상의 범위에 “아들”도 포함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도 모르는 사람 중의 하나로 언급하시는 바, 이 대목에는 비밀스럽고 거룩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속삭이듯 말하신다. 어쨌든 오시기로 된 당사자가 자기가 올 날을 모른다는 것은 타당성있는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는 대답만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이 대목 역시 주님의 말씀을 육의 차원이 아니라 영의 차원임을 가르치시는 게 아닐까? 아버지만이 마지막 때를 알고 있는 이유는 신격(godhead)의 원리와 아버지라는 명칭이 지닌 의미로부터 찾아진다. 아버지는 무한한 그분의 사랑이고, 아들은 무한한 그분의 지혜이고, 천사와 사람은 두 무한한 속성에 응답하는 유한한 속성이다. 그렇다면 왜 무한한 지혜이신 아들이 그 때를 알지 못할까? 혹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이 지식을 소유할 참 사람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르는 이유가 “때”라는 속성, 즉 종말에 있게 되는 교회 상태의 본성에서 발견되어진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말하신 바, 그분은 그분을 아는 이들은 알고 모르는 이들은 모른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논리가 유한한 존재에도 적용된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인간도 천사도 모른다고 말해질 경우 이는 교회의 종말에 그 교회에는 진실 된 인간적인 것, 천사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고, 그 교회는 일반적으로든 세부적으로든 모두 내적, 외적 측면의 전부가 파괴되리라는 말도 된다. 이는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선포와 유추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천사는 하늘의 거주민이고 사람은 땅의 거주민인데 이들의 존재가 중단될 경우 진실로 인간적이고 천사적인 마음의 지각을 위한 바탕이 없다는 것, 참으로 진실 된 인간적이거나 천사적 원리의 수용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천국과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를 거절한다면 거룩한 사람과 천사가 그들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지는 셈인 바 거기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존재 않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했다. 이 간결한 선포가 우리를 가르치는 바, 세상에 오게 되는 종말에는 교회 또는 교인의 마음에 어떤 진리나 지혜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신성한 지혜가 인간으로부터 알거나 획득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 남아 있을 모든 것, 또는 인간 마음 안에 남아 있을 모든 것은 선 또는 사랑에 관해 얼마간의 남겨진 것뿐이라는 말이다. 이 남아있는 것이야말로 신성한 사랑과 선함과 어떤 연결이 존재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남은 것을 수단으로 신성한 아버지는 그들을 영적으로 아시게 된다. 주님께서 또 다른 복음서에서 또 다른 형체로 위 내용을 가르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복음 21:22).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다. 선 또는 선행에 관한 얼마간의 남겨두심이 교회의 말기 즉 주님의 재림 때까지 보존되고, 진리 또는 신앙은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37. 이상 우리가 살펴 온 똑 같은 진리가 이 구절에서도 취급되고 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교회의 황폐가 여기서 기술되고 있다. 노아는 영적 교회, 또는 진리나 지혜를 원리로 삼는 교회를 뜻한다. 이에 비해 아담은 천적 교회, 또는 사랑이나 선함을 원리로 삼는 교회를 뜻한다. 교회의 상태가 노아에 빗대어 언급된 것은 교회가 진리 측면에서 황폐되어 진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과의 비교는 없는 바 교회가 선에 관한 측면에서는 황폐되지 않고 계속 얼마간은 남아 있을 것도 더불어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참으로 천적 수준의 남아 있음은 유아 시절에 저장되고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바 이의 파괴는 최후에 해당된다. 만일 이것이 파괴된다면 교회의 회복 내지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그런 불가능이 있다면 “그 날과 그 시간”을 아는 자는 아들도 아니고 아버지까지도 아닐 것이다. 더불어 교회는 “그 날과 그 시간”에 영원히 절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을 주시는 하느님, 그분의 자비에는 실패라는 게 없다. 그분의 자비는 아주 미미한 선한 것도 영원히 보존되게 하시고 장차 신성한 사랑이 지상에 새로운 종자를 형성하게 한다. 첫 기독교회의 종말의 상태가 노아 때로 비교되고 있다. 그 이유가 첫 기독 교회는 고대 교회와 유추되기 때문이다. 기독 교회는 고대 교회를 싸고 있던 천을 벗긴 격이다. 그 이유는 기독 교회의 원리가 고대 교회의 표징물로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추가 본문의 경우 거꾸로 되고 있다. 그 이유가 기독 교회의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 노아 시대는 고대 교회 시대가 아니라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 전인 태고 교회의 마지막 때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조화는 기독교의 과정에서 기독교 이전의 것이 도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금방 사라진다. 첫 번째 교회는 고대 교회와, 두 번째 교회는 태고 교회와 각각 유추된다. 기독 교회의 황폐된 상태는 태고 교회의 황폐한 상태에 비교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아 때”라 불리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영적 근원을 암시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것은 황폐함 뿐만 아니라 약속도 암시하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 노아는 위로(comfort)라는 뜻이다. 노아가 시험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질 수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바 홍수가 의미하는 시험에 이어지는 위로함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에, 고대 교회의 첫 번째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의 오심도 같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위로자로서 오신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는 악을 정죄하고 선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38. “노아 때”로 의미된 상태의 본성이 묘사되고 있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다.” 먹고 마심이란 악과 거짓을 자기 것 삼았다는 것, 장가들고 시집감이란 악이 거짓과 결합했다는 것이다. “장가들고 시집갔다”는 말은 악과 거짓이 상호적으로 바래고 활동하는 것을 흥미롭게 표현한 말이다. 악은 왜곡된 것에 장가들고, 왜곡된 것 자체는 악한 것에 시집간다. 이것이 지옥적인 결혼, 악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의지와 지성의 하나 됨, 심정과 머리의 하나 됨이다. 또한 이것은 악을 뜻하고 행하는 바 심정과 손의 하나 됨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노아는 두 번째 교회를 생산할 싹틈으로서 첫 번째 교회에서 구원하여 남겨진 자이다. 방주는 노아를 홍수 동안에 보존해준 수단이다. 이 방주는 옛 것으로부터 새 세상으로 그를 운반해준 셈이다. 교회를 안전하게 해주는 방주, 교인을 안전히 지켜주는 방주,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외에 더 다른 게 있을까?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듯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사나운 비바람을 피할 은신처를 지을 재료를 얻는다. 사악한 자의 경우 이에 대해 비웃고 그들 자신을 말씀에 의지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던 날”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이 분리되던 날, 즉 정의가 사악함에서 분리될 때이다. 그리하여 신실한 사람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지극히 높은 분의 보호 아래 놓여지게 되는 때이다.
39.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악한 자는 닥치는 심판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홍수는 영적으로 이해하면 거짓의 범람이다. 이 범람이 첫 교회를 멸망으로 끌어갔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 구절은 기독 교회의 종말이 홍수로 있어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하늘의 처방 또는 “세상”의 종말은 불로 있어진다고 선포되어있다. 불은 사랑을 상징하는데 악한 사랑을 수단으로 첫 강림의 교회는 살라진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라는 구절은 악한 자가 자기 재난의 시기를 모르고 있다는 것과 관계된다. 악한 자가 열심히 사고 팔면서 쾌락을 즐길 때 재앙이 덮친다고 말씀은 언제나 말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도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를 언제나 준비하면서 깨어 경계하고 있는 게 악한 자와 다른 점이다.
40, 41. 그분이 오시면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드러내진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각 두 쌍은 모두 완벽히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게 분명하다. 밭에 있는 두 사람은 일부는 선한 것, 일부는 악한 것에 속한다.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사람은 일부는 진리인 것, 일부는 거짓된 것에 속한다. 이 두 사람은 어떤 인물들이 아니라 두 부류을 말한다. 이 두 부류는 말씀 어디서나 취급된다. 즉 의지로부터 더 행동하는 이들과 이해성으로부터 더 행동하는 이들이다. 특히 두 번째 언급된 부류는 우리의 관심을 고조시킨다. 그들은 “맷돌을 갈고 있었다.” 갈고 있음(grinding)이란 조회함 또는 조사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지적 측면의 작용을 암시하고 있다. 맷돌을 갈고 있는 둘이란 같은 교리 안에 있는 둘, 그러나 생활에서는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이들, 그의 주변 여건은 교리와 삶이 일치할 수도 있는데 교회의 타락된 상태, 기우는 상태에 더 협력하는 쪽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 인간의 진짜 상태, 마지막 그의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생활이다는 것이다. 같은 교리라 할지라도 인간에 따라 반대되는 사랑, 즉 악한 사랑과 선한 사랑 어느 쪽의 사랑을 습득하여 유지 지탱해 갈 수 있다. 이것이 맷돌을 갈고 있는 사람이 “여인”이다는 것에서 암시해주고 있다.
42. 주님께서는 시대의 종말과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 관해 직선적인 어조를 사용하시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우리에게도 전달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길잡이가 되는 엄숙한 교훈 중 하나이다. 먼저 훈계와 경고가 한꺼번에 담긴 말씀이다.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지켜보고 있어라.” 영적으로 경계함(watchfulness)은 행동 차원만이 아닌 상태 차원, 의무 측면 뿐만 아니라 원리 측면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경계함, 또는 지켜봄은 목적에의 헌신, 목적이 실현된다는 확신을 꾸준히 간직하는 것, 그 목적을 확고히 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 등등을 다 포함해서 이르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는 믿음의 선 가운데 있는 상태, 믿음에 의거한 생활과 진리의 상태를 말한다. 믿음의 선이란 믿음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 지켜보고 있음, 경계하고 있음 등등의 말은 모두 준비(각오)가 되어 있음(preparedness)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어느 시간에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서이다. 교회의 마지막, 삶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는 우리에게서 감추여 있다. 그럼으로 인해 지켜 경계하는 일을 어떤 특별한 지식이 못하게 하거나 무능력하게 만드는 바, 우리는 그 일을 일반적 지식에 의해 준비해가도록 영향력을 받게 된다. 그분이 교회 종말에 오신다거나 또는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 각각에게 오신다는 경고는 우리로 주님의 연설을 더 잘 새겨듣게 하는 실용적인 장점을 지닌다. 우리 각 개인의 마지막 날과 그 시간과 관련된 신성한 섭리는 대단히 슬기롭고 자비로워서 우리들로부터 그것들은 감추여 있게 하는데 그런 이유는 우리로 언제나 준비를 갖추고 잘 감시하게 할 목적 때문이다. 우리는 경계함이라는 단어를 흔히 적의 접근을 발견해서 쫒아버리는 것을 연상하지만 본문의 경우 이는 그분을 만나서 친구로 환영하는 것을 연상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 자체는 피할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가능만 하다면 비켜가길 원한다. 비켜가려고 해보아야 쓸데없는 짓이라면 가장 슬기로운 행동은 그 사건에 대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주님이 어느 시간에 오실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를 아는 것만으로 우리는 언제나 준비해야 하리라.
43. 그러나 이 구절의 말씀은 앞 구절을 무효화시키는 듯 보이게 할는지 모른다.“ 만일 도둑이 밤 어느 시간대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지켜보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이 먼저 생각들게 하는 것은 도둑이 언제 올지를 집주인이 알고 있는 듯 여기게 하는 점이다. 어쨌든 이는 인간이 해야만 하는 것에 관한 묘사라기 보다는 인간이 늘 하고 있어야 하는 것에 관한 묘사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늘 그 죽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시간이 접근할 때까지 지켜보는 일은 생각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위 구절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도 결심한다. 종교에 헌신하겠다고 사업이나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는 결심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계획들은 잘못된 견해와 그럴 듯 여긴 느낌의 돌출된 결과일 뿐이다. 이는 여느 일반 사람들의 생활이 주는 즐거움이나 의무에서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인 바 오류에 해당된다. 사실 평범한 사회 생활 자체는 종교적 덕행을 세련되도록 실습하는 지정된 곳이다. 종교는 생활 깊숙이 주입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이유가 삶, 인생 여정은 천국으로 가는 방법을 실제로 배우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적극적인 유용함을 추구하는데서 찾아진다. 지상 생활을 천국적 목적에 맞춤으로 그 생활 자체를 성별되게 하는 것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천국에서의 삶은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살아지는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는 천국에서 살게 될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어쨌든 본문의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주님께서는 도둑이 들어오는데 관해 말하실 때 “hour”를 사용하시지 않고 “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 구절을 영어로 표기해보자. “If the good man had known in what watch the thief would come” 구약 성경 시대에서 “watch”는 네 시간(four hours)이었다. 그러므로 “a watch”는 “an hour”이라는 단어보다 더 넓은 시간대 즉 더 일반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시간 단위이다. 더불어 경계함, 또는 지켜봄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느낌은 지적 측면 또는 진리 측면의 상태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선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켜봄(watchfulness)은 선에 종점을 가진 진리, 의지 안에 바탕을 둔 지성이다. 그 반면 악한 자에게 있어진 지켜봄이란 선이 없는 진리, 육욕에 바탕을 둔 지성이다. “도둑이 언제 올는지 알고 있어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집주인”이란 위의 선한 자, 선함을 위해 진리를 소유한 사람의 상태이다. 위의 번역, 뚫고 부순다(…broken up)는 단어를 더 직역하면 파헤친다(dug through)인바 이 직역이 주는 느낌은 지적 행동이다. 그 이유가 판다(dig)는 것은 조사, 탐구, 발굴하는 것 등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다는 이 단어는 뿌리고 거두기 위해 땅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면을 수단으로 뭔가를 휙득하기에는 너무나 게을러 훔침을 수단으로 하려고 집을 부수는 것을 두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지키는 사람이 집이 뚫리지 않게 하려면 어떠한 태도여야 할 것인지 상상될 것이다. 그의 지성은 그의 마음을 탐색해 가는 상태에 계속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마음을 상징하는 이 집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획득한 지식을 거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44.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이 구절에서 “지켜보라”가 “준비하라”로 대체되고 있다. 지켜봄이 이해성 측면을 더 강하게 암시하는데 비해 준비함은 의지와 선함 측면을 더 부각되게 해준다. 지켜봄은 준비를 갖추기 위한 길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선함을 위해서 존재한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준비된 사람임을 발견할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지식을 신실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그 지식이 가르치는 미덕까지 완성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이 준비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목표로 삼아야 할 상태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람의 아들이 오는 시간이 막상 닥쳤을 때야말로 우리가 그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이 준비는 그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 그때 가서는 실감하리라.
45. 이제 주님께서는 위 가르침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이 문단에서 지켜 경계하는 사람이 주인이 맡긴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준비한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반면 주인이 더디 오겠지 하며 동료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놀면서 그분이 맡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종은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자는 칭찬을 받고 후자는 질책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신성한 직유(divine simile)를 찬찬히 살펴보자.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 종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우리는 하느님을 잘 섬기도록 창조한 하느님의 종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데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발견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섬김이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집주인을 섬기는 일, 동료 종들 즉 가족이나 교인 모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 구절의 종(servant)은 영적 측면에서 볼 때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과 관계되는 명칭이다. 이 종들이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에 따라 착한 종도 되고 악한 종도 된다. 이 종은 주인의 다른 종들을 다스리도록 되어있다. 집이란 교회이고 다른 종이란 교회 멤버들이다. 교회의 “한 종”이란 목사이고 그의 직무는 교인에게 적절한 교훈을 주는 것,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좀 더 확대시켜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 각각은 “한 종”이다. 그 이유가 믿음의 식구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 형제들을 보살피는 일은 모든 교인 각자에게도 할당된 의무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각자는 자기 이웃에 봉사함을 수단으로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그분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남보다 진리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가리키는 삶의 방향과 품질에 관해서 더 봉사할 수 있다. 이렇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 세계에서 그에게 할당된 장소는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곳이리라. 이렇게 비유의 일반적 교훈은 표면 가까이 놓여있다. 이 비유의 특색 있는 의미를 개인의 마음에 적용하면 각자의 심정과 내면 삶에서 역사되는 것과 그 상태를 보여준다. 내적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인, 종, 다른 종”을 발견해 볼 수 있다. 내적 인간은 주인이고 외적 인간은 종이다. 더 내면적으로 볼 때 내적 인간 안에 있게 되는 선의 원리가 주인이고 외적 인간에 있어지는 진리의 원리는 종이다. 다른 종, 또는 식구들은 선함에 관한 애착과 진리의 지각이다. 한 종이 다른 종들을 다스리도록 주인에 의해 임무가 부여되었다. 다른 종 또는 식구들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 인 바 진리가 그것들을 다스린다. 그 이유가 진리의 임무는 질서를 생산하고 유지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선이 통치력이라 불리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또 다른 표현으로 의지는 이해성을 수단으로 통치한다. 선 또는 의지는 자기 스스로, 또는 직접 진두에 나서서 통치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선은 단지 애착일 뿐이고 의지 역시 눈이 먼 추진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식별과 판단은 진리와 지성에 소속되어있다. 한 마디로 통치와 질서가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은 법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애착과 생각을 질서 안에 가져다 놓고 질서 있게 관리해 가기 위해 선은 반드시 진리를 채용해야 하고, 의지는 이해성을 고용해야 한다. 통치는 보다 높은 것이 능동적인 힘으로서 보다 수준 낮은 것을 수동적 도구로 해서 실시되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 도구로서의 종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고 책임 있을 이유도 없는 바 칭찬이든 책망이든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은 서로 구분되어진다. 이 둘은 인간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부분들이지만 그 둘은 구분된 뜻과 행동을 가지고 있다.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렇다고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다. 외적 인간은 일종의 (실험실에 있는) 시약(re-agent)같아서 내적 인간의 것을 재연할 수 있지만 때로 내적 인간에 반대되게 작동할 수도 있다. 따라서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일 수도 있고 “악한 종”도 될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바 같이 마음의 두 부분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일종의 중간 영역(intermediate)이 있다. 이 존재는 우리도 의식한다. 이 중간 영역에서 우리는 각자의 마음과 품성, 선하고 나쁜 것, 참되고 거짓된 것 양쪽 모두를 헤아리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일까? 외적 인간이 스스로 내적 인간의 뜻에 복종할 때, 그리하여 내적 인간의 의도를 충실히 수행하려고 자연적 애착과 욕구를 다스려가면서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때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종”이 될 것이다. 특히 본문의 “양식(meat)”은 자연적 애착과 욕구를 받쳐주는데 필요한 선을 뜻한다. 그럼에도 이 선은 마구잡이로 획득해 나누어준 선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먹여져야 하는 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내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인성은 그 인성 속에 내재하시는 신성의 뜻을 행함으로 먹여진다. 달리 표현하면 그분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뜻을 행함으로 먹여진다. 이와 같이 우리의 외적 인간의 애착들은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 또는 자연적 수준의 것이 영적 수준의 것에 충실하고 슬기롭게 종속됨으로 먹여진다. 위촉받는 “한 종”은 자기 때에 맞추어 “다른 종들”에게 양식을 주어 자연적 수준의 것이 진리에 의거 행함으로 선을 만들도록 하는 것, 달리 표현하면 식별력을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선이 바래고 사랑하는 대로 식별해가기 때문이다.
46. “주인이 돌아 올 때에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복있는 종이다.”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에게 발표되고 약속하는 축복은 그의 성실과 지혜의 결과이다. 내적 인간의 뜻에 순종하여 외적 인간의 애착과 지각을 다스리고 제 때에 양식을 먹인 결과로 우리의 두 본성이 하모니를 이루고 하나 되어졌다. 이 하나 됨 자체가 복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하나 됨은 마음을 고요와 평화, 행복한 상태로 진입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연적 차원에서 내적, 외적 인간은 완전히 반대되어있다. 이 반대 됨은 무질서와 재난의 원인이다. 반대 됨이 제거될 때 그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회복되어 신성한 축복이 받아들여진다. 축복은 주인이 돌아와 그렇게 행했음을 발견할 때 약속되었다. 본문의 줄거리에서 비쳐지는 바, 주인은 집에 없었고, 종만 집에 남아서 전 식구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듯 여겨진다. 이는 우리의 자연적 인간은 자기가 결정한 것을 하든지 말든지 자유로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모습이다. 더불어 주인이 올 때까지 주인의 지시를 꾸준히 이행해 가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47. 이런 사람에 대한 심판의 결과가 이어진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 됨에 관해 말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셨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신성과 인성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관계와 같이 서로 관계된다. 주님 안에서 성취된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도 결과 될 수 있는 것에 관한 장엄한 대형(prototype)에 해당된다. 신성화 하심을 수단으로 주님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속성을 소유하셨 듯, 거듭남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모든 자질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외적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소유는 위촉받아 붙잡고 있는 상태인 바 진정한 소유권은 내적 인간이고 내적 인간의 명령에 따라 사용되는 것이다. 내적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진리, 그에 따른 기쁨과 즐거움, 모두는 외적 인간 스스로 선용하는 성실의 보상으로 향유하게 된다. 적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 역시 성실히 처리해갈 수 있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해 같은 기쁨을 누리리라.
48. 그러나 외적 인간의 반대적 측면이 위와 대비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악한 종이라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한다.” 사악하다고 평가받는 종의 경우가 여기서 말해지고 있다. 이 종도 성실한 종이나 마찬가지로 집주인이 집관리를 맡겼고, 주인이 되돌아 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오는 때가 늦을 것을 생각하면서 주인이 자기에게 베푼 신뢰를 남용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 그러나 실지로 위선자라 불리는 교인이 위의 악한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이 종은 자연적 수준의 인간 타입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종은 우리 속의 두 가지 차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종교적인 습관과 형식에 잘 훈련되어진 외적 인간, 그래서 영적 삶의 질서가 바깥쪽으로만 일치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구절의 경우 그의 내적 인간이 질서 있는 외적 인간에로 흘러들어 그 외적 인간에 필요한 힘을 주고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참으로 이 종은 일반적으로는 외적 인간을, 세부적으로는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명시하고 있는 바 이럴 경우의 악한 종이란 외적 인간 안에 진리의 품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선과 상응되지 않는 진리였을 때를 말한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형태 중 첫 번째가 “주인이 더디 오겠지”라고 심중에 말하는 대목에서 부상하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중얼거린 이 말은 은밀히 의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이 “생각”은 자기 소원의 소산이다. 심정 안에서의 소리는 의지로부터 솟아난 생각이고 자기 바람을 말한 것이다. 더디 옴(delay)은 꾸물거림(procrastination)이라는 것보다 그 강도가 더한 경우이다. 시간은 상태를 상징하는 바 서두름이나 지체함은 확실함과 불확실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하셨을 때 그분께서 시간적으로 곧 오리라는 것이 아닌 확실히 오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주인이 더디 오려니 라고 악한 종이 말한 것은 그의 주인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자기의 불신뢰를 은밀히 굳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종의 말에 포함된 영적 생각, 영적 상태이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그의 불신앙은 내적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내적 인간에 상응되는 모든 것에 의심을 갖는 것, 교회와 천국, 말씀과 주님의 내적 측면 모두에 결국 의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결과가 다음 절에 기술되고 있다.
49.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할 것이다.” “다른 종, fellow-servant”이란 동등하게 종속되는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나쁜 상태로 규율되고 불일치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로 놓여져 있다. 사람들이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 진리가 진리들끼리 일치하는 것은 대단히 이상적이다. 우리가 악한 상태일 경우 그 악한 만큼 우리가 소유한 진리는 다투게 된다. 이는 무신론자, 특히 계시된 종교는 모순된 체계라고 생각하는 무신론자에게서 발견되는 노골적인 극도의 모습이다. 다소 표면상의 형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악이 좌지우지하는 모든 마음 안에서도 진리가 서로 다투는 모습은 역력히 나타난다. 악이 뒤집어엎은 통치하는 진리는 다른 진리들을 때린다. 모든 사람을 향해 대적하려드는 이스마엘족의 손과도 같다. 진리가 침묵 속에 주저앉거나 거절당할 때 악과 거짓의 탐식이 있어진다. 이것이 “술친구와 먹고 마시는” 악한 종의 모습이다. “술친구”란 거짓을 흡입하는 악들, 그리하여 진리와 더욱 반대되게 하고 이 악한 종의 행동지침은 진리의 거짓화밖에 더 달리는 표현 해볼 수도 없다.
50.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인이란 내적 인간을 의미하는 바 악한 자의 경우 그 사람에 적당한 내적 인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주인의 옴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할까?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내적 측면은 상이하지만 어쨌든 모든 인간은 내적 인간을 가지고 있다. 악은 참된 내적 측면을 닫히게 하여 마치 그것이 존재 않는 듯 만든다. 이것이 “주인이 더디 오려니”라고 종이 심중에 말한 것에 해당된다. 선의 저자되신 분, 행복을 나누어주시는 그분의 오심이 실로 지연되는 이유는 외적 측면을 규율하고 있는 악 자체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꼭 오신다. 설사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저 세상에서라도 꼭 당도하신다. 그 이유는 심판은 내적 측면이 열림으로, 모든 생명이 기록된 내적 기억의 책이 펴짐으로, 행동을 있게 한 목적이 밝히 드러남으로 결과 되기 때문이다. 말과 행위가 외적 기억 안에 씌어지는 동시에 그 동기는 내적 기억 안에 새겨진다. 이것이 열려질 때, 즉 외적 인간 안에서의 행위와 모든 기록된 말들이 설명될 때 주님은 오신다. 그가 그분을 찾지 않는 날에 오신다. 그 이유가 영의 내적 기억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그 봉인을 떼고 그 속에 담긴 것을 밝힐 때까지 내면의 기록은 침묵 속에 남아 있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내면의 상태가 밝히 드러나 완결될 때 자기 악을 확인하게 된다.
51. 내 주인은 더디 오겠지 라고 생각해 처신한 종에 대한 주인의 판결이다. “주인은 그 종을 자르고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보낼 것이다.” 조각조각 자른다(cutting asunder)는 표현은 심판의 결과, 또는 내적 측면이 열려 형식적이고 사기 뿐인 제자로부터 참되고 선한 것들을 떼어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형식에 불과한 종교 품성만을 지닌 이들은 바깥쪽으로만 선과 진리를 옷입고 있는 바 이는 거짓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어 예언자인냥 치장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바깥쪽 치장을 벗기면 그들은 본연 그대로의 자신, 악한 종의 품성이 적나라해진다. 그들이 갖고 있던 선과 진리, 사랑과 믿음이라는 우수한 품성은 그들의 외적 측면에서 부착되었을 뿐 그들의 본질적 품성과 하나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선자, 모독자들이 있는 곳이 그들의 지정석인 바, “거기에서 그는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슬피 움(weeping)은 악으로부터 발생하는 재난이고 이를 갊은 거짓으로부터 야기되는 재난이다. 슬피 움은 심정의 통곡이고 이를 갊은 지성의 눈물이다. 사실 이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슬피 우는 게 아니라 실망에 따른 분노 때문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악으로 꽉 찬 의지가 꼼짝 못한 탓에, 뒤집기만 하고 사기만 쳐왔던 이해성의 오류가 투명해진 탓에 슬피 우는 것이다. 악과 거짓은 자기 스스로 자기 벌을 가져온다. 저 세상에서 이는 당연한 이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