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

성서 본문: 예레미야 1장 11-14절

1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감복숭아 가지가 보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2. 야훼께서 이르셨다.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 보리라.”
13. 야훼께서 두 번째로 이렇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읍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4.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황폐함

본문의 비유는 두 개의 환상으로 구성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요 예언자로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이어서 영의 내향적 세계가 되어가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 환상들은 인간 마음의 상황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계의 영적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환상들 (visions)

주제는 황폐된 것, 또는 적들에 의해 땅이 황폐해진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주제는 악을 탐닉함으로 황폐해진 마음이다.

가지

가지(막대기, 지팡이)란 통치자의 주권 같은 능력, 권위, 권세를 표현한다. 통치자의 일이 모든 것을 그의 명령 밑에 두려는 것, 또는 이런 목적을 위해 비질서 하에 있는 이들을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등등, 통치자가 가할 수도 있는 처벌을 포함하는 훈련과 교정을 표현한다.

감복숭아 나무

위의 경우의 가지는 감복숭아 나무로부터 이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원리들과 그 원리들이 실제 삶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나무들은 각기 다른 원리, 각기 다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여 이것이 인간 안에, 또는 각 개인 안에서, 또는 집합된 마음인 교회 안에 있게 된다. 이런 연유로 나무가 성경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감복숭아(살구, almond) 나무는 봄철에 가장 빨리 꽃이 핀다. 1월에 꽃이 피고 3월에 열매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봄의 선구자이다. 히브리어 뜻을 보면 감복숭아는 바삐 서두는 것, 조급함(hasty)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성급한 나무” 또는 “깨우는 자”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서 이 나무의 이름의 뜻이 응용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본다. 즉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보리라.” 예레미야가 본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급한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감복숭아 나무는 조속히 오게 되는 것에 대한 표현물, 또는 약속이나 예언의 성취가 곧 닥친다는데 대한 표현인 것이다.
영적으로, 새 계절을 제일 먼저 잡는다는 면에서의 감복숭아 나무는 진리가 우리 내향의 삶에 적용될 때와 같이 내면의 진리를 지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지각은 우리가 거듭날 때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정의 선함을 바탕으로 파생된다. 따라서 감복숭아 열매는 일상생활이나 일 가운데 있는 실제적인 선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나무의 가지가 지팡이(rod)로 전환될 경우,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자연적 감각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바램들을 훈련시켜 교정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목적을 위해 성경의 글자, 특별히 십계명은 이 지팡이의 가장 바깥의 형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진리가 우리 지각에 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들, 즉 실제 삶 속에서 우리를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지팡이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시선을 모으거나, 경고하고 훈련시키는데 사용하듯, 신성하신 선생님은 언제나 말씀이라는 막대기를 잡고 계시면서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그리고 선한 행동쪽으로 우리의 관심을 애정 깊게 불러서 당기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삶의 법칙에서 탈선될 경우 부드러운 어조로 경고하시고 영원하신 선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선을 행하려는 사람의 경우, 주님께 고백하는 말,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다”이다. 주님이 그분의 사랑의 섭리 가운데서 필요하신 것은 “만국을 쇠지팡이로 다스리심”이다. 즉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훈련시키시되 자연적 진리라는 엄격한 법칙에 의거하신다는 것, 진리를 우리의 행동이라는 자연적 삶에 응용시켜 가신다는 말이다. 감복숭아 나무에 관한 첫 환상은 뭔가가 절박하다는 것, 또는 뭔가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감복숭아 가지가 보였다 함은 교정과 훈련이 있을 것임을 미리 말해 두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환상, “끓는 솥물”은 그 훈련의 형체가 어떤 것인지, 그 훈련이 언제 있을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끓는 솥 (seething pot)

둘째 환상에서 예레미야는 “끓는 솥물” 또는 끓는 냄비, 고기 가마가 끓어올라 가장자리로 넘치려 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마솥, 급기야는 흘러 넘치 게 될 것 같은 상황의 가마솥을 본 것이다.
글자적인 표현에서의 부글부글 끓는 고기 가마솥은 장차 북쪽에서 내려오는 느부갓네살왕의 군대 때문에 크게 흔들릴 예루살렘성을 표현한 것이다. 가마솥 속의 내용물들이 끓어 넘침은 강력한 적들로 인해 유대인들이 파괴되고, 재난과 혼란이 있게 될 것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영적으로, 움푹 들어간 용기인 가마솥은 마음에 있는 가마솥, 다시 말해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을 담고 있는 진리의 서술, 즉 교리를 표현한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교리들을 교리로서 붙잡을는지 모르나 어찌됐든 각양 각색의 교리들은 그들의 정신적인 용기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그 용기가 사용 중에 있으면 담겨있는 내용물 여하에 따라 그릇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 내용물이 건강에 좋은 음식일 수도 있고, 때로 심하게 나쁠 경우는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 나쁜 의미에서 고기 가마라면 감각적 쾌락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그 내용물이 육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에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도중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의 고기 가마를 무척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만나에 관해서는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만나는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 양식은 고기 같이 그들의 식욕을 즐기게 하고 뱃속을 무겁게 채워주지 않는 “가벼운 양식”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교리를 자기의 교리로서 붙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육의 욕구로 채우고, 그의 자연적인 마음을 감각적 생각으로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의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 앉으면 자기 앞에 차려진 다채로운 음식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그의 먹는 모습을 보면 며칠 굶은 사람 같이 먹는다. 옆에서 본다면, 그는 마치 살려고 먹는다기 보다 먹으려고 사는 듯 여겨진다. 이럴 경우, 비유적으로 보면, 그는 좋은 가마솥, 또는 교리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는 육의 욕구라는 음식을 가지고 자기 솥을 채우고, 감각적 오류라는 물을 사용한다. 그 다음 육의 욕구와 감각적 오류를 넣은 자기 솥을 자아 사랑이라는 불로 끓이는 격이다. 자아 사랑의 불은 그 본성이 자기 불을 조절할 줄을 몰라서 그 솥은 끓어 넘치게 되어 모두 못쓰게 되고 만다.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 역사에는 위와 같은 모습들이 각 교회 말기에 존재한다. 즉 악한 열정이 인간을 통치해 가되 그 교회의 교리를 가진 이들 모두를 통치해 버릴 때까지 그 열정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있어지는 것이다. 자아 사랑이라는 악령은 만사가 끓어 넘쳐 한도를 넘어 끝장을 보는 것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 결국 영적 파멸이 있게 될 때까지 이어진다.

북쪽 (the North)

무질서하고 약해진 상태가 되면 북쪽에 있는 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그나마 잔류해 있는 조금의 생명까지 쓸어버린다.
본문은 말하기를, 가마솥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가마솥의 열림(얼굴이)이 북쪽을 향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이스라엘은 인구와 영토에 비해 돌이 많은 편이어서, 연료를 채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방법, 즉 집안에 구덩이를 파고, 그 주위를 돌로 둘러치고 솥을 걸어 열의 손실을 막으면서 음식을 끓였다. 그래서 이 구덩이의 사면 중 한쪽은 연료를 더 보충할 수 있도록 열려 있었다.
이런 불구덩이와 솥을 예레미야가 환상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연료를 넣기 위해 열린 구멍이 북쪽이었을 것임이 본문을 통해 추측된다.

나침반의 방위 (the points of the compass)

나침반의 방위는 각기 다른 정신적인 관점(standpoints)을 표현한다. 동쪽, 이곳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보다 높고 보다 내면에 속한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다. 주님을 처음 인식하게 되는 방위, 즉 사랑을 원리로 삼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남쪽, 이곳은 태양이 정오에 위치하는 방위이다. 그래서 가장 밝은 빛이 있을 때인데 이는 총명해지기 위해 진리를 찾는 경우, 즉 진리의 총명을 표현한다. 서쪽, 이곳은 태양의 하루 일과 중 마지막에 도달되는 곳이고, 동쪽에 반대되는 바, 이는 사랑과 선함의 측면에서 마음이 보다 희미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다시말해 보다 외적인 상태, 영적인 상태에 비해 보다 더 자연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남쪽의 반대 위치인 북쪽은 진리 또는 총명의 측면에서 보다 더 희미해져 있는 상태, 영적 총명보다 자연적 상태에 치우쳐 있는 경우이다.
이상 살핀바와 같이, 북쪽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상태를 암시해 준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이 자연적 상태는 진리라기보다 거짓 사상의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희미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알려져 있는 영적 진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이라는 악에서 방어해 줄 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육의 욕구는 과감히 돌진해 들어온다. 그리하여 각 사람 속의 교리라는 가마솥은 거짓과 악한 느낌으로 채워지고 만다. 그런 다음 그 가마솥은 끓어오르고, 가마솥의 얼굴은 북을 향하고 있어 타락된 사람 속의 희미한 것들과 차디찬 심정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 넣는 것이다.
가마솥의 얼굴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느냐는 것에는 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 신체에서 얼굴은 마음의 지표(index)이다. 그 이유는 마음 속에서 행동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얼굴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듯이 서 있게되면 얼굴을 포함하는 그의 머리 부분은 타 부분보다 언제나 위쪽에 위치한다. 그런고로 얼굴은 안쪽의 삶,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실지 갖고있는 생각과 느낌을 알기위해 흔히 상대방의 얼굴을 훑어본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에 접촉하기를 원할 때, 우리는 얼굴을 그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임을 보여주고 싶을 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뒤쪽으로 향하게 하거나 아예 등을 돌려 댄다. 이상 살핀 의미를 참작해서 보면, 북쪽을 향해 있는 가마솥의 얼굴은 영적인 북쪽을 향해 얼굴을 댄 것인바, 이는 북쪽에서 흘러오는 영향들을 받겠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적 의미는 다른 성경 부분에서도 그 일반적 원리에서는 같고 관점만 다를 뿐이다.

끓어 넘침 (boiling over)

본문이 제시한 표현상의 그림은 매우 강하다. 부글부글 끓는 솥, 그 속의 내용물이 끓어올라 넘치는 모습, 넘쳐흘러 못쓰게 되고, 더욱 끓어 결국 태우기까지 해서 솥 속에 든 것은 무엇이든 다 파괴하고 마는 모습은 인간의 마음상태 중, 희미하게 하고 죽게 만드는 자아 사랑의 감각적 욕구가 마음 전체에 열을 가하게 될 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돌진해 들어오는 것같이 지옥의 모든 영향력이 마음에 돌진하는 찰나를 그려주고 있다. 악과 거짓이 필연적으로 저지르고야 마는 것은, 악과 거짓에 문이 열린 마음을 파괴하고 천국 쪽에 대한 마음 문을 확실히 닫히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Jeremiah)

이 환상은 예언 초기에 있는 젊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처음 보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일과 사명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 환상이다. 감복숭아 나뭇가지에 관한 첫 환상이 그를 가르친 것은,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이 나뭇가지를 사용하라는 것, 타락해 가는 그 백성들의 세대 속에서, 그들 교회의 지도자들까지 이기적이고 감각적 삶으로 다 포기된 상태 하에서, 그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교정하고, 타이르고, 훈육하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한참 기운 상태에서의 예언자란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행동을 바꾸라는 외침은 매우 고조될 수밖에 없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교회의 파멸, 국가의 파멸에 관해 말할 뿐이어서 매우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그는 “슬피우는 예언자”라 불렸고, “애가”의 저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예언자 주위의 모든 것, 즉 백성의 상황은 퇴보되어 악의 열매가 무르익어 악의 추수인 파괴가 성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형편 속에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큰 사명을 놓으셨다. 즉,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예언자의 경고에 경청해서 도움을 예언자에게 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운반해 주게 된다. 이러므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새로운 애정을, 그들의 이해성에 새 생각을 심게 됨으로써 새 삶을 건설하여 새로운 실제 삶으로 단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 응용 (practical application)

우리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끔직한 상황들에 처했었는데, 더욱이 그런 상황에는 그 당시 학식이 있다는 자들까지 포함해서 이다. 게다가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한 그들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은 우리가 자신 속에서 악의 영향력이 행세하도록 허용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명백한 진리는 심각한 경고와 교정을 말해주느라 오늘도 우리 마음속을 거닐고 있으시다. 감복숭아 나무가지가 고대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듯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지이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의 나무가지 밑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영적으로 안전치 못하다. 우리는 정신적인 설비들을 갖추어 가는데 가장 보증되는 교리라는 가마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가마솥 안에 무엇을 넣고 끓여야 할까? 이 솥에 열을 공급해 줄 불은 어디로부터 있어져야 하는 것일까? 내향의 삶이라는 일용할 양식을 끓여줄 영적인 물의 종류는 무엇일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예레미야의 일을 자신을 위해 해야 할 때이다. 즉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 마음에 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s

네 병거와 말

네 병거와 말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6장 1-8절

1. 또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병거 네 대가 나오는데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네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다. 4.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5.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 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6. 붉은 말들은 동녘 땅으로, 검은 말들은 북녘 땅으로, 흰 말들은 서녘 땅으로, 점박이 말들은 남녘 땅으로 나갈 말이다.” 7. 그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8. 그 천사가 나를 부르며 일러 주었다. “자, 보아라. 북녘 땅으로 나갈 말들이 주의 영을 모시고 북녘 땅으로 떠난다.”

요약

새교회를 위한 교리들은 사랑과 이타애로부터 끌려 나와 진다는 것, 이 교회는 영적 진리에 무지하나 마음씨 고운 각 사람들로부터 형성되어진다는 데 대한 예언이다.

병거들

네 병거가 환상 가운데서 보여졌다. 모든 수송 수단(vehicle)은 인간이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송 수단은 실제로 사용될 수 있게 진리를 놓는 것, 즉 진리를 서술의 형체로 바꾼 것인 바, 교리들을 표현하게 된다. 시편 20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병거를 신뢰한다는 것은 교리에 신뢰를 둔다는 것이고, 말을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연적인 이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과 지도를 위해 주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네 병거가 있고, 각각은 네 방위 동, 서, 남 그리고 북쪽으로 여행하리라고 예상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뒤에서 살피겠다.

놋쇠로 된 산들

이 병거들은 두 산 사이로부터 출현했다. 땅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산이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원리 중에서 가장 높은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 가장 높은 원리란 사랑의 원리, 특별히 주님을 사랑함이 자신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사랑은 선한 모든 것의 근원이다.
본문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이는 서로 구별되는 사랑의 두 형체,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산들은 놋쇠(brass)로 된 산이었다. 놋쇠는 다각도로 사용되는 기초 금속류이나 귀금속인 금이나 은에 비해 그 가치는 훨씬 낮다. 놋쇠는 자연적 선함, 실생활에 있는 선, 자연적 마음속의 선을 표현한다. 이 선은 금으로 표현되는 천적 선과 은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등차가 다른 선이다. 따라서 놋쇠로 된 산들이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련을 갖는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병거들이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교리들은 자연적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의 정신적 평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에서 흘러내려 계곡을 비옥하게 하는 물의 흐름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 사용되는 진리는 우리의 자연적 행동 지침을 선한 질서 속에 있게 하는데, 이 진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가장 심오한 바램, 그리고 동료들과도 가장 좋은 유대 관계가 있어지게 해준다. 만인의 사용을 위해 모세가 높은 산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 왔다는 것이 위의 말을 예증해 줄 것이다. 시련과 시험 속에 있는 거듭 나아가는 사람들이 신성한 인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때, 다윗처럼 이렇게 노래하리라.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시편 121:1,2).

말들

병거는 말에 의해 끌려진다. 말은 인간의 지적인 원리, 이해성, 특별히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에제키엘 39장 17,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의 산에 제물을 잡아 큰 잔치를 벌여 놓았으니, 너희는 사방에서 몰려 와 제물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셔라… 너희는 내가 차려 놓은 잔칫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그 밖의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이와 비슷한 잔치가 계시록 19장에서도 선포되고 있다. 이런 모든 사항들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와 교리 등등에 관한 영적 잔치를 상징화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이 끄는 병거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해성의 품질 수준에 따라 인간의 이해성에 의해 끌려지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색깔들

각기 다른 조건과 품질의 인간 이해성이 여러 가지 색깔인 빨강, 검정, 흰 그리고 회색(gray, bay)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빨간 색은 사랑과 선함에 관한 색이다. 그 이유가 선함은 행동에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붉은 말은 사랑 또는 선함이라는 측면에서의 이해성에 관한 속성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맨 먼저, 병거가 붉은 말에 이끌려지는데, 이는 새교회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의 마음의 조건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교리가 선포되는 가운데서 진리의 품질이나 그 수준은 진리에 도움을 얻는 사람들의 상태와 언제나 부응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모든 등차 속에 존재하므로 그 진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국면에 도달된다. 그러나 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에 도달되는 진리는 현재 그 인간의 정신적 열림의 수준이나 등차에 국한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붉은 말로 이끌리는 병거는 자연적인 선함이나 사랑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달되도록 주어지는 교리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를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새 교회는 초기 기독교회의 남은 조각들로부터 형성되지 않고 이방인의 세계, 즉 초기 기독교회의 교리들로 특별하게 훈육되지 않고, 단지 단순하게 신실한 마음이 선한 이들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이다.
검은 색이란 정신적인 어두움, 진리에 무지함, 예를 들면 글자대로의 외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표현한다.
흰색은 진리의 빛, 또는 깨끗한 순수성을 표현한다. 흰 말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하는데, 인간 마음이 진리에 관한 어떤 지식을 획득하여 이해성이 빛이 날 때를 말한다. 계시록 19장 11, 13,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점박이 또는 회색은 흰색과 검은 색의 혼합이다. 따라서 점박이 말이란 무지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 즉 지식 측면이 희미한 상태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씩씩함 (strong, bay)

본문에서는 씩씩한 말(bay horse, 적갈색 말) 역시 보여주고 있다. “bay”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짙은 빨강, deep red”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색은 창백함을 암시하기 보다 오히려 “강함”을 나타내는데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 성경의 경우, “씩씩함” “건장함”으로 번역되고 있다. 본문의 씩씩한 말(bay horse)의 색깔은 적갈색(reddish brown), 밤색(chestnut color)이다. 이 단어가 색깔 측면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사용되는 곳이 성경 내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나. “건장함, strong”으로 사용되는 예를 한군데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를 미워하는 억센(강한) 원수들, 내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것들 손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시편 18:17).
적갈색(reddish brown)은 활력 있는 건강한 색깔로 여겼는 듯 추정된다. 이 색을 강건함(strength)으로 여긴 것은 이 단어의 표현적 의미와도 일치된다. 적갈색 말(건장한 말)이란 악과 거짓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이 있는 인간 이해성의 상태, 그래서 진리의 힘이 아주 강한 인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색깔이 다른 말들에 관한 언급은 즈가리야서와 계시록 모두 유사하게 기록되고 있다.

네 영 (또는 네 바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예언자가 병거와 말들에 관해 묻자,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영”은 “바람”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단어 하나가 바람, 숨, 영을 다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정확한 의미는 알기 곤란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말해졌던지간에 이 말들은 인간이 지닌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의거한 필요성에 맞춰 인간에게 뻗쳐 나가는 신성의 영향력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온 천하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데로부터 사방으로 뻗쳐 나가기 때문이다. 온 천하란 모든 각 교회 속의 하느님이다. 시편 104편 3절에서 주님에 관해 이렇게 노래한다.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글자대로 읽을 경우, 지상의 네 방위를 언급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그 영적 의미는 인간에게로 나가 각 인간의 생각과 삶의 각 등차에 도달되는 네겹(fourfold)으로 된 주님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여준 거룩한 성에도 네 면이 있었다. 이 성은 천국에서 내려와서 새교회를 받을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인간 마음에 닿게 되는 새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말하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인격 때문에 하늘 나라를 차단시키고 있다는 것, 그러나 교회는 이방인들로부터 형성될 것이라고, 즉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29). 그래서 어린 양이 큰 책의 봉인을 뗄 때, 각 색깔의 말들이 요한에게 보여졌다. 큰 책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요, 어린 양이 봉인을 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경의 내적인 영적 의미를 밝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 속의 진리가 인간에게 뻗쳐 나가 이 진리를 받고 싶어하는 각종 인간 국면에 도달된다는 말이다.

영적 네 방위

넓은 의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태양이 그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에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동쪽은 주님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의 결과가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주님을 영적으로 사랑하며 산다고 할 때, 그는 동쪽에 거주한다고 말해진다. 이 동쪽과 반대 위치에 있는 서쪽은 동쪽이 내적이고 영적인데 비해 외적인 자연적 사랑의 상태를 표현한다. 태양이 정오에 있을 때가 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때가 가장 많은 빛이 비치는 바, 남쪽은 영적 총명을 표현한다. 남쪽에 반대되는 북쪽은 자연적 마음 수준이 갖는 총명, 영적 진리보다는 자연적 진리를 붙잡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진리의 국면들을 표현한다. 비교적 측면에서 볼 때, 북쪽과 서쪽은 성경의 글자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고, 그 반면 남쪽과 동쪽은 신성한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진리와 사랑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색깔의 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본문은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먼저, 검은 말은 북쪽으로 갔는데, 그 뒤를 흰 말이 따르고 있다 (개역 성경 참조). 북쪽은 마음이 차고 어두운 상태를 표현한다. 이 상태는 자연적인 사랑 안에 있을 때이고, 진리에 관한 빛이 희미할 때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검정이 표현하는 바, 이는 영적인 북쪽과 부합되어 진다. 북녘을 향해 검은 말이 간다는 것은 마음이 선하지만 무지해 있는 이들, 마지막으로 새교회 안으로 들어와질 이방인들에게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소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개받은 뒤, 그들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될 때, 그들에게 더 큰 진리의 빛을 보내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검은 말 뒤를 이어 흰 말이 나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받고, 그 글자에 있는 법대로 자신의 행동을 굳혔을 경우, 그들은 자기들 정신적 상태와 행동에 적절한 진리의 더 높은 형체들에 그들 마음이 열릴 준비가 되어 있게 된다.
점박이(grizzled, 회색, gray) 말들은 남녘으로 갔다. 이 말들은 검정 말이 표현하는 진리의 빛보다 더 많은 빛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교통할 수 있다.
적갈색 말(또는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향을 더욱 폭넓게 미치도록 하라는 말이다. 비교 측면에서 볼 때 하늘이 정신적인 천국, 영적 마음을 표현하는데 반해, 땅(earth)은 인간 속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땅을 두루 다녀라(순찰하라)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마음에 도달하여 인간이 지닌 악에 대한 자연적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신성한 진리의 빛 속에서 자기 속의 악을 극복하게 하는 목적을 수행해 가는 것, 더불어 그분의 강함만이 인간을 감각적인 조건에서 영적 조건에로 바뀌게 할 수 있음을 확연히 인정할 수 있게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을 가라앉혔다 (quiet my spirit)”

본문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보라 북녘 땅으로 나간 자들이 북녘 땅에서 내 영을 잠잠하게 했다. Behold. these that go toward North country have quieted My Spirit in the North country.” 이를 글자대로 말하면, “…내 영을 쉬게 했다. Have caused my Spirit to rest in the North country.” 주님의 영, 그 영은 바로 주님 자신이신데, 병거나 말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영 안에서 어떤 다른 것을 만들게 하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전혀 타당치 않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되는 상황은 주님의 영을 향한 태도를 유발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표현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자기 속에서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시려고 역사 하시는 주님의 영에 반대하여 더 이상 투쟁하지 않게 될 때, 주님의 영은 쉬시고, 잠잠해지신다. 거듭나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mutual love)이 신성한 사랑을 위해 거처할 장소를 제공할 경우, 주님은 그 사람 속에서 안식하신다. 만물의 창조 후에 이어진 안식일(The Sabbath, rest)은 창조하시므로 몹시 피로해지신 창조주가 피로를 회복하시려고 정해 놓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인간 거듭남의 영적인 조건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고, 그 조건을 갖춘 심정 속, 즉 평화와 사랑 속에서 주님은 쉬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이런 인간 조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찾아보자.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스바니야 3:17). “야훼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시편 116:7).
이렇게 되는 조건은 “북녘 땅에서” 발생된다. 즉 이방인들, 주님의 말씀이 없는 자, 무지 가운데 있었던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 신성한 말씀을 수단으로 새교회는 형성되어질 것이다. 먼저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수단으로, 후에 그 글자를 바탕으로 한 영적 의미 속에서 형성된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주님은 천상 천하의 영원한 교회, 그분의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신다. 아마도 형체에서는 다양하겠지만 사랑과 진리에서는 하나인 교회를 건설하신다. 다음의 구절로 위의 말을 더 되새겨 보자. “축제 기분에 들뜬 우리 마을, 시온을 보아라!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천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에서 넓은 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지 아니하고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우리를 재판하는 이는 야훼, 우리의 법을 세우는 이도 야훼, 우리를 다스리는 왕도 야훼,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사야 33:20-22).

여인과 에바

여인과 에바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5장 5-11절

5. 나와 말하던 그 천사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6. 내가 “저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은 말이다. 저 말 속에는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 있다.” 7. 그러자, 납으로 된 뚜껑이 열리면서, 그 큰 말 속에 한 여인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8. 그는 “몹쓸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말 속에 틀어 넣고 납뚜겅을 도로 덮었다. 9.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두 여인이 나타나서 황새 날개 같은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며 그 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날아 가고 있었다. 10.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저 여인들은 그 말을 어디로 가지고 갑니까?” 하고 묻자 11.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그가 있을 신전을 시날 땅에 짓고 받침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모시려고 갔다.”

개요

악한 사랑으로 속을 채운 유대교회가 자기들의 선함을 뒤집고, 더 나아가 신성한 진리까지 모독하여 완전히 뒤집힌 교회가 되는 것을 본문은 밝히 알려 준다.

에바

에바란 이스라엘 후손들이 사용한 가장 큰 측량치로서 마른 것을 측량할 때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1 부쉘(bushel), 또는 1 말 정도일 것이다. 고체(solid)는 선함에 관한 것을, 액체(liquid)는 진리에 관한 것을 표현하는 바, 고체(마른 것)의 측량치는 선함의 품질, 또는 선함의 품질을 테스트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에바는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선함이 실제 사용되고 있을 때 “저기 나타나는 것…” 이라고 본문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천사가 말하는 에바에 관해서 개역 성경은 “This is their resemblance through all the earth,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있다.” 다른 번역의 경우, “그것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 등등으로 번역되나, 히브리어를 글자대로 말한다면, “This is their eye through all the earth, 이것은 온 땅에 가득한 그들의 눈이다”일 것이다. 눈이란 이해성, 또는 지성으로 이 눈이 마음의 눈이요, 이 눈으로 정신적인 것들이 총명하게 보여지게 된다. 에바라고 본문이 언급한데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는 통상적인 측량치 정도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건대, 이는 교회 안에서의 자연적 선에 관한 통상적인 종류들, 예를 들면, 경건함이나 헌신 등과 같은 바깥쪽 행동으로 측량되는 선함을 표현한다.

이 에바는 납뚜껑을 가지고 있다. 기초 금속으로서의 납은 아주 낮은 수준의 선함, 즉 물질에 속한 선, 자연적 감각에 알려진 선, 즉 감각적인 선을 말한다. 이 납 뚜껑은 “한 달란트, a talent of lead”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달란트라는 무게 단위는 매우 무거운 측량치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정확히 일치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무게로 볼 때 100파운드(pound)쯤 될 것이라 본다. 금 한 달란트나 은 한 달란트는 큰 액수가 요구되는 큰 공사나 사업에 사용되는 액수이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는 달란트라는 용어의 사용에 관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화폐 가치로 사용된 달란트는 진리나 선함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왜냐 하면, 돈처럼 지식도 어떤 것을 획득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큰 덩치의 납뚜껑이 물질적(육적)이고 감각적인 선함을 표현했는데, 그 뚜껑이 납 한 달란트였다는 사실이 육적인 선함에 형태를 주는 지식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에바(말) 속에 든 것이 폭로 되도록 이 납뚜껑이 들리웠다(열려졌다).

여인

뚜껑이 열려지자, 에바 속에 든 내용물은 여인이었다. 여인이란, 개개인의 인격에 따른 선과 악, 또는 애정 측면의 삶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거꾸로 되어 버린 교회가 그려지고 있으므로, 여인은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이 사실이 뒷받침되도록 천사가 그 여인에 대해 “몹쓸 것, 사악함, wickedness, 글자대로 보면 악”이라고 말했다. 이 악한 여인은 썩어진 교회에 대한 일반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에바는 자연적 선, 즉 외적 행동에 있는 선을 표현했고, 여인은 심정 안에 있는 악,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경건함이나 헌신이라는 외적 선함 내에 거주하고 있는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 비록 그들이 아직까지는 교회 예배의 형식을 엄격히 준수해 가고 있다 해도, 그들의 심정은 온갖 종류의 악 속에 몰입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모습에 대해 “위선자,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라고 예수님께서 질타하시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들 국가의 일반적 모습을 표현하셨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마태복음 23:27). 이 서술은 외형상으로는 경건하게 열심히 고백하는 중에 있다 해도 유대인들의 속은 악한 속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바 속에 든 악한 여인으로 상징화된 의미인 것이다.
여인이 에바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위와 같은 악 속에 자신을 고정시켰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앉음”이란 어느 정도 항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어떤 조건에서 안일함을 갖고 있어 마음이 변하는 이동하는 상태인 서 있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여인이 “에바 속에” 있었다는 것은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조건으로 확실하게, 통째로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덮음

천사가 예언자에게 여인을 보여준 뒤, 그는 여인을 에바 속으로 틀어넣고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이런 행동이 나타내 주는 것은,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가 외적인 경건과 헌신이라는 선함을 유지했으면서도 그들 심정으로는 악을 확증하여 고정시켰다는 것, 이런 악들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선으로 덮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이런 심정의 소유자들은 자기들 종교를 육적인 선 속에 놓았다는 것이다. 행동에 있는 선을 심정에 있는 악과 결합시키는 것은 선함의 모독을 성립시킨다.
천사가 에바를 닫을 때, 말해진 것은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He cast the weight upon the mouth”이다. 이를 히브리어 글자대로 말한다면, “납 같은 돌, stone of lead”로 덮었다이다. 고대 시대 때의 무게, 중량(weight)은 종종 돌로 표현했다. 그래서 중량이 흔히 돌로 불리웠는데, 오늘날의 경우, 영국에서는 14파운드를 돌 하나(a stone)로 일컫는다. 돌이란 자연적 평면에서의 진리,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돌은 거짓으로 왜곡된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리하여 “납 같은 돌”이란 감각적인 거짓을 의미하고, 이 의미는 감각적인 악을 표현하는 납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두 여인

에바가 닫힌 후, 두 여인이 나타나 에바를 들어 운반했다. 여인은 애정을 표현하는 바, 두 여인은 다른 교회들에 존재하는 애정, 그 교회의 다른 조건, 에바 속의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의 악한 인격을 지각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에바 속의 여인이 사라지도록 주님의 지휘를 받아 다른 교회들을 오염시키지 않은 채 그 자체 스스로 존재 될 수 있는 곳에 던져지도록 섭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방인 교회의 일부는 비록 그 교회가 진리에 무지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단순한 심정으로 주님을 모셔 보려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오염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들이 지닌 자연적인 선한 애정들이 유대인 속에 든 위선을 인식하도록 허용하심으로 그것이 죄악임을 알고 거절하게 하여 그 악의 오염에서 보호되어 져야 했다는 말이다. 여인이 둘이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하나 된 상태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와 하나를 이룰 때 위선적인 경건함 따위는 노출되어 알게 됨으로서 주님이 그런 죄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게 된다.

날개

이 여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날개, 이는 새의 팔인 바, 힘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새들이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수단이 날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는 우리의 생각(사고)을 표현하고, 날개는 사고하는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날아간다는 것은 사고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위선적인 경건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잘 사용함으로 가능해진다. 즉 사고력의 사용은 악한 여인이 들어앉은 에바를 들어 올려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여인이 “황새 같은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그들의 날개는 길고, 강해서 더 세차게 공기를 차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황새는 자연적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 생각은 계속적으로 힘있게 생각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람

두 여인에 관해 말해질 때, 그들에게 황새 같은 날개가 있어 “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해지고 있다. 개역 성경을 참조하면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The wind was in their wings”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날개가 바람을 이용하는데 대해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 의미는 보다 더 심오해진다.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 그럼으로 해서 필요한 목적을 성취시키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역사, 특별히 신성한 진리를 인간 마음에 흘려 보내심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표현한다. 사람을 창조하는 기록,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바람, 숨, 영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날 땅

두 여인은 에바에 든 여인을 시날 땅으로 운반해서, 거기에 그녀가 있을 집을 지어 그녀의 “처소 (받침대, base)”로 삼게 했다. 시날 땅은 갈대아 또는 바빌로니아에 관한 고대 이름인데, 이에 관해서는 창세기 10장 10절에서 “힘센 사냥꾼 니므롯”을 거론하면서,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잡고는…”(창세기 11:2)라고 언급되고 있는 바, 거기서 그들은 바벨이라는 큰 탑을 짓기 시작했다.
시날 땅이란, 심정이 악과 결합되어 있어 모든 선함과 진리를 모독해 버리면서도 외형으로는 예배 속에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헌신적인 외적 경건함을 유지해 간다면 그리스도의 “대속, Vicarious Sacrifice”에 의해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된다고 믿는 이들, 이런 구원을 위해서 악에서 선으로의 인격 변화인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을 간절히 바래고 노력하는 주님과의 협력 관계는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고 믿는 식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에바에 앉은 여인이 시날 땅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은 위선적 경건함, 심정이 악으로 차 있는 교회를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서 교회의 다른 형체와 섞이거나 혼돈 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은 그 자체대로 있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채워야 한다는데 대한 표현적 그림이다.
시날 땅에 그런 교회를 위해 집이 지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집이란 인간의 고향, 즉 인간이 각자 거주하는 고향이다. 이 고향이란 각 개인이 독자적으로만 거주하는 곳, 자기 내면에 있는 의지이다. 이러므로 악한 여인이 사라지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 여인을 위한 집이 지어져 그곳에 안착한다는 것은 위선적인 선함이 분리되고, 그것 자체는 그것과 품질이 같은 생김새가 그 악 자체를 위한 기초(받침대)가 된다는 말이다.

예언

글자대로 생각해 본다면, 본문은 예루살렘의 파멸, 그리고 유대인 국가가 파괴될 것이라는데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사실 이런 예언은 로마가 유대 땅을 정복함으로 곧바로 실현되었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본문은 유대인에게 내려졌던 처방(dispensation) 위에 있을 심판, 더불어 모든 시대, 만민, 각 개인의 마음이 본문의 의미와 같을 경우, 그 마음 위에 내려질 심판을 묘사해 놓고 있다.
하나의 처방전으로 볼 때 유대교회는 오래 전 자신들의 악들로 인해 끝장을 보았다. 교회에 있어 온 각 개인은 아직 존재하고, 그 조직 역시 흐트러진 파편같이 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걸치면서, 유대인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종교적으로 내쫓겼다. 유대인의 일부, 아마 많은 이들이 아직도 옛 이스라엘의 회복,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라는 예언이 글자대로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성경의 예언 성취는 결코 있지 않는다.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성취되나 글자적으로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글자적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 성취의 결과인 것뿐이다. 이 예언들이 의미하는 것들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새로워진 교회, 거듭나는 주님의 교회, 새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고, 이 목적을 향해 고대 예루살렘이나 그 백성들은 단지 글자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치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의 상징물인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매 단계, 태고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은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선과 진리, 그리고 그분의 섭리를 사랑하는데 실패되도록 작용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만의 사랑에 집착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신뢰함으로서 영적인 사랑과 믿음과 정의를 자신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파괴했다. 인간의 악과 거짓은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영적 자유의 상태를 끌고 가, 진리는 왜곡하고 선함의 표준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아에서 파생된 관념 속에 상주함으로써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예배한 하느님의 진정한 모든 속성까지 실지로 부정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영적 시날, 자아 사랑과 위선적 예배라는 정신 상태로 운반되어 진다. 그곳, 노아의 후손이 해 놓은 고대의 모형 속에서 그들은 큰 탑을 쌓되 자신의 자연적 감각을 받침대로 해서 천국까지 도달하게 쌓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아 숭배를 위한 탑은 옛날과도 똑같이 사상에 혼동이 와서 끝장이 나는 바, 영적 사람다움을 이룩해 줄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다음의 두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야훼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한 발짝인들 제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10:23).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겠느냐? 땅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땅을 고르고 나서 검정풀씨나 회향초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과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쌀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이런 농사법을 일러주신 이가 누구냐? 하느님께서 농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검정풀씨를 타작기로 떨더냐? 탈곡기를 굴려 회향초를 떨더냐? 검정 풀씨는 막대기로 두드려 떤다. 회향초는 도리깨로 두드려 떤다. 어찌 밀알이 바숴지도록 두드리겠느냐? 아니다, 무작정 두드리지는 않는다. 바숴지기까지 탈곡기를 굴리지는 않는다. 이 생각도 만군의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놀라운 계획을 멋지게 이루시는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사야 28:23-29).

날고 있는 두루마리

날고 있는 두루마리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5장 1-4절

1. 또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었다. 2. 그가 나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기에 나는 “스무 자 길이에 나비가 열 자 되는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그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것은 온 나라를 휩 쓸 저주이다. 이 두루마리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들은 다 사라지리라’ 라고 적혀 있다. 4. 이것은 내가 보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남의 것을 훔쳐 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 가 그 집 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

개요

본문은 교리나 생활면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버린 유대교회의 파멸이 임박했음에 대한 표징적 예언이다.

두루마리

예언자에게 보여진 두루마리는 현재와 같이 인쇄나 제본이 발명되기 전에 만들어진 책, 손으로 써서 만든 책이다. 에제키엘이 그의 환상 속에서 이와 같은 책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2:9).
책이란 책 안에 씌어 있는 내용에서, 또는 저자의 특질로부터 책의 특성 역시 결정된다. 만일 책의 내용이 진정하다면, 그 책은 내용에 다소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진리를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 책은 거짓을 표현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책, the book”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신성한 진리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되는 책은 이스라엘 후손 내의 썩어진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것, 자아 사랑에서 튀어나온 왜곡된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 즉 두루마리는 유대교회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것뿐인 거짓을 표현하고 있다. 이 두루마리가 날고 있었다는 말은, 이런 거짓이 부패된 교회를 사방으로 다니며 설치어 그나마 마음 안에 남은 모든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의 크기

이 두루마리가 책이라고 볼 때 굉장히 큰 크기였다. 어림잡아 30피트 길이에 폭이 15피트 정도였다. 이같이 책의 크기가 굉장함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온갖 것을 통해 침투한 거짓 원리의 굉장한 세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큐빗(cubit)은 오늘날의 측량치로는 약 18인치 정도이다.
길이는 선함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폭(나비)은 진리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길이는 20큐빗이었다. 숫자로서의 20은 인간 마음 안에 저장된 내면의 원리, 즉 각자의 어린 시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것, 그리하여 성년 시절 시험이 올 때 그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는 원리들, 이를 통틀어 “아껴 두신 것들, remains”이라 불리는 것들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그리고 나비는 10큐빗이었다. 숫자 10은 모든 것, 완성되는 시리즈를 표현하는데, 대표되는 예로서 모든 인간 삶을 위한 법칙인 십계명이 있다. 나비는 진리 측면을 말하는 바, 열 큐빗이란 원리 속의 진리에 관한 것, 즉 두루마리의 모든 특성이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선함이 악으로 뒤바뀌고, 진리가 거짓으로 온통 되어 버린 썩을 대로 썩어 거의 죽은 유대교회의 정신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두루마리는 영적 삶의 수단으로 인간에게 밝혀 주셔 왔던 모든 신성한 원리들이 그 원리를 받았던 인간들에 의해 썩혀지고 영적 죽음으로 변하게 했다는 것, 주님이 축복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인간들이 저주로 바뀌게 했다는 것도 표현해 준다.

저주

천사가 두루마리의 의미를 예언자에게 설명할 때, “이것은 온 나라를 휩쓸 저주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 저주란 정죄 또는 처벌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 이는 인간이 거짓되게 맹세한 것, 자기 생각에 거짓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에게는 진리를 증거 하겠다고 할 때 되돌려 받는 대가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처벌은 시민법에서 흔히 맹세에 붙어 다니는 조항인데, 이는 신성한 법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맹세라는 단어의 가치는 언제나 신실함과 신뢰 속에만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까닭이다. 어떤 사회 속에 있어야 할 표준 외의 어느 다른 표준이 발생되면, 그것은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의 삶과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맹세의 본성이나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의도적인 거짓 맹세를 할 경우, 그 새빨간 거짓말은 필시 시민적이고 영적인 처벌을 당사자에게 반드시 초래한다고 믿는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악인에게 곤경을 만들어 주는 듯 여긴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서, “너희가 이렇게 굴었기 때문에 계절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다. 너희 죄가,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린 것이다.” 이사야 59장 1,2절에서,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지면 (나라, the face of the earth)

저주는 “온 지면(나라)을 휩쓸 저주”라고 말해지고 있다. 온 지면(whole earth)이란 처방이 내려졌었던 온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 마음속의 천국인 영적 마음과 구별되는 인간 속의 모든 자연적 마음도 표현한다.“ 얼굴(face)은 마음을 표시(index)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속의 내용물을 표현한다. 악인의 경우, 그가 알고 있는 내용물이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내용물뿐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는 영적 마음이 닫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저주가 악을 행하는 이들을 “사라지게(cut off)” 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를 내향적으로 볼 때, 악한 인간이 확증한 거짓 원리들이 주님께로 열려야만 가능해지는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의 공급을 그들 속에서 자르게 된다는 말이다.

도둑질

본문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악행자의 두 가지는 도둑질하는 자들과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다. 도둑질이라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타인에게서 그의 물질적 재산이나 정신적 재산을 불법으로 탈취하는 것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타인에게서 그 사람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 또는 그의 합리성, 또는 영적 자유를 제거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상대방이 모르게 제거시킨다 해도,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의와 죄에 관한 그 사람의 올바른 감각을 강탈한 것이 된다. 한 마디로 영적 삶의 수단들을 강했다는 말이다. 이를 더 깊은 의미에서 살피면, 악인이 주님을 사랑함과 순종함을 거절할 때, 자기 생명이 주님의 선물임을 인정치 않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거짓이라는 망측한 저주가 인간의 마음을 쓸고 다닐 때, “도둑질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만다.” 즉 이와 같은 거짓은 인간에게 생명을 실어 나를 수 없고, 오로지 죽음만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거짓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의 근원에서 자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주님의 사랑스러운 초대를 받는다 해도 영적 죽음만을 선호하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너는 생명을 갖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영적인 도둑질은 심정으로부터 모든 선을 거둬 가고, 그나마 주님께서 각 인간의 유아 시절에 저장해 두셨던 “아껴 두신 것, remains”까지 파괴한다.

맹세함

본문의 맹세란 거짓 맹세, 맹세 밑에 위증죄가 깔려 있는 허위 맹세임은, 본문 4절에서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단지 맹세한다라든가, 진리를 말한다고 맹세하는 것, 등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반면, 맹세는 주님에 의해 성별되어 사제의 임무에서 규율되고 특별화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가장 엄숙한 태도로 가장 높은 권위를 수단으로 확언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신실함이나 진실성을 증언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으면서 유유히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가장 무거운 죄의 하나를 범하게 된다. 영적으로 볼 때, 맹세를 깨트림 속에서 우리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혼동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영적 합리성과 영적 자유를 파괴한다. 그 이유가 “죄인은 자기 죄에 노예이기” 때문이다. 거짓 맹세함은 주님께서 인간 마음 안에 저장해 두신 진리에 관해 “아껴 두신 것들”을 파괴한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2절은, “너희는 남을 속일 생각으로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그것은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도둑과 거짓 맹세자들은 날고 있는 두루마리, 즉 저주로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활기치는 거짓의 역사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서술은 한쪽에 그리고 다른 쪽에도 적혀 있는데, 이는 오른쪽과 왼쪽을 각각 암시하는 바, 심정 속의 선함, 이해성 속의 진리를 모두 제거시킨다는 말이 된다. 오른쪽은 우리의 애정 측면의 본성을, 왼쪽은 우리의 지성 측면의 본성을 표현해 준다.

집, 기타 등등

날고 있는 두루마리, 곧 저주는 “남의 것을 훔쳐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 그 집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인간의 집이란 각자의 마음, 특별히 그의 의지, 또는 심정이고, 이곳은 인격의 근본 동기인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거주하는 곳이다. 날고 있는 두루마리로 표현된 이 거대한 파괴적인 거짓 원리들은 인간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서 애정의 영적인 생명까지 살라 버린다. 거짓 맹세자의 정신적인 집 속에서 이 엄청난 거짓들은 그 속에 남은 진리의 모든 형체까지 왜곡시켜 버린다.
본문은 서술하기를, 저주는 대들보(timber)와 돌담(stones)까지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무로 된 대들보란 모든 인간 삶이 건설되어야 할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돌(stone)이란 선한 인간의 정신적인 집의 기초나 벽을 형성해 주는 것, 즉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와 같은 선함과 진리들이 고정되어진 거짓이라는 저주로 파괴되어지고 만다.

일반적인 표징

오늘 본문에 흐르는 양상을 보면, 두 가지 죄 즉 도둑질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을 열거하면서 이 두 죄를 널리 퍼져 있는 죄악들에 대한 대표되는 격으로 내세워 놓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두 죄가 십계명의 두 돌판에 반대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 대해, 또 하나는 인간 상호 관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은 첫 돌판에 반대되는 죄이고, 도적질하는 것은 둘째 돌판에 있는 율법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악이나 거짓, 그리고 죄는 어느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홀로 거주하는 일이 없다. 악들은 떼지어 돌아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마음의 소유권을 탈취했다고 여겨지는 어떤 고정되어진 악을 발견한다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타락하는 심정을 발견하고, 그외 다른 악들도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 못한다면 최소한 잠재하고 있다든지, 시작하는 초기에 있다고 보아도 된다. 모든 인간은 인격의 일반적(평균) 수준을 가진다. 그 수준은 선을 향해서도, 악을 향해서도 동등한 수준이다. 또는 일반 수준 아래나 위로 자신의 미덕이든 악덕이든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도 자기 인격 중 어느 일부만 거듭 나아가고, 일부는 타락된 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은 부피로 진보되는게 아니라 품질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 속에 있는 인격의 일반적인 품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각 분과에 품격을 주게 된다.
큰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면서 닥치는 곳마다 파괴하는 모습은 아주 생생하고 강력한 그림을 우리 마음에 남게 한다. 어찌됐든 악과 거짓, 죄악으로 고정되고만 인간 마음속을 날고 있는 참혹한 저주는 존재한다. 이는 인간의 심정과 지성 안에서 형성되어 고착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이다. 우리가 그런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죽게 하는 저주를 형성시켜 주고 먹여 살려 주는 썩은 것을 사랑함 때문이다. 이런 것에서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거듭남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인격 속에서 악이 고정되기 전 일뿐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느님이 내리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회개치 못하는 심정 속에 확증된 악이 고착되기 전, 즉 자신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데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일러주어라 ‘내가 맹세한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 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 오라.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 오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에제키엘 33:11).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너희의 말대로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모스 5:14).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4장 1-4절, 11-14절

1. 나와 말을 하던 그 천사가 돌아 와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얼떨떨해 하는 나에게, 2. 그가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금으로 만든 등잔대가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 등잔대 꼭대기엔 그릇이 하나 있고, 그 가장자리로 돌아 가며 심지 주둥이가 하나씩 뚫린 등잔 일곱 개가 붙어 있었다. 3. 그리고,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서 있었다. 4. 나는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1.나는 그 천사에게 “그러면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무엇입니까? 12. 또, 금대롱으로 기름을 대어 주는 올리브나무 가지가 둘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 천사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14. 그는 이렇게 일러 주었다.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 성별한 두 사람을 뜻한다.”

개요
이 본문은 천국적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새교회에 있게 될 영적인 빛을 취급하고 있다.

깨어남

자연적인 삶과 영적인 삶은 경험에 있어서 그 수준이 아주 다르다. 육체적 삶에 속한 것들,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생각, 일에 종사할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현상이나 경험에 대하여는 마치 잠자는 듯한 상태로 있게 된다. 영계는 내면의 세계요, 원인과 생명에 관한 세계이다. 그 반면, 자연계는 영적 원리가 구체화되는 세계요, 그 결과라는 외면의 세계이다. 통상적인 생활,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기 몸 속에서 활동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 영혼의 눈을 갑자기 열리게 하시어 영계를 보도록 허락하시면 그 당사자는 잠자는데서 갑자기 깨어나듯 하면서 자연적 삶의 현상 속에 자기 의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깨어남이 우리 마음에서도 발생한다. 그 때란, 생각의 감각적 형체로부터 영적 국면으로 건너갈 때, 즉 자연적 마음의 상태만 가지고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원리들을 합리적으로 지각하게 될 때에 발생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천사가 예언자를 흔들어 깨워 영계에서 진열되는 상징적 표현물을 보도록 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자연적 마음만 지닐 경우 잠자는 상태라고 언급하고, 마음이 영적 진리에로 승강시키도록 불리워질 때, “깨어나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읽어볼 수 있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이사야 26:19). “깨어라, 깨어라. 너 시온아, 힘을 내어라 찬란하게 몸을 단장하여라” (이사야 52:1).

황금 촛대

예언자는 황금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를 보았다. 촛대란 등잔대이다. 본문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빛, 등불을 포함하는 덮개, 초, 횃불 등등에 다 사용되는 일반적 용어이다. 오늘날의 경우, 빛을 언급할 때, 가스, 전기 불, 촛불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다양하게 사용된 한 예로 다음 구절을 보자. “야훼여 당신은 나의 등불, 내 앞에서 어둠을 몰아 내 주십니다” (사무엘하 22:29). 시편의 경우, “당신은 나의 촛불이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둠을 밝혀 주소서.”
자연적인 수준의 풍자적 의미에서 본문의 환상은 즈루빠벨의 일들, 성전을 수리하고 새로 설비하는 일에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인간 마음속에서 영적 교회를 수리하는 그분의 일, 천국의 진리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이 환상은 천상 천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빛 가운데 존재한다. 특별한 의미로 볼 때, 이 교회는 주님의 성전이시다. 그 안에서 주님은 신성한 인성으로 알려져 예배되어 진다. 신성한 인성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여호와의 성전이시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네가 본 일곱 황금 등경은 일곱 교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등경은 금으로 되어 있다. 금은 주님을 사랑함과 상응된다. 주님을 사랑함이 위의 교회에 존재하고, 그 교민들은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진리, 진리의 가장 높은 빛을 지각하여 진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릇, 대롱(주둥이, pipe) 등등

등잔대는 기름을 담은 그릇을 꼭대기에 가졌고 일곱 등잔대는 제각기 대롱을 가지고 그릇 꼭대기에서 기름을 공급받게 되어 있었다.
그릇과 대롱이란 말씀에서 오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는 그릇과도 같이 진리와 사랑의 선함을 담고 있으면서 영적인 것이 실제 사용될 때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이 그릇이 등잔대의 꼭대기에 있었다는 것은 기름, 즉 천국적 사랑의 근원을 표현하고, 생명의 가장 높은 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그 등잔은 일곱이었다. 일곱은 거룩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일곱 등잔이란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회 속의 거룩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거룩함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막의 등잔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자.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어라. 한 덩이를 두드려서 밑동아리와 원대를 만들고, 또 두드려서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들이 뻗어나게 하여라… 그리고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앞을 환히 비추도록 등잔대에 올려놓아라” (출애굽기 25:31,37).

등불

넓은 의미로 볼 때, 등은 교리를 의미한다. 교리는 빛처럼 진리를 밝히 드러내게 해준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라고 불리는 등잔대 위의 일곱 등불은 인간 삶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시어 거룩하게 지키는 주님의 완전한 섭리를 표현한다. 지상의 교회는 각기 등차별로 신성한 진리를 가지되, 그 진리를 전복시키지 않았을 경우, 제각기 “세상의 빛”이다. 최고로 높은 등차에서 볼 때,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셨기도 하다.

올리브나무

환상 속의 올리브나무는 천적인 교회(the Celestial Church),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리로 삼는 교회, 동료를 위해서도 천국적 사랑을 포함하는 교회를 뜻한다. 올리브나무의 열매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미끈미끈한 기름으로 가득 차 있는 바, 이는 주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까지 보여지는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올리브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그중 오른쪽은 천적인 사랑을, 왼쪽은 천적인 총명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오른쪽은 사랑이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의지 또는 심정을, 왼쪽은 생각을 지니는 지성, 또는 이해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두 올리브나무는 사랑과 이타애, 또는 천적 인간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위 두 가지 품성,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위 두 가지 사랑의 품성으로 다스려지는 사람(person)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환상에서 보여진 것들에 관해 예언자가 천사에게 묻자, 그의 첫 대답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것이었다. 되받아 치는 식의 이 대답은 환상 속에서 두 번씩 있어지고 있다. 당연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예언자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고는 모를 것임을 천사가 짐짓 알고 있다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의 되받아 친 대답은 예언자의 마음 상태를 더 선명하게 만들므로서, 그의 생각을 끌어내어 그의 마음에 더 확실하게 문제를 고정시켜 주려 의도된 것이다. 이래서 이 예언자가 인간들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표현해 준 격이 된다. 따라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천사의 물음이란, 예언자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환상 속의 이런 저런 모습은 교회와 더불어 존재한 신성한 말씀 속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것이라서 만일 인간이 거듭나고 계발되는 상태에 있다면 이미 이해되고도 남을 사항들이라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거기서 요한이 영계의 표현적 현상을 목격하고 있을 때 원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물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때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 사항을 알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응답했다.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요한에게 가르쳐 주었다. 위와 같은 천사의 물음은 우리의 정신적 의문들, 선함이나 빛에 관한 우리의 물음은 비록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듯 여겨진다 해도 그것은 주님에 의해 부추겨 진 것이라는 위대한 영적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각자의 마음 문이 열린 등차에 따라 흘러 들어와서 더욱 많은 물음이 당사자에게 있도록 하여 영적 삶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지게 하신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가 자신 스스로에게서 그런 것들이 발생한 듯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허용해 주신다. 그리하여 더 높은 인격 달성에 각자 스스로 노력하게 배려하신다.

기름 부음

천사가 예언자를 가르치기를,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진 두 사람” 이라고 했다. “기름 부어짐”은 올리브 기름으로 부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는 올리브 기름은 주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선함과 상응되기 때문이다. 올리브 기름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것의 상응은 예언자를 통해 그 교회에 밝히 알려져 있었다. 기름 붓는 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이루어져 왔었다. 예를 들면 성막이나 성전에서, 사제들, 예언자나, 왕들, 어떤 맹세의 증거로 삼는 돌들 위에도 부어졌었다. 개인의 경우, 자기의 기쁨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기름을 붓기도 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부어지는 기름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 기름 부어지는 이들은 “기름에서 태어남, born of oil”이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랑의 영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를 모심 (주 앞에 서 있음, standing by the Lord)

기름 부어진 자들이 “주를 모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본문이 의도한 객관적인 그림은 양쪽에 명령을 즉각 받을 준비를 갖춘 두 신뢰하는 종을 거느린 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려지는 본문의 그림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즉위하신 신성한 왕으로서의 주님에 관한 것이다. 그분 옆에 서 있는 두 “기름 부어진 자”란 주님을 사랑함(오른쪽)과 이웃을 사랑함(왼쪽)을 기둥 원리로 삼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 두 원리는 인간 마음속에서 주님을 자신의 통치자로 인식하면서 매일의 생활에서 겪어 가는 자그마한 일 까지에서도 그분이 하라는 것을 행하는 착실한 종들과 같다. 주님의 뜻을 내 삶에서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는 마음은 행복하다.
본문에서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서의 “온 세상”이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주님은 모든 교회의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8)라고 선포하시었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이시다. 낮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다. 이 두 마음 모두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을 때 인간은 거듭나게 되어 천국 품성을 지니게 된다. 이 때 주님은 각 마음속에서 왕위에 오르시게 된다. 그러면 그 왕좌 옆에 천국의 사랑과 지혜라는 두 올리브나무가 서 있게 된다. 이 마음에 의해 하느님의 뜻은 자연계의 삶 즉 지상에서 펼쳐지게 된다. 동시에 계발된 영적 삶이 하늘에도 알려지고 행해지게 된다. 매일 우리 삶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시어 천국적 사랑의 선함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려 노력하신다. 매일 매일 그분의 역사 속에, 그분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구체화하시면서 우리 앞에 앉아 계신다.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우리 삶의 사실(fact)들 앞을 지나치시면서 지금도 이렇게 되물으신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대사제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

대사제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3장

1. 또 야훼께서 대사제 여호수아가 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고발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2. 야훼의 천사가 사탄을 나무랐다. “사탄아, 너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예루살렘을 택하신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 아니냐.” 3. 그 때 여호수아는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4. 천사가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저 때묻은 더러운 옷 대신에 좋은 옷을 입히고, 5. 머리에는 깨끗한 관을 씌워 주어라.”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주자, 야훼의 천사가 일어서서 여호수아에게, 4.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벗겨 준다”하고 선고하였다. 6. 그리고, 그 천사는 여호수아에게 주의 말씀을 일러 주었다. 7.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내가 일러 준 길을 따르고 내가 맡긴 직책을 다한다면 너는 내 울 안을 지키고 내 집을 다스리며 여기 섰는 자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리라. 8. 대사제 여호수아야, 똑똑히 들어라. 여호수아를 모시고 앉아 있는 동료들도 잘 들어라. 나 이제 내 종이 될 새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너희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이 그가 올 징조다. 9. 나 이제 여호수아 앞에 돌을 하나 놓는다. 돌은 하나인데 눈은 일곱 개가 달려 있다. 나는 친히 이 돌에–내가 이 땅의 죄를 하루 아침에 쓸어 버리겠다–고 새기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개요

본문은 다음에 대한 예언이다. 이스라엘 교회 속에 있는 지옥적인 거짓 원리들은 주님께서 세우실 첫 기독교를 무지의 거짓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것,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거짓들을 제거하시고 진리를 주실 것이라는 것, 교인들은 자기들 마음과 생활로부터 거절하는 만큼에서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신성한 예언들은 그 적용 대상이 일반적이어서 모든 인류 조건에 응용되듯, 본문 역시 계시록에서 나열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상징화된 새교회의 설립과 형성, 주님의 재림에서 나타나는 첫 기독교회의 상황을 예언적으로 밝히고 있다.

글자대로의 그림

갈대아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와 발견했던 것은 자기들의 고향과 백성들이 퇴보된 상황에 있는 모습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역시 붕괴된 채 방치되어 있고, 성전 예배 물론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태였다. 유대인 중 일부는 이렇게 악한 조건에 있는 모습을 인식하여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나라 속에 만연된 악들이 워낙 심해서 그들이 과연 여호와께서 용서해 주신다거나 그분께서 예전의 상황으로 백성이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까에 대해 매우 의심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 특별히 하깨나 즈가리야는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도록, 특히 성전의 재건을 마무리짓도록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에게 힘을 내도록 본문에서 보여지는 환상이 즈가리야에게 보여졌다. 이 환상에서 대사제 여호수아는 심각한 죄를 고소 당하는 사람으로 심판자 앞에 서서 고소자와 맞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관습에 의거 때묻은 더러운 옷까지 입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면하시어 그를 석방하라고, 그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도록 명령하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면책하시어 용서하시고 예전의 번영하던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 자기들 생활을 개혁한다는 조건에서이다.

영적 의미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보면, 여호수아와 사탄이 심판에 올라 있는 극적인 그림은 유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세해져 있던 것들, 신성한 말씀이 자아에 근거한 총명으로 인해 왜곡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여호와의 대사제 여호수아는 신성한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 또 다른 의미로서 주님의 자연적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신성한 말씀을 글자에서까지 뒤집어 모독한 이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경멸했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신성한 말씀과 교회를 거짓과 모순들을 가지고 고소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인간을 정죄하는데 있지 않고 악과 거짓에서 구해 주시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을 고소하는 자, 인간의 적, 사탄을 언제나 꾸짖으신다. 이 책망은 사탄을 정죄함뿐만 아니라 사탄의 일에 대치되는 진지한 하느님의 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악한 불 속에서 잘 타고 있다고 사탄이 더 입증하면 할수록, 주님은 각 개인을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 같이 여기시고 구출하시려고 더욱 애쓰신다.

사탄

사탄이란 어떤 누구를 지칭한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적”을 의미하는 공적인 칭호이다. 그런데 성경의 글자 대로를 고수한 첫 기독교회는 사탄이 타락한 천사일 것이라고 가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처럼 주님의 적수로서의 어떤 큰 인물이라는 악마는 없다. 악마란 타락하는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악의 원리로서 이는 지상에 있든 지옥에 있든 마찬가지이다. 악을 자기의 인격 속에 고정시킨 사람은 악마인 것이다. 주님께서 유다에 관해 말하시기를, “내가 뽑은 사람은 열 둘이 아니더냐?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악마이다”와 같이 언급하신 대목을 참조하면 위의 말이 납득될 것이다.
악마와 사탄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있다. 악마는 집합적으로 본 악의 원리를, 사탄은 집합적으로 본 거짓을 의미한다. 대사제 여호수아를 공박하는 사탄이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또는 교회라는 집합된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감각적인 거짓의 영이 신성한 말씀에 반대하되 특히 말씀의 생명과 영에 적이 된다. 이런 반대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 자기를 규율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서까지 작동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지상의 인간 삶의 많은 측면, 즉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상업적으로 우리가 의를 실천해 보겠다고 할 때, 사탄은 우리 오른편에 서서 우리를 고소하려 들어 우리가 해보겠다고 하는 결심에 비상등이 켜지게 하고 짓눌러 좌절하게 만든다.
손이란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손을 수단으로 뭔가를 해내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른손은 선함을 사랑하려는 심정, 의지 속의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손은 진리에 관한 지식 속에 있는 지성, 이해성을 표현한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탄이란 주님으로부터 받아 우리 심정 속에 있는 선을 파괴하고자 몸부림치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이렇게 사탄은 형제를 무고하는 적인데, 표징적으로 인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남으로 해서 이 거짓 영은 마음 밖으로 쫓겨 나가는데, 이런 모습이 계시록 12장 9-10절에서 또 다른 그림으로 주어지고 있다.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은 쫓겨났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타다 남은 나무

어떤 이가 큰 위험을 극적으로 피했을 때, 흔히 우리는 “타 버릴 뻔한 나무,”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라고 부른다. 이는 다 타 버리고 말 뻔했던 데서 건져졌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언어가 영적 위험에도 응용되어 지옥의 불에서 구원된 회개한 죄인을 말하기도 한다.

때묻은 옷

과거에는 중범을 저지른 죄수일 경우, 그의 외모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여서 그로 그의 행동 인격에 어울리는 옷차림, 즉 때묻은 지저분한 옷을 걸치게 했다. 이런 형태는 로마 관습에도 있어 기소된 자를 “더러운 자, sordidati, filthy one”라고 불렀었다. 영어의 경우 이에 해당되는 말은 “sordid”일 것이다.
몸을 감싸는 옷(garment)은 우리의 애정을 감싸는 진리, 즉 애정이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을 말한다. 존경받는 사람이 특별히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게 품위 있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낮고 천하다는 사람, 특히 죄를 진 사람의 경우, 그는 더러운 옷이나 넝마를 걸친다. 마음은 각 마음에 걸맞은 자연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복장은 영적 조건이 어떠한지가 표현되도록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사야 61장 10절을 찾아 읽어보자.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 주셨다.”

겉옷이 바뀜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희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 겉옷의 나타남이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때묻은 옷이란 악에서 퉁겨 나오는 거짓 원리들을 표현한다.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은 대사제를 두었다는 것은 교회가 진리 대신 거짓들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거짓들이 주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결국 주님에게 자기들이 더러워진 탓을 돌려,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경멸해 댄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신성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시어, 자아 총명에서 비롯되는 거짓을 거절할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은 교회를 거듭나게 하시면서, 인간의 불법이 사라지게 하신다. 다시 말해 거짓이 퍼졌을 때, 인간이 그 거짓을 거절하여 지옥에로 그것들을 내쳐 보내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신다.

깨끗한 옷이 여호수아에게 입혀진 뒤, “머리에는 깨끗한 관이 씌워졌다.” 주교, 또는 감독자가 쓰는 공적인 모자(mitre)란 거룩한 말씀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에 근거한 교회의 총명과 지혜를 표현한다.

주님의 길을 따름

관이 씌워진 뒤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내가 일러준 길을 따르고 내가 맡긴 직책을 다한다면 너는 내 울 안을 지키고 내 집을 다스리라.’”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교회가 말씀 속의 가르침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진리를 신실하게 믿고 있다면, 그 믿는 증거는 그가 자신의 모든 생활 속에서, 즉 그의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 진리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대사제로서의 여호수아는 주님의 종으로 교회에 대한 직책을 가졌다. 이는 주님이 내리신 임무요, 어떤 방법으로든 주님이 파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 교회가 집합 단체로서 이든, 각 마음속에 있는 교회로서 이든, 교회에 위탁된 선함과 진리에 속한 신성한 사랑들에 대해 임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주님의 집을 다스린다(judge)는 것은 이스라엘 가문을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이 말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합리적인 마음이 영적 진리 속의 원리와 응용면을 볼 수 있게 열려질 때, 생활의 지침에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응용해 간다는 뜻이다. 주님의 울안을 지킨다(keep)는 것은 선한 질서 속에서 교회의 바깥 사항을 보존시킨다는 말이다.

징조 (sign)

이스라엘 사제들이나 예언자들은 주님을 공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징조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백성들은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에제키엘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면전에서 비유를 직접 그의 행동으로 표현해 주었는데, 예를 들면, 포로로 끌려 갈 것을 자기 물건들을 꾸려서 떠나는 모습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백성에게 에제키엘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는 징조(sign)이다. 너희는 나의 몸짓을 보고 이 겨레도 사로잡혀 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리라” (에제키엘 12:11).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여호수아를 모시고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고 있다.

순 (가지, branch)

아마 인간에 대한 징조 중 가장 큰 징조는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이리라. 즉 신성한 여호와로부터 자라 나온 가지, 인성(humanity)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 싹(branch)이 돋아난다.” 그리고 즈가리야 6장 12, 13절에서,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 이름은 새 싹이니, 이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싹이 돋으리라. 그는 야훼의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야훼의 성전을 짓고, 영광스런 옥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다.”

“나 이제 여호수아 앞에 돌을 하나 놓는다.” 이는 교회 앞에 놓여질 신성한 말씀, 이 말씀의 글자적 의미 속의 진리까지도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교인들이 인정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인들의 마음속에 지어질 새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고 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 돌은 땅 위 교회의 반석으로서의 주님의 인성이요, 거듭나는 마음속에 있는 내향적 성전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28장 16절에서, “보아라,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
이 돌은 일곱 눈을 가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의 눈은 이해성 또는 지성을 표현하는데, 이를 수단으로 마음이 본다. 일곱이란 완전하고 거룩한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눈이 일곱 개라는 말은 진리를 완전하게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이 놓으시는 이 돌이란 신성한 지혜로 있어지는 완전한 신중함과 섭리를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 즈가리야에게 일곱 등잔이 달린 등잔대가 보여졌을 때,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일곱 등잔은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이다 (즈가리야 4:10).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이런 다음,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거룩한 땅의 더운 지방에서 그들은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족들이 만찬을 가졌는데, 그 지방은 특히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많은 관계로 그 나무 밑에서 자주 행사를 벌였었다. 그럴 때 지나가는 이웃이나 여행자가 식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면서 식사하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평화 속에 쉬는 마음의 모습, 영적이고 자연적인 선함을 사랑하여 이해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대한 적절한 구절이 열왕기상 5장 5절(개역 성경 4:25)일 것이다.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표징적인 약속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어져 있었기도 하다. 더욱이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어지는 각 교회 단계에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복을 주시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본문 외에도 고상한 영적 모습에 관한 모든 영화로운 그림들은 오늘날 우리 삶의 초상화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끄집어내서 그 악을 회개하여 삶을 개혁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모습들이다. “의로운 길을 걷는 이들로부터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그분은 철회하시지 않으신다.” “주님 안에 자기 마음을 머물게 하는 이들, 주님께서 온전한 평화를 언제나 간직되게 해주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계신다.

측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

측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

성서 본문: 스가랴(즈가리야) 2장 5-9절 (구번역 2:1-5)

5.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았더니, 누가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6. 내가 그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그는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폭과 길이를 알아 보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7. 나와 말하던 천사가 거기 서 있다가 다른 천사가 마주 오는 것을 보고 8. 그에게 일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 가서 일러 주어라.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 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 9. 이는 야훼의 말이다. 내가 불이 되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 쌀 터이고 그 안에서 나의 영광을 빛내리라.’”

개요

본문은 새교회의 영적 품질을 표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교회는 크게 불어나고, 이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에서 주님이 현존하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측량함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영적 환상에서 보여진 이 사람은 영계에 있는 거듭난 사람, 즉 천사였다. 천사는 주님의 특사인 바, 그에게 명령한 일 역시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는 주님의 일을 말한다. 천사의 행동이 표징적이듯, 그 일 역시 인간 사이에 있게 되는 주님의 영적 행동을 표현했다.
자연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물건의 크기를 알아보려면, 그 물건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두께, 즉 높이를 측량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의 경우는 양보다는 품질과 관계가 된다. 그래서 영적 물건의 크기는 성질(character)에 관계가 있다. 자연적인 것을 측량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길이, 넓이, 높이인데, 이런 크기들은 영적 측량으로 알아 볼 경우,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 그리고 등차(수준)로 표현된다.
아마 위의 말에 대한 납득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일상 언어를 살펴보면 쉽게 납득된다. 우리는 야비한 사람을 두고, “그는 좁은 사람이야…” 또는 “그는 작은 마음을 지녔어…”라고 하고, 관대하고 선한 사람을 두고, “그는 넓은 마음을 지녔어…” 또는 “그 사람은 큰 가슴을 가졌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이런 마음이나 가슴을 잰 표준은 주님의 신성한 말씀에서 밝혀진 그분의 진리이다. 우리 속에서 이런 표준을 사용하거나 측량하는 능력은 자기에게 밝혀진 진리를 지각하여 그 표준을 원리 속의 진리로 인정하는 우리의 능력, 즉 합리적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각자의 마음과 삶의 각기 다른 상태를 보여주시려고 천사를 보내 영적으로 측량할 때, 천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납득하기 위해 우리의 합리적 마음은 반드시 열려서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을 측량함

본문에서 말하는 바, 천사는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것이었다. 글자대로 볼 때, 그 천사는 예루살렘 성의 크기를 재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성을 수리하고 재건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모른다. 이 행동은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영적으로 측량하는 상징적이고 표징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 이는 이스라엘 교회들의 사령탑인바, 교회를 말한 것이고,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떠하느냐란 교회의 영적 상황과 품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측량이란 교회의 생명에 관한 영적 품성, 품질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의 품성이 변화된 상황은 영적 측량을 다시 함으로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서 있는 그대로 측량한다고 말할 경우, 이는 기존 교회의 영적 품성을 밝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환상에서 보여진 예루살렘을 측량할 경우, 이는 미래에 있게 될 교회의 영적 상황, 특별히 주님이 오신 이후의 교회의 상황과 관계가 있게 된다.

두 천사

“나와 말하던 천사가 저기 서 있다가 다른 천사가 마주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일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일러주어라.’” 이 두 천사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보내진 주님의 진리를 표현한다. 우리는 신성한 진리를 각기 다른 측면에서 본다. 하나는, 의지 또는 심정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선함이 수행되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지적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수행해야 할 것들에 수반되는 생각을 이해하게 된다.

벽이 없는 성읍

천사는 주님의 약속이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라고 밝혔다. 고대 시대 때, 큰 성읍이나 중요한 장소들은 높은 벽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은 성읍이나 마을들, 특히 농장의 경우는 평야나 언덕, 또는 계곡에 성벽 없이 건설되어 있었다. 강도나 적들이 휭행하는 때에 성벽도 없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생계를 잇는 성읍이나 마을은 평화, 고요함, 자유로운 상태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때로 성 안이 과밀 되었을 경우, 불어난 인구는 성 밖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이 성읍과 저 성읍이 연결을 이루면서 그곳 주민이 아닌 외부인이 서로 교역하면서 그들이 잠시 체류할 때 그들은 성 밖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다.
이 본문의 경우를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예루살렘이 평화와 번영의 때를 맞이하여 즐기는 가운데, 인구가 크게 증가해서 성밖에도 성 안 만큼이나 커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적 측면에서의 비유

그러나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보면, 이 본문은 미래에 있을 주님의 교회 상황, 거듭나는 상태 속의 새교회,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내면으로 받는 상태를 초상화 해놓고 있다. 따라서 성 안에 있는 시민들은 천국의 더 높은 수준에 이르는 총명한 새교회 인을 표현하고, 성 밖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선량한 자연적 인간처럼 자연적 수준에서 새교회의 영향을 받아 새교회로 향해 오는 이방인들을 표현해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여느 교회나 비슷하게 새교회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천국에도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에 관한 지식, 그에 따른 선한 삶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리 속의 원리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내적 시야인 영적 지각이나 총명이 없다.
이와 같은 모습은 지상의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상당한 영적 마음을 소유하는데 비해, 어떤 이는 자연적 수준의 생각만으로 진리를 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람 모두 거듭 나아가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은 서로 공통된 점이다. 따라서 교인들 역시 각기 나름대로의 수준과 평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외적 사람이 본문에서 짐승으로 의미되고 있고,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라고 하여 사람과 짐승을 구별짓고 있다. 이렇게 구별한 이유는, 영적인 사람과 선한 자연적 사람의 내면상의 차이가 선한 자와 좋은 가축의 차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둘 다 바깥쪽은 자연적 삶에 열려 있지만, 삶의 안쪽은 품질면에서 완전히 영적이어서 차이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천국에서 각 사람의 거주지를 배열하는 데서도 보여진다. 아주 슬기롭고 선한 천사들은 중심 부근에 살고, 그 외 사람들은 중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외곽으로 퍼져 산다. 어느 정도까지 바깥쪽에 거주하느냐는 총명이 어느 정도 약해지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불로된 벽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바는, 비록 예루살렘이 불어나서 성 바깥까지 거주하게 된다 해도 “내가 불이 되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 쌀 터인즉” 예루살렘은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성벽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불로된 성벽이라면 더욱 보호해 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벽이야말로 적에 의해 부서질 수도 없고, 감히 들어오려고 생각해 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뚫지 못하는 불로 된 성벽은 그분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섭리, 즉 그 안의 백성들이 영적 사랑의 법칙에 의거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는 이웃사랑과 주님을 사랑하는 수준만큼에서 바깥쪽 적들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불로된 벽은 어떤 악령도 감히 침입할 수도, 아예 들어 올 생각조차 못할 벽이다. 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임을 시편 34편 7절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야훼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인간을 보호해 주는 벽이란 교회, 또는 교회에 있는 체계적인 교리를 말한다. 교리는 거듭 나아가는 마음이 바깥쪽에 해당되는 자신의 감각적인 것들 속에서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적들인 자연적 꾐이나 악한 영향력에 물드는 데에서 보호해 준다. 교리 중에서도 사랑의 교리는 가장 완전한 벽이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자신이 증거를 가졌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동이나 기운 속에 있는 마음은 그에 따른 모든 것에 대해 명백한 추론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불
불은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신성한 사랑이 이스라엘 후손들의 성막 안 제단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불로 표현되어 졌었고, 성전에서도 꺼지지 않도록 명령되었기도 하다. 이 영원한 불은 인간이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어야 할 꾸준한 사랑이 표현되도록 의도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그분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출애굽기 3:2). 이 때의 불은 신성한 사랑, 아버지를 표현했고 떨기로 표현된 것은 말씀의 글자인데, 이에 대한 또 다른 의미는 주님의 외적 인간성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영광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그 안에서 나의 영광을 빛내리라.” 예루살렘은 마음에 건설된 일반적 교리 체계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하고, 이 예루살렘 성이 지상에 건설되고, 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영광”이란 교회의 교리 속에서 빛나는 신성한 진리,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밝게 빛나는 신성한 진리를 말한다. 이 진리는 불로부터 빛이 발하여지듯, 교회 깊은 곳으로부터 발출된다.
또 다른 국면에서 볼 때, “안에 있는 영광, glory in the midst”은 신성한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말하고, 이 의미는 거룩한 성경 글자를 통해 밝게 빛난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한 가운데 있는 영광, glory in the midst”은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에서 빛나는 가장 깊숙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빛을 발하는 신성이 예수님의 머리 주위에 있는 후광으로 수많은 미술가에 의해 그려졌기도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한 인격을 보고 이해하여 인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납득할 때, 이 납득의 뒤를 잇는 것, 영적 진리에 대해 밝히 알게 되는 것(계시)은 우리로 더 높은 수준에로 마음을 승강시키도록 부름 받게 하여 더욱 더 높은 차원에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때 주님의 소리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있게 된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이사야 60:1).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에 오심을 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30). 이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말씀 글자를 통하여 밝게 빛을 낼 것이라는 말이다.
내면적인 교회는 이스라엘 후손들 사이에서는 건립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 상태는 지독하게 낮은 마음, 자연적 마음 안의 상태여서 내면에 속한 것들을 지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교회로서 첫 기독교회가 건설되어 단순한 수준, 즉 자연적이면서도 영적이기도 한 인간 수준에서라도 영적 상태들의 적은 부분이라도 마음속에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첫 기독교회 역시 내면에 있는 영적 사항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은 재림 속에서 새로운 교회인 새 예루살렘 교회를 건설하시었고, 그 교회로 그분의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을 어떤 신비로움이나 샤머니즘 같은 이상한 증거가 필요 없는 명백한 영적 빛으로 받을 수 있게 설비해 주셨던 것이다. 이 새교회는 성경 글자 속에서 발하는 주님의 영광, 말씀의 내면에 해당되는 영적 의미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자, “성령이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는 사람들”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