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차례

역자의 말….4

성경의 비유들의 본성, 사용, 해석에 관해서…5

구약의 비유들….19

신약의 비유들….349

부록

선각자 신학 관련 도서들 목록
영계 관련 용어 도표로 스케치
선각자의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 구입 안내

역자의 말

역자가 이 비유를 설교에 사용하고자 번역을 마친 때가 1996년 경 일 것 같다. 그 뒤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교회 웹사이트에 다른 번역서와 더불어 게재하여 많은 분들이 다운 내지 복사해간 것으로 사료된다. 어느 교회는 요청하는 자가 꽤 있어 아예 수십 권을 비치한 것도 보았다. 역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성경의 비유의 올바른 이해와 삶에의 응용이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최근 역자가 도서 출판 벽옥 출판사를 열었다. 그 이유는 번역 서적이 많이 쌓여 많은 양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종이책을 원하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인쇄소에 맡기면 대단히 편하게 출판이 되겠지만 한꺼번에 수천 권을 쌓아둔다는 것은 너무 한 것 같아 필요에 따라 2-30권 분량으로 많으면 200여권 정도 직접 제본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의 부피와 가격을 대비해보면 간단히 알게 된다. 원래 이 비유 책은 신, 구약으로 원서에서는 구분되어 출판했기에 지금까지 그렇게 역자도 제본해왔다. 그러나 제작비를 절약하기 위해 궁리한 것이 한 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피가 900여페이지에 달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역자의 성경 상응 사전은 1082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역자의 출판 목적은 지식의 전달과 보존일 뿐, 영리 추구에는 하등 관심은 없기에 여느 출판사와는 목적 차원이 다르다.

이 책을 대하는 분들 모두가 책값 정도는 아끼지 않고 쓸 수 있는 분들이다면 좋겠지만 대중적인 수준은 대체로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들이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되기에 신, 구약 합본의 출판으로 무거워진 책에 불평은 없기 바란다.

종이책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전화를,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아래 웹사이트와 불로그를 검색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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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비유들의 본성, 사용, 해석에 관해서

정의

단어 “비유, parable”는 “곁에 놓음, throw beside,” “비교함, compare”라는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비유를 정확히 구별해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힘들다. 그 이유가 기존에 있어 온 정의는 비유의 필수적인 어떤 요소를 제외하고 있다거나, 단지 비유적 형체인 것만을 포함시키거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터 사전(Worcester’s Dictionary)은 이렇게 비유를 정의하고 있다. “자연 또는 삶에 있는 실제적인 어떤 것에 기초된 짧은 이야기 또는 우화, 그 이야기를 즉각적인 관심사의 어떤 것과 비교함으로 도덕성을 끌어내는 이야기들.” 대주교 트렌피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유는 하나의 가공적이긴 하나 대체로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취해져 보다 높고, 덜 알려진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사용된 대화체들.” 비유는 우화(fable)와는 다르다. 그 이유가 우화는 생명 없고 추론이 불가능한 것들을 인간 존재가 행동하듯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는 인간 존재에게 가능한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 단지 그 이야기가 특별한 경우를 위해 창안되었다는 점에서만 가공적일 뿐이다. 풍유(allegory)도 의미를 엄격하게 보면 비유와 다르다. 그 이유는 풍유에서는 사상이나 품질이 인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유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해석하고 있으나, 비유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영어 성경의 공통된 번역, 특히 구약 성경의 경우, 단어 “비유”는 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1. 수수께끼(enigma), 또는 희미하게 말함 2. 풍유적인 어떤 담화로서 3. 가공적이나 가능한 대화체로 어떤 진리를 탐사하고 예증하려고 고안됨. 그러나 비유를 취급할 때, 일반적인 비유 목록은 우화나 풍유, 예언들, 환상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것을 나열하고 있다.
비유는 진리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들이 진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져다 놓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풍유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닌, 상응에 의한 서술,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짝을 이루는 법칙에 의한 서술인 것이다.

상응 (correspondence)

영적 원인인 내향의 것과 영적 원인의 자연적 결과인 외향의 것들 사이에는 명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물리적인 세계 속의 것들은 영(spirit)이라는 내부 세계 속의 것들을 명백하게 해주거나 체현된 바깥쪽 형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쪽 삶을 언급하는데 있어 육체적 삶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되 풍유적 방법, 또는 상징적 방법으로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진리를 본다고 말하거나, 애정이 훈훈하다라던가, 명백한 생각, 달콤한 느낌 등등의 말을 늘 사용한다, 이런 용어들이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정확히 일치해서 사용될 때, 우리는 상응에 의거 말하는 것, 또는 자연과 영을 대응시켜 말하는 것이 된다. 이 법칙은 성경이 씌어진 수단이기도 하다. 성경의 글자 의미는 바깥쪽 사항들, 인간의 자연적 삶에 속한 것을 취급하면서, 그 반면 영과 육체의 관계와도 같이, 글자 내에는 변하지 않는 의미, 시종일관된 의미, 계속적인 영적 의미가 있어 언제나 인간 본성의 영적 측면을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안쪽 의미, 즉 영적 의미는 상응의 법칙에 관한 지식과 사실들을 수단으로 발견되어진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는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고 영적 삶에 응용된다. 그래서 영적 진리가 감추어 놓인 글자 언어는 유사함을 수단으로 글자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유사함이란 상징물, 상응물, 그리고 표현물의 형상을 수단으로 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

주님이 성서에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다음 논제는 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서는 어떤 억측도 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 13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진리란 일종의 칼과 같다. 잘 사용하면 우리를 잘 섬기는 물건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칼을 다룬 자를 다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지식이 더 많아질 때,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더 많은 단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그 인간에게 있어 최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논리적 서술은 서술 그 자체가 인간으로 이해하도록 명령하는 셈이지만, 비유는 진리를 받고 사용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 진리를 운반해 주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들을 준비가 안된 이들을 위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비유는 시선을 끈다

주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데 대한 이유는 비유가 지닌 놀란만한 특성과 동시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서였을 것이라 본다. 대화의 시작에서 비유 형체는 듣는 자의 시선을 잘 잡아당기고, 그 속의 교훈이 인정되어 상대방 속에 정착할 때까지 들은 자로 하여금 잘 붙들고 있게 해준다. 비유는 진리를 큰 힘으로 마음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때 유사성은 기억 속에서 교훈이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영적 사항들은 이 세상의 인간 삶의 통상적인 것들과는 달라서 자칫하면 기억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있는 흔한 문제와 관련되어 생각할 때, 비유는 우리의 상상 속에 놀랄 만하게 인상지워 놓여있게 해준다. 이렇게 되면 진리들은 이중적으로 표현되어진다. 진리의 영은 사실이라는 육체로 준비되고, 육체는 원리의 영으로 준비를 갖춘다. 그래서 진리의 각각 측면은 마음속에 진리를 고정시킬 뿐 아니라 다른 측면이 마음에 고정되는 것까지 돕고 있다. 비유는 시선을 잡아끈다. 그 이유는 비유가 원리를 구체화 해 놓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비유 안에서 추상적인 원리들은 단단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다시 말해 비유는 모든 마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데, 그 이유가 비유는 모든 이들이 아는 친숙해진 것들로 형성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움직이며 살아간다. 육체가 일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들은 경험을 수단으로 우리의 감각들과 고리를 형성해 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마음들이 열리는 시작 초반에는 늘 경험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야만 영적인 것에 관한 분명한 사상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비유가 시선을 끄는 이유는, 모든 타락된 본성 속에 숨겨 있는 악덕을 다루면서, 한편 거듭나는 사람이 배워 실제에 응용해야 할 미덕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는 마치 해묵은 달력과 같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그 속의 진리는 “매 아침을 새롭게, 매 저녁을 새로워지게” 하는 주님의 부드러운 자비와 같다.

비슷한 것에서의 지각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슷한 것(유추)에서 오는 지각은 인간 본성의 모든 국면에 공통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글자가 주어진 동방인들은 쉽게 비슷한 속성에서 지각한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같은 종류들은 모든 인간 속에 놓여져 있다. 따라서 이 능력을 비합리적인 독단적 교리가 내려 누르지 않는다거나, 감각적 삶이 질식시키지 않는 한, 언제나 인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비유에서 사용되는 진리의 형체는 모든 본성에, 모든 세대에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형체는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사람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치는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것이다. 생각이나 표현의 양식이나 어조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그러나 유추의 원리는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은 모든 본성 속에 있는 같은 성질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으나, 영적 마음은 거의 열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시대 풍토에서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각 인간의 감각에 먼저 접촉하는 것이다. 그 다음 유추를 수단으로 진리는 감각을 넘어서 영적 삶이 열린 사람에게로 들어간다.

비유는 의지에까지 도달한다

그 다음 비유 속의 진리는 마음을 통과해 의지를 두드려 설사 논리적 서술이 주어져 이해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에도 스스로 용납하도록 마음을 강요시킨다. 명확하게 지적인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많은 진리들은 인간 속의 각종 편견으로 인해 명확한 진리에 마음 문이 닫혀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비유가 지닌 놀라운 형체는 의지를 갈아엎어 지성의 문을 열도록 하여 마음이 변화할 준비를 갖추게 한다. 이런 한 예로 바쎄바에 관련하여 다윗을 견책한 나단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는 다윗에게 진리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비유 속의 악행자에 대하여 분노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죄 있는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 진리는 그 진리가 적용된 사람에게 예언의 말을 수단으로 쉽게 자각되었던 것이다.

비유는 심판을 위해 일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꺼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비유의 형체는 그 사람으로 자신의 영적 위치가 어딘 지를 분명하게 해줌으로써 심판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그 이유가 비유는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 형편에 맞추어 진리를 표현하는데 가장 좋은 형체인 반면, 진리의 형체는 듣는 자가 기꺼이 회개하지 않으면 듣는 자의 마음에 진리가 옳다는데 대한 뉘우침이나,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진리를 향한 인간 의지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리하여 비유는 진리를 사용하겠다는 이들에게는 진리를 날라다 주고, 동시에 교훈을 받을 채비가 안되어 그 교훈을 모독할 것 같은 이들로부터는 진리를 감추는 두 가지 일을 수행해 낸다. 마치 땅콩의 껍질과도 같이, 비유의 글자는 진리를 남용하려는 것에서 비유의 알맹이인 가르침을 보호하면서 장차 사용을 위해 잘 보존되게 해준다. 또는 이스라엘 후손의 여행을 인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과도 같아, 여행의 안내와 더불어 추격해 오는 에집트 군대가 그 후손을 볼 수 없게 했던 것과 같다.

비유는 형상(image)이 고정되게 한다

위에서 살핀바와 같이 비유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나타내 보이고,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감추이게 하지만, 무관심하게 듣는 자에게도 비유의 형상만은 고정시켜 주어서 차후 비유 속에 있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비유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비유의 글자는 땅에 떨어진 씨의 껍질과도 같아 속에 든 생명이 싹트기에 적절한 토양의 조건을 갖출 때까지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

비유는 성령으로 차 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확답하신 것은, 성령이 와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것,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그들 기억에 가져다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취되었는데, 과거 그들 마음에 씨와도 같이 뿌려진 형상들, 즉 비유를 수단으로 있어졌던 것들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그 속의 영적 의미들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비유들은 과거 그들의 마음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단지 형상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 자체가 진리의 빛으로 팽창되며 사랑으로 뜨거워지자, 그들 속에 있던 형상들이 벗겨져서 진리의 더 높은 양상에서 더 높은 생명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영적 가르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준 다기보다는 듣는 자의 마음을 열게 하고 훈련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가 들은 정보 속에 있는 모든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씨는 말씀이다. 씨의 성장은 심어져야만 한다는 조건뿐만 아니라 심겨진 토양의 조건에도 의존된다. 어떤 수준의 진리가 보여지고, 어떤 국면의 진리가 받아들여 질 것이냐는 것은 진리를 받는 마음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각기 다른 종류의 땅에 씨가 떨어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될 것이다.
똑같은 사실, 똑같은 교리라 해도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진리만을,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 진리를, 천적인 사람에게는 천적인 진리를 전달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 그들이 감각적인 마음 상태에 있었을 때, 주님이 말하신 비유는 그들을 혼동하게 해주었던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해처럼 명백한 빛보다 구름이라는 희미함 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 “주님은 구름과 함께 오신다.”

각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받는다

진리의 빛은 각 사람에게 각자가 정신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어야 진리를 볼 수 있는지 밝혀 준다. 마치 자연계의 태양이 쏟는 밝은 빛에서 어떤 이는 그 빛으로 인해 자기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보겠지만, 어떤 이는 태양의 강한 광선만을 똑바로 쳐다보아 오히려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태양과 자기와의 위치에 따른 결과는 극과 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주님이 말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으로 듣는 위치에 있어야 함이 선결 조건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 가진 자에게 주어지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하느님에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비유 속에 있는 두 겹의 속성은 주님 자신 속에 있는 속성과도 같다. 그분은 그분의 인성(humanity) 가운데서 그분을 영접하는 마음의 열림에 따라 하느님으로, 때로는 단지 인간이신 듯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의 교리는 인간이 만든 신조(creed)로부터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지만, 그 돌은 새 예루살렘에서는 “모퉁이의 돌”이 되어 있다. 이 돌은 비유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제자들에게 알게 해주시되 각자의 수준에 따라 깨닫도록 배려하시기도 했다. 우리가 주님의 속성 측면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욱 명확하게 관조할 수 있다. 그분의 속성은 모든 진리와 더불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속성을 사랑하여 인격을 형성하는데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비유는 주님이 일하실 때 필요하셨다

왜 주님이 비유로 말하셨는가를 좀 더 외적 측면에서 찾는다면, 그분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필요하셨다는 것, 지상에서 그분이 오신 이유를 노골적으로 말하셨다면 유대인의 폭동과 분노를 폭발시켜 그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는데 간섭을 받으시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런 저런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진 목적과 협동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셔서 듣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그분의 가르침에 든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되, 그가 받을 수 있는 정도만큼에서 진리의 어떤 면을 보여주셨다. 이리하여 선한 사람들의 거듭나는 일을 도와주시고, 준비된 사람들을 개혁과 회개에로 인도해 주셨으나, 진리의 영적 측면을 볼 준비가 아직 안된 이들에게는 그들의 장래를 위해 기억 속에 진리의 형상이 고정되게 해주시고, 진리를 명확히 보기는 하되 진리를 남용하게 될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된 진리를 모독하는 가장 비참한 죄에서 보호되게 배려하셨는가 하면 심판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빛 가운데 심판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었다. 귀를 연 자는 들을 수 있었으되, 자기들의 영적인 귀를 틀어막은 자의 경우는 그들에게 상해를 입지 않게 지나쳐 갔다.

유추함의 원리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추의 원리를 납득해야 한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생각을 어느 정도 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원리는 우리 삶의 양면인 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목적, 원인, 그리고 결과 사이에 있는 논리적 연결을 지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비유에서 취급되는 자연의 사실이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원리는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도울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와 영적 의미에 있는 상응은 단지 서술 형체뿐만 아니라 감각, 사상까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로 마음 안에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진리의 상징물로 고용된 것들에 관해 적절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교리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비유가 진리의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에 고리를 맺기 때문에 영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교회 속의 교리에 관한 좋은 지식의 획득은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입해 주고자 하는 영적 진리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해준다. 이런 사항은 다른 문제들, 다른 영적인 사항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많으면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기회를 가진 셈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미 가진 것은 더 많은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이 가르친다

주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을 납득하는 좋은 방법은 주님이 직접 가르치셨던 그 사람들로부터 느끼셨던 대로 우리도 느껴 보려 하는 것이다. 그분은 파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상한 심정을 싸매 주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그분의 느낌과 생각 안으로 진입해 음미할 때,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 역시 음미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똑같은 목적, 즉 인간 구원에 대한 모든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 본성을 관조하되 남을 단죄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속셈을 챙기기 위해 관조한다면, 우리는 무한하신 사랑의 가르침을 움켜 쥘 수 없을 것이다.

비유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비유 하나 하나가 독립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단지 비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상응으로 가르치는 신성한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들이 각자 독립된 위치에 있으면서 그 모두는 서로 관계가 있다. 한 예로 마태복음 8장에서 “씨뿌리는 자”로 시작되는 몇 개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들은 거듭남의 진보를 예증하면서 모두 연결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비유는 마치 어떤 사람이 화랑을 걸어다니면서 전시된 작품을 면밀히 검사해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비유를 전체적 시리즈로, 또는 개별적 비유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각 비유는 각 나름대로 우리를 가르친다. 그럼에도 시리즈로 된 미술 작품과도 같이 각각은 나머지 비유들을 설명해 주고 있고, 모든 비유는 각 비유가 이해되도록 돕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관조할 때, 우리는 천국의 화랑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인도, 성령의 이끌림을 원한다면, 그림들이 설명될 때 우리를 참석하게 해줄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설명되고 이해된 부분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영적이고 천국적인 음미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를 안내하는 그 가르침이 일상 생활에서 적은 부분일지라도 꼭 응용하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각 복음서가 조금씩 다르듯 각 비유도 차이가 있다

각 복음서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듯 각 복음서 내의 비유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네 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온 진리의 서술이다. 이는 영의 세계에 있는 네 방위로부터, 거룩한 성에의 접근이 네 측면에서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개별적으로는 각기 다르고, 다양한 특성을 소유했다 해도, 복음서, 그리고 그 속의 비유들은 모두 다 신성하게 무한한 사랑 속의 위대한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들

인간에게 도달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은 입으로 말해지는 비유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비유까지 동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오지그릇을 사 가지고 벤힌놈 골짜기로 가서 장로와 사제 몇 사람에게 그 그릇을 깨는 모습으로 가르치도록 예레미야가 명령받는다 (예레미야 19:1-11):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와 끈을 만들어 그것을 주님의 말씀과 함께 여러 왕에게 보내는 비유 (예레미야 27:2): 하나니야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순 뒤 있게 되는 예언의 비유 (예레미야 28:18):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비유 (예레미야 32:6-15) 등등이다.
또한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행동을 통한 비유도 있다. 묵시록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비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본 것, 환상들은 행동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 아주 큰 규모로 행동된 비유는 인간 거듭남을 예증하는데 보여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더불은 광야 여행이다.
보편적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은 지상에 있는 일상 경험을 비유로 삼아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 지상의 삶에 속한 것은 사실상 영적 삶에 대한 비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은 만일 우리가 들으려 하고 경청하려 한다면 영적 교훈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고대의 언어는 비유적이다

인류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면,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비유가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더 충만한 영적 시야가 인간을 더 광대한 감각적 삶 위로 들어올릴 때, 바깥 자연 속의 모든 것은 마음속 내적 세계에 관해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까지 쳐다본다. 자연은 일종의 거울이다. 그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비유로 충만해 있는 주님의 일을 발견한다면, 비유의 언어로 씌어진 그분의 말씀 역시 발견하는 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글자 형태로 교회에 내려 온 모든 것은 기독인인 우리에게 와지는 영적 실재에 관한 형상으로 존재해 왔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으나,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오게 되었다.”

예증과 견책

주님의 비유들 중에 어떤 비유는 위대한 진리를 예증해 주기 위해 주어진 듯 보이나, 다른 비유는 그 당시 널리 퍼진 죄들을 견책하시기 위해 주어진듯 여겨질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비유이든, 저 비유이든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각 비유 속에는 위의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교리를 강력히 주장하거나, 삶을 위한 교훈 등등 모두는 태양 광선이 열과 빛을 다 같이 보내듯 따로 따로이되 동시에 한 비유 속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기독교는 신조에 있는게 아니라 삶에 있기 때문이다. 신조(creed)는 삶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종교는 생활에 관계되 고, 종교 생활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교리는 삶에 관한 이론이고, 행동은 삶 속에서 이론이 구체화된 것이다.

비유의 해석

따라서 주님의 비유에 관한 해석의 법칙은 무엇일까? 많은 각 개인은 그들 나름대로 비유를 읽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밝혀질 수 있어 사용할 수 있는 해석의 법칙은 없을까? 자연이나 인간에 속한 모든 것에 법칙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계획이나 방법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그 중에서 방법이 법칙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두 세계, 영계와 자연계 속의 모든 것이 질서, 또는 법칙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면,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법칙에 속한 어떤 질서에 따라 작동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기록되고 말해지는 비유들이 어떤 법칙에 일치되며 골격이 짜여 있다면, 비유들은 법칙에 의거 읽혀질 수 있다.
법칙이 존재한다면 이는 밝혀질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고용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법칙의 원리를 알고 있고, 어떤 사건의 사실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에 법칙을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읽으면서 자신의 관념에 머무른다면, 비유로부터 끌어 올려져 알게 된 진리에 기초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려진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 비유의 가르침을 건설하는 반석을 가진 셈이 된다. 모든 과학은 그 나름대로 법칙과 용어를 가지고 있다. 미술도 그 나름대로의 방식(mode)이 있다. 음악을 기술하는 경우, 그 나름대로 소리를 위한 표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배울 때, 각자의 지식이나 기술에 따라 각 사람에게 모든 것을 똑같이 말해 준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관념이나 변덕스러움을 남겨 두어서는 안된다.

상응의 법칙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성경의 비유는 상응의 법칙, 즉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상대물에 의거 씌어져 있다. 상응의 법칙은 육체와 영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위대한 법칙이다. 비유의 글자는 인간의 자연적 삶 속의 것들로 되어 있지만 비유가 예를 들어 증거하는 영적 원리는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법칙이다. 이런 관계가 인간의 육체와 영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진리는 자연적 삶에 흔한 사항들에 기초를 두고, 비유라는 형체로 놓여져 사람들이 비유의 의미를 알고자 하여 유추(analogy)를 수단으로 해서 자기들의 영적 마음이 비유의 의미에 열리게 할 수 있다.
자연과 영의 대응물, 상응의 법칙에서 우리는 비유 해석에 관한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의 응용은 열려진 모든 마음, 모든 시대, 모든 나라, 정신적 진보가 어느 수준에 와있든 비유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응의 법칙은 변동이 없는 원리, 또는 해석의 법칙이요, 이 응용은 비유뿐만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모든 다른 부분에도 응용된다. 사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경험이나 현상에 적용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한 분 하느님,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고, 해석의 법칙도 하나뿐이다. “들을 귀 가진 자는 들을 것이다.”

비유의 세부 사항에도 진정한 뜻이 있는가?

주님의 비유를 해석하는데 확실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게 해준다. 얼마나 많은 비유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비유의 세부 사항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일반 원리를 우리는 수집했는가? 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이런 요점 사항들에 대해서는 계속 확정짓지 못한 채 연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신성한 법칙이 존재하고, 비유는 이 법칙에 따라 골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비유는 그 법칙에 의거 완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유 속의 세부 사항 모두는 그림 속의 세세한 부분과 같다. 전체로서의 그림을 구성하는 것이 세부 사항이다. 그래서 비유를 해석해 가는 가운데 세부 사항에서 주님 스스로 생각을 어떻게 맞추셨는지를 알게 해준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신 주님의 방법, 생각을 상기해 보라. 예수께서도 세부 사항에 관한 해석을 주고 계신다. 이 구절에 덧붙여 기억해 볼 것은, 이 때 주님께서는 듣는 자에게 걸맞는 해석, 즉 외적인 해석만을 주셨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외적 해석만이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비유에 관한 승강된 가르침, 영적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의 세부 사항에서도 가르침을 얻어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예수님 스스로 사용하신 방법을 생각하면 결말이 나리라 본다. 사실 상응의 원리로부터 살피면 위의 의문은 명백히 풀린다.
우리가 상응 속의 원리와 사실들을 따라가는 한, 우리는 비유의 세부 사항까지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다.

보증 없는 추론들

한가지 위험한 것은 상응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추론으로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대중화한 방침으로든지, 비유의 상응을 가지고 추론하려 들든지, 모두 보증 안된 것들일 뿐이다. 예를 들면,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했다고 서술하는 “열 처녀의 비유”를 가지고, 인류의 절반은 구원되고, 절반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주님의 비유에서의 가르침이든, 그 외 다른 구절에서든, 어리석은 추론을 생산했을 뿐이다. 이런 추론은 상응의 법칙이 응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상응이란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관계, 마음의 눈인 영적 시야와 육체의 눈인 자연적 시야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보증 없는 추론은 외적인 이것과 또 다른 외적인 저것과의 비교일 뿐, 인간 삶의 법칙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상응들을 살피되, 정당성이 보증도 안되는 추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유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교훈을 끌어내야 하리라 본다.

상응은 신성한 원리이다

새교회 밖에서의 큰 곤란은, 상응의 원리를 신성한 원리로서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이들은 비유가 인간을 본따서 만든 석상과 동등한 형상으로 생각한다. 사실 석상은 어떤 인간 형상의 모습인바 바깥 형체는 비슷할는지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 초상화의 경우, 색깔까지 그 사람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속 부분은 불가능하여 오로지 피상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비유의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비유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인간의 형상이다. 바깥으로 구체화된 열정은 그 열정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마치 웃는 얼굴이나 양팔을 벌린 모습은 그 사람의 애정이 표현된 모습이고, 반대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을 경우, 그것은 그 사람의 분노가 표출된 모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로부터 외적인 것들인 자연적 추론이 아닌, 자연적 결과 안에 들어 있는 영적 원인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비유는 중심 되는 진리로부터 붙잡아야 한다

비유를 해석하여 영적 교훈에 가장 잘 도달될 수 있는 것은 먼저 비유 속에 있는 중심 되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은 그림의 전체 중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중심된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비유를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공원의 중앙에 위치한 사람이 사방의 길을 볼 수 있는 경우 같이 된다.
구심점은 비유의 중심 원리에 해당되고, 사방으로 뻗는 길은 비유의 여러 상황을 말한다. 그래서 중심 원리가 좁고 넓은 길들을 통제하여 간다. 따라서 공원 한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공원의 계획도 쉽게 알게 되고, 공원의 특정 지역들 사이의 연관성도 이해할 수 있듯이, 비유 해석의 중심에 선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에 관한 일반 계획, 서로 다른 듯한 비유간의 연결이나 관계까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원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은 공원의 특정 구역과 구역의 연결을 납득 못하듯, 비유의 중심 원리를 파악치 못하고 바깥으로만 맴도는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을 납득하지 못한다.
비유 속의 중심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경우, 우리는 그 비유의 전후 문맥을 살피거나, 소개되는 상황, 또는 응용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른다. 주님이 토론하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응용하기를 바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이 의도하시는 가르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하학에서의 경우 주변은 언제나 중심에 이끌려 있지, 중심이 주변에 매달려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중심 되는 진리는 비유가 올바르게 해석되게 방향을 제시하고 더불어 응용 가능하게 해준다.

비유는 예증하는 구절들이다

비유는 논쟁적이지 않고 예를 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교리를 확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비유 속의 중심 진리를 볼 수 있을 때만이 그 비유의 응용 또한 가능한 것이다. 전후 문맥 속의 모든 상황은 비유가 예증하는 중심 진리를 내세울 때만이 하나로 뭉쳐진다.
비유 속의 진리는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중심 원리, 또는 진리가 언제나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발견된 이후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있다. 마치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데 노력이 많이 들었지만, 그 뒤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 속의 비유는 주님의 작품이므로 그 비유들은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분이 밝혀 두신 법칙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을 뿐, 어떤 국가나 교회사, 예언하는데 기발난 생각들을 제공하려고 주어져 있지 않다. 교회들의 역사에서 모든 종파나 그 종파의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입증하려는데 사용되도록 비유는 강요당해 왔었다. 그래서 상징적이거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비유의 경우, 쉽게 남용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새교회 밖에서의 경우, 비유의 영적 가르침은 몇 계단 올라간 수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자연적인 의미일 뿐, 확실히 구분되는 영적 의미는 아닌 것이다.

영적 의미는 외관상으로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비유의 영적인 해석은 비유의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놓고 새교회에서도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러나 위의 사항이야말로 새교회가 비유를 해석하는데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유의 글자와 영의 관계는 인간의 육체와 영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 둘은 아주 가깝게 연결이 가능한 가운데 존재한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연구하여 이해했다 해도 그것 가지고 인간의 영을 이해하는 수준까지 오를 수 없다. 사실 노골적으로 불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자연과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이 더욱 물리적 삶을 연구할수록, 그들은 더욱 영적 삶의 존재를 덜 믿는다.
왜? 이유를 정밀하게 말한다면, 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영과 육체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 둘의 연결은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응성에 있다. 영적 삶을 명백하게 이해하고저 하는 사람은 그 삶의 증거를 물리적 삶을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연구함으로 발견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영적 마음을 열므로 해서 발견해야 한다. 영적 마음이 열려질 때, 과거 영적 사항을 지각하는데 장애물이었던 자연 속의 참 사실들은 이제 자신의 열린 눈을 통해 그에게 영적 삶을 확증해 주고, 예증물도 되어 주며 응용도 할 수 있게 한다. 비유를 해석하는 새교회의 방법 속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들은 글자 의미와 끊어져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영과 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는 정도 이상으로 글자와 영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연결된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끊어져 있지 않다.
성경의 영적 의미, 이는 인간의 영과 같이,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그 존재의 비밀을 끝내 밝혀 준다. 이미 알려진 영적 원리들은 진리의 빛으로 보는 이에게 비유의 비밀을 밝히고 응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이유가 진리는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이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영적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해석을 위한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못한다.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않은 채 비유에서 의미를 찾을 경우, 그는 성경에서 의미를 퍼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경을 밀쳐내어 놓고 만다. 이러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성경은 인간에 의해 남용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영으로 성경의 글자에 다가가는 사람, 주님이 자기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준비가 된 그 사람에게, 성경의 모든 부분은 그 사람 속에서 영원한 생명수가 솟아오르도록 하는 샘이 되어 줄 것이다.

구약의 비유 차례

* 서문———————————–23
1. 왕을 세우는 나무들—-판관기 9: 8-15———— 24
2. 삼손의 수수께끼—– 판관기 14: 5, 6, 8, 12, 14—— 33
3. 암컷 새끼 양——-사무엘하 12: 1-4———– 40
4. 원수 갚는 자——-사무엘하 14: 5-7, 11——— 49
5. 도망친 포로—–열왕기상 20: 39-40————- 57
6. 야망의 가시나무—-열왕기하 14: 9————– 66
7. 황폐된 포도원——이사야 5; 1-7————- 73
8.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예레미야 1: 11-14—– 82
9. 쓸모 없게 된 허리띠—–예레미야 13: 1-7——— 88
10. 훼손된 옹기장이의 그릇—–예레미야 18: 2-6——- 94
11. 깨진 옹기장이의 그릇—예레미야 19: 1, 2, 10 ——– 98
12. 무화과 두 바구니——-예레미야 24: 1-2——— 100
13. 예레미야의 멍에와 끈–예레미야 27: 2,3,6. 28:1,2,10,12,13– 105
14. 포장된 광장에 돌을묻다—예레미야 43: 8-10———- 111
15 번쩍이는 불과 생물, 그리고 바퀴—에제키엘 1: 4-16—— 117
16. 이 두루마리 책을 먹어라—에제키엘 2: 8-10. 3: 1-4, 14— 123
17. 포위 공격되는 예루살렘—-에제키엘 4: 1-13———- 130
18. 예언자가 머리털과 수염을 밀다—-에제키엘 5: 1-5—— 137
19.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에제키엘 8: 1-16——– 143
20. 예루살렘의 대학살—–에제키엘 9: 1-6. 10: 1, 2, 7—– 150
21. 보따리를 꾸려 떠남———에제키엘 12: 1-7—— 156
22. 무서워 떨며 먹는 빵, 겁에 질려 마시는 물–에제키엘 12: 18-20- 162
23. 거짓 여 예언자들——-에제키엘 13: 17-23——– 165
24. 예루살렘의 포도나무——에제키엘 15: 2-8——– – 173
25. 독수리와 포도나무——-에제키엘 17: 2-10——— 180
26.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에제키엘 18: 1-2——— 188
27. 암사자와 그 새끼 사자——에제키엘 19: 1-9——– 196
28.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의 어머니—–에제키엘 19: 10-14— 203
29. 끓고 있는 고기 가마——에제키엘 24: 3-12——— 210
30. 레바논의 아시리아 송백——–에제키엘 31: 3-12—– 218
31. 악한 목자———에제키엘 34: 1-6, 9-11——– 226
32. 마른 뼈가 되살아나다———-에제키엘 37: 1-14—- 233
33. 두 막대기가 하나로——-에제키엘 37: 16-23——- 241
34. 큰 제물에의 초대———-에제키엘 39: 17-21—— 249
35.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제키엘 47: 1-9—– 256
36. 큰 형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다니엘 2: 31-45— 263
37. 큰 나무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다니엘 4: 10-28— 271
38. 향연과 벽에 써진 글——–다니엘 5: 1-28——– 279
39.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환상—다니엘 7: 2-18, 23-27— 287
40. 수양과 수염소—-다니엘 8: 2-26—————- 295
41. 소귀나무 사이에 있는 사람과 말—-즈가리야 1: 8-11—- 302
42. 네 뿔과 네 대장장이–즈가리야 2: 1-4 (구번역 1: 18-21)- 307
43. 측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즈가리야 2: 5-9 (구번역 2: 1-5)- 313
44. 대사제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즈가리야 3장——– 318
45.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즈가리야 4: 1-4, 11-14—- 325
46. 날고 있는 두루마리——-즈가리야 5; 1-4——— 330
47. 여인과 에바————-즈가리야 5: 5-11——- 335
48. 네 병거와 말——-즈가리야 6: 1-8————– 342

구약 비유 서문

거룩한 성경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씌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다.
신성한 말씀은 영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영적 존재인 인간에 대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뿐인 인간에게 진리가 납득되도록 내려와지기 위해서 영적 진리들은 자연적 형상안에, 자연적 사항에 상응하여 표현되고 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느님이었다…나는 예언자들에게 내 말을 들려 주었다. 환상도 많이 보여 주었다. 나의 계획을 예언자들을 시켜 알려 주었다” (호세아 12:9,10).
성경은 영과 몸을 가지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안쪽과 바깥쪽 상응물로서 상응의 관계가 존재한다.
단어 비유는 세 가지 의미에서 사용되어 진다. 1. 수수께끼, 또는 아주 모호한 말. 2.비유적인 대화. 3. 꾸민 이야기 이지만 진리를 알아낼 수 있거나 진리를 예증하도록 고안되었으나 실제로도 가능성이 있는 대화체이다. 신약성서의 비유들은 모두 세 번째 정의에 해당된다. 구약성서는 꼼꼼하게 위의 기초를 적용할 경우 몇 개의 비유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구약성서 비유를 취급할 때 우화나 환상을 포함하는 두 번째 정의 까지 채택하였다.
모든 비유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대화체적 의미 2. 자연물이나 사물에 적용시킴으로서 오는 비유적 의미 3. 마음에서 실행되는 원리를 예증해 주는 영적 의미이다.
이 책에 고용된 해석 체계는 이마누엘 스베덴볽를 통해 교회에 알려진 “상응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각 비유를 각 비유 단원 자체에서 완성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아서 약간의 반복 설명이 있음을 첨부해둔다.

1
왕을 세우는 나무들

성서: 판관기 제 9장 8-15절

8. 하루는 나무들이 모여 와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세우기로 하고
올리브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9. 그러나 올리브나무는 사양을 했소.
‘내 기름은 모든 신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런데 나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0.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사양을 했소.
‘나 어찌 이 훌륭한 과일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2 그래서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13 그러나 포도나무도 사양을 했소.
‘내 술은 모든 신과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것,
그런데 나 어찌 이 술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 보며 으스대겠는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는 가시나무에게 청을 드려 보았소.
‘자네가 와서 왕이 되어 주게나.’
15. 그러자 가시나무는 그 나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소!
‘너희가 정말로 나를 왕으로 모시려는가?
정녕 그렇거든 와서 내 그늘 아래 숨어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이 가시덤불이 불을 뿜어
레바논의 송백까지 삼켜 버릴 것이다.’

지배욕

지배욕은 남을 다스리려 하며 파멸로 치닫는다. 인간 속의 보다 높은 원리들은 제각각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특질을 선용하는데 만족해 하나, 보다 낮고 비천한 인간의 성향은 타인을 다스리기를 바랜다.

본문의 역사 배경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에게 청하기를,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내가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요, 내 자손이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하며 그들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야훼시오” 라고 말해 주었다. 그 뒤 기드온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판관으로서의 그의 조언이 계속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가 죽자 그들은 곧 우상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기드온이 소실에서 얻은 아들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교활한 음모를 짜서 기드온의 친아들 칠십 명중 숨어 버린 요담을 제외한 모두를 한 바위 앞에서 죽였다. 그래서 주님은 아비멜렉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요담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이고 아마 가장 오래된 성서의 비유일 것이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그들이 내세운 왕이 가문 중에서 하위 급에 속한 자요, 왕위를 얻기 위해 기드온의 친아들의 피를 본 잔인성이 있는 자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처럼 남을 다스리거나 파괴할 준비가 된 자로서 악령이 덮쳐 있어 그의 통치는 이스라엘에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고 세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역사에 표현된 의미

나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하고 있다. 올리브는 기드온, 무화과나무는 기드온의 친아들들, 그리고 포도나무는 기드온의 자자손손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기드온이 왕위에 앉기를 사양했고 그 자손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가시나무는 아비멜렉, 그리고 레바논의 송백은 세겜의 사람들이다.

역사에 표현된 영적 의미

비유는 위의 역사 표현에 영적인 응용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악함과 우상 숭배에 빠져들 때 그들은 언제나 어떤 강한 적에 의해 패배를 맛보았었다. 우리의 경우, 각자가 주님의 명령에서 이탈할 때 악에 침몰하여 자아나 세상을 숭배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에 반기를 드는 어떤 영적인 적의 수중에 잡혀 심각한 패배를 맛보고 만다.
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빠져 든 악과 거짓을 표현해 주는 어떤 국가나 민족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때로 이 백성들은 포로로서 끌려가기도 했다. 끌고 간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적으로 끌고 가는 악한 원리들을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는 육의 욕망에 영적으로 포로됨을 말한다. 이럼으로서 그들은 거듭나는 삶의 고향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 기쁨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자기 죄상을 보고 인정할 때, 그리고 구원을 위해 주님에게 돌아서고 회개하여 악을 죄로 알고 금함으로서 구원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들은 하느님이 도우셨음을 쉽게 잊어 버리고 이기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든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신적인 왕인 장엄하고 신성한 진리를 간직하려는 대신, 진리를 거꾸로 뒤집어 보려고 하는바, 노예 같은 원리가 사생아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생아를 자기의 정신적인 왕으로 내세운다.

아비멜렉

아비멜렉은 이기적으로 남들을 지배하려는 잔인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랑은 자아 사랑에서 태어나진다. 한마디로 지배하고 파괴시키는것에 준비가 완료된 가시나무인 바, 자기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으려는 더 나은 원리들은 불살라 버린다.

세 나무들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자주 함께 언급되는 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은 인간 생명의 불연속 등차인 천적, 영적, 그리고 자연적 등차를 표현하고 있다. 천적 등차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영적 등차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자연적 등차는 법에 순종함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나무란 인간의 지성과 삶의 내향적 원리를 표현한다. 선한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주님의 나무들”이라 불리고, 악한 사람 속의 원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 토양의 두통거리들이라 불린다. 시편을 찾아보면 나무에 대한 이해를 보태 줄 것이다. 즉 “나는 하느님의 집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올리브나무 같이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믿고 살리라” (52:8). “의로운 사람아.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아라” (92:12).

올리브 나무

올리브 나무는 주님을 사랑함을 표현하는바, 이 사랑은 천적인 원리에 해당된다. 이 사랑의 원리는 기름(oil)같이 따뜻하고 미끈미끈하다. “당신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기에 하느님, 당신의 하느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을 다른 사람 제쳐놓고 당신에게 부으셨읍니다” (시편 45:7). 이 사랑의 기름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올리브의 “기름(fatness)”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마음을 규율하여 모든 애정, 생각, 행동 지침들을 통치할 때 그 인간은 천적으로 거듭난 상태 안에 있게 된다.
올리브 나무가 나무들을 다스리기를 사양했다 함은 천적인 사랑이 거듭나는 마음을 규율할 수 없다던가, 규율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이와 같은 천적인 사랑은 세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식의 마음 바탕을 규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겜 사람들은 천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이 다스려지길 바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이기적인 데에 쏠려 있음을 음흉하고 살인적인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서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주님을 사랑함, 천적인 사랑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마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만일 천적인 사랑이 이기적인 원리들과 하나를 이룬다면 이는 필시 천적 사랑의 특질을 잃게 되고 악에 의해 간음질화가 있고야 만다. 그래서 다스리기를 사양한 올리브 나무의 대답은, “내 기름은 모든 신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런데 나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으스대겠는가?” 이였던 것이다. 이 거절의 기본 원칙은 천적 사랑은 그 사랑의 선함을 잃지 않고서는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원리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글자대로 볼 때, 올리브 나무는 하느님과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올리브 기름은 성전에서 하느님의 예배에 사용되고, 또한 사제들이나 왕들은 이 기름을 부워 세워졌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볼 때, 올리브 나무가 하느님과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리로 하는 자는 언제나 주님만을 찾으며, 그분을 인식하고 모든 영예를 그분께 돌려 드릴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과 연합하는 상태로 가져다주려 하는 바 이런 상태의 사람이 진정으로 존경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역시 왕이 되기를 사양했다. 무화과는 자연적인 선함, 자신에게 밝히 알려진 법에의 순종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이 사랑이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려고 자연적인 사랑을 배가시켜 가려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미덕을 가지고 타인을 다스리려는 포부의 영을 먹여 살리려 하면 필시 이 사랑 속의 선한 특질은 파괴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미덕이 악덕으로 부패해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무화과나무는 자기의 달콤한 맛과 훌륭한 과일을 돌보지 않게 되고야 말 것이다. 인간이 지적으로 진리를 잘 알고, 기꺼이 그 진리에 순종하게 될 때, 요엘서 2장 22절과 같이,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영적인 상태가 된다. 무화과나무의 “달콤함”이란 내향적인 선한 원리들을 말하고, 훌륭한 과일이란 그 원리들이 적용되어 이루어지는 선한 일들을 뜻한다.

포도나무

포도나무 역시 왕이 되기를 거절했는데, 말하기를 “내 술은 모든 신과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것, 그런데 나 어찌 이 술을 내지 않고 자리를 떠나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으스대겠는가?” 이었다. 포도나무는 영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포도나무의 열매는 진리를 사랑하기에 튀쳐 나오는 선을 말한다.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는 구별된다. 본문 글자대로 볼 때, 포도주는 하느님과 인간을 기쁘게 하거나 흥겨웁게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포도주는 주님에 대한 헌물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한 포도주를 올바르게 이용하면 슬픈 자나 피로에 지친 이에게 힘을 북돋아 주거나 기쁘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볼 때, 포도주는 신성한 진리, 영적으로 “주님의 피,” 주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 선한 사람이 그분에게서 받고자 하는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은 영적인 “포도의 피,” 신성한 진리는 인간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며 그 심정을 따뜻하게 해주어 그 사람의 삶을 부유하게 만든다.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자신을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부르셨다.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언급하시면서, “잘 들어 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마가복음 14:25) 라고 하셨다. 이 새 포도주란 성경의 영적인 뜻이 우리의 내면에 와질 때 있게 되는 진리들, 즉 새로운 영적 진리를 말한다. 이 진리가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 안에 있게 해주는바, 이것이 영적으로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이 영적 포도주는 “하느님과 인간을 흥겹게 해주는데,” 그 이유는 신성이 인간에게 더욱 더 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신성한 사랑의 역사가 더욱 더 팽창되기 때문이다.

다른 나무들

다른 나무들은 좋은 나무가 자기들을 다스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 주려면 좋은 나무들은 자기들의 높고 거룩한 인격을 떠나 다른 나무들의 처지에로 내려가야만 했다. 바꿔 말해 다른 나무들은 세 나무들이 자기들 위에서 통치해 달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대신 그들은 “우리 왕이 되어 주게나! Come thou, and rule over us” 라고 제의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인격이나 처지를 더 나은 곳으로 들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자기들의 이기적인 조건을 주창 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더 높은 것들이 내려와서 자신들의 더 낮은 조건에 동의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좋은 나무들은 자기들의 분명한 특질이나 인격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들의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다. 따라서 왕이 되기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 나무의 차이점

올리브와 무화과나무는 내, 외향적 선에 관한 의지 또는 심정의 상태, 혹은 사랑을 표현한다. 포도나무는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와 진리로 살아가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들은 남을 지배하고 싶은 어떤 이기적인 형체와 자신들이 결합되기 위해 자신들의 선함과 진리를 내버릴 수는 없었다.

가시나무

좋은 나무들이 왕이 되기를 사양하자 다른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제의해 보았다. 각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 이 가시나무는 대중을 지배하고 파괴시키려 드는 위험한 인물들을 표현한다.
추상적으로 볼 때, 이 가시나무는 남을 다스리기를 즐기려드는 이기적인 형체를 표현하는바, 이 형체는 매우 세상적이고 도도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다.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악한 용도에로 충당될 때는 가시나무같이 되어져 위험스럽고 불붙기 쉬워 이기적 욕망이라는 지옥의 불로 쉽게 타 버리고 만다. 성경의 글자도 그 글자들이 내향적인 영에서 분리되면 악한 용도에 금방 충당되므로 지성 속에서 가시나무가 되고 만다. 이렇게 성경의 글자가 남용되면 위장된 선함, 가짜 선함이 생산되는 것이다. 시온이 죄악스런 상황에 처할 때에 대해 말하기를, “궁궐마다 딸기 덩굴만 무성하고, 요새마다 쐐기풀과 가시덤불만 얽혀 자라나고 승냥이가 득실거리며, 타조가 노니는 곳이 되리라” (이사야 34:13) 라고 하였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을 지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기적인 사랑은 한 인간 속의 지배욕이 기꺼이 모든 것을 다 지배할 때까지 계속 그 지배욕을 키운다. 그래서 악인이 많이 알면 알수록 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 사람이 교리로서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자신 속의 감각적인 욕망의 불은 자기 지성 속의 모든 진리에 불을 뿜어 태워버리고 만다. 레바논의 송백이란 합리적인 진리들,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진리들인데 이것까지도 다 삼켜 버리게 된다.
지배욕은 자기 지식을 이기적인 목적에 충당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교회를 향해서도, 모든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선심을 쓰는 척 할 것이다. 만일 교회 속의 모든 것, 모든 선한 것이 선함을 떠나 이 욕망 아래로 내려와 이 욕망의 섬김을 바라는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를 시도하면, 이 욕망은 지옥의 불을 보내 지성 속에서 다 태워 버린다. 인간 사회 속의 역사는 이와 같은 가시나무로 꽉 차 있고, 교회의 성직에 필요한 체계 속에서도, 정치인들의 정치 술수 속에서도, 사회 생활의 남용 속에서 남을 지배하고 파괴하려는데 전심전력 투구하는 모습에서 엿보아진다. 타락한 인간은 자아 사랑을 자기의 진짜 하느님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자아 사랑만이 자기 생명이라고 여겨 기대고 있는 동안 이 사랑은 그를 지옥 불 속에서 파괴시켜 버리는 줄을 그는 까마득하게 모른다.
아비멜렉, 가시나무 같은 그는 무가치한 것 중에서 가장 무가치한 고로 통치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 이유는 백성들은 그런 왕을 내심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도 자신에게 올 이익 때문에 그들을 다스려 줄 준비가 되었었다.
이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기울어졌고 가시나무 역시 자기 방식대로 지배하고 파괴하기 위해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만함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겠다는 아비멜렉의 뻔뻔함, 자연적 수준의 인간성이 영적 수준의 인간성을 지배하겠다고 하는 건방짐이 모든 나무들, 게다가 곧바르게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자라는 레바논의 장대한 송백 나무까지도 보잘것없는 가시나무 그늘 아래 들어와야 한다고 을러대는 낮고 비천한 가시나무의 말에서 보여지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위의 괴물 같은 뻔뻔함, 이것이 지성 속의 드높은 원리들을 끌어내리려 시도하는 것, 이 원리로 하여금 악한 목적에 충당하려 하는 것, 전적으로 자기 그늘 아래 앉게 하려 하는 것, 또는 악한 욕망의 거룩하지 않은 불로 그 원리들을 파괴시키려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지성 안에 든 지배욕이 보여주는 착각들이다.

송백 나무

레바논의 송백은 거듭나는 삶 속에 있어지는 장엄한 합리적인 진리들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 나무는 고상한 모양새로 땅 위 아주 멀리까지 자라 오르고 그들 잎사귀들은 언제나 푸른 바, 이 진리들은 영적이며 죽지 않는 인성을 사람에게 가르친다. 시편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땅에서도 야훼를 찬양하여라. 큰 물고기도 깊은 바다도, 번개와 우박, 눈과 안개도 당신 말씀대로 몰아치는 된바람도, 이 산 저 산 모든 언덕도 과일 나무와 모든 송백도…” (148:7-9.) 어떻게 드높고 영화로운 진리들이 구부리고 구부려도 땅바닥에 붙어 있듯 서 있는 낮고 천한 가시나무 그늘 아래에 자신들을 구겨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에 관한 지식을 남을 지배하려드는 이기적인 사랑의 욕망에 팔아 넘길 수가 있을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리석게도 이런 식을 시도한다면 우리 심정 속에 든 지옥의 불은 확실하게 봉기해서 우리 속에 든 레바논의 송백까지도 삼켜 버리고야 만다.

각 개인에 대한 응용

창조에는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창조자에 의해 성별되어 있어 모든 창조물의 조직 안에 고정되어 있다. 이 질서에 따라 각 개인은 자기가 설 곳이 정해지고 자기가 어디에 쓸모 있는가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각자의 용도에 맞는 항목을 선택하여 수행해감을 사랑하는 가운데 행복은 발견되어진다. 다시 말해 눈은 보는 일에, 귀는 듣는데 편성되면 가장 적합한 용도에 충당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눈은 어떤 소리도 감지 못하고, 귀는 어떤 빛도 인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눈은 보는 일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아야 하고 귀는 듣는데서 떠나 다른 일을 하기를 원치 않아야 한다. 따라서 최상의 것이라면 각자의 씀씀이대로 편성된 속에서 자기 일을 수행하는게 가장 행복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다른 것을 다스릴 이기적인 포부란 있을 수 없다. 거듭나는 지성 안에 든 삶의 각 원리들은 제각각의 장소와 일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제각각의 용도에 충당됨으로써 행복이 100% 성취된다. 만일 그 중 하나가 이기적인 욕망이 있어 제 길을 벗어나 다른 것을 지배하려든다면 그것의 좋은 특질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지배욕

그러나 우리 속의 가시나무, 지배하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우리의 포부는 자기 외의 모든 다른 것을 다스리려 하거나 악한 욕망의 지옥 불에 다른 것들을 종속시키려 들므로서 좋은 특질을 파괴하려 애쓴다. 천국은 겸손의 영으로 꽉 차 있고 지옥은 자기 주장으로 꽉 차 있는 곳이다.
만일 어떤 천국적인 원리들이 우리 지성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면, 이 원리들은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의 조절 아래 놓여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선한 원리들을 남용한다면, 사랑의 기름을, 영성인 포도주를, 좋은 과일 속의 달콤한 맛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복음 3:10).
지배를 좋아하는 사랑은 여러 방면에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즉 자신의 길만이 올바르다고 우겨댐에서, 자기 견해만을 뻣뻣하게 과시함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능력을 과대 평가함에서 드러낸다. 게다가 이 평가는 적절한 비평이 있을 경우 참지 못하는 특성도 겸비하고 있다. 특별하게는 타인을 경멸하는 비열한 악덕 속에 상존 한다. 모든 이런 양상들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타인을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사랑의 일부 형체들에 속한다.
겸손이 없으면 사랑의 기름은 그 특질인 천국적인 따뜻함을 잃는다. 진리의 포도주는 그 속의 영적 특질을 잃고 만다. 그리고 순종의 무화과는 그 자체의 주특기인 실용적인 달콤한 맛을 잃고야 만다.
우리 지성 속에 든 가시나무, 우리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고 추키려 들 때든지, 타인을 경멸하도록 자기 심정을 허용할 때든지, 더욱이 하느님이 자기에게 밝혀 준 진리(Divine Revelation) 속의 거룩한 진리들을 끌어내려 자신의 감각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이기적 용도에 충당시키려 들 때는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그것은 우리 속의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을 다스리고 있는 모습이다.

영적 진리

성경의 글자적인 사실들을 놓고 이는 어떤 민족의 역사에 불과하다던가, 지구상의 어느 조그만 부분에 대한 과학이나 지리학에 관한 지식을 제공할 뿐이라고 하는 이들의 주장에 휘말리거나 맞서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그 사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밖에 사용되지 못하고 만다.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예언들이 자연적 측면 이상의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예상할 때 영적이고 천적인 올리브 나무가 열매를 내지만 그 기름은 조금밖에, 무화과나무가 무화과를 맺어 봐야 그 열매 속의 달콤함은 조금밖에, 포도나무가 포도를 생산한다 해도 그 포도로 빚은 포도주는 조금밖에 안되고 만다. 밝혀진 진리의 빛 안에서 인간 영혼을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신성한 말씀을 간주할 때만이, 그 말씀 속의 진리가 인간의 영적 양상 속에서 보여짐으로써만이 성경 속의 진리들은 천국적인 진리로 보여지고, 우리 지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주며, 출생부터 영원까지 있어지는 인간 영혼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나열해 준다.
주님이 영적으로 오시는 가운데, 그분은 인간에게 “더 풍부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더 높은 품질에 속한 생명을 주시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뜻한다면, “하느님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가 될 수 있도록 그분은 예비해 두셨다. 그래서 “그날에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즈가리야 3:10).

2
삼손의 수수께끼

성서 본문: 판관기 제 14장 5, 6, 8, 12, 14절

5. 삼손이 딤나로 내려 가서 딤나에 있는 한 포도원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다. 난데없이 어린 사자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6. 그 때 야훼의 영이 갑자기 내리덮쳐 삼손은 양새끼 찢듯 맨손으로 그 사자를 갈기갈기 찢었다… 8. 얼마 후 삼손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으러 가다가, 가던 길을 벗어나 죽은 사자가 있는 데로 가서 그 죽은 사자 몸에 벌이 꿀을 쳐 놓은 것을 보았다…. 12. 그 자리에서 삼손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수수께끼 하나를 낼터이니, 잔치가 계속되는 이렛 동안 생각해서 맞혀 보게. 알아 내기만 하면 내가 모시옷 서른 벌과 예복 서른 벌을 내지.”… 14. 그래서 그는 수수께끼를 내놓았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유혹에 저항

신성의 도움을 가지고 유혹에 저항하면 우리는 악의 권세를 이겨내서 거듭남의 단맛을 즐기면서 더 강해질 수 있다.

삼손

나지르인으로서의 삼손은 신성한 진리로 무장하고 지옥과 싸워 정복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연적 인간성을 표현한다. 삼손의 힘은 그의 머리털에 있었다. 머리털, 이는 피부로부터 자라고 육체 중에서도 가장 바깥쪽에 해당되는 바, 자연적인 마음에 속한 것들, 또한 자연적인 삶에 속하는 것들을 표현해 준다. 좀더 뾰족하게 생각하면 머리털은 신성의 가장 바깥, 즉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표현해 준다.
진리가 무언가를 분명히 해줄 때 진리는 아주 힘있고 효과적인데 특히 바깥쪽 삶의 행동에 직접 응용될 때 더욱 그러하다. 열 개의 계명에 의해 행해진 삶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정직해야 함이라는 주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 주제에 가능해지는 많은 논리들을 펼칠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해 십계명을 참작하면, 진리는 자아 부정이라는 명백하고 실용적인 형체를 띄고 우리들과 대결하게 된다. 즉 “도적질하지 말라” 라든가 “거짓 증거하지 말라” 와 같은 형태로 대결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도를 구체화해서 표현한 행동 지침에 대한 법의 실용적인 힘을 깨트릴 수 있는 기발할 논쟁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글자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힘이 머리털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고로 예언자나 표현적인 인물, 즉 에사오, 엘리야, 세례자 요한, 삼손은 특별히 “털이 많은 사람”으로서 언급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연적인 인간성은 유대 종족에 존재해 온 악에 속한 자연적인 경향성을 그의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성향인데, 이것이 삼손에 의해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자연적인 인간성은 순수해지고 영화되어서 내재하는 신성과 하나를 이루어야 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위의 과정은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진리인 예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리하여 예수의 인간성은 모든 신성한 성질, 모든 신성한 권능으로 채워지는 바, 신성함이 신성한 인간성 안에 충만하게 내재할 수 있었다. 이상의 과정이 인간성이 영화하는 과정이요, 신성한 인간성인 하느님의 외적인 것을 만들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외적인 것 안에 하느님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로, 신성한 인격 속의 삼위일체, 즉 아버지, 아들, 성령 또는 신성한 사랑, 신성한 지혜, 신성한 권능 모두가 한 분 하느님이고 한 인격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 안에 상존한다.

사자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는 작업, 영화 되시는 작업의 한 부분이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임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표현물(representative)은 때로는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나, 뭔가가 비질서 속에 있을 때는 나쁜 의미로도 사용된다. 좋은 의미에서 사자를 살펴보면, “짐승의 왕” 또는 큰 힘을 가진 짐승으로서의 사자는 권능, 특별히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는 진리의 권능을 표현한다. 더 특별하게 보면 사자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가진 권능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사자가 털이 많은 짐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주님은 “유다지파에서 나온 사자”라 불리우신다. 그러나 이 동물이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 사자는 거꾸로 된 진리의 권능, 거짓 권능으로 변한 권능, 퇴보되는 지성 속에 든 진리, 신성한 진리의 영에 맞선 전쟁에 가담한 비진리, 또는 실제의 삶 안에서 선함에 맞선 것들을 표현해 준다.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그분이 배운 신성한 진리를 거짓화시키고 싶어하는 자연적인 경향성으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본성 중에 내적인 것과 신성한 부분은 예수님의 전 인격을 선한 질서에로 가져다 놓으려 하지만, 진리를 거짓화하려는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연적인 마음이 위와 같은 변화에 반대하므로 영화되는 과정에 당연히 저항한다. 이와 같이 진리를 거짓화 하려는 위의 자연적인 경향성이 본문에 있는 사자이다. 삼손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란 상응으로 볼 때 정신적인 사자, 즉 예수님의 자연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사자가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바, 시편 22편에서,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시편 57편 4절에서, “나는 사자들 가운데에,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 가운데에 누워 있읍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의 신성한 본성이 진리를 거짓되게 하려는 경향성들을 극복한 이유는 인간성 스스로 이와 같은 경향성에 저항하며 신성한 의지를 행하려고 했기 때문인데, 이런 행동이 사자를 찢는 삼손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분이 입으신 인간성, 우리가 입고 있는 인간성 모두에 대한 신성한 약속이 시편 91편 13절에서,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 새끼와 구리뱀을 짓이기라”로 표현되어 있다.

사자의 공격

악과 거짓의 큰 권능은 예수님이 입으신 인간성 안에 있는 유대 종족의 자연적인 경향성에만 있는게 아니다. 악과 거짓에 대한 이런 경향성은 자연적인 마음 안에 흔들리지 않는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옥은 이 바탕을 근거지로 삼고 전 인격을 소유하려는 바, 인간성을 영화하려는 예수님 안의 신성한 본성과도 전쟁을 치르게 된다. 영화하심은 선함만을 위한 것인지라 모든 악이 대항하게 되므로 지옥에 있는 모든 악령들은 이 영화하심이 실패되게 하려 발버둥친다. 그런고로 악령들은 모든 자기들의 권능을 모아서 죄에 빠지도록 예수님의 인간성을 꾀게 된다. 이러한 지옥의 권세가 공격하는 것이 사자의 공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반면, 사자에 대한 삼손의 큰 힘은 단지 그가 지닌 근육의 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내리 덮쳐” 있었던 힘과 더불어서 이다.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대부분은 인간을 붙잡고 있던 악과 거짓 그리고 죄의 근원인 지옥을 정복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인간을 위해 이 일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예수님도 그분의 자연적인 마음 안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수행하셔야만 했다. 그분도 그분 속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을 만나 그것들을 거꾸러트리셔야 지옥적인 권능에서 인간을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는 말이다. 삼손의 행동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위의 일을 표현해 준다. 신성한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가 입으신 인간성 안에 내재하시어 예수의 자연적 인격을 지휘하고 강건하게 해주시면서 지옥과의 대결이 있어 왔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이 되셔서 우리 속에도 있으시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뜻하기만 하면, 우리가 지옥과 대결하는데 있어 그분은 우리를 지휘하시고, 유지 보존시키며 가르치시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 뒤 그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누가복음 10장 17-19절을 보면,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읍니다’ 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라는 말씀은 위 내용을 보다 더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삼손의 수수께끼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먹는 자,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자, 파괴자는 사자였다. 그래서 여기서의 사자는 거짓 원리의 힘을 표현한다. 이 원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속에서 난동을 부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함, 모든 영성을 파괴하려 애쓴다.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이와 같은 사자는 악과 거짓의 영들이고, 이 영들은 영계에 살면서 언제나 인간의 악한 경향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하여 언제나 이 경향성에 들러붙어 악과 거짓을 일으켜 세우고 증가시켜 인간을 영적으로 파괴시킨다. 그러나 삼손은 사자를 죽였다. 이는 인간성 안에 계신 주님이 악과 거짓의 영들에 대항하여 역사하고 그들의 영향력에 대처하셨음을 표현했는데, 이는 그분이 입으신 자연적인 인간성뿐 아니라 거듭나기를 정말 원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악에 기울려는 상태에 저항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마디로 주님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사람 속에서 삼손이 사자를 죽이는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악과 거짓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오래 전 인간이 악에 함몰되었기 때문에 악의 격렬한 권세로 꽉 차 있다. 그런데다 계속 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악에 대한 그들의 경향성은 더욱 증가되어 왔다. 그래서 지금 인간의 외적 본성은 지옥의 악한 영향에 일치되어 태어나진다. 그러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노력은 위와 같은 악한 권세의 힘을 부수었는 바, 이것이 본문에서 삼손이 사자를 죽이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죽은 사자는 자기의 격렬한 힘을 잃었다. 즉 거듭 나아가는 사람 속에서의 악과 거짓의 본성은 신성한 영향력과 인간과의 협동작전에 의해 패배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거듭나고 있지 않은 채 있을 때 모든 그의 자연적인 정신력은 악쪽으로 진행되므로 그들은 악을 위한 격렬한 권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거듭나는 동안 위의 권세들은 그 품질이 바뀌어진다. 그리고 더 이상 악을 위해 일하지 않는바, 그들 안의 게걸스러웠던 사자는 죽게 된다. 거듭남은 인간의 심정을 지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영적으로 달콤한 인격 안에서 인간을 주님과 하나되게 한다. 따라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속의 정신적 강함의 성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로 새 성질은 영적으로 파괴적이 아니다. 이를 돌려서 보면, 새 성질은 인간 영혼을 위한 양식인 영적인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래서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게 된다.” 그 이유는 마음속의 힘이 거듭났기 때문이고, 그 힘의 강함도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삶 속에서의 선함인 영적인 단 것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단 것이란 선한 자연적인 애정들을 말하고 이 애정은 바깥 행동을 선하게 이끄는데 단 것 중에서 매우 단 것, 꿀로 표현되고 있다.

개인적인 응용

삼손의 수수께끼는 우리 각자 앞에 세워둔 거울 같은 상징물이다. 이 수수께끼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처지나 가능성을 읽어 볼 수 있다. 우린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악, 거짓 그리고 죄에 대한 경향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의 외적 본성에 든 이 경향성들은 마치 으르렁거리는 사자와도 같아 선하고 진실된 우리 속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우리 속의 게걸스런 사자가 으르렁대고 덤비려는 과정에서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심정 속에 악마를, 삶 속에 악행이라는 악한 인격을 형성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악의 영향력에 무방비된 상황속에 어느 누구도 방치되지 만은 않는다. 우리의 주님, 그분의 무한한 섭리는, 각 사람으로 진리를 듣게 되도록, 그리고 각 사람이 자기가 들은 진리가 납득되는 나이가 찰 때까지 그 진리가 각 사람에게 보존되게 설비해 두시고 있다. 더욱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서조차, 진리가 행동을 규율하도록 모든 사람의 관심에 가져다 두시어 각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되며 무엇은 하지 않아야 되는지, 이런 경우에는 왜 그렇게 되는지 등등을 알 수 있게 조처하고 계신다. 이렇게 빛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바, 모든 이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조건에 방치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 권능이 주님으로부터 진리 안에서, 진리로 인해 모든 이에게 오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진리를 사용하며 실용적인 면에서 진리의 권능을 획득하여 진리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힘을 자신의 것인 냥 발휘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의 권능에서요, 그 권능이 우리를 통해 또는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것이라고 인정할 때 우리의 악한 경향성은 정복되는 바, 우리는 비질서적인 본성인 사자를 죽이게 된다. 그러면 악의 격렬한 권세 역시 파괴된다. 바꿔 말하면 악이 소멸해 간다는 말이다.

애정은 잃는 게 아니라 변해 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생명에 속하는 어떤 것을 그 사람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애정의 성질을 악에서 선으로 바뀌게 해서 악을 제거시킨다. 사실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으되 그 애정의 성질, 특성들이 변하는 것이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자기들의 애정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신 게 아니라 애정을 선하고 참된 대상에 갖다 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사야서 1장 16-17절을 살펴보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와 같은 것이다.
시험받는 동안 앞일이 난감해 질 때, 만일 우리가 자연적인 바램들을 포기한다면, 살아야 할 가치가 있게 해주는 모든 것을 잃는 듯 우리는 종종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악한 경향성들을 내려놓은 후에도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도 잃지 않았다는 것, 우리의 애정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 더욱이 이 애정들이 천국의 사랑을 받음으로 해서 더 순수해지고 거듭 나아지고 더 달콤해졌음을 발견한다. 이 발견이 있는 순간,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는 바,” 이것이 영적 삶을 위한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애정들, 과거 우리 구원에 장애물처럼 보이기만 했던 이 애정들이 깨끗해지고 순수해졌을 때, 이 애정들은 우리에게 거듭나는 삶 속에서 단 것을 제공한다. 이리하여 자유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져도 우리에게는 악을 위한 바램이 없다. 이것이 영적으로 볼 때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이다.

위대한 진리

이런 진리도 큰 진리이다. 즉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단것, 인간 생명을 기운 내게 하는 영적 양식은 실지로 우리 속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이 정복될 때 즉 우리 안에서 삼손이 사자를 갈기갈기 찢을 때에야 시작이 있게 된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난 것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배움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습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삶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지, 진정한 삶의 힘은 어떻게 유지 존속시켜야 하는지, 존속되는 가운데 그 속의 단 것이 어떻게 나오는지 배우기 위해서이다. 거듭 나아가겠다는 진실되고 성의있는 우리의 노력에 주님이 채워 주신 위대한 강건함을 가진 우리가 우리 속의 사자를 짓부수는 것을 다 습득할 때까지 우리 인생은 투쟁으로 이어져 가야만 한다.
알고 있는 모든 진리들은 정신적인 방법이요 길인 바, 이 길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도록 우리는 요청받고 있다. 거듭남의 시작 초 좁은 길의 곳곳마다 으르렁대는 사자가 우리와 대결하려 버티고 있다. 그럴 경우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들 옆에 또는 우리 속에서 삼손처럼 계시어 우리 속의 사자를 갈기갈기 찢으실 준비를 완료하고 계신다. 우리가 발전을 거듭할 때마다 마음속의 영적인 벌들은 꿀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게 될 것이다. 즉 “사자가 얼씬도 못하고 맹수가 돌아다니지 못하는 길, 건짐받은 사람만이 거닐 수 있는 길,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이사야 35:9-10).

3
암컷 새끼 양

성서 본문: 사무엘하 12장 1-4절

1. 야훼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읍니다. 2.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3.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읍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읍니다. 4.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 왔읍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와서, 그 가난한 집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읍니다.”

인식되지 않은 악들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첫 노력들은 자기의 이기적 동인과 폭넓게 섞음질 된다. 우리는 많은 악들에 빠지고 죄를 범하는데, 이런 악이나 죄가 자신의 것인지 인식되지 않은 채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악들을 추상적으로 보고, 그 다음 합리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선과 진리에 관한 이해가 실용화되는 단계로 진전할 때까지 악이나 죄는 자신에게 자기 것으로서 나타나지지 않는다. 우리의 지성은 진정한 교리도 있지만 거짓 사상들도 들어 있어 섞여 있는 조건에 놓여 있다. 우리는 타인들 안에 있는 악들의 추함을 보고 어떤 비판적인 사상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 속의 악들이 복종 당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종교적인 교리의 어떤 체계를 도입한다. 그럼에도 그 교리의 체계를 자신의 일상생활에 응용하는 실제에 부닥치면 흔히 그 교리 속의 영을 거짓화되게 하는데, 그 방법은 우리의 악한 바램에서 튀어나오는 거짓된 의향(변덕스런 마음)을 그 교리에 혼합시킴으로 왜곡한다.

정신적인 성 (mental city)

“한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다”. 이는 한 마음 안에 진리와 거짓이 똑같은 교리에 연결하여 존재한다는 말이다.
성 안은 집들로 차 있는데, 이는 인간 삶의 각종 사용을 위한 교리의 체계를 표현해 준다. 교리의 체계는 인간 지성 안에 건설되는데 특별히 우리의 지력에 그 기반을 두고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들을 어디다 사용할 것인가를 계획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나지 않는 조건 속에서, 또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받고, 어떤 경우에는 거짓 사상들을 받음으로 있어지는 혼잡한 마음의 조건 속에서 우리의 지적인 교리 측면은 마치 큰 성과 같은 모습이다. 그 성 안에는 각종의 인격들, 즉 선한 것, 악한 것이 거주하고, 때로는 진리의 지식에 부유하고, 때로 영적인 것들에 무지함인 가난함도 다 들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첨부해 둘 것은 부유한 것이 선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것이 꼭 악한 것을 수반하는게 아니다는 것, 오히려 위와 반대적일 때가 더 많을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적인 부와 가난

“어떤(one)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다.” 성경의 위치나 조건을 글자대로 생각해 본다면 이 비유의 적용은 다윗과 우리야에 대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비유는 모든 이를 위해 성경 안에 존재한다는 내향적인 의미, 즉 영적 의미가 있다. 한 인간이 주님의 말씀이나 교회에 관해서 배우게 될 때, 그는 지적으로 부유해진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전 인격을 바꿔지게 해줄 진리라는 큰 소유물을 가진다. 물론 그가 그 진리들에 순종하여 그렇게 행동하기로 작정할 경우에 변화는 있어진다. 넓은 의미에서 부자란 주님이 알려져 그분의 말씀이 읽혀지는 교회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방인 (Gentile)

그리고 가난한 자란 이방인들, 또는 이방인의 상태 속에 있는 모든 이를 말하는데, 이들은 영적 진리의 가르침을 잘 받지 못했으나, 그들이 지닌 자연적 애정의 성품은 선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우리야는 헷족이다. 이 헷족은 가나안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은 종족에 해당된다. 헷족으로서의 바쎄바는 이방인 사이에서 시작되는 교회를 표현해 준다. 그 이유는 한 교회가 성품이 좋은 이방인들, 이스라엘 족의 영보다 더 나은 영을 소유한 자들에게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과의 부부 관계에서 처음의 바쎄바는 비정상이었는데, 이는 이방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회의 첫 상황 속에 든 삶의 성질을 표현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진리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이긴 했으나 그 진리의 실제화, 즉 삶의 실제 움직임인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지 못했다. 인간의 이런 상태와 더불어서 주님은 단번에 천국적인 진정한 교회를 형성하실 수 없으셨다. 단지 교회에 약간 접근되는 시도만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이런 인간의 상태에는 많은 악들이 선한 원리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바쎄바의 아이들

그런고로 다윗과 바쎄바 사이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었다. 이는 진리가 우리 속에서 작동되기 시작할 때, 우리 삶의 첫 상태는 순수하거나 선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진리는 거듭나는 인격 속에서 우리 속의 자연적인 악들과 섞여 있어 영적으로, 영구적으로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아내로서, 그리고 솔로몬의 어머니로서의 바쎄바는 위의 과정, 즉 시련과 시험을 거쳐 진보를 이룬 보다 높고 영적인 상황을 갖춘 이방인의 교회를 표현한다. 시험으로 정제된 순수함을 통해 이방인 속에 존재한 선이 기독교의 진리에 하나가 될 때 그들의 선은 기독교인의 선이 된다. 위대한 지혜로 유명한 솔로몬은 새로이 탄생된 아이, 영적 결혼으로 탄생된 아이 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표본(representative)이다

성경 이야기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늘 염두에 둘 사항은 성경은 그 글자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거듭남과 발달을 모든 상황에서, 즉 무지하고 악한 상황에서 지혜롭고 선함으로 까지의 발달에 관한 표본적인 기록이다는 것이다.
상징적이거나 표본으로 착출된 인물은 그 문맥에서도 가장 중심 되는 요점 역할을 한다. 이 요점에 의해 성경의 모든 것은 해석되어지게 된다. 예수께서 말하시기를, “나의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고 하셨다. 신, 구약성서를 통틀어 있는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영적 삶에 우선적으로 응용하게 되어 있다.

영적 결혼

모든 인간 속에서 거듭남의 수준은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영적인 결혼이 당사자 속에서 어떻게 결과를 낳느냐에 의존된다. 표본들을 사용해서 영적 결혼을 예증해 주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의 비유는 자연적인 결혼, 그런데 그 결혼의 꺼꾸로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야와 다윗

헷족이요, 이방인인 우리야는 자연적 마음의 좋은 성품을 표현해 주고 있다. 부유한 이스라엘 족인 다윗은 내적이고 자연적인 마음 즉 진리로 가르침을 받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인 영적인 양이나 소를 많이 소유한 부자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인 이방인은 그의 소유물로서 오로지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뿐이었다. 이 암컷 새끼 양(exe-lamb)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순진의 상태인데, 이 순진의 상태는 무지한 순진을 말하고, 흔히 어린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 순진이 가르침과 수련에 의해 발달되면 지혜로운 순진으로 된다.

도덕적인 선

이런 순진은, 예를 들면, 도덕적인 선함 안에, 또는 질서 있는 삶의 외형에 존재하며 흔히 착하고 선량한 성품에 동반되는 때가 많다.
이방인 상태의 마음은 이런 도덕적인 선을 하나의 위대한 선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영적인 선에 관해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애정의 비질서적인 상태들을 포기함으로 도덕적인 선을 사거나 얻는다. 그리고 얻어 들인 이 선들에 자양분을 공급해서 마음속에서 성장시킨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정신적인 가족의 일원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된 이 선을 자기 품에, 즉 심정에, 또는 애정에 품는다. 그와 더불어 이와 같은 도덕적 선은 먹고 마신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일반적인 생각이나 애정과 동질로서 함께 하는 것이다.

한 마음 안에 든 두 사람

이리하여 비유는 한 사람 속에 든 생명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다윗과 우리야는 한 마음 안에 있는 각기 다른 원리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성에 살고 있다. 기억과 생각 속에 공통된 교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듭나기 시작한 후에도,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각기 다른 두 사람은 그대로 있다. 한 사람은 특별히 지적이어서 말씀과 교회에 속한 진리의 지식으로 꽉 차 있는 반면, 같은 마음 속에는 성품이 좋은 도덕적 생명의 이방인적 상태도 한쪽에 있다. 그런데 지적 측면이 우리 속에 있는 악에 잘 기우는 유전적 경향성과 접합되면, 이런 경향성들은 자기들 바램을 성취하기 위해 지적인 것들을 고용하게 된다. 그러면 지적 측면의 마음은 선과 진리에 대한 원리로 꽉 차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이런 지식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만다.

손님 (traveller,여행자)

여행자는 좋은 의미에서 삶이 진보되는 것, 진리 안에서 정신적으로 여행함을 말한다. 이 진리는 우리 마음을 여행하되 바깥쪽 기억에서 생각을 통해 애정 안으로 여행한다. 그런 다음 일상생활에까지 당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 여행자란 기억에서 끌어낸 거짓 원리를 말하고, 이 원리는 생각 속을 여행해서 애정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행동 지침에서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본문 비유 속의 영은 본문 속의 여행자(손님)를 나쁜 의미인 거짓 원리, 즉 다윗의 마음 속을 배회하는 거짓 원리, 이 원리와 비슷한 것으로 자극 받아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마무리

지적인 사람은 지식의 풍부함으로 말미암아 부자인 것이다. 도덕적인 선함은 가르쳐지지는 않으나 암컷 새끼 양인 단순한 순진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마음 속에 거짓 원리가 마음 속을 여행하면서 손님 대접을 받고자 한다. 이런 움직임은 어떤 악한 욕망에 의해 운전되어진다. 이런 경우 마음은 무엇을 하게 될까? 마음의 의지적 측면은 진정하고 선한 원리들을 기억 속에서 끌어내서 마음 속을 여행하는 거짓에 적용한다. 그런데 악한 욕망이 재촉하는 이상 끌어낸 진정한 원리들은 거짓 원리들을 가르치지도 못하고, 견책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원리는 우리야의 암컷 새끼 양인 도덕적인 선의 단순한 원리들과 섞이게 해서 천사가 자기 생명력을 유지하기를 중단할 때까지 더욱 섞는다.

예증

결혼에 관한 도덕적인 선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인간이 감각적인 마음의 욕망에 재촉을 받게 되면 진정한 결혼에 존재해야 할 도덕적인 선을 사로잡아 파괴시킨다. 이리하여 일부 다처제라는 거짓 사상도 손님 대접을 받고자 주저앉는다.
결혼에 관한 인간의 내적 사상은 각 개인의 영적 성질에 대한 테스트이다.
다윗, 그도 바쎄바를 옆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불법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의 남편을 죽일 계획을 세워 결국 그 여자를 획득했는데, 이는 자연적인 마음에 대한 표본되는 그림이다. 자연적인 마음이 악한 열정에 의해 충동질 받게되면 자연적인 상태 속의 순진을 이기적 용도에 충당하려고 애를 쓰는 결과, 그 순진의 수준에 맞춰 결혼되어 있는 진리를 이혼시키는 방법을 강구해 낸다.
그래서 인간이 선과 악에 관한 지식에 반대되는 쪽으로 하강할 때, 그 인간은 도덕적 선함을 탐내기 시작하고, 자기의 악과 죄를 정당화하려 들고, 결국 합법적인 남편인 도덕적 선에 동반하고 있는 글자적인 진리를 분리시키고야 만다. 그러한 인간도 도덕적 선인 바쎄바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를 자신을 위해 바래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는 도덕적 선의 아름다움을 고백하되, 그것은 단지 이기적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다. 고로, 그는 자기 고백을 뒤집어서 악한 목적에 충당했으므로 순진한 선 속의 순결을 모독하게 된다. (종교상의) 자유 사상가(libertine)들이 글자를 가지고 순진한 선을 뒤집는 것 같이, 모든 악한 원리는 마음속에서 악한 목적을 위해 악한 원리를 고용해서 모든 선하고 순진한 경향성에 뒤섞은 다음 그 순진을 뒤집어 버리고야 만다.

살인

위의 죄는 살인을 수반한다. 즉 자연적인 사람의 목적에 이르는 길가에 놓인 모든 진정한 원리들을 죽인다.
예를 들면, 교회에 잘 참석해 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를,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자기가 받는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올바른 태도라고 느끼고 있을 경우, 이 사람의 외적 상태는 하느님과 인간 양쪽 모두에 좋은 성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도덕적인 선함의 형체이고 바깥쪽 순진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진정한 예배는 자기 심정 속에 존재해야 하고 일상생활 속에 있어져야 함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 속에 거룩하지 못한 포부가 그의 마음속을 여행하면서 그 포부의 욕구를 만족시켜 보려한다고 가정해 볼 경우, 그는 사실 이런 욕구를 견책과 훈육의 진리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예배에 대한 바깥쪽 애정이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에 모른 척 내버려둔다면 그는 자기를 우쭐대게 해줄 거짓 원리로 예배에 관한 그의 순진한 도덕적 선을 섞이게 해 버리고 만다. 즉 비유 속에서 다윗이 바쎄바와 정을 통하고,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는 바가 되고 만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속에 든 거짓 원리를 책망하려고 일어서는 모든 글자적인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자기의 영적 생명인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파괴할 때 있어진다. 우리 역시 진리를 죽일 때도 있다. 그 때란 우리가 자신 속의 마음에서든지, 타인의 마음속에서든지 진리를 왜곡시키고 뒤집어 악과 죄들을 정당화하려 들 때이다. 살인하는 영의 형체가 나쁜 감정, 분노, 원한인 것 같이 모든 거짓은 진리의 생명을 부수려는 경향이 있다. 간음과 살인이 사회의 심각한 범죄인 것 같이, 영적인 간음(섞음질)과 살인은 영적 생명을 가장 심하게 파괴한다.

주님 안에서의 결혼

결혼의 원리는 주님 자신 안에 있는바, 그것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합일이다. 이 결혼의 원리는 모든 창조에 스며 있는데, 창조된 생명체의 가장 높은 형체로 있게 되는 가장 완전한 것이다.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들은 가장 완전한 결혼 속에 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신실한 결혼은 악한 영향에 대한 완벽한 방어벽인데 이 상태를 경험한 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증되어진 간음은 지옥에 항복한 상태여서 마음속의 모든 선과 진리를 뒤엎게 하고 살인을 수반하고 만다.

다윗으로 주님을 표현한 방법

다윗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어질 수 있을까? 또는 본문에서와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게 되리라 본다. 따라서 우리는 표현의 원리를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표현하는 사람은 주님의 행동들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입으신 인성 속의 유전적인 경향성, 즉 자연적인 어머니(마리아)로부터 상속된 경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경향성이 행동 지침 선상에까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그분이 입으신 인성 속의 이런 악에 대한 유전적인 경향성을 수단으로 해서 “죄를 짓지 않고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측면에서 시험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이런 경향성들에 저항하셨고 극복해 내셨다. 다윗이 저지른 범죄나 살인은 그분이 입으신 인성 속에서 아주 심오한 정신적 시험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어떤 죄(sin)도 범하신 일은 결코 없으셨다.

다윗의 범죄 (crime)

다윗의 범죄를 생각해 보기 앞서 반드시 기억해 볼 것은, 다윗의 시대에 있어서나 일부 다처론자에게 있어서나, 또는 다윗의 시대 때에 그의 죄악들이 계명에 의해 금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악들의 진정한 품질에 대한 영적 측면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당시 사람들은 어떤 조그만 도전 같은 것을 가지고, 또는 어떤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윗은 자기 죄가 악랄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본문의 범죄가 저질러진 후 쓰여진 시편이다. 이곳에서 그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배우게 된다. 다윗은 왕이고 재판관이기도 했다. 고로 비유 속의 범죄에 대한 그의 결정은 곧 합법적인 재판이었다. 그의 분노는 악행자에 대해 거셌다.

도덕

오늘 비유 속의 도덕은 이론상의 미덕에 대한 경고로서 타인의 악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는 모습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한 결과, 또는 남을 비평하는데 지나치게 민감해져 자신 속의 악을 미처 보지 못할 때 경고를 받도록 우리는 타인이 자기를 보듯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볼 때까지 가르쳐지게 된다. 우리가 차분한 마음의 상태나 재판관 같은 처지에서 남을 판단하려고 앉아 있을 때 옳고 그름을 이론적으로 보는 것은 아주 쉽다. 마치 다윗이 차분한 마음 상태에서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판결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고 말해 두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7:2). 직접 당사자가 아닌 측면, 즉 이론상에서의 죄를 죄라고 보는 것과, 때로는 이론상의 그 죄가 자기 죄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경우, 흔히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봄도 없이 단지 충동적이었기 때문에, 또는 유전적인 경향성으로 인해서, 혹은 타인의 영향이나 그 사람의 행동 지침 때문이어서, 또는 자기 주위 환경이 좋지 않아서 등등에 기대어서 자기 죄의 변명을 찾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타인의 악들이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 이상 악행자를 비판하려는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론적인 선함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은 비유 속의 죄인에 대해 상당히 분노했다는 점이다. 사실 비유 속의 죄인이 자기였다는 것이 다윗의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가 자기에게 적용되었을 때에야 그는 비유의 실체에 눈이 열렸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진리가 추상적인 실례 속에 있는 한, 우리에게 실용적인 중요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리가 “당신이 그 사람이다”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질 때만이 진리는 우리를 위해 쓸모가 있게 된다.

다윗의 회개

다윗은 비유의 응용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자마자, 그는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라고 고백하여 비유 속의 죄인이 자기임을 인정했다. 만일 그가 비유 속의 진리가 자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그 진리에 반항해서 핑계라도 만들었다면 그는 이전의 악함보다 훨씬 더 악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이론적으로 토의하길 좋아하고 그 진리를 가지고 타인을 자주 비평하는 습관에 젖어 있으면서, 비평하는 가운데 인내심이 부족하여 성급하면, 우리가 기껏 토의해 온 진리에 자기의 관심도가 신실하지 못했음을 주지해야 한다. 신실하게 선한 사람은 악을 미워한다. 특별히 자신 속에 든 악을 더 미워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을 다윗처럼 타인이 지적해 주는 것을 매우 반겨 한다.

비평

자기 동료를 고귀하게 사랑하고 싶다면 타인의 악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을 비평하고 나무라는 데에 즉각 응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비평이나 나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또는 어떤 악한 동기에서 그러한 비평이나 나무람을 일삼아 하지는 않는다.
어떤 교인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을 하는게 아닌가 하고 눈치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런 설교는 어떤 쓸모가 있게 될까? 목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똑바로 인식했을 때, 그리하여 그 경향성에 신성한 진리를 적용시켰을 때 가장 좋은 설교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 각자 속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죄는 악이다. 죄는 어떤 우연한 기회 속에, 또는 어떤 좋지 못한 환경으로, 팔자가 이 꼴로 되어 있으니, 불운이 겹쳐서 라는 등등에 기인하여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죄란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우리의 행동에 본색을 드러내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의 죄악에서 나 자신을 지키었다. I have kept myself from mine iniquity”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자신을 다져야 하리라 (시편 18:23).

4
원수 갚는 자

성서 본문: 사무엘하 14장 5-7, 11절

5. “웬일이냐?” 하고 왕이 묻자 여인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임금님, 저는 남편을 여읜 과부입니다. 6. 그런데 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어쩌다가 벌판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말릴 사람이 없어 한 아이가 그만 제 동기를 때려 죽이고 말았읍니다. 7. 그런데 이번에는 온 문중이 들고 일어나 동기를 죽인 놈을 내놓으라고 이 계집을 들볶지 않겠읍니까? 그 애를 쳐죽여 죽은 아이의 원수를 갚고 그 애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 계집의 불씨마저 꺼지고 맙니다. 남편의 이름을 이어 내려 갈 후손이 땅 위에서 영영 끊기고 맙니다.”… 11. 여인은 계속 간청하는 것이었다, “저 원수갚겠다는 자들이 제 아들을 기어이 죽여 없앤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그렇게 못한다고 임금님의 하느님 야훼를 두고 맹세해 주십시오.” 그가 다짐하였다, “살아 계시는 야훼 앞에서 맹세하거니와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없게 해 주리라.”

보복 (retaliation)

보복의 영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마음에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다. 이 영은 우리 본성 중 동물적 부분에 속한다. 이 영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서 우리 속을 기어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극복해 내기 힘든 악 중의 하나이다.
보복은 자아 사랑이 자기 적이라고 추측하는 것의 공격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이 자아 사랑으로 규율되는 한, 원수라는 형체를 띄우면서 보복의 영에 의해 좌우되고 만다. 사실, 자연적인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말해 보라 하면, 보복의 영은 정당화되고 만다. 이 자연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불친절한 모든 이들에게 좋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아무런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에게 친절한 모든 이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악이다 든지, 혹은 은혜를 입은 자에게 무례함은 죄 중에서도 비열한 측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이다 든지 통상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그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미워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피에는 피로”라는 것이 거듭나지 않고 있는 자연적인 마음의 외침인데, 이 외침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속어 중 “복수하니 시원하다” 라는 표현 같은데서 찾아볼 수 있다. 적대감은 오랫동안 또 다른 대상에 따라붙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대상에 보복을 가하고 만다.

미워함 (hatred)

이리하여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며, 내 욕구를 채워가는 길에서 걸림돌이 된 자, 내 계획을 간섭하는 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말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느낌의 표현을 좀 더 추적해 보면, 자기가 부러워하는 대상, 자신을 상하게 한 모든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 이 말 뒷면에 잠복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미워함을 개별적으로 따진다면 불합리하게 보일런지 모르나 위와 같은 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상하게 하는 이들을 미워함보다, 더 한 미워함은 그 미워하는 자를 친구 인체 하면서 비밀리에 그가 상하도록 보복하려는 마음이다.

복수심은 타락된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

위에서 살핀 것들은 그 근원이 지옥임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타인 속에서 볼 때 아주 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은, 복수하고 싶어하는 경향성들은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거듭 나아지든지 회개나 개혁을 통과하든지 할 때까지 모든 개인의 자연적인 마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준은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이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향에 저항한다던가, 혹은 아예 집중해 버리는 양상은 모두에게 있어 각기 다르다. 이 자연적 마음을 따로 떼어 느끼게 한다면, 자기 친구를 사랑하고, 자기 적을 미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혈연의 원수를 갚는 자 (the revenger of blood)

옛날에는 원수 갚는 영이 아주 거세어서 그 시대에는 죽은 이의 친척이 살인자를 죽이는 것을 허락하는 관습이 있게 되었다. 게다가 만일 그 살인자를 잡지 못해 미처 죽이지 못할 경우에는 그 살인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이 죽이는 것까지도 허용했던 것이다.
자기 친척의 죽음을 복수하는 것은 “최 근친, next of him” 또는 가까운 남자 친척의 의무로서 간주했었다. 그래서 최 근친 인은 “혈연의 원수를 갚는 자,” 또는 “혈연의 복수자” 라고 불리었다. 이 관습은 세월이 경과하면서 더욱 나빠져, 그 살인자의 친척 관계가 아무리 먼 친척이었다던가, 또는 죽이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순진하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혈연의 원수를 갚겠다는 자에 의해 죽은 자의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심지어 아주 어리고 순진한 아기마저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그 아기와는 관계가 멀어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이 범한 살인 행위로 인해 원수 갚는 것을 당해야 했기도 하다. 오늘날 어떤 다른 사람을 향해 나쁜 의지, 원한, 복수 같은 것을 마음에 품는 정도에 따라 우리 역시 살인자의 친척에게 가해진 순진한 인격의 피에 굶주린 것에 고대 이스라엘 족이 빠졌었던 것처럼 비슷한 영에 파묻히고야 마는 경우가 빈번하다.

영적 살인 (spiritual murder)

그래서 적개심 있는 분노의 영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접근해올 때, 이에 단호히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서나, 타인 속에서나 새롭고 거듭 나아가는 생명 속의 애정과 생각들, 즉 영적 자녀들에게 파괴적인 일격을 가하게 된다. 적개심, 이는 어떤 형태에서든, 그것이 비밀리에 있든, 공개적이든 모두 지옥으로부터 발생된다.
기독교의 영은 증오나 복수의 어떤 형태와도 완전히 반대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라고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43-46).

비유의 글자적 의미

글자 상의 의미에서 본문의 비유는 압살롬의 친누이이며, 암몬에게는 배다른 누이인 다말에 대한 흉악하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른 당사자 암논을 압살롬이 살해한데 대한 다윗의 용서를 획득하는데 기민하고도 매우 성공적인 듯 보여지고 있다.

비유의 표본적 의미 (the representative idea)

그러나 이스라엘 족에 대한 하늘이 내린 처방들은 표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의 생활이나 관습들 중 작은 것 어느 하나도 성경에 기록되어진 이상, 그것은 퇴보되는 상태들에 있는 인간 마음, 또는 그 반대인 악에서 선으로 가는 영적 여행에 있는 마음의 조건이나 활동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이스라엘 족에게 허락되어졌는데, 그 이유가 그들은 표본이 되는 수준이거나 상징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수단을 제외하면 인도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복 (retaliation)

예를 들면, 잔인하고 피에 굶주린 사람에게 보복이라는 법칙은 지극히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더 높은 형체의 어떤 법도 삶의 어떤 더 나은 질서 속에서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마음이나 생명의 상태 속에 있었는고로 사랑의 원리로 뭔가를 해낼 수 없고 오직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형태만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피에는 피로”라는 보복의 법칙은 영적인 법칙 중에서도 가장 껍질에 속하는 외적 형체이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게 품은 악이나 그에게 가하는 악은 똑같이 되돌려 온다는 법칙에 해당된다. 인간의 바깥쪽 몸에 가해지는 외적인 법은 사실 인간 생명 속에 존재하는 내적인 법의 표본인 것이다.

악은 되튀긴다

어떤 종류이든 악은 다른 것에 빠져들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상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가 그 악을 인격의 일부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해서, 음모를 계획하고 있다면, 언젠가 틈만 보이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이런 동향이 자신의 영적 생명을 미워하고, 음모하고,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것이 자신에게 선을 베푼 누군가에 대해서라면, 더 비열하므로 자신 속의 영적인 것을 더 상하게 할 것이다. 이러면 우리의 마음은 나누어지는 바,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은 영적 마음의 거듭나는 시작인 보다 높은 생명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거듭남에 저항한 모든 자연적인 기질들은 영 속에 있어지는 주님의 일을 파멸시키려 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자초하고 만다.

정신적 투쟁 (mental struggle)

이 비유는 우리 속의 자연적인 마음과 영적인 마음 사이에 있는 투쟁에 대한 표본적인 그림이다.
어떤 사람도 투쟁없이 거듭나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연적 경향성인 보복이라는 영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이 종류는 소멸되어지지는 않으나 기도나 단식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악을 이기기 위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가르침,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교리를 배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배운 진리들을 고유의 속성인 자연적인 경향성에 대치시켜 경향성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리의 소리가 악한 경향성 앞에서 체제를 갖출 때까지 투쟁은 이어진다. 다윗 앞에 당당히 선 예언자 나단은 진정한 이론을 설교해 주었을 뿐 아니라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고 확신시키는 논리를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실제에 응용해서 다윗의 실제적인 느낌, 생각, 행위를 고치게 했던 것이다.

과부

남편이 죽고 없는 여인이 과부이다. 비유 속의 과부는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는 진리가 결핍된 자연적인 애정의 수준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자연적인 마음 속에는 진리 쪽을 향하려는 기질이 통상적으로 있지만, 남편이 죽은 본문의 과부는 진리로부터 아예 분리된 상태이다. 이 상태는 거듭나는 시작 단계에서 많은 사람에게 있게되는 마음이다. 그러나 또 다른 상태도 마음 속에 있다. 진리인 남편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경우, 어떤 조건이 발달될 때도 있는데, 이 때는 보다 나은 자연적 애정이나 생각이 출생되기도 한다.

두 아들

성경에는 두 아들이 자주 등장한다. 먼저 출생한 아들은 자연적인 생각이다. 이 생각은 순수한 진리를 미처 알지 못하는 시기인 인생 초기의 상태이다. 그러나 더 나은 것들에 의해 마음이 열릴 때, 또 하나의 출생이 있게 된다. 이 출생은 영적 마음에서 있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의 두 아들은 자연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 또는 자연적인 마음과 영적인 마음, 그리고 이 두 마음이 보게되는 각각의 진리, 혹은 마음의 두 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첫 생각은 자연적이고 설사 진리를 얼마라도 아는 수준에서도 이기적이다. 진리에 의거한 사람이나 또는 진리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우리는 진리라는 형체를 소유할 수는 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속에 뭔가가 거론되면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듯 했을 뿐 시야를 밝게 해주지 못함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속의 진리가 과부인 듯 보인다. 이와 동시에, 자연적인 생각 속에는 조잡한 거짓 사상들이 있고, 진리는 영적 생각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이 두 부류가 실생활이라는 장소에서 접촉될 때, 싸움은 당연히 뒤따른다. 그 이유는 이 둘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거듭남을 추구하고 있다면, 영적 마음 속의 진리들은 자연적인 생각 속의 거짓 사상들을 짓부수고 살해한다. 다시 말해 그 사상들을 단죄하여 파괴한다는 말이다.

문중 (가문, family)

새 진리가 옛 거짓 사상들과 대치 상태에 있게 될 때, “온 가족,” 즉 자연적 마음 속에 든 모든 욕망과 거짓들은 들고 일어나 새 진리를 파괴하려 한다. 특히 이 진리에 보복하려 들 때도 있는데, 그 이유는 새 진리가 거짓 사상의 일부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 즉 자연적인 애정 속의 선한 모든 것은 왕, 즉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에 아들을 구해 달라고 호소한다.
예를 들면, 거듭나지 않는 상태에서의 우리는 자아와 세상만에 관심이 있을 뿐, 영적인 삶은 소홀히 해 버린다. 그러나 거듭남의 시작, 즉 우리 속의 선과 진리가 결혼하게 될 때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은 여전히 조잡한 사상, 또는 폭넓게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담고 있긴 하나, 우리의 내향 쪽인 영적 마음은 순수한 진리를 한 움큼 쥔 상태에도 있게 된다. 이 두 상태를 지닌 채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떤 행동이 요구될 때, 자연적인 생각 속의 자기 이익 추구나 세상적 책략은 영적 생각 속의 명백한 원리와 싸움이 붙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자연적인 생각과 영적 생각이 올바른 질서 속에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싸움도 없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각각은 각각의 일이 있어 각 삶의 평면을 지킬 뿐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생각 속에 거짓 사상이 있게 되면, 이는 영적 진리에 의해 뽑혀 버려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 든 이기적인 생각은 거짓들이므로 뽑아 내야겠다는 결정이 있자 마자,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의 온 문중은 피를 부르며 진리의 파멸을 선언하고 나선다. 이리하여 거짓 사상과 악한 경향성은 상호 방어와 공격을 위해 한 가문임을 선언하여 마음의 거듭남을 저지하게 된다.

예증

예증으로서, 보복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택해 보자. 자연적인 생각은 복수는 꼭 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보복하길 바랜다. 그러나 영적인 생각은 복수란 그 성질로 보아 지옥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있어 행동이 요구되면 마음속에서 투쟁이 있게 된다. 이런 행동이 “벌판(field)”이다. 이곳에서 두 아들은 서로 싸웠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그에게 피해를 당해 그가 악으로 갚은 격이 되었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보복을 해야 할까? 우리 속의 자연적 마음은 필시 보복을 가하라고 열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영적인 빛 속에서 복수라는 지옥적인 성질, 그뿐 아니라 그것에 연계되는 적개심, 이 적개심의 조그만 형체인 시기심까지 다 들추어낸다.
이 영적 진리의 빛 속에서, 우리는 모든 분노, 시기, 복수하려는 느낌이나 생각은 악이요, 지옥적인 성질임을 밝히 보게된다. 기독교 사랑의 큰 진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 박해하는 자들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힘이 봉기하여 보복해야 한다는 거짓 논리를 쳐서 박살낸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 자기 자신은 선함을 획득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우리 속의 시기심이나 분노하는 느낌과 생각을 추방했다고도 상상할 것이다.

투쟁

그러나 아니다! 선함이 획득되었다고 하기 전 해야 할 한가지 일이 있다. 진리는 거짓을 쳐서 부쉈으므로 우리는 어느 것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를 생각 속에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 속에서 죽었다고 알고 있는 거짓들은 실상 잠잠할 뿐인 것이다. 우리 속의 악이나 거짓들은 그 근원이 같고 성질도 비슷해서 들고일어나면 한 가문같이 행동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 가문 중 하나를 쳐서 부수면 사실 온 가문을 건드리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이 가문은 거듭나지 않은 본성을 한 군대로 편성해 놓고 자기 가문의 일원을 감히 짓부순 영적 진리를 죽여야 한다고 외친다. 이 가문도 잘 아는 것은, 영적 진리가 생활 지침 속에 발판을 확보한 이상 그 세력은 증가되고 자기들 가족을 다 몰아 낼 때까지 계속 밀어붙일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악과 거짓도 자체 생존을 위해 투쟁을 선언한다.

거짓 논쟁

물론 우리 속의 거짓도 진리를 죽여야 할 권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근거란 진리가 거짓이라는 가문의 일원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우긴다.
예를 들면, 우리를 상하게 했거나, 또는 상하도록 할 것이라고 가상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보복이라는 생각에서 스스로 추론했다 해도, 모든 우리의 속임수, 세상적인 전략, 자만심, 과민 반응, 자기 이익 추구, 시기함, 그 외 악에 대한 모든 경향성들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과 결합되어 영적 진리의 실지에 대한 영향력을 죽이려고 시도하거나 실지의 행동을 영적 진리가 좌지우지하려는 것을 억제하려 든다. 많은 그럴듯한 추론들이 자연적인 생각 속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상하게 한 것은 벌받아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던가, 상하게 할 염려가 있는 것도 처벌 대상이라고 하거나, 공적인 선은 이런 처벌을 요구하니 처벌함은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쟁을 수단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악과 거짓들은 본문에서 원수갚겠다는 문중의 사람들 같이 우리가 이론적으로 채택한 영적 진리를 실지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다. 사실 악과 거짓에서 나온 속임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 논쟁이 진정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악은 이 논쟁을 나쁜 목적에 이용해 버린다.

상한 자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기억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을 상하게 했는지의 여부에 무관심해 하는 것은 그들을 상하게 하려고 하는 영만큼이나 나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관심은 기독교 사랑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이 가진 흥미들을 조심스럽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영적 흥미를 사랑하라는 것,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켜 주라는 것이다.

기독교 사랑

기독교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악을 행한 이들 속에 있는 영적 선을 위해 활동하라는 것, 가장 도달되기 쉬운 방법을 동원해 그 선을 키워 주라는 것이다. 자신의 피해를 보복하려는 것은 마치 악행자가 우리에게 가한 것과 같다는 것도 기억해 두도록 기독교 사랑은 요구한다.
보복하고 싶은 느낌이나 생각들을 내려놓고 기독교 사랑의 거룩한 체험으로 진입하면, 우리는 인간 속성을 감각적인 삶이라는 아주 낮은 평면 위에 맴도는 먼지나 연기, 구름을 훨씬 넘어 높은 산에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 그래서 분노라는 지옥의 영이 결코 간섭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 안으로, 영적 삶이라는 훨씬 높은 고도에까지 승강될 수 있다.

두 아들의 재 연합

계발된 합리적인 생각은 두 아들, 자연적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결국 하나가 되게 할 수 있고 두 생각이 우리 생각의 안과 밖의 측면에서 “사랑이 스스로 증거함”이 우리를 인도해 줄 때까지 서로 협력하게 할 수 있다. 이 협력의 상태는 높은 상태이다. 이 상태 속에서만이 우리를 상하게 한 이들이야말로 비참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악행자가 진정 고통받는 자

그렇게 간주할 수 있는 이유는, 진정으로 고통받는 자는 상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상해를 가한 자, 그것을 의도한 자이기 때문이다. 행위자는 그 상해를 두 배로 자신에게 되 퉁겨 오게 한다. 그는 자신의 영적 생명에 상처를 입힌다. 그는 자신의 상해 받은 이들로 분노하고 그 원수를 갚고 싶도록 충동질하게 하는데 성공했다면, 그 영은 상해자까지 지옥에 끌어들이는데 일보 전진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복이라는 영을 넘게 될 때, 미움에 사랑을, 악에 선을 되돌려야겠다는 생각의 원리를 앞세울 때, 우리는 실지의 어떤 상해도 초월하여 마음을 부상시킬 수 있다. 그러면 마음속에 예정된 상해는 우리의 보다 높은 발달의 수단, 우리의 영적인 선을 위해 허락된 시험이 된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10).

5
도망친 포로

성서 본문: 열왕기상 20장 39-40절

39. 왕이 지나는데 그가 왕을 불러 말하였다. “임금님, 소인이 싸움이 한창 벌어진 곳을 지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포로를 하나 데리고 전쟁터를 벗어나 저에게 와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 만일 놓치면 네가 대신 죽으리라. 죽기 싫으면 몸값으로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한다.’ 40. 그런데 소인이 이 일 저 일로 분주하여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포로가 도망치고 말았읍니다.” 여기까지 말을 듣고 이스라엘 왕은 “그렇다면 그대로 당해야지. 네 스스로 판결을 내렸으니까”하고 말했다.

거짓을 탐닉함 (indulging falsity)

어떤 거짓도 우리 지성 속에서 자유가 허용된 적은 없다. 그 이유는 거짓 원리가 순수한 선함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지성에서 인정을 받아 그 속에 자리잡으면 거짓이라고 보여지는 모든 사상의 축출은 당연히 뒤따른다. 모든 거짓은 합리적 능력에 포로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떤 피해를 내지 않도록 억류되어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원리가 거짓임을 알고도 그 원리를 계속 사용하겠다고 고집 부린다면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표본적 의미(representative sense)

이스라엘은 주님의 교회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적들은 교회의 적, 교인들의 적인 악과 거짓원리를 표현했다. 표본이 되어 있었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교인의 마음속에 든 악과 거짓을 복종시키거나 조절시키는 것이 표현되기 위해 그들 주위의 적들을 복종시키거나 조절하도록 섭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신성한 명령은 그들의 적을 파괴하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아주 고된 일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가 상기해 둘 것은 이스라엘 또는 성경 기록의 표본적인 성격에 관한 것이다.
진실로 이스라엘이 적을 파괴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심은 우리가 다루기 힘든 사람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그야말로 이들은 현재 있는 상황 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잘된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잘 진보되어 있는 나라들 속에서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갖가지 종류의 인간을 위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각각에 적절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자유를 누리게, 범죄자는 감옥에 억류하고 심지어는 사형에까지 처하게 된다. 범죄자의 적절한 감옥살이는 공동체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걸맞도록 채택된 형체로 되어 있다. 주님이 아시는 이 법들을 다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이 모든 이에게 선하게 대우해 주셨다는 것, 그분의 부드러운 자비가 그분의 일 속에 넘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우리는 읽어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저지른 짓이 무엇이었던 간에, 이들이 더 악해지는 것에서 구하시고자 주님은 노력하셨다.

채택 (adaptation)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닿기 위해 그분은 반드시 인간의 인격 조건에 따라 움직이셔야 했다. 예를 들어보자.
건강한 눈에 대한 주님의 자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빛의 공급일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거나 병든 눈에 대한 주님의 자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눈의 상황에 맞는 부드러운 빛의 공급이 있어져야 할 것이다. 썩고 있어 못쓰게 된 팔에 대한 자비는 무엇일까? 만일 그 팔이 전혀 구제될 수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자비란 그것을 잘라버려 나머지 신체라도 죽지 않게하는 것일 게다. 이 때의 외과 의사는 고깃간의 주인 같은게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나쁜 버릇을 가진 아이에 대한 자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어린이가 탐닉하는 나쁜 습관을 억제시키고 좋은 습관을 형성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성품이나 상황에 따라 주님의 자비는 채택되어진다. 회복 불가능한 것을 자르는 것은 나머지의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해서 이다. 이것이 주님의 방침이신 바, 말씀하기를,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해석 (interpretation)

본문의 비유는 시험 동안 악과 거짓 원리에 대항하는 투쟁을 취급하고 있다. 이를 최고 높은 내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비유는 주님이 입으신 인성에서의 투쟁, 즉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는 영화하시는 과정에서의 투쟁을 취급하고 있다. 본문의 싸움이란 시험(temptation)이다. 포로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고 말한 “어떤 사람”이란 주님이시다. 시험 기간 동안 주님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열어 주시어, 그 능력이 진리를 진리로서 보게 해주신다. 그리하여 영적 삶에서 싸워야 했던 거짓 원리들의 진짜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 다음 우리의 합리적 능력에 그분이 하시는 말씀, 포로된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 이다. 다시 말해 이 거짓 원리가 틀림없이 우리에게 복종 당하고 있도록 잘 감시하고 있으라는 것, 그 원리의 영향력이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에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 이 원리들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들임을 유념하라는 것 등이다. 만일에 거짓 원리가 우리 지성 속에서 일하게끔 자유를 준다면 정녕 이 원리는 영적 생명을 음험한 수단을 써서 침식해 갈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거짓은 지옥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파괴시키든지, 아니면 그것에 의해 파괴당하든지 어느 하나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우리 생명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잘 감시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할 경우, 악과 거짓 원리는 합리적 능력의 감시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그 뒤에도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자유를 갖도록 계속 방치하면 지옥적인 작업의 수행이 영적 생명과 점점 대결하는데까지 치닫고 만다. 이래서 우리의 자연적 생각 속에 있는 거짓 원리들이, 비밀스럽게 영향을 주는 것이든, 공개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든 양쪽 모두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고를 주고 계신다.

은 한 달란트 (the talent of silver)

“이 사람을 잘 감시하여라. 만일 놓치면(즉, 그가 자유를 얻으면) 네가 대신 죽으리라. 죽기 싫으면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한다.” 달란트란 이스라엘 왕국에서 사용되는 무게 표시 중 가장 큰 무게에 속한다. 은 한 달란트이면 아마 미화 이천여 불에 해당되는 많은 액수의 돈이다. 포로를 놓친 그 “소인”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려면 은 한 달란트를 지불해야 했다. 좋은 의미에서 은이란 영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 은이란 거짓, 또는 왜곡된 진리를 표현한다. 모든 좋은 것이 악한 목적에로 남용되거나 고용되어질 때, 이 물건들의 표현성은 그 반대적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 소인은 죄인 취급을 당하게 되어 은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 즉 은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에 은은 거짓을 표현한다. 무게란 애정 속의 어떤 것을 측량함으로 식별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무게란 마음속의 생각 또는 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비유가 글자대로 라면 이 히브리인은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은 한 달란트를 달아 준다는 것, 또는 지불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원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거짓을 봄 (seeing a falsity)

이리하여, 주님이 밝혀 주시는 진리를 가지고 거짓 원리 속에 든 지옥적인 속성들을 우리 눈이 열려 보게 된다면, 영적 생명이 거짓 원리를 얼마나 잘 복종시키느냐, 또는 그 원리들이 우리 실생활 속에 미치는 영향을 얼마나 감소시키느냐에 우리의 영적 생명의 보존이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짓 원리의 속성을 잘 알아야만 하고, 그것들을 계발된 합리성에 복종되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 또는 거짓 원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애정)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원리들이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주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던가, 우리의 행동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외적인 거짓 생각은 영구적인 치명상을 우리 영에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의 많은 종교 교리의 체계 속에는 거짓 사상들, 특별히 하느님의 속성이나 인간의 영적 생명에 관해 거짓 사상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런 교리 체계를 수단으로 하시어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 이유는 인간은 거짓 사상을 기억 속에만 저장해 두고 자기의 심정이나 삶 속에 갖다 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 속에 많은 거짓 사상이 있는데도 이 사상들이 해를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사상들이 악을 정당화시키는데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글자 의미에는 영적이지 않거나, 진정하지 않은 사상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이 성경 글자를 가지고 자신의 악들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지 않는 한, 어떤 인간도 성경의 모든 상징적인 서술을 쓰여 있는 글자대로 믿는다 해도 그의 영적 생명은 잃지 않는다.

예증 (illustration)

예를 들면, 비록 성경이 하느님은 성내시고, 성마르시고, 편파적이신 듯 표현하고 있다해도 실상 그런 성격은 그분에 대한 진실이 아니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자연적 마음 수준에 머문 사람, 또는 계발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것인 바, 한 마디로 진리의 외관(appearance of truth)일 뿐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계발된 사람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 그분 속에는 비 사랑적인 성질은 하나도 없으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의해 이끌어질 수 없는 사람은 공포, 불안 같은 것에 의해 이끌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그분은 자기를 속박해 두시기를 좋아하는 분으로 믿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일 거짓 관념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해도 우리는 은 한 달란트를 물어내는 것, 즉 거짓 원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포기함으로 생명을 되찾을(redeem) 수 있다.
그 이유는 설사 우리가 사실(fact)에 관해서까지 거짓 사상을 가진다 해도 거짓 원리로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법도에서 하라는 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총명한 선택이라고 하여 그분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 주님의 행동 강령이 주님의 법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어찌됐든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자기 기억 속에, 자기 바깥쪽 생각 속에 많은 거짓 관념이 들어차 있다해도 결국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진정한 원리로부터 행동되고야 만다.

통치하는 사랑 (the ruling love)

위와 같이 순종하는 사람 속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분명 선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 속의 잘못된 관념은 결국 계발되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사랑이란 마음속에 있는 절대 군주로서 마음이라는 제국의 모든 것은 그 군주 지휘하에서 보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뜻을 이해할 때 그는 더욱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더욱 더 그분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만일 누군가가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그는 교리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므로 영혼을 바뀌게 한다.” 주님의 법은 그 법에 순종하는 영혼을 전환시켜 준다는 말이다.

주님의 포로 (Lord’s prisoner)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적이든 파괴시키도록 명령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적의 포로를 사로잡았을 때, 주님의 명령에 의거 그 포로는 주님의 포로로서 취급하여야 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의 뜻을 거듭나는 삶 속에서 행하여야 한다. 어떤 거짓 원리를 자신 속에서든 타인 속에서든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거짓 원리를 주님의 포로로서 그분의 명령 하에 취급되게 하여야 한다. 이 원리에 어떤 가상적인 자비가 있어져서는 안된다. 이 원리가 포로로 붙잡힌 이상, 도망가거나, 자유를 얻게해서 다시 우리의 영적 생명에 대항하도록 빈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실제에 아주 중요한 요점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심정 상태가 열릴 때,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 속에 존재하는 거짓 원리의 성질, 품성에 대해 어떤 판단이 주어진다. 마치 모세와도 같이, 우리는 산으로 인도되어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형을 보고, 다시 실제 삶이라는 평지로 내려 와서, 산에서 본 모형대로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오만하고 무례하며 신성을 모독한 적이 도망가도록 허용한 아합의 우둔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더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영적 우둔함 (spiritual folly)

거짓 원리의 속성이 지옥적인 것들임을 보고 난 후에도 그것들을 자유롭도록 방치하여 다시금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우둔한 짓인가? 예를 들면, 우리 속에 든 뽐냄(pride)은 우리를 얼마나 많은 곤경 속으로 몰아 넣는지 모른다. 아마 시험이 발생하면, 그 동안 거짓 원리들이 자연적인 자랑심의 기초가 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게되는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자꾸 우리의 뽐냄을 허용하는 것일까? 만일 주님이 그 뽐냄의 더러움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셨다면, 시험과 싸우는 도중에 주님께서는 이 뽐냄을 우리의 합리성의 감시 하에 놓이게 해주심으로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 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수중에 있는 이 뽐냄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셨을 것이다.

위험의 요점 (the point of danger)

진짜 위험은 일상생활이라는 삶의 생각에는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의 관심이 거짓이라는 속성에 쏠리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빠르게 포로로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의 세부 사항이랄 수 있는 “이 일 저 일로 분주한” 때에 진짜 위험은 오게 된다. 이런 때, 이미 알고있는 거짓까지 합리성의 지배를 벗어나도록 자칫 흘려 보내서, 삶의 전투에서 악한 영향력이 이 거짓을 사용하게끔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산신”이므로 “평지에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열왕기상 20:23) 다시 말해 평지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말하고, 산이란 마음의 높은 수준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일 저 일로 분주한 동안에도” 이미 알고 있는 거짓들이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에 실지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포로를 잘 감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거짓을 잘 공격하면서도 실제에서 그것들이 세력을 떨치는데 대해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론상과 실제상의 미덕(virtue)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허리에 무기를 찬 적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될 것이고, 적을 다 부숴버린 뒤에 무기가 필요 없다고 벗어 던지는 것을 자랑해서도 안된다.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 (열왕기상 20:12) 라는 구절을 상념해야 할 것이다.

거짓 원리들 (false principles)

이 세상 삶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영적 축복보다 더 바라는 것이 거짓 원리이다. 돈이야말로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도 거짓이다. 명성이 인격보다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도 거짓 사상이다. 만일 어떤 관념이 거짓임을 명확하게 보았다면, 주님은 위에 열거한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포로들로서 주님의 명령으로서 꼼짝 못하도록 하여 우리에게 넘겨주실 수 있다. 위의 좋다는 것들이 우리의 적들임을 오늘 보았다면, 내일 왜 우리는 그것들이 마음 속에서 활개치도록 자유를 허용할까?

인격의 강건함 (strength of character)

영적으로 인격이 강해짐은 악한 것에 저항하고 선한 것을 기꺼이 행동에 옮김으로 있어진다. 간혹 목적의 불분명함(weakness)이나 강건한 인격의 결핍은 자비나 관대함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수가 허다하다. 강함(strength)은 자신이 겸비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막상 겸비하려치면 골치 아픈 일처럼 보이기도 해서 손도 대보지 못하고 풀이 죽고마는 약한 심정이라던가,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제 팔을 자를 수 없는 여린 심정, 죄를 견책해야 그 죄인을 구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유약한 심정 같은 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사회나 사업이라는 삶 속에는 그렇게도 많은 협잡으로 가득 차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시험에 저항하려는 결단 있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거나, 본인도 그것이 거짓이요 악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실은 그 원리를 즐기는 바, 기꺼이 내던지지 못해 사기꾼이나 사기 당하는 자나 공히 그들의 깊은 심정은 같은 원리를 탐닉하는데 전문가가 되고 있는 연약한 남녀들이 많기 때문이다.

진짜 새교회인 (genuine New-Church men)

새 예루살렘 교회(요한계시록 21:2)의 새 진리가 실용적인 열매를 보여주려면, 이 진리는 인간을 발달시킴으로 더 영적인 용기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 새교회인은 삶의 매 걸음마다에서 결실이 있어져야 할 것이다. 성실(integrity)이라는 높고 순수한 기운 속에서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끈질기게 따라 붙어 매혹시키려 하는 모든 거짓과 그것의 영향에 대해 단호히 “no!”라고 즉각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원리 속에서 거짓을 보았을 때 그 거짓을 포로로 잡아 놓고 빠져나갈 수 없게 감시하는데 있어 빈틈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모든 사기 행위와 비열함에 찬웃음을 보낸다. 게다가 어떤 위기라도 정면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weakling)들이 처하는 위험한 바다에서 표지(beacon-light)가 되어 준다. 이 사람은 나라의 기초나 인류의 기반을 좀먹어 들어가게 하는 비열함이나 감각적 행위 그리고 수 천 가지의 근대 협잡들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런 고상한 사람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해야 할까? 그곳은 영적 삶의 진리가 알려진 곳 새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다. 우리는 옛 사상이 해체되고 새 원리의 파종기인 위험 시기에 살고 있다. 위기는 경고도 주지만 기회도 부여한다. 위기는 강한 인격을 발달시키는 수단이다. 각 인간의 원리들을 시험해 보는 때가 바로 이런 때에 있어진다. 연약한 인간은 대중적인 관행이나 그 바람에 겁먹고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강건한 자는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려 드는 각종 영향력을 자기 강건함을 위해 시험해 보는 기회로 삼는다. 이 사람이 어떤 대중적인 인기를 끈 원리 속의 거짓된 속성을 명확히 보게 될 때, 그는 그것들을 자기 발 아래 누르고, 주님의 포로로 잡아 그분의 명령에 복종되게 처신한다.
이 사람이 아는 사항은, 모든 거짓원리들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로 이끌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거짓원리를 짓밟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뒤 결코 그 고지를 뺏기지 않는다. 한번 거짓원리를 보고 참 진리의 가치를 확인한 이상 이 사람은 심사숙고된 계획으로 돌진하고, 이 돌진은 그의 바깥쪽 생각에까지 밀어붙이며 결국 그의 실제의 행동에까지 옮기는 직진 코스를 밟는다.

진리에 문을 열라 (openness of truth)

진리는 풍부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진리를 수용하려는 상태에서, 심정에, 지성에, 그리고 행동에 진리를 간직해 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진리가 자기에게 와질 때 즉각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많은 진리들이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 열려 있지 않은 마음에도 빛을 비추이고 있다. 우리 모두 인정하는 바는, 어떤 주일에는 여느 주일보다 영적 진리를 받을 수 있게 마음 문이 한층 더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확인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주일 날, 주님의 말씀인 성경이 영적 교훈을 위해 읽혀진다. 찬송은 우리 애정에 호소하고 있다. 설교는 우리의 합리적 생각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어떤 이는 예배에 대해 여느 때 보다 더 흥미를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 사람과 비교해서 덜 흥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 지난 주일에 무관심한 사람이 이번 주일에는 관심이 많기도 한다. 오늘 마음 문이 열린 사람은 오늘 뭔가를 받아 가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마태복음 5:6).
영적 진지함이 고갈되어 온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뿐이다. 그는 불이 다 태워 버리고 난 찌꺼기, 한 줌의 재와도 같다. 특별히 오늘 세대에서 우리는 목적에 대한 진지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적, 정치적, 일상 삶 속에서 번갈아 가며 맞이할 수밖에 없는 모든 거짓 원리를, 우리를 홀리는 거짓 사상을 내려 눌러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 온 내 길을 반성하고 당신 언약의 길로 되돌아 오리이다… 교만한 자, 거짓으로 나를 꾀어도 마음을 다 쏟아 당신 계명을 지키리이다” (시편 119:59, 69).

6
야망의 가시나무

성서 본문: 열왕기하 14장 9절

9.그러나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는 유다 왕 아마지야에게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송백에게 딸을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하였다가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자연적 마음의 자신감 (the self-assurance of the natural mind)

자연적 감각에서 있어지는 생각들은 영적 진리를 납득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 역사를 통해, 자연적 마음은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 비추어 인간의 영적 생명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고 시도해 왔다. 그러나 이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아마 결코 되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빛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자상의 이야기 (the literal story)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으로 분단된 그 시대에, 유다의 왕 아마지야는 에돔족을 정복했는데, 그는 이 정복보다 더 큰 군사적 영예를 욕심 내던 차,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에게 사신을 보내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여호아스는 그의 도전을 거절하면서 집안에서 편안히 있을 일이지 타인을 건드려 다치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그는 유다 군대를 경멸하는 표현으로서 비유를 사용하였는 바, 그 내용은 천박하고 무가치한 가시나무가 짐승에 짓밟히는 신세를 유다 군대로 빗대면서 깊게 뿌리 내려 폭풍에도 끄덕없이 버티고 선 레바논의 드높은 송백 나무와를 대비시켜 말했다.
여호아스의 충고를 유념치 않은 아마지야는 전쟁을 일으키려 고집했다. 그리고 그 바로 뒤의 전투에서 그와 그의 군대는 사정없이 패하고 말았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가 주는 교훈은 명백하고 유용하다. 첫째,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안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즉 원리면에서 볼 때,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설사 말싸움하기를 좋아하고 야심있는 사람이라 해도, 종종 예상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원리와 신중한 정책은 당사자를 평화롭게 해준다는 말이다. 둘째로, 적의 힘을 과소 평가해 가지고는 결코 안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의 실수는 적에게 더 유리한 측면을 제공하는데다가 정작 대처했어야 할 것들을 미처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자로서, 또는 사람을 많이 다루는 직업인의 경우, 능력 발휘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기대하려면 자신의 자원을 조심성 있고 면밀하게 평가하며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잘 헤아려 놓는 것이 있어야 한다. 성공하는 경영자는 언제나 자기 일 앞에 기습적인 사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 바, 사건의 발생에 준비가 되지않은체 느닷없이 당하는 일은 없다.
삶의 매 사건들에서 약하거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일을 불시에 떠 안게 되어 자기가 그 일에 미리 대비되지 않았음을 늦게서야 발견한다. 그러고도 그는 그 일이 자기에게 닥칠 수밖에 없었다는듯 당연하게 받는다. 그러면서 그 일이 무사히 풀리겠지 라고 단순하게 예상해 버린다. 또 자기 방법으로도 뭔가 좋은게 있어질 수 있다라고 상상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일이 무사히 잘 풀려야만 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지는 않는다.
셋째로, 본문의 또 다른 교훈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데 따른 위험에 대해서이다. 예를 들면, 어떤 젊은이가 마을에서 자기의 체육 실력을 칭찬 받았을 때, 이 실력 정도라면 전국을 제패할 수 있고 전국적으로 칭찬을 받을 거라는 야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그가 전국 체전에 참가했다면, 그는 패배로 인해 조용히 귀향하고 만다.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 (열왕기상 20:11). 이 구절이 이런 청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뭔가 나도 잘할 수 있다 해서 분이 넘치는 목표에 도전함으로 자신을 망치는 경우는 요즈음도 흔한 일이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은, “거만엔 재난이 따르고 불손에 멸망이 따른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번영을 누리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 번영에 감사하고 더욱 조심성을 발휘해야 그 번영의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자랑으로 떠벌리면, 그 축복이 저주의 일로 바뀌어 되돌려 오고 만다.
우리가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음은 지당한 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주제 파악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능력 이상의 것을 과도하게 욕심 낸다면, 일의 곤란성을 우습게 여겨 실패해버리고 말것이다.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성사될 일들이 자기 과신이 가져다주는 부주의한 가운데 그 일을 처리함으로 어이없이 실패를 당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 흔한 사건이다. 우화 속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역시 이를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영적 의미 (spiritual meaning)

위의 모든 것들은 암시적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영적 의미는 이와 비슷한 원리들을 영적 삶에 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레바논의 송백에게 딸을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하였다가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 장대한 송백 나무의 울창한 숲을 가진 레바논 산이란 멀리 내다보는 영적 진리에 합리적 지식을 지닌 인간의 영적인 마음 또는 영적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상록수인 송백이란 합리적 생각을 표현한다. 그래서 레바논의 송백이란 합리적으로 보고 이해된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상처를 주게 되는 위험성을 지닌 가시나무는 악에서 튀어나오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들판에 자리를 잡게하면 근절시키기가 힘든 것이 가시나무들인 것같이, 악한 애정에서 나오는 거짓 원리들은 집요하게 우리 지성에 달라붙어 있게된다. 가시나무의 아들이란 거짓 원리에서 나오는 거짓 생각을 뜻하고, 레바논 송백의 딸들이란 영적 진리에 대한 애정을 말한다.

결혼 (marriage)

송백의 딸을 가시나무의 아들에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자연적 마음속의 어떤 거짓된 생각과 결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자연적 마음에 의해 우리 속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애정(affection)은 진리의 빛이 필요하고, 진리를 갈망한다. 우리 주님은 영적 진리에 대한 애정이 우리 속에서 신장 되도록 노력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이해성 안에서 진리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하나를 이루도록 추구하신다. 이 추구의 결과가 선과 진리의 천국적인 결혼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우리 속의 거듭나고 있지 않은 경향성들과 연계를 맺고 천국적 결혼을 저지하려 발버둥친다. 악령들은 우리의 성장해가는 애정들을 유인하여 감각에서 오는 거짓에 고정시켜 거짓이 진리인듯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사랑하게끔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연적 감각에서 영적인 것의 슬기로움을 기대하게끔 만들려 한다.
결혼은 쌍방의 수준이 비슷해야 한다는 균등성이 비유 속에 비쳐져 있다. 이는 옛날 결혼 습관에서 가문과 가문을 비교한 것과도 비슷할는지 모른다. 이를 영적 의미에서 보면, 이 비유는 감각에서 오는 거짓 관념으로 채워져 있는 자연적 마음이 영적 진리에 대한 내향적 애정과 비교해서 영적 수준과 같다고 상상하는 그 오만성을 쉽게 알게 해준다. 낮고 비천한 가시나무가 드높은 송백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오만함 같이, 우리 속에서는 감각적 마음이 우리 속 영적 부분들을 끌어내려 하는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감각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기는,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것,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방향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에 대해 어떤 제약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무정부적인 생각들이 무질서하게 뻗어가는 특성을 지닌 가시나무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감각의 가시나무 같은 거짓들과 레바논 송백의 딸이 결혼을 통해 연합하는데 대해서 영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이런 보호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 협력이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진리를 배워야 하는 일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진리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감각에서 오는 오류들과 연합되어 야기된 잘못들로 고통을 주었던 예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양심적인 이교도가 박해 당하는 것도 목격한다. 사랑 많은 이들이 거짓과 연합됨으로 사랑 없는 행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에 관한 속성과 그분의 섭리에 대한 거짓 관념에 사기 당한 채 자신의 미덕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들은 개인의 정신적 측면에서도 흔한 일이다. 악한 경향성에서 튀어나온 감각적 거짓들은 영적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낮은 수준에로 닥치는 대로 끌어내리려 한다. 즉 어떤 처녀가 고이 간직한 사랑은 그녀에게 주어질 고상한 남편, 영적 삶 속에 있는 장엄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자연적 감각 속에서 나오는 어떤 거짓 관념과 결혼될 경우,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잃고 우리의 애정은 사기 당해 거짓과 결혼하고 마는 것이다.

실례들 (examples)

예를 들면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으나, 그 사랑이 자아 총명에서 비롯된 지독한 거짓과 결합했다고 하자. 이럴 경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어떤 계시(밝히 알게 해주심) 없이도 인간 삶에 관한 진리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즉, 자연 과학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던가, 영적 삶, 또는 영계는 없다고 상상해 버리고 말 것이다. 아마 더 미묘한 술책은 거짓 원리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영계를 인정하게 하면서, 그리고 진리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치면서 하느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자신의 총명에 슬쩍 돌려지게 만드는 경우이다. 이렇게 해서 선함과 악, 진리와 거짓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듯 여기게 되어 영적 생명을 파멸시키려 든다.
자주 발생하는 것 중 하나는, 비록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감각에서 오는 어떤 비천한 거짓이 이 진리에 대한 애정을 붙잡아 거룩하지 못한 결합을 이루게 되면 실제로 이 진리는 선함이라는 열매의 생산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아마 실제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 기울려는 경향성에 따라붙는 악의 세력을 계속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을 때가 흔하다. 아마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길 좋아하여 우리가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쉽게 망각한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모든 선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인데,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에 언제나 간직한다면 우리는 선을 주님의 선물로서 받아 사용할 것이고 우리가 주님과 분리되어서도 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옴을 보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악에 대한 우리의 경향성도 볼 수 있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 다음 우리는 이것들을 지옥의 탓으로 여기고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 지침 상에서 이런 경향성들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 속에서 우리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음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악을 자신의 것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악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게 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선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선의 근원인 하느님과 분리되는 바, 천국적인 속성들 역시 결핍되고 말 것이다.
나쁜 습관에 젖어 든 젊은이들을 주목해 보자. 만일 여러분이 이 젊은이의 나쁜 습관 중 하나를 꼬집어 준다면,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그 습관 따위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런 습관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만두겠다고 생각하면 즉각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내 속에 어떤 강함도 없다고 상상하겠지요?” 그런데 이 젊은이의 결과는 무엇일까? 사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영적 강함을 과대 평가하고 있고 그 반면 악의 미묘한 힘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위의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마 영적으로까지 균열을 일으켜 미리부터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을 종종 목격해 볼 수 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나쁜 이름, 나쁜 본보기, 나쁜 영향만을 남기고 무덤에 들어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나쁜 습관을 즉각 중단할 수 있다고 재잘거리나, 그 동안 탐닉에 의해 그들은 더 약해지고 악들은 더 강세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속한 저항

악이라고 판정될 때 즉각 악을 내던지는 것만이 유일한 안전 수칙이다. 이미 알고있는 악을 즐기는 일, 그 일의 한건 한건은 우리의 정신 태도를 지옥에 노예화 되도록 하는 쇠고리에 큰 못을 박아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에게 미리 경고된 것,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잘 관찰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가 선과 악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실감있게 알게 될 때에야 비로소 큰 요점이 파악된 것이다. 우리의 악한 경향성들은 마치 불길 같다. 이 불길이 거세지기 전이라면 진리인 물을 조금만 가지고도 진화시킬 수 있겠지만 이 불길이 거셀 경우, 이 불은 우리의 정신적인 집을 태우고 만다. 악한 영향력들은 주님이 우리 속에서 발달시키시는 더 높은 삶과 다투도록 언제나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영계를 가리고 있는 휘장을 우리가 들어올릴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우리 속 나쁜 충동들의 근원을 볼 수 있다면, 악령이 던지는 사악하고 야비한 암시들을 경청하려는 자신의 우둔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악한 영향력 밑에 있는 사람을 그려보자. 그는 악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는 지옥으로 열린 문 옆에 서 있다. 음험한 영향력은 자기들 명령대로 움직이게 하려고 그에게 재빠르게 돌진해 들어가 그를 부추기고 있다. 그 사람 바로 위에 천국으로 열린 문이 있다. 거기서 천사들은 천적인 축복 속에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국에 등을 돌리고 그의 얼굴을 지옥에로 향한다. 왜 그가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인식할 수 없을까? 그 이유는 어떤 거짓 원리가 그 사람의 이해성을 점유하고 있고, 그의 경향성이 악을 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즉 레바논 송백의 딸이 비천한 가시나무의 아들과 결혼했다면, 그 딸은 보기 흉할 정도로 잘못된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된다.
우주에는 선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선을 채택하며 음미하여 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을 받을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자기 앞에 먹을 것이 가득하다 해도 그 음식들을 먹어 소화 흡수할 신체 조건을 먼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경우나 다름없다.

신성한 섭리

주님은 인간이 남용하지 않고 사용할 준비가 된 모든 이들에게 선과 진리를 언제나 공급하고 계신다. “곧바르게 걷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은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삶의 평면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각 사람은 각기 다른 삶에 대해 열려져 있다. 그런고로 각자가 열고 있는 삶의 평면이 채워질 때 그는 만족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열고 있지 않은 것들은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한마디로 굼벵이가, “나도 비둘기처럼 날아 봤으면…” 하고 소리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두더지는 공중을 날기보다는 땅 밑을 파며 여행하는 것을 사랑한다. 이것이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삶을 다른 짐승에게 하라고 한다면 죽는 거나 다름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 속에서 삶의 각기 다른 형태에 따라 “그분의 손을 펴시어 모든 살아 있는 것의 바램을 만족시켜 주신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정신적 사람의 원리에도 적용되고 있다. 주님은 우리와 협력 관계를 가지고 우리 속에서 우리가 기꺼이 열어주는 모든 영적 능력을 발달시키신다. 그래서 보이든 안보이든 많은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가 기꺼이 보호받아야겠다고 하는 한, 거짓 원리나 거짓 관념으로부터 방어도 해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애정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이 애정들이 우리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생각에 있는 거짓으로 말미암아 짐을 떠맡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안전 수칙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함을 매일의 생활 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면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인지 또는 내 생각에서 나온 가르침인지를 알 것이다” (요한복음 7:17). “그분은 천사들에게 임무를 주어 모든 너희들의 길을 지키게 하신다.”

가시나무가 짓밟힘

본문에서 가시나무가 송백에게 청혼하였는데, 그 다음 말하기를,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짓밟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쓰여있다. 삶의 형체라는 면에서 짐승이란 애정(affection)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살아 있어 의식하는 모든 것들은 애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애정들은 선하든, 악하든 필히 어느 한쪽에 해당된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들짐승들은 좋은 측면에 속한다. 예를들면 들사슴이 자연적인 선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자연적 인간은 그 인간의 열정에 있어서 들짐승 같다. 인간은 자기의 영성, 즉 선과 진리를 보고 아는 그의 내향적 능력에 의해 구별된다.
선한 들짐승이 가시나무를 짓밟았다. 즉 선한 자연적 애정이 영적 진리에 대한 애정과 하나가 되겠다고 하는 거짓을 밟아 버렸다는 말이다. 영적 진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서 발달되는 동안, 자연적 감각 안의 거짓은 우리를 매혹시키려 하며 사기 당하도록 한다. 마치 어떤 사기꾼이 순진한 처녀를 속여 결혼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연적 마음속에 든 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싶어하는 우리의 바램을 보호하신다.
이 짐승은 레바논에 있었다. 즉 선에 대한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진리에 대한 지식과 하나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자연적 마음이 더 높은 삶을 위해 기꺼이 계명을 지키는 모습이기도 하다. 자연적 수준에 있는 선에 대한 이 사랑, 주님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결정한 이 사랑이 거짓의 미묘한 실력 발휘에서 우리를 보호한다. 이 사랑은 주님의 명령을 실제에 일치시킴에서 오는 모든 암시들이 테스트 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 진리를 감각적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애쓴다. 이런 애씀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과학을 가지고 영적 생명의 신비를 관통할 것으로 기대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두고 경멸적으로 내뱉는 말,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와 같이, 단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자연적 감각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의 존재를 언제나 의심한다. 그리고 자기 감각으로 납득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거절해 버리고 만다.
삶의 위급한 상황을 위해 언제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간이 사는 두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가 알고 있는 영적 원리에 삶의 기초를 둔 이들, 신성한 섭리와 협력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 “만사가 주님께 달려 있다고 기도하고, 만사는 자기에게 달려 있다고 하면서 일하는 사람,” 이 세상 만사에 진리에 대한 사랑을 진리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지식에 결합시키는 사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유용한 생활로 감각에서 오는 미묘한 거짓들을 분쇄하면서, 더불어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로 영적 삶을 충만하게 하는 사람이다. “당신의 법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만사가 순조롭고 무엇 하나 꺼릴 것이 없다” (시편 119:165).

7
황폐된 포도원

성서 본문: 이사야 제 5장 1-7절

1.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2.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3.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4.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5.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 짓밟히게 하리라.
6. 망그러진 채 그대로 내버려 두리라.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이게 하리라.
구름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명하리라.
7.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썩어진 교회

주님이 심으신 교회가 인간에 의해 부패되었다. 신성한 사랑은 영적 삶을 받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어 창조했다. 신성한 지혜는 인간으로 그들의 근원, 조직, 운명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진리를 공급했다. 그리고 신성한 권능은 영적 삶의 길을 걷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인간과 교통했었다. 신성한 사랑, 지혜, 그리고 그로부터의 권능 모두는 인간에게 일해 주었고 일해 왔으며 계속 일하시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삶을 뒤집어엎고 부패시켰다. 이와 같은 전복과 부패가 인간 재난을 가져오고 있다.
본문의 비유는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다루시는데 대한 표본적인 그림이요, 교회의 부패에 관해서, 그런 교회 속의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표본이 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에서는 이스라엘에 내려진 처방의 전복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내향적인 영적 의미에서는 인간 마음, 그 자체의 타락된 상태와 관계된다. 그리고 특별하게 첫 기독교회의 기울어지는 상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포도원 (the vineyard)

“사랑하는 자” 또는 “임, well-beloved” 이란 포도밭의 주인, 그분의 신성한 인성, 즉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에 관련지어 볼 때, 본문은 주님에 의한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결합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인간 안에서의 이 결합은 영적 수준인 믿음의 선이 천적 수준인 사랑의 선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결합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든, 인류 전체로서 볼 때이든 통과해가는 단계 속의 어떤 것이든 간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영화하시는 주님의 인간성 속에서 다 경험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인간의 선에 관한 모든 형체와 모든 상황들을 다 겪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입으신 인간성, 즉 자연성 안에 있는 악으로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 악의 모든 형체를 만나고 극복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포도원은 영적 수준의 교회이다. 이 교회의 중심 원리는 이웃 사랑이다. 포도는 이타애의 선, 즉 이웃 사랑이 만들어 낸 실제의 선한 일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일이란 삶의 실제적인 원리가 바깥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이를 글자대로 직역하면, 기름진 산등성이(a very fruitful hill)는 뿔(horn), 또는 기름의 아들(the son of oil)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뿔은 위쪽으로 불거저 올라온 땅 조각, 산등성이를 표현하는데 대한 동양적인 용어이다. 이와 같은 땅은 보다 더 많은 양의 태양 빛과 열을 잡게되는고로 보다 더 생산적인 땅이다. 기름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계를 위해서는 윤활 역할을 하므로 사랑의 원리를 표현한다.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이 출생시킨 것, 즉 사랑에서 파생되어 나온 어떤 것이다. 이스라엘로 표현된 영적 교회 속에서 아들은, 아들과 딸이라는 측면에서 구별해 볼 때, 진리에 쏟는 마음, 즉 지성을 표현한다. 딸의 경우는 애정을 표현한다. “기름의 아들”이란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 즉 우리가 선하고 진정한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납득되어 채택되는 진리들을 말한다. 따라서 주님이 “기름의 아들, 뿔에,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셨다”는 것은 표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주님께서 인간 지성에 영적 교회를 심으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선하고 진정한 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 의해 납득될 수 있는 곳, 즉 이해성에 심으셨다는 말이며, 그 납득된 진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영적 교회를 심으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로 꽉 찬 거룩한 말씀을 수단으로 인간과 교통되는 교회를 건설하셨다.

주님이 하신 것 (what the Lord did)

신성한 섭리로 위와 같은 교회를 건설하심에서, 포도밭이 열매 풍성한 조건이 될 수 있는 교회로 되도록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두셨다. “그분은 포도밭에 울타리를 쳐 두셨다.” 이는 교회가 악의 영향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 또는 벽을 말하는 바, 일상생활을 위한 계명, 즉 십계명이라는 명백한 진리를 말한다.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인간의 자연적 감각에 비교해서 보면 말씀의 내향적 의미인 영적 진리를 보호하는 울타리이다. 씨의 껍질이 속 알맹이를 보호해주듯, 인간의 폐와 심장을 보호해 주는게 갈비뼈이듯, 인간 두뇌를 보호하는 것이 두개골인 것 같이,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인 영적 진리를 보호하는 벽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성경의 글자적 의미가 주는 가르침, 특별히 꼬집어 말한다면 십계명은 악의 습격에서 인간의 영을 보호하는 울타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단순하다 보니 오히려 미련한듯 보이는 사람이든지, 책을 가지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해도, 그가 주님의 계명을 이해하는 대로 지킨다면, 그는 감각에서 오는 오류로 받게 될 피해를 예방할 수 있고, 악령이나 이교도들의 미묘한 논리에 휘말리지 않는다.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십계명을 가지고 교회에 울타리를 쳐 놓으셨다. (참조; 한글 성서의 경우, “임은 포도밭에 울타리를 치고…” 대신, “임은 밭을 일구어…” 라고 하여 울타리를 침(fenced) 대신 일굼(digged)을 사용했다. 이 경우, 땅을 일굼이란 자연적인 마음을 열어 그 마음의 조건을 탐사하고 검증함을 뜻한다.)

돌 (stone)

그 다음 그분은 포도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돌을 골라내셨다. 즉 감각에 있는 거짓 원리, 이것이 영적 성장의 길에 버티고 있다는 말이다. 좋은 의미에서 돌은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그러나 자연적 진리가 마음 안에 놓여 있을 때, 포도밭에 있는 돌과 같이, 영적 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성장을 간섭하게 되는바, 이 진리는 거꾸로 된 형체, 즉 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가 되고만다.

포도나무 (the vine)

주님은 그분의 포도원에 “좋은 포도나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이 포도나무란 주된 동기로서 이웃 사랑의 원리, 순수한 영적 진리의 원리를 교회에 심으셨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는 모습이 포도원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원리가 애정(하고 싶은 마음, affection)에 의해 수행될 때, 일상생활 안에서 실습될 때 원리의 실제 열매는 영적 이타애인 이웃에 대한 실용적인 사랑의 선한 일, 좋은 포도들이다.

망대 (tower)

포도원이라는 교회의 한 가운데에 주님은 망대를 세우셨다. 망대란 지상의 표면에서 높혀진 위치, 그래서 보다 더 넓은 시야를 보게 해주어 더 높은 관점을 볼 수 있게 하는 시설물인 바, 이는 내면의 진리, 즉 보다 높고 깊은 안쪽에 해당되는 관념으로부터 보는 것을 표현한다. 이 망대가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는 것은 이 관념이 우리의 내향적 사고 안에 있다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의 더 높고 더 내면적인 형체나 양상을 볼 안쪽 능력을 주셨다는 말이다. 이 능력은 영적인 빛으로 진리를 보고 납득하는 능력, 즉 합리성(rationality)을 말한다.

포도주 틀 (술틀, wine-press)

그리고 주님은 포도원에 “포도주 틀”도 만드셨다. (또는 포도주 통을 파셨다) 포도주 틀에 의해 포도는 짜 지고, 그 포도즙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축출되어지는 바, 포도주 틀이란 합리적 능력을 표현해 준다. 우리가 시험받는 동안 이 능력 속에서, 이 능력을 도구로 삼아 우리는 실생활에서 생산하는 선한 일로부터 진리의 영적 포도주를 축출해 낸다. 포도나무 그 자체로 본다면, 인간 마음속에서 작동해서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 포도나무의 좋은 열매, 즉 선한 일은 진리의 더 높은 형체를 산출해 낼 수 있다. 이것이 포도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통해 포도나무를 심으신다. 그 다음 그분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로부터 타인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 결과 여러분은 그 진리를 교리로서 붙잡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그 진리를 살아있는 포도나무로서 붙잡고 있으면 그 원리는 자라나서 그 원리로부터 행동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행한 선한 일은 영적 포도가 된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더 전진할 수 있다. 여러분은 더 확증된 형체 안에서 이 진정한 원리의 생명, 즉 참 영을 얻을 수 있다. 여러분에게 시험이 발생할 때, 그 원리로 서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가지고 그 시험과 부딪친다. 합리적 사고라는 압력기는 포도라는 자연적 쥬스(juice)로부터 진리의 영을 밝혀 낸다. 그리고 이 쥬스는 그것이 순수한 포도주가 되기 전 시련을 통과하여 걸러져야 한다. 이 쥬스 속에는 끝까지 견뎌 낼 수 없는 어떤 것도 있다. 이런 불순물은 쥬스가 발효되는 가운데 내던져져 멀리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비록 여러분이 이웃 사랑의 원리로 행동되었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이나 행동에는 떼어 내어야 할 어떤 불순물, 즉 자아에 속한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험들이 계속 오는 것이고, 그 원리에 얼마나 충실해야하는지가 시험대 위에 계속 서게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시련을 견뎌내면서 지속적으로 서 있다면, 정신적 포도인 자연적 쥬스는 순수해진다. 그리고 찌꺼기 같은 불순물이 내던져지고, 여러분 속에 있는 진리는 정신적 발효를 통해 삶 속에서 확증된 진리, 영적 진리라는 순수한 포도주가 되어진다.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심에 있어서 주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진리로서 보는 능력, 즉 합리적 능력을 주셨다. 이 능력을 수단으로 인간은 자연적 진리에서 영적 진리로 진보해 갈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해주신다.
지금 주님은 인간을 위해 위와 같이 변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해 놓으셨고, 이를 수용할 정신적 능력에 필요한 모든 것도 인간에게 주셨고, 거기에 필요한 영적 양식과 도움까지 공급해 주셨다. 이제 그분은 인간에게 해 놓으신 것들에 적절한 열매가 생산되리라고 생각되시어 인간을 쳐다보고 계신다. 그분은 포도 즉 이타애의 선한 일들을 인간에게 기대하고 계신다.

들포도 (wild grapes)

그러나 인간이 생산해 낸 포도는 포도이긴 하되, 달콤한 천국적 영이 없는 시큼하고 맛없는 포도들, 즉 껍데기에 불과한 선한 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형체 뿐인 이타애, 바깥쪽에서 볼 때 도덕적이고 친절한 체하여 결국 있어지는 것이라곤 교활(policy)과 자아사랑 뿐이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비천한 들포도가 주님의 교회 속에서 생산되는 것일까?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예루살렘 시민들”이란 진리 안에 있는 선한 원리들이다. “유다 백성, men of judah”이란 모든 선 안에 있는 진리들이다. 이런 것들은 교회 속의 사람들의 마음에 필경 있어져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교회 속의 사람들은 선하고 진정한 인간이 아니었고,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뒤집는 자, 부패시키는 자들이었다고 주님은 선포하고 계신다. 인간에게 영성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선함으로 인도해주기 위해 신성한 사랑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은 다 해주셨다. 인간의 악은 인간을 위한 주님의 설비에 어떤 미흡함이 있어서 발생된게 아니다.

섭리 (providence)

시대를 따라 내려가면서 지상에는 각기 다른 교회들이 연속되어 왔는데, 그 때마다 주님은 인간을 위해 하실 수 있으신 모든 것을 해 주셨다. 그리고 신성한 인성으로 세상에 오심은 인간을 위한 그분의 은총 중 가장 큰 것이다. 주님이 해주지 않으신 어떤 것이 있어 주님이 더 하실 일이 있었을까? 아주 오랜 뒤인 지금, 우리는 인간의 자손들에게 더 충분한 빛과 생명이 쏟아져 나오는 영적 의미, 그분의 재림을 가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거듭 나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바르게 걷는 이들에게 주님은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가운데서 그분께 해 달라고 조르는 때이다. 설사 해주시지 않는다 해도 그분은 우리가 당장 가져야 할 가장 좋은 영적인 모든 것을 받는 길을 열어두시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바래야 할 모든 것을 주실 채비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적 축복을 기쁘게 받지 못해 왔던 것이다.

결과 (results)

본문이 선포하는 바, 주님은 그분의 포도원이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시고, 그것을 구원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글자적 의미는 실제적 삶에 대한 사실들을 서술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타애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첫 기독교회가 그 교회 속의 거짓 가르침으로 해서 되어 갈 것들에 관해, 그래서 교회 멤버들의 악한 삶에 의해 되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하면, 이 구절들에서 언뜻 보여지는 것은, 주님이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위와 같은 황폐함으로 인해 사람들을 처벌하는듯 여겨진다. 그러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애쓰신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주님이 인간을 파괴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감사하지 않는 자, 악한자에게까지 친절하시다.”
그러나 주님의 포도원 울타리는 거두어지고, 담은 허물어져 적들에 뜯기고 짓밟히는 바,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들의 일상생활을 보호해 주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더 이상 간직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온갖 종류의 악과 거짓이 인간 마음에 돌진해 들어와 마음 속의 선과 진리를 파괴해 버린다. 인간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합리적으로 검증해서 악하고 거짓된 것을 던져버리지 않을 때, 주님의 포도원은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게 된다.” 이러면 악과 거짓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쑥쑥 자라나 자유로이 마음 속을 점령해 간다. 성경의 글자로부터 새로운 진리가 마음에 계속 공급되지 않을 때 구름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면 주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에서 오는 진리의 어느 한 조각도 인간 마음에 더 이상 받아지지 않게 된다. 이 결과의 종착역은 영적 진리에 열려져야 할 내면의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즉, 주님은 인간을 위해 총명과 선함을 설비해 두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거짓의 어두움과 악의 냉혹함을 더 선호하여 주님에게 곡성만 들려주었을 뿐이다.

주님의 방법 (the Lord’s ways)

그럼에도 주님의 방법은 동등하고 정당하며 사랑과 자비로 꽉 차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는게 아니다고 사람들은 불평한다. 그리고 인간은 악에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이라는 조건을 지니고 세상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지닌 유전적인 각종 경향성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고 단지 그가 사는 것만에 책임이 있다. 만일 그가 그의 경향성들을 바꾸고 싶다면 이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의 선함이 얼마나 선을 행하고 싶어하고 악에 얼마나 저항하고 싶어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의 믿음까지도 우리의 지배하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그의 인격, 즉 그의 실제적인 원리들에 따라 믿는 것이지 단지 그의 교리적 관점에서 믿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되어지는 것은 결국 그가 영적 인격의 집을 짓는데 어느 재료를 사용하기를 바래느냐에 달려 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인간은 주님의 도우심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을 바꿀 수 있다. 모든 천국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 이유는 인격 속의 모든 천국적인 상태가 우리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만큼 우리는 선해진다. 우리를 천국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 속의 악들뿐이다. 따라서 선함의 척도는 우리가 악을 금하는 정도에 비례된다. 인간은 자기의 기회에 대한 표준, 즉 그에게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되어지고자 원하여 이루어 놓는 것에 의해 심판되어진다. 주인의 뜻을 모르는 무지한 종과 주인의 뜻을 잘 아는 총명한 종이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무지한 종이 경미한 처벌을 받는 반면, 총명한 종은 사정없는 매질이 가하여진다. 심판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것을 도로 받는 것이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시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5:3).

포도원을 돌보심 (care of the wine yard)

심겨진 이후, 포도나무에 필요한 것은 꾸준한 돌봄이다. 땅은 언제나 일구어진 상태여야 하고, 그 속의 돌들은 골라내어져 있어야 한다. 가지는 위로 치켜들어서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을 잘 받아야 할 것이다. 좋은 가지는 정리해 주면서 죽은 가지는 잘라 내야 한다. 인간 마음도 위와 같은 꾸준한 돌봄 즉 영적인 수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 마음은 훈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정리 정돈되어야 하며 돌이나 잡초 같은 것의 거리적 거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밭에서 지긋지긋하게 구는 잡초 씨 같은 우리 속의 유전적 경향성들은 틈만 있으면 포도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디밀고 올라온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요한복음 15:2).

가능성 (possibilities)

튀어나오는 모든 잡초가 성장하도록 내버려두어 씨를 맺도록 방치한다면 그 포도원은 무엇이 될까를 상상해 보자. 그 다음 여러분 속의 악에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여러분의 나쁜 감정이나 생각들이 삶의 실제 행위에 튀쳐 나오게 방치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되어질까 상상해 보자. 이제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하신 것,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신 것,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것, 여러분의 정신적인 포도원을 돌보아 주신 방법에 대한 것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분이 더 해주셨어야 했던 것은 무엇이 더 있을까?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들포도를 생산했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랑의 하느님은 가장 높은 천사들에게 해준 것만큼 여러분을 위해서도 해주고 계신다. 여러분은 가장 높은 천사들이 모신 똑같은 사랑하는 구세주를, 똑 같은 신성한 말씀을, 게다가 천사들이 지닌 똑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천사들의 인격 역시 여러분에게도 열려져 있다. 여러분은 전진해서 그 인격을 붙잡을 수 있고 자신의 것으로 간직할 수도 있다. 언제, 어느 때든지 주님은 그분의 천사들에게 임무를 주어 여러분에게 보내서 갖가지 방법으로 그 인격을 간직하도록 배려하신다. 단 하나 조건은 여러분이 천사의 인도를 기쁘게 받을 것이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관해 밝혀 주신 귀중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 포도원을 잘 가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가? 반문해 볼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금도 하고 있는가? 다시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포도원의 임자가 시작하셨듯이 포도밭에 뒹구는 쓸모 없고 해만 주는 것들을 청소해 냄을 필두로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감각적인 삶인 잡초나 돌밭에서 주님의 포도나무는 번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포도원에 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우리 마음을 점유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소비하며 만족치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게 되리라” (이사야 1:16-17,19).

8
감복숭아 가지와 끓는 가마솥

성서 본문: 예레미야 1장 11-14절

1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감복숭아 가지가 보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2. 야훼께서 이르셨다.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 보리라.”
13. 야훼께서 두 번째로 이렇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읍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14.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황폐함

본문의 비유는 두 개의 환상으로 구성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요 예언자로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이어서 영의 내향적 세계가 되어가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 환상들은 인간 마음의 상황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계의 영적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성경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환상들 (visions)

주제는 황폐된 것, 또는 적들에 의해 땅이 황폐해진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주제는 악을 탐닉함으로 황폐해진 마음이다.

가지

가지(막대기, 지팡이)란 통치자의 주권 같은 능력, 권위, 권세를 표현한다. 통치자의 일이 모든 것을 그의 명령 밑에 두려는 것, 또는 이런 목적을 위해 비질서 하에 있는 이들을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등등, 통치자가 가할 수도 있는 처벌을 포함하는 훈련과 교정을 표현한다.

감복숭아 나무

위의 경우의 가지는 감복숭아 나무로부터 이다.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는 원리들과 그 원리들이 실제 삶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나무들은 각기 다른 원리, 각기 다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여 이것이 인간 안에, 또는 각 개인 안에서, 또는 집합된 마음인 교회 안에 있게 된다. 이런 연유로 나무가 성경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감복숭아(살구, almond) 나무는 봄철에 가장 빨리 꽃이 핀다. 1월에 꽃이 피고 3월에 열매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봄의 선구자이다. 히브리어 뜻을 보면 감복숭아는 바삐 서두는 것, 조급함(hasty)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성급한 나무” 또는 “깨우는 자”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주님의 대답에서 이 나무의 이름의 뜻이 응용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본다. 즉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보리라.” 예레미야가 본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급한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감복숭아 나무는 조속히 오게 되는 것에 대한 표현물, 또는 약속이나 예언의 성취가 곧 닥친다는데 대한 표현인 것이다.
영적으로, 새 계절을 제일 먼저 잡는다는 면에서의 감복숭아 나무는 진리가 우리 내향의 삶에 적용될 때와 같이 내면의 진리를 지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지각은 우리가 거듭날 때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심정의 선함을 바탕으로 파생된다. 따라서 감복숭아 열매는 일상생활이나 일 가운데 있는 실제적인 선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나무의 가지가 지팡이(rod)로 전환될 경우,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우리의 자연적 감각들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바램들을 훈련시켜 교정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목적을 위해 성경의 글자, 특별히 십계명은 이 지팡이의 가장 바깥의 형체를 담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진리가 우리 지각에 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한 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들, 즉 실제 삶 속에서 우리를 교정하고 훈련시키는 지팡이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시선을 모으거나, 경고하고 훈련시키는데 사용하듯, 신성하신 선생님은 언제나 말씀이라는 막대기를 잡고 계시면서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그리고 선한 행동쪽으로 우리의 관심을 애정 깊게 불러서 당기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삶의 법칙에서 탈선될 경우 부드러운 어조로 경고하시고 영원하신 선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선을 행하려는 사람의 경우, 주님께 고백하는 말,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다”이다. 주님이 그분의 사랑의 섭리 가운데서 필요하신 것은 “만국을 쇠지팡이로 다스리심”이다. 즉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훈련시키시되 자연적 진리라는 엄격한 법칙에 의거하신다는 것, 진리를 우리의 행동이라는 자연적 삶에 응용시켜 가신다는 말이다. 감복숭아 나무에 관한 첫 환상은 뭔가가 절박하다는 것, 또는 뭔가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감복숭아 가지가 보였다 함은 교정과 훈련이 있을 것임을 미리 말해 두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환상, “끓는 솥물”은 그 훈련의 형체가 어떤 것인지, 그 훈련이 언제 있을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다.

끓는 솥 (seething pot)

둘째 환상에서 예레미야는 “끓는 솥물” 또는 끓는 냄비, 고기 가마가 끓어올라 가장자리로 넘치려 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마솥, 급기야는 흘러 넘치 게 될 것 같은 상황의 가마솥을 본 것이다.
글자적인 표현에서의 부글부글 끓는 고기 가마솥은 장차 북쪽에서 내려오는 느부갓네살왕의 군대 때문에 크게 흔들릴 예루살렘성을 표현한 것이다. 가마솥 속의 내용물들이 끓어 넘침은 강력한 적들로 인해 유대인들이 파괴되고, 재난과 혼란이 있게 될 것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영적으로, 움푹 들어간 용기인 가마솥은 마음에 있는 가마솥, 다시 말해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을 담고 있는 진리의 서술, 즉 교리를 표현한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교리들을 교리로서 붙잡을는지 모르나 어찌됐든 각양 각색의 교리들은 그들의 정신적인 용기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그 용기가 사용 중에 있으면 담겨있는 내용물 여하에 따라 그릇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 내용물이 건강에 좋은 음식일 수도 있고, 때로 심하게 나쁠 경우는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 나쁜 의미에서 고기 가마라면 감각적 쾌락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그 내용물이 육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에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도중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의 고기 가마를 무척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만나에 관해서는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만나는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 양식은 고기 같이 그들의 식욕을 즐기게 하고 뱃속을 무겁게 채워주지 않는 “가벼운 양식”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교리를 자기의 교리로서 붙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육의 욕구로 채우고, 그의 자연적인 마음을 감각적 생각으로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의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 앉으면 자기 앞에 차려진 다채로운 음식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그의 먹는 모습을 보면 며칠 굶은 사람 같이 먹는다. 옆에서 본다면, 그는 마치 살려고 먹는다기 보다 먹으려고 사는 듯 여겨진다. 이럴 경우, 비유적으로 보면, 그는 좋은 가마솥, 또는 교리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는 육의 욕구라는 음식을 가지고 자기 솥을 채우고, 감각적 오류라는 물을 사용한다. 그 다음 육의 욕구와 감각적 오류를 넣은 자기 솥을 자아 사랑이라는 불로 끓이는 격이다. 자아 사랑의 불은 그 본성이 자기 불을 조절할 줄을 몰라서 그 솥은 끓어 넘치게 되어 모두 못쓰게 되고 만다.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 역사에는 위와 같은 모습들이 각 교회 말기에 존재한다. 즉 악한 열정이 인간을 통치해 가되 그 교회의 교리를 가진 이들 모두를 통치해 버릴 때까지 그 열정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있어지는 것이다. 자아 사랑이라는 악령은 만사가 끓어 넘쳐 한도를 넘어 끝장을 보는 것을 그 본성으로 가지고 있어 결국 영적 파멸이 있게 될 때까지 이어진다.

북쪽 (the North)

무질서하고 약해진 상태가 되면 북쪽에 있는 적들이 마음으로 내려와 그나마 잔류해 있는 조금의 생명까지 쓸어버린다.
본문은 말하기를, 가마솥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가마솥의 열림(얼굴이)이 북쪽을 향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 이스라엘은 인구와 영토에 비해 돌이 많은 편이어서, 연료를 채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방법, 즉 집안에 구덩이를 파고, 그 주위를 돌로 둘러치고 솥을 걸어 열의 손실을 막으면서 음식을 끓였다. 그래서 이 구덩이의 사면 중 한쪽은 연료를 더 보충할 수 있도록 열려 있었다.
이런 불구덩이와 솥을 예레미야가 환상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연료를 넣기 위해 열린 구멍이 북쪽이었을 것임이 본문을 통해 추측된다.

나침반의 방위 (the points of the compass)

나침반의 방위는 각기 다른 정신적인 관점(standpoints)을 표현한다. 동쪽, 이곳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보다 높고 보다 내면에 속한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다. 주님을 처음 인식하게 되는 방위, 즉 사랑을 원리로 삼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남쪽, 이곳은 태양이 정오에 위치하는 방위이다. 그래서 가장 밝은 빛이 있을 때인데 이는 총명해지기 위해 진리를 찾는 경우, 즉 진리의 총명을 표현한다. 서쪽, 이곳은 태양의 하루 일과 중 마지막에 도달되는 곳이고, 동쪽에 반대되는 바, 이는 사랑과 선함의 측면에서 마음이 보다 희미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다시말해 보다 외적인 상태, 영적인 상태에 비해 보다 더 자연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남쪽의 반대 위치인 북쪽은 진리 또는 총명의 측면에서 보다 더 희미해져 있는 상태, 영적 총명보다 자연적 상태에 치우쳐 있는 경우이다.
이상 살핀바와 같이, 북쪽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상태를 암시해 준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이 자연적 상태는 진리라기보다 거짓 사상의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희미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알려져 있는 영적 진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이라는 악에서 방어해 줄 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육의 욕구는 과감히 돌진해 들어온다. 그리하여 각 사람 속의 교리라는 가마솥은 거짓과 악한 느낌으로 채워지고 만다. 그런 다음 그 가마솥은 끓어오르고, 가마솥의 얼굴은 북을 향하고 있어 타락된 사람 속의 희미한 것들과 차디찬 심정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 넣는 것이다.
가마솥의 얼굴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느냐는 것에는 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 신체에서 얼굴은 마음의 지표(index)이다. 그 이유는 마음 속에서 행동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얼굴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듯이 서 있게되면 얼굴을 포함하는 그의 머리 부분은 타 부분보다 언제나 위쪽에 위치한다. 그런고로 얼굴은 안쪽의 삶,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실지 갖고있는 생각과 느낌을 알기위해 흔히 상대방의 얼굴을 훑어본다. 그리고 우리가 뭔가에 접촉하기를 원할 때, 우리는 얼굴을 그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임을 보여주고 싶을 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뒤쪽으로 향하게 하거나 아예 등을 돌려 댄다. 이상 살핀 의미를 참작해서 보면, 북쪽을 향해 있는 가마솥의 얼굴은 영적인 북쪽을 향해 얼굴을 댄 것인바, 이는 북쪽에서 흘러오는 영향들을 받겠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적 의미는 다른 성경 부분에서도 그 일반적 원리에서는 같고 관점만 다를 뿐이다.

끓어 넘침 (boiling over)

본문이 제시한 표현상의 그림은 매우 강하다. 부글부글 끓는 솥, 그 속의 내용물이 끓어올라 넘치는 모습, 넘쳐흘러 못쓰게 되고, 더욱 끓어 결국 태우기까지 해서 솥 속에 든 것은 무엇이든 다 파괴하고 마는 모습은 인간의 마음상태 중, 희미하게 하고 죽게 만드는 자아 사랑의 감각적 욕구가 마음 전체에 열을 가하게 될 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돌진해 들어오는 것같이 지옥의 모든 영향력이 마음에 돌진하는 찰나를 그려주고 있다. 악과 거짓이 필연적으로 저지르고야 마는 것은, 악과 거짓에 문이 열린 마음을 파괴하고 천국 쪽에 대한 마음 문을 확실히 닫히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Jeremiah)

이 환상은 예언 초기에 있는 젊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처음 보여진 것들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일과 사명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 환상이다. 감복숭아 나뭇가지에 관한 첫 환상이 그를 가르친 것은,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 위에 이 나뭇가지를 사용하라는 것, 타락해 가는 그 백성들의 세대 속에서, 그들 교회의 지도자들까지 이기적이고 감각적 삶으로 다 포기된 상태 하에서, 그로 하여금 그 백성들을 교정하고, 타이르고, 훈육하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한참 기운 상태에서의 예언자란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행동을 바꾸라는 외침은 매우 고조될 수밖에 없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교회의 파멸, 국가의 파멸에 관해 말할 뿐이어서 매우 슬픈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그는 “슬피우는 예언자”라 불렸고, “애가”의 저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예언자 주위의 모든 것, 즉 백성의 상황은 퇴보되어 악의 열매가 무르익어 악의 추수인 파괴가 성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형편 속에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큰 사명을 놓으셨다. 즉,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예언자의 경고에 경청해서 도움을 예언자에게 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운반해 주게 된다. 이러므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심정에 새로운 애정을, 그들의 이해성에 새 생각을 심게 됨으로써 새 삶을 건설하여 새로운 실제 삶으로 단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 응용 (practical application)

우리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끔직한 상황들에 처했었는데, 더욱이 그런 상황에는 그 당시 학식이 있다는 자들까지 포함해서 이다. 게다가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한 그들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은 우리가 자신 속에서 악의 영향력이 행세하도록 허용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명백한 진리는 심각한 경고와 교정을 말해주느라 오늘도 우리 마음속을 거닐고 있으시다. 감복숭아 나무가지가 고대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듯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지이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의 나무가지 밑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영적으로 안전치 못하다. 우리는 정신적인 설비들을 갖추어 가는데 가장 보증되는 교리라는 가마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가마솥 안에 무엇을 넣고 끓여야 할까? 이 솥에 열을 공급해 줄 불은 어디로부터 있어져야 하는 것일까? 내향의 삶이라는 일용할 양식을 끓여줄 영적인 물의 종류는 무엇일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예레미야의 일을 자신을 위해 해야 할 때이다. 즉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 마음에 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9
쓸모 없게 된 허리띠

성서 본문: 예레미야 13장 1-7절

1.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모시 잠방이를 하나 사다가 허리에 걸치고 물에 적시지 않도록 하여라.” 2. 야훼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나는 잠방이를 사서 허리에 걸쳤다. 3. 그랬더니 야훼께서 또 나에게 이르셨다. 4. “네가 사서 허리에 걸친 잠방이를 벗어 들고 브랏으로 가서 바위 틈에 숨겨 두어라.” 5. 나는 야훼께서 내린 분부대로 브랏으로 가서 그 잠방이를 거기에 숨겨 두었다. 6. 오랜 시일이 지난 다음,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이제 떠나 브랏으로 가서 내가 시킨 대로 숨겨 두었던 잠방이를 가져오너라.” 7. 나는 브랏으로 가서 숨겨 두었던 자리를 파고 잠방이를 꺼내 보았더니, 그 잠방이는 썩어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진리가 전복됨 (Truth perverted)

주님의 진리라 해도 우리의 감각적인 본성에 파묻힐 때는 그 진리가 가진 천국적인 품질을 잃는다. 그리하여 어떤 특별한 용도를 위해서도 아무 쓸모 없게 된다.

허리띠 (the girdle)

허리띠는 동양의 의복 차림에서 눈에 잘 띄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많이 사용되는 허리띠는 대개 가죽이나 물감들인 옥양목으로 만든다. 더 섬세한 허리띠는 모시로 만들고, 거기에 명주나 금이나 은으로 된 실을 가지고 수를 놓는다. 때로 허리띠는 보석이나 진주를 박아서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허리띠는 그 띠를 두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부를 암시하기도 했다. 매우 섬세하고 호화로운 허리띠는 그 소유자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표시가 되기도 했다. 사실, 허리띠란 띠를 두른 자의 허리 부분에서 느슨해지는 겉옷을 붙잡아 두는데 사용된다. 특히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일 경우 더욱 요긴한 품목이다. 이와 같은 용도 측면에서 허리띠는 묶음(bond)을 상징한다. 영적 측면에서 교회 속에 있는 선함과 참된 원리를 한데 묶는 것, 인간 마음이 이 원리들을 함께 붙잡고 있는 것, 또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진 진리에 마음을 매어 놓는 것을 말한다.
허리띠를 맨 효과는 다음 구절에서 암시해 준다. “허리에 잠방이(허리띠)를 단단히 걸치듯이 나는 이스라엘의 온 가문과 유다의 온 가문을 나에게 꼭 매어 두려고 하였다” (13:11).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을 붙잡아 두시는데 사용된 수단은 신성한 말씀의 글자였고, 그들의 안내를 위해 이 글자가 주어진 것이고, 띠의 묶는 힘으로 해서 그들이 주님과 계속 연결되게 하셨던 것이다. 허리띠는 몸을 단단히 조여 주기도 한다.

모시 (linen)

본문에서, 허리띠는 모시(고운 베)였다. 모시는 정의에 대한 표현물, 즉 주님의 계명에 의거한 질서있고, 깨끗하고 순수한 삶에 관한 표현물인 것이다.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을 보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 the fine linen is the righteousness of saints”라고 말하고 있다 (19:8.). 이는 모시가 정의를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시로 만든 허리띠는 주님의 말씀에서 끌어 낸 진리가 교회의 교리 안에, 특히 일상생활에서 십계명을 실지 응용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허리띠를 맨다. 이럴 때의 행동은 우리가 뭔가를 행하려 할 때 우리 마음의 적절한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규율하도록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사용할 때라든가, 우리 심정 안에 있는 선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한다던가, 이것들을 위해 우리가 행동하는 것 등등일 것이다. 그래서 허리띠로 묶어 서로 분리된 옷을 하나가 되게하는 역할은 주님의 진리가 결합해 주는 효과, 즉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주님의 진리로 우리를 고정시킬 때, 그래서 우리가 사랑과 총명 속에서 주님과 묶이게 될 때를 표현한다.
예언자,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위와 같은 말씀을 표현했던 것이다.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 즉 우리가 그분께로 날아가서 그분이 우리와 결합하도록, 그리고 더 풍부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요한이 본 하느님의 성전으로부터 나온 일곱 천사들은 “깨끗하고 눈부신 모시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었다.” 이는 천사들의 상태로 거듭나는 조건, 즉 인간이 자기 마음을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에 의거 질서 있게 간직하는 것, 또는 천국적인 길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사야 11장 5절에서 읽는 바,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진리로 띠를 띠리라, Justice shall be the girdle of thy loins, and truth the girdle of thy thighs.”

(물건을) 사다 (buying)

이 예언자는 허리띠를 사게 되었다. 어떤 영어 번역 성경의 경우 산다(buy)는 표현보다 얻는다(get)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산다는 쪽의 번역이 더 본문의 의미에 충실할 것이라 본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얻는다”라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노력이 그 안에 들어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우리는 노력에 의한다던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기 소유를 내놓음으로서 인격의 어떤 조건과 품질을 사게 된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배울 때, 특히 진리를 획득하기 위해 강한 노력을 경주할 때, 또는 이 진리를 간직하기 위해 자신 속의 자연적인 생각이나 관념들을 내놓음으로 이 둘의 자리를 바꿀 때, 이를 표현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고운 모시띠를 사는 것이 된다.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던 열 처녀의 비유에서, 그들은 등잔을 사용하려면 기름을 사야만 했었다. 이는 우리가 진리의 빛 속에서 총명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선함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포획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허리띠를 숨겨 둠 (hiding the girdle)

이 예언자는 허리띠를 사서 그것을 한동안 사용하다가 바위틈에 숨겨 놓았다. 동양에 있는 관습 중 하나를 살펴보면, 어떤 이가 상대방에게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어떤 물건을 습기가 많은 강둑이나 습지에 묻어서 썩어지게 하는 행동을 취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 견해를 표현하고, 아마도 그의 소원을 그런 방법으로 나타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괴롭힌 자의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약한 자들은 이런 행동의 표시로 상대방을 나쁜 운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특이한 행동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하여 위와 같은 방법으로 쉽게 이해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바위 틈새에 자기 허리띠를 감추어두는 행동은 영적으로 자신 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자기 마음의 높은 위치에 놓아두면서 삶 속에서나 마음 속에서나 마음 속의 각종 것을 질서 속에 간직되게 묶어두는 대신 자연적 감각 부류에서 나오는 희미한 관념 속에 감추어두는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신성한 진리가 감각의 오류 안에 감추어질 때, 그 진리들의 생명력은 잃고 말아 결국은 실생활 속에서 아무 쓸모없게 된다. 게다가 감각적 추론이 더욱 남용하여 거짓으로 변하게 하고 만다.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한 이들이 바위틈에 숨어 있는 요한계시록 6장 16절도 상기해 보기 바란다. 이런 곳에 거하는 이들이란 거짓 사상에 거주하는 마음들, 그리고 영적 진리의 빛으로부터 숨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을 표현한다.

유프라테스 (Euphrates)

예레미야는 유프라테스(브랏) 강둑에 허리띠를 숨겨 두었다. 유프라테스는 가나안과 아시리아 사이에 있다. 아시리아는 추론력, 또는 합리력을 표현한다. 이 능력은 좋은 의미에서 보면, 거듭나는 합리적인 능력, 각자 나름대로 빛 속에서 영적 진리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퇴보하는 인간의 경우, 합리적인 능력은 단지 추론하는 능력일 뿐이고, 오히려 이 능력을 가지고 인간은 자연적 수준의 빛이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오류 속에서 추론할 뿐이다. 따라서 태양도 안 비치고 습한 곳인 바위 틈새에 허리띠를 숨겨 놓았다는 사실로 볼 때 유프라테스는 나쁜 측면에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무질서한 형태, 또는 외적이고 퇴보적 상태이다. 계발되지 않은 자기 추론을 신용할 때, 그는 모든 것을 잘못된 길에서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가 주님과 관련해서 사물을 보기보다 자아를 표준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 “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둠이야말로 어떠하겠느냐”는 구절을 상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마음에 흘러 들어오셔서 계발해 주시지 않는 이상, 자연적 인간은 영적 진리나 합리적인 진리를 지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 계발을 인간 속의 영적 마음을 통해 이루시는데, 인간이 자기 마음 문을 열어 영적 진리를 보려고 노력하는 만큼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 마음이 닫혀질 때, 그는 자기의 감각적 마음 안에서 살게되어 진리 측면의 것은 희미해지고 만다.
그 당시 교통 사정으로 보아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여행하는 것은 아주 먼 여행에 해당된다. 이 여행은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마음이 뒤로 후퇴하는 것, 즉 주님의 말씀이 주는 명확함에서 점진적으로 어두워지고 희미해져서 자연적 감각에 있는 오류나 거짓 속에 전적으로 감추어지고 말 때까지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 예언자가 하게된 긴 여행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고, 그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수행해 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 여행은 본문에서 한번 더 있어졌다.

쓸모 없게 된 허리띠

한번 더 있어진 여행에서 발견된 허리띠는 썩어 아무데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그 띠는 이젠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집행된 비유 속에서 얼마간의 표현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확한 진리를 가진 교리를 주셨다는 것을 자기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고, 자기들이 그 교회 속의 모든 것을 뒤엎었다는 것도 감지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이 알고 있는 또 하나는, 자기들이 주님의 길을 계속 따르고 있지 않고 자신들의 고집대로인 무질서한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허리띠는 이제 못쓰게 된 허리띠, 곰팡이 피고 썩어 뭉그러지는 형태로 유대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 자신들의 퇴보되고 있는 모습이고 그들 앞에 서서 기다리는 비참한 운명에 대한 예언의 표현인 것이다. 깨끗한 허리띠는 존경받는 부유한 사람을 표시해 주겠지만, 더럽고 썩어진 허리띠일 경우는 저질이고 퇴보적인 사람을 표시해 주게 된다. 이 상징적인 표현의 예언을 사려 깊은 유대인일 경우, 바위틈에 숨겨진 허리띠란 장차 유대인이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자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고 외국 땅에 포로가 될 것과 자기들의 국가적 위신은 추하게 되고 그들의 힘은 잃어지며, 행복은 파괴된다는 것을 미리 그려주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교회나 어떤 개인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주님에 관한 어떤 지식들, 즉 거룩한 말씀에서 주어진 바대로 계명을 삶 속에 두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이는 깨끗한 모시띠로 허리를 동이고 움직일 자유를 갖는 상태이다. 그러나 쓸모없게 된 허리띠란 어떤 개인 또는 교회가 신성한 진리에의 흥미를 잃었을 때, 또는 명백한 합리적 시야와 총명이 닫혀졌을 때를 표현한다. 이런 상태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진리가 세상과 자아만의 사랑을 즐기는 감각의 추론 속에 침수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퇴보되는 사람 속에서 신성한 법은 쓸모 없게 되는 바, 인간의 심정과 삶이 더 이상 주님과 묶여 있지도 않고 더욱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두고 씌어진 말씀 구절은 “하느님은 그의 생각 안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나를 떠나서 너희는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한다” 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 신명기 30장 17-18절에서,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 강을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미리 일러 두셨다.

비유의 실지 적용

유대인에게 못쓰게 된 허리띠를 보여 주신 후 이 비유는 그 다음 구절에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나는 그와 같이 유다의 거만과 예루살렘의 엄청난 거만을 꺾어 버리겠다. 이 몹쓸 민족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저희의 악한 생각을 굽히지 않고 멋대로 살아왔다. 다른 신들을 따라다니며 섬기고 예배하였다. 그래서 이 백성은 잠방이처럼 되어 아무 쓸모도 없게 될 것이다.”
이 메시지나 이 비유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은 힘으로 말하고 있다. 단지 우리에게는 영적인 적용만이 있다. 이는 표현적 의미보다 더 넓게, 더 멀리, 더 쉽게 그 적용이 있게 된다. 영적인 띠를 정신적인 허리에 동여매듯, 우리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붙잡아서 간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활에 그 진리를 쓰기 위해 그 진리를 깨끗하게, 그리고 쓸모있게 간직해야 한다. 영적인 진보를 하고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의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감각적 추론이라는 바위 틈새에 그의 영적인 허리띠를 숨겨 둘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 진리가 자기 마음이나, 행동들과 꽉 묶여 있어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계명에 의거 행동이라는 자연적 삶을 질서있게 함으로서 주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들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따라다녀 간섭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면 우리는 더 높고 높은 조건, 즉 명백하게 해주는 영적인 시야를 갖게 되는바, “사람의 자”가 곧 “천사의 자”를 지니게 되며, “정의가 우리 허리의 띠가 되리라.”

10
훼손된 옹기장이의 그릇

성서 본문: 예레미야 18장 2-6절

2. “너는 곧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 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일러 줄 말이 있다.” 3. 말씀대로 옹기장이 집에 내려 가 보았더니, 옹기장이는 마침 녹로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그런데 옹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내다가 제대로 안 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다시 빚는 것이었다. 5. 마침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들려 왔다. 6. “진흙이 옹기장이의 손에 달렸듯이 너희 이스라엘 가문이 내 손에 달린 줄 모르느냐? 이스라엘 가문아, 내가 이 옹기장이 만큼 너희를 주무르지 못할 것 같으냐? 야훼가 하는 말이다.”

섭리

인간의 악과 거짓 그리고 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일을 훼손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실패 뒤에라도 가능만 하면, 하느님은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의 국가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시어 또 다른 형태로 선한 결과를 산출해 내신다.

옹기장이

옹기장이가 진흙을 추켜들 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이상적인 형태의 그릇을 먼저 가지고 있다. 그 이상적인 형태를 향해 그는 진흙을 가지고 일을 한다. 그러나 그 형태가 잘못 되면,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다시 실패한다면, 진흙의 질이 허용되는 한도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를 창출해 본다. 이와 같이 주님은 신성한 옹기장이 이셔서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계시고, 이를 향해 그분은 모든 국가, 모든 개인들을 그 각각의 정신적인 진흙이 창출 가능한 한도에서 어떤 모양을 추구하신다.
인간의 몰락은 인간 그릇이라는 것이 훼손된 일반적 형태이다. 그러나 주님은 몰락된 인간을 끌어올리시기 위해 신성한 섭리를 지속적으로 행사해 오셨었다. 그래서 한가지 처방이 인간에 의해 부패되어졌을 때, 또 다른 처방이 그 인간 조건에 맞추어 설비되어져 왔다. 게다가 인간이 악 속에서 스스로 파멸되기로 작정한 듯 보이는 때 조차에서도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로서 그들에게 내려 오셨다. 즉 “인간을 사랑하시고 측은히 여기시어 주님은 그들을 구속해 주셨다.”

하느님의 생각

아주 넓은 측면에서, 모든 선한 인간의 생명이란 하느님에 관한 생각, 신성한 마음 안에서 형성된 계획, 선과 진리에 관한 그분의 영광스러운 특질을 보여주심으로 오는 이상적인 형태인바, 이 형태가 그분의 인간 창조의 활동 속에서 반영되는 것이다.
구원되는 집단, 즉 거듭나는 집단 속의 모든 남녀는 자기들을 만드신 자의 선함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는 말씀의 구절을 읽게 될 때, 이를 가장 높은 의미로 본다면, 내향적이고 영적인 천국은 거듭난 사람에게 있는 재형성이 이루어진 마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 그리고 그 마음들이 선한 일을 재 생산할 때인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그릇이요, 주님의 목적을 위해 빚어져 있는 것이고, 삶의 다양한 용도 속에서 창조물의 행복을 위한 주님의 계획을 수행해 가기 위한 그릇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모든 인간 삶을 위한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이에 걸맞게 인간을 만드시는 바, 우리가 영적으로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어떤 부분이라 해도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지혜는 오로지 주님과 협동하는 것, 신성한 이상향에 자기 인격을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비극적인 어리석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풀고 계신 것에 반대되게 일을 해 나가는데 있게 된다. 이러므로 하느님이 의도하시는 이상적인 형태, 즉 인간이 자기 안에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을 망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인 것이다.

영적인 경제

옹기장이가 비록 자기가 만들고자 계획한 그릇이 망쳐졌어도 그 진흙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그릇으로 다시 모양을 잡듯이,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망쳐 놓거나 인간 자신의 나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모든 인간과 더불어 그분의 일을 사랑으로 다시 하신다. 주님은 어떤 인간에게 대한 일이 실패된 후, 그 사람의 현 상태에서 가능해지는 영적인 그릇이 재형성되도록 추구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실패하고 잘못되어졌다 해도 우리가 가져야 할 노력의 방향은 사람다운 삶 쪽으로 최선을 다하는 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일게다. 따라서 인간 마음과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이상향이 무엇일까 라는데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산다면, 우리는 이 이상향 쪽으로 우리의 모양을 잡으려는데 자신의 실력을 늘 사용할 것이라 본다. 살림 잘하는 주부는 어떤 물품이 비록 망가졌어도 이를 고쳐 뭔가 좋은 용도에 충당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여 그 물품을 버리지 않듯이,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자신의 처지를 가지고도 어떤 선용을 발견할 수 있고, 자기 체험에서 온 모든 여건을 어떤 선을 창출하는 쪽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시점에 우리가 이미 당도해 있다 해도 다시 자신의 인격을 형성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한, 또는 악과 죄로 고정되고 굳어져 있지 않는 한, 망쳐진 우리 삶이라 해도 모델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올바른 결과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설비해 두신 모형 외의 어떤 다른 모형을 만들려고 일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모형에 협동하지 않는 한 그 노력은 쓸모없게 된다.

이상적인 형태

어떤 이가 이렇게 물어 올는지 모른다. “인간을 위한 신성한 이상향이 무엇이 있었으며,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상적인 형태는 말씀 속에서 다각적인 방법으로 주어지고 있고, 인간 역사를 통해서도 밝혀져 있다. 이 형태는 각기 다른 처방으로 이어진 교회 속에서, 그리고 사람의 총명의 수준에 따라서 인간에게 와졌다. 아주 수준이 낮은 인간 조건에서까지도 이 형태는 십계명 안에 와 있었고, 모든 사람은 아주 적은 형태로나마 실제적으로 이 형태를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세대가 한참 지난 후, 이 형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삶 속에 특별히 와져서, 복음서의 모든 가르침 안에 수록되어 있다.
지상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은 그분 자신과 그분 인격, 그리고 그분의 일을 밝히 알게 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에게 그들이 해야 할 부분을 하도록 명령하셨는데, 이는 신성한 표준에 의해 인격을 형성하라는 말이다. 표준 중에서 가장 큰 표준이라면, 그것은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성하고 무한하나,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며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지는 근본되는 이상적인 형태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신성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에덴에서 밝혀진 이상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세대를 통해 반복되어 왔다. 게다가 기독교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더 높은 이상향을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믿음이라는 단순함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더욱이 그분의 재림 속에서, 하느님은 그분의 영적인 양상(aspect)을 그분 스스로 밝히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영적 양상 안에서 인간다운 것을 이해 가능하게 해주셨던 것이다.

악에 저항함

인간의 몰락이 더 낮은 조건 속에로 내려갈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재형성시켜 주시기 위해 조건을 개조해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보다 나은 조건에로 인간이 되돌려지도록 인도하시는 실제 방법을 언제나 준수해 가고 있다. 이런 준수 속에서 인간이 개혁되어지는 정도 보다 더욱 명료한 진리의 이해를 주님은 인간에게 결코 요구하지 않으셨고, 단지 각 단계마다 요구되는 것은 주님에게 되돌아가는 것, 인간 속의 악한 바램에 저항하라는 것,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에게 보여진 악들을 멀리 하라는 것 등이다. 각 단계의 시작에서 인간은 악을 행함을 중단하고 계명을 지키라는 것인 바, 이 정도의 요구 사항은 각자의 지식과 총명이 있는 한도라면 인간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있어지는 하느님의 이상적인 형태에로 인간은 일을 해 왔고, 하고 있는바, 이상적인 형태에의 도달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각자 수준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적인 자기의 인간 됨을 다시 형성시키는데 진일보하는 방법이 되어 왔다. 우리들 수준이 어떠하든, 내 환경 조건이 어떻게 되어 있든지간에, 우리가 악을 보고 아는 대로 그 악을 중단하며 계명에 순종해 간다면, 신성한 옹기장이는 우리들을 뭔가 쓸모 있는 그릇으로 형태를 잡아 주시어 그 그릇 안에 각자 수준에 걸맞게 천국에 있는 것을 담을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인격

뭔가 쓸모있는 그릇이 되어 간다는데 대한 실제의 결실은 인간의 삶과 운명이라는 것인데, 이것들은 각자의 환경이 어떠하느냐가 아닌 인격이 어떠해지느냐에 관한 문제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주님은 정말 받들기 힘든 공사장의 감독 같은 분이 아니시다. 게다가 인간의 부족함과 실패라는 것을 가지고 벌하시려고 기회를 노리시는 분은 더욱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요, 우리의 실패를 통해 돕고 계시고, 주님의 인도 하에 다시 도전해 보라고 격려하시면서 우리 곁에서 맴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모든 노력은 인간을 저주하는데 있지 않고 구원하시는데 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 하고, 영적 죽음에로 인간이 빠지려는 것을 방치해 두시는 분이 아니다.

11
깨진 옹기장이의 그릇

성서 본문: 예레미야 19장 1,2,10,11절

1.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지그릇을 하나 사가지고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 몇 사람과 사제 몇 사람을 데리고 2. ‘옹기 대문’ 바로 밖에 있는 벤힌놈 골짜기로 나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줄 말이 있으니, 너는 그 말을 외쳐라.”
10. “이렇게 말하고는 같이 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 그릇을 부수고 11. 일러 주어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옹기그릇이 부서져 다시는 주워 맞추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이 백성과 이 도읍을 그렇게 부수리라. 마침내 사람 묻을 자리가 없어 이 도벳에마저 무덤을 쓰게 되리라.’”

그릇이 깨어짐

만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여, 죄 가운데 살고, 하느님의 경고를 소홀히 하면서 하느님의 인도와 가르침에 저항하고 선함보다 악을 더 선호한다면, 이런 사람은 악한 인격 속에 심정을 확증시켜 뿌리박는 것이 된다. 그러면 신성한 옹기장이의 손에 의해서도 더 이상 빚어질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고 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아 사랑이라는 불로 자신을 이미 구워서 더 이상 어떤 틈을 허용치 않게 된 것, 그들에게 있어야 할 탄력성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그릇, 이 사람이 깨어질 때, 그 그릇, 그 사람은 전체적으로는 다시 만들어질 수 없다.
이와 같이 굳어진 인간으로부터는 신성한 옹기장이도 어떤 쓸모 있는 그릇을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어떤 인도하심에도 저항했고 영구적으로 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이와 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말한다면, 좋은 데에 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기술자조차도 어떤 좋은 것으로 그 인간이 재 모델이 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심정과 삶 속에 지옥이라는 것을 형성시켰고 그 안에 거하기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비유의 문맥이 연결되는 점을 보면, 본문은 확증된 악 속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 관계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 나라에 부패되지 않은 나머지라도 있어 선함을 담을 여지가 있는 한, 그들은 옹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도 같이 주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인격 조건에로 다시 형태를 잡아 개혁될 소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나머지라도 있는 조건에서는 주님은 그들을 큰 시련, 가뭄, 전쟁, 염병, 급기야는 포로로 잡혀가는 시련까지 다 동원시켜 목이 굳어진 이 백성들을 개혁하려고 추구해 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는 내향적인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같은 조건 속에 있는 전 시대 모든 이의 인격에 적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단지 교회라는 조직뿐만이 아니고 인간 속의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더 뾰족이 말하면, 인간 마음속의 내향적인 교회, 즉 인격과 삶을 형성시키는 마음 속의 원리들을 표현한다.

저주

본문에서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처벌이 공포되고 있는데, 이는 수세기 전 모세에 의해 공포된 저주와도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우리는 주시해 두어야 한다. 이런 저주들은 표현적 의미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이 저주들은 인간의 거듭나지 않은 마음 부분 안에 거주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에 적용되고, 이런 원리를 흠모하는 인간에게 떨어지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어느 인간도 저주하시지 않는다. 설사 그 인간이 악하다 해도 저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개혁과 거듭남에 의해 어느 인간이라도 구원하시려 애쓰신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그 이유는 영적 생명을 파괴하려드는게 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악을 사랑하는 이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지옥을 형성하는바, 이 지옥으로부터 구원되려면, 모든 인간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개혁되고 거듭 나는 것이라는사실을 우리 마음에 확실히 못박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그릇

“너를 깨끗이 하라. 깨끗한 네가 여호와의 그릇이다.” “여호와의 그릇”이란 인간의 심정과 지성이다. 이것이 쓸모 있는 그릇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이것이 천국적인 사랑과 천사 같은 인간에 속하는 영적 총명을 담고 있다. 이것을 담고 있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능력을 다 사용해 가야 한다. 사실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심정이나 지성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정과 지성을 악하고 거짓된 것들로 채울 어떤 영적 권리도 가진게 아니다. 한마디로, 악과 거짓으로 주님의 그릇인 심정과 지성을 망쳐 놓을 권한이 없다는 말이다. 악과 거짓들은 인간다움 안에 있는 그분의 형상을 파괴하고 있다. “선한 자의 거듭나는 단계는 여호와에 의해 순서가 잡혀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질서 속에 있음으로 기뻐한다. 비록 그에게 잘못이 있게 되었다 해도 그는 지옥에 던져질 정도까지 빠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그의 손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12
무화과 두 바구니

성서 본문: 예레미야 24장 1-2절

1.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유다의 고관들과 은장이, 대장장이들을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데려 간 뒤였다. 하루는 야훼의 성전 앞에 무화과 바구니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을 야훼가 나에게 보여 주셨다. 2. 한 바구니에는 맏물처럼 썩 좋은 무화과가 담겨져 있었고, 다른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이 썩은 무화과가 담겨져 있었다.

운명

내향적으로 선한 사람들은 자연적 삶의 시련이나 영혼이 시험을 만나게 될 때 참고 견디어 자신을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여 천국적인 인격을 발달시켜 간다. 반면, 주님이 허락하시는 훈련을 피하려 들고 그 훈련에 반발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신 만만해함 속에 오히려 자신을 묻히게 해서 결국 자기들의 악으로 자멸하고 만다.

글자상의 이야기

서기 약 600년 전 경,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었다.
그 당시 유다의 왕 시드키야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특사를 보내 여호와께서 거룩한 성을 적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당신들은 이 백성에게 야훼의 말씀이라 하며 이 말을 전하시오. ‘내가 살길과 죽을 길을 너희 앞에 내어놓을 터이니 너희는 그중 하나를 택하여라. 이 성안에 버티고 있다가는 칼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서 너희를 포위하고 있는 바빌론 군에게 항복하면 살 것이다.’”
이리하여 예루살렘 백성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갈라졌다. 즉 주님의 말씀을 받아 바빌론 군에 항복하는 이들과 예언을 거절하여 예루살렘에서 여전히 버티는 이들로 갈라졌다. 그리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백성들 중 더 나은 부류는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이고, 더 나쁜 부류는 더 나쁜 운명을 위해 고국에 남게되는 자들이라고 보았다. 포로가 안된 백성들이 자기들은 포로로 끌려간 백성보다 운이 더 좋다고 상상할 것은 어쩌면 당연할는지 모른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예언이라는 신성한 말씀으로 그들 상상과는 반대되는 국면, 즉 포로들은 결국 예루살렘에로 귀환해서 번영할 것임을, 그 반면 남아서 포로가 안되려고 저항하는 이들은 해외로 흩어지게 되고, 전쟁, 기근, 염병 같은 시련을 더 당하게 될 것을 보여주었다.

비유

이러한 것들이 본문의 비유와 그 앞 뒤 문맥에서 표현되고 있다. 즉 “하루는 야훼의 성전 앞에 무화과 바구니 두개가 놓여 있는 것을 야훼께서 나에게 보여주셨다. 한 바구니에는 맏물처럼 썩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이 썩은 무화과가 담겨져 있었다… 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나는 유다 사람들을 이곳에서 바빌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아 주리라. 잘 보살펴 이 지방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헐지 않고 세우며, 뽑지 않고 심으리라. 나를 알아보는 마음을 주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나 야훼인줄 알게 하겠다. 그리하면 이 백성이 진심으로 나에게 돌아와 내 백성이 되고 나도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그러나 유다와 시드키야와 그의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국내에 남아 있는 자나 에집트로 망명한 자는 썩어서 먹지 못할 무화과 같이 만들겠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려 세상 만국이 보고 놀라 넘어지게 하겠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쫓겨다니며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희롱거리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쳐서 모두 없애 버리고, 선조 때부터 살도록 내어 준 이 땅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하게 하리라.”

무화과

글자로만 생각한다면, 비유의 무화과와 유대인의 두 부류 사이에 어떤 연결 관계가 있는듯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결은 영적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무화과란 자연적인 선함, 즉 행동에 있는 선함인바, 이는 하느님의 법에 순종하는 가운데 있는 선함을 표현해 준다. 선한 자는 마음 속으로 선한 원리를 사랑하여 그의 실제 삶 역시 선하게 꾸리는 이들이다.
무화과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언제나 행동의 품질을 표현하여 선한 것은 선한 사람과 더불어, 나쁜 것은 나쁜 사람과 더불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진리에 관한 영적 총명은 포도로, 주님에 대한 천적 사랑은 올리브로 표현되고 있다. 무화과는 행동 또는 삶 속의 자연적 선함에 관계가 있는바, 이는 인간의 의지 또는 심정에 관한 상태를 언급해 주게 된다. 선한 자는 그 심정 속의 선한 창고로부터 선한 것을 산출하고, 악한 자는 악한 창고로부터 악한 것을 산출한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알 수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유에서의 무화과 두 바구니는 인간의 두 반대되는 부류, 즉 인격이 발달할 때 있어지는 선과 악을 표현했다. 썩 좋은 무화과는 맏물(first ripe)처럼 매우 좋았다고 말해지고 있다. 첫 수확물인 초기의 무화과는 아주 맛이 좋은데, 그 이유는 그 과일의 풍미 때문이다.

성전

무화과의 풍미뿐만 아니라 첫 수확인 이유로, 맨 처음 익은 무화과는 성전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왜 이 무화과가 성전 문 앞에 놓여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주님의 지시에 의해 과일과 포도주, 기름과 곡식의 첫 수확물은 성전 예배에서 주님께 바쳐졌었다. 이렇게 첫 수확물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그래서 첫 산물을 거두게 될 때, 이러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 축복임을 인정하고 즐기기 위해 큰 축제가 있어 왔다. 이로부터 주님께 특별히 바쳐지는 첫 무화과는 일상생활 안에 있는 선한 상태를 표현했다. 이런 삶 속에서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동하고 주님의 원리에 따라 자기들 삶을 꾸렸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비유에 있는 좋은 무화과는 맨 처음 딴 잘 익은 무화과 같았던 것이다. 표현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성전에 각자의 일상 생활에 있었던 행동들을 갖다 놓게 된다. 그 이유는 진짜 인격, 또는 삶의 품질은 우리 행동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런 행동들을 수단으로 우리는 자신의 사랑의 품질과 예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가지 측면에서 주님의 성전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성이신 바, 그 인간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그 인간성 속에서 우리는 그분을 이해하며 예배하는 것이다.
좋은 무화과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인간성인 성전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만 천국이 형성되어진다. 포로된 유대인들이 고된 훈련을 계속 통과해야만 되었지만 결국 그들은 거듭남에 진입해서 천국으로 인도된다. 그들의 심정과 생활은 맏물 무화과의 영적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썩은 무화과는 악 속에 있는 이들, 악을 사랑하여 실지로 사용한 바,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이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다. 영적으로나 표현적으로나 그들은 먹을 수 없이 썩어진 무화과인바, 그것들 속에는 어떤 선함도 없이 부패되어 있어서 거듭나는 마음에 의해 음미될 수 있거나 거듭나는 마음과 융화될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심판

유대인이 두 부류로 갈라짐은 심판에서 악한 자와 선한 자의 갈라짐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분리는 집합체로서의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고, 개인적으로는 각자의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데, 이럴 경우, 마음속의 선함은 그 속의 악한 경향성에서 분리되어 보호되고 발달할 때 있어진다.
이러한 정신적인 분리 속에서 선한 원리들은 자연적인 생각들을 성가시게 하는듯 여겨지지만 결국 거듭나는 사람의 고향이요 영적인 출생지인 천국 조건의 탁월함을 열매맺어 준다. 그러나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려는 마음, 주님의 예언을 듣고서도 계속 악쪽으로 고집하는 마음은 결국 거듭나는 마음으로부터 분리되어 항구적으로, 완전히 흐트러지고 만다. 그래서 마음이 거듭나는 인격으로 강하게 성장할 때, 이런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들은 결국 “욕을 먹고 희롱거리 조롱거리”라는 것밖에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영적으로 그런 경향성들은 칼과 기근, 염병을 만나 그 땅에서 모두 사라지고 만다. 즉 그들 자신의 악과 거짓 교리로 인해 자멸되고 만다는 말이고, 따라서 그 속에 생명이 없고, 그들의 삶은 악한 영향이 뿜는 독에 중독되고 만다는 말이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천국적 삶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고, 사악한 자는 악에 의해 살해당해 영적 죽음에 던져진다.

실제 응용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선을 위해 바빌론 땅에 보내셨던 것과 같이, 주님은 그분의 슬기로우시고 사랑하시는 섭리 속에서 우리가 참아 내기 매우 힘든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경험들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신다. 이런 허용은 모두 다 우리의 선을 위한 조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을 신성한 섭리의 인도와 허용의 법칙으로 받아서 그런 시련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하려 하는 선을 포획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여 순종하는 경험을 많이 가진 이들이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걷고 있는 당사자가 그의 발걸음을 지휘하는게 아니다는 것, 오히려 선한 이의 발걸음은 여호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 그래서 비록 자신이 밑으로 떨어졌다 해도 자신이 내동댕이쳐지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여호와가 그 사람의 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아는 선한 사람은 자기 체험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외친다. “저는 고민해 보지도 않고 당신을 저버렸지만, 이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제가 괴로움을 받음으로 당신의 규례를 배우게 된 것, 저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입니다.”
우리 속에는 한편은 좋고 한 편은 나쁜 두 명의 남자, 또는 여자가 있는데, 이것이 본문에서 무화과 두 바구니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속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억눌러 질 수 없는 분투가 존재하고, 그중 어느 것이 통치권을 장악하도록 우리가 결정할 때까지 싸움은 상존한다. 그리고 이 둘은 항구적으로 함께 남아 있지도 못하고, 서로 협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어느 하나가 반드시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다. 우리 각자는 어떤 것을 주인이 되게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자신 스스로 답해서 결정지어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가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인격과 운명을 결정짓는다. 고로 우리의 거듭남은 각자의 정신적인 이스라엘이 크게 동요하게 만들기도 하고, 각자의 삶에 큰 위기를 갖게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감각적 삶에 포로 되어 있었던 영에 속한 것에 자유를 갖게 하는 동시에 악한 경향성을 흐트리고 몰아낸다. 거듭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질문일 것이다.
위의 말들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자신 스스로의 물음은 이러할 것이다. “나더러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으라는 말인가?”, “세상적 삶을 갖기 위해 나더러 무엇을 하라는 얘기인가?”, “어디서 살아야 되는 건가?”,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런 물음보다 한 수 높은 질문도 떠오를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건가?”, “나의 인간다움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이런 스스로의 물음에서 있어야 할 것은 비유에 있는 환상, 무화과 두 바구니를 여러분의 정신적인 눈앞에 붙잡아 볼일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되물어서, 두 바구니 중 어느 바구니가 당신의 진짜 삶, 당신의 인간다움의 품질이 담긴 바구니인지, 당신의 운명의 추세는 어느 바구니에 해당되는지 점검해 보라. “한 바구니는 썩 좋은 무화과를 담고 있다… 다른 한 바구니에는 먹을 수 없이 썩어 버린 무화과 였다.”

13
예레미야의 멍에와 끈

성서: 예레미야 27장 2,3,6절, 28장 1,2,10,12,13절

27장. 2.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로 멍에를 만들어 가죽끈으로 목에 메어라. 3. 에돔 왕과 모압 왕과 띠로 왕과 시돈 왕이 유다 왕 시드키야에게 보낸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지 않느냐? 너는 그들에게 내 말을 일러 주어, 본국의 왕들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6. “이제 나는 이 천하를 나의 종인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맡겨 부리게 하였다.”
28장. 1.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다. 때는 시드키야가 유다 왕이 된 지 얼마 안 된 제사 년 오월이었다. 기브온 사람 아쭈르의 아들 하나니야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는 야훼의 성전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시는 말씀이오. ‘나 야훼는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10. 그러자 예언자 하나니야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메었던 나무멍에를 목에서 벗겨 부수었다.
12. 예언자 하나니야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멍에를 벗겨 부순 후에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너는 하나니야에게 가서,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너는 나무멍에를 부수었지만, 나는 그 대신 쇠멍에를 만들겠다.’”

보호하는 섭리

진리를 지각하여 인정하면서 빛에 반대되는 죄나 악 속에 푹 빠지는 것보다는 아예 진리를 모르는 무지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퇴보하는 인격을 위해서는 더 낫다.

글자적 이야기

오늘 본문과 그 전후의 문맥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매우 곤란했던 시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시대의 사제와 통치자까지 포함하여 그들 대부분은 신성한 것을 고백하지만 피상적으로 간주했고, 아주 감각적인 상태로 침몰되는 타락의 시대 속에 휘말려 있었다. 이기적인 세상욕의 영이 거의 모든 이, 모든 계층에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백성들 일부는 이미 포로로서 바빌론에 끌려갔고, 이제 다시 갈대아의 대 군사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두려움, 의혹, 불 신뢰, 자포자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좋지 않은 것이 그들 주위에 잔뜩 깔려 있었다. 양식은 거의 없어졌다. 군사력도 거의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과거 갈대아군이 자기들을 패배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안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 나쁜 상황은 백성들이 두 패로 갈라진 것이다. 한 패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자는 것이고, 다른 쪽은 계속 저항하면서 에집트와 연합해서 갈대아인과 싸우자는 것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여호와의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목소리를 돋구어 갈대아인에게 항복해서 평화적으로 바빌론에 끌려가 이미 거기 가 있는 동료 백성들과 합류하는 것이 지금 같은 참혹한 전쟁을 치르려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고 어차피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전보다 더 처참한 성의 파괴와 여호와의 성전 파괴를 당하기 보다 더 낫지 않으냐고 백성을 설득했다.

하나니야

예언자 수련생의 하나인 하나니야가 나서서 항복을 반대하고 전쟁을 선호하는 쪽에서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명령으로 예레미야는 예언을 반복하면서 본문의 비유를 가지고 하느님의 방침을 강조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멍에와 끈을 만들어 자기 목에 매고 이방인들의 왕에게 그것을 보내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복종하라고 권유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예레미야는 많은 유대인들, 특히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시드키야 왕에게 그들이 생각해 볼만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하나니야는 예레미야의 조언을 뒤엎었는데, 특히 시드키야 왕에 대한 영향력을 뒤엎었다. 하나니야는 자기가 주님의 성전에서 예언하도록 불렸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유대인들은 갈대아인들에 저항하고 물리쳐야 한다고, 더욱이 포로가 되어 가 있는 유대인도 머지 않아 예루살렘에 귀환한다고, 그들과 더불어 과거 갈대아인들이 강취해간 여호와 성전의 거룩한 집기들도 되돌아 올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이 거짓 예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니야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 부수었다. 이 멍에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예레미야가 예언할 때 걸친 것들이다.
하나니야의 이런 행동은 신성을 모독하는 짓이었다. 그 이유는 그 행동이 여호와께서 인정한 예언자를 무시한 것이요,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진정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내려와, 하나니야가 예언이라고 주장한 것이 거부되도록, 거짓을 진짜 예언인 냥 현혹한 대가로 그는 곧 죽게 될 것이 예언되었다.
이상의 글자적 이야기는 두 예언과 그 속의 의미에 날카로운 대비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영적 의미

오늘날 우리는 위의 이야기 속에 있는 영적 의미, 특히 각자의 개인 생활에 응용될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주님 말씀 속의 영적 의미는 언제나 우리의 내향적 삶 속의 것에 응용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위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의 내향적 세계에 있는 광경들임을 살펴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우리 속에서 의미하는 것을 살핀다.

속박 (captivity)

본문에 흐르는 중심 요점은 포로됨, 즉 속박된다는 것에 있다. 멍에와 끈은 속박되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자연물일 것이다. 선한 사람에게 정상적인 조건이라면 그것은 자유이고, 그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속박(포로됨)은 자유가 제한되어, 행동에 한계를 주고 생각과 애정을 감금당하게 한다.
자연적인 속박에는 이런 두 종류도 있을 것이다. 즉 자발적인 속박과 비자발적인 속박이다. 어떤 이가 자신의 어떤 목적을 성취해 가는데 있어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속박에 자신을 스스로 한정시키게 된다면 이는 자발적인 속박일 것이다. 그러나 비자발적일 경우의 속박이라면 , 그것은 그가 사회법을 깨트렸을 때 그를 강제로 제한하는 때이다. 영적 속박도 이와 유사한 구별을 가진다. 거듭나는 사람이 상호적인 사랑이라는 묶음(속박)으로 자신을 주님과 이웃사랑이라는 데에 한정시킨다면, 이것은 자발적이요 그 자신이 기뻐하는 일이 되어 이 속박은 사실상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가장 큰 충만함과 자유를 제공받게 된다.
그러나 퇴보되는 사람은 자신들에게 밉살스럽게 보이고 역겨운 법에 의해 속박된다. 이 속박은 그들의 바램과 계획, 그리고 행동을 엄격히 제한시키고, 그들이 이 속박을 깨트릴 경우, 그 댓가로 더욱 격리되어 더 손해를 본다는 두려움으로 통치 받게 된다. 퇴보되는 사람에게 있게 되는 속박은 억제하는 수단이요, 영적인 속박이다.
인간이 선함을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하지 않을 때, 그는 벌이라는 두려움에 속박될 수밖에 없다. 신성한 진리를 거절하는 모든 마음은 결국 거짓 원리들에 포로가 되는 지경에 빠지게 되고, 이 상황은 마음의 문을 닫아걸어 영적 어두움에 처하고 만다.
영적 진리를 명백하게 지각했음에도 심정으로는 그것을 싫어하여 일상생활에서 그 진리를 모독하는 것보다, 차라리 영적 진리를 아예 모르는 채 있는 것이 당사자의 구원을 위해 더 나은 때가 있다. 교도소라는 사회 체제는 일반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범죄자 자신을 위해 더 나은데, 그 이유는 수감자로 어떤 제한을 가해서 불순종에 대한 처벌이라는 더 엄격한 제한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범죄자는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서 어느 정도까지라도 방어되게 해준다. 만일 그에게 자유를 계속 허용한다면, 그는 더욱 더 많은 범죄에 빠져 끝장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영적 사항에도 비등하게 존재한다. 범죄자 속의 선이 보호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라는 속박이 필요하다. 이 속박이 본문 비유에서 표현되는 중심 요점이다.
자유로운 사람 또는 국가가 포로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 속의 애정이나 생각의 수준이 더욱 낮아져 삶의 표준 역시 하위에 머무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본문 시대 때의 유대인들은 최악의 정신 상태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이 상태의 그들에게는 포로가 되는 것이 그들을 위해 최상의 방법이다. 그들이 포로가 되면 어떤 제한 아래에서 살아야 될 것이고, 그 삶은 그들 속의 끈질긴 자만심을 깨트려지게 해서 더 많은 악과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우월감의 이기적인 자연적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빌론

바빌론은 권력과 자만심, 그리고 학식의 큰 중심이었다. 그러나 바빌론의 삶이나 학식은 자연적 감각에 속한 것이요, 자연적 마음의 수준에 머물 뿐이었다. 거기에는 영적인 것에 관한 지식은 없다. 그들의 권세, 영예, 화려함은 육에 속한 것, 세상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바빌론은 인간 본성 중에서 외적이고 감각적 측면을 표현한다. 특히 의지나 심정에서의 감각적 측면인바, 그들의 예배는 외적이고 형식뿐이지, 거기에는 영에 속한게 없다.
따라서 바빌론 군대 앞에 나가 항복한 유대인은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교인이 타락하는 과정에 진입된 상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지 속으로 빠져 들어 결국 자연적 마음 수준에서 느끼고 생각하는데까지 자신이 몰입되게 허용된다. 이래야만이 그 사람으로 더 이상 영적 빛에 반대되어 죄를 범하는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남아서 버티는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을 인정하고 그 지식 속에 머무르면서 더욱 악한 삶에 침몰되는 상태를 표현한다.

기회

물론, 어떤 사람이 스스로 정신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악한 습관을 깨트리고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제한시켜 간다면, 그는 영적 예배의 따스함과 영적 진리의 빛 속에서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은 그로 하여금 영적 무지 가운데 빠지도록 허용하시어 그를 보호하신다. 사랑하시어 보호해 주시려는 주님의 섭리는 각 인간이 현재 달성 가능한 최상의 조건에 관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각 인간이 지옥의 어떤 형체에로 몰락되는 것보다는 비록 가장 낮은 천국이라 하더라도 그를 그곳에로 인도하시는 것이 그를 위해 더 낫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든 영적 생명은 제 아무리 적다 해도 주님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시려 애쓰신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악화된 경우, 그 사람이 천국의 어떤 형체에로도 구원되어질 수 없는 현재 상황이라면, 게다가 더욱 자기 심정에 지옥을 더 만들어 가는 형편이라면, 그 사람이 수긍해서 인도되어질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지옥에로 가는 것을 허용하신다. 근대 개혁 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경우, 위와 같은 신성한 방법들로부터 자신들이 실제화한 방법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아주 흔한 경우는, 그들이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인간이 도달 가능한 최고의 상황을 그들 마음에 확정해 놓고 개혁이 필요한 모든 이로 그 지점까지 도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처 따라오지 못할 경우, 그를 최악의 악한 상태에 침몰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경우를 초래하고 만다. 이런 방향을 강행하다 보면, 개혁하려는 당사자가 사다리에 발을 들여놓는 최소한의 수준에라도 닿을 수 있게 섭리하시는 주님의 방법을 지연시키는 경우도 발생된다. 광대한 주님의 섭리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높은 수준이나 표준에 도달하라고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자가 갈 수 있고 기꺼이 가겠다고 하는 만큼까지 인도해 주신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근대 개혁자들이 불가능이라고 포기한 많은 이들을 결국 구원해 주신다.

훈련

그러나 주님은 각 사람에게 꽤 유용해질 수 있는 영적 훈련을 주고 계신다. 주님이 허용하시는 모든 훈련, 그것은 영적이든 자연적이든 우리의 인생 결산에서 남아 있게 될 우리의 선을 위해 허용하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분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이에게는 자비와 진리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허용하신 훈련을 더 충분히, 자유롭게 받아, 그 훈련에서 더 연단된 선을 받는다면, 주님은 더 많은 선을 우리의 인격과 행복을 위해 해주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게 닥치는 훈련을 거절하고 게다가 반항까지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도달 가능하도록 더 고된 훈련을 허용하실 수밖에 없게 된다.
본문과 그 전 후 문맥에서 기록된 바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위의 말에 대한 실 예이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나무 멍에 메기를 거절한 그들에게 나무보다 더 차고, 더 무겁고, 더 고될 뿐인 쇠 멍에를 그들 스스로 자초했음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무와 철

나무는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데, 이를 반대의 의미에서 보면 자연적 악을 표현해 준다. 철은 자연적 진리와 글자적 진리를 명시하는바, 그 진리가 왜곡되면 자연적인 거짓을 표현하게 된다. 나무 멍에를 멘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타락하는 우리 속의 애정들이 자연적인 악의 지배하에서 사랑을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쇠 멍에를 멘다는 것은 우리의 악들과 반대되는 글자적인 진리들과 대결하는 상태에 있게 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악에 대한 강력한 제제수단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철에 속박된다는 것은 참아 내는 정도가 나무로 속박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 이유는 우리 심정이 글자적 진리에 동조하지 않는 데도 우리의 이해성은 그 진리를 빤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란 상태로 빠지는 바 더 힘든 고뇌를 겪게 된다.

두 예언자

진정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두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힘을 겨룸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의 진리와 자아에서 나온 관념들이 서로 진짜 진리라고 하면서 마음에 터전을 닦으려 다투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구약 히브리어인 하나니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인 신약에 등장하는 이름, 아나니야(사도행전 5:1-10)와 같은 바,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니야는 거룩한 성전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한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재빠른 죽음을 자초했다. 그는 그 당시 시대의 특별한 거짓말쟁이로 주님에 반대되는 거짓말을 성전에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말로 죽어 버린 아나니야도 비슷한 상황이다. 죽은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의 영을 시험해 보는 가운데 신성모독이란 죄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해대는 자아 사랑의 영을 표현하는데, 이 영은 거듭남의 큰 방해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유일한 안전도로는 신성한 인도를 따르는 것, 그분이 무엇을 지시하든, 그분은 현재의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갖도록 인도해 주심을 알고, 그분께서 최상의 것을 향해 설비하시어 허용하시는 수단을 통해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뿐이다.

14
포장된 광장에 돌을 묻다

성서 본문: 예레미야 43장 8-10절

8. 다흐반헤스에서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9. “큰 돌을 몇개 가져다가, 다흐반헤스의 파라오궁 대문 앞 포장된 광장을 파고 유다 사람들만 보는 앞에서 묻어라. 10. 그리고 나서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하는 말이라고 하며 유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개요

자연적 감각 속의 거짓인 오류들은 타락한 마음을 이기적인 심정 속의 악에서 보호해 줄 수 없다.

글자 이야기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 백성의 대부분을 끌고 갔을 때, 그 왕은 유다 왕국 내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소출을 거두도록 일부 가난한 자들을 남겨 놓았었다. 그리고 바빌론 왕의 명령을 받도록 게달리야에게 잔류민을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한참 후, 유대인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과 그의 부하들이 게달리야를 살해했다. 그 뒤 그들은 바빌론 왕의 보복이 두려워 많은 유대인을 사로잡아 암몬땅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요하난과 그의 부하들은 군대를 이끌고 이스마엘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가던 사람들을 되찾고 이스마엘은 암몬땅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요하난과 그의 부하들 역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에집트로 가기로 계획하면서 여호와의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상담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에집트로 가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그들이 고집 부려 에집트로 갈 경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나는 적과 똑같은 적을 그곳에서도 필히 만나 죽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에집트에 가기로 작정한 이 사람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 붙였다. 그리고 에집트로 향하면서 예레미야까지 강제로 데리고 갔다.
이쯤에서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고, 그 장소는 다흐반헤스이다. 다흐반헤스는 팔레스틴의 남쪽 경계요, 고센지방의 남쪽 한계쯤에 있는 에집트의 큰 도시로서 각기 다른 시대 때, 벳세베스, 또는 온, 또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기도 한 도시이다. 이곳은 에집트인의 학식과 예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곳은 태양의 집 또는 큰 신전이 있기도 한 곳이다.
그런데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 파묻어 놓은 돌 위에 옥좌를 차리게 하고 이 큰 도시 다흐반데스에 있는 파라오의 궁전과 그곳의 신전을 부수고 에집트를 말끔히 털게 하리라고 말해지고 있다.

암시해 주는 것들

본문과 같은 예레미야의 행동은 유대인들에게 과거와 미래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보도록 했을는지 모른다. 본문의 광경은 아주 오래 전 히브리민족이 에집트에 속박되었었던 모습이었다. 벽돌은 그들 선조에게 에집트 파라오가 짚도 주지 않으면서 단단한 벽돌을 대량으로 구워내도록 명령한 강제 노동을 암시해 주었을 것이다. 과거 에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큰 사실은 장차 여호와에 의해 있게 될 또 다른 구원의 희망을 말하고 있기도 한 것을 눈치채게 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역사를 참작할 때 그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에집트에 상주하려는 것을 주저하게 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요셉의 시대 때에 그들은 에집트에 자발적으로 갔지만, 여호와에 의해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하기 전 그들은 잔인한 속박 속에 묶여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들의 끔직한 적, 바빌론 왕이 에집트와 팔레스틴 사이의 경계인 다흐반데스에까지 와서 그의 보좌를 차리게 된다는 것이다.

영적 의미

이스라엘족을 위해 교회가 세워진 곳 가나안 땅, 팔레스틴은 영적 인간, 또는 인간 안의 영적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에집트는 자연적 인간 또는 인간 안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타락하는 자연적 마음은 자연적 감각이라는 어둠 속에서 영적 진리의 빛도 없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에집트로 내려간다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영적 진리와 분리되어 자연적 감각이라는 평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은 거듭나는 사람을 위한 고향이 못된다. 이런 상황은 삶의 여정 중 초기 단계에 거치는 임시로 체류하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님의 법을 생각하기를 그 법은 너무 엄격해서 따르기에 힘들다고 말할 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감각 앞에 나타나는 외관에 따라 생각하기 시작하고, 신성한 가르침을 무시해 가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는 인간이 타락해 가는 상황이요, 인간의 자연적 감각을 표징한 뱀의 소리에 경청하는 이브이다. 뱀같이 낮게 기어다니는 생명, 자연적 감각은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에집트에서 뱀을 높이 평가해서 숭배하기까지 한 것은 에집트의 상응성을 고려해 볼 때 합당한 결과일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밝혀지는 진리에 자신의 자연적 감각을 증거로서 갖다 대며, 감각성에 비중을 더 두게 될 때, 우리는 고대 유대인 같은 위치에 서고 마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지 않은 이들을 두고 “거만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다. 거만한 자란 신뢰를 주님에게 두지 않고 자신에 두는 이들을 말한다. 오늘날의 거만함, 자아 총명 역시 위와 유사한 영적 결과이다. 하느님의 법칙은 지키기에 너무 무리한 요구인듯 싶어 자기 감성이 주는 확신에 기대려 물러 선다면, 막상 걱정했던 악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 오히려 그 악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진로를 막고 점거해 버린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악에 잘 기우는 경향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악들은 우리에게서 절대로 멀리 있지 않음을 언제나 되새겨야 한다.

바빌론

위의 악은 에집트까지 뒤쫓아와 유대인을 사로잡는 바빌론 왕으로 의미되고 있다. 바빌론이란 의지, 심정 측면에서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오늘 본문의 경우, 바빌론은 교회를 파괴하는 악한 자연적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바빌론 왕이란 타락하는 자연적 의지를 좌지우지 해 버리는 거짓 원리를 말한다. 그리고 에집트는 이해성 또는 지성 측면에서의 자연적 마음, 자연적 감각 속의 오류를 가지고 생각하는 지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바빌론이 에집트를 정복했다는 것은 감각 속의 거짓이나 오류를 수단으로 자연적인 악한 사랑이 마음을 정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정복되는 이유는 거짓은 악한 바램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짓이나 악한 바램은 둘이 협력하여 주님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맞서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이 에집트에 합류한 다음, 바빌론이 에집트를 정복하는 가운데 합류해 버린 에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족까지 정복해 버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타락하는 자연적 의지가 마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한, 영적 마음은 어떤 성장도, 자유도 있을리 만무하다.
비록 에집트나 바빌론이 표현하는 정신적 조건들이 한 인격 속에서 내향적으로 서로 협동하는듯 해도 그 둘 사이에 전쟁이 있는듯 보이는 때도 있다.

이론과 실제

다시 말해서, 똑 같은 마지막 결과를 향해 실제로 일하는 것들 사이에 눈에 나타나 보이는 교전 상태가 종종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적 상태는 최소한도 어느 한쪽의 경우만이라도 피상적이거나 무지하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가운데 자신의 자연적 감각 속에 있는 관점으로부터 삶 속의 것들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심정에서 올라오는 악한 느낌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이론적일 뿐이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는 세상의 많은 이들이 나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 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나쁜 감정이 타인에게서 노출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아주 신속하게 그 잘못을 끄집어 올려 단죄하려 든다. 특히 그 감정이 자신과 이해 관계가 있을 경우는 더욱 기민하게 반응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자기에게 어떤 자극을 가했을 경우, 그는 그 행동에 대해 타인들이 평가한 것 같이, 또는 많은 이들이 이론적으로 채택한 것과 동일하게 느끼고 행동하는 쪽으로 즉각 기울고 만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자신의 가슴속에 삶의 영적 원리를 고정시키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악에 반대하되 그 반대가 심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우리의 피상적인 이론은 자신 속의 악한 바램에 의해 쉽게 흐트려지고 만다.
또 하나 예를들어 생각해 보자.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라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온 사람, 더불어 경건하게 보이는 것이 순수한 경건심인듯 여겨지게 양육된 사람이 있을 경우, 그는 겉보기에 아주 경건하며 교회의 일에도 아주 열성적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은밀히 기대고 있는 원리는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교리, 구원은 실제 삶 속의 선함과 필수적 관계는 아니다는 교리 쪽으로 흘러간다. 이럴 경우 그는 주일날 배운 성서 속의 진리가 주 중의 일 속에로 이행되지 못한다. 게다가 나쁜 감정이 마음속에서 솟구칠 때, 처음에는 그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결국 피상적 상태에 머무르고 만다. 게다가 주님이 악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데 대한 확고한 목적을 갖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 속의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바램들은 끝내 그 사람의 피상적인 사상을 뒤엎고 그의 행동까지 정복해 버리는 것이다. 설사 그가 에집트로 피신하는 것, 즉 자신 속의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한다 해도 그 사람 속의 악한 경향성은 거기까지 뒤쫓아가, 결국 온 마음을 정복한다.
때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상당히 활동적이고 경건하며, 꽤 선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가 큰 시험이나 갑작스레 덮친 시험에 버티지 못하는 것을 볼 경우도 있다. 왜 그렇게 될까?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신성한 원리에 있어서, 인간 안에 고귀함이나 성실도에 대한 사랑이 확실히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정책(상식)이 나쁜 것을 행하는데서 단념하게끔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자기의 진짜 인격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긴장이 한계점에 이를 때, 자기를 방어해 줄 수 있는 것이 자기 속에는 없다. 마치 에집트의 보호를 받고자 내려간 유대인 같이 결국 바빌론 왕의 손아귀에 도로 잡히고 만다.
우리가 주님의 선함과 진리를 일상생활에 건설하는 것 외의 어떤 것에 신뢰를 두는 한 우리 역시 위의 유대인 같은 신세가 되어 위험에 직면하고 만다. 자연적 감각의 오류들, 자연적 생각의 거짓들, 자기의 똑똑함에서 나오는 각종 아이디어 등은 자신 속의 자아 의지가 발동을 걸 때, 정작 어느 한계점에 가서는 한 걸음에 무너져 내린다.

돌과 벽돌

“큰 돌을 몇개 가져다가, 다흐반헤스의 파라오궁 대문 앞 포장된 광장에 묻어라.”
자연계는 크게 세 왕국으로 구성된다. 즉 동물, 식물, 광물 왕국이다. 이 세 가지는 생명의 각기 다른 등차, 종류, 품질로서 인간 안의 생명에 있어지는 세 개의 불연속 등차이다. 이 불연속 등차 중 가장 깊고 높은 등차는 천적 등차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선함을 사랑하는 등차이다. 그 다음 등차는 영적 등차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 진리를 사랑하는 등차이다. 세째는 자연적 등차로서 법을 알고 사랑하여 그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광물계에 소속되는 보통의 돌들은 자연적 진리들을 표현하는데, 이 진리는 자연적 등차에만 열린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모든 것, 모든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거나 쌍방간의 합의에 대한 징표로 석상, 돌무더기, 돌기둥들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돌들이 나쁜 목적, 잘못된 것을 언급하게 될 때, 그 돌의 표현성은 바뀌어 거짓, 잘못 응용된 왜곡된 진리를 표현해 준다. 따라서 성서 내의 서술에서는 돌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말해지지만 그 서술의 실제 결과는 바뀌어 진리가 왜곡된 것, 어떤 이의 삶에서 진리가 남용된 거짓을 표현하게 된다. 인간의 자연적 감각에 묻힌 큰 진리는 그 진리의 품질을 잃고 만다.
예레미야가 취한 큰 돌은 그것이 자연계 안에 놓인 상태에서는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주지만, 그 돌을 이교도의 왕을 위해 포장된 광장 아래 묻었을 경우, 그 돌은 자연적 마음이 내뿜는 뜨거운 욕망 아래에 묻혀 감추여버린 성서 내의 자연적 진리들을 표현해 준다. 따라서 성서의 글자적 진리가 자아 총명이나 자아 사랑을 드러내는데 남용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연계의 형체대로가 아닌 인간의 산물인 도로 포장에 쓰이는 모르타르(mortar)는 물과 석회로 끈끈하도록 반죽된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모르타르는 거짓이라는 물과 자아 사랑이라는 불이 서로 연합된 상태를 표현해 준다.
사람이 만든 돌, 벽돌이란 인간이 주님의 진리와 대체해 보겠다고 하여 마음속에서 지어낸 거짓 사상들이다. 따라서 큰 돌이 묻힌 포장된 벽돌 위에 옥좌를 차리는 바빌론 왕이란, 인간이 자기의 감각적 사고로 성서 글자를 해석해서 만들어 낸 모든 거짓 관념을 수단으로 마음을 통치하도록 악한 사랑과 결합한 거짓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인간이 성서로부터 입증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되씹어 보면, 인간의 어떤 거짓 관념이 지지되도록 성서의 글자적 의미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에집트

느부갓네살이 와서 에집트를 쳐서 있게되는 모든 것들이란 자연적 마음에 가져다 놓은 나쁜 정신적 조건들, 이것들은 에집트가 어두울 때 감각적인 악한 사랑이 그 마음을 소유하여 자연적 마음에 남아 있는 얼마 안되는 선과 진리까지, 즉 거듭나는 삶의 밑천까지 몽땅 소모시키고 만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에집트에 신뢰를 둘 경우 망하고 만다는 이사야의 예언으로 마감지어 보자.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원군을 청하러 에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아! 너희가 군마에 희망을 걸고 많은 병거와 수많은 기병대를 믿는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쳐다보지도 아니하고 야훼를 찾지도 않는구나. 하느님께서 어찌 어수룩하게도 재앙을 내리신다 하시고 그 말씀을 거두시랴? 괘씸한 자들의 집을 치러 일어나시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의 편에 서는 자도 치시리라. 에집트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타는 말은 고깃덩이요, 정신이 아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두르시면, 돕던 자도 비틀거리고 도움을 받던 자도 쓰러지리라. 모두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1-3).

15
번쩍이는 불과 생물,
그리고 바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장 4-16절

4. 그 순간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 오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름이 막 밀려 오는데 번갯불이 번쩍이어 사방이 환해졌다. 그 한가운데에 불이 있고 그 속에서 놋쇠 같은 것이 빛났다. 5. 또 그 한가운데는 짐승 모양이면서 사람의 모습을 갖춘 것이 넷 있었는데 6. 각각 얼굴이 넷이요 날개도 넷이었다. 7. 다리는 곧고 발굽은 소 발굽 같았으며 닦아 놓은 놋쇠처럼 윤이 났다. 8. 네 짐승 옆구리에 달린 네 날개 밑으로 사람의 손이 보였다. 9. 넷이 다 얼굴과 날개가 따로따로 있었다. 9. 날개를 서로서로 맞대고 가는데 돌지 않고 곧장 앞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10. 그 얼굴 생김새로 말하면, 넷 다 사람 얼굴인데 오른쪽에는 사자 얼굴이 있었고 왼쪽에는 소 얼굴이 있었다. 또 넷 다 독수리 얼굴도 하고 있었다. 11. 날개를 공중으로 펴서 두 날개를 서로 맞대고, 두 날개로는 몸을 가리우고 12. 돌지 않고 앞으로 날아 가는데, 바람 부는 쪽을 향해 곧장 앞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 동물들 한 가운데 활활 타는 숯불 같은 모양이 보였는데 그것이 마치 횃불처럼 그 동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불은 번쩍번쩍 빛났고, 그 불에서 번개가 튀어 나왔다. 14. 그 불은 번개처럼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였다.
15. 그 짐승들을 바라보자니까, 그 네 짐승 옆 땅바닥에 바퀴가 하나씩 있는 게 보였다. 16. 그 바퀴들은 넷 다 같은 모양으로 감람석처럼 빛났고 바퀴 속에 또 바퀴가 있어서 돌아 가는 듯이 되어 있었는데….

주님의 현존

넓은 의미에서의 주제는 주님의 현존, 즉 모든 사람과 더불어, 그리고 각 개인과 더불어 항상 계시어 각자의 필요성에 편의를 제공하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말씀으로 현존하시어, 그 말씀에서 다각도로 그분 자신을 밝히신다. 이렇게 해서 각 사람, 특히 각자의 영적 진보 단계에서 그가 실지 삶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만큼에서 정신적인 빛을 가져다주신다.

폭풍

폭풍이란 대기의 정상적인 조건을 휘저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폭풍은 정신적인 조건이 휘저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폭풍은 예를 들면, 주님이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 또는 악과 거짓 속에 사는 이들 사이에서 명백한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실 때 발생한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은 사람에게, 주님은 자기들의 현 조건을 간섭하시기 위해 휘젓고 파괴적인 힘으로 다가오시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북쪽

폭풍(회오리바람)이 북쪽에서 불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방위는 인간 마음의 각기 다른 조건을 표현한다. 북쪽은 가장 어두운 방위로, 가장 밝은 빛을 주는 남쪽에 반대되는 방위이다. 그래서 남쪽의 빛은 총명의 영적인 빛을 표현한다. 북쪽은 그 반대가 되어 미미한 수준의 영적 총명, 즉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 또는 영적 진리에 무지한 상태를 표현한다.
신성한 진리로 접근하시는 주님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시게 되어, 그 마음의 통상적인 조건을 깨트리신다.

구름

폭풍과 더불어 큰 구름이 밀려온다. 신성한 말씀의 영적 의미는 영적 마음의 경우, 그 앞에 밝은 빛, 따뜻한 광채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 영적 의미들이 숙박하려 할 때, 신성한 말씀은 글자적 의미라는 구름 속에 존재해서 말씀의 신성한 의미를 볼 준비가 안된 이들에 대해서는 영적 진리를 희미하게 보게 해준다.

포개지는 불 (enfolding fire)

그럼에도 볼 준비가 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구름 속에서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신성한 사랑의 번쩍이는 불이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에서 이 불은 “포갬 자체(infolding itself)” 또는 받는 자체(receiving itself)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가 불꽃이면서 앞으로 흘러나왔다가 중심에 있는 불로 되돌아가 포개지는 불의 흐름 때문일 것으로 본다. 이런 결과로 마치 별이 반짝이듯, 불의 섬광이 번쩍거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 불은 근원적 측면으로의 불로서 계속 불을 공급하여 가는 모습이 된다. 이런 모습으로 본문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해 주고 있다. 즉 만물의 근원이 되는 사랑, 여기에서 인간을 위한 사랑과 지혜가 항구적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것, 이 사랑은 사랑이 인식되면서 다시 주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 주위에는 후광 같은 빛남이 있었는데, 이는 주님을 명백하게 하는 신성한 진리, 이 진리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옴을 표현한다. 이 빛남 한 가운데는 호박색갈(color of amber, 놋쇠)이었다. 호박색(황갈색)은 금색과 은색이 합하여진 색깔인 바. 금의 따스함과 은의 밝음을 가지게 된다. 호박색 같은 신성한 진리의 현존과 그 영향, 또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에서 속으로부터 따뜻하게 빛나는 것인 영적 의미를 표현한다.
불과 광채, 그리고 호박색이라는 세 가지 모습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 속에서 세 가지 불연속 등차인 천적, 영적, 자연적 등차로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세 가지 면모를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 세 양상은 각기 다른 정신적 관점에서 보여지는 것, 즉 선함을 사랑함, 영적 진리로 총명함, 생활 규율에 순종하는 삶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양상을 말한다.

생물

불 속에서 네 생물이 나타났다. 각기 다른 생물들은 주님이 신성한 말씀에서 각기 다른 총명의 수준으로 인간에게 감명을, 각자의 삶의 수준이나 평면에 따라 감명을 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 사람일 경우, 신성한 말씀은 인간 삶의 모든 용도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의 선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저 사람의 경우, 그 말씀은 명백한 진리의 보물 창고로 여겨지고, 또 다른 이의 경우, 말씀은 인간이 삶을 연구하고 응용해야 하리라 생각되지만 잘 알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찬 듯 여겨지기도 하고, 어떤 이의 경우 말씀은 행동 규율을 위한 지침서 역할로 나타난다.
이 생물, 또는 거룹이 외관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글자상의 말씀이다. 이 글자는 내향적인 것, 즉 영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둘러싸서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 안에서 진리가 모독되는 것에서 보호해 준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섭리는 각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급하게 해주면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가를 모르는 이들의 남용을 방지시켜 준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이 생물들은 생명의 그릇인 인간에게 흘러드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표현한다.
주님이 성경에서 생물들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각 경우에 인간에게 알려지고 보여지는 어떤 양상에 따라서 신성한 속성 중 어떤 면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분의 권능을 표현하기 위해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 불리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이 표현되도록 어린 양이라고 불리신다. 성경에서 사람들도 종종 각 개인이 표현하는 속성에 따라 선과 악이 표현되도록 동물들로 불리는 것도 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것 같은 여러 동물이 혼합되어 생긴 동물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바, 매우 괴상하게 보여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징적 표현물은 동양의 문학에서는 풍부하게 나타난다.

본문의 생물은 넷이었다. 둘은 연합, 결합을 표현하는바, 심장과 폐, 또는 영과 육,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넷은 둘과 둘의 합, 또는 겹쳐진 것, 포개진 것을 말한다. 즉 자연적인 의지와 이해성이 영적 의지와 이해성과 결합을 이루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든 것 안에는 이와 같이 포개진 연합이 있게 되어 완전을 이룬다. 이 결합은 상호성을 가지고 있다. 즉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기가 이해하는 것을 사랑한다.

얼굴들

공통적으로 이 생물들은 사람의 형상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 생물들이 신성한 인간으로서의 주님, 유한한 인간에게 그분 자신을 명백하게 하시는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흔히 얼굴은 마음에서 적극성을 띠는 느낌과 생각을 나타내는 신체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이 생물들 각각은 각기 다른 종류의 네 얼굴을 가졌다. 이 각기 다른 얼굴들은 주님 말씀에 있는 영적 진리의 각기 다른 양상을 표현한다. 이 양상은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데, 내적 의지에, 외적 의지에, 내적 이해성에, 외적 이해성에 영향을 주는 것을 표현한다. 네 얼굴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은 사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즉 거룩한 성의 네 측면에서 보게 되면 모든 곳을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모든 계층, 영적 계층이든 자연적 계층이든 모든 이에게 영향을 주는게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날개들

각 생물은 네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팔과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날개란 힘을 발휘하는 수단인 바, 이는 능력을 표현한다. 날개를 좀 더 특징적으로 보면, 몸체를 높이 오르게 한다거나, 빠르게 이동시켜 준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것을 우리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해성이나 지적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우리로 생각을 높이 나르게 하고 여러 가지 다른 느낌들을 빠르게 이동시켜 진보하게 해준다. 날개들이 쌍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심정과 지성이 협력해서 일하는 것을 표현한다. 둘씩 짝을 이룬 네 날개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둘이 작동할 때 있어지는 생각의 힘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 안에서 자연적인 생각과 영적 생각이 함께 움직일 때 그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남용하는데서 그를 보호해 준다. 생물이 신성한 인간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했듯, 네 날개도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 안에서 말씀의 글자와 영의 양면에서 동시에 있게 되는 신성한 권능의 협력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리가 비록 글자와 영이라는 측면에서 각기 다른 양상을 띄우고는 있지만 결국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인 발은 마음의 가장 낮은 부분인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발바닥은 감각적인 삶, 생명의 육적 평면으로, 자연적 마음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분을 표현해 준다. 이 생물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다.
가축이라는 측면에서 소는 우리의 자연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 어려서 힘이 약한 송아지는 정신적 삶을 지탱시켜 줄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인 자연적 마음속에 든 순진한 상태를 표현한다. 말라기 4장 2절을 보면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소(송아지)가 풀려 뛰어 나오듯…”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거듭나는 자연적인 마음이 주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선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달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생물 각각의 다리는 곧고 송아지 발굽 같았다고 했는데, 이는 주님의 말씀이 자연적 인간에서 일어나서 인간으로 삶에 관한 신성한 법칙에 단순히 순종시킴으로서 선한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발달시키게 됨을 암시해 준다.
이 발은 닦아 놓은 놋쇠처럼 윤이 났다. 금속의 중요한 기초를 구성하는 놋쇠는 자연적 인간 또는 인간의 자연적인 애정을 표현하는데, 이는 영의 가장 깊은 애정을 가진 천적 사랑을 표현하는 금과 구별된다. 자연적인 애정이 선하고 질서적일 경우, 이것들은 잘 광을 낸 놋쇠와 같은 것, 즉 마음의 보다 높은 형상을 반사시켜 주는 바, 선한 자연적 애정은 선한 내면의 것, 또는 천국적 애정을 표현하게 된다.
윤이 나는 발이란 주님의 말씀이 그 말씀의 가장 바깥 선상의 글자에서까지 선하고 순수한 자연적 삶을 가르치시는 말씀의 특성을 말한다.
이 생물 날개 아래 있는 사람의 손이란 영적 진리의 높은 능력을 표현해 주는데, 이 힘은 신성한 말씀 글자의 능력 속에 종종 감추어 놓여 있다.

각 얼굴들

이 생물의 네 얼굴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얼굴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내면의 지혜에 있는 신성한 진리로서 이 진리는 천적인 사람에게 보여지는 진리로서 이들에게 슬기로워지는 힘을 준다. 사자는 강함을 표현한다. 사자의 얼굴을 가진 생물은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지닌 힘을 표현하는 바, 주님 사랑의 힘으로 인간 구원을 위해 말씀의 글자를 형성하는 그 속에 나열되고 있다.
소는 자연적인 애정을 표현하는데, 이 애정에 있는 진리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상태이다. 독수리는 인간 마음의 지적 측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짐승이 애정을 표현함과 구별된다. 독수리는 아주 힘차게 비행하는 능력과 더불어 넓은 시야를 똑바르게 관찰하는 새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새, 독수리는 합리적 마음속에 있는 보다 넓은 생각들, 통찰력을 표현해 준다.
이렇게 해서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을 가진 생물들은 신성한 말씀의 각기 다른 면모를 표현하는 바, 이는 제각기 다른 인간 자아를 지닌 모든 이에 대한 주님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

바퀴

생물 각각은 바퀴를 가졌고 이 바퀴는 생물들과 함께 움직였다. 바퀴란 전진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바퀴는 교리에 관한 총명한 지식을 표현하고, 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마음은 여행하며 진보해 간다.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총명한 지식(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 글자에 관한 좋은 지식 등등)은 마음을 더욱 진보할 수 있게 해주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문은 각 바퀴 한 가운데에 바퀴가 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 총명 안에 영적 총명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에는 그 말씀의 바깥 글자 지식 속에 영적 원리인 안쪽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총명은 인간을 두 겹으로 학자가 되게 한다. 즉 자신의 자연적 삶을 위해 신성한 말씀의 사실과 규칙을 배우고, 영적 삶과 관련되는 진리 속의 영적 총명까지 보유하게 된다.
이 생물들은 요한에 의해 보여진 계시록의 생물과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두 환상에 보여진 내용들은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각 층의 총명을 지닌 인간 후손들에게 접근하시는 모든 형체들을 표현적으로, 그리고 상응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표현물은 우리의 빛과 생명을 위해 주님을 찾아 나서서 자신 속에서 찾은 것을 키워 가고 타인이 주님을 찾고 키우는데 협력해 주어, 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열해 놓으신 모든 능력, 지혜, 사랑을, 특히 그분 말씀 안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여 더 한층 자신 속과 이웃 속에서 커 가게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 갈 때만이 우리는 가장 높은 인간 총명을 발달시킬 수 있어 열려진 영으로 가능한 직관적 통찰, 즉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자신 스스로 답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얻게 된다.
이런 마음을 지닌 자의 고백은 이러할 것이다. “생명의 샘은 정녕 당신께만 있고, 당신의 빛으로만 볼 수 있나이다” (시편 36:9).

16
이 두루마리 책을 먹어라

성서 본문: 에제키엘 2장 8-10, 3장 1-4,14절

2장 8. “너 사람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만은 저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처럼 나에게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10.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펴 보이시는데 앞뒤에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엮어 대는 상여 소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3장 1. 그것을 보이시고 그분은 “받아 먹어라. 너 사람아,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서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 주어라.” 2. 내가 입을 벌리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면서 그분은 3.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부르게 먹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 먹으니 마치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이 말씀하셨다.
14. 그분의 기운이 나를 쳐들어 옮겨 갔다. 야훼의 손에 꽉 붙잡혀 가는데 나는 그냥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이었다.

글자적 사실들

오늘 본문은 예언자가 본 경이로운 환상, 즉 폭풍, 포개지는 불, 바퀴 속의 바퀴 등등의 환상에 이어지는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을 반역적이고 완악하며 뻣뻣한 목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고 가르치도록 보내고 있다.
에제키엘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는 그에게 보내진 메시지를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손이 그에게 나타났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고, 그 두루마리는 앞뒤로 씌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애가와 탄식, 곡하는 소리들이었다. 그 책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말해 주도록 명령하고 있다.

영계에서

이 광경은 영계에서 있어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영적 감각들로부터의 경험에 종사하게 된다. 즉 그의 영체가 느끼는 감각으로 예언자의 일을 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사실은 본문뿐만 아니라 전후 문맥의 언어를 보아서도 명백할 것이다. 이 책의 시작에서 말해지기를 강가에 있을 때 “야훼의 손에 잡혔다”고 언급하는데, 그가 표현하기를,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스런 광경의 발현을 보았다” 라고 했고, 다시 말하기를 “그분의 기운이 나를 쳐들어 옮겨갔다. 야훼의 손에 꽉 붙잡혀 가는데 나는 그냥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이었다.” 이런 모든 기록들은 그가 주님에 의해 움직여졌고 인도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영적 의미

환상의 영적 의미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에 관해 언급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각 개인의 마음에 관계하고 있다.
영적으로 반역만 일삼는 이스라엘 가문이란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생각과 느낌을 가진 인간 속의 퇴보된 자연적 마음을 말한다. 이에 더하여 인간의 나쁜 습관들에 관한 것도 말하고 있다. 이런 조건들이 오늘 본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 있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모든 사람은 물질적 몸 속에 영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각자 속에 있는 영적 감각들은 언젠가 주님에 의해 열리어져 그 삶으로 영계에 속한 것을 볼 수 있고 행동하게 해주신다. 이런 것이 모든 선견자들, 또는 한 때이지만 영계에 들어가게 허락된 성서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경우이다.

우리의 힘을 나타내는 신체 도구가 특별히 손이다. 따라서 손은 힘을 표현한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은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신의 능력 범주에 있음을 의미하기 위해, “그 문제는 내 수중에 달려 있어…”라든가, “그 문제야말로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야…” 라고 말한다.
본문의 경우, 손이 영계에 있었는 바, 이는 영의 힘, 특수적으로는 신성한 영의 힘, 그분의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또는 그 말씀으로 역사 되는 힘을 표현해 준다.

두루마리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 책”은 신성한 책,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이 책이 두루마리라고 불린 이유는 고대 시대 때의 책들이 손으로 쓴 책이고 두개의 롤러(roller)가 달린 긴 종이, 파피루스, 양피지의 긴 조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읽힐 때 낭독자는 한 손은 롤러를 돌려 풀면서 다른 한 손은 롤러를 감아 가면서 읽어 갔다. 손으로 잡고 있는 두루마리란 주님의 말씀으로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전달해야 할 말씀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타 국가와는 달리 신성한 말씀을 수단으로 있어져야 했기 때문이고, 그분의 법칙이 인간 삶을 위한 것으로 인간은 자신들의 악들이 그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체를 가져 결과될 내향적 지옥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이 주님의 법임과 그분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백성들에게 밝히시는 수단이 말씀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손이 예언자 앞에 그 책을 “펴 보이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이 예언자에게 밝히 보여주신다는 말이다.
이 책의 앞 뒤(안과 밖)에 글이 적혀 있었다는 것은 말씀이 내향적인 영적 의미와 외향적인 글자적 의미를 가졌다는 말이다. 그 책에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엮어 대는 상여 소리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영적 진리가 악한 자의 내향적 동인과 생각들에 있는 악과 거짓, 그리고 죄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 상의 각종 죄악상을 밝히 보여준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잃게 된 선 때문에 애가를 부른다. 그래서 애가란 모든 악에서 떼어질 수 없는게 슬픔이라는 것과 그 악으로 선을 잃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악은 인간 심정 속에 있는 모든 선들을 황폐해지게 하고, 피폐된 채 놓아둔다. 이런 일은 특히 자신 속의 악을 사랑하고자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남용할 때 여지없이 발생된다. 그 결과 “악은 사악한 자를 살해한다.”
이렇게 애가(구슬픔)란 심정 속의 선함을 상실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울부짖는다(애곡)는 것은 진리를 상실한 것, 즉 거짓이 생각을 지배하게 될 때 지성 속에 있는 진리의 손실을 말한다. 재앙(엮어 대는 상여 소리)이란 악인의 행동과 실지 삶에서는 기쁨이 상실된다는 것을 뜻한다.

책을 먹음

신성한 명령으로 이 예언자는 그 책을 먹었다.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먹을 경우, 몇 가지 과정을 거친다. 입이 음식을 받아 그것을 씹어야 한다. 그 다음 위를 통과하여 분배된다.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은 영적으로는 어떤 선과 진리, 또는 어떤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들어온 음식은 반드시 위에서 소화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합리적 생각을 수단으로 들어온 선과 진리, 느낌이나 생각을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새로운 조건을 주게 된다. 더 나아가 소화된 음식이 위장 다음의 다른 장기를 통과하는 것은 그것들을 우리 내면의 의지로 테스트하는 것,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가질 때 더 내면적이고 영적인 생각을 그 경험에 부합시키는 것을 표현해 준다. 위장을 다른 내장과 비교해 보면, 위는 이해성에 속한 일을 표현하는 반면, 그 외 내장이 하는 일은 의지 또는 심정의 행동을 표현한다. 이 행동의 새로운 조건을 우리 마음이 받아 인정하고 음미해서 자기 것으로 융합시켜 준다.

달고 쓴 것

이 예언자가 책을 먹었을 때, 그 맛은 그의 입에서 매우 달았다. 그러나 그는 영 가운데서 그 맛이 쓰다는 것(불안하고 초조한 심정, in bitterness, in the heat of my spirit)을 느꼈다. 달고 쓰다(sweet and bitter)는 상황은 오늘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계시록에서 요한에 의해 말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들려 오던 그 음성은 나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는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손에 펴든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나는 그 천사에게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읍니다. 그 때 그 천사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 삼켜버려라. 이것이 네 입에 꿀같이 달겠지만, 네 배에 들어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 하고 말했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읍니다. 과연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아팠읍니다. 그 때 ‘너는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해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나에게 들려 왔읍니다” (계시록 10:8-11).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자기가 영 속에 있을 때였다고 그는 선포한다. 즉 그가 영계에서 또는 영적 감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이제 에제키엘의 환상과 요한의 환상에 있는 몇 가지 유사한 점에 주목해 보자. 두 예언자 모두 영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린 책이 천사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책을 먹었는데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지만, 소화 되면서는 매우 쓰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직후 그들은 백성에게 예언하도록 부름 받는다. 두 환상 모두 예언자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달다는 것은 우리의 바램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을 마음에 받음으로 느끼는 기쁨이다. 꿀이란 마음속의 이러한 기쁨을 말하는데, 좀 더 뾰족이 말한다면 사물의 외적 측면을 다루는 자연적인 것들 속에서 오는 기쁨인 것이다.

안과 밖 (external and internal, 외부와 내부)

마음과 삶이 질서 있는 상태일 경우, 우리의 자연적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은 우리의 계발된 영적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퇴보되고 비 질서적 상태의 마음일 경우, 많은 것들이 자연적인 느낌과 생각을 기쁘게 하겠지만, 내적 양상에서는 같은 마음일지라도 맛을 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 즉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기쁘게 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글자적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일 경우, 그는 성경의 글자적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악한 애정이나 거짓된 관념, 죄가 되는 행동까지도 정당한듯 나타나게 만들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고대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글자를 가지고 자기들이 타 국가나 민족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것, 특히 주님의 백성으로 자기들은 선택되었다는 것이 입증되도록 해석해 왔다. 이런 견해는 고대 유대인들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자랑삼게 해주어 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성한 말씀의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 바, 자기들이 선택된 것은 영적 교회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상징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외적 방법으로, 오로지 영적 교회를 표현하도록만 선택되었음을 그들이 알았을리 만무하다. 한 마디로 연극 작가의 마음을 작가 대신 표현하는 배우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고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당도하리라는 성경의 글자 의미에 기쁨을 누려 왔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장차 올 메시아가 그들을 일으켜 세워 빼어난 국가로, 그들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해줄 것이라는 가상적인 기쁨, 기쁨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아로 그들 앞에 당도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삶에 관한 그분의 방법을 실지 보여주셨을 때, 입맛이 씁쓸했던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씁쓸해 한 이유는 그분께서 오시어 선포하신 내용이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 거듭남으로 인간을 영적 왕국에 인도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 때문이다. 이를 표현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은 이 유대인들의 입에서 달았겠지만 그들의 내장에서는 쓴 것이다.

예증

오늘날 위와 유사한 상황이 사람들 사이에도 상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구원됨, salvation by faith alone”이라는 세상에 널리 퍼진 이론이 이에 해당된다. 이 이론은 잘못 이해된 성경 글자를 가지고 많은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이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대속, vicarious Atonement”이라는 수단으로 구원되기를 기대하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자기 심정과 삶의 품질이나 인간 속의 실지 인격은 구원과 무관한듯 여기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가고 그리고 자신이 매우 경건한듯 여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등록하고 경건한듯 여김으로 악으로부터 선으로의 인격 변화를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달성해 가는 거듭 나아감의 과정에 있게 되는 길고 힘든 노력 없이 천국을 획득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이는 자신의 악한 삶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들에게 귀여케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성경의 내적 의미에 있는 영적 진리가 가르쳐질 때, 그리고 영적 진리가 그 사람에게 적절한 이해를 동반하여 글자의 의미에서 확증될 때, 또는 구원은 믿음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심정 속의 사랑과 지성 속의 믿음, 그리고 삶 속에 있는 정의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 할 때, 이와 같은 진리들은 그들에게 매우 쓰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영적 원리가 구원은 쉽게 된다라는 이론을 거둬가기 때문이고, 그럼과 동시에 그들에게 신성한 계명에의 순종으로 악으로부터 헤어 나와 선 쪽으로 가게 하는 계속적이고 심도있는 노력의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귀여 되도록 하시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계신 분,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은 그들에게 그분의 의를 나누어주시되 각자가 자기들의 실지 삶에서 정의롭지 못한 것을 중단한 만큼에서, 그리고 신성한 법도에 따라 살아간 만큼에서 나누어주신다는 명백한 진리를 위의 사람들은 맛있게 먹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실제의 거듭나는 삶 없이 천국에 입장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위의 명백한 진리는 더할 나위 없이 쓰고 쓸 뿐이다. 오로지 성경의 글자적 의미만이 그들에게 꿀같이 달 것인 바, 그 이유는 그 의미가 자기로 천국 가는 쉬운 방법을 약속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주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초상화해 두셨다.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위의 비유 속의 사람에게도 말씀은 외적으로는 달겠지만 내적으로는 쓸 뿐이다.

세상의 상태

정치나, 사업 분야, 또는 교회 분야, 개혁이나 자선사업 같은 세상사를 둘러보면, 이기심과 세상욕이라는 영들이 성경의 글자 뒤에 진을 치려고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그렇게 해서 신성한 말씀 속의 영에 반대되는 실제 일상생활로 살아가게 만드는지 여러분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인 세상욕의 영은 국가간에 이루어지는 싸움 가지고도 쉽게 예증되는 바, 영의 빛에서 시편 기자가 외친, “뭇 족속들의 신들은 우상들임”을 우리도 함께 소리쳐야 할 것이다.
나라들도, 각 개인들의 경우에서도 그들은 인간 이기심에 동조해서 같이 얼버무려 질 수 없는 성경의 영적 의미가 내놓는 명백한 가르침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성서 글자를 가지고 모험을 하거나 간교를 부린다. 기독 사상은 근 이 천년 동안 세계를 가르쳐 왔다. 오늘날도 기독교는 세계를 이끄는 국가들에서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이 세상 어디에도 교인이라는 증명서가 각 개인의 실제적인 선한 인격을 보증한다거나, 거듭나는 삶의 동료라는 확신을 주는 허가증과 대체될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삶과 영에 실제적 관련을 맺지 않는 구원의 이론에 만족해하고 기뻐하는 장소나 모임일 뿐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와 대조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유일의 하느님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인간의 인도자요 구원자로,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의 합리적이고 영적 마음에서 이해하고 믿는다. 이들은 지금 천국 가는 길에 서 있고 장차 천국에 거하게 된다.

천국

자신의 심정 속에서는 천국의 원리를 자기의 동기와 목적으로 갖고, 나날의 생활에서는 신성한 계명이 그 생활의 규범이 되어 있는 이들은 천국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입에 들어온 말씀의 글자는 영적으로 달고, 내향적 부분에서도 말씀의 영은 글자와 똑같이 달다. 이에 관해 주님께서 말하시기를, “나는 내 법을 너희들 안쪽 부분에 놓을 것인바, 너희들 심정에 그 법이 씌어지게 하리라.”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법칙이요 우주를 움직이게 한다.
말씀의 글자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 매우 달게 느껴져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흥미를 갖기 전 우선 그 사람의 시선을 끌어 당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 뒤 조금씩, 천천히 여유 있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 의미 쪽으로 말씀의 글자를 당기게 인도해서 결국 말씀의 글자 속에서 영적 의미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의 행동 지침이나 동기들을 말씀의 글자를 가지고 개혁하는 일을 스스로 허용할 때까지 글자 속의 영적 의미는 그 사람에게 매우 쓴맛만을 주게 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도중 시험자에게,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4: 4).
자신의 매일 생활에서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읍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은 주님의 것이라 불러 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읍니다” (예레미야 15:16)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신성한 말씀은 안쪽으로나 바깥쪽으로나, 말씀의 글자에서나 영에서나 어느 측면일지라도 그를 들어올릴 것이다.

17
포위 공격되는 예루살렘

성서 본문: 에제키엘 4장 1-13절

1. 너 사람아, 흙벽돌을 집어다 앞에 놓고 그 위에 예루살렘 지도를 파 새겨라. 2. 그리고 그 바깥에 포위망을 새겨라. 또 감시탑을 세우고 옆에 돌더미로 축대를 쌓고 진을 둘러 치고 성벽을 허무는 쇳덩이를 사방에 늘어놓아라. 3. 또 석쇠를 가져다가 너와 그 도시 사이에 둘러 쳐서 쇠로 된 성벽으로 삼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말아라. 그렇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라. 그것으로 예루살렘이 어찌 될지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 주어라.
4. 너는 왼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어라. 내가 네 몸에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메우는 것이니, 네가 그렇게 누워 있는 날수만큼 그들은 죄를 받는 것이다. 5. 나는 너에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백 구십 일 동안 지운다. 그 하루는 그들이 벌받을 한 해와 맞먹는 것이다. 6. 그 날수를 채운 다음 이번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워 유다 족속의 죄를 받아라. 하루를 한 해씩으로 쳐서 사십 일 동안 받아라. 7. 너는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눈을 떼지 말고 팔을 걷어 붙이고, 예루살렘은 망한다고 예언하여라. 8. 나는 너를 사슬로 묶어 놓으리라. 그래서 네가 갇혀 있을 기한이 다 차기 전에는 옆구리를 이쪽 저쪽으로 뒤쳐 눕지 못하게 하리라. 9. 네가 한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백 구십 일 동안 누워 있으면서 먹을 빵은 밀, 보리, 잠두, 제비콩, 조, 쌀보리를 섞어서 만들어야 한다. 10. 너는 그 음식을 저울로 달아 하루에 이십 세겔씩 시간을 정해 놓고 먹어라. 11. 물도 되어서 마시는데 하루에 마실 분량은 육분의 일 힌이다. 그것도 시간을 정해 놓고 마셔라. 12. 보리과자를 굽듯이 빵을 굽는데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인분으로 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구워 먹어라. 13. 그리고 내 말을 전하여라.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 가운데로 쫓아 보내실 것이며 너희는 거기에서 이렇게 부정한 빵을 먹게 되리라.’

글자 이야기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적들로 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흉내내는 연극을 보여줌으로서 예언자는 비유를 말하였다. 이렇게 흉내낸 포위 공격하는 연극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어날 징조를 선포하고저 해서였다. 그리고 그 외 예언자의 다른 행동들, 즉 옆으로 누워 있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등은 포위 공격 될 때 성내 주민들이 당하는 재난을 글자대로 표현하고 있다. 음식은 호화스런 잔칫상이 아닌 극히 평범한 밥상이 될 것이고, 물도 귀해져서 아껴 마셔야 할 지경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포위 공격되는 긴 기간이 예언자가 이쪽 저쪽으로 드러누운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시해 보아야 할 것은, 예언자가 왼쪽으로 드러누운 날 수가 390일이고 오른쪽으로 누운 날수는 40일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숫자를 더하면 430이 되는데 이 숫자는 과거 출애굽 이전 이스라엘 후손들이 에집트에 속박되어 있던 햇수와 같은 숫자가 된다. 그리고 유다 족속을 위해 오른쪽으로 드러누운 날인 40일은 이스라엘 후손이 출애굽 해서 광야 생활을 한 햇수의 숫자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두 숫자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는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받아 항복한 뒤의 이스라엘 족속들의 퇴보된 모습이 예언자가 마른 인분으로 빵을 굽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인분으로 빵을 굽는 것은 그 당시 가난한 자들이 연료가 비싸서 구입하지 못하여 흔히 사용된 평범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워진 빵은 종교적 예식이나 기타 축제에서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었는바, 인분을 연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 백성들에게 아주 가난함이나 재난을 암시해 주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예언자는 어떤 징조를 표현해 주는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언제나 인식되어 있었고, 또한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백성들과 교통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예언자는 백성들에 의해 언제나 주목받아 왔던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거 일동은 표현의 강약은 있을지라도 뭔가를 표현해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의 개인 생활은 표현되는 성격과 결합되어 있는 셈이었다.

영적 의미

본문에 대한 역사적 측면의 영적 의미는 유대 국가와 그 교회의 타락을 나열하고 그 타락은 자아 사랑에서 근원된 악과 섞이지 않은 어떤 선도 남아 있는게 없다는 것, 또는 자아 총명에서 비롯되는 감각적 관념으로 왜곡되지 않은 어떤 진리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본문을 개인의 영적 측면에서 본다면, 일반적인 주제는 인간 마음의 타락이고, 타락하는 마음에서 생활 속의 선은 이기적인 악들과 섞음질 당하고 주님 말씀 속의 진리는 왜곡되어 지옥이 그 마음을 지배하는데 이르러 영영 악한 상황에서 빼내어 질 수 없는 모든 고통에 종속 당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폭로하고 있다.
본문이 나열하는 바 같이, 예언자가 행한 모든 것, 즉 공격하는 적의 행동을 흉내낸 것들은 인간 마음에 있게 되는 악한 영향력의 맹습이 각 사람의 자연적 마음 안에서, 그리고 바깥쪽으로는 악령에 의해 있게 되는 특수적인 사항들을 표현해 준다.

흙벽돌 (tile)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을 파 새긴 흙벽돌은 태양으로 말리워져 단단해지기 전의 큰 벽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벽돌에 그는 성을 새겨 놓았을 것 같고, 만일 단단한 벽돌이라면 아마 그는 벽돌에 성을 그렸을 것 같다. 어느 경우이던, 초상화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정신적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포위망을 좁히는 식의 포위 공격은 성내 백성들이 그들이 선택한 삶의 과정으로 그들 스스로 자초하는 것들을 표현해 준다.

한쪽으로 드러누움

어느 한쪽으로 오랫동안 드러눕는 억류된 모습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한 가지 형태의 영향하에 있게 될 경우, 그 영향으로 그 마음은 한 가지 형태만 강요되어 좁아지면서 실생활 역시 제한되어 결국 그 사람 속에 남게 될 정신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거듭남의 선과 진리를 빼놓고는 어디에도 충만된 영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락하는 삶에 불가결한 요소는 엄격한 제한과 한계이다.
타락하는 삶에 관해 표현된 적절한 구절이라면, “침대는 짧아서 길게 눕지 못하고, 이불은 좁아서 몸을 덮지 못한다” (이사야 28:20) 일 것이다.
신체의 양 측면은 마음의 양 측면을 표현한다. 오른 쪽은 사랑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의지적 원리, 심정, 애정적 본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쪽은 지식이나 지혜, 진리 그리고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는 지성적 본성이나 이해성을 표현한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을 표현하기 위해 왼쪽으로 드러누웠고, 유다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누웠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지성적 측면을, 유다는 애정적 측면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주님에게서 받아 인간에게 가르친 진리를 표현하듯이, 한쪽으로 오랫동안 눕는 예언자의 강제된 행동은 인간 마음에 가르쳐져 온 신성한 진리가 오로지 외적 측면에서만, 단지 정규적 예배 형식에만 필요한 진리로 그 진리의 사용을 억지로 제한시킨 마음을 표현한다.

날 수

시간은 마음의 상태, 즉 애정과 생각의 상태, 이 상태에 의해 인간 마음의 진보는 계산되어진다. 날에 해당되는 용어들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본다면, 날(days)은 보다 작은 상황들, 즉 일상생활에 있는 정신적 상태의 변화를 표현하고, 해(year)는 보다 큰 상황들, 즉 보다 적은 상황들인 일상 생활 속의 상태들이 더 확장된 정신 상태를 표현한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된 것은 해가 아닌 날들이다. 이렇게 날들로 제시된 이유는 그 적용의 편리함 때문인듯 하다. 그럼으로 해서 표현될 교훈이 보다 더 뾰족해지고, 더 직접적인 효과를 주게 된다. 정신적 성장의 보다 큰 기간의 품질은 작은 기간의 품질을 보여주고 표현해 주게 된다.
숫자 3은 충만함, 완성됨을 표현하는데 특별히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리의 충만함이나 완성을 표현한다. 즉 삶 속에서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실제화 하여 있게 된 진리의 충만함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진리가 충만됨 속에서 진리를 받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각 사람의 심정과 이해성, 행동 지침 그리고 삶 안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100, 1000 등등의 숫자는 의미를 더 강조하는 숫자인 바, 의미가 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확정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300이란 진리에 관한 보다 더 넓은 기간을 표현한다. 90은 3이 곱해져 이루어진 숫자인 바, 충만함을 표현하되, 특별히 “아껴 둔 것, remains,” 즉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상태들에 관련된 충만함이다. 마음 상태와 관련해 볼 때 390일 동안 예언자가 왼쪽으로 누워 있었다는 것은 진리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황폐해졌음, vastation”을, 또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나온 거짓 사상들로 인해 진리가 파괴된 채 오랫동안 방치되어졌음을 표현하고 있다.

40

숫자 40은 시험을 표현하되, 특히 의지나 심정에 관한 시험을 표현한다. 홍수가 40일간 계속 되었다든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40년간 광야를 배회했다던가, 이스라엘의 열 두 스파이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던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신 것 등등이 성경에서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경우나 그 외 다른 경우에서도 40은 시험을 표현한다. 본문에서 유다를 위한 40일이란 타락된 마음속의 심정에 대한 충분한 시험, 그리고 악을 산출해 냄으로 완전히 타락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불법을 짊어지라고 말해진 것은 예언자로 그들의 죄를 대신하라는 표현은 아니고, 단지 예언적인 가르침을 목적으로 짊어지는 표징적 표현일 뿐이다. 390일과 40일, 모두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지는 선함과 진리의 완전한 황폐, 그들이 심정으로부터 선함을 완전히 거절하고, 이해성에서 진리를 완전하게 거절하여, 그들의 마음이 지옥에 포로가 되고야 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찾는다면, 위의 두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으신 인성에 대한 시험, 입으신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내향적 삶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이 예언자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430일간 누워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우리로 그렇게 이해하도록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즉 예언자가 드러누울 때 오랫동안 어느 한쪽으로만 눕도록 명령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자기가 먹을 빵과 물을 오랫동안 자신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14개월 이상 되는 기간을 위해 드러눕기 전 양식과 물 모두를 한꺼번에 준비해 둔다는 것은 빵이든 물이든 모두 적절치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만일 그가 오랫동안 부동적인 자세를 취했다면, 아마 누군가가 그를 시중들도록 되었을는지 모른다. 어찌 됐든 위의 사항에 대한 언급은 본문에서 찾을 수 없다.
양식과 물의 양도 예언자에게 아주 한정되었는데, 빵은 10온스, 물은 1 1/2 파인트(pints)로 생명 유지에 겨우 필요한 하루분 정도뿐이었다. 이런 사항들은 타락된 마음의 경직된 상황을 표현하는 바, 이런 마음은 영적 자양물이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부정한 빵

글자대로 보면 인분으로 빵을 굽는 것은 불결한 방법인데, 이는 포위 공격되는 기간동안 성내 백성들은 심각한 연료 부족 상태에 빠져 가장 확실한 연료 공급 방법인 인분 사용을 강요당할 것과 포위 공격 후에는 이방인들이 주는 오염된 빵을 먹도록 강요당할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말린 똥으로 빵을 굽는다는 것은 악과 거짓, 죄악에 빠진 타락한 마음에는 자아 사랑의 불결한 탐욕으로 인하여 뜨겁게 될 어떤 선도, 진리도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 이런 불결한 탐욕은 거듭나는 마음으로부터는 거절된다는 것, 형식적 예배의 모든 것까지 자아 사랑의 불순함으로 오염되어 있을 것을 표현한다.

불순함

영적인 것에 관한 총명한 지식보다는 좀더 까다로운 맛을 선호하는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의 경우, 그들이 때로 불평하는 것 중 하나는, 성경은 자기의 세련된 맛을 오히려 더 떨어지게 하는 구절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의 불평이 성경 글자에 국한된 말이라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성경이 이와 달리 더 어떻게 잘 씌어질 수 있을까? 성경이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아주 낮은 인격의 소유자, 즉 타락된 인간에게 까지 도달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말씀은 타락된 사람들이 사는 삶의 평면에까지 내려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그들에게 도달되어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말씀은 낮고 낮은 수준의 마음만을 지닌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국면을 다루어야 하고 그들이 흥미를 갖는 것들을 가지고 말해져야 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이 천사들만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성경은 현재의 성경과 아주 다른 글자적 의미로 이루어져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와 죄인 양쪽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만일 죄인이 자신의 거듭남의 실제를 위해 성경을 사용코자 한다면, 그는 언어적인 반감이 없이 오히려 성경의 언어가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성경의 언어가 담고 있는 글자적 의미는 영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상응이나 표현, 또는 상응물이기 때문에 죄인일지라도 성경 글자를 사용함과 더불어 결국 영적 의미도 다소나마 발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사람의 경우, 그는 성경 언어가 외적으로 우아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 속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에 대해 경고를 보내 주는 평범한 진리에, 또는 우아한 감각적인 풍미 뒤에 감추어 놓인 평범한 진리가 발견되는 것에 기뻐할 것이다. 성경을 접하는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 그리고 순수함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이를 구할 수 있도록 인간의 불순함이 필요로 하는 것, 그 상황에까지 내려와 닿고 있다는 점이요, 특히 원어로 읽을 경우는 더욱 그것을 느끼게 해주고 번역의 경우도 그와 비등할 것이리라 믿는다.

신성한 의사

진정한 의사일 경우, 그는 자기 환자의 천연두가 터져 고름을 질질 흘리고 있다 해도 마다하지 않고 그 환자의 생명을 위해 그 고름을 만지는 수술까지 감행하여 건강을 찾도록 노력해 주듯이, 무한하신 신성한 사랑은 타락된 사람이 푹 빠져 있는 악의 깊은 수렁까지라도 가능만 하다면 따라가서 그 인간을 구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으신다. 그를 건져내어 천국에로 올리는 것이 가능치 않다면, 그가 더 낮은 지옥에로 침몰되지 않도록 해주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 지옥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시편 139:9,10).
성경은 잘 교육받았다는 사람들의 세련된 자연적인 입맛에 맞춰지는 우아한 글자의 생산물만이 되도록 의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 찬 천국으로부터 성경의 언어를 사용해서 악취뿐인 지옥에까지 내려갈 수 있게 장치되어 잃어버린 사람을 구해 내도록 섭리되어 있다. 성경은 그분의 인간 환자들을 위해, 인간의 질병들, 정말로 불결한 인간 영혼의 질병들까지 서술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는 위대한 의사의 안내서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의 질병이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성경 내에서 자신의 견해와 불일치 되는 부분에 오래 거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보지만, 성경 언어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서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의 영적 질병을 진단해서 적절한 치료를 강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더욱이 주님의 무한하게 부드러운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졌든, 안보여졌든, 그분의 항존하는 섭리가 우리를 주시해 주지 않고 방치한다면 얼마나 깊은 수렁에로 빠질 것인지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다 높은 상황에 있도록 자신이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악에 기울려는 자신 속의 경향들에 저항을 끊임없이 해 가노라면, 우리를 무한한 사랑과 지혜의 위대한 일들이 펼치는 신성한 방법들을 가지고 비평해 대는 것을 중지할 것이다. 자신의 내향적 경험으로 신성한 말씀 속의 영을 더 배우게 될 때, 말씀의 외적 형태를 비평하려드는 잘남이 수그러들 것이라 본다. 심정으로 이렇게 고백할 때, 즉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그래서 인간의 길들은 감각적 삶으로 진흙투성이요 추잡투성이 뿐임을 보고, 이 불결한 것들을 신성한 말씀이 내려 비추어 그 본성을 밝혀 주고 그 본성 속에 든 위험한 것들이 우리에게 경고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될 때, 하느님의 말씀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누가복음 1:79).

18
예언자가 머리털과 수염을 밀다

성서 본문: 에제키엘 5장 1-5절

1. 너 사람아, 너는 이발사의 면도칼처럼 날선 칼로 네 머리와 수염을 밀어라. 그리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가지고 2. 포위가 끝나는 날 삼분의 일은 성 안에서 불에 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 밖을 돌면서 칼로 짓이기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바람에 날려라. 내가 칼을 빼들고 그것을 뒤쫓으리라. 3. 그리고 조금 남겼다가 그것을 두루마기 단에 메두어라. 4. 그 중 더러는 불속에 넣어 살라라. 거기에서 불이 번질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온 가문에 일러라. 5.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을 뭇 나라에 둘러 싸여 뭇 민족들 한가운데 자리잡게 했건만, 예루살렘은…

요약

탐욕과 욕망이 인간 마음을 지배하는 세력을 획득했을 때, 이 세력은 그 마음속에 있는 모든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여, 결국 마음 속에 어떤 자연적 진리까지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바, 자연적 마음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파괴시킨다.

예언자

본문에서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그들을 통해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인간에게 주어졌는데, 이 예언자들은 말씀의 측면에서 그분을 표현하고, 또 한편 말씀에서 축출되어 나오는 교회의 교리도 표현한다. 예언자는 주님의 견지에서 볼 때 오로지 인간적인 수단들, 즉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행동하도록 부름 받고 있을 경우, 그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표현하였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의 아들이란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자신이요, 인간을 통해 입으신 외적 인간다움을 가지고 본을 보이시고 신성한 진리를 완성하심을 표현한다. 예언자가 주님이 인간에게 진리를 밝혀 주시려는데 있어 수단으로 사용되었듯이, 예언자가 당한 것들은 신성한 말씀 글자에 저지른 유대인들의 폭력, 또는 신성한 진리에 대한 폭력을,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해 말씀이 육이 되신 그분의 인성에 대한 폭력까지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예언자가 주님의 명령으로 행동한 모든 일들 역시 표현적 방법에서 위와 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칼과 깎음

이런 표현적인 행동의 하나로 예언자는 예리한 칼, 즉 면도칼처럼 사용될 수 있는 칼을 취하여 자신의 머리털과 턱수염을 밀도록 명령되었다. 깎거나 자르는데 사용되는 칼이나 검 등등은 좋은 의미일 경우, 그것들은 모든 거짓이나 악, 죄악된 행위에 반대하여 그것들을 자르려 하는 무기라는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현하고, 마음 속에 들어오는 각종 생각들을 검사하고, 분리하고, 잘라 내는 진리도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자르는 도구나 무기들은 나쁜 목적에 충당하려고 거짓이 전복해 버린 왜곡된 진리, 그리고 선하고 진정되며 유용한 좋은 것들을 파괴하려 드는 왜곡된 진리를 표현해 준다. 날이 선 칼은 대상물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자른다. 날카로움이 정확함을 표현하듯 예리한 진리는 거짓 관념들을 자르고 관통하여 악한 느낌이나 죄짓게 하는 행동의 본성을 노출시켜 준다. 그리고 거짓된 간섭으로부터 사실들을 분리시켜 주고 거짓 사상의 영향력을 마비시켜 주기도 한다.

머리털

신체의 표면에서 자라는 머리털, 이는 삶의 자연적 평면에 해당되는 것들, 말단에 해당되는 자그마한 사건들을 표현한다. 이 머리털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살피면, 말씀의 글자를 표현하는데, 이 글자는 신성한 말씀 속에 든 생명 있는 부분에 해당되는 내적인 영적 의미와 구별된다.
따라서 머리털을 모두 깎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있어야 할 말단적인 것, 즉 외부 사항들을 거두어버리는 것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하는 수단들인 진리의 지식이 결여됨으로 일상생활 속에 있어야 할 원리들이 마음 속에서 결핍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머리

그러므로 대머리는 선을 행하는 수단인 진리가 결핍된 사람을 표현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글자적인 지식이 결핍될 경우,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를 판가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지상의 인간일 경우, 그에게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결핍해질 때, 그는 자연적 진리와 영적 진리 모두에서 배우고 이해하는 수단이 없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성경의 글자에 관한 지식을 왜곡시키고 부패시켜 자신의 악한 목적에 충당해 갈 때 주님의 말씀의 글자를 올바르게 사용치 못하는 바, 유용한 말씀의 글자의 사용이 결핍되고야 만다.
이렇게 잘리워진 머리털은 땅에 떨어져 결국 소멸되고야 만다. 즉 진리의 외적인 것들, 규율들, 또는 예배의 형식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내향의 영과 생명에서 분리될 때, 그런 것들을 단지 형식적 방법으로서만 준수해 가는 사람들 속에는 어떠한 내적인 영적 생명도 있지 않는 텅빈 형체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표현

자신의 머리를 대머리로 만들므로서 이 예언자는 타락한 삶의 조건에 빠진 예루살렘 백성들의 정신 상태를 표현했다. 그리고 주님을 예배한다고 계속 고백하면서도 타락되는 상태속에 있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의 정신 상태까지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글자로서의 신성한 말씀은 퇴보되는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검사하여 그들 속의 악과 거짓을 노출시켜 주는 날카로운 칼이기도 하다. 그런데 칼이 예언자의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성한 말씀의 모든 힘을 파괴할 수 있게 자기들의 마음에 거짓 관념을 허용하고, 말씀 속의 모든 개념과 명령들은 단지 정규적인 축제를 위한 것일 정도로 등급을 하락시키는 영적 행위가 되었음을 표현해 준다.
모든 천적이고 영적인 진리들은 마치 육체 속의 영이 육체에 의존하여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듯 말씀의 글자에 의존되어 있다.
말씀의 글자는 그 글자가 말하는 자연적인 것과는 글자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를 연결해 주는 상응을 수단으로 하는 표현적인 측면이나 비유적 측면에서는 언제나 일치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표현적인 글자나 상응적인 글자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는 영적 진리를 담는 그릇, 또는 거처하는 장소가 되어주므로 중요하다. 즉 우리 얼굴의 표현, 말하는 목소리의 억양은 우리가 이해한다는데 대한 생각, 심정 속에서 있어지는 내향적인 느낌을 붙잡아 표현하는 바, 그릇 역할과 같음을 비교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동양에서의 대머리

대머리가 지닌 표현적 의미 때문에 대머리는 동양에서는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고, 범죄에 대한 처벌로 그 사람의 머리를 대머리로 만들 경우, 특별히 무례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때로 어떤 이는 자신 스스로 대머리가 되어 친척의 죽음을 매우 슬퍼한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여 예언자가 자기 백성들의 영적 대머리를 슬퍼하여 자신의 머리를 밀도록 명령되고 있다. 대머리는 동양의 경우 수치스러움, 대머리란 말을 타인을 향해 말할 경우, 상스러운 별명을 부르는 것이 된다. “대머리야, 꺼져라”라는 이 구절은 자기 스승 엘리야가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가고 그 뒤를 승계 받았다고 하는 엘리야의 사건 뒤를 잇는 구절에 등장하여 그 앞의 사건에 대해 경멸적인 말투가 되었는데, 이를 내뱉은 베델의 아이들에 관한 기사가 열왕기하 2장 23-25절에 있다. 그래서 42명의 이 아이들은 암콤에 의해 죽었는데, 곰은 표면에 털이 많아 대머리와 특별히 대조를 이룬다. 아이들이 예언자를 놀려대는 것은 말씀의 글자가 신성하다는 것을 경멸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 다음 곰에 의해 아이들이 죽는 것이란 경멸적으로 말씀의 글자를 부정하는 이들이 성경의 글자를 거절하고 미워했지만, 성경의 글자를 부정하는 자는 그 글자의 힘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삼손의 위대한 힘은 그의 긴 머리털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머리털이 잘리우자, 그의 비상했던 힘은 사라졌다. 이는 성경의 글자를 부정하고 거절함으로 말씀을 대머리로 만드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신성한 말씀의 권능은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이유가 말씀의 글자 의미 안은 신성한 말씀(신성)으로 가득 차있어 그분의 권능이 상존하는바 글자 의미가 삶의 지침으로 직접 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응용에 대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계명이나 황금률, 기타 다른 교훈들일 것이다. 게다가 성경 글자의 어떤 부분이 오로지 표현적 성격만을 띄고 있다 해도 그 글자 속에 든 내적 의미인 모든 영적 원리까지도 발견해서 실용화 할 수 있다.

무게를 담

무게를 단다는 것은 물품의 양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게를 단다는 것은 느낌이나 생각 속의 영적인 성격, 즉 그 품질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달아본다는 것은 대상물 속의 선을 측정하는 것이고, 뭔가를 재어 본다는 것은 대상물 속의 진리를 결정짓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영적으로 달아 볼 경우,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그 성격이 판명되어 장차 있어질 것이 예견되어진다. 정신적인 것의 무게를 달아보는 영적인 저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영적 진리에 의해 계발된 마음속의 생각하는 능력, 그리고 자연적 진리로 이해된 마음 속의 생각하는 능력인데, 한마디로 합리적인 능력이다. 계발된 합리력이 애정들과 생각들의 영적 특질을 명확히 보게 될 때, 그 능력은 마음의 삶, 어딘가에 거처를 배당 받는다. 이것이 예언자가 잘리운 머리털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나뉜 각 부분은 그 부분대로 운명을 받고 있다.

세 부분

숫자 3은 진리적 측면에서의 충만함, 완성을 표현한다. 즉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사랑하여, 그 진리를 자기 삶에 실제 사용하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힘은 인간 삶의 모든 부분, 즉 사랑하려는 의지, 생각하는 지성, 또는 이해성, 실제화 하는 행동 지침의 모든 부분을 완성해 주기 때문이다.
머리털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진리가 모든 것에 닿을 수 있을 충분한 수준에서 응용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중 삼분의 일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타락되는 마음이 되는 한가지 원인은 자아 사랑이라는 뜨거운 불, 악한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성 안에서 불에 사르라는 것은 타락의 한가지 원인인 악한 욕망은 교회의 중심되는 교리, 즉 주님에 관한 교리를 썩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머지 중 삼분의 일은 칼로 토막을 내라고 했는바, 이는 말씀 글자 속에 있는 힘은 타락된 마음 속에서는 감각적인 오류로부터, 자아 사랑에 근거한 거짓 추론으로 깡그리 파괴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머지 삼분의 일을 바람에 날려라는 것은 타락된 마음 속에서는 바람이 등겨를 날리듯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말씀 글자까지도 싹쓸어 흩어지게 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이 선포하는 바, 바람에 날리는 머리털은 정해진 장소도, 놓여질 곳도 없게 된다는 것, 게다가 계속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칼을 빼들고 그것을 뒤쫓으리라.” 또는 그것에 대항하도록 칼을 보내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글자적 진리가 교리라는 어떤 바람에 의해 현재의 생각에서 어딘 가로 날려 가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더 심각한 거짓들이 따라 붙어 글자적 진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루마기 단으로 묶음

마지막 삼분의 일 가운데 머리털을 조금 남겨 그것을 두루마기 단에 묶어 두도록 예언자에게 명령되었다. 두루마기 단이란 도포의 가장 낮은 부분에 해당된다. 의복이란 형체를 주는 것, 애정을 옷입힌 진리, 사랑이 표현됨, 실지 응용을 위한 계획 등을 표현한다. 옷자락이란 진리가 행동 지침의 가장 바깥쪽에 응용될 때의 진리를 표현한다. 예언자가 머리털 일부를 두루마기 단으로 묶었다는 것은 실제 행동에 말씀의 교훈 중 아주 적은 분량을 응용해보려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 된다. 그러나 타락하는 마음일 경우, 행동을 위한 실제 교훈까지도 결국 자아 사랑이라는 불 속에 던져지고 만다. 이런 사항들이 발생할 때, 인간 속에 든 진리의 마지막 보루마저 허물어져 악의 불은 인간 마음과 삶 속에 있게되는 교회 속의 모든 것을 사르고 만다. 이런 사항들이 예언자에게 지시된 행동, 즉 두루마기 단에 묶어 둔 조금밖에 안되는 머리털까지 불 속에 던짐으로 표현되고 있고, 이런 사항들로부터 이스라엘 온 가문에 불이 일어날 것임을, 또한 이것이 예루살렘임을, 이런 상황이 예루살렘 백성의 영적 모습임을 본문은 표현적으로 묘사하여 선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항들은 오늘날 우리 상황에도 상존하는 것들이다. 위와 같이 타락된 상태에서 살고 있는 정도만큼, 각자의 실생활에 응용하도록 되어 있는 신성한 말씀을 옷벗기는 방법으로 말씀 속의 권능과 생명을 거절하는 정도만큼에서 우리 역시 예루살렘 백성이나 다를 바 없게 된다.

예루살렘

본문의 뒤를 이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하셔야 할 것에 대한 서술이 등장하고 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무례한 짓으로 보답한 것, 예루살렘의 악행에 대한 마지막 결과에 반드시 있어져야 할 것들에 관한 내용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총애로 타 국가 사이에 놓여 괄목할만 했지만, 오히려 타 국가들 보다 더욱 주님께 반역하여 더 사악한 짓을 했다. 그들은 신성한 법도와 원리들을 폐기시키고, 자기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우쭐대면서도 하느님의 규정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아예 주님의 거룩한 예배 장소까지 각종 우상을 세워 더럽혀 주님을 모독했다. 그들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삭발된 머리를 가진 예루살렘, 타락하고 퇴보되어 자아가 파멸되는 것이 예루살렘의 실체인 것이다.
이렇게 사실대로 묘사하여 표현된 그림은 특별히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우리들의 교회에게 보다 더 적절한 경고를 주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의 예루살렘보다 더 많은 것을 새 예루살렘을 위해 주셨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영적으로 거룩한 성인 우리의 새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 보다 덜 영적 빛을 가져서 신성한 인격의 본성이나 그 질을 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여타 종교들 사이에 놓여 있다. 우리는 신성한 말씀에 대해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라는 훨씬 더 큰 영적 빛을 가지고 있고, 성경의 바깥 형체인 글자와 그 글자 속의 영적 의미 사이를 야곱의 사다리가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듯 말씀을 보는 능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일상 생활이 영적 원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안다. 그야말로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그분의 총애를 받고 있다.

우리의 가능성들

이런 빛과 기회를 동시에 가진 우리는 평범한 이들, 덜 영적 빛을 가지고 있는 이들보다 실제에 있어 선한 인격이 더 높아지게 부상되어야 하리라 본다. 우리에게 많은 것이 주어진 만큼 많은 것도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모든 기회는 가능성을 포함하겠지만 의무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슬쩍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리라 본다. 사랑의 주님이 심정 속에 나날이 건설하시려 애쓰신 것, 새 예루살렘은 우리가 그 성을 내 속에 짓겠다고 부단히 노력하는 한, 즉 자신 속에 든 악들, 거짓, 우리를 썩게 만드는 각종 죄가 되는 행위들, 우리 속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걸려는 타락된 심정 속의 찌꺼기들,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영이라는 양쪽 측면 모두를 부패시키려 하는 각종 행위들에 우리의 의지가 저항하는 한, 그 성은 우리의 영화로운 영적 고향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한다. “예루살렘의 무너진 집터들아,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 (53:9).

19
예루살렘의 우상숭배

성서 본문: 에제키엘 8장 1-16절

1. 제육 년 유월 오일, 나는 집에 앉아 있었다. 유다 장로들이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야훼께서 손을 내밀어 나를 사로잡으셨다. 2. 내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사람같이 보였으나, 허리 아래 모양은 불 같았고, 허리 위는 놋쇠처럼 환히 빛나는 것이었다. 3. 그분이 손같이 생긴 것을 내미시어 내 머리를 잡으시자, 그의 기운이 나를 공중에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신비스런 발현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들려 갔다. 그 곳은 질투를 불러 일으키는 우상이 자리잡고 있는 북향 안문 문간이었다. 4. 거기에서 나는 전에 들판에서 본 것 같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 5. 거기에서 “너 사람아, 어서 북쪽을 바라보아라”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니, 제단 문 북쪽 초입에 질투를 불러 일으키는 우상이 있었다. 6. 그분은 “너 사람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느냐?” 하시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짓은 너무나도 역겨운 짓들이다. 이런 행위로 그들은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다. 너는 여기에서 이 외에도 그들이 하는 역겨운 일을 더 보게 되리라.”
7. 그분은 나를 뜰로 들어 가는 문간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에 가 보니, 담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8. 그분이 나에게 “너 사람아, 담을 뚫어라” 하시기에 그 담을 뚫으니, 문이 하나 보였다. 9. 그분이 말씀하셨다. “들어 가 보아라. 사람들이 거기에서 흉악하고 발칙한 짓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씀을 따라 10. 들어 가 보니 온갖 길짐승과 추한 짐승의 그림과 이스라엘 가문이 섬기는 온갖 우상이 그 담 사면에 돌아 가며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의 장로 칠십 명이 사반의 아들 야자니야를 가운데 세우고 그 우상들 앞에 서서 저마다 손에 향로를 들고 있는데 향연이 향기를 풍기며 올라가고 있었다. 12.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가문의 장로들이 따로따로 신상을 그려 놓은 컴컴한 방에서 하고 있는 짓들을 보았느냐? 저들은 내가 이미 저희를 돌보지 않고 이미 이 땅을 버렸다고들 생각하고 있다.” 13. 그리고는 “이들이 하는 역겨운 짓을 또 보아라” 하시며 14. 나를 야훼의 성전 북향 정문 문간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에서는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즈신의 죽음을 곡하고 있었다. 15. “너 사람아, 보았느냐?” 하시면서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역겨운 짓을 또 보아라.” 16. 그리고는 나를 야훼의 성전 안마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거기 야훼의 성전 정문간, 현관과 제단 사이에 사람 이십 오 명 가량이 야훼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해를 보며 절하고 있었다.

개요

악인은 신성한 말씀의 거룩함을 모독한다. 그들의 악은 예배까지도 침범하여 주님 말씀의 글자적 의미까지 뒤집어 놓는다. 내면적으로, 그들은 모든 선한 원리들을 섞음질 하여 주님 대신 자아 사랑만을 예배하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신성한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닿게 하는 모든 길을 차단하기에 이르른다.

글자적 이야기

본문의 시대 때쯤, 예언자 에제키엘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 틈에 있었다. 그가 타락된 유대인들을 올바르게 세워 보려 노력했었지만, 유대인들은 악한 길속에로 이미 깊숙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과의 언약에 무관심한 상태 속에 침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언자가 공적으로 말해 줄 때 경청하지 않았던 바, 에제키엘은 집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만을 만났던 것이다. 이들에게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말했는데, 그런 상황이 오늘 본문의 경우이다.
이 때, 그의 영적 감각이 영계에 열리면서 표징적인 예언을 말했던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사람이었던 불은 신성한 사람이신 주님을 표현하고 있었고, 그분이 이 예언자를 들어 올려 타락되어 가는 유대인의 모습들을 상징적인 환상으로 밝혀 주신 것이다.

영적 의미

예언자를 들어올릴 때, 수단이 된 것은 그의 머리털이다. 이 머리털은 신체의 표면에서 자라나는 바, 이는 바깥쪽 사항들, 즉 외부에 속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신성한 말씀이 예언자를 통해 주어질 때, 예언자가 그 말씀을 표현하듯, 성경 글자, 이를 수단으로 우리 지성은 영적으로 승강되어 영적 마음이 열리면서 말씀 속의 영적 의미가 우리에게 밝혀지게 된다.
예언자를 붙잡은 손은 말씀의 글자를 수단으로 발휘되는 주님의 권능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 스베덴볽은 그가 말씀의 글자를 읽고 있는 동안 그의 지성이 계발되고 승강되어져 신성한 말씀 속의 영적 진리들이 가르쳐졌다는 사실이다.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

이 예언자는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이 있는 장소로 옮기어졌다. 유다 왕국의 열 세 번째 왕인 므나쎄, 그는 서기 칠백 여년 전 왕국을 통치했었는데, 그는 악하고 우상을 섬기는 왕이어서 이교도들의 역겨운 짓들을 도입했다. 특히 그는 가나안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제일 가는 신으로 여겨 만든 바알 제단을 육성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의 국가들의 주요한 여신인 아세라 목상도 세워 놓았는데, 이 우상은 아마 그리스나 로마의 아스타르테(Astarte)일 것으로 본다. 이 아세라 목상이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이다. 이 우상은 예루살렘의 여호와의 성전 바깥뜰에 세워졌는데, 이 장소는 큰 제단 옆이어서 “성소”와 마주보게 세워진 이유란, 여호와를 질투하는 신이 되게 하면서 동시에 여호와와 맞먹는다고 생각된 우상을 맞세워 여호와가 시기하여 자기들을 괴롭히는 데서 떠나 오히려 보호하기를 바래서였다. 이 우상이 “질투를 불러일으킨다”는 표현을 가지고 있어 위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측면에서 “질투, jealous”란 “열정, zealous”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 두 단어의 히브리 어원은 똑같다. 신성한 질투 또는 열정은 인간의 영적 복지를 위한 불타는 사랑이다. 위의 우상들을 세운 므나쎄라는 왕의 히브리 이름은 “잊어버림, forgetting”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까지 연결하여 생각하면 본문의 이해에 더 보탬이 될 것이다.
왕이라는 므나쎄의 지위는 더 확실하고 특별하게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했다. 즉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포기하고 죽은 우상들을 섬겼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우상들이 나라를 휩쓰는 와중에서도 예언자의 눈은 눈부신 광채,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는바, 이는 영적 영광인 사랑과 지혜를 표현한다.
예언자가 쳐다 본 방위는 북쪽이었는데, 이는 영적 태양이신 주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지는 상황, 그분의 따뜻함을 가장 적게 받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이 자연적 마음뿐일 때를 표현해 준다.

역겨운 짓들

“역겨운 짓들”이란 선함을 모독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불결한 것들은 교회에서, 예배 속에서 신성한 말씀을 부패케 함으로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표현했다. 이러므로 해서 타락하는 인간 속의 악한 욕망은 외모상 정규적인 축제 예배를 개최하는듯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지옥과 연결을 맺고 있는 것이 되었다.
본문에서 말해지는 바, 이런 역겨운 짓들로 “그들은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다”라고 언급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까지조차 이교도 여신 아세라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을 영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만의 삶에로 하향할 때, 그는 악을 사랑하는 각종 신들을 만들게 된다. 그 다음 그는 더 이상 여호와를 찾지 않게 되는 바, 비록 그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척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태로 인간이 타락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성소를 떠나시지도, 그 인간을 버리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 마음의 내향에 있는 성전에서 여호와를 몰아내는 것이다.

벽, 기타 등등

예언자는 구멍이 있는 담에 오게 되었다. 담이란 담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해 준다. 그런데 그 담에 큰 구멍이 생겼을 경우 그 보호는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의 담이란 말씀 속의 영을 보호하는 글자를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글자에 관한 인간의 지식, 이 글자에 대한 공경심, 이 글자에 대한 순종이 없게 될 때, 그는 진리를 항상 썩게 만드는 인간의 악한 경향성에 대항하여 보호해 줄 담이 없어지게 된다.
담에 구멍이 났을 경우, 담 안에 있는 것이 보여지게 될 뿐 아니라 공격에 노출되고 만다. 이와 같은 경우가 우리 마음에도 발생한다. 즉 우리의 자연적 마음과 동인들을 꿰뚫는 빛은 마음에 있는 아주 은밀한 구석에서 되어지는 것들까지 노출시켜 밝혀 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담을 뚫는다는 것은 자연적 마음의 외적 상황을 탐사하여 내향적 상황까지 발견해 가는 것을 말한다. 타락한 인간이 외적인 경건 같은 담으로 자신을 제아무리 숨기려 해도, 샅샅이 뒤지는 주님의 진리의 빛은 그 담을 관통해서 담 안에서 벌어지는 불결한 우상을 예배하는 것, 즉 자아 사랑이나 세상적 정책들을 밝히 노출시켜 준다.

은밀한 방

이 예언자는 감추어 놓인 방, “온갖 길짐승과 추한 짐승의 그림과 이스라엘 가문이 섬기는 온갖 우상이 그 담 사면에 돌아가며 새겨져 있는” 방을 발견하였다. 환상에서 보여진 이 장소는 아마 지하 동굴이라던가, 태양 숭배자들이 집합했던 갈대아나 에집트, 페리샤의 산 속에 있는 장소 같을는지 모른다. 내면의 벽이 그림 문자나 상형 문자를 사용해 온갖 짐승을 표현해 놓았는바, 이런 짐승 종류에는 불쾌하고 독까지 내뱉는 기어다니는 짐승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의 신전 같은데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우상들은 합성된 물체, 즉 일부는 사람, 일부는 짐승으로 표현되어 있었을 것인데 아마 에집트, 아시리아 등에서 숭배한 우상들이라 본다.

짐승들

짐승은 애정에 관한 측면에서 인간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모든 각각의 짐승은 인간 마음에 있는 어떤 원리가 삶에서 표현된 형태들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있는 인간 아래의 모든 것은 표징적인 것으로 창조의 가장 높은 존재인 인간을 정점으로 하여 각 동물은 개별적으로 인간 속에 든 각 품질을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도 짐승들은 인간 품질에 상응되고 있는 바 그 품질을 상징하거나 표현해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헤로데가 여우의 음흉한 특질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연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둘로 형성되나 짐승들은 자연적 애정만으로 형성되는바 인간과 공통적인 것은 자연적 애정뿐이다. 때로 우리가 사람을 어떤 짐승으로 부를 경우, 이는 그가 이기적이고 자연적인 느낌만 있을 뿐, 정작 인간 삶에 존재해야 할 더 높은 느낌이 결핍되었을 때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좋은 동물들은 종교적 제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 그 동물은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가장 좋은 특질을 바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선하고 유용한 짐승은 선한 애정을 표현하나, 사납고 잔인한 짐승은 악한 특질을 표현한다. 기어다니는 것들은 가장 낮은 품질, 즉 자연적 감각에 관계되는 것을 표현한다.
본문에 언급되는 은밀한 방의 벽에 그려진 짐승들이란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들, 즉 감각적인 욕망과 거짓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백성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은밀한 방, 즉 심정 속은 온갖 이기심과 불결을 사랑함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들어감

이런 감추어 놓인 방에 예언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진리가 악한 목적을 감추려 애쓰는 바깥쪽 형체를 꿰뚫는 것을 표현한다. 집이란 인간 마음을 표현한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속의 은밀한 방에서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생각할 때, 자기의 속셈은 주님에 의해 보여지지도, 알려지지도 않을 테니까 외적 예배를 잘 지키면 하느님께로부터도 신뢰를 얻을 것이니 일거 양득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런 악하고 거짓된 불결한 것들이 타락되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 안쪽에 상주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비록 인간이 제 아무리 경건하게 열심히 주님을 믿노라고 신앙을 고백할지라도 그 인간에게 악한 인격을 주고야 만다. 그래서 신성한 말씀 속의 순수한 진리가 이 타락한 인간에게 와 닿을 때 그 속에 들었던 모든 짐승 같은 것들, 기어다니는 냉혈적인 것들, 그 외 자연적 마음 안에 상주하는 것들은 드러나 밝혀지고 만다.
벽에 그려 있는 끔찍한 그림들은 고대 유대인들의 하급 열정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 속에 상주하는 유사한 것들인 분노, 시기, 앙심, 미움 등도 표현해 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불결한 것들은 타락하는 인간 마음의 은밀한 방 속에서 떼지어 기어다닌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우리 속 어두운 곳을 명백해지게 해서 천국의 빛으로 나아가 거듭나는 실제의 일이 시작될 수 없도록 계속 우리의 심정과 지성을 더럽히려고 한다.

장로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나라의 현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지혜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현자들까지 우상 숭배로 전락되었을 때, 그들 모습은 지혜가 부패된 것을 표현하게 된다 즉 합리적 마음이 영적인 것들로부터 빛을 받아야 할 터인데, 스스로 영적 빛에 문을 닫고 자연적 감각 속의 저급 품질로부터 사건을 분석할 자료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 마음은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과 같이 침몰된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들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3:27-28).
칠십 장로들이 우상들 앞에 있었다는 것은 거룩한 것의 모독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7과 70은 거룩한 것을 표현하는 바, 거룩한 것의 남용은 모독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담무즈

폭로된 역겨운 짓의 하나는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즈 신의 죽음을 곡하는” 것이었다. 담무즈란 시리아인들의 태양신이었고, 아마도 그리스의 아도니스(Adonis)일 것으로 본다. 고대 신화에 의거하면, 담무즈는 봄의 생기나 영화로운 것에 관한 자연의 외적 양상을 표현했는데, 이것이 가을과 겨울의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이 담무즈가 산에 사는 야생 돼지에 의해 가을에 죽임을 당한 아름다운 젊은이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래서 매 가을마다, 여인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와 같은 것들이 가을과 겨울철이 태양에서 더 멀리 떨어진듯 나타나는 것으로도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두 계절은 담무즈를 위해 곡하는 계절로 선택되어졌다. 이는 지상적인 것들이 덧없음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영적으로 보건대, 본문의 여인들은 영적이고 거듭나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데 실패하고, 게다가 감각적 쾌락마저 잃어 통곡하는 타락된 각 개인 속의 자연적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 여인들이 주님 성전의 면전에서 곡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신성한 사항들을 소홀히 여기면서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을 충족시켜 보려는 욕망으로 자신들의 심정을 좁히려 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단계는 악에로 한 걸음 더 빠져드는 것, 즉 신성한 것을 거절하고 부정하면서 주님이 계실 장소에 자아 사랑이라는 우상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이십 오명 가량이 야훼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해를 보며 절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 25명의 구성원 중 1명은 예배를 관장하는 대사제, 24명은 사제 임무를 돌아가며 맡는 사람 또는 그 과정을 표현했을 것으로 본다.
이 사람들이 주님의 거룩한 성소에서, 성전에 등을 돌린 채, 해를 쳐다보면서 자연계의 태양을 숭배했다는 것은 여호와의 신성한 사항들을 완전히 배격하면서 동시에 우상으로 태양과 연합하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들이다. 그리하여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어야 할 이들, 여호와의 예배를 인도해야 할 이들이 그분께 맞서겠다는 쪽으로 전락된 것이다. 악인이 숭배하겠다는 태양은 단지 죽은 본성만 가졌을 뿐인 바, 타락한 마음속에서는 자아 사랑이라는 죽은 것이 살아 계신 하느님이 계실 장소에 들어앉았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주님 사랑의 불이 이렇게 된 심정 속에 들어가시고자 할 때, 주님의 사랑이 자아 사랑이 흠모하는 삶을 파괴하려 든다고 간주할 뿐이다.
이런 타락된 인간을 향해 주님의 소리는 경고성 있는 사랑의 소리로 다가가서 말하시기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에제키엘 18:31).

20
예루살렘의 대학살

성서 본문: 에제키엘 9장 1-6절, 10장 1,2,7절

9장 1.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그분의 음성을 나는 들었다. “이 도시를 벌할 자들아, 모두들 두드려 부술 연장을 손에 들고 나오너라.” 2. 그러자 북쪽에 있는 높은 문에서 사람 여섯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손에 망치를 들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모시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의 필묵통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 와서 놋제단 곁에 서자, 3.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자리잡고 계시던 거룹에서 떠올라 성전 문턱으로 나오시어 모시옷을 입고 필묵통을 허리에 찬 그 사람을 부르시며 4. 말씀하셨다. “너는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 다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주어라.” 5.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내가 듣는 데서 이렇게 이르셨다. “너희는 저 사람 뒤를 따라 도시 안을 돌아 다니며 마구 쳐라, 가엾게 여기지도 말고 불쌍히 보지도 말아라. 6. 노인도, 장정도, 처녀도, 어린이도, 부인도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 우선 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있는 장로들부터 치기 시작하였다.
10장. 1. 내가 바라보니, 거룹들 머리 위에 있는 덮개 위에는 청옥 같은 것으로 된 옥좌 같은 것이 있었다. 2. 거기에는 모시옷 입은 그 사람에게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들려 왔다. “바퀴들 사이로 해서 거룹 밑에 들어가, 그 거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 내어 이 도성 위에 뿌려라.” 그러자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리로 들어 갔다.
7. 한 거룹이 그 거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손으로 집어다가 모시옷 입은 사람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개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는 성서를 거룩한 말씀으로 소유한 교인들에게 있는 영적 인격을 검사한다. 이 검사에서 인간이 신성한 말씀을 어떻게 받는지를 밝혀 준다. 이것이 영적 심판이요, 이 심판 속에서 악한 인간은 자신에게 이미 고정시켜 놓은 인격에 의해 자신을 파괴시킨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악들에 의해 모독되었거나 파괴되지 않은 진리와 선함이 자기 속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교인은 신성한 진리를 신실하게 자기 심정에 받되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영을 수단으로 거듭 나아간다.

심판

우리가 기억해 둘 것은, 본문은 글자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심판에 대한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환상으로 이 심판은 인간 마음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성

도성에 대해 어떤 임무를 가진 이들에게 어떤 명령이 주어졌다. 도성, 이곳은 인간을 위해 집과 같은 것들이 체계적으로 집합되어 서있는 곳인바, 이는 인간 마음이 사용하려고 정리해 놓은 체계적인 교리를 표현한다.
예루살렘이 교회를 표현하듯, 도성은 교회 속의 교리를 표현한다. 오늘 본문의 경우, 도성은 더욱 악쪽으로 침몰되는 가운데 있는 타락하는 마음속에 든 교회의 교리를 표현했다.

사람들

도시에 어떤 임무를 띤 사람들이란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교회의 교리 안에 거주하고 있고, 이 진리를 수단으로 진리 측면에서의 인간 마음 상태는 이 진리가 예리하게 심정의 삶 안에, 즉 바깥 행동에 응용됨으로 해서 검사되어 심판되는 것이다.
여섯 사람이 있었다. 여섯이란 전투하는 상태를 표현하고, 이 상태 속에서 진리는 악과 거짓을 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여섯은 창조의 육일이다. 이는 마음 속에서 계속되는 전투를 표현해 준다. 이 전투 속에서 인간이 도달 가능한 거룩한 칠일 째를 맞기 전, 인간은 선과 악, 거짓과 진리의 양 측면이 계속 대립을 이루어 가면서 거듭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의 종들은 육 년을 봉사하고 난 뒤 칠 년째에 자유를 얻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 족들은 자기들의 토지를 육 년 동안 계속 경작하다가, 칠 년 되는 해에 경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섯 사람이 도시의 북쪽 문에서 나왔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전투를 하게되는 국면은 거룩한 말씀의 글자에서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추운 방위인 북쪽은 외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도자

여섯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대 학살을 주도하는 지도자였다. 특별히 그는 모시옷을 입고 서기관의 필묵통을 옆에 차고 있었다. 희고 깨끗한 모시는 순수하고 깨끗한 삶, 의로운 상태를 표현한다. 이 상태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삶을 올바르게 정립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묵시록에서의 경우, 모시옷은 교회에 관련되어 말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19:8). 본문에서 모시옷을 입은 사람이 심판을 주도하는 자였다. 그런 이유는 교인을 심판하는 가장 중요한 테스트가 실제 삶이 얼마나 올바른 행위이냐에 있기 때문이다.

기록자

모시옷을 입은 사람이 필기자(기록자)처럼 필묵통을 찼다는 것은, 실제 있어진 정의가 인간 삶에 관한 실제의 기록을 있게 한다는 것, 각자의 일상 생활의 행동이 자기 인격의 품질을 기록하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열매로 너희는 그들을 알 것이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 한다면 계명을 지켜라.”
“하느님의 영광,” 이는 신성한 현존을 표현하는 후광인데, 이 영광이 거룹에서 떠올라 성전 문턱으로 갔는바, 이는 주님께서 빛나는 진리로서 교회의 바깥 사항들에 특별하게 나타나시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의 실제 행동 속에 있어진 선과 악을 수단으로 각 사람의 인격의 품질이 증명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구별은 뚜렷하게 이루어진다. 영적 심판은 악한 자에게는 그 악에 대한 징벌로서 앙심 있는 처벌을, 선한 자에게는 그 선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각 사람의 인격이 충분히 발달되므로 해서 악으로부터 선을 분리하는 것이요, 그 분리 속에서 각 사람은 자기가 이룩해 놓은 인격 품질의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에게 표를 해주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들은 발칙한 짓들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짓들이 영적 삶에 반대되므로 크게 슬퍼한 이들이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들에 한숨짓고, 자신의 애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탄식한다.
이마는 내면에 있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마가 얼굴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듯, 이 사랑은 인격의 가장 높은 부분에 해당된다. 어떤 것에 표를 해 둔다는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선한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인간을 심판하는 가운데, 즉 선과 악을 분리함에서 인간의 진짜 품질에 해당되는 내향의 인격을 가지고 분리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내향의 인격이란 그의 행동만이 아닌 그의 동기까지 포함될 때이다. 본문에서 표(mark)라는 의미로서 사용된 히브리 단어(tàw)는 특별히 십자가 표를 의미한다. 십자가가 시험의 고난을 표현하듯, 십자가 표를 한 사람들은 시험의 투쟁을 통과하면서 거듭 나아간 사람들이다.
이에 더해서 기억되는 한 가지는, 과거 이스라엘 후손의 출애굽 직전에 여호와께서 에집트의 맏이들을 죽이게 되었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그들의 문에 피가 묻어 있으면 에집트 사람과 구별되는 표로 삼아 이 마지막 재앙이 아무도 죽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두셨던 줄거리이다.
이 사건은 후에 과월절 축제를 기념하게 된 큰 사건이 되었다.

마구 쳐부숨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할 것 없이 마구 쳐부순다는 것은, 심판 중에 악한 자들은 마음과 인격 속의 모든 부분들을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부분이란 그들의 총명, 애정, 그리고 순진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그렇게 부서지는 이유는 그들을 이끈 사랑이 악인 고로 그 악이 마음과 생명에 속한 모든 특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 그들은 악한 심정이라는 창고로부터 악한 것을 만들어 낸다.
인정 사정 보지 말고 마구 짓부수라는 것은 악한 인격 속에는 구원되어지고 거듭나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악한 인격이 황폐해져야 함이 악인에게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파괴는 주님의 성소, 즉 거룩한 장소부터 시작되게 하라고 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거룩한 장소에서 우상들을 숭배하느라 분주했던 장로들부터 쳐 부셔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지도자인 장로란 악행을 일으키게 한 마음속의 주된 사랑(ruling love)을 표현한 것이고, 이것들이 그 벌을 맨 먼저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악 가운데 있는 지도자, 악한 원리로 사람을 이끄는 자는 그 원리로 타인을 현혹시켰겠지만 결국 자기까지도 현혹시키고 만다. 따라서 그들의 악들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시킴으로 자신에게 되돌려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것들이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읍니다”라고 주님께 보고되는 심판 속에 있는 지도자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청옥의 옥좌

이런 일이 진행된 뒤, 청옥 같은 것으로 된 옥좌가 거룹 위에 나타났다. 푸른색인 청옥(sapphire)은 진리를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청옥은 그분의 진리,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있게 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진리는 그분이 신성한 사랑 안에 계신 분임을 밝히 나타나게 해준다. 태양의 빛에서 아름다운 청옥이 맑고 투명하게 빛나듯,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오게 되는 영적인 빛에서 말씀의 글자는 온유하신 자비로 지상에 있는 인간의 모든 내향적 삶과 외향적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나게 해준다. 주님의 옥좌란 주님이 계신 곳, 천국을 표현한다. 내적 의미에서 볼 때, 천국은 주님이 거하시는 선한 자의 거듭나는 마음이다.

모시옷 입은 사람에게 명령되기를, “바퀴들 사이로 해서 거룹 밑에 들어가, 그 거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두 손 가득히 움켜 내어 이 도성 위에 뿌려라” 라고 하였다.
불은 사랑을 의미한다. 다만, 여건에 따라 선한 사랑이나 악한 사랑을 의미할 뿐이다. 거룹이란 주님의 섭리를 표현한다. 즉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 의해 영적인 것이 모독되는 데서 지켜 보호하시는 섭리이다. 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 중 글자 부분은 악의 거짓이나 감각적 오류로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적 의미를 보호해 준다.
근원적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인간에게 온다. 따라서 사랑은 품질면에서 선하다. 그러나 악한 자가 이 사랑을 받게 되면, 그는 자신의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 속에 사랑을 침수시켜 사랑의 품질을 뒤집는 바, 신성한 사랑을 인간의 악으로 바뀌게 하고 만다.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악할 경우, 그들에게는 믿음의 신비에 관한 영적 이해, 즉 거듭나는 삶에 관한 내적인 것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는게 그들을 위해 더 바람직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 반대되는 생활과 영적 진리들을 미워하고 모독하는 가운데 있으므로 더 밝은 영적 이해가 있을 경우, 그들은 악속으로 이 진리를 침몰시켜 더더욱 악해 지기 때문이다. 악인이 더욱 악해져 끝장을 보게 된다거나, 죄인들에게 복수하는 식으로 정죄하려는 것이 주님의 바램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주님의 바램이어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을 본인이 기쁘게 받을 수 있는 정도만큼만, 선해지기 위해 그가 사용 가능한 만큼의 진리만을 주시려 하신다. 그래서 악이 자기가 선택한 악들로 인해 구원될 수 없을 때, 주님께서는 그가 더욱 깊은 악들로 빠져드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덜한 악에로 구원해 주신다. 이 목적을 위해, 악한 자로 하여금 마음의 외적 조건에 머무르도록, 즉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가운데 머무르게 허용하신다. 그렇게 허용하시는 이유는 악한 자가 지옥적 삶 중에서도 조금 덜한 조건에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숯불 (coals)

거룹들 사이에 있는 숯불은 영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숯불이 그 장소에서 꺼내져서 악한 자의 도성에 뿌려지게 될 때, 이와 같은 행동은 마음의 낮은 형태, 즉 자연적 마음에 사랑이 하강되고 마는 것을 표현한다.
도성은 교리의 체계를 표현하나, 본문의 경우, 이 도성은 악한 자들이 붙잡고 있는 교리, 즉 뒤집혀진 교리, 거짓 교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이 도성에 숯을 뿌렸다는 것은 주님의 허용하심에 관한 것, 다시 말해서 악한 자들이 영적 사랑이라는 높은 것들을 보고 모독해 버리느니 보다는 차라리 감각에서 오는 야생적 욕망에서 살게 하고, 자연적 애정만을 뒤집고 오염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 더 낫다는 주님의 판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진리를 전복하는 사랑과 거짓 교리를 믿는 가운데 있는 그들이 만일 더 높은 생명을 뒤집는다면 그들은 더욱 한탄스러운 조건에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이 진리에 의해 심판되어지고, 각자가 있을 곳을 결정한 인격 그대로 있도록 허용되어, 악한 자가 악한 욕망에서 살도록 하는데서 심판은 마무리된다.
그 다음 주님의 영광은 거룹 사이로 되돌아온다. 즉 주님의 선함과 진리는 주님에 속한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격을 갖춘 이들에 의해 높은 영적 빛 속에서 보여지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만 명백하게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님 가운데 머물게 하는 자, 완전한 평화 안에 있도록 그분은 지켜 주신다.”

21
보따리를 꾸려 떠남

성서 본문: 에제키엘 12장 1-7절

1.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 사람아, 너는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 가운데서 살고있다. 그들은 두 눈이 성하면서도 보려고 하지 않고, 두 귀가 성하면서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역할 생각밖에 없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3. 너 사람아, 포로로 잡혀 가는 사람이 메는 보따리를 꾸려 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길을 떠나거라. 사람들이 보는 데서 네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거라. 행여 이 겨레가, 자기들은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인 줄을 깨달을지 아느냐? 4. 사람들이 보는 데서 포로로 잡혀 가는 사람이 메는 보따리를 대낮에 꾸려 놓았다가 저녁에 사람들이 보는 데서 사로잡혀 가듯이 떠나거라. 5. 사람들이 보는 데서 벽에 구멍을 뚫고 나가거라. 6. 어두울 때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고 나가거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 겨레가 겪을 운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개요

타락하는 마음은 주님에 정반대 되어 그분의 신성한 말씀이 담긴 성서의 글자까지 왜곡시킨다. 따라서 주님의 교회는 타락된 인간과는 결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인간을 더 이상 개별적인 교회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교회 안에서는 주님을 아버지로, 또는 교회의 통치자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에서의 의미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포로로 끌려 갈 시기가 임박해졌다고 거듭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예언자의 경고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하는 말이란, 고작 그 예언들은 아주 먼 훗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실을 더욱 부채질하여 그들의 악이 필연코 가져오는 결과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에제키엘이 끼어 생활했던 포로들, 이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들이 사랑했던 예루살렘으로 귀향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제키엘은 그들에게 귀향하고 싶은 희망은 소원 사항으로 끝날 뿐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이유가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 자체가 머지않아 이곳에 끌려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에제키엘은 본문에서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 즉 포로나 망명자들이 떠날 때 하는 모습인 보따리를 꾸려 떠나는 모습을 보여 주므로서 위의 예언을 예증해 보였다.
사막을 여행했던 고대 유대인들은 그들이 먼 여행을 준비할 때, 그들은 낮 동안에 각종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서 집결지에 모아 떠날 채비를 다해 놓고 있다가 서늘해지는 밤을 이용해서 이동하였었다. 이 여행 대열에 합류할 사람이 있을 경우, 그들은 낮 동안 짐을 꾸려서 집에 머무르다가 저녁 무렵 짐들을 어깨에 메고 나와 그들과 합세하곤 했다.
집을 떠나는 예언자의 태도에서 보여지는 것은 글자대로 포로로 잡혀가기 싫은 사람이 도망치듯 하는 수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낮에는 보따리를 꾸려 감추어 두었다가 어둠을 틈타 탈출하는 수법이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의 백성과 수령들이 탈출한다고 에제키엘은 예언해 주었던 것이다. 예레미야도 이와 같이 왕 시드키야가 갈대아인을 피해 도망갔다고 기록했다. 즉 “유다 왕 시드키야와 그의 군인들은 그 장군들을 보고 두 성벽이 만나는 성문으로 빠져나가, 왕실 정원을 거쳐 밤을 도와 아라바 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바빌론 군대는 그 뒤를 쫓아 예리고 벌판에서 시드키야를 붙잡아…” (예레미야 39:4-5).
벽을 조용히 뚫는다는 것은 적의 감시를 피하려는 모습이다.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은 비통, 슬픔, 굴욕의 표시이다.

볼 눈 등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역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불리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볼 눈을 가졌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는데도 듣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악한 인간도 진리를 볼 능력을 가졌고, 자기가 본 진리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신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진리를 미워하고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영적인 모든 빛에서 얼굴을 돌린다.
악인에게 있는 문제점이란 그의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고집스런 무지, 즉 의도적으로 내세우는 무지에 있다. 그래서 이런 악인이 진정한 원리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적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한마디로 그들은 진리를 바라지도 않고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그래서 그들이 진리를 접할 때 추구하는 첫 단계는 진리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는 말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마무리짓는 단계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옛 말에, “본의 아니게 승낙했다 해도 그것은 그의 견해의 범주에 들어 있다.” 이에 더해서 있는 속담의 말, “보지 못할꺼라는 사람만큼 눈먼 자는 없다.” 이런 백성을 두고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백성들은 참으로 배반하는 백성, 믿을 수 없는 자식들, 야훼의 가르침을 따르기 싫어하는 자식들이구나. 계시를 보는 이들에게, ‘계시를 보지 말라’하고 예언자들에게 ‘진실을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라’하며 ‘솔깃한 말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나 하여라. 한 길에서 물러서거라. 한 길에서 비켜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이야길랑 우리 앞에서 꺼내지도 말라’ 하는 자들아!” (30:9-11).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그들의 일상 생활과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 집을 세상의 방법이라는 모래 위에 세울 뿐, 진리라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듣는 것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종종,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라고 말해 두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영적인 귀를 열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영적으로 기꺼이 듣겠다고 준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한 영적 총명은 진리를 보고 인정하여 기쁘게 사랑함에서 비롯된다. 이 단계는 영적인 들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보고 이해한 진리를 심정 안에 받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진리를 듣는 것이 된다. 그 다음 이 진리가 선과 결합할 때 들었던 진리는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진리를 본다는 것은 우리의 지성 안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되고, 진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 심정(의지) 안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된다.
“심정이 순수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느님을 뵐 것이다.” 이 때의 본다는 것은 육체의 눈이 본다는 말이 아니라, 내향적 삶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인데,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살아 있게 해줌을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자기들의 영적인 눈과 귀를 열지 않는다. 즉 그들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보고 이해하는 유전 받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소경일 경우, 그들은 소경이라는 것, 또는 그들은 회개하고 개혁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가르쳐져야만 한다. 영적 소경은 정신적인 무감각 상태인 바, 그 마음이 올바른 조건, 제 정신으로 회복될 수 있기 전, 반드시 그 무감각의 극복 즉 소경의 눈이 뜨여야 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된다.

소지품

소지품, 또는 집안의 물건이란 집을 관리하는데 필수되는 것들을 말한다. 집이 마음을 표현하듯, 집안의 물건들은 인간의 마음에 공급되어야 하는 필수 사항들, 인간을 영적으로 살게 해줄 것들,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표현한다. 주거지를 옮긴다는 것은 마음을 다른 조건에로 건너가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런 옮김에서, 마음은 삶 속의 일을 위해 그 일에 공급되어야 할 필수적인 것들까지 운반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예언자는 반역적인 악 속에 있는 유대인의 모습을 표징적으로 초상화해놓고 있다. 예언자가 공적으로 신성한 말씀을 표현했듯이, 그의 집안에 있는 것도 신성한 말씀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표현했다. 그래서 집안에 있어야 할 소지품을 집밖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간직해야 할 말씀에서 오는 선함과 진리 모두를 마음 밖으로 내던지고 성경 글자에 있는 각종 축제를 형식적으로 지키는 그들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말씀 글자 내에 있는 의미가 썩어질 때 그 글자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는바, 그렇게 되면 주님의 선함과 진리는 그들의 악한 마음과 결별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일이 “사람들이 보는데서” 있었다는 것은 만일 그들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면 말씀의 글자가 밝히는 삶의 법칙으로부터라도 자신들의 악한 길을 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이동이 저녁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거짓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 진리를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영적인 빛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말씀의 글자가 주는 경고가 그들의 정신적 조건에 고취되도록 경고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여 어떤 실제의 선한 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포로, 등등

포로로 잡혀가거나 추방당해 쫓겨가듯 하는 모습으로 예언자가 자기 짐을 꾸리는 모습은, 보따리를 싸는 것이 소풍이나 여행 정도의 일시적인 행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그리고 힘든 환경 속에서 지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자유를 누릴 때란, 그가 선함을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하여, 자기 삶을 위해 신성한 법칙에 기쁘게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악을 사랑하고 거짓에 신뢰를 두어 죄 가운데 있게 되면, 그는 영적으로 포로가 된 상태요, 악의 사슬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포로에 꼭 동반되는 영적 고통 속에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언제나 “죄인은 자기 죄에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치시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서 떨어져 나간 모든 사람들은 자기 고향과 자유를 떠나, 영적인 포로로 전락되면서 외국 땅에서 비천한 망명 생활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악이나 거짓, 죄, 슬픔, 노예 신세 등등은 인간 영혼의 영적 보금자리를 결코 산출해 내지 못한다.

구멍을 뚫음

집 벽을 뚫는다는 것은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행위, 즉 검증, 또는 탐사를 표현한다. 그래서 선함과 진리에 속하는 신성한 원리들이 거꾸로된 교회의 교리 속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을 때, 이 원리들은 그 원리와 전혀 맞지 않는 성질로부터 떠나 자기들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다. 다시 말해 마음 상태를 잘 관찰하는 총명한 마음은 불순물로 꽉 차 있는 악 속에는 주님의 원리가 거주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안다. 인간의 왜곡된 사상이나 부패된 것들은 신성한 법칙과는 아주 딴판이라는 것은 말씀의 글자만을 가지고도 쉽게 판결된다.
예언자가 얼굴을 가리우고 집 밖을 나서되 땅을 보지 말고 나가라는 것은 유대 교회 안에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가 주는 삶의 법칙, 선함에 관한 어떤 지각도 남은게 없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어두울 때 보따리를 메고 나가는 예언자란 정신적 어두움과 거짓으로 꽉 차 있는 백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상징 (sign, 징표)

“나는 상징(징표)이다” 라고 백성들에게 선포하도록 예언자는 명령받고 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그들의 정신적 행동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가 자기 집의 모든 물품을 옮기는 것은 유대 교회의 모습, 즉 그들에게 어떤 진리나 선함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런 선포가 있어지는 이유는 그들 속의 모든 것이 악과 거짓으로 깡그리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본문 같은 인간 마음의 조건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공생애나 그분의 속성을 잘못 해석하거나 남용함으로 본문과 유사한 상태로 위험스럽게 접근되고야 마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인격과 생활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즉 악에서 선으로 변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만으로 의로워짐,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피에 기대는 손쉬운 구원 방법을 강조함으로 교인들의 이해성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의 명확하고 실제적인 서술은, “내가 살기 때문에 너희도 살게 될 것이다.” “너희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면, 계명을 지켜라” 임을 흘려 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거듭남

구원이 인간에게 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악인에게 귀속됨(impute)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분의 의를 나누어주심(impart)으로, 그리하여 인간이 거듭나 새 인격으로 다시 태어남으로, 그리고 새로운 인격을 천상 천하의 유일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탱시켜 주심으로 가능해진다.
예언자에게 “백성들의 불법을 짊어지도록” 말해진 것은, 예언자가 백성의 불법을 거두어 갔다라던가, 그가 불법이 끼칠 피해를 없어지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의 불법을 표현해 주어 그들로 자기들의 속을 들여다보게 하셨을 뿐이다.
예언자와 백성의 관계에서 예언자가 어떤 산 제물 같이 여겨지는 것은 예언자의 표징적 직무(representative office)에 대한 본성이나 역할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에 관해 말해질 때도 위와 비슷하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의 불법을 예수로 짊어지게 하셨다 함이란,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이 악인의 불법을 거두어 가셨다던가 또는 그 불법의 필연적 결과로 당하는 피해를 성난 하느님의 분노를 유화함으로 피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인간 속에 있는 악들을 단지 표징적으로 짊어지신 것이다.
그분이 입으신 인간성 속에서 예수님은 지옥에 있는 모든 공격을 당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지옥을 만나셨고, 정복하시어 인간을 지옥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셨다. 이 구속은 만인을 위해 있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속이 각 개인이 자신 속의 악으로 인해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인격 속에 있는 악한 조건으로부터 구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하여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나아가는 것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본질 측면에서든, 인격 측면에서든 한 분 뿐이시다는 것, 그 한 분 뿐인 하느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그리고 그분의 공생애(mission)는 실지의 거듭남,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남을 수단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manifest) 것임을 납득하게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누가복음 17:21)이 우리 삶에서 실현될 때, 우리는 천국에로 들려지는 바,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도 보았거늘…” (요한복음 14:9)라고 선포해 두셨다.

22
무서워 떨며 먹는 빵, 겁에 질려 마시는 물

성서 본문: 에제키엘 12장 18-20절

18.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19. “너 사람아, 빵을 먹으며 무서워 떠는 몸짓을 하여라. 물을 마시면서 불안해서 겁에 질린 몸짓을 하여라. 그리고는 지방민들에게 일러 주어라. ‘예루살렘 주민들이 어떻게 될지, 이스라엘 농토가 어떻게 될지 나 야훼가 말한다. 땅에서 남아 돌아가던 것이 모두 없어져 다들 마음을 못 놓고 빵을 먹을 것이며, 허둥대고 물을 마실 것이다. 그것은 온 주민이 잔악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20. 사람이 우글거리던 도시들은 사막이 되고 시골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개요

거짓과 악을 탐닉함으로 타락하는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서 그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자신들 스스로 파괴한다.

빵과 물

백성에게 징조를 보여주기 위해 예언자로 하여금 빵을 먹으며 무서워 떨고, 물을 마시되 불안해서 겁에 질린 몸짓을 하도록 명령되었다. 넓은 측면에서 빵은 양식을 대표하는 바, 이는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의지 또는 심정에 받게 되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물은 우리의 이해성 또는 지성에 받게 되는 진리를 표현한다. 포도주와 물을 구별해 본다면, 물은 자연적 진리, 즉 일상 생활에 응용되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가진 관점에서 보여지는 진리이다. 빵을 먹고 물을 마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선함과 진리를 받는다는 말이다.

무서워 떨고, 겁에 질림

무서워 떠는 것은 위험이라는 공포, 또는 정신적 동요를 야기시키는 어떤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몸짓이다. 인간이 선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획득하면서도 정작 그가 행복하지도 않고 평화롭지도 않은 상태, 뭔가 불확실해서 위험이라는 큰 공포가 덮칠 것 같은 마음 상태를 가질 때, 본문에서 언급하는 무서워 떨며 빵을 먹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신 속의 악과 획득한 선이 섞여지기 때문이다.
불안해서 겁에 질려 물을 마신다는 것은, 의심과 공포, 또는 흥분과 곤란한 상태 속에 있으면서 진리를 진리로 간주하여 받는 모습을 말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진리를 받되, 자기 속의 거짓 관념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근심, 걱정(불안, care)

성경에서 근심(care)은 고민을 포함하는 불안 (anxiety)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또 가시덤불에 떨어 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의 “세상 걱정”이란 세상 업무 수행에 필요한 측면에서의 걱정이 아니라 세상욕을 채우기 위해 긴장하는 것, 이기심의 발작으로 비롯되는 근심 걱정이요, 신성한 섭리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신중함에 전적으로 의지함에서 생산되는 근심 걱정이다.
이런 표현이 본문에서, “그들은 불안해하며 빵을 먹게 될 것이다”로 서술되고, 이는 공포와 불확실로 인해 올라오는 걱정 근심으로 가득 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겁에 질려 물을 마신다”는 것은 타락하는 인간은 신성한 섭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마음들이 혼동을 일으켜, 하느님이 분노하실 것까지 상상 속에 보태면서 닥쳐올 결과에 심각한 우려를 갖는 상태이다.
본문의 예언은 두 왕국,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되고 있다. 이는 악인의 온 마음에 근심 불안이 고루 퍼지게 될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유다, 또는 예루살렘은 애정이 들어 있는 의지 또는 심정을, 이스라엘은 생각이 들어 있는 이해성 또는 지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황폐함(desolation)

그 땅에 속한 모든 것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내에, 또는 인간 심정 안에 있는 모든 선함이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온 주민이 완악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선함을 전적으로 거절하고, 모든 신성한 원리에 광폭하게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도시들은 사막이 되고, 시골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이는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교리들, 그 교리를 집으로 삼아 거주하던 진리들이 타락된 마음속에서 지독하게 파괴되리라는 것을 뜻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타락하는 마음은 오로지 악한 동기와 거짓 관념으로 말씀을 해석해 가기 때문이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악이 심판 속에서 선과 분리될 때, 분리라는 이 작업이 주님으로부터임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은 영적 빛으로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영적 인간에 의해서만 보여질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알려지는데, 그 이유는 이런 사실이 성경 글자에서도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인은 자기에게 자연스럽게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생명을 썩게 함으로 자신이 자신을 판결하여 스스로 자신을 영적으로 죽인다. 영적으로 그가 에덴에서 쫓겨 나는 것, 즉 좋은 것으로 가득 찬 모든 것을 차 버리고, 어렵고 고된 정신 세계, 힘들게 땀흘려 보아야 고작 얻는 영적 생명은 조금 뿐인 정신 세계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애가서 5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자기의 물을 돈 내고 얻어 마시며 자기의 나무도 값을 내고 들이게 되었습니다. 목에 멍에를 걸고 허덕이며 숨돌릴 겨를도 없이 지쳤습니다.”

거듭남은 필수 과정

이상의 모든 증거는 인간 삶이 거듭나는 상태에 있어야만이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거듭나지 않는 모든 상태들은 무거운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 이유가 그들 속에 든 조건들이 필시 불행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외형에서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인간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인격의 품성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은 거듭남 속에서, 즉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 선하고 진정된 모든 원리를 사랑하면서 일상 생활을 그 원리로 꾸려 가는 데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행복에로 오도록 가장 은혜로운 초대를 다음과 같이 베풀고 계신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네 영혼이 살리라” (이사야 55:1-3).

23
거짓 여 예언자들

성서 본문: 에제키엘 13장 17-23절

17. “너 사람아, 너는 이제 눈을 돌려 네 겨레 가운데서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하면서도 그것을 내 말이라고 하는 여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18. ‘주 야훼가 말한다. 저주받아라, 너희 사람 팔목에 토시를 만들어 끼우고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에게 너울을 씌워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들아! 너희가 내 백성의 목숨을 노리면서 너희의 목숨은 부지할 듯싶으냐? 19. 너희는 내 백성이 보는 데서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을 받고 나를 욕되게 하였다. 거짓말에나 귀가 솔깃해 하는 나의 백성을 속여,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할 자를 살려 두었다.
20.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새잡듯이 사람을 잡는 그 토시를 어떻게 내가 그냥 두겠느냐? 내가 그것을 너희의 팔에서 찢어 버리고 너희가 사로잡은 그 사람들을 새처럼 놓아 주리라. 21. 너희가 씌워 준 너울을 찢어 버리고 더 이상 잡고 있지 못하게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구해 내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22. 죄없는 사람의 마음을 내가 왜 괴롭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터무니 없는 소리로 그 마음을 꺾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죄있는 자는 나쁜 길을 버리고 살 길로 돌아 오지 못하게 옆에서 부채질을 하였다. 23. 내가 이제 너희로 하여금 다시는 허황된 환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속임수로 점을 치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 백성을 너희의 손에서 구해 내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개요

신성한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랑은 거짓된 설득으로 우리 마음들을 유인하려 든다. 이 설득력은 마음이 악으로 파멸 당할 때까지 그 마음을 딴 길로 인도한다. 거짓된 설득을 주창하는 이들은 정신적인 파멸에 타인까지 그릇되게 끌고 간다. 그러나 이러한 그릇된 인도에 저항하는 모든 마음은 신성한 섭리에 의해 보호되어 진다.

글자적 사실들

“네 겨레 가운데서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 하면서도 그것을 내 말이라고 하는 여인들”이란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거짓 여 예언자들이다. 본문 당시 이 여자들은 부패된 계층 속에 있었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받아 예언하는 체하면서 실지로는 자기들 심정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했다. 다시 말해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위선적으로 사기치는 무리들이었고, 따라서 주님께 물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현혹시켜 희생되게 했다. 그들은 느슨한 인격을 지닌 여자들이지만 자기들 방식을 사용할 때는 예리해져 잘 속여서 교회라는 외투 속에 자신들의 썩은 직업을 잘 숨겨 둔 자들이었다. 그 시대 상황에서는 이런 것도 잘 번창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통치자나 그 외 대다수가 썩은 상태면서도 교회의 규율은 엄격히 지키겠다고 고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시편 12편에서 예를 들어주고 있다. “주위에는 악인들이 우글거립니다. 더러운 자들이 판을 칩니다.”

베개를 바느질함 (토시를 만듦)

본문의 역사가 있었던 그곳의 사람들은 아주 감각적이어서 신체의 편안, 감각을 즐기게 하는데 매우 신경을 썼다. 특히 부유한 자는 더욱 편하게, 사치스럽게 살려고 육체의 안락을 연구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부자들은 가능만 하면 적은 노동을 하고 대부분의 노동을 종들에게 시켰다. 여자들은 지적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주요 의무는 남편이나 아버지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들 뿐이었다. 그 대신 부유한 여자들은 마차에서 베개에 기대고 있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운세, 행운을 주님께 묻고자 하는 이들이 위의 여자들에게 왔을 때, 그 여자들은 문의자들에게 우선 부드러운 베개나 푹신한 것들에 기대게 해서 상대방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그래서 이런 여자들은 손목까지 내려 온 속옷의 진동에서도 사치스러운 편안함이 과시되도록 자기 팔 아래 조그만 베개를 바느질해 두었었다. 이런 것은 위의 것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 여자가 장래 운세를 물어 온 사람에게 이런 저런 사기극을 벌인 후, 자기가 대고 있는 베개의 안락감과 사치스러움을 그 사람이 기다리는 행운의 상징물로 지적해 보이곤 했던 것이다.

너울

그리고 이 여자는 머리에 너울을 둘러쓰고는, 이 너울을 좋은 장식품으로 간주하면서 이 너울이 자유나 풍요함을 상징하는 듯 여겨지게 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의 경우 자유를 상징한듯 한 이런 모자(너울)로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을 상징화하고 싶었을는지 모른다.
본문을 그대로 읽을 경우, 너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모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은 “person (개인)”을 추가해서 번역함으로 이해를 돕고 있는데, 어찌됐든 악한 여자의 영향력에 모든 연령층의 남자들이 빠져들었음은 틀림없다.

목숨을 노림 (영혼을 사냥함)

글자 의미를 풍자적으로 볼 때, 목숨을 노린다는 것은 뭔가를 얻어내려고 상대방을 현혹시키고 썩게 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칭 예언자라는 여인들이 주둥아리를 미묘하게 놀린다던가, 뭔가 상대방이 은근히 바래는 것들을 감지해서 예언해 줌으로 그들은 그 사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사기가 성공되는 이유는 그 당시 사회에는 진리에 대한 어떤 영적 지각도, 합리적 판단도 전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늙은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모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쉬운 방법, 자연적 소원만을 탐닉하려는데 빨려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 여 예언자들이 사람들의 위와 같은 바램을 예언하는 척하여 대가를 받아 손쉽게 자기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이런 사회 풍조 속에서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가 전하는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을 것은 별로 이상한 사건이 못된다. 게다가 주님의 예언자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재난들을 예언해 왔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이 백성들 마음에서 더럽혀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인간의 감각적 오류 속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주님의 여 예언자라고 자처한 여자들도 합세해서 거짓말로 백성을 덮어 그들을 악 속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행운을 물어 온 자들로부터 거짓 예언자들은 소량의 보수를 당연히 받았음을 본문에서,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을 받고…”라는 데서 알 수 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죽이고”란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썩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죽여야 할 자를 살려둠”이란 악한 자들에게 계속적인 번영을 약속해 줌으로 불법 속의 악을 더 부추겼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악한 자를 더 부채질 해주어 그들이 회개하여 삶이 수정되지 못하게 모략한 것이다.
에덴의 동산에 있던 뱀이 이브에게 금지된 과일을 먹게 되면 해를 입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진다고 설득시켰듯이, 악한 여 예언자들은 거짓된 설득으로 남자들을 파괴 쪽으로 유인했다. 결국 기쁨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까지 심정을 슬퍼지게 하여 삶이 파괴되어졌다. 그 이유가 여 예언자들이 더 큰 생명을 확실히 약속하는 듯하여 확실한 죽음에의 희생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성은 악에 정반대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 주님은 위와 같은 행동들에 정반대 되므로 그분은 그들의 영향력을 파괴하여 극복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사회 속의 악한 교회에 심판을 단행하시면서 그분의 법칙을 생명으로 삼고 따르는 백성들을 위와 같은 악에서 건져내실 것을 약속하고 있으신다. 이런 주님의 역사가 있기 전 주님의 예언자는 그 사회 속의 모든 악을 까 벌려 주면서 주님의 진리를 선포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영적 의미들

위에서 살핀 모든 것들은 본문의 글자에 속하는 사항들이다. 이제 글자 속에 있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본문의 줄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사항들이 아니라 이 시대 오늘의 우리 속 심정과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옛날 주님의 예언자가 말한 경고 역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경고이다. 그 이유를 영적으로 보면, 주님의 예언자란 신성한 진리 그 자체요, 이 진리가 우리 마음 속의 거리들을 거닐면서 우리로 회개하고 개혁하며 거듭나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소리란 그분의 신성한 진리인바, 이 진리가 거룩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와 만난다. 그리고 죄악된 행위를 멈추도록 우리 속의 자연적 마음에 경고를 보낸다. 이와 동시에 열려진 영적 마음에는 천국의 거룩한 원리들을 말해 주시어 우리로 “사람의 자, 즉 천사의 자”를 갖도록 배려하신다.

여인

본문에서 언급하는 주님의 예언자인 신성한 진리는 우리를 죽게 만드는 계략이 든 타락된 자연적 애정을 향해 경고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은 신성한 진리가 통치의 요소로 부각되어 있는 영적 교회를, 여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남자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의 하나됨은 거듭남에서 있어지는 영적 결혼을 표현해 준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여자들은 악했다. 그들은 자아 사랑으로 썩어 버렸다. 이러한 부패된 거짓 여 예언자란 전적으로 악하고 이기적이어서 주님 대신 자아로 꽉 찬 자연적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 애정은 주님이 밝혀 주시는 뜻에 반대만 하고 자신의 욕구로부터만 언제나 중얼거릴 뿐이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선한 체 할 때, 그들이 의도적으로 하려 할 때, 이 애정들은 인간의 합리적 판단을 딴 길로 들어서게 유혹하느라 끝까지 모략질 한다. 결국 온 마음은 자연적 애정 밑에 깔려 죽고 만다. 이렇게 속임수를 쓰는 실제들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서 노출되고 있다.

영혼을 사냥함

영혼을 사냥한다는 것은 영적 인격이 파괴되도록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냥질은 타인을 향해, 또는 자신의 심정과 삶을 향해 우리 자신에 의해 행해지기도 한다. 성경에서 용어 “영혼, soul”은 여러 가지의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와 그리스 단어들 자체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영혼(soul)은 어떤 생물, 인간 존재, 또는 자연체의 생명, 인간의 영(spirit)속에 있는 생명, 또는 인간을 특징지어 구분해 주는 이해성 속의 생명, 또는 신성한 진리 등을 의미할는지 모른다.
오늘 본문에서의 영혼(soul)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인간의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적 생명은 영혼(soul), 영(spirit) 속에 있다. 악한 자연적 애정이 진리의 지식들을 뒤집는 술책을 수단으로, 자연적 욕구가 좋아하는 것을 나열함으로, 진리를 거짓이라고 설득함으로, 죄는 악이 아니고 허용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꾐으로, 이런 등등으로 합리적 판단을 그릇 인도 할 때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거짓 여 예언자들은 영혼을 사냥해 버린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이 추켜세우면서 그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이 추켜주는 것에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은 지금 참 생명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군림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선함과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자연적 감각 수준의 삶 속에 푹 젖은 상태, 자연적 마음만을 가진 상태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간다. 따라서 이들이 영적 지각을 가지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지는 논쟁이나 교리들의 특성을 명확히 구별해 내지 못한다. 그런 고로 그들은 거듭나는 사랑이나 이타애를 포함하지 않은 지극히 외적인 믿음, 그러나 설득력 있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믿음이 펼친 논쟁에 의해 쉽사리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만다. 그래서 이사야 5장 20절은 이렇게 경고한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영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을 파괴시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생명에 있어야 할 영성을 파괴시킨다는 말이다. 이런 파괴로 인간 안에 있는 교회는 사라진다. 이웃에 거짓 증언을 하는 것도 영적으로 보면,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정의와 죄들의 관계를 혼동하게 하여 그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포악한 자는 재앙에 몰려 망한다” (시편 140:11). 다시 말해 타인에게 가한 영적 포악함은 필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일은 우리 마음 속에서도 발생되는데, 우리의 자연적 애정이 우리의 판단을 현혹시킬 때 일어난다. 타락되는 때의 자연적 애정들이 거짓 여 예언자들이요, 이것들이 우리로 안일해지도록 기댈 베개(토시, pillow), 즉 자연적 수준의 바램을 탐닉하게 하면서, 이기적이고 감각적 삶만이 유일한 우리의 안전이라고 어루만져 준다. 이것들은 우리의 머리들, 합리적 생각들을 너울, 즉 자기만을 위한 탐닉이 번영을 기약해 줄 것이라는 그럴듯한 논쟁으로 덮어씌운다.
이것들이 키가 작든 크든 모든 사람의 머리를 덮어씌운다는 것은 정신적 성장의 모든 단계를 망라해서, 즉 어떤 조건이나 영적 필요에서이든 현혹하려 든다는 뜻이다.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타락되는 자연적 애정들은 우리의 머리들을 덮어씌우려고 현혹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발달되는 영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 있는 가장 높은 원리들을 자아 사랑의 미묘한 호소로 덮어 씌워 잘 안보이게 하려고 발버둥친다.

주님을 더럽힘

모든 우리 생각들의 머리가 되는 신성한 원리가 우리의 감각적 관념으로 덮혀질 때 우리 마음 속의 주님도 더렵혀진다.
죽지 않아도 될 영혼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인간 마음 안에서도 결코 죽지 않아야 할 진리의 생명이 마음 속에서 박탈되는 것이다. 죽어야 할 영혼을 살려 두는 것이란 어떤 인간 마음에서도 살아 있게 허용해서는 결코 안될 거짓 원리들의 권세를 지속시켜 놓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것들은 신성한 원리를 거절하여 선과 진리 대신 악과 거짓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상태의 지속은 악에게 용기를 주어 그의 권세는 더욱 강해지는 대신 선함과 진리는 위축되어 아무런 힘도 없게 된다. 부패된 자연적 애정들이 탐닉 속에서 생명과 번영을 약속해대지만, 결국 그것들은 영에 어떤 생명도 줄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영적으로 죽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악들은 타락된 자연적 애정에 의해 생산되는데, 그 이유가 부스러기에 불과한 보상, 즉 “보리 몇 줌과 빵 몇 조각,” 다시 말해서 감각적 삶을 먹여 주는 탐닉의 작은 분량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악들에 대항하시는 바, 신성한 원리를 꾸준히 신뢰하려고 애쓰는 모든 마음에 대해서는 위의 악들의 권세가 꺾이게 섭리해 주신다.

정면 대결

심각한 시험을 겪지 않고도 거듭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험을 겪는 동안,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굳건히 지켜 간다면, 우리 속의 자연적인 애정들 안에 있는 거짓 여 예언자들의 농간이나,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려는 타인들의 술책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겪는 시험을 우리의 선을 위해, 우리 속의 악을 타파하는 데에 사용하실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예언자, 즉 주님의 진리는 악한 여 예언자를 향해 정면에서 대면할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진리의 내향적인 영체를 우리에게 밝혀 주시어 비질서적인 자연적 애정이 감각적으로 유혹하려는 데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내면의 마음인 영적인 마음은 비질서적인 자연적 삶에 완전히 반대되는 영적 삶으로 열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의 예언자, 즉 명백한 영적 진리는 우리 마음의 거리에서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선포한다.

우리의 영향력

우리가 악에 빠지고 있을 때, 남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행실로 남들까지 악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려는 경향이 짙다. 더욱이 많은 고통이나 곤경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이가 곤경에 허덕일 때, 일부러 그에게 더 많은 짐을 지워 놓고도 놀랄 정도로 태연해 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삶의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우리가 조금만 성의를 가진다면, 우리와 더불어 길을 걷는 동료 여행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여유도 가질 수 있다. 아마 우리는 동료들에게 슬픔이나 고통 대신 사랑과 친절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생명의 길은 모든 이가 이용해야만 하는 공용 도로이다. 이 길은 자기만에 전용된 개인 도로도 아니요, 자신에게 특전으로 부여된 길도 아니다. 생명의 도로에 서성거리는 타인이 있다 해서 그를 떠밀 권리도 없다. 생명의 나라에는 모든 이를 위해 충분하고도 남는 빈 방이 준비되어 있다. 단지 모든 이가 합리적이고 정당하게 처신할 때만이 가능하다.
거듭나는 사랑, 그 외 모든 선하고 진정한 것들은 우리가 타인과 그 사랑들을 나눌 때, 나눈 정도만큼 우리에게 배가된다. 이것이 거듭나는 사랑의 본성이다. 그러나 모든 이기심은 그 인간을 좁아지게 하고 작아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 악은 그 사람의 심정을 하늘나라에 닫히게 한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에게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신명기 30:15-20).

24
예루살렘의 포도나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5장 2-8절

2.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 얽힌 덩굴과 다를게 무엇이냐?
3. 거기에서 가구를 만들 재목이 나겠느냐?
무엇을 걸어 둘 못을 만들겠느냐?
4. 보아라, 땔감으로 불에 들어 간다.
양쪽 끝은 타고
가운데는 그을었는데,
그것을 무엇에 쓰겠느냐?
5. 옹근 대로 있어도 쓸모가 없을 터인데,
하물며 불에 타 그을은 것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6. 주 야훼가 말한다.
숲 속에서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집어 넣듯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나는 불에 집어 넣으리라.
7. 불에서 빠져 나오다가도
내가 화가 나서 노려 보면
불에 타 죽고 말리라.
내가 화가 나서 노려 보리니,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8. 나를 배신하였으니
내가 그 땅을 쑥밭으로 만들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개요

악 속에 확실히 빠진 마음 안에는 어떤 선도, 어떤 영적 교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악한 사랑에 의해 다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글자 의미

나무 중에서 포도나무는 재목으로 쓰기에는 합당치 못하다. 그 이유는 너무 가늘고, 구부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목재의 다양한 용도로 볼 때 목재로는 적합치 못한 것이다. 게다가 너무 쉽게 구부러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릇을 걸 수 있는 걸이 못으로의 사용까지도 적합치 못한 형편이다. 또한 포도나무는 바싹 마르게 되면 잘 바스러지는 성질까지 있다. 고대 시대 동방의 생활 양식은 아주 단조로워서 돌집과 같은 단단한 집을 지을 때, 돌 사이에 나무못이나 핀 등을 끼워 넣어 방 안쪽으로 삐져나오게 해 두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 나무못을 이용해서 부엌의 기구나 방 안의 갖가지 물건들을 걸어 두었다. 이런 못들은 벽 안에 집어 놓은 것들이라 매우 단단한 장치여서 거기에 웬만한 무게의 기구는 모두 걸어 둘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못은 상당히 단단한 재질의 나무이어야지 포도나무와 같은 품질로는 가능치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포도나무는 연료용 나무로서도 별 도움이 못된다. 그 이유는 쉽게 불이 붙긴 하지만 금방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사용한다면 점화용 정도이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죽는다던가 할 때, 그 나무는 나무를 처분하기 위한 방편으로 불살라지고 말았다. 불이 포도나무 끝에 당기면, 그 끝이 이내 비틀어지면서 나무 전체에 불이 번져 금방 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가 목재로 쓸 수도 없고, 게다가 나무가 생생할 경우, 불이 당겨 재로 바뀌게 하는 데도 쉽지 않다.

비유

위와 같은 상황들이 예루살렘 백성들을 위해 비유로서 본문에 실려 있다. 유대 국가가 타 국가보다 나은게 있을까? 그들이 타 국가 보다 특별히 낫다거나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오히려 타 국가들은 나라 자체도 크고, 더 강한 것이 군사면으로나, 인구로나 훨씬 더 할지도 모른다. 에집트, 아시리아, 기타 다른 국가들이 유대 국가보다 예술이나 과학면에서만 보아도 더 진보되어 있다.
유대인들, 그들이 잘 하고 있다 해도 타 국가 보다 더 나은게 없는 형편인데, 타락해 가는 상황에서는 주변 국가보다 훨씬 하급으로 처지고 만다.

선택된 백성

타 국가 보다 더 사랑 받는 백성,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선택한 백성이 자기들이라고 그들은 무척 떠벌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생각과 심정, 그리고 행동들은 주님을 등지고 있었다. 이것은 주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성경에서 말해지는 구절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거절하고, 대신 악과 거짓, 죄악들을 좋아했을 때, 자기들이 악을 선택했다는 것은 잊은 채,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번성하게 해주지 않으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인 것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품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징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교회를 표현하게 하려고 선택하셨을 뿐이다. 이런 표징성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들로 많은 경험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그들 위에 내려진 그분의 섭리적인 돌보심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가지게 해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것을 동원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선하고 참되며 고상한 백성이 되도록 유대인을 도우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땅에 심기워 좋은 관리를 받는 주님의 포도나무 같았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스스로 나쁜 포도나무가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무익한 포도나무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주님을 떠나 악 속에 푹 잠겼다. 그래서 그들의 땅은 황량해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질서 속에 그 땅을 유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인 자기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그들은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의 일과 죄로부터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이제 위의 상황과 처지에 관해 영적 의미를 살피기로 하자.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얼굴에 나타난 것이 마음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바, 마음은 얼굴에서 그 자체가 표현된다. 주님의 얼굴은 그분의 신성한 인격, 즉 사랑과 지혜의 표현이다. 이 두 가지는 본성과 품질의 양 측면에서 악과 거짓, 그리고 죄악에 반대하여 언제나 얼굴에 놓여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이러한 모든 것은 주님에 반대하여 그들 얼굴에 놓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속성에 반대된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교회를 표현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은 교회의 사령부로서 성전이나 제단 등등이 있어 거기서 모든 백성에 의한 예배가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거동이 가능한 모든 성인 남자들이 참석해야 하는 정기 종교 행사도 있어 왔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상황은 인간 마음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백성들은 완전히 썩어질 대로 썩어진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히브리인들, 그들이 목자나 농부로서의 조용한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들은 타 국가에 본이 되는 생활을 꾸렸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타인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함을 위해 이 세상에서 살았던게 아니라,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는 가운데 삶을 영위해 왔던 것이다. 결국 끝내 포기 못하는 악한 욕망의 불에 던져지고 마는 죽은 포도나무 같이 그들에게서 신성한 섭리는 떠나게 나타나셨다.

신성한 유입 (divine influx)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주님의 선함과 진리가 유입되는 곳은 그 사람의 영적인 내면이요, 이 부분이 천국적 사랑과 총명, 그리고 평화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똑 같은 신성한 사랑이 악한 자의 마음으로 흐를 경우, 그들의 영적 내면은 닫혀져 있기 때문에 자연적 마음의 내면에 도달되고 만다. 그런데 이 내면이 악과 거짓으로 차 있어 선함과 진리에 반대하고 있을 때, 선한 원리들의 흐름은 악한 인간 자신의 삶의 모든 형체와 품질에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삶을 수행하게 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 인간 자신의 품질과 직접 접촉될 경우 이 흐름은 심한 고통을 생산하고 만다.
신성한 생명의 유입은 선한 사람의 경우, 생명과 기쁨으로 차 있다고 성서에서 묘사되지만, 악한 자의 경우, 태워 없애는 불로 묘사된다. 이는 마치 올빼미나 박쥐로 하여금 이글거리는 태양에 노출되어 있도록 강제하는 것일 것이다. 올빼미가 태양을 피해 그늘 속에 살게 되어 있듯, 악한 자가 신성한 가르침을 경청하지 않을 때 자기들이 선택하는 악 속에 살고, 신성한 원리를 거절할 수 있게 허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주님의 영향이 태워 없애는 불로서 언급될 때, 이 표현은 악한 자의 마음 앞에 있게되는 현상에 일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특별히 성경의 글자와 마주하는 자연적 마음에 주어지는 표현이다.

열매 맺음

모든 인간 마음은 포도나무와 같이 좋은 열매를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좋은 열매를 생산할 기회를 모든 인간에게 부여하고 계신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신성한 태양으로서 주님께 얼굴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포함된다. 그래야 그 영적인 따뜻함과 빛이 인간 포도나무로 번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악한 자는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께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무성할 뿐인 포도나무, 열매를 많이 맺긴 했으나…” (호세아 10:1). 주님 없이 어떤 인간도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듯이, 타락된 자연적 인간은 선함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성할 수 있어도 열매는 없다.
좋은 열매를 맺는 이들은 영적으로 번영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이 신실하다 해서 기분 내키는 식의 보상 때문이 아니라, 좋은 원리를 사용한 결과로 신실함이 보상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를 잘 관리하는 목적은 좋은 포도를 생산하려는데 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바, 오히려 어떤 유용한 작물을 심을 수 있는 공간만을 헛되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나무는 잘리워 불에 던져지게 된다.” 이 때의 불이란 악한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욕망이라는 불이다.
위는 각자가 마음으로하여금 열매 없도록 허용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속에 이식해 두신 모든 진리가 자신의 악의 불로 살라지고 마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 조건들이었을 때,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뽑히우고 땅은 황폐해지리라는 표징적 언어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서 진리는 거짓으로, 선은 악으로 변하고 만다는 말이다.

못과 그릇

타락한 마음의 상태 하에 처해 있다면, 기댈만한 것이 우리 마음에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교리가 앉혀질 든든한 마음, 그 교리를 잘 사용할 준비된 마음의 장소가 없을 뿐이다.
속이 빈 형태여서 뭔가를 붙잡아 두게 하는 그릇이란 서술의 형체, 즉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정신적 양식의 준비를 필요로 할 때 애정과 생각을 수단으로 기억에 모아진 진리가 실제 사용될 수 있게 한다.
집을 지을 때 벽 안에 미리 넣어 만든 걸이못(the stout hard-wood nail)은 그릇을 잘 붙잡고 있는데에 사용하려는 것인 바, 이 못은 사용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따라서 걸이못은 일상 생활 속의 실제적 선함을 표현해 준다. 이 선함이야말로 우리가 의지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튼튼한 못으로서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일해 준다. 우리는 이 실제의 선함 위에 우리의 정신적인 그릇, 즉 매일 사용될 필요가 있는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를 걸어 둘 수 있는 것이다.
나무 걸이못을 수단으로 집 안의 모든 그릇들이 집에 접촉되고 있듯, 못은 결합 또는 정신적으로 하나됨, 다시 말해 진리의 교리와 마음 속에 있는 심오한 원리 사이에 결합이 있게 해준다. 이 결합은 행동 속에 있는 실제적 선함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선함만이 우리의 내향적 인격과 진리의 교리 사이에서 접착제 역할을 해주어 서로가 확실히 붙잡고 있게 한다. 그래야 적극적인 사용을 위해 언제나 준비된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선함 외에는 신뢰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무못에 담긴 표징적 의미는 유대인들도 알고 있다. 유대인들 중 누가 확실한 지위를 확보한 듯 여겨지면 그의 친구들이 그를 두고 “그는 못처럼 단단히 박았어…”라고 말하는데서 미루어 짐작된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성경 글자에서도 발견된다. 즉 이사야 22장 23, 24절에서, 주님이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킴에 관해 말하신 대목이다. “나는 그를 단단한 곳에 못을 박듯 굳건하게 해주리라… 그의 가문의 모든 영광이 그에게 걸려 있다. 접시 그릇에서 병 그릇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은 그릇과 같은 그의 자손과 후예가 모두 그에게 매달려 살리라.”

선함과 진리

왜 포도나무 가지로는 좋은 나무못을 만들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표징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매우 흥미 있고도 중요한 점이 있기도 하다. 이 설명에는 두 개의 원리, 즉 선함과 진리 사이의 차이점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교회의 교리를 받는다. 그 때에 그 교리들이 진정한 것이라고 그가 인정하게 되면, 그는 교리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들을 가지고 자기 인격을 형성해 보려 뜻한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이런 진리에 의해 형성해 보려 한 적이 예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쁜 인격인 악에 잘 기우는 그의 자연적 경향성을 진리의 빛으로 보고, 내려놓기 전, 그는 많은 투쟁을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 대치되는 진리를 보고, 그 진리가 자기에게 가르치는 것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위해 악과 싸우게 된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자기를 인도하는 원리로서 진리를 사랑하는 가운데 일한다. 진리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그는 꾸준한 다툼이나 번뇌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 높은 위치에 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란 선이 선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위치, 선을 사랑하는 지점을 말한다. 결국 그가 이 높은 위치에 도달 될 때, 그는 거듭 나아지는 것이다.

예증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고 하자. 아마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진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용감하고도 과감성 있게 올바르게 처리했을 경우, 우리는 선하지 않은 것을 행하려 드는 이기적인 바램을 정복한 셈이다. 그래서 자기는 진리를 따랐다고도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것은, 자신이 행한 선이 칭찬되기를, 최소한 남들이 인정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사실 우리는 칭찬만을 바래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설사 자기의 행함이 잘못 이해되고 흑평받을 때조차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한 후, 그 일이 칭찬 받아질 때까지 실제로 만족 못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선을 사랑함에 의해서 그 일을 처리한게 아니고 진리를 사랑함이 실제화 되었을 뿐이다. 이런 단계 역시 거듭나는 과정 중의 하나이지만 그 단계는 초기 단계인 것이다.
진리를 사랑해서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선의 종류는 우리에게 영향을 준 진리의 품질에 따라 다양해진다는 것 정도는 이제 가늠할 것이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은 진리가 각자에게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들을 생각하는 면에서 각양 각색이 된다. 진리가 마음 속에서 명백해 있지 않으면 그의 마음 역시 선한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역시 모호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진리를 사랑해서 얻어지는 선함, 진리의 선이 이스라엘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포도나무로 표현된다.

좋은 못

위와 같은 종류의 선, 포도나무라는 재목을 가지고 교리라는 그릇을 걸어 둘 수 있는 좋은 못을 만들지 못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이해했으리라 본다. 이런 선함은 포도나무의 성질 같이 생각이 여러 가지로 변화할 때마다 그 변화에 쉽게 구부러지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마음이 붙잡은 교리라는 모든 그릇을 걸어 두는데 있어서 그 나무(선)는 견고함이나 안전함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할 못은 단단한 나무, 즉 선이 선인 고로 선을 사랑함이라는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 못이 집안 벽에 들어가 부착되어야 우리 속의 교리가 언제 어느 때라도 즉각 사용 가능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이 된다.
새 예루살렘의 명백한 교리들, 이 그릇은 영적 사용을 위해 가장 우수한 그릇이요, 우리는 이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릇을 일상 생활에서 직접 사용하기 위해서는 걸어 둘 믿음직한 못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이 못은 우리가 십계명을 일상 생활에서 준수해감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사람을 두고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축제 기분에 들뜬 우리 마을, 시온을 보아라!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장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에는 넓은 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지 아니하고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이사야 33:20,21).

25
독수리와 포도나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7장 2-10절

2. “너 사람아,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놓아라. 비유를 들어 말해 주어라.
3. ‘주 야훼가 말한다.
큰 독수리 한 마리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득 쓰고
긴 것, 큰 날개를 치며
레바논에 가서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땄다.
4. 그 연한 가지 끝에 돋은 햇순을 따서
무역국가로 가져다가
상업도시에 내놓고는
5. 그 지방에서 난 종자를 찾아
버드나무 심듯
물이 콸콸 흐르는 강가,
갈아 놓은 밭에 심었다.
6. 움이 돋고 보니, 그것은 포도나무였다.
뿌리를 땅에 박고 낮게 옆으로 퍼지며
덩굴은 그 독수리에게로 뻗었다.
포도덩굴이 되어 가지가 뻗으며 움이 돋았다.
7. 깃털이 많은 큰 날개를 치는
다른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자
이번에는 그 포도덩굴이
가는 넌출을 그리로 뻗고
뿌리도 그리로 뻗어 물을 빨아 들이려고 하였다.
8. 물기 넉넉한 좋은 밭에 심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포도나무가 되리라 여겼더니, 그 모양이었다.’
9. 주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일러라.
‘그러고도 잘 될 것 같으냐!
그러고도 뿌리가 뽑히지 않을 듯싶으냐?
열매를 훑어 가지 않을 듯싶으냐?
새 잎은 돋아나자마자 마를 것이다.
그 뿌리를 뽑는데는 힘들 것도 없다.
대군을 출동시킬 것까지도 없다.
10. 옮겨 심었다고는 하지만 잘 되기는 이미 틀렸다.
동쪽에서 열풍이 불어 오면 바싹 마르리라.
자라던 터전에서 그대로 시들리라.’”

영적 교회

본문은 영적 교회의 건립과 성장, 그와 동시에 그 교회의 뒤집힘과 하강을 표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적 교회는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건립되어진다. 이 진리들을 통하여 인간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거듭 나아진다.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이나 영적 마음이 거듭 나아진다. “지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해준 말을 통해 깨끗해진다.” 교회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보고, 본 진리를 실지 사용함으로서 영적으로 되어 간다. 그러나 진리를 소홀히 하고 남용함으로 인간은 진리를 왜곡해 버리고 삶 속의 악에 잠겨 버린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질적인 측면에서 부패되어 결국 멸하고 만다.

글자적 의미

본문의 비유를 일반적으로 보면, 시드키야가 느부갓네살과 협약을 하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을 그가 깨트림으로 결과된 시드키야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예언하기 위해 말해졌을 것으로 추측해 오고 있다.
첫 독수리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고, 둘째 독수리는 에집트 왕 파라오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나 추구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영적 삶을 주시려는 것이다. 심판으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신성의 어떤 분노 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악들로 인한 것이다. 맹세 또는 협약, 이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 지침을 묶어 주게 되는데, 이 맹세에서 쌍방은 각기 맹세에 대한 성실과 신뢰를 위해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세운다. 이런 맹세는 선량한 사람으로 자기 의무에 묶이게 하는 내향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이 실제의 의무를 형성해 준다. 그 이유는 영적 인간의 경우, 맹세는 그 사람의 행동 지침의 바깥쪽만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원리인 고로 그 원리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본문은 인간이 영적 원리를 소홀히 할 경우 과연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한 것을 미리 말해 주고 있다.

표현적 의미

삶 속에 창조된 모든 형체는 인간의 정신적 삶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을, 새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한다. 새의 날개나 팔은 힘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팔이나 날개를 수단으로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날아갈 때의 날개란 사고력 또는 생각하는 힘의 사용을 표현한다. 이러므로 날아간다 함은 지각이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새를 덮고 있는 깃털이란 글자적인 진리 즉 각자의 처지에 알맞은 상태에서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독수리

새라는 짐승으로서의 독수리는 생각을 표현한다. 독수리는 “새의 왕”이라 불리는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독수리가 지닌 힘, 예리한 시각, 오랜 시간을 나는 것, 신속한 비행 능력 등등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독수리는 생각에 있어서 총명함, 멀리 내다보는 것, 예리한 시각과 높은 관점을 가질 수 있는 합리적인 생각을 표현한다. 때로 독수리는 자연적인 것들을 넘어 날아가는 영적인 생각, 자연적인 것만을 볼 수밖에 없는 생각이 그 수준을 넘어 보게 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독수리 같은 영적인 생각은 그 보금자리를 높은 장소에 둔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라고 읊고 있다.
본문의 첫 독수리는 영적 교회의 바깥 측면에 있는 총명 또는 생각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영적 교회를 표현하고, 둘째 독수리는 내적인 영적 교회에 있는 총명이나 생각, 즉 인간의 영적인 마음에 있는 영적 교회를 표현한다.
두 독수리의 날개는 주님의 말씀의 글자로부터의 외적인 생각들이다. 많은 깃털을 가진 큰 날개란 진리나 과학적 지식, 또는 자료나 교리로서 알려진 것들의 풍부함을 표현한다. 이런 것들로부터 자연적인 마음은 그 마음에 총명을 이끌어 낸다. 많은 깃털로 된 큰 날개를 치며 재빠르게 비행하는 큰 독수리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로 잘 훈육될 때 있어지는 자연적 마음의 생각들,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위와 같은 장엄한 독수리와 여타 새들 사이의 대조는 매우 놀랍다. 이 대비를 마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적 원리로 멀리까지 도달하는 합리적인 생각과 일상 생활의 잡다한 생각의 차이와 비등한 것이다.

레바논

이 독수리는 레바논으로 가서 키가 큰 송백의 가장 높은(끝) 가지를 취했다. 지상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란 마음에서 자라는 진리를 지각함을 표현하는데, 이 지각이 생각 속에 심어질 때, 처음에는 감상적 수준( sentimental)에 심어져 순을 내고 자라 잎과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된다. 높은 장소라는 측면에서 볼 때, 레바논 산은 마음의 높은 상태 또는 칭찬되는 상태를 표현한다. 레바논이란 영적 인간 또는 인간 안에 있는 영적인 선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은 영적 인간을 통치하는 원리이고, 영적 인간으로 구분되게 해주는 특질이다. 그래서 시편 92편 12절은, “의로운 사람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는다”고 노래하고 있다.
송백이란 진리를 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레바논의 송백이란 선을 사랑함에 기초를 두고 진리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해 주게 된다. 즉,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나 이웃과의 관계에 적용하고자 하는 원리를 알기를 바랄 때와 같은 경우, 즉 이웃을 사랑함은 우리의 의무이다고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송백의 가장 높은 가지(끝)”이란 합리적인 생각 중에서 가장 상승된 원리를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웃이, 또는 내 친구가 우리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지각하는 경우 등등이다. 우리는 표현적으로 뭔가를 높다라고 부를 경우는 그것이 상당히 가치 있을 때나, 칭찬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특별히 주님은 “지존한 곳에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라고 불리신다. 독수리가 레바논 송백의 가장 높은 가지를 취했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진리에 관한 지식을 합리적으로 취해서 우리의 이웃이 주님의 자녀라는 차원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데에 응용하게 될 때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독수리는 가는 가지(순)를 무역 국가(장사하는 땅)로 가져다가 상업 도시에 내놓았다. 이는 우리 마음이 영적 진리를 생각하는 가운데 그 진리를 자연적인 과학이라는 평면에까지 운반하여 바깥쪽에 있는 것들에서 그 진리를 확증한다는 말이다. “장사하는 땅”이란 자연적인 마음이다. 이 마음 평면에서 우리는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교환하고, 팔고 사는 무역을 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마음은 자연적인 기억으로부터 뭔가를 취하고, 그것 가지고 추론하는 바, 상업 도시가 있는 무역 국가(장사하는 땅)인 것이다. 즉, 갖가지 지식으로 가득 찬 교리를 말한다. 사람들이 사용하기 위해 건축해 놓은 도시란 살아 있는 진리를 담기 위해 축조된 교리의 체계를 표현하고, 진리는 이 체계를 수단으로 실용화된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교리 없이 우리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진리의 지식으로 마음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독수리는 “그 지방에서 난 종자를 취하여 갈아 놓은 밭(옥토)에 심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 교회의 교리를 취하여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인 애정(사랑하는 마음, affection)에 심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곳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큰 물 (콸콸 흐르는 물)

독수리는 송백의 순을 “물이 콸콸 흐르는 강가”에 심었다. 즉, 주님의 말씀에 관한 글자적 진리가 풍부함 속에 심었다는 말이다. 깨끗하게 씻어 준다는 측면에서의 물이란 글자적인 진리들, 또는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하는데, 이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깨끗하게 해준다. 말씀의 글자는 큰 저수지 또는 큰 물로서 여기에서 모든 진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독수리는 송백의 순을 버드나무 심듯 심었다. 버드나무는 강둑에서 잘 자라는데, 이는 하느님 말씀의 글자로부터 진리를 자연적 수준에서 지각함을 표현한다. 이렇게 심어진 송백은 자라나서 “낮게 옆으로 퍼지는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본문은 읊고 있다. 이 대목의 경우는 글자적인 역사일 수가 없을 것이다. 즉 송백 나무가 포도나무로 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백이 표현하는 것이 포도나무 또는 포도덩굴이 표현하는 것으로는 변할 수 있다. 즉, 삶 속에서 진리를 영적으로 지각한 것은 실제적인 영적 원리 또는 포도나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먼저 이런 것은 단지 영적 원리의 시작일 뿐이다. 즉 포도나무는 낮게 옆으로만 퍼지고 높은 데까지 도달치 못한다는 본문의 말과 같다. 비록 낮기는 해도 옆으로 넓게 퍼지기는 했다. 즉 흔한 일상 생활 속의 만사(자연적 삶)에 영적 원리가 응용되었다는 뜻이다. 그 뒤 점차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영적 삶의 원리를 볼 수 있게 될 때, 이 원리들은 우리 마음 안에서 적절한 장소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원리들은 천국적 삶의 질서 안에 배치된다. 그런 뒤 일상 생활에의 응용을 다시 가지게 된다.

독수리들

첫 독수리에 관해 지금까지 살핀 바를 종합하면, 본문은 자연적인 마음이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에 관련되고 있다. 만일 마음이 합리적이면서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합리적으로 본 대로 말씀의 가르침 속에서 기뻐한다면, 이해도는 증가될 것이다. 한 마디로 송백 나무가 포도나무가 되어진다는 말이다. 즉 어떤 원리를 지각한 것이 실지 살아 있는 원리가 되어 일상 삶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합리성으로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는 영적 인간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 영적 인간의 삶을 시편 1편은,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라고 읊고 있다.
둘째 독수리는 영적 마음의 생각, 즉 영적 인간의 내향적 마음을 표현한다. 두 독수리들은 영적 인간의 생각, 즉 영적 교회의 인간, 또는 거듭나는 동안에 있는 삶의 영적인 수준을 표현해 준다. 첫째 독수리는 영적 인간의 자연적인 부분 또는 외적 마음의 거듭남인데, 이것이 먼저 가르쳐지고 훈련받게 된다. 그리고 둘째 독수리는 마음의 영적인 부분, 즉 내향적인 부분의 거듭남을 표현하는데, 이 부분은 자연적 부분의 거듭남이 있어진 후 열리고 훈육되어진다. 두 독수리 모두 큰 날개와 많은 깃털을 가졌다. 즉 영적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인 안쪽과 바깥쪽 모두에서 풍부한 지식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 지식이란 알려진 사실(fact), 알려진 원리들이고, 이런 것에 의해 영적 인간의 생각은 힘과 신속함을 가지고 연습되어진다.
“이번에는 그 포도 덩굴이 가는 넌출을 그리로 뻗고 뿌리도 그리로 뻗어 물을 빨아들이려고 하였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즉 영적인 마음, 내향적인 마음이 열리어 생각이 새로운 수준에서 발달될 때, 모든 뿌리와 가지들인 우리의 지식과 지각의 시작과 성장은 생각의 새로운 수준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수준과 연결해 보려 한다는 말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해 보면, 생각의 새롭고 영적인 수준이 우리 속에서 열려질 때, 과거에 알고 있었고 이해했었던 만사가 생각의 새로운 길을 향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삶, 보다 더 높은 종류의 삶을 향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 자연적 차원에서, 자연적인 것에만 기여해 오던 사실들이나 원리에 관한 지식이 비록 같긴 하지만 이제는 영적 차원에서 영적인 생각을 위해 수단이 되고 도움을 주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의 영적 생각은 과거의 사실이나 원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인계 받아 삶의 새로운 관점에 이 모든 것을 응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습득한 바깥쪽 지식들, 이 지식들이 과거에는 자연적인 것 속에 있는 지혜만을 찾을 수 있게 했지만, 같은 지식들이라도 이제는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지혜를 열려진 영적 마음으로 습득하게 해준다. 이러면 마음에 있는 중심 원리는 생각 속의 잡다한 것들에까지도 영적 생각의 품위와 성질을 주게 된다. 둘째 독수리의 보호 아래에 있는 포도나무는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즉 진리의 지각은 팽창되어 삶의 실지에 응용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잘 준수함으로 “훌륭한 포도나무(good vine)”가 되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번영

그러나 본문은 묻는다. “그러고도 잘 될 것 같으냐?” 이것은 영적 교회, 또는 고대 교회의 몰락과 파멸, 각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지키지 못한 까닭에 있게 되는 삶의 영적 수준이 뒤집혀 맞이하는 파멸에 대한 예언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유다왕 시드키야와 같은 처지, 주님 앞에서 만든 맹세를 깨트리는 그의 마음 같은 것이다. 어떤 이의 경우, 그가 영적 사고의 어떤 조그만 수준을 달성했을 때, 그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대항하는데 진리를 응용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총명하다는 자만에 빠져 버린다. 그래서 그 진리를 가지고 자기 자만을 확증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는 실제에서 주님을 잊고 자신을 예배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잘못은 기껏 알게 된 진리를 뒤집는 결과인고로 더 이상의 진리의 발전이나 상승, 즉 번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건대 그는 시들어 죽는 것이다. 결국 그가 생산하는 열매는 훌륭한 포도가 아닌 들포도일 뿐이다.
동쪽은 주님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생명과 빛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좋은 측면에서 볼 때, 동풍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 그분의 생명과 반대되고 있는 이들 안으로 흘러들 때, 주님의 생명은 그들을 파괴하는 듯 보인다. 마치 우리가 강한 태양 빛을 계속 응시하면 오히려 그 빛이 눈을 병들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주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와서 심판을 집행하는 셈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이를 환영한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지도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는 이들은 진리의 현존에서 피해 보려고, 숨으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태양이 생명 없는 식물을 말려 버리듯 그들은 시들어질 뿐이다.

좋은 독수리와 나쁜 독수리

독수리에 관한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표징물의 특성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관점이나 다른 양상에서 관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좋은 성질과 능력의 측면에서의 독수리는 독수리의 좋은 것들을 표현한다. 즉 예리한 시각, 기민한 동작, 오래 비행할 수 있다는 것, 용기나 힘이 강하다는 측면에서의 독수리는 합리적이고 영적인 생각, 멀리 내다보고, 사물을 명확히 보며 진리의 높은 영역까지 오르게 해주고, 힘과 용기를 가지고 그 영역에서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만하고, 외톨이로 생활하며, 싸움을 좋아하는 새요, 먹이는 주로 사냥하는 자같이 포획한다. 이러한 탐탁치 못한 특성에서 본다면, 독수리는 인간 속의 자기 총명(자만)을 표현해 주는데, 이 총명은 거만하여 자기 야망의 길에서 거리적 거리는 모든 것을 해치우려 단단히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총명은 비록 입술로는 살아 있는 진리를 내뱉으면서 삶의 실지 동기에서는 악과 거짓에 속하는 죽은 것들에 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하시기를,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여든다”라고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4:28). 이런 총명은 자기를 사랑함에 속한 것에는 매우 분주하나 천국적인 것들에는 무관심하여 죽어 있다.
인간은 보다 높은 지적인 것을 소유해서 생각이라는 영역을 드높일 수 있고, 교리라는 측면의 총명이 보다 오래 비행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인간은 지적인 것뿐일는지 모른다. 오히려 그의 심정은 악하고,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건방지고 야비해서, 자기 총명을 낭비해 버리고, 인간 존재와 더불어 있어야 할 실용적인 영적 공감에서는 붕 떠 있는 상태로 자신을 간직해 간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번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판 밭고랑인 자기 총명 속에서,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는 가운데,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총명의 본질을 뒤집는 가운데 시들고 만다.

약속된 좋은 나무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자라고 번성할 송백나무를 심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즉, “나도 그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따리라. 그 연한 가지에 돋은 햇순을 따서 높고 우뚝한 산 위에 몸소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이 되고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재림으로 이미 만드신 새 예루살렘의 영적 진리를 통해 영적 교회를 건설하실 것이다. 그분의 재림은 거룩한 말씀 속의 영적 의미를 열으심으로 생명과 빛을 새롭게 쏟아 부워주시는 영적인 오심이다. 그리고 이 영적 진리는 일상 생활의 세세한 사항 안에서 본체를 드러내며 천국의 태양 광선으로 지상의 생명체도 빛을 발하게 해준다. 그래서 일상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의의 열매가 속속들이 맺힐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영적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준비되는 이들 사이에서 주님은 이 영적 교회를 지금 건설하고 계신다. 교리에 관한 지식, 진리를 이해하는 총명은 순수한 새교회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필수 사항은 온유하고 겸비한 영(a meek and lowly spirit), 그래서 만사에 있어 주님을 찾는 영, 자만은 지옥의 것이어서 기어이 금하고야 마는 영이다.
겸허한 새교회인은 하느님의 섭리가 보호해 주시는 보살핌 밑에서 영원히 배우고, 자라며, 기뻐할 것이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야훼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더냐? 산등성이를 타게 하여 주시며 밭에서 나는 오곡을 먹게 하여 주시고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꿀을 먹이시며 돌 틈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을 마시게 해 주셨다” (신명기 32:11-13).

26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성서 본문: 에제키엘 18장 1-2절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머리말

구원은 유전적으로 받은 조건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 실제 삶으로 고정되는 현재의 인격에 의존된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지닌 악한 특질이나 그에 따른 불행 등에 대해 자기들에게 책임이 없을 만한 구실로 변명을 해 왔었다. 그 구실이란, 자기들은 선조들의 퇴보된 기질로부터 자연적인 특성을 상속받았다는 것, 이런 특성은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축적되어 아예 고쳐질 수 없도록 정착되어버린 성질의 것이 되어 유대 종족의 마음에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이런 사상이 본문의 비유, 또는 속담인, “아비가 설익은(신) 포도를 먹으면(먹었으므로)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고 하는 것에 표현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감각적인 생각에로 몰입하게 한다. 오늘날에서 까지도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내 성질을 바꿀 수 없어, 본시 그렇게 태어나진 것을… 이것이 내 본성인데… 나는 도저히 내 성격을 바꿀 수 없어…”라는 식으로 말함으로서 잘못된 느낌을 변명으로 들이대는 것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게 된다.

출애굽기 20장 5절

유대인들 사이에 퍼진 본문 같은 이런 관습은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인,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라는 계명을 잘못 이해함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자연적 마음 상태에 감각적인 것이 보태져,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악행자에게 예상되는 하느님의 분노라는 점에서, 악행자는 이 자연계에서 그 악의 벌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했었다. 자연적 수준의 생각에서, 악행자의 자녀는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여질 수는 있다. 다시 말해, 만일 부모가 슬기롭고, 신중하며 근면하다면, 그 부모들은 순조로운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녀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어떤 쓸모 있는 직업을 위해 적절한 훈련도 거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부모가 부도덕하고, 나태하며, 부주의 하다면, 그 자녀들은 위의 자녀들 같은 혜택 없이 성장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악한 경향성을 제지하지 않고 살아간 부모들의 경우, 그들은 자기들과 방향이 비슷한데로 후손이 유도되게 되면서 더 증가된 악한 경향성을 전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자기들의 신체를 남용한 부모들은 손상된 신체 조건의 얼마가 자녀에게 이전될 수도 있다. 이는 몇 세대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할는지도 모른다. 인간 삶의 모든 국면에서 있는 기질이나 경향성, 그리고 쉽게 어느 쪽에 기울어지는 것 등은 유전적이기도 하다.

유전적인 것들

위의 좋지 않은 유전적인 영향들이 선조의 죄로 인해 주님이 부과한 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어서, 이런 유전적인 조건들은 선조가 후손에게 부과하여 삶의 형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사물의 본성 측면에서, 모든 것은 “각 종류에 따라 생겨나야”만 한다. 그 이유는 부모는 부모가 가진 조건 속에서만 후손이라는 유기체를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은 부모에게로 흐르지만, 주님은 모든 자녀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려 애쓰신다. 그러나 주님 역시 그들의 부모를 통하여서만 주실 수 있으시다. 이러므로 하느님의 선물은 양친이 가진 유기체라는 현재 조건에 의해 제한되어 진다.
이런 사실은 자연적인 마음들이나 신체 조건 같은 측면의 경우가 모든 국가, 가문, 개개인에게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육체라는 생명의 경우, 어느 인간도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자기의 마음과 몸에 대해 선택하지 못한다. 어느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에게 이전되어진 조건만을 받아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더 나은 조건이 되게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는 것뿐이다. 이래서 유전적인 것의 능력은 결과에 편견을 갖게 하는데, 그 이유는 본시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더 나은 조건에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은 분별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법

자연적인 마음뿐인 인간들에게 유전적인 영향에 관한 생각에 착오가 없도록 하시기 위해, 주님은 이 세상까지를 포함하는 인간 삶의 법칙에 대해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서술해 두셨다. 우선 신명기 24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일 수 없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죽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열왕기하 14장 6절에서, 유다의 왕 아마지에 관해 말해지기를, “그는 왕권이 튼튼하게 되자 부왕을 죽인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그 살인자들의 자손들은 죽이지 않았다. 그는 모세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야훼의 명령을 따랐던 것이다.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이지 못하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이지 못한다. 죽을 사람은 죄지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31장 29-30절에서 이스라엘 회복에 관해 말해지면서, “그 날이 오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죽을 사람은 죄지은 그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위의 구절만으로도, 유전적인 영향에 관한 문제에서 주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지에 관해서는 의심을 가질 것이 없으리라 본다. 그리고 본문 뒤에 이어지는 구절 속에서 주님은 아직 더 확실하게 해주시고 있으시다.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딸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 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에제키엘 18:4,20,21,23).
모든 영혼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기 위해 형성된 하나의 그릇이요, 유기체인 것이다. 그런 고로 모든 영혼의 숙명을 훼방 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훼방이 가능한 한가지는 주님에게서 그에게로 흐르는 생명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당사자의 거절뿐인 것이다.

영적 죽음

악한 인간은 자기의 영적 생명을 잃는다. 잃는 이유는 그가 영적 생명이 흘러들지 않도록 문을 닫아거는 것들만을 사랑하여 행동하는 것에 집착해서 영적 죽음이라는 상황으로 자신을 꾀기 때문이다. 지옥은 조건이라는 것에 존재한다. 지옥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반기를 드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이 먼저 자신들의 심정 속에 지옥을 만들고, 그 다음 자기 주변까지 형성해 놓는다. 악인의 파멸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 그들이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영혼의 통로에 있는 문을 닫아걸음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악인의 영적 죽음은 복수를 위한 처벌에 의한 것이 아니요, 더욱이 하느님의 기분 내키는 식의 규율에 의해서도 아니다. 이 죽음은 원인과 결과라는 불가피한 원리에 의한 것이다. 어떤 인간이 처벌당해졌다면, 그것은 자기 죄로 인해 당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거나 그의 악에 의해 처벌당하는 것이다.

경향성 (tendencies)

본문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근본 되는 요점은, 우리는 어떤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성품을 상속받는게 아니라, 단지 어떤 것만을 고집 하려는 경향(tendency)과 어떤 쪽으로만 잘 기우려 하는 성향(inclination)을 상속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나 성향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싫다 하여 거절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렇게 거절하면, 우리는 이런 것들이 고정되고 마는 인격 속의 원리로 정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서도 그 행위가 나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악을 인정하고 회개해서 개혁도 가능하다. 그러면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 나아질 수 있게 된다. 즉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인격을 주시고 그는 이를 위해 일한다. 이런 고로 영적 삶은 유전적인 것 또는 과거 삶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은 현재의 우리 인격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영적인 의미

위에서 살핀 주제는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살피게 되면 예증도 할 수 있다. “설익은 (신, sour) 포도”란 들포도인데, 이 포도는 매우 신맛을 함유하고 있고, 이 맛은 신경을 자극하여 느낌을 혼란스럽게 까지 한다.
좋은 측면에서 포도란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이타애, charity”라는 원리로 작동되어 질 때 생산되는 삶의 실제에 있는 선을 표현한다. 거듭나는 삶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은 사랑을 가지고 있어 매우 달고, 진리를 가지고 있어 아주 향기롭다. 그러나 신 포도는 나쁜 열매, 거듭나지 않고 있는 것 속의 악한 행동, 이기심이라는 예리한 산성(acid)으로 꽉 차 있어, 이 포도는 만족을 주지 못한다.

영적으로 먹음

영적으로 먹는다 함은 사용하기 위해 충당하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teeth)란 우리 몸이 음식물을 사용할 수 있게 입 속에서 붙잡아, 그것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준비시켜 주는 바, 이는 우리의 자연적인 감각들을 표현한다. 이 감각을 수단으로 우리는 정신적으로 뭔가를 붙잡고, 붙잡은 것을 조사하여 마음이 받을 수 있게 준비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원리나 애정, 그리고 생각 등을 붙잡을 때,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심히 불일치할 때, 그것들은 마음을 반대쪽으로 끌어 당겨 우리를 흥분시킨다. 마치 설익은 포도 속의 신맛이 신경을 심하게 자극하여 이까지 시큼해지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런 현상은 거듭나는 사람이 모든 악들을 동반하는 예리하고 삐꺽거리는 거짓들과 접촉할 때 있어진다.
육체적으로 만일 누군가가 자기 이가 시큼해 있는 상태에 오래 오래 방치해 둔다면, 그는 신경과민이라는 습관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신경과민에 잘 쏠리는 경향이 생기고, 그의 자녀에게 유전될는지도 모른다.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

본문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에 있게 되는 전체적인 풍경을 그려보아야 할 것 같다. 영적으로 아버지란 마음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원리들을 말한다. 이 원리는 마음에 또 다른 상태들을 생산한다. 물론, 만일 우리가 생각과 느낌에 대해 사려 깊은 감독 없이 자신의 자연적 경향에 따른다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습관 속에 자연적 경향을 고정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도에 관심을 두고, 주님이 제시한 잣대로 자신의 삶을 측정해 간다면,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을 조절하고, 변화시켜 간다. 마음속에서의 아버지란 옛 느낌이고, 이로부터 새 느낌이 파생되어 진다. 새 느낌은 아들로서 또 다른 정신적인 세대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의 원리를 개선한다면, 각각의 새로운 정신적 세대는 앞선 세대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속의 옛 느낌 안에 이기심이 있다면, 새 느낌 안에서는 그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정신적 아들인 새 애정(affection)은 그의 아버지의 악 때문에 영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성품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거에 지녔던 조건들로부터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나쁜 유전적인 경향들에 저항하면서 확실히 더 나은 성품을 건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변화와 건설은 때로 이기적인 우리의 느낌에서 시작되기도 하나, 점차적으로 그 느낌은 더 나은 느낌으로 변화되어, 결국 올바른 느낌에까지 이르른다. 그러면 그 느낌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되었었던 느낌은 비록 이기적이고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옛 느낌 때문에 현재의 선한 느낌은 단죄되지 않는다. 즉 “아들이 아비의 죄 때문에 죽지 않는다.”

영적인 세대

푸르퉁하고 아직 익지 않은 포도는 매우 시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사실, 시큼한 푸른 포도는 질 좋은 포도의 시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잘 익고 감미로운 포도라 해도 이 시큼한 과정을 거쳐 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태양과 공기 그리고 비와 토양 덕분에 점차 처음의 시큼한 성질을 벗어나 잘 익고 달콤해질 때까지 성장하여 결국 포도즙이 많은 우량한 포도로 바뀐 것뿐이다. 따라서 포도가 잘 익는 단계에서 이전 단계가 지닌 특질은 이후 단계의 아버지인 셈이다.
이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 마음이기도 하다. 영적인 진보는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계속 이어져 간다. 애정과 생각의 각 새로운 상태는 새로운 정신적인 세대로서 이 세대는 앞선 세대에 의해 탄생되어 진다. 그러면서 주님의 자비를 입어 더 개선된 조건으로 인도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의 정신적인 선조를 추적해 보면 흔히 발견되는 것도 그 시작 당시의 느낌과 생각이 꽤 이기적인 어떤 것에 발단을 두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가 부드럽게 인도해 주신 덕택에 각 세대 안에 이기적인 느낌이 있는 동시에 풍미 있는 영도 소개되어져서 자신 속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을 딛고 부상해야겠다는 각오만큼 그 영은 우리의 것으로 정착된다.

예증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마음 안에서 있게 되는 결혼의 발전에 관해서다. 우리가 20세 안팎의 젊은 미혼 여성을 생각하면서 말할 때, 대개 그녀들에게 있는 순결함을 연상해서 그들은 매우 사랑스럽고 달콤한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매력, 달콤함의 경우, 20세 가량의 여자들은 40세 가량의 여자들 보다 그 달콤함이 훨씬 못하다. 그 이유는 40세의 여자들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이웃과 친구로서 그들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선을 행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그 여인들은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축복을 하늘로부터 지상에 가져다 놓은 것이기도 하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신혼 첫날의 애정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즉 결혼 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더 높아지는 영적 단계를 향한 어떤 사랑이 되어 가는 두 사람의 거듭남의 시작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첫 젊은 사랑은 단지 보석을 담는 상자일 뿐이고, 그 이후에 많은 세월의 부부 생활을 거쳐 여물어지는 영적 결혼이라는 보석을 담게 된다. 이 보석만이 천국에서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아마 옛 속담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이다”에서도 영적으로 부모와 자식 관계의 원리를 찾어 볼 수 있다. 즉 바램이 마음에서 강해지면 생각이 번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삼, 사 세대”

십계명의 말씀을 앞에서 살핀 바, 주님을 미워하는 아비의 죄는 그 후손 삼, 사대에까지 갚는다고 읽게 되고, 또 한편 고대 유대인과 근대의 성경 직역주의자들은 아담의 죄나 자기에게 가까운 선조들의 죄 때문에 있을 하느님의 분노에 떨면서 산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속성,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이시요, 사랑의 하느님이신 것에 대한 지식을 사용해서 위와 같은 공포에서 보호될 수 있다.
그리고 십계명을 영적 의미로 보면, 그 계명 속에서 명령되는 아버지와 아이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임을 인식한다. 그것들이란 우리 자신의 보다 이른 때와 늦은 때에 있는 정신적 조건들을 표현한다. 십계명은 외적인 부모 자식간의 유전성을 문제시하여 다루거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는 것, 오히려 각 개인의 정신적인 가족 관계 속에 든 현재의 조건과 성장, 즉 각자의 심정과 생각을 통치하는 원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주님의 도움을 가지고 각자가 조절 가능한 것들이다.
진정으로 사실인 바, 주님을 미워하는 이들, 즉 선함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는 우리 속의 애정들, 그리하여 악 가운데 사는 이들이 맺는 죄악은 정신적인 세대 속에서 삼, 사대까지 이어져 내려간다. 그 이유는 그 악한 성질이 유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정이 질적인 측면에서 악한 선조와 같은 한, 당사자 자신의 성품은 똑 같은 단죄 밑에 놓여질 것이다.
표징적으로 볼 때, 3이란 진리와 관련되는 숫자인바, 그 반대 의미에서 보면, 거짓 또는 왜곡된 진리에 기초를 두는 경우에 관계된다. 4란 숫자는 선함을 표현하고, 그 반대 측면에서 악, 또는 부패된 선을 표현한다. 이러므로 죄악이 삼, 사 대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악들은 거짓 원리로부터 태어나진 모든 악한 것 안에, 그리고 악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거짓된 것 안에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퇴보되는 것들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것들은 악하고 거짓된 것의 선조와 함께 죽어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들 아버지처럼 자식들도 영적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것들까지도 파괴하시지 않으나, 그들이 그들 속에 있는 영적으로 생명 있는 것을 파괴해서 자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제키엘 18장 3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거역하며 저지르던 죄악을 다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먹고 새 뜻을 품어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27
암사자와 그 새끼 사자

성서 본문: 에제키엘 19장 1-9절

1. 너는 이스라엘 두 수령의 죽음을 애도하여 이렇게 읊어라.
2. ‘그대의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였는가?
수사자들에게 둘러 싸인 암사자 아니었는가?
젊은 사자들 틈에 누워
새끼들을 기르지 않았는가?
3. 그 길러 낸 새끼 하나가
젊은 사자 되어
사냥해 찢어 먹는 법을 익혀
사람을 잡아 먹더니,
4. 여러 민족이 함정을 파 놓고 몰아치는 바람에
거기에 빠져 코를 꿰어 에집트로 끌려 갔네.
5. 어미 사자는 어이가 없어,
바라던 일이 물거품 된 것을 보고,
새끼 가운데서 또 하나 골라
젊은 사자로 추켜 세웠지.
6. 이놈도 사자들 사이를 드나들며
제법 젊은 사자 행세를 하면서,
사냥해 찢어 먹는 법을 익혀
사람을 잡아 먹더니,
7. 궁전을 짓밟고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며
으르렁대는 소리에
온 나라가 다 벌벌 떨게 하더니,
8. 여러 민족이 사방에서 모여 와 몰아치며
그물을 그 앞에 치니,
함정에 빠져 잡히고 말았네.
9. 코를 꿰이고 철창에 갇혀
바빌론 임금에게 끌려 가
우리에 갇혔네.
다시는 그 소리 이스라엘산에
울려 퍼지지 않게 되었네.

개요

본문은 악한 애정에서 파생된 거짓 원리들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있어지는 계속적인 진리의 모독을 기술하고 있다.

글자적 의미

글자대로 보면, 이스라엘의 수령(princes)이란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에 속한 왕자와 왕들이었다. 이스라엘족 교회의 어머니는 고대 교회(Ancient Church)로서 이 교회가 더 나은 상태 때는 아주 강력했었다. 동양적 상상을 동원하면 활기에 찼던 교회가 암사자로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짐승들은 인간의 인격 속의 품질을 흔히 나열해 주는 바, 본문도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 짐승이 표현하는 사람이 어떤 종류에 속한지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유대인들은 로마인을 두고 흔히 “짐승들”이라고 불렀고, 바울이 네로의 테러자들로부터 탈출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았다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성경에서 짐승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는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특히 에제키엘이나 다니엘, 그리고 계시록의 경우는 더욱 현저한데, 모두 인간의 품질을 표현해 주고 있다.

사자

어떤 강력한 개인을 사자나, 암사자로 표현하는 성경의 언급은 상당히 많다. 이는 영적으로 강력한 원리들을 명시해 준다. 한 두 군데를 들추어보자. 즉 “보아라, 사자처럼 일어나는 백성을! 사자처럼 한 번 몸을 일으키면 잡아먹지 않고는 눕지 않는구나. 잡은 짐승의 피를 다 핥지 않고는 눕지 않는구나” (민수기 23:24). “사자처럼 웅크리고 있는데, 그 사자 같은 자들을 누가 감히 건드리랴!” (민수기 24:9).
본문에 언급되는 두 새끼 사자는 역사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유다의 두 왕 여호아하즈와 여호야킴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두 왕은 매우 악했고, 그 야망이 탐욕적이고 앙심 깊은 우상 숭배자였던 것이다. 여호아하즈가 파라오에게 잡혀 에집트로 끌려 가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그 뒤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 여호야킴이 왕이 되었으나, 그는 느부갓네살에게 붙잡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사실들이 본문의 글자 의미에서 부각되어 두 왕자(수령)들을 위한 애가로서 불리고 있는데, 이는 넓은 측면에서 나라를 위한 애가이기도 한 것인바, 그 이유는 그 나라는 매우 부패되어 쇠약해져 큰 슬픔과 굴욕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표징적 그림

유다 왕국이 위의 역사 시대 보다 훨씬 나았던 시대 때가 짐승의 왕인 사자로 표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유다의 영화는 영원히 두 조각 나고 말았다. 그 나라의 왕들은 망명 속의 포로일 뿐이었다. 여호와에 의해 심어진 고대 국가, 그분의 사랑의 섭리로 젖먹여져 길러진 그 나라가 위와 같은 꼴, 즉 백성들의 끔찍한 부패로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로서 오늘날의 우리 눈앞에서 영화의 한 장면같이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글자상의 역사는 악과 거짓 그리고 죄에 따른 생생한 경고의 긴 시리즈로 오늘날의 사회나 각 개인 앞에 놓여 경고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성경에서 언급할 때, 종종 비유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그 역사가 주는 교훈을 더욱 힘있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적인 언급, 즉 더 심오하고 영적인 인간 삶의 역사,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의 심정과 삶을 어떻게 다루시는 가에 관한 언급, 이 언급이 머나먼 과거 시대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삶에서의 실용적 쓰임을 위해 비유의 언어로 놓여 있는 것은 오로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전달되기 위해서다.

영적 의미

우리의 내향적 마음속에 있는 교회는 원리에 관한 우리의 체계로서, 우리는 이 원리들을 사랑하고 믿는 바, 이를 실생활에로 옮기게 된다. 이 원리들 중 어머니 역할을 하는 원칙적인 원리가 있는데, 이것이 다른 원리들을 이끌어 가면서 기타 원리들은 어머니 되는 원리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순진했던 시절에 우리 속의 어머니 되는 원리는 주님으로부터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면에서 타락되고 있다면, 어머니 되는 원리의 자식들 역시 뒤집혀 가서 결국 선조의 품질을 잃고 만다.
이스라엘에 있는 지도자들의 삶은 더욱 부패해져서 결국 주님의 교회에 있는 원리들과 정 반대 되어 그 교회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조직으로서의 나라 역시 파괴되고 말았다. 명목뿐인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감각적인 추론을 사용함으로서 그들 인격 속의 것이 뒤집어져 자연적 마음뿐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이런 모습이나 처지는 영 속에 있어지는 순수한 삶보다 감각적 삶을 더 선호함으로 영적 삶을 파괴하고 교회의 원리들을 전복시키는 것은 오늘날에도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서 재발되고 있다.
주님 말씀 속의 강력한 진리가 인간 마음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암사자로 표현되었지만, 이 진리가 타락하는 마음속에 있을 경우 철창에 갇히고, 사슬에 묶인 사자처럼 힘이 빠진 상태가 되어지고 만다.

사자

일반적으로 사자는 힘을 표현한다. 세부적 측면에서 볼 때 이 힘은 최말단(ultimate), 즉 가장 바깥 형체에 있는 진리의 힘, 예를 들면 신성한 말씀의 글자에 있는 힘을 표현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족들에 강하게 부각되어 이끌리도록 해주었기도 하다. 가장 높은 측면에서 사자는 신성한 진리 또는 진리의 힘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 이런 견지에서 주님은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고 불리고 있다.
암사자, 어미 사자란 선함과 하나가 되었을 때의 진리의 힘을 특별히 표현한다. 그러나 본문은 타락되는 교회를 표현하는 고로, 암사자는 위와 반대 의미인 악에서 튀어나오는 거짓의 힘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타락되는 마음은 자기 속의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암사자는 악과 연계된 거짓의 힘을 말한다. 타락해 가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 힘은 주님의 교회의 원리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 사람 마음속에서 주님의 교회의 원리들을 파괴시키고 타인의 마음에서도 자기 영향력을 행사하려 발버둥친다.

함정과 덫

본문은 젊은 사자에 관해 언급하기를, “…여러 민족이 함정을 파 놓고 몰아치는 바람에 거기에 빠져 코를 꿰어 에집트로 끌려갔다”라고 읊고 있다. 표징적 측면에서 사자와 여러 민족간 사이의 적대 관계는 인격 속의 적대 관계, 또는 여러 민족 안의 어떤 선함 같은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민족들이란 이교도 국가들로서 그들도 타락하는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두 마리의 젊은 사자와 여러 민족들의 취급은 악과 거짓의 어떤 계층이 부패된 원리의 또 다른 계층에 행동을 취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함정, 덫, 그물, 올가미 등등은 동물을 유인하는 방법으로 포획하는 장치들인바, 이는 외적이고 자연적인, 또는 육적인 마음속의 탐욕이 모든 느낌과 생각들을 끌어내려 타락시켜 감각적 욕구에 고정시키려는 현혹이나 꾐을 말한다. 감각적 삶 속에서 인간의 악에 대한 경향성은 그들 자신을 인간의 욕구 쪽으로 따라가도록 끌어당긴다. 마치 강물의 흐름은 그 강물 위에 떠 있는 물체를 결국 바다로 향하게 하여 파괴시키고 마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함정을 판다던가, 덫을 놓는다는 것은 세상 사랑이나 자아 사랑이 주는 기쁨을 부추겨서, 특히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을 애호하는 자연적 감각 속의 오류를 근거로 추론하도록 꾀어서 파괴 쪽으로 몰고 가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속에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악령들은 이런 악한 사랑들이 들썩거리도록 선동하고, 거짓 암시 같은 것으로 이기적인 사랑이 기뻐하도록 발버둥치는데, 우리 마음이 함정에 빠질 때까지 계속 진리 대신 거짓으로 선 대신 악으로부터 추론하려 든다. 그러나 함정이나 덫은 무엇보다 자신과 세상 것만을 사랑하려는 이들을 붙잡을 수 있긴 하지만, 이것들은 거듭남을 추구하는 신실한 마음까지 덫이나 함정에 걸려들게는 못한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렇게 읊는다. “사자가 잡아먹을 것이 없는데도 숲 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창애에 내려 와 걸리겠느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창애가 퉁겨 오르겠느냐?” (3:4-5).
누군가를 덫에 걸리게 할 수 있었던 술책 같은 것이 진리의 지식이나 선한 삶 때문에 보호되는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비밀에 속한 것이다.

사슬 (갈고리)

젊은 사자는 사슬 또는 갈고리로 꿰여져 에집트로 끌려갔다. 들짐승을 사로잡을 때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갈고리를 입이나 코에 꿰어서 사슬로 끌고 가는데 오늘날에도 숫소 같은 짐승을 이런 식으로 다루고 있다. 고대 시대 때는 잔인함이 흔한 일로 여겨져서 전쟁 중의 죄수들을 위와 같이 코를 꿰거나 사슬로 엮어 끌고갔던 것이다.
원래 입이나 코는 고통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부분인고로 동물이든 사람이든 코를 꿰어 끌면 쉽사리 끌려가게 된다. 이런 상태로 묶인 사람은 감각적인 기쁨의 끌어당김에 쉽게 유혹되는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경우, 비록 코를 꿰인 사람의 마음도 위와 같은 감각적 기쁨을 탐닉함을 금해야 함을 알고 있다 해도, 자기의 자연적 경향성을 내려 누를 경우에 오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젊은 사자가 코를 꿰어 끌려간 에집트란, 자연적 감각에 관한 지식도 진리들을 건설해 준다고 간주하는 신앙이나 생각, 그리고 기억 속에 쌓고자 자연적인 감각으로 배우려는 것을 표현한다. 이 자연적 감각들은 거짓 사상을 먹여 키우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감각의 오류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진 마음은 마치 숲 속의 젊은 사자가 코를 꿰인 것과 같고, 포로된 유다의 왕이 고통받으며 토굴에 갇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 새끼 사자

암사자는 자기의 첫 새끼 사자가 되돌아오지 않자 실망해 버렸다. 이는 타락하는 마음속의 정신적인 사자들, 즉 자연적인 마음을 통해 펼치려던 힘센 거짓들은 기대된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첫 새끼 사자가 생각의 육적 평면에 있는 감각의 오류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 같은 학문도 그것이 부패될 때는 거짓 원리 속에서 자유를 갖게 된다.
그럼에도 암사자는 또 다른 젊은 사자를 배출한다. 즉 악으로부터 오는 통치 권한이 있는 거짓이 생각의 보다 높은 평면에로 자신을 들어 올려 교회의 삶에 관해서 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해 보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삶은 자연적 마음의 내면에 있는 원리들이다. 이 높은 평면에서도 역시 거짓은 포획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사람까지 잡아먹는다. 즉 생각과 느낌의 보다 높은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선한 원리들을 파괴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젊은 사자가 안 것은 인간의 궁전을 황폐케 하는 것이다. 거짓들을 이끄는 대장격인 거짓 원리는 자연적 마음을 황폐하게 하려면 인간에게서 영적 원리들을 빼내어 못쓰게 하면 된다는 것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성읍까지 폐허로 만드는 것까지 알았다. 즉 마음속에 있는 교회 속의 교리 즉 인간 마음속에서 선하고 진정한 원리의 주거지인 마음속에 든 교회의 교리마저 폐허로 만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본문은, “으르렁대는 소리에 온 나라가 다 벌벌 떨게 하더니…”로 이어지고 있다. 좋은 측면에서 볼 때, 온 나라, 즉 마음에 가득 차야 할 것은 신성한 말씀에 의해 진리가 풍부해진 결과 가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 사랑에서 오는 악한 기쁨은 타락해 가는 마음일 경우 그 속에 든 주님의 모든 진리를 공격해서 파괴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선용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선 거절하고, 그 다음 파괴시켜 버리는 것이다.

으르렁댐

사자가 으르렁대는 소리는 숲속의 소리 중에서 가장 위협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길게 내뱉는 굉장한 음량은 산들 사이에서 굴절되어 땅을 흔드는 듯 여겨질 정도이다. 이 소리는 듣는 이의 신경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듯 해서 거의 무기력하게 하여 죽음의 공포가 흐르게 한다. 한 마디로 사람이나 짐승들에게 공포를 전달해서 당황하게 만든다.
이런 사자가 마을 주위를 맴돌고 있으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할 때, 그 마을이 얼마나 공포 속에 있을 것인지는 쉽게 상상되리라 본다. 사자가 사람이나 짐승을 포획할 때 내는 으르렁댐은 그곳 주민들로 쉽사리 공포 속에 떨게 할 것이다. 타락한 이스라엘에 예언된 슬픔 중의 하나는 이러하다. “그래서, 사자가 숲에서 뛰어 나와 사람들을 물어 죽입니다. 벌판을 쏘다니던 늑대가 덤벼들고 표범이 성읍 밖에서 노리다가 나오는 사람을 모두 잡아갑니다. 그렇게 거역하기만 하고 그렇게 배신만 하더니 이 꼴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5:6).
강력한 사자, 죽게 만드는 거짓이 마음속에서 우렁찬 소음을 일으켜서 영적 생명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을 송두리째 위협할 때, 주님 말씀 속의 모든 진리를 몽땅 삼키겠다 할 때, 진리를 왜곡시켜 악한 목적에 진리를 충당함으로 악한 원리를 주님 말씀으로 확증하려 들 때, 인간 마음속에서는 재난과 맞먹는 상황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마음 전체는 전율과 불확실성이라는 공포 속에 놓이고 만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밝혀 주시는 도움도 없이 자신의 자연적인 추론만 가지고 모든 진리를 이해하는데 충분하다고 단정 지을 경우가 있다.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사자들이 기어이 먹이를 찾아내듯 이런 거짓은 영적인 파괴를 우리 마음에서 기어이 저지르고 만다. 영적으로 사자가 으르렁댐이란 모든 선함과 진리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탐욕과 격렬한 열정이 쉴새없이 내뱉는 거짓들을 말한다.

둘째 새끼 사자가 잡힘

위와 같이 공포를 자아낸 사자, 타락되는 마음속에 있는 두 번째 사자 역시 그물에 걸려 함정에 빠져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큰 문화를 이룬 사회라는 측면에서 바빌론은 교회를 인정하는 이들, 비록 글자적 의미 수준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가진 이들, 그러나 인간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신성한 말씀과 교회를 이용하는 이들, 그리고 주님이 자기에게 인간을 지배하도록 권세를 주었다고 선포하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들이 이런 것을 실제에 옮길 때, 그들은 교회 속에 있는 선을 뒤집고,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비인격 측면에서의 바빌론은 자아 사랑에 근거한 지배욕이라는 악한 원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철창에 갇히고 코를 꿰어 바빌론에 끌려갔다는 것은 이기적 목적을 성취해 보려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도록 지배욕이라는 지옥의 영을 자기 마음에 허용함으로 자신의 삶을 부패시켜, 결국 자신 속의 이기적인 욕망의 본부인 자아 사랑의 사슬에 꼼짝 못하게 얽혀지고 마는 것을 말한다.
사자 앞에 그물을 쳤다는 것은 자아 사랑이 세상적 야망이 주는 기쁨과 그것을 탐하는 욕구라는 것을 발판으로 추론하게 유도함으로써 결국 어떤 희망도 없게 되도록, 그물 같은 체계 속에 갇히도록, 우리가 자신 속의 자아 사랑을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의 “소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 산에 울려 퍼지지 않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세상과 자아에 속한 낮은 것에로 끌려 내려가 인간 삶의 더 높은 평면을 더 이상 생각지도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선에 관한 모든 것이 부패되었고, 진리 역시 모두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연히 수반되는 것은, 타락하는 마음에서는 교회 역시 파멸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이교적인 것들을 전멸시켜야 하는 이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시편의 두 구절로 마무리 지어 보자. “당신의 언약은 영원히 나의 유산이며 내 마음의 기쁨입니다. 당신 뜻을 따르기로 내 마음 정하였사오니 그것이 영원한 보상입니다” (119:111-112).

28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의 어머니

성서 본문: 에제키엘 19장 10-14절

10. ‘“그대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은
포도덩굴 같았지.
물이 많아 햇가지가 무성하여
송이가 소담스러웠고,
11. 세찬 가지를 뻗어
왕의 지팡이가 되었고
어찌나 키가 큰지,
탐스런 가지들 사이에서도 뛰어나고
게다가 잎 또한 무성해서 돋보이더니,
12. 뙤약볕에 뽑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네.
열풍이 불어 오니 줄기는 말라 꺾였고,
그 세차던 가지도 말라
불에 타 버리고 말았네.
13. 이제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메마른 땅,
사막에 옮겨 심었더니,
14. 그 줄기에서 불이 나
가지도 열매도 삼키고 말았네.
그 세차던 가지도 없어져
왕의 지팡이가 나지 못하게 되었네.’”

개요

영적 인간은 신성한 진리의 삶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감각적 인간 안에서는 모든 신성한 진리가 전복되고 거절되어진다.

어머니

글자대로, 또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교회와 유대 교회의 어머니는 고대 교회(Ancient Church)였다. 이 교회는 영적 교회로서 합리적이고 영적인 진리들의 빛에 있게 되는 선한 삶을 원리로 삼았던 교회이다.
이 고대 교회가 좋고 풍성한 포도를 맺는 포도나무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포도나무는 진리가 근본 바탕이 된 영적 수준에 있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 간혹 다른 나무들, 혹은 동산으로 교회가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 5장 7절의 경우, 이렇게 말해진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그대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은 포도덩굴 같았지. Thy mother is (or was) like a vine in thy blood”라는 구절은 글자대로 보면 출생의 때와 관계가 있다. 즉 에제키엘 16장 4-6절의 “네가 나던(태어나던) 일을 말하자면… 내가 지나가다가… 너를 보고 핏덩어리야 살아라”를 읽으면 이해된다. 그러나 피(blood)가 육체에서 순환하는 생명이듯, 영혼을 순환하는 피는 신성한 진리이다. 신성한 진리의 사랑이 영적 교회 안에 있었다. 이 사랑이 이스라엘에 의해 상속되어 그들의 경향성 속에서 발달되어 이스라엘 교회를 이룩했다.

물가 (the waters)

어머니인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는 물가에 심겨졌다. 즉 풍부한 진리 가운데 설립되었다는 말이다. 물은 우리를 가르치게 되는 진리들을 표현하고, 이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풍부한 진리를 가진 영적 교회는 그들이 소유한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하고 의로운 삶을 꾸렸었다. 따라서 그 교회는 실제의 선함인 “송이가 소담스러웠고,” 물가에 심긴 덕분에 생각이 넓혀지고 더 성장한 바, “햇가지도 무성했다.” 그 이유가 진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 성장이 뛰어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진리는 수단에 속하는 고로 선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바, 어떻게 성장하며 결실을 거두어야 하는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가지들 (rods)

“세찬 가지를 뻗어 왕의 지팡이(홀, sceptre)가 되었고…” 이를 글자대로 생각해 보면, 포도나무가 강하고 크게 자라서 지팡이나 홀을 만들 수 있는 가지가 많이 있었다는 말이다. 원래 왕의 홀(직함을 적은 패)은 단순히 왕의 지팡이 일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판관은 이와 같은 지팡이를 자기 직책의 표시로 지니고 다녔다. 그 뒤 점차로 통치자들은 홀의 형체를 단순히 직능을 상징하는 용도로 사용해 갔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직능의 위엄을 나타내도록 보석이나 귀금속으로 홀을 장식했다. 이런 장식을 사용하는 것은 미개한 나라에서 많았으나 문명화된 나라의 경우에도 자기가 사용하는 지팡이 등에 어떤 상징적이고 표징적인 형태를 새기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지팡이, 특히 통치자의 홀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여행 동안 사람들이 의지하게 되는 지팡이는 힘을 표현한다. 인간이 이 지팡이에 의지해서 힘을 아껴 더 버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팡이는 나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자라는 진리를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나무로 된 지팡이, 또는 홀은 진리의 힘을 표현하는데, 마음은 이 힘에 의지해서 버틴다. 그리고 통치자의 홀일 경우, 그 홀은 통치자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상징물이다. 그래서 신정 시대(the theocracy) 때의 경우, 통치자는 주님에 의해 뽑혀졌으므로 그의 홀은 신성한 권능을 표현했고 신성한 이름과 권능 하에 인간 통치자는 자기 지위를 지탱했다.
포도나무가 위와 같은 가지들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은 영적 교회가 그 교회의 내향적 원리나 행동을 위한 바깥쪽 통치라는 양 측면에 응용할 수 있는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에서 오는 풍부한 힘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성경의 글자는 인간 삶의 실용적 측면인 일상 생활을 위해 위대한 지팡이인 것이다.

탐스런 가지(굵은 가지, the thick branches)

그러나 이 포도나무는 “탐스런 가지들 사이에서도 뛰어났다.” 즉 영적 교회는 지적으로 잘 성장해 갔으나, 지적인 자신을 두고 우쭐대었다는 말이다. 영적 교회인들은 자신이 총명해지는 것을 무척 사랑해 갔는데, 급기야 그들은 주님의 진리가 모든 인간 총명의 근원인 것을 잊어버리는 데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즉 그들은 자신 속의 총명의 근원이 자신들인 냥 착각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아 총명을 자랑함으로 자신을 우뚝 세웠던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탐스런 가지들, the thick branches, 많은 가지들”이란 서로 뒤엉킨 상태의 가지들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포도나무는 빼어나게 크게 보였다.
일종의 그물망과도 같이 서로 얽혀서 두툼해진 가지들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더 팽창되어 생각 속에 또 생각이 포개지고 포개지듯하여 비비꼬인 다발이 되어 버린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마음은 생각들이 뒤엉켜져서 결국 서로 혼잡을 이루다 못해 명백히 해주어야 할 총명마저 상실하고 만다. 예를 들면, 자기를 추켜세우는 무신론자의 경우, 그는 자기 총명을 최고의 것으로 간주해서 어떤 영적 의문도 신성한 말씀의 도움도 없이 다 답변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바, 결국 그의 생각은 뒤엉켜져서 그의 속에 있는 많은 거짓 관념과 뒤섞이고 만다.
영적 인간은 양심을 그의 마음 안에 형성하여 가지고 있고, 이 양심은 어릴적부터 조금씩 발달하는데, 선생이나 부모, 기타 다른 이들에 의해, 후에는 교회의 교리에 의해 발달되어진다. 그러나 진리의 원리들에 대한 명백한 개념이 없는 이상, 그는 자기가 아는 교리들을 자기의 감각들을 통해 획득한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확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지 못한 자연적 사상을 받는 상태라면 그의 사상은 감각에서 오는 오류와 거짓된 것들의 혼합으로 그의 마음은 서로 뒤엉켜지게 되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진리마저 파괴되고 만다. 더욱이 자기는 아는 것이 많아 총명하다고 하여 자기 마음을 추켜세우려 할 때, 그는 자기 총명까지 파괴할 것들과 뒤엉켜지고 마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모습은 타락되는 영적 교회 또는 오늘날 이와 비슷한 정신적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해당된다. 좋은 영적 조건을 지닌 사람들은 신성한 진리를 받아 매일의 생활에 응용해 간다. 그러나 자아를 찬양하려 드는 사람은 신성한 진리를 뒤집고 거절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 속에서 파생된 관념들이 주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있게 될 상황들이 본문의 포도나무에서 일어나는 것들로 표현되고 있다.

뽑힘

“뙤약볕에 뽑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네. 열풍(동풍)이 불어오니 줄기는 말라 꺾였고…” 타락하는 마음속에는 분노로 인해 그 마음에 심겨진 진리가 뽑혀 내던져 진다. 즉 그 진리들은 인간의 자아 사랑에 반대되므로 분노가 치밀어 진리가 뽑혀진다는 말이다.
“열풍(동풍)이 불어오니 줄기는 말라 꺾였고, the East Wind dried up her fruit.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보면, 진리의 적극적인 영향이나 작용을 표현하나, 나쁜 의미의 경우,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짓 원리들의 활동을 말한다. 태양이 뜨는 동쪽 역시 좋은 의미로는 주님을 표현하지만, 반대 의미로는 자아 사랑이고 타락하는 마음속에서는 이 사랑이 주님 대신 들어앉는다.
따라서 나쁜 의미에서의 동풍이란 악에서 온 거짓들이고, 이 거짓이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을 흐트리고 파괴한다. 그리고 악의 모든 탐욕을 부추긴다. 이런 정신적 조건에 처하면 정신적 포도나무가 제 아무리 세찬 가지였다 해도 부러지고 시들어진다. 그 이유는 그 마음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즉 교회 속의 진리가 파괴되어져 그 마음은 지옥에 저항할 힘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옥적인 “불”은 자아 사랑의 악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교회는 파괴됐는데, 그 파괴는 신성한 진리의 거절과 전복에 의한 것이다.

역사적 의미

유다 왕국의 파괴는 글자대로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통해 이루어져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고대 교회는 무성하게 자라고 풍성한 포도를 맺는 훌륭한 포도나무 같았다. 게다가 많은 지식으로 그 교회는 채워졌었다. 지팡이나 홀이 됨직한 많은 가지들이란 신성한 법을 배운 많은 현자들이다. 이들은 교회나 어떤 지역들을 슬기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시대 때에 느부갓네살은 회오리바람과도 같이 들이닥쳐 그들을 끌고 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영광이 있던 그들의 역사는 닫히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 이상 과거 같은 국가도 없이 지상의 여러 민족 속에 흩어졌고 그들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은 그 황폐해진 것만이 알려지게 됐던 것이다.

광야

“이제 바삭 바삭 타 들어가는 메마른 땅 사막(광야)에 옮겨 심었더니…” 광야란 생명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생명 있는 원리인 주님으로부터 온 선함과 진리가 없는 마음을 표현한다. 악과 거짓 속으로 타락해 가는 교회 또는 마음은 생명을 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영적인 광야 그 자체에 심겨진 바 된다.
그래서 악한 자아 사랑의 불은 거짓과 뒤엉킨 포도나무 가지까지 번져 가서 새 삶의 시작이 되고 천국적 삶을 발달시켜 줄 지식들인 마음 안에 있는 거듭나는 사랑, 지혜, 선용이라는 열매까지 삼키고 만다.
타락하는 과정에 있는 이 정신적인 포도나무는 왕의 지팡이가 될 튼튼한 가지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된다. 그 마음은 더 이상 신성한 진리의 실용적인 힘에 관한 지식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이 지식에 기대어야만이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자기 삶의 원리와 행동 지침을 찾아 낼 수 있고 자신을 지배할 힘도 거기에서 나오고 삶의 낮은 수준을 지배하는 거듭남의 실제를 위한 계발된 영이 가지는 총명까지 가능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진다는 말이다.
마음 안에 있는, “자아를 확신하게 하는 사랑의 추론,” 이것이 인간으로 주님의 것을 지각하도록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주님의 것을 사랑해서 채택하도록 하지만, 타락되는 마음일 경우 그 속에서의 이 추론은 힘을 상실해서 사랑과 지혜의 품질에 대한 인식이 없게 된다. 신성한 진리, 그 진리의 영의 측면이든 글자적 형태로 이든 선한 자에게는 그가 의지할 지팡이이지만, 악한 자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보인다.

황폐함

본문은 신성한 진리를 흠모하기를 중단해 버린 마음을 표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마음은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모든 영적 선과 진리를 마음이라는 영토에서 몰아낸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은 영적 생명에 속한 것을 받는 데에서나, 또는 영적 죽음에 저항해 보려는 쪽이든지, 어느 쪽에서든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마음의 영역에는 오로지 지독한 허무주의, 불합리한 폭력적 혁명의 발생, 사악함뿐인 파괴주의 같은 것만 팽배해질 뿐, 무한하게 선하신 사랑의 하느님이 인간의 삶과 심정에 쏟아 부어 주시려 하는 모든 것을 자기 근처에도 접근 못하게 훼방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자기 심중에 대고 하는 말, 하느님은 안 계신다.” 이렇게 말한 그는 하느님이 안 계시는 우주에서 살아 보려고 그의 하찮은 노력을 경주해서 자기속 우주로부터서도 하느님을 몰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발버둥친 그의 인간 삶이란 황량한 슬픔만 생산하여 그의 바깥쪽은 사막이고 그의 안쪽은 지옥이라는 죽음의 광야에 자신 스스로 목 매이게 한다.

애가

위와 같은 광야가 “애가”라고, 인간이 소유 가능한 천국을 잃어버린데 대한 “애가”라고 불리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니다. 악인은 천국을 신중하고도 결정적으로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연기 속에 빨려들듯 희미함 속으로 사라졌다. 여호와에 의해, 그분의 경이로운 역사로 건설된 다윗의 계보는 망해야 할 시기도 되지 못해 부패와 우상 숭배로 인해, 꺼질 줄 모르는 죄악들을 통해 오래 전에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 유다 왕국의 몰락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왕조의 몰락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사항은 역사적 사항이고, 마지막으로 회복된 것은 표징적 측면, 또는 영적 측면에서의 회복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가능했고 이분이야말로 다윗의 계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로 알게 해주는 것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거듭 인간에게 다가와서 각 개인이나 인류에게 영적이고 천국적인 생명의 축복을 주시려 애쓰신다는 것일게다.
지나 가버린 시대의 역사를 반영해 볼 때, 우리로 조심스럽게 기억하도록 하는 것은, 위와 같은 역사적 사항들이 거룩한 성경 안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들을 우리가 거울로서 삼아 각자 자신 속을 들여다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속에 있던 감각적이고 자만으로 꽉 찬 지옥의 영은 이 세상을 활보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유전적 경향성 속에 매복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틈만 엿보이면 우리를 꾀어내려 한다는 것을 거듭 상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고난, 슬픔, 투쟁, 고통 등등, 이 지상의 삶인 자연적 삶의 모든 국면에 걸쳐 있는 우리가 피했으면 하는 것들 모두는 오로지 각자 속의 자연적 경향성이 발동되어 오는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결과임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도 주님은 더 강한 팔로, 더 많은 사랑으로 오래 전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듯 말하신다.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나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사야 59:1-2).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 머물고 있을 경우, 그분은 우리로 완전한 평화에 머물도록 해주실 것이리라.

29
끓고 있는 고기 가마

성서 본문: 에제키엘 24장 3-12절

3. 이 반역하는 족속이 어찌 될 것인지 비유를 베풀어 일러 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솥을 걸어 놓고 물을 부은 다음
고기를 썰어 넣어라.
4. 좋은 고기를 다 썰어 넣어라.
넓적다리, 등심을 썰어 넣어라.
5. 양도 살진 것을 골라 잡아 넣고
밑에 장작불을 지펴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되도록 푹 삶아라.
6. 주 야훼가 말한다.
무죄한 피를 흘린 이 망할 도성,
뻘겋게 녹이 슨 솥,
닦아 낼 수 없이 녹이 슬었으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기를
한 점 남기지 말고 꺼내어라.
주사위를 던져 골라 낼 것도 없다.
7. 이 도성 안에서 참으로 무죄한 피가 흘렀다.
맨바위 위에 뿌려졌다.
흙으로 덮어 버릴 수 있도록 땅에 흘리지도 않았다.
8. 진노하여 그 원수를 갚을 셈으로 내가
덮어 버릴 수 없도록 바위 위에 뿌리게 하였다.
9. 주 야훼가 말한다.
죄 없는 피를 흘린 이 망할 도성,
장작 더미를 가려 놓을 터이니,
10. 나무를 많이 넣고 불을 지펴라.
고기를 푹 삶아서 국물을 쏟아 버리고 뼈는 태운 다음
11. 솥을 숯불에 올려 놓아 달구어라.
놋쇠가 달아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타고
녹이 다 가시게 하여라.
12. 아무리 해 보아도, 아무리 불에 올려 놓고 달구어도 녹은 가시지 않았다.

개요

주님은 만민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신다. 그러나 자신을 악과 거짓으로 확증해 놓은 이들은 거듭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악을 기꺼이 내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

본문은 예루살렘 성과 그 백성들이 끊고 있는 고기 솥이라고 비유로 말하고 있다. 이 비유의 근원은 유대인들 자신이 뱉어 놓은 말에 있었음을 에제키엘 11장 3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예언자가 곤경이 닥칠 것임을 지도자들에게 말해 주자, 그들이 수군거리는 말은, “집을 지어 놓았었다. 우리는 냄비 속에 고이 담겨 있는 살점 아니냐?” 는 그들의 말을 주님께서 비유로 쓰신 것이다.
이 당시 바빌론 왕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솥 안에 든 살점들은 솥 밑에서 타고 있는 불로부터 당장은 안전한 듯 여겨질 것이나, 그것들은 솥 안에 담긴 상태인지라 꼼짝할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이와 같은 포위 공격받는 예루살렘 성내의 백성들은 성곽 덕분에 안전하다고 우선 안심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들을 안전하게 해준 성벽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장애물이어서 어디로든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어, 한편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에게 꼼짝못하게 되어 있다.
솥 안의 내용물이 끊고 있을 경우, 그 속의 찌꺼기 같은 물질은 끓는 표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그 찌꺼기를 걷어 내어 줌으로 내용물이 넘치지 않게 한다. 그러나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내용물이 다량으로 넘치게 되어 쉽게 태워지고, 물이 없는 가마솥 역시 불에 달구어져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풍자적 의미

본문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성과 백성은 독 안에 든 쥐의 꼴이라는 그림이다. 본문의 예언자는 고기와 뼈까지 솥에 넣어 끓이라고 지시 받고 있다. 게다가 펄펄 끓어 넘치도록 하여 아무 것도 없게 하라고 지시되고 있다. 그 다음 놋쇠솥 자체가 달구어져 파괴되게 하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역사적 사실로 판명되었는 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제 십 구 년 오월 칠일, 바빌론 왕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야훼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 성 안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큰집은 모두 불탔다. 친위 대장을 따르는 바빌론 군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죄다 허물어 버렸다” (열왕기하 25:8-10).

계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을 처리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밝히 보여주셨다는 점이다. 25장 첫 두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때는 제 구 년 시월 십일이었다. 너 사람아, 오늘 날짜, 바로 오늘 날짜를 기록해 두어라. 이 날은 바빌론 왕이 예루살렘 공격을 개시하는 날이다.”
이 당시 에제키엘은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질러 500마일 이상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곳에 포로로 가 있던 때였다. 그 당시에는 소식을 즉각 알려줄 전화 같은 통신 수단이 전혀 없을 때이다. 그러나 위와 같이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알려준 날짜는 열왕기하 25장 1절의 기록으로 충분한 확증을 우리로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즉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왕 구 년 시월 십일,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을 포위하고 사면에 토성을 쌓았다.”

예언

여호와께서는 에제키엘을 통해 반역만 일삼는 이스라엘 가문이 머지 않아 황폐되고 말리라고 예언하셨다. 이 예언이 표현적 형상, 즉 끓고 있는 고기 가마로 주어지게 되었는데, 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그분의 경고가 인상깊어지게 하시려는 것, 둘째는 이 예언에 담긴 영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영적 진리를 밝혀 주시면서, 동시에 경고를 해주기 위해서이다.
이와 비슷한 예언이 예레미야의 선교 초기에도 있었다. 예레미야 1장 13, 14절을 보면, “야훼께서는 두 번째로 이렇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부글부글 끓는 솥물이 북쪽에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야훼께서 이르셨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북녘에서 재앙이 쏟아져 내리리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 율례, 규정 등등을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여 떠벌렸다. 그러나 타락하는 백성이 지닌 인격은 그들이 자랑했던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법칙을 준수함에 있어 원리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공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진리를 소유한 그 자체만 가지고는 어떤 악한 인간도 구원될 수 없다. 마치 태양의 빛이 소경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같다.

찌꺼기 (scum, 녹)

도시 안에 있는 저질의 사람들을 흔히 “찌꺼기”들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가 그들은 범죄를 일으킬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가 조금만 소란해져도 그 틈을 즉각 이용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더욱이 주민 대다수가 위와 같은 저질일 경우 그 도시는 송두리째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아예 형태 자체까지 파괴에 이르고야 만다.
한 때 막강한 군사력으로 큰 도시를 이루어 그 일대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고대 나라들의 경우, 그들 백성들이 타락하여 악덕 속에 푹 잠길 때 타 국가에 의해 쉽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발굴되는 고대 도시들의 경우 이런 예가 많은데, 아직도 역사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위와 같은 대도시들이 더 있을는지 모른다.
모든 시대를 망라하는 지상의 역사에서 위와 같은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다.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위한 가장 항구적인 요소는 인격의 거듭남밖에 없다. 시간은 오고 간다. 나라들은 일어섰다가 몰락한다. 인류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도 한다. 이런 상태의 변화 속에 인격의 수준은 상승되기도 하고 밑으로 처지기도 한다.

영적 의미들

고대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보내진 표현적 예언들로부터 인격의 진보 역시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본문의 경고, 가르침의 필요성은 고대의 유대인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일 “성령이 교회에 하는 말을 들을 귀 있어 듣는다”면, 성경의 글자 속에서 더 심오한 영적 진리를 보게 되어, 성경이 단지 어떤 역사 사실만을 언급하는게 아니라 신성한 원리, 즉 모든 인간에게 영적으로 응용 가능한 원리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 속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각자의 마음속에는 진리의 체계가 건설되어 있고 그 안에 애정과 생각들이 거주한다. 이 영적 예루살렘에 사랑의 주님은 신성한 모든 진리를 건설하시고, 각자의 심정과 행동 지침에 모든 선한 원리들을 건설해 주시려 노력하신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속에 건설해 주신 정신적인 예루살렘 안에서 살게 된다면,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성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노젓는 큰 배는 들어오지 못하고 장엄한 배는 얼씬도 못하리라” (이사야 33:20,21).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시편 122:6,7)를 누리게 될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타락하고 있다면, 우리 속의 정신적인 예루살렘은 반역적인 집, 심정이나 행동에서 신성한 원리에 반대되게 사는 자가 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본문이나 본문 뒤에 따르는 바와 같이 나타난다.

고기 가마

음식 또는 액체를 담기 위해 움푹 들어간 그릇은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들이 음식물과 그릇의 관계와도 같이 인간 마음에도 작용한다. 진정한 모든 교리는 선함과 진리를 담는 정신적인 그릇이다. 물은 그 자체로 볼 때 어떤 형체가 없다. 그러나 물을 담는 그릇은 물에 형체를 주게 된다. 따라서 물을 사용하려면 물은 그릇에 담겨져야 한다. 이와 같이 진리는 교리 속에서 형체를 취해야 하는 바, 그 이유는 교리가 진리를 서술해 주어 진리가 어떤 생김새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음식을 요리하는 냄비, 솥, 가마 등등도 교리를 표현한다. 물은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자연적인 마음에 의해 보여져 응용된 진리를 말한다. 단단한 음식은 실제에 있는 선함을 표현하는데, 진리라는 물이 사랑이라는 불에 의해 끓여져 요동할 때 정신적인 사용을 위해 준비되어져야만 한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고기 가마(솥)는 구리로 만든 가마(솥)이다. 구리(brass)는 자연적인 선, 자연적인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선, 바깥 형체에 있는 선을 표현한다. 그러나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선함에 관한 자연적인 사상은 금으로 표현되는 천국적인 선함의 형체와는 아주 다르다. 구리도 광을 냈을 경우 잠깐 동안 금과 비슷하게 보일는지도 모르나, 금과 구리의 품질은 아주 다르다. 이와 같이 자연적 수준의 선함과 천국적 수준의 선함은 그 품질이 매우 다르다.
솥을 걸어 놓는다는 것은 솥 안의 내용물을 끓이기 위해 불 위에 솥을 놓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기의 애정을 적용할 때를 말하는데, 이 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실제의 형체로 자신의 선함과 진리를 가져다 놓게 된다. 솥 안에 들어가는 “좋은 조각”들이란 정신적인 사용을 위한 제각기 다른 선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넓적 다리, 어깨, 뼈들”이란 정신적 삶의 제각기 다른 분과, 즉 천적, 영적, 그리고 자연적 분과에 응용할 수 있는 제각기 다른 선함들을 표현해 준다. 넓적 다리(thigh)는 천적 사랑의 선, 특별히 순수한 결혼적 사랑을 표현한다.
어깨(shoulder), 이를 가지고 인간이 밀어붙이는 바 힘을 표현한다. 정신적 힘이 삶에서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바, 어깨는 영적 수준을 표현한다. 이 수준의 근본 되는 요소는 진리요, 이 수준에서 나오는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실제에 사용함으로 생산되는 선인 것이다. 그러나 뼈들, 이는 육체의 부분 중 부드러운 살과는 달리 덜 생명이 있는 바, 이는 자연적 수준을 표현한다. 이 수준은 행동 지침의 외적 선에 해당되므로, 각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이를 수단으로 인간은 설 수 있고 움직일 수도 있다. 위 세 가지 선, 즉 사랑의 선, 진리의 선, 행동의 선 모두는 매일 우리들의 양식을 위해 정신적 가마솥 안에 놓여지는 것이다.

뒤집혀지고 부패됨

그런데 본문에서 언급되는 고기 가마솥은 사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했던 가마이다. 그들이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들을 남용함으로 해서 그들은 진리와 선 그리고 정의를, 악과 거짓 그리고 죄악들로 뒤집어 놓아 썩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본문에서 이들을 두고 “피를 흘린 도성”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글자대로만 보아도 악하고, 잔인하고, 살인적인 사람들을 뜻함은 금방 알 수 있다.
좋은 의미에서 피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육체 속에서 피가 각처를 순환하면서 생명을 공급하여 건강한 육체를 유지시키듯, 거듭나는 마음속을 영적 생명은 순환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성한 진리를 뒤집고, 진리의 영을 거절할 때, 내향의 생명은 신성한 진리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악한 거짓에 의해 순환될 뿐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인간의 가마솥은 찌꺼기들로 덮어지고 만다. 정신적인 찌꺼기는 이기심 속의 추잡한 사랑에 의해 생겨난다. 가마솥 안의 찌꺼기, 그것이 넘쳐 나거나, 벗겨지지 않으면, 가마솥의 내용물을 더 더럽게 한다. 이와 같이 불결한 이기적 사랑이라는 찌꺼기, 그것의 본성이 어떠한지 알아차려 제거치 않으면 인간 마음속에 있는 모든 선함과 진리는 더럽혀 지고 만다.
그래서 끓고 있는 동안, 즉 우리의 심정이 일상 생활에서 실제의 사용을 위해 자신의 애정과 생각을 준비하는 동안, 정신 속의 찌꺼기가 마음의 표면 위로 떠올라 우리로 인식할 수 있게 섭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속의 찌꺼기가 무엇인지, 그것은 쓸모 없는 것인 고로 걷어 내야 한다는 것을 제 눈으로 보고 알아채도록 의도되어 있다는 말이다.
각자의 생활 체험은 자기 속에 있는 자연적인 유전적 경향성을 관찰할 기회를 제공하여 각자의 불순한 경향성들을 자기 마음에서 치워 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자기 인격 속에 고착되고 말리라는 것을 알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자기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 전 인격은 서서히, 혹은 빠르게 불순해져 악한 인격으로 만들어진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자기 속의 불순한 찌꺼기들을 거절하고 제거시키는 작업은 자기의 가마솥의 내용물이 끓고 있는 동안 각자가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책무이다.
지상의 삶 속에 있는 시련이나 고난은 정신적 삶에서 뒤엉켜 있는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을 도와준다. 따라서 시련이나 고난의 시기가 올바르게 이용된다면, 우리 속의 정신적 표면 위에 둥둥 뜨는 찌꺼기들을 걷어 내는데 바람직하게 이용된다. 그러나 악한 마음일 경우, 찌꺼기는 언제나 남아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마음 자체가 자신 속의 불순물을 자기 생명의 필수 요소로 느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 속의 찌꺼기는 인격의 본체와 뒤섞여 늘어붙는 바, 그의 인격은 더러운 채로 남아있게 된다.
본문 뒷부분은 더러운 것(filthiness)과 찌꺼기(scum)를 구별해서 언급하는데, 더러운 것은 악을, 찌꺼기는 거짓을 표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피에 관련된 율법은 아주 엄격했다. 그 이유가, 신체적으로 피가 육체의 생명이듯, 마음의 생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의 남자들은 피를 취급함에 어떤 부주의도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들이 피를 쏟으려면 땅에 쏟고 흙으로 덮어서 피가 땅에 스며들게 하도록 명령되어 결코 공기 중에 노출시켜 부패시키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관해 말하는 바, 그들은 피를 조심스럽게 흙으로 덮기는커녕, 이중적으로 과시하고자 바위 위에 뿌려 태양과 공기에 노출시켜 부패시켰다. 이런 짓들은 주님 보시기에 아주 역겨운 형태였다. 그 이유가 이 형태는 바위로 표현되는 신성한 말씀 안의 진리에 의거 악과 거짓을 추구함으로, 자신 속의 악과 거짓을 더욱 자랑함으로 하늘 면전에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 악인의 노골적이고 대담한 행동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거룩한 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더욱이 신성한 법에 의거 그 자체가 의롭다고 떠벌릴 정도로 뻔뻔하다.

가마솥을 태움

위와 같은 신성모독(desecration)의 형태는 악한 목적에 충당코자 교리를 뒤집는 마음속에서 모든 진정한 교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살폈다. 이런 모습들이 비유에서 고기 가마 속의 내용물과 찌꺼기(녹)까지 태워 버릴 뿐더러 가마솥에 불을 더 놓아서 놋가마 자체가 솥에 늘어붙는 찌꺼기와 함께 모두 파괴되게 하라고 말하는 사실로 표현되고 있다. 악과 거짓은 모든 영적인 것을 파괴하되, 어떤 영적 생명도 남지 못하도록 철저한 파괴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본문의 마지막 절은, “아무리 해 보아도, 아무리 불에 올려놓고 달구어도 녹(찌꺼기)은 가시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신 속의 악과 거짓을 결코 포기치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슬픈 운명이요, 이는 영적 죽음으로 치닫아 자아 사랑이라는 지옥의 불이 그 속의 거짓이라는 더러운 찌꺼기와 더불어 언제나 혼합되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 하나 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그래야 올가미에 걸려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가 죽다니 될 말이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 (에제키엘 18:30-32).

30
레바논의 아시리아 송백

성서 본문: 에제키엘 31장 3-12절 (* 표준 새번역 참조 *)

3. 아시리아는 한 때 레바논의 송백이었다. 가지가 멋지게 우거져 그늘이 좋고 키가 우뚝 솟아 꼭대기 가지는 구름을 뚫고 뻗었다.
4. 너는 물을 먹고 크게 자랐고 지하수를 빨아 치솟았다.
네가 선 주위로는 강물이 돌고
도랑물이 흘러 들나무를 모두 적셨다.
5. 그래서 너는 들의 어떤 나무보다 키가 컸다.
그 많은 굵은 가지에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은 것은
물이 많아서 잘 자란 탓이었다.
6. 그 가지들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고
우거진 가지들 밑에서 온갖 들짐승들이 새끼를 쳤으며
그 그늘 밑에 큰 민족들이 모두 자리잡았다.
7. 뿌리가 물을 마음껏 빨아 들여
키는 크고 가지는 멋있게 뻗었다.
8. 하느님 동산에서 자란 어느 송백이 이만하랴!
전나무 가지도 그만큼은 되지 않았고
플라타나스도 그만큼은 무성하지 못하였다.
하느님 동산 어느 나무가 이만큼 멋지랴!
9. 나는 이 나무를 가지도 무성하게 멋지게 키웠다.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나무들조차
모두들 부러워하도록.
10.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이 나무가 스스로 키 크고, 그 꼭대기 가지가 구름을 뚫을 만큼 높다고 으쓱해져서 우쭐대므로 11. 내가 이 나무를 뭇 민족을 거느린 우두머리에게 넘겨주었다. 못할 짓을 한 만큼 그대로 갚아, 내쫓은 것이다. 12. 뭇 민족 가운데서도 포악한 침략자들이 이 나무를 베어 산에 내던졌다. 그래서 잎사귀들은 모든 골짜기에 너저분하고 무성한 가지는 부러져 이 계곡 저 계곡에 흩어졌으며 세상 모든 민족이 이 나무를 내버려 두고 그 그늘에서 도망쳐 버렸다.

지능을 자랑함

영성이 없는 총명은 지능을 자랑하게 되어 결국 악에 빠지고 만다. 많이 아는 것, 쉽게 배우는 사람이 자기 학식을 수단으로 인격이 더 나아진다고 꼭 말할 수는 없다. 선함은 자기가 안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겸허하게 사용함으로 생산된다. 자기에게 알려진 진리, 그러나 그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그대로도 살지 않을 경우, 그 진리는 진리일 뿐 영적 생명, 즉 선이 결여된 채 있게 된다.

글자적 의미

글자대로 생각하면, 본문은 에집트의 몰락에 대한 예언이 집행된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아시리아의 몰락을 인용하고 있다.
아시리아 사람들은 광폭하여 전쟁을 즐기고, 총명했으나 믿을 수 없는 자, 거만하고 멋대로 굴며 타 국가들이 자기 나라 보다 하급이라고 공언했었다.

표현 속에 든 의미

앗수르 또는 아시리아가 표현하는 의미는 인간이 총명해지는 수단인 합리력, 추론력, 생각하는 원리들이다. 그리고 성서의 표현 속에 든 의미들은 교회와 개인들에 유효하도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영적 사항에 관한 한, 우리들로서는 개인적인 것보다는 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리는 그 사용자가 개인들이든, 집단이든, 똑 같이 적용된다. 게다가 교회 속의 모든 개개인은 작은 형태로 있는 좁은 측면에서의 교회이고,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란 작은 형태의 교회가 집합한 것이다.
본문은 과거 속에 존재했던 교회에 관한 예언물이요 역사물만을 언급하는게 아니라, 본문에서 묘사된 마음과 삶의 상태에 있는 모든 시대, 모든 이에게 응용되어 진다. 본문과 똑 같은 심정과 삶 속에 든 악은 고대 아시리아인들에게 영적 몰락을 가져오게 했지만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파멸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본문 같은 종류의 총명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 그래서 총명을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디는 위험은 언제나 우리와 대결 상태에 놓여 있다. 더욱이 진정한 교리가 풍부하여 많은 지식을 얻을 기회가 많은 새교회인의 경우, 더욱 그런 상태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지식을 가짐과 더불어서 모든 진리의 근원이 오직 하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데 대한 책임감 역시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영적 의미 – 나무들

“아시리아는 레바논의 송백이었다.” 고상한 송백 나무숲을 가진 레바논 산이란 영적 진리에 관한 장대한 지식을 지닌 영적 인간, 즉 인간 속의 영적 마음을 표현한다. 나무들이란 진리에 관한 지각을 표현하는데, 이 지각은 마음속에서 자라 올라 삶에서 결실을 맺는다. 나무들 중에서도 송백 나무는 합리적인 지각을 표현해 준다. 따라서 레바논의 송백이란 영적 진리에 관한 지각을 표현하는데, 지각된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마음속에서 가지를 뻗으며 자라 오른다.
본문은 선포하기를, 아시리아인은 레바논의 송백같이, 물가에서 자란 덕분에 크게 성장하였다. 이는 자연적 진리, 주님 말씀의 글자로부터 온 진리들이 잘 공급된 바, 이로 말미암아 총명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말씀 글자로부터 온 지식은 우리의 영적 총명을 발달시켜 준다. 이 발달 덕분에 영적 총명은 “들의 어떤 나무보다 키가 컸던 것이다.” 즉 자연적 지식 너머에까지 지식이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가지들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 이는 갖가지의 생각들이 총명한 마음 안에서 자라나, 거기서 생각들이 번성하여 새로운 생각들을 생산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마음속의 합리적 능력은 마음의 영적 부분과 자연적 부분의 중간에 있어 매개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합리적 능력, 또는 생각하는 능력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생각들은 마음대로 풍부하게 생각을 더 산출해 내어 영적 생각들에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 이유가 영적 사고는 단지 영적 사항에 관해서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영적 관점으로부터 영적인 방법에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 빛으로 비추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항을 생각하나 자연적 관점으로부터 생각하므로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 결과 그는 영적으로 생각하는게 아닌 자연적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송백나무 아래에는 짐승 역시 새끼를 쳤다. 이는 영적 진리에 관한 지각은 애정까지 증가시키고 배가하게 된다는 뜻이다. 송백은 키가 크고 가지도 멋있게 뻗었다. 즉 영적인 것을 지각하는 마음은 합리적 총명으로 인해 아름다워진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어느 나무도 아시리아라는 송백을 덮을 수 없었다. 즉 영적 총명은 자연적 총명을 넘어 멀리까지 다다른다는 뜻이다. 다른 나무들은 이 송백 나무를 부러워하여 멀리까지 뻗어 오르는 것을 흉내 내고 싶어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이 영적으로 총명하다면, 그 총명은 다른 모든 총명보다 더 승강되어 위엄을 드러낸다. 모든 총명은 선과 악을 알기 위해 영적 총명 같이 되고자 열망하게 된다.

영적 총명

본문은 영적 인간 속의 총명에 관한 아름다움 또는 그 영성을 위와 같이 나열해 놓고 있다. 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은 생각의 영적 등차에 마음이 열리어 있다. 그의 마음은 레바논의 송백 같이 고상하고 드높으며 언제나 푸르면서 하늘의 햇빛을 받아 멀리까지 이르른다. 주님 말씀 속의 진리들, 글자적 의미만 가졌다해도 영적 마음이 열린 자에게는 물이 송백 나무의 뿌리를 적시우듯 그에게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 글자에서 글자 속에 내재하는 영적 진리를 보고 영적 사항들에 가르침을 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이런 사람을 두고,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철 따라 열매 맺는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리아 사람은 자기 인격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높은 지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영적으로 볼 때, 조건(condition)은 인격에 의존된다. 인격이 선함으로 인해 진보되어 가면 영적 성장을 있게 해주지만, 인격이 퇴보될 경우, 영혼을 썩게 만든다. 인격 성장을 목적으로 삼도록 주어진 그의 총명이 어떤 총명이던지 간에, 영적 성장을 위해 그 총명을 사용할 때만 그 총명은 그 사람과 더불어 남아 있을 수 있다. “의로운 자는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에 있는 송백같이 자랄 것이다. 여호와의 집안에 심기운 이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번성할 것이요, 그들은 고령에도 계속 열매를 맺으리라.”
이런 조건이 위와 같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총명이 주님께서 계속 주시는 선물임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자기 속의 총명이 자기가 잘나서 있게 된 총명으로 착각하게 되면, 그는 곧 바로 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가 총명 속의 영적 품질은 파괴되고 만다. 그 이유가 총명은 생명처럼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순간 순간마다, 계속해서 흘러들어야 하기 때문인 바, 마치 열과 빛이 태양으로부터 식물에게 계속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태양이 주고 식물이 받음 같이, 주님은 주시고 인간은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무조건 총명을 받아 사용하며 보유할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해 가고 있으시지 않는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자기에게 흘러드는 총명을 받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총명은 조건(condition, 상황, 요건, 처지, 상태)적 이다. 그리고 이 조건이 유지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주님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주님에게 얼마나 기쁘게 마음 문을 열어 놓느냐에 따라 유지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인격이 타락할 때, 인간의 영적 총명도 타락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에게서 받는 능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이 인간은 스스로 주님에게 자신의 문을 닫아건다. 총명을 유지 보존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 속에는 하나도 없다. 비록 어떤 인간이 어떤 진리를 사실(fact)로서 이해하거나, 교리로서 납득했다 해도 그 진리는 그의 실제 삶에 즉각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진리는 그 사람에게 더 나은 인간다움을 창조해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진리를 주님께서 자기에게 밝혀 주신 진리로서 간주한다면, 그는 그 진리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고, 주님의 진리로서 그 진리에 순종할 때, 그는 그 진리로 인해 더 나은 인간을 형성한다. 이렇게 되면 그는 자기 마음에 흘러드는 신성한 생명의 흐름에 자신을 열어 두게 되는 것이다.

지적 오만

그러나 어떤 인간이 진리를 지적으로 받았는데, 그 진리가 자신의 총명에 의해 발견되어진 것이니 그 진리가 자기 것이라고 간주해 버리면 그는 자기 총명을 자랑하는 데로 빠져들고 만다. 그러면 그는 자기 속의 총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 진리도 총명도 모두 인간을 위해 순간 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잊게 된다.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는 것은 그 인간으로 자신을 우쭐대게 만들고, 그 결과 자기보다 덜 똑똑한 듯 싶은 이들을 경멸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런 행동의 되풀이는 그가 주님에게 반대하여 내적 마음을 닫게 만들면서 총명 속에 있어야 할 영성(영혼)을 파괴시키고 만다. 따라서 그는 지식의 바깥 형체만을 고수하고 있을 뿐 그 지식 속의 영혼은 상실되어진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 그의 총명이나 지식은 그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대신, 더욱 나쁜 쪽으로 끌고 간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 속의 총명과 지식을 자아와 결부시키는 바, 지적 오만(거만)이라는 지옥의 것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런 지옥의 형체에로 몰락되는 때가 허다하다. 성경 전체를 망라해서, 주님께서는 이런 지적 오만에 관해 인간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선함을 낭독하는 자리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자기들의 번영이 자기들이 똑똑한 결과라고 결론 짓는 일이 없도록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신명기 8:17-18). 신약 성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아를 추켜 대는 것과 제가 똑똑하다고 하는 자만심에 대한 경고를 기록해 두시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시리아의 자아 찬양과 지적 오만이 기술되면서, 그것으로부터 오게 되는 결과를 증거로 보여주신다.
우리 속 자연적 마음의 끈질긴 경향성은 자신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비치려 하고 그 중요한 자아를 더욱 과장하려 든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총명을 조금만 자랑하려 들어도 그 순간 그는 신성한 총명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퇴조시키고 만다. 자신이 위대하다고 착각할 때, 그는 자신 너머에 있는 어떤 총명의 필요성을 더욱 덜 느끼게 된다. 덜 느끼는 가운데, 그는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되는 총명에 대해 더욱 거룩해진 듯 여긴다. 이와 같은 자아 영광은 자아 사랑이라는 지옥의 영을 발달시켜 준다. 그리고 이 영은 악령들, 지옥의 악마들과 더욱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게 한다. 그 이유는 지옥의 영들 모두는 제 잘난 멋에 혼자 춤추면서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자아 총명에 가장 큰 신뢰를 두는 지옥의 영들에게는 천국의 빛에 있는 영적인 것들마저도 지독하게 사악한 듯 보여질 뿐이다.

영적 몰락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총명에 우쭐하는 늪에 빠질 때, 그는 천사들의 영적 집단에서 탈퇴되고, 인격면에서, 동기면에서, 계획하는 면에서나, 사사건건 그는 악령들과 상의한다. 그는 생명이신 주님에게 등을 돌려 대고 타인 보다 자아를 사랑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악한 느낌과 거짓된 생각에 자기를 내주고 말아 악한 삶으로 이내 자신을 확증하고야 만다. 과거 그의 총명은 고상한 레바논의 송백 같았었지만, 지금 그의 총명은 송백을 닮긴 했지만 부러져 내려앉은 송백 나무여서 더 이상 밤의 새들에게 안식처를 주지 못하고, 타락한 본성 속에 있는 거짓과 악들의 짐승에 짓밟히는 송백 나무일뿐이다.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저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이사야 14:12-15).
위와 같은 모습이 자기 지성을 자랑하며 자기 총명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라고 우쭐대는 이들의 마지막이다. 지적으로는 그가 별들 위에 오를는지 모르지만, 그의 심정은 악 가운데 있어 그의 삶은 죄 속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가 안다는 진리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오만이라는 욕망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가 과거에는 영적 인간이었을는지 몰라도 이제 자기 마음을 자아 총명의 오만이 통치하도록 방치한 이상 그의 실지 삶은 아주 낮은 감각적 상태에로 환원되고 만다.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 속에서, “이는 파라오와 그의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위와 같은 것이 자기의 학식, 과학, 짐짓 지녔다고 생각되는 총명들, 이 모두를 이기심의 감각적 삶에 던져 버린 자연적 인간이다. 이것이 주님을 신뢰하는 대신 말과 병거를 신뢰한 에집트이다. 이것이 주님을 인도자로, 진정한 교리를 찾고자 주님의 말씀을 찾는 대신 자기 지식이나 이해성에서 끌어낸 교리에 신뢰를 두는 자연적 인간이다. 진실로, “아시리아의 콧대는 꺾이고 에집트는 국권을 잃으리라.” (즈가리야 10:11).
자아에서 끌어낸 총명 속에 있는 자들은 자기가 알게 된 진리들을 총명을 뽐내려 드는 자만심과 포부욕이라는 욕망과 뒤섞는다. 이렇게 해서 그들 속의 모든 진리는 모독당하고 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경고하신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이셨다.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이해해서 진리로 간주하였는가와, 어떤 원리로부터 진리를 진리라고 인정하느냐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겸손한 사람, 그는 자기가 제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자기 속의 총명을 주님의 선물로서 간주하여 그것을 유용한 일, 즉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수단으로서만 간주한다. 따라서 그는 긍정적인 원리 안에 있는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주님의 진리로 믿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진리는 그로 하여금 슬기롭게 해주며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해주어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자신의 총명으로 콧대가 세어진 사람은 그 총명이 자기 작품인 냥 여겨 우쭐대는 바, 자아 사랑을 먹여 키우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이타애로부터 분리시키는 바, 자기 지식을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내향적으로 그는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추론하고, 일상 생활속의 실제적 거짓 원리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 자신이 타인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 들어 있는 진리까지 그는 왜곡시켜 진리의 영을 뒤집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생명까지 파괴시킨다. 한마디로 자기 심정 속에서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황과 같은 바, 즉 자기 속의 거짓 믿음이 자기 속의 이타애를 살해한다.

지적 위험 – 섭리

지력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지적 오만이라는 악에 특별히 더 빠지기 쉽다는 말이 자칫 하면 우리로 그 말이 당연한 듯 여기게 할는지 모른다. 그 반면, 특별히 총명한 사람, 지력이 강하다는 사람은 이런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들의 자연적인 유전적 악에 대한 경향성은 그들이 타인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쪽으로 기울게 부추겨 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가 지적으로 타인 위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데서 피해 갈 수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는 눈에 나타난 우위성을 스스로 보게 하는 지성은 그와 동시에 모든 인간은 자신 스스로 악과 거짓뿐이란 것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은 주님에게만 있고 그분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 모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만 총명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더 총명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신 스스로부터서는 떠벌릴 만한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음을 더 알게 된다. 즉 더 총명할수록 더 겸손한 마음이 되어야 함을 안다는 말이다. 만일 지적으로 높은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위험할거라고 우리가 상상하고 있다면, 우리는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잊고 있는 셈이다. 자비로 이뤄지는 그분의 섭리는 각인의 필요에 맞춰 그의 영적, 자연적 상황을 조정해 주시어 언제나 당사자로 영적 자유 속에 있도록 배려하신다. 악해지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죄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치우치도록 추근대고, 악령은 이 경향성이 활성화되게 부추긴다. 그 반면, 천사들은 동등한 힘을 가지고 인간에게 그런 경향성과 악령들에서 보호되도록 경고해 주어 악에 강요당하지 않게 하고 있다. 인간 속의 자연적인 유전적 경향성이 어떤 악에 더 솔깃해지면 해질수록, 그만큼 천국의 보호하려는 힘이 그로 하여금 그 악에 대항하도록 더 강해진다. “그분은 너희가 가는 모든 길을 지킬 수 있게 천사들에게 임무를 주시리라.”
흔히 듣고서 끄덕이는 말은, 강한 인격의 소유자는 연약한 인격의 소유자보다 더 유리한 조건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는 강한 인격의 경우 연약한 인격이 쉽게 넘어지는 상황에 능히 버틸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연약한 인격은 바람개비와도 같이 작은 바람에도 금방 감지되어 휩쓸릴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평가한 이유는 우리가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덜 강한 자는 사람을 공격하는 악한 영향력 역시 덜 강하다. 연약한 인격은 연약한 해결책과 의지를 가진 셈이지만, 그 반면 그에게 오는 시험 역시 연약하다. 주님의 방법은 만민에게 모두 평등하다. 모든 인간에게 오는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등해지도록 해서 그가 자유롭고 그의 능력에도 합당해서 선과 악을 자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주님은 배려하시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약한 자가 시험에 걸려 쉽사리 넘어지는 것을 나무랄 수 없을 것이고 강한 자가 악에 버텨내는게 별 대수로운게 못될 것이다. 한 마디로 양쪽 다 핑계가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강해지면 더 강한 시험이 오고, 동시에 더 강한 보호가 그를 감싸고 있다. 아마 주님께서 천국의 보호를 철회하신다면,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악의 작은 영향력에도 넘어지고 만다. 이와 반대로 만일 인간이 악에서 구원되기를 기꺼이 원한다면 그가 구원되는데 충분한 보호가 언제나 그 사람 앞에 존재한다. 정말 강한 자가 있다면, 그는 연약한 사람을 짓부숴버리는 시험 정도는 능히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약한 자가 자기 힘에 부치는 시험에는 결코 노출되지 않는다. 주님의 도움을 가지고 각자가 해낼 수 있는 만큼이라도 자기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그에게 좋은 것 그 이하의 어떤 것을 요구 당하는 일이 결코 없다.
“모든 사람의 등은 각자 자기 짐을 지는데 적합한 것이다.” 그 이유가 각자에게 주어지는 짐은 그 사람의 등에 꼭 맞게 섭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올 때, 주님은 각 사람에게 그 위기에서 지탱할 힘을 공급해 주신다. 이를 두고 신명기 33장 25절에서,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27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야훼께서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 군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리라. 군대를 몰아 달려들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마음 든든하리니…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27:1,3,14).

31
악한 목자

성서 본문: 에제키엘 34장 1-6, 9-11절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3.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4.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9.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10.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11.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개요

자아 사랑, 이 사랑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일할 뿐 의무를 게을리 하고 이웃이 피해 당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국 그 사랑의 리더십이 박탈되어야 그나마 다른 이들이 구원 될 수 있는게 이 사랑의 끝말이다.

배경

주님께서는 예언자 에제키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속에 있는 악들을 노출시켜 견책하시면서 이와 같은 악들의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경고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의 폭로와 경고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을 향한 것이다. 이들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푹 썩어 있어 이기적인 소득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는 자였을 뿐이다.

목자들

위와 같은 배경 속에 있는 목자들이란 모든 지도자들, 즉 왕, 왕자, 각 급 관리들, 심지어 교회의 사제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백성을 억누르고 수탈하는데 자신들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한껏 발휘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 훨씬 앞서서, 주님께서는 명백히 그들 선조에게, “백성을 통치하는 자는 반드시 정의로워야 하며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다스려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었다. 즉 백성들의 선을 위해 신성한 법칙을 수행해 가는데 실패할 경우의 두려움을 가지고 통치하라는 말이다. 악한 목자에 관한 비유의 형체로 그들의 악한 방법들이 오늘 본문에서 노출되고 있다. 이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위탁된 양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줘서 결국 자신들 스스로까지 파멸되고 만다.
목자라는 직책, 이는 양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 양떼 주위를 잘 지켜보는 것, 좋은 풀밭에 그들을 인도해야 하는 것, 좋은 물가로 그들을 인도해 줘야 하며, 각종 짐승에게 유린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사고나 병드는데서 보호해야 하는 것이 그 직책의 수행일 것이다. 이런 일들을 수행치 않는 목자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직책에서 반드시 해고당해야 할 것이다.
양떼와 목자라는 관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도자와 그 지도자의 영향력 밑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왕, 왕자, 상급 관리자, 재판자, 사제, 선생, 백성의 선을 위해 직무를 맡고 있는 모든 이들은 백성들의 선을 위해 정직하고 신실하게, 총명하고 관대하게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맡은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 직책을 부여받은 목자, 그들이 양떼의 복지에 무관심하고 자기 편리함에 치중할 경우, 머지않아 양떼는 이런저런 형태로 고통을 당하면서 결국 흩어지고야 말 것이다.

유대인

위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되는데 있어, 그들의 악한 결과가 눈에 잘 띄도록 조치되어 있다. 악하고 이기적인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동안 백성들은 나쁜 길로 빠지고 말았다. 강력하고 위대했던 이스라엘 국가는 잠간의 세월 속에서 깨어지고 흩어지고 말았다. 한 예로 열 두 지파 중 열 지파가 아시리아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다 지파는 대부분 포로가 되었는데, 일부는 바빌론에, 일부는 에집트에 끌려갔고, 그나마 예루살렘에 남은 이스라엘인들 역시 정복자들의 발 밑에 눌려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처참한 신세는 백성들 속에 있는 악이 꾀어낸 결과요, 그 악은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욕망이 베푼 자비요, 교회나 국가라는 양 측면에 있는 모든 지도자들 속에 있는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악이 베푼 자비의 모습이다.

신성한 목자

유대인의 무가치함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처방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 기독교회가 건설되어졌다. 영적 상황에서 있어진 이 위대한 변화가 본문에서 비유의 언어로 예견되고 있다. 본문 끝에서 주님께서,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먹히지 않게 하리라.” “나의 양을 찾아 구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유대인들 사이에 오셨다. 그리고 타락된 인간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해 두셨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선한 목자의 일에 관한 살아 있는 예증과 본보기 그 자체이셨다. 그분의 생애는 자기 양을 사랑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한편, 그들을 온갖 악에서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신성한 목자를 신뢰하여 그 인도를 따르는 모든 이는 보호받으며 인도되는 것이다.

목자로서의 목사

본문의 풍유적인 글자 의미 안에서 특별히 목자가 교회의 목사와 관련을 갖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목사들은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교인들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직책상, 목사의 불성실은 사람들에게서 재연되고야 만다. 그 이유가 목사들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진리를 명백하고 사랑스럽게, 그러나 용기 있게 사람들의 선함을 위해 가르칠 거라는 데에 신뢰를 두고 있고, 게다가 그 가르침은 이 세상과 저 세상 모두를 위해 가르치고 있다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는 거짓 원리나 악한 길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사람이라고 알고있다. 그런데 목사가 사람들의 선에 무관심하여 그 선함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한다면, 목사라는 직책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고유의 선한 일은 미결로 남겨지고 만다.
이런 목사가 잘못된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방황하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는 그 사람에게 명백하고 실용적인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지 못하고 그가 뭘하든 아무렇게나 방치할 것이다. 주님의 보편 타당하고 꾸준한 섭리를 의심하려 드는 주위 환경이 있다 해도, 부주의한 목자는 양떼들을 영적 측면에서나 생활 측면의 양쪽 모두에서 병들어 쇠약해지게 방치하고 말 것이다. 어떤 이가 심한 영적 훈련 속에서 부상당했다면, 위와 같은 목사는 그 부상을 싸매 주는 자기 직무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또는 어떤 이가 감각적 오류 속에 헤매고 있다 해도 그 사람이 교회라는 우리 속에 다시 들어오도록 자기 책무를 다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위와 같은 조그만 예증들로만 생각해 보아도, 이기적인 목자는 제거됨이 바람직해지는 것이다.

준비

목자는 그 의무 수행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좋은 목자는 양의 본성, 양떼가 필요로 하는 것, 그 필요함을 어떻게 어디서 공급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양떼를 덮치는 위험들이 무엇들인지, 이런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지, 만날 경우, 어떻게 대적해야 할 것인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고로 목사는 자기 직무 수행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하다. 그는 진리의 창고인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신성한 진리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자기 이해성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더불어 그는 사람들을 원기 있게 사랑할 심정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심정 속의 사랑은 유용함을 사랑하도록 준비되어 사람들의 영적 필요성, 실제적 위험을 헤아려 두어 그 위험을 만나는 방법, 그 위험의 피해를 피하는 것까지 알고 있어야 헐 것이다.
목자는 위와 같은 위험의 가능성이 자기에게 있을 경우로 바꿔 이해해 볼 때만이 사람들을 위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영적 체계나 필요성 등등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심정을 비슷비슷하게 다듬어 놓으셨다.” 따라서 유일하게 진정한 목자는 주님뿐이다. 인간의 영적 선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신성한 목자로서의 주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확실히 이해해 두어야 한다. 영적인 양은 주님의 소리를 알고 그분을 신뢰하여 따른다.

나쁜 목자

교회에 있는 나쁜 목자란 교인들보다 자신에 흥미를 더 느끼는 이들이다. 그가 목사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지만, 갖고 있는 이유가 단지 세상적인 후원 또는 공적 지위를 갖는 기회 정도일 뿐이다. 설사 목사가 교회의 재정을 번창하도록 하여 외적 교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잘 하고 있다 해도, 위와 같은 마음의 태도는 결국 목사로 영적 부주의함을 빚게 하고야 말 것이다. 목자가 자신을 먼저 챙기는 한, 양떼를 향한 영적 무관심은 존재하고야 만다.
이런 점에서의 무관심은 악이다. 인간은 어떤 동기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만일 동기가 분명히 선하지 않다면, 행동은 반드시 악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동기 속에는 중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동기의 기초, 또는 그 동기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사랑의 어떤 형체로 존재한다. 그 형체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거나, 어떤 유용함을 사랑하는 데에도 있겠지만, 나쁜 사랑, 즉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데에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인의 영적 선에 무관심 하다면, 그는 영적 선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물론 주님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각자의 심정 속에 먼저 오게 되는 사랑, 상석에 앉게 되는 사랑이 그 사람 속의 여타 사랑을 지배하여 인격의 품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타적인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고로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목자는 자기 양떼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영적 의미들

이상과 같은 생각들은 우리로 본문에 있어질 영적 사항들을 생각해 보도록 이끌고 있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는 원리들에 관계되지, 인간 어떤 개인에 관계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차원에서 주님은 교회 또는 각 교인에 대해 목자이시다. 신성한 목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천상 천하의 유일한 하느님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이다. 신성한 선생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이다. 이 두 속성, 사랑과 진리가 신성한 목자의 속성들이다. 그분의 양떼는 우리 인간 마음들, 심정과 이해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안으로 신성한 사랑과 진리는 들어가실 수 있고, 그 안에서 사랑과 진리는 삶의 새롭고 거듭나는 품성을 생산하고 받쳐 주기 위해 역사 된다.
이런 사항이 우리와 주님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실임을 인식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이심을 알면,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라고 말하신 것도 인식하게 된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위해 빈방을 준비할 때 우리 심정 속으로 흘러든다. 이 말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자아 사랑이나 악한 애정이 심정에 눌러 앉으려 하는 것을 기꺼이 거절할 때이다. 거듭나게 하는 사랑, 주님의 사랑이 우리 심정에 들어 올 때, 그 사랑은 우리의 신성한 목자가 되는 것이다. 위의 목자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우리 심정이 진리를 배우고 사랑하고 경청해 가는 쪽으로 기울게 해준다. 이 신성한 목자는 우리의 이해성을 안쪽으로 열리게 해주어 가르쳐 진리를 명확히 보게 하는 주님 영의 내향적 빛을 받게 해준다.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의 목자로서 받고 실제 삶으로 그분을 따라가는 정도만큼에서 모든 각 개인은 자기 개개인이 발휘하는 영향력 수준에서 목자가 된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며, 동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운반해 준다. 이와 같은 사랑은 모든 주님의 자녀들, 그들에게 유용한 것을 사랑하여 영적, 자연적으로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두게 해준다. 이와 같은 사랑은 만민과 더불은 모든 관계에서 공정하고 직바르며 관대해지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실제 삶 속에서 진정으로 효능 있는 목자인 것이다. 이 사랑은 모든 우리 속마음을 돌아다니며 정신적인 양과 어린 양을 먹여 줄 것이다. 그리하여 약함으로 붕괴되고 말는지 모르는 우리 속의 생각이나 애정을 강건케 해주어 영적 질병이 낫게 된다. 또는 삶의 투쟁에서 찌그러지고 찢기고 만 우리 속의 어떤 것도 싸매 줄 수 있어 마구 짓밟혀 있던 조그만 선한 품성까지 회복되게 해줄 것이다. 결국 우리 의식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잃었던 좋은 품성을 재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적극적 사랑이라는 끄나풀로 모든 우리 속의 양떼들은 잘 간수되어 영적 시온산, 햇빛 잘 받는 그 산에서 매일 먹여져 안과 밖에서 엄습하는 모든 위험에서 보호되며 모든 불화도 종식되리라. 이것이 선한 목자의 양이 된 사람의 거듭 나아가는 상태이다.

악한 목자

그러나 우리가 자아 사랑의 영을 심정과 삶의 목자로서 허용해 버린다면, 악한 목자가 되고 만다. 나쁜 목자란 진리 대신 거짓을 가르치고, 선함 대신 악한 삶으로 유도하는 목자이다. 이럴 경우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악한 결과가 우리 마음에 따라붙는다. 목자가 된 자아 사랑의 영은 이기적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심정과 삶 속에 건설하시고자 추구해 오신 양우리 속의 모든 양떼들은 영적 불결함으로 인해 병들어 위험 속에 방치되면서 흩어져 몽땅 잃게 되어 그 울타리 속에 남는 것이라곤 거짓 관념, 곤경으로 굽어진 사상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잔인한 인생의 원칙만이 쭈그리고 앉아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약속

위와 같은 끔찍한 상황이 우리 삶 속에서 이미 전개된 어떤 것들이기도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해도, 본문의 끝 절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북돋게 해주고 있다. 끝 절에서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삶에 관한 그분의 법칙을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악한 목자를 해고시켜 주시고 그분 스스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속의 여하한 자연적인 경향성도 주님의 권능 보다 강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 그분이 일하실 기회를 주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 심정과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악행을 금하고 그분의 법칙에 의거 선을 계속 수행하려 할 때 마음속에서 기적을 주님이 수행해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분과 협력하여 일하는 이상, 우리 속의 어떤 악도 그분의 권능을 덮을 수 없다.
악에 잘 쏠리는 우리 속 유전적 경향성은 아주 강하고 요란하게 우리를 뒤흔들려 하겠지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경향성이 부추기는 욕구들을 밀쳐 낼 때 그런 것들 모두는 우리의 지배 아래 눌러지고 말 것이다.
소년 목자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생각해 보라. 무장도 갖추지 않고 오로지 돌팔매와 개울가에서 주운 돌 다섯 개를 들고있는 다윗, 그리고 거대한 무기와 튼튼한 방패와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거인 골리앗, 두 사람의 비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대가 될 수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목자 소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그분의 군대를 모독하는 언사를 퍼부으면서 도전해 온 이교도의 거인을 여호와께서 때려 눕혀 주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돌팔매질을 했을 때, 그 팔매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를 땅에 거꾸러지게 만들었다.
개울에서 얻은 돌이란 주님의 말씀 글자로부터 얻은 진리들, 예를 들면 십계명 같은 진리들이다. 이 진리로 무장하고 주님의 섭리를 확신하고 있는 우리는 각자 속의 자연적인 마음 안에 있는 자아 찬양이라는 거인 골리앗이라는 악도 단번에 쳐 눕힐 수 있다. 우리의 신성한 목자는 우리가 그분의 양떼로서 따라가는 정도와 수준만큼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다.

우리에게 할당된 부분

우리가 해야 할 실제의 일이란 우리의 정신적인 양우리를 올바른 질서로 관리하는 것, 선하고 진정한 모든 애정과 생각들을 존속시켜 가는 것, 모든 악한 느낌과 거짓 사고들이라는 들짐승은 때려잡고 우리 밖으로 던져 파괴시켜야 할 것, 약해져 있는 모든 사랑을 강건케 할 것, 겁에 질린 생각들에 용기를 주어야 할 것, 방황하고 길 잃은 애정이나 생각들을 원위치에 되돌릴 것, 살아 있는 모든 원리들을 선한 목자의 인도 하에 우리에 몰아 넣어야 할 것이다. 이런 우리의 노력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은혜로운 약속을 해주고 계신다. “나는 그들을 푸른 풀밭에서 먹게 해주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들을 위한 우리를 지어… 누구도 그들을 두렵게 만들지 않게 하여 마음 편히 살게 하리라.”

32
마른 뼈가 되살아나다

성서 본문: 에제키엘 37장 1-14절

1. 야훼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야훼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 내셨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 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2.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 다니게 하셨다. 그 들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3.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 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야훼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하고 아뢰니, 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6.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불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8.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9.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 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개요

교회가 타락되는 상황에서, 그 교회 속의 사람들은 악과 거짓, 그리고 죄 가운데 죽어 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신다. 이 교회는 생명이 있는 바, 그 이유는 그 교인들이 영적 진리로 훈육되어 마음을 다시 열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적 의미

이 본문은 넓은 측면에서의 부활, 즉 언젠가 인간이 죽음에서 깨어날 때 과거의 자기 육체로 다시 들어간다는 부활을 언급해 준다고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상상했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위와 같은 물질적 부활과 관계없음을, 그러나 이는 지상에서 재난을 맞고 있는 유대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글자적으로 의도된 환상임을 본문의 글자에서 스스로 증거해 주고 있다.
예언자 에제키엘, 그는 외국 땅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포로된 유대인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아주 빠르게 사라져 가는 시점에 달한 유대인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래서 본문은 노골적으로 주님께서 그들로 고국에 되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선포하고 있다. 속박된 유대인들, 게다가 외국 땅에서 이미 매장되어 버린 그들 모두는 이제 유대 땅을 다시 밟는다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린 상태까지 이르렀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만을 생각할 줄 알았지 장래의 부활 따위는 생각조차 안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사두가이파의 유대인들은 육체가 죽은 뒤에 있게 되는 어떤 삶도 믿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연계의 삶과 분리된 영계 속의 삶에 관한 개념은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설사 부활이 있을 거라고 여긴 소수의 사람도 부활은 자연계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거라고 추측해 볼 정도였다.

부활

위의 소수의 사람이 생각한 것 같이 또 다른 장소에 거행될 물질적 육체로의 귀환 또는 넓은 측면의 부활은 발생하지 않는다. 물질적 몸은 물질 세계의 물체로 형성되어져 있다. 따라서 육체는 물질적 삶에 알맞게 되어 있다. “육과 피는 하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즉 영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물질로서의 인간 존재가 끝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끝나면 인간의 육신은 부패되어 과거에 있던 조직화된 형체를 잃어버린다.
부활은 죽은 육체가 다시 일어나는게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일어남, 즉 죽은 육체로부터 영이 일어 나는 것이고 이 영이야말로 삶의 더 진보된 세계에 적합해 있다. 부활 뒤의 몸이란 영의 몸(영체), 내향적인 몸을 말하고, 이 몸에서 인간이 태어나지는 것이다. 이 몸은 그가 지상에 사는 동안 육의 몸(육체) 속에 상존해 있어 오던 몸이다. 따라서 자연계에서의 죽음은 바깥쪽 몸, 즉 물리적인 몸이 거두어져서 영적 실체를 형성하는 영체, 영계에 살 수 있는 영체를 가지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의 부활이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 그는 영적으로 생각지 않는 바, 오로지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만 보아서 그 빛에 나타나는 외관에 의거 자연적 관점을 만들어 만사를 규명하려고 고집한다. 그럼에도 육체가 부활한다고 믿는 이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오늘 본문에 관해 언급하기를, 이는 악과 죄라는 영적 죽음으로부터 내향적인 정신적 부활, 거듭나는 정의의 삶을 말하고 있다고 넓은 측면에서 이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영적 의미들

영적 의미로 볼 때, 본문의 주제는 거듭남에 관한 것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육체의 불순물을 포함해서 인간의 더 낮은 본성에 대한 거절이다. 그래서 거듭남의 부활에서 자연적 마음속의 더 낮은 것들과 불순결한 것은 거절되어 죽는다.

계곡

예언자에게 보여진 것은 마른 뼈들이 가득히 널려 있는 계곡이었다. 땅이란 땅의 형상이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마음에 대한 상징물이다. 지상 표면 위에 있는 산이란 높은 장소인 바, 이는 마음의 더 높은 상태, 즉 더 높은 수준의 애정과 생각을 표현한다. 그 반면 계곡은 더 낮은 장소인 바, 이는 마음의 더 낮은 상태, 즉 정신적 삶의 낮은 수준을 표현한다. 상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자연적 마음은 낮은 장소인 계곡과 같고, 영적인 마음은 우뚝 서 있는 산과 같다. 인간 삶은 누구나 그의 가장 낮은 수준인 계곡이라는 장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각 인간은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더 열려서 더 진보된 인간다움인 더 높은 것들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정신 세계 속의 계곡인 우리의 자연적 생각은 자연적 감각들 앞에 보여지는 그대로 사물을 볼뿐이고, 더 높은 수준의 사물은 영적 진리의 빛 안에서만 보여 진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 나아가는 매 단계에서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고 있다. “어서, 야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을 뽑으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거기서 어떤 길을 가리켜 주시든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르자. 그렇다. 야훼의 가르침은 시온에서 나온다.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들려 온다” (미가 4:2).
계곡에서 산꼭대기까지 이르는데는 꾸준하고도 성의 있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 꾸준히 등반함이란 거듭 나아가는 사람이 더 높은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표현한다. 이 등반은 감각들에 의한 낮은 수준의 방법들을 거절하여 우리 뒤에 남겨 두고, 느낌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더 깨끗하고 질서 있는 삶을 채택함으로 성취되어진다. 이 사람을 두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시편 24:3-4).

뼈들

물질적 몸 속에 든 뼈를 몸의 여타 다른 구성물, 즉 심장, 폐, 뇌 등과 비교해 볼 때, 뼈는 그것들 보다 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뼈는 생명을 가장 적게 받는 마음속의 것들, 중심이 될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들을 표현한다. 내적인 영적 마음에 비교해 볼 때 뼈는 외적인 자연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를 보다 더 뾰족하게 의지와 지성이라는 생명의 측면에서 비교 생각하면, 뼈는 지성 쪽의 생명에 해당된다. 지성이라는 생명도 필수적이고 유용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생명은 의지 속의 사랑이 거기에 흘러들어서 심정의 목적이나 일을 위해 사용될 때까지는 살아 움직이는 충만해진 생명은 못된다.
뼈는 행동에서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오로지 근육과 신경을 수단으로 행동되어 진다. 그럼에도 골격은 근육에 수단을 제공해 이를 가지고 근육 역시 일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지적 생명 그 자체는 그것이 심정의 사랑에 의해 훈훈해질 때까지 차가운 상태요 죽은 상태 같다. 따라서 심정을 위해 일 가운데 놓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교회 속의 진리를 지적으로 붙잡아 교리로 간추려 놓는다. 이 교리들은 우리 심정이 일상 생활에서 교리를 필요로 할 때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 해도 정작 사용되고 있지 않은 상태는 뼈가 가진 생명의 수준, 즉 생명의 중심에서 아주 먼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심정이 어떻게 선함과 진리를 사랑해야 하며 행동에 옮기울 것인가를 위해 이 교리들을 사용하게 될 때 이 뼈들은 살아나기 시작하고, 살과 신경들, 피부들로 옷입혀져 삶에 사용하기 적당한 정신적 몸으로 완성되어 진다. 뼈만 앙상한 골격에서 몸으로 건설된다는 것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처음에 교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면서 충만된 인간을 만드는 생명 있는 것들을 가지고 정신적 골격을 점차 덮어 가는 마음의 건설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른 뼈들

예언자의 환상에서 뼈들은 아주 말라 보였다. 즉 아주 죽은 듯, 생명과는 거리가 먼 듯 보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타락되는 마음속에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은 아주 죽은 듯 한데, 그 이유는 살아 있는 어떤 원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때문이다.
환상 속에서의 뼈들은 이리 저리 널려 있었다. 어떤 연결된 골격조차 형성 못한 상태라는 말이다. 이는 타락되는 마음속에 있는 진리들의 모습을 표현한다. 그 속의 진리들은 완성된 체계로 서로 연결도, 배열도 되어 있지 않은 채 서로 떨어진 관념들로 엉성해서 실제 사용하는 데로 가져다 놓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나오는 질문은,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자연적인 기억 속에 죽은 듯 누워 있는 흐트러진 관념들에 순수한 영적 생명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있을까? 기억 속에 흐트러져 있는 교리에 관한 지식들, 심정 속의 생명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는 그 지식들 안에 영적 생명 어느 하나라도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늘 보는 것 중 하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 학교에 와서 교회의 교리로 가르침을 받고, 성경 말씀을 외우면서도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감각적 삶이라는 먼지 속에 그 지식을 매장하거나 마치 낮고 이기적인 생명인 계곡 속에 흐트러져 널린 마른 뼈들처럼 어떤 영적 생각도, 어떤 고상한 감정 하나도 없을 경우 그 지식들은 단지 머리 속에 흐트러져 있는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또 상기되는 질문은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아니다. 현재의 조건이라면 절대 아닐 것이다.

생명 있음

그러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은 만일 위의 젊은이들이 그분께 되돌아서서 생명을 구한다면, 참 생명을 그들에게 채워 주실 수 있다. 죽은 교리라는 뼈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법을 오늘 본문이 표현해 주고 있다. 그분은 그 뼈들을 완전한 몸이 되게 해주신다. 이 응용은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나 다 같이 해당된다.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매 단계의 종말에는 언제나 그 교회 안의 사람들은 지극히 외적인 상태로 침몰하고 있다. 그들이 지닌 진리의 지식 역시 심하게 분산되어 조각난 상태로 있어 흡사 죽은 상태나 별 다름없다. 그러나 매 단계에서 끝장을 본 교회에 이어 주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교회, 이전 교회의 상황과 전혀 다른 교회를 거듭 나아질 수 있는 가능한 사람들에게서 건설되게 해주시고 있다. 신성한 진리는 위의 사람에게 아주 다른 형태로 가져다주시어 그들의 시선을 집중케 해주신다. 그러면 그들에게 있는 옛 교리들은 뼈와 같이 골격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그 위에 주님은 영적인 살과 힘줄을 입혀 주시어 완전한 사람으로 건설해 주신다. 그런 뒤 그분은 이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은 뼈에 관해 예언하는 예언자란 죽은 마음에 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타락된 마음에 새 빛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우리가 거듭나는 삶의 질을 의식하게 될 때 주님은 우리의 죽은 마음에 들어오시기 위해 숨을 쉬게 하시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신성한 진리의 기운으로 영적인 숨을 쉬게 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바람, 숨을 쉼, 영에 대한 단어들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이다. 인간이 죽게 될 때, 우리는 그가 숨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숨을 다시 쉰다는 것은 죽은 마음 안에 영적 생명이 온다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그 다음 힘줄(또는 신경)이 해골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히브리어(gid)에서는 힘줄과 신경을 구분치 않고 말한다. 온 몸에 뇌의 전달을 뻗치게 하는 신경계란, 진리가 온 마음에 뻗쳐 가는 것, 즉 영적 마음속의 내용물이 각 단계를 통과하여 바깥쪽인 자연적 마음에까지 전달되는 수단을 표현한다. 육체 속의 신경계에 어떤 힘도 없다면, 그 육체는 완전 마비되어 죽은 상태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생산한 힘이 온 마음을 순환하지 않으면 영적 생명은 있으나 마나이다.

살, 등등

그 뒤 뼈들에게 살이 주어지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의 살은 선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선은 의지 또는 심정에로 들어간다. 힘줄이나 신경이 지적 부분을 표현하는데 비해 살은 마음의 애정 부분을 표현한다. 이 둘은 어떤 영적 삶에도 필수적이다. 뼈에 살을 붙인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을 그의 심정이 되살아나게 하므로 거듭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재건설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거룩한 성찬에서 사용되는 주님의 살을 표현한 빵의 의미도 이와 같다. 주님의 살은 신성한 사랑 또는 신성한 선을 의미하는데, 성찬에서 이를 우리가 받는 것이다.
힘줄과 살이 육체를 위해 제공되어졌다 해도 꼭 더 필요한 것은 가죽(피부)으로 덮어 씌워지는 일이다. 가죽은 중요한 용도를 지녔는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육체를 보호하는 기능일 것이다. 피부는 모든 종류의 영향, 즉 뜨겁고 찬 것, 또는 위험이나 기쁨 등등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동시에 접촉해 오는 각종 불순물을 떠밀어 내 육체를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도 피부의 중요한 역할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몸 전체를 뒤집어씌운 상태에서의 피부(가죽)는 행동이라는 바깥쪽 삶, 일상 생활에서 있게 되는 각종 실제적 행동, 즉 우리의 안쪽 원리들이 행동으로 옮기어지는 것을 표현한다. 게다가 피부를 수단으로 즉 행동 거지를 보아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이의 정신적 불순물을 인식해 내서 피해를 당하기 전 던져 버린다던가, 자신의 실제 행동에 그 불순물이 반영되지 않도록 미리 조처를 취할 수 있다. 건강한 피부가 육체와 상충하여 완전히 유용해지듯, 선하고 유용한 실제 삶은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완성시켜 준다. 이 인간다운 인간은 선한 심정에 명백한 이해성을 수반할 때 존재한다.
질병에서 몸을 보호하려면 늘 피부를 깨끗이 간수해야 할 필요가 있듯, 바깥쪽 삶이 건전하고 깨끗한 것은 영적 삶을 보호하는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본문은 선포하기를, 뼈들이 되살아 날 때, 되살아난 인간들은 주님을 알아 볼 것이라고 했다. 이 사항이 표현해 주는 것은, 주님에 의해 영적으로 생기 있게 되는 인간은 우선적으로 주님을 진정하게 알아본다는 말이다.

회복

본문은 기술하기를, 각기 다른 뼈들이 움직이어(shake) 소리내면서 서로 붙었다고 말한다. 시끄러운 소리(noise)란 마음의 옛 조건에 혼동이 있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정신적인 소리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새 생명이 작동하게 되면서 미치는 영향력에 죽은 옛 상태들이 떠들썩해지기 때문이다. 흔들림(shake) 또는 전율(trembling)이란 마음의 동요인 바, 이런 상태는 옛 것들에 붙잡힌 상태에서 풀려날 때, 그리고 새 생명을 받게 될 때 있게 된다.
이 뼈들이 서로 모여 뼈와 뼈가 붙었다. 이는 기억 속에서 흐트러진 채 방치된 교리들이 진리의 일반 체계에로 서로 집합해 마음과 삶을 지휘하여 행동에 응용되는 모습이다. 이 조건에 있는 마음은 모든 것이 서로 관련이 있고 서로 연계되어야 함을 지각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힘줄과 살이 해골에 더해지기 전 갖추어야 할 예비 조건이다. 즉 우리에게 영적 지혜와 사랑이 주어질 수 있기 전 진리적 체계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육체가 다 갖추어졌는 데도 주님께서 숨을 주시기 전에는 그 몸은 숨을 쉬지 못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런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이요, 우리 속에 현존하신 주님이 그것의 소유자이심을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영적 삶도, 생명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선하고 진정한 원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재주로도, 어떤 힘으로도 포획될 수 없으며 더욱이 우리 속에는 그 원리에 비슷한 어떤 것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사방에서 온 바람

숨 또는 영이 죽은 뼈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사방 (four winds)에서 불어 왔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사방이란 글자 그대로 동서남북이라는 네 방위를 말한다. 이 네 방위는 영적으로 보면 인간 삶의 네 가지 영적 상태, 즉 자연적 이해성과 의지, 영적 이해성과 의지를 표현해 준다. 이러한 삶의 각기 다른 네 국면은 삶의 질과 수준에 있어 각기 다른 네 가지 정신적 관점에서 오는 삶의 양상들이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또는 정신 조건에서 인간의 필요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약 성서는 네 복음서로 되어 있고, 각 복음서는 네 가지 정신적 조건들 각각에 있는 인간에 적합토록 배려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정방형으로 지어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사방에서 숨이 불어 왔다”는 것은 그 숨의 근원이 영계의 모든 방위, 즉 외적 진리와 선, 내적 진리와 선으로부터라는 것, 그 근원으로부터 모든 양상들에 영적 생명을 가져와서 모든 인간 마음 형체에 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의 사용을 위해 모든 선하고 진정한 천국 원리를 가져다주신다는 말이다.
이 몸들이 숨을 받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거듭나는 마음은 새 원리를 실생활에 즉각 도입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 마음은 이 원리들이 인간 행동들 모두에 응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거듭나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온 가문”임을, 주님만을 찾는 영적 교회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그들 고국에 회복시켜 주신다. 즉 인간을 거듭나는 상태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응용

여러분 앞에 마른 뼈로 된 인간 해골을 놓고, 한쪽에 건강하게 작동되는 살아 있는 육체를 놓아보라. 아마 이 두 인간의 대비는 그 차이가 엄청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거듭나고 있는 중이든지, 또는 타락되고 있는 중이든지 한다면, 그 두 개의 평행 속에 있는 차이는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 볼 수 있다. 해골뿐인 인간의 경우와 살아 숨쉬는 인간의 경우를 영적으로 보면, 한쪽은 생기 있는 영적 건강, 즉 사랑과 총명, 그리고 질서 있게 활동하는 인간이고, 해골 쪽은 이와 정 반대가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해되는 것은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는 구절일 것이다. 이렇게 해주시는 이유는 그분께서는 우리의 죽은 심정이라는 옛 무덤을 여시어 우리 영혼이 영적 삶에서 일어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에 있는 주님의 약속,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이 사항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성취되게 해주시고 있다.

33
두 막대기가 하나로

성서 본문: 에제키엘 37장 16-23절

16. “너 사람아, 나무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써라. 또 다른 나무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라고 써라. 17. 그리고 이 둘을 붙여서 한 막대기로 만들어라. 둘이 하나가 되게 잡고 있어라. 18. 네 겨레가 너에게 막대기가 저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려 달라고 묻거든 19. 이렇게 일러 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에브라임 수중에 있는 요셉과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를 유다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에 붙여 한 막대기로 만들리라. 둘이 하나가 되게 내가 잡고 있으리라.’ 20. 네 손으로 이름을 쓴 그 나무 막대기들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들고, 21. 사람들에게 일러 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 이제 뭇 민족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리라. 사방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 오리라. 22. 그들을 나의 땅 이스라엘 산악지대에서 한 민족으로 묶고 한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하리니, 다시는 두 민족으로 갈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반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나를 거역하여 온갖 죄를 지으며 보기에도 역겨운 우상들을 섬겨 몸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배신하여 온갖 탈선 행위에 빠졌던 그들을 건져 정하게 해 주리니, 그들은 다시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개요

거듭나고 있는 마음속의 천적 원리와 영적 원리는 그의 내면의 삶과 외면의 행동에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이 사람은 신성한 섭리의 보호 속에서 주님의 교회를 형성한다.

글자적 의미

예언자 에제키엘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 어떤 축제를 표현하는 행위를 보여주어 주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족들에게 해주실 일을 예언하도록 했다. 하느님의 약속은 장차 흐트러진 이스라엘 지파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한 왕 아래 그들을 고향으로 되돌리고 신성한 보호 아래 있도록 하실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위의 약속을 역사적 사실 측면에서 볼 때, 글자와 똑같게 이루어진 때는 없었다. 아마 그런 징조조차도 없었던 것 같이 추정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자기들 스스로 본문 같은 식의 회복을 무척 기대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많은 근대 유대인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스라엘 족의 역사, 즉 성경의 글자적 의미로 엮어진 그들 역사는 표현적이요, 상징적으로 우리의 거듭남을 특징화 해 놓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성경의 예언들은 우선적으로 인간 마음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돕기 위해 주어져 있다. 성경 속의 많은 예언들이 글자대로도 성취된 것은 사실인데, 그 이유는 글자상의 조건들은 그 글자에 상응되는 영적 조건이 밖으로 돌출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글자상에서 이루어진 부분은 성경의 중요성 중 두 번째에 해당될 뿐이다.
한편, 성경 예언들의 아주 많은 부분들은 글자 그대로 성취될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이런 부분을 통해 성경은 풍유적으로, 비유적으로, 표현적으로, 상징적으로, 씌었는 바 상응을 통해서만 이해되도록 의도되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족, 그리고 여타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대한 성경의 예언 모두를 그 글자 자체대로 적용해 보려는 것은 사실상 역사책 수준으로 성경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밖에는 안된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지금의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막대기

예언자 에제키엘은 막대기 하나에는 유다, 다른 막대기에는 요셉과 에브라임의 이름을 써서 뭔가를 표현해 보이도록 명령받았다.
어떤 개인을 표현하기 위해 막대기, 또는 지팡이에 이름을 적는 관습은 아주 오래된 행위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오늘 본문의 시대보다 구 백년 앞선 시대인 민수기 17장 16-20절(개역 17:1-4)에서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여 각 가문에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가져오게 하되, 각 가문별로 어른들이 하나씩 가져오게 하여라. 이렇게 가져온 열 두 가지에 각기 자기 가문의 이름을 새기게 하되 레위 가문의 가지에는 아론의 이름을 새겨라. 각 가문마다 그 가문의 어른에게 나뭇가지가 하나씩 있어야 한다. 그것들을 내가 너를 만나는 만남의 장막 안 증거궤 앞에 놓아 두어라…’”
예언자가 두 막대기를 어떻게 하나로 붙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꼼꼼하게 상상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본문의 언어적 측면에서 볼 때 어떤 기적에 의해 하나가 되어 있도록 했다는 식의 상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로 붙잡아서 막대기에 적힌 지파들이 한 왕 아래 한 백성으로 서로 모이도록 하는데 대한 예언만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하나로 모인다는 것은 오늘날의 미합중국같이 각 주가 독립된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미국이라 불리는 나라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습일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것은 막대기에 적힌 것이 우리들 삶에서 표현되는 것일게다.

영적 의미들

두 막대기는 야곱의 두 아들, 이스라엘 지파의 두 지파인 유다와 요셉으로 명명되어졌다. 야곱의 열 두 아들, 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집합체로 볼 때의 교회 속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를 표현한다. 그 중 유다는 천적인 원리, 즉 사랑을 원리로 삼는 것, 주님을 사랑함, 또는 선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이 원리는 선이 선이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여 선을 행한다. 요셉은 영적인 원리, 즉 진리를 사랑함, 진리를 사랑하는 결과 보여지는 것, 진리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원리이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영적 진리를 이해함을 표현한다. 위의 말은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유다는 천적인 선(celestial good)을 표현한다. 이 유다와 한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천적인 진리뿐인데, 그 이유가 진리는 언제나 자기와 비등한 선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영적인 선을 표현한다. 영적 선과 한편이 되는 것은 영적 진리들이다.
유다, 요셉,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적은 곳은 나무로 된 막대기였다. 나무(wood)는 실제의 삶에 있게 되는 선함, 즉 자연적 선함(natural goodness)을 표현한다. 막대기에 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적힌 이름에 속한 사람(person)의 품질을 알게 만드는 것을 표현한다. 근원적으로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특질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름은 어떤 개인, 또는 사물의 품질, 특성을 표현해 준다.
성경에서 개인이나 사물의 이름이 불릴 때 위와 같은 표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 예수라는 이름이 요셉에게 계시되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마태복음 1:21). 단어 예수는 구원자(savior)란 뜻이다. 우리가 기도를 끝마칠 때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하여 그분의 이름에 축복이든, 소원 사항이든 묻게 된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이 지니는 품질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막대기가 하나로

두 막대기, 유다와 요셉, 그의 아들의 이름이 적힌 막대기는 글자대로 볼 경우, 이스라엘의 두 지파를 표현하는데, 이를 더 넓게 생각한다면 유다와 이스라엘을 표현한다. 영적으로 볼 경우, 그들은 천적 원리와 영적 원리, 또는 사랑을 근본으로 삼는 것과 진리를 근본으로 삼는 것,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를 표현한다. 사랑은 인간의 위치(심정)로 흘러들어 그로 하여금 선을 지각(perception of goodness)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성으로 흘러들어 그로 하여금 진리를 인식(recognition of truth)하게 해준다.
위의 원리가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인간은 많은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를 자기 삶의 행동 지침으로 삼아 응용하지 않아서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찌 됐든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함을 사랑하여 그 원리에 따라 살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은 각인의 삶과 마음속에서 그가 지니고 실천한 선함과 진리에 하나를 이루신다. 이렇게 선함과 진리가 하나를 이룸이 주님의 명령으로 예언자의 수중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를 이룬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를 표현하도록 두 막대기가 한 막대기로 된 것이다.
심정 속의 선함과 이해성 속의 진리가 연합함, 또는 서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거듭나고 있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적인 결혼이요, 이 결혼은 선함과 진리가 하나 되어 생명력이라는 결과를 갖게 하는 바, 사랑이 지혜 안으로 흘러들어 지혜가 움직이는 동기를 제공하는 한편, 지혜는 사랑에게 빛을 밝혀 준다. 이 영적인 결혼은 심정의 선함과 지성의 지혜가 행동이라는 실제의 선함 속에서 성립된다. 매일의 생활 속에 있는 선한 생활, 그곳은 선함과 진정한 원리가 만나는 장소요, 그 장소에서 그 둘은 결합하여 그 사람 속의 선은 거듭나게 된다. 이런 사항들이 이름이 적힌 표현물, 나무 막대기에 담겨 있다. 그 이유가 나무(wood)는 실제의 선함(practical goodness)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손

두 막대기는 예언자의 손에서 하나로 붙여졌다. 예언자란 주님의 말씀을 표현한다. 특히 주님이 예언자 또는 기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인간에게 밝히 알려 주신(계시)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손(hand), 우리는 이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붙잡아 그 무엇이 어딘가에 사용되도록 한다. 따라서 손은 일반적으로 힘(power)을 표현하지만, 좀 더 뾰족하게 살피면, 우리 마음이 어떤 선하고 참된 원리를 실제로 붙잡아 일상 생활 속에서 응용되게 하는 힘을 표현한다. 두 막대기가 예언자의 수중에서 하나로 되듯, 주님의 말씀에서 끌어져 나온 신성한 능력 속에서 우리 심정 속의 선한 사랑과 지성 속에 있는 진리들이 일상 생활에 응용되는 만큼에서, 즉 애정을 형성하는데, 생각을 정리 정돈하는데, 우리 행동을 규율하는 만큼에서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조화(일치)나 하나됨이 주님의 말씀에서 이렇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3,24). 제단이란 우리가 주님께 예배함을 표현한다. 주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는 우리의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룬 만큼에서만 존재한다. 만일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들이 우리가 이해한 진리를 우리의 심정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 꾸짖는다면, 이는 영적으로 이해성 속의 형제가 심정 속의 형제에 반대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선을 사랑함과 진리에 대한 지식이 화해(조화) 하기로 결정을 볼 때까지 주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예배의 실제적 품질은 우리 마음의 두 부분이 실지로 일치하는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피상적인 예배는 형식적일 뿐 순수하고, 진지한 예배가 못된다.

주님의 일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예언자의 수중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로 되게 하시겠다는 사항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 서술에서 강조되는 것은, 거듭나는 삶 속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심정이 주님께 문을 열도록 노력하고, 그분이 선이라고 말하시는 것을 사랑해 보려 애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자기 삶의 법칙으로, 행동을 규율하는 표준이 되게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과 심정을 하나 되게 하는 영적인 일인 내면의 작업은 주님으로부터만, 즉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우리가 거듭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을 경주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속에서 일을 진행하시는 주님을 찾아야만 한다.
영적 역사에서 두 교회가 있었다. 하나는 천적인 교회로서 주님을 사랑함을 그 교회의 중심 원리로 삼은 교회이다. 다른 하나는 천적인 교회 뒤를 이은 교회로서 영적인 교회인데, 이 교회의 중심 원리는 이웃을 사랑함이었다. 천적인 교회로부터 천적인 천국이 형성되었고, 영적인 교회로부터 영적인 천국이 형성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위 두 교회는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다. 마치 심장과 폐가 분리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지상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위 두 천국을 그분의 인성을 통해서 그분에 의해 역사 되는 인간의 거듭남과 구속을 수단으로 더욱 가까운 하나됨을 이룩해 놓으셨다. 더 큰 일반적 측면에서 보면, 위 두 교회는 하나이고, 두 천국도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이 한 마음을 이루듯, 심장과 폐가 한 육체를 이루듯이 하나를 이룬다. 이러한 일반적인 조건들은 천국이나 지상의 거듭나는 각 인간의 마음과 삶에서 거행되는 세부적인 변화를 표현해 준다.

이스라엘을 모으심

본문과 본문 뒷부분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족들을 한 국가로, 한 왕을 가진 한 왕국으로, 한 목자 아래 모으시겠다고, 그리고 그들의 악들을 깨끗케 하시겠다고, 그리고 우상 숭배로부터 더럽혀지는 일이 없게 하시겠다고, 신성한 법칙에 반대된 탈선 행위를 정리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들은 모두가 영적 측면에서의 약속이다. 따라서 이 약속들은 거듭나는 각 개인에게 해주신 약속이다. 이교도들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지파들, 그리하여 역겨운 짓들에 빠져 온갖 탈선 행위에 푹 빠졌던 그들이란 거짓 관념에 빠지고,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을 허용하여 죄악에 빠진 행위들로 범벅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마음은 의롭고 거듭나는 가운데 있어야 할 인간 마음의 진정한 고향을 멀리 등진 상태이다. 이런 비질서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온갖 다툼질뿐인 관념들과 섞여 연합을 이루기 때문에 사실상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마음 전체를 다스려 줄 왕으로서의 아주 큰 신성한 진리가 없다. 거기에는 하나로된 마음을 이끌어 줄 목자로서의 아주 큰 신성한 사랑도 없다.
그럼에도 거듭남이라는 작업 속에서 우리의 주님은 위와 같은 조건들에 변화가 오게 하신다. 신성한 진리를 한 분 왕으로 채택하는 수준만큼에서, 목자로 신성한 사랑을 받는 정도만큼에서 그분께서는 우리 삶에 흐트러진 각종 요소들을 한데 모으시고, 그것들은 하나의 정신적인 왕국, 한 울타리 안에 가져다 놓아주신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목자로 인식하는 정도만큼에서, 그분이 우리 지성 속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이심을, 우리 심정 속의 모든 것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보게 된다. 이 수준이 점차 높이를 더하고 깊이를 더함에 따라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시면서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그분의 영향력을 확장해 가신다. 비록 마음과 삶 속의 각종 요소들이 제각기 떨어져 있다 해도, 그분은 그것들 모두를 인간다움의 하모니를 이루도록 진리의 한 왕국, 선함의 한 나라로 이끌어 내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적 삶을 영적 삶과 밀접한 연결을 이루는데 까지 승강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면 다윗이 영원히 왕이 될 것인 바, 역사적으로, 글자적으로, 표현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다윗이 표현한 신성한 진리가 우리의 온 마음, 분단 안된 마음과 삶을 통치할 것이다. 영적 마음뿐인 조건 속에서의 우리는 신성한 진리를 찾되 단지 행동을 규율하는 외적 권위로서뿐 아니라, 명확히 보고 이해된 신성한 원리로, 모든 우리의 존재에 관한 영적인 법으로 알게 되리라.

우리의 하느님

기독교의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지혜라는 원리의 하느님이시다. 그 원리 속에서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 우리의 존재를 가지게 된다. 그분은 두려움을 우리에게 주어 순종하게 하시는 하느님, 마음 내키는 대로 권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오로지 그분의 선함을 사랑으로 우리 심정에 채우시고 진리의 원리들을 우리로 이해하도록 계발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시면서 그분의 권능으로 “거룩의 아름다움 속에” 우리의 활동들을 유지되게 해주시며 그분과 연합함으로 기쁨을 만들어 주신다. 이리하여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법칙에 반대되느라 있어지는 계속적인 다툼이 있지 않고, 하느님의 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꾸준히 그분과 협동하여 악과 거짓에 쉽게 넘어가던 자연적 경향성과 분리되어진다. 우리 속에 있는 자연적 경향성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게 되면 우리는 자기 앞에 놓이게 될 위험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신성한 가르침과 인도를 받음으로 우리는 “온갖 죄를 짖는 것,” “몸을 더럽히는 것”에서 보호될 것이다. 더욱이 “온갖 탈선 행위”로부터도 보호되어지리라. 이리하여 주님을 온전히 사랑함 속에서, “거룩함의 아름다움” 속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다음과 같은 은혜의 약속을 듣고 이해하리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34
큰 제물에의 초대

성서 본문: 에제키엘 39장 17-21절

17.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날개치는 모든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일러 주어라. ‘모여 오너라. 내가 이스라엘의 산에 제물을 잡아 큰 잔치를 벌여 놓았으니, 너희는 사방에서 몰려 와 제물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셔라. 18.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수령들의 피를 마셔라. 이들의 살은 수양이나 새끼양이나 수염소나 바산의 살진 송아지의 살코기 못지 않다. 19. 내가 잡아서 차려 놓은 이 제물의 기름을 베부르게 먹고, 피를 취하도록 마셔라. 20. 너희는 내가 차려 놓은 잔치상에서 말과 기병의 용사(병거)와 그 밖의 모든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21. 내가 나의 영광을 뭇 민족들 가운데 드러내리라. 모든 민족들은 내가 심판을 내리고 팔을 휘둘러 그들을 치는 것을 보리라.

총괄

영적 사항을 들을 귀 있어 듣는 모든 이는 영적 잔치, 즉 신성한 말씀의 내향적 의미에 초대되어 진다. 이들은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각인의 수준에 따라 진리로 훈육되어 갖가지 것속에 영적 선이 스며들게 되어 내면의 예배와 더불어 외면의 예배로도 새교회를 형성할 것이다.

본문의 상황

성경을 별로 대해 보지 못했던 사람이라 해도 이 본문을 읽을 경우 금방 알 수 있는 사항은 본문은 글자대로 이해하도록 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비유적인 예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의 부름(초대, calling)은 육으로 주님이 오실 때 이방인을 향해 있어진 내용이다. 이를 개인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부름(calling)은 초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정신적 조건에 있는 모든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과 비슷한 구절이 계시록 19장 17-18절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나는 또 태양 안에 한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모든 새에게 큰 소리로 ‘자, 다같이 하느님의 큰 잔치에 오너라.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하고 외쳤습니다.” 본문과 위 구절에서와 같은 카니발에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을 초대해서 수령이나 왕자들, 용사들을 먹으라고 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본다. 더 확실한 것은 나무나 쇠로 된 전쟁 무기인 병거는 먹을 수 없는데도 먹으라는 것은 더 더욱 타당치 않으리라 생각되리라 본다. 더욱이 양식으로 삼는 짐승의 피나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하신 하느님께서 잔치에 그들을 불러 기름과 피를 먹도록 했을 리 만무이다. 확실한 것은, 본문이 의도하는 뜻은 표징적 의미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영적 의미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표현하는데, 좁혀 생각하면 예언자를 통해 주어진 말씀을 표현한다. 가금류(fowls)란 온갖 종류의 새를 통칭하는 말이다. 인간은 창조된 모든 생명의 머리된다. 인간 아래 있는 모든 창조물의 힘이나 능력 등은 인간 마음에 있는 각기 다른 능력을 표현한다. 넓은 의미에서 짐승은 심정의 삶에 있는 인간의 애정들을 표현하고, 반면 새는 지적 삶에 있는 인간의 생각들을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적 의미 때문에 짐승과 새들이 이스라엘 족들에게서 제물로 사용되어 왔었다.
이러한 모든 새와 짐승들을 주님의 제물에 모여 오도록 부른다는 것은 어떤 공통된 목적을 위해 스스로 연합해서 참여하도록 인간의 생각과 애정을 영적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각기 다른 등차나 국면을 함께 모아서 주님이 신성한 말씀 속의 내향적 생명으로 먹이시는 모든 선하고 진정한 것들이 잔치를 벌이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영적인 목적에 충당되도록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은 주님께 대한 예배, 자신이 가진 모든 선함과 진리가 오로지 그분으로부터만 근거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 제물은 큰 제물(great sacrifice, 큰 잔치)이라 명명되고 있다. 그렇게 명명되는 이유는, 큰 제물은 순수한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일반적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태가 요구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속성을 지각해서 그분만이 모든 생명, 선함과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이심을 지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치가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산이란 영적 잔치에 모여든 사람 속에 있는 의지와 이해성이 드높여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먹고 마심

영적으로 먹는다는 말은 어떤 원리를 애정 속으로 받아들여 음미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떤 원리를 인격에 채용해서 자기 것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살과 피 중에서 단단한 부분인 살(flesh)은 선함을 표현하고, 액체 부분인 피는 진리를 표현한다. 피는 생명 있는 액체로 생명을 순환시켜 주는 바, 피는 인간 마음을 순환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이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존재한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존재한다. 거듭나는 사람이 어떤 선한 원리를 자기의 의지나 심정에 받게 될 때, 원리가 생산하는 선함은 그 사람의 의지에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삶을 새로운 품질로 바뀌게 한다.
그 다음, 인간이 자기 이해성에 어떤 원리를 받게 될 때, 즉 새 진리를 영적으로 마실 때, 그 진리는 그 사람의 이해성, 지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상태에서 일하게 하여 실제의 삶 역시 새로운 상황에로 진입된다. 그러므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선함과 진리를 받는 것을 뜻한다. 거듭나는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잔치에서 주님으로부터 생명 있는 양식을 받는다는 것은 영혼이 생명 있는 양식을 음미하여 사용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주님과 더불어 있는 잔치인데, 그런 이유는 그 잔치 속에서 인간은 주님의 현존을 영적으로 의식하여 그분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교제

위의 설명은 성찬에서 먹고 마시는 의식에 담긴 영적 의미이기도 하다.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살과 피가 갖는 영적 의미와 비슷하다. 그 이유는 동물계의 살과 피는 선함과 진리에 대한 표현물인데, 식물계의 빵과 포도주도 같은 의미를 가진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 성찬 참석자가 빵과 포도주가 표현하는 의미를 이해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 연계를 이루고, 자신의 심정과 이해성에 주님의 선하고 참된 원리를 받게 되면 즉각 그는 주님의 잔치에 정신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 영적 잔치 자체가 큰 제물이 된다. 그 이유는 그 제물로 해서 인간 양식이라는 통상적인 것까지도 드높여져, 주님과의 교제를 위한 거룩한 목적에 사용됨으로 모두 거룩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물에 대한 예를 외적 상태의 마음만을 소유한 이들에게서도 관찰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성찬에서 사용되는 포도주가 비질서적인 정신 상태에서 맛보는 경우를 두려워한다. 이렇게 그들이 가진 포도주에 대한 경외심은 그들에게 좋지 않는 성질인 절제하지 못하는 습관을 극복하게 하는 체험 쪽으로 유도해 주는 경우가 있다.

영적 양식

본문에서, 새와 짐승들이 잔치에 불려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수령들, 바산의 살진(기름진) 모든 것, 송아지, 수양, 새끼양, 수염소의 피를 마시도록” 말해지고 있다. 영적으로 용사, 또는 힘이 세다는 것은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에 대한 지식을 마음속에 지닌 이들, 이 지식을 수단으로 악과 거짓을 금하고 심정과 행동에서 선을 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측면에서 이를 말한다면, 인간에게 능력을 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 실생활에서 이를 예증해 본다면, “지식은 힘이다”라고 하는 말이 될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해지는 이유는, 지식은 각 개인의 의도나 목적을 이루게 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용사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진리에 관한 지식이 신실한 마음에 실제적인 선을 받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통치하며 백성을 이끄는 왕 또는 왕자(수령)란 모든 등차나 종류를 막론하고 마음에서 통치하는 근본 되는 원리, 제일 가는 진리를 표현한다. 세상(the earth)이란 지상의 교회를 표현한다. 그 이유는 지상의 인간과 더불어 교회는 가장 수준 낮은 기초인 자연적인 마음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지상) 수령(왕)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삶에 직접 응용 될 수 있는 기초되는 형체로 신성한 진리를 받는다는 것을 표현적으로, 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

수양(ram)은 영적 선인 이타애의 선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새끼양(lamb)은 심정과 삶, 또는 원리와 실제 안에 있는 순진을 표현한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순진은 소극적인 상태 하의 순진인데, 이 상태 하의 각 개인은 죄가 되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수준에 머무른다. 그러나 영적이고 내적인 순진은 적극적 상태 하의 순진이어서 이를 지닌 사람은 잘못된 느낌이나 생각에 빠지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염소는 믿음을 표현한다. 이 믿음은 사랑이 안쪽인데 비해 외곽 쪽을 형성해 주어, 진리의 빛에 마음을 머물게 한다. 송아지(bullock)나 소떼는 우리의 자연적 애정들을 표현한다.

바산

“바산의 살진 가축들, fatlings of Bashan”이란 영적인데 근원을 둔 자연적인 마음과 삶에 있는 선을 표현한다. 지방(fat) 또는 기름(oil)의 특성은 신체를 따뜻하게 하는 것, 미끈미끈 해서 마찰을 소모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름(oil)은 주님으로부터 온 선함, 즉 따뜻하고 온화한 애정, 선함으부터 발생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기름(fat, 지방)은 천적인 선을 표현하는데, 이 선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심오하게 나타난다. 넓은 의미에서 기름(fat)은 인간 마음의 낮은 등차, 즉 자연적 삶(실생활)에서 수행된 선을 표현한다. 살진 가축이란 잘 양육된 가축들, 아주 양호한 상태에 있는 가축이다. 이런 가축은 인간의 마음이 영적으로 양호한 조건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요르단 동쪽으로 길르앗 다음 지역에 해당되는 바산 지역은 므나쎄 반쪽 지파에 의해 점령된 지역인데 소떼가 잘 크는 지역이기도 하다. 요르단 동쪽, 팔레스타인의 중심 구역이 아닌 바산이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바산의 살진 가축”이란 자연적 마음과 삶에 있는 천국적인 선함을 표현한다.
위의 말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수양이나 새끼양이나 수염소나 바산의 살진 송아지”가 잔치에 올려진다는 것은 주님의 잔치에 오라고 하는 영적인 부름(call)이다. 이 부름이 그분의 신성한 말씀에서 있게 되고, 이 말씀 가운데서 주님은 이타애와 순진, 믿음, 그리고 거듭나는 자연적 애정들로 우리를 가득 채우신다. 이런 사항들이 실생활에서 선한 행동을 생산하게 한다.

가득 채우심

“내가 잡아서 차려 놓은 이 제물의 기름을 배부르게 먹고, 피를 취하도록 마셔라.” 이는 한마디로 모든 선과 진리가 풍부하게 있고 그것 모두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아마 현대의 관습이나 사상을 가진 우리에게 본문 글자대로의 의미는 매우 자극적이어서 반발을 불러일으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본문은 오로지 표현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사람들로 술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많이 마신다면 술에 취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피가 있다는 것뿐이다. 더욱이 피가 술취하게 할 것이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의미는 모두 비유적이다. 그 이유를 하나의 사실을 들어 말해 본다면, 어떤 이가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 들이되 자기 심정이 사용하는 양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경우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진리에 취할(intoxicate, 중독) 수 있기 때문이다.

취함 (intoxicate, 중독, 도취)

신체가 술에 취하는(drunkenness) 것은 포도로 만든 식초나 시큼한 포도주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아주 잘 숙성된 우량한 포도주를 남용하는데서 비롯된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정신적인 술 중독은 거짓 사상으로부터만 오는게 아니라, 불성실한 마음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이 알고 있는 영적 진리들의 의미를 왜곡하여 남용하는데서 비롯된다.
좋은 것으로 채운다는 것(배부르게 먹고 마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모든 선한 사랑과 믿음 속에 든 모든 진리를 자신의 심정과 이해에 가득하도록 채운다는 말이다. 주님의 잔치에서 배불러진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위의 영적인 것들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받음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수단으로 있게 되고, 이 수단에 의해 우리는 사랑과 믿음에 속한 것을 알게 되거나 그것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거듭나는 마음에 천국적인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잔치를 준비해 놓고 계신다.

말, 기병(병거) 등등

“말과 기병과 용사와 그 밖의 모든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라고 본문은 우리를 잔치에 부르고 있다. 말(horse), 이 짐승은 인간에게 매우 친근하고 총명한 하인 같은 짐승이다. 그래서 말은 인간의 이해성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삶, 특별히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말이 성경에서 표현적 언어로 자주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사람을 운반하는 수송 수단인 병거(chariot)는 교리, 또는 진리를 운반하는 진리의 서술을 표현한다. 말과 병거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와 교회 속의 교리를 총명하게 이해함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군인들, men of war”도 먹으라고 본문은 말한다. 군인들이란 우리의 자연적 경향성에 있는 악하고 거짓되며 죄짓게 하는 것들과 싸우는 진리들이다. 따라서 군인들을 먹는다는 것은 악에 저항하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 권능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받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영광

큰 잔치에 초대한 후,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내가 나의 영광을 뭇 민족들 가운데 드러내리라.” 주님의 영광은 신성한 진리가 발하는 눈부신 빛이다. 이는 거듭나는 마음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둘러 싼 후광 같은 것이다. 주의 영광을 뭇 민족 가운데 드러낸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에게는 신성한 진리가 발하는 빛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신성한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이란 내면의 선 가운데 있는 자, 또는 내면의 예배 가운데 있으면서 외적 예배를 지키는 자들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의 마음은 주님을 이해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사랑의 선,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생활의 선인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에도 있어 새로운 영적인 선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 사항에 총명해 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주님을 더욱 더 알 수 있게, 주님의 속성과 생명에 관한 더 높은 면모를 알 수 있는 영적 진리로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들이 새로운 영적 교회를 건립한다.
오늘 본문은 위와 같은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영적인 산으로, 즉 거듭나는 인격의 더 높은 상태에 모이도록 부르고 있다. 그 상태에는 사랑과의 더 밀접한 유대 관계가 있고 더 위대한 영적 총명이 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들을 부르시어, 우리의 영적인 속성과 자연적 속성을 더욱 높은 상태로 끌어올리라고, 순종하는 사랑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에 관한 장엄한 원리들을 매일 사용하여 즐기라고 말하신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어 이렇게 당부하신다. 갖가지 측면의 인간 삶에 영양을 공급하는 순수한 종교로 우리가 진입해야 한다는 것, 우리의 발걸음이 평화의 길에 매일 머무르도록 인도해 주는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분 앞에서 정의롭고 거룩한” 가운데 생애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35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성서 본문: 에제키엘 47장 1-9절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 갔다. 2. 나는 그분에게 이끌리어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돌아 가 보았다. 물이 그 대문 오른쪽에서 솟아 나는 것이 보였다. 3. 그분이 측량줄을 가지고 동쪽으로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무릎에 찼다.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허리에 찼다. 5.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보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이나 치면 건널까, 걸어서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있었다. 6. “너 사람아, 보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며 그분은 나를 강가로 도로 데리고 갔다. 7. 되돌아 와 보니 강을 끼고 양쪽에 나무가 무성한 것이 보였다. 8.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 물은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 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 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 9.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 들어 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린다.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

개요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에게서 흘러 나와 각 천국의 천사들 속으로, 지상의 사람들 속으로 각각의 마음과 삶의 등차에로 품질에 따라 흘러든다.

신성한 진리

이 예언적 환상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거듭나는 단계를 몇 가지 측면에서 그려 주고 있다. 이 신성한 진리는 양적 측면에서 증가하여 더 높은 수위에 달해서 인간으로 진리를 더욱 더 이해하고 더욱 더 지각하는 데에 이르게 해준다.
측량 줄을 가진 사람은 몇 가지 양상으로 보여지고 있다. 우선 그는 특별한 사명을 띄고 보내진 천사이도록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거듭나는 사람을 계발시켜 인도하는 신성한 섭리 가운데 계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비인격 측면에서 볼 때 그 사람은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현존하시어 당사자를 발달시켜 줌으로 있어지는 진리에 대한 지각을 표현하고 있다.
성전 또는 주님의 집은 한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를 표현하고 있고, 이 교회는 인간과 더블은 주님이 거하시는 장소이다. 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집 또는 성전은 주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천국도 표현해 준다. 위의 두 의미는 인간 삶에 진리를 적용하는 면에서 하나를 이룬다. 그 이유는 보다 높은 의미로 볼 때, 교회와 천국은 인간 마음 안에서 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거듭나는 사람의 지성과 심정을 말한다. 어떤 영적 의미에서도 천국의 존재는 어떤 장소에 있는게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속에, 그곳에 천사들이 거하게 되고 주님 역시 그 사람과 더불어 영적으로 거하신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집 또는 성전은 주님의 신성한 인성이고, 그 인성에서 신성한 생명이 인간에게 오며, 인간과 더불어 거하시고, 인간은 사람의 손이 만들지 않은 집, 영원한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것이다.

문, 입구

주님의 문, 또는 출입구란 입문하게 해주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 주님과 그분의 교회에 관해 정보를 제공하는 바, 그 사람이 교회 안으로 올 수 있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 소개란 단지 외적 조직인 교회만을 말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교회의 원리에 관한 것을 소개해 준다고 해야 지당할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는 일상 생활 속의 선함에 마음을 소개시켜 줌으로 내면의 교회를 형성시켜 준다.
이러한 입문적인 진리들의 실제 응용은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에 관해 언급하는 계시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즉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두루마기(계명)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 (22:14).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물이란 인간 삶에 사용되도록 하기 위해 주님에게서 오는 실질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영적인 방위들

이 물은 동쪽에서 흘러 나왔다. 영계에서 방위는 어떤 지점이나 지역을 두고 언급하는게 아니라 정신적인 상태를 말한다. 주님은 “정의의 태양”이시다. 따라서 어떤 천사가 어느 곳에 살고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사는 곳의 위치는 영적 태양이신 주님을 향한 그의 정신적인 태도에 의존되어 그의 거처가 결정되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이를 우리 속에서 본다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동쪽에 반대되는 서쪽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덜해 가는 수준을 표현하고, 가장 빛이 많은 남쪽은 신성한 진리에 대해 총명이 가장 큰 빛을 발하는 상태를 표현한다. 남쪽에 반대되는 북쪽은 영적 총명이 덜해 가는 수준을 표현한다. 이 덜해 가는 수준의 가장 작은 수준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 즉 외적 마음속에 있는 바, 이 마음들은 오로지 자연적 감각의 빛으로만 사물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대 시대 때, 예배를 위한 성전은 동향으로 지었는 바, 그 집의 최전방을 동쪽으로 향하게 해서 예배자들의 얼굴이 동쪽을 향하게 했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오른쪽이란 애정이나 의지 또는 심정 측면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쪽은 지성이나 이해 측면을 표현한다. 오른쪽으로부터 나오는 물이란 진리가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호소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진리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여부는 그의 심정이 얼마만큼 주님의 진리에 흥미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 몇 명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쪽에 던지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렇게 한 결과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요한복음 21:3-6). 배는 교리를, 그물은 논쟁을 표현한다. 따라서 배라는 교리의 오른쪽에 그물인 논쟁을 던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기를 바라면서, 즉 사랑으로 인간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는 진리라는 바다에 살아 움직이는 고기라는 것, 즉 지식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실들을 끄집어올리는데 언제나 성공한다. 이 물이 제단 남쪽에서 나왔다는 것은 진리들은 신성한 총명에서 비롯되어 주님을 예배하는 인간의 가장 높은 총명에 도달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과 동쪽

이 예언자는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인도되었다. 인간은 자기의 거듭남을 가장 차겁고 어두운 방위, 영적인 북쪽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방위는 영적 사항들에 무지한 자연적인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그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본문은 선포하기를, 비록 이 예언자가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즉 마음의 가장 외적 상태를 통과해 가면서도, 그는 동쪽 즉 주님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물이 오른쪽에서 솟아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말씀 또는 교회 속에 있는 진리 가운데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물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사랑은 열(따스함)이요, 이 열로부터 우리의 빛이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찾게 되고 영적인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 방법에서 자아를 위해서만 지적 발달이 있다면, 영적으로 형성되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바, 영적인 것들은 비현실적이고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거듭나는 사랑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덜 지적이다 해도, 우리는 영적 빛 가운데서 각자의 삶의 수준과 등급에 따라 존재가 가능해 진다. 그리하여 각자가 바라는 영적 삶에 관계된 것을 확신하게 할 충분한 빛도 소유하게 된다. 거듭나는 사람이지만 순박할 뿐인 경우, 즉 불완전한 교육의 소지자, 또는 자기 일상생활에 자기가 지닌 진리를 잘 응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진리가 가르쳐질 때 그 진리를 인식할 수는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사랑이 그로 하여금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 자세에서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빛으로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적이긴 하지만 자연적인 사람의 경우, 즉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빛에 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은 진리를 향해 부정적인 상태에 있고, 그는 자연적인 감각이라는 가상의 빛에 거하기 때문이다.

측량

동쪽으로 가면서 이 안내자는 흐르는 물의 깊이를 재되, 이 지점에서 저 지점까지, 그리고 그 결과를 표지하면서 재어 갔다. 어떤 것을 영적으로 측량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의 품질 또는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어떤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길이나 넓이, 높이 등을 측량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측량할 경우, 우리는 그 속의 선함과 진리, 그리고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얼마나 들리워 있는지, 영적 원리로 얼마나 승강되었는지를 발견하려는 것이다. 큐빗은 오래된 측량 단위인데, 이는 우리의 정신적인 측량, 즉 합리적인 판단을 표현하고, 이 단위에 의해 우리는 사물의 속성을 결정 짓는다. 어떤 양을 완성하게 하는 숫자, 즉 한 바퀴 돈 숫자인 100이나 1000등등과 같은 숫자는 마음이나 삶이 충만해진 상태, 혹은 완성된 상태를 표현한다. 흔한 일상 용어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물에 관해 상대방으로부터 그 대상물의 확실한 여부를 반복해서 질문 받게 될 때, 흔히 “아마 난 그것을 수 백 번 보았을 꺼야” 라는 식으로 대답해서 아예 그 대상물을 훤히 안다는 말을 강조한다.
이 예언자가 그 물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는 것은 주님을 찾는 마음이 안쪽을 향해 흐르는 진리의 흐름을 따라 갈 때, 그의 진리는 더 증가되고 더 깊어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여행이 몇 번씩 측량되었고, 물의 깊이가 각 측량 결과 테스트되었다는 사실은 진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정신적 여행은 성공적인 단계, 또는 진보의 단계로 이루어 나가고, 각 단계는 거듭나는 사람의 정신적 경험을 완전한 상태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각 단계 때마다 더 깊어져 간 물이란 마음 안에 들어온 진리는 더욱 더 심오해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발목

이런 진보의 첫 단계인 천 큐빗되는 곳, 완전을 이루는 마음의 첫 상태에서, 그 물은 발목까지 찼다. 발이란 자연적 인간, 인간 속의 자연적 마음, 정신 기관의 가장 수준 낮은 부분을 표현한다. 발목까지 찬 물이란 첫 단계 진보가 마무리되는 때에 보여지는 주님의 진리, 즉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자연적 삶에 응용한 결과 보여지는 진리, 다시 말해 진리의 껍데기 측면을 보는 것을 표현한다. 좀 더 설명하면, 성경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그 말씀의 규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가야 한다고 느끼는 마음의 상태이다. 이런 각오가 선 사람은 진리를 얼마만큼 알게 되고 진리 속에서 비록 자연적 수준이지만 총명도 획득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행동에 진리를 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한 그 행동은 선함인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거듭남의 첫 단계의 완성에 불과한 것이다. 이 완성 다음에 주님은 인간으로 또 다른 천 큐빗을 신성한 진리의 흐름에 따라 측량하게 인도해 주신다. 즉 영적 진보를 완성하는 단계를 갖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무릎

그러면 물은 무릎까지 차게 된다. 무릎은 사지의 낮은 부분 중에서 높은 위치이면서 넓적 다리 아래 부분이다. 그래서 무릎은 영적-자연적이라 불리는 마음 조건을 표현한다. 그 마음 조건이란 그 마음이 자연적 마음이라 불리기는 하지만 영적 빛의 영향을 받아 영적 조건을 형성하는 자연적 마음이다. 따라서 이 마음은 완벽한 영적 조건이 그 사람의 의식 세계까지 다다르지 못한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발목보다는 더 깊은 진리의 물 속에 서 있는 셈이다. 그 이유는 신체의 낮은 부분인 사지가 물로 덮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행동 원리는 주님의 법칙에 따른 행동이 단순한 순종, 맹목적인 순종, 하기 싫지만 주님의 법이니 실천해야 한다는 억지 순종 같은 차원을 넘어선 정신적 조건에 있다. 그래서 그가 주님에 관해 느끼는 것이 비록 희미한 상태 속에는 있을지언정, 주님의 법칙이 규율이라는 차원을 넘어 원리라는 차원에서 주님의 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한다. 그의 자연적 마음은 내향적으로 빈 상태가 아닌 큰 힘으로 채워져 있고, 이를 그가 이해하며 느낀다. 한 마디로 그의 마음에서는 영적 합리성이 자라난다는 말이다.

허리

그 뒤 인도자가 또 다른 천 큐빗을 재니 그 물은 허리까지 찼다. 이제 이 사람은 진보의 또 다른 단계를 완성했다. 그는 영적 마음을 확실히 소유한 것이다. 허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 “네 허리를 띠로 졸라매고 네 빛이 타오르게 하라.” 이는 너의 사랑하고 싶은 마음(애정)을 진리의 띠로 졸라 맨 뒤, 너의 영적 총명이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천 큐빗을 재어 보니 그 물은 큰 강이 되어서 헤엄이나 쳐야 건널 수 있는 강이 되었다. 이는 거듭남으로의 진보에 있는 마지막 단계를 표현한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천적 인간으로 구별되어 진다. 이 정신적 상태는 그가 이웃 사랑이라는 차원을 넘어 진보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높은 상태, 완성된 사랑인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 신성한 사랑 속에 있는 사랑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된다. 이 상태에서 진리는 그 사람 전체를 덮는 큰 강이 되고, 무한한 진리에 푹 잠겼음을 자신이 느낀다. 이 경우는 인간 경험에서 가능해질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다 덮은 상태이다.
이럴 경우 거듭남의 진보에서 진리의 증가는 극도에 이른다. 그 사람의 마음은 주님의 진리 속에 있는 영과 생명을 최대한 붙잡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의 과정을 더 완전하게 따라가면 갈수록 더욱더 큰 진리가 우리에게 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더욱 이해하고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마음은 억지가 아닌 사랑의 자유 속에서 “생명수를 값없이 마실 수 있게 된다.”
이 강은 묵시록의 환상 속에서 요한에 의해 보여진 강과 같은데, 그 환상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 천사는 또 수정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계시록 22:1). 이 강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강과도 같다.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 (시편 46:4). 이 강둑에는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이는 살아 있어 성장하는 원리들, 또는 거듭나는 마음이 알고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뒤 구절에서 배우는 바대로 이 나무들은 많은 열매를 생산하는데, 이는 실제적인 선한 일, 우리가 수용한 원리들이 해낸 바깥쪽 일들을 표현한다.

치료하는 물

“이 물은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 메마른 벌판이란 영적인 것에 대해 죽어있는 자연적인 마음이다. 바다란 자연적인 기억, 즉 보고 들은 모든 것이 저장된 곳을 말한다. 그래서 자연적인 인간은 그가 모든 사실들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신성한 진리의 물이 그의 마음과 기억 속에 들어와 신성한 것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다. 자연적인 기억은 교리와 같은 것을 포함해 많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을는지 모르나, 이런 지식은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때까지 인간 속에서 어떤 영적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와 반대로, 모든 신성한 것들은 그것들이 자연적인 마음과 기억 속에로 유입되어 질서대로 정착될 때까지는 마음속에 어떤 굳건한 기반을 취할 수 없다. 그래서 위의 두 가지 과정 모두가 사막이나 바다로 흘러 갈 때 물들을 치료한다. 그러면 “여호와에 관한 지식은 물이 바다를 덮듯이 지상을 덮게 될 것이다.”
지형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가상해 보는 바는, 본문의 물은 예루살렘의 성전 동쪽으로부터 흘러내려 사해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물로 인간의 자연적 마음인 죽어 있는 것에 생명을 주는데 대한 상징적 그림은 마찬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살아 있는 물이 흘러가는 곳은 어디든지 모든 것을 생명 있게 해준다. 그 이유는 주님의 생명은 그분의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인간에게 가르쳐진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인간의 영혼에 운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들이 입장하도록 허락된 심정이나 이해성, 그 진리로 행동하는 마음속에 이 진리들은 천국의 빛을 운반하여 그 인간을 거듭나게 해준다.

고기

치료된 물, 단물 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득실거렸다. 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만 냉혈 동물이요 생명의 저 수준급인 고기는 우리에게 알려진 실지의 사실들, 그래서 자신의 일상 경험이 되게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이런 사실들은 교리에 관한 지식, 과학 지식들이요, 이런 것들은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임을 우리가 인정할 때 살아 있게 되어 우리의 정신적 양식이 되어 준다.

응용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게 떠오를 것이다. 즉 유대 교회에서의 진리의 물은 발목까지만 찼었다. 그 이유는 진리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적인 국면에서만 보여졌기 때문이다. 첫 기독교회에서 이 물은 무릎까지 찼다. 이들은 자연적인 국면에다 얼마간의 영적인 것들도 주어졌었지만, 성경을 글자대로 해석하는 교리를 더불어 지녔었다. 그러나 새교회에서 거룩한 곳에서부터 흐르는 물은 허리까지 깊어졌는 바, 이는 진리를 보되 영적 진리로서 보게 된다. 우리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되, 단지 자연적 인간으로가 아닌, 신성한 인간(Divine Man), 그분 속에 모든 신성한 생명이 존재함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진리이시고, 사랑이시며 그리고 생명이 되시는 분으로 본다. 그래서 생명 있는 원리들로부터 흐르는 진리들은 영적이고 자연적인 우리 생명 속의 모든 것을 다 망라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 마음속의 모든 것은 그 강물로 인해 결코 시드는 일이 없게 된다.

36
큰 형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성서 본문: 다니엘 2장 31-45절

31. “임금님께서 보신 환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매우 크고 눈부시게 번쩍이는 것이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임금님 앞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32.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쇠요, 33. 정강이는 쇠요, 발은 쇠와 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34. 임금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가 난데없이 날아들어 와 쇠와, 은, 금이 한꺼번에 부서져 타작마당의 벼처럼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가고 자취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친 돌은 산같이 큰 바위가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36. 꿈은 이러합니다마는, 이제 그것을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37. 임금님께서는 왕이실뿐 아니라 왕들을 거느리신 황제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임금님께 나라와 힘과 권세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38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다 어디에 있든지 그것들을 임금님의 손에 맡겨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금으로 된 머리는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39. 임금님 다음에는 임금님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서겠습니다. 세 번째는 놋쇠로 된 나라가 온 천하를 다스리게 됩니다. 40. 네 번째로 설 나라는 쇠처럼 단단하겠습니다. 쇠는 무엇이나 부숩니다. 그 나라는 쇠처럼 모든 나라를 부술 것입니다. 42.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두 발과 발가락들이 옹기 흙과 쇠로 되어 있는 것은 나라가 둘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쇠처럼 단단하기는 하겠지마는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쇠는 옹기 흙과 섞여 있습니다. 42. 발과 발가락들이 쇠와 옹기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단단한 편도 있고 무른 편도 있다는 뜻입니다. 43.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쇠가 옹기 흙과 섞인 것은 사람들이 인척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쇠와 옹기 흙이 엉기지 않듯 서로 결합되지 않을 것입니다. 44. 이 왕들 시대에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고,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앞에 말한 모든 나라들을 부수어 없애 버릴 것입니다. 그 나라는 길이 서 있게 될 것입니다. 45.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바위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놋쇠와 옹기 흙과 은과 금으로 된 것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는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꿈은 분명 이런 것이었고 그 풀이 또한 틀림이 없습니다.”

총괄

타인 위에 군림하겠다는 통치하는 사랑(the love of ruling)은 처음에는 교회 내의 어떤 지도자를 꾀어서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교회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배우고 가르치게 해서 교회가 건설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도자들은 점차 자신의 총명과 지식에 흠취되어 영적 진리 대신 글자적 규율만을 가르치는 데로 하향하고 만다. 결국 그는 교회 속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을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섞음질 하여 교회가 끝장을 보게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시기 위해 오시게 된다. 이런 것들은 넓은 측면에서의 지상의 교회에 관계되고 세부 측면에서는 각 인간의 마음에도 관계되고 있다.

바빌론

바벨 또는 바빌론이란 자아 사랑을 위해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랑을 표현한다. 자기만을 사랑함(self-love)은 교회 속의 거룩한 것까지 사용해서 인간 영혼을 통치하려 들고 온 세상 위에 군림하려고 발버둥친다. 바빌론의 왕은 군림하려 드는 욕망을 표현한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많은 국가를 정복했었다. 그는 온 세상을 지배해 보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이런 야망 속에서 그는 본문같은 의미심장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 꿈은 미래 교회들의 조건에 관해 주님으로부터 온 계시였다.
그러나 위의 주제를 본문의 왕이나 여느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생각 수준에 놓여지기 위해 예언자 다니엘로 하여금 그 꿈이 마치 지상의 왕국들의 시리즈인 것처럼 해석하도록 인도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영적 삶에 관련되고 지상적 사항들은 단지 영적 원리들을 예증하고 있을 뿐이다. 이 꿈에 관한 영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 역시 꿈 자체 못지 않게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 꿈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본다.

교회들

지상에는 아주 넓은 측면에서 네 개의 교회들이 존재했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이에 있었던 주님의 교회들의 조건이 크게 네 가지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아담으로 지칭되는 천적 교회, 노아로 불린 영적 교회, 이스라엘로 표현된 자연적 교회, 그리고 영적-자연적 교회라 할 수 있는 첫 기독교회이다. 고대인들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는 상응(correspondence)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했었다. 그래서 현자들은 각기 다른 시대 또는 교회들을 가치가 각기 다른 금속들로 표현했는데, 즉 “금시대,” “은시대,” “동시대,” “철시대”로 표현했다. 그 이유는 이 금속들은 지상의 인간에게 중점적으로 우세했던 원리들을 적절히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금속들

금, 이는 금속들 중 가장 가치가 높고 부식이 안되는 금속이다. 금은 인간 삶에 있어 가장 뛰어난 원리, 가장 가치가 높은 원리를 표현하는데 그 원리의 중심은 사랑이다. 특별히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이 자신을 지휘해 가는 경우이다. 이 원리를 우리는 천적 원리라 부른다. 이 원리는 삼층 천국인 천적 천국에 거주하는 이들을 움직여 주는 원리이다. 이 천국은 천국 중에서 가장 높은 천국에 해당된다. 이는 “불로 연단 된 금”이다. 이 금은 인간을 인격 측면에서 영적으로 부자가 되게 해준다. 은은 금보다는 수준이 낮은 원리를 표현하지만, 이 원리도 천국 삶의 기본 요소에 해당된다. 이 원리는 이웃을 사랑함을 원칙으로 삼은 원리요 우리는 이를 영적 원리 즉 이타애라 부른다. 이 원리는 주님을 사랑함을 원칙으로 하는 것보다는 그 수준이 낮은데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은 선함 자체를 사랑하는 것인 반면, 이웃을 사랑함은 근본적으로 진리를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을 사랑함이 진리를 실천함을 수단으로 달성된다. 영적 원리, 이타애는 영적 천국이라 불리는 중간 천국인 이층 천국에 거주하는 천사들을 구별짓게 하는 원리이다. 동(brass, copper)은 자연적 선을 표현한다. 이 선은 인간이 자연적 삶에서 주님의 법에 순종할 때 획득되는데 이 순종은 인간으로 선을 행하게 해준다. 철은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규율 속의 진리요 이 진리는 인간의 행동을 조절해 준다. 마지막 두 개는 자연적 천국 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존재하는 선과 진리의 품질들로 천국적 삶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가치와 품질을 지닌 금속은 각기 다른 교회들 또는 지상의 인간 사이에 있는 넓은 측면에서의 각기 다른 면모의 교회들과 상응된다.

인간의 몸

위에서 살핀 각 금속들의 상응 외에도 인체의 각기 다른 부분과 인간 삶의 각기 다른 수준은 상응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직립할 경우 머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 된다. 게다가 머리는 가장 중요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닌다. 그래서 머리는 인간 만사 중에서 머리가 되는 것, 인간 삶의 가장 높은 요소인 주님을 사랑하라는 황금 원리와 상응된다. 머리 아래에 위치하는 것은 가슴과 팔이다. 이것 역시 큰 가치를 지니고, 이것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은 원리와 상응된다. 이 원리는 거듭나는 삶의 영적 원리이다. 이 아래 부분으로 복부와 정강이가 있는데 이는 자연적 선을 표현하고, 이는 동(구리)과 상응된다. 이 아래 부분으로 다리와 발이 있는 바, 이는 자연적 진리로 이루어지는 삶을 표현하고 이는 마음속의 철과 상응된다. 위에서 열거된 각기 다른 요소들은 선을 생산하는바,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데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이렇게 해서 삶의 각기 다른 요소들은 천국에서도 더 높거나 낮은 상태로 서로 유사한 관계가 있게 된다. 따라서 두 세계의 비교 또는 상응은 각기 다른 양상들로 있는 인간 삶에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지상에 존재해 온 각기 다른 교회이든, 천국에 있는 각기 다른 조건들이든, 인간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있는 원리들에 관계되든, 모두 유사한 품질을 지니게 된다.

형상 (the image)

위에 살핀 내용들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보여진 큰 형상으로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왕 자신의 마음 안에 똑바로 우뚝 선 것들, 즉 그의 야망에 찬 생각들, 자신의 위대함, 왕국의 장려함, 그의 권세가 팽창함, 그리하여 온 세계를 통치하겠다는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 그의 마음과 똑같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지배욕이 인간 마음 안에서 작동될 경우, 그리고 인간 역사 속에서 작동될 경우 맞이해야 할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인간에게 밝히 알게 해주고 있다. 그 이유가 지배욕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자아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결국 자신만에 관심을 가질 뿐 주님과의 결별을 초래한다. 따라서 악을 사랑하고 죄짓는 생활 속에서 자아 파멸로 이어져 결국 멸해지고 만다.
형상의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함이라는 천적 사랑을 표현한다. 상체는 은으로 되었는데, 이는 영적 사랑인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하고 있다. 하체는 구리로 되었는 바, 이는 자연적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는 철로 되어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주고 있다. 이상의 모든 것들은 실상 올바른 인간 마음과 선한 것에 필수적 요소들이다. 만일 다리가 좋은 철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형상은 고상한 인간다움을 표현해 주었을 것이고, 각기 다른 원리들이 서로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의 약점은 발에 있었다. 그 이유는 발은 “진흙과 쇠”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철과 진흙은 서로 결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형상은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없다. 철과 결합할 수 없는 진흙(clay)은 자연적인 악을 표현하는데 이 악은 자연적 진리와 결합될 수 없는바 선한 자연적 삶의 굳건한 기초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인간 역사

이상에서 살펴본 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타인을 지배하려는 원리의 총 역사, 그리고 그 원리의 종말은 자아 파멸이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이 큰 형상은 금으로 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어떤 역사의 시작 초, 또는 마음의 가장 높은 상태인 주님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통치자는 상상하기를, 자기는 자기 밑에서 통치 받는 이들에게 천적 선을 행하기 위해 그들을 통치할 뿐이라고 한다. 그 이유가 이 백성들은 주님의 자녀인 바, 왕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치에 재미를 붙여 더 강세를 얻은 사랑은 천적 사랑 아래로 점차 타락되면서 새로운 정신적 조건을 가져온다. 즉 주님의 요구가 잊혀져 가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삼게 되는 바, 그 이유가 그는 자기가 지배하는 이들이 잘 사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사랑은 은으로 된 가슴과 팔로 내려앉아 금으로 된 머리와는 결별하고야 만다.
그러나 통치하려 드는 사랑 속에 잠복한 이 사랑의 근본을 이루는 자아 사랑은 사랑의 영적 요소를 망각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력은 더욱 증가한다. 그래서 이 통치자는 백성의 외적인 것과 자연적 선을 위해 그들을 통치해야 한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시킨다. 이 수준은 그로 하여금 구리로 된 가슴과 팔의 위치로 하강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 점진적인 하강은 마음의 또 다른 상태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자연적 평면 조차에서도 선함을 잊는 것, 그리하여 철로 된 다리로의 하강, 그래서 자연적 진리라는 고된 법에로 하강 국면을 맞이한다. 이를 수단으로 통치자는 자연적 진리야말로 타인을 통치하는데 가장 적절하고 올바르다고 자신 스스로 설득시킨다.
위의 하강 추세는 철의 단계에서조차도 멈추어지지 않는다. 이제 통치자의 마음은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선함과 진리에 관한 어떤 사상도 한쪽으로 밀쳐 내고 한편으론 진흙으로 한편으론 철로 자신의 서 있음을 버텨 내려고 골몰한다. 결국 법에 수반되어 있어질 뿐일 법의 허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자연적 진리 또는 법이라는 철은 악이라는 더러운 진흙과 부합되지 않는 바, 형상 전체는 자신의 안전한 위치를 잃고야 마는 것이다.

파멸

위와 같이 이 큰 형상이 낮은 평면에서 서 있었을 때 형상 부근의 산에 있던 돌이 굴러 내려와 이 형상을 산산 조각 냈다. 이 돌은 형상의 연약한 부분인 다리를 쳐서 그 형상을 날려 버려 “타작 마당의 겨처럼” 먼지가 되게 했다. 한 마디로 진흙, 철, 동, 은, 금, 모두 파괴되었다는 말이다.
형상을 짓부순 “돌”은 주님의 진리요, 이 진리는 인간에게 밝히 알게 해주는 바, 주님 사랑이라는 큰 산으로부터 출현된다. 주님은 스스로 그분의 진리에 계신다. 그래서 진리가 인간 마음을 따라 자라면서 그 진리는 성장해서 “큰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진리는 교회와 인간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운다는 말이다. 이 돌은 인간의 손을 거쳐 산에서 취해진 돌이 아니고 저절로 출현된 돌이다. 이는 악과 거짓을 흐트러 버리는 진리는 여느 인간이 조작한 신조로 있어지는게 아니라 신성한 진리 자체의 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이 꿈과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몽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읽는 가운데 혼동치 말아야 할 것은 “금으로 된 머리는 임금님이십니다”라는 대목이다. 이는 바빌론 또는 바빌론 왕이 마음의 천적 상태를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빌론은 한 때 천적 교회였던 것들이 타락되고 타락되면서 남은 찌꺼기일 뿐이다. 한 때이지만 천적 교회 속에 있던 통치자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백성들 속의 선을 위하여 통치했었다. 갖가지 모든 교회 속에서 우리는 각 교회를 특징지어 주는 것들의 점진적 하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진보하고 타락하는 모든 단계 속에서 교회 속의 어떤 것이 유지될 수 있다면 단체라는 교회의 조직이 계속 되도록 허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속의 인간들이 한결같이 감각적 측면으로 쏠려 교회의 생명인 영적 특성을 무시하여 잃게 되었다 해도 외적 교회를 수단으로 외적 질서 속에 그 교회는 계속 유지 보존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선에 속한 어떤 것을 더 이상 섬기지 못할 때, 그 교회는 막을 내린다.

교회들

태고 교회는 아주 큰 영적 총명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그 교회인들은 지식의 나무를 잘못 먹음으로, 다시 말해 주님께서 알게 해주신 진리들이 짐짓 제가 잘나서 인줄 착각하여 진리가 제것이라고 고집함으로서 타락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가 총명하다는 것으로 인해 파멸되었는데, 이것이 홍수라는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교회의 파멸은 이스라엘족에 의해 가나안 땅의 백성이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대 교회의 끝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 기독교회의 끝은 세세한 도표 형식으로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는데 이를 계시록에서 특별히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첫 기독교회의 끝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오셨는데, 그 오심은 처음의 오심과는 달리 영적으로 오셨고, 이 오심에서 있어지는 그분의 생명과 빛은 더욱 더 충만 되게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빛과 생명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는 자”에게 흘러들고 있다.
끝장을 본 모든 교회들은 한결같이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image)을 정반대 되게 함으로 해서 타락되고 말았다. 각 교회인들의 시도는 쇠와 흙으로 된 발 위에 천국적 금과 은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시도는 이기적인 악한 삶 위에 천국의 원리를 세우려 했다는 말이다.

실용적 교훈들

먼 옛날 이 왕에 의해 보여진 형상은 오늘 우리 앞에서도 타락하는 마음의 끝장을 그린 놀라운 그림으로 버티고 서 있다. 우리는 세상의 미덕으로 자기 속의 이기심을 덮어두려 골몰할는지 모른다. 자기 속의 진짜 동기에 든 악을 보호하고자 온갖 합리성으로 자신을 옹호하려 들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저런 노력이 있다 해도 우리 인간은 계속 아래로 향해 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마지막 자아 파멸을 피할 도리는 없다. 거듭 나는 삶만이 타락하는 자신의 코스를 바뀌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말이 뒷바침 되도록 오늘 본문의 끝 부분에서, “…이 왕들 시대에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 왕국은 주님 자신의 영적 왕국, 그분의 재림에, 그분의 영 가운데 있는 왕국이다. 주님께서는 이 왕국을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의 심정 안에 건설해 주신다. 이 왕국은 신성한 말씀의 내향적 의미인 영적 의미를 수단으로 건설된다. 그래서 이 왕국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바,”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사야 40:8).
인간을 위한 하나의 처방으로 도래된 첫 기독교회 역시 앞서 살핀 모든 상태를, 초기 금의 상태로 시작해서 은으로, 그리고 동과 철, 마지막의 진흙 상태까지 이어진 뒤 주님의 재림에서 끝을 내었다. 이제 교회의 진보가 부상되면서 이 경우는 정반대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모든 각 개인, 교회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작업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 온다는 약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잃어버린 땅으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하시지 않음으로 우리로 영적 유산을 다시 받게 해주실 것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노래한다. “내가 놋쇠 대신 금을 들여오리라” (이사야 60:17).
새 예루살렘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선한 원리들은 사랑받고, 이해되여 일상 생활 속에서 건설되면서 그 자체 스스로 더 높은 국면에서 우리 영혼이 열리고 마음은 더 높은 차원에로 승강되어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게 해주리라.

현 조건들

가끔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좀더 빠르게 하강하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큰 진리는 이 큰 형상의 연약한 발을 강타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형상이 산산이 부숴져 가고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기독교국이라는 분파 속에 있는 선은 영적 선이라기보다 자연적 선이라고 보는게 옳고 이 선이 최선의 방책인 듯 아직도 드넓게 자리잡고 있다. 선이라 불리는 수많은 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악들인 진흙과 뒤엉켜 있다.
인간 삶의 갖가지들이 뒤범벅된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어떤 기반이 새 예루살렘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것인가 되물어 보라. 일반화되어 버린 무질서, 이기적 목적을 위한 큰 규모의 조직들, 법의 제한을 뚫으려 드는 성급함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또는 노골적으로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던가, 거만할 정도의 자기 이익만의 추구들은 보편화되어 있다. 범죄 역시 풍부하다. 많은 이들이 신뢰할 것을 믿지 못해 의무까지 회피하고 있다. 부도덕이 구릿빛 얼굴을 버젓이 내밀고 온 땅을 활보하고 있다. 온갖 비합리적인 학설들이 순수한 기독교의 자리에 들어앉으려 한다. 야비하고 무례하고 저속한 악들이 세련된 모습으로 웃음을 던지고 있다. 이같은 것들은 거룩한 성이 내려올 준비된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시대 상황의 틈바구니에서도 보다 높은 영적 조건에로 기어오르려 애쓰는 각 개인에게는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주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모스 5:14).

37
큰 나무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성서 본문: 다니엘 4장 10-28절

10.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 것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가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늘에서 거룩한 감독원 하나가 내려 오더니 11.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 나무를 찍어라. 가지는 잘라 내고
잎은 흩뜨리고 과일은 따 버려라.
짐승들로 하여금 그 밑을 떠나게 하고
새들로 하여금 가지를 떠나게 하여라.
12. 그러나 등걸과 뿌리만은 뽑지 말아라.
쇠사슬, 놋쇠사슬로 묶어 풀밭에 버려 두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고
짐승들과 어울려 풀이나 뜯게 버려두어라.
13. 사람의 정신을 잃고
짐승처럼 생각하면서 일곱 해를 지내야 하리라.
14. 이것은 감독원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포고이다.
거룩한 이들의 명령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히시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
15. 이상이 나 느부갓네살왕이 꿈에서 본 것이다. 벨트사살, 이것을 해몽하여라. 이 나라에는 내 꿈을 해몽할 재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너는 거룩한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니 해몽해 주리라 믿는다.’”
16. 벨트사살이라고도 불리는 다니엘이 크게 놀라며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벨트사살, 내 꿈이 길몽이 아니더라도 사실대로 풀이하여라. 꺼릴 것 없다.” 그러자 벨트사살이 대답했다. “임금님 그런 꿈은 임금님의 원수들이 꾸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해몽도 임금님의 적에게나 해 주고 싶습니다. 17. 임금님께서 보신 그 나무는 크고 우람져서 하늘까지 닿았고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고 하셨지요? 18. 잎사귀들은 싱싱하고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다 먹고 살 만큼 많이 열렸으며 들짐승들이 그 밑으로 찾아 들었고 가지에는 공중의 새가 깃들었다고 하셨지요? 19. 그 나무는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임금님께서는 그처럼 위대하시고 세력이 크십니다. 임금님의 세력은 하늘까지 뻗고 세상 끝까지 다스릴 만합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 보신 대로 하늘이 보낸 그 거룩한 감독원이 땅에 내려와 이렇게 외쳤다고 하셨지요? ‘그 나무를 찍어 버려라. 그러나 등걸과 뿌리만은 뽑지 말아라. 쇠사슬과 놋쇠사슬로 묶어 풀밭에 버려 두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고 들짐승들의 먹이나 얻어 먹으며 일곱 해를 지내리라.’ 21. 임금님, 해몽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임금님을 두고 내리신 판결입니다. 22. 임금님께서는 세상에서 쫓겨 나 들짐승들과 같이 살게 되셨습니다. 소처럼 풀을 뜯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며 일곱 해를 지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올려 앉혀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23. 나무등걸과 뿌리만은 그대로 두라고 한 것은, 임금님께서 하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면 이 나라를 임금님께 다시 돌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24. 임금님께서는 이제 소인이 드리는 의견을 기꺼이 받아 들어 주십시오. 선을 베풀어 죄를 면하시고 빈민을 구제하셔서 허물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실 것입니다.”

머리말

천적 교회(Celestial Church)는 생명있어 번성하는 조건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자신의 것이나 된 듯 사랑하는데 몰입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잊어 갔다. 결국 그들은 교회의 몰락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함의 일부는 새교회가 건설될 때까지 주님에 의해 인간의 심정인 내면에 보존되어 자양분을 그분에게서 공급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들이 역사적으로는 집단적인 교회에, 개인적으로는 인간 속마음에 응용되었다.

통치하는 사랑 (the love of ruling)

본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통치해 가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인간의 마음에 이러한 사랑으로 있게 될 피할 수 없는 결과도 예증해 주고 있다. 통치하는 사랑에는 두 가지, 즉 선한 사랑과 악한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 통치하는 선한 사랑은 인간 사이에 있어지는 주님의 섭리에 속한 것들을 집행해 가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거듭나는 마음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그 사랑의 목적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통치해 보려는 바램은 주님의 이름으로, 또는 인간 삶을 위해 그분이 밝혀 주신 법칙에 따라 인간 사이에서 주님의 통치를 수행하고자 하는 바램일 뿐이다. 그러나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악한 사랑은 자아애의 형체로서, 이는 자기만을 위해, 자아 사랑을 위한 이득을 챙기고자 타인을 복종케 하려 든다. 이 악한 사랑은 지옥에 근원을 두고 있으면서 거듭나지 않는 사람 속에 들어간다.
글자대로 본문을 살피면, 본문은 바빌론 제국과 그 나라의 위대한 왕을 다루고 있다. 바빌론은 타인 위에 군림하겠다는 악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왕은 이 악한 사랑에 방향을 제시하여 이끄는 거짓 원리를 말한다. 본문 시대 때의 바빌론은 한 때 천적 교회였던 데에서 퇴보된 잔류(remnant)였다. 바빌론이라는 도시는 거대한 도시였다. 그 곳 신전에서의 예배는 아주 거창하고 정교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화려하고 번성하는 듯 보였다. 이런 견지에서 바빌론의 외적 조건들이 본문에서는 우람차게 큰 나무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큰 나무

그래서 이 나무의 역사는 바빌론으로 표현된 정신적 조건에 있는 영적 역사를 표현하게 된다. 한 개의 씨로 출발해서 지상에서 자라는 나무란 마음속에 이식되어, 여러 단계의 진보를 통과하면서 마음속에서 자라는 원리를 표현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겨자씨의 비유」에서, 주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있어지는 그분의 진리의 성장을 이 작은 겨자씨의 성장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본문에 있는 크고 우람한 나무란 멀리까지 미치는 마음의 총명, 그 안에서 주님의 진리가 크게 자라 큰 힘을 소유한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이 나무가 하늘까지 닿았다는 것은 마음이 천국적인 것들을 이해하는데 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 끝 어디서나 바라보였다는 것은 글자대로도, 그 나무의 키가 높아서 먼 거리에서도 보여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영적으로 살피면, 그것은 마음의 총명이 교회의 미미한 사항에까지 진리가 닿도록 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에 속한 사항 모두에 진리가 스며든다는 말이다. 이 나무의 잎은 싱싱했다. 즉, 합리적인 생각들이 진실되고 풍부하게 있다는 말이다. 그 열매는 아주 많았다. 즉, 선한 일 역시 선한 원리의 결과로 풍부했다는 뜻이다. 더욱이 이 열매는 세상 사람이 다 먹고 살 만큼 풍부했다. 자라나는 진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부분에 생명과 만족을 주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 그늘 밑으로 찾아 들었다. 마음속의 애정들은 알려진 진리 안에서 쉴 곳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새들이 그 나뭇가지에 깃들었다. 생각들이 알려진 진리 사이에 거주했다는 말이다.
이상 살핀 바의 나무는 삶의 모든 평면에서 자라서 무성해지는 상태, 좋은 조건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즉 거듭나는 상태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한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파멸

그러나 본문에서의 나무는 퇴보되는 마음, 높게 번성해 가는 조건에서 추락하는 마음, 그래서 거의 다 파멸되고 마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파멸의 원인은 인간이 자기만의 사랑에 몰입되어 집착하면서 그 사랑을 목적으로 해서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랑을 고수하려는데 있다. 이 사랑에서 발동되는 악한 원리는 마음 안에서 크게 번성한 진리에 관한 나무의 파멸을 야기시킨다.
이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감독원의 명령으로 찍혀지고 말았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것인데, 신성한 권능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발휘되어 인간의 영적 생명이 지극히 위험할 정도까지 치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각적인 경험을 통하도록 인간을 인도해 가고, 그러는 가운데 항구적인 기초인 좋은 마음 바탕이 회복되어지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 그 상황의 막바지까지 치닫아 그 퇴보하는 단계를 완성시켰을 때 주님께서는 존재하는 상황에 있어야 할 심판을 허용하시어 그 상황이 끝장을 맞이함으로서 새로운 시작이 정신적 생명의 다른 수준에서 만들어지게 해주신다.
그러나 이전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라던 주님의 진리에 의한 모든 지식과 총명은 땅에 떨어져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자아 사랑과 타인을 지배하려는 사랑에 충당하려고 주님의 진리에서 나온 총명과 지식을 뒤집어서 남용했기 때문이다. 선하고 참된 원리가 그 생명과 성장, 그리고 열매의 생산을 계속해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원리가 주님의 선이나 진리로서 받아 사용했을 때만이, 그리고 주님이 인간의 삶에 대해 밝혀 주신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선함과 진리가 악한 목적에로 뒤집어지면 그것을 썩게 하는 마음속의 악과 거짓이 되어 버린다. 이런 마음속에 있는 모든 선한 짐승과 새들은 그 나무에서 떠나도록 경고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나무가 이내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삶을 좌지우지하면 마음속에 있는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은 그 마음에서 분리되어져야 한다.

등걸 (그루터기)

그러나 주님의 무한한 자비는 그 인간의 미래의 회복과 성장을 위해 등걸과 뿌리만은 남도록 설비해 주신다. 그 이유는, 만일 뿌리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다면, 그 뿌리는 적당한 조건하에 새 나무를 자라게 할 수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뿌리란 의지 속에 있는 애정들이다. 근본이 되는 원리들로부터 새 생명은 새 조건하에 자라나 열매를 맺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자기가 익히 아는 원리들을 썩게 만들어 스스로 파괴를 자초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허용할 때, 그는 영적으로 거의 죽은듯한 상태에로 떨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만일 그 사람의 심정 속에 선함에 관한 것이 약간만 남아 있어도 주님은 이 작은 선함을 보존하시고, 주님의 섭리의 인도하심과 교훈을 수단으로 그 조금 남은 선함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잠재한 영적 생명을 끌어내시어 새로운 성장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그 인간이 빠지고야 말 영원한 죽음, 즉 영적 죽음에서 유보되게 배려하신다. 그러면서 주님은 자연적인 선함과 진리에 관한 지식 가운데에 그를 붙잡아 두시는 방법으로 새로운 성장을 행할 수 있으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그분의 말씀의 글자에서 나오는 빛 가운데 인간의 마음을 붙잡아서 그가 주님의 계명에 따라 자기 행동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와 같이 말씀 글자에 있는 명령들은 한 인간이 삶의 실제적인 악들에 빠지는 것을 방어하게 해 주고, 더불어 실제의 악들에 자신을 고정시킴에 따라 야기되는 영적인 죽음에서도 방어해 주시게 된다.
이런 방어가 철과 놋쇠 사슬로 표현되고 있고 이 사슬들이 본문에 서술된 바대로 이 나무의 그루터기를 묶고 있는 것이다. 글자대로 인간이 나무의 등걸을 보존시킬 수 있는 길은 그 등걸을 강한 고리(사슬)로 동여맴으로서 비나 바람 그리고 서리가 그 등걸을 쪼개지게 하거나 썩게 만드는데서 방어되게 하는 것이다. 이 사슬이 시련의 때에 인간 마음에 주어지는 보호 수단이다. 쇠사슬이란 자연적인 진리, 또는 글자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놋쇠 사슬이란 자연적인 선을 표현한다. 그래서 어떤 한 인간이 악에 빠질 때, 그는 하느님 말씀의 글자가 묶어 주는 영향 밑에 보존되어 질 수 있다. 즉 그가 일상 생활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 사람 심정 속에 있는 잠재적인 선은 무엇이든지 보존될 수 있고, 이 선이야말로 새로운 영적 성장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묶은 등걸과 뿌리가 “풀밭에 버려두었다.” 이는 인간의 인격이 형성되는 곳인 일상 생활 안에 있는 자연적인 것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 사이에 놓여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소(ox)처럼 풀을 뜯고…”라는 22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등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셔야 할 것이라 했는데, 이는 하느님 말씀 속의 진리들이 일상 생활의 세부 사항에 응용될 때 그 진리가 마음에 닿게 될 것임을 뜻하고 있다.

짐승들과 어울려…

그러나 퇴보되는 인간은 “사람의 정신을 잃고,” 자연적 충동에 의존하는 짐승들 같이 되어진다. 이런 사람의 애정의 질은 더 이상 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이다. 이럴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의 일부가 모독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의 지성은 영적인 빛 속에서 영적 진리를 보는 능력인 영적 합리성에 속하는 인간 특성을 더 이상 즐기지도 못한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인식되는 주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기 본래의 위치로 전락된다. 이렇게 전락된 상황은 그로 하여금 본문에서 짐승으로 표현되는 악령과 정신적인 연합을 초래하고야 만다.

일곱 번

본문에서 “…일곱 해를 지내야 하리라, let seven times pass over him”라고 언급되는데, 이를 보다 더 글자대로 말한다면 “…일곱 번 바뀔 것이라, seven times shall change upon him”가 되기도 한다. 글자에서의 해(또는 때, times)는 영적일 경우 해나 때에 관해 언급하는게 아닌 정신적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이란 숫자는 상징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바, 이는 완성함과 거룩함이다. 두 의미는 실상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거룩함이란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기를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해” 또는 “일곱 때”란 타락한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선이 그를 진정한 인간 삶으로 회복시켜 주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정신적 상태의 연속되는 변화의 완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썩어진 마음속의 낡은 것들은 거룩함의 내향적 삶이 싹트기 전 완전히 닦아 내 지도록 스스로 허용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인간 왕국을 다스리는 분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십니다”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가르쳐 진다. 이는 하느님의 원리가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통치한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말해지는 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시고 그런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히시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신다”고 적고 있다. 겸손한 사람(천한 자, basest of men)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성품에 관계되는게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관계된 말이다. 이는 천한(humble), 비천한 지위(humble position),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low station)에 관계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간혹 사회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을 일으키시어 왕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읊는다.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올리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끌어내시어 귀인들과 한 자리에, 백성의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신다” (시편 113:7-8). 그리고 누가복음 1장 52절에서,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라고 노래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위의 사항들을 마음속에서, 인격 속에서 행하시되, 우리가 자기 찬양을 내려놓고 과거에 경멸해 왔던 거듭나는 사랑에 있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인 특질을 찬양할 때까지 계속 행하신다.

나무로서의 느부갓네살

성경에서 명명되는 인물 중의 일부는 오로지 표징적일 뿐, 실제의 개인을 암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실제의 인물로서 서기 육 백년 전에 살았던 바빌론의 아주 유명한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학과 건축에 관한 거창한 업적을 창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개인적 야망은 마침내 그를 사악한 인물로 치닫게 해서, 아마 낭광(lycanthropy, 자신을 이리 따위의 야수라고 여기는 정신병)으로 알려진 특이한 형체의 사악함에 몰입된 듯하다. 이런 병적 증세는 쉽게 인간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해서 사악한 인간과 쉽사리 유대 관계를 맺는 악령에 휘말린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주님을 잊게 될 때, 쉽게 빠지고 마는 거짓들이나 천한 오류들을 표징한다. 이러면 마음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요소들은 축출되고, 인간의 동물적인 요소들이 그 인간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짐승처럼 생각하고 짐승들에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한 마디로 그는 합리적인 인간 삶이라기 보다 동물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확실한 왕국

그러나 만일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가 인간 안의 어떤 새로운 선을 발달시킬 수 있다면, 그는 합리적인 인간다움을 회복하여 그의 영적 왕국은 그를 위해 확실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수단이 바로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해석해 주면서 충고한데에 나타나고 있다. 즉 “선을 베풀어 죄를 면하시고 빈민을 구제하셔서 허물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실 것이다.” 이 충언은 자아사랑과 자아에서 파생된 총명을 드높여 찬양하는 한편 가난과 재난에 방치해두었던 우리의 영적 본성에 생명을 줌으로써 악과 거짓을 중단하고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항구적인 개선의 수단이다.

응용
본문은 선포하기를, “이런 것들이 다 그대로 느부갓네살왕에게 들어맞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서 예언의 글자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는 동안, 이 역사의 외적인 줄거리들은 영적 측면을 상징화 해주고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경우가 잠언 16장 18절의 좋은 예이다. “거만엔 재난이 따르고, 불손에 멸망이 따른다.” 느부갓네살은 타인 위에 군림하겠다는 이기적인 사랑의 영향 아래 죽어 가는 인간 본성을 표현한다. 이런 지옥적인 영은 개인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 세상에서, 저 세계에서도 공히 존재한다.
지상의 인류사 역시 지나친 야망에 관한 많은 실예를 제공한다. 그 야망들은 정신적 측면에서, 물질적 측면에서, 어느 측면이라도 좌지우지하려 드는 것이다. 크시륵세스(xerxes), 시이저, 나폴레온, 기타 많은 자들이 인간 역사의 지평선을 타고 찬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한 종말 속에 침몰되었던 것이다.
우리 각 개인의 자그마한 인생 속에서도 위의 인물들이 지녔던 비슷한 자기 찬양의 영은 우리 인생 과정 속에서 줄을 잇고 있으면서 우리를 지배하려 든다. 그러나 가장 행복해지는 것은, 우리가 인생 경력을 쌓는 가운데 가능만 하면 빨리 우리 속에 든 지독하게도 악질적인 지옥적 본성을 발견하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악을 거절하고 저항하면서 빛과 안내를 주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때로 이런 악들은 이렇게 자신에게 묻는 경우에도 발생된다. “왜 우리 주님은 내가 원하는 방법과 같은 측면에서 나를 잘되게 해주시지 않는가? 내 생각도 꽤 주님의 생각과 맞는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의 정신 상태가 영적으로 번영하지 않고 있다면, 필시 엇갈리는 바, 그 이유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건설하는데 요구되는 충분한 반석이 마음과 생활 속에 아직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나무가 찍어지도록 허용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법칙이 우리 인생 경험을 통치해야 함을 보고 스스로 찾을 때까지,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받도록 준비가 될 때, 우리를 위한 사랑과 선함으로 가득 찬 그분의 의지에 우리의 자아 의지는 반대되고 있음을 지각할 때까지 그분은 우리 속의 나무인 원리가 일곱 번이나 찍어지도록 허용하신다. 다시 말해 자아가 주님 앞에 송두리째 허물어 질 때까지 우리의 자아가 찍힘을 허용하신다. 이러고 나면, “주님의 기운이 내리덮쳐,…아주 딴 사람이 될 것이다” (사무엘상 10:6).

38
향연과 벽에 써진 글

성서 본문: 다니엘 5장 1-28절

1. 벨사살왕이 잔치를 베풀고 만조백관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신 일이 있었다. 2. 벨사살은 거나하게 되자 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하여 온 금잔, 은잔을 내 오라고 하였다. 왕은 고관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그 잔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3.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집에서 약탈하여 온 금잔이 나오자 왕은 그 잔으로 고관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4. 이렇게 술을 마시며 금은동철이나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는데 5.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서 등잔대 맞은 쪽 왕궁 벽에 붙어 있는 판에 글자를 썼다. 왕은 글 쓰는 손을 보고 6. 새파랗게 놀랐다. 그는 머리가 아뜩해지며 허벅지가 녹는 듯하고, 무릎이 떨려 7. 마술사들과 점성가들과 점장이들을 불러 들이라고 고함쳤다. 재사들이 대령하자 왕이 말했다.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어 주는 사람은 자주색 도포를 입혀 주고 금목걸이를 걸어 주며 이 나라에서 세째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 주리라.” 8. 그러나 불려 나온 왕실 재사들 중 아무도 그 글을 읽고 뜻을 풀어 내는 사람이 없었다. 9. 벨사살왕의 얼굴빛이 달라지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고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10. 그 때 왕비가 고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회장으로 올라 가 아뢰었다. “임금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그렇게 안색이 달라지시도록 당황하실 것은 없습니다. 11. 임금님의 나라에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명석하여 지혜롭기가 하느님 같다고 소문난 사람입니다. 선왕 느부갓네살께서 그를 마술사들과 술객들과 점성가들과 점장이들의 수령으로 임명하신 일까지 있습니다. 12. 임금님께서 벨트사살이라고 이름을 주신 다니엘이 그 사람입니다. 그는 신통력이 놀라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꿈이나 수수께끼나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잘 풀어 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다니엘을 부르시면 이 글을 풀어 드릴 것입니다.”
13. 그래서 다니엘이 불려 나오자 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바로 유다에서 포로로 끌려 온 다니엘이란 사람인가? 14. 그대는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서 머리가 명석하여 지혜가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15. 나는 재사들과 마술사들을 데려다가 저기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이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 뜻을 풀지 못했다. 16. 내가 들으니, 그대는 무엇이나 다 잘 알아 내고 어떤 수수께끼든지 풀 수 있다던데 이제 그대는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이하여 보아라. 그리하면 그대에게 자주색 도포를 입히고 금목걸이를 걸어 주며 그대를 이 나라에서 세째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 주리라.”
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했다. “임금님께서 주시겠다는 선물은 거두시고, 그 사례는 다른 사람에게나 내리십시오. 그래도 저는 임금님께 저 글을 읽어 드리고 뜻을 풀이하여 드리겠습니다. 18. 임금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나라를 강대하게 하셔서 영화와 영광을 떨치게하여 주셨습니다. 19. 하느님께서 그렇게 선왕을 위대하게 해주셨으므로 인종과 말이 다른 천하 만민이 모두 선왕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선왕께서는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올려 앉히기도 하고 내려 앉히기도 하셨습니다. 20. 그렇게 마음이 높아져서 거만을 떨며 자기 생각만 내세우시다가 그만 옥좌에서 쫓겨 나 영화를 빼앗기고 21. 세상에서 쫓겨 나 그 생각이 짐승과 같아져서 들나귀하고 어울려 지내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몸을 적시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의 왕국을 다스리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야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신 것입니다. 22. 그분의 아들이신 임금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고도 겸손해지기는커녕 23. 오히려 하늘의 대주재를 거역하시고 그분의 집에서 쓰던 잔들을 이 자리에 내어다가 대신들과 왕비들과 후궁들과 함께 그 잔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금은동철이나 보석으로 만든 신상들,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안에 쥐고 계시는 하느님, 임금님의 일거 일동을 지켜 보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으셨습니다. 24.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손가락을 내 보내시어 저 글자들을 쓰게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25. 저기 쓴 글자들은 ‘므네 므네 드켈’ 그 다음은 ‘브라신’입니다. 26.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시고 마감하셨다’는 뜻입니다. 27. ‘드켈’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브라신’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샤에게 갈라 주신다’는 뜻입니다.”

개요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중단되고 자아 사랑이 교회 안에서 우세해질 때, 바빌론이라는 영이 자라 오른다. 이 영이란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특히 인간의 영을 통치하기를 사랑하는 것, 종교의 목적을 은밀하게 타인을 지배하려는 데에 두는 영이다. 이 영은 결국에 가서는 신성한 말씀 속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면서 말씀이나 주님 위에 자신을 세워 찬양하게 된다. 이런 영이 교회 속에 팽배될 때 교회는 파괴되는 것이다.

글자적인 이야기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이지만 본문에서 직계 비속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갈대아 이름인 벨사살은 하느님의 왕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과거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빌론에 잡혀갔을 때 갈대아 말로 다니엘에게 주어진 이름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갈대아 왕 벨사살과 히브리 예언자 다니엘인 벨트사살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왕인 벨사살은 감각적인 취미와 습관에 젖은 사람으로 이교도의 우상 숭배자이다. 게다가 그는 기독교적인 미덕의 표준이 전혀 없는 고대 동양에 전수된 다첩제나 음란한 생활이 몸에 베어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큰 잔치를 벌이고 거나하게 포도주에 취하자, 그 향연을 더 떠들썩하게 해줄 것 같은 착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과거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여호와 제단에서 약탈해 온 아름답고 가치 있는 금, 은잔을 가지고 마시는 것이었다. 이 거룩한 금, 은 집기들은 오로지 여호와를 예배하는데에만 사용되었었는데, 그 왕은 낮은 마음의 평면, 천한 마음 안에 있는 음란한 동물적 쾌락을 돋구기 위해 거만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행동은 신성을 모독한 행동인 바, 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집기들로 마셔 취하면서 그들은 생명도 힘도 없는 이교의 우상들을 찬양했다는데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환상

그들이 이렇게 흥청대는 사이에 심판을 함축하는 환상이 그들에게 밝혀졌다. 그들의 영적 눈이 열리어져서, 왕을 포함한 그들 일부가 벽에 희미한 글자를 쓰고 있는 손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이 광경은 영적 세계에서 있어진 것이고, 영적인 눈이 그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계시된 것이다. 진짜가 아닌 물체가 영계에서는 주님이 바래신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때로는 천사들이 생각하고 느낀 것, 그들이 바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꾸준히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형상이 감각적인 것뿐인 왕을 새파랗게 놀라게 했다. 따라서 그는 박사들을 불러 신비한 글자를 읽고 해석하도록 했다. 그들은 그 글을 읽고 뜻을 풀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흥청대는 향연에 참석하지 않았던 왕비, 그런데 연회장이 이상한 표적 때문에 흥분된 것에 이끌려 오게 된 이 왕비는 왕으로 하여금 다니엘을 불러 그 글을 해석하도록 권고해 주었다. 아마 이 왕비는 왕비의 어머니일는지 모르고, 어쩌면 통치자의 왕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녀는 향연에 초대되지도 않았지만 다니엘을 기억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보다 나은 인격 소유자일 것 같다.
불려 나온 다니엘은 벽에 써진 글을 읽어 해석했다. 그리고 그는 왕과 왕국에 대한 심각한 심판을 선포했다. 그날 밤, 도성을 포위한 메대왕 다리우스에 의해 벨사살은 살해되어 그 왕국이 다리우스에게 넘어 감으로서 그 심판은 글자대로 성취되었다. 이는 그 줄거리 속에 더 중요하게 담긴 영적 이야기의 겉에 불과할 뿐이다.

바빌론과 향연

바빌론은 타인을 통치하려 드는 이기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바빌론 왕이란 타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악한 사랑을 이끌고 가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향연 중에서, 좋은 의미의 향연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 선함과 진리를 받는 것이지만, 악인의 경우는 주님으로부터 선함과 진리 모두를 받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원리에 반대되는 자신의 악과 거짓으로 향연을 갖는 것이다.
타인 위에 군림하려 드는 악인의 이기적인 사랑이 적극성을 띌때, 왕이라는 거짓 원리가 정신적인 향연을 베푸는 모습이고, 그 향연에 참석한 만조 백관이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좀 똑똑하다고 자찬하는 원리들이다. 왕자들이란 우리를 이끌려는 모든 진리들, 왕비란 자연적인 애정들, 첩들이란 비질서적인 감각적 애정들을 말한다. 모든 이런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정신적 향연에 참가할 때, 참석된 모든 것들은 선함이나 고상함에 있는 법칙이 무시된 채 음란해져 흥청대고 마는 것이다.
악인이 위와 같은 조건 속에 있으면서도 교회나 말씀에서 축출되는 진정한 교리들을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포도주에 만취되어 있는 동안, 즉 자기가 아는 진리에 흠뻑 젖어 있는동안 그는 교회의 진정한 교리를 자신의 거짓 관념에 일치시키려고 애쓸는지 모른다. 주님의 제단에서 강취해 온 금과 은 집기들은 교회의 진정한 교리를 뜻한다. 주님 성전의 집기에 딸아 놓은 포도주는 악한 인간 자신의 관념들이다. 따라서 왕과 만조 백관들이 성전 제단에서 강취해 온 거룩한 집기로 포도주를 마시는 본문의 모습은 악과 죄라는 잔치에 모든 정신적 능력을 불러모으는 한편, 주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악한 삶에 맞춰지게 강요하겠다는 정신적 측면에서의 대칭물인 것이다.

모독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감각적 향연에서 주님 성전의 집기들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거룩한 것을 남용함으로 인해 신성을 모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성한 진리들을 자신의 이기적인 악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때, 우리 역시 알고 있는 진리들을 의도적으로 남용함으로서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짓게 된다. 이런 한 예를 복음서에서 찾아보면, “이것이 바로 전해 오는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냐?”라는 구절이다 (마가복음 7:13).
모독 죄는 심각한 악인데, 그 이유는 그 죄가 무식해서 있게 되는 단순한 죄가 아니라 고집스런 악이 갖는 이중성 때문에 야기되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에 대한 깊은 속성이 여호와의 집기로 포도주를 마시면서, 금속이나 나무, 돌에 불과한 우상들을 찬양하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의 모습은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와 교회의 교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이를 수단으로 주님이 최상의 분이심을 부정하고 주님 위에 자신을 놓고 찬양하는 사람을 그려 주는 것이다.

우상들

금 우상은 자아 사랑이라는 악이요, 주님의 선함을 모독하는 악이다. 은 우상은 거짓인 바, 이것이 자아 사랑의 악을 숭배하는 마음속에서 신성한 진리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 둘 다 파괴한다. 놋 우상은 자연적인 악, 또는 자연적 평면에 있는 악으로 이 악은 주님의 계명을 지켜보려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그의 자연적인 선함을 부패시킨다. 쇠 우상은 행동에서 딱딱해진 글자적인 규칙으로 이는 인간 삶을 위한 신성한 규율에 반대되어 있다. 돌 우상은 진리로서 받아들여진 글자적 서술들, 그럼에도 그 서술을 이상하게 사용하는 바, 결과에서는 거짓을 만들어 낸다. 나무 우상이란 자기의 감각적인 삶이 선해지기를 바라면서도 신성한 표준에 의거 그 삶을 선하게 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위의 모든 우상들을 찬양해 대는 이런 저런 사람들은 그들이 주님의 집기로 마시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신성한 말씀 글자를 사용해서 애정 속의 이기적인 악들이나 생각 속의 거짓, 그리고 행동 속의 죄들을 정당화하려 발버둥친다. 이들의 삶은 정작 주님께서 우리 속에 천국을 만들도록 하기 위해 주신 각종 것들을 자기 마음에서 몰아내고 대신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남용, 더럽힘, 모독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거하실 곳, 즉 자기의 심정과 생각에 자아를 놓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심정을 지옥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차가움은 너무 차가워 주님의 사랑도 그것을 따뜻하게 할 수 없고, 이들의 어둠은 너무 짙어 그분의 지혜가 그것을 밝게 해줄 수 없다. 그런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그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악한 것으로 자신 속을 다 채우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자신을 심판대로 가져다 놓는다.

심판

궁전 벽에 써진 육필은 왕과 왕국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것이었다. 사람의 손가락 하나가 벽에 글을 쓰는 것을 왕이 보고서 그는 새파랗게 놀랐다. 감각적 삶의 욕망에 푹 빠진 악인이라 해도 때로 그의 제잘난데 따라 곧 닥칠 운명에 대한 사전 경고와 그 징후는 있게 마련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사랑하시는 섭리로 이런 운명을 예방해 주시려 애쓰시지만, 그런 인간은 자신의 인격과 삶에 있어서 결정적 순간에는 자아로 되돌아가고 만다.
당사자를 뒤흔드는 사전 경고인 곤란함은 악인에게도 자연스럽게 있는 바, 그도 자기 이익 추구나 그에 따른 생각들을 타인에게 문의해서라도 자기에게 발생할 것을 예상해 보려 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있는 곤란함은 자기에게 손실을 초래할 것이고 자신의 악하고 이기적인 품질까지 뒤흔들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악인에게서의 손실에는 영적 삶의 손실이라는 것까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런 손실은 아예 발생조차 않는다. 벨사살 왕에 의해 표현되어진 자아에 의존함은 이교도의 점성가들을 불러 벽에 쓰인 글을 해석하게 한다. 그런데 이교도의 어떤 현자도 이 글을 읽지도 해석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란, 우리 자신의 이기적 관념이나 세상적 사상은 우리를 이기적 삶의 위험이나 절박해진 심판에서 건져 줄 수 없다는데 대한 영적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왕비, 흥청대는 향연장에 있지 않았던 여자는 여호와의 예언자 다니엘을 상기해서 그로 벽에 써진 글을 읽고 해석하게 했다. 이 왕비는 마음 안에 있는 보다 나은 것들, 주님이 우리의 어린 시절에 특별히 저장하여 아껴 두신 것을 표현한다. 이로 말미암아 곤란 속의 인간은 주님에게로, 그분의 말씀에로 나아가 빛을 얻게 된다. 예언자 다니엘은 신성한 말씀을 표현한다. 그런고로 다니엘은 벽의 글을 해석해서 왕이 처한 조건과 그에 따른 결과를 명백하게 알려 주었다.

글자 해명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시고 마감하셨다.” 이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흔한 말 가운데, 어떤 것이 마무리되거나 끝에 오게 될 때, “그 수가 다하였다”라고 말한다. “드켈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 즉 인격에 결함이 있다는 말이다. “브라신이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샤에게 갈라 주신다”는 것이다.
글자상의 의미로 볼 때,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점은 다니엘이 벽의 글을 읽을 때는 “므네 므네 드켈 브라신”이라고 읽었는데, 해석에서는 “브라신, Upharsin, 우바르신”을 “베레스, peres”로 말했다는 점일 것이다 (개역 성경 참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해가 곤란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언어의 관용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는 고대 갈대아어 또는 시리아어로 씌어졌다. 단어 “우바르신”은 두 단어, 즉 “and”와 나뉨인 “pharsin”이 합해진 것이다. 갈대아어의 “그리고”란 단어가 “그리고” 에 뒤따르는 명사에 붙여 한 단어로 쓰였던 것이다. 문법상에서 “므네, Mene”와 “드켈, Tekel”은 과거 분사로서 이미 행하여져 온 것을 표현하는 바, 즉 세었고 저울에 달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어 “pharsin”은 능동적인 현재분사로 “나뉘고 있음,” 즉 그들이 지금 왕국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 의미를 설명할 때, 그는 능동적 현재 분사인 “pharsin”을 사용하는 대신, 마치 메대와 페르샤로 이미 왕국이 나뉜 것처럼 과거분사 “peres,” 즉 “나뉘었음”을 사용했다.

위에 대한 영적 의미

영적으로 수를 센다는 것은 사물의 성질에 있는 진짜를 추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의 무게를 달아본다는 것은 그것 속의 선함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래서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 보시고 마감하셨다”는 뜻으로 다니엘이 해석한 것이다. 왕의 나라란 각 개인적 측면에서의 정신적인 왕국인 각자의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이 세어졌다는 것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진리를 계산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각 마음이 이력서를 쓰고 싶을 만큼 써서 다 채웠을 때, 그리고 마음속에 든 지식에서 오는 진리가 다 왜곡되어 질 때, 각자의 마음은 영적으로 셈을 한 것이요, 이력서의 끝줄을 끝내어 심판인 결산을 보게 된다.
“드켈,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즉 선함에 관한 인격을 달아보니 선함이 부족한 것이 발견되어 신실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이라. 야훼는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사무엘상 2:3).
그리고 욥이 고백한다. “바른 저울에 달아보시면 아시리라. 하느님께서 나의 흠 없음을 어찌 모르시랴?” (욥기 31:6).
“베레스,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샤에게 갈라 주신다.” 영적으로 마음을 나뉘게 함은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주님이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시어 그 안에 거할 때만이 진실로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왕국은 선함과 진리 안에 존재하면서 생활로 하나를 이루고 있어야만 하는 왕국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가 아는 진리를 심정과 삶에서 떼어 낸다면, 그는 자기의 영적 왕국을 파괴하게 된다. 그 이유는 분리된 마음속에서는 주님이 왕으로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의 인간 마음의 왕국은 영적 적들, 즉 자신의 악한 사랑과 거짓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교도인 메대와 페르샤는 인간 마음의 악한 상태를 표징하는데, 이 상태 속의 이타애와 믿음, 선함과 진리는 분리되고 그의 정신적 왕국은 악과 거짓의 권세 하에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날 밤 왕은 영적 생명의 손실로 말미암아 살해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표징적인 그림들은 각자의 영적인 인간다움이나 그의 미래의 행복은 자아 사랑이 부추기려는 각종 암시, 이 암시를 정당화하는 거짓들에 강력히 저항하는 매일의 삶에 절대 의존되고 있음을 각 사람 속의 합리성이 가르쳐 주고 있다. 영적 세계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다. 우리 삶의 매일 매일, 그 매일 속에 있는 갖가지 사건이나 잡다한 일들은 우리 앞에 있는 벽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있다. 자연적인 삶에 흥미가 있는 만큼 영적인 삶에도 흥미를 두어 보다 폭 넓게 깨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의 벽에 써진 글을 읽어 내어, 해석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벽에 써진 글, 선하지도 진정하지도 않은 인격 속에 든 모든 것에 떨어지는 심판을 매일 발견해야 한다. 우리 마음과 삶에 있는 악과 거짓에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너를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른다.” “조금 맞았다고 하여 웬 엄살을 이렇게 부리느냐? 그 아픔은 쉽게 가시지 않으리라” (예레미야 30:15

39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환상

성서 본문: 다니엘 7장 2-18절, 23-27절

2. “다니엘이 말한다. 나는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하늘 끝 사방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가 출렁이는데, 3. 바다에서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 왔다. 4. 그 첫째 것은 몸이 사자같이 생겼고 독수리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 짐승의 날개가 뽑혔다. 그러더니 땅에서 몸을 일으켜 사람처럼 발을 딛고 서는 것이었다. 그 짐승은 사람의 마음까지 지니게 되었다. 5. 둘째 짐승은 곰같이 생겼는데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짐승은 이빨 사이에 갈비 세 개를 물고 있었는데 어디서 ‘일어나 고기를 실컷 먹어라’ 하는 말이 들려 왔다. 6. 내가 또 바라보니 이번에는 표범같이 생긴 짐승이 올라 오는데 옆구리에 새 깃이 네 개 달려 있었고 머리도 넷이었다. 그 짐승은 권력을 받았다. 7. 그 날 밤 꿈에 본 네째 짐승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힘도 무척 세었다. 쇠로 된 이빨로 무엇이나 부러뜨려 먹으며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았다. 먼저 나온 짐승들과는 달리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다.
8. 그 뿔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 몸에서 작은 뿔 하나가 새로 돋아났다. 그러자 먼저 나온 뿔 셋이 그 뿔에 밀려서 뽑혀 나갔다. 그런데 그 작은 뿔은 사람처럼 눈이 있고 입도 있어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9. 내가 바라보니
옥좌가 놓이고 태고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옷은 눈 같이 희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그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 그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또, 억조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
그는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셨다.
11. 그 뿔이 계속하여 외쳐대는 건방진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면서 보고 있자니, 그 짐승은 나의 눈앞에서 처형을 받아 시체가 박살이 나고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었다. 12. 다른 짐승들은 권세가 빼앗겼으나 목숨만은 얼마 동안 부지하도록 버려졌다.
13.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14.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15. 나 다니엘은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 이상한 광경이 머리를 어지럽히게 하였다. 16. 그래서 거기 서 있는 한 분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설명해 주었다. 17. ‘이 큰 짐승 네 마리는 세상 나라의 네 임금을 가리키는데 18. 마침내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물려 받아 길이 그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토록 이어 나가리라는 뜻이다.’

23.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째 짐승은 네 번째로 일어날 세상나라인데
그 어느 나라와도 달라,
온 천하를 집어 삼키고 짓밟으며 부술 것이다.
24. 뿔 열 개는 그 나라에 일어날 열 임금을 말한다.
이들 임금 다음에 다른 임금 하나가 일어날 터인데
그 임금은 먼저 일어난 임금들과는 달라
그 중 세 임금을 눌러 버릴 것이다.
25.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욕을 퍼부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을 못살게 굴 것이다.
축제일과 법마저 바꿀 셈으로
한 해하고 두 해에다 반 년 동안이나
그들을 한 손에 넣고 휘두를 것이다.
26. 그러나 마침내 재판을 받아, 주권을 빼앗기고
송두리째 멸망하여 버릴 것이며,
27.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에게
모두 돌아 올 것이다.
그 나라는 영원히 끝나지 않아
모든 나라가 그 나라를 섬기고,
그 명을 따를 것이다.’”

개요

제 7장은 지상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를 계속 하면서 있게 되는 교회들의 영적 조건에 관한 계시를 담고 있다. 바빌론에 의해 마지막으로 표현된 교회는 그 교회의 첫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진리에 관한 이해성을 가졌었지만, 두 번째 상태에서 그 교회는 성경의 글자만을 연구했고, 세 번째 상태에서는 연구한 것이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왜곡시킨 바, 그 거짓이 진리인 냥 드러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믿음만으로 구원됨, salvation by faith alone”을 형성하여 가르치면서, 그 교리를 성경의 글자로 확증했는데 이는 외관적 수준에서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교리의 이론(heresy)은 교회의 영적 생명을 거의 죽은 지경으로 파괴한 바, 첫 기독교회는 처방 측면에서 끝을 맺게 되어 새로운 기독교회가 일어나 기독교인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실제에 응용하게 된다.

짐승들

환상에서, 다니엘은 네 짐승을 보았는데, 이들은 바다에서 올라 왔고, 이들은 각기 특이하게 모양이 달랐다. 이 네 짐승들은 네 개의 일반적 교회들의 상황과 그 활동, 또는 지상의 인간에 있는 교회의 일반적 상태들을 표현적으로 그리고 있다. 직역주의자(literalist)들은 본문같은 표현적인 계시들을 물질적인 것이나 이 지상의 나라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에게 적용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중 가장 심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영적 본성에 있는 원리나 그 활동 측면에서 인간과 관계되고 있다. 따라서 그 적용은 인간의 영적 활동들이 발생하는 영계의 작용에 관계된다.
다니엘이 자기가 본 것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가 물었던 천사는 그것들이 네 왕을 언급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대화는 다니엘이 본 영계, 그가 행동했던 영계에서 있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그는 선각자로서 영의 눈이 열렸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사는 우리가 읽는 글자대로의 방식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표징적인 것인 바 그의 언어는 그가 말하는 환상 속의 것들만큼이나 표징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천사에게 있어, 지상은 물질적 지상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지상이라 불리는 영적인 것, 즉 인간 마음의 지상적 측면의 것인 자연적 마음으로 이는 천국적 측면인 영적 마음과 구별되는 지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물질적인 지상의 통치자만을 언급하는게 아니고, 마음속의 지상인 자연적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예언, 또는 모든 계시에서 중요한 의미는 언제나 그 전체적 광경이 인간 마음 안에 놓여져 있음을 미리 감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네 짐승은 네 개의 다른 왕들, 즉 각기 다른 통치 원리가 마음을 좌지우지하여 있어지는 인간 마음의 네 개의 연속적인 조건들을 표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짐승들의 표징적 전말에서 우리는 퇴보하는 인간 마음이 점차 거짓과 악 그리고 죄로 고정되는 조건에로 몰락되는 영적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런 인간의 마음과 삶에서 주님의 교회는 결국 파괴되고 마는 것도 보게 해준다.

네 바람

다니엘이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는 말은 교회의 캄캄한 상태, 그리고 진리를 외적이고 표징적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다루어 내면의 영적 진리가 명확히 선포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늘의 “네 바람이 일면서 큰 바다를 출렁거리게 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신성한 영향이 인간 마음에 역사 되는 것을 표현한다. 바람을 더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3장 8절을 더 읽어보면,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신성한 영향(Divine influences)이 인간 위에 놓일 때, 모든 각 사람은 각자가 지닌 인격의 품질에 따라 그 영향을 만나, 그것을 선용하거나 남용하게 된다. 선한 사람의 경우, 그는 신성의 유입을 받아들여 자기의 심정을 신성한 사랑에 열고, 자기의 지성을 신성한 지혜에 열지만, 악인의 경우, 그는 주님의 선함과 진리의 품질을 뒤집어 악과 거짓으로 변하게 한다. 큰 바다는 영적으로 보면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요, 이 마음이란 모든 것들이 수집되어 저장된 기억이라는 물의 집합인 것이다. 따라서 큰 바다에 작용한 하늘의 네 바람이란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미치는 신성한 영향에 대한 그림인 것이다.
네 바람이란 네 방위,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북쪽은 가장 어두운 영적 방위를 표현하는데, 이는 신성한 영향력이 가장 외적인 형체, 또는 가장 미미하게 느껴지는 형체인 신성한 원리, 즉 자연적 진리로 올 때를 말하고, 한마디로 실제의 규율이 이에 해당된다. 남쪽은 가장 밝은 방위인 바, 이는 인간 마음을 가장 밝게 계발하는 진리, 즉 영적 진리로 오는 신성한 영향력이다. 동쪽, 이는 태양이 떠오르는 방위인 바, 신성한 사랑의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해 주고, 이 사랑은 차고 어두운 세계에 떠오른다. 따라서 동쪽은 영적 선에 해당되는 방위이다. 그리고 서쪽은 자연적 선이다. 바람이 바다에 분 결과로 네 짐승이 연속해서 바다에서 올라 왔다.

첫 번째 짐승

첫 번째 짐승은 사자 같았고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다. 짐승의 왕으로 알려진 사자, 매우 강한 짐승인 사자는 힘을 표징하는 바, 권능적 측면에서의 진리를 말한다. 좋은 의미에서 주님도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 불리셨는데, 이는 영적인 왕, 신성한 진리가 체현하는 신성한 권능을 말한다. 그래서 사자, 즉 권능적 측면에서의 진리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것이다. 날아오르는 측면에서 매우 강력한 독수리는 매우 높이 날아 드넓게 멀리 있는 지점까지 관찰하는 바, 독수리는 생각하여 자기 마음을 높은 데로 승강시켜 높은 관점에 있는 진리를 지각하게 하는 인간의 합리적 생각을 표현한다. 따라서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란 좋은 의미로 볼 때, 합리적 사고를 동반하여 영적 진리를 지각하게 해 주는 교인들 마음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다.
이런 마음은 교회 초기에 있던 마음의 상태였다. 그러나 이 날개들이 뽑혔는데, 이는 지각한 영적 진리의 빛에 따라 사는데 실패하므로서 마음속의 합리성이 쇠약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자는 몸을 일으켜 사람처럼 발을 딛고 섰는데, 이는 인간이 삶의 법칙을 이해했던 바대로 올바른 삶을 자기 표준으로 삼아 자기들 마음을 승강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분투 노력으로 그들은 어느 수준까지는 진짜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이 사자에게 사람의 마음이 주어졌다고 표현된 것이다.

둘 째 짐승

그러나 새로운 상태가 인간에게 왔는데, 이것이 털 많은 짐승, 곰으로 표현되고 있다. 털이란 신체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따라서 털이 길어 돌출한 모양새를 가진 짐승, 곰은 글자적 진리, 외적인 진리, 즉 성경의 글자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인격 측면에서 볼 때, 곰은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외적으로 이해하는 인간 마음을 표현한다. 즉 성경의 글자적 측면에 있는 진리는 보지만 그 글자 속의 영적인 측면을 이해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곰이 물고 있는 세 갈비란 위의 인간 마음이 붙들고 있는 말씀 글자에 관한 지식은 충만한 상태이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빨은 물고만 있었지 씹어 삼켜 소화한 것은 아니다. 즉 성경 의미에 관한 생각이 그 의미의 바깥쪽 측면일 뿐 성경의 안쪽에 관한 생각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런 모습은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 관한 외적 지식은 대단할 정도로 많은 양을 소유했음에도 성경의 안쪽인 영적 의미에는 마음이 열리지 못한 시대, 즉 성경을 글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교회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 상황의 자연스런 결과는 교회 속의 영적 생명을 먹어 치우는 것, 또는 표징적으로 볼 때, “고기를 실컷 먹는” 것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마음 안에 있는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 관한 지식은 그 의미의 오류 속으로 점차 침몰되기 때문이다.

세 째 짐승

이런 식으로 교회의 상태는 다시 변화하여 더욱 나쁜 상태로 빠져드는데, 이것이 표범 같은 짐승, 즉 약삭빠르고, 믿을 수 없고, 맹렬하고,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특성들은 거짓을 사랑하여,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왜곡시키고 전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물이 행동을 개시하는데서 그것들은 네 날개를 이용했다. 둘이 포개진 숫자 넷이란 생각하는 힘이 의지와 이해성이라는 양 측면에서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거짓 사상들은 지성에서 보여지고, 심정에서 확증되어 행동에서 체현되고 만다. 이 표범이 네 머리를 가졌다는 것은 교회의 상태에서 인간 마음의 내면에 있는 원리들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글자적 오류와 거짓과 결합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 마음속에서 그 표범은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네 째 짐승

이런 교회의 상황은 영적 하강의 길로 더 빨려 든다. 이런 상황에서의 인간의 정신 상태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겼으며 힘도 세어 파괴적인 짐승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글자적 의미를 감각적 측면에서 잘못 이해함으로 유도된 상황인 바, 그들은 신성한 계명에 따른 삶, 선한 삶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을 설득이라는 추론으로 물리쳐 내고, 동시에 인간 구원은 “믿음만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가능해졌다고 착각해 버린다. 따라서 영적 인격이 어떠한지는 별 관심이 없다. 이로 인한 성경 글자의 잘못된 견해는 교인들의 영성을 파괴하고 만다. 이 짐승의 쇠로 된 이빨이란 완악하게 감각적인 글자적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성경 글자를 분쇄해서 인간 마음에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말이다. 네 째 짐승은 무엇이든 부수고 짓밟는 것을 기뻐했다. 이는 타인을 통치하기를 기뻐하는 영을 표현한 것이다. 바빌론으로 표현되는 악한 영이 교회를 장악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들은 교회 속의 거룩한 것들, 신성한 말씀까지도 수단으로 이용해 교회에서 강한 권력자로 자신을 부상시킨다. 이것들은 기울어 가는 교회, 죽어 가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이고, 인간 마음 측면에서 보면, 인간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가 있어야 할 장소를 찬탈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 끔찍한 짐승은 뿔 열 개를 가졌는데, 그들의 거짓과 오류들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설득시키는 힘이 굉장하다는 것을 말한다.

작은 뿔

그런데 그 몸에서 또 다른 뿔, 작은 뿔이 돋아났다. 이 뿔은 사람처럼 눈이 있고 입도 있어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 작은 뿔이 다른 뿔 셋을 뽑히게 했다는 것은 성경의 글자에서 까지도 반대되고 더나아가 글자적 지식을 남용하는 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행동이 사람 눈처럼 생긴 눈의 도움을 받아 저질러졌다는 것은 성경 글자의 지식을 남용하되 자신의 악을 변호하기 위해 영적 총명의 가상적인 것들을 가지고 그 일을 치른다는 것을 표현한다. 작은 뿔의 입이란 거꾸로 된 교회에 의해 말해지고 가르쳐지는 교리가 겉보기에는 성경의 글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

고대 시대

위의 모든 것들, 교회를 썩게 하는 모든 것들은 첫 기독교회 위에 있어진 심판을 초래하였는 바, 이 마지막 심판은 1770년경 영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영적 조건들에 있어졌다. “태고적(the ancient of days)부터 계신 이”란 사람의 아들과 구별해 볼 때, 신성한 아버지, 신성한 사랑 또는 신성한 선함이고 사람의 아들이란 신성한 진리, 신성한 인성인 바, 이에 의해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말씀을 글자와 영이라는 양 측면에서 이해하는 영적 교회인 새 기독교회를 건설하셨다. 태고적부터 계신 이에 관한 내용인 불과 광채, 그리고 그분의 옷과 머리털이 희다는 것은 신성한 아버지의 특성이 사랑과 지혜, 그리고 순수함인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떠받들어 모시는 천만 신하들이란 천국과 영적 교회에서의 그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표현한다.
주님의 오심에서 심판이 집행되어 끔찍한 짐승의 모든 권세와 유보되었던 다른 짐승의 권세도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악의 권세에서 구속되어졌다. 심판을 위해 열린 책들이란 인간의 정신적인 책, 즉 세상을 사는 동안 자신들 스스로 써 놓은 마음의 상태들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 즉 성경 글자를 타고 오셨다. 글자로 오심은 자신들의 악한 삶을 변명하고자 성경 글자를 남용하고 뒤집은 이들을 심판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정도와 수준에서 그분의 재림은 인간의 내향적 마음에 영적으로 오신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어 주권과 영화와 나라를 주님께 모두 돌리게 되어 마음속의 뭇 백성과 나라인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 모두에 주님의 영원한 왕국이 세워진다는 말이다.

짐승들과 왕들

짐승이 글자적 역사상의 어떤 왕들을 표현함으로서 본문에 대한 외관적 해석도 가능토록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인격들이 성경 글자의 내면인 영적 측면에 있는 진리를 지각 할 수 있기 전의 교회 시대 동안 성경을 외관적으로 이해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배려 때문인데, 한 마디로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사용할 수 있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섭리는 대상물이 당장 받을 수 없는 내용의 경우 간접적 수단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도하심이 첫 기독교회에서 있어졌다. 이 교회는 자연적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의 형태였는 바, 그들의 경우, 첫 짐승은 갈대아 왕을, 둘째 짐승 곰은 메디아왕을, 셋째 짐승 표범은 페르샤왕을,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생긴 네째 짐승은 마게도니아, 또는 그리이스왕을 각기 표현한다고 알고 있다. 또 작은 뿔은 시리아의 위대한 왕(Antiochus Epiphanes)을 표징한다고 믿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사실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왕들이나 나라는 표징적일 뿐이고, 표징된 것들은 내향적인 영적 교회의 조건이 변하는 가운데서 인간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들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표징적인 짐승들은 계시록에서 명명되는 다른 짐승과 매우 유사하다. 계시록의 짐승 역시 인격의 조건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본문과 마찬가지이다.

경고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가 기울어가는 상태는 우리 각자에게 경고를 꾸준히 보내고 있다. 하늘의 바람들이 일어, 우리의 자연적 마음인 바다를 출렁거리게 할 때, 즉 우리가 하느님의 영향력을 느끼고, 신성한 진리를 지각할 때, 만일 그 진리를 꽉 붙잡아, 그 진리를 더 명백하게, 더 승강되도록 해 나간다면, 감각이 늘 주고 있는 오류로 인해 그 진리의 이해가 희미해진다거나 뒤집어 질리 만무인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영적 사랑과 지혜 속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의로움 속에서도 살게 될 것이다. 이러면 우리 속에서 주님은 지속될 나라를 건설하시고, 우리 속 모든 나라(생각과 애정)가 그 나라를 섬기고 그 명을 따를 것이다.

40
수양과 수염소

성서 본문: 다니엘 8장 2-26절

2. 내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는데, 그것을 본 것은 내가 엘람 지방의 요충지인 수사의 울래강 가에 있을 때였다. 3. 내가 눈여겨 보니 강가에 수양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 수양은 긴 뿔이 두 개 돋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나중 나온 뿔이 더 길었다. 4. 그 수양이 뿔을 휘두르며 서쪽, 북쪽, 남쪽으로 치닫는데 어느 짐승도 그 수양을 당해 낼 수가 없었고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수양은 제멋대로 날뛰며 스스로 강하여졌다.
5. 저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서쪽에서 수염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날쌘 몸짓으로 온 세상을 휩쓸었다. 그 수염소의 두 눈 사이에는 외뿔이 완연히 돋아 있었다. 6. 수염소는 강가에 서 있는 조금 전의 그 수양에게 쏜살같이 달려 들었다. 7. 수염소가 성을 내어 수양을 받아 그 두 뿔을 꺾어 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수양이 대항할 힘을 잃자 수염소는 수양을 땅에 거꾸러뜨리고 짓밟아 버렸다. 그래도 그 수양을 구해 주는 이가 없었다.
8. 이리하여 수염소의 기세는 매우 커졌다. 그러나 한창 힘을 쓸 때쯤 해서 큰 외뿔이 부러지고 그 자리에 뿔 네 개가 돋아나 사방 하늘로 멋지게 뻗어 나갔다. 9. 그 중 뿔 하나에서 작은 뿔 하나가 돋아나서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나라 쪽으로 줄기차게 뻗어 나갔다. 10. 그 세력은 하늘 군대에게까지 뻗쳐 하늘의 군대와 별들을 땅에 떨어뜨려 짓밟았다. 11. 그는 하늘 군대 사령관까지 업신여기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고, 성소의 터까지 파헤쳤다. 12. 나아가 하늘 군대까지 몰아 내고 날마다 제멋대로 굴었으나 그 하는 일마다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13. 그런데 하늘이 보낸 이 둘이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왔다. “지금 나타나 보이는 대로 날마다 드리는 제사가 폐지되고 돌무더기가 된 이 자리에는 부정한 것이 버젓이 놓여 있으며, 성소와 하늘 군대가 짓밟히고 있는 저 일이 언제까지 갈까?” 14. “아침과 저녁이 이천 삼백 번 바뀌어야 성소가 복구되리라.”
15.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면서 그 뜻을 몰라 애쓰고 있는데 내 앞에 문득 장사같이 보이는 이가 섰고 16. 울래강 너머에서 웬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브리엘, 너는 저 사람에게 환상을 풀이하여 주어라.” 17. 그러자 가브리엘은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그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내가 겁이 나서 엎드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아, 보고 깨달아라. 이 환상은 세상이 어떻게 끝판날 것인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18. 그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린 채 까무러친 나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고는 19.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모두 터뜨리실 세상 끝판에 일어날 일을 너에게 알리러 왔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끝날은 오고야 만다. 20. 네가 본 수양의 두 뿔은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들이다. 21. 수염소는 그리이스요, 두 눈 사이에 돋은 큰 뿔은 그 첫 임금이다. 22. 그 뿔이 부러지고, 그 자리에 네 뿔이 돋은 것은 그 백성이 네 나라로 갈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힘은 첫 임금만 못할 것이다.
23. 죄악이 가득 차
나라가 끝장나게 되었을 때
사나운 임금이 나타나
권모술수를 써 가며
24. 세력을 뻗칠 것이다.
비상한 계략을 짜 내어
무슨 일이든지 해 내고야 말 것이다.
강대국들을 부수고
거룩한 백성까지 부술 것이다.
25. 못된 꾀로 흉계를 꾸며
그 모든 일을 제 손으로 해치우리라.
마음이 방자해져서
많은 사람들을 불시에 덮쳐 멸하고
가장 높으신 사령관에게까지 맞서다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부서지고 말리라.
26. 이것은 장차 정해진 날에 틀림없이 이루어지겠지만
오래 있다가 될 일이니 비밀에 붙여 두어라.”

머리말

이타애(charity), 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에 생명과 번영을 가져다준다. 믿음(faith), 그러나 이 믿음이 이타애에서 분리 될 경우, 뒤집어져 거짓이 되어 간다. 게다가 거짓 추론들로 해서 믿음은 인간 마음에 있어야 할 진리를 흐릿하게 하면서 부패시킨다. 그래서 영적 교회가 더 이상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교회 속에 있는 예배의 영을 파괴한다.

수양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수양과 수염소, 그리고 이들 사이의 싸움이다. 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수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하는데, 이웃을 사랑함은 교회의 영적 원리로서 인간 삶을 영적 수준으로 구별되게 해준다.
성경에서 이타애를 삶의 원리로 삼은 이들을 흔히 양, 또는 주님의 양떼라고 불리고 있고, 주님은 그 양떼의 목자라 불린다. 본문의 수양은 두 뿔을 가졌다. 무기라는 측면에서 뿔은 힘을 표현해 주는데, 이 뿔을 수단으로 동물은 실력을 과시한다. 본문에서 수양 또는 양의 뿔이라는 것은 이타애와 믿음 속에 있는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거듭나는 인간 속에서 이타애와 믿음은 하나가 되어 있고 그들은 의지와 이해성이 함께 움직이듯 서로 협동한다. 또 다른 측면인 교회 속에서의 경우, 이해성이 터득하고 의지로 사랑되는 상태,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양쪽에 의해 이해되고 사랑될 때 나타나는 진리의 힘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뿔이 매우 길었다(high)는 것은 마음의 높은 장소에로의 승강(elevation)을 표현해 준다. 그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길었는데, 그 이유는 이타애가 믿음 보다 더 칭찬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긴 뿔은 나중에 나온 뿔이었다. 그 이유는 내면에 있는 이타애는 우리가 알게 된 진리들 가운데서 더 명료해진 믿음만을 수단으로 뒤늦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본문이 인간 마음의 상황들을 영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여러 방면으로 치닫는 수양이란 자연적 마음의 사방에서 올라와 악하고 거짓된 영향력들에 대적하려는 참되고 사랑 받는 이타애의 원리를 표현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수염소

그런데 수염소가 서쪽에서 나타나 수양에게 달려들었다. 수염소는 믿음과 상응된다. 좋은 의미로 볼 때 수염소는 이타애와 하나를 이루는 믿음이지만, 반대 의미인 양과 대적하는 상태에서는 이타애와 분리된 믿음과 상응된다. 이타애와 분리된 믿음인 “믿음만, faith alone”은 단지 외면상의 믿음, 또는 지적인 믿음이다. 이 믿음은 거듭나는 사랑과 하나를 이루지도 않고, 의로운 생활과 인연을 갖고 있지 않은 믿음이다. 양과 염소는 이타애 가운데 있는 이들과 이타애와 분리된 믿음만에 있는 이들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는데,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25장, 에제키엘 34장 17, 18, 22절을 참고하면 된다.
본문의 수염소는 서쪽에서 왔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의 반대 방향인 서쪽이란 아주 먼 거리에서 선함과 진리를 보는 인간 마음의 상태, 즉 가장 외적 평면, 자연적 평면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나쁜 의미에서 볼 때, 마음의 외적 상태는 자연적 악 가운데 존재한다. 그리고 거짓된 영, 이타애 없는 믿음뿐인 영은 인간 심정에 든 악으로부터 온다. 이 수염소가 온 세상을 휩쓸었다는 것은 거짓된 믿음이 온 교회를 휩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염소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은 이 믿음은 이론적일 뿐 선하고 실용적인 일상 생활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수염소의 뿔

수염소의 뿔이란 선함과 진리를 채워가는 마음속에서 그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믿음의 권세를 표현한다. 이 뿔이 수염소의 두 눈 사이에 돋아 있었다는 것은, 거짓 믿음의 권세는 총명인체 하는 것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이 논쟁 가운데서 사람에게 시선을 끌게 매력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겉보기뿐인 총명은 자아에서 파생된 것인지라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자아 사랑을 부추겨 주는 논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자기만을 사랑하는데에 표준점을 두고 온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염소의 뿔이란 자아에서 파생된 총명도 의미하고, 이것이 맹렬한 기세로 수양에게 달려들었다. 즉 자아에서 나오는 총명은 거짓 추론으로 현혹시키는 권세인 바 교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타애를 쫓아낸다는 말이다.
수염소는 수양의 두 뿔을 꺾었다. 이는 “믿음만으로”라는 영이 마음속에서 생산한 거짓 원리는 이타애와 진정한 믿음에 있는 능력을 꺾어 버리고, 그 속성도 파괴하면서 마음을 감각적 수준에로 떨어트려 성질 자체를 거꾸로 뒤집는다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보다 높은 국면의 진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믿음만으로”라는 영이 교회에서 우세해지면, 교회의 생명은 부패되고 마는 것이다.

수염소의 뿔이 부러지다

수염소의 외뿔이 부러졌을 때조차도 그 자리에서 네 뿔이 돋아났다. 이는 “믿음만으로”가 내놓는 주요 논쟁들에 반박이 가해졌음에도, 똑같은 근원인 자아 총명은 다시 득세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성경 글자를 왜곡시켜 심정과 행동 속에서 악과 거짓을 결합시키려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뿔

네 뿔 중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돋아났다. 이는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은근히 빗대서 심어 놓은 오류를 표현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그 교리가 논쟁하기를, 인간은 스스로 선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악한 경향성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선 안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의지를 발휘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존하겠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악들을 거둬가시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렇게 말꼬리를 잇는 가운데 미묘한 오류가 심어져 인간은 지옥의 자비에 방치되고, 주님의 계명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규율할 능력을 행사하는 것마저 실패하고 만다. 사실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억누르는데 자기 나름대로 전력해 가면서 자신의 힘이나 총명을 떠받치기 위해 주님을 신뢰해 가야 지당할 것이다. 이래야 자아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 돋아난 뿔은 작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묘한 논쟁, 은근히 심어지는 오류들은 실력 행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뿔은 “남쪽과 동쪽, 그리고 영광스러운 나라”에 까지 줄기차게 뻗어 나갔던 것이다. 즉 이 뿔은 선함에 대항하여 큰 힘을 발휘했다는 말이고, 영적 총명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교회의 생명에 대해서도, 주님이 밝혀 주신 진리의 빛에까지 그 힘을 행사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 작은 뿔은 하늘 군대와 별들까지도 짓밟아 뭉갰다. 즉 “믿음만”이라는 영은 교리 속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맞붙어 싸우되 교회에 있는 진리의 지식을 왜곡함으로 해서 진정한 교회 원리의 영향력을 파괴했다는 뜻이다.
이 뿔은 하늘 군대 사령관까지 업신여겼는데, 이는 신성한 진리라는 측면에서의 주님까지 무시해 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주님의 성소까지 파헤쳤다. 즉 “믿음만”이라는 영은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를 통째로 왜곡시켜 인간 마음속에 있어야 할 예배의 영과 삶을 파괴시켰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인간이 “믿음만”을 구원의 방향으로 고집하면서 신성한 인간(Divine Humanity)을 찾겠다는 쪽으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 속에서 주님을 찾되,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할 힘을 주시고, 우리 나름대로 선을 행할 힘을 주시기 위해 타락한 인간에게 내려와 닿으시려 하는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삶의 방향과 힘을 주님에게 의존해야 한다.

수염소 권세의 기간

거룩한 이들, 즉 천사들이 수염소의 권세가 언제까지 될 것인지를 놓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선포하기를, 수염소의 권세가 이천 삼 백 일이 지나야 성소가 깨끗해질 것이라고 했다. 숫자 2는 선함과 관계가 있고, 3은 진리와 관계된다. 백이나 천이라는 단위가 곱해지거나 더하여지는 것은 앞의 숫자인 2나 3의 숫자가 팽창되거나 보강된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수염소의 권세가 이천 삼 백 일간 계속된다는 것은 “믿음만”이라는 영이 모든 선함과 진리를 다 파괴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계속 극성을 떨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교회에 관한 훼방이 끝나 주님의 성소가 깨끗해지는 때까지, 즉 새로운 교회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정의로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일어나는 때까지라는 말도 포함한다.

가브리엘, 그리고 그의 교훈들

이 환상을 다니엘에게 설명하도록 가브리엘이 보내졌다. 이와 똑같은 천국의 특사가 복음서의 마리아와 즈가리야에게도 가르치도록 보내어졌었다. 단어 가브리엘이란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은 글자대로만 읽는다면, 그 이름은 오로지 한 천사의 이름인 듯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름은 천국 사회에 대한 이름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에 대해 인간의 마음을 계발시켜 주시려는 특별한 용도를 지니고 성경에 등장되고 있는 것이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을 가르치는 모습은 구약성서의 글자에서 아주 희미하게 모습을 나타내는 영적 진리가 밝히 알게 되는 것, 마치 잠들어 있는 사람을 건드려 깨우듯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환상에 대한 가브리엘의 해석은 표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인데, 이것은 영적 원리와 상응되는 바, 미래에 그 의미가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말에서 영적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 말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이렇게 본문은 말한다. 수양의 두 뿔은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들을 표현하고, 수염소는 그리이스의 왕들, 그 뿔은 각기 다른 왕들을 표현한다고 했다. 통치자로서의 왕이란 인간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원리를 표현한다. 본문의 메대와 페르샤의 왕이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을 원리로 마음에 갖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리이스의 왕은 이타애가 없는 “믿음만”을 표현하고 있다.
“죄악이 가득 찼을 때,” 즉 악의 권세가 완전히 장악해서 교회의 처방이 끝장을 보게 되었을 때, “사나운 임금이 나타나 권모술수를 쓴다고”했다. 즉 악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거짓 원리, 그리고 그 원리는 무식해서 튀어나온 원리가 아니다는 말이다. 이 악한 거짓은 맹렬한데, 그 이유는 이웃에 대한 온화한 사랑이 전혀 없는 탓이다. 악을 사랑하는 이들, 또는 자신들 속에 있는 악에 쉽게 기울려는 성질을 저지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믿음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자신들이 옳다고 확증해 대면서, 구원에는 “믿음만”이면 충분하고 선한 삶은 구원의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떠든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는 불필요한 물건으로 취급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을 추켜세우면서 하느님의 뜻과 선함 위에 자아 의지를 세우고야 마는데로 치닫는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평가하건대 주님보다 더 낫다는데 까지 자신을 추켜세운다. 이런 것들이 영적인 사악함, 부정한 것이다. 아마 현재의 세상 주위를 둘러 보아도 지능적으로 사악한 이들은 자신이 주님이라고까지 선포하는 우스꽝을 식은 죽 먹듯 해치우는 것을 여러분들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이야기

위에서 살펴 알 수 있는 것은, 본문의 환상은 하나로 있어야 할 믿음과 이타애가 분리될 때 있게 되는 싸움을 상징적으로 기술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과 유사한 이야기는 본문 이전의 성경에서도 이미 있었던 것인데, 이 내용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되는 내용들이다. 우리에게 맨 처음 등장된 성경 이야기로는 인간 가족에 관한 첫 가상적인 이야기인 카인과 아벨에서,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였을 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역사의 매 시대에서 그 자체가 반복되고, 넓은 측면에서 볼 때 교회의 각 처방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고, 더욱이 또 다른 교회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새교회를 가져다 놓게 한 큰 사건, 주님의 오심은 옛 교회에게 끝을 맺게 했는 바, 이는 영계에서 있어진 넓은 측면의 영적 심판인 것이다. 이 심판에서 수염소의 권세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같이 부서졌고, 새로운 처방이 그 뒤를 이어 영적 진리의 새 빛과 영적 사랑의 따스함 속에서 시작되었기도 하다.
구원은 “믿음만”가지고 되지 않는다. 또한 선한 일만 가지고도 안된다. 좌우지간 그 어떤 한쪽 측면만 가지고는 구원은 없다. 구원은 사랑과 믿음의 연합으로 있어지는 정의 속에 존재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인간 자신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속에 처박힌 악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켜 가는 한도 내에서만 구원해 주신다. 영계에 있게 될 우리의 거처는 각자가 실제로 이룬 인격의 직접적인 결과이고 그 인격이란 각자의 사랑과 생각의 품질에 따라 있는 바, 이 품질이 어떠하느냐는 각자가 주님의 계명을 자기 행동에서 얼마나 체현(embody)했느냐에 의존된다. 어떤 젊은이가 주님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직선적으로 물었을 때, 주님은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고 대답하셨다.

41
소귀나무 사이에 있는 사람과 말

성서 본문: 즈가리야 1장 8-11절

8. 내가 밤에 환상을 보니, 낮은 곳에 소귀나무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한 기사가 붉은 말을 타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 뒤에는 붉은 말, 잿빛 말, 흰 말을 탄 기마대가 늘어서 있었다. 9, 내가 “나리, 이것이 웬 기마대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가 “이것이 웬 기마대인지 알려 주리라” 하며, 10. 소귀나무들 사이에 서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야훼께서 세상을 순찰하라고 보내신 자들이다.” 11. 그러자, 말 탄 사람들이 소귀나무 사이에 서 있는 야훼의 천사에게 “세상을 돌아 보니, 사람들이 평안히 살고 있었읍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내적 측면에서의 이해

내적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은 교회의 하강을 나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쇠퇴해 가는 교회의 각기 다른 단계에서 있어지는 신성한 말씀에 대한 이해의 품질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 본문의 적용은 우리로 자아를 검증하도록 뾰족하게 유도해 주고 있다.

글자적 의미

글자상에서 본문의 시대는 서기 전 약 520년 정도 된다. 이 시대에 몇 달 앞서서 예언자 하깨가 유대인에게 여호와는 머지 않아 “나라들을 뒤흔들고,”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고 선포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사건을 기다리는데 매우 성급해지기도 하고 일부는 그 미래에 관해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언자 즈가리야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되는 8개의 환상 시리즈가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즈가리야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을 향한 주님의 호의적인 의도를 재 보증했다. 즉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이 임박했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쾌거가 있는다고 예언해 주었다.

영적 의미

환상 속의 계시가 밤에 있었다는 것은 그 계시가 희미하다는 것, 즉 진리로 명확한 시야를 만들지 않는 것, 자신들의 명백한 빛으로 진리를 볼 준비가 안된 마음들에 있어지는 계시를 암시해 준다.
밤중에 있는 이들이란 정신적으로 어둠의 상태인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 가운데 있는 것, 또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무지한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인격 측면에서 악하다면, 그는 거짓이라는 두꺼운 암흑 속에 있는 셈이다. 오늘 본문의 시대 때 유대 교회는 깊고 두꺼운 층으로 된 암흑이라는 상황 가운데 있었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그 교회의 사람들의 인격이 상당히 퇴보(degenerate)되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로서의 즈가리야는 교리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즉 교리의 진리와 지식 가운데 있는 이들을 표현하는데, 이에 적절한 성경 구절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또는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마태복음 13:9, 계시록 2:11) 일 것이라 본다.

사람

즈가리야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11절을 보면 주님의 천사였다. 천사는 영계의 개인적 인물(person), 즉 주님의 진리를 알고 사랑하여 그렇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주님에게 피택되어 지상의 사람들에게 그분의 진리를 선포하며 교통하기 위해 보내어졌었다. 그러나 이 천사를 비인격적 측면에서 보면 천사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데, 이 진리 속에서 주님은 영적으로 인간에게 오신다.

말 (horse)

예언자에 의해 보여진 사람은 말을 타고 있었다. 상징적 측면에서 말은 인간의 지성이나 이해성을 표현한다. 특별한 경우 말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할 때도 있다. 붉은 말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 붉은(red)색은 사랑 또는 선함을 나타내는 색깔로서 가장 활기 있고 근본 되는 색이다. 그래서 붉은 말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가르쳐지는 선함이나 거듭 나아가는 사랑에 관련되는 신성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그래서 붉은 말을 탄 기사(사람)가 천사로서 이방인이나 이교(heathen)에 있는 사랑의 질이나 선함의 질, 즉 사랑의 체현(embodiment)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보내어지고 있다.

소귀나무 (화석류나무)

붉은 말을 탄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소귀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서 있다는 것은 뭔가가 발생되기를 기다리는 것, 뭔가 준비된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이 모습은 더 많은 행동을 취하기 위해 결과를 기다리는 정신적인 상태를 표현해 주게 된다.
소귀나무는 방향성의 잎이 무성한 작은 상록수이다. 장대하게 높게 뻗는 송백나무는 멀리까지 미치는 합리적인 진리를 표현해 주지만, 소귀나무는 단순하고 하급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합리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소귀나무로 표현되는 진리 역시 영적 진리이기는 하지만 높은 영적 수준이지는 못한 것이다. 교회 속의 개개인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교회 회복에 관한 예언인 이사야 55장 중 13절은 악에서 선으로 변화된 결과가 이렇게 상징되고 있다. “가시나무 섰던 자리에 전나무가 돋아나고 쐐기풀이 있던 자리에 소귀나무가 올라오리라. 이런 일이 여호와의 이름을 드날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가 되리라.”
그래서 소귀나무 사이에 있는 천사의 일은, 유대인들이 내적, 외적으로 자기들의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함을 위해 주님께서는 아직도 그들 사이에 천사들을 보내고 계신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로 주님을 찾도록 유인하시고, 그러므로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와 삶에로 되돌아와, 결국 그들 악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유대인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낮은 곳

천사인 본문의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소귀나무 사이에 있었다. “낮은 곳”이란 계곡 같은 곳, 또는 과거에 강바닥이었다가 지금은 물이 말라 마른땅이 된 것 같은 낮은 장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소귀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그늘진 장소일 것이다. 이런 주위 환경이 표현해 주는 바는,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살피려고 천사가 내려 왔다면 필시 그 천사는 낮은 곳에 있는 소귀나무 같은 인간들의 모습, 즉 자연적 마음속의 생각 역시 외적이고 수준이 낮은 상태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천사 뒤에는 붉은 말, 잿빛 말, 흰 말이 있는 것이다. 이 말들 뒤에 늘어선 말들은 세 말들 보다 더 하급의 위치에 있는 것인 바, 이 말들은 더 낮은 상태, 그리고 더 외적인 상황에 있는 상태를 표현하게 된다.

색깔들

여러 가지 색깔의 말들은 교회 경력에 있어서 각기 다른 시기, 또는 각기 다른 인간 안에 있게 되는 상황을 표현한다. 나쁜 의미로 보면, 사랑의 색인 붉은 색은 악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런 붉은 색의 교회는 매우 퇴보된 상태 안에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말들의 색은 교회의 색을 반영(reflect)해주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붉은 말은 순수한 사랑 또는 선함이 신성한 말씀에서 가르쳐지는 바에 대해 납득하는 측면이 썩어 있는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하고 있다.
좋은 측면에서 흰 말은 신성한 말씀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표현한다. 계시록 19장 11-14절을 보면,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의 경우, 흰 말 위의 승마자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똑똑하게 명명되었다. 그래서 흰 말 위에 계신 분은 “말씀이 육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바, 이 구절은 말이 짐을 나른다는 측면의 상징성, 즉 모든 거듭나는 이들의 생각 속에 주님이 계시어 거듭나는 인간의 마음과 그분이 영적으로 연계됨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악인에게 있어서는 시편에서 말한 바 같이, “하느님은 악인의 모든 생각 속에 계시지 않는다.”
나쁜 측면에서 볼 때, 흰 말은 활기가 결핍되어 창백한 상태의 흰색이다. 그래서 흰말은 죽어 가는 마음, 즉 영적으로 생명력을 잃어 가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이것이 본문의 흰말에 담긴 의미이다.
또 하나의 말은 잿빛이었다. 즉 색이 혼합된 상태, 일부는 희고 일부는 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모습은 혼합된 마음 상태, 즉 진리에 관해 얼마 정도라도 지식이 있는 반면, 또 얼마는 악과 거짓이 있어 혼합된 상태의 마음이다.

왔다 갔다함 (순찰)

이 말들은 “여호와께서 세상을 순찰하라고 보내신 자들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순찰이란 조회(inquiry)가 이루어진다는 것, 특별히 신성한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이해하는지에 관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속의 사람의 상태를 조회한다는 말이다. 그러자 순찰자들이 이 명령을 받들어 세상을 돌아본 결과를 보고하였다. 즉 존재하는 상황이 지금 밝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순찰자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평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still and at rest” 이었다. 지상은 지상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관찰된 상황은 지상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즉 인간 안에 있는 교회의 상태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평안(at rest)하다고 발견되었다는 것은 어떤 활동이나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생명이 없는 탓이다. 게으르거나 활발하지 못해서 있어지는 평안(고요함, still), 또는 죽어 있는 탓에 움직일 수 없어 정온함, 이는 평화(peace)로 있어지는 조용함이 아니다.
본문을 글자로만 볼 때, 이 보고는 하깨의 최근 예언인 “여호와께서 머지 않아 나라들을 흔들어” 그것들을 짓부술 거라는 예언이 고려되어 있다. 그래서 순찰자의 보고는 영적으로 냉혹하고 무관심하며 이기적인 것들이 흔들릴 어떤 징조나 이교도 세계의 죽은 상태가 흔들려 깨워질 어떤 징조가 당장은 없다는 보고였다. 외형상에서 이 나라들은 조용한 듯 보였고, 심지어 자기들의 이기적인 길들만이 자기들을 견고하게 해줄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관상의 조용함은 내적인 평화까지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교도 국가들은 심판이 있게 될 때, 즉 인격의 내적 상태에 따라 되어지는 심판에서 자아 파멸로, 그들의 불법이 목까지 차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응용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교(heathen)들이란 우리의 이기적인 열정이나 관념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인격의 진정한 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또는 우리가 악 가운데 살고 있음으로 해서 피할 수 없는 내적 생명의 결과를 볼 수 없을 경우, 매우 평안한 듯 느낄는지 모른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악 가운데서 더 견고해지고 자아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면 이런 여건의 우리는 더 희망적이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적 마음이 영적 생명을 위해 격렬한 투쟁을 해야 하는 동안,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그 감각적 수준에서 머무르며 평안해 있을는지 모른다.
이교도 국가들이 쉬운 방법으로 잘 살고 있는데 비해, 유대인들은 고난 속에서 살았는 바, 아마 자기들은 매우 힘든 삶을 꾸리는 듯 여겼다. 영적 생명을 찾는 인간 존재의 삶의 투쟁 속에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위의 유대인 같은 처지가 존재한다. 교회가 물질 세계 속에 남아 있는 한, 교회는 그 세상의 상황인 감각적인 것들에 부딪쳐야만 한다. 감각적 상태와의 싸움이 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자연적인 평화나 쉬운 방법을 추구하는데 비해, 우리 내면의 마음들은 선함과 진리, 그리고 의로움 속에서 거듭남에 오게 되는 영적 평화와 쉼을 추구한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분투하면서 그 싸움에서의 성공을 갈망한다면, 우리의 주님은 때때로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신다. 그리하면 우리는 자신의 감각적인 자연적 마음의 현 상황을 직시하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리의 천사를, 우리 지성 속에 있는 표징적인 말들, 그리고 우리들 마음의 합리적인 생각들, 즉 소귀나무 아래 이 말들이 서 있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리하면 우리는 자신 속의 각기 다른 이해성, 즉 어떤 측면의 이해는 붉은 색, 또는 잿빛, 또는 흰색의 이해성뿐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때로 우리는 이기적이고 악한 사랑으로부터, 혹은 죽은 듯한 순백색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결핍된 창백함에서 이해하겠다고 노력해 온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이 우리 속에 있음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밝히 알게 될 때, 이 앎은 우리가 순수한 사랑과 진정한 생각, 그리고 의로운 행동으로 들어가도록 자신으로 노력하게 해서 주님은 영적 원기를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게 된다. 이렇게 하면, 우리 마음에서 이교(잡신)를 추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 속의 주님은 영적으로 “시온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자기 것으로 삼으실 것이다.”

42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성서 본문: 즈가리야 2장 1-4절 (구번역 1:18-21)

1. 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뿔이 네 개 있었다. 2.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이게 웬 뿔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들이라는 대답이었다. 3. 그 때에 야훼께서 대장장이 네 사람을 보내 주셨다. 4. 내가 “이들은 무엇하러 온 사람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바로 이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했지만, 이 대장장이들은 일찍이 유다 땅을 흩뜨리던 그 뿔이 돋은 나라들을 혼내 주러 온 것이다.”

개요

본문은 교회가 악한 사랑에 근원한 거짓 원리로 말미암아 못쓰게 된 채 방치되는 것, 즉 황폐함(vastation)과 그 후 주님께서 거짓 원리들을 몰아내고 영적 진리를 가진 새교회를 건설하심으로 교회를 회복하실 것을 묘사하고 있다.

뿔들

성경의 상징적 언어 속에서 뿔은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뿔이 무기로 사용되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중에 있는 무기로는 칼, 곤봉, 총 등등일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는 뿔이나 발톱이 무기에 해당된다. 이 무기들은 소유자가 힘을 발휘할 때 한층 더 강한 실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정신적 삶이 질서 있는 상태라면, 우리 사랑의 힘은 우리가 알고 사랑해서 사용하게 되는 진리를 수단으로 발휘되어 진다. 이와 같은 좋은 의미에서 볼 때, 뿔은 악이나 거짓, 죄 등등에 대항하는 진리의 힘을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 삶이 비질서적이고 타락하는 내림 길에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진리에 의존해서 힘을 발휘하지 않고, 정신적 어둠인 자아 총명에서 파생되는 관념들이나 거짓 원리에 의존하게 된다. 이럴 경우, 자신의 힘이라고 하는 것들은 선과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의 힘일 뿐이다. 따라서 나쁜 의미에서 볼 때, 뿔은 인간 삶의 법칙인 주님의 진리에 대항하려고 마음속에서 발휘되는 거짓의 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거짓의 힘은 거짓을 흠모하는 마음 안에서 교회에 관한 원리나 그 생명을 파괴하고, 이런 거짓이 사람들 가운데서 우세해지면 집합체로서의 교회 역시 파괴된다.
뿔은 성경에서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자주 언급되고 있다. 우리 주님의 중심 되는 생명은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권능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발휘되어진다. 따라서 성경에서 주님에 관련하여 뿔이 언급되면, 그 뿔은 그분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해 준다. 그리고 뿔이 인간에 관련해서 언급될 경우, 이는 그 인간에게 밝혀 주신 신성한 진리에 의해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힘을 표현한다.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서는 뿔을 가지고 힘을 암시하는 것이 그들에게 관습이 되어 유행했었다. 그래서 뿔을 가지고 장식구로 사용하거나 자기의 현재 상태를 표시하도록 사용했다. 남자의 경우, 머리띠를 할 때, 머리 정면 부분의 띠를 조금 더 길게 해서 위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그리 크지 않은 금속으로된 뿔을 약간 비스듬하게 부착했는데, 때로는 머리 부분에서 아주 높게 장식해 달기도 했다. 여자들의 경우, 이 뿔을 더 길게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게다가 모자에는 수직으로 세워 장식했다. 그래서 뿔로 머리를 장식한 사람이 머리를 세우고 있으면 그의 뿔은 더 높은 위치에서 뽐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매우 우울해져 머리를 떨구고 있으면, 그의 뿔은 머리보다 더 아래로 쳐진다. 이렇게 해서 뿔의 높,낮이는 뿔로 장식한 사람의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표징적 측면에서 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우 친밀했던 상징물이었다.

예식에서의 뿔

뿔은 예식을 거행할 때도 사용되었다. 왕이나 사제에게 기름 부을 때, 사용된 올리브 기름은 뿔로 만든 화약통과 비슷한 소뿔로 된 용기에 간직했다. 그리고 분향단과 번제단의 네 귀퉁이도 뿔 모양으로 돋아나게 만들었다. 이래서 그 뿔은 예배에 있게 되는 진리의 힘을 상징하게 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되어 그 교회의 예배가 위선이 되었을 때, 아모스 3장 14절을 통한 예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진다. “나를 거슬러 죄짓는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날 내가 베델의 제단에 벌을 내리리라. 그 제단의 뿔들을 때려부수어 땅바닥에 흩어 버리리라.”

환상 속의 뿔

예언 속의 상징적인 환상에서 뿔 달린 짐승들이 보여졌고, 특별히 뿔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다니엘은 환상 속에서 특이한 뿔을 가진 수염소를 보았는가 하면, 다른 때에는 뿔이 많이 돋아 올라 끔찍하게 보이는 짐승들도 보았다. 그 중에는 뿔이 열 개 달린 짐승도 있었다. 그리고 요한은 열 개의 뿔을 가진 용을 보았다. 모든 이러한 나쁜 짐승들은 교회를 파괴하고자 주님의 진리에 맞서 싸우려는 거짓을 표현했다.

흩뜨림

위와 같이 자아에서 비롯되는 총명에 의존하는 마음속에 있는 진리들은 흐릿해지고 만다. 악에서 튀어나오는 거짓들은 교회 속의 진리들을 흩뜨리고 교회의 생명까지 죽인다. 그 이유가 교회는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주님에 관한 지식 속에서만, 주님이 밝혀 주신 원리들을 사랑해서 실제에 응용할 때만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위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교인들에게 팽배해질 때, 그 교인들은 이방인의 포로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위의 모습이 본문의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 이라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다는 선함 또는 사랑의 측면에서의 교회를, 이스라엘은 진리 또는 지혜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예루살렘 성은 교회에서 가르쳐진 교리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각기 표현한다. 그래서 선함과 진리, 그리고 올바른 교리는 신성한 진리 대신 자아에서 비롯된 관념들에 의존하는 사람이나 거짓을 탐닉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는 모두 흩트려진다.

본문에서 보여진 뿔은 넷이다. 넓은 의미에서 각 숫자는 의지 또는 심정 속의 생명에 관계되어 사랑 또는 선함에 관한 각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 반면, 첨가된 숫자들은 이해성 또는 지성에 관계되어 각 인간은 지식이나 총명, 진리에 관한 상황을 표현해 준다.
단일 숫자로서의 둘은 선함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사랑과 지혜가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사랑과 지혜는 의로운 삶 속에서 둘이 연합하기 때문이다. 넷은 둘에 둘을 곱한 숫자이다. 그래서 넷은 이중 형태로 둘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는 마음의 안쪽과 바깥쪽인 행동의 양면에서 동시에 있게 되는 선함을 표현해 준다.
자연계에는 네 방위, 즉 북, 남, 동, 서가 있는데, 네 방위는 인간 마음의 모든 상황, 즉 자연적 총명과 영적 총명, 영적 사랑과 자연적 사랑에 관한 상황을 표현해 준다.
그러나 인간이 인격 면에서 타락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그 사람에 관계하는 숫자들의 표징은 위와 반대되는 성질로 바뀌어진다. 따라서 악인에게 있어서의 북, 남, 동, 서는 거짓과 악에 속한 상황을 나타내 준다. 이런 것들이 본문에서 유다와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라는 거짓 권능으로 유인되어 나오는 상황이다.

대장장이 (또는 목수)

교회 속에 있는 거짓의 악한 결과를 좌절시킴으로 교회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주님의 의도요, 계획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악에서 파생된 거짓들이란 교회에서 가르쳐진 거짓 교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 속에서 사랑되고 생각 속에서 흠모하여, 삶 속에서 실제화된 거짓 원리들, 정의로운 사랑 대신 이기적인 욕망들을 북돋는 것, 진정한 사상 대신 부정한 생각들을 부추기는 이런 저런 것들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사악한 거짓의 힘을 깨트리기 위해, 주님은 그 힘에 맞서도록 신성한 말씀의 글자 의미 속의 진리를 삶의 최 말단에 가져다 놓으심으로 인간으로 각자의 일상 생활에 진리를 응용해서, 인간으로 자기 삶에서 행해야 할 것을 볼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이럼으로 해서 우리는 명백한 글자적 진리에 의해 발휘되는 큰 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글자적 진리는 행동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법칙은 인간이 가진 관념이나 이론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 행동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붙잡고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틀을 만들어 주고 있음으로써 각 사람은 자기 행동에 관해 그가 행하는 실제의 일들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으로 해서 그의 마음을 죽이려고만 하는 거짓의 각종 영향력들로부터 그가 원하기만 하면 벗어나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에 놓인 진리들이 즈가리야가 환상에서 본 대장장이 이다. 번역된 대장장이(smith)는 어떤 번역의 경우는 목수(carpenter)로도 했는데, 확실한 것은 이 단어가 기술 있는 사람, 또는 철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자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철 도구(iron tool)란 실제에 응용하기 위해 글자라는 외관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혼내 줌

네 뿔, 즉 거짓들을 혼내 주기 위해 또는 교인의 마음으로부터 거짓을 쫓아내기 위해 대장장이들이 파견되었다. 만일 인간이 주님이 밝혀 주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일을 계속해 간다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선한 일 속에 자신의 행동이 머물도록 애쓴다면, 그의 마음은 새로운 진리들에 더욱 더 열려지게 되어 그가 행하는 실제의 선들과 일치되어 진다. 그리고 점차 그는 이전의 거짓 관념들을 벗어나게 인도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서 매일 생활을 규율하는 진리, 즉 일하고 있는 새로운 실제 속의 진리들은 과거 거짓이 점령하고 있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의 영역 수준까지 도달되기 위해 자신을 개혁하게 해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자기 마음에 선한 영향력이 행사되도록 허용한다면, “네 대장장이”가 네 뿔을 혼내 주듯이 자신 속의 옛 거짓에 속한 모든 형태나 양상들에 새로운 진리가 도달해서 정복해 줄 것이다. 이와 유사한 모습이 즈가리야의 첫 환상인, 네 승마자가 교회의 영적 상황을 순찰한 구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네 뿔에 네 대장장이가 대치하는 모습은 힘의 균형(balance)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우리 마음이 균형(equilibrium)을 갖도록 역사 하신다는 것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렇게 역사 하심으로 주님은 우리가 선함과 진리로 되돌아오고 악과 거짓에는 저항이 가능하게 영적 자유를 유지시켜 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시험이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영적인 도움과 보호를 정말로 원한다면 각자에 부응되는 섭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54장 16, 17절을 찾아보면, “숯불을 불어 피우고 자기가 쓸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를 나 말고 누가 만들었겠느냐? 닥치는 대로 부수는 파괴자를 나 말고 누가 만들었겠느냐? 너를 치려고 버린 무기는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소용이 없으리라. 너를 법정에 고소하는 혀가 도리어 패소의 쓴잔을 마시리라. 바로 이것이 야훼의 종들이 나에게서 받을 몫이다. 내가 이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준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머리를 쳐듦

“뿔들이 유다를 흩뜨리어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즉 정복자가 유다를 짓부수어 굴욕시켜서 그들의 용기를 강탈하고 독립해 설 수 없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신체 중에서 머리는 가장 높은 위치이다. 그래서 머리는 총명을 가지고 통치하는 사랑을 표현한다.
악에서 끌어낸 거짓 사상으로 마음을 압박한 결과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되는 것, 고상하고 영적 인간으로 되게 해주는 모든 것이 깔아뭉개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 신성한 말씀 글자에서 가르쳐진 진리, 이 진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형태를 취할 때, “이방인의 뿔”은 흩뜨려져서 그로 하여금 머리를 다시 쳐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즉 그의 내면에 있어야 할 사람다움(manhood)이 승강되어 영적 총명을 다시 획득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글자대로 볼 때 “이방인의 뿔들”이란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교도 국가로부터 배운 끔직한 것들이었다. 영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이교도는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늘 존재하고 있다.
본문이 보여주는 글자적인 의도는 유대인에게 용기를 주는 것, 그들이 처한 국가적 고통은 장차 끝장을 보게 된다는 것, 더 좋은 세월이 그들을 위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더 좋은 외적 상황이 그들에게 도래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뭔가 좀더 총명한 기독교인이 기대하는 “더 좋은 세월”이라면, 그것은 자기 속의 변화라는 것, 자신의 인격이 신성한 인도와 가르침 밑에서 더 개선되는 날들일 것이다.
즈가리야는 “야훼께서 나와 말하던 그 천사를 좋은 말로 위로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영적 삶을 위해 묻는 진지한 물음에 언제나 “좋은 말로 위로해 주신다.”
본문은 머나먼 과거에 이스라엘을 주님이 해방하셨던 것과 장래 그들의 적들을 전복시키실 것을 표징적으로 예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계발된 총명 상태에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개개인의 살아온 역사에 관한 표징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임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이 그림은 우리를 심각해지게도 만들지만, 그 반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타나엘, “거짓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정도만큼에서 우리 앞에 놓인 가능성들에 기뻐할 풍부한 이유도 제시해 준다 (요한복음 1:47).

43
측량줄을 잡고 있는 사람

성서 본문: 즈가리야 2장 5-9절 (구번역 2:1-5)

5.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았더니, 누가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6. 내가 그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그는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폭과 길이를 알아 보러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7. 나와 말하던 천사가 거기 서 있다가 다른 천사가 마주 오는 것을 보고 8. 그에게 일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 가서 일러 주어라.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 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 9. 이는 야훼의 말이다. 내가 불이 되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 쌀 터이고 그 안에서 나의 영광을 빛내리라.’”

개요

본문은 새교회의 영적 품질을 표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교회는 크게 불어나고, 이 교회의 내적, 외적 측면에서 주님이 현존하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측량함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영적 환상에서 보여진 이 사람은 영계에 있는 거듭난 사람, 즉 천사였다. 천사는 주님의 특사인 바, 그에게 명령한 일 역시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는 주님의 일을 말한다. 천사의 행동이 표징적이듯, 그 일 역시 인간 사이에 있게 되는 주님의 영적 행동을 표현했다.
자연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물건의 크기를 알아보려면, 그 물건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두께, 즉 높이를 측량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의 경우는 양보다는 품질과 관계가 된다. 그래서 영적 물건의 크기는 성질(character)에 관계가 있다. 자연적인 것을 측량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길이, 넓이, 높이인데, 이런 크기들은 영적 측량으로 알아 볼 경우,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선함과 진리, 그리고 등차(수준)로 표현된다.
아마 위의 말에 대한 납득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일상 언어를 살펴보면 쉽게 납득된다. 우리는 야비한 사람을 두고, “그는 좁은 사람이야…” 또는 “그는 작은 마음을 지녔어…”라고 하고, 관대하고 선한 사람을 두고, “그는 넓은 마음을 지녔어…” 또는 “그 사람은 큰 가슴을 가졌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이런 마음이나 가슴을 잰 표준은 주님의 신성한 말씀에서 밝혀진 그분의 진리이다. 우리 속에서 이런 표준을 사용하거나 측량하는 능력은 자기에게 밝혀진 진리를 지각하여 그 표준을 원리 속의 진리로 인정하는 우리의 능력, 즉 합리적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각자의 마음과 삶의 각기 다른 상태를 보여주시려고 천사를 보내 영적으로 측량할 때, 천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납득하기 위해 우리의 합리적 마음은 반드시 열려서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을 측량함

본문에서 말하는 바, 천사는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것이었다. 글자대로 볼 때, 그 천사는 예루살렘 성의 크기를 재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성을 수리하고 재건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모른다. 이 행동은 인간 사이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영적으로 측량하는 상징적이고 표징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 이는 이스라엘 교회들의 사령탑인바, 교회를 말한 것이고,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떠하느냐란 교회의 영적 상황과 품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측량이란 교회의 생명에 관한 영적 품성, 품질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의 품성이 변화된 상황은 영적 측량을 다시 함으로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서 있는 그대로 측량한다고 말할 경우, 이는 기존 교회의 영적 품성을 밝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환상에서 보여진 예루살렘을 측량할 경우, 이는 미래에 있게 될 교회의 영적 상황, 특별히 주님이 오신 이후의 교회의 상황과 관계가 있게 된다.

두 천사

“나와 말하던 천사가 저기 서 있다가 다른 천사가 마주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일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일러주어라.’” 이 두 천사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보내진 주님의 진리를 표현한다. 우리는 신성한 진리를 각기 다른 측면에서 본다. 하나는, 의지 또는 심정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선함이 수행되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지적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수행해야 할 것들에 수반되는 생각을 이해하게 된다.

벽이 없는 성읍

천사는 주님의 약속이 “예루살렘에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 성을 둘러치지 않고 살게 되리라”라고 밝혔다. 고대 시대 때, 큰 성읍이나 중요한 장소들은 높은 벽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은 성읍이나 마을들, 특히 농장의 경우는 평야나 언덕, 또는 계곡에 성벽 없이 건설되어 있었다. 강도나 적들이 휭행하는 때에 성벽도 없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생계를 잇는 성읍이나 마을은 평화, 고요함, 자유로운 상태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때로 성 안이 과밀 되었을 경우, 불어난 인구는 성 밖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이 성읍과 저 성읍이 연결을 이루면서 그곳 주민이 아닌 외부인이 서로 교역하면서 그들이 잠시 체류할 때 그들은 성 밖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다.
이 본문의 경우를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예루살렘이 평화와 번영의 때를 맞이하여 즐기는 가운데, 인구가 크게 증가해서 성밖에도 성 안 만큼이나 커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적 측면에서의 비유

그러나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보면, 이 본문은 미래에 있을 주님의 교회 상황, 거듭나는 상태 속의 새교회,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내면으로 받는 상태를 초상화 해놓고 있다. 따라서 성 안에 있는 시민들은 천국의 더 높은 수준에 이르는 총명한 새교회 인을 표현하고, 성 밖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선량한 자연적 인간처럼 자연적 수준에서 새교회의 영향을 받아 새교회로 향해 오는 이방인들을 표현해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여느 교회나 비슷하게 새교회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천국에도 말씀으로부터 온 진리에 관한 지식, 그에 따른 선한 삶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리 속의 원리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내적 시야인 영적 지각이나 총명이 없다.
이와 같은 모습은 지상의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상당한 영적 마음을 소유하는데 비해, 어떤 이는 자연적 수준의 생각만으로 진리를 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람 모두 거듭 나아가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은 서로 공통된 점이다. 따라서 교인들 역시 각기 나름대로의 수준과 평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외적 사람이 본문에서 짐승으로 의미되고 있고,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서…”라고 하여 사람과 짐승을 구별짓고 있다. 이렇게 구별한 이유는, 영적인 사람과 선한 자연적 사람의 내면상의 차이가 선한 자와 좋은 가축의 차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둘 다 바깥쪽은 자연적 삶에 열려 있지만, 삶의 안쪽은 품질면에서 완전히 영적이어서 차이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천국에서 각 사람의 거주지를 배열하는 데서도 보여진다. 아주 슬기롭고 선한 천사들은 중심 부근에 살고, 그 외 사람들은 중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외곽으로 퍼져 산다. 어느 정도까지 바깥쪽에 거주하느냐는 총명이 어느 정도 약해지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불로된 벽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바는, 비록 예루살렘이 불어나서 성 바깥까지 거주하게 된다 해도 “내가 불이 되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 쌀 터인즉” 예루살렘은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성벽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불로된 성벽이라면 더욱 보호해 주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벽이야말로 적에 의해 부서질 수도 없고, 감히 들어오려고 생각해 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뚫지 못하는 불로 된 성벽은 그분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성한 섭리, 즉 그 안의 백성들이 영적 사랑의 법칙에 의거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는 이웃사랑과 주님을 사랑하는 수준만큼에서 바깥쪽 적들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불로된 벽은 어떤 악령도 감히 침입할 수도, 아예 들어 올 생각조차 못할 벽이다. 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임을 시편 34편 7절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야훼의 천사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 주셨다.”
인간을 보호해 주는 벽이란 교회, 또는 교회에 있는 체계적인 교리를 말한다. 교리는 거듭 나아가는 마음이 바깥쪽에 해당되는 자신의 감각적인 것들 속에서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적들인 자연적 꾐이나 악한 영향력에 물드는 데에서 보호해 준다. 교리 중에서도 사랑의 교리는 가장 완전한 벽이다. 그 이유는 사랑으로 자신이 증거를 가졌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동이나 기운 속에 있는 마음은 그에 따른 모든 것에 대해 명백한 추론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불
불은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신성한 사랑이 이스라엘 후손들의 성막 안 제단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는 불로 표현되어 졌었고, 성전에서도 꺼지지 않도록 명령되었기도 하다. 이 영원한 불은 인간이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어야 할 꾸준한 사랑이 표현되도록 의도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그분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출애굽기 3:2). 이 때의 불은 신성한 사랑, 아버지를 표현했고 떨기로 표현된 것은 말씀의 글자인데, 이에 대한 또 다른 의미는 주님의 외적 인간성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영광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그 안에서 나의 영광을 빛내리라.” 예루살렘은 마음에 건설된 일반적 교리 체계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하고, 이 예루살렘 성이 지상에 건설되고, 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영광”이란 교회의 교리 속에서 빛나는 신성한 진리,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밝게 빛나는 신성한 진리를 말한다. 이 진리는 불로부터 빛이 발하여지듯, 교회 깊은 곳으로부터 발출된다.
또 다른 국면에서 볼 때, “안에 있는 영광, glory in the midst”은 신성한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말하고, 이 의미는 거룩한 성경 글자를 통해 밝게 빛난다.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한 가운데 있는 영광, glory in the midst”은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에서 빛나는 가장 깊숙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빛을 발하는 신성이 예수님의 머리 주위에 있는 후광으로 수많은 미술가에 의해 그려졌기도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한 인격을 보고 이해하여 인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납득할 때, 이 납득의 뒤를 잇는 것, 영적 진리에 대해 밝히 알게 되는 것(계시)은 우리로 더 높은 수준에로 마음을 승강시키도록 부름 받게 하여 더욱 더 높은 차원에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때 주님의 소리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있게 된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이사야 60:1).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에 오심을 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4:30). 이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말씀 글자를 통하여 밝게 빛을 낼 것이라는 말이다.
내면적인 교회는 이스라엘 후손들 사이에서는 건립되어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 상태는 지독하게 낮은 마음, 자연적 마음 안의 상태여서 내면에 속한 것들을 지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교회로서 첫 기독교회가 건설되어 단순한 수준, 즉 자연적이면서도 영적이기도 한 인간 수준에서라도 영적 상태들의 적은 부분이라도 마음속에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첫 기독교회 역시 내면에 있는 영적 사항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은 재림 속에서 새로운 교회인 새 예루살렘 교회를 건설하시었고, 그 교회로 그분의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을 어떤 신비로움이나 샤머니즘 같은 이상한 증거가 필요 없는 명백한 영적 빛으로 받을 수 있게 설비해 주셨던 것이다. 이 새교회는 성경 글자 속에서 발하는 주님의 영광, 말씀의 내면에 해당되는 영적 의미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자, “성령이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44
대사제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

성서 본문: 즈가리야 3장

1. 또 야훼께서 대사제 여호수아가 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고발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2. 야훼의 천사가 사탄을 나무랐다. “사탄아, 너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예루살렘을 택하신 야훼께 책망받을 놈아!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 아니냐.” 3. 그 때 여호수아는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4. 천사가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저 때묻은 더러운 옷 대신에 좋은 옷을 입히고, 5. 머리에는 깨끗한 관을 씌워 주어라.”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주자, 야훼의 천사가 일어서서 여호수아에게, 4.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벗겨 준다”하고 선고하였다. 6. 그리고, 그 천사는 여호수아에게 주의 말씀을 일러 주었다. 7.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내가 일러 준 길을 따르고 내가 맡긴 직책을 다한다면 너는 내 울 안을 지키고 내 집을 다스리며 여기 섰는 자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리라. 8. 대사제 여호수아야, 똑똑히 들어라. 여호수아를 모시고 앉아 있는 동료들도 잘 들어라. 나 이제 내 종이 될 새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너희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이 그가 올 징조다. 9. 나 이제 여호수아 앞에 돌을 하나 놓는다. 돌은 하나인데 눈은 일곱 개가 달려 있다. 나는 친히 이 돌에–내가 이 땅의 죄를 하루 아침에 쓸어 버리겠다–고 새기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개요

본문은 다음에 대한 예언이다. 이스라엘 교회 속에 있는 지옥적인 거짓 원리들은 주님께서 세우실 첫 기독교를 무지의 거짓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것,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거짓들을 제거하시고 진리를 주실 것이라는 것, 교인들은 자기들 마음과 생활로부터 거절하는 만큼에서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신성한 예언들은 그 적용 대상이 일반적이어서 모든 인류 조건에 응용되듯, 본문 역시 계시록에서 나열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으로 상징화된 새교회의 설립과 형성, 주님의 재림에서 나타나는 첫 기독교회의 상황을 예언적으로 밝히고 있다.

글자대로의 그림

갈대아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와 발견했던 것은 자기들의 고향과 백성들이 퇴보된 상황에 있는 모습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역시 붕괴된 채 방치되어 있고, 성전 예배 물론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태였다. 유대인 중 일부는 이렇게 악한 조건에 있는 모습을 인식하여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나라 속에 만연된 악들이 워낙 심해서 그들이 과연 여호와께서 용서해 주신다거나 그분께서 예전의 상황으로 백성이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까에 대해 매우 의심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 특별히 하깨나 즈가리야는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도록, 특히 성전의 재건을 마무리짓도록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에게 힘을 내도록 본문에서 보여지는 환상이 즈가리야에게 보여졌다. 이 환상에서 대사제 여호수아는 심각한 죄를 고소 당하는 사람으로 심판자 앞에 서서 고소자와 맞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관습에 의거 때묻은 더러운 옷까지 입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면하시어 그를 석방하라고, 그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도록 명령하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면책하시어 용서하시고 예전의 번영하던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 자기들 생활을 개혁한다는 조건에서이다.

영적 의미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보면, 여호수아와 사탄이 심판에 올라 있는 극적인 그림은 유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세해져 있던 것들, 신성한 말씀이 자아에 근거한 총명으로 인해 왜곡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여호와의 대사제 여호수아는 신성한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 또 다른 의미로서 주님의 자연적 인성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신성한 말씀을 글자에서까지 뒤집어 모독한 이들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경멸했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은 신성한 말씀과 교회를 거짓과 모순들을 가지고 고소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인간을 정죄하는데 있지 않고 악과 거짓에서 구해 주시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을 고소하는 자, 인간의 적, 사탄을 언제나 꾸짖으신다. 이 책망은 사탄을 정죄함뿐만 아니라 사탄의 일에 대치되는 진지한 하느님의 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악한 불 속에서 잘 타고 있다고 사탄이 더 입증하면 할수록, 주님은 각 개인을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 같이 여기시고 구출하시려고 더욱 애쓰신다.

사탄

사탄이란 어떤 누구를 지칭한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적”을 의미하는 공적인 칭호이다. 그런데 성경의 글자 대로를 고수한 첫 기독교회는 사탄이 타락한 천사일 것이라고 가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처럼 주님의 적수로서의 어떤 큰 인물이라는 악마는 없다. 악마란 타락하는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악의 원리로서 이는 지상에 있든 지옥에 있든 마찬가지이다. 악을 자기의 인격 속에 고정시킨 사람은 악마인 것이다. 주님께서 유다에 관해 말하시기를, “내가 뽑은 사람은 열 둘이 아니더냐?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악마이다”와 같이 언급하신 대목을 참조하면 위의 말이 납득될 것이다.
악마와 사탄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있다. 악마는 집합적으로 본 악의 원리를, 사탄은 집합적으로 본 거짓을 의미한다. 대사제 여호수아를 공박하는 사탄이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또는 교회라는 집합된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감각적인 거짓의 영이 신성한 말씀에 반대하되 특히 말씀의 생명과 영에 적이 된다. 이런 반대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 자기를 규율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서까지 작동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지상의 인간 삶의 많은 측면, 즉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상업적으로 우리가 의를 실천해 보겠다고 할 때, 사탄은 우리 오른편에 서서 우리를 고소하려 들어 우리가 해보겠다고 하는 결심에 비상등이 켜지게 하고 짓눌러 좌절하게 만든다.
손이란 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손을 수단으로 뭔가를 해내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른손은 선함을 사랑하려는 심정, 의지 속의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왼손은 진리에 관한 지식 속에 있는 지성, 이해성을 표현한다. 오른쪽에 서 있는 사탄이란 주님으로부터 받아 우리 심정 속에 있는 선을 파괴하고자 몸부림치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이렇게 사탄은 형제를 무고하는 적인데, 표징적으로 인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남으로 해서 이 거짓 영은 마음 밖으로 쫓겨 나가는데, 이런 모습이 계시록 12장 9-10절에서 또 다른 그림으로 주어지고 있다.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은 쫓겨났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타다 남은 나무

어떤 이가 큰 위험을 극적으로 피했을 때, 흔히 우리는 “타 버릴 뻔한 나무,”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라고 부른다. 이는 다 타 버리고 말 뻔했던 데서 건져졌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언어가 영적 위험에도 응용되어 지옥의 불에서 구원된 회개한 죄인을 말하기도 한다.

때묻은 옷

과거에는 중범을 저지른 죄수일 경우, 그의 외모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여서 그로 그의 행동 인격에 어울리는 옷차림, 즉 때묻은 지저분한 옷을 걸치게 했다. 이런 형태는 로마 관습에도 있어 기소된 자를 “더러운 자, sordidati, filthy one”라고 불렀었다. 영어의 경우 이에 해당되는 말은 “sordid”일 것이다.
몸을 감싸는 옷(garment)은 우리의 애정을 감싸는 진리, 즉 애정이 자신을 스스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을 말한다. 존경받는 사람이 특별히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게 품위 있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낮고 천하다는 사람, 특히 죄를 진 사람의 경우, 그는 더러운 옷이나 넝마를 걸친다. 마음은 각 마음에 걸맞은 자연적인 지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복장은 영적 조건이 어떠한지가 표현되도록 종종 언급되고 있다. 이사야 61장 10절을 찾아 읽어보자.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 주셨다.”

겉옷이 바뀜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희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 겉옷의 나타남이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때묻은 옷이란 악에서 퉁겨 나오는 거짓 원리들을 표현한다. 때묻은 더러운 옷을 입은 대사제를 두었다는 것은 교회가 진리 대신 거짓들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거짓들이 주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결국 주님에게 자기들이 더러워진 탓을 돌려,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경멸해 댄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신성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회복시켜 주시어, 자아 총명에서 비롯되는 거짓을 거절할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은 교회를 거듭나게 하시면서, 인간의 불법이 사라지게 하신다. 다시 말해 거짓이 퍼졌을 때, 인간이 그 거짓을 거절하여 지옥에로 그것들을 내쳐 보내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신다.

깨끗한 옷이 여호수아에게 입혀진 뒤, “머리에는 깨끗한 관이 씌워졌다.” 주교, 또는 감독자가 쓰는 공적인 모자(mitre)란 거룩한 말씀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에 근거한 교회의 총명과 지혜를 표현한다.

주님의 길을 따름

관이 씌워진 뒤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내가 일러준 길을 따르고 내가 맡긴 직책을 다한다면 너는 내 울 안을 지키고 내 집을 다스리라.’”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교회가 말씀 속의 가르침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진리를 신실하게 믿고 있다면, 그 믿는 증거는 그가 자신의 모든 생활 속에서, 즉 그의 애정과 생각, 그리고 행동 속에서 그 진리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대사제로서의 여호수아는 주님의 종으로 교회에 대한 직책을 가졌다. 이는 주님이 내리신 임무요, 어떤 방법으로든 주님이 파견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 교회가 집합 단체로서 이든, 각 마음속에 있는 교회로서 이든, 교회에 위탁된 선함과 진리에 속한 신성한 사랑들에 대해 임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주님의 집을 다스린다(judge)는 것은 이스라엘 가문을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이 말을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합리적인 마음이 영적 진리 속의 원리와 응용면을 볼 수 있게 열려질 때, 생활의 지침에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응용해 간다는 뜻이다. 주님의 울안을 지킨다(keep)는 것은 선한 질서 속에서 교회의 바깥 사항을 보존시킨다는 말이다.

징조 (sign)

이스라엘 사제들이나 예언자들은 주님을 공적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징조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백성들은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에제키엘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면전에서 비유를 직접 그의 행동으로 표현해 주었는데, 예를 들면, 포로로 끌려 갈 것을 자기 물건들을 꾸려서 떠나는 모습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백성에게 에제키엘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는 징조(sign)이다. 너희는 나의 몸짓을 보고 이 겨레도 사로잡혀 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리라” (에제키엘 12:11). 이와 같이 본문에서도 여호수아를 모시고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고 있다.

순 (가지, branch)

아마 인간에 대한 징조 중 가장 큰 징조는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이리라. 즉 신성한 여호와로부터 자라 나온 가지, 인성(humanity)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11장 1절에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 싹(branch)이 돋아난다.” 그리고 즈가리야 6장 12, 13절에서,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 이름은 새 싹이니, 이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싹이 돋으리라. 그는 야훼의 성전을 지을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야훼의 성전을 짓고, 영광스런 옥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다.”

“나 이제 여호수아 앞에 돌을 하나 놓는다.” 이는 교회 앞에 놓여질 신성한 말씀, 이 말씀의 글자적 의미 속의 진리까지도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교인들이 인정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인들의 마음속에 지어질 새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고 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 돌은 땅 위 교회의 반석으로서의 주님의 인성이요, 거듭나는 마음속에 있는 내향적 성전이다. 이를 두고 이사야 28장 16절에서, “보아라,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값진 돌을 모퉁이에 놓아 기초를 튼튼히 잡으리니 이 돌을 의지하는 자는 마음 든든하리라.”
이 돌은 일곱 눈을 가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의 눈은 이해성 또는 지성을 표현하는데, 이를 수단으로 마음이 본다. 일곱이란 완전하고 거룩한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눈이 일곱 개라는 말은 진리를 완전하게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이 놓으시는 이 돌이란 신성한 지혜로 있어지는 완전한 신중함과 섭리를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 즈가리야에게 일곱 등잔이 달린 등잔대가 보여졌을 때,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일곱 등잔은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이다 (즈가리야 4:10).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이런 다음, “너희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오가며 살리라.” 거룩한 땅의 더운 지방에서 그들은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족들이 만찬을 가졌는데, 그 지방은 특히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많은 관계로 그 나무 밑에서 자주 행사를 벌였었다. 그럴 때 지나가는 이웃이나 여행자가 식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면서 식사하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평화 속에 쉬는 마음의 모습, 영적이고 자연적인 선함을 사랑하여 이해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들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 대한 적절한 구절이 열왕기상 5장 5절(개역 성경 4:25)일 것이다.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표징적인 약속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어져 있었기도 하다. 더욱이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고 이어지는 각 교회 단계에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복을 주시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본문 외에도 고상한 영적 모습에 관한 모든 영화로운 그림들은 오늘날 우리 삶의 초상화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을 끄집어내서 그 악을 회개하여 삶을 개혁한다면 언제나 가능한 모습들이다. “의로운 길을 걷는 이들로부터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그분은 철회하시지 않으신다.” “주님 안에 자기 마음을 머물게 하는 이들, 주님께서 온전한 평화를 언제나 간직되게 해주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놓고 계신다.

45
황금 촛대와 올리브나무

성서 본문: 즈가리야 4장 1-4절, 11-14절

1. 나와 말을 하던 그 천사가 돌아 와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얼떨떨해 하는 나에게, 2. 그가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금으로 만든 등잔대가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 등잔대 꼭대기엔 그릇이 하나 있고, 그 가장자리로 돌아 가며 심지 주둥이가 하나씩 뚫린 등잔 일곱 개가 붙어 있었다. 3. 그리고,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서 있었다. 4. 나는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1.나는 그 천사에게 “그러면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무엇입니까? 12. 또, 금대롱으로 기름을 대어 주는 올리브나무 가지가 둘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 천사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14. 그는 이렇게 일러 주었다.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 성별한 두 사람을 뜻한다.”

개요
이 본문은 천국적 진리를 수단으로 사랑의 선, 즉 주님으로부터 새교회에 있게 될 영적인 빛을 취급하고 있다.

깨어남

자연적인 삶과 영적인 삶은 경험에 있어서 그 수준이 아주 다르다. 육체적 삶에 속한 것들,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생각, 일에 종사할 때, 우리는 영적 삶의 현상이나 경험에 대하여는 마치 잠자는 듯한 상태로 있게 된다. 영계는 내면의 세계요, 원인과 생명에 관한 세계이다. 그 반면, 자연계는 영적 원리가 구체화되는 세계요, 그 결과라는 외면의 세계이다. 통상적인 생활,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기 몸 속에서 활동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 영혼의 눈을 갑자기 열리게 하시어 영계를 보도록 허락하시면 그 당사자는 잠자는데서 갑자기 깨어나듯 하면서 자연적 삶의 현상 속에 자기 의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깨어남이 우리 마음에서도 발생한다. 그 때란, 생각의 감각적 형체로부터 영적 국면으로 건너갈 때, 즉 자연적 마음의 상태만 가지고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원리들을 합리적으로 지각하게 될 때에 발생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천사가 예언자를 흔들어 깨워 영계에서 진열되는 상징적 표현물을 보도록 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자연적 마음만 지닐 경우 잠자는 상태라고 언급하고, 마음이 영적 진리에로 승강시키도록 불리워질 때, “깨어나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읽어볼 수 있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이사야 26:19). “깨어라, 깨어라. 너 시온아, 힘을 내어라 찬란하게 몸을 단장하여라” (이사야 52:1).

황금 촛대

예언자는 황금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를 보았다. 촛대란 등잔대이다. 본문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빛, 등불을 포함하는 덮개, 초, 횃불 등등에 다 사용되는 일반적 용어이다. 오늘날의 경우, 빛을 언급할 때, 가스, 전기 불, 촛불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다양하게 사용된 한 예로 다음 구절을 보자. “야훼여 당신은 나의 등불, 내 앞에서 어둠을 몰아 내 주십니다” (사무엘하 22:29). 시편의 경우, “당신은 나의 촛불이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둠을 밝혀 주소서.”
자연적인 수준의 풍자적 의미에서 본문의 환상은 즈루빠벨의 일들, 성전을 수리하고 새로 설비하는 일에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인간 마음속에서 영적 교회를 수리하는 그분의 일, 천국의 진리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이 환상은 천상 천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빛 가운데 존재한다. 특별한 의미로 볼 때, 이 교회는 주님의 성전이시다. 그 안에서 주님은 신성한 인성으로 알려져 예배되어 진다. 신성한 인성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여호와의 성전이시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네가 본 일곱 황금 등경은 일곱 교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등경은 금으로 되어 있다. 금은 주님을 사랑함과 상응된다. 주님을 사랑함이 위의 교회에 존재하고, 그 교민들은 그분의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진리, 진리의 가장 높은 빛을 지각하여 진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릇, 대롱(주둥이, pipe) 등등

등잔대는 기름을 담은 그릇을 꼭대기에 가졌고 일곱 등잔대는 제각기 대롱을 가지고 그릇 꼭대기에서 기름을 공급받게 되어 있었다.
그릇과 대롱이란 말씀에서 오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는 그릇과도 같이 진리와 사랑의 선함을 담고 있으면서 영적인 것이 실제 사용될 때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이 그릇이 등잔대의 꼭대기에 있었다는 것은 기름, 즉 천국적 사랑의 근원을 표현하고, 생명의 가장 높은 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그 등잔은 일곱이었다. 일곱은 거룩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일곱 등잔이란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회 속의 거룩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거룩함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막의 등잔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자.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어라. 한 덩이를 두드려서 밑동아리와 원대를 만들고, 또 두드려서 꽃받침과 꽃잎 모양을 갖춘 잔들이 뻗어나게 하여라… 그리고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앞을 환히 비추도록 등잔대에 올려놓아라” (출애굽기 25:31,37).

등불

넓은 의미로 볼 때, 등은 교리를 의미한다. 교리는 빛처럼 진리를 밝히 드러내게 해준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 라고 불리는 등잔대 위의 일곱 등불은 인간 삶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시어 거룩하게 지키는 주님의 완전한 섭리를 표현한다. 지상의 교회는 각기 등차별로 신성한 진리를 가지되, 그 진리를 전복시키지 않았을 경우, 제각기 “세상의 빛”이다. 최고로 높은 등차에서 볼 때,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셨기도 하다.

올리브나무

환상 속의 올리브나무는 천적인 교회(the Celestial Church), 주님에 대한 사랑을 원리로 삼는 교회, 동료를 위해서도 천국적 사랑을 포함하는 교회를 뜻한다. 올리브나무의 열매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미끈미끈한 기름으로 가득 차 있는 바, 이는 주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까지 보여지는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올리브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그중 오른쪽은 천적인 사랑을, 왼쪽은 천적인 총명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오른쪽은 사랑이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의지 또는 심정을, 왼쪽은 생각을 지니는 지성, 또는 이해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두 올리브나무는 사랑과 이타애, 또는 천적 인간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동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표현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위 두 가지 품성,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위 두 가지 사랑의 품성으로 다스려지는 사람(person)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환상에서 보여진 것들에 관해 예언자가 천사에게 묻자, 그의 첫 대답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것이었다. 되받아 치는 식의 이 대답은 환상 속에서 두 번씩 있어지고 있다. 당연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예언자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고는 모를 것임을 천사가 짐짓 알고 있다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사의 되받아 친 대답은 예언자의 마음 상태를 더 선명하게 만들므로서, 그의 생각을 끌어내어 그의 마음에 더 확실하게 문제를 고정시켜 주려 의도된 것이다. 이래서 이 예언자가 인간들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표현해 준 격이 된다. 따라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라는 천사의 물음이란, 예언자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환상 속의 이런 저런 모습은 교회와 더불어 존재한 신성한 말씀 속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것이라서 만일 인간이 거듭나고 계발되는 상태에 있다면 이미 이해되고도 남을 사항들이라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거기서 요한이 영계의 표현적 현상을 목격하고 있을 때 원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물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때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 사항을 알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응답했다.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요한에게 가르쳐 주었다. 위와 같은 천사의 물음은 우리의 정신적 의문들, 선함이나 빛에 관한 우리의 물음은 비록 그런 것들이 우리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듯 여겨진다 해도 그것은 주님에 의해 부추겨 진 것이라는 위대한 영적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로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각자의 마음 문이 열린 등차에 따라 흘러 들어와서 더욱 많은 물음이 당사자에게 있도록 하여 영적 삶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지게 하신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가 자신 스스로에게서 그런 것들이 발생한 듯 느끼고 생각하는 것도 허용해 주신다. 그리하여 더 높은 인격 달성에 각자 스스로 노력하게 배려하신다.

기름 부음

천사가 예언자를 가르치기를, “올리브나무 두 그루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도록 기름 부어진 두 사람” 이라고 했다. “기름 부어짐”은 올리브 기름으로 부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 이유는 올리브 기름은 주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선함과 상응되기 때문이다. 올리브 기름은 이스라엘 교회에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것의 상응은 예언자를 통해 그 교회에 밝히 알려져 있었다. 기름 붓는 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에서 이루어져 왔었다. 예를 들면 성막이나 성전에서, 사제들, 예언자나, 왕들, 어떤 맹세의 증거로 삼는 돌들 위에도 부어졌었다. 개인의 경우, 자기의 기쁨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 기름을 붓기도 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부어지는 기름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 기름 부어지는 이들은 “기름에서 태어남, born of oil”이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랑의 영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를 모심 (주 앞에 서 있음, standing by the Lord)

기름 부어진 자들이 “주를 모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본문이 의도한 객관적인 그림은 양쪽에 명령을 즉각 받을 준비를 갖춘 두 신뢰하는 종을 거느린 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려지는 본문의 그림은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에 즉위하신 신성한 왕으로서의 주님에 관한 것이다. 그분 옆에 서 있는 두 “기름 부어진 자”란 주님을 사랑함(오른쪽)과 이웃을 사랑함(왼쪽)을 기둥 원리로 삼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 두 원리는 인간 마음속에서 주님을 자신의 통치자로 인식하면서 매일의 생활에서 겪어 가는 자그마한 일 까지에서도 그분이 하라는 것을 행하는 착실한 종들과 같다. 주님의 뜻을 내 삶에서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는 마음은 행복하다.
본문에서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라고 불리고 있다. 여기서의 “온 세상”이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주님은 모든 교회의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마태복음 28:18)라고 선포하시었다. 최고 높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이시다. 낮은 의미에서 하늘과 땅은 인간 안에 있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다. 이 두 마음 모두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을 때 인간은 거듭나게 되어 천국 품성을 지니게 된다. 이 때 주님은 각 마음속에서 왕위에 오르시게 된다. 그러면 그 왕좌 옆에 천국의 사랑과 지혜라는 두 올리브나무가 서 있게 된다. 이 마음에 의해 하느님의 뜻은 자연계의 삶 즉 지상에서 펼쳐지게 된다. 동시에 계발된 영적 삶이 하늘에도 알려지고 행해지게 된다. 매일 우리 삶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진리들을 가르쳐 주시어 천국적 사랑의 선함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려 노력하신다. 매일 매일 그분의 역사 속에, 그분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구체화하시면서 우리 앞에 앉아 계신다.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우리 삶의 사실(fact)들 앞을 지나치시면서 지금도 이렇게 되물으신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느냐?”

46
날고 있는 두루마리

성서 본문: 즈가리야 5장 1-4절

1. 또 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었다. 2. 그가 나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기에 나는 “스무 자 길이에 나비가 열 자 되는 두루마리 책 한 권이 날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그러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것은 온 나라를 휩 쓸 저주이다. 이 두루마리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들은 다 사라지리라’ 라고 적혀 있다. 4. 이것은 내가 보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남의 것을 훔쳐 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 가 그 집 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

개요

본문은 교리나 생활면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버린 유대교회의 파멸이 임박했음에 대한 표징적 예언이다.

두루마리

예언자에게 보여진 두루마리는 현재와 같이 인쇄나 제본이 발명되기 전에 만들어진 책, 손으로 써서 만든 책이다. 에제키엘이 그의 환상 속에서 이와 같은 책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2:9).
책이란 책 안에 씌어 있는 내용에서, 또는 저자의 특질로부터 책의 특성 역시 결정된다. 만일 책의 내용이 진정하다면, 그 책은 내용에 다소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진리를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 책은 거짓을 표현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책, the book”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내용이 신성한 진리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되는 책은 이스라엘 후손 내의 썩어진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것, 자아 사랑에서 튀어나온 왜곡된 원리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 즉 두루마리는 유대교회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것뿐인 거짓을 표현하고 있다. 이 두루마리가 날고 있었다는 말은, 이런 거짓이 부패된 교회를 사방으로 다니며 설치어 그나마 마음 안에 남은 모든 선함과 진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의 크기

이 두루마리가 책이라고 볼 때 굉장히 큰 크기였다. 어림잡아 30피트 길이에 폭이 15피트 정도였다. 이같이 책의 크기가 굉장함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온갖 것을 통해 침투한 거짓 원리의 굉장한 세력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큐빗(cubit)은 오늘날의 측량치로는 약 18인치 정도이다.
길이는 선함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폭(나비)은 진리에 관한 측량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길이는 20큐빗이었다. 숫자로서의 20은 인간 마음 안에 저장된 내면의 원리, 즉 각자의 어린 시절에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것, 그리하여 성년 시절 시험이 올 때 그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는 원리들, 이를 통틀어 “아껴 두신 것들, remains”이라 불리는 것들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그리고 나비는 10큐빗이었다. 숫자 10은 모든 것, 완성되는 시리즈를 표현하는데, 대표되는 예로서 모든 인간 삶을 위한 법칙인 십계명이 있다. 나비는 진리 측면을 말하는 바, 열 큐빗이란 원리 속의 진리에 관한 것, 즉 두루마리의 모든 특성이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선함이 악으로 뒤바뀌고, 진리가 거짓으로 온통 되어 버린 썩을 대로 썩어 거의 죽은 유대교회의 정신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두루마리는 영적 삶의 수단으로 인간에게 밝혀 주셔 왔던 모든 신성한 원리들이 그 원리를 받았던 인간들에 의해 썩혀지고 영적 죽음으로 변하게 했다는 것, 주님이 축복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인간들이 저주로 바뀌게 했다는 것도 표현해 준다.

저주

천사가 두루마리의 의미를 예언자에게 설명할 때, “이것은 온 나라를 휩쓸 저주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 저주란 정죄 또는 처벌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 이는 인간이 거짓되게 맹세한 것, 자기 생각에 거짓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에게는 진리를 증거 하겠다고 할 때 되돌려 받는 대가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처벌은 시민법에서 흔히 맹세에 붙어 다니는 조항인데, 이는 신성한 법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맹세라는 단어의 가치는 언제나 신실함과 신뢰 속에만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까닭이다. 어떤 사회 속에 있어야 할 표준 외의 어느 다른 표준이 발생되면, 그것은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의 삶과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맹세의 본성이나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의도적인 거짓 맹세를 할 경우, 그 새빨간 거짓말은 필시 시민적이고 영적인 처벌을 당사자에게 반드시 초래한다고 믿는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악인에게 곤경을 만들어 주는 듯 여긴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서, “너희가 이렇게 굴었기 때문에 계절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다. 너희 죄가,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린 것이다.” 이사야 59장 1,2절에서,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지면 (나라, the face of the earth)

저주는 “온 지면(나라)을 휩쓸 저주”라고 말해지고 있다. 온 지면(whole earth)이란 처방이 내려졌었던 온 교회를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 마음속의 천국인 영적 마음과 구별되는 인간 속의 모든 자연적 마음도 표현한다.“ 얼굴(face)은 마음을 표시(index)한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속의 내용물을 표현한다. 악인의 경우, 그가 알고 있는 내용물이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내용물뿐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는 영적 마음이 닫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저주가 악을 행하는 이들을 “사라지게(cut off)” 할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를 내향적으로 볼 때, 악한 인간이 확증한 거짓 원리들이 주님께로 열려야만 가능해지는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생명의 공급을 그들 속에서 자르게 된다는 말이다.

도둑질

본문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악행자의 두 가지는 도둑질하는 자들과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다. 도둑질이라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한다면, 타인에게서 그의 물질적 재산이나 정신적 재산을 불법으로 탈취하는 것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타인에게서 그 사람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 또는 그의 합리성, 또는 영적 자유를 제거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항 중 어느 하나라도 상대방이 모르게 제거시킨다 해도, 그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의와 죄에 관한 그 사람의 올바른 감각을 강탈한 것이 된다. 한 마디로 영적 삶의 수단들을 강했다는 말이다. 이를 더 깊은 의미에서 살피면, 악인이 주님을 사랑함과 순종함을 거절할 때, 자기 생명이 주님의 선물임을 인정치 않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거짓이라는 망측한 저주가 인간의 마음을 쓸고 다닐 때, “도둑질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만다.” 즉 이와 같은 거짓은 인간에게 생명을 실어 나를 수 없고, 오로지 죽음만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거짓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의 근원에서 자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주님의 사랑스러운 초대를 받는다 해도 영적 죽음만을 선호하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신다. “너는 생명을 갖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영적인 도둑질은 심정으로부터 모든 선을 거둬 가고, 그나마 주님께서 각 인간의 유아 시절에 저장해 두셨던 “아껴 두신 것, remains”까지 파괴한다.

맹세함

본문의 맹세란 거짓 맹세, 맹세 밑에 위증죄가 깔려 있는 허위 맹세임은, 본문 4절에서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단지 맹세한다라든가, 진리를 말한다고 맹세하는 것, 등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반면, 맹세는 주님에 의해 성별되어 사제의 임무에서 규율되고 특별화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가장 엄숙한 태도로 가장 높은 권위를 수단으로 확언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신실함이나 진실성을 증언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으면서 유유히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가장 무거운 죄의 하나를 범하게 된다. 영적으로 볼 때, 맹세를 깨트림 속에서 우리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혼동하게 되어 결국 자신의 영적 합리성과 영적 자유를 파괴한다. 그 이유가 “죄인은 자기 죄에 노예이기” 때문이다. 거짓 맹세함은 주님께서 인간 마음 안에 저장해 두신 진리에 관해 “아껴 두신 것들”을 파괴한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2절은, “너희는 남을 속일 생각으로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그것은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도둑과 거짓 맹세자들은 날고 있는 두루마리, 즉 저주로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활기치는 거짓의 역사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서술은 한쪽에 그리고 다른 쪽에도 적혀 있는데, 이는 오른쪽과 왼쪽을 각각 암시하는 바, 심정 속의 선함, 이해성 속의 진리를 모두 제거시킨다는 말이 된다. 오른쪽은 우리의 애정 측면의 본성을, 왼쪽은 우리의 지성 측면의 본성을 표현해 준다.

집, 기타 등등

날고 있는 두루마리, 곧 저주는 “남의 것을 훔쳐먹은 자의 집에도, 내 이름을 팔아 거짓을 옳다고 맹세하며 사기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 그 집안에 머물면서 대들보와 돌담까지 다 허물어뜨릴 것이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으로 보건대, 인간의 집이란 각자의 마음, 특별히 그의 의지, 또는 심정이고, 이곳은 인격의 근본 동기인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거주하는 곳이다. 날고 있는 두루마리로 표현된 이 거대한 파괴적인 거짓 원리들은 인간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서 애정의 영적인 생명까지 살라 버린다. 거짓 맹세자의 정신적인 집 속에서 이 엄청난 거짓들은 그 속에 남은 진리의 모든 형체까지 왜곡시켜 버린다.
본문은 서술하기를, 저주는 대들보(timber)와 돌담(stones)까지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무로 된 대들보란 모든 인간 삶이 건설되어야 할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돌(stone)이란 선한 인간의 정신적인 집의 기초나 벽을 형성해 주는 것, 즉 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한다. 이와 같은 선함과 진리들이 고정되어진 거짓이라는 저주로 파괴되어지고 만다.

일반적인 표징

오늘 본문에 흐르는 양상을 보면, 두 가지 죄 즉 도둑질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을 열거하면서 이 두 죄를 널리 퍼져 있는 죄악들에 대한 대표되는 격으로 내세워 놓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두 죄가 십계명의 두 돌판에 반대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 대해, 또 하나는 인간 상호 관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은 첫 돌판에 반대되는 죄이고, 도적질하는 것은 둘째 돌판에 있는 율법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악이나 거짓, 그리고 죄는 어느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홀로 거주하는 일이 없다. 악들은 떼지어 돌아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마음의 소유권을 탈취했다고 여겨지는 어떤 고정되어진 악을 발견한다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타락하는 심정을 발견하고, 그외 다른 악들도 발견하게 되는데, 발견 못한다면 최소한 잠재하고 있다든지, 시작하는 초기에 있다고 보아도 된다. 모든 인간은 인격의 일반적(평균) 수준을 가진다. 그 수준은 선을 향해서도, 악을 향해서도 동등한 수준이다. 또는 일반 수준 아래나 위로 자신의 미덕이든 악덕이든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도 자기 인격 중 어느 일부만 거듭 나아가고, 일부는 타락된 채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은 부피로 진보되는게 아니라 품질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 속에 있는 인격의 일반적인 품질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각 분과에 품격을 주게 된다.
큰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면서 닥치는 곳마다 파괴하는 모습은 아주 생생하고 강력한 그림을 우리 마음에 남게 한다. 어찌됐든 악과 거짓, 죄악으로 고정되고만 인간 마음속을 날고 있는 참혹한 저주는 존재한다. 이는 인간의 심정과 지성 안에서 형성되어 고착된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이다. 우리가 그런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죽게 하는 저주를 형성시켜 주고 먹여 살려 주는 썩은 것을 사랑함 때문이다. 이런 것에서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거듭남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인격 속에서 악이 고정되기 전 일뿐이다. 그래서 사랑의 하느님이 내리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그래서 회개치 못하는 심정 속에 확증된 악이 고착되기 전, 즉 자신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데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일러주어라 ‘내가 맹세한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 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 오라.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 오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에제키엘 33:11).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너희의 말대로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아모스 5:14).

47
여인과 에바

성서 본문: 즈가리야 5장 5-11절

5. 나와 말하던 그 천사가 나서서 말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6. 내가 “저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기 나타나는 것은 말이다. 저 말 속에는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 있다.” 7. 그러자, 납으로 된 뚜껑이 열리면서, 그 큰 말 속에 한 여인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8. 그는 “몹쓸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말 속에 틀어 넣고 납뚜겅을 도로 덮었다. 9.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두 여인이 나타나서 황새 날개 같은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며 그 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날아 가고 있었다. 10.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저 여인들은 그 말을 어디로 가지고 갑니까?” 하고 묻자 11.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그가 있을 신전을 시날 땅에 짓고 받침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모시려고 갔다.”

개요

악한 사랑으로 속을 채운 유대교회가 자기들의 선함을 뒤집고, 더 나아가 신성한 진리까지 모독하여 완전히 뒤집힌 교회가 되는 것을 본문은 밝히 알려 준다.

에바

에바란 이스라엘 후손들이 사용한 가장 큰 측량치로서 마른 것을 측량할 때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1 부쉘(bushel), 또는 1 말 정도일 것이다. 고체(solid)는 선함에 관한 것을, 액체(liquid)는 진리에 관한 것을 표현하는 바, 고체(마른 것)의 측량치는 선함의 품질, 또는 선함의 품질을 테스트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에바는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선함이 실제 사용되고 있을 때 “저기 나타나는 것…” 이라고 본문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천사가 말하는 에바에 관해서 개역 성경은 “This is their resemblance through all the earth,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이 담겨있다.” 다른 번역의 경우, “그것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 등등으로 번역되나, 히브리어를 글자대로 말한다면, “This is their eye through all the earth, 이것은 온 땅에 가득한 그들의 눈이다”일 것이다. 눈이란 이해성, 또는 지성으로 이 눈이 마음의 눈이요, 이 눈으로 정신적인 것들이 총명하게 보여지게 된다. 에바라고 본문이 언급한데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는 통상적인 측량치 정도로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건대, 이는 교회 안에서의 자연적 선에 관한 통상적인 종류들, 예를 들면, 경건함이나 헌신 등과 같은 바깥쪽 행동으로 측량되는 선함을 표현한다.

이 에바는 납뚜껑을 가지고 있다. 기초 금속으로서의 납은 아주 낮은 수준의 선함, 즉 물질에 속한 선, 자연적 감각에 알려진 선, 즉 감각적인 선을 말한다. 이 납 뚜껑은 “한 달란트, a talent of lead”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달란트라는 무게 단위는 매우 무거운 측량치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정확히 일치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무게로 볼 때 100파운드(pound)쯤 될 것이라 본다. 금 한 달란트나 은 한 달란트는 큰 액수가 요구되는 큰 공사나 사업에 사용되는 액수이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는 달란트라는 용어의 사용에 관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화폐 가치로 사용된 달란트는 진리나 선함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왜냐 하면, 돈처럼 지식도 어떤 것을 획득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큰 덩치의 납뚜껑이 물질적(육적)이고 감각적인 선함을 표현했는데, 그 뚜껑이 납 한 달란트였다는 사실이 육적인 선함에 형태를 주는 지식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에바(말) 속에 든 것이 폭로 되도록 이 납뚜껑이 들리웠다(열려졌다).

여인

뚜껑이 열려지자, 에바 속에 든 내용물은 여인이었다. 여인이란, 개개인의 인격에 따른 선과 악, 또는 애정 측면의 삶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거꾸로 되어 버린 교회가 그려지고 있으므로, 여인은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이 사실이 뒷받침되도록 천사가 그 여인에 대해 “몹쓸 것, 사악함, wickedness, 글자대로 보면 악”이라고 말했다. 이 악한 여인은 썩어진 교회에 대한 일반적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에바는 자연적 선, 즉 외적 행동에 있는 선을 표현했고, 여인은 심정 안에 있는 악,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경건함이나 헌신이라는 외적 선함 내에 거주하고 있는 악을 사랑함을 표현했다. 유대 교회, 비록 그들이 아직까지는 교회 예배의 형식을 엄격히 준수해 가고 있다 해도, 그들의 심정은 온갖 종류의 악 속에 몰입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위와 같은 모습에 대해 “위선자,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라고 예수님께서 질타하시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그들 국가의 일반적 모습을 표현하셨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마태복음 23:27). 이 서술은 외형상으로는 경건하게 열심히 고백하는 중에 있다 해도 유대인들의 속은 악한 속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바 속에 든 악한 여인으로 상징화된 의미인 것이다.
여인이 에바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위와 같은 악 속에 자신을 고정시켰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앉음”이란 어느 정도 항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세는 어떤 조건에서 안일함을 갖고 있어 마음이 변하는 이동하는 상태인 서 있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여인이 “에바 속에” 있었다는 것은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조건으로 확실하게, 통째로 고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덮음

천사가 예언자에게 여인을 보여준 뒤, 그는 여인을 에바 속으로 틀어넣고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이런 행동이 나타내 주는 것은,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가 외적인 경건과 헌신이라는 선함을 유지했으면서도 그들 심정으로는 악을 확증하여 고정시켰다는 것, 이런 악들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선으로 덮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이런 심정의 소유자들은 자기들 종교를 육적인 선 속에 놓았다는 것이다. 행동에 있는 선을 심정에 있는 악과 결합시키는 것은 선함의 모독을 성립시킨다.
천사가 에바를 닫을 때, 말해진 것은 “…납뚜껑을 도로 덮었다. He cast the weight upon the mouth”이다. 이를 히브리어 글자대로 말한다면, “납 같은 돌, stone of lead”로 덮었다이다. 고대 시대 때의 무게, 중량(weight)은 종종 돌로 표현했다. 그래서 중량이 흔히 돌로 불리웠는데, 오늘날의 경우, 영국에서는 14파운드를 돌 하나(a stone)로 일컫는다. 돌이란 자연적 평면에서의 진리,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돌은 거짓으로 왜곡된 자연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이리하여 “납 같은 돌”이란 감각적인 거짓을 의미하고, 이 의미는 감각적인 악을 표현하는 납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두 여인

에바가 닫힌 후, 두 여인이 나타나 에바를 들어 운반했다. 여인은 애정을 표현하는 바, 두 여인은 다른 교회들에 존재하는 애정, 그 교회의 다른 조건, 에바 속의 여인으로 표현된 유대교회의 악한 인격을 지각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에바 속의 여인이 사라지도록 주님의 지휘를 받아 다른 교회들을 오염시키지 않은 채 그 자체 스스로 존재 될 수 있는 곳에 던져지도록 섭리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방인 교회의 일부는 비록 그 교회가 진리에 무지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단순한 심정으로 주님을 모셔 보려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오염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들이 지닌 자연적인 선한 애정들이 유대인 속에 든 위선을 인식하도록 허용하심으로 그것이 죄악임을 알고 거절하게 하여 그 악의 오염에서 보호되어 져야 했다는 말이다. 여인이 둘이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하나 된 상태에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선한 자연적 애정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와 하나를 이룰 때 위선적인 경건함 따위는 노출되어 알게 됨으로서 주님이 그런 죄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게 된다.

날개

이 여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날개, 이는 새의 팔인 바, 힘을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새들이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수단이 날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는 우리의 생각(사고)을 표현하고, 날개는 사고하는 힘을 표현한다. 그리고 날아간다는 것은 사고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위선적인 경건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잘 사용함으로 가능해진다. 즉 사고력의 사용은 악한 여인이 들어앉은 에바를 들어 올려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여인이 “황새 같은 날개”를 가졌다는 것을 글자대로 생각하면, 그들의 날개는 길고, 강해서 더 세차게 공기를 차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황새는 자연적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 생각은 계속적으로 힘있게 생각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람

두 여인에 관해 말해질 때, 그들에게 황새 같은 날개가 있어 “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해지고 있다. 개역 성경을 참조하면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The wind was in their wings”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날개가 바람을 이용하는데 대해 풍자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 의미는 보다 더 심오해진다.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 그럼으로 해서 필요한 목적을 성취시키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역사, 특별히 신성한 진리를 인간 마음에 흘려 보내심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표현한다. 사람을 창조하는 기록,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바람, 숨, 영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날 땅

두 여인은 에바에 든 여인을 시날 땅으로 운반해서, 거기에 그녀가 있을 집을 지어 그녀의 “처소 (받침대, base)”로 삼게 했다. 시날 땅은 갈대아 또는 바빌로니아에 관한 고대 이름인데, 이에 관해서는 창세기 10장 10절에서 “힘센 사냥꾼 니므롯”을 거론하면서,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에 관해서 말해지는 바,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잡고는…”(창세기 11:2)라고 언급되고 있는 바, 거기서 그들은 바벨이라는 큰 탑을 짓기 시작했다.
시날 땅이란, 심정이 악과 결합되어 있어 모든 선함과 진리를 모독해 버리면서도 외형으로는 예배 속에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예를 들면, 헌신적인 외적 경건함을 유지해 간다면 그리스도의 “대속, Vicarious Sacrifice”에 의해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된다고 믿는 이들, 이런 구원을 위해서 악에서 선으로의 인격 변화인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을 간절히 바래고 노력하는 주님과의 협력 관계는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고 믿는 식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 에바에 앉은 여인이 시날 땅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은 위선적 경건함, 심정이 악으로 차 있는 교회를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서 교회의 다른 형체와 섞이거나 혼돈 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은 그 자체대로 있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채워야 한다는데 대한 표현적 그림이다.
시날 땅에 그런 교회를 위해 집이 지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집이란 인간의 고향, 즉 인간이 각자 거주하는 고향이다. 이 고향이란 각 개인이 독자적으로만 거주하는 곳, 자기 내면에 있는 의지이다. 이러므로 악한 여인이 사라지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 여인을 위한 집이 지어져 그곳에 안착한다는 것은 위선적인 선함이 분리되고, 그것 자체는 그것과 품질이 같은 생김새가 그 악 자체를 위한 기초(받침대)가 된다는 말이다.

예언

글자대로 생각해 본다면, 본문은 예루살렘의 파멸, 그리고 유대인 국가가 파괴될 것이라는데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사실 이런 예언은 로마가 유대 땅을 정복함으로 곧바로 실현되었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본문은 유대인에게 내려졌던 처방(dispensation) 위에 있을 심판, 더불어 모든 시대, 만민, 각 개인의 마음이 본문의 의미와 같을 경우, 그 마음 위에 내려질 심판을 묘사해 놓고 있다.
하나의 처방전으로 볼 때 유대교회는 오래 전 자신들의 악들로 인해 끝장을 보았다. 교회에 있어 온 각 개인은 아직 존재하고, 그 조직 역시 흐트러진 파편같이 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걸치면서, 유대인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 종교적으로 내쫓겼다. 유대인의 일부, 아마 많은 이들이 아직도 옛 이스라엘의 회복,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라는 예언이 글자대로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런 성경의 예언 성취는 결코 있지 않는다.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성취되나 글자적으로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 글자적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 성취의 결과인 것뿐이다. 이 예언들이 의미하는 것들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새로워진 교회, 거듭나는 주님의 교회, 새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고, 이 목적을 향해 고대 예루살렘이나 그 백성들은 단지 글자로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치 육체적 삶이 정신적 삶의 상징물인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매 단계, 태고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은 주님과 그분의 신성한 선과 진리, 그리고 그분의 섭리를 사랑하는데 실패되도록 작용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만의 사랑에 집착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신뢰함으로서 영적인 사랑과 믿음과 정의를 자신들의 심정과 삶 속에서 파괴했다. 인간의 악과 거짓은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영적 자유의 상태를 끌고 가, 진리는 왜곡하고 선함의 표준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아에서 파생된 관념 속에 상주함으로써 그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예배한 하느님의 진정한 모든 속성까지 실지로 부정하고 만다. 이런 것들은 영적 시날, 자아 사랑과 위선적 예배라는 정신 상태로 운반되어 진다. 그곳, 노아의 후손이 해 놓은 고대의 모형 속에서 그들은 큰 탑을 쌓되 자신의 자연적 감각을 받침대로 해서 천국까지 도달하게 쌓아 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아 숭배를 위한 탑은 옛날과도 똑같이 사상에 혼동이 와서 끝장이 나는 바, 영적 사람다움을 이룩해 줄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다음의 두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야훼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한 발짝인들 제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10:23).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겠느냐? 땅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땅을 고르고 나서 검정풀씨나 회향초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과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쌀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이런 농사법을 일러주신 이가 누구냐? 하느님께서 농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검정풀씨를 타작기로 떨더냐? 탈곡기를 굴려 회향초를 떨더냐? 검정 풀씨는 막대기로 두드려 떤다. 회향초는 도리깨로 두드려 떤다. 어찌 밀알이 바숴지도록 두드리겠느냐? 아니다, 무작정 두드리지는 않는다. 바숴지기까지 탈곡기를 굴리지는 않는다. 이 생각도 만군의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놀라운 계획을 멋지게 이루시는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사야 28:23-29).

48
네 병거와 말

성서 본문: 즈가리야 6장 1-8절

1. 또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병거 네 대가 나오는데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네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다. 4.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5.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 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6. 붉은 말들은 동녘 땅으로, 검은 말들은 북녘 땅으로, 흰 말들은 서녘 땅으로, 점박이 말들은 남녘 땅으로 나갈 말이다.” 7. 그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8. 그 천사가 나를 부르며 일러 주었다. “자, 보아라. 북녘 땅으로 나갈 말들이 주의 영을 모시고 북녘 땅으로 떠난다.”

요약

새교회를 위한 교리들은 사랑과 이타애로부터 끌려 나와 진다는 것, 이 교회는 영적 진리에 무지하나 마음씨 고운 각 사람들로부터 형성되어진다는 데 대한 예언이다.

병거들

네 병거가 환상 가운데서 보여졌다. 모든 수송 수단(vehicle)은 인간이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송 수단은 실제로 사용될 수 있게 진리를 놓는 것, 즉 진리를 서술의 형체로 바꾼 것인 바, 교리들을 표현하게 된다. 시편 20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병거를 신뢰한다는 것은 교리에 신뢰를 둔다는 것이고, 말을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연적인 이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과 지도를 위해 주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네 병거가 있고, 각각은 네 방위 동, 서, 남 그리고 북쪽으로 여행하리라고 예상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뒤에서 살피겠다.

놋쇠로 된 산들

이 병거들은 두 산 사이로부터 출현했다. 땅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산이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원리 중에서 가장 높은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 가장 높은 원리란 사랑의 원리, 특별히 주님을 사랑함이 자신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표현한다. 사랑은 선한 모든 것의 근원이다.
본문에는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이는 서로 구별되는 사랑의 두 형체,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산들은 놋쇠(brass)로 된 산이었다. 놋쇠는 다각도로 사용되는 기초 금속류이나 귀금속인 금이나 은에 비해 그 가치는 훨씬 낮다. 놋쇠는 자연적 선함, 실생활에 있는 선, 자연적 마음속의 선을 표현한다. 이 선은 금으로 표현되는 천적 선과 은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등차가 다른 선이다. 따라서 놋쇠로 된 산들이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련을 갖는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병거들이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교리들은 자연적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선함, 즉 자연적 선함의 정신적 평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에서 흘러내려 계곡을 비옥하게 하는 물의 흐름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 사용되는 진리는 우리의 자연적 행동 지침을 선한 질서 속에 있게 하는데, 이 진리는 사랑의 가장 높은 산으로부터 흘러내리고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가장 심오한 바램, 그리고 동료들과도 가장 좋은 유대 관계가 있어지게 해준다. 만인의 사용을 위해 모세가 높은 산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 왔다는 것이 위의 말을 예증해 줄 것이다. 시련과 시험 속에 있는 거듭 나아가는 사람들이 신성한 인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때, 다윗처럼 이렇게 노래하리라.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시편 121:1,2).

말들

병거는 말에 의해 끌려진다. 말은 인간의 지적인 원리, 이해성, 특별히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인간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에제키엘 39장 17, 2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의 산에 제물을 잡아 큰 잔치를 벌여 놓았으니, 너희는 사방에서 몰려 와 제물인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셔라… 너희는 내가 차려 놓은 잔칫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그 밖의 군인들의 살코기를 배불리 먹어라.” 이와 비슷한 잔치가 계시록 19장에서도 선포되고 있다. 이런 모든 사항들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와 교리 등등에 관한 영적 잔치를 상징화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이 끄는 병거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수단으로, 그리고 이해성의 품질 수준에 따라 인간의 이해성에 의해 끌려지는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색깔들

각기 다른 조건과 품질의 인간 이해성이 여러 가지 색깔인 빨강, 검정, 흰 그리고 회색(gray, bay)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빨간 색은 사랑과 선함에 관한 색이다. 그 이유가 선함은 행동에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붉은 말은 사랑 또는 선함이라는 측면에서의 이해성에 관한 속성 또는 품질을 표현한다. 맨 먼저, 병거가 붉은 말에 이끌려지는데, 이는 새교회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의 마음의 조건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교리가 선포되는 가운데서 진리의 품질이나 그 수준은 진리에 도움을 얻는 사람들의 상태와 언제나 부응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모든 등차 속에 존재하므로 그 진리는 인간 마음의 모든 국면에 도달된다. 그러나 세부적인 측면에서 인간에 도달되는 진리는 현재 그 인간의 정신적 열림의 수준이나 등차에 국한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붉은 말로 이끌리는 병거는 자연적인 선함이나 사랑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달되도록 주어지는 교리들을 표현한다. 그 이유를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새 교회는 초기 기독교회의 남은 조각들로부터 형성되지 않고 이방인의 세계, 즉 초기 기독교회의 교리들로 특별하게 훈육되지 않고, 단지 단순하게 신실한 마음이 선한 이들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이다.
검은 색이란 정신적인 어두움, 진리에 무지함, 예를 들면 글자대로의 외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표현한다.
흰색은 진리의 빛, 또는 깨끗한 순수성을 표현한다. 흰 말은 신성한 말씀에 관한 이해성을 표현하는데, 인간 마음이 진리에 관한 어떤 지식을 획득하여 이해성이 빛이 날 때를 말한다. 계시록 19장 11, 13,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점박이 또는 회색은 흰색과 검은 색의 혼합이다. 따라서 점박이 말이란 무지한 듯 하면서도 약간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 즉 지식 측면이 희미한 상태의 이해성을 표현한다.

씩씩함 (strong, bay)

본문에서는 씩씩한 말(bay horse, 적갈색 말) 역시 보여주고 있다. “bay”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짙은 빨강, deep red”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색은 창백함을 암시하기 보다 오히려 “강함”을 나타내는데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한국어 번역 성경의 경우, “씩씩함” “건장함”으로 번역되고 있다. 본문의 씩씩한 말(bay horse)의 색깔은 적갈색(reddish brown), 밤색(chestnut color)이다. 이 단어가 색깔 측면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사용되는 곳이 성경 내에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나. “건장함, strong”으로 사용되는 예를 한군데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를 미워하는 억센(강한) 원수들, 내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것들 손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시편 18:17).
적갈색(reddish brown)은 활력 있는 건강한 색깔로 여겼는 듯 추정된다. 이 색을 강건함(strength)으로 여긴 것은 이 단어의 표현적 의미와도 일치된다. 적갈색 말(건장한 말)이란 악과 거짓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이 있는 인간 이해성의 상태, 그래서 진리의 힘이 아주 강한 인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색깔이 다른 말들에 관한 언급은 즈가리야서와 계시록 모두 유사하게 기록되고 있다.

네 영 (또는 네 바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예언자가 병거와 말들에 관해 묻자,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영”은 “바람”이라고도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단어 하나가 바람, 숨, 영을 다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정확한 의미는 알기 곤란하게 되어 있다. 어떻게 말해졌던지간에 이 말들은 인간이 지닌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의거한 필요성에 맞춰 인간에게 뻗쳐 나가는 신성의 영향력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온 천하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데로부터 사방으로 뻗쳐 나가기 때문이다. 온 천하란 모든 각 교회 속의 하느님이다. 시편 104편 3절에서 주님에 관해 이렇게 노래한다.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글자대로 읽을 경우, 지상의 네 방위를 언급하는 듯 여겨진다. 그러나 그 영적 의미는 인간에게로 나가 각 인간의 생각과 삶의 각 등차에 도달되는 네겹(fourfold)으로 된 주님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여준 거룩한 성에도 네 면이 있었다. 이 성은 천국에서 내려와서 새교회를 받을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인간 마음에 닿게 되는 새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말하신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인격 때문에 하늘 나라를 차단시키고 있다는 것, 그러나 교회는 이방인들로부터 형성될 것이라고, 즉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29). 그래서 어린 양이 큰 책의 봉인을 뗄 때, 각 색깔의 말들이 요한에게 보여졌다. 큰 책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요, 어린 양이 봉인을 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경의 내적인 영적 의미를 밝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 속의 진리가 인간에게 뻗쳐 나가 이 진리를 받고 싶어하는 각종 인간 국면에 도달된다는 말이다.

영적 네 방위

넓은 의미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은 주님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태양이 그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에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동쪽은 주님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의 결과가 인간의 심정 속에 있는 선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주님을 영적으로 사랑하며 산다고 할 때, 그는 동쪽에 거주한다고 말해진다. 이 동쪽과 반대 위치에 있는 서쪽은 동쪽이 내적이고 영적인데 비해 외적인 자연적 사랑의 상태를 표현한다. 태양이 정오에 있을 때가 남쪽에 해당되는데, 이 때가 가장 많은 빛이 비치는 바, 남쪽은 영적 총명을 표현한다. 남쪽에 반대되는 북쪽은 자연적 마음 수준이 갖는 총명, 영적 진리보다는 자연적 진리를 붙잡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진리의 국면들을 표현한다. 비교적 측면에서 볼 때, 북쪽과 서쪽은 성경의 글자에서 보여지는 바대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고, 그 반면 남쪽과 동쪽은 신성한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진리와 사랑을 표현한다.
각기 다른 색깔의 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본문은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먼저, 검은 말은 북쪽으로 갔는데, 그 뒤를 흰 말이 따르고 있다 (개역 성경 참조). 북쪽은 마음이 차고 어두운 상태를 표현한다. 이 상태는 자연적인 사랑 안에 있을 때이고, 진리에 관한 빛이 희미할 때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검정이 표현하는 바, 이는 영적인 북쪽과 부합되어 진다. 북녘을 향해 검은 말이 간다는 것은 마음이 선하지만 무지해 있는 이들, 마지막으로 새교회 안으로 들어와질 이방인들에게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소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개받은 뒤, 그들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될 때, 그들에게 더 큰 진리의 빛을 보내신다는 것이 본문에서 검은 말 뒤를 이어 흰 말이 나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신성한 말씀에 관한 글자를 받고, 그 글자에 있는 법대로 자신의 행동을 굳혔을 경우, 그들은 자기들 정신적 상태와 행동에 적절한 진리의 더 높은 형체들에 그들 마음이 열릴 준비가 되어 있게 된다.
점박이(grizzled, 회색, gray) 말들은 남녘으로 갔다. 이 말들은 검정 말이 표현하는 진리의 빛보다 더 많은 빛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교통할 수 있다.
적갈색 말(또는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향을 더욱 폭넓게 미치도록 하라는 말이다. 비교 측면에서 볼 때 하늘이 정신적인 천국, 영적 마음을 표현하는데 반해, 땅(earth)은 인간 속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땅을 두루 다녀라(순찰하라)는 것은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마음에 도달하여 인간이 지닌 악에 대한 자연적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신성한 진리의 빛 속에서 자기 속의 악을 극복하게 하는 목적을 수행해 가는 것, 더불어 그분의 강함만이 인간을 감각적인 조건에서 영적 조건에로 바뀌게 할 수 있음을 확연히 인정할 수 있게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을 가라앉혔다 (quiet my spirit)”

본문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보라 북녘 땅으로 나간 자들이 북녘 땅에서 내 영을 잠잠하게 했다. Behold. these that go toward North country have quieted My Spirit in the North country.” 이를 글자대로 말하면, “…내 영을 쉬게 했다. Have caused my Spirit to rest in the North country.” 주님의 영, 그 영은 바로 주님 자신이신데, 병거나 말들을 수단으로 주님의 영 안에서 어떤 다른 것을 만들게 하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전혀 타당치 않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되는 상황은 주님의 영을 향한 태도를 유발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표현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자기 속에서 자기를 거듭나게 해주시려고 역사 하시는 주님의 영에 반대하여 더 이상 투쟁하지 않게 될 때, 주님의 영은 쉬시고, 잠잠해지신다. 거듭나는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mutual love)이 신성한 사랑을 위해 거처할 장소를 제공할 경우, 주님은 그 사람 속에서 안식하신다. 만물의 창조 후에 이어진 안식일(The Sabbath, rest)은 창조하시므로 몹시 피로해지신 창조주가 피로를 회복하시려고 정해 놓은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인간 거듭남의 영적인 조건을 표현해 놓으신 것이고, 그 조건을 갖춘 심정 속, 즉 평화와 사랑 속에서 주님은 쉬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이런 인간 조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찾아보자.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스바니야 3:17). “야훼께서 너를 너그럽게 대하셨으니 내 영혼아, 너 이제 평안히 쉬어라” (시편 116:7).
이렇게 되는 조건은 “북녘 땅에서” 발생된다. 즉 이방인들, 주님의 말씀이 없는 자, 무지 가운데 있었던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 신성한 말씀을 수단으로 새교회는 형성되어질 것이다. 먼저 신성한 말씀의 글자를 수단으로, 후에 그 글자를 바탕으로 한 영적 의미 속에서 형성된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주님은 천상 천하의 영원한 교회, 그분의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신다. 아마도 형체에서는 다양하겠지만 사랑과 진리에서는 하나인 교회를 건설하신다. 다음의 구절로 위의 말을 더 되새겨 보자. “축제 기분에 들뜬 우리 마을, 시온을 보아라! 네 눈은 아늑한 보금자리, 옮겨지지 않을 천막, 예루살렘을 보리라. 그 말뚝이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고 그 줄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에서 넓은 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지 아니하고 야훼께로부터 한 시내가 흘러 우리의 기쁨이 되리라… 우리를 재판하는 이는 야훼, 우리의 법을 세우는 이도 야훼, 우리를 다스리는 왕도 야훼,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사야 33:20-22).

신약 비유 차례

서문 ——————————-353
1. 반석 위에 지은 집——마태 7: 24-27——- 354
2. 옷과 포도주—-누가 5: 6-39————–362
3. 장터에 있는 아이—–마태 11: 16-19- ——-373
4. 씨뿌리는 사람—마태 13: 3-8, 18-23———383
5. 밀밭 속의 가라지—-마태 13: 24-30, 36-43– — 407
6. 겨자씨———-마태 13:31-32———- 419
7. 누룩———–마태 13:33————- 429
8. 숨겨진 보물——-마태 13: 44 ———– 439
9.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꾼—–마태 13: 45-46— 450
10. 끌어 올려진 그물—–마태 13:47-50——– 458
11.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마태 13: 51-52- 467
12. 무자비한 종—–마태 18: 23-35———–473
13. 포도원의 일꾼들—마태 20: 1-16———– 485
14. 두 아들——–마태 21: 28-32———- 497
15. 사악한 소작인—–마태 21: 33-43———-508
16.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마태 22: 2-14—– 522
17.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마태 24: 32-35—- 540
18. 열 처녀——마태 25: 1-13————-550
19. 달란트——–마태25: 14-30————560
20.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마가 4: 26-29—– -572
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누가 6: 39———583
22. 빚진 두 사람——누가 7: 41-43———–592
23. 선한 사마리아 사람—-누가 10: 30-37———603
24.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 11: 5-8—614
25. 어리석은 부자——누가 12: 16-21———–625
26.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고 기다려라–누가 12: 35-48— 635
2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누가 13: 6-9——- 645
28. 낮은 자리에 앉으라——–누가 14: 7-11——- 653
29. 핑계들——–누가 14: 16-24 ————- 661
30.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누가 14: 28-33– —– 673
31. 잃었던 양 한 마리——-누가 15: 3-7———- 682
32. 잃었던 은전——-누가 15: 8-10————- 691
33. 잃었던 아들—–누가 15; 11-32- ————- 700
34. 부정한 청지기—-누가 16: 1-12————— 724
35. 부자와 라자로—-누가 16: 19-31—————735
36. 보잘것없는 종—–누가 17: 7-10- ————- 746
37. 부정한 재판관—–누가 18: 1-8————— 754
38. 바리사이파인과 세리—-누가 18: 9-14———— 766
39. 선한 목자—–요한 10:1-16- —————- 775
40.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 15: 1-10———– 785

신약의 비유 서문

이 책은 신약 성서의 비유를 새 예루살렘 교리의 관점에서 살펴 실제에서 응용이 잘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이유는 비유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필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제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비유에 관한 주제를 총망라해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각 비유를 관조해서 해석하는데 몇 가지 국면이 있어지겠지만, 각 경우에서 저자는 실제 사용에 가장 적합한 듯 보이는 국면만을 선택했다. 각 비유의 설명은 그 비유 자체 내에서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되어 꼭 필요한 경우, 설명을 반복했다. 글자적 견지를 중시하는데 있어, 저자는 해석의 일반적 방법, 상응이나 표현성에 관한 사실과 원리에 대해서는 이마누엘 스웨덴볽의 신학 저술에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그리고 몇몇 예를 드는데 있어서, 저자는 다른 주석들이 제공하는 암시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I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실제에 적용 안 된 진리의 불안정성 –

성서 본문: 마태복음 7장 24-27절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종교는 삶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는 주님의 비유 중에서도 의미 파악이 가장 명백한 비유에 속할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두드러진 요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화된 진리만이 시험에 잘 견딘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 이는 주님이 말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다는 것, 그분의 진리를 밝혀 주심이다는 것, 우리의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이라는 영혼의 정부(government)를 위해 그분이 내려놓는 위대한 삶의 원리이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인 것은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시요, 인격화되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성경 부분에서 주님은 말하시기를, “너희가 듣는 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은 아버지요, 진리는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선이 진리와 하나를 만들듯 하나인 것이다. 진리는 선의 형체이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마치 불의 열이 불의 빛과 불가분하게 하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듣는 것

속뜻에서 듣는 것은 속 사람, 즉 영이 듣는 것, 즉 영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은 진리이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되고, 그분의 소유인 그 말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자연적인 인간은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생각해 봄도 없이 단지 과학적인 수준 정도에서 진리를 원리로서 채택한다. 예를 들면, 세상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말하기를,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고 말하고, 그는 가장 정직한 정책을 채택한다. 채택하는 이유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정직한 정책보다 정직한 정책이 소득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 받지 않고 세상적인 정책에 규율 받아진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정책을 선택함에 있어 뱀의 신중성을 사용해 간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고 뜻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이 있는 사항을 행동에 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되어 진다.
오늘 비유는 경고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 경고가 갖는 힘의 출처는 천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저 알고 이해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이해한 뒤 행동함에 의거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있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차이가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사람”인지 아니었는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양쪽 다 듣기는 했고, 양쪽 다 알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전자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응용해서 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경우이나, 후자는 그분의 말씀을 지적 측면에서는 간직했으나, 일상 생활에서의 응용이 없었던 결과, 시험이라는 폭풍이 불어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영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한마디로 그 말씀을 행동에 놓기 위함이요 듣는 목적인 바, 듣는 것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

주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세상은 많이 아는 자를 슬기롭다고 흔히 부른다. 그러나 주님이 슬기로운 자라고 하실 때 그 사람이란 자기 지식에 따라 살아감으로서 선용을 만드는 자를 두고 일컫고 계신다. 어리석은 자란 지식을 선한 삶에 응용 못했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증거 한다. 영적 의미에서의 이 비유는 영적인 사항들, 즉 영이 마음속에서 짓게 되는 영적인 집과 관계가 있다.

영적인 집

마음은 각자의 영적인 집이고, 그 집은 각 개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음은 의지와 생각으로 구성되고 의지는 애정(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지성을 동반하고 있다. 인간의 영적 삶은 그의 마음, 즉 그의 의지와 이해성 속에 존재한다. 각자의 영적 삶의 질, 또는 삶의 종류는 그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원리 하에 각자의 마음을 짓고 있다. 뾰족이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될 집을 우리 속에 짓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계획에 의거 집에 구조물을 하나씩 하나씩 붙여 세워가고 있다. 우리가 이 집을 천국의 재료들인 선한 애정, 진정한 생각들로 짓고 있다면, 우리의 주님은 그 집에 들어가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주님이 거하실 집을 짓게 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말하시는 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23).
선한 사람이 자기 몫인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동안, 주님은 그분의 몫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통해 우리 속에서 집을 실지로 지으신다. 악한 사람의 경우, 악령이 그에게 역사해서 그를 악마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속에 짓게 되는 집이라는 인격은 지어지는 집, 즉 상부 구조에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정성은 집이 앉게 되는 기초에 의존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견고한 기초 없이 안전한 집은 있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번쩍거리는 궁전일지라도 그 기초가 가라앉는다면 그 궁전의 가치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반석

성경 글자에서 반석(rock)은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고로 그분은 바위(rock)라 불리우신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시편 18:2).
반석, 그 위에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짓는데, 그 반석은 주님이시다. 좀더 뾰족한 의미로 보면 반석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는다.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은 주님의 진리 위에 마음을 세운 것이며 순수한 믿음을 붙잡게 된다. 위에서 살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은 집의 두 부분과 같다. 의지는 집의 기초이고, 이해성은 기초 위에 세운 상부 구조이다. 의지가 믿음 속의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때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고 이해한 뒤 우리 심정을 그 진리, 주님의 진리 위에 정착시킬 때, 한 마디로 그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이 영위될 때 반석 위에 집은 건설되는 것이다.

모래

“모래”란 의지로 사랑됨이 없이 기억이나 지성 속에 놓여 있는 진리를 상징한다. 바위나 모래는 똑 같은 재료인 돌로 구성되어 있다. 둘 다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있지만, 모래는 과거 수많은 세월 동안 큰 바위가 서로 결집된 상태가 흐트러진 죽은 해골 같은 돌들이다. 바위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우리 마음에서 결합되고 응고되어 서로 단결되어 있는 생생한 진리와도 같다. 이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원리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 속의 분자는 서로 풀리어 있어 서로가 접합하고 있을 뿐 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서로 옆에 놓여 있는 상태이므로 기반을 주지 못하는 기억이나 지성 속의 진리들과 같은 것이다.
의지에 기초를 둔 진리, 즉 진리에 의거 살고 있는 믿음이라는 반석이 아니면 단단한 기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누가복음 6장 49절에서는 더 뾰족하게 서술되는데,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

반석 위의 교회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우리의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반석이란 진리를 살아 내는 믿음, 즉 의지 안에 기초를 둔 진리이다. 우리가 반석 위에 영적인 집을 건설할 때 그 집이 교회인데,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인간 안에서, 믿음의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에 원리를 두지 않으면, 자아 사랑으로 흘러 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천국적인 것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아에 의존하면 어떤 힘도, 안정성도, 견고함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를 지상적으로 받게 될 때 그 진리는 자기에게 자기 속의 악들을 보여주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악들을 끊지 못하며 진리의 실제 응용 역시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 왜, 어떻게 모래가 우리 집을 짓는데 불안정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위험은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에서 온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위험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공히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버티고 다른 하나는 허물어진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별난 재주가 있기라도 해서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괴되는 것을 피할 뿐이다.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이란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강타하는 시험을 표현해 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이것들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자는 그것들 아래서 견고하게 서 있고, 악한 자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 속에서 그 강도, 기량, 성질 등등 모든 것의 상태를 조사 받게 된다. 만일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주님 위에 기초를 두고 심정으로 사랑되고 있는 바, 그 믿음은 그 테스트에 견디게 되어 불 속에서 연단된 금같이 더 품질 좋은 순수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믿음이라면, 혹은 지성 속의 믿음에 불과했다면,또는 사랑이 주도해 가는데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훼손되어 쓸려 가버리고 만다.

시험 (temptation)

악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발판으로 해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꾀어 들이어 유전적인 우리의 악한 성질(propensity)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악한 영향력과 맞서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우리의 믿음이 지성 속에만 있을 경우, 천사들은 생각 차원에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고, 만일 우리 심정이 악과의 대결에서 포기된 상태이면, 악령은 심정에 다가가서 애정을 수단으로 우리를 끌고 가버린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애정이란 언제나 전진 방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우리의 생각이 애정과 이견을 보인다 해도 애정은 지성을 점진적으로 장악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천사들이 우리의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게 하려면, 우리는 믿음에 속한 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한 만큼 가능해진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악한 기질까지도 우리를 장악할 힘을 어떤 시험 속에서도 갖지 못한다.
시험은 모든 이에게 온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있어 시험은 자신을 더 순수해지게 만들고, 악한 자에게는 자기의 악을 더 확증하는 기회가 된다.
시험의 심한 시련이 비나 홍수, 바람이 집에 불어 들이치는 모습으로 본문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비,” 이것도 물과 같이 자연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가 광폭하고 파괴적일 때 이는 꺼꾸로된 진리, 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를 명시하게 된다.
집을 때려부술 듯 퍼붓는 비는 마음을 공격하는 거짓, 우리에게 오는 거짓 암시, 속임을 당하게 만드는 거짓들, 악령에서 나와 마음에 오게 되는 각종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악에 대한 유전적인 자연적 경향성을 흥분시키는 것들까지도 비가 표현해 준다.

홍수

시험 속에서 이런 거짓 암시들이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 차츰 이 암시들의 부피가 증가해 간다. 자연계에서 오래 계속되고 무거워진 비가 홍수를 야기시키듯, 시험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이 거짓 암시라는 사악한 비는 처음에는 조금 들어오지만 차차 거짓을 축적해서 이를 부풀려 홍수를 만들고, 넘칠듯 넘실거리는 홍수와도 같이 돌진하여 그나마 우리 속에 남아 있던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집어삼키고야 만다.

바람

비에는 바람이 흔히 동반한다. 비와 동반하는 바람이 세어지면 폭풍이 되는데, 이는 거짓이 생각에 관계하여 있어지는 독특한 모습들을 표현해 준다. 폭풍은 비나 홍수보다 더 미묘함을 가지고 은근히 강타하게 된다. 바람은 모든 틈새나 구석까지도 침투해 들어와 약한 모든 구석을 자기들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이용하고 만다. 바람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오나 맹렬한 돌풍을 일으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거꾸러트린다.

단어의 차이점

번역 성경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차이점에 대한 암시를 주고자 한다. “부딪치매, beat”라는 단어는 두 집의 경우 똑같지는 않다. 반석 위에 지은 집에 있어지는 부딪침은 약한 부딪침, 엄습함, fall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일 것 같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때려눕힘, beat upon, 또는 때려부숨, dash against가 더 나을 것 같다고 본다. 시험 기간 동안 거짓들은 악한 마음에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광폭하게 돌진하여 그 속에 잔류한 선과 진리들을 모두 때려 눕힐 수 있다. 그러나 선 자체에게는 아주 약한 광폭함을 가지고 다가와 쓰러트리려 할 뿐이다. 더우기 거짓은 거짓을 초대한 우리의 악한 성질을 광폭하게 끌고 가 버린다. 그래서 선한 자의 경우, 엄습한 폭풍인 시험이 끝나면 선한 자 속에든 악한 기질이 그만큼 더 사라진 결과 달콤한 평화가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영적 폭풍의 근원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인간 안에서 지으시되 “죽음도 감히 누르지 못할” 살아 있고, 사랑받는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지으신다. 이는 우리에게 광폭한 시험의 근원을 암시해 주게 된다. 시험은 성난 폭풍이고, “지옥문”으로부터 돌진해 나와, 우리 속의 악들이나 악한 기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 그 이유는 지옥의 것과 우리 속의 악한 성질과는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각종 시험을 수단으로 악령은 우리의 영적인 집을 파괴하거나 유인해낸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위와 같은 폭풍은 선한 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고, 더욱이 주님의 경우는 “분노한 자로 그분을 찬양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한 자는 선함을 더욱 확고 부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함을 허용받는 계기가 된다. 시험 중에 선한 자는 더 굳건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이 거듭나는 중이기 때문이고, 그들 안쪽의 사랑들이 시험을 야기시키는 주범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유전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집은 영계에서 세워진다

인간의 영은 언제나 영계에서 사는 바, 우리 안쪽의 집 어디에 계속 건축되어 가고 있을까? 물론 영계이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슬기로운 자이어서 굳건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같다고 했다. 사실 영적으로 보건대 슬기로운 자는 “…사람 같다”가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영적인 반석 위에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으로 짓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인 모래 위에 짓는다.
본문은 영적인 사항에 관해 글자적으로도 진정한 것이다. 선한 자의 안쪽에 있는 집은 실제로 천국에 짓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게 아닌 내향의 상태(inward stat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각자에게 자기 집에 대한 소유권을 100% 획득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시험 동안에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안쪽 마음이 그들을 도와주게 될 천국 쪽에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옥이 그들을 이끄는 대로 뜻을 같이 한다. 따라서 악한 자는 자기들의 집을 지옥에다 실지로 짓고 있다.
반석 위에 기초한 집은 폭풍에 견디고 무너지지 않는다. 즉 자기 의지 속에 기초한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에게 생명과 도움을 구하고, 받기 때문에 어떤 시험, 죽음까지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는 바, 그는 악령과의 대적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무너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에 노출되면 무너진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즉, 진리를 알고 이해하되 마음 안쪽에서 악을 흠모하는 이들은 시험 동안에 무너진다.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있어지는 지식이나 이해성의 남용으로 인해 스스로 “더 큰 단죄를” 자초한다. 그 무너짐이란 아주 크고, 완전한 무너짐이다. 이 무너짐은 처음에는 가벼운 거짓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경미한 거짓의 수준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별로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미한 거짓이 반복되어 가다 보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라는 크고 강한 급류로 돌변해 간다. 이 급류의 원인인 억수 같은 비는 진실로 크게 무너지는 것, 영적인 것을 완전히 침식하여 영적 인간을 영원히 멸해 축축한 무덤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인격

실제로 사용된 진리만이 참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업무는 우리의 주님이 거하실 집을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지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야생 동물이나 불결하고 보기 싫은 새들이 거할 굴을 짓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애정들은 우리 안쪽의 집을 짓는데 쓰여지는 품질 좋은 재목들이다. 모든 진정한 생각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돌이다. 그 반면 우리 속의 악한 애정은 벌레 먹은 재목이요, 모든 거짓 생각은 인간이 찍어 만든 벽돌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을 잘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계산할 수 있게 섭리해 두셨다. 이 건축의 실제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계획대로 집을 지으려고 애쓰지만 선하고 슬기로운 자는 주님의 계획대로 집을 짓는다. 슬기로운 자는 온 정성을 가지고 재료들을 선발하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서 집을 지어 간다. 그러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손에 편리할 듯 싶은 재료이면 선뜻 선택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감상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 고정된 원리들이다. 원리를 가지고 뭔가를 실현하지 않고는 고정된 원리가 인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진리를 생각함, 선을 사랑함들이 한 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지침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2
옷과 포도주
– 새 교리는 새 진리를 위해 필요했다 –

성서 본문: 누가복음 5장 36-39절

36.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쓰게 만들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38.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요약

진리는 교리로 표현된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그 진리를 담을 적당한 교리를 요구한다. 새 진리는 낡은 교리에 의해 전시될 수 없고, 그 교리에 담길 수도 없다. 그러므로 새 진리를 위해 새 교리를 가져야 한다.
교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칠 때, 삶에 관한 모든 새 특질은 새 교리와 동반되어 진다. 그 이유는 삶의 새로운 종류는 새로운 생각, 감정, 습관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생각함이나 느낌이 낡은 방법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새 방법이 왜 있어져야 하는지 보지 못한다. 동시에 그는 새 습관의 필요성도 보지 못한다. 새 삶은 새로운 내적, 외적인 것을 포함한다.
위의 원리들이 이 비유의 주변에 깔려 있다.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요한의 제자들은 물론이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제자들까지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라고 물었다.

새 방법과 낡은 방법

그래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사이파인의 제자들과는 달리 다른 습관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주고 있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옛 유대인에게 하늘이 내린 처방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느낌, 생각, 습관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내렸던 처방(dispensation)의 특질 속에 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새 진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을 경고하러 왔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제자들은 예배의 새 형체를 입을 준비는 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에 대한 새로운 처방을 소개하시기 위해, 새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옛 처방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셨다. 더욱이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들에 근본적인 도전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이 그들의 인격 변화의 한 부분으로서 행동하는 방법이 바뀌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늘이 준 처방의 차이

삶에 대한 각 처방은 인간의 영적 필요와 조화되도록 인간 삶에 재 조정되어 왔다. 인간이 더 낮은 인격 상태에로 기울어질 때,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그들에게 내려와 그들의 조건을 재 조정하여, 그들의 악에 따라 있어질 나쁜 결과로부터 가능한 한 지켜 주시었다. 동시에 그들의 인격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하늘의 축복이 열릴 수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었다.
교회에 대한 각 처방은 그들속의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을 수단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재 조정하여 왔다. 따라서 각 처방은 삶의 고유한 단계가 있고,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질이 있게 된다. 다른 처방 속의 인간은 다른 인간의 종류 속에 있어 왔고, 그 인격의 성질 역시 다르고, 바깥쪽 삶의 방법이나 습관 역시 다르게 있어왔는 바, 이것들이 인격을 구체화시켜 표현하였다.

후퇴함 (retrogressing)

각 처방에서 인간의 영적 삶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후퇴될 때, 새 처방이 반드시 대두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이전 처방의 특색을 이루는 성질의 얼마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들의 중심 원리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삶의 방법 역시 다르게 되었다. 이렇게 다른 것을 성장시켜 가면서 영적 영향의 다른 국면들이 자기들의 영적 필요성에 채용되어졌던 것이다.
인간이 신성한 사랑을 보다 높은 형체에서 고맙게 여기던 데서 아래로 처질 때, 무한하게 부드러운 주님의 사랑은 더 낮고, 더 외적인 형체로 그들에게 다가와 그들이 그분의 사랑을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주님의 오심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는 상황의 가장 낮은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파멸되는 정점에서 인간을 건지시기 위해 육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천국 삶의 진가를 인정하는 쪽으로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해 주셨던 것이다.

상승 (the ascent)

그리하여, 신성한 사랑의 인도 하에서 과거에는 잃고 있었던 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인류의 상승이 시작되었다. 상승하던 인간이 자기에게 존재했던 처방 속의 특질을 벗어나 새롭게 위쪽을 향할 준비가 되어 삶의 더 높은 국면을 필요로 하자, 새로운 처방이 소개되었다.

옛 것과 새 것의 분리

이와 같은 변화의 각 단계에서, 자신에게 존재한 낡은 영과 처방의 특질에 한껏 빨려 들어 있어 그 삶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새 처방의 필요성도, 그 특질을 납득하는데도 실패했다. 그래서 새 처방 속에 든 새로운 감정이나 생각들이 삶의 새로운 방법으로 그 자체를 드러냈을 때 옛 처방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옛 표준을 가지고 새 것을 저울질 해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 것을 위험한 혁신으로 선한 옛 방법으로부터 죄를 짓게 하는 출발로 간주해 버린다.

주님의 재림

위와 같은 상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영적 생명과 빛인 새 처방 속에서의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도 비슷하다. 주님의 재림은 바깥쪽 또는 육체적인 오심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에 오시는 안쪽으로의 오심, 즉 영적인 오심이요, 이는 인간에게 안쪽(inward)과 바깥쪽(outward) 삶에 새 품위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 오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옛 것이 새 것을 잘못 생각함

옛 것은 새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옛 것이 새 것으로 될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 것은 옛 것을 넘어 있고, 삶의 새 국면에 있어서는 존재의 수준 자체가 달라 삶의 특질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 새 것을 이해 못하는 옛 것이 새 것을 잘못 판단하게 됨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옛 것이 상도에서 벗어나 성장하면서 새 것은 자신이 과거에 처해 있던 조건을 납득하면서 오히려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한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은 자신의 눈이 보는 경험을 하기 전 까지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납득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 (garment)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옷 입히며 보호도 해주는 겉옷이란 우리의 선한 애정들을 영적으로 옷 입혀 보호하는 진리를 표현한다. 진리의 명석한 지식이 산출해 내는 보호가 없으면 우리의 선한 자극(impulse)들은 자주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만다.
이와 같은 겉옷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주님의 말씀 속에서 겉옷에 관해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이사야서 52장 1절을 보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 찌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는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아름다운 진리로 자신을 잘 차려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 진리들을 가르침으로 해서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일 날 예배에 참석하러 갈 때 혹은 사회적인 모임에 갈 때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려 하는 습관은 우리가 주님께 접근될 때 또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때문에 발산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때 주님의 진리로 우리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정신적인 습관을 표현해 준다.
유대인들의 예배에서 사제들의 겉옷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 것인데, 이는 각기 다른 경험 속에 있는 우리의 애정을 옷입히게 될 진리에 대한 주님의 규율을 표현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언급된 매우 흰 겉옷은 영계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입고 있는 바, 이는 삶에 진리를 적용해서 입게 되는 진리, 순수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옷의 표본 (representative)

옛 유대인에 대한 처방에서 그들은 영적인 것들의 표본이 되어 있었는 바, 옷 입는 것까지도 표본이 되는 그들의 특질에 맞추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회에서, 새로운 처방의 영적 삶 어디서나 인간의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들은 애정의 상황에 부응되는 지성의 옷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적으로 의복 차림, 각자의 옷차림은 그 사람의 조건, 직업, 공적 지위 등등을 암시해 주듯, 인간의 정신적인 의복, 즉 자기 마음을 옷 입히는 진리들은 그 사람의 영적 조건과 그의 삶의 성질을 암시해 준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매.” 다시 말해 그분은 진리의 빛 안에 그분의 속성을 진열해 놓으신다는 말이다.
주님의 겉옷 자락을 건드리기만 해서 병이 나은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는 말씀 속의 진리에 접촉함으로 애정을 깨끗케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천사들이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여졌다. 이는 인간 삶의 천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빛나는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변모하실 때 그분의 옷은 희고 광채가 났던 것이다. 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외투(outer garment)와도 같아 글자 안쪽에 든 것, 즉 영적 의미를 보호한다.

새 옷과 헌 옷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옷(garment)은 마음을 입히고 있는 진리를 표현해 준다. 수선해서 입어야 할 헌 옷이란 생각의 헌 상태, 인간 마음 안에 든 영적 질서가 올바르지 않은 것, 한마디로 진리의 낡은 국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새 옷은 생각의 새로운 방법, 진리의 새 국면(phase), 새 진리를 표현한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 이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보는 바 대로의 의미이다. 이 의미는 잘못 성장할 우려가 많지만 말씀의 속뜻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가 그는 진리의 영으로부터 글자에서 발하는 빛을 발견하여 총명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옷

교리는 영적 성장에 맞게 조정되어야 할 필요를 이 비유는 예증해 주고 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사실 어떤 사람도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진리의 낡은 국면을 과대 성장시킨 사람도 낡은 사상이 새 환경 조건을 섬기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새 조각을 가지고 헌옷을 깁는 격이다. 새 상황은 그 변화된 마음 상태에 적절한 새 진리가 필요한 것이다.

헌 옷을 깁는 것

낡은 신앙에 얼마 큼의 새 빛을 놓음으로써 낡은 신앙을 보충하려 한다면 그 노력은 성공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새 옷의 조각이 헌 옷을 찢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새 옷처럼 새 진리는 탄력성이 있다. 그러나 헌 진리는 헌 옷과 같아서 팽팽하게 당겨 질 수 없다. 당겨지면 째지고 만다. “새 옷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즉 헌 관점과 새 관점 사이에는 하모니가 없다는 말이다.

포도주

이와 같은 일반 원리가 “새 술을 헌 가죽 부대(병)에 담는 사람이 없다”는 두 번째 본문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포도주는 영적 진리와 상응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도주는 주님의 성찬에서 사용되는 바, 이는 주님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받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많이 등장하는데, 나쁜 의미로의 사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적 진리라는 내적 의미를 가진다. 나쁜 의미의 표현에서 포도주는 꺼꾸로된 진리, 왜곡된 진리, 그 성질이 부패된 상태의 진리를 표현한다.

병 (bottle, 가죽 부대, wineskin)

병이 포도주를 담는 용기일 경우, 이 병은 진리를 붙잡고 함유하는 교리들을 표현한다. 교리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또는 진리가 사용되기 위해 필수적이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병이란 염소나 새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병(가죽부대)이다. 그래서 신약 성서의 새 번역에서는 병 대신 “가죽부대(wineskin)”를 사용하고 있다.
가죽부대가 새 것일 때는 매우 탄력성이 있다. 새 포도주가 그 속에 담아질 때 포도주의 발효는 이 부대를 부풀게 만든다. 그러나 이 부대가 오래된 것이면 경직되어 있어 그 유연성을 잃어버린 상태라서 새 포도주가 이 헌 부대에 담기게 되면 포도주의 발효는 이 부대를 터트리고야 만다. 그러면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터져 양쪽 다 못쓰게 된다. 이 비유에서 헌 병(부대)은 헌 교리, 낡은 사고 방식, 낡은 정신적 조건들을 표현한다. 그 반면, 새 병은 새 교리를, 마음의 새로운 조건에 부응될 교리들을, 교회의 새로운 상태에 대한 가르침들을 표현한다.
유대주의 속의 교리는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