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그 곳의 가르침-

차례

역자의 말
선각자 소개

서문-새 천국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된 것…9
1 선과 진리…12
2 의지와 이해성…15
3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18
4 총괄적 측면에서의 사랑…23
5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26
6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33
7 신앙…42
8 경건함…48
9 양심…52
10 자유…55
11 공적…58
12 회개와 죄의 용서…61
13 거듭남…65
14 시험…69
15 세례…72
16 성찬…74
17 부활…76
18 천국과 지옥…78
19 교회…81
20 신성한 성경, 또는 말씀…83
21 섭리…85
22 주님…89
23 교회 정부와 시민 정부…97

부록

선각자의 서적 안내
선각자의 용어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생각들
도서 구입 안내

역자의 말

어느 누군가가 ‘당신이 말하는 새교회는 무엇입니까?’…더 정확히 질문받아서 ‘스위든볼지언(Swedenborgian)이 갖고 있는 교리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 받는 스위든볼지언의 답변을 위한 준비물로서 이 책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여 번역을 시도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선견자의 책 중에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무게 있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45년 전쯤 대학 시절에 이 책을 만나는 기회도 가져었지만 아마 그 시절의 만남은 어쩌면 책을 관광하는 수준이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지금도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버벅거리는 수준이라 말해야 정확한 내 지식 수준의 칫수이리라 생각된다.
역자의 판단에서, 이 책의 장점이라면 2-30여권이나 되는 선견자의 중심 저서 중 어쩌면 정수리에 해당되는 내용이 아주 짧은 문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자의 이 책의 단점이라면, 원서에 비해 너무나 간결하게 해서 독자의 이해함에 부족함이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따라서 간결하지만 집약적인 이 교리를 반복해서 읽고 숙고함으로 가슴에 새겨지길 바랄 뿐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더 충분한 이해는 주님의 자비하신 허락의 범주인 바, 해맑은 심정으로 주님에게 간절히 간구하는 자세로 옷깃 여미고 좌정한다면 여러분을 늘 수호하는 두 천사의 도움으로부터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2013년 추수감사절에, 뉴욕 베이사이드에서…

에마뉴엘 스웨덴볽
(Emanuel Swedenborg, 1688-1772)

그는 비상한 재능들을 부여받았었는데, 이 재능은 아주 독특하고 다양하기도 해서, 저명한 학자들은 다방면에서 천재이다 라고 평가되는 아주 희귀한 몇 사람들 사이에 그를 끼여 넣어 분류했다. 백과사전들은 많은 주요한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그의 비옥한 지성의 잘 익은 열매들로 진열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물질에 관한 근대 역학 개념을 예상했다. 혹성의 형성에 관한 성운설을 암시했다. 야금술 분야에서 처음 포괄적 작업들을 일궈낸 광산 엔지니어였다. 대수학에 관한 스웨덴의 교과서를 처음 준비한 수학자였다. 그리고 두뇌의 몇 구역의 기능과 관이 없는 선(glands)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과학의 가장 바깥 영역들에 까지 이르는 한편, 그는 혼(soul)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탐구에도 몰두했다. 이 탐구는 그가 영(spirit)의 아주 방대한 영역으로 돌아서고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영적 실재를 알아 채게 될 때 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었다. 그는 이 영적 실재를 “영적 시각” (영적으로 봄) 이라 불렀다. 그는 인간 혼의 발단과 성장에 관한 가장 완전한 서술이 성서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우리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기가 기록한 것들은 그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의 파편 조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파편 조각의 실재를 움켜쥔 애독자, 자신의 생명과 그것의 성장이 이 저술 안에서 반사(mirrored)되고 있음을 찾아내는 독자들은 성서를 위한 가장 드높은 이름인 “하느님의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인간의 진행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서문

새 천국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된 것
(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 and What is meant by The New Jerusalem)

계시록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1:1,2,12-24) “나는 새 천국과 새 땅을 보았다. 그 이유는 처음의 천국과 처음의 땅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자기 남편을 위해 준비된 신부 같았다. 이 성은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 두 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다). 도성 자체는 정사각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이는 넓이와 같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일만 이천 펄롱(스타디온)이였다. 그리고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는 사람의 측량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구조물은 벽옥이었다. 그리고 도성 자체는 순수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열 두 문들은 열 두 진주들이었다.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것을 밝게 했다.
그리고 그 곳의 등은 어린 양이었다. 그리고 구원되어진 나라들이 도성의 빛 안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땅의 왕들이 도성 안으로 영광과 영예를 가져 올 것이다.”
위 구절을 읽는 사람이 글자 의미에 따라서만 이해할 경우 이럴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땅과 하늘이 멸해지고 새 하늘이 올라온다는 것, 그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새 땅에 내려 올 것이고, 상술한 바대로 측량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위 구절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한다. 천사들이 위 말을 이해할 때, 그 이해는 그 말의 의미이다. 이 의미는 말씀의 내적 부분, 즉 말씀의 영적 의미이다. 내적 또는 영적 의미에서 새 천국과 새 땅은 천사들이 이해할 경우, 천국들 안에 있는 새로운 교회와 지상에 있는 새로운 교회이다. 양쪽 세계에 있는 새로운 교회가 이제 우리가 살필 논제의 중심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도성 예루살렘은 새로운 교회의 천국적 교리를 뜻한다. 각 치수가 동등한 길이, 넓이, 높이란 총체적 측면에서 이 교리 속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뜻한다. 성벽이란 새 교회를 보호하는 진리들을, 성벽의 치수, 이는 144큐빗이고, 이는 천사에 속하는 사람의 측량이다란 총체적 측면에서 모든 보호하는 진리들과 이 진리들의 품질을 의미한다. 진주로 된 열 두 문은 천국 입장을 위한 진리들을 뜻하고, 문에 있는 천사 역시 같은 의미이다. 귀중한 돌로 된 성벽의 기초들은 새로운 교회의 교리에 기초가 된 지식들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새로운 교회 속의 모든 것들을 뜻한다. 열 두 사도들 역시 같은 의미이다.
도성과 거리를 만든 순수한 유리 같은 금이란 사랑의 선, 이 선의 진리와 더불은 교리는 반투명하다(translucent)를 뜻한다. 구원되어
지는 나라들, 그리고 도성 안으로 영광과 영예를 가져 올 땅의 왕들이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새로운 교회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뜻한다. 하느님과 어린 양이란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에 관련된 측면에서의 주님을 뜻한다. 이상 간략하지만 살핀 내용이 말씀의 영적 의미이고 이 의미에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글자 의미, 또는 자연적 의미이다; 더 나아가 이 두 의미, 즉 자연적, 영적 의미는 상응을 통하여 하나를 만든다. 이렇게 대단히 간략하나마 살펴 본 이유는 성경의 글자 의미 너머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정도만을 확인해보려 해서였을 뿐이고, 구절과 구절이 담는 세세한 의미는 이 책의 목적하는 바가 아니다.

1

선과 진리
(Good and Truth)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는 바, 선과 진리에 관련 맺고 있다. 이 둘에 관련되지 않는 것은 천국이든 이 세상이든 어디에도 없다. 이유인 즉, 선과 진리 모두는 신성으로부터 진행되고, 이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아둘 필요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즉 선이 진리에 어떻게 관련을 가지는지…어떻게 선이 진리와 결합하는지 등등이다.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은 교인에게는 더 더욱 절실한 지식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천국의 모든 것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되는 것과 꼭 같게 교회의 모든 것과도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내용이 책의 여러 항목 중 우선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신성한 질서에 의거 선과 진리는 결합되고 분리되지 않는다. 고로 그것들은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그 이유가 결합된 그것들이 신성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 그리고 그것들은 천국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선과 진리들은 교회 안에서도 결합되어 있어야
만 한다. 천국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의 결혼이라 부른다. 그 이유가 천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런 결혼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근거로 말씀에서 있는 천국도 결혼에 비교되어져서 주님은 신랑과 남편이라 불리우고, 한편 천국과 교회는 신부와 아내라 부르고 있다. 천국과 교회가 위와 같이 불리는 이유는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진리 안에서 신성한 선을 받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소유한 모든 총명과 지혜는 이 결혼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선으로부터 떼어져 진리만으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진리로부터 떼어져 선으로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경우는 교회 속의 사람들에게도 똑같다.
선과 진리가 결혼 같은 바, 명백해지는 것은, 선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는 선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 저것과 결합하기를 서로 갈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 이런 열망을 가지지 않은 교회 속의 사람은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로 교회가 그 사람 안에 아직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결합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선은 여러 겹이다. 일반적으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있고, 둘 모두는 순수한 도덕적 선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선이 이러하듯 진리도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에 속해 있고, 선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경우가 위와 같은데 비해 정반대되는 경우는 악과 거짓의 관계이다. 즉 신성한 질서에 따라 있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선과 진리에 관계를 가지듯, 신성한 질서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악과 거짓에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선이 진리와, 진리가 선과 결합하기를 사랑하듯, 악은 거짓과, 거짓은 악과 결합하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모든 총명과 지혜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부터 튀어나오듯, 모든 어리석음과 아둔함은 악과 거짓의 결합으로부터 발생된다. 악과
거짓의 결합을 지옥의 결혼이라 부른다.
악과 거짓이 선과 진리에 반대되어 있다는 여건으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진리는 악과 결합될 수 없고, 선이 악으로부터의 거짓과 결합할 수 없음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악에 결합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이미 거짓화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 악의 거짓과 결합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니고 악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섞음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아니다면 선과 더불어 결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생활 안에서 확증함으로부터 악 안에, 그리고 이 악으로부터의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악을 선이다고, 자신의 거짓을 진리이다고 굳건히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 안에서 확증함으로부터 선 안에,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모든 이 각자는 악과 거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은 그것의 진리와 더불어 본질적 차원에서 천국적이기 때문이다. 설사 아직 본질 차원에서 천국적이지 않다해도 이는 천국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악, 그것의 거짓과 더불어 본질 차원은 지옥적이다. 그리고 아직은 본질 차원에서 지옥적이다 고는 말하기가 꺼끄럽다해도 그것은 여전히 그 근원을 지옥에 두고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빛 안에 있으나, 지옥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어둠 안에 있다.

2

의지력과 이해력
(The Will and Understanding)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능력(faculty)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의지력이라 불리우고, 또 하나는 이해력이라 불린다. 이 두 능력들은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되나, 하나의 형체로 있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일 때, 이 둘은 마음(mind)이라 불리워진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 생명은 그것들 안에 있다.
신성한 질서에 따른 우주의 모든 것이 선과 진리에 관계를 맺듯,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은 의지력과 이해력에 관계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선은 그의 의지에 속하고, 그 인간과 더불은 진리는 그의 이해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능력들, 곧 인간의 이 두 생명들은 선과 진리를 위한 그릇(receptacle)과 신하(subject)이다. 의지는 선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의 그릇과 신하되고, 이해함은 진리에 관계하는 모든 것들의 그릇과 신하가 되고 있다. 인간과 더불은 선들과 진리들은 이 밖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선들과 진리들이 이 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듯 사랑과 신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사랑은 선에 속하고, 선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은 진리에, 진리는 신앙에 속한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선과 진리에 관련되고, 교회의 모든 것 역시 사랑의 선과 신앙 속의 진리와 관련을 가지기에, 그리고 인간은 이 두 능력으로부터 사람이기에, 이 두 능력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하여 자기만의 또렷한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이 능력 위에서 그것을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도 발견하기에. 이런 중요함 때문에 여기서 이 능력들이 다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의지와 이해성은 인간의 영(spirit)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지혜와 총명, 그의 생명 전체가 이 둘 안에 주재하기 때문이다. 몸은 그저 순종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의지력과 이해력이 한 마음을 만드는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선과 진리가 하나를 만들듯 한 마음을 만든다. 그 이유가 의지력과 이해력 사이에도 선과 진리 사이에 있는 결혼과 똑같은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결혼의 품질이 무엇인지는 선과 진리 편에서 언급했었던 것으로부터도 충분히 나타날런지 모른다; 즉 선은 어떤 사물의 실재(esse) 자체이고 진리는 실재 자체로부터의 실체(existere) 이듯, 인간과 더불은 의지는 그의 생명의 참 실재이고, 그의 이해는 이 실재로부터의 참 실체이다. 그 이유가 의지력에 속하는 선은 이해력 안에서 모양을 갖추고 그 자체를 볼 수 있게 진열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의지와 이해함을 가지고 있으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의지와 이해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의지 대신 욕망을, 이해함 대신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진실로 인간의 의지는 선의 저장소이고, 이해성은 진리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지는 악을 내포할 수 없고, 이해성은
거짓을 내포할 수 없다. 각 둘은 반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반대되는 것은 상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는 왜 악 안에 있고, 악으로부터의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을 두고는 그들이 합리적이다, 슬기롭다, 총명하다 등의 말을 하지 않는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악한 자와 더불어서는 의지와 이해성이 주재하는 마음에 속하는 내면들은 닫혀있다. 악한 자 역시 자기들 스스로는 나는 뜻하고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의지와 이해를 가졌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들의 의지는 오로지 지독히 탐냄이고, 그들의 이해는 오로지 지식이다.

3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인간은 영계와 자연계에 동시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어져 있다. 영계는 천사들이 있는 곳이고, 자연계는 인간이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양쪽에 있을 수 있게 창조되었기에 인간에게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주어져 있다. 내적 부분, 이를 통하여 그는 영계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외적 부분, 이를 통해 그는 자연계 안에 있을 수 있다. 그의 내적 부분은 내적 인간, 그의 외적 부분은 외적 인간이라 불리운다.
모든 인간 각각은 내적, 외적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경우는 다르다. 선한 자와 더불은 내적 부분은 천국 안에,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외적 부분은 세상에, 세상의 빛에 있다. 그리고 선한 자의 외적 부분의 빛은 천국의 빛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러므로 선한 자의 내적, 외적 부분은 마치 원인과 결과 같이, 또는 앞서 오는 것에 그 뒤를 당연히 따르듯 하나로 행동한다. 그러나 악한 자와 더불은 내적 부분은 세상 안에 그리고 세상의 빛 안에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빛이 외적 부분에 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천국의 빛으로부터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세상의 빛으로만 가능하다. 이 빛은 그들에 의해 자연의 발광체라 불리운다. 이것은 왜 천국에 속한 것이 그들을 위해서는 짙은 어둠이고 세상에
속하는 것만이 빛 안에 있다라고 하는 이유인가 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선한 자는 내적, 외적 인간을 가지나, 악한 자는 내적 인간은 없고 단지 외적 인간만 있다.
내적 인간은 영적 인간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인간은 영적인 빛인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 인간은 자연적인 빛인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이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외적 부분은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양쪽 세계 모두에서 영적 인간이나, 내적 부분이 천국의 빛 안에 있지 않고, 외적 부분은 세상의 빛에서만 있는 경우 그는 양쪽 세계에서 자연적이다. 말씀에서, 영적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 자연적 인간은 죽어 있는 인간이라 불리우고 있다.
자기의 내적 부분이 천국의 빛 안에 있고, 그의 외적 부분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 자연적 양쪽으로 생각하는 바, 그의 영적인 생각은 그의 자연적 생각 안으로 흘러서 거기서 지각된다. 그러나 자기의 내적 부분과 함께 외적 부분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물질적으로만 생각함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물질 뿐인 세상의 것들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생각함이란 사물의 그 본래 취지대로 생각함, 즉 진리를 진리의 빛으로부터 보는 것,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선을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사물의 품질을 보고 그것들의 애착을 지각하고, 물질로부터서는 추상적으로 생각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생각함이란 어떤 사물을 물질과 더불어, 물질 안에서 생각하고 보고 지각함을 뜻한다. 고로 이 방법은 매우 조잡하고 희미한 수준이다.
내적, 영적 인간은 그 자체로만 간주해보면, 천국의 천사이다. 더욱이 몸 안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서 조차 비록 그가 알아채리지는 못하겠지만 천사들과 연계되고 있다. 언제인가 그가 몸에서 분리될 때, 이 인간은 천사 사이에 와서 있는다. 그러나 내적, 자연적 인간은 그 자체로만 간주하면 영이고 천사는 아니다. 이 인간 역시 몸 안에서 사는 동안 영들과 연계되어 있으나 그 연결은 지옥의 영들과 더불어서 이다. 그가 몸에서 분리되는 때 지옥의 영들 사이에 있게 된다.
영적 인간들과 더불어 있는 내면의 것들은 실제로 천국을 향하여 끌어 올리어진다. 그 이유는 이 내면의 것들의 주요 관심사가 천국에 속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자연적일 뿐인 인간과 더불은 마음에 속한 내면의 것들은 세상 쪽을 향해 실제로 돌아 선다. 그 이유는 그것의 주된 관심은 세상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속한 내면의 것들은 당사자가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 쪽으로 돌아 선다. 더불어 보다 수준 낮은 마음에 속하는 외면의 것들 역시 같은 방향으로 돌아 선다.
내적, 외적 인간에 대하여 단지 총괄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이들은 생각하고 뜻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외적 인간이다 라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생각하고 뜻함은 볼 수 없고, 말함과 행동은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렇다. 즉 인간이 총명하게 생각하고, 슬기 있게 뜻할 경우, 그러면 그는 영적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총명하게 생각하지 않고 슬기롭게 뜻하지 않을 경우, 그는 자연적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과 주님에 속하는 것들을 올바르게 생각할 때, 그리고 이웃과 이웃에 속한 것들을 올바르게 생각할 때, 그리하여 주님과 이웃을 향하여 올바르게 처신할 때, 그는 영적인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로부터의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고로 천국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과 이웃에 관해 잘못되게 생각하고 뜻할 경우, 그는 자연적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한다. 그 이유는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악인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고로 지옥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영적 내적 부분 안에 있는 것이고, 또한 그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자연적 내적 부분 안에 있고, 그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그것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주님에 의해 질서 잡혀 설비되었는 바, 인간이 천국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는 한, 그의 내적, 영적 인간은 열려있도록 형성되어 있다. 그 열림은 천국 쪽으로, 주님 쪽으로 있다. 그리고 그 형성은 천국 속에 있는 것에 따라서 있는다. 한편 인간이 천국으로부터 생각하지도, 뜻하지도 않고 세상적으로만 일 경우, 그의 내적, 영적 인간은 닫혀져 있고, 그의 외적 인간은 열려져 있다. 그래서 그 열림은 세상 쪽에 있고, 그 형성됨은 세상 속에 있는 것에 의거해 있다.
내적, 영적 인간이 천국 안으로 주님을 향해 열려져 있는 이들은 천국의 빛 안에 있고, 주님으로부터 계발되는 중인 바, 그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이들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본다. 그들은 그것이 선이기에 선을 지각한다. 그러나 내적, 영적 인간이 닫혀 왔던 이들은 내적 인간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는 더 더욱 모른다. 이들은 신성이 존재함을, 사후에 삶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천국과 교회에 속하는 여러 사항들 역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빛 안에서만 있고, 그것으로부터서만 계발되
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이 신성이다고, 거짓을 진리라고, 악을 선이라고 간주해버린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고, 그의 손이 만질 수 있는 만큼만을 그의 내적 부분이 자기의 외적 부분이라고 할 경우, 이를 감각적 인간이라 부른다. 이 인간은 가장 수준 낮은 자연적 인간이고, 교회의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여 오류 속에 있다.
지금까지 살핀 인간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인간의 영의 내적 부분이고 외적 부분이다; 그의 몸은 단지 덧붙여진 외적 부분일 따름이나 이 몸 안에 두 부분이 실존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몸 안에 주재하는 몸의 영으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해둘 것은, 인간의 영이 몸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뜻함을 계속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생각함과 뜻함은 그의 내적 부분이고, 말함과 행동함은 그의 외적 부분이다. 이에 관해 더 살피겠다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을 읽어 살피기 바란다.

4
총괄적 측면에서의 사랑
(Love in general)

인간의 참 생명은 그의 사랑이다. 사랑이 존재하는 것과 꼭 같게 그의 생명도 존재한다. 정확히 그의 전부이다라고 말해도 무난하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신을 지배하는 사랑, 또는 통치하는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많은 사랑들을 그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랑들은 이 통치하는 사랑의 작은 갈래들이라 말하는 편이 나을 듯 하다. 이 많은 사랑들은 여러 다른 모양 아래 나타나나 여전히 통치하는 사랑 안에 포함되고, 한 왕국을 구성한다. 통치하는 사랑은 마치 몸의 경우 머리에 해당되고, 왕국의 경우 왕에 해당된다. 이 사랑은 그 외 사랑들을 지휘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목적들을 꼼꼼히 따져봄으로 여러 사랑들과 관계를 가지며, 결국 그 사랑 자신의 목적을 의도한다. 이 목적은 모든 사랑들이 중요시하는 궁극적 목적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직, 간접적으로 실행한다. 통치하는 사랑에 속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되고야 만다.
인간이 우선적으로 사랑한 것은 그의 생각 안에, 그의 의지 안에 꾸준히 현존하고, 이것이야 말로 자기만의 진짜 생명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재물을 최고라 여겨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재물이 돈이든 어떤 취득물이든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것이냐에 그의 관심은 온통 집중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달성했을 때, 그는 내향적으로 심히 기뻐하고, 그것을 잃었을 때 내향적으로 무척 슬퍼한다. 그 이유가 그의 심정이 그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사에 앞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만사에서 시시콜콜 자신만을 염두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의 생명은 자아를 위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그 무엇보다 먼저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고, 모든 것들 각각에서도 그 목적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의지 안에 있는데, 제아무리 어떤 것에 바빠 있다해도 마치 그 흐름이 보이지 않는 듯 여전히 있다 해도 흐르고 있는 시냇물 처럼 그를 끌어 당기고 끌고 가고야 만다. 그 이유가 그 사랑만이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인 바, 또 다른 것에서도 여전히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이것에 따라 그는 자기를 이끌든지, 또는 행동을 펼치든지 한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 삶을 통치하는 것과 꼭 같은 품질 속에 있는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타인과 차별된다. 만일 그가 선한 자라면, 그의 천국의 품성에 따라 그의 통치하는 사랑이 형성되어진다. 이와 반대로 그가 악한 자라면, 그의 지옥의 본성에 따라 형성될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의지 자체, 그의 고유의 자아, 그리고 그의 인격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그의 생명의 참 실재이어서 이것은 사후 바뀌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즐거움, 만족함, 행복함으로부터의 모든 느낌은 그의 통치하는 사랑으로부터 이 사랑에 의거 각자에게 파생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두고 그는 즐겁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데도 그는 즐겁다 할 수도 있을런지 모르나 어쨌든 이것은 그의 생명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아니다. 사랑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인간의 평가에서 선인 것이다. 그러나 즐겁지 않을 경우
그는 악으로 간주한다.
두 사랑이 있다. 이 사랑들은 모든 선들과 진리들의 참 원천이고 이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 악과 거짓의 원천이 되는 두 사랑들도 있다.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근원을 삼는 두 사랑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모든 악들과 거짓들이 발생하는 두 사랑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후자의 사랑들은 전자의 사랑들에 직반대되고 있다.
두 사랑으로부터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대로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고, 인간과 더불은 천국을 구성하는 바, 이 두 사랑은 천국을 통치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이 인간과 더불은 천국을 구성하는 바, 두 사랑은 인간과 더불은 교회를 구성한다. 모든 악들과 거짓들이 진행되는 두 사랑은 위에서 말한 바대로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인데 인간과 더불어 지옥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지옥 역시 통치한다.
모든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 두 사랑들, 이미 주목한 바 같이 천국의 사랑들이고, 내적, 영적 인간을 형성하고 열리어 있다. 그 이유가 그 사랑들은 내적, 영적 인간 안에 주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악들과 거짓들을 발생하게 하는 두 사랑들, 이것들이 강세해질 경우, 내적, 영적 인간을 닫히게 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통치력과 범위에 비례하여 인간을 자연적, 감각적으로 되게 한다.

5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자아 사랑은 자신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아를 위해서 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을 뺀다면 타인의 잘됨은 바라지 않는다. 이 범주에는 교회나 자기 나라, 사회나 동료들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다. 이 사랑이 선을 행할 경우도 있는데, 그 목적은 자신의 명성, 영예, 존경 따위를 얻으려는 절차상의 선행일 뿐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선행을 실시하는 가운데 위와 같은 영예나 명성이 예상되지 않을 경우, 자기 심중에 이렇게 말한다.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왜 내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말이냐?’…‘도대체 내게 올 이득이 뭐란 말인가?’ 곧이어 그는 실시하던 선행을 집어치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자아를 사랑함에 있는 자는 교회도, 나라도, 사회도, 동료도,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것만 챙긴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를 사랑함 안에 있으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뜻할 경우, 그는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공동의 최상의 것을 생각지도 않는 바, 주님에 관련한 것은 더 더욱 아니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에 속하는 것에만 집착한다. 그러므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사사건건 자신과 자신에 속한 것을 위해서 이다. 그래서 만일 그가 공공의 최상의 것과 이웃을 위하여 했다면, 그것은 단지 겉모양새를 갖추려해서 이었을 뿐이다.
위에서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에 속한 것을 위하여 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딸린 것들까지 사랑하려들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 그에게 속한 것들이란 세부적으로 나열하면, 자식, 손자 등등, 자신과 하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기 것이다고 부르는 것들을 뜻한다. 이런 것들을 사랑함은 자아를 사랑함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것들을 바라보건대 마치 자신 안에 있는 냥, 자신이 그것들 안에 있는 듯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이라 부르는 것들 사이에서 그는 아첨하는 말을 달콤히 듣고, 존경도 받고 숭배받기도 한다.
자아를 사랑함 안에 있는 자는 이웃을 자신과 비교하여 경멸하고, 이웃이 자기의 환심을 사려들지 않는다거나, 자기를 존경하는 눈빛이 없을 경우, 자기를 존경하지 않는 것 같으면 그 이웃을 적으로 간주해버린다. 더욱 더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을 경우, 위와 같은 것을 빌미로 이웃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심할 경우, 복수심에 불타고 이웃을 파멸로 치닫게 한다. 이런 인물은 결국은 잔인함에서 즐거움을 찾고야 만다.
자아 사랑의 품질은 천국의 사랑과 비교해 봄으로부터 나타난다. 천국의 사랑은 선용을 위해 선용을 사랑함에, 즉 사람이 교회나 사회, 동료에 선을 실시하되 선 자체를 사랑함에 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함 때문에 선을 사랑하는 자도 위와 마찬가지로 자기 하인들을 사랑하지만, 그 목적은 자기를 잘 섬기게 하려는데 있다. 이로부터 다음 사항이 수반되는 바,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교회나 사회나 자기 동료가 자기를 섬기기를 바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 위에 자신을 둔다. 그리고 자기 아래 그들의 위치를 정한다.
누군가가 천국의 사랑 안에 있는 한, 즉 그가 선용과 선들을 사랑하
는 가운데 있고, 그리고 그것들을 실시함에서 심정으로 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만큼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이 계시는 사랑이요 그분으로부터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아를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면, 있는 정도 만큼 그는 자신에 의해 인도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에 의해 인도되는 만큼 그는 그의 고유 자아에 의해 인도되는 셈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는 악 밖에 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유전적 악이고, 이 악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천국 보다 세상을 사랑하는데 있다.
자아를 사랑함이 위와 같은 특성을 지녔기에 행여 이 사랑에 지배권이 주어질 경우, 또는 바깥쪽 여건에서 그 사랑을 제약하던 것이 제거될 경우, 다시 말해 법이나 그에 따른 처벌이 없다면, 혹은 명성이나 영예, 이득 등등에 대한 손실이 없다면, 이 사랑은 곤두박질치듯 하는 모습으로 돌진하여 온 세상 뿐 아니라 천국도, 아예 신성 위에 까지 군림하려 든다. 그 이유가 그런 짓에는 경계선이 없고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비록 자연계에서는 위에 언급했듯 지배력이나 바깥쪽 제약 같은 것으로 튀어나오지 못해서 눈에 보여지지 않지만 어쨌든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자들 안에 깊숙이 감추여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인물이 제약하는 것에 마주치면, 그는 그 제약이 풀릴 때까지 멈추기는 한다. 이런 사랑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사악하고 무절제한 욕망을 자신 안에 비밀리에 숨겨 놓고 있는지 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위 내용이 실지의 경우이다는 것은 세상의 이런 부류들, 즉 권력을 휘두는 이들, 왕으로부터, 바깥쪽 제약이나 불가능이 존재 하지 않는 자, 즉 어떤 재갈도 물려지지 않은 자로부터, 또는 성공으로 면류관을 쓰고 있는 한, 돌진하여 성읍과 왕국들을 복종시키려한 바, 무제한의 권력과 영광을 열망하는 왕 같은 자들로부터 미루어
이를 짐작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천국 안으로 자기의 통치를 밀어 넣고 아예 주님의 신성한 권능을 내놓으라 하기 조차 한다. 그러고도 이를 넘어 돌격하기를 갈망한다.
통치를 실행하는데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하나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방식이고, 또 하나는 자아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통치의 이 두 종류는 그것들의 본질상 서로 직반대되어 있다.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통치를 실시하는 사람은 모든 이에게 선을 의도한다; 그리고 그는 유용한 목적을 완성하는 것 외 바랄 것이 없다. 고로 그는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랑한다. 타인에게 봉사함은 선을 행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웃이 잘되기를 기꺼이 바라는 것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선용을 수행한다. 이것이 그의 사랑이요 그의 심정을 즐거웁게 하는 일들이다. 이런 인물은 또한 자기가 존경받는 높은 지위로 드높혀질 때도 영예의 높은 자리 때문이 아닌 더 큰 선용이 실시되었음이 증명됨에 즐거워 할 뿐이다. 이런 종류의 통치가 천국들 안에서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아를 사랑함으로부터 통치를 실시하는 자는 자신과 자기에게 속하는 이들에게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의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가 성취하는 선용이란 고작 자신의 영예와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이 선용이 그가 아는 선용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그가 타인에게 봉사하는 목적은 봉사함의 신세를 진 그들이 이 봉사에 감사해 행여 자기를 떠받들지 모른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는 영예를 추구한다, 이는 그가 행할지 모르는 선 자체를 위하여가 아니다. 단지 그가 높은 지위를 점령하고 영광을 긁어 모으고, 이것으로 그의 심정에 즐거움을 생산하고 싶어서이다.
이 통치하는 사랑은 사후에도 모든 이에게 남아 있는다.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통치를 실행한 사람은 천국들 안에서 그에게
통치가 위탁된다. 그럼에도 거기서는 통치란 단어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공익과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통치할 때, 주님께서 통치하신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아 사랑을 바탕으로 삼아 통치를 실시했던 이들은 사후 지옥 안에 있고, 그들은 천박한 노예로 산다.
자아 사랑에 있는 사람에 관해서는 위로부터 알았으리라 생각된다. 한 가지 더 보탤 것은 누가 자아 사랑을 자기의 동력원으로 삼고 있는지는 그의 외관 가지고는 판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그가 오만하다거나 온유하다거나 하는 외관으론 결정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위에서 언급된 속성은 그의 내적 인간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자기들의 내면들은 감추여져 있다. 그리고 외적 인간은 공동의 최상의 것과 이웃을 사랑함에 속하는 것들로 덮혀 씌워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내면과 외면은 반대되고 있다. 자아만을 사랑하는 자라해도 자기를 위해 이웃에 선을 베풀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들도 모두에게 최상이 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만인에게 감명을 준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기 때문, 고로 자기들이 선행을 베풀면 그에 비례해 자기들이 사랑받고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어쨌든 그런 선행일지라도 감명을 주는 이유는 천국은 이런 사랑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에서 이다.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에게 속하는 악들을 일반적으로 몇 개 나열한다면, 타인을 경멸함, 시기함, 자기를 예쁘게 보지 않는 이들을 적대시함, 갖가지 미워함, 복수, 사기, 무자비함, 잔인함 등등이 있다. 이런 악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신성을 경멸함, 신성한 것, 즉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을 우습게 여김도 늘 따라붙어 있다. 그리고 이런 신성
한 것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받아야 하는데, 이들은 입술로만 그럴 뿐 심정은 그렇지 않다. 이런 악들이 자아 사랑으로부터 진행되듯, 비슷한 거짓들 역시 그것으로부터 근원된다.
세상을 사랑함은 갖가지 술책을 써서라도 타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램에 존재한다. 그리고 재물 위에 자신을 자리잡아 앉히고, 자신의 자아가 영적 사랑으로부터-이웃 사랑-즉 천국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방관하고 그 대신 세상적인 것에 의해 자신을 이끌어 간다.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는 이들은 다양한 계략을 써서 타인들의 선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이웃의 선을 가볍게 여기고 잔꾀와 사기를 동원해 타인의 선을 가로채려 고심한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타인의 선들을 몹시 탐낸다. 그래서 타인의 선을 가로채는데 따른 범법 행위가 듵키지 않게 안전망이 쳐지고, 명성을 잃을 염려도 없게 되면 실제로 강도짓을 하고 약탈도 서슴치 않는다.
세상을 사랑함은 자아를 사랑함 만큼이나 천국적 사랑에 반대되어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자아 사랑만큼 규모적으로 크게 감추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랑도 종류가 많다. 존경받는 지위에 도달하려고 재물을 사랑한다. 순서를 바꾸어 재물을 얻고저 영예와 명성의 지위부터 사랑한다. 다양한 용도로 재물을 사용하여 그로부터 즐거움을 얻고자 재물을 사랑한다. 재물 자체가 좋아 재물을 사랑한다. (이와같은 것이 수전노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물의 도움으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유용함(use)이다. 이 목적 또는 유용함으로부터 사랑의 품질은 존재한다. 그 이유는 사랑은 사랑이 존재하기 위한 목적과 똑같은 품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것들은 수단들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직반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지옥의 사랑들이다. 이 사랑들이 지옥을 통치한다, 동시에 인간 안에서 지옥을 구성한다. 그러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천국적 사랑들이다. 이 사랑들이 천국을 통치하고, 인간과 더불은 천국을 구성한다.
이상 말해 온 것으로부터 알게되는 바, 모든 악들은 위 두 사랑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 문단에서 나열한 악들은 일반적 악들이고 세세한 악들은 열거되지 않았으나 세세한 것들은 일반적 악들로부터 파생된다. 이로 미루어 알게되는 것은, 인간이 이 두 사랑들 안에서 태어난 바, 그는 모든 종류의 악들 안에서 태어나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악들을 알기 위하여서 그는 악들의 근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악들을 알지 않으면 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품질도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악들의 두 근원이 여기에서 취급된 것이다.

6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Love towards the Neighour, or Charity)

‘이웃’ 이라는 단어에 의해 무엇이 의미되는지를 우선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가 사랑되어지게 되는 것이 ‘이웃’이고, ‘이웃’을 향하여 선행이 실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않으면, 선행은 분별 없이 실시될 것이다. 그래서 악한 자나 선한 자에게 똑같은 방식을 적용할런지 모른다. 그러면 선행은 선행이 아닌 것이 되고야 만다. 즉 악한 자는 받은 혜택을 수단으로 이웃에게 더욱 악을 행하고, 선한 자는 선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흔히 상상하는 것은, 모든 사람 각각은 똑같은 수준에서 이웃이다는 것, 선은 도움을 요구하는 모든 이에게 행해져야한다는 것이다. 기독인은 인간의 생명의 품질을 검사하는데 있어 매우 신중해야 하고 그 검사 결과에 맞추어 선행을 실시해야 한다. 내적 교회인은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한다. 고로 총명하다. 그러나 외적 교회인은 구별하는 능력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분별없이 행동한다.
이웃 안에 있는 것을 구분함에 교인들은 잘 익숙해 있어야 하고 이 구분함은 이웃 각자와 더불어 있는 선에 의거 실시되어야 한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기에, 주님 자신은 최고의 의미에서, 그 무엇과 비교 안되는 탁월한 수준에서 이웃이시고, 이 이웃으로부터 이웃이라는 관계가 근원된다. 이로부터 뒤따르는 것은, 각 사람은
주님의 어떤 것을 가진 만큼에서 이웃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방식으로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선을 받지 않는다. 즉 이 사람이 받는 선과 저 사람이 받는 선은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천국들에 있는 모든 사람, 땅 위의 선을 지닌 모든 사람은 선에 관한 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떠한 두 사람도 완전히 똑같은 선을 결코 가지지 않는다. 선은 다양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래야 각각의 선이 단독으로도 생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다양함들, 즉 이웃에 있는 구분되는 모든 선들, 이것들은 주님을 영접함에 따라, 즉 그분으로부터 선을 받음에 따라 있어지는 바, 이는 어느 인간도, 어느 천사도 아주 총체적 방식 외에는 세세한 방식은 결코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교회인이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에 따라 사는 것 외에 더 어떤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모든 이 각자의 선은 다양한 바, 선의 품질은 이웃의 등급을 결정하고 이것에 맞추어 누군가는 이웃이 된다. 이것이 왜 그러한지는 주님의 비유로부터도 쉽게 감지된다. 즉 누군가가 강도를 만났는데 이 강도는 그를 절반쯤 죽여 놓았다, 때마침 거기를 지나는 성직자와 레위인이 그를 못본척 했으나 그를 발견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싸매서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를 잘 돌볼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까지 했다. 이 사마리아인, 그가 선행의 선을 실행했기 때문에 강도 당한 자의 이웃이라 불리우고 있다 (누가 10:29-37). 이로부터 사마리아인은 선 안에 있는 이웃이다. 그가 상처에 부은 기름과 포도주 역시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지금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선이 이웃이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와 더불어 있는 선의 품질에 따라 이웃이다는 말이다. 선이 이웃인 까닭에, 사랑이
이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 각자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사랑의 품질에 따라 이웃인 것이다.
누군가를 이웃이 되게하는 것이 사랑이다는 것, 모든 이 각자는 그의 사랑의 품질에 따라 이웃이다는 것은 자아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 선명해질지 모른다. 이들은 자기들을 가장 많이 사랑한 이들, 또한 이 사랑의 정도에 비례해 누군가를 자기들에 속하는 이웃으로 인정한다. 그들은 이들을 포옹한다. 그들에게 키스한다. 그들에게 선을 행한다. 그리고 그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아니, 악이 있는 그들을 타인들에 앞서 있는 이웃이라 부른다. 여타 사람들은 자기들을 사랑한 정도에 비례해 이웃으로 인정한다. 즉 자기를 향한 그들의 사랑의 크기와 품질에 따라 이웃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런 인물은 이웃의 근원을 자신에게 놓고 있다. 이와 달리 타인에 앞서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는 이들, 즉 주님의 왕국 속에 있는 이들의 경우,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해야 할 그분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이웃의 근원을 가진다. 그들은 모든 이 각자를 상대가 지닌 주님을 사랑함의 품질에 따라, 곧 주님으로부터 어떤 이웃인지를 가늠한다. 이리하여 분명해지는 것은, 교인은 주님으로부터 이웃의 근원을 끌어내야 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 각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에 따라 이웃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 자체가 이웃이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마태 25:34-40); 그분은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 ‘너희들은 그에게 먹을 것을, 마실 것을, 입을 옷을 주었고, 그를 방문했었고, 그리고 그가 감옥에 있을 때도 거기까지도
왔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그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것을 행했기에 그들은 그것을 나에게 행한 것이다.’ 이 구절에 담긴 선의 여섯 종류는 영적 의미에서 이해해 보건대, 이웃의 다양한 모든 종류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로부터서도 확실한 바, 선이 사랑되어질 때, 주님 자신 역시 사랑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선 자체이시고, 선 안에 계시며 그분으로부터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웃은 단 한 사람을 두고 말해진듯 여겨지지만 여러 사람, 즉 단체 차원에서의 이웃도 있다. 즉 보다 작은 사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사회, 나라, 교회, 주님의 왕국, 무엇보다 주님 자신 역시 이웃이다. 열거한 위의 모두는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실시되어야 하는 이웃이다. 그들 역시 승강하는 등급의 서열에 있다. 숫자가 적은 사회는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사회보다 등급이 낮다. 그러나 한 개인 보다는 훨씬 높다. 사회 보다 나라는 더 높은 등급이다. 교회는 이보다 더 높다. 주님의 왕국은 교회보다 더 높고, 최고의 등급에는 주님이 계신다. 이렇게 승강하는 등급은 마치 사다리의 층계와 비슷하다. 이 사다리 꼭대기에 주님이 계신다.
한 사회는 한 개인 보다 더 큰 이웃이 된다. 그 이유는 다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은 한 개인에게 실시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즉 사회 안에서 널리 우세한 선의 품질에 따라 실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곧바른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에 대한 선행은 분명 방식이 달라야 할 것이다.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사회의 선이 돌보아질 때 그 사회는 사랑되어진다.
각자의 나라는 사회보다 더 큰 이웃이 된다, 그 이유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자는 나라 안에서 태어나고 먹여지고 보호되기 때문이다. 선은 각자의 나라의 필요에 부응해
사랑으로부터 실시되어야 한다. 간략히 말해 나라의 지탱 유지와
나라 안의 사람들의 시민적 영적 생활에 관심을 맞추어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는 말이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 자기 나라에 유용한 도움을 기꺼이 제공하려 할 때, 그는 나라를 향해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 그가 저 세상에 올 때, 그는 주님의 나라를 사랑한다. 그 이유가 거기서의 그의 나라는 주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그분의 왕국에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각자의 나라 보다 더 큰 이웃이 된다. 그 이유가 교회를 돌보는 사람은 영혼들을 돌보는 것이고,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을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부터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가 천국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행복은 타인을 위해 바래야 하고 뜻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왕국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이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천국에서이든 지상에서이든 그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은 다양한 품질의 선의 집합, 즉 총체적인 선이다. 그래서 이 선이 사랑되어질 때 선 안에 있는 모든 이도 역시 사랑되어지는 셈이다.
이상 살핀 내용이 이웃에 관한 등급이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은 위와 같은 등급에 따라 승강한다.
이 등급은 연속적인 질서로 되어 있다. 이 질서에서 앞서는 것, 또는 보다 높은 것이 낮은 것, 또는 뒤에 있는 것에 우선하여 실시된다. 최고 높은 등급에 주님이 계신다. 그리고 어느 등급이든 각 등급의 목적은 주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무엇보다 우선 사랑되어져야 한다. 이로부터 더 알 수 있는 바, 주님을 사랑함은 어떤 방법에서이
든 이웃 사랑과 그 자체 결합하여 있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 모든 이 각자는 자신에게 이웃이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이 각자는 자신을 우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선행에 관한 교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가 가르치고 있다. 모든 이는 자신과 자신에게 딸린 사람들의 필요한 것, 즉 음식, 의복 , 주거지, 여타 여러 가지 것들을 준비하여 자신을 돌봄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가 있는 곳에서의 시민 생활의 필수일 것이다. 이 준비는 며칠 뿐 아니라 먼훗날 것 까지도 포함해 이르는 말이다. 만일 그가 위와 같이 자신을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는 선행을 실시할 조건에 있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자기부터 필요하니까 말이다.
무슨 방법에서이든, 모든 이는 자신에게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래 비교 고찰로 나타날런지 모른다. 모든 이는 각자의 육체를 위해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야 한다. 건전한 마음이 건강한 몸 안에 있기 위해 몸 관리가 먼저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그의 마음을 위한 마음의 음식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총명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로 마음에 음식을 공급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자기 동료나 사회, 나라, 교회, 주님에게 까지 쓸모 있는 인간의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영원한 복지 까지도
돌보는 셈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첫째 일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이 목적을 위하여 행동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것은 목적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먼저 놓는 사람의 경우와도 비슷할 것이다. 기초는 집을 위해 반드시 놓아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집은 거주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를 첫 번째 이웃으로 찾는 사람은
자기를 기초로서 간주한 것은 맞으나 목적으로서의 집도, 거주지도 아닌 것과 같다. 그렇지만 거주함이 첫째 목적이자 긍극의 목적 일 때, 기초와 더불은 그 집은 목적을 향한 수단일 따름이다.
목적(end)은 어떻게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이웃이라 생각해도 좋은지와 어떻게 자신을 첫째로 돌보아야 하는 가를 설명한다. 만일 누군가의 목적이 타인 보다 더 부자가 되는 것이라면, 재물 자체의 축적만이 목적이라면, 또는 쾌락만을 위하여라면, 타인 위에 최고 실력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의 목적은 악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의 목적이 자기 동료나 사회, 또는 나라, 교회에 유익하게 쓸 목적으로 재물을 쌓았다면, 공익을 목적으로 공직을 획득했다면, 그는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셈이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참 목적이 인간을 만든다. 그 이유가 그의 목적이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는 그의 첫째요 마지막 째의 목적으로 그가 무엇보다 먼저 사랑한 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우리는 이웃에 관해 말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웃을 향한 사랑, 즉 선행(charity)에 관해 말할 것이다.
많은 이들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이웃을 향한 사랑은 가난한 자에게
뭔가를 주는 것, 궁핍한 자를 돕는 것, 누구에게나 선행을 실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선행은 신중함을 가지고 행동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적을 위하여 선은 선행으로부터 결과되어야 한다. 가난한 악행 자나 악행 자의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는 것은 그를 통하여 이웃에게 악을 실시한 셈이 된다. 그가 악한 자에게 제공하는 도움을 통해 그는 악 안에 있음을 그에게 확증시켜 주는 셈이다. 게다가 그에게 타인을 향해 악을 행할 수단을 공급하는 셈이다. 그러나 선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선행은 위의 경우 같이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대한 것 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다. 그 이유가 선행은 모든 일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는데, 각자의 공직에서 임무를 충실히 행하는데에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만일 판사가 정의를 위하여 정당하게 판결을 실시했다면, 그는 선행을 실시한 것이다. 만일 그가 죄인을 처벌하고, 순진한 자를 석방한다면, 그는 선행을 실행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렇게 행함에서 그는 동료들의 시민의 복지를, 나라의 복지를 돌본 셈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는 성직자는 진리와 선을 위해 선행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세상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행할 경우 그는 선행을 실시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웃을 사랑함이 아닌 자신을 사랑함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경우는 판사가 아니더라도, 혹은 그가 공직에 있든, 아니 있든 원칙은 동일하다. 고로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하인과 주인,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서도, 또는 신하와 왕,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의무의 견지에서 의무에 충실한 것, 정당함의 견지에서 올바름을 고수하는 것, 이 모두가 선행의 실시
이다.
이웃 사랑에 속하는 이런 것들, 즉 선행에 속하는 것들은 위에서 말했던 바대로 모든 사람이 이웃이되 그 이웃을 대접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상대적으로 작든, 혹은 크든 사회는 개인 보다 더 높은 등급에 있다. 나라는 사회 보다 더 높다. 주님의 왕국은 나라 보다 더 높다. 주님 자신은 모든 것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이웃이다. 그리고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선은 이웃이다. 결과적으로 성실과 정의가 이웃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선을 행하든 선을 위해서라면, 성실과 공정함을 위하여 성실하고 정의롭게 행동한다면,
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실시하고 있다. 그는 선인 것, 진실인 것, 정의로운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선, 성실, 정의가 들어 있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선행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선행은 내적 애착이고, 이 애착으로부터 인간은 선을 뜻하고 참으로 어떤 댓가도 없이 선을 행한다. 내적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과 더불어서의 선행은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뜻하고 행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선이 자기에게 이웃이 되어 있을 때, 사람이든 천사이든 그의 내면에 관련해 선행이다. 이렇게 선행의 범주는 그 폭이 대단히 넓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목적으로 지닌 이들이 선행 안에 있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 안에 있는 천국은 어떤 보상과는 관계없이 선을 이웃에 뜻하고 행할 때, 행복이 있어진다는 것,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 속해 있는 선행에 대한 애착 안에는 더 할 수 없는 행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는 것을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영예와 재물의 결과인 영광으로부터 발생하는 즐거움을 박탈 당하면 자기들에게 남아 있을 기쁨은 더 이상 없을 것이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쁨이 사라진 후에야 천국의 기쁨은 시작되고 무한하게 넘친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모른다.

7

신앙
(Faith)

본질적 측면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는 그가 선행이 무엇인지 먼저 알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은 선행이 있지 않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선행은 신앙과 하나를 이룬다. 마치 이는 선이 진리와 하나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 즉 그가 귀히 여겨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사자의 눈에서는 선이고, 그가 믿는 것 역시 자기 눈에서는 진리이다. 어쨋든 선과 진리의 합일이 있듯, 선행과 신앙에서도 그와 꼭 같은 합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합일에 관한 속성은 제1장의 선과 진리 편에서 이미 상술했다.
선행과 신앙의 합일은 인간과 더불은 의지력과 이해력의 합일과 동일하다. 그 이유가 이 두 능력이 선과 진리를 받기 때문이다. 즉 의지력은 선을 받고, 이해력은 진리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이 두 능력들은 선행과 신앙을 받는다. 그 이유가 선은 선행에 속하고, 진리는 신앙에 속하기 때문이다. 선행과 신앙이 사람과 더불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눈치채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고, 자기 안에 있기에 그것들은 그의 의지력과 이해력, 그 외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의 생명 전체가 이 능력 안에 있고, 그것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바깥뜰에 불과하여 거기에는 의지력과 이해력 안으로 이제 막 들어가려고 하는 것들이 수집되어 있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신앙과 선행의 합일은 의지력과 이해력의 합일과 똑같다는 점이다. 이 합일에 관한 속성은 의지력과 이해력 편에서 이미 상술했다.
인간이 자기가 알고 지각한 것을 뜻할 때, 선행은 사람 안에서 신앙과 결합되어 있는다. 뜻함은 선행에 속하고, 앎과 지각함은 신앙에 속한다. 인간이 자기가 알고 지각한 것을 뜻하고 사랑할 때 신앙은 사람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것이 되어간다. 그러나 한 동안 그것은 사람 밖에 있다.
신앙이 영적이지 않으면, 그 신앙은 인간과 더불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이 그의 사랑의 신하가 되지 않으면 신앙은 영적으로 되지 않는다. 그가 진리와 선을 살아내는 것을 사랑할 때, 즉 말씀에서 명령한 일련의 것들에 따라 사는 것을 사랑할 때, 신앙은 인간에게 사랑의 신하가 되어간다.
신앙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뜻함으로부터 발생하는 진리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뜻함은 인간의 영적 평면을 구성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 평면과 아주 동떨어져 있다. 인간의 자연적 평면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영예나 명성과 이득을 위하여 진리를 뜻할 뿐이다. 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진리는 영적 평면을 구성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기 때문에서 이다. 신성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영적 평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을 통하여 인간에게 결합되어진다. 그 이유가 사랑은 영적 결합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알고 생각하고 이해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묵상할 때 자신으로부터 내 던진
다. 육체의 삶 이후 그가 영일 때 역시 마찬가지로 내 던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 것 만이 그의 영 안에 남기 때문에서 이다. 그 외 나머지는 사후 이상한 것(모르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사랑에 속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집 밖으로 내 던진다. 여기서 ‘영 안에’ 라고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사후 인간은 영으로서 살기 때문에서 이다.
태양의 열과 빛의 예를 가지고 선행에 속하는 선과 신앙에 속하는 진리에 관련해 어떠한 관념을 형성해 볼 수 있다. 태양으로부터 생긴 빛이 열과 결합되어 있을 때, 마치 봄철과 여름 같이, 지상의 표면의 모든 것은 싹이 트고 꽃을 피운다. 그러나 빛 안에 열이 없을 때, 지상의 만물은 활기가 없고 죽게 된다. 영적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영적 열은 사랑이다. 이를 가지고 교회인을 놓고 어떤 생각을 형성해 볼 수 있다. 즉 그 사람과 더불은 신앙이 선행과 결합되고 있을 경우, 그는 정원이나 낙원 같다. 그러나 그와 더불은 신앙이 선행에 결합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는 사막이나 눈으로 덮힌 토지 같다.
확신함, 또는 신뢰함은 신앙 측면에 속하고 구원받는데 필수 요소임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신앙만(faith alone)이 절대 요소일 뿐 선행을 배제한다면 그 확신과 신뢰는 영적이 아닌 자연적 수준의 것일 뿐이다. 영적 확신과 신뢰는 그것의 본질과 생명을 사랑의 선으로부터 끌어낼 뿐 분리되어 홀로 있는 신앙의 진리로부터는 아니다. 이런 신앙의 확신은 죽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확신은 악한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아버지와 더불은 주님의 공로의 탓으로 돌려야 할 뿐, 인간 삶의 품질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신앙 논리의
확신은 진리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 신앙을 가진 모든 이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삶의 지침을 실행해야 구원되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말씀, 즉 교회의 교리가 가르치는 일련의 것들을 믿는데도 그에 따른 삶의 모습은 없을 경우도 겉모양새로는 신앙이 있는 듯 나타난다. 어떤 이의 경우는 자기는 이런 신앙을 통하여 구원되어졌다고 상상조차 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 한쪽만으로 구원될 자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설득에 의한 신앙이기 때문인데, 아래에서 추가 설명한다.
설득에 의한 신앙, 이것은 말씀과 교회의 교리가 믿어지고 사랑되어지는 이유가 진리를 위하여, 그리고 진리에 의거 살기 위하여서가 아닌, 말씀과 교리를 연구해 학식을 쌓아 명성을 날리기 위하여, 소득의 한 수단으로, 여느 직업 같이 생계수단 등등이 목적이 되어 있을 경우 야기된다. 이런 신앙을 가지는 이들은 실지로는 주님을 찾지 않고 천국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없고 오로지 현실에 집착해 자신의 이득에 관심을 집중할 뿐이다. 세상의 위대한 것들에 대망을 품은 이들, 그래서 많은 것들에 군침을 흘리는 이들은 세상적인 것에 욕심이 없고 그래서 타인의 것에 탐냄이 없는 이들보다도 교회의 교리가 가르치는 것이 진리이다고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훨씬 더 강력할 때가 많다. 그 이유인즉 전자에 속한 무리들은 교회의 교리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의 한 수단일 뿐이어서 이다. 목적이 탐욕스러운 만큼, 그
수단들은 더 사랑되고 더욱 믿어지기 마련이다. 이를 본질적으로 들여다 볼 경우 다음과 같다. 위의 인물들이 자아와 세상 사랑의 불 안에 있는 만큼, 그리고 그 불로부터 말하고 설교하고 행동하는 만큼, 그들은 설득의 위 원리 안에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것이 그렇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다. 설사 그들이 이러한 사랑의 불에 있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믿는 것마저도 거의 없다. 많은 자들이
전혀 믿지도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설득에 의한 신앙은 입술의 신앙이고 심정의 신앙이 아니다. 고로 본질적으로 신앙이 없다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설득에 의해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떤 내적 계발로부터도 알지 못한다. 아니, 이들은 만일 대중이 자기들의 설득력에 먹혀 자기들의 말을 믿는다면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이 없다. 그 이유가 이들은 진리가 진리이기에 진리를 위한 진리에 애착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이 확보한 명예나 이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즉각 믿음 마저 내 팽개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 이유가 설득에 의한 신앙은 인간과 더불어 내향적으로 있지 않고, 외향적, 즉 기억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고 이 기억으로부터 가르침도 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신앙은 그것이 지닌 진리와 더불어 사후 사라진다. 그 이유가 인간 안에서 내향적으로, 즉 선 안에 뿌리를 내렸던 신앙에 속한 것, 고로 그의 삶 속의 실상이 되어갔던 신앙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설득에 의한 신앙 안에 있던 이들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그 날에 많은 자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했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를 내 쫓았고, 당신의 이름으로 경이로운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결코 알지 못한다고 잘라 말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3장 26, 27절에서,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당신께서는 우리의 도로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할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하는 바, 나는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로부터 떠나라.’” 위 인물들은 자기들의 등불에 기름을 지니지 않은 다섯 아둔한 처녀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마침내 다섯 처녀가 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여 말하셨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모른다.” (마태 25:11, 12) 등불 안에 있는 기름은 신앙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8

경건함
(Piety)

많은 이들은 영적인 삶, 즉 천국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경건함에, 바깥쪽 거룩함에, 세상을 단념함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선행과 동떨어진 경건함, 내향의 거룩함을 제외한 외향의 거룩함, 세상에서의 일반적 생활을 별도의 문제로 치부한 세상을 단념함은 영적 삶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선행으로부터 흐르는 경건함. 내적 거룩함이 풍겨내는 외향의 거룩함. 세상과 짝을 이루는 세상적인 것을 단념함이 영적 삶의 구성요소라 말할 수 있다.
경건함은 신앙심 깊게 생각하고, 말함에 존재하고 있다. 주도면밀하게 기도함에도 있다. 겸손을 가지고 처신하는데에도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데도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설교를 독실하게 경청하는 데에도 있다. 성찬에 자주 참가하는데에도 있다. 신성한 예배에 참석하듯 교회의 의식도 같은 수준에서 참석하는데에도 있다. 그러나 선행의 삶은 이웃에 선을 뜻하고 행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정당하고 공정한 것의 원리로부터 행동함 안에, 그리고 선하고 참된 것을 모든 일에서, 모든 업무에서 실행함에 있다. 한마디로 선행의 삶은 홍익인간을 목표로 공익을 도모하는데 있다. 신성한 예배는 일차적으로 선행의 삶 안에, 이차적으로 경건함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을 떼어놓는 사람, 즉 경건한 생활은 하면서 선행의 삶은 뒷전에 머물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맞는 얘기인 것 같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으로부터 생각할 뿐이다. 그 이유가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 관해서 골몰할 뿐 이웃에 대하여는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가 이웃의 품질과 꼭 같지 않는 이상, 그는 자기와 관련을 맺지 않는다. 또한 그는 천국을 보상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그의 마음 안에는 공적에 관한 생각이 있다. 또한 자아 사랑 뿐 아니라 선용을 경멸하거나 무시하기 까지 한다. 이웃에 관한 것도 예외일 리 없다. 이제 그는 자신은 죄없음이 되었다는 의식 안에서 신앙을 지닌다. 이상으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르는 것은 선행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경건한 생활은 신성한 예배에 있어야 하는 영적인 삶이 아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태복음 6장 7, 8절을 읽어보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느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바깥쪽 거룩함 역시 경건함과 같다. 그러나 내적 부분이 거룩하지 않으면 인간과 더불은 이 거룩함은 거룩하지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의 외적 부분의 품질은 그의 내적 부분의 품질에 따라 있어지기 때문이다, 전자는 후자로부터 생겨난다. 마치 행동이 그의 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깥쪽 거룩함은 내적 거룩함에서 분리될 경우 자연적일 뿐, 영적이지 않다. 이런 이유로 자연적 거룩함은 선한 자에게 있는 만큼 사악한 자에게도 존재한다. 그리고 예배 전체를 이런 외적 의식에 두는 이들의 예배는 텅빈 예배,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들과 진리들은 인간이 알아야하고 믿어져야하며 사랑되어야하는 참으로 거룩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있고 신성은 그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향의 거룩함은 선과 진리를 사랑함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선과 진리는 선이고 진리이기 때문, 그리고 내향의 거룩함은 정의와 성실함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의와 성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 같은 태도에서 위의 것을 사랑하는 만큼, 그 자신, 그의 예배는 영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들을 알려하고 뜻하고 그것들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위와 같은 태도에서 사랑하지 않는 만큼, 그와 그의 예배는 자연적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는 알려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 내적 예배로부터 분리된 외적 예배는 심장과 분리된 호흡이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내적 예배로부터 흐르는 외적 예배는 심장과 긴밀히 결합된 호흡작용과 비슷하다.
세상을 단념함의 경우를 살펴보자. 많은 이들에 의해 믿어진 바, 세상을 포기함, 그리고 육 안에서가 아닌 영 안에서 생활함은 재물이나 명예 같은 세상적인 것들을 내 던지는데 있다고 한다. 하여, 꾸준하게 이리저리 배회하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삶에 관해 경건히 묵상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경건한 책들을 많이 읽고, 참회도 거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세상을 단념함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실지로 세상을 단념함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을 뜻한다. 그리고 사람이 그분의 계명들에 따라 살 때 하느님은 사랑받아진다. 인간이 공익(uses)을 수행할 때 이웃이 사랑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의 생명을 받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가 세상 업무나 다양한 의무들을 이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들로부터 격리된 삶은 생각 속의 삶이고,
사랑과 선행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의 삶이다. 이런 삶 안에서는 선을 뜻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함은 사멸한다. 이렇게 후자가 사멸할 때, 영적 생명은 기초없는 집 같아 점차 가라앉고, 균열이 생기며 비틀거리다 무너져 내린다.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임은 주님의 아래 말씀으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는 그를 바위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신중한 사람에게 비유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비유할 것이다; 또는 어떤 기초도 없이 지면 위에 짓는 자에 비유할 것이다.”
경건한 생활이 선행의 삶에 결합되어 있는 한, 경건한 생활은 쓸모가 있고, 주님에 의해 받아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가 선행의 삶이 제1순위의 삶이고, 이 삶이 경건한 삶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경건한 생활이 내향의 거룩함으로부터 진행하는 한, 바깥쪽 경건함도 주님에 의해 받아지고 쓸모 있다. 그 이유가 내향의 거룩함이 경건함의 품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포기가 쓸모 있고 주님에 의해 받아지는 것은 세상의 포기가 세상 안에서 일을 수행하는 경우이다. 그 이유가 세상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치워내는 이들에 의해 포기되어진다. 그리고 어느 직책에서 이든, 어느 사업을 하든, 자기에게 할당된 모든 일에서 내면으로부터 정의롭게, 성실하게 실시하는 이들에 의해 포기되어진다. 이 근원은 그가 올바르게, 신실하게, 정의롭게 행동할 때. 그 사람의 생명 안에 주재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신성한 법들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9

양심
(Conscience)

양심은 특정한 종교를 자신 안에서 내향적으로 받아 들임에 따라 그 종교로부터 인간에게 형성되어진다.
교회인과 더불은 양심은 말씀으로부터 신앙 속의 진리들을 통하여, 또는 말씀으로부터 파생된 교리로부터 심정에 이것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형성되어진다. 인간이 신앙 속의 진리들에 친숙해지고, 그것들을 납득하고, 후에 그것을 뜻하고 행동할 때, 그는 양심을 받는다. 심정에 받아들임은 의지에 받음을 뜻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의지는 소위 심정(heart)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양심을 가지는 이들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심정으로부터 이다 든가, 그들은 심정으로부터 행동한다 하고 말한다. 그들 역시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한 것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이 선과 진리이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층 더 완전한 양심은 신앙 속의 진리들 안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계발된 이들과 더불어, 그리고 확실히 지각함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계발되거나 불분명하게 지각하는 이들에 비해 가능성이 더 크다.
인간의 진짜 영적 생명은 진정한 양심 안에 주재한다. 그 이유가 선행과 결합된 신앙이 양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
이 양심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양심에 반대되어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의 참 생명에 반대되어 행동하고 있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물이 양심에 일치하여 행동할 때, 그는 내적 복됨 안에, 평화의 고요함 안에 있는다. 그리고 그가 양심에 거스르게 행동할 때, 그는 불안함 속에, 고통 속에 있는다. 이 고통은 소위 양심을 갉아먹는 고통이라 부른다.
인간은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내적 인간의 양심이고,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외적 인간의 양심이다.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내적 애착으로부터 신앙의 명령들에 따라 행동하는데 있다; 그러나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은 외적 애착으로부터 시민적이고 도덕적인 법들에 따라 행동하는데 있다.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올바른 것으로부터의 양심 역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올바른 것으로부터서만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선인 것으로부터의 양심을 받을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역시 훈육 받음을 통해 그것을 받는다.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양심은 진리로부터의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는 바, 이들은 진리로부터의 양심을 가진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은 양심은 진리를 사랑함을 통하여 형성되어진다. 후자의 양심은 더 높은 질서 안에 있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이라 불리워진다. 진리로부터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왕국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지각이라 불리는 더 높은 양심을 가지는 이들은 주님의 천적 왕국으로부터 이다.
이 문단에서는 양심이 무엇인지를 예증하는 보기를 들어 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물건을 소유했다면, 그런데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없을 경우, 그리하여 법 위반이라는 공포도 염려할 필요가 없고, 들킬 경우 명예나 명성이 실추될 걱정을 놓아도 되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도 이 사람이 그 취득물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 주인의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그는 양심을 가진 것이다. 그는 선인 것을 위하여 선을 행했고, 정의를 위하여 정당한 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예를 열거해 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공직 자리를 두고 누군가와 경쟁할 때, 상대방이 자신에 비해 그 공직 업무에 더 합당하다 판단될 경우, 그가 나라의 복지 향상을 위해 상대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면, 그는 선한 양심을 가진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양심이 없는 이들에 관한 것도 추측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양심을 지닌 이들의 거꾸로가 이에 해당된다. 즉 자신의 이권을 확보하려고 부정한 것을 정당한 것인 냥, 악한 것을 선인 냥 위장하는 이들은 양심이 없다. 이런 자들은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만일 이들에게 양심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가르치려들면, 그 말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속성을 지닌 이들은 자신들과 세상 것을 위하여 집중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양심을 받지 못한 이들은 저 세상에서도 양심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원될 수 없다. 그 이유인 즉, 이들은 천국이 놓여질 평면,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이 흘러들고, 이 흘러듬을 통하여 그분이 역사를 펼치실 평면, 그리하여 그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평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양심은 천국이 유입됨을 위한 그릇이요 평면이기 때문이다.

10

자유
(Freedom)

모든 자유는 사랑에 속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행동에 기꺼이 옮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유는 의지에도 속한다. 그 이유가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서 이다. 이상으로부터 자유가 무엇인지 드러났을 것이다. 즉 자유는 사랑, 의지, 고로 인간의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한 것은 마치 그것이 자아로부터 온 듯 당사자에게 나타난다.
자유함에서 악을 행함도 비록 그것이 노예 신분이다 해도 자유 같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자아와 세상 사랑으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사랑들은 지옥으로부터 이다. 사후 이와 같은 자유는 실제로 노예 같이 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이 세상에서 이런 자유 속에 있어 왔던 이들이 사후 지옥에서 천한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자유 자체의 구성요소가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자유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사랑들은 천국 사랑들이다. 이 자유는 사후에도 남아 진짜 자유가 된다. 이것을 소유해왔던 사람은 아래 구절의 “집의 아들” 같이 천국에서 되어간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죄를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에 묶인 종이다. 죄에 묶인 종은 집에 영원히
거주하지 못한다. 아들은 영원히 집에 머문다. 그러므로 만일 아들이 너를 자유하게 만든다면, 너희는 실로 자유할 것이다.” (요한복음8:34-36)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있기에, 자유는 주님에 의하여 인도받음에, 묶임은 지옥에 의하여 인도됨에 있다고 당연히 귀결된다.
인간은 악과 거짓을 생각하는 자유, 그리고 법의 제한이 없는 한, 악과 거짓들을 행할 자유를 가진다. 이것은 인간으로 개혁되어질 능력을 갖게 한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이 그의 사랑 안에, 그의 의지 안에 이식되어 그의 생명의 부분이 되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그가 악과 거짓, 선과 진리 모두를 생각할 자유를 갖지 않으면 가능치 않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주님에 의해 만인에게 수여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악과 거짓을 거절하고 선과 진리를 생각하는 만큼에서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들을 그의 사랑 안에, 그의 의지 안에, 결과적으로 그의 생명 안에 이식해 주시어 그를 개혁한다. 자유함에서 뿌려진 것은 남는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뿌려진 것은 남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강제적인 것은 그 사람의 의지로부터가 아닌 제3자의 의지로부터 뿌려졌다고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역시, 자유로부터의 예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나 강제성이 동원된 예배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자유로부터의 예배는 사랑으로부터의 예배이나 강제성을 띤 예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선을 행하는 자유와 악을 행하는 자유가 바깥 모양새로는 비슷한 듯 나타날지 모르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천국이 지옥과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유는 천국으로부터인 바, 천국의 자유라 불리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유는 지옥으로부터인 바, 지옥의 자유라 불리운다. 따라서 인간이 이쪽
편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저쪽 편에 있지 않는 셈이다. 그 이유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 6:24) 위 사항을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기들을 즐겁게 하는 악을 뜻하고 거짓을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지옥의 자유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이것이 노예 신세요 강제 당함이라고 믿어진다. 한편 천국의 자유에 있는 이들은 악을 뜻하고 거짓을 생각하게 하면 몸을 부들부들 떨고, 그렇게 하도록 밀어붙이면 그들은 고문당하는 느낌을 받고야 만다.
자유로부터 행동함이 인간에게는 자아로부터인 듯 나타나는바, 천국의 자유는 인간의 천국적 자아(Self, Proprium), 지옥의 자유는 인간의 지옥적 자아라 불린다. 인간은 지옥적 자아로부터 태어나는데, 이 자아는 악이다. 그러나 개혁됨을 수단으로 천국적 자아가 인간에게 소개되고, 이 자아는 선이다.
이상으로부터 미루어 선택의 자유가 의미하는 것도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것은 선택함으로, 즉 의지로 선을 행함을 뜻한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은 이 자유 안에 있는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은 선과 진리를 위하여 선과 진리를 사랑한다.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볼 때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으로부터 자신의 자유의 품질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모든 즐거움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이다.

11

공적
(Merit)

공적을 확보할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공적을 획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보상받는 것 역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기쁨을 보상받음에서 발견하고 선 안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다.
선 자체인 선을 행함은 선을 사랑함으로부터 흘러야 한다. 고로 이는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공적 같은 말은 들으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행함을 사랑함 안에 있고, 행함 안에서 만족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꾸로 만일 그들이 공적을 생각하거나 자기들이 행한 어떤 것이 자기를 위하여서 인듯 여겨지면 대단한 슬픔에 빠지고야 만다. 이것은 친구 관계를 위하여 친구에게 선을 행하는 경우나, 또는 형제 관계를 위해 형제에게, 아내나 아이를 위하여 아내와 아이에게, 나라를 위하여 나라에 선을 실시하는 경우나 비슷할 것이다. 이들은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고 있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이들은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닌 타인을 위하여서 이다.
보상을 기대하고 선을 행하는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일차적 관심은
자신들, 자신에게 선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선, 동료에 대한 선, 사회나 나라, 교회에 대한 선은 그들에게는 자기들 목적을 위한 수단들일 뿐이다. 이런 근거에서 공적의 선 안에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선이 잠복하고 있다. 이 후자의 선은 인간으로부터 이고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은 선이 아니다. 자아와 세상 사랑이 이 안에 잠복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것은 악이다.
순수한 선행, 순수한 신앙은 공적이라는 단어 조차 모른다. 그 이유가 선행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선 자체이고, 신앙으로부터의 즐거움은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선행과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공적에 대한 생각이 결여된 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선행과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선은 보상을 기대하여 행해져서는 안됨을 주님 자신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만일 네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면, 무슨 감사함이 네게 오겠느냐? 죄인 역시 이런 것은 행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네 원수를 사랑해라, 그리고 선을 행하라, 그리고 빌려주되, 다시 아무것도 희망하지마라. 너희 보상은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최고 높으신 분의 아들일 것이다.” (누가 6:32-35) 자신으로부터의 선인 선을 행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3:27)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들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더 이상 너희는 열매 맺지 못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는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나를 떠나서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4-8).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이고, 인간으로부터 서는 아니기에,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오는 선은 선이 아닌 바, 공적은 어떤 인간에게도 속한 것이 아니고 주님 만에 속한다는 귀결이 뒤따른다. 주님의 공적은 그분 자신의 힘에서 인류를 구하셨다는 데에, 그리고 그분은 그분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을 구원하신다에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말씀에서, 주님의 공적과 정의 탓에 자신은 구원되고 있다는 사람은 정당한 사람이고, 구원받는 것이 자아에서 비롯된 공적과 정의 탓이라고 하는 자는 부정한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선을 행함을 사랑함 안에 거주하는 참 즐거움은 영원히 남는 보상이다. 그 이유가 천국과 영원한 행복은 주님에 의해 이 선 안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천국으로 들어가려면 선은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선을 실행한 사람들이 천국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믿는 것은 보상을 목적으로 중요시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에서 공적을 내세운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실시하는 이들은 위와같이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기는 하되, 선을 위해 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목적의 자리에 보상을 놓고 중시하고 자기들의 일 안에 공적을 놓는다.

12

회개와 죄의 용서
((Repentance, and the Remission of Sins)

구원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죄들을 고백하고 회개를 실행해야 한다.
자신의 죄들을 고백함이란 악을 알고 있음, 자기 자아 안에 있는 악들을 봄, 그 악을 인정함, 자아가 죄있음을 선포함, 그래서 자아를 규탄함을 뜻한다. 이것이 하느님 앞에서 행해질 때, 죄들을 고백함이있어진다.
남들이 통상 하는 방식으로 자기도 죄인이다고 인정하고, 모든 악들에서 자신에게 죄있다고 선포하는 사람, 그런데 아직 자신을 검사하지 않고 있는 사람, 즉 자기 악들을 보았고 그래서 고백까지 했음에도 회개의 고백이 없는 사람, 이와 같은 사람은 자신에게 자기 악들을 숙지시키지 않았기에, 그는 이전에 살았던 그대로 사후에도 살아간다.
선행과 신앙의 생활을 이끄는 사람은 매일 회개를 실시한다. 그는 자신과 더불어 있는 악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본다. 그는 그 악들을 인정하고 그것에 맞서려 애쓴다. 그래서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 스스로일 경우 꾸준히 타락할 수 밖에 없고, 그러나 주님에 의해 그는 꾸준히 들어올려지고 선으로 인도되어지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모습이 선 안에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이들은 꾸준히 타락한다. 그리고 이들도 주님에 의해 꾸준히 들어 올려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엉뚱한데로 인도되어 아주 비통한
악들에 빠져들고 만다.
회개를 실행할 의도로 자신을 점검하는 사람은 그의 생각들, 그의 의지 속의 의도들을 조사해야 한다. 즉 자신의 명성이나 이득에서 손실의 위험이 없을 경우,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검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악들은 그 사람의 생각들과 의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육체와 더불어 행하는 악들은 모두 거기로부터 있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들과 의지 속의 악들을 조사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실행할 수 없다. 그는 사후에도 세상에서 했던 것과 꼭같게 생각하고 뜻한다. 악을 뜻함이 악을 행함인 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사전에 검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생활로가 아닌 입술로의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죄들은 입술로 고백했다고 청산되지 않고, 생활로 회개할 때 청산이 가능해진다. 참으로 죄들은 주님에 의해 꾸준히 용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허지만 죄들은 인간에게 너무나 착 달라붙어 있는데, 인간은 그것들이 청산되었다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악들은 진정한 신앙의 가르침들에 의한 삶 외의 수단으로는 당사자로부터 제거되지 않는다. 인간이 진정한 가르침에 의해 사는 만큼에서 그의 죄는 옮겨져 간다. 그리고 그것들이 옮겨진 만큼, 그것들은 삭제되어져 간다.
죄들이 청산되었을 때, 죄들은 닦아내지거나 물로 오물을 씻듯 되어진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죄들은 닦아지는게 아니라 옮겨진다. 즉 그가 주님에 의해 선 안에서 보존될 때, 그것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억제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선 안에 보존될 때, 죄들은 그에게 마치 죄없는 듯, 그리하여 씻어내 없는 듯 나타난다. 인간은 개혁된 만큼에서 선 안에 보존되어질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개혁되는가는
다음 장인 거듭남 편에서 보여질 것이다. 죄들이 이 외 다른 방식에서 청산된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의 설득에서 사기당한 것이나 다름 없다.
죄들이 용서되었다는 표시들, 즉 옮겨졌다는 표시들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예배함에서 즐거움이 지각된다. 이웃을 위하여 이웃을 섬김 안에 있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함 안에 있다.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말함 안에 있다. 선행과 신앙에 속하는 어떤 것을 수단으로 공적을 거두어 들이는 짓은 마냥 싫어진다. 악들이 금하여지고 예를 들면, 적개심, 미워함, 복수, 간음들, 그리고 그것들의 의도들에 함께 악들로부터의 생각들을 아주 싫어한다. 위와 반대로 용서되지 않았다는 표시, 즉 옮겨지지 아니했다는 표시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이 예배되지 않는다. 이웃을 위하여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 선과 진리를 위하여 선이 행해지지 않는다. 진리가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와 세상을 위하여서만 말해지고 행동한다. 자신의 행동에 의해 공적을 모아들이는 것에 느낌이 좋다. 적개심, 미움, 복수, 간음질 같은 악들이 지각될 때 불유쾌한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런 악들로부터 사람들은 제한 없는 자유로 그것들을 생각한다.
자유의 상태에서 실시된 회개는 쓸모가 있다. 그러나 강박 충동의 상태에서 실시되어진 회개는 쓸모가 없다. 강박충동의 상태는 아픔의 상태, 불행으로 마음이 우울한 상태, 죽음이 다가오는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 이해력의 사용을 박탈당해 두려운 모든 상태들이다. 이런 강박충동의 상태 아래 있게 되면 악인이라도 회개를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벗어났다 싶으면 악한 인간은 이전에 즐기던 악한 생활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선한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이 자신을 검토한 후에, 자기 죄들을 인정했고, 그가 회개를 실시했다면, 그는 선 안에 있으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것도 생애 마지막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악한 이전 생활로 거슬러 되돌아가서 이전 삶을 끌어안는다면, 그는 모독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선과 결합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의 후자의 상태는 전자의 상태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이를 두고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깨끗지 않은 영이 사람으로부터 나갔을 때, 그는 마른 장소를 지나고, 쉴 곳을 찾고, 그것을 발견치 못한다. 그러면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왔을 때, 그는 그 집이 텅비고, 청소되어 있고, 수리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면 그는 가서 자신과 함께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영들을 데리고 와서 안에 들어가 거기 거주한다; 그래서 이 사람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 상태 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마태 12:43-45) 모독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 편에서 다룰 것이다.

13

거듭남
(Regeneration)

영적 생명을 받지 않는 사람, 즉 주님에 의해 새로이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 갈 수 없다. 주님께서 이를 가르치신다. “참으로, 참으로 나는 네게 말한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 (요한 3:3)
인간은 자기 부모로부터 영적 삶이 아닌 자연적 삶을 살도록 태어나진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함에,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함에 있다. 참으로 주님께서 말씀에서 가르치신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데 있다. 자연적 삶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과 하느님을 사랑함 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하는데 있다.
부모로부터 인간 존재 모두는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이라는 악 안에서 태어나진다. 습관을 수단으로 자연적인 것이 되어간 모든 악은 후손에게 전해진다. 즉 부모로부터, 조부모로부터, 그리하여 뒤로뒤로 거슬러 가면 옛 선조로부터 계속적으로 물려 내려온 악들이다. 이러하기에 아래로 건네 준 악들은 규모상 심히 커서 인간 자신의 생명 전체는 악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계속적인 악의 갈래들이 깨어지고 변화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과 선행의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유전을 수단으로 이어받은 악을 향해 계속적으로 기울고, 그것 안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이 근원으로부터 그는 악 안에서 자신
을 확증한다. 또한 자신으로부터 악을 더 추가한다. 이런 악들은 영적 생명에 반대되어 있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지 않으면, 즉 영적 생명을 받지 않으면, 그러므로 그가 새로이 임신되고, 새로이 태어나지 않으면, 그리고 새로이 교육되지 않으면, 즉 그가 새로이 창조되지 않으면, 그는 지옥에 사는 무리에 끼여 있게 된다. 그 이유가 그는 자아와 세상에 속하는 것, 어쩌면 지옥에 있는 이들이 하는 짓 외는 어떤 것도 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새로운 삶에 속하는 것들, 즉 영적 삶에 속하는 것들에 정통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거듭나질 수 없다. 새로운 삶, 즉 영적 삶에 속하는 것들은 믿어져야하는 진리들, 행해져야 하는 선들이다. 전자는 신앙에 속하고, 후자는 선행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누구도 자신으로부터서는 알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감각들에 부딪치는 것들 만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그는 자연적 발광체라 불리는 빛을 자신을 위해 포획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세상과 자신에 속하는 것 만을 볼 뿐, 천국과 하느님에 속하는 것까지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후자의 것을 계시(밝히 알게 해주심)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예를 들면,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신 주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분은 천국 안에서와 지상 위에서 모든 권능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것, 신앙과 선행의 전체, 고로 진리와 선 모두는 그분으로부터 이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만일 자기가 선을 행하였으면 천국에서, 악을 행하였다면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 등등에 관해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위의 사항 그리고 신앙에 속하는 이 외 더 많은 것들이 거듭나아져갈 사람에게 알려져야 하고 알아야 한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에 정통해진 사람이어야 그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을 뜻할 수 있어,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생명, 새 삶을 가질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그가 주님이 인류의 구세주이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일 경우, 그는 그분에 대한 어떤 신앙도 가질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며, 그분을 위하여 선을 실시할 수도 없다. 그리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구원이 그분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생각을 뜻해 본다는 것은 더더욱 가능치 않다. 고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살 수 없다. 그리고 지옥이 있다는 것, 천국이 있다는 것,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 그는 천국의 삶도, 천국을 받기 위해 자신을 정립함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 조차 가능치 않다. 아마 이 외 더 많은 사항의 전체적 윤곽도 이와 비슷하다.
모든 사람은 내적, 외적 인간을 가지고 있다: 내적 인간은 소위 영적 인간이라 불리고, 외적 인간은 소위 자연적 인간이라 불린다. 인간이 거듭나지기 위해서는 위 두 인간 각각은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의 외적 인간이 통치하고, 그의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을 추종할 뿐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의 경우, 내적 인간, 즉 영적 인간이 통치하고,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을 추종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인간의 삶의 질서는 출생 때부터 거꾸로 있다는 점이다. 즉 통치해주어야 하는 것이 추종하는 위치에, 추종만 해야 하는 것이 통치하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되려면 이 질서를 거꾸로 해야 한다. 이 거꾸로의 삶은 주님에 의해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가능치 않다.
내적 인간이 통치하고 외적 인간은 이를 따르기만 하는 것, 또는 이와 반대의 경우가 의미하는 것은 이런 예증으로 살필 수 있을 것이
다. 만일 인간이 자기의 선 전체를 육욕적인 것에, 이권에, 자만에 놓아두고, 그리고 그가 미워함, 복수함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게다가 이런 자기의 모습을 이성으로 합리화하여 내면적으로 확증까지 한다면, 분명 이것은 그의 외적 인간이 통치하고 그의 내적 인간은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그의 선과 즐거움을 선량하게, 진솔하게, 정의롭게 생각하고 뜻함에서 발견한다면,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로 바깥쪽에서도 행동하고 있다면, 분명 그는 그의 내적 인간이 통치하고 외적 인간은 굴종하고 있다.
내적 인간이 주님에 의해 먼저 거듭나지고, 그 후 외적 인간도 거듭난다, 이 후자는 전자에 의해 거듭난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을 생각함으로 내적 인간이 거듭나고, 이에 따라 생활함으로 외적 인간이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인간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 (요한 3:5) 물은 영적 의미에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를, 성령은 이 진리에 따른 생활을 의미한다.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내적 인간은 천국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천사들과 더불어 천사로 있고, 사후 그는 이 천사들 무리에 온다. 그리하여 그는 천국에서 살면서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보살피며, 진리를 이해하며, 선을 즐기며, 복됨을 지각한다.

14

시험
(Temptation)

거듭나아가고 있는 이들만이 영적 시험들을 겪는다. 그 이유는 영적 시험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악령에 의해 촉발된 마음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악령들이 거듭나는 이들에게 있는 악들을 흥분시킬 때, 거기서 심통의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심통은 시험에 속한다. 이 근원을 모르는 사람은 심통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악령과 선한 영 둘 다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다. 악령들은 그 사람의 악들 안에 있고, 선한 영들은 그의 선들 안에 있다. 악령이 가까이 올 때, 이 영들은 그의 악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영들은 그의 선들을 산출한다. 이로부터 충돌과 전투가 발생하고, 이로부터 인간은 내면의 고통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시험에 의해 의미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시험은 지옥에 의해 야기되고 천국에 의해서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은 아무도 시험하시지 않는다는 교회의 신앙과도 일치한다.
내면의 고통의 느낌은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지 않는 이들과도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자연적 고통이지 영적 고통의 범주는 아니다. 이 두 고통은 이렇게 구별된다. 즉 자연적 고통은 그 대상이 세상적인 것 때문이나 영적 고통은 천국적인 것 때문이다.
선이 악을 지배할 것인지, 악이 선을 지배할 것인지가 시험들 안에
서 경쟁한다. 통치를 바라는 악은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 안에 있고, 선의 경우, 이는 영적 인간,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다. 만일 악이 우세하다면, 자연적 인간이 통치하고, 선이 우세하다면, 영적 인간이 통치한다.
이 전투들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 속의 진리에 의해 야기되어진다. 이 진리들로부터 인간은 악과 거짓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가 말씀 외 여느 다른 진리로부터 싸운다면 그는 시험을 정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은 어느 다른 것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전투는 신앙 속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소유할 때까지, 그리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그가 어떤 영적 생명을 획득할 때까지 영적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년이 되기 전, 인간은 자기 안에 전투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굴복하면, 시험 후 그의 상태는 이전 보다 더 악화된다. 그 이유는 악이 선을 압도하는 힘을, 거짓은 진리를 압도하는 힘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신앙이 희귀한데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선행이 신앙 안에 없기 때문 -그 이유는 교회가 그것의 끝에 와 있기 때문 -그러므로 어떤 영적 시험들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기에 이 시험들이 무엇인지, 시험의 사용은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험의 용도는 선이 악을 지배하는 힘을, 진리가 거짓을 지배하는 힘을 획득하는데 있다. 더 나아가 시험은 진리들을 확실히 함에,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 동시에 악들과 거짓들을 흐트러 버림에 사용된다. 영적 시험은 내적 영적 인간을 열리게 하고 영적 인간에 자연적 인간을 복종하게 하는데 사용된다. 동시에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깨트려버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욕망들을 억제하는데 사용된다. 이런 것들이 다 꺼내어진 후 인간은 진리와 선, 거짓과 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계발과 지각을 획득한다. 이것이 인간을 위한 총명과 지혜의 경우이다. 이것은 이 후 날마다 증가한다.
주님 만이 시험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싸워주신다. 그리고 주님 만이 그를 위해 싸워주시고, 그를 위해 정복해주신다는 것을 그가 믿지 않으면, 그는 외적 시험 만을 수행한다. 그에게 영적 시험은 어떤 유익함도 주지 못한다.

15
세례
(Baptism)

세례는 어떤 인물이 교회 속에 있다는 표시를 위해, 그리고 그가 거듭나지게 된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어졌다. 그 이유가 세례의 씻음은 거듭남인 영적 씻음 외에 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거듭남은 신앙 속의 진리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 진리에 일치된 생활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결과를 가진다. 그러므로 세례는 어떤 인물이 교회 속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는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낳는다. 그 이유가 거듭나게 하는 이가 주님이심이 교회에서 인정되어지기 때문, 그리고 교회 안에 신앙 속의 진리들이 있는 말씀이 있기 때문, 이 진리들을 통하여 거듭남은 결과되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사람이 물과 영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 물은 영적 의미에서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 속의 진리를 뜻하고, 영은 이 진리에 따른 생활을 뜻한다. 그리고 태어남은 신앙과 생활을 수단으로 거듭나짐이다.
거듭나고 있는 모든 이 각자는 시험들, 즉 악들과 거짓들에 맞선 영적 전투를 실시하는 바, 세례의 물 역시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세례는 위 같은 것들에 대한 표시와 기념물로 존재하기에 삶을 살아보지 않은 유아도 세례를 받게 된다. 이렇지 않다면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이들은 세례 의식 자체가 신앙이나 구원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님을 주지하면서, 더 나아가 신앙을 획득하고 거듭나면, 구원될 것임을 증거해야 한다.
하여 이 말씀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된다. “믿고 세례받았던 사람은 구원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될 것이다.” (마가16:16) 믿는 사람이란 주님을 인정한 사람,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런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16

성찬
(Holy Supper)

성찬은 주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천국, 고로 주님과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찬은 예배에서 최고로 거룩한 행동이다.
그러나 성찬을 통하여 결합이 어떻게 결과하는지는 말씀의 내적 또는 영적 의미에 관한 어떤 것을 모르는 이들에 의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들은 글자의 외적 의미 너머에 있는 의미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의 내적, 영적인 의미로부터, 몸과 피의 의미,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의미, 그리고 먹는 것의 의미가 알려진다.
영적 의미에서 주님의 몸, 또는 살, 마찬가지로 빵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주님의 피, 그리고 마찬가지로 포도주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먹는 것은 자기 것이 됨, 그리고 결합을 표시한다. 사람과 더불어 성찬 의식에 참가중인 천사들은 위의 의미 외에 달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거룩함이 천사들로부터, 고로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그 사람 안으로 흐른다. 이렇게 하여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인간이 주님의 몸인 빵을 먹는 의식에 참가할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주님과 결합되어진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피인 포도주를 마시는
의식에 참가할 때, 그는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주님과 결합된다. 그러나 마음 안에 꼭 새겨둘 일은 성찬 예식을 통한 주님과의 결합은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선과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선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이들에게만 거행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과 더불어 성찬을 통한 결합이 있다. 그 외 사람들 역시 성찬에 참가하겠지만 결합은 없다.
더 나아가 성찬은 이스라엘 교회 처방에서 제정된 신성한 예배의 전체를 포함하고 아우르고 있다. 그 이유가 번-제물과 희생 제물, 이 안에 이 교회 예배의 제일가는 사항이 있는데, 한 마디 표현으로 “빵”이다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찬은 위 예배의 요약이다.

17
부활
(Resurrection)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에 관련해서는 그가 죽을 수 없도록 창조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는 신앙과 사랑을 수단으로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 하느님과 결합함은 영원한 삶을 뜻한다.
내적 인간은 태어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있다.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을 수단으로 신앙과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행한다. 내적 부분은 소위 영이라 불리우고, 외적 부분은 몸이라 불리운다. 몸이라 불리는 외적 부분은 자연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인간이 죽을 때 벗어 던진다. 그러나 영이라 불리는 내적 부분은 영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것은 죽지 않는다. 만일 당사자가 세상에서 선한 쪽에 있어 왔다면 그의 내적 부분은 선한 영과 천사이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동안 악한 쪽에 있어 왔다면 그것은 악령이다.
몸이 죽은 후, 인간의 영은 영계에서 인간 형체로, 마치 자연계에서 있던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자연계에서 했었던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그는 자연계에 있었을 때 같이 생각하는 능력, 뜻하는 능력, 행동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한마디로, 그는 세상에서 입고 있었던 몸 전체를 입고 있지 않다는 것 외에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사람이다. 그는 죽을 때 세상을 위한 몸을 남기고 다시는 그것을 되찾지 못한다.
삶의 이런 연속이 부활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사람들은 죽게 되면,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이 멸망하는 때인 마지막 심판 이전에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감각적 인간이 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것이 다시 생명을 얻지 않으면 인간 전부는 끝장일 것이다고 믿고 있다.
사후 인간의 삶은 그의 사랑의 삶과 그의 신앙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연계에서 지니고 살아왔었던 그의 사랑과 신앙의 삶이 그대로 그를 기다리고 영원까지 이어진다. 자신만을, 세상의 것만을 위해 자연계의 삶을 소비한 사람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했고 자신인 듯 이웃을 살핀 이들은 천국의 삶을 이어받는다. 이 후자가 신앙을 지닌 이들이다. 전자는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천국의 삶은 소위 영원한 삶이라 불린다. 그리고 지옥의 삶은 영적인 죽음이라 부른다.
사후에도 인간은 산다는 것을 말씀이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는 것” (마태 22:31), “라사로는 사후 천국으로 운반되었으나 부자는 지옥에 던져졌다는 것” (누가 16:22, 23),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천국 안에 있다는 것” (마태 7:11, 12:31, 32, 누가 20:37, 38),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너는 낙원에서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신 것 (누가 23:43), 등등이다.

18

천국과 지옥
(Heaven and Hell)

인간 영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사랑과 신앙이다. 사랑은 그의 의지력의 생명을 구성하고, 신앙은 그의 이해력의 생명을 구성한다. 선을 사랑함,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 진리의 신앙이 천국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리고 악을 사랑함, 이 사랑으로부터 거짓의 신앙은 지옥의 생명을 구성한다.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국의 구성 요소이다. 그리고 신앙 역시 위와 마찬 가지이나 단지 위 두 사랑들로부터 존재하는 한 그러하다. 이 사랑들, 그리고 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인 바, 주님이 천국을 만들고 계심도 분명할 것이다.
각 사람과 더불은 천국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음에 따라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받는 이들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받는 이들은 자신들 안에 천국을 가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천국은 인간 안에 있기 때문, 주님께서도 이를 가르치시고 있다. “하느님의 왕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마라. 그 이유는 하느님의 왕국은 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1)
인간과 더불은 천국은 인간의 내적 부분, 고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그의 의지력과 사고력에 주재한다. 그리고 그의 외적 부분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다. 천국은 내적 부분과 떨어진 외적 부분에는 있지 않다. 그 이유가 위선자의 경우 속과 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후 저 세상으로 올 때는 천국이 그 사람과 더불어 있는지 여부는 즉각 판명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도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는 외적 부분만 나타날 뿐, 내적 부분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쪽 삶에서 내적 부분은 분명히 드러나진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그가 영으로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함 안에,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쁨은 이 사랑 안에, 이 신앙 안에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천국을 지닌 이들은 사후 이 기쁨을 향유한다. 한편 이것은 그의 내적 부분 안에 감추여 있다. 천국들 안에서는 모든 선들을 공유함도 있다. 모든 사람 속의 평화, 총명, 지혜, 행복은 거기서 각자에게 소통되어진다. 허나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는 정도에 따라 가능하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천국에 있는 평화나 총명, 지혜 그리고 행복은 그 얼마나 큰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인간과 더불은 천국의 구성 요소이듯,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우세해질 경우, 지옥의 생명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 이유가 이 후자의 두 사랑은 전자의 두 사랑에 직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권을 쥐게 한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받을 수 없고 지옥으로부터 오는 것만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믿는 것은 무엇이든 천국이나 지옥이나 어느 한 쪽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득세하고 있는 이들은 천국과 천국적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 어느 사랑 안에서 행복함이 가능할지 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듯 여겨진다. 어쨌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목적하는 것에서 제거되는 정도에 비례해 천국의 행복은 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 이 옮겨짐에 뒤 따르는 행복은 실로 너무나 커서 인간의 모든 납득력을 초월한다.
인간의 생명은 사후에는 바뀔 수 없다. 이 생명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남아 있는다. 그 이유가 인간의 영은 자기 사랑들의 품질에 따라 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의 사랑은 결단코 천국의 사랑으로 변형시켜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둘은 직반대되기 때문에서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한 말에서도 의미되고 있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네게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고자 해도 갈 수 없다.” (누가 17:21) 이로부터 확실한 바, 지옥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 천국에 가는 이들은 거기서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19

교회
(Church)

인간과 더불어 천국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은 또한 교회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사랑과 신앙이 천국을 구성하듯, 마찬가지로 사랑과 신앙은 교회를 구성한다. 따라서 천국에 관해 이미 상술했었던 것으로부터 교회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인정되어진 곳이다고, 그리고 말씀이 존재하는 곳이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교회의 필수 요소는 주님을 사랑함과 그분을 믿는 것이고, 이 둘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받기 위하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교회가 존재한다란 거기에 말씀으로부터의 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 이유는 교리 없이 말씀이 이해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교리 만이 아니라 교리에 따른 생활도 필수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믿음 만으로 교회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인 믿음으로부터의 생활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순수한 교리는 선행에 관한 교리, 동시에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 즉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선행의 교리와 동시에 신앙의 교리는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가 선행의 교리로부터 떨어진 것은 생명의 교리가 아니다.
교회 밖에 있다 해도 한분 하느님을 인정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을 믿으며 선한 생활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지옥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교회는 세상 두루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특수한 측면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일반적 측면에서의 경우 거기서 주님은 인정되고, 거기에도 말씀은 존재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이는 구원되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지옥에 간다.

20

신성한 성경, 또는 말씀
(The Sacred Scripture, or Word)

신성으로부터의 참 계시 없이 인간은 영원한 삶에 관한 어떤 것, 또는 하느님에 관하여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을 사랑함과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한 것은 더 더욱 모른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지독하게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해력을 형성되게 하는 모든 것을 세상의 물체로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유전적으로 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악 안에서 태어나진다. 거기로부터 발생되는 즐거움은 계속적으로 우세하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신성에 직반대되어 있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이 영원한 삶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참 계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참 계시로부터 인간은 여러 지식을 가질 것이다.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사람들을 설득하여 영원한 삶에 속하는 것들에 관하여 무지해 있게 한다는 것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의 경우로부터 오히려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이 계시로부터 하느님은 계신다…천국과 지옥이 있다…영원한 삶이 있다…이 삶은 사랑과 신앙의 선을 통하여 획득해야만 한다…등등을 알아채고 있는 듯 해도, 그들이 학식이 있든 없든 별 상관 없이 위 사항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가정해 보건대 참 계시가 전혀 없다면 그 부정함의 심각성은 어떠할까?
인간은 사후 살기에, 그리고 영원히 살기에, 이 삶은 그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그를 기다리고 있기에, 수반되는 것은,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성은 이런 삶으로 인도해줄 것들을 계시하였고 이것이 인간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다. 신성이 계시해온 것이 우리와 더불어 있는 말씀이다.
말씀이 신성으로부터의 계시인 바, 말씀의 각각의 것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신성하다; 그 이유가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은 다른 방도로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것은 천국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내려온다; 그러므로 천국들 안에서는 거기 있는 천사들의 지혜가 편의를 제공하고, 지상의 경우는 거기 있는 사람들의 납득력이 편의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말씀 안에는 천사들을 위해서는 영적인 것인 내적 의미가 있고, 지상의 인간을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인 외적 의미가 있다. 고로 인간이 천국과 결합하려면 말씀을 통하여야만 가능하다.
계발되어온 이들이 아니면 말씀의 순수한 의미를 이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 안에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지닌 이들은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들의 내면들은 주님에 의해 천국의 빛 안으로 들려지기 때문이다.
글자로 있는 말씀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를 수단으로 해서만 납득될 수 있다. 단순한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그들의 이해력이 편의를 제공해준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는 글자 의미를 위해 등불 역할을 담당한다,

21

섭리
(Providence)

천국에서, 그리고 지상에서의 주님의 통치는 섭리라 불리워진다. 사랑 속에 있는 모든 선, 신앙 속에 있는 모든 진리, 이로부터 구원이 있고, 이는 그분으로부터 이고 사람으로부터서는 절대 아닌 바, 명백한 사항은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류의 구원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의 것 안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요한 14:6) 그리고 다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너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4,5)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인간 삶의 지극히 작은 세세한 것들에까지 이르른다. 그 이유가 생명의 유일한 한 개의 원천이 주님이시기 때문, 이 분으로부터 우리는 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신성한 섭리에 관하여 생각하는 이들은 섭리는 단지 보편적인 사항에 국한되고 세세한 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을 뿐이다고 결말 짓는다. 이들의 헛점은 자기들이 천국의 신비함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의 추론을 자아와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의 쾌락으로부터서만 도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선한 자 보다는 사악한 자가 영예로운
지위에, 그리고 재물도 더 많이 축적하는 것을 볼 때, 더우기, 그들의 구상을 밀어붙여 성공하는 것을 볼 때, 자기들의 심중에 말하는 바, 신성한 섭리가 모든 것, 그리고 각각에 존재한다면 이런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신성한 섭리는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지상의 것인 인간의 생명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는 것들은 중시하지 않고 영원히 지탱할 것들, 끝이 없는 것들에 깊은 관심을 둔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끝이 없는 것이 존재를 가진다는 것, 그러나 끝이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간과하고 있다. 혹은 그들로 하여금 수 천 년과 영원을 비교해 생각하게 해보자. 아마 그들은 그 둘이 같지 않다는 것을 지각할 것이다. 그러니 한 백년 남짓한 세상에서의 인생 기간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저세상 인생 기간은 어떠할 것인가?
정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재물과 등급은 비록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있는 쾌락으로부터 그것들이 신성한 축복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 그것은 진짜 신성한 축복들이 아니다는 것을 알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소멸해 버리고, 뿐아니라 많은 것들을 부추켜 천국으로부터 돌아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삶, 그것의 더 없는 행복이야말로 신성으로부터 있는 진정한 복들이다. 이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네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천국들 안에 네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준비하라. 거기는 도둑의 접근이 없고, 썪는 일도 없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심정 역시 거기에 있다.” (누가 12:33, 34)
사악한 자가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함에서 성공이라는 왕관을 쓰는 이유는 이러하다. 그들의 계획한 바가 신성한 질서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으로부터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자유함으로부터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의 이성에 따라 자유로부터 행동하도록 인간을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신성한 질서에 일치되는 쪽에서 창안된 것들은 사악한 자의 창안이다 해도 성공되어야 그나마 사악한 자라도 영원한 생명을 받는데 적합해 질 기회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영원한 생명은 당사자가 자유할 때, 그리고 그의 이성이 계발될 때 인간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스며들기 때문이다. 강제성이 동원된 것은 그 사람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는 바, 어느 누구도 선 쪽으로 강요 당하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강요당할 경우 그의 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의 것이 되는 것은 그의 이성에 따라 자유함에서 행동된 것들이다; 그리고 자유함으로부터 행동된 것은 그의 의지로부터, 즉 그의 사랑으로부터 행해진 것이다. 그의 의지, 즉 그의 사랑은 인간 자신이다. 만일 인간이 뜻하지 않은 것을 강제로 하게 해도, 그는 꾸준히 그의 의지가 뜻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대체로 모든 이는 금해진 것을 얻으려 애쓰는 경향이 짙다, 게다가 감추여 놓인 원인으로부터 더욱 그러하게 애쓴다. 그 이유가 모든 이는 자유를 쟁취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인간이 자유 안에 보존되지 않으면 선은 그를 위해 준비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로부터 생각하고 뜻하라고 내버려두는 것, 법들이 그것을 금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함에서 생각하고 뜻하게, 설령 악을 행할지라도 유보하시는 것을 허용하심(permission)이라 부른다.
세상의 복된 것 쪽으로 노련한 계획에 의해 이끌어가는 것이 인간에게는 마치 당사자의 신중함의 결과인냥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허용함에 의해 신성한 섭리는 그를 거들어, 계속적으로 악으로부터 그가 멀리 떨어지도록 이끌고 있다. 결국 천국의 복된 것들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신중함의 결과가 아님이 알려지게 되고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이고, 그분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야기되고, 배열되고, 계속적으로 선 쪽으로 인간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위와같은 경우를 인간은 자연의 빛으로부터는 납득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빛으로부터서는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섭리와 예견이 있다는 것은 마음 안에 출생되도록 되어 있다. 선은 주님에 의해 설비되나, 악은 그분에 의해 예견되는데, 선과 악이 마음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으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밖에 없다.

22
주님
(The Lord)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보존자이시다. 또한 그분이 천국의 하느님이시고 지상의 하느님이시다.
인간과 더불어 천국 생명의 구성 요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 이 생명을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리고 이 생명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인간으로부터서 끌어 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 1의 것은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태어난 이들은 주님, 그리고 그분의 신성과 인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그 사람에게 거한다” (요한 3:36). 다시, “이것은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인즉, 아들을 보고 그분을 믿는 모든 이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들어올릴 것이다.” (요한 6:40) 그리고 다시,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하셨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더라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 26).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 주님과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고, 고로 그들은 천국에서 천사들이 거주하는 어떤 장소도 할당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음을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독생자이신 그분이 하느님을 나타내었다” (요한 1:18). 다시, “너희는 어느 때이든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고, 그분의 모양을 본적도 없다” (요한 5:37). 다시, “아들, 그리고 아들이 그분을 계시할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알 사람은 없다” (마태 11:27). 그리고 다시, “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는 아무도 없다” (요한14:6). 누구도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하느님에게 결합되어질 수 없는 이유는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그 두 분은 하나이기 때문에서이다. 그분이 이렇게 가르치신다. “만일 네가 나를 알았다면, 너는 내 아버지 역시 알았을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는 믿지 못하느냐?” (요한14:7-11).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믿을 것이다” (요한 10:30, 38).
아버지가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에, 그리고 주님은 믿어져야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바, 명백한 것은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말씀 역시 이렇게 가르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 모든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말씀 없이 만들어진 것은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말씀이 육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것과 같은 영광을 바라보았다” (요한1:1, 3, 14). 그리고 이사야서에서(9:6),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태어나,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다. 그리고 통치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하느님, 영웅, 영원의 아버지, 평화의 왕자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아라, 처녀가 임신하고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7:14, 마태1:23). 그리고 예레미야에서(23:5, 6, 33:15. 16), “보라, 때가 이르면, 나는 다윗으로부터 의로운 가지를 들어 세울 것이다. 그리고 한 왕이 통치하고 번창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이름인즉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 우리의 정의라 부를 것이다.”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사람, 천국으로부터의 빛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을 본다. 그러나 천국의 빛으로부터가 아닌 이들은 주님 안에서 인간밖에 더 이상의 것은 보지 못한다. 어쨌든 신성과 인간은 주님 안에서 하나되어 있는 바, 그 둘은 하나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를 가르치신다. “아버지, 나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모든 것이 나의 것입니다” (요한17:10).
교회에 알려져 있는 바, 주님은 아버지 여호와로부터 임신되셨다는 것, 고로 임신으로부터서도 그분은 하느님이셨다는 것, 또한 그분은 몸 전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무덤에서 그분 뒤에 남긴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 이 주제에서 역시 그분은 후에 제자들에게 확증하시어 말하시기를, “보라, 내 손과 발을, 이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만져라 그리고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 보는 바 같이 나는 가지고 있다” (누가24:39). 그리고 비록
그분이 살과 뼈에 관한 점에서 사람이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닫힌 문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을 명백히 하신 후에 그분은 눈에 보일 수 없게 되셨다 (요한20:19, 26, 누가 24:31). 이런 경우의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모두 다르다. 그 이유가 그분은 그분의 몸에 관하여가 아닌 영에 관하여서는 단독으로 다시 일어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어떤 영 같이 있지 않았다고 말하심에서 주님은 자신은 또 다른 사람 같이 있지 않았다고 말하셨다. 이로부터 주님 안에 있는 인간 역시 신성임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인간 아버지로부터 혼(soul)이라 불리는 것 , 즉 그의 생명의 실재를 가진다. 이 실재로부터 몸이라 불리는 것, 즉 생명의 실체가 있다. 그러므로 몸은 혼의 인형(effigy, 초상)이다. 혼은 이 인형을 통하여 저 좋을대로 자신의 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부모를 닮아 태어나지고, 가족들은 서로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몸의 어떤 종류, 즉 주님이 가지셨던 인간은 어떤 종류이었냐가 드러난다. 즉 그것은 그분의 생명의 실재(esse)인 신성 자체와 같았다는 것, 또는 아버지로부터의 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요한 14:9).
주님의 신성과 인간이 한 분 인물(one Person)이다는 것은 기독교계에 두루 받아진 신조와 일치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비록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인간일지라도, 그분은 아직 둘이 아닌 한분 그리스도이다; 인물의 통일성을 수단으로 전부가 하나이다. 몸과 혼이 한 사람이듯,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은 한 분 그리스도이다.” 이 말들은 아타나시안(Athanasian) 신조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신위(Deity)에 관련하여 세 인물들이다는 생각을 견지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한 분이시다는 생각을 지닐 수 없다. 입술을 가지고 그들이 하나라고 말한다 해도 여전히 그들은 셋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신위에 관련해 한 분 인물 안에 세 가지 신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 분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고, 역시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고 생각한다.
한 분 인물 안에 셋에 관한 생각은 아버지가 주님 안에 있음으로서, 그리고 성령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으로서 생각할 때 윤곽이 잡힌다. 그러면 삼위일체가 주님 안에 있다; 즉, 아버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아들이라 불리는 신성한 인간, 그리고 성령이라 불리는 신성한 진행(Proceeding, 역사하심)이다.
신성 전체가 주님 안에 있기에 그분에게 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서 모든 권능이 속해 있다. 이를 그분께서 이렇게 선포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손에 모든 것을 주셨다” (요한 3:25). 다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육을 제압하는 힘을 주셨다” (요한17:2). 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다시, “모든 권능이 천국과 땅에서 나에게 주어졌다” (마태 28:18). 이 권능은 신성이다.
주님의 인간(성)을 또 다른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만드는 이들은 참 신성으로부터 그분에 관한 개념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이의 몸이 그의 혼의 인형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의 부활이 그분의 몸 전체를 가지고 있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의 얼굴이 태양 같이 빛난 그분의 변모하심이 어떻게 그렇게 나타나게 되셨는가 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주님께서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해 말하신 것들, 아버지와 하나된 주님의 존재에 관하여도, 그분의 신성이 되심에 관하여도, 그리고 천국과 땅의 모든 권능에 관해서도,
즉 이런 것들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인간에 관해 말해진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그분의 인간에서 조차 편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마태 28:20). 그럼에도 성찬에서 그분이 편재하신다는 믿음은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편재함(omnipresence)은 신성이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성령이라 불리는 신성이 주님의 인간성으로부터 진행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성령은 그분의 신성이 되신 인간(His Glorified Human)으로부터 진행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말해졌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는 아직 신성화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9).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서 멸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에게 만연되어 있었던 지옥들의 세력들을 복종하게 하심으로, 동시에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으로 인류 구원이 작업되게 하셨다. 이렇게 하셨기에 그분은 지옥을 영원한 복종 아래 묶어 둘 수 있으셨다. 지옥을 복종하게 함, 동시에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심은 그분이 어머니로부터 가졌던 인간 안으로 침입한 시험들을 극복해가심을 통하여 결과되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수난은 마지막 시험이었고 (마무리 짖는) 완전한 승리였다.
주님이 지옥들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그분 자신이 가르치셨다. 십자가의 수난이 가까워졌을 때 그분은 말하셨다, “지금은 이 세상의 심판이다. 지금 세상의 제1인자가 내던져질 것이다” (요한 12:31). 다시, “힘내어라, 내가 세상을 정복했다” (요한16:3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에돔으로부터 오는 이가 누구냐? 아주 큰 그분의 힘 안에서 여행하신다. 구원하는 힘이다. 나 자신의 팔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왔다. 이렇게 그분은 그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63장, 59:16-21). 주님이 그분의 인간을 신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은 마지막 시험이었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승리하셨다는 것, 이를 통하여 그분은 신성이 되심을 이루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요한복음(13:31, 32)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치신다. “유다가 나갔을 때,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신성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그분을 신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곧 그분을 신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다시, “아버지,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신성이 되게 하시고, 아마 당신의 아들도 당신을 신성이 되게 할런지 모릅니다” (요한 17:1, 5). 그런 다음 다시, “지금 내 혼이 괴로워하고 있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그런다음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나는 둘 다를 영광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영광되게 할 것이다” (요한 12:27, 28). 다시 누가복음(24:26)에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어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말들은 주님의 수난에 관해 말해졌다. 영광되게 함은 신성으로 만듦을 뜻한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바,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사람이 되시지 않으면,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구원은 있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고로 이해되는 것은, 주님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인간을 충분하게 영광되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어머니로부터 입었던 인간을 벗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의 인간을 입으셨다, 이것이 신성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었다.
교회에서 첫째이자 맨 먼저인 것은 한 분 하느님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지식과 인정함을 떠나서는 결합도 없다. 주님을 인정함 없이 있는 교회의 경우를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에게 주재한다” (요한 3:36).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너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 8:24).
주님 안에 삼위(trinity)가 있다는 것, 즉 신성 자체, 신성한 인간, 진행되는 신성이 있다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있는 신비이다. 그리고 거룩한 예루살렘 안에 있을 이들을 위하여 계시되었다.

23

교회의 통치와 시민의 통치
(Ecclesiastical and Civil Government)

사람들 사이에서 질서 안에 있어야 하는 두 가지 것이 있다. 천국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이다. 천국에 속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은 시민에 속한 것이다.
질서가 유지되려면, 권위를 지닌 인물이 있어, 질서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것들, 질서에 반대될 경우 초래되는 것들을 주지시키고, 질서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보상을, 질서에 거스리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형벌을 가해야 유지 존속된다. 이것이 실시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할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전성에 의해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 타인의 좋은 것을 갈취해 내 것 삼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이에게 대체로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로부터 적개심, 시기, 미워함, 복수, 사기, 잔인함, 이외 수많은 악들이 발생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법에 의해 제한된 상태에 놓이고, 각기 자기들의 사랑에 걸맞는 보상을 수단으로, 즉 선한 자에게는 영예와 이득을 보장하고, 악한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방식 속에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권위가 부여된 인물은 인간 집단을 질서 안에서 보존하는데 필요하게 된다. 이 인물은 법률에 노련해야 하고, 슬기 있으며 특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면 최상일지 모른다. 질서는 권위가 부여된 이들 사이에도 물론 있어야 한다. 이들이 좋아해서 이든 무지함으로해서 이든 질서에 거스르는 악들을 허용하지 않도록, 그럼으로 질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함이 필수일 것이다. 이는 공직 지위가 더 높거나 더 낮거나 하는 계열을 수단으로 종속 관계에서 관리 감독됨으로 보호될 수도 있다.
천국에 속하는 사람들, 또는 교회 조직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권위를 갖도록 앉혀진 사람들을 성직자라 부른다. 그들의 직능은 성직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는 사람들, 즉 시민들 사이에 앉혀져 권위가 부여된 사람들은 행정 장관, 그리고 그들의 최고직은 왕이라 부른다.
성직자의 경우, 그들은 사람들에게 천국 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또한 그 길로 인도해가야 한다.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자기들의 교회의 교리에 의거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 교리에 따라 살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진리들을 가르치고, 진리들을 통하여 생활의 선으로, 고로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성직자는 양떼의 선한 목자이다. 그러나 가르치기는 하나 생활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성직자라면, 그는 나쁜 목자이다.
성직자는 인간의 혼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공언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인간의 내면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창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 권능은 주님 만에 속하기 때문이다.
위엄과 영예는 그들이 집행하는 거룩한 사항들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기 있는 성직자는 거룩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인 바 주님께 영예를 돌린다. 한편 슬기롭지 못한 이들은 영예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때로는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갈취하기도 한다. 자기들이 집행하는 거룩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성직자는 그들이 돌보아야 할 혼들의 구원보다는 영예나 이득을 더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영예를 자신들이 아닌 주님에게 돌리는 이들은 영예나 이득에 앞서 혼들의 구원을 돌보고 있다. 어떤 직능으로부터의 영예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집행하는 공직의 위엄에 따라 사람에게 붙어져 있을 뿐이다. 고로 접합된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시 공직과 더불어 분리되어진다. 사람에게 천부적으로 있는 영예는 지혜의 영예,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으로부터의 영예이다.
성직자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고 진리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생활의 선으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강요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기가 진리이다고 생각하여 자기 심정에 담아놓은 것에 거슬러 믿도록 강요될 수 없다. 성직자와 다르게 믿는 사람, 그런데 어떤 혼란함도 만들지 않는 사람은 평화로이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혼란함들을 만드는 사람은 그 혼란에서 그가 분리되게 해주어야 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것 역시 성직 신분이 감당해야 하는 질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신성한 법과 예배에 속하는 것들을 집행하는데 권위가 부여된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왕이나 행정관들은 시민적 법들과 재판에 속하는 것들을 집행하는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왕 한사람이 모든 것을 집행할 수 없는 바, 왕 아래 권위를 이양받은 사람들이 서열별로 내려가며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왕으로서도 실시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업무를 왕 대신 처리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집합해 왕정의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왕 자신은 권위 측면에서 최고이다.
진짜 왕정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어있을 뿐이다. 왕권이 자신 고유에 속한 것이라고 믿는 왕, 그리고 자기 직권의 위엄이 자기 고유의 것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행정관은 슬기롭지 못하다.
왕정은 공정의 원리로부터 왕국의 법들에 따라 집행함에, 그리고 이 법들에 의거 재판함에 있다. 법을 자기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왕은 슬기롭다. 그러나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법이 자신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왕은 법 안에 왕정을 둔다. 그리고 법들이 그 자신마저 통치한다. 그 이유가 그는 법이 정의를 뜻하고 모든 정의는 신성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왕정을 놓고 있다. 그는 자신이 법이라고 믿거나 정의인 법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성 아래 자신을 두어야 할 그가 오히려 신성인
것 마저 자신에게로 가로챈다
정의인 법은 슬기롭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입법자에 의해 왕국 안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과 신하 모두 그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제정된 법에 따라 사는 왕은 그의 신하들에게 본을 보이는
바 진실로 왕이다.
자기에게 절대적 권력이 있다고 믿는 왕, 그리고 그의 신하는 자기의 노예나 다름 없는 바, 그들의 소유물이나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다고 상상하는 왕은 만일 그가 이런 권리를 행사한다면 그는 왕이 아닌 폭군이다.
순종은 왕국의 법들에 따라 왕에게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시민은 순종 때문에 말에 의해서 이든 행위에 의해서 이든 결단코 상처받아져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이것 위에 공공의 안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부록
(Appendix)

선각자의 출판 서적, 비 출판 서적 소개
선각자의 용어에 대한 간결한 풀이
선각자에게만 유일한 기본 생각들
도서구입 안내

선각자의 신학 관련 저서들

1. 직접 출판한 저서들 2. 출판되지 않고 발견된 그의 기록 내지 저술인 것들.

천국의 비밀들 (1749-1756년) 영의 일기(또는 영적 경험)(1745-1765)
천국과 지옥 (1758년) 요한계시록 설명 (1757-1759년)
새 예루살렘과 그곳의 교리 (1758년) 아타나시안 신조 (1759-1763년)
마지막 심판 (1758년) 주님에 관하여 (1759-1763년)
백마 (1758년) 예언서들과 시편의 내적의미(1759-1763년)
우주에 있는 땅들 (1758년) 마지막 심판 (1759-1763년)
주님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사랑 (1759-1763년)
거룩한 성경에 관한 교리 (1763년) 신성의 지혜 (1759-1763년)
삶에 관한 교리 (1763년) 선행의 교리 (1766년)
신앙에 관한 교리 (1763년) 5 기억할만한 관련들 (1766년)
마지막 심판에 관한 계속 (1763년) 결혼에 관해서 (1766년)
신성의 사랑과 지혜 (1763년) 정경들 (1769-1772년)
신성의 섭리 (1764년) 새 교회에 관한 교회의 역사 (1769-1772년)
요한계시록 밝힘 (1766년) 부속물(coronis) (1769-1772년)
부부의 사랑 (1768년) 새 교회로 초대함 (1769-1772년)
간략한 해설 (1769년)
유입, 또는 혼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1769년)
진정한 기독 종교 (1771년)

선각자의 용어 풀이
(Glossary)

** 참고: (commercium) 식의 표기된 것은 라틴어임
이 풀이는 간결해서 좋지만, 한편 너무나 간결해서 어떤 단어의 경우는 이해함에 불리할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어쨌든 아래의 글들은 Swedenborg Resercher’s Manual by William Ross Woofenden으로부터 발췌되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이 필요할 경우 역자에게 연락하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헌 책은 구매가 가능할지 모른다, 검색해보기 바란다).

감각적인 (Sensuous)
관능적인, 감각의, 그리고 감각 지향의. 섹스적인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각들에서 집중함에 의해 특색을 이루는 것, 감각들에 의해 납득되는 것. 마음의 자연적 수준에서도 가장 낮은 평면.

개혁 (Reformation)
거듭남의 과정 중의 일부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당사자의 바깥쪽 생활을 질서 안에 놓는 것이다. 당사자는 진리가 우세한 순종의 상태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를 받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거듭남 (Regeneration)
넓은 의미에서 재출생의 모든 과정. 좁은 의미에서 개혁에 뒤이어지는 과정. 주님이 각 개인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가시는 과정, 또는 (삶의) 과정의 목적(goal).

결혼의 (부부의, connubial)
결혼에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혼에 연계
된 외적인 것들 만에 관련하여, 또는 부정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편이다. 새나 동물의 짝짓기에 사용되었다.

고대 교회 (ancient church)
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 의해 표현된 고대 시대 성경 속의 사람들의 종교.

과학물들 (Scientifics)
과학적 진리들을 보라. 지식들, 사실들, 자료들.

과학적 진리들 (Scientific truths)
위 표현은 빈약한 번역일지 모른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가 아는 “과학(science)”을 가리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연구함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획득한 사실들, 자료들, 진리들이다.

공적 (Merit, meritorious)
흔한 사용법에서 이 단어가 함축하는 것은 긍정적(건설적) 측면이 대세이다. 그러나 선각자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경우, 거의 언제나 뜻하는 것은, 공적 추구(merit-seeking), 즉 자비롭게 여겨질 수 있다 싶은 어떤 행위 또는 친절한 어떤 행동에 대하여 돈 또는 명성을 보상을 은근히 기대함이다.

광적 신앙 (Religiosity)
외적, 또는 미신적 믿음 체계, 신봉자의 편에서 내적 약속의 깊이를 갖지 않은 종교를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교류 (Intercourse)
왕래함 (commercium)에 대한 오래전의 번역, 상호 작용 (interact)을 뜻한
다, 이는 개인들 또는 어떤 것들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혼과 몸이 어떻게 교통하고 일반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교리 (Doctrine)
세 가지를 뜻하려고 사용된다: 1. 배움의 과정, 2. 학식 또는 과학의 분과, 또는 3. 특별한 취지에서 교회의 가르침. 일반적으로 이것은 진실로 종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고로 본질적으로 실용적일 것이다.

교회 (church)
이 단어는 흔한 보통의 단어 사용에서도 어떤 영적 생활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종파나 조직체만을 지칭할 때도 아닌 것이 뜻해지게 보통이 아닌 의미에서 사용되어진다, 즉 조직체에서이든, 개인적으로 이든, 영적 생활을 사실로 깨달음이다. 고로 개인(person, 개인)은 영적인 교회이다.

균형 (balance)
(평형을 보라.) 천국 세력과 지옥 세력이 균등하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섭리적 상태를 염두해서 사용된다, 하여 당사자가 악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듯 외관상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자유한 상태에서 도덕에 관한 결정들을 만들게 됨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릇 (Vessel)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그릇”이다고 말해진다, 단지 담는 용기라는 말이 아니고 유기적 형체로서 이다.

기억해둘만한 관련 사항들 (Memorable relations)
기억해둘만한 사건(memorabilia, memorable occurrences)라고도 말한다. 선각자가 그의 후기 저서들의 장들에 첨부하는 식으로, 또는 군데군데에 흩뿌
리는 식으로 해서 기록했는데, 다른 세계에서의 그의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기운 (영역, sphere)
모두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총체적 사랑들로부터 되튀긴 유출물에 에워싸여 있다고 말해진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땅 위에서는 감지될 수 없다. 누군가의 기운이 어떤지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에 의해서는 확연히 감지된다, 하여 상대방과 연계되어도 되는지,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초이다.

길들여진 선 (Domestic good)
개인이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끌어낸 선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당사자가 (선택의) 자유함 안에서 그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으면 “저축”되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자연적 선”, 그리고 “자연적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천국의 비밀 3518항의 창. 27:9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김나지움 (Gymnasium)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함에서는 두 번째의 학교 (중고등학교). 선각자는 이 단어를 그룹들의 멤버들이 생각들을 토의하고 그들의 마음들을 실행해보는 영계의 모임들이나 거기의 학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했다.

끊이지 않는 등차들 (continuous degrees)
수준들(levels) 또는 단계들(gradations), 마치 찬 것으로부터 따뜻한 것까지, 또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까지의 경우와 유사하다. 또한 “넓이의 등차들” 또는 “수평적인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나머지 상태들 (Remnant states)
“리메인스”를 보라.

논리를 더듬어 사고함 (Ratiocination, 합리화함)
“추론(reasoning)”으로만 번역되면 약간 유감스럽다. 이는 거짓 추정들, 거짓 추론, 거짓 연역을 끌어내는 과정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합리화 함(rationalizing)”의 뜻을 지닌 최근의 심리학적 용어에 매우 가까울지 모른다.

능력(Faculty)
이런 것을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1. 신체적 수단(resource), 2. 가능성, 기회, 3. 타고난 경향(propensity) 또는 능력(ability), 그리고 4. 정신의 품질. 이 마지막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수여됨이다. 이 수여된 것을 올바로 사용함에 의해 당사자는 자기 안에서 주님의 현존하심을 보증받는다.

다써버림(고갈, exinanition)
영이 텅빔, 영적 황무함의 상태. 주님의 경우, 이것은 그분의 인간 부분이 내부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된 듯 여겨져 있는 겸허의 상태이었다.

담는 어떤 것(용기, containant)
초기 번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 또한 “포용함(continent)”으로도 번역하나 통상적인 수준은 못된다. 이것은 콘테이너, 저장소를 언급하는 것인데, 때로는 마음이 생각들의 “저장소”이다를 서술함에서 심령 연구적 측면에서 사용된다.

더 낮은 땅(Lower earth)
영계에 관한 선각자의 세부적 묘사에서, 더 낮은 땅은 영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래쪽 영역이고, 지옥 쪽에서는 그 위쪽 영역이다.

동물 영 (animal spirit)
갈렌(Galen)의 관념에 있는 세 신체 영들 중의 하나. 선각자는 더 순수한 종류의 피를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돌(Dole)의 “신성의 사랑과 지혜” 423쪽에서는 “혼-영”으로 번역하였다.

동물 왕국 (동물 왕국의 경제)
“인간의 혼의 영역의 역학”을 다룬 선각자의 1740년의 저서 Oeconomia Regni Animalis 에 대한 미흡한 번역어 이다.

되풀이하는 결혼들 (Iterated marrages)
반복된 결혼들, 재결혼.

되찾음 (구속, Redemption)
보통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되사는 것”, 되찾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 과정의 결과로 얻어진 지옥을 복종케 함과 천국의 질서를 다시 세운 것을 뜻한다. 하여 믿는 자에게 가능할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만드신 것이다.

리메인스 (Remains)
사랑과 진리에 관한 감명들이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방법에서 주님에 의해 개개인 안에 심어진 사랑과 진리에 관한 깊은 감명들, 이것은 유아로부터 모든 삶을 통하여 각 개인과 더불어 계속 “남아” 있으면서, 재출생을 위한 기초가 되어주고 있다. 이 단어는 “나머지들(remnants)” 또는 “나머지 상태들”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림버스(Limbus, 가장자리, 변방)
“봉투, 덮개(envelope)” 또는 “테두리, 가장자리(border)”로도 번역되었다. 각자의 특질(본성, nature)로부터 끌어내진 가장자리를 뜻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후에도 이것은 존속하여 영계에서 (어떤 형체라고 분명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불변성(fixity), 안정성(stability), 영속성(permanence)을 주고 있다. 이 단어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복잡한 개념에 있다.

맥시머스 호모 (Maximus Homo)
“웅대한 사람”과 “보편적 인간”을 보라

메디아 (Media)
종종 단수의(유일한, singular), 매개(중간, medium). 이는 사이에서 가는 것들을 뜻한다. 두 실체의 각각으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는 중간의 것(intermediary), 그리고 개인을 이쪽 편으로 끌어낼 때, 다른 쪽은 종속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모양 (Form)
유기체(organization) 또는 본질이 나타나게 하는 유기적 저장소(organic receptacle)를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것은 외형(shape, 모양)에 관련되지 않고, 질서, 의향, 배열과 실재물의 부분들과 관련된다. 기능 또는 사용과 밀접하게 연합하고 있다.

목적, 원인, 결과 (End, Cause, Effect)
목표(goal) 또는 의도(purpose)의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목적은 의지력의 사랑 또는 의향(intention)이고, 원인은 의도(purpose)를 성취하려고 이해력을 통하여 있는 수단들이다, 결과는 초래하는 행동, 말함, 감각 또는 생산, 고로 성취됨이다.

묶는 것들(속박됨, bonds)
이는 족쇄를 채우는 식의 뜻에서는 아니고, 어떤 개인이 유독 사랑하는 특별난 것을 뜻한다. 즉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것에 묶인 상태인 듯 되는 것, 하여 사랑된 것의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는 금하게 한다(아랑곳하지 않는다). 외적 묶임들은 시민 생활에, 내적 묶임들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방계적인 선(Collateral good, 부수적인 선, 서자 출신의 선)
자연적 선함과 영적 선함 사이에 놓인 선함, 하여 일부는 자연적 선함, 일부는 영적 선함이 섞인 상태의 선함, 즉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 고로 진짜의 선함은 아니나 진짜의 선함에 관련되고 있다.

별개의 하나 (구분되는 하나, distinctly one)
선각자에게서의 단일성(하나임, oneness)은 단순함이 아니고 목적(의도, purpose)의 통일성(unity)이다. 사랑과 진리는 행동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의 하나임 안에서 구분될 수 있다, 고로 “별개의” 또는 더 나은 표현으로는 “구분할 수 있게 있는 하나”이다.

부가적인 (adscititious)
때로는 “외래의(adventitious)”로도 번역할 때도 있다, 부가적인(additional), 외적 측면에서 첨가됨

부끄러히 여김 (창피함, 굴욕, Humiliation)
당황함이나, 근대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겸손의 상태를 뜻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겸손 안에서 개인은 자기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어떤 선 또는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의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 단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텅빔의 상태를 두고 사용하셨다.

부부의 (결혼의, conjugial)
이는 선각자가 철자를 기록함에서 (conjugalis 대신) conjugialis를 더 좋아했다는 점을 반영하기 위해 초기 번역자들이 개발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결혼에 속하는 것들, 그리고 결혼한 양쪽(부부)가 서로를 위하여 가지는 사랑들에 관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

불연속 등차들 (discrete degrees)
구분되는 수준들, 이쪽이 저쪽 보다 더 높다, 마치 목적, 원인, 결과의 관계와 같다. 또한 수직적 수준들이라 불리운다, 고도(altitude)의 등차들, 높이의 등차들.

보편적 인간 (Universal Human)
맥시무스 호모에 대한 돌씨의 번역어이다. “웅대한 사람”을 보라.

보편적 교회 (Universal church)
“우주로부터의 교회(the church universal)”, 모든 곳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 조직체를 초월한 교회이다. 진실로 전기독교적인 개념,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각 종교의 신앙으로부터 있는 신실한 개인들.

사람 (Man, homo, vir)
라틴어는 “사람”을 위해 두 단어들을 가진다: 호모(homo)-개인(person, 남자와 여자 모두), 인류(mamkind), 본질적 개인으로서의 주님; 그리고 버(vir)-남자 인간의 존재.

사정관(assessor, 재산 평가인)
1716년 선각자는 광산 왕립 대학에 “비범한 사정관”으로 위촉되어졌다, 즉 그는 스웨덴 광산국의 협력 멤버로 명명되어졌다. 그는 1724년 사정관 정회
원이 되었다. (그때 당시 광산국은 국왕 직속 감시 아래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왕의 중요한 자금 조달이 금을 비롯한 광산 채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주)

사탄 (Satan)
악마를 보라. 악의 욕망들을 지적으로 확증하는 악령. “악한 자”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 즉 하나의 제 일의 악마 또는 어둠의 제 일 인 자가 있다는 식으로 선각자는 믿지 않는다)

사회 (Society)
연계된 사람들의 그룹,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그룹, 공동체, 다음 세계에서 천사들 또는 영들의 그룹. 또한 스웨덴볼지언들이 자기들의 지역 교회 조직이나 모임을 지칭할때에도 사용했다.

상응 (correspondence)
스웨덴볼기안이즘에 기초되는 개념, 신성과 모든 보다 낮은 생명의 등차들 사이에 있는 원인적인 관계와 기능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신성이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이다.

상응물들(correspondences)
응답하고, 걸맞고, 동의하고, 또는 서로에게 유추되는 어떤 것들, 또는 실재물들, 마치 태양의 열과 빛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상응하는 것과 같다. 고로 열과 사랑, 그리고 빛과 진리는 상응물인 것이다.

새 교회 (New Church) (1)
하느님-인간 관계들의 어떤 새로운 상태를 놓고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주님만을 인정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거룩하게 붙들고, 신성의 진리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거절하는 교회 시대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새 교회 (New Church) (2)
스웨덴볽의 신학 저서들에서 발견한 교리들에 접착된 어떤 조직화된 종교 그룹을 대중적으로 규정하려고 사용된 명칭이다. 이런 그룹의 개개인들은 새 교회인(a New Churchman)이라 종종 불리운다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성경의 계시록서의 뒷 부분에서 묘사된 상징적 도성이다. 초기 스웨덴볽지언들이 천국의 도성을 수단으로 상징화되고 의미된 교회를 자기들의 교회로서 삼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하였었다.

새 예루살렘의 교회 (Church of the New Jerusalem)
선각자께서 기독교 교리의 본질되는 주석을 이끌어낸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교회의 이름인데, 약식으로 말하면, “새 교회(New Church)” 이다.

선 (Good)
선함 또는 선한 것을 뜻하려고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의 질서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함에 애착함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고로 이것은 쓰임(use)이 포함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이 그 품질이다. 인간에 있는 선은 하느님의 신성의 선에 관련이 있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정밀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선행(charity)”이다, 즉 (이웃에) 쓸모있는 행동들을 있게 하는 각 개인들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진 진리를 사랑함이다.

선의 진리 (Truth of Good)
이 관용구의 또 다른 대체할 수 있는 어구는 “사랑의 지혜”가 있다. 이는 누군가가 지혜있기를 바램, 또는 지혜 있기를 사랑함을 가지지 않으면 지혜에
도달될 수 없다를 알아채게 한다. 이 사랑으로부터 결과할 수 있는 지혜가 “선의 진리”이다.

선행 (charity)
흔한 대중적인 사용법에서일 경우, 이 단어는 물질적 궁핍을 경감되게 해주는 것(자선 행위)을 뜻한다. 선각자는 이 단어를 영의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 영의 복지를 향상되게 하는 것, 사욕이 없이 주어진 업무에 매진함,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어떤 보수도 예상되지 않는다해도 심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정 (변경, Modification)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그의 어떤 저서에서, 본성을 통하여 교통하는 모든 방식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생각은 그의 후기 교리 또는 상응물에 관한 개념 안에 통합되고 포함시켜졌다.

순결한 (chaste)
흔히 이해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한, 독신(주의) 따위이다. 선각자는 결혼한 자가 섹스에 대하여 순수하고 깨끗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뜻하는데 사용하였다. 진정한 결혼의 사랑은 “순결함 자체”이다 말하고 있다.

순수 지력 (Pure intellect)
선각자의 신학 저서가 있기 전에서인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라는 책에서, 그는 순수 지력이란 개인들에게 생각하고 추론하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수 지력은 하느님으로부터 파생된 직각적인 지혜와 함께 유기체의 모든 과정들을 통치한다.

순진 (Innocence)
라틴어의 뿌리에서는 해가 없음(harmlessness)을 뜻한다. 영적 순진은 자아
에 의해 인도되기 보다 주님에 의해 인도되기를 내향적으로 기뻐함이다. 이 특성은 각 개인에 인접되어 있으면서 당사자가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을 돕는다.

스톨지 (Storge)
유아를 사랑함을 뜻하는 그맄어로부터 빌려온 단어, 특별히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 유아들을 위해 느끼는 사랑. “어버이다운 사랑”,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번역되었다.

시대의 종말 (consummation of the age)
잘못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의 “세상의 끝”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 이 어구는 시대, 또는 년대의 마감, 또는 끝을 언급한다.

시리즈(Series)
연결된 순서, 생각함의 열차. 선각자의 신학 저서 이전의 시기의 저서에 “시리즈들과 사회” 그리고 “시리즈들과 등차들”의 용어들이 가설로 언급되었는데, 이후 등차에 관한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켜졌다.

시험 (Temptation)
나쁜 것을 하도록 부추킴 또는 자극함의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각 개인의 지배하는 사랑을 공격하여 개인을 심리하고 테스트한다- 당사자의 특성을 밝히 드러내주고, 그 특성이 더 힘세어질 기회를 제공하는 내적 투쟁이다.

신앙의 진리 (Truth of faith)
누군가의 신앙의 부분에 있는 진정한 생각, 그러나 당사자의 삶에서 사용하게 놓여져 있지는 않은 진리이다. 이는 “신앙의 선”에 대조되어 사용된다, 이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신조들로부터 와지는 선함이다.

신성이 되심 (Glorification)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있음의 모든 평면들에 있는 인간적일 뿐인 것을 벗기 위해 그것들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과정. 또한 주님의 마음 안에 신성한 의식을 건립하심, 그리하여 그분이 생명 자체가 되셨다를 뜻하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신성의 인간 (Divine Human)
새 교회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생각, 이 용어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고로 인간의 형체에 있는 신성의 사랑이다-즉 “신위(Deity)”의 모든 충만함이 신체의 형체 안에 살고 있으심”이다. (골. 2:9)

신성의 자연 평면 (Divine Natural)
신성이 되심,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예수의 마음, 또는 내부의 본성의 자연적 수준, 또는 가장 낮은 수준.

신성이 진행함 (Divine proceeding)
진행함의 행동에 있는 신성, 고로 그분으로부터 방산되는 하느님의 품질들, 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성령과 필적되고 있다.

신하 (Subject, 종속하는)
평범한 사용법에 추가하여, 철학적 의미에서는 활동 또는 행위에 기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행은 “신하”를 가져야만 한다, 즉 선행을 구체화하고, 느끼고, 실시하는 개성.

쓰임 (사용, Use)
쓸모 있는 활동, 목적을 섬기는 기능, 종종 선과 같은 뜻의 선상에 놓이기도 한다. 섬기기를 진짜로 바램이 들어있는 수고함을 정규적으로 함축하고 있
다. 고로 “쓰임으로부터의 선, good of use”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잘 어울리는 알맹이나 동기를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행위.

아니마 (anima, 영혼, 내적 개성, 남성의 여성적 요소)
인간의 혼(soul), 이 단어는 다양한 전통적인 의미선상에 있어 한마디로 통일된 정의는 힘들다. 사후 살게되는 개인의 부분이다. 선각자는 분석 심리학자로 유명한 융(Jung) 보다 훨씬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융이 이 단어에 여성의 특성을 할당했으나 선각자의 경우에서는 그런 추가된 의미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뮤스(animus, 왕성한 정신, 외적 개성, 여성의 남성적 요소)
때로는 “의향(desposition)”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만일 아니마와 대비하여 사용된다면 보다 수준이 낮은 마음,) 일반적으로 마음(mind)에 관련된다. 각자의 기질, 개성.

악 (Evil)
악, 자체만에 주목하면, 선으로부터 절단(severance) 또는 무질서된 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disunion)와 주님과 천국에 반대함. 고로 개인 안에 있는 악은 그 개인 내부에 있는 지옥이다.

악귀들 (인간의 일생 동안 따라 다닌다는 귀신, Genii)
선각자는 이 용어를 가장 나쁜 종류의 악령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들어붙어 악의에 차서 행동하게 하고, 당사자의 선한 바램들을 악한 의도들 쪽으로 비튼다. 진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가 이런 악령에게서는 그것이 거짓이고 반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 (devil)
선각자를 위하여서 단어 “악마(devil)”는 지옥들 전체를 뜻한다. 악마는 사후에 있는 악한 개인이다. “사탄”에 대비해볼 때, 사탄은 자신들 안에 있는 악들의 욕망들을 지성적으로 확증한다, 악마들은 그것들을 살아내려 뜻한다.

악의 거짓 (Falsity of evil)
이는 “악으로부터의 거짓(falsity of evil)”라고도 불리운다. 거짓 생각 또는 악한 바램이 원인이 되어 진리가 비뚫어짐.

…안에 (In)
“종사함 안에” 또는 “상태 또는 조건 안에”의 의미에서 자주 사용된다. 선각자의 책에서 우리는 읽는 바, 어떤 개인이 “선 안에”, 또는 “선에 애착함 안에” 있다 등등이라고 읽는다. 이는 그가 선인 것을 사랑함의 상태 안에, 또는 선함의 상태 안에 있다를 뜻한다.

알카넘 (알캐이넘, arcanum)
비밀, 감추인 어떤 것. 이 단어의 복수는 알카나(알캐이너, arcana)이다. “알카나 세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즉 천국의 비밀들”은 선각자의 가장 방대한 저서 명이다.

양심 (conscience)
선을 악으로부터 구별하는 능력-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배워서 획득한 능력인 바 모든 이에게 균일하게 똑같을 수 없다. 선한 자만이 진정한 양심을 가진다. 가짜 양심이 선의로 의도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신조의 오류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양심 장사치들 (conscience mongers)
지나치게 양심적인 인간들, 타인을 혹평하는 인간들.

역사적인 신앙 (Historical faith)
전통에 기초한 “신앙” 또는 타인들의 신조들(믿음들)에 기초한 “신앙”, 고로 진실된 신앙은 아닌 것이 확실하고, 신앙 같이 나타남(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가정의 선”도 참조해보라.)

영계 (영적 세계, Spiritual world)
다음 세계, 또는 사후 개인들의 거처를 일반적으로 아우러서 언급하는 용어이다. 영들의 세계, 즉 사후 들어가는 첫 상태를 위해 선각자가 이름 지은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혼동하지 말라.

오류(잘못된 생각, Fallacy)
현혹시키는 나타남. (태양이 “올라온다” 같은 식에서의) 감각들의 오류들이 가장 작은 중대한 것이다. 보다 나쁜 것은 당사자의 보다 수준 낮은 본성으로부터 파생되어진다, 즉 악과 결합된 거짓들이다, 이는 개인의 부분에 신앙의 부족에 기인된다.

외관 (나타남, appearance)
순수한 진리, 또는 신성의 진리를 그 진리가 숙박한 형체들로부터 구별하려고 사용되는 단어이다. 고로, 모든 이는 자기의 유한한 상태에 따라 진리를 볼 때의 그 진리이다. 진리의 이런 나타남을 당사자가 선한 의도로 사용한다면, 이 나타남을 진리로서 주님께서 받아주시기 때문에, 망상(잘못 생각함, illusion)은 아니다.

웅대한 사람 (Grand Man)
라틴어의 맥시무스 호모(maximus homo, 가장 큰 사람, greatest man), 돌(Dole)에 의해서는 “보편적인(우주적인) 인간”으로 번역되었는데, 주님의 “몸”으로서의 천국들 전체, 또는 천국과 땅 위의 교회를 아우르는 주님의 왕국에 관련된다. 때로는 주님 자신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유입 (Influx)
흘러듦(inflow), 또는 입력(input) 또는 영향력 (influence)를 뜻한다. 이 단어는 행동하는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의 모든 것 안으로 변함없고 중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유전적 악 (Hereditary evil)
이 용어는 선각자에 의해 별도의 제한됨도 없이 무조건식으로 사용되는 편이기는 하나, 사실상 그는 전통적 견해는 사절하고, 우리는 실제의 악을 유전적으로 상속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들을 상속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인들이 되어서는 이것을 확증하거나 채택하거나, 또는 거절하거나 거부할는지 모른다.

유출 (Efflux)
산출(output), 밖으로 흐름. 하느님으로부터 개인들 안으로 흘러든 선과 진리는 되돌아서 이웃을 사랑함의 행동들의 형체로 세상 안으로 흘러나간다. 하느님의 보편적 법은 유입은 언제나 유출에 의거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coporeal)
실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 신체적 부분, 또는 신체에 부착된 마음의 부분을 뜻하였다. 신체적, 육체적인 것은 감각과 육체적 쾌락들과 더불어 선취되어 있다.

은근히 주입하다 (Insinuate)
기초되는 라틴어의 의미에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노골적 방법이 아닌 미묘하게 받아들여지게 또는 스며들게하는 것을 뜻한다. 수용자가 주입 과정을 충분히 알아챔이 없이 내면의 위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음란 (간통, scortatory)
성관계가 문란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음행, 매춘.

의미함 (Significative)
영적 뜻을 운반하고 가리키는 어떤 것. 특별한 뜻, 뜻있음. 현재는 표현함과 상응함과 구분되어 사용된다.

의지력과 이해력 (Will and understanding)
“의도력과 식별력(intentionality and discernment)”, “자발력과 지력(the voluntary and the intellectual)”. 이것들은 인간의 개성 속의 포괄적인 두 양상들 또는 능력들이다. 의지력은 의지력의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신성의 영향력에 반응을 보이고, 수용하는 부분을 섬긴다. 이해력은 식별하는 모든 기능들을 포함하고, 의지력을 가르치고, 그것의 의향들을 집행하는 것을 섬긴다.

이성이 있는 (합리적인, rational)
이 단어는 실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해졌다.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는 정신적 평면이다. 의식되는 마음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영적 진리이다.

이웃 (Neighbor)
내 집 아닌 다음 집에 있는 사람이면 이웃이다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독특한 생각선상에 있다, 즉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이웃인 것이다, 고로 각 개인이 나의 이웃이 되는 척도는 상대방이 주님으로부터의 선을 받아들인 양과 질에서 이다. 고로 가장 비중이 큰 이웃의 순서를 차례로 열거한다면, 주님-교회-나의 나라 등등으로 내려간다.

인식함들(cognitions)
때로는 “지식들”로도 번역된다. 이는 사실들(facts)을 관념들(ideas), 또는 앎의 보다 깊은 수준들 안으로 조직화 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 엘리엇씨는 그의 새 번역서인 “알카나 세레스티아”에서 “내면의 것들에 관련되는 지식의 항목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있음 (being, ens)
실재(entity) 또는 구별되는 어떤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선각자는 이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했다, 또한 순수하게 정신적 건설을 뜻하기 위한 합리성, 이성적 인 것에 대한 어구인 “ens rationis”에서 사용되었다. 이를 있음인 esse, 즉 “혼” 또는 어떤 것의 본질되는 속성과 대비해보라.

있음 (being, esse)
어떤 것에 있는 본질되는 품질, 실체(reality) 자체, 예를 들면, 하느님의 근본적 본질은 신성한 사랑이다.

자기 것이 되게 하다 (appropriate, 사유)
이 단어는 선각자에 의해 형용사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동사로만 사용된 특별한 단어인데,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장함, 또는 소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 (Own)
자기 자신은 라틴어 suus 와 proprium 모두를 번역하는데 몇 번역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자아(self), 자아를 위해, 자아로부터 살아감, 이기심이라는 자아를 느낌, 인간의 거듭남에서 자아가 인도함이라는 망상은 필수적이다.

자아 (Proprium)
자기 자신을 보라. 이기심을 느낌이라는 기초적 의미에 추가하여 많은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즉 천사적인 자아, 악마적인 자아, 인간 자아, 신성한 자아, 지옥적 자아, 지적 자아, 자발적 자아 등등이다.

자아로서 같이 (as of self)
마치 자기 고유의 힘을 수단으로처럼, 컽으로 보기에 자신 스스로인 듯 하는 것. 선각자의 신학에서 비평적 개념인데, 즉 누군가가 “마치” 자아의 힘에서 인 듯 행동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 (Natural man)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적으로 흥미를 가지는 어떤 개인을 뜻한다 할지라도, 그 개인의 전체를 뜻하여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어떤 개개인에게서 가장 수준이 낮은 인간의 마음을 언급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자연주의자 (Naturalist)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연을 믿는다는 어떤 개인을 경멸적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다, 즉 물질주의자와 비슷하다. 자연주의도 이와 비슷한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의 근원을 자연에 신뢰를 둔 것이라 정의된다.

자유 (Freedom)
애착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하고, 이치에 맞다고 여겨지는 것에 따라서 자유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들이 천국적이다면, 자유는 진짜이다; 만일 지옥적이다면, 이것은 외관적일(껍데기적일) 뿐, 실제로는 비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당사자로 자아 강요(self-compulsion)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배하는 사랑 (Ruling love)
삶을 좌지우지하는 각 개인에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 가능할 수 있는 지배하는 사랑은 네 가지로 함축해볼 수 있다: 1. 하느님을 사랑함. 2. 이웃을 사랑함. 3. 자아를 사랑함. 4. 세상을 사랑함이다. 이 중 첫 둘째 만이 거듭나지는 개인을 위하여 받아져야 하는 지배하는 사랑들이다.

지혜 (Wisdom)
많은 지식을 소유함을 언급하는 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통상 삶에 관한 것만을 서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지각함, 뜻함, 행동함으로 구성된다. 슬기로운 개인은 진리에 기초한 선을 행함을 위한 변동없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진실한 (True)
절대적 의미에서 진실함은 신성한 사랑의 형체와 수단들이다. 관계적 의미에서, 이것은 개개인의 사랑 속에 있는 지각하고 결과를 있게 하는 기능이다.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개개인 안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도달되는 상태인데, 이 상태는 사랑의 행동들 안에서 자체를 표현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진리는 선이 된다. 이것은 영적인 선이라고도 불리운다.

질투 (Jealousy, zelotypia)
선각자는 부부의 사랑의 첫 장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귀중한 것을 보호함을 사랑함, 특히 결혼의 사랑을 보호하기를 사랑함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나쁜 질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으나,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질투의 긍정적 측면에서 이다. 그는 이것을 열정들 중의 열정이라 일컫는다-즉 열정의 진정한 모양새이다.

천사 (angel)
천국에 있는 개인(person). 선각자의 신학에서 모든 천사들은 처음에 자연계에 살았고, 사후 천국에 입장한 사람들이다. 선각자는 천사의 개념을 놓고, 창조로부터의 분리된 계층으로 말하는 것을 거절한다.

천성 (타고난 자질, Genius)
개인의 기질, 특성, 재능, 경향성, 개인과 개인들 집단의 영 또는 품질.

첩 (pellicacy, concubine, mistress)
이 단어는 pellex로부터 인데, 첩을 두고 사는 상태이다

최말단 (Ultimate)
연결 고리의 마지막, 수준이 가장 낮은 것, 가장 외적인 것, 가장 먼 것. “가장 큰 것”을 뜻하기 위해 선각자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격(자극, conatus)
종종 “애씀(endeavor)”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행동들 뒤에 놓인 에너지를 두고 사용된다. 특별한 목적들을 쟁취하게 하는 꾸준한 충격을 받는 생활 자세일 수 있다.

타고난 (선천적인, connate)
글자대로 말하면, “출생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때로는 유전적 경향성들을 부정하는데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주 비슷한 단어인 생득의(innate, 타고난), 천부의 (inborn), 같은 성질의(congenial)와 더불어 사용된다

탐욕 (cupidity, 강력한 욕망)
(현세에의 욕망을 보라.) 자연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강력한 욕구, 갈망, 그리워함. 이 단어의 라틴 뿌리는 현세에의 욕망의 뿌리만큼 강한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여 운반하지는 것은 아닌 듯 비쳐진다.

태고 교회 (Most ancient church)
선각자는 이 용어를 대문자로 자주 표기했다. 하여 이 이름이 매우 지당하다 싶어서인 듯한 느낌을 우리로 갖게 한다. 이 용어는 신성에 관련하여서 일 경우, 가장 이른 유사 이전(역사 문명 이전)을 언급하는 전문어이다. 이 용어는 창조와 에덴의 동산을 언급하는 창세기서의 사건에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트란스훌럭스 (Transflux)
관통하여 흘러가버림.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어떤 개인을 관통하여 흘러가버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언급함에 사용되었다. 마치 물이 조리채를 빠져나가는 경우 같다. 이런 개인은 양심 없이 있다라고 말해진다.

평형 (Equilibrium)
(균형을 보라.) 가장 널리 가능할 수 있는 선각자의 번역에서 용어 “평형”이 발견될 것이다. 현재까지에서, 보다 단순하고 충분하게 어울리는 번역문은 돌(Dole)의 번역에서의 “균형”에 번역어의 한계가 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표현 (Representative)
영적 생각(idea)을 상징하려고 사용되는 자연의 대상물, 개인, 행동, 또는 이 영적 생각 자체. 또한 영계에서 보일 수 있는 형체에서 생각이 표출됨.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Ens rationis)
순수하게 정신적 건축물,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떤 문맥에서는 도깨비불(will-o-the-wisp, ignis fatuus, 환영)에 대충 견주기도 한다. 있음 [ens]를 보라.

허용 (Permission)
이는 신성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 선각자는 규정하고 있다. 허용된 것, 관용(묵인)된 것은 허락된 것, 묵인되어진 어떤 것이나 그렇다고 하느님이 바라는 어떤 것은 아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행동들을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현세에의 욕망(concupiscence, 강한 욕망)
몇몇 번역자들에 의해 존속되어 온 라틴어풍의 단어이다. 동사 형체는 어떤 것을 강하게 바램(desire), 또는 갈망함(lust)을 뜻한다. 명사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데, 통상적으로는 악, 또는 (섹스 쪽이거나 아니거나 할는지 모르는) 욕망이다. 때로는 탐욕(cupidity)이라는 단어와 분간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황폐됨 (Vastation)
황무한 상태, 극점(종말), 다빠져나가 텅빔. 영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과정, 즉 외적인 악들과 거짓들이 선한 자로부터 제거됨, 그리고 위선적으로 있는 선들과 단지 지식들인 것이 악한 자로부터 제거됨, 하여 어정쩡하게 선과 악이 뒤섞여 있던 세상에서의 인간의 상태가 선과 악이 선명한 상태로 확실히 구분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회개 (Repentance)
재출생에서의 첫 단계,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죄들을 고백함, 자기가 용서되기를 간구함이 포함되고, 진정한 선행과 신앙의 교훈들에 따라 새로운 생활을 이끌려는 진실한 노력이 뒤따르는 것이다.

(외부쪽에) 흘러듦 (afflux)
…쪽으로 흐름, 또는 …쪽을 향하여 흐름. 이 방식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악을, 악한 자를 통제하신다. 선과 진리는 악한 자 쪽으로(to) 흐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악이나 악한 자 안쪽으로(into)는 흐르지 않는다. 고로 악이나 악한 자를 통치하는 것은 내부(within)로부터가 아닌 외부(without)로부터 이다. 이 단어는 (내부쪽에) 유입됨(influx, 흘러듦)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선각자의 책에서는 사용되나 한국어에서는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어 가로에 영어를 추가로 기입해서 (역자는) 구별해보고 있다.

선각자의 신학에서만 유일한 기본적 생각들(concepts)

1. 하느님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혀진 기본적 생각들

신성한 생명은 하나이고, (사실) 생명은 이 생명밖에 없다. 주님 만이 생명 자체이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땅 위 인간과 영계에 있는 인간은 이 생명의 그릇들일 뿐이다.

(참고: 선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위해 단어 “주님”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한다. 또한 이 글 내지 역자의 번역서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 개인(個人, 때로는 인물, 人物, person)이 있는데, 그러나 역자가 이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같이 사람 등의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조금은 껄끄러운 개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지상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물질인 인간, 즉 개인(예를 들면, 예수)을 뾰족이 암시하고 싶어서 이다.)

하느님의 본질에는 두 구성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지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성하는 세 고유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바깥쪽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체로부터 복되게 하여주는 것이다.

신성의 사랑과 지혜를 본질 자체 측면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은 무한이어서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지혜가 상응적(correspondential) 외관에서 일 경우,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천사의 눈에서, 주님은 태양으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영적인 열과 빛이 나아가는 바, 유추해봄(analogy)을 수단으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유지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적 빛과 열, 즉 하느님으로부터 꾸준히 방산되는 신성의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 이다를 생각하고 알 수 있다.

상응을 수단으로, 이 유추해봄은 땅 위 개인들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연이 물질적 태양의 열과 빛을 수단으로 매 순간을 유지 지탱하듯, 인간인 나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를 수단으로 영적으로 유지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알 수 있다.

주님(the Lord)은 보편적(우주적) 인간(universal human)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충분하게(fully, 결여됨이 없는) 인간이시다. 이 분으로부터 천사들, 영들, 그리고 지상의 거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사람들(men)”이라 불리운다. 이 분이 천국 안으로 유입되심으로 전체 천국은 하나의 인간을 표현하고 닮아 있게 하고 있다. 유추를 수단으로, 땅 위 개인들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천국의 것 만이 진실로 인간(human)이다

새로운 기독 세계의 하느님은 하나의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고, 이 분 안에 보일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시는데, 마치 혼이 그의 신체 안에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했다면, 그는 이 하느님과 결합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개인들의 사이에 있는 모든 결합은 상호적(reciprocal) 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은 보일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위와 비슷하게, 모든 천국들 안에서, 하느님에 관하여 이런 생각밖에 없다: 즉, 그분은 개인이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인이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통찰력이 선각자의 견해가 진실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즉, 일어나시고 신성이 되신(risen and glorified)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Godhead)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주하시고 있다. 땅 위와 천국 안에 있는 사람(people)은 이를 알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에 관하여서 성경의 구절들은 상징적 언어에서 말하고 있다. 신성의 삼위일체는 주님의 한 개인 안에 있다, 이 셋을 구별해 알 수 있는 것은 혼, 신체, 그리고 이 둘의 결과인 활동(activity, 행동)으로 이해할 경우에서 이다. 유추를 수단으로 각각의 개인 안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셋을 한꺼번에 취합하면 하나의 개인을 구성한다: 즉 혼, 신체, 그리고 혼이 신체를 이용한 결과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한 삼위일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그릇들, 또는 생명의 “기관들(organs, 유기체들)”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무한이고, 고로 신성인 이유는 주님은 그분의 인간(human)조차도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그리고 성령이든, 이 단어의 언급이 있는 말씀 안의 어디에서 이든, 이는 하느님의 속성을 구별해 말해보는 양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통일성(unity, 여럿이 아닌 하나) 안에 삼위가 있는 바, 아버지, 또는 성령(님) 같은 식으로 분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주님 만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주님으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할지 모른다 역자주) “아버지”, 또는 하느님의 “혼(soul)”과 “영(Spirit)”,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주님 만으로부터 존재하고 출현(coming forth, 존재 안으로 옴)된다. 그러므로 하느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으로 분리된 존재들로 말하는 듯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들이다 해도 상징적, 유추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고로 통찰력은 분리된 둘, 또는 셋의 신성의 존재들로서가 아닌 유일한 하나의 하느님의 속성과 활동의 어떤 양상(면모, aspect)들 쪽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성의 사랑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지탱자이다. 영적인 존재들은 사랑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없다; 그리고 창조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 이신 주님으로부터만 존재 안으로 와질 수가 있다 (세상 밖으로 나타나짐).

모든 창조의 보편적 목적(purpose, 의도)는 창조자가 창조된 우주와 영원히 합류하는(join) 것이다. 이 합류는 이 창조 안에 신성의 본성이 “거주”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신성에 걸 맞는 성질이 각 개인들 안에 있어야 합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사용을 위해서 창조되어왔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창조된 것들의 사용은 가장 바깥 부분들로부터 개인들 쪽으로 등차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개인들을 통하여 하느님 쪽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불리운다.
창조의 특별한 목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되돌림을 영원히 계속함으로, 인류로부터 천사들의 천국을 영원히 부풀려감일는지 모른다.

하나의 끈덕진 신학적 관념에 반대하여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무로부터 만들어진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은 실체(substance, 물질) 자체인 실체로부터 창조되어져 왔다. 이 실체는 신성의 사랑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만 모든 것들은 만들어내지고 지탱되어진다.

하느님은 물질의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영적 실재(reality)들에 “옷을 주는(clothing)” 것, 그리고 개인들이 원하면, 그들 고유의 자유의지로부터 영적이고 잠재적인 천사의 존재들이 되는 평면(plane)을 제공하기 위하여서 이다.

자연 평면에서 더 이상 진짜 인간 다움(humanity)이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류가 바야흐로 파멸에 직면하려고 했을 때, 즉, 천국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는 역량을 거의 잃었을 때, 하느님은 그분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만드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개인 안에서 세상 안으로 오셨다. 이때 쾌히 받아들심으로부터 주님이 “입으신” 인간 다움은 인류를 괴롭히는 허약함과 동일한 것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내부에 잠재적인 신성의 거주하심에서 끌어냄을 수단으로 예수는 지상 평면에서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천국과 지옥의 세력 사이에 있는 균형을 언제나 회복되게 하시면서, 점진적으로, 질서있게(순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지옥들의 힘들에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셨다. 주님의 삶의 모든 과정은 되찾음을 구성하는 것, (즉) 개개인의 구원이 지금 그리고 언제나 가능하게 만드심이다.

2. 영적 세계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진짜이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국, 지옥 그리고 영들이 있는 중간 세계이다.

죽음은 삶에 있는 질서적, 필수적 단계이다. 인간의 신체가 그것의 생각들과 애착들에 상응하는 자연계에 있는 기능들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개인은 “죽는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개인은 죽지 않는다, 단지 지상 평면에서 사용을 위해 주어진 육체라는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질 뿐이다, 개인은 살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신체 때문이 아니라 영 때문, 즉 개인 안에 있는 생각하는 혼, 또는 영이 당사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착과 더불은 생각이 그 개인을 구성한다. 고로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 생명의 모두가 중단되자 마자, 개인은 영들의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소생되어진다. 이것은 가장 높은 천사들의 조력을 받아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 그 다음, 개인은 자기 검증과 자기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안내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결단력이 영원한 집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선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입장이 주어지는 수단으로서의 “보상”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도 지옥으로 정죄됨을 수단으로 “처벌”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 안에서 모든 이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수단으로 각자의 영역에 있다.

죽음 후에 모두 각각의 개인에게는 자신의 생각들과 애착들을 수정할 충분한 수단들이 수여된다. 모두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인도되어진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들이 생명을 따라서 생명을 살아감이다는 것,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그들은 첫째로 모든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에 맞서 악들을 죄들로서 금하는 노력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은 이내 진리들을 듣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고 물러나버린다. 짧게 말해, 섭리는 모두가 구원되는 쪽으로, 즉 천국을 선택함이 가능해지도록 그것을(진리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은 개인은 홀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용어 “영”은 영들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후 첫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있는 자를 뜻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용어 “천사”는 교육받고 자기 수정을 끝내서 천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이들을 뜻한다. 지옥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는 이들은 사탄들 또는 악마들이라 불리워진다.

개인로부터의(각자의) 영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진입하였을 때, 그녀 또는 그의 얼굴과 음성의 음질은 그들이 세상에서 가졌었던 것들에 대단히 비슷하다. 그러나 그 후 얼굴과 여타 얼굴의 생김새들과 행동들은 점차적으로 각자의 애착(affection)들과 당사자를 지배했던 사랑(ruling love)에 일치하도록 바뀌고 있다. (지상에서는 가면을 씀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가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신체 안에서 영의 생명의 외면의 것들의 사용함이 끝나서, 이 외면의 것들이 곁에 놓여진 지금, 바깥쪽으로의 나타남과 이전의 애착들은 바뀐다, 하여 바뀐 그의 상태란 그가 보여지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그의 내면의 존재와 완전 일치되고 있는 상태의 것이다.

천국의 생활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고저 이 책의 페이지를 할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바, 여기서는 윤곽만을 그리고 지나간다; 우선 그 곳의 삶이 진짜 삶이다는 것, 진짜 당신의 가족들이 거주한다는 것, 직업들(각자 할 일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 기쁨만을 언제나 선사하는 공동체와 모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것은), 거기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유아기나 어린 아이 시절에 죽은 모두는 천국 안으로 직접 오고 거기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옥은 기본적으로 천국에 반대되는 것들, 거기를 선택한 이들의 특성이 악인지라 그들의 파괴적 힘에 의해 (모두는) 총체적으로 (언제나) 찡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주님께서 악한 자를 징벌하려 만든) 불, 유황(불), 또는 기분내키는대로의 임의적 처벌 등등이 없다; 악은 그것 고유의 사용료(toll)를 부담할 뿐이다; 지옥은 객관적으로 불행의 상태이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3. 우리에게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 생각들

하느님이 언제나 설비해두시는 것은, 어느 시대를 무론하여 그 시대의 인간다움에 걸맞을 수 있는 신성한 진리의 밝힌(계시) 것을 관리하는 책무에 봉사하는 교회를 인류와 더불어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 계시는 말씀(Word)이고, 이 말씀은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이 말씀을 수단으로 인류는 천국들과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들 안에 천국의 것들과 연관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이 내적 의미를 지닌 특성 때문에 말씀은 천국의 마음들과 인간의 마음들을 결합하게 한다.

많은(아마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이의 없이 이구동성 말하는 것은, 말씀은 신성의 호흡이 담겨 있다는(영감되어 있다, inspired) 것,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다. 그렇지만 선각자를 통한 이 계시 앞의 (시대에서) 경우, 말씀 안에서 어디에 말씀의 거룩함 또는 신성이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가 말씀을 여느 책을 읽듯 평범히 읽는다면 (즉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경우라면), 여느 촌뜨기 작가의 저술 같고, 때로는 문체상 (문법도 모르고 씌어진 듯하여) 엇박자인 냥 보이고, 심지어는 현 시대의 저술 보다 수준이 미천한 듯까지 깍아서 평가할 수도 있는 책인 듯 비쳐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지 않든지, 또는 하느님 보다 세상의 것들을 존경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하는 이들은 말씀에 관련해 거룩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마저 부정하는 오류 안으로 쉽사리 추락할는지 모른다. 짧게 말해, 이렇든 저렇든 각자는 말씀을 신성이 거주하는 책임을 수긍하던지 부정하던지는 그의 선택(의 잣대) 안에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순위에서) 자연 앞에 하느님을 두는 이들, 그리고 진짜로(순수하게) 진리를 찾는 이들은 글자에 있는 많은 서술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서 확인하여 그 글자들을 꾸준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상 이들의 마음들은 계시(밝히 앎)의 필요와 실재 쪽으로 통찰력이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계시 없이 지식은 없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함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어져왔었던 계시를 통하여서만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접근할 수 있어, 그분으로부터의 유입을 받고, 자연적 존재로부터 영적 존재로 되어질 수가 있었다.

말씀의 책들은 계속적이고 연결된 내적 의미를 가지는 모든 책들이다. 구약 성서 부분에 있는 이 말씀의 책들은 모세의 다섯 책들, 여호수아, 사사,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 성서 부분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계시록이다.

복음서들은 주님 자신의 말들을 포함한다, 이 말들 안에는 영적 의미들이 숨겨져 있고, 이 영적 의미들을 통하여 천국과의 교통이 가능하다. 사도들의 저술들(서간문)은 교회를 위해 유용하나,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말씀의 가장 바깥쪽, 또는 글자적 의미로부터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감각 기관(sensory)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납득력에 적합해 있다, 고로 어린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특별히) 안성마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의 대부분은 진리의 외관 (측면)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발된 이해력으로부터 지각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진리이다고 믿어져버림에 의해 거짓화 되어갈 수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이들이 아닌 이들, 특히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이다면) (마음만 먹으면) 거짓화 할 수 있는 위험성이 글자로 있는 많은 서술문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시험하신다, 그분이 지옥으로 내던지신다 등등이다; 또한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글자에 박힌 그대로 구름을 타고 땅 쪽으로 내려오신다… 태양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을 것… 별들은 추락할 것이다 등등도 있다. 이런 서술들은 자연계의 재난을 예보함들이 아니고, 어느 누구 안에서 거행될 수 있는 내적 바뀜들에 대한 상징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적 투시 화법(perpective, 상관 관계, 견지, 시각, 원근법)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이런저런 방법들에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의미는 어떤 상해받음도 허용 않을는지 모르는 글자 안쪽에 숨겨 놓인 진짜 진리들 쪽으로 안내하는 역할로 봉사하고 있다. 이 개인은 이런 식으로 해서, 저 개인은 저런 식으로 해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할 때라 해도 영속되는 피해는 있지 않다; 그러나 피해가 가해지는 때이다면,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들을 첨가할 때이다. 이 짓은 거짓들 안에 있는 자신이 정당하다 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말씀의 서술들을 선택하는 이들에 의하여 자행된다.

말씀 안에 있는 모두 각각의 개인, 장소, 어떤 것, 어떤 사건 등등은 어떤 영적 실재(reality)를 상징하고, 이 실체(reality)와 상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상응을 통한 의미들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구성한다. 따라서 영적 의미는 글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 내부에 있다. 마치 혼이 신체 안에 있는 경우, 지성의 생각이 눈 안에 있는 경우, 사랑의 애착이 얼굴 안에 있는 경우 같다. 말씀을 영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 의미이다. 영적 의미야 말로 진실로 주님의 말씀이다.
어쨌든, 글자 그대로의 의미 안에서 말씀은 그것의 충만함으로, 그것의 거룩함에서, 그리고 그것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가 글자 그대로의 말씀은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들의 거처이자. 그릇들이고, 받침기둥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표현들은 그것들의 시리즈 안에 영적인 생각들을 포함하도록 씌어 있다. 이 영적 생각들은 글자를 읽는 자가 상응 지식에 친숙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생각들이다. 이 방법에서 신성은 말씀 안에 감추여 놓여 있다.
상응들이 모든 힘을 가진다, 하여 상응에 따라서 땅 위에서 행하여진 것은 천국 안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가진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상응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신성은 이 당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당사자 안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개인, 생명을 바라는 개인에게 생명을 주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말씀은 살아 있다, 그래서 생명을 준다, 그 이유는 최고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씀에 있는 생명은 말씀을 읽는 당사자가 거룩함의 느낌을 갖게 하면서 당사자의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으로 있는 말씀 측면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원천이다고 선포하신다.

4. 우리 자신과 우리가 의도했던 운명에 관하여 선각자에게 밝히 알린 기본적 생각

사랑과 지혜, 그러므로 의도력과 분별력이 각자의 생명 자체를 구성한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드문 편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할 때, 그것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 그것은 개념화에 도전하는 어떤 것인 듯하게 여긴다. 이렇게 응답하는 이유는 하느님 만이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생명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다를 실감 못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만큼에서 우리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로부터 쇠하여질 때 그는 나태해진다, 지혜가 쇠하여져 갈 때, 그는 무디어져 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쇠하여지면, 그는 말살되고 있다.

신성의 사랑은 이 사랑이 사랑하는 다른 존재들 안에서 이 사랑을 사랑한 당사자를 수단으로 현재의 것이 존재하고 있음과 되어감을 도울 수는 없다. 어쨌든 만일 이런저런 인간의 존재들이 자신들 안에 무한의 어떤 것, 또는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실체와 생명의 어떤 것,또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졌다면 위의 말함이 발생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들 안에 무한하고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하느님은 타인들에 의해 사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타인들)는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한 또는 신성은 특이하고 나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로의 사랑은 본질적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은 타인들과 더불어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본질적으로와 자아 측면 만에 집중한다면, 짐승으로부터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오각도 매우 비슷하다, 식욕도, 자연적 수준의 바램들도, 뿐만 아니라 애착들도 피장파장일지 모른다. 개인의 최선의 사랑들조차 매우 비슷하다, 즉 동료를 사랑함, 자식을 사랑함, 결혼한 짝을 사랑함 등등에서 이다. 어쨌든 인간은 내면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 덕분에 짐승 보다 상위에 있는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사랑의 생명과 신앙의 생명이다. 만일 이것이 출석되지 않고 있다면, 그 개인은 결코 인간일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통하여 그 개인은 사후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속해 있는 내면들의 것에 관련되는 물질의 신체로 이 세계 안에서 옷을 입고 있는 영이다. 신체는 영의 생각함들의 방향과 영의 애착함들의 조절 아래 있다.

인간 종족, 위에서 명기한 대로, 천국이 설립되는 기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창조는 마지막 번째에서 이었다, 그 이유가 마지막 번째가 앞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개인들은 신성의 질서의 형체들로 창조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연계와 영계가 외면적으로 결합(join)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실상, 개인이 영적 존재로 되는 정도에서, 그는 두 세계가 외면적, 내면적 결합(conjunction)을 위한 매체가 되어져 있는다.

인간의 혼(soul)은 당사자의 가장 깊고 가장 순도 높은 본질이다. 그러나 본질은 형체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혼은 사랑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애착(affection)들이라 불리우고, 지혜로부터의 모든 것들의 형체로부터 지각(perception)들이라 불리운다.

개인은 어떤 지식 안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총명 또는 지혜 안으로 태어나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런 것들을 받는 수용력, 그리고 그것들을 빨아들이는 능력만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두 겹의 방법에서 결과되어진다: 신성이 흘러드는 내적인 방법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드는 외적인 방법에서 이다. 이것들이 개인 내부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때 개인이 신성에 의해 계발되기를 선택하는 정도에서 개인은 지혜의 상태 안으로 점진적으로 들어간다.

모두 각각의 개인은 자기를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함에서 자아가 인도할 수 있다 라는 환영(幻影, 착각, 잘못 생각함), 자아(selfhood, 이기심)로부터의 느낌, 감각을 가진다. 선각자는 이기심으로부터의 이런 저런 느낌을 “자아(proprium)”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개인을 두고 성화함이라는 단어 보다는 “거듭남”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신성의 섭리인 것은, 개인은 이성에 일치하여 자유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 또한 개인이 생각하고, 뜻하고, 행동하는 것의 모두는 온전히 자아로부터 있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타남이 없다면, 어떤 것이 그의 것, 또는 자기 자신의 것임을 아무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개인은 자신 고유의 개인일 수도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의 이런저런 감각 없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어떤 것도 있어질리 만무하고, 고로 개인은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든지 무관심, 또는 하느님을 믿든, 지옥의 꼬드김을 따라가든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지고 만다. 줄여 말해, 개인은 개인 당사자될 리 없고, 진실로 인간일 수도 없다는 말이다.

개혁되고 영적으로 되어가는 모든 이의 처음 상태는 그들이 주님에 의해 개혁됨을 믿지 않는 것, 그 대신 자신들에 의해 개혁됨을 믿는 것이다; 즉 선에 대한 모든 뜻함과 진리에 대한 모든 생각함이 자신으로부터 근원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보다 한 술 더 떠진 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이런 상태 안에 있게 배려하시고 있으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자신 스스로 하고 있다 하지 않으면, 그는 개혁되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만일 그들이 거듭남 이전에 너희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진정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주님으로부터) 말해졌었다면, 자기들은 의지와 생각 안으로의 유입을 기다려야 한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붕괴되든지, 또는 만일 선과 진리가 자신들 안에서 근원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기계 같은 처지이다고 상상하는 실수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과 진리가 자신들로부터 근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이 한참 진행되면서 점차로 조금씩 가르쳐짐이 있어지는 것은, 예전의 자기 느낌과 생각함과 다른 것이 있다는 것, 즉 선하고 진정한 모든 것은 주님으로서만 100% 존재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슬금슬금 비쳐온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이 더 한참, 즉 완전함에 거의 접근하다시피 할 때, 당사자에게 주입되는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는 것은 악이고 거짓이다는 것이다.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이 세상의 삶 동안 가르쳐짐을 많이 깨닫지 못한 채 기한이 다 찰 경우, 다음 삶에서 이를 깨닫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보도록 인도 받는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듭남에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애착들과 모든 생각함들에 관련하여 내면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지 않으면, 개인은 선과 진리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질서 안에 결코 놓여질 수 없다. 이 자유함은 양쪽에 놓여지는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천칭(저울)에 유추되는 방식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되어진다. 비슷한 방식에서 주님은 모두 각각의 개인에 대한 선과 악의 영향력이 균형을 맞추고 있게 유지하신다. 그러나 개인은 이에 대해 의식하지 못 한다, 하느님의 선물 중의 하나인 것은,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그것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라고 느껴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즉, 우리가 말씀에 있는 질서의 법들에 일치하여 살기를 선택할 때, 고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함이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부터 임을 우리가 느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분의 손가락을 천칭 위쪽에서 직각으로 세우시어 유지하시면서 선택의 우리의 자유함을 알맞아지도록 조절해주시지만, 그렇다고 강제적 수단으로 자유를 침범하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질서 안에서 실제의 선택들이 인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해버렸을는지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처음 그들을 창조했던 사랑 안으로 태어나졌다면, 어떤 악도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조차 하여 있었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가 창조되어진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으로부터의 사랑이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웃에 선을 행함에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랑이 진실로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이 사랑 안에 짐승으로부터 발견되는 자연적 수준의 사랑과 구별되는 영적 수준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원죄” 또는 “유전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실제의 악들 안으로 태어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악들을 향한 다소의 경향과 더불어 악들을 향한 경향성만 지니고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사후 개인은 악들을 향한 어떤 유전적 경향성으로부터 판단되어지지 않고, 개인이 동의함에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실제의 악들로부터 만 이다.

우리가 실제의 선을 상속하지 않고, 선이 되어질 경향성만이 상속 가능하다는 것도 위와 동일하게 진정하다. 천성적으로 자연적 선과 친절함을 향유한 듯 여겨지는 이들, 그리고 타인에게 선을 행함을 타고

난 듯 실행하는 이들이라 여기지는 이들을 목격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라 해도 그들이 말씀으로부터 선을 행함에 관한 원리들을 동시에 흡입하지 않으면, 그들은 양심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자연적 선, 또는 유전적 선에 대한 경향성과 그것에 일치하는 생명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개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영적 세계 안으로 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강하게 인상지우는 선과 진리의 원리들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여, 테스트되고 심리되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방법에서만이 그들은 천국의 양심을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천국행의 삶을 사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믿는 것 만큼 고되고 힘든 삶이 아니다. 혹 자는 생각한다, 영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든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포기함이 필요하기 때문, 신체와 육에 연합된 식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존재들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함을 뜻하는 것으로 받는다, 뾰족하게는 재물과 명성을 거절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꾸준히 경건하게 묵상하는 것, 그들의 생활은 기도함과 말씀을 읽는 것, 여타 경건하다는 저서들을 읽는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각자는 말한다, (그가 저 세계로부터의) 풍부한 경험과 천사들과의 토론은 그로 하여금 위와 상황이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상, 이 세상을 포기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천국의 환희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 때문에 슬픔에 잠긴 삶을 저 세상에서 건설하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개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 개인과 더불어 (저 세상에서도 당사자에게) 머물고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려면 개인은 이 세상에서 그것과 대등한 삶을 살고 있었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의 과정에서 있는 시민적, 도덕적 생활을 수단으로 개인은 영적 생명을 획득한다, 사실상, 이 방법만이 영적 생명이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게 할 수 있다, 또는 개인의 영이 천국을 위하여 준비되게 해줄 것이다.

천국행으로 인도하는 생활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당신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다고 아는 방법으로 어떤 것을 얻을 때, 특히 당신의 영이 그런 쪽으로 향하여 움직이려 들 때, 당신에게 필요한 딱 하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에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대수롭지 않다 여겨지는 사소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것을 부딪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하나를 처리해 소화해나간다면, 점차 당신은 천국 쪽에 당신의 발을 디밀고 있다. 이러할 때 당신의 더 높은 수준의 마음들이 열리어져서 어떤 것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보았을 때, 단번에 그것들을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가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에 획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쪽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도서 구입 안내 **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의 단가는 여느 시중의 책의 단가와는 달리 순수 재료비만을 계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느 복사 비용보다 저렴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출판사의 책은 팔릴 때마다 조금씩 적자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출판사의 바램은 이익 창출이 아니라 이 귀중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 더불어 이 귀중한 지식이 많은 분들의 손 안에, 책꽃이에 있어 필요시 언제나 읽기를 바램에서, 또한 이 지식의 습득은 여느 소설이나 수필집을 대하듯 하여서는 즉각 이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기에, 어쩌면 시험 공부하듯 노력함이 곁들여야 하기에 전자책이나 전화기나 컴퓨터 다운에 앞서 종이책 구입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출판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펴내는 자: 한광숙, 배제형
펴낸곳: 도서 출판 벽옥
등록: 제 2016-000002호
주소: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안양산로 31-5
전화: 010-4738-1711
홈페이지: baysidechurch.org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역자 E-mail : jeandsook@gmail.com

각 도서와 가격

** 각 도서는 대체로 양장본으로 제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인터넷 주소에서 책을 만나볼 수 있고 다운받아 직접 제본도 가능할 것입니다.

1. 번역 서적

말씀의 합리적 이해 (전 6권. 각 430여쪽) 값 각 권 12000원
비유 (796쪽) 값 25000원
신약 비유 해석 (516쪽) 값 15000원
구약 비유 해석 (394쪽) 값 15000원
이스라엘의 첫 세 왕 (576쪽) 값 15000원
마태복음 해석 (736쪽) 값 15000원
요한복음 해석 (640쪽) 값 15000원
요한계시록 해석 (513쪽) 값 15000원
바이블 스터디 노트 (전 4권, 각 권 평균 65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공과 (전 24권, 각 권 평균 234쪽) 값 각 권 5000원
창세기 요약 해석 (401쪽) 값 15000원
레위기 해석 (526쪽) 값 15000원
영, 한글 구약 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340쪽) 값 5000원
영, 한글 신약 성경 (4 복음, 계시록 406쪽) 값 5000원
성경 상응 사전 (1082쪽) 값 25000원
헬렌 켈러의 신앙 간증 (126쪽) 값 5000원
죽음 그 이후 영들의 세계 그리고 천국과 지옥 (132쪽) 값 5000원
새 예루살렘 그리고 그곳의 교리 (100쪽) 값 5000원
천국의 비밀들 (전 12권 각 500여쪽) 값 각 권 20000원
창세기 해석 (전 5권 각 550-630여쪽) 값 각 권 15000원
성경 연구 (전 6권 각 430-480여쪽) 값 각 권 15000원

2. 원서

선각자의 필적이 담긴 쉬밑의 라틴 성경 (900쪽) 값 25000원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엘리엇 영역)
알카나 세레스티아 (쟌 클라우 영역, 쟌 폿스 수정) 값 각 권 20000원
* 이 외의 원서의 종이책 재출판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위 엘리엇 영역본은 copyright이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미루고 있는 바, 필요한 분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므로 연락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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