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편저자 서문

제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다고 당신이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어떤 원리들이 있다는 것…(No matter how selfish you think man is, it’s obvious that there are some principles in his nature….) 이 글은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의 첫 장의 첫 글귀인데, 이는 그의 책의 출발이자, 그의 책의 근간이 인간 본성을 관찰하고 주목함에 있다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을 파악하는 것이 너와 나… 라는 우리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피력한 글귀 같이 여겨져 여기에 인용했다. 또한 그의 두 번째 책 “국부론” 역시 이기적일 뿐인 인간 본성과 나라의 재물과의 관계를 파헤쳤다고 대단히 간결하지만 이 책과 연관지으면, 그렇게 역자는 말해보고 싶다.
이 책 “창세기 해석”은 이기적일 뿐인, 그래서 악 뿐인 인간 본성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즉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아시는 바, 인간 구원을 위해 적절한 섭리를 어떻게 펼치시는 지를 조금이나마 실감나게 알게해 줄 것이다. 하여 이 책을 정독하면 아담 스미스의 책 뿐만 아니라 칸트의 저서인 “순수 이성 비판”, 궤테의 “파우스트” 등등의 책들을 섭렵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왜 주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우리에게 정독하라고 성경을 주셨을까? 인간 구원은 그의 생활이 개혁되어 거듭남인 주님으로부터의 새 창조가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한번에 받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백 번 뒤엎을 수 있게 복잡한 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을 만나는 것, 하여 새 생명을 받아 처음의 인간(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인간(영적 수준의 인간)이 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성경은 이를 셀수 없이 많은 경우들을 이야기 형체로, 비유 형태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반복적이고 중복되는 듯 여겨지지만, 이를 통해 주님에 관하여와 그분의 왕국(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우리로 알게 해주시고 있다.
이 책은 천국의 비밀들 (Secrets of Heaven, 라틴어로는 알카나 세레스티아, Arcana Coelestia)을 성경의 구절만을 중심으로 재 편집했다.
여러분께서 마음의 가장 깊은 안쪽에 거주하시는 주님을 찾아가 만나뵙는데 이 책이 한몫 해주길 기도한다.
더 많은 자료는 baysidechurch.org 또는 biblestudynotesblog.wordpress.com을 검색하면 도움을 줄지 모른다.

6. 19. 2016 뉴욕 베이사이드에서 배제형.

창세기 제 1 장

성경: 창세기 제 1 장

1. 시작에서 하느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3.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4.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셨더니, 그것은 선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 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그분은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 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6.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 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
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는 물 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분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 렇게 있었다.
8.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천국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 이 었다.
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11.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산출하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2.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산출하는 풀잎을,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이것은 선 이었다.
13. 저녁과 아침은 셋째 날 이었다.
1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
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있게 하여 땅에 빛 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 고, 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18. 낮을 규율함, 그리고 밤을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 님께서는 그것이 선 이었음을 보셨다.
19.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 이었다.
20.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있는 혼을 기게 하 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에 따라 기게 한, 기는 모 든 살아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22.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23.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 이었다.
24.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 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 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 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짐승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 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26.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들 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들의 새와 짐승과 모든 땅, 그리고 땅 위 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2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 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 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 그리고 땅 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하늘들의 새, 땅위에서 기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
29.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 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은 너에게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30. 그리고 땅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에게, 그리고 살아 있 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푸른 모든 풀잎은 양식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셨더니 그것은 참 선 이었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여섯째 날 이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시작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최 고대의 시간이 ‘시작’이라 불리운다. 이는 예언자들에 의해 여러 구절들에서 “옛(것)의 날들”, 그리고 또한 “영원의 날들”로 불리우고 있다. “시작”은 또한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때에서 첫 기간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그 때 인간은 새로이 태어나지고,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라고 불리운다. 예언서의 거의 모든 부분들에 있는 “창조”, “형성”, “만듦”이라는 단어가 의미에서는 약간씩 차이는 보이지만 대체로 거듭남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경우:
내 이름을 수단으로 불리우는 모든 자(를), 나는 내 영광을 위해 그를 창조했고,
나는 그에게 모양을 주었다, 그렇다, 나는 그를 만들었다 (이. 43:7).
그러므로 주님은 “되찾으시는 분,” “자궁으로부터 모양을 주시는 분,” “만드시는 분,” 그리고 또한 “창조하시는 분”이시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여호와 네 거룩한 자, 이스라엘의 창조자, 네 왕이다 (이. 43:15).
다윗서에서:
창조된 사람들이 야(Jah)를 찬양할 것이다 (시. 102:18).
당신은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고, 그들이 창조되어지고, 그리고 당신은 지면의
얼굴들을 새로이 하십니다 (시. 104:30).
“하늘”이 내적 인간을, “땅”이 외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알게 될런지 모른다.

2절. 땅은 공허하고 텅비었고,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깊음의 얼굴들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물들의 얼굴들 위에서 움직이셨다.
인간의 거듭남 이전, 그는 “공허하고 텅빈 땅”이라 불리우는데, 또한 선과 진리가 전혀 씨뿌려지지 않았던 “지면”이라고도 불리운다; “공허하다”는 선에 관한 것이, “텅비다”는 진리에 관한 것이 씨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짙은 어둠”이 오는데, 즉 우둔함, 그리고 주님에 관한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에 무지함, 그 결과 영적 측면에 속하는 모든 것과 천국의 생명에 무지함(이다). 이런 인간을 예레미야를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묘사하신다:
내 백성들은 우둔하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해 왔다; 그들은 어리석은 아들들이다,
그리고 총명하지 않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는 영리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공허하고
텅빔(이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 4:22-23).

“깊음의 얼굴들”은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욕망들(craving, 또는 탐욕들). 그리고 거기로부터 근원하는 거짓들이다. 거듭나지 안ㅎ고 있는 자는 이 욕망들과 거짓으로 되어 있고, 이 안에 완전히 침수되어 있다. 이 상태는 빛을 가지지 못하는 바, 그는 “깊음”, 또는 불명확하고 혼돈된 어떤 것과 같다. 또한 이런 인물들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에서 “깊은 곳”, 그리고 “바다의 깊은 곳”이라 불리는데, 이것이 인간이 거듭나기 전, “말라붙어 있다,” 또는 “황폐되어 있다.” 이사야서의 경우:
고대의 날들 안에서, 옛 세대들 안에서와 같이 눈뜨고 있게 하소서.
당신은 바다, 큰 깊은 곳의 물들을 말라붙게 하신 그분, 몸값을 치루고
되찾는 자가 건너가도록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신 그분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가 돌아올 것입니다 (이. 51:9-11).
위와 같은 사람이 천국으로부터 보여질 경우, 생명력이 결여된 검은 덩어리같이 나타난다. 같은 방식의 표현들이 예언자들에 의해 자주 말해지는데, 인간의 황폐함을 포함한다. 이것은 거듭남에 앞서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참된 것을 알고, 선인 것으로 감동 받기 전, 참된 것과 선인 것이 들어옴에 저항하고 방해하는 이것 저것들이 반드시 제거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인간이 임신되어질 수 있기 앞서, 반드시 옛 인간은 죽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영”을 수단으로 주님의 자비가 뜻해진다. 이 영이 “움직인다,” 또는 암탉이 자기 알들을 품듯이 “품으신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감추여 있게 하신 것, 또는 소중히 보관하시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두루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아 있게 하신 것(remnant)이라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참된 것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외적인 것들이 깡그리 피폐될 때까지 빛 또는 낮 안으로 결코 와지지 않는다, 이 지식들이 이 구절에서 “물들의 얼굴들”이라 불리운다.

3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첫 상태는 선인 것과 참된 것이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할 때이다. 인간의 외적 측면은 모두 다 선하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두고도 선이라고 공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참된 것이라고 공상한다; 하여 (공상한) 이런 선들이 악들이고, 이런 진리들이 거짓들임은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새로운 것을 마음에 품을 때, 그는 먼저 자기의 선들이 선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빛 안으로 올 때, 주님이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주님이 실재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분 자신께서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요.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또는 생명, 그리고 진리 자체, 또는 빛이시다,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도, 진리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선포하셨다:
시작에서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있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그리고 이 빛이 어둠 안에서 빛나고 있다. 그분은 참 빛이셨다,
이 참 빛이 세상 안으로 오는 모두 각각의 사람을 비추고 있다 (요. 1:1, 3-4, 9).

4, 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빛을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빛이 “선”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빛이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인간에게 새로운 것이 임신되어 태어나기 전, 빛인 듯 나타났던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을 뜻한다. 그 이유는 악이 선인 듯, 거짓이 진리인 듯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둠인데, 인간 자신에 어울리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낮”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낮은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고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밤”에 비교되는데, 그 이유는 밤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함들은 말씀 안에서 자주 발생한다.

5절.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 이었다.
“저녁”을 수단으로, “아침”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지금 식별되어질 수 있다. “저녁”은 앞서 있는 모두 각각의 상태를 뜻하는데, 그 이유는 저녁이 그늘의 상태, 또는 거짓으로부터와 신앙 없음으로부터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침”은 이후의 모두 각각의 상태, 빛 속의 것, 또는 진리로부터와 신앙에 관한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저녁”은 인간 고유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침”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모두를 말하는데, 다윗을 통해 이렇게 말해졌다:
여호와의 영이 내 안에서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이 내 혀 위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바위가 나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분은
태양이 올라오고, 구름들 없는 아침일 때, 밝게 빛나심으로부터, 비를 주심으로부터
부드러운 풀잎이 땅으로부터 밖으로 솟구치는 때의 빛 같이 계신다 (삼하 23:2-4).
“저녁”은 신앙이 없을 때, 그리고 “아침”은 신앙이 있는 때인 바, 세상에 주님의 오심이 “아침”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는 때에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 불리우기에, 다니엘서에서:
거룩한 자가 나에게 말했다, 저녁조차 그것이 아침이 되는 때,
이천 삼백(일) (단. 8:14, 26).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말씀에서도 “아침”이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침은 새로운 창조에 관한 표현인 것이다.

“날”이 때 자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말씀에서 이보다 더 공통되는 표시함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잘 보라, 여호와의 날이 온다. 나는 천국들을 흔들 것이다,
땅은 내 성남의 분노의 날에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그녀의 때는 오는 것
근처에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은 오래 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13:6, 9, 13, 22).
그녀의 오랜 것은 고대의 날들로부터 이다. 그리고 두로는 왕 한명의 날들에 따라
칠십 년을 잊혀져 있을 그 날이 올 것이다 (이. 23:7, 15).
“날”이 때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 때는 그 때의 상태 또한 표시하는데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우리에게 화있다, 그 이유는 날이 기울었기 때문, 그 이유가 저녁의 그림자들이
뻗쳐져 있기 때문이다 (예. 6:4).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만일 너희가 날에 관한 내 언약, 그리고 밤에 관한 내 언약을 헛되이 만들 것이다면,
그들의 계절에는 낮도 밤도 있지 않을 것이다 (예. 23:20, 또한 25).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옛 것으로부터 이듯 하여지게, 우리의 날들을 갱신하소서 (애. 5:21).

6, 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 한 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고, 그것이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를 구별되게 하라.
하느님의 영, 또는 주님의 자비가 낮 안으로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과 선인 것에 관한 지식들을 낳고, 그리고 주님이 계시다는 것, 그분이 선 자체, 진리 자체 이시다는 것,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선과 진리는 없다는 첫째가는 이 빛들이 주어진 후, 그 다음 그분은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사이에,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과 외적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구별을 만드신다. 내적 인간은 또한 “광활한 공간”이라 불리운다;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들이 “광활한 공간 위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외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광활한 공간 아래쪽의 물들”이라 불리운다.
인간은 거듭나지고 있음 이전 일 경우, 그는 어떤 내적 인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그는 내적 인간의 본성과 품질에 대하여는 아주 많이 덜 친숙해 있다. 그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된 상태에서 그의 내적 인간 역시 그것들 안에 침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여, 구분된 것이 혼동되고 불명료한 단일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말해졌다, “물들 한가운데 광활한 공간이 있어라,” 그리고 그 다음, “물들 안에서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그 뿐만이 아니다, “광활한 공간 아래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게 하자,” 이는 다음 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광활한 공간 아래에 있는
물들과 광활한 공간 위에 있는 물들 사이에 구분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천국이라 부르셨다 (창. 1:7-8).
인간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목하는 다음 것은 그가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은 선들과 진리들이고, 이것들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아져 가고 있는 때에도, 외적 인간은 여전히 선들은 자신으로부터 행해진 것, 진리들은 자신으로부터 말해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본성 속에 있다. 인간이 주님의 그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나 마치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인도되는 듯 하여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말하는 까닭에, 7절에서도 광활한 공간 아래의 물들에 관한 구분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광활한 공간 위의 물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인간은 자신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뿐 아니라 탐욕들을 수단으로 인도되어지고, (그것이)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쪽으로 구부려진다는 것 또한 천국의 신비이다, 하여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 하나하나, 일반적, 세부적으로 공히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고로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또는 “땅”으로부터 “하늘”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광활한 공간, 또는 내적 인간이 지금은 “천국”이라 불려진다.

“땅을 뻗는 것과 천국들을 뻗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거듭남을 취급할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형체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시는 분, 그리고 자궁으로부터 네게 모양을 주신 그분이
말 하신다; 나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여호와, 나 자신 천국들 만을 뻗어 나아가게
하는 여호와, 땅을 널리 뻗게하는 여호와이시다 (이. 44:24).
그리고 다시, 주님의 강림이 공개적으로 말해지는 대목에서:
상한 갈대를 그분은 부러뜨리시지 않는다, 그리고 연기나는 심지를 그분은 꺼지게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심판을 진리 쪽에서 낳으실 것이다 (이. 42:3).
즉, 그분은 오류들을 부러뜨리시지 않고, 탐욕들을 꺼지게 하시지 않으나, 그것들을 선하고 참된 것 쪽으로 구부리신다; 그러므로 뒤잇는 바:
여호와 하느님께서 천국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을 뻗쳐지게 하신다;
그분은 땅을 뻗게 하신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소출(을 내신다); 그분은 그것 위의
사람들에게 숨을 주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걷는 그들에게 영(을 주신다) (이. 42:3-5).
같은 취지를 두고 다른 구절들을 나열함으로 인한 중복된 언급은 삼갈 것이다.

8절. 저녁과 아침은 둘째 날 이었다.
“저녁,” “아침,” 그리고 “날”에 관한 뜻은 위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다.

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모두 한 장소로 모이고, 마른 [토지]가 나타나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있다는 것, 진리들과 선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에게 흘러든다는 것이 알려질 때, 비록 그것이 그렇게 나타나지지 않을지라도, 그 다음 이런 진리들과 선들, 또는 거듭나고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들은 인간의 기억 안에 저장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분류되어져 저장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의 기억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 것,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일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서 거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주님에 의해 (꺼내져) 나와진다. 이런 지식들이 “한 장소로 다함께 모아진 물들”이고, “바다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 자신은 “마른 [토지]”로 불리우나, 다음 절에서 즉시 “땅”이라 불린다.

10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른 [토지]를 땅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물들”이 지식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는 매우 흔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바다”는 지식들이 수집됨을 의미한다. 이사야서를 보자:
땅은 물들이 바다를 덮듯 여호와에 관한 지식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 11:9).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지식들의 결핍이 취급되어진다:
물들이 바다로부터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강이 말라붙되 깡그리 말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내들이 물러날 것이다 (이. 19:5-6).
새로운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학개서에서:
나는 천국들과 땅, 그리고 바다 그리고 마른 [토지]를 흔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민족들을 흔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의 바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집을 영광으로 채울 것이다 (학. 2:6-7).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는 사람에 관하여, 스가랴서에서:
거기 한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여호와에게 알려질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그러나 저녁 때에 비쳐짐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생명 있는
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다, 그것의 한쪽 부분은 동쪽의 바다를 향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한쪽은 뒤쪽의 바다를 향하여 (나갈 것이다) (슥. 14:7-8).
거듭나져서 여호와를 예배할 황폐한 사람을 다윗이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가둔 자들을 경멸하시지 않는다; 천국들과 땅, 바다와 바다
안에서 기는 모든 것이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시. 69:33-34).
“땅”이 (받아 담는) 용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스가랴서로부터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천국들을 뻗치게 하신다, 그리고 땅의 기초들을 놓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영에 모양을 주신다 (슥. 12:1).

11, 12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부드러운 풀잎을 내고, 풀잎은 씨를 산출하라, 그리고 과일 나무는 땅에서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과일을 그 종류대로 맺으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그래서 땅은 부드러운 풀잎,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풀잎을, 본질적으로 씨가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놓았다.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이것은 선 이었다.
“땅” 또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인 천적인 씨들을 받고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생산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다음 주님께서는 먼저 부드러운 것이 솟아오르게 하시는데, 이것이 “부드러운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 다음 더 쓸모있는 어떤 것, 이는 그 자체 안에 씨를 다시 맺는데, “씨를 산출하는 풀잎”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드디어 열매가 많이 열리게 되는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그것의 종류에 따라 각각 “자체 안에 씨를 가진 과일을 맺는 나무”라 불리운다.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이 처음 가지는 품질은, 자기가 행하는 선,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로부터 이다 라고 상상하는 것, 실재로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상상한다. 하여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상상하는 누구이든지 그는 아직까지는 진정한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에 (생명을) 받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아직까지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다 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을 받도록 준비하는 상태에 아직은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생명의 계속됨이 생명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된다.
씨뿌리시는 그분은 주님이시고, “씨”는 그분의 말씀이다, 그리고 “땅”은 인간이다. 이에 대하여는 그분 자신이 선포해주셨다 (마 13:19-24, 37-39; 막 4:14-21; 눅 8:11-16). 세 복음서 모두 대체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하느님 왕국은 이러한 바, 마치 땅에 씨를 던지는 사람 같다, 그리고 잠들고
밤과 낮이 일어난다, 그리고 씨는 성장하여 일어선다, 그는 어떻게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땅이 그녀 자신으로부터의 열매를 가져다 주기 때문인데, 먼저,
싹을 내고, 그 다음 이삭, 그후 이삭 안에 알찬 곡식(을 가져다 놓는다) (막 4:26-28).
“하느님의 왕국”을 수단으로, 보편적 의미에서 천국 전체가 뜻해진다; 덜 보편적 의미에서, 주님의 진정한 교회; 그리고 세부적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 속에 있는 모든 이, 또는 신앙 속의 생명을 수단으로 거듭나진 모든 이(가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물 역시 “천국”이라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왕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님께서 누가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하느님의 왕국이 올 것이냐고 그분에게 요구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셨다, 하느님의 왕국은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
그들이 말한다, 오 여기다, 또는 오, 저기다! (그러나) 아니다. 그 이유가 잘 보라,
하느님의 왕국은 너희의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눅 17:20-21).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세 번째 무대(단계), 즉 회개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 상태 역시) 같은 방식, 즉 그늘로부터 빛으로, 또는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셋째 날 이었다.

14-1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표시와 계절과 날과 해를 위해 있게 하라. 15 그리고 그것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있는 발광체들을 위해 있게 하여 땅에 빛을 주게 하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두 개의 큰 발광체를 만드시고,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고,보다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땅에 빛을 주도록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두었다.
큰 발광체들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은 우선 신앙의 본질인 것과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본질이 진보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명료하게 이해되어질 수 없다. 신앙의 참 본질과 생명은 주님 뿐 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인데, 이를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선포해 두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볼 수 없고,
하느님의 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요 3:36).
새로이 창조되어가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신앙의 진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생명은 선인 것과 참된 것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후에 그들은 신앙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첫 번째, 지식일 뿐인 기억 속의 신앙을 수단으로; 다음에 지성적인 신앙인 이해함에 있는 신앙을 수단으로; 마지막으로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또는 구원을 가능케하는 신앙인 심정에 있는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을 받아간다. 이 세 종류 중 첫 두 종류는 3절로부터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러나 사랑을 수단으로 생명을 주는 신앙은 20절부터 25절 까지에서 생명 있는 것들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 그리고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지금 여기서 먼저 취급되어지고, “발광체들”이라 불리운다; 사랑은 “낮을 규율하는 더 큰 발광체”이다;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은 “밤을 규율하는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 두 발광체들은 하나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 바, 그것들에 관해 말해질 때, 복수를 암시하지 않게 단수 표현으로 “발광체들이 있어라”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육체상의 외적 인간에 있는 열과 빛과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자는 후자를 수단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런 연유에서 발광체들이 “하늘의 광활한 공간 안에 있다,” 또는 내적 인간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큰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그리고 작은 발광체는 내적 인간의 이해함 안에 놓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 빛을 받는 대상 안에서 오로지 있어지듯 의지와 이해함 안에서만 나타난다. 의지는 사랑을 가지고 감동되고, 이해함은 진리 또는 신앙을 가지고 감동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로 가능해지는 영역에 속한다.

“큰 발광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예언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를 보자:
내가 너희를 소멸할 때, 나는 하늘들을 덮고 거기 있는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빛으로부터의 모든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8).
위 구절에서는 바로와 이집트인들이 취급되는데, 말씀에서 그들을 수단으로 감각과 기억 속의 것만으로부터의 원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속의 것만을 수단으로,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어져 갔었음을 아래 구절에서 살필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이 황폐함 안에 토지를 놓기 위해 온다, 그 이유가 하늘의 별들과
거기로부터의 별자리들이 그들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그의 나감(해돋음)에서 어둡게 되어지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비추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13:9-10).
다시,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 어둠의 날이고 짙은 어둠의 날이다; 땅은 그분 앞에서 떨린다,
하늘들이 동요한다; 태양과 달은 검어진다, 그리고 별들은 그것들의 빛남을
철수할 것이다 (욜 2:1-2, 10).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강림에 관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이 계발됨에 관해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교회(a new church)에 관해서, 그리고 세부적 측면에서는 어둠 안에 있는 모두에 관해서, 그리고 빛을 받는 모두, 그리고 거듭나지고 있는 모두에 관해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일어나라, 빛나게 하라, 네 빛이 오기 때문이다; 잘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짙은 어둠이
사람들을 덮고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네 위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네 빛 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왕들은 네 일어남으로부터의 빛남 쪽으로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너에게 영원한 빛으로 계실 것이다, 네 태양은 더 이상 저물지 않을 것이다, 네 달이 그 자체를 철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가 너에게
영원한 빛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60:1-3, 20).
다윗서에서:
총명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신다; 그분은 물들 위 너머에
땅을 뻗치신다; 그분은 큰 발광체들을 만드신다, 태양은 낮을 규율하고,
달과 별들은 밤을 규율한다 (시. 136:5-9).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네 여호와를 찬송하라, 태양과 달아, 그분을 찬송하라, 빛으로부터의
너희 모든 별들아, 그분을 찬송하라, 너희 하늘들 속의 하늘들아,
그리고 하늘들 위 너머 있는 네 물들아 (시148:3-4).
위 모든 구절들에서 “발광체들”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 하여 “발광체들”이 주님을 향하여 있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의미했기 때문에 유대 교회 안에서 영구적으로 발광체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계속 불타고 있어야함을 엄히 명령해두셨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 안에 있는 명령 사항들이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발광체에 관해서 이렇게 쓰여 있다: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명령해서, 그들로 너에게 발광체를 위해
기름을 가져오게 해서 등이 계속적으로 밝히고 있게 할 것이다. 베일 밖,
만남의 천막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저녁으로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배열할 것이다 (출. 27:20-21).
이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 이것들에 주님께서는 불붙이시어 내적 인간 안에 빛이 드리우게 하시고,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에도 빛을 드리우시는데, 이는 신성한 주님의 자비에 속하는 바, 적당한 장소에서 알릴 것이다.

사랑과 신앙이 처음 “큰 발광체들”이라 불리우고, 후에 사랑은 “더 큰 발광체”, 그리고 신앙은 “더 작은 발광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규율한다”고 말해지고,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규율한다”라고 말해진다. 이것들은 감추여져 있는 신비함인 바, 날들에 관한 이 끝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의 허락이 있어 그것들을 설명해 볼 것이다. 이런 비밀들이 날들의 이 끝 안에 더 특별하게 감추어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종말, (즉) 어떤 사랑도 거의 없고, 그 결과 어떤 신앙도 거의 드문 때이기 때문인데, 주님 자신이 복음서들에서 다음의 말로 예견해 두셨다:
태양이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며, 별들은 천국으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천국들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 구절에서 “태양”을 수단으로 사랑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어둡게 되어진다; “달”을 수단으로 신앙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빛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별들”을 수단으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뜻해지는데,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추락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천국들의 미덕들과 능력들”이다.
태고 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이 없음을 인정했다. 천적인 천사들 역시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을 제외하면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천국 전체는 사랑으로부터의 천국인데, 그 이유는 사랑으로부터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천국들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모든 행복이 파생되어 나온다, 이는 너무나 위대해서 그것을 묘사할 재간은 아무 것도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도 마음에 품어진 적이 없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이들, 심정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알고 선포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은, 모든 사랑, 그 결과 모든 생명은 사랑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고로 모든 행복은 주님으로부터서만 온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의 미미한 것, 생명의 미세한 것, 또는 행복의 아주 작은 것조차도 자신으로부터는 가지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주님만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그분의 변모하심의 사건에서 큰 발광체, 또는 태양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져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그분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을 발했고, 그분의 의복은 빛같이 희었다 (마. 17:2).
가장 깊게 있는 것들이 얼굴에 의해, 의복에 의해서는 가장 깊게 있는 것들로부터 진행되는 것들이 의미되고 있다. 고로 주님의 신성이 “태양”, 또는 사랑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분의 인성은 “빛”, 또는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지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

각자의 능력에서도 쉽게 알아지는 것은, 얼마간의 사랑도 없이 가능할 생명은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것이 아니고도 가능할 환희(joy)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이 이러하고, 생명도 이러하고, 환희도 이러하다: 만일 당신이 사랑들, 바램들(desires, 이것도 사랑으로부터 있기 때문)을 제거한다면, 생각함은 즉시로 중지될 것이고, 당신은 죽은 인물 같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에 대하여 나에게 보여졌던 바와 같다. 자아 사랑들과 세상 사랑들도 생명과 환희와 유사한 어떤 것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진정한 사랑, 즉 인간은 모든 것들 위 너머에 주님을 사랑함이, 그리고 자신 같이 이웃을 사랑함이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에 반대되기에, 그것들은 사랑들이 아닌 미워함들 임이 분명해질 것은 틀림 없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는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그러므로 주님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이고, 진정한 생명은 그분으로부터의 사랑 속의 생명이다,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이 생명으로부터의 기쁨이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생명은 한분으로부터 밖에 있을 수 없다, 이로부터 진정한 기쁨들과 더없는 진정한 행복들이 흐른다, 천국들 안에 있는 천사들의 경우가 이와 같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하나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똑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발광체들”에 관해 말해지는 처음 대목에서, 그것들은 하나로서 간주된 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 안에 발광체들(sit luminaries) 이 있어라” 하고 말해진다. 이 상황에 관하여 아래의 경이로운 세부사항들을 관련시켜서 설명하도록 나에게 (주님으로부터) 허락되어졌다. 천적 천사들, 주님으로부터 자기들 안에 있는 천적 사랑의 덕택으로 이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들 안에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명과 총명으로부터의 빛 안에 있는데, 이것의 어떤 것도 거의 묘사되어질 수 없다. 그 반면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물로부터의 지식들 안에 있는 영들은 생명의 차거움과 빛의 희미함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천국들의 첫 문지방에조차도 접근 할 수 없고 다시 뒤돌아 도망한다. 그들 중의 몇은, 비록 그분의 가르침들에 따라 살아오지도 않았으면서도,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었노라고 말한다, 이런 품성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셨다:
나에게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 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한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마 7:21,22, 끝절까지).
여기에서 명백해지는 바는,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 안에도 역시 있고, 그것에 의해서 천국의 생명 안에도 있다는 것, 그러나 신앙 안에 자기들은 있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사랑의 생명 안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마치 열이 없는 태양의 빛 같고, 겨울철과 같은 바,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고, 모든 것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듯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앙은 봄철의 태양의 빛 같아, 태양의 열매 풍성하게 하는 열의 결과로 모든 것들은 성장하며 번성한다. 이것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거의 비슷하다. 하여 말씀 안에서도 이것들은 세상과, 땅의 얼굴 위에 존재하는 것들 가지고 통상적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신앙 없음, 그리고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에 의해 “겨울”에 비교되어지고 있다. 시대의 종말을 미리 말하시는 마가복음서에서:
너희의 도망감이 겨울에 있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 이유가 이것들은 재해의 날이기
때문이다 (막 13:18-19).
“도망감”은 마지막 때를 뜻한다. 또한 인간이 죽을 때인 그 사람의 때도 뜻한다. “겨울”은 사랑이 결여된 생명이다; “재해의 날”은 다른 삶에서 겪는 비참한 상태이다.

인간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지력(뜻함, will)과 이해력(이해함, understanding)이다. 이해함이 뜻함에 의해 통치되어질 때, 그것들은 함께 한 개의 마음(one mind)을 구성한다, 고로 한 개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뜻하고 행동하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의도 또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함이 뜻함에 일치하지 않을 때 (신앙을 가지고 있다 말하면서 그 신앙에 정반대되어 사는 이들의 경우 같이), 그러면 한 개의 마음은 둘로 분리되어진다. 즉 한 개는 천국 안으로 자체를 드높이려는 바램을 지니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여 간다; 의지가 모두 각각의 행동 안에서 행위자 일 경우, 전체 인간은 만일 주님의 자비가 그 인간 위에 드리워 있지 않다면 지옥 안으로 곤두박질하여 빠지고 말 것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이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신앙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이는 단지 생각하기이다 라고, 어떤 이는 주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은 생각하기 이다 고 상상하고, 그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다 라고 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함유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과 인정함, 뿐만 아니라 특별하게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가르치고 사람들로 순종하라 하는 첫째가는 것들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이유가 만일 인간이 이 두 교리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가복음에서 아주 명백하게 가르치시는 바 그것에 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한다.
마가복음서에서:
모든 명령 중의 첫째[이다], 귀 기울여라, 오 이스라엘이여; 주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주님이시다. 너희는 모든 네 심정으로, 그리고 모든 네 혼으로, 그리고
네 모든 지성으로,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그리고 둘째도 비슷하다, 즉 이것이다, 너희는 너의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할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명령은 없다 (막 12:29-31).
마태복음서에서, 앞의 명령들을 “첫째이고 큰 명령”이라 부르시고, “이 명령에 모든 율법과 예언들이 걸려있다”라고 말하신다 (마 22:37-41). “율법과 예언들”은 넓은 측면에서 신앙으로부터의 교리이고, 전체 말씀이다.

광명체들이 “표시들을 위해, 그리고 계절들을 위해, 그리고 날들을 위해, 그리고 햇수들을 위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졌다. 이 말들 안에는 현재 펼쳐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들이 포함되어져 있다. 물론 글자 의미 안에는 신비한 종류의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교체(alternations)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있다는 것, 이것들이 날들과 햇수들에 비교되어진다는 것을 주목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날들의 변화는 아침으로부터 정오로, 그로부터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통과하여 아침으로 이다; 햇수들의 변화도 이와 유사하다, 즉 봄으로부터 여름으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통하여 봄으로 이다. 하여, 열과 빛의 교체가, 그리고 땅의 생산물의 교체가 있다. 이 변화들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의 교체가 비교되어진다. 이와 같은 교체와 다양함 없는 생명은 불변할 것인 바, 결과적으로 생명이 전혀 없다; 선과 진리는 식별되고 구별되어질리 없을 것이고, 지각됨은 더 더욱 없을 것이다. 이런 교체들이 예언서들에서 “법칙들, ordinances, 정해놓은 질서”로 불리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이 분은 빛을 위해 낮에는 태양을 주신다,
그리고 달과 별들의 법칙은 밤에 빛을 위해서이다…이 규례들은
내 앞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예. 31:35-36).
그리고 같은 예언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만일 낮과 밤에 관한 내 언약이 서있지 않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하늘과 땅의 법칙을 놓아두지 않았다면 (예. 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창세기 8:22(에서 살핀다).

18절. 낮을 규율함, 그리고 밤을 규율함,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분함;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선 이었음을 보셨다. “낮”에 의해 선이 뜻해지고, “밤”에 의해 악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선들은 낮의 일들이라 불리우나, 악들은 밤의 일들이라 불린다; “빛”에 의해 진리가 뜻해진다, 그리고 “어둠”에 의해 거짓이 뜻해진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바: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 쪽으로 온다 (요. 3:19, 21).

19절. 그리고 저녁과 아침은 넷째 날 이었다.

20절.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물들은 기는 것(동물),(과) 살아 있는 혼(soul)을 기게 하는 원인이 되라. 그리고 새(fowl)는 하늘들의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의 위쪽, 땅 위에서 날으라.
큰 발광체들이 불을 밝혀오고 내적 인간 안에 장소를 두고, 이로부터 외적 인간도 빛을 받은 이후, 인간은 처음으로 살아 있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은 자신이 행한 선을 놓고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있어진 것, 자기가 말한 진리를 두고서는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였다고 상상하는 까닭에 그는 살아 있어 왔다고 말해지기는 거의 힘들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으로부터는 죽어 있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악과 거짓인 것 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아 있지 않다, 그 까닭은 그는 그 자체가 선인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인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선인 것을 뜻할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선인 것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교리로부터 모든 이 각각에게 명백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선한 씨를 뿌리는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다 (마. 13:37).
어떤 선도 선의 진짜 원천으로부터가 아니면 와질 수 없는데, 이 선의 원천은 오직 한 분이신 바, 주님께서 다른 복음서에서 말하신다:
한 분, 하느님 외에 선한 자는 없다 (눅. 18: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생명 쪽으로 인간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를 거듭나게 하실 때, 먼저 그분은 그에게 그가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참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가 최초 시기의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인 듯 하는 것 외 다른 것은 마음에 품어질 수도 없기 때문, 그리고 믿는 쪽으로 인도되는 길, 후에 모든 선과 진리는 그분만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지각하도록 인도되는 길은 먼저 자신으로부터인 듯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허용하심에서) 이와 같은 길(방도, way)에서 생각하는 동안, 그의 진리들과 선들은 “부드러운 풀”에, 또한 “씨를 산출하는 풀잎”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일을 맺는 나무”에 비교되어진다. 이 모두는 생명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생생해지고, 주님이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심을 믿는다. 하여 그는 먼저 “물의 기는 것들”에, 그리고 “땅 위에서 나는 새들”에, 또한 짐승에 비교되어진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생 혼들”이라 불리운다.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새들”은 합리적, 지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후자는 내적 인간에 속한다. “물들의 기는 것들”, 또는 “물고기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나는 왔고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내 견책에서 나는 바다를 말렸다, 나는 강들을
황무지로 만든다; 그것들의 물고기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날 것인데, 그 이유는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들을 검음으로 옷 입힌다 (이. 50:2-3).
이것이 에스겔서로부터서는 한층 더 명백해진다.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the new temple), 또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교회(a new church), 그리고 교회 속의 인간, 또는 거듭나는 인물을 묘사하신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모든 이 각각은 주님의 성전(a temple)이기 때문이다:
주 여호비께서 내게 말하셨다. 이 물들은 동쪽을 향한 경계선 쪽으로 유출될 것이다,
그리고 바다를 향하여 갈 것인데, 바다 안으로 인도되는 바, 물들이 치료될 것이다;
그리고 강물이 가는 곳은 어디이든 기어다닐 모든 생 혼은 살아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극도로 많은 물고기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물들이 그쪽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치료될 것이다, 그리고 강이 닿는 쪽의 모든 것은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부들이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것 위에 서서,
그물을 펼칠 것이다; 그것들의 물고기는 종류별로 있을 것인데, 마치 큰 바다의
물고기 같이 극도로 많을 것이다 (겔. 47:8-10).
“엔게디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어부들”과 “그물을 펼침”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로 자신의 자연적 인간을 훈육받을 이들을 의미한다.
“새들”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동쪽으로부터 새를 부르고, 먼 토지로부터 내 의도에 맞는 사람을 부른다 (이. 46:11).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잘 보니 사람이 없었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도망가 버렸다 (예. 4:25).
에스겔서에서:
나는 우람한 삼목의 새 싹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들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장엄한 삼나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날개 달린 모두 각각의 새가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 아래에서
그들은 거주할 것이다 (겔. 17:22-23).
그리고 새로운 교회에 관해, 또는 거듭나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들짐승과, 지면의 움직이는 것들과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들짐승”이 들짐승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새”가 새를 의미하지 않을 것은 모든 이에게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만드신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 안에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것이 명백하게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그것은 딱딱한 (느낌), 마치 뼈만 앙상한 물체나 검은 물질 같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인 것은 무엇이든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모습을 보일 때 인간적이고 생생함이 나타난다. 이것은 신용할 수 없는 듯 보일런지 모르나 지독하게도 진실되다. 하여 천사들의 영 안에 있는 단 하나인 모두 각각의 사상, 생각하기, 표현은 그것의 미세한 세부 사항들 안에도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애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들 안에 생명을 가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분을 향한 신앙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이 구절에서 “생 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신체의 한 특성(species)이라 할 수 있는 것 역시 가지고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자체를 움직이는 것”, 또는 “기어다닌다, creeps”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어쨌든 이런 진리들은 인간에게는 아직까지는 깊은 수준의 비밀들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생 혼”, 그리고 “자체를 움직이는 것”만이 언급되어 취급되어지고 있다.

2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큰 고래들, 그리고 물들이 각 종류대로 기어다니게한 기는 모든 살아 있는 혼, 그리고 날개 달린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셨더니 그것은 선 이었다.
“물고기들”은, 앞서 말했던 바 같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을 수단으로 생명이 있다, 고로 살아 있다. “고래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에 종속됨 안에 있는 그 지식들의 일반적 원리들이다, 그리고 일반적 원리들로부터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부적인 것들이 존재하되 일반적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우주 안에 없기 때문이다. “고래들”, 또는 “큰 물고기들”은 때로는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언급되기도 하는데, 거기서도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속의 일반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집트 왕 바로(그를 수단으로 인간의 지혜나 총명, 즉 일반적 측면에서의 지식이 표현되어져 있다)가 “큰 고래”라 불리운다. 에스겔서를 보자:
잘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여, 자기 강들 한 가운데 누워있는
큰 고래여, 하여, 내 강은 나의 소유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말했다 (겔. 29:3).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서:
이집트 왕 바로를 위해 애가를 채택하라, 그리고 그에게 말해라,
너는 바다들에 있는 고래 같다, 그리고 네 강들 안에서 나갔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겔. 32:2),
이런 말들을 수단으로 기억적 지식들을 수단으로, 고로 자신들로부터 신앙 속의 비밀들 안으로 진입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되어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단단하고 크고 강한 검을 가지시고 꽤나 긴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하기까지 한 뱀 리워야단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다 안에 있는 고래들을 죽이실 것이다 (이. 27:1).
“바다 안에 있는 고래들을 죽임”에 의해서 진리로부터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인물들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를 고래같이 들이켰다, 그는 자기 배를 나의 맛있는
것을 가지고 채웠다, 그는 나를 내 던졌다 (예. 51:34),
고래가 요나에게 했듯, 그는 이 구절에서 “맛있는 것”이라 부르는 신앙으로부터의 지식들을 삼켰음을 명시하고 있다; “고래”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로부터의 일반적 원리들을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소유하는 이들, 그리고 이런 방식 안에서 행동하는 이들을 명시하고 있다.

2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것들에 복 주셨고 말하시기를,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바다들에 있는 물들을 채우라, 그리고 새는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에 생명을 가지는 모든 것은 그 자체 열매를 많이 맺고 광대하게 번성한다; 이는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다른 삶에서는 깜짝 놀라는 수준에서 (전개된다). 말씀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시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그리고 “번성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단정하고 있다. 말씀에서 있는 주님의 “복 주심” 역시 열매를 많이 맺음과 번성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복 주심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23절. 저녁과 아침은 다섯째 날 이었다.

24, 25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땅은 그 종류대로 살아있는 혼을 내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그 자체 움직이는 것,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2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그 종류대로, 그리고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것은 선 이었다.
인간, 땅 같아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인간 안에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는 바, 무엇에 의하여 인간은 믿어지고 행함이 있는 지를 알아야 할런지 모른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력의 직무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력의 직무이다.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믿노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신조에 따라 살지 않을 때의 경우와 같다; 이럴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하고 있다, 고로 분단된 마음(mind)을 가진다, 하여 주님께서 “어리석은 자”라 부르시는 자가 되어 간다.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내 말들을 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는 누구이든, 나는 그를 반석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한 슬기로운 인간에게 비교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들을 듣고,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모든 이를, 나는 모래 위에 자기 집을 건축한
어리석은 자에 비교할 것이다 (마. 7:24, 26).
이해함에 속하는 것들은, 앞서 보였던 바 같이, “물들이 생기게 한 기는 것들”, 그리고 또한 “땅위에 있는 새”, 그리고 “광활한 공간의 얼굴들 위에”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러나 뜻함 속에 있는 것들은 여기서 “땅이 생산하는 생 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 또한 “그 땅의 야생 동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고로 태고 때에 살았던 이들은 이해함과 뜻함에 관련되는 것들을 (한꺼번에)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구약 성경의 말씀 안에서 비슷한 것들이 여러 다른 동물들을 수단으로 꾸준히 표현되어져 있다. 짐승(beast)들은 두 종류가 있다; 악한 짐승,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짐승, 그것들은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은 악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데, 예를 들면, 곰들, 이리들, 개들 등등이다; 그리고 선하고 온화한 것들은, 어린 암소, 양, 어린 양이 지닌 본성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참조되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화한 것들이다, 그런고로 애착(affection)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1장이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서보다 더 수준 낮은 것(애착)들, 이것들은 신체와 더 잘 연결되는데, “그 땅의 야생 동물들”이라 불리우고, 그리고 탐욕들(cupidities)과 쾌락들(pleasures)이다.

“짐승들”이 인간의 애착들, 악한 자의 경우는 악한 애착, 선한 자의 경우는 선한 애착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 안의 수많은 문단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몇 구절만 살핀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너를 위하여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뒤돌아 볼 것이다, 하여
너희는 갈고 뿌릴런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서 사람과 짐승을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불어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고대 때 안에서와 같이 너희를 살도록 해 주겠다 (겔. 36:9, 11, 거듭남을 취급함).
요엘서에서:
내 들판의 너희 짐승들은 걱정하지 말라, 그 이유는
광야의 거주하는 장소가 풀이 무성해지기 때문이다 (욜. 2:22).
다윗서에서도 역시:
이렇게 나는 어리석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짐승 같이 있었습니다 (시. 73;22).
예레미야서에서, 거듭남을 취급하면서:
잘 보라, 그 날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바, 나는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가지고 씨뿌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건축하고 심는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다 (예. 31:27-28).
“야생 동물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호세아서를 보자:
그 날에 나는 그들을 위해 들판의 야생 동물들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 리고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욥기서에서:
너는 땅의 야생 동물들을 두려워 말라, 그 이유는 네 언약이 들판의 돌들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들은 너와 평화로이
있을 것이다 (욥. 5:22-23).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와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악한 야생 동물들이 토지로부터
중지되게 할 것이다, 하여 그들은 광야 안에서 확신을 갖고 거주할 것이다 (겔. 34:25).
이사야서에서:
들판의 야생 동물들이 나를 존경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광야에 물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43:20).
에스겔서에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를 그 굵은 가지들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자기들의 새끼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 모든 민족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31:6).
이 대목은 아시리아인을 두고 말해지는데, 그들을 수단으로 영적 (평면의) 인간(the spiritual man)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에덴의 동산에 비교되어진다.
다윗서에서: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모든 그분의 천사들아, 땅으로부터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고래들아, 과일 나무들아, 야생 동물아,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짐승아,
기는 것이여, 그리고 날고 있는 새여 (시. 148:2, 7, 9-10).
위 구절에서의 언급은 같은 것(한 가지 것)에 관해서이다. “고래”, “과일 나무”, “야생 동물”, “짐승”. “기는 것”, “새” 들이 인간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을 의미하지 않으면 그것들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불러지지도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짐승들”과 “땅의” “야생 동물들”, 그리고 “짐승들”과 “들판의” “야생 동물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해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선들이 “짐승들”이라 불리는데, 천국에서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동물들”이라 불리는 것과 꼭 같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서 모두에서:
모든 천사들이, 그리고 원로들이, 그리고 네 동물들이 왕좌를 빙둘러 섰다,
그리고 자기들의 얼굴을 왕좌 앞에 떨구었다, 그리고 어린 양을 경배했다
(계. 7:11; 19:4).
복음을 가진 이들은 창조물이라 불린 그들에게 전도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새로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 안으로 가라, 그리고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 (막. 16:15).

이런 말들이 거듭남에 관련하여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앞 구절(24절)에서 말해졌던 바와 뒷 구절(25절)로부터 분명하다, 즉 땅은 “생 혼, 짐승, 그리고 땅의 야생 동물”을 낳았다, 이에 반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땅의 야생 동물을” 만드셨다 라고 말해졌다, 그리고 “짐승”의 순서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리고 그후 그가 천적 수준이 되어갈 때까지, 인간은 자신에 관한 것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로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여기서(25절)는 또 다른 순서가 있다, 그리고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되었다.

그 다음 인간이 이해력에 속하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이야기할 때,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참된 것 안에 있음과 선인 것 안에 있음을 확증할 때 그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안에 있음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 사람에 의해 낳는 것들은 생명이 있음이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들의 새들”이라 불리운다. 그가 이해함에 속하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뜻함에 속해 있는 신앙에서 파생된 사랑으로부터 진리들을 이야기하고, 선들을 행할 때, 그는 여섯째 상태 안에 있다; 그 다음 그가 낳는 것은 “생 혼”, 그리고 “짐승”이라 불린다. 그리고 그 다음 그가 신앙으로부터 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하느님의 형상(image)”인 영적 (평면의) 인간(a spititual man)이 되어 간다. 이것이 지금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26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태고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셨던 이 교회인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사람(a Man) 같이 나타나셨다; 이 대목에 관련하여서는 많은 말을 한참 더 해야 하겠지만, 때가 아직 도착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자기들을 두고 아무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단지 주님 자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들에 국한해 사용했다; 그들이 자신을 “사람들”이라 부르지 않았으나 단지 자신들 안에 있는 어떤 것들, 즉 사랑으로부터의 모든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진리를 두고 (“사람” 칭호를 붙였는데), 자기들이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가졌음을 지각했다. 그들이 “사람으로부터”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해서 예언서들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지혜와 총명; 고로 거듭나지는 모든 이(까지도 뜻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나는 땅을 잘 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공허하고 텅빔 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잘 보았고 보니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은 도망가 버렸다 (예. 4:23, 25).
아래 구절, 이사야서에서는 내적 의미에서 , “사람”에 의해 거듭나는 인물이 뜻해지고, 최고 의미에서는 한 분 사람으로서의 주님 자신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를 만들어 내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땅을 만들었다, 그 위에 사람을 창조했다; 나, 내 손들이 천국들을 펼쳤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에게 나는 명령했다 (이. 45:11, 12).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으로서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에스겔서를 보자:
광활한 공간 위쪽에, 사파이어 보석의 나타남 같은, 왕좌의 모습이 (있고),
그것 위에 사람의 나타남 같은 모습이 (계셨다) (겔. 1:26).
그리고 다니엘에 의해 보여질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불리셨다. 다니엘서에서: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을
사용하시어 왔다, 그리고 날들의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그분 앞 가까이 데려왔다; 그리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고,
모든 백성, 민족, 언어들이 그분을 섬기도록 했다; 그분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분의 왕국은 파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단. 7:13, 14).
주님 역시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라 부르신다, 그리고 다니엘서와 같이, 영광 안에서 그분이 오심을 미리 말하시고 있다:
그때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하늘의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다; “권능과 큰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다. 이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왕국만에 관련되는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있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적 의미는 그것의 권능과 영광을 파생시킨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형상”을 수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이해했다. 인간은 자기가 천사와 영들을 통하여 주님의 통치하심 아래 있다는 것, 모든 이 각각과 더불어 최소한 두 영들과 두 천사들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다. 영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교통한다. 영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와, 천사들을 수단으로 천국과,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의 교통이 없으면, 인간은 전혀 살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의존된다. 고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가 버린다면, 그는 그 즉시 사멸되고 말리라.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있다면, 거듭날 때와 전혀 딴판이다. 타락하는 동안 악령이 그와 함께 있고, 악령이 그를 좌지우지 하는 바, 비록 천사가 현존하지만, 천사는 그가 최고로 수준 낮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가 어떤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해보는 것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사실상 그가 선 쪽으로 구부려지게 하는 것은 탐욕들을 수단으로, 진리 쪽으로는 감각들의 오류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이때에도 인간은 그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하여 영들의 세계와 교통을 한다, 그러나 천국과의 교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악령이 통치하고 천사들은 악령들의 통치를 막으려 하는 수준, 소극적 자세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날 때, 천사가 통치하고, 그래서 그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로 감화된다, 그리고 악들과 거짓들에 관련해서는 그것들에 대한 걱정과 공포 수준에서만 그치고 있다. 실로 천사들이 그를 인도하나, 오직 봉사할 뿐인데, 그 이유는 주님 만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인간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로 말해지지만, 여전히 주님만이 통치하시고 배치하시기 때문에, 다음 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형상 안에서 그를 창조하셨다”라고 단수로 말해진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그런고로 여호와, 너를 되찾으신 자, 그리고 너를 자궁으로부터 만들어내신 그분,
나 여호와가 모든 것들을 만들고, 천국들을 펼치시며,
나 자신에 의해 땅을 퍼트린다 (이. 44:24).

“형상”에 주목해보자. 형상(image)은 모습(likness)은 아니나, 모습에 따라 있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에 따라서(after) 우리의 형상 (안)에서 만들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영적 인간이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습”, 또는 유사함(similitude)이다. 이 장에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다음 장에서는 천적 (평면의) 인간이 다루어진다. “형상”인 영적 (평면의) 인간이 주님에 의해 “빛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요한복음서에서:
어둠에서 걷는 자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너희가 빛을 가지는 동안,
너희는 빛의 아들일런지 모른다 (요. 12:35, 36).
그분은 또한 “친구”라고 일컬으신다:
만일 너희가 내가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다
(요. 15:14-15).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 이 인간은 “모습(likeness)”인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 운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가 아니고, 육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13).

인간이 영적 (평면)에 있는 한, 그의 통치권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 쪽으로 진행된다. 하여 26절에서 말해지는 바: “그것들로 바다의 고기 위에서, 그리고 하늘들의 새 위에서, 그리고 짐승 위에서, 그리고 모든 땅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하자.” 그러나 그가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갈 때, 그래서 그가 사랑으로부터 행할 때, 그러면 그의 통치권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 쪽으로 진행한다. 주님께서 다윗서에서 자신을 묘사하시는데, 더불어 그분의 모습인 천적 평면의 인간도 묘사 하신다:
당신은 그를 당신 손으로부터의 일들 위에서 통치권을 가지게 만드셨다;
당신은 그분의 발 아래 모든 것들, 양떼와 모든 가축떼, 또한 들판의 짐승들,
하늘들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바다의 길을 통과하는 것이
무엇이든 놓아두셨다 (시. 8:6-8).
이 시편 구절에서,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새, 물고기의 언급이 있다,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하는 사랑으로부터 진행하는 바, 영적 인간과 다르다. 하여 영적 인간의 경우는 이해력에 속하는 “물고기들”과 “새”가 먼저 명명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쪽이다; 그리고 “짐승들”은 후에 언급되었다.

27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그분 고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그분은 그를 창조하셨다.
“형상”이 여기서 두 번 언급된 이유는 이러하다. 즉 신앙, 이해력에 속하는데, “그분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이에 반하여 사랑, 의지력에 속하는데, 이것은 영적 인간에서는 뒤에 따라 온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서는 의지 측면인 사랑이 앞에 오는 바, “하느님의 형상”이라 불리운다.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다. 내적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을 수단으로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태고 교회에게는 잘 알려져 있으나, 말씀의 내면의 의미가 이 교회의 후손 사이에서 잃어져 버렸을 때, 이에 따른 비밀들 역시 멸해졌다. 그것들의 결혼들은 행복과 즐거움의 최고의 근원들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들은 결혼에 비교했었는데, 이렇게 함으로 결혼의 더없는 행복을 지각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적 인간인 그들은 내적인 것만으로 기뻐했다. 외적인 것들을 그들은 눈으로 단지 볼 뿐이고 (외적인 것이) 표현한 것만을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외적인 것들은 별 것이 아니었고, 단지 내적인 것 쪽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돌리게 하는 어느 정도의 수단이 되어주는데 불과했다. 하여 천적인 것 쪽으로, 그리고 자기들의 전부되시는 주님 쪽으로, 그 결과 천국의 결혼 쪽으로,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의 결혼들로부터의 행복이 와진다는 것을 지각했다. 영적 인간에게 있는 이해함을 그들은 남성이라 부르고, 뜻함을 여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그들은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 교회로부터 관례가 된 말(speech)의 형체가 왔는데, 이 관례 때문에 교회 자체는 선으로부터 있는 교회의 애착으로부터 마치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 등등의 말 같이, “딸”, 그리고 “처녀”, 그리고 “아내”라 불리웠다. 이 주제를 놓고 살피는 것은 2:23과 3:15에서 있을 것이다.

28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것들에게 말하셨다. 열매를 많이 맺으라, 그리고 번성하라, 그리고 땅을 계속 채우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위에서, 하늘들의 새 위에서, 땅 위에서 기는 살아있는 각기 모두 위에서 통치권을 가져라.
태고 사람들은 이해함과 뜻함,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conjunction)을 결혼이라 불렀던 바, 이 결혼으로부터 생산된 선에 관한 모든 것을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음”, 그리고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번성함”이라 일컬었다. 이리하여 그것들은 예언서들 안에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한 예로 에스겔서를 보자:
나는 너 위에서 인간과 짐승을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번성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너희의 고대 때들 같이 거주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네 시작들에서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람이 네 위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서조차 걷게
해 줄 것이다 (겔. 36:11-12).
위 구절에서 “인간”을 수단으로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영적 인간이 뜻해진다; “고대 때들”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시작들”을 수단으로 홍수 이후 고대 교회가 뜻해진다. 진리 측면인 “번성함”의 언급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선의 측면인 “열매를 많이 맺음”의 언급이 있는 이유는 현재 다루는 대목이 거듭나아지고 있는 인간이지 거듭나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함이 뜻함과, 또는 신앙이 사랑과 하나되어질 때, 그 인간은 주님에 의해 “결혼한 토지”라 일컬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네 토지를 두고 폐물이라 더 이상 칭하지 않고, 헵시바(내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
라 불리워질 것이고, 네 토지는 쁄라(결혼했음)라 부를 것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네 안에서 기뻐하시기 때문, 그리고 네 토지는 결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62:4).
거기로부터 유출되는 열매들은 진리로부터인 바,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은 “딸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말씀 안에서 매우 흔하다. 많은 진리들과 선들이 있을 때,
땅은 “계속 충전되어진다”, 또는 “채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복 주시며 이야기하실 때, 즉 그 인간 위에서 일하실 때, 선과 진리의 광대한 증가가 있어지기 때문인 바,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말하신다:
천국들의 왕국은 겨자-씨 한 알 같은데, 이것을 인간이 가져다가 자기 들판에 뿌렸다,
이것은 모든 씨들 중에서 지극히 작으나, 그것이 성장될 때, 그것은 풀잎들 사이에서
가장 커져서, 나무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천국들의 새들이 와서 그 나무의 가지에
자기들의 둥지를 짓는다 (마. 13:31-32).
“겨자-씨의 한 알”은 인간이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기 이전에서의 인간의 선이다. 하여 이 선은 “모든 씨들 중에서 지극히 작다.”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자기로부터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리고 인간이 지닌 것은 악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남의 상태 안에 있을 경우, 그 사람 안에는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있으나 그 선은 모든 선 중에서 가장 작은 선이다.
좀 더 설명하면, 신앙이 사랑과 접합할 때, 신앙은 더 크게 성장하고, “풀잎”이 되고, 마지막으로 결합이 완성되어, “나무”가 된다. 그 다음 “천국들의 새들” (이 구절들에서의 경우 진리들, 또는 지상적인 것들을 명시하고 있음) 이 “그 나뭇가지에 자기들의 둥지를 짓는다.” 이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인간이 영적 (평면의) 수준으로 되어가는 때 뿐만 아니라, 영적 (평면의) 수준에 이르러서도, 그는 전투하는 상태 안에 있는 바, 본문에서 “땅을 정복하고 통치권을 가져라” 라고 말해진다.

29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온 땅의 얼굴들에 있는 씨를 맺는 모든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모든 나무를 준다; 씨를 산출하는 나무, 그것은 너에게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만으로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것들은 천적 식량이라 불리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을 가지고 기뻐해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기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 하여 영적 식량이라 불리운다. 자연적 인간도 위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 가지고 즐거워해진다. 이것이 그의 생명 속에 있는 바, 식량이라 불리는데, 간략히 말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존재한다. 영적 인간이 여기서 다루어지는 바, 그의 영적 식량이 표현물을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가 있는 나무”와 같다. 일반적으로는 “씨를 산출하는 나무” 이다. 그의 자연적 식량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씨를 맺는 풀잎”은 사용을 중요시하는(주목해서 보는, regards) 각각 모두의 진리이다; “열매가 있는 나무”는 신앙으로부터의 선이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식량, 그러나 “열매를 생산하는 씨”는 그분이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주는 식량이다. 그러므로 “씨를 산출하는 나무, 네게 그것은 식량을 위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천적 식량이 나무로부터의 열매라 불리우는 것은 천적 인간이 취급되는 다음 장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여기서는 이를 확증하는 수준에서 에스겔서로부터 주님의 이 말들만을 인용해보자:
강가, 거기로부터 강둑 위, 이쪽에, 저쪽에, 식량의 각각 모두의 나무가 올라오는데,
이 나무의 잎은 시들지 않고, 거기로부터 열매가 사라지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달 안에서 다시 태어나진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성소로부터의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량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2).
“성소로부터 유출되는 물들”은 “성소”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이다. “열매”는 지혜,
이것이 그들을 위한 식량일 것이다; “잎”은 그들의 사용(use)을 위해 있게 될 총명이
다, 그리고 이 사용이 “치료약”이라 불려진다. 그러나 이 영적 식량이 “풀잎”이라 불리는데, 다윗서로부터 나타난다:
나의 목자, 나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서는 나로 풀잎의 초장에
눕게 만드신다 (시. 23:1,2).

30절. 그리고 땅의 각각 모두의 야생 동물에게, 그리고 하늘들의 각각 모두의 새에게, 그리고 살아있는 혼이 있는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 각각 모두의 푸른 풀잎은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있었다.
동일한 인간의 자연적 평면의 음식물이 여기서 묘사되어져 있다. 그의 자연물이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고, 이것에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이 식량을 위해 주어져 있다. 그의 자연적 식량과 영적 식량 모두 다윗서에서 이렇게 묘사되어져 있다:
여호와께서는 짐승을 위해 풀이 자라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섬김을 위해 풀잎을,
하여 그는 땅으로부터 빵을 낳을런지 모른다 (시. 104:14),
이 구절에서 “짐승”은 11,12절에서 언급된 땅의 야생 동물과 하늘들의 새 모두를 표
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 있다.

“야채와 풀잎의 푸른 것” 만이 자연적 인간을 위한 식량으로 묘사된 이유는 이러하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이 영적으로 만들어질 때, 그는 전투를 꾸준히 실시해간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원”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전, 탐욕들이 통치권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전체 인간은 오로지 탐욕들과 이 탐욕들로부터 파생된 거짓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동안 이런 탐욕들과거짓들이 한방에 폐지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한방에 폐지되면 그가 획득하고 있는 생명의 전부가 탐욕들과 거짓들인데, 한방에 그의 모든 생명이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이 인간과 더불어 계속하는 짓을 내버려두다 보면, 악령들은 인간의 탐욕들을 흥분시키는데, 이 흥분으로 인해 이것들이 느슨해지는 틈이 생기는데, 이는 무수한 방법들에서 있고,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하여 개혁되어질 수 있는 쪽으로 구부려질 수 있다. 전투 시기에서, 악령들은 선하고 참된 것 모두에 맞서, 즉 주님을 향하고 있는 사랑과 신앙, 이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극도의 미움을 결과 맺는 바, 풀잎의 푸른 것과 야채에 비교되는 식량밖에 그 인간에게 남기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씨를 맺는 풀잎, 그리고 열매 있는 나무에 비교되는 식량 역시 주신다. 이 식량이란 환희와 기쁨과 더불어 있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들이다.; 그리고 이 식량을 주님께서는 간헐적으로 인간에게 주신다.
주님께서 인간을 매 순간, 어쩌면 각각 모두의 순간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방어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에 맞서는 영들의 세계 안에서 우세를 떨치는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미워함의 결과로 곧바로 사멸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의 확실함을 내가 확언할 수 있는데, 나는 (신체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년 동안 다른 삶 안에 있는 영들과 연합되어 왔었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최악의 영들과도 (접촉)되었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수 천의 영들에 둘러싸인 채로 그들이 독액을 내품는 것도 (당하게) 허용되어진 바 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에서 나에게 떼지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내 머리털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이 안전했던 것은 주님의 보호 덕택이었다. 이런 저런 많은 경험들로부터 나는 영들의 세계와 그곳의 본성에 관하여,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거듭나는 이들의 전투에 관하여도 통째로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의심없는 신앙으로 믿어짐에서 이런 일반적 묘사만으로 잘 교육될 자는 없을 것이다. 세부적 사항들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다음 장에서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3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고, 바라보시니 그것은 참 선 이었다.
이 상태는 “참 선”이라 불린다. 앞의 상태에서는 단지 “선”이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지금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과 하나(one)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로 결혼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과되어져 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
로부터 있는 모두가 천적 (수준)이라 불려진다; 전자는 이해력에 속하고 , 후자는 그
의 의지력에 속한다.

인간 거듭남의 때들과 상태들은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여섯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의 창조의 날이라 불리어진다; 그 이유가, 점차로, 전혀 인간이지도 않음으로부터, 그는 처음 한 가지씩 어떤 것이 되어간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그는 여섯째 날까지 도달한다. 여섯째 날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 되어간다.

한편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 악들과 거짓들에 맞서 계속적으로 싸우신다. 그리고 전투들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 안에서 그를 확증하신다. 전투의 때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예언서들에서 거듭남은 하느님의 손가락의 일이라 불리어진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을 원리로하여 행동할 때까지 쉬시지 않는다; 그 다음 전투가 중지된다, 일이 꽤 많이 진전되어 갔을 때,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지는 바, 이것이 “참 선”이라 불리워 진다; 그 이유는 그 때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으로서 그를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령들은 떠난다. 그리고 선한 영들이 악령들의 자리에 들어 앉는다. 그리고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또는 천적인 낙원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의 몫이다.

이상 살핀 내용은 말씀의 내적 의미이고, 말씀 속의 최고의 생명이며, 글자의 뜻으로부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여기에 담긴 비밀들은 너무나 많아 이 작은 몇 페이지로 그것들을 펼쳐 전개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은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매우 작은 한, 두 가지, 즉 거듭남이 이 장에서 취급된다는 것, 이 거듭남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내적 인간으로 진행한다는 것 정도 뿐이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것은 이러하다: 그들은 글자 안에 있는 것의 어떤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단 하나의 단어를 놓고서도 그러하다; 더욱이 그들은 말씀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들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들, 성들, 강들, 인물들의 이름은 더 더욱 모른다. 그들은 단어들과 이름들에 의해 의미된 것들로부터서만 생각(idea)을 가진다. 고로 낙원에 있는 아담을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를 지각하는데, 그럼에도 그 교회가 아닌, 그 교회 속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각한다. 노아를 수단으로 그들은 태고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 잔존하여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한다. 아브라함을 수단으로 그들은 그 개인을 결코 지각하지 않고, 그가 표현했던 것, 즉 구원해주는 신앙을 지각할 뿐이다; 이 외 훨씬 많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름들과 단어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지각하고 있다.

말씀 안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의 문체가 있다. 첫 번째 문체는 태고 교회로부터의 문체이다. 표현의 이 형식은 지상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언급될 때,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표현물을 수단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자기들에게 더 생명을 주도록 하기 위하여 어
떤 종류의 역사적 시리즈들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아주 높은 등급에서 기쁨을 주었다. 이 문체로부터 한나가 예언했다, 말하기를:
높고, 높은 것을 말하라! 고대의 것이 네 입으로부터 나오게 하라 (삼상 2:3).
이런 표현들이 다윗서에서 “옛 (시절)로부터의 어두운 말들”이라 일컬어졌다. 창조에 관한 세부 사항들, 에덴의 동산, 등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온 것들을 모세가 태고 교회의 후손들로부터 가졌다.
두 번째 문체는 역사물이다. 이는 안쪽으로는 아브람의 때로부터 있는 모세의 책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로부터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이 책들 안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그것이 글자의 의미에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들 모두는 내적 의미에서는 아주 다른 것들을 일반적,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뒤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그것들 순서 안에서 (열거 된다).
세 번째 문체는 예언적인 것이다. 이것은 태고 교회에서 아주 높게 받들어 모시다시피 해 왔던 말들로부터 태어났다. 어쨌든 이 문체는 태고 교회 문체처럼 연결되거나 역사적 형체 안에 있지 않고, 깨어져 있고, 내적 의미 안에서가 아니면 이해는 불가능에 가까웁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있다. 그리고 이 비밀들은 아름답게 연결되는 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에; 교회의 많은 상태들에; 천국 자체에;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 관련되고 있다.
네 번째 문체는 다윗의 시편들의 것이다. 이는 예언적 문체와 통상적 (우리의) 언어 사이인 중간에 해당되는 문체이다. 여기서 주님은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물 아래, 내적 의미 안에서 취급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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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2 장

성경: 창세기 2장

1.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2.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 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 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들과 땅의 태생이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5.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 할 사람이 없었다.
6. 그리고 그분께서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자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 졌다.
7.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 다.
8.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동쪽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
9.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식품으로 좋은 모든 나 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 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10.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 다.
11.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땅을 에워싸고 있 다.
12. 이 토지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 었다.
13.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땅을 에워싸고 있다.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고, 이 강은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15.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16.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 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 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리라.
19.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 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20.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할 도움은 발견되지 않았다.
21.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 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22.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빗대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왔다.
23.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지금 이는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 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녀가 사람으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24.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25.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 모두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이 구절은 이제 인간이 “여섯째 날”을 통과하여 영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늘”은 그의 내적 인간이고, “땅”은 그의 외적 인간이다. “그들의 군대”란 사랑, 신앙,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이 세 가지는 앞 장에서 “큰 발광체”와 “별”로 의미되었었다. 내적 인간이 “하늘”이라, 외적 인간이 “땅”이라 불리우는 것은 앞 장에서 이미 인용된 구절들로부터 명백한 바, 이사야서를 더 추가해본다:
나는 사람을 속이 찬 금보다, 오히려 오빌의 귀한 금보다 더 드물어지게 만들겠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들을 공포로 세게 칠 것이고,
땅은 그것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 13:12-13).
너는 하늘들을 뻗치고, 땅의 기초를 놓는 너를 만든 자 여호와를 잊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네 입에 내 말들을 놓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내 손의 그림자 안에 감출 것이다,
하여 나는 하늘들을 뻗게하고, 땅의 기초를 놓을 것이다 (이. 51:13, 16).
위 인용 구절을 보면 “하늘”과 “땅”이 사람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비록 그것들이 태고 교회를 첫째로 언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말씀의 내면들은 교회에 관해 말해질 때 교회 속의 멤버들 각각 모두 역시 언급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 교인이 세부적 측면에서 교회가 아니다면, 일반적 측면의 교회의 부분이 되는 것도 가능할 리 없기 때문, 즉 주님의 성전이 아닌 자가 성전에 의해 의미되는 것, 즉 천국과 교회일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태고 교회는 단수 표현을 써서 “사람”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여섯째 날”이 되어갔을 때,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 속의 모든 군대”가 “마무리되어졌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때 사랑과 믿음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면 신앙이 아닌 사랑이, 바꿔말하면 영적 수준의 원리가 아닌 천적 수준의 원리가 그의 제일가는 원리가 된다. 즉 천적 인간(a celestial man)이 되는 것이다.

2, 3절.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 주님께서 육 일 동안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으므로 주님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신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기에 일곱째 날은 성별되었고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은 쉼을 의미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창조되었고, 형태를 갖추었고, 만들어졌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는 것,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안식일이라 불렀다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신비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천적 인간의 본성에 관해 친숙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의 본성에 친숙한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친숙치 못한 결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본성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제 81항에서 잠깐 살핀 바 있다. 일곱째 날에 관한 것,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님(Lord)이다 (막 2:27),
위 구절의 단어들은 주님이 사람 자신이시고,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하고 있다. 천국들 안에서와 땅 위에 있는 그분의 왕국이 그분으로부터 안식일,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 불리운다.
여기서 취급되는 태고 교회는 이 교회 뒤를 이었던 모든 교회를 능가하는 주님의 안식일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에 뒤이어 있는 주님의 가장 깊은 (수준의) 교회 역시 안식일이다; 그리고 거듭나는 모두 각각의 인물도 천적 수준이 되어갈 경우,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인물은 주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 안에서 노동의 날들, 그리고 안식일이었던 일곱째 날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이 교회 안에 설립된 모든 것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련한 표현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것이 전진하고 쉬었을 때의 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광야에서 궤의 여행들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궤가 쉼은 평화의 상태가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궤가 전방을 향해 놓여질 때, 모세가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여호와시여, 그리고 당신의 적들을 흐트시고, 당신의 얼굴 앞에서
당신을 미워한 자들이 도망치게 하십시오. 그리고 궤가 쉴 때, 그는 말했다,
여호와시여, 이스라엘의 천 만(인)에게 돌아오소서 (민. 10:35-36).
위 구절은 궤가 “이스라엘을 위해 쉴 곳을 수색하기 위해” 여호와의 산으로부터 나간 것을 두고 말해졌다 (민 10:33).
천적 인간의 쉼이 이사야서에서 안식일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져 있다:
만일 네가 네 발을 안식일로부터 되돌려, 내 거룩함의 날에 네 바램을 행하지 않고,
안식일의 것들을 기뻐함들이라 부르고,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존경할 수 있고,
그것을 존대하고, 네 자신의 방법을 행치 않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 너희는 여호와로 즐거워해질 것이고, 나는 땅의 드높다하는 것들 너머에서
네가 태어나지게 할 것이고, 야곱의 유산으로 너희를 먹일 것이다 (이. 58:13-14).
위와 같은 품질이 천적 인간의 품질인 바, 그는 자신의 바램에 따라서가 아닌, 주님의 선한 즐거움, 즉 그분의 “바램”에 따라 행한다. 그리하여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을 향유한다. 여기서 이것이 “땅의 드높다 하는 것 너머 드높여 있는 것”을 수단으로 표현되어 있다. 동시에 외적 고요함과 기쁨, 이는 “야곱의 유산을 가지고 먹여짐”에서 표현되어져 있다.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되기를 시작할 때, 이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고, 이것이 “안식일의 전야(eve)”로서, 유대 교회에서 (안식일 이전 날) 저녁으로부터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킴에 의해 표현되었다. 천적 인간은 이제 말해지게 되는 “아침”이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 또는 “쉼”인 이유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전투는 중지되기 때문이다. 이때 악령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 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접근한다; 이것이 표출되면 악령의 잔존은 가능치도 않아 멀리멀리 떠난다. 사실 전투를 수행한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닌 주님이셨는 바, 본문에서 주님께서 “쉬셨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될 때, 그는 “하느님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그를 위해 싸우시고, 창조하시고, 모양을 내시고 그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그분의 일을 마치셨다” 말해진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는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예언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사람이 “여호와의 손가락의 일, 또는 손의 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고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그를 지은 자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나에게
표시들을 물어라, 너희가 내게 부탁한 내 아들들에 관하여, 그리고 내 손들의 일에
관하여 물어라. 나는 땅을 만들었고, 그것 위에 사람을 창조했다; 나, 내 손이
하늘들을 뻗쳤고,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를 나는 명령했다. 그 이유는 하늘들을
창조하신 여호와, 땅을 모양을 주고 그것을 만드신 하느님 자신이 말하시기 때문;
그분이 그것을 세우신다, 그분은 그것을 공허하게 창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그것을
사람이 살 수 있게 모양을 내셨다; 나는 여호와이고 나 외에 하느님은 없다
(이. 45:11-12, 18, 21).
이로부터서도 분명한 바, 새로운 창조, 또는 거듭남은 주님만의 일이다는 것이다. “창조”, “모양”. 그리고 “만듦”이라는 표현이 아주 구분되게 사용되는데, 즉 “하늘들을 창조함, 땅을 형성함, 그것을 만듦”인데, 이사야서의 다른 장소도 보자:
내 이름에 의해 불리우는 모든 이, 나는 그를 내 영광을 위해 창조했고,
나는 그에게 모양을 주었다, 그렇다, 나는 그를 만들었다 (이. 43:7),
그리고 또한 창세기의 앞장과 이 장에서; “그분은 만드심에 있으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그분의 일로부터 쉬셨다” 는 본문의 구절에서도, 주님이 “창조자(creator)”, “모양을 주시는 분(former)”, 또는 “만드시는 분(maker)”이라 불리는데, 이런 단어 사용법은 내적 의미에서 우리로 구분된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4절. 하늘들과 땅의 태생은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하늘들의 태생과 땅의 태생”은 천적 인간을 형성함(formation)들이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형성함이 취급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풀잎이 아직 자라지 않는다는 점,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는 점, 사람의 모양을 내신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신 점, 이 후에 그분은 모두 각각의 짐승과 하늘들의 새를 만드셨는데, 이 만드심은 이미 앞장에서 있었다는 점; 이런 앞뒤 상황으로 미루어 또다른 사람이 여기서 취급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 더 구별되는 점은, 영적 인간을 취급하는 앞 장에서는 주님이 단순하게 “하느님”으로 불리셨는데, 여기서는 처음 동안은 “여호와 하느님”으로 불리신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지금은 “지면” 그리고 “들판”이 언급되는 반면, 앞 장의 경우는 오직 “땅”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땅”에 앞서 “하늘”이 먼저 언급되고 , 후에 “땅”이 먼저 언급된다; 이런 이유는 “땅”은 외적 인간을, 그리고 “하늘”은 내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인간에서의 재형성(reformation)은 “땅”으로부터,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반면, 여기서 취급되는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5, 6절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6. 그리고 그분께서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자,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졌다.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생산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두가 뜻해진다. 영적 인간의 수준에 남아있는 동안,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땅”이라 불리우나,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될 때, 천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지면(ground)” 그리고 또한 “들판(field)”이라 불리운다. “비”, 이는 곧 이어 “안개”라 불리우는데, 전투가 중지될 때 있는 평화로부터의 고요함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포함하는 것을 지각함은 인간의 상태가 영적 수준으로부터 천적 수준으로 되는 동안의 상태를 알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깊게 감추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 수준인 동안,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순종하거나 내적 인간을 섬기는데 기꺼이 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는 상존한다; 그러나 그가 천적 수준이 될 때,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에의 순종과 섬김은 기꺼이 있는다. 그러므로 전투는 중지되고, 고요함이 결과된다 (87항 참조). 이 고요함이 “비”와 “안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이 둘은 비슷한 수증기여서, 이것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 물을 공급 받거나 적시어진다; 평화의 산물, 이 고요함이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이라 불리는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특별하게는 천적 수준의 영적 근원(a celestial spiritual orgin)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것들과 합리적 마음 속의 것들이다.

전투의 정지, 또는 탐욕들과 거짓들로 야기된 쉼 없음의 정지에서 있는 외적 인간의 평화 속의 고요함에 대한 본성은 평화의 상태에 친숙해 있는 이들에게만 알려질 수 있다. 이 상태의 기쁨은 매우 깊은 수준이어서 기쁨이라는 여하한 생각의 범주를 넘는다: 이것은 전투의 정지 뿐 아니라 내면의 평화로부터 진행하는 생명이고, 감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의 방식 안에서 외적 인간에게 감명을 안긴다;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사랑으로부터의 선, 이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그것들의 생명을 끌어내고, 그때 출생되어진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평화의 고요함을 선물받고,-비에 의해 새로워짐-그리고 악과 거짓인 것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되는데, 주님께서 에스겔서에 이렇게 묘사해 놓으셨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악한 들짐승이 그 토지로부터
중지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숲에서 잠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장소를 빙둘러 내 언덕을 축복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절에 따라 비가 내려오게 할 것이다; 그것은 축복의
비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나무는 그것의 과일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것의 소출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히 자기들의 지면 위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멍에의 고삐를 부수고, 너희들로 자기들을
섬기라고 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해방되게 할 때, 내가 여호와 임을 알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양떼, 내 목장의 양떼이다, 너희는 사람이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 (겔. 34:25-27, 31).
그리고 이것이 “셋째 날”에 결과된다는 것, 이는 말씀에서 “일곱째”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선포되었다:
이틀 후 그분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실 것인데,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알 것이다, 힘껏 알려고 할 것이다; 그분의 나가심은 새벽같이 준비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비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같이 오실 것이다 (호. 6:2-3).
그리고 이 상태가 “들판이 성장함”에 비교되어지고 있는데, 고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에스겔에 의해 선포되어진다:
나는 너로 들판이 성장함 같이 번성하게 했다, 그래서 너는 불어나고 성장했다,
하여 특출하게 꾸며지기에 이르렀다 (겔. 16:7).
그리고 이렇게도 비교되어져 있다:
주님께서 심으신 어린 가지,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하신 일 (이. 60:21).

7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formed),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지면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이 인간은 이전에는 사람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라고 말해졌었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숨을 그의 콧구멍 안으로 불어넣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은 살아있게 만들어졌음이 의미되어 있다.

외적 인간의 생명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앞 두절에 있는 이해함 또는 신앙의 생명, 그리고 이 절에 있는 의지 또는 사랑의 생명이다. 지금까지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더불어 전투에 임함에서 기꺼이 내적 인간에 굴복하고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외적 인간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지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고 섬기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람”을 만든다. 신앙의 생명이 그를 준비시키고,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의 콧구멍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셨다”에 관하여는 이러하다: 고대 시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콧구멍”을 수단으로 냄새 때문에 있는 감사히 여긴 것은 무엇이든, 이것은 지각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졌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여호와에 관련해 반복적으로 쓰여 있는 대목은,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또는 그분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그분은 쉼의 냄새를 맡으셨다”이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은 그분에게 최고로 감사해야 하는 바, “그분은 그분의 콧구멍을 통하여 생명들의 숨을 쉬셨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 즉 주님에 관하여 “콧구멍의 숨”이라 불리어진다 (애4:20).그리고 주님 자신 “그분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면서” 이 구절과 같은 것을 의미해두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며 말하셨다,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생명이 “숨을 쉼”을 수단으로, 그리고 “숨”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진 이유는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들을 수단으로 지각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들의 후손에서는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는 말해진 바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와 같은 것은 깡그리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이것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삶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교하는 것도 이런 흔적 때문이다. 주님 역시 인간의 거듭남을 이야기 하실 때 사용하셨다. 요한복음서에서:
바람은 그것이 바라고 싶은 곳으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것으로부터 소리를 들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 (참) 영으로부터
태어나지는 모두 각각의 사람도 이와 같다. (요. 3:8).
다윗서에서도:
여호와의 말에 의해 천국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의 입의 숨에 의해
그것들 속의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다) (시. 33:6).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그러모으시니, 그들은 끝을 보고, 자기들의 먼지로
되돌아 간다; 당신께서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니, 그들은 창조되었고, 그리고
당신은 지면의 얼굴들을 새로이 하십니다 (시. 104:29-30).
“숨”이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위해 사용된 것은 욥기서로부터도 나타난다:
그분은 인간 안에서 영이시다, 그리고 솨다이의 숨이 그들에게 이해력을 준다 (욥. 32:8).
하느님의 영이 나를 만드셨다, 그리고 솨다이의 호흡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욥. 33:4).

8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동쪽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
“동산”에 의해 총명이, “에덴”에 의해 사랑이, “동쪽”에 의해 주님이 의미되어진다; 결과적으로 “동쪽 에덴의 동산”은 천적 인간의 총명이 의미되고, 이 총명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가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어서 일 경우, 비록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력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다툰다. 고로 마치 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기억력이나 추론력 안으로 흐르는듯 나타난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는 주님이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이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 안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다툼은 없는 바, 그는 이것이 실지로 그렇다고 지각한다. 고로 영적 인간과 더불어 거꾸로 되어 있어 왔던 질서가 천적 인간과 더불어 원위치를 찾은 바가 지금 묘사되어 있다. 이 질서, 또는 사람이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불리어진다. “동쪽에서 에덴 안에 여호와 하느님에 의해 창설된 동산”은 최고의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시다. 가장 깊은 의미(inmost sense)에서, 마찬가지인 보편적 의미에서, 이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인간이 천적 수준이었을 때 그가 위치되는 천국이다. 이런 그 사람의 상태는 그가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마치 그들 사이에 하나의 천사인 듯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동시에 천국 안에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 안에서 그의 모든 생각들, 그리고 생각들로부터의 관념들, 그의 말들과 행동들에 이르기까지 열려있고, 주님으로부터조차도 열려있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는 천적 수준인 것과 영적 수준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의 각각 모두는 그것 내에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동산”이 총명을,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나타난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위로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황폐된 모든 장소를
위로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녀의 광야를 에덴같이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막은 여호와의 동산같이 만드실 것이다; 환희와 즐거움이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고백함과 노래하는 음성(이 들릴 것이다) (이. 51;3).
이 문단에서, “광야”, “환희”, 그리고 “고백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또는 사랑에 관련되는 것을 표현하는 말투이다; 그러나 “사막”, “즐거움”, 그리고 “노래하는 음성”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 또는 이해력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투이다. 전자는 “에덴”과 관련되고, 후자는 “동산”에 관련되고 있다; 이 예언자와 더불어 위 두 표현들은 똑 같은 것에 관하여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이 중의 하나는 천적인 것,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들이다. “에덴에 있는 동산”에 의해 의미된 것은 10절에서 더 보여질지 모른다.

주님이 “동쪽”이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도 나타난다. 에스겔서에서:
그분은 나를 문으로, 동쪽의 길이 쳐다보이기조차 하는 문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잘 보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동쪽의 길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음성과 같았다, 그리고 땅은 그분의 영광을 가지고 빛났다 (겔. 43:1-2, 4).
주님이 “동쪽”이신 결과 때문에 성전 건물 앞에서 그들이 기도할 때 자기들의 얼굴을 동쪽으로 돌리는 거룩한 관습이 표현물인 유대 교회 안에서 우세를 떨쳤다.

9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식량으로 좋은 모든 나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나무”는 지각을; “바라보기에 바람직한 나무”는 진리를 지각함을; “식량으로 좋은 나무”는 선을 지각함을;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무”가 지각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주제가 영적 인간일 경우는 달라진다. 그 이유는 주제의 본성에 서술 부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진리와 선인 것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어떤 내적인 감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지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완전한 바, 그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이고 선인 것에 관하여 알아채고 지식을 얻는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의 것도; 뿐 아니라 자기들에 다가오는 누군가의 품질도 단지 그가 접근만 해도, 그의 사상들의 딱 하나만으로부터도 그의 품질을 알아챈다. 영적 인간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양심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이다; “동산의 중앙에”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있다. 의지(will), 이는 말씀 안에서 “심정(heart)” 이라 불리우는데, 인간과 천사들과 더불어 주님의 제일가는 소유물(possession)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바, 설사 의지가 인간이라 단정할지라도, 의지, 또는 심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의지라 부르는 것인 탐욕은 인간의 것이다. 그 다음 의지가 “동산의 중앙에” 있고, 거기에 생명들의 나무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탐욕만 가지고 있기에, “생명들의 나무”는 주님의 자비이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오는 바,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이다.

그러나 “동산의 나무”의 본성, 또는 지각; “생명들의 나무”, 또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본성; 그리고 “지식의 나무”, 또는 감각적인 것만에서, 또는 기억 속의 지식만에서 근원되는 신앙의 본성은 뒤를 잇는 페이지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10절.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다.
“에덴으로부터의 강”은 사랑으로부터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을 적시는 것”은 총명이 수여되는 것; “거기서부터 네 머리로 갈라졌다”는 것은 뒤 구절에 이어지는 바 같이 네 강들을 수단으로 총명을 묘사함이기 때문이다.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교할 때, 지혜 역시, 그리고 지혜에, “강들”에 관련되는 것들도 비교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단지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일컬었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예언자들 안에도 똑 같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그것들을 비교했고, 때로는 그렇게 불렀다. 이사야서를 보자:
네 빛은 어둠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짙은 어둠은 낮의 빛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물로 적셔진 동산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들의 배출구처럼 너의 물들은 마르지 않는다 (이. 58:10-11).
신앙과 사랑을 받는 이들을 취급하면서. 다시 거듭나는 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이 심어짐은 골짜기들 같고, 강가의 동산들 같고, 여호와께서 심은 침향목 같고,
물들 옆에 있는 삼목들 같다 (민. 24:6).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되다; 그는 물들 옆에 심은 나무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뿌리들을 강가로 내보낸다 (예. 17:7-8).
에스겔서에서 거듭나는 자가 동산과 나무에 비교되지 않고 그렇게 불리운다:
물들이 그녀를 자라게 만들었다, 물들의 깊음이 그녀를 위로 치솟게 했다,
강이 그녀가 심어진 주위를 빙둘러 달렸다, 그리고 그것의 수로들을 들판의 모든
나무들에게 내보냈다; 그녀는 그녀의 위대함 안에서, 그녀의 가지들의 길이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졌다, 그 이유가 그녀의 뿌리가 많은 물들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삼나무는 그녀를 감추이게 하지 못했다; 전나무는 그녀의
굵은 가지들 같지 않았다, 그리고 플라타너스나무는 그녀의 가지들 같지 않았다,
하느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그녀의 아름다움에서 그녀와 동등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그녀의 가지를 많게 해서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동산에 있던 에덴의 모든 나무들은 그녀를 부러워했다 (겔. 31:4, 7-9).
이 인용 구절로부터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또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동산”에 비교했을 때, 그들은 적시어지게 하는 수단인 “물들”과 “강들”을 추가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물들과 강들이 그의 성장을 있게한 것들을 뜻했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비록 지혜와 총명이 인간 안에서 나타난다 해도, 그것들은, 말했던 바와 같이, 주님만으로부터 있기에 에스겔서에서 유사한 표현물을 수단으로 이렇게 선포되었다:
잘 보니, 물들이 동쪽에 있는 집의 문지방 아래로부터 유출되었다;
그 이유는 집의 얼굴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물들은
동쪽을 향하여 있는 경계선 밖으로 유출하여, 그리고 평지로 내려간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바다 안으로 인도된 물들이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강의 물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기는 살아있는 모두 각각의 혼은 살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강둑 위 강가, 이쪽과 저쪽에, 식량을 위한 모든 나무들이 올라온다, 이들의 잎은
시들지 않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소진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달들 안에서 다시 태어나진다, 그 이유는 그것의 물들이 성소로부터 유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식량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을 것이다 (겔. 47:1, 8-9, 12).
여기서 주님이 “동쪽”에 의해, 그리고 “성소”에 의해 의미되고, 거기로부터 물들과 강물들이 유출되었다. 계시록서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하느님과 어린 양의 왕좌로부터 나오는 수정 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생명의 물의 순수한 강을 보여주었다. 도성의 길
한 가운데에서 흐르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어,
열 두 과일들을 맺는데, 그 나무의 과일은 매달 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의 잎들은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해 있었다 (계. 22:1-2).

11,12절.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12. 이 토지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었다.
“첫째” 강, 또는 “비손”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총명을 의미한다; “하윌라 토지”는 마음(mind)을 의미한다; “금”은 선을 의미한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 “금”은 두 번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천적 인간이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을 서술해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지혜와 지혜로부터 파생된 총명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들은 기억 속의 지식 밖에는 거의 알지 못한 바, 그들은 총명과 지혜, 그리고 신앙을 기억 속의 지식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외적 인간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조차 없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의지력과 이해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개의 마음을 구성한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의 각각은 구분된다, 그렇다, 아주 확실히 구분된다, 그리고 천국 전체는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에 의거 최고로 구분이 잘되는 방식 안에서 정돈되어 있다. 이것은 무수하기도 하다.

더 나아가 (천국 전체에) 알려져있는 바,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지혜는 없다는 것,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어떤 총명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는 선은 없다는 것;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이 실지로 이런 이름들에 의해 불려지는데, 그것들은 가짜이다.

말씀 안에서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금”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표현되어진다는 것보다 더 공통적인 것은 없을지 모른다. (언약)궤에, 성전에, 금빛의 탁자에, 촛대에, 그릇들에, 그리고 아론의 의복 위에 있는 모든 금은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했고 표현했다. 예언서들에서도 그러하다. 에스겔서를 보자:
네 지혜와 네 총명 안에서 너는 네 재물을 얻었다,
그리고 네 금고에 금과 은을 얻었다 (겔. 28:4).
거기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의 것이 “금과 은”이다는 것, 또는 선한 것과 참된 것임은 명백하게 말해진다, 그 이유가 “은”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언약)궤에서, 성전에서도 그러하다. 이시야서에서:
수많은 낙타들, 미디안과 에바의 단봉 낙타들이 너희를 덮을 것이다;
그것들 모두는 세바로부터 올 것이다, 그것들은 금과 향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호와의 찬양들을 내보일(show forth) 것이다 (이. 60:6).
고로 또한:
동쪽으로부터 현자들이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 그분에게 와서, 꿇어 그분을 경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금고를 열어, 그들은 그분에게 금, 그리고 유향, 그리고
몰약을 선물들로 바쳤다 (마. 2:1, 11).
여기서도 역시 “금”은 선을 의미한다; “유향과 몰약”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때문에 감사히 여기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것들은 “여호와의 찬양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다윗서에서 말해진다:
그는 살(live)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세바의 금으로부터 주어질 것이다; 기도가 그를
위해 계속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매일 그는 그에게 복을 빌 것이다 (시. 72:15).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말씀 안에서 귀중한 “돌들”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판단(judgment)의 가슴받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아론의 에봇의 어깨 위에서와 같다. 가슴받이에서,“금, 푸른색, 빛나는 심홍색, 두 번 물들인 진홍색, 그리고 꼬아만든 고운 아마포”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귀중한 “돌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에봇의 어깨 위, 두 개의 “기억함의 돌들”, 이는 호마노 돌인데, 금으로 박아 끼워 놓였다 (출 28:9-22). 귀중한 돌들의 이 의미는 에스겔서로부터도 명백하다, 거기서, 지혜와 총명인 천국의 재물을 소유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말해진다:
지혜가 가득하고, 아름다움이 완전한 너는 하느님의 동산, 에덴 안에 있어 왔다;
귀중한 모두 각각의 돌이 네 덮개였다, 홍옥 , 황옥, 금강석, 녹주석, 호마노,
그리고 벽옥; 청옥, 녹옥수, 녹옥, 그리고 금; 네 작은 북(taboret)과 네 피리에 관한
솜씨가 네 안에 있었다; 네가 창조되었던 그 날에 그것들이 준비되어졌다;
너는 네가 창조된 날로부터 네 길들에서 완전하였다 (겔. 28:12-13, 15),
위의 말들이 돌들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신앙으로부터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 각 돌은 신앙 속의 어떤 필수 요소를 표현하였다.

태고 사람들은 “토지들”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이해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가나안의 토지나 시온 산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관념을 가지는 것과 같다. 태고인들은 이런 장소들이 언급될 때, 어떤 토지나 산 자체를 생각하는 비중보다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만에 더 생각이 쏠려 있었다. 이 구절의 “하윌라 토지”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는 창세기 25:18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 즉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시리아로 향하는 , 이집트 앞 수르(Shur)에 이르기까지에서 거주했다” 이다. 천국의 관념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말들로부터 총명, 그리고 총명으로부터 흐르는 것 밖에 더 지각하는 것이 없다. 비손 강이 “하윌라의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에서 말한 “에워 쌈”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은 안으로 흐름을 지각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아론의 어깨 위 호마노 돌들인데, 이 돌들은 금으로 에워싸 박아끼워져 있다 (출. 28:11). 그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지각한다. 많은 다른 예들의 경우도 있다.

13절.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둘째 강”은 “기혼”이라 불리우는데, 선한 것과 참된 것,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스의 토지”는 마음(mind) 또는 능력(faculty)을 의미한다. 마음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 구성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이해력에 속해 있다.

“구스의 토지”, 또는 에티오피아, 더 나아가, 금, 귀중한 돌들, 그리고 향신료들이 풍부함은 앞서 말했듯이, 선, 진리, 그리고 이 둘로부터 파생되는 감사히 여기는 것들, 말하자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의 것들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사야 60:6; 마태복음 2:1, 11; 시 72:15를 인용한 페이지로부터 분명해진다. 비슷한 것들이 말씀에서 “구스”, 또는 “에티오피아”, 그리고 “세바”를 수단으로 뜻해지는데, “구스의 강들”이 언급된 스바냐서로부터 명백해진다:
아침에 그분은 빛을 위해 그분의 판단을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때 나는
명료한 언어를 가지고 백성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런지 모르고 한 개의 어깨로(일치 단결하여) 그분을
섬길런지 모른다; 구스의 강들의 출입구로부터 나의 청원자들이 나의 공물을
가져올 것이다 (습. 3:5, 9-10).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북쪽과 남쪽의 왕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금과 은의 보물 위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바람직한 모든 것들 위에서
권능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리비아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이 그의 발걸음
아래 있을 것이다 (단. 11:43),
거기서 “이집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명시한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인들”은 지식들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서:
세바와 라아마의 상인들, 이들은 모든 향신료의 최고 등급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귀중한 돌에서, 그리고 금에서 네 상인들이었다 (겔. 27:22),
이들을 수단으로 같은 방식에서 신앙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진다. 이렇게 다윗서에서도, 주님을, 결과적으로 천적 인간을 이야기 하면서:
그의 날들에서 정의로운 자가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달이 없을 때까지 평화의
풍부함이 있을 것이다, 다르싯의 왕들과 섬들의 왕들이 선물을 가져올 것이다,
시바와 시바의 왕들이 선물을 바칠 것이다.
이 말들은 앞 절과 뒤잇는 절의 연결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신앙의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것들이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의 여왕, 그리고 그녀가 내놓은 어려운 질문들, 그리고 솔로몬에게 향신료, 금, 그리고 귀중한 돌들에 의해서도 의미되었다 (왕상. 10:1-2). 그 이유는 예언서 뿐아니라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포함된 모든 것들도 의미하고, 표현하고, 그리고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고, 이 강은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힛데겔 강”은 추론함(reason)이다, 또는 추론으로부터의 명민함(clearsightness)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이다;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는 강”은 추론의 명민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속에 있는 합리적인 마음 안으로 옴을 의미한다; “브라데”, 또는 “유브라데”는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 지식은 최말단(ultimate), 또는 경계선(boundary)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 또는 인간의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에스겔서를 보자:
잘 보라, 앗수르는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 꽤 많은 가지들과 그늘 드리우는
숲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높이는 드높다; 그리고 그것의 분지는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었다. 물들이 그녀를 자라게 만들었다, 물들의 깊음이 그녀를
드높게 했다, 강이 그녀의 심어진 곳을 빙둘러 달렸다 (겔. 31:3-4).
합리적인 것이 “레바논에 있는 삼나무”라 불리운다;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는 분지”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기억 속의 지식이 이 서약 안에 있는 바, 이사야서에서 이에 대해 더 명료해질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집트에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수르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앗수르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앗수르와 더불어 세 번째 되어,
토지 한 가운데에서 복될 것인 바, 여호와 체바옫(Zebaoth)께서 복 주시며 말하시기를,
이집트 내 백성, 그리고 내 손의 일들 앗수르, 그리고 내 상속자 이스라엘은
복 되다 (이. 19:23-25).
위 구절 내지 다른 인용 구절에서도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앗수르에 의해 추론함이, 이스라엘에 의해 총명이 의미된다.

“이집트”에 의해서와 같이 “유브라데” 역시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감각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얻어진다. 이는 예언서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미가서를 보자:
나의 적(she-enemy)이 말했다, 여호와 네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그가 네 성벽들을
건설하는 날, 그 날 법령이 멀리 옮겨질 것이다; 그 날 그는 앗수르로부터 네게,
그리고 이집트에게, 그리고 [유브라데] 강에 올 것이다 (미. 7:10-12).
이렇게 예언자들은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어가도록 그를 거듭나게 할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네가 시홀의 물들을 마시려고 이집트의 길에서 무엇을 하려드느냐?
네가 [유브라데]강의 물들을 마시려고 앗수르의 길에서 무엇을 하려드느냐? (예. 2:18),
거기서 “이집트”와 “유브라데”도 마찬가지로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부터 파생된 추론들이 의미되는 바,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포도나무를 이집트로부터 나가게 만드셨다; 당신은 민족들을 몰아내셨다;
당신은 그녀를 심으셨다; 당신은 그녀의 어린 가지들이 바다에까지 뻗게 하셨다,
그리고 그녀의 굵은 가지들은 (유브라데) 강까지로 뻗게 하셨다 (시. 80:8, 11),
거기서 역시 “유브라데 강”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으로부터의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유브라데는 앗시리아로 향한 이스라엘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마치 기억으로부터의 지식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총명과 지혜의 경계선인 것과 같다. 같은 것이 아브라함에 의해 말해진 것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네 씨에게 나는 이 토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에 이르러
줄 것이다 (창. 15:18).
이 두 경계선들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적 질서의 본성, 또는 생명 속의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는 이런 강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지혜가 진행되고, 지혜를 통하여 총명이, 총명을 통하여, 추론함이, 추론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생기 있어진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고, 천적 인간들은 이와 같은 바, 그들은 “슬기롭고, 총명하며, 그리고 지식이 있는 자”이다 (신. 1:13,15). 그런고로 궤를 건축한 브살렐에 관해 말해지기를:
하느님의 영을 가지고, 지혜 안을, 이해력을, 지식을, 그리고
그의 모든 일을 채우셨다 (출. 31:3, 35:31, 36:1-2).

15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이미 상술했듯, “에덴의 동산”을 수단으로 천적 인간의 모든 것이 의미되었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것을 즐기도록 천적 인간에게 허락되어졌다가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었다.

천적 인간은 인정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들,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는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도 천적 인간과 참으로 똑같게 인정하나, 그 인정은 입을 가지고서 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승인도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그는 그것이 자기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잃는 것은 자신을 멸하게 한다고 상상한다.

지헤, 총명, 추론, 지식은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두로부터 분명하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집주인, 즉 포도원을 창설하고, 그 것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를 준 주인에 비유되고 있다 (21:33).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진리의 참 영이 모든 진리 안으로 너희를 안내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으로부터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듣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나를 신성화 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는 나의 것을
받을 것이고, [그것]을 너희에게 선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 16:13-14).
인간은 천국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 3:27).
이것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천국의 신비에 조금만이라도 친숙해진 이들에게는 알려져 있다

16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어도 된다.
“모두 각각의 나무를 먹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으로부터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나무”는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계시들을 수단으로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과, 그리고 천사들과 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환상과 꿈에 의해서도 가르쳐졌다. 이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자, 낙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지각을 가졌다, 하여 그들은 기억 안에 쌓아둔 것으로부터 꺼내 되튀겨 봄으로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의 여부를 즉시 지각했고, 거짓된 어떤 것 자체가 표출될 때,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공포가 엄습하는 바 그것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이것이 천사들의 상태이다. 후에, 태고 교회의 이 지각 대신, 이전에 계시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졌다, 그 후에는 말씀 안에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져 (지금까지에) 이르고 있다.

17절.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설명해 온 것까지 취합해보면, 이 구절의 말들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다면 모두 각각의 지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참되고 선한 것과 친숙해지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다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천적 등급)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과 기억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사하고 싶은 바램(desire)이 다음 장에서 취급되듯이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타락하는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두 각각의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서는 (생각에는) 거짓들만, 생활에는 악만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 심정에서 말한다. 만일 내가 신앙에 관해, 그리고 신앙에 관련한 모든 것에 관해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내가 보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고, 내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니,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반대되어져 있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자신을 확증한다. 고로 이 사람은 천적인 것과 신성인 것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가르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바램의 실현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이런 식을 수단으로 더 바랄수록 그는 더 눈먼 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수준, 급기야는 영적인 것, 영원한 생명, 어떤 것이든 믿지 않게되고 만다. 이런 것은 당사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이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는 것” 이다. 누군가가 이로부터 더 먹을 수록 그는 더 죽은 자가 된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슬기로워진 사람은 자기 심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반드시 믿어져야만 한다는 것, 즉 주님이 말씀에서 이야기 하신 것은 반드시 믿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그는 자기 생각들을 규율한다. 그는 (이 원리를 원칙으로) 추론으로부터의 것들,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자연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확증이 있지 않은 것들은 한쪽으로 내던진다.

인간은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거짓된 것조차도, 그리고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함은 그의 원리들을 찬성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가 무수한 생각들은 자기 마음에 표출된 것을 지지하는 쪽으로 구부려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 고로 인간은 거짓된 것 안에서도 확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보여지고, 이해될 때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원리로 당연시하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보여질 수 없고 상상 같은 것 가지고 마음에 품어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질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슬기로워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뒤를 따르는 것이다. 하여 그는 추론에 관한 문제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문제들조차도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과학들을 배우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고 삶을 기쁘게 할 것이기 때문.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 원리로부터, 즉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가능한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세상 지식 속의 친근해진 말 안에서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지, 자신이 아니다; 그 이유가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동산”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로부터 가진다;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의 “에덴”이다; 그의 “동쪽”은 서쪽, 또는 자신이다; 그의 “유브라데 강”은 그의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것은 정죄되어진다; 그의 “둘째 강”, “앗시리아”인 곳, 거짓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얼빠진 추론들이다; 그의 “셋째 강”, “유브라데”인 곳, 거기로부터 파생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원리들이다.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의 “네째 강”은 거기서 파생된 지혜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마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집트”-이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는데-후에 이 지식은 마술이 되었는 바, 그런 사람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알 것이다. 이 사람은 자아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관해 에스겔서를 보자: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 이집트의 왕 바로,
자기 강들의 한가운데 드러누운 큰 고래에 맞서 있다, 이 자가 말했다,
내 강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 그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는
황무하고 피폐된 채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이 강은 나의 것, 그리고 내가 그것을 만들었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겔. 29:3, 9).
이런 사람은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라 불리워진다, 같은 예언서에서, 바로, 또는 이집트인이 이런 말들로 취급되어진다:
내가 그를 구덩이 안으로 내려간 그들과 함께 지옥 안으로 내려가게 만들었을 때;
그들에게 너는 에덴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영광과 위대함 안에 있음 같게 만들어져
있지 않았더냐? 그럼에도 너는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더 낮은 땅 안으로,
할례받지 않은 자 한가운데에서, 검으로 죽임을 당한 그들과 더불어 내려가게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와 그의 군대이다 (겔. 31:16, 18),
위에서 “에덴의 나무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지식들을 명시한다, 이것을 그들은 추론들을 수단으로 모독한다.

18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리라.
“홀로(alone)”를 수단으로 의미된 바,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self)와 세상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은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이것은 동시에 “여인으로 건축된 갈빗대”라 불리웠다.

고대 때에 천적 인간 같이 주님의 안내 아래 있었던 이들을 두고 “홀로 거주함”이라 말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악들, 또는 악령들에 의해 있는 (악과 거짓에) 감염됨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토지에서) (타)민족들을 몰아내었을 때, 그들 만이(alone) (그 토지에서) 거주함을 수단으로도 유대 교회 안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런 연유로, 이것이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에 관해 말해질 때 그녀는 “홀로”이다 하고 때로는 말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일어나라, 너는 확신을 갖고 거주하는 조용한 민족에 이르러라, 주님께서 말하신다,
거기는 문들이나 빗장이 없다; 그들은 홀로 거주하고 있다 (예. 49:31).
모세의 예언에서:
이스라엘은 홀로 확신을 갖고 거주했었다 (신.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명료하다:
보라, 백성들이 홀로 거주한다, 그리고 민족들 사이에서
세어지지 않을 것이다 (민. 23:9),
여기서 “민족들”은 악들을 의미한다. 태고 교회의 후손들은 홀로 거주할 의향이 없었다. 즉 천적 인간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마치 유대 교회, 즉 이스라엘 후손이 민족들 사이에 있기를 바란 것과 같다. 태고 교회 후손이 홀로 있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바라고 있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자기 자신의 본성,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 둘 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 취급된 교회의 사람이 호의를 가졌던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런 종류의 자기 자신이 마치 그의 자기 자신 같이 나타났는 바,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라 말해졌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분하면, 육체적, 세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이런 것들의 본성을 (말로) 설명하려면 무수한 것들을 열거해야 할 지 모른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과 더불어서, 그의 자기 자신은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 밖에 아는 것이 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인간은 만일 자기 자신을 상실하면 자기는 멸해지고 말 것이다 라고 상상한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도 외관은 앞의 인간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비록 그가 주님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지혜와 이해함을 주신다는 것, 결과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그는 자기 심정의 신조로부터라기보다는 입술로부터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두의 생명이시다는 것,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식별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있음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an own)이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이 자아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지각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행복과도 결합되어 있다. 천사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 안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최고 높은 평화와 고요함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주님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은 그들의 자기 자신을 통치하시고, 그들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들을 통치하신다. 이 자기 자신은 더할나위 없는 천적 자체이다. 이에 반해 육체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이다. 그러나 이 자기 자신은 이후 더 취급할 것이다.

19, 2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20절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할 도움은 발견되지 않았다.
“짐승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애착들이, 또는 의지 측면의 애착들, “하늘들의 새들”을 수단으로 영적 애착들이, 또는 이해함 측면의 애착들이 의미되어진다. “그가 그것들을 부르는 것을 보시기 위해 그것들을 그에게 데려 옴”에 의해 그 사람으로 그것들의 품질을 아는 것이 가능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들을 주는 것”은 그가 그것을 알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애착함들의 품질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그의 자아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이 앞절에서와 같은 표현, 즉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에 표현되어 있다.

“짐승들”과 “동물들”을 수단으로 고대적으로는 애착들과 인간 안에 이와 비슷한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경우에서는 낯설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때의 사람들은 천적인 관념 안에 있었는 바, 그리고 이와 같이 동물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되었는 바, 그리고 사실상, 그들이 이런 동물과 닮았는 바, 그들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밖의 것을 뜻하지도 아니했다. 마찬가지로 짐승들이 언급되는 말씀 안에서도 일반적 측면이든, 특수적 측면이든, 위의 방식 외의 방법으로 의미를 뜻하는 곳은 없다. 예언적 말씀 전체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내적 의미를 포함하는 말씀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앞서 주시했던 바같이 짐승은 두 종류로 있다. 하나는 악하고 유해한 짐승들, 그리고 선하고 해가 없는 짐승들이 있다. 선한 짐승들에 의해서는 선한 애착이 의미되는데, 이런 짐승으로는 양, 어린 양, 비둘기 등등이다; 이것이 이미 취급한 천적 인간, 또는 천적인 영적 인간인 바, 같은 것이 여기서도 뜻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짐승들”이 애착들을 의미하는 것은 45-46항의 몇 인용구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인 바 여기서 추가로 확증해 볼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품질(quality)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이 “이름”을 수단으로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보는 것과 부르는 것”에 의해 그들은 품질을 안 것을 이해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 딸들에게 의미된 것에 따라 이름들을 주었다. 그 이유는 모두 각각의 이름은 그것 안에 특유한 어떤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름으로부터, 이름을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이들의 본성과 근원을 알런지 모른다. 이 부분은 미래의 책, 즉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다루는 때 주님의 자비로부터 알게 될 것이다. 이름들이 이름 불러진 것의 근원과 품질을 함축하는 바, “이름으로 부름” 역시 같은 이해의 범주이다. 이것은 고대인들 사이에 말하는 관습적 양식이었으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에 의아해 할지 모른다.

말씀 안에서도 “이름”이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했고, “이름으로 부르고 보는 것”에 의해서도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했다. 이사야서를 보자:
나는 네게 어둠의 보물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은밀한 장소의 감추인 재물을 네게
줄 것이다, 하여 너는 나, 여호와,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른 분, 이스라엘의 하느님 임을
알 것이다. 야곱 내 종을 위하여,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기까지 했다, 나는 너를 별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다 (이. 45:3-4).
이 인용구절에서, “이름으로 부르는 것” 그리고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품질을 미리 아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에서:
너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질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의 입이 선포하실 것이다 (이. 62:2),
이는 또 다른 품성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앞 뒤 구절로부터 나타난다.
다른 구절에서:
두려워 말라, 오 이스라엘이여, 그 이유가 나는 너를 되찾았고,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기 때문. 너는 나의 것이다 (이. 43:1),
이는 그분이 그들의 품질을 아셨음을 명시한다.
같은 예언서에서:
네 눈을 높게 들어올려라, 그리고 이것들을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잘 보라,
그들의 군대를 수를 세어 데려내왔다. 그분은 그들을 이름으로
모두 부르실 것이다 (이. 40:26),
이는 그분이 그들 모두를 아셨음을 뜻한다.
계시록서에서:
너는 사데에서조차 몇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이겨내는 그는 흰 의복이 입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고백할 것이다 (계. 3:4-5).
이들의 이름들이 생명의 어린 양의 책 안에 Tm여 있지 않다 (계. 13:8)
위 인용 구절에서의 “이름들”에 의해서는 결코 이름들을 뜻하지 않고 품질들을 뜻한다. 천국 안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이 알려진 적이 없다. 오직 그의 품질만 알려져 있다.

서술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의미된 것의 연결이 알려질런지 모른다. 18절에서,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에게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겠다”, 그리고 현재, “짐승”들과 “새들”이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이는 앞서 (1장에서) 취급되어졌었다, 그리고 즉시 반복되는 것, “사람을 위해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그가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알게 허용되었을 지라도 그는 그의 자기 자신에 여전히 기울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인 것을 바라는 이들은 주님의 것들을 경멸하기 시작하고, 어쨌든 그들은 그것을 표현도 하고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21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 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가슴의 뼈인 “갈빗대”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이 안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으나 인간이 친애하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다; “갈빗대의 자리에 있는 살”에 의해 생명력이 있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뜻해진다; “깊은 잠”에 의해 그가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을 가진듯 자신에게 비쳐지게 놓이는 상태가 뜻해진다. 이 상태는 잠이 든 것과 닮아있다. 그것 안에 있는 동안 그는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이 자신으로부터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그러면 그는 마치 잠에서 깨듯 일어난다, 그리고 깨어 있는다.

인간의 자기 자신(그리고 실로 그가 친애하는 것)이 가슴의 뼈인 “갈빗대”라 불린 이유는,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이 선행(charity)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갈빗대는 심장과 폐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뼈는 천한 것을 의미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생명력이 조금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살(flesh)은 생명력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을 명시했다. 이 의미의 바탕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신비 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핀다.

말씀에서도 역시 인간의 자기 자신은 “뼈들”에 의하여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실로 자아는 주님에 의해 생기있어 진다. 이사야서로 보자:
여호와께서는 가믐에서도 네 혼을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뼈들을
방심하지 않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물을 댄 동산 같이 있을 것이다 (이. 58:11).
그때 너희는 볼 것이다, 그리고 네 심정은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네 뼈들은 잎 같이 돋아날 것이다 (이. 66:14).
다윗서에서:
나의 모든 뼈들이 말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누가 당신 같으리이까? (시. 35:10).
이것은 에스겔서로부터 더 명백해진다, 거기서 뼈에 살이 붙음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들 안으로 영이 놓이는 것에 관하여:
여호와의 손이 나를 계곡 한 가운데 놓았다, 그리고 그곳은 뼈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말했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고로 주 여호비께서 이 뼈들에게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너에게 숨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 힘줄들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가죽으로 너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안에 숨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여호와이심을 알 것이다 (겔. 37:1, 4-6).
인간의 자기 자신, 천국으로부터 관조할 때, 전체적으로 뼈만 앙상한, 생명없는 어떤 것 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매우 추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체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기있어질 때, 그것은 살같이 보인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이나 되는 듯, 참으로 모든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죽은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이다. 만일 이 생명이 철회된다면, 그는 돌 만큼이나 죽은 자 되어 내동댕이 쳐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오직 생명의 기관(organ), 그리고 기관이라 말해주어야 할 정도, 그리고 생명의 애착 같은 것일 뿐이다. 주님만이 그분의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으시다.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주님의 자기 자신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 그 자체 죽은 것이나,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주님의 자기 자신은 주님의 말들로부터도 의미되어지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영은 살과 뼈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너희가 보는 바대로 나는 가지고 있다 (눅. 24:39).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는 부러뜨리지 않아야 한다에 의해서도 뜻해져 있다 (출. 12:46).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때, 또는 자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인간의 상태는 “깊이 잠듦”에 비교되어진다. 고대인들은 실지로 깊이 잠듦이라 불렀었다; 이사야 29:10의 경우, 그들은 “깊은 잠의 영을 그들 위에 쏟았다”, 그리고 예레미야 51:57의 경우,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sleep a sleep) 등등 말해지고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그 자체에서는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생명을 가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져 왔었는 바, 거기서 자신들 밖에 더 사랑하는 자가 없는 악령들,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있다고 억지 주장하는 악령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경험에 의해 (그렇지 않음을) 확신시켜졌다, 그리고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서는 살지 못함을 고백하도록 강요 당했다. 수 년 동안 나는 특별한 방법에서 인간의 자아와 더불어 있는 경우가 어떤지를 알도록 허락되어졌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은 (우리에게) 흘러들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어디로부터 흘러드는지를 지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상상하는 인간은 거짓인 것 안에 있다, 그리고 자기는 자신으로 산다고 믿는 것을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만일 그의 믿음이 어떤 경우 속의 진짜의 진리에 일치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실행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2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빗대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왔다.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는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갈비”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살아있지 않다는 것; “여인”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주님에 의해 살았다는 것; “그분이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 옴”을 수단으로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이 그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교회의 후손은 자기들의 부모 같이 천적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 자신의 스스로 안내함 아래 있기를 원했는 바, 고로 이 후손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 기울고 있는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들에게 수여되었고, 계속 이 자기 자신(an own)은 주님에 의해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인”이라 불리었고, 후에 “아내”라고 불리었다.

여인이 사람의 갈빗대로부터 만들어내지지 않았다라고 (글자로부터) 식별하는 것, 하여 이 대목에는 지금까지 누군가들이 알아채린 것보다 더 깊은 비밀들이 함축되어져 있다는 것을 식별하는 데는 주의력이 요구되지만 누군가의 경우들은 거의 이 대목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인”을 수단으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먹도록) 유혹되어진 자가 여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알아질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혹하는 것은 그의 자기 자신, 똑 같은 것으로,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진다고 말해지고, 앞 장에서 거듭남이 취급될 때 사용한 단어인, “창조되어졌다”, 또는 “형성되어졌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가 본문의 여인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는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었던 것을 일으켜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 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구절을 찾아 읽으면, “건축”하는 것이 악들에 관해 서술되고, “일으켜세우는” 것은 거짓들에 관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하는(renew)” 것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사야서를 보자: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쓸모 없는 것들을 건축한다, 그들은 고대의 황무한 것들을
다시 세운다, 그리고 그들은 쓸모 없는 성들, 대대로 황폐해 있던 것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 61:4).
위 구절에서의 “쓸모 없는 것들(wastes)”, 다른 인용구절에서도 악들을; “황무한 것들(desolations)”은 거짓들을; “건축하는 것(build)”은 전자에 적용되고, “다시 세우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된다, 그리고 이 구분은 예언자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주목되고 있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너를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건축되어질 것이다,
오 이스라엘의 처녀여 (예. 31:4).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과 거짓을 빼면 자기 자신으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밖에 더 아니다. 이 대목은 인간 자아 속의 것들이 영계에서 관조하도록 표출되어졌을 때,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양없이 나타나서 더 흉측하게 그려내본다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차이는 있는데, 눈에 보이게 진열된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공포를 일으켰다, 마치 악마로부터는 도망치고 싶듯, 자신으로부터 도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의 천적인 것이 응용되는 생명에 따라 다양하게도 나타난다; 실로 선행을 증여받았던 이들, 또는 선행으로 해서 생명있는 이들은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소년소녀들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순진 안에 있는 이들, 벌거벗고 있는 유아들 같고, 그들의 가슴을 빙둘러 화환으로 꾸미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에서 살고 놀고 있다, 그리고 진짜 가장 깊은 데로부터 행복을 지각하고 있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졌다”는 대목에는 누군가가 글자로부터 발견했다는 것 너머에 아주 깊게 감추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깊은 내용은 주님 자신, 그분의 왕국, 이로부터 말씀의 모든 생명이 온다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 안에서 천국의 결혼을 중시하고 있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같은 본성 속에 존재하는 바, 이것은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운다. 고로 생기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두를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 자기 자신의 본성, 즉 주님의 “신랑과 아내”라 불리는 자기 자신은 간결하게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 외에 달리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 주제에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함을 주목하는 것만에서 (이해함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아주 조금만 떠나도 그들은 변화를 지각하는 애착의 본성을 지녔기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자기들의 평화와 행복을 향유함 속에 있다. 이 자아가 예레미야에서 뜻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땅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 여인이 남자를 두를 것이다 (예. 31:22 ).
위 인용구절에서도 역시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어져 있다. 즉 “여인”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생생해진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이 구절로부터 여인은 “두르다, compass”라는 표현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는 살로 만든 갈빗대가 심장을 에워싸(encompass) 듯, 이 자기 자신의 본성은 에워싸는 것 같기 때문이다.

23절.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지금 이는 지금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 이유는 그녀가 남자(vir)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뼈들 중의 뼈, 살 중의 살”은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뼈”, 이 자기 자신은 생명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살” 이 자기 자신은 생기 있어진 자기 자신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존재로부터(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과 이렇게 짝을 이루는 바,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이전에 “여인”이라 불리던 자기 자신이 여기서 “아내”라 명명되어졌다. “지금”은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때에 결과되었음을 의미한다.

“뼈들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내적 인간이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했던 연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이라 일컬을 수 있는 모든 이들, 나아가 한 가문 속의 이들, 한 가족 속의 이들, 꽤 가깝다 하는 이들까지도 “뼈들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일컬어 말했다. 고로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정녕 너는 내 뼈이고 내 살이다 (창. 29:14).
그리고 아비멜렉이 자기 어머니의 형제들에 관해서, 그리고 자기 어머니의 아버지의 가문 속의 가족을 두고,
나는 네 뼈이고 네 살임을 기억하라 (사. 9:2).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자신들에 관해 말했다.
잘 보시오, 우리는 당신의 뼈이고 당신의 살입니다 (삼하. 5:1).

남자가 내적 인간, 같은 것으로 총명하고 슬기 있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명백하다:
나는 잘 보았다, 그리고 남자(vir)가 없다, 그들 사이에서조차,
그리고 조언자가 없다 (이. 41:28),
위 구절은 슬기롭고 총명한 자가 없음을 뜻한다. 또한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예루살렘의 거리들을 이리저리로 달려라, 그리고 네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자), 실행하는 정의가 있는지를 살펴라 (예. 5:1).
“정의를 실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인물을 뜻한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총명한 자를 뜻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가 이해되고 있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어떻게 이런 것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지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실로 이 구분은 아주 잘되어 있어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이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통치하시는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후손의 상태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그들의 자기 자신을 바란 결과로, 아주 바뀌어져, 그들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는 내적 인간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하여, 이 후손들은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하나이다고 상상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식의 지각은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때 거행되기 때문이다.

24절.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는 것”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임신하고 낳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의 몸이다”는 것은 두 인간들은 거기서 함께 있다는 것; 이전에 내적 인간과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외적 인간은 영(spirit)이었는데, 지금 그것들은 몸(육, flesh)이 되었다. 고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자아에 결합되어 있다, 하여 그것들은 하나로서 있을지 모른다.

태고 교회의 이 후손은 악은 아니었고, 여전히 선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적 인간 안에서, 또는 그들의 자아 안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것 뿐이다; 어쨌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비로 거기 안에 주입되어져 있다.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로서 행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로서 나타나는지는, 이것이 저것 안으로의 유입(influx)이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 없다. 이것에 대한 생각을 품어보기 위해 행동이라는 것을 예로 취해보자. 행동 안에 선행(charity)이, 즉 사랑과 신앙이, 그리고 이것들 안에 주님이 있지 않으면, 행동은 선행의 일, 또는 신앙의 열매 라고 불려질 수 없다.

진리와 올바름에 관한 모든 법칙들은 천적인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가 전체 천국은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모든 것 안에 모두이시고 천적 인간이신 바, 이로부터 그들은 천적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진리와 올바름의 모두 각각의 법칙이 천적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바, 마찬가지로 특별한 방식에서 결혼의 법칙이 실행된다. 천적(또는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이 결혼에 의거, 땅 위 모든 결혼들이 파생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결혼은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천국, 또는 주님이 머리되는 하나의 교회와 같다. 이로부터 파생된 결혼의 법칙은 하나의 남편과 하나의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천적인 결혼을 표현하고, 천적 인간의 본보기이다. 이 법칙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적 인간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남자는 하나의 아내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내적 인간이기를 중단하고, 외적 인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 아내들과 결혼했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 결혼 문제에서 천적인 결혼을 표현했기 때문에, 결혼의 사랑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기울었을 때, 그들은 결혼의 사랑에서 행복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숫자로부터의 쾌락 안에 있었는데, 이 쾌락은 외적 인간의 즐거움이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심정의 완악함”이라 불려졌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여러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모세에 의해 허용되어졌다, 하여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너희 심정의 완악함 때문에, 그는 이런 명령서를
너희에게 써준 것이다. 그러나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 이런 원인 때문에 사람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의 아내에게 굳게 결합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 둘은 하나의 몸일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함께 결합하신 것을, 사람은 떼어놓지 말라 (막. 10 5-9).

25절.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 모두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음”은 그들은 순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순진을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방지하시기 위해 그들의 자기 자신 안으로 순진을 주입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 앞서 서술했듯이, 단지 악이다, 그리고 관조해보도록 자아가 진열될 경우, 어떤 모양인지 알 길이 없이 (흉칙하)다. 그러나 선행과 순진이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 주입될 때, 이 자기 자신은 선하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154항 참조). 선행과 순진은 인간의 자기 자신(인간 안의 악하고 거짓인 것)을 너그러이 봐 줄 뿐아니라, 마치 그것이 철폐되기라도 한듯 하여 있게 해준다. 이를 놓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보자. 어린 아이들 안에서 악과 거짓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부모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한, 감추여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즐거움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아적 순진은 그 자체를 보인다. 이로부터 그가 순진의 어느 수준이라도 소유하지 않으면 천국 안으로의 입장을 허락받을 자는 아무도 없는 이유를 알런지 모른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것을 보시고, 매우 언짢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내버려두고, 그들을 금하지 말라: 그 이유가 하느님의
왕국은 이와 같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왕국을 어린 아이 같이 받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그는 거기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막. 10:14-16).

“벌거벗음으로부터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순진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을 수단으로 입증되어진다. 그 이유가 성실과 순진이 떠났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두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숨겼다. 같은 것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물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를 원하여 자기의 죄없음을 증명할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순진을 증명하려고 벗은 자신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특별하게는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진의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하고 벗은 유아들로서 나타난다. 한편, 순진을 그리 많이 가지지 않은 이들은 그 (수준에) 어울리고 빛나는 의복 안에서 있는데, 이 천사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가끔 보여진 바 있다.

위의 예는 말씀의 이 장 안에 포함된 것들의 몇에 불과하다. 여기서 발표되는 것은 극히 적을 뿐이다. 천적 인간을 취급했는 바, 이 인간은 현재로서는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진 바 없기에, 여기서 설명하는 미미한 것 마저 불명료해 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만일 누군가가 각 구절에 얼마나 많은 신비가 포함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함된 수많은 신비를 말하지 않고 지나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글자에 보여진 바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짧게 서술하기 위하여: 글자의 말들은,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름다운 질서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생생하게 표현된 것은 무엇이든 표현물 안에 있는 세세한 것들에 이르러 두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되어진다;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세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형언할 수 없는 천사와 같은 관념 안에서 풍부하고 가득차게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기쁨에 일치되어 끝없는 다양함 안에 있다. 이와 같음이 주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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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3 장

성경: 창세기 3:1-13절

1. 뱀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너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했느냐?
2. 그러자 여인이 뱀에게 말했다. 우리는 동산의 나무의 열매로부터 먹을 수 있지만
3. 동산의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로부터,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너는 그것으로 부터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네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
4. 그리고 뱀이 여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
5.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네 눈들이 열려질 것이고, 네가 선 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같이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서 이다.
6. 그리고 여인은 그 나무가 식품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 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열매를 취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와 함 께 있는 그녀의 남자(vir)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7. 그리고 그들 모두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이 띠를 만들었다.
8. 그리고 그들은 낮의 공기에서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 리를 들었다. 그래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동산의 나 무 사이에 자신들을 숨겼다.
9.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homo)에게 소리치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셨다.
10.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벌거벗었기에 나 는 두려워져서 나 자신을 숨겼습니다.
11. 그리고 그분께서 말하셨다,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고 너에게 말했느냐? 너는 내가 먹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한 나무로부터 먹었느냐?
12.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당신께서 나와 함께 있도록 나에게 준 여인, 그녀가 나에 게 나무로부터 주었고, 내가 먹었습니다.
13.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여인에게 말했다, 왜 너는 이런 짓을 했느냐? 그리고 여인이 말했다, 뱀이 나를 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먹었습니다.
14.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 네가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너는 모 든 짐승,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을 초월하여(above) 저주되고, 배로 다닐 것이며, 네 사는 날 동안 너는 먼지를 먹게 되리라.
15. 그리고 나는 너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enmity) 를 놓을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너는 그분의 뒤꿈치에 상처를 입 힐 것이다.
16. 그리고 여자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내가 슬픔과 임신을 크게 늘릴 것이다. 슬픔 가운데 너는 아들들을 낳을 것이고, 너의 순종함이 너의 사람(남자)에게 있어, 그 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17. 그리고 사람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 문에, 그리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여 말한 나무를 먹었기에 너 때문 에 지면은 저주된 바 너는 네 사는 모든 날들 동안 큰 슬픔 가운데 땅의 것을 먹 게 될 것이다.
18. 그리고 지면은 너에게 가시와 엉컹퀴를 산출하고, 너는 들판의 풀잎을 먹으리라.
19. 네가 지면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너는 네 얼굴의 땀 속에서 빵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먼지인 바 먼지로 되돌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20. 그리고 사람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 코트(옷)를 만드셨고, 그들을 옷입혔다.
22.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보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앎에서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 역시 가져 가서 먹고 영생하지 않도록 하리라.
23. 그러므로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어 그가 있어지 게 했던 지면을 경작하게 하셨다.
24.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에덴의 동산을 향하여 살게 만드셨고,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뱀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그가 여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너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했느냐?
여기서 “뱀”을 수단으로 인간이 신뢰를 두는 감각적 부분이 뜻해진다; 여기서의 “들판의 야생 동물”을 수단으로, 이미 살핀 바 같이, 외적 인간의 모두 각각의 애착이 뜻해진다; “여인”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뱀이 한 말, “참으로, 하느님이 말하시기를, 너더러 모두 각각의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 하더냐?”에 의해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가 뜻해진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태고 교회의 세 번째 후손이다. 이 교회는 그들이 그렇다 하는 것을 보고 느끼지 않으면 계시된 것을 믿지 않기를 시작했다. 그들의 첫 상태, 이것은 의심 중의 하나였는데, 여기서와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묘사되어 있다.

태고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짐승들과 새들에 비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을 일컬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말하는 관습적 방식이 홍수 후 고대 교회 안에까지 남아있었다. 그리고 예언자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졌다. 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인 것들을 “뱀들”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뱀이 땅에 아주 가깝게하여 살고 있듯, 육체에 가장 밀접한 것, 육체 다음에 해당되는 것이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감각들의 증거들에 기초한 신앙의 비밀들에 관한 추론들을 그들은 “뱀의 독”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추론자들 자신들을 “뱀들”이라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물들이 감각적인 많은 것으로부터, 즉 가시적인(visible) 것으로부터 (지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 세속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인 것, 등등) 추론하기 때문에, “뱀은 들판의 여느 야생 동물보다 더 미묘했다.”
그리고 다윗서에서, 추론들을 수단으로 인간을 유혹하는 이들에 관해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뱀같이 날카롭게 한다;
독사의 독이 그들의 입술들 아래 있다 (시. 140:3).
그리고 다시:
그들은 거짓을 말하면서 자궁으로부터 길을 벗어나고 있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고, 그녀의 귀를 멈추게하는 독성 강한 귀머거리 독사 같다. 하여 그녀는
불평자들의 음성을, 매력으로 홀리는 현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시. 58:3-6).
위 구절에서 현자가 말하는 것, 또는 현자의 음성을 들으려하지도 않는 추론들을 “뱀의 독”이라 불리운다. 이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 속담이 된 것이, “뱀은 귀를 멈추게 한다”이다. 아모스서에서:
마치 사람이 집에 와서, 벽에 자기 손을 기댔는데, 뱀이 그를 물었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지 않더냐? 그 안에 빛남 없는
짙은 어둠이기까지 않더냐? (암. 5:19-20)
“벽에 있는 손”은 자기에게서 파생되는 힘을 뜻한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을 신뢰함, 이로부터 눈 멀음이 오는데, 위에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이집트의 음성은 뱀 같이 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강력함에서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패는 자의 도끼들을 가지고 그녀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숲을 찍어 내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것이 수색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메뚜기보다 더 번성했다. 그래서 셀 수 없다. 이집트의
딸이 수치함에 놓일 것이다. 그녀는 북쪽의 사람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 46:22-24).
“이집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을 추론함을 명시한다. 이런 추론들이 “뱀의 음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눈 멀음이 야기되었다. “북쪽의 사람”(이 야기된 것이다). 욥기서에서:
그는 독사들의 독을 빨 것이다; 독사들의 혀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는 시내들을, 꿀과 버터가 흐르는 강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욥. 20:16-17).
“꿀과 버터의 강들”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다. 이것은 추론자들에 의해 보여질 수 없다; 그리고 추론들이 “독사의 독”과 “독사들의 혀”라 불리운다. 뱀에 관한 것은 14,15절에서 더 살핀다.

고대 때에, 계시된 것들보다 감각적인 것들을 더 신용했던 이들을 “뱀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의 경우, 더 악화되어 있다. 그 이유가 지금 그들은 자기들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모든 것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지식들을 수단으로 믿을 수 없음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고로 자신들이 더 큰 수준에서의 눈 멀음을 야기시킨다. 어떻게 이들이 자신들을 눈 멀게 하는지, 그후 보는 것, 듣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만드는지,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천국의 문제들에 관한 자기들의 결말들을 만들어내는 자들, 기억 속의 지식에 관하여, 그리고 철학에 관하여 (결말을 내는 자들), 그리고 “귀머거리 뱀들”, 뿐 아니라 말씀에서 자주 말해지는 더 치명적인 “날고 있는 뱀들”인 자, 이런 사람들이 영에 관하여 믿는 것을 아래에서 예를 들어 조금 생각한다.
감각적 인간, 또는 자기 감각들의 증거를 믿는 자는 영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보는 것, 만지는 것을 나는 존재들이라고 안다.” 기억적 지식으로부터의 인간, 또는 자기의 결말을 그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만들어 내는 자가 말하기를, 수증기나 열, 또는 옅은 공기 안으로 이내 사라져버리는 과학의 어떤 다른 실재물을 제외하면 무엇이 영인가? 동물들 또한 신체나 감각, 또는 추론에 유추되는 것을 가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것은 죽을 것이다고 확언한다. 그런데 인간의 영은 살아있을 것이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닌가? 고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정한다.
철학자들, 그들은 인류의 여타 사람들보다 더 날카로울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도 이해 못하는 전문용어 같은 말투로 영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것들에 관하여 논쟁하기 때문이다. 하여, 물질적인 것, 유기체적인 것, 또는 광범위한 것으로부터 끌어내 영에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은 단 한 개가 아니다고 경쟁하는 바,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관념으로부터 추상화 하였는 바, 그것은 그들로부터 사라지고 만다. 결국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좀 더 분별있는 자는 영은 생각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하는 가운데, 모든 실재성을 그것으로부터 분리한 결과로, 결국 그들은 육체가 종료될 때 영도 사라져버린다고 결론맺는다. 고로 감각의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에 관하여, 그리고 철학에 관하여 추론하는 모든 이는 영의 존재를 부정한다. 고로 영과 영적인 것에 관하여 말해진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는다. 심정이 단순한 자는 위와 같지 않다: 만일 사람들이 영의 존재를 두고 의문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이 존재함을 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사후 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자기들의 합리성을 소멸되게 하는 대신,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영의 존재를 살아있게 한다.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 사이에서, “뱀”을 수단으로 용의주도함이 의미되었다. 또한 감각적 부분을 통하여 그들은 상해받음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서 용의주도함(circumspection)을 발휘했다. “뱀”으로부터의 이 의미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잘 보라, 나는 너희를 이리들 한 가운데로 양을 보냄 같이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들 같이 신중하고, 비둘기 같이 단순하라 (마. 10:16).
그리고 또한 광야에 세운 “구리뱀”으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주님 안에 있는 감각적 부분이 의미되어져 있고,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고, 주님만이 모두를 돌보시고 모두를 위해 섭리하신다가 의미되어 있는 바, 구리뱀을 올려다 본 모든 이는 (생명이) 보존되었다.

2,3절. 그러자 여인이 뱀에게 말했다. 우리는 동산의 나무의 열매로부터 먹을 수 있지만 3 동산의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로부터,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너는 그것으로부터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네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
“네가 먹어도 되는 나무의 열매”는 태고 교회로부터 그들에게 밝히 알리신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함은 이미 2장 16절, 천적 인간, 또는 태고 교회를 다루는 대목에서 말한 것, 즉 “동산의 나무”라 말하지 않고 여기서는 “네가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라고 언급한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동산의 나무”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이다; 본문의 선과 진리는 “동산의 나무”가 근원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열매”라 불리우고, 말씀에서 자주 “열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이 먹어도 되는 나무의 열매”가 태고 교회로부터 그들에게 밝히 알려주신 신앙 속의 선과 진리,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함은 이런 사실, 즉 천적 인간, 또는 태고 교회를 취급할 때(창. 2:16)의 경우 같이, “동산의 나무”라 말해지지 않고, “그들이 먹어도 되는 나무의 열매”라고 말해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동산의 나무”는 선하고 진리인 것을 지각함이다. 이 구절의 선과 진리는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열매”라 불리운다. 또한 말씀의 많은 곳에서도 “열매”라는 단어를 통해 이 의미가 전달되고도 있다.

“지식의 나무”가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말해진 이유인즉, 비록 2장 9절에서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지식의 나무가 아닌 생명들의 나무라 할지라도, 동산의 “한 가운데”란 가장 깊은 것(the inmost)을 의미해서 였다; 그리고 천적 인간의, 또는 태고 교회의 가장 깊은 것은 “생명들의 나무”, 즉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이었다; 이에 반해 이 인간, 천적으로부터의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일런지 모르는 이 인간과 더불어, 또는 이 후손과 더불어 신앙이 동산의 “한 가운데”, 또는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태고 교회 때에 살았던 사람들의 품질을 묘사하는 것은 더 충분하게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오늘날, 그들의 천성(genius)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다가, 지금 누군가와 더불어 발견되는 것도 완전히 다르다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천성으로부터 얼마의 생각을 가져다가 살피면 이럴 것 같다.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다, 또는 사랑으로부터 그들은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세대가 종료되었을 때, 이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천성을 승계했다. 즉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또는 사랑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식별하는 대신,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인 것에 관한 지식을 획득했다, 또는 신앙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사랑 속에 있는 것을 획득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지식 외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것이 세상의 파멸을 방지하시려 홍수 후에 만든 변화(의 원인이)였다.

홍수 앞의 태고인의 것 같은 천성은 발견되지 않고, 오늘날은 존재하지도 않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구절의 말들이 순수한 의미에서 무엇을 함축하는지를 총명하게 설명해낸다는 것은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어쨌든 이런 구절도 천국에서는 완전하게 이해되었다. 그 이유는 천적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와 같은 영들은 홍수 이전 거듭나진 태고인과 같은 천성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이라 칭해지는 천사들과 천사와 같은 영들은 홍수 이후 거듭나진 자들과 유사한 천성(genius)으로부터 있다. 이 두 천성(genius)은 무제한으로 다양함 안에 있다.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 교회는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는 것”, 즉,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속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그만두어야 했을 뿐 아니라, 이 나무를 만지는 것, 즉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관한 문제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허용조차 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천적 삶으로부터 영적 삶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아래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배려하심에서 이다. 천적 천사들의 생명이 더 내면적으로 있는 경우, 그들은 신앙이 이름 불러지는 것조차, 또는 영적인 것에 관여되는 어떤 것이든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말해진다면, 신앙 대신 그들은 자신들에게만 알려진 차이와 더불어 사랑으로부터 지각을 가진다;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들은 신앙에 관해 있는 어떤 추론을 들을 경우 더욱 덜 참는다. 신앙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의 작은 어떤 것을 두고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각으로부터 그들은 어떤 것이 그렇다인지, 아니다인지를 즉시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어떤 것이 말해질 때, 그들은 그것이 그러하다, 또는 그러하지 않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너희의 의사전달은 예, 예; 아니다, 아니다 이도록 하라;
그 이유가 이보다 더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악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마. 5:37).
그 다음 이것이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만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에 의해 뜻해졌다; 그 이유가 만일 그들이 그것을 만진다면, 그들은 악 안에 있을 것, 즉 그들은 “죽는”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적 천사들은 다른 천사들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놓고 다함께 대화한다. 그러나 천적 언어, 즉 사랑으로부터 만들어내고 도출된 언어 안에서 이다. 이는 영적 천사들의 것보다 더욱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수준이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하여 대화하고, 지성으로부터, 추론으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 속의 것들을 확증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바탕들 위에서 신앙에 관한 문제들에 관하여 자기들의 결론들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그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 같지는 않다 해도 신앙의 모든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이 주님에 의해 증여되어 있다. 영적 천사들의 지각은 주님에 의해 생생해진 일종의 양심이고, 이는 실로 천적 지각 같이 나타난다. 그래도 같은 것은 아니다, 오직 영적 지각일 뿐이다.

4, 5절. 그리고 뱀이 여인에게 말했다, 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 5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는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네 눈이 열려질 것이고, 네가 선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 같이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서 이다.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그들의 눈이 열림”은 만일 그들이 감각과 지식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즉 자신들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들을 검사한다면, 신앙들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보이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이 “선과 악을 앎에서 하느님 같이 있을 것”은 만일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하느님 같이 있을 것이고, 자신들을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두 각각의 구절은 교회에 있는 특수한 상태, 또는 상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앞서 있는 구절의 경우, 비록 그들이 기울어졌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불법적이다고 지각했다; 이 구절의 경우, 그들이 선조로부터 들어왔던 것들이 진리이었는지를 알아보려 한 이래, 의심의 전조(incipient), 즉 그것이 자기들을 위해 합법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눈은 열려졌다; 드디어 자기 사랑(self-love)이 주도권을 쥔 결과,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로 주님 같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자기 사랑 같은 본성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믿어져야 한다는 것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과 감각 속의 것들과 더불어 상담하여 스스로 안내되고 싶어한다.

자기들의 눈들이 열리고, 선과 악인 것을 하느님 같이 아는 자,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적 학식이 뛰어난 이들, 누가 더 강한 신조를 가진 것일까? 그리고 누가 더 눈이 멀었을까? 이렇게 이들에게 물어보자. 그러면 이내 알게 되는 것은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아는 것조차 없고, 믿는 것은 더욱 없다는 것이다; 영적, 천적 본성과는 너무나 친숙한 게 없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사멸하는 야수같이 있다고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과 자연을 숭배한다. 자기들의 표현(법)에서 안내되기를 원하는 자들 중의 어떤 이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자연 속의 어떤 최고의 존재(ens)가 모든 것들을 통치한다 하고 말한다. 이 말함이 그들로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다각도의 방법에서 자신들을 확증하는 원리이다. 만일 그들이 뻔뻔해지면, 그들은 모든 우주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비록 이런 인물들이 신들(gods) 같이, 또는 최고 슬기로운 자 같이 있기를 바랄지라도, 만일 그들이 자기들 자아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지 질문 받으면, 그들은 그것은 존재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고, 그리고 만일 그들이 자아인 모든 것을 박탈 당한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도 대답할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받으면, 그들은 그것을 공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양심이 무엇인지 아는지를 물으면, 그들은 그것이 단지 상상의 창조물인데, 하층 계급을 관리하는 억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지를 물으면, 그들을 그 물음을 비웃고, 그것을 열광적인 잡동사니라 부를지 모른다. 위와 같은 것이 그들의 지혜라는 것, 그들이 가진 “열린 눈”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신들(gods)이다. 이런 원리들을 두고, 자기들은 대낮보다 더 명료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원리들을) 자기들의 출발점으로 삼고 계속 전진한다. 이 방식 안에서 신앙 속의 비밀들에 관하여 추론한다; (끝까지 가면) 어둠의 심연밖에 결과될 어떤 것이 있을까? 모든 여타 사람들 너머있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유혹해대는 “뱀들”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이 후손들은 아직까지(이 구절까지)는 위와 같은 품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되어간 것은 본장의 14-19절에서 다루어진다.

6절. 그리고 여인은 그 나무가 식량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 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한다 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열매를 취해서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와 함께 있는 그녀의 남자(vir)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식량을 위해 좋다”란 탐욕(cupidity)을; “눈을 기쁘게 한다”란 공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명을 주고 싶어한다”란 쾌락(pleasure)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여인”으로부터 있다; “남자가 먹음”을 수단으로 합리성이 동의함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태고 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었다. 이들은 자기-사랑을 수단으로 유혹되는 자신들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에 의해 확증되지 않으면 밝히 알려주신 것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나무가 식량을 위해 좋고, 눈을 기쁘게 하고, 총명을 주고 싶어 한다”와 같이 여기서 채용된 표현들은 의지 측면에 더 특별한 관계를 가진 태고 시절에 살았던 이들의 천성에 잘 어울리는 표현법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악들은 의지 부분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홍수 후에 살았던 사람들을 다루는 말씀에서의 이런 표현들은 이들의 의지 측면이라기보다는 이해력 측면에 관련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태고인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으나, 홍수 이후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own)이 무엇인지는 이런 방법에서 서술될런지 모른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 솟구치는 모든 악과 거짓이다. 또한, 주님과 말씀을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 또한 감각으로부터와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하여 납득되어질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상상함으로부터 솟구치는 모든 악과 거짓이다. 이 방법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악과 거짓만으로 되어갔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거꾸로 중요시 한다; 악인 것들을 선으로, 선인 것들을 악으로, 거짓인 것을 진리로, 진리인 것을 거짓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존재한 것들을 아무 것도 아니다고 상상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전부라고 상상한다.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고, 어둠을 빛이라고, 죽음을 생명이라고 거꾸로 부른다.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이 “절름발이”, “소경”이라고 불리워진다. 이런 것이 인간의 자아이다. 이것은 그 자체 지옥의 것들, 저주되는 것들이다.

7절. 그리고 그들 둘 다의 눈이 열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그들의 눈이 열려짐”은 그들이 자기들의 내면의 지령(dictate)으로부터 알고 있음과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은 그들이 이전처럼, 순진 안에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악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눈이 열렸음”을 수단으로 내면의 지령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말씀에서 이와 비슷한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발람이 자신을 두고 한 말, 그가 환상을 가진 결과로, “눈이 열려진 사람”이다고 자신을 부르는 대목으로부터 (민 24:3). 그리고 요나단으로부터, 그가 벌집으로부터 맛보았을 때, 그것이 악이었음을 내부로부터 지령을 가졌다, 하여 그는 자기 “눈이 보았다”고 말했는데, 즉 계발되어져서, 자기가 몰랐음을 보았다. (삼상. 14:29). 더 나아가, 말씀에서 “눈”은 이해함을 나타내기 위해, 거기로부터 있는 내면의 지령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어지고 있다.
다윗서에서:
제가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나의 눈을 밝게 하소서 (시. 13:3).
위 구절의 “눈”은 이해력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에스겔서에서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에 관해 말하면서, “보는 눈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 (겔. 12:2). 이사야서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눈을 가지고 보지 않도록 그들의 눈을 닫으라 (이. 6:10).
이는 그들이 이해하지 않도록 그들은 눈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렇게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알 심정을, 볼 눈을, 들을 귀를 주시지 않았다 (신. 29:4).
이 구절의 “심정”은 의지를, “눈”은 이해함을 명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에 관련해 말해진다:
그분은 소경의 눈을 여실 것이다 (이. 42:7).
같은 예언서에서
“소경의 눈이 짙은 어둠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볼 것이다” (이. 29:18).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고 있음”을 수단으로 자기들이 전과 같이 순진 안에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악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한다가 의미되어 있다. 이는 앞 장의 마지막 절로부터 명백하다. 거기서 말해진다. “그리고 그들 둘 다가 벌거벗었다,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라고 하여 이 구절은 “그들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가 순진이다를 의미한다고 보일런지 모른다. 이 반대가 이 구절 같이 “부끄러워함”에 의해, 이 구절에서 말해진 것, 그들은 “무화과나뭇잎을 함께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을 숨겼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순진이 없음, 벌거벗음은 불명예와 창피함이기 때문인데, 이것에는 악을 자각함이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창피함과 악의 유형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거꾸로 된 교회를 서술하기도 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벌거벗고 알몸이었다, 그리고 네 피를 짓밟고 있었다 (겔. 16:22).
그들은 그녀의 벌거벗은 알몸인 채로 놔둘 것이다,
그리고 벌거벗음은 덮어지지 않을 것이다 (겔. 23:29).
계시록서에서:
나는 네가 옷입혀지도록, 하여 네 벌거벗음이 나타나지 않도록
나에게서 흰 의복을 사라고 충고한다 (계.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
깨어 있어 자기의 의복을 간수하여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걷지 않도록 한 사람은 행복하다 (계. 16:15).
신명기서에서:
만일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서 어떤 벌거벗음을 발견했다면,
이혼 증서를 그녀에게 써주게 하라 (신. 24:1).
똑 같은 이유로 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들이 제단에 와서 섬길 때, “그들의 벌거벗음의 살을 덮어 그들이 불법을 저질러 죽지 않도록” 고운 아마포의 반바지를 입도록 명령되었다 (출. 28:42-43).

그들이 “벌거벗었다”라고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자기 자신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기 자신, 즉 자신에 남은 자들은 총명과 지혜, 신앙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더 이상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진리와 선에 관하여는 “벗은 채”로 있는 바, 그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에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분명해지게 되었다. 영들이 자신들로부터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여하튼 악과 거짓이었던 관계로, 그들이 자신들로부터 이야기한 것을 나로 하여금 알게 만들 때는 언제든지,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하려고 진리로부터 라고 설득해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식으로, 어떤 인물들이 영적인 삶과 천적인 삶에 관한 것들을 두고, 또는 신앙에 관한 것들을 두고 추론하기 시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의심하고, 부정조차 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신앙에 관해 추론하는 것이 의심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 모두는 자기(self), 또는 자기 자신(own)으로부터인 바, 그들은 단지 거짓들 만으로 가라앉는다, 결과적으로 짙은 어둠의 심연, 즉 거짓들에 (침몰된다). 그들이 심연 안에 있을 경우, 제 아무리 작은 이의제기도 수 천의 진리들을 압도한다. 예를 들면, 미세한 먼지 부스러기도 눈의 동공에 붙어 있으면, 우주와 그것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닫히게 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인물들에 관해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자신들의 눈에서 슬기롭다하고, 자신들의 얼굴 앞에서 총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이. 5:21).
네 지혜와 네 지식, 그것이 너를 돌아서게 했다. 그리고 너는 네 심정 안에서 말했다,
나, 그리고 나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악이 네게 올 것이다. 너는 그 악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지를 모를 것이다, 해악이 네 위에 떨어질 것이다,
이것을 너는 속죄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황폐함이 갑자기 네 위에 닥칠 것이다,
이에 관해 너는 알아채리지 못한다. (이. 47:10-11).
예레미야서에서:
모든 사람은 지식을 수단으로 어리석게 만들어진다. 모든 주물공은 새긴 상을
수단으로 혼동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의 부어 만든 상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안에 숨이 없기 때문이다 (예. 51:17).
“새긴 상”은 거짓이다, 그리고 “부어 만든 상”은 인간 자아 속의 악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꿰맸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띠들을 만들었다. “무화과 나뭇잎을 꿰매는 것”은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띠들을 만드는 것”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렇게 태고인들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교회의 이 후손들을 묘사했는 바, 이는 그들이 이전에 향유했던 순진 대신 자연적 선만을 소유했고, 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의 악은 감추어져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적 범주에 있는 바, (이런) 자기들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포도나무”가 말씀에서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잃어져 왔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들이 발생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들은 이런 뜻들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주님께서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에 관한 것을 비유에서 이야기 하셨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분이 길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그분은 그것에 오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잎들만 (발견하셨다), 그리고 그것에 말하셨다,
이후로 영원히 나무에서 열매가 자라게 하지 말자. 그리고 곧바로 무화과나무는
시들어버렸다 (마. 21:19),
위 구절을 수단으로 선이 없다, 자연적 선조차 없다는 것이 땅 위에서 발견되어졌다가 뜻해진다. 이와 비슷한 대목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의미인데,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이 역겨운 짓을 범했을 때 그들이 부끄러워하더냐? 아니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얼굴이 붉혀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필시 그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포도나무 위에
포도들이, 무화과나무 위에 무화과들이, 그리고 잎들이 떨어질 것이다 (예. 8:12-13),
위 구절을 수단으로 모든 선, 영적, 자연적 선이 멸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너무나 타락하여 부끄럽다 하는 느낌조차 잃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 안에 있는 이들도 비슷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사악함에 얼굴을 붉히기는 커녕 아예 그것을 자랑으로 만든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광야에 있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발견하였다; 나는 너의 조상들을
시작에서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첫 익은 것으로 보았다 (호. 9:10).
그리고 요엘서에서:
두려워 말라, 내 들판의 너희 짐승아, 그 이유가 나무가 자기 열매를 맺을 것이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그것의 강함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욜. 2:22).
위 구절의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명시한다.

8절. 그리고 그들은 낮의 공기에서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고 있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동산의 나무 한 가운데에 자신들을 숨겼다.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그들을 두렵게 느끼게 한 원인인 내적 지령이 의미되어졌다. 이 지령은 그들이 소유해왔던 지각의 나머지(residue)이다; “공기”, 또는 “낮”의 “숨”을 수단으로 교회가 아직 지각의 어떤 나머지를 소유했었을 때의 기간이 명시되어진다; “여호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자신들을 숨김”은 지령을 두려워하는 것, 그 이유가 악을 의식하는 이들의 경우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동산의 나무 한 가운데”를 수단으로 자연적 선이 의미되어진다. 가장 깊은 것이 “한 가운데”라 불리우고 있다; “나무”는 앞서와 같이 지각을 명시한다; 그러나 매우 적은 지각이 남아 있었던터라 마치 한 개 밖에 남은 것이 없는 듯, 이 나무는 단수로 말해지고 있다

“동산을 스스로 거니시는 여호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그들이 두려워했던 내적 지령이 뜻해진다는 것은 말씀에서 “목소리”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는 말씀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 또는 내향적으로 주의를 줌, 또한 거기로부터 결과하는 모든 책망, 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계시록서에서:
천사는 사자가 으르렁거리듯 큰 음성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가 외쳤을 때,
일곱 우레가 그들의 음성들을 발음했다 (계. 10:3),
다시 계시록서에서:
일곱 번째 천사의 음성의 날에, 하느님의 신비는 끝날 것이다 (계. 10:7).
다윗서에서:
하느님을 노래하라, 주님을 찬양하라, 그분은 옛 것 속에 있었던
천국들의 천국들을 타신 분이시다; 보라, 그분은 그분의 목소리를,
그분의 강하심의 목소리를 내보내실 것이다 (시. 68:32-33).
“옛 것 속에 있었던 천국들의 천국들”은 태고 교회의 지혜를 표시한다; “목소리”는 계시를, 또한 내적 지령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의 음성이 물들 위에 있으시다; 여호와의 음성이 능력 안에 계신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영광으로 계신다; 여호와의 음성이 삼나무들을 부러뜨리신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불의 불꽃을 가르신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광야가 흔들린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암사슴으로 새끼를 낳게 만드시고 숲들을 벗기신다 (시. 29:3-5, 7-9).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목소리의 특출함이 들려지게 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통하여 앗수르를 타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30:30-31).

“스스로 거니시는 목소리”는 남아있는 지각이 거의 없었음이 뜻해진다. 그리고 마치 자체, 그리고 들리지 않음을 수단으로 하는 듯 홀로인 것이 뜻해진다. 이는 다음 절, 즉 “여호와께서 사람을 부르셨다”로부터 명백해진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광야에 있는 하나의 외침의 목소리, 목소리가 말했다, 소리쳐라 (이. 40:3,6).
“광야”는 신앙 없는 교회이다; “하나의 외침의 목소리”는 주님의 강림을 통고함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분의 오심의 모두 각각의 통고, 마치 거듭나는 자에게 그분이 오실 때마다 있는 통고 같다. 거듭나는 자들과 더불어 내적 지령이 있다.

“공기” 또는 “낮의” “숨”을 수단으로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지각이지만 남아있는 기간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낮”과 “밤”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태고인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의 때들과 밤의 때들에 비교했다. 낮의 때들은 교회가 아직 빛 안에 있었는 때, 그러므로 이 상태가 “낮의” 숨, 또는 공기에 비교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지각이 약간 남아 있었고,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타락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 또한 신앙 있음의 상태를 “낮”, 신앙 없음의 상태를 “밤”이라 부르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낮이 있는 동안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일들을 해야만 한다:
밤이 온다,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요. 9:4).
똑 같은 이유로 해서 거듭남의 상태들이 제1장에서 “날들, days”로 불렸다.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자신들을 숨기는 것”이 지령을 두려워하는 것, 마치 악을 의식하는 이들의 경우(case)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제 10절, “나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벌거벗었기 때문에 저는 두려웠습니다”라는 그들의 응답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의 얼굴”, 또는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 임은 아래 인용 구절의 축복으로부터 분명하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네 위에 비추신다, 그리고 네게 자비를 베푸신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얼굴을 네 위에 들어올리신다, 그리고
너에게 평화를 주신다 (민. 6:25-26).
그리고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하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주신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로 우리 위에서 비추게 하신다 (시. 67:1)
많은 이들이 누가 우리에게 어떤 선을 보일 것이냐? 말합니다. 여호와시여,
당신은 우리 위에 당신의 얼굴의 빛을 들어 올리소서 (시. 4:6).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가 “(그분의) 얼굴들의 천사”라 불려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여호와의 자비들에 관하여 언급을 할 것이다; 그분은 그의 자비들에 따라,
그의 자비들의 많음에 따라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
그들의 모든 고난에서 그분은 고난받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의 천사가 그들을
구원했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동정하심에서 그분은 그들을 되찾으셨다 (이. 63:7-9).

“주님의 얼굴”이 자비, 평화,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이신 바, 분명한 것은, 그분은 자비로부터 모든 이를 중시하신다는 것, 그분의 용모를 어떤 자로부터도 결코 비켜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키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악 안에 있을 때, 자기 얼굴을 돌린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에 의해 말해진다:
너의 불법들이 너와 너의 하느님 사이를 분리되게 했다.
그리고 너의 죄들이 너로부터 그분의 얼굴이 숨겨지게 했다 (이. 59:2);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숨겼다, 그들이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자비, 평화, 그리고 모두 각각의 선, 또는 “여호와의 얼굴”은 지각을 가진 이들과 더불은 지령의 원인이다. 그리고 또한 비록 다른 방식에서이다 해도 양심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서도 지령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 지령들은 언제나 자비스럽게 역사한다. 그러나 이 인간의 상태, 즉 태고 교회의 이 후손의 상태는 자연적 선 중의 하나 였다; 그리고 자연적 선 안에 있는 그들의 품성은 자신들을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통하여 자신들을 숨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연적 선이 결여된 자들은 자신들을 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수치심에 무감각하기 때문인데, 이들에 관하여는 예레미야 8:12-13을 보라.

“동산의 나무 한 가운데”가 자연적 선, 이 선 안에 “나무”라 불리는 얼마간의 지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거주한 “동산”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이 “동산”이라 불리기 때문. 물론 이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경작한 인간에 따라 차이는 있다. 선 안의 가장 깊은 곳이 천적 수준이지 않으면 선이 아니다. (그 이유가)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이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각이 오기 (때문이다). 이 가장 깊은 곳이 여기서 “한 가운데, midst”라 불려지고 말씀의 많은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9, 1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소리치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셨다. 10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벌거벗었기에 나는 두려워져서 나 자신을 숨겼습니다.
“소리침”, “동산에서의 목소리”, “벌거벗어 두려워함”, “자신을 숨김” 등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맨 먼저 인간에게 물어지는 것은 말씀에서 매우 흔한 일에 속한다. 묻는 까닭은 그가 그것에 대해 고백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각, 내적 지령, 양심의 근원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관계로 이 주제에 관련하여 어떤 것을 살펴보는 것은 유익할 것 같다. 인간이 영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통치되는 것은 큰 진리에 속한다. 악령이 통치하기를 시작할 때, 천사들은 악들과 거짓들을 비키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로부터 전투가 발생한다. 이 전투로부터 인간은 지각, 지령, 양심을 수단으로 감지할 수 있어진다. 이 세 가지 것, 그리고 또한 시험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자기와 함께있는 영들과 천사들을 명백하게 볼 수 있고, 자기는 영들과 천사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육체적 측면에 깊이 침몰된 것도 아님을 명백히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 설사 수 백 번 이런 전투들을 느끼기조차 해도 여전히 그것들은 상상적인 것, 무질서한 마음의 결과 이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전투를 느껴보도록, 수 천 번 그것들의 생생한 느낌을 가지도록 허락되어, 수 년 동안 꾸준히, 그것들이 왔다가 떠날 때 그것들을 야기시킨 누구, 무엇, 어디에 관하여 (감지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대화했었다.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가도 되는지 안되는지의 허가를 발견하는 절묘한 지각을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사들은 그것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는 인간 자신보다 수 천 번씩 들어가는 것, 들어 갈 때에 관한 품질을 더 완전하게 지각한다. 천사는 생각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해도 가장 위대한 인간이 지각하는 것보다 더 충분하게 지각한다. 이것은 실로 믿을 수 없겠지만, 최고로 진리이다.

11-13절. 그리고 그분께서 말하셨다,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고 너에게 말했느냐? 너는 내가 먹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한 나무를 먹었느냐? 12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당신께서 나에게 여자를 주셨고, 그녀가 나에게 나무(의 실과)를 주어 내가 먹었습니다. 13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말하셨다, 왜 너는 이런 짓을 했느냐?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뱀이 나를 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먹었습니다.
위 말들의 의미는 전에 설명했던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인간의 합리성은 (합리성의) 자기 자신에 의해 속임을 당해지도록 자체를 내버려두었다. 그 이유는 속임 당함 자체가 (자기를 사랑함을 수단으로 하는 바,) 인간의 합리성에 가치가 있다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의 합리성은 자기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모든 이가 아는 바, 여호와 하느님이 뱀에게 이야기하시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실로 뱀은 없었다는 것, 더 나아가 그분이 “뱀”에 의해 의미되어진 감각적 부분에 말을 한 것은 아니다는 것; 그러나 이 대목들에는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 즉 그들은 감각들에 의해 자신들이 미혹되게 했음을 지각했다는 것,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사랑의 결과로, 그들은 주님에 관하여, 그분에 대한 신앙에 관하여 들었던 진리를 자기들이 믿기에 앞서 그것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 후손을 통치하는 악은 자기를 사랑함(love of self)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지닌 세상을 사랑함까지도 오늘날 존재하는 세상을 사랑함 만큼을 동시에 가진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오늘날과 달리 자기 식솔들, 가족 범주 안에서 살았던 바, 부를 축적하려는 오늘날 사람의 세상을 사랑함 같은 것은 없었다.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 교회의 악, 뿐 아니라 홍수 이후에 존재한 고대 교회의 악, 또한 유대 교회의 악, 그후 주님의 오심 이후 새로운 교회, 또는 이방인들의 교회의 악, 또한 오늘날 교회의 악은 그들이 주님과 말씀을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들과 자신의 감각들을 믿는 것이다. 이로부터 신앙은 없다, 그리고 신앙이 없는 곳에 이웃을 사랑함도 없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악과 거짓이다.

오늘날 이 악은 이전 시대 때보다 더 악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감각들로부터는 쉽사리 믿기지 않던 것도 지금은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둠을 형언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게 했다. 만일 인간들이 이 원인으로부터 있는 어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면, 그들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으리라.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 또는 갈빗대가 심장이나 가슴의 원 섬유(fibrils)들을 규율하려는 만큼이나 불가능할 것이다. 이 정도에 맞먹는 것이, 우리의 감각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 영적이고 천적인 것과의 관계일 것이다. 무수하다 말해야 마땅한 자연의 감추인 것들을 탐사하려는 자는 하나도 거의 발견하지 못한채, 오히려 그것들을 탐사하는 동안 오류에 빠지는 경우는 잘 알려져 있다. 영적 삶과 천적 삶 속의 감추인 진리들을 탐사하는 동안의 경우는 훨씬 더 하다. 그 삶에는 우리가 자연에서 대견치 않게 볼 수 있는 하나를 두고도 얼마나 많은 비밀함들이 존재하는지! 한가지 예를 들어 살피고 지나가자.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악 밖에 행할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런 행함과 돌아섬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악령들이 하고 있다. 이 악령들이 그것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들이 그들의 자기 자신을 만든 악 자체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악을 행하고 주님으로부터 자신을 돌아서게 하고, 과오 안에 있다; 그러고도 아직 그는 주님으로부터 만 살고 있다. 또 한편 이런 경우도 있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 선인 것을 행하고, 주님에게 돌아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을 수단으로 행하여진다. 천사들이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이 그것을 하신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인 것 같이 선인 것을 행할 수 있고, 자신을 주님에게 돌아서게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의 감각, 기억 속의 지식, 철학을 수단으로 결코 납득되어질 수 없다. 만일 우리의 이런 것에 조언을 구하겠다면, 그것이 진리이다 해도 필시 부정되어지고야 만다.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믿음의 문제를 두고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조언을 구하는 것은 자신들을 의심 안으로 던져 넣을 뿐 아니라 부정함 안으로, 즉 짙은 어둠 안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탐욕들 안으로 던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거짓인 것을 믿을 때, 그들은 또한 거짓인 것을 행한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을 때, 그들은 육체와 세상 속에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하여 그들은 자기와 세상에 속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거짓인 것으로부터 탐욕들과 악들이 튀어나온다.

14절.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 네가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너는 모든 짐승,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보다 뛰어나게(above) 저주되고, 배로 다닐 것이며, 네 사는 날 동안 너는 먼지를 먹게 되리라.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셨다”란 그들은 (자기들의 타락의) 원인이 자기들의 감각적인 부분(sensuous part)에 있음을 지각했음을 의미한다. “뱀은 모두 각각의 짐승과 들판의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보다 뛰어나게(above) 저주되었다”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이 자체를 천국적인 것으로부터 비켜, 육체(body) 속에 있는 것들 쪽으로 돌아 섬으로 자체를 저주했음을 의미한다. 전과 같이 여기서도 “짐승”, “들판의 야생 동물”은 애착들을 의미한다. “뱀이 배로 다님”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은 더 이상 천국에 속하는 위 쪽을 쳐다볼 수 없고 오로지 육체와 땅에 속한 아래 쪽만을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 사는 날 동안 먼지를 먹는다”란 그들의 감각적인 부분은 육체와 땅에 속한 것 말고는 그 어떤 것 가지고도 살 수 없게 되었음을, 바꿔말하면 그것은 지옥(infernal)적인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태고의 천적 인간에서의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은 내적 인간에게 고분고분하고, 도움이 되는 본성의 범주였고, 이 수준 이상으로 그것들은 취급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내적 인간 앞에 육체의 감각적인 것을 놓았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리되어지고 육체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저주되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하심”을 수단으로 자기들의 타락의 원인이 감각적 부분임을 그들이 지각함을 의미함은 이미 상술한 바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분이 뱀에게, 너는 모두 각각의 짐승보다 뛰어나게, 들판의 모두 각각의 동물보다 뛰어나게 저주되었다 라고 말하신 것은 감각적인 것은 천국적인 것으로부터 그 자체를 비켜, 육체의 것 쪽으로 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하게 보여질런지 모른다. 여호와 하느님은 결코 저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누군가에게 결코 화내시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시험으로 인도하시는 일도 결코 없다. 결코 벌하시지 않는다. 그러니 저주하시는 일은 더더욱 없다. 저주하는 것은 지옥의 패거리이다. 그 이유가 이런 해를 주는 일은 자비와 평화, 그리고 선함의 원천으로부터는 결코 진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진 이유는 말씀의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고, 화내시고, 벌하시고, 시험하시고, 죽이시고, 저주조차 하시는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 모든 사람, 악 자체, 처벌들, 시험들을 통치하시고 배려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하여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을 가졌을 때, 그 후에 그분이 어떻게 처벌과 시험으로부터 악을 돌리심에 의해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배려하시는 가를 인간은 배우게 된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에서, 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반드시 제일 먼저 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는 이와 같은 의미들로 꽉 차있다.

“짐승과 들판의 야생 동물”이 애착들을 의미하는 것은 제 45, 46항에서 말했던 것으로부터 알 것인 바, 아래 인용구절로 족할 것이다. 다윗서로부터:
당신, 오 하느님, 당신의 친절하심으로부터 비를 보내소서; 당신은 노동하시는 당신의
유업을 확증하십시요; 당신의 야생 동물이 그 안에 거주할 것입니다 (시. 68:9-10),
이 구절 역시 “야생 동물”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느님의 유업 안에 거주한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고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도 또한 “짐승과 들판의 야생 동물”이라 언급되어진다. 그 반면 창세기 1장 24, 25절에서는 “짐승과 땅의 야생 동물”이라 명명되는 이유는 현재 구절은 교회, 또는 거듭난 사람을 취급하고, 이에 반해 창세기 첫 장은 아직까지는 교회이지는 않은 교회, 또는 이제 막 거듭나는 인간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들판(field)”은 교회, 또는 거듭난 자에 응용되어진다.

“뱀이 자기 배로 간다”는 그들의 감각적 부분은 더 이상 위쪽인 천국의 것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육체와 땅의 것들 쪽인 아래쪽을 향한다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고대 시대 때에, “배(belly)”를 수단으로 땅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 의미되어졌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가슴(chest)”을 수단으로 땅 위쪽에 있는 것들; 그리고 “머리(head)”를 수단으로 가장 높은 것들이 의미되어졌다. 그 자체로 인간 본성의 가장 낮은 부분인 감각적 부분은 “그것의 배로 갔다”고 여기서 말해진다. 그 이유는 감각적 본성이 땅인 것 쪽으로 돌아서버렸기 때문이다. (뱀의 배가) 땅을 내리 누름(depression), 머리 위에 먼지를 뿌림은 유대 교회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다윗서를 보자: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우리의 비참함과 압제 당함을 잊으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혼이 먼지에 절했고, 우리의 배가 땅에 들러붙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시어, 우리를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의 자비하심을 위하여 우리를
되찾으소서 (시. 44:24-26),
위 구절에서도 역시, 인간이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비킬 때, 그는 자기 배를 수단으로 먼지 쪽에, 땅 쪽에 착 달라붙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요나서에서, 요나가 던져진 큰 물고기의 “배”를 수단으로 땅의 더 낮은 부분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의 예언을 보자:
지옥의 배로부터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제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욘. 2:2),
위 구절의 “배”는 더 낮은 땅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의 것들을 중요시했을 때, 그는 “똑바로 서서 걷는다”, 그는 “위쪽을 쳐다본다”, 또는 그는 “앞으로” 향한다 등등으로 말해진다. 이 표현 모두 같은 것을 뜻한다; 그가 육체적이고 땅의 것을 중요시할 때, 그는 “땅에 절했다”, 그리고 “아래쪽을 본다”, 또는 “뒤쪽을 향한다”라고 말해진다. 레위기서를 보자:
나는 너희를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 내와 너희가 그들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한
너희 하느님 여호와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멍에의 끈들을 부수었다, 그리고 너희를
똑바로 서서 가게 만들었다 (레. 26:13).
미가서에서:
그 때부터 너희는 너희 목들을 제거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는 똑바로 서서 가지 않을 것이다 (미. 2:3).
예레미야 애가서에서:
예루살렘은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녀를 경멸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그녀의
벌거벗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녀는 신음하며 뒤쪽으로 돌아섰다.
높은 곳으로부터 그분은 내 뼈들 안으로 불을 보내셨다, 그리고 나를 뒤쪽으로
되돌아 가게 만드셨다; 그분은 나를 황폐해지게 만드셨다 (애. 1:8, 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당신은 되찾으시는 분, 슬기로운 자들을 뒤쪽으로 돌리시고,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만드신다 (이. 44:24-25).

“네 사는 날 동안 먼지를 먹는 것”이 감각적인 부분은 육체와 땅으로부터 인 것 외에는 어떤 것을 가지고도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 더 말하자면, 그것이 지옥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에서 “먼지”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미가서를 보자:
당신의 사람들을 영원의 날들에서 같이 먹이십시요. 민족들이 보고 자기들의 모든 능력을
두고 얼굴을 붉힐 것입니다; 그들은 뱀 같이 먼지를 핥을 것입니다. 그들은
땅의 기는 것(뱀) 같이 자기들의 은신처(holds)들로부터 흔들 것입니다
(미. 7:14, 16, 17).
이 구절의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뜻한다; “민족들”은 자기들의 자아를 신뢰하는 자들을 뜻하는 바, 이들로부터 “그들은 뱀 같이 먼지를 핥을 것이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야만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적들이 먼지를 핥을 것입니다 (시. 72:9).
“야만인들”, “적들”은 지상과 세상 것만을 중요시하는 이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먼지가 뱀의 빵일 것이다 (이. 65:25).
“먼지”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중요시하지 않는 이들,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만을 중요시하는 이들을 의미하기에,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들어간 성이나 집에 가치가 없다면, 너희는 “너희의 발로부터 먼지를 흔들어 털어라” 하셨다 (마. 10:14). (“먼지”가 정죄되는 것, 지옥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제 19절로부터 더 보여진다.)

15절. 그리고 나는 너와 여자 사이에, 그리고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enmity)를 놓을 것이다; 그는 네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너는 그의 뒤꿈치에 상처를 입힐 것이다.
이 구절이 주님께서 세상 안으로의 첫 강림하심을 예언한 대목임은 모든 이가 눈치채고 있다; 실로 이것은 말들 자체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구절로부터, 그리고 예언서들로부터, 유대인들조차 메시아가 오시기로 되었음을 알았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이 구절 속의 특별한 말들, 즉 “뱀”, “여인”, “뱀의 씨”. “여인의 씨”, “짓밟혀질 뱀의 머리”, “뱀이 상처입힐 뒤꿈치”에서 특별하게 뜻해지는 바를 이해한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꼭 설명하여야 할 것이라 본다. 이 구절에서의 “뱀”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악을 뜻하는데, 더 뾰족히 말하면 자기를 사랑함(love of self)을 뜻한다. “여자”는 교회를 뜻한다. “뱀의 씨”는 모든 불신앙 (infidelity)을, “여인의 씨”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분, He”는 주님 자신을, “뱀의 머리”는 일반적으로 악의 지배(권력)을, 특별히 자기를 사랑함이 지배함을, “짓밟음”은 의기소침됨(depression)을, 짓밟은 이유는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뒤꿈치”란 가장 낮은 자연 평면(the lowest natural), 예를 들면 유형적, 육체적 물질적(corporeal)인 것을 뜻하는데, 뱀은 이런 것들에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이다.

“뱀”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든 악을, 특별하게는 자기를 사랑함을 뜻하는 이유는 모든 악의 일어남이 마음의 감각적 부분과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뱀”에 의해 제일 먼저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뱀은 모두 각각의 악을, 특별하게는 자기를 사랑함, 또는 이웃과 주님을 미워함을 표시한다. 이 악과 미워함은 그 종류가 다양해서, 수많은 특질들로 구성되고, 더 나아가 수많은 종류로 구성되는 바, 말씀 안에서도 뱀들의 종류는 다양하게 표현되어, 미움이라는 독의 종류에 따라, “뱀(snake)”, “독사(cockatrice)”, “불의 뱀(fiery serpent)”, “날으는 큰 뱀(serpent that fly)”, 그리고 “기는 뱀(that creep)”, “독사(viper)” 등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를 보자:
너 불레셋이여, 너희를 치던 막대가 부러졌다고 기뻐환호하지 말라. 그 이유가
뱀의 뿌리로부터 독사가 나오고, 그것의 열매는 날으는 불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14:29).
“뱀의 뿌리”는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과 연결되는 마음 부분, 또는 원리를 표시한다.; “독사(cockatrice)”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 안에서 근원하는 악을 표시한다; 그리고 “날으는 불뱀”은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오는 탐욕을 표시한다. 같은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서 이렇게도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독사의 알들을 부화한다. 그리고 거미줄을 친다; 그들의 알을 먹는 자는
죽는다, 그리고 그것이 으깨질 때, 독사가 나온다 (이. 59:5).
여기 창세기에서 묘사된 뱀은 계시록에서 “크고 붉은 뱀”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늙은 뱀”, 또한 온 세상을 미혹하는 “악마와 사탄”이라고도 불린다 (12:3, 9; 20:2), 거기서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도 “악마”를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한명의) 특별한 악마가 아니라 악령들의 패거리, 또는 악 자체가 뜻해짐도 첨언해둔다.

“여인”을 수단으로 교회가 뜻해진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인, 천국의 결혼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천국의 결혼의 본성은 천국, 결과적으로 교회가 교회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만큼에서 주님에게 결합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 없이 합일(union)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이 자기 자신 안으로 순진, 평화, 그리고 선을 은근히 심어두실 때, 이 자기 자신도 여전히 인간의 것인 자기 자신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천국적이고 가장 행복하게 되어간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천국적이고 천사의 자기 자신의 품질(이 있고), 그리고 (본래의) 자기 자신의 품질, 이것은 자기(self)로부터(이기) 때문에 지옥적이고 악마적인데, (이 차이는) 확실히 말해 질 수 없다. 이 차이는 천국과 지옥 비슷하다.

천국적이고 천사 같은 자기 자신 때문에 교회는 “여인”, “아내”, “신부”, “처녀”, 그리고 “딸”이라 불리운다. 그녀가 계시록서에서 “여인”이라 불리워진다:
여인이 태양을 옷입고, 달을 그녀의 발 아래 두고, 열 두 별들의 왕관을
그녀의 머리 위에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용은 남자 아이를 낳은 여인을
박해했다 (계. 12:1. 4-5, 13).
이 인용구절에서, “여인”을 수단으로 교회가; “태양”을 수단으로 사랑이; “달”을 수단으로 신앙이; “별들”을 수단으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뜻해지는데, 이것 모두를 악령들은 미워하고 극도로 박해한다. 교회가 “여인”이라, 또는 “아내”라 불리는 이사야서를 보자:
너를 만드신 분은 너의 남편, 군대들의 여호와가 그분의 이름이시고, 그리고
너를 되찾으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고, 그분은 온 땅의 하느님이라 불리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여인이 버림받고, 영에서 고뇌한 것 같이,
그리고 젊은 시절의 아내 같이 부르셨다 (이. 54:5-6),
위 구절에서 남편/만드는 자는 (히브리어의 이중(dual)인) 일종의 복수로 있다. 그 이유는 자아(selfhood, proprium)가 동시에 [취급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이 버림받음”, 그리고 “젊은 시절의 아내”는 고대 교회와 태고 교회를 특별하게 의미하는데, 이와 마찬가지인 말라기서를 보자:
여호와께서는 너와 네 젊은 시절의 아내 사이에 증언을 해두셨다 (미. 2:14).
그녀가 계시록서에서 “아내”와 “신부”로 불리워진다:
나는 자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서 준비되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의
안에서 밖으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이리로 오라,
내가 네게 신부,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줄 것이다 (계. 21:2, 9).
(주님의) 교회가 예언서의 많은 곳에서 “처녀”, “딸”로 불리운다.

“뱀의 씨”를 수단으로 모든 불신앙(신을 믿지 않음, infidelity)이 뜻해짐은 “뱀”이 모든 악이다는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씨(seed)”는 생산하고 생산되는 것, 또는 낳고 낳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바, 이것은 불신앙이다. 이사야서에서, 뒤집혀 있는 유대 교회의 상태에 관련하여, 그것이 “악행자의 씨”, “간음의 씨”, “거짓의 씨”라 불리운다: 즉,
죄짓는 민족, 불법이 쌓인 백성들, 악행자들의 씨, 파괴자들인 아들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성나게 했다,
그들은 뒤쪽을 향하여 자신들을 떼어 놓았다 (이. 1:4).
이리로 가까이 오라, 너 음행자의 아들들아, 간음자의 씨들아,
너희는 위법의 자녀, 거짓의 씨가 아니더냐 (이. 57:3-5).
그리고 다시, “뱀” 또는 “용”에 관해 말하는데, 루시퍼(14:12)라 불러진다:
너는 역겨운 어린 가지 같이 네 무덤으로부터 내던져졌다, 그 이유는
네가 네 토지를 부패하게 했고, 네가 네 백성을 죽였기 때문이다; 악행자의
씨는 영원까지 부를 일이 없을 것이다 (이. 14:19-20).

“여인의 씨”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교회인 “여인”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씨”는 신앙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교회가 교회라 불려지는 이유는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신앙이 “하느님의 씨”라 불려진다: 즉,
여호와께서 너와 네 젊은 시절의 아내 사이에서 증거해두셨다; 그리고 영의
나머지를 가진 자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 자는 하느님의
씨를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러나 너는 네 영을 관찰하여,
네가 네 젊은 시절의 아내를 두고 불성실해지지 않도록 하라 (말. 2:14-15).
위 구절에서 “젊은 시절의 아내”는 고대와 태고 교회들이다, 이 교회의 “씨” (또는 신앙)을 두고 예언자가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이 교회에 관련해:
나는 네 목마름에 물들을 부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마른 땅 위에 홍수들을;
나는 나의 영을 네 씨 위에 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축복을 네 후손 위에 (이. 44:3).
계시록서에서:
용은 여인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명령들을 준수하고,
예수에 관한 증거를 가진 그녀의 씨들과 전쟁을 만들려고 나갔다 (계. 12:17).
그리고 다윗서에서:
나는 나의 뽑은 자와 언약을 만들었다, 나는 내 종, 다윗에게 맹세했다, 영원까지
나는 네 씨를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좌는 천국들의 날들 같다; 그의 씨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좌는
태양 같이 내 앞에 있을 것이다 (시. 89:3-4, 29, 36),
위 구절에서 “다윗”은 주님을 뜻한다; “왕좌”는 그분의 왕국을; “태양”은 사랑을; 그리고 “씨”는 신앙을 뜻한다.

신앙 뿐 아니라, 주님 자신 역시 “여인의 씨”라 불리신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신앙을 주시기 때문, 그분이 신앙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통하여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타락한 교회 안에서 기꺼이 태어나시려 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의 신성의 권능을 수단으로 그분이 그분의 인간 실체 안에서 인간의 자기 자신과 신성의 천적 자기 자신을 하나되도록, 하여 그분 안에서 그것들이 하나이도록 하시기 위함 때문이었다; 이 합일(union)이 결과되지 않았으면, 세상 전체는 지독하게 파멸되었을 것이다. 주님이 “여인의 씨”이셨기 때문에 “그것(it)”이 아닌 “그분(He)”으로 말해지고 있다.

“뱀의 머리”가 일반적으로는 악이 지배함, 특수하게는 자기를 사랑함이 지배함을 뜻한다는 것은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이것의 본성은 너무 비참해서 지배권을 추구할 뿐 아니라, 땅 위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든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치 못해 천국에 있는 것까지 지배하려 한다. 더 나아가 주님 자신까지도 지배하려 든다…그렇다해도 만족치 못한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함으로 불붙어지는 시초 안에 잠재되어 있다. 만일 이것이 탐닉되어지되, 제한이 없어져 있다면, 이것은 순간에 튀어올라, 그것의 열망하는 높이까지 치솟을 것임을 우리는 지각할 것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뱀”, 또는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의 악이 지배력을 발휘하기를 바라는지, 얼마나 많이 자기 지배력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을 미워하는지 분명하다. 이것이 자체를 드높이는 “뱀의 머리”, 그리고 땅쪽으로 “짓밟아 내어”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 하시려는 뱀의 머리이다. 또한 “뱀” 또는 “용”이 “루시퍼”라 불리우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오 루시퍼야, 너는 네 속으로 말했다, 나는 천국들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내
왕좌를 하느님의 별들 너머로 드높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회중의 산 위, 북쪽에
앉을 것이다, 나는 구름들의 높이 너머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가장 높은 자와
동등하게 만들 것이다; 허나 너는 구덩이 쪽으로,
지옥 아래로 데려가 질 것이다. (이. 14:12-15).
“뱀”, “용”이 계시록서에서도 그가 그의 머리를 드높이는 것에 관련해 묘사되고 있다:
크고 붉은 용, 일곱 머리와 열 뿔, 많은 왕관을 가졌는데;
그러나 그는 땅으로 내던져졌다 (계. 12:3, 9).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님에게 말하신다, 너는 내가 네 적들을 네 발판으로 만들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으라; 여호와께서는 시온으로부터 네 강함의 막대를 내보실 것이다,
그분은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은 죽은 몸들로 채우실 것이다, 그분은
많은 토지 위에서 머리를 부수실 것이다; 그분은 길에서 시내를 마실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그분은 머리를 들어올리실 것이다. (시. 110:1-2, 6-7).

“짓밟음”, 또는 “상하게 함”이 의기소침함을 뜻하는 것은 그것이 “배로 다니고 먼지를 먹도록” 강요당하기 위해서인 바, 이 절과 앞 절로부터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높은데 거주하는 그들을 아래로 내던지셨다; 드높은 성을 그분은
낮추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땅에까지 낮추실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먼지까지에로
넘어뜨리실 것이다; 발이 그것을 밟아 뭉갤 것이다 (이. 26:4-6).
다시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손으로 땅쪽으로 내던지실 것이다;
그것들은 발로 짓밟힐 것이다-자만의 왕관이다 (이. 28:2-3).

“뒤꿈치”에 의해 가장 낮은 자연의 것, 또는 육체의 것이 뜻해짐은 태고인들이 인간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했던 방법이 알려져야 이것도 알게 된다. 그들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머리와 얼굴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선행과 자비)로부터 출시된 것은 가슴에; 자연적인 것들은 발에; 보다 더 낮은 것들은 발바닥에; 가장 낮은 자연적인과 육체적인 것들은 뒤꿈치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것들이 서로 관련이 있다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것들을 불렀다. 추론의 가장 낮은 것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인데 야곱이 단을 두고 예언한 것에 의해 뜻해지고도 있다: 즉,
단은 길가에 있는 뱀, 작은 길에 있는 독사(adder)여서 말(horse)의 뒤꿈치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승마자는 뒤쪽으로 떨어진다 (창. 49:17).
다윗서에서:
내 뒤꿈치의 불법이 나를 휘감았습니다 (시. 49:5).
마찬가지 방식에서 야곱이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야곱에 관련하여:
그의 손이 에서의 뒤꿈치를 붙잡고 있었는 바,
이로부터 그는 야곱이라 불려졌다 (창. 25:26),
이름 “야곱”은 “뒤꿈치”로부터 기인했는데, “야곱”으로 의미된 유대 교회가 뒤꿈치를 상하게 했다. 뱀은 가장 낮은 자연의 것들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독사의 종류가 아니면, 인간 안의 내면의 자연적인 것들을 다치지 못하게, 인간의 영적인 것들은 더욱더 다치지 못하게 하고 천적인 것은 거의 다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을 주님께서는 그의 지식을 사용함 없이 결점 안에서 보존하시고 비축해놓시고 있다. 고로 주님에 의해 비축된 것이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운다. 뱀이 홍수 때의 사람들 안에 있는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을 파괴한 방식은 자기를 사랑함과 감각적 원리를 수단으로 한 것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의 경우는 감각적인 것들, 전통들, 하찮은 것,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해서 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경우, 뱀이 감각의 것들, 기억 속의 것들, 철학 속의 것들, 동시에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어떻게 파괴해왔고 어떻게 계속 파괴해가는 지는 추후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이상 말해진 것으로부터 명백해지는 것 또 하나는 이것이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그때의 교회에 밝히 알려졌다는 점이다.

16절. 그리고 여자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내가 슬픔과 임신을 크게 늘릴 것이다. 슬픔 가운데 너는 아들들을 낳을 것이고, 너의 순종함이 너의 남자(vir)에게 있어,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여자”는 자아(proprium)와 관계 있는 교회, 자아를 사랑한 교회를 의미한다. “슬픔을 크게 늘린다”란 전투와 전투로 야기되는 불안을 의미한다. “임신”은 모든 생각을, “그녀가 슬픔 가운데 낳는 아들”은 그 교회가 생산하는 진리들을, “남자”란 전과 같이 여기서도 그 교회가 순종할 합리성과 그 교회를 지배할 합리성을 의미한다.

교회가 “여인”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지는 것은 앞서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인을 수단으로 본래 의미된 교회가 뒤집혀진 상태에서의 교회이다. 그 이유는 뒤집혀진 태고 교회의 후손이 지금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적 부분이 그 자체를 비킬 때, 또는 그 자체를 저주할 때, 그 결과는 악령들이 강력하게 싸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따라붙는 천사들의 노동은 더 심해지는 바, 이 전투가 본문에서 “나는 네 임신과 아들들의 출생에 관련하여 네 슬픔을 크게 늘리겠다”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즉 진리에 대한 생각과 진리를 생산함들에 관련하여 수고가 클 것이다는 말이다.

말씀에서 “임신과 아들들의 출생”은 영적 의미에서 취해진 것-“임신”은 생각과 심정의 고안을 위해, “아들들”은 진리들을 위해 취해진 것임은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에브라임에 관하여, 그들의 영광은 출생으로부터도, 자궁으로부터도, 임신으로부터도 새같 이 날아갔다; 설사 그들이 자기들의 아들들을 양육한다 해도, 나는 그것들을 빼앗아 사람 없게 할 것이다, 내가 그들로부터 떠날 때 그들에게 화가 있다 (호. 9:11-12),
위에서 “에브라임”은 총명, 또는 진리를 이해함; 그리고 “아들들”은 진리들 자체를 의미한다. 그밖의 구절에서도 에브라임은 총명있는 자, 또는 우둔한 자를 의미한다:
산고의 슬픔들이 그에게 닥친다, 그는 지혜 없는 아들이다, 그 이유가 그때에
그는 아들들의 자궁의 깨트림에서 서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 13: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얼굴을 붉혀라, 오 시돈아, 그 이유가 바다가 말했었다, 바다의 요새(fortress),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않았다, 낳지도 않았다, 나는 젊은 남자들을 기르지도
않았다, 소녀들을 성장하게 하는 원인도 아니었다; 이집트에 관한 보고(report)에서 같이, 그들은 두로의 보고에 따라 산출할 것이다 (이. 23:4-5),
“시돈”은 신앙에 관한 지식 안에 있어왔던 이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 지식을 파괴한 이들, 하여 불임(barren)이 되어버린 이들을 뜻한다.
다시 예언서에서, 거듭남을 같은 예언서에서 취급하면서, 그리고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녀는 산고가 있기 전 그녀는 낳는다; 그녀의 고통이 오기 전, 그녀는 남자 아이를
(낳아서) 인계했다; 누가 이런 것들을 들었던가? 그리고 내가 낳게하지 않았더냐?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가 낳게하고 닫히게 하지 않더냐?
네 하느님이 말하신다 (이. 66:7-9).
그러므로 천국의 결혼으로 임신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이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아들들”이라 불리운다:
선한 씨를 뿌리시는 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다; 들판은 세상이다;
그리고 씨는 왕국의 아들들이다 (마. 13:37-38).
그리고 구원하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을 그분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 부르신다 (요. 8:39); 그 이유가 “씨”는 신앙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로부터 있는 “아들들”은 신앙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로부터 또한 주님께서는 자신이 “씨”이신 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즉 교회 속의 신앙이라 부르신다.

“남자(vir)”에 의해 합리성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이 장의 6절로부터 나타난다. 즉 여인이 자기와 함께 있는 그녀의 남자에게 주었다, 그는 먹었다, 이를 수단으로 그가 동의했음이 뜻해지는 대목에서 이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남자에 관해 말해진 것, 거기서 남자에 의해 슬기롭고 총명한 자가 뜻해진다. 어쨌든 여기서의 경우 “남자”는 합리성(the rational)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음을 수단으로 지혜와 총명이 파괴된 결과,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 합리성은 총명의 모조품(imitation)이어서 마치 총명일 듯할 뿐이다.

모든 법과 교훈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부터, 즉 그것의 진정한 시작으로부터 출시되는 바, 결혼의 이 법이 그러해야 하는 바, 요구되는 것은, 여인의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인 바램(desire)으로부터 행동하는 아내, 이 바램은 남자 같이 합리성으로부터 라고 말할 수 없는 바, 아내는 남자(합리성)의 신중함에 복종해야 한다.

17절. 그리고 사람에게 그분은 말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여 말한 나무로부터 먹었기에 너 때문에 지면은 저주된 바 너는 네 사는 모든 날들 동안 큰 슬픔 가운데 땅의 것을 먹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이란 사람(남자)이 동의 했음, 또는 합리성이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동의함으로 말미암아 합리성 역시 비켜섰다. 또는 스스로 저주하였다. 그 결과 외적 인간 전체도 자체를 저주했는 바, “너 때문에 지면이 저주되었다”로 표시되었다. “그 원인으로 슬픔 가운데 먹는다”란 그의 삶의 미래 상태는 불쌍할 것임을, 그리고 이는 교회의 마지막 까지에서조차도, 즉 “네 사는 모든 날들 동안” 불쌍할 것임을 뜻한다.

지면(ground)이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전에 상술한 “땅”, “지면”, “들판”의 서술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땅”이라고는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천적 씨가 자기 안에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지면”에 비교되어지고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도 “지면”이라 불리운다. 선과 진리의 씨가 외적 인간 안에, 즉 그의 애착과 기억 안에 이식되어진다. 그러나 내적 인간 안에는 아니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 안에는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외적 인간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더 이상 표출되어 나타나지 않을 때, 인간은 외적, 또는 육체적이다; 어쨌든 선들과 진리들은 인간의 지식 없이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 안에 비축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외적 인간이 (죽었거나,) 거의 죽은 정도의 상태, 통상적으로, 시험, 불행, 아픔, 그리고 죽음의 시간 같은 기회 외에는 (잠간이라도) 출시되지 않는다. 합리성 역시 외적 인간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자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일종의 매체(medium)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은 합리성을 통하여 육체적 외적 인간에서 실행하기(operate)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이 동의할 때, 합리성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을 분리한다. 하여 내적 인간의 존재는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그 결과로 내적 인간으로부터 있는 지혜와 총명도 알려지지 않는다.

여호와 하느님이 “지면”, 또는 외적 인간을 “저주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자체를 비켜 세웠다, 즉 자체를 저주했다. 이는 제245항에서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큰 슬픔 안에서 지면으로부터 먹는 것”은 삶의 비참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 절과 뒤를 잇는 구절로부터 “먹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사는 것을 언급한 것임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이런 삶의 상태는 악령이 싸우려들고, 천사가 이에 맞서 애쓸 때인 전투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악령이 지배력을 확보할 경우, 한층 더 비참해진다; 그 이유가 이때 악령들이 외적 인간을 지배하고, 천사들은 내적 인간만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로부터는 리메인스(remains)가 거의 없어 천사들은 인간을 방어해줄 거기로부터의 어떤 것을 거의 가져오지 못한다; 이로 인해 비참함과 걱정 불안이 발생한다. 죽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비참이나 걱정을 느끼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자신을 두고 누구보다 더 진실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그리고 영원인 것에 대해 야수들이 아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수같이 그들은 지상의 것 쪽인 아래쪽을, 또는 세상의 것 쪽인 바깥쪽을 쳐다보며, 합리성과 합작하여 자기들의 좋아함(inclination)과 감각 측면들에 몰입한다. 그들은 죽어 있으므로 영적 전투나 시험들을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악령에 항복한 셈이다. 하여 그들의 생명은 그들의 무거운 탐욕의 무게 아래 깊이 침몰되어 있다. 그것으로 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더 한층 저주하여, 지옥의 더 깊은 곳으로 자신들을 빠뜨린다; 그들은 가장 비참한 고통을 견디어낸다. 이와 같은 것이 또한 지면은 저주 받는 것, 슬픔 가운데 그것을 먹는 것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네 사는 모든 날”이 교회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기서 취급한 주제가 개개인이 아닌 교회와 교회의 상태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이 교회의 날들의 끝은 홍수의 때였다.

18절. 그리고 지면은 너에게 가시와 엉컹퀴를 산출하고, 너는 들판의 풀잎을 먹으리라.
“가시와 엉컹퀴”에 의해 저주와 황폐함이; 그리고 “너는 들판의 풀잎을 먹을 것”에 의해서는 그는 야생 동물같이 산다는 것이 뜻해진다. 인간은 그의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분리되고, 내적 인간은 극히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외적 인간에 작동할 때, 그는 야생 동물처럼 사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내적 인간을 통하여 받는 것으로부터 사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파생하는 것 가지고는 야생 동물이다.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외적 인간, 그 자체만 국한하면 야생 동물이 가지는 것, 즉 비슷한 본성, 바램, 식욕, 공상, 그리고 감정, 비슷한 신체 기관에 이르러 동물보다 더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추론함이 외적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받음을 수단으로 영적 실체(substance)로부터 가진 것이 있는 듯 자신을 여겨지게 한다. 이런 여김마저도 이와은 인간에게는 뒤집혀 있고, 하여 죽음인 악의 생명이 되어간다. 이로부터 그는 죽어있는 인간이라 불리운다.

“가시와 엉컹퀴”가 저주와 황폐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축복과 번성함을 표시하는 말인 추수함과 열매 나무로부터 분명해진다. “가시(thorn)”와 “엉컹퀴(thistle)”, “찔레(brier)”, “가시나무(bramble)”, “쐐기풀(nettle)”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호세아서에서:
보라, 그들은 황폐함 때문에 달아나버렸다; 이집트가 그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멤피스가 그들을 매장할 것이다; 그들이 은(silver)을 탐내나, 쐐기풀이
그들에게 상속될 것이다; 가시나무가 그들의 천막들 안에 있을 것이다 (호. 9:6).
위 구절에서 “이집트”와 “멤피스”는 자신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것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표시한다. 같은 예언서에서:
아웬의 드높은 장소들, 이스라엘의 죄는 파멸될 것이다; 가시와 엉컹퀴가
그들의 제단들 위에서 자랄 것이다 (호. 10:8),
위 구절에서 “아웬의 드높은 장소들”은 자기를 사랑함, 그리고 “제단들 위에 있는 가시와 엉컹퀴”는 모독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쾌 쓸만한 들판들 때문에, 열매있는 포도나무 때문에 젖꼭지 위에서 슬퍼할 것이다;
내 백성의 지면 위에 가시돋힌 엉컹퀴가 자랄 것이다 (이. 32:12-13).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 가문을 찌르는 가시나무, 그들을 빙둘러 있는 모두로부터 고통 주는
엉컹퀴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겔. 28:24).

“들판의 풀잎을 먹는 것”(즉 야생 식량)은 야생 동물과 비슷하게 사는 것을 표시한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에 관해 말해진 다니엘서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너를 사람으로부터 몰아낼 것이다. 너의 거주함은 들판의 짐승들과 더불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소들 같이 네가 풀을 먹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일곱 때가 너를 지나갈 것이다 (단. 4:25).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너는 내가 그것을 오래 전에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듣지 못하였느냐? 나는 옛적의
말들로부터 그것을 만들었다; 지금 나는 그것이 지나가게 하였다, 그리고 성채,
울타리 있는 성읍들이 돌무더기로 황폐되어 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민들,
힘이 약한 바, 어쩔줄 몰라하고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들판의 풀로, 풀잎의
푸른 것으로, 지붕의 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들판은 곡식이 서있기 전에 바싹
말리울 것이다 (이. 37:26-27).
위 구절은 “들판의 풀”, “풀잎의 푸른 것”, “지붕의 풀”, “바싹 말라진 들판”을 수단으로 의미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가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홍수 전의 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래 전”, “옛적의 날들”에 의해 뜻해져 있다.

19절. 네가 지면으로 되돌아 갈 때까지 너는 네 얼굴의 땀에서 빵을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먼지인 바 먼지로 되돌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의 땀 속에서 빵을 먹는다”란 천적인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취해졌던 지면으로 되돌아 감”이란 거듭나기 전의 상태인 외적 인간으로 거슬러 되돌아 감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되돌아 가라”란 그는 죄있는 바 지옥이다.

“얼굴의 땀에서 빵을 먹는 것”이 천적인 것을 싫어함을 의미하는 것은 “빵”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빵”을 수단으로 영적인 모든 것과 천적인 모든 것이 뜻해진다. 이 둘은 천사들의 식량이다. 인간들에게서 빵이 결핍될 때와 같이 이것들이 천사들로부터 결핍되면 그들은 사는 것이 중단되고 만다. 천국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은 땅에 있는 빵과 상응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보여진다. 주님이 “빵”이시다는 것, 그 이유가 그분으로부터 천적이고 영적인 것은 무엇이든 진행되기 때문인데, 이를 그분 자신께서 요한복음서에서 가르치신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요. 6:58).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성찬에서 상징물로 채용되고 있다. 또한 이런 천적인 것이 만나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천적, 영적인 것이 천사들의 식량을 구성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들로부터 명백해진다:
인간은 빵만에 의해서 살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두 각각의 말을 수단으로 산다 (마. 4:4),
즉,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이 생명으로부터 천적, 영적인 모든 것이 와진다.
홍수 직전 존재했던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 여기서 취급된 인간은 (천적, 영적인 것을) 통째로 잃었고, (그 대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 그들은 신앙 속의 진리인 것, 주님이 누구이셨는지, 또는 이 분이 오시어 자기들을 구해주신다는 것, 등등에 관해서 들어보는 것조차 더 이상 반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주제들이 (그들 앞에) 꺼내질 때, 그들은 비켜 뒤돌아섰다. 이런 (지독한) 싫음이 “얼굴의 땀에서 빵을 먹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대인들, 그들이 천국의 것들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적 메시아만을 갈구한 결과, 만나를 두고 싫어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만나가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 하여 그들은 그것을 “천한 빵”이라 불렀는데, 이것 때문에 불뱀이 그들에게 보내졌다 (민. 21:5,6). 더 나아가 천국의 것들을 역경과 고난의 그들의 상태에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이 천국의 것들은 그들이 눈물 안에 있을 때, 그들에 의해 “역경의 빵”, “고난의 빵”, 그리고 “눈물의 빵”으로 불리었다. 이 구절에서, 싫어함과 함께 받아진 천국의 것이 “얼굴의 땀 속의 빵”이라 불리운다.

지금 말해진 것들은 내적 의미이다. 그러나 글자에보다 밀접해 있기를 고집하는 자라면, 그는 이를 두고, 인간은 그의 얼굴의 땀을 수단으로, 또는 노동을 수단으로 지면으로부터 자신을 위해 빵을 획득해야 한다 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 “인간”은 어떤 인간이 아닌 태고 교회를 뜻한다; “지면”은 지면을 뜻하지 않는다. “빵”은 빵을 뜻하지 않는다. “동산”은 동산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것은 누누이 설명했다.

“네가 취해진 것인 지면으로 되돌아 감”을 수단으로 교회가 거듭남 이전과 같은 외적 인간으로 되돌아갈 것임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지면”이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그리고 “먼지”는 정죄된 것과 지옥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뱀을 말했을 때의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미 살핀 먼지에 대한 내용에 다윗서로부터의 다음 인용구절을 추가해 보자:
먼지된 자로 내려가는 모든 이들, 그리고 자기들의 혼을 살아있게 못할 자도
여호와 앞에서 절한다 (시. 22:29).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다, 그들이 근심한다; 당신께서 그들의 숨을 가져가신다.
그들은 종료된다. 그리고 그들의 먼지로 되돌아 간다 (시. 104:29),

위 구절들을 시리즈로 취합하면, 감각적 부분이 천적 평면으로부터 그 자체를 비켜서게 했다는 것 (14절); 주님께서는 그것들을(천적인 것과 감각적 부분들을) 다시 결합되게 하실 목적으로 세상에 오실 것(15절); 외적 인간이 그 자체를 비켜서게 한 결과 전투가 발생했다는 것(16절); 이로부터 재난이 발생했다는 것(17절); 정죄됨(18절); 마침내 지옥이다는 것(19절). 이런 것들이 홍수 쪽으로 내려가는 넷째 후손으로부터 그 교회 안에서 연속적으로 있어진 것이다.

20절. 그리고 사람은 그의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모든 생명있는 것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사람(homo)”은 태고 교회의 사람, 또는 천적 인간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모든 생명있는 것의 어머니”는 교회를 뜻한다. 그녀는 “어머니”라 불리는데 그녀가 첫 번째 교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교회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관한 신앙을 소유하기에 “생명있다”이다.

“사람”이 태고 교회의 인간, 또는 천적 인간을 뜻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동시에 살폈던 것은, 주님만이 사람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 모두 각각의 천적 인간도 사람이다는 것,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그분의 모습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 교회의 모두 각각의 교인은 어떤 예외나 구분됨 없이, “사람”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 이름은 짐승과 구별하기 위해, 사람으로 나타난 신체를 지닌 누구에게나 응용되고 말았다.

“아내”를 수단으로 교회가, 보편적 의미에서는 천국 안과 땅 위의 주님의 왕국이 뜻해진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머니”에 의해서도 같은 뜻이 있다. 말씀에서 교회가 “어머니”라 불리는데, 이사야서를 보자:
어디에 네 어머니의 이혼 증서가 있느냐? (이. 50:1).
예레미야서에서:
네 어머니는 크게 부끄러워했다; 너를 낳은 그녀가 수치심으로 뒤덮혀 있다 (예. 50:12).
에스겔서에서:
너는 그녀의 남자와 그녀의 아들을 싫어한 네 어머니의 딸이다;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그리고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족이었다 (겔. 16:45).
위 구절에서, “남자”는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 “아들들”은 신앙 속의 진리들; “헷족”은 거짓인 것; 그리고 “아모리족”은 악인 것을 표시한다. 같은 예언서에서:
네 어머니는 네 모습에서 물가에 심어진 포도나무 같다;
그녀는 많은 물들 때문에 잎이 풍성하고 열매가 많다 (겔. 19:10).
여기서 “어머니”는 고대 교회를 표시한다. “어머니”라는 말 표현은 태고 교회를 위해서는 더 특별하게 적용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첫 교회이기 때문, 그리고 여느 다른 교회보다 주님에 의해 더 사랑된 교회이다.

그녀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소유했던 결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 불리운 것도 이미 살핀 바 있다. 한 개의 생명 그 외에 더 생명이 있을 수는 없다. 이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모든 것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면 생명있는 생명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가 아니면 생명있는 신앙은 있어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신앙 안에 계신다. 이러하기에, 말씀에서 주님만이 “살아계시다(living)”, 그리고 “살아계신 여호와”라 이름불러지신다 (예. 5:2; 12:16; 16:14, 15; 23:7; 겔. 5:11); “영원히 사시는 분” (단. 4:34; 계. 4:10; 5:14; 10:6); “생명의 원천” (시. 36:9); “살아있는 물들의 원천” (예. 17:13). (그분으로, 그분에 의해 사는) 천국이 “살아있는 자의 토지”라 불리운다 (이. 38:11; 53:8; 겔. 26:20; 32:23-27, 32; 시. 27:13; 52:5; 142:5).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살아있는 자”라 불리는데, 다윗서에서:
우리의 혼을 살아있는 자 사이에 놓는 분 (시. 66:9).
그리고 신앙을 소유한 이들이 “생명들의 책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시. 69:28), 그리고 “생명의 책에서” (계. 13:8; 17:8; 20:15).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받는 이들은 “살아있게 만들어짐” 이라고 말해진다 (호. 6:2; 시. 85:6). 그 반면,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죽은(dead)”이라고 불려진다; 이사야서에서:
죽은 자는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르비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방문하시어 그들을 파괴하셨기 때문이다 (이. 26:14),
이는 자기를 사랑함을 가지고 부풀려진 이들을 뜻하고 있다; “다시 일어 나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찔렀다(piersed)” 라고도 말해진다 (겔. 32:23-26, 28-31). 그들은 또한 주님에 의해 ”죽은(dead)”이라고 말해진다 (마. 4:16; 요. 5:25; 8:21, 24, 51, 52). 지옥 역시 “죽음”이라 불려진다 (이. 25:8; 28:15).

이 절에서 그녀의 젊은 시절인 꽃 안에 있는 때, 첫 때가 묘사되는데, 천국의 결혼을 표현한다. 이러기에 그녀는 결혼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지고, “생명”을 뜻한 단어인 “이브(Eve)”라 불리워진다..

21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homo)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 코트(coat, 옷)를 만드셨고, 그들을 옷입혔다.
이 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서 가르치셨음을 의미한다; 그분이 그들을 가르치심이 “만드심”과 “옷을 입힘”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그리고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가죽 옷”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글자로부터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에 어떤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음은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죽 옷을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가죽 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 밝히 알려주심과 말씀의 이와 비슷하게 표현된 여러 구절들을 비교함이 아니면 누구도 분명해지지 않는다. 일반적 말투인 “가죽(skin)”이 여기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염소 새끼, 양, 또는 숫양의 피부(가죽)이라고 이해된다. 이 동물들은 말씀에서 선, 선행(charity)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이 제물로 사용된 양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선행의 선, 즉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수여된 이들이 “양” 이라 불리워진다. 이로부터 주님은 “양의 목자”라 불리워진다. 그리고 선행이 수여된 이들이 “그분의 양”이라 불리우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들을 “가죽 옷으로 입히셨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태고인들은 그들의 순진 때문에 벌거벗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순진을 잃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악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것 역시 “벌거벗었음”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것들은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법에 일치하여) 역사적으로 밀착되게 나타나는 바, 여기서 “그들이 벗고 있지 않도록 옷입히셨다”, 또는 악 안에 있지 않도록 옷입히셨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 있음은 제1-13절에서 그들에 관해 주목했을 때, 그리고 여기서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가죽 옷을 만드셨고, 그들을 옷입히셨다”에 관련 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는 이와 같은 선이 수여된 이들, 즉 교회의 첫 후손-더 정확히는 둘째와 셋째 후손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새끼 염소들, 양, 염소들, 그리고 숫양들의 가죽이 영적 선들과 자연적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야곱이 취급된 말씀, 그리고 궤가 취급된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야곱의 경우가 이렇게 말해진다: 그는 “에서의 의복을 입었다”. 그리고 벌거벗겨진(매끈한) 상태의 그의 손과 목은 “염소들의 새끼의 가죽으로” (덮혀졌다). 그리고 이삭이 그것들을 냄새 맡을 때, 그는 말했다, “내 아들의 냄새는 들판의 냄새 같다”(창. 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이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 장소에서 보여질 것이다. 궤에 관련하여서는 이렇게 말해졌다. 천막의 덮개는 “숫양의 가죽들과 오소리의 가죽들로부터” 였다 (출. 26:14; 36:29). 그리고 그들이 전진할 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궤를 “오소리의 가죽으로부터의” 덮개로 덮었다, 마찬가지로 탁자와 그릇들, 촛대와 그 기구들, 금 제단, 그리고 섬김의 기구들과 제단의 기구들도 덮었다 (민. 4:6-14). 주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이 장소에서 보여진 바, 이 가죽들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 이유는 궤, 성막, 천막, 거룩함으로 옷입은 때 아론 위에 있던 것은 무엇이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들에는 제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 해도 표현성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었다.

천적 선은 옷입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은 가장 깊은데 있고 순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으로부터의 영적 선(celestisl spiritual good, 영계의 선)이 먼저 옷입혀지고, 그 다음 자연적 선(자연계의 선)이 옷입혀진다. 그 이유가 이들은 더 외적 선이다. 이런 이유로 이것들은 “옷”에 비교되고 “옷”이라 불리운다; 고대 교회에 관해 말하는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를 수를 놓은 (옷으로) 입히고, 오소리(가죽으로) 신겼다,
나는 너를 고운 아마포로 띠를 둘렀다. 그리고 나는 너를 비단으로 덮었다 (겔. 16:10).
이사야서에서:
네 아름다운 의복을 입어라, 오 예루살렘, 거룩함의 성이여 (이. 52:1).
계시록서에서:
자기들의 의복을 더럽히지 않은 자,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계. 3:4-5),
위 계시록에서 24 원로들이 “흰 의복을 입었다”라고 말해진다 (계. 4:4). 고로 더 외적인 선들, 이것들이 천적으로부터의 영적, 그리고 자연적 선인데, “의복들”이다; 그러므로 선행으로부터의 선이 수여된 이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옷을 입는다; 그러나 여기
서, 아직 육체에서 이기 때문에, “가죽옷”으로 입혀졌다.

22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보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앎에서 우리 중의 하나 같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역시 가져 가서 먹고 영생하지 않도록 하리라.
이 구절 처음의 “여호와 하느님”은 단수로 언급되지만 후반부에서는 “우리”라 하여 복수로 언급된 이유는 단수로 표현된 “여호와 하느님”은 주님을 의미하고 동시에 복수 즉 “우리”로 표현된 “여호와 하느님”은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앎”이란 그가 천적인 수준에 이른 것, 즉 슬기롭고 총명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또한 가져 가지 않도록”이란 그는 신앙의 신비에 관해 정통해져서는 절대 안됨을 뜻한다. 그 이유가 “영원히 사는” 것, 즉 그는 결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두 신비가 있다: 첫째로, “여호와 하느님”은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국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들이 신앙의 신비에 정통해졌다면, 그들은 영원히 멸해지리라는 것이다.

첫 번째 신비에 관한 것: “여호와 하느님”을 수단으로 주님과 천국이 동시에 뜻해진다. 말씀에서, 비밀한 이유 때문에 언제나, 주님은 때로 단지 “여호와”, 때로 “여호와 하느님”, 때로 “여호와” 그리고 그 다음 “하느님”, 때로 “주 여호비”, 때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때로 “하느님”만으로 불리신다. 하여 창세기의 첫 장에서, 또한 말해지는 바, “우리가 우리의 형상에서 사람을 만들자”이어서 복수 형태이다. 그분은 “하느님”만으로 불리신다, 즉 다음 장, 천적 인간이 취급되는 대목까지 “여호와 하느님”이라 불리시지 않는다. 그 다음 그분이 “여호와”라 불리시는 이유는 그분만이 본질로부터 존재, 또는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이라 불리시는 이유는 그분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권능으로부터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이 만들어지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49:4, 5; 55:7; 시. 18:2, 28, 29, 31; 31:14). 이렇기 때문에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한 모두 각각의 천사나 영, 그리고 어떤 권능을 소유했다고 가정되는 모두 각각의 천사나 영이 “하느님”으로 불리운다 다윗서를 보자:
하느님은 하느님의 회중 안에 서 있으셨다,
그분은 신들의 한 가운데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시. 82:1);
누가 하늘(sky)에서 여호와에게 비교되겠느냐?
누가 신들의 아들들 사이에서 여호와와 비슷할 것이냐? (시. 89:6)
너는 신들(gods)의 하느님(God)에게 고백하라,
너는 주들(lords)의 주님(Lord)에게 고백하라 (시. 136:2-3).
인간들 역시 능력을 소유한 경우 “신들”이라 불리운다 (시. 82:6; 요. 10:34, 35). 모세 역시 “바로에게 신”이라고 말해진다 (출. 7:1).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어에서의 “하느님”은 복수인 “엘로힘(Elohim)”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인정하는 바는, 자기들은 미미한 권능도 자신들로부터는 소유하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부터서만, 그리고 한분 하느님 밖에 계시지 않는 바, 말씀에서 “여호와 하느님”을 수단으로 주님만이 뜻해진다. 그러나 창세기 첫 장에서와 같이 어떤 것이 천사들의 섬김(minitry)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지는 곳에서 그분은 복수 숫자에서 말해지신다. 여기서 역시 천적 인간은, 인간 범주에서인 바, 주님과 비교함에 놓여질 수 없었고, 오직 천사들로만 인 바, 사람이 “선과 악을 앎에 우리 중의 하나 같이 되었다”라고, 즉 슬기롭고 총명해지게 되었다고 말해진다.

둘째 신비는 그들이 신앙의 비밀들에 정통해졌다면, 그들은 영원히 멸해지고야 만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지금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취해서, 먹고, 영원히 살지 않도록”아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들이 생명의 질서들을 역으로 향하게 하였을 때, 그리고 (생명의 질서들에 따라) 사는 것이 반갑지 않을 때, 또는 자신들로부터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면 슬기로워지고 싶지 않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들었던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이 과연 그러한지, 또는 아닌지를 추론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 추론을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자신들로부터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때, 이 추론은 반드시 부정함 쪽으로, 결과적으로 성령모독과 모독함 쪽으로 결론을 맺고야 만다. 마침내 그들은 거룩한 것에 모독된 것을 혼합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인간이 이렇게 되어갈 때, 그는 저쪽 삶에서 정죄되므로 구원의 다른 희망이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가 모독을 수단으로 혼합된 것들은 혼합된 채로 남아있어,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그 자체를 표출할 때면 언제나 거룩한 그것과 결합된 모독된 어떤 것에 대한 생각 역시 거기에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지옥에 떨어진 자 외에 어떤 (천국)사회 안에 있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삶에서 극도로 절묘하게 지각되어지는데,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 그리고 천사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서는 더욱 더 절묘하게 지각된다. 그렇게 천사들은 단 하나의 생각을 수단으로도 인물의 품성을 파악한다. 결합된 모독과 거룩한 것의 분리는 지옥의 고통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결과될 수 없는 바, 이를 알아챈 사람이라면, 그가 지옥 자체를 피하고 싶어하는 만큼, 모독하는 것도 피하려 할 것이다.

신앙의 비밀들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이러하다. 그들은 사후 산다는 것,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려 오시리라는 것조차도 믿지 않았다. 이런 대단한 무지와 우둔함을 그들은 고수했고, 계속 고수했는 바, 그들은 내적 인간의 존재, 또는 내적인 어떤 것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알고 있지 않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 알고 있어왔고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모독하고야 마는 품성을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 다른 삶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희망은 있지 않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에서 주님에 의해 뜻해져 있다:
그분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심정을 단단해지게 하셨다;
하여 그들은 [그들의] 눈을 가지고 보지 못하게, [그들의] 심정을 가지고 이해하지 못하게, 전환되지 (않게), 내가 그들을 치료하지 (않게) (요. 12:40).
그리고 비유가 별도의 설명없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말해진 이유이다:
그들이 보는데 보지 못하고; 그리고 그들이 듣는데 듣지 못하고,
그들이 이해 못하게 (하시려 해서) 때문이다 (마. 13:13).
같은 이유 때문에 신앙의 모든 비밀들은 그들로부터 감추어져 있고, 그들의 교회 속의 표현물 아래 숨겨졌다. 같은 이유로 예언적 스타일(style)도 이와 같은 특성으로부터 있다. 어쨌든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아는데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그가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인정하고, 후에 성령모독과 모독하는 이들이 있는데, (위의) 주님의 말들에 의해 뜻해져 있다.

인간은 자기가 설득되어진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생명을 획득한다, 즉, 그가 인정하고 믿는 것을 수단으로 생명을 획득한다. 그가 설득되지 않은 것, 또는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서는 그의 마음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설득되어져, 인정하고,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없다.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알고는 있을런지 모르나, 그들은 마치 알지 못한 것처럼 있다. 그리고 존재를 가지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는 이들과 같다. 이것이 주님의 강림 시기의 유대인들의 경우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에서 “황폐됨(vastated)”, “황폐해져 있음(laid waste)”. 즉 어떤 신앙도 더 이상 가지지 않고 있다 라고 말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이 열린 말씀의 내면의 목차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들을 다치게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들은 어떤 인물을 보고 있음, 여전히 보지 못함; 들음, 여전히 듣지 못함이기 때문; 이들의 심정은 막혀 있다; 이들에 관해서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라, 너희는 듣기는 하나,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보기는 하나,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심장을 살찌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를 무겁게 만들어라,
그리고 그들의 눈을 흐려지게 하라, 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그들의 귀로 듣지 않도록, 그들의 심정으로 깨닫지 않도록, 그리고 전환이 있어
그들이 치료되지 않도록 하라 (이. 6:9-10).
신앙에 관한 비밀들은 인간이 지독하게 황폐되어 더 이상 믿지 않는 상태 안에 있을 때까지 밝히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주님에 의해 같은 예언서의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그때 내가 말했다. 주여, 얼마나 오래? 그리고 그가 말하셨다, 성들이 황무해져,
거주민들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집들에는 사람이 있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지면이 지독하게 황폐되어질 때까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람을 옮기실 때까지 (이. 6:12).
그분이 슬기있는, 또는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라 불리신다. 이미 말했듯, 유대인들은 주님의 강림 시기에 황폐된 상태였다. 같은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탐욕들을 수단으로, 특히 그들의 허욕(avarice)을 수단으로 계속 그들의 품성이 지속되었는 바, 그들은 수 천 번 주님으로부터 듣더라도, 그들의 교회 속의 표현물들이 각각의 세부 사항에서 그분에 관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홍수 이전 사람들이 에덴의 동산 밖으로 내쫓긴 이유, 그리고 그들이 어떤 진리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는 때까지 황폐된 이유이다.

이 모두로부터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취해서 먹고, 영원히 살지 않도록”이라는 말들에 의해 뜻해진 것이 분명해진다. “생명들의 나무로부터 가져가서 먹는 것”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인정할 수 있도록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생명이 복수로 있는 경우, 즉 “생명들(lives)”은 사랑과 신앙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는 것”은 전과 같이 여기서도 아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사후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사는 것이다. “죽어있는(dead)” 사람이라 말해진 것은 그가 육체의 생명이 죽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죽음의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서 이다. 그 이유가 “죽음(death)”은 지옥에 떨어짐과 지옥이기 때문이다. 표현, “산다”가 에스겔서에서도 본문과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해서는 혼들을 사냥하고, 네 자신들을 위해서는 살아있게
보존한다, 그리고 너희는 죽이지 않아야 하는 혼들을 죽이고, 살아있지 않아야 할
혼들을 살아있게 만들므로 내 백성 사이에서 나를 모독했다 (겔. 13:18-19).

23절. 그러므로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어 그가 있어지게 했던 지면을 경작하게 하셨다.
“에덴의 동산에서 내보냄”이란 모든 총명과 지혜가 박탈되는 것이다. “그가 있어지게한 지면을 경작함”이란 거듭나기 전의 상태인 육체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지는 것이 모든 총명과 지혜가 박탈되어지는 것임은 상술했던 바와 같이 “동산”, “에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동산”은 총명, 또는 진리를 이해함을 의미하고, 사랑을 의미하는 “에덴”은 지혜, 또는 선을 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있어지게 한 지면을 경작함”은 그가 거듭남 전에 있던 것 같은 상태인 육체적으로 되어감을 의미함은 19절에서 이미 상술했다.

24절.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에덴의 동산을 향하여 살게 만드셨고,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선에 관한 모든 의지와 진리에 관련된 모든 이해를 깡그리 박탈하는 것인 바 그는 박탈된 만큼에서 선과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살게 만드심”이란 그가 신앙의 비밀스런 어떤 것에 들어감을 금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에덴의 동산을 향한 동쪽”은 천적인 것, 그리고 이것으로부터의 총명이기 때문이다. “그룹들”은 인간이 신앙에 관한 것들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방지하시려는 주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스스로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란 신앙의 신비에 진입하기를 원할 정도로 미친듯한 탐욕과 설득력을 지닌 자기-사랑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은 육체와 지상에 속한 것에 도취되고 만다. 이렇게 되어지는 이유는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는” 목적, 즉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을 예방해 주시려는 목적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들이 취급된다, 이들은 홍수를 수단으로 멸해졌다, 그리고 “에덴의 동산 밖으로 내쫓긴”, 즉 진리에 대한 모든 이해함이 박탈되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사악한 탐욕들과 설득력만 그들에게 남아서, 그들은 마치 사람이 아닌듯 되었다.

“동쪽”과 “에덴의 동산”의 의미는 위에서 주어졌는 바, 더 상술함은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룹들(cherubim)”은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있는 것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비밀들에 사악하게 들어가서, 그것들을 모독하여 자신을 파멸에로 치닫지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를 표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 그룹들이 언급되는 모든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유대인들은 만일 그들이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교회의 모형, 내지 표현물이 그분에 관한 것을 의미함에 관하여, 사후 삶에 관하여, 내면의 인간과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하여 명확한 지식들을 소유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모독하고야 말아, 영원히 멸해지고 마는 품질의 소유자들 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궤 위쪽 자비석 위의 그룹들, 성막의 휘장 위에, 베일 위에, 성전 안에서, 그룹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들을 간수하심에서도 의미되었다 (출.25:18-21; 26:1, 31; 왕상. 6:23-29, 32). 그 이유가 증거를 안에 담은 궤는 이 구절에 있는 생명들의 나무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즉 주님과 주님에게만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했다. 이로부터 주님은 “그룹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도 자주 불리우셨다. 그리고 이로부터 주님은 “그룹사이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하셨다 (출. 25:22; 민. 7:89). 또한 에스겔서에서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 그분이 계셨던 그룹 위로부터 집의 문지방 쪽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분은 아마포로 옷입은 사람을 불러, 그에게 말하셨다,
성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가라, 그리고
거기로부터 행해진 모든 역겨움 때문에 울며 탄식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표를 놓아라. 그리고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셨다,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을 통과하여 가며, 쳐죽여라; 네 눈이 남은 것을 보게 말라, 너는 동정심을
가지지 말라; 노인, 젊은이, 그리고 처녀, 유아, 그리고 여인들을 섬멸되게 죽여라;
집을 더럽혀라, 그리고 뜰들을 죽은 자로 채워라 (겔. 9:3-7).
그분이 아마포로 옷입은 사람에게 말했다, 그룹 아래쪽 바퀴 사이로 가라,
그리고 그룹들 사이로부터 숯불로 네 손바닥을 채워라, 그리고 그것들을 성에
흩뿌려라; 그룹이 그의 손을 그룹들 사이로부터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마포로 옷입은 사람의 손바닥에 놓았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겔. 10:2, 7).
위 구절로부터도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감에서 인간들을 방지해주시는 주님의 섭리가 “그룹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사악한 탐욕들에 남겨졌다는 것이 “성에 흩뿌린 불”에 의해, 그리고 “누구도 남겨두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자체를 회전하는 검의 불꽃”은 사악한 탐욕들과 설득들을 가진 자기-사랑, 이것이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진입하기를 바라나, (오히려) 육체적이고 지상의 것들 쪽으로 휩쓸려버리고 만다가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 가능하나 (대표적으로) 에스겔서만을 발췌해 본다:
예언하여 말하라,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검에게 말하라, 검아, 그것은 날이
선 검이다, 또한 극도의 살육을 만들려고 광을 낸 검이다; 그것의 날카로운 것은
번개같이 있을런지 모른다. 그 검이 그의 죽임의 검으로 세 번씩 두 번을 죽이게 하라;
큰 살육의 검, 이것이 그들의 침실 안으로 들어간다, 하여 그들의 가슴이 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위법들은 증대되어 있다. 나는 그들의 모든 문들에 검의 공포를 놓았다.
오라! 그것은 번개로서 만들어져 있다 (겔. 21:9-10, 14-15).
여기서 “검(sword)”은 인간이 선하고 참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들과 반대의 것들만을 보는 인간의 황폐함을 의미함이 “증대하는 위법들”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 신앙의 비밀들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이들에 관해서 나훔서에서 말해진다. “말을 탄 기병, 그리고 검의 불꽃, 그리고 창의 번쩍임, 그리고 수 많은 죽은 자” (나. 3:3).

이 절에 있는 각각의 세부적인 표현은 아주 깊은 취지로부터의 많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는 바 (이 취지는 홍수에 의해 멸해진 사람들의 천성에 적용할 수 있는데, 이 천성은 홍수에 뒤이어 살았던 이들의 천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비밀들을 설명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우리는 간략하게 주목해본다. 그들의 처음 부모들, 즉 태고 교회를 구성한 이들은 천적 인간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식된 천적 씨들을 가졌다; 그로부터 그들의 후손들은 자기들 안에 천적 근원으로부터 씨를 가졌다.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씨는 사랑이 마음 전체를 통치하고, 그것이 하나를 만든다. 그 이유가 인간의 마음(human mind)은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랑, 또는 선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함에 속한다; 그리고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태고인들은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하는 것을 지각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이런 인류의 후손과 더불어, 동일한 천적 근원으로부터의 씨가 필연적으로 남는데, 그들의 부분에 있는 진리와 선으로부터 떨어져나감이 어떤 정도이든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데, 그들의 전체 마음은 다른 삶에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뒤집혀졌다. 이와는 다르게, 천적 씨를 소유하지 않고 영적 씨만을 소유한 자는 다르다. 이들은 홍수 후의 사람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이들 안에는 사랑이 없다. 그 결과 선으로부터의 의지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에 관련된 가능성, 그리고 진리를 이해함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이들은 선행의 어느 수준까지는 데려와 질 수 있다. 그러나 방법은 다른데, 즉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파생된 선에 바탕을 둔 양심이 주님에 의해 은근히 주입됨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홍수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법이다. 이 상태에 관하여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차후 (살핀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세대에게는 매우 친숙치 못한 신비에 해당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조차도, 인간 마음의 품질, 그로부터 결과되는 삶, 사후 삶에 관해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홍수에 의해 멸해진 이들의 상태는 그들이 영들의 세계 안에, 또는 다른 영들과 더불어 있을 수 없는 상태여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옥들과 분리된 어떤 지옥 안에 있다. 그래서 마치 어떤 산 아래 있는 듯하다. 이것은 그들의 끔직한 공상들과 설득들의 결과로 사이에 끼어든 산 같이 나타난다. 그들의 공상들과 설득들은 다른 영들 안에서 심오한 혼미함을 생산하는 바,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는지, 죽은지를 알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진리에 대한 모든 이해력을 그들로부터 박탈하여 그들이 아무 것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설득력은 그들이 세상에 거처를 두었던 동안에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 이들은 일종의 죽음 같은 것을 자기들에게 유발하지 않고서는 다른 영들과 연계될 가능성이 없음이 미리 보여졌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사멸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분은 홍수 이후에 산 이들 위에 (홍수 이전 상태와는) 다른 상태들을 유발하셨다.

이 절에서, 이런 홍수 이전의 상태는 충분하게 묘사되어져 있는 셈이다. 즉 그들이 “내쫓겼다”, 또는 천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룹들이 동쪽으로부터 에덴을 향하여 놓여졌다”. 이 표현, 즉 “동쪽으로부터 에덴의 동산을 향하여”는 (홍수 이전의) 그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후에 살았던 이들에 관련해서는 사용되어질 수 없다. (이후 살았던) 그들에 관련된 표현이라면, “에덴의 동산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체를 회전하는 검의 불꽃”이라는 말의 경우, 오늘날 사람에 적용한다면, “자체 회전하는 불꽃의 검”이어야 할 것이다. “생명들의 나무” 역시 오늘날의 경우라면, “생명 나무”가 적절 할 것이다. 시리즈(series)에는 다른 것을 언급함이 없어 추가 설명은 가능할 수 없으나, 천사들에 의해서는 이해되어진다.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그것들을 밝히 알리신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상태는 무한한 비밀들을 포함하는데, 인간들에게 알려진 하나로부터 조차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서 첫 인간에 관해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왜곡되어 가상된 것은 그것이 그로부터(첫 인간)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여기서 취급된 것은 태고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아담”이라 불리울 때, 인간이 지면으로부터 있었다는 것, 또는 사람 아님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그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름, 사람에 관한 근원과 의미이다. 그러나 유전적 악에 관련하여서는 이러하다. 실제적 죄를 범하는 모든 이는 그 죄에 의해서 자신 안에 본성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악이 그의 자녀 안에 이식되어진다, 그리고 유전되어간다. 고로 모두 각각의 부모로부터,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증조부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내려온다. 이렇게되어 악은 내려가는 각 자손에서 늘어나고 증대되어, 각 인물과 더불어 남는다, 그리고 그의 실제적인 악을 수단으로 더 불려진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이들 안에서를 제외하면, 해를 주지 않도록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다. 주의 깊은 관찰자라면, 부모의 악한 경향성들이 그들의 자녀들 안에 눈에 보이게도 남는다는 사실에서 이 진리를 수단으로 증거를 볼런지 모른다. 이리하여 한 가족, 그리고 전체 인류조차 이것 때문에 서로서로로부터 구별될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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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4 장

성경: 창세기 제 4 장

1.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가인을 낳고,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남자, 여호와를 얻었다.
2. 그녀는 그의 아우 아벨을 낳아 추가했다. 그리고 아벨은 양떼의 목자였고, 가인은 지면의 경작자였다.
3. 그리고 날들의 끝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예물로서 지면의 열매를 가져왔다.
4. 그리고 아벨, 그도 또한 자기 양떼의 맏배와 그로부터의 지방(fat)을 가져왔다. 그 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지켜보셨다.
5. 그러나 가인과 그의 예물을 그분은 지켜보시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의 노염이 극도 로 지펴졌고 그리고 그의 얼굴들은 떨구어졌다.
6.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왜 너의 노염이 지펴졌느냐? 그리고 왜 네 얼굴이 (땅으로) 떨어졌느냐?
7.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
8. 그리고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들이 들판에 있 었을 때,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9.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 가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
10.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가 무엇을 저질렀느냐? 네 형제의 피들의 목소리가 지 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11.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 지면은 네 손으로부터 네 형제 아벨 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 입을 열었다.
12. 네가 지면을 경작할 때 이제부터는 지면이 너에게 지면의 힘을 더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 일 것이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내 불법이 제거되어 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큼니다.
14. 보라 당신께서 나를 지면의 얼굴로부터 오늘 저를 축출하셨고, 그리고 당신의 얼 굴로부터 내가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일 것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 앙갚음 이 일곱 배나 있게 되리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 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16.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놋의 땅에서 거주했다.
17.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 다. 그리고 가인은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 이라 불렀다,
18. 그리고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랏은 므두야엘을 낳았고, 므두야엘 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그리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그리고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그 중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였고, 그리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씰라였다.
20. 아다가 야발을 낳았고, 야발은 천막들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의 조상 이었다.
21.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고,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든 자 의 조상이었다.
22. 그리고 씰라, 그녀는 두발-가인을 낳았고,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 생이었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23. 그리고 라멕이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이여, 그리고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그 이유는 내 가 나의 부상을 인하여 남자를 죽였고,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기 때문 이다.
24. 만일 가인을 위해 일곱 배의 앙갚음이 있다면, 진실로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 있을 것이다.
25.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를 다시 알았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 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셋에게, 그에게도 역시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에노스 라 불렀다.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사람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가인을 낳고,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사람과 그의 아내 이브”는 태고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의 첫 자식, 즉 첫 출생은 신앙(faith)이다. 이 신앙이 “가인”이라 불리고 있다. 그녀가 말한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닌 신앙은 그 자체 (사랑, 선행과) 따로 떨어져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앞의 세 장들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를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의미되어졌다는 것은 의심함이 없도록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살핀 것들에 의심이 없다면, 이 교회에 의해 결과된 임신과 출생도 우리가 말했던 것으로부터 있다고 보여진다. 이름들을 주는 것은 태고 교회의 관례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의미했다. 이것이 족보의 틀을 짜는 셈이기도 하다. 교회 속의 것들도 이런 방식에서 서로에 관련되고 있다. 즉 족보에서 같이 이쪽이 임신하고, 또 다른 것을 출생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말씀에서도 교회 속의 것들을 “임신”, “출생”, “자손”, “유아들”, “작은 아이들”, “아들들”, “딸들”, “젊은 사람들”, 등등으로 불리우는 일이 매우 많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들에는 이런 표현들이 매우 풍부하다.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라는 말은, “가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이 따로 떨어져서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의 시작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본래 그들은 마치 신앙이 무엇인지에 무지한 것처럼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 속의 모든 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을 구분된 교리로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지각으로부터 가졌던 것을 취해서, 그것들을 교리 안으로 환원해 놓고, 그것을 마치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라고 불렀다; 고로 전에 심정에 새겨졌던 것이 단지 앎의 문제 수준이 되고 말았다. 고대 시대 때에 그들은 새로운 모두 각각의 것에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에서 이름들에 포함된것이 설명되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그녀의 고뇌를 들으셨다” 말함을 수단으로 설명되어진다 (창. 16:11); 르우벤의 경우, “여호와께서 내 고통을 보셨다”라는 표현을 수단으로 (창. 29:22); 이름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덜 사랑받은 것을 들으셨다”라고 말함을 수단으로 (창. 29:33); 그리고 유다의 경우, “이 때 나는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를 수단으로 (창. 29:35); 그리고 모세에 의해 지어진 제단이 “여호와는 내 군기” (출. 17:15)라고 불리었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신앙의 교리가 여기서 “나는 여호와(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또는 “가인”이라 명명되었다.

2절. 그녀는 그의 아우 아벨을 낳아 추가했다. 그리고 아벨은 양떼의 목자였고, 가인은 지면의 경작자였다.
태고 교회의 두 번째 자식(출생)은 선행(charity)인데 이 선행이 “아벨”, “형제”로 의미되고 있다. “양떼의 목자”란 선행의 선을 실행하는 자를 명시한다. “지면의 경작자”란 선행이 전혀 없는 자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면 그 분리가 어느 정도이든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교회의 두 번째 자식이 선행이다는 것은 교회가 임신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선행밖에 더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똑 같은 의미가 야곱으로부터 레아의 첫 자녀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르우벤”은 신앙을 표시하고 있다; “시므온”은 행동에 있는 신앙을; 그리고 “레위”는 선행을 표시한다 (창. 29:32, 33, 34).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성직 직분을 받았고, “양떼의 목자”를 표현했다. 선행이 교회의 두 번째 자식인 바, “형제”라고 불리우고, “아벨”이라 명명되어진다.

“양떼의 목자”가 선행의 선을 실행하는 자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확해 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이것은 구, 신약 성경에서 친숙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끌고 가르치는 이들이 “목자”라 불린다. 그리고 인도받고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양떼”라 부른다. 선행의 선쪽으로, 선행의 선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리고 선쪽으로 인도되지 않고, 선인 것을 배우려하지 않는 이들은 양떼 속에 있지 않다. “목자”와 “양떼”에 관한 위의 의미를 확증해보고자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래 몇 군데 살피고 지나 가자.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지면에 뿌린 네 씨에 비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의 소출로부터
빵을 (먹을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은 넓은 풀밭에서 네 가축을 먹이실 것이다 (이. 30:23).
위 구절에서 “지면의 소출로부터의 빵”은 선행을 표시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목자같이 그분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팔 안으로
어린 양들을 그러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가슴 안에서 운반하실 것이다.
그리고 어린 것과 함께 있는 양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 40:11).
다윗서에서:
귀를 주소서, 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양떼같이 요셉을 인도하시는 분이시여;
그룹들 위에 앉으신 분이시여, 빛을 비추이소서 (시. 80:1).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시온의 딸을 미모의 섬세한 여인에 견주었다; 목자와 양떼가 그녀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 가까이 빙둘러 천막을 고정시킬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이를 그의 자신의 공간(에서) 먹일 것이다 (예6:2, 3).
에스겔서에서:
고로 주 여호비에게 말한다, 나는 그들을 인간의 양떼로서, 거룩한 양떼로서,
예루살렘의 양떼로서 정해 놓은 때들에서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황폐된 성들은 인간의 양떼로 채울 것이다 (겔. 36:37, 38).
이사야서에서:
아라비아의 모든 양떼들이 네게로 다함께 모아질 것이다,
느바욧의 숫양들은 너를 섬길 것이다 (이. 60:7).
선행의 선쪽으로 인도하는 자들은 “양떼를 그러모으는” 자들 이다; 그러나 그들을 선행의 선쪽으로 이끌지 않는 자는 “양떼를 흐트는”자들 이다; 그 이유가 모두 함께 모으고,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선행 속에 있고, 모든 흐틈과 해체함은 선행의 결핍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즉 기억 속의 지식(memory-knowledge)을, 지식(knowledge)을, 그리고 신앙의 교리들을 쓸모가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신앙이 가르치는 것과 같게 되는 것 말고 더 쓸모 있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제일의 것은 선행이 아닌가? (막. 12:28-35; 마. 22:34-39). 이것은 신앙이 목표로 삼는 모든 것의 정점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모든 지식 또는 교리는 단지 텅빈, 아무 것도 아닌 것밖에 무엇인가?

“지면의 경작자(tiller of the ground)”는 선행이 결여된 자이다. 이 자는 제아무리 많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다 해도 그는 신앙이 없는 셈이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구절, 즉 여호와께서는 그의 공물을 존중하지 않으셨다는 것, 그가 그의 아우를 살해한 것, 즉 “아벨”로 의미되는 선행을 파괴한 것으로부터 명백해진다.
육체적이고 지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지면을 경작하는”이들이다. 이는 지나온 구절, 즉 인간이 “지면을 경작하도록 에덴의 동산에서 내쫓김”인 창. 3:19, 23에서 말해진 바로부터도 분명해진다.

3절. 그리고 날들의 끝에서 가인은 여호와께 예물로서 지면의 열매를 가져왔다. “날들의 끝”이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가 뜻해진다. “지면의 열매”란 선행이 없는 신앙의 일들을, “여호와께 가져온 공물”은 이 신앙에서 파생된 예배를 뜻한다.

“날들의 끝”은 시간의 경과임은 모든 이에게도 자명할 것이다. 처음에서, 즉 신앙이 순박함 안에 있는 동안,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는 나중에 열납되지 못할 만큼까지 있지는 않은듯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들의 자식을 “여호와(로부터) 사람”이라 일컬은 것에서 분명해진다. 고로 처음 당시의 신앙은 “날들의 끝”, 즉 시간이 경과된 후에서 만큼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진정한 신앙의 교리라면 사랑으로부터의 분리를 원하지 않듯 그렇게 처음에는 있었다는 말이다.

“지면의 열매”가 선행 없는 신앙의 일들이 뜻해지는 것은 뒤따라오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선행이 결핍된 신앙의 일들은 그 자체 죽은 것, 즉 신앙 없음의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외적 인간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서에 쓰여 있다: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번영을 누립니까? 당신께서 그들을 심으셨고, 그들은 뿌리를
뻗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갔습니다, 그들 역시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입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장(감정과 애정)으로부터서는 멀리 계십니다;
얼마나 오래 토지가 슬퍼할 것입니까? 그리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은 얼마나
오래 시들고 있어야 합니까? (예. 12:1, 2, 4).
“그들의 입에 가까이, 그러나 신장으로부터는 멀다”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토지가 슬퍼한다”라고 말해진다. 같은 예언서에서 이런 일들이 “열매의 일들”이라 불리운다:
사기침이 모든 것들 너머 있는 것이 심장이라, 그것이 구제 불능인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 여호와가 심장을 수색하고, 신장을 심리하여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 주기까지 할 것이다 (예17:9, 10).
미가서에서:
토지는 황폐될 것인데,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 때문이다. 그들의 일들의 열매 때문이다 (미. 7:13).
이런 “열매”는 열매가 아니다는 것, 또는 “일”은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열매와 뿌리는 멸해진다는 것이 아모스서에서 선포되어진다: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족을 파괴했다. 그들의 키는 삼나무보다 더 컷고,
그들의 강함은 상수리나무보다 더 강했다; 그럼에도 나는 위로부터는
그들의 열매를, 아래로부터는 그들의 뿌리를 파괴했다 (암. 2:9).
그리고 다윗서에서:
당신은 땅으로부터 그들의 열매를 파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씨를 인간의 아들로부터 (끊을 것입니다) (시. 21:10).
그러나 선행의 일들은 살아있다, 그래서 그것들에 관하여 선포되는 바, 그것들은 “아래쪽으로 뿌리를 뻗고, 위쪽으로는 열매를 맺는다”이다. 이사야서에서:
유다 가문으로부터 탈출한 남은 자가 다시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쪽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37:31).
“위쪽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선행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런 열매가 “빼어난 열매”라고 불리운다. 같은 예언서에서:
그 날에 여호와의 어린 가지가 아름답고 영광스러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로부터 도망한 그들을 위해 특출하고 아름답게 (있을 것이다) (이. 4:2).
이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이다. 그래서 같은 예언서에서 그렇게 불리운다: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트려라, 너 천국들(heavens)아, 그리고 하늘들(skies)이
정의를 아래로 쏟게하라; 땅이 열리게 하라, 그리고 그것들의 구원의 열매를
산출하게 하라, 그리고 정의가 함께 솟아오르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것을 창조할 것이다 (이. 45:8).

“공물”을 수단으로 예배가 뜻해진다는 것은 유대 교회의 표현물들로부터 명백해진다. 유대 교회의 여러 종류의 제물들, 뿐 아니라, 땅의 첫 열매들과 땅의 생산물의 첫 소산들, 그리고 첫 출생의 봉헌, 등등이 “공물”이라 불렸는데, 이것들 안에 예배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천국의 것들을 표현했고, 모든 것이 주님에 관련되고 있는 바, 진정한 예배가 이런 공물들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경의) 표현물들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또는 일종의 우상 내지 죽음의 것이 아니라면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 만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반문 때문이다.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지닌다. 이렇게 숙고해봄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표현 교회(유대 교회)의 모든 공물들은 주님을 예배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세부적으로 다룰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물”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예언서들 두루에서 분명해진다. 말라기서에서:
그분의 오심의 날에 누가 버티어지겠느냐? 그분은 은의 주물자로서 제련자로서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레위의 아들들을 정화하실 것이다. 그들을 금과 은을
걸러내듯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의 안에서 공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다.
그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공물은 여호와께 영원의 날들 안에서 같이,
고대의 햇수들 안에서 같이 기쁨이 될 것이다 (말. 3:2, 3, 4).
“정의 안에 있는 공물”은 내적인 공물이다. 이것을 “레위의 아들들”, 즉 거룩한 예배자들이 바칠 것이다.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를, “고대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이의 산에서, 거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
모든 토지가 나를 예배할 것이다; 거기서 나는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너희의 봉헌물들을, 그리고 너의 모든 거룩해짐 안에 있는
너희 공물들의 첫 열매들을 요구할 것이다 (겔. 20:40).
“봉헌물들”, 그리고 “거룩해짐 안에 있는 공물들의 첫 열매들”은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수단으로 거룩해진 일들이다. 스바냐서에서:
에티오피아의 강들 너머로부터,
나에게 탄원하는 자가 나의 공물들을 가져올 것이다 (습. 3:10).
“에티오피아”는 천적인 것들, 즉 사랑, 선행,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을 소유한 이들을 표시한다.

4절. 그리고 아벨, 그도 또한 자기 양떼의 맏배와 그로부터의 지방(fat)을 가져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지켜보셨다.
이미 살핀 바대로 “아벨”을 수단으로 선행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양떼로부터의 맏배들”을 수단으로 거룩인 것, 주님으로부터서만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지방”을 수단으로 천적 (평면) 자체, 이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공물을 지켜 보셨다”를 수단으로 선행에 관한 것들과 선행에 바탕을 둔 모든 예배는 주님을 매우 흡족하시게 함을 뜻한다.

“아벨”이 선행을 의미함은 앞서 살폈다. 선행을 수단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자비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이웃을 자기 같이 여겨 사랑하는 자는 이웃의 괴로움들이 자신을 향해서 있는듯 여겨 이웃에 자비로워져 있기 때문이다.

“양떼의 맏배들”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현 교회의 맏배, 또는 첫 출생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들은 모두 거룩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에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주님만이 “첫 출생”이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이 첫 출생이다. 모든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사랑의 조각 하나도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첫 출생”이시다. 이것이 고대 교회에서 여호와에게 거룩하게 바쳐진 인간과 짐승의 첫 출생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출13:2, 12, 15); 그리고 비록 레위가 르우벤과 시므온 뒤를 이어 출생해서 첫 출생은 아니지만, 그가 내적 의미에서 사랑을 의미한 까닭에 신앙을 의미한 위 두 형을 대신하여 첫 출생으로 열납되고, 성직 직분이 할당되었다 (민. 3:40-45; 8:14-20). 모든 것의 첫 출생으로서의 주님에 관하여, 그분의 인간 실체에 관련하여, 다윗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나를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내 구원의 반석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또한 그를 내 첫 출생으로, 땅의 왕들 위에 높은 자로 만들 것이다 (시. 89:26, 27).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의 첫 출생,
그리고 땅의 왕들 중의 제 1인 자 (되셨다) (계. 1:5).

“지방”을 수단으로 천적 (평면) 자체가 의미되어진다. 이것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다. 천적 (평면)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모두이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있을 때 그 신앙 역시 천적 (평면)이다. 선행은 천적 (평면)이다.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은 천적 (평면)이다. 이런 모든 것이 제물에 있는 여러 종류의 기름들을 수단으로, 구분해 보면, 간(liver), 또는 대망막(caul)을 덮은 지방을 수단으로; 신장(kidneys) 위에 있는 지방을 수단으로; 내장(intestines)들을 덮거나, 내장들 위에 있는 지방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것들은 거룩했다. 그래서 제단 위에서 태워바치는 공물로 바쳐졌다 (출 29:13, 22; 레. 3:3, 4, 14; 4:8, 9, 19, 26, 31, 35; 8:16, 25). 그러므로 그것들은 “여호와께 쉼을 위한 불을 수단으로 하는 공물의 빵”이라 불리웠다 (레. 3:14, 16). 같은 이유에서 유대 백성들은 “대대로 영원한 규례” 라고 불리는 것을 수단으로 짐승의 지방을 먹는 것을 금해왔다. 이것은 교회가 내적인 것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 천적인 것은 더 더욱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이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로부터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빵도 아닌 것을 위해 은을 다느냐? 그리고 만족치도 못하는 것을
위해 너희는 노동하느냐? 너는 나에게 열심히 귀기울여라.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네 혼은 살찌움 안에서 즐거움에 놓일 것이다 (이. 55:2).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많은 지방으로 성직자들의 혼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내 백성은 내 선으로 충분히 채울 것이다 (예. 31:14),
위 구절에서 많은 지방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다윗서에서:
그들은 당신 집의 많은 지방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당신의
맛있음의 강을 마시게 만듭니다. 그 이유가 당신과 함께 생명들의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시. 36: 8, 9).
여기서 “많은 지방”과 “생명들의 원천”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맛있음의 강”과 “빛”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시 다윗서에서:
내 혼은 뼈골과 많은 지방으로 물릴정도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내 입은 노래들의 입술들을 가지고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시. 63:5),
같은 방식에서 “지방”은 천적 (평면)을 표시한다. 그리고 “노래들의 입술들”은 영적 (평면)을 표시한다. 이것이 천적인 것임은 이것이 혼을 충분히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 때문에 땅의 첫 출생에 해당되는 첫 열매들이 “지방”이라 불리운다 (민. 18:12).
천적인 것들의 종류(genera)들은 무수하고 이에서 분류되는 종류(species)는 더 한층 무수한 바, 그것들이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암송한 노래 안에 일반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암소의 버터, 그리고 양떼의 우유, 어린 양들과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바산의 아들들, 그리고 염소의 아들들, 밀의 신장(kidneys)의 지방과 함께;
그리고 너는 섞지 않은 포도의 피 안에서 마실 것이다 (신. 32:14).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고는 위 구절의 표현들의 의미들을 누군가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적 의미 없이, “암소의 버터”, “양의 우유”, “어린 양들의 지방”, “숫양들과 염소들의 지방”, “바산의 아들들”, “밀의 신장의 지방”, 그리고 “포도의 피”의 표현들은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해지고,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 머문다. 그럼에도 이것들 전체와 각각은 천적인 것들의 종류들과 부류들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벨, 그리고 그의 공물을 지켜보셨다”란 선행 속의 것들, 그리고 선행에 바탕을 둔 모든 예배는 주님을 흡족하게 한다는 것은 앞서 “아벨”, “그의 공물”을 언급할 때 설명되었다.

5절. 그러나 가인과 그의 예물을 그분은 지켜보시지 않았다. 그래서 가인의 노염이 극도로 지펴졌고 그리고 그의 얼굴들은 떨구어졌다.
이미 서술했듯이, “가인”을 수단으로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이런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그의 공물은 지켜보시지 않음”이란 그의 예배는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인의 노염이 극도로 지펴졌고 그의 얼굴은 떨구어졌다”란 그의 내면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노염”은 선행이 떠났음을 표시했다. “얼굴들”은 내면들을, 이것들이 “떨구어짐”은 내면들이 바뀌었음이다.

“가인”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또는 이런 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교리가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지켜보시지 않은 공물”이란 그의 예배는 열납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가인의 노염이 지펴졌다”가 선행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후에 그가 선행을 의미한 자기 아우를 죽인 대목과 관련하여 살피면 명백해진다. 노염(anger)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사랑과 그것의 탐욕들에 반대되어진 결과로부터 있는 일반적 애착(affection)이다. 이것은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확실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 세계에 주님에 맞서 있는 일반적 노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노염은 악령들의 선행 없음의 결과, 미움 안에 있음, 자기 자신의 사랑과 탐욕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흥분을 일으킨 결과물이다. 말씀에서, “노염”, “분노”, “격노”라는 단어가 여호와에 관련해 자주 서술되는 편이나, 이런 것들은 인간으로부터 있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외관 때문이다. 고로 다윗서에 쓰여 있다:
그분은 그들을 향하여 그분의 콧구멍의 노염을, 그리고 분노를, 그리고 격노를,
그리고 곤경을, 그리고 악한 천사들의 훼방질을 보내셨다; 그분은 그분의 노염
때문에 길을 저울질 하셨다. 그분은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보류하시지 않는다 (시. 78:49, 50).
여호와께서는 누군가 위에 그분의 노염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신들 위에 노염을 보내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 사이에 악한 천사들을 보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사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노염 때문에 길을 저울질하셨다,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보류하시지 않았다”가 첨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말해진다, “그가 여호와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격노한 모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이. 45:24). 이 구절로부터 분명한 바, “노염”은 악들이다는 것, 또는 같은 말로, 선행으로부터 떠남이다.

“얼굴들이 떨구어짐”이 내면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얼굴”과 “떨구어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고 때에는 얼굴이 내적인 것들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어 인간의 얼굴로부터 각 사람의 의향이나 마음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얼굴에 의해 보여진 것이 이것인데,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괴물 같은 것으로 심각하게 생각했다. 내부의 것이 얼굴에 의미되는 바, (속과 겉이 다른 것인) 흉내냄과 속임은 흉측할 뿐이었다. 선행이 얼굴로부터 빛을 발할 때, 그 얼굴은 “들어 올림”이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 반대가 발생할 때, 얼굴이 “떨구어진다”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주님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인 감사 기도에서, “그분은 그분의 얼굴들을 인간 위에 들어 올리신다”라고 말해진다 (민. 6:26; 시. 4:6). 이를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에게 선행을 주신다가 의미되어 있다. “얼굴이 떨구어짐”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예레미야서로부터 나타난다:
나는 나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떨구어지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자비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말하신다 (예. 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이다, 그리고 그분이 누군가 위에서 “그분의 얼굴을 들어올리실 때” 이것은 자비로부터 그분이 그 사람에게 선행을 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반대는 그분이 “얼굴을 떨구어지게 만드실” 때, 즉 인간의 얼굴이 떨구어질 때이다.

6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왜 너의 노염이 지펴졌느냐? 그리고 왜 네 얼굴이 (땅 쪽으로) 떨어졌느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심”이란 양심이 지령(dictate)을 받았다가 뜻해진다. “그의 노염이 지펴졌고 그의 얼굴(안색)이 떨어졌다”란 선행이 떠났고 그의 내면들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가 양심이 지령을 받았다를 뜻한다는 것은 유사한 구절들을 위에서 설명했는 바, 확증은 필요 없을 것이다.

7절.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
“만일 네가 잘 행동하고 있다면 (얼굴을)들어 올린다”란 만일 네가 호의적이면 너는 선을 행할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네가 잘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드러눕는다”란 만일 네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너는 선행 없음인 바, 악 임을 의미한다. “너에게 그의 바램(desire)이 있다, 그런데 너는 그를 지배한다”란 선행은 너와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신앙이 선행을 지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가인”이라 불리는 신앙의 교리가 여기서 묘사되어진다. 이 교리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결과, 사랑의 자식에 해당하는 선행으로부터도 역시 분리되어 있다. 교회라는 것이 있는 곳은 어디이든, 이단들(heresies)이 일어난다. 그렇게 발생되는 이유는 인간이 신앙의 어떤 세부 조항에 집중해버리면, 그는 그 조항을 주요한 것(일 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어떤 하나의 것에 집념하는 동안 그것을 여느 다른 것에 앞서 놓아두려는 것이 인간 사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상상력이 그것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이라도 한 듯 주장할 때, 게다가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것을 부풀릴 때 세부항목이 전체 항목인듯 대체시켜버린다는 말이다. 하여 모든 것이 그것에 일치하고 확증도 주는듯 해진다. 이것은 비록 그것이 거짓이다 해도 마침내 그것이 맞다고 맹세하기까지 치닫는다. 이런 경로에서 “가인”으로 불리는 이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인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사랑 없이 살았을 때, 자기를 사랑함과 공상이 다함께 그것을 확증함에 공모했다.

“가인”이라 불리우는 신앙에 관한 교리의 본성이 이 절에서 그것에 관한 묘사로부터 보여진다. 이로부터, 그것은 선행이 신앙에 결합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 하여 신앙이 아니고 선행이 지배권을 가지리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하기 때문에, 먼저 말해지는 바, “만일 네가 잘하고 있다면, 너는 (얼굴을) 들지 않겠느냐?”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 만일 네가 호의적이다면(선량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선행이 현존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다; 그 이유가 “잘 행함”은 내적 의미에서, 호의적인 마음 자세임을 의미하기 때문, 선인 것을 행함은 선인 것을 뜻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고대 때에 행동과 의지는 하나였다;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상대방의 의지를 알았다. 하여 그때 당시 흉내냄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들어 올림(uplifting)”은 선행이 현존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얼굴을 말할 때 이미 살폈다. “얼굴을 들어올림”은 선행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을 떨굼”은 그 반대이다.

두 번째로, 말해지는 바, “만일 네가 잘하지 않고 있다면, 죄가 문에 누워있다”이다. 이는 만일 네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선행은 현존하지 않는 바, 악이다를 의미한다. “죄가 문에 누워 있음”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악, 이미 악이다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파악될 것이다; 그 이유가 선행이 없을 때, 거기에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있고, 한마디로 모두가 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죄(sin)가 “악마”라, 즉 지옥들의 패거리라 불려진다. 이것은 선행이 결여될 때는 언제나 즉시 가까이(“문”)에 존재한다; 따라서 악마와 그의 패거리들을 마음의 문으로부터 몰아내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 뿐이다.

세 번째 장소에서 말해진다. “너에게 그의 바램(desire)이 있다, 그리고 너는 그를 지배하고 있다”이다. 이 구절을 수단으로, 선행은 신앙과 거주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질서에 반대되는 것인, 신앙이 선행을 지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임이 의미되고 있다. 신앙이 지배권을 가지려 추구하는 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 신앙이 되어가려면, 선행이 통치해주어야 한다. 선행은 열과 빛의 본체인 불꽃에 비교될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열과 빛이 그것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 속에서 열이 빠진 빛에 비교되는 바, 이 때는 만물이 움직이지 못하는 계절, 죽어있는 계절인 겨울의 빛이다.

8절. 그리고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에게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들이 들판에 있었을 때,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란 시간의 간격을 의미한다. “가인”은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선행을 의미한다. 선행은 신앙의 형제이기에 여기서도 두 번씩 “그의 형제”라 말하고 있다. “들판”은 교리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가인이 그의 형제를 향해 일어나 그를 죽였다”란 (신앙과 선행이) 분리되면 신앙은 선행을 절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행이 신앙의 “형제”이다는 것, “들판”은 교리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외의 다른 것은 비슷한 인용 구절로 확증해볼 필요까지는 없어도 될 것 같다. 선행이 신앙의 “형제”이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 또는 실체로부터 누구나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형제 관계가 에서와 야곱을 수단으로 표현되고, 그들이 다툰 바탕은 장자권과 지배권이었다. 또한 형제 관계가 유다에 의한 다말의 아들들인 베레스와 제라를 수단으로도 표현되어졌다 (창. 38:28, 29, 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창. 48:13, 14); 그리고 위 두 가지에서, 뿐 아니라 다른 유사한 경우에서, 다툼은 장자권과 지배권에 관한 것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신앙과 선행, 모두가 교회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가인인 신앙이 이 장의 1절에서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선행은 “형제”라 불리우고 있다 (이. 19:2; 예. 13:14 참조); 이외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신앙과 선행의 합일(union)이 “형제들의 언약”이라 불리우고 있다 (암. 1:9). 가인과 아벨의 형제 관계와 유사한 것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이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밀어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호세아서를 보자:
야곱을 그의 길들에서 방문하시고, 그의 행동에 따라 그분은 그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자궁 안에서 그의 형 에서를 밀어냈다(호. 12:2,3).
그러나 에서, 또는 에서로 표현되는 선행이 마침내 지배권을 가진다는 것이 아버지 이삭의 예언자적 예견으로부터 나타난다:
검을 수단으로 너는 살 것이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너는 지배권을 가질 것이다.
즉 너는 네 목으로부터 그의 멍에를 부러트릴 것이다 (창. 27:40).
또는 같은 것으로 이방인들의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가 에서에 의해, 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들로 인정할 것이라고 자주 말해진 이유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또는 원시적인(primitive) 교회에서, 모든 이는 선행으로부터 형제들이라 불렀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주님에 의해 형제라 불리우고 있다 (눅. 8:21); 듣는 이들은 신앙을 가지는 것과 같다; 행하는 이들은 선행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듣고, 또는 자기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행함이 없는 것, 선행을 가지지 않는 것은 형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바보들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마. 7:24. 26).

“들판”이 교리를 의미하는 것, 결과적으로 신앙과 선행의 교리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들판에 있는 오 나의 산이여, 나는 네 소유물들과 모든 네 보물들을
전리품으로 줄 것이다 (예. 17:3).
위 구절의 “들판”은 교리를 의미한다; “소유물들”과 “보물들”은 신앙의 영적 재물, 또는 신앙의 교리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레바논의 눈이 내 들판의 바위로부터 실패할 것이냐? (예. 18:4).
이것은 시온에 관하여 선포한 것, 즉 신앙의 교리가 심히 궁핍해질 때, 그녀는 들판 같이 갈아엎을 것이다고 선포한 것이다 (예.26:18; 미. 3:12). 에스겔서에서:
그는 토지의 씨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씨뿌림의 들판에 놓았다 (겔. 17:5),
위 구절은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가 교리가 교회 안에 있는 씨로부터 “들판”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에게 나 여호와가 높은 나무를 내려 놓는다는 것을
알게 하자 (겔. 17:24).
요엘서에서:
들판은 못쓰게 되어졌다. 지면이 슬퍼한다, 그 이유는 곡식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포도주가 말라진다, 기름이 쇠약해진다, 농부가 부끄러워한다, 들판의 수확이
멸해졌다,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졌다 (욜. 1:10, 11, 12).
위 구절에서 “들판”은 교리를 의미한다. “나무들”은 지식을, “농부”는 예배자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들판과 그 안의 모든 것이 드높일 것이다,
그 다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할 것이다 (시. 96:12),
위 구절의 경우에서, 들판이 드높일 수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 없는 것은 완전하게 분명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의 것들,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얼마나 오래 토지가 슬퍼하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이 시들어 있어야 합니까? (예. 12:4),
위 구절에서 토지도 들판의 풀잎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황폐해 있는 동안과 관련이 있다.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에서 나타난다:
산들과 언덕들이 네 앞에서 노래부르러 뛰쳐나올 것이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다 (이. 55:12).
주님께서 시대의 종말을 예견하시는 대목에서 신앙의 교리를 “들판”이라 부르신다:
그때 들판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데려가지고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 (마. 24:40; 눅. 17:30),
위 구절에서 “들판”은 두 가지 신앙의 교리, 즉 진정한 교리와 거짓된 교리를 뜻한다. 들판이 교리를 뜻하기 때문에, 신앙의 어떤 씨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인간이든, 교회이든, 또는 세상이든 “들판”이라 불리운다.

이상으로부터 그 다음을 잇는 것은 다음의 말들,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향하여 일어나 그를 죽였다, 그들이 들판에 함께 있었을 때였다.” 이는 신앙과 선행 모두 신앙의 교리로부터 있는 동안,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여전히 선행을 무시하고, 결국 소멸시킨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선행의 어떤 일 없이 신앙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은 요즈음의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이런 가상 속에서 비록 그들이 사랑 없으면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알고있다 해도 여전히 선행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9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네 형제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음”은 선행 또는 “형제 아벨”에 관한 지령을 내부로부터 있게한 어떤 지각력(perceptivity)을 의미한다. 가인의 대답, “나는 모릅니다. 제가 내 형제의 경호인 입니까?”란 신앙이 두루 생각해 본 결과 선행이 별 것도 아닌데, 선행에 도움이 되어 줄 필요가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더 심사숙고 한 결과 모든 신앙이 선행의 모든 것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교리는 되어 갔다.

“여호와께서 말하심”을 수단으로 태고인들이 지각을 가졌음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지각은 사랑이 제 1 순위에 머무르는 동안만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함, 그 결과인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단되었을 때, 지각은 사멸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남은 만큼에서는 지각도 남아있었다. 이 지각력은 태고 교회에서 번창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홍수 이후의 사람들 같았을 때, 즉 선행이 신앙을 통하여 주어졌을 때, 양심이 지각을 계승하였다. 양심 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지령(dictate)을 주기는 한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를 수단으로 이후 살핀다. 양심이 받아쓰기를 할 때(지령을 받을 때)도, 말씀에서는 (태고, 고대 시절에서나) 마찬가지 방식인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신다”를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양심은 밝히 알려주신 것(계시된 것, revealed)들로부터,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인식(cognition)된 것들로부터, 그리고 말씀이 이야기할 때, 또는 지령을 줄 때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이야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로 인해, 양심에 관한 어떤 주제, 신앙에 관한 어떤 주제를 두고 언급할 때, “주님이 말하신다”라고 하는 표현은 오늘날 대중화되다시피 했다.

“경호인(keeper)”은 유대 교회에서 문지기나 수위 (문지방을 지키는 자)와 마찬가지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선행의 “경호인”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섬겨야한다는 사실로부터, 선행은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의 원리로부터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7절에 말한 바 같이 신앙은 통치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10절.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네가 무엇을 저질렀느냐? 네 형제의 피들의 목소리가 지면으로부터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네 형제의 목소리”란 폭력이 선행에 휘둘러졌음을 의미한다. “피들이 소리침”이란 죄있음을 고발함을, “지면”은 종파(schism), 또는 이단(heresy)을 의미한다.

“피들의 목소리”가 폭력이 선행에 저질러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말씀 안에서 “목소리”는 고발하는 어떤 것, “피”는 어떤 종류의 죄, 특별히 증오함(hatred)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기 형제를 향하여 증오함을 낳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심정 안에서 살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너희는 옛 시대로부터의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 즉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임을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네게
말한다, 이유 없이 자기 형제에게 성 내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라가 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평의회(에 출석하는) 위험에 놓일 것이다: 너는 바보야 하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옥 불의 위험에 있을 것이다
(마. 5:21, 22),
위 구절의 말을 수단으로 증오함의 수준이 뜻해진다. 미움은 선행에 반대된다, 그리고 여하한 방법을 취해서라도 선행을 살해한다. 만일 손으로 살해 못한다면, 영 안에서라도 살해한다. 증오함의 행동은 오직 외적 제약에서만 멈추어 있는 듯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증오함은 “피” 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왜 너희는 사랑을 구하려고 네 길들을 선하게 만드느냐 ?
네 치맛자락에서조차 궁핍한 순진한 자들의 혼들의 피들이 발견되어졌다 (예. 2:33, 34).
그리고 증오함이 “피”를 수단으로 표시되듯, 갖가지의 불법도 표시한다. 그 이유는 불법의 샘이 증오함이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에서:
그들은 거짓 맹세하고, 거짓말하고, 죽이고, 훔치고, 간음을 범한다. 그리고
그들은 피들 안에서 피를 만진다; 그러므로 토지가 슬퍼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가 참혹하게 살고 있다 (호. 4:2, 3).
그리고 무자비함에 관해 말하는 에스겔서에서:
너는 피들의 성을 심판하느냐? 그리고 모든 그녀의 역겨운 짓을
그녀로 알게 만드느냐? 성 한 가운데에서 피들을 흘리는 성.
너는 네가 뿌린 그들의 피를 통하여 죄있게 되었다 (겔. 22:2, 3, 4, 6, 9).
에스겔서에서:
토지는 피들의 심판으로 차 있다, 그리고 성은 폭력으로 차 있다 (겔. 7:23).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서 정의로운 자의 피를 흘린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의 죄들,
그녀의 불법 때문에, 그들은 거리들에서 눈먼채 방황하고,
그들은 피로 오염되어 버렸다 (애. 4:13, 14).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 심판의 영으로, 그리고 불타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실 때, 그리고 한 가운데로부터 예루살렘의 피들을 정화 하실 때, (이. 4:4).
그리고 다시:
너희의 손바닥들은 피 안에서 더럽혀졌다,
너희의 손가락들은 불법 안에서 더러워졌다 (이. 59:3).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의 불법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피들”이라 불려진다:
내가 너를 지나쳐갔다, 그리고 너를 보았더니, 네 자신의 피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나는 네게 말했다, 네 피들을 살아있게 하라, 그렇다, 나는 네게 말했다,
네 피들을 살아있게 하라 (겔. 16:6, 22).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함이 계시록서에서 피를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16:3, 4). “피들”이 복수 단어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불의와 역겨운 모든 것은 증오함으로부터 분출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는 선과 거룩한 모든 것이 사랑함으로부터 분출된다. 그러므로 자기 이웃을 향하여 증오함을 느끼는 자는 기회가 생기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회가 올 때가 아니라 기회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에서 “피들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목소리가 외침”, 그리고 “외침의 목소리”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의 형체이다, 그리고 어떤 시끄러움, 동요, 혼란, 또한 행복한 어떤 사건에서도 사용되는 형체이다 (출. 32:17, 18; 습. 1:9, 10; 이. 65:19; 예. 48:3). 이 구절의 경우는 고발함(규탄함, accusation)을 표시한다.

위로부터 “피들의 외침”은 죄지었음을 규탄함을 의미함이 뒤이어진다; 그 이유가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죄지음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그들은 죄있을 것이다 (시. 34:21).
에스겔서에서:
네 성은 네게 뿌린 죄들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다 (겔. 22:4).

“지면(ground)”이 여기서 종파(schism), 또는 이단(heresy)을 의미하는 것은 “들판”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교리 안에서 들판을 가지는 “지면”은 종파이다. 인간 자신은 “지면”이다, 또한 “들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교리나 종파, 이단 같은 것들이 인간 안에서 심어지고 싹틔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으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인간이, 악하고 거짓된 것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인간이다는 말이다. 어떤 특별한 종파, 또는 이단 안에 있는 자는 그것으로부터 명명되어진다. 이 구절의 “지면”은 인간 안에 있는 종파, 이단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11절. 그리고 지금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 지면은 네 손으로부터 네 형제 아벨의 피들을 받으려고 그 입을 열었다.
“너는 지면으로부터 저주되었다”란 종파를 통해 그는 돌아섰다를 의미한다. “땅이 그 입을 열었다”란 이교가 그것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너로부터 네 형제의 피들을 받는다”란 선행과 분리된 신앙이 선행에 폭력을 휘둘러 선행을 멸절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저주됨”은 선에 반대됨이다. 그 이유가 불법들과 역겨움들, 또는 증오함들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들이다. 하여 인간이 아래쪽만을 향하게, 즉 육체적, 지상적인 것만을 중요시하게, 결국 지옥으로부터 있는 것들 쪽으로 치닫게 한다. 이런 것은 선행이 추방될 때, 소멸될 때 발생된다. 그 이유가 주님과 연결되는 끈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선행, 또는 사랑과 자비만이 우리로 그분과 결합되게 하는 끈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그리고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결합의 끈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 단지 지식이기 때문, 지옥의 패거리들이 소유한 신앙의 것과 같기 때문, 이런 신앙 가지고 (악마들은) 선한 자를 미혹하고 자신을 빛의 천사인체 덧칠해놓고 있다; 자기 입술로부터 내뱉는 설교가 비록 자기 심정 속에는 한 개도 같은 것이 없을지라도 사악한 설교자들은 버젓이 대단한 경건심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늘어 놓는다. 기억 안에만 머문 신앙, 그로부터 파생된 생각들이 어떤 소용이 있을 거라 판단할만큼 (머리가) 둔한 자가 (세상에) 있을까? 의지나 의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데도 본질이 어떠해도 뭔가에 동의하거나 그것을 높게 평가해주는 일이 가당하기나 한 것일까? 이 사람과 저 사람이 결합하게 하고 서로가 기뻐하게 하는 것은 이럴 것이다. 의지가 진짜 인간이다. 의지가 따르지 않는 생각이나 말은 아니다. 인간은 의지로부터 자기의 본래의 모습과 의향을 획득한다. 그 이유는 의지가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누구가 선인 것을 생각한다면, 신앙의 본질, 선행인 것이 생각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선인 것을 행할 의지가 생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인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사악하게 살고 있다면, 그는 악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가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은 없다.

12절. 네가 지면을 경작할 때 이제부터는 지면이 너에게 지면의 힘을 더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일 것이다. “지면을 경작함”은 종파나 이단을 탐닉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에게 그 힘을 더해주지 않을 것이다”란 열심히 재배하고 탐닉해봤자 무모할 것(barren)임을 뜻한다.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지면을 경작하는 것”이 이 종파 또는 이단을 탐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위에서 살핀 “지면”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그것의 힘을 더해주지 않음”이 그것의 무모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지면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단어들 자체로부터, 그리고 심사 숙고 해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선행 없는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신앙 없음을 고백하는 것임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이다”가 선하고 진리인 것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배회함”과 “도망함”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예언자들과 성직자들이 거리에서 눈먼채 배회할 것이다, 그들은 피로
오염되어 왔다; 그들은 (성직자나 예언자의 옷을) 만지는 것을 할 수 없다 (애. 4:13-14),
위 구절에서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에 따라 사는 이들이다; “거리에서 눈먼채 배회하는 것”은 참되고 선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모스서에서:
들판의 한쪽에는 비가 왔다, 그리고 들판의 한쪽은 비가 내리지 않아 시들어졌다;
그렇게 두, 세 성읍이 물을 마시려고 한 성으로 베회할 것이다, 그리고 만족하지 못할 것이 다 (암. 4:7-8),
위 구절에서 “비가 내린 들판의 한쪽”을 수단으로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비가 내리지 않은 들판”의 “부분(쪽, part),” 또는 “조각(piece)”을 수단으로 선행 없는 신앙의 교리가 의미되어진다. “물을 마시려 배회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쳐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뿌리는 말라졌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나의 하느님이 그들을 내쫓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에게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들 사이에서
방랑자일 것이다 (호. 9:16,17).
“에브라임”은 그가 요셉의 첫 출생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진리, 또는 신앙을 이해함을 표시한다; “말라버린 뿌리”는 열매맺을 수 없는 선행을 표시한다; “민족들 사이에 방랑자”란 참되고 선한 것을 모르는 이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아라비아를 향하여 올라가라, 그리고 동쪽의 아들들을 황폐되게 하라.
너희는 극도로 도망하고 배회한다; 하솔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위해 깊은 데로
내려가게 하자 (예. 49:28, 30).
“아라비아”와 “동쪽의 아들들”은 천적 부유함,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황폐될 때 “도망하고”, “배회한다”, 즉 “도망자와 방랑자”라고 말해지는데, 그들이 선인 것이 하나도 없을 때이다. “하솔의 주민들”, 또는 영적 부유함을 지닌 이들, 즉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소유한 이들에 관하여, 그들은 “깊음 안으로 내려가게 하자”라고 말해지는데, 그들이 멸한다는 뜻이다.
이사야서에서:
너희의 맨 먼저 되는 모든 자들은 모두가 배회할 것이다, 그들은 활 앞에 묶여졌다,
그들은 멀리 도망했다 (이. 22:3),
“환상의 골짜기”를 놓고 말함, 또는 신앙은 선행 없이 가능하다는 공상에 관해 말한다. 이로부터 이사야서 22:14에서 말해진 이유가 나타난다. 즉 선행으로부터 떨어진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는 것, 즉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내 불법이 제거되어 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큼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란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돌출되어 자기가 악했었다고 하는 어떤 고백을 의미한다. “내 불법은 제거되어질 수 있기에는 너무 크다”란 자기가 악했었다는 고백 때문에 있게 되는 자포자기를 의미한다.

이 구절로부터 나타나는 바는, 선에 관한 어떤 것이 아직은 가인에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나마 조금 있던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선이 멸절되는 것이 19, 23, 24절의 라멕에 관한 언급으로부터 명백해진다.

14절. 보라 당신께서 나를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오늘 저를 축출하셨고, 그리고 당신의 얼굴로부터 내가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를 발견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일 것입니다.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축출됨”은 교회의 모든 진리와 분리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얼굴들로부터 숨겨짐”이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서 나오는 모든 선에서 분리되어짐을 의미한다. “땅에서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모든 이가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란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축출되는”것이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는 것은 “지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지면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인, 그러므로 교회가 고백하는 무엇이든 이다. 단어의 의미는 주제가 취급되어짐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이들조차도 의미에 포함될 수 있다. 즉 이단이나 종파를 고백하는 이들도 또한 “지면”이라 불려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면의 얼굴들로부터 축출됨”은 교회의 진리 안에 더 이상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얼굴들로부터 숨겨지는” 것은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임은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들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들이 여기서 그분의 “얼굴들”을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도망자와 방랑자”이다는 것은 참되고 선인 것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저를 발견하는 모든 이가 나를 죽일 것입니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을 뒤잇고 있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선행을 박탈할 때, 그는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분리한다. 그 이유는 선행만이, 즉 이웃을 향한 사랑만이, 그리고 자비만이 인간을 주님과 결합되게 해주기 때문이다. 선행이 없는 곳, 거기에 분리됨이 있다, 그리고 분리됨이 있는 곳에서, 인간은 자신에, 또는 그의 자기 자신에 남아 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이다. 이것들은 인간을 죽인다, 또는 남아있는 생명이 없게 만든다.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죽임을 당할 거라는 계속적인 두려움 안에 있다. 모세로부터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너희의 토지는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성들은 황폐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부터 남은 그들 위에 나는 그들의 적들의 토지에서 그들의 심정 안으로
연약함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굴러가는 잎의 소리가 그들을 칠 것이다, 그들은
검으로부터 도망치듯 도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추격하지 않는데도
넘어질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추격하지 않아도 마치 검 앞에서 인 것처럼
자기 형제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레. 26:33, 36-37).
이사야서에서:
반역자가 불충하게 취급한다, 그렇다, 반역자의 불충 안에서 그들은 반역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두려움의 씨끄러움으로부터 도망하는 자가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구덩이의 한 가운데로부터 올라오는 자는 덫에 걸릴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위법은 그것 위에서 매우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추락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24:16-20).
예레미야서에서:
잘 보라, 나는 너희 위에 두려움을 가져온다, 모든 너의 주위로부터 너희는
그의 얼굴들을 향하여 모든 사람을 몰아낼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배회하는
그를 그러모우지 못할 것이다 (예49:5).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말을 타고 도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도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날랜 (말을)을 타고 도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를 추격하는 그들은
더 날랜 (말을) 탈 것이다; 일 천 명이 한 명의 꾸짖음에서 도망할 것이다,
다섯 명의 꾸짖음에서 너희는 도망할 것이다 (이. 30:16-17).
위 구절들과 말씀의 여러 구절들에서, 거짓과 악 안에 있는 이들이 “도망함”으로서, 그리고 “죽을까 두려워함”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을 보호할 자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미워한다, 하여 그들 모두는 서로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삶에서 악령들의 상태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들로부터 모든 선행을 박탈해버린 악령들은 배회하고, 이 장소 저 장소로 도망다닌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만일 어떤 단체로 간다면, 그들이 단지 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품성을 즉각 지각한다. 그 이유가 그 세계에서는 지각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령들은 단체원을 몰아내려 할 뿐 아니라, 심각하게 그들을 처벌하려든다, 그리고 이런 악의를 가지고 할수만 있다면 그들을 죽이려한다. 악령들은 서로를 괴롭히고 벌줌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높은 희열이다. 지금도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런 것의 원인임이 알려지기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누군가를 위해 바라면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처벌을 가진다.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처벌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런 처벌의 두려움을 자신들 안에 가진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 앙갚음이 일곱 배나 있게 되리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그 앙갚음이 일곱 배나 있는다”란 분리된 신앙이라 해도 그 신앙에 폭행을 하는 것은 신성한 것을 더럽힘(sacrilege)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그를 발견하는 자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심”이란 주님께서 인류의 사용을 위해 신앙이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particular manner)으로 신앙을 구별해두셨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구절의 내적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기 앞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 경우가 신앙과 더불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태고 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이 아니면 신앙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특성이었다. 하여 그들은 시랑으로부터의 신앙 외에는 언급조차 꺼려왔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한 천적 천사들이 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견된 바, 인류가 이런 특성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신앙이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신앙은 그 스스로 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설비된 것이 있다. 신앙을 통하여,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행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고로 지식, 또는 들음이 먼저 올 것이다는 것, 그 다음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선행, 즉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자비가 주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다는 것, 그리하면 선행은 신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 속의 제1의 것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고 교회가 가졌던 지각 대신 양심이 계승되고 이 양심은 선행과 결합한 신앙을 통하여 획득된다. 양심은 진리인 것을 받아 적는 것 (지령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진리이다. 홍수 이후 교회들 대부분은 이런 특성 속에 있었고, 주님의 강림 이후 소박한 교회(원시적인 교회, primitive church), 또는 첫 교회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이를 수단으로 영적 (왕국의) 천사들과 천적 (왕국의) 천사들은 구별되어진다.

인류가 영원한 사망으로 멸하여지지 않도록 위와 같이 예견되어 설비해두셨기에, 여기서 선포되는 것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의미되어지는 가인에게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 더 나아가 표가 가인 위에 놓였다는 것, 이는 그것의 보존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식에서 신앙을 구별해두셨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신비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결혼과 고자들에 관련된 것을 말하시는 대목 안에 참조되게 해두셨다. 마태복음서에서:
자기들의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그렇게 태어나는 고자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 고자들이 있다; 천국의 왕국을 위하여 자신을 고자로 만든
고자들이 있다; [이것을] 받을 수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이것을] 받게 하라
(마. 19:12).
천국의 결혼에서 이들은 “고자들”이라 불리운다; “자궁으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들은 천적 (평면의) 천사들과 유사하다;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 고자들은 영적 (평면의) 천사들과 유사하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과 비슷하다. 이 영들은 선행으로부터 라기보다는 순종으로부터 행한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그 앙갚음이 칠 배가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라는 말은 신앙이 분리된 때조차에서도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인 “가인”, 그리고 신성한 숫자인 “일곱”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숫자 “일곱”은 거룩함으로 높이 평가되어졌는데, 이는 창조의 육일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이고, 이 인간 안에 평화, 쉼, 그리고 안식일이 있다. 이로부터 이 숫자는 유대 교회의 예식들 안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신성함이 있는 어느 곳에서든 이 숫자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시간의 더 큰 기간과 덜 큰 기간이 일곱들로 구별되어져, “주들(weeks)”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의 큰 간격들인 주도 있다 (단. 9:24-25); 그리고 칠 년의 시간이 라반과 야곱에 의해 “주(week)”라 불려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곱이 언급되는 어디이든지, 숫자 일곱은 거룩함, 또는 범할 수 없음으로 간주되어졌다. 고로 우리는 다윗서에서 읽는다.
하루에 일곱 번씩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시. 119:164).
이사야서에서:
달의 빛이 태양의 빛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은 일곱 날들의
빛 같이 일곱 배일 것이다 (이. 30:26).
위 구절에서 “태양”은 사랑을 , “달”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 신앙은 사랑 같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일곱에 도착하기에 앞서, 즉 천적 인간이 되기에 앞서 여섯으로 구별되어졌듯이, 인간의 황폐해지는 기간도 천적인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의 기간도 일곱으로 구별되어진다. 이것이 몇 번의 유대인들의 포로됨에 의해, 마지막, 또는 바빌론에의 포로됨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이 포로됨은 10년씩 일곱, 또는 칠십 년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땅이 그것의 안식을 갖는 것이 일곱 때라고 말해졌다. 똑 같은 것이 느부갓네살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다니엘서에서:
그의 심정은 인간으로부터 바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심정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일곱 번 지나갈 것이다 (단. 4:16. 23, 32).
그리고 마지막 때의 황폐해짐에 관하여 계시록서에서:
나는 천국에서 또 다른 크고 경이로운 표시를 보았다. 일곱 천사들이
일곱 재앙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 15:1, 6-8);
그리고 같은 책에서: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일곱을 여섯 번씩, 즉 마흔 두 달을 밟을 것이다 (계. 11:2).
나는 안쪽과 뒤쪽에 쓰여지고, 일곱 봉인으로 봉하여진 책을 보았다 (계. 5:1).
같은 이유 때문에 처벌의 가혹함과 증가되게 함이 숫자 일곱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만일 너희가 모든 이것 때문에 여전히 나에게 순종하고 싶지 않다면,
나는 네 죄들을 일곱 배로 응징할 것이다 (레레. 26:18, 21, 24, 28).
그리고 다윗서에서:
(그 모독을) 그들의 가슴 안으로 일곱 배로 하여
우리의 이웃들에게 갚아주십시오 (시. 79:12).
지금 신앙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 신앙이 섬김에 사용될 것이라고 말해졌는 바, “가인을 살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앙갚음이 그에게 일곱 배로 하여 되갚을 것”이라 말해졌다.

“여호와께서는 누구도 그를 죽이지 않도록 가인 위에 표를 놓으셨다”는 주님께서 신앙이 보존되도록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을 구별해두셨다가 의미된다는 것은 “표(mark)”, 그리고 구분하는 수단으로 누군가에 “표를 놓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를 통하여, 성 한가운데를 통하여 가라,
그리고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통곡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만들어라 (겔. 9:4),
위 구절에서 “이마에 표를 해두는 것”이 그들의 머리들의 앞 부분에 선을 긋거나 점을 찍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을 뜻한다. 계시록서에서:
메뚜기들은 이마에 하느님의 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만을
다치게 하는 것이었다 (계. 9:4),
위 구절에서 표를 가지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뜻한다. 같은 책에서 “이마와 손에 표”에 관해서도 읽게 된다 (계. 13:16). 같은 것이 유대 교회에서 손과 이마에 첫째되는 큰 명령을 묶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들어라, 오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느님은 한분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 네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으로, 네 모든 혼으로, 네 모든 힘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 말들을 네 손에 표시하여 묶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은 너희
눈들 사이에서 부적으로 있을 것이다 (신. 6:4, 8; 11:13, 18).
이를 수단으로 첫 명령들은 여타 다른 명령들을 사랑함과 구별되어졌다. 따라서 “손과 이마에 표를 함”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혀들을 그러모으러 온다; 그리고 그들은 와서 내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위에 표를 놓을 것이다 (이. 66:18-19).
그리고 다윗서에서:
오 제게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당신의 힘을 당신의
종에게 주시고, 당신의 몸종의 아들을 구해주십시오. 선을 위해 제게 표를
놓아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시. 86:16-17).
이상의 구절들 만으로도 표의 의미는 이제 분명하다. 그러므로 가인이라 불리는 특별한 인물 위에 어떤 표가 놓였다는 상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글자의 의미에서 포함된 것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16절.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놋의 땅에서 거주했다.
“가인이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서 비롯되는 선과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가 놋의 땅에 거주했다”란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의미한다.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는 이전에 사랑이 통치했던 곳인 지적인 마음 근처를 의미한다.

“여호와의 얼굴로부터 떠났다”는 것이 사랑의 신앙 속의 선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보일런지 모른다; “놋의 땅에 거주하는 것”이 진리와 선의 바깥쪽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의 의미가 “방랑자와 도망자”이다는 것, 방랑자와 도망자는 진리와 선이 결핍된 것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는 이전에 사랑이 통치했던 곳인 지적 마음 가까이, 그리고 또한 이전에 선행이 통치했던 곳인 합리적 마음 가까이를 의미한다. 이는 “에덴의 동쪽”의 의미에 관해서 말해진 것, 즉 “동쪽”이 주님이시다는 것, “에덴”이 사랑이다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 교회인과 더불어 의지와 이해함은 하나였다. 그 까닭은 의지로부터 있는 사랑과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신앙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 이유는 사랑이 모든 것의 모두였고,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후, 즉 “가인”이라 불리운 이들의 경우 같이, 의지가 더 이상 통치하지 못했다. 그 마음에서는 의지 대신 이해함이, 또는 사랑 대신 신앙이 통치했다. 이것이 가인이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거주했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방금 앞서 살핀대로,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 즉 인류의 미래에 사용되도록 보존하시려 “신앙 위에 표가 놓였기 때문”이다

17절.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그리고 가인은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불렀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고, 그녀가 임신했고, 에녹을 낳았다”란 이 종파(schism) 또는 이 이단(heresy)이 그 자체 “에녹”이라 불리는 또 다른 종파, 또는 이교 신앙을 생산했음을 의미한다. “그가 지은 성”이란 가인으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모든 것과 이단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한다. 종파나 이교 신앙이 에녹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그 성의 이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불렀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가인이 그의 아내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고, 에녹을 낳았다”가 어떤 종파, 또는 이교가 그 자체로부터 또 다른 이교를 생산했다는 것은 이전에 말했던 것으로부터, 그리고 첫 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 이브가 가인을 생산했다”라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임신과 출생에서 지금의 경우도 앞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 생산이 교회에 관해서이든, 이교에 관해서이든, 거기로부터 그들은 족보를 만들어냈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서로에게 유사하게 있기 때문이다. 임신된 한 개의 이교로부터 수많은 이교들이 다시 출생되어진다.

교리물과 가르침을 가진 이교가 “에녹”이라 불렸다는 것은 이 이름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분명해진다. 이는 가르침이 그렇게 시작했다, 또는 개시되었다를 뜻한다.

“지어진 성”을 수단으로 이 이교로부터 나온 모든 교리물과 이교의 가르침이 의미되었다는 것은 성의 이름이 발생하는 말씀의 모든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성이 언급되어도 성을 뜻하지 않고 언제나 교리적인 어떤 것, 그 밖의 이교물에 관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성이 무엇인지에, 또는 어떤 성의 이름이 무엇인지에 무지했다; 그런 까닭은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만을 생각할 뿐이었기 때문에서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성이나 성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거룩한 성”, 또는 “거룩한 예루살렘”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주님의 왕국, 또는 각 개별적 측면에서는 이 왕국 안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성(city)”, 또는 “시온의 산” 역시 비슷하게 이해된다; 후자는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 전자는 영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천적 자체와 영적 자체가 “성들”, “궁전들”, “집들”, “(성)벽들”, “(성)벽들의 기초들”, “(성)루벽”, “문들(gates)”, “빗장들”, “성전”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겔. 48장, 계. 21장 15에서 끝까지를 참조). 계시록의 21:2, 10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불려진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13:18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취급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막들의 거룩한 장소, 하느님의 성”이라 불리운다 (시. 46:4);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성, 거기 여호와” (겔. 48:35),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 쓰여있다:
외국인의 아들들이 당신의 성벽을 세울 것이다. 당신을 경멸한 그들 모두가
당신의 발바닥에서 자신을 구부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를 여호와의 성,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부를 것이다 (이. 60:10, 14).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을 진리의 성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시온의 산, 거룩함의 산 (이라 부를 것이다) (슥. 8:3),
위 구절에서 “진리의 성”, 또는 “예루살렘”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의 산”, 또는 “시온의 산”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성을 수단으로 표현되는 바, 유다의 성들과 이스라엘의 성들 또한 그러하다. 그것들 각각은 그 성의 이름이 불려질 때 그것 자신의 특별한 의미로부터 교리물의 어떤 것을 지닌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부터 외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자는 아무도 없다. 교리적인 것들이 “성들”을 수단으로 의미되듯, 이교들 역시 그러하다. 각각 성의 이름에 따라 각각의 성은 특수한 이교적 어떤 견해를 의미한다. 현재로서 우리는 아래의 구절들로부터만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성”은 교리적인 어떤 것, 또는 그밖에 이교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만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읽는다:
그 날에 가나안의 입술로 이야기하는 이집트의 토지에 다섯 성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체바옫에게 맹세한다; 하나는 멸망(Heres)의 성이라 부를 것이다
(이. 19:18).
위 구절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강림 때에서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래서 다시, 환상의 골짜기, 즉 공상의 골짜기를 취급할 때:
너는 동요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야단 법석인 성, 떠들썩한 성 (이. 22;2).
예레미야서에서, “남쪽에” 있는 이들에 관해서, 즉 진리의 빛에 있는 이들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을 소멸한 자에 관해서:
남쪽의 성들은 닫혀져 왔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을 열지 못할 것이다 (예. 13:19).
여호와께서 시온의 딸의 성벽을 파괴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벽과
성루가 슬퍼지게 만든다; 그들은 모두 쇠약해졌다. 그녀의 문들은 지면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분은 파괴하시고 그녀의 빗장들을 부수셨다 (애. 2:8-9),
위 구절에서 “성벽”, “성루”, “문들”, 그리고 “빗장들”을 수단으로 교리적인 것들만이 뜻해짐을 알런지 모른다.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사야서에서;
이 노래는 유다의 토지에서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튼튼한 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함이 성벽들과 성채들에 놓일 것이다; 너희는 문들을 열어라, 하여 성실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들이 안으로 들어갈런지 모른다 (이. 26:1-2).
나는 당신을 드높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고백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당신은 성을 돌무더기로, 방어하는 성을 페허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의
궁전이 성으로 영원히 세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백성들이 당신을
존경할 것이고, 포악한 민족들의 성이 당신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 25:1-3),
이 구절에서는 특별한 성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발람의 예언에서:
에돔이 상속자일 것이다, 그리고 야곱으로부터 한 사람이 지배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성의 나머지를 파괴할 것이다 (민. 24:18-19),
위 구절에서의 “성”이 성을 뜻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텅빔의 성은 부셔져 있다; 모든 집은 닫혀 있다, 하여 거리들에
포도주를 두고 외친 자들이 들어갈 수 없다 (이. 24:10-11),
위 구절에서, “텅빔의 성”은 교리의 텅빔을 표시한다; 그리고 “거리들”은 성에 속하는 그밖의 것들, 거짓들이든, 진리들이든 어느 것을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일곱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쏟았을 때, 큰 성이 세 부분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민족들의 성들이 무너졌다 (계. 16:17, 19).
“큰 성”은 이교적인 어떤 것, “민족들의 성들”도 마찬가지를 표시한다는 것은 모든 이도 아는 바일 것이다. 큰 성이 요한이 본 여인이었다고 설명되었다 (계 19:18); 여인은 앞서 보여준 품성의 교회를 표시한다.

위에서 우리는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 부분 모두가 역사적 형체를 띄고 있어, 글자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는 가인이 성을 건설했고 에녹이라 불렀다는 것 이상의 의미로는 더 비쳐질 수 없다. 그러나 가인이 아담의 첫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상당한 것이 상상되는 바 앞뒤 순서가 맞지 않는 셈이다 (14절 참조); 하여 이 역사적 시리즈의 배경을 살펴두어야 한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들을 표현적 모양 아래 역사적 형체로 배열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연구는 그들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었다. 그 이유가 그렇게 하면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듯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8절. 그리고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랏은 므두야엘을 낳았고, 므두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그리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위 이름들은 “가인”이라 불리는 첫 번째 (이교)로부터 파생된 이교들(heresies)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름들 외에는 그들에 관한 잔존하는 기록 같은 것은 없는 바 이름 외에 더 말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굳이 뭔가 추적하려 한다면 이름이 파생된 근원을 더듬는 정도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랏”은 그가 “성으로부터 내려옴”, 즉 “에녹”이라 불리는 이교로부터 내려옴 정도일 뿐이다.

19절. 그리고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그 중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였고, 그리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씰라였다.
“라멕”은 순서대로 보면 가인의 여섯 번째에 해당된다. 그에게는 더 이상 어떤 믿음도 있지 않은 바 무용지물(vastation, laid waste)을 의미한다. 그의 “두 아내”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아다”는 이 새로운 교회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어머니를, “씰라”는 자연적인 것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라멕”이 황폐됨을 의미하는 것, 또는 신앙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23-24절로부터, 즉 “나의 부상당함에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에 어린 것을 살해했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 것”은 선행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교회의 상태는 이런 상황이다. 시간의 경과에서, 교회는 진정한 신앙으로부터 떠나, 황폐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는 상태에까지, 즉 신앙이 아예 없는 상태로까지 치닫는다. 이런 과정은 가인족(Cainites)이라 불려진 태고 교회의 경우이다, 또한 홍수 후 고대 교회, 유대 교회와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주님의 강림 때에 이 마지막 상황은 그들이 주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분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오신다는 것, 그분에 대한 신앙 역시 아는 것조차 없었다. 오늘날 이것은 완전하게 황폐되었으므로 그것 안에 남아있는 신앙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핵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관하여 황폐된 이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와 함께 있었다. 이 교회로부터의 나머지가 홍수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홍수 사건 후에도 계속 남았다. 교회의 이 나머지가 “노아”라 불리운다.

교회가 심히 황폐해져 더 이상 어떤 신앙이 없게 되었을 때, 그 때, 전과 달리, 교회는 새로이 시작한다, 즉 새로운 빛이 빛을 발한다, 이것이 말씀에서 “아침”이라 불리운다. 새 빛, 또는 “아침”이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 빛을 발하지 않는 이유는 신앙의 것들과 선행의 것들이 모독된 것들과 혼합되었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상태 안에 남아있는 한, 빛 또는 선행의 어떤 것이 은근히 심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가라지”가 모든 “좋은 씨”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없을 때, 신앙은 더 이상 모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함도 믿지도 않고 단지 알고만 있는 이들은 모독할 수 없다. 이는 이미 주목해본 바 있다. 이것은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오늘날 기독인들 사이에 사는 결과, 기독인들이 주님이라 부르는 그분이 자기들이 기다린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눈치채는 정도일 뿐이다. 하여 여전히 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고) 예상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를 모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주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는 모하멭이나 이방인들도 같은 처지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유대 교회가 인정하고 믿는 것이 전무할 때까지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위의 경우는 “가인”이라 부르는 이교와 더불어서도 똑같다. 이 이교도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 비록 이 이교가 사랑을 인정했을지라도, 여전히 신앙을 사랑 위에 놓았고, 이로 인해 이 이교도 점진적으로 방황해갔는데, 순서상 여섯째인 라멕에서는 신앙조차 송두리째 부정했다. 이 때가 당도하자, 새 빛, 또는 아침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아다와 씰라”로 명명되어진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이라 불리웠다.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인데도 그녀들은 비록 라멕이 신앙이 전혀 없음을 의미할지라도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운다. 이는 신앙이 없는 유대인들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교회와 같다. 즉 야곱의 아내들인 레아와 라헬의 경우와 같은데, 레아는 외적 측면의 교회를, 라헬은 내적 측면의 교회를 표현한다. 이 교회들은 비록 둘로 나타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이다; 그 이유는 외적 측면, 또는 표현적 측면이 내적 측면으로부터 분리되면, 우상적인 어떤 것, 또는 죽은 것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외적 측면과 함께한 내적 측면은 교회를 구성하고, 하나되기조차 한다. 이와 같은 교회가 여기서 아다와 씰라의 경우이다. 야곱과 그의 후손, 라멕의 경우같이, 신앙이 없게 되었을 때, 교회는 그들과 더불어 남아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이동되어졌다. 이방인들은 불신앙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고 신앙에 관해 무지함 안에서 살아온 이들이었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황폐될 때 그들 사이에도 진리들을 가진 이들이 그 안에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모든 진리에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교회는 이동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들은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보다 훨씬 더 신앙을 잘 껴안기 때문이다.

황폐함(vastation)은 두 종류로부터 있다; 첫째로, 아는 이들과 알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 또는 보는 이들과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 마치 옛날의 유대인들과 작금의 기독인들 같다; 그리고 둘째로, 자기들의 무지함의 결과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이들, 마치 고대와 근대의 이방인들 같다.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아는 이들과 알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 즉 보는 자들과 보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 닥칠 때, 새로운 교회가 발생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들이라 부르는 이들과 더불어 발생한다. 이것이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와 더불어, 그리고 홍수 이후 고대 교회와 더불어, 또한 유대 교회와 더불어 일어났다. 전에는 새 빛이 있지 않다가 완전한 황폐 이후 빛을 발한 이유는 이미 말했듯이, 그들이 더 이상 밝히 안 것들을 모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진리를 인정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황폐함의 마지막 때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예언서들에서 주님에 의해 자주 선포되어지고 있다. 예언서들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황폐함(vastation)”, “황폐케함(laying waste)”; 그리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황무함(desolation)”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는 “종말(consummation)”과 “끊음(cutting off)”으로도 말해지고 있다. (이. 6:9, 11-12; 23:8-끝까지; 24; 42:15-18; 예. 25; 단. 8; 9:24-끝절까지; 습. 1; 신. 32; 계. 15; 16; 그리고 뒤잇는 장들에서.)

20절. 아다가 야발을 낳았고, 야발은 천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었다.
“아다”는 신앙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함은 이미 위에서 말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이었고, 육축을 했다”란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선, 즉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아다”를 수단으로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가 의미된다는 것은 그녀의 첫 출생 야발이 “천막에 거주하는 자의 조상, 그리고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라 불리운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천적 (평면)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사랑에서 파생된 선들이기 때문이다.

“천막에 거주하는 것”이 사랑의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천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여, 누가 당신의 천막에 거주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함의 산에
거주할 것입니까? 직바르게 걷는 사람, 정의를 일삼는 사람, 자기 심정 안에서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시. 15:1-2),
이 구절에서, “천막에 거주하는 것” 또는 “거룩함의 산”에 거주하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수단으로, 즉 직바르게 걷는 것, 정의를 일삼는 것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진다. 다시:
그것들의 소식(line)이 온 땅을 통하여 나가고, 그것들의 이야기는 세상의 끝까지
퍼져 간다. 그것들 안에서 그분은 태양을 위하여 천막을 놓으신다 (시. 19:4),
위 구절에서 “태양”은 사랑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당신의 천막 안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날개의 덮음을 신뢰할 것입니다 (시. 61:4),
위 구절에서 “천막”은 천적인 것을, “날개의 덮음”은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영적인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자비를 수단으로 왕좌는 굳건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진리 안에, 다윗의
천막 안에 왕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하시고, 공정을 추구하시고,
정의를 서두르신다 (이. 16:5),
위에서 “천막”은 사랑의 거룩인 것을 표시한다. 이는 “공정, 판결함”, 그리고 “정의를 서두르심”의 언급을 수단으로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다시:
시온을 쳐다 보라, 우리의 지정된 축제의 성이다; 네 눈이 예루살렘,
조용한 주택, 움직이지 않을 천막을 볼 것이다 (이. 33:20),
천국의 예루살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야곱의 천막들로부터의 포로된 자를
다시 데려온다, 그리고 그의 거주지에 자비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성은 그녀의
자신의 더미 위에 건설되어질 것이다 (예. 30:18);
“천막들로부터의 포로된 자”는 천적인 것의 황폐됨, 또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의 황폐됨을 의미한다. 아모스서에서:
그 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터진 곳을 울타리로 두를 것이다; 나는 그것의 파멸들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나는 영원의 날들 안에서 같이 그것을 건설할 것이다 (암9:11),
위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과 거기로부터의 거룩한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온 토지가 황폐되어 있다, 갑자기 내 천막들이 황폐되어 있다,
그리고 내 커튼들이 순간에 (황폐되었다) (예. 4:20).
내 천막이 황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나의 끈들이 잡아뜯겼다, 내 아들들이
나로부터 가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있지 않다; 더 이상 내 천막을 펴줄 자가 없다
그리고 내 커튼들을 쳐줄 자가 없다 (예. 10:20),
위에서 “천막”은 천적인 것들을, “커튼들”과 “끈들”은 천적인 것에서 파생된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그들의 천막들과 그들의 양떼들을 그들이 가져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들의 커튼들을, 그들의 모든 그릇들을, 그리고
그들의 낙타들을 끌어갈 것이다 (예. 49:29),
아라비아와 동쪽의 아들들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것, 또는 거룩인 것을 소유한 이들이 표현되어졌다. 다시:
시온의 딸의 천막 안으로 주님께서는 불 같은 그분의 분노를 쏟으셨다 (애. 2:4),
신앙의 천적 또는 거룩한 것들의 황폐됨을 이야기한다.
“천막”이 사랑의 천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씀에서 고용된 이유는 고대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천막 안에서 예배의 거룩한 의식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 속의 것들을 모독함으로 해서 천막을 모독하기를 시작했을 때, 성막이 지어졌고, 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러므로 천막은 성막과 성전에 의해 표시된 모든 것을 표현했다. 같은 이유에서 거룩한 사람이 “천막”, “성막”, 그리고 주님의 “성전”이라 불리운다. 천막, 성막, 성전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 다윗서에서 분명해진다:
한가지 것을 나는 여호와께 물었다, 나는 추구할 것인 즉, 나는 내 삶의 모든 날들을
여호와의 집 안에 머무르며, 여호와를 달콤함에서 바라보며, 아침 일찍 그분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의 날에 나를 그분의 성막 안에 감추어 둘 것이다;
그분의 천막의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어 둘 것이다; 그분은 나를 바위 위에
올려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리를 내 주위의 내 적에 맞서 들어 올리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천막에서 큰 소리 내어 제물을 바칠 것이다 (시. 27:4-6).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인간 실체 측면에서의 그분이 “천막”, “성막”, “성전”이시다; 이로부터 모두 각각의 천적 인간도 그렇게 불리운다, 또한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리운다. 태고 교회가 이 교회 뒤를 잇는 여느 교회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그들은 홀로 살거나 가족 단위로 살았으므로 자기들의 천막 안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천막은 성전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모독되었다. 그것을 회상하면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 (이 절기는) 그들이 땅의 생산물을 그러모을 때, 태고인들 같이, 천막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레. 23:39-44; 신. 16:13; 호. 12:9).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로부터 파생된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의 2절로부터 분명해진다. 2절에서, “양떼의 목자”가 선행의 선을 의미함을 살폈다. 여기서는 “목자(shepherd)” 대신 “조상(father)”이, 그리고 “양떼(flock)” 대신 “육축(cattle)”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야발이 조상이라고 말해진 이유인 단어 육축은 천막 바로 뒤를 이어 등장하는 바, 이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주택은 천막이고, 가축의 주택은 가축 우리 임도 뜻하고 있다. 이 구절의 이런 표현들이 사랑의 천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의 다양한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나는 내가 그들을 흐트러버렸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의 남은 것들을
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그들의 (양)우리(fold) 안으로 데려올 것이다,
하여 그들은 열매가 풍성하고 번성할 것이다 (예. 23:3).
에스겔서에서:
나는 그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우리(fold)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좋은 우리 안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찐 목장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먹을 것이다 (겔. 34:14),
위에서 “우리들(folds)”과 “목장들(pastures)”은 사랑으로부터의 선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지방이 많음, 살쪘음(fatness)”이 서술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너희가 지면에 뿌린 너희의 씨에 비를 주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의
생산물로부터의 빵은 살쪄(fat)있고 기름이 가득할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은 너희 가축을 넓은 초장에서 먹이실 것이다 (이. 30:23),
위에서, “빵”은 천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가축이 먹을 초장의 “살찜(fat)”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선들을 의미했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야곱을 되찾으실 것이다, 그들은 높은 시온에 와서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의 선이 밀을 위해, 새 포도주를 위해, 기름을 위해,
양떼의 새끼들을 위해, 목축떼를 위해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혼은 물을 댄 동산으로 있을 것이다 (예. 31:11-12),
위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밀”과 “기름”으로, 거룩함에서 파생된 선이 “새 포도주”와 “양떼의 새끼(sons)들과 목축떼”, 또는 “가축(cattle)”으로 묘사되었다. 다시;
목자들과 그들의 가축의 양떼들이 시온의 딸에게 나올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향하여 빙둘러 자기들의 천막들을 칠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공간에서 먹일 것이다 (예. 6:3).
“시온의 딸”은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 교회로부터 “천막들”, “가축의 양떼”들이 서술되고 있다.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이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야발이 최초로 “천막에 거주하고 육축하는 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아담과 이브의 둘째인 아벨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그가 “양떼의 목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발은 순서대로라면 가인으로부터 내려온 일곱째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21절.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고,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든 자의 조상이었다.
“그의 형제의 이름은 유발이었다”란 아다와 똑 같은 교회 속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하고, “하프와 오르간을 켜는 모든 자의 조상”이란 믿음 속의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20절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의) 것들을 취급했으나, 21절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 (평면의)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들이 “하프”와 “오르간”으로 표현되어졌다. 줄을 사용한 악기들, 하프 같은 악기는 신앙으로부터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심사숙고 해보면 분명해진다. 여러 악기들, 또한 노래함이 표현 교회의 예배에서 위와 같은 것들을 표현해준 이유에서, 그 당시에도 많은 성악가와 음악가가 있어 왔다. 천국의 모든 기쁨(joy)이 심정의 즐거움(gladness)을 생산하기에 이것들이 노래를 수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노래함은 현악기를 수단으로 더욱 효과를 높였다. 심정 속의 모두 각각의 애착이 이렇게 동반되어진다: 애착이 노래를 생산한다, 결과적으로 애착은 노래와 연결되어져 있다. 심정의 애착은 천적 (평면)이나, 그 결과인 노래함은 영적 (평면)이다. 노래함과 노래와 비슷한 것이 영적인 것을 표시하는 것은 두 종류로 된 천사 합창단이 천적 부류와 영적 부류로 되어 있는 것에서 나에게 분명해졌다. 영적 합창단들은 그들이 노래함에 떠는(vibrant) 음색이 있어 천적 합창단으로부터 쉽게 구별되었다. 이 음색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등등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은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은 폐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노래하는 음성, 악기들의 소리도 폐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다. 이런 생각의 바탕은 심장과 폐가 결혼, 즉 사랑과 신앙의 결혼 같은 것만을 표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천적인 천사가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천사가 폐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이 구절에서 뜻해지는 이유는 이 구절의 말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원칙 때문이다. 즉 유발이 하프나 오르간을 연주하는 자의 조상이라는 단순한 사실만에 하느님의 말씀을 국한 시키면, 그 말은 아무런 생명도 없고, 생명 없는 것은 말씀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는 논리만으로도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선들 이듯,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인 것, 뿐 아니라 선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은 위 두 가지(천적, 영적)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천적 (평면의) 것이다. 신앙이 천적, 영적인 두 평면에 연루되기에, 신앙은 두 악기들, 즉 하프와 오르간에 의해 의미된다. 하프는 현악기인 바, 영적 진리를, 오르간은 현악기와 관악기 중간인 바, 영적 선을 의미한다.

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들이 등장한다. 각각의 악기는 각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관한 세부사항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 각기 적당한 장소에서 더 설명한다. 여기서는 다윗서에서 말해진 것만을 추가해 본다:
나는 여호와의 천막에서 큰 소리내어 제물들을 바칠 것입니다, 나는 노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시. 27:6),
위에서 “천막”은 천적인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큰 소리 냄”, “노래함”, “찬양을 부름”은 천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된 영적인 것을 표현한다. 다시:
여호와에게 노래하라, 오 너희 의로운 자야, 그 이유가 그의 찬양은 곧바른 자를
위해 알맞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프로 여호와께 고백하라, 수금(현악기)으로
노래하고 열 줄로 된 악기로 노래하라. 그분에게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
큰 소리내어 노련하게 연주하라; 그 이유가 여호와의 말씀은 올바르시고,
그분의 모든 일은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시. 33:1-4),
위 구절은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하는데, 이 진리들에 관련되어 이런 것들이 말해지고 있다.
즉 영적인 것들, 또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 하프와 수금, 노래와 이에 유추되는 악기들을 가지고 경축되었다. 그러나 신앙으로부터의 천적인 것들은 관악기, 즉 나팔 같은 것 가지고 경축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전에서 여러 악기들이 사용된 것이다. 하여 이 주제(subject), 또는 저 주제가 어떤 특정한 악기로 경축되었기에, 그 결과 악기가 등장하는 성서 대목에서는 사용된 악기 이름으로도 그 대목의 의미 파악에 도움을 준다.
다시:
나는 수금을 가지고 당신의 진리까지도 고백할 것입니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에게 나는 하프를 가지고 찬양합니다, 오 당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여;
제 입술이 제가 당신을 찬양할 때 노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혼을 당신은
되찾으셨습니다 (시. 71:22-23),
위에서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었다. 다시:
여호와에게 고백으로 답하라, 우리의 하느님에게 하프로 찬양하라 (시. 147:7);
“고백”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계되는데, 그 대상이 여호와이시다. “하프로 찬양을 하라”는 신앙의 영적인 것에 관계를 가지므로 그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다시:
그들이 춤을 추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자,
그들이 소고와 하프로 그분에게 찬양을 드리게 하자 (시. 149:3),
위에서 그들이 찬양하는 악기인 “소고”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프”는 진리를 의미한다.
다시:
나팔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라; 수금과 하프로 그분을 찬양하라; 소고와 춤으로
그분을 찬양하라; 현악기와 오르간으로 그분을 찬양하라; 큰 소리의 심벌즈로
그분을 찬양하라; 큰 소리내는 심벌즈로 그분을 찬양하라 (시. 150:3-5).
이 악기들은 찬양의 주제 속에 있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표시한다; 각각의 악기가 각각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위 구절에서 여러 악기가 언급된 것을 두고 말씀을 신뢰 못할지도 모른다. 다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관련하여:
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보내소서, 그것들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저를 당신의 거룩함의 산으로, 당신의 주택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하느님에게 갈 것입니다, 내 드높임으로부터의
즐거움(에서); 그렇습니다, 저는 하프로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오, 하느님, 나의 하느님 (시. 43:3, 4).
이사야서에서, 신앙에 있는 것들에 관련하여, 그리고 그로부터의 지식들에 관련하여:
하프를 가져오라, 성을 돌아다녀라, 연주를 잘하라, 많은 노래를 불러라,
하면, 네가 기억 안으로 불러질지 모른다 (이. 23:16).
계시록서에서 이와 같은 것이 더 명백하게 표현되어졌다:
네 생물과 이십 사 원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렸는데, 그들 각각은 하프와
성인들의 기도인, 향 제물로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다 (계. 5:8),
위에서 “하프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향 제물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선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악기들을 켜는 것이 “찬양들”과 “고백함들”이라 불리운다 (시. 42:5; 69:31). 그리고 또 다른 구절인 계시록서에서:
나는 많은 물소리 같은 천국으로부터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자기들의 하프를 가지고 연주하는 하프 연주자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계. 14:2-3).
그리고 또 다른 대목에서:
나는 하느님의 하프를 가지고 유리 바다에 서 있는 그들을 보았다 (계. 15:2).
이런 점은 알아두면 유익할 것 같다. 즉 천사들과 영들은 선과 진리에 관련된 자기들의 차이에 따라 소리들을 구별하는데, 이 소리들을 노래하고 악기들을 켬으로 생산한다, 아울러 음성들도 생산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가 똑 같은 자는 아무도 없음을 인정한다. 하여 소리들, 악기들의 소리는 각자가 지닌 선하고 참된 것의 본래의 모습에 일치하고 있다.

22절. 그리고 씰라, 그녀는 두발-가인을 낳았고,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생이었다. 그리고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씰라”는 새로운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두발-가인, 구리와 쇠를 다루는 모든 기술공의 선생”이란 자연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놋쇠”는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표시한다.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란 두발-가인과 유사한 교회, 또는 그 교회의 바깥쪽에 관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이 구절에 있는 새로운 교회가 어떠한 경우인지는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 모두를 가졌던 유대 교회의 형성 과정을 들여다 보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내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각기 구성된다. 내적 교회는 라헬에 의해, 외적 교회는 레아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러나 야곱, 또는 야곱보다는 오히려 말씀에서 “야곱”으로 지칭되는 그의 후손은 외적인 것들만을 바라고 있었고, 예배 역시 외적인 것만을 중요시했기에, 레아가 라헬에 앞서 야곱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침침한(blear) 눈을 지닌 레아에 의해 유대 교회가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라헬에 의해 이방인들로 부터의 새로운 교회가 표현되었다. 이런 연유로 “야곱”은 예언서들에서 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뒤집힌 상태의 유대 교회를, 또 하나는 이방인들의 진정한 외적 교회이다. 내적 교회가 의미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로 불렸다; 이런 주제들은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더 말할 것이다.

두발-가인이 “모든 기술공의 선생(instructor)”이라 불리운다. 즉 “야발과 유발”의 경우는 “조상(father)”이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아니다; 그 이유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또는 내적인 것들이 (두발 -가인에) 앞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발과 유발의 경우는 내적인 것들이 (그 두 사람에) 앞서 존재했기에 이를 표시하고자 이 두 사람에게는 “조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이에 반해 자연적, 또는 외적인 것들은 (그들 모두에) 앞서 존재했고, 지금은 단지 내적인 것에 응용되는 것 뿐이다. 하여 두발-가인은 “조상”이 아닌 “선생”이라 불리우고 있다.

말씀에서 “기술공”은 슬기롭고 총명하며, 박식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경우, “놋쇠와 쇠를 다루는 모두 각각의 기술공”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친숙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이렇게 사정봐줌 없이 이 큰 도성 바빌론은 내던져졌다, 그리고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프 연주자들, 그리고 음악가들, 그리고 피리부는 사람들,
그리고 나팔부는 사람들의 음성이 더 이상 너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공예품을
다루는 어떤 장인(기술공)도 더 이상 너에게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계. 18:21-22).
위 구절에서 “하프 연주자”는 진리들을; “나팔 부는 자”는 신앙의 선들을; “공예품을 다루는 기술공”은 알고 있는 자, 또는 진리와 선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을 각각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기술공이 새긴 (우)상을 녹여 만든다, 그리고 제련공이 그 상에 금을 뿌린다,
그리고 은사슬을 달아준다; 그는 새긴 상이 움직이지 않도록 준비하려고
슬기로운 기술공을 구한다 (이. 40:19-20),
위 구절은 공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위해 거짓인 것-새긴 상-을 날조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나타나도록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에 관한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얼이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멍청하기도 하다, 무익한 교리들, 그것은 나무토막 밖에
더 아니다. 두드려서편 은은 다르싯에서, 금은 우바스로 부터 샀다, 기술공의 작품,
그리고 제련공의 손 작업; 그것들 모두는 잔재주 부리는 자의 일이다 (예. 10:1, 8-9),
위 구절은 거짓들을 가르치는 이들, 자기의 발명품을 말씀으로부터 모은 말들 가지고 날조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익한 교리”라고 불리우고 “잔재주 부리는 자의 일”이라 불리운다. 이런 인물들으 고대 때에는 우상을 만드는 기술공으로 표현했다. 이 우상들, 거짓들을 기술공들이 금으로, 즉 선으로 장식했다; 은으로, 또는 진리의 외관으로 꾸몄다; 그리고 청색 (옷)으로, 의복으로, 또는 눈에 보이게 일치하는 자연적인 것으로 입혔다.

“놋쇠(brass)”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말씀에서 언급되는 모든 금속이 각기 특별한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금”은 천적 선을; “은”은 영적 진리를. “쇠”는 자연적 진리를; 그 외 다른 금속도 마찬가지, 그리고 “나무(wood)”와 “돌”도 마찬가지 이다. 증거궤에서, 성막에서, 성전에서 이런 저런 금속과 나무, 돌이 각기 특별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몇 인용구절 가지고 일부만을 살펴보자. 이사야서로부터 :
너희는 이방인들의 젖을 빨 것이다, 그리고 왕들의 가슴을 빨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놋쇠를 위해 금을, 쇠를 위해 은을, 나무를 위해 놋쇠를, 돌을 위해 쇠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네 공물을 평화로, 네 강요자를 의로운 자로 만들 것이다 (이. 60:16-17),
위 구절은 주님의 강림, 그분의 왕국, 천적 교회를 취급하고 있다. “놋쇠를 위해 금”이란 자연적 선을 위해 천적 선을; “쇠를 위해 은”이란 자연적 진리를 위해 영적 진리를; “나무를 위해 놋쇠”란 육체적인 선을 위해 자연적 선을; “돌들을 위해 쇠”란 감각적 진리를 위해 자연적 진리를 가져다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에스겔서에서:
야완, 두발, 메섹, 이들은 네 상인들이었다, 사람의 혼들,
그리고 놋쇠의 그릇들을 가지고 너와 장사했다 (겔. 27:13),
위 구절은 두로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이 구절을 수단으로 영적, 천적 부유함을 소유한 이들이 의미되었다; “놋쇠 그릇들”은 자연적 선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토지의 돌들은 쇠이고, 거기의 산으로부터 너희는 놋쇠를 캘 것이다 (신. 8:9),
위 구절의 “돌들”은 감각적 진리를, “쇠”는 자연 평면, 즉 합리적 진리를; 그리고 “놋쇠”는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에스겔이 보았다:
살아있는 4 창조물들, 또는 그룹들, 이들의 발은 닦아 광을 낸 놋쇠 같이 번득거렸다
(겔. 1:7),
위 구절의 “놋쇠”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니엘에게 나타났다:
아마포 옷을 입은 사람, 그의 허리는 우바스의 금으로 띠를 둘렀다, 그의 몸은
녹주석(beryl) 같았다, 그의 팔과 발은 닦아 광을 낸 놋쇠의 겉모습 같았다 (단. 10:5-6).
“구리뱀(민. 21:9)”이 주님의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선을 표현했다는 것을 위 구절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쇠”가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스는 네 교역자였다. 그 이유는 그것에 은, 쇠, 주석, 납 등의 많은 재물들(riches)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의 거래업자였다. 단, 야완, 그리고 우잘(Meusal)이
네 교역에 빛나는 쇠를 공급했다; 계피(cassia)와 창포(calamus)가 네 장터에 있었다
(겔. 27:12, 19).
위 구절에서 천적, 영적 재물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각 표현들, 이름만 언급하고 있어도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말 뿐이 아닌 영적 차원을 말씀 안에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누가 쇠, 북쪽으로부터의 쇠를, 그리고 놋쇠를 부술 수 있느냐? 네 물질과 네 보물들을
나는 댓가없이 전리품으로 줄 것이다, 그 이유는 너의 죄들 때문이다 (예. 15:12-13),
위 구절의 “쇠”와 “놋쇠”는 자연적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이것이 북쪽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 수준인 것이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인 것은 천적, 영적 수준에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짙은 어둠 같기 때문이다 (즉 빛이 밝은 남쪽에 비해 “북쪽”은 어둡다); 또는 그늘같다, 이것이 여기서 “어머니”인 “씰라”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져 있다. “물질(substance)”과 “보물”은 천적, 영적 재물이다.
다시 에스겔서에서:
너는 쇠냄비를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을 너와 성 사이에 쇠벽으로 삼을 수 있게
놓아라, 그리고 네 얼굴을 그것을 향하여 놓아라, 그리고 포위 공격한 것 같이
그것을 있게 하라, 그리고 너는 그것을 옥죄게(straiten) 하고 있어라 (겔. 4:3),
위 구절을 보면 “쇠”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 강함이 진리의 속성이라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쇠의 강도에 버텨낼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쇠를 수단으로 진리, 또는 신앙 속의 진리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조각으로 부수어진다” 그리고 “바스라진다”고 다니엘서 2:34, 40에서 기록되고 있고, 계시록서에서는:
이겨내는 자, 그에게 나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주권을 줄 것이다. 하여 그는 그들을
쇠막대를 가지고 그들에게 풀을 먹일런지 모른다; 마치 그들이 옹기장이의
그릇들을 산산이 부수듯이 말이다 (계. 2:26-27).
여인이 남자 아이를 생산했다, 이 아이는 쇠 막대를 도구로해서 모든 민족들에게
풀을 뜯게 할 것이다 (계12:5).
“쇠 막대”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진리임이 계시록에서 설명되고 있다:
나는 천국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 말이, 그리고 그(말) 위에
앉으신 분은 성실과 진실이라 불리셨다, 그리고 정의 안에서 그분은 심판을 행하시고
싸우신다; 그분은 피에 담근 의복으로 입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었다; 그분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검이 나온다, 그것 가지고 그분은
민족들을 쳐죽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쇠 막대를 가지고 그들에게 풀을 먹이신다
(계. 19:11, 13, 15).

23절. 그리고 라멕이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이여, 그리고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그 이유는 내가 나의 부상을 인하여 남자를 죽였고,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라멕”은 무용지물, 황폐함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그가 “그의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너희 귀를 가지고 내 연설을 지각하라 라고 말했다”란 고백을 의미하는데, 이 고백은 라멕의 “아내들”로 의미되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만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 부상을 인해 사람을 죽였다”란 그가 신앙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 상처로 인해 어린 것을 살해했다”란 그가 선행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부상”, “상처”란 더 이상 온전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부상”은 신앙이 황폐되었음(desolated)을, “상처”는 선행이 황폐되었음(devastatied)을 의미한다.

이 절의 내용과 다음 절을 보면, “라멕”은 황폐되었음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사람을, 어린 것을 죽였다”고, 그리고 “가인을 위해서는 일곱 배,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로 앙갚음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이 장 1절, 이브가 말한 것, 그녀가 가인을 낳았을 때, “나는 남자, 여호와(로부터) 얻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앙으로부터의 교리가 “남자, 여호와”라 불렸다. 이미 살핀 바 같이, 남자, 또는 남성은 이해력을 의미하고, 이해력은 신앙 속에 있다. 그가 “어린 것” 또는 “어린 아이”라 부른 선행을 소멸했다가 뒤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을 부정하고 살해하는 자는 동시에 신앙으로부터 태어나는 선행 역시 부정하고 살해하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어린 것” 또는 “어린 아이”는 순진, 그리고 선행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진정한 순진은 선행없이 존재할 수 없고, 진정한 선행은 순진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진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말씀에서, “젖먹이(suckling)”, “유아(infant)”,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에 의해 의미되었다; 진정한 순진이 진정한 사랑, 또는 선행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바, 세 가지 순진에 수반되는 사랑도 세 등급들이 있다. 즉 어머니, 또는 유모를 향한 온유한 사랑인 젖먹이의 사랑, 그 다음 부모를 향한 사랑인 유아의 사랑, 그 다음 선행, 이는 선생님을 향한 사랑인 어린 아이의 사랑과 비슷하다. 고로 이것이 이사야서에서 말해진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송아지, 그리고 어린 사자, 그리고 비육 가축도 함께,
그리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11:6).
위에서 “어린 양”, “염소 새끼”, 그리고 “송아지”는 순진과 사랑의 세 등급을 의미한다; “이리”, “표범”, “어린 사자”는 그 반대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선행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너희 혼들에 맞서 이 큰 악을 저질러 너희로부터 남자와 아내, 유아와
젖먹이를 유다 한 가운데로부터 잘라내어 하나도 남지 않게 한다 (예. 44:7).
“남자와 아내”는 이해함과 의지로부터의 것들, 또는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째 등급을 표시한다. “유아”와 “어린 아이”가 순진과 선행을 표시하는 것은 누가복음서에서 주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유아들을 데려왔다, 그분이 그들을 만지도록 하려 해서 였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이 이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데려온 자들을 나무랬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분에게로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어린 아이가 나에게
오게 내버려두라, 그들을 금하지 말라: 그 이유가 하느님의 왕국은 이와 같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는 네게 말한다, 어린 아이 같이 하느님의 왕국을
받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결단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눅. 18:15-17).
주님 자신이 “어린 아이”, 또는 “아이”라 불리우신다 (이. 9:6), 그 이유는 그분이 순진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같은 구절(9:6)에서 그분이 “경이로우신 분, 상담자, 하느님, 영웅,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제 1 인 자”라고 말해지시고 있다.

“부상(wound)”과 “상처(bruise)”에 의해 더 이상 온전함(soundness)이 없음이 의미되는 이유는, “부상”은 신앙이 황폐됨을, “상처”는 선행이 황폐됨을 각기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상”은 “남자”를 서술하고, “상처”는 “어린 것”을 서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앙과 선행의 황폐됨이 이사야서에서 마찬가지로 묘사되고 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그것 안에는 온전한 것이 없다; 그러나 부상과 상처와
갓만들어진 종기를 그들은 짓눌러 짜지도 않고, (천으로) 감아주지도 않고,
기름으로 누그러지게 하지도 않는다 (이. 1:6).
위 구절에서 “부상”은 황폐된 신앙을 서술하고 있다, “상처”는 황폐된 선행을, 그리고 “종기”는 황폐된 신앙과 선행 모두를 서술하고 있다.

24절. 만일 가인을 위해 일곱 배의 앙갚음이 있다면, 진실로 라멕을 위해서는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은 그들이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소멸했음, 즉 폭력을 휘둘러 신성한 것을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신앙을 통하여 태어나질 선행을 소멸했음, 즉 더 중대한 신성한 것에 속하는 것인 선행을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연유로 죄가 있었는 바 이것이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이다.

“일곱 배로 앙갚음”인 가인의 경우는 “가인”에 의해 뜻해진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휘둘러 신성이 더럽혀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15절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칠십 칠 배의 앙갚음”은 훨씬 더 큰 신성을 더럽힘이고, 이에 대한 결과는 지옥에 확실히 감이다. 이는 “칠십 칠 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숫자 “일곱”이 거룩이다는 것은 “일곱 째 날”이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왕국, 그리고 최고 높은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근원한다. 이로부터 숫자 “일곱”은, 말씀 어디에서 이든, 거룩인 것, 또는 가장 신성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거룩(holiness)과 신성(sanctity)은 문맥에 따라 있거나 또는 그것을 서술하거나 한다. 이로부터 숫자 “칠십”의 의미도 오고 있다. 칠십은 일곱 시대들을 함유하고 있다; 말씀에서, 한 시대(age)는 십 년이다. 가장 거룩한 어떤 것, 또는 신성한 어떤 것이 표현되어질 때, “칠십 칠 배”로 말해진다. 사람이 자기 형제를 일곱 번 까지만 용서하지 말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주님께서 말하신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마. 18:22). 이는 그들이 죄짓는 만큼 용서도 많아야 할 것, 하여 용서함은 끝이 없을 것, 또는 영원히 있을 것, 그러하니 이것은 거룩이다는 것이 뜻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라멕은 “칠십 칠 배로 앙갚음될 것”이란 지옥에 떨어짐을 뜻한다. 그 이유는 최고로 신성한 것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25절. 그리고 사람(homo)이 그의 아내를 다시 알았고,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사람(homo)”과 그의 “아내”는 이 구절의 경우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 교회(the new church)를 뜻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그의 이름은 셋인데 그는 새로운 신앙(a new faith)을 의미하고 이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이 획득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하느님께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또 다른 씨를 지명했다”란 가인이 분리했고 소멸했던 바로 그 선행이 이 교회에 주님에 의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의 “사람과 아내”가 19절의 아다와 씰라에 의해 의미된 새 교회(the new church)를 뜻하는 것은 글자 의미로부터 알 수 있거나 추리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남자와 그의 아내”는 앞서 이미 태고 교회와 그 후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내적 의미에서 살피고, 더불어 5:1-4에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들이 낳은 셋이 다시 언급되는 대목으로부터 위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물론 5장의 언급이 이 절과 단어까지 같은 것은 아니고, 이 경우, “남자와 그의 아내”가 태고 교회의 첫 후손으로 의미되고 있다. 만일 이 구절이 앞서 있는 구절의 반복에 불과하다면, 다시 언급되지 않았을 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짐작될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의 창조, 땅의 열매들, 짐승들의 창조를 가지고 영적 인간의 창조가 취급되었는데, 2장에 들어서서, 다시 천적 인간을 취급하면서도 비슷한 것이 다시 거론되는 경우이다. 어떤 반복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있을 경우, 거기에는 각기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구별과 파악은 내적 의미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이 구절에서는 연결됨 자체가 주어져왔었던 의미를 확증하게 해준다. 추가로 고려해 볼 것은, 남자와 그의 아내라는 용어는 부모격인 교회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토의 중에 있다)를 의미하는 일반적 말투(term)이다는 점에 대해서이다.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그녀의 “아들”에 의해 새로운 신앙, 그리고 이 신앙을 수단으로 선행이 달성될 수도 있다가 의미되어 있다는 것은 전에 이미 서술한 것과 가인에 관련된 것, 즉 그에게 표를 놓아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시리즈로 서 있는 주제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가인”에 의해; 선행은 “아벨”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에 있는 신앙이 선행을 소멸함이 가인이 아벨을 죽임에 의해 의미되었다. 선행이 주님에 의해 이식되기 위해 신앙이 보존됨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놓아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심에서 의미되었다. 이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선한 것이 신앙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다가 낳은 야발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신앙의 영적 (평면)이 주어진 것이 야발의 형제 유발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 둘로부터 자연적 선과 진리가 왔는데, 이것이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을 결말짓는 마지막 두 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요약을 가진다. 즉 “남자와 그의 아내”에 의해 앞서(19절) 아다와 씰라라고 불리었던 새로운 교회(the new church)가 의미되고, 셋에 의해 신앙을 통해 선행이 이식됨이 의미되고, 이어 26절에서, “에노스”에 의해 신앙을 통해 이식된 선행이 의미되었다.

“셋”은 이 구절에서 새로운 신앙, 즉 선행을 오게 하는 신앙이 의미되는데, 이는 그의 이름으로부터 설명되어진다.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가인이 살해한 아벨 대신 또 다른 씨를 지명(appoint)”하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느님께서 “또 다른 이름을 지명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또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씨”란 선행을 오게 하는 신앙이다. “씨”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255항에서 살폈다.

26절. 그리고 셋에게, 그에게도 역시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불렀다. 그때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셋”은 선행을 있게 하는 신앙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그의 “아들”의 이름은 “에노스”인데 그는 신앙의 제 1의 원리가 선행임을 주목해서 보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란 이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예배함을 의미한다.

“셋”에 의해 선행을 오게 하는 신앙을 의미함은 앞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다. 셋의 “아들, 에노스”는 선행을 신앙의 제 1의 원리로 중요시하는 교회를 의미함은 앞에서 살폈고, 또한 “에노스”로 그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에노스는 “인간(man, 또는 person)”을 뜻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천적 인간은 아니고, 영적 본성을 지닌 인간(human with spiritual nature)이다. 이 이름 바로 뒤를 이어 같은 의미를 지니는 표현, “그때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에서도 더 분명해진다.

바로 위에 인용한 말들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이 교회의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이 그 당시 주님을 예배함에 대한 관습적, 일반적 언어 스타일이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예배가 선행으로부터 있었다는 것은 앞 부분에서는 주님이 “하느님”으로 불리우다가 여기서 “여호와”로 불리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주님은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예배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진정한 예배는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심정으로부터가 아닌 단지 입술로만으로는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이 주님에 대한 모든 예배의 언어상의 관습적 형체인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설했다, 그리고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 (창. 12:8; 13:4); 그리고 그는 “브엘세바에 상수리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 21:33). 이 표현이 모든 예배를 표현하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명백하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말하셨다,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오 야곱아,
그러나 너는 나를 피곤해 있게 하여 왔다, 오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태워바치는
제물로 작은 가축을 가져 왔다, 너는 네 제물을 가지고 나를 존경하지 않았다. 나는
공물을 가지고 나를 섬기라고 시키거나, 향을 피우느라 네가 피곤해지라고 시킨적이 없다
(이. 43:22-23),
위 대목에서 모든 표현 뿐인 예배(representative worship)에 관한 요약이 주어져 있다.

(무당이 주문을 외우는 식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탄원하는 것이 이 때 당시 개시되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에 관하여는 태고 교회에서 언급되었다. 즉 태고 교회는 주님만을 숭배하고 예배했을 뿐 여느 다른 어떤 것(신들)들은 생각조차에도 없었다. 또한 아벨이 양떼의 맏배를 공물로 가져온 것도 보태어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은 새 교회(the new church)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지 더 다른 것은 아니다. 즉 앞의 교회가 “가인”과 “라멕”이라고 불리는 이들에 의해 절멸된 이후 있어진 새 교회의 예배다는 말이다.

위에 설명한 이 장의 내용들로부터 미루어 분명해지는 또 하나는 태고 시대 때에, 태고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많은 교리들과 이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그 각각도 나름대로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이들도 어쩌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오한 생각의 성과를 올렸을 확률도 높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때의 사람들이 최고로 여긴 것이 (요즈음 부자되고 잘난 사람됨이 인간의 목표인냥 되어버린 것의 반대인) 주님을 생각함, 주님을 섬김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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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5 장

성경: 창세기 제 5 장

1. 이것은 사람의 출생들에 관한 책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 그분 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그를 만드셨다.
2.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던 그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
3. 사람은 일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4. 그리고 그가 셋을 낳은 후 사람의 날들이 팔백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5. 사람이 살았던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6. 그리고 셋은 일백 오 년을 살았고, 에노스를 낳았다.
7.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 다.
8. 그리고 셋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9. 그리고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게난을 낳았다.
10. 그리고 에노스는 그가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에노스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 년 이었고, 그는 죽었다.
12. 게난은 칠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하랄엘을 낳았다.
13. 그리고 게난은 그가 마하랄엘을 낳은 후 팔백 사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4. 그리고 게난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5. 그리고 마하랄렐은 육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렛을 낳았다.
16. 그리고 마하랄렐은 그가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7. 그리고 마하랄렐의 모든 날들은 팔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18. 그리고 야렛은 일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19. 그리고 야렛은 그가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 다.
20. 그리고 야렛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21. 그리고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았다.
22. 그리고 에녹은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3. 에녹의 모든 날들은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
24. 그리고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 는 하느님께서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멕을 낳았다.
26. 므두셀라는 그가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 들을 낳았다.
27. 그리고 므드셀라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구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28. 그리고 라멕은 일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29.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노아라 불렀고, 말하기를, 그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 면에서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30. 그리고 라멕은 그가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31. 그리고 라멕의 모든 날들은 칠백 칠십 칠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32. 그리고 노아는 오백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았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이것은 사람의 출생들에 관한 책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그를 만드셨다. “출생들에 관한 책”은 태고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의 목록표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날”은 그가 영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을 표시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만드셨다”란 그가 천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고 교회에 관한 묘사이다.

“출생들에 관한 책”이 태고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의 목록표이다는 것은 뒤잇는 말씀으로부터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여기로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에서 있게되는 이름들은 인물(person)들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실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태고 때에 인류는 가족(house)들, 가문(family)들, 민족(nation)들로 구별되어졌다; 가족의 구성원은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녀, 그리고 가족을 섬겼던 이들(종, 하인)이다. 가문은 가족의 수가 많든 적든 집합적 가족들이다. 가문들은 멀리 떨어져 산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붙어 산 것도 아니다; 그리고 민족은 많든 적든 가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만 거주했고, 가족, 가문, 민족으로만 구별된 까닭에, 이것에 의해 교회가 보존되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그 이유가 모든 가족, 가문은 그들의 부모에 의존되는 바, 사랑 안에, 진정한 예배 안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더 주목되는 것은, 각 가족은 가족들 서로로부터 구분되는 특유한 천성 속에 있었다는 점이다; 자녀들, 그 아래 있는 자손들도 그들의 부모로부터 특유한 천성이 파생되어 간다는 것, 이와 같이 표가 나는 특성은 그들의 얼굴에 의해, 그 외 다른 특유함에 의해 구별되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뒤섞이지 않고 정확한 구분이 있도록 그들이 위 같은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반겨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왕국에 대한 살아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왕국은 무수한 사회들로 구성되고, 각 사회들은 그들이 지닌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구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홀로 산다”, “천막에서 거주한다”를 수단으로 뜻해진다. 같은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이 가족, 가문과 민족으로 구분되어지는 것, 모든 이가 그의 자신의 가족 내에서 결혼을 맺는 것을 주님은 반겨하셨다; 이 점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의해 그의 존재가 영적 수준으로 만들어짐이 의미된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의 모습(likeness) 안에서 만드심”에 의해 그의 존재를 천적 수준으로 만드셨음이 의미된 것은 위에서 말해진 것과 보여준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창조한다(create)”는 표현은 인간이 새로이 창조되어질 때, 또는 거듭나질 때의 경우에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단어 “만들다(make)”는 인간이 완전해질 때의 경우에 적절하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창조함(creating),” “형성함(forming),” “만듦(making)”을 사용하는데 정밀한 구분이 있음이 제 2 장에서와 같이 관찰되어진다. 제 2 장의 경우, 영적 인간을 천적 인간으로 만드심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일, 즉 하느님이 만드심 안에서 창조하신 일로부터 쉬셨다”에서 말해진다; 다른 구절 역시, “창조함”은 영적 인간에 관련되고, “만드는 것”, 즉 완전해지는 것은 천적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 (제 16, 88항도 참조).

“하느님의 모습”이 천적 인간이고, “하느님의 형상”이 영적 인간이다는 것은 이전에 살폈다. “형상(image)”은 모습에 앞선 준비이다. 그리고 “모습(likeness)”은 실재의 복제(replica)이다. 그런 이유는 천적 인간은 그분의 “모습”대로, 주님에 의해 완전히 규율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취급하는 것이 태고 교회의 출생, 또는 증식됨인 바,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로 가는 것이 먼저 묘사되었다. 그 이유가 증식(propagation)은 이 뒤를 잇기 때문이다.

2절.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그리고 그들이 창조되어진 그 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
“남성과 여성”이란 신앙과 사랑의 사이에 있는 결혼을 의미한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란 이것이 교회(the church)임을, 뾰족한 의미에서는 사람(Man, homo)으로 불려지는 교회를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 신앙과 사랑 사이에 있는 결혼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선포하고 입증도 했다. 거기서 남성, 또는 남자(vir)는 이해력, 그리고 이해력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여성, 또는 여인은 의지력, 또는 의지력에 소속하는 것들, 그 결과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브라 불리운다. 이 이름은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은 사랑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성에 의해 교회가 의미된다. 이는 이미 살폈다; 남성은 교회 속의 사람(vir)으로 의미된다. 여기서의 주제가 교회의 상태, 즉 교회가 영적 상태이었을 때, 그리고 이 상태 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에 앞서 언급된 것인데, 이는 창. 1:26, 27 의 경우도 같다. “창조한다”가 영적 인간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이 있게 된 후에, 즉 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진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라 말하지 않고 “사람(homo)”이라 말해진다. 사람은 이 결혼 때문에 남성과 여성 둘 다가 의미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제 뒤잇는 말은, “그분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사람”이 태고 교회이다는 것은 자주 말했고 앞서 살폈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습인 바, 사람이라 불리운다. 영적 교회는 주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천적 교회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 인간의 이해력을 가진 모든 이는 사람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해력 덕택에 인간은 사람이고, 그 이해력에 따라서 이 인물이 다른 인물과 구분되는데, 즉 주님을 사랑함에 바탕을 둔 그의 신앙에 따라 구분지어짐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태고 교회,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진정한 교회, 이 교회 사람, 또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사는 이들은 특별하게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를 말씀으로부터 확인해보자. 에스겔서로부터:
나는 네 위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 위에서, 그것의 모두 위에서 사람이 번성되게
할 것이다; 나는 네 위에서 사람과 짐승이 불어나게 해서 그들은 번성하고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는 네 고대의 것에 따라 너희가 거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시작 때보다 더 잘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위에서 사람이 걷게
할 것이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여 (겔. 36:10, 11, 12),
위에서 “고대의 것”에 의해 태고 교회가 의미된다; “시작”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된다; “이스라엘의 가문”, 그리고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원시 교회, 또는 이방인의 교회가 의미된다; 이 교회들 모두가 “사람”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회상하라, 너희는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가장 높으신 분이
민족들에게 상속분을 줄 것이데, 그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들을 떼어 놓으실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에 따라 백성의 경계들을 정하실 것이다 (신. 32:7, 8),
위에서 “영원의 날들”에 의해 태고 교회가; “대대로”에 의해 고대 교회가; “사람의 아들들”에 의해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뜻해진다. 이 신앙이 “이스라엘의 자손의 숫자들”이다. 거듭나는 인물이 “사람”이라 불린다, 예레미야서로부터 나타난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그것은 텅비었고 공허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사람이 없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도망 갔다 (예. 4.:23, 25),
위에서 “땅”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하늘”은 내적 인간이다; “인간”은 선을 사랑함이다;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를 이해함이다.
다시:
잘 보라 내가 이스라엘의 가문, 유다의 가문을 사람의 씨를 가지고,
짐승의 씨를 가지고 씨뿌릴 것이다 (예. 31:27),
위에서 “인간”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짐승”은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너는 콧구멍 안에 숨이 있는 사람인 것을 멈추어라.
그 이유가 어떤 점에서 그를 세어야하는지 때문이다 (이. 2:22),
위에서 “사람”은 교인을 의미한다. 다시:
땅의 거주민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사람은 매우 조금 남을 것이다 (이. 24:6),
위에서 “사람”은 신앙을 가지는 이들을 의미한다. 다시:
작은 길들이 황폐되었다. 여행자가 길 위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언약을
헛되이 만들었다, 그는 성들을 경멸했다, 그는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땅은 슬퍼하고 활기를 잃는다 (이. 32:8, 9),
히브리 발음에서 “에노스(Enosh)”는 사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사람을 정금보다 더 귀하게 만들겠다, 그리고 오빌의 금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들을 흔들 것이다,
땅들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움직일 것이다 (이. 13:12, 13),
위의 사람이란 단어에서 앞쪽은 “에노스”이고, 뒤쪽은 “아담”이다.

그가 “아담”이라 불리운 이유는 단어 “아담”이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역 한글 등등에서는 아담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담”이라는 이름을 수단으로 불러지는 것은 결코 적절치 않다. 그러나 “사람(Man)”이어야 한다. 이는 이 구절과 이전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어떤 경우] 그는 단수로 말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아울러 부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그분은 그들이 창조되던 그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라고 말해지는 바, 복수임이 분명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 1 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 (27, 28)”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이 구절이 취급하는 주제로부터 더 파악된다. 즉 인류의 첫 사람인 누군가의 창조가 아닌, 태고 교회라는 점이다.

“이름을 부름”, 또는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말씀에서 어떤 것의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전에 이미 살폈다. 현재의 경우 이것은 태고 교회의 품질과 관련되어, 인간이 지면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 또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졌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단어 “아담”은 “지면”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그가 천적 수준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는 주님을 사랑함에서 근원되는 신앙 덕택에 가장 뛰어나게 “사람”이 되었다.

그들이 창조되어진 그 날에서 “사람”이라 불려진 것은 제1장 26,27절로 부터도 나타나고 있다. 즉 여섯 째 날의 끝에서, 이는 안식일의 저녁에 응답하고 있다, 또는 안식일, 또는 일곱 째 날이 시작했을 때에 응답한다; 그 이유가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살폈다.

3절. 그리고 사람은 일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낳았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일백 삼십 년”이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전 시간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교회는 태고의 사람들의 교회를 많이 닮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바, 이 교회는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의 단어 “모습, likeness”은 신앙에 관계되고, “형상, image”은 사랑에 관계된다. 이 교회가 “셋”이라 불리우고 있다.

“년들(years)”, 그리고 “년들의 숫자들(numbers of years),” 제 5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단어들인데,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글자 의미에 머무는 이들은 그 숫자들은 몇 세기, 몇 백 년 같은 오랜 세월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여기로부터 창세기 12장까지에는 글자 의미에서 나타남에 의거한 역사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일반적, 세부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은 다른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름들 뿐만 아니라 숫자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편에 속하는 숫자로는 3과 7이 있다. 이 두 숫자는 어디서 언급이 있든, 때들(the times), 또는 다른 것들이 포함되거나 표현하는 상태들(the states)에 관련한 거룩한 어떤 것, 또는 아주 신성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의 간격과 매우 긴 시간의 간격이나 (예를 들면, 하루-일 년-십 년-백 년 등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가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듯, 아주 작은(짧은) 것이 아주 큰(긴)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나오기 위하여 그것에는 반드시 닮음(likeness)이 있어야만 한다. 고로 이사야서에서:
지금 여호와께서 이야기 하셨다. 말하시기를, 삯꾼의 햇수들 같이, 삼 년 내에,
그리고 모압의 영광은 하잘 것 없는 영광으로 될 것이다 (이. 16:14).
다시:
고로 주님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일 년 내에, 삯꾼의 햇수에 따라,
그리고 게달의 영광은 살라져버릴 것이다 (이. 21:16),
위에서 가장 작고 가장 큰 간격이 의미되었다. 하박국서에서:
여호와, 저는 당신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졌습니다; 오 여호와시여,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의 일을 되살아나게 하소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에서 알게 만드소서 (합. 3:2),
위에서 “햇수들의 한 가운데”란 주님의 강림을 의미한다.보다 적은 간격에서, 이것은 주님의 오심의 모두 각각을 의미한다. 이런 오심은 흔히 인간이 거듭나질 때에 있다.;보다 큰 간격에서의 경우는, 주님의 교회가 새로이 일어날 때에 있다. “되찾음(구속함)의 해”라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이사야서에서:
복수의 해가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오고 있다 (이. 63:4).
사탄이 결박되어 있는 천 년 (계. 20:2, 7), 그리고 첫 부활의 천 년 (계. 20:4, 5, 6), 이런 천 년 역시 시간 간격의 천 년을 의미함은 결코 아니고, 그것들의 상태들이다; “날들(days)” 또한 햇수와 더불어 상태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상태들은 날들이나 햇수들의 숫자에 의해 묘사되어진다. 이 장의 경우 때들 역시 상태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교회는 각기 유전적으로 지닌 천성에 그 자체 획득한 천성이 합쳐져 달라진 상태에 따라 지각의 상태도 차이가 나는 상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열거되는 이름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엘,”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아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 속에서 첫째이고 제1의 교회가 “사람(Man)”으로 불리었다. 이 교회들의 제일 중요한 특성은 지각이었다. 그러므로 이 때에 속해 있는 교회의 차이는 지각의 차이였다. 하여 지금 나는 이 지각(perception)에 관해 잠깐 설명해두어야 할 것 같다. 모든 천국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묘사는 설명되어질 수 없이 무수하고, 특히 똑 같은 두 개의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존재하는 지각들은 대단히 크게 종류들(genera)과 부류들(species)로 구별된다. 종류들은 무수하고, 각 종류는 또한 무수하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언급될 것이다. 거기에 있는 지각의 종류들은 무수하고, 각 종류 안의 부류 역시 무수함에 비교하면, 오늘날의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에 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미미한지 모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지각이 무엇인지 모른다. 설사 지각이 이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믿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이외의 사항도 이와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태고 교회는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현했다. 이 교회의 지각도 일반적(generic)이고 특수적(specic) 차이들을 갖고는 있다. 그런 반면, 지각의 가장 일반적 본성마저 오늘날은 거의 알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교회들의 지각의 종류와 부류들은 부득이 어둡고(dark) 기묘한(strange) 것 인 냥 인간들에게 나타난다. 그 당시 태고인들은 가족(house)들, 가문(family)들, 민족(nation)들로 구별되었을 뿐이고, 결혼 역시 그들의 가족 내지 가문 내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지각의 종류와 부류가 부모로부터 정밀하게 전수되고 보존되기 위하여서 였다. 한마디로 출생적 특성이 대대로 전수되어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 함께 거주한다.

“셋”이라 불리운 교회는 태고 교회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서술한 말, 즉 사람이 그의 모습 안에서, 그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 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단어 모습(likeness)은 신앙에 관련되고, “형상”은 사랑에 관련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에 관하여 태고 교회 같지 않다는 것이, 방금 전에 말한 것, 즉 “남자와 여자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로부터 명백해지는데, 이 구절을 수단으로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 의미되어, 이 사람의 모습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 쪽 이었다. 즉 사랑이 제일의 원리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신앙이 사랑과 결합된 수준이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셋”은 4장 25절의 “셋”과 다른 교회가 뜻해진다는 것은 제 435항에서 알런지 모른다. 다른 교리로부터의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수단으로 불리었다는 것은 앞장 17, 18절에서 “에녹”과 “라멕”이 불리었는데, 이 장에서 역시 “에녹”과 “라멕”이(21, 30절) 다른 교회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

4절. 그리고 그가 셋을 낳은 후 사람의 날들이 팔백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날들”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때들(시간들)과 상태들을; “햇수”는 특별한 측면에서의 시간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은 태고 교회 사람들이 지각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날들(days)”이 일반적 측면에서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는 것은 첫 장, 창조의 “날들”에서 살핀 바 있고, 이 외 더 다른 의미는 가지지 않는다. 말씀에서 모든 때를 “날들”로 부르는 것은 통상적인데, 이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8, 11, 14, 17, 20, 23, 27, 31); 그러므로 때들의 상태들도 일반적 측면에서는 “날들”로 의미된다; 그리고 “햇수들”이 추가될 때, 하여 햇수들의 계절들에 의해서는 상태들의 품질, 고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된다. 태고인들은 자기들의 숫자들을 가졌다. 이 숫자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3”, “7”, “10”, “12”, 그리고 이 숫자들이 합성되어 여러 다른 숫자들도 있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에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비밀들을 포함한다. 숫자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설명하는 것, 또는 판단하는 것이었다. 똑 같은 것들이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발생하는데, 특히 예언서에서 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예식 행위에서도 제물, 식사 공물, 헌물, 등등 여러 예식 안에 숫자들이 있는데, 적용됨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 장 4절에서의 경우, “팔 백”이다. 다음 절에서는 “구 백 삼십 년”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들의 교회의 상태들의 변화이고, 그들의 일반적 상태에 응용되는 바,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이 책의 미래 부분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 속에서, 12까지의 단순한 숫자에 한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숫자를 알지 못하면, 이 숫자로 합성된 숫자의 파악은 불가능하다.

“날들”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햇수들”은 특별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나타난다. 에스겔서에서:
너는 날들이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네 햇수까지 와 있다 (겔. 22:4),
역겨운 짓들을 저지른 이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죄들이 가득 차버렸다는 것, 그들의 일반 상태가 “날들”에 의해, 특별한 상태가 “햇수”로 서술되었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왕의 날들에 날들을 더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햇수들은 대대로까지 미치게 하실 것이다 (시. 61:6),
위 구절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해서, “날들”과 “햇수들”은 그분의 왕국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나는 옛 것의 날들을, 시대들의 햇수들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시. 77:5),
“옛 것의 날들”은 태고 교회의 상태를, “시대들의 햇수들”은 고대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복수의 날이 내 심정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되찾음의 해가 오고 있다 (이. 63:4),
마지막 때들에 관해 말하시는데, 거기서 “복수의 날”은 지옥에 떨어짐의 상태를, “되찾음의 해”는 복됨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주님이 받아 주실 수 있는 해,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복수하시는 날을 선포하는 것;
슬퍼하는 모두를 위로하시는 것 (시. 61:2),
위에서 “날들”과 “해들”은 모두 상태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옛 것으로부터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로이 하소서 (애. 5:21),
위에서 상태들이 명백히 뜻해진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어둠의 날,
짙은 어둠의 날, 구름 짙고 희미함의 날이다; 이와 비슷한 것은 있은 적이 없다,
이것 이후도 없을 것이다, 대대로의 햇수에서조차 (없을 것이다) (욜. 2:1, 2),
위에서 “날”은 어둠의 상태, 짙은 어둠의 상태, 구름 짙고 희미함의 상태, 각각이 특별한 측면에서,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두와 더불어이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하루 날에 이 토지의 불법을 옮길 것이다; 그 날에 너희 네 동료 사람에게 포도나무 아래에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외칠 것이다 (슥. 3:9, 10).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여호와께 알려진 날 하나가 있을 것이다, 그 날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빛이 있을 것이다 (슥 14:7),
위 구절에서 상태가 뜻해짐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 저녁 시간에 빛이 오는” 날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십계명에 있는 표현들로부터 나타난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존경하라, 네 날들이 길어질 것이고, 지면 위에서
너는 잘되어 갈 것이다 (신. 5:6; 25:15),
위 구절에서 “길어진 날들”을 가진다는 것은 목숨이 길어진다가 아니라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글자 의미에서는 마치 “날들”이 시간을 의미하게 나타나는 것을 필요로 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의미한다. 천사들은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그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시간들을 구별하게 하는 태양도 달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날들과 햇수들을 모른다, 오직 상태들이 어떤지,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만 알 뿐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있는 천사들 앞에서 모든 것은 문제(matter)에 관련되고,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에스겔서의 이 구절의 글자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날들이 가까웁다, 여호와의 날조차 가까웁다, 구름의 날이다;
이것은 민족들의 때일 것이다 (겔. 30:3).
그리고 요엘서에서:
오호라 날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을 위하여,
그리고 황폐됨으로 그것은 온다 (욜. 1:15),
위 구절에서 “구름의 날”은 구름, 또는 거짓을 의미한다; “민족들의 날”은 민족들, 또는 사악함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날”은 황폐됨을 의미한다. 시간의 관념이 제거될 때,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에 관한 관념들이 남는다. 이 장에서 언급되는 “날들”과 “햇수들”에 관련하여서도 똑같다.

“아들들과 딸들”은 그들이 지각으로부터 가졌던 진리들과 선들이다. 실제로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딸들”이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예언서들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는 옛날 때와 같이 교회의 임신과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이방인들이 네 빛에 올 것이다, 그리고 왕들이 네 일어남의 빛남에 올 것이다;
네 눈을 들어올려 주위를 빙둘러 보라;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지고 네게 온다;
네 아들들이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네 딸들이 네 편에서 유모일 것이다; 그때 너는
보고 멋지게 늘어질 것이다, 그리고 네 심정은 놀라워질 것이다,
그리고 확장될 것이다 (이. 60:3, 4, 5),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외국인의 아들들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소서, 구출하소서, 그들의 입은 헛됨을
말합니다; 하여 우리의 아들들은 그들의 젊음 안에서 성장한 식물 같이 있을런지
모르고, 우리의 딸들은 성전의 모양(form)으로 자른 모퉁이돌 같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시. 44:11, 12),
위에서 “외국인의 아들들”은 가짜 진리들, 또는 거짓들; “우리의 아들들”은 진리에 관 한 교리물을; “우리의 딸들”은 선에 관한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내가 북쪽에게 말할 것이다, 포기하라, 그리고 남쪽에게, 감추어 두려워하지 말라;
멀리로부터 내 아들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내 딸들을 땅 끝들로부터 데려온다;
눈 먼 백성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들은 눈을 가질 것이다; 귀머거리, 그리고
그들은 귀를 가질 것이다 (이. 43:6, 8),
위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눈 먼자”는 진리들을 보게 될 이들; 그리고 “귀머거리”는 진리들에 순종할 이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부끄러움이 우리의 젊은 시절로부터 우리의 조상의 노동을 삼켰다; (즉)
그들의 양떼들, 그들의 목축들,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딸들(이다) (예. 3:24),
위에서 “아들들”,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자녀들”, “아들들”이 진리들을 의미함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제 야곱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이제는 창백함의 밀(납)이
발라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의 한 가운데에서 내 손의 일로부터
그의 자녀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이름을 신성스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거룩한 이를 신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경외할 것이다; 영 안에서 잘못으로 헤매던 그들 역시 이해함을 알 것이다
(이. 29:22, 23, 24),
위에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주님을 의미한다; “자녀”는 거듭나는 자, 선과 진리의 이해함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다시:
노래하라, 아이를 못낳는 너, 불모인(자)여, 그 이유가 결혼한 아내의 아들들보다
황무한 자의 아들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54:1),
위에서 “황무한 자의 아들들”은 원시 교회(primitive church), 또는 이방인들의 교회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결혼한 아내의 아들들”은 유대 교회 속의 진리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천막은 황폐된채 있고 내 (천막)줄은 뽑혀져버렸다;
내 아들들은 나로부터 나가버렸다, 있지 않다 (예. 10:20),
위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시:
그의 아들들은 이전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congregation)은
내 앞에 설립될 것이다 (예. 30:20),
위에서 “아들들”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스가랴서에서:
나는 네 아들들을 휘저을 것이다, 오 시온아, 네 아들들과 더불어,
오 야완아, 그리고 너를 용사의 검 같이 만들어라 (슥. 9:13),
위에서 사랑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고 있다.

말씀에서 “딸들”이 자주 선들을 표시하고 있다; 다윗서에서:
왕의 딸들이 네 귀중한 것들 사이에 있었다; 네 오른편에 오빌의 최상의
금 안에 있는 여왕이 있다; 두로의 딸이 선물을 가지고 있다; 왕의 딸은
안쪽에 있는 모든 영화로움이다; 금으로 된 작은 구멍(eyelet)의 작업이
그녀의 의복이다; 네 조상 대신 네 아들들이 있을 것이다 (시. 45:10-17),
위에서 선, 그리고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아름다움이 “딸”에 의해 묘사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교회들이 선들 덕택에 “딸들”이라 불리운다. 마치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과 같다 (이. 37:22, 그 외 많은 구절에서); 교회들이 “내 백성의 딸들”이라 불리운다 (이. 22;4). “다시스의 딸” (이. 23:10), “시돈의 딸” (이. 23:12), 그리고 “들판에 있는 딸들” (겔. 26:6, 8).

같은 것들이 이 장에서 “아들들”과 “딸들”에 의해 의미된다 (4, 7, 10, 13, 16, 19, 26, 30). 그러나 교회들이 위와 같고, 아들들과 딸들이 위와 같은데, 즉 선들과 진리들과 같다; 진리들과 선들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지각되는듯 서술되는데, 그 이유는 이상 살핀 내용들이 태고 교회를 서술하기 때문이고, 이 교회가 여타 다른 교회들, 계승되어져 가는 모든 교회의 부모격이고 제일 가는 교회이기 때문에서 이다.

5절. 사람이 살았던 모든 날들은 구백 삼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여기서 “날들”과 “햇수들”은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었다”에 의해 더 이상 이와 같은 지각이 존재하지 않았음이 의미되었다.

“날들”과 “햇수들”이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함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나, 세상에서 때(시간)들과 치수들은 필수적이다, 이것에 관련되는 것은 자연의 최말단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날들과 햇수들, 또한 치수들에 사용된 숫자가 말씀에서 적용될 때는 언제든지 숫자의 의미에 일치하여 때들과 치수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면, 일하는 육일,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는 것; 희년 (jubilee)은 매 49년 째에 선포하고, 50년 째에 기념할 것이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열 둘이다는 것, 주님의 사도들이 열 둘이다는 것; 칠십 원로들, 주님의 칠십 제자들; 등등, 숫자들이 적용된 것들로부터 추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성경에서의 예들은 훨씬 더 많다; 이렇게 추상할 때, 상태들이 숫자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가 “죽었다”가 이와 같은 지각은 더 이상 있지 않았다를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의 “죽다”에 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해 왔었는데 중지되는 것이다. 고로 계시록서에서: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거라; 이런 것들을 하느님의 일곱 영들, 그리고
일곱 별들을 가지신 분께서 말하신다: 나는 네 일들, 즉 네가 살아있다 그리고
죽어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계하라 그리고 이제 막
죽으려하는 그 남은 것들을 강건하게 하라: 그 이유가 나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네 일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 3:1, 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네가 낳아지지 않은 또 다른 나라로 너를 낳은 네 어머니를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예. 22:26),
위에서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미 여러 번 말했던 바 대로, 교회와 더불어, 교회는 그 본래의 모습이 차츰 퇴색되고 퇴보해가다가 급기야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는데, 그 주된 요인은 유전적 악이 증가한 탓이다. 이 악은 이어져 내려가는 부모들이 자신들이 상속받은 악에 자신이 만든 악을 추가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있는 모든 실제의 악은 어떤 종류의 본성을 옷입는다, 그리고 이것이 상습적으로 재발할 때, 그들에게 본성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보태진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전이 된다, 하여 후손에게 계속 전이 된다. 이런 방법 안에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광대하게 증가되어 있다. 이런 것은 자녀들의 악한 경향성이 그의 선조들의 악한 경향성과 꼭 같음이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도 극히 일부라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아담으로부터 우리 안에 이식되어져 온 악 외에는 유전적 악은 없다고 하는 의견은 완전한 거짓 주장이다. 진실은 이렇다. 즉, 모든 이 각자는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을 수단으로 유전적 악을 만든다, 그리고 이 악을 그가 상속받은 악들에 보탠다. 이런 과정에서 악은 축적되고, 모든 후손들 안에 남는데, 주님에 의해 거듭나아지는 이들 안에서가 아니면 줄어들지 않는다. 모두 각각의 교회 안에서 이것이 퇴보의 제일의 원인인데, 이것은 태고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태고 교회가 퇴색되어 갔는지는 지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지 않으면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지각하는 교회이고, 이 교회가 오늘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각은 그 교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 안에서 존재한다. 마치 천사들의 경우와 같다; 여기서 말하는 선하고 참된 것은 시민 사회의 것과 동등하게 여겨서는 안되고, 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와 주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의 것임을 확실히 구분지어 생각해두어야 한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삶에 의해 확증되어져 나오는 신앙의 고백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고, 그것이 어떤 존재를 가지는지를 안다.

6절. 그리고 셋은 일백 오 년을 살았고, 에노스를 낳았다.
“셋”은 이미 주목했던 그대로 두 번째 교회이다. 이 교회는 아버지격인 태고 교회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긴 하나 그래도 태고 교회 반열에는 낄 수 있다 (제3절 참조). “그가 일백 오 년을 살았다”란 때들(시간)과 상태들을 의미함은 앞의 구절과 같다.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란 그들로부터 “에노스”라 불리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내려 왔음을 의미한다.

“셋”이 두 번째 교회인데, 이 교회의 부모되는 태고 교회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지만, 여전히 태고 교회 중의 하나이다는 것은 제3절의 셋에 관해 말했던 것으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른다, 이미 말했듯, 교회와 더불은 경우에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앞서 살핀 이유 때문에 퇴색되었다.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가 그들로부터 또 다른 교회, “에노스”라 불린 교회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 다른 것들은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7, 8절.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8.그리고 셋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날들”과 “햇수들”의 숫자는 앞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때들(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 그가 “죽었다”는 의미 역시 같은 맥락이다.

9절. 그리고 에노스는 구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게난을 낳았다.
“에노스”는 전과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는 두 번째 교회보다 더욱 덜 천적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교회 역시 태고 교회 중의 하나였다.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앞의 교회를 계승하고 있다.

교회들이 시간의 과정에서 서로 계속되어 간다는 점, 이로부터 이것이 저것으로부터 태어나졌다고 말해지는 바, 이는 마치 열매들, 또는 후손들과 더불은 경우와 똑같다. 이런 것들의 한 가운데, 즉 그것들의 가장 안쪽들 안에, 마치 열매들 속의 열매, 또는 후손들 속의 씨들이 있듯, 이 씨로부터 정규적인 질서 안에서 연속되는 부분들이 살아 있는다. 그 이유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가장 안쪽으로부터 주변을 향하여 있기 때문, 다시 말해, 열매, 또는 후손의 본질이 그것들 안에서 있되, 바깥쪽을 향하여 가서 가장 안쪽 것의 종착지인 그것들의 덮개, 또는 외피에 도달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의 경우에서도, 외피의 실체라 불리는 미묘한 기관의(organic) 형체들인 가장 안쪽 부분들 안에서, 이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혼들이 진행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로부터 정규적 순서에서,보다 더 순수한 덮개들이 그 뒤를 이어 받는다, 그 다음 더 밀도 높은 것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뇌막이라 불리는 일반적 덮개들, 이것은 아직 더 일반적 덮개들에서 종결되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것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두개골이다.

위 세 교회들, “사람”, “셋”, “에노스”가 태고 교회를 구성한다. 물론 각 교회는 지각의 정도에 따라 완전함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 교회의 지각력은 이어지는 교회들에서 쇠약해져 더욱 일반적 수준이 되어갔다. 이는 위에서 주목한 열매들, 또는 두뇌의 경우와 같다. 완전함(의 수준)은 지각함의 능력이 (얼마나) 명료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지각력은 지각함이 덜 명료해지고 더 일반적이 될 때 줄어져 간다. 그리하여 더 불명료한 지각이 더 명료한 지각을 계승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자취를 감춘다.

태고 교회의 지각하는 능력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 안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덕행(well-doing, 선행)으로부터 올라오는 행복과 기쁨 안에 존재했다. 선인 것을 행함 안에 있는 행복감과 즐거움 없이는 이 지각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나, 이 행복과 즐거움 덕택에 그것은 생명을 가진다. 태고 교회가 향유했던 것과 같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의 생명은 (나 자신이 세상에서) 쓸모 있음(use)이 되어 있는 동안, 즉 선과 진리가 유용함 안에서 있는 동안 생명을 가진다는 말이다; 쓸모 있음으로부터, 쓸모 있음을 수단으로, 쓸모 있음에 따라 생명은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쓸모 없음인 것 안에 생명은 없다. 그 이유는 쓸모 없는 것은 (헌 신짝 내던지듯) 내던져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태고 교회는 주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지각하는 힘들(powers)에서 그들은 그분의 형상들이 되었다. 지각하는 힘은 선하고 참된 것을 앎 안에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 안에 존재한다: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앎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고, 선하고 참된 것을 행함 안에서, 즉 유용함을 추구함 안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

10, 11절. 그리고 에노스는 그가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1 그리고 에노스의 모든 날들은 구백 오 년 이었고, 그는 죽었다.
여기서도 “날들”, “년 수”, “아들들과 딸들”, 그가 “죽음” 등등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와 똑같다.

“에노스”는 앞서 주목한대로, 세 번째 교회로 아직 태고 교회 중의 하나이나, 덜 천적 수준이고, 결과적으로 “셋”의 교회보다 덜 지각적이다. “셋” 역시 “사람”이라 불린 부모되는 교회보다는 덜 천적 수준이고 덜 지각적이다. 이 세 교회들이 태고 교회를 구성하는데, 첫 교회는 그 뒤를 잇는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매들 속의 핵심이었다. 이에 반해, 나머지 두 교회는 첫 교회의 막질(membranaceous) 부분이었다.

12절. 게난은 칠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마하랄엘을 낳았다.
“게난”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하랄엘”은 다섯 번째 교회이다.

“게난”으로 불리는 교회는 앞의 세 교회가 지닌 완전한 것, 즉 지각력에서 위 세 교회 서열에는 낄 수 없다. 즉 앞의 세 교회들과 구분된다는 말이다. 즉 앞의 세 교회가 일반적으로 차츰 되어가는 중 이었음에 비해 이 교회는 아예 일반적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이 상태는 실로 묘사되어지지 않고 있으나, 이후 살피는 “에녹”과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묘사로부터 약간은 어림잡을 수 있다.

13, 14절. 그리고 게난은 그가 마하랄엘을 낳은 후 팔백 사십 년을 살았고,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4 그리고 게난의 모든 날들은 구백 십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날들”과 “년 수들”의 숫자들은 전과 같은 의미이고, “아들들과 딸들” 역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이로부터 교인들은 지각을 가졌으나 앞의 교회보다 더욱 일반적 방법(general manner)으로 가졌다. 그가 “죽었다”란 지각의 이런 상태가 중지됨을 의미함은 앞의 구절과도 같다.

여기서 주목해 둘 것은 모든 것들은 교회의 상태에 관련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15절. 그리고 마하랄렐은 육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렛을 낳았다.
“마하랄렐”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지각력이 감소해갔을 때, 하여 더 특수한 측면, 또는 명료함에서 더 일반적 측면, 희미함으로 쇠퇴되어 갔듯, 사랑의 생명, 또는 쓸모 있음의 생명 역시 그러했다; 그 이유가 사랑이나 쓸모 있음의 생명과 지각력의 생명은 같기 때문이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 수준이다; “마하랄렐”로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이들의 생명은 그들이 쓸모 있음으로부터 얻는 즐거움보다 진리들로부터 얻는 즐거움을 더 좋아했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저 세상 삶에서 이와 같은 사람 사이에 내가 있어본 경험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16, 17절. 그리고 마하랄렐은 그가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17 그리고 마하랄렐의 모든 날들은 팔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이 구절 역시 앞의 구절의 의미와 동일하다.

18절. 그리고 야렛은 일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에녹을 낳았다.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야렛”이라 불리는 교회에 관하여는 관련된 사항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의 특성은 “마하랄렐”과 “에녹”으로부터 알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둘 사이의 매체, 내지 중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 20절. 그리고 야렛은 그가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았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0 그리고 야렛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이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위 말들의 의미는 앞 절과 거의 동일하다. 대 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나이가 앞의 절들이 말한 것 같이, 즉 야렛은 구백 십이 년을 살았다든가,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이 년을 살았다와 같이 실지로 오래 살지 않았음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는 구절에서 설명해 볼 것이다. 즉 년 수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나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

21절. 그리고 에녹은 육십 오년을 살았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뜻한다.

“에녹”이라는 교회의 품질은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22절. 그리고 에녹은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그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교리적인 문제들(matters)을 의미한다.

그 당시 태고 교회와 계승된 교회들에서 지각의 문제들(matters)이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들의 뼈대를 구축해서 이 교리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아는 규칙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이들이 있었다. 이 인물들이 “에녹”이라 불리었다. 이것이 “그리고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라는 말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교리를 “에녹”이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이름, “에녹”이 “가르치다(instruct)”를 뜻함에 의해서도 의미되기도 한다. 이와 똑같이 “걷는다”라는 표현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여호와와 더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걸었다”라고 말해진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이나, “여호와와 더불어 걷는” 것일 경우, 이는 사랑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걷는 것”은 “법 안에서 걷는다”, “규례 안에서 걷는다”, “진리 안에서 걷는다” 등등과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관습적 언어 형체이다. “걷는”것은 길(way)에 더 적절히 어울리는 단어인 바, 진리에, 결과적으로 신앙의 교리에 더 친근하다. 말씀에서 “걷는”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이 구절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아래 구절들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미가서에서:
그분께서 네게 선인 것을 보여주셨다, 오 사람아,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정을 행하는 것, 자비로부터의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네 하느님과 함께 걸음으로 네 자신을 겸손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더냐? (미. 6:8),
위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은 여기서 암시된 것들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여기서 “하느님과 더불어” 라고 말해지는 한편, 에녹에 관해서는 또 다른 단어 “하느님과 더불어로부터”가 의미되는 것이 사용되고 있다. 하여 표현이 애매모호하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충동질 받음으로부터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하여 나는 산 자의
빛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걸을런지 모릅니다 (시. 56:13),
위에서 “하느님 앞에서 걷는” 것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걷는 것, 이는 산 자의 빛이다. 마찬가지가 이사야서에서:
어둠 안에서 걷는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 (이. 9:1).
이렇게 주님께서 모세에 의해 말하신다:
내가 한 가운데에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네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백성일 것이다 (레. 26:12),
그들이 법의 교리에 따라 살 것을 의미하면서,
예레미야서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그에 따라 걷고, 추구하던 태양과 달 앞에,
하늘들의 별들에 그것들을 흐트러 놓을 것이다 (예. 8:2),
위 구절에서 명백한 구분이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 사이에 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는,” “섬기는”에 의해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걸음,” “추구함”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예언적 저술(writing)의 모두에서 모든 표현은 정밀하게 되고 있다. 하여 이 단어를 저 단어로 적당히 섞어 쓰는 일은 없다. 그러나 “여호와와 더불어 걷는 것,” 또는 “여호와 앞에서”는 말씀에서 사랑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23, 24절. 에녹의 모든 날들은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 24 그리고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데려 가셨기 때문이다.
“에녹의 모든 날들이 삼백 육십 오 년 이었다”란 그들이 조금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하느님이 데려가셨기 때문이다”란 후세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를 보존하셨심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라는 말들에 관하여가 후세의 사용을 위해 이 교리의 보존을 의미하는데, 에녹의 경우, 이미 말했던 바 같이, 그는 태고 교회에서 지각의 주제(matter)가 되어왔던 교리로 환원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 교회 때에는 환원된 이 교리를 허용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지각에 의해 안다는 것은 교리에 의해 배움으로부터 와는 매우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지각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이 안 것을 공식화한 교리에 의해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잘하는가를 아는 예술가는 예술의 어떤 규칙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받는 중에 잘 생각하는 그의 능력이 오히려 손상 입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스콜라식(scholastic, 학교 교육의) 먼지(혼란)로 해서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경우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지각을 수단으로 배우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선하고 참된 것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교리로부터 배우는 이들에게, 지식이 외적 경로를 수단으로, 또는 신체적 감각들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비슷하다. 천적 인간에게는 명세서 같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상태나 주위 환경에 일치하여 아주 미세하고 특유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 교회의 지각력이 멸하여질 것이 예견되었고, 이후 인류는 참되고 선인 것을 교리를 수단으로 배우리라는 것, 또는 어둠을 수단으로 빛에 나아온다는 것이 예견되었는 바,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해진다. 즉 후세의 사용을 위해 교리를 보존하셨다는 말이다.

“에녹”이라 불리운 이들과 더불은 지각의 상태와 품질이 나에게 알려졌었다. 이것은 어떤 명료함 없는 일종의 희미한 지각이었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마음은 마음의 바깥쪽 상황만으로 교리적인 것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25절.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멕을 낳았다.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의 품질이 언급된 곳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나 그것의 지각력이 일반적이고 희미하다는 것은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완전함이 퇴조된 만큼, 완전한 지혜와 총명도 퇴조된 것이다.

26, 27절. 므두셀라는 그가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27 그리고 므드셀라의 모든 날들은 구백 육십 구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이 구절도 상기 구절들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8절. 그리고 라멕은 일백 팔십 이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라멕”은 여기서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교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지각은 대단히 일반적이고 희미해져서 거의 없다시피 된 바 교회는 실상 무용지물의 교회였다. “아들”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라멕”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각이 매우 일반적이고 매우 희미해져 지각이 없다고 해야할 정도로만 남아 있는 교회, 결과적으로 교회가 황폐해졌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 앞 장에서 말해진 것과 다음 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제4장에 있는 “라멕”은 제 5장에 있는 “라멕”과 거의 같은 의미인 황폐됨을 의미로 가진다. (4장의 경우, 18, 19, 23, 24절 참조); 그리고 그를 낳은 자 또한 거의 같은 이름인 “므두사엘”인 바, 의미 또한 거의 같다. “므두사엘”과 “므두셀라”는 막 죽으려하는 어떤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라멕”에 의해서는 파괴되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29절.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을 노아라 불렀고, 말하기를, 그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에서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노아”는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 손들의 수고와 우리의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함”이란 교리를 의미한다. 이 교리를 수단으로 뒤집혀져 왜곡되어 갔던 것들이 회복되어지게 된다.

“노아”에 의해 고대 교회, 또는 홍수 이후 세 교회들의 부모되는 교회를 의미했다는 것은 노아를 크게 다루는 다음 페이지(page)에서 나타날 것이다

제 5장에 있는 이름들은 교회들, 같은 말로 교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교회는 교리로부터 존재와 그것의 이름을 갖기 때문이다; 고로 “노아”는 태고 교회로부터 남은 교리, 또는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들, 또는 교리들과 더불어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어지는가는 앞서 서술했었다. 즉 그들이 기운다, 그리고 그 기움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의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이다는 것, 하여 교회는 황폐되어져 있다고 말씀에서 말하여진다. 그러나 여전히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심)는 항상 보존되고 있다는 것, 또는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누군가와 더불어 신앙 속의 선과 진리는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신앙 속의 선과 진리가 이들 극소수 안에서라도 보존되지 않으면, 인류가 천국과 결합하는 일은 없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생각해보면, 이것을 덜 가진 자일 수록, 그가 소유한 지식과 이성은 덜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의 빛은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주님을 통하여 리메인스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 안에 리메인스가 없다면, 사람일 수가 없고 야수보다 더 천박할 것이다; 더 적은 리메인스가 거기 있다면 덜 사람인 것이다. 더 있다면 더 사람이 되어 있다. 리메인스는 천국의 별과 같다. 이 별이 작다면, 빛 또한보다 작아진다. 더 크다면 빛 역시 더 밝아진다. 태고 교회로부터 남게된 매우 적은 리메인스들이 노아로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이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이 남은 것은 지각으로부터의 남은 것이 아니고, 완전함으로부터의 것이다, 그리고 태고 교회 안에 있는 지각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파생된 교리로부터의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지금 일으켜졌다. 이 교회는 태고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태생적 특성으로부터 이다. 하여 고대 교회라 불리워진다. 고대란 홍수 이전 시대들의 마감에서 존재하여 홍수 이후 첫 기간 동안 존재한 경우를 두고 말해진다. 이 교회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에 의해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의 손들의 수고함과 일로부터 우리를 위로하심”에 의해 이 교리로 해서 뒤집혀만 갔었던 것이 회복되어짐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page)들에서 나타날 것이다. “일(work)”에 의해 그들은 노동과 고생을 하지 않으면 참된 것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우리의 손들의 수고함”에 의해 그들은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고로 라멕을 묘사한 것은 황폐된 교회였다. “일과 손들의 수고함”이 있는 때는 자신들로부터, 또는 자기 자신(own)으로부터 인간이 참된 것을 추구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때이다. 이 일과 수고함으로부터 와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거짓과 악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심”에 의해 의미된 것은 제 245항에서도 알런지 모른다.) “위로함”은 노아와 관련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새로운 거듭남, 고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고 이것이 고대 교회이다. 이 교회, 또는 “노아”는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쉼(rest)을 의미하고, 쉼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의미되는데, 태고 교회에 관해 말했던 부분, 즉 주님이 쉬신 일곱 째 날이 의미된다. (84-88항도 참조.)

30, 31절. 그리고 라멕은 그가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31 그리고 라멕의 모든 날들은 칠백 칠십 칠 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라멕”은 무용지물이 된 교회를 의미한다. “아들들과 딸들”은 이런 교회의 임신과 출생들을 의미한다.

라멕에 관계되는 것은, 그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 이것은 이와 같은 교회의 임신과 출생이다는 것 외에 더 이상은 없는 바, 이 주제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출생들이 무엇인지, “아들들과 딸들”이 무엇인지는 교회로부터 나타난다; 그 이유가 교회가 이런 종류이면 그것으로부터의 출생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므두셀라”와 “라멕”으로 불리운 교회 모두 홍수 전에 기간이 만료되었다.

32절. 그리고 노아는 오백 년의 아들 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셈, 함, 야벳을 낳았다.”
“노아”는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셈, 함, 야벳”은 세 개의 고대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들의 부모는 “노아”라 불리는 고대 교회였다.

“노아”로 부른 교회가 홍수 전에 있는 교회로는 세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29절로부터, 즉 “여호와께서 저주하신 지면으로부터 그들의 손들의 수고와 그들의 일로부터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고 말한 대목으로부터 나타난다. “위로받음”은 교회가 살아남고 참아내는 것이다. 노아와 그의 아들에 관하여는 이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앞 페이지들에서 홍수 전에 존재한 교회들에 의해 소유된 지각에 관하여 말했었다, 그리고 오늘날 지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여 어떤 이는 계시의 계속이라 하고…어떤 이는 인간들 안에 이식된 어떤 것이라 하고…혹 자는 상상이라 하고…갖가지 말들이 제멋대로 나부끼고 있다; 지각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참 천적 자체(the very Celesstial itself)와 같다. 그리고 끝없이 다양해지는 보편적 천국 안에 있는 지각과 같다: 그러므로 지각이 무엇인지에 관한 약간의 개념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천국들 안에 존재하는 주요한 종류의 지각을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서술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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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6 장

성경: 창세기 제 6 장

1. 사람이 지면의 얼굴에서 그 자신을 늘려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그들이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의 영은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 그 이 유는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
4. 그 당시,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낳아 주었는데, 네피림과 똑 같은 용사가 되 었고, 이 용사들은 옛날에 있었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 번창했고, 그리고 그의 심정 속의 생 각의 모든 상상들이 매일 악할 뿐임을 보셨다.
6.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 그리고 그분으로하 여금 그분의 심정에서 몹시 슬퍼하게 했다.
7.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가 지면의 얼굴에 창조했던 사람을 파괴하리 라. 사람과 짐승, 기는 것들, 하늘의 새를 파괴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내가 그것들 을 만든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8.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
9. 이것들은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 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10.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들, 셈, 함, 야벳을 낳았다.
11. 그리고 땅은 하느님 앞에서 부패되어 있었다. 그리고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 다.
12.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그리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그 이 유는 땅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폭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보라 나는 땅과 함 께 그들을 파괴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목재(gopher wood)로 방주를 만들고, 너는 대저택들을 방주에 만들 어라, 그리고 그것을 역청으로 안팎으로 역청칠을 하라.
15. 이런 식으로 너는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고, 넓이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다.
16. 너는 방주에 창문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창문을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하라. 그리고 너는 방주의 문을 옆쪽에 두어라. 너는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을 만들 것이다.
17. 그리고 나는,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와서 하늘들 아래로부터 있는 생 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도 소멸할 것 이다.
18. 그리고 나는 너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는 방주로 들어 가되, 너, 그 리고 너의 아들들, 너의 아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
19. 그리고 모든 육체의 살아 있는 모든 것 각각 한 쌍을 너와 함께 방주로 들어오게 해서 생명이 보존되게 만들어라. 그들은 숫컷과 암컷일 것이다.
20. 새는 각 종류대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지면에서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 모든 종류가 한 쌍씩 너에게로 들어와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라.
21. 너는 먹어야 하는 모든 양식을 너에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에게로 수 집하라.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그들을 위한 양식일 것이다.
22.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 그렇게 그는 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사람이 지면의 얼굴에서 그 자신을 늘려가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사람”은 여기서는 그 당시 존재하던 인류의 종족을 의미한다. “지면의 얼굴”은 교회가 있었던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딸들”은 이 사람의 의지에 관련되는 것들, 결과적으로 그리워함(yearning)을 의미한다.

“사람”에 의해 그 당시 존재한 인류 종족, 실로 악 이었던 종족, 썩어 있었던 종족이 의미된다는 것은 3절, 즉 “내 영은 영원히 사람을 타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육이기 때문이다”로부터 나타난다. “사람 속의 악이 번창했고, 그의 심정 속의 생각들의 상상은 오로지 악 이었다” (5절). “나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7절); 그리고 다음 장 (7:21-22)에서, “모든 육은 죽었다, 땅에서 기었던 것,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던 모든 것이 죽었다.” 사람에 관련해 이미 말했던 바, 주님 만이 사람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천적 인간, 또는 천적 교회가 “사람”이라 불리운다. 이로부터 여타 다른 교회들도 모두 사람들이라 불리운다: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무슨 신앙이든 상관없이 야수로부터 구별되고 사람되기는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 이다.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 즉 리메인스를 가짐을 통하여를 제외하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야수와 구별되지 않는다. 리메인스가 우리를 사람이라 불리도록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리메인스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리메인스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것은 우리의 상태가 심히 악하다 해도 주님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이름을 획득하게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리메인스를 가지지 않으면 사람일리 없고 어쩌면 야수보다 더 하위일지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면의 얼굴들”은 교회가 있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면”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말씀은 “지면(ground)”과 “땅(earth)”을 정밀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지면”은 교회를 의미한 어디이든, 또는 교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지면”으로부터 “사람”, 또는 “아담”이 오고, 아담은 “지면”을 뜻한다; “땅”은 다양한 장소에서 교회가 없음, 또는 교회에 속하는 어떤 것이 없음이 뜻해진다. 예를 들면, 1장에서는 “땅”만이 명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는 교회, 또는 거듭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장의 경우, “지면”이 처음 언급된다, 그 이유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말해지고, 다음 장에서(7:4, 23), “모든 물질은 지면의 얼굴로부터 파괴될 것이다”에서도 “지면”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창. 7:3에서 막 창조되어져야 할 교회에 관해 말하시면서, “지면의 얼굴 위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는 것”이 말해진다. “지면”은 말씀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여호와께서 야곱 위에 자비를 가지실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지면 위에 놓으실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를 데려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장소로 그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문은 여호와의 지면 위에서 그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 14:1-2),
만들어져 있었던 교회에 관해 말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같은 장에서 교회가 없음이 “땅”이라 불린다 (이. 14:9, 12, 16, 20-21, 25-26).
다시:
그리고 유다의 땅은 이집트에게 공포일 것이다; 그 날에 가나안의 입으로 말하는
다섯 성이 이집트의 토지에 있을 것이다 (이. 19:17-18),
위에서 “지면”은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토지”는 교회가 없는 곳이다. 다시:
땅은 술취한 자 같이 앞 뒤로 휘청거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높은 곳에서 높은 자의
군대 위에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면 위에 있는 지면의 왕들 위에 방문하실 것이다.
(이. 24:20-21).
예레미야서에서:
닳아 해진 지면 때문에, 그 이유는 땅 위에 비가 없기 때문에, 농부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덮을 것이다, 그렇다, 암사슴이 들판에서
새끼를 낳았다 (예. 14:4-5),
위의 “땅”은 “지면”을 포함하는 땅이다, 그리고 “지면”은 “들판”을 포함하는 지면이다.
같은 예언서에서:
그분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북쪽의 토지로부터, 내가 그들을 몰아낸 모든 토지들로부터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예. 23:8),
위에서 “토지”와 “토지들”은 교회들이 없는 곳이다; “지면”은 교회가 있는 곳, 진정한 예배가 있는 곳이다. 다시:
나는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이 토지 안에 남은 그들을, 그리고 이집트에 거주하는
그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폭동에 넘길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이
땅의 모든 왕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검을, 기근을, 그들 사이에 염병을
보낼 것이다, 하여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주고, 그들의 선조에게 준 지면으로부터
싹쓸어 사라질 때까지 보낼 것이다 (예24:8-10),
위에서 “지면”은 교리와 교리에서 파생된 예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가 예. 25:5에도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너희가 흐트러져 있어 왔었던 토지들(lands)로부터 너희를 그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의 토지 안으로 다시 데려올 때, 내가 너희 조상에게
주려고 내 손으로 들어올린 토지 안으로 데려올 때,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 것이다 (겔.20:41-42),
위에서 “지면”은 내적 예배를 의미한다; 내적 예배가 없을 때 “토지”라 불리운다. 말라기서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너를 소멸되게 하는 그를 견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면의 열매를
너를 위해 썩지 않게 할 것이고, 포도나무가 들판에서 너를 위하여 빼앗김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여 모든 민족들이 너를 복되다 부를 것이다,
그 이유가 너는 매우 기쁜 토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말. 3:11-12),
위에서 “토지”는 (담는) 용기(container)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임이 분명하다. “지면”이 교회, 또는 교리를 표시할 때, 인간이 “토지”라 불리우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노래하라, 오 너희 민족들아, 그의 백성들아, 그분은 그분의 지면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죄씻음을 만드실 것이다 (신. 32:43),
위에서 이방인들의 교회가 분명하게 의미되는데, 이것이 “지면”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는 것을 알기 앞서, 지면은 버려짐을 당해
있을 것이고, 이것을 너희는 양쪽의 왕들의 면전에서 증오할 것이다 (이. 7:16),
위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고 있다; “지면이 버려짐을 당해 있을 것”은 교회, 또는 신앙의 진정한 교리를 표시한다. “지면”과 “들판”은 씨가 뿌려짐으로부터 그렇게 불려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야서에서:
그때에 내가 지면에 뿌릴 네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지면 위에서 노동하는
수소들과 어린 나귀들 (이. 30:23-24).
그리고 요엘서에서:
들판은 황폐해 있다, 그리고 지면은 슬퍼했다,
그 이유는 곡식이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욜. 1:10).
그러므로 “사람”은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라 불리우고, “지면”은 교회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진정한 신앙의 교리 안에서 훈육된 이들이 사는 모든 지역이 교회의 지역이라 불리운다; 마치 가나안의 토지, 유대 교회가 거기 있었을 때이고, 지금의 경우 유럽 지역, 기독교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지역 바깥의 토지나 지역들은 교회의 지역, 또는 “지면의 얼굴들”이 아니다. 홍수 이전 교회가 있던 곳은 에덴의 동산에서 흘러나온 강들이 에워싼 토지들로부터 나타날런지 모른다. 이를 수단으로 말씀의 여러 장소에서 가나안의 토지의 경계들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토지 안에” 있었다는 네피림에 관해 이어지는 구절로부터도; 그리고 이 네피림이 가나안의 토지에 거주했고 이들로부터 이다는 아낙의 후손들을 언급한 구절로부터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 13:33).

“딸들”이 이 인간의 의지로부터 있는 것, 결과적으로 그리워함(yearning)을 의미하는 것은 창. 5:4에서 “아들들과 딸들”에 관해 말했던 바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그리고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고 있다. “딸들”, 또는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이해함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고로 “아들들과 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의 구절은 부패된 상태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하여 그는 의지가 없고 의지 대신 탐욕이 있을 뿐이다. 이 탐욕이 당사자가 상상하기로는 그의 의지인 것이어서 그렇게 불리워진다. 문장에서 서술되는 것은 서술되는 것의 품질과 일치되기 마련이다. 사람으로부터 출생한 딸들이 여기서 서술되는 바, 딸들도 부패된 인간이다.
“딸들”이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거기에 선으로부터의 의지가 없다면 그 의지는 의지가 아니라 그리워함(yearning)에 불과하다; “아들들”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하지만, 진리를 이해함이 없을 경우, 그 이해력은 공상에 불과하다. 여성 섹스(female sex)의 경우, 의지, 또는 탐욕이 이해력보다 더 그들 안에서 지배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여성들의 기질의 경향이 이러하고, 그것의 본성이 이러하다. 이에 비해 남성의 경우, 지성, 또는 이성이 마음을 우선적으로 통치한다. 이로부터 두 이성의 결혼은 모두 각각의 인간 안에서 의지와 이해함의 결혼과 같다; 본문 당시 선으로부터의 의지는 없으나, 아직은 지성적인, 또는 합리적인 어떤 것은 주어질 수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유대 교회에서 아내는 순종하고, 남편의 특권을 법제화 해 둔 이유이기도 하다.

2절.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니 그들이 선 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딸들”은 그리워함을 의미함은 이미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선 이었다고 보면서,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그 자신에게 아내로 취했다”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그 자체를 그리워함들과 결합시킨 것, 사실상 그리워함이 무엇이었든 모두 교리적인 것들과 결합시켰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에 의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는 5장 4절에서 살폈다. 거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했다. 교회의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그 자체에서는 진리들인데, 그 이유는 여기서 다루는 이들은 이 교리들을 태고인들로부터 전설(tradition, 구전)을 수단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것들이 관계적 차원에서 그렇게도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리워함이 “사람의 딸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이 교회인의 품질이 여기서 묘사되는데, 즉 그들은 거룩인 것인 교회의 진리들을 그리워함 안에다가 침수시켰다. 그리하여 그 거룩한 진리들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 방법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을 매우 강하게 설득했던 원리들까지 확증해 버렸다. 이런 일이 어떻게 발생했을까를 짐작해보려면 아마 각자 자신 속이나 타인 속에서 이런 현상이 지나가는 것을 주목하면 쉽게 가능할지 모른다: 어떤 주제에 관련하여 자신을 설득하는 이들의 경우, 그는 사람들이 진리이다고 상상하는 것, 필요하면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 포함되었다고 발견함을 수단으로 해서라도 자신을 설득한다; 그들이 받은 원리들에 기우는 한편, 설득도 되어가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주제에 동의하고 좋아하게 만든다. 이에 더하여 자기를 사랑함의 영향 아래 더 있을 수록 그는 설득된 주제를 더 견고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인종(race)에 관한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더 살필 것이다. 묘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무서운 설득들을 취급할 때,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추론들을 수단으로 해서 흘러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오직 그리워함을 수단으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현존하는 영들 안에서 합리적으로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선 이었다고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모든 것을 아내들로 자신들에게 취했다”는 구절의 의미가 나타난다, 즉 그들은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사실상 어떤 그리워함이었든지 신앙의 교리들을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신앙의 교리들을 사악한 그리워함들에 침수시키는 품성을 지닐 때, 그는 진리들을 모독한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리메인스들을 빼앗긴다. 설사 그것들이 남아있다 해도 생산성이 없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가 산출되어 보았자 모독되어 있는 것들에 의해 다시 모독되기 때문에 산출이 있으나마나 이다. 말씀에 대한 모독들은 마치 (피부의) 경결을 생산한다. 이 경결이 폐쇄(obstruction)의 원인이다. 그리고 리메인스의 선들과 진리들을 흡수해 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거짓 원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이 진리들임을 믿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짓은 피하게 하는 것이 상책인데,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의 영은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 그 이유는 그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
“나의 영이 사람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으리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심”이란 사람을 더 이상 전과 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가 육체(flesh)이기 때문이다”란 그가 물질적인(corporeal) 인간이 되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그의 날들은 일백 이십 년 이리라”란 그는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remains)를 가져야만 할 것임을 의미한다.

내 영은 인간을 영원히 타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심에 의해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목과 뒤잇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앞의 구절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진리, 또는 교리들을 그리워함들에 침수시킴을 통하여 그들은 더 이상 타일러 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즉 악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와 선을 지각하는 모든 능력이 그들의 설득들을 통하여 소멸되었는 바, 자기들의 설득들에 일치할 때만 그것이 진리이고 선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홍수 이후 교인들은 아주 다르게 되었다. 그들과 더불어서는 양심이 지각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타일러 질 수 있었다. “여호와의 영이 질책하심(reproof)”은 내향의 지령, 지각, 또는 양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은 참되고 선한 것의 유입을 의미 한다; 이사야서를 보자:
나는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이 내 앞에서 궤멸하고 내가 만든 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57:16).

“육(flesh)”은 인간이 물질적이 되어갔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육의 의미로부터 나타난다. 말씀에서 육은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인간, 그리고 특별하게는 물질적 인간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어진다. 모두 각각의 인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를 보자. 요엘서에서: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다 (욜. 2:28),
위에서 “육”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의 유입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당신에게 모든 육이 나아올 것입니다 (시. 65:2),
위에서 “육”은 모두 각각의 사람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인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다, 그리고 육이 그의 팔을 만든다 (예. 17:5),
위에서 “육”은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팔”은 힘(power)이다. 에스겔서에서:
모든 육이 안다는 것 (겔. 21:4-5).
스가랴서에서:
잠잠히 있으라, 모든 육이여, 여호와 앞에서 (슥. 2:13),
위에서 “육”은 모두 각각의 인간을 표시한다.
물질적 인간을 특별하게 의미하는 것의 경우를 보자. 이사야서에서:
이집트인은 인간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말(horse)들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이. 31:3),
위 구절에서,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은 물질적임을 의미하고 있다; “말들”은 이 구절, 그 밖의 구절에서도 합리성을 표시한다. 다시;
그가 오른 손을 움추릴 것이다, 그리고 배고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왼손에서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팔의 육을 먹을 것이다 (이. 9:20),
인간의 자기 자신은 모두 물질적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는 혼으로부터, 그리고 육에 이르기까지 살라질 것이다 (이. 10:18),
위에서 “육”은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음성이 말했다, 외쳐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무엇을 외칠 것인가?
모든 육은 풀이다 (이. 40:5-6),
위에서 “육”은 물질적인 모두 각각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불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논쟁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검을 가지고 모든 육과
더불어 (논쟁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로부터 죽은 자가 불어나질 것이다 (이. 66:16),
위에서 “불”은 그러워함들을 처벌함을; “검”은 거짓들을 처벌함을; 그리고 “육”은 인간의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육이었다는 것, 스러지는 숨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시. 78:39),
육(고기를)을 갈망하는(먹고 싶어하는)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 관해 말하실 때, 그들은 물질적이었다는 것; 그들이 육을 바램은 그들이 물질적인 것들 만을 바랐음을 표현하였다 (민. 11:32-34).

인간의 날들이 일백 이십 년이다는 것은 인간은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가져야 한다를 의미함은 창. 5:3-4절에서 살핀 바 있는 “날들”과 “햇수들”이 때들과 상태들을 의미함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태고인들은 간단한 숫자들과 이 숫자들을 합성하여 만든 숫자들을 가지고 교회에 있는 상태들과 변화함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평가하여 수치로 나타낸 본래의 모습은 오늘날은 완전히 상실되어져 있다. 이 구절에서도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나마 이를 이해해 보려면 최소한 1부터 12까지의 단순한 숫자의 감추어놓인 의미의 이해가 먼저 되어있어야 본문의 120년도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본문을 글자대로 이해한다면 사람의 목숨이 120년이다는 말이지만, 홍수 이후에도 더 오래 산 사람들이 11장만 보아도 수두룩하고, 노아의 경우도, 홍수 이후 “350년”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창. 9:28). 이렇게만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성경의 숫자들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짐작될 것이다. 숫자 “120” 안에 포함된 것은 숫자 “10”과 “12”로부터 나타난다. “120”의 의미는 이 두 숫자가 곱해질 때 120이 만들어진다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10과 12의 의미로부터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함이 보여질런지 모른다. 숫자 “10”은 말씀에서, “1/10(십분의 일, 열 번째, tenth)”과 더불어, 리메인스(remains)를 의미하고 표현한다. 이 리메인스는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 안에서 보존되어지고, 거룩하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숫자 “12”는 신앙, 또는 한 개의 복합체(complex)에서 신앙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숫자가 합성되어진 것은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숫자 “십”, 그리고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에서 확인해보자:
많은 집들이 크고 아름다우나 거주할 자 없이 황폐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도원 10 에이커에서 1 바트가 생산되고, 1 호멜의 씨가 1 에바를 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5:9-10),
위 구절은 영적 (평면)의 것들과 천적 (평면)의 것들이 황폐해짐에 관하여서 이다: “포도원 10 에이커가 1 바트를 만든다”란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 호멜의 씨가 1 에바를 산출함”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많은 것들이 토지 한 가운데에서 버려짐을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십분의 일이 그것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되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은 다 소모되어질 것이다 (이. 6:12-13);
위에서 “토지 한 가운데”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십분의 일 부분”은 리메인스가 적음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정의로운 추를, 그리고 정의로운 에바를, 그리고 정의로운 밧을 가질
것이다: 에바와 밧은 한 개의 칫수로부터 있을 것이다. 즉 밧은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는다, 그리고 에바도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는다. 그것으로부터의 칫수는
호멜에 따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에 관한 규례이다, 기름의 밧, 한 고르는
열 밧, 한 호멜, 그 이유가 열 밧이 한 호멜이기 때문이다 (겔. 45:10-11, 14).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것들이 칫수를 수단으로 몇 종류가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10”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와 이로부터 파생된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리메인스가 의미된다; 이 외에도 이 예언서의 앞 장(40장)의 천국의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묘사에서 언급되는 여러 칫수 역시 많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모스서에서:
처녀 이스라엘은 타락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천 명이 성을 나가면 백 명이 남아 있을 것이고,
백 명이 나가면 열 명이 이스라엘의 가문에 남을 것이다 (암. 5:2-3),
위에서 리메인스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매우 적게 남아 있는다는 것, 오직 “십분의 일 부분”, 또는 리메인스로부터의 리메인스만 있다는 말이다. 다시:
나는 야곱의 자랑거리와 그의 궁전을 몹시 싫어한다, 그리고 성, 그리고
그것의 충만함은 봉쇄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한 집에 열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들은 죽기조차 할 것이다 (암.6:8-9),
거의 남아있지 않는 리메인스를 말하고 있다. 모세의 책에서:
암몬족과 모압족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열 번째 후대에까지조차 영원히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할 것이다 (신.23:3);
“암몬족과 모압족”은 신앙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모독함을 의미한다. 앞 절에서는 리메인스가 말해지고 있다.
이로부터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현함도 나타나는데, 말라기서를 보자:
너희 모두는 보물 집 안으로 십일조(십분의 일들, tenths)를 가져오라,
하여 내 집 안에 노획물(booty)이 있을런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로 너희가
이것에서 분발하는지를 나에게 입증하게 하라, (하여) 내가 하늘의 큰 폭포를
열지 않도록, 그리고 네게 축복을 쏟아 내도록 (말. 3:10);
“내 집 안에 노획물이 있을런지 모른다”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이 리메인스가 “노획물”에 비교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리메인스는 엄청나게 많은 악들과 거짓들 사이에서 비밀리(by stealth)에 은근히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모든 축복이 온다. 모든 인간의 선행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오고 있다는 것, 또한 이것이 유대 교회에서 이런 규례에 표현되어져 있다. 즉 그들이 십일조 바치기를 모두 마쳤을 때, 그들은 그것을 레위인, 외국인, 고아, 과부에게 줄 것이다 (신. 23:3 이하 참조).
리메인스는 주님만에 속한 까닭에, 십분의 일들은 “여호와께 거룩함”이라 불리운다; 모세의 책에서:
토지의 모든 십분의 일들, 토지의 씨의 모든 십분의 일들, 나무의 열매로부터의
모든 십분의 일들, 그것들은 여호와의 것이고, 여호와께 거룩함이다: 목축의
모든 십분의 일들, 양떼의 모든 십분의 일, 목자의 막대 아래를 지나가는
무엇이든, 십분의 일은 여호와에게 거룩함일 것이다 (레. 27:30-31).
십계명은 “열 가르침들, 또는 열 말(word)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것들을 돌판들(tables)에 쓰셨다는 것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이것이 여호와의 손에 의해 씌어짐은 리메인스는 주님만으로부터 있다는 것, 그것들이 내적 인간 안에 있음이 돌판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신. 10:4).

숫자 “12”가 신앙, 또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 한 복합체 안에 이것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함은 성경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이 가능하다. 모두가 익히 아는 대표적 예를 들면, 야곱의 “열 두” 아들로부터와 그들의 이름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그리고 주님의 “열 두” 사도들 등등이다; 창세기 29, 30 장을 취급하는 근처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것이다.

본문의 숫자만 살펴도 주님의 말씀은 그것의 품 안에, 내면의 깊숙한 곳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비밀들이 있는지는 분명해졌을 것이다. 물론 다른 말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여기서 취급된 홍수 이전 사람들과 더불어 리메인스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차 후 그것들에 관해 말해지는 곳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리메인스도 그들 사이에서는 보존될 수 없었는 바, 리메인스를 가질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가 여기서 말해진다; 이것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4절. 그 당시,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낳아 주었는데, 네피림과 똑 같은 용사가 되었고, 이 용사들은 옛날에 있었고 유명한 사람이었다.
“네피림”이란 자기들의 고고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통해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 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간 이후, 그들이 그들에게 낳았다”란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 속의 교리들을 파묻고, 참된 것을 수단으로 거짓된 것을 설득할 때 네피림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네피림”은 자신의 고고하고 탁월한 설득력을 통하여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 대목과 뒤를 잇는 대목으로부터, 즉 그들은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들을 침수시킴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감, 그리고 그(녀)들이 그들에게 낳아줌”에 의해 의미된 것에서 나타난다. 자기를 설득함과 이 설득의 공상들은 그것들로 들어간 것들이 불어남에 따라서도 증가하는데, 결국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 때까지 (절대 떼어지지 않는 때까지)에 치닫고 말 때까지 증가한다; 그리고 신앙의 교리들이 이것에 보태어질 때, 그러면 최고로 센 설득력의 원리들로부터 그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빛을 만든다, 그리고 “네피림”이 된다. 홍수 이전에 살았던 이 종족(race)은 이러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끔찍한 공상들을 수단으로 모든 영들을 숨막히게 하여 죽기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특성 때문에 (저 세상에 있는) 영들은 (이 네피림의 설득력 때문에) 생각하는 힘을 온통 빼앗기고 반쯤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수단으로 이 독 있는 종족들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자유해지게 하시지 않았다면, 거기에 존재할 영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영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통치되는 인간 종족은 멸해졌으리라. 그러므로 지금 이 네피림들은 지옥에서 특별한 관리 아래, 즉 안개로 덮힌 육중한 둥근 돌 아래 있는 지옥, 왼쪽 발 뒤꿈치 아래에서 (통제되어), 매우 경미한 일어섬도 허용될 수 없다. 고로 이 최고로 위험한 패거리로부터 영들의 세계는 자유해 있다. 이에 관하여와 이 독 있는 설득력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별도로 언급할 것이다. 말씀 안에서 “아낙”과 “르바임”이 네피림의 후손이라 칭해지고 있다. “아낙”에 관해 모세의 책을 보자:
거기서 우리는 네피림을, 네피림으로부터의 아낙 후손들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아도 메뚜기(grasshopper)들 같았고, 그들이 보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민. 13:3).
그들이 르바임이라 불리운 것도 모세의 책에서 나타난다:
엠족속이 모압 토지에서 전에 거주했는데, 이들은 크고, 많고, 그리고 아낙같이
키가 컸는 바, 이들은 아낙족속으로, 르바임족속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모압족이 그들을 엠족이라 불렀다 (신. 2:10-11).
네피림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르바임은 예언서에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아래쪽 지옥이 너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다, 오고 있는 너를 만나려고 해서이다,
그것은 너를 위하여 르바임을 휘저었다 (이. 14:9),
위 구절은 (네피림 비슷한) 영들의 거처인 지옥에 관해서 이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너희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방문하시어 그들을 파괴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기억이 멸해지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26:14),
위 구절 역시 지옥이 언급된다, 이로부터 그들은 다시는 더 일어나지 못한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당신의 죽은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당신의 시체,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깨어나 노래하라, 먼지 안에 거주하는 너희들아, 그 이유가 풀잎들의 이슬이 당신의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르바임의 토지로 내쫓을 것입니다 (이. 26:19);
“르바임의 토지”는 위에서 언급한 지옥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죽은 자에게 경이로움을 보이시렵니까? 르바임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들이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까? (시. 88:10),
위 구절 역시 마찬가지 방식에서 르바임의 지옥에 관해 말하는데, 그들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 그런고로 그들의 설득력으로부터의 끔찍한 독을 가지고 영들의 세계에출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이런 끔찍한 공상과 설득력에 물들어버리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도록 섭리해 두셨다. 홍수 이전 살았던 이들이 이런 본성과 천성을 지녔는 바, 그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것에 물들어지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 알려진 바 없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927항)에서 살핀다.

그 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들에게 낳았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물들을 침수시켰을 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2절의 “하느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딸들”은 그리워함들이다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에 의해서 생산된 출생들은 빛을 만들어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것 밖에 더 없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으로부터의 것인 바, 모두 거룩하고 참된 것에 반대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 안에서 그리워함들이 득세하는 상황이어서 거룩하고 참된 것, 그리고 이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마저 그리워함 안에 침수시키는 바,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나 있다. 그 이유가 그리워함은 인간에게서 뿌리뽑혀 질 수 없고 분리됨도 불가능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워함(yearning)은 (우리가 가지는) 모두 각각의 생각(idea)에 꽉 달라붙어 있다. 다른 삶의 경우에서도 서로가 교통하는 수단은 바로 생각(idea)이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산출되면, (그리워함으로 인해) 그 즉시 모독하고 거짓인 것이 이 참된 생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들은 분리되어져야만 하고 지옥 맨 아래로 내쳐져야 한다.

네피림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용사”라 불린다는 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의 용사들은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채 안에 앉아 있다,
그들의 기력은 떨어진다, 그들은 여인들 같이 되어간다 (예51:30),
위에서 “바벨의 용사‘는 자기를 사랑함을 가지고 먹어치운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검이 거짓말쟁이를 향하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미쳐 있을 것이다,
검이 그녀의 용사를 향하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낙담될 것이다 (예.50:36).
나는 낙담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더니, 그들의 용사들이 산산조각나
있었다, 그리고 되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느라 급급했었다; 두려움이 (용사를) 빙둘러
있었다; 발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고, 용사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올라오라,
너희 말들아, 그리고 격노하라, 너희 병거들이여, 그리고 용사들은 앞으로 나아가라,
구스인이여, 붓인이여, 루딤인(Lydians)들이여 (예. 46:5-6, 9),
추론함들로부터 있는 설득력에 관해서이다. 다시:
우리는 용사이다, 전쟁을 위한 강함의 사람들이다 말하는데 어찌된 것이냐?
모압은 황폐해져 있다 (예. 48:14-15).
성이 점령당하고, 그리고 튼튼한 성채가 사로잡혀졌다, 그리고 그 날에
모압의 용사의 심장은 산고로 괴로워하는 여인의 심장 같이 되어 있다 (예.48:41).
마찬가지로 말해진다:
에돔의 용사의 심장 (예. 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으로부터
그에게 앙갚음하셨다 (예. 31:11),
위에서 “힘 셈(mighty)”이 (히브리어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져 있다. 네피림으로부터 있는 아낙족속이 “용사”라 불리우는 것이 모세의 책에서 보여진다:
너희는 너희보다 더 크고 더 숫자도 많은 민족들을 소유하러 가기 위해 오늘
요단을 건너라. 그들의 성들은 크고 견고하며 하늘에 닿고 있다. 사람들은 크고
키가 큰데, 아낙의 후손들이다. 너희는 그들을 안다, 그들에 관해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다; 아낙의 후손 앞에 설 자 누가 있느냐? (신. 9:1-2).

5절.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 번창했고, 그리고 그의 심정 속의 생각의 모든 상상들이 매일 악할 뿐임을 보셨다.
“여호와께서는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서 번창했음을 보셨다”란 선한 의지가 없어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심정 속의 생각의 모든 상상은 매일 악할 뿐이었다”란 참됨과 선에 관한 지각이 없었다를 의미한다.

사람 속의 악이 땅 위에서 번창했다란 선한 의지가 없음이 시작되었다가 의미된다. 이는 위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즉 어떤 의지도 더 이상 없고, 탐욕만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땅에 있는 사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글자 의미에서 “땅”은 인간이 있는 곳이다. 내적 의미에서는 사랑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사랑이 의지 속에, 또는 탐욕 속에 있는 바, 땅은 인간의 의지 자체를 뜻하기 위해 취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앎이나 이해함으로부터보다는 뜻함으로부터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 이해한 것 역시 결국 의지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뜻하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고 있을 때, 여전히 말이나 행동과는 멀리 떨어져 그를 통치하는 의지의 어떤 것이 있다. “가나안의 토지”, 또는 “거룩한 토지”가 사랑을 표시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천적 인간의 의지를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족들의 토지도 그것들의 사랑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는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바, 여기서는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살핀 것과 본문을 연결해서 나타나는 것은, “땅 위 사람의 악”에 의해 그의 자연적 악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지 속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불어났다”라고 말해진다. 이는 모든 것이 타락된 후에 그 타락된 것이 불어났다가 아니라 처음에는 그들이 타인을 위해 선을 원했다는 것, 이것이 차츰 자신들을 위한 선의 섞임이 불어난 것이다; 뒤집힘이 완성된 것이 “심정의 생각들의 상상”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심정의 생각들의 상상이 날마다 오직 악 뿐이었다란 진리와 선을 지각함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하고 보여준 바 대로, 그들은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함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켰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지각을 상실하게 해버렸다, 그리고 지각의 자리를 무서운 설득력이 꿰찾다, 즉 , 최고로 깊이 뿌리박혀 치명적인 공상이 자리를 차지했는 바, 이는 소멸과 질식됨의 원인이었다. 이런 치명적인 설득력이 “심정의 생각들이 상상하는 것”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 말에서 “생각들”을 빼내고 문장을 연결하면 “심정의 상상들”이 되는데, 이는 자기를 사랑함, 또는 그리워함으로부터의 악이 의미되어진다. 이것이 8장에서, 노아가 태워바치는 제물을 드린 후 여호와께서 말하신 것, “나는 인간 때문에 다시는 지면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의 상상은 그의 어릴적부터 악하였기 때문이다”에서 나타난다 (창8:21). “상상(imagination)”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안하는 것이다. 이것 가지고 인간은 자신을 설득한다; 하박국서를 보자:
새긴 우상은 조각자가 만든 것인데 그것이 네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도 주조자가 벙어리 우상을 만들고저 자기 상상에 의지한 것이니
그것도 거짓말하는 선생이 아니더냐? (합. 2:18),
“새긴 상”은 누군가의 자기(self)를 수단으로 임신되고 부화된 원리들을 근원으로 하는 거짓된 설득력들을 의미한다; “새기는 자(fashioner)”는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는 자이다. 이 “상상”이 이 사람이라 단언된다. 이사야서에서:
오 너희의 외고집이여! 옹기장이를 진흙이라 여기고, 옹기 그릇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그리고 모양 지음을 받은 것이
그것에 모양을 준 자에게, 그는 총명이 없다 말해도 되는 것이냐? (이. 29:16)
위 구절에서 “모양 지음을 받은 것”이란 인간의 자기 자신에 근원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설득력을 의미한다. “모양 지음을 받은 것” 또는 “상상된 것”, 일반적으로 인간의 심정, 또는 의지로부터 창안한 것이다. 다윗서로부터: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방식(fashioning)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먼지 임을 기억하신다 (시.103:14).
모세의 책에서:
나는 내가 그를 토지 안으로 데려오기 앞서
오늘날 그가 하는 그의 상상을 알고 있다 (신. 31:21).

6절.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 그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심정에서 몹시 슬퍼하게 했다.
“그분이 후회하셨다”란 자비(mercy)를 의미한다. “그분이 심정에서 슬퍼하셨다” 역시 자비를 의미한다. 단지 “후회”는 지혜 쪽과 관련이 있고, “슬퍼함”은 사랑 쪽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되게 했다는 것은 자비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심정에서 슬퍼하셨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바,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는 결코 회개하시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그분은 일반적, 세부적으로나 모든 것을 영원으로부터 미리 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즉 사람을 새로이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그가 천적 수준의 인간이 될 때까지 그들을 완전하게 하셨을 때, 역시 그분은 시간의 과정에서 인간이 여기서 묘사된 바 같은 식으로 되어가리라는 것도 미리 보셨다. 이렇게 그분은 미리 보셨기 때문에 그분은 후회하실 수 없었다. 이것이 사무엘이 말한 대목으로부터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무적이신 분은 거짓말 하시거나 후회하시거나 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삼상.15:29).
그리고 모세의 책에서:
하느님은 거짓말해야 할 사람이 아니시다, 또는 회개를 해야 하는 인간의 아들도
아니시다; 그는 말하셨고, 행하지 아니하셨더냐? 또는 그분이 말하셨는데, 그리고
그분께서 그것을 선한 쪽으로 만드시지 않더냐? (민. 23:19).
그러나 “회개하는 것”은 자비 있으심을 의미한다. 여호와, 또는 주님의 자비에는 인류를 향하여 주님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 인류는 주님께서 그들 각각의 상태에 따라 불쌍히 여겨 주어야 하는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처벌받게 허용한 인간의 상태를 불쌍히 여기신다, 또한 선을 즐기도록 수여해준 자도 불쌍히 여기신다; 처벌되어지는 것도 주님의 자비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자비는 처벌 속의 모든 악을 선 쪽으로 선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향유하게 수여하는 것도 자비로부터 있다, 그 이유는 선인 어떤 것이 자신의 공적 때문이라 할 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인류는 악하고, 인간 스스로부터서는 모두가 지옥행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행에서 건져짐을 받는 것도 자비로부터 있다; 자비는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건지고, 지옥으로부터 건진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의 이름을 가진다; 이것이 인간에 관련하여 자비라 불리우는 이유는 인류 모두가 불행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자비는 그들 모두를 향한 사랑의 결과이다.

“후회하시고”, 그리고 “심정에서 슬퍼하시는 것”이 주님의 속성이라 단언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자비에서 그와 같은 느낌이 일도록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러하도록 “후회함”, “슬퍼함”이 외관에 따라 말해진다. 이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의 나타남이 등장한다. 주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자비는 인간의 이해력을 무한하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비가 무엇인지는 후회와 슬퍼함에 있다고 우리는 안다; 인간은 자신의 납득력에 따라 자비에 관한 그의 생각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는 그것에 관한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그는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다; 이것이 왜 인간의 고유성(property)이 주님, 또는 여호와의 속성(attribute)이라 단언되는가의 이유이다. 그래서 마치 인간이 하는 것, 벌 주고, 시험에로 인도하고, 파괴하고, 성내고 하는 것들을 주님도 하신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누구를 처벌하신 적이 없으시고, 누구를 시험 가운데 인도하신 적도 없고, 결코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으시며, 성내신 적도 한 번도 없으시다. 주님의 속성이 이러함에도, 후회함이나 슬퍼함이 그분의 속성이라 단언함이 이어진다; 그 이유는 이쪽의 단언이 다른 쪽의 단언을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 구절로 이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에스겔서에서:
내 성냄이 극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내 분노를 쉬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후회하게 할 것이다 (겔. 5:13).
위에서 “성냄”, “분노”가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후회함” 역시 서술되어진다. 스가랴서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 조상들이 나로 성내도록 하였을 때, 내가 악을
행하기로 생각하였고,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다시 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집에 선을 행하려 생각하고 있다 (슥. 8:14-15).
위 구절에서 여호와께서 “악을 행하시려 생각했다”고 말해지나 그분은 누구에게나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두에게, 각각의 사람에게 선을 베푸신다. 모세의 책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얼굴의 참으심을 간구했을 때:
당신의 성내심의 분노로부터 돌아서소서, 그리고 이 백성을 향한 이 악을
당신께서 후회하소서;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백성에게 행하려 말하신 것을
후회하셨다 (출.32:12, 14).
위에서 “성내심의 분노”가 여호와의 속성이다, 그리고 “후회하심”도 그분의 성내심의 결과이다고 표현되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왕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돌아서시지 않고 후회하시지 않을지, 그리고
그분의 성내심의 화로부터 돌아서시고, 우리를 멸하시지 않을지 누가 아느냐? (욘. 3:9).
위 구절도 앞의 인용구절과 비슷하다. “후회하심”이 “성내심”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된다.
호세아서에서:
내 심정이 내 내부에서 돌아섰다; 나의 후회함들이 함께 불켜졌다;
나는 나의 성냄의 분노를 집행하지 않을 것이다 (호. 11:8-9);
위 구절 역시 “후회함들이 불켜진” 심정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이는 본문에서 그분은 “심정에서 슬퍼하셨다”와 같은 맥락이다. “후회하심”은 큰 자비를 표시함은 요엘서를 보면 명백하다:
여호와 네 하느님에게 돌아서라; 그 이유가 그분은 은혜로우시고 동정심이 많으시다,
성내심은 느리고 자비는 풍부하시다, 그리고 악에는 후회하신다 (욜. 2:13);
위에서 “후회”는 자비를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도 보자: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모두가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그것은 나로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던) 악을 후회하게 할 것이다 (예. 26:3),
위 구절은 자비를 가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만일 이 민족이 그들의 악으로부터 돌아서면,
이것은 나로 (그들에게 내리려던) 악을 후회하게 할 것이다 (예.18:8);
위 구절 역시 그들이 돌아서는 조건에서 “회개”는 자비를 표시한다. 주님의 자비가 자기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는 정작 인간 자신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자비를 베푸시기를 철회하신 적이 없으시다.

위의 인용 구절, 내지 수많은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appearances)에 따라 기록되어졌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말씀에 기록된 글자를 근거 삼아 들이대어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는 아주 쉬운 작업이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말씀을 수단으로 거짓 원리들을 확증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을 순박하게 믿는 것이다. 거짓 원리를 확증하는 자의 경우, 첫 번째 작업은 자기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원리, 즉 절대 양보 못할 원리 원칙을 가정해 세워둔다. 그 다음 이 원리들을 확증해줄 만한 것들을 어디서이든, 특히 말씀으로부터 긁어모우고, 축적해둔다. 그리하여 그 자신 더 이상 진리를 찾을 데가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할 때까지 축적해간다. 그러나 단순 소박하게 믿는 자의 경우, 그는 물러서지 않을 원리를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놓고 이 말씀은 진리이다고 주님이 말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이해함을 증진시켜 확실한 가르침을 얻을 때, 묵묵히 따르며 그의 심정은 기쁨으로 가득해 있다. 단순 소박하게 믿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은 성내시고, 처벌하시고, 후회하시고, 슬퍼하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악을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며, 해를 받지도 않는다; 그 이유가 이 믿음이 그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신다를 믿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신앙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서 계발되는 기회를 얻지 못하면, 다른 삶에서 계발되어진다. 이와는 아주 다른 경우가 있다. 자기가 이미 설정해 놓은 원리들로부터 연역하여 나와지는 어떤 것을 자신이 믿어지게 설득하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흠취된 이들의 경우이다.

“후회하심”이 지혜와 관계가 있고, “심정에서 슬퍼하심”은 사랑 측면에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수준에 일치되는 것이 아닌 이상, 즉 외관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인간의 납득력에 설명되어질 수는 없다. 인간 안에서 생각함 속의 모두 각각의 관념 안에는 이해함으로부터와 의지로부터의 어떤 것, 또는 그의 생각함과 그의 사랑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있다. 관념(idea)이 그의 의지 또는 사랑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그것은 관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의지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함과 의지 사이에는 파기할 수 없는 영구적인 결혼 같은 것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각함의 관념 안에는 그의 의지 또는 그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이 본시 가지고 태어나기라도한듯 점착되어 있다. 인간에 있는 이런 상태로부터 인간은 주님의 자비, 즉 지혜와 사랑 안에 포함된 것을 놓고 마치 알고 있는듯, 아마 오히려 그에 관한 어떤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듯 착각한다. 고로 예언서들, 특히 이사야서에서, 모든 것에 관련해 이중적 표현들을 사용하는 곳이 의외로 많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이쪽 표현이 영적 (평면)인 것을 서술하면, 다른 쪽 표현은 천적 (평면)을 서술하려는 때문이다. 주님의 자비의 영적 평면은 지혜이고; 천

7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내가 지면의 얼굴에 창조했던 사람을 파괴하리라. 사람과 짐승, 기는 것들, 하늘의 새를 파괴하리라. 그 이유는 나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나는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소멸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즉 벌하시고, 시험하시고, 악을 행하시고, 파괴하고 죽이고 저주하시는 것이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같이 표현됨에 관련하여 설명한 대목을 다시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창세기 38:7, 10절에서, 그분은 유다의 첫 출생 엘을 죽이셨다; 그리고 유다의 또 다른 아들 오난도 죽이셨다;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첫 출생 모두를 죽이셨다 (출. 12:12, 29).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나의 성냄과 나의 분노에서 그들을 죽였다 (예. 33:5).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성냄의 분노에; 격한 성내심에,
그리고 격노하심과 곤경에 내던지고, 악한 천사들을 보내신다 (시. 78:49).
아모스서에서:
악한 일이 성에 발생하는데, 여호와께서 이것을 하시지 않았겠느냐? (암. 3:6).
계시록서에서:
일곱 금빛의 대접이 영원히 사시는 하느님의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계. 15:1; 16:1).
위 모든 구절에서 하는 말은 비록 그분의 본래의 모습과는 반대일지라도 어쨌든 여호와를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반대적으로라도 서술되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아주 일반적인 관념을 만들어 줄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악한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더군다나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자신 위에 악을 가져오는 것은 인간 본인이다는 것, 하여 자신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이 인간 자신임을 배운다. 설사 이것이 당사자가 직접적으로 자초하지 않은듯 해도 그를 흥분시키고 유도하는 악령의 짓임을 배운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 자신이다, 그 이유는 그가 믿기 때문에 그가 행위자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나는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여호와께서 말하시는데, 사실상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고 소멸되게 한다.
이런 모습은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내린 처벌을 계속 애석해 하고 처벌의 모든 악을 주님께 그 탓을 돌리고 있다.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처벌하는 일을 자기의 즐거움이자 가장 큰 기쁨으로 만드는 자도 흔하다; 게다가 이 짓을 하는 자들은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악의 어느 한 조각도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다는 것, 처벌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여진다; 그 이유가 악이 악을 행한 자에게 되돌아 오는 공평(equilibrium)의 법칙이 다른 삶에서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해서 악의 처벌이 있다. 누구도 이것에서 예외는 없다. 이것은 악의 수정됨을 위하여 허용된다고 말해진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처벌의 모든 악을 선으로 되돌리신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나가는 것은 선밖에 어떤 것도 없게 된다. 허용(permission)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왔다; 허용된 것은 허용한 그분에 의해 행해져 있다고 믿어진다. 그 이유는 그분이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아주 딴 방법으로 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2447항 참조).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의 얼굴 위로부터. 이 사람은 태고 교회의 후손으로부터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말해온 것들로부터, 즉 그분이 “창조”한 사람, 즉, 그분이 거듭나게 한 사람; 그리고 그 후에 그분이 “만든” 사람, 즉 완전해진 사람, 또는 천적 수준이 될 때까지 거듭난 사람으로부터 분명해지고; 뿐 아니라 그것의 존재로부터, 즉 “지면의 얼굴 위로부터”에서도 분명해진다. “지면”은 교회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와 똑 같은 것이 자기들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들을 침수시킨 이들이 취급된 사실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그렇게 침수할 수 없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은 진리와 선에 무지해 있다. 어쩌면 이런 무지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순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들은 과거 어릴적 자신들이 양육되어온 것, 그때부터 진리와 선이라고 믿어왔던 것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어떤 열정으로부터 행동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를 확실히 가진 이들의 경우는 이와는 딴판이다. 이들은 진리를 거짓들에 섞을 수 있다, 거룩한 것을 모독된 것과 뒤섞을 수 있다. 이들에게 다른 삶에서 거주하게 할당된 영역은 이방인들이라 불리는 이들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다. 이들에 관해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 모두, 그리고 기는 것. 이 대목이 의지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소멸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 “짐승”, “기는 것”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은 오로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서만 인간이고, 이를 수단으로 야수로부터 구별된다; 그 외 여러 측면에서는 인간도 야수들과 비슷한 것이 많다. 본문의 사람들의 경우, 선을 뜻함과 진리를 이해함 모두가 멸하여졌다. 선을 뜻함을 대신하여 광기의 그리워함이 있었다. 진리를 이해함을 대신하여 비상식적인 공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들의 그리워함과 뒤범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리메인스는 마치 파멸된 것처럼 있었는 바, 그들은 소멸될 수 밖에 없었다. 의지로부터의 모든 것들이 “짐승들”과 “기는 것들”이라 불리운다는 것은 짐승과 기는 것들을 살핀 앞의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는 인간의 특성인, “짐승”은 선한 애착을 의미하지 않고, 악한 애착을, 결과적으로 그리워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는 것들”에 의해서는 육체적, 감각적인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이미 살핀 바 있어 생략한다.

하늘들의 새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 즉 생각함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을 의미한다. 이는 앞 1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8절.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했다.

“노아”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새로운 교회는 홍수 이전의 교회인 태고 교회와 구별되도록 고대 교회(the ancient church)라 불리우는 바, 고대 교회는 홍수 이후에 있는 교회이다. 위 두 교회들의 상태는 전적으로 달랐다. 태고 교회는 선을 지각하고, 이 지각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가지는 방식이었다. 고대 교회의 상태, 또는 “노아”는 그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양심(conscience)을 가지는 방식이었다. 이는 지각을 가짐과 양심을 가짐 사이의 차이와 같다고 말해도 무난하다. 더불어 태고 교회와 고대 교회의 차이라 규명해도 하자가 없다. 지각(perception)은 양심이 아니다; 천적 평면(the celestial)은 지각을 가진다; 영적 평면(the spiritual)은 양심을 가진다. 태고 교회는 천적(celestial) 수준이었고, 고대 교회는 영적(spiritual) 수준이었다.
태고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가졌다. 그 수단은 영들과 천사들과 한 식구 됨(consort)으로 해서, 또한 환상들과 꿈들로 해서 였다. 이를 통해서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일반적 지식을 획득한 후, 이러한 이끌어가는 일반적 원리들은 지각들을 수단으로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에 의해 확증되어졌다; 그리고 이 무수한 것들은 일반적 원리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특별 항목, 세부 사항이었다. 그런고로 날이 가면 갈수록 이끌어가는 일반적 원리들은 늘어나는 세부 항목들로 해서 더욱 확실한 원리임이 확증된다; 그들은 일반적 원리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아니다고 지각했다; 그 반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맞다고 지각했다.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이런 품성을 지니고 있다.
태고 교회의 일반적 원리들은 천국의 진리들이고 영원한 진리들이다. 이러하다; 주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 죽어있다는 것; 이와 유사한 많은 다른 품성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진리들을 받쳐주고 확증하게 하는 수도 없는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지각으로 받았다. 그들과 더불어 사랑은 신앙의 제 1 원리였다. 사랑을 수단으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각하도록 주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로 인해 그들과 더불어 신앙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란 주님께서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을 예견하셨음을 의미한다. 주님의 자비에는 온 인간 종족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고, 주시하시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은총(grace)”의 경우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인간 종족의 구원이 의미되고 있다. “노아”는 새로운 교회,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신앙도 의미한다. 이 신앙은 선행(charity)으로부터 있는 신앙이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통하여 인류는 구원되어질 것임을 예견하신 것이다 (이 신앙은 차 후 살핀다).
말씀에서 단어 “자비”와 “은총” 사이에 구별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받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도 일치한다; “자비”는 천적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되고, “은총”은 영적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된다.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은 자비 밖에, 영적 평면은 은총 외에 거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은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적 평면은 자비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천적 평면은 자비만 존재하고 영적 평면은 은총만 존재한다. 이 둘은 각기 다른 겸손(humility, 부끄러워함, humiliation)을 바탕으로 하여 있다. 심정의 겸손함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자비를 빈다(beg); 그러나 생각함의 겸손함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구한다(seek); 그리고 만일 후자들이 자비를 간구(pray)한다면, 시험의 상태, 또는 입만 가지고 행하여지는 상태에 있을 경우이다. “노아”라 불리는 새 교회는 영적 수준이지 천적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의 눈에서 “자비”를 발견하였다가 아닌 “은총”을 발견하였다고 말해진다.
말씀에서도 “자비”와 “은총”에 구별이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시편 103:8; 11:4; 145:8; 요엘 2:13). 이런 구별이 있는 구절을 몇 군데라도 찾아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검을 놔두고 간 백성들이 광야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스라엘에게 휴식을 주러 갔을 때이다. 여호와께서
멀찍이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했다;
그러므로 자비 안에서 나는 너를 이끌었었다 (예. 31:2-3),
위 구절에서 “은총”은 영적 평면을 서술하고 “자비”는 천적 평면을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너희 위에 자비를 가지도록 자신을 드높이신다 (이. 30:18).
위 구절 역시 “은총”은 영적 평면을 주시하고, “자비”는 천적 평면을 주시한다. 이와 비슷한 대목이 롯이 천사에게 말하는 구절이다:
당신의 종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비를 크게 만드셔서 당신께서는 제 혼이 살아있게 만들고저
저와 함께 작업하셨습니다 (창. 19:19).
“은총”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또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에 관련된다는 것은 위 구절에서, “당신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자비”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의지로부터 있는 천적인 것들에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천사에게 “작업한 자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혼을 살아있게 만들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진 것에서 분명해진다.

9절. 이것들은 노아로부터의 출생들이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노아의 출생들”에 의해 새로운 교회로 재구성 또는 거듭남에 관한 특징 열거가 의미된다. 이는 창. 2:4; 창. 5:1에서 살핀 바에서 분명해진다.

노아는 그의 세대에서 올바른 자요 완전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선행을 수여받아질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이는 “올바름”이 선행으로부터의 선에 관련을 가지고, “완전함”은 선행으로부터의 진리에 관련된다는 것으로부터, 또한 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선행이다는 점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올바름”이 선행의 선에, “완전함”이 선행의 진리에 관련됨을 이사야서로부터 보자:
그들은 내 길들에 관한 지식을 날마다 구하고 바랄 것이다, 마치 정의를 행하고
자기들의 하느님의 공정을 버리지 않는 민족들 같다; 그들은 나에게 정의의 판결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의 접근을 갈망할 것이다 (이. 58:2).
여기서 “공정”은 진리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정의”는 선으로부터 있는 이들이다. “정의와 공정을 실행함”은 참되고 선한 것을 행함을 위한 설립된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 (이. 56:1; 예. 22:3, 13, 15; 23:5, 33:14, 16, 19도 참조). 주님께서 말하셨다:
정의로운 자는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태양 같이 빛을 낼 것이다 (마. 13:43),
“정의로운 자”는 선행을 수여받는 자를 뜻한다. 시대의 종말에 관하여 그분은 말하셨다:
천사들이 나가서 의로운 자 사이에서 사악한 자를 떼어낼 것이다 (마. 13:49).
위에서도 역시 “의로운 자”는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완전함”이 선행으로부터 있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진리는 또 다른 많은 근원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이 “완전함”, 또는 “완전한 사람”이라 불리우고 있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천막에 누가 체류할 것입니까? 당신의 거룩함의 산에 거주할 자 누구입니까?
완전함에서 걷는 자, 정의를 일삼는 자, 그리고
그의 심정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시. 15:1-2).
“완전한” [또는 완벽한] 사람이 여기서 묘사되어진다. 다시:
거룩한 자에게 당신께서는 거룩한 당신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완전한 사람에게
당신은 완전한 당신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 (시. 18:25),
위에서 “완전한 사람”은 거룩함으로부터 그렇게 있는 자, 또는 선행의 선이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께서는 완전함 안에서 걷는 그들로부터 선을 보류하시지 않는다 (시. 84:11).
“완전한 사람”은 선으로부터 진리인 자, 또는 선행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자이다는 것은 “걷다”와 “길”이 완전인 것, 즉 온전함(wholeness, entirety)에 자주 적용된다는 것에서, 또한 진리에 속해있는 단어, “직바름(uprightness)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윗서를 보자:
나는 완전한 자에게 그가 나에게 오는데 얼마나 먼 길인지를 가르칠 것입니다.
나는 내 심정의 완전함 안에서 내 집 안에서 걸을 것입니다 (시. 101:2),
그리고 제 6절에서:
완전함 안에서 걷는 자가 나를 섬길 것입니다 (시. 101:6).
길에서 완전한 자, 여호와의 법 안에서 걷는 자는 복되다 (시. 119:1).
완전함과 직바름이 나를 지킬 것이다 (시. 25:21).
완전한 자에 주목하고 직바른 자를 주시하라, 그 이유가
이 사람의 끝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시. 37:37).
위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의로운 자”라 불리는 자는 선인 것을 행하는 자, “완전한 자”라 불리는 자는 진리인 것을 행하는 자이다는 것, 이것들 역시 “정의 와 공정”을 행하는 것이다. “거룩함”과 “정의로움”은 신앙의 천적 수준이다; “완전함” 그리고 “공정함(judgement)”은 천적 수준에서 파생된 영적 수준이다.

“세대들”이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신앙 발달의 단계들)이다는 것은 역사적인 것인 글자 의미로부터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내적인 것만을 다루는 바, 신앙의 세대들이 의미되었다. 이것은 또한 세대들이 다른 말들과 연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이사야서에서:
너로부터 있을 자들이 옛 것의 황폐된 장소를 건설할 것이다; 너는 대대로의 기초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리고 너는 파괴함을 수리하는 자라,
작은 길들을 거주하도록 회복하는 자라 불러질 것이다 (이. 58:12).
이 모든 것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옛 것의 황폐된 장소”란 신앙 속의 천적인 것들; “대대로의 기초들”은 신앙 속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고대 시대로부터 소멸되어 왔다.
다시:
그들은 옛 황폐된 것들을 건설할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황폐된 것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황폐한 성들, 대대로의 황폐된 것들을 새로이 할 것이다 (이. 61:4);
이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헛되이 노동하지 않을 것이다, 곤경을 위해 산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은 자손도 (그러하다) (이. 65:23).
위에서 “산출함(bring forth, generare)”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노동함(labor)”은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사랑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씨”이고; 신앙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그들은 “자손”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걷는 것”이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지난 번, 에녹 (창. 5:22, 24)을 살핀 대목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에녹을 두고,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 하고 말해진다. 이는 후손의 사용을 위해 보존된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 후손이 바로 지금 거론되고 있기에 이 구절에서도 같은 어구인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교회 사람의 품질이 9절에서 일반적 수준에서 묘사되어 있다. 엄밀히 구분하면 이 교회는 아직까지는 이 구절 그대로와 같은 수준은 아니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의 형성(formation)이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수준이 되어간다는 것; 즉 신앙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는 선행을 수여받아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행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선으로부터 진리인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문구 역시 선행의 선, 즉 올바른 자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선행의 진리, 즉 완전한 자가 뒤이어진다. 선행, 이미 말한 바대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그리고 이는 태고 교회의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보다 낮은 수준의 사랑이다. 그런고로 지금은 외적인 쪽으로 더 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랑이 아닌) 선행이라 불리어진다.

10절. 그리고 노아는 세 아들들, 셈, 함, 야벳을 낳았다.

노아는 세 아들들을 낳았다. 이는 거기로부터 세 종류의 교리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이름들의 의미를 살핀 곳에서, 이름들은 교회, 또는 교리들 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음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이 세 이름들은 주님께서 이 천성을 지닌 사람이 선행을 수여받을 수 있다는 예견하심의 연결 차원에서 언급될 뿐이다. 이 세 교리는 차 후 셈, 함, 그리고 야벳을 취급하는 곳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기술될 것이다.

“노아는 의롭고 완전하였다”는 것, 그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는 “세 아들들을 낳았다”는 것, 모두가 과거 시제에서 말하여진다, 그럼에도 이 표현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는 시간과 관련 없음을 알게 해줄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표현법을) 원어에서는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원어에서 때때로 한 개 그리고 같은 단어가 (시제가 바뀔 경우)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어떤 시간대나 무엇이든지에 응용한다. 그 이유는 이를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것을 내적 의미로부터 끌어내는 바, 이것은 누군가가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하다; 그러므로 이 언어 표현은 시간이나 구별함에 의해 제한받아짐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11절. 그리고 땅은 하느님 앞에서 부패되어 있었다. 그리고 땅은 폭행으로 채워져 있었다.

“땅”이 종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땅과 지면의 의미를 살필 때 언급된 것에서 분명해진다. “땅”은 말씀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이 단어를 수단으로 주님의 진정한 교회가 있는 “토지(land)”가 의미되어진다, 즉 “가나안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또한 교회가 있지 않은 “토지”도 있다. 즉 이집트, 또는 이방인들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거기 거주하는 종족이 표시된다. 이것이 종족을 표시하는 바, 마찬가지로 거기 거주하는 종족 속의 모든 이도 표시한다. 교회는 천적 사랑으로부터 “토지”라 불리워진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불순한 사랑들로부터는 “이방인들의 토지”라 불리운다. 그러나 이식되어진 신앙으로부터 “지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토지나 나라는 지면을 담는 그릇이고, 지면은 들판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신앙을 담는 그릇이고, 신앙은 이식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담는 그릇이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땅”은 천적인 사랑의 모든 것과 교회의 모든 것이 멸해진 종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땅이 그들의 끔찍한 설득력들 때문에 “썩어지고”, 더러운 그리워함 때문에 “폭행으로 차있다”라고 말해진 것은 동사 “썩다”와 단어 “폭행”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이 말이 저 말을 위해 가져다 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문장의 표현이 한결같도록 서술하는 단어만으로도 내적 의미까지 즉시 나타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사용한 단어 “썩다”와 “폭행”이 그 한 예이다. “썩다”는 그것이 황폐해질 때 이해함 측면의 썩음이고; “폭행”은 그것이 황폐할 때 의지 측면의 폭행이다. 고로 “썩은 것”은 설득력들을 서술하고, “폭행”은 그리워함들을 서술한다.

“썩은 것”이 설득력들을 서술하는 것은 이사야서로부터 분명하다:
그들은 내 거룩함의 모든 산에서 다치지 않을 것이고, 썩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이 여호와의 지식으로 가득해 있기 때문이다 (이. 11:9);
그리고 이사야서 65장 25절에서도 “다치는 것”은 의지에. 또는 그리워함에, “썩은 것”은 이해함에, 또는 거짓의 설득력들에 관계되고 있다. 다시:
죄지은 민족, 불법을 일삼는 백성들, 악행 자들의 씨,
썩은 자인 아들들에게 화가 있다 (이. 1:4).
위에서,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도, “민족” 그리고 “악행 자들의 씨”는 의지, 그리워함으로부터 있는 악들; “백성들” 그리고 “썩은 자인 아들들”은 이해력, 또는 설득력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이다.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네 모든 길들에서 그들보다 더 썩었다 (겔. 16:47).
위에서 “썩다”는 이해함, 또는 추론함, 또는 생각함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길”은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그들은 썩은 것을 행했다, 그리고 역겨운 일을 행했다 (시. 14:1).
위에서 “썩은 것”은 끔찍한 설득력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역겨운”은 일 안에 있는 더러운 그리워함을 표시한다, 이 그리워함으로부터 일이 진행되어진다. 다니엘서에서:
62주에 메시아가 중단하실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에게 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백성은 도성과 성소를 썩게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홍수와 더불어 있을 것이다 (단. 9:26).
위 구절 역시 “썩다”는 거짓인 것으로부터의 설득력, 이로부터 “홍수”가 서술되어진다.

땅은 폭행으로 가득찼다. 이렇게 말해진 것은 그들의 더러운 그리워함들 때문에, 자기를 사랑함, 또는 과도한 거만으로부터 와지는 것들 대부분 때문임은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으로 그것들에 폭력을 휘두를 때, 마치 홍수 직전 사람들이 갖가지 종류의 그리워함 안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해버린 경우 같을 때, 이를 두고 “폭행”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내 얼굴을 나는 그들로부터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거룩한 [장소]를
모독할 것이다, 그리고 강도들이 내 거룩한 장소 안으로 들어가서 거룩함을
모독할 것이다. 사슬을 만들어라; 그 이유는 토지는 피들의 심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성은 폭행이 가득하다 (겔. 7:22-23).
“폭행”은 위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서술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서술한 것과 같다는 것을 서술한다. 다시:
그들은 고독함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막함에서
자기들의 물들을 마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토지는 그것의 충만함으로부터
황폐될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거기 안에 거주하는 그들 모두의 폭행 때문이다
(겔. 12:19).
“그들이 고독함에서 먹을 빵”은 천적인 것들, 그리고 “그들이 적막함에서 마실 물들”은 영적인 것들, 이것들에 그들은 폭력을 가하고 모독해버린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직물들은 의복들로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들 안에서
덮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그리고 폭력의 행위가
그들의 손에 있다 (이. 59:6).
여기서 “직물들” 그리고 “의복들”은 이해함으로부터의, 즉 생각함으로부터의 것들; “불법” 그리고 “폭력”은 의지, 즉 일들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하고 있다. 요나서에서:
모든 이 각각은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자기 손에 있는 폭행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라 (욘. 3:8),
위에서 “악한 길”은 거짓들을 서술하고, 이는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폭행”은 악들을 서술하고, 이는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소문이 일 년 안에 올 것이다, 그리고 토지 안에 폭행 (예. 51:46).
“소문”은 이해함으로부터 있는 것들, “폭행”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폭행을 가한 적이 없다, 그분의 입에서 어떤 사기침도 없었다 (이. 53:9).
위에서 “폭행”은 의지로부터의 것을; “그분의 입에 있는 사기침”은 이해함으로부터 것들을 표시한다.

(진정한) 교회가 있지 않은 상태가 이 대목에서 취급된다는 것은 앞 절의 경우, 단어 “여호와”가 사용되다가, 이 구절 그리고 이 장의 이어지는 구절에서 단어 “하느님”이 사용되기 때문에서 알게 된다. 교회가 있을 경우, “여호와”가 사용되는데, 창세기 첫 장 같이 교회가 없을 경우, 하느님이, 제 2장에서는 교회가 있었는 바, “여호와 하느님”이 사용되고 있다. 이름 “여호와”는 가장 거룩하다, 그리고 교회에 만 속해 있다; 그러나 이름 “하느님”은 가장 거룩하다고 까지 할 만큼 거룩하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하느님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누구도 이름 “여호와”를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 “하느님”은 누구라도 말할런지 모른다.

12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그리고 들여다보니 그것은 부패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땅을 보셨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이 이런지 저런지 보실 필요도 없으셨다는 말도 된다. “보는”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온 6절이나 그 밖의 경우에서 말씀은 인간이 “보는” 것에 일치되어 말해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하느님께서 “눈을 가지고 보신다”라고 까지 (인간 바닥 수준에서) 말해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육체가 땅에서 그것의 길을 썩혔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본성이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력을 파괴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육(flesh)”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3절 참조). 육체는 일반적으로는 모두 각각의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물질적(corporeal) 인간, 또는 육체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뜻한다;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를 이해함, 즉 진리 자체인 것으로부터 위 의미는 분명해진다. “길”이 진리를 이해함, 즉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인용구절을 살폈는데, 아래 몇 개 더 추가해보자. 모세의 책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일어나라, 너는 여기로부터 빠르게 내려 가라; 그 이유는
네 백성들이 자신들을 썩혔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로부터 갑자기 돌아섰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부어만든 상을 만들었다 (신. 9:12, 16),
그들의 진리들인 그분의 명령들로부터 돌아서버렸음을 뜻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분의 눈들은 사람의 아들들의 모든 길들에 열려 있어,
모두 각각의 사람에게 그의 길들에 따라, 그의 일들의 열매에 따라 주신다. (예. 32:19).
위에서 “길들”은 명령들에 따른 삶이다; “그의 일들의 열매”는 선행으로부터의 삶이다. 그런고로 “길”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가르침들과 명령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homo]의 아들”의 의미와 남자[vir]의 의미는 이미 살폈다. 이 구절과 비슷한 구절이 같은 예언서에서 7:3; 17:10에도 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의 길들에서 그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일들을 되돌려 갚을 것이다 (호. 4:9).
스가랴서에서:
너는 네 악한 길들에서 돌아가라, 그리고 네 악한 일들로부터 돌아서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의 길들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일들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려 생각했던 것같이 말이다 (슥. 1:4, 6).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나 그것들이 악한 길들과 악한 일들이므로 반대적 의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개의 심정, 한 개의 길을 줄 것이다 (예. 32:39).
“심정”은 선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길”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다윗서에서:
저로 당신의 명령들의 길을 이해하게 만드십시요; 나로부터 거짓말의 길을 옮겨 주십시요; 그리고 제게 당신의 법을 은혜스럽게 수여하십시오. 저는 진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들의 길을 달릴 것입니다 (시. 119:27, 29-30, 32).
위에서 “명령들의 길”이 “진리의 길”이다 불리운다. 이것의 반대가 “거짓말의 길”이다. 다시:
저로 당신의 길(way)들을 알게 만드십시오, 오 여호와여, 제게 당신의
작은 길(path)들을 가르치십시오. 제 길을 당신의 진리 안에서 인도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가르치십시오 (시. 25:4-5).
위 구절 역시 “길”은 진리를 분명히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의논을 하셨는지, 누가 그를 훈육했는지, 그리고
[누가] 공정의 길을 그에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누가] 지식을 그에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누가] 그를 이해함의 길을 알게 만들었는지 (이. 40:14),
위 구절은 진리를 이해함을 위해서가 분명하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런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라, 그리고 옛 작은 길들을
물어보라, 좋은 길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가라 (예. 6:16).
위 구절 역시 “길”이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놓여져 있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희 알지 못하는 길에서 눈먼 자를 인도할 것이다, 그들이 알지 못해왔던
작은 길에서 나는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 42:16).
단어 “길(way),” “작은 길(path),” “거리(street),” “도로(road),” “좁은 길(lane)” 등등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보조 도로, 즉 다듬지 않은 길에서 걸으려하다가 고대의 작은 길들에서,
자기들의 길들에서 자신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예. 18:15).
사사기서에서:
야엘의 시절에 작은 길들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작은 길에서 걷던 자들이
구불어진 작은 길을 통해 갔다. 도로들이 이스라엘에서 중단되었다 (사. 5:6).

여기서의 내적 의미는 이렇다. 교회가 있던 토지에 있는 자는 누구이던 “자기의 길을 썩혔다”, 즉 모든 자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다. 그 이유가 모든 이가 물질적이 되었기 때문, 이 자들은 앞 절의 사람들 뿐 아니라 “노아”로 불린 이들, 특히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 있는 사람들까지 아우른다. 그 이유가 이들은 거듭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먼저 말해진 이유는 다음 절에서 그들의 거듭남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 교회의 것이 남은 까닭에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지금은 명명된다. 이 절에서 남은 진리가 없다고 말해졌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노아”라 불린 이들이 가진 리메인스 외에는 아무 선도 없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가 없으면 구원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았던 교리적인 문제들도 남은 것이 없다. 선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진리를 이해함도 없다. 의지력이 있지 않을 경우, 이해력도 있지 않는다; 의지가 있다면, 이해함도 있다. 태고인들은 선한 의지를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 그러나 이 이해력은 의지력과 함께 완전히 사멸됐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자연적 선,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합리적 진리가 “노아”라 불려지는 이들과 더불어 남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듭나아질 수 있었다.

13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그 이유는 땅이 그들의 얼굴로부터 폭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보라 나는 땅과 함께 그들을 파괴하리라.

“하느님께서 말하셨다”는 그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여호와는 있음(being) 자체이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와 있다 란 인간 종족은 사멸할 수 밖에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문장의 단어들 자체, 그리고 육체의 의미, 즉 모두 각각의 인간은 물질적 인간을 일반적, 특수적 측면에서 뜻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데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땅이 폭행으로 가득 차 있다 란 그들이 더 이상 선한 의지를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11절에서 “폭력”의 의미를 살필 때 말했다. 앞 절에서는 진리를 이해함이 말해지고, 여기서는 선한 의지가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 둘 모두 교인과 더불어 멸해지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을 포함해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를 갖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이 천적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을 가져버린 것처럼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것은 주님만으로부터 이다. 이것을 천적 인간들 역시 알고 인정하고 지각한다. 천사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알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선한 의지가 없고, 진리를 이해함도 없다. 모두 각각의 인간, 모두 각각의 천사, 최고로 천적 수준의 누구라해도 그의 자기 자신(own)에는 거짓과 악 밖에 없다; 이런 이유를 욥기 15장 15절을 참작하면 주님 이전 천국들은 깨끗하지 않았음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도 이해될 것이다. 더불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만에 속한 것, (주님만으로부터 우리에게 있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는 만큼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도 그 만큼 허락되어, 그 만큼 그는 완전해진다. 말하자면,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도 그 만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은 것마저도 그가 가진 것은 오로지 가진듯 보이는 것(appear)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자비로부터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양과 질은) 두 가지 조건에 따라, 즉 그의 삶의 실제 행동들에 일치되게, 그리고 자기 부모들을 수단으로 이식된 유전적 악에 걸맞추어 결정된다.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가 적당한 의미에서 무엇인지를 납득되도록 말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것 같다. 그 이유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이해함(력)으로부터 있다 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그는 의지로부터 있다 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더 한층 힘들게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해력 속에 있는 것은 의지력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것에 무지해 있어서 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뜻한다고 말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어떤 것을 뜻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그것을 생각한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힘든 한 가지 원인이고, 또 다른 힘든 이유는, 인간은 육체에 속한 것 안에만 있다는 것, 즉 자기들의 삶은 극도로 외적인 것 안에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각각의 사람 안에는 내면(interior)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내면 안에 내면이 있는 것, 즉 가장 안쪽(inmost) 내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은 가장 바깥쪽(outermost)일 뿐이다는 것이다. 바램(욕구, desire)들,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은 내면이고; 애착(affection)들과 합리적인 것들은 바램과 기억 속의 것들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선한 의지와 진리를 이해함은 가장 안쪽(inmost)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구분되어 있는데, 어느 것도 구분되어 질 수 없는 것은 없다. 육체적(corporeal) 인간은 위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confound). 이런 이유 때문에 육체가 죽을 때 모든 것도 죽게 되어 있다 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을지라도 사실인즉, 죽은 다음, 그는 먼저 살기를 시작한다. 이 삶은 그의 내면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의 순서 안에서 밀접하게 서로 서로의 뒤를 이어 간다. 만일 그의 내면들이 이렇게 구분이 되지 않고, 그리하여 이것 뒤를 이어 저것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다른 삶에서 각자의 내면들에 따라 영들, 천사 같은 영들, 천사들로 결코 구분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 천국들이 있고, 각 천국은 다른 천국과 (철저히) 구분되고 있다. 위와 같은 추가 설명을 통해 적절한 의미에서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가 무엇인지 어림잡아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천적 인간, 또는 셋째 천국의 천사들에 만 해당되어 서술될 수 있다.

앞 절과 이 절에서 말해진 것은 홍수 이전 교회의 날들의 끝에서 진리를 이해함과 선한 의지의 모든 것이 사멸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홍수 이전 사람들 사이에 (있던) 끔찍한 설득력들과 더러운 그리워함들은 흔적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아”라 불리는 이들과 더불어 그들 안에서는 리메인스가 계속 존재했으나, 이 리메인스(remains)는 이해함(understanding)과 뜻함(will)의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없었고, 오로지 합리적(rational) 진리와 자연적(natural) 선 만의 산출이 가능했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의 실행(operation)은 인간의 본성(nature, 본래의 모습)에 따라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를 통하여 이 사람들은 거듭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설득력들이 (이 거듭남을) 방해하지 못했고, 리메인스를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operation)에 흡수되었다. 설득력들, 또는 거짓의 원리들이 모든 역사함(operation)을 방해함에 뿌리를 둘 때, 그래서 이것들이 먼저 뿌리 뽑혀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거듭나아질 수 없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나는 그들을 땅과 더불어 파괴할 것이다. 이는 교회와 더불어 인간 종족이 사멸되리라는 것을 의미함은 “땅과 더불어”라고 말해진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땅”은 넓은 의미에서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교회의 천적 수준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경우, 사랑이 없고, 천적인 것에 속한 것도 남아있지 않은 바, 여기서의 “땅”은 자기를 사랑함, 또는 천적 수준의 것에 반대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거기에 교회의 사람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미 상술했던 바 같이, 땅은 지면의 그릇이고, 지면은 들판의 그릇이듯, 사랑은 신앙의 그릇이고, 신앙은 신에 관한 지식들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땅과 더불어 파괴할 것이다”가 교회와 더불어 인간 종족이 멸해질 것이다를 의미한 이유는 이러하다: 만일 주님의 교회가 땅 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진다면, 인간 종족은 결코 존재할 수 없고 모조리 사멸된다. 이미 말한 바대로, 교회는 심장(heart)과 같다: 심장이 살아 있는 한, 이웃되는 내장이나 조직들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심장이 죽자 마자, 그것들 역시 모조리 죽는다. 땅위에서 주님의 교회는심장과 같아, 거기서부터 인간 종족, 그것의 한 부분이 교회 바깥쪽일지라 해도 생명을 가진다. 이런 이유는 누구에게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의 일부라도 알도록 서술해두어야 할 것 같다. 땅 위 전체 인간 종족은 여러 부분들을 가진 신체 같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주님의) 교회는 심장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교회가 주님이 천국과 영들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이도록 하는 심장으로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분리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인간 종족의 분리됨이 있었다면, 인간 종족은 그 즉시 멸종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첫 창조로부터 교회가 언제나 있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가 멸해질 때이면 언제나 다시 교회는 누군가와 더불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그분의 자비로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땅 위 전체 인간 종족은 사멸되고 말았으리라. 그 이유가 그 당시 교회는 그 극점에 치닫고 있어, 어떤 선과 진리도 거의 살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종족은 천국과 영들의 세계를 통해 주님과 결합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만 주시해본다면, 그는 야수보다 더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을 자신 안에만 남겨둔다면, 이내 그는 자신의 파멸, 그리고 모든 것의 파멸로 돌진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바라는 것의 전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질서는 자신같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이가 타인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고로 모든 타인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나 야생 동물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그들의 질서는 그들이 사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런고로 그들이 존재하는 질서에 꼭 맞추어 그들은 살고 있다. 인간은 자기 질서(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함)에 정반대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런 인간 위에 측은해 하심을 가지시지 않으면, 동시에 인간들을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게 결합되게 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모른다.

14절. 너는 고페르 목재로 방주를 만들고, 너는 대저택들을 방주에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역청으로 안팎으로 바르라.

“방주”가 “노아”라 불리는 교회, 또는 이 교인을 의미하는 것은 다음 절에서 방주에 대한 묘사로부터 충분하게 설명되어진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말씀은 영적이고 천적이다는 말이다. 방주가 역청으로 입혀지는 것, 방주의 칫수, 방주의 건축, 그리고 홍수 등등이 글자 대로의 의미 그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의미는 아예 없고, 역사적 어떤 것만 있을 것인 바, 여느 특이한 작가에 의해 서술된 것 이상, 인류를 위해 별 소용이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어느 구절에서나 말씀의 가슴에, 내면에, 영적인 것, 천적인 것, 또는 둘 모두를 한꺼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방주와 방주에 관하여 말해진 모든 것에는 지금까지 밝히 알려지지 않은 감추인 것들이 의미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이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말씀에는 대표적인 중요한 세 궤(ark)가 등장한다. 하나는 배라고 하는 궤, 즉 방주이다. 두 번째는 작은 상자, 또는 작은 궤인데, 모세가 이것에 감추여져 강가 사초(sedge)에 놓여졌다 (출. 2:3);보다 더 고상한 실예는 광야에서의 거룩한 궤이다. 이 궤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만일 궤에 관련된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 역시) 일종의 우상 숭배, 우상 예배의 수준밖에 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 생각에서 솔로몬의 성전 역시 (물질적) 그 자체, 즉 금, 은, 삼나무, 돌 등등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방주와 그 건축, 그리고 그에 따른 세부 사항들이 교회에 관한 감추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일 리가 없고, 단지 죽은 글자, 여느 모독적인 작가의 글 수준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방주는 “노아”라 불리는 교회, 교인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고페르 목재”는 강한 욕망들을, “대저택”은 이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어 의미가 이런지는 먼저 어떻게 이런 경우가 교회와 더불어 있게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태고 교회는 이미 자주 말했던 바 같이 사랑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선한 의지로부터 진리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후손들은 유전에 의해 탐욕들도 상속받았고, 이것이 의지 속에서 그들을 통치했는 바, 이 탐욕 안에 그들은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침수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만일 사람들이 이런 본성을 계속 지닌다면, 필시 인간은 영원히 사멸하리라고 예견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의지력을 이해력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인간은 이전처럼 선한 의지를 수단으로가 아닌, 진리를 이해함을 통하여 선한 의지력처럼 나타나는 선행을 수여받아 (거듭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새로운 교회는 “노아”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교회는 태고 교회와는 아주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교회 외에도 그 당시 다른 교회들도 있었다. 창세기 4:26을 보면 에노스라 불리는 교회도 있다. 그 외 다른 교회들은 언급됨이나 묘사됨이 기록상으로는 잔존하지 않는다. 오직 이 교회 “노아”가 여기서 기술되는데, 그 이유는 이 교회만이 태고 교회와 아주 다른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노아 교회인은 그가 의지력이라 불리는 부분이 개혁될 수 있기 전 이해력이라 불리는 부분이 개혁되어야 하는 바, 여기서 의지력에 속한 것들이 이해력에 속한 것들로부터 어떻게 분리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지력에 속한 것들에 어떤 것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의지 측면의 것들은 덮어서 가려져 있거나 따로 떼어 비축한듯한 상태로 있다. 그 이유가 의지속의 것들이 탐욕들의 부추킴으로 동요될 경우, 멸해지고 말기 때문인데, 차 후 더 살핀다. 이 인간의 두 부분들 -의지력과 이해력- 은 인간 안에서 완전히 구분되고 있어서 아마 이보다 더 완벽한 구분된 어떤 것은 없다. 나에게 이에 대한 확실함을 갖도록 영들과 천사들의 이해력이 (관찰함이) 나에게 주어졌다. 이들의 이해력은 머리 또는 두뇌의 왼쪽 부분 안으로 흐른다, 그리고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오른쪽 부분으로 흐른다; 그리고 얼굴에서도 같았다. 천사 같은 영들이 안으로 흘러들 때, 그 흐름은 공기 속의 아주 부드러운 숨 쉼같았다; 그러나 악령이 흘러들 때, 끔찍한 설득력들과 공상을 가지고 두뇌의 왼쪽 부분 안으로 범람하듯 밀려든다. 그리고 탐욕들과 더불어 오른쪽 안으로 흘러드는데, 이 흘러듦은 공상과 탐욕들의 범람함 같았다.

위 모두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방주에 관한 첫 묘사, 즉 고페르 목재로 건축함, 대저택들, 역청으로 안과 밖의 표면을 덮음, 등의 묘사는 의지력에 속한 부분이 침수됨으로부터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력에 속한 부분만이 열려짐이 16절에서, 그리고 가장 낮은 창문, 둘째, 그리고 셋째 창문으로 해서 묘사되었다. 이런 것들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들은 인간의 무지함을 수단으로 감추어져 있는 최소한의 의미이고 가장 일반적 의미에 불과하다. 만일 하나하나의 세부사항들이 말해진다면 그 하나하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단어들 자체의 의미에 주목해 보자: “고페르 목재”는 강한 욕망을, “대저택”은 인간의 두 부분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씀 안에서도 분명해진다. 고페르 목재는 전나무(fir) 같은 유황 성분을 많이 함유한 목재이다. 이런 종류의 나무는 다른 것들도 있다. 어쨌든 나무가 지닌 유황 때문에 이 목재는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쉽게 불이 잘 붙기 때문이다. 태고인들은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금, 은, 놋쇠, 철, 돌, 그리고 목재(나무)에 이렇게 비교했다. 인간의 가장 안쪽 천적 평면의 것은 금에, 그의보다 낮은 천적 수준인 것은 놋쇠에, 그리고 가장 낮은 것, 또는 물질적인 것은 목재에 비교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안쪽 영적 평면의 것은 은에, 그의보다 낮은 영적 평면의 것은 철에, 그의 가장 낮은 것은 돌에 비교했다. 이와 같은 내적 의미가 성경에서 그것들이 언급될 경우 그것들의 의미가 된다. 이사야서에서:
놋쇠를 위해 나는 금을, 그리고 철을 위해 나는 은을, 그리고 목재를 위해 나는
놋쇠를, 돌을 위해 철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네 관리들을 평화로 만들 것이다.
네 강제 집행 관리들을 정의로 만들 것이다 (이. 60:17).
위 구절은 주님의 왕국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다루고 있다. 거기서의 금속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것은 “평화”와 “정의”가 언급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금”, “놋쇠”, “목재”는 각각이 상응하여, 의지력에 속한 것, 또는 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은”, “철”, “돌”은 각각이 상응하여 이해력에 속한 것, 즉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네 재물들을 망쳐놓을 것이고 네 전리품을 상품으로 만들 것이다;
네 돌들, 그리고 네 목재 (겔.26:12).
위 구절에서 “재물들”, “상품”이 세상의 재물과 상품을 뜻하지 않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뜻함은 분명하다; 돌들과 목재도 마찬가지이다. “돌들”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 그리고 “목재”는 의지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하박국서에서:
돌들이 (성)벽으로부터 외친다, 그리고 목재로부터의 들보가 대답한다 (합. 2;11).
“돌”은 가장 낮은 수준의 이해력을, “목재”는 가장 낮은 수준의 의지력을 표시하는데, 이것들이 어떤 것이 감각적 지식으로부터 추출되어 나올 때 대답해준다. 다시:
깨어있으라 하고 목재에게 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리고 벙어리 돌에게 일어나라
하고 말하고, 이것이 가르칠 것이다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잘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씌워져 있다. 그것들에는 숨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분의 거룩함으로부터의 성전 안에 계신다 (합. 2:19, 20).
위 구절에서도 역시 “목재”는 탐욕을 표시한다; “돌”은 가장 수준 낮은 이해력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벙어리”다는 것과 “가르친다”가 그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것에는 숨이 없다”란 그것은 천적이든, 영적이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 단지 성전에 있는 돌, 목재, 그리고 이것들이 금과 은과 함께 묶여져 있는 상황일 뿐이다.
예레미야애가서에서:
우리는 은을 주고 우리의 물들을 마신다; 우리의 목재는 값을 치루고 온다 (애. 5:4).
위에서 “물들”과 “은”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그리고 “목재”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다시:
목재에게 말한다, 너는 내 아버지이다; 그리고 돌에게는, 너는 나를 낳았다 (애. 2:27).
위에서 “목재”는 탐욕을 표시하고, 이것은 의지 속에 있다, 거기로부터 임신한다; 그리고 “돌”은 감각적인 지식이고, 이로부터 “낳는다.” 다른 예언서를 보면, “나무와 돌을 섬기는 것”이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을 예배하기 위해 놓였다. 이를 수단으로 그들이 탐욕과 공상을 섬겼다가 의미되었다; 또한 예레미야서 3:9을 보면 “나무와 돌을 가지고 간음을 범함”도 있다. 호세아서에서:
내 백성이 그들의 목재들에게 문의한다, 그리고 목재로 만든 지팡이가
그들에게 선포한다; 그 이유는 매춘의 영이 그들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호. 4:12),
위는 그들이 목재로 된 새긴 상에게, 또는 그리워함(탐욕)의 우상에게 문의함을 의미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도벳은 어제로부터 준비되어졌다, 쌓아올린 것은 불이고 많은 장작이다,
여호와의 숨이 불타는 유황의 시내 같다 (이. 30:33).
위에서 “불,” “유황,” “장작”은 더러운 탐욕들을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목재(나무, 장작)은 가장 수준 낮은 의지로부터의 것들을 의미한다; 귀한 목재들, 삼목(cedar) 내지 이와 비슷한 목재들은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성전의 삼나무 목재, 나병환자를 위해 사용된 삼나무 등이다 (레. 14:4, 6, 7). 또한 마라에서 나무가 쓴 물들에 던져졌다, 이로부터 물들이 달게 되었다 (출. 15:25), 이에 관한 의미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편에서 취급된다. 그러나 귀중하지 않은 목재들, 새긴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된 목재들, 사람을 태우기 위해 사용된 장작들은 탐욕들을 의미한다. 본문의 경우는 고페르 목재이다. 그것이 지닌 유황 성분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 앙갚음하시는 날; 거기로부터의 시내는 역청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먼지는 유황으로,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불타는
역청이 될 것이다 (이. 34:9).
위에서 “역청(pitch)”은 끔찍한 공상들을; “유황”은 역겨운 탐욕들을 의미한다.

“대저택들”이 인간의 두 부분들, 즉 의지력과 이해력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이 두 부분들, 의지력과 이해력은 서로가 정확히 구분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두뇌는 두 부분들로 나뉘어 뇌반구(hemisphere)들이라 불린다. 왼쪽 뇌반구는 지적인 능력에 속하고, 오른쪽 뇌반구는 의지 쪽에 속한다. 이 구분은 최고로 일반적 구분이다. 이 외에도, 의지력과 이해력은 무수한 부분들로 구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의 지적 측면의 분활(division)들은 너무나 많고, 의지 측면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일반적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만 가늠한다 해도 셀 수 없다. 인간은 최소한도에서의 천국이기 때문에 영들의 세계와 천국에 상응하고 있다. 인간 안의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의 종들과 속들은 주님에 의해 완전한 질서에서 구별되어져 있어 어느 것 하나도 구별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천국에서 이런 분활은 사회(공동체, Society)들이라 불리우고, 말씀에서는 주거지(주소, habitation)라 불리는데, 주님에 의해서는 대저택이라 불린다 (요. 14:2 참조). 본문 역시 “대저택”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방주(ark)를 서술하기 때문, 이것은 교인을 의미한다.

“역청으로 안과 밖을 칠하는 것”은 탐욕들에 침수됨으로부터 보존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그 이유가 이 교인의 첫 번째 일은 이해력에 관련된 것이 개혁되는(reform)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선 그는 탐욕들에 침수됨에서 보존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탐욕이 앞서면 개혁의 모든 일은 (시작도 있기 전에) 파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에서는 “역청으로 역청을 칠하라”라고 실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호(protection)”를 표시하는 단어가 사용되어져 있다. 이 단어는 단어 “속죄하다(expiate)” 또는 “화해하다(propitiate)”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의 속죄, 화해함은 악에 침수됨으로부터의 보호이다.

15절. 이런 식으로 너는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의 길이는 삼백 큐빗이고, 넓이는 오십 큐빗이며, 높이는 삼십 큐빗이다.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 즉 숫자들, “삼백”, “오십”, “삼십”은 리메인스를 의미하고, 그것들이 거의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길이”, “넓이”, “높이”는 거룩함, 진리, 선을 의미하나, 이것이 모든 이에게 낯설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글자의미로는 더욱 멀다. 이 장의 3절에서 일백 이십 년이 신앙으로부터의 리메인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살필 때 말해진 것에 더 보태어 설명하면, 선한 영들이나 천사들은 아예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만에 속한 것들 너머에 있다. 그런고로 그들은 지상에서 사용하는 숫자나 치수 등등을 너머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주님에 의해 말씀을 충분하게 지각하는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거리가 먼 듯한 내적 의미에 대해 긍정적 사고를 지닐지 모른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이 구절들의 세부 사항들은 글자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글자 의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천적, 영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천적, 영적인 사항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더 알게되는 것은, 인간이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지식을 수단으로 신앙의 문제들인 이 구절 같은 말씀을 파헤치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이다.

말씀에서 숫자들과 치수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계시록과 에스겔서에 있는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치수(measure)들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성전”이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들과 땅 위 주님의 왕국은 지상의 치수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를 아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길이, 넓이, 높이인 그것의 용적(dimension)이 숫자에 의해 나타내지고 있다. 이로부터 누군가는 숫자나 치수에 의해 거룩한 것들이 의미되어진다고 결론 내릴런지 모른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를 닮은 갈대가 주어졌다; 그리고 천사가 가까이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 그 안에서 숭배하는
그들을 측량해보라 (계. 11:1).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 성은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 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 위에
열 두 천사들이 있고, 거기에 이름들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열 두 지파의 것들 이다. 동쪽에 세 문들, 북쪽에 세 문들, 남쪽에 세 문들, 그리고
서쪽에 세 문들(이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그는 금빛의 갈대를 가졌는데,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도성은 정사각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이는 넓이와 같다: 그리고 그가 갈대로
도성을 쟀더니 일만 이천 스타디아였다; 그리고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측량이다 (계. 21:12-17).
숫자 “12”는 많은 곳에서 등장한다. 이 숫자는 매우 거룩한 숫자이다. 그 이유는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3절처럼 29-30 장에서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살필 예정이다). 그러므로 위 인용 구절에서도 마지막 첨가된 말은 “사람의 측량, 즉 천사의 측량”이다. 이는 에스겔에서의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의 경우도 같다. 거기서도 측량함이 기술되어 있다 (40장 3, 5, 7, 9, 11, 13, 14, 22, 25, 30, 36, 42, 47; 41장 1-끝까지; 42장 5-15; 스가랴 2장1, 2). 여기서도 역시 숫자 자체만 주시하면 숫자들은 추상적으로 거룩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 밖에 더 없다. 증거 궤의 용적에 관한 숫자(출. 25:10); 자비석에 관하여; 금빛의 탁자에 관하여; 성막에 관하여; 그리고 제단에 관하여(출. 25:10, 17, 23; 26장; 27:1); 그리고 성전의 모든 숫자들과 용적(왕상. 6:2. 3), 그 외 다른 숫자들.

여기서 방주에 관한 숫자나 치수들은 이 교인이 개혁되어질 때 이들과 더불어 있었던 리메인스, 그리고 이 리메인스는 거의 없었다는 것 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이 숫자들 안에서 뛰어난 숫자가 5 이다는 것과 5는 말씀에서 약간(some), 또는 조금(a little)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를 보자:
거기에 이삭 줍기 할 것이 남을 것이다, 마치 올리브 나무를 흔들 때 가지 꼭대기에
남는 두 세 개, 열매 풍성한 것의 가지들에 있는 네 다섯 개 남은 것과 같다 (이. 17:6),
위에서 “두 세 개” 그리고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다시:
한 명의 꾸짖음에서 일천 명이; 다섯 명의 꾸짖음에서 너희는 달아날 것이다;
너희가 산 꼭대기 위에서 막대기 같이 남을 때까지 이다 (이. 30:17),
위에서 “다섯”은 적음을 표시한다. 반환 후에 최소한의 벌금이 오분의 일이 추가되었다 (레. 5;16; 6:5; 22:14; 민. 5:7). 그리고 그들이 짐승, 집, 들판, 또는 십일조를 되찾을 때, 최소한의 추가분이 “오분의 일”이었다 (레. 27:13, 15, 19, 31).

숫자에 의해 묘사되는 무엇이든, 거기에서 “길이”는 거룩함을, “넓이”는 진리를, “높이”는 선을 의미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부터의 확증은 많지는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그 대목의 주제나 취급되는 상황에 따라서 각각이든, 모두이든 서술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시간에 적용될 경우 “길이”는 영구함, 그리고 영원함을 의미하고, 시편 23:6, 그리고 21:4에 있는 “날들의 길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공간에 적용될 경우, 거룩함을 표시한다. “넓이”나 “높이”의 적용도 이와 동일하다. 지상의 것 모두에는 3부로 된 치수들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보다 크든, 보다 작든, 완전함을 뜻하려고 (지상적) 치수들과 별개로 해서 서술될 때, 그래서 양과 질을 서술할 때가 있다; 여기서의 경우, 그것의 품질은 리메인스이고 그것의 양은 매우 적다를 뜻하고 있다.

16절. 너는 방주에 창문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창문을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마무리 하라. 그리고 너는 방주의 문을 옆쪽에 두어라. 너는 가장 낮은 층, 둘째 층, 셋째 층을 만들 것이다.

“창문”은 지적인 부분, 그리고 “문”은 들음(hearing)을 의미하는 데, 이 구절에서 인간의 지적 부분이 취급된다는 것은 앞서 서술된 것에서 분명해진다(641, 642항 참조). 특이한 것은, 지적 부분이 이 교회의 사람을 위한 개혁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간은 두 종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는 의지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력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의지력은 없고, 그 대신 욕구(desire)가 의지 자리를 차지했을 경우, 그때 의지가 아닌 다른 쪽, 즉 지적 부분이 개혁되어질 때, 이 지적 부분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주어질 수 있어 이 둘은 여전히 한 개의 생명, 즉 선행과 신앙을 구성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지금 의지력은 없고, 의지력 대신 탐욕만 있기 때문에, 의지력에 속한 부분은 닫혀지고(14절), 다른 쪽 또는 지적 부분이 열리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다른 쪽이 이 절에서 취급되는 주제이다.

이 경우는 이러하다: 인간이 개혁되어질 때, 이 개혁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수단으로 결과되는데, 이때 악령들은 인간과 제휴하여 그 인간의 지식과 이성 측면의 것만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리고 탐욕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악령들은 그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접근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두 종류의 악령들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인간의 이성 측면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탐욕들 측면에서 활동한다. 인간의 이성 부분을 흥분시키는 악령은 온갖 거짓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그것이 진리이다고 설득해댄다. 인간은 시험 안에 있을 때, 먼저 이 거짓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실지로 싸우는 것은 그 인간이 아니고 그 인간에게 인접된 천사들을 통한 주님의 싸우심이다. 그리하여 이 전투들을 수단으로 거짓들이 분리될 때, 흡사 사라져버린듯 될 때,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받을 준비를 갖춘 셈이다. 그 이유가 거짓들이 길을 막고 있는 상황이어서 거짓들이 득세하는 한,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을 결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신앙의 진리들을 받을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첫째로 천적 수준의 씨들이 그 사람 안에 심어질 수 있다. 이 씨들은 선행의 씨들이다. 선행의 씨들은 거짓들이 통치하는 바탕 위에는 심어질 수 없고, 오직 진리가 통치하는 바탕에만 심어질 수 있다. 이것이 영적 (평면의) 인간의 개혁, 또는 거듭남인데, “노아”로 불리는 이 교인도 동일하다. 이로부터 방주의 “창문”, “문”이 말해진다, 그리고 그 창문은 “가장 낮은, 둘째, 그리고 셋째 층들”로 말해진다. 이것 모두가 지적 인간 또는 영적 (평면의) 인간에 속하여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알려져 있는 것, 즉 신앙(믿음)은 들음을 수단으로 생긴다고 하는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신앙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들, 또는 믿어지려고 있는 것에 관한 지식은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신앙은 인정함(acknowledgement)이다. 그리고 이 인정함은 그 사람 안에 신앙의 원리가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다. 이 신앙의 원리는 선행,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선행이 있을 때, 인정함, 또는 신앙이 있는 것이다. 달리 납득하는 자는 땅과 하늘이 떨어진만큼 신앙의 지식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신앙의 선함인 선행이 현존할 때, 그때 신앙의 진리인 인정함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식, 이성, 이해함에 속한 것들에 따라 거듭나질 때, 그 끝은 바탕이 준비되는 것, 선행을 받기 위해 그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일런지 모른다; 이후 그는 이로부터, 또는 이로부터의 생명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때 그는 개혁되고 거듭나져 이전의 그가 아니다.

“위로부터 한 큐빗에서 완성(마무리)하게” 되는 “창문”이 지적 부분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방주의 건축이 취급될 때라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방주”를 수단으로 교인이 의미된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지적 부분이 “위로부터 있는 창문”에 비교할만한 다른 표현은 없을듯 싶다. 말씀의 다른 부분등에서도 이와 같다: 인간의 지적 부분, 즉 인간의 내적 시야, 그것이 이성이든, 단지 추론함이든, “창문”이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오, 사나운 비바람에 요동치고 위로받지 못하는 너 고뇌하는 자여, 내가 홍보석으로
네 창문들(suns, windows)을, 네 대문을 석류석(carbuncle)으로, 모든 네 경계를
즐겁게 하는 돌(보석)들로 만들 것이다 (이. 54:11, 12).
여기서 “햇빛들(suns)”이 창문들을 위해 놓여져 있다. 이 햇빛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오도록) 입장이 허가된 빛, 또는 전도(투과)된 빛으로부터 이다. 위 구절에서 창문, 또는 햇빛은 선행으로부터 온 지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홍보석(ruby)에 비교되어진다; “대문(gate)”은 이로부터 파생된 합리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경계”는 지식과 감각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교회가 여기서 취급되어진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모든 창문들은 같은 것을 표현했다: 즉 그것들의 가장 높은 것은 지적인 것들을; 중간은 합리적인 것들을; 가장 낮은 것은 지식과 감각들에 속한 것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삼층이었기 때문이다 (왕상. 6:4, 6, 8). 에스겔서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창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40:16, 22, 25, 33, 36). 예레미야서에서:
죽음이 우리의 창문 안으로 올라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궁전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거리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거리들로부터 절멸한다 (예. 9:21).
중간 층의 창문이 위 구절에서 언급되어진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것, 이것이 소멸되어지는 것이다; “거리에 있는 어린 아이”란 시작하는 진리이다.
“창문들”이 진리로부터 있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거짓으로부터 있는 것 역시 의미한다. 그런고로 같은 예언서에서:
자기 집을 정의롭지 않게 짓는 자, 자기 골방들을 공정하지 않게 짓는 자에게
화가 있다; 누가 말한다, 나는 규모있는 집을 나에게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널찍한
골방들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잘라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은
삼나무로 마루를 깔 것이다, 그리고 주홍색으로 칠할 것이다 (예.22:13-14).
위에서 “창문들”은 거짓의 원리들을 표시한다. 스바냐서에서:
짐승들의 떼가 그녀의 한 가운데 드러눕고 있다, 모두 각각의 갖가지 야생 동물,
가마우지(cormonant)와 알락해오라기(bittern)가 거기로부터 석류나무에 숙박할 것이다;
목소리가 창문에서 노래할 것이다; 폐허됨이 문지방에 있을 것이다 (습. 2:14).
위 구절은 아수르(Assur)와 니느웨(Neneweh)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아수르”는 이해함을 표시하는데, 여기서의 경우 황폐되었다; “창문들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는 공상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옆쪽의 문”에 의해 들음이 의미되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는 바, 말씀으로부터의 더 확증해봄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귀와 감각의 내부 기관 사이의 관계되는 것은 옆쪽의 문과 위쪽의 창문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 다시 말해, 들음이 귀로부터 있듯, 지적 부분은 내적 감각으로부터 있다.

“가장 낮고, 둘째, 그리고 셋째 층들”에 의해 지식, 추론함, 이해함에 관한 것들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이미 살핀 바를 뒤잇고 있다. 인간의 지적 측면에는 세 등급들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지식으로부터의 것이다; 중간 등급은 합리적인 것으로부터의 것이다; 가장 높은 것은 지적 측면으로부터의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로부터 아주 잘 구분되어 있어 그것들은 혼동되는 일이 결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생명을 감각과 지식만에 속한 것에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것에 집착해 있는 동안에서는, 그는 그의 합리성의 부분이 앎에 관심을 가진 것들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그의 지적 부분은 더욱더 구분되어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인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적 부분을 통하여 그의 합리적 부분 안으로, 합리적 부분을 통하여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흐른다는 것, 이로부터 봄과 들음의 감각에 생명이 와진다. 이것이 진정한 유입이다, 그리고 이것이 혼과 몸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또는 오히려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안으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 안으로-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통하여 합리적인 것들 안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것들을 통하여 기억 속에 있는 그의 지식들 안으로 유입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생명 있음은 불가능일 것이다. 설사 인간이 거짓들과 악들 안에 있다 해도, 주님의 생명은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을 통하여 유입된다. 그러나 안으로 흐르는 것은 악과 거짓의 형체에 따라 그의 합리력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유입이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인간에게 추론하는 능력(ability), 되씹어 보는 능력, 이해하는 능력을 준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자비로부터 살피는데, 그때 야수에게 속하는 생명과 더불어 있는 경우도 살필 것이다.

인간의 지적인 것들에 속한 세 등급은 일반적으로 이해력, 추론력, 기억 속의 지식인데, 앞서 말해진 것, 예루살렘의 성전의 삼층의 창문들에 의미된 것과 거의 같다 (왕상. 6:4, 6, 8). 또한 제2장 10-14절에서, 즉 동쪽 에덴으로부터 나간 강들에 의해서도 의미를 알 수 있다.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이는 의지로부터 이다; “동산”은 사랑에서 파생된 총명을; “강들”은 지혜, 추론,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17절. 그리고 나는,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가져와서 하늘들 아래로부터 있는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도 종료되게 할 것이다.

“홍수”에 의해 악과 거짓의 범람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태고 교회의 후손에 관해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즉 그들은 더러운 그리워함들을 소유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더러운 그리워함 안에 신앙에 관한 것들을 침수되게 했다는 것, 그 결과 모든 진리와 선을 소멸하는 거짓의 설득력들을 가졌다는 것, 동시에 리메인스를 위한 길은 차단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손길이) 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 말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리메인스를 위한 길이 닫히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는 더 이상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인간을 소멸하는 것에만 골몰하는 악령들에 의해 완전히 소유당해지고 만다. 이로부터 홍수 이전 사람의 죽음이 왔다. 이것이 홍수로, 또는 완전한 범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악령들로부터의 공상들과 그리워함의 유입이 홍수와 거의 닮았다; 그러므로 말씀의 많은 곳에서 “홍수” 또는 범람함이라 불리운다. 이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하늘들 아래로부터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파괴하는 것. 이것이 태고 교회의 후손 전체가 자신들을 파괴할 것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말해졌던 바로부터, 그리고 이전에 주어진 그들에 관한 묘사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유전에 의해 그들의 부모로부터 끔찍한 설득력들에 물든 천성을 계승하였다는 것, 특히 그들은 자기들의 그리워함들 안에 그들이 소유한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켜버렸다. 그러나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지지 않은 이들, 그래서 신앙에 완전히 무지한 채로 사는 이들의 경우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이들은 태고 교회인들 같이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없다. 이러므로 해서 그들의 리메인스를 위한 길이 막혀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님의 천사들을 자신들로부터 몰아낼 수 없다.
리메인스,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순진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선행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자비로부터의 모든 것들, 신앙의 진리로부터의 모든 것들이고, 이것은 유아 때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그리고 배운 것이다. 이런 것들의 모두와 각각은 저장되어 있다; 만일 인간이 이런 것들을 가지지 않았다면, 순진, 선행, 자비에 관한 어떤 것도 인간에게 있을 수 없고, 그리하여 그의 생각들과 행동들 안에도 선과 진리의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어 그는 미개한 들짐승보다 더 열악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것은, 만일 그가 리메인스를 가졌으나 더러운 그리워함들과 끔찍한 거짓의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막아버렸다면 (주님의 생명의 유입이 있게되는) 주님의 역사하심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자신들을 파괴한 홍수 이전 사람의 모습이다. 그들이 “하늘들 아래,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이다.
“육체(flesh),” 이미 살핀 바 같이, 일반적으로 모두 각각의 인간, 세부적으로는 물질적 인간을 의미한다. “생명들의 숨”은 일반적으로 모든 생명, 그러나 적절하게는 거듭나아져갔던 이들의 생명, 결과적으로 이 구절의 경우 같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을 의미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남아있는 신앙의 생명은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로부터 자기들을 숨막히게 하는 씨의 어떤 것, 이 구절의 경우, “생명들의 숨”이라 불리는 것, 또는 (7:22에서) “콧구멍들 안에 생명들의 숨을 쉬고 있는”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획득해 갔다. “하늘들 아래 육체”는 단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하늘들”은 진리로부터 있는 이해성 속의 것들과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이고, 이것들은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있을 수 없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이다. 인간을 유지지탱되게 하는 것은 천국과의 결합, 즉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하는 것 뿐이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종료될 것이다. 이것은 이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 그리고 이 교회의 품질을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 이미 말했던 바, “땅”은 전체 세상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 있는 이들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대홍수(deluge)가 여기서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보편적 대홍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리메인스로부터 분리될 때, 또는 진리로부터 있는 이해성 속의 것들과 선으로부터 있는 의지 속의 것들로부터 분리될 때, 그러므로 천국들로부터 있는 것들과 분리될 때, 거기 존재했던 이들이 종료됨, 또는 질식함이다. “땅”은 교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기 사는 이들을 의미함은 이미 인용했던 구절에 더 보태어 확증해 보자. 예레미야서에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온 땅이 황무해질 것이나, 나는 종말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땅은 슬퍼하고, 하늘들은 검어질 것이다 (예.4:27-28).
위에서 “땅”은 황폐해진 교회가 있는 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하늘들을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릴 것이다 (이. 13:13).
“땅”은 황폐해지게 되는 인간을 표시하고 거기에 교회가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의 죽인 자가 땅의 끝으로부터 땅의 끝까지조차 그 날에 있을 것이다 (예. 25:33).
여기서 “땅의 끝”은 온 세상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가 있던 지역만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교회 속에 있던 사람들이다. 다시:
나는 땅의 모든 거주민들 위에 검을 불러올 것이다; 야단법석 댐이 땅의 끝까지조차
올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민족들과 논쟁하셨기 때문이다 (예25:29, 31).
이 구절 역시 온 세상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는 지역만 뜻한다, 그리고 교인, 또는 거주민만 뜻한다; “민족들”은 여기서 거짓들을 뜻한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께서 그분의 장소로부터 땅의 거주민에 물어볼 것이 있으시어
방문하신다 (이. 26:21).
여기서도 뜻하는 바는 같다. 다시:
너희는 듣지 않았느냐? 시작부터 너희에게 말해왔지 않느냐?
너희는 땅의 기초들을 이해 못하느냐? (이. 40:21).
여호와, 하늘들을 창조하셨다는 것, 하느님 자신이 땅을 만들어 내시고
그것을 만드신다는 것, 그분이 그것을 건립하셨다는 것 (이. 45:18).
“땅”은 교인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의 말이다, 그분이 하늘들을 펼치셨다, 그리고 땅의 기초들을 놓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영을 만들어 내신다 (슥. 12:1),
위에서 “땅”은 교인을 확실히 표시한다. “땅”은 지면(ground)과 구별되는데, 마치 교인과 교회 자체인 것 같다, 또는 사랑과 신앙의 구별과 같다.

18절. 그리고 나는 너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는 방주로 들어 가되, 너, 그리고 너의 아들들, 너의 아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너와 함께 들어가라.

앞의 구절에서는 자신들을 파괴한 이들이 취급되었다. 여기서는 거듭나는 이들이 취급되는데, “노아”라 불리운다.

“언약을 세움”은 그가 거듭나짐을 의미한다. 이는 주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사랑과 신앙을 수단으로 결합한다는 것 외에 다른 언약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그러므로 “언약”은 결합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가장 참다운 언약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결혼, 또는 결합은 거듭나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넓은 의미에서 거듭남 자체가 “언약”에 의해 의미된다. 주님은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실 때, 인간과 더불어 언약 안으로 진입하신다; 그러므로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언약은 그 외 다른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언약, 그 외 후손들과의 언약이 각 개인에게 관계된 것 밖에 글자 의미로부터는 더 발견되는 것이 없다. 이에 반해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질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예배를 외적인 것에 존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의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과의 연결도 없이 거룩하다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언약은 오직 거듭남을 표현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의 의식도 같은 처지였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그들은 사랑과 신앙으로부터의 것들을 표현했다. 대 성직자들과 성직자들 역시 그들의 품성이 어떠하든, 그 중에는 사악한 자 까지도 마찬가지로 천국의 성직 직분과 가장 거룩한 성직도 표현했다. 표현성에서 인물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표현된 것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 사악한 왕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요셉을 이집트의 통치자로 세운 바로까지도 그들은 주님의 왕권을 표현했다; 야곱의 아들들과 자주 하신 언약이 표현성 있는 종교적 의식일 뿐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숙고해 본다.

“언약”이 거듭남과 거듭남에 속하는 것 외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언약”이라 불리우신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된다. 그 이유는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남을 돌보시고, 사랑과 신앙 속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언약 그 자체이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 분명하다:
나 여호와가 정의 안에서 너를 불렀다, 그리고 네 손을 잡았고, 너를 간수하고,
그리고 민족의 빛을 위해 백성에 대한 언약을 네게 줄 것이다 (이. 42:6),
위에서 “언약”은 주님을 표시한다; “민족들의 빛”은 신앙이다. 이사야 49:6, 8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라기서에서:
잘보라 나는 나의 천사를 보낸다, 그리고 네가 찾는 주님이 갑자기 그분의 성전에
오시는데, 네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이시기까지 이다; 잘보라 그분이 오신다;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에 머무르겠느냐? (말. 3:1-2),
위 구절에서 주님이 “언약의 천사”라 불려진다. 안식일은 “영구한 언약”이라 불려지는데(출. 32:16), 그 이유는 그것이 주님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천적 인간이 그분을 수단으로 거듭나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참 언약 자체이신 바,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는 모든 것은 언약으로부터 이다. – 마치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인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들 안에 계시고, 언약 자체가 그것들 안에 있고, 거기서 그들은 받아진다. 이것들이 거듭나는 인간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바, 거듭난 자로부터, 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언약으로부터 있고 언약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내 자비가 너희로부터 떠난 것이 아니다,
내 평화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 54:10),
위에서 “자비”, 그리고 “평화의 언약”은 주님을 표시하고, 그분에 속하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라, 들어라, 그리고 네 혼은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영원한 언약을 만들 것이다, 다윗의 확실한 자비들을; 잘 보라,
나는 그에게 백성에 대한 증거를 줄 것이다, 민족들에게 지도자와 입법자를 (이. 55:3-4).
“다윗”은 여기서 주님을 표시한다; “영원한 언약”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이런 것들 안에,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에게 감, 들음, 혼이 살 것임에 의해 뜻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개의 심정, 그리고 한 개의 길을 줄 것이고, 그들은 모든 날 동안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의 아들들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을 그들과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경외함을
그들의 심정에 놓을 것이다 (예.32:39-40).
이것이 거듭나지는 이들에 관해서, 거듭나지는 이들에 속한 것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즉 “한 개의 심정과 한 개의 길,” 즉 선행과 신앙,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마찬가지로 언약으로부터 있다. 다시:
잘보라 날들이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나는 새로운 언약을 이스라엘의 가문과
그리고 유다의 가문과 만들 것이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만든 언약에 따라서가
아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 언약을 헛된 것으로 돌려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이 날들 후에 이스라엘의 가문과 만드는 언약이다; 나는 내 법들을 그들
한 가운데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심정에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백성일 것이다 (예. 31:31-33).
여기서 “언약”의 의미가 확실하게 설명된다, 그것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있는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고 다시 예레미야서에서, 사랑은 “낮의 언약”, 그리고 신앙은 “밤의 언약”이라 불리운다 (예. 33:20). 에스겔서에서:
나, 여호와, 그들의 하느님일 것이다, 그리고 내 종 다윗 그들의 한 가운데에서
제1인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악한 짐승이 그들의 토지로부터 중단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안전히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숲들에서 잘 것이다 (겔. 34:24-25).
여기서 거듭남이 분명하게 취급되어진다. “다윗”은 주님을 표시한다. 다시:
다윗은 그들에게 영원히 제1인자 일 것이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영원의 언약일 것이다;
나는 내 성소를 그들의 한 가운데 영원히 놓을 것이다 (겔. 37:25-26).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듭남이 취급되어진다. “다윗”과 “성소”는 주님을 표시한다. 그리고 다시:
나는 너와 더불어 언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너는 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물들로 씻었다, 그리고 네 위로부터 네 피들을 씻어내버렸다,
그리고 나는 기름으로 네게 기름부을 것이다 (겔. 16:8-9),
위 구절 역시 거듭남이 명백하게 뜻해진다. 호세아서에서:
그 날에 나는 들판의 들짐승과 더불어, 그리고 하늘들의 새와 더불어,
그리고 땅의 기는 것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언약을 만들 것이다 (호. 2:18),
거듭남을 뜻하고 있다; “들판의 들짐승”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하늘들의 새”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되찾으심을 보낸 그분;
그분은 그분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다 (시. 111:9),
위 구절 역시 거듭남을 뜻한다. 이것이 “언약”이라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주어지고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지지 않는 이들, 같은 말로, 예배를 외적인 것에 있게 만드는 이들,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고, 자신을 예배하는 이들, 마치 신들이라도 된 듯,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을 높이 평가해대는 이들에 관해서, 그들은 언약을 헛되게 만든다 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주님으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의 언약을 내던졌다,
그리고 자신들을 다른 신들에게 구부려 절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섬겼다 (예. 22:9).
모세의 책에서:
태양, 달, 하늘들의 군대 같은 다른 신들을 섬겨 언약을 위반한 자는
돌로 칠 것이다 (신. 17:2, 3).
“태양”은 자기를 사랑함; “달”은 거짓된 원리들; “하늘들의 군대”는 거짓들 자체를 표시한다. 이상의 모두로부터 이제 명백해지는 바, “언약의 궤”는 그 안에 “언약”이, “증거”가 있는 바, 그것은 주님 자신임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책” 역시 주님 자신을 의미했다 (출. 24:4-7; 34:27; 신. 4:13, 23); 그리고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출. 24:6, 8)에 의해서도 주님 자신이 의미되고 그분만이 거듭나게 하는 자 되심이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언약“은 거듭남 자체를 표시한다.

너는 방주로 들어가라,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네 아내, 그리고 너와 더불어 네 아들들의 아내들도 (들어가라). 이것은 그가 구원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핀 내용과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하다: 그는 거듭났기 때문에 구원되어졌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앞서 살폈다 (5:4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아들들”과 “아내들”이다, 그 이유는 “아내들”은 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이 없으면, 또는 선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없으면 진리는 생산되어질 수 없다. 생명은 선 안에, 선으로부터의 즐거움 안에 있다. 진리가 선과 선으로부터의 즐거움으로 생명을 가지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선 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만들어 내지고 태어나진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 질서이다. 진리로부터 있는 신앙은 선에 속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만들어내고 태어난다. 이는 빛이 있는 경우와 같다; 태양, 또는 불꽃으로부터가 아니면 빛은 없다; 불꽃이 빛을 만들어 낸다. 진리는 선의 형체일 뿐이다; 그리고 신앙은 사랑의 형체이다. 진리는 선의 품질에 따라 사랑으로부터 만들어 내진다. 이것이 “아내” 그리고 “아내들”이 언급된 이유이다, 이들이 진리들에 인접된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음 절에서 말해지는 것은 방주로 들어가는 것들은 쌍(pair)들, 숫컷과 암컷으로 말해진다; 그 이유가 진리들에 인접한 선들 없이 거듭남은 없기 때문이다.

19절. 그리고 모든 육체의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모두의 한 쌍들을 너는 방주로 들어오게 해서 너와 더불어 생명이 보존되게 만들어라. 그들은 숫컷과 암컷일 것이다.

“살아 있는 혼”에 의해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모든 육체”에 의해서는 의지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됨은 앞서 말해진 것,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살아 있는 혼”은 일반적으로 어느 종류이든, 살아 있는 모두 각각의 생물이 의미되어진다 (창. 1:2-24, 29 참조);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모든 육체”와 즉각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교인은 전진(진급, advance)하기에 앞서 지적인 것들의 측면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절에서 “새”(이는 지적, 또는 합리적인 것들)가 먼저 언급되고, 후에 “짐승들”이 언급된다. 짐승들은 의지에 속한 것들이다. “육체”는 특별하게는 물질적인 것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의지 측면에 속한다.

모든 쌍들을 너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그것들이 살아 있게 보존하라. 이것이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앞 절과 연결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진리들은 선들과 그것의 즐거움을 통하지 않고는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것들도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통하지 않고는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두의 쌍들이라 말해진다. 즉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과 의지력에 속하는 선들, 모두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이해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또한 선한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고, 가진듯 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저 가졌다 라고 편리하게 항간에서 말해지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거듭나지 않은 자라 해도 그는 이성으로부터, 지식으로부터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살아 있지 않다. 그는 의지 속에 어떤 종류의 선한 것을 가질런지 모른다. 마치 이방인들의 경우나 야수들의 경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살아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유추된 것일 뿐이다. 인간 안에 있는 이런 선은 그가 거듭나질 때까지 살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살아 있게 만들어진다. 다른 삶에서는 살아 있지 않은 것과 살아있는 것은 분명하게 지각되어진다. 살아 있지 않은 진리는 어떤 물질, 섬유질 같은 것으로 지각되어 닫혀진다; 살아 있지 않은 선은 어떤 나무 종류, 뼈들, 돌 같이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 있게 만든 진리와 선은 열려있고, 활력있고, 영적, 천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어, 주님으로부터 열리고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생각에서, 모든 행동에서, 그들의 어느 쪽 지극히 작은 것에서도 그러하다. 이것이 왜 살아 있게 보존하려고 쌍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숫컷은 진리를, 암컷은 선을 뜻하는 것은 앞서 설명했다. 인간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일종의 결혼의 모습이 있다.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과 쌍이 되어 있다. 이런 쌍을 이룸, 또는 결혼 없이는 아무 것도 산출되지 않는다.

20절. 새는 각 종류대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지면에서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 모든 종류가 한 쌍씩 너에게로 들어와서 생명이 보존되게 하라.

“새(fowl)”가 지적인 것, 또는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리고 “짐승”이 의지에 속한 것들, 또는 애착들을 의미한다는 것도 살폈다. “지면의 기는 것들”은 위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제일 낮은 수준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는 지면의 기는 것은 지면에서 가장 낮은 것이다는 간단한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것들이 살아 있게 보존하기 위해 모든 쌍들이 네게로 들어가라”는 그들의 거듭남을 의미한다.

“새는 각 종류대로,” 그리고 “짐승도 각 종류대로,” 그리고 “기는 것도 각 종류대로”라고 말해져 있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는 이해력으로부터,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이 무수하게 많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서로가 완벽히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것이 인간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거듭남 동안,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각각 그리고 모두를 그것들의 질서에 따라 끌어내시고, 그것들을 분리하시고 배치하시어 그것들이 진리들과 선 쪽으로 구부려지도록 하시고, 그것들이 결합되게도 하신다. 이 작업은 상태들에 따라 다양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또한 무수하다. 이 모든 것들은 각 종들로서, 각 속들로서, 그리고 각 상태에서 완전해짐은 영원까지조차 결코 있어질 수 없고, 각각으로 있을 때이든 병합될 때이든 그 숫자는 셀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하고야 만다. 이것이 주님께서 거듭남에 관하여 니고데모에게 말하신 것이다:
바람은 그것이 바라고 싶은 곳으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것으로부터 소리를 들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 (참) 영으로부터 태어나지는
모두 각각의 사람도 이와 같다 (요. 3:8).

21절. 너는 먹어야 하는 모든 식품을 너에게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것들을 너에게로 수집하라.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그들을 위한 식품일 것이다.

거듭나지게 되는 인간의 식품에 주목해보면 이러하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있기 앞서, 그의 거듭남을 섬기게 될 모든 것들, – 의지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들과 애착들로부터의 기쁨들, 또한 이해력을 위한 수단으로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 이 진리들을 확증해주는 다른 근원의 것들까지 공급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런 것들이 공급되어질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다; 이것들은 식품을 위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 인간은 그의 거듭남이 진행되기 앞서 주님에 의해 그를 위해 각 당사자만을 위한 특유의 식품이 설비되어진다.

“먹게 되는 모든 식품(food)을 그가 가져옴”이 선들과 기쁨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하다: 즉 진리가 아닌 선들과 기쁨들이 인간의 생명을 구성한다는 것; 그 이유가 진리들은 선들과 기쁨들로부터 그것의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유아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선인 것과 기뻐함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떤 지식, 또는 이성도 결코 은근히 심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을 “식품”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들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인 바 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쉽게 알아차려질 것이다.

“자신에게로 수집함”이 진리들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수집함”은 인간의 기억 안에 있는 것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기억 안에 진리들은 다 함께 모여져 있다. 그리고 이 표현에는 인간이 거듭나기 앞서 선들과 진리들 모두가 수집되어 있을 것임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가 함께 모아진 선들과 진리들이 없으면, 실상 주님께서는 모여진 이것들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시는 바, 인간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그것은 너를 위해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식품으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바, 선들과 진리들 모두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선들과 진리들이 인간의 진짜 식품임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결여된 자는 생명이 없어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죽어 있을 때, 그가 먹은 식품은 악들로부터의 기쁨들과 거짓들로부터의 쾌락들이다. 이것은 죽음의 식품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육체적, 세상적,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더불어 그것들 안에는 생명의 어떤 것도 없다. 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사람은 말씀에서 “식품” 또는 “빵”이 언급될 때면 언제든지 그것은 육체의 식품을 뜻한다고 상상한다; 예를 들면,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매일의 식품을 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놓고 그는 육체의 지탱을 위한 어떤 것을 뜻한다고 상상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것은 식품 외에 의복, 자산, 등등도 넓혀 포함될 수 있다고 우긴다. 더욱이 그들은 이 기도문이 어떤 다른 식품을 뜻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부정한다; 어쨌든 그들도 본문의 앞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들에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주님의 왕국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이 외에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천적이고 영적이다는 것을 알게 될런지 모른다.
이로부터와 이와 유사한 실예로부터 오늘날 인간이 얼마나 육적인지는 충분하게 분명하다; 그리고 유대인들 같은 경우, 그들은 말씀을 총체적이고 물질적 의미에서 말씀에서 말해진 것을 가지고 있도록 처방되어져 있다. 주님 자신 말씀에서 “식품”과 “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백하게 가르치신다. “식품”의 경우,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멸해지는 음식[식품]을 위하여 애쓰지 말고
영원히 생명을 지탱하는 음식을 위하여 노동하라,
사람의 아들은 이 음식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그리고 “빵”에 관하여 말하신다. 요한복음서에서:
너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다. 인간이 이것으로부터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는다면,
그는 영원하게 살 것이다 (요. 6:49-51, 58).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 같은 이가 오늘날에도 있어 말한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 이들은 “물러가서 더 이상 그분과 걷지 않았다” (요. 6:60, 66). 이들에게 주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은 영이고, 그것들은 생명이다” (요. 6:63).
그리고 “물”에 관하여도 위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요한복음서에서 이야기하신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물로부터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게 되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구한 생명을 솟아나게 하는
물의 우물일 것이다 (요. 4:13-14).
그러나 주님께서 우물가에서 말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들었던 여인 같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있어, 말한다. “주여, 우리에게 이 물을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목마르지 않아, 여기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하십시오” (요. 4:15).
말씀에서 식품이 영적 식품과 천적 식품, 즉 주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사랑 외에 다른 식품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를 보자:
적들이 그의 손을 예루살렘의 욕심낼만한 모든 것들에 뻗쳤다; 그 이유가
그녀는 민족들이 그녀의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에 관하여
당신께서는 그들이 너희 회중 안으로 들어오게 말라고 명령하셨다. 모든 백성이
슬피운다, 그들을 빵을 찾고 있다; 그들은 혼을 기운나게 하려고 식품을 위해
자기들의 값진 것을 주었다 (애. 1:10-11).
위 구절에서, 영적 빵과 식품이 뜻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주제가 성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외쳤다, 그들은 나를 속였다; 성에 있는
내 성직자들과 원로들이 죽어버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의 혼을
소성케하려고 자신들을 위해 식품을 찾았기 때문이다 (애. 1:19),
같은 의미에서, 다윗서에서:
이들 모두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께서는 때에 맞추어 그들의 식품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줍니다, 그들은 모웁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을
여십니다, 그들은 선으로 만족해집니다 (시. 104:27, 28).
여기서 더 마찬가지로 영적, 천적 식품이 뜻해진다.
이사야서에서:
오, 목마른 모든 자여, 너희는 물들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우유를 사라 (이. 55:1),
위에서 “포도주”와 “우유”는 영적 마심과 천적 마심을 표시한다. 다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그분은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악한 자를 거절하고
선한 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유가 풍부해지는 때가 오고 그들은 버터를
먹을 것이다; 그 이유가 버터와 꿀을 그 토지 한 가운데에 남은 모든 이가
먹을 것이다 (이. 7:14-15, 22).
위에서 “꿀과 버터를 먹는 것”은 천적-영적인 것을 내 것 되게 하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이들에 관하여 말라기서에서:
너희는 보물집으로 모든 십일조들을 가져오라,
그리하여 내 집에 식품이 있을런지 모른다 (말3:10).
“십일조”는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천적인 식품과 영적인 식품의 본래의 모습은 다른 삶으로 가야만 가장 잘 알 수 있다. 천사들과 영들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같은 식품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는 모두 각각의 말”에 의해서이다 (마. 4:4 참조). 진리는 이렇다: 즉 주님만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오고 있다는 것. 이렇게 천사와 영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령들 역시 천사들 같이 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악한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선들과 진리들을 받아서 뒤집기 때문이다. 받음과 애착은 그릇에 따라서 있다. 이는 태양의 빛을 받는 다양한 대상들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은 빛을 유쾌하지 않거나 불일치할 수 있는 색깔들로 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대상은 빛을 유쾌하고 아름다운 색상으로 바뀌게 한다. 하여 그것들의 형체에 따라서, 결정함에 따라서, 그들의 부분들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서 바뀐다. 전체 천국과 영들의 전체 세계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살고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각각의 개인은 생명을 가진다; 온 천국과 영들의 세계 뿐 아니라 온 인류 역시 위와 같게 생명을 가진다. 이런 사항들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수 년 동안의 계속적인 경험으로부터 나는 그것들이 최고로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악령들의 세계에 있는 악령들은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기꺼이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종종 역설되어 왔었다. 그들이 이것이 진리임을 분노로 치달으며 인정하기까지 역설되었다. 만일 천사들, 영들, 인간들이 이 식품을 박탈하면, 그들은 그 순간 종료되고 말 것이다.

22절. 그리고 노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했다. 그렇게 그는 했다.

“했다”가 두 번 반복한 것에 주목해 보자. 이는 양쪽, [선과 진리]를 포함한 표현이다. 이는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것이 두 겹의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평화 안에서 그분이 그의 발로 가지 않았던 길을 통과하셨다.
누가 이것을 작업하고 행하겠느냐? (이. 41:3-4).
위에서 하나의 표현은 선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의 표현은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또는 하나는 의지에 속한 것에, 다른 하나는 이해함에 속한 것에 관련되고 있다; 즉 “그분은 평화 안에서 지나셨다”는 의지에 속한 것을,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발로 가본 적이 없는 길”은 이해함에 속한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작업했다와 행했다에서 포함되고 있다. 그런고로 의지력과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 또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함께 결합하여 각각과 모든 것 안에서 결혼의 모습이 있고, 천국의 결혼에 관련을 맺는다. 여기서 더 예외는 없는 바, 한 개의 말이 반복되어져 (천국의 결혼이)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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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7 장

성경: 창세기 제 7 장

1. 그리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2. 너는 깨끗한 모든 짐승은 남자와 그의 아내 일곱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은 남자와 그의 아내 둘을 너에게로 취하여라.
3. 하늘들의 새 역시 남성과 여성 일곱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 있게 보존하라.
4. 지금부터 칠 일 후 나는 사십 일 주야로 땅에 비가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가 만들었던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
5.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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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 그리고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
7. 그리고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 갔다.
8.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깨끗한 짐승, 깨끗하지 않은 짐승, 새와 지면 에서 기는 모든 것들이
9. 둘과 둘, 남성과 여성이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10. 그리고 일곱 날이 지나자 홍수의 물들이 땅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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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노아의 삶이 육백 년째 된 둘째 달, 십칠 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 이 깨어졌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
12. 그리고 비가 땅에 사십 일 주야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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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 들들의 아내가 방주로 들어 갔다
14. 그들,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새들, 모 든 나는 것들, 모든 날개 달린 것들.
15.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와서 둘과 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가 방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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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리고 안에 들어간 그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물이 불어났고, 그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떠올랐다.
18. 그리고 물은 더욱 거세졌고, 땅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방주는 물의 얼굴에서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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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 그리고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 다.
20. 물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
21. 모든 육체, 즉 땅에서 기는 것, 새,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을 기는 모 든 기는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22.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든 것,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었다.
23. 그리고 그분은 지면에 있었던 모든 물질,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 기는 것까지, 하 늘의 새들까지 파괴하셨다. 그래서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그래서 노아 만이,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것들만이 남았다.
24. 그리고 물은 일백 오십 일 동안 거세어져 있었다.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서 너의 의로움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1-5절까지는 앞 장의 구절과 거의 같음이 발견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이는 단지 반복에 불과하다 여길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예들이 말씀의 따른 부분에서도 발생하는데, 특히 예언서의 경우이다. 거기에서 같은 것이 다른 말들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그 단어들까지 채택되거나 두 번씩 서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전에 말한 바 같이, 그 이유는 인간 안에는 서로가 구분되는 두 능력-의지력과 이해력-이 있기 때문이고, 말씀에서 이 두 능력들이 구분되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여기서 뒤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말하셨다. 이것이 그렇게 되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있으심(esse, 스스로 계심)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함으로 분명해진다: 그분이 말하시는 것이 때가 이르고 이루어지는 것; 앞 장 13절의 경우, 그 밖의 구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하셨다”라는 표현은 그것이 와지고 이루어졌음 이다.

이름 “여호와”가 여기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지금 선행이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앞 장 9절에서 끝 절까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이 말해진다, 그 이유는 거기서 취급된 주제는 “노아”를 준비하심(“노아”라 불리는 교회인을 준비하심) 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력 측면에 관한 것들,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는 의지력에 관한 것들,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이 취급된다. 이해력에 관한 것, 신앙에 관계된 것이 주제로 취급될 때,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나, 의지력에 속한 것, 사랑으로부터의 것들이 취급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해력, 신앙에 속한 것들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사랑에 속한 것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사랑과 선행 안에 계시고 신앙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선행으로부터 있을 경우에는 그 신앙 안에도 계신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신앙은 “밤”에, 사랑은 “낮”에 비교되어진다; 창세기 1장의 경우, “큰 빛들”이 말해지고, “더 큰 빛”, 또는 태양, 이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낮을 규율한다, 그리고 “덜 큰 빛”, 또는 달, 이것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밤을 규율한다 (창. 1:14, 16); 그리고 예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 31:35; 33:20; 시. 136:8, 9; 계. 8:12).

너와 네 모든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것이 의지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있는 앞 장에서의 경우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즉: “너는 너와 네 아들들, 그리고 네 아내, 그리고 너와 더불어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 (18절). “집”이 의지와 의지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함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의 경우:
그들의 집들이 타인의 것들로 변할 것이다, 그들의 들판들과 그들의 아내들도 (예6:12).
여기서 “집들”과 “들판들”과 “아내들”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 다시:
너희는 집들을 짓고 그것들 안에 거주하라;
그리고 동산을 심고 그것들의 열매를 먹어라 (예. 29:5, 28).
위 구절에서 “집들을 짓고 그것 안에서 거주함”은 의지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동산을 심는 것”은 이해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른 구절에서도 같다. “여호와의 집”은 많은 장소에서 언급되는 말인데, 이는 사랑을 제 1의 원리로 삼는 교회를 의미한다; “유다의 집”은 천적 (왕국의)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평면의) 왕국을 의미한다. “집”이 교회를 의미하는 바, 교인의 마음(의지와 이해함에 속한 것들,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있는 마음) 역시 “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 준비되어지는 것이다 함은 앞 장 18절에서 이미 서술했다. 그러나 거기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인 이해력에 속한 것들 측면에서의 구원을 위한 준비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지 측면에 관한 것, 즉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다. 인간이 준비되지 않으면, 즉 진리들과 선들을 공급받아 지참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거듭나아질 수 없고, 시험받아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은 악령들은 어떠한 때에 그의 거짓들과 악들을 흥분시킨다; 그런데 만일 진리들과 선들이 현존하지 않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인간을 그가 이미 지닌 진리들과 선들 쪽으로 구부려주시거나,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흐트시는데, 이것들이 가능하지 않는 바, 그는 (악과 거짓에) 굴복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때의 사용을 위해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들 이다.

그 이유가 나는 이 세대에서 의로움을 네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선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 9절에서 서술했고 보여주었다. 이 9절에서 “정의로운” 또는 “올바른”이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완전한”은 선행의 진리를 의미한다. “세대들”이라 하여 복수로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해력에 속한 것이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대”라 하여 단수인데, 그 이유는 의지력에 관한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의지 부분은 이해 측면의 것을 그 자체에서 납득하지만, 이해 부분은 의지 측면의 것을 그 자체로는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절. 너는 깨끗한 모든 짐승, 남자와 그의 아내를 일곱씩을, 깨끗하지 않은 짐승, 남자와 그의 아내를 둘씩을 너에게로 취하여라.

선에 대한 애착함들이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짐승에 관해 살핀 내용으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애착들이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인간 자체,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에 주목해보면,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짐승이 지닌 감각들, 식욕, 욕구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의 선, 아니, 그의 최고의 사랑들도 매우 유사하다; 자기와 같은 종류의 동료를 사랑함, 제 새끼를 사랑함, 제 아내를 사랑함, 등등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것,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은 그가 내면의 생명을 지니는 까닭이다. 이것을 짐승들은 가질 수 없고 결코 가지지 못한다. 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다. 그리고 만일 이 생명이 그가 가진 짐승과 공통되는 모든 것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짐승밖에 그 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한 예로 동료들을 사랑함을 취해보자: 만일 그가 자신을 위해 동료들을 사랑한다면, 그의 사랑 안에는 천국으로부터, 또는 신성으로부터의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인 바, 그는 이로부터서는 사람이라 불리울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지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생명과 그의 이해력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신앙의 생명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진 생명 덕택에 그는 사 후 살게 된다; 주님이 그를 그분 자신에게 인접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는 천사들과 더불어 그의 천국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원히 산다. 그리고 비록 인간이 야생 짐승 같이 살고, 자신밖에, 자신을 중시하는 것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자비는 위대해 있으시어-그 이유가 이 자비는 신성이고 무한이기 때문-그분은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 사람 안으로 천사들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신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다른 방법 없이 받으리라 상상조차 하시는 바, 이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놓고 도덕적, 시민적, 세상적, 또는 물질적인 것에 관련하여 선인지, 악인지를 생각하고, 반성해보고,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태고인이 알았고 겸허하게 인정했던 것은, 자기들은 짐승이나 들짐승밖에 더 아니다는 것, 단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가진 것 덕택에 사람 노릇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짐승 등등에 비교했을 뿐 아니라 짐승 등등의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했다; 그래서 의지력으로부터의 것을 짐승에 비교했고, 그리고 짐승들로 불렀다; 그리고 이해력으로부터의 것은 새들에 비교했고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애착들과 악한 애착들을 구별했다. 선한 애착들을 그들은 어린 양들, 양, 염소 새끼들, 암염소들, 숫염소들, 숫양들, 어린 암소들, 황소들에 비교했는데, 그 이유는 이 짐승들이 선하고, 온화하고, 그들의 식품이 되어주고, 그것의 가죽과 털은 의복을 만들 수 있어 생활에 요긴하기 때문이다. 이 짐승들은 제1의 깨끗한 짐승들이다. 그러나 악하고 맹렬하여, 생활에 요긴하지 못한 짐승은 불결한 짐승들이다.

거룩한 것들이 “7”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일곱 째 날, 또는 안식일에 관하여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은 일곱 째 날이시다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천적 (왕국의) 교회, 또는 천적 (왕국의) 인간이 일곱 째 날이다는 것, 그리고 참으로 천적 (왕국) 자체이다는 것, 이는 최고로 거룩하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서와 같이, 내적 의미에서는 “7”이 숫자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까지 하고 있다. 실지로 내적 의미에만 머무는 이들, 마치 천사나 천사 같은 영은 숫자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7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깨끗한 모든 짐승들의 일곱 쌍들이 취해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는 마치 일곱이 둘보다 더 많은 듯이 악한 짐승보다 선한 짐승이 더 많이 취해졌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교인의 의지 부분에 선들이 공급되었다는 것, 그 선들은 거룩하다는 것, 이것 때문에 그는 거듭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해졌기도 하다.
“일곱”이 거룩인 것, 또는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표현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의식(ritual)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의식에서 숫자 일곱은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피와 기름을 일곱 번 뿌렸는데, 레위기서를 보자:
그리고 모세는 기름붓는 기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막에 발랐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도 발랐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신성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제단
위에 그것을 일곱 번 뿌렸다, 그리고 제단과 그것의 모든 기구들, 그리고 물두멍과
그것의 받침에 발라서 그것들이 신성해지게 했다 (레. 8:10-11.
위 구절에서 “일곱 번”은 만일 그 숫자가 거룩인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통째로 아무 의미 없이 있었을 것이다. 또다른 구절에서: 아론이 거룩한 장소 안으로 왔을 때 말해졌다:
그리고 그는 수소의 피를 가져 와라, 그리고
그것을 동쪽 자비석 위에 그의 손가락으로 뿌려라. 그리고 자비석 앞에서
그는 자기 손가락으로 피를 일곱 번 뿌려라 (레. 16:14).
그리고 제단에서도:
그리고 그는 자기 손가락을 가지고 일곱 번 그것 위에 피를 뿌려라, 그리고 그것을 깨끗해 지고 신성해지게 하라 (레. 16:19).
위 구절의 세부사항들, 각각 그리고 모두는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거룩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피”, “자비석,” 그리고 피가 뿌려진 방향인 “동쪽”, 그러므로 “일곱” 또한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제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레위기서를 보자:
만일 어떤 혼이 잘못을 통하여 죄짓는다면, 그리고 만일 기름부은 성직자가
죄를 지어 백성들에게 죄있게 하였다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거세한 수소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는 피에 자기 손가락을 담글 것이다, 그리고 피를
성소의 베일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릴 것이다 (레. 4:2-3, 6).
위 구절에서도 “일곱”은 거룩인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죄를 씻음이고, 죄를 씻음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고, 그러므로 취급된 주제가 주님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식이 나환자에 관련하여 제정된 구절에 있다, 이에 관해 레위기서를 보자:
새의 피로부터, 삼목, 주홍색(실), 우슬초와 함께, 성직자는 나병환자임으로부터
깨끗해지게 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려,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라. 같은 방식에서
그에게 그의 왼쪽 손바닥에 있는 기름을 여호와 앞에서 일곱 번 뿌려진다, 그리고
그렇게 나병환자가 있던 집에도 하는 바, 그는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을 가져오고,
그리고 새의 피를 가지고 일곱 번 뿌린다 (레. 14:6-7, 27, 51).
위 구절에서도 “삼목”, “주홍색(실)”, “기름”, “새의 피”, 그리고 “일곱” 등등이 거룩한 것에 대한 표현이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것들의 의미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리하여 거룩하다는 것을 빼놓으면 남아있는 모든 글자는 죽은 듯, 또는 모독적인 우상을 섬기는 듯 하다. 그러나 위 구절이 신성한 예배를 담은 거룩한 것임을 의미한다면, 위 글자는 외면적인 것들에 의해서 내면적인 것들을 표현만 해줄 뿐이다. 위 글자를 그대로 사용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런 의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몰랐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에도 “삼목”, “우슬초”, “주홍색(실)”, “새”에 의해 의미된 것을 모르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몰랐던 거룩한 것들 안에 포함된 것을 알고 싶어하고, 그렇게하여 주님을, 또는 오실 메시아를 예배했다면, 그리하여 자기들의 나병을 치료했다면, 즉 그들이 거룩한 것들을 모독함에서 벗어났다면, 그들은 구원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렇게 생각하고 믿은 자들이 저쪽 삶에서 왔을 때 그들이 바란다면 위 구절이 표현한 모두, 그리고 각각의 의미들을 즉시 가르침을 받아 온전히 이해함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붉은 어린 암소에 관해 명령되어졌다:
성직자는 그녀의 피를 그의 손가락으로 가져다가 그녀의 피를 만남의 천막의
얼굴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릴 것이다 (민. 19:4).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 주님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천적 (왕국의) 인간, 그리고 천적 왕국 자체를 의미한 바, 유대 교회에서 일곱 째 날은 그들의 모든 종교적 준수 사항 중에서 가장 거룩한 준수 사항이었다; 이로부터 칠 년 마다 “안식일 중에서도 안식일”이 왔다 (레. 25:4), 그리고 “희년”이 년 수들의 일곱 안식일들, 또는 칠 년씩 일곱 번이 지난 후에 선포되어졌다 (25:8-9). 최고 의미에서 “7”은 주님, 이로부터 사랑의 거룩함을 의미함은 금빛의 촛대와 그것의 일곱 등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출. 25:31-3, 37; 37:17-19, 23; 민. 8:2, 3; 슥. 4:2 참조) 그리고 이에 관해 요한에 의해 쓰여진 바:
일곱 금빛의 등잔들; 그리고 일곱 등잔들 한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은 분 (계. 1:12-13).
위 구절에서 “일곱 등불들을 가진 등잔”은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등불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 천적 수준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등불들은 “일곱”이다.
그리고 다시:
왕좌로부터 불로부터의 일곱 횃불들이 나와서, 왕좌 앞에서 타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계. 4:5).
위 구절에서 주님의 왕좌로부터 나온 “일곱 횃불들”은 일곱 빛들, 또는 등불들이다. 예언서에서 숫자 “7”이 발생하는 경우,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에서:
달의 빛이 태양의 빛 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빛은 일곱 날의 빛 만큼으로
일곱 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날에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들의 명령 위반(breach)을
싸매주실 것이다 (이. 30:26).
위 구절에서 “일곱 배가 된 빛, 마치 일곱 날들의 빛”은 일곱 배를 의미하지 않고, 그러나 사랑이 거룩하다가 태양에 의해 의미되어졌다. 창세기 4장 15절에 보여준 숫자 “7”에 관한 것도 참조하라. 위 모든 구절로부터 다시 확인되는 바는 숫자 일곱이 단지 7을 의미하려고 사용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6:3도 참조).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인간의 의지 측면에 관한 것들이다는 것, 또는 의지 부분이라 단언되는 인간에 있는 선 또는 거룩한 것들임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 “깨끗한 짐승을 일곱씩을 가져와라”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에 관하여도 다음 절에서 똑같이 말해진다. 그러나 6장 19-20절의 경우, “일곱”이라 말해지지 않고 “쌍, 또는 둘씩”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이해력에 관한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거룩하지 않으나,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사랑으로부터 거룩하다.

“남자(vir)와 아내”는 진리들이 선들과 결합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남자”가 진리, 이해력에 속한 것, 그리고 “아내”는 의지력에 속한 것, 선이다는 의미로부터, 또한 남자가 생각이나 애착, 행동의 어느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 남자 단독으로는 그것 안에 의지력과 이해력의 어떤 종류의 결혼도 의미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인간의 각종 기관 형체, 그것이 합성되어 있든 하나만 가지고 관찰해 보든, 거기에는 최고로 단순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비활성(passive, 수동적)과 활성(active, 능동적)이 있고, 이것들이 결혼 같은 식의 쌍, 즉 남자와 그의 아내라는 쌍을 이룬 관계에 있지 않다면, 거기에 존재조차 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생산하는 것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이는 보편적 본성이다. 이것들의 끊임 없는 결혼들이 천국의 결혼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고 도출되어진다. 주님의 왕국에 관한 생각, 즉 이 왕국은 결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보편적 본성이 되어 모든 것 안에서 강하게 인상지워져 있다.

악한 애착들이 “깨끗하지 않은 짐승”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깨끗한 짐승들에 관한 내용에서 미루어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깨끗하다”라고 불린 이유는 그것들이 온순하고, 선하며, 쓸모있기 때문이다. 불결한 것-이것도 종들과 속들이 있는데-반대적인 것, 맹렬하고, 악하며, 쓸모가 없다. 말씀 안에서 이것들은 이리들, 곰들, 여우들, 돼지들, 이외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들에 의해 다양한 그리워함들과 악한 기질들이 의미되고 있다. 그런데 불결한 짐승들 (즉 악한 애착들)도 방주 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여지고 있다. 진실인 즉 이렇다: 여기서 이 교회의 교인의 품성 측면의 것들이 기술되고 있다. 즉 방주, 그리고 방주 안에 있는 것들, 또는 방주 안으로 데려간 것들을 수단으로 교인들의 품성이 기술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교회인이 거듭나기 전 이 교회인 안에 있던 것들이다는 말이다. 이들은 거듭나기 전 주님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공급 받았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 없이는 누구도 거듭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악들이 말하여진다. 이것이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인간 안에는 거듭나는 동안 반드시 흐트러져야만 하는 악들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의 악들은 거듭나는 동안 선들에 의해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져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에 있는 실제의 악과 유전적인 악은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까지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심어진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단지 상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큼 주님으로부터의 선들을 수단으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 뿐이다. 그리하여 나타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다. 또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지는 악들은 실제의 악들이고 유전적 악들은 아니다;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다.

“쌍들”이 상대적으로 모독인 것을 의미함은 숫자 2의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쌍,” 또는 “둘”은 결혼, 특히 천국 결혼을 서술할 경우, 거룩한 숫자일 뿐아니라, 이것은 6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노동의 육 일은 쉼의 일곱째 날, 또는 거룩한 날과 관계되듯, 2는 3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셋째 날은 일곱 째 날을 위해 사용되기도한다, 그리고 이 두 숫자의 의미는 많이 비슷하다. 그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셋째 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주님이 세상에 오심, 그리고 영광에 계심, 그리고 주님의 오심 모두와 각각이 “일곱째”와 셋째 날에 의해 동등하게 묘사되어진다. 이런 이유로 셋째 날에 앞서 있는 둘째 날은 상대적으로 모독적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에서:
오라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이유가 그분이 상처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기 때문; 그분이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 후에 그분은 우리를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 것이다 (호. 6:1-2).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모든 토지에서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 토지 안에 있는 두 부분들(2/3)이
절멸할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 그 토지 안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을 통하여 삼분의 일 부분을 데려 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은을 정제하듯 정제할 것이다 (슥. 13:8-9).
그리고 은은 일곱 번 순수하게 했을 때 가장 순수했다고 시편 12:6에서 나타난다; 위구절로부터도 “일곱”은 숫자 7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의미하듯, “쌍들”이 쌍들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모독적인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뜻은 깨끗한 짐승들, 또는 선한 애착들에 비교해 불결한 짐승, 또는 악한 애착들이 7대 2의 비율로 적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이유가 (사실상) 인간 안에 있는 악들은 선들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남자와 아내”에 의해 악들과 결합된 거짓들을 의미함은 깨끗한 짐승을 설명한 대목으로부터 알고 있을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그 이유가 앞 구절 부분에서는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고, 여기서는 악들과 결합한 거짓들을 의미한다. 주제에 따라 서술도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3절. 하늘들의 새 역시 남성과 여성 일곱을 온 땅의 얼굴에서 씨가 살아있게 보존하라.

“하늘들의 새(fowl)”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의미함은 이미 살핀 바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일곱”은 이미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룩한 진리들이고, 거룩한 이유는 그것들이 선들로부터 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선들로부터 오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다. 사람들이 말씀으로부터 많은 진리들을 발음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기억으로부터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 또는 선행으로부터 생산된 진리들이 아니면 어떤 거룩함도 그 진리들에 두고 서술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사랑과 선행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 그는 위 설명을 인정하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으로부터가 아닌) 심정으로부터 온다. 신앙의 경우도 같다. 많은 이들이 신앙만이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이나 선행으로부터 있지 않으면, 신앙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사랑과 선행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 안에 주님은 계시지 않는다. 분리된 신앙은 인간 자신이고, 그 안에는 불결함 밖에 더 없다. 그 이유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의 심정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은 그의 자만, 그에게 유리한 것 밖에 더 없다. 그는 이런 것들로부터 말한다. 이런 사항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익히 아는 사실이다. 어떤 이에게 자기는 당신을 사랑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입이 내뱉는 말일 뿐, 심정은 딴판일 경우도 있다. 이러면 이 자는 상대방을 조롱한 것이다. 신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저 세계에서의) 많은 경험으로 나로하여금 알게 해주셨다. 육체 속의 삶 동안 달변과 위장된 경건심까지 가세해 청중들의 감탄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주님과 신앙을 설파했으나 정작 자기 심정으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이 저쪽 삶에서는 주님을 향한 증오함 안에 있고, 신실한 자들을 박해하는 이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남성과 여성”에 의해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어지는 것은 앞서 살핀 것, 즉 “남자”와 “남성”은 진리를, “아내”와 “여성”은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을, “남자와 아내”는 의지력으로부터의 것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결혼을 표현함에서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라 말하기보다는 남자와 아내가 더 친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는 제 스스로 선과 더불은 결혼 관계에 들어갈 수 없으나, 선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선으로부터 생산되지 않은 진리, 선과 짝을 이루지 않은 진리는 없다. 만일 당신이 진리로부터 선을 철수시킨다면, 단어들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온 땅의 얼굴 위에서 씨가 살아 있게 보존하라. 이것이 신앙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교회에 의해 씨가 살아있게 보존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씨”에 의해 신앙이 뜻해진다. 태고 교회의 후손들의 나머지들은 더러운 그러워함들과 끔찍한 설득력들을 수단으로 그들 안에 있는 천적(왕국의) 씨들과 영적 (왕국의) 씨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천적 (왕국의) 씨들은 멸해질 것이나 “노아”라 불린 이들은 영적 (왕국의) 씨들을 수단으로 거듭나졌다. 이것들이 의미되어지는 것들의 (요약이다). 이것들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있게 보존되라”고 말해지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들에만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들 안에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하지 않는 것들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이에게 분명해진다. 영원하지 않은 생명, 짧은 시간에서 멸해지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있음(being, esse)은 있음이 중단되는 것을 두고 있음이라 단정될 수 없다. 오로지 있음이 중단되지 않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고로 살아있음과 있음(living and being)은 주님, 또는 여호와로부터 있는 것들에 만 있다; 모든 있음과 살아 있음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분으로부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수단으로 영원한 행복이 뜻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290항을 다시 찾아 보기 바란다.

4절. 지금부터 칠 일 이면 나는 사십 일 주야로 땅에 비가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들었던 모든 물질을 지면에서 파괴하리라.

“지금부터 칠 일”은 여기서의 경우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절에 포함된 모든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구절에서는 “노아”라 불리는 사람의 시험이 취급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이 장은 “노아”라는 사람의 시험, 그리고 태고 교회인들과 그들에 관련되어 서술되어 왔었던 내용들이 멸절되어짐을 취급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칠일”은 시험의 시작일 뿐아니라, 황폐되어짐의 끝장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지금부터 칠 일”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7”이 거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칠 일”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 그리고 그분의 오심은 영광되심에서, 그리고 세부 측면에서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을 의미한다. 모두와 각 개인에게 따라붙는 주님의 오심은 거듭나아지려는 이들에게는 거듭남의 시작, 황폐되어져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끝장의 시작에 해당된다. 그런고로 이 교회인에게 주님의 오심은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유혹될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고 거듭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이 절멸될 수 밖에 없었던 태고 교회인의 끝이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역시 이와 같았다. 그 당시 교회는 황폐함의 마지막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것들이 “지금부터 칠 일 후면”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는 것이 다니엘 서에 분명해 있다:
칠십 주들이 네 백성 위에, 네 거룩한 성 위에, 위법을 끝장을 내라고, 죄들을
가두어버리라고, 불법을 깨끗하게 하라고, 그리고 대대로 의로운 자를 가져오도록,
환상과 예언을 가두라고,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자에 기름을 부으라고 포고되었다.
그러므로 알고 지각할 것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기 위해 이 말이
나감으로부터 제 1 인 자 메시아까지 칠 주일 것이다 (단. 9:24-25).
위 구절에서 “칠십 주들” 그리고 “칠 주들”은 “칠 일”과 같이 주님의 오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명백한 예언인 바, 숫자를 중복하는 방법, 즉 7개 한 벌(septenary)을 수단으로 시간들이 신성하게, 확실하게 더 한층 강화되도록 의도 되었다. 그런고로 시간들에 적용된 “일곱”은 주님의 오심 뿐 아니라 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작 역시 “지극히 거룩한 자”, 그리고 “회복되고 건설되는” 예루살렘에 의해 의미되었다. 동시에 마지막 황폐되어짐이 “칠십 주들이 거룩함의 성 위에 죄들을 가두고, 위법에 끝장을 보라고 포고되었다”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었다.
말씀의 다른 구절, 에스겔서에서 에스겔이 자신에 관해 말하는데:
나는 델아빕에 포로된 그들에게 와서 그발 강 가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칠 일 동안 그들 사이에서 깜짝 놀란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칠 일의 끝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왔다 (겔. 3:15-16).
위 구절 역시 “칠 일”은 방문의 시작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칠 일 후, 그가 포로된 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다시:
그들은 곡을 매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토지를 일곱 달 동안 깨끗해지게
할런지 모른다; 일곱 달의 끝에서 그들은 살필 것이다 (겔. 39:12, 14).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일곱”은 황폐시킴의 마지막 한계를, 그리고 방문의 처음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의 심정이 인간의 것으로부터 바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심정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 그를 지나갈 것이다 (단. 4:16, 25, 32),
위 구절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황폐됨의 끝,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다.
바빌론에 “칠십 년”을 포로화됨도 같은 것을 표현하였다. 숫자가 “칠십”이든, 또는 “칠”이든 같은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칠 일 또는 칠 년, 또는 칠십 년을 만드는 일곱 세대들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포함한다. 황폐됨이 포로됨의 칠십 년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자유해짐과 성전의 재 건축에 의해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표현되어졌다. 이와 비슷한 의미가 야곱이 라반을 섬김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 년을
섬겼다; 그리고 라반이 말했다, 이 주(week)를 채우라, 그리고 나는 네게 그녀 역시 줄 것 이다. 또 다른 칠 년을 너는 나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야곱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한 주를 채웠다 (창. 29:18, 20, 27-28).
위 구절에서 봉사함의 “칠 년”도 같은 의미이다. 칠 년이 지난 후, 결혼과 자유함이 왔다, 칠 년의 이 시기가 다니엘서에서 “주(week)”라 불리웠다.
같은 의미가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라고 하는 명령에서도 표현되었고, 그리하여 성벽이 무너졌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곱 째 날,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같은 방식에 따라 일곱 번을 돌았다,
그리고 일곱 번째 돌았을 때 일곱 성직자들이 일곱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성벽이 무너졌다 (여. 6:10-20).
위 구절 역시 우리가 위에서 살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성을 일곱 번 돌라는 명령, 일곱 성직자들과, 일곱 나팔이 주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구절들에서 더 살필 수도 있는 바, (욥. 2:13; 계. 15:1, 6-7; 21:9) “칠 일 후면”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 그리고 옛 교회의 끝을 의미한다. 본문 역시 “노아”라 불린 교인, 그리고 그의 시험, 그리고 자신을 파괴한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을 취급하는 바, “지금부터 칠 일 후면”은 노아의 시험의 시작과 태고 교회의 끝 또는 마지막 황폐됨과 시효가 만료됨 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비가 옴”에 의해 시험이 의미된다는 것은 7장의 서문에서 말했기도 하다. 즉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 이 구절은 “비”를 수단으로 묘사되는데, 시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황폐함 역시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페이지(page)들에 등장하는 홍수에 관해 말해지는 것에서도 같은 의미가 나타난다.

“사십 일 낮과 밤”에 의해 시험의 기간이 의미됨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명백하다. “사십”이 시험의 지속 기간(duration)을 의미함은 주님 자신 사십 일 동안 자신을 유혹받게 내버려두신 사실로부터 온다 (마. 4:1,2; 눅. 4:2; 막. 1:13). 그 외 주님께서 오시기 전, 유대 교회와 다른 표현 교회 안에 제정되어 있는 것들 모두와 각각이 그분에 관한 예징(type)들이듯, 그렇게 사십 일 낮과 밤도 일반적으로 모든 시험을 표현했고 의미했다. 또한 특별하게는 대상이 무엇이든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인간은 시험 안에 있을 때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육체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에 관하여 황폐해짐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사십일 낮과 밤”은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 또는 영적, 천적 인간으로 만들어지기 전,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모든 것들, 육체로부터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 또한 여기서의 주제도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의 시험과 홍수 이전 사람들의 황폐해짐 둘 다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숫자 “사십”이 규모가 크든, 작든 시험과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너는 네 오른 쪽으로 누워있어라, 그리고 유다 가문의 불법을 사십 일 동안 짊어져라,
(오른 쪽으로 누운)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나는 네게 정해준 것이다 (겔. 4:6).
위 구절에서 “사십”이 유대 교회의 황폐해짐의 계속 기간을 표시하고, 주님의 시험 받으심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그가 “유다 가문의 불법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나는 이집트의 토지를 황폐해지게 만들 것이다, 황무함의 황폐이다, 인간의 어떤 발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짐승의 어떤 발도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십 년 동안 거주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집트의 토지를 황무한
토지들 한 가운데 있는 황무함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성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의 성들은 황폐된 채로 놓여 쓸쓸한 사십 년을 있을 것이다 (겔. 29:10-12).
위 구절 역시 “사십”은 황폐해짐과 황무해짐의 지속 기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사십 년이 뜻해지지 않고, 일반적으로 신앙의 황무해짐만을, 그것이 시간 측면에서 규모가 크든 작든 그것만을 의미한다. 계시록서에서:
성전 밖인 뜰은 내쫓고 그것은 재지 마라; 그 이유가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계11:2).
그리고 다시:
그리고 거기서 그에게 큰 것들과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이 주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그에게 마흔 두 달 동안 일할 권한이 주어졌다 (계. 13:5),
(위 구절은) 황폐해짐의 존속 기간을 표시하는데, 아마 누구도 시간의 마흔 두 달이 뜻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숫자 “사십 이”가 “사십”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 인용 구절의 마흔 두 달은 “칠 일”이 황폐해짐,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여섯”은 노동의 육 일, 또는 전투함의 육 일로부터 노동을 의미함으로부터, 7에 6을 곱한 숫자가 42인 바, 이는 거룩함을 안에 지닌 거듭나지는 인간의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과 시험의 지속 기간, 또는 노동과 전투를 의미한다. 사실 위 인용 구절에서 보여주듯, 대략적인(rounding) 숫자 40은 대략적이 아닌(not-so-round), 즉 정확한(exact) 숫자인 42를 위해 채용되어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가지기 앞서, 사십 년을 광야에서 인도 되었는데, 이것 역시 시험의 지속 기간, 또한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을 표현하고 의미했다. 시험의 지속 기간은 사십 년 후에 그들이 거룩한 토지 안으로 진입함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고, 황폐해짐의 지속 기간은 이집트를 빠져나간 이십 세 이상의 모두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빼고 광야에서 죽었음에 의해 표현되고 의미되었다 (민. 14:33-35; 32:8-14). 이 백성들이 자주 불평했던 것들은 시험들을, 이 백성위에 닥친 재앙들과 파멸됨은 황폐해짐들을 의미했다. 이런 사항들이 시험과 황폐해짐을 의미한다는 것은 차후 각 해당하는 구절을 만날 때 설명한다. 이런 것들에 관해 모세의 책에 쓰인 바:
너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신 모든 방법들, 너희를 괴롭히시고, 너희를 시험하시고, 너희 심정에 있는
것들을 알게 하시고, 너희가 그분의 명령들을 준수하는지, 아닌지를
(보신 것 등등이다) (신. 8:2-3, 16).
모세가 사십 일 낮과 밤을 시내산에서 있었다는 것 역시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 즉 모세가 백성을 진멸하시지 않도록 탄원하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십 일 주야를 산에 머문 것이 주님의 시험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신. 9:9, 11, 18, 25-29; 10:10).
“사십 일”이 시험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 이유는 방금 말했듯이,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허용하신 것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주님에 대한 표현인 바, 시험에 관한 생각(idea)이 천사들과 더불어 표출될 때, 이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는 천사들이 영들의 세계 안으로 하강하는 동안 벌어지는 모든 천사 같은 생각들과 더불은 경우이다: 즉 그들이 표현적으로 표출되어짐 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에서 시험에 관한 생각이 주님께서 사십 일 동안 유혹되셨기 때문에 숫자 “40”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주님과 더불어, 그 결과 천사 같은 천국과 더불어서도 어떤 것이 현재 있든지, 장차 있을 것이든지 모두 똑같다; 올 것이 현재 있고, 또는 이루어질 것이 이루어져 있다. 이로부터 표현(representative) 교회에서 “40”을 수단으로 시험에 관한 표현이 있다. 황폐해짐의 표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직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들의 세계 안으로 천사 같은 천국의 유입이, 이런 유입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물질(substance)을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파괴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생기있어질 때 마치 인간의 자기 자신(own)은 파괴된 것처럼 되어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관해 이미 설명한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154-155, 164항 참조). 인간의 자기 자신은 모든 악과 거짓이다. 이것에 계속 집착해 있는 한, 그는 죽어 있다; 그러나 그가 시험들 안으로 올 때, 그것은 흩어진다.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수단으로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진다는 말이다. 그런고로 해서 인간은 생기 있어지고 마치 악들과 거짓들은 현존하지 않는듯, 사라진듯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나 있지 않고 더 이상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파괴함”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다. 이것은 흑과 백의 색깔과 거의 같다. 이 둘이 빛의 광선에 의해 가감되어질 때, 이것은 아름다운 빛깔들, 푸른색, 노랑색, 보라색 등등과 같은 빛깔들로 바뀌는 것과 같다. 즉 그것들의 배열에 따라 사랑스럽고 호감이 가는 엷은 빛깔들, 마치 꽃들의 경우같이 표출되어진다. 그럼에도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빛깔인 검은 색과 흰 색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태고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의 황폐됨이 취급되는 바,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내가 만든 존재하는 모두 각각의 것들을 파괴할 것이다”에 의해 절멸해지는 이들도 의미되고 있다 (이 절과 23절에도 있다). “내가 만든 물질”은 안에 천국의 씨, 또는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 모두 각각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다음 절 모두에서, “지면(ground)”이 언급되고 있고, 지면은 선과 진리가 심어져왔었던 교회인을 의미한다. “노아”라 불린 이들 안에서 이 씨는 이미 말했듯 악과 거짓이 흩어짐에 (비례해서)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절멸된 홍수 이전 사람들 안에 있던 이 씨는 가라지들을 수단으로 소멸되어졌다.

5절.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했다.
이는 이런 식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앞에서의 구절과 같다. 앞장 22절과 비교해보면 노아가 두 번씩 “…했다”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이 구절에서는 한 번 뿐이다. 22절에서는 하느님이 등장하나 여기서는 여호와이시다, 그 이유는 앞 절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을 취급했고, 이 구절은 의지력으로부터의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해력에 속한 것들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생각할 때 자기들과 매우 다르고 구분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자기들과 하나되는 것, 또는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해함은 의지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앞 절에서는 두 번 “…했다”고 기록되고 이 절에서는 한 번만 “했다” 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이는 왜 “하느님”이 명명되고, 왜 “여호와”가 명명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6절. 그리고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 그리고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 “노아는 육백 세가 된 아들 이었다”란 그의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한다. “물들의 범람이 땅에 있었다”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

앞 장(창. 6:13-22)에서 이해력 측면인 진리들이 취급되었다. 거기에서 “노아”라 불리는 교인이 그가 거듭나기 전 주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장(1-5절)에서 의지 측면인 선들이 취급되어지는데, 그는 주님에 의해 선들을 증여받았다. 위와 같이 성경 두 부분에서 이를 취급하는 바, (글자로만 보면) 이것이 반복된 듯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 6-11절에서 그의 시험이 취급되고, 이 구절의 경우, 첫 상태와 시험의 시작이다; 그리고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바, 반복이 다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이 절에서 “노아는 육백 세 된 아들이었다”라고 말해졌는데, 11절에서 홍수가 땅 위에 왔을 때, 이것은 “노아의 육백 년째, 둘째 달, 그 달의 십칠 일”에 있었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7절에서 노아는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더불어 방주 안으로 갔다고 말해졌는데, 마찬가지로 13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짐승들이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고 8, 9절에서 말해지는데, 14, 16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여기서도 앞서 말한 것의 반복이 있다는 점이다. 글자 의미만에 머무는 이들은 그것은 반복된 역사적 문제일 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가 말씀 속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해서 이지) 어느 단어 하나, 마침표에 이르기까지 헛되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반복되는 것 안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 반복하시지 않는다. 앞서 말한 그대로 여기서도 이는 첫 번째 시험이다는 것, 이는 이해함 측면에서의 시험이고, 그 후에는 의지 측면에서의 시험이 있다. 시험은 거듭나는 이들에게 이 측면 뒤에도 다른 측면이 뒤를 이어 온다. 그 이유가 이해력 측면의 시험과 의지력 측면의 시험은 아주 다르다. 이해력에 속한 시험들은 가벼운 편이고, 의지력 측면의 시험들은 통렬하다.

이해력 측면에 관련된 시험, 또는 인간 안에 있는 거짓들에 관련된 시험이 가볍다라고 말한 이유는 인간이 감각들의 오류들 안에 있는 고로, 인간은 감각들의 오류들 안에 들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쉽게 떨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므로 이해력 측면의 시험은 인간의 납득력에 따라, 또는 인간의 감각들의 오류들에 따라 말하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 머무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을 믿는다는 단순함에서 신앙을 가졌다면, 그들이 오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가르침을 받도록 쉽게 자신을 내어준다. 예를 들면, 주님은 성내시고 벌 주시고 사악한 자에게 악을 실행하신다고 믿을 때, 이런 신앙은 글자 의미로부터 도출된 것인 바,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려줄 수 있다. 또는 누군가가 자신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자기는 스스로부터 선하다고 단순히 믿고 있다가 저세상에 가면 거기서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고, 더불어 그가 행한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쉽게 가르쳐질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에서 주님은 무료로 보상을 하신다. 그러므로 이해 측면의 문제로서 시험이 올 때, 또는 오류 측면에서 시험이 있을 때, 그들은 가볍게 유혹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첫 시험이고, 이 시험은 거의 시험 같이 여겨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지금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심정의 단순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말씀을 믿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들이 거짓들이나 오류들을 확증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기들의 그리워함을 지지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를 수단으로 몰아채는 이들은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하기 위해 자신들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많은 추론들을 다함께 가져다놓고, 그것도 모자라면 말씀에서 확증하고, 자신들을 설득해 간다.

“노아”, 또는 이 새로운 교회의 사람에 초점을 모아보면, 그는 그가 태고 교회로부터 가졌던 것을 단순 소박하게 믿는 품성을 지녔다. 이는 교리 측면에 관련된 것들이고, 이것은 “에녹”이라 불리워진 이들에 의해 어떤 교리적 형태로 환원되어 수집되었었다. 그래서 (노아에 속하는) 이들은 멸종되는 홍수 이전 사람들, 즉 “네피림”이라 불린 이들, 즉 자기들의 더러운 그리워함들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침수시켜 끔찍한 설득력을 임신하였고, 이로부터 제 아무리 누군가가 그들의 설득력의 잘못을 보여주고 수정하도록 가르쳐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천성(genius)으로부터 있었다. 오늘날의 경우도 이와 꼭 같지는 않지만, 이런 천성, 또는 본성을 지닌 이들이 있는가하면 그와 다른 천성이나 본성를 지니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거듭남이 쉽게 진행되는 한편, 또 다른 이는 힘든 경우도 있다.

노아는 육백 세의 아들 이었다. 이것이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여기 그리고 제 11장의 에벨에 이르기까지에서 등장하는 숫자들이나 년 수 기간과 이름들이 제 5장과 더불어 순수하게 상징적 의미만을 지니기 때문이다. “육백 년”이 여기서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숫자 600을 지배하는 숫자가 10과 6이고, 10이 두 번 곱해졌음(6x10x10)에서 분명하다. 그리고 숫자가 커지든 작아지든 같은 약수(factor)에서 출발하면 그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10과 100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단지 100은 10이 강조된 것, 계시록의 666도 6의 뜻이 강조되고 또 강조를 한 것이다-역자의 의견임). 숫자 “10”에 주목해보면, 이는 이미 6:3에서 살폈는데,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들)를 의미한다; 그리고 “6”은 노동과 전투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경우는 이렇다: 앞서 살핀 것에서, 주제는 시험을 위해 노아라 불리는 인간이 준비되는 것, 주님께서 그의 이해력에 진리를, 그의 의지력에 선들을 공급하심으로 시험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이 진리들과 선들이 리메인스이다. 이 아껴두신 것들은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는 인식되도록 인간에게 가져다 놓이지 않는다. 시험을 통하여 거듭나지는 이들의 경우, 인간 안에 있는 이 리메인스는 그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위해 있고, 인간 안에 있는 거짓들을 흥분시키고 그를 맹렬히 습격하는 악령에 맞서 천사가 그를 위해 방어할 때 꺼내어 사용한다. 리메인스가 “10”에 의해 의미되고, “6”에 의해서는 전투들이 의미되는 바, 이런 이유 때문에 년 수들이 “육백”이라고 말해지고, 이 안에서 지배하는 숫자가 10과 6인 바, 시험의 상태를 의미한다.
“6”을 세부 측면에서 주시해보면, 이것이 전투를 의미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으로부터 분명하다. 그 장에서 육 일이 묘사되고, 이 안에서 인간이 천적 수준으로 되기 앞서 거듭나진다. 이 육 일 안에서 계속적인 전투가 있다. 그러나 일곱 째 날에 쉼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 노동의 육 일이 있고, 일곱 째 날은 쉼을 의미하는 안식일이다. 이로부터 히브리 종은 육 년을 봉사하고, 칠년 째에는 자유해졌다 (출. 21:2; 신. 15:12; 예. 34:14); 또한 그들은 육년 동안 토지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모아들였다, 그러나 칠년 째에는 씨뿌리지 않았다 (출. 23:10-12). 포도원 역시 같은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일곱 째 해는 토지에게 “안식일의 안식일, 여호와에게 안식일” 이었다 (레. 25:3, 4). “6”이 노동과 전투를 의미하는 바, 숫자 여섯은 거짓들의 분산(흩어짐)을 의미한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니 여섯 사람들이 북쪽을 향하여 바라보는 위쪽 문의 길로부터 왔다,
그리고 모든 이가 자기 손에 분산(dispersion)시키는 자기 무기를 가졌다 (겔. 9:2).
그리고 다시, 곡을 향하여:
나는 다시 너를 돌아서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를 여섯 째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북의 측면으로부터 올라오게 만들 것이다 (겔 39:2).
위에서 “여섯” 그리고 “여섯 째로 줄임(reduce)”은 분산을 의미한다; “북”은 거짓들을; “곡”은 외적인 것들로부터 교리의 주제들을 이끌어내는 자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은 내적인 예배를 파괴한다. 욥기서에서:
여섯 곤경들 안에 그는 너를 넘길 것이다, 그렇다, 일곱 째에서 어떤 악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욥. 5:19),
위는 시험의 전투를 뜻하고 있다.
그러나 “여섯”이 노동, 전투, (거짓의 ) 분산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즉 신앙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경우인데, 이는 “열 둘”에 관계될 경우이다. 열 둘은 한 복합체(one complex)에서 신앙과 신앙의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3”은 거룩을 의미한다. 이 “3”으로부터 숫자 “6”의 진짜 의미가 파생된다; 에스겔서(40:5)를 보자. 이 구절에서 사람의 갈대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을 측량했더니, “6” 큐빗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에서도 예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6”의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신앙의 거룩함은 시험의 전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전투의 6 일은 거룩한 일곱 째 날을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노아가 “육백 년의 아들” 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아들”이 이해력 측면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말했다. 그러나 11절에서 그는 “아들”이라 불리우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의지 측면에서의 그의 시험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물들(waters)의 홍수”에 의해 시험의 시작이 의미되었다는 것은 여기서 이해력 측면의 것들에 관한 시험이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시험은 먼저 있어지는 시험, 그리하여 가벼운 시험인데, 이는 앞에서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 여기서의 홍수는 “물들의 홍수”라 불려지고 17절 같이 “홍수”라 단순히 불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물들”은 인간의 영적인 것들, 신앙의 지적인 것들, 반대 의미에서는 신앙의 거짓들을 특별하게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확인해 볼 수 있을런지 모른다.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이 시험을 의미하는 것은 7장 서문에서 살폈다. 마찬가지가 에스겔서에 있다: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나는 내 격노함을 헤치고 나가도록 폭풍의 바람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범람하는 비가 내 성남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박들이 분노 안에 (있어), 종말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가 부적당한
것을 가지고 칠해 놓은 벽을 파괴할런지 모른다 (겔. 13:13-14).
위 구절에서 “폭풍의 바람”과 “범람하는 비”는 거짓들의 황폐됨을 표시한다; “부적당한 것 가지고 칠한 벽”은 진리같이 나타나는 지어낸 이야기(fiction)이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범람으로부터 방어되신다, 폭염(heat)으로부터 그늘이시다,
그 이유가 광폭한 자의 숨이 벽을 향하여 범람함 같이 있기 때문이다 (이. 25:4).
여기서 “범람함”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을 표시한다, 그리고 “폭염”이라 불리는 의지 측면의 시험과 구별되어진다.
다시:
잘 보라 주님은 강력하고 힘센 자를 가지고 있으시다, 그리하여 우박의 범람같이,
파괴하는 폭풍같이, 강력한 물들의 범람함같이 넘쳐 흐르신다 (이. 28:2),
위에서는 시험의 등급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네가 물들을 통과할 때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들을 통하여 (갈 때),
그것들이 네 위에서 넘쳐 흐르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을 통과하여 걸을 때
너는 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불꽃이 네 위에서 불붙지 않을 것이다 (이. 43:2).
위에서 “물들”과 “강들”은 거짓들과 공상들을 표시하고, “불”과 “불꽃”은 악들과 그리워함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이를 위해 거룩함이 있는 모든 이는 발견하심의 때에서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물들의 범람에서 그것들이 그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숨는 장소입니다; 당신은 곤경으로부터 나를 보존되게 하십니다 (시. 32:6-7),
위에서 “물들의 범람함”은 “홍수”라 불리는 시험을 표시한다. 시편에서:
여호와께서는 홍수에 앉아 계신다;
그렇다, 여호와는 영원히 왕으로 앉아 계신다 (시. 29:10).
위 구절로부터, 그리고 7장의 시작에서 전제한 것으로부터,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이 비록 태고 교회를 묘사한 방식을 따라 역사적 (스타일)로 묘사되었을 지라도 시험들과 황폐됨만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7절. 그리고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들어 갔다.

노아는 홍수의 물들이 있기 앞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 그가 보호받았음을 의미한다는 정도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시험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두 세력), 즉 천사들과 악령들의 전투들이다. 악령들은 모든 잘못된 것들, 인간의 유아기 때부터 있던 악들과 거짓들, 그것이 행동되었던 것이든 생각만에 있던 것이든 모두 소집한다. 악령들에게는 이 짓을 하는 것 이상 더 큰 즐거움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의 참 기쁨이 그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키신다. 그래서 한계를 넘는 악령과 악귀(genii)들을 제지하시고, 인간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인간이 침수 당함으로부터 지키신다.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이, “아내”에 의해 선들이, 그리고 “아들들의 아내들”에 의해 선들과 결합한 진리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6:18에서 살폈다. 비록 여기서 아들들과 아내들로 말해지는 진리들과 선들이지만 이것들은 “노아”라 불리는 사람 안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을 뜻한다. 이런 문장체는 역사적 방식과 연결시켜 말하는 태고인들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천국의 비밀들을 포함하고 있다.

8, 9절.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깨끗한 짐승, 깨끗하지 않은 짐승, 새와 지면에서 기는 모든 것들이 9 둘과 둘, 남성과 여성이 노아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선을 애착함들이 “깨끗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 장 2절에서 살폈으므로 생략한다. 그리워함들, 즉 악한 애착들은 “깨끗하지 않은 짐승”에 의해 의미됨도 이미 살폈다.

“가금류(fowl)” 또는 “새(bird)”에 의해 일반적으로 생각들이 의미되는 것은 새들에 관해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그것들은 이해력 측면의 것들, 또는 합리적 측면의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나 앞에서는 “하늘들의 새(fowl)들”이라 불리웠고, 여기서는 “새(fowl)”라고만 불릴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러 종류의 새들, 깨끗한 새, 불결한 새가 있고, 14절에서는, “새”, “나는 것”, 그리고 “날개 달린 것”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깨끗한 새들은 진리를 생각함이다; 불결한 새는 악한 생각들이다; 이에 관하여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더 살핀다.

지면 위에서 기는 모든 것. 이것이 감각적 부분과 그것의 모두 각각의 쾌락을 의미하는 것은 전에 살폈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과 그것의 쾌락들을 파충류나 기는 것들에 비교하고 비유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부르기조차 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바깥 것 쪽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적 부분은 인간의 표면에서 마치 기는 듯하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그 자체 더 높게 들어 올려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야만 한다.

“둘씩”이 상응하는 것들을 의미함은 그것이 쌍(pair)들 임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쌍은 서로에게 상응하지 않으면 쌍일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진리와 선, 또는 거짓과 악 같은 형태이다. 모든 것들 안에는 결혼, 또는 짝지움(coupling)과 매우 유사함이 있다. 마치 진리들이 선들과, 악들이 거짓들과 같다. 그 이유는 이해력과 의지력의 결혼, 또는 의지력과 이해력의 결혼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실로 모든 것은 그것들의 결혼, 또는 짝지움이 있다. 이것 없이는 살아가질 수 없다.

그들이 “방주 안으로 감”이란 그들이 보호되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에 관해 말해진 구절, 7절에서 살폈다.

“남성과 여성”이 진리와 선을 의미하는 것은 2, 3절에서 살폈는데, 거기서 “남성과 여성”은 새들에 관련해서, “남자와 아내”는 짐승들에 관련해서 서술되었다. 그 이유 역시 서술하기를, 즉 그것들 자체를 주시해서 보면, 이해력 부분이 의지력 부분과 결혼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의지력 부분이 이해력 부분에게 결혼한다 말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남성과 여성에 해당되고 후자는 남자와 아내에 해당된다. 이 구절의 주제는 이해력 측면에서 이 인간의 시험을 다루는 바, “남성과 여성”이라 말해진다, 그리고 이해력 측면의 시험, 또는 전투가 뜻해진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셨다. 그렇게 되어감을 의미하는데, 이는 6:22, 7:5에서 살폈다.

여기서의 주제는 “노아”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인의 시험이고, 시험들의 본성을 아는 자가 별로 많지 않아 시험에 관해 간략한 설명이 추가되어야 할듯 싶다. 이미 말했듯, 시험의 때에 악령들은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을 소집한다. 사실상 인간의 유아 때로부터 그가 생각했고 행하기도 했던 것은 무엇이든 그의 기억으로부터 불러낸다. 악령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의와 노련함으로 실행에 옮기는데, 이때 인간과 더불은 천사들도 그의 선들과 진리들을 끌어내서 그를 방어한다. 이 전투가 인간에게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일으킴에 의해 느껴지고 지각된다.
두 종류의 시험들이 있다,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이고, 또 하나는 의지력 측면에서의 시험이다. 인간이 이해력 측면에서 유혹될 때, 악령들은 그가 죄라고 느끼고 있어왔던 악한 것들(여기서는 “불결한 짐승들”에 의해 의미되었다)을 소집할 뿐이다, 그리고 그를 기소하고 정죄한다; 악령들은 그 인간의 선한 행위들(여기서 “깨끗한 짐승들”)도 불러낸다. 그리고 수 천 가지 방법으로 뒤집는다. 동시에 악령들은 그 인간이 생각한 것(여기서는 “새”), 이와 비슷한 것인 여기서는 “지면 위에서 기는 모든 것”에 의해 의미된 것도 불러낸다.
그러나 이 시험은 가볍다, 그리고 어떤 흥분됨과 마음에 상기하는 방식에 의해서 지각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지 측면에서 유혹되어질 때, 그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소집되기보다는 악귀들이 있어 이것들이 인간 당사자가 물들여져 있는 그의 그리워함들과 더러운 사랑들을 가지고 불을 지핀다. 그런고로 전투는 인간의 그리워함 자체들을 수단으로 벌어지는 것이고, 악귀들이 아주 악의있게, 아주 은밀하게 진행하므로 시험이 그리워함들로부터 있는지조차도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악귀들은 인간 당사자의 그리워함의 생명 안으로 자신들을 한 순간에 주입시킨다, 그리하여 거의 순간적으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을 악과 거짓에 애착하도록 뒤집고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순식간에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이렇게 뒤집히고 바뀐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만 알 뿐 이것이 악귀로부터인지를 아는 것은 가늠할 수 없다. 이 시험은 아주 통렬하고, 내향의 고통과 고문하는 불로서 지각되어진다. 이에 관하여는 더 언급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위와 같은 경우를 나로 하여금 알고 지각하도록 여러 번 경험하게 하셨다; 또한 악령들 또는 악귀들이 언제 어떻게 흘러들고 범람하는지에 관해서도, 그것들이 누구이며 어디서인지도, 이런 것들에 관한 경험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특별하고 세부적인 언급이 차 후 있을 것이다.

10절. 그리고 일곱 날이 지나자 홍수의 물들이 땅에 있었다.

“일곱 날들”에 의해 시험의 시작이 의미된다는 것은 4절에서 살폈다; 그리고 앞에서의 것을 참조하면, 이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것에 관한 시험이고, 시험의 시작, 또는 첫 시험이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결말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첫 시험이 이해력 측면이기 때문에 7절에서 같이 “홍수의 물들”이라, 6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 모두 설명한 바 같이 시험을 의미한다.

11절. 노아의 삶이 육백 년째 된 둘째 달, 십칠 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렸다.

“육백 년째 해, 둘째 달, 십칠 일”에 의해 시험의 두번 째 상태가 의미되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진 것으로부터 미루어 알게 된다; 그 이유가 6절로부터 11절 까지에서 취급된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시험들이었다. 지금은 의지력 측면의 시험, 시험의 두번 째 상태가 취급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나이가 다시 말해지기 때문에서이다. 앞 절에서 그의 나이는 “육백 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홍수가 “그의 인생의 육백 년 째에, 둘째 달에, 그리고 십칠 일에” 왔다. 노아의 나이의 년 수들, 그 속의 달들, 날들에 의해 무엇이 특징지워져 있는지, 의지 측면의 시험의 상태가 뜻해지는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말했듯이 이와 같은 표현은 태고 사람들의 언어구사 또는 작문 방식의 하나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하게 그들은 시간들이나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함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럼으로 해서 실제 역사와 비슷한 대화체를 조립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 안에 그들의 지혜가 있었다.
6절에서 살핀 바 같이 “육백 년”은 시험의 첫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시험의 둘째 상태가 의미되기 위하여 이 구절은 달과 날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실로 두 달들(two months) 또는 “둘째 달에”는 전투 자체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숫자 2에 관한 의미를 살핀 6:2절로부터 분명하다. 즉 2는 6과 같은 의미, 즉 노동과 전투, 또한 분산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17은 시험의 끝과 시작 둘 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17이 7+10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숫자가 시험의 시작을 의미할 경우, 이것은 일곱 째 날까지를, 또는 일곱 날들의 한 주(week)를 함유한다; 그리고 이 시작함의 의미는 7;4에서 살폈다. 그러나 7이 시험의 끝을 의미할 경우, 이때의 “7”은 거룩하다; 이것에 “10”이 합쳐졌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없이 인간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 “17”이 시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예레미야서에서도 분명해진다, 예언자가 아스돗에 있는 그의 삼촌의 아들, 하나멜로부터 들판을 사도록 명령받았을 때; 그는 그에게 돈으로 은 17세겔을 달아주었다 (예. 32:9). 이 숫자가 바빌론에의 포로됨을 의미하고, 이것이 신실한 자의 시험과 불성실한 자의 황폐됨을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시험의 시작과 동시에 시험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은 32장의 36절에서의 포로됨과 37절에서의 자유함, 그리고 뒤잇는 구절까지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렇게 이 숫자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예언서에 나타날리도 없었을 것이고, 다른 말씀들의 경우도 감추인 의미를 포함했다.
“17”이 시험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요셉의 나이로부터, 즉 그가 “17세”였을 때, 그는 그의 형들에게 (심부름을 위해) 보내졌는데, 이집트로 팔려졌다 (창. 37:2). 그가 이집트로 팔림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그 장의 해설에서 살핀다. 역사적 큰 사건(event)들은 표현물(representative)이고, 이것은 묘사된 바 대로 실제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의미적(의미를 담기 위한) 역사적 작은 사건(incident)이 조립되었다(compose). 이것은 글자 의미에서 묘사된 바 대로 거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실제의 대 사건들은 천국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사건들의 모두 각각의 단어에 천국의 비밀을 포함한다. 정확히 만들어 낸 역사물들로서 천국의 비밀을 포함한다. 이 역사물들을 읽을 때 이상야릇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마음(mind)은 어떤 역사적 사실 또는 서술이 표현되는 곳에서 글자 안에 붙잡혀지고 글자로부터 마음 자체를 풀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의 생명이 주재하는 곳은 내적 의미 안이다 (글자 안이 아니다,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 없이는 죽어 있다). 이는 총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내적 의미가 없다면, 말씀에 있는 어떤 역사적 서술이라도 어떤 모독된 작가에 의해 작성된 역사적 서술과 얼마나 달라질까? 그리고 본문의 경우, 홍수가 거행될 때인 노아의 나이, 달, 날을 아는 것이 만일 그 말에 천국의 비밀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런 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하는 말이 예언적인 말임을 누가 눈치채지 못할까? 더 많은 설명은 있지 않아도 될 듯 싶다.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다”는 것은 의지 측면의 시험의 극단(extreme)을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시험의 두 종류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시험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 하나는 이해력 측면에서이고, 또 하나는 의지 측면에서 이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더 맹렬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까지가 이해력 측면에서의 시험이 취급되었다. 앞서 살핀 것과 마찬가지임이 “깊음”, 즉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거짓들(18항 참조)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의 아래 구절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마치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성들 같은
황무한 성을 네게 만들 때, 내가 네 위에 깊음을 가져올 때,
그리고 많은 물들이 너를 덮을 것이다 (겔.26:19),
위에서 “깊음”과 “많은 물들”은 시험의 극단을 표시한다. 요나서에서:
물들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혼까지조차; 깊음이 저를 빙둘러 있었습니다 (욘. 2:5),
위 구절도 마찬가지로 “물들”과 “깊음”은 시험의 극단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깊음이 물들이 솟구치는 시끄러움에 깊음을 부른다;
네 모든 부서지는 파도와 물결이 내 위에 있다 (시. 42:7),
위에서도 역시 시험의 극단이 명백하게 표시되고 있다. 다시:
그분은 홍해 역시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말리워졌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광야에서 (통과함) 같이 깊음들을 통과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미워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구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되찾으셨다, 그리고 물들이 그들의 적들을 덮었다 (시. 106:9-11),
위에서 “깊음”은 광야에 있는 시험들을 표시한다.
고대 때에, 지옥이 “깊음”에 의해 뜻해졌다; 그리고 공상이나 거짓된 설득력은 물들과 강들에 비유했었다. 또한 깊음으로부터의 연기 같은 것에도 비유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지옥들은 그렇게 나타난다, 즉 깊음들과 바다들 같이 나타난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이런 지옥으로부터 황폐케하는 악령들이 온다, 또한 인간을 유혹하는 악령도 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쏟아붓는 공상들도 거기로부터 온다, 그리고 악령들이 인간을 불붙이는 그리워함도 그쪽에서 온다. 거기로부터 범람과 (분노 등의)폭발도 온다. 그 이유가 앞에서 말한 바 같이, 악령을 통하여 인간은 지옥과, 천사를 통하여 천국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깊음의 모든 샘들이 깨어졌다”라고 말해질 때,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지옥이 깊음이라 불리는 것, 그리고 더러운 방사물들이 강들이라 불리움이 에스겔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가 지옥에 내려가던 날 나는 슬퍼해지게 했고,
나는 그 위에 깊음을 덮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부터의 강들을 억제시켰다,
그리고 큰 물들이 머물렀다 (겔. 31:15).
지옥이 역시 “깊음”, 또는 “심연(abyss)”이라 불리운다. 계시록도 참조하라 (계. 9;1-2, 11; 11:7; 17:8; 20:1, 3).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 이것이 이해력 측면의 시험의 극단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의지력 측면의 시험, 또는 그리워함에 관한 시험은 이해력 측면의 시험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만일 분리되어졌다면, 어떤 시험도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나 범람함이 있고, 이런 경우는 그리워함들의 불 속에서 사는 이들과 더불은 경우인 바, 마치 그들은 지옥의 영들같이 자기들의 생명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큰 폭포”라 불리운 것은 거짓들, 또는 추론함들의 범람으로부터 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두려움의 시끄러움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는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구덩이의 한 가운데로부터 올라오는 자는 덫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 이유가
높은 데로부터 큰 폭포가 열려져 있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24:18).

12절. 그리고 비가 땅에 사십 일 주야로 내렸다.

“비”가 여기서 시험을 의미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것들로부터, 즉 “홍수” 그리고 “범람함”에 관한 내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깊음의 샘들이 깨어졌다”와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가 시험인 바로 부터도 알게된다.

“사십 일 낮과 사십 일 밤”이 지속 기간을 의미함은 4절에서 살폈다. 즉 “40”은 시험이 크던 작던, 시험의 모두 각각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시험은 맹렬한 시험이고, 의지력 측면에서 있는 시험이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쾌락들을 수단으로,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들과 세상을 사랑함들을 수단으로, 그 결과 이런 사랑들의 활동들과 연결된 그리워함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이런 사랑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획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천국의 생명과 일치됨은 불가능이다; 그 이유가 누구도 두 반대되는 사랑을 동시에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사랑은 아래쪽을 주시하고, 천국의 사랑은 위쪽을 주시한다. 우리는 자신을 아주 적게 사랑할 수 있고, 동시에 이웃을 적게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주님도 적게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섬기지 않는 자를 미워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기보다 이웃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천국의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아주 멀다. 이로부터 인간의 생명은 천국의 생명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옮겨져 있는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험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나진다, 그리고 (주님과) 일치됨 쪽으로 그를 데려다놓기 위해 (그를) 구부리신다. 이것이 시험이 맹렬하다 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 이유가 이 시험은 인간의 진짜 생명을 건드려야 하고, 그 생명을 공격하고, 파괴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이런 말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깊음의 샘들이 깨어졌다, 그리고 하늘의 큰 폭포가 열려졌다.”

인간 안에서 있게되는 영적 시험은 인간과 함께 있는 악령과 천사의 전투이다는 것, 이 전투는 그의 양심 안에서 흔히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상술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천사들이 계속적으로 방어한다는 것, 그리고 악령들이 그에게 가하려는 악들을 비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천사들은 인간에 있는 악하고 거짓인 것까지도 방어해주려 한다. 그 이유는 천사들은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이 어디로부터 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즉 악령들과 악귀들로부터임을 진즉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로부터 거짓과 악한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생산하는 자는 그와 더불어 있는 악령이다. 악령은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이 인간 스스로 생산한듯 인간을 믿게 만든다. 이런 것이 악령의 악의(malignity)이다. 더 나아가 악령은 생산한 악과 거짓을 인간에게 주입시키고 강제로 끌어들인 순간, 그 인간을 기소하고 정죄한다. 이에 관하여는 나의 많은 경험으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자는 그가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한다고 믿지 않도록 (즉 악령 때문에 그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납득하게 할 수 없다. 그 결과, 그는 악을 자기 것 되게 하고, 그와 더불어 있는 악령 같이 자기도 되어간다. 이와 같은 과정이 인간에게 있다. 천사들은 이를 알기 때문에 거듭남의 과정에서 인간의 거짓들과 악들 역시 방어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굴복당할 것은 당연지사 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악과 악에서 파생된 거짓 밖에 없어, 인간은 악들과 거짓들의 집단 또는 합성(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적 시험들은 오늘날 매우 적게 알려져 있다. 게다가 옛적에 있었던 영적 시험의 등급은 알도록 허용되어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앙의 진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 그러므로 굴복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들 대신에 있는 시험과 유사하게 인간이 여기는 것은 불행, 슬픔, 걱정, 자연적, 육체적 원인으로부터 야기되는 것, 즉 병듦, 신체의 질병 등등인데 더 이상은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어느 정도까지에서 인간의 쾌락과 그리워함들의 생명을 복종시키고 깨뜨린다. 그리고 내면과 종교적 주제들을 생각하게 하여 위쪽을 향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영적인 시험들은 아니다. 영적인 시험은 진리와 선에 관한 양심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이들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 양심 자체가 시험의 평면(들판, plane, field) 이고, 이 안에서 그것들은 작업된다.

이제까지 시험들이 취급되어 왔다. 뒤이어지는 것은 시험의 끝, 또는 목적이다, 시험의 끝은 새로운 교회가 존재 안으로 와지는 것이다.

13절.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노아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아내가 방주로 들어 갔다.

이제까지 “노아”로 불린 교인의 시험을 다루어 왔다. 먼저 이해력 측면의 시험이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다 (6-10절). 그 다음 의지력 측면의 시험인데, 이는 선행의 선들이다. (11-12절). 시험들의 끝, 또는 목적은 태고 교회가 멸절됨을 바라보면서 시험을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 또는 (새로운 품성을 소유하는) 교인이 다시 출생하는 것이다. “노아”라 불린 이 교회, 이미 언급했듯이, 태고 교회와 아주 다른 품성, 즉 영적 (평면의) 교회, (또는 영적 종교) 였다. 이 교회 내지 이 종교의 특성은 (한마디로) 신앙 속의 교리적인 교훈들(precepts, 제재들, matters)을 수단으로 재 출생되는 것이다. (즉,) 이 교훈들이 심어진 후, 양심이 (거듭나는) 인간 안으로 서서히 주입되어지는데, (주입된 만큼에서) 인간 당사자는 신앙이 얼싸안고 있는 진리와 선에 거슬러 행동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진리와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음 가운데에 있는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행(charity)이 증여되어지고, 이 선행이 양심을 통치하고, 통치된 양심으로부터 그는 행동하기를 시작한다. 이로부터 이제 영적 (평면의) 인간이 무엇인지 분명해있을 것이다; 이 인간은 선행없는 신앙이 (자기를) 구원하리라고 믿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신앙의 본질로 삼고, 이로부터 행동하는 사람이 다. 이런 부류의 인간, 또는 교회가 일어나리라는 것이 예상되는 끝(end)이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가 다루어지고 있다. 교회가 지금 취급된다는 것은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것인냥 말해지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즉, “바로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 셈, 그리고 함, 그리고 야벳, 그리고 노아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세 아내들”이라고 말해졌다; 마찬가지로 7절에서, “그리고 노아는 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다루어지는 바, 아들들의 이름들, 셈, 함, 야벳이 라고 이름이 불려지고 있다. 세 이름이 명명될 경우, 이는 교회 속의 사람이 뜻해지고, 단지 아들들로만 명명될 경우, 이는 신앙 속의 진리를 뜻하게 된다. 이 외에도 방주 안으로 들어간 짐승들과 새들에 관한 8, 9절이 14, 16절에서 반복되어 말해지고 있으나 그 차이가 교회의 주제에 적용할 수 있고, 일치되고 있다.

그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 그들이 구원되었음(이 구원은 “노아”였던 교인, 그리고 여기서 말해진 이 사람들로부터 파생되고 이어지는 다른 교회들을 포함하여)을 의미하는것은 “방주로 들어감”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에 의해서는 교회 속에 있는 것, “셈, 함, 야벳”에 의해서는 거기에서 파생된 교회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여기서 7절 같이 아들들이라 말해지지 않고 그들의 이름들이 불러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런고로 이름들이 불러질 때 그들은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 교회의 사람은 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이다. 이는 교회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라고 납득하는 일반적 술어(통칭함)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태고 교회에서 살폈듯, 이 교회는 “사람(man)” 이라 불리었다. 이는 이름으로 불러지는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고로 “노아”에 의해, 그리고 “셈”, “함”, “야벳”에 의해 한 복합체에서 교회 속에 있는 무엇이든, 그리고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의 무엇이든, 모두가 의미되어진다.
위와 같은 것이 말씀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스타일이고 방식이다. 그런고로 예언서에서 “유다”라고 이름 불러지는 대목이 있으면, 거기서 천적 (평면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의미되고, 아울러 그 교회에 속하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또는 “이스라엘”이 명명될 경우, 영적 (평면의) 교회가 우선적으로 의미되고, 아울러 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도 의미한다; 또는 “야곱”이 명명될 경우, 외적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두 각각의 사람과 더불어서 교회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다. 진정한 교회는 내적 측면에 존재하고,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로부터 파생된 것인데, 후자가 “야곱”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름 불러지지 않을 경우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 이유가 이름이 불러질 경우, 그 불러진 이름이 주님의 왕국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바, 불러진 이름을 듣는 이로 왕국의 어떤 것을 상기되게 하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그분의 왕국의 모든 것 되신다; 그리고 교회가 땅 위에서 그분의 왕국인 바, 주님만이 교회의 모든 것 이시다. 교회의 모든 것은 사랑과 선행이다; 사람( 또는 이름에 의해 불러진 것)은 사랑 또는 선행, 즉 교회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그의 “아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단순하게 의미한다. 여기서도 이와 같다. 그러나 “셈, 함, 야벳”에 의해 어떤 종류의 교회가 의미되는지는 차 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말할 것이다.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앞서 살핀 “아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고, 더불어 그의 “아들들”이라고 보태어 말하고 있다.

노아의 “아내”에 의해 교회 자체가 의미되고, “그들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의 세 아내들”에 의해서는 이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 자체들이 의미되는 것은 방금 전에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교회의 사람이 이름 불러질 때, 교회의 모든 것이 뜻해진다는 것, 또는 이름은 교회의 머리인 것 같이 뜻해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 그의 “아내”가 교회 자체인 것은 앞에서 살폈다. “남자와 아내”, 또는 “남성과 여성”이 말씀에서 이름 불러질 때 다른 각도에서 불러진다는 말이다. 즉 “남자”와 “남성”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을; “아내”와 “여성”은 의지력에 속한 것들을, 또는 신앙으로부터의 선들이 의미되어진다.

말씀에 있는 모두 각각의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있기에, 표현 안에는 신성인 것을 가지고 있는 바, 각 단어, 내지 미소한 것(쉼표 등등)조차 어떤 것을 포함하거나 의미하지 않는 것은 없다. 여기서의 경우, 표현상 미소한 차이에 불과한 말들, 즉, “세 아내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또한 “그들과 더불어” 에도 차이가 있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짚고 넘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말들이 지니는 일반적 취지만을 아는 것으로도 이 책의 역
할은 다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14, 15절. 그들,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야생 동물,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모든 짐승, 그리고 각기 종류대로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각기 종류대로 모든 새들, 모든 나는 것들, 모든 날개 달린 것들.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오고,15 둘과 둘, 생명들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가 방주로 들어 갔다.

“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교회의 사람, 또는 이 교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방금 전에 언급한 사람들, 노아, 셈, 함, 야벳인 네 사람인데, 비록 넷이라 할지라도 다함께 하나를 구성한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노아” 안에, 그를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고대 교회가 뜻해지고, 마치 부모 또는 씨 같이 노아라는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들을 포함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에 의해 고대 교회가 의미되었다. “셈, 함, 야벳”이라 불리우는 모든 이런 교회들이 고대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를 다함께 구성한다.

“각기 종류대로 야생 동물”에 의해 모두 각각의 영적 선이, “각기 종류대로 짐승”에 의해 모두 각각의 자연적 선이, 그리고 “땅 위를 기는 기는 것들”에 의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모두 각각의 선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서 서술되고 살핀 바 있다. 얼핏 읽고 판단할 경우, “야생 동물”이 영적 선을 의미할 수 없을듯 나타날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표현의 시리즈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첫 표현은 “그들”이고 이는 교회의 사람을 뜻한다; 다음은 “야생 동물”이고; 그 다음은 “짐승”; 마지막으로 “기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 이런 시리즈로 볼 때, “야생 동물”은 “짐승”보다 더 높은 가치와 특출한 것을 포함하게 된다. 또 하나 이유는 히브리어원에서 표현되는 “야생 동물”은 생 혼이 안에 있는 동물 또한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평범한 야생 동물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 혼이 있는 모두 각각의 동물을 뜻한다. 그 이유가 단어가 같기 때문이다. “동물들”, “짐승들”, “땅위에서 기는 기는 것들”이 의지 부분에 속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고 이내 뒤잇는 곳, 즉 새들이 말해지는 곳에서 조금 더 살필 것이다.

본문에서 각각에 대해 “각 종류에 따라”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선들에는 종들(genera)과 속들(species)이,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이, 파생되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선들이 있고, 영적 진리들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서 이다. 천국 안에, 모든 선들과 진리들, 천적 선들과 영적 선들은 그것들의 종들 안에서 아주 잘 구분되어 있고, 속들 안에서도 그러한 바, 그것들 중의 작은 것도 확실히 구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수하여, 독특한 차이들을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이 정도로만 생각해도 인간의 지혜는 얼마나 하찮고 거의 존재하나마나 한지 모른다. 인간의 지혜는 어떤 것이 영적 선이고 영적 진리인지 모르고, 영적 선과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 더욱 모른다. 천적, 영적 선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진리들로부터 유출이 있어 자연적 선들과 진리들로 내려간다. 영적 선으로부터 흘러나가지 않은 자연적 선과 진리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천적 선으로부터 흘러나가지 않은 영적 선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모두는 같은 것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한다. 만일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철수한다면, 자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것들의 근원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들,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분으로 천적 평면(등급)이 존재한다; 그분으로부터 천적 평면을 통하여 영적 평면이 생겨난다; 영적 평면을 통하여 자연적 평면이 생겨난다; 자연적 평면을 통하여 물질적이고 감각적 평면이 생겨난다. 이것들 모두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분으로부터 존재한다. 우리 모두 익히 아는 바, 생존(subsistence)은 존재 안으로 영구히 오고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존재 안으로 옴과 어떤 것이 생겨남에 관하여 위와 다른 개념을 가진 자들은 마치 자연을 예배하고 자연으로부터 어떤 것의 근원들을 연역하는 이들 같은 바, 그 원리는 확실히 죽은 원리이므로 숲의 들짐승의 공상들이 훨씬 더 제정신일지 모른다. 이러함에도 자기는 지혜에서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각기 종류에 따라 모두 각각의 새”가 모두 각각의 영적 진리를, “날으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날개 있는 것”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새에 관해 설명한 40항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인들은 인간의 생각들을 “새들”에 비유했다. 그 이유는 의지 측면에 상대적인 것인 생각들이 새들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언급은 “새” , “나는 것”, “날개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에 있는 지적, 합리적, 감각적인 것과 같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를 성경의 다른 구절로부터 예증하여 의심이 없도록 해두는 것이 좋을듯 싶고, “새”가 등장하는 구절들에 방금 앞에서 살핀 “짐승”들도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다함께 살펴볼까 한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그분을 당신의 손들의 일들 위에서 지배권을 가지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발 아래 모든 것들을 놓습니다; 모든 양과 수소들, 그렇습니다,
그리고 들판의 짐승들, 하늘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 (시. 8:6-8).
위 구절은 주님을 두고 말해지고 있다. 그분의 다스림이 인간 위에, 인간에게 속하는 것 위에 있다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들”과 “새들” 위에서 지배함이 뭐란 말인가? 다시:
열매 풍성한 나무들과 모든 삼나무들, 야생 동물과 모두 각각의 짐승,
기는 것들과 나는 새,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자 (시. 148:9-10, 13).
“열매 풍성한 나무”는 천적 (평면의) 인간을 표시하고, “삼나무(cedar)”는 영적 (평면의) 인간을 의미한다. “야생 동물”, 그리고 “짐승”, 그리고 “기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역사에서(본문에서) 같이 그들의 선들이다; “날으는 새”는 그들의 진리들이다; 이런 선들과 진리들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 야생 동물, 짐승, 기는 것들, 그리고 새들은 주님의 이름을 결코 찬양할 수 없다.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새나 짐승이 아니라 사실상 인간, 인간 속의 것들이 아닐까?) 어떤 세속의 저작자라면 이런 표현을 과장법 문체로 이용할지 모르나, 주님의 말씀 안에는 과장법은 없고 오로지 표현해주고 의미하는 문체밖에 없다.
에스겔서에서: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하늘의 새들, 그리고 들판의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그리고 땅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현존에서 흔들릴 것이다 (겔. 38:20).
위 구절에서 “짐승들”과 “새들”에 의해 이와 같은 것들(인간의 자연적 선과 영적 진리)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물고기들, 새들, 그리고 짐승들이 흔들린다해서 어떻게 여호와의 영광을 기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구절에 거룩한 것이 포함되고 있지 않다면 이런 표현이 거룩하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잘 보았다, 그리고 오,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달아났다 (예. 4:25),
위 구절은 모든 선과 진리를 표시하고 있다; “사람” 역시 사랑의 선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그것들이 불태워졌다, 그리하여 아무도 지나갈 수 없고, 사람들이 가축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하늘들의 새와 짐승이 달아났다, 그것이 가버렸다 (예. 9:10),
위 구절과 같은 방식에서 모든 진리와 선이 떠났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오랫동안 토지가 슬퍼하고, 모두 각각의 들판의 풀잎이 시들어야 합니까?
그 토지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 때문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최후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짐승과 새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예. 12:4).
위에서 “짐승들”은 선들을,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것이 멸해졌다. 스바냐서에서:
나는 사람과 짐승을 없앨 것이다, 나는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와 더불은 장애물도 (없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면의 얼굴로부터 사람을 멸절할 것이다 (습. 1:3).
위 구절에서 “사람과 짐승”은 사랑과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그런고로 진리로부터 있는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이 장애물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자연계의 짐승이나 새가 사악한 자에게 장애물이 되어서가 아니라 선들과 진리들이 사악한 자에게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사람”을 두고 말해진다는 말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나무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거기에 새들이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든다 (시. 104:16-17).
“여호와의 나무들”과 “레바논의 삼나무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을 표시한다; “새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의 합리적, 또는 자연적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 진리들은 영적 (평면의) 인간에게 “둥지” 역할을 한다.
“새들이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 것이다”라는 흔히 사용하는 표현 형체가 있는데, 이 형체에서의 (둥지도) 진리들을 의미하고 있다. 에스겔서를 보자;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나는 그것을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지를
들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훌륭한 삼나무이다; 그리고
그것 아래 모두 각각의 날개 있는 모두 각각의 새들이 거주할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의 그늘에서 그들은 거주할 것이다 (겔. 17:23),
영적인 이방인들의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교회는 “훌륭한 삼나무”이다; “모두 각각의 날개 있는 새”는 모두 각각의 종류로 있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하늘들의 모든 새들이 그의 굵은 가지들에 자기들의 둥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가지들 아래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의 그늘 아래 모든 민족들이 거주할 것이다 (겔. 31:6).
이것은 아수르(Assur)를 두고 말해진다, 이는 영적 교회여서 “삼나무”라 불리운다; “하늘들의 새들”은 영적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짐승들”은 영적 교회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거기로부터의 잎은 고왔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를 위한 음식 이었다; 들판의 모든 짐승들이 그것 아래 그늘을 가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거주했다 (단. 4:12, 21).
위에서 “짐승들”은 선들을, “하늘들의 새들”은 진리들을 표시한 것은 모든 이들도 그렇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위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지 않으려면 새와 짐승이 거기에 산다고 말씀이 굳이 말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주님께서 말하신 대목이 있다.
하느님의 왕국은 누룩 씨의 한 알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사람이 이 씨를 가져다가
그의 동산에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자랐고, 그리고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거기로부터의 가지들에 숙박했다 (눅. 13:19; 마. 13:31; 막 4:31, 32).

“새”가 영적 진리를, “날으는 것”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날개 있는 것”은 감각적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이 이런 식으로 구별된다는 것도 위에서 살핀 바에 따라 이미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감각적 진리들, 이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속한 것들인데, “날개 있는 것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바깥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날개”의 의미이기도 한데, 다른 것에 마찬가지로 응용된다.

지금 “하늘들의 새들”이 이해력에 속하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바, 생각들도 의미한다. 그런고로 반대 의미일 경우, 공상들 또는 거짓들도 의미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생각 속에 있고 “새들”로 역시 의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악한 자가 “하늘의 새들에게, 그리고 들짐승들에게 음식으로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해질 때, 공상들이나 그리워함들을 뜻한다는 말이다 (이. 18:6; 예. 7:33, 16;4, 19:7, 34:20; 겔. 29:5, 39:4). 주님 자신 역시 공상들이나 거짓 설득력들을 “새들”에 비교하신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발 아래에서 뭉개졌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것을 삼켰다 (마. 13:4; 눅. 8:5; 막. 4:4, 15),
위에서 “하늘의 새들”은 거짓들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 와서 방주 안으로 들어 갔다. 이는 그들이 구원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둘과 둘”이 쌍들을 의미하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창. 6:19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생명들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 이는 새로운 창조물을 , 또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육체(flesh)”가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인류이고, 특별한 측면에서 물질적 인간인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이미 말했다. 이로부터 “생명들의 숨이 있는 육체”는 거듭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듭나는 인간 자신 안에 주님의 생명인, 선행과 신앙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 각각의 인간은 “육체”일 뿐이다; 그러나 선행과 신앙의 생명이 주님에 의해 그 사람 안으로 숨쉬어질 때, 육체는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적 (평면의) 인간과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고 새로이 창조되어 왔음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물”이라 불리운다 (막. 16:15).

16절. 그리고 안에 들어간 그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 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15절의 “그들은…들어 갔다”로부터 16절의 “안에 들어간 그들…들어 갔다”까지를 (연결해보면), 교회가 “노아”라 불리운 이들 안에서 보존되어갔던 것으로 묘사되어 왔음이 엿보인다. 이제 이 교회의 상태가 뒤잇고 있다. 이 상태의 대략적인 것은 앞 구절로부터 살폈고, 지금은 세부적인 것, 이 교회의 상태의 품질이 묘사된다. 단 한 절, 단 하나의 단어도 이 교회의 특이함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미리 염두하면 좋을듯 싶다. 그래서 지금 이 교회의 상태가 취급되었기 때문에 15절에서 말해진 것이 반복되는데, 여기서는 두 번 말해진다; 즉 “안에 들어간 그들,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들어 갔다”라는 단어들에서 이다; 한편 15절의 경우, “그리고 그들은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 안으로 모든 육체의 둘과 둘이 들어 갔다” 말씀에서 있는 이런 반복은 또 다른 상태를 취급함을 의미한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이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위 문단 항목을 통해 자연스럽게 명백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말에 “모든 육체의 남성과 여성이 안으로 들어 갔다”가 뒤잇고 있다. 이는 거듭나는 인간과 더불어 모두 각각의 선들과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여러 번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것은 그가(노아) 그것들(새 생명)을 받기 위해 준비되어 왔었음을 의미한다. 주님과 더불어, “명령”하는 것은 준비되는 것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 이는 천적 (평면에 있는) 교회의 사람이 누렸던 천국과의 교류 (방식)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 서술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태고 교회의 상태에서, 그들은 천국과 내적인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이런 교류로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도 (연결되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었다.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마치 각자가 다른 몸을 가졌으되 같은 옷을 입은 것이다. 그들의 내면들은 가리워져 있지 않았고, 주님으로부터조차 열리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회는 달랐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앙 안에 있고, 신앙을 통하여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다. 이런 상태는 태고인 같은 식의 내적 교류를 가질 수 없고, 외적 (교류는 가능하다). 내적 교류와 외적 교류의 본래의 모습은 설명하자면 너무나 길지 모른다. 모두 각각의 인간, 사악한 자까지도,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을 통하여 천국과 교류를 가진다 (물론 교류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교류마저 없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교류의 등급들의 차이는 끝이 없다. (하나 더 강조할 것은,) 영적 (수준의)인간은 천적 (수준의) 인간이 가진 교류는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주님은 신앙 안에 계신다 라기보다는 사랑 안에 계신다 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뒤에서 닫으셨다”에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닫으신” 이래 천국은 태고 교회의 사람에게 열려졌던 방식으로는 열린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나는 모세와 아론, 그 외 다른 예언자들처럼 영들과 천사들과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물론 이 대화는 과거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법이고, 이는 차 후 언급할 기회를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가질 것이다. 이렇게 천국이 닫혀진 이유는 깊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닫혀있는 이유로해서 사람들은 영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천사들이 자기와 더불어 있는 것은 더욱 모르고, 세상에서 동료가 없을 경우 자기는 홀로 있다 라고 , 자기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리인 것은, 그는 영들의 집단 안에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 이 영들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그가 의도하고 고안하는 것, 등등을 마치 세상에서 지켜본듯하게 충분하고 명백하게 주시하고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천국이 닫힌 관계로 이런 것에 아주 무지해 있다. 이는 최고로 진리이다. 만일 그에게 천국이 열려있다고 가정하고, 그런데 그가 신앙이 없다면, 더욱이 신앙의 진리가 없다면, 그리고 선행 안에 있지 않다면, 열린 천국은 그 사람에게 지독하게 위험해질 것이다. 이것이 또한 아래 구절에 의미되어 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에덴의 동산의 동쪽에서
그룹들을 놓아두셨다, 그리고 생명들의 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그 자체
회전하는 검의 불꽃(을 세워두셨다) (창 3:24, 301-303항 참조).

17, 18절.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있었다, 그리고 물들이 불어났고, 그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떠올랐다. 18 그리고 물들은 더욱 거세졌고, 땅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40”에 의해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4절에서 이미 살폈다. 그러나 17절에서는 “사십 일”이나, 4절에서는 “사십 일 낮들과 사십 일 밤들”이다; 그 이유가 4절의 경우 시험의 존속 기간이기 때문, 그리고 시험 안에 있는 “밤들”은 걱정, 불안들이기 때문.

“홍수”에 의해 교회를 침수시키려드는 거짓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에 보여준 것으로부터 이어진 의미이다. 그 이유가 “홍수” 또는 “범람”은 거짓들의 범람 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6절에서의 경우, “물들의 홍수”가 시험을 의미했다. 이 시험은 악령들이 인간 안에서 선동한 거짓의 범람이다. 여기서도 경우는 같으나 시험이 없는 상태에서이다. 그러므로 “물들의 홍수”가 아닌 “홍수”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물들이 불어났고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이는 이런 모습이 시험의 파동(fluctuation)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물들이 더욱 거세졌고 땅에서 크게 불어났고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란 시험의 파동은 빈번히, 그리고 더 세차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노아”라 불리는 이 교회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해두지 않으면 의미가 위와 같음을 분명히 할 수 없다. “노아”는 고대 교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씨, 또는 부모격에 해당되는데 이미 말했다. “노아”는 “셈, 함, 야벳”과 더불어 고대 교회를 구성했다. 이는 태고 교회를 직접적으로 계승했다. “노아”라 불리는 교회의 모두 각각의 사람은 태고 교회의 후손으로부터 였다, 그리고 유전적인 악에 관련해서도 멸절된 후손의 것과 거의 같은 상태였다; 그리고 멸절된 후손과 거의 같은 상태의 인간은 (태고 교회 시절과 같은 방법으로는) 거듭나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런 품성을 상속받지 않은 이들의 거듭나는 방법으로는 영적 수준으로 되어야 한다. 그들의 유전적 품질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서술되었다.
(주제가 더 명료하게 이해되도록) 예를 들면; 야곱의 씨로부터 있는 이들, 마치 유대인들 같은 이들은 이방인들이 거듭나지는 것 만큼 잘 거듭나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신앙에 반대되는 것을 선천적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원리들을 유아 때로부터 흡수해서 후에는 그것을 확증했기 때문 뿐 아니라 유전적 기질로부터도 있다. 이것이 유전적 기질로부터 타고났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남다른 천성, 남다른 방식, 또한 남다른 모양새, 등등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으로부터도 어느 정도는 감지된다. 이런 특질들을 그들은 상속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면의 품질들과도 똑같다. 그 이유가 방식들이나 모양새들은 내면의 견본(type)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등으로) 전환된 유대인들은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파동이 심하다. 위의 예는 고대 교회의 첫 사람들과도 같았다. 이들이 “노아”라 불리는 것은 그들이 태고 교회 사람들이라는 종족 또는 씨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여기서 묘사된 파도의 넘실거림, 즉 파동(fluctations)들이다. 뒤이어지는 구절 안에 더 있다: 노아는 농부였다, 그리고 포도원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 취해졌다, 그리고 그의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다 (창. 9:20-21). 이들의 숫자가 아주 작았다는 것을 (주님께서) 나에게 분명하도록 해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좁은 면적의 방에 있고, 키가 크고 홀쭉한 모양새로 표현되어진 사실로부터 이다. 어쨌든 여전히 그들은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을 자기들 사이에서 가졌고 보존했다.

이 교회의 사람의 파동들이 여기서 묘사된다; 첫째로, “물들 (즉 거짓들)이 불어남”이 말해진다; 그 다음, 그것들이 “방주를 덮쳤다”, 그리고 방주는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이 후에 “물들이 거세졌다, 그리고 땅위에 더욱 불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주는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이 구절에 있는 파동의 각 등급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장황하고 지루해질런지 모르고 어쩌면 불필요할런지 모른다. 우리는 이 대목이 파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정도를 아는 것만으로 족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방주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갔다는 서술이 의미하는 것만을 언급할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악들과 거짓들에 (침수당함)으로부터 붙잡아 놓으시는(withhold)지를 알지 않으면 이 구절을 알 도리가 없다. 이것 역시 감추인 것들인 바, 간략히나마 설명이 필요할듯 싶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각각의 인간은 만일 주님께서 그를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지옥 안으로 곤두박질 할 것이다. 그야말로 그를 붙잡아 주심에서 한 순간만 놓여도, 그 순간 그는 지옥 안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주님께서) 경험에 의해 알도록 해주셨는데, 그 일부가 말(horse)에 의해 표현되었음은 이미 소개했다. 이렇게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붙잡아 놓으심이 방주가 땅으로부터 떨어져 들어 올려짐, 그리고 물들의 얼굴 위에서 오감에 의해 의미되어진 승강(elevation)이다.

이 구절과 다음 절에 있는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함은 이 장의 시작에서 예증으로 제시한 말씀의 인용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홍수, 또는 물들의 범람함”이 취급된 6절에서도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구절에서 물들이 범람함들이 황무해짐들과 시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이것은 똑 같은 거짓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황무함들과 시험들은 악령이 선동한 거짓들의 범람해진 것 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물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영적인 것,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 추론으로부터 있는 것, 기억 속의 지식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들이 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물들은 또한 그 반대의 것들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거짓은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해있는 어떤 것이고, 추론과 이해함으로부터의 것인듯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들도 생각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물들”이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에서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짓들 역시 의미하는 것도 분명해진다. 이미 인용한 구절에 더하여 아래에서 더 살피면 확증에 보탬이 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이 백성이 곱게 흐르는 실로아(Shiloah)의 물들을 거절했었다; 그러므로 잘 보라 주님께서
강하고 많은 강의 물들을 그들 위에 가져 온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의 강둑들을
넘어갈 것이다 (이. 8:6-7).
위 구절에서 “곱게 흐르는 물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시하고, “강하고 많은 물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날개들로 어둡게하는 토지에게 화가 있다, 이 토지는 에티오피아의 강들 저편에 있다;
이것이 바다위에 사절들을 보낸다, 그리고 물들 위에 파피루스로 만든 배들 안에
(태워 보낸다). 가라, 너희 민첩한 사절들이여, 이미 작정되었고(meted out)
짓밟은 민족에게로 (가라), 강들이 그들의 토지를 망쳐놓았다 (이. 18:1-2),
위 구절에서 거짓들이 “날개들로 어둡게 하는 토지”에서 표시되고 있다.
다시:
네가 물들을 지나갈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강들을 통과할 때에
그것들이 너를 침수시키지 못하리라 (이. 43:2).
위에서 “물들”, “강들”은 곤경들, 그리고 거짓들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는 실로의 물을 마시려하여 이집트의 길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네가 강들의 물들을 마시려고 아시리아의 길에서 무엇을 하느냐? (예.2:18),
위 구절 역시 “물들”이 추론으로부터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런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너를 마치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성들 같이
황무한 성을 만들 때, 내가 네 위에 깊음을 가져다 놓을 때, 그리고 큰 물들이
너를 덮을 때, 그 다음 나는 그것들과 더불어 너를 구덩이 아래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겔. 26:19-20).
위에서 “물들”은 거기로부터 있는 악들과 거짓들을 표시한다. 하박국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말들을 타고 바다를, 많은 물들의 습지를 밟으셨다 (합. 3:15),
위에서 “물들”은 거짓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뱀은 여인의 뒤에서 그의 입으로부터 강물 같은 물을 내뿜어 그녀를 시내를
수단으로 쓸어내버리려 하였다 (계. 12:15-16).
위에서 “물들”은 거짓들과 거짓말들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위로부터 당신의 손을 보내시어, 저를 구출하여 큰 물들로부터, 외국인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해방되게 하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입니다 (시. 144:7-8).
“큰 물들”이 여기서 거짓들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외국인의 아들들” 역시 거짓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노아”, 또는 “노아”로 불린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어왔는데, 이들은 “방주” 안에 있었고, 물들 위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지금부터의 주제는 물들 아래 있는, 즉 물들에 의해 가라앉혀진 태고 교회의 후손들일 것이다.

19, 20절.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 그리고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다. 20 물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
“그리고 물이 땅에서 극도로 거세졌다”란 거짓의 설득(persuasion)은 이런 식으로 불어남을, “온 하늘 아래 있던 모든 높은 산들을 덮었다”란 선행의 모든 선들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십오 큐빗 위쪽에서 물들이 압도하였다, 그리고 산들을 덮었다”란 어떤 선행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5”는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이 장의 끝까지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절멸한 홍수 이전 사람들이다는 것은 묘사된 구절 속의 특이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는 내적 의미 안에서 이 구절을 읽는 사람이라면 읽는 즉시 알 것이다. 이들은 실로 단어 하나만에서도, 또는 여러 단어들의 연결된 상황으로부터 금방 눈치챈다. 다른 주제들이 취해질 경우, 즉시 단어들이 달라진다, 또는 같은 단어들이라 해도 다른 연결을 짓는다. 그 이유는 단어들에도 영적 (평면의) 것에 잘 어울리는 것이 있는가하면, 어느 단어는 천적 (평면의) 것에 어울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는 이해력 측면에, 잘 어울리거나, 어떤 단어는 의지력 측면에 잘 어울린다. 예를 들면: 단어 황무함(desolation)은 영적 (평면의) 것들을 서술하고, 황폐함(vastation)은 천적 (평면의) 것을 서술한다; “성(city)”은 영적 (평면의) 것을, “산(mouuntain)”은 천적 (평면의) 것들을 서술하는 등등이다. 그리고 (아주 특이한 사항은) 히브리 언어에서 단어들이 단어들의 소리를 수단으로 아주 흔히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등급에 속하는 것들 안에서 첫 세 모음들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천적 등급에 속해 있는 단어들에서는 마지막 두 모음들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다른 주제들이 취급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듯 (서술의) 반복됨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즉 앞 절에서 말한 바 있는 “그리고 물들이 땅 위에서 극도로 거세어졌고…”가 여기서 다시 말해진다. 변경(switch)이 있다는 사실은 뒤잇는 모든 것으로부터 알아내질 것이다.

물들이 땅 위에서 극도로 거세어졌다. 이는 거짓의 설득력들이 (극도로) 불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그리고 “물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홍수, 또는 범람함의 물들이 거짓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거짓들, 또는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설득해주려 함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에 “물들이 극도로 거세어졌다”라고 말해진다. 원어에서 이 표현은 최상급 표현이다. (여기서) 나는 거짓들을 가지고 거짓된 약속들과 거짓된 설득력들을 의미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홍수 이전 사람들 사이에 광대하게 불어났음은 앞서 말한 바로부터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들이 그리워함(yearning)들에 진리들을 뒤섞을 때, 또는 진리들이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을 편들게 만들 때, (거짓된) 설득력은 광대하게 불어난다; 그 이유가 이런 식의 수 천 가지 방법들로 인간들은 진리들을 악용하고, 자기 사랑과 물질주의에 진리를 강제로 동의하게 하려 들기 때문이다. 거짓 원리에 흠취되어 자신의 사상 기반이 되게 한 누군가가 있다면 자기가 배워 얻은 학식을 다 동원해서라도, 게다가 말씀으로부터도 근거 삼으려 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거짓 원리를 확증하려 어떤 것들을 말꼬리(lay hold)로 삼지 않을 이교가 있겠는가? 아마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라도, 별 수단을 다 동원해 설명하고 비틀고 하여 자기의 거짓 원리들은 불일치가 아니다 우기지 않는 이교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선행의 선들 없이도 신앙만으로 구원이 있다 라는 원리를 채택한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말씀(the Word)으로부터 신학의 전체 체계를 짜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구절, “나무는 그것의 열매로 알려진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에 관한 구절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고 건너뛰는가? (마. 7:16-20; 12:33; 또는 3:10). 육체가 바라는 것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욕구에 눈꼽만치의 선행도 뒤따라 주지 않는 진리를 보태어 가지는 데도 구원은 여전히 가능할까? 인간이 (은근히) 막무가내로 편애하는 자기의 그리워함들이 그 인간의 의지력의 생명을 만들어 내고, 왜곡된 원리나 거짓된 설득력은 그 인간의 이해력의 생명을 만들어 낸다. 이 두 능력들이 하나를 만드는 때는 진리들, 또는 신앙의 교리물들이 그리워함들에 침수되는 때이다. 이리하여 모두 각각의 인간은 마치 혼이라도 되는 냥 그것들을 자신이 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사 후 그의 생명이 되어있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아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참된 것을 알고, 알아낸 참된 것을 그대로 실행하는데 참된 것이 남용될 리 없다. 더구나 참된 것이 그리워함 안에 몽땅 침수되어 절멸하는 결과로 될 리가 없다. 영원히 사는 것에 심정의 초점을 맞추는 것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육체의 삶에서 자기 혼을 망가트리면, 그는 영원히 망가진 혼을 부여잡고 살아야 함을 누가 모를까?

전체 하늘 아래 있던 모든 산들이 덮혀졌다. 이는 선행의 모든 선들이 소멸되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태고인들의 산들에 대한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과 더불어 산들은 주님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산들이 땅에서보다 더 높은 장소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산들에서 그분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산들”은 천적 (평면의) 것들 (또는 “지극히 높은 것”들이라 불리기도 함)을, 그 결과 사랑과 선행을, 이로부터 천적 (평면) 인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했다. 그리고 반대 의미에서, 말씀은 자만심(conceit, vainglorious)이 강한 사람도 “산”이라 일컬었고, 그러므로 자기 사랑 그 자체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다. 마치 어떤 것들의 시작이 땅 위 넘어 승강된 것들로부터인듯, 천국인듯, 말씀에서 태고 교회 역시 “산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산들”이 주님을 의미하고,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의) 모든 것들,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을 의미하는 것은 말씀 속에서 인용한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인용 구절들은 세부적 측면에서 의미되는 사항들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에서 각 구절이 의도하는 주제에 따라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정의 안에서 산들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언덕들도 (그리할 것이다) (시72:3).
위에서 “산들”은 주님을 사랑함을; “언덕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시한다. 이는 태고 교회의 품질과 같다. 이 품성 때문에 태고 교회가 말씀에서 “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내 거룩함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높음의 산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거기서 전체 토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겔. 20:40).
위에서 “거룩함의 산”은 주님을 사랑함을; “이스라엘의 높음의 산”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건립되고,
언덕 위 드높여있을 날이 나중에 있을 것이다 (이. 2:2),
위에서 “산들”은 주님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있다. 다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은 모든 백성에게 살진 것들로부터의 축제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 산에서 덮음의 얼굴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 25:6, 7).
위에서 “산”은 주님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있다.
다시:
그리고 모두 각각의 드높은 산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덕, 강들,
물들의 시내들 위에 (있을 것이다) (이. 30:25),
위에서 “산들”은 사랑의 선들을 표시한다; “언덕들”은 선행의 선들을 표시하고, 이로부터 “강들과 물들의 시내들”인 신앙의 진리들이 있다. 다시:
너희는 노래를 가질 것이다. 마치 거룩한 축제를 지킬 때의 밤에서와 같다;
그리고 심정의 즐거움을 (가질 것이다), 마치 누가 이스라엘의 바위 쪽으로,
여호와의 산으로 피리를 가지고 갈 때와 같다 (이. 30:29).
위에서 “여호와의 산”은 사랑의 선들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시한다; “이스라엘의 바위”는 선행의 선들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 체바욷께서 시온산 위에서, 그리고
그로부터의 언덕들 위에서 싸우기 위해 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시온산”은 주님, 그리고 천적 (평면의) 모든 것과 사랑이 있는 모든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들”은 더 낮은 등급의 천적인 것, 즉 선행인 것을 표시한다.
다시:
오 시온아, (너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 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오 예루살렘아, (너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 준다, 네 음성을 힘차게 들어올려라 (이. 40:9).
“높은 산으로 오르는 것과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안쪽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다”고도 불리운다, 그 이유는 가장 안쪽의 상태는 가장 높은 상태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다시:
바위의 거주민들이 노래하게 하자, 그들로 산들의 꼭대기로부터 외치게 하자 (이. 42:11).
“바위의 거주민들”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산들의 꼭대기로부터 외침”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시고, 평화를 공표하시고, 선의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는
그분의 발이 산 위에 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52:7).
“산 위에서 좋은 소식들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교리로부터 주님을 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다시:
산들과 언덕들이 당신 앞에서 노래를 일시에 쏟아낼 것이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다 (이. 55:12).
위에서 “산들과 언덕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함을; 그리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으로부터는 “들판의 나무들”이 표시한다.
다시:
나는 모든 나의 산들에 길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의 큰 길들을 드높일 것이다 (이. 49:11);
위에서 “산들”은 사랑과 선행을 표시한다; 그리고 “길들과 큰 길들”은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그것들이 그들의 가장 깊은 안쪽과 같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일 때, 이것이 “드높여진다”라고 말해진다. 다시:
나에게 신뢰를 두는 자는 토지를 상속 재산으로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내 거룩함의 산을 상속받을 것이다 (이. 57:13).
위는 주님의 왕국을 표시하고, 그 왕국 안에는 사랑과 선행밖에 없음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야곱으로부터 씨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로부터 내 산들의 상속자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뽑은 (자)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이. 65:9).
위에서 “산들”은 주님의 왕국과 천적인 선들을 표시한다; 유다는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시한다. 다시:
그런고로 영원히 거주하는 높고 드높은 자들아, 이들의 이름은 거룩하다,
나는 높고 거룩한 장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57:15).
위에서 “높은”은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땅 위 너머 그들의 높이 때문에, 산들은 주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시내산으로부터 법을 선포하셨다. 아래 구절에서 사랑과 선행이 주님에 의해서도 뜻해지고, “산들”에 의해, (이 구절이 포함된 마태. 24, 25장에서) 시대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말하신다:
그때 유다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마. 24:16; 눅. 21:21; 막. 13:14),
위에서 “유다”는 황폐된 교회를 나타낸다.

태고 교회가 산들 위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고대 교회 역시 그렇게 했다. 이로부터 그 시절의 모든 표현적 예배에서,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서 산들 위에서, 그리고 산과 비슷해지게 높은 장소를 건설하여 제물을 바치는 것이 유행했다. 이는 아브람에 관련된 역사로부터 분명하다 (창. 12:1; 22:2); 그리고 성전 건축 이전의 유대인들에 관련해서 (신. 27:4-7; 여. 8:30; 삼상. 9:12-14; 19; 10:5; 왕상. 3:2-4); 민족들에 관련하여 (신. 12:2; 왕하. 17:9-11); 그리고 우상숭배하는 유대인들에 관련하여 (이. 57:7; 왕상. 11:7; 14:23; 22:43; 왕하. 12:3; 14:4; 15:3, 4, 34, 35; 16:4; 17:9-11; 21:5; 23:5, 8-9, 13, 15).

위 모두로부터, “물들로 산들이 덮혀짐”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거짓된 설득들, 이것이 선행의 모든 선을 소멸했다.

물들은 십오 큐빗 위쪽에서 압도했고, 산들을 덮었다. 이는 남아있는 선행은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5”는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을 만큼 적다를 의미함은 창. 6:15에서 살핀 “5”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15”는 말씀의 스타일(style)에서, 내적 의미에서, 5와 10으로 구성되는데, “5”는 적음을 의미하고; “10”은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창. 6:3 참조). 이는 이 사람들과 더불어 어떤 리메인스도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이 너무나 거세어져 그들은 모든 선을 소멸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 안쪽에 저장된 리메인스에 관하여는 앞에서 살폈는데, 거짓된 원리들, 더 나아가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이 홍수 이전 사람들과 더불어 창궐했기 때문에, 이들이 꺼낼 수 없도록 (영구히) 감추어두는 방법으로 (내적 통로를) 닫으셨다. 만일 그들이 꺼낸다면, 그들은 곧바로 왜곡되게 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를 거절하고, 모든 거짓은 흡입할 뿐아니라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진리를 악용하는 것이 설득력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21, 22절 “모든 육체, 즉 땅에서 기는 것, 새,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을 기는 모든 기는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22 코로 생명들의 호흡을 하고 있는 모든 것, 마른 육지에 있었던 모든 것이 죽었다.

그리고 땅 위에서 기는 모든 육체가 죽었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후손에 속하는 이들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잇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들의 설득력들과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관하여 묘사되어진다. 우선 그들이 여기서 “땅 위를 기는 육체”라 불리우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감각적이고 육체적(물질적인, corporeal) 수준으로 되어 갔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들, 이미 말한 바 같이, 태고인들은 이것을 기는 것에 견주었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 움직이는 육체”가 말해질 때, 이는 오로지 감각적이고 물질적으로 치닫는 사람을 의미한다. “육체”는 일반적 측면에서 모든 인류, 그리고 특별한 측면에서는 감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여기서 주어진대로의, 홍수 이전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부터 태고인의 글쓰기 문체가 무엇이었는지, 예언적 문체는 무엇이었는지가 분명해진다. 여기로부터 이 장의 끝까지는 이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그들의 설득력들에 관하여, 그리고 23절에서는 그들의 그리워함들에 관하여서 이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의 이해력 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그 다음 그들의 의지력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묘사된다. 물론 설득력이나 그리워함은 이해력과 의지력에 속한 것들은 실제로는 아니나 반대적 의미에서 이해력 측면과 의지력 측면이라 불릴 뿐이다. 다시 말해, 거짓으로부터의 설득력은 이해력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워함도 의지력에 속한 것은 결코 아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먼저 그들의 거짓 설득력에 관하여, 그 다음 그리워함들에 관하여 묘사되고 있다고 내가 말했는데, 그 이유는 21절에 포함된 것이 23절에서 반복되는데,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예언적 문체이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두 생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해력에 속한 것들; 다른 하나, 의지력에 속한 것들이다. 이 두 생명들은 서로로부터 완전히 구분된다. 인간은 이 둘 모두로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오늘날, 비록 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분리된채로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대부분을 위해서는 하나되어 있다. 그것들이 하나되는 것,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되는가가 많은 예증들에 의해 확고히 되고 명백히 만들어졌다. 인간이 이런 두 부분들, 즉 이해력과 의지력, 그리고 이쪽에서 저쪽 안으로 흘러듬에 의해 존재하기에, 인간이 말씀에서 묘사되어질 때, 인간은 이쪽 부분에 관하여, 그리고 다른 쪽 부분에 관하여 구분하여 묘사된다. 이런 이유로 같은 말이 다른 구절에서 반복된다. 반복됨이 없으면, 묘사는 불완전해진다. 여기서의 이해력과 의지력 측면의 경우는 다른 구절의 경우도 같다. 단지 그 문맥의 상황에 따라 그 주제로부터 발출되는 것에 일치하여 있을 뿐이다; 주제로부터, 즉 실지의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 안에서도 각 구성하는 부분 안에도 전체와 비슷한 방법에서 묘사되고, 이 방법이야말로 묘사를 충만하게 한다.

설득력이 이 구절에서 먼저 취급되고, 23절에서 그리워함들이 취급된다는 것은 이 절에서 “새”가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짐승”이 언급되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새”는 이해력으로부터, 또는 추론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짐승”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워함들에 속하는 것들이 묘사될 경우, 23절 같이,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 “새”가 언급된다; 그리고 말했던 대로, 이쪽 부분이 저쪽 부분으로 상호적으로 흐르고, 순서만을 뒤바꾸어 묘사하면두 부분에서 공히 충만한 묘사를 가진다.

새, 그리고 짐승, 그리고 야생 동물, 그리고 땅 위를 기는 모두 각각의 기는 것을 포함하여. 이것들은 그들의 설득력들을 의미하는데, “새”는 거짓인 것에 애착함을,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야생 동물”은 쾌락들을, “기는 것”은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새”와 “짐승”을 다룰 때 이미 살폈다. “새들”이 이해력, 추론,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바, 그것의 반대되는 것 역시 의미한다. 즉 왜곡되고 악용된 추론, 거짓들, 거짓된 것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홍수 이전 사람들로부터의 설득력들은 여기서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즉 그것들 안에 거짓된 것에 애착함, 그리워함들, 쾌락들,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설득력들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인간이 알아채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거짓된 것을 원리라고, 거짓된 것으로부터의 설득력들을 믿으면서, 단순한 것, 하나의 일반적인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많이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건의 경우마다 각각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두 각각의 애착도 모두 그의 이해력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그의 의지력으로부터 그것의 본성과 존재를 끌어낸다. 다시 말해 인간 전체,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 모두는 그의 각각의 애착 안에 있다는 말이다. 아주 사소한 애착의 범위까지도 그 안에 있다.
이것은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나에게 분명하게 만들어졌다. 한가지만을 예로 들면, 저세상에서는 영들의 품질을 그의 생각의 단 하나의 관념(idea)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실로 천사들은 누구를 응시만 해도 즉시 그의 품성이 무엇인지를 어떤 실수도 없이 꼭집어 즉시 알아보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가지고 있다. 인간 속의 모두 각각의 생각, 애착, 그것이 아주 사소해도 그것 안에는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이 담겨 있다. 즉 그의 이해력, 그의 의지력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가깝게이든, 떨어져서이든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끔찍한 설득력들이 이 구절에서 묘사되었다: 즉 그들 안에 거짓인 것에 애착함들, 악한 것에 애착함들, 또는 그리워함들, 또한 쾌락들, 마지막으로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을 묘사해놓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런 설득력들 내부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반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인들, 설득력들의 지극히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에서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 만일 누군가 거짓된 것으로부터의 한가지 원리, 또는 설득력내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안다면, 금새 소스라치고 말리라. 이것은 지옥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순진으로부터, 또는 무지로부터 채용되고 있다면, 그 안의 거짓들은 쉽게 쫓아버려진다.

이 구절에 “모두 각각의 사람”이 첨가되어 있다, 이를 수단으로 위에 살핀 것들이 인간 안에 있음을 의미해주고 있다. 이는 앞서 진행하여 온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적으로 결론내리는 구절이다. 이런 구절들은 자주 첨가되어진다.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 모든 것. 이는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 태고 교회로부터 있는 이들을 의미하고, 이 생명들이란 사랑과 사랑에서 파생된 신앙임은 전에 말했던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태고인들 사이에서, 생명은 “코 안에 있는 숨”, 또는 “호흡함”에 의해 의미되었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생명은 영적 (평면의) 것들에 상응하고, 심정의 운동(motion)은 천적 (평면의) 것들과 상응한다.
여기서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함이었던…”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홍수 이전 사람들이 취급되기 때문에서이다. 이들에게는 유전적으로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씨를 가졌으나, 소멸, 또는 질식되고 말았다. 이 말들 안에는 감추여놓인 더 깊은 의미 또한 있다. 이에 관하여는 살폈다. 즉 태고 교회 사람은 내적 호흡을 가졌다는 것, 이 호흡은 천사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인데,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차 후 살핀다. 이 호흡은 내적 인간들의 모든 상태들에 일치되게 다양해졌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서 이 호흡은 그들의 후손들 안에서 바뀌어갔다. 결국 마지막 세대에서는 이 호흡이 지닌 천사 같은 것이 소멸되기까지 바뀐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천사 같은 천국과 더 이상 호흡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들이 절멸되는 진짜 원인이다; 그러므로 지금 말해지는 바, 그들의 “기한이 만료되었다(expired)”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코가 생명들의 숨의 호흡이었던 자들이 “죽었다”라고 말해진다.
이 때로부터 내적 호흡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천국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천적 (수준의) 지각도 종료되었다. 그 대신 외적 호흡이 계승되었다. 천국과의 교류가 중지되었기 때문에, 고대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의 사람은 더 이상 태고인 같은 천적 (평면의) 인간일 수는 없고, 영적 (평면의) 인간(은 되어질 수 있었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차 후 살핀다.

마른 [토지]에 있던 모든 것. 이것은 더 이상 생명이 없는 것, 그들의 죽어감은 그들이 기한이 다 찼다는 것을 의미함은 살펴 온 것으로부터 지금 뒤잇고 있다. 사랑과 신앙의 모든 생명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마른 [토지]”라고 말해진다. “마른 [토지]”란 거기에 물이 없다는 것, 즉 영적 (평면의) 것, 더욱이 천적 (평면의) 어떤 것도 없다는 말이다. 마치 영적, 천적 (평면의) 모든 것이 질식한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의 이해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들의 많은 경험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고로 거짓인 것 일지라도 그 견해들로 마음에 안착되어버린 것들에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고집 셈이 들러붙어 제아무리 거짓에 반대되는 것을 들이대도 꿈쩍하지 않고 듣는 것조차 불쾌해 한다; 그리하여 자기들 눈 앞에 진리가 버젓이 놓여도 자신들에게 그것들이 알려지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한술 더 떠서 거짓된 것이 신성하다는 생각까지 얹어 숭배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퇴짜를 놓고, 자기들이 뒤집은 진리는 용인하는 바, 결국 공상들 안에 침수되는 것 뿐이다. 여기서 풀도, 물도 없는 “마른 [토지]”로 의미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강들을 마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토지를 악인들의 손에 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황무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있는 가득함도
황무하게 할 것이다 (겔. 30:12).
“강들을 마르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어떤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너의 토지는 마른 [토지]가 되어진다 (예. 44:22).
위에서 “마른 [토지]”는 황무해지고 쓸모 없어진 토지, 그리하여 진리와 선에 관한 어떤 것이 더 이상 없음을 표시한다.

23절. 그리고 그분은 지면에 있었던 모든 물질, 즉 사람으로부터 짐승까지, 기는 것까지, 하늘의 새들까지 파괴하셨다. 그래서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그래서 노아만이, 그와 함께 방주에 있었던 것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물질을 파괴하셨다. 이는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그것들이 표현물들을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질(substance)”은 의지로부터 있는 것들을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모든 것들은 의지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의지로부터 존재 안으로 와져서 실존한다는 말이다. 의지력이 인간의 참 물질, 또는 인간 자체이다. 홍수 이전 사람들의 그리워함들은 자기를 사랑함 속에 있었다. 가장 보편적인 두 종류의 그리워함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함에 속하는 종류와 세상을 사랑함에 속하는 종류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을 바란다. 그러므로 그리워함들은 그의 사랑에 속한다. 이 사람들과 더불어 자기를 사랑함이 통치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워함들이 통치한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너무나 지독하게 사랑했는 바, 그들은 자신들이 신들이라고 믿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들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설득력이었다.

지면의 얼굴 위에 있는 것. 이는 태고 교회의 후손을 의미하는데, “지면”이 교회임으로부터, 그러므로 이 교회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지면의 얼굴 위에 있는 모든 물질”이 “파괴되었다”라고 말해졌을 때, 그 의미는 태고 교회에 속한 이들, 그리고 그들 품성 속에 있는 이들이 파괴되었다 이다. 여기서 “지면”이라 말해지는데, 21절의 경우 “땅”이라 말해진다. 그 이유는 교회는 이해력 측면에 속한 것으로는 결코 서술될 수 없고, 의지력에 속한 것이어야 서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지식과 그것에 수반되는 합리적 설득력들은 의지력에 속하는 선행만이 교회, 또는 교회인을 구성한다. 필수적인 모든 것은 의지력으로부터 있다; 결과적으로 교리적인 것이 교회를 만들려면, 일반적으로, 세부적으로 반드시 선행을 주목하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선행이 교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교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교회로부터 인지 아닌지도 분명해진다. 주님의 교회, 이는 마치 천국들에서 주님의 왕국같이 사랑과 선행으로만 구성된다.

사람과 짐승 모두, 그리고 기는 것, 그리고 하늘들의 새. 이 말들이 그들의 악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 “인간”은 그 본성 자체; “짐승”은 그리워함들을; “기는 것”은 쾌락을; 그리고 “하늘들의 새”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앞에서 설명이 있었으므로 세부적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땅으로부터 파괴되었다. 이것이 결말이다는 것, 즉 태고 교회는 기한이 만료되었다는 것; 그리고 “노아만이 남았다,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던 것만이 남았다”는 새로운 교회를 구성한 그들은 보존되어졌다가 의미된다는 것;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었던 것”에 의해서는 새로운 교회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의미되는데, 더 긴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24절. 그리고 물은 일백 오십 일 동안 거세어져 있었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의미한다. “150일”은 마지막 한계, 그리고 처음을 의미한다.

이는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그리고 “150”은 마지막 한계, 그리고 처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 안에서의 경우, 자주 등장하는 단순한 숫자에 비해 적절히 확증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20절에서 살핀 “15”로부터 분명해진다. “15”의 경우, 거의 어떤 것도 있지 않을 만큼 적다를 의미한다; “150”의 경우, 15에 10을 곱해 얻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10은 남아 있는 흔적(remaining trace, 또는 remains)을 의미한다. 적은 것을 곱하는 것(곱하여 적어지는 것), 예를 들면, 1/2을 곱하면(1/2×1/2) 1/4로 줄어가는… 1/10 하는 식으로 계속 줄어저 가게하는 곱하기이다. 그리하여 거의 아무 것도 있지 않게 되는 것, 결과적으로 끝장, 마지막 한계가 되는 것이다. 숫자 150은 8:3에서도 등장한다. 거기서, “물들이 150일의 끝에서 줄어들었다”라고 말해지는데, 같은 의미이다.
말씀에서 언급된 숫자들은 글자의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된 의미인) 추상적 측면에서 의미를 찾아서 이해되어야 한다. 숫자들은 글자 의미에 있는 역사적 시리즈를 함께 연결하기 위해서만 도입되어진다. 그런고로 “일곱”이 발생하는 곳에서 그것은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숫자에 따라 자주 붙는 말들, 즉 치수나 시간들로부터서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를 지각하는 천사들은 치수나 시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숫자가 가리키는 것은 더 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그 말씀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다. 천사들은 말씀 어느 곳에서나 숫자가 읽혀질 때, 그들은 숫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고, 숫자가 의미한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천사들의 경우, 그들은 이 구절의 숫자에서도 그것이 태고 교회의 마지막 한계를 표시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서는 고대 교회, 또는 새로운 교회의 처음 한계를 표시한다고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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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8 장

성경: 창세기 제 8 장

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노아, 그리고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그리고 방주에서 그와 함 께 있었던 짐승 각각 모두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은 줄었다.
2. 또한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비가 억눌렸 다.
3. 물들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일백 오십 일 이후 물들은 감소했다.
4. 그리고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맥에서 휴식하였다.
5. 그리고 물들은 열째 달까지 가고 줄어들고 하였는데 열째 달, 첫 날에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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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을 때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7.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8. 그리고 노아는 물들이 지면의 얼굴에서 줄어들었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 자기로부 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리고 비둘기는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 되돌아 왔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의 손을 내 밀어 비둘기를 잡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주 안으로 가져 왔다.
10. 그리고 그는 다른 칠 일을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비둘기를 방주로부터 내어 보냈다.
11. 그리고 비둘기는 저녁 무렵 돌아 왔다. 보라, 비둘기 입에는 올리브 잎이 잡아뜯 겨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물이 땅으로부터 줄어든 것을 알았다.
12.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칠 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비둘 기는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13. 그리고 육백 년 그리고 첫 해, 시작에서, 달의 첫째에서 였다, 물은 땅으로부터 말랐다. 그리고 노아는 방주의 덮개를 벗겼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보라, 지면은 말라 있었다.
14. 둘째 달, 이십 칠 일, 땅은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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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리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야기하시어, 말하신다.
16. 너와 네 아내, 네 아들들,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은 방주에서 나가거라.
17. 모든 육체로부터, 너와 함께있는 야생 동물 각각 모두, 즉 새와 짐승과 땅에서 기는 기는 것 각각 모두, 너와 함께 있도록 가져온 것들은 땅에서 자신들을 퍼져 나가고,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고, 번성하도록 하리라.
18. 그리고 노아는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그의 아내 그의 아들들의 아내들,
19.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기는 것들 각각 모두, 새들 각각 모두, 땅에서 기는 것 각 각 모두, 그 가족들에 따라 방주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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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건축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짐승으로부 터, 그리고 모두 각각의 깨끗한 새로부터 가져왔다, 그리고 제단에서 태워바치는 제물들을 바쳤다.
2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휴식의 냄새를 맡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심정 에서 말하셨다. 나는 인간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지면을 다시는 저주하지 않으 리라. 그 이유는 인간의 심정이 제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했던 것 같이 생명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부수지 않으리라.
22. 땅의 모든 날 동안 파종기와 추수, 그리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여름과 겨울, 그 리고 낮과 밤은 중단되지 않으리라.

각 절의 내적 의미

1절.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노아, 그리고 야생 동물 각각 모두, 그리고 방주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짐승 각각 모두를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은 줄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기억하셨다. 이는 시험의 끝과 새롭게 함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는 앞 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는 특별히 그분은 자비하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회상하심은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험 후에 특별히 서술된다. 그 이유는 이때 새로운 빛이 비추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계속되는 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분이 안 계신듯 상상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악귀로 말미암아서 이고, 심할 경우 자포자기함으로 까지 치닫는데, 이럴 경우 어떤 하느님도 있지 않다고 믿어질 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말,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라는 표현은 외관에 따른 표현인 바, 시험의 끝을 의미하고, 새롭게 함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해지고, “여호와”가 기억하신다고로는 말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아직은 거듭남 이전의 상태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나질 때, 이 장의 20, 21절에서 같이 “여호와”란 표현이 사용된다. 그 이유인즉, 신앙이 선행(charity)과 결합함이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선행으로부터 행동할 때, 처음으로 거듭나진다 라고 말해진다. 선행 안에 여호와께서는 현존하시지만, 신앙이 선행과 결합 이전일 경우, 신앙 안에도 완전히 현존하신다고 까지는 말해질 수 없다. 선행은 저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이고 그것만이 진짜 있음(being)이다; 그리고 있음 자체와 생명 자체가 여호와이신 바, 우리가 여호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만들기 이전일 경우,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고 말해지는 분은 “여호와”가 아닌 “하느님”일 수 밖에 없다.

“노아”에 의해 고대 교회의 사람이; 그리고 “방주 안에 그와 더불어 있는 모두 각각의 야생 동물, 그리고 모두 각각의 짐승”에 의해 고대 교회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 장에서 “야생 동물”과 “짐승”을 말한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말씀에서 “야생 동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가 인간 안에 있는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을 의미할 경우의 이유는 히브리어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고인들이 자기들의 겸허함 안에서 자신들을 야생 동물들로서 인정했는데, 이 경우의 단어는 인간 안에 죽어있는 것의 유형(type)이 되었다. 본문에서일 경우, 두 가지 의미 모두가 한 복합체 안에있는 것으로 뜻해진다. 통상적으로 이는 시험 후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과 일치하는데, 이 상태 안에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또는 주님에 속하는 것과 인간의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심하게 혼동된 상태여서 당사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해서 정리정돈해 주신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야생 동물”이 인간 안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7:14로부터, 그리고 8:17, 19절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창 1-2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땅을 지나가도록 바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이 줄었다. 이는 모든 것이 각기 질서에 맞추어 배열됨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있는 “바람”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영들, 선한 영이든, 악한 영이든, “바람들”에 비교되고 견주어지고 그렇게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원어에서 “영들”은 “바람들”을 뜻하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시험들 안에서 (이 구절의 경우 줄어든 물들), 악한 영들은 범람의 원인인데, 이 영들은 자기들의 공상들과 더불어 패거리지어 흘러들어 인간 안에 있는 자기들의 공상과 비슷한 공상들을 선동함으로 그 인간 자체를 침수시킨다; 그리고 이런 영들, 또는 그들의 공상들이 흩어질 때, 말씀에서 “바람”에 의해 행해진다고, 참으로 “동풍”에 의해 행해진다고 말해진다.
이것은 시험 동안 한 인간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동요함, 또는 시험의 물들이 중단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더불은 경우인데, 나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에서 악령들은 때로는 군대같이 단결하고, 이것 때문에 소동이 야기되는데, 그들이 다른 단결된 영들에 의해 흩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이 다른 영들은 오른쪽으로부터, 즉 동쪽 방위로부터 오고, 그들이 오면 악한 영들 안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되어 도망가야만 한다는 생각 밖에 더 할 수 없게 한다. 이때 악한 영들과 제휴한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한 목적을 위해 형성된 영들의 세계는 해체된다. 이렇게 흩어지게 한 영들의 군대가 (주님의) 동풍(the East Wind)이라 불리운다; 흩어지게 하는 방법들은 이 외에 무수하게 있는데, 역시 “동풍들”이라 불리운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필 것이다. 악령들이 흩어질 때, 동요와 소동의 상태가 있으나 이 뒤에 고요함, 또는 침묵의 상태가 이어진다. 이는 시험에 있어온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다; 그 이유가 시험에 있는 동안에서 그는 악령의 군대들 한 가운데 있으나, 그것들이 다 몰아내진 상태, 또는 흩어진 상태에서는 고요한듯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 배열됨의 시작이 있다.
어떤 것이 질서의 상태로 환원되기 앞서, 가장 통상적인 절차는 어떤 것들을 혼돈된 집단에로 되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질서적인 것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할 것들은 미리 떼어내는 것이다. 그 다음 주님께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질서 안으로 배열해 주신다. 이 과정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도 전체적, 개별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환원되기 앞서 먼저 혼돈된 매체 안으로 환원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잡다한(이질적인) 것이 무엇이든 흩뜨리는 폭풍이 대기에 있지 않으면, 공기는 결코 깨끗해 있지 못하고 해로운 것의 축적으로 치명적인 공기로 되어질 것이다. 인간 신체 안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피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이질 성분이든 동질 성분이든, 모두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한 개의 심장 안으로 다 함께 뒤섞여 있기 위해 흐르지 않으면, 액체들이 치명적 교착 상태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각각의 쓸모에 맞게 구분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인간의 거듭나는 과정 역시 이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람”, 특히 “동풍”은 거짓들과 악들의 흩어짐, 또는 악령들과 악귀들의 흩어짐 외에 더 아니다. 이후에 질서 안으로 배열됨인데,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네가 그들을 부채질 할 것이다, 그리고 바람이 그들을 운반해 갈 것이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산산이 흐틀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 안에서
기뻐 환호할 것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기뻐 할 것이다 (이. 41:16).
위에서 (떼지어 있던 것을) 흐트림(dispersion)이 “바람”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모이지 못하게 산산히) 흩어버림(scatter)은 회오리바람에 비교된다. 이것은 악들에 관해서 이다. 그 다음 거듭나는 이들이 여호와 안에서 기뻐 환호할 것이다. 다윗서에서:
보라, 왕들이 자신들을 집합시켰다, 그들이 함께 지나갔다; 그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 다음 그들은 놀라워졌다; 그들은 낙담해졌다, 그들은 허겁지겁하였다;
떨림이 거기서 그들을 사로잡았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다;
동풍으로 당신은 다르싯의 배를 부수십니다 (시. 48:4-7).
위에서 공포와 혼동이 동풍에 의해 발생했음을 묘사하고 있고, 이 묘사는 영들의 세계를 지나가는 것으로부터 취해지고 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포함되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의 토지를 놀람으로 만드는 것: 나는 적 앞에서 동풍으로 하듯이
그들을 산산히 흩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평온함의 날에 얼굴이 아닌 목을 응시할 것이다 (예. 18:16, 17).
위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동풍”은 거짓들의 흐트림을 표시하고 있다. 홍해가 말리워진 것,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건너간 것 역시 비슷한 동풍의 표현이다. 출애굽기서에서:
여호와께서 밤새 내내 강한 동풍으로 바다를 뒤로 가게 하셨다,
그리고 바다를 마르게 만드셨다, 그리고 물들이 나뉘었다 (출. 14:21).
홍해에서의 물들의 의미는 본문의 홍수에서의 물들의 의미와 비슷하다. 사악한 자를 표현한 이집트인들이 익사한 것, 한편 여기서 “노아”로 표현된 거듭나는 자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건너는 것도 의미 측면에서 비슷하다. “홍해”에 의해, “홍수”에 의해서와 같이 지옥에 떨어짐, 뿐만 아니라 시험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런고로 “동풍”에 의해 물들의 흐트려짐, 즉 악한 자들이 지옥에 떨어짐, 또는 시험이 의미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홍해를 건넌 후 부른 모세의 노래로부터 분명해진다 (출. 15:1-19); 그리고 이사야서로부터:
여호와께서 이집트인의 바다의 혀를 파괴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의 바람으로
그분은 그분의 손을 강 위에 흔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게 쳐서 일곱 시내들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신발을 적시지 않고 행군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분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나오게 한 날에 이스라엘을 위해 있었던 것 같이, 아시리아로부터 남아있을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위해 큰 길이 있을 것이다
(이. 11:15, 16).
위에서 아시리아로부터 남아있을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를 위한 큰 길은 질서 안으로 배열하심을 의미한다.

2절. 또한 깊음의 샘들과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의 비가 억눌렸다.

여기로부터 6절까지는 시험 후, 이 교회인의 첫 상태가 취급되어진다. 이 구절에서는 시험의 중단이 의미된다. 그의 시험, 의지력과 이해력 모두에서의 시험은 이전에 다루었다. “깊음의 샘들이 멈춤”에 의해 의지력 측면의 시험의 중단이; “하늘의 큰 폭포가 멈춤”에 의해 이해력 측면의 시험의 중단이 뜻해지고 있다. 이 표현들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7:11에서 살폈다; 또한 “비”가 시험 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7:12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생략된다.

“깊음의 샘들”이 의지 측면에서 있는 것에 관한 시험을, 그리고 “하늘의 큰 폭포”가 이해력 측면에서 있는 것에 관한 시험을 의미하는 이유는, 지옥에 의해 영향을 직접 받는 것이 의지 측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해력 측면의 것들은 이것이 의지로부터 있는 탐욕들에 침수되지 않고 있을 경우, 지옥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는다. 의지력으로부터 있는 악들이 인간을 정죄하고 지옥으로 그를 내던진다, 그리고 거짓들의 경우, 그것이 악들과 결합되지 않은 이상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이해력은 의지력을 뒤잇기 때문이다. 이 서술이 진실인 이유는 거짓들 안에 있는데도 여전히 구원되어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경우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연적 수준의 선행과 자비 안에서 사는 이방인 사이에 많이 있다, 그리고 기독인들의 경우, 심정의 천진난만함 안에 신앙을 지닌 이들이 이런 경우에 포함된다. 그들의 무지함과 천진난만함은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게 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 안에는 순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 안에서 자신들을 확증한 이들, 그리하여 거짓된 삶과 계약을 맺은 이들, 결국 모든 진리를 거절하고 내치는 이들의 경우는 위와 매우 다르다; 그 이유가 거짓으로부터의 이 삶은 진리와 선의 어떤 것이 수정되기 이전 반드시 황폐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쁜 상황이 있다. 자신들의 탐욕들 아래 거짓들 안에서 확증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거짓들과 탐욕들이 하나의 생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지옥에 풍덩 빠트린 자들이다. 의지 측면의 시험이 지옥들인 “깊음의 샘들”에 의해, 이해 측면의 시험들이 비를 오게하는 구름들인 “하늘의 큰 폭포”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이다.

3절. 물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고 일백 오십 일 이후 물은 감소했다.

물은 땅으로부터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 이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의 파동들을 의미함은 이미 말한 바로부터 분명하다: 즉 홍수의 물들, 또는 범람, 노아에 관련하여, 시험들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주제가 여기서 시험 후 첫 상태를 의미하는 바,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물러갔다”가 진리들과 거짓들 사이의 파동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파동의 본래의 모습은 시험이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알게 될 수 없다. 시험 후에 있는 것이 파동이기 때문이다. 시험이 천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선과 악 사이에 있다; 시험이 영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에 있다; 시험이 자연적 수준일 경우, 파동은 탐욕에 속한 것과 탐욕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 있다.
시험들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즉. 크게 구분하면,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에서 이다. 천적 수준의 시험들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영적 수준의 시험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자연적 수준의 시험은 위 두 수준의 시험들과는 구분된다. 이 시험은 엄밀히 말하면 시험이 아니고, 단지 세상에서의 불운, 질병, 또는 신체의 피나 다른 액체들이 악화된 조건들에 습격 당한 자연적 수준의 사랑들로부터 발생하는 근심 불안 일 뿐이다. 이것은 대단히 간략한 설명이지만 이로부터서도 시험이 무엇인지 짐작은 했으리라 본다. 따라서 (심신의) 고통과 걱정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모든 시험의 수준에 공통되는 생산물이다. 그런고로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사랑이 습격 당하면, 가장 깊은 고통을 생산하고, 이는 천적 수준의 시험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 사랑이 습격 당하면, 양심의 고통이 생산된다. 이것은 영적 수준의 시험이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이들이 시험들과 양심의 아픔(pang)들이라 부르는 것은 시험이 아니고, 그들의 사랑들이 습격 당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걱정들일 뿐이다. 이것들은 이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 재산, 명성, 쾌락, 신체적 생명, 등등 같은 것에 흠집이 나고 손실이 생기는 것이 예견되어 오는 느낌에서 발생되는 불안 걱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곤경들은 선함 측면의 어떤 것을 쉽게 생산되어지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 더 나아가 자연적 수준의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시험들을 체험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결과로 갖가지 종류의 이교도, 이방인, 그리고 우상숭배자들로 자기들이 흠모하는 자기들 신앙의 생명을 공격 당함으로부터 일어나는 곤경에 의해 시험을 맛볼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시험들을 흉내내는 비애(woe)들이다.

시험들이 끝났을 때, 흔들림(wavering)이 있다. 만일 시험이 영적 수준에서 였다면 진리와 거짓 사이에 흔들림이 있다. 이는 이렇게도 설명이 된다. 시험은 거듭남의 시작이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거듭남은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는 것, 또는 그가 생명을 받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아님에서 사람이다로 되는 것, 또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있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그의 이전 삶, 단지 동물적인 뿐인 삶이 시험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기에, 그는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에서 흔들림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삶 속에 있고, 거짓은 옛 삶 속에 있다; 따라서 옛 삶이 파괴되지 않으면, 즉 이 흔들림이 거행되지 않으면, 어떤 영적인 씨도 뿌려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영적인 씨를 받을 지면(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전의 삶이 파괴되고, 흔들림이 결과될 때, 인간은 진리와 선인 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실로 진리인 것 같은 어떤 것도 거의 모른다. 예를 들면, 그가 선행의 선들을 곰곰이 되씹어 볼 때, 또는 사람들이 일컫는대로와 같이, 선한 일들에 관해서, 그리고 자기는 자신스스로로부터 그것들을 행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내가 행한 선한 일에 나 자신 공적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에 대해 불명확함과 어두움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자기 자신, 또는 자신 스스로로부터는 선을 행할 수 없음이 통보될 때, 나아가 누구도 공적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모든 공적은 주님만에 속한다는 것을 통지받으면, 그는 놀라움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외에 신앙의 다른 문제들의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불명확함과 어둠은 점진적으로, 분별적으로 계몽되어진다.
거듭남은 인간이 유아로 출생하는 것과도 같다. 유아 때의 그의 삶은 매우 희미하다; 그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먼저 유아는 사물의 일반적인 것들을 받는다, 이것은 점차 세부적으로 구분되어가서 일반적인 것들 안에 삽입되어진다. 그리고 구분된 세부적인 것들 안에 더 세세한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세부사항들에 의해 예증된 일반적인 것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은 사물의 존재를 배울 뿐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품질까지 배운다. 영적 시험으로부터 빠져나온 이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리고 거짓들 안에서 있어온 이들의 저세상 삶과 황폐됨도 이와 비슷하다. 이 상태가 (영적) 흔들림(Fluctuation)이고, 이 구절에서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줄어들었다”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일백 오십 일 이후에 물들이 감소했다. 이는 시험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이 숫자가 끝남과 시작 점이라고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7:24 참조). 여기서는 흔들림의 종결(끝남, termination)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4절. 그리고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에 아라랏 산맥에서 휴식하였다.

“방주가 휴식하였다(rested)”가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방주”가 이 교회의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방주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은 거듭남의 사람 안에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살폈다. 그러므로 방주가 휴식한다 라고 말해질 때, 이는 이 사람이 거듭나있다를 뜻한다. 글자 의미의 연결로도 방주의 휴식함에 의해 시험 후 이어지는 흔들림들의 중단이 의미됨을 함축하는듯 엿보인다; 그러나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불명료함들과 의심들인 흔들림들이 쉽사리 중단되지 않고, 꽤 오래 존속한다. 이는 뒤잇는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어떤 것의 계속성은 내적 의미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이 의미들은 신비적인 바, 이를 펼쳐 보이도록 내게 허락해 주셨다; 영적 (평면의) 인간도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시험을 견디어 낸 후 주님의 “휴식”이 있다; 영적 (평면의) 인간도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일곱 째 달이 되어간다 (천적 평면의 인간같이 일곱 째 날이 아님). 이렇게 천적 (평면의) 인간과 영적 (평면의) 인간 사이에 차이가 있는 바, 전자의 “휴식”은 원어에서도 안식일을 뜻하는 단어로 표현되고, 후자는 휴식을 뜻하는 또다른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였다. 이 단어로부터 “노아”라고 이름지어졌다, 이는 “휴식”을 적절하게 뜻한다.

“일곱 째 달”이 거룩한 것을 의미함은 앞서 많은 설명이 있었다. 이 거룩함은 천적 (평면의) 인간에 관련되는 것에 상응한다 (2:3 참조): 즉 일곱 째 날은 신성하게 되어졌다는 것,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속에서 휴식하셨기 때문이다.

“열 일곱 째 날”이 새로이 있는 것을 의미함은 같은 숫자가 등장하는 7:11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이 숫자는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시작은 새로이 있다.

“아라랏 산맥”이 빛을 의미하는 것은 “산”이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아라랏”의 의미가 빛(light, 또는 a bit of light, lumen )임으로부터, 그리고 실로 거듭난 자가 향유하는 빛이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새로운 빛(lumen), 또는 거듭난 자의 처음의 빛(light, 또는 glimmer)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그 빛의 존재를 가지는 일은 결코 없고, 오직 선행으로부터서만 가진다. 신앙의 진리들은 빛의 광선(rays, lucis) 같고, 사랑 또는 선행은 불꽃 같다; 거듭나있는 자의 빛(lumen)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가 아닌 선행으로부터 이고, 신앙의 진리들은 선행으로부터 파생된 빛의 광선이다. 그런고로 “아라랏 산맥”은 선행으로부터의 빛(lumen)을 의미한다. 이 빛이 시험 후 지각되어지는 처음의 빛이고, 처음인 바, 이 빛은 어둑하다. 그래서 충분한 빛(lux)이 아닌 빛의 조각(조금, lumen)이라 불리운다.

이상 살핀 바로 이 구절이 내적 의미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영적 (평면의) 인간은 선행으로부터 있는 새로운 지적인 빛(lumine)의 덕택으로 있는 거룩한 “휴식”이다는 것이다. 이 진리들은 천사들에 의해 다양함에서 아주 경이롭게, 그리고 질서에서 매우 기쁘게 지각되어지는데, 인간은 이를 천사 같은 생각에서는 단하나도 획득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수천의 겹겹의 시리즈가 되어 천사와 인간에게 들어가 감화를 준다. 사실상 이와 같은 것들은 묘사가 가능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에서 이런 방식은 내적 의미 두루에 걸쳐 있다. 글자 의미에서 일지라도, 역사 그대로 안에서조차 그러한 바, 마치 본문, 즉 “방주는 일곱 째 달, 십칠 일, 아라랏 산맥에 휴식하였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5절. 그리고 물은 열째 달까지 가고 줄어들고 하였는데 열째 달, 첫 날에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물은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 이것은 거짓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어들 자체로부터, 뿐아니라 3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3절의 경우, “물들이 가고 되돌아 오고 하면서 줄어들었다”인데, 이 구절에서는 “물들이 가고 줄어들고 하였다”라고 말해진다. 이 절도 앞 구절 같이 진리인 것과 거짓인 것 사이의 파동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파동들이 감소하고 있다. 이미 말한대로 시험 후 파동들과 더불은 경우,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점차적으로 파동은 중단되어 간다는 것, 그리하여 진리의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인즉, 인간이 이와 같은 상태 안에 있는 한, 내적 인간은 주님을 통하여 외적 인간 위에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 안에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는 선한 것과 진리인 것에 대한 애착들이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외적 인간 안에는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이 있다. 이 후자가 종속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한, 길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을 위해 열리지 않는다.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험들은 인간의 외적인 측면들이 종속되는 것, 그리고 그의 내적 측면들에 순종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을런지 모른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모든 이에게 분명해질지 모른다. 즉, 불행이나 병듦, 마음의 슬픔 같은 것에 의해 인간의 사랑들이 습격당하고 깨지고 한다면, 그의 그리워함들은 가라앉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는 경건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이전 상태로 되돌아 오면, 그의 외적 인간은 우세하기 시작하고 내적 인간 따위는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은 육체의 것들이 소멸하기 시작하는 때인 죽음의 시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사람은 내적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외적 인간은 무엇인지; 또한 리메인스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 속에 있는 그리워함들과 쾌락들이 내적 인간을 통한 주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지도 알런지 모른다. 이로부터 또한 모든 이에게 명백해지는 바, 시험들, 또는 양심의 찌름이라 불리는 내적인 고통들이 외적 인간으로 하여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이다. 외적 인간이 순종한 결과란 이렇다: 선하고 참된 것에 애착함들이 그리워함들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거짓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저항받지 않고, 질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워함들과 거짓들의 중단됨이 여기서 “가고 줄어드는 물들”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열째 달”은 리메인스 속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하는 것은 “10”이 리메인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내적 인간에 있는 리메인스에 관한 것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달의 첫째 날에 산들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란 보이기 시작한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함은 “산들”의 의미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의 선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이 거듭나질 때,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양심을, 선행을 선물 받는다; 사랑과 선행의 선들로부터가 아닌 어떤 다른 바탕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또는 산들의 봉우리들을 본다고 상상하는 자는 완전 잘못된 상상이다; 이것들 없이 유대인들과 모독된 이방인들도 완전 잘못된 상상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을 본다고 할런지 모른다. “산들의 봉우리들”은 나타나는 빛의 첫 여명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또 하나는, 모든 거듭남은 저녁으로부터 아침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첫 장, 인간의 거듭남이 취급되는 대목에서 여섯 번 서술된다. 2, 3절은 저녁을, 4, 5 절은 아침이 묘사되어 있다. 본문은 빛의 첫 여명, 또는 이 상태의 아침이 “산들의 봉우리가 나타남”에 의해 묘사되어지고 있다.

6절.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을 때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사십 일의 끝이 왔다. 이것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과 이어지는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4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설명은 앞에서 있었다; 거기서, 주제는 시험이다. 그리고 “사십 일 낮들과 사십 일 밤들”이라 말해진다. 이는 시험의 존속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제는 시험 다음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십 일 낮들”이라 말해지고 사십 일 밤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즉 선행, 이는 말씀 안에서 “낮”에 비교되어지고 “낮”이라 불리운다, 이 낮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있는 신앙이 선행과 아직은 결합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밤”에 비교되고 “밤”이라 불리운다 (창. 1:16에서와 다른 구절에서도). 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듯, 말씀에서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그것의 빛을 받기에 밤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이로부터 신앙은 “달”에 비교되고 “달”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은 “태양”에 비교되고 “태양”이라 불리운다. “40일”, 또는 존속기간은 앞의 것과 뒤잇는 것 모두에 관계되는 바, “사십 일의 끝에서” 라고 말해진다; 그런고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존속 기간과 지금 취급하는 이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험 후 이 교회인의 두 번째 상태의 묘사가 개시된다.

노아는 그가 만든 방주의 창문을 열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 나타나는 두 번째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앞 절의 마지막 단어들로부터, 즉 “산들의 봉우리들이 나타났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더하여 “창문”의 의미가 이해력, 또는 신앙의 진리임으로부터 더 알 수 있다; 그리고 앞 절과 마찬가지로 이로부터도 빛의 첫 여명이 있다. 이해함, 또는 신앙의 진리에 관하여가 “창문”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위에서도 관찰될런지 모른다. 즉 신앙의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또는 선행으로부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 마치 의지로부터 있지 않은 진정한 이해함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의지로부터 있는 것을 제거한다면, 이해함도 있지 않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선행을 제거한다면, 신앙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단지 탐욕일 때, 이 탐욕 안에 그의 이해력, 또는 신앙의 진리가 침수됨을 예방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경이로운 장치를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양심이라는 매체를 수단으로 이해력 측면의 것과 의지력 측면의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섭리 없이 아무도 구원되어질 수 없었으리라.

7절.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 물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나가서…가고 되돌아 오곤 하였다. 이는 거짓들이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만들었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까마귀”와 “나가서…가고 되돌아오곤 하였다”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는 이후 더 말해질 것이다. 이 구절에서 거듭나지는 사람의 두 번째 상태가 묘사되는데, 이는 신앙의 진리가 마치 빛의 첫 여명과도 같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 상태의 본성은 거짓들이 계속적으로 혼란함을 만들고 있음인데, 아침 해뜨기 직전의 어스름한 상태와 유사하다. 따라서 밤의 불명료함이 아직 남은 상태의 아침이다. 이것이 “까마귀”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영적 (평면의) 인간, 특히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의 거짓들은 짙은 구름의 부분과 같다. 그 이유인즉, 그는 말씀에서 밝혀주는 것으로부터를 빼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대부분은 일반적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항(generals)은 구름의 한 부분 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일반적 측면은 그것 안에서 수천의 세부 사항(partculars)들을 납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세부사항들은 수천의 낱개들(singulars)에 속하는 사항들을 납득한다. 그리하여 모든 일반적인 사항들은 세부사항들로부터의 낱개 사항들에 의해 예증되어진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밝혀진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어떻게 묘사하거나 마음에 품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인간에 의해) 인정될 수도, 믿어질 수도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인간 안에 존재하고 인간이 파괴되어지라고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인 감각의 오류들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천적 (평면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지각을 소유하는 이 인간은 위 영적 인간과 아주 다르다; 그 이유가 이 인간 안에는 세부 사항들과 세부 사항으로부터의 낱개 사항들이 은근히 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진정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아내와의 결혼이다; 그리고 이 결혼은 천국의 결혼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천국의 결혼은 이 결혼 안에 있을 수 있으나 한 남자와 여러 아내들과의 결혼 안에 있을 수 없다.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이를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알고, 묵묵히 따른다, 그리고 여러 아내와의 결혼이 죄이다는 것을 양심의 차원에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은 이 일반적 사항을 확증하는 수천의 것들을 지각한다. 그러므로 한 명 이상의 여러 아내와의 결혼은 생각만해도 혐오스러움을 느끼고 만다. 영적 (평면의) 인간은 일반적 사항들(지식들)만을 알고 있기에, 그의 양심 역시 일반적 사항들로부터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말씀의 일반적 사항들은 감각들의 오류들에 숙박하고 있기에, 하나 더 분명해지는 바는, 무수한 거짓들, 이것은 흩어질 수 없다는 것, 말씀의 일반적 사항들 자체가 무수한 거짓들에 인접해 있을 것이고 그것 안으로 은근히 불어 넣어지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거짓들이 여기서 “나가서, 가고 되돌아오는 까마귀”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까마귀”가 거짓들을 의미함은 새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방법에서는 분명해진다. 즉, 새들은 이해력, 추론력,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또한 그 반대적 의미인 추론함들과 거짓들까지 의미한다. 이들 모두는 새들의 종류에 의해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다; 온화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새들에 의해서는 이해력으로부터의 진리들을; 그리고 게걸스럽게 먹고, 보기 싫고, 불결한 새들에 의해서는 거짓들이 묘사되어진다. 또한 진리와 거짓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묘사된다. 조잡하고 짙은 거짓들이 올빼미들과 까마귀들로 묘사되어진다; 올빼미들은 그것들이 밤의 어두움에서 살기 때문이고, 까마귀는 그것의 색깔이 검기 때문에서 이다. 이사야서를 보자:
올빼미와 까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이. 34:11),
위 구절은 유대 교회가 단지 거짓들 안에 거주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거짓들이 올빼미와 까마귀로 표현되었다.

“가고 되돌아 옴”이 그들의 상태였음을 의미하는데, 이 상태는 시험 후 인간의 첫째와 두 번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즉 거짓들이 주위를 나는 것, 가고 되돌아 오고 하는 것이 인간과 더불어 있는 거짓들임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된 이유 때문, 즉 시험 후 첫, 둘째 상태의 인간은 가장 일반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 안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서 이다. 이런 일반적 지식 안으로 물질적, 감각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일어나는 공상들이 흘러드는 바, 이것은 신앙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물들이 땅에서 마를 때까지. 이는 외견상 거짓들의 흩어짐을 의미하는데, 이는 거듭나는 인간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모든 이가 믿는 바는 이렇다: 인간 안에 있는 악들과 거짓들은 거듭나는 동안 완전히 분리되고 폐지되어진다는 것, 즉 인간이 거듭나게 될 때, 남아있는 악과 거짓은 없다는 것, 그는 물로 씻고 깨끗해지듯 정의롭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어쨌든 깡그리 거짓이다; 그 이유가 단 한 개의 악이든 거짓이든 폐지되어지듯 털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인간은 유아로부터 파생된 유전적인 것 모두, 행위와 행동에 의해 얻어진 모두가 남아 있는 바, 그가 거듭났다 해도 그에게는 여전히 악과 거짓밖에 더 없음은 사후 혼들의 삶에서 여실히 보여진다. 이렇게 숙고해보면 더 충분하게 이에 관한 진리를 파악할지 모른다. 즉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인간 안에는 선에 관한 것, 진리에 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모든 악과 거짓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 그리고 영, 그리고 천사조차도 아주 작은 순간조차 라도 그 자신에 머물게 방치해두면, 즉각 지옥으로 돌진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말씀에서조차 천국은 순수하지 않다 라고 말해지고 있다 (욥. 15:15 참조). 이는 천사들에 의해 인정되는 바이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천사는 천사들 사이에 있을 수 없다. 주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자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들을 지옥에서 끌어당기시어 그들이 그쪽으로 치닫는 것에서 보호하신다. 그들이 지옥 안으로 돌진함에서 주님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천사들에 의해 분명하게 지각되고 선한 영들도 조금은 지각한다. 악한 영들, 그들은 인간같이 이를 믿지 않는다. 이에 관한 설명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내 경험으로부터 말해질 것이다.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생명은 악과 거짓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은 폐지시킬 정도로까지 털어내질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분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동안, 시험을 통하여 그의 악들과 거짓들을 굴복시킴으로 그것들은 죽은듯 하게 나타난다. 비록 죽은 것은 아니다해도 복종 상태이므로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또한 동시에 시험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선들과 진리들을 받는 새로운 능력을 주신다. 즉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들과 생각들을 그에게 선물함으로, 이것에 악들과 거짓들이 구부려질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일반 사항들 안에 세부 사항들을, 세부 사항들 안에 낱개 사항들을 삽입하시고, 이것들은 인간 안에 저장되나 인간은 이런 것을 아예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그의 납득력과 지각의 영역 쪽 내면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저장소, 또는 그릇의 역할을 담당하여 주님에 의해 선행이 은근히 심어질 수 있게 하고, 이 선행 안에는 순진이 담겨진다. 인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더불은 이런 유연해짐에 의해 일종의 무지개가 표현될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무지개는 언약의 표시로 만들어졌다 (창. 9:12-17 참조). 이 대목은 차후 살핀다.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내질 때, 그는 거듭나진다고 말하지만, 그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와 동시에 그의 모든 선들과 진리들도 보존된다. 악한 인간과 더불은 그의 모든 악들과 거짓들은 그가 육체의 삶에서 그것들을 가졌던 것과 꼭같게 저세상에서도 되돌아와서 지옥의 공상들과 처벌로 바뀌어진다. 그러나 선한 인간과 더불어 그의 모든 선과 진리는 저세상에서 친구 관계 같이 선행으로부터, 순진으로부터 다시 불려나와 그것들의 즐거움들과 행복과 함께 강대하게 늘어나고 불어난다. 이런 것들이 물들의 마름에서 의미되어 있고, 이것이 거짓들의 외견상 흐트러짐이다.

8절. 그리고 노아는 물이 지면의 얼굴에서 줄어 들었는지 여부를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거듭나지게 되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비둘기”의 의미로부터, 특별히 주님께서 세례 받으셨을 때 그분 위에 온 비둘기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마태복음서를 보자: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 받으셨을 때, 그분은 물로부터 곧바로 올라오셨다,
그리고 보라, 천국들이 그분에게 열려졌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고, 그리고 그분 위에 오고 있다.
(마. 3:16; 요. 1:32; 눅. 3:21-22; 막. 1:10-11)
위 구절에서 “비둘기”는 신앙의 거룩함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례” 자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일어날 새 교회에서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수단으로 받아지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 비슷한 것들이 유대 교회에서 태워바침과 제물로 바치는 어린 비둘기(young pigeon)들과 호도애(turtle dove)들에 의해 포함되고 표현되었다. 이에 관련된 성경 몇 구절로는 레. 1:14-17; 5:7-10; 12;6, 8; 14:21, 22; 15:14, 29, 30; 민. 6:10, 11; 눅. 2:22-24를 보면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구절들이 어떤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경 내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단 하나만의 숙고함으로도 이 구절이 지닌 의미에 긍정하리라 본다. 그렇지않을 경우 이 구절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신성에 관련된 것도 없게 된다. 교회의 외적인 것은 죽은 생명의 업무처리일 뿐이고 교회의 살아 있음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이고, 이는 주님으로부터 있다.
“비둘기”는 일반적 측면에서 신앙의 지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언서에서 확인된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고, 심정이 없다; 그들은 이집트라 불리운다,
그들은 아시리아로 갔다 (호. 7:11).
그리고 다시, 에브라임에 관하여:
그들은 이집트로부터의 새 같이 두려워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시리아의 토지로부터의 비둘기 같이 두려워져 있을 것이다 (호. 11:11).
위에서 “에브라임”은 총명한 자를, “이집트”는 지식을 가진 자를, “아시리아”는 합리적인 자를, “비둘기”는 신앙의 지적인 것들로부터 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역시 주제는 영적 교회의 거듭남이다. 다시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당신의 호도애의 혼을 들짐승에게 넘기시지 않습니다 (시. 74;19);
위에서 “들짐승”은 선행 없음으로부터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호도애의 혼”은 신앙의 생명을 표시한다. 또한 새들에 관해 말해진 것도 참조하라. 즉 그것들은 지적인 것들을 의미하되, 온화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새들은 지적인 진리들과 선들을; 그러나 맹렬하고, 보기 흉하고, 쓸모 없는 새들은 반대적 의미, 또는 거짓들을 의미하는데, 이 구절의 까마귀와 같고 여기서 비둘기에 반대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보기 위해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어지는 구절들로부터, 즉 시험 후 이 사람의 거듭남의 세 상태들을 취급하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세 상태가 세 번 비둘기를 내어보냄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여기서의 말들은 대략적으로 그가 탐구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보려고 자기로부터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즉 물들이 줄었는지; 즉, 선들과 진리들이 받아질 수 없을 정도로 거짓들이 아직도 널려있는지를 보려고 해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 탐구는 필요 없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일반적, 세부적, 모두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의 단어들은 탐구가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첫 상태, 거짓들이 아직도 방해하고 있는 때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물들이 줄었는지 여부를 (보려고)”라는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지면의 얼굴들”이 교회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뜻한다는 것, 그리고 “지면”이 언급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이 교회가 되어가는 첫 상태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지면”이 교회인이다고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 교회인 안에 뿌려질 때, 그는 “지면”이라 불리우나, 뿌려지기 이전의 경우에서는, 그는 “땅”이라 불리운다. 예를 들면, 창세기 첫 장에서 인간이 천적 수준의 품성을 획득하기 이전에서 그를 땅으로 묘사되나; 그가 천적 수준의 품성을 획득한 2장에서는 그를 “지면”과 “들판”으로 묘사한다. 본 장의 경우도 비슷한 바, 단어 “땅”과 “지면”으로부터는 내적 의미에서 의미되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이 대목 뿐만 아니라 말씀 두루에 걸쳐 그러하다. “지면”에 의해 보편적 의미에서는 교회가 의미된다. 그리고 교회, 교회의 사람이 의미되는 바, 교회의 각 개인도 교회이다.

9절. 그리고 비둘기는 그녀의 발 바닥을 위한 쉼을 찾지 못하고, 노아에게 되돌아 왔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그의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주 안으로 가져 왔다.

여기서 시험 후 이 교회인의 거듭남의 첫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이 상태는 거듭나지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상태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선인 것을 행하고 진리인 것을 생각한다고 상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은 큰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상상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이런 상상함에 있는 이상, 그들이 행한 선, 그들이 생각하는 진리는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이기 때문, 즉 불순하고 가장 불결한 근원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불순하고 불결한 원천으로부터 선은 나갈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공적과 정의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기조차 한다 (주님께서 이를 눅. 18:9-14에서 가르치신다). 그 외 여러 방법들에서 인간은 실수 투성이이다. 인간 자신의 그리워함들은 그 자체를 뒤섞는 방식을 추가해서 바깥쪽에서 볼 때는 선 인듯 나타나게 하나, 내향적으로는 더러울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 상태에서 행하는 선은 신앙으로부터의 선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진리 측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가 참된 것을 생각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것으로부터 일 경우, 실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라 할지라도, 신앙의 선은 그 안에 없다; 그래서 모든 진리, 신앙의 진리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것 안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신앙의 선을 지녀야만 한다. 이것이 처음으로 선과 진리가 되는 때이다.

그러나 비둘기는 그녀의 발바닥을 위한 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신앙의 선과 진리가 아직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비둘기”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를 의미함으로부터, “발 바닥을 위한 쉼”의 의미가 뿌리를 가짐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말해진 이유는 뒤잇는 것 안에서 말해지는데, 즉 거짓들이 여전히 넘쳐흐르고 있어서 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이유는 영적 (평면의) 인간의 거듭남이 어떻게 결과되는지를 알지 않으면 가능치 않다.
이 인간과 더불어 신앙의 지식들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그의 기억 안에, 또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로부터 그의 기억 안에 심어지게 된다 (고대 교회는 태고 교회에 밝히 알려진 것으로부터 신앙의 지식들을 가졌다). 따라서 영적 (평면의) 인간은 그의 마음의 지적 측면이 가르쳐지게 된다. 그러나 거짓들이 그 안에서 넘쳐흐르는 한, 신앙의 진리들이 씨뿌려져 보았자, 뿌리를 가질 수 없다. 이 진리들은 지면만에 남아있다. 즉 그의 기억 안에만 남아있다. 지면이 이 씨에 적합한 지면이 되어있지 않아서, 즉 그 안의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게 몰아내어지지 않아서 이다.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진짜 지면은 그의 지적 마음(intellectual mind)에 준비되어진다. 이 지면이 준비되었을 때, 선행의 선이, 이로부터 양심이 주님에 의해 은밀히 심어지고, 이후에 이 인간은 양심으로부터 행동한다. 즉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신앙과 연결하여 선과 진리를 결과 안에 가져다 놓으신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영적 (평면의) 인간의 지적인 것들을 그의 의지로부터의 것들과 구분되어 있게 장치해두셨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결코 하나로 있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하나로 있으면, 그는 영원히 멸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의지로부터의 것들은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들과 하나되어 있었다. 마치 천적 천사들과 같다. 그러나 이 고대 교회의 사람과 더불어 그것들은 하나되지 않았고, 이는 어떤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도 그러하다. 실로 그가 행하는 선행의 선은 마치 그의 의지로부터 인 것처럼 나타나나, 이것은 외관 상일 뿐이고 오류이다. 그가 행하는 선행의 선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고, 그의 의지를 통하여가 아닌 그의 양심을 통하여 있다. 만일 주님께서 잠간이라도 그의 의지로부터 행동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는 선 대신 악을 자기의 증오, 복수, 잔인함으로부터 행동한다.

위와 같은 경우는 영적 (평면의)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진리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양심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또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는 빛의 천사를 덧 쓴 악마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밖에는 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삶에서는 대단히 명백하다. 이런 설명들로부터 어떤 방식에서 거듭남이 결과되는지, 그리고 영적 (평면의) 인간의 거듭남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즉 사실상, 그의 지적 부분은 그의 의지 부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 이 분리 수단은 주님께서 그의 지적 부분에 만들어 놓은 양심을 수단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심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의지로부터인 듯 나타나나, 실지로는 주님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방주로 그에게로 되돌아 왔다. 이는 선과 진리가 마치 신앙으로부터인 것처럼 나타남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해진 것과 뒤잇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내적 의미에서, “방주로 돌아감”은 해방(liberation)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해방은 방주로부터 나가고 되돌아 오지 않음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12절에서, 그는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로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15-16절로부터, 노아는 방주로부터 나가라고 명령받는다; 그리고 18절에서, 그는 나갔다. “방주”는 거듭나기 전 이 교회인의 상태를 의미하고, 이 상태 안에 그는 포로된 신세, 또는 감금된 신세같이 있었고,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또는 홍수에 의해 사방에서 에워싸여 있었다. 이런 상태인지라 비둘기는 방주로 그에게로 되돌아 온 것이고, 이는 비둘기에 의해 뜻해진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다시 되돌아 왔다가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행했다고 상상하는 선은 무엇이든 그에게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자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가 선을 행할 때, 그는 이 선이 세상에서, 또는 천사들 앞에서 과시되기를, 그리고 천국의 한 자리가 그의 것이기를, 기왕이면 천국에서 큰 자이기를 욕심내기 때문이다. 이런 등등은 인간의 자기 자신 안에, 인간 생각의 도처에 스며있다. 단지 바깥쪽 형체에서만 선과 진리인듯 나타날 뿐이다. 신앙으로부터의 선과 진리는 가장 안쪽 측면의 세계로부터 있는 내향의 선과 진리이다; 즉 신앙으로부터의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가장 안쪽 세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것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는 자기의 공적으로부터일 때, 내면들은 더러워지고, 외면들은 깨끗한듯 나타난다; 마치 곱다란 모양새를 풍기는 더러운 음녀와 같을지 모른다. 아마도 흰 수의로 둘둘 말아놓은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미이라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온 땅의 얼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거짓들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홍수의 “물들”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단어들 자체로부터도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방주로 자기 안으로 가져 왔다. 이는 그의 자신의 힘을, 그리고 그는 자신으로부터 선인 것을 행했고, 진리인 것을 생각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손”의 의미가 힘(power)이다는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경우, 자신의 힘으로 그는 이런 것들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그의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붙잡아 그녀를 자신에게로 가져왔다”가 “비둘기”에 의해 뜻해지는 진리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에 의해 권위(authority), 그리고 자기 과신(self-confidence, 자기 만족, self-assurance)이 의미됨은 말씀의 여러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나는 아시리아 왕의 위대하다 우쭐대는 심정의 열매를 방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기를, 내 손의 강함으로 나는 그것을 행했다, 그리고 내 지혜로
(그것을 행했는데), 내가 총명하기 때문이다 (이. 10;12-13),
위 구절에서 “손”은 그가 해낸 것이 그의 자신의 손 이었음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방문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시:
모압은 자기 한 가운데에서 그의 손들을 펼 것인데, 마치 수영자가 헤엄치려
팔을 벌리는 것 같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교만을 그의 손들의
큰 폭포(cataract, 수문, floodgate)와 함께 낮게 놓이게 하실 것이다 (이. 25:11);
위에서 “손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힘을 표시한다. 그는 이 힘이 다른 사람의 힘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것, 고로 교만으로부터 이다.
다시:
그들의 거주민들은 손이 짧아 있었다, 그들은 낙담하였고 수치를 당하였다 (이. 37:27);
“손의 짧음”은 힘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진흙이 옹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너는 무슨 일을 하느냐?
그는 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하겠느냐? (이. 45:9).
여기서 “손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가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를 뜻한다. 에스겔서에서:
왕은 슬퍼할 것이다, 제 1 인 자들은 망연자실로 옷 입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사람들의
손들은 곤경을 당할 것이다 (겔. 7:27),
위에서 “손들”은 힘을 표시한다. 미가서에서:
불법을 고안하는 그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의 침대 위에서 악을 일하는 자는
(화가 있다); 아침이 빛이 있는 때, 그들은 그것을 실습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손이 그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미. 2:1),
위에서 “손”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신뢰한 자신의 힘을 표시한다. 스가랴서에서:
양떼를 내버려두는 무가치한 목자에게 화가 있다; 검이 그의 팔 위에, 그의 오른쪽
눈에 있을 것이다; 그의 팔은 말리워 깨끗해질 것이다(오그라들 것이다, shirvel),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은 지독하게 어두워질 것이다 (슥. 11:17)
“손들”이 힘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악들과 거짓들이 말씀에서 “그의 손들의 일”이라고 계속적으로 불리운다. 악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의 의지력 측면에서 있고, 거짓들은 그의 이해력 측면에서 있다. 이것이 악들과 거짓들의 근원이다는 것은 악과 거짓 밖에 더 아닌 인간의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충분히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손들”이 힘을 의미하기에, “손들”은 말씀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의 속성이 되어 있어, “손들”은 내적 의미에서 전능으로 이해된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당신의 손이 들리우신다 (이. 26:11),
이는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다시:
여호와께서 그분의 손을 뻗치셨다, 모든 것이 살라졌다 (이. 31:3),
위에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다시:
내 손들의 일에 관련하여 너는 나에게 명령하느냐?; 내 손들이 하늘들에 뻗쳤다,
그리고 하늘들의 모든 군대에게 내가 명령들을 주었다 (이. 45:11, 12),
위 구절 역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거듭난 자가 말씀에서 “여호와의 손들의 일”이라 자주 불리운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손이 땅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나의 오른 손이 뼘으로 하늘들을 재었다
(이. 48:13),
위에서 “손”과 “오른 손”은 전능을 표시한다.
다시:
내 손이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짧더냐? 또는 내가 구원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 않더냐? (이. 50:2).
위 또한 신성한 힘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당신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힘을 수단으로, 그리고 당신의 내뻗은 팔을 수단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표시들을 가지고, 경이로운 것들을 가지고,
강한 손을 가지고, 내뻗은 팔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데려왔습니다 (예. 32:17, 21),
위 구절도 신성한 힘을 표시하고 있다; 위 구절에서 “힘”은 17절에서, “손”은 21절에서 명명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강한 손과 내뻗은 팔”을 사용하여 이집트로부터 데려내왔다는 것은 자주 말해진다 (신. 4:34; 5:15; 7:19; 26:8; 시. 136:11-12 등등). 에스겔서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내가 이스라엘을 선택한 그 날에, 그리고 내 손을
야곱의 가문의 씨 쪽으로 들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게 만들었다; 나는 내 손을 그들 쪽으로 들었다.
내가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이다 (겔. 20:5-6, 23).
모세의 책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이집트 위에 집행한 위대한 손을 보았다 (출. 14:31).
“손”에 의해 힘이 의미되는 것은 이상 살핀 구절로부터서도 분명해진다. 실로 “손”은 힘에 대한 함축된 단어이기도 한 바, 표현적 의미 역시 지니게 되었다. 이는 이집트에서 행해진 기적들, 즉 모세가 자기 막대, 또는 손을 뻗치라고 명령받았을 때, 그것들이 그렇게 되었던 대목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출애굽기서에서:
모세가 그의 막대를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의 토지에
우박을 비가 쏟아지게 하셨다 (출. 9:22, 23); 모세는 그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내뻗었다, 거기에 짙은 어둠이 있었다 (출. 10:21, 22); 모세가 바다 위에 그의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바다를 마른 토지로 만드셨다;
그리고 모세가 바다 위에 그의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바다는 되돌아왔다 (출. 14:21, 27).
논리에 맞추어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위 구절의 힘들이 모세의 손이나 막대에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기적은 신성한 힘 때문이라 확신할 것이다. 그렇기는 유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