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5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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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5장

사울이 아말렉을 쳐부수러 보내지다

신약성서가 지니는 두 번째 가는 중요한 축복이라면 그것은 구약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처방에 살아있는 특전의 두 번째 가는 것이라면 기독교 출발 이전에 있던 교회의 진정한 본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처방과 기독교 처방의 차이점, 그리고 각 처방에 속해 있게 된 성경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기독교는 유대인이 행했던 실제의 일을 채택하기도 하고 그 영을 흡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족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그분의 총애를 받은 백성이라고 가정해버리면, 그 민족들이 했던 것은 전부는 아니다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어 신성한 권위 아래 있다고 간주해버리면서 그들의 행동들은 하느님의 허가로 하느님의 뜻을 모방한 듯 여기고 만다. 어떤 이들은 가상하기를, 유대인의 성경은 유대교의 처방이 끝남과 더불어 그것도 중단되어야 하는바, 기독교를 위해서는 유대인이 말하는 성경은 어떤 권위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까지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빛으로 비쳐본다면, 구, 신약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그런데도 두 성경은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유대인의 성경과 기독교의 성경은 바깥쪽 형태에서는 폭넓게 다르나, 안쪽인 영적 의미에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다. 두 처방은 같은 게 없지만 그들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대칭 되는 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연적인 것들은 기독교에서는 영적인 것이 되고 있다. 유대인에게 에집트는 그들의 세계였고, 사막을 횡단한 뒤의 가나안은 그들의 천국이었다. 번성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요, 장수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멸에 해당되었다. 그들의 적이란 자기들의 일시적일 뿐인 세상적 성취를 가로막고 서는 이들이요, 그들의 전쟁이나 무기는 육욕인 것, 세상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그들 역사를 영적으로 통역해놓는다면, 그들 역사는 기독인의 체험을 언어로 묘사해놓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역사 속에서 신성하게 훈육되는 어떤 것, 영적인 가르침을 보게 되리라 확신한다. 가나안의 일곱 나라를 멸절시키는 전쟁은 깊은 도덕적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 나라가 통째로 부패될 때 지상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그 민족이 보존되고 복지를 되찾으려면 그 도덕적 결함의 제거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교전한 나라들이 우리의 새로운 본성을 구성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상반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유대인이 치른 전쟁에 어떤 영적인 교훈이 우리를 위해 담겨있게 된다. 유대인의 적대 국가들은 감각, 특별한 어떤 악이나 거짓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암몬족이나 불레셋 족이 표현하는 것들은 이미 앞 장에서 살핀바 있다. 이제 또 다른 악의 성격, 아주 유한한 것 중의 하나를 이제 살피고자 한다.
아말렉은 가나안 땅 경계선 주변에 거주하는 흉폭한 민족들이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그들로부터 처음 공격받았다. 이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매우 목말라 허덕거리고 지쳐있는 기회를 틈타 공격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심히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위반한 악에 상응하는 속성을 지닌 국가들에 의해 처벌되어졌다는 것이다. 갈증으로 고통 받을 때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신성을 부정해버리는 정도까지 불평했다. 불평해대는 이스라엘과 그에 앙갚음하듯 공격하는 아말렉 사이에는 표현적 유사함이 있다. 선견자는 이스라엘의 세 왕을 설명하는 가운데 특별히 아말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종류의 인격이 아말렉이 표현하는 내면의 악에 근거를 두는지 살펴보는 것이 보다 쉬울 것이라고 본다. 내면의 악(interior evil)은 인간 안에 내향으로 감추어 놓인 것, 그 사람의 의지 안에 축적되어 있는 악, 그로부터 생각 안에도 있게 되는 악, 언어나 행동, 용모 같은 바깥쪽에서 전혀 추적되지 않는 악이다. 이와 같은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특히 정직이나 정의, 이웃 같은 사랑의 가상(껍질)속에 그 악을 감추어 숨겨놓는다. 그러면서 계속 그는 악행만을 생각하고 가능하면 타인을 수단으로 그 악을 행하여 자신으로부터 악을 행하지 않았던 냥 한다. 그들은 악 자체를 변장시켜놓아 악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있다. 이들 삶의 큰 기쁨은 어떤 음모를 꾸미는데 있고 계략도 은밀하게 감행한다. 이것을 우리는 내면의 악이라 부른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마귀(genii)라 불리고, 저 세상에서 이것들은 영(spirit)이라 불리는 외면의 악과는 분리되어있다. 이 악귀(evil genii)는 사람 뒤쪽 즉 등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 곳에는 다양한 동굴이 있다. 그러나 악령(evil spirit)은 인간 앞쪽 또는 옆쪽에 그들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 큰 사람(grand man)측면에서 이 마귀들은 소뇌(cerebellum)의 영역에 소속되고 있고 또한 무의식 부분에 신경과 섬유질을 내보내는 척추 부분에도 있다. 더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은 악령들에게서 비롯되는 거짓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은 진리들을 공격하지 않고 신앙의 선들을 공격한다. 그이유가 그들은 타락한 애착들을 수단으로 행동하여 선한 생각까지 뒤집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악들은 거의 인지할 수 없는 방법 안에 숨어있다. 이런 특성을 지녔으므로 그들의 지옥은 악령과 완전히 분리되어 거의 어떤 고통도 있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있는 이유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 악이 그들 지옥에서 흘러나온다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지독하게 썩어지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악들이 영적 교회인의 양심에 비밀리 작용하기 때문이고, 타락한 애착들을 흥분시킴으로 양심을 뒤엎기 때문이다. 이 지옥적인 악귀는 인간을 공개적으로는 결코 공격 않는다. 더구나 인간이 그것에 저항할 경우도 절대 공격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굴복하던가 양보 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른 것 같을 때 모습을 드러내어 그 인간을 완전히 무너지게 한다. 아말렉이 공격하는 모습이 이런 악귀의 공격 수법을 표현하고 있다. 민수기 14장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등을 돌리고 가나안 국가들에게 겁을 먹었을 때, ‘그 산에서 살던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달려 내려와 호르마까지 쫓아오며 그들을 무찔렀다.’ 위 구절로부터서도 아말렉이 표현하는 이들의 성격은 명백해지리라고 보고, 아말렉에 내린 주님의 심판에서 그들과 항구적으로 싸워야한다고 왜 그러셨는지, 그들은 천국 아래서부터, 일찌감치 기억 속에서까지 삭제되어야 한다고 하셨는지를 납득하리라 본다.” 이상의 모습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하였을 때 섭리하시는 하느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시험에 빠졌을 때 이들을 공격한 아말렉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시험은 이 세상과 인간 만사에 하느님의 통치가 있음을 부정할 때만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이 악은 불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우리들 속에 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천상천하의 통치자 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부정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신성한 통치인 하느님의 섭리에 진정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느끼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방식이 기독인 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사이에 이 악이 거점을 확보하는 형체이다. 이 형체는 하느님을 드러내놓고 부정하는 것보다 더 내향적이고 더 사기성이 강한 형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말렉이 표현한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원리인 것이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빠진 시험의 본성 역시 이러한데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 아말렉의 공격은 여호수아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런 다음 신성한 판단은 이렇게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무도 아말렉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늘 아래에서 전멸시키겠다…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워 주시리라”(출애굽기 17:14-16). 사울은 지금 이 구절을 실행하도록 위촉되고 있다. 사무엘은 먼저 그에게 상기시키기를 야훼께서 기름 부은 자라는 것, 그러므로 주님의 소리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이렇게 이어진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이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즉, 에집트에서 올라오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실 사울에게는 아말렉을 위와 같이 해치워야할 특별한 건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의 사건은 하느님의 기억 속에서 사백여 년 간 남아있던 죄악상들이다. 하느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분은 과거와 미래 모두가 현재 일 뿐이므로 뭔가를 마음에 되불러 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의 상태와 관련시켜 신성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이 기억하신다고 말하실 때의 경우란, 그분의 진리를 우리 기억에서 새삼 떠오르게 하실 때 사용된다. 지상에 계셨을 때 주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이 성령은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 기억에 모두 가져다주게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은 과거의 말들을 재 수집하게 해주시는 것뿐 아니라 이전의 상태를 재생산 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영적으로 기억함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원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삶에 받아들여졌던 것만이 내적 기억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 으로 기억함이란 내향에 있는 것을 바깥쪽 삶에도 산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전에 획득된 원리의 재생산밖에 더 다르게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행동과 노력이 주님께서 과거 사막에서 아말렉이 했던 짓을 기억하신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말렉은 거의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왔고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제 명령은 그들을 참혹하게 파괴하라는 것이다. 이 파괴가 지금 시도되어지는 이유는 공격할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선함에서 파생된 진리를 표현하는바, 이는 악에서 파생된 거짓에 정반대 된다. 완벽하게 극을 이루는 원리, 즉 극과 극이 대치하지 아니하면 상대쪽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다. 악과 거짓이 선함과 진리에 정반대 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함으로 전투의 원인이 되는데 이는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시험에 의해 흥분 될 때 발생된다. 그리하여 전투는 상대 쪽을 처절하게 파괴하도록 거행된다. 사울이 이러한 하느님의 위탁된 업무를 충실히 집행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은 대과업에 합당할만한 자격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의지를 표현한 하느님의 명령은 부분적이 되었긴 해도 일부 성취되었다. 이 명령을 미숙하게 처리한 탓에 사울은 자기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성취해야 했던 것은 다윗의 통치와 권력에 의해 더 쉽게 더 확실하게 아말렉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게 된다. 이제 사울의 행동사항들에 시선을 모아 보자.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델라임에서 점호해보니 보병이 이십만 이었고 유다 측에서도 일만이 가담했다. 진리와 선함에 속한 원리들을 다 모아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의거 정렬해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요, 델라임에서 수를 세는 모습이다. 지역 이름 델라임은 성경에서 두 번 언급될 뿐인데, 오늘 본문과 이사야 40장 11절에서이다. 이 구절에 연결되어 그 단어가 지닌 의미는 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대해 좋은 착상을 주고 있다. 단어 자체는 아주 어린 양, 새끼 양(young lamb)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주님의 강림에 관한 아름다운 예언과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대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는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lamb)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9-11) 여호와께서 권능을 가지고 오시고 그분의 인성인 팔을 휘둘러 통치하신다. 그분은 원수들 가운데서도 왕권을 행사하실 정도로 강력한 사람으로 오시지만 (시편110:2) 한편 그분은 목자처럼 오시어 새끼 양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어주시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영적 싸움에 종사하고 사랑의 영에 감화 받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델라임에 자기 힘을 모아 계량해야 한다. 델라임은 유다의 땅인바, 그 지역은 지혜의 순진을 상징하고 있다.
사울이 자기 군인들과 함께 아말렉 성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먼저 이들과 섞여 사는 켄족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스라엘의 옛 적을 칠 때 불상사를 입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켄족이 다치지 않도록 의도한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에게 베푼 친절 때문이었다. 켄족은 미디안 족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 이기도 했다(판관기 1:16).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러 왔었다(출애굽기 18:1). 이스라엘이 사막에 진입한 후 아말렉은 그들을 공격한 첫 민족이 된 반면, 켄족은 이스라엘 편을 든 첫 민족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 즉각 뒤따라 켄족의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사울의 친절한 연락으로 켄족은 아말렉의 파멸에서 유보되어졌다. 위와 비슷하게 두 민족이 붙어있는 모습이 판관 기드온 시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모든 동방의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거기 평지를 덮고 있었다”(7:12). 이렇게 많은 군대들이 개처럼 물을 핥아먹은(튕겨 먹은, lapped) 삼 백명의 군대에 의해 무찔러졌다는 것은, 악은 병치(apposition)상황에서 뿐 아니라 그 반대(opposition)상황에서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말렉이란 이름 자체는 개처럼 핥다(lick up)라는 뜻이다. 켄족을 미디안 족과 비슷하게 간주해본다면, 선한 자연적 기질을 지녔으나 그 자체로서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표현한다. 그러면 왜 이들이 날카롭고 뒤집혀진 이해성을 가진 아말렉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을까? 그 이유가 단순히 선한 것은 교묘한 추론에 쉽게 빨려들고, 계획적인 설득에 쉽게 녹아들고 마는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멍청한) 선함은 선보다는 악에 더 쉽사리 끌려갈 수 있는 성향이다. 그 이유는 악은 비둘기의 순진(해가 없음)은 없고 오로지 뱀의 신중함 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그 사용함에 있어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어 “설마 인간이 그럴 리가,” 라고 말하는 단순한 선함의 기대를 쉽게 유혹해내지만, 선은 재촉하여 뭔가를 하도록 독촉하려 들기보다는 뭔가를 확신시키려는 쪽에서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위 두 민족이 거듭나고 있는 마음 안에서 표현하는 원리까지 생각해보자. 마음 속에 위 두 원리들이 서로 모여있는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도 주님께서는 이 두 원리가 뒤섞이지 않게 설비해 놓으시어 장차 싸움이 있을 경우 선이 악과 더불어 멸해지는 일이 없게 배려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둘을 식별할 수 있게 훈육된다. 켄족이 떨어져 나오자 사울은 아말렉을 공략해서 “하윌라에서 시작하여 에집트 동쪽에 있는 수르까지 따라가며 쳐죽였다.” 수르 광야는 과거 하갈이 자기 여주인의 얼굴을 피해 달아날 때 고생한 장소이다. 지금 아말렉이 거주하는 이 구역은 창세기 25장 18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절을 읽어보면 이 구역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이 소유했었던 곳 임을 알게 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하윌라에서 수르에 이르는 지방에 퍼져 살았다. 수르는 에집트 동쪽 아시리아로 가는 도중에 있다.” 이 지역은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이는 표현적 특성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과학, 지식, 추론은 등급별 시리즈를 형성한다. 과학은 기억 속에, 지식은 생활 속에, 추론은 이해성 속에 각기 존재한다. 과학과 추론 사이에 놓인 것이 지식이다. 달리 말하면, 기억과 이해성 사이에 놓인 것이 생각이다. 하윌라와 수르는 에집트와 아시리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차이점은 에집트와 아시리아는 넓은 측면인 반면 하윌라와 수르는 좁은 측면 즉, 세부 측면에 한정된다. 아말렉을 하윌라에서 수르까지 쫒아가 쳐부순다는 것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위에 진정한 진리의 판결이 집행될 때, 과학이 기초를 둔 기억에서부터 추론이 자리를 두고 있는 이해성에까지 이르러 판결은 집행된다는 말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아말렉이 쳐 부셔지긴 했지만 완전한 하느님의 목적은 덜 성취된 채 남아있다. “사울이 거느리는 이스라엘 군은 아각 뿐 아니라 양과 소 중에서도 좋은 놈, 기름진 짐승과 새끼 양들과 그밖에 모든 탐스러운 것들을 없애버리기가 아까워 그대로 살려두고 쓸모 없고 하찮은 것들만 없애버렸다.” 싹 쓸어 없애야 하는데 뭔가를 남겨둘 때, 사울이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게 될 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 그럼에도 그 죄는 그를 심각하게 벌할 만큼 확대되어 부각되고 있지 않은 듯 보여지고 있다. 이럴 경우 죄는 행동의 본성에만 반드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명령의 위반에 있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죄는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똑같게 된다. 그러나 이 원리는 건전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말씀의 글자에 국한된 것만을 받쳐 줄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에게는 불순종이라는 것 외에 악은 없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예들은 글자가 표현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신성한 정의는 너무나 순수해서 해를 주지도 않는 본성 속에 있지도 않은 것을 죄 있는 행동으로 만들지 못한다. 만일 사울의 죄가 영원한 결과를 수반하는 영적 행동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면 그의 죄는 그렇게 심각하게 견책되고 처벌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각을 살려둔 채 잡아 놓고, 기름진 가축 떼를 살려둔 것, 이런 것이 그 소유자의 도덕적 부패나 죄와 관계되지 않은 이상 탐욕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그 자체 악에 속한 성격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아예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울에게 주님이 내리신 행동 강령은 미래의 모든 세대에 있게 될 교회 소속인들에 대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또 그들로 하여금 영적 진리를 탐사할 수 있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있어진 명령이다. 몰살시키라고 내린 명령에 포함된 진리, 가르치시고자 의도된 교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사울의 불순종에서 따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야훼의 말씀이 사울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주님이 후회하신다는 것, 그분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인간이 후회한다면 그것은 견해가 바뀐다던가 목적이 변하는 것, 그것이 이해성에 속하든 의지에 속하든 어느 쪽이 변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이해나 의지가 바뀌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후회(회개)로 성경에 두루 있다. 이 변화들은 불완전한 존재, 죄 있는 존재에게만 있어지는 후회일 뿐 하느님에게는 하등 해당사항이 없는 항목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이 사항을 명백해지도록 주님께서는 사울로부터 왕국을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을 주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비추시는 이는 빈말을 하시거나 변심하시는 분이 아니오.. 그는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니시오..” 시작에서 끝을 이미 보시는 그분은 결코 실수를 만드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회할 건수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후회할 수도 없는 분이라도 해도 성경에서 후회의 탓을 그분께 돌리는 듯 기록되어 있는 구절에도 우리를 가르치는 의미는 가득 차 있다. 그분을 위협해대는 악에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해 질 경우, 이 후회는 자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이 행하신 것들, 예를 들면 인간을 만드신 것,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들을 후회하신다고 말해질 경우, 거기에는 자비 외에도 어떤 의미를 더 포함하고 있다. 가장 깊은 측면, 천적 의미에서 말씀 전체는 육을 입으신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을 취급하고 있다. 이 사항은 앞에서 일부 살핀바 있듯이, 사울의 역사는 그분이 입으신 인성이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만드시기 전에 있던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으로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이 인성을 입으셨으되 타락한 본성에 든 인간 공통적인 약한 부분까지 입으셨는데 대해 후회할 수 없으셨다. 그럼에도 인간 후회와 아주 비슷한 어떤 것이 일어나는 항목들이 그분의 어린 시절 상태나 경험 안에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주님은 여느 사람들처럼 죄의 상태로부터 의로운 상태로 건너가지 않았고 따라서 회개(후회)가 있으신 적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회개와 거의 닮은 인간 상태나 그 상태의 변화를 통과하셨다. 참으로 주님은 그분이 영화하시는 과정에서 통상적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의 모든 단계들을 거치셨다. 인간은 자연적, 영적 양면에서 상태의 변화를 거친다. 그분도 유아, 어린 시절, 젊은이 시절, 성인시절 이라는 상태들을 통과하셨다. 더욱이 그분은 삶의 자연적 상태로부터 영적 상태로, 영적 상태로부터 천적 상태에 이르는 더 큰 과정들을 통과하셨다. 게다가 주님은 하느님과 인간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날로 지혜와 총명을 더 하셨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똑같이 자라셨다. 그래서 신성한 자연적 존재로부터 신성한 영적 존재와 천적 존재가 되셨다. 통상적으로 인간은 자연적, 영적 삶의 낮은 상태에서 더 높은 상태로 건너가면서 자기가 털고 일어선 그 자리(수준)에서 자기의 불완전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시험이나 시련 속에 있는 동안 그가 체험하는 것은 고작 그 시련이나 시험의 피상적 본성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상태에서 있게 되는 시험은 악의 더 낮은 깊이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더 낮은 깊음은 초기 상태에 있는 당사자에게는 느껴지거나 눈치 채이지 않고 더욱이 흥분시킨 악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악은 일반적인 것일 뿐 세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 일반적 사항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죽였지만 왕 아각은 살려져 있었고 좋게 보이는 것도 그대로 보존했었다. 이런 것들과 상응되는 상태를 주님은 통과하시면서 그것에 상응하는 경험을 가지셨다. 이런 사항들이 그분의 모형을 그려내는 이들의 행동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사울은 이런 모형들 중 더 부각된 모형이라 할 수 있다. 사울과 그의 군인들의 죄들은 그분의 시험을 표현하고 있다.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은 악의 권세나 악과의 싸움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초기 삶에 있던 시험이 그분을 공격하는 악의 가장 깊음에까지 접근되셨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닮음 꼴을 형성한다는 내용을 취급한 선견자의 저서에서 위 사항을 잘 알게 해 준다. “모든 사람은 지식으로 자기가 획득한 선과 진리에 의해 우선적으로 영적 전투에서 버텨간다. 그리고 그 지식으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들을 판단해 간다. 모든 사람들, 그가 영적 전투에 처음 임하게 될 때 자기를 버티게 해준 선과 진리들이 자기 것, 즉 그것들이 제 잘난데서 비롯되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저항해낸 힘이 자기에게 근원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거듭나기 전, 선과 진리는 자신으로부터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선함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임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악이나 거짓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악령이 악과 거짓을 흥분시키고 주입한다는 것, 더구나 악령을 수단으로 자신이 지옥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 지옥은 전력을 다해 자신을 누른다는 것, 마치 파도에 부딪치는 모든 것에 파도가 밀어붙이는 힘과도 같은 악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는 지독하게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어찌됐든 거듭나기 이전일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싸우고 있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상상하도록 허용되지만 그 후에 차츰 그는 계발되어진다. 선함과 진리가 자신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저항하는 힘 역시 자신의 힘이라고 여기면서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상태에 있을 경우, 비록 그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 보인다고 해도 진정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이기심이 그들 안에 있고 그는 승리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고, 주님만이 싸워 정복해 주실 수 있는 악과 거짓에 대한 싸움을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로 떠벌린다. 이런 경우에 있는 진리는 시험에 의해 거듭나는 이들에게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주님의 아주 어린 시절 그분이 가장 비통한 악과 거짓의 싸움에 소개되었을 때 그분도 위와 같은 상상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더 다른 도리가 없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은 계속적인 전투에 소개되고 그분의 신성은 계속 승리해 가서 서로 하나되는 것이 신성한 질서이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그분 역시 외적 인간에 소속되어 있는 악이나 거짓과 싸워 가셨던 것이다. 이런 선과 진리들이 모두 신성은 아닌 까닭에 가상적인 선과 진리들이라고 불린다. 그분의 신성 측면이 정복 할 수 있도록 인성 측면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분의 첫 전투에서 가지고 싸우셨던 선과 진리들은 어머니 쪽에서 받은 유전적인 것의 얼마로 얼룩져 있는 한 그것들은 신성은 아니다. 그러나 점차로 악과 거짓이 정복되어감과 동시에 그것들은 완전해져 신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상의 선과 진리들을 신성 같이 착각되는 선과 진리들일 뿐 신성한 선과 진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성으로부터 존재할 뿐 그 자체 스스로 신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들은 천사나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서 유한한 자질 안에 받아들여짐으로 유한한 그대로 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초기 싸움에서 어둠에 맞서졌을 때 가졌던 선과 진리들이고 이를 신성한 진리로 만드시는 준비물로 삼으셨는 바,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성을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 만드셨다. 이 유한한 것, 즉 눈에 보이게는 선과 진리 같은 것은 어머니 쪽에서 얼마 정도가 유전되어 얼룩져 있었는바, 이것이 사울로 표현되어 있고 우리는 그의 바둑판 같은 역사를 통해 믿기 어려울 정도인 현실 자체를 봄으로서 주님의 내적 삶과 경험 중 초기 부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게된다. 주님의 초기 시절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은 그분의 인간적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불완전을 벗고 그분의 신성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무한한 완전을 입으셨을 때와 비교한다면 보다 덜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왜 사울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백성은 죽였는데 왕은 살려주었는지, 왜 하찮은 것은 다 없애면서 좋은 것은 아껴두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늠하리라 본다. 악과 거짓의 넓은 측면의 원리들, 백성들은 파괴되었지만, 왕 같은 통치하는 원리는 아직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시험과 승리가 결국 악의 뿌리 까지 뽑는 마지막 까지 달성하는 것은 이상형일 뿐 아직은 그 뿌리에 접근도 못하고 있다. 내적 인간에 있는 것, 본문의 하찮은 것들, 눈에 보이는 악과 거짓은 무엇이든지 다 없애버렸지만 선하고 진정한 듯 눈에 보이는 것은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제 더 살펴볼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데 대해 후회하신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사울이 표현한 그분에 관련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다. 후회는 어느 경우라 해도 신성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치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간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도 주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하모니가 있기를 원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선과 진리는 비록 주님 안에 있다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었을 뿐 아직 하느님-인간(God-man)은 아니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데 후회하시는 신성한 존재란, 연약한 인간성을 입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뻔 했지 않았을까 라던가, 약한 인간성 속의 불완전함이 악의 권세에 맞서 그분의 초기 싸움부터 명백히 드러나야만 하신데 대한 후회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속의 불완전함은 신성한 완전함과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 달리 말해 본다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주님의 인성 앞에서 일시적으로 통치하는 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 쪽의 인성에 있는 이기심은 통상적 인간 존재 같이 어린 예수 안에서, 즉 그분 속의 유전적 악들이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그 자체는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정신 발달의 과정 중에 흥분시켜주는 매체에 의해 깨어날 때까지 아담의 모든 아이들의 가슴 안에서 휴면 상태에 있다. 그런고로 해서 주님이 사울을 선택하시고 후회하시는 데에는 불일치 같은 게 우리에게 비쳐질 수밖에 없다. 사울이 왕이 되는 초기에는 그에게 없었는 듯 보인 악한 자질들이 드러나기 전 까지 에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신데 대해 주님이 후회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를 풀어 말하면, 유전적 악이 주님의 어머니 쪽 인성 안에서 그 자체로 전개될 때까지 신성과 인간 사이의 대비되는 사항들은 신성한 존재가 후회하심으로 표현되는 실제가 지각되는 것, 그 자체는 드러내어지지 않았었다.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내렸다. ‘나는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애가 타서 밤새도록 야훼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초기 상태와 경험에 관해 선견자의 저서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그분을 상상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분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전투를 수행하셨고, 이 수행의 결과로 나오는 능력으로 그분의 도구인 선과 진리들은 그분 자신의 것이 되어 외적 인간 속에 있었다. 이제 본문은 내적 인간 쪽으로 향하면서 외적 인간의 조건을 감지하게 해주고 있다. 그 결과는 내적 비통함, 그런고로 신성 자체와 더욱 가까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더욱 강한 바람이 오고 있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읽는바,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밤새 기도하셨다. 사람의 아들을 수단으로 경험되는 정신적 고난의 어두운 상태가 본문에서 사무엘이 애가 타서 밤새 울부짖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와 상응되는 주님의 말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이 내적 담화는 더 간절한 기도로 더 강화되어 외적인 것에도 가져다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상태라는 새벽에 내적 인간에 전달된 진리는 바깥쪽에도 역시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사울 왕은 오는 길에 가르멜에다 자기의 승전비를 세워놓고 그 곳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읍니다.’” 본문의 가르멜은 그 이름 자체에서 파생되는 열매 풍성함이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이름은 아니다, 산으로서의 가르멜 이라기 보다는 성읍으로서의 가르멜로 참작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뜻은 이해성에 있는 원리는 의지에 있는 원리와 같은 것을 가진다는 것이 되고 자연히 내적인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뜻한다. 사울이 승전비를 가르멜에다 세운 것은 아말렉과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사무엘하 18장 18절에도 있다.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이어 갈 아들이 없다고 해서 왕의 계곡에 돌기둥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는 그 돌기둥을 자기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 부른다.” 사울의 상태나 그가 표현하는 것은 승리로 자기를 추켜세우는 어떤 것에 관한 생각을 지지하는 모습이다. 사울은 가르멜을 떠나 길갈로 내려갔다. 사무엘은 아말렉의 수모를 “벗기기”위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위의 성경 줄거리를 가장 깊은 의미, 즉 인성 가운데 계신 주님에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자신에 관련되는 내적 의미, 그분의 신성화 하심의 형상인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좀 더 실감 있게 알게 되고, 그분이 연약한 인간 본성, 타락된 인간 본성을 입으신 목적은 인간이 고통 받고 겪게 되는 것을 거쳐가심으로 그분이 이룩하시는 신성으로 만들어 가심에 우리도 참가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더 확실히 알게 된다. 말씀 안에 담긴 가장 깊은 의미를 관조 하게 되면 더 심오한 가르침과 영향을 받을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육을 입으신 상태에서 주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자비로운 일들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원형이요. 근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지에 다가가거나 그 안에 머물기에는 너무 멀고 원대하다. 인간 거듭남의 거울 안에 비쳐지는 모습 같이 라도 주님의 신성화 하심을 관조해간다면 그 정도 만에서도 우리에겐 유익하고 충분해지리라고 본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 만나자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야훼께 복을 받으십시요. 저는 야훼께서 시킨신대로 다 하였읍니다.’ 하며 인사를 하였다. 사무엘이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또 소 우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사울이 ‘군인들이 아말렉에서 빼앗아 온 것입니다. 양떼, 소떼 중에서도 좋은 놈을 살려두었다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잡아 바치려고 끌어 온 것입니다. 그밖의 것은 모조리 없애 버렸읍니다.” 사울의 즉각적인 응답에서 보여지듯 자기가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치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주님의 명령을 잘 이해했다는 것이 저절로 보증되도록 사무엘을 만나자 야훼께 복을 받으시라는 말과 자기 행동의 결과를 결합시키고 있다. 사무엘이 묻는 말, 양이나 소가 우는 소리는 어찌된 것이오 라는 질문에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도록 교묘하게 대답하고 있는바, 빼앗아 온 것은 군인들의 짓이고 모조리 없애라는 명령의 말에는 자기를 포함시키고 있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댓가를 얻어내느라 열심이듯, 사울은 책임을 피하려고 분주하고 있다. 그가 선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만큼 악에 대해서는 책임지기를 거절하고 있다. 이런 모습에도 영적 진리가 있어 우리를 가르친다. 거듭나는 삶의 초기 수준에서 자연적 마음은 공적과 책임을 알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상적으로 알 뿐 실제적으로는 모른다는 말이다. 종교적 가르침 중 가장 쉽고 가장 먼저 있게 되는 것 중 하나는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신 바 자신의 선함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자유로운 가운데 악을 행할 경우 그 죄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미덕은 자랑하려 들고 악덕에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 등등이다. 이 주제에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용적인 교회의 교리가 있다. 만일 모든 선을 천국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온다고 우리가 믿고 있다면, 우리는 선을 자기 것 삼지도 않아야 하고 악에 대해 죄의식도 없어야 한다. 선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 속의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악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함으로 해서 우리는 악을 정당화시키려들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그 속에서 발생되는 죄과는 거절된다. 이런 상태 속에 있는 자연적 마음을 사울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마음을 통해 주님의 빛이 들어 올 때 이런 상태는 드러나져 이런 상태가 어떠한 것들인지 자연적 마음 자체가 밝혀진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변명을 늘어놓자, 사무엘은 지난 밤 야훼께서 내리신 말씀을 전한다. “그대는 본래 자신을 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야훼께서 그대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로 삼으셨소…” 거듭나는 삶의 초기 과정에 있는 마음은 의지가 이해성의 방향 아래 조절되게 하려드는 것이다. 이 의미가 위의 구절 “사울은 본래 하찮은 사람” 이라는 것에 담겨있다. 그런 다음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임을 그에게 상기시켜주고 그가 얼마나 불완전하게 임무를 마쳤는지 꼬집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명령에 잘 순종해서 주님이 시킨 대로 다 수행했다고 뻐기면서 아말렉왕 아각만 사로잡고 나머지는 다 파괴했다고 우긴다. 단지 군인들이 길갈에서 주님께 바치기 위해 양떼 소떼 중 좋은 놈만 남겼다고 핑계 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우리에게 기억되는 다음의 말을 해주고 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낫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의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의무는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힘을 더 얻으려는데 있다. 하느님은 자비를 요구하시지 제물이 아니다. 그리고 번제를 바치는 것보다 더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이다. 정규 축제에 관한 율법은 정신적인 율법을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구약 시대의 것보다 신약 시대에 주어진 예배는 정신적 법에 관한 의미를 수행하는데 더 도움을 주고 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유일한 일임은 틀림없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그분께 경청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보다 더 나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만일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의 예배가 순수하고 거룩한 삶을 보조해 주는 두 번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에 기초한 예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때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을 예배드림으로 때움질 할 수 있을까? 뉘우침이 심정 속에 존재하면서 기도가 입술에 담겨져야 순서가 맞는다. 그 이유는 심정 속에 든 것이 입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바쳐지는 제물 자체도 순수해야 한다. 율법 아래의 제물들은 흠 없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단 위에 바쳐지는 동물들은 인간 마음 속의 선한 애착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물들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으로 얼룩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것이다. 아말렉의 양과 소들은 순수하고 순진한 애착들을 표현할 수 없는 동물들이다. 그 동물 자체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얼핏 보기에는 흠이 없는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의 소유주들은 이미 도덕적인 부패 속에 있어 왔다. 따라서 소유주와 그들의 동물 모두는 완전히 파괴했었어야만 했다. 어떻게 그것들이 주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단 말인가? 탐욕으로 물든 옛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한다. 새 애정의 새 사랑만이 주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영적 삶의 최말단에 있어야 할 조건이요, 영적 싸움에 있어야 할 두 개의 큰 목표물이다. 이것들은 주님 자신의 지상 삶에서의 목표물이기도 했다. 그분은 옛 사람, 마리아로부터 상속받은 연약한 인간성을 십자가에 처해지게 하시어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 새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셨던 것이다. 이와같은 완전한 신성화 하심, 이와 상응되는 인간의 완전한 거듭남이 위와 같은 사울의 행동에서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그의 통치로도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거절한 사울을 향해 주님께서도 그가 왕으로 있는 것을 거절하셨다고 사무엘은 발표하고 있다. 이 발표는 처음이 아니다. 예언자가 그의 왕국을 몰수하리라는 발표는 두 번 째에 해당된다. 처음의 경우, 사울이 불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주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칠 일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여 성직자가 해야 할 제물 바치는 거룩한 임무를 가로챈 죄를 범했을 때였고, 지금의 경우, 그는 주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올리라고 건의함으로서 주님을 혐오하시게 하고 있다.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사무엘의 발표가 있자, 그는 갑자기 자신을 낮추어 빌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군인들이 무서워서 야훼의 명령과 선생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습니다.” 이 사울의 말은 왕의 뜻이 군인들에 의해 위압받은 두 번째에 해당된다. 왕의 성급한 명령 때문에 야기된 명령 불복종의 죄에서 요나단을 살리고자 하여 있어진 군인들의 탄원은 옳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명령을받고도 쓸만한 것을 유보해둔 본문의 경우는 잘못되었다. 이는 더 낮은 원리가 더 높은 것을 통치할 경우 우리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또는 열정이 지성을 통치할 경우와 바람이 의무 측면을 제압할 경우를 말해주고 있다. 본문의 경우에서 아각 왕과 가축떼를 살려두는 결과가 사울에게서 발견된다.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 또는 첫째가는 것과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개의 양 극에 있는 원리가 파괴해버려야 할 것을 남겨둘 때 검증하는 작업이 제아무리 정밀히 있어졌다 해도 거기에는 지독하게 불완전한 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면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같이 갈 수 없소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저버렸으니, 야훼께서도 그대를 이스라엘 왕위에서 밀어내실 것이오.”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 가려고 하자, 사울이 도포를 붙잡는 바람에 도포자락이 찢어졌다. 사무엘이 그에게 일렀다. “야훼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그대에게서 찢어내시어 동족 가운데에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주셨소.” 사울이 사무엘의 도포자락을 찢듯이 자기의 심정을 찢었더라면 그의 죄는 용서되고 왕국 역시 그에게 계속 유보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뒤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회개는 깊지 않았고 자기 죄를 느끼는 정도는 그가 지은 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 받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내 체면을 한번만 보아 주십시오. 내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선생께서 저와 함께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 갔다. 사울은 야훼께 예배를 드렸다.” 이상의 구절에서 우리는 사울이 표현하는 진리의 외적 특성, 그것이 영화하시는 주님의 과정에 관련해서 이든지, 거듭나는 인간의 과정에서 이든지 양 쪽 모두에 있게 되는 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측면에서 후회라 불리는 것에 관한 예를 사무엘을 통해 보게 된다. 그는 처음에 사울과 함께 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간절히 애원하는 바람에 응낙하고 있다. 이 모습은 자비에 관한 표시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 간구에 대한 결과였는바, 이는 인간 마음에 있는 상태의 변화는 신성한 마음에 있는 의도가 바뀐 듯 인간의 눈에 비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진리는 이러하다.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그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그 인간 안에서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에서 알 수 있듯 사무엘이 사울과 같이 간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각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 미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 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아각은 아말렉으로 모형화 된 내면에 있는 것,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아각을 난도질 했다는 것은 악 또는 거짓 원리는 그것에 정반대 되는 선 또는 진리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라면 그 왕은 아말렉의 왕과 정반대되는 것, 내면이 차있는 외면을 표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각을 살려두고 있었다.
이상의 줄거리는 오늘날 또 다른 양상으로 늘 나타나고 있다. 옛 것을 다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독교의 제자들, 그런데도 한쪽 부분은 아껴두고 싶어하는 기독인들, 그래서 하느님과 세상 것 둘을 함께 섬기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서 위의 성경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지 않을까?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소득의 일부를 주님께 바침으로 신성의 비위를 맞춰보려고 하는 일을 얼마나 쉽게 해버리는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하느님과 화해하려 않고 하느님이 자기와 화해하도록 예배하고 그분을 섬기려 드는 일, 얼룩진 죄에서 깨끗해지려 하기 보다 죄를 면제 받으려 그분께 묻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이런 등등에 더 추가하고야 마는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자기가 찬양되게 부추키는 행위들일 것이다. 이런 결과의 발생은 성경을 글자대로 마구잡아 사용하는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글자 속에 내재하는 영적 의미를 살필 때, 우리는 성경 역사의 세부사항들에서 영적 전투에 있게 되는 마음의 작용이나 상태를 추적해 볼 수 있게 된다. 깡그리 파괴하라고 명령된 심정 속에 든 악들은 교활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심정을 얼마나 썩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악들이 본문에서 모조리 없애라는 것들, 즉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로 의미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는 안쪽 인간 속에 있는 애착과 생각들이다. 양떼와 소떼, 낙타와 나귀는 바깥쪽 인간 영역에 있는 애착과 생각, 지식, 과학들이다. 이보다 더 격렬하고 몰인정한 듯 생각되는 명령을 주님께서는 기독인들에게 복음서에서 부과하시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 율법과 복음서 양 쪽에 의해 부과된 영적 의무는 옛 사람에 속한 애착이나 욕망은 십자가에 매달아서 새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무를 실제에 응용할 때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자기를 즐기게 해줄 것 같은 생명, 자신이 생각할 때 참 생명인 듯 여겨지는 것을 내던지는 것 보다 더 하기 싫은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포기해야만 하는 생명, 부패된 이기심이라는 생명은 거듭남으로 받게 된 생명과 정반대되는 생명이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생명 만이 현재이든, 미래이든 진정한 행복을 붙잡게 해준다. 우리 속의 자연적인 의지나 이해성이 자신을 철저하게 검증 못하도록 유인하던가, 자신이 은근히 좋아하는 어떤 특질을 아껴두거나, 더욱이 자연적인 사랑이나 기쁨을 흠모하는 쪽으로 기울게 하는 어떤 영향이나 암시에 우리가 노출되는 것은 과히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의 편리주의나 자기에게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자연적인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에 자연적 마음은 쉽게 누구러뜨려지고 흔들거려 같이 춤춘다. 이것이 소떼, 양떼를 다 죽이지 않은 군인들에 은근히 동조하는 사울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 내적 인간은 사무엘 처럼 더 높은 수준에서 사물을 직시하므로 낮은 수준의 자연적 애정이나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바 흔들거리는 연약한 자연적 마음의 행동지침에 슬퍼한다. 바깥쪽 인간이 불완전에 허덕이고 연약함을 노출하지만 안쪽 인간은 완전무결 속에 남아 있는다. 그래서 안쪽 인간을 통해 주님은 바깥쪽 인간에게 말하시어 그 인간의 무력함이나 불쾌해지는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마음의 진짜 본성과 그 작용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알 수 있는 이유는 동물적 본성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동물적 마음은 설사 그 마음이 어떤 능력을 지녔다 해도 반사적 행동 (반성하는 행동)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이 지닌 신성의 창조 구성은 우리 자신을 곰곰히 반성해 볼 수 있게 장치되어 있어 자신의 수준 낮은 경향이나 상상등을 판단하여 조절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사울의 애원을 받아 들인 사무엘은 그를 따라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제물은 아말렉에게서 빼았은 더러운 것일 수는 없었으리라. 그 제물은 진정한 예배에서 바쳐지는 진정한 애착을 표현하는 이스라엘의 가축떼에서 조달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과 사울,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나로 움직였을 때, 한 가지 덜 완성된 것, 미결의 행동 하나가 있었다. 예배를 마친 후 사무엘은 아말렉왕 아각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아각은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고 생각하며 좋아서 사무엘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너의 칼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자식을 잃었는지 아느냐? 네 어미도 그런 여자들 처럼 자식을 잃어야 마땅하다’ 하며 야훼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 길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절에 대해 우리의 해설자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아각에 대한 사무엘의 말 속에는 아말렉에 내려진 신성의 저주에 대한 그 원인이 깊게 감추여 놓여 있다. 즉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싸우실 거라는 것,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서 삭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각이 좋아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습은 아말렉이 표현하는 악의를 품은 영들이 타인들 앞에서 실지로 해대는 외적인 매력이나 유혹이다. ‘네 칼이 많은 여인들을 자식 없게 만들었다’ 는 사무엘의 말은 위의 악령은 지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의지로부터 파생되는 악한 애착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무엘이 주님 앞에서 아각을 난도질 하였다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파생되어 악의 거짓 속에 있는 자들을 따로 분리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마귀(genii)가 영들로부터 분리되어 졌다.” 위 인용문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자신에게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내면의 악, 그것이 인간에게서 제아무리 감추여 놓여 있다 해도 그 악의 원리는 하느님의 보좌에 정반대 된다는 것, 주님은 그 악에 영원히 맞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이상, 우리 역시 그것이 절멸될 때까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듯이 그 악은 우리 속 아주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한번의 투쟁으로 뿌리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뿌리뽑혔다 하여 한숨 돌릴 때, 그 즉시 그 악은 고개를 쳐든다. 따라서 그 악을 계속 발바닥 밑에 두고 밟고 있으려는 끈질긴 노력만이 그 악의 힘을 약화 시키게 될 것이고, 결국 거듭나는 마음의 천국에서 그 이름조차 모두 삭제되어 지리라 본다.
사무엘과 사울은 이제 서로 제 갈길로 갔고 다시는 육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각자는 자기 출생지로 되돌아 갔다. 두 사람 각각이 표현한 진리들은 각 진리가 소속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속에서 은거하게 된다. 비록 그들 사이에 바깥쪽 왕래는 중단되었다 해도 동정적인 연결까지 완전히 절단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통곡하여 마지 않았다. 내향에 있는 애착과 생각은 외향에 있는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통곡은 그치지 않는다. 통곡한다 해서 외향에 있는 상태가 개선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외향의 연약함으로 잃는 것 때문에 내향의 것들은 통곡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무엘이 주님 앞에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일에 대한 후회를 계속하시고 있다. 어머니쪽 인간성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사울이 표현한 이 진리는 신성한 사랑의 선과는 일치 않는 가운데 있어 신성한 사랑이 거할 영원한 거주지를 제공하지 못한다. 더구나 천국을 정돈하며,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해줄 매개체 역할은 더더욱 힘들다. 항구적인 거주지와 매개체가 또 다른 원리, 더 수준 높은 원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원리를 주님 스스로 설비해두시고 계신다. 이 원리의 취임식이 다음 장에서 거론되는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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