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0장 해석

창세기 제 50 장

1-3절.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의원들은 이스라엘을 방부처리했다. 3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는데,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칠십 일 동안 곡을 했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 이는 내적 부분이 선에 애착함 쪽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얼굴에 엎드려짐”의 의미가 유입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얼굴”의 의미함이 애착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은 자기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졌다”에 의해 내적 부분이 영적 선에 애착함 안으로 유입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내적 부분이 영적 선에 애착함 안으로 유입된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영적 (수준의) 교회 (the spiritual Church, 영적 평면의 교회, 영적 수준의 인간을 위한 교회, 둘째 천국의 교회)이고, 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되어졌다 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 의해 진리의 선, 또는 영적 선이 의미되고, 이 선이 영적 (수준의)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의해 이 교회가 의미되어진다. 이 선이 존재 안으로 오기 위하여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의 천적 평면(the internal celestial)의 유입이 반드시 있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그 이유가 이 유입 없이 영적 선은 선이 아니기 때문, 그 이유는 이 선이 애착 없음으로부터 있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이 교회의 설립이 계속되어진다. 죽고, 매장되어지는 이스라엘에 의해 이 교회가 의미되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죽음”에 의해 죽음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 “매장”에 의해 매장이 의미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죽음”에 의해 새로운 생명 (삶)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에 의해서는 거듭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울었다. 이는 슬픔을 의미한다. 여기서 “울다”에 의해 외적 부분에서와 같은 죽음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 같은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뜻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의 선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즉 이 교회의 선이 자연적인 것 넘어 승강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이 선을 완전해지게 하시어 그분 쪽으로 끌어당기시려 계속적으로 유입을 통하여 흘러드시기 때문, 그러나 여전히 천적 (수준의) 교회에 속하는 첫째가는 선의 등차로 승강되게 하실 수 없으시기에 야기되는 슬픔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적 교회인은 상대적으로 희미함에 있기 때문; 즉 그들은 진리들인지 아닌지를 추론한다; 또는 진리들을 교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확증한다; 확증한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지각함이 없다; 그가 그것을 자신과 더불어 확증했을 때, 그것이 진리이다고 완전히 믿어버린다. 설사 거짓일지라도 믿어 굳히고야 만다; 그 이유가 기발난 착상으로 이리저리 꿰맞춘 교리일 뿐, 총명으로부터가 아닌 것, 지혜로부터는 더 더욱 아닌 것일지라도 확증되어질 수 없다 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거짓된 것이 진짜인 것보다 더 쉽사리 이의 없이 확증될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인간의 강한 욕망들을 흡족하게 하는 대목이 삽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감각들의 오류들과 일치해놓기 때문이다. 영적 교회인의 속성이 위 같을 진대, 그는 자연적인 것 넘어로 승강되어질 수 없다; 이런 등등이 “요셉은 그(이스라엘) 위에서 울었다”에 의해 의미되는 슬픔이다.

그리고 그에게 키스했다. 이는 첫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함”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의 결합이다로부터; 이 경우 첫 결합이다, 그 이유는 더 밀착된 결합이 이어지는 것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종, 의사에게 명령하였다. 이는 결합을 방해한 악으로부터 보호함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의 의미가 흘러듦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의원”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존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 보존함이 방금 앞에서 말한 결합을 방해한 악들로부터를 표시하는 것은 문맥의 연결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종, 의원에게 명령했다”에 의해 결합을 방해한 악들로부터 보존함에 관련되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의원”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존함인 이유는 영계에서 질병들이 악들과 거짓들이기 때문, 영적 질병은 악들과 거짓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들과 거짓들이 내적 인간으로부터 건강을 거두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에 병듦을 유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통들을 일으킨다; 말씀에서도 “질병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밖에 더 없다.
“의사(physician)”, 또는 “의술”, “약”이 말씀에서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보호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아래 구절에서 알게 된다:
만일 너희가 하느님의 음성을 귀기울인다면, 그리고 내가 보기에 선인 것을 행한다면, 그리고 나의 명령들에 청종하여 모든 그분의 규례들을 지킨다면, 나는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질병의 어느 것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나는 너희의 의사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출. 15:26);
“의사 여호와”는 악들로부터의 보호자(보존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내려진 질병”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질병”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추론함에 근원을 둔 악들과 거짓들, 그리고 신앙의 비밀들에 관한 오류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질병들을 취급하는 대목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질병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바로 위 인용구절,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선을 행하고, 그분의 명령에 귀기울인다면, 이 질병들은 그들 위에 내려오지 않는다”에서도 분명해진다.
같은 의미에서 주님은 자신을 의사라고 일컬으신다, 누가복음서에서:
온전한 자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로운 자가 아닌 회개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눅. 5:31, 32);
위 구절에서 역시 “의사”는 악들로부터의 보호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온전한” 자는 정의로운 자를, “병든” 자는 죄인을 뜻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길르앗에 향유(香油, balm)가 없더냐? 거기에 의사가 없더냐? 왜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느냐? (예. 8:22);
“의사”는 교회에서 거짓들로부터 보호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이 교회에 있는 교리의 진리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고치다(heal),” “치료하다(cure),” “치료(remedy),” 그리고 “약(medicine)”이 말씀에서 자연 측면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측면에서 이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왜 당신께서는 우리를 치시고, 치료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평화를 기다리나 선은 없습니다; 치료의 때, 그러나 바라보니 공포(의 때입니다) (예. 14:19; 8:15).
다시:
나는 그로 하여금 건강과 고쳐짐이 있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평화와 진리의 왕관을 밝히 알릴 것이다 (예. 33:6).
다시:
건강을 위하여 네 판단을 판결할 자는 아무도 없다, 너는 회복의 약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 46:11).
에스겔서에서:
거기로부터의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식품의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온다, 그들의 잎은 시들지 않는다, 거기로부터의 열매는 다 소비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달들에서 다시 열매맺 는다, 그 이유는 거기로부터의 물들은 성소로부터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의 열매는 식품을 위해 있고, 거기의 잎은 치료약을 위해 있다 (겔. 47:12);
위 예언서에서 취급한 주제는 하느님의 새로운 집, 또는 새로운 성전이다, 이를 수단으로 새로운 교회가, 내적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 “식품을 위한 모두 각각의 나무가 올라오는 둑을 가진 강”은 총명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나무들”은 지각들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 “성소로부터 나가는 물들”은 총명을 만드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성소”는 천적 수준의 사랑, 즉 최고 의미에서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이다; “식품을 위한 열매들”은 사랑의 선들이다; “치료약을 위해 있는 잎”은 신앙의 진리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치료약”이 의미하는 것, 즉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보호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생활의 선쪽으로 인도할 때, 이것이 보호해준다, 그 이유는 이것이 악들로부터 물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하도록. 이는 어떤 접촉 전염으로 감염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함”의 의미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를 방부 처리를 함”에 의해 영적 교회에 속하는 선이 어떤 접촉 전염으로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함의 수단이 의미되어진다. “방부 처리”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의 수단인 이유는 신체를 방부 처리하는 목적이 썩음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접촉 전염으로부터 영적 선의 보호의 수단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스라엘을 방부 처리했다. 이는 진리로부터 있는 선의 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함”의 의미가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보호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방부 처리를 했다”하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의사”의 의미가 악들로부터 보호함이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은 영적 선, 즉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사십 일을 채웠다. 이는 시험들을 수단으로 있는 준비함의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 “40”의 의미함이 시험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준비의 상태들이다는 것이 “날들이 그를 위하여 채워짐”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날들이 채워짐으로 시체가 썩음에서 보호됨이 준비되어지기 때문인데, 영적 의미에서는, 혼들이 악의 접촉 전염됨으로부터 보호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방부 처리하는 기간이 사십 일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러함이 보존의 상태들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방부 처리를 함”의 의미가 보호의 수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곡을 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함이 슬픔의 극치이다, 그리고 내적 슬퍼함의 표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의 슬퍼함이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울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 그의 죽음 때문에 있어진 슬퍼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글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슬퍼함은 교회의 선 때문에 있는 슬퍼함을 뜻한다, 즉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선이 교회의 외적 부분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남겨 두고, 그것들로부터 교회의 내적 부분으로, 즉 진리의 선으로 승강했다. 이럴 경우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이전 같이 있는 그 자체에서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의 선 아래쪽에 있는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의 진리가 선이 될 때, 혁명이 거행된다, 즉 인간은 진리들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 혁명은 이미 몇 번 설명해왔었다. 이로부터 슬퍼함이 오고, 또한 다른 질서가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 결과되어진다, 이것은 고통 없이 결과되지 않는다.

칠십 일 동안. 이는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70”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 숫자는 “7”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7”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 고로 충분한 상태를 의미한다.
“70”이 전체 기간, 고로 충만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두로가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 칠십 년을 잊혀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칠십 년의 끝으로부터 두로는 음녀의 노래 같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칠십 년의 끝으로부터 여호와께서는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23:15, 17);
“두로”는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잊혀져 있을 것이다; “칠십 년”은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이다;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란 상태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왕”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 하는 이들이다면, 눈치채는 것은, “두로”가 두로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적 의미 없이 “두로가 칠십 년을 잊혀져 있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 “한 왕의 날들에 따라서”가 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온 땅이 황무해질 것이다, 그리고 황페함이다, 그리고 이 나라들이 칠십 년을 바빌론을 섬길 것이다; 그리고 칠십 년이 찰 때, 내가 바빌론 왕에, 이 나라에 있는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예. 25:11, 12; 29:10);
“칠십 년”은 황무함과 황폐함이 충만되는 상태를 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태 백성이 견뎌야 하는 칠십 년의 포로됨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다니엘서에서:
칠십 주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함의 도성 위에 포고된 것은 위법함이 절정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고 죄들을 가두기 위하여, 그리고 불법이 벌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시대들의 정의로운 자를 데려다 놓기 위하여, 그리고 환상과 예언을 밀봉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극히 거룩함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서 이다 (딘. 9:24);
위에서 “70”은 충만된 상태, 즉 주님이 오시기 이전 전체 기간을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분에 관해서 말해지는 것은, 그분은 “시간의 충만해짐(때가 차자)”에서 오셨다 이다. “칠십 주”가 충만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은 이 구절의 세부 사항들로부터 명백하다, 즉 많은 주들이 “위법함이 절정에 이르기 위하여”, 또한 “불법이 벌을 받기 위하여”, 또한 “시대들의 정의로운 자를 데려다 놓기 위하여”, 또한 “환상과 예언을 밀봉하기 위하여”, “지극히 거룩한 자에게 기름붓기 위하여 포고되어졌다”의 각 세부사항들은 충만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것이 인용구절의 다음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알고 지각하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설하라는 말이 나감으로부터 제 1 인 자 메시아에 게 (이르기) 조차 (하는데) 칠 주 일 것이다 (단. 9:25);
위의 “7”은 충만한 상태를 표시한다. (“7”, 또한 “70”은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이 이 구절에서 새로운 교회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은 그때 건축되지 않았고, 파괴되어졌기 때문이다.

4-6절.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말하기를, 5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하고,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올라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6 그리고 바로는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가 너에게 맹세 시킨대로 그를 매장하라.

그리고 그를 위하여 곡하는 날들이 지나갔다. 이는 슬픔의 상태들이 완성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지나갔다”의 의미가 완성되어졌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곡하는 날”의 의미가 슬픔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집에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이 자연적 마음에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유입됨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집의 표현함이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요셉이 바로의 집에 말하였다”에 의해 자연적 마음 안으로 내적 부분이 유입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말하기를, 만일 제가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면. 이는 그것이 잘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의 의미가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고로 잘 받아질는지 모른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부디 바로의 귀에 말합니다. 이는 동의를 구하는 탄원을 의미한다. 이는 “부디”의 의미가 탄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귀”의 의미가 순종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동의함인데, 그 이유는 왕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순종함 또한 동의함이다; 그러나 하위 등급에 대하여는 순종함, 상위 등급에 대하여는 동의함이다.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맹세하게 했다. 이는 그는 심정에 교회를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맹세를 만든다”가 내향적으로 묶는다, 고로 심정에서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향적으로 묶는 자, 고로 양심을 수단으로 묶는 자가 이것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심정에서 그것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기서 “맹세를 만든다”에 의해 의미된다.

말하기를, 보라, 나는 죽는다. 이는 교회가 존재되는 것이 중지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는다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회가 만기가 될 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내가 가나안의 토지에 나를 위하여 파둔 내 매장지에 너는 나를 매장하여라. 이는 교회는 이전의 교회가 있어 왔던 곳에서 소생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지” 또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소생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이 여타 다른 곳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매장되어진 곳, 가나안의 토지에 매장되기를 바랬던 이유는 그의 후손들이 그 토지를 소유해야 하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들 사이에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내적 의미는 이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밖의 어떤 것, 즉 거듭남과 부활의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매장”에 의해 거듭남과 부활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하여 교회가 의미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의해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의 내적, 외적 부분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거기 그들의 매장지의 내적 의미가 이러한 바,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유태인들과 더불어 비록 자기들이 가나안 외의 지역에 매장된다 해도 자기들은 거기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를 간직하고 있다.
“이전의 교회가 있어왔던 곳”에서 교회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태고 때로부터 주님의 교회가 가나안의 토지에 있어왔었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거기로 가도록 명령받았고, 야곱의 후손들이 그곳으로 데려와진 것이다; 그렇다고 가나안의 토지가 여타 다른 토지들 보다 더 거룩하다 해서가 아니고, 태고 때로부터 거기의 모든 장소들, 지역들, 도성들, 산들, 강들 등등이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에게 주어진 이름들 자체가 이런저런 것들을 포함했다. 그 이유가 천국으로부터 주어진 모두 각각의 이름이 어떤 장소에, 그리고 어떤 인물에 주어져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으로부터 주어졌는 바, 천국에서도 그렇게 지각되어졌다; 이것은 천적 수준이었고 천국과 교통을 가졌던 태고 교회가 이름들을 주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기서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말씀이 거기서 주어지고, 말씀 안에서 그 토지의 모든 것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표현하여, 말씀은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이해되어진다; 이렇게 장소와 인물의 이름들이 의미적이지 않으면 이해됨은 가능해질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데려와져야 했고, 거기서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수단으로 말씀들이 쓰여졌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표현이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설립되었다. 이상 살핀 바로 왜 이전의 교회가 있었던 곳에서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졌는지가 납득되었을 것이다.
말씀에 있는 이름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름들의 의미가 설명되는 대목에서 살펴진 바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말씀의 이름들이 의미 측면에서 지각되어진다는 사항은 아직 알려진 바 없어 말해두고 가야 할 것 같다. 말씀이 읽혀질 때, 주님께서는 흘러드시고 가르치신다. 경이롭다 말할 것은 영계에도 쓰기, 저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때때로 보았었다, 그리고 읽을 수가 있었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수단으로 하면 명료하게 이해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들의 보편적 언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 알도록 해준 것은, 거기서의 모든 단어는 음절 자체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세계에 속한 것, 즉 영계의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것들은 숨쉼으로부터, 말함으로 결과하는 애착으로부터, 고로 더 부드럽거나 더 거칠거나 하게 변경되어진다; 그러나 이것을 아마도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열어 보여주신 이유는 말씀에 있는 이름들이 천국 안에서 기록되어져 왔었다는 것, 거기서는 의미 측면에서 지각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청하옵건대 나로 가게 하소서,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매장하게 하소서. 이는 내적인 것을 수단으로 거기에 교회의 소생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소생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이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를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겠습니다. 이는 자연적 마음에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돌아오다”의 의미함이 현존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발표하는 것(set forth)”, 그리고 “가는(go) 것”은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되돌아 오다”, “다시 오다”는 떠남 대신에 생명의 현존이다, 그 이유가 마음이 여전히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함이 자연적 마음에 있는 이유는 되돌아 오는 곳이 이집트이고, 이집트는 자연적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바로가 말했다, 올라 가라, 그리고 네 아버지를 매장하라. 이는 교회가 소생될 것임을 확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확언함이 표시되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너에게 맹세 시킨 것에 따라. 이는 이것이 심정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맹세를 만든다”가 심정에서 가지는 것이다 (6514)에서 알게 된다.

7-9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그의 집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8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이 함께 올라 갔다. 오직 아기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 그들의 목축떼 만이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9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와 기병도 함께 했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다. 이는 내적인 것이 교회를 다시 설치하려는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매장함”의 의미가 소생함이다로부터, 고로 다시 설치함인데, 그 이유는 교회에 관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로의 모든 종들이 올라 갔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을 자체에 인접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와 함께 올라감”이 자신에게 인접되게 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들이 올라가게 된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인 바, 요셉이 이들을 자신 쪽에 인접되게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종들”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된다; 그리고 자연 평면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의 “종들”에 의해서, 또는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의미된다.

그의 집의 원로들. 선에 일치된 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원로들”의 의미함이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과 일치하는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집”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원로들”이 지혜의 제일의 것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노인”들이 슬기로운 자를, 그리고 인물로부터 추상화된 의미에서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고, 백성들 위에 임명된 제 1 인 자들은 총명 속에 있는 제 1의 진리들을, 그리고 “원로들”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 속에 있는 제일의 것들이 의미되어진다.
“제 1 인 자”가 총명 속에 있는 제 1의 진리들을 의미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폈다; “원로들”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그리고 “노인”이 지혜를 의미함에 대하여는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로 여호와를 벡성의 회중에서 격찬하게 하라, 그리고 그분을 원로들의 집회에서 (격찬하게 하라) (시. 107:32);
위에서 “백성의 회중(모임, 집합)”은 총명에 속하는 진리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회중”은 진리들을 서술하고, “백성” 또한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원로들의 집회”는 선에 있는 이들을 서술하는데, 이는 지혜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지혜는 생명(삶) 속에, 고로 선 속에 있고, 총명은 지식들 속에, 고로 진리 속에 있다. 다시:
나는 원로들 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의 명령들을 준행하기 때문입니다
(시. 119:100);
위에서 “원로들”은 슬기로운 자를 분명하게 표시한다. 마찬가지로 욥기서에서:
노인 안에 지혜가 있다, 그리고 날들의 길이 안에 총명이 있다 (욥. 12:12).
모세의 책에서:
너는 백발의 머리 앞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존경하라 (레. 19:32);
이것이 명령된 이유는 노인들이 지혜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계시록서에서:
왕좌 위에 나는 24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다, 머리에 금빛의 왕관을 가졌다 (계. 4:4);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고로 선에 속하는 것들이다; “원로들”이 이런 것들을 표시하는 것은 그들을 묘사한 것으로부터: 즉 그들은 “왕좌 위에 앉았다, 흰옷을 입었다, 그리고 머리에 금의 왕관을 가졌다”에서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왕관”은 지혜의 선으로부터 있는 총명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흰옷”도 마찬가지이다. “머리에 금빛의 왕관”은 지혜의 선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금”은 사랑의 선이다, 그리고 “머리”는 천적 평면(부분), 여기에 지혜가 있다. 셋째 천국, 즉 가장 안쪽 천국에 있는 이들이 “슬기롭다” 라고 불리우고, 주님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그러나 중간 천국, 즉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은 “총명하다”라고 불리우고 주님에 가까이 있지는 않다.
다시:
모든 원로들이 왕좌를 빙둘러 섰다, 그리고 원로들, 그리고 네(4) 동물들 (계. 7:11);
위에서 역시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 아래 구절도 마찬가지 이다:
아이가 노인을 향하여 으쓱대었다, 경멸하는 자가 존경받는 자를 향하여 우쭐대었다 (이. 3:5);
다시:
여호와 체바욷이 시온 산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원로들 앞에서 영광되실 것이다 (이. 24:23).
예레미야서에서:
나의 성직자들과 나의 원로들이 도성에서 숨을 내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혼에 원기를 주겠다고 식품을 찾아 헤멨기 때문이다 (애. 1:19).
다시:
그녀의 왕과 그녀의 제 1 인 자들이 법이 없는 나라들 사이에 있다; 시온의 딸의 원로들이 땅에 앉아 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애. 2:9, 10).
다시:
그들이 시온에서 여인들을 강탈했다, 유다의 성들에서 처녀들을 강탈했다; 제 1 인 자들이 자기들 손으로 목을 매었다; 노인의 얼굴이 존경되지 않고 있다; 원로들이 성문으로부터 끊어졌다
(애. 5:11, 12, 14).
에스겔서에서:
불행에 불행이 겹치고, 소문이 소문에 겹쳐 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언자로부터 환상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로부터 법이 멸해졌고, 원로들부터 묘략이 멸해졌다. 왕은 슬퍼할 것이고, 제 1인 자는 놀람으로 옷입을 것이다 (겔. 7:26, 27).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들에 남노인과 여노인들이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탓에 모두 각각은 자기 손에 지팡이를 가질 것이다 (슥. 8:4).
원로들은 지혜에 속하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세에게 내려졌던 하느님의 영이 원로들에게도 내려져서 이로부터 그들이 예언하게 하신다는 기록으로부터도 알게 된다 (민. 11:16-17). 반대적 의미에서 “원로”는 지혜에 반대되는 것들을 표시한다 (겔. 8:11, 12).

그리고 이집트 토지의 모든 원로들. 이는 진리에 일치됨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원로들”의 의미가 지혜의 제일의 것들, 고로 선에 일치함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진리에 일치함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선에 일치함에 있는 이들은 진리에 일치함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진리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참일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요셉의 모든 집안. 이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의 집안”이란 영적 평면 속의 천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 이는 그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요셉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영적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요셉”인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 이는 영적인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인 선이다로부터; 그러므로 그의 “집안”은 이 선에 속하는 복합체에 있는 모든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오직 아기들. 이는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살핀 바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떼. 이는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선행의 내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목축떼. 이는 선행의 실제들을 의미한다. 이는 “목축떼”의 의미가 선행의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거기로부터의 실제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선행의 외면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남았다. 이는 이것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의 가장 안쪽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토지”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기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순진과 선행의 선들, 내면과 외면 모두가 이것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어린 아이들, 양떼들, 목축떼들을 고센의 토지에 남겨두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들이 거기 있다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그들이 남았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남았다가 의미되지 않고, 그러나 거기 있다, 즉 “고센의 토지”인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의 가장 안쪽에 있다가 의미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병거가… 함께 했다. 이는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병거”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병도. 이는 지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기병”의 의미가 지적 부분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말”에 의해 지성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기병”이 지성, 또는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을 표시한다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더 알 수 있다:
여호와만이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분은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셨다
(신. 32:12, 13);
위는 고대 교회에 관하여 이다;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심”은 더 높은 이해력을 수여하심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영예 안에서 오르시고 진리로부터의 말씀, 관대하심으로부터 말씀, 정의로부터의 말씀을 타소서, 그리고 당신의 오른 손이 당신에게 경이로운 것을 가르칠 것입니다 (시. 45:4);
주님에 관해서 말해지고 있다; “진리로부터의 말씀을 탄다”는 진리로부터 이해함 자체에서 이다를 표시한다. 다시:
하느님을 노래하라, 너희는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분의 이름 야(Jah)를 수단으로 구름들을 타시는 그분을 드높여라 (시. 68:4);
위 구절 또한 주님을 말하고 있다; “구름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를 표시한다; “그것들을 탄다”란 내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진리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스가랴서에서:
그 날에 나는 놀람으로 모두 각각의 말을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미침으로 쳐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눈을 유다의 집안에 열 것이다; 그러나 소경됨으로 백성의 모두 각각의 말을 쳐죽일 것이다 (슥. 12:4);
위에서 “말”은 지적 부분(지적인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기수”는 지력을 표시한다. 위 구절의 “말”이 동물인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기수”가 기수를 뜻하지 않을 것임을 누가 짐작하지 못할까? 이것이 이해력에 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말”과 “기병”에 의해 지적인 것들이 의미되는 것, 반대적 의미에서 추론함과 이로부터의 거짓들을 의미함을 아래에서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흰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활을 가졌다; 그리 고 왕관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복하며 정복하려고 나아 갔다. 그리고 거 기서 또 다른 말이 나오는데 붉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져 가는 것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큰 검이 주 어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검은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는 그의 손 에 저울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창백한(pale) 말; 그리고 그 위에 앉은 그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계. 6:2-8);
위에서 “말”, 그리고 “말 위에 앉은 자”는 진리를 이해함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 거짓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함이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흰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이해함을 표시한다. “흰말 위에 앉은 자”가 말씀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이 분명한 말들로 말하여지고 있다 (계. 19:11, 13, 16). “붉은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악의 탐욕들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폭력이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에 저질러진다; “검은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진리로부터의 지적인 것을 소멸시킴을 표시한다; 그리고 “창백한 말과 그 위에 앉은 자”는 결과적으로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 “말”과 “기병”은 타락된 지력을 표시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거짓들이다. 에스겔서를 읽어보자:
오홀라는 내 앞에서 매춘짓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애인에 홀딱 빠졌다, 이들은 통치자요 지도자이며, 그들의 모두는 잘생긴 젊은 이들이고, 말을 타는 기병이었다. 그녀의 자매 오호리바는 앗수르의 아들들을 사랑했다, 이들은 통치자이고 지도자들이고, 그녀의 이웃들인데, 잘 차려입고 말을 타는 기병이었고, 그들 모두가 잘생긴 젊은이 이었다 (겔. 23:5, 6, 12);
“오홀라”는 타락한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이는 “사마리아”이다; 그리고 “오홀리바”는 타락한 천적 교회이다, 이는 예루살렘이다; 그 이유가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족들이 영적 교회를 표현했고, 예루살렘 속에 있던 유태인은 천적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앗시리아인”, “앗수르의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에 맞서 추론함을 표시한다; “말을 타는 기병”은 타락한 이해력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거짓들이 온다.
하박국서에서:
나는 갈대아인들을 휘저을 것이다, 이들은 모질고 성급한 민족이다, 땅의 넓이로 가서 자기의 소유가 아닌 주택을 상속받기 위하여서이다; 그들의 말은 표범보다 빠르다, 저녁의 이리보다 더 날카롭다, 그들의 기병들은 멀리로부터 와서 자신들을 펼쳐놓는다 (합. 1:6, 8)
“갈대아인”들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진리들에 있는 것같이 나타난다, 고로 진리의 모독이다, 그리고 “바빌론”은 선의 모독이다. “땅의 넓이로 가는” 것은 진리들을 파괴함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멀리로부터 와서 자신들을 펼치는 기병“은 타락된 이해력에 속하는 것들, 고로 거짓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군대는 심히 많았다. 이는 진리들과 선들이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군대”가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는 진리들과 선들이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 그리고 “요셉의 집안”,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의 집안”에 의해 모두 의미되고, 이 모두가 함께 있기에, “심히 큰 군대”에 의해서는 진리들과 선들이 결합되었다가 의미된 것이다.

10-11절. 그리고 그들은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다. 11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곳은 요단 강 건너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닷의 타작 마당에 왔다. 이는 첫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타작 마당”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 있는 곳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타작 마당에 낟알이 있기 때문, 그리고 “낟알(grain)”에 의해 진리로부터 있는 선이 의미된다, 또한 선으로부터의 진리도 의미된다; 그리고 “아닷”의 의미로부터 이 상태의 품질이 의미된다. 고로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의하여 교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상태가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가나안 토지쪽에서 볼 때) 요르단 건너편(요르단강을 건너서)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너감(통과함, passage)에 의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가르쳐짐이 개시됨이 의미된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 이유가 “요르단(강)”은 가나안 토지의 첫 경계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는 바, “요르단”에 의해서는 교회가 시작됨의 처음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또는 이런저런 것들로 해서 교회로 입장함이 열려지는 것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의해서는 처음 상태가 의미된다; 그리고 처음 상태가 의미되기에, 슬퍼함이 타작마당 가까이에서 있어졌다, 그 이유는 이곳이 요르단 이쪽이었기 때문, 그리고 교회를 의미하는 가나안이 시야 안에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타작 마당”이 진리의 선과 선의 진리가 있는 곳, 고로 교회 속의 것들이 있는 곳임이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너희 시온의 아들들아 기뻐환호하라, 그리고 너의 하느님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하라; 타작 마당들 이 낟알로 가득하다, 그리고 압착틀은 새로운 포도주와 기름으로 넘쳐흐른다 (욜. 2:23, 24);
위에서 “시온의 아들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낟알로 가득한 타작 마당”은 진리들과 선들로 풍부함을 표시한다.
호세아서에서:
즐거워하지 마라, 오 이스라엘아, 그 이유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아래로부터 매춘짓을 범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낟알 마당들에서 매춘 삯을 사랑했다;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그녀를 속일 것이다 (호. 9:1, 2);
“매춘짓을 범하고 매춘 삯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들을 왜곡하는 것과 왜곡한 것을 사랑하는 것을 표시한다; “곡식 마당들”은 왜곡된 선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타작 마당”이 선을 의미했고, 또한 진리도 의미했기에, 낟알들이 마당으로부터 모아질 때, 그들은 성막들의 축제를 벌였는데, 모세의 책을 읽어보자:
너희가 너희의 타작 마당으로부터, 그리고 포도즙틀로부터 그러모을 때, 너희는 칠 일 동안 성막의 절기(잔치)를 너희에게 만들 것이다 (신. 16:13);
“성막 절기”는 거룩한 예배를 의미했다, 고로 선과 진리로부터의 예배이다.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는…(이집트에서 보는 요르단강이 아니고 가나안의 쪽에서 보아서 말해진다 따라서 통곡함이 강을 건너기 전에 있었다로 생각한다 역자 주.)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인지(認知, 인정하고 앎)함이 개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요르단”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를 인지하기를 개시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인지함이 주님의 왕국과 교회로의 입장의 처음에 해당되고 마지막 나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요르단 건너”는 선과 진리의 인지함을 개시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과 진리를 인지함이 인간이 교회에 속하는 것들을 받아들임에서 첫째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대단하게 소리내어 울었고 슬피 울었다. 이는 통탄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리내어 운다”가 통탄함 임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의미된 통탄함은 개시함의 통탄함이다; 그 이유가 처음의 시기에서 있는 선과 진리를 인지함이 선 안에 심어져서 교회의 선이 되기 전 통탄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또 다른 상태가 자연 평면에서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또 다른 질서 안에 놓여짐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이 이전에 사랑해왔던 이것저것은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시험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통탄함이 소리내어 울 정도의 통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다. 이는 슬픔의 끝을 의미한다.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심어지기 전, 통탄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칠 일”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끝까지의 전체 시기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러므로 끝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들이 끝났을 때, 그들은 요르단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토지의 주민인 가나안 족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선을 수단으로 슬픔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주민”의 의미함이 선이다로부터; “애곡함”의 의미가 통탄함이다; 그리고 “아닷의 타작 마당”의 의미가 처음의 상태, 즉 개시함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 아닷의 타작 마당에서 크게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교회의 선을 수단으로 통탄함이 지각됨이 의미된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통한 슬픔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것이 교회 속의 진리 안으로 입장하기 전, 슬픔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바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이는 통탄함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그리고 “이름을 부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고대 시대 때는 어떤 것이다와 그것이 어떤 상태이다를 의미하기 위해 이름이 주어졌는 바, 여기서는 품질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품질 자체가 “아벨미스라임”에 의해 의미된다, 이 이름의 원어는 “이집트인들이 통곡한다”를 뜻한다.

12, 13절.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13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를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마므레 앞,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들판과 함께 매입한 막벨라의 들판에 있는 굴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가 그들에게 명령했던 대로 그에게 행했다. 이는 유입에 따른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다”의 의미가 결과이다로부터; “명령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그를 가나안의 토지로 운반했다. 이는 교회가 저쪽에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운반했다”의 의미함이 이동했다 이다로부터, 즉 교회가 이동했다 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매장했다. 이는 거기서 소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함”이 소생함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막벨라의 들판의 굴에. 이는 거듭남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막벨라의 들판의 굴”의 의미함이 희미함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막벨라”는 거듭남을 표시한다; 고로 거듭남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때 신앙이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들판과 함께 샀다. 이는 주님께서 도로 찾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되찾다 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아브라함이 들판과 더불어 샀다”에 의해 주님께서 되찾은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족 에브론으로부터. 이는 신앙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고 거듭나지려고 자신이 고통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지”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 헷족의 표현함이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므레 앞. 이는 질과 양을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들의 질과 양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의 들판의 동굴을 매입한 것이 무엇인가 특별한 어떤 것이 의미되리라는 것은 이 말이 거의 똑같게 나열되어 여러 군데의 구절에서 언급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아래에 모아 보았다: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들판을 확실히 (자기 것임을) 만들었다 (창. 23:17-18).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마므레의 얼굴 위 막벨라 들판의 동굴에 매장했다. 그리고 들판과 거기 있는 동굴이 헷의 아들들로부터 매장지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것을 확실히 해두었다 (창. 23:19, 20).
그들은 아브라함을 마므레의 얼굴 위쪽인 헷족 소알의 아들 에브론의 들판에 있는 막벨라의 동굴에 아브라함을 매장했다; 아브라함이 헷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들판이었다 (창. 25:9, 10).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매장하라,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창. 49:29-32)..
그리고 이 장에서
그들은 그를 막벨라의 동굴에 매장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매장지의 소유를 위해 들판과 더불어 헷족 에브론으로 샀다, 마므레에 있다.
위 구절들에서 읽듯 거의 비슷한 단어의 반복됨에 의해 의미되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수단으로 주님이 표현되어졌다는 것; 그들의 매장이 부활과 소생을 표현했다는 것; 막벨라 동굴에 의해 거듭남의 시작이; 헷족 에브론에 의해 신앙의 선을 받는 이들, 그리고 거듭나지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을; 헷족의 아들들에 의해 영적 교회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하여 비록 여러 군데에서 반복되었을 뿐 실상 한 줄밖에 안되는 정도의 말만 가지고도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를 다시 설립(시작, set up, establish)하는데 필요한 요건이 다 충족되어 의미되어 있다.

14절.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올라 갔던 모든 이들이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뒤 돌아 갔다.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로 돌아 갔다, 그와 그의 형제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과 신앙의 진리가 살아가는 것(삶)을 의미한다. 이는 “되돌아 오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복합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내적 부분의 천적인 것과 신앙의 진리들이 살아 감이 창세기 몇 장에 걸쳐 있는 셈이기는 하다; 즉 요셉이 이집트의 토지의 통치자와 바로의 집안의 주인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오는 여행에서, 그리고 이집트로 이들과 더불어 아버지까지 오게 됨에서 취급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매장하러 그와 함께 올라 갔던 모든 이들. 이는 거듭남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듭남과 부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소생함과 다시 교회가 설립됨이다로부터; 이러한 것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그와 함께 올라갔던 모든 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모든 이들은 요셉의 전체 집안, 또한 그의 아버지의 집안, 마찬가지로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이기 때문; 하여 “요셉의 집안”에 의해서는 영적 평면의 천적인 것들이 의미되고, “그의 아버지의 집안”에 의해서는 영적 선의 모든 것들이 의미되고; “바로의 집안의 원로들”은 선과 일치하는 것들이 의미되고; “이집트의 토지의 원로들”에 의해서는 진리와 일치하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와 함께 매장하려 올라갔던 모든 이들”은 거듭남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의미된다. “매장하는” 것이 거듭남과 부활함을 의미하고, 또한 소생함과 교회가 다시 설립됨(시작함)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의미들이 결국은 같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듭남이 부활함인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 그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 있게 되어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에서 교회가 소생되어 인간 안에서 다시 설립될 때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이것도 거듭남에 의해, 고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인 부활함에 의해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매장한 후… 이는 교회를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되어짐”의 의미가 교회가 소생함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국의)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15-21절.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요셉이 혹시 우리들을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으로 갚았을 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생각했으나, 하느님은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주리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기들도 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더라.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는 선과 진리로부터 멀리해지는 것, 그리고 교회가 소생되어졌음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과거 그들이 요셉을 죽이기를 바랬었고, 그를 팔리게 만들었을 때, 그들은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지려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혹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앙갚음했던 모든 악을 우리에게 되갚는다면”의 말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죽어 있다”의 의미가 소생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즉 교회가 소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교회가 소생되어졌던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리해졌던 것을 수단으로 지각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혹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그들은 내적 부분을 거절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한다(증오함을 갖고 있다)”의 의미가 반대되는 것, 그리고 거절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사실상 요셉이 그들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셉을 거절했다. 즉 외적 부분(“형제들”)의 탓을 내적 부분(“요셉”)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외관에 따라 말하면 그런 식이 된다. 즉 미워함 복수함 같은 것들은 실상 인간에게 속한 특성일 뿐인데, 말씀 안에서 여호와께서 복수하시는 듯 쓰여 있는 경우와 같다.

우리가 그에게 앙갚음했던 모든 악을 우리에게 되갚는다. 이는 응분의 상벌에 따라 임박해진 처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에게 징벌한 모든 악이 되돌려진다”의 의미가 응분에 따른 처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게 행하여진 악을 되돌림은 그 악을 저질른 것으로부터의 처벌이기 때문이다. 처벌함, 악을 되돌림이 영계에서는 어떻게 있는지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로부터 본문의 내적 의미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어떤 악을 행하려 할 때, 그들이 세상에서 저질렀던 악을 넘어서 저지르려고 하면, 처벌자들이 초과되어 행해지는 악에 대하여는 응징을 한다. 처벌 당한 자는 어떻게 처벌자들이 자기가 초과된 악을 했는지를 알아냈는지를 말할 수 없다. 또한 그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것이 다른 세계에서의 질서이다는 것, 즉 악 자체는 그것과 동등한 처벌을 꼭함께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하여 행위로부터의 악은 처벌로부터의 악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의 벌은 악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징벌자가 즉시 있는 셈이다.
위의 경우는 악령들이 영들의 세계에서 악을 행할 때이고, 그들의 세계인 지옥에서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품어왔던 악들로 행동된 악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응징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들과 더불어 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처벌이 응분의 상벌에 따라 임박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즉 “우리가 그에게 징벌한 모든 악이 되돌아 온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러나 선한 영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이 악을 말하거나 행한다면, 그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된다, 변명을 인정해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목적이 악을 말하거나 행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 의해 자기들 안에서 악을 흥분되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로서 인정되기까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목격되는 것은 이런 악들에 저항하려 애쓴다는 것, 또한 벌어진 악들에 슬퍼한다.

그들은 요셉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과 그 결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전하다(command, 명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셉에게 명하여, 말하기를”에 의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의미된다, 그 결과 지각함이 결과된다. 요셉에게 대한 그들의 명령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외적 부분으로의 유입인 이유는 유입은 언제나 내적 부분에서 외적 부분으로 만 있기 때문이다. 이 반대로의 흐름은 없다.

당신의 아버지는 그가 죽기 전, 명령하시어 말하기를. 이는 그것은 교회의 명령을 수단으로 하여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교회이다로부터; “명령함”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여기서의 명령하다는 교회로부터 오는 명령, 고로 신성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의 의미함이 교회가 아직 존재하는 동안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것이 교회의 명령을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모든 이는 그의 형제, 또는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아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다, 저에게 죄를 진 형제를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까지 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나는 네게 일곱 번까지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다 (마. 18:21, 22).
유태 나라에 각인된 것은, 그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적으로서 간주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들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듯 허용된 셈이었다, 하여 급기야는 그를 죽여도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적 측면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이 외적인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는 내적 교회의 명령은 없었다. 이것이 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고 자기들에게 악을 행할까 매우 두려워했던 이유이다. (이 민족들이 완전 외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고 들은대로 적는 것이 어느 민족 보다 꼼꼼해서 성경을 만드는 인간 도구로는 최적이었다 역자주.)

그러므로 너희는 요셉에게 말하라. 이는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역사적 말씀에서 지각하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행해져야 하는 것이 “고로 너희가 말하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바라건대 네 형제들의 잘못, 그리고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라. 이는 청원과 회개를 의미한다. 이는 “부디 용서하라”가 청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회개함 또한 의미한다는 것은 그들이 잘못하고 죄지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것, 즉 그들은 자신들을 요셉에게 종들로서 바치는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잘못함”과 “죄지음”이라는 중복된 듯한 언급이 있는 이유는 말씀의 세부적 측면에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잘못(transgression)”은 진리에 대한 악행을, 고로 보다 덜 악한 것을; “죄(sin)”는 선에 대한 악을, 고로 보다 더 큰 악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 모두가 언급되는 것인데, 다른 구절들에서 이를 읽어보자:
야곱은 라반에게 말했다, 나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내 뒤를 따라 추격해왔다 (창. 31:36).
이사야서에서:
나는 너의 잘못들을 구름 같이 지워없앨 것이다, 그리고 너의 죄들을 구름 같이 (지울 것이다) (이. 44:22)
에스겔서에서:
그가 잘못한 그의 잘못함에서, 그가 죄지은 그의 죄 안에서, 이것들 안에서 그는 죽는다
(겔. 18:24).
다시:
당신의 잘못들이 밝혀지는 한편, 모든 너의 일들 안에서 너의 죄들이 나타날는지 모른다
(겔. 21:24).
다윗서에서:
잘못되어짐이 용서되는 자는 복있다, 죄지은 것이 덮어지는 자는 복있다 (시. 32:1).

그 이유는 그들이 너에게 악으로 갚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흘러드는 선과 진리로부터 돌아서 버렸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악”의 의미가 돌아서 버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선과 진리로부터 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요셉에게 갚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은 천적 부분(평면), 그리고 내적 선이고, 이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있는 유입에 주목하면 이렇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가지시고 인간의 내적 부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드신다, 하여 선은 생명과 그것의 열을 주는데 이것은 사랑이고, 진리는 계발함과 그것의 빛을 주는데, 이것은 신앙이다. 그러나 이 유입함이 더 전진할(advance) 때, 즉 외면들 쪽으로 발전할 때, 거기서는 거절함, 타락시킴, 질식시키는 악들과 더불어 있게 된다; 이때 거절, 타락, 질식시킴의 정도에 따라서 내면들은 그 정도만큼 닫혀진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여기저기 흩으러져 조금씩 남고 유입의 통로 역시 갈라진 틈새 수준으로만 열려 있다; 이로부터 거기에 인간에게 생각하는 것과 뜻하는 능력이 남아 있으나 진리와 선에 대하여는 맞서 있다. 어쨌든 이 닫힘은 악의 정도에 따라서 외면의 것들을 향하여 더욱 더 꿰뚫는다 (스며든다, 통과해간다, penetrate), 하여 이것은 감각적 수준 쪽으로 내려간다, 이로부터 이때 생각함이 온다. 그다음 쾌락(pleasure)들과 열망(craving)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이런 상태에 지옥들이 있다; 그 이유가 이익과 명예와 명성을 위하여 생각했었던 선하고 고귀한(올바른) 것에 대한 것은 다른 삶에 오는 악한 자로부터서는 그것 모두를 떼어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이 악한 자는 감각적인 것 안에 있는다.

그리고 지금 바라건대 당신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의 잘못을 용서 하소서. 이는 회개, 그리고 교회 속에 신성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부디 잘못을 용서하소서”의 의미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함, 그리고 회개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의 의미가 교회 속의 신성한 것들을 인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신들을 “그의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이라 일컬음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의 하느님을 섬길 것임을,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신성한 것들이 있음을 인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여기서 “아버지”에 의해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이 그에게 말했을 때 울었다. 이는 사랑으로부터 수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슬픔과 사랑 모두를 의미한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의 천적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수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유입이 “요셉”인 내적 부분의 천적 측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용함은 요셉의 “형제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수단으로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셉에게 말했을 때, 그는 울었다”에 의해 사랑으로부터 수용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와서 그 앞에 엎드렸다. 이는 내적 부분 아래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요셉 앞에 엎드림”의 의미가 복종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그의 “형제들이 가서 요셉 앞에 엎드렸다”의 의미가 내적 부분 아래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복종함이다가 분명해진다. 이 장의 주제는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를 다시 설립하심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자연 부분(평면)의 것들이 내적 부분(평면)에 복종함이다; 따라서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 평면의 것, 또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들이 영적 평면, 또는 내적 인간에 (완전) 복종함이 있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주님의) 영적 교회(a spiritual Church)의 설립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에 속한 진리만이 인간을 선점하고, 선행에 속하는 선이 그 하위 등차에서 있는 한, 그 만큼에서 자연적, 외적 인간은 영적 또는 내적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이 지배력을 확보하자마자, 자연적, 외적 인간이 자신을 복종하게 내놓아지고, 이때 인간은 영적 교회가 된다. 이는 인간은 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자연적 인간(평면)이 애착과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 없이 자기가 애착하려는 것과 반대되는 쪽으로는 절대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애착 자체, 애착함의 요구에 따라서 있어지는 추론력이 지배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기쁨들을 조절하여 그것에 너무 흠뻑 취하지 않게 경감되게 하거나, 억제하거나, 제압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눌러버리기까지 (정복) 할 수 있다(subdue). 또한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채우고 있는 오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이것이 거듭되다 보면, 차츰 자연 평면의 많은 사항들을 점유하여 마지막에는 완전 정복하는 것, 즉 자연 평면 전체가 복종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다. 하여 이 복종함이 인간의 쾌락들(pleasure, 기쁨들) 사이에 있어진다. (즉 사사건건에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마다, 즉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따른 생활이 기쁨이 되어 있다. 역자주) ; 이후 자연 평면은 쉼에 있고, 일치함에 놓여 있는다. 그리고 일치함에 놓일 때, 내적 부분의 유쾌함에 동참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이 내적 부분에 복종함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는지 모른다. 이것이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보라,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처신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자신의 자유함 없이 있는다 이다로부터, 고로 자신의 자유 의사대로 하지 않는다 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 마시오. 이는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두려워 말라”의 의미가 그들은 근심에 있지 않아도 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말로부터, 즉 그들을 위로하여 걱정을 떨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에 의해서는 재 창조가 의미된다.

내가 하느님을 대신하리이까? 하느님이 설비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하느님을 대신할까?”가 하느님이 있으심이 아니고, 하느님이 설비하신다는 것이 의미되는 질문 형식의 말투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생각했다. 이는 멀어진 것들은 악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어진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에 대해 악을 생각했을 때, 그때 그들은 멀리되어진 것들을 표현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위에 악을 생각함”의 의미가 악을 의도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에 맞서 생각함은 악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멀어진 것들은 선을 의도할 수 없기에 악밖에 더 의도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 경우를 조금 더 주목하면 이렇다: 선과 진리로부터 멀어진 이들은 악밖에 더 의도하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선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의도한 것들은 실상 그를 통치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의 모든 생각들 안에, 그의 지극히 작은 것(행동) 안에도 있다; 그 이유가 의도나 목적이 인간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 목적은 그의 사랑이기 때문, 그리고 그의 사랑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그가 가진 목적과 똑같고, 천국의 빛에서 있는 그의 형상이다; 그리고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그의 형상은 그의 의지의 사소한 것에서도 똑같다. 고로 그의 목적이 이러이러하면, 전체 인간 또는 그러그러하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악한 목적이 있는 자는 선한 목적들이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고로 지옥에 있는 자가 천국에 있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목적들이 충돌하기 때문, 그리고 (거기서는) 선한 목적들이 언제나 대승한다, 그 이유는 선한 목적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누구이든 자비만으로부터 천국으로 입장 승인이 있는다고 믿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악한 목적을 자신 안에 지닌 자가 천국 안으로 들어오면, 그는 마치 육체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 같이 그의 생명은 노동을 한다; 게다가 그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야 만다; 이외에도 그는 천국의 빛에서는 악마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리와 선에서 멀어진 이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악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악은 당사자의 생각과 의지의 매우 작은 사항 안에도 있다는 것은 이런 영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멀리로부터 방산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들의 품질이 지각되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생명의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 있는 영적 증기(evapor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을 위하여 생각하셨다. 이는 신성은 그것을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를 의미한다. “선을 위해 생각함”의 의미가 의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이것은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 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그분은 행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이렇게 있는 것 같이 하시려고. 이는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질서에 의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행하심”의 의미가 신성에 관련해 말해질 경우, 질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신성이 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질서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과 같이 있다”의 의미가 영원으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드시려고. 이는 이로부터의 생명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에게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있게 만드심”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많은 백성(great people)” 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진리로부터 선이 있는 것에 비교해서 크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사실상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 그 이유는 선으로부터 만들어내졌기 때문이다; 고로 그것 형체에서도 선이다.
여기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한 말인 즉: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한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그것을 생각하셨다, 하여 오늘과 같이 하시어, 많은 사람들로 살아있게 만드시었다” 인데, 이 말 안에는 천국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하다: 다른 삶에서 주님께서는 지옥의 영들이 선한 자를 시험 안으로 유인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결과적으로 악들과 거짓들을 쏟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게다가 악령들은 전력을 다해 쏟아 붓는다; 이러는 이유는 이러할 때, 그들은 기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 시험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현존하신다, 그리고 지옥의 악령의 거짓들이 끽소리 못하게 논박하시고, 그것들의 악들이 사라지게 하신다, 고로 새로움, 희망, 승리감을 주시딘다. 고로 선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은 더욱 내향적으로 심어져서 더욱 강하게 확증되어진다. 이리하여 영적 생명이 수여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인 즉, 진리와 선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이 시험들을 유발한다는 것, 악밖에 더 행해지는 것은 없다는 것, 그러나 신성은 그 악을 선으로 돌려 놓으신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있는 질서에 따라서 이다는 것, 이로부터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선한 자를 곤경에 몰아 넣는 것은 허용된 지옥의 영들이 하는 짓인 악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온힘을 쏟아 누구이든 천국으로부터 지옥으로 끌어내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생명의 즐거움은 누군가의 혼을 파괴하는 것에서 얻어내기 때문이다; 고로 영원으로까지이다. 그러나 선이 그 시험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주시는 것 외에는 누구도 그들로 해서 지옥으로 빠지는 일은 없다. 즉 선한 자가 지닌 진리와 선이 이 시험들로 해서 더욱 튼튼해지고 모양새를 확실히 가져오는 것만 있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목적이 영계를 보편적으로 통치한다. 하여 제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하심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왕국은 목적(end)들과 쓸모 있어짐(use)의 왕국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제 두려워 마시오. 이는 그들은 걱정하지 말라를 의미한다.

내가 당신들을 떠받쳐 주리다, 그리고 당신들의 아기들도 (기르리이다). 이는 그들은 이해력에 있는 진리와 의지력에 있는 선을 수단으로하여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떠받치다(sustain)”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유입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을 통하여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꼼꼼히 말하면 생명은 내적 부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서 있다, 하여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기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잇는 영적 진리들, 그리고 그것들 안에 있는 순진이 의미되고, 이것들은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신성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살아가진다. “떠받침”이 진리와 선을 수단으로 살아감을 표시하는 이유는 영적 식품이 지식, 총명, 지혜, 고로 진리와 선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이해력에 있고, 선은 의지력에 있다라고 말한 이유는 모든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기 때문, 그리고 선은 의지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이해력은 진리의 저장소이고, 의지력은 선의 저장소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위로했다. 이는 희망을 의미한다. 이는 “위로함”의 의미가 희망을 가지고 마음의 불안을 달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에 말했다. 이는 신뢰를 의미한다. 이는 “심정에 말하다”의 의미가 신뢰를 나누어주다, 즉 악이 닥치지 않는다는 신뢰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말하다(speak)”가 유입을 표시하기 때문, 그리고 “심정”은 의지를 표시한다; 고로 “심정에 이야기 하는 것”은 의지 안으로 유입됨을 표시한다, 그 결과는 신뢰함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다시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의 세부 사항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 “위로함”은 이해력에 속하고, “심정에 말함”은 의지에 속하기 때문;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위로함”이 희망을 의미하는 이유가, 이것이 선을 수단으로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짜 신뢰함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만 가능하고, 진짜 희망은 신앙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에게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22, 23절. 요셉은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과 함께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그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주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살아간다(생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살아간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앞 구절들에서 취급된 주제는 다시 설립되어지는 영적 교회이다; 그리고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이 내적 또는 영적 인간에 완전히 복종한 이후-즉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라고 말하며 엎드린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에서 의미된 것들 이후,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다시 설립된 영적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서,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주함에 의해, 그리고 에브라임으로부터 출생한 아들들, 그리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영적 교회인 인 이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내적 부분으로 살아감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인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종속됨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종속됨의 질서를 위하여 그들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받아들인다, 하여 이 선과 진리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의 저장소들이다. 그러나 영적 교회이지 않은 이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이들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와 선의 확증물들을 주변으로 거절해버리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고로 천국의 빛으로부터 멀리 옮겨져 있다; 하여 그것들의 빈 자리를 거짓과 악을 저장하는데 사용한다.

그와 그의 아버지의 집안.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의 의미함이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요셉은 일백 십 년을 살았다. 이는 상태와 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숫자들의 의미함이 실제의 어떤 것들(real things)이다로부터; 그리고 뾰족하게 말하면, 실제의 어떤 것의 상태와 품질이다로부터알게 된다. “110”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숫자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살아감의 상태와 품질을 포함한다.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의 아들들의 삼 대를 보았다. 이는 지력 측면에 관련하여 교회가 다시 설립됨, 그리고 그것의 파생물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 측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삼 대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파생물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부모로부터의 아들, 아들의 아들인 바, 그들은 부모에 의해 표현되는 것의 파생물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교회를 다시 세우심(설립하심)이 “요셉이 보았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 역시. 이는 의지력 측면에 관련하여 교회가 다시 설립됨, 그리고 그것의 파생물을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교회의 의지력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로부터, 여기서는 “마길의 아들들”인데, 파생물들이다로부터; 즉 교회의 의지력 측면의 파생물들인데, 이는 마길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즉 진리들과 결합한 선들, 고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파생되어져 왔었던 진리들이 선의 형체들이기 때문이다. “마길의 아들들”이 진리들과 결합한 선들을 표시함이 그들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데, 뒤이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함이 사사기서의 책에서 이렇게 의미되어 있다: “마길로부터 입법자들이 내려왔다” (5:14); “입법자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들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진리의 선과 합쳐진 선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무릎에서 낳다”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난 마길의 아들들은 요셉이 그들을 그의 자기 자신으로 인정했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렇게 말해질 경우, 이것은 그들이 그의 자기 자신으로 채택했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헬의 하녀 빌하로부터 출생한 아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아들을 두고 라헬이 말한다:
보라 내 하녀 빌하가 있다, 그녀에게로 가라, 그리고 그녀가 내 무릎에 낳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로 말미암아 건축할 것이다 (창. 30:3).
이 아들들이 요셉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 인정된 이유는 므낫세에 의해 교회의 의지력 측면, 즉 교회의 선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은 선과 더불어서만 흘러들 뿐, 선을 통하지 않는 진리와 더불어서는 흘러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들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난” 자라고 말한 것이다.

24-26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로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25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하고, 말하기를,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26 그리고 요셉은 죽었고, 일백 십년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 있는 궤 안에 놓여졌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죽는다. 이는 교회 속의 내적 부분이 중지된다고 예언함이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이 장의 앞 부분에서 취급된 주제는 교회를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즉 주님에 의해 내적 부분을 통하여 다시 설립함이었었다;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이와 같이(영적 교회)로 있는 것이 중지되는 것이다. 이 때에 관한 예언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마지막에까지 조차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교회의 더 나아간 상태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나는 죽는다라고 말했다”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중지될 것이 의미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교회가 존재를 하려면 내적, 외적 부분이 반드시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교회의 내적 부분(domain, 범위) 안에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외적 부분 안에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는 매우 적고, 후자는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내적 교회가 있는데, 이들 또한 외적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인 외적 교회의 경우도 내적 교회와 분리되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교회와 더불어 존재하는 내적 부분은 매우 희미함 안에 놓여 있다.
교회의 내적 부분은 심정으로부터 선을 뜻하고, 선에 감동되어 있음에 존재한다; 그리고 내적 부분에 속하는 외적 부분은 심정으로부터의 뜻함을 행동 안에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이 행동은 인간이 선으로부터 아는 신앙의 진리들에 따라서 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부분은 대체로 의식들을 경건하게 수행함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선행의 일들을 행함에 존재한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교회의 내적 부분은 의지력에 있는 선행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이 중지될 때, 교회 자체 또한 중지된다, 그 이유가 선행의 선이 교회의 근본(essential,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이 중지된 이후라 해도 외적 예배는 실로 이전 같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때의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의식 준행이다. 즉 이러이러하게 하라고 틀이 짜여졌기 때문에 그냥 보존되는 것일 뿐이다. 예배 같이 나타나는 이 (예배) 의식은 알맹이가 없는 깍지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내적 부분이 없이 남은 외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상태가 이러할 경우, 이 교회는 마지막에 있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이는 마지막 때가 올 것이다를 의미한다. “방문하심이 있다”의 의미가 마지막 때이다로부터, 역사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압제당함의 마지막의 시기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 측면에서는 옛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이다. 말씀에서 이 마지막 때가 “방문하심(visitation)”이라 불리우고, 이 방문은 일반적 측면에서는 교회를 방문하심, 특수적 측면에서는 교회인을 방문하심, 하여 양쪽 모두를; 그리고 태어나지는 새로운 교회를 방문하심, 만기가 되는 옛 교회를 방문하심을; 특별하게는 구원되어지는 교회인을 방문하심, 그리고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자를 방문하심, 모두를 서술한다.
위의 사항들이 말씀에서 “방문하심”, “방문의 날”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누가 복음서에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양할지라; 그 이유는 그분은 방문하시어 그분의 벡성을 해방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느님의 자비의 동정심(bowel)을 통하여, 그럼으로서 높음 위로부터 동틀녘에 우리를 방문하셨다, 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나타나실는지 모른다
(눅. 1:68, 78, 79);
위 구절은 주님이 탄생하실 즈음, 주님에 관한 사가랴의 예언적 말함이다; 이 구절의 “방문하시는” 것은 새로운 교회의 일어남을 표시한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선에 무지한 이들을 계발하심, 고로 무지함에서 해방되게 하심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지는 바, “그분은 방문하시어 그분의 백성이 해방되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방문하셨는 바, 어둠에,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나타나실는지 모른다.”
모세의 책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함께 모우라,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느님이 나에게 나타나셨다, 말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꼭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너희에게 행해진 것(을 방문할 것이다)
(출. 3:16).
다시:
백성은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방문하셨다를 들었다 (출. 4:31).
여기서 “방문하는 것”은 교회가 중지되는 때인 마지막 때를, 그리고 교회가 시작하는 때인 처음의 때를; 이집트인들과 더불어서는 마지막 때가,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더불어서는 처음의 때를 표시한다; 고로 후자의 해방됨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질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내가 방문하는 때까지조차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하느님의 집의 집기들이 오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이 장소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예. 27:22).
다시:
칠십 년이 바빌론에서 충족되었을 때, 나는 너희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선한 말을 너희 위에서 확고히 굳힐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이 장소로 도로 데려다 놓을 것이다 (예. 29:10);
위에서 “방문하는” 것은 해방을 표시한다; 일반적 측면에서는 포로됨과 황무해짐의 마지막 때이다.
“방문하심”과 “방문의 날”이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함을 아래에서 읽는다:
방문하심과 황폐하심의 날에서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것은 멀리로부터 올 것이다; 너희는 도움을 위하여 누구에게로 도망할 것이냐? (이. 10:3)
다시:
보라 여호와의 날이 온다, 잔인, 그리고 분노함, 성냄, 격노함이 땅을 황폐해지게 만들어지게 하신다. 나는 세상에 있는 악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 위의 그들의 불법(을 방문할 것이다) (이. 13:9, 11).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은 추락하는 그들 사이에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방문하심의 때에 그들은 곱드러질 것이다 (예. 8:12).
호세아서에서:
방문하심의 날들이 와진다, 보답(대갚음)의 날들이 와진다 (호. 9:7).
모세의 책에서:
그리고 지금 가라, 백성을 내가 너에게 말했던 곳으로 인도해라. 보라 내 천사가 네 앞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 방문의 날에 나는 그들 위에 있는 그들의 죄를 방문할 것이다 (출. 32:34).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하셨다, 그들은 네 안에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네 방문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눅. 19:44).
“방문의 날”은 주님의 오심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때 계발됨을 표시한다; 그러나 유태 나라에 관하여서일 경우,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아니했는 바,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표현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제물 바침이 중지되었기 때문, 그리고 그 나라는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큰 음성이 내 귀에서 외쳤다, 도성을 방문하심이 가까이 와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손에 파멸의 자기 도구를 가지고 있다 (겔. 9:1);
위도 의미는 비슷하다. 이사야서에서:
르바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당신은 방문하셨다, 당신은 그들을 소멸되게 하셨다 (이. 26:14);
“르바임”은 홍수 이전인 태고 교회의 후손을 표시한다, 이들은 또한 “느빌림”과 “아낙”이라 불리운다; “당신이 르바임을 방문하시고 소멸되게 하셨다”는 이 교회의 마지막 때, 그리고 그들을 지옥으로 내던지심을 표시한다. “방문”은 보답(앙갚음), 고로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이것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냐? 내 혼이 이런 나라에 앙갚음하지 않겠느냐? (예. 49:8).
다시:
나는 내가 그를 방문하는 때에 그 자 위에 에서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예. 49:8).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를 그의 길(방법)들에서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일들에 앙갚음할 것이다
(호. 4:9).

그리고 너희로 하여금 이 토지로부터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토지에로 올라 가게 만드실 것이다. 이는 그들은 고대인들이 있었던 교회의 상태에로 갈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떠나 올라가야 하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황폐된 교회이다로부터; 이 교회가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압제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파멸은 수프 바다(홍해)에서 그들이 익사됨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즉 이스라엘 후손이 올라가야 한다는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고대 교회, 또는 고대인들이 있었던 교회의 상태이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토지라고 지목하심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 이유가 최고의 의미에서 이들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 그리고 표현 의미에서 천국들에 있는 그분의 왕국, 땅 위의 그분의 왕국, 즉 교회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주신다고 맹세하는” 것은 고대인들이 있던 교회의 상태 안으로 그들이 온다를 확증하는 것이다. 사실상 야곱의 후손들은 이런 교회의 수준에 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외적인 것만에 국한되었다, 즉 표현만 했을 뿐, 즉 내용 없는 형식적 교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토지에 와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영적 교회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맹세”가 신성으로부터 확증하는 것이다에 대하여는 2842, 3375항을 보라.) 또한 가나안의 토지가 야곱의 후손에게 약속되고 주어진 이유는 그들이 교회를 표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대 때로부터 교회가 있어 왔기 때문에 그곳의 모든 장소의 이름들은 (천국에서 이미) 명명되고 표현 의미를 이미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라고 했다. 이는 묶음을 의미한다.

방문하시는 하느님이 너희를 방문하실 것이다. 이는 교회의 이런 마지막이 올 때를 의미한다. 이는 “방문함”이 교회의 마지막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내 뼈를 여기로부터 올라 가게 만들어라. 이는 거기에 교회를 표현함이 있을 것임을, 그러나 내적 부분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는 표현 교회는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에 의해 교회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에, 그의 “뼈”에 의해서는 (교회의) 가장 외적인 것, 또는 교회의 최말단의 것, 고로 교회를 표현함 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고대 교회에서 있어왔었던 표현들, 또한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제정되어진 표현들은 교회의 최말단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 표현물들(장소, 인물, 건물 등등)이 표현하고 의미한 것들은 교회의 내적 부분들이었다. 이 내적 부분들은 “영이 있는 살”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러나 “뼈”에 의해서는 최말단들이 의미되어진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것은, 내적 부분 없는 외적 부분만으로 교회가 있을 때, 이런 교회의 품질은 살이 없는 뼈로만 된 인간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죽었다. 이는 교회의 내적 부분의 존재함이 중지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이전 같이 있는 상태가 중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백 십 년의 아들. 이는 그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110 년”의 의미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의 생명의 상태와 품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방부 처리를 했다. 이는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방부 처리를 하다”의 의미가 악의 접촉 전염으로부터 보존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마지막이기에, “교회가 있기를 중지할 때 (내적 부분은)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에 대하여 좀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인간과 더불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 중지할 때 거행된다. 이때에도 외적 부분은 여전히 과거 내적 부분이 있었을 때와 같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때 내적 부분은 인간 당사자와 더불어 실제로는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 설사 생각한다 해도 그것에 감동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이 내적 부분은 인간 당사자와 함께 하는 천사와 더불어 있다. 그리고 황폐된 교회 속의 인간은 내적 부분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감동되는 일도 없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은 당사자로 인해 상해를 받아 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알고 있는 것, 특히 그가 믿었던 것이 당사자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모르거나, 존재하는 것을 믿지 않거나 하고 한다면 피해를 입힘 자체를 생각해볼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 방식에서 교회의 내적 부분은 보존되어진다, 하여 어떤 악도 영향을 줄 수 가 없다. 이렇게 하여 교회의 내적 사항들은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인 것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내적인 것을 알려 하지도 않았다; 고로 교회의 내적인 것들은 그들에게 밝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 말한 것들이 “보존되어짐”에서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서 궤 안에 놓여졌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숨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궤”의 의미가 저장하는 것, 숨겨지게 하는 어떤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때 당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고대 교회에 있어왔던 표현과 의미들에 관한 지식들이다. 이것들 안에 내적 부분이 숨겨 놓임이 전술한 말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궤”가 어떤 것이 저장됨, 또는 어떤 것이 숨겨 놓임을 표시하는 것은 증거의 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 궤 안에 십계, 또는 법이 저장되었다.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포함되는 내적 의미가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 안에서 모든 것들은 48, 49장의 예언적 부분들 말고는 대체로 역사적이다. 예언적 부분은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파악이 불가능하게 글자 자체가 나타나지고 있다. 역사적 형체로 된 글자의 경우는 그것의 내적 의미로부터 떼어낼 수 도 있다. 내적 의미가 글자 의미와 완전히 다른 구절의 경우는 분리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주제로) 취급하고, 글자 의미는 세상적, 지상적인 것들을 (주제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 두 의미들은 사실상 불연속적, 등차가 다른 평면에 있기 때문, 마치 상응이라는 층계가 없으면 오가지 못하는 윗층과 아래 층의 경우와 유사할지 모른다 역자주) 지금까지 내적 의미가 각 절의 단어 하나하나로부터 설명되어 왔다, 특히 천국으로부터 나에게 이런 내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받아쓰게 해주셨기에 가능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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