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장 해석

창세기 제 49 장

1, 2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그러모으라,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2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고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진리들과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르다”의 의미가 질서 안에 놓는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그들을 함께 부르는 이유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이 질서 있게 배열되어 표출되게 하려는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장의 내적 의미에서 표현되고, 여기서 의미되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에 주목해보자: 이미 살핀 바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은 하나로 된 복합(one complex, 그것들의 전체 their entirety)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 고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결과적으로 천국 안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그리고 천국을 구성하는 이것저것들을 일반적 측면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반적 측면에서 모두 표현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측면에서 개별적으로도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일반물은 그것 안에 특별한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체가 부분들을 아우르는 것과 같다.
천국에 있는 빛들은 선들과 파생되는 진리들에 일치하여 다양해진다, 그리고 빛들에 일치하여 총명과 지혜의 상태들이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빛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반짝거렸고 흔들거렸다(quiver), 그리고 이것은 질문을 만든 주체의 상태에 일치하는 다양함과 더불어서 였다. 이것이 거행된 이유는 열두 지파들을 수단으로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었기 때문, 하여 지파들이 가슴받이에, 즉 우림과 둠밈에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각 지파 당 한 개의 보석을 거기에 박도록 명령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석인 이유는 그것들이 영적, 천적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석들이 앉혀지게 한 금은 선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림과 둠밈에 의해 의미되어진 비밀이다.
열두 지파가 이런 의미를 가진 것은 그들이 언급되는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특히 여호수아서의 가나안의 토지에서 지파들의 상속분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그들의 상속분으로부터, 이는 에스겔서의 마지막 장들에서이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땅, 새로운 예루살렘, 새로운 성전에 관해 읽는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이다 (계. 7:4-8); 또한 그들이 광야에서 진영을 펼치는 질서로부터, 이 질서는 진정한 질서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의 이모저모이다. 그러므로 발람의 예언적 발음이다; “발람이 자기 눈을 들어올려, 이스라엘이 각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발람 위에 왔다. 그는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너희 성막들은 얼마나 좋은지, 오 야곱아! 너 거주민 오 이스라엘아! 그들이 심어진 것은 골짜기들 같고, 강가에 있는 동산 같고, 여호와께서 심으신 백단향(sandal-wood)나무 같고, 물가에 있는 삼나무들 같다” (민. 24:2-6).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함께 그러모으라. 일반적인 측면에서 있는 모든 것을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그러모으다”의 의미가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이다로부터, 즉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사랑의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 모두이다.

그리고 나는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이는 그들이 그때 있었던 질서에서 있는 교회의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일어날 것을 말함”의 의미가 교통하고 미리 말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끝”의 의미가 그들이 함께 있는 상태의 마지막 국면(final phase)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날들”은 상태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end)”은 마지막(last, final) 국면이다; 고로 날들의 끝은 상태의 마지막 국면이다, 즉 마지막 국면에서 질서적으로 함께 있을 때의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과 선들이다. 교회의 상태가 의미되는 이유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에 의해 교회가 표현되었고; 그의 아들들 또한 교회를 표현했다. 상태의 품질이 뜻해지는 이유는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의 표현함이 지파들, 또는 야곱의 아들들이 말씀에서 언급된 순서에 따라서 있기 때문이다. 르우벤이 첫 번째로 언급되는데, 이때 교회의 품질 중의 하나가 언급된다, 즉 르우벤이 처음 언급될 때는 신앙이라는 신앙의 품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유다가 처음 언급될 때는 사랑이라는 신앙의 품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떤 다른 것이 처음 언급되는 경우도 마차가지로 달라진다. 또한 품질은 처음 언급된 지파 뒤를 따라 언급되는 질서에 따라서도 다양해진다. 그러므로 사실상 무수하게 출시된다, 그렇다, 무한하게 다양함들이다, 그리고 열두 지파들에 의해 의미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과 선들이 특수적인 다양함들을 가지게 될 때, 각 진리와 선은 무수한 것이 되고, 이것은 그것들 각각이 또 다른 얼굴을 일반적 측면에서 갖게 한다; 이 특수적인 진리들과 선들이 무수한 낱개의 다양함들을 가지게 된다; 등등이다. 발생한 무한한 다양함들은 자연 평면에서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열두 지파가 말씀에서 하나의 질서에서 언급될 때, 다른 의미들을 가진다; 고로 (다양함 때문에) 그들이 다른 부분에서 언급될 때 또 다른 의미들을 가진다. (여기서의 경우가 그 하나의 예이기도 한데,) 이 장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것들은 말씀의 다른 곳에서와 다르다.

너희 자신들을 소집하라.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소집하다(assemble, 모으다, 조립하다)”의 의미가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히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소집하는” 것은 이외 다른 뜻은 없기 때문이다, 즉 진리들과 선들은 질서대로 놓여지지 않으면 모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보편적인 유입이 이를 결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것들 안에 아주 미세한 것들까지 내려가는 모든 낱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함께 모아진 모든 것들이 보편적 유입이고, 이 유입이 천국들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질서로 환원한다. 보편적 유입이 이를 행할 때, 선들과 진리들은 마치 자신들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 앉혀 놓은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그것들이 그것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질서 안으로 흐르는 것처럼 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보편적 유입에 의해 질서 안에서 계속적으로 보존되어진다. 일반적 측면에서의 천국들의 사회들도 경우는 이와 같고, 특수한 측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나 영들이 소집되자 마자, 그들은 즉시 자신들에 관련된 질서 안으로 배치되는 바, 이것이 천국의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 이것이 천국의 형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거행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일반적 유입이 참으로 미세한 사항에 이르기까지에서 포함되어야 하는 것, 즉 미세한 것까지도 가장 완전한 질서 안에 포함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상상하듯, 어떤 보편적 유입이 미세한 낱개적 사항들이 포함됨 없이 있는다면, 하여 인간, 영, 천사들 각각이 낱개들을 좌지우지 한다면, 질서 대신 거기에는 혼동만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천국도, 지옥도, 인류도, 심지어 자연계조차 있어질 수 없다. 이것은 인간과 더불은 많은 것들로 예증될는지 모른다. 인간 당사자의 생각들이 보편적으로 질서잡혀 있고, 동시에 사랑의 애착함들에 의해 낱개적으로도 정돈되지 않으면, 그의 생각들이 합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그것을 위하여 흐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행동들과 더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보편적, 낱개적 측면에서의 혼이 신체의 각 기관 안으로 흘러들지 않으면, 육체가 질서있고 정상적 운행이 거행될 수 없다; 그러나 낱개적, 보편적 측면에서 혼이 흘러들 때, 신체의 모든 것들은 자체들에 관하여 질서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알게 되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이 자체들을 질서 안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림되었을 것이다.

들으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아.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서 들으라. 이는 영적 선에 의해 그들에 관하여 예언됨, 최고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음을 의미한다. 이는 “듣다”의 의미가, 즉 날들의 끝에서 발생할 것을 듣는 것은 예언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예언함이 “날들의 끝에서 발생할 것을 들음”에 의해 의미되었기 때문에, 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미리 보셨음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예언은 주님의 미리 보셨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에게 듣는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주님에게서 듣기 때문, 즉 말씀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듣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께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에 관하여 말씀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야곱의 이 아들, 저 아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런 저런 진리와 선에 관하여 그분이 예언하신 것들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분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여기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의해 의미되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치시고 예언하신다; 그리고 “유다”에 의해 의미되는 천적 선에 관하여도, “요셉”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선에 관하여도, 나머지 아들들에 의해 의미되는 이것저것 모두를 가르치시고 예언하시고 있다.

3, 4절. 르우벤, 내 장자, 너는 내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4 물 같이 가벼운 바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bed) 위에 갔고,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르우벤, 내 장자. 이는 신앙이 외견상으로 앞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첫 출생”의 의미가 앞의 위치(prior place)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는 내 강함이다. 이는 신앙을 통하여(수단으로) 선에 힘(power)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너”인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강함(strength)”의 의미가 선 안에 있는 힘(power)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힘(power)에 주목해보자: 즉 생각하는 힘, 뜻하는 힘, 지각하는 힘, 선인 것을 행하는 힘, 거짓들과 악들을 흩뜨리는 힘, 등등인데, 이것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의 모든 것이다; 선이 주체이고, 진리는 도구적인 것이다. 본문의 강함(세기, strength)이 선 안에 있는 힘(power)을 의미함에 비해 “기세(기력, forces)”는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기세의 시작”이 바로 뒤를 이어 말해지고, 이는 진리에 있는 첫 힘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씀의 원어에서 “기세”는 진리를, “강함”은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거룩하다는 것, 그리고 말씀의 내면은 가장 거룩하다는 것은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들 안에 천국의 결혼이 있다는 것,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모든 세부 사항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그분의 왕국과 교회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의 신성 자체와 신성한 인간의 합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장 거룩한 사항들이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안에 있다. 이는 말씀이 신성으로부터 내려왔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것이 그러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은, 선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진리의 언급 또한 있다는 것; 내적 부분이 말해지는 곳에서는 외적 부분도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을 꾸준히 의미하는 단어들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꾸준히 의미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도 있다; 만일 그것들이 선과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선과 진리를 서술하거나 그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어들이 서술하고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미 말했듯이, 모두 각각의 세부 사항 안에 선과 진리의 결혼, 즉 천국의 결혼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 최고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 있는 신성의 결혼, 고로 주님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결혼은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의 경우,“너는 나의 강함이다, 그리고 내 기세의 시작이다”, 또는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라고 표현하여 결혼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강함”은 선에 관련되고, “기세”는 진리에 관련된다; 그리고 “탁월함이 우수하다”는 진리에, “힘이 우수하다”는 선에 관련된다. 르우벤에 관해 이어지는 말에서, “너는 네 아버지의 침대에 올라갔다;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에 올라갔다.”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말에서: “그들의 성냄은 저주받을지라, 그 이유는 격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는 저주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단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에서 나누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을 흩뜨릴 것이다” (7절); 여기서 “성냄”은 선으로부터 돌아섬을, “분노”는 진리로부터 돌아섬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곱”은 교회의 외적 부분을,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네 형제가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게 절할 것이다” (8절); 다시: “그는 자기의 어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13절). 단에 관하여: “그는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 작은 길에 있는 독사일 것이다” (17절).
똑같은 것이 시편서와 예언서들에서 발생한다, 이사야서에서: “바벨은 영원히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대대로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때는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날들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13:20, 22). 다시: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으라, 너희는 읽으라; 이것들 중의 하나도 빠진 것이 없어 이쪽이 다른쪽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분이 입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이 그것들을 그러모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분이 그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손이 재어서 그들에게 분배하셨다. 그들은 그것을 영원까지 소유할 것이다, 대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 34:16, 17); 이외에도 예로 들 수 있는 구절은 수천 절도 족할 것이다. 말씀에 있는 표현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사항들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은 선을, 어떤 것은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위의 예로 든 구절만 가지고도 거기서 거의 비슷한 말을 왜 반복했는지를 모를 수밖에 없다. 하여 지면만 낭비하는 듯 지루하게 여길지 모른다. 이럼으로 말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대목에서는 경멸적인 느낌을 내비친다. 그들의 속내야 어찌 되어가든 이런 반복된 대목 안에 참으로 신성한 사항들이 저장되고 있다. 즉 천국의 결혼, 이는 천국 자체이다; 그리고 신성의 결혼, 이는 주님 자신이다. 이 의미가 주님이 계시는 “영광”이다, 그리고 글자 의미에서는 이 영광이 있는 “구름”이다.

그리고 내 기세(氣勢)의 시작이다. 이는 이 신앙을 통하여 진리에 첫 힘(개시하는 힘)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기세의 시작”의 의미가 처음의(개시하는)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기세”는 진리를 서술하는 바, 진리에서의 첫 힘이 의미된다, 이와 같은 의미가 이사야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지쳐버린 자에게 강함을 주신다, 그리고 기세가 없는 자에게 그분은 힘이 불어나게 하신다 (이. 40:29)
위에서 “강함”은 선을 서술하고, “기세”는 진리를 서술한다, 그리고 “힘”은 양쪽 모두를 서술한다. 신앙을 통하여 선에 힘이 있고 진리에 첫 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르우벤, 너는 나의 첫 출생, 너는 나의 강함, 나의 기세의 시작이다”에 의해 의미되는 지를 조금 더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영계에 있는 모든 힘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부터 있다, 선 없이 진리는 무엇이든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몸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은 이 몸의 혼 같다. 혼이 무언가를 행하기 위하여 몸을 수단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백한 바, 선이 없는 진리는 무엇이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혼이 없는 육체 같다는 말이다, 이때의 육체는 송장이다, 진리도 선 없이는 마찬가지 형국이다.
선을 통하여 진리의 신앙이 처음 출생할 때, 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 힘이 “신앙을 통하여 진리에 있는 첫 힘”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기세의 시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생득권(장자권)”이 취급되는 다른 구절을 읽어보자:
그분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첫 출생을, 함의 천막들에서 기세의 시작을 쳐죽이셨다 (시. 78:51).
다시:
그분은 그들의 토지에서 모든 첫 출생을, 모든 그들의 기세의 시작을 쳐죽이셨다 (시. 105:36).
신명기서에서:
그는 미움받는 자의 첫 출생의 아들을 인정하여, 그에게 그를 위하여 발견되는 모든 것의 두 부분을 줄 것이다; 그는 그의 기세의 시작이고, 생득권의 권리가 그의 것이다 (신. 21:17).
첫 출생에 의해 진짜 의미에서 선행 속에 있는 선이 의미되나, 나타남(외관)에 따른 의미에서는 신앙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 둘은 교회의 기초들이기에, 고대인들에 의해 “아버지의 강함, 그의 기세의 시작”이라 불리웠다. 이와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모두 각각의 첫 출생은 여호와, 또는 주님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첫 출생 대신, 레위 지파가 받아졌고, 성직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 세상의 거의 누구도 선으로부터 진리에 힘이 있음의 본성을 아는 자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삶에 있는 이들에게는 익히 아는 사항들이다; 고로 이런 의미는 거기로부터의 밝히 알게 해주심(계시)에 의한 것이다.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이들은,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에 있는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힘 안에 있다. 이 힘 안에 모든 천사들이 있고, 이로부터 천사들은 말씀에서 “힘들(권능들)”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악령들을 제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 한 명의 천사가 수 천의 악령들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 그들이 이런 힘을 주로 발휘하는 때는 인간과 더불어 있을 때, 그를 많은 지옥들로부터 방어할 때이고, 그것은 수 천천의 방법에서 실행된다.
그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을 가지는 바, 주님만이 그들 안에 있는 힘이다.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있는 이 힘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뜻하여 있다:
이 바위 위에 나는 나의 교회를 건축할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큰 문들이 그것에 맞서 세력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천국들의 왕국의 열쇠들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묶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들에서 묶일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푸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들에서 풀릴 것이다 (마. 16:18, 19);
위 구절이 베드로에게 말해졌다, 그 이유는 배드로에 의해 신앙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베드로”라고 불리우는 말씀의 어디에서 이든, 내적 의미에서 신앙이, 최고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주님이 의미된다.

탁월함이 우수하고 힘도 우수하다. 이는 영광과 거기로부터 파생된 주권을 의미한다. 이는 “탁월함이 우수하다”의 의미가 영광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탁월하면 영광 안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이 우수하다”는 주권(sovereignty)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힘있는 자가 주권을 쥐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의 “영광(glory)”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주권”은 선행 속에 있는 선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므로 영광과 주권이라 말해진다, 즉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다.

물 같이 가벼운 바. 이는 신앙 만으로는 이와 같은 영광과 주권들을 가지지 못한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물 같이 가볍다”의 의미가 무게가 없다, 또는 힘이 없다 이기 때문이다. 신앙만이,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뜻해지는 이유는 이어지는 대목에서, 즉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관하여 이어지는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그들의 이름 아래 신앙만, 또는 분리된 신앙이 취급된다.

너는 우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영광도, 주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탁월함에서, 힘에서 “우수하지 않다”의 의미로부터 알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살폈다. 이런 신앙에서는 영광도 주권도 없다.

그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의 선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더러운 결합을 가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다”의 의미가 더러운 결합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즉 선행의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만일 여기서와 같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되는 신앙인 교리에 있는 신앙, 또는 이해력에 있는 신앙이 선 쪽으로 개시되지 않거나 선과 결합하지 않거나 한다면, 그것은 흩터지거나, 효력이 없거나 되어 있든지, 또는 악하고 거짓인 것 쪽으로 개시하거나 결합해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 의미된 더러운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때 이것은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러하다는 것은, 신앙은 선밖에 어느 곳에도 거처할 곳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고로 만일 거기에 거처할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무익해지거나 악에 들러붙는다. 이는 다른 삶에서 선행 없이 신앙만 있을 경우 그들의 신앙은 흩터지고 마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악과 결합했다면, 그들의 몫은 모독과 더불어 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간음(adultery)”은 선에 섞음질하는 것을, “매춘(whoredom)”은 진리를 거짓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러운 결합은 금지된 수준들이라 불리워져 (레. 18:6-24), 모독의 다양한 종류가 의미된다. 이 본문 역시 모독이 의미되는 것이 분명하다, 즉 “너는 네 아버지의 침대 위에 갔다, 그때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그는 내 침상 위에 갔다.” 이것이 분리된 신앙을 수단으로 선을 모독함을 뜻하는 것은 르우벤의 사악한 행위가 벌어졌던 (창. 35:22) 대목에서 이미 살핀 바 있다.
신앙만, 또는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과 더불은 경우는 이렇다: 만일 이것이 악과 결합한다면 (이는 누군가가 처음에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믿고, 후에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에 반대되게 생활할 때 발생된다), 이때 이것은 모독이 된다; 그 이유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와 선행 속에 있는 선이 처음에는 교리와 생활을 수단으로 내면들에 뿌리를 박았는데, 그 후에 거기에 악을 불러들여 악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다른 삶에서 최악의 장소가 이런 부류의 인간이 오는 것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자와 더불은 악은 그로부터 떼어내질 수가 없기 때문, 그래서 다른 삶에서도 그들은 특별 분리되어 관리된다; 이런 인간은 그의 내면들에 저장된 어떤 리메인스도 없다, 그 이유가 (그의 내면들에 악이 들러붙었기에) 그들은 악 안에서 깡그리 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자의 지옥은 먼 거리에서 앞쪽 왼쪽에 있다, 이들이 천사의 시각에서는 해골 같이 보여 생명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를 모독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주님이 미리 보신 바) 거듭남의 싹수가 전혀 없는 자들의 경우, 악 안에, 이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것이 허용된다, 이때 그는 모독할 수는 없다.

그 다음 너는 그것을 모독했다. 이는 만일 그것이 악과 결합했다면 모독함은 존재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는 내 침상(couch)에 올라 갔다. 이는 그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을 오염시켰다를 의미한다. 이는 “침상에 감”의 의미가 모독함으로 오염시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5-7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6 그들의 비밀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7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이다. 이는 의지에 있는 신앙, 그리고 선행을 의미하는데 여기서의 선행은 거꾸로의 선행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에 있는 신앙 이다로부터; 그리고 레위의 표현함이 선행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 거꾸로의 것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신앙이 르우벤에 의해 표현될 때(4절), 이에 뒤잇는 것이 시므온과 레위에 의한 의지에 신앙이 없음, 고로 선행도 없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그것들의 시작으로부터 시리즈에서 뒤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에 의해서는 의지에 있는 거짓이, 레위에 의해서는 행동에 있는 악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은 의지에 있는 신앙, 선행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저주받음으로부터 분명하다.

폭력의 도구들이 그들의 칼들이다. 이는 교리적인 것이 선행의 일들, 이리하여 선행 자체를 파괴하는데 충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폭력의 도구들”이 선행을 파괴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로부터 (“도구들”이 섬김 속에 있는 것들을 표시하고, 그리고 “폭력”이 선행의 파멸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검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검들(swords, gladius)”은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하고, 이를 수단으로 거짓들과 악들에 맞서 전투가 치러진다(2799항), 고로 “검(machaera)”은 교리적인 것들(종교적 가르침)이다. 여기서는 교리적인 것을 수단으로 진리와 선에 맞서 전투가 치뤄짐, 이리하여 진리와 선이 소멸됨이다, 그 이유는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거꾸로 세력을 떨치기 때문이다.
신앙만에 있는 종교적 지식들(교리들)이 선행을 파괴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선행의 일들 없이 신앙만을 수단으로 구원된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일은 필요 요건이 아니다는 것, 설사 그의 전 인생이 어떤 식으로 살아와졌던지 이에는 마지막 한 시간 전까지도 포함된다는 것, 게다가 간음자였던, 잔인했던 자이든, 모독을 일삼았던 자이든 모두가 구원될 수 있다는 것, 구원은 천국으로의 입장 승인이고, 이는 각자 삶의 마지막에서라도 입장 승인의 은총을 받는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여 어떤 자는 자비로부터 뽑혀지고, 어떤 자는 무자비함으로부터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 등등이다. (아마 이 책이 쓰여진 이전으로 계산하면 한 5백년 전 이상은 족히 넘는데 그때의 경우는 문맹 시대여서 성직자가 위 같이 말해도 먹혀들었지만, 인터넷으로 성직자가 한 말을 조사하고 비교하고 재검토가 가능한 시대가 열린 지금이야 신앙만으로 구원은 가능함이라는 교리로 점철된 신학교를 나왔다 해도 무리수를 두어 억지 주장을 대놓고 할 수준 이하의 성직자는 없을 것이다고 생각해본다. 역자주) 설사 간음자가 천국에 왔다 할지라도, 거기는 생명과 생명의 교류가 그 당사자를 거기서 거주할 수 없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그가 거기서 자기 생명의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자기 생명을 드넓게 발휘하여 속이 시원할 가장 깊은 지옥으로 가기를 소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이 싸우고 살육하는 거짓을 의미하는 것을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붉은 또 다른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자에게 땅으로부터 평화를 가져가는 것이 주어졌다, 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큰 검이 주어졌다 (계. 6:4).
다시:
만일 누군가가 검으로 죽인다면, 검을 가지고 그가 죽여질 것이다 (계. 13:10, 14).
“폭력”이 선행에 타격을 가한 폭력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폭행자는 중지될 것이다, 조롱자는 소진 될 것이다, 불법을 영글게 한 모든 자는 절멸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죄짓게 만든다, 그리고 큰 문에서 사람을 꾸짖어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텅빔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 29:20, 21);
위 구절에서 “폭행자”는 원어에서는 또 다른 단어로 표현하나 의미는 거의 같다; “폭행자”는 선행에 상해를 입힌 자이다는 것이 “사람을 말을 가지고 죄짓게 만든다”, 그리고 “의로운 자를 텅빔으로 들어서게 하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다시:
그들의 일들은 불법의 일들이다, 그리고 폭력의 행위가 그들의 손 안에 있다. 그들의 발은 악쪽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그들은 순진한 피를 서둘러 흘리게 만든다 (이. 59:6, 7);
위에서 “폭력”은 선행에 가한 폭력이다, 이것 또한 “피를 흘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다시:
폭력이 네 토지에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네 경계내에서 황폐해짐과 파괴가 없을 것이다 (이. 60:18);
위에서 “폭행”은 선행의 파멸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 파멸로부터 “토지, 즉 교회의 황폐함과 파괴”가 오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폭력과 황폐를 외칠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말이 나를 꾸짖어 내가 온종일 수치함에 있기 때문이다 (예. 20:8);
위에서 “폭력”은 영적인 것들에 있는 폭력을 표시한다, 고로 선행의 파멸과 신앙의 파멸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토지가 피들의 심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도성은 폭력이 가득하다 (겔. 7:23);
위에서 “피들의 심판”은 신앙의 파멸, “폭력”은 선행의 파멸을 표시한다.
다시:
만일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폭행하는 것, 피를 뿌리는 것, 이런 짓들을 누군가에게 행하는 자이다면: 만일 그가 산들 위에서 먹었고, 그의 동료의 아내를 더럽혔다면,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했다 면, 약탈품을 가로채고, 저당물을 내주지 않는다면, 자기 눈을 우상들에게로 들어 올리고, 역겨운 짓을 한다면, 돈놀이에 주어서 이자를 받아 먹었다면, 그는 살 것이냐?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정녕 그는 죽는다 (겔. 18:10-13);
위에서 “폭행하고 피를 뿌리는 아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파괴하는 선행의 모든 일들이 열거되고 있다; 고로 “폭행하고 피를 뿌리는 아들”은 선행과 신앙의 파괴자이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시여 저를 악인으로부터 구출하소서, 저를 폭행자로부터 보전되게 하소서, 그들은 그들의 심정에서 악들을 생각합니다, 온종일 그들은 전쟁을 위해 함께 모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뱀 같이 그들의 혀를 날카롭게 합니다,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사악한 자의 손으로부 터 저를 지키소서 오 여호와여; 저를 폭행자로부터 보전해주소서. 혀의 사람이 땅위에서 존속 못하게 하소서; 악으로 그를 뒤엎도록 폭력의 사람을 사냥하게 하소서 (시. 140:144, 11);
“폭력의 사람”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들을 파괴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들이 이 진리들과 선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 그들이 “전쟁을 위헤 온종일 함께 모인다, 뱀같이 혀를 날카롭게 한다, 그들의 입술 아래 독사의 독이 있다, 그리고 악이 그를 뒤엎으려고 그를 사냥한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 구절 외에, 겔. 12:19; 욜. 4:19; 말. 2:16, 17; 습. 3:4; 시. 18:48; 55:9-11; 58:3-6; 신. 19:16 도 더 찾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비밀(스런 장소) 안으로 내 혼은 가지 말지라. 이는 영적 선은 그들의 의지 속에 있는 악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를 자신에게 말하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비밀함으로 가지 않음”의 의미가 알기를 바라지 않음, 즉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 의미된 의지 속의 악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음이다로부터: “내 혼”이라 말해지는 이유는 여기서 영적 선을 갈망하는 선의 생명이 의미되기 때문; 그것의 진리의 생명은 이어지는 말에서 있는 “영광”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거기서 파생된 그들의 생각 속의 거짓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들의 회합에 연합하지 않다”의 의미가 그들의 생각 속의 거짓들과 결합하기를 바라지 않음, 고로 그것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음이다 (생각 속의 거짓이 “회합”에 의해 의미된다, 이것은 마치 “무리들” 같이 진리들을 서술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들이다); 그리고 “영광”의 의미로부터, 이것은 진리를 서술한다, 그 이유가 진리는 영적 선에 있는 이들에게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자신들을 깡그리 돌아서게 했다, 이렇게 방향을 틀어 버리는 와중에 신앙을 소멸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성냄”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 퇴조함, 그리고 돌아섬이다로부터; 그리고 “죽이다”의 의미함이 소멸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람(남자, vir)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다. 이는 타락된 의지로부터 그들은 선행의 외적인 선을 완전히 쇠약해지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유쾌하다(good pleasure)”의 의미함이 의지이다, 여기서는 타락된 의지이다로부터; “느슨해짐(unstring)”이 약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수소”의 의미가 선행의 자연적, 또는 외적인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수소”가 여기서 말해지는 이유, 그리고 방금 앞에서 “사람”이 말해지는 이유는, “사람(남자)”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수소”에 의해 선행의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이 취급될 때, 진리 역시 취급되도록, 그 이유는 말씀의 모두 각각에서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한다. 이는 선으로부터 비극적으로 돌아 섬을, 결과적으로 정죄됨을 의미한다. 이는 “저주되다”의 의미가 정죄(定罪)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저주되어져 버린 자는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냄”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돌아섬이다로부터; 고로 “격렬한 성냄”은 비극적 돌아섬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가 단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파생된 진리로부터 돌아 섬, 그것이 확증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wrath)”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돌아섬이다로부터; 그리고 “단단하다”의 의미가 확증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확증되어진 거짓들은 설득되기 까지 하기 때문에 단단해서 이다. 이 단단함이 경험으로부터 알도록 내게 허락되었다. 영들과 천사들 사이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시야에 표출되어진다, 그러나 악으로부터의 거짓은 단단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단단함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확증됨에 비례해서이다. 설득이 많은 것들로부터 확증함들을 수단으로 야기 되었을 때, 이 단단함은 거기서 마치 뼈의 단단함 같이 나타난다. 이런 단단함은 마치 세상의 단단함 같다, 세상에 있는 단단함은 빛의 광선을 되튕긴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단단함 에 낙하할 때 악과 거짓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되튕기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부드러움에 낙하할 때, 선으로부터 진리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받아들임이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 안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누다”의 의미가 진리와 선으로부터 분리함과 제거함이다로부터, 고로 추방함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뜨리라. 이는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서도 추방되어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흩뜨리다”의 의미가 추방하다 이다로부터; 그러나 “흩뜨림”은 “나누다”와 구별되는데, 후자는 외적 인간 또는 진리를 서술하나, “흩뜨림”은 내적 인간 또는 선을 서술한다. 이상 살핀 것들, 즉 이스라엘에 의해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관련하여 말해진 사항들은 (1절의) 날들의 끝에서 그들의 후손들은 저주받지 않았고, 그리고 야곱 안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사실만 보아도 짐작된다: 즉 시므온 지파는 지파들 중의 하나로서 여전히 건재했다는 것, 레위의 경우는 저주가 아닌 오히려 축복이라 말해도 괜찮게 그들은 성직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 르우벤 지파 또한 다른 지파 보다 시시하거나 천박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날들의 끝에서 그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하여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 이 장에서 말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것들에 닥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5-7절의 경우,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진 이들, 즉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에게 닥치는 것들이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는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자연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사이에 있는 상응 관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의미이다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이 무엇이며,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적 의미는 완전 어둠이다는 것이다.

8-12절.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9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10 (임금의) 홀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실로가 올 때 까지 조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11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로 씻는다,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로 빤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너 유다야. 이는 천적 (수준의) 교회(the celestial church), 최고 높은 의미에서 신성의 천적 부분 측면에서의 주님 (the Lord as to the Divine celestial)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사랑의 신성 측면에서의 주님, 또는 신성의 천적 부분 측면에서의 주님이다로부터;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 고로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 형제들이 너를 경축할 것이다. 이는 이 교회는 여타 나머지 교회를 넘어서 특출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경축되어짐”이 특출해 있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너”인 유다의 표현함이 천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형제들”의 의미가 이 교회의 진리들, 고로 또한 이 진리들에 있는 교회들이다로부터; 이것은 유다의 형제들이 표현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과 선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에서 이다. 천적 교회의 진리들이 “네 형제들”, 즉 유다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다; 한편 영적 (수준의) 교회의 진리들은 “그의 아버지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에 있을 것이다. 이는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패거리들은 그의 현존에서 혼비백산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적들(원수들)”의미가 지옥적인 악마적인 패거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들이 영적인 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 네 손이 있다”의 의미가 도망가는 중에 있는 자들을 추격함이다, 그 이유가 적들이 도망할 때, 정복자의 손이 그의 목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현존에서 그들이 도망할 것이다 라고 말해진 이유는 지옥의 어떤 패거리가 주님의 천적 왕국의 천사에게 접근할 때, 그는 천사가 현존만 해도 견디지 못해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는 천적 사랑, 즉 주님을 사랑함의 기운에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기운은 지옥의 패거리들에게는 태워버리고, 고통을 주는 불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적 천사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 더욱이 제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의 목에 자기 손을 놓지 않는다, 실로 그가 관심을 두는 누구도 원수로서 간주하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현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조건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의 의미는 지옥의 것들이 자기들을 그의 원수로 간주하여 그가 나타나자 혼비백산 달아나는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너에게 절할 것이다. 이는 진리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복종시킬 것이다. 이는 “절하다”가 자신들을 복종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들”의 의미함이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영적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영적 선이다에서 알게 된다. 이 진리들이 자진해서 복종하는 이유는, 유다에 의해 표현된 천적 수준의 사랑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영적 진리들 안으로 흘러들 때, 그것을 질서에로 배치하기 때문, 고로 그것들을 주님에게 복종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천적 부분은 영적 진리 안으로 유입을 통하여, 즉 선이 유입을 통하여 진리 안에서 이런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천적 왕국은 가장 깊은(안쪽, inmost) 천국, 또는 셋째 천국인 것, 고로 다른 천국 보다 주님에 가장 가까운 천국이다. 이에 비해 주님의 영적 천국은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인데, 주님으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질서로부터 주님은 영적 왕국 안으로 천적 왕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모두에서 흘러드신다. 영적 왕국은 천적 왕국을 수단으로 질서 안에 보존된다, 그리고 이 질서에서 주님에게 복종한다. 천적 왕국으로부터의 유입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이 천적 왕국에게는 외적 부분이고, 영적 왕국에게는 내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왕국의 결합이 있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이는 타고난 힘(force, strength, 氣勢)을 지닌 순진을 의미한다. 이는 “사자”의 의미함이 사랑의 선과 거기로부터 파생하는 진리가 그것들의 힘 안에 있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고로 “사자의 새끼”는 힘들을 가진 순진을 표시한다. “타고난 힘을 가진”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 “유다”는 사랑의 천적 부분이고, 사랑의 천적 부분은 의지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타고난 힘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의지 부분의 것들 쪽에서 태어나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고 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적 부분에 속했고, 자기들이 의지 부분에 선을 가졌던 만큼에서 사랑의 선 안으로 태어나진다. “사자의 새끼”가 순진을 표시하는 이유는 “사자”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표시하고, “새끼”는 마치 그것의 유아이듯 하여 순진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사자”가 천적 수준의 사랑의 선을 표시하는 것, 그리고 파생되는 진리,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반대적 의미에서는 자아 사랑의 악이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사자”가 언급되는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우선 천적 사랑의 선이 표시되는 구절이다:
보라 유다의 지파 속에 있는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를 하시어 그 책을 여시고, 거기의 일곱 인들을 푸신다(떼신다) (계. 5:5);
여기서 주님이 그분 자신의 신성의 사랑과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전능하심으로부터 “사자”라고 불리우신다. 말씀의 다른 구절들에서, 여호와, 또는 주님이 “사자”에 비교되어진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뒤를 따라 갈 것이다; 그분은 사자 같이 표호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표호하시고, 아들들은 바다로부터 영예와 더불어 오기 때문이다 (호. 11:10).
이사야서에서:
고로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사자가 표호할 때 같이, 그리고 젊은 사자가 자기 먹잇감 위에 있을 때 같아, 만일 많은 목자들이 그에게 달려왔다해도, 그는 그들의 음성에서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야단법석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싸우시기 위해 시온 산 위에, 거기로부터의 언덕 위애 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 신성한 선의 전능하심이 “사자”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의 전능함이 “어린 사자”에 비교된다, 그 이유가 “여호와 체바욷께서 싸우시기 위해 시온 산과 거기로부터의 언덕들에 오신다”라고 말해지기 때문, 여기서 “시온산”은 신성의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언덕”은 거기서 파생되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이다.
같은 이유로 에스겔서와 계시록서에서 동물들, 이를 수단으로 거룹들이 의미되는데, 사람, 사자, 수소, 독수리의 얼굴들을 가졌다. 에스겔서에서:
네 동물들의 얼굴들의 닮음이다: 오른쪽에서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얼굴을 그들 넷이 가졌다; 그리고 왼쪽에서 수소의 얼굴을 그들 넷이 가졌다; 그리고 그들 넷은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 (겔. 1:10; 10:14).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왕좌 앞에 앞과 뒤에 눈들이 가득한 네 동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첫째 동물은 사자 같았았다, 그리고 둘째 동물은 송아지 같았다, 셋째 동물은 사람으로서의 얼굴을 가졌다, 넷쩨 동물은 날고 있는 독수리 같았다 (계. 4:6, 7).
이 동물들이 거룹들이라고 에스겔서 10장에서 말해진다,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그것들의 묘사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들은 앞과 뒤에 눈들을 가졌다; 그 이유가 “거룹들”에 의해 주님의 미리 보셨음과 섭리하심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자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의 전능하심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이것은 섭리 속에 있다. 새로운 성전에 관련하여 있는 거룹들도 비슷하였다 (겔. 41:19).
천적 수준의 인간, 그는 선과 파생된 진리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힘 안에 있다는 것이 “사자들”에 의해 뜻해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다. 젊은 사자가 결핍되고 배고픔을 견딘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그들은 어떤 선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시. 34:9, 10).
다시:
사자들이 그들의 먹잇감을 따라 으르렁댄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의 식품을 찾으려 한다. 태양이 올라온다, 그들은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들의 거처들에 누울 것이다 (시. 104:21, 22).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
그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말해질 것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라 백성들이 늙은 사자로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자로서 그는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먹잇감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민. 23:23, 24).
그리고 다시:
발람이 자기들의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보았을 때 말했다, 그는 구부리고 있다, 그는 사자 같이 웅크린다, 그리고 늙은 사자 같아 누가 그를 일어나게 하는가? (민. 24:2, 9).
위에서 천적 수준의 인간이 묘사된다, 그 이유가 발람이 이스라엘이 지파들에 따라 거주하는 것을 영 안에서 보았을 때, 지파들이 그들의 진영에 의해 표현된 천적 수준의 질서이었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통하여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 그리고 이 질서 안에 모든 권능이 있다, 이것이 여기서 “구부리고 웅크린 사자”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
미가서에서:
야곱의 남은 자들이 나라들 사이에, 많은 백성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마치 사자가 숲속의 들짐승 사이에 있듯, 젊은 사자가 양떼들 사이에 있듯 이다; 그가 통과하고, 짓밟고 흩뜨린다, 구출될 자 아무도 없다. 너희의 손이 너희의 적들 위에서 의기양양해지게 하라, 그리고 모든 네 적들이 멸절되게 하라 (미. 5:8, 9).
위에서 “사자”와 “젊은 사자”는 천적 수준의 선과 천적 수준의 진리를 표시하고, 이것이 “야곱의 남은 자들”이다. 이 의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구절로는 이. 21:8; 예. 25:38; 겔. 32:2; 슥. 11:3도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솔로몬의 왕좌 양쪽에서, 여섯 계단들의 열두 사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 있다 (왕상. 10:18-20); 또한 열 놋쇠 받침들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다 (왕상. 7:29, 36).
반대적 의미에서 “사자”는 자아 사랑의 악이 그것의 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기에 사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굶주린 짐승이 그 위에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거기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로이 갈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되찾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에 올 것이다 (이. 35:9, 10).
예레미야서에서:
왜 이스라엘이 먹잇감이 되었느냐? 젊은 사자가 그에 맞서 으르렁댄다,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을 발음한다, 그것들은 그들의 토지를 황폐해짐으로 환원되게 한다 (예. 2:14, 15).
다시:
사자가 그의 덤불로부터 올라온다, 그리고 나라들을 파괴하는 자가 여행했다, 그는 토지를 황폐쪽으 로 되돌리기 위해 그의 궁전으로부터 나갔다 (예. 4:7)
다시:
그들은 여호와의 길을, 그들의 하느님의 정의를 알지 못해왔었다. 그러므로 숲으로부터의 사자가 그들을 쳐죽이며, 그리고 들판의 이리가 그들을 황폐해짐에 눕게 할 것이다 (예. 5:4, 6).
그리고 나훔서에서:
사자의 주택(사자굴)이 어디 있느냐? 젊은 사자들의 풀밭(먹는 장소)이 어디이냐? 어디서 사자, 늙은 사자, 사자의 새끼가 성큼성큼 걷더냐?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이) 두려워 떨게 하지 못했지 않느냐? 사자는 그의 새끼들을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잡았다, 그리고 그의 늙은 암사자를 강건하게 했다. 보라 나는 너에 맞서 있다,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나는 너의 병거를 태워 연기 안에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검이 젊은 사자들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땅으로부터 먹잇감을 절멸할 것이다 (나. 2:11-13).
니느웨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위 구절에서 “사자”는 자아 사랑의 악이 파괴하고 황폐하게 할 때 그것이 소유한 힘을 표시한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예. 12:8; 49:19; 50:17, 44; 51:38; 겔. 19:2-11; 33:2; 욜. 1:6; 습. 3:3; 시. 57:5; 58:6; 91:13; 계. 13:2도 있다.

먹이감이 됨으로부터 내 아들 너는 올라 갔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천적 수준의 것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부터 해방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잇감이 됨으로부터 올라갔다”의 의미가 지옥으로부터 해방됨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내 아들”인 유다의 표현함이 신성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먹잇감이 됨에서 올라감”이 지옥으로부터의 해방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인간은 그 스스로부터서는 지옥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의지와 생각은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 이를 수단으로 그는 지옥에 붙들인 바 되고 있어 폭력 없이 거기로부터 떼어내질 수가 없다. 이 떼어냄과 해방됨(구출됨)이 “먹잇감”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행해지기 때문, 하여 천적 수준의 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지옥으로부터의 해방됨이 있다고 말해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하는 것은, 육체의 삶에서 그가 영적 선 안에, 즉 신앙을 통하여 선행 안에 있었지 않으면 지옥으로부터 떼어냄이나 해방됨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가 신앙을 통하여 이 선 안에 있었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선은 통과하여 흐르는 바, 이를 받을 그릇이 없다면, 주님의 선은 어느 곳에서도 안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의 인물들은 지옥들로부터 떼어내지거나 해방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이 육체의 삶에서 획득한 모든 상태들이 다른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채우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니고 온 선의 상태들에 주님의 선이 채워져(보완되어) 천국으로 올려지는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니고 온 악의 상태들에 악이 보충되어 지옥으로 내려진다. 이것이 인간이 죽을 때, 그와 같이 그는 남는다고 말함의 뜻이다. 이상 살핀 것으로부터, 신성의 천적 부분을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해방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대목은 영계에서의 사건임을 미리 감지하며 읽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는 구부렸다, 어떤 사자 같이, 늙은 사자 같이 웅크렸다. 이는 사랑의 선과 거기서 파생된 진리가 그들의 능력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구부리다”의 의미가 자기 힘을 뻗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자가 (먹잇감을 보고) 웅크릴 때, 이 자세는 힘줄을 단단히 조이고, 힘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이다; “웅크리다(couch)”의 의미가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눕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자”와 “늙은 사자”의 의미가 사랑의 선과 파생되는 진리가 그것들의 힘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젊은 사자”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통하여 힘 안에 있는 자이고, “늙은 사자”는 선을 통하여 힘 안에 있는 자이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싸우지 않고 선을 통하여 안전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는 곳에서는 악들이 도망한다, 그 이유는 악은 그들의 현존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늙은 사자”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다.

누가 그를 일으켜지게 할까? 이는 그는 지옥 안에 있는 모든 것 사이에서 안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가 그로 일어나게 할까”의 의미가 안전하게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지옥들에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임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가 모든 악들 사이에서 안전해 있기 때문, 설사 지옥들 한 가운데에서 조차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이 결과를 가지기 때문인데,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은 주님과 아주 밀접하게 결합해있고, 주님 안에 있기 때문,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악도 그에게 접근조차 시도할 수 없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무수한 지옥들이 있다는 것, 이 지옥들은 종과 속에 따라 등차별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이 종과 속은 그 세부 사항적으로 무수하다는 것이다; 각 지옥 안은 이런 질서로 있다는 것; 이 질서는 천적 수준의 천사들을 통하여, 직, 간접적으로 주님에 의해 보존된다는 것; 상황에 따라서는 천사들이 그들의 무질서를 질서로 가져다 놓기 위해 지옥 이리저리로 보내진다는 것; 이 수준의 천사들은 그들의 임무 수행에서 안전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천적 수준의 것 안에 있는 이들은 지옥들에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서 안전하다고 말한 것이다.

홀(지휘봉)이 유다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주권은 천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옮긴다”의 의미가 떠나다 이다로부터; “홀(scepter)”의 의미가 주권이다로부터, 실로 선으로부터 진리의 주권이다, 그 이유가 지휘봉은 왕권의 표지이기 때문, 그리고 왕권에 의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천적 왕국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글자의 의미로부터 나타나는 대로라면, 이 구절에 포함되는 것은, 왕국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유태 백성으로부터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가 뜻해진다. 이것 역시 맞다, 이런 역사적 진리 안에서도 내적 의미가 있다; 그 이유가 왕국이 유태 백성으로부터 옮겨지지 않는 것은 세상의 문제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의 영적 진리는 “홀”을 주권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유다”가 천적 왕국으로 이해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주권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천적 왕국으로부터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계시로부터 알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다. 이러하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 여호와, 또는 주님으로부터 인간과 영들에게 생명을 유입하심은 천적 왕국을 통하여, 즉 이 왕국에 있는 천사들을 통하여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권을 가졌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 안으로 오셨을 때, 그리고 그분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 천적 왕국의 천사들과 더불어 있었던 것을 입으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이 주권을 입으신 것이다. 그 이유가 이전의 신성은 신성한 인간이 되어주었던 이 천국을 통하여 내려와졌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을 때 시야에 표출되어진 신성한 사람(Man, Person)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신성한 인간은 주님 자신이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중지되었다. 이는 이 경우가 어떻게 비밀한지를 보여준다. 이 왕국의 천사들은 실로 큰 주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을 사랑함을 통하여 주님의 신성한 인간 안에 있는 만큼에서이다.

그리고 법률 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 이는 더 낮은 것들에서 이 선으로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발”의 의미함이 자연 수준의 것이다로부터, 고로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적인 것들은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법률제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라고 말해졌는데, 이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 또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가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서이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영적 왕국은 주님의 오심 이후 같이 천적 왕국과 구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왕국과 하나로 되어 있었고, 단지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발 사이로부터”라고 말해져서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되도록 말해졌다; 그 이유가 그의 발 사이에 라는 말이 발의 안쪽 측면이 뜻해졌고, 이것이 그의 허리와 교통함으로부터 임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로부터 “실로가 올 때 옮겨짐”도 말해지고 있다, 즉 그것의 주권이 옮겨질 것, 즉 천적 왕국의 것과 같은 주권이 옮겨진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그때 당시 천적 왕국은 이 진리를 수단으로 그것의 주권을 행사했었기 때문; 그리고 이것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 진리가 “법률제정가”라고 불리운 것이다. 이 진리가 이사야서에서 “법률제정가”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뜻해져 있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법률제정가 이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다 (이. 33:22);
위에서 “재판관”은 그분이 선으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법률제정가”는 그분이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왕”은 그분이 진리로부터 행하신다를 표시한다; 고로 그것들은 질서에 따라서 이다. 다윗서에서:
길르앗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므낫세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강함이다, 유다는 나의 법률제정가이다 (시. 60:7; 108:8);
위에서 “유다는 법률제정가”란 천적 선과 그것의 천적 진리이다. 모세의 책에서:
샘, 제 1 인 자들이 그것을 팟다, 백성의 귀인들이 그것을 팟다, 법률제정가를 수단으로, 그들의 장대들을 가지고 이다 (민. 21:18).
다시:
갓은 자신을 위한 첫 열매들을 보았다, 그 이유가 감추인 법률제정가의 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로부터 백성의 머리들이 왔다; 그는 여호와의 정의를 일했다, 그리고 그분의 공정을 이스라엘 과 더불어 (신. 33:21);
위에서 “법률제정가”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실로가 올 때까지. 이는 주님의 오심, 그리고 그 다음 평화의 고요함을 의미한다. 이는 “실로”의 의미가 주님이시다로부터; 이 분이 실로라고 불리우신 것은 그분이 평화를 회복시켜 모든 것들을 고요하게 하신다는 사실로부터이다. 원어에서 “실로”는 고요함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주님이 여기서 실로라고 불리우신 이유는 이미 말해진 천적 왕국과 그것의 주권에 관하여로부터 명백해진다; 그 이유가 신성이 이 왕국을 통하여 시야에 표출되어질 때, 거기에 비고요함이 있었는데, 천국에 있든, 지옥에 있든 모든 것은 질서 안으로 환원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 그 이유는 이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신성이 순수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천국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서 이다. 이 천국은 자체적으로 모든 것이 질서에로 완전 환원될만큼의 강함은 없었다, 하여 지옥적이고 악마적인 영들이 지옥으로부터 올라올 수가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혼들을 통치하였다. 그 결과 천적 수준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었다. 드디어 거의 누구도 구원이 가능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자, 주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이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들을 질서로 환원되게 하셨는데, 첫째는 천국을, 둘째는 지옥들이었다, 그후 평화의 고요함이 생산되었다. 영적 수준의 인간, 즉 영적 왕국의 교회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오심으로 해서 구원되어졌다. 즉 여호와,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인류 안으로 천국을 통하여 흘러들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이 선으로부터 자신을 옮겼을 때 이 흘러듦은 만족할 성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세상에 오셨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자체로부터 신성한 진리가 진행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고, 이로 인해 진리를 통해 선을 받는 인간이 구원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들이 순종한다. 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받아질 수 있는 진리들이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순종”의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진리들을 받아들임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들”의 의미가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 고로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러므로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다.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이는 외적인 교회를 위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통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맨다, 묶는다”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포도나무”의 의미가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교회의 외적 부분 (external spiritual church, 외적 영적 교회)인데, 그 이유는 곧이어 말해지는 “특선한 포도나무”가 내적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나귀”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통하여 외적 교회와 결합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나귀 새끼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 이는 내적 교회를 위한 합리성으로부터의 진리를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나무”의 의미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특선한 포도나무”는 내적 교회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내적 부분은 외적 부분 보다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나귀 새끼”의 의미함이 합리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회의 외적 부분은 그것의 내적 부분과 구별된다; 전자는 자연 평면에, 고로 외적 인간 안에 있고; 후자는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 안에 있다. 교회의 외적 부분에 있는 이들은 진리 안에 있으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은 선 안에 있다; 전자는 신앙의 진리에 비해 선행의 선에 많이 감동되지 않으나, 후자는 선행의 선에 감동되고 이로부터 신앙의 진리와 더불어도 있다. 후자는 “특선한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나 전자는 “포도나무”에 의해 의미된다.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 안에서 씻는다. 이는 그분의 자연 평면은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씻다”의 의미함이 순수해지는 것이다로부터; “포도주”의 의미함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그리고 신앙의 선,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옷(clothing)”의 의미가 내면의 것을 덮는 외면의 것이다; 고로 자연 평면, 그 이유가 이것이 외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인 합리성을 덮는다; 그러므로 “옷”은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진리는 외면이기 때문, 그리고 내면인 선을 덮는다.
“포도주”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이다는 것은 성찬 예식에서의 빵과 포도주에 관련하여 이미 살핀 바 있다; 즉 “빵”은 천적 사랑의 선, “포도주”는 영적 사랑의 선이다. 이는 제물을 바침에서 식사 제물과 음료 제물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즉 “식사 제물”은 사랑의 선을, “음료 제물”은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바, 사랑의 선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로 식사 제물은 구성되고, 음료 제물인 포도주는 신앙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더욱이 제물들 자체가 “빵”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포도주의 음료 제물이 제물 바침에서 고용되어진 것에 대하여는 출. 29:40; 레. 23:12, 13, 18, 19; 민. 15:2-15; 28:6, 7, 18-끝절까지; 29:1-7을 더 살피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포도주”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목마른 모든 이여, 너희는 물들쪽으로 오라, 그리고 은을 가지지 않은 자; 너희는 오라, 사서 먹으라; 그렇다 오라, 은 없이 그리고 값을 치룸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55:1);
위 구절에서 모든 이가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이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러나 포도주와 젖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은 없이, 값을 치룸 없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뜻이다.
호세아서에서: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그들을 속일 것이다. 에브라임이 이집트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붓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물들을 그분이 반기시지 않을 것이다 (호. 9:2-4).
위 구절 역시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뜻해진다, 이것을 그들은 중단되게 했다; 사랑의 선은 “타작마당”이다; 신앙의 선은 “포도즙틀”, “새로운 포도주”, 그리고 “제주 (술을 따라 바침)”이다; “에브라임이 이집트로부터 돌아온다”란 지적 부분이 신앙의 비밀들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그들이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는 그 결과 추론함으로부터 결과하는 것을 표시한다. 더욱이 연결 자체는 글자들에서 보다 말들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시종일관성이 있으나 외적 의미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타작 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가 그들을 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내 이어진 “에브라임은 이집트로부터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을 먹을 것이다”인데, 내적 의미로가 아니면 무엇을 뜻할 것인가?
상호 사랑과 신앙의 선의 중지가 “포도즙틀”과 “포도주”에 의해 묘사되는데, 예레미야서에서 이다:
너의 포도원 위에 황폐자가 닥쳤다; 그리하여 즐거움이 그러모아졌다, 그리고 기쁨은 갈멜로부터이 다, 그리고 모압의 토지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내가 포도주가 포도즙틀로부터 중단되게 저주했기 때문이다; 그가 환호하는 소리를 짓밟을 것이다 (예. 48:32, 33).
“포도주”가 상호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나는 네 동물들의 한가운데로부터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기름과 포도주를 다치게 말라
(계. 6:6)
위에서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이다; 그리고 “포도주”는 영적 사랑의 선이다.
“기름과 포도주”에 의한 같은 의미가 주님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에 있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했을 때, 그는 도둑들에 의해 상처받은 자를 보았다, 하여 그의 측은함 마음이 움직여졌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그는 그의 상처들을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눅. 10:33, 34);
위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다”는 그가 사랑의 일들과 선행의 일들을 수행하였다를 의미한다. 같은 것이 고대인들이 어떤 것을 성별할 때 기둥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것에 의해서도 뜻해졌다 (창. 35:14).
“포도주”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표시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때에 말하셨던 아래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더불어 포도나무의 생산물을 새로이 마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이후로부터 마시지 않을 것이다 (K. 26:29; 눅. 22:17, 18);
모든 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거기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시리라는 것, 그러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의미되었다는 것, 이것을 그분은 그분의 왕국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주시리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가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는 구절로는 이. 24:9, 11; 애. 2:11, 12; 호. 14:7; 암. 9:13, 14; 슥. 9:15, 17; 눅. 5:37-39 에서도 더 읽어볼 수 있다.
“포도주”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에,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그것을 받는 인간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대부분의 표현들이 반대적 의미 또한 지니는데, 여기서의 “포도주”도 예외는 아니다, 즉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하는데, 이사야서에서:
새벽 아래 아침에서 일어나서, 독주를 뒤따라서, 황혼 까지 머무는 그들에게 화있을 것인 즉, 포도주가 그들을 불태울런지 모른다! 포도주를 마시는 영웅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주를 섞는 용사에게 화있을 것이다 (이. 5:11, 22).
다시:
이들은 포도주를 통하여 실수한다, 그리고 독주를 통하여 엉뚱한데로 간다; 성직자와 예언자는 독주를 통하여 길을 잘못 든다, 그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들은 독주를 통하여 배회한다; 그들은 보는 사람(seer)들 사이에서 실수하고 있다, 그들은 재판에서 걸려넘어지고 있다
(이. 28:7).
다시:
목자들이 이해하려고 알려 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길쪽으로 뒤쪽을 쳐다본다. 너희는 오라, 나는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주로 취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일도, 오늘 같이, 큰 풍부함이 있게 하라 (이. 56:11, 12).
위 구절 외에, 예. 13:12; 호. 4:11; 7:5; 암. 2:8; 미. 2:11; 시. 75:8; 신. 32:33도 더 찾아 읽을 수 있다.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분노의 포도주의 잔”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예. 25:15, 16; 계. 14:8, 10; 16:19); 그리고 “하느님의 성내심의 격노함의 포도주의 포도즙틀”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계. 19:15); 그리고 “매춘의 포도주”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계. 17:2; 18:3).

그리고 그의 덮개는 포도의 피에서 (빤다). 이는 그분의 지적 부분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포도들의 피”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의 주님의 신성한 선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덮개(covering)”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지적 부분이 그릇이기 때문이다, 받는 것이 그릇인데, 이는 덮는 경우와 같다. “덮개”에 의해서는 지적 부분이 의미되지만, “옷(clothing)”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이 의미된 이유는 거기서 취급된 주제가 외적 부분이기 때문, 그러나 여기서는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는 천국의 결혼이 모든 곳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인 것이 취급되면 내적인 것이 뒤잇고, 진리가 취급되면 선이 그 뒤를 잇기도 하여 짝을 맞춘다. 때로는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즉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에서 빤다, 그리고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빤다”에서 포도주나 포도들의 피나 거의 똑같은 것이도록 나타난다, 또한 “옷”과 “덮개”도 거의 같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완전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포도들의 피”가 주님의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표시하는 것은 “피”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포도들”이 최고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주님의 신성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선행의 선이 의미된다. “포도의 피”에 의해 모세의 책에서 같은 의미로 있는 구절이다:
목축의 버터와 양떼의 젖, 어린 양들과 바산의 아들들의 숫양들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숫염소들,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그리고 너는 혼합하지 않은 포도의 피를 마실 것이다 (신. 32:14)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다. 이는 지적 부분, 또는 주님의 인간의 내적 부분은 선밖에 더 다른 것은 없다를 의미한다. “붉다(red)”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붉은 것인 불로부터와 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포도주로 붉다”는 선밖에 더 이상은 없다; 그리고 “눈”의 의미가 지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지적 부분”에 의해 뜻해지는 것은 그분의 인간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인간의 외적 부분이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다. 이는 신성의 자연 평면은 진리의 선밖에 더 아니다를 의미한다. 이는 “희다(white)”가 진리를 서술한다로부터; 그리고 “이”의 의미가 순수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 육체에 있는 것들 중 단단한 것, 뼈, 이, 연골은 가장 낮은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선들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젖”의 의미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celestial spiritual), 또는 진리로부터의 선(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진리의 선이다는 것을 인간에 비교해 말하면, 주님을 사랑함에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외적 교회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보다 더 높게 생각을 승강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내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생각을 자연 평면을 넘어 내적인 것 쪽으로 승강하게 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 생각들을 승강되게 하는 수용력에 따라 그분에 대한 생각도 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의 본성을 아는 자가 내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의 본성을 모르는 자는 외적인 것만에 대한 생각을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워진다, 그럼에도 그분의 전체 인간은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다.

지금까지 유다에 관해 말했던 것으로부터 아주 분명해지는 것은, 말씀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으면, 유다에 괸해 쓰여진 것들의 의미 또한 알아질 수 없다. 즉 그는 “사자의 새끼이다”는 것, 그는 “약탈품으로부터 가버렸다”는 것, 그는 “사자 같이 구부렸고 웅크렸다”는 것, “늙은 사자 같이”; 그리고 “그의 발 사이의 법률제정가”가 의미한 것, “실로”가 의미한 것, “그의 젊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 그의 나귀새끼를 특선한 포도나무에 맨다”가 의미한 것, “그의 옷을 포도주에, 그의 덮개를 포도들의 피에서 빤다”가 의미한 것, “그의 눈은 포도주로 붉다, 그의 이는 젖으로 희다”가 의미한 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완전하게 감추여 뉘여 있다, 하여 더 깊이 놓인 의미들을 수단으로 알아내야 한다.

13절. 스불론은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스불론. 이는 선과 진리가 동거함을 의미한다. 이는 스불론의 표현이 천국의 결혼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다, 그 이유는 이 결합이 천국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과 진리가 동거함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원어에서 “스불론”이 동거함(cohabitation)을 뜻하기 때문에서 이다. 여기서는 “스불론”의 이름 아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영적 진리들에 관하여 결말을 만들어내는 교회에 있는 이들, 고로 이 결말들을 가지고 자신과 더불어 튼튼한 성벽을 쌓아둔(fortify) 교인들이 취급된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은, “스불론”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이 그것을 위한 증거들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고 부정적인 것(마음의 소극적 태도) 안에 있는 이상 믿지 않는 이들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이든 이런 마음의 태도에 있다면 누구도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것, 소극적 마음의 태도가 보편적으로 그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부정적인 것들이 흘러들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함께 모아지나, 확증하는 것들은 아니다; 사실상 후자는 한쪽 측면으로 내몰려 있거나, 그나마 내몰리는 형편이 아니다면 부정적인 것에 박수를 쳐대는 박수부대로서 전락하여 있다. 그러므로 해서 부정적인 것은 더욱 요새화 된다. 그러나 여기서 “스불론”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을 믿는 이들, 고로 이들과 더불어서는 확증하는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은 진리들 안에 있지는 않고,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교리적인 것들에 적용하기 때문, 하여 그들이 확증한 것을 요새화 한다. 그러므로 “스불론”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의 어떤 진리를 듣거나 생각할 때, 그들은 즉시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뒤쪽으로 낙하한다. 이 세상에는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이 이런 사용을 위헤 그들을 섬기게 장치해두신 바 있다.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할 것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정박소(haven)”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종착지이자 그것들이 출발(시작)하는 주소지(residence, 주거)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주소지이다. 그 이유가 “스불론”의 이름 아래 이 주소지 안에 신앙의 진리들이 있는 이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바다들(seas)”의 의미가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28항); 그리고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생활하다(삶, life)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바다들의 정박소에서 거주함”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는 생활을 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생활은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 그리고 어떤 이와 더불어서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에서, 또는 감각적 수준에서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 보아야 기억 속의 지식들에 묶인 바 되어 승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 수준의 교회의 여타 다른 이들 보다 더 희미함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지적 부분으로부터 아주 조금의 빛밖에 더 가지지 못하기 때문, 그 이유는 지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감각적인 것들 안에 침수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 안에 있는 이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진리들을 요새화한 이들의 경우는 매우 다르다; 이들은 이런 지식들로부터 승강되어질 수 있다, 즉 이것들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승강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지적 부분은 계발되어져왔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적 진리에 대하여 어떤 지각함을 지니고 있다, 이 지각함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진리를 비추어 보아 나타나게 하고 인정되게 하는 거울 같은 섬김을 한다. 마치 애착들이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는 배들의 정박소에 있을 것이다. 이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정박소”의 의미가 주소지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배(ship)들”의 의미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배들”이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배들은 바다들과 강들을 통과하여 생활에 유익한 것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바다들”과 “강들”에 의해 지식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 이것들을 통해 운반되는 삶의 유용한 것들은 교리적인 것들이다, 또한 “배들”에 의해 의미되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 자체임이 아래 구절에서 확인된다:
섬들이 나를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스의 배들이 우선적으로 멀리로부터 네 아들들을, 그들과 더불어 자기들의 은과 금을 가져오려 (한다) (이. 60: 9);
“다시스의 배들”은 교리적인 것들과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은과 금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아들들”에 의해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은”에 의해 진리 자체가; “금”에 의해 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가 아는 바, 다시스의 배들이 여기서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 아들들도, 은도 금도 뜻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너의 경계들은 바다의 심장 안에 있다, 너의 설계자가 너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했다, 그들은 스닐의 전나무의 모든 판자로 건축되었다; 그들은 너를 위한 돛대를 만들기 위하여 레바논으로부 터 삼나무를 가져왔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로 그들은 노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너의 들보를 상아로 만들었다; 깃딤의 섬들로부터 층계의 딸(회향목, 황양목)을 (가져와서 만들었다); 이집트로부터 수를 놓은 일로 만든 고운 아마포가 너의 돛이었다, 하여 그것은 너에게 기(ensign, 깃발)일는지 모른다; 엘리사아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진홍색 (천)은 너의 덮개이었다. 시돈과 아르왓의 주민들이 너의 노잡이 이었다:너의 현자들, 오 두로여, 네 안에 있다, 너의 수로 안내인들 이었다. 그발의 원로들과 현자들이 네 안에서 너의 배를 틀어막는 자 이었다; 바다의 모든 배들과 그들의 선원들이 네 안에 있어 상거래를 했다 (겔. 27:4-9). (층계의 딸이라 번역되었는데, 이는 배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고 회향목과 황양목은 한역 성경의 것을 옮겨놓은 것임, 역자주.)
위는 두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의미된다, 이것이 배에 속하는 용어들로 묘사되고 있다; 즉 “널판자”, “돛대”, “노”, “들보”, “돛”, “덮개”, “노젖는 자”, “수로안내인(키잡이)”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이 글자대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임은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그러나 “두로”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배들”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더불은 모두라고 이해할 때, 위 구절 모두는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 당신의 일들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지혜 안에서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만들었습니다. 이 바다는 공간들에서 크고 넓습니다; 거기에 배들이 갑니다; 당신이 만들어내신 고래가 거기 안에서 놉니다 (시. 104:24-26).
다시:
그들로 고백함의 제물을 바치게 하라; 그리고 기뻐환호하여 여호와의 일들을 선포하여라. 배들로 바다로 내려가는 그들은, 많은 물들에서 일하는 그들, 이것들이 여호와의 일들과 그분의 경이하심들 을 깊음 안에서 본다 (시. 107:22-24).
위에서 “배들”은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고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일반성들(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배들”이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이기에, 그러므로 말해지기를, “배로 바다로 내려가는 그들은 깊음 안에서 여호와의 일들과 그분의 경이함들을 본다 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 안에 있는 이들이 보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로 타고 있는 큰 산인 듯한 것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다에 있는 창조물의 삼분의 일이, 그리고 혼들을 가졌던 것이 죽었다; 그리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었다 (계. 8:8, 9)
“불타고 있는 큰 산”은 자아 사랑을 표시한다 (1691항); 이 “바다”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 “피”는 폭행이 선행에 있어졌음이다; “혼들을 가진 바다의 창조물들”이란 선들을 지닌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진리들이다; “삼분의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들이 “죽는다”란 그들은 영적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 이다; 그러므로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됨”이란 말씀으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속의 진리들과 선들이 거짓화되었다를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이 예언을 수단으로 뜻하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배들”은 거짓과 악인 것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끝의 때에서 남쪽의 왕이 그와 겨룬다; 그러므로 북쪽의 왕이 회오리 바람 같이, 병거와 마병, 그리고 많은 배들을 거느리고 그에게 돌진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토지들 안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뒤엎고 꿰뚫을 것이다 (단. 11:40);
“남쪽의 왕”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표시한다; “북쪽의 왕”은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을; 마병과 더불은 “병거들”과 배들은 거짓의 교리적인 것들을; “토지들”은 교회들을, 끝의 때에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이 교회들을 꿰뚫고 뒤엎을 것이 예언되어 있다.
계시록에서:
모든 키잡이와 배들에 고용된 모든 이, 그리고 선원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많은 자들이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리고 그들은 바빌론을 불태우는 연기를 보았을 때 외쳤다, 말하기를, 어느 도성이 이 큰 도성과 비슷할 수 있는가? 슬픔, 슬픔이 있다, 이 큰 도성아, 바다에서 배들을 가졌던 모든 자들은 그녀의 호화로움 때문에 부자로 만들어졌다! (계. 18:17-19).
위에서 “배들”이 거짓과 악의 교리적인 것들과 지식들을 표시함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바빌론”이 바깥쪽으로만 거룩할 뿐 내향적으로는 모독적인 예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의 배들이 배가 아닌 그밖의 어떤 것을 뜻하는지를 모를 자는 없을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고로 너희를 되찾으신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나는 바빌론쪽으로 보냈었다, 하여 나는 모든 그녀의 빗장들을 내던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갈대아인들, 이들의 외침은 배들 안에 있다 (이. 43:14).
위에서의 의미도 (앞 구절과) 비슷하다. 더욱이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 “배들”에 의해 의미되어지는 것을 이. 2:11, 16; 23:1, 14; 시. 48:7에서 더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옆은 시돈 쪽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는 한 쪽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옆, 측면(side)”의 의미가 어느 한 쪽에서 확장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시돈”의 의미함이 선과 진리에 관한 외면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스불론이 취급되는 곳, 여기서의 경우 같이,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언급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하여 이쪽에서 확장됨이 있다고 말해지고, 또한 말씀으로부터 교리적인 것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진리의 결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말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위 용어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지식들은 이쪽에서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다른 쪽에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경험을 통해 알아진 것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경험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14, 15절. 잇사갈은 무거운 짐들 사이에 드러누운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15 그리고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하고,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그리고 공물에는 종이리라.

잇사갈. 이는 일들로부터 얻은 보답(recompense, 보상 reward)을 의미한다. 이는 잇사갈의 표현함이 보상 또는 보답, 삯(hire)으로서 획득되는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일들로부터 획득되는 보상임이 분명한데, 이는 여기서 잇사갈에 관한 예언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세부 사항으로부터 확실해진다. 더욱이 잇사갈은 원어에서 보상(reward, hire)을 뜻한다. 잇사갈이 여기서는 일들로부터 얻어지는 보상을 의미하고, 앞 장에서는 상호간의 사랑도 뜻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서의 “잇사갈”에 의해서는 상호간의 사랑의 어떤 종류와 나타남 안에 있는 이들, 즉 어떤 종류의 이웃을 향한 사랑, 또는 선행 속에 있다고 나타나지는 이들, 그리고 자기들이 행한 선들 때문에 보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뜻해지고 있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이런 이들은 진짜 상호간의 사랑, 또는 선행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악용하거나 뒤집거나 곡해하고 타락시킨다. 그 이유가 진짜 상호간의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로 해서 이웃이 이롭게 될 때, 그것 자체가 자기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이 일들로 보상은 커녕 어떤 바램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쁨과 복됨(bliss)이 말씀에서 “삯, 보상”에 의해 뜻해진다; 그 이유가 기쁨과 복됨이 보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삶에서의 경우(영들의 세계에서), 이것이 그들을 위한 천국이 된다. 그 이유가 이 사랑에 있는 이들이 쓸모 있어짐(use)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타인들에게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이런 환희와 행복함에 있으므로 처음 동안에서는 그들이 천국 안에 있다라고 자신들에게 여겨진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각자의 선용의 등차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보상을 생각하자마자 이 행복은 사라진다, 그 이유가 보상에 관한 생각은 사랑을 불순해지게 하게 때문, 그리고 그것을 타락쪽으로 기울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이때 그가 이웃에 관하여가 아닌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기 때문, 즉 타인이 아니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자신들을 향한 사랑 쪽으로 전환한다. 그들이 이를 행하는 만큼에서 천국으로부터의 환희와 행복은 그들에게 교통되어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으로부터의 행복의 유입을 자신들에게 집중해두었기 때문이다, 즉 타인들에게 보내지는 쪽으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치 빛의 광선을 전도하지 않고 흡수만 하는 대상물 같다. 빛을 전도하는 대상물들은 빛 안에서 나타나고 반짝거리지만, 그것들을 흡수해버리는 물체는 불투명하고 전혀 반짝거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본성 속에 있는 이들은 천사의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진다, 그리고 마치 천국과는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는 이들 같다. 이런 이들이 여기서 “잇사갈”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되어 있다.

뼈만 앙상한 나귀. 이는 가장 수준 낮은 섬김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의 의미가 섬김(service, 봉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뼈”의 의미가 생명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뼈만 앙상한 나귀(bony ass)”는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이다. 그 이유가 보상을 위하여 선인 것을 행하는 자, 그 사람도 실로 쓸모 있음을 수행하고 섬김 속에 있는 것은 분명하나 가장 낮은 장소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교통되는 선을 분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옆을 지나쳐간다, 혹시 이들에게 선을 행한다면, 이것을 주님에게 반드시 보상을 청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실시한선에 대한 공적을 확실히 챙긴다. 고로 주님의 자비가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도중에서 그들은 굴종의 상태로부터 퇴조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복되고 행복한 것을 받는 상태에 비례하여 선을 베풀려 한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다른 삶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쓸모 있는 일에 참여는 하나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에 속한다.

무거운 짐들 사이에 누워 있다. 이는 일들에 둘러 싸여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누워 있다”의 의미가 생활(life)이다로부터, 그러나 불명료한 생활이다; 그리고 “짐들(burdens)”의 의미가 일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짐들”이 이런저런 일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여기서 취급된 이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선들을 행하지 않고, 자아를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흐르는 일들은 초라한 나귀에 의해 운반되는 짐들 같다, 그 이유가 그들의 일은 가장 낮은 섬김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억지적 섬김(servitude)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고, 자유적 섬김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전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고, 이것은 폭력과 더불어 명령되나, 후자의 사랑으로부터의 애착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고, 명령되지 않고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다시 분명한 것은, 보상을 예상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이들은 가장 수준 낮은 섬김들이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일들은 (고달프게 하는 수준의) “짐들”이다. 같은 것이 아래 구절의 “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잇사갈의 제 1 인 자들이 드보라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잇사갈은 바락과도 그러했다; 골짜기에서 그는 그의 발 아래 놓일 것이다, 르우벤의 부류(class)들에서 심정의 결심들이 대단했다. 당신은 양떼의 쉿하는 소리(hissing)를 들으려고 왜 짐들 사이에 앉아 있는가? (사. 5:15, 16)
위에서 “잇사갈”은 일들에 대해 보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을 표시한다; “발 아래 계곡에서 놓여지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에서 섬김을 담당하는 것이다; “르우벤 부류”는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지식들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들 사이에 여기서 “잇사갈”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 아래의 장소에서 이다; “양떼들의 쉿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양떼들”인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로부터 경멸됨을; “짐들 사이에 앉다”는 자아 공적의 일들 사이에 있다를 표시한다. (쉿하는 소리란 연설을 듣다가 거기에 불만을 표할 때 내는 야유소리라고 생각하면 될지 모른다; 또한 짐들 사이에 있다란 내가 이렇게 선행을 많이 베푸는데 왜 알아주지 않나하고 푸념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연상하면 될지 모른다. 역자주.)

그는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이는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 그것들은 행복으로 꽉 차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쉼(rest)”의 의미가 천국에 속하는 것들, 고로 선행의 선 안에 있는 것들, 또는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이것이 좋다”의 의미는 그것들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이다. “쉼”이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이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쉼”, 또는 “평화”는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계적 의미에서는 천국을 의미한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쉼” 또는 “평화”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에 있는 이들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 외애 더 다른 사람은 없는 바, 고로 보상 없이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있는 이들이고, 이들이 “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내적 의미에서 연결되는 사항들로부터 뒤이어지고 있다.
주제 자체에 주목해보자: 보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이들은 어떤 보상도 없이 선을 행함에 천국의 행복 자체이다는 크나큰 행복이 있다라고 아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 그들이 무지한 이유는 그들이 행복을 자아 사랑의 기쁨에서 지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사랑에서 기쁨을 지각하는 한, 그는 그만큼에서 천국의 사랑에 있는 기쁨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은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자아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기쁨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기쁨을 완전 소멸되게 한다, 하여 이 사람에게는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절대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만일 이런 본성이 말해주어봤자, 믿지 않고, 도리어 부정해버린다.
다른 삶에서 이것을 나로 악령들로부터 알게 해주신 적이 있었다. 이들은 지상 삶에서 보상 없이는 선을 타인들을 위하여서나, 또는 나라를 위하여서나 행한 적이 없던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보상의 목적 없이 선을 행하고 기쁨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상이 없으면 모든 기쁨이 중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 기쁨이 중지될 때, 천국의 기쁨이 시작된다라고 말을 덧붙였더니, 그들은 이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놀라워하는 것은, 이 천국의 기쁨이 인간의 가장 안쪽을 통하여 흘러든다는 것, 하여 그의 내면들은 표현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감동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믿는 것은, 만일 자기들이 자아 사랑의 기쁨을 잃는다면, 매우 비참해질 것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때 자기들의 생명의 모든 환희가 박탈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이들 또한 자아 사랑의 상태와 다른 상태에 있는 이들을 단순한 자, 천진난만한 자라고 부른다. 어쨌든 본문이 말하려는 이들은 보상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이들을 닮지 않은 대목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섬김에 따라 자신들에게 그 섬김에 보상해줄 자가 아니면 이웃이든, 나라이든, 천국이든, 주님이든 모든 것에 관계가 없고 오로지 자신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것이 본문의 잇사갈에 관하여 내적 의미에서 서술된다.

토지를 보고 그것이 즐거움이다. 이는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들은 이 행복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 고로 또한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토지”가 이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이 표현된다, 그 이유는 거기에 교회가 태고 때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즐거움(pleasant, 유쾌함)이었다”로부터, 이것은 보상 없이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있는 행복을 의미한다. 본문이 이렇게 말한다, 즉 “그가 쉼을 보고 그것이 좋다, 그리고 토지를 보고 그것은 즐거움이다.” 이 두 표현들에 의해 주님의 왕국에 있는 행복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쉼을 보니 좋다”는 천적 수준의 것에 관련되어 선 측면에서; “토지를 보니 유쾌하다”는 영적 수준의 것에 관련되어 진리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표현이 연달아 (반복되듯) 있는 이유는 선과 진리의 결혼 때문이다. 보상 없는 선으로부터의 일들 안에 행복이라는 주제를 한번 더 관심을 가져보자: 오늘날, 보상의 목적 없이 선들을 행함 안에 천국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매우 적은 편이다; 그 이유가 명예를 발전시키는 것에, 타인의 섬김을 받는 것에, 재물을 풍부히 지니는 것에, 쾌락들 안에서 생활하는 것 말고는 행복이 있는 곳은 없다고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들에 감동을 주는, 내면들을 훈훈하게 하는 행복이 있다는 것, 고로 천국의 행복이 있다는 것, 이 행복이 진짜 선행의 행복이다는 것에 너무나 깊이 무지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자라고 칭송되는 자에게 이것이 천국의 행복인지 여부를 물어보라. 많은 이들이 선한 일들을 거절하는 이유는 자기 공적을 인정받음 없이 선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믿는데서 비롯된다. 이들이 모르는 것은 주님에 의해 인도됨 안에 있는 이들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 자체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 이들은 선한 일의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의지 안에 있다, 이 의지는 거듭나져가는 이들에게 주님에 의해 주어진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 안에서 주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짐을 메기 위해 그의 어깨를 구부릴 것이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 노력으로 노동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깨”의 의미가 모든 힘, 또는 모든 노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짐을 멘다”의 의미가 공적을 위하여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러므로 “메기 위해 어깨를 구부린다”에 의해서는 공적을 위하여 온 노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멘다(bear)”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들이 선에 애착함이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애착함으로부터 마지못해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수행한 선에 보상을 바라는 이들에 한번 더 주목해보자: 우리가 알아야 하는 바, 그들에게는 만족이라는 것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 보다 더 큰 보상이 없을 경우 그들은 분노한다. 자기 보다 더 축복받았다고 보여지는 자를 발견하면, 슬퍼지고 불평을 늘어 놓는다. 그들은 내향의 행복에 존재하는 행복은 결코 만들지 못하고 외향의 것만에서, 즉 특출하다 칭송받는 것에서, 지배권을 쥐는 것에서, 천사들의 섬김을 받는 것에서, 천사들 수준을 넘는 것에서, 결과적으로 천국에서 제 1 인 자요 위대한 자이다가 되는 것에서 이다; 허나 여전히 존재하는 천국의 행복은 통치하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고, 타인이 나를 섬겨주는데 있지 않다는 것,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말하기를, 당신의 영광 안에서 우리가 하나는 당 신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자리를 수여 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네가 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내 오른편과 내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아는 바, 이방인들을 지배한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 위에서 왕권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들의 큰 자는 그들 위에서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나 너희 사이 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즉 너희 사이에 크다 일컫는 자는 누구든지, 너희 를 섬기는 자 일 것이다. 그리고 최고이다 하는 너희 속의 누구든지 모두의 종일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람의 아들 조차도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섬기기 위해 왔다 (막. 10:35-45).
그리고 보상의 목적 없이 선인 것을 행하는 이들이 천국을 가진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 이유가 자신을 추켜세우려 드는 자는 누구든지 깎아내려 질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 는 드높여 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정찬이나 만찬을 만들 때, 네 친구들을, 네 형제들을, 네 친척들을, 네 부유한 이웃들을 부르지 말라; 그들 역시 다시 너를 초대해서, 초대했던 너에게 보답을 만들지 않게 하라. 그러나 너는 잔치를 만들 때, 가난한 자, 불구자, 절음 발이, 소경을 부르라. 그리고 너는 복되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네게 보답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너는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 받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눅. 14:11-14).
“정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답된다”는 보상 없이 잘 행동함으로부터 향유하는 내적인 행복함이다, 그들은 이 행복을 자기들이 쓸모 있음을 수행할 때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보수 없이 섬김을 사랑하는 이들, 그들이 더 사랑하면, 그들이 수행하는 쓸모 있음은 더욱 고귀해진다, 사실상 그들은 타인들 보다 더 위대하고 더 힘있는 것이다.
보수를 위하여 선한 일들을 하는 자도 똑같이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말씀으로부터 아는 바, 천국에서 작은 자이기를 바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말하면 큰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큰 자가 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그러나 보수 없이 선을 행하는 자는 실지로 저명해진다는 것을 염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섬김만을 수행할 뿐이다.
이들로부터 공적을 챙기려 드는 자들, 그들의 품질을 위에서 살폈는데, 다른 삶에서 어떠한지는 여러번 살핀 바도 있는데, 이렇다: 그들은 나무를 패고 풀을 깍는다; 어떻게 그들이 표현하는지; 자아와 세상을 위해 선인 것을 행한 자는 다른 삶에서 보상이 없다는 것; 이들에 공적을 놓는 자는 자기들 입맛에 따라 말씀의 글자를 해석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내면의 내용이 있다에 비웃는다; 진정한 선행에는 자기 공적은 통째로 빠져 있어야 한다는 것;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하는 자는 그들이 행한 일들을 자아 공적으로 만든다는 것;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들 자신의 것과 자아 공적을 벗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선행한다고 믿는 것, 그리고 이 선을 수단으로 그들은 공적을 가지는 것은 개혁 초기의 대부부의 인물들이 가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남으로 해서 이것을 벗는다.

그리고 그는 공물에는 종이리라. 이는 그는 공적을 가질지도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공물에 종이다”의 의미가 종속되는 것과 섬기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뼈만 앙상한 나귀이다, 짐들 사이에 누운” 자들이 일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라고 말해지고, 그리고 “그는 짐을 메려고 어깨를 구부린다”와 “공물에는 종이다”에 의해서도 역시 일들을 통하여 공적을 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의미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가장 수준이 낮은 섬김이기 때문이다. “공물을 섬기는 것”이 종속되고 섬기는 것이다를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가 그것에 맞서 싸우려고 도성쪽으로 가까이 다가설 때, 너희는 그들을 평화에 초대하라; 그리고 그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응답하여, 너희에게 문을 연다면, 그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백성은 너희에게 공물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섬길 것이다 (신. 20:19, 11).
예레미야서에서:
사람들이 복작거리던 이 도성이 어찌하여 적막하게 되었는지! 그녀는 과부 같이 되어졌다. 나라들 사이에 위대했던 그녀, 제 1 인 자들을 통치했던 그녀가 공물을 바치는 자가 되었다 (애. 1:1).
위에서 “조공자가 되었다”는 섬김이 의미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시몬아? 땅의 왕들은 누구로부터 관세나 공물 을 거두느냐? 자기들 자녀로부터, 또는 외국인으로부터? 베드로가 그분에게 말한다, 외국 인들로 부터.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신다, 그러면 자녀들은 자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리가 그들에게 반칙 하지 않도록, 너는 바다로 가라, 그리고 갈고리를 던져라, 그리고 먼저 올라오는 물고기를 집어 올려라; 그리고 네가 그것의 입을 열었을 때, 너는 돈 한 조각을 발견할 것이다; 가져 가라, 그리고 나와 너희를 위하여 그들에게 주거라 (마. 17:25-27).
위에서 “공물을 주는 것” 또는 세금에 의해 섬기는 이들이 뜻해진다, 그러므로 “외국인들이 내고 아들들은 자유하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포로로 잡아 온) 외국인들은 종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바다로부터 물고기를 취하고 그것의 입에서 그가 바쳐야하는 돈 조각을 발견하는 것은 가장 수준이 낮은 자연 평면은 섬김을 마땅히 해야함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물고기들”이 이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6-18절. 단은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판결할 것이다. 17 단은 길에 있는 뱀, 작은 길의 독사이고, 말의 뒤꿈치를 물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18 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단. 이는 진리 가운데 있으나 선 가운데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표현함이 생활의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로부터 생활의 얼마간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으로부터서는 아직 아닌 이들이다. 그 이유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인간은 이런 등차에서 있다: 그는 처음에 진리 안에 있는다; 그러나 진리로부터 생활의 어떤 선 안에 있지는 않는다; 그 다음 그는 진리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는다, 그러나 선으로부터는 아직 아니다; 후에, 그가 거듭나져갔을 때, 그는 선으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다,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한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진리를 불어나게 한다: “단”에 의해 진리로부터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으로부터는 아직 아닌 이들이 뜻해진다; 그들과 더불은 선은 진리 안에 깊숙이 감추여 뉘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리에 애착함을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진리에 따라 살도록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함이 아닌, 진리로부터 인 바, 즉 새로운 의지로부터가 아닌 지적 부분으로부터 인 바, 고로 사랑으로부터가 아닌 그렇게 행하도록 명령되었기에 행동되는 것, 순종함으로부터 인 바, 그들은 첫 천국, 또는 최말단 천국 (천국의 외곽 부분)에 있다.
이들이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그의 열두 아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있는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서 그들의 품질 측면에서 주님의 왕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일반적 측면에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단”에 의해 의미된 이들이 최말단 천국 안에, 또는 주님의 왕국의 최말단 부분이 의미되는 이유는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나안의 토지를 지파들의 상속분으로 분배할 때, 단의 몫(lot. 부지, 제비뽑기)은 마지막에서 할당됨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여. 19:40-48); 그리고 그들의 상속분은 이 토지의 맨끝 지경에 놓였다 (사. 18); 제비는 여호와 앞에서 뽑혔다 (여. 18:6), 그러므로 그들의 표현함에 따라 각각에게 할당된 것이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왕국을 표현했다, 그리고 모든 경계선들은 표현적이었다; 고로 이 토지의 최말단들은 주님의 왕국에 있는 최말단들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단은 거기서 최말단들에 있는 이들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선과 결합하기 이전에서는 그것들은 최말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진리가 선으로부터 완전 분리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왕국의 어떤 경계선 안쪽에는 있지 않는다, 경계선 밖에 있는다.
단의 상속분이 가나안의 토지의 최말단이었다는 것은 이 토지의 전체를 묘사할 때 말해진 것, 즉 “브엘세바로부터 단까지”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삼하. 3:10; 17:11; 24:15; 왕상 4:25). 이 인용 구절에 등장하는 “브엘세바”는 토지의 가장 안쪽을 의미했다, 그 이유가 시온과 예루살렘이 토지의 중심이 되기 전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는 있으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의 품성이 사. 18장에서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이 거주할 곳을 확보하기 위하여 쳐들어갔을 때, 미가의 집으로부터 레위인을 데리고 나오고, 그의 에봇, 데라빔, 새긴 우상도 가져왔다; 이것 때문에 진리 안에는 있으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의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그들은 외적인 것을 숭배하나 내적인 것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선 안에 있는 자 외에는 내적인 것을 알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이 단 지파에 의해 표현되어진 것은 말씀의 모든 역사물들, 즉 모세의 책,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들이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마찬가지가 단 지파에 관한 사사기서의 줄거리도 포함된다. 진리 안에 있으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단에 관한 아래의 내적 의미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의 지파 중의 하나로서 판결할 것이다. 이는 그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표현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들 중의 하나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판결하다”의 의미가 공적 측면에서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백성”의 의미가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 이다, 그 이유가 이들이 “단”, 또는 단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파”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하나로서 그의 백성을 판결할 것이다”에 의해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 진리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표현하는 일반적 진리들 사이에 있다가 의미되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판결함”에 의해 공적 측면에서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지파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모든 진리들이 표현되기 때문인데, 이 지파가 언급되는 많은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심판하는 것은 진리이다; 고로 “자기 백성을 심판함”에 의해서는 공적 수행에서의 진리가 의미된다.
이에 관련하여 우리가 말씀에서 읽게 되는 대목으로는, 24원로들이 왕좌에 앉아 나라들과 백성들을 심판한다는 것;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마찬가지로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대목이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글자대로 심판한다고 (억지로라도) 알고 있으려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24 원로들”, “12 사도들”, “왕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알게 될 때, 이런 대목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내적 의미로부터 알게 된다; 즉 하나의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로서 있는 모든 진리들이다. 이에 따라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가 여기서인, “이스라엘의 지파중의 하나로 자기 백성을 판결함”에서 뜻해진다; 그러나 그들, 또는 그들의 어떤 원로들이 판결한다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의미된 진리들 자체가 판결한다는 것, 고로 주님 만이 판결하신다는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24원로들이 왕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대목이 아래 구절에 있다:
왕좌를 빙둘러 24 왕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왕좌 위에 24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흰 의복을 입었고, 그들의 머리에는 금 왕관이 있었다 (계. 4:4: 11:16).
다시:
나는 왕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계. 20:4).
열두 사도들에 관하여는 아래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거듭남에서 나를 따랐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의 왕좌 위에 앉을 때, 너희 역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나는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 같이 왕국을 너희에게 약속한다, 너희는 내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심판하는 왕좌에 앉을는지 모른다
(눅. 22:29, 30).
위 구절들에서 24 원로들, 열두 사도들이 뜻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인간이든, 천사들이든 누구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 뜻해진다; 즉 주님밖에 인간의 내면들을 알 수 있는 분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지금 명백한 바, “단이 이스라엘의 지파 중의 하나로 그의 백성을 판결할 것이다”에 의해 단에 의해 표현된 진리가 일반적 진리들 사이에서의 하나로서 심판이 있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단은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 이는 선이 아직 까지는 인도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표현함이 진리 안에 있으나 선 안에는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다로부터; “뱀(serpent)”의 의미함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길”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단은 길에 있는 뱀일 것이다”에 의해 진리에 관하여 그들이 추론함, 그 이유는 선이 아직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추론함의 품질, 그 결과 진리의 품질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것에서 말해질 것이다.
“뱀”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서 인간의 내면들이 다양한 동물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이로부터 말씀에서도 마찬가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적인 것들이 뱀에 의해 표현되는 이유는 감각적인 것들이 인간 안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적으로 지상적인 것들, 그리고 마치 기어다니 듯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흐르는 형체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그밖의 장소에서 살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감각적인 것들이 뱀들에 의해 표현되어졌고, 주님의 신성한 감각적 부분 조차 광야에서 구리뱀에 의해 표현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외적 부분들에서는 신중함과 용의주도함이 “뱀”에 의해 의미되었음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는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악의가 없어라 (마. 10:16).
그러나 인간이 감각적인 것 안에 있을 때, 내적인 것과 멀리 떨어진다, 마치 진리 안에 있고, 선 안에 있지 않은 경우와 같다, 그리고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말한다, 이때 “뱀”에 의해 추론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단이 취급되는 여기서는 진리에 관하여 추론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선이 아직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에서 뱀에 의해서는 악의, 교활, 사기가 뱀에 의해 의미된다, 그러나 독 있는 뱀, 독사 같은 경우는 독성 있는 추론이 의미된다

작은 길의 독사. 이는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추론함을 의미한다. 이는 “독사(arrow-snake)”의 의미가 선에 관하여 추론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작은 길(path)”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작은 길의 독사”가 선에 관하여 진리로부터 추론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뱀”에 의해 추론함이 의미되고, 고로 “독사”에 의해서는 (추론) 자체를 계획하는 추론함, 즉 선을 향하여 진리로부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는 아래쪽에 있고, 선은 위쪽에 있기 때문이다.

말의 뒤꿈치를 문다.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오류를 의미한다. 이는 “문다(bite)”의 의미가 달라붙는(유착, adhere) 것, 그렇게 해서 상해를 입히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의 뒤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오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뒤꿈치(heel)”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과 육체 수준의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은 지적 부분을 표시한다; 여기서의 “말”은 오류들을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 또는 감각적 수준의 것에 속하는 지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있는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오류 안에 있는 이유는 선이 진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진리는 어떤 빛 안에도 있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리고 선이 어떤 진리를 만날 때, 선은 진리를 계몽할 뿐만아니라, 선 자신의 빛 안으로 진리 자체를 가져다 놓는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 선 안에 있지 못한 이들은 그늘과 어둠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진리는 자체로부터 빛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으로부터 가지는 빛은 어렴풋한 수준의 빛, 마치 틈새로 새어나온 빛의 수준일 뿐이다. 이런 수준의 인물이 진리에 관하여 생각하고 추론할 때, 그리고 진리로부터 선에 관하여 추론하고 생각할 때, 그들은 어둠에서 유령을 보는 이들과 비슷하다, 그리고 유령들을 진짜 신체들이라고 믿는다; 또는 침침한 장소에서 벽에 있는 표시들을 보고 공상 안에서 이것들이 어떤 인간 또는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과 비슷하다; 여기서 취급되는 진리와 더불은 경우가 이런 수준의 경우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진리들이 아닌 것을 진리들이라고, 즉 유령을 신체라고, 벽의 어떤 표시가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의 모든 이설(이단, heresy)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어떤 진리 안에 있어왔던 이들, 그러나 선 안에 있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발생되어져 왔다; 그들에게 이설은 진리 같이 정확하게 나타났다; 같은 방식에서 교회 안의 오류들도 그러하다. 이런 자신들만의 진리(오류)들을 선포해왔던 이들이 선 안에 있지 않아왔었다는 것은 그들이 신앙의 진리 뒤쪽 멀찍이 구석으로 선행의 선을 처박아 두거나, 이 선에 전혀 일치하지 않는 기발난 비꼬기 논리로 돌려 부분적으로 자동으로 거절되게 한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이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수준으로부터의 오류들로부터 선과 진리에 관하여 추론한다고 말했는 바, 이제는 오류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가야할 것 같다. 예로 사후의 삶을 가지고 생각해보자. 가장 낮은 자연적 수준으로부터의 오류 안에 있는 이들, 즉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 신체 외에는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여 그가 죽을 때, 그가 다시 육체를 받지 않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런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즉 우리의 육체 안에는 육체라는 것이 살아 있는 것 말고 또 다른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 즉 내면의 인간이 있다는 것, 우리가 죽을 때 이 인간이 주님에 의해 들리워진다는 것, 들리워지면 인간은 영들과 천사들이 가지는 것과 같은 몸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는 보고, 듣고, 말하면서 어느 집단 안에 있다는 것, 이는 그가 세상에서의 자기와 같은 인간 자신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허나 그들은 이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가장 수준 낮은 자연적인 것으로부터의 오류들이 그들로 이런 일들은 불가능하다고 믿게 만든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체가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인물들이 영 또는 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이것마저 자연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이에 관한 생각도 여하간 오리무중해 있다, 하여 누구는 에테르이라고, 누구는 숨이라고, 누구는 불꽃이라고 얼버무린다; 어떤 이는 그것이 육체에 다시 결합할 때까지 그것은 거의 어떤 생명력도 가지지 못하는 단지 생각하는 힘이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모든 내면의 것들이 그늘 안에, 어둠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바깥쪽의 것들 만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실수 안으로 쉽게 빠져들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하여 그들은 혼이 육체와 다시 함께 하는 것만에 몰두한다. 특히 세상의 파멸 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인간의 생명은 들짐승의 생명과는 완전히 같지가 않다, 그리고 죽은 자의 누구도 인간에게 나타나서 생명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만 간단히 초점을 바꾸어 생각해도 그들은 항간에서 말해온 부활에 관한 교리로부터 물러나 앉고 만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예가 많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본문과 연결해 생각을 정리하면, 그들이 선 안에 있지 않아서, 즉 선을 통하여 빛 안에 있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위의 예를 든 경우 같은 수준에 머물고 막무가내로 그것을 당차게 고집하는 이들에 관하여 말해진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쪽을 향하여 떨어질 것이다;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여.” 이는 주님이 도움을 가져다 주시지 않으면 퇴조함이 온다가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기수는 뒤를 향해 떨어질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물러남이 온다를 의미한다. 이는 “뒤를 향해 떨어짐”의 의미가 멀어짐(recrde), 즉 진리로부터 멀어짐이다; “기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으로의 오류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에 의해 위에서 서술한 이런저런 상태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주님의 왕국에서 마지막째(가장 바깥 경계선)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단”에 의해 거짓들을 부화하고 퍼뜨리는 거짓 안에 있는 이들도 의미된다. 그들의 거짓들이 “말”이라 불리우고, 진리와 선에 관해 그들의 추론함이 “뱀”이라고 아래 구절에서 불리운다:
그의 말들이 코를 불며 거칠게 숨쉼이 단으로부터 들려졌다; 그의 강한 말들의 울음 소리에 온 토지가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고 토지와 거기 가득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을 삼켰다. 보라 내가 너희 사이에 뱀들을, 독사들을 보낸다, 이것은 마법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물을 것이다 (예. 8:16, 17).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여. 이는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을 기다림”의 의미가 도움을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 안에서 물러나고 선 안에서 아직 인도되지 않을 때 주님께서 가져오시는 도움에 관하여 주목해보자, 이것이 “기수가 뒤쪽으로 떨어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오 여호와시여”에서 의미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래쪽, 또는 바깥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그들이 아직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마치 거듭나는 이들 같이 위쪽 또는 안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거듭나질 때, 질서는 이 길로 바뀌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그리고 선 안에 아직 있지 않은 이들이 아래쪽과 바깥쪽을 쳐다보는 바, 그들은 웅대한 사람에서 바깥쪽의 피부의 영역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 이유가 바깥쪽 피부는 신체의 내면들로부터 바깥쪽으로 돌아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인 것으로부터 그것의 닿음(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내부로부터의 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이 주님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웅대한 사람에 있기 때문, 그러나 최말단들에 있다.

19절. 갓,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갓”이란 진리로부터의 일들 일 뿐, 아직은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님을 의미한다.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란 사려분별함 (판단함)이 없이 진행된 일들, 이것은 진리로부터 질주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란 그러므로해서 자연 평면에 있는 무질서를 의미한다.

갓. 이는 진리로부터의 일들 일 뿐, 아직은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갓”의 표현함이 일들(works)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진리로부터의 일들, 그러나 아직 선으로부터는 아닌 일들이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의 묘사됨으로부터 알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질서적 순서에 따라서 이기도 하다. 앞의 “단”의 경우는 진리 안에 있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것, 그 뒤를 이어 진리들로부터의 일들이기는 하되, 아직 선으로부터의 일들은 아니다, 하여 순서적으로 이 일들의 품질이 이어진다.

군대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사려분별함 (판단함)이 없이 진행된 일들, 하여 그들은 진리로부터 질주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군대(troop)”의 의미가 일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사려분별 없는 일들이다; 그 이유가 진리로부터 이되 아직 선으로부터가 아닌 일들을 행하는 이들은 불명료한 이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선으로부터 일들을 행하는 이들은 계발된 이해력을 가진다, 그 이유는 선이 계발해주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의 진리의 빛은 선을 통하여 지적 부분으로 흘러든다, 고로 진리 안으로, 그러나 진리 안으로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여기서는 경우는 태양의 빛과 같다, 이 빛은 열을 통하여 식물 왕국의 주체들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그것들로 성장하고 꽃피우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빛이 열 없이 흘러든다면, 그것은 겨울의 경우인 바, 자라거나 꽃피우거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를 파괴한다”란 진리로부터 내몰아낸다를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갓”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이 누구인지가 말해질 것이다. 진리에 관련하여환영에 빠진 이들, 그럼에도 이로부터 일들을 하는 이들; 고로 진리로부터가 아니고, 선으로부터는 더 더욱 아닌 이들이 있다. 이런 일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로부터부터 내몰린다, 그 이유가 진리 안에 있으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어떤 것을 자기의 종교적 어떤 확신(광신적 신앙, religiousity)으로부터 행동 안으로 가져온 그 후 그는 마치 그 확신이 진리 자체인 듯 둔갑하여 그것을 방어하는데 골몰하고 그것 안에 웅크린다, 이런 상태의 당사자는 선 안으로 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확신 자체를 수정하려 어떤 것도 받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가 그렇게 행동함을 수단으로 그는 그것에 물들여져 있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로 일들이 그를 진리에서 내몰리게 하는 셈이다. 이 외에도, 그는 이런 것들이 진리가 아닌데도 진리이다고 믿는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 또한 “단”에 의해 의미되는 이들 같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사려분별함 없이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모든 이는 이웃으로 동등하게 세어져야 한다는 것을 진리로 삼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그는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똑같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에 그의 관심이 모아져 있다. 고로 그는 사려 분별 없이 일들을 진행하는 셈이다. 또한 진리 자체에도 반대된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인 즉, 모든 이는 이웃이다, 그러나 모든 이웃은 각기 다른 등차에 있다, 그리고 선 안에 있는 이웃이 더 등차가 높은 이웃이다.
또한 “갓”에 의해 모든 구원받음은 일들 만에 있다고를 만드는 이들도 의미한다, 이를 염두하시고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고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서서 기도했다, 하느님, 저는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즉 제가 다른 이들 같지 않기 때문, 즉 저는 강탈자가 아니고, 부정한 자도 아니고, 간음자도 아니고, 심지어 세리조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 주에 두 번 금식합니다, 저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눅. 18:11, 12);
그야말로 위 구절은 진리들 자체로서 외적인 것을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주님의 왕국에도 이런 이들이 있는데, 문지방에 서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내가 네게 말한다, 세리가 다른 이들(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여김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눅. 18:14). 또한 바리새인도 의롭다여김을 받고 내려갔다, 그 이유는 그는 명령되었기에 순종함으로부터 일들을 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갓에 의해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부르면서 일들을 행한 이들이 표현되어진다; 어쨌든 그들의 일들은 진리들과 같다, 그 이유가 일들은 의지와 이해력이 행동선상에 있는 것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선인 것을 행하겠다는 의도심을 지니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무지함 안에 순진의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일하는데도 진리이다고 믿어 외적 일들 안에 있는 이들이 아래 구절에서 “갓”에 의해 의미된다:
여호와를 버린 너희, 나의 거룩함의 산을 잊은 너희, 갓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므니에게 음료 제물 (제주)을 따른 너희 (이. 65:11).
“갓에게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일들만에 있다 임을 표시한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서:
암몬의 아들들에게 향하여,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이스라엘에 [아들들이 없느냐]? 그에게 상속자가 없느냐? 어찌하여 그의 왕이 갓을 물려 받고, 그의 백성들이 도성들에 거주하느냐? (예. 49:1);
“갓을 물려 받는”것은 진리이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일들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암몬의 아들들”은 진리들을 거짓화하는 이들, 거짓화 해놓고 그것에 따라 사는 이들 이다, 갓에 관한 이런 사항들이 예언자에 의해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질서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는 “파괴하다(ravage)”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내몰려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질서가 혼란한 것, 또는 질서가 결핍되는 것이다; 그리고 “뒤꿈치”의 의미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질서의 궁핍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진리로부터 일들을 하되, 아직 선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그들의 자연 평면에 질서의 궁핍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일들이 자연 평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영향을 미친 만큼에서 그들의 내면들이 닫힐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내면들이 종결되는 평면이 자연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질서의 결핍이다면, 내면들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것도 질서의 결핍 안에 있게 된다; 질서의 결핍은 어둠이고 불명료함이다, 하여 그들은 진리인 것을 볼 수 없고, 어둠과 불명료함 때문에 그들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붙잡고, 비 진리로부터 일들을 하고 있다. 사실상 일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진리이다, 그 이유는 일들은 결과와 삶 안에 있는 선행과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여 진리 없이 선행도 없다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할까? 일들은 바깥쪽 형체로 있는 선과 진리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는 선은 의지력으로부터, 진리는 이해력으로부터 있고, 이것들이 행동 안으로 놓여질 때, “일들”이라 불리우는 것인 바, 선과 진리가 이러이러하면, 일들 역시 이러이러함이 분명하지 않을까?

20절. 아셀로부터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아셀로부터”란 애착들은 행복이다를;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란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란 진리로부터 오는 즐거움(유쾌함)을 의미한다.

아셀로부터. 이는 애착들은 복됨(blessedness, 행복, 은총 입음)이다를,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천적 수준의 애착들의 복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셀”의 표현함이 영원한 생명(삶)으로부터의 행복(happiness), 그리고 애착들로부터의 복됨(blessednes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아셀은 복됨(blessedness)으로부터 그렇게 불리우는 이름이다. (이 대목에서 복됨이라는 단어는 역자가 사전에도 없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가 영한 사전은 다른 두 영어 단어를 행복으로 모두 번역하나 영어 단어는 구분해 사용해서 이 구분을 표시하기 위해 약간 다른 단어로 복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실상 모두 행복이다. 그러나 단어의 괄호에 두 다른 영어 단어를 삽입해두어서 혹시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하여 덧붙인다. 영어 단어는 자연적 차원에서만, 영적 차원에서만, 또는 자연적과 영적을 혼동해 사용하거나 할 때 각각의 표현에 각각의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휘는 많고 복잡하지만 일단 그 단어나 어휘를 알면 차후 구분이 완전히 자동적으로 잘되므로 읽는 자로 혼돈을 줄 염려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늘을 성경에서 heaven이라고 표현하지, sky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성경은 인간의 자연적 행복 보다는 영적 행복을 추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표현인 기쁨의 경우도 joy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기쁨(천적 수준의 기쁨, 환희)을, delight은 보통의 영적 기쁨을, pleasure는 자연적, 육체적 수준의 기쁨, 하여 쾌락 같은 것을 말한다. happiness는 일반적, 또는 자연적, 영적 모두를 아우르되 자연적 수준이 강조되는 행복이나, blessedness는 영적 수준의 행복일 것으로 여겨진다. 역자가 언어학자가 아닌 이상, 위에 말한 것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아이디어 제공 수준에서 참조하기 바란다. 역자주) 아셀로 표현되는 행복은 쉽게 묘사되어질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적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누구와도 당사자의 육체 자체와 더불어 이 행복은 좀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감각 부분에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육체에서 그의 삶 동안 (두 감각들을 지니는데), 인간은 자기 육체에서 거행되는 감각들에 대해서는 100% 명료하나, 그의 영에서 거행되는 감각 부분에서는 매우 불분명해 있다. 그 이유는 육체에 있는 동안 세상적 그의 관심사가 영적 감각을 방해하는 형국으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감각적인 것이 내향의 것들과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애착들의 복됨은 흘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겨우 흘러든 것마저도 실상 아주 희미한 수준, 하여 마음이 만족함으로부터 있어지는 고요함 정도에서만 감지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것은 자체를 완전 명명백백하게 한다, 하여 그때는 복되고 행복한 어떤 것으로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때 그것은 내면들과 외면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 마디로, 천적 수준의 애착들로부터의 복됨은 내적 경로를 수단으로 흘러드는 혼 또는 영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향하여도 꿰뚫는다, 그러나 자연적,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즐거움들이 길에 버티지 않는 만큼에서일 뿐이다.
그나마 이 복됨의 조금(whit, 조각)일지라도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즐거움에 있는 자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사랑들은 완전 반대 국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들에 있는 자들은 위엄을 드높이는 것, 재물이 풍부해지는 것, 누구보다 더 잘났다 칭송받는 것 등등을 벗어나 복됨이라는 단어는 납득조차 불가능해 있다.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본다면, 즉 이런 사랑들로부터의 즐거움들은 외적이다는 것, 하여 육체와 더불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사후 마음에 남는 것은 슬픔과 우울함으로 변하여진다는 것, 이런 것이 지옥들을 지배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에 있는 이들에 의하여 향유되는 만족함과 행복이 있는 내적 즐거움이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사항들을 그들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외적 부분이 그들을 지배하고 내적 부분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아셀”에 의해 의미된 애착의 복됨이 무엇인지 알았으리라 본다.

그의 빵은 지방이 있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기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지방이 많음, 살쪘음(fstness)”이 천적인 것, 또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어 “지방”이 사용되되 빵에 결합되어 사용될 경우, 이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고, 이때 “지방”에 의해서는 이 사랑의 기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왕의 기쁨들을 산출할 것이다. 이는 진리로부터 오는 유쾌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쁨(delight)들”의 의미가 유쾌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왕”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왕의 기쁨들을 산츨할 것이다”는 진리로부터 유쾌한 것을 표시한다. 위에서 “선으로부터의 기쁨”과 “진리로부터 유쾌함”이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말씀의 모든 곳에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에서 이다. 천국의 복됨으로부터인 선으로부터 기쁨과 진리로부터의 유쾌함은 게으름에 있지 않고, 활동적임에 존재한다; 또한 활동적 임에서 기쁨과 유쾌함은 항구적이고 꾸준히 위쪽을 향하는 바, 복됨을 유발한다. 천국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활동적임은 쓸모 있어짐을 수행함에 존재한다 (이들에게 이것은 선으로부터의 기쁨이다), 그리고 쓸모 있어짐의 목적에 풍미를 더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로부터의 유쾌함이다).

21절.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라, 세련된 강연을 한다.

납달리. 이는 시험들 이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납달리의 표현함이 시험이다로부터; 또한 시험들 이후의 상태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납달리는 “씨름함”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명명되어졌다, 이는 영적 의미에서 시험들을 의미한다.

풀어 놓은 암사슴. 이는 자연적 애착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암사슴”의 의미가 자연적 애착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풀려 있다”의 의미가 자유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붙잡힌 암사슴이 풀어나진다면, 이는 자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험의 상태로부터 해방됨이 “풀어나진 암사슴”에 비교되는 이유는 암사슴이 숲의 동물이고, 여느 짐승 보다 자유함을 사랑하는 짐승이기 때문, 이것은 또한 자연 평면과도 닮은 데가 있다; 그 이유가 이것(자유함을 사랑함)은 그것의 애착들의 기쁨 안에서 있기를 사랑하기 때문, 결과적으로 자유함 안에 있기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자유함은 애착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사슴”이 자연적 애착을 의미하는 이유는 암사슴이 [선한] 애착들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즉 쓸모 있음과 식품을 위해 있는 짐승들, 어린 양, 양, 염소, 염소새끼, 수소, 거세한 수소, 암소 등과 비슷한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화된 이런 짐승들은 태워바침이나 제물로 사용되기 때문에 영적 수준의 애착들을 의미함에 비해, 암사슴은 이런 쓰임새에는 있지 않는 바, 자연적 수준의 애착밖에 더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적 애착들이 “암사슴”에 의해 의미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내 발을 암사슴들의 것 같게 만드신다, 그리고 나를 내 높은 장소에 서게하신다 (시. 18:33).
그리고 하박국서에서:
여호비 주님은 나의 강함이시다, 그분은 내 발을 암사슴의 것 같게 놓으신다, 그리고 나를 내 높은 장소 위에서 행군하게 만드신다 (합. 3:19).
“암사슴들의 것 같게 발을 만드는” 것은 애착들의 자유함에 있는 자연 평면을 표시한다. “암사슴들의 것 같이 발을 놓는” 것이 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발이 암사슴들의 것 같이 달리기 위해 재빠르고 행동적인 발을 만드는 것이 영적 어떤 것이 아니다는 사실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적인 어떤 것이 포함한다는 것은 즉각 이어지는 말이, “여호와께서는 그를 놓아서 그가 그의 높은 장소 위에서 행군하게 하신다” 임에서 분명해진다. 이것이 자연적 애착 넘어 있는 영적인 애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아래 구절에 있다:
절름발이가 숫사슴 같이 뛸 것이다 (이. 35:6);
그 이유가 “절름발이”에 의해 선 안에 있는 이, 그러나 아직 진짜 선 안에 있지는 않는 이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숫사슴이 물있는 시내를 갈구함 같이 제 혼이 당신을 갈구합니다 (시. 42:1);
위에서 “숫사슴”은 진리에 애착함이다; “물있는 시내를 갈구함”은 진리들을 갈망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의 딸로부터 그녀의 모든 영예는 가버렸다; 그녀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들 같이 되어진다, 그들은 풀밭을 발견하지 못했다 (애. 1:6)
위에서 “시온의 딸”은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이 애착함은 천적 수준의 애착함으로부터 이다; “제 1 인 자”들은 이 교회의 제 1 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이는 숫사슴들에 비교되어진다, 그러므로 자연적 진리의 애착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숫사슴들이 풀밭을 발견 못함”에 의해서는 진리들과 그것들의 선 없이 있는 자연적 애착들을 의미된다.
마찬가지로 “암사슴”에 관한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땅이 조각으로 갈라져버렸다, 토지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들을 덮었다, 그 이유는 새끼를 낳은 암사슴조차도 들판에 풀이 없어 새끼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 14:4, 5)
“암사슴”은 자연적 선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들판에서 새끼를 낳았다”란 자연적 애착들이 교회의 영적인 것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애착들이 진리들과 선들이 결핍되어졌기 때문에, 말해지는 바, 그녀는 “포기했다(내버렸다), 풀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이는 이 구절에서 “암사슴”에 어떤 내적 의미가 있을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 없이는 “암사슴이 들판에 새끼를 낳고 풀이 없어 그것을 포기했다”에 의해 뜻해지는 바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암사슴들로 낳게 만드신다, 그리고 숲을 발가벗기신다; 그러나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이는 말한다, 영광 (시. 29:9);
“암사슴들로 낳게 만드는 여호와의 음성”이라는 말에 영적인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 뒤를 이은 말, “그러나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이들이 말한다, 영광”이 이어짐에서 분명해진다. 이 말은 영적 의미 없이는 앞의 암사슴들과 숲과 일치되지 않는다.

강연을 세련되게 한다. 이는 마음(mind)이 기뻐함(gladness)을 의미한다. 이는 “세련된 강연”의 의미함이 마음이 기뻐함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모든 강연이 마음(지성)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 하여 마음이 기쁘고 기운차 있을 때, 세련된 강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단, 갓, 아셀, 납달리에 관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 없이 그의 발언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즉, “단은 길 위의 뱀, 작은 길의 독사이다, 말의 뒤꿈치를 문다, 그의 기수는 뒤쪽으로 떨어질 것이다”; 또한 “군대가 갓을 파괴할 것이다, 그는 뒤꿈치를 파괴할 것이다”; 또한 “아셀의 빵은 지방이 있다, 그는 왕에게 기쁨들을 줄 것이다”; 또한 “납달리는 풀려진 암사슴이다, 세련된 강연을 한다”에 대해서이다. 내적 의미라는 열쇠 없이 누가 이런 사항들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사항들은 야곱의 아들들, 또는 지파들에 관해 말해진 것이 아님은 “날들의 끝에서” 그들에게 떨어지는 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로부터도 간단히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표현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는 것을 이미 살핀 바로 분명해졌을 것이다.

22-26절.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인데,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24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25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26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이다. 이는 영적 왕국의 교회, 최고 높은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부분에 관련되는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는 신성한 영적 부분에 관련한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왕국과 신앙의 선을,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는 열매가 풍성함과 번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이 선의 열매가 풍성해짐과 진리의 번성함을 표시하기 때문에 그는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이다”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이 묘사되나, 앞의 유다에 의해서는 주님의 천적 왕국이 묘사된다고 말해진 바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이 천적, 영적 왕국이기 때문이다. 천적 왕국은 셋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 천국이고, 영적 왕국은 둘째 천국, 또는 중간 천국을 구성한다. 영적 왕국에서 주님은 달 같이, 천적 왕국에서는 태양 같이 나타나신다. 요셉과 유다에 의한 두 왕국의 차이는 단지 받는 그릇의 차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은 선밖에 그 외는 아니시다. 그분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이 천국 안으로 흐르는데, 그분의 천적 왕국으로 흐를 경우, “신성의 천적 부분”이라 말하고, 영적 왕국으로 흐를 경우, “신성한 영적 부분”이라 말할 뿐이다. 즉 받는 그릇에 따른 상대적, 관계적 표현일 뿐이다.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오는 진리로부터 결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결실이 풍부한 자”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결실이 풍부함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결실이 풍부함은 출생, 태생 같이 진리와 선의 결실이 풍부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샘(fountain, 원천)”의 의미가 말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아들이다는 점에서는 샘 가까이에 있는 결실이 풍부한 자이다”에 의해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 결실이 풍부함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 즉 영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진리로부터 선인 것을 아는 것을 배운다, 고로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들어감이 있어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실이 풍부한 자”에 의해 의미된 열매가 풍성함을 가진다.

딸이다는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이는 거짓들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딸”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영적 수준의 교회, 그 이유는 이것이 여기서 취급되는 주제이기 때문; 그리고 “성벽 위에서 행진함”의 의미가 거짓과 싸우기 위하여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사수가 그를 비참해지게 한다, 그리고 그를 향해 쏜다, 그리고 그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활의 강함 안에서 앉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맞서 거짓들이 싸우는 것이 의미된다.
“담 위에서 행진한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거짓들에 의해 진리가 공격받음, 그리고 진리가 거짓에 맞서 방어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수준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고, 주님에 의해 이것이 방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 교회에 속하는 것들이 도성에 비교되어, 그 안에 성벽, 외루, 성문, 빗장 등을 지닌 성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성이 공격당함에 의해서는 거짓들에 의해 진리가 공격 당함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성”은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의 “성벽”은 그것을 방어하는 신앙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반대적 의미로는 그것을 파괴하는 거짓들이다. “성벽”이 방어하는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강한 도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을 그분께서는 성벽들과 성채들을 위하여 임명하실 것이다. 너희는 성문을 열어라, 하여 신의를 지키는 정의로운 나라가 들어갈는지 모른다 (이. 26:1).
다시:
너희는 너희 성벽들을 구원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성문은 찬양(이라 부를 것이다) (시. 60:18).
다시:
보라 나는 너희에게 손 위에 새겼었다, 너희 성벽들은 내 앞에서 계속적으로 있다 (이. 49:16);
“성벽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너희 성벽들 위에 경비병들을 놓을 것이다, 오 예루살렘이여; 그들은 마음에서 여호와를 간직하면서 낮과 밤 내내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이. 62:6);
위도 의미는 앞과 같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빌론과 싸우려 지닌 전쟁의 무기들을 되돌릴 것이고, 성벽 없이 너희가 포위되게 할 것이다. 나 자신 내뻗은 선으로 너희에 맞서 싸울 것이다 (예. 21:4, 5).
다시: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딸의 성벽을 파괴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누벽과 성벽이 통곡하게 만드셨 다; 그들은 함께 쇠약해질 것이다. 그녀의 성문은 땅 안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분은 그녀의 빗장들을 파괴하시고 부수셨다 (애. 2:8, 9).
에스겔서에서:
아르왓의 아들들과 너의 군대가 내 성벽 위 빙둘러 있었다; 그리고 가마딤이 너의 망루에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방패들을 네 성벽 빙둘러 걸어두었다, 그들은 너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했다 (겔. 27:11);
두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수단으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되고 있다.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이 “성벽”과 “도성”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요한에 의해 보여진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로부터 매우 분명해진다. 거기서 새로운 교회가 의미되는 것은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명백하다; 그리고 거기의 “성벽”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어진다: 즉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 크고 높은 벽을 가지고 있고, 열두 문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은 열 두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던 그는 도성과 그곳의 문들과 벽을 측량하였다. 그리고 그가 도성의 벽을 쟀는데, 일백 사십 사 큐빗이었고, (이는) 천사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치수이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구조물은 벽옥이었다, 그리고 도성은 순수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 그리고 도성의 벽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 귀중한 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계. 21:10-19);
“성벽”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선행의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는 것은 성벽에 관하여 말해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열두 기초들을 가졌고, 그것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있다.” “열둘”에 의해 모두가 의미된다; 그리고 “성벽”과 그것의 “기초들”은 신앙의 진리들, 마찬가지가 “열두 사도들”이다; 또한 “성벽은 144큐빗이었다.” 이 숫자에 의해 “12”와 같은 것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12×12=144 이기 때문이다. 이 숫자가 성벽에 적용될 때 이는 신앙의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에 덧붙여진 말은 “사람의 치수, 즉 천사의 치수”이다는 것이다; 또한 “성벽의 기초는 벽옥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기초들은 모두 각각의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그 이유가 “벽옥”에 의해, 그리고 “보석”에 의해 신앙의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반대적 의미에서 “성벽”은 파괴시키는 거짓들이 의미되는데 아래 구절에 있다:
환상의 골짜기에 떠들썩함의 날; 주 여호비 체바욷께서 성벽을 파괴하신다, 그리고 산을 향하여 외침이 있다; 그 이유가 엘람이 화살통을 메고, 사람의 병거와 더불어, 마병과 더불어 이기 때문, 마병들은 성문에서조차 그 자신을 놓이게 했다 (이. 22:5-7).
다시:
네 성벽들의 피난의 요새를 그분은 풀이 죽게 하시고, 내던지시고, 땅으로 날려보시고, 먼지로 되게 조차 하실 것이다 (이. 25:12).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그녀의 성벽들에 가라. 그리고 던져라 (예. 5:10).
다시:
나는 벤하닷의 궁전을 삼킬 불을 다마스커스의 벽에 지필 것이다 (예. 49:27).
다시:
바빌론의 성벽들을 향하여 기를 들어올려라, 경계를 계속하라, 경비병을 세워라 (예. 51:12).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두로의 성벽들을 전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탑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로 부터 그녀의 먼지를 긁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바위의 마름(dryness)으로 만들 것이다
(겔. 26:4).

그를 더 비참하게 한다. 이는 거짓들을 수단으로 저항함을 의미한다. 이는 “더 비참하다”의 의미가 저항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싸움이 지금 취급되는 동안 저항이 큼에 비례하여 비참함도 더해지기 때문이다. 저항함이 거짓을 수단으로 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를 향해 쏜다. 이는 그들은 이런 거짓들로부터 싸운다를 의미한다. 이는 “쏘다”의 의미가 거짓들로부터 싸우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하다; 그 이유가 “활”이 교리를 의미하고, “화살”, 또는 “표창(dart)”은 교리 속에 있는 이것저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교리의 진리들을, 그리고 거짓들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교리의 거짓들을 의미한다. “쏘는”것이 여기서 거짓들로부터 싸우는 것인 이유는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를 미워한다, 활쏘는 자. 이는 모든 적개심을 동원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미워한다”의 의미가 모든 적개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누군가를 미워함에서 붙들고 있는 자는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모든 적개심으로 박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쏘는 자”의 의미가 여기서는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 반대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활로 쏘는 자”, 또는 “궁수”가 영적 인간을 표시하는 이유는 “활”이 영적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대적 의미에서 “활로 쏘는 자” 또는 “궁수”는 영적 인간을 적으로 삼는 자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바, “궁수가 그를 미워한다”는 거짓에 있는 이들이 모든 적개심으로 영적 교회인을 박해한다가 의미된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는 교리 속의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 안전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앉아 있다”의 의미가 안전하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기 활의 강함에 앉은 자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교리의 강함이 진리이다, 그 이유가 교리 안에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강한 이유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행동하기 때문에서 이다; 선에는 악 또는 거짓이 접근할 수 없는 특성을 선 자체가 보유하기 때문, 고로 지옥의 어떤 패거리의 접근도 불가능하기 때문, 오히려 선이 접근하면, 또는 선 안에 있는 천사가 접근하면 이들은 흠칫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이 지옥으로부터 인간과 더불어 있는 이 패거리들과 싸우기 위하여, 또한 세상으로부터 도착하는 영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더 낮은 땅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은 진리를 통하여 행동한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선이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힘이 진리 안에 있는지를 나로 분명히 알도록 다른 삶에서 보는 것이 주어졌다. 자연적 진리에 있었던 어떤 영의 경우, 이 세상에서 그의 삶 동안 그는 의로운 자이었는데, 많은 지옥들을 통과해갔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술했다; 그가 힘과 강함에 있었고, 아주 대단했으므로 지옥의 영들이 그에게 감염시키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 하여 그는 이 지옥으로부터 저 지옥으로 건너갔지만 안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활의 강함에 앉음”이 교리의 진리를 수단으로 안전해 있다를 의미함이다: 이것이 싸우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전에 진행된 것으로부터 뒤이어진다, 즉 “궁수가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에 뒤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힘세어지게 만들어졌다. 이는 싸우기 위한 기세의 힘을 의미한다. 이는 “무기”와 “손”의 의미함이 힘(power)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싸움을 위한 기세(force)의 힘이 분명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싸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전능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손”의 의미가 힘이다로부터, 그리고 주님이 취급되는 최고 의미에서 전능하심이다. 그리고 “강력한 야곱”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고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이것이 “강력한 야곱”에 의해 뜻해지는 주님이시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여호와에게 맹세하고 강력한 야곱에게 서원했다, 나는 내가 여호와를 위한 장소, 강력한 야곱의 주택을 발견할 때까지 내 집의 천막 안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시. 132:2, 3, 5).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모든 육체가 알는지 모른다, 즉 나 여호와가 너의 구세주, 너의 되찾는 자, 강력한 야곱이시다는 것이다 (이. 49:26).
다시:
들어라 오 야곱 나의 종아,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아, 나는 내 영을 너희 씨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축복을 네 아들들 위에; 누군가가 말할 것이다, 나는 여호와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분 자신을 여호와의 이름을 수단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것임을 적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별칭하여 부를 것이다
(이. 44:1, 3, 5).
“이스라엘”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표시함을 아래에서 읽는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였을 때, 그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을 이집트로부터 불렀다 (호. 11:1);
주님이 “이스라엘”에 의해 뜻해짐이 아래에서 분명하다:
요셉은 소년과 더불어 이집트로 갔다, 하여 예언자에 의해 말해진 것, 즉 이집트로부터 나는 나의 아들을 불렀다가 성취되었다 (마. 2:14).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이는 이로부터 영적 왕국 속의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목자”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를 수단으로 선행의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여기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 취급되는 바, 이는 선과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돌”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은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선이 영적 교회의 본질 자체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의해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그리고 보다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의미된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에 의해 주님의 영적 왕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가 의미됨이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돌”은 그분의 영적 왕국에 있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신데, 그 이유는 “돌”이 일반적 의미에서 성전을, 특수적 의미에서는 성전의 기초를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성전”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의미되고 (요. 2:19, 21), 그리고 또한 성전의 기초 (마. 21:42, 44, 이. 28:16)도 의미한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돌”은 그분의 영적 왕국 속에 있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 관련한 주님을 표시하는 구절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건축가들이 거절한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 이것은 여호와로부터 행해졌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놀라웁다 (시. 118:22, 23).
“돌”이 여기서 주님이시다는 것이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쓰여진 바, 건축가들의 거절한 돌, 같은 돌이 모퉁이의 머리가 되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든지 부셔질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누가 떨어지든, 그 돌은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눅. 20: 17, 18);
위는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하신 말들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이 너의 두려워함이 되게 하라, 그분이 너의 경외함이 되게 하라; 그 이유가 그분은 성소를 위해 있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두 집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돌, 그리고 위반케 하는 돌일지라도; 그들 사이에 많은 이들이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추락한다, 그리고 부셔질 것이다
(이. 8:13-15);
위에서 주제는 주님이시다. 다시:
고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보라 나는 시온에 반석을 위하여 돌을, 연단된 돌을 귀중한 모퉁이의 돌로, 견고한 반석의 돌로 놓을 것이다;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 28:16).
스가랴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그분의 양떼를, 유다의 가문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전쟁애서 영광의 말(horse)로서 만들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모퉁이돌이 있다. 그분으로 못(nail)이 있다, 그분으로부터 전쟁의 활이 있다 (슥. 10:3, 4)
다니엘서에서:
당신은 손으로 행해지지 않고 잘라내진 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이 상의 발을, 즉 철과 진흙이었던 발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각으로 부셨습니다. 상을 부순 돌은 큰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땅을 채웠습니다. 천국들의 하느님이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왕국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분의 왕국은 또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을 가루로 부수고 살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는 영원히 설 것입니다. 이와같이 당신은 보셨은 즉, 사람의 손이 뜨지 않은 돌이 철, 동, 진흙, 은, 금을 부순 것을 보신 것입니다 (단. 2:34, 35, 44, 45);
위 구절에서 “돌”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이 뜻해진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의 영적 왕국이 뜻해진다; 돌이 “바위로부터 떼어져 나왔다”는 것은 이것이 신앙의 진리로부터 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이 말씀에서 “바위”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돌” 또는 “바위”에 의해 의미되기에, 주님의 영적 왕국 또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 왕국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이로부터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베고 잤던 돌, 그 후에 그가 기둥으로 놓은 돌, 마찬가지가 의미되어 있다:
야곱이 그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정녕 하느님이 이 장소에 계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워졌다, 그리고 말했다, 이 장소는 얼마나 떨리는 곳인가! 이것은 하느님의 집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일 것이다 (창. 28:16-18, 22).
고대인들은 돌을 수단으로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표현 의미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을 이해했다.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성소에 있었던 돌을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전체 백성에 게 말했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돌이 여호와의 모든 강연들,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셨던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돌은 너희를 향하여 증거로서 있을 것이다, 너희가 너희의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여. 24:26, 27).

요셉에 관련한 앞 세 절 (22-24절, 라틴 원문은 “앞 두 절”이라 말하고 있음 역자주) 의 내용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다는 것은 이미 살핀 내용들로부터 분명할 것이다. 이 내용들은 영적 왕국의 본성이 알려지지 않으면 여전히 불분명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왕국은 신앙의 진리 안에 있고, 이 진리로 생활의 진리를 만들고 이로부터 선을 만드는 이들로 구성되는 왕국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살아내질 때, 이것이 선이 되고, 이 선은 “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 측면에서 이것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주님의 영적 왕국에서 신앙의 진리는 다양하다, 그 이유는 예를 들면, 이 교회에서는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저 교회에서는 진리가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교회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고로 사실상 이 교리들이 진리라고 불리운 셈이다. 이런 진리들이 선과 결합되어져서 영적 교회의 선을 만든다; 고로 그것의 선은 그것의 진리가 어떠한지가 관건인 셈이다. 그 이유는 선이 진리들로부터 그것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영적 교회의 선은 불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순하기 때문에, 영적 수준의 인간들은 신성한 수단이 아니면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고, 자신 안에서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 구원의 수단 자체를 만드신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영적 수준의 인간은 구원되어진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그들과 더불은 선은 불순하기 때문에 그들은 악과 거짓들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고로 전투들이 있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전투들을 수단으로 그들 안의 불순한 것들을 점진적으로 깨끗해지게 설비해두신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딸이 성벽 위에서 행진한다”에 의해, 그리고 “궁수들이 그를 비참하게 하고, 그에게 쏘고, 그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활의 강함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의 무기는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강하게 만들어 진다, 이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에 관해 이미 말해진 바를 되살피면, 그들은 진리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선의 측면에서 희미함 안에 있다는 것; 이 희미함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에 의해 계발된다는 것; 주님의 오심 이전, 그분의 오심 이후와 같은 영적 왕국은 있지 않았다는 것; 주님이 (영계에서의) 영적 수준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구원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그의 손의 무기는 강력한 야곱의 손에 의해 상하게 만들어진다, 이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에 의해 싸움의 힘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전능하심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 이로부터 영적 왕국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있다.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이는 그분은 고대 교회의 하느님이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교회가 영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주님이 예배되었다, 이 분이 여기서 “고대 교회의 하느님”에 의해 뜻해진다. 이 분으로부터 위에서 말해진 전투에서 도움이 있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이는 시험들 후에 은혜를 베푸는 사람, 주님을 의미한다.
이는 “솨다이”의 의미가 주님이 시험들에 관련하여 그렇게 불리우심, 그리고 시험들 후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 이다.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blessing)들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다 . 이는 내부로부터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복됨”이 진리의 번성함과 선의 열매가 풍성함이다로부터; “복됨”은 영적 의미에서 이밖에 더 없다; 그리고 “위의 천국”의 의미가 내부로부터 인데, 그 이유가 인간 속의 천국이 그의 내면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의 내면의 측면에 관련하여 보면, 그는 천사들과 더불은 사회 안에, 고로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외면들은 인간의 사회들과. 고로 세상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내부로부터 있는 천국을 통하여 흘러드는 선과 진리를 받을 때, 그는 “위의 천국의 복됨들을 가지고 복되고 있다.”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들을 가지고.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복됨들을 가지고 복되어 있다”의 의미가 영계로부터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수여받음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래 드러누운 깊음”이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국”인) 그의 내면에 비해 자연 평면은 “아래 드러누운 깊음”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자연 평면이 “아래 드러누운 깊음”에 의미되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이것들 모두는 기쁨들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자연 평면의 생명을 만들기 때문, 특히 영적 인간과 더불어 그것의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는 진리들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깊음”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들이 의미되는 다른 구절이 아래에도 있다:
여호와의 복됨이 그의 토지이다; 하늘의 귀중한 것들 때문에, 이슬 때문에, 또한 아래 들어누운 깊음 때문에 (신. 33:13).

가슴들의 복됨을 가지고. 이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을 가지고를 의미한다. 이는 “가슴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슴들”이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인 이유는 가슴의 신체 기관이 자손 (번식)과 관련되기 때문, 그러므로 해서 부부의 사랑(conjugial love, 결혼의 사랑)의 범주(province)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혼인 천국의 결혼에 상응한다; 그 이유가 부부의 사랑이 이 결혼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단어로 한역되는 영어 단어는 주로 marriage이다. 이 책에서는 두 단어를 사용한다. conjugial과 marriage이다. 둘 모두 영한 사전을 참조하면 결혼으로 번역함이 대세일지 모르나, 이 책의 주인(원저자)이 두 단어를 잘 모르거나 혼동해서 마구잡이로 단어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를 염두한다면 분명 역자로서는 두 영어 단어를 가능한 다른 한역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라틴어로부터 영역에서도 둘을 가능한 구분하고 있다. 하여 역자는 conjugial은 “부부의”로, 간혹 “결혼의”로 번역하기로 작정했는데, “부부의”가 더 순수해진 결합을 표시하지 않나 하는 역자의 개인적 소견으로 선택된 한역임을 덧붙여둔다, 역자주.) (원저자의 저서에 결혼애로 흔히 번역해 말해지는 “conjugial love”가 있는데, 역자는 이 책의 제목을 부부의 사랑, 부제로는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천국의 결혼이라 말하려 한다. 역자가 이 책까지 번역할 의도는 아직은 없다. 그 이유가 이 책이 성경 글자를 바탕으로 깔지 않기 때문이다. 역자의 관심은 성경 읽기와 이해에 있어서 이다.) 그러므로 “가슴들”에 의해서 선과 진리에 애착함이 의미된다. 마찬가지인데, 유아들이 가슴(유방)들을 수단으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는 사실로부터도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 애착을 통하여 “가슴들”은 자손을 향한 사랑과 더불은 부부의 사랑의 결합이 의미된다.
이 애착들이 “가슴들”에 의해 의미되는 다른 구절이 아래에 있다:
너는 나라들의 젖을 빨 것이다, 그리고 왕들의 가슴들을 빨 것이다. 나는 놋쇠를 위하여 금을, 철을 위하여 은을 가져온다 (이. 60:16, 17);
“왕들의 가슴들을 빠는” 것은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왕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나라들의 젖”에 의해, 그리고 “왕들의 가슴들”에 의해 어떤 감추인 의미, 즉 영적 의미가 있을 것임은 누구에게나 예상될 것이다. 그 이유가 성경이 의미함도 없이 괜히 이런 예언을 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은 바로 이어진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나는 놋쇠를 위해 금을, 쇠를 위해 은을 가져올 것이다.” “놋쇠”는 자연적 선을, “금”은 천적인 선을, “철”은 자연적 진리를, 그리고 “은”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
불어남을 말한다면 나는 들판의 싹같이 너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너는 불어나게 했다, 그리고 성장했다, 그리고 너는 장식품으로 꾸몄다; 너의 가슴들은 견실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너의 머리털은 자랐다 (겔. 16:7);
이것은 예루살렘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고대 영적 교회가 의미된다; “가슴들”이 “견실하게 만들어짐”에 의해 선과 진리에 내면의 애착함이; “그들의 머리털이 자랐다”에 의해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외면의 애착함이 표시된다. 이 말들 안에 글자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것 없이 “그녀의 가슴들은 견실하게 만들어졌다, 그녀의 머리털은 자랐다”라고 예루살렘을 두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한 두 여인이 있는데, 한 어머니의 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매춘짓을 했다, 매춘짓에서 그들의 가슴들은 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처녀임의 젖꼭지가 접촉되었다 (겔. 23:2, 3);
“두 여인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이다. 이들을 수단으로 내적 의미에서 교회들이 의미된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이집트에서 매춘짓을 했다”에 의해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교회의 진리들을 왜곡되게 했다가 의미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슴들이 눌려졌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거짓화함을 수단으로 타락되어졌다가 의미된다. 이런저런 사항들이 “여인의 매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가슴들이 눌림”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이 여인들에 대한 묘사에서 의미를 찾고저 하는 이들이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너는 너의 어머니에게 탄원(변론, plead)하여, 그녀로 그녀의 얼굴로부터 그녀의 매춘들을, 그리고 그녀의 가슴들 사이로부터 그녀의 간음들이 중단해지게 하라, 하여 내가 그녀를 발가벗기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광야로서 만들지 않도록, 그리고 그녀를 가믐의 토지로 놓지 않도록, 그리고 목마름 으로 그녀를 죽이지 않도록 하라 (호. 2:2, 3);
“어머니”는 교회를 표시한다; “매춘들”은 진리를 거짓화 함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가슴들 사이로부터 간음함”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섞음질 됨을 ; “발가벗겨짐”은 모든 진리가 박탈됨을; “그녀를 광야로 만들고, 그녀를 가믐의 토지로 놓는 것, 그리고 목마름으로 죽게 하는 것”은 모든 진리가 소멸함을 표시한다.
다시:
유산하는 자궁과 마른 가슴을 그들에게 주소서 (호. 9:14);
“마른 가슴들‘은 애착들이 진리와 선에 관해 있지 않은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걱정거리 없는 너희 여인들아 일어나 내 음성을 들어라, 자신만만한 너희 딸들아, 네 귀로 내 강연을 들어라; 네 자신을 발가벗겨 알몸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허리에 띠를 두르라; 그들은 순수한 포도주의 들판들과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들 위에서 자신을 칠 것이다 (이. 32:9, 11, 12);
위에서 “딸들”은 애착들을 표시한다; “알몸으로 만드는”것은 진리가 결핍됨이다; “허리에 띠를 두름”은 잃어진 선 때문에 슬퍼함에 있다를 표시한다; “가슴들 위에서 칠 것이다”는 잃어진 진리로부터의 선 때문에 슬픔에 있다를 표시한다; 이런 사항들이 의미되기에, “순수한 포도주와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위하여”가 말해진다; 그 이유가 “들판”은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그리고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결과적으로 진리로부터의 선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나는 일곱 금빛의 등불대들을 보았고, 그리고 일곱 등불대들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데, 발까지 내려오는 흰 의복을 입고, 금빛의 띠로 가슴들에서 띠를 매신 분이셨다 (계. 1:12, 13);
“금빛의 등불대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사람의 아들”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금빛의 띠로 가슴들에서 띠를 두르심”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요한에 의해 보여진 이런저런 사항들은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말씀은 신성하다로부터 결말지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의 왕국들에 관하여 위의 예언들이 있는 것이다면 이 말씀에 무슨 신성함이 있을 것인가?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사항들이 “등불대”에 의해, 그리고 “발 까지 내려오는 의복을 차려입고, 가슴에 금띠를 매신 사람의 아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누가복음서에서:
군중들로부터 어떤 여인이 목청을 돋구워 예수에 관해 말했다, 당신을 밴 자궁은 복 있다, 당신에게 젖을 물린 가슴은 복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셨다, 그렇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있다 (눅. 11:27, 28);
주님의 답변으로부터 “복된 자궁”과 “가슴”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진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이들이다; 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진리에 애착함이고, 들은 말씀을 행하는 것은 선에 애착함이다.

그리고 자궁의. 이는 그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자궁”의 의미가 가장 안쪽에서의 부부의 사랑이다로부터; 부부의 사랑이 선과 진리의 결합인 천국의 결혼으로부터 출시되는 바, 그러므로 이 결합이 “자궁”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네 아버지의 복됨이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할 것이다. 이는 이 교회는 합리성으로부터가 아닌 자연 평면으로부터 영적 선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수준의 교회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선조들”인 이삭과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성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즉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내적 부분, 또는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고,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주님의 왕국과 교회의 내적 부분을 표시한다. 이 모두로부터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할 것(prevail, 널리 보급될 것, 크게 유행할 것) 이다”에 의해 뜻해지는바가 짐작되었으리라 본다. 즉 영적 수준의 교회는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으로부터 선을 가져야 할 것, 그러나 합리성 또는 내적 인간으로부터서는 아니다 이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교회인의 선은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합리성에 있다. 이런 의미가 이 말에 포함된 것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과 이삭이 무엇을 표현하는지와 영적 교회의 선은 어디에서, 어디로부터 인지가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가 없다.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에 맞먹는다. 이는 천적 수준인 서로의 사랑을 향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시대의 언덕들”이 서로의(mutual 상호간의) 사랑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설명한다) 알게 된다. 영적 수준의 교회가 이 사랑에 도달할는지 모른다는 것이 “시대의 언덕들의 바람에 맞먹기 조차”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시대의 언덕들”이 서로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른 구절들로부터 살피기에 앞서, 서로의 사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먼저 말해져야 할 것 같고, 이 사랑 쪽으로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수준의 교회인이 도달하느라 분주하다는 것이다. 이미 말해져서 알고 있는 것은, 천국을 구성하는 두 왕국이 있다는 것,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두 왕국에 있다. 천적 왕국의 내면의 선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고, 이 왕국의 외면의 선은 서로의 사랑함의 선이다; 이 왕국에 있는 이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신앙의 진리라 불리우는 진리 안에 있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이 왕국의 선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 진리는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보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왕국에 속하는 이들은 신앙은 언급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는 신앙의 진리 대신 있는 것이 서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왕국의 경우, 내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고 외적 부분은 신앙의 진리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이 왕국들의 차이점이다, 또한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라 불리우는 중매를 통하여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천적 왕국의 외적 부분이 서로의 사랑의 선이고,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이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전자는 합리성으로부터, 후자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인) 서로의 사랑의 선이 더 내면적일지라도,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은 더 외면적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중매를 통하여 이 선들을 결합하신다, 고로 두 왕국들은 결합하고 있다.
천적 교회의 선과 영적 교회의 선의 차이를 만들기 위하여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우리는 전자의 선을 서로의 사랑의 선이라 부르고, 후자의 선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라 부를 것인데, 지금까지에서는 이 차이를 관찰하지는 않았었다. 이 차이들을 먼저 알고 있어야 이 영적 교회에 관한 이스라엘의 복있음인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기 조차”에 의해 의미하는 것인, 영적 왕국은 천적 왕국 속에 있는 서로의 사랑의 선에 까지 선행의 선을 끌어올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에 대해 말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이런 방법에서 두 왕국들은 친밀하게 결합할는지 모른다: 이것이 이런 말들(“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예언의 말씀의 아주 많은 구절들에서, “산들과 언덕들”이라는 말의 언급이 있는 편이다. 이 말들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이 의미된다: 즉 “산들”에 의해서는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 하여 천적 왕국의 내적 부분이, “언덕들”에 의해서는 서로의 사랑함이, 하여 이 왕국의 외적 부분이 의미된다; 그러나 영적 왕국이 취급될 경우, “산들”에 의해서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 하여 이 왕국의 내적 부분이, “언덕들”에 의해서는 신앙의 진리가, 하여 외적 부분이 의미된다.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주님의 모두 각각의 교회에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그분의 왕국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언덕들”이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후자의 날에서 여호와의 산은 산들의 머리를 위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언덕들의 넘어로 드높여질 것이다 (이. 2:2; 미. 9:1);
“여호와의 산”은 시온 인데, 주님의 천적 왕국을 표시한다, 고로 이 왕국의 선, 이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이다; 고로 최고 의미에서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 이유가 천적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선은 주님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시온의 산”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의 언덕들”에 의해서는 서로의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 시온의 산 위에, 그리고 거기의 언덕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 (이. 31:4);
위에서 “언덕”은 서로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에 의해 서로의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리고 “산”에 의해 주님을 사랑함의 선인 천적 사랑의 선이 의미된다, 하여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산, 거기의 언덕들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실 것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연계의) 시온의 산과 거기의 언덕들에 내려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사랑의 선이 있는 곳을 위하여, 즉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는 말이다. 하여, 만일 그분이 시온을 위해,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셨다면, 그들이 천적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이 된다. 그러므로 시온 산은 거룩하다고 불리우고 예루살렘 역시 거룩하다 불리운다. 이 일컬어짐은 예언서들에서 예루살렘의 역겨운 것들이 취급되는 상황에서, 하여 그 자체 더러움이었던 때에서 조차도 거룩하다 불리웠다.
다윗서에서:
산들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은 정의에 (있을 것이다) (시. 72:3).
다윗서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산들아, 그리고 모든 언덕들아 (시. 148:9).
다윗서에서:
산들이 숫양들 같이 깡충깡충 뛴다, 언덕들은 양떼의 아들들 같이 (뛴다) (시. 104:4, 6).
다시:
하느님의 산은 바산의 산이다; 언덕들의 산은 바산의 산이다. 왜 너희는 껑충 뛰느냐? 너희 산들아, 너희 산들의 언덕들아. 하느님께서는 그것 안에서 거주하시기를 바라신다, 여호와께서는 영원히 거주하실 것이다 (시. 68:15, 16).
이런 구절들에서 “산들”은 천적 사랑을 표시한다, 그리고 “언덕들”은 영적 사랑을 표시한다; 여기서 산들이, 언덕들이, 산이나 언덕에 있는 이들을 뜻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높은 산 위애, 들어올려진 모두 각각의 언덕, 시내들, 물들의 수로들 위에 있을 것이다 (이. 30:25);
“물들의 수로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모두 각각의 높은 산과 들어올려진 언덕”에 있다 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 지식들은 천적 평면의 선들과 영적 수준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하박국서에서:
여호와께서 서시어 땅을 측량하셨다; 그분이 보시고 나라들을 흩으셨다. 그 이유는 영원의 산들이 흩어졌기 때문, 그리고 시대의 언덕들이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합. 3:6);
“영원의 산들”은 태고 교회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이었다; “시대의 언덕들”은 이 교회에 속했던 서로의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전자는 내적 부분이고, 후자는 외적 부분이다. 이 교회가 말씀에서 뜻해질 때, 태고적의 이들이 암시되게 “영원”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첨가된다, 여기서는 “영원의 산들”인데, 다른 구절에서는 “영원의 날들”이 첨가된다; 그리고 “시대” 또한 첨가되는데, 여기서는 “시대의 언덕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발음에서,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에까지 조차”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시대의 언덕들”에 의해 서로의 사랑이 의미된다는 것, 이것은 천적 수준의 교회, 또는 주님의 천적 왕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모세의 책에서 요셉에 관련한 모세의 예언적 말함에도 있다:
동쪽의 산들의 첫 열매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영원의 언덕들의 귀중한 것들에 관한 것으로부터, 그것들로 요셉의 머리 위에 오게 하라 (신. 33:15, 16).
이사야서에서:
산들과 언덕들이 노래로 다시 소리낼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으로 박수칠 것이다 (이. 55:12).
요엘서에서:
그 날에 산들이 새로운 포도주를 떨어트릴 것이다, 그리고 언덕들이 젖으로 흐를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모든 시내들이 물로 흐를 것이다 (욜. 3:18; 암. 9:13).
에스겔서에서:
나의 양이 모든 산들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언덕에서 방황하고, 그리고 땅의 모든 얼굴 위에서 그들은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내 언덕의 범위에 있게, 복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철따라 비를 내려보낼 것이다 (겔. 24:6, 26).
예레미야서에서:
황폐케 하는 자들이 광야에 있는 모든 언덕들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 이유가 여호와의 검이 삼키기 때문이다 ( 예. 12:12).
이 구절들에서 천적 사랑의 선들이 “산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언덕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이나, 보다 낮은 등차에서 이다.
이상 살핀 바와 같이 “산들”과 “언덕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고대 교회에서 그들의 신성한 예배 또한 산과 언덕에서 있어졌다; 그 후에 히브리 나라가 산과 언덕 위에 제단을 쌓고, 거기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웠다; 그리고 언덕이 없는 지역에서는 높은 장소를 건축했다. 그러나 이 예배가 우상화가 되어갔는데, 그 이유는 산이나 언덕 자체를 거룩한 것으로 여겨 예배했기 때문, 하여 이스라엘이나 유태나라에서 이런 예배가 금지되어졌다, 그 이유는 여타 다른 나라보다 더 쉽게 우상화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대 시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표현들은 유지되어야하는 질서에서 시온 산은 선택되고, 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 표현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에 있는 신성의 영적 부분과 천적 부분이 표현되어졌다.
이와 같은 것들이 의미되었기에 아브라함으로 모리아의 토지의 어느 산으로 가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되었기도 하다, 그리고 주님이 산 위에서 모세에 의해 보여지셨다, 그리고 법이 산의 정상에서 선포되어졌다, 그 이유가 그분은 호렙산 위에서 모세에 의해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시나이 산 위에서 선포되어졌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산 위에 지어졌다.
고대 의식으로부터 거룩한 예배는 산위와 언덕 위에서 개최되었다는 것, 그 후에 이방인들과 우상화된 이스라엘족들과 유태인들이 그 위에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운 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너의 간음들, 요상한 소리들, 매춘의 사악함이 들판의 언덕 위에서, 나는 너희의 역겨운 짓을 보았었다 (예. 13:27);
위는 예루살렘에 관해 말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의 찌름당해진 자들이 그들의 우상들 한가운데에서, 제단을 빙둘러서, 모든 높은 언덕에서, 산들의 모든 머리들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모두 각각의 엉켜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뒹굴 것이다 (겔. 6:13).
예레미야서에서:
모두 각각의 높은 언덕 위에, 모두 각각의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
(예. 2:20; 3:6; 그리고 왕상. 14:23; 왕하 16:4; 17:10).
우상적인 예배가 산들과 언덕 위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해 반대적 의미인 자아 사랑에 속하는 악들이 의미된다. 예레미야서에서:
산들, 그리고 보라 그것들이 흔들려졌다, 그리고 모든 언덕들이 뒤엎어졌다. 나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 거기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새들이 날아가버렸다 (예. 4:24, 25).
이사야서에서:
모든 계곡이 들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추어질 것이다 (예. 40:4).
이사야서에서:
보라 나는 너를 긴 못을 가진 새로운 타작기로 놓을 것이다; 너는 산 위에서 타작할 것이다, 그리고 언덕을 겨 같이 만들 것이다 (이. 41:15).
다시:
나는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된 채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것들의 초본들을 말리울 것이다 (이. 42:15).
그리고 미가서에서:
너희는 여호와께서 말하시는 것을 듣기를 바란다; 일어나라, 너는 산들과 쟁변하라 , 그리고 너의 음성을 언덕들이 듣게 하라 (미. 6:1).
예레미야서에서:
내 백성이 잃어진 양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잘못 이끌고 있다, 반역적인 산들아, 그들은 산으로 언덕 위로 가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양)우리를 잃어버렸다
(예. 50:6; 또는 예16:6; 나. 1:5, 6).
“산들”과 “언덕들”이 사랑의 선들과 영적 사랑을 의미하는 이유는 산이나 언덕이 땅 보다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돌출되고 높은 것들에 의해 천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에 속해 있는 것도 표현되어졌다. “가나안의 토지”는 주님의 천국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토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의미적이었다, 따라서 “산들”과 “언덕들”이 이런저런 높은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에 있던 태고인들은 자기들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 높음으로부터 거룩한 것을 생각했다, 그 이유는 여호와 또는 주님이 “가장 높은 곳에서” 거주하신다고 말하셨기 때문, 또한 영적 의미에서 “높다”는 사랑의 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내면들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머리”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것들은 머리에서 그들의 첫 원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내면의 것들이 머리에 의해 의미되는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목”은 중매적인 것을 의미한다; “몸”은 외면의 것들을; “발바닥”과 더불어 “발”은 가장 바깥쪽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 상응은 천국이 웅대한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천국, 즉 주님의 천적 왕국이 있는 곳은 웅대한 사람의 머리에 관계한다; 중간 또는 둘째 천국, 즉 영적 천국이 있는 곳은 몸에 관계한다; 그리고 최말단, 또는 첫째 천국은 발에 관계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이는 외면들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의 의미가 외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형제”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외면이다, 그 이유가 영적 교회인은 진리의 선 안에 있고, 이 선은 내면인데, 이것이 자연 평면의 내면이기 때문이다. “나지르인”이 외면의 것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나지르인들이 신성의 자연 평면 측면에서의 주님을, 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의 외적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들이 표현했다는 것은 나지르인 됨은 털에 있다는 것, 신성 있음이 털에 존재했다는 것, 이것은 언급되어져 왔던 표현을 위하여서 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머리)털이 자연적인 것에 상응하고, 의미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나지르인 됨을 서약하는 이들로부터도, 즉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털을 면도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 (민. 6:5); 그리고 이후에 그들이 나지르인 됨을 끝냈을 때, 그들은 천막의 문에서 머리를 밀고, 그 털을 평화 제물의 바침 아래 불 안에 놓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 (민. 6:13, 18) 등등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더 분명해지는 대목으로는 나지르인 이었던 삼손, 그의 힘셈이 그의 머리털에 있었다는 사건으로부터 일 것이다 (사. 13:3, 5; 16; 3301항).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 쓰여진 바:
네 나지르인됨의 머리털을 잘라내어라, 그리고 그것을 내던져라, 그리고 언덕들 위에서 통곡을 하여라 (예. 7:29).
이 구절들로부터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에 의해 외면의 것들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은 그의 머리털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나지르인에 의미된 비밀이다.

이상 살핀 이스라엘이 요셉에 관해 예언한 모두로부터도 분명해지는 것은, 모든 세부 사항에서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 없이 거의 어떤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자만으로부터 이 구절들을 들여다보는 이는 이런 사항들이 요셉에 관해 예언된 것인 바, 요셉의 두 아들에서까지에 이르러 발생할 것이라고 믿을지 모른다 (창. 48:1). 그러나 그들의 역사에서, 즉 모세의 책으로부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에 이르기까지에서 예언한 말과 비슷하게도 발생된 것이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나머지 지파들 보다 더 축복된 것이 없다는 것, 그들도 포로로 끌려가고 이방인들 사에에서 영영 흩어지고 말았다; 이로부터도 분명한 바, 이 구절이 글자 의미에서 서술된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 고로 내적 의미에서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적 의미 없이 요셉에 관한 이 구절이 포함한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요셉은 “결실이 풍부한 자의 아들, 아들이란 점에서는 샘 가까이 결실이 풍부한 자이고, 딸이란 점에서는 성벽 위에서 행진하는 딸이다. 활쏘는 자가 그를 더 비참하게 하고, 그를 향해 쏘고, 그를 미워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활의 강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들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의 돌이 있다.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솨다이와 더불어, 그리고 그분은 위의 천국의 복됨을 가지고 너를 복되게 하실 것이고, 아래에 드러 누운 깊음 속의 복됨과, 가슴들과 자궁의 복됨을 내리실 것이다. 네 아버지의 복됨은 네 선조들의 복됨 보다 더 우세하여 시대의 언덕들의 바램과 맞먹을 것이다. 그것은 요셉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나지르인의 머리의 관 위에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의 각각이든 전체적이든 내적 의미가 아니고서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을 알 수 없다.

27절. 베냐민은 이리이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베냐민. 그는 “요셉”인 영적 교회의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은 선으로부터 진리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예언적 말함에서 있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인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영적 교회가 표현되는 바, 베냐민에 의해서는 이 교회의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는 선으로부터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선의 진리가 “베냐민”이다.

이리이다. 이는 선을 구출하고 구해내려는 강한 욕망(avidity, 탐욕, 갈망)을 의미한다. 이는 “이리”가 사로잡고 흩트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말씀에서 “짐승들”이 탐욕(욕망, cupidity)들을 의미하는 바, 이리 또한 사로잡으려 하는 강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들은 양의 의복을 입고 너희에게 온다, 그러나 내향적으로 그들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다 (마. 7:15).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목자가 아닌 품꾼인 자, 양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떠나 도망한다, 그리고 이리는 양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양들을 흩어진다 (요. 10:12; 이와 비슷한 구절로는 눅. 10:3; 예. 5:6; 겔. 22: 27; 습. 3:3도 있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이리는 사로잡으려는 이들이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는 사로잡혀져 있어 왔던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출하려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의 이리는 앞의 사자의 경우와 비슷한 범주에 있다. 즉 사자의 경우 말해진 것은, “약탈한 것을 움킴”, “전리품을 그러모움”, “약탈에 약탈을 더한다” 등등 같은 말인데, 여기서의 이리에 대한 표현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좋은 의미에서 “사자”는 선으로부터 힘을 지닌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약탈적인 짐승인 표범, 독수리 등에서도 같다.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을 것이다. 이는 주님이 현존할 때 그것이 행해질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아침”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로부터, 그러므로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는 주님이 현존하실 때, 이때 선을 구출함과 구해냄이 있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을 것이다”의 의미가 그분이 구출하고 구조해낸 이들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붙잡음”, “약탈함”, “전리품”, 그리고 “약탈품”이 말씀에서 주님에 관련되어 말해지는 이유는 그분이 선을 구출하고 구조하심 때문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9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유다는 사자의 새끼이다; 먹이됨(prey, 약탈품됨)으로부터, 나의 아들, 너는 가버렸다.” 이를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천적인 것을 통하여 지옥으로부터 해방됨(구조됨)이 있다가 의미되어 있다. 또한 말씀의 다른 구절로 아래에 있다:
여호와의 표호하심은 사자의 것과 비슷하시다. 그분은 젊은 사자 같이 표호한다, 그리고 으르렁 소리를 내신다, 그리고 먹이감을 꽉 붙드신다, 하여 그것을 빼앗을(구출할) 자 아무도 없다
(이. 5:29)
다시:
사자가 표호하고, 젊은 사자가 강탈한 것 위에 있듯, 여호와께서 시온의 산 위에 싸우시기 위해 내려오신다 (이. 31:4).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 날에 너를 구출할 것이다, 정녕 나는 너를 구출할 것이다; 그러나 네 혼은 너에게 전리품을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는 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 39:17, 18).
스바냐서에서:
너는 나를 기다려라,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내가 약탈품 쪽에서 일어나는 날까지 조차에서 (기다리 라) (습. 3:8).
이사야서에서:
나는 많은 것들 사이에서 그분과 나눌 것이다, 하여 그분은 강한 자들과 전리품을 나눌지 모른다 (이. 53:12);
위 이. 53장 전체는 주님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강탈품 또는 전리품을 게걸스레 먹는 것”은 악들에 의해 붙잡아져왔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임이 아래 발람의 예언적 말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라, 백성이 늙은 사자 로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사자 같이 그는 자신을 들어올릴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먹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민. 23:24).
이 모두로부터 “강탈품”, “전리품”, “약탈품” 등의 단어가 주님에 의해 선을 구출하고 구조함을 표시함이 분명하다. 이 단어들이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서술하는 이유는 힘이 진리의 속성이고, 이 힘은 선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그는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이는 아직은 그들이 희미함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왕국 안에서 그들이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저녁”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약탈품을 나눈다”의 의미함이 천국에서 소유함을 주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약탈품”이 주님에 의해 구출되고 구조되어왔던 이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탈품을 나눈다”의 의미는 천국에 있는 이들 사이에 분배됨이 의미되는데, 이는 주님의 왕국에서 소유함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것이 “저녁”에 행해진다 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천국으로 승강되는 이들이 처음에는 희미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이 천국의 어떤 사회에 보내지기 위해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진리들에 관한 가르쳐짐을 받아서 명료한 상태에 와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거짓들이 사라지기 위하여서는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위 사항들은 “베냐민”에 의해 의미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 없이, 베냐민에 관해 말해진 것, 즉 “이리”, “그는 아침에 붙잡을 것이다”, “그는 전리품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다, 저녁에 약탈품을 나눌 것이다” 같은 말에 포함된 것이 무엇인지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구절들은 내적 의미에 의한 밝힘 없이는 완전히 감추인 대목들이다. 이런 종류의 구절들은 예언서들에 다량으로 있다. 이 구절들 역시 글자로부터 이해하려들면 거의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그리고 이들의 이름으로 명명된 “지파들”에 의해 주님의 교회와 왕국 속에 있는 이런저런 사항들이 의미된 것이다.

28절.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복있게 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그의 복됨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이다. 이는 복합체(complex, 전체, entirety)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의 의미가 복합체에 있는 모든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지파들”에 의해 의미된 것은 각 지파들을 살핀 앞 장의 구절과 이 장에서 말해진 사항으로부터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유입을 통하여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peak)”의 의미가 유입(inflow)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유입(influx)을 통하여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들을 복있게 했다. 그는 각자에게 걸맞는 복됨에 의거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이는 영적 삶에 관한 예언, 이와 같은 상태에서 각각의 인간에게 일어날 것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 이는 “복됨”의 의미가 예언이다로부터; 그리고 “각자에게 걸맞는 복됨에 의거 그는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의 의미가 각각의 인간에게 발생하리라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저런 상태에서 있는 각각의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것이 이 장의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그들의 이름에 따른 지파들에 관해 말해진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에 의해 선들과 진리들에 관한 교회의 모든 상태들이, 고로 교회 내에 있는 모두 각각의 인간의 영적 생명(삶)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다.

29-33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려 하고 있다.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에게 매장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의 토지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31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33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이고 만기가 되니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은근히 심어줌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이스라엘이 자기 아들들에게 막벨라 동굴에, 거기 아브라함과 이삭의 매장지에 자기를 매장할 것을 말할 때, 이 말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에 있는 생명, 자연 평면 안에 내면의 것들과 가장 안쪽의 것들이 있음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취급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했다”에 의해 위의 사항들이 은근히 심어짐이 의미된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로 거두어지고 있다. 이는 그는 자기로부터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내 백성”인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들 이름으로 명명된 지파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백성에게 거두어짐”의 의미가 이러저런 것들 안에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와 뒤이어 취급되는 주제가 거두어짐, 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또는 그들 이름에 따른 “지파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출시됨(cming forth, 세상 밖으로 공표됨) 이기에,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안에는 가장 안쪽의 것, 이것 아래 내면의 것, 외면의 것이 있다. 이 세 개의 부분들은 완전 구분이 되는 것들로서 있다; 그것들은 질서 안에서 계속적이다, 고로 가장 안쪽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으로 내려간다; 그것들이 연속되는 질서에 따라서 그것들 역시 흘러든다; 고로 생명은 가장 안쪽을 통하여 내면들 안으로, 그리고 내면들을 통하여 외면들 안으로 이다; 고로 질서에 따라 그것들은 연속된다; 그리고 흐름이 멈추는 최말단 외에서는 이 흐름은 계속된다. 그리고 내면의 것들이 질서에 따라 최말단 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바, 내면의 것들은 최말단 안에서 함께 있으나 유입의 이런 질서에 따라서 있다: 즉 흘러든 가장 안쪽의 것은 중앙 부분을 붙들고(점유하고) 있다; 그다음 가장 안쪽의 것 아래 있는 내면의 것들은 중앙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외면의 것들이 주변(외곽, circumference)을 만든다; 그리고 이런 형국은 일반적 측면에서, 그리고 낱개적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전자의 질서를 “연속적인 질서”라고, 후자의 질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질서”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후자의 질서는 전자의 질서로부터 기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경우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질서는 연속적인 질서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근원되어야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내면들이 최말단 안에서 함께 있는 바, 그러므로 생명이 마치 최말단 안에 있는 것처럼, 즉 육체 안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생명은 (육체가 아닌) 내면의 것(혼)에 있으나, 그렇다고 근원적인 생명이 거기 있는 것은 아니고 가장 높은 것 안에, 즉 주님 안에 있을 뿐이고, 이 분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근원된다. 그러므로 외면에 있는 생명은 내면의 생명에 비교해 매우 희미하다; 그 이유가 외면에서 생명은 일반적 수준에서 있고, 많은 것들의 유입으로, 즉 내면의 무수한 것들의 유입으로부터 출시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것들이 함께 (연속적, 동시적 질서에 따라) 함께 나타나고 일반적 측면에서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주제와 연결해 생각해보자. 즉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그의 아들들, 또는 지파들인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영적 선은 자연 평면의 내면에 해당되고 그의 아들들인 선들과 진리들은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여 영적 선이 이것들 안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 “나는 내 백성에게로 거두어지고 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나를 내 조상에게 매장하라. 이는 그 안에는 내면의 것들과 가장 깊은 것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내면의 것들과 가장 안쪽의 것이다로부터; 즉 아브라함은 가장 안쪽의 것, 그리고 이삭은 가장 안쪽인 것 아래 있는 내면의 것이다

굴에. 이는 희미함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동굴”의 의미가 희미함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지파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선들이 있는 자연 평면의 외면들에 희미함이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는 일반적 수준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이는 그럼에도 명료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사람 에브론”의 표현함이 진리와 선이 받아질 수 있는 이들, 고로 신앙의 희미함이 명료해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특히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것에 비교하면 희미하다, 더욱이 합리성에 있는 것에 비하면 더더욱 희미함에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함은 두 방법에서 명료해진다: 첫째는 만일 외면들이 내면의 것들에 굴종함에 가져다 놓인다면, 고로 상응함 안으로 가져다 놓이는 경우이다; 둘째로, 만일 인간이 외면으로부터 내면의 것들 쪽으로 승강할 수 있다면, 고로 내면의 것들로부터 외면의 것들을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교회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에게 가능하고, 전자는 외적 부분에 있는 이들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든 저것이든 주님으로부터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되어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희미함이 명료해질 방법은 있다는 것이다.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이는 이 희미함 안에를 의미한다. 이는 “동굴”, 그리고 “막벨라”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마므레 앞. 이는 그것에 관한 양과 질을 의미한다. 이는 “마므레”의 의미함이 인접된 것 쪽으로 어떤 것의 양과 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나안의 토지에 이는 교회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샀다. 이는 되찾음(redemption)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또한 되찾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되찾아지는 것은 자신 소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표현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론 헷 사람의 표현이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즉 선과 진리가 받아질 수 있는 교회인을 주님께서 되찾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매장지를 소유하기 위해. 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무덤”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거기에 매장하였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에 매장하였으며 나는 레아를 그곳에 매장하였다. 이는 모든 내면의 것들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선과 진리 안에 질서적으로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이는 진리를 받는 이들, 그리고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이들을 되찾는다를 의미한다. 이는 “산 것, 매입, purchase”의 의미가 되찾음이다로부터;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인이다, 그 이유가 교인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동굴”의 의미가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의 표현이 고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영적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헷의 아들들”이 고대 교회로부터의 영적 교회이기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받는 이들, 그리고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 영적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밭과 거기에 있는 동굴을 헷사람의 아들들로부터 매입함” 은 진리를 받고,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선을 받는 교회인들, 비록 그들이 아직은 희미함의 수준이지만 되찾으신다는 것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쳤다. 이는 은근히 심음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하다”의 의미가 은근히 심어짐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기를 마치다”는 은근히 심어짐의 결과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발을 침대에 거두어 들였다. 이는 내면에 있던 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 보다 더 수준 낮은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쪽으로 향함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발을 거두어들이다”의 의미가 자신을 더 낮은 것들 쪽으로 향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면의 것인 보다 낮은 것들이 뜻해지는 것은 이미 살핀 대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침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인간과 더불어 자연 평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낮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인 이유는 이 자연 평면이 자신을 향하게 하고 있기 (침대로 거두어 들임)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야곱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영적 진리가, 그리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이 표현되는 바, 이것들이 엄밀히 말하면 각기 다른 종류별로 구별될 수 있기에, 그러나 단어 “침대(bed)”도 자연 평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장의 여러 군데에서 삽입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구절의 경우, “그가 말하기를 마치자, 그의 발을 침대로 거두어 들였다” 라든가, 요셉이 그에게 왔을 때, 말해지기를, “그는 기운을 차리고 침대 위에 앉았다” 라든가; 그가 요셉에게 자기를 매장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했다” 라든가 하는 경우들이다. 이런 언급이 있어진 이유는 야곱이 생각되어질 경우, 영들의 세계에서는 침대에 누워있는 인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리 위 먼 거리에서, 오른쪽 앞쪽에서 나타난다. 이런 나타남은 천국에서 야곱에 대한 생각이 자연 평면에 관하여로 바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야곱이라는 인물이 지각되지 않고 야곱에 의해 표현된 것, 즉 자연 평면이 지각되기 때문, 이 자연 평면이 침대에 의해서도 간단히 의미된다, (하여 여러 구절에 침대가 등장하는 일이 발생된 것이다.)

만기가 되었다(expired). 이는 거기서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즉 그의 아들들과 지파들에 의해 표현되는 보다 낮은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만기가 되다(숨을 내쉬다, expire)”, 또는 “죽다(die)”의 의미가 새로운 삶(생명)이다 .

그의 백성에게로 거두어 졌다. 이는 영적 선은 영적 선 자체로부터 있는 자연 평면 속의 선과 진리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같은 말이 등장한 구절(29절)에서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거기서 살핀 것이 영적 선의 출시됨과 삶에 관하여서인데, 이것이 그의 아들들과 지파들인 더 낮은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다.) 외면의 것 안에서 내면의 것의 출시됨에 관하여 더 알아둘 것이 있다: 즉 모든 것들, 인간 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연계의 것들은 연속적인 만들어짐(형성, formation)을 수단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 고로 후자의 것은 전자의 것으로부터 연속된 만들어짐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만들어짐은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출시된다, 그러나 사실상 여전히 후자는 전자에 의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후자는 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와 연결됨이 보존되면서 전자를 수단으로 만들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후자 안에 이 후자 앞의 모든 것들이 질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자를 본체(substance)라고 간주할 경우에서 전자로부터 진행하는 양식(mode)과 힘(force)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인간에 속하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과 같은 경우이고, 또한 인간의 생명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의 경우이다.
위와 같은 만들어짐에 따라 인간에 있는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또한 이것이 다른 것 안으로 유입됨에 관한 생각도 아예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육체적인 것인 외적 부분(외적 인간)은 죽음에 의해 분리될 때, 외면의 인간의 품질이기도 한 내면의 인간이 출시되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지 않다.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을 놓고 이런 생각을 품는 다른 경우도 있다; 즉 이 두 가지 것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더 순수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 고로 계속성을 수단으로 이 둘은 대단히 밀착되어져 있다는 것, 고로 후자의 만들어짐이 전자의 것과 구분됨이 없다는 것, 이런 생각을 품는다면, 외적 부분이 죽을 때 내적 부분도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밀착되고 시종일관하기 때문, 그것들의 연속성과 밀착함을 이유로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어야 한다고 결론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하여 (이 책에서는) 이 본문 말고도 수 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온 것은 내적 부분(내적 인간)과 외적 부분(외적 인간)은 서로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것과 외면의 것은 질서 안에서 계속된다는 것; 또한 모든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 안에서 함께 있다는 것, 다른 말로 모든 전자의 것들은 후자의 것들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이 구절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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