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8장 해석

창세기 제 48 장

6218. 1, 2절.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어떤 이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버지가 아프다. 그리고 그는 그와 함께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다. 2 그리고 어떤 이가 야곱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6219. 이런 말들이 있은 후 였다. 이는 이전에 있어왔던 것들로부터 뒤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의 의미가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이 말들이 있은 후”는 앞에 있어왔던 것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6220 누군가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탁월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1791, 1815, 1819, 1822, 1898, 1919, 2080, 2619, 2862, 3509, 5687항); 이 지각이 탁월한 지각이라 말한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 뒤이어지기 때문에서이다, 고로 교회의 진리와 선, 그리고 이것은 “요셉”인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을 통하여 유입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6221. 보라 네 아버지가 아프다. 이는 거듭남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죽는다”가 생명 쪽으로 부활함을 의미하고, 그리고 거듭남도 의미한다 (3326, 3498, 3505, 4618, 4621, 6036항); 이로부터 “아프다”, 이는 (죽는 쪽으로) 진행중이다인 바, 거듭남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 고로 거듭남의 계속인 것을 표시한다. “죽는다”가 거듭남을, 그리고 “아프다”가 거듭남의 계속을 표시한다는 말은 믿어지기에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말과 생각의 어떤 것을 아는 자라면, 이 의미가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이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천사들은 죽음 이라는 것을 모른다, 아프다는 것도 모른다, 고로 이것들에 대한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장소에서, 인간이 그것들을 읽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은 삶의 계속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가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자기 영의 세상 삶을 떠받쳐준 육체를 벗고, 자기 영이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영의 어떤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다”와 “아프다”가 천사들 앞에서 읽혀질 때, 그들에게 표출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거듭남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생명 안으로 부활함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이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 그러나 그가 거듭나졌을 때, 그는 살아 있고, 부활의 아들이 된다. 만일 그가 육체 안에서 살 때, 인간 자신이 천국을 갈망할 경우, 죽음과 병듦을 놓고 이것은 생명 쪽으로 부활함으로 진행해가려 함이다는 것밖에 더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으로 육체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철수하게 할 것이다, 특히 자신이 아플 때, 하여 죽음 가까이 다가감이 확실하다고 자신이 확신할 때 더욱 육체에 집념된 생각으로부터 철수 하게 할 것이다. (어쩌면 영과 육의 분리됨을 육체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약간 맛볼지 모른다. 역자주) 이로부터 육체의 죽음에 관한 영적인 생각은 생명의 새로워짐에 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거듭남이 천국에서 주제가 될 때, 이 생각들은 아래로 흐르고, 세상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생각밖에 더 달리 내려오지는 않는다. 고로 이 생각은 말씀과 더불어 있는 바, 이런 생각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측면에서 주님으로부터 (천국 안에) 내려와져서, 그 다음 천국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도 내려와진다; 이런 하강함에서 이 생각들(천적, 영적 의미, 또는 내적 의미)는 우선 세 천국들 각각의 납득력에 어울리는 것을 (옷)입는다, 그리고 마지막 (지상의) 인간의 납득력에 적절한 형체를 (옷)입는다. 이것이 지상의 모든 이가 마주 대하는 글자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왔다. 이는 교회 속의 의지력과 교회 속의 지력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함을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가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의지력과 이것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이 자연 평면에서의 새로운 지력과 이것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들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됨은 그들이 요셉의 아들이다는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 뜻해지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교회의 지력(지성, intelluctual)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아는 바, 인간은 자신이 끌어안은 교의 (주장, tenet)는 무엇이든, 그것을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해야 속이 풀리는(안심하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 여기서 성경의 글자가 한몫 거드는 일익을 담당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성경의 글자기 지니는 부작용일지 모르나 이는 자연계의 글자인 이상 피할 도리는 없다 역자주), 이런 이유는 말씀의 글자 의미는 진리들을 받는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그릇들의 품질은 당사자가 진리들을 받을 때까지 투명성을 통하여 이듯 (진리가)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는 (지독하게 넓다 말할 수도 있는) 일반성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성을 말씀이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걸맞는 것인 특수적, 개별적인 진리들을 받기 위하여는 우선 일반성 범위의 것들이 배워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 전쟁을 위한 기본틀을 군인이면 누구나 습득한 다음, 각기 특별 부서에 배치되어 군인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때 훈련소에서의 배움은 전쟁을 위한 일반성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익힘 없이 특수한 임무를 배우는 일이 없다. 한마디로 해부학을 합격 못한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지 모른다. 역자주.) 이렇게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당사자가의 의미로부터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어떤 주장(교의)이든 확증할 기회를 제공하므로 수많은 교파, 이교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그들 주장의 전부가 글자 의미에 빠짐 없이 있는 것은 아니고 어느 부분의 일치함을 기발나게 발굴해서, 그들 스스로 그것을 확대하여 자신의 주장의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나 된 듯 진리로 비쳐지게 만든 것 뿐이다. (이른 바 휴거 소동이 인간들의 역사에 몇 번씩 등장한 것, 예수님이 승천 이후,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는바, 하늘의 구름을 보고 구름에 나타나는 예수를 학수 고대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던가, 그래도 최근은 대놓고 버젓이 이를 강조하는 연설자는 줄어든 것 같다. 아마 예수가 아무리 기다려도 구름 안에 오시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역자주) 아마 이런 자들에게 진리 자체를 천국으로부터 듣게 한다면, 그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일까? 아마 완전 거부 뿐일 것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지력을 가지지 않은 때문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지력은 당사자가 말씀을 읽을 때, 하여 이 구절과 저 구절을 조심스럽게 비교하며 믿어져야 하는 것, 행동되어져야 하는 것을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 이 지력이 발견되어지는 것은 오직 주님에 의해 계발되는 때 뿐이다. 이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계발된 자라고 불리어 진다. 이 계발됨은 진리들을 알기를 바라는 자, 그러나 자신의 영예나 영광 따위가 아닌 삶과 선용을 위해 알기를 바라는 자들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이 계발됨 자체는 인간에 있는 지력에 의해 받아진다, 그 이유가 계발되는 것이 지력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지력이 약한 사람은 말씀으로부터 이런저런 것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 그들은 자기들이 계발되어지리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것 뿐이다. 더 알아야하는 것은, 거듭나져가는 이들은 계발되어질 수 있는 지력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지력으로 흘러들어 지력을 계발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있는 빛이다; 그 이유가 지력이 그것의 빛, 그것의 시각, 그 결과 그것의 지각을 가질 수 있는 근원은 이외 다른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지력이라 불리우는 이 지력은 단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오는 지력보다 더 내면적이다, 그 이유는 어떤 것이 그러하다고 하는 지각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또는 철학 같은 것으로부터의 명령(dictate)이 아닌, 말씀의 영적 의미로부터 있는 명령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지력에 있는 이들은 말씀 어디에서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선행이 교회의 근본임을 가르친다는 것을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사후 남아 있다는 것; 그의 생명은 그의 사랑들로부터 이다는 것; 또한 신앙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되면 신앙이 아니다는 것; 신앙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에 인접하여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것들과 신앙은 영원한 생명이 있기 위해 함께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등등을 지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계발된 지력을 가지는 이들에 의해서만 명백하게 지각될 수 있을 뿐이다.
흔히 믿어지고 있는 대목은, 교의나 자신들의 교회의 교리물들을 능란하게 이리저리 잘 꿰매어 설득력 있는 확증함으로 열변을 토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지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지력이 아니다; 그 이유가 교의를 확증하는 것은 지력으로부터가 아니고, 감각적 부분에서 있는 창의력(발명의 재주, ingenuity)으로부터 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것은 최악의 인간들에게서 발견되는 일이 흔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도 행해질 수 있고, 심지어 거짓 자체에만 있는 이들에 의해서 행동된다. 이런 식의 아이디어 창출 수준은 사기성이 교묘한 자들이라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성경의 구절들을 예증으로 슬며시 곁붙치면서 단순한 자들을 거짓 교의 안에 가둔다. 이런 결과물이 도래되는 것은 교회의 지력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상상에도 없어야 정상 아닐까?
본문의 에브라임이 교회의 지력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선은 므낫세에 의해 표현된다. 이 선은 신앙의 진리들을 수단으로 교인들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지는 선행의 선이다.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선과 함께 지력 안으로 흘러들고 지력을 계발하고, 또한 지력과 의지력이 하나의 마음을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력과 의지력 모두가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나진다는 것은 많이 말해왔었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에 애착함 모두를 수단으로 계발함이 오는데, 이 애착의 근원들은 내적 부분밖에 없기 때문,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태어나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너에게 오고 있다. 이는 내적 부분의 현존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 “에게 오다”의 의미함이 현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여기서는 내적 부분이다 라고 말해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라 말해졌는데, 이런 의미 변경은 자연 평면에서 이 평면 아래 수준인지, 또는 이 평면 위쪽 수준인지에 따라 응용함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즉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보다 낮은 수준이 암시되는 경우에서는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 the internal”이 표현되고, 보다 높은 수준일 경우인 이스라엘이 언급되는 경우, 또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 언급될 경우,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the internal celestial”, 또는 “내적 부분의 선(internal good, 내적인 선)이 표현된다. 이런 이유는 유입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힘을 일구었다). 이는 영적 선을 통하여 있는 새로운 힘을 의미한다. 이는 “기운을 차리다”의 의미가 새로운 힘(force)들을 받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힘들이 영적 선을 통하여 있다고 말한 이유는 “야곱”이라 말해지고, 즉각 “이스라엘”이라 뒤이어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보라 네 아들 요셉이 온다. 그 다음 이스라엘은 기운을 차렸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 그러나 “야곱”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 자연 평면의 진리는 거기서 신앙 속에 있고, 선행의 선인 영적 선을 수단으로 확증되어진다 (기운을 차린다, 힘이 돋구어진다). 또한 “이스라엘”은 교회의 내적 부분이고, “야곱”은 교회의 외적 부분이다. 교회의 외적 부분은 교회의 내적 부분 외에 다른 근원으로부터 힘이 돋구어지거나 힘을 받거나 하지 않는다. 교회의 내적 부분에 있는 이들이 선행의 선에 있는 이들이다, 이 선은 신앙의 선, 진리의 선, 영적 선, 이것이 “이스라엘”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교회의 외적 부분에서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다, 따라서 선 안에 있다고 잘라 말해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한 수준, 그렇지만 그들의 진리 안에 선이 있는 상태, 이 진리가 “야곱”이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 이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 쪽으로 돌리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침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침대에 앉다”가 영적 선이 자연 평면쪽으로 돌리어졌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창. 47:31에서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에 의해서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쪽으로 자체를 돌렸다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기로부터 자신을 옮겨 침대에 앉음에 의해서는 자연 평면 쪽으로 자체를 돌렸다가 의미된다. 자연 평면의 내면 쪽으로, 외면 쪽으로 돌림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납득력에 와닿게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내면과 외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함이 이것이다 하고, 다른 경우에서는 저것이다 하고 말하는 이유를 아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모르는 자는 이런 사항들을 곰곰이 되집어 생각하려는 것도 없는 바,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지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단지 정도나 수준이나 따위에서만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그 이유가 생각이라는 것은 때로 높고 고상한 것까지로 상승했다가도, 때로 낮고 천한 수준까지로도 하강하는 일을 밥먹듯 일삼기 때문이다.
이 외에 모든 이도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함, 그리고 후에 침대에 앉다를 추켜든다면, 최고로 거룩한 말씀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들먹거리기에는 너무나 경미한 주제들이 아닌가 말할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이 말씀 역시 정녕 거룩한 말씀이다에 무게를 둔다면, 이 말의 의미 역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이 의미는 각 단어가 지니는 개별적 영적 의미를 우선 알아야 하고, 이 의미는 천사들이 생각하는 언어들이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천사들은 세상의 물체, 육체에 속하든, 땅에 속하든 천국의 언어로만 알 뿐이다. 이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상응이다. 이에 대하여는 몇 장에 걸쳐 설명한 바 있다.

3-7절.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4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5 그리고 지금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집트의 땅에서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 그들은 나의 것이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들은 나의 것이다. 6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은 너의 것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7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있는데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 그 길에서, 에브랏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베들레헴과 같은 곳,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 매장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또한 교통하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지각된 것이 교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하느님 솨다이께서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루즈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이는 신성이 이전의 상태에서 자연 평면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 솨다이(Shaddai)”의 의미가 신성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 “솨다이”이라고 불리웠기 때문, 그리고 그분은 여호와, 또는 주님, 고로 신성이셨다, 이는 이미 지나온, 창. 28:13, 20에서 살핀 바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나에게 나타나셨다”의 의미가 그분이 나타나셨다 이다로부터; “루즈”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하느님 솨다이께서 나에게 가나안에 있는 루즈에서 나타나셨다”에 의해 신성이 영적 교회가 있는 자연 평면에서 나타나심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내리셨다. 이는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주시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생동 있게 함에 관하여 예언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복을 주심은 그분이 그를 열매가 풍성히 있게, 그를 번성하게, 그가 일련의 백성들로 한 집단으로 일구어지게, 자기 이후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토지를 주시는 것 등등을 해주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언되는 모든 것은 생동 있게 함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 안에 있는 이들에 해당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있는 “야곱”과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를 열매 있게 만들고, 너로 번성해지게 할 것이다. 이는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생기 있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 풍성해지게 만들어지다”의 의미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번성해지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말해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을 살아있게 만들기에, 생기 있어 짐이 그들을 서술한다.

큰 무리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이는 무한하게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는 “큰 무리의 백성”의 의미가 한계 없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백성”들이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무리(company)”는 풍부함이다. 이로부터 “큰 무리의 백성을 만든다”는 진리들이 풍부히 증가하게 된다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무한하다인 이유는 무한이신 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영계의 모든 것들은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무한대로 불어나고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라 불리는 것은 숫자를 가지고 한계를 지어 말해보거나 세어질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영계의 무한인 것은 절대적 무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한이다. 이 둘 사이에는 비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진리들과 선들이 무한하게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무한이신 주님으로부터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고 있디. 진리들과 선들이 이런 속성 속에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천국은 진리와 선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사람의 진리와 선이 저 사람의 진리와 선과 똑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런 식으로 수 천천의 천국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천사들이 영원히 완전 쪽으로 진행해간다는 사실로부터도, 즉 그들은 선과 진리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완전함의 등급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한한 영역에 언제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숫자적으로 무한이기 때문, 그리고 각 진리는 그것 안쪽에 무한한 영역을 지니기 때문, 등등이다.
이것은 자연에 있는 어떤 것 가지고도 더 확실해진다: 비록 인간이 숫자상 무한하게 불어난다 해도, 같은 얼굴을 가진 또 다른 자는 여전히 없다, 그리고 내부의 얼굴 또한 그렇다, 즉 마음이 같은 자, 아마 목소리의 어조 조차도 그렇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는 것, 이것과 저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함은 영계에 속하는 진리와 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무한적이다; 그 이유가 자연계의 하나의 것이 영계의 수천 천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고로 더 내면에 속할수록 더 무한적이다.
영계에 속한 것이 무한한 이유, 자연계의 것 역시 그 다양함이 무한한 이유 모두는 무한 자체로부터 출시되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말했다; 그것들이 무한에서 출시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결코 무한이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양쪽 세계의 무한이신 것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신성이 무한이심 이다.

그리고 나는 이 토지를 너 이후 네 씨에게 영원히 소유하도록 주리라. 이는 이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 여기서는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영원히 소유함”의 의미가 주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왕국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서 지금 너에게 태어난 네 두 아들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두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에서 태어난,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의지력과 지력이다로부터, 그리고 선이 의지력에, 진리는 지력 속에 있기 때문에, 같은 것에 의해 교회의 선과 진리도 의미된다; 요셉에게 “태어난 자”의 의미가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다 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이 안에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그리고 자연 평면도 의미한다.

내가 이집트로 너에게 오기 전. 이는 자연 평면 속의 진리가 거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기 전을 의미한다. 이는 “내가 네게 오기 전”의 의미가 그것이 있었기 이전 이다로부터; 자신에 관한 이것을 말하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안으로 옴에 의해 진리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짐이 표현되었다에 대하여는 앞 두 장들에서 보여준 바 있다.

그들은 나의 것이다. 이는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 관련해 이 말을 한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의지력과 지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 “그들은 나의 것이다”가 그들을 내 안에 있다를 표시한다고 말을 한 이유는 야곱이 자연 평면의 진리, 고로 진리 측면에 관한 자연적 수준, 그리고 자연 평면에서 있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지력과 의지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연 평면에서 있는 바, 그들은 “나의 것”에 의해 그것들은 내 안에 있다가 의미된 것이다. “야곱”이 자연 평면이다는 것,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는 것; 그리고 관계적 측면에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 고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적 수준, 그러므로 그의 “열 아들들”은 자연 평면에서 있는 세부적인 교회의 진리들, 고로 지금은 “요셉의 아들들” 또한 자연적 평면에 포함된다. 바로에 의해서도 역시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진리 측면은 아니고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되어서 이다. 이것은 진리들 보다 더 수준이 낮다, 그리고 이 안으로 진리들은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은근히 심어질 수가 있다. 이것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 안으로 옴에 의해 표현되어졌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이는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을 의미한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그들은 나의 것이다. 이는 그들은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일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에 있는 신앙, 그리고 인간을 생활의 선에 도달 할 수 있게 하는 교리의 진리이다로부터,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지력 속의 진리이다; 그리고 시므온의 표현함이 의지력에 있는 신앙, 결과적으로 행동에 있는 진리, 이는 신앙의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고로 일반적 측면에서 새로운 의지력에 속하는 선이다. 같은 것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르우벤은 그의 표현성(representative)을 모독해버렸다; 그리고 시므온은 그의 표현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저주되었다(창. 39:3-7), 그러므로 그들은 생득권을 잃었다, 그들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첫 출생으로 인정되어졌다 (역상.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성은 르우벤과 시므온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이유가 표현하는 실제 인물이야 어찌됐든 그것이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르우벤과 더불은 이해력에 있는 신앙의 표현은 거기에(자연 평면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지력에 있는 신앙의 표현도 거기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더불어 교회의 지력을 표현함, 그리고 므낫세와 더불어 교회의 의지력의 표현함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 이후 너에게서 출생하는 네 자손. 이는 그 후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자손(generation)”의 의미가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 고로 진리들과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 이후에”의 의미가 그 후에 있는 내면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면의 것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후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나지는 (begotten) 것들은 더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전에 태어나져왔었던 것들이 이후에 더 내면적으로 태어나지는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섬김(봉사, 디딤돌)의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적 부분은 점차적으로 자연 평면을 그것 자체 쪽으로 승강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에 있는 지력(지성)의 모든 것들의 자손(대대)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처음에는 감각적 인간, 이후에 그가 지적 인간이 될 때까지 더욱 더 내면 쪽으로 들어간다. (감각적 수준의 인간 ->자연적 수준의 인간-> 그 다음 자연적- 영적 수준의 인간 -> 그 다음 영적 수준의 인간 -> 그 다음 천적 수준의 인간도 가능하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소설화 한 것이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 (일명, 쟌발잔)이 아닌가 싶다 역자주.) 이는 신앙과 선행을 수단으로 결과되는 새로운 자손과도 똑같다. 인간은 등차적으로 왼전해져 간다 (인간의 거듭나짐은 내면들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승강함이다에 대하여는 6183항을 보라).
말씀에서 “세대, 자손(generation)”이 신앙과 선행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적인 것 외에 내적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서이다. 이런 자손이 다윗서에서 뜻해진다;
그들은 정녕 두려울 것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이 의로운 자의 자손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시. 14:5);
“의로운 자의 자손”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정의”가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헛되이 애쓰지 않을 것이다, 공포를 산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씨이다 (이. 65:23).
다시:
누가 그것을 작업하고 행할까? 누가 시작으로부터 자손이라고 부를까? 나, 여호와, 처음, 그리고 마지막과 더불어 나는 똑같다 (이. 41:4).
에스겔서에서:
너의 무역과 너의 자손들은 가나안족의 토지 속에 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이었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네 자손들에 관하여, 네가 태어나던 그 날에 너의 배꼽(줄)은 잘라지지 않아졌었다, 그리고 너는 내 시각을 위해 물들로 씻어지지 않았다 (겔. 16:3, 4);
위는 예루살렘의 구역질 나는 것들을 이야기 한다, 위의 “자손들”은 영적인 것에서의 자손들이 분명하다.
다시 이사야서에서:
영원의 날들에서 같이 깨어라, 영원들의 자손들아 (이. 51:9);
“영원의 날들”은 태고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영원”이라는 표현이 이 교회와 관련하여 서술되는 이유는 이 교회가 주님을 사랑함의 선 안에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 선,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영원”이라 불리우고 있다. “영원들의 자손들”은 이 선으로부터 파생된 선의 형체들이다.
모세의 책에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자손 대대로의 햇수들을 깨달으라 (신. 32:7);
위에서 “영원의 날들”은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 이었다. “자손 대대로의 햇수들”은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와 시간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영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위에서 이 교회들이 취급된 것이다.
그리고 요엘서에서:
유다는 영원 쪽으로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자손 대대로 쪽으로(거주할 것이다)
(욜. 3:20);
위에서 “영원”이 유다를 서술한다, 그 이유는 유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교회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 대대로”가 예루살렘을 서술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에 의해 영적 (평면의) 교회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나의 정의는 영원 쪽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자손 대대로 쪽으로 (있을 것이다) (이. 51:8);
위에서 “영원”은 사랑의 선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가 “정의”가 이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은 신앙의 선을 서술한다.
다윗서에서:
당신의 왕국은 모든 영원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통치하심은 모든 자손 대대로에게 있습니 다 (시. 145:13);
위에서의 의미도 앞 구절들과 같다; 그 이유가 “영원”이 천적인 것을, 그리고 “자손”이 영적인 것을 서술하지 않으면, 하나만 말해져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쓸모도 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신앙의 상태에 속하는 것들이 사생아는 십대까지 여호와의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명령에 의해서 (신. 23:2); 암몬족과 모압족은 십대 그이후 조차까지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것(3절); 에돔족과 이집트인들은 삼대까지만 회합에 오지 못한다는 것 (8절); 십계명의 명령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아들들 위에서, 그분을 미워하는 이들에 관련하여 삼, 사대 위에(까지) 방문하실 것이다 (출. 20:5)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자손들”이 신앙과 선행 속의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영적 의미에서 자손은 거듭남 속에 있는 이것 저것, 또는 거듭나는 자 속의 이런 저런 것들 외에 다른 것을 뜻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가 말씀에 있는 “출생들”, “해산함”, “임신함들”의 경우이다; 이런 단어들도 신앙과 선행의 임신, 해산, 출생을 표시한다.

너의 것이다. 이는 그것들은 내적 부분인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합리성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너의 것이다”에 의해서는 그것들은 합리성 안에 있을 것이다가 의미되지만, 바로 앞에서의 경우, 즉 “나의 것이다”에 의해서는 그것들은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있는 자연 평면 안에 있을 것이다가 의미된다. 따라서 합리성(rational)이 무엇인지 간략한 서술이나마 있어야 할 것 같다: 내적 인간의 지력이 “합리성”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외적 인간의 지력은 “자연성”이라 불리운다; 고로 합리성은 내적 부분이고, 자연성은 외적 부분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로부터 완벽하게 구분된다. 진실로 합리적 인간은 천적 인간이라 불리우는 자, 하여 선을 지각함과 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함을 가진 이들이다; 이에 비해 이 지각을 가지지 못한 이들, 그러나 지식을 가진 이들, 즉 배워진 바 있기에 진리인 것을 아는 이들, 이로부터 양심을 가진 이들은 진실로는 합리적 인간은 아니고, 내면의 자연적 인간이다. 이런 이들은 주님의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다. 영적 평면과 천적 평면은 아주 다르다, 마치 달빛과 태양빛이 다른 것에 비교된다. 고로 주님께서는 영적 평면에는 달로서, 천적 평면에는 태양으로 나타나신다.
세상에 있는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합리적 인간은 많은 것들에 관하여 예리하게 추론할 수 있는 자이다는 것이다, 하여 그가 자기의 추론들을 함께 정리하면 마치 그의 결말들은 진리처럼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짓은 인간들의 가장 나쁜 짓 안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악들이 선들이라고, 거짓들이 진리들이라고도 노련하게 추론헤서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저리 뒤집는 것 역시 별로 힘들지 않다. 그러나 곰곰이 반영하는 자라면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추론의 발상은 사악한 몽상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합리성은 선이 선임을, 이 선으로부터 진리가 진리임을 내향적으로 보고 지각함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인간의 시각과 지각함은 천국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 내면적으로 자연적 수준인 이유는 그들이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것, 그 후에 자신이 확증한 것들을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 또한 자신 안에서 그것을 확증하는 것 외의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진리인지 여부를 내향적으로 보지도 지각도 못한다. 따라서 이것은 천적 수준과는 딴판이다. 후자가 합리적이다, 그러나 전자는 내면적으로 자연적(자연 평면의 안쪽 부분, interiorly natural)이다.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internal celestial)은 합리성 안에 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은 자연 평면의 내면(interior natural)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의해 영적 수준의 인간들이, 요셉에 의해서는 천적 수준의 인간들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제들의 이름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상속 재산을 청구하리라. 이는 그들은 교회 속의 진리들과 선들과 함께 하면서, 그것들의 품질 속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 “이름으로 부름”의 의미함이 품질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고로 진리와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상속 재산에서”의 의미가 그들 사이에 함께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 내가 밧단으로부터 오는. 이는 지식들의 상태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밧단-아람”의 의미가 진리에 관한 내면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밧단”은 지식들의 상태이다.

라헬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죽었다. 이는 내면의 진리에 대한 이전의 애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존재하는 것이 중지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전의 표현함의 끝이다; 그리고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대한 애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길에서, 아직 토지의 넓이가 있었을 때 죽었다. 이는 중간인 것을 의미한다.

에브랏으로 가는. 이는 이전의 상태 안에 있는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랏”이 이전 상태에서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거기 에브랏으로 가는 길에서 매장했다. 이는 이 상태를 거절함을 의미한다. 이는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절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랏”의 의미가 이전 상태에 있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베들레헴과 같은 곳. 이는 그것의 장소에서 선과 진리에 새로이 애착함을 의미한다.
이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새로운 상태에 있는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진리에 새로이 애착하는 상태; 그 이유가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이 선의 진리,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내용이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를 잠간 살피고 가야할 것 같다.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진리의 이전 상태를 거절함, 그리고 새로운 상태를 수용함이다. 진리의 이전 상태는 인간이 거듭나지고 있는 동안에서 있는 상태이다, 후자, 즉 새로운 상태는 그가 거듭나져갔었을 때 있는 상태이다. 이전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이 총명해지기 위하여 진리에 애착되어진 상태이고, 후자는 삶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하는 상태이다. 교리를 위하여서는 인간은 진리로부터 선을 찾고, 삶(생명)을 위하여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찾는다. 고로 후자의 상태는 전자의 상태와 반대적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상태는 그가 거듭나지는 동안 거절되어져 간다; 그리고 후자, 새로운 상태가 받아져 간다. 더욱이 두 상태를 비교해보면, 전자는 후자에 비해 불순하다. 그 이유가 그가 총명해지기를 원해서 교리를 위하여 진리에 애착할 때, 그는 명성과 영광에도 동시에 애착하는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이 애착은 당사자에게 표출될 수밖에 없고, 받아지게 허용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어쩔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삶을 위해 진리에 애착할 때, 그는 목적으로서의 영광과 명성은 거절하고, 생활의 선을 포옹한다, 즉 이웃을 향한 선행을 포옹한다. (이것이 베들레헴, 즉 빵의 집이다, 역자주)

8, 9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9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들은 나의 아들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부디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의 아들들을 보았다. 이는 교회 속의 지력과 의지력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요셉”인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들은 누구의 것이냐? 이는 그들의 근원을 의미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이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들이 누구의 것이냐?”의 의미가 그들의 근원에 관하여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질문은 지각함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는 내부로부터의 대답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지각할 때, 그때 그는 자신과 더불어 질문을 만들고, 또한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관찰했었던 것은, 영들이 나에게 무엇을 물었을 때, 그들은 단지 내 생각을 들여다 봄으로 답을 받아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여기서 저에게 주신 나의 아들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에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아들들이다고 말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인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자연 평면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들을 나에게 데려와다오. 이는 그들은 영적 선(의 요구)에 동의해야함을 의미한다. “그들을 그에게로 데려오다”의 의미가 그들은 동의해야 한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동의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표현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빌리라.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을 의미한다. 이는 “복을 빌다”가 예견하다인데, 여기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의해 표현되는 선과 진리에 관하여 예견함이다. “복을 빌다”기 일반적 표현 자체일 경우, 그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견도, 즉 발생될 좋은 일, 발생될 나쁜 일 모두를 의미한다, 이는 다음 장에서 이스라엘의 예언함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게는 나쁜 것을, 유다와 요셉에게는 좋은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함이 창. 49:28에서 “복을 빈다”로 불리우고 있다: 즉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야기 한 것,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빈 것, 각자의 복에 따라서 그가 그들에게 복을 빌었다.” “복을 빔”이 예언을 표시하는 것은 49장의 1절이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다 함께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날들의 끝에서 너희에게 발생할 것을 말할 것이다.”

10-14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고령인 탓에 무거워졌다.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 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을 포옹했다. 11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13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14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에 얹졌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내밀었다,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눈은 무거워졌다. 이는 그의 희미한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눈”의 의미가 지각이다로부터, 또는 “보다” 역시 같은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무거워짐”의 의미함이 눈에 관해 말해질 경우, 희미한 것이다로부터, 고로 희미한 지각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그가 희미한 지각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성경에서 아브라함, 이삭과 더불어) 표현함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일반적 측면에서 말하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이 희미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천국의 빛이 아닌, 자연계의 빛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 이에 비해 영적 (평면)의 선, 천적 (평면의) 선은 천국의 빛에 있는 합리성으로부터 있다. (인간의 외적 부분), 또는 외적 인간이 위의 자연 평면에 해당된다. 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언급될 때, 이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고, 그러므로 이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영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희미하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희미함에 있는 이들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첫째 자리에(첫째 중요성)놓는다, 마치 여기서 이스라엘이 자기 손을 므낫세에 앞서 에브라임에 놓는 것과 같다.
영적 인간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영적 인간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들은 선을 지각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선은 내부로부터 진리에 애착함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이 거듭나졌을 때까지 선을 지각함의 수준은 아니다는 말이다. 고로 이들은 신앙의 열매들을 선행의 선들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이전의 삶이 어떠하든, 좌우지간 원칙상으로 설사 선행의 일들이 없다해도 신앙만이 구원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신앙의 열매가 선행의 선이라 말해지는 따위는 너무나 관심에서 멀어 있다. (신앙 제일 주의, 하여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신앙에 있어도 되고 없다해도 괜찮다는 식에서 선한 일들을 간주하는 경우일 것이다. 역자주) 이것이 선과 진리를 희미하게 지각함이다. 어쨌든 다음과 같다: 교리로부터 파생되는 원리로부터 신앙을 선행 보다 중요시하는 이들, 그렇지만 선행의 생활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영적 교회 속에 있다, 그리고 구원되어진다; 그 이유는 생활 측면에서 그들은 선행의 선을 첫째에 놓았고, 교리 측면에서는 신앙의 진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령인 탓에. 이는 표현함의 끝에서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의미가 표현의 새로움이다로부터, 고로 이전 것의 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볼 수 없었다. 이는 용의 주도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용의주도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이는 현존을 의미한다. 이는 “데려오다”의 의미가 현존을 만들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키스했다. 이는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의 의미가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진리에 애착하므로부터 인 이유는 “그가 그들을 포옹했다”는 말이 뒤잇고, 이는 선에 애착함으로부타의 결합함이기 때문이어서 이다, 그 이유가 “포옹함”이 키스함 보다 더 내면적이고, 더 밀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포옹했다. 이는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포옹함”의 의미가 사랑의 결합함이다로부터, 고로 선에 애착함으로부터 결합함이다. “포옹함”이 이 애착을 표시하는 것은 포옹을 수단으로 사랑함을 증명하기 때문, 포옹은 사랑으로부터 흐르는 행동이다; 그 이유가 모두 각각의 영적 애착은 그것에 상응하는 제스추어(gesture)를 인간의 신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제스추어가 애착의 표현이다. 키스함도 이 표현 중의 하나임은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 쪽으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함이 지각하다이다로부터, 또한 유입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승강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이 구절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사랑의 유입, 고로 내적 부분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유입이기 때문이다, 이 유입이 내적 부분 쪽으로 승강함이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과 승강함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부분을 향한 사랑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에서 느껴지는 사랑 자체는 내적 부분 속에 있었고, 이로부터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생산하기 위하여 모두 각각의 행동함은 그것의 반작용 또는 상호 작용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행동함은 원인이고 반작용은 원인이 발생시킨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반작용은 행동함 속에 있다, 마치 원인으로 야기된 어떤 것이 원인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발생시킨 원인에 있는 모든 힘이 원인으로부터 인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자연에 있는 모두 각각의 낱개들에 있는 반작용의 경우이다.

나는 네 얼굴들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랑이 유입되리라는 것에 대한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얼굴들”의 의미가 내면들이다로부터, 애착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빛을 내는 신체 부분은 주로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얼굴”은 신성의 사랑을, 그 결과 자비를 표시한다; 그리고 “나는 …에 관하여 생각을 갖지 못했다”의 의미가 그는 희망을 가져보지를 못했다 이다. 이것이 “얼굴을 봄”에 의해 의미되는 사랑의 유입이다는 것은 진행하는 것,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해주셨다. 이는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씨”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의지력 속의 선과 지력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 또한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렇게 말해졌기 때문이다: 즉 “나는 네 얼굴들을 보리라는 생각은 갖지 못했다, 보라, 하느님께서 나로 네 씨 역시 보게 만드셨다.” 이 말은 사랑의 유입이 지각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로부터 선과 진리도 파생되었다를 의미하게 된다; 그 이유가 “얼굴들을 보는 것”에 의해 사랑의 유입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을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 이는 영적 선의 부분에 있는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있는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요셉이 떼어 물러나게 한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넓적다리”의 의미가 사랑의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영적 선의 부분에서”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영적 선인 이스라엘로부터 떼어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단으로 의미되는 것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영적 선으로부터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를 이동시켰다는 것, 즉 거기로부터의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옮겼다는 것,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영적 선이 표현되는데, 그가 이 선과 진리를 자신에게 접근하게 했기 때문이다 (9절). 그렇지만 실제 요셉에 의해,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의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떼어 물러나 있게 했고, 다시 요셉에 의해 가까이 데려다 놓여진다 (이는 뒤이어진다). 이유인즉, 이 방법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사랑의 유입이 영적 선을 통하여 그것들 안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이 질서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 이로부터 그들이 축복되어질 때 외적 의식도 엄격히 이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것들은 주님 앞에서 표출된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복을 빌다”에 의해 의미된 예견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넓적다리로부터 떼어 물러나게 했다가, 다시 이스라엘 쪽으로 데려다 놓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절했다. 이는 그들의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을 땅 쪽으로 구부려 절함”의 의미가 내면의 굴종함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절함은 마음의 굴종함에 상응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정으로부터 하느님을 숭배하는 이들은 이런 식으로 구부려 절한다. 지금 요셉이 절한 이유는 그들을 대신함 때문이고, 이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아닌 주님 앞에서이고, 이 분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복을 받기 때문이다. 이 절함이 그들을 대신해 요셉에 의해 있어진 이유는 이런 경우가 영적 사항에서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의지력의 선과 지력의 진리는 주님 앞에서 그것 자체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 오직 유입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으로서만 겸허해질 수 있다. 자연 평면 자체에는 의지력과 이해력이 없다, 생명의 어떤 것도 없다. 오직 내적 부분을 중매자로 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거기에 생명이 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 둘 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왼쪽에. 이는 (중요성에서) 두 번째 장소(위치)에 지력의 진리가 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왼쪽에 있는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이는 (중요성에서) 첫 번째 장소(위치)에 의지력의 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오른쪽”의 의미가 첫째 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왼쪽”의 의미가 둘째 자리이다로부터; 이는 통상 우리의 손의 사용됨의 우선 순위로부터이다. 여기서의 경우가 어떤지가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을 그에게 가까이 데려왔다. 이는 근접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에브라임의 머리에 놓았다. 이는 그가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라고 생각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의 오른손을 내밀다”가 첫째 자리이다라고 생각함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 부분, 또한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가 인간의 지력 부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지력에 천국으로부터의 빛이 있을 경우, 즉 영적 시각에서만 신앙의 진리가 있다). 지금 이 구절과 17-19절에서, 놓여지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그의 오른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는 것이다; 이를 수단으로 그는 신앙의 진리가 첫째로 중요하다고, 선행의 선은 그 다음 중요하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의미되어 있다. 이런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질 때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수준의) 인간은 이와 달리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수준의 인간은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느껴질 수 있는 납득력을 가지지만, 선행의 선이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내면의 길을 통해 흐르지만, 전자는 외면의 길, 즉 기억 속의 지식 같은 것을 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아마 거듭나지 않고 있는 이들은 이렇게 절대적으로 말한다: 즉 신앙은 첫째로 중요하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고, 그 이유는 이 길에서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 더 보태는 말인즉, 자기들은 신앙에서 구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에 이르러 선행은 흔적 조차 찾기 힘들어져서 이에 대한 본성은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못한 채로 있는 바, 결과적으로 제대로의 신앙 역시 거의 갖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가 전자 없이 후자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선행이 첫째 자리에, 신앙을 둘째 자리에 놓고 있다면, 교회의 양상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사는 이들을 두고 기독인들이라 부르지 않을 것, 선행의 생활로 기독인의 기준을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은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이때는 지금 같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입씨름으로 서로를 구분짓는 바람에 교파가 많아질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이 안에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있다, 교회가 있는 지역,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지역도 모두 이 안에 있다. 이 방식에서 교회는 주님의 왕국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의 본보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선행이 계발되고, 선행 없는 신앙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리된 신앙만으로 초래되는 오류도 명백히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만일 선행의 선을 첫째 위치에 두는 경우 교회의 양상은 얼마 다를지이다. 즉 선행이 본질이고, 신앙이 둘째 본질에 있어 선행을 위한 형식 부분을 담당한다면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때의 교회의 면모는 고대 교회의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선행 외에 다른 교리물이 없던 교회, 선행 안에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가졌다. 이 교회의 품질이 모세의 책에서 말해지는 아래의 구절에 있다:
여호와께서 그를 여기저기로 인도하셨다, 그분은 그를 가르치셨다, 그분은 그를 눈 속의 (눈)동자 로서 지키셨다. 독수리가 그녀의 둥지를 휘젖고, 그녀의 어린 것이 파닥거리고, 그녀의 날개를 넓게 펴는 것 같이, 그분은 그를 데리고 갔다, 그분은 그를 그분의 날개 위에서 실어날랐다; 여호와만이 그를 인도하셨다, 그와 더불어 어느 이상한 신이 없었다. 그분은 그를 땅의 높은 장소들을 타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를 들판들의 증가분으로 먹이셨다; 그분은 그가 반석으로부터 꿀을 빨게 만드셨다, 그리고 바위의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하셨다; 목축의 버터, 그리고 어린 양의 지방과 더불어 양떼의 젖,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 숫양들, 숫염소들, 그리고 밀의 콩팥의 지방;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희는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신. 32:10-14).
그러므로 이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은 천국 안에, 거기서 모든 행복과 영광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이였다. 이는 비록 그것이 두 번째 장소에 있다 할지라도를 의미한다. 이는 “동생”의 의미가 둘째 위치에 있어져야 한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 이는 그는 선이 둘째 위치에 있다 라고 생각했다를 의미한다. “그의 왼손을 얹다”의 의미가 둘째 위치라고 생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 고로 선행의 선 또한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대한 것은 앞에서 살폈다.

그는 그의 손들을 엇갈리게 놓았다. 이는 그러므로 질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러므로 해서 그는 동생을 첫출생으로 만들어 질서가 거꾸로 있게 했다; 즉 신앙의 진리가 앞서 있고 더 높다는 것, 선행의 선은 뒤의 것, 더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생득권”은 앞의 것, 우위인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악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히 알게 한다. 거꾸로의 질서로 인해 교회인들은 희미함에 젖어 선이 무엇인지를, 고로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 이유가 선은 불꽃 같고, 진리는 이 불꽃으로부터의 빛 같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불꽃을 치워버리면 빛 역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만일 어떤 빛이 나타난다면, 불꽃 없이 있는 빛인 바, 사기적 빛인 것이다. 이런 사기적 빛으로부터 교회들은 서로의 의견을 내세워 다양해져, 진리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다. 하여 자기들의 견해가 진리이다고, 저 견해, 저 교리는 사기라고 설득해대는 것이다. 더욱 더 나쁜 상황은, 그들이 교회의 회중에서 앞의 자리에 신앙을 놓아두었을 때, 그 다음 그들은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떼어내는 것, 하여 후자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삶에 별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차츰 교인들로 생각하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교회는 멸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과 더불어 교회를 만드는 것은 생활 없는 교리가 아니고, 고로 특출한 신앙인 확신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진짜 확신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 이로부터 확신 있는 신앙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므낫세가 장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선이 앞선 위치에 있어 왔기에를 의미한다. 이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의지력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생득권”의 의미가 앞인 것(우선권, priority)과 우위인 것 (superiority), 고로 “첫출생”은 앞의 위치(자리)에 있는 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마 누구라도 조금만 계발된다면, 선이 의지력에 있다는 것, 첫째 중요하다는 것, 진리는 둘째 중요하다는 것, 인간의 생각함 안에 있다는 것을 누구인들 알 수 없을까? 또한 인간의 의지력이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사고력 자체가 딴짓을 할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더불은 선이 이것, 또는 저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반대인 악의 경우도 생각해보라. 역자주) 고로 진리가 둘째 자리에 있다는 것, 선이 첫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가 차라리 더 힘들지 모른다. 신앙 속에 있는 진리가 선이 아니면 뿌리를 내릴 수 없는지 여부, 신앙이 선 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신앙인지 여부는 각자의 사고력에 맡겨 조금만 생각해도 결판나는 대단히 어렵지 않는 숙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우선적인 것, 본질이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좁혀 말해서 인간 안에 있는 교회는 어떤 것이 내용이어야 하고 형식이어야 하는지 이다.

15, 16절.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나를 먹이신 하느님, 16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그는 요셉을 축복했다. 이는 지력 속의 진리와 의지력 속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예견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했다”의 의미함이 예견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요셉”이라 말해지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으로부터의 진리와 의지력으로부터의 선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에 의해 그의 아들들이 뜻해지는 것은 축복함의 내용 자체로부터 분명하다, 즉, “나를 모든 악으로부터 되찾으신 천사가 이 소년들에게 축복하소서,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불리워지게 하소서”하고 말해지기 때문,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이 선과 진리가 자연 평면의 내적 부분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실로 서로로부터 확실히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 평면에서 함께 있다, 거기서 내적 부분은 그것 자신에 어울리는 형체 안에서와 같이 있다, 이 형체는 그것 자체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안쪽의 내적 부분으로부터서만 있을 뿐이다; 고로 그것은 (배우가) 연기하듯 행동할 뿐이다. 마치 효력(효능, 유효성, the efficient)이 결과 안에 있는 것과 같다: 효력과 결과는 서로로부터 구분되어진다, 그럼에도 효력은 효력 자신이 개작한 형체에서와 같은 식으로 하여 있다. 이 형체를 통하여 생산되는 영역에서 원인으로서 행동한다. 인간 안의 자연 평면에서 내적 부분으로부터 출생한 선과 진리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자연 평면에서 삶을 인도하면서 그 자체도 거기 있기 위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 자체를 옷입혀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입혀진 이것들은 덮개라는 역할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앞에서 걸어 가셨던 하느님. 이는 내적 선과 내적 진리는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가졌다를 의미한다; “걷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또는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아브라함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 자체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 고로 주님의 내적 인간 (internal human)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야곱이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 또는 주님의 외적 인간 (external human)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적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내적 선, “이삭”은 내적 진리이다. 표현적 의미에서 있는 이런 사항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주님의 왕국에 있는 선과 진리가 그분의 신성과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주님의 왕국에 계시기 위함인 바, 고로 그분 자신이 그분의 왕국이다.

나를 먹이신 하느님. 이는 신성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진리의 선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생기 있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먹이는 것”은 가르치는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풀밭(pasture, 목초지)”이 인간의 영적 생명을 받쳐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먹이는 것”, “풀밭”은 양떼를 염두하고 한 말인데, 비해 본문의 경우는 야곱을 두고 먹여짐이 말해지고 있다; 즉 그의 삶과 생명에 필요한 것이 받쳐주어졌다는 말이다. 내적 의미에서도 역시 같은 것이 의미된다. 즉 신체의 생명을 받쳐주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는 영적 생명을 받쳐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에, 영적 진리의 선이 여기서 의미된다; 그 이유가 순수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이고, 이 교회의 선은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교회에 속하는 이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에 관하여 가르쳐짐이 있기 때문, 즉 그들이 진리에 따라서 행동할 때, 그 안에서 그들은 가르쳐짐이 있어진다는 것, 이때 이 진리가 선이라 불리운다. 이것이 진리의 선이라 불리우는 선이고,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 이는 계속적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오늘(to-day)”, 또는 “이 날 (this day)” 의 의미가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이다로부터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존재한 이래, 오늘 까지”는 먹여주심과 생기 있게 하심이 계속적으로 있다를 의미하게 된다.

나를 모든 악에서 되찾으신 천사(Angel).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이를 수단으로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이 결과되어진다를 의미한다. “천사”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되찾음”의 의미가 해방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악”의 의미가 지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악”이 지옥을 표시하는 이유는 지옥 자체는 악밖에 더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당신이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은 악이다라고 말하든지, 지옥은 악이다고 말하든지 같기 때문이다. “악”이 언급될 때, 지옥이 영적 의미에서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이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천사들이 인물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듯 하기 때문, 이것이 양쪽의 그들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양쪽 모두에서 악은 지옥이다. 통치하는 악이 뜻해질 때 등장하는 단어 “죄” 역시 같은 논리에서 있다. 이를 위해 창. 4장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하셨다, 만일 네가 잘하지 못하면, 죄가 (방)문(door)에서 누워있다; 그리고 너에게 그의 바램이 있다, 그리고 너는 그를 통치할 것이다 (창. 4:6, 7);
위에서 “죄”는 지옥을 표시한다, 하여 인간이 악을 행할 때 지옥은 당사자 바로 가까이에(at hand), 또는(또한) 즉시(at hand) 있는다. 인간과 더불은 악 자체는 지옥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악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때의 인간은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지옥인 것이다, 즉 지옥에 있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연계의 인간이나 추상적 측면에서는 같다는 말이다. 그 반면, 인간에 있는 선 자체는 당사자에 있는 천국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선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 고로 선 안에 있는 자는 가장 작은 형상에서의 천국이다, 즉 선을 행하고 있는 인간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나 같다는 말이다.

“되찾는 천사(redeeming Angel)”란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인간을 옷입으시고, 그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인간을 되찾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즉 인간을 지옥으로부터 되찾으셨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로부터 주님의 인간 측면에서 그분은 “되찾는 분(구속자, Redeemer)”라 불리우신다. 신성한 인간이 “천사(Angel)”라고 불리운 이유는 단어 “천사(angel)”가 보내짐을 뜻하기 때문, 그리고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은 “보내심”이라고 말해지는 대목을 복음서들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명백해진다. 더욱이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은 그분이 말씀을 이야기하셨을 때 천국을 통하여 흐르는 여호와 자신이셨다; 그 이유가 여호와는 천국들 넘어 계셨기 때문, 천국들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건너온 것이 그때 당시에서는 신성한 인간이셨다; 그 이유가 천국 안으로 여호와가 유입되심을 수단으로 그분은 사람을 놓으셨고, 거기로부터 파생된 신성 자체가 신성한 사람(a Divine man)이었다. 이때 이것이 “보내짐(Sent)”이라 불리우고, 이를 수단으로 진행됨(preceeding)이 뜻해진다, 이것이 본문의 “천사(Angel)”와 같다.
그러나 그분의 이 신성한 인간을 수단으로 여호와께서는 인간에게 더 이상 흘러드실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을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옮겨버렸기 때문,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인간으로 옷입으셨고, 그것을 신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로부터 천국을 통한 유입을 수단으로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들을 받는 인류에게 도달이 가능해지셨던 것이다, 고로 이것은 보일 수 있게 만들어졌고,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해방하실 수 있었다, 이외 다른 수단으로는 이 해방은 가능할 수가 없다. 이 건지심이 “구속하심”이라 불리운 것이고, 건진 자, 되찾으신 자인 신성한 인간 자체가 “되찾으신 천사”라고 불리운 것이다.
신성한 인간, 뿐만 아니라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은 천국 넘어 계신다; 그 이유가 그분은 천국에 빛을 비추이시는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은 그분 아래 멀리 있다. 천국 안에 있는 신성한 인간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고, 이것은 태양으로서의 그분으로부터의 빛이다. 그분의 본질 측면에서 주님은 신성한 진리가 아니다, 그 이유가 이것은 태양으로부터의 빛 같이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나 그분은 신성한 선 자체, 여호와와 더불은 하나이시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 “천사(Angel)”라 불리우는데 아래 구절을 읽어보자:
모세가 하느님의 산, 호렙 쪽에 왔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덤불의 한가운데로부터 불의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보려고 이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보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덤불의 한가운데로부터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분은 더 말했다, 나는 너희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다 (출. 3:1, 2, 4, 6);
위에서 “여호와의 천사(Angel)”라고 불리운 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시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이 말하셨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신성한 인간 안에 거기서 계셨다는 것은, 신성 자체는 신성한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나타나실 수 없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요한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이렇다: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신 아들(the only begotten Son),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분, 그분이 그를 알게 만드셨다(나타나게 만드셨다, set forth, known, declare)” (요. 1:18);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그분의 모양을 본 적도 없다” (요. 5:37).
더욱이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이 “천사”라고 불리우신 대목은 백성을 가나안의 토지로 인도하심이 취급되는 곳에서도 있다:
보라 나는 너희 앞서 천사(Angel)를 보낸다, 길을 지켜주어서 내가 준비한 장소로 너희를 데려오기 위하여서 이다. 너는 그분의 얼굴로부터 조심하여라, 그 이유는 그분은 너희의 위법을 참아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의 이름이 그분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출. 23:20, 21, 23);
위 구절의 “천사”가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은 이 말, 즉 “나의 이름이 그분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라 말해진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호와 자신이시다. “나의 이름”에 의해 신성한 인간 안에 계신 여호와의 품질이 의미되어진다.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그분은 환난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들로부터의 천사가 그들을 구해내셨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와 그분의 긍휼 안에서 그분은 그들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데려가셨다, 그리고 영원의 모든 날들(에서) 그들을 운반하셨다 (이. 63:9);
“여호와의 얼굴들의 천사”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되찾으셨다”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말라기서에서:
잘 보라 너희를 찾는 주님이 그분의 성전으로 갑자기 오실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천사 조차; 잘 보라 그분은 오신다, 여호와 체바욷. 그러나 누가 그분의 오심의 날을 참아낼까?,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에서 서있을 자 누가 있을까?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식사 제물이 여호와께 달콤할 것인 바, 마치 영원의 모든 날들에서 같고, 이전의 햇수들 같다 (말. 3:1, 2, 4);
“언약의 천사”는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취급된 주제가 그분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여호와에게 향기로울 것이다”란 사랑과 신앙으로 그분을 예배함은 그때 향기로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유다가 뜻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의해 예루살렘이 뜻해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때나 그 후에나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은 향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의 날들”은 천적 수준이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들이다; “이전의 햇수들”은 영적 수준이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들이다. 더욱이 “천사(angel)”가 말씀에서 천사를 의미하지 않고, 주님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되찾음”에 주목하면, 이것의 적당한 의미는 회복하는 것과 그분의 것이어왔던 그분 자신에 어울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노예됨, 죽음, 그리고 악에 관련해 서술된다; 노예이었을 때란 영적 의미에서 지옥에 의해 노예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에 관련할 경우, 이는 저주됨을 의미한다; 악에 관련해서는 여기서와 같이 지옥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천사들이 되찾는 악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런 악들로부터 그분 자신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심으로 해방되게 하셨는 바, 그러므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은 말씀에서 “구세주, 되찾는 분”이라 불리우신다: 즉
나는 너희를 돕는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리고 너희의 되찾는 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 41:14).
다시: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되찾는 분, 그의 거룩하신 분 (이. 49:7, 20).
다시:
여호와 체바욷이 그분의 이름이다; 그리고 너희를 되찾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온 땅의 하느님으로 그분은 불리우실 것이다 (이. 54:5).
위 구절들에서, “여호와”라고 불리우시는 신성 자체가 “되찾는 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 불리우는 신성한 인간과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신성한 인간 안에 여호와 자신이 계신다는 것은 아래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고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그의 되찾는 분,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나는 처음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나 외에 하느님은 없다 (이. 44:6)
다시:
고로 여호와 너희의 되찾는 분이 말하신다, 나는 너희 하느님 여호와이시다, 너희를 가르친다 (이. 48:17).
다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우리를 모르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이름은 있습니다 (이. 63:16).
다윗서에서:
구덩이로부터 너의 생명을 되찾으신 여호와 (시. 103:4).
위 구절들로부터 말씀에서 “여호와”에 의해 주님 외의 다른 뜻이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호와 구속자”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되찾아졌었던 이들이 “여호와의 되찾으심”이라 불리운다: 즉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잘 보라 너의 구원이 온다; 잘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그리고 그분의 일의 값이 그분 앞에 있다. 그들이 그들을 부를 것이다, 즉 거룩함의 백성, 여호와의 되찾으심 (이. 62:11, 12);
주님으로부터 그들이 “여호와의 되찾으심”이라 불리우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가 그분의 오심에 관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보라 너의 구원이 온다; 보라 그분의 보상이 그분과 더불어 있다.” 이 외에도 이. 43:1; 52:2, 3; 63:4, 9; 호. 13:14; 출. 6:6; 15:13; 욥. 19:25 등등의 구절에서 “구속함(redemption)”이 노예됨, 죽음, 악에 관련해 서술된다.

소년들을 축복하소서. 이는 선과 진리를 가지도록 그들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의 의미가 선과 진리를 수여하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축복함”은 이외 다른 것은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교회의 지력과 의지력이다로부터, 이것에 진리와 선이 주어질 것이다: 즉 지력에는 진리가; 의지력에는 선이 수여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이 그들 안에서 일컬어지게 하소서. 이는 그들 안에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의 품질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워짐”의 의미가 당사자에 있는 그의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진리의 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품질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 역시 야곱의 아들들로 받아들여졌고, 지파들로, 즉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레위 지파가 성직을 담당하므로 해서 상속분을 할당받는 지파들로부터 제외되었을 때, 이 두 지파가 보태져서 열두 지파로 세어졌다 (레위와 요셉이 빠졌으므로 열 지파 인데 거기에 요셉의 두 아들들이 추가된 것이다. 역자주) (여호수아서와 에스겔서 48장을 참조하라.)

그리고 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 이는 내적인 선과 진리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이름”의 의미가 품질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인 선과 진리는 이것들이 선과 진리이기 위하여 반드시 외적인 선과 진리 안에 있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이미 말했듯이, 외적 부분은 어떤 것에 형체를 주는 일만 담당한다, 하여 내적 부분이 있을 그릇일 뿐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자체 안으로 유입됨에 따라 거기로 삶을 인도한다. 또한 내적 부분도 가장 높은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높은 것은 주님이시고, 이로부터 모든 생명이 온다; 그리고 그 아래쪽의 것들은 그들의 질서에서에서, 마지막인 육체에 이르기 까지 등차들을 통하여 생명을 담는 그릇되는 형체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로 땅의 한 가운데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소서. 이는 가장 안쪽으로부터 확장됨을 의미한다. 이는 “한가운데”의 의미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크게 불어남”의 의미가 확장함이다; “다수”로 의미되는 진리들은 가장 안쪽, 즉 중앙으로부터 주변으로 자체들을 확장한다; 그리고 확장함이 더 커질수록 천국의 질서에 더 나은 일치함에 있게 된다, 고로 보다 더 완전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축복의 이 부분에 의해 의미되는 상태이다: 즉 “그들로 땅의 한가운데에서 다수로 자라게 하소서.”

17-2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붙잡았다. 18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장자입니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19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20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해서,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았다. 이는 그는 진리가 첫 번째의 장소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오른손을 머리에 놓다”의 의미함이 첫째 자리에 있다라고 생각함이다로부터;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자기 아버지가 에브라임의 머리에 그의 오른 손을 얹는 것을 보았다”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진리가 첫째 자리에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지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였다. 이는 불쾌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이것이 요셉을 불쾌하게 헸다고 말한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헤 표현되는 영적 선 보다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더 수준 높은 것은 더 수준 낮은 것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진리인지를 알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더 높은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아래 있는 것을 본다는 말이다; 고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잘못함을 보고 있다는 것, 고로 그를 불쾌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이는 그의 희미한 지각의 능력 안으로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붙잡다”의 의미함이 지각의 힘 안으로 유입이 있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이 유입을 수단으로 외적 부분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고 뜻하라고 강요할 때, 마치 여기서 그의 손을 붙잡듯, “손”에 의해 의미되는 지각의 힘으로부터 바라기 때문이다. 영적 평면이 희미함에 있다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의 경우 그는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아주 짙은 어둠에 있다, 그 다음 거듭남이 자꾸 진행을 반복하면서 자기가 인정하는 어떤 교회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로 신앙을 가지고 진리인지 아닌지를 따져본다. 어쨌든 그의 진리가 의지 속에, 그로부터 생활 속에 있게 될 때, 그 진리들은 선이 되어간다. 이때의 선을 진리의 선, 신앙의 선, 마찬가지로 영적인 선, 또는 영적 교회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런저런 근원으로부터 있는 선의 품질은 그 당사자가 주제(중요 사항)를 곰곰이 생각할 경우 알려질는지 모른다. 어쨌든 이방인들의 선을 포함 이런저런 선이라 할지라도 그 선의 주요 관심의 주제가 이웃을 향한 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리고 이 선행 안에 순진이 있다면 그 선은 주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는 선이다.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 옮기려고. 이는 잘못함으로부터 그를 돌아서게 하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옮기다”의 의미가 돌아서게 함이다로부터;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부터 므낫세의 머리 위로”는 잘못함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가 첫째 자리에, 선이 둘째 자리에 있는 것은 그를 위하여는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출생입니다. 이는 선이 우위를 가진다는 것에 관하여 지각할수 있게 유입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여기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을 서술할 경우,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할 수 있는 유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손을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이 아이가 첫 출생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놓으소서. 이는 그리하여 선이 첫째 장소에 있어야 하리라를 의미한다. 이는 “머리에 오른 손을 얹는다”의 의미가 첫째 자리이다라고 생각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가 축복했을 때, 이스라엘은 그의 손을 머리에 놓았는데, 이는 고대인들로부터 받아진 의식이었다; 그 이유가 머리 안에 인간의 지력과 의지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육체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주는 것, 동의하는 것이다; 고로 머리에 손을 놓는 것은 축복함이 지력과 의지력에, 고로 인간 자신에게 교통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고대 때로부터의 똑같은 의식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셈이다, 하여 즉위식에, 또는 작금의 축복을 위한 행위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거절했다. 이는 동의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안다, 내 아들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알고 있다”의 의미함이 여기서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 나타난다 이다.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이를 지금 지각한 것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으로부터 이었다. 영적 선이 이런 유입으로부터 계발됨에 있을 때, 이것이 그러하다를 지각한다, 즉 선이 앞의 자리에, 진리가 그 다음 자리에 있는다는 것, 또한 이것은 달리 나타난다는 것까지 지각한다; 그러나 진리가 선을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에 입각할 경우, 진리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어린 아들의 머리에 오른 손을, 첫 출생의 머리에 왼손을 놓는 것을 유지한 것이다.

그도 역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크게 될 것이다.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 고로 천적 (왕국의) 인간도 증가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민족(people)”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크게 되어짐”의 의미함이 증가하는 것이다로부터 ; 그리고 여기서 축복되는 므낫세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자연 평면이 있는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천적 수준의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말해왔던 바이다: 즉 천적 인간은 의지력으로부터 선 안에 있는 자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진리 안에 있다; 그리고 그는 지력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고, 이로부터 선 안에 있는 영적 수준의 인간과 구별된다. “므낫세”가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천적 인간이 표현된다, 그러나 천적 인간 중의 (내적 부분이 아닌) 외적 부분,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이다; 그 이유가 “므낫세”는 자연 평면, 고로 외적 인간에 있는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요셉”은 천적 수준의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 이유는 합리성에, 고로 내적 인간에 있는 의지력의 선이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 속에 있는 선의 진리에 관하여 조금 말을 보태야 할 것 같다. 이 진리는 실로 진리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 선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어 주님을 사랑함의 선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 있다. 주님을 사랑함의 선은 그의 내적 부분이고, 이웃을 사랑함의 선은 그의 외적 부분이다. 그러므로 천적 교회 속에 있는 인간들만에 주목하면,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의 내적 부분 속에 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 속에 있는 이들은 이 교회의 외적 부분 속에 있다. 이 사랑의 선, 즉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이 여기서 “선의 진리”라고 불리우고, 이것이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 이유가 천적 수준의 인간은 진리로부터 추론하지 않는다, 또는 진리에 관하여 추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는 선으로부터 지각을 가지고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지각을 가지고) 이것이 그러하다, 그러하지 않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과 더불은 선행의 선이 진리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천적 수준의 진리이다.

그럼에도 그의 동생이 형보다 더 크게 될 것이다.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은 더 증가함을 받는데, 이것이 영적 (왕국의) 인간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어린 형제(동생)”인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태어난 자연 평면에 있는 지력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 “에브라임”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다른 이(형) 보다 “더 크게 되어짐”은 더 불어남을 받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여기서 “에브라임”이 진리로부터 선인 이유는, 그가 영적 수준의 교회인을, 그러나 영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치 므낫세가 천적 수준의 교회의 외적 부분의 인간인 것과 비슷하다. 진리로부터의 선이 이 인간을, 즉 영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을 구성한다. 이 교회의 내적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에브라임에 의해서는 외적 부분이다. 영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은 천적 수준의 교회의 인간과 이런 점에서 다르다: 영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지력 부분에 심어진다, 그러나 천적 수준의 교회의 선은 의지력 부분에 심어진다; 그러므로 (짧게 말하면) 에브라임은 영적 인간을, 므낫세는 천적 인간을 표현한다.
진리로부터의 선 또는 영적 인간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천적 인간 보다 더 증가함을 받는 이유는 인간의 의지력은 계속적으로 타락시켜져 오다가 마지막으로 악이 의지를 점유해버렸다, 하여 거기에 온전한 것이라고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멸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설비하신 것은, 인간이 지력 부분에서 거듭나져 구원되는 것이다. 의지력 부분이 온전한 자가 거의 없는 바, 천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자 역시 거의 없으나, (지력 부분에서의 거듭남을 개시하여) 영적 인간을 만드는 것은 가능한 바, 이들은 당연히 크게 증대할 것이 틀림이 없다. 고로 후자가 전자 보다 더 증대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동생이 형 보다 더 크게 된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의 씨는 나라들에 충만할 것이다. 이는 신앙 속의 진리가 세력을 떨치리라(크게 유행할 것이다, 군림할 것이다, reign)를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신앙과 선행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앙이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들에 충만함”의 의미가 풍부함, 고로 신앙의 진리가 크게 유행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충만함(fulness)”은 모두를 의미한다; 그리고 모두를 의미하지 않을 경우, 풍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와 선 양쪽에서 모두를 서술한다; “다수, 수가 많음(multiude)”은 진리를, “크기, 양, 확대 (magnitude)”는 선을 서술한다. 양쪽 모두를 서술할 경우 충만함인데, 이를 아래에서 읽어보자: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일어난다, 이것은 넘쳐흐르는 시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토지와 토지 속에 충만된 것,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을 침수되게 할 것이다 (예. 47:2);
“토지와 충만한 것”은 진리와 선 모두를, 즉 교회 속에 있는 진리와 선 모두를 표시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첨가되는 말은, “도성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이다; 그 이유가 “도성”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고,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에 의해 선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외톨이 임에서 자기들의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물들을 깜짝 놀람과 더불어 마실 것이다, 거기로부터의 토지는 그것의 충만함으로부터 황폐해질는지 모른다 (겔. 12:19);
“토지”는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충만함”은 거기 있는 선과 진리이다. 양쪽 모두가 의미되는 것은 앞의 말로부터, 즉 “그들은 외톨이 신세로 빵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깜짝 놀람과 더불어 물들을 마실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빵”에 의해 사랑의 선이, “물들”에 의해 신앙의 진리가, 이것이 “땅의 충만함”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야곱이 자랑하는 것, 그의 궁전들을 나는 미워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성과 거기로부터의 충만함을 닫을 것이다 (암. 6:8).
다윗서에서:
천국들이 당신의 것, 땅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세상과 거기의 충만함을 당신께서 기초를 놓으셨습 니다 (시. 89:11).
그리고 다윗서에서:
땅은 여호와의 것, 그리고 거기의 충만함; 세상, 그리고 거기 안에 거주하는 그들. 그 이유가 그분은 바다들 위에 그것을 기초를 놓으셨기 때문, 그리고 그것을 시내들 위에 건설하셨기 때문이다 (시. 24:1, 2);
위 구절의 “충만함” 역시 진리와 선을 표시한다; “땅”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교회를, “세상”은 보편적 의미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바다들 위에 세상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에 있는 것들 위에를 표시한다; 그리고 “그분은 시내들 위에 그것을 건설하셨다”는 총명 속에 있는 것들 위에를 표시한다. 아마 이 구절의 말이 평범하게 생각하려 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깊게 하는 이라면, “바다들”과 “시내들”이 뭔가 다른 어떤 것이다고, 하여 이 어떤 것이 말씀의 영적, 또는 내적 의미임을 눈치 챌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는 이 날 그들을 축복했다. 이는 예언과 영원하게 섭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함”이 예언함이다로부터, 그러나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선견 (미리 보셨음, foresight)이다; 선견이기 때문에, 또한 섭리이다. 그 이유가 선견은 섭리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악을 미리 보시고, 선을 준비해두신다, 그리고 미리 보여진 악을 섭리를 수단으로 선 쪽으로 구부리신다. 여기서 “축복하는” 것이 선견과 섭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축복하는 이스라엘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영원하게가 뜻해진 것은 “이 날”, 또는 “오늘”의 의미가 영원인 것이다로부터 분명하다.

말하기를,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니, 말하기를, 하느님이 너를 에브라임 같이 그리고 므낫세 같게 평가하신다. 이는 그 자신인 영적 부분이 지력의 진리 안에 그리고 의지력의 선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에브라임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 므낫세의 표현함은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인 영적 부분이 그들 안에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은 이 말, 즉 “너 안에서 이스라엘이 축복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너를 놓는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인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 안에 있다에 의해 표현된 영적 부분에 주목하면 이렇다: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선은 내적 교회의 영적 부분이다; 이에 비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와 선은 외적 교회 속에 있다. 내적 부분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기 위하여서는 교회의 외적 부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이 내적 부분이 서는 기초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이 흘러들어 담겨 있게 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인 자연 평면 또한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 않을 경우, 내적 부분은 그것이 서는 기초도 그것을 담는 그릇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초도, 그릇(저장소)도 없다면, 내적 부분은 완전하게 사멸한다. 고로 (사멸하지 않으려면) 영적 부분은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주제를 예증으로 살펴보자: 인간이 자신 내부에서 평온과 복됨으로 느끼게 하는 선행의 애착 자체는 어떤 보수를 바램 없이 이웃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행함에 있다는 것이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선을 뜻하고, 진리로부터 이 선을 행하는 것, 즉 이를 말씀이 명령하였기 때문에 뜻하고 행하는 것은 교회의 외적 부분이다. 만일 외적 부분인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즉 이 선을 뜻하고 행함에 참여 않겠다면, 그 이유가 보상이 없다면, 자아를 위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결정한다면 (그 이유가 이런 기질은 유전적으로부터, 그리고 실제적으로부터 누구나 지니는 것이다), 이때 내적 부분은 설 자리인 기초가 사라진 셈, 내적 부분에 상응하는 저장소도 없는 것, 하여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된 것은 거절당하고, 악용당하고, 마지막으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은 멸해지는 바, 닫아지고 멈추어진다, 하여 천국으로부터의 어떤 것도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따라서 일반적 본성으로부터의 미세한 어떤 빛만이 틈새를 통하여 이리저리 다니는데, 이것은 자연적 수준의 생각함, 말함, 뜻함에 얹혀 있고, 선과 진리에 반대하는 악과 거짓이 자기들의 행동에 영적인 빛이 종속하여 박수쳐주는 부대로 전락해 있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앞에 에브라임을 자리잡아 앉혔다. 이는 그는 진리가 첫째 장소에 있다고 간주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영적 부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13, 14, 17-19절에서 설명되었다).

21, 22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22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 몫은 내가 내 검과 내 활로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죽는다. 이는 영적 선이 새로운 삶에 관하여, 그리고 표현함을 끝냄에 관하여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생명으로 부활함이다로부터, 또한 이전의 표현함의 끝이다 알게 된다; 이 끝 또한 여기서 “죽는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교회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자가 죽을 때, 그 표현성은 누군가가 계속 잇는다, 즉 아브라함을 이어 이삭이, 이삭을 이어 야곱, 야곱을 이어 그의 아들들이 계승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가 승계했고, 사사 시대에도, 열왕 시대에서도 그러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의 의미가 주님의 신성한 섭리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누군가와 더불어 계실 때, 그분은 그를 인도하시고, 발생할 모든 것들을, 슬프던, 즐거운 것이든 그에게 선을 위하여 발생하게 하신다; 이것이 신성의 섭리이다. “주님의” 섭리라고 말한 이유는 이 말, 즉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인데, 말씀에서 “하느님”에 의해, “여호와”에 의해 주님이 뜻해지기 때문에서이다; 그분 외에 하느님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 자체, 아들 자체이신 바, 그들은 하나이시다; 아버지는 그분 안에, 그분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을 그분 스스로 요. 14:9-11에서 가르치신다.

그리고 너를 네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이는 양쪽 고대 교회의 상태에로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조상들”의 의미가 고대와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두 고대 교회들의 상태”라고 말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고대 교회들에 속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왕국을,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모두 각각의 특별한 측면에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표현 자체 역시 조직되어졌다: 즉 유태 나라와 더불어서는 천적 왕국을, 이스라엘 나라에 의해서는 영적 왕국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오로지 표현뿐만 (완전 껍데기 수준의 표현)이 설립되어질 수 있었는 바, 주님의 왕국, 또는 교회의 어떤 것은 전혀 없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바랬던 것은 내적 부분의 어떤 것은 절대 아닌 외적인 것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표현이 존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것 때문에 천국과의 어떤 교통이,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주님과의 어떤 교통함이 있기 위하여, 그들은 외적 부분들에 보존되었다; 그리고 이때 주님에 의해 설비된 것은, 교통함은 내적 부분 없이 단지 외적 부분의 표현만을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 쪽에서 이다면 야곱의 후손들을 도로 데려다 놓으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몰랐지만 그들의 외적 표현들 안에 내향적으로 감추인 신성한 것들이 뉘여 있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의 경우,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관계적 의미에서 천국들에, 그리고 교회에 있는 주님의 왕국에 관한 것이다. 양쪽 고대 교회의 이 상태가 “하느님께서는 너를 너의 조상들의 토지에로 도로 데려가실 것이다”는 말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네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주겠다. 이는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거기서 더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요셉”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표현함이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형제들 보다 뛰어난 한 몫을 준다”의 의미가 거기, 즉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 안에서 더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지력의 진리와 의지력의 선을 더 가지는 것, 이것들이 교회의 필수 요소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득권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역상. 5:1).

내가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얻은 것. 이는 악을 제어하는 승리를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아모리족의 의미가 악이다로부터; 그리고 “손으로부터 취함”의 의미가 승리를 통하여 획득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모리족에 주목해보자. 그들에 의해 악이 의미되는데, 가나안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말씀에서 언급되는 그 토지에 있는 나머지 나라들도 다양한 종류의 악들과 거짓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를 점유하기 위해 왔을 때, 이런 나라들에 의해 이런저런 것들이 표현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천국의 것들을, 그 토지의 나라들은 지옥의 것들을 표현했다, 하여 그들에게는 저주가 있어졌는 바,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잔존하는 그들과 계약을 맺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지옥들을 표현한 이들의 토지를 탈취하여 살았다는 것은 주님의 오심의 때쯤에서 지옥의 것들이 천국의 큰 부분을 점령해왔었다는 것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오심과 그분의 인간을 그분 자신 안에서 신성으로 만드심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추방하시어 지옥들 안으로 내던지셨다, 그리고 그것(그것들이 내쫒긴 영역)을 그분의 영적 왕국 속에 있을 이들에게 상속분으로 주셨다.
아모리족의 나라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악이 표현된 것은 그것이 언급되는 아래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예루살렘, 너의 상거래(trading)들과 너의 세대(generation, 출생들, births)들은 가나안족의 토지 로부터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겔. 16:3, 45);
내적 의미에서 “아버지”는 교회의 선을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악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교회의 진리를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해진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족, 너의 어머니는 헷족이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그들 앞에서 아모리족을 파괴했다, 이들의 키는 삼나무들 같았다, 그리고 그는 상수리나무의 튼튼함이었다.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했다 (암. 2:9, 10);
위 구절 역시 “아모리족”은 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자아 사랑의 악이 “삼나무들의 높이와 상수리나무의 튼튼함”에 의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아모리족”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악인 이유는 가나안의 토지 전체가 “아모리족의 토지”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하여 말해진 바, “나는 아모리족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했다.” 다시 아래에서:
유다의 왕 므낫세는 자기 앞에 있었던 아모리족들이 했던 모든 악보다 더 악한 짓을 했다
(왕하. 21:11).
내 검을 가지고에 의해 전투하는 진리를 수단으로 이다는 것은 “검(sword)”의 의미가 전투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내 활을 가지고가 교리를 수단으로가 의미되는 것은 “활(bow)”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말, 즉 “내가 내 검과 내 활을 가지고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취한 몫”이 이스라엘에 의해 내적 의미 때문에 이야기되어졌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과거 야곱이 자기의 검과 활로 아모리족으로부터 취한 몫이 아니고, 그 몫(토지, 지분)을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샀기 때문인데, 이는 창. 33장의 이 말로부터 이다: “야곱이 세겜에, 세겜의 도성에 당도하였는데, 이곳은 가나안의 토지 안에 있고,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그쪽으로 왔을 때이다; 그리고 도성 앞에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들판의 몫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으로부터 일백 크시라를 주고 샀다” (18, 19절). 이 들판을 그가 요셉에게 준 몫이었다는 것은 여호수아서의 이 말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의 뼈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모셔왔는데, 그들은 세겜에서, 야곱이 일백 크시라로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샀던 토지의 몫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상속분을 위해 있었다” (여. 24:32). 이로부터 분명한 바, 이 몫은 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요셉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몫의 근처에 세겜 성이 있었지만 이 성은 뜻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둘 일이다. 과거 시므온과 레위가 성의 모든 남자들을 살육하고, 그 성을 그들이 검으로 강취했었는데 (창. 34장), 야곱은 이 행위를 혐오했다, 이것 때문에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했다, 그리고 자신을 이 행위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하여 말한다, “내 혼이 그들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 것이다; 그들의 회합에 내 영광은 연합하지 말지라. 그 이유는 그들이 분노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들은 수소를 느슨해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 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흩뜨리라” (창. 49:5-7). 이런 모두로부터 명백한 바, “내가 내 검과 내 활을 가지고 아모리족의 손으로부터 취한 몫”이라는 말이 그에 의해 말해질 때, 그가 예언적 영 안에 있었다는 것, 이는 내적 의미를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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