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7장 해석

창세기 제 47 장

1절.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에게 와서 말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현존함, 그리고 그 결과로 유입과 지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오다”의 의미가 현존하다 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말하다(tell)”의 의미가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 이로부터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이 바로에게 왔다, 그리고 말했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에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현존함이 의미된다, 그 결과 유입과 지각함이 있다.
자주 말했던 사항은, 내적 부분의 유입이 자연 평면,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후자가 지각함이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자연 평면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유입이 있는 덕택에 존속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유입 없이 자연 평면은 생명이 없기 때문, 생명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의 자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이 가지는 모든 것은 영계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연은 생명이 지독하게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더불은 자연이 살아 가기 위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어야만 하고, 이는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적 부분 안으로 직접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계를 통하여 중개적, 간접적으로 있는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은 영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살아 있기 위하여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안으로 유입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자연 평면은 거기로부터 생명을 받아 만들어 진다. 이것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 안으로 유입됨에 의해 뜻해진다.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 덕택에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외적 또는 자연 평면에 지각이 출시된다; 그 이유가 유입과 지각함은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6064.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방금 위에서 말한(6063항) 유입과 지각함이 이것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에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양떼들, 그리고 그들의 목축들. 이는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들”의 의미가 내면의 선들, 그리고 “목축들”의 의미가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선들이 의미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이 진리의 선이기 때문이다. 천국 안에서와 인간에게 있는 선들은 두 근원으로부터 이다, 하나는 의지력에, 또 하나는 이해력에 근원을 가진다. 의지력에 근원을 둔 선 안에는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던 태고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력에 근원을 둔 선 안에는 영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었던 고대인들이 있었다. 전자의 선에는 셋째 천국, 또는 가장 안쪽의 천국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선 안에는 중간 천국 또는 둘째 천국에 있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한 본성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주 거론해왔기도 하다. 어쨌든 의지에서 근원되는 선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있는다; 그러나 이해력에서 근원하는 선은 진리로부터 있는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 이 선은 자체적으로는 진리가 행동에 있는 것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 이는 그로부터 파생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왔다. 이는 그들은 교회로부터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어떤 “토지로부터 오다”의 의미가 거기로부터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왕국과 지상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보라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있다. 이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인 자연 평면의 한 중앙에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 중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의 중앙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교회 속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 이것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다는 것이 신앙과 더불어 자연 평면에서 받아지고 인정되어갔을 때, 그것들은 거기서 중앙(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그 이유가 바라봄 아래 곧바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은 중앙에, 그리고 바라봄 아래 있으나 곧바로 있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은 측면 쪽에 있는다. 고로 중앙에 있는 것들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측면의 것들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이는 눈의 시각이 가지는 경험과 똑같다. 시각 아래 곧바로 있는 것 (직시하는 것)은 중앙에 있고,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시각 아래 곧바로 있지 않은 것들, 즉 중앙으로부터 떨어진 것들은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내적인 눈, 이는 지적 마음인데, 이 마음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그것의 시력을 가지고, 그것 자체의 바깥쪽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조망한다. 이는 외적인 눈인 기억 속의 지식들도 마찬가지 인데, 이것은 자체의 바깥쪽의 대상물과 그 주변 대상물의 영역을 조망한다. 내적 시각은 인간 당사자가 지닌 진리와 선에 가장 많이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결정되고, 이때 이 지식들은 중앙 쪽에 위치한다. 내적 시각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지를 검사하고 영적인 것들 쪽으로 시각의 초점을 모으려해서이다. 하여 영적 관조함 아래 있게 하려 해서 이다.

2-6절.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다가 바로 앞에 세웠다. 3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4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인데,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5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6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살게 하라.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그리고 네가 알아보아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다면 내 가축의 제 1인 자로 세워라.

그는 형제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데려갔다. 이는 교회 속의 진리로부터 얼마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다섯”의 의미가 얼마 정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바로 앞에 세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은근히 심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은근히 심어짐(insinuation)이 “그 앞에 세움”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그것들을 표출하는 끝이 그것들, 즉 교회의 진리들을 은근히 심는 것이기 때문, 그 이유가 이것들이 “야곱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진리들에 주목하면, 그것들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은근히 심어져야만 함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이 주제에 관하여 오늘날 알려진 바 없어 여기서 더 예증해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내적 의미로부터의 진리들이 이런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으면, 마음은 갖가지 이교(이단)들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들이 그것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는다면 마음은 이단들을 끌어낼 수 없다.
예를 들면,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배웠던 이들의 경우, 하느님은 성내신다, 그분은 처벌하시고 시험으로 인도하신다, 지옥으로 내던지시고, 심지어 악이 야기되게 하신다 등등의 하느님에 관한 거짓 생각들을 끌어낸다; 하여 하느님이신 선 자체로부터 악은 출현할 수 있다, 이는 그분에게 정반대되는 위험한 도출이다, 여전히 선으로부터 선만이 오고, 악은 악으로부터서만이 온다. 그러나 만일 내면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져 있지 않으면, 이 지식들은 엉뚱한 발상을 도출할 수도 있다. 이런 진리들이 그럴지 모른다: 즉 인간을 성내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는 악 때문이다, 이것이 시험들로 인도한다, 벌한다, 지옥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그 자체가 악을 계속 생산한다는 것; 이 주제 주위의 사정은 왕국들에 있는 법들 같은 것이다, 이 법들은 왕으로부터 온다, 반면 처벌의 악들은 왕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러나 악들을 행한 이들로부터 이다.
이런 진리도 있다: 지옥들은 존재한다,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것이 허용되어져 있는 이유는 인간을 위하여 피할 수 없기 때문, 즉 그가 악 안에 있다는 것을 보도록, 그의 생명은 거기로부터 파생되어져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가 악 안에 남아 있다면, 그는 자유 안에 있을 수 없다, 고로 개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악을 선쪽으로 구부리신다.
이 진리 또한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들이 처음에 믿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 그것들은 개별적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예증되어진다는 것; 예를 들면, 이런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 즉 거행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이다, 고로 처벌의 악도 모든 것이라는 말에 포함된다; 그러나 한 참 후에 이것이 어떤 방식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인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허용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에 대한 근원과 본성도 배워진다.
마찬가지로 이 진리가 있다: 하느님에게 대한 모든 예배에는 거룩한 두려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이 두려움 안쪽에는 하느님은 선에는 보상을, 악에는 처벌을 하신다는 생각이 있다. 단순한 자나 어린 아이들은 이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허용이 무엇인지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에 따라서 조차 즉 “오히려 몸과 혼을 지옥으로 파괴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 하라” 이다 (마. 10:28); 그리고 그들이 악인 것을 행함에서 두려움 때문에 감히 엄두를 못낼 때, 차츰 선과 함께 사랑이 은근히 심어진다, 이런 뒤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지각도 한다, 그리고 악은 자신들로부터 이다는 것, 마지막으로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이다는 것까지 이다.
더욱이 천국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선뿐이다는 것을 지각하나, 지옥에 있는 이들은 모든 악은 하느님으로부터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것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제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들의 세계에 있는 이들에게 대답으로서 말해지는 것은, 만일 악이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들은 생명이 없게 되는 것, 이것이 악 안에 있는 이들의 경우이다는 것; 그들 안에 있는 악이 법에 따라서 자신들을 처벌한다는 것; 그리고 처벌의 악 때문에 그들은 악들을 마음대로 행하려듦이 금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악의 처벌은 선을 보호하는 장치도 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더하여, 악 안에 있는 이들, 또한 내적 예배 없이 외적 예배에만 이들, 유태인의 경우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함 안에 모든 수단에 의해서라도 있어야 하고, 하느님은 반드시 처벌하신다는 신앙도 지녀야 한다; 그 이유가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그들은 선인 것을 행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부터서는 결코 아니다.
이런 것들과 이외 많은 다른 진리들이 위에 참고로 제시한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질 때, 아주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이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투명한 (transparent) 그릇 같기 때문이다. 이 그릇 안에서 진리들은 하나의 일반적 진리로서밖에 보여지도록 하는 원인이 되어준다.

그리고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과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바로가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가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 자연 평면이 지각함이 의미된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 이는 용역(service)과 사용(use)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용역과 사용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선들이기 때문이다. 선행의 선들이라 불리우는 모든 선들은 사용(선용, 유용, use)들밖에 더 아니다, 그리고 사용(쓰여짐)들은 이웃을 위한, 우리의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주님의 왕국을 위한 일들밖에 더 아니다. 더욱이 그 자체에 주목하면, 선행 자체는 선행은 일로 되고, 행동 안에 담길 때까지 선행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에게 선을 행항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를 향한 선행의 모든 것은 행위 자체, 또는 일 안쪽에 포함되고 있음은 누구나 경험한 사례가 적지 않을 줄로 본다. 한마디로 이에 대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일은 자신의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들의 복합체인 셈이다, 그리고 영적 선들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실로 실행에 의해, 즉 쓰여짐에 의해 선이 되어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의 선 안에 있기에, 그들은 쓰여짐을 갈망하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이 쓰여짐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기쁨들 자체이다,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서 그들은 더 없는 행복을 향유한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천사들과 더불어 그분의 영광에서 올 것이다; 그때 그는 모든 이에게 그의 일들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마. 16:27);
“일들”에 의해 여기서 일의 바깥쪽 형체에서와 같은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향의 형체에 있는 일들을 뜻한다, 즉 그것들에 포함된 선행 등등이다; 천사들은 이외 다른 것 때문에 일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일들은 그의 선행과 신앙의 모든 것들의 복합체이다, 그리고 삶은 선행을 선행이 되게, 신앙을 신앙이 되게, 고로 선이 되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느 다른 제자들보다 더 요한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는 만찬에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고 있다 (요. 21:20); 그 이유가 요한에 의해 선들 또는 선행의 일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베드로가 아니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말하셨다, 베드로에 의해서는 신앙이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인 신앙이 분개하여 말했다,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다,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남아있게 하려 뜻한다면 그것이 네게 무엇일 것이냐?” (요. 21:11-23). 이 말씀에 의해 미리 말해진 것은, 신앙은 일들을 경멸하리라는 것, 그럼에도 이 일들은 주님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과 염소에 관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알아질 것이다 (마. 25:34-46), 여기서 일밖에 세어지는 것은 더 없다. 그리고 신앙은 주님을 거절할 것임이 베드로가 그분을 세 번 부인할 때 그에 의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그의 부인함이 밤에 있었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어떤 선행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 그가 세 번 행했다는 것은 이런 조건이 그 때 완성되다를 의미한다; 이 부인함이 수탉이 울 때 이었다는 것은 교회의 새로움이 일어나기 전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밤을 뒤잇는 동틀녃과 아침은 교회의 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에게 말했다, 당신의 종들은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는 그들은 선으로 인도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을 치는 목자”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이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와 우리의 조상들도. 이는 이것은 고대인들로부터서도 그러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조상들(아버지들, fathers)”의 의미가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태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취급되는 말씀의 구절에서 칭찬과 더불어 그들의 조상들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말씀의 글자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이 조상들을 놓고 이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는 야곱의 아들들에 국한되는 이해해버리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에서 좋은 의미에서의 내적 의미에서의 경우, 조상들에 의해 그들의 열조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전의 태고 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 교회에 속했던 이들이 뜻해진다. 이 두 교회들이 “아버지들”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교회가 내려와졌기 때문, 또한 교회에 관한 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조상들”에 의해 고대 교회에 속한 이들이 뜻해지는 구절을 읽어보자:
여호와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시는 것에서 기쁨을 가지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 이후에 그들의 씨를 선택하셨다 (신. 10:15).
다시:
영원의 날들을 기억하라, 대대로의 햇수들을 이해하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을 때, 그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했을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숫자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놓으셨다. 그러나 여수른이 살쪘을 때, 그는 하느님을 버렸다, 그들은 악마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으로부터 온 신들, 그리고 너희의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 31:7. 8, 15, 17);
위 구절은 모세의 예언적 노래이다, 이 노래에서 고대 교회가 7-15절까지에서, 야곱의 후손이 15-44절 까지에서 취급되고 있다. 홍수 전에 있었던 태고 교회의 상태가 “영원의 날들”에 의해, 홍수 후에 있었던 고대 교회의 상태가 “대대로의 햇수들”에 의해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들의 선의 상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라들에게 그들의 상속분을 주었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진리의 상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인간의 아들들을 분리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숫자에 따라 경계들을 놓으셨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조상들”에 의해 고대 교회에 속한 이들이 뜻해짐이 분명하다.
마찬가지인데, 아래 구절도 있다:
거룩함의 우리의 집, 그리고 우리의 잘 꾸며진 (집), 우리의 조상들이 당신을 찬양했던 곳이 불로 타버렸다 (이. 64:11).
예레미야서에서:
너희의 아버지(조상, father)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는 공정과 공의를 행했다; 그때 그것은 그들과 더불어 더 할 나위없었다 (예. 22:15).
다시:
그들은 여호와께, 공의의 주택에,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의 희망, 여호와에게 죄를 지었다
(예. 50:7).
다윗서에서:
우리는 우리의 귀로 들었었습니다, 오 하느님,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의 날들(시절)에서, 옛날의 날들에서 행하셨던 일들입니다 (시. 44:1).
위 “조상들”의 의미와 같은 의미가 다니엘서 11:23, 37, 38에도 있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이 위의 구절들에서 “조상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글자 의미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와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이 취급되는 내적 의미에서만 보여진다. 더욱이 천국의 결혼, 즉, 선과 진리의 결혼인 교회 자체가 말씀에서 선 측면은 “아버지”로, 진리 측면은 “어머니”로 불리운다 (3703, 5581항).

그리고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의 계속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 의한 지각함의 계속이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에게 말했다”는 표현 때문이다.

우리는 이 토지에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안에서 생명을 구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체류하다(머무르다, sojourn)”의 의미가 가르쳐짐이 있다, 또한 사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머무르기 위해 오다”는 생활을 찾는 것(살 곳을 찾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토지”, 여기서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진리의 생활함에,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살 곳을 찾는 진리들에 주목해보자, 알려져 있는 것은, 영계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영계로부터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있을 곳(은신처)을 찾는다, 찾는 이유는 결과 안에서 원인으로 행동하는 것, 즉 그것들이 어떤 것을 계속적으로 생산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이 은신처에 대한 대표적 실예가 몸일 것이다, 이 몸 안에 있으려고 찾는 것이 혼이다. 찾는 노력은 생기가 없는 것들이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자연의 최말단에서만 중지될 뿐이다. 자연계 안에서 이것은 모든 것 안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또한 영계에서 보여진다; 즉 영계에서는 선이 진리들 안에서 생활하려고,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살려고 찾고 있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의 것들 안에서, 그리고 감각의 것들은 세상에서 살 곳을 찾는다.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진리들 안에 있다 라는 것에 더 특별히 주목해보자: 알려진 바, 내면의 진리들이 실로 기억 속의 진리들 안에 은근히 심어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선이 있을 때까지 생명을 가지고 있지를 않는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생명이 있고, 선으로부터 진리들 안에 생명이, 고로 진리들을 통하여 선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선은 진리들에게 혼이다, 그리고 진리들을 통하여 육체와 같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 혼이다. 다시 말해 이웃을 향한 선행은 신앙에 생기를 넣고 움직이게 하고, 신앙을 통하여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에도 생기를 넣고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다.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오늘날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이유인 즉, 선행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자가 거의 없는 탓이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 안에 선행이 없을 경우, 이것은 진리들이 아니라 기억 속의 지식들밖에 더 수준이 못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이 기억 속의 여느 지식들이나 매한가지로 우두커니 있는 것, 즉 쓰여짐을 받지 못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으로부터 있을 때, 또는 선행이 그것들 안에 있을 때, 이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차별화 된다, 때로는 자신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넘어로 승강되게 하고, 지식들을 자기들 아래쪽에 두고 그것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이것은 사 후 인간의 상태로부터 아주 선명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이때야말로 그가 합리적으로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하여 생각하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육체의 삶에서의 경우 보다 더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기억으로부터 어떤 기억 속의 지식들을 되부를 수는 없다, 비록 그가 기억들을 다 가지고는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잊혀져 버렸고, 철폐된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 분명한 것은, 그 자체 영적인 신앙의 진리들과 그 자체 자연적인 기억 속의 진리들은 서로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은 선행의 선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의 수준으로부터 천국을 향하여 승강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의 종들의 양떼를 위한 풀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의 선이 결여되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위한 풀밭”의 의미가 진리의 선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풀밭이 없다”란 진리의 선들이 없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내적 의미에서 “풀밭”은 영적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어떤 것, 특별히 기억 속의 지식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육체가 식품을 요구하듯, 혼은 이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진리가 자양분을 준다, 그러므로 “먹이는” 것은 가르침을 주는 것(배워지는 것)을 표시한다. 기억 속의 지식과 진리들이 인간의 혼을 떠받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것들을 알기를 갈망함으로부터, 또한 식품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의 상응 관계로부터도 매우 분명해진다, 이 상응은 인간 안에서 당사자가 식품에 관여할 때,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 이유가 당사자가 (식품과 상응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듣는 동안이다면, 유즙을 받는 그릇들은 열리고 받되 그렇지 않았던 때보다 더 활짝 열리어 받기 때문이다. 영적 진리들과 가르침들 또한 만일 당사자가 선에 애착함 안에서 있다면 더 충분히, 보다 더 완전하게 깨닫는 결과를 준다. 진리들이 영적 생명에 자양분을 주는 것은 선한 영들과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더욱 또렷하다, 그 이유가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어떤 것을 알기를, 그리고 슬기로워지기를 언제나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영적 식품에 결핍할 때, 그들은 황무함을 느끼고, 그들의 삶은 께느른해 있고, 그리고 그들은 배고파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갈망함이 만족될 때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행복 안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이 혼에 건강한 자양분을 생산해주기 위하여, 그것들 안에는 진리의 선으로부터 생명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만일 이 근원으로부터 생명이 없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내면의 생명을 떠받쳐주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그의 자연적 생명, 그의 영적 생명이 아닌 채로 있을 뿐이다.
“풀밭”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떠받드는 것을 표시하는 것을 다른 구절로부터도 읽어볼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백성의 언약을 주었는데, 토지를 회복하기 위하여서; 묶인 자들에게 나가라 하고 말하기 위하여;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밝히 나타내라 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그리고 그들은 길들에서 먹여질 것이다. 모든 언덕들 위에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이다 (이. 49:8, 9);
“길들 위에서 먹여지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 가르쳐짐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든 언덕들 위에 풀밭”은 선으로부터 떠받쳐지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언덕들”, “산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내 풀밭의 양떼를 흩트리고 파괴하는 목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예. 23:1);
위에서 “풀밭”은 영적 생명을 떠받쳐주는 이런저런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시온의 제 1 인 자들은 숫사슴 같이 된다; 그들은 어떤 풀밭도 찾지 못했다 (애. 1:6);
“그들이 풀밭을 찾지 못했다”란 선의 진리가 없다를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 나 조차 내 양떼를 수색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좋은 풀밭에서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들에 그들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고로 그들은 좋은 우리 안에 누워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방이 많은 풀밭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먹을 것이다 (겔. 34:11, 14);
위에서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좋고 지방이 많은 풀밭”이란 진리의 선들을 표시한다. 다시:
너희가 좋은 풀밭에서 먹었던 것이 별것 아닌 듯 여기고, 너희 풀밭의 남을 것을 발로 짓밟았다 (겔. 34:18);
위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호세아서에서:
나는 너희를 광야에서, 메마름의 토지에서 알았다. 그들이 그들의 풀밭을 가졌을 때,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들의 심정은 우쭐대었다 (호. 13:5, 6).
요엘서에서:
짐승들이 신음소리를 낸다, 수소의 목축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풀밭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작은 가축떼의 양떼들이 황무해지게 만들었다 (욜. 1:18).
다윗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풀잎의 풀밭에 그분은 나로 눕게 만드실 것이다; 쉼의 물들 쪽으로 그분은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내 혼을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시. 23:1-3).
다시: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만드셨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분의 백성, 그분의 풀밭의 양떼(도 그러하다). [또는,]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것이다; 그분의 백성, 그리고 그분의 풀밭의 양떼 (이다) (시. 100:3).
위 구절들의 “풀밭”은 인간이 배워야 하는 영적 생명을 중요시하는 이런 저런 진리들을 표시한다; 영적 생명은 마치 풀밭 같아서 피폐해 있을 경우, 목축들이 쇠약해지듯, 마치 육체와 식품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이다. “풀밭”은 혼 또는 인간의 영을 회복되게 하고 떠받치는 선과 진리를 표시한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문이다; 어떤 자가 나로 말미암아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간다, 그리고 풀밭을 발견할 것이다 (요. 10:9).
“풀밭”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만으로부터 생명을 찾는 이들이 가지는 선들과 진리들이다.

기근이 가나안의 토지에 극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것들이 결핍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의 곂핍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건대 당신의 종들이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해주십시오. 이는 그들이 그들의 한 중앙에서 살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중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이로부터 자연평면은 지각함을 가진다.

너의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너에게 왔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안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유입됨에 관련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형제들”인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이 의미된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요셉에게 말해지기 때문이고, 요셉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평면 안으로, 또는 외적 부분 안으로의 유입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리고 네 앞에 이집트의 토지가 있다. 이는 자연 평면 속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네 앞에”의 의미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네 아버지와 네 형제들이 거주하게 하라. 이는 그들은 이것들의 가장 안쪽에서, 즉 기억 속의 지식들의 가장 안쪽에서 살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이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와 형제들”인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과 거기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장 좋다(best)”가 가장 안쪽을 표시하는 이유는 똑바로 전망되는 곳이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 그 이유가 눈은 가장 애착하고 기쁨이 있는 것에 똑바로 방향을 두기 때문이다; 이런 똑바로 바라보는 곳이 가장 안쪽인 이유는 이것이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강한 빛에서 눈 앞에 있다; 한편 다른 것들은 주변을 빙둘러 위치한다, 그러므로 덜 명료하다, 마지막의 것은 불명료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에는 덜 애착이 있고 기쁨도 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빛 앞에서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의 모습이다. 내적 시각의 대상물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기뻐해지는 것과 그것들에 있는 선이 그것들을 향하여 시각을 방향짓게 한다. 내적 부분에 일치하는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진리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감동되는 것들과 더불어 잘 보여지는 곳(즉 가장 안쪽) 아래에 와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이런 진리들은 가장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들과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들이 애착하고 기뻐하는 것과 더불어 전망 아래 똑바로 오지 않는다.

그들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하게 하라. 이는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너는 그들 사이에 활동적인 자가 있는지 알아보라. 이는 교리에서 더 특출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활동적인 자”의 의미가 교리 측면에서 더 특출한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람(남자, vir)”이 총명 있는 자, 또한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교리이다; 그리고 “활동적(activity)”이 원어에서는 힘, 용기를 의미하는 단어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이는 내적 의미에서 힘을 가진 것, 고로 특출한 것이다.

그들을 내 가축떼의 제 1 인 자로 세워라. 이는 그들은 기억 속의 지식의 제 일 가는 것일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제 1 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일의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떼”의 의미가 선이 있게 하는 진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는 “내 가축떼 위에”, 즉 바로의 것 위에 라고 말해지기 때문, 바로를 수단으로 선을 있게 하는 진리들이 아닌 진리들이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10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와서 바로 앞에 세웠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였다. 8 그리고 바로가 야곱에게 말했다, 네 나이가 얼마인가? 9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햇수들의 날들은 일백 삼십 년입니다. 많지 않으나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나의 나이는 내 조상들의 체류함의 날들에서 그들의 생애의 햇수들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10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왔다. 이는 일반적 진리가 현존함을 의미한다. 이는 “오게 함”, 또는 “모셔옴”의 의미가 현존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누군가에게 “오다”가 현존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의 교리, 여기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진리인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들이 세부적 측면에서의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인 이유는 “요셉”이 내적 부분이기 때문, 이로부터 자연 평면에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진리가 요셉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는 일반적 진리는 무엇 보다 먼저 인간에게 은근히 심어지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진리는 세부적, 특수적 진리들로 풍요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이성과 이해력으로부터 이런 진리들을 조망함을 출시한다. 이는 인간과 더불어서도 거의 같다, 그 이유가 그의 판단력이 유아로부터 점차 증가해가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이 새로이 태어날 때, 또는 거듭나질 때의 영적 진리들과 선들과도 똑같다. 그러나 내적 부분이 일반적 진리로부터 자연 평면에 출시된 이후, 상태는 바뀐다, 그리고 내적 부분은 아버지로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으로서 이다. 자기 아버지 마저 그의 종이 된다는 것이 요셉의 꿈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다: 즉 태양과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경례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이 꿈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엎드려 네게 절해야 한다는 말이냐?” (창. 37:9, 10);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요셉의 면전에서 그의 “종”이라고 자주 불리우기도 했다 (창. 43:28; 44:24, 27, 30, 31); 더욱이 요셉은 모든 이와 이집트의 토지에서 주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세웠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일반적인 것 안으로 은근히 심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이는 결합을 경건하게 소원함, 그 결과로 열매 가 풍성히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축복하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결합을 경건히 소원함이다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가 결합함을 경건히 소원함이다, 그 이유가 여기서 이 결합이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축복하는(bless)” 것은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은 선인 모든 것, 또한 번창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을 선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합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열매가 풍성해짐을 의미한다; 또한 번창하기를 경건히 소원함도 의미한다; 여기서 그러므로 여기서 취급되는 것에 대한 경건한 소원, 즉 결합을 위해, 그리하여 열매 풍성해지기 위해서 이다. 그 이유가 열매가 풍성해짐은 결합에 뒤잇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선은 증가하고, 진리는 배가되기 때문이다. 이때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는 바, 이로부터 위의 결과들이 생산된다. 매춘 같은 짓의 경우 위의 질서를 건너뛸는지 모르나, 이 근원으로부터의 선은 가짜일 뿐이다; 진리 역시 선을 자체에 중요시하여 가지는 바, 이 선으로부터 자체의 향기를 파생시킨다.

그리고 바로는 야곱에게 말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교회의 일반적 진리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 (say)”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교회의 일반적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당신의 생애의 햇수의 날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는 영적 평면으로부터 자연 평면의 생명의 상태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 또한 “햇수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생애(인생, life)”의 의미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생명(삶), 즉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자연적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야곱은 바로에게 말했다. 이는 대답을 의미한다.

내가 머무른 햇수들의 날들. 이는 생명의 연속인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 “햇수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체류함들, 머무름”의 의미가 삶(생명, life)과 훈련(가르침, instruction)이다로부터, 고로 생명의 연속적인 상태이다.

일백 삼십년입니다. 이는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고로 취급되는 어떤 것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특별하게 지금까지 야곱에 속하고 관련되었던 생명의 상태와 품질을, 즉 자연 평면이 이때까지 영적 평면으로부터 가졌던 영적 생명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많지는 않으나(few) 악이 내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자연 평면의 생명(삶)의 상태는 시험들로 꽉 차 있어 왔다를 의미한다. 이는 날들과 햇수들이 상태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생애”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삶(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상태에 있는 시험들이 “악”을 가지고 있어왔던 날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모든 시험들에는 악이 나타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내면의 근심 불안과 비통함이고, 마치 지옥에 떨어짐 같기 때문이다. 이때 당사자는 자신의 악들의 상태 안에, 결과적으로 그를 고발한 악령들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악령들이) 양심을 고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그를 방어한다, 즉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호하신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그를 희망과 신뢰함 안에서 간직하시려 하기 때문, 이러므로 내부로부터 두 힘의 맞붙음이 야기 된다. 특히 당사자가 영적인 것을 받을 때, 그의 자연 평면이 시험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자연 평면에 교리의 거짓들과 생활의 악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이 이를 자신에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야곱에 의해 여기서 진리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조상들의 생애의 햇수들의 날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의 상태로까지는 들어 올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도달하다”의 의미가 들어 올려지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 그리고 “생애의 햇수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의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달하다”가 여기서 들어 올려 지는 것인 이유는 그의 조상들, 이삭과 아브라함이 더 들어 올려졌기 때문, 즉 자기 보다 더 내면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최고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을, 그리고 야곱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의해서는 인간과 더불은 천적 평면, 이삭은 영적 평면. 야곱은 자연적 평면을 표현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신성이 되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상 모두로부터 “그리고 그것은 내 조상들의 생애의 햇수들의 밀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에 의해 그들의 생명의 상태로까지는 들어올려지지 못했다가 의미됨이 분명하다.

(** 그들의 체류한 날들에서. 이는 그들의 생명의 상태에 관련하여서를 의미한다. 이는 원문에서 생략되고 있다 역자주.)

그리고 야곱은 바로를 축복했다. 이는 결합을 위하여 경건하게 소원함, 그리고 그 결과 열매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앞으로부터 나왔다. 이는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나왔다”의 의미가 분리되어지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이다. “나감”에 의해 시간에 관련하여 분리됨이 의미된다는 이러하다: 앞 페이지들에서 취급한 주제는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 또한 그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결합하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과의 결합은 아직 취급되지 않았었다, 결합은 아니고 오직 거기에 은근히 심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 즉 13-27절로부터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이 바로 앞으로부터 나갔다”에 의해 시간에 관련하여서의 분리됨이 의미된 것이다.

11, 12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소유권을 주었는데,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 라암세스를 바로가 명령한대로 주었다. 12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모든 집식구를 아기의 입에 따라 빵으로 떠받쳤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살 곳을 만들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교회 속의 진리들이 생명을 받음(생명을 이어감)을 의미한다. 이는 “살다(거주하다)”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모두로부터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의 살 곳을 만들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이 생명을 이어감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소유권을 주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소유권”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 거주함(residence)이다로부터;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이란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소유권을 토지의 가장 좋은 곳에서 주었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안쪽에서 영적 생명이 거주함이다가 의미된다.

라암세스의 토지에서. 이는 마음의 가장 안쪽과 그것의 품질을 의미한다. 말씀에서 있는 모든 이름들, 인물이든, 장소이든 모두는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센의 토지”는 자연적 마음의 가장 안쪽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토지의 가장 좋은 곳인 “라암세스”는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 가장 안쪽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안쪽에 관한 본성은 인간에 의해 거의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이것은 무수하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 고로 천국의 빛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말씀에서 이외 다른 이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바로가 명령한 대로.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 동의함과 더불어를 의미한다. 이는 “명령하다”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동의함인데, 그 이유는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 그러므로 자연 평면이 명령한다는 것은 실로 그것으로부터의 명령 같이 나타나나, 실지로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동의함이다. (자연 평면을) 내적 부분에 비교한다면, 이는 말과 생각의 관계와 같다; 인간의 말이 명령한다고 나타나지만, 실지로는 생각이 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를 빵을 가지고 떠받쳤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선과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이것들의 생명인 선이 계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빵을 가지고 떠받든다”의 의미가 선의 유입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떠받드는” 것이 여기서는 계속적으로 흘러듦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영적 생명을 가진다, 그리고 “빵”은 사랑의 선이다;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 “형제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영적 선 속에,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한 복합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버지의 집을 빵을 가지고 떠받쳤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사랑의 선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그리고 영적 선 속에, 그것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안으로 계속적으로 유입함이 있다가 의미됨이다.

아기들의 입에 따라서. 이는 각각의 순진의 선의 품질에 따라서를 의미한다. 이는 “입에 따라서”가 각각, 그리고 품질에 따라서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기”의 의미가 순진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유입이 순진의 선의 품질에 따라서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 안으로 있는다에 주목해보자: 순진은 선행의 모든 선과 사랑의 모든 선에 품질을 주는 가장 안쪽에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은 순진을 통하여 선행 안으로 흘러드시기 때문, 그리고 순진에 비례하여 이러저러하게 선행을 받음이 있게 된다; 그 이유가 순진은 선행의 본질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진의 본성은 어린 아이를 거울로 삼으면 알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만을 신뢰한다, 그리고 부모들을 기쁘게 하는 것 외의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식품과 입을 것을 가지는데, 그것이 필요해서만이 아닌 그들의 기쁨을 위하여서도 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기에, 그들은 부모들에 동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애착의 기쁨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는 명령 뿐만 아니라 명령받기를 원함에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엇이든에서 자기를 중시함은 없다; 이외 유아의 특징은 더 있겠지만 더 열거함은 생략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어린 아이들의 순진은 순진이 아니라 순진의 외관(semblance)일 뿐이다는 것이다. 진짜 순진은 오로지 지혜 안에만 거주한다, 그리고 지혜는 신앙의 선과 사랑의 선으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주님을 향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을 때만에서 존재한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향하여 자세를 취하는 위의 경우 같다.

13-26절.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14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15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16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은이 떨어졌다면 나는 너에게 너희 가축을 받고 (빵을) 줄 것이다. 17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말과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그리고 나귀들과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그 해에 모든 가축과 바꾸었다. 18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은이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19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도록 씨를 주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20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21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이집트의 경계 이 끝에서 저 끝 까지 이르러 도성으로 이동하게 했다. 22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23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24 그리고 수확하면 너희는 바로에게 오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분(오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는데,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다. 25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26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분의 일을 가지되, 성직자들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라는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유효했다.

그리고 모든 토지에는 빵이 없었다. 이는 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빵”의 의미함이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거기 “모든 토지에서 아무것도 없다”의 의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금 이어지는 것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모든 것을 일반적인 원리 아래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하는 것이 취급되어지는데, 그 목적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교회의 진리들과 결합함이 결과되도록, 그리고 이 진리들을 통하여 영적 선과 , 그리고 이 선을 통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결함함이 결과되도록 하려 해서 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반적인 원리 아래 질서 안으로 환원되게 함은 선의 황폐됨과 진리의 황무해짐을 통하여, 그리고 머지 않은 그 후에, 유지 지탱하는 것을 줌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과되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어지는 것에서 모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러나 많은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 동안의 인간의 경우, 이런 사항들은 좀처럼 거행되지를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삶에서 그것들은 거듭나는 모든 이와 더불어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 세상의 인간과 더불어 거행되지 않기에, 거기서 거듭나는 자에게 이 사항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해도 경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이전에 듣지 않았던 비밀한 것들 같이 여겨질 뿐이다.

그 이유는 기근이 아주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황량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선의 결핍과 지식들의 결핍이다로부터; 고로 “아주 심한 기근”은 황무함을 표시한다. 황무함에 주목함과 더불어 알아야하는 것은,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지식들은 천국에 있는 이들의 영적 생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이 천적이고 영적인 식품들이어서, 이로부터 그들이 자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이 식품들은 주님에 의해 매일 그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에게 아침이 올 때, 선들이 공급된다, 정오일 때, 진리들이 공급된다; 그러나 저녁일 때, 선들과 진리들이 결핍된다, 그리고 이 결핍은 저녁에서 동틀녘과 아침이 되돌아 올 때까지 이다. 아침일 때 천사들은 식욕이 대단히 왕성해 있다, 이것은 지상의 인간들이 배고파 먹을 것을 찾을 때 보다 더 갈망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가 “기근”의 상태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황무함이기도 한데, 이것은 더 낮은 땅에서 있는 황무함과는 다른 황무함이다.
이 세상의 거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천사의 천국이 진리들과 선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지식에 식욕을 돋운다는 것에 대하여서 이다; 그 이유가 이득과 영예와 쾌락에 몰입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천사들에게 삶의 주제이다는 것에 의아해 할 것이다, 하여 말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무엇이다는 말인가? 이것들이 삶에 무엇을 해준다는 말인가? 생명을 주고 삶에 기쁨을 안겨주는 것들이 재물과 명예와 쾌락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은 육체의 생명이고, 혼의 생명은 아니다는 것, 전자의 생명은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고 후자의 생명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거처가 있는 동안 영적 생명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악과 상담할 뿐이다.
황무함에 더 주목해보자, 황무함은 식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식욕의 강도에 따라서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램들이 식욕에 의해 흥분될 때, 선과 진리를 획득함이 있어 그들로 행복과 만족함을 향유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삶에서 황무함에 있는 이들은 머지 않아 갱생되어저 그들의 바램들을 달성한다. 이런 교차됨을 수단으로 모든 이는 완전해져 간다. 주목해둘만한 것은, 자연계의 하루 안에 있는 교차됨이다, 즉 아침, 정오, 저녁, 밤, 그리고 다시 아침인데, 이것은 영계의 교차됨을 완전하게 표현한다는 것, 이런 차이는 있다: 영계의 교차됨은 이해력과 의지력 안으로 흘러들고, 하여 생명 속에 있는 이것저것들을 유지지탱시킨다는 것, 하여 그것을 떠받쳐준다는 것이다.
더 주목해두어도 될 만한 것은, 저녁의 그늘과 밤의 어두움은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천사들, 영들, 인간들에 속하는 것들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태양으로서의 주님은 계속 빛나고 흘러들지만, 인간에 있는 인간 자신의 것으로부터의 악들과 거짓들이주님으로부터의 그것들을 돌려있게 하고 뒤짚는다는 것, 고로 저녁의 그늘로, 밤의 어둠 안으로 자신들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계의 태양도 같다. 그것은 계속 비추고 흘러들지만, 지구가 자전함으로 태양으로부터 돌려세워 자체를 그늘과 어둠으로 데려다 놓는다.
자연계에 이런 교차가 있는 이유는 자연계가 영계로부터 출시되었기 때문, 고로 영계로부터 존속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보편적 자연은 주님의 왕국을 표현하는 극장 무대이다. 교차됨이 영계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계속적으로 완전해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런 교차됨은 자연계 안에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핍과 더불어 멸해지고 만다.
더 알면 도움이 될 것은, 천국에는 밤이 없다는 것, 오직 저녁까지만 있다는 것, 이 저녁을 계승하는 것은 아침에 앞서 있는 동틀녘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밤이 있다. 거기에도 교차됨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천국의 교차됨에 반대적이다; 그 이유가 지옥에서 아침은 탐욕들의 열이다, 정오는 거짓의 근질근질함(참을 수 없는 욕망)이다, 저녁은 불안 근심이다, 밤은 고통이다. 이런 모든 교차됨을 통하여 밤이 통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그늘과 밤의 어두움만을 표출한다.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영계에서 이 사람의 교차됨과 저 사람의 교차됨은 같은 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거기의 교차됨은 (자연계 같이) 시간대로 나뉘어지지 않고 그들에게 보이도록 표출되는 상태의 다양함들이다; 그 이유가 시간이라는 것은 자연계 안에 있고, 상태라는 것은 영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었다. 이는 이것은 자연 평면에서와 교회 내부에서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의 의미가 황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는 기근으로 시달림을 겪고 있다”는 말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 그리고 교회 내부에 황무함이 있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요셉은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 이는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거두어 들임”의 의미가 하나로 함께 가져옴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참되고 개작 가능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 이유는 이 은은 이집트의 토지와 가나안의 토지에 있는 은이라 말해졌기 때문인데, 이제 이어진다. 이로부터 “요셉이 모든 은을 거두어 들였다”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참되고 개작 가능한 기억 속의 지식을 하나 안으로 함께 가져다 놓았다가 의미된다. 기억 속의 지식이 참되고 개작 가능하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오류들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아왔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일소되어질 수 없는 한, 비적합한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들에 의해, 또는 자신의 자아에 의해 거짓들과 악들에 응용됨으로 뒤집어지지 않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한때 언제인가 감명된 적이 있어 기억 속에 있고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손상을 입지 않아 자유로운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은 참되고 적합해지게 개작할 수 있는 지식들이다.

이집트의 토지에서,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발견되는. 이는 자연 평면에, 그리고 교회에 있었던…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교회는 인간과 더불은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 진리와 선 안에 있을 때 그는 교회이기 때문, 일반적 교회 역시 이런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농산물을 샀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므로해서 그들은 버텨냈다를 의미한다. 이는 “농산물(produce)”의 의미가 교회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의미는 버텨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농산물”에 의해 의미되는 영적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 식품을 자기 것이 되게 할 때 영적 생명은 버텨낸다.

그리고 요셉은 은을 바로의 집으로 가져왔다. 이는 모든 것은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의 의미가 관계 안으로 가져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고로 “바로의 집”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 그 이유는 복합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참되고 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일반적인 것에 관련됨 쪽으로 가져와졌다는 말에 주목해봄에서 일단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기 위하여,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 그리고 또한 진리들, 무엇이든 그것들은 일반적인 것들에 관련됨 안으로 가져와짐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일반성 아래 놓여지고 포함되고도 있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산산히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어떤 것이 되기 위하여, 그것들은 하나의 형체 안으로 가져와져야 함에 틀림이 없다, 그래야 그것들은 서로 상호적으로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려면 그것들은 하나의 일반성 아래에서 연계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형체 안에서 그것들을 함께 붙들고 있는 것은 이 일반성이고, 그 안에 있는 각각은 시종일관 자신의 품질을 가질는지 모른다. 일반성 자체는 다른 일반성과 함께 더 큰 일반성 아래 관련됨 쪽으로 가져와짐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더 큰 일반성은 다시 그 보다 더 큰 일반성 아래로 등등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다함께 공존하게 붙드는 가장 큰 보편적 일반성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함께 붙드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영계에서는 일반적 사회들이다, 이 쪽으로 신성한 진리는 흘러들고 그것들을 서로로부터 종류별로 구분되게 한다. 일반적인 것들은 더 일반적 사회 아래에서 덜 일반적이다. 더 일반적 사회들은 인간 안에서 (팔 다리 같은) 부분들, 기관, 내장 등에 상응한다. 이들은 경이로운 연결을 수단으로 상호적으로 중요시하면서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서로가 함께 서로를 붙들고 있다. 또한 하나로서 모두를 함께 표출한다. 인간 안에서 가장 보편적 일반성은 함께 한 개를 붙드는 것인 혼이다. 고로 또한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계속적으로 흘러들면서 인간으로 그렇게 있도록 해주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는 “모든 것들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라고 불리운다 (요. 1:1-3), 또는 이를 통하여 모든 것들은 존재 안으로 왔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이를 통하여 존속한다. 보편적 자연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반성 아래, 각각은 그것 자신의 일반성 아래 있다; 그리고 이와 달리해서는 그것들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자연에 있는 무엇이든 조금 깊이 관찰하면 금방 식별되는 사안이다.

그리고 은이 이집트의 토지,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소비되었을 때. 이느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터에 참되고 융통성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자연 평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더 이상 보여지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모두 소비됨”의 의미가 더 이상 보일 수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참되고 융통성 있는(개작할 수 있는) 기억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황무함 때문이었다는 것은 앞에 살핀 바로부터 분명하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요셉에게 왔다. 이는 내적 부분에 신청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에게 오다”의 의미가 신청하는 것이다로부터; “이집트”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자연 평면에서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었다는 것이 요셉이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했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러나 자연 평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과 교회의 진리들이 결합하는 것이 내적 의미에서 이제 묘사되어진다.

말하기를, 우리에게 빵을 주소서. 이는 영적 생명의 지탱에 관하여 간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다”의 의미가 빵을 서술할 경우, 지탱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빵”에 의해서는 특별하게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의미 되나, 일반적으로는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이 경우에서 “빵”에 의해 모든 식품이 뜻해지기 때문;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식품이 뜻해질 때, 영적 생명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일반적 측면에서의 식품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둘이 영적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이 떨어졌다고 해서 왜 우리가 당신 옆에서 죽어야 합니까? 이는 진리가 결핍된 이유로 영적 죽음이 초래되는 도리밖에는 달리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영적 죽음이다로부터(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이 떨어짐”의 의미가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결핍이 있을 때 영적 죽음이 있다에 주목하면 이렇다: 영적 생명은 진리들에 따른 활동들, 결과적으로 사용함들(uses)에 존재한다; 그 이유가 영적 삶에 있는 이들은 생활에 긴요하게 필요할 것으로 여겨 진리들에 식욕을 가지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회가 되면 진리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용됨에 일치하는 만큼에서 진리를 받을 수 있고, 그 만큼에서 영적 생명도 지닌다, 그 이유는 그만큼에서 그들은 총명과 지혜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저녁”에 의해 의미되는 때인, 그늘짐의 상태가 오는 때, 즉 진리들이 부족해졌을 때, 영적 생명은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이 자신들에게는 그늘에 속하는 것으로, 영적인 죽음에 속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런 경우, 그들은 이전 같이 빛 안에 간직되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 쪽으로 뒤미끄려져 놓여 있기 때문이다; 거기 그늘로부터 영적 죽음의 형상, 지옥에 떨어짐이 발생된다.
“죽음”에 의해 영적 죽음, 또는 지옥에 떨어짐(damnation)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분명해지는데, 아마 아래에 열거하는 구절들만 가지고도 충분할지 모른다:
이사야서에서:
정의 안에서 그분은 가난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정직을 가지고 땅의 야비함을 꾸짖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입의 막대를 가지시고 땅을 쳐부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입술의 숨을 가지고 그분은 사악한 자를 죽게 하실 것이다 (이. 11:4);
주님에 관해서 이다. “그분의 입의 막대”, 그리고 “그분의 입술의 숨”은 신성한 진리로부터 심판이 있다를 표시한다; “죽는” 것은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다시:
그분은 영원하게 죽음을 들키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께서는 모든 얼굴들 위로부터 눈물을 닦으실 것이다 (이. 25:8).
다시:
죽은 자는 살지 못할 것이다; 르바임(Rephaim)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방문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을 소멸하셨다 (이. 26:14).
다시:
너희 죽은 자는 살 것이다, 나의 주검, 그들은 일어날 것이다 (이. 26:19).
다시:
너희는 말했었다, 우리가 죽음과 언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어 우리는 환상을 만들었다; 죽음과 더불은 너의 언약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옥과 더불은 너의 환상은 서지 못할 것이다 (이. 28:15, 18).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빛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죽음의 그림쪽으로 돌리신다, 그분은 그것을 짙은 어둠으로 만드신다 (예. 13:16).
에스겔서에서:
너희는 보리 한웅큼과 빵 조각들 때문에 내 백성 사이에서, 죽지 않아야 하는 혼들을 살해되게, 살아 있지 않아야 할 혼을 살게 만들어 나를 모독했었다 (겔. 13:19).
호세아서에서:
나는 그들을 지옥의 손으로부터 되찾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나는 그들을 건질 것이다; 오 죽음아, 나는 너의 유해물(pest)들일 것이다; 오 지옥아, 나는 너의 파멸일 것이다 (호. 13:14).
다윗서에서:
당신은 나를 죽음의 큰문들로부터 들어올리신다 (시. 9:13).
다시:
나의 눈을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우연히라도 제가 죽음에 잠들지 않도록 (시. 13:3).
다시:
죽음의 끈들이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지옥의 끈들 (시. 18:4, 5).
다시:
그들은 지옥에서 양떼로서 놓여질 것이다; 죽음이 그들에게 풀밭일 것이다 (시. 49:14).
계시록서에서:
나는 지옥의 열쇠와 죽음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 1:18).
다시:
극복하는 자는 두 번째 죽음에서 상해받지 않을 것이다 (계. 2:11).
다시:
나는 너의 일들을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너는 죽어 있다. 너는 경계하라, 그리고 막 죽으려 하는 그 남은 것들을 확고히 굳히라 (계. 3:1, 2).
마태복음서에서:
어둠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고 죽음의 지역과 그림자에 앉은 그들에게, 그들에게 빛이 일어나졌다 (마. 4:16).
요한복음서에서:
내 말을 듣는 자, 나를 보내신 그분을 받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갔다 (마. 5:24).
다시:
나는 떠나간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너희가 나는 있다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들 안에서 죽을 것이다. 만일 누가 내 말을 지킬 것이다면, 그는 죽음을 결코 보지 않을 것이다 (요. 8:21, 24, 51, 52).
“죽음”이 지옥에 떨어짐이기에, 표현 교회의 백성은 죽은 자를 만지는 것을 금해왔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접촉되었다면, 그들은 불결한 자이었다, 그리고 깨끗해져야 했다 (겔. 44:25; 레. 15:31; 21:1, 2; 22:8; 민. 6:6-12; 19:11-끝절까지).

그리고 요셉이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대답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이것이 대답을 의미함은 분명하다.

너희들의 가축을 다오. 그리고 나는 너희 가축을 받고 너에게 (빵을) 줄 것이다. 이는 그들은 장래 진리로부터의 선을 가져와야 그들은 버텨낼 수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의 의미가 진리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준다”의 의미, 즉 빵인데, 이는 영적 생명을 유지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만일 은이 떨어졌다면. 이는 만일 진리가 더 이상 그들에게 보여질 수 없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은이 떨어졌다면”의 의미가 진리의 결핍이다로부터, 고로 진리가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보여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는 황무함의 상태에서 진리는 마치 도망가버린 듯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리는 현존한다, 그 이유는 여하튼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와 선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영, 그리고 천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 하여 언제나 남아 있고, 그것들이 거두어가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황무함의 상태에서 그것들은 나타나있지 않기 위해 그들 자신의 것을 수단으로 희미함에 있는다; 그러나 빛의 상태가 되돌아 올 때, 그것들은 현존하고 보여질 수 있다. 이것이 진리가 보여질 수 없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가져왔다. 이는 진리의 선들, 즉 그들이 장래 가져와야 하는 진리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져오다”의 의미가 장차 가져오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가축”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빵을 주었다. 이는 영적 생명에 관련되는 자양분을 의미한다. 이는 “빵을 주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을 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들을 위하여(말 대신에…). 이는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들(horses)”이 지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이 이집트를 서술했고,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바, 여기서의 “말들”은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여기서 잠간 살펴야 하는 것은 지적 부분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이 무엇인지 이다. 인간은 지력(지성, intelluctual)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의지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력과 의지력은 그의 내적 인간 뿐만 아니라 외적 인간도 가지고 있다. 인간에 있는 지력은 그의 유아기로부터 그의 성숙기에 이르기까지에서 자라고 증가한다. 그리고 경험에 속하는 것과 기억 속의 지식에 속하는 것으로부터 바라보고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들에 존재한다; 또한 결과들로부터 원인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원인들과 연결하여 결과(consequense)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고로 지력은 시민적, 도덕적 생활의 범주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납득하고 지각함에 존재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의 빛의 유입으로부터 존재 안으로 온다; 그러므로 모두 각각의 인간은 지력에 관하여 완전해질 수 있다. 지력은 인간이 응용(신청, appiication)하려는 것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모든 이 각각에게 주어진다; 지력은 만일 건전한 마음 바탕에 있다면, 결핍되는 일이 없다. 지력이 주어지는 목적은 당사자로 자유 안에, 선택함 안에 있도록 하려 해서, 즉 선과 악을 자유함에서 선택하게 하려 해서 이다. 인간이 위에 상술한 것과 같은 지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는 이것을 스스로로부터 행할 수 없다, 고로 어떤 지력이든 그에게 자기 것이 되게 할 수 없다.
더 알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는 영적 진리와 선의 그릇이기 위하여 영적인 것을 받는 지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에 관한 어떤 것, 즉 선행에 관한 어떤 것, 진리에 관한 어떤 것, 즉 신앙에 관한 어떤 것도 지력을 가지지 않은 자 안으로는 은근히 심어질 수가 없기 때문, 그러나 그의 지력에 따라서만 은근히 심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성년기 까지, 즉 그가 지력을 소유할 때까지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지 않는다. 지력을 소유하기 전의 인간의 마음은 메마른 지면에 뿌려져 있는 씨 같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는 당사자에게 있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져갔을 때, 그의 지력은 선인 것, 이로 말미암아 진리인 것을 보고 지각하는 쪽에서 쓰임새(use)를 수행한다; 그 이유가 지력은 천국의 빛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자연의 빛 속에 있는 것들 안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 안에서 나타난다, 마치 인간의 내면의 애착이 컽치레에서 자유한 얼굴로부터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지력이 이 사용(쓰임)을 수행하는 바, 말씀에서, 교회의 영적 부분이 취급되는 많은 구절들에서 지력 또한 취급된다, 이에 관하여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장소에서 더 살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뜻하는 것, 즉 그것들은 인간이 악인지, 선인지를 지적으로 납득하고 지각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말씀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도움을 위해, 그리고 말들에 기대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거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많고 마부가 있고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이집트는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말들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이. 31:1, 3);
위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은 뒤집어진(악용된)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그는 이집트로 사절들을 보냄으로 그를 향하여 반역했다, 이집트가 자기에게 말과 많은 사람들을 주지 않을 까 해서 였다. 그가 잘 될까? 이 짓을 한 그가 도망할까? (겔. 17:15);
위에서 “이집트로부터의 말들”은 타락한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신앙을 주제로 상담하고 있다, 한편 말씀, 즉 주님은 자기들의 타락된 지력으로부터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는다; 고로 믿는 것이 도대체 없다; 그 이유가 부정함이 타락한 지력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이 파멸되는 것이 바로의 말들과 병거들이 수프 바다(홍해)에 익사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 지식들이 “말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그리고 거짓 교리적인 것들이 “병거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말들과 병거들”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출. 14:17, 18, 23, 26, 28을 보라; 그리고 그 이후 있은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에서:
바로의 말이 안으로 갔다, 또한 그의 병거도, 그리고 그의 마병도 바다 안으로 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다의 물들을 그들 위에 되돌아오게 하셨다. 너희는 여호와께 노래하라, 그 이유가 그분은 자신을 드높이셨기 때문이다; 말과 기병들을 그분은 바다 안으로 내던지셨다
(출. 15:19, 31).
위와 비슷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스라엘 위에 세우는 왕을 위해 모세의 책에 규정해 둔 것에 의해서도 의미되고 있다;
만일 왕을 바란다면, 형제들의 한가운데로부터의 왕이 그들 위에 놓일 것이다; 오직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말을 번성되게 말 것이다, 말들을 불리려고 이집트 쪽으로 백성을 되돌리지 말 것이다 (신. 17:15, 16);
왕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고로 총명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진짜(순정, genuine)가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을 때 총명이 있기 때문이다. 총명은 신성한 진리인 말씀을 수단으로 포획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력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왕은 “말들을 불려서는 안되고 말들을 불리겠다고 이집트로 사람들을 되돌리지 말라”는 훈령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 이는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가 내면의 선들, “목축떼”가 외면의 선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선들이 진리로부터의 선들이기에 “양떼의 가축떼”, 그리고 “목축의 가축떼”라고 말해진다. “가축떼(cattle)”는 진리의 선이다.

그리고 나귀들. 이는 섬김의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들”의 의미가 섬김(봉사함)의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빵을 공급하여 … 모든 가축떼와 바꾸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을 통하여 버텨나감을 의미한다. 이는 “빵을 공급하는” 것, 또는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의 의미가 영적 생명을 유지해감이다로부터; “가축떼”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공급하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내적 부분을 통하여 선의 유입으로부터 있은 이유는 자연 평면에서 영적 생명의 모든 지탱함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선의 유입, 즉 내적 부분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유입 때문이어서 이다. 유입(influx)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빈번한 바, 이것이 무엇인지 잠간 살피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유입의 본성은 자연에서의 유입(inflow)의 이런저런 것들과 비교해봄으로 알는지 모른다, 즉 태양으로부터 땅의 모든 것들 안으로 열의 유입, 이로부터 (식물 세계의) 생장하는 생명이 온다; 그리고 같은 것 안으로 빛의 유입으로부터도 생장하는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온다, 그리고 이 외에도 색갈과 아름다움들의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열이 우리의 신체들 안으로 유입됨으로부터, 그리고 빛이 눈 안으로 부터도, 등등이다. 이로부터 천국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이 무엇인지를 알는지 모른다, 이 분으로부터 사랑인 열이 온다, 그리고 신앙인 영적 빛이 온다. 더욱이 유입 자체가 명백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천국의 열, 이는 사랑인 바, 인간 안에서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열이 있게 한다; 그리고 천국의 빛, 이는 신앙인데, 인간 안에서 총명의 빛이 있게 한다; 단지 이것들은 받아짐에 따라 다양해질 뿐이다.

이 해에. 이 상태의 시기에를 의미한다. 이는 “해”의 의미가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체 기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해가 끝났을 때. 이는 이 상태의 시기 이후 황량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 해가 끝났을 때”의 의미가 이 상태의 시기 이후이다로부터 “해”가 전체 상태의 기간을 표시하는 앞 항에서 말했다. 이 기간 이후 황량함이 있다가 의미되는 것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이다.

그들은 두 번째 해에 그에게 왔다. 이는 그 뒤를 이어 있는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할 필요 없이 알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내 주께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내적인 것에 알려졌다는 것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 “주”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주께 숨기지 않는다”의 의미가 알려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의미에서 “숨기지 않는다”가 알려진다를 표시하는 이유는 자연 부분에서 출시되고 거행되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에게 감추여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외적 의미에서, 특히 역사적 의미에서, 본문 같은 형체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이야기를 하실 때, 그분은 그에게 당장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질문하는 방식 같은 것이다. 사실 그분은 이미 다 파악하고 계시지만 대화의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대목이 등장하는 곳으로는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 이야기를 할 때(창. 16:7, 8); 아브라함에게(창. 18:9); 모세에게(출. 4:2) 등등이다; 실로 이런 방법이 아니면 (인간의) 외적 느낌이 만족할 대안이 없다, 즉 어떤 것이 발음되지 않으면, 인간이 믿는 것은 자기는 모른다 일 뿐이다.

어떻게 이 은이 소비되었는지… 이는 진리가 황량함 때문에 보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짐승떼는 내 주에게 있습니다. 이는 진리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의 떼”, 또는 “양떼와 목축떼”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내면과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황량함 때문에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내 주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지면 밖에 없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이 완전하게 황폐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몸”의 의미가 선을 담는 그릇(선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지면(ground)”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면”이 진리의 저장소(그릇)인 이유는 지면이 씨들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면에 뿌려진 씨들에 의해 특별하게는 선행으로부터 신앙 속에 있는 것, 고로 선으로부터 진리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지면”이 진리를 담는 그릇을 표시함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 저장소들이 황량해졌다는 것이 “이외에 내 주 앞에 남은 것은 없다”에 의해 의미된다.
진짜 의미에서 “몸(body)”은 사랑이 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면”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은”과 “가축떼”로 의미되는 진리들과 진리의 선들이 황량함 때문에 더 이상 보일 수가 없을 때, 이때 “몸”에 의해서는 선의 저장소만을, “지면”은 진리의 저장소만을 의미하게 된다. 진짜 의미에서 “몸”이 사랑 속에 있는 선을 의미하는 이유는 몸, 또는 “몸”에 의해 뜻해지는 전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저장소이기 때문, 고로 선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이 인간 안에서 생명 자체를 만들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열이 사랑인바, 사랑은 생명의 열 자체이다; 그리고 이 열이 인간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에서 “열”에 의해 사랑의 선이 뜻해진다. 그리고 인간이 천국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 지옥의 사랑만을 가질 때조차에서도, 여전히 그의 생명의 가장 안쪽은 천국의 사랑으로부터 있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흘러듦의 시작점에서는 당사자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는 열이 결과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점을 지나는 진행의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뒤집히고 남용되고 타락된다, 이로부터 지옥의 사랑이 온다, 이로부터 불결한 열이 있다.
진짜 의미에서 “몸”이 사랑의 선이다는 것은 천사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현존할 때, 사랑이 그들로부터 쏟아지기 때문, 하여 천사는 보이지도 않고 사랑 밖에 더 있는 것은 없다고 여러분도 믿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전체 몸으로부터 또한 사랑으로부터 있는 빛으로부터 밝게 빛남이 있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은 그 자체로부터 발광하는 불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기서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이다. 이것이 천국의 천사들의 특품인 바, 거기서 주님 자신이 어떠하실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짐작되었을 것이다; 즉 그분으로부터 천사들은 사랑의 모든 것을 가진다, 이분의 신성한 사랑인 태양으로서 나타나고, 이 태양으로부터 천국의 빛이 있다, 그리고 거기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자기들의 천국의 열을, 자기들의 사랑을, 고로 자기들의 생명을 가진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이런저런 것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몸(body)”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신성한 사랑임을, 마찬가지로 그분의 “살(flesh)” 또한 신성한 사랑이다. 더욱이 주님의 몸 자체, 영광되셨을 때, 즉 신성으로 만드셨을 때, 신성한 사랑밖에 더 아니다. 무한 이신 신성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한다면 이 이상 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모두로부터 거룩한 만찬에서 “몸”은 보편적 인류를 향하여 있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밖에 더 뜻해지는 것은 없다, 이에 관해 복음서들에 쓰여 있다:
예수께서 빵을 가지시고, 그리고 축사하시고, 쪼개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말하셨 다, 받으라, 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마. 26:26; 막. 14:22; 눅. 22:19);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빵에 관해 그분이 말하신 이유는 “빵”에 의해 신성한 사랑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이 주님의 “몸”에 의해 요한 복음서에서 의미된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이 성전을 파괴하라, 그리고 삼 일 안에 내가 이것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몸의 성전에 관해 말하셨다 (요. 2:19, 21);
“그분의 몸의 성전”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분의 “몸”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사랑의 신성한 선이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모든 이는 “주님의 몸 안에” 있다라고 말해진다.
주님의 “몸”이 신성한 선이다는 것은 아래 말씀으로도 알게 된다:
나는 나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잘 보니, 고운 아마옷을 입으신 사람이 보였는데, 그분의 허리는 우하즈의 금으로 띠를 하고 계셨다; 그분의 몸은 또한 녹주석(tarshish, beryl)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얼굴은 번개의 나타남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불의 횃불로서 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팔과 발은 광을 낸 놋쇠의 빛남 같았다, 그리고 그분의 말들의 음성은 군중의 음성 같았다 (단. 10:5, 6);
“우하즈의 금으로 띠를 두름”에 의해, “번개의 나타남이 그분의 얼굴이었다”에 의해, “불의 횃불이 그분의 눈을 표현했다”에 의해, “놋쇠의 빛남이 그분의 팔과 다리이었다”에 의해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금”이 사랑의 선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또한 “불”도 살폈다, 그리고 번개 역시 불이기 때문에 같다; 그리고 “놋쇠”는 자연 평면에서의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다; “녹주석(또는 감람석, 황옥)”에 의해 몸의 나머지 부분이 나타났다, 즉 머리와 허리 사이의 몸의 중간인데, 선행의 선과 신앙의 선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녹주석은 빛나는 귀한 돌(보석)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우리와 우리의 지면 모두가 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만일 그들이 황폐되어질 것이다면, 내적 부분 아래 영적 생명은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눈 앞에서”의 의미가 내적 부분 아래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 말을 받는 자가 요셉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그릇들(저장소들)이다로부터, 고로 영적 생명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저장소들 안에 영적 생명이 없을 때, “죽는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죽는다”가 황무해짐, 즉 선과 진리가 영적 생명을 만드는데, 이것이 결핍됨이 의미된다.

우리와 우리의 지면을 빵으로 사십시오. 이는 그들이 선을 가지고 버텨내도록 그릇 둘 모두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다 이다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고로 둘 모두가 저장소들이다; 그리고 “빵으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 지탱함이다. “빵”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인 이유는 여기서는 빵에 의해 모든 식품이 뜻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우리의 지면은 바로에게 종입니다. 이는 완전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지면”의 의미가 선과 진리의 저장소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종들”의 의미가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 없이 있다로부터, 고로 모조리 복종함이다. 저장소들에 의해 인간의 형체들 자체가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형체들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형체들은 인간들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영적 생명이 들어옴을 거절하는 실제의 삶과 유전적인 것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저장소들이 아주 많이 단념되어 그것들이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도 더 이상 가지지 못할 때, 온통 복종함이 있다. 거듭나지고 있는 인간은 황무함의 반복되는 교차함에 의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길만한 것이 더 이상 없는 마지막 수준까지 떨어질 때, 하여 남은 것은 주님의 것 뿐이다고 여겨지는 때를 맞는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것이 되어갈 때, 자기에게 남은 것은 자기를 슬프게하는 것뿐이라고, 하여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이런 자아의 상태로부터 건져내질 때, 그는 자기의 행복과 복됨 안으로 되돌아 온다. 이런 상태들의 순환은 모든 천사들에게 있다.
그분이 인간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완전 복종을 요구하신다, 즉 그가 한쪽으로는 자신, 다른 쪽으로는 주님 하여 양다리 걸치기 식의 부분적 복종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그는 두 주인을 섬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마. 6:24). 완전 복종은 주님의 아래 말씀에 의해서도 뜻해진다:
나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가치가 없다; 그리고 나 보다 아들과 딸을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 가치가 없다 (마. 10:37);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 의미되는 것은 유전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인 것들, 그리고 “아들과 딸”은 실제의 생활로부터 그의 자기 자신인 것들이 의미된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혼”에 의해서도 의미된다: 즉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쪽으로 간직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섬기려한 다면, 그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라; 그리고 내가 있는 곳, 거기에 나의 종 역시 있을 것이다 (요. 12:25, 26).
완전 복종이 아래 주님의 말씀에 의해 의미된다:
또 다른 제자가 말했다, 주여 , 저로 먼저 가서 나의 아버지를 묻게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는 그들의 죽은 자가 매장하게 하라
(마. 8:21, 22).
복종이 100%이어야만 함은 교회의 첫째 명령으로부터도 분명하다: 즉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혼으로부터, 그리고 네 모든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네 힘으로부터 사랑할 것이다; 이것은 첫째의 명령이다 (마. 12:30).
고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심정, 모든 혼, 모든 마음, 그리고 모든 힘, 이것은 받는 것들인 바, 주님의 것들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복종은 당연히 통째로 이어야 한다. 이런 복종이 여기서 “우리는 살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지면도, 바로에게 종들이다”라는 말에 의미되는 복종인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에 의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최고 의미에서일 경우, “요셉”인 주님의 후원 아래 있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씨를 주십시오. 이는 이 방도에서 선행으로부터의 선과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을 “주는” 것이 유입이다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인간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 것이고 죽지 않습니다. 이는 이 근원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있고 더 이상 지옥에 떨어짐의 공포도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산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지옥에 떨어짐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옥에 떨어짐의 공포이다, 그 이유는 황무함의 상태이나 인간이 거듭나지는 상태 이기도한 바, 이 상태에서는 지옥에 떨어짐은 없는 바, 단지 공포일 뿐이다.

그리고 지면은 황폐해진채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마음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으로 경작되어야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 이다로부터, 저장소 자체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자연적 마음이다, 그 이유는 말해지는 지면이 이집트의 지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폐해 있다”의 의미가 보여질 수 있는 진리가 없이 있는 것이다로부터; 현재의 경우,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없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에 의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토지”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지면”은 이 마음을 특별하게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면이 황폐해 있지 않다”에 의해 마음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함양되어야 함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를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지면을 샀다. 이는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적 마음 전체를 그 자신에 자기 것이 되게 해서 일반적인 후원 아래 두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사다”의 의미가 자신의 것이 되게 하다 이다로부터; “이집트의 지면”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바로를 위하여”는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 후원 아래 놓는 것을 표시한다.

이집트인들은 각자 그의 들판을 팔았다. 이는 교회를 향하여 유익한 모든 것들이 재 통일되고 종속됨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자기 자신의 것이 더 이상 있지 않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단념하고 종속시키는 것(신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의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 의미에서는 교회이다. 이로부터 “이집트인들은 각자 자기 들판을 팔았다”에 의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재 통일되고 종속됨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기근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포자기에 이를 정도의 황폐함이 있었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기근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 관련하여 황무함이 있다로부터; 그리고 기근이 “가혹하게 극심하다”고 말해질 때, 이것은 자포자기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황무함의 마지막 단계가 자포자기이기 때문이다. 자포자기가 황무함의 마지막 순서이고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허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아래에서 열거해보겠다. 자포자기는 자신들로부터서는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신으로부터 정죄되고 말았다고, 그러나 주님에 의해 정죄되고 만 자신들이 건져내어졌다고, 그리고 근원은 선과 진리를 수단으로 함 안에서만 흘러든다는 것을 결과물들 안에서 인정하는 것을 느끼는 이들에게서 발생된다. 또한 이들에게 자포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있는 생명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포자기에서) 이 상태로 나와 있을 때, 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운명, 지옥에 떨어져야 할 운명에서 있었지만, 그런 감옥에서 자유해져 있는 것과 같다. 더욱이 황무함과 시험들을 수단으로 천국의 삶에 반대되는 상태들을 실감했지만, 이 결과는 만족하고 행복한 것에 대한 감각하고 지각함이기에 자포자기함이 마치 이를 위해 있었던 필수 과정이였음을 뒤돌아 본다. 그러므로 두 완전 반대되는 상태의 비교는 자연스레 뒤따를 수밖에 없고 그 비교는 지금의 행복을 더 진하게 만든다. (아마 이런 신앙의 체험은 많은 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겪는 일들이다.)

그리고 토지는 바로의 것이였다. 이는 모든 것들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종속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토지는 바로의 것이었다”의 의미가 “토지”에 의해 의미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 것이 되게 하고 종속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이 안으로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가져와진다. 이것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이유는 일반적, 부분적 모두를 아우르는 전체 자연 평면에서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는 요셉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바로의 집까지도 통치하였다를 아래에서 읽는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를 보낸 하느님께서는 바로에게 아버지, 그의 집의 모든 이에게 는 주인으로 (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이집트의 토지를 통치한다 (창. 45:3, 8).
위 구절은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도성들 쪽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들은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백성”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것이 이집트의 사람들을 서술하므로 기억 속의 진리들이다; 그리고 “도성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도성 쪽으로 옮기는 것”은 교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쪽으로 기억 속의 진리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이 말을 뒤잇는다, 즉 진리들은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에 관련되는 쪽으로 가져와진다에 뒤잇고 있다; 그 이유가 교리적인 것들은 일반적 수준인 바, 이쪽으로 진리들은 관련되게 가져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교리는 그것의 머리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각 머리는 교회의 일반적 수준에서 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은 요셉에 의해 도성으로 옮겨진 것이 일반적인 것들, 고로 교리적인 것들에 진리들이 관련됨이 표현된 것이다.

이집트의 이 끝에서 저 끝에 까지. 이는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 전체를 망라하는 확장을 의미한다. 이는 “경계의 이 끝으로부터 경계의 저 끝까지”라는 표현의 의미가 전체를 망라하여 있는 확장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담는 것,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담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또한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에 의하여는 자연적 마음이 의미된다.

그는 오직 성직자들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 이는 내적 부분은 선을 받으려는 자연적 수용력으로부터 그 자체를 위하여 획득했는데, 그 이유가 자연적 수용력(capacity)은 스스로 존재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는 위 말이 나온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여기서의 경우 선을 받는 수용력이다, 그 이유가 수용력이 받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장소가 저장소이기 위해서는 수용력은 내부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이 수용력은 선으로부터 온다,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온다; 그 이유가 사랑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지 않으면, 선이든, 진리이든 무엇이든 받는 능력을 가질 자는 없기 때문이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선의 유입이 인간 안쪽의 모든 것들로 받는 능력을 갖게 해준다. 선을 받는 수용력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이집트에 있는 지면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련한 자연 평면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위에 주어진 내적 의미는 “성직자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사지 않는다”의 의미가 이런 수용력들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이다로부터, 사실 이 수용력은 황무함과 유지지탱시켜줌을 수단으로 내적 부분이 그것들의 수용력과 더불어 선과 진리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수용력들은 자신으로부터, 즉 내적 부분으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성직자의 지면은 사지 않았다”는 말에 의해서는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자체를 위해 선을 받는 수용력을 포획하지 않았다가 의미되는데, 이런 이유는 이것들이 사실상 자체로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진리와 선을 받는 인간에 있는 수용력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있다, 바꿔 말해 이 수용력을 인간이 지니는 것은 당사자의 도움이 주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선과 진리를 받기 위한 이 수용력을 언제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용력으로부터 인간은 이해력과 의지력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것을 받지 못하는 때란 그가 악으로 돌아서 있는 때이다; 그렇다 해도 사실상 이 수용력은 당사자에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각과 느낌쪽으로의 접근이 당사자에게 닫힌 것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보고 선을 느끼는 수용력은 인간이 자신으로 악 쪽으로 돌아서게 하고 생활과 신앙에서 악을 확증함에 비례하여 사멸한다. 인간이 진리와 선을 받는 수용력, 어떤 수용력이든 그것에 기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교회의 교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의 어떤 것도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모두는 주님만으로부터 오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 수용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로부터 지금 알아지는 것은, 내적 부분이 선을 받는 수용력들을 자연 평면으로부터 자체를 위해 어떻게 포획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자체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 평면으로부터”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선의 유입됨이 내적 부분을 통하여 자연 평면 안으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받는 수용력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획득되었을 때, 유입이 있다, 그 이유는 이때야 말로 받음이 있기 때문이다.
선들이 “성직자들”에 의해 의미된다에 주목할 경우,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두 가지 것들이 진리와 선이다는 것이다. 신성한 선은 성직자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는 왕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로부터 “성직자”는 선을, “왕”은 진리를 의미한다. 고대 표현 교회에서, 성직과 왕권은 한 인물 안에 병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가 하나로 있었기 때문, 그리고 천국에서 천사들또한 함께 인접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이와 같이 둘이 병합되어 있던 인물이 “멜기세덱”, 또는 “정의의 왕”이라 불리웠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방문한 멜기세덱으로부터 확인된다: 즉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게 성직자 였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창. 14:18, 19).
그가 양쪽 측면 모두에서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은 그가 왕이었고, 동시에 성직자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 아브라함에게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의 상징물인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멜기세덱이 양쪽 측면 모두에서 주님을 표현한 대목이 다윗서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는 맹세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후회하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 영원하게 성직자이시다 (시. 11:4);
위는 주님에 관하여 말해졌다; “멜기세덱의 방식에 따라”란 그가 왕과 성직자이었다를 뜻하는데, 최고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함께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표현 교회가 야곱의 후손과 더불어 설립되어졌는 바, 그러므로 한 인물에서 결합되어 주님으로부터 하나로서 진행하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가 (애당초에서는) 표현되었다. 그러나 전쟁들이나 이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에 이 두 직능은 우선 나뉘어졌다. 백성을 통치한 자들은 “지도자”, 후에는 “사사(판관)”라 불리웠다; 한편 거룩한 것들을 공적으로 수행한 이들은 “성직자(priest)”라고 불리었고, 아론의 후손과 레위인이 이에 속했다. 그럼에도 이후에 이 직능은 한 인물에서 함께 병합되었는데, 그 인물은 엘리와 사무엘이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의 특성상 결국 그들 사이에서 표현 교회(교회를 표현함, a representative church)가 설립되어질 수 가 없었고, 표현만 하는 교회(껍질만 교회임, the representative of church)가 유지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 사이에서 대세를 이룬 것이 우상 숭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직능들이 둘로 분리되는 것이 허용되어졌다. 하여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은 왕들에 의해,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은 성직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셔서가 아닌 백성이 원해서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서 읽어진다:
백성이 네게 말하는 모든 것에서 백성의 음성에 순종하라; 그 이유가 그들이 너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나를 거절해왔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로 자기들을 통치하지 않게 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왕의 권위를 보여줄 것이다 (삼상. 8:7-끝절; 12:19, 20).
이 두 직능들이 분리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분리된 신성한 진리는 모든 이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신성한 선에 하나된 신성한 진리는 구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진리로부터 인간은 지옥 쪽으로 정죄되지만, 신성한 선에 의해서는 그가 거기로부터 꺼내져 천국으로 승강되게 한다. 구원은 자비 속에 있다, 고로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비를 거절할 때, 고로 자신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거절할 때 지옥에 떨어짐이 있다; 즉 그는 진리로부터의 심판에 남겨진다는 말이다.
성직자들이 신성한 선 측면에 괸하여 주님을 표현했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성직 직분이 제정되고 설립되는 구절들에서 알아질는지 모른다. 즉 아론이 대 성직자로 뽑힐 때의 성직 직분에 따른 이모저모들에서, 후에는 레위인들에 관한 사항들에서; 대 성직자가 제단을 보살피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라든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들은 성직자를 위해 있는다라든가 (레. 23:20; 27:21); 성직자들은 토지에서 몫을 가지거나 상속받지 못한다라든가,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몫과 상속분이다는 것 (민. 18:20; 신. 10:9; 18:1); 레위인들은 첫 출생 대신 여호와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에 의해 그들은 아론에게 주어졌다는 것 (민. 3:9, 12, 13, 40-끝절; 8:16-19); 레위인과 더불어 대 성직자는 그들이 진을 칠 때, 앞을 향할 때 진영의 한가운데 있는다는 것 (민. 1:50-54; 2:17; 3:23-38; 4:1-끝절); 아론의 씨 중에서 어떤 흠이라도 있는 자는 번제단과 제물 바침에 가까이 있어서는 안된다 (레. 21:17-21); 이 외에 많은 다른 사항들이 있다 (레. 21:17-21).
모든 이런 사항들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선을 표현했다. 고로 관계적 의미에서 사랑 속에, 선행 속에 있는 선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론의 의복들, 이는 “거룩함의 의복들”이라 불리우는데,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 이 의복에 관한 것은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편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진리가 “왕들”에 의해, 선이 “성직자들”에 의해 의미되기에, 말씀에서 “왕들과 성직자들”이 함께 자주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의 아버지에게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드셨다
(계. 1:5, 6; 5. 10);
“왕들”이 신앙 속에 있는 진리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그리고 “성직자들”은 선행 속에 있는 선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라고 말해진다. 고로 주님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진리와 선은 맞잡고 있다. 마치 천국에 있는 이들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왕들과 성직자들로 만들어짐이다”에 의해 뜻해져 잇다.
예레미야서에서:
왕과 제 1 인 자들의 심정이 멸해지는 그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놀라워질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경이로워 할 것이다 (예. 4:9).
다시:
이스라엘의 집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그들, 그들의 왕들, 그들의 제 1 인 자들, 그리고 그들의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의 예언자들 (예. 2:26).
다시:
유다의 왕들, 제 1 인 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예언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님들 (예. 8:1).
이 구절들에서 “왕들”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제 1 인 자들”은 제 1 의 진리들을; “성직자들”은 선들을; 그리고 “예언자들”은 가르치는 이들을 표시한다.
더 알게 되는 것은, 요셉이 성직자들의 지면을 사지 않음은 선과 진리를 받는 모든 수용력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숫한 레위인들의 들판에 관한 법이 있다:
레위인들의 도성들의 외곽의 들판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지이 기 때문이다 (레. 25:34);
위 구절의 내적 의미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인, 교회의 선의 어떤 것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몫은 바로에 의해 성직자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은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자연 평면을 수단으로 질서 안에 놓여있었음을 의미한다. “분배된 몫(지정된 몫)”의 의미함이 질서에 놓인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인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 평면에 질서 안에 놓인 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었다라는 말이 더 추가되었다, 이것은 요셉이 이집트의 통치자이었다, 또한 바로의 집도 통치했다에 의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가 그들에게 주었던 할당된 몫을 먹었다. 이는 선들을 질서 안에 장착됨에 따라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게 자기 것이 되도록 하지 않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누군가의 자신에게로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에게 할당된 몫”의 의미가 질서에 놓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에게 할당된 몫을 먹다”에 의해 선들을 질서에 놓여진 것 그 이상을 자기 것이 되게 하지 않았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었다는 것, 즉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자연 평면에서 이었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살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지면을 팔지 않았다. 이는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것들을 단념하거나 복종시킬 필요가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단념하다 이다로부터, 고로 복종케 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단념하는 것은 또 다른이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성직자의 “지면”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서 선을 받는 수용력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것들을 단념하거나 복종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그러므로…않았다”는 표현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요셉은 백성에게 말했다. 이는 내적 부분이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요셉”인 내적 부분을 서술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외적 부분에서 지각되는 것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백성”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보라 나는 오늘 바로를 위하여 너희와 너희의 지면을 샀다. 이는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 획득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종속되게 만들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과 획득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진리의 저장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을 자연 평면에서 일반적인 것 쪽에 종속되게 했다는 것이 “그가 그것들을 바로를 위해 샀다”에 의해 의미되는데, 바로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 표현되고 있다. 하여 앞에서 살핀 내용에 일치함과 더불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라고 말한 것이다.

자, 여기에 너희를 위한 씨가 있다, 그리고 너희는 지면에 씨를 뿌리라. 이는 심어져야 하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 고로 모두이다; “뿌리다”의 의미가 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면”의 의미가 저장소이다로부터. 그러나 진리와 선이 심어질 때, “지면”은 더 이상 저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들판 같이 교회 속에 있는 이런 저런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확하면. 이는 거기로부터 파생된 열매를 의미한다. 이는 “수확(ingather)하다”의 의미가 열매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추수, 이는 들판에서 그러모으는 것인 바, 이것은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바로에게 오분의 일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즉 이것들은 내적인 것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을 위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5”, 또는 “1/5”의 의미가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라고 더 붙여 말한 이유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리메인스가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즉 그것들은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된 주님으로부터의 선들과 진리들이다. 이것들은 당사자가 선의 상태에 있을 때, 그의 외면, 또는 자연 평면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악의 상태에 있는 순간이면, 그것들은 재빨리 되돌아서 다시 저장된다. 그것들이 이렇게 민감하게 처방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악과 혼합되어 멸해지고 마는 것을 예방하시려 해서 이다. 인간이 거듭나질 수 없을 때, 당사자에게 있는 리메인스는 그의 내면 안에서 조심스럽게 보존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나질 때, 거듭나는 만큼에서 그것들은 내면으로부터 꺼내지고 외면 안으로 놓여진다, 그 이유가 거듭남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들과 결합하고 하나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는 처음에는 일반적인 것들에 놓여지고, 그 후 세부적, 특수적인 것들에 계속적으로 놓여 간다. 여기서 취급되는 내적 의미에서의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이기에, 리메인스가 자연 평면에 있는 일반적인 것들을 위하여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사 분(오 분의 사)은 너희를 위하여 있다. 이는 아직 리메인스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 (부)분들(4/5)”,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하는 오 분의 일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인 바, 가져가버려지는 것인 바, 이는 아직 리메인스가 아닌 것들이 의미된다. 숫자 “4”는 “2”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쌍인 것들, 함께 결합한 것들을, 즉 선과 진리가 결합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것들이 아직 리메인스가 되지 못하였을 때의 그것들이 여기서 “사 분”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들과 진리들은 그것들이 인간에게 자기 것 삼아질 때까지는 리메인스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유 안에서 애착으로부터 받아질 때, 처음으로 인간에게 자기 것이 되어 간다.

들판의 종자를 위하여. 이는 마음의 자양분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종자(씨)”의 의미가 진리와 선이다로부터, 고로 신앙과 선행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일반적 의미에서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있는 교회이다, 고로 교회가 있는 인간, 즉 진리와 선을 받는 인간이다. 그가 “들판”이라 불리울 경우, 그의 마음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그의 외적 형체로부터 인간이 아니고, 그의 마음으로부터, 즉 그의 마음을 구성하는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으로부터, 또한 그의 더 내향의 마음을 구성하는 신앙의 진리와 선행의 선으로부터 인간이다. 이것, 즉 이 마음이 진짜 의미에서 인간일 때, 진리와 선에 의해 자양분을 받아 유지 존속된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씨”에 의해 의미되는 바, 자양분 또한 그것에 의해 의미된다. 이는 이어지는 말에서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너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로부터 “들판의 씨”가 마음의 자양분을 표시한다.

그리고 너희의 식품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하여. 이는 그러므로해서 진리의 선이 각각에, 모든 것 안에 있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식품(food)”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집에 있는 그들”의의미가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집에 있는 그들을 위한 식품”의 의미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서 있는 진리의 선이다. 진리의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에 있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인간이 거듭남에 비례하여, 선은 당사자에게 속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 안으로 그 자체를 은근히 심는다; 그 이유가 선에 애착함이 당사자 안에서 보편적으로, 즉 각각 그리고 모두에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낱개적으로도, 즉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통치한다. 이것은 모든 이와 더불은 통치하는 애착으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이 애착,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의지력의 각각의 특별한 것 안에, 또한 그의 생각의 특별한 것 안에 현존한다, 그리고 비록 생각 안에서 언제나 나타나지 않은 듯 할지라도 그것 안에 있다. 나타나지 않은 듯 한 이유는 어떤 순간에서는 대상물을 수단으로 애착에 덧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입혀진 애착이 벗겨지면, 통치하는 애착은 명료한 시야 안으로 와진다.
이것은 영들과 천사들의 경우로 말해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악인 영들, 또는 악이 대세인 이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악하다, 설사 그들이 참된 것을 이야기하고, 선인 것을 행하는 때 조차도 악하다, 그 이유는 사사건건에서 그들은 타인으로 선이라 믿게 하기 위해 속임수를 쓰거나, 선과 유사한 것으로 술책을 부리려는 의도 외에 다른 것은 그들의 심중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행될 때, 그들의 말함은 매우 강한 어조로부터 들려지고, 또한 그들의 기운으로부터 지각된다. 선이 통치하는 천국의 천사들은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선이다; 바꿔말하면, 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으로부터의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에서 빛을 내고 있다; 그 이유가 설사 그들이 악의 어떤 것을 행한 듯 여기는 때 조차에서도 그럼에도 그들의 목적이나 의도는 선이 거기로부터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뿐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한 것은, 선이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곳은 선이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악과 더불어서도 같은 이치이다.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이 같은 본성으로부터 일 때,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처음에 존재 안으로 온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은 이것들의 양과 질에 따라서 있는다; 그 이유가 보편적이라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개별적으로 모든 것들 안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기들을 위한 식품을 위하여. 이는 순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식품”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기들”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영적 생명은 여타 다른 방법에서, 여타 어느 근원에서도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게 만들었다”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행되는 것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 평면의 거듭남, 생동하게 함이어 왔다. 이것의 전체 과정이 묘사되어져 있다. 여기에 더 첨부되는 말은 자연 평면의 거듭나는 과정은 이런 방식밖에 없고, 여타 다른 근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 주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이 방법에서 그들은 의지를 종속시켰다와 굴종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자기들에게 속했던 모든 것이 단념되어 온 이후 나온 말이고, 인정함의 말들이다; 고로 이런 방법에서 자기들은 종속된다는 의지로부터의 말들이기도 하다; 고로 이 말들은 굴종함의 말들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이 말 안에 있다는 것, 이때의 백성의 상태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 상태는 전 후에 이어지는 시리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의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자기 자신을 단념하고,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복종시킴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그들 자신으로부터의자유가 결핍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의 것이다”의 의미함이 내적 부분의 후원 아래 있는 자연 평면에 종속됨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것을 법령으로 만들었다. 이는 동의함으로부터 결론지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법령을 만듦”의 의미가 동의함으로부터의 결말지은 것이다; 그 이유가 법령이 만들어지는 것은 양쪽의 동의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치함에 의해 정해진 것들로 간주된다. 고로 정식으로 이다.

오늘날 까지. 이는 영원하게를 의미한다.

이집트의 지면에 관하여, 즉 바로가 오 분의 일을 가지도록. 이는 리메인스를 의미한다.

성직자의 지면 만은 바로의 것이 아니다. 이는 선을 받기 위한 수용력, 이것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직접 있다를 의미한다. 자연 평면이 내적 부분과 결합함에 관하여, 그리고 황무함과 생동있게 함의 반복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거듭남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오늘날 교인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말로서 어안이 벙벙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은 진정 그렇게 실행되고 있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이 겪는 영적 삶에 조회해본다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삶에서 단순한 영들조차도 잘 친숙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인간에 의해 읽혀질 때, 다른 삶에 있는 이들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뿐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지각하고, 더불어 무수한 비밀들도 눈치챈다, 이런 대목은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다. 예증되어왔었던 이런저런 것은 오직 상당히 적을 뿐이다.

27-31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28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십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29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고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30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여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31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상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영적 선이 교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서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dwell)”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센의 토지에서. 이는 그들의 한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한가운데, 또는 중앙이다로부터, 고로 기억 속의 지식들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고센은 이집트의 가장 좋은 지역(tract)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소유권을 가졌다. 이는 내적 부분에 의해 질서 안에 주어지고 놓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소유권(possession)”의 의미가 영적 생명의 주소지(residence)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이 소유권을 주었는 바 (11절), 이는 이 주소지가 내적 부분에 의해 주어자고 질서 안에 놓여졌다가 의미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시리즈로부터 뒤잇는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었고, 극도로 번창했다. 이는 선행의 파생되는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열매를 많이 맺다”의 의미가 선행의 선들을 산출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번창함”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들을 산출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표현은 “열매들”로부터 오기 때문인데, 이는 내적 의미에서 선행의 일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표현, “번창하는 것”은 “다수, 수가 많다(multititude)”에서 인 바, 이는 내적 의미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서술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많다(many)”는 진리들, “크다(great)”는 선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살았다. 이는 자연 평면의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살아 있다(living)”의 의미가 영적 생명 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십칠 년. 이는 거기에서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17”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년(햇수)”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이 이집트에서 살았던 17년”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 사이에서 자연 평면이 있는 영적 생명의 끝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이 생명의 상태의 시작이 의미된다.

그리고 야곱의 날들, 그의 생애의 햇수는 칠 년, 그리고 일백 사십 년이었다. 이는 일반적인 상태와 그 상태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숫자들, 즉 “7”, “40”, “100”의 의미가 밝혀진다면 알는지 모른다. “7”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살폈다; “40”이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리고 “100”이 의미하는 것도 살폈다. 그러나 이런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합성된 숫자는 밝히 알기가 쉽지는 않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요약된 서술 쪽으로, 그리고 납득함 쪽으로 표현되어지기 위해 환원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위 숫자들은 일반적 측면에서 야곱, 그리고 야곱의 품질에 의해 표현되는 상태의 전부를 포함한다. 천사들은 이런 사항들은 147이라는 숫자 자체로부터 하나의 복합체(complex, 영적 실체) 안에서 본다; 그 이유가 천사들과 더불어서는 말씀에 있는 모든 숫자들이 영적 실체들(realities)에 대한 관념(추상적 생각, idea)으로 건너가기(fall, pass) 때문이다. 이는 때로 길게 늘어 놓은 숫자들이 나에게 나타나곤 했는데, 그 때 천사들이, 자기들이 대화하는 것들이 연속되는 숫자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해준 사실로부터 (말씀의 숫자들에 대한 개념이) 명백해졌다. 이로부터 또한 천적 수준의 교회 속에 있던 태고인들은 숫자들로 구성되는 평가(계산, computation)를 만들었고,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의 관념(생각, idea)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천국의 것들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들 이후 이런 평가 방법은 천국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과 더불어 멸절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단순한 숫자들의 의미, 그나마 일반적 의미만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 단순한 숫자들은 예를 들면, “3,” “6,” “7,” “12” 이다. 그리고 중복된 숫자들의 의미에 대한 지식은 많지가 않다. 오늘날 말씀 안에 있는 숫자들이 계산적 측면이 아닌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마 많은 이들에게 믿기 힘든 생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지고 있었다. 이는 거듭나기 직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당겨지다”의 의미가 가까이 있어진다, 고로 바로 앞에 있다 이다로부터; “날들”의 의미함이 상태들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다시 일어남, 그리고 영적 삶 안으로 깨어남이다로부터, 고로 거듭나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거듭나지고 있는 이들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 안으로 깨어나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렀다. 이는 내적 부분의 현존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게로 부르다”의 의미가 자신과 더불어 현존함을 만드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현존함이 있다;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 이는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이 요셉에게 위 말들을 말했을 때 야곱이 지녔던 애착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애착이 대화의 이 형체 안쪽에 있다; 그 이유가 “만일 내가 네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여 왔었기를 간구한다면”의 말은 애착이 표현되는 수단으로서의 말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의지의 갈망함이다.

청컨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에 놓아라. 이는 거룩한 묶임을 의미한다. 이는 “손을 넓적다리(thigh) 아래에 놓다”의 의미가 부부의(결혼의, conjugial) 사랑에 속하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힘으로 묶는 것(binding)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손”에 의해 힘(power)이 의미되고, 그리고 “넓적다리”에 의해서는 부부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최고 의미에서 부부 (결혼, the conjugial)는 주님 안에서 신성과 신성한 인간의 합일 (union)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천국 안에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의 합일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천국은 천국이다, 그리고 “결혼(marriage)”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이것은 거기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고, 이 결합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고, 결합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은 선이시기에, 그리고 천국은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이기에,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은 “신랑”이라 불리우고, 천국과 교회는 “신부”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선과 진리가 결혼을 만들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결합은 부부(the conjugial)에 의해 뜻해진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부부인 것을 수단으로 묶여져 있는 것들은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이다. 이것이 “넓적다리에 손을 놓다”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이로부터 선과 진리의 결혼은 진짜(순수) 부부의 사랑의 자손이다. 이에 대한 것에 관련하여, 그리고 이것의 신성(고결함)에 관련하여서는 이미 살핀 바도 있다.
(선각자는 단어 “conjugial”을 즐겨 사용하는 편이나, 영한 사전에는 없고, 대신 “conjugal”이 있고 이에 대한 번역은 “부부의, 또는 결혼의” 이다. 왜 전자의 단어를 선각자가 즐겨 사용했는지, 즉 고집하였는지를 역자는 아직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한역에서 역자는 “결혼의”로도 번역도 하나 여기서는 “부부의”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결혼이라는 단어는 결혼 생활이라고 말을 더 붙여 사용하지 않을 경우, 결혼 직전부터 결혼하는 과정이 주로 연상되지만, 부부라는 단어는 결혼 직전 내지 막 결혼하고 있음, 또는 결혼 초기 등과 같은 느낌은 전혀 주지 않고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긴 세월이 지난 상태, 자녀도 낳고 기르는 상태를 암시하는 것 같아서 부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부부라는 단어에는 결합이라는 단어 보다 합일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독자들의 생각의 범위를 더 넓히려는 차원에서 첨가한 말이므로 참조하여 도움이 되길 바란다 역자주.)

자비와 진리를 나에게 행하라. 이는 굴종(humiliation)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를 행하다”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진리를 행하다”의 의미가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알게 된다. 이 말들이 애원(supplication)의 말로 발음되고 있다, 고로 굴종함이다. “자비를 행하다”가 사랑의 선인 이유는 모든 자비가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자비 안에 또한 있다, 그리고 당사자 안에 있는 사랑 또는 자비는 이웃이 필요함에, 또는 불행에 있을 때, 자비가 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태의 이웃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므로 “자비”에 의해서 사랑의 선이 의미되어지는 것이다. “진리를 행하다”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하는 이유는 모든 진리는 신앙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원어에서 똑같은 표현에 의해 신앙과 진리는 뜻해지고 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는 가장 가까운 결합에서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쪽이 저쪽 없이는 가능할 수 없기 때문에, 본문 같은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고대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이 둘은 말씀에서도 결합하여(연대로) 자주 말해진다: 즉
여호와는 자비와 진리가 크시다(많으시다, great) (출. 34:6).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이 여부스인들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에게 자비와 진리를 행하신다
(삼하. 2:5, 6).
같은 책에서:
다윗이 기드 출신 잇대에게 말했다, 너는 돌아가라, 그리고 너와 함께 네 형제를 데리고 돌아가라, 자비와 진리와 더불어 (삼하. 15:20).
호세아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토지의 거주민들과 논쟁을 가지셨다, 그 이유는 거기에 진리가 없고, 자비도 없고, 하느님에 관한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 (호. 4:1).
다윗서에서:
여호와의 모든 길들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자비와 진리이다 (시. 25:10).
다시:
당신은 나로부터 당신의 자비들을 보류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진리가 나를 영구적으로 지켜줍니다 (시. 40:11).
다시:
나는 여호와의 영원한 자비들을 노래할 것이다; 내 입을 가지고 나는 당신의 진리가 대대로 알려지게 만들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말했기 때문, 즉 자비는 영원하게 건축될 것이다; 천국들 자체에서 당신은 당신의 진리를 확증하실 것이다.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왕좌를 받친다; 자비와 진리가 당신의 얼굴들 앞에 서있다 (시. 89:24, 33; 92:2);
위 구절 외에 시편서에 더 있다 (26:3; 36:5; 57:3, 10; 61:7; 85:10; 86:15; 89:24, 33; 92:2).

부디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라. 이는 거듭남은 기억 속의 지식에서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부활과 거듭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듭남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있지 않다를 뜻하는 것은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내가 내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이는 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생명(삶)을 의미한다. 이는 “눕다”가 삶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눕는” 것이 여기서는 조상들과 더불어 매장되는 것을 뜻하고, 그리고 “매장되어짐”이 부활과 거듭남을 표시하는 바, “조상들과 함께 눕다”는 삶,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상들(fathers)”의 의미가 고대와 태고 교회 속에 있었던 이들이다로부터, 고로 고대인들이다.

너는 나를 이집트로부터 운반하라. 이는 거기에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의 승강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나를 운반하라”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로 건너가는 것은 “올라간다”라고 말해지기 때문, 고로 승강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운반하다”의 의미도 같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함이 무엇인지 잠간 살펴야 할 것 같다: 자연 평면의 거듭남은 영적 생명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주님에 의해 은근히 심어짐으로 결과되어진다. 이 은근히 심어짐이 이 장에서 취급되어왔다. 만일 거듭남이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면, 그는 더 진전될 소지를 지녔는 바, 이제 그는 자연 평면의 내면 쪽으로 승강되어진다, 이 승강함은 내적 부분의 직접적 후원 아래 있다; 거듭남이 이렇지 않게 진전이 없다면, 그의 영적 생명(삶)은 자연 평면의 외면에 있다. 이 승강함은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것들로부터 탈퇴함(withdrawl, 움추림, 물러남)으로 결과되어진다, 바꿔 말하면, 이런 것들 넘어로 승강함으로 결과된다, 이때 당사자는 내면의 생각과 애착 안으로 와있다, 고로 내면적으로 천국 안으로 와있다. 이 후자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내적인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전자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외적 교회에 있다, 이 외적 교회가 야곱에 의해, 후자에 있는 교회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적적 측면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일는지 모른다, 고로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에 의해 내면의 자연 평면인 영적 선이 표현될는지 모른다, 고로 내적 부분에 있는 영적 교회가 표현될는지 모른다. 이런 말들이 야곱에 의해 말해졌다.

나를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라. 이는 이런 저런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장사하다(bury, 매장하다)”의 의미가 거듭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들의 매장지에 장사하다”도 이런저런 거듭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이는 신성에 의해 섭리 속에서 그렇게 행해질 것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서 행하다”의 의미가 그렇게 행하여질 것이다로부터; 여기에 “신성에 의한 섭리 속에서”가 첨가된 이유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세 가지 사항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최고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이삭은 신성한 합리성을, 그리고 야곱은 신성한 자연 평면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을 중요시하는 측면일 경우, 이 세 열조들은 천적 선이 있는 가장 안쪽(inmost), 영적 선이 있는 내면(interior), 그리고 자연적 선이 있는 외면(exterior)을 표현했다. 이것들이 하나의 매장지 안에 셋이 있음으로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는 “매장지(sepuchre)”에 의해 생명과 거듭남 쪽으로 부활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 맹세하라. 이는 그것은 취소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맹세(swear)”가 취소할 수 없는 확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맹세했다. 이는 그것은 취소할 수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침대의 머리에서 자신을 구부려 절하였다. 이는 그가 내면의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을 구부려 절하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자신을 돌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침대(침상)”의 의미가 자연 평면이다 (아래에서 살핀다)에서 알게 된다. 고로 “침대의 머리”는 자연 평면에서 더 높은 것, 즉 내면인 것이다; 그 이유가 “머리”가 말씀에서 언급될 때, 내면의 것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면은 외면인 육체에 관련하여서인 (상대적) 내면이다. 그가 자연 평면의 내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쪽으로 자신을 돌려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은, “야곱”인 자연적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쪽으로 승강되어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잠간 살폈다.
“침대”가 자연적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자연 평면은 합리성 아래 있기 때문, 그리고 합리성에 침대로서 섬기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자연 평면 위에 침대에 몸을 뉘듯 하여 있다; 자연 평면이 아래에 (자리를) 펼쳐 놓기 때문에, 그것이 침대라고 불리는 것을 아래에서 읽어보자:
목자가 사자의 입으로부터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구조했을 때 같이; 그렇게 사마리아에서, 침대의 모퉁이에서, 침상(couch, 소파겸 침대)의 끝에서 거주하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구 조할 것이다 (암. 3:12);
“침대의 모퉁이에서”란 자연 평면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를 표시한다;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란 감각적인 것에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이들의 중심지(수도)가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주님의 영적 왕국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여기서는 아버지 이스라엘에 관련해 말해진다, 즉 “침대의 머리에서”이다. 그 이유는 영적 선, 이것이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침대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 속에 있는 가장 낮은 자연 평면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쪽으로 자신을 돌렸을 경우, 이때 그들에 관해서는 “침대의 모퉁이에서”, 그리고 “침상의 끝에서”라고 말해진다.
다시 같은 예언서에서:
상아 침대에 누운 그들, 그리고 자신들을 그들의 침상 위에 뻗친 그들; 그러나 그들은 요셉 의 어김을 위하여는 슬퍼하지 않는다 (암. 6:4, 6).
“상아의 침대들”은 가장 낮은 자연 평면의 쾌락들을 표시한다, 이것은 거만에 속하는 이것저것들이다; “요셉의 어김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내적 부분으로부터 선이 사라짐에 관하여 관심이 없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만일 내가 내 집의 천막 안으로 온다면, 만일 내가 내 침대의 침상 위에 올라 간다면
(시. 132:3);
“내 집의 천막”은 사랑의 거룩함을 표시한다; “침대의 침상 위에로 올라가는”것은 자연 평면 위쪽, 사랑의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 쪽으로를 표시한다. 위 구절의 말들이 예언적이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될 것이다, 하여 이런 말씀들은 내적 의미로서가 아니면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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