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6장 해석

창세기 제 46 장

1절.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 이는 결합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의 의미가 연속적이고 계속적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이스라엘”, 그리고 “요셉”의 최고 의미에서 의미되는 주님의 신성이 되심에서 연속되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의 연속적이고 계속적인 것이다. 이 장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의 결합,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의 결합이라는 주제가 연속되고 계속되는 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여행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이라는 말은 이 결합의 시작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브엘세바에 왔다. 이는 선행과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브엘세바”의 의미가 선행과 신앙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교리가 아닌 선행과 신앙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영적 선은 교리 그 위의 수준이고, 교리는 이 선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영적 선에 도착한 이는 교리적인 것들에 속하는 것은 필요가 없고, 다른 것들부터 있는다; 그 이유가 그는 어느 방향으로 무엇에 집중하든 그는 목적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목적 쪽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리적인 것들은 목적으로서의 선에 도달하는 수단밖에 더 아니다. 이런 이유로 “브엘세바”에 의해 선행과 신앙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다. 이는 거기서부터 있게 되는 예배, 그리고 신성한 지적 측면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제물을 바침”의 의미가 예배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삭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신성의 합리성,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이다로부터; 거기서부터 예배 안으로 유입이 의미되고 이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제물을 바친 곳, 브엘세바에 의해 의미된 것이 선행과 신앙이고, 이로부터 있는 것이 예배이다가 뜻해지기 때문이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 보여주는 바는, 유태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들이 무엇 같았는지(속성이 어떤 것인지)이다, 즉 그들 각각은 제각기 자신의 하느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삭의 하느님은 야곱의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이었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이런 사실로부터, 즉 그가 그분에게 제물을 바쳤고, 밤중의 환상에서 그에게 말해지기를, “나는 하느님이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또한 그가 이렇게 말하며 맹세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리고 나홀의 하느님, 그들의 아버지의 하느님, (그분이) 우리 사이를 판결하신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의 두려우신 분을 두고 맹세했다” (창. 31:53). 그리고 또한 분명한 것 하나는, 그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 이유가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저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내가 걷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고, 그리고 저에게 먹을 빵을 주시고, 입을 의복을 주시고, 그리고 제가 내 아버지의 집으로 평화로이 되돌아오게 해주신다면, 그때 여호와는 나의 하느님일 것입니다” (창. 28:20, 21). 고로 그는 여호와를 조건적으로 인정했다.
자기들의 아버지들(조상)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하느님의 경우는 특별하였다. 이 관습의 근원지는 시리아에 있는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그 이유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 또한 거기 있을 때의 아브람 자신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야곱,”“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그들의 후손 역시 이런 환경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 바, 결과적으로 심정 상에서는 그들은 이방인들의 하느님들을 예배했다, 그리고 여호와는 입에서와 이름에서만 일 뿐이었다. 하여 그들은 어떤 내적 측면은 하나도 없이 외적 측면에서만 있었기에 예배는 하느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고 외치면 되고, 그분이 자기의 하느님이라고 입으로 인정하면 되고, 그분이 자기들에게 복주시는 한 그분을 자기의 하느님으로 삼는 것, 이것이 예배의 전부 였다; 따라서 선행과 신앙의 생활로 예배가 구성되는 것은 그들의 상상 속에도 없었다.

2-4절.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3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4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밤의 환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이는 희미한 계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환상들 안에서 말하셨다”의 의미가 계시하심 (revelation, 밝히 알리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계시들이 만들어지는 방법들은 여러 종류들인데, 즉 꿈들에 의해서, 밤의 환상에 의해서, 낮의 환상에 의해서, 인간 내부로부터의 말함에 의해서, 보여지는 천사들로부터 당사자 바깥쪽으로부터의 말함에 의해서, 또는 보여지지 않는 천사들로부터 당사자 바깥쪽으로부터 말함에 의해서, 등등이다. 여기서의 경우, “밤중에 있는 환상”인 바, 이는 희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희미함의 영적 의미는 진리가 나타나지 않음이다. 더욱이 말씀에서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악으로부터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이 밤의 희미함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지옥에 있는 모든 자는 밤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진다. 참으로 그들은 거기에 있는 일종의 빛 안에 있다, 그 이유가 그들도 서로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빛은 석탄불로부터의 빛 같다, 그리고 천국의 빛이 흘러들 경우, 어둠으로, 짙은 어둠으로 변하여진다. 그러므로해서 지옥에 있는 이들은 밤 안에 있다 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밤의 천사, 또는 어둠의 천사라고도 불리운다; 한편 천국에 있는 이들은 낮의 천사, 또는 빛의 천사라고 불리운다.
“밤”이 희미한 것, 마찬가지로 거짓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아래 말씀의 구절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낮에는 12 시간들이 있지 않더냐? 만일 누군가가 낮에 걷는다면, 그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걷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넘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빛이 그 자 안에 없기 때문이다 (요. 11:9, 10);
“12 시간들”은 진리의 모든 상태들을 표시한다; “낮에 걷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밤에 걷는 것”은 거짓 안에서 사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낮 동안 나는 나를 보내신 그분의 일을 해야만 한다; 밤이 올 때,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요. 9:4);
“낮”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밤”은 악으로부터의 거짓을 표시한다. 교회의 처음의 때는 “낮”에 의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처음 당시에는 인간들이 선 안에 있어 진리가 받아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마지막의 때는 “밤”에 의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때에는 인간들이 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진리도 받지를 못해서이다. 인간이 선 안에 있지 않을 때, 즉 그가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을 때, 설사 진리들 자체가 당사자의 입을 통해 말해진다 해도, 그는 그것들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때의 경우, 진리인 것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의 빛이 육체와 세상에 속한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의 시중을 들고 있어, 육체와 세상의 것들만이 진짜인 것으로 판단되고 사랑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속한 것들은 아닌데, 이런 인간과 더불어서의 천국에 속한 것들은 거의 값어치가 전무하다. 고로 진리의 빛은 빽빽한 어둠 안에서 질식되거나 흡수되어 있으나마나 한 듯 해진다, 마치 태양의 빛이 검은 것 안에 비출 때의 경우나 별반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이와 같은 때를 두고:
신랑이 지체하는 사이, 모든 처녀들은 졸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한밤에 외침이 만들어졌다,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마. 25:5, 6);
“한 밤”은 옛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시한다, 이때란 선행이 없어 신앙이 없는 때이다, 또한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밤에 한 침대 위에 둘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받아들여질 것이나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 (눅. 17:34);
위 구절에서도 “밤”은 옛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때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하셨다, 너희 모두는 이 밤에 나를 향하여 수치스런 일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 밤에, 수탉이 울기 전,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마. 26:31, 34);
주님이 밤에 붙잡히는 상황은 그 당시 그 때에 그들과 더불어 신성한 진리는 밤의 희미함 안에 있었음을,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거짓이 그 장소에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신앙의 진리가 가르쳐져 왔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던 교회의 마지막 때를 표현했다. 이런 때가 “밤”인 이유는 그 때에 주님은 인간들의 심정에서 완전 부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열두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 같이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현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밤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 모두는 이 밤에 나에게 창피한 일을 벌일 것이다”라고 말하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누군가가 세일로부터 나를 불러, 경비병아, 밤이 어쨌다는 말이냐? 경비병아 밤이 어쨌다는 말이냐? 경비병이 말했다, 아침이 온다, 또한 밤도 온다 (이. 21:11, 12);
위는 주님의 오심에 관해서 말해지는데, 이는 “아침”이다, 이 오심은 땅에서 어떤 영적 진리도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에 거행되었고, 이 때가 위 구절에서 밤이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 알려진 어느 날이 있을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그 이유가 저녁의 때쯤 빛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생명 있는 물들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모든 땅 위에서 왕이실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는 한 분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다 (슥. 14:7-9);
위 구절 또한 주님에 관하여, 또한 새로운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호와는 왕이실 것, 그리고 여호와는 한 분이실 것,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나일 것”이란 신성한 인간 측면에 관련한 주님에 관해서인데, 이 신성한 인간은 “아버지”라 불리우는 신성 자체와 더불어 하나이신 것이다. 주님이 오시기 이전, 신성한 인간은 천국들에 계신 여호와이셨다, 그 이유가 천국들을 통하여 그분은 땅 위 많은 이들 앞에서 신성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표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신성한 인간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 안에서 완전한 하나를 만드신 때와 같이 신성 자체와 더불어 완전하게 하나이셨던 것은 아니다. 이전 이 둘은 마치 분리되어 있는 듯하여 있었다는 것이 창. 19장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위에 천국으로부터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게 하셨다”(24절). “낮도, 밤도 아닌” 때가 그분이 태어나신 때이다; 그 이유가 그때는 “저녁”이었기 때문, 즉 표현뿐인 교회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의 때쯤의 빛”은 그때 나타날 신성한 진리이다.
이사야서에서:
정녕 밤에 알(Ar)은 폐물이 되었고, 모압은 베어져 버렸었다; 정녕 밤에 모압의 길(Kir)은 황폐해졌 었다 (이. 15:1);
“모압”은 자연적 선을 표시한다, 반대적 의미에서는 섞음질 된 선을 표시한다; 그것의 황폐함이 여기서 취급된다. 황폐해짐들이 “밤”에 결과되는 이유는 그때 진리가 희미해지고, 거짓들이 진입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큰 도성이 밤에 정녕 슬피 울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그녀의 뺨에 있을 것이다 (애. 1:2);
진리의 황무함을 묘사하고 있다; “밤”은 거짓을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너는 밤의 공포를,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정오를 황폐하게 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91:5, 6);
“밤의 공포”는 지옥으로부터 있는 악의 거짓들을 표시한다; “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공개적으로 가르친 거짓이고, 이것 때문에 선이 파괴되어진다; “정오를 황폐하게 하는 죽음”은 노골적으로 살고 있는 악이다, 이것 때문에 진리가 파괴되어진다. 계시록서에서: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문들은 낮에 닫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 밤이 없기 때문이다 (계. 21:25).
거기에 밤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초(candle)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빛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주 하느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계. 22:5).
“거기에 밤이 없을 것이다”는 거기에 거짓이 없을 것이다를 표시한다.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밤이었을 때, 나의 환상 안에 있었다. 이후 나는 밤의 환상들에서 보았다 (단. 7:2, 7);
위의 “밤의 환상들” 역시 희미한 계시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네 짐승들이 취급되기 때문, 그리고 그들의 뿔들, 그리고 희미한 계시에 속하는 많은 것들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스가랴가 “밤에” 보았던 여러 색깔의 말도 이와 의미가 비슷하다 (슥. 1:8 이하).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이는 자연적 진리 쪽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자연적 진리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기 아들들과 더불은 야곱에 의해 의미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개시됨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이는 주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말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는 신성한 지적 측면, 이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함이 신성한 합리성, 또는 주님의 지적 측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해지기를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유입이 있다고 말한 이유는 모든 진리는 지적 측면 속에 있기 때문, 고로 또한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적 진리 속에 있다. 위 말씀의 원어에서, 앞의 “하느님”은 단수인 “엘(El)”로, 두 번째 “하느님”은 복수인 “엘로힘(Elihim)”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 하느님은 그분은 많은 속성들을 가지시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름 “엘로힘”, 또는 복수에서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말씀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속성들이 있기에, 고대 교회는 그 속성 각각에 이름을 할당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후손들과 더불어서는 각각의 이름에 관한 이런 저런 지식들을 상실했는 바, 남은 것은 거기에 많은 하느님들이 있다는 정도뿐이었다, 하여 각 가문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을 위하여 그 하느님들 중의 하나를 선택했다. 마치 아브라함의 경우는 솨다이 (Shaddai), 이삭의 경우는 두려운 분(Pachad, Dread)이라 불러지는 하느님을 선택했다. 각각의 하느님은 신성의 속성들 중의 하나이기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하느님 솨다이”이다 라고 말하셨다 (창. 17:1), 그리고 여기서 야곱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이는 자연적 진리는 그것에 소속된 모든 것과 더불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로 되어있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내려감”의 의미가 받아들여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받아들여짐(introduce, 개시됨, initiate)이 표현되기 위하여 야곱과 그에 딸린 모든 것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짐에 주목하면 이렇다: 그때 당시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기들의 의식들에 관한 표현들과 의미들이었다, 그 이유가 교회의 모든 의식들은 이런 저런 표현들인 바, 이런 표현은 자기들의 선행의 교리물로 섬긴 그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이다. 고로 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그들은 가난한자, 궁핖한 자, 비천한 자, 고뇌받는 자, 압제받는 자, 과부, 고아, 체류자, 감옥에 갇힌 자, 병자, 배고픈 자, 목마른 자, 절름발이, 소경, 귀머거리, 불구자 등등에 의해 뜻해지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이외에도 많은 다른 분류들로 해서 이웃을 구별했다, 하여 어떻게 선행이 실행되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이와 같은 것이 그때 당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오늘날 이런 것들은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런 상황은 말씀에서 언급되는 대목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오늘날, 거의 누구도 말씀에서 “과부”가 등장할 경우 그 과부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또는 “체류자(외국인)”, 또는 “감옥에 갇힌 자”가 언급될 경우,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옛날 이집트에서는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이 번창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야곱”인 자연적 진리가 이런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받아지는 것이 야곱이 모든 습득물을 챙겨 이집트로 내려감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진리들이 이런 기억 속의 지식들 쪽에서 받아지는 것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있기 위해 이집트 안으로 데려가질 때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생각 안으로 올 때,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데려와진 진리들도 동시에 기억함 안으로 오기 때문에 여기서 받아진다고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체류자(외국인)가 생각에서 표출되면, 이 체류자를 수단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이들이 의미됨을 보게 되고, 즉시 이와 같은 선행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진리도 생각 안으로 오는 경우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적 진리들로) 채워질 때, 그다음 누군가가 이로부터 생각할 경우, 생각은 그 자체를 더 멀리 더 넓게 확장하고 흩뜨린다, 동시에 천국들에 있는 많은 사회들 쪽으로 방산된다. 이런 저런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 자체 안쪽에 많은 진리들로 구성되고, 비록 인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지만, 위의 방식으로 자체를 밝힌다; 따라서 필요한 전제 조건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진리들이 있는 것이다.
내면의 것들이 자신들을 외면의 것들 안에 증여하는 것이 신성의 질서이다. 또는 앞의 것들이 뒤의 것들 안에 담기도록 뒤의 것들에 증여하는 것이다, 고로 마지막에 가서는 최말단의 것들 안에 앞의 모든 것들이 (겹겹이 포개진 듯) 담겨 있다. (아마 양파를 연상해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역자주) 이런 방식은 자연계의 창조물의 어디에서이든 발생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충분하게 거듭나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진리 쪽으로 가져다 놓음을 수단으로 내면의 것들과 외면의 것들이 일치를 이루고 하나를 만들어야 불일치가 발붙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불일치가 있다면, 그는 선 안에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신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시각의 감각이 가지는 빛과 거의 같은 수준의 빛을 지니는 까닭에 진리로부터 있는 빛을 수단으로 내부에서 계발이 있지 않으면, 거짓들 쪽으로 인도되기 십상이다, 특히 감각의 오류로부터 파생되는 거짓 쪽으로 들어서고 만다; 또한 거짓들로부터 악들 안으로 진입하고야 만다. 이에 대하여는 각 장들의 끝에서 있는 유입에 관한 경험으로부터 더 알아질 것이다.

나는 거기서 너로부터 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는 진리들이 선이 되어 갈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위의 말이 말해지는 대상인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나라”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라”와 “백성”은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이런 차이가 있다: 즉 “나라”는 선들 또는 악들을; “백성”은 진리들, 또는 거짓들을 의미한다.

나는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 이는 그런 상태 안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너와 함께 내려 감”의 의미가 주님의 현존하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밤의 환상들에서 야곱에게 말하신 하느님이 주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너로 올라오게 하리니 정녕 올라온다. 이는 그 후 승강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올라 가다”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의미되는 승강함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더 내면 쪽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진리들로 채워진 후, 인간은 더 내면을 향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승강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은 당사자의 정신적 활동들의 최말단 평면으로 봉사한다. 더 내면쪽으로 향한다란 더 내면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영으로서, 천사로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내면적 생각이 더 진전될수록 더 완전해지기 때문,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리와 선의 유입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이 네 눈에 그의 손을 놓을 것이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생기를 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눈에 손을 놓다”의 의미가 생기있게 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눈에 손을 놓다(죽은 자의 눈을 감겨주는 것)”은 외적 감각, 또는 육체에 속한 것이 닫혀지고, 내적 감각이 열리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승강함이 결과돠어 생기있게 된다. 죽은 자의 눈에 손을 놓는 것은 관습이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을 수단으로 생명으로의 소생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죽을 때, 그는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세상 삶을 위해 봉사했던 육체를 한쪽에 내려 놓고, 육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다른 삶으로 건너갈 뿐이기 때문이다.

5-7절.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로 운반했다. 6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가축떼,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을 챙겼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7 즉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그리고 모든 그의 씨를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그리고 야곱은… 일어났다. 이는 자연적 진리가 계발됨을 의미한다. 이는 “일어남”의 의미가 빛의 상태 쪽으로 승강함이다로부터, 고로 계발됨이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브엘세바로부터. 이는 선행과 신앙의 교리로부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운반했다. 이는 영적인 진리들은 자연적 진리가 발전하게 해준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들이 운반했다”가 그들이 발전되게 했다인 이유는 이것이 자연적 진리에 비교하여 영적 진리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발전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것의 생명과 행동하게 하는 힘은 영적 근원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야곱의 아들들이 여기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 불리우고, 야곱은 “야곱”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들의 아기들을. 이는 순진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과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아기들”의 의미가 순진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순진 속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 또는 “선행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순진과 선행 없이, 영적 진리가 자연적 진리를 발전하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가 순수해지기 위하여 진리는 그것의 본질과 생명을 선행으로부터 파셍되어 있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행은 순진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를 생생하게 하는 내면의 것들은 이런 순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은 순진이다; 그 다음 낮은 것은 선행이다; 가장 낮은 것은 진리로부터 또는 진리에 따른 선행의 일이다. 그것들이 이 질서 안에서 서로가 연계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들에서 그렇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 또는 세 번째 천국은 순진의 천국이다; 중간 또는 두 번째 천국은 선행의 천국이다, 이것 안쪽에는 가장 안쪽 천국으로부터의 순진이 있다; 첫 번째 또는 최말단 천국은 진리의 천국이다; 이것 안쪽에는 두 번째 천국으로부터의 선행이, 이 선행 안쪽에 세 번째 천국으로부터의 순진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 더불어서도 같은 질서 속에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들 측면에 관련하여 인간은 위 세 천국들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은 특별한 측면에서, 또는 가장 작은 형체로서의 천국이다. 그러나 그의 외면의 측면애 관련하여, 특히 육체에 관련하여, 그는 세상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에 의하여 그는 소우주(microcosm)라 불리운다. 귀는 공기와 소리의 전체 속성에 따라, 눈은 에테르(ether)와 빛의 전체 속성에 따라, 혀는 액체에 있는 용해성과 유동성의 전체 감각에 따라, 콧구멍은 대기에 있는 이런 저런 유동성을 감각함에 따라, 촉각은 차고 뜨거운 것을 감각함에 따라, 또는 무게를 지닌 땅의 이런 저런 것들을 감각함에 따라서 등등이다. 이렇게 인간의 외적 감각들은 자연계의 전체 형상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내적 감각들은 그의 이해력과 의지력에 속해 있다, 그리고 천국의 전체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 바, 일반적 측면에서 천국이 있고,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 각각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선을 받는 그릇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을. 이는 선행 속에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여인들”의 의미가 그들의 “남자들”이 진리들일 경우, 선들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선행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 이유가 모든 영적 수준의 선들은 이웃을 향한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천적 수준인 선들은 주님을 사랑함 속에 있다.

바로가 그를 모시라고 보낸 수레에서.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온 교리물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레”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왕”에 의해서는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어진다, 이는 이 구절 외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사실상 대부분의 구절들에서 “이집트”의 경우 같이 “바로” 역시 거꾸로된(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측면에서의 경우인, “바로”에 의한 일반적 측면의 기억 속의 지식은 아래 구절에서 살펴진다:
어리석음들이 소안의 제 1 인 자들이다, 현자는 바로의 상담자들이다; 상담이 야만적이 되었다; 너희는 어떻게 바로에게 나는 현자의 아들이다, 고대의 왕들의 아들이다 하고 말하겠느냐?
(이. 19:11)
위에서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자의 아들”이라, “고대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현자”와 “고대의 왕들”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우둔하게 만들어졌음이 여기서 뜻하여진다, 그 이유가 “어리석음들이 소안의 제 1 인 자들이다; 상담은 야만적이 되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입에 묻지 않았다; 자신들을 바로의 강함에서 힘세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강함은 너희에게 수치함이 될 것이고,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함은 치욕이 될 것이다
(이. 30:2, 3);
“자신들을 바로의 강함에서 강해지게 하는 것, 이집트의 그림자를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것들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신뢰를 두는 것, 그러나 기억 속의 지식과 감각적인 것이 영적 진리를 받기를 명령하지 않으면, 어떤 영적 진리에서도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을 표시한다. 이는 거꾸로된 질서이다; 그 이유가 신앙의 진리들이 첫째 자리에, 기억 속의 지식들은 둘째 자리에 있음이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 질서이기 때문, 만일 기억 속의 지식들의 순위가 제 1 순위에 있으면 진리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말하셨다, 잘 바라보라 내가 노에서 아몬을, 그리고 바로를, 그리고 이집트를, 그리고 그것의 신들을, 그리고 그것의 왕들을; 특히 바로를, 그리고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방문한다(처벌한다) (예. 46:25);
위 구절에서도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그를 신뢰한 자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신뢰한 자들을, 그러나 말씀을 신뢰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말씀 안의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거짓이 오고, 신성과 천국에 속한 것을 부정함이 온다. 특히 이런 식의 태도가 입가에서 맴돈다, 즉 “나로 하여금 내 눈으로 천국도, 하느님도 보이게 보여 보아라, 나는 믿을 것이다.” 하여 보여졌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것이 그를 통째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로를 향하여: 잘 보라 물들이 북으로부터 올라온다, 이것은 넘쳐흐르는 시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토지에 범람하고 이로부터 도시와 거기에 거주하는 그들을 덮을 것이다; 하여 인간들은 외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모든 주민들은 악을 쓰며 말할 것이다, 자기의 강한 말들의 발굽의 짓밟음에서 이다, 그리고 그의 병거 바퀴의 덜커덩거리는 소란한 소리에서 이다
(예. 47:1, 2, 3);
바로에 관하여 말해지는 위 구절의 각각의 것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바,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는 것, 여기서는 거꾸로의 질서, 즉 신앙의 진리들을 파괴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넘쳐 흐르는 시내”는 진리에 관한 이해력을 파괴하는 기억 속의 지식이다, 고로 황폐함이다; “그것들이 토지에 범람한다”란 이것이 전체 교회에 있어진다를 표시한다; “도성과 거기 거주하는 이들”이란 교회의 진리와 거기서 파생되는 선을 표시한다; “말들의 발굽 소리”는 가장 낮은 기억 속의 지식들, 이것은 감각의 것들로부터 이리저리 방향지워지는 지식들이다; “병거의 진동”은 파생되는 거짓 교리를 표시한다; “덜커덩거리는 바퀴 소리”는 감각의 것들과 그것들의 오류들을 표시한다, 이것이 나아감을 야기한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잘 보라 나는 너희에 맞서 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에, 그의 강들 한가운데 누운 큰 고래, 이렇게 말한다, 강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턱에 갈고리를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 강들의 고기가 네 비늘에 찔리게 할 것이다 (겔. 29:3, 4)
위에서 “바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을 표시한다. 이것도 그에 관해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다시:
이집트의 왕 바로를 위해 애가를 지어라. 너는 바다들에서 고래들 같이 있다; 그리고 너는 네 시내들과 더불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네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혔다. 내가 너희를 절멸했을 때 나는 하늘들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의 별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을 빛이 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빛의 모든 발광체들을 나는 네 위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2, 3, 7, 8);
위 구절, 또한 많은 예언서의 구절들 같이 내적 의미를 앎이 없이는 누군가라도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바로가 바다들에 있는 고래들로서 이다, 그는 자기 시내들로부터 출시되었다; 그 자 위에서 하늘들이 덮어질 것이다, 별들은 검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빛의 모든 발광체들; 태양은 구름으로 덮힐 것이다, 달은 빛을 주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그의 토지 위에 놓일 것이다 등등 같은 말들에 대한 의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친다, 즉 만일 인간이 그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비밀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리고 그가 신앙의 비밀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보지 않으면, 그가 이 비밀들을 감감의 것들로부터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면, 기억 속의 지식들은 교회의 진리들을 뒤엎을 것이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적 의미인 것은 각 표현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바로가 기억에만 있을 뿐인 진리로부터 “이집트의 왕”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진리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의 왕은 백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고로 “바로”는 “이집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반적 측면이다. “이집트”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는 것은 자주 말해왔다. 바로가 “바다들에 있는 고래들”에 비교되고 있다, 그 이유는 “고래” 또는 “바다의 괴물”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일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집합들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자기 시내들로부터 출시되었다”라고 말해지는데, 그 이유는 “시내들”이 총명의 것들이기 때문, 여기서는 미친 짓에 속한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감각과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그의 발로 물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혔다”라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물들”이 영적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것들이 의미된다; 고로 “자기 발로 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진리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뒤집고 더럽히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내들을 더럽힌다”는 총명을 뒤집고 더럽히는 것이다.
마지막, “그분이 절멸할 때, 하늘들이 닫힐 것”이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하늘들”에 의해 인간의 내면들이 의미되기 때문, 실로 이것들이 그의 하늘들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신앙의 진리들을 지배할 때, 또는 자연 평면이 영적 평면을 다스릴 때, 하늘들은 닫혀진다. 그때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은 멸해진다는 것이 “나는 하늘들의 별들을, 빛의 모든 발광체들을 검게 만들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이때 사랑의 선은 더 이상 흘러들 수 없다가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덮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신앙의 선이 흘러들 수 없다는 것은 “달은 그녀의 빛이 빛이 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고로 거짓들 만이 자연적 마음을 점유할 것이다가 “나는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이상 모두로부터, 위 예언의 말씀에 포함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는 바, 바로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도 의미된다.

그리고 그들의 가축떼를 챙겼다. 이는 진리의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가축떼(cattle)의 의미함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가축떼”에 의해 양떼와 목축떼, 그리고 말, 낙타, 노새, 나귀까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떼(flock)”는 내적 의미에서 내면의 선들을, 그리고 “목축떼(herd)”는 외면의 선들을, 그러나 “말들,” “낙타들,” “노새들,” “나귀들”은 지적 측면에 속하는 것들, 고로 이 측면으로부터의 모든 것은 진리에 관련된다, 고로 “가축떼”에 의해 진리의 선이 의미되고 있다.

가나안의 토지에서 획득한 그들의 소유물. 이는 교회 속에 이전부터 있던 진리들로부터 포획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습득물의 의미가 포획된 진리, 또한 포획된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것들이 이전의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포획된 것이다는 이유는 진리들이 자체들을 선으로 배가했을 때, 그것들은 이전의 진리들부터 배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집트로 왔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로 “오다”, 또는 “내려가다”의 의미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짐(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진리가 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야곱,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그의 모든 씨. 이는 자연적 진리, 그리고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신앙 속의 모든 것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즉,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받아들이어짐, 또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쪽에서 개시됨이다). 이는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씨”의 의미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 고로 “그와 더불은 모든 씨”란 자연적 진리에 속하는 신앙의 모든 것들을 표시한다.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 이는 그것들의 질서 안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고로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들의 질서에서 이전의 것들로부터인 진리들이다.

그의 딸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딸들. 이는 질서 안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고로 “아들들의 딸들” 또한 이전으로부터 있는 선들, 고로 그것들의 질서에서이다.

그리고 모든 그의 씨. 이는 신앙의 모든 것과 선행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씨”의 의미가 선행의 신앙이다로부터, 고로 신앙과 선행 모두이다; 그 이유가 전자가 있으면 후자가, 후자가 있으면 전자도 있는 것이 신앙과 선행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와 함께 이집트로 데려 왔다. 이는 그들은 교회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가져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 쪽으로 “오다”, 또는 “내려 가다”의 의미가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받아들이어짐, 또한 그쪽에서 개시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의미인 것이 “이집트 쪽으로 그와 더불어 데려와짐”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진리들에 의해 규율될 때, 진리들은 그 지식들 안으로 들이어지고, 그 안에서 개시된다; 그리고 진리가 말씀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셨기 때문에 인정될 때, 기억 속의 지식들은 진리들에 의해 통치되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한 기억 속의 진리들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에 반대되는 기억 속의 지식은 제거된다. 고로 진리는 진리를 확언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주인이다, 한편, 확언되지 않은 것들은 거절된다. 이럴 경우,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생각하는 인간은 거짓들쪽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이는 진리들이 내부에 있지 않은 경우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자체로부터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 그러나 그것들 내부에 있는 진리들로부터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으로 그것들 안에 진리들이 있는 바, 이런 일반적 진리가 기억 속의 진리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진리는 단지 그릇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들과 거짓들 모두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없는 다양성에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이는 이웃이다 라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있다. 이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끝없이 풍부함에서 진리들이 가져와지고 개시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이웃에는 차이가 있다; 선 안에 있는 자가 최고의 이웃이다, 그리고 이것 마저 선의 품질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 이웃의 근원은 주님 자신으로부터이다, 하여 그분에게 더 가까이 되면 될수록, 즉 그들이 선 안에 더 있을수록, 그들은 더 이웃이다; 반대로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더 떨어지면, 덜 이웃이다; 그리고 또한 사회(공동체)는 개인 보다 더 이웃이다, 그리고 일반적 왕국은 사회보다 더 이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는 다른 왕국들보다 더 이웃이다, 그리고 주님의 왕국은 더욱 더 이웃이다; 또한 누군가가 다른 이의 선을 위하여, 또는 그의 나라를 위하여, 또는 교회를 위하여 그의 직무를 올바르게 집행할 때 이웃은 사랑되고 있다, 등등이다. 이는 어떻게 많은 진리들이 교회의 이 하나의 기억 속의 지식 쪽으로 가져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하도 많은 진리들인지라, 그것들을 구별하고 인식하려고 종과 속으로 나누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이것이 고대의 교회들에서는 학문이었다.
같은 기억 속의 지식도 끝 없는 거짓들로도 채워질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위의 전술한 진리들을 거꾸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식일 것이다, 즉 모든 이는 자신에게 이웃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례에서 이웃의 근원은 나자신으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나를 좋아하는 자이다, 그래서 나와 하나를 만드는 자이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자 안에서 자신의 형상이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유리하지 않으면 나라라 해도 내 이웃이 아니다; 등등이다. 그럼에도 기억 속의 지식은 똑같이 남아 있다; 즉 모든 사람은 이웃이다고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로 그것을 채우고, 저 사람은 그것을 거짓들로 채운다. 이런 경우는 다른 기억 속의 지식들도 같다.

8-27절.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니 야곱과 그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10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요 11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인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13 잇사갈의 아들 곧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14 스불론의 아들 곧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15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인데,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며, 16 갓의 아들 곧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17 아셀의 아들 곧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니 18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라 합 십 육명이요 19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22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 사명이요 23 단의 아들 후심이요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육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들의 이름이 이러하다”란 질서 안에서 영적 평면으로부터 온 진리들의 품질, 이것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가져와짐을 의미한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란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 그리고 세부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 속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이란 이해력에 있는 신앙, 이것이 첫 장소에서 가상적으로 있는다.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란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신앙 속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시므온의 아들 곧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이란 의지력에 있는 신앙과 전체적 측면에서의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여인의 소생 사울”이란 진짜 근원으로부터가 아닌 교리를 의미한다. “레위의 아들 곧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라”란 영적 사랑과 전체적 측면에서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유다의 아들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란 천적인 사랑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란 거짓과 악이 근절되어졌음을 의미한다. “또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다”란 선행의 선들로부터의 진리들을 의미한다.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다”란 천적 수준에서 있는 결혼의 사랑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다”란 천국의 결혼과 그것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레아가 밧단 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다”란 이러한 교리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자연 평면에서 영적인 애정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딸 디나”란 교회를 의미한다.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 삼 명이다”란 영적 생명의 상태와 그 품질을 의미한다.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이다”란 신앙의 선과 그로부터 파생된 일들과 그것들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 곧 헤벨과 말기엘이다”란 영원한 생명의 행복과 애착들로부터 있는 기쁨과 그것들의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실바의 아들들이다”란 이들은 외적 교회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이란 외적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다”란 그들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었음을 의미한다. “십 육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들”이란 천적인 애착으로부터 인 것을 의미한다. “요셉과 베냐민이다”란 교회의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요셉”은 내적인 선을, “베냐민”은 거기서 파생된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에게 이집트의 토지에서… 태어나졌다”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온의 제사장 보디세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았다”란 선이 진리와 결혼함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혼함으로부터를 의미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란 새로운 의지력과 그것의 지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교회 속에 있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다”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영적인 것과 그것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아들들이다”란 그들은 천적인 애착으로부터 이었음을 의미한다. “십 사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단의 아들은 후심이다”란 신앙의 거룩함과 생활의 선, 그리고 이들 속의 교리를 의미한다. “납달리의 아들은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다”란 승리가 있는 시험들과 그것들에 관한 교리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빌하의 아들들이다”란 이들은 내적 교회 속에 있다를 의미한다.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이란 내적 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칠 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란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받아들이어진 모든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 “야곱의 몸(넓적다리)로부터 나왔다”란 결혼으로부터 이었다를 의미한다. “야곱의 자부 외에”란 이 결혼으로부터 있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애착을 제외하고를 의미한다. “육십 육명이다”란 그들의 상태와 품질을 의미한다.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란 자연 평면에 있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두 명이다”란 의지와 그로부터 파생된 지성을 의미한다.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는 칠십 명이었다”란 질서 안에 꽉찼음을 의미한다.

위 구절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이름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방금 앞에서 주어진 일반적 설명으로부터 알 것이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그들의 출생이 있는 대목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정리해둘 만한 것이 있다: 즉 야곱의 아들들은 비록 그들이 아직 젊다 해도 그들로부터의 아들의 출생이 이집트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아들들 모두는 가나안의 토지에서 출생했다는 것, 베냐민을 제외하고는 그들 모두가 밧단-아람에서 출생되었다. 이는 주님의 특별한 신성한 섭리로부터 이었다, 즉 교회 속의 것들이 그들의 출생 자체로부터 그들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질서 때문이다.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들은 교회 속의 것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수단으로 새로이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 또는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밧단-아람”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출생은 신앙과 선행을 통하여 새로운 출생을 표현했다, 고로 처음에 이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서 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토지에서 모두 태어나졌다는 것은 그때로부터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이었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는 교회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이집트에서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외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이 지배함을, 특히 자연 평면에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 통치하는 것이 질서임을 표현했다, 즉 “므낫세”는 자연 평면에서 있게 되는 (새로운) 의지력 측면이고, 그리고 “에브라임”은 자연 평면에서 있게 되는 교회의 지적 능력(새로운 이해력)을 표현하는데, 이것을 교회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두 목사는 조금씩 다르게 라틴어로부터 번역하고 있으나 말만 조금 다를 뿐 결국은 같은 말 뜻에 이른다. 즉 Potts 목사의 경우, the celestial spiritual 인데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부분이라고 역자는 번역했다. 그리고 참고로 보는 영역서인 Elliott 목사의 경우, the celestial of spiritual 이고 역자가 번역한다면 영적 평면 속의 천적 부분일 것이다. 모두 같은 말 뜻임을 알기 바란다. 역자주)

28-30절.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내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 29 그리고 요셉은 그의 마차에 견인줄을 채웠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고센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고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30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가 아직 살아 있어 네 얼굴을 보았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그리고 그는 그에 앞서 유다를 보냈다. 이는 교회 속의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자기에 앞서 보낸다”란 교통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유다가 보내진 이유는 선이 선과 교통한다는 것, 이는 직접적, 즉각적 교통함이 있다가 의미되도록 하기 위하여서 이다. 다시 말해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 선이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선과의 교통함이다. 직접, 즉각적이다고 말한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부터 있는 선과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부터 있는 선은 내적 부분을 통하여 외적 부분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고로 외적 부분에서 받아진 선 만큼 거기에 선이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외적 부분에 선이 없이 신앙의 진리만 있다면, 이때 내적 부분을 통한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유입은 외적 부분에서 받아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진리와의 직접적인 교통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다가 야곱에 의해 요셉에게 보내진 이유이다.

자기에게 고센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도록. 이는 자연 평면의 중앙에 관련하여를, 즉 중앙에서(가장 깊은 곳에서) 교통이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고센”이 자연 평면에서 중앙(midst, center, 즉 inmost)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서 중앙, 또는 가장 깊음에 의하여 자연 평면에서 가장 좋은 곳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가장 좋은 것이 중앙에 있기 때문, 즉 중앙에 가장 좋은 것으로부터 선함의 등급에 따라 중앙으로부터 변두리쪽으로 점점 멀어져 가서 위치하는 것이 천국의 배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열은 거듭나는 자 안에서 선들의 질서적인 배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악한 자와 더불은 배열은 가장 악한 것이 중앙에, 그리고 선들은 추방되고 계속 밀려나서 완전 외곽으로, 결국은 바깥으로 내몰린다. 이것은 사악한 자들의 개인적으로 지니는 형체이고, 일반적으로는 지옥들이다. 고로 이것은 지옥의 형체이다. 중앙에 가장 좋은 것, 그리고 측면을 향하여 선들이 질서에서 배열됨에 관하여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교회의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과 교통함이 뜻해지는 것은 자연 평면에서 중앙에 관련되는 것과 더불어서 임이 분명하다.

(** “그리고 그들은 고센의 토지에 왔다”란 거기에 생명이 거주함을 의미한다. 이 대목을 추가로 설명하는 문항은 원문에서 있지 않다 역자주.)

그리고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채웠다”란 내적 부분으로부터의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병거”의 의미함이 교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 올라 갔다. 이는 유입을 의미한다. 즉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 안으로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맞으러 올라가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그를 맞으러 올라 가는 것”은 유입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맞으러 올라 가는”것이 자신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그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센으로. 이는 자연 평면의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방금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보여졌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두에게 알려져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인간과 더불어 그의 생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영적 빛과 영적 열이다. 영적 빛은 그의 이해력을 만들고, 영적 열은 그의 의지력을 만든다. 영적 빛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것의 근원이 있다, 그러므로 선행의 선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다. 영적 열은 주님의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그것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인 천적 수준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인 영적 수준의 사랑의 선이다. 위 둘이 인간의 전체 생명을 구성한다.
영적 빛에 주목해보자, 영적 빛은 이해력 안에서 이해력과 더불어 있다, 마치 자연계의 빛이 외적 시각에서 시각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같다; 즉 눈이 보기 위하여서 빛이 조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눈은 눈의 바깥쪽 빙둘러 있는 것들을 본다; 그러나 눈이 보는 대상물들은 영적 이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다. 그러나 이 빛이 조명되지 않을 때, 지적 마음 또는 인간의 내적 눈은 마치 외적 또는 육체의 눈 같이 어둠에 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의 어떤 것도,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지적 마음을 비추이는 빛이 진정한 빛 자체이다, 그리고 이 빛은 자연계의 정오의 빛을 수 천 배 이상을 능가하는 빛임을 나는 내가 보았기에 증거하고 있다. 이 빛을 수단으로 천국들에 있는 모든 천사들은 자신들 바깥쪽을 빙둘러 볼 수 있고, 또한 같은 빛을 수단으로 그들은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과 그것의 품질을 보고 지각한다. 이로부터 “보다”에 의해 영적 의미에서 이해함 뿐만 아니라,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즉 생각, 반영, 관찰, 신중, 등등 많은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앙, 뿐만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즉 진리, 말씀으로부터의 교리, 등등까지도 의미한다.
영적 열에 주목해보자. 이 열은 인간의 의지력 안에 의지력과 더불어 있다, 마치 자연계의 열이 육체 안에 육체와 함께 있어 생기 있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의 첫 근원에서 이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영적 열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신성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분에 대한 상호적인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다. 이 영적 열이 진정한 열 자체이다, 이 열이 열을 가지고 천사들의 몸을 기쁘게 한다, 동시에 사랑으로 그들의 내면을 기쁘게 한다. 이로부터 “열,” “불꽃,” “불”이 말씀에서 사랑에 속하는 것들을 진짜 의미에서 의미한다, 즉 선과 진리에 대한 애착, 그리고 또한 선 자체 등등이다.

그리고 그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았다. 이는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목들을 어긋맞겨 안다”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즉 대단히 가깝고 친밀한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대목이 결합을 의미하는 이유는 목은 머리와 몸을 함께 결합되게 하기 때문, 그리고 “머리”에 의해서 내면들이, “몸”에 의해서는 외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목”은 내면들이 외면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고로 내면들이 외면들과, 또한 천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교통함이 결합 덕택인 바, 같은 단어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요셉”은 내적 부분을, “이스라엘”은 요셉에 비교해서 외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 이는 자비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목들에서 한참동안 울었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결합의 처음 그리고 계속되는 결합이 자비, 최고 의미에서 “요셉”인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영적 선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 지각함이다로부터; 요셉의 목들에서 울었던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관한 모두는 이미 앞쪽에서 상세히 알려져 있다.

나는 지금 죽어도 된다. 이는 새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의 의미가 생명으로 부활함이다로부터, 고로 새로운 생명이다. “죽는다(dying)”가 생명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이유는 위의 열거한 항들에서 보여준 바 있다; 즉 인간이 죽을 때, 즉각 그의 생명의 새로움이 시작된다; 그 이유가 지금까지 세상에서의 삶을 섬겨주기 위해 입었던 물질적 몸을 벗고 생명 안으로 일으켜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이 “죽는다”에 의해 의미된 이유는 새로운 생명은 내적 부분을 수단으로 유입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합으로부터, 이것은 요셉이 이스라엘의 목들을 어긋맞겨 안음“에 의해 의미되었다.

내가 네 얼굴들을 보았으니. 이는 자비를 인지했으니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인지하다(notice)이다로부터; 그리고 “얼굴들”의 의미가 주님을 서술할 경우, 자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네가 아직 살아 있다. 이는 자신 안에 그 결과로서 있는 생명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살아 있다”가 내적 의미에서 영적 생명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신 안에서 이 생명을 지각함이 의미된 것은 앞의 진행된 상황에 이어져서 이다. 그리고 그를 봄에서 있는 환희가 자신 안쪽에 생명이 현존함을 지각하게 했다.

31-34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32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33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34 그러면 당신은 말하십시오, 당신의 종들은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 까지 조차,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도 모두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요셉이 말했다”에 의해 그가 지각함이 의미되지 않는 이유는 요셉은 내적 부분이기 때문, 그리고 모든 지각함은 내적 부분을 통하여 외적 부분, 또는 자연 평면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자체 스스로로부터 자연 평면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고, 오직 그 자체에 앞서 있는 것으로부터만 지각한다; 물론 앞의 것이라 해도 자체로부터서는 아니고 그 앞의 앞의 것으로부터 지각이 가능하다, 고로 마지막 앞의 것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계신 주님이시다. 이와 같음이 유입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이 지각의 본성이다. 유입과 더불어 출시됨(공표됨, coming forth)과 존속됨(subsistence)이 있다. 자체로부터 출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앞의 것으로부터 이다, 고로 모든 것들은 처음(First)으로부터, 즉 자체적(Itself)으로 있음(Esse)과 존속함(Existere)이신 분으로부터이다. 또한 같은 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은 존속한다, 그 이유가 계속적인 출시됨이 항구적인 존속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이 영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방법에서 생각 속의 관념(idea)이 인물들로부터 추상화 되기 때문, 그리고 어떤 것들 쪽으로 결정을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 즉 진리들과 선들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 있고,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이 분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에서 또한 진리들과 선들을 인물의 것이라고 여기려고 생각함으로부터 물러나게 한다. 이와 같은 언어를 수단으로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게 되는 바, 이 관념은 당사자의 생각이 진리들과 선들에 인접하는 것 보다 더 드넓게 확장되게 해준다; 예를 들면, 만일 “이런 진리들 안에서 이들이 지각한다”라고 말해진다면, 관념들은 즉시 인물에 국한되어지고 만다, 하여 그것들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물러나는 것이 발생된다; 동시에 이런 방식이라면, 진리의 빛으로부터의 계발됨이 흐지부지 되어진다. 더욱이 다른 삶에서, 인물들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생각한 이들을 흥분시킨다; 그 이유가 다른 삶에서 모든 생각이 교통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교통함이 있는 이유는 말함의 추상화 된 형체가 사용되기 때문, 그 한 예가 여기서의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의 지각함이 있다”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집(식구)에게 말했다. 이는 거기서 선들에 관하여, 즉 선들에 관하여 지각함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집(house)”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나는 올라 가서 바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하기를, 내 형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 가나안의 토지에 있었는데, 나에게 왔습니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하여서 이고, 그것들이 받아들이어졌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버지의 집”의 의미가 거기에 있는 선들이다로부터;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에게 오다”, 또는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오다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받아들어졌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이는 그것들은 선으로 인도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목자들”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가 “목자”이고, 가르침을 받고 인도 받는 자가 “양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이 뜻해진다, 그 이유가 여기서 “사람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수단으로 “양떼의 목자들”은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인도하는 진리들이다. 신앙 속에 있는 진리들이 선행 속에 있는 선 쪽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같은 논리에서, 일반적, 세부적, 특수적 측면에서의 모든 것들은 목적에 관련이 있고,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목적을 바라보지 않는 것들은 존속할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은 목적을 위하여가 아닌 것은 창조하신 것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같은 취지인 것은, 창조되어진 모든 것들 안에서 목적은 모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조되어져 왔었던 모든 것들이 이런 질서에 있는 바, 처음으로부터 중간의 것들을 통하여 있는 모든 것들은 마지막의 것들, 또는 최말단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마지막, 또는 최말단에 있는 목적은 처음 안에서 있는 목적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것과 저것의 연결이 온다. 처음 근원으로부터 목적 자체는 신성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밖에 더 없다; 고로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이라 불리우신다 (이. 41:4; 44:6; 48:12; 계1:8, 11, 17; 2:8; 21:6; 22:13). 이럴진대, 인간과 더불은 생명에 속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은 목적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고, 목적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합리적 능력의 얼마라도 겸비한 자라면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진리들을 바라보고 찾는다는 것,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들의 목적으로 선들을 바라보고 찾는다는 것, 그리고 선들은 마지막이고 처음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찾는 것이다; 그들이 그분을 진리들로부터 바라보고 찾을 경우 그들은 마지막에 있는 목적 측면에서 이다. 만일 그들이 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며 찾을 경우, 그들은 처음에 있는 목적 측면에서 이다. 선 쪽으로 인도하는 교회의 진리들의 경우가 이럴진대, 이것이 “사람들은 양떼의 목자들입니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떼의 사람들”이다가 아래에서 이어진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진리들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축떼(cattle)”의 의미가 진리의 선, 진리들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관련되어 말해진다; 고로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들을 두고 말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와 목축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내면의 선, 외면의 선 그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현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내면의 선이다로부터; “목축떼”의 의미가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있는 무엇이든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가져왔다”의 의미가 현존하고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아마 바로는 당신을 부를지 모릅니다. 이는 만일 자연 평면 안에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면 합쳐지기를 뜻할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게로 부른다”의 의미가 결합이 있기를 뜻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기의 토지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장차 자신과 더불어 하나의 나라가 되게 하고 싶은 애착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부른 것은 결합되기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도 알려진다. 바로가 부름에 의해 받아들이어짐과 결합이 상호적이다는 것, 즉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자연 평면의 선들과 진리들의 결합과 상호 받아들이어짐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모든 결합은 상호성, 즉 양쪽이 동의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진리들이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과 결합함이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실로 결합의 시작이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를 통하여 결합으로 진입함은 신앙의 진리 쪽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의 것들부터 파생되기 때문, 고로 세상의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바, 거기로부터서는 무수한 오류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합의 출발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만 있어야함이 틀림이 없다. 첫째,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그 다음 이 교리들이 진정한 진리인지를 말씀으로부터 검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저렇게 말했고, 추종자들이 그것이 맞다고 확증했다고, 그 나라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교회로부터의 교리이니까, 또는 자기의 출생 때부터 인간들이 그것들을 붙들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교황의 교리적인 것이든, 퀘이커의 교리적인 것이든, 유태인들의 것이든, 심지어 모하멭의 것이든, 모두를 아울러 몽땅 진리라고, 즉 맹목적 추종함은 위험 천만하기 때문이다. 고로 알게 되는 것은, 말씀은 수색되어져야만 한다는 것, 하여 교리가 진정 진리인지를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 행해질 때, 이때 인간은 거기로부터의 앎 없이 진리인 것을 지각하기 위하여 주님에 의해 계발되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선에 일치함에 따라 계발됨 안에서 진리의 확증함이 있게 된다. 만일 이런 진리들이 교리적인 것들과 불일치한다면, 자기로 하여금 교회를 휘젖지 않도록 조심하게 해야 한다.
그 후에, 그가 확증했을 경우, 고로 교리적인 것들이 신앙의 진리들이다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확언했을 경우, 이때 그는 자기가 소유한 기억 속의 모든 지식들을 수단으로 그것들을 확증하게 허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확언한 것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받아들이되, 그것이 오류를 포함했기에 불일치하는 것은 거절한다. 그 이유가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힘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출생한 교회의 교리적인 것들이 진리인지 여부를 알려는 애착으로부터 성경을 수색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금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그가 계발될 수 있는 방법은 이외 달리 있지를 않다. 이것이 행해진 후,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것 역시 금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계발되기도 전에 자신의 방어벽부터 튼튼히 하려는 것은 질서상 맞지가 않다. 이상 설명한 것이 신앙의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이외 모든 다른 지식들 무엇이든지와 결합해가는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 순서를 따르는 이는 흔치가 않다; 그 이유가 말씀을 읽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진리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읽지 않기 때문, 대체로 자기들이 내세운 교리들과 맞는 대목이 어디 있나 하고 탐사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기 때문, 한마디로 자신의 주장을 말씀에게 증명해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의 왕국을 묘사하는 말씀에서, 그 안에는 영적, 합리적, 그리고 기억 속의 지식들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름들만을 열거함으로 의미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라는 나라 이름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영적 측면이, “앗시리아”에 의해서는 합리적 측면이, “이집트”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된다 아래 말씀을 읽어보자:
그 날에 이집트의 토지의 한가운데에 여호와의 제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경계선 가까이에 여호와께 기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집트의 토지에 있는 여호와 체바욷에게 표시를 위해,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증거를 위해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압제자 때문에 여호와께 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구조자, 그리고 제 1 인 자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구원해낼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이집트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그 날에 여호와를 알 것이다, 그리고 제물과 식사 제물을 바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서약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것이다. 그 날에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 로 작은 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이집트 쪽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 로, 그리고 이집트인들이 앗사리아를 섬길 것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더불어, 그리고 앗시리아와 더불어 세 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한 가운데에서 행복할 것이다; 이것을 여호와 체바욷께서 복주실 것이다, 말하시기를, 이집트 나의 백성은 복될지어다, 그리고 앗시리아 는 내 손의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나의 상속이다 (이. 19:19-25);
모든 이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위 구절에서 이집트가,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고 그 나라들의 이름을 수단으로 그밖의 뭔가를 뜻할 것이라는 것이다. 셋이 교회인 안에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예언자의 말, 즉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로의 작은 길이 있을 것, 그리고 앗시리아가 이집트로 올 것,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로, 그리고 이집트는 앗시리아를 섬길 것;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앗시리아 다음으로 세 번째 일 것,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복될 것”에서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교인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그가 영적 인간, 합리적 인간이 되고, 이 인간들을 섬기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결코 거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합은 전자의 방법, 즉 신앙으로부터의 방법을 수단으로, 그러나 후자의 방법이 아니다는 것, 즉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방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너의 일들은 무엇이냐? 이는 그리고 당신의 선들을 알려고를 의미한다. 이는 일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일들”이 선들인 이유는 선들은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로부터 있는 것은 선, 또는 악이다, 그러나 이해력으로부터 있는 것들, 즉 강연, 설교 등등은 진리, 또는 거짓이다. 야곱의 아들들의 일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의 일들은 가축에 풀을 뜯기는 것, 고로 목자들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 일들이 선들을 의미하는 또 하나는 특별하게 진리들로부터의 선들이다. 일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상응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양떼에 속하는 것들인 어린 양, 양, 염소새끼, 염소가 선행의 선에 상응하기(내적 선) 때문이다; 목축에 속하는 거세한 수소, 수소도 마찬가지(외적 선)이다. 이것들이 상응하는 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즉 천사들이 선행의 선에 관하여 대화를 할 때, 영들의 세계 어딘가에서, 또한 첫 천국, 또는 최말단 천국의 어딘가에서 양떼와 목축떼가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천사들이 선행으로부터의 내면의 선을 이야기 할 때는 양떼가, 외면의 선일 경우는 목축이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이런 사항들이 “양떼와 목축떼”에 의해 의미된다.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있는 모두 각각의 의미함은 다른 삶에서의 표현들로부터 그것의 근원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이유인 즉, 원인과 결과의 관계 같이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있기 때문, 고로 자연계에서 원인으로 행동한다. 이 방법에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방침과 질서에서 함께 붙들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말하십시요, 당신의 종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조차 가축을 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는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선이 있게 하는 진리들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가축을 치는 사람들”의 의미가 진리로부터 선이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의 의미가 시작으로부터 아직까지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가축떼”가 선을 있게 하는 진리들이다에 주목해보자, 모두가 아는 것은, “가축떼”에는 덩치가 크든 작든 짐을 싣는 모든 짐승들, 양떼와 목축들, 그리고 또한 낙타들, 노새들, 나귀들 모두에서 이다. 짐을 싣는 짐승은 진리들에 관련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목축들과 양떼들은 선에 관련되는 이런 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가축떼”인 일반적으로 짐을 싣는 모든 짐승들은 선인 것을 있게 하는 진리를 의미한다. 단어 “가축떼(cattle)”가 원어에서는 “습득물(acquisition)”을 뜻하는 단어로부터 이다, 그리고 “습득물”은 영적 의미에서 선을 있게 하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획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가축떼”는 내면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들에는 양떼에 속하는 것, 어린 양, 양, 염소새끼, 염소, 숫양이기 때문이다. “가축떼”가 선을 있게 하는 진리인 것을 다른 구절에서도 확인 해보자:
그때 그분은 네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 너는 토지에 씨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빵의 증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방일 것이고 풍부할 것이다; 그 날에 네 가축떼는 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을 것이다 (이. 30:23);
“풀을 뜯는 것”은 진리들 안에서와 선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는 것을 표시한다; “넓은 목초지”는 진리의 교리를 표시한다; “넓다”라고 말해진 이유는 “넓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로 “가축떼”는 진리들로부터 선이 있음이 분명하다.
네 손을 (이제는) (사람이) 살게 된 황폐된 곳 위에, 그리고 가축떼와 소유물을 가지고 일하며, 땅의 배꼽(중앙)에 거주하는 (여러) 나라로부터 그러모은 백성 위에로 도로 가져다 놓는 것 (노략질 하려 드는 것) (겔. 38:12);
위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축떼”는 진리들을 통하여 선이 있음을 표시한다; 그리고 “소유물”은 선을 표시한다.

우리 모두, 그리고 조상들도. 이는 처음의 선들로부터 그렇게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조상들(fathers, 아버지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가축을 치는 사람들, 또한 조상들 모두는 처음의 선들로부터를 표시한다. 말씀에서 “조상들”에 의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보다 훨씬 먼 선조이며 선 안에 있었던 고대 교회에 속했던 이들이 뜻해진다.

이는 당신이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입니다. 이는 그렇게 당신의 거주지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이 있는 자연 평면의 한 중앙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삶이 있다 이다로부터; 고로 삶의 거주지들이다; 그리고 “고센”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거기에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고센은 이집트의 최상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 사람들은 양떼를 치는 모두 각각의 목자를 지겹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에 반대되고 있는 왜곡된 기억 속의 지식과 분리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역겨워하는 것”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을 분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역겨운 것들이 분리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원리들과 사랑들을 받아들임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 이다; 현재의 경우, “양떼의 목자라면 누구든지 이집트인들에게는 역겹다”라고 말해질 경우에서의 이집트인에 의해 의미된 것, 즉 거꾸로된 기억 속의 지식들에 반대함이다; 그리고 “양떼의 목자”의 의미가 선으로 인도하는 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선을 확증하는 기억 속의 지식에 타락된(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같은 부류의 지식들이지만 서로에게 반대적 이다. 악용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행의 선을 파괴한다, 그리고 또한 질서를 거꾸로 하고 있다, 마치 마술사들이 이집트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질서에 일치하는 아주 많은 것들을 이런 마술사들은 남용하기 때문이다, 즉 상응들과 표현들을 남용한다는 말이다. 사실상 이것들은 여느 평범한 이들에서 보다 마술사 같은 이들 사이에서 더 발달되어 있다. 악한 자들이 표현과 의미, 상응들을 응용할 때 조차 그것들은 질서에 따르고 있다, 그 이유가 이들이 그것들을 응용함에서 타인에게 명령함을 실행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초래되기 때문인데, 그것들이 뒤집혀 마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반대되는 것의 분리함이 중요한 바, 여기서는 진리들과 더불은 선이 “고센”에 의해 의미된 (자연 평면의) 중앙에 있게 될 때 거행되어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식으로 하여 결과되고 있다; 그 이유가 반대적인 악용된 기억 속의 진리들은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취급한 주제는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결합함이었다. 더 나아가 내적 부분, 또는 영적 인간이 외적 부분, 또는 자연적 인간과의 결합은 진리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은근히 심어지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의 애착들의 기쁨들과 함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합이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서 결과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것도 결과되는 것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거듭나도록 하기 위하여는 그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은 함께 결합하여야만 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선은 악용되거나, 질식되거나, 거절되기 때문이다, 이때 내적 인간은 닫히고 만다. 하여 이 결합이 결과되는 방법이 이 장에서 묘사되어 왔다, 이 방법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삽입하는 수단들에 의하여서 이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