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장 해석

창세기 제 45 장

1, 2절. 그리고 요셉은 자기 앞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2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고, 바로의 집도 들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가까이에 서있었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는 모든 것들은 이제 결합을 위하여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the internal celestial) 을 수단으로 준비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 고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천적 평면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선이 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의 의미가 모든 것이 결합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는 이런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얻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질주했다면, 결과를 개봉하고 싶은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때와 같다. 이것을 위의 본문이 의미한다; 앞 장에서는 결합이 개시되었고, 이 장에서는 결합 자체가 진행된다. “요셉 가까이에 서있던 모든 이”에 의해서는 결합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내보내졌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래서 그는 소리질렀다. 이는 결과가 아주 가까이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억제할 수 없을 때 나오는 것이 소리침인 바, 이는 결과가 임박했다를 뜻한다.

모든 사람은 나로부터 물러가라. 이는 역으로 있거나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한 가운데로부터 내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그와 더불은 모든 사람”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이 이집트인들이었고, 그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치하지 않고 역으로 있다고 말한 이유는 이렇다: 결합이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인간에 있는 진리들이 내적 부분인 선과 결합될 때, 즉 신앙의 진리들이 선행의 선과 결합될 때, 이때 일치하지 않는 기억 속의 모든 진리들, 특히 역으로 있는 것들은 중앙에서 측면 쪽으로 거절되어진다. 고로 중앙에 있는 빛으로부터 그늘진 바깥쪽으로 거절되어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결합을 위해서 기억 속의 지식들은 필수적인 것, 중요한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보여지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모니를 이루거나 일치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면, 그것들로부터의 것은 거기 남아 있는데, 그 나마 남아 있는 것들은 추출된(extract) 지식들, 즉 격이 높아진(sublime)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지식들을 가지고 내면은 감각한다. 이 감각함으로부터 얼마 정도의 즐거움 까지, 즉 하루 중에서 아침이 우리에게 주는 상쾌함 같은 정도까지는 느껴질 수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신앙 속에 있는 진리는 선행 속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진다.

그리하여 요셉이 자신을 그의 형제들에게 알리는 동안 거기에는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이 중매자를 통하여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합쳐질 때 여타 어느 지식도 현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목청을 돋구어 울었다. 이는 자비와 환희(joy)를 의미한다. 여기서 “울다(weep)”의 의미가 자비의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또한 슬픔의 결과, 사랑의 결과이다로부터, 고로 환희이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들었다. 이는 최말단(ultimate) 조차도를 의미한다. 이는 “듣다(hear)”, 즉 우는 소리를 듣다의 의미가 자비와 환희를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최말단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인간의 최말단, 즉 인간의 기억과 생각에 있는 것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말단이라고 당사자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지혜나 총명으로부터 인 듯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로 이것들은 지혜나 총명의 그릇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이 지식들은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과 자체들을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함을 되짚어보면 분명해진다. 즉 우리가 어떤 진리를 문의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함이 기억 속의 진리 안에서 이리저리 뒤져보는 바, 이 지식들이 표출되고 현존하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의 눈, 귀 같은 감각에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이때 생각은 이 지식들이 포함하는 것을 (한약을 달여 약만을 추출하듯) 추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억 속에 흩어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깊숙이 감추여 있다시피 있는 지식들까지도 다 뒤져낸다.) 그 다음 문의에 대한 답으로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한 차원 더 전진하는데, 즉 생각이 더 내면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 수단은 생각이 기억 속의 지식들을 생각함 자체로부터 제거하는 것이고, 얼마 만큼 제거되느냐에 따라 얼마나 깊이 내면을 수색하는지가 결정된다.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 것은 다른 삶의 경우이다. 인간이 다른 삶에 오게 되어 영이 될 때, 실로 그는 자신의 기억 속의 지식들까지도 가져오지만, 거기서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와 선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도 하는데, 세상에서 보다 더 또렷하고 완전하게 이다. 이로부터 알는지 모르는 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해력을 형성하는 것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력이 형성되어지고 나면, 이 지식들은 최말단 평면(plane)을 구성해줄 뿐, 인간은 이 지식으로부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 지식 위에 있게 된다.

바로의 집도 들었다. 이는 자연 평면 전체를 통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고로 그의 “집”은 자연 평면 전체를 의미한다.

3-5절.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요셉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고, 지금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에 지각하는 능력을 주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지각의 능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야곱의 열 아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내적 의미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다”가 지각하는 능력을 주는 이유는 이어지는 사항들에서의 주제가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야곱의 열 아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 결합함이기 때문, 그리고 결합이 있을 때, 지각력이, 즉 진리에 애착함을 통하여, 고로 선으로부터 지각하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요셉이다. 이는 자신을 명백히 함(manifestation)을 의미한다.

나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가?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의 현존(現存)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가 아직 살아 계신가”의 의미는 거기로부터 현존하고 있다 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에서 사실 아버지가 살아계심으로 판단하고 있음에도 안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생각 속에서 현존했고, 이 현존함을 생각하면서 계속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이야기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인즉,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과의 결합은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 인 영적 선을 통하지 않고는 결괴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합이 결과되었을 때, 그들은 야곱의 열 아들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 아들들”, 즉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다.

그런데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은 아직 말할 상태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그의 형제들”인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대답할 수 없다”의 의미가 말할 상태에 아직 있지 않다로부터, 즉 진리들로부터 내적 인간과 말할 상태는 아직 못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가 여기서는 이렇다: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될 때, 또는 선이 진리와 결합될 때, 처음에는 내적 인간 쪽에서만의 교통함이 외적 인간과 더불어 있다; 즉 교통함이 아직 상호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 교통함이 상호적일 때, 결합이 있는다. 그러므로 요셉이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고, 그의 모든 형제들과 키스하고 난 후 처음으로 그의 형제들이 그와 대화했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15절). 이는 결합이 결과된 이후, 받아들임 덕택에 상호 교통함이 있다는 것이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셉 앞에서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당황함(cobsternation)이 있다”의 의미가 동요함(commotion)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황함은 그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동요함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에 관한 질서가 새로이 배열됨(dispostion)과 설정됨(setting)이 뜻하여진다. 질서 안에서의 이런 설정됨에 관하여, 즉 인간의 기억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질서 안에서 설정됨에 관하여는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실 경우, 천사들에게는 알려진다. 그 이유가 이것은 경이로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조그만 다발(bundle)들 같이 응집(cohere) 한다, 그리고 조그만 다발들 자체가 함께 응집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마음에 품는 것들에 따라서 있다. 이 응집함은 여느 인간도 믿어본 적이 없는 경이로운 것이다. 다른 삶에서 때로는 그것들이 시야에 잡히기도 한다. 그 이유가 영적인 이런저런 것들은 천국의 빛에서는 눈의 시각에 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눈의 시각은 아니다. 기억 속의 지식들과 진리들은 인간의 사랑들 만으로 황홀한 형체들로 배열되어진다,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수단으로 지옥의 형체들로,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수단으로 천국의 형체들로 배열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듭나지는 동안, 그리고 결합이 내적 인간의 선과 외적 인간의 진리들에서 결과되는 한편, 동요함은 진리들 사이에서 발생된다, 그 이유가 이 결합시에 다른 배열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 동요함이 여기서는 “당황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동요는 이전 상태의 바뀜으로부터, 즉 이전 상태에서 누려왔던 기쁨이 결핖됨으로부터 발생하는 걱정에 의해 진리 자체가 명명백백해진다. 또한 이 동요됨은 과거 삶에 관한 걱정으로도 자체를 표명한다, 즉 내적인 선과 내적 부분 자체를 더 낮은 자리에 추방해버리고 있었던 것에 대한 걱정이다. 이 걱정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새로운 자연 평면이 지각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들은 자연 평면 자체 역시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로의 경우, 그가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인데, 이는 그가 이집트의 왕이었기 때문인데, 그는 일반적 측면에서는 자연 평면 자체를 표현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 그리고 자연 평면 자체, 또는 자연적 인간 자체 모두는 하나로서 행동한다, 그 이유가 진리들은 내용들(알맹이들)이고, 자연 평면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적 의미에서 그릇이 의미되고, 내용은 어떤 시리즈에 따라서 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은 새로운 자연 평면을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고, 이를 위한 결합의 행동이 일반적인 설명(explication)에 일치하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의 결합, 또는 선이 진리와 결합함이 거행될 때, 첫 번째 순서는 인간이 진리에 감동되고 선과도 감동되는 지각력이 수여되는 것이다, 이때 동요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내면으로 교통함이 유입을 수단으로 주어진다; 등등이다. 이로부터 야곱의 아들들이 지금 표현하는 것은 새로운 자연 평면인데, 그 이유는 이전의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나에게 부디 가까이 오시오. 이는 내면적으로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오다”의 의미가 더 밀접하게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여기서는 내적 측면에 비교하여 외적 측면을 서술하는 경우이므로, 이는 더 내면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르는 것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과의 교통함에는 내면과 외면의 양쪽 측면에서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모르는 이유는 그가 내적 인간에 관한 관념, 그리고 외적 인간의 생명과 구분되는 내적 인간의 생명에 관한 관념을 자신을 위해 만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이에게 내적 인간에 대해 물어본다면, 이것은 우리 안쪽에 있는 인간이다는 정도의 생각 뿐일 경우가 허다할지 모른다. 게다가 안쪽 인간이 바깥쪽 인간, 즉 외적 인간과는 별도의 생명 (또한 삶)을 지니고 있어 완전 구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게다가 내적 인간의 삶은 더 순수하다는 것, 하여 인간이 죽을 때,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진짜 분리됨이 거행되고, 이 분리됨 이후 살아가는 내적 인간이 영(spirit)이라 불리운다는 것까지 연결해 생각을 정리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영이 인간 동물이라는 육체애 얹혀서 살고 있는 인간 당사자 자체이다. 이 영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나”이고 다른 삶에서는 이세상의 인간 같이 나타나는 육체라는 껍질 없는 진짜 “나”가 나타나고 있다. 저세상의 인간도 이세상의 인간이 향유한 것들, 즉 촉각, 후각, 시각, 청각, 이야기함, 생각함이 수여되어져 있다. 저 세상에 도착한 당사자가 자신이 다른 삶에 있다는 것을 꼼꼼히 반영해보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육체 안에 있던 자기를 상상하고 있다. 이는 내가 거기 있는 영들이 말하는 것에서 확인되었다. 어쨌든 이런 사항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의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이 무엇인지 이다. 이런 두 부분들에 관하여 생각을 정리해서 지닌다면, 이후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라는 단어의 등장에서 보다 더 선명한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 본다. 또한 여기서 “이리 가까이 내게로 오시오”에 의해 의미된 내면의 교통함이 뜻하는 것도 더욱 실감될 것이다. (성경의 첫 장 첫 절에 등장하는 “하늘” 과 “땅”이 성경을 여는 두 단어 인 셈인데, 이것이 비록 거듭남 이전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을 의미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지니는 두 인간을 선포함으로 성경의 책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에 떠올린다면, 이 두 인간에 대한 것을 생각 속에 정리해두는 것이 성경의 이해에 얼마나 중요할 것인지 실감되리라 본다. 역자 주)

그래서 그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이는 그 결과를 의미한다. 즉 보다 더 내면적으로 교통함이 결과된다 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요. 이는 유입을 수단으로 명백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의 형제 요셉이다”의 의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함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명백히 함은 유입을 수단으로 된다고 말한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으로 가는 방법은 유입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더 내면적인 교통함이 결과되어졌다. 유입을 수단으로 명백히 함이 선의 측면에서는 진리에 애착함을 통하여 통지함,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다; 그러나 진리 측면에서는 그 점에 관하여 인정함, 그리고 이것은 신앙이다.

당신들이 이집트로 팔았던. 이는 그들이 멀리했던 내적 부분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팔아버린 그”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내적 인간)이다로부터; 그리고 “팔다”의 의미가 멀리해버림, 소원해지게 함이다로부터(alienate) 알게 된다. “이집트”에 의해 가장 낮은 것이 여기서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인정함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는 측면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 고로 최말단, 또는 가장 낮은 것 쪽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요셉이 이런 경우에 처했었지만, 오늘날의 경우는 요셉이 의미하는 내적 인간도 우리라는 인간으로부터 소원된 단어로, 생소한 단어로 있기는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실로 이 단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이 교리로부터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낮은 것 쪽으로 거절되어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인정되지 않았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이 기억으로부터 멀어졌다기 보다는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적 의미에서 “판다”는 것은 신앙과 선행에 속한 것들을 멀리해버림, 결과적으로 인간을 내적 교회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소원해짐이다는 것은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같이 팔고 사는 것은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러나 “사다”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를 내 것 되게 함, 그리고 “팔다”에 의해서는 그것들로부터 멀어짐이다는 사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또한 “팔다”에 의해서는 선에 관한 지식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의 교통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거래함(trade)”이 이런 지식들을 획득하고 교통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우 팔다는 “은(돈)을 수단으로 하여 있어지는” 통상적인 장사에서의 팔다는 아니다.
“파는” 것이 소원해짐을 표시하는 것은 아래 말씀의 구절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내가 떠나보냈던 너희 어머니의 이혼 증서는 어디 있느냐?
또는 내가 너희를 판 나의 고리대금 업자는 누구냐? 보라, 너희의 죄들 때문에 너희는 팔렸었다, 그리고 너희의 위법 때문에 너희의 어머니는 떠나보내졌었다 (이. 50:1);
“어머니”는 교회를 표시한다; 그리고 “팔다”는 멀어짐(소원해짐)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때가 온다, 날이 가까이 와있다; 사는 자는 기뻐하지 마라, 그리고 파는 자는 슬퍼하지 마라; 그 이유가 분노는 거기로부터 모든 군중 위에 있다. 그 이유가 비록 그들의 목숨이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 아직 있을지라도 파는 자가 판 것을 되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겔. 7:12, 13).
위는 영적 교회인 “이스라엘의 토지”에 관해서이다; “파는 자”는 진리들을 멀리 있게 하고 거짓들을 자신에게 은근히 심은 자들을 표시한다.
요엘서에서:
유다의 아들들과 예루살렘의 아들들을 너희는 그리스인들의 아들들에게 팔았었다, 하여 너희는 그들을 자기들의 경계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보라 나는 그들을 너희가 그들을 팔았던 장소로부터 휘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을 유다의 아들들의 손 안으로 팔 것이고, 이들이 아주 멀리 떨어진 쪽의 사람들에게, 스바인들에게 팔 것이다 (욜. 3:6-8);
위는 두로와 시돈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판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도 표시한다. 모세의 첵에서:
그들의 반석(되신 분)이 그들을 팔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닫으셨다 (신. 32:30);
“파는” 것이 멀어짐을 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석”은 최고 의미에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표현 의미에서 신앙이다; “여호와”는 선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영적 의미에서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해 포획하는 것, “파는” 것은 멀리하는 것인 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늘의 왕국을 팔고 사는 것에 비교하신다:
하늘들의 왕국은 들판에 감추여 있는 보물에 견주어진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감추어두 고, 그리고 기쁨을 가득히 안고, 가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판다, 그리고 그 들판을 산다. 다시: 하늘들의 왕국은 아름다운 진주들을 찾는 상인에 비교된다; 그가 귀중한 진주 하나를 발견했을 때, 가서 그는 가진 것을 팔이서 그것을 샀다 (마. 13:44-46);
“하늘들의 왕국”은 인간과 함께 있는 선과 진리를, 고로 당사자와 더불어 있는 천국(하늘)을 표시한다; “들판”은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진주”는 진리를 표시한다; “사는” 것은 포획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함을 표시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그의 자기 자신을 멀리함을 표시한다, 고로 악들과 거짓들을 멀리함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그의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젊은 제 1 인 자에게 말하셨다, 그렇지만 네게 하나의 것이 부족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라,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분배하라, 그때 너는 천국에 있는 보물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눅. 18:22);
내적 의미에서 위 말씀에 의해 뜻해지는 바, 인간 자신 속의 모든 것들은 악들과 거짓들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인 이것들은 반드시 멀리해야만 함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멀리 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있는 보물”인 선들과 진리들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다른 구절에 있다:
너희의 재산을 팔아라, 그리고 자선(보시)을 하라, 닳아지지 않는 지갑을 만들어라, 실패함이 없는 천국들에 있는 보물을 만들어라 (눅. 12:33);
아마 모든 이는 위 말씀들 안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재산을 파는 누군가는 오늘날의 경우 자신을 거지로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행위에서 공적 주의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 외에도, 미래에 선행을 실시할 능력을 자신에게서 영영 박탈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국에는 지상에서 가난한 자였던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는 위의 구절들에 있는 의미도 더 포함하고 있다.
“파는” 것이 교회의 것들을 멀리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래 구절에 있다:
포로로 잡은 여성과 결혼하여 아내가 된 그녀가 만일 기뻐하지 않으면, 어디로이든 떠나보내라,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은을 받고 팔지 말라, 그리고 그녀를 가지고 이익을 만들지 말라, 그 이유는 그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신. 21:14);
“포로된 여성으로부터의 아내”란 진짜 지주로부터가 아닌 멀어진 진리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인간에 속하여 있는 교회의 선에 어느 방법에서 근접될는지 모른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렇지만 이 진리가 어떤 점에서 일치함이 없다면 제거될는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멀리해짐은 아니다는 것, 그 이유는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에서는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 법의 영적 의미이다.
마찬가지인데 아래에 법이 더 있다:
만일 이스라엘의 아들들로부터의 자기 형제들의 혼을 훔치고, 거기서 이득을 만들고, 그리고 그을 팔아먹은 자가 발견된다면, 그 도둑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여 너희는 너희 한가운데로부터 악들을 멀리해버릴는지 모른다 (신. 24:7);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도둑들”은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진리들을 획득한 이들, 그러나 그것들에 따라 살려는 목적에서가 아니고, 고로 심정으로부터 그것들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이익을 창출하려는 이들이다: 이런 도둑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지금 슬퍼하지 않는다. 이는 심정, 또는 의지의 불안을 의미한다. 이는 “슬퍼함”의 의미가 불안함(anxiety), 그리고 실로 심정 또는 의지로부터의 불안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즉각 이어지는 말인즉, “분노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분노(anger)”가 영의 슬픔, 또는 이해력에서의 슬픔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정 또는 의지의 슬픔, 그리고 영 또는 이해력의 슬픔이라 말한 이유는 상응을 수단으로 심정은 의지와 관계되기 때문, 그 이유는 의지는 천적 평면, 또는 사랑의 선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spirit, 숨, breath)은 폐에 관련되고, 이해력에 속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 그 이유는 이것은 영적 평면, 또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 라틴어에서는 영과 숨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당신의 눈에서 분노가 있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는 영의 슬픔, 또는 이해력의 슬픔을 의미한다. 이는 “분노”의 의미가 여기서는 슬픔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같은 감정의 반복, 즉 “슬퍼하지 않는다”의 반복이고, 그리고 “슬퍼하지 않는다”가 의지 또는 심정의 슬픔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마음의 다른쪽인 이해력 측면의 슬픔이 의미된다; 말씀에서 반복됨이 발생할 경우, 한쪽은 의지에, 다른 쪽은 이해력에 관련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하나는 사랑의 선쪽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진리쪽에서 이다; 그리고 “눈”의 의미가 이해함이다로부터 더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들이 저쪽으로 나를 팔았다. 이는 그들이 가장 낮은 쪽으로 소외되게 했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살게 만들고저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렇기 때문에 섭리로부터 그들에게 나누어 준(impart)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살게 만들려고”의 의미가 영적 생명이 있다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들 앞에 보냈다”의 의미가 섭리로부터 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것이 섭리로부터 이다는 것은 요셉의 꿈에서 분명해진다; 즉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그들 자신들을 굽혀 절할 것, 그리고 아버지도 그러할 것이 미리 보여졌는데, 이것이 섭리로부터가 아니면 예견되었을리 만무하다. “살게 만듦”에 의해 영적 생명이 의미된다는 것, 또는 거듭남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의미된다는 것은 이것 만으로부터 알런지 모른다. 즉 말씀의 영적 측면은 영적 생명 그 이상의 표현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말씀에는 자연적 생명이 있고 영적 생명이 있다. 자연적 생명은 말씀의 글자 의미에 있고, 영적 생명은 내적 의미 안에 있다;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 “살아있게 만듦”에 의해, 그리고 “생명”에 의해 글자 의미에서 영적 생명 자체가 뜻하여진다; 에스겔서에서:
내가 사악한 자에게 너희는 정녕 죽으리라 말할 때; 그리고 너희는 그에게 경고를 주지 않거나, 사악한 자로 그의 악한 길을 단념하고 살아 있게 만들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겔. 3:18)
다시:
너희는 보리 한웅큼과 빵 조각 때문에 내 백성 사이에서 나를 모독하여, 죽지 않아야 할 혼들이 살해되게 하고, 죽어야 할 혼들을 살게 만든다. 너희는 사악한 자의 손을 더 힘세지게 하여, (오히려) 그것들로 살아 있게 만들어 그의 악한 길로부터 되돌아오지 못한다 (겔. 13:19, 22).
호세아서에서:
이틀 후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살는지 모른다 (호. 6:2).
다윗서에서:
내가 생명의 토지에서 선을 보는 것을 믿었지 않으면 (시. 27:13).
계시록서에서:
극복하는 자에게 나는 하느님의 낙원의 한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로부터 먹도록 줄 것이다 (계. 2:7).
요한복음서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어 그들을 살게 만드심 같이, 아들도 그분이 뜻하는 자를 살게 만든다 (요. 5:21).
다시:
살게 만드는 것이 영이지, 육은 아무 이익도 내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말들은 영이고, 생명이다 (요. 6:63).
위 구절들에서 “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생명”은 영적 생명, 이 생명은 천국에 있는 생명, 그리고 이 생명이 단순히 “생명”이라 마태복음서에서 불리운다:
[문(gate)이] 좁고, 길이 협소하다, 이것은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거의 없다 (마. 7:14);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 (마. 18:8, 9; 19:17; 막. 9:43, 45, 47; 요. 5:24).

6-8절. 2년 동안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5년이 아직 있습니다. 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remains)를 놓으시려고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큰 피신으로 당신들이 살게 만드시려고 입니다. 8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되게 놓으셨고,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동안. 이것은 실제의 경우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앞 뒤 문맥의 진행으로부터 파악되는 바 설명이 필요 없다.

기근이 토지의 한가운데에 있은지 이 년이 되었다. 이는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서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햇수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기근”의 의미가 선의 결핍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빵(bread)”이 영적 의미에서 사랑의 선, 그리고 “식품(food)”이 진리의 선, 그러므로 “기근”은 선의 결핍, 그리고 “목마름”은 진리의 결핖이기 때문); 그리고 “토지의 한가운데에”, 즉 이집트의 한가운데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한가운데, 중앙 (midst)”이 가장 안쪽(inmost)이고, 거기는 선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년”은 선과 진리의 결합함의 상태를 표시하는데, 그 이유는 “2”가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 여기서의 경우, 결합은 아닌데, 2년이 기근의 햇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선이 일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적 마음 안에 진리들이 있어야만함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진리들은 진짜의 사랑으로부터 있는 애착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인간의 기억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들은 어떤 사랑을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합되어 거기에 남아 있다. 신앙의 진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이 진리들이 진리를 사랑함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면, 이 진리들은 그 사랑과 결합되어 남아 있다. 그것들이 결합되어오고 있을 때, 이때 다음의 경우들이 이어진다: 만일 애착이 재생산된다면, 그것과 결합된 진리들은 동시에 세상 밖으로 출시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거듭남 동안 (이는 성인 시기에만 결과되는데, 그 이유는 그전에는 당사자가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 동시에 그에게 감명을 준 진리들을 간직하면서, 그리고 결합되어 왔던 애착 안에 있는 이런저런 진리들을 수단으로 해서 이다; 그리고 이 애착, 즉 진리에 대한 애착이 선으로부터 인 바, 그는 점차 선쪽으로 인도된다.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하여 많은 경험으로 나에게 분명해졌다, 그 이유가 내가 주목했던 것은, 악령들이 악들과 거짓들을 주입했을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의 천사들이 이미 심어졌었던 진리들을 가지고 나를 지켜주어, 나로 하여금 악들과 거짓들을 억제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졌던 것은,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뿌리내려져왔던 신앙의 진리들은 천사들이 일하는 평면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평면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천사들에 의해 인도될 수 없어, 자신들이 지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천사들이 어느 곳에도 발붙일 곳이 없어 그냥 통과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평면은 신앙의 진리들이 행동 안으로 놓여지지 않으면, 즉 의지 안에 심어지고, 의지를 통하여 생활 안에 놓여지지 않으면 획득되어질 수도 없다. 또 하나 언급해둘만한 것은, 인간과 더불어 신앙의 진리들 안으로 천사들이 작업하는 것은 좀처럼 명백하게 거행되는 것, 즉 이 진리에 관한 생각들을 흥분시키기 위하여 주도적인 듯한 느낌을 나타내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착과 함께 이 진리에 일치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생산한다. 그 이유가 이 작업은 감지할 수 없는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기 때문, 이것은 시각에 표출될 때, 흐르는 빛 같이 나타난다, 이 빛은 선 안에 있는 셀 수 없는 진리들로 구성되고, 이것은 인간에 있는 어떤 낱개의 것을 에워싼다, 그리고 그를 진리 안에 있는 동안 이 진리의 사랑 안에서 간직한다. 그리하여 천사들은 인간의 마음을 거짓들로부터 승강되게 하고, 그를 악들로부터 보호한다. 어쨌든 이러저런 사항들은 인간에게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 년이 아직 더 있다. 이는 리메인스(remains)가 빛을 발할 때까지 이 상태의 기간을 의미한다. “5”의 의미가 리메인스(remains)이다로부터; 그리고 “년(year)”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기간은 “아직” 있다를 수단으로 이 햇수가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이 말들에 의해 리메인스가 빛을 발할 때까지의 이 상태의 기간이 의미된다는 것이다. 리메인스(remains)란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된 진리들과 선들이다. 여기서는 선이 자체를 드러내기 이전 진리에 애착함들과 인정함들이다. 선과 더불어 이것들은 빛을 발한다. 빛을 발하는 동안 이것들로부터 끌려나오는 만큼에서 생활에의 사용에 도움을 준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 영역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적인데, 비록 인간이 그것에 관해 아는 바 없을 지라도, 또는 기꺼이 알려하지 않아도 계속 된다. 그 이유가 인간 당사자는 낱개적인 미미한 사항들에서까지 섭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 그렇지만 인간 출생으로부터 마지막에 까지, 그다음 영원까지 이것은 계속적이다. 모두 각자와 더불어 어떤 숫자로 적어질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섭리에 속한 것들이 매 순간 발생한다.

경작함도 수확도 없는. 이는 한동안 선, 그리고 파생되는 진리도 나타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경작하다(밭을 갈다, plow)”의 의미가 진리들을 받기 위해 선을 수단으로 준비함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더 살핀다); 그리고 “수확”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수확은 작물이 영글어 그러모을 때이기 때문, 이로부터 “수확”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알려진다. 이 진리가 존재 안으로 오기 이전, 실로 진리들이 나타나나, 그것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이 있게 될 때의 진리들이고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은 아니다. 진리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이 있는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으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 안에 있는다. “경작함”이 선을 표시한다고 말해진 이유는 경작되는 들판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에서 이다, 고로 교회 속에 있는 선이다. 고로 “경작함”은 진리들을 받기 위해 선을 수단으로 준비됨이다; 더욱이 경작함에서 사용된 수소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을 의미한다.
이것이 경작함의 의미이기에, 표현 교회에 금해진 사항은 “수소와 나귀를 함께 가지고 (겨리를 지워가지고) 경작하는”것이다 (신. 22:10), 그러나 안쪽으로부터의 어떤 이유, 고로 영계로부터의 어떤 이유가 없다면 결코 금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사 함께 경작함에서 어떤 피해가 거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안쪽으로부터, 또는 영계로부터의 이유인즉, “수소로 경작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을 의미하고; “나귀로 경작하는” 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를 의미해서 이다. 위 금지 명령의 내면의 이유 또는 영적인 이유는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반드시 결합하여 하나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소와 나귀를 수단으로 하는 이런저런 경작을 기꺼이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천적 평면의 천사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된 진리는 아예 생각하는 것조차 엄두를 못낸다, 그 이유가 자신들과 더불은 모든 진리는 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선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양털과 아마를 섞어 짜서 옷을 만드는 것”도 금하였다 (신. 22:11); 그 이유가 “양털”은 선을, “아마”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밭을 가는” 것, “써레질하는” 것, “씨뿌리는” 것, “베어들이는” 것은 선과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속하는 이런저런 것들임이 호세아서로부터 분명하다:
나는 에브라임을 (짐승을) 타게(ride) 만들 것이다; 유다는 밭을 갈 것이다, 야곱은 그를 위하여 써레질을 할 것이다; 정의에 따라 네 자신을 위해 씨뿌려라, 경건함에 따라 베어들여라; 너를 위하여 묵히는 지면을 부수어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시어 정의를 가르치실 때까지 여호와를 찾을 때이다 (호. 10:11, 12);
(짐승을) “타는” 것이 에브라임을 서술하는 이유는 “타는” 것이 이해력을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교회의 지적 측면이다; 그러나 “경작하는” 것은 유다를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유다”는 교회의 선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서에서: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더냐? 누가 수소들을 가지고 경작할 것이냐? 하여 너희는 판단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쑥으로 바뀌게 했다 (암. 6:12);
“말들이 바위에서 달리더냐?”는 신앙의 진리가 이해되더냐?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바위는 영적 의미에서 신앙이기 때문이다 (창. 22 서문을 보라); 그리고 “말들”은 이해력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 “누가 수소들로 경작하더냐?”란 그가 선을 행할 것이냐?를 표시한다. “수소들”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 이것이 그렇게 행해질 수 없었다는 것이 이어지는 말, “너희가 판단을 쓸개로, 정의의 열매를 쓴쑥으로 바뀌게 했기 때문”에서 의미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쟁기를 자기 손에 놓았는데, 뒤쪽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왕국을 위하여 적합하지 않다 (눅. 9:62)
위 말들은 마태복음서의 아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집 위에 있는 자는 자기로 하여금 집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오지 않게 하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는 자기로 하여금 자기 옷들을 가져가려 되돌아 가지 않게 하라 (마. 24:17, 18);
위 말들의 의미는 이렇다: 선 안에 있는 자는 신앙의 교리물들에 속하는 것들 쪽으로 자신을 향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로 “자기 손을 쟁기에 놓은 자”는 선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나 “뒤쪽을 쳐다보는” 것은 신앙의 교리물들을 찾는 자이다, 그리고 고로 선을 돌보지 않게 된다. 엘리야가 불쾌히 여겼던 사건이 있다. 즉 그가 들판을 경작하는 엘리사를 불렀을 때, 그가 묻기를, 자기 아버지 어머니에게 키스를 먼저 했으면 (작별 인사) 하고 물었을 때였다; 엘리야가 말했다, “가고, 되돌아오라, 그 이유가 내가 네게 무엇을 행하였는지 때문이다” (왕상. 19:19-21). 반대적 의미에서 “경작하는” 것은 선을 삭제해버리는 악들을 의미한다, 고로 황폐함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시온은 들판 같이 경작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무더기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산은 숲의 높은 장소들 같이 되어지는 것이다 (예. 26:18; 미. 3:12).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습니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섭리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들 앞에 나를 보냈다”의 의미가 신성의 섭리이다에서 알게 된다.

당신들을 위하여 토지에 리메인스를 놓으시려고. 이는 교회의 중앙과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한다. 이는 리메인스(remains)의 의미가 주님에 의해 인간 안쪽에 저장하신 진리들에 결합된 선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회의 중앙과 가장 깊은 쪽에를 의미한다. “중앙과 가장 깊은 쪽”이라 말한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가장 깊은 곳은 가장 안쪽의 것들과 내면의 것들이 함께 있는 곳이 자연 평면의 중앙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연속되는 것들에서 서로를 뒤잇는 것 안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연 평면에서의 이 경우는 동시적이다; 고로 가장 깊은 쪽의 것들은 자신들을 외면의 것들에 배열한다. “토지에 당신들을 위하여 리메인스를 놓아두시려고”는 교회의 가장 깊은 측면이 야곱의 아들들과 더불어 있어야만 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가장 깊은 안쪽에 있어야만 한다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형체 안에 교회의 표현이 그들과 더불어 설립되어야 한다는 말, 하여 말씀이 거기에 있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교회에 비교하여, 추상적으로는 민족이나 나라로부터 “리메인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리메인스 또는 나머지(residue)라는 단어는 간혹 말씀에서 언급되는데, 이 두 단어 모두에 의한 표현들이 단지 백성의 남은 자, 나라 속의 남은 자 같은 식으로 글자에 따라서만 이해되고 있다; 허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아왔던 것은 그 단어들이 영적 의미에서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해두신 선들과 진리들이다는 것이다; 아래 구절을 보자. 이사야서에서: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영예를 위하여와 영광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피신한 그들에게 장엄함과 장식함을 위하여 땅의 열매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남은 이들, 예루살렘 에 남겨진(residuus) 이들, 예루살렘에서 생명 안으로 적혀 있는 모든 이가 거룩하다 불리울 때가 온다 (이. 4:2, 3);
“시온에 남은 이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들”은 생명 안으로 적혀 있는 다른 이들 보다 더 거룩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는, “남은 자와 남겨진 자”에 의해 거룩한 것들과 생명 안으로 적힌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 이런 거룩한 것들은 진리들과 결합된 선들이고, 이것들은 주님에 의해 내면의 인간 안에 저장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리고 야곱의 집의 피신했던 이들이 자기들을 친 자들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고 진리 안에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여호와께 기댈 것이다.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남은 자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이. 10:20, 21);
위의 “남은 자”가 어떤 백성, 또는 어떤 나라로부터의 남은 자가 아니다는 것은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이스라엘이 뜻해지지 않는 것, “야곱”에 의해 야곱이 뜻해지지 않고, 모두에 의해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것이 뜻해진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알는지 모른다. 여기서의 경우, “남은 자들”에 의해 이스라엘과 야곱의 남은 자가 아니라 교회에 속하는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된다. 그렇다, “어떤 백성의 남은 자들”, 또는 “나라 에 남겨진 자들”, 이런 식으로 말씀에서 말하여질 때, 어떤 백성이나 나라의 남은 자가 의미되지 않는 이유는 내적 의미에서 “백성”에 의해 진리들이, “나라(민족)”에 의해서는 선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리메인스(남은 자)”에 의해 진리들과 선들이 의미되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하여 이상한 듯 나타나는 이유는 글자 의미, 특히 역사적 부분에서, 이런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강력하게 보류되게, 물러나 있게 장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때 백성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작은 길(path)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앗수르로부터 남겨진 자(residue)일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올라올 때 바다를 통과하는 그들을 위해 있었던 것 같다 (이. 11:16);
위 구절 역시 의미는 비슷하다; “앗수르로부터 남겨진 자”란 외고집의 잘못된 추론을 통하여 파괴되지 않은 이들이다.
다시:
그날에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남은 자에게 잘생김의 머리띠를 위하여, 왕관을 장식품 을 위하여 있으실 것이다 (이. 28:5).
다시:
더욱이 남겨진(residua) 유다의 가문의 피신자가 다시 아래쪽을 향하여 뿌리를 내릴 것이고, 위쪽을 향하여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남은 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갈 것이고, 시온으로부터서 는 피신자가 나갈 것이다 (이. 37:31, 32).
다시:
버터와 꿀을 남겨진 모든 자가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먹을 것이다 (이. 7:2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내가 그들을 흩뜨려버렸던 모든 토지들로부터 내 양떼의 남은 것들을 그러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양우리로 도로 데려다놓을 것이다, 하여 그들은 생산하고 번성할는지 모른다 (예. 23:3).
다시:
검에 의해 남은 자들로부터의 백성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그에게 쉼을 주려함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다 (예. 31:2);
“광야에서 검에 의해 남은 이들로부터의 백성”은 “유아들”이라 불리워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죽고 남은 자들이고, 가나안의 토지로 데려와졌다. 이 “유아들(infants, 작은 아이들, 대략 7세 미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들을 수단으로 순진의 선들이 의미되었다, 그들이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받아들여짐은 주님의 왕국 안으로의 입장이 승인됨을 표현하였다.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나라들 사이에서 피신하는 때, 너희가 땅에서 흩터지는 때, 나는 남겨질 자를 만들 것이다. 그때 너희의 피신한 이들은 포로가 된 나라 사이에서 나를 기억할 것이다 (겔. 6:8, 9)
인간의 내면의 것들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이 “흩트러지고 포로가 된 나라들 사이에서 남은 자와 남겨진 자”에 의해 표현된 이유는 인간이 악들과 거짓들 사이에서 있고 이것들에 포로가 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악들과 거짓들은 “나라들”에 의해 의미 것들이다. 외적 인간, 내적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때, (아껴둘만한 것까지) 깡그리 분리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사자의 미래 거듭남의 발전이 다시 있을 때의 경우를 위해 선들과 진리들을 그러 모아 저장해두신다. 이렇지 않다면, 인간은 구원이 가능해질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리메인스 없이 누구도 구원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모든 이가 피신할 때가 올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던 바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사이에 여호와께서 부를 자가 있을 것이다 (욜. 2:32).
미가서에서:
나라들 사이에, 많은 백성들의 한가운데에서 야곱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인데, 마치 사자가 숲의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 (미. 5:8).
스바냐서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외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기치는 혀도 그들의 입 안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먹여지고 쉼에 있을 것이고, 아무도 두려움을 만들지 않는다 (습. 3:13);
스가랴서에서:
도성의 거리들은 그 거리들에서 노는 소년소녀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네 백성의 남은 자들의 눈에서 경이로울 것이다: 지금, 나는 이전의 날들 같지 않게 벡성의 남은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것은 평화의 씨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가 그것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땅은 그것의 증가분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들은 그들의 이슬을 산출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백성의 남은 자를 이 모든 것들의 상속자로 만들 것이다 (슥. 8:5, 6, 11, 12);
위에서 리메인스(남은 자)들이 “평화의 씨”라 불리운다, 그리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선의 진리들에 있는 이들이 “포도나무는 그것의 열매를, 땅은 그것의 증가분을, 하늘들은 그들의 이슬을 산출한다”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영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리메인스는 생활 속의 악들과 거짓들로부터의 확신(거짓들에 설득됨)에 의해 닫혀지고,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에는 인정해왔던 진리들을 부정함에 의해 그것들은 살라져버리고 만다, 그 이유가 이것은 모독이라 불리우는 진리와 거짓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서에서:
그분은 인간을 옮기실 것이다, 그리고 사막들이 토지의 한가운데에서 번성할 것이다: 거의 누구도 거기서 있지 못하나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십분의 일이) 근절될 것이다 (이. 6:12, 13)
“10”은 리메인스를 표시한다. 다시:
나는 너희의 뿌리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의 남겨진 그것들을 죽일 것이다 (이. 14:30);
위는 블레셋에 관하여서이다, 이들은 지식들의 지식들에만 있는 이들, 지식들로부터의 생활이 없는 이들이다; 위에서 남겨진 이들이 “뿌리”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뿌리들로부터 같이 그것들(지식들)로부터 선들과 진리들이 자라오르기 때문, 이것이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을 옮기실 것이다”는 리메인스를 파괴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젊은 이들은 검에 의해 죽을 것이다; 그들의 아들들과 그들의 딸들은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에게 남은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예. 11:22, 23);
위는 아나돗인에 관해서이다. 다시:
나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데려갈 것이다, 이들은 이집트에 체류하려고 그들의 얼굴을 이집트의 토지 안으로 가게 놓아둔 자들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 살라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피신자는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남은 자로 남겨진 자가 있는데, 그는 이집트의 토지에 거주하려고 왔던 자이다 (예. 44:12, 14, 28);
유다 지파로부터 있던 이들이 이집트에 체류하는 것, 거기에 거주하지 못하게 한 이유, 그리고 이 금지가 매우 심각한 금지 명령이었던 이유인즉, 유다 지파는 주님의 천적 평면의 교회를 표현했기 때문, 천적 평면은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하여 지독하게도 기꺼이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천적 수준의 선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 쪽으로 자신들을 향하게 한다면 선이 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천적 왕국에 있는 이들은 천적인 선 안에 있는 바, (그리고 천적 진리는 선행이고, 한편 영적 진리는 신앙이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꺼내기를 주저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선으로부터 “내려가지” 않도록, 그리고 뒤쪽을 향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 말씀에서도 의미된다:
집 위에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집으로부터 어떤 것을 가져가려 내려 가게 하지 말라; 그리고 들판에 있는 자, 자기로 하여금 자기 옷을 가져가려 되돌아가게 하지 말라(마. 24:17, 18);
위 구절은 앞에서 살폈다 (5895항)l 그리고 이 말씀도 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눅. 17:32);
그녀는 뒤쪽을 쳐다보았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
어떤 것도 남겨지는 것이 없도록 철저히 저주된 나라들에 의해 불법이 그들과 더불어 극점에 달했다는 것, 하여 잔존한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고로 리메인스가 전혀 없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모세의 책에서:
그들은 바산 왕 옥을 쳐부셨다, 그리고 모든 그의 아들들, 그리고 모든 그의 백성들,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였다 (민. 21:35; 신. 3:3).
다시:
그들은 시혼의 성을 공략했다, 그리고 성의 모든 자, 남자, 여인, 어린 아이에게 저주를 주었다; 그들은 하나도 남지 못하게 했다 (신. 2:34).
그들이 “저주를 주었다”라고 쓰인 구절은 더 있다.
리메인스에 주목하면, 또는 주님에 의해 인간의 내면들에 저장된 선들과 진리들에 주목하면, 이렇다: 인간이 애착으로부터, 고로 자유함에서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이때 선과 진리는 심어진다. 그리고 이 심어짐이 거행될 때, 천국으로부터의 천사들은 더 가까이 접근하고, 인간과 자신들을 결합한다. 이 결합은 인간의 내면들에서 선들과 진리들이 출시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 측면으로부터의 것들에 있을 때, 마치 그가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있을 경우, 이때 천사들은 물러간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갈 때, 이때 이런저런 선들과 진리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때 결합이 있었은즉, 그 인간은 천사들과 결합하는 능력 안에는 있다, 고로 자기에게 속하는 선과 진리에 대한 수용력은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갖가지 사용에 따라 이런저런 것들을 배치하시는 주님의 기뻐하심이 있는 것 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거행되지는 않는다.

당신들을 살게 만드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을 위하여 거기로부터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 “살게 만든다”는 것은 영적 생명이 있다를 의미한다. 영적 생명의 모든 것은 리메인스로부터 인 바, 거기로부터 영적 생명이 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이 거기로부터 있기 때문에, 이 리메인스에 관하여 말해진 이후 즉각 뒤이어지는 것은 “당신들을 살게 만드시려고”이다, 즉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큰 피신으로. 이는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이는 “피신함(escape)”의 의미가 지옥에 떨어짐에서 해방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해방됨은 리메인스를 수단으로, 즉 주님에 의해 인간에게 저장하신 선들과 진리들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선들과 진리들을 받은 자, 즉 그것들이 내면들 안에 심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자는 지옥에 떨어짐을 피한다, 그리고 남겨진 자 사이에 있는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피신”이 말하여지는 곳에서는 “남겨진 자”나 “리메인스”의 언급 또한 있는다. 여기서는 요셉을 수단으로 하여서이고, 다른 구절을 더 읽어보자: 이사야서에서:
그 날에 땅의 열매가 이스라엘의 피신자를 위한 장식과 당당함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 남아 있는 자,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가 거룩하다 불리우는 때가 올 것이다
(이. 4:2, 3).
다시: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그리고 야곱의 가문의 피신자가 자기를 친 자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을 것이다 (이. 10:20).
다시:
더욱이 남겨진 유다의 가문의 피신자가 다시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쪽으로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그 이유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갈 것이고, 시온으로부터서는 피신자가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37:31, 32).
에스겔서에서:
너희가 나라들 사이에서 검을 피하는 자 얼마를 가질 때, 너희가 땅에서 흩어질 때, 나는 남겨지는 자를 만들 것이다; 이때 너희로부터의 피신한 그들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겔. 6:8, 9).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자들이 피신하는 때가 온다; 여호와께서 말하신 바대로, 시온에서, 예루살렘 에서 피신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자 사이에서 여호와께서 부를 자가 있다 (욜. 2:32).
예레미야서에서:
피신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남은 자로 남겨지는 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예. 44:12, 14)
위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피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피신하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진 이들이다, 그리고 “피신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짐으로부터 건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나를 저쪽에 보낸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자연 평면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로 떠나게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보내진 곳, “저쪽”인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당신들이 나를 보내지 않았다”는 그들이 떠나보내지 않았다인 것은 분명하다.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이 이것을 실시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이에 관하여는 앞의 요셉의 사건을 살필 때 밝히 설명했다: 즉 그가 이집트에 팔리우고, 그때 처음에는 보디발의 집을 섬겼을 때인데, 그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보다 낮은 의미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지는 이들을 표현했던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은 배워지는 처음의 것들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로부터 결말되어지는 것이 진리들이기 때문, 고로 이 지식들은 결말로 얻은 진리들에게 종결점인 셈이다. 이후 이 지식들은 더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진보를 만들어 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요셉이 표현했는 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신성이 그를 거기에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바로에게는 아버지되게 놓으셨다. 이는 지금 자연 평면은 그분으로부터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분으로부터이다는 것은 그가 “아버지로 앉다”에 의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아들들은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적절한 의미는 선이다; 그리고 선에 내적, 외적 인간의 모든 것들이 의존되는 바, “하느님이 바로에게 아버지로 자기를 앉힘”에 의해 그분으로부터, 즉 선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있다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요셉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 또는 내적인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유입을 수단으로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질서 안에 놓이고, 마지막으로 자연 평면이 자체로부터 있게 해준다.

그의 모든 집에는 주가 되게 하셨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모든 집”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모든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기의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이다는 것이 요셉이 그것 위에 주(lord)로 앉혔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더욱이 말씀에 있는 “주”는 선을 서술한다.

나는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통치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을 배열한다를 의미한다. 이는 “통치한다”의미가 배열 배치한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다로부터, 고로 모든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이런 지식들은 자연적 마음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자연적 마음의 지적 부분(이해력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내적 인간으로부터 흘러드는 선이 거기서는 의지 부분을 만들고 거기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배열한다.

9-13절.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10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고,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입니다. 11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뿌리 뽑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그리고 보라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을 당신들의 눈이 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고 있다. 13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을 말씀드리시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당신들은 서둘러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십시오. 이는 영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이다로부터. 영적 선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아버지이다고 말한 이유는, 영적 선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 내적 부분이 출시되기 전에 이미 외적 부분은 있었다는 것, 마치 아들이 있기 전에 아버지가 이미 있었다는 논리에서 뜻해진 말이다. 그러나 발전함의 질서는 외면의 것들로부터 내면의 것들 쪽으로, 마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지적인 것들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쪽의 것들은 안쪽의 것들에 평면을 제공한다. 이런 발전으로부터, 또는 이 출생으로부터 외적 부분은 내적 부분에 의해 “아버지”라 불리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인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아버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오, 당신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일 경우,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celestial)이다로부터.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관하여 지각(력)이 있다가 의미되는 이유는 “당신의 아들 요셉이 말했다”의 내적 의미가 영적 선 안으로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의 유입이 지각력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모든 이집트의 주로 세웠습니다. 이는 자연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각각을 배열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세움”의 의미함이 배열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모든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고로 그 평면에 있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려 오십시오, 지체마십시오. 이는 확실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내려오다”, 또는 “나에게 오다”의 의미가 결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지체 말라”의 의미가 확실한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 거주할 것입니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중앙에를 의미한다. 이는 “거주하다”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고센의 토지”의 의미가 중앙 또는 가장 안쪽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토지가 이집트 안에 있고, “이집트”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이 의미되기 때문에, “고센의 토지”는 자연 평면에서 중앙, 가장 안쪽이다. 고센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가장 좋은 지역이었는 바,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 자연 평면에서 가장 좋은 곳은 단연 중앙, 한가운데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서 선 자체는 태양 같은 어떤 것으로 있고, 중앙으로부터 변두리에 있는 진리들에 빛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저 가까이 계실 것이다. 이는 영구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가까이 있다”의 의미가 영구적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요셉에게 오다”에 의해 결합이 의미되기 때문. 그러므로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것, 고로 그 옆에 계속적으로 있는 것은 영구적인 결합이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이는 영적 선 그리고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당신”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의 아들들”의 의미가 이 선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로부터,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 “아들들의 아들들”의 의미가 이것들로부터 있는 것들, 즉 다시 태어나고 파생된 진리들이다. 선이 첫 위치 (상석)에 있고, 지배할 때, 이 선은 계속적으로 진리들을 생산한다. 즉 진리들은 주변으로 더욱 많은 진리들을 불려가는데, 마치 아주 강한 빛을 내는 별 주위에 작은 별들이 두루 깔리는 것 같다. 선만이 진리들을 증가되게 하는 것은 아니고 진리들로부터 진리들이 배가된다. 이것이 “아들들의 아들들”, 또는 손자 등등이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통하여서가 아니면 그의 형제들을 초대하지 못한다, 하여 “그”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아들들의 아들들과 더불어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 중매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양떼, 그리고 당신의 목축들. 이는 내면과 외면에 있는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의 의미가 내적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내면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는 그 양떼가 이스라엘의 양떼이기 때문, 이스라엘에 의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축”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목축”에 의해 외면의 선이, “양떼”에 의해 내면의 선이 의미되는 이유는 목축을 구성하는 짐승들이 수소나 거세한 수소이고, 이것들은 제물을 바침에서 선행의 외적 선들, 또는 외적 인간의 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떼를 구성하는 짐승은 어린 양, 양, 염소들이고, 선행의 내적 선, 또한 내적 인간의 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후자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말씀에서 흔히 읽는 단어 “양떼(flock)”로 불리우고, 그것들을 인도하는 자가 “목자”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 이는 거기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있는 것 모두이다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들과 진리들은 아버지로서의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 그러므로 그것으로 있는 바 그것들은 그것 속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당신을 떠받들 것입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계속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떠받든다(sustain)”의 의미가, 이것이 요셉에 의해 말해질 경우,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을 표현하는 그가 말할 경우인 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이 계속 유입됨이 의미된다; 영적 의미에서 떠받친다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선의 유입과 진리의 유입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로부터 천사들 역시 유지 지탱되고, 이로부터 인간의 혼도(즉 그의 내적 인간도) 그러하다. 이 떠받쳐짐은 식료품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떠받쳐짐과 상응된다; 그러므로 “식품(food)”에 의해 선이, “음료(drink)”에 의해서는 진리가 상응된다. 이러한 바, 인간이 식품에 관여할 때,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생각에 관여한다, 특이하고 경이로운 것은 식품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르게 관여한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이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와 더불은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에 관한 생각 안에 있다, 그 이유는 빵이 사랑의 선과, 포도주는 신앙의 선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말씀에서도 같은 상응을 가진다.
인간의 혼(즉 내적 인간)이 영적 식품과 음료, 즉 선과 진리에 의해 떠받쳐진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모세의 책에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모두 각각의 말하심(言說, utterance)을 수단으로 인간은 살아 있다 (신. 8:3; 마. 4:4);
“여호와의 입으로부터의 말하심”은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선과 진리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멸해지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지 말라, 그러나 영원한 생명 쪽으로 남아있게 하는 식품을 위하여 노동하라. 이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 6:27).
다시:
제자들이 예수에게 간절히 원하여 말하기를, 스승이시여, 잡수십시오. 그분이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식품을 가지고 있다 (요. 4:31, 32).
그리고 음료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인데: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이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해서 마시게 하라; 내 안에서 믿는 자는 누구이든, 성경이 말했던 그대로, 그의 배로부터 살아있는 물의 시내들이 흐를 것이다 (요. 7:37, 38).

그 이유가 기근의 다섯 해가 아직 더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이 결핍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이미 “기근”과 “다섯”에 관하여는 살핀 바 있어 설명은 생략한다.

당신이 뿌리뽑히지 않도록. 이는 멸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당신과 당신의 집식구, 그리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이는 영적 선 그리고 영적 선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당신”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집식구,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영적 평면에 속하는 모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보라, 당신들의 눈이 보고 있다. 이는 지각으로부터 증언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과 “보는” 것의 의미함이 지각함이다로부터; 고로 증언함이 의미됨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아우 베냐민의 눈. 이는 중매자의 지각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눈”과 “보다”의 의미가 이해하고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의 경우 이렇다: 베냐민이 중매자를 표현하고, 이 중매자는 내면의 진리이고, 이 진리는 “요셉”인 내적 선에 의존하는 바, 이 진리는 그의 열 형제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인 외적 진리 보다 더 명료하고 정교한 지각을 가졌다. 즉 진리와 선이 내적 부분에 더 가까울수록, 그것들은 더 완전한 지각력을 가지는 바, 천국의 빛에서 더 깊게 지각하고, 주님 쪽으로 더 가까이 위치한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진리의 유입은 계속적인 조정함(mediation), 그리고 연속적임을 통하여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의 원리들(첫 등차) 또는 (주님으로부터의 유입됨이) 시작하는 등차에 있는 이들은 중간 등차나 최말단 등차에 있는 이들 보다 더 명료한 지각과 더불어 유입을 받는다(그 이유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받는 셈이기 때문). 거리들에 따라서 (빛 속에 있는 경우) 선과 진리의 연속적인 희미해짐이 있다. 그 이유가 등차를 수단으로 계속적으로 더 완전해짐에는 상대적으로 어둠침침이 있기 때문이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중매자의 지각함으로부터 증언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다. 그 이유는 중매자는 내면이고,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진리들은 외면이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 이는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첫 증언은 그들의 눈이 본 것으로, 두 번째 증언은 베냐민의 눈이 본 것으로, 지금은 세 번째의 증언으로 그가 그들에게 말하는 그의 입을 가지고 이다; 이럼으로해서 그가 요셉이다는 것에 대한 모든 의구심이 제거되었다; 결과적으로 (요셉 자신이) 완전히 명백하게 나타났다는 것, 그러므로 이 말에는 명백하게 나타냄이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아버지에게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화를 말하시오. 이는 자연 평면에서 영적 (평면의) 천국이 영적 선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하다이다로부터; “영화(glory)”의 의미가 영적 천국 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 고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교통함이 만들어지게 될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내 영화의 모든 것을 아버지에 말하라”에 의해 자연 평면에서 영적 선이 영적 (평면의) 천국과 교류함이 의미된다.
“영화”가 영적 (평면의) 천국을 표시함에 주목하면, 이렇다; 천국을 만들어내는(form, consist) 두 왕국들이 있다; 즉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천적 왕국은 가장 안쪽 천국, 또는 세 번째 천국, 그리고 영적 왕국은 중간의 천국, 또는 두 번째 천국이다. 천적 평면에 있는 선은 천적인 (수준의) 선이라 불리우고, 영적 평면에 있는 선은 영적인 (수준의) 선이라 불리운다. 천적 선은 주님을 사랑함의 선이고, 영적인 선은 이웃을 향한 선이다. 이 두 왕국의 결합에 주목해보면, 이 두 왕국을 결합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이다. 그 이유가 천적 왕국의 내적 부분은 주님을 사랑함 이고 외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 이기 때문이다; 한편, 영적 왕국의 내적 부분은 이웃을 향한 선행이고, 외적 부분은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이다. 이로부터 이 두 왕국의 결합은 이웃을 향한 선행을 통하여 결과됨이 분명하다. 그 이유가 이 선행에서 천적 왕국의 종착점이 있고, 영적 왕국의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출발과 도착이 있는 버스 터미널을 연상해보아도 될지 모른다 역자주.) 고로 전자의 마지막이 후자의 시작이다. 이런 관계로 이 둘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영화”가 무엇인지 이제 말해본다. “영화(영광)”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 고로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이다. 그러나 표현 의미에서 “영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선, 또는 선행(charity)이고, 이것은 천적 왕국의 외적 선이고 주님의 영적 왕국의 내적 선이다, 그 이유가 이 선은 진짜 의미에서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영적 선, 또는 선행인 이스라엘이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이 천국들에서 영적 왕국을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땅에서 영적 교회를 만들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말하라고 한 요셉의 “영광”을 수단으로는 영적 (평면의) 천국이 뜻해진다. 영적 천국이 “영광”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 천국에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빛 안에서, 밝게 빛남 안에서, 광휘 안에서 이기 때문이다.
“영광”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는 것, 이것이 왕 측면에서의 주님의 속성이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에 관한 영광을 보았고, 은총과 진리로 가득하였다 (요. 1:14);
“말씀”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광”은 신성한 진리를 서술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산에서 변모하셨을 때;
보라 거기에 그분과 더불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이들이 영광 안에서 보여졌다 (눅. 9:30, 31);
주님께서는 위 광경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신성한 빛 안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보이셨다; 그리고 이때 그분이 보이셨던 형체는 내적 의미에서 있는 말씀과 같은 것을 바라보도록(view) 표출되었다; 고로 이것은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 이유가 말씀은 교회의 사용을 위한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분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도 동시에 바라보게 표출된 것이다; 그 이유가 모세에 의해서는 율법이, 고로 역사적 부분과 더불은 모세의 책들을 표현되었고, 엘리야에 의해서는 예언서들, 또는 예언의 말씀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법을 뜻한다에 대하여는 창. 18장 서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엘리야”가 예언의 말씀을 뜻함도 같은 서문에서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능력과 영광과 더불어 하늘의 구름들 안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 24:30);
말씀의 글자 의미가 “구름”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는 “영광”이다. 외적 의미 측면에서의 말씀은 구름 안에서 있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마음들이 어둠 안에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구름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떤 누구에게나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적 의미에 속하는 거룩한 것들은 세상에 있는 악한 인간(people)에 의해 모독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의 모두 각각의 거주지 위에, 그리고 그녀의 회합의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불의 불꽃이 빛을 내게 창조하실 것이다;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낮 동안에는 그늘을 위하여 성막이 있을 것이다 (이. 4:5, 6).
그런고로 성막 위에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불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성막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를, 고로 교회의 신성한 진리인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같은 사항이 모세의 책에서 이 말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주택을 채웠다 (출. 40:34).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 앞에서 만남의 천막에서 나타났다 (민. 14:10).
다른 곳에서:
구름이 천막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 (민. 16:42).
마찬가지로 시내산 위에서 “구름”과 “영광”,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갔을 때, 구름이 산을 덮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육일 동안 시내산에 거주하셨다 (출. 24:15, 16).
이런 사항들이 표현한 것 역시 법, 즉 신성한 진리인 법때문이었고, 하여 이 산으로부터 선포되었다. 여호와의 구름과 영광이 모세가 산에 올라 갔을 때 보여진 이유는 그가 법, 즉 역사적 말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말해지는 것은, “모세와 예언자들”, 또는 “율법과 예언서들”이라 불러지는 것이다. “법”에 의해서는 모세의 책과 더불어 역사적 부분의 말씀이, 그러나 예언서들은 아니다, 이 책들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역사적 부분과 예언적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율법과 예언서들”이라 말해질 경우, “율법”은 역사적 말씀을, “예언서들”에 의해서는 예언적 말씀이 뜻해진다.
신성한 진리가 거룹을 빙두른 구름에서와 그것들 위에서 무지개로서 밝음에 의해 표현되었다:
나는 불의 나타남, 마치 빙둘러 빛남의 나타남을 보았다; 비가 온 날의 구름에 있는 활의 나타남 같았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나타남이었다 (겔. 1:27, 28);
그리고 이렇게 불리워진다:
여호와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 (겔. 8:4; 10:18, 19; 11:22, 23);
비교적 측면에서 가장 깊은 천국의 영광은 “여호와의 영광”, 비교적 측면에서 중간, 또는 영적 천국에서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이라 불리운다. 천국들에 있는 신성한 진리가 영광 안에서 나타나는 이유는 영적 천국에서의 진리 자체가 빛나는 구름으로 눈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이는 나에게도 보도록 허락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진리 안쪽의 선은 거기서 불타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로 불에 의해 다양해진 구름은 외적 의미에서 “영광”인 경이로운 양상들을 표출한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의 “영광”은 총명과 지혜이고, 이것들이 영광에 의해 표현되어져 있다.
신성한 진리, 이로부터 모든 지혜와 총명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적 시각 앞에 다채로운 구름의 나타남인데, “영광”이다. 아래 구절들에서 분명해진다: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살아 있음이 나이다, 그리고 온 땅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다 (민. 14:21);
위 말씀은 여호와께서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의절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의 어린 것들만이 가나안의 토지에 갈 것이라고 말해졌을 때 였다, 이런 상황 아래, “온 땅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채워졌다”에 의해, 그들과 더불은 교회의 표현만 할 뿐임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대부분이 그들을 취급하고, 거기에 여호와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이와 더불어 온 천국도 (영광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이로부터 교회의 거룩한 것들이 있을 것이 의미되고 있다.
이사야서에서:
스랍이 소리쳤다, 거룩, 거룩, 거룩, 여호와 체바욷이시다; 모든 땅의 충만함이 그분의 영광이다 (이. 6:3).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밝히 알리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육체가 함께 볼 것이다 (이. 40:5).
다시:
그러므로 우림 안에서, 바다의 섬에서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자 (이. 24:15);
“우림”은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있는 빛을 표시한다; “바다의 섬들”은 진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이들을 표시한다.
다시:
레바논의 영광이 그것에 주어질 것이다, 갈멜과 샤론의 영예;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우리의 하느님의 영예를 볼 것이다 (이. 35:2);
“레바논”은 영적 교회를 표시한다; “갈멜과 샤론”은 천적 교회를 표시한다; 선행인 천적 진리가 뜻해질 때, 글자로부터까지 “여호와의 영광”을 서술하고 있다; 앞 구절(이. 24:15)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예”가 서술되는데, 이는 영적 선이 뜻해질 때, 이것 역시 선행이 있을 때이다.
다시:
일어나라, 빛을 발함이 있으라, 네 빛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 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는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 위에서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 60:1, 2);
위는 주님에 관하여서이고, 이분이 “빛”이라 불리우신다 (요. 1:4, 9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분 위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해진다; 즉 신성한 진리가 그분의 것이다고 말해진다. 마찬가지가 같은 예언서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나 지신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행할 것이다; 어찌 그것이 모독되어진다는 말인가? 내 영광을 나는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 (이. 48:11);
위 구절도 주님에 관하여서 이다;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신성한 인간을, 또한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 거기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는다”란 그분 자신과 하나인 신성한 인간에게 만 그것을 주신다는 말이다.
계시록서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발광체는 가장 귀중한 돌 같다 (계. 21:10, 1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천국들에 있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다, 그리고 땅에서는 그분의 영적 교회이다, 이 둘을 “영광”이 서술하고 있다; “발광체”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이다.
말씀에서 신성한 진리가 왕권에 의해 표현되듯,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왕들에 의해 표현되므로 “영광”을 왕의 속성이 되고 있다. 다윗서에서:
너희 머리들을 들어라, 오 너희 큰 문(gate)들이여; 그리고 너희는 들리어질 것이다, 세상의 너희 작은 문(door)들아; 영광의 왕이 안으로 가신다. 누가 영광의 이 왕이냐? 강하고 영웅이신 여호와; 전쟁의 영웅 여호와 (이시다). 너희의 머리들을 들오라 오 너희 큰 문들이여; 그리고 오 세상의 작은 문들을 들어라; 영광의 왕이 안으로 가신다. 누가 영광의 이 왕인가? 여호와 체바욷 (이시다), 그분이 영광의 왕이시다 (시. 24:7-10).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체바욷이 시온의 산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그분의 영광의 원로들 앞에서 (이. 24:23);
“영광”은 신성한 진리를 표시한다. 여호와가 신성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여호와 체바욷”이라, 또는 “군대들의 여호와(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리우신다, 그 이유는 “군대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에 의해서는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었는 바, 그러므로 왕이 앉은 왕좌는 그들이 심판했을 때 “영광의 왕좌”라고 불리웠다 (이. 22:23; 예. 14:21; 17:12).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 (마. 19:28).
다시:
사람의 아들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올 때, 그리고 그분과 더불은 모든 거룩한 천사들, 그때 그분은 그분의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다. 그리고 왕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마. 25:31, 34, 40).
왕좌가 “영광의 왕좌”라 불리운 또 다른 이유는 심판들이 진리로부터 결과되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사람의 아들은 그분의 천사들과 더불은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분은 모든 이에게 그의 행실들에 따라서 보답할 것이다 (마. 16:27).
위 모두로부터 “영광”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마. 6:13).
천국들에서의 주님의 영적 왕국과 땅 위에서의 그분의 영적 교회는 “잘생김, comeliness”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이. 60:7; 63:15; 64:11; 단. 8:9; 11:16, 41, 45. ** 참고: 이 구절들에서의 히브리 단어는 라틴어로는 decus 인데, kjv 등의 영역에서는 영광, glory으로 번역하는데, 원저자의 경우는 아름다움, 잘생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역자주.) 더욱이 “영광”이 요셉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요셉 자신이 신성한 영적 평면,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 그리고 또한 신앙의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 이는 거기서 주목되었고 지각된 것은 무엇이든지를 의미한다. 이는 “보다(see)”의 의미가 이해하다와 이해함으로부터 지각하고 주목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서두르시오,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이쪽으로 내려 오게 하시오. 이는 더 가까운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애착으로부터 인 바, 이것은 친밀한 결합을 표시한다.

14, 15절.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에 엎드려져서 울었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15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우 베냐민의 목들(necks)에 엎드려졌다. 이는 중매자와 더불은 가장 깊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목”의 의미가 유입, 교통, 그리고 결합인데 (** 눈이나 귀와 달리 목은 하나뿐인데, 복수인 목들로 히브리어, 라틴어 모두에서 기록하고 있다. 역자 주), 여기서 가장 적절한 의미는 결합, 즉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결합, 고로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the internal celestial)이 “베냐민”인 천적 평면의 영적 부분(the spiritual of celestial)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목들에 엎드려졌다(목들을 끌어 안았다, fall)”는 자신들을 밀접하게 결합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가장 깊은 결합을 표시한다.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울었다. 이는 자비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weep)”가 자비로부터 인 것이다, 고로 그것의 결과가 의미된다.

그리고 베냐민은 그의 목들에서 울었다. 이는 영접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이는 이 행동이 상호적으로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받아들임과 상호 관계를 표시한다.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 그리고 상호적으로 진리가 선과 결합함에 주목해보면, 선이 진리들 안으로 흐르고, 자체를 그것들에 결합할 때, 진리들 안으로 선은 자체로부터 선을 쏟는다, 그리고 선의 자신을 수단으로 선 자체에 진리가 달라붙게 한다, 이리하여 결합이 오고 있다. 그리고 진리들이 생명을 받을 때, 받은 후에는 그것들은 서로에게 작용, 반작용하여 마치 각기 자신들로부터 행동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진리들은 자신들로부터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들에 자체를 수단으로 하여 달라붙은 선 안으로 흐르는 선으로부터 행동한다. 이런 경우는 살아있는 육체에 있는 혈관과 같다. 진리들은 피 없는 혈관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은 마치 피 같이 있다; 이 선이 자체를 이전에 텅비어 있던 (혈관이라는) 그릇 안으로 쏟을 때, 그것(혈관)은 움직임 안에 놓인다, 또한 선 역시 상호적으로 움직임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피로부터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 마치 생명을 받은 것과 같다.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선이 진리들과 결합함, 그리고 상호적으로 진리들이 선과 결합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 것인지 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모든 형제와 키스했다. 이는 은총으로부터 인접함(adjunction)을 의미한다. 이는 키스의 의미가 애착(애정)으로부터의 결합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은총으로부터 인접함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진리들은 요셉인 내적 선과 비교적으로 거리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 그리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내적 선과 결합하려면 중매자를 통하여서만 그나마 가능해진다; 그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은 내적 선과 상응하지 않는 이런저런 것들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들과 키스함”에 의해서는 은총으로부터 결합함이 의미된다. 여기서 자비로부터가 아니라 은총으로부터라고 말한 이유는 내적 선에서 한층 더 멀리 떨어진 상태의 진리들, 고로 상응함이 충분하지 않는 상태의 진리들은 그것들이 자비를 간청할 수 있는 만큼의 (완전) 굴종(겸허, humiliation)의 수준에 있지 않아서 이다; 그것들은 심정으로부터서는 자비라는 단어조차 끄집어낼 수가 없다, 그 대신 은총이라는 단어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에 붙어 있는 비 상응적인 것들이 자기를 사랑함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심정으로부터서는 자신을 겸허해지게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는 자신을 자신 내부로부터서는 상석에 앉히고 있기 때문, 다시 말해 모든 것에서 자신만을 중요시한다는 것, 자신 외의 것은 하찮은 일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울었다. 이는 애착(애정)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울다”의 의미가 자비의 결과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바로 앞 문단의 설명한 이유와도 상충된다.

그 후에 그의 형제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 이는 영접으로부터의 상호 소통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또한 영접함으로부터 있는 상호 교통함이 무엇인지도 이미 살폈다.

16-20절.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그의 종들의 눈에도 좋게 여겨졌다. 17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18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을 먹을 것이다. 19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너희 아기들, 그리고 너희 여인들을 위하여 가져가라,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20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는 것을 보게 말라.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의 집에 들렸다. 이는 이것이 보편적인 자연 평면을 채웠다 를 의미한다. 이는 어딘가 다른 곳, 또는 멀리로부터서 들려진 목소리(voice), 이것이 유입을 서술할 경우, 채워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들려진 목소리가 채우듯, 흘러드는 유입도 그렇게 채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집”의 의미가 보편적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바로에 의해서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와있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서 현존하고 있다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와있다(to have come)”의 의미가 현존하고 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거기에는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가장 수준 낮은 지식들이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외적 감각들, 또는 육체의 것들로부터 직접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적 상태, 시민의 통치 정부, 규례들, 법들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들은 앞의 지식들 보다는 약간 더 내면적이다; 그리고 도덕적 삶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있다, 이것은 한층 더 내면적이다; 그러나 영적 삶에 속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앞의 모든 것들 보다 더 내면적이다. 이 후자가 교회의 진리들이다, 이것이 인간과 더불어 교리로서만 있는 한에서는 그것은 기억 속의 지식들 그 이상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지식들이 사랑의 선으로 있을 때, 그 지식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라는 수준을 박차고 일어난다; 그 이유는 이때 그 지식들은 영적인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빛으로부터의 질서에서 이 지식들은 그것들 아래쪽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을 쳐다 본다.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이런저런 등차들을 수단으로 인간은 총명의 수준에 이른다, 그 이유가 이런 등차들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마음을 열리게 해서, 영계로부터의 빛이 흘러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으로부터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의 현존함에 의해 뜻해졌음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의 눈에 좋아 보였다. 이는 거기 안이 기쁨으로 꽉 찼음을 의미한다. 즉 자연 평면이 기쁨으로 꽉 찼다는 말이다. 이는 누군가의 “눈에 좋아 보임, 또는 …의 눈에 선이다(to be good in the eyes of) ”란 당사자에게 기쁨이다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의 종들의 눈에도. 이는 거기 가장 낮은 것들에서 조차를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이다로부터, 고로 가장 낮은 수준의 것들이다도 의미한다.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서 보다 낮은 것, 가장 낮은 것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래서 바로는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한다로부터;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요셉이 표현하는 천적 평면은 내적 부분이고, 바로가 표현하는 자연 평면은 외적 부분이기에, 그러므로 지각함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 속에 있는다, 그 이유가 모든 지각함은 내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거꾸로인 밖으로부터 안쪽의 것을 지각함은 없다. 그 이유가 유입으로부터 지각함이 있기 때문이다.
지각함이 무엇인지는 자주 언급되어진 바이지만 여기서도 간략히 더 살펴야 할 것 같다. 모두 각각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이 그렇다, 아니다 하는 것을 지각하는 능력(capacity)이 있다. 자신 안에서, 또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결말을 끌어내는 능력이 어떤 것을 지각하게 한다. 이 능력은 영계로부터의 유입이 있지 않으면, 지독하게 불가능하다. 때로 이 선물을 향유함에서 이 사람은 저 사람의 능력보다 탁월하다. 덜 탁월한 이들은 자신 안에서, 또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맺어지는 결말이 덜 강력한 바, 덜 지각한다. 즉 이들은 타인들이 대체로 이런 신앙을 가지니까 아마도 그것이 옳을 것이다고 하여서, (또는 목사들이 설교에서 있던 말이니까 아마 맞지 않을 까하는 식의 태도로 인해 자신 내부의 결정에 사실상 자신의 이해력이 한발 뒤로 물러선 셈일 때) 당사자의 지각력은 무디어져 있게 된다는 말이다, 고로 덜 지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더 탁월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가 아닌 상태에서 자신들을 위해 이것이 그렇다 여부를 보는 이들이다; 어쨌든 모든 이와 더불어 존재하는 지각은 행위 자체 안에서 세상작인 것들과 하나되어 있다. 오늘날 누군가의 지각함이 영적인 것들과만 하나되어 있는 자는 없다. 그 이유는 흘러들어 지각을 있게 하는 영적인 것들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의 기쁨을 수단으로 희미해지고 결국 소멸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무감이나 관습적인 것들의 제약이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의 제멋대로 하려 듦을 제어하는 정도에서 겨우 기사회생되어 있기 일쑤이다; 따라서 만일 의무감에서 해제되고 관습적 제약 조건도 거두어진다면, 위 두 사랑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 퇴짜를 놓고, 증오감마저 느끼기도 하고, 아예 부정해버리기까지 이르른다.
영적인 것들에 지각을 가지는 이들은 반드시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하고 있어야 하고, 진리들을 알려는 바램을 계속적으로 지녀야만 한다. 그러면 이로 인해 그의 지적 부분이 계발된다, 그리고 지적 부분이 계발되어졌을 때, 이때 자신 안쪽에서 내향적으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진리에 애착함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기가 그것이 그렇다하는 것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그리고 성직자, 장로, 수도사 등등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로부터 알고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지각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은 세상적인 것 안에 존재하고 영적인 것 안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 모른다; 이것은 이런 사실로부터 더 확실해질 것이다: 즉 모든 이는 자신이 출생한 교리 안에 머문다는 것, 예를 들면, 유태인으로, 교회 밖에서 태어나든 거기에 남아 있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가 이교도에서 태어난다면, 그런데 이들에게 최고로 진짜되는 진리들을 말해준다면, 그래서 그들이 이 진리들을 확증조차 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의 진리의 한조각도 지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그 진리들은 거짓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에 관하여를 의미한다 (즉 그것들에 관하여 지각함이 있다는 것).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그들의 아기들과 여인들과 더불어 초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아버지도 초대하고 있다; 바로가 말한다: “네 형제에게 말하라, 이것을 너희는 행하라,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데려오라, 그리고 너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너희의 아기들과 너희의 여인들을 위하여 수레들을 가져가라,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데려와 오게 하라.” 방금 앞 절에서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의 아들들로서만 초대하고 있다,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시오, 그리고 그에게 말하시오, 나에게로 오시되 지체하시지 말라; 그리고 당신은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할 것이다, 당신은 내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의 아들들, 당신이 가진 모든 것도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서두르라, 이쪽으로 나의 아버지를 데려오라.”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초대했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를 초대했는데 그에 대한 이유는 내적 의미가 아니면 분명해지지 않는다. 즉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은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의 진리들에 더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을 초대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들과는 직접적인 교통함이 없고, 그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서만 교통함을 가진다, 그래서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초대하는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을 너희는 하라. 너희 짐승들에 (양식을) 실어라. 이는 그들은 모두 각각의 진리를 선으로 채워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짐승들에 싣는다”는 것은 진리들을 (선으로) 충분히 채운다이다로부터; 그리고 짐승이 실어나르게 되는 양식(grain)은 진리의 선이다. 여기서 “짐승들”이 진리들인 이유는 그것들이 나귀들이었기 때문이다 (창. 42:26, 27; 43:18, 24; 44:3). 그리고 “나귀들”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고, 그리고 중매자를 통하여 내적 선과의 결합이 결과되었기에, 여기서의 나귀인 짐승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므로 “나귀”라는 표현 대신, 짐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짐을 싣는 짐승들(jumenta)”이라 불리운 것이다.

가서, 가나안의 토지에 당도하라. 이는 그들의 거주지, 즉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는 “가나안의 토지”가 교회 속에 있어왔던 이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고로 선과 더불은 교회의 진리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 진리들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와 너희 집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라. 이는 영적 선과 교회 속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기억 속의 지식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그의 아들들로부터의 모든 것이 “집식구들”이다; “오다”의 의미가 접근하다이다로부터; 여기서 “나에게”인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를 종합하면, “너의 아버지, 그리고 너희의 집식구들을 데려와서, 나에게 오라”에 의해 영적 선과 교회의 진리들이 자연 평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접근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의 토지의 좋은 곳을 줄 것이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가 “토지의 좋은 곳을 준다”의 의미가 소유함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소유권을 주는 자라면 거기로부터의 좋은 곳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해당된다.

그리고 너희는 그 토지의 지방(fat)을 먹을 것이다. 이는 거기서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교통되는 것, 결합되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지방(fat), 또는 “살찐 것 (지방이 많음, fatness)”, 또는 “토지의”, 즉 이집트의 의미가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지방”이 천적 평면, 또는 선을 표시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지방은 동물로부터의 지방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것들로부터의 것, 즉 버터(butter)나 기름(oil)도 포함된다. 그리고 살찌움에 가담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정도에 따라 선으로부터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넓게 말해서) 젖이나 꿀, 내지 수지 등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지방이 많음”이 천적 선,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는 사랑의 표현물이었다는 것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로부터, 즉 이 제물들에 있는 모든 지방은 제단에서 태워졌고, 그것으로부터의 냄새는 “여호와의 쉼의 냄새”이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지방을 먹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대목으로부터, 이외의 많은 대목들로부터 이스라엘족들 사이에 제정된 사항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표현물이었다는 것, 고로 그것들은 거룩한 사항들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모든 지방을 제물로 바치는 것, 그것의 타는 냄새가 여호와의 쉼의 냄새이다는 것, 또는 피처럼 지방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에 대한 신성한 이유가 있어질리 만무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사항들 안에는 저장된 어떤 의미가 있지 않다고 믿는다거나, 또는 단순히 지방을 여호와께서 기뻐하신 물품인가 하는 식의 막연한 생각에 자신을 생각을 멈추고 있다면, (요즈음 시대로 보면, 지방을 많이 먹으면 살쪄 건강에 해로우니까 태우라 명령하신 것은 아닌가 따위의 생각) 정녕 이런 생각의 소유자는 거룩한 말씀에 막돼먹은(gross) 해석을 들이댄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주님으로부터의 법령에 의해 포함된 것에 관한 지식을 얻어 보고자함은커녕 아예 개의치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지상적, 육체적 수준일 것이다; 이는 말씀 속의 의미나 영원한 삶을 알려는 애착이 없다는 표시이다.
“지방”에 관하여 우리는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읽는다:
너희는 내장을 덮은 모든 지방, 그리고 간 위의 대망막, 그리고 콩팥 위의 지방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울 것이다 (출. 29:13, 22; 레. 3:4, 5, 9, 10, 14, 15; 4:8, 9, 19, 26, 31, 35; 7:3, 4).
가슴의 지방 또한 제물로 바쳐졌다 (레. 7:30, 31). 이것이 “여호와께 쉼의 냄새” 였다. 고로:
이것은 쉼의 냄새를 위하여 여호와께 태워바치는 빵이다 (레. 3:16).
성직자는 여호와의 제단 위에서 피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 지방을 바칠 것이다 (레. 17: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수소, 그리고 양의 첫 배 새끼의 지방은 제단 위에서 태워질 것이다, 여호와께 쉼의 냄새를 위하여서 이다 (민. 18:17);
“쉼의 냄새”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에 의해 먹어지지 않았다는 것:
모든 지방은 여호와의 것으로 있게 하라.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너희의 거처에서 대대로를 위한 영원한 규례이다; 너희는 어떤 지방, 또는 어떤 피도 먹지 말라 (레. 3:16, 17).
다른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이야기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지방도, 그것이 소의 것이든, 양의 것이든, 또는 염소의 것이든 먹지 말 것이다; 여호와께 불로 만드는 제물인 짐승의 지방을 먹는 자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잘리울 것이다; 너희는 어떤 피도 먹지 말 것이다 (레. 7:23, 25, 26).
태워 바침과 제물들은 이 백성과 더불어 신성한 예배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그러므로 일반적 측면에서 태워바침과 제물에 의해서서는 예배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제물로 바친 것들, 또한 제물을 바치는 괴정에 의해서는 예배의 품질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지방과 지방을 태움에 의해서는 신성한 천적 평면 자체가 되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의 선이다. 이것이 아래 구절로부터 나타난다:
오 야곱아, 너는 나에게 은으로 달콤한 줄기(cane) 사지 않았고, 네 제물의 기름을 가지고 너는 나를 채우지 않았다; 오직 너는 나에게 네 죄들을 통하여 섬김을 만들었다 (이. 43:24)
“너는 은을 가지고 달콤한 줄기를 사지 않았다”란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포획하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그리고 네 제물의 지방을 가지고 너는 나를 채우지 않았다”란 사랑의 선이 포획되지 않았다를 표시한다.
다윗서에서:
저는 당신에게 살찐 것의 태워 바침을 숫양들의 향기와 더불어 바칠 것입니다 (시. 66:15);
“살찐 것을 태워 바침”은 사랑으로부터의 예배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해질 경우, 즉 그들의 제물들의 지방을 먹었고, 그들의 음료 바침의 포도주를 마셨던 그들의 하느님들, 그들이 의지했던 바위는 어디 있느냐? (신. 32:37, 38);
위 말은 신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가지고 먹여졌을 것이다고 상상했던 이방인들에 의해 말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완전히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제물의 지방은 예배에서 천적 평면, 또는 사랑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료 바침의 포도주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신앙의 진리이다는 것이다. 실상 제물이 바쳐질 때, 천사들은 이런 의미들로 감명받았다; 그리고 천국이 표현과 상응을 수단으로 인간 가까이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런 규례들이 명령된 것이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너희의 제물들을, 그리고 너희가 지방을 태워 바치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시. 20:3);
“지방을 태워 바침으로 만드는 것”은 예배를 선이 되게 하는 것을 표시한다. 이사야서에서:
이 산에서 여호와 체바욷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기름진 것들의 잔치를, 재강(lees, 포도주의 찌끼라기 보다는 오래 저장한 포도주일 것같다. 역자주)의 잔치를,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의 잔치를, 잘 걸러진 재강의 잔치를 만드실 것이다; 그분은 영원히 죽음을 삼키실 것이다; 그리고 주 여호비가 모든 얼굴들에서 눈물울 닦으실 것이다 (이. 25:6, 8);
“잔치”는 천국과 거기서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천사들과 결합함을 표시한다; “살찐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이다. 이사야서에서:
어찌하여 너희는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소비하느냐? 그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너는 노동을 하느냐? 진정으로 나에게 경청을 하라, 그리고 너희는 좋은 것을 먹는다, 그리고 너희의 혼이 살찌움에서 기뻐해지게 하라 (이. 55:2)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그들의 슬퍼함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슬픔으로부터 즐거움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찌움을 가지고 성직자의 혼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나의 백성은 내 선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예. 31:13, 14);
“살쪘음(fatness)”은 선을 명백하게 표시한다, 그 이유가 “그들의 혼은 충분히 만족될 것이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에서 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의 선”이라 불리운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 외에 더 아니다. 다윗서에서:
내 혼은 살쪘음과 지방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입은 노래들의 입술로 찬양할 것이다 (시. 63:5);
위 구절의 뜻도 비슷하다. 다시:
당신은 당신의 선하심의 해에 왕관을 씌우신다, 당신의 길들에 살쪗음을 떨어뜨리신다 (시. 65:11).
다시:
사람의 아들들은 당신의 날개들의 그늘을 신뢰하신다; 그들은 당신의 집을 살찌움으로 채우셨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기쁨들의 시내를 마시게 만드신다 (시. 36:7, 8).
이사야서에서:
그때 여호와께서 너의 씨에게 비를 주실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너는 토지에 씨를 뿌릴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소출로부터의 빵, 그리고 그것은 지방이 되고 풍부할 것이다 (이. 30:23).
계시록서에서:
살찌고 화려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너는 그것들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계. 18:14);
위는 바빌론에 관해서 이다; “살찌고 화려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랑의 모든 선들과 신앙의 진리들이 그렇게 되어졌다를 표시한다. 모세의 책에서:
그분은 그를 바위로부터 꿀을 빨게, 그리고 바위의 틈새로부터 기름을 빨게 만드셨다; 목축의 버터, 그리고 양떼의 젖, 어린 양의 지방, 그리고 바산의 아들들의 숫양, 그리고 숫염소들, 밀의 콩팥의 지방과 더불어 (먹게 하시며); 그리고 포도의 피로부터 너는 순수한 포도주를 마신다 (신. 32:13, 14)
위는 고대의 영적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들의 다양한 선들이 하나하나 열거되고, “꿀,” “기름,” “버터,” “젖,” 그리고 “지방”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있다.
“지방”이 선을 표시하기에, 이것은 자체로는 지방이 아닌 이런저런 것들에 인접되어 있기도 하는데, 여전히 선들을 의미한다. 고로 “지방”과 “선”은 마치 같은 것인 냥 있는 경우도 있다. 인용하는 구절에서의 “밀의 지방”이다. 마찬가지가 다윗서에도 있다:
나는 밀의 지방으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 (시. 81:16).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그분은 네 경계를 평화로이 있게 하신다, 그리고 너희를 밀의 지방으로 충분히 만족하게 하신다 (시. 147:14).
모세의 책에서:
순수한 기름의 모든 지방,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의 지방, 그리고 곡식의 모든 지방, 이것은 첫 열매들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아론에게 주여졌다 (민. 18:12).

그리고 지금 명령했다, 이것을 너희는 실시하라. 이는 뜻함을 의미한다.

너희는 이집트의 토지로부터 수레들을 가져가라.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물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에서 이집트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대체로 병거들과 말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때 “병거(chariot)들”에 의해서는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되는데, 때로는 거짓 교리, 때로는 진정한 교리가 취급된다, 그리고 “말”에 의해서는 지적인 것들이 양쪽 의미에서 취급된다. “병거”가 교리적인 것들이다에 관하여는 이미 취급했다. 거의 마찬가지가 “수레(cart)”이지만 이것들에 의해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있는 교리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교회가 소유한 내면의 진리들, 예를 들면, 선은 고아나 과부, 거리의 가난한 자 등등에게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 또는 십계명의 가르침 같은 것이 해당되는데, 이런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처음 시기에 있는 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한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이 “이집트의 수레”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은 인간이 배우는 시기에는 처음에 해당되고, 나중에는 최말단의 평면으로 쓰여진다; 그 이유가 발전이 더 내적인 것들 쪽으로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최말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이것들에서 실제로 종결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 서기도 하고 그것 안에서 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영계는 자연계를 마치 그의 발과 발바닥인 듯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영적 삶의 측면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 안에 그의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내적 의미는 말씀의 글자 의미 안에서 그것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런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수레들”은 말씀의 몇 군데 외에서만 언급되어져 있다. 이 “수레”는 원어 그대로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 대목이 있는 곳은, 궤를 실어 운반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다 (삼상. 6:7, 8; 삼하. 6:3), 그리고 성막이 성별될 때에서 이다 (민. 7:3). 궤가 천국을 표현했던 바, 천국은 기억 속의 지식들의 교리적인 것들 위에서 서기도 하고 그 안에서 쉬기도 한다.

너희의 아기들을 위하여, 그리고 너희의 여인들을 위하여. 이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를, 즉 교회의 더 내면의 것들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아기들”의 의미가 이런저런 사항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여인들”의 의미가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인 “남자들(viri)”이 진리들을 의미할 때, 그들의 여인들은 진리에 애착함들을 의미한다; 한편, “남자들(viri)”이 선들을 의미할 때, 그들의 여인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 실상 이럴 때의 남자들은 남편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여기서의 여인들인 진리에 애착함들은 “남자들”인 진리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으면 교회의 더 내면적인 것들을 알지 못한다. 진리들이 없는 애착들은 마치 이해력으로부터의 것도 없이 있는 의지력과 같다. 의지가 어떤 것을 알려하거나 보려는 경우, 의지는 이해력을 통하여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 그 이유가 이해력에 의지력의 시각, 또는 눈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이는 그들의 섬김과 접근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의 아버지를 모셔 옴”의 의미가 섬김(service)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오다”의 의미가 접근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너희의 아버지를 모셔옴”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보다 더 낮은 것들은 내면의 것들을 섬겨야 한다. 수준 낮은 것들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고, 이것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내면인 것은 영적 선이고,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보다 수준 낮은 것들은 섬김의 것들이 되어 있는 것 외에 더 이상을 위해 만들어져 있지를 않다, 즉 낮은 수준의 것들은 내면의 것들이 그것들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 만일 내면의 것들을 그것들에서 거두어 가버린다면, 그것들은 생명과 행동함이 없는 그릇들밖에 더 아닌 바, 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과 육체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이 물러갈 때, 육체는 즉시 죽는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경우도 같다, 또한 내적 인간과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 이유가 내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가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분의 생명의 기관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적 인간은 그분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에 요구되는 모든 사용을 위해 주님을 섬기려고 만들어져 있다, 하여 처음에는 자연계 안에서, 후에 영계에서 이다.

그리고 너희의 눈이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 하게 말라. 이는 도구적인 것들은 돌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물자, 재료(stuff)” 또는 “그릇들”의 의미가 도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돌보아야할 필요는 없다는 “너희의 눈이 아끼려는 것을 보게 하지 말라”에 의해 의미되어져 있다. 일상 생활을 포함 대부분의 일에서는 필수적인 것들과 도구적인 것들이 있다. 제아무리 필수적인 것이 중요하다해도 그것을 행동으로 작업되게 하는 도구적인 것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도구가 만들어내는 것과 꼭 같이 있는 것이 행동이다. 예를 들면, 육체는 영의 도구이다;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도구이다;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의 도구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의 도구이다 (3068, 3079항) 등등이다.
말씀에서 도구적인 것들이 “그릇들(vessels)”이라 불리운다; 여기서의 경우는 “물자”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이주함에, 고로 집 안에 있는 것들의 이사함에 관련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수적인 것들은 말씀에서 “것들(things)”이라 불리우고, 이것들은 도구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행동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외면의 것들을 통하여 행동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에 해당한다. 도구적인 것들은 돌보아져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란 이것들이 목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필수적인 것들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도구적인 것들이 목적으로 중요시하는 만큼 필수적인 것들은 물러나지고 때로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고로 만일 기억 속의 지식이 목적으로 중요시 된다면, 진리들은 돌보아지지 않는 바, 결과적으로 진리들은 흐지부지되어 급기야 어떤 진리 한조각도 지각되어질 수 없다. 더욱이 지상적, 육체적, 세상작인 것을 목적으로 가진 이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의 것들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는바, 그들에게서는 천국의 것들은 사라져버려 천국의 것들의 존재 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항들이 본문, “너희의 눈을 너희의 물자를 아끼려함에 있게 하지 말라”에서 의미되고 있다.
알아야 할 것인즉, “필수”와 “도구”의 상대적인(relative, 관계 있는, 친척뻘이 되는) 단어이다는 것이다; 즉 필수적인 것은 그것의 도구 또는 기관을 수단으로 즉 자체 외의 또 다른 것을 수단으로 행동하기에 그렇게 불리운다. 그러나 또 다른 필수적인 것이 앞서의 필수적인 것을 도구를 삼아 행동할 경우, 이전의 필수적인 것은 도구 수준에서 있는다는 말이다. 더욱이 창조된 우주에서는 자체적으로 필수라고 할 어떤 것도 있지 않다; 자체적으로 필수인 것은 오직 가장 높으신 분, 즉 주님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 분만이 있음(Esse), 또는 자체적으로 필수되심(본질, 가장 중요함, Essential in itself)이신 바, 있음(esse, being)으로부터 “여호와”라 불리우신다. 따라서 이외 모든 것들은 (사실상) 도구일 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본질적인 것만이 목적으로 중요시 되어야만 한다는 것, 도구적인 것들이 아니다는 것, 고로 주님만이 그렇게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집트의 온 토지의 좋은 것,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 안에서 제일 가는 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가 자연적 마음이다로부터; “온 토지의 좋은 것”에 의해서는 제일 가는 것이 의미된다. 이 구절도 앞의 구절과 거의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즉 만일 도구적인 것들이 아닌 필수적인 것들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도구적인 것들을 (당연히)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만일 진리들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온 이집트의 좋은 것”인 기억 속의 지식들을 풍부히 가진다는 것. 마찬가지로 만일 선이 돌보아진다면, 그들은 진리들을 풍부히 가질 것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진리들을 돌보아져야만함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목적으로서는 선만을 중요시해야 한다. 만일 눈을 목적 안에서 선 위에 두고 있다면, 그 눈의 소유자는 그 결과로 이어지는 것들을 완전히 잘 관조하게 된다, 또는 관조의 결과로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지각한다, 이 지각함은 선이 목적으로 있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선이 당사자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한 조각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육체와 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육체를 돌보아야 한다, 하여 자기 육체에게 자양분을, 옷입힘을 조달한다, 그리고 세상의 기쁨들을 즐기게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육체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혼을 위하여서, 즉 혼이 건장한 육체 안에서 상응되고 올바르게 행동하게 해주기 위하여, 고로 혼에 완전 고분고분한 기관 수준으로서 육체를 가지기 위하여야 한다. 고로 혼이 목적임에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혼 자체도 완전 목적이 아닌 중간 목적일 뿐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닌 양쪽 세계에서 반드시 수행하여야만 하는 쓸모 있는 자(the uses)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적으로서 (이웃의 선에게) 쓸모 있는 어떤 것을 수행할 때, 그는 목적으로서 주님을 소유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쓸모 있음을 위하여 배열 배치함을 만들어 가시기 때문, 그리고 유용함 자체를 배치하시기 때문이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너무 적어 여기서 좀 더 살펴야 할 것 같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인간 당사자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그는 목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적으로 가지는 것은 분명하게 식별되어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당사자 안에서 보편적으로(사사건건에서) 통치, 간섭하기 때문이다; 고로 당사자 자신이 자기의 목적을 의식하지 않는 때조차도, 또는 생각하지 않는 때일지라도 그것은 계속적으로 당사자 안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 이유가 그것은 내부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 그리고 그의 내면의 생명(삶)을 만들기 때문, 고로 은근히 당사자의 각각 그리고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 이다. 예를 들면, 자기 부모를 심정으로부터 존경하는 자의 경우, 이 존경심은 그의 부모가 계신 자리에서이든, 안계신 자리에서 이든 한결 같이 각각 그리고 만사에서 존경이 표출되고 있다. 이 존경심은 그의 제스추어나 말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도 감지될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신앙인의 경우, 이 두려워함과 경외심은 그가 생각하고, 이야기 하고 행동하는 만사에서 표출된다, 그 이유는 이것이 당사자 안에 있어, 교회 건물 안에 있지 않은 때일지라도, 즉 교리와 거리가 먼 듯한 사업장에서도 비록 직접적 표출된 것은 느껴지지 않을 지라도 그 사업 까지도 통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은 보편적으로 통치하기 때문, 따라서 세부적인 것도 관여한다. 인간 안에서 통치하는 것은 다른 삶에서 분명하게 지각되어진다, 그 이유가 그가 발산하는 그의 온 생명의 기운이 거기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하느님은 눈 앞에서 언제나 간직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다. 이것은 꾸준히 생각함 뿐만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함, 또는 경외함이 보편적으로 통치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런 경우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세부적 측면에서도 눈 앞에 간직하는 것이 된다. 이럴 진대, 인간이 그분을 생각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든가, 또는 그분에 맞서는 것을 행동하고, 그분을 불쾌하게 했다면, 보편적으로 통치하는 당사자 안에 감추여 놓인 것이 당사자의 생각, 말, 행동 자체를 까벌려지게 해주고 훈계한다.

21-2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22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23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곡식과 빵과 자양분을 나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영적 진리들로부터의 결과를 의미한다. 이는 “행했다”의 의미가 결과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영적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진리들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인간, 영, 또는 천사의 바깥 측면에 있는 신앙의 진리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아니다, 그 이유가 그것들이 어떤 주제에 적용되어, 이런저런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영, 또는 천사에게 주제로서 적용될 때, 이때 그 진리들은 신앙의 진리들이 되어간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다. 처음 그 진리들을 배운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만 있는다. 이후에 만일 어떤 이가 이 진리들에 경건하게 존경심을 가진다면, 진리들은 더 발전한다, 그리고 교회의 진리들이 된다; 그리고 그 진리들이 그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 그리하여 그것들에 살고 있을 때, 이때 그 진리들은 영적 진리들이 된다; 그 이유가 영계로부터서만 있는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신앙의 진리들을 채워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진리들로 감명되고 그 진리들에 따라 사는 것은 이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진리들이라 불리우는 진리들의 품질, 이것들에 따라 사는 자와 살지 않는 자가 나에게 보여졌다. 그것에 따라 살지 않는 자와 더불어 그것들은 흰 섬유(실)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진리들을 가졌던 이들과 더불어 선은 전혀 없었다. 그것들은 부스러지기 쉽게 보였다; 그러나 이 진리들에 따라 살아간 이들과 더불어 그것들은 영으로 채워진 뇌로부터의 섬유들 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부드럽다. 고로 이 후자의 진리들은 살아있어 움직이나 전자의 경우는 꼼작 않는 죽어 있다. 이로부터 아는 바,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진리들의 품질의 상태는 각자의 삶의 상태에 따라서 이다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영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삶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들들로서의 그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들은 영적인데, 그 이유는 삶으로 만들어져왔음으로부터 그 진리들은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으로 채워져 왔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진리들이 이 대목에서 뜻하여진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야곱의 아들들인)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요셉인) 내적 선과 (베냐민인) 중매자, 또한 (이스라엘인) 영적 선을 통하여 결합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바로의 입에 따라 수레를 주었다. 이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대로 교리적인 것들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것들을 “주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바로의 입에 따라”의 의미가 기뻐하는대로,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인 영적 진리들이 기뻐하는대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이런저런 진리들이 바로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는 수레들도 그들의 의향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뻐하는대로”라고 말해진 이유는 “이집트의 수레들”에 의해 의미된 교리적인 것들이 말씀의 글자적 의미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내적 의미 없이 어떤 선이든지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때 공개적(노골적)으로 가르치시지 않고, 선을 통하여 참된 것을 생각하는 쪽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당사자에게 알려지지 않는 방법에서 그분은 지각을 느끼게 하여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것이 참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시는데, 선택의 이유는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기 때문, 그리고 이런 저런 것이 말씀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는 각 인간이 받아들인 선에 걸맞는 진리를 내보이신다; 그리고 이것은 각 인물의 애착에 따라서, 고로 자유함에서 거행되는데, 여기서 “기뻐하는대로” 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길 양식을 주었다. 이는 한동안 선과 진리로부터 지탱함을 의미한다. 이는 “양식(provision)”의 의미가 선과 진리로부터 지탱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바꿔 입을 의복을 주었다. 이는 진리들이 선 안에서 시작함을 의미한다. 이는 “의복(garment)”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고로 “바꿔 입을 의복”은 새로이 있는 진리들이다; 그리고 진리들은 그것들이 선 안에서 개시될 때 새로워진다, 그 이유는 그때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취급되는 주제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과 결합함이다. 결합이 결과될 때, 이때 진리들은 바뀌어지고 새롭게 된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선의 유입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의복들”에 의해 진리들이 의미된 이유는 (뇌에서는) 섬유들이 [살아 움직이는]영이듯, 혈관과 피의 관계 같이 진리들이 선을 옷입히기 때문이다. “의복들”이 진리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들, 또한 천사들이 의복을 입고 나타나기 때문, 그리고 각자에게 속하는 진리들에 따라서 옷을 입기 때문이다. 선인 것을 통하여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은 흰 의복을 입고 나타난다, 또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을 안에 있는 이들은 밝은 빛을 내는 의복을 입고 있다; 그 이유가 선이 진리를 통하여 빛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휘를 준다.
영과 천사들이 의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을 말씀으로부터 볼 수 있다. 천사들이 보여졌던 마태복음서에서:
주님의 무덤에서 앉아 있는 천사의 나타남은 번개 같았고, 그리고 그의 의복은 눈 같이 희었다 (마. 28:3).
계시록서에서:
왕좌 위에 나는 흰 의복을 입은 이십 사 원로들이 앉은 것을 보았다 (계. 4:4).
계시록서에서:
흰 말 위에 앉으셨던 그분은 피로 물들인 의복으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라 불리었다. 천국에서 흰 말 위의 그분을 뒤따르는 그분의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옷을 입었다 (계. 19:11, 13, 14);
“눈 같이 흰 의복들”, 그리고 “고운 흰 아마포(옷)”은 거룩한 진리들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흼과 희게 빛을 냄은 거룩한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흰 것들이 빛에 가장 가깝게 접근된 색이기 때문,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있는 빛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그러므로 주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나타났다: 즉
예수께서 변모하셨을 때, 그분의 얼굴은 태양 같이 빛나셨다, 그리고 그분의 의복들은 빛 같이 되었다 (마. 17:2).
위의 “빛”이 신성한 진리이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회에 알려진 사항이다. 이 진리가 “의복”에 비교되는 구절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빛을 의복으로 삼으시어 자신을 덮으신다 (시. 104:2).
“의복들”이 진리들이다는 것은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 마태복음서에서:
왕이 (초대)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 왔을 때, 그는 거기서 결혼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자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결혼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여기에 온 것은 어찌된 것이냐? 그러므로 그는 바깥 어둠 쪽으로 내던져졌다 (마. 22:11-13);
위 구절의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이미 살핀 바 있다. 이사야서에서:
깨어라! 깨어라! 너의 강함을 입으라, 오 시온아; 너의 장식으로 꾸민 의복을 입으라, 오 예루살렘아, 거룩함의 도성아; 그 이유는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불결한 자가 너희에게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52:1);
“장식으로 꾸민 의복”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을 표시한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수를 놓는 작업으로 너를 입혔다, 그리고 너를 오소리 (가죽)으로 신겼다, 그리고 나는 고운 아마 (끈)으로 허리를 매었다, 그리고 비단으로 덮었다. 너의 의복들은 고운 아마포, 그리고 비단, 그리고 수놓는 작업으로 된 것이었다; 너는 고운 곡식가루, 꿀, 그리고 기름을 먹었다
(겔. 16:10, 13);
위는 예루살렘에 관하여서이다, 위 구절을 수단으로 태고 교회가 기한이 만료된 후 주님에 의해 세워졌던 고대 영적 교회가 뜻해졌다. 이 교회에게 수여되었던 진리들이 “의복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수놓는 일”은 기억 속의 진리이다, 이 지식이 순수할 경우, 마치 수놓은 작품, 레이스 (lace) 같다; “고운 아마포와 비단”은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다; 그러나 천국에서, 빛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은 밝게 빛나고 투명하다.
같은 책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수 놓은 일로 된 고운 아마포가 너의 돛이었다; 엘리사아섬으로부터의 푸르고 심홍색 (천)은 너의 덮개였다 (겔. 27:7);
위는 두로에 관하여서이다, 이를 수단으로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표현되어졌다, 이것이 순수할 경우, “수놓는 일로 된 고운 아마포”이다; 파생되는 선, 또는 진리의 선은 “푸르고 심홍색 (천)”이다.
다윗서에서:
왕의 딸은 모든 영화로웁다; 금을 섞어 짠 것으로부터 그녀의 의복이 있다; 수놓은 (의복을) 입고 그녀는 왕에게로 데려와질 것이다 (시. 45:13, 14);
“왕의 딸”은 진리에 애착함을 표시한다; “금을 섞어 짠 것으로부터 그녀의 의복이 있다”란 안에 선이 들어 있는 진리를 표시한다; “수를 놓은 (의복)”은 가장 낮은 진리들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너는 자기들의 의복들을 더럽혀 오지 않아왔던 몇 이름들을 사르디스에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흰 의복을 입고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럴만하기 때문이다. 극복하는 자는 흰 의복들을 입을 것이다 (계. 3:4, 5);
“의복들을 더럽히지 않음”은 진리들을 거짓들로 더럽히지 않음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지켜보고, 자기 의복을 간수하는 자는 복 있다, 하여 그는 벗은 채로 걷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부끄럼을 보고 있다 (계. 16:15);
위 구절의 “의복”도 진리들을 표시한다. 말씀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들이 이 “의복들”에 의해 적절히 의미된다. 그 근원(말씀)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획득하지 않았던 자, 또는 이방인들의 경우 같이 자기의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진리들 또는 진리와 유사한 것이라도 획득하지 않았던 자, 하여 자신의 생활에 그것들을 응용하지 않았던 자는 자신이 선 안에 있다 라고 상상할 지라도 그는 선 안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말씀으로부터, 또는 자기의 종교적 확신으로부터 진리들을 가지지 않았던 바, 그는 선한 영에 의해 인도되는 만큼 악령이 추론을 수단으로 자신을 끌어가는 것도 허용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천사들에 의해 방어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위 구절의 권면인, “지켜보고 자기 의복들을 간수한 자에게 복 있다, 그는 벌거벗지 않고 걸을 것이고, 그들은 자기의 부끄럼으로 본다”에 의해 뜻해진 것이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는 더럽혀진 의복들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천사들 앞에 섰다, 그 앞에 섰던 누구가 말했다, 여호수아로부터 더러워진 의복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에게 그는 말했다, 보라 나는 너의 불법을 너로부터 건너가게 했다, 그래서 너를 의복을 바꿔 입힌다 (슥. 3:3, 4);
“더럽혀진 의복들”은 악으로부터 있는 거짓들에 의해 오염된 진리들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 의복들이 제거되고, 다른 의복을 입을 때, 말해진다, “보라 나는 너의 불법을 너로부터 건너가게 했다.” 아마 누군가는 의복을 바꿔 입는다고 불법이 건너갈리 만무함을 알 것이다. 하여 이로부터 의복을 바꿔 입는 것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것이라는 결말도 가질 것이다.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말씀에서의 경우, 즉 백성들을 순수해지게 하여야 할 때, 마치 시내 산 가까이 왔을 때(출. 19:14), 의복을 빨으라고 명령된 것이라든가, 그들이 불순함들로부터 깨긋해져야 할 때 (레. 11:25, 40; 14: 8, 9; 민. 8:6, 7; 19:21; 31:19-24) 에서의 경우에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불순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하여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들이 선이 무엇인지를,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주님이 계신다는 것, 천국이 있다는 것,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진리가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저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다, 아예 이런 저런 것들이 존재하는지 조차 모를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함의 선과 세상을 사랑함의 선이 인간에 딸린 유일한 선이라는 것, 이 두 선으로부터 그의 생명의 기쁨이 있다는 것 외에 더 달리 자신으로부터 알 자가 누가 있을 까? 그리고 신앙의 진리가 아니면,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또다른 선이 있다는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함의 선, 이웃을 향한 선행의 선, 그리고 이 선 안에 천국의 생명이 있다는 것; 또한 이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든다는 것, 이 흘러듦은 인간이 타인 보다 자신을 덜 사랑하는 만큼에서, 천국보다 세상을 덜 사랑하는 만큼에서 이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런 모두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의복들을 빰에 의해 표현된 깨끗해짐은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그는 은 삼백 조각을 주었다. 이는 중매자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로 가득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그리고 (은 조각을) “주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이다로부터; “삼 백”의 의미함이 충만한 것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위 모두로부터 분명한 바, “그가 베냐민에게 은 삼 백 조각을 주었다”에 의해 그는 중매자에게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충분하게 주었다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베냐민이 표현하는 중매자는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을 통하여 있는 내면의 진리이다. “300”이 충분한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숫자가 3×100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3”은 충분한 것을, “100”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내진(합성된) 숫자는 단일 숫자로부터 그것이 무엇인지가 보여진다.
“300”은 이 숫자가 등장하는 다른 구절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300 큐빗이었다 (창. 6:15);
또한 기드온이 미디안을 대적하여 군사 삼 백 명으로 대승했는데, 사사기서에서:
자기의 입에서 자기의 손으로 (물을) 튀겨먹은 자의 숫자는 삼백 명이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하셨다, 물을 튀긴 이 삼백 명을 가지고 나는 미디안을 너의 선에 줄 것이다. 기드온은 삼 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각각의 손에 나팔을 주었다, 그리고 텅빈 단지들, 그리고 단지 한가운데에 횃불을 (담았다). 그들이 삼 백개의 나팔들을 소리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 모두 각각의 검이 자기 동료들을 향하게, 그리고 온 진영을 향하게 놓으셨다
(사. 7:6, 7, 16, 22);
위 구절에서도 “300”에 의해 충분한 것이, 또한 300명이 나뉜 세 부대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각 부대의 숫자인 “100” 은 많고 충분하다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미디안을 쳐부수는데 충분했다. 더욱이 숫자 말고도 이런 모든 것들은 표현적이다; 즉 물을 튕겨먹은 이들만 뽑아 군사가 된 것, 각각은 나팔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횃불을 담은 단지들 등등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미디안에 맞섰기 때문인데, 미디안은 진리가 아닌 진리를 표현했는데, 그런 이유는 생활의 선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의 각각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른 곳에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숫자들 또한 표현적인데, 다른 구절로서는 여호수아서에서 그들이 여리고를 공략할 때 등장하는 숫자 “7”도 있다. 즉 (성을 공략하기 앞서) 성직자가 궤 앞에서 일곱 쥬빌리(jubilee) 나팔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칠일 째에는 성을 일곱 번 도는 대목 등등이다 (여. 6:4).

그리고 다섯 번 바꿔 입을 옷을 주었다.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많은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5”의 의미가 많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바꿔 입을 의복들”의 의미가 선 안에서 개시된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자연 평면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의복들”은 자연 평면을 서술하고 있다.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중매자가 자연 평면의 진리를 가졌다고 말한 이유는 중매자는 양쪽 평면 즉 일부는 내적 부분에서, 일부는 외적 부분에서 참가하기 때문이다. 내적 부분으로 있는 것은 중매자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충분히 가지고 있음 인데, 이것은 앞 구절에서 “은 삼 백 조각”에 의해 뜻해졌다. 외적 부분으로부터 있는 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 진리가 많다인데, 이것은 “다섯 번 바꿔 입을 의복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게 이 방식에 의거 보냈다. 이는 영적 선에 무료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보내다”의 의미가 무료로 주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모든 것은 무료로 주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영적 선 안으로 흘러드는 것조차도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선이기 때문이다. 실로 주님께서는 굴종함, 숭배함, 감사함, 이외 많은 것들을 인간으로부터 요구하시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수여하시는 것은 그분이 요구하신 것을 받은데 따른 되갚으심이어서 사실 상 그분이 수여하시는 것은 무료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을 위하여 위의 사항 같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은 인간의 굴종, 숭배, 감사함 따위로부터 영광을 가지시지 않기 때문이다. 신성 안에 자아 사랑의 어떤 것이 있으라라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즉 그분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는 자아 사랑 같은 것을 (안에 내포하고) 이르는 말이다. 위의 하느님의 요구 사항들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굴종 안에 있을 때,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장애물인 자아 사랑과 그것의 악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 자신을 위하여 인간에게 굴종의 상태를 요구하신다; 그가 이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은 천국의 선을 가지고 흘러드실 수 있다. 이런 굴종 말고도 숭배함의 경우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물론 감사를 받으심(thanksgiving)의 경우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리고 열 마리의 나귀가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이는 더 많은 섬김을 위한 [더 좋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10”의 의미함이 많다 이다로부터; “나귀들”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가장 낮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런 이유는 나귀들이 내면의 것들을 운반하는 서비스 용역을 담당하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좋은 것”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러나 교회에 관한 기억 속의 지식이다; 이런저런 것이 “이집트”에 적절히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이집트의 좋은 것”이라고 말해진 이유는 그것들이 요셉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즉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에 의해 영적 선에게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 마리의 암나귀가 …곡식과 빵을 나른다. 이는 더 많은 섬김과 더불은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10”의 의미가 많다 이다로부터; “암나귀”의 의미함이 섬김에 속하는 것들이다로부터; “곡식(낟알)”의 의미가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여기서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기 때문; “빵”의 의미가 이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곡식(grain, 낟알)”이 다른 구절들에서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선의 진리, truth of good)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면 이렇다: 곡식의 의미는 유입이 천적 평면의 내적 부분으로일 때와 영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일 때의 경우 달라진다. 전자로부터 흐르는 것은 선밖에 없다, 실로 이 선 안에 진리가 있다, 고로 이 진리 또한 선이다. 그러나 후자로부터 흐르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 이것이 (생활에의 응용을 통해) 생명이 되어갈 때, “진리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곡식의 의미는 때로는 선의 진리, 때로는 진리의 선인데, 여기서는 선의 진리이다, 그 이유는 요셉인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유입이기 때문이다. 암나귀가 곡식과 빵을 운반하고, (숫)나귀는 이집트의 좋은 것을 운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숫나귀”는 진리에 관련되는 만큼에서의 섬김의 것들을 의미하고, “암나귀”는 선에 관련되는 만큼에서의 섬김의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나귀가 서비스 용역에 각각 참가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귀를 두고 암나귀이냐, 숫나귀이냐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길을 떠나는 그의 아버지를 위한 자양분. 이는 한동안 영적 선을 위한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자양분(nourishment)”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 자양분이 선의 진리와 진리의 선으로부터 출시되기 때문, 이것이 “곡식과 빵”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더욱이 내면의 진리는 영적 선을 위한 자양분이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은 영적 선이다; 그리고 “길을 위하여, 또는 길을 떠나는”의 의미가 한동안, 즉 완전 결합이 결과되기 이전, 또는 이 결합이 당도하기 이전이다.

24-28절.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25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26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27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28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을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이는 숨겨짐 (concealment)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 보내다”의 의미가 자신으로부터 옮겨지는 것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이전처럼 그들과 함께 함은 더 이상 없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가다”, 또는 “출발하다”의 의미가 살아간다, 또는 더 멀리서 살아간다, 또한 떠나다(leave)이다로부터; 고로 종합하면 숨겨지는 것이다를 의미하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옮겨짐, 또는 그것으로부터 숨겨짐이 지금 취급되는 이유는 그것들의 이어지는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영들의 삶, 또는 천국들에서의 천사들의 생활상이 어떤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진리의 숨겨짐, 또는 선의 숨겨짐이 지금 왜 취급되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방금 전까지도 진리와 선의 빛 안에 있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천국에서 영들과 천사들은 그들의 아침, 정오, 저녁, 박명(황혼, 해뜨기와 해질 무렵), 다시 아침 등등의 상태가 있다. 주님이 현존하시고 명백한 행복으로 그들에게 복 주실 때가 그들의 아침이다: 이때 그들은 선을 지각함의 상태에 있다. 그들이 진리들의 빛 안에 있을 때가 그들의 정오이다; 그리고 이때의 경우, 주님은 그들에게서 좀 더 멀리 계신 듯, 감추여 계신 듯 나타난다. 천국의 모든 이들은 이런 상태의 계속적인 교차를 겪어가며 통과해가는데, 이외 달리 그들이 보다 더 발전된 완전 쪽으로 전진해가는 방법은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런 교차됨에서 대비되는 상태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정반대의 상태, 즉 선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을 아는 과정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의 상태를 겪으며 선인 것, 진리인 것의 행복한 상태를 진지하게 경험하여 보다 더 굳건한 지각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의 상태와 저 사람의 상태가 완전 같은 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가 영원히 없다는 것, 또한 이 영과 천사가 통과하는 상태를 저 영과 천사가 통과하는 경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는 각자의 선과 진리가 각기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얼굴과 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마치 수 백 명이 같은 영화 장면을 보고 있다해도 그들의 얼굴 표정이 완전 같지 않은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역자주). 그럼에도 이런 (무한한) 다양함으로부터 주님께서는 하나를 만드신다. 일반적 규범(canon)인 것은, 어떤 품질을 가지는 모두 각각의 하나는 하모니의 일치함을 수단으로 그들 모두가 하나로서 나타나는 이런 저런 만장일치 쪽으로 환원되는 다양한 것들로부터 출시된다는 것이다. 고로 천국들에서는 만들어낸 통일(unity), 또는 합일(union)은 사랑과 선행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떠나 보내고 그들이 출발함”에 의해 의미된 숨겨짐이 말씀에서 “저녁”이라 불려지고, 주님이 현존하심을 천사들이 지각하지 못할 때에 숨겨짐이 발생한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주님을 지각함이 계속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 지각함의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선에 감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이전 같이 보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만, 곧 이어 새벽이 오고,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이는 그들이 고요함 안에 있어야 하리라고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에게 말하다”의 의미가 “요셉”인 내적 부분에 의하여 주어진 지각이다로부터; 그리고 “길에서 다투지 말라”의 의미는 고요함(평온함)에 있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누군가와 다툼은 비 고요함이기 때문, 이것은 수준 낮은 마음의 소동(혼란)이기 때문이다. 방금 앞 문단에서 살핀 다른 삶에서 다양해지는 상태들은 거기 있는 이들의 선과 진리의 지각함에 따라서이다. 고로 주님의 현존을 그들이 지각함에 따라서 이다. 이 지각함에 따라 그들은 고요함도 가진다; 그 이유가 주님의 현존을 지각함에 있는 이들은 자기에게 닥치는 각각 그리고 모든 것들을 그들의 선 쪽으로 구부리고, 악들은 자기들에게 도달하지 않게 하는 지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고요함 안에 있다. 주님 안에서 이런 신뢰, 또는 신앙 없이 누구도 평화의 고요함 안에 와질 수 없다, 고로 환희 안에 있는 행복(천국의 기쁨)을 향유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이런 더없는 행복(bliss)은 평화의 고요 안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올라갔다. 이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물러남을 의미한다. 이는 “거기로부터 올라감”의 의미가 물러남이다로부터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의 토지 쪽으로는 올라감이라 말해지고,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이집트 쪽으로는 내려감이라고 말씀에서 언급된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는 “올라감”이고 이는 출발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로부터, 이에 대한 적절한 의미는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 여기서 의미되는 이유는 그들이 요셉과 더불어 이집트에 있을 때 교회의 기억 속의 지식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들로부터 옮겨짐, 고로 교회로부터 있는 것들로부터 옮겨짐이 여기서부터 이 장의 마지막 절까지에서 취급된다. 이 옮겨짐이 앞 문단에서의 숨겨짐을, 여기서는 물러남을 뜻하고 있다. 말씀에서는 이 상태가 저녁에 의해 의미되어진다.인간이 이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천국적이고 영적인 것들로부터 물러나 있다, 그리고 천국적이고 영적이지 않은 이런저런 것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숨겨짐은 주님께서 자신을 숨겨서, 또는 물러나셔서 발생된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들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렇게 붙드는 것이 자신들에게 적합하지가 않아서 더 이상 붙들고 싶지가 않아서 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자신 쪽으로 떠났을 때 이런 상태에 도착한다; 그들이 천국에 속한 것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만큼, 선은 그들에게 비 지각되고, 진리는 희미한 상태에 있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주님은 자신을 숨기시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인간, 영, 천사가 자신을 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왔다. 이는 영적 선이 아닌 자연적 선이 있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는“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고로 교회를 표현한 이들의 거주지이다로부터, 즉, 알려진 바, 이들은 야곱의 후손들이 교회를 표현했다; 그리고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그러나 영적 선은 아닌데, 그 이유는 영적 선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연적 선이라고 말하든지, 교회의 외적 부분이라고 말하든지 이는 같은 말이다; 또는 영적 선과 교회의 내적 부분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 이유가 자연적 선이 교회의 외적 부분을 구성하고, 영적 선이 교회의 내적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빛 안에 있는 것이 영적 수준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 빛 안에 있는 것은 선에 애착함과 진리를 지각함 안에 있기 때문이고, 이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교회의 내적 부분 안에 있고, 그들의 머리 측면은 천국 안쪽에 있다. 그러나 세상의 빛 안에 있는 것은 자연적 수준이라 불리우고, 이 빛 안에 있는 것은 선에 애착함과 그 자체 안쪽에서 진리를 지각함이 없고, 그 자체 바깥쪽으로부터 지각함을 가진다; 그 이유가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 빙둘러 있는 것을 계발하기 때문, 고로 안쪽의 계발이 아닌 바깥쪽의 계발이다; 따라서 선이 선으로서 알게, 진리를 진리로서 알게 하는 원인은 그것들이 그렇게 말해졌기 때문이지, 이것이 그러하다고 지각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머리는 천국 안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들은 바깥으로부터 계발된다. 야곱이 지금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이라 불린 이유는 지금 그들이 외적 부분의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설명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이는 유입과 주목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tell)”의 의미가 교통과 결합이다로부터, 고로 유입 또한 의미한다, 그 이유가 말해진 것은 생각 안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하다(say)”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의 경우, 지각함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또한 주목함도 의미한다.

요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이는 내적 부분이 거절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아직 존재한다, 고로 거절되지 않았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살아 있다”가 거절되지 않았다인 이유는 요셉에 의해 표현된 내적 부분이 애당초에는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거절되어졌고, 그들의 아버지는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지고 말았다고 믿었었기 때문이다; 고로 지금 “살아 있다”에 의해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온 토지의 통치자입니다. 이는 자연적인 마음이 그것의 권위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통치자”의 의미가 그것의 권위 아래 있다 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집트의 토지”의 의미는 자연적 마음이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낙담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이는 자연 평면 속에 생명이 결여되어 있음 그리고 그로부터 이해력에도 생명의 결핍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심정이 낙담함”의 의미가 생명의 결핍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야곱에 관련해 말해졌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는 자연적 선이 표현되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 평면의 생명의 결핍이 의미된다; 그리고 “믿지 않다”의 의미는 이해력의 결핍이다. 본문에서 그렇기 때문에 (thence)라고 말해진 이유는 의지로부터 있는 생명이 앞서 있고, 그 뒤를 이해력의 생명이 잇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지 안에만 생명이 있고, 이해력의 생명은 의지로부터서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말한 요셉의 모든 말들을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는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유입이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자기를 모시려고 보낸 수레들을 보았다. 이는 설득되도록 거기로부터 파생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수레들”의 의미가 교리적인 것들이다로부터; “요셉이 보낸”의 의미가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으로부터 이다; “그를 모시려고”의 의미가 설득되도록 이다; 그 이유가 그가 그를 보려고 자기에게로 그를 모시는 것은 설득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가 수레를 보고서 설득되는 것이 이제 이어지는 말, 즉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요셉 나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영은 되살아 났다. 이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영이 되살아남”의 의미가 새로운 생명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자연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에 의해 자연적 선쪽으로 새로운 생명이 있다가 의미된다. 생명은 영적인 것이 내적 부분으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 안으로 흘러들어 내부로부터 행동할 때 새로이 된다. 그것 때문에 자연 평적은 영적 으로 되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된 영적 선에 인접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 야곱은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바, 이렇게 말해진다, 즉 “야곱의 영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했다. 이는 이제 영적 선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 친숙하지 않은 자는 왜 야곱이 때로는 “야곱”으로, 때로는 “이스라엘”로 불리우는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 장 이 구절에서 조차 같은 인물을 두고 동시에 야곱이라 하고, 이스라엘이라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말해진다, “야곱의 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제 다른 구절도 찾아 읽어보자:
베냐민, 요셉의 형제를 야곱은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양식을 사러) 왔던 이들의 한가운데에서 왔다 (창. 43:4, 5).
이스라엘은 여행했다; 하느님이 밤의 환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하셨다, 야곱아, 야곱아; 그리고 그는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있습니다 (창. 46:1, 2).
야곱은 브엘세바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모셨다 (창. 46:5).
이집트로 온 야곱의 집의 모든 혼들은 칠십 명이었다; 요셉은 그의 병거에 견인줄을 매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맞으러 올라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창. 46:27, 29, 30).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고센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야곱은 이집트의 토지에서 17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날들은 죽는 쪽으로 가까이 당겨졌다 (창. 47:27-29).
그리고 누군가가 야곱에게 말했다, 말하기를, 보라 당신의 아들 요셉이 당신에게로 오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힘을 내어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말했다
(창. 48: 2, 3).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 자신들을 집합하라, 그리고 들어라,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여;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귀기울여라 (창. 49:1, 2).
그들의 성냄은 격렬한 바 저주받아야 하고, 그들의 분노는 단단한 바 저주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야곱 안에서 나누어 낼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을 흩트리라 (창. 49:7).
그의 손의 무기들은 강력한 야곱의 손들에 의해 힘세어지게 만들어졌다. 거기로부터 목자, 이스라엘 의 돌이 있다 (창. 49:24).
이외에도 예언서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흡족하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 이는 내적인 것이 멸해지지 아니했음에 따른 환희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천적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아 있다”의 의미가 멸해지지 않고 있었다, 거절되지 않고 있었다 이다로부터; 이로부터의 감정은 환희(joy, 벅찬 영적 기쁨)일 것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이는 새로운 것에 앞서 결합을 갈망함을 의미한다. 이는 “가서 보다”의 의미가 결합되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보다”가 결합하는 것인 이유는 영계에서는 내면의 시각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시각은 생각이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로서 행동할 때, 마치 합창단 같은 행위가 있을 때,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저 사람도 생각한다; 고로 생각이 결합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도 생각은 결합한다. 이로부터 “가서 보다”의 의미는 결합인 것이다. 결합을 갈망한다는 것은 방금 앞 문단의 벅찬 기쁨에 곧 이어지는 표현이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의 의미가 새로운 것이 있기 이전이다, 즉 표현들의 새로운 것에 앞서 라는 말이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표현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 즉 이 사람이 죽을 때, 다음 사람이 또 다른 표현함을 잇는다; 고로 새로운 것인 셈이다; 즉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삭에 의해 표현이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야곱에 의해 표현은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후손에 의해 표현은 계승되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한 새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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