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장 해석

창세기 제 44 장

1, 2절. 그리고 그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의 자루에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양식으로 채워라. 그리고 각자의 은은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아라. 2 그리고 내잔, 곧 내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고, 그리고 그의 곡식에 은을 놓아라. 그리하여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그대로 했다.

그리고 그는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는 자신으로부터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는 “명령함”이 유입(influx)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집을 다스리는 그”의 의미가 교통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요셉이 표현하는 자신으로부터, 즉 내적 측면의 천적 평면으로부터 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명령하는”것이 유입인 이유는 천국에서는 아무도 명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함이 교통되어진다, 그리고 교통된 다른 쪽은 거기에 일치하게 기꺼이 행동한다. 어떤 것이 행하여지기를 뜻하는 바램과 더불어 생각의 교통함이 유입이고, 받는 자의 쪽은 지각함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명령함”은 지각함 또한 의미된다.
더욱이 천국에서 그들은 생각함, 뿐만 아니라 함께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나 지혜 속의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대화 안에 서로에게 명령하는 암시는 없다, 하여 주인이 되려하는 바램은 아무에게도 없고, 상대를 종으로 간주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다른 이를 섬기고 봉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로부터 천국들을 통치하는 형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이에 관하여 주님께서 마태복음서에서 이렇게 묘사해두셨다:
너희 사이에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서 큰 자가 되려거든 너희의 섬 기는 자(minster)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첫째인 자는 누구든지 너희의 종이어야 한다 (마. 20:26, 27);
그리고 다시:
너희 사이에 큰 자인 자는 너희의 섬기는 자 일 것이다. 자신을 드높이는 자는 낮춰질 것 이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드높여질 것이다 (마. 23:11, 12).
심정으로부터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있다. 또는 이기적 목적 없이 타인에게 선을 행함에서 진정 기쁨과 복됨을 향유하는 자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이다; 즉 이웃을 향하여 선행을 가지는 이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낮춘 자들이다.

사람들의 자루를 양식으로 채우라. 이는 진리로부터의 선을 가지고 자연 평면 안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bag)”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food)”의 의미가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되는 바, 그가 “이 집을 다스리는 자에게 사람들의 자루를 양식으로 채우라고 명령함”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진리의 선 안으로 유입됨이 의미된다. “진리로부터의 선 (진리의 선, good of truth)”, 그리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선의 진리, truth of good)”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 바, 간단히 나마 짚어보아야 할 것 가다. 천적 (평면의) 교회가 영적 (평면의) 교회와 비교하여 무엇인지를 모르면 위 두 용어의 이해도 풀리지 않는다. 선으로부터의 진리는 천적 (평면의) 교회로부터,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선은 영적 (평면의) 교회로부터 있다. 천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선은 의지 부분에 심어져 있다. 실로 의지 부분은 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선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이 선을 통하여 이 교회인들은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진다. 그러나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지적 부분에 심어진다, 그 이유는 모든 진리가 지적 부분 속에 있기 때문,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통하여 선쪽으로 인도된다; 이들에게서는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진다. 이 후자가 영적 (평면의) 교회 속에 있는 이들이라 단언된다; 비록 선으로부터 진리가 이 영적 (평면의) 교회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두고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이는 여유있을 정도로 충분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은을 각자의 자루 아구에 놓으라. 이는 자연 평면의 외면에서 진리와 새로이 함께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새로이 진리라고 말한 이유는 은이 이전에 그들의 자루 아구에 놓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 42:25, 27, 28, 35).

그리고 내 잔, 곧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놓으라. 이는 중매자에게 수여된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은 잔”의 의미가 선행의 선으로부터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잔이 “내 잔”, 즉 요셉의 것이라 불리우는 바, 이것은 내면의 진리이다; 중매자로서의 베냐민을 서술할 경우에서, “자루 아구”는 중매자가 자연 평면에 인접되는 곳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중매자가 중매자이기 위하여는 외적, 내적 측면 양쪽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어린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상 살핀 바에서 요셉이 자기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놓음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의 곡식(값)인 은.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곡식(grain)”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내적인 천적 부분(internal celestial)으로부터 진행하는 내면의 진리, 또는 영적 진리, 이것이 “요셉”이고, 선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리고 그는 요셉이 말한 말에 따라 했다. 이는 그것이 그와 같이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3-5절.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4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을 뒤쫒아 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악으로 되돌리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그리고 그분이 점을 칠 때 쓰는 것 아니냐?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아침이 빛을 자라게 했다. 이는 그 때 당시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침”과 “빛이 자라남”의 의미가 계발되는 상태 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아침”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침이 빛이 자라게 했다”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계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이유가 모든 계발됨은 주님으로부터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들과 나귀들도. 이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것의 진리와 기억 속의 지식과 함께 어느 정도 제거되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사람들”이라 말해지는 야곱의 아들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진리들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외적 인간이다로부터; “나귀들”의 의미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떠나가다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것, 즉 얼마 가지 않은 것”은 자연적 인간의 외적 측면이 그것의 진리들과 기억 속의 지식들과 더불어 얼마 정도 이동되었다가 의미된다.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인 천적 평면(internal celestial)으로부터 얼마 정도 이동되었다가 의미된다.
“나귀들”에 주목해보자, 나귀들은 두 용도로, 즉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운반하거나 할 때 사용된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아는 바이다; 사사(judge, 판관)들, 왕들,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은 암나귀나 숫나귀, 또한 노새를 탓다, 이때 이 짐승들은 합리적 평면을, 또한 자연 평면을, 진리와 선을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재판관과 왕으로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분은 망아지가 딸린 나귀를 타셨다; 그 이유는 이 모습이 재판관과 왕권의 지위에 대한 표(mark, sign)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와 같이 나귀가 짐을 운반하는 용도에 충당될 때, 그것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memory-knowledges, 또는 factual knowledges, 사실에 입각한 지식들)을 의미했다. 이런 지식들은 짐을 실어 운반하는 나귀와 (쓰임새에서)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내면의 것들을 놓고 이것은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 그 이상은 아니다하여 그 이상의 생각의 발전이 없는 자는 인간의 모든 것은 이 지식들에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이 지식들이 인간 안에서 최하위 수준의 지식들이다는 것, 아마도 이런 지식 대부분은 육체가 죽을 때 함께 벗어야하는 지식인 줄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단지 진리와 선에 애착함과 더불은 (애착된) 진리와 선 만이 남는다; 기억 속의 지식은 진리와 선에게 혼에 대한 몸의 관계 같이 있다.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진리와 선, 또는 거짓과 악을 기억 속의 지식 안에 가진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이 그것들을 함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들은 내면의 것들을 운반하는 바, 짐들을 운반하는 나귀들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이 도성을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였다. 이는 이동된 양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과 유입을 새로이 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말씀의 역사물들에서의 의미는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이 지각은 듣고 들은 것을 수용하는 자에 관련되는 지각인 바, 말하는 자에 관련한 유입이 된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서로 상호적으로 대답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뒤를 따라 올라가라. 이는 지금 그들을 자체쪽으로 인접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서 그들을 따라 잡는다”가 인접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뒤따르는 것”이 인접하고저 하는 의향을 표시하기 때문이고, “따라 잡다”는 인접함이기 때문이다. 이 장의 나머지는 야곱의 아들들의 귀환이고, 다음 장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 이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진리들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결합함이 의미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뒤따름”에 의해서는 그들을 자체에 인접되게 하는 것이 의미된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따라 잡을 때. 이는 중간 정도로 인접함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자에 의해 따라 잡힐 때의 의미가 중간 정도의 인접함이다가 분명해진다.

그들에게 말하라, 어찌하여 너희는 선을 위하여 악으로 되돌리느냐? 이는 떠나간 이유를 의미한다. 이는 “선을 위하여 악을 되돌리는 것”이 떠나감(돌아섬, return away)을 의미한다로부터, 그 이유는 악이 선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떠나감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악 안에 있는 자는 선에 대해, 즉 선행과 신앙으로부터 있는 영적 선에 코방귀를 뀌기 때문이다. “악”이 떠나감이다는 것은 다른 삶에 있는 악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천국의 빛에서는 발이 위쪽으로, 머리는 아래쪽으로 하여 있기 때문(3641항), 고로 완전히 거꾸로하여 있는 바, 돌아섬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쓰는 것 아니냐. 이는 그들과 더불어 있는 내면의 진리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잔(cup)”의 의미로부터, 즉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실 때 쓰는 것”에 의해 뜻해진 것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나의 주인”인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천적 평면인데, 그 이유는 내면의 진리가 취급되고, 이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천적 평면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는 것이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의 자루 아구에 놓여진 잔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잔을 가져간 것처럼 고소당하고 있다. 고소당하는 이유는 잔이 거기에 있어왔다는 사실(fact)만 가지고서 인데, 이유는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주님에 의해 수여되는(bestow, 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impart) 진리는 처음에는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수여되지 않은 듯한 상태에서(주님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 받아진다; 그 이유가 거듭나기 이전에서의 인간은 자신이 진리를 포획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상상하는 동안, 그는 영적 도둑이 되어 있는 셈이다.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이것은 자신의 정의와 공적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한, 그는 그분의 것인 진리와 선을 자신에게로 갈취한 것이다. 이 상황이 표현되기 위하여 요셉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둑으로 몰린 이유는 결합이 결과되기 위함이었다. 인간이 거듭나기 이전일 동안은 그는 자신의 선함, 정의, 공적이 자신의 잘난 탓이라고 믿는 것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영적 도둑으로 있는다는 말이다. 실로 그는 입술로는 신앙의 모든 진리와 선행의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을 교리로부터 말하지만, 그가 심정으로부터 인정하는 때인, 신앙이 선 안에 심어질 때까지 실로 그는 자기가 말한 그 교리를 믿지 않고 있다.
교리로부터의 고백은 신앙으로부터의 고백과 아주 다르다. 선 안에 있지 않은 누구라해도 그는 교리로부터 고백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이들에게 있어서 교리는 지식 수준이기 때문이다; 누구이든, 그가 영적 선 안에, 즉 이웃을 향한 선행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신앙으로부터 고백할 수 없다. 결합이 야기되기 위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도둑으로 고소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빌미로 요셉이 그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한동안 자기들이 했던 것에 대해 되돌아 보는 한편, 그 사이에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 자신을 그들에게 결합되게 한다.

이것으로 그가 점을 친다. 이는 천적 평면은 감추인 것들을 그것의 신성으로부터 안다를 의미한다. “점을 친다”란 감추인 것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신성으로부터 이다인 이유는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를, 또는 신성이 안에 있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렇게 하여 악을 행했다. 이는 그것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한 법에 반대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도둑”의 의미가, 즉 여기서 “그들이 했던 악”에 의해 뜻해진 것의 의미가 주님에 속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 요셉의 은잔에 의해 의미된 진리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신성한 법에 반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인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즉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가 진리 안에 있기 위하여서 이다; 그가 진리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천사들이 있는 천국의 빛 안에 있는다; 그가 이 빛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총명과 지혜 안에 있다, 그리고 그가 총명과 지혜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는 행복함 안에 있다이것이 인간이 심정의 신앙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은 자신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당연한 진리임을 인간은 인정해야 한다.

6-10절. 그리고 그가 그들을 따라 잡자,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 이야기했다. 7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내 주인께서는 이 말들에 따라 이야기를 하십니까? 당신의 종들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멈니다. 8 보시다시피, 우리는 우리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했던 은도 우리는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당신에게 되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당신의 주인 집에서 은, 금을 훔치겠습니까? 9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그는 죽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내 주인에게 종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제 네 말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고, 너희는 죄없으리라.

그리고 그는 그들을 따라 잡았다. 이는 인접함이 중간 정도에 와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이런 말들을(요셉이 지시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런 것이 유입됨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 하다(speak)”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리고 “말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떤 것”, 그리고 “말들”은 원어에서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서 “말하다”가 지각하다임에서 알려진다.

어찌하여 내 주인은 이 말들에 따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이는 이와 같은 것이 왜 흘러드는지 반영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흘러듦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말들에 따라”의 의미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어찌하여”라는 단어 안에 반영해봄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자신에게 묻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말들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당신의 종들에게는 거리가 멈니다. 이는 그것이 의지로부터가 있지 않다를 의미한다. 즉 진리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는 “행동하다”의 의미가 의지쪽으로 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모든 행위는 의지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행위 자체는 자연 평면이고, 의지는 행위의 영적 근원이다. 고로 “당신의 종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지로부터 있지 않다가 의미된다.

보라 우리가 우리의 자루의 아구에서 발견한 은. 이는 진리가 무료로 수여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발견했다”의 의미가 무료로 수여되었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자루의 아구”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의 문지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안의 토지로부터 되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종교의 원리로부터 복종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되가져오다”의 의미가 복종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종교적인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가나안의 토지”는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 이유는 그 토지는 아주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왕국, 교회, 결과적으로 교인까지도 포함한다, 그 이유는 한 개인도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항들을 의미하는 바, 교회의 천적 평면, 즉 사랑의 선도; 또한 교회의 영적 평면인 신앙의 진리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 있는 종교적 원리까지도 의미한다. 고로 누구도 진리와 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도 교회의 종교적 원리 속에 있다. 이상 살핀 바만 가지고도 동일한 표현이 여러 가지 사항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복합체 안에서 몇 개의 사항들을 포함하는 경우, 이것은 시리즈에 따라 있는 내적 의미를 포함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겠습니까? 이는 어찌 우리가 신성한 천적 평면으로부터인 진리와 선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까를 의미한다. 이는 “훔치다(steal)”의 의미가 주님에 속하는 영적 의미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은”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금”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44장 전체를 망나해 영적 도둑,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진리와 선을 자신으로부터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취급되고 있다. 사실 이 주제는 아주 큰 주제이어서, 사후 이런 인간은 천국 안으로 입장되어질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은 주님 만으로부터 있고, 자신으로부터서 있는 악밖에 없다는 것을 심정에서 인정할 때까지 (영들의 세계에 머무를지는 모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사후 인간에게 많은 경험을 수단으로 보여진다.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지각하고 있다; 더욱이 주님에 의해 자신들은 악으로부터 보류(억제) 되고, 동시에 선 안에, 마찬가지로 진리 안에 간직된다는 것, 이 역사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이다는 것을 확실히 지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지각하도록 많은 햇수 동안 허락해주셨다. 하여 내가 나 자신에 남아 있는 만큼 나는 악들에 침수되었고, 내가 주님을 수단으로 악들이 억제되는 만큼에서 나는 악으로부터 선 안으로 들리워졌다. 진리와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국을 통치하는 극히 보편적 진리에 반대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구원은 자비 속에 있다는 것, 자신으로부터서는 지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로부터 주님을 수단으로 끌어져 나오는 것도 자비로부터 이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반대 된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서는 악밖에 없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 굴종함(부끄러이 여김, humiliation) 안에 있어질 수 없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자비를 받을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주님의 자비는 굴종이나 겸허함 안으로만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 인정함이 결여될 경우, 그는 (선에 관련한 ) 공적을 자신의 (잘난) 탓으로 돌리고, 급기야 자신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의로서 간주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이유가 주님으로부터 인 모든 진리와 선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자신을 정의롭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악들의 근원이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자기가 이웃에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자아를 중시하고 있고, 그가 이것을 행동할 때, 실상 그는 자신을 다른 이들 위에서 사랑하고, 이때 그는 다른 이들을 내리깔본다, 물론 입이 아닌 심정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심정에서 그렇게 있는 것은 결국은 얼굴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에서, 챤스만 닿으면 입으로도 까벌리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 같다 역자주)

그것이 발견되는 당신의 종은 누구든지 죽을 것입니다. 이는 그렇게 행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를 의미한다. 이는 “죽는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영적 죽음은 지옥에 떨어짐밖에 더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방금 살핀 것 같이, 즉 주님으로부터 있는 모든 진리와 선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천국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천국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천국 바깥에 있는 자는 지옥에 떨어질 일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은 진리로부터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심판이 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즉 당사자의 무지함, 또는 단순함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자기 것이라 주장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황폐함(vastation)이라는 방법에 의해 자유한 가운데 놓여 있는다. 더욱이 모든 이는 자신으로부터 참되고 선인 것을 실행해야 하나, 이것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믿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렇다 하여질 때, 그의 총명과 신앙이 발전하면서, 그는 진리와 선의 근원이 자아이다는 오류를 벗어 던지고, 결국 자신이 행하는 선,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모든 자신의 노력 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심정에서 인정한다. 그러므로 요셉에 의해 보내진 자는 비록 실로 그가 (차후) 확증할 지라도, 현재로서는 잔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판결함을 거절한다; 즉 그가 말한다, “이제 너희 말들에 따라 그렇게 하겠다; 잔이 발견되는 자는 나에게 종으로 있고, 너희는 죄가 없을 것이다.” 이는 보다 관대한 판결문이다. 그러나 무지와 단순성으로부터가 아니고, 신앙에서, 삶에서 확증한 원리로부터 인 경우는 다르다; 허지만 그들이 선인 것을 행한 이상, 주님께서는 자비로부터 거기에도 무지와 단순함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인정해주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내 주에게 종이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는 자유함 없이 영원히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 역시”의 의미가 연계됨이다로부터; 그리고 “종이다”의 의미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있는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종인 자는 주인 자신과 주인의 자유함에 의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아로부터는 자유함 없이 있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말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지금 네 말들에 따라. 이는 참으로 그것은 공정으로부터 그렇게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곳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이 짓을 한 자는 죽어야 함이 공정함으로부터 임이 “지금 너희 말들에 따라”에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관대한 판결이 이어진다.

그와 같이 하리라. 이는 관대한 판결을 의미한다. 이 판결이 뒤이어진다.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이든지 나에게 종이 된다. 이는 그렇게 있는 자는 그 자신의 자유로움 없이 영원히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자신 스스로부터의 자유함이 없다 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과 더불어 있는 은잔은 내면의 진리를 의미한다. 내면의 진리에 있는 자는 모든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또한 자신으로부터의 모든 자유, 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지옥적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가 그가 자신의 자유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할 때, 그는 악밖에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흐르는 바, 그는 악마의 종인 것이다. 또한 이런 상태인 자는 이 자유함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자닌 악과, 자신이 태어난 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하고, 그 대신 천국의 자유를 옷입어야 한다. 이 자유는 선인 것을 뜻하고 그것을 행함에 있다. 인간이 이 자유를 받을 때, 그는 주님의 종이다, 이때 그는 자유함 자체 안에 있고, 그가 전에 지녔던 자유함, 그때 당시 그에게 자유 같이 나타났던 자유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너희는 죄없다. 이는 나머지는 그들 자신의 처분대로 맡겨질 터인데. 그 이유는 과오를 나누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종에 관련하여 “죄없다, 비난할 점이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처분(아량)에 맡겨도 된다는 것이 의미된다; 즉 과오를 부담질 일 없기 때문인데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오래된 관습 중의 하나는,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동료들을 위법자로, 심지어는 그의 모든 집안을 위법자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은 지옥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거기서는 모든 동료들이 함께 악들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거기의 사회들은 선에 맞서 하나로서 행동하므로 이럴 때는 한 형제인 듯 하나, 저들 끼리에서는 서로를 향해 증오함만 증폭시키고 있다. 그들은 강도들의 하나됨, 우정관계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동료들은 악을 위해 함께 연계되는 바, 그들이 악을 행할 때, 그들 모두가 처벌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지옥에서 같이 행하는 것은 신성한 질서에 반대 된다; 그 이유가 세상에서는 상대의 내면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여, 세심한 주의력의 결핖 같은 것으로 선한 자가 악한 자에 끼여있는 형국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인간들을 위한 신성의 법은 자신의 불법에서 처벌됨이다. 즉:
아버지들 (선조)이 아들들을 위하여 죽지 않을 것이고, 아들들이 아버지들을 위해 죽지 않 을 것이다; 모두 각각은 자신의 죄에서 죽임을 당한다 (신. 24:16).
에스겔서에서:
죄지은 혼이 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낳지 않는다. 정의로운 자의 정의가 그 자 위에, 사악한 자의 사악함은 그 자 위에 있을 것이다 (겔. 18:20).
이런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본문의 야곱의 아들들의 경우이다: 즉 “그것이 당신의 종들의 누구에게서 발견되든 그는 죽을 것이고, 우리 역시 종으로 내 주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 의해 보내진 자는 자기 판단을 바꾸어 말했다, 즉 “발견되는 자는 나의 종이 되고, 너희에게는 죄 없다”; 그러나 여기에 유다가 요셉에게 더 말을 보탠다, “보라 우리는 나의 주에게 종들이다, 우리와 잔이 발견된 자 또한.” 요셉이 말했다, “내가 이것을 행함은 나로부터 멀다; 잔이 발견된 자만이 나의 종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가라 (16, 17절).

11, 12절.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제각기 자기 자루를 열었다. 12 그리고 그는 뒤졌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어린 자 까지 뒤졌다.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황급해졌다. 이는 성마름을 의미한다. 각 개인이 자신을 분명히 할 경우, “황급함”은 성마름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 자루를 땅에 내려 놓았다. 이는 그들은 자연 평면에 있었던 것을 감각의 것들쪽으로 내려가게 가져다 놓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내려가게 만드는 것”이 이어지는 것과 관련지을 때, 가져다 놓다가 의미된다; “자루”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외면이다로부터; 그리고 “땅”의 의미가, 여기서 그들로 “땅에 내려 놓았다”라고 말해질 때의 경우, 최말단, 가장 낮은 것, 고로 감각의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감각의 것들은 세상 바깥쪽으로 문지방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감각의 것들쪽으로 가져다 놓는 것은 어떤 것이 그러한지를 통째로 확증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제가 감각의 증거쪽으로 가져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각각 자기 자루를 열었다. 이는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 주제를 자신에게 명백히 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자루를 염”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여는 것, 고로 주제를 명백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뒤졌다. 이는 탐사를 의미한다. 설명은 필요 없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자에서 시작하여 가장 어린 자에까지 뒤졌다. 이는 질서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폈다 (5704항).

그리고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천적 평면으로부터 온 내면의 진리가 중매자와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잔”의 의미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천적 평면으로의 이런저런 진리가 중매자와 더불어 있다는 것은 요셉의 명령에 의해 베냐민의 자루에 놓여진 잔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미 살핀 바 있다.

13-17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그리고 각자의 것들을 자기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14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으로 떨구었다. 15 그리고 요셉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한 짓은 대체 어찌된 것이냐? 너희는 내가 점을 하는 자인 줄을 몰랐느냐? 16 그리고 유다가 말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이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정당하리이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의 불법을 들추어내셨습니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우리 모두 종입니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자도 그러합니다. 17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행동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잔이 발견된 자 만이 나에게 종이 되리라.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 가라.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옷을 찢었다. 이는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다”의 의미가 진리가 잃어짐 때문에 슬퍼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는 진리들 때문에 있는 슬픔인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요셉의 집을 다스리는 자의 면전에서(9절), 또한 요셉의 면전에서(16절) 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 까닭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고로 자신들로부터의 진리들 없이 있을 것이 의미되었다; 자신들로부터의 진리들 때문에 슬퍼함에 주목하면, 이것은 그들이 “자기 옷들을 찢음과 종으로 자신들을 만듦을 제공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는 바, 여기서 알려지는 것은 거듭나지는 이들과 더불어 반전(돌아섬, turn about, 거꾸로 움직임, reversal)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고, 후에 선으로부터 진리쪽으로 인도되는 경우이다. 이런 반전이 거행될 때, 또는 상태가 바뀔 때, 이전 것의 거꾸로가 되어 아침이 있다; 그 이유가 그들이 (진리를 수단으로 할 경우) 시험 안으로 놓여지고, 자신의 것이 약해지고, 부셔지고, 그 사이에 선이 은근히 심어지고, 선과 더불어 새로운 의지가, 그리고 새 의지와 더불어 새 자유함이, 고로 새로운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로 자포자기한 채로 돌아오고, 자신들을 종으로 제공하고, 한동안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데, 즉 시험 이후 일 때까지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음을 수단으로 함이 표현되어져 있다; 시험이 정복되었을 때, 주님께서 위로하심으로 그들 위에서 빛을 비추이신다.

그리고 각자의 것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왔다. 이는 진리들이 감각 속의 것으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에로 되돌려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나귀”가 기억 속의 지식이다로부터; “나귀에 싣고”에 의해서는 감각의 것들로부터 되돌려 가져옴이 뜻해지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의 자루를 땅에 내려 놓다”에 의해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감각 속의 것쪽으로 내려놓음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들어올림이 여기서 “싣다”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도성”의 의미가 교리적인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진리를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되돌려 가져다 놓는 것을 살펴보자: 감각 속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 그리고 진리들은 다르다. 그것들은 서로가 교대로 이어받아 간다(연속적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출시된다; 진리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출시된다; 그 이유가 감각들에 의해 들어간 것들은 기억 안에 쌓여진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인간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는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또는 그것들로부터 그가 배운 기억 속의 지식을 지각한다;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그는 진리들이다는 것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또는 그가 배운 진리들을 그것으로부터 지각한다. 모든 이는 이런 발달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로부터 성장해 간다. 그가 아이일 때, 그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납득한다;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생각하고 납득한다; 후에는 진리들부터 이다. 이런 연속적인 교차 과정이 나이와 더불어 진행되면서 그의 판단력도 성장한다.
이상 간단한 설명만 가지고도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기억 속의 지식들, 진리들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인간은 때로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안에 있는 만큼에서 그때는 그 만큼 그는 감각들로부터 만나는 것들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 있는 경우, 그때는 그는 그만큼 그의 마음을 감각들로부터 승강되게 하여 내면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결론을 가진 진리들 안에 있는 경우, 그때는 그는 더 내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마 각자가 자신을 곰곰이 되살피면, 이런 과정이 자신 안에서 늘 거행됨을 눈치 챈다. 또한 인간은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 안으로 내려와 가져다 놓고, 이것들 안에서 진리들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감각 속의 것들 안으로 내려다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감각들 안에서 그 지식들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둘 간에 담화도 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자연 평면에 있는 것을 감각 속의 것쪽으로 내려 놓는 것, 그리고 감각 속의 것들로부터 진리들을 기억 속의 지식들 안으로 되가져다 놓는 것에 대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들어갔다. 이는 교회의 진리들과 더불은 교회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표현함은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유다가 들어가서 요셉과 이야기를 한 것이지, 첫 출생인 르우벤이 말하지 않은 것, 더욱이 다른 형제들이 아닌 이유는 유다가 표현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서 이다; 신성으로부터 있는 천적 평면과 교통하는 것은 선이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리는 선을 통하여서가 아니면 신성과 교통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다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요셉의 집. 이는 내적 부분과 교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집에 들어감”의 의미가 교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집에 들어감”이 교통함을 표시하는 이유는 “집”에 의해 인간 자신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을 만드는 것, 즉 진리와 선과 더불은 인간의 마음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감”이 말해질 때, 이는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는 바, 교통함을 가진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이는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되돌아오리라는 것이 요셉에 의해 예견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그래서 그는 집에 머물렀고, 자신을 베냐민에게 밝히 알리려고, 결과적으로는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자신을 밝히기 위함이 되었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결합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과 신성의 천적 평면과 결과된다. 여기서 “예견”이라 말한 이유는 이 의미에서 “요셉”인 주님이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 이는 굴종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 없이 알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그때 그들이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이것이 그들이 지각함인 이유는 이것이 요셉에 의해 말해지고, 요셉에 의해 내적 부분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부분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모든 지각함이 오기 때문이다. 지각의 근원은 이외에는 없다, 감각으로부터가 아니다. 그런데 마치 감각으로부터인 듯하게 나타난다, 마치 지각함이 외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에 의해 오는 듯하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그 이유가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을 통하여 느껴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체에 놓여진 감각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감각할 수 있기 위해 내적 부분을 돕는 기관 또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적 부분이 외적 부분 안으로 흘러들어 외적 부분이 느끼도록 하고, 식별하여 보다 더 완전해지려는 쪽을 향한다. 그러나 거꾸로는 아니다.

대체 너희들은 어떤 짓을 했느냐? 이는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매우 큰 악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그들이 고발당한 원인인 도둑의 의미가 주님에 속하는 진리와 선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은 내적 의미에서 뜻해지는 “짓, deed, 행위”이다.

너희는 내가 점을 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이것은 미래와 감추인 것을 보시는 그분으로부터 감추여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점을 치다, divining”의 의미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감추인 것들을 아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5748항), 또한 미래의 것들을 아신다, 그 이유는 여기서 “요셉”인 주님이 최고 의미에서 취급되기 때문이다, 감추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단어 자체로부터도 분명하다.

그리고 유다는 말했다. 이는 자연 평면 안에서 교회의 선에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함이다로부터; 이것이 “주어진다”인 이유는 모든 지각함은 내적 부분으로부터 오기 때문, 즉 주님으로부터 내적 부분을 통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유다가 표현하는 것에 주목해보면, 그는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 측면에 관련되는 주님을, 내적 의미에서는 그분의 천적 (평면의) 왕국을, 고로 이 평면에 있는 사랑의 천적인 (수준의) 것을; 여기서는 자연 평면의 교회에 있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지금의 경우는 내적 부분과 결합되어지려는 자연 평면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이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주께 무슨 할 말이 있으리이까? 무슨 말을 하리이까? 이는 혼란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 말들의 표현의 느낌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 정당하리이까? 이는 우리는 죄지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어찌 정당해지겠는가?”의 의미가 (즉 그들은 정당해질 수 없다)가 그들은 죄지었다 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정당해질 수 없는 자는 죄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죄지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요셉에게 종으로 자신들을 제공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의 불법을 찾아내셨다. 이는 고백을 의미한다. 즉 그들이 잘못했음에 대한 고백을 의미한다. 이 잘못이란 그들이 요셉을 판 것에 대한 잘못인데, 내적 의미에서 그들이 진리와 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멀리 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내적 부분으로부터 분리되게 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보라 우리는 내 주에게 종들입니다. 이는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로부터 영원히 박탈되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종들”의 의미가 그들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 없이 있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이 박탈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말한 적이 있으나, 이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인 바, 다시 살피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외적 인간이 있고, 내적 인간이 있다; 외적 인간을 통하여 내적 인간이 행동한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도구 내지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럴진대,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통째로 종속되어야 함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종속될 때, 천국은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의 이런저런 것들에 따라 배열하고 행동한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는 외적 인간이 종속되지 않을 때, 오히려 통치할 때이다. 이때의 인간은 그의 목적으로 육체와 감각의 쾌락을 가지고, 특히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한마디로 천국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가진다. 목적으로 가지는 것을 인간은 사랑하고 목적에 관련 없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이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진다면, 그는 내적 인간이 있다는 것, 육체가 죽을 때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이 선과 진리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하는 것만을 도울 뿐이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에 내적 인간이 열려 다른 유입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천국 속의 것들을 통째로 경멸하고, 되돌아 서있기 까지 한다. 이상 간단히 살핀 바로도 분명해지는 것은, 외적 인간은 자연적 인간 같이 영적 인간인 내적 인간에 정녕 종속되어 있어야 하리라는 것, 결과적으로 그것 자신의 자유함으로부터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은 갖가지 종류의 쾌락들에 몰입하고,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하며, 타인을 박해하고 증오함에서 기쁨을 얻는 악 안에 머물게 하고, 의도적이고 사기적으로 휘두르는 일명 무 양심에서 상대를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결과들로 치닫는 것이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이다. 그러므로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에 있는 인간은 껍질만 인간일 뿐 악마인 것이다. 그가 이런 그의 자유함을 스스로 포기하는 기회를 가질 때여야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자유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진 자들에게는 지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자들이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잃으면 자신의 모든 생명은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된 생명 자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의 환희와 행복이 있다.

우리 모두. 이는 연루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모두”라는 말 자체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잔이 발견된 손을 지닌 자 역시. 이는 뿐만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진리를 지닌 자도를 의미한다. 이는 “손을 지닌”이 함께 있다를 의미함으로부터; “잔”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의 천적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런 짓은 나로부터는 거리가 멀다. 이는 그것은 결코 그렇게 되어 있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잔이 발견된 자. 이는 신성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진리를 가진 자를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는 나에게 종이 될 것이다. 이는 그는 영원히 종속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종”의 의미가 영원히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없다 이다로부터, 고로 영원히 종속된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너희는 네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돌아가라. 이는 내면의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교회의 진리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잔이 발견되지 않은 자들, 즉 “잔”인 내면의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자에 연루되는 것을 야곱의 열 아들들이 표현한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에게 평화로이 올라가라”가 의미함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그 이유가 그들이 “요셉”인 내적 인간에 의해 받아지지 않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이전 상태뿐이기 때문이다.

18-31절. 그리고 유다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19 저로 하여금 나의 주여, 당신의 종이 내 주의 귀에 한마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당신의 종을 향하여 분노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이유가 당신은 바로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20 내 주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가 있느냐, 또는 네 형제가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 그는 노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노령에 얻은 아이가 있는데, 가장 어린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는바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 아이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1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시기를,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눈을 놓을 것이다. 22 그리고 우리는 내 주에게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자기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그의 아버지를 떠나면 그는 죽을 것이다. 23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의 가장 어린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 24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우리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갔을 때, 우리는 그에게 내 주의 말을 말했습니다. 25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돌아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26 그리고 우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려 갈 수 없습니다. 만일 가장 어린 아우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내려 갈 것입니다. 그 이유가 막내인 그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의 얼굴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7 그리고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아내가 나에게 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8 그리고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정녕 그는 갈갈이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29 그리고 너희는 내 얼굴들로부터 이 하나 역시 데려 가려 한다. 그리고 만일 해악이 그에게 떨어지면, 너는 내 흰 머리털을 무덤으로 악 가운데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30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갈 때, 그리고 이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그의 혼은 소년의 혼과 묶여 있는바, 31 그가 소년이 있지 않음을 본다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종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의 흰 머리털을 슬픔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왔다. 이는 외적 인간이 선을 통하여 내적 인간과 소통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가까이 옴”의 의미가 교통함(소통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유다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에 있는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소통한다고 말한 이유는 유다는 외적 인간, 또는 자연 평면에 있는 교회의 선을 표현하고, 요셉은 내적 인간에 있는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을 통하여”라고 말한 이유는 교통함은 오로지 선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통하여서는 아니다는 것, 단지 진리 안에 선이 있는 경우는 가능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say)”가 지각을 의미함으로부터 이다.

저로 하여금, 나의 주여. 이는 간절한 부탁을 의미한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부디 당신의 종이 내 주의 귀에 한마디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이는 (간절한 부탁을) 듣는 것과 그것을 수용함을 위하여를 의미한다. “말 한마디를 이야기 하다”의 의미가 유입이다로부터, 그리고 이것이 유입일진대, 상대쪽의 경우는 수용함을, 그리고 “귀”의 의미가 순종하다 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경청함 또는 들어줌이다. 그 이유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바, “내 주의 귀애 한마디 말을 하게 해달라”의 의미가 들어줌과 수용을 위한 간절함 부탁임을 알게 된다.

부디 당신의 종에게 화를 내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그가 외면하지 않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화를 냄”의 의미가 돌아섬 이다로부터 인데, 그 이유는 누구에게 화가 난 자는 그 자로부터 돌아 선 것, 즉 그 자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 반대 이기 때문이다. 성남이 외면함(돌아섬)이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들에서도 분명해진다, 특히 성냄 또는 분노하심이 여호와 주님이라고 말해질 경우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주님이 돌아서심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가 돌아설 때 마치 주님이 그렇게 하신 듯 자신에게 비쳐지는 것이다. 사실 듣지 않은 것은 인간 당사자이다. 말씀이 그렇게 말해진 이유는 말씀이 외관(나타남)에 일치하여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냄이 돌아섬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돌아선 쪽에서 선과 진리에 폭행한 것이다; 한편 돌아서지 않은 쪽에서는 폭행은 없고, 악과 거짓인 것을 싫어하여 있는 불유쾌함이다.
“성냄(anger)”이 폭행(assault) 이다고 이미 보여준 적이 있다; 또한 돌아섬이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폭행당할 때, 처벌이 있다는 것이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이사야서에서:
불법을 법령이다고 선포하는 자들에게 화있을 것이다. 그들은 묶인 자 아래로, 그리고 죽임 을 당한 자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앗수르에게 화있을 것이다, 나의 성냄의 막대여. 나는 그를 위선적인 민족들을 향하여 보낼 것이다, 그리고 분노의 백성을 향하여 나는 그에게 임무룰 줄 것이다. 그는 올바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심정은 올바른 것을 중 재하지 않는다 (이. 10:1, 4-7);
“성냄”과 “분노”는 인간쪽에서의 돌아섬과 반대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처벌과 듣지 않으심이 성내셨음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인간쪽에서 인 바, 말해지는 것은, “불법을 법령이라고 선포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그는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은 올바른 것을 중재하지 않는다” 인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그분의 성내심의 그릇들을 가지신 여호와께서 온 땅을 파괴하시려고. 보라, 여호와의 날이 분개와 분노와 성냄과 더불어 오고 잔인하여 땅을 황폐되게 만들기 위함이어서, 그분은 그 것으로부터의 죄인들을 파괴할는지 모른다. 여호와 체바욷의 분개하심에서 나는 하늘을 흔 들고, 땅을 그녀의 장소로부터 흔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성냄의 분노의 날에서 이다 (이. 13:5, 9, 13);
“하늘”과 “땅”은 여기서 교회를 표시한다, 이 교회가 진리와 선으로부터 돌아섰다, 이 교회의 황폐해짐과 파괴됨이 여호와의 “분개, 성냄, 분노”에 의해 묘사되어 있다; 사실상 이는 완전 반대 인 바, 즉 악 안에 있는 자들이 분개하고, 분노하고, 성낸다. 그리고 진리와 선에 자신이 반대되여 놓이게 한다. 악으로부터 있는 처벌이 그 외관 때문에 여호와께서 벌을 내렸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 외의 말씀의 여러 곳에서 교회의 마지막 때와 그것의 파멸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 불리운다.
다시:
여호와께서 사악한 자의 지팡이를, 통치자들의 막대를 부러뜨리셨다. 당신은 격노함에서 백 성들을 죽어지도록 치셨다, 성냄과 더불어 민족들을 통치하신다 (이. 14:5, 6);
위에서도 의미는 비슷하다. 이것은 범죄자가 법에 의해 처벌되어지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처벌의 악을 왕이나 재판관에게 그 탓을 돌린다. 다시:
야곱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길에서 걷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의 법을 듣지 않는다; 그분은 그 자 위에 성냄의 분노를, 전쟁의 폭력을 쏟으셨다 (이. 42:24, 25).
예레미야서에서:
나는 내뻗은 손과 강한 팔로 너와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성냄에서, 분노에서, 큰 열에 서 이다. 내 격노함이 불 같이 나가서, 그리고 태우고 꺼지지 않도록 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 일들의 사악함 때문이다 (예. 21:5, 12);
위 구절에서 “격노”, “성냄”, “큰 열(heat, 격함)”은 선하고 참된 것으로부터 돌아선 탓에 있는 악의 처벌됨밖에 더 아니다.
신성한 법에 의해 악은 처벌이 수반된다, 그리고 경이롭다 말할 것은, 다른 삶에서 악과 처벌은 완전히 밀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통상적인 악행 보다 더 세게 악행이 있게 되면, 처벌하는 악령들이 즉시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처벌한다, 여기에 참작해주는 것은 없다 (용서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 없이 즉각적이다 역자주.) 돌아섬 때문에 있는 처벌의 악이 뜻해지는 것은 분명한데, 이렇게 말해짐에서, “너희의 일들의 사악함 때문에”에서 분명해진다. 다윗서에서:
그분은 그분의 성나심의 분노를, 격노하심을, 심통을 그들 위에 보내셨다, 그리고 악한 천 사들의 침입을 보내셨다. 그분은 그분의 성내심을 위하여 작은 길을 편편하게 하셨다, 그분 은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유보하시지 않으셨다 (시. 78:49, 50). (또한 이. 30:27, 30; 34:2; 54:17; 62:3, 6; 66:15; 예. 4:8; 7:20; 15:14; 33:5; 겔. 5:13, 15; 신. 9:19, 20; 29:20, 22, 23; 계. 14:9, 10; 15:7을 보라.)
위 구절의 “분노”, “성냄”, “분개”는 돌아섬, 폭행, 결과적으로 처벌을 표시한다. 돌아섬과 폭행에 대한 처벌이 여호와 또는 주님 때문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에 있는 “성냄”, “분노”, 그리고 격노 때문이다고 기록된 이유는 지독하게도 외적인 야곱으로부터 튀어나온 종족이 교회의 표현(껍데기, representative)들 안에 보존되어지게 되었기 때문, 그리고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호와를 끔찍이 두려워함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에게 성내시고 분노하시어 악을 행하시는 분으로 믿게 하는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이 전혀 없이 외적인 것들로만 똘똘 뭉쳐진 이들은 그에 걸맞는 것,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 외적인 것들로 상대해주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들을 구부릴 수 있는 내면적인 것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외관으로부터 있는 교회 내의 단순한 자들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면 하느님께서 화를 내신다는 것밖에 달리 하느님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생각이 좀 더 깊은 자일 경우, 그가 곰곰히 생각하면, 여호와, 또는 주님에게 성내심, 격노하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자비 자체, 선 자체이시기 때문, 그리고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심을 무한하게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웃을 향하여 선행 안에 있는 이가 이웃에게 악을 행할 리 만무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이러할진대, 주님의 경우는 어떠할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삶에서의 경우이다: 주님께서 천국과 그곳의 사회들을 질서 안으로 환원하실 때, 이는 새로이 오는 자들 때문에 계속적으로 행해지는데,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과 복됨을 향유하게 해주시려 해서인데, 이때 이것이 이와 반대적으로 있는 사회 안으로 (그 이유가 천국과 과 지옥은 대칭, 균형하에 있기 때문) 흘러들 때, 이들은 천국의 현존 때문에 변화를 느끼고, 동시에 성내고 분노하고, 즉시 악을 터뜨리고, 급기야 처벌의 악으로 돌진한다. 더욱이 악령들, 또는 악귀들이 천국의 빛에 접근할 경우, 그들은 성냄과 고통을 느끼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을 만든 것은 천국, 또는 주님 탓이라고 한다; 사실상 그들 스스로 고통을 자초한 것이다. 그 이유가 악은 선에 가까이 올 때, 고문 당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주님으로부터서는 선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은 돌아선 자들, 반대적인 자들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비함으로부터 본문의 주제가 어떻게 있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당신은 바로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의 표현함이 일반적(전체적) 측면에서의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적 부분이 자연 평면을 다스린다는 것이 요셉이 이집트 모든 토지의 통치자로, 또한 바로의 모든 집안에 대하여도 통치자로 앉혀졌다에 의해 표현되었다 (창. 41:40, 41).

내 주께서 그의 종에게 물어, 말하기를. 이는 그들의 생각 속의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묻다”의 의미가 또 다른 자의 생각을 지각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묻다”가 이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영계 또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다른 이의 생각을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의 애착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생각 자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을 알려 할 필요가 없이 지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부분은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외적 부분에 물을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다”에 의해 생각을 지각함이 의미된다. 때로 우리가 말씀에서 읽는 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묻는다는 대목이다, 이때도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시다. 그렇게 말해진 이유는 인간이 생각하건대, 생각은 자기 안에 있으므로 감추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음은 이런 외관, 이 외관에서 파생되는 믿음에서 연유된 것일 뿐이다.

너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또는 형제가 있느냐? 이는 근원으로는 선이 있고, 수단으로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또는 진리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근원이 선인 이유는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이 영적 선으로부터 이기 때문이고, 여기서 “형제”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진리이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이 진리가 수단이라 말한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이 표현하는 자연 평면의 교회의 진리들이 “이스라엘”인 영적 선과의 결합은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를 통하여서 결과되기 때문이다. 결합이 이를 통하여서 이기에, 많은 구절들에서 그의 아버지가 이 진리를 표현하는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그리고 유다가 베냐민 없이 다른 이들과만 왜 돌아갈 수 없었는지가 잘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이는 상호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상호 지각함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아버지, 노인이신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은 근원으로서 영적 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스라엘의 표현에 주목하면, 이미 살핀 바로부터 그는 영적 교회, 실로 영적 교회의 내적 부분을 표현한다는 것, 이는 진리의 선, 또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을 표현한다.

그분께는 노령에 얻은 아이, 막내가 있습니다. 이는 거기로부터 새로이 있는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이, 가장 어린 것(막내)”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노령”의 의미가 삶의 새로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바, “노령의 아이, 가장 어린 것”은 새로이 있는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거듭나져서 영적 수준으로 되어가는 인간은 처음에는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 인도되어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또는 말씀으로부터 축출한 교리를 통하여가 아니면 영적 선이 무엇인지, 같은 말로 기독교의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서 그는 선 안으로 입문되어진다. 선의 실습이 개시되어진 이후 그는 더 이상 진리를 수단으로 선쪽으로의 인도받음은 없으나, 그 대신 선을 통하여 진리쪽으로의 인도됨이 있다. 즉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이전에 그가 알았던 진리를 볼 뿐만 아니라, 선으로부터 그가 전에는 몰랐고 알 수도 없었던 새로운 진리들을 생산한다; 이제 그의 선에는 이전 같이 진리들을 갈망함이 더 이상 뒤따르지 않는다. (직접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제 생산하는 새로운 진리들은 그가 처음에 가졌던 진리와는 아주 크게 다르다. 그 이유는 처음에 알았던 진리들은 생명이 매우 조금이었으나 지금 그가 획득하는 진리들은 선으로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쪽으로 올 때, 그는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이때 그가 선으로부터 받는 진리들, 즉 주님으로부터 선을 통하여 받는 진리들은 새로운 진리이고, 이것이 베냐민이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이다. 이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자연 평면에서 열매가 풍성해진다, 그리고 안에 선을 지닌 셀 수 없이 많은 진리들을 산출한다. 이 방법에서 자연적 평면은 거듭나진다, 그리고 열매 풍성함을 통하여 처음에는 좋은 열매들을 지닌 나무 같이 되어 있는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불어나 동산 같이 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영적 선으로부터의 새로운 진리에 의해 뜻해지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은 죽었습니다. 이는 내적인 선은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고로 내적인 선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어 있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두 선의 차이점, 즉 요셉의 표현으로부터인 내적 선과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영적 선의 차이이다. “요셉”은 합리성으로부터의 내적 선이고, “이스라엘”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내적 선이다. 또한 천적 (평면의) 선, 또는 천적 (수준의) 교회로부터 있는 선과 영적 (평면의) 선, 또는 영적 (수준의) 교회로부터 있는 선의 차이도 위와 비슷한 논리 선상에 있다. 이에 관하여 누누이 말해지고 있으므로 더 이상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내적, 또는 천적 선이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그의 형은 죽었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막내 만이 그의 어머니에게는 남았습니다. 이는 이것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남은 유일한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어머니”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 즉 베냐민이 여기서 표현하는 진리, 즉 앞에서 기술한 것들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이다에 주목하면 이렇다: 이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베냐민이 요셉과 더불어서 있게 될 때는 한층 더 깊은 (높은) 내면의 진리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 이 진리가 새로운 진리라고 불리우고 이 진리가 인간으로 교회이도록 만든다. 그 이유는 이 진리에서, 또는 이 진리들 안에 선으로부터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으로부터 신앙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교회이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이럴 경우의 인간과 더불은 진리들은 생명이 없으므로 죽어 있다, 설사 똑같은 진리를 지녔다 해도 그러하다. 이로부터 이것(새로운 진리)만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합니다. 이는 그것은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과 결합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사랑”의 의미가 결합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아래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그를 사랑하는 자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 즉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진리(새로운 진리)가 이 선(영적 선)과 결합함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거기에 이 진리와 더불은 결합이 실패할리 만무하다. 그 이유는 이 선(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이 진리와 선 사이에 있는 결합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결합 같은 것이다; 또한 마음의 뜻함과 마음의 이해함 사이에서와 같다. 의지가 선을 뜻할 때, 이 선은 이해력 안으로 은근히 심어진다, 그리고 선의 품질에 따라 형체를 가져온다; 이 형체가 진리이다. 그리고 새로운 진리가 출생되기 때문에, 결합이 있음은 분명하다
결합으로서의 사랑에 주목해보자. 사랑이 영적 결합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마음들의 결합, 또는 생각과 뜻함의 결합, 이 둘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분명한 것은, 사랑 자체만에 주목하면, 이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자연적인 것은 연계되고 결합함으로부터의 기쁨이다. 본질 측면에서 사랑은 상태의 변화로부터 결과하는 하모니, 그리고 형체들이나 실체들에서의 다양함들, 이 속에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다. 이 하모니, 만일 천국의 형체로부터이다면 이는 천국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의 사랑 자체 외의 다른 근원은 가질 수 없다; 고로 이 사랑은 형체 안으로 흐르는 신성이고, 이 신성이 배열하므로 상태의 변화들과 다양함들로부터 천국의 하모니는 결과 된다.
이 사랑에 반대되는 사랑도 있다, 즉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결합은 없고 분열 뿐이다. 그들은 실로 결합들 같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합작해서 명예를 취득하려거나 이득을 챙길 경우 같은 것인데, 이것 마저도 결국 분열쪽으로 결론 맺는다. 천국의 사랑은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을 사랑하기 위하여 선을 행한다. 그리고 이 선을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결과적으로 선 자체 이신 주님을 위하여 선을 행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주어진 지각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 부분에서는 지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어떤 것이 그들에게 말해졌었기 때문에, 이것은 주어진 지각을 의미하게 된다.

그를 나에게 데려오라. 이는 새로운 진리는 내적 선에 종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데려옴 (내려오게 만듦, making to come down)”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결합하기 위하여 내적 부분쪽으로 오는 것은 내적 부분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 그 이유는 하위의 것은 높은 것에 통째로 종속되어야 결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려와야만 하는 자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내려오게 하는 자인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 위에 나의 눈을 놓을 것이다 . 이는 그 다음 선으로부터 온 진리의 유입이 있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눈을 놓는다는 것(직접 보는 것)의 의미가 신앙 속에 있는 진리를 교통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기 눈을 놓는” 것은 교통함이고, 또한 유입이다; 그 이유는 요셉이 표현하는 내적 선은 베냐민에 의해 표현된 진리와의 교통함은 유입을 수단으로 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는 하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 주께 말했습니다. 이는 상호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 소년은 그의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이는 이 진리는 영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다를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분리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진리가 “소년”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진리는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출생되지 않는다. 그는 선과 결합된 새로운 진리를 통하여 생명의 새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그의 노령의 아이, 가장 어린 것”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떠난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 이는 만일 그것이 분리되어진다면 교회는 멸망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분리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의미가 더 이상 있지 않다 이다로부터, 고로 멸해진다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선과 결합한 이 진리가 교회를 만들기에, 만일 이 진리가 이 선과 분리된다면, 교회는 멸해지고 만다. 더욱이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은 교회를 표현하나, 이 진리 없이는 교회를 표현 못한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셨다. 이는 이것에 관한 지각을 의미한다.

만일 너희 막내(가장 어린 형제)가 너희와 더불어 오지 않는다면. 이는 만일 그것이 내적 선에 종속되지 않을 것이라면을 의미한다.

너희는 더 이상 내 얼굴들을 보지 못하리라. 이는 거기에 자비가 있지 않을 것이고 자연 평면에서 결합도 없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얼굴”이 주님을 서술할 경우, 자비이다로부터; 그러므로 “얼굴들을 보지 못한다”는 자비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비가 없을 때, 결합도 없다, 그 이유가 영적 결합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랑은 인류와의 관련됨에서 아주 큰 고뇌하심(miseriae, distress, misery)으로 괴롭힘을 받는(괴로움에 에워싸여진, beset) “자비(mercy, misericordia, pity)”라고 불리운다. 자연 평면에서 진리들과 더불은 결합이 없을 것이다는 것은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자연 평면의 진리들을 표현하는 야곱의 아들들에게 말해졌고, 이 말이 지금은 그들에 의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가 “요셉”인 내적 선에 종속되지 않으면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와의 결합도, 자비도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이렇다: 인간을 교회이다라고 만드는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인간이 선 안에 있을 때, 이때 그는 선으로부터 진리들을 보고 그것들을 지각한다, 고로 그것들이 진리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선 안에 있지 않다면, 이는 전혀 아니다. 선은 마치 불꽃 같아서 빛을 주고 계발을 해주어 인간으로 (진리들을) 보게 해주고 지각하게 하고 믿게 해준다. 그 이유가 선으로부터 진리에 애착함은 내적 시각을 (영적인) 저쪽으로, 그리고 어둠을 유발하는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쪽에서는 물러서게 한다. 여기서 베냐민이 표현하는 진리가 이와 같은 진리이다. 이것이 교회의 유일한 진리이다. 즉 이것이 인간으로 교회를 만드는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선에 통째로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내적 선을 통하여 흘러드시고, 하위급에 있는 진리들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고로 또한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의 영적 선으로부터 있는 이 진리에 생명을 준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명백해지는 또 하나는, 결합은 이 진리를 수단으로 하위의 진리들과도 거행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가 내적 선에 종속되어 이 선으로부터 자체에 선의 유입이 있지 않으면, 내적 선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흐르는 자비를 받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중재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자비를 받음이 없다면, 결합도 있을리 만무하다. 이것이 “만일 너희가 너희와 더불어 가장 어린 것과 함께 오지 않으면, 내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당신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이는 영적 선으로 승강함을 의미한다. 이는 “올라감”의 의미가 승강함이다로부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올라 감”에 의해 의미되는 승강함이 내면의 것들을 향하여 인데, 이 향함은 야곱의 열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쪽으로 향함 이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에는 내면과 외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평면의 내면에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있고, 외면에는 “야곱의 아들들”인 교회의 진리들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로 올라 감”에 의해서는 영적 선쪽으로 승강함이 의미된다.

우리는 그에게 내 주의 말들을 말했습니다. 이는 이런 것에 관하여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서 말하셨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말씀의 역사물에서는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너희는 돌아가서, 우리에게 양식을 조금 더 사오너라. 이는 진리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사다”의 의미함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양식(food)”의 의미함이 진리로부터의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영적 선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모든 선이다, 그러나 특별한 측면에서는 진리를 수단으로 획득되는 선, 즉 의지와 행동에 있는 선이다, 그 이유는 이 선은 뜻함과 행동함으로부터 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로부터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 불리운다. 고로 이 진리가 선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삶에서의 당사자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한다. 그 이유가 그가 다른 삶 안으로 진입할 때, 선이 안된 이런 진리는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 즉 (이 진리가) 그의 의지와 일치되지 않기 때문, 고로 그의 사랑의 기쁨과 더불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배웠던 자, 그러나 그 진리들을 뜻하고 행함을 위하여 진리를 지니지 않았던 자, 고로 그 진리들이 선으로 바뀌지 않았던 자, 오로지 명예나 이득 같은 직업 수준에서 그 진리들을 가르치고 알고 있던 자, 제아무리 최고의 학식을 그런 진리들 분야에서 칭송받았다 해도, 다른 삶에서 그를 치장해주었던 세상에서의 그런 진리들은 온데간데 없다, 그리고 그의 자신의 의지쪽의 것, 즉 그의 본래의 생명만이 달랑 남아 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 안에 남아 있기에, 경이로운 것은, 그가 세상에서 애지중지 한 듯 떠벌려왔던 모든 신앙의 진리들을 싫어하고, 자신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들을 뜻함과 행동함을 수단으로, 즉 살아냄으로 선으로 바뀌는 것이 진리로부터의 선을 자기 것이 되게 함에 의해 뜻해지고, 여기서 “양식을 조금 더 사오라”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우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이는 거절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의 가장 어린 형제(막내)가 우리와 함께라면 우리는 내려가겠습니다. 이는 자기들과 중매자가 결합되어져 있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가장 어린 형제, 막내”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결합되게 하는 중매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에 주목해보자: 베냐민은 “요셉”인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 즉 내적 선과 “야곱의 열 아들들”인 자연 평면에 있는 진리들 사이에 있는 중매자를, 또한 새로운 진리도 표현하는데, 이때의 경우, 중매자가 중매자이기 위하여서는 내적 부분과 외적 부분 양쪽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가져야만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중매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베냐민은 새로운 진리가 있는 외적 부분인 자연 평면으로부터 파생된 중매자를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진리는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자연 평면에 있는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매자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부분으로부터 유입을 수단으로 파생되어진다. 고로 중매자는 각각으로부터의 어떤 것에서 파생되는 셈이다. 이것이 왜 베냐민이 결합하게 하는 중매자이고, 또한 새로운 진리인 이유이다. 즉 베냐민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새로운 진리를, 요셉과 함께 할 때는 결합을 하게 하는 중매자이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 이상으로 명료해지게는 말해볼 수 없는 비밀한 것이다. 더구나 인간 안에서 내적, 외적 부분이 서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생각 안에 갖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예 이해되어질 수 없다. 더욱이 진리들을 알려하는 애착을 지니지 않을 경우는 더 더욱 까마득한 내용일 뿐이다. 이것들은 천국의 빛에 의해 지적 부분 측면에서 계발되어지고, 하여 이들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것 역시 비밀하다.

그 이유가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비도, 결합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의 막내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이는 중매자를 수단으로 하는 것을 빼놓고는을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중매자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하셨습니다. 이는 영적 선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너희는 내 아내가 나에게 두 아들들을 낳아준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만일 교회 속에 영적 선이 있다면, 거기에는 내적 선과 진리가 있을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것을 자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에게 두 아들들을 낳은 아내인 라헬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에 애착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그녀가 낳은 “둘”인 요셉과 베냐민의 표현함이 내적인 선과 진리, 즉 요셉은 내적인 선, 베냐민은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 즉 만일 교회 속에 영적인 선이 있다면, 거기에는 내적 선과 진리가 있을 것이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영적인 선은 진리로부터의 선, 의지와 행동에 있는 진리이다. 이 진리, 또는 진리로부터의 이 선은 인간 안에서 당사자를 교회이다로 만든다.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졌을 때 (즉 인간 당사자가 진리에 따라서 살려는 목적을 위하여 진리에 감동했던 사실들을 수단으로 지각된 진리), 이때 거기에는 내적인 선과 진리가 있다. 인간이 이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이때 주님의 왕국이 당사자 안에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교회이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아져서 흔히 우리가 말하는 교회, 즉 일반적인(넓은) 측면에서의 교회를 만든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교회가 교회가 되려면, 거기에 반드시 영적 선이, 즉 진리로부터의 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진리만으로는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오늘날 교회는 교회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이 교회를 저 교회와 구별한다. 진리를 배우고 아는 목적이 삶을 위하여서가 아니다면 자신 안의 그런 진리는 무엇이 되어 있을지 자신스스로에게 되물어 보라. 삶에의 적용을 가지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가지는 교리적인 것들이라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리고 십계명의 가르침이 그것들에 따른 생활이 없다면 그 계명은 과연 무엇일까? 자신이 이런 계명들을 익히 알고, 일명 해석에 일가견이 있어 유창하게 말한다 해도 그것에 반대되는 삶, 적어도 그것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그 가르침이 당사자에게 무슨 혜택을 주고 있을까? 하여 아무런 결과도 없다면 아마도 지옥에 떨어질 길밖에? 이런 경우가 말씀으로부터의 신앙의 교리물들에 해당되고, 기독인의 삶의 가르침들의 경우인 이유는 이것들이 영적 법칙들이기 때문이다. 교리물이 생활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당사자에게 주지 못한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어떤 것이 생명이 있다면, 이 생명 자체가 있는 곳이 우리의 의지 속 그 외의 다른 곳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보라.
이로부터 말해지는 바, 구약 성경에서 주님에 의해 말해진 것이 신약 성경에서 확증된다; 즉 모든 율법과 모든 예언들은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에서 발견되어진다, 고로 삶 자체에서, 그러나 삶이 없는 신앙에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만으로는 결코 아니다; 결과적으로 확신(confidence)안에서도 아니다, 그 이유가 확신함은 선행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위험의 때들에서 악과 더불어 나타나면, 또는 죽음이 확실히 임박했을 때이다면, 이것은 더욱 더 가짜 확신이다. 그 이유가 이런 상황에서의 확신은 저 세상에서는 눈꼽만치도 확신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신앙을 확신함이라고 하든 신뢰함이라고 하든 사악한 자들과 더불어서는 아무런 결과들이 없다, 이를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받았던 많은 그들에게, 그리고 그분의 이름 안에서 믿는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들 이 되는 힘을 주셨다; 이들은 피(blood)들로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고, 살(flesh)의 의지로 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 태어난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요. 1:12, 13).
“피들로부터 태어난” 자들은 선행에 폭행을 한 자들이다, 또한 진리를 모독한 자들이다; “살로부터 태어난” 자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악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부터 태어난” 자들은 거짓 신조(false persuasion, 거짓 관념 false notion)들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진리를 의미하나, 반대 의미에서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이들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아져 왔었던 이들, 그러므로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을 영접한 이들, 그분의 이름 안에서 믿는 이들, 그리고 이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힘을 주신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신앙만으로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결과하는지 이다.
인간이 거듭나지고 교회가 되기 위하여 그는 진리를 통하여 선쪽으로 이끌어들여져야만 한다는 것; 진리가 의지와 행동에서 진리가 될 때 이끌어들여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진리가 선이다, 이 진리가 진리로부터의 선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진리들을 산출한다; 처음동안 이 진리는 그 자체를 열매가 풍성해지게 만든다. 이렇게 산출하고 열매가 풍성해지게 한 진리가 내적 진리이고, 이 진리로부터 선이 있는데, 이것이 내적 선이라 불리운다; 진리가 의지 안에 심어질 때까지 어떤 것도 내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지 속에 있는 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측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가 인간의 바깥쪽에 머무는 한, 즉 이해력에만 머무는 한, 그것들은 인간의 바깥쪽이다; 그 이유가 이해력은 바깥쪽이고, 의지는 안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 이는 얼핏 보기에 내적 선이 떠난 듯 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나가다” 또는 어디로 가다“가 떠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내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떠남은 사실상 얼핏 그러다는 것일 뿐인데, 그 이유는 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요셉에 관련되는 처음부터 끝까지는 질서적으로 있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을 표현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보다 낮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표현하였다, 그 이유가 요셉의 일생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심(glorification)의 형상(image), 또는 유형(type)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거듭남의 경우에서는 이렇다: 첫 상태에서, 인간이 진리를 통하여 선 안으로 이끌어들이어 질 때, 진리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진리는 육체의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선과 더불어서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 진리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 게다가 육체의 감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 속에 있는 진리는 분명하게 나타나나, 선은 그렇지 않다, 허지만 선은 계속적으로 현존하고, 흘러들고, 진리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인간은 이외 다른 방법으로 거듭나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태가 통과되었을 때, 이때 선은 자체를 분명히 밝힌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함을 수단으로, 그리고 생활을 위하여 진리에 애착함을 수단으로 밝히 알린다. 이것들 또한 요셉이 끌려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후에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밝히는 일련의 과정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내적인 선이 떠나서 없는 듯 비쳐짐이 ”하나는 나로부터 나갔다“에 의해 뜻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그는 정녕 찢기워서 조각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는 그것은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졌다를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의 의미가 지각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찢기워 조각남”의 의미가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멸해지다 이다로부터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된 내적 선이 멸해지는 것) 알려진다; “찢기워 조각남”이 이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영계에서 선에 속한 것이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찢기고 조각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경우 죽음과 같은 것, 그리고 죽음에 관련되는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이것들은 자연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죽음, 지옥에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영계에서는 다른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찢기움”도 들짐승에 의해 찢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악들과 거짓들에 의해 선이 조각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찢는 들짐승은 영적 의미에서 탐욕들의 악들과 이 악에서 파생되는 거짓들을 의미하고, 이것 역시 다른 삶에서 들짐승들에 의해 의미된다.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선은 악들과 악들에서 파생되는 거짓들에 의하여서, 그리고 거짓들과 거짓들에서 파생되는 악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멸해질 수 없다. 그 이유가 이 선, 즉 내적 인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흘러드는 이 선이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에게 당도하자마자, 이 선은 악과 거짓을 만나게 되는데, 이 악과 거짓에 의해 선은 마치 들짐승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들로 찢기워 조각나고 소멸된다. 그러므로해서 내적 인간을 통한 선의 유입은 저지되는 바(check), 안쪽의 마음(inner mind)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어 유입이 닫혀지고. 영적 평면 속의 많은 것들은자연적 인간이 영적인 것들을 동원해야 추론하고 이야기되는 것을 협조하는 정도에서만이 유입됨의 승인이 있기를 기다리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나마 요구된 협조 사항조차 지상적, 육체적,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일 뿐인 바, 실로 선과 진리에 반대되고, (그나마 끌어다 사용한 영적인 것들은 위의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인 것들을 포장하는) 겉치레(pretence)나 사기침에 일치시키는 것 뿐이다.
하여 보편적인 법칙인 것은 유입(influx)은 유출(efflux)에 의거 자체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출이 저지된다면 유입도 저지되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선과 진리의 유입이 있고, 외적 인간을 통하여 유출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즉 생활(삶) 안으로의 유출, 선행(charity)의 실행(exercise)이 있다는 말이다. 이 유출이 있으면, 그때 천국으로부터의 계속적인 유입이,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한 유입이 있는다; 그 반면, 만일 유출됨이 없다면, 그러나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에서의 저항이 있다면 (즉 악과 거짓이 안쪽으로 흐르는 선을 찢어 조각내고 소멸해버림이 있다면), 유입이 유출에 따른 자체를 조절하는 보편적 법칙이 적용되어, 선의 유입은 뒤로 물러서고, 그것 때문에 내적 인간을 통한 유입은 닫혀져 있는다; 그리고 이 닫힘을 통하여 영적 사항들에 관련하여서는 우둔함이 초래되고, 심지어 인간은 영원한 삶에 관련된 것을 모르고, 알려하지도 않는다; 끝내 그는 미쳐져 있어, 거짓들로 진리들에 반대하여 맞서게까지 하고, 거짓들을 진리들이라고, 진리들을 거짓들이라고 부르고, 악들을 선들에 반대하여 맞서게 하고,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로 그는 선을 찢고 완전하게 조각낸다. (선과 악의 구분이 없게 해버린다.)
“찢기워짐(torn)”이라는 단어는 말씀에서 때때로 언급되는데, 그때마다 대체로 적당한 의미는,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통하여 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악들을 통하여 멸해지는 경우는 “시체(carcass)”라고 불리운다. “찢기운” 것만이 언급될 때는 위 두 경우 모두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쪽의 의미가 저쪽의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찢기운” 것이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을 수단으로 멸해진 것이 의미되었기 때문에, 표현 교회에서 찢기운 어떤 것도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찢기운” 것이 위와 같은 영적인 악으로 천국에서 이해되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금지 명령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들짐승에 의해 찢기운 살을 먹음에서 무슨 해(피해, harm)가 있을까?
“찢기운”것들에 관하여, 그들이 이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시체의 지방과 찢기운 것의 지방이 모두 각각에게 사용을 위해 있을지 모르나, 먹으려하는 조건이다면, 너희는 그것을 먹어서는 안될 것이다 (레. 7:24).
다시:
시체와 찢기운 것과 더불어 더럽혀지는 바, 너희는 그것들을 먹지 말 것이다: 나는 여호 와이다 (레. 22:8).
그리고 다시:
거룩함의 사람들로 너희는 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들판에서 찢기운 살을 먹 지 말 것이다; 너희는 개들에게 그것을 던져야 한다 (출. 22:31).
에스겔서에서:
예언자가 말한다, 오 주 여호비이시여! 보십시오 제 혼은 더럽혀지지 않아왔습니다, 그리고 시체와 찢기운 것을 저는 저의 젊은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먹지 아니했습니다, 하여 역겨움 의 살이 내 입 안으로 오지 아니했습니다 (겔. 4:14).
위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찢기운 것을 먹는 것이 역겨움인 이유는 그것이 찢기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악들로부터 있는 거짓들을 수단으로 선이 조각들로 찢기움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시체”는 악들에 의한 선의 죽음을 의미했다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에 의해 선이 조각들로 찢어짐이 다윗으로부터의 아래 구절들로부터 내적 의미에서 있다:
사악한 자의 모습은 사자 같이 있다, 그는 찢기를 바란다, 그리고 은폐된 장소에 앉아 있는 젊은 사자로서 이다 (시. 17:12).
다시:
그들은 나에 맞서 자기들의 입을 열었다, 찢고 으르렁대는 사자이다 (시. 22:13).
그리고 다시:
그들이 사자로서 내 혼을 찢지 않도록 구출해주는 자 아무도 없다 (시. 7:2).
“사자”는 교회를 황폐해지게 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미 지나온 구절의 요셉에 관련한 것에서, 즉 그가 자기 형제들에 의해 팔리움을 당하고, 그의 튜닠(웃옷)은 피로 물들여져 그의 아버지에게로 보내지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은 나의 아들의 튜닠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찢고 삼켰다, 요셉은 조각들로 찢겼다” (창. 37:33)를 다시 생각해보라.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너희는 내 얼굴들로부터 이 하나 또한 데려가려 한다. 이는 만일 새로운 진리 역시 떠나려 한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말해지는 주인공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내 얼굴들로부터 그를 데려감”의 의미가 영적 선으로부터 떼어내지는(estrange) 것, 고로 떠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진리가 “이스라엘”인 영적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만일 이 진리가 떠나버린다면, 선 자체와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 날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은 그것의 품질을 진리들로부터 취하기 때문이고, 진리들은 선으로부터 그것의 있음(생명)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둘 모두는 (사실상의)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해악이 그에게 닥친다면. 이는 악들과 거짓들을 수단으로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해가 닥친다”의 의미가 악들과 거짓들로 해서 상해받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외 다른 피해당함은 영적 의미에서 뜻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계에서 모든 피해는 악들과 거짓들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흰 머리털이 악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이는 영적 선, 그런고로 교회의 내적인 것은 멸망하리라를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 그리고 영적 교회의 내적 부분이다로부터; “흰 머리털”의 의미가 교회의 최말단이다로부터; 그리고 “악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다”의 의미가 멸해지는 것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선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과 거듭나지는 것, 그러므로 “악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인 바, 고로 멸해지는 것이다. 만일 베냐민에 의해 표현되는 진리가 멸해질 것이다면, 교회의 내적 부분도 멸해진다는 말에 주목해보자: 선이 선이 되어 있으려면, 선은 그것 자신의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진리들도 진리이기 위하여서는 그것 자신의 선을 지녀야만 한다. 진리 없는 선은 선이 아니고, 선이 없는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결혼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을 두고 천국의 결혼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만일 이쪽이 떠난다면, 다른 쪽은 멸해진다; 그리고 이쪽이 악들과 거짓들로 해서 찢기운 바 되어 저쪽으로부터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의 종 나의 아버지에게 갈 때. 이는 교회의 선은 내적 교회의 영적 선과 상응함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 스스로 이것을 말하는 자인 유다의 표현함이 교회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유다가 표현하는 교회의 선은 외적 교회의 선이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영적 선은 내적 교회의 선이다; 그리고 외적 교회의 것들은 내적 교회 속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 고로 유다가 표현하는 교회의 선은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과 상응한다.

그리고 이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면. 이는 만일 새로운 진리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면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소년”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의 혼이 소년의 혼과 묶여 있는 바. 이는 밀접한 결합이 있어 온 터에를 의미한다. 이는 “혼(soul)”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고로 이쪽의 생명이 저쪽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 고로 친밀한 결합이 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이 “베냐민”인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와 밀접하게 결합함 이다. 이쪽의 혼이 다른쪽의 혼에 묶여 있듯이 선과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밀접하게 결합함의 경우는 이렇다: 인간의 마음, 이는 인간 자신이고, 인간의 생명이 있는데, 두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는 신앙의 진리들쪽으로 할당(allot)되어져 있는데, 이해력이라 불리우고, 또 하나는 선행의 선쪽에 할당되어 있고, 의지력이라 불리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서는 이 두 능력들은 반드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능력들은 모두 떼어져(disjoin) 있다. 이는 이런 사실로부터, 즉 인간은 진리인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했음에도 얼마든지 그것을 뜻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두 능력은 서로에게 별개의 것인 듯하고 있다는 것을 알는지 모른다. 우리는 십계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진리이다는 것을, 또한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물들에서도 이런저런 것들이 진리들이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사항들을 지적으로 확증할 수 있고, 그것들이 진리임을 타인들에게 전도까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을 놓고서는 다르게 뜻하고, 그것이 별개의 것인 듯, 자신과는 무관한 듯 행동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인간에 있는 이 두 능력들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열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런 사실로부터,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 그를 천국쪽을 향하여 승강하게 한다는 것, 악을 뜻하는 것은 그를 지옥 쪽인 아래로 끌어당긴다는 것으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인간 당사자는 이 둘 사이에 걸려 있다. 그의 생명이 존재하는 그의 의지가 여전히 아래쪽으로 당기고 있다면, 필시 갈 곳은 지옥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이 두 능력들은 결합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거듭남을 통하여 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진리를 선행의 선 안에 심음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고로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인간은 새로운 이해력을 수여받고, 선행의 선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수여받는다. 이리하여 두 능력들은 하나의 마음을 만든다

그리고 그가 소년이 있지 않음을 볼 때 그는 죽을 것입니다. 이는 (만일 “베냐민”인 진리가 떠난다면) 영적 선은 멸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죽는다”의 표현함이 이와같이 있기를 중지하는 것이다로부터, 고로 멸해진다 이다.

그리고 당신의 종들은 당신의 종 우리의 아버지의 흰 머리털로 하여금 슬픔 속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입니다. 이는 교회와 더불은 모든 것은 끝장 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살폈다.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이 교회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표현하는 영적 선이 인간 안에서 교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적 선”이라 말하든지, “교회”라고 말하든지 같은 말이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분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이다.

32-34절. 당신의 종은 이 소년을 위해 나의 아버지 앞에서 담보가 되어 말하기를, 만일 제가 그를 당신에게 데려오지 않는다면, 저는 영영 나의 아버지에게 죄인 될 것입니다. 33 그리고 지금 원하옵기로, 당신의 종이 이 소년 대신 내 주에게 종으로 남아 있게 하소서, 그리고 이 소년은 그의 형제와 함께 올라 가게 하소서. 34 이 소년이 저와 함께 있지 않는데 어떻게 제가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 가겠습니까? 필시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닥치는 악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당신의 종은 내 아버지 앞에서 이 소년을 위해 담보가 되어 말하기를. 이는 그것 자체에 근접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구를 “위하여 담보가 된다”의 의미가 그를 자신에게 인접되게 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베냐민이 표현한 진리가 “아버지”인 영적 선과 더불어 있지 않고, 한동안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인 선과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적 선과 영적 선은 상응을 수단으로 하나로서 행동한다.

만일 내가 그를 당신에게 도로 데려오지 않으면. 이는 그것이 영적 선과 합쳐지지 않으면을 의미한다. 이는 “도로 데려오다”의 의미가 다시 결합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영적 선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영영 죄인 일 것입니다. 이는 돌아서서 떠남, 그리하여 교회의 선은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죄인이다”의 의미가 분열함이다로부터, 고로 돌아서서 떠남(turn away, 외면함, 돌보지 않음)이다; 그리고 만일 유다가 표현하는 외적 교회의 선이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내적 교회의 선으로부터 자체를 돌려세우면, 거기에는 교회의 선은 더 이상 있지 않다. 결합 자체가 선으로부터 교회가 있게 하는 원인이다. 이 두 선들, 즉 내적 교회의 선과 외적 교회의 선의 경우는 이렇다: 내적 교회의 선, 또는 내적인 선은 외적 교회의 선, 또는 외적인 선을 유입을 수단으로 생산한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내적인 선은 외적인 선을 지켜보기 위하여 외적인 선을 자신쪽으로 승강하게 한다, 하여 주님을 향하여 위쪽으로 이다. 이것은 결합이 있을 때 거행된다; 그러나 만일 분열이 있다면, 외적인 선은 자체를 돌아서게 하여 떠나고, 아래쪽을 쳐다보는 바, 멸해진다. 이런 돌아서서 떠남이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영영 죄인일 것입니다”에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바라옵기로 당신의 종이 이 소년 대신 내 주에게 종으로 남게 하소서. 이는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종으로 제공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함을 박탈하는 것이다, 고로 자신을 타인에게 통째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를 수단으로 자연적 인간 또는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 아래 복종함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선이 자체를 복종시키는 곳에서는 진리들 자체도 복종하는 결과가 따라오는데, 그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년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이는 내면의 진리가 영적 선과 합쳐지기 위하여를 의미한다. 이는 베냐민의 표현함이 새로운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자기 형제들과 함께 올라 감”의 의미가 자기 아버지와 다시 결합함, 즉 이스라엘에 의해 표현되는 영적 선과 다시 결합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베냐민이 표현하는 내면의 진리는 새로운 진리이다. 그 이유가 이 진리는 하위인 진리에 비교하여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이 진리가 선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 이것이 내면의 진리이다. 즉 이 진리는 “이스라엘”인 영적 선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에 내면의 진리인 것이다. 의지로부터의 선행의 선, 고로 애착으로부터의 선행의 선은 내적인 선, 또는 내적 교회의 선이다; 그러나 애착으로부터 있지 않은 선행의 선, 즉 순종함으로부터 있는 선, 그리고 의지로부터가 아니고 교리로부터 있는 선은 외적인 선, 또는 외적 교회의 선이다; 그리고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들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 소년이 저와 함께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가 나의 아버지에게 올라가겠습니까?” 이는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 내면의 진리 없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이스라엘의 표현함이 자연 평면으로부터의 영적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소년”인 베냐민의 표현함이 내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알려지고 있다.

필시 저는 나의 아버지에게 닥치는 악을 볼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멸해짐을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see)”의 의미함이 이해하다 이다로부터, 그러므로 거기로부터 지각하다가 있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멸해진다는 것이 “그에게 닥칠 악”에 의해 의미되는데, 이와 같은 말이, “그의 흰 머리털이 악 안에서 무덤으로 내려가게 만듦”의 경우이다, 또한 만일 그의 아버지가 그의 형제와 더불어 보지 못한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에 의해서도 같은 말이다. 이것이 의미되어진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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