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1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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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31장

이스라엘의 패전과 사울의 죽음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거룩한 저자는 이 나라의 통치자나 백성에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돌출시켜 지면을 할애하고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와 연결되는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는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게 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일상사와 마음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정부, 즉 하느님의 나라는 영감된 기록의 장엄한 주제이고 그외 원리나 힘은 하늘 왕국의 번성을 도와 주거나 방해하는 정도로 소개하고 있다. 하느님의 왕국이 말씀 안에 있듯 우리 안에도 있다. 주님의 나라는 우리가 관심을 두고 가장 중요시하는 제일 가는 목적이다. 그외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목적을 안정되게 발전시키는데 영향을 미치는 수준에서 관심을 둘 뿐이다. 28장 1절, “불레셋군과 이스라엘군이 싸우려고 군대를 집합시켰다”는 대단히 짧은 기록에 이어 사울과 엔도르의 무당, 그리고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있었고 그가 아말렉을 공격했다는 긴 이야기를 전개해 놓고 있다. 양쪽 군대가 전쟁 준비를 했다는 짧은 서술 뒤에 본문의 첫 절이 이어진다. “불레셋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군은 불레셋군에게 쫒겨 도망치다가 길보아산에서 마구 죽어 나갔다.” 이 짧은 문구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아 공표되고 있는지! 전쟁과 패전이 짧고도 평범한 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전쟁 자체로나 그 전쟁 결과로 보나 평범한 전투는 절대 아니다. 이 전투는 이스라엘 왕국의 운명을 판가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첫 왕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었다. 동시에 그 왕과 백성이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 조건과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준 전투였다. 전쟁 자체가 이스라엘을 질책한 원인은 아니지만 그 패배는 백성들이 타락했다는 표시가 되었다. 전투에서 숫적으로 열세해서 이스라엘의 군대가 불레셋을 피해 도망친 것은 아니다. 만일 사울이 이스라엘의 강함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면 적의 어떤 강함도 그를 격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혼백을 불러내는 영을 지닌 그들에게서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자기의 도덕적 약함과 실지의 불신앙이 초래하는 결과를 보았다. 자기 종교를 미신으로 대체할 때, 또는 “생명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해결책을 구할 때 위 사울의 신세가 되고 만다. 하느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지 못할 때 죽은 신앙을 지닌 이들에 의해 처벌되어진다. 불신앙의 이스라엘은 믿음만을 표현하는 불레셋에 쫒겨 도망쳤다. “악이 사악한 자를 도륙하리라.” 사실 본문 전,후의 글자상에서 보면 사울만이 악과 불신앙을 지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왜 백성들까지 사울의 죄로 고통당해야 할까? 자녀들은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 받고 신하는 제 통치자의 잘못 때문에 욕을 당하고, 군인들은 장군의 무능력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이 역사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책임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과 합세했다. 사실 그들은 나라에 공헌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야 했고 자기들을 도울 최고의 군인이 누구인지 구별했어야 했다. 게다가 다윗 군대로 인해 급박한 죽음을 모면한 크일라 주민이 사울의 수중에 다윗을 넘긴다는 것은 너무 비도덕적 양심 소유자의 소행이었을 뿐이다. 지브 사람들은 사울에게 다윗의 은둔지를 비밀리에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그들이 사울의 범죄에 동참했듯이 사울이 받는 벌에도 마땅히 동참할 수밖에 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자연적이고 도덕적 법의 집행 말고도 그 법칙에 근거한 영적 법칙의 작용도 있다. 이 법칙은 우리의 정신적, 영적 삶을 규율하는 법칙이다. 우리가 첫 번째 준수해야 할 원리를 그르칠 때 그에 따른 부수적 단계는 올바른 길과 참 목적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목적이 악하면 그에 동원되는 수단은 사기 책략들이고 행동 결과는 죄뿐이다. 통치하는 사랑이 더 수준 낮은 애착 안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속성에 일치하는 품성과 결정을 애정에 주게 된다. 더구나 그 사랑과 전혀 다른 속성까지도 지배해 버릴 때도 많다.
이런 원리와 꼭 맞아 떨어지는 게 사울의 역사이고 그의 운명은 우리에게 위의 원리를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가 불레셋 군대에 쫒겨 도망치자 불레셋군은 겁에 질린 졸병보다는 거물급에 목표를 집중시켰다. “불레셋군은 계속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다, 말기수아를 쳐죽였다. 전세가 이미 다 기울어진 판에 사울마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말았다. 사울은 자기의 무기당번에게 일렀다. ‘저 오랑캐들에게 붙잡혀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네가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나 무기당번은 감히 칼을 뽑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사울은 손수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당번과 사울의 부하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어떤 큰 사건도 이 전투의 결과만큼 큰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제아무리 황폐해진다 해도 이 패배만큼 처절할 수 없다. 아마 이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궤가 옮겨지면서 엘리의 두 아들이 살해되고 엘리 마저 의자에서 넘어져 죽는 사건일 것이다. 이 경우는 비록 패배했다 해도 전멸당한 것은 아니다. 엘리의 죄가 대 이변의 원인 중 한 가지였고 사울의 죄도 또 다른 대 이변이지만 그것을 자초했다. 각각의 경우 그 계승자는 전임자가 무가치하게 통치했지만 합법적인 통치 시기 동안에 신성하게 미리 임명되었다. 그리고 계승자는 전임자 자신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양육되었다. 사무엘이 엘리 밑에서 가르쳐 길들여 졌고 다윗은 사울 밑에서 어느 정도 나마 그러했다. 두 사건 모두 같은 일반적 교훈을 가르친다. 다른 점은 판관과 왕으로서의 표현적 속성뿐이다.
영적 의미와 실제적 교훈을 배울 의도에서 이 역사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울 자신이 관련된 대 이변에 관한 상세한 것에서 너무 지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울 자신은 물론 백성, 자기 하느님의 적들과 마지막이요 운명적인 전투가 될 거라고 사울 자신도 의심할 바 없었던 전투인데도 전투를 강행한 무모한 용기에 감탄할 어떤 점이 없지는 않다. 이 점만이 불레셋과 교전한 사울 왕에 관해 좋게 말해줄 수 있는 전부일 것 같다. 사울이 전쟁에 참가하는데 있어 용기가 부족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충실도가 부족했다. 충실해지는 것은 용기를 내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하다. 자아 사랑이나 사리 사욕도 본래 가지지 않았던 용기나 담력을 흡입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으나 성실함은 자아 사랑이나 사리 사욕의 포기를 종종 요구한다. 의무나 책임에 성실하려면 우리가 가장 아끼는 자연적 애착을 부정해 버리도록 요구한다. 사울도 즉위 초기 시절, 즉 자신이 별 큰 인물이 못된다고 여기고 있던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고상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아각 왕을 살려 놓았을 때 그는 꽤 관대함으로 통치하는 듯 자신을 평가했을는지 모르나 그것은 하느님의 소리와 이성을 거역한 것이었다. 다윗을 향한 그의 행동에서 그는 자연적 인간의 속성을 명백히 드러냈다. 자연적 인간의 좋아함과 싫어함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줏대 없이 작동한다. 자연적 인간의 상냥함이나 안심함이 타인을 측량할 때 그런 좋은 자질이 자신 안에 있는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로 이루어진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네게 무슨 보상이 있을까?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종교적 윤리를 표준으로 판단한다면 사울 통치의 후기는 거의 악마적인 속성을 암시하고 있다. 잔인하고 저속한 모든 열정의 부모격인 자아 사랑의 본성이 다윗을 향해서 공포적인 행동으로 적나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그의 행동은 다윗이 그의 목숨을 살려주는 사건에서는 더욱 대조적으로 가증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후기 통치에서는 관용, 아량, 용서 같은 보다 고상한 태도는 아예 비쳐지지도 않는다. 이미 살핀바 있듯이 사울은 통상적인 표준에 의해 판단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완전하게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나 그의 직무 경력의 많은 기간 동안 악마에 홀려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행동은 더 인상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그이유가 자연적 인간의 본래의 품성, 또는 우리의 자연적 마음의 본래의 품성은 이보다 더 완전하게 보여줄 방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의 체험에서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죄와 더불어 있게 되는 비참함과 가엾음이다. 그의 마지막에서 그가 하느님을 버리고 이미 떠난 영과 개인적으로 접촉해서 해결책을 알려고 하는 우리의 병든 모습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사울의 개인적 행동을 들여다 보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만 특히 그의 생을 마감하는 장면, 마지막 전투인 본 장을 그를 통해 표현된 품성 측면에서 잘 생각해보는 것도 더욱 유익할 것이다. 그는 주님께서 최대한 양보하신 상태에서 타락의 속성을 어머니로부터 입은 자연적 마음의 품질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울의 품성을 우리에게 반영시켜 볼 수 있고 같은 영적 영향력에 신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그의 품성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사건과 주변 상황이 가르치는 영적 교훈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사울의 표현적 품성과 행동에 관해서 이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중시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사울에게 수여되어진 기능 자체는 거룩하고, 표현적 측면에서는 신성이고 영적이다. 이 기능이 개인에게 붙어 있다 해서 그 개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주님의 기름부은 자로서 거듭나는 인간을 표현하고 육체 안에 계신 주님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울의 개인적 품성에서는 위 두 가지 모두와 부합되지 않는다. 다윗은 자기애 관하여 이 구별을 명백히 만들었다. 다윗은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죄 있는 자로, 기름부은 자로서의 자기는 거룩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울의 적인 불레셋과 그외 여러 민족들도 다윗과 싸웠고 다윗도 그들과 교전했으나 그것은 개인 차원이 아닌 공적 차원, 즉 그들이 지배하길 원했던 왕국의 왕의 차원에서 였다. 그러므로 이런 전쟁들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대항해서, 또는 그분의 나라를 위한 전쟁, 영적 전쟁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에 대항하는 임무가 주어진 이들이 표현한 영적 전쟁들은 주님 개인 차원에 대해 주어진 임무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교전은 그분에 대항해서 한 번 수행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분이 육 안에서 나타나실 때 개인적 차원에서 공격당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 자신과 그분의 나라의 적, 어둠의 영들에 의한 것은 악마와 사탄으로 불린다. 어느 전투에서든지 주님은 정복자이셨다. 그러면 사울과 불레셋 사이의 마지막 전투,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사울도 죽게되는 전투는 그분의 전투 중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험- 싸움에서 정복하는 이들의 외관에는 패배의 외관이 언제나 있다. 주님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격렬한 시험, 십자가의 고난이 이 외관을 표출했다. 그분의 죽음은 어둠의 영들에게는 승리의 쾌거로 비쳐졌다. 드디어 그들은 그분을 정복했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 그분은 죽음의 끈을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권능을 가진 영화된 인성으로 일어나셨다. 이긴 듯 보인 승리는 패배로 갑자기 바뀌어 그들 자체가 끌어내려져 영원히 그분께 종속되어 버렸다. 이 한 개의 예만이 가시적이었지만 모든 시험은 똑같은 가상과 실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험이 극에 달하면 자포자기가 뒤이은다. 그래서 시험당한 자가 자포자기되면 시험자에게 승리가 있는 듯 보인다. 또한 모든 시험에는 죽음과 부활이 뒤따른다. 옛 사람의 어떤 것이 죽고 새 사람의 어떤 것이 살아난다. 옛 사람의 죽음은 악령에 의해 결과되는바 이것이 악령에게는 승리인 듯 보인다. 새 사람의 부활은 천사에 의해, 또는 천사를 통해 주님에 의해 결과되는데 이것은 악령에게 실제의 패배이다. 그러므로 악령에게는 통치하는 사랑이라는 일반적 측면과 애착과욕망이라는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옛 사람의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각종 수단들이 허용된다. 악령은 제 죽음의 장례를 치르는 죽은 자이고 새 사람은 신성한 명령 “너는 나를 따르라”에 순종한다 (마태 8:22).
그러므로 사울의 죽음, 그의 아들의 죽음, 이스라엘 군대의 패전을 주님의 신성화 하심,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시켜 이해해 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영의 패배와 죽음이 아니라 육의 패배와 죽음을 뜻한다. 이를 두고 사도들은 우리가 그분과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육의 죄를 벗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위 설명에 걸맞지 않는 듯 여겨지는 사울의 죽음에 관한 한 가지 세부사항이 있다. 사울은 적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 그럼에도 이 사항도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선포하신 진리 측면에서 주님을 표현한 것으로 고려되고 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요한 10:15,18).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 만을 취급한다. 그리고 이 의미 안에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화 하심 또는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됨에 관한 모든 상태가 묘사되어 있다. 마찬가지의 모든 상태들은 지옥을 종속시키고 천국의 모든 것까지 포함해서 질서에로 환원하신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전멸,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어둠의 권세와의 그분의 싸움, 승리, 인성의 신성화와 관계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울의 군대가 도망치고 사울 스스로 죽는 광경은 주님께서 마지막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있던 모습과 매우 비슷한 게 있다. 예수께서 높은 성직자가 보낸 무리들에게 잡혔을 때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님의 작은 무리가 도망친 것은 사울의 큰 군대가 도망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이다. 그분께 복종당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던 악령들은 주님이 잡히자 대 성공이라고 기뻐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대한 순간에 주님의 제자들이 도망했을 때 주님 스스로 피할 방도를 구하지 않으셨고 잡히는데 어떤 저항도 않으셨고 적의 손에 그분 자신을 내맡겼다. 자신의 생명을 얼마든지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자신을 내어 놓고 있다면 이는 자기 희생, 산제물이 아닐까? 물론 이 모습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주님의 기름부어진 자로서의 마지막 행동에 의해 표현적 백성의 역사 안에서 기름부은 자, 메시아의 모형을 특징짓고 있지 않을까?
또하나 기억해둘 게 있다. 시험받고 죽는 것은 주님의 인성에 있는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이라는 것이다. 신성처럼 여겨지는 진리 즉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는 사람의 아들로 의미되기도 한다. 이는 천사나 인간의 납득력에 걸맞도록 유한하게 있는 신성한 진리, 천사나 인간이 영적인 것과 신성에 관해 느끼고 생각해 볼 때 그들의 상태에로 내려오는 가상으로 옷입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분의 개인적 고통과 죽음에 관해 말하는 신약 성서의 어느 곳에서든지 그분은 언제나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 언급하신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수단으로 주님은 말씀 측면의 그분 자신에 관해 언급하신다. 현재로서는 더 이상 주님은 시험당하시거나 개인적으로 죽음에 놓여질 수 없다. 이제는 그분에게 가해진 모든 것, 육체 안에 계실 당시 그분이 받으신 모든 고통은 말씀, 진리의 성경, 그리고 그분의 교회와 백성에게는 가능하다. 인간 본성으로 옷입혀진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주님 사이에도 상응이 존재한다. 주님이 입으신 인간 본성은 인간의 유전적인 불완전을 가졌다. 그리고 계시된 말씀이 인간에게 내려오느라 입혀진 언어는 타락된 인간의 납득력에 의거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 유대인이 주님을 취급한 것같이 현재의 기독인도 주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것은 가능하다. 기독인이 진리를 부정하고 진리에 반대할 수 있다. 마치 유대인이 주님을 부정한 것과 같다. 유대인이 주님을 죽인 것같이 기독인도 진리를 파괴할 수 있다. 이런 기독인은 자기 손으로 새로이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을 보이는 셈이다 (히브리서 6:6). 이런 바탕에서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이 받으신 대접, 그 대접이 구약에서 기록된바 같이 그분을 표현한 이들에서든지, 신약에서 그분 자신에 직접 가한 대접이든지 어느 것이든지 이는 말씀이 가르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반대되는 이들에게서 말씀이 대접받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정죄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에 있는 이들이 말씀을 취급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런 상응은 아직 더 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련된 것은 무었이든 그분의 교회(the Church)에도 관계된다. 그이유가 이 교회는 주님의 신비로운 몸, 그분 자신의 거룩한 몸의 형상이고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그 진리로 떠받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가 신실한 사람의 일반적 몸을 구성하는 것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교회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를 인정함까지 다 포함해서 이다. 그러므로 유추의 고리와 그것의 연결은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천국과 지상의 그분의 교회에,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가장 미미한 그분의 제자들에게 까지 내려온다. 한 가지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모든 것에 관련되고, 장소에 따라 각각에 관해 다른 점은 내려오는 규모를 말하고, 그 규모는 첫 원인으로부터 마지막 결과에 까지 이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자연계에 소속된 것 같이 그 대부분이 진리의 외관(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외관들은 그것 자신의 교정을 위한 수단 그 자체 내에 보유하고 있다. 외관적 진리들은 진짜 진리들이 어느 정도라도 발견되거나 밝히 알려질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에서이든, 그분의 일 속에서이든, 진짜 진리에 선천적으로 모순되는 것으로 해서 그것이 가상(외관, 껍질)이라는 것이 입증되어 질 수 있다. 말씀의 외관적 진리들은 참으로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영적 의미는 글자가 함유한 영(soul) 또는 생명이어서 글자가 죽을 때 글자 속의 의미는 살아 남는다. 그러나 이 원칙은 성경의 모든 글자에 해당되는 게 아니고 외관적 진리들에 국한된다고 조심스럽게 이해해 두어야 한다. 그 이유가 성경의 글자적 의미에는 외관적 진리들 뿐만 아니라 진짜 진리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짜 진리(real truth)는 글자 안에서도, 영혼에서도 참된바 언제나 바뀔 수 없어 영원하다. 외관적 진리(apparent truth)는 영혼 안에서는 참되나 글자에서는 그렇지 않은바 바뀔 수 있어 일시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주님은 누구에게나 선하시고 그분의 온유한 자비는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넘쳐나고 있다는 것은 글자에서도, 영혼에서도 참이다. 그 반면 주님은 날마다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신다는 것은 영혼의 경우는 참이지만 글자의 경우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예에서라면 영혼은 글자에 반대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는 사악한 자, 그들의 모든 상태에까지, 주님의 본성에 상반되는 상태에까지 퍼져가지만 그분의 사랑은 사악한 자가 느끼기로는 그분이 성내신 듯, 아예 자기를 미워하는 듯 여기므로해서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자 의미는 반드시 죽고 영적 의미는 살아나야 한다. 참으로 단어들이 함유하고 있는 진짜 진리인 영적 의미가 발견되어지고 밝히 알려질 때 글자 의미는 마치 제 스스로 자결하듯 죽는다. 주님의 영의 칼, 순수하고 영적 의미로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가상적인 진리를 쳐서 떨어뜨린다. 이것은 말씀의 전체 측면이나 부분 측면에서나 똑같이 적용된다. 성경의 어느 한쪽 부분이라해도 그 속의 순수하고 영적인 의미가 알려지면 거기에 소속된 가상적 진리는 자연스레 죽어지는 게 아니라 폭력적으로 죽어진다. 죽는다 해도 가상적 진리는 계속 성서 안에 체류한다. 마치 자연계와도 같다. 그러나 더 이상 진짜 진리로 간주되지 않는다. 더 이상 가상적 진리는 삶의 안내도, 교리의 원천도 되지 못한다. 더구나 불레셋이 그것을 남용할 수도 없고 최소한 타인의 신앙을 파괴하는데 남용되지 못한다. 그들은 생명없는 몸을 움켜쥐고 모욕해버릴 수 있겠지만 영만큼은 모욕할 수도 없고 남용도 할 수 없다.
이상 살핀 내용은 본장에 관한 일반적 관점이다. 이 지식을 가지고 역사의 세부사항을 살핀다면 더 흥미가 있게 되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레셋을 피해 달아나다 길보아 산에서 마구 죽어나갔다. 길보아란 샘(fountain)이라는 뜻이고 거기에 샘이 있다. 이 샘은 이즈르엘 골짜기 근처에 있었고 이스라엘 군대가 집결한 곳이고 거기서 이스라엘 군대가 부상당해 쓰러졌고 사울의 아들들도 살해되고 사울 자신도 자결해 버린 곳이다.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인 영적 사랑을 상징하는 산, 길보아가 최소한 한동안이지만 자연적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자연적 사랑이 통치하면 영적인 영원한 죽음이다. 가장 좋은 것도 뒤집히면 가장 나쁜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이 최상의 의미도 반대되는 법칙에 의하면 최악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시온은 높은 산이 되어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하도록 명령되어 있다(이사야 40:9). 그러나 그분이 오셨을 때 악마는 그분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분을 시험했다 (누가복음 4:5). 율법이 시나이산에서 선포되었으나 갈보리산에서는 모독되어졌다. 이런 구절의 예를 보면 산은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 거룩한 원리를 상징하지만 자아를 사랑함이라는 부정한 원리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을 우리는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를 쫒는 자, 하늘의 독수리보다 빨라 산등성이에서 끈질기게 따라오고…” (예레미야 애가 4:19). “나는 너의 살코기를 산에 내다 버리고 네 시체로 골짜기를 채우리라” (에제키엘 32:5). “네 군대는 다시 모을 길 없이 이 산, 저 산에서 흩어졌다” (나훔서 3:18). 본문의 역사로 표현된 것 같이 교회의 진리가 세상의 오류 앞에서 도망칠 때, 또는 종교의 원리나 참된 개념들이 거짓된 자들 앞에서 퇴각할 때, 그 한계점은 삶에 관계된 것들이다. 참된 것의 종착지는 선이고 거짓의 종착지는 악이다.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졸병들을 도망치도록 했을 때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해 따라 잡았다. 그리하여 불레셋은 세 아들을 죽였고 설사 사울이 자결하지 않았다해도 필시 불레셋의 칼에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전체 속의 세 구성요소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울은 통치하는 원리 자체, 아들들은 원리 자체로 규율된 이끌어 가는 원리, 이스라엘 군대는 통치되는 보통의 원리들이다. 보통의 원리들은 더 높은 원리가 안주하는 기초를 형성하고 받쳐준다. 따라서 보통의 원리가 제각기 도망친다면 그외 다른 원리, 제아무리 높은 원리라 해도 파멸된다. 말씀 측면에서 이를 생각해보자. 글자 속의 보통 진리들은 그외 더 높은 진리의 기초를 형성하고 더욱이 그것 안에 신성한 진리가 충만과 권능으로 안주한다. 교회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생활과 예배에 관한 보통의 원리들은 믿음과 사랑에 속하는 더 높은 원리의 기초를 이룬다. 인간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의 생각과 애정의 기초를 이룬다. 기초를 이룬 모든 것은 더 높은 원리들을 떠받친다. 따라서 기초가 조각날 때 그 위, 그 안의 모든 것은 당연히 멸해지고 만다.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치자 사울의 아들들이 살해되고 사울마저 죽는다. 그러므로 영감된 이 역사 기록은 글자적 사실과 함께 영적 진리까지 한꺼번에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다. “…전세가 다 기울어진 판에 사울마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말았다…그리하여 그 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 당번과 사울의 부하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과거 야곱이 요셉에게 내린 축복의 아래 구절처럼 위 사건도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그를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창세기 49:23,24). 이는 마치 사울에 관한 것이 표현했듯 주님에 관한 예언이다. 요셉은 주님의 인성의 영적 부분을, 사울은 자연적 부분을 표현했다. 거듭나는 인간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요셉을 쏜 사수란 영적 교회의 사람을 반대하는 이들을 뜻한다. 그이유가 사수(archer)는 영적 인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은 교리를, 화살은 교리에 소속된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리 속의 진리는 진리 안에 있는 이들과, 교리 속의 거짓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한다. 요셉과 사울 모두 화살을 받아 활 쏘는 자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요셉의 활은 강했다. 그이유가 야곱의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에 의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의 활은 강하지 못했다. 그이유가 그의 손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손에 의해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울로부터가 아니라 다윗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가 나왔다. 천국은 주님의 육을 입으시기 전의 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지상에서 육을 입으신 인성으로부터 였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로부터가 아니라 신성한 진리로부터 성전의 모퉁이 돌, 양의 목자가 왔다. 어머니쪽의 유한한 것은 벗으시고 아버지쪽의 무한한 것을 입으셨다.
이 비극적인 전투에서 언급 않고 지나칠 수 없는 전사자가 있다. 사울의 무기당번이다. 그는 제 상전의 찌르라는 명령을 거절하고 사울의 뒤를 따라 그와 함께 죽었다. 무기당번은 상전의 전쟁 장비를 간수하는 사람이다. 무기당번과 그의 상전의 관계는 진리와 선함과의 관계, 또는 외적 측면과 내적 측면의 관계와도 같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외적 측면은 내적 측면을 위해 봉사하고 섬긴다. 사울이 자연적 마음을 표현하는바 사울과 그의 무기당번은 자연적 마음의 내면과 외면에 해당된다. 자연적 마음의 내면은 우리의 동기가 자리잡는 곳이고 그 외면은 우리의 수단들이 자리잡는 곳이다. 전자는 주인 격이고 후자는 도구에 해당된다.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완전한 일치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되어 행동한다. 일치 않을 경우 외적 측면은 내적 측면이 간절히 부탁해도 순응하지 않는다. 사울의 무기당번은 찌르라는 상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이유는 심히 두려워서였고 그것도 제 상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 칼 위에 엎드려지자 그의 무기당번도 자기 칼 위에 엎어졌다. 내적 측면이 엎어지면 외적 측면도 엎어진다. 내적 인간이 죽으면 외적 인간도 그와 더불어 죽는다.
이 전투의 또하나 비극적인 결과가 이어진다. “그 곳 골짜기 건너편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군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모두 저희의 성읍을 버리고 도망치자 불레셋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거주한 성읍은 생명 있는 진리들로 가득 찬 교회의 교리를 표현했다. 이 성읍이 이스라엘 사람에 의해 버려지고 불레셋이 거주한다는 것은 생명 있는 진리가 텅비고 거짓들로 점령당한 교회의 교리를 표현한다. 위 사항이 무엇을 뜻하냐고 물어 온다면 몇 가지 예를 들어 답해야 하리라 본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가르쳐질 때, 하느님 안에 세 가지 신성한 본질이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다면 그 교리는 진리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신성한 세 분(persons, 인물들)이 있다 라고 가르쳐진다면 필시 그 교리는 거짓으로 꽉 찬 것이다. 대속의 교리를 가르치되 하느님 자신과 세상이 재회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진리를 내포하게 되지만, 아버지 되시는 하느님과 세상이 재회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계신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거짓을 내포하게 된다. 부활의 교리를 가르치되 삶이 끝나면 영체로 일어난다고 가르치면 진리로 이 교리는 차있는 것이지만, 세상 끝에 자연적 몸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치면 그 교리는 거짓들로 꽉 찬 엉터리에 불과하다. 신앙의 교리가 진리로 차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faith of love)이 구원해준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신앙 만으로(faith alone) 구원된다고 가르치면 그 교리는 거짓들에 소유당한 것이다. 교회의 본질 되는 것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교회라는 이름은 남아서 존속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읍을 버리고 도망치고 불레셋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다.
그 이틑날 불레셋 군은 길보아 산에 올라, 죽은 군인들의 옷을 벗기다가 사울과 그이 세 아들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사울의 목을 자르고 갑옷을 벗겨 불레셋 땅 방방곡곡에 보내어 저희의 우상과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나서 그가 입었던 갑옷은 야스다롯 신당에 보관하고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 놓았다. “ 불레셋이 사울의 몸에 가한 모욕, 목베기와 일종의 십자가형은 유대인이든 기독인이든 영적 불레셋에 의해 진리에 가해진 모독을 표현한다. 그리고 한분 인물 안에 진리로서 계신 주님과 계시된 진리로서의 그분의 말씀에 가해진 모독까지 표현한다. 주님의 말씀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 결국 종교 자체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연결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기름부은 자, 사울의 목을 잘라 그의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다. 악의 공격에 선을 방어해주는 진리를 말씀에서 제거한다면 그것은 영적 불레셋이 사울의 갑옷을 벗기는 것이다 거짓 원리가 참된 원리를 뒤엎고 모든 그들의 예배와 생활로 당당히 들어간다면 그것은 영적 불레셋이 저희의 우상과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격이다.
불레셋 군이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 신당에 보관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신 아스다롯이 달을 표현한다고 믿어지는 좋은 이유가 있다. 성경에서 달은 신앙을 상징한다. 불레셋을 달과 관련해 생각한다면 신앙 만의 원리를 표현하고 이 원리를 절대 중시함이 아스다롯을 예배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선함을 방어해야 할 진리가 선함 없이도 구원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신앙 만의 교리를 섬기게 된다면 그것은 사울의 갑옷이 아스다롯 신당에 있는 셈이다.
불레셋이 사울의 시체를 못박아 놓은 성벽이 있는 벳산은 과거 므낫세 지파의 상속분이었는데 그 지파 사람들은 그곳의 가나안족들을 다 몰아내지 못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강해지면서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여호수아 17:11-13, 판관기 1:27). 벳산이란 이름은 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실한 사람들은 진리에의 순종으로 획득한 선 가운데서 자신이 쉴 집을 발견한다. 그러나 불성실한 자들은 악 가운데에서 저들이 쉴 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악을 선이라 부르고 있고 진리가 자기들에게 순종하게 만들어 정착한다. 진리가 벗겨지고 그 능력이 박탈된 선이 놀림감이 된 모습이 사울의 시체를 벳산 성벽에 매단 것과 같다. 므낫세의 성읍은 선을 방어하는 진리를 표현해왔지만 불레셋의 성읍이 되면 악을 방어해주는 거짓을 표현한다. 두 종류의 유신론자가 있다. 두 종류 모두 “선은 제가 옳다고 우겨대지 않는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경우 “악은 정죄되지 않는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의 신앙이 공개되지 않는 이상 이것은 비밀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비록 이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저 세상에서는 명백해 질 것이다. 또한 진리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당신이 자연적 빛을 벗어나 영적 빛으로 들어갈 때, 마치 사후 있어지는 모습 같을 때 신앙이 무엇인지, 선행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그때 신앙은 형체에서 선행이라는 것, 그러므로 선행은 신앙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 마치 애착이 생각 속에, 소리가 언어 속에 있는 것과 같음을 당신은 명백히 알 것이다.”
비록 사울의 시체가 벳산 성벽에 매달렸지만 거기에 그렇게 방치되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야베스길르앗에 살던 사람들은 불레셋군이 사울을 이렇게 해치웠다는 소식을 듣고 용사들이 모두 길을 떠나 밤을 도와 벳산에 이르러 사울 부자의 시체를 그곳 성벽에서 내려다가 야베스로 옮겨 화장한 다음 그 뼈를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매장하고 칠 일간 단식하였다.” 야베스길르앗은 과거 이 성읍이 암몬족에게 공략 당했을 때 사울이 군인다운 용기와 왕권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첫 장소이다. 그래서 사울은 야베스 사람들에게는 평판이 매우 좋았다. 그런 연고로 그들은 적이 입성한 벳산 성벽에서 사울 부자의 시체를 구해내기 위해 과감한 용기를 발휘했다. 그리고 왕의 장례식에 걸맞도록 그들을 매장했다. 야베스 사람들에게 과감한 용기가 있게 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야베스는 요르단 저 편에 있는 므낫세 반 쪽 지파에 소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벳산이 요르단 이 쪽의 반 쪽 지파에 소속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두 므낫세 반 쪽 지파들은 영적 선함이라는 같은 원리의 외적, 내적 측면을 의미해준다. 그이유가 요셉의 큰 아들로부터 나온 지파가 영적 선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불레셋에 의해 이 쪽 성읍에서 모욕 당한 진리가 저 쪽 성읍 야베스 사람에 의해 회복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야베스 사람들은 과거 다윗을 대우한 크일라 사람과는 매우 다르게 사울을 대우한 것이다. 의심할 바 없는 중요한 이유란 다윗의 시련은 아직 진보되어가는 중에 있었고 사울의 고난은 이제 끝장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첫 왕의 표현적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매장이라는 과정이다. 그이유가 매장은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야베스길르앗 사람들보다 더 효과적인 의미에서 사울을 매장할 수 있었을까? 야베스길르앗 지역 외 어디서 사울의 재가 사울에게 꼭맞는 휴식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야베스 용사들의 과감한 행동은 성실하게 수행된 어떤 선한 행위도 잃지 않는다는 것, 맨 처음 이식된 선은 마지막에 이식된 선에서 실감되고야 만다는 생명의 신성한 법칙을 본보기화해주고 있다. 야베스 사람들에게 보인 사울의 영웅적 자질의 첫 왕권적 행동으로부터 사울 시체에 대한 야베스 사람의 영웅적 자질의 마지막 행동에 이르기 까지의 사이에는 수많은 어두운 낯과 밤이 그 세월 사이에 끼여 있었다. 모형 되는 품성 차원에서의 사울, 영적 마음에 적개심을 보이는 자연적 마음을 표현하는 다윗의 추격자로서의 사울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런 것이 있다. 자연적 측면이 죽거나 벗어 던질 때 그것은 마치 땅에 뿌려진 씨와 같이 새로운 나무가 싹이 터 나온다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그러나 사도들이 말하는 이런 구절도 있다.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같이…” (고린도전 3:15). 주님께서 육을 입는다는 예언 중에 스가랴에게 이렇게 말하신다. “거기 안에 있는 삼분의 이는 잘리우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을 통해 삼분의 일을 데려오리라. 그리고 이들을 은이 정련되듯 정련하고, 금이 연단되듯 연단하리라” (스가랴 13:8,9). 말라기가 말한다. “그분은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다. 그는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는 자로 자리잡을 것이다” (말라기 3:2,30. 사울 부자의 시신을 태운다는 것은 위와 같은 종류의 걸러냄, 순수해지게 함을 암시한다. 시신을 화장하는 것이 평범한 유대인의 장례 관습은 아니었다. 설사 이 사건의 경우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해도 야베스 사람들의 이런 조치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덜 명확해진다거나 덜 교훈적이지는 않다. 이 의미는 거듭나는 과정에만 국한된다고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체험의 고된 모든 시련을 통과하신 그분에 관한 일부를 표현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어야 하리라.
야베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뒤 나무 아래 묻고 칠 일간 단식하였다. 이 두 가지 행동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행동들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 그곳을 울음의 상수리라 불렀다 (창세기 35:8). 요셉이 아버지를 안장하러 올라 갔을 때 칠 일간 곡을 했다 (창세기 50;10). 얼핏 보기에 단순한 사건 같은 드보라의 죽음과 매장에도 주님과 거듭나는 인간에 관련된 중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유모인 드보라는 주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유아일 때 자양분을 공급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어머니쪽에서 공급되어진 주님의 것들은 그 자체 연약하고 악한 유전적 본성이고 주님은 이 본성과 싸우셔서 그것들을 추방하시어 마리아의 아들이 되는 것이 중단되게 하셨다. 자연적인 마음으로부터 유전적인 악을 완전하고 영원히 거절함이 드보라가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사울 부자의 뼈가 묻히는 것도 위 드보라의 경우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왜 매장이 거절과 부활 모두를 의미할까? 그이유는 옛 것의 거절은 새 것의 일어남, 부활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 자신의 경우였다. 그분은 인간 쪽 어머니의 생명을 내려 놓으셔서 신성 쪽 아버지의 생명을 들어 올리셨다. 그이유는 “마리아의 아들이 죽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울의 뼈를 묻고 왕을 잃은데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 실시된 야베스 사람들의 칠 일간의 단식은 진리와 선함을 잃은 것, 진리와 선함의 패배에 대한 통곡을 뜻한다. 이 의미는 단식이 지닌 의미 중 한 가지이기도 하다. 상응성이 없어도 유사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기름부은 자로서의 사울과 주님 자신 사이에는 유사성과 상응성 모두가 있지 않을까? 양쪽 모두 적에 의해 못박힘을 받았고 친구들에 의해 안장되었다. 주님의 경우 제자들이, 사울의 경우 신하들이 스승과 상전을 잃은데 따라 곡하고 슬퍼했다. 양쪽 모두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기대했던 희망이 꺽인데 대해 슬퍼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바람”이 되어 왔고 불레셋의 압제에서 해방되도록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치뤄야 할 그가 적에게 되려 정복 당하고 만 것이다. 사울과 그의 아들, 그의 군대는 더 이상 존재 않는다. 요르단강 양쪽의 당황하는 이스라엘족들은 성읍을 버리고 달아나고 그들을 쫒던 적들이 진입해 점령했다. 불레셋은 기뻐 소리치고 있었다. 가장 값진 트로피, 승리의 트로피가 제 아들에 의해 받게 된 불레셋의 신들은 여호와를 눌렀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자포자기해 버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듯 여기고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더 광채있는 날이 이 백성에게 밝아 올 것이다. 허나 이 시간 만큼은 단식만이 그들 상태에 꼭맞는 표현 방법이다. 영적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는 없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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