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9-30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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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9-30장

전쟁 준비- 아말렉이 시글락을 약탈하다- 다윗이 모두를 되찾다

사울 위에 드리운 구름은 더욱 그의 마음과 기대를 어둡게 하고 급속도로 더 짙은 먹구름으로 변해가면서 그를 위협하고 있다. 수넴으로 집합하던 불레셋군이 지금은 아벡에 총 집결하고 있고 이스라엘도 이즈르엘 샘가에 진을 쳤다. 사울이 다윗을 자기 휘하에 계속 거느리는 총명이 있었다면 불레셋이 두려워하고 신하들이 사랑하는 견고한 망루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사울이 자살적인 행동을 이끌어낸 어리석음을 속으로 는 통탄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사울은 자기를 강력히 보조할 다윗을 잘라내어 정말 큰 적인 불레셋의 팔 안으로 내던졌다. 그래서 공포의 군대가 그를 몰아 붙이고 천국은 그에게서 영영 닫혀지고 대신 그는 황천의 문을 두드리며 죽음과 상의하고 있다.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이 진을 친 이즈르엘로 행군하려고 “불레셋 추장들은 백명씩, 혹은 천명씩 부대를 편성하였고 다윗의 일행은 아기스와 함께 후방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본문을 읽으면 마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 나라와 싸우겠다고 하는 적들과 연합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가 적의 대열에 서서 자기 백성과 싸울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다윗의 이런 곤경은 불레셋 그들 자신에 의해 미연에 막아지게 되었다. 어쨋든 만일 다윗이 전투에 임했다고 가정한다면 불레셋 추장들이 그를 의심한 것, 즉 “그가 싸움터에서 제 상전의 환심을 사려고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판가름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다윗이 배반할 수 있다고 불레셋 추장들이 믿은 또 한 가지 증거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귀환할 때 “사울은 수 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 만을 치셨다네” 라는 여인들의 노래이다. 아마 다윗은 쓴맛 나지만 성실하게 처세했든가 아니면 철저히 아기스를 속였든가 어느 한쪽에 해당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아기스가 다윗에게 불레셋 추장들의 결정을 전해줄 때 다윗이 항의하듯 되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이 날까지 당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에게 무슨 허물이 있었다고 싸우러 나가지 못하게 합니까?” 아기스가 다윗을 믿는 신뢰는 변함이 없다. “내가 보기에 장군은 하늘이 보낸 사람처럼 훌륭하오. 그럼에도 불레셋 지휘관들이 장군과 함께 싸우러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찍 부하들을 데리고 정해준 곳으로 떠나시오.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을 데리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불레셋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불레셋은 이즈르엘로 진군해 갔다.” 다윗의 대답은 위에서 추정했던 두 가지에 모두 일치하는 듯 하다. 그러나 지난번 아기스에게 신분을 위장해 완전한 속임수를 썼던 것만큼이나 지금은 완전히 그에게 충복을 바치고 있는지에 대한 근거는 없는 것 같다.
본문의 각 개인들로부터 파생되는 교훈은 단지 도덕적 반영 뿐만 아니라 영적 해석에 의해 생각하면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게 있다. 만일 다윗이 영적 인간의 모형이고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자신에 대한 모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녕 그는 매우 좋은 것, 매우 고상한 품성만을 드러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고 있다. 또한 대상자의 상태에 따라 표현적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모양새를 가진다. 주님께서는 인간 당사자의 상태에 따라 각각의 사람에게 나타나신다. 시편이 이렇게 설명한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당신을 받들면 당신께서도 두 마음 품지 않고 붙들어 주신다” (18:26). 이 구절은 본문 역사의 상황을 시편 기자에 의해 발음된 것이다. 즉 “이 노래는 야훼께서 사울을 비롯한 모든 원수의 손에서 다윗을 건져주셨을 때 부른 것이다.” 이 시편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에 관해 예언한 것이고 그분이 겪게 될 체험이 다윗의 삶으로 모형화 되어 있는 것이다.
다윗은 아말렉을 습격했는데 아기스에게 유다 지방을 털었다고 표현되어 있었음을 27장에서 살핀바 있다. 이 거짓 표현은 신앙 만의 교리를 지닌 이들이 신성한 진리의 가르침을 형성할 때 있어지는 거짓 개념을 상징화 한 것이고, 이 거짓 개념은 그 개념이 독선이라 불리우는 데는 적개심을 보이나 자아 사랑이라 불리는 데는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까지 상징화되어 있다. 현재 다윗의 위치는 과거 그의 위치와 한 가지 점에서 다르다. 현재의 경우 그가 부하와 함께 자진해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한다고 믿기우고 있다. 지난 번의 경우 그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불레셋과도 싸워야 했다. 이 번의 경우는 다르다. 적 또는 경쟁자가 약해지는 것은 자신의 입지가 강화되는 반사 효과를 얻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 또는 자신이 결부된 타인에 의해 있어져야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제 삼자가 우리의 적과 적군 상태에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친구 상태가 아닐 수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 피해를 입는 게 바람직하다고 상상해왔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의 정복을 위해 다른 국가를 도우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레셋 추장들이 이런 견해를 지녔고 그들이 전쟁터에서 다윗이 반기를 쳐들 흑심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기스 만은 다윗을 친구로 간주했고 다윗이 전쟁터에서 자기를 도우리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다윗과 불레셋 추장들 사이에 관한 본문의 기록은 일찍이 불레셋에 거주한 적이 있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에 관련한 기록을 상기시켜 준다. 이 두 열조는 자기 아내가 누이라고 하여 아비멜렉 왕을 속였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는 높고 거룩한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안다. 즉 합리적 진리는 신성한 진리를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허용된다는 것이다. 합리적 진리는 자매와 형제 측면에서의 선과 관련되고 신성한 진리는 아내와 남편 측면에서의 선에 관련되어 진다.
다윗이 연루된 본문의 상황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아내가 사라와 리브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있어졌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 사건으로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적어도 이사악이 그 곳을 떠난 이유는 다윗을 전쟁터에서 돌아가라는 불레셋 추장의 요구와 유사하다. 즉 “아비멜렉이 이사악에게 ‘너는 우리보다도 훨씬 강해졌으니 여기에서 물러가라’ 고 말했다” (창세기 26:16). 이사악과 아브라함의 경우는 숨긴 사실이 발각된 것이고 다윗의 경우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변증 같은 논리학에서 나쁜 논쟁은 그것을 유발한 당사자에게 되돌아 간다. 종교적 논증에서 극도의 경우 역사의 확실성이든, 원문의 진실성이든 확실히 알든지 또는 강한 의혹을 갖든지 하여 부정해버리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예수의 기적적인 잉태의 사건을 주는 신약 성서 부분에 대한 진실성마저 예수를 단지 인간 수준으로 믿는 이들은 부정한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기적이 정말 있었는지, 그분이 정말 부활했는지까지 의혹을 던지고 부정해버린다. 말씀의 가상적 진리만을 전부라고 믿는 이들이 불레셋으로 표현되고 위와 같은 결과가 이런 불레셋 사람 같은 특성을 지닌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해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고 간주하려든다. 참으로 대단히 많은 왜곡된 생각들이 신성한 속성이나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섭리 측면에 관한 생각 속에 침투되어 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말렉이 네겝과 시글락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놓고 여자를 비롯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은 하나도 죽이지 않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사로 잡아갔다.” 불레셋 군대를 따라간 사이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재난이 불어 닥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시련 중 하나를 표현한다.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새로운 어떤 모험적 계획에로 돌아 설 때 우리의 중요한 이익은 보호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아말렉은 자기들의 속성과 똑같게 본문에서도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방어자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시글락을 약탈했다. 내면의 선에 바탕을 두는 진리가 빛으로부터 퇴조할 때, 마치 다윗이 아기스와 연합하려고 불레셋 군대를 뒤따를 때와 같을 때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은 돌진할 채비를 갖춘다. 참으로 이런 마음의 조건, 즉 진리가 직감의 수준에서 추론의 수준으로 내려올 때 이해성보다는 심정 쪽에 속하는 내향의 믿음에 거짓 암시가 은근히 이식되기 십상이다. 이 때 거짓 암시는 선함의 애착에서 오는 진리의 직감을 박탈하는데 마치 아말렉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자식들을 생포하는 것과 같다. 애착들이 포로가 될 때, 영적 포로 상태인 시험의 상태에 빠지면 생명의 모든 기쁨은 사라진다. 마치 본문에서 “다윗과 함께 있던 무리들이 소리쳐 울부짖다가 지쳐서 더 이상 울 기운조차 없게 된” 모습과 같다. 그리하여 “온 무리는 아들 딸을 잃고 격분해서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고 수근거렸고 다윗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출애굽기 17장 4절을 보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어 헐떡거리자 모세를 돌로 쳐죽이려고 위협했던 모습과 비슷하다. 격렬한 시련의 상태에서, 영혼의 쓰라림에서 마음은 자멸의 막바지까지 이르게 된다. 이 상태에서 신앙 속의 모든 진리와 진리 속의 모든 믿음이 저절로 소멸되게 하는 시험의 늪에서 허덕이게 된다. 이것이 모세를 돌로 치려는 백성의 위협이요, 다윗을 돌로 치려는 부하들의 위협이다. 극도의 이런 위협적 폭동은 모세의 경우 같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을 찾도록 인도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의 하느님 야훼를 믿고 힘을 얻었다.” 진리는 사랑으로부터 힘을 끌어낸다. 끌어낸 진짜 효과, 마치 시련의 진정한 목적 같이 진리와 사랑을 묶는 끈이 더 강하게 되는 것, 먼저 내적 측면에서, 그다음 외적 측면에서 더욱 강건해진다.
내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힘을 얻고자 할 뿐 아니라 지혜의 나아갈 방향까지 찾는다. 다윗은 성직자 아비멜렉의 아들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한 다음, “다윗이 야훼께 여쭈었다. ‘이 강도떼를 쫒아가면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야훼께서 ‘쫒아가거라. 따라 잡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도로 찾을 수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신성한 대답은 자포자기된 다윗의 부하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다윗은 부하 육 백 명을 이끌고 나섰다. 브솔 개울에 다다랐을 때 뒤에 처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다윗은 지쳐서 브솔 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이 백 명을 거기에 남겨두고 사 백 명만을 데리고 계속 쫒아갔다. 다윗의 추격은 판관기 7장에 기록된 것, 즉 기드온이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백성들과의 전투 준비 때와 흡사한 점이 있다. 두 가지 유사점이 있다. 육 백 명의 군인들을 다 동원해도 시글락을 침입한 군대를 공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 추격에 참가한 군인은 사 백 명으로 줄어 들었다. 숫자 넷은 둘처럼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현한다. 다윗이 추격하는 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결합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말렉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아내를 끌어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적 결혼이 단절된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다윗의 경우 그의 군대 숫자가 너무 많다거나 물을 마시는 방법으로 숫자를 줄이거나 하는 등등은 말해지고 있지 않다. 다윗의 부하들은 기력이 빠졌을 뿐 기드온의 군대같이 겁쟁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친 이유는 며칠 동안의 강행군 때문 이였다. 그들은 기꺼이 싸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개울까지 추격해 갔지만 그곳을 건널 수 없었다. 개울이나 강은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속해줄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 (이사야 43:2). 다윗의 부하 중에서 힘이 없어 개울을 건너지 못하는 이들이란 선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상당하는 진리를 지니고 있지 않아 자기들 앞에 놓인 시련을 통과할 수 없는 이들을 뜻한다. 선함 홀로, 또는 진리 홀로만으로는 아무 힘이 없다. 진리는 선함으로부터 모든 힘을 얻는다. 선함은 진리를 수단으로 모든 능력을 언제나 발휘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선함을 지닌 이들이어서 영적 삶의 전투 중 어떤 전투는 참가할 수 없고 시련을 통과하기 힘들다 해도 타인들이 획득한 전리품을 나눠갖는 특전은 있다. 이것이 이 본문에서 본보기가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적을 추격하고 있다가 “벌판에서 에집트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다윗에게 데려왔다.” 이 종은 그가 병들자 상전인 아말렉 사람이 버리고 가서 그는 사흘 밤,낮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먹고 마시어 정신이 들자 아말렉이 저지른 일부터 지금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 알게 되었다. 악한 자를 섬기던 과학은 선한 자도 섬길 수 있다. 지식은 허위와 진실을 섬기는데 고용될 수 있는 도구이다. 지식 없이는 허위도 거짓도 존재할 수 없다. 그이유가 알려져 있는 어떤 것이 허위인지 진리인지를 확증도 부정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사실들 속에 있다. 진리이냐 허위이냐 하는 그것들은 우리가 지식들로부터 끌어낸 결론이고 그것들이 확증하는 것을 섬겨주는 원리이다. 과학은 신앙인이 계시된 종교 속의 진리들을 확증하는 것을 돕는다. 마찬가지로 비신앙인이 부정하는 것도 도와준다. 과학은 참되고 선한 것으로 채워질 수 있고 반대로 악하고 왜곡된 것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그릇이다. 마치 에집트 종을 아말렉이 보살필 수 있고 이스라엘도 보살펴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과학은 병들어 있거나 건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판단에 따라 더 이상 쓸모 없을 경우 주인이 폐기시킬 수도 있다. 악한 자의 목적을 섬기느라 과학이 피로해졌는데도 악한 자가 그것을 경멸하고 거절할 때 병들게 된다. 인간이 공개적으로 사악해질 때 과학은 악한 자가 의롭다고 떠드는 억지를 받쳐주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과학물에서 악과 거짓이 빠지면 선함과 진리, 자연적이고 영적인 것이 마치 에집트인이 사흘을 굶다가 빵과 물, 무화과와 건포도로 배를 채우듯 빈자리를 채운다. 그러면 진리를 섬기고 파괴와 모독함을 벗어난다. 마치 다윗이 에집트인을 제 상전에게 되돌려 보내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그에게 맹세해준 것과 같다. 그러면 이런 과학적 지식은 과거 마음을 약탈하던 악의 거짓들을 찾아내는데 긴요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에집트인의 안내를 받은 다윗은 “아말렉이 깔려있는 곳, 불레셋 지방과 유다 지방을 털어온 것들을 먹고 마시며 흥청거리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자연적 마음이 감각적 쾌락으로 휘청거리고 더 높은 품성이 낮은 품성인 욕망의 전리품으로 전락되어 있는 모습이 아말렉 진영의 풍경이 지닌 의미이고 이 진영은 육욕적인 마음과 육적 인간에 대한 참 형상이기도 하다. 감각적 즐거움에 다 내어준 자연적 인간 같은 아말렉은 자신들이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진리의 심판은 자기들에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때와 상황이 같다. 여느 심판과도 같이 아말렉에 대한 심판도 밤중에 떨어졌다. “다윗은 황혼부터 .이튿날 해질 무렵까지 그들을 처부수었는데 겨우 사백 명 정도가 낙타를 타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황혼(twilight)은 새로운 상태의 새벽이고 이때에 영적 빛이 마음에 드리워 마음의 품성을 밝히 알게 해서 심판하는 신성한 진리의 작업 아래 그 마음을 가져오게 한다. 이 심판의 완벽함이 황혼부터 다음 날 해질 무렵까지 살륙이 계속된 것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도망친 사백 명이라는 숫자는 아말렉 군의 숫자에 관한 어떤 착상을 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백 명만이 낙타를 타고 도망쳤다는 이 구절의 묘사는 역사적 사건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다. 아말렉의 살아남은 사 백 명이란 아말렉으로 표현된 원리를 확증한 수준은 아니고 단지 일반적 지식 수준에 머무른 이들을 말하고 그들이 타고 도망친 낙타란 참되고 선한 지식에 대한 애정을 뜻한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글자대로 성취했다. “다윗은 아말렉군이 털어갔던 것을 모두 되찾고 두 아내도 살려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했던 것을 되찾았다. 다윗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아들 딸은 물론 그들에게 빼았겼던 물건까지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되찾았다.” 이는 과거 아브람이 반역한 왕들에게 강탈당했던 모든 것을 되찾은 사건과 역사적 사실이나 그 의미에서 까지 똑같다. “아브람과 그의 부하들은 여러 패로 나뉘어 밤을 틈타 그들을 기습, 다마스커스 북쪽에 있는 호바까지 추격해 가면서 모든 것을 되찾아 냈다” (창세기 14:15,16). 아브람의 경우에도 아말렉족이 거론되고 있다. “그돌라오멜은 동맹을 맺은 왕들과 출동하여….아말렉족의 온 땅을 쳐부수었다” (창세기 14:1-7). 영적 인간을 지배하려던 자연적 인간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다윗의 사건에서 표현되고 있다.
되찾은 물건외에도 승리의 전리품인 소떼와 양떼를 앞세우고 돌아 오던 다윗은 뒤에 쳐저 있던 부하 이백 명을 만났다. 실지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 중 어떤 부하들은 그들에게 처자만을 주고 전리품을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것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싸우러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뒤에 남아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다 한가지로 똑같이 분배해야 하오.” 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다윗의 그날 판결은 이스라엘의 관습법이 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너무 지쳐서 개울을 건너지 못해 뒤에 처진 사람들이란 선을 원리로 삼고 있지만 영적 삶의 싸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진리가 충분치 못한 상태를 뜻한다고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진리는 선으로부터가 아니면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지 않고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도 이미 거론한 바 있다. 사실 선과 악은 직접 대결하지 않는다.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악은 거짓을 수단으로 싸운다. 그래서 모든 악이 제각기에 걸맞는 거짓을 수단으로 악 자체를 방어하듯 모든 선도 제각기에 어울리는 진리로 자체를 방어한다. 악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악에 반대되는 선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투에 임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건을 지키고 있었다. 이 물건(stuff)이란 다윗 군대의 보급품이다. 사울이 제 몸을 숨긴 “짐짝(stuff)”에 관해 이미 살핀바 있듯이 이것은 글자대로 보면 용기(vessel)들을 뜻한다. 용기는 과학물 또는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진리들은 아니고 단지 진리를 담거나 내포할 수 있는 그릇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들은 지식들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지식들이 진리들이다. 따라서 지식은 이해함에 앞서 온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전 우리는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그 진리에 반대하는 거짓과 싸움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하는 이들, 비록 그것 가지고 전투는 할 수 없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지식을 공급해 줄 수 있고 언제인가는 자신들에게도 거짓에 대항하는 진리, 악에 대항하는 선을 옹호하는 수단이 되어 줄 수 있다.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규칙은 이러하다. 동일한 선한 목적 때문에 노력들이 서로 병합되고 있다면 그것을 달성하는데 있어서의 방법이 다르다 해도 전리품은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에서 물건을 지킨 아내도 밖에 나가 더 적극적으로 물건을 획득한 남편과 똑같은 배분의 권한이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교회에서는 선물은 다양하지만 그 영은 하나이다. 사랑의 똑같은 영으로 영향받은 모든 이들은 각자의 선물이 무엇이든 간에 전체 습득물의 혜택을 똑같이 나누어 갖게 된다.
선견자의 “비망록”을 보면, 전리품을 똑같이 나누는 사건에 담긴 의미는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고용하는 비유에 담긴 의미와 같은 진리를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한 시간 일한 일꾼이 온 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한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의 저서를 보면, 일꾼이 고용된 각각의 시간은 삶이 각기 다른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3시- 6시- 9시에 고용된 이들은 진리의 상태에 있는 이들이고, 11시에 고용된 이들은 진리의 상태에 있지는 않으나 선한 상태에 있는 이들, 그래서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이들, 다시말해 이해성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을 뿐 마음씨 고운 젊은 이들 같은 상태에 속한 이들이다. 이 마지막 일꾼이 본문에서 물건을 지킨 군인들에 해당된다. 이들은 진리를 알지만 이해 못하고 있어 전투에 임할 수가 없다.
모든 부하들에게 동등한 몫을 나누어 준 다윗은 “시글락에 돌아와 친분이 있는 유다 장로들에게 전리품을 보내면서 말을 전하였다. ‘야훼의 원수들에게서 털어온 것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성의 장로들, 자기와 부하들을 거느리고 드나들던 모든 지방의 장로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다.” 이런 다윗이 표현한 주님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분은 권세와 세력을 못쓰게 만드셔서..” (골로새서 2:15). “…그는 강한 자와 전리품을 나누리라” (이사야 53:12). 구속자가 굴욕을 받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분의 축복은 그분이 드높혀짐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둠의 권세에 승리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그분께서 획득하신 전리품을 신실한 모든 자들과 나누신다. 이를 본문에서 강조하고저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아말렉이 포로로 삼은 자들을 구해내는 사건으로 다윗은 그분 스스로 시편에서 예언적으로 기리신 신성한 구원을 표현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당신께서 높은 곳에 오르셨다. 당신께서는 사로잡은 자를 포로로 끌고 가셨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위해, 또한 반역자들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 이는 주 하느님께서 그들 사이에 거하시기 위해서이다” (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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