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8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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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8장

사울과 엔도르의 무당

사울이 엔도르의 무당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주는 호기심 있는 흥미와 함께 대단히 엄한 훈계라는 두 측면의 특이함은 여느 성서 구절도 여기에 버금갈 수 없을 것이다.
여인이 소유했거나 또는 소유했을 거라고 상상되는 초자연적 능력의 본성과 그 범위, 그녀가 사무엘을 불러내는 실상과 가상 또는 환영 등등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에 의해 토의되어 왔다.
위와 같은 비평적 견해를 떠나 단순히 역사적 사실 자체만을 생각해 본다면 이 본문의 사울은 자기가 지닌 품행을 통해 하느님과 재물 (God and Mammon)을 동시에 섬기고 싶어하는 마음 바탕의 그림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집행하는데 무척 게을렀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잽싸게 기대려 들었다. 그는 사무엘의 생존시 그의 충고를 우습게 여기고 묵살했다. 그러나 사무엘이 죽은 지금 그의 충고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울은 자기 왕국 내에서 무당들을 추방했는데, 지금 그는 자기가 섬멸하려고 했던 불법적인 능력이 꽤 쓸모있어 지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의 행동이 보여주는바 종교에 진정한 관심이 없을 경우 그런 마음은 미신의 영향 하에 있어지기 쉽다는 것과 자기를 안내해 줄 종교적 원리가 정착되지 못한 마음의 조건에서는 행동이 변덕스러워지기 쉽다는 것 등등이다.
위 두 가지는 이런 질문을 유발한다. 사울이 부탁한 여인이 과연 죽은 자를 불러내는 능력이 있는 것인지 혹은 있는 척 한 것인지, 이 여인이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하기로 한다면 그 여인이 불러낸 사람은 과연 사무엘 자신인지, 또는 예언자의 역을 맡은 연기자 같은 또 다른 사람인지이다. 어쨋든 추론만 가지고는 만족스런 결론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그분에 대한 믿음에 상반되는 어떤 증거도 성경 안에는 없다는 것, 산 사람이 죽은 자와 느낄 수 있게 교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말씀 자체도 이런 사실에 풍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과학의 경우 그 실마리를 전혀 모르고 있을 경우 불가사의한 듯 여겨지지만 알게 되면 보통의 일로 되어진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육체를 지녔던 때와 똑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영혼의 거주지인 영계는 자연계만큼이나 가깝게 있다는 것,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경우 같이 영계와 자연계는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는 크게 의아해 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안다. 물론 인간이 자기 육체의 눈으로 영을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계에 살고 있는 동안이라 해도 자신의 영적 몸의 기관을 가지고 영들이 보고 듣고 하는 상태에 놓이는 게 가능하다는데 의심을 제기할 이유도 있을 수 없다. 육체가 자연적 감각을 지녔듯 영체에도 영의 감각이 있다. 영들이 거주하도록 창조된 인간 영혼과 영계는 최소 규모에서 물질계의 몸과 물질 체계 만큼 진짜이고 실체이다. 영적 대상을 보는 게 당사자에게 좋을 때 신성한 지혜가 이를 허용하면 영적 대상이 표출되고 물질적 몸의 방해 없이 영적 감각을 수단으로 인지되어진다. 천사나 영들이 인간에게 보여지고 만져지고 대화하는 성경의 기록들은 물질적 감각이 아닌 영적 감각에 의한 것들이다. 천사들이 물질적 몸을 입고 나타난 게 아니라 인간이 영적 상태에 놓여진 것이다.
영적 교통이 가능함을 인정할 경우 교통하는 능력이 인간 의지에 의해 실시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특히 본문의 엔도르 무당이 하듯이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상반된 것을 하는 누군가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은 모순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 같은 원칙에서 에집트의 마술사가 실시한 기적의 능력도 그것이 사람을 미혹한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 발휘되었다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는지 모른다. 이런 저런 경우를 두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과 빌라도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사용해볼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께 말한다. “나에게는 너를 놓아 줄 수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을 모르느냐?” 빌라도의 이 말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하늘에서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권한이 발휘되는 어느 곳에서든 그것은 신성한 허용에 의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와 같은 것들을 허용하시되 이 허용은 그것들을 바래셔서가 아니라 한없는 사랑과 끝없는 지혜 되신 분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의지와 지혜를 넘은 영역에서 작업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분 스스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 의지, 그러기에 그분도 위반할 수 없는 자유 의지, 이것이 파괴되지 않고는 악이 예방되어 질수 없을 때 악의 허용이 있어진다. 능력 자체만을 떼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성이다. 마술적인 기적, 또는 불법적인 영적 경이로운 일들은 천국으로부터 훔쳐져서 어떤 통로를 지나 신성한 법칙을 뒤집는데 응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엔도르의 무당이 사울에게 영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나 그외 성경의 이와 비슷한 증거들이 영적 교섭의 법칙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의문으로 남는 것은 엔도르 무당이 불러낸 영이 사무엘의 영인지 아니면 예언자일 듯한 영인지에 관한 것이다.
선견자 자신이 출판한 새 교회의 저서에서도 엔도르의 무당의 경우와 관련되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제18장에서 언급했듯 그의 단편 저서들, 사후 출간된 책들 안에 이와 관련된 글들이 있다.
본문의 사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사무엘이 무당에 의해 나타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본다. 이것은 오류의 한 가지 종류이다. 이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사무엘을 흉내낸 어떤 것이다. 그 이유가 악령에게 허용이 있게 되면 악령은 워낙 교묘해서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를 거의 완벽하게 똑같이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 나는 어떤 영을 매개체로 하여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다. 이 영은 과거 내가 그의 인생을 알고 있는 사람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아 나는 그들과 오랜 동안 대화했는데 그들은 지상 생활 때와 똑같은 듯 여겼다. 이렇게 영들은 자기들이 등장시키고저 하는 누군가를 표현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무엘이 아니라 그를 흉내낸 악령이라는 것을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한 사무엘이 아니었다는 것은, ‘지하에서 유령이 올라 오는 것이 보입니다’ 라고 13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고 이스라엘이 패배할 것을 예견하는 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령이 미래에 관한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으로부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한 영을 통하여 주어지고 이 영들에게 주어진 것이 악령의 언어로 바뀐 것이다. 무수한 예를 통해 나는 악령이 마치 어떤 사건 등등을 예견하는 듯 말하는 것을 관찰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느님 외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어쨋든 본문의 세부사항은 흥미와 더불어 그 역사가 기록하는 영적 현상의 근원과 본성에 만족할만한 관점을 찾도록 우리를 직접 인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사건의 영적 의미와 실제적 응용에 관한 것이다.
본문의 사울도 표현적 품성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깊은 영적 재난의 상태에 빠진 자연적 마음의 상태와 경험, 또는 열정이 다투는 결과에서 자연적 인간이 애쓰는 모습의 상태나 경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불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사울도 이와 맞서기 위해 이스라엘 전군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승리를 보장해주는 확신감이 이번에는 사라졌다. 사울은 이번 전투가 두려웠고 그의 심정은 크게 떨렸다. 이스라엘 백성, 특히 그 지도자들이 믿고 신뢰하라고 가르쳐져온 으뜸가는 진리 중 하나가 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만 주신다면 적의 수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14:6). 사울이 무시해버리고 있었던 이 진리가 시련을 눈앞에 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이 표현하고 있는 영적 시련은 완전하고 충분한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 못하는 느낌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런 경우는 어느 때든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에서 발생한다. 확신을 불어넣는 것이 믿음과 사랑이다. 그 이유가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에게서 파생된 그분의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를 받쳐 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에 속한 것이 아닌 어떤 것 안에도 거하실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과 진리인 그분 나라의 원리를 수단으로 내적 삶을 형성시킨 만큼에 비례해서 주님은 그분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 심정에 영감을 불어 넣으실 수 있어 무가치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주실 수 있다. 솟구치는 두려움이나 비신뢰는 생활이 정상일 때는 느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물론 은밀하게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말이나 행동, 느낌, 생각을 매우 엄격하게 영적 분석을 시도한다면 발견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아마 어느 누구도 삶이 평안할 때 제 마음 상태를 해부해보려 시도할리 만무하다. 어떤 특별한 요구가 우리에게 있어질 때 은밀히 작용하던 사랑과 믿음에 관한 우리의 비신뢰는 급부상해 느낄 수 있게된다. 즉 우리의 영적인 어떤 적이 우리와 맞서려고 포진할 때 과연 싸워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쉽게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그러나 이런 적들이란 우리 심정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이라고 곰곰히 생각해볼 때 원인분석의 실마리가 열린다. 심정 속의 악들, 이해성 속의 거짓들이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활동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고요하고 생활은 행복하다. 그러나 경험의 정상적인 과정을 벗어나는 어떤 것이 있어 우리 속의 악과 거짓이 행동 개시할 건수를 만들어 줄 때 시련의 때는 다가오고 두려움과 겁에 질리게 된다. 이런 것들을 허용하는 하느님의 의도는 우리로 각자 자신의 진짜 상태, 진짜 자기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시어 개선되는 결과가 있게 해주려는데 있다. 바꿔말해 우리의 진짜 모습은 평범한 조건에서는 자기에게 존재 않는 듯 여겨지고 특별한 조건 즉 비상 상태에서는 존재하는 듯 보인다는 말이다.
불확실함, 곤경 같은 모든 상태를 당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끊임없는 위로와 진실한 조언의 근원을 하느님 안에 가지고 있다. 큰 임무를 수행하게 될 때, 특히 전투가 막 개시되려 할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조언을 구했다. 이때 지도자이든, 백성이든 속죄되지 않은 죄가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했다. 이 책 14장에서 이에 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적들을 다 추격할 때까지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말라는 사울의 명령이 있었는데 요나단이 꿀을 맛보았다. 물론 요나단의 행동은 사울의 명령을 하달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있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응답은 보류되었다. 이 사건이 가르친다. 모든 악이 행동으로 불거질 때, 설사 무지로 인한 악이라 해도 언제든지 모든 악은 하느님의 영향력의 하강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의도적인 악과 의도적인 악 사이에는 폭 넓은 차이가 있다. 어느 쪽도 비록 수준에는 차이가 있지만 상처를 주는 결과 만이 있다. 이에 대한 이유는 명확하다. 바깥쪽의 악은 유전적인 본성에 있는 안쪽의 악이 돌출된 것이다. 양쪽의 악은 비록 어느 한쪽이 알려지지 않은 때일지라도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요나단의 실수에서 살폈듯이 악이 행동으로 반복되어 돌출되다 보면 생활의 습관이 되어간다. 그리고 악한 습관은 그것을 생산되게 한 우리 속 악한 경향성을 더욱 굳혀 강화시킨다. 그런 이유로 덕행을 쌓는 것, 질서 있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 더구나 올바른 원리들을 계속 획득해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아마 젊은 세대의 교육에 이런 원칙의 응용은 상당히 중요하리라 본다. 현실의 악 또는 행동하는 악, 설사 비의도적으로 범하여졌다 해도 그것을 범한 당사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의식에서 의식적인 죄 뿐만 아니라 무지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있다. 이런 의식은 실지의 악, 비록 경미하다 해도 당사자가 하느님과 교통할 수 있기에 앞서 실용적인 회개를 통해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요나단이 미처 몰라서 지은 죄까지도 하느님의 응답의 길을 가로 막았을 정도인데 하물며 사울의 경우는 어떠할까? 실수의 죄보다 의도된 죄는 얼마나 더 하느님의 응답을 가로막을 것인가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으리라.
불레셋의 군대를 본 사울, 곤경에 빠진 사울은 주님께 승리의 길을 조회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 세 가지 매체는 하느님과 교통되게 하는 방법들이다. 잠들어 있을 때 꿈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영이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환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말씀 속의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이다. 예언자로 해서 주어지는 것은 교리적 가르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울의 경우, 그가 소속된 교회는 표현뿐인 교회라는 수준에서 그에게는 위의 사항들이 보류되어 있다. 그러나 영적 체험에 관한 문제라는 점에서 영적 교통의 위 세 가지 경로는 하느님께 반대되는 죄로 인해 닫혀진다. 이사야가 말한다.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의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59:2).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1:15). 천국으로부터 오는 빛과 위로가 차단되고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지 않을 때 이보다 더 끔직한 일이 있을까? 이렇게 낙담될 때 무엇이 행해지게 될까? 적법한 순서는 당사자가 요구한 대답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이유가 조회자가 잘못됐을 때 주님과 그분의 말씀은 답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더 말한다.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16,18). 우리가 바라고 요구한 것들을 받지 못할 때 그 원인이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인 그 자체가 우리를 가르칠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고백과 애원, 회개와 착한 행실로 그분의 응답이 오는 것을 저해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게 우리의 지혜요 의무이다. 자신이 바란 것을 획득하는 수단을 찾는 데에서나, 가장 슬기롭고 가장 나은 소원이라 해도 그것을 달성하는데 있어지는 장애물을 찾아낼 때도 우리는 자신 밖만을 점검하려 드는지! 이런 점검으로 생산된 판단의 왜곡된 형태는 우리를 더욱 큰 악을 범하는 쪽으로 유인해 간다. 다시 말해 신성하게 지정된 큰 길과 질서 있는 수단들을 우습게 여김으로 우리 자신에서 닫혀진 것들을 불순한 경로와 금지된 수단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든다는 말이다.
사울은 통회의 재를 둘러쓰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대신, 신성한 법과 자신이 선포한 법이 정죄하고 있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원한 것을 획득하려 했다. 하느님의 법은 이렇게 선포되어 있다. “너희 가운데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에 살라 바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또 점장이, 복술가, 술객, 마술사, 주문을 외는 자, 도깨비 또는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백에게 물어보는 자가 있어서도 안된다.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모두 야훼께서 미워하신다…너희는 한 마음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만 섬겨라” (신명기 18:10-13). 사울이 위와 같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였든지, 자신의 왕명을 내세우고 싶어서였든지 그는 나라에서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과 박수를 몰아내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리자 그는 자기가 근절시키라고 했던 무당을 오히려 찾아 나섰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울을 모방할 때가 많다. 자기 판단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정죄해버린 것에 상황이 위급하다는 핑계로 편리주의를 도모해 자기 심정을 거기에 기대고 타인의 어떤 행동이 대단히 비뚤다고 핀잔했던 것을 자기 스스로 버젓이 재현한다. 꼭 배워야할 큰 교훈의 하나는 자기 고유의 영혼에 신뢰를 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속에 하느님께 충실함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무는 주 하느님 만을 잘 받드는 것, 그분은 우리의 모든 선함의 샘이시며 모든 생명의 저자로,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그분께 접근하고 그분의 말씀과 진리의 교리들을 통해 그분의 얼굴을 보려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 행함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본문 같은 초자연적 지식의 불법적인 유통은 악한 심정이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진리와 선함을 설득하려드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뜻에 반대되는 일꾼들, 무당이나 강신술사 같은 사람은 인간의 썩어진 이기심에서 근원하는 각종 편법 수단을 표현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하느님에게만 속한 분야요 그분만이 발휘할 수 있는 권능을 자기 목적을 위해 발휘하라고 억지를 부린다. 이런 편법과 그 노력은 기회만 있으면 선을 위압하려든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락에게 고용되었을 때의 경우가 성경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민수기 22-24장). 발람은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도록 하늘로부터 강요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점장이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원수 갚을 때 그도 살해되었다 (민수기 31:8). 민수기의 이런 사건은 본문의 경우와도 똑같다. 사울은 금기된 능력 안으로 제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제가 원했던 것과는 너무 상반된 답변 만을 받았다. 제깐에 영리해서 불순한 경로를 이용한다 해도 받아야 할 벌은 피할 도리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불레셋의 손에 넘기고 그와 그의 아들들도 그 전투에서 죽게 된다고 말하시고 있다.
사울이 처한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시험에 푹 빠진 것, 진리의 생명이 소멸된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영적 삶을 발전시켜가는 이들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사울의 죽음은 옛사람의 남은 찌꺼기의 생명이 죽는 것, 그리고 진짜 생명인 다윗이 새 능력을 더해 더 드높혀지는 것까지 암시한다.
성서의 무당들, 영적 의미로 이해해 본다면 그들은 신앙의 진리에 자아 사랑이라는 악의 거짓을 접합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술수는 모독의 죄를 포함하고 있다. 사울이 하느님께서 지정한 예언자를 버리고 엔도르의 무당과 상의하는 것,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뢰를 버리고 죽은 예언자인 무당에 신뢰를 둠으로 그는 신성한 것에 더러운 것을 혼합시켜 자멸로 빠져들고 말았다.
사울이 찾아 나선 무당은 전부터 사울이 알고 있던 무당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변장했다. 옷을 바꿔 입고 두 신하와 함께 밤중에 그녀에게 갔다. 이 모습은 거룩함에서 모독함으로 돌아선 사람들의 상태와 행동을 얼마나 강력하고도 간단하게 표현하는지! 그들은 자신을 위장한다. 그들은 진리의 옷을 거짓의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렇게해서 의지와 이해성이 충족되면 “오로지 악만 계속 있을 뿐인 자기 심정의 생각에 대한 망상”에 관해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에게 문의하려고 낮의 빛을 피해 밤의 어두움을 이용한다. 사울이 원하는 내용이 하느님에게 물어 보아야할 것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여 그분께 묻는 것을 결코 거절한 것도 아니다. 어쨋든 그가 거룩하지 못한 매체를 통해 원한 것을 획득했다고 결론지어 보아도 그의 생각 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한 때 그가 죄악시하여 섬멸하려던 짓을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마치 무당이 은밀한 방문자에게 사울의 명령 사항, 즉 이 땅에서 무당과 박수를 몰아내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이 잘못된 쪽으로 크게 기운 이상 자신의 행동이 삐뚤었다고 판단하여 자기 의도를 철회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 진다. 그래서 사울은 “이 일로 자네에게 죄가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하고 쉽게 보증까지 서주고 있다. 바람이 탐닉될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벌어질까? 왕의 명령에 따라 이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었을 때 그 여자는 큰 소리를 쳐 말했다. “왜 나를 속이셨습니까? 당신은 사울 왕이 아닙니까?” 왜 유령은 방문자가 사울이라고 여인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확신시켰을까? 이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영적 이유가 거기에 없을까? 예언자 사무엘은 말씀, 그리고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말씀 속의 진리는 인간 심정에 매우 잘 숨겨진 비밀까지 밝혀준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신 말씀까지도 다 알고 낱낱이 이스라엘 왕에게 말해줍니다” (열왕기하 6:12). 그러나 두려움도 이내 누구려뜨린다. 마음이 어떤 목적물을 향해 완전히 구부러졌기 때문이다. 사울은 무엇을 보았느냐고 여인에게 묻는다. 사울의 이 물음은 아직 그가 유령 자체를 보지 못했다는 표시이다. 영은 자연적인 눈으로는 보여질 수 없고 영적인 시야가 신성한 능력으로 열려질 때 보여진다는 것, 그래서 이쪽은 저쪽을 보고 있지만 저쪽이 이쪽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과 확실히 일치하고 있다. 주님께서 영혼의 눈에 덮힌 베일을 벗겨 주시겠다 할 때 나타난 영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울이 열린 이 환상을 받기 전 어느 정도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같이 여겨진다. 그 이유가 사울이 여인에게 유령의 모습을 물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대답했다. “도포를 입은 노인이 올라옵니다.” “이 말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땅에 대고 절을 하였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고 말했다. 사울은 이 예언자의 유령에게 자기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 그분께서는 더 이상 예언자로도 꿈으로도 대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는가를 사무엘에게 물으러 왔다고 말했다. “야훼께서 이미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되셨는데 어쩌자고 나에게 묻느냐?” 선이 하나도 없는 그를 진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선은 선함을 떠나버린 이들로부터서 만 떠난다. 이럴 경우 진리는 심판의 말만을 들려주게 된다. 진리만의 심판은 자비 없는 심판이다. 자신의 행동 안에 심판의 자비를 제거해버린 이들은 자비 없이 심판될 것이다 우리는 심판하는 대로 심판받게 된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마태 7:1-2). 사울은 스스로 선함이 강탈된 진리의 심판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이 진리는 말하기를, 불순종 때문에 왕국이 몰수되었고 그 왕국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는 것, 당장 들이 닥친 전투는 참혹해진다는 것까지 들려주고 있다. “내일이면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게 되리라 게다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불레셋 군의 손에 붙이실 것이다.”
이 엄청난 미래에 관한 소식을 듣자 “사울은 그만 땅바닥에 번 듯이 쓰러졌다. 하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해 기운이 빠진데다가 사무엘이 하는 말에 겁을 먹고 기절했던 것이다.” 사울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사건 줄거리로 짐작해 보건대 사울이 쓰러진 것은 참회로 인한 자발적인 엎드려짐이 아닌 자포자기로 인한 비자발적인 엎드려짐이다. 그 외에 그에게는 아무 기력도 없었다. 그는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단식은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이사야 58:6) 진정한 단식으로 주님을 경외해서가 아니다. 여인이 사울에게 다가와서 뭔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는 거절했다. 그러나 “신하들과 그 여자의 청에 못이겨 일어나 침상에 앉았다.” 그가 앉은 침상은 참된 교리라는 침상이 아니었다. 그 침상은 여자 점쟁이 (pythoness)의 침상이었다. 그녀가 마련한 살진 송아지는 거룩한 송아지가 아닌 부정한 살코기(학개 2:12, 에제키엘 4:14)이고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서가 아닌 악마에게 바치는 제물로 우리는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친절을 다하는 여인 무당까지 위 사항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사울의 처절한 모습이 그녀에게 더 나은 느낌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울의 불쌍해진 모습을 지켜보는 그 순간이나마 그녀는 자신이 무당이라는 존재를 떠나 있었다. 표징적인 역사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행동은 다른 품성을 가지고 있어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악한 수단을 채용해 거기에 몰두될 때 공급된 그 수단으로부터 우리의 힘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울 역사의 이 부분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엄한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 심정이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마음은 참된 모든 위로를 잃으며 올바른 방향마저 박탈된다. 이런 상황은 난국이나 위험한 때에 진열되고 느껴져 온다. 굳은 날, 잔혹한 시련의 날이 미래에 있는 이상 우리는 주님의 소리에 성실히 답변하려 애써야 하고, 그분의 섭리적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정작 시련에 진입되고 싸움을 거쳐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될 때 그에 대처하는 능력, 인내가 이미 우리 속에 장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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