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7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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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7장

다윗이 불레셋으로 피신하다

앞 장의 사건을 생각해보면 이젠 다윗의 시름이 끝난 듯 여기게 한다. 사울은 더 이상 다윗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을 아들이라고 불러 마치 제 상속자로 우대한 듯 보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 장은 다윗의 비탄, “나는 언제고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다” 는 옛시름으로 시작하고 있다. 사울이라는 왕은 자기가 지닌 좋은 감정을 쉽사리 잃고 자기가 엄숙히 약속한 것도 얼마나 빨리 취소해 버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는 그의 옛 적개심만 앙상하게 남아있는다. 어쨋든 세월의 흐름이라는 것은 앞 장과 본 장에 기록된 사건이 분리되게 한다. 시간의 경과가 길었든 짧았던 사울의 행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사울이 다윗을 통해 느껴야만 했던 책임감은 제아무리 세월이 지난다 해도 지워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사실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바, 사울이 받은 감명은 매우 강했지만 피상적이었고, 그가 받은 느낌은 강렬했지만 금새 수그러 들었다. 강한 분위기로 휩싸여 있어진 그의 결심은 새벽 이슬 같고 돌밭에 떨어진 씨와도 같아 흙이 많지 않은고로 싹은 나왔지만 태양이 강하게 비치면 뿌리가 깊지 않아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과 같다. 정직한 심정이라는 옥토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확신이나 정감은 자아 사랑이라는 태양이 솟아오르면 계속 생존하기가 매우 힘들다. 자연적 수준의 느낌이라는 천박한 토양은 진리의 씨와 덕행이 빠르게 성장하게 해줄 수 있을는지 모르나 매우 빠르게 죽어지고 만다. 사울은 돌밭에 떨어진 씨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인간 모형이다.
악령이 사울을 다시 덮치면 더 격앙된 추격을 받아 애꾿은 희생자가 될 자기임이 내다보이는바 다윗은 이렇게 생각한다. “불레셋 땅으로 망명하는 것이 상책이겠다. 사울은 나를 이스라엘 안에서만 찾다가 결국 단념하고 말겠지. 그러면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과거 다윗은 불레셋의 영토로 피신해서 갓나라 왕 아기스와 대면했던 때도 있었다. 그때 다윗은 이쪽에서의 위험을 피하려고 저쪽으로 도망했지만 거기서도 위험은 여전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친절한 대우를 받고 시글락 성읍까지 그에게 맡겼다. 그런 연유로 이 성읍은 이 날까지 유다 왕실에 속하게 되었다. 처음에 다윗이 불레셋으로 피신하였을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아둘람의 굴에 숨어있을 때 모여든 군인들로 구성된 육 백 명의 군인까지 합세해 피신하고 있다.
불레셋지역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달아난 첫 장소이자 마지막 장소이었다. 불레셋은 에집트처럼 신앙자의 여정 중 어떤 한 단계, 즉 바둑판 무늬같은 거듭나는 삶의 체험을 통해 진보해 갈 때 있어지는 어떤 단계이다. 어쨋든 이 단계는 수준 낮은 단계는 아니다. 에집트로 의미된 단계보다 더 진전된 단계, 즉 자연적이 아닌 천적이고 영적인 단계에 속한다. 아브라함과 이사악도 불레셋에 체류했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불레셋의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새 삶에서 자연적이 아닌 영적 단계는 불레셋에 소속된 것으로 표현되는 체험들이다. 이 단계의 시련은 과학 수준이 아닌 신앙수준에 관한 것, 지식에 관한 게 아닌 신념에 관한 것, 글자가 아닌 영에 관한 것이다. 다윗의 체류지가 이런 단계인 것은 그가 영적 인간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불레셋은 다윗에게 시련의 장소일 뿐아니라 은둔지이기도 했다. 다윗의 두 번째 체류지와 관련된 사항 중 얼마를 이제 살피게 된다.
다윗이 갓으로 망명하면 사울이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망명의 가장 중요한 효과이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은 이제 끝장났다. 그렇다고 사울의 포기는 다윗을 추격하고 싶은 욕망이 죽어져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권 제도를 희망한 목적의 하나는 불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울은 불레셋의 골리앗을 죽여 불레셋의 압제에서 백성을 해방시킨 불레셋의 정복자를 자기 왕권의 적수로 삼아 군대를 백성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사용해왔다. 게다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가장 좋은 친구를 가장 강한 적의 수중에 넘긴 셈이 되었다. 불레셋을 정복해가야 할 사람이 되려 정복되어 있는 꼴이다. 불레셋은 자기들 땅에 다윗의 진입을 허용함으로 다윗을 구하고 사울의 추격도 저지해주었다. 지금 불레셋은 사울의 어떤 추격에서도 다윗을 보호해주게 되었다. 이런 조치로 불레셋은 자기들을 압도할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지켜주고 그의 세력이 더 강해지게 해준 셈이 되었다. 이것은 은혜로운 목적을 향해 섭리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자연적 인간의 힘, 자연적-합리적 인간의 능력도 영적 인간의 힘으로 결코 정복될 수 없다. 서로 다투는 두 열정은 서로를 자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자제되는 결과에는 진정한 개혁은 없다. 따라서 그것들 모두를 억제하고 진압해서 자기 스스로 복종하여 하위 서열에 서게 만드는 더 높은 힘이 있어야만 한다. 이 힘이 얼마나 높은 지가 수많은 신성한 수단들, 각양각색의 허용과 설비해두심으로 결과 되어 진다.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이 깨뜨려지지 않을 경우 구부리신다. 또는 사랑으로 인도될 수 없다면 두려움으로 인간을 억제시킨다.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에로 그들을 인도하는데 그들의 이기적 사랑을 도구로 삼으시기도 한다. 우리가 처음 갖게 되는 종교적 자극 안에는 천국의 사랑 보다는 지옥의 두려움이 더 많다. 그래서 두려움 안에 사랑이 존재한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파멸로 가게 하는 넓은 길을 피하고 대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선택하도록 재촉할 수 없다. 초기 신앙 속에는 자기 과신이 있다. 마치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 않겠읍니다”라고 말할 때의 베드로와 같다. 사실 초기의 믿음이 자기 확신 안에 있지 않으면 베드로 같이 순교도 불사하겠다고 마음먹어 보는 순간 조차 가져볼 수 없다. 처음 지니는 정의 속에는 그 공적의 주인이 자기라는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공적 없이 정의가 그 사람 속에 심어질 수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초기 종교 안에는 자아라는 재료가 대단히 많이 들어가 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이기심이 가득한 재료에 호소하신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이들을 향해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는 옥좌에 않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주님은 수준 높은 동기가 더 발달될 때까지는 수준 낮은 동기라 해도 그것을 수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다가 오신다. 그 이유가 언젠가 우리가 진지한 종교를 지니게 되면 수준 높은 동기는 수준 낮은 동기 안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나비가 풀쐐기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수준 낮은 것이 죽을 때 수준 높은 것은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의 초보적 두려움 안에 사랑이 있고, 자만심 안에 신뢰가 있고, 자기 공적 자랑 안에 무욕이 있다. 시련과 환난을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인내와 버팀으로 하늘나라가 점차 우리 안에 건설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하느님과 하늘 아버지에게 왕과 성직자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해 주님의 진리가 우리의 이해성을 통치하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심정을 통치하는 수준에 이른다.
불레셋에 있는 다윗은 이미 기름부워진 왕이 되어 장차 이스라엘 왕국의 통치를 위해 위와 같은 방법으로 준비되고 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지상에서 고통 받으심으로 완전해지신 그분에 대한 완전한 모형이다. 그분은 기름부은 자요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에도 승천하시어 옥좌에 오르시어 천상천하의 통치자가 되시기 까지 고통 받는 삶을 통과해 가셨다.
다윗은 아기스 앞에 나가서 자기가 거주할 지역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이 사는 지역 외 다른 곳을 원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그러므로 해서 오늘까지 시글락은 유다 왕실에 소속되었다. 시글락이라는 성읍의 역사에는 흥미 있는 줄거리가 있다. 이 성읍은 원래 유다지파의 몫으로 할당되었었다 (여호수아 15:31). 그러나 유다 지파의 몫이 너무 많았으므로 시므온 지파의 몫은 유다 지파의 몫에서 떼어 주었다 (19: 1-9). 그래서 시글락은 유다 지파로부터 시므온에게 넘겨진 것이다 (19:5). 그 결과 시므온 지파의 몫은 유다 지파 영역 안에 있어졌다. 이 두 지파는 서로에게 의지와 이해성이 되어 있다. 천적 수준의 인간의 이해성은 의지 안에 있고 의지로부터 파생되어진다. 마치 시므온 지파의 몫이 유다 지파 안에 있고 이 지파로부터 할당된 것과 같다. 영적 인간의 의지는 이해성 안에 형성되어진다. 천적 인간의 이해성은 의지 안에 있다. 영적 인간은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뜻한다. 그 반면 천적 인간은 자기가 뜻한 대로 이해한다.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은 완벽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어 최고 높은 수준에서 한 마음을 형성한다.
시글락 성읍의 역사가 위와 같지만 본문 당시에는 불레셋의 지배 아래 있었다. 마치 진짜가 가짜에 짓눌린 것과 같다. 그러나 이제 시글락은 다윗의 거주지가 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오랜 뒤에는 진짜 주인인 유다 왕과 그 지파에 남게 된다.
시글락, “샘이 넘쳐 흐름”, 생명 있는 진리와 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이 장소로부터 다윗은 자기 백성의 원수 중 일부를 향해 맹렬한 습격을 감행했다.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술족과 기르스족과 아말렉족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그들을 털곤 하였다.” 세 부족들의 의미 파악은 별로 어렵지 않다. 수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떠난 뒤 목이 말라 지쳤을 때 첫 시험이 있었던 곳이다 (출애굽기 15:22). 그리고 씬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이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습격한 부족이 아말렉족이다 (17:8). 아말렉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을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이 부족들은 다윗의 침입과 연계되어 있다. 이 침입에 관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다윗이 남녀를 한 명도 갓으로 끌어오지 않고 모두 죽인 것은 자기가 한 일을 고해 바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윗은 불레셋 지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줄곧 이렇게 해왔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어디를 털었느냐고 물었을 때 ‘유다 남부와 여라므엘족이 사는 지방 남부, 켄족이 사는 지방 남부를 털어 왔습니다’ 라고 둘러대었다. 그래서 아기스는 그런줄도 모르고 ‘다윗이 제 동족 이스라엘에게서 미움을 사고는 이제 아주 내 종이 되었구나’ 하며 다윗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이 본문에는 다윗의 두 가지 범죄 행위가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몰살한 것을 감추고 있고 왕에게도 거짓말로 대답하고 있다. 기독인의 도덕적 표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럼에도 다윗은 영적 인간의 모형이고 특히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다윗의 행동을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까? 만일 다윗이 자기 영토에서 살고 있으면서 원수들을 습격했다면 이는 칭찬받을만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백성의 적과 함께 살고 있다. 더구나 그는 자기 백성이 원수나 되는 듯 행동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그는 적의 영토 안에서 안식처를 찾아야 하는 만큼 매우 잔인해질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자신이 지배하게 될 이 영토에 무관심하거나 불성실해서도 안 된다. 이외에도 지금 그가 거주하는 지역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하느님께서 선언하시어 그들 후손에게 소속되기로 약속되었던 곳이다 (창세기 13:15, 26:3). 이 지역은 과거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곳이기도하다 (여호수아 13:3).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고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 남겨진 부족 중 하나가 불레셋이다 (판관기 3: 1-3). 그리하여 이스라엘족은 정복하지 못한 부족들과 섞여 살았다 (판관기 3:5). 그래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 역시 불레셋 땅에서 외국인 취급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윗과 부하들과 그 땅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섞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들을 서로 시집 장가 보내고 그들의 신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런 짓은 그들에게 재난을 불러다 주었다 (판관기 3:6-9). 그러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이런 악행을 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섞여 사는 불레셋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불레셋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하늘이 내리시는 기회로 여겼다. 그들을 섬멸할 수밖에는 달리 처방을 내릴 수 없는 그들을 향해 신성한 심판을 대행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불레셋이 베푼 친절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을 불레셋이 눈치채서는 절대로 안되는 게 다윗의 처지였다. 오히려 다윗은 불레셋의 친구가 아닌 적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믿게 해야만 했다. 다윗으로 표현된 신성한 진리의 가르침과 행동으로부터 그것과 상응되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불레셋으로 표현된 신앙의 본성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신앙 만 (faith alone)을 원리로 채택하여 실제로 따라가게 되면 신성한 진리의 가르침과 그 작용에 관해 마음의 직감이 둔해져 설사 보는 게 있다 해도 뒤집힌 모습만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부른다 던가, 어둠을 빛 대신 빛을 어둠 대신 놓는다. 단 것을 쓰다 하고, 쓴 것을 달다고 말한다” (이사야 5:20). 이런 원리에 의거하면 신성한 진리는 악과 싸우는 게 아니라 선과 싸우게 된다. 이는 난감한 말 처럼 들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위 원리는 이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 원리가 합법적 결과를 수행해냈다면 그것은 바깥쪽 측면의 합법적 모양새이다. 위 원리는 아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앙 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일은 칭찬받을만 하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일은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선한 일이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라고 믿게 된다. 그 결과 그들에게 악한 일은 정죄되지 않는다 라고 믿는 것도 과히 어려운 난제는 아니다. 오늘날 이런 식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줄로 안다. 그럼에도 신앙 만으로 구원됨이라는 교리는 위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 위와 같은 왜곡된 경향성을 늘 품고 있다. 그럼에도 신앙 만이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꾸리고 있다. 이런 사람은 영적 불레셋이라는 교파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적 불레셋 사람이란 선이 의롭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악이 정죄되는 것도 아니다 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기 교파가 공언한 내용을 받들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파고드는 신학 저술가의 지적 노력에서 위와 같은 경향성을 목격할 때가 있다. 이런 학자들은 성경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신앙을 우선시하는 듯 보이는 구절이나 사건을 접하면 이를 추켜 올리므로 해서 선행이나 선한 일을 강조하는 성경의 구절은 별로 많지 않은 듯 여기게 사람들의 관심을 돌린다. 설사 이런 구절들이 강하게 그들의 마음을 흔들면 강요나 당한 듯 비키려 한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 없이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는 바울의 서술 (로마서 3:28)을 기독교 교리의 전부나 되는 듯 추켜든다. 그 반면 “사람은 신앙 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된다” 는 야고보의 서술 (2:24)은 유대교 식을 따른다고 비난해 버린다. 이 서간문의 구절은 지푸라기의 서간인 듯 나타난다고 루터가 이 특출한 편지를 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위 두 주장,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두 저자의 주제와 목적을 이해할 경우 완전한 조화를 가진다. 하여튼 위와 같이 성경을 읽는 방식이 아기스가 다윗을 신뢰한 것, 즉 다윗이 그술족과 기르스족과 아말렉족을 습격한 게 아니라 유다 남부와 여라므엘족 남부와 켄족 남부를 습격했다고 말한 것을 신뢰한 것과 같다. 참으로 아기스는 다윗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믿었다. 다윗이 아기스를 속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 또는 그분의 말씀이 인간을 속인 것일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말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20:7).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말하신다. “만일 예언자가 꾐에 빠져 그런 말을 한다면, 바로 내가 그 예언자를 유혹한 것이다” (14:9).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합을 꾀어 내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채용하셨다 (열왕기상 22:20-23). 이것들은 가상적인 진리들 (apparent truth)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의 가르침으로 인간을 현혹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분의 말씀에 왜곡된 해석을 덧붙여 자신들을 현혹한다. “계시를 보는 이들에게 ‘계시를 보지말라’ 하고, 예언자들에게 ‘진실을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라’ 하며, ‘솔깃한 말이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만 하여라” (이사야 30:10). 사기당할 기질이 종교적 사기의 모든 근본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요한 17:17).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었다. (로마 1:25). 다윗이 아기스에게 말한 것은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다윗이 했던 것과 반대된다. 더구나 다윗이 말했던 장소나 백성들 역시 반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말렉은 내면의 악에 바탕을 둔 거짓이고 유다 남부란 내면의 선함에 바탕을 둔 진리이다. 기르스족은 추론으로 생겨난 거짓이고 여라므엘족이란 총명으로부터의 진리이다. 그술족은 과학으로부터의 거짓이고 켄족 남부란 자연적 선함 안에 근거를 둔 진리이다. 그러므로 위 세 가지는 천적, 영적, 자연적 진리와 그 반대되는 거짓과 관계된다. 모든 남,녀를 다 죽였다는 것은 글자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면 매우 참혹하지만 이는 모든 민족을 향해 발표된 신성한 심판이 수행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 나라를 구성하는 신성한 진리와 선함의 우월성에 반대하는 모든 생각과 애착을 소멸한다는 것에 대한 모형이다.
“아기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다윗이 제 동족 이스라엘에게서 미움을 사고는 이제 아주 내 종이 되었구나’ 하며 다윗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다윗의 제 동족 이스라엘이란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제 스승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불레셋이란 주님의 진리를 제 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진리는 선함으로 인도해준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삶과 관련된다. 우리가 종교의 가르침을 따를 때만이 우리는 주님의 신하요 종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다른 사람의 선함을 신뢰하는 대로 인도하고, 모든 종교는 신앙과 관계된다고 믿는다면 앞과 뒤라는 올바른 질서관계를 뒤엎게 되어 진리가 우리에게 신하가 되고 종이 되게 만든다. 그이유가 우리의 견해와 목적에 진리가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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