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6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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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6장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 그의 창을 가지고 오다

본 장의 주제는 그 특성이 앞 장의 주제와 매우 비슷해서 이 장에서 추론될 주요한 교훈의 얼마쯤은 예상되리라. 도덕적 어조가 달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한 설명은 건너뛰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사건에 신성이 덜 하거나 덜 교훈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사건을 이끄는 모양새가 앞 장과 동일하기에 생략할 뿐이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는 성서 역사의 부분들이 인간 본성의 밝은 측면, 즉 우리로 할 수 있게 격려하는 것 보다 덜 교훈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되리라. 아마 인간 본성의 진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두운 쪽이 부각되어야 더 실감할는지 모른다. 어쨋든 성경의 역사적 줄거리를 읽어 가되 우리의 영적 진보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곳, 더 밝고 새로움을 주는 줄거리에서 머뭇거리는 게 더 유쾌하고 유익할는지 모른다.
성경을 단순한 글자로만 읽게 될 때 많은 부분에서 인간 본성의 타락되고 추잡한 것들과 마주치게 되면 고통스런 암시만 던져주지만 이런 부분들은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를 더 확신되게 해준다. 인간의 심정은 그 어떤 것 보다 쉽게 현혹되고 거의 절망적으로 사악해지기 까지 하지만 그런 틈바구니에도 인간 본성의 고귀한 면모의 회복 가능성이 완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거듭남, 새 창조,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들도 전쟁 중이든, 승리했을 때이든, 평화 시기이든, 창피를 느낄 때이든 인간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시해주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모습은 신성이 인간의 근원이 됨을 밝히 알려준다. 설사 당사자가 자기 심정에 하느님이 있으심을 인정 않는 때일지라도 마음이든 인간 사이이든 거기에 하느님의 계심이 있다는 말이다. 자연적 수준에서 선한 것들, 설사 사악한 자에게 남은 선한 것들 까지도 영적 수준이나 의로운 자에게 있는 선한 것과 마찬가지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 선한 분은 한 분 하느님 밖에 없다. 창조물 속의 좋은 것은 창조자로부터 인바 그 사람 안에 있는 좋은 것은 창조자의 것이다. 장미의 향그러움과 수줍듯 피어나는 장미꽃은 자연계의 태양에 절대 의존되어 있다. 인간의 갖가지 느낌과 생각은 천국의 태양에 의존하고 있는데 장미보다 의존도가 더 강할 것이다. 어쨋든 이것들 모두는 의로운 자나 악한 자나 모두에게 똑같이 비추시는 그분의 태양에 그 시작을 연유하고 있다. 시작은 같을지라도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은 폭넓은 차이가 있다. 한가지 차이점만을 살펴 보자. 영적 인간은 자신이 지닌 선한 것 모두는 그것을 주신 분께 자기 소유의 원인을 둔다. 그러므로 그는 좋고 아름다운 것을 수여하신 그분과 받은 선물을 수단으로 연결을 이루고 있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근원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공적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주장함으로 해서 그는 하느님과 상호 결합되는 연결 고리를 자른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가 지닌 게 매우 특출하다 해도 그는 자연적 수준에만 남아 있는다. 그 이유가 그는 자연을 넘어 있는 어떤 것을 보지 못하고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의 덕행은 제 잘남으로 가득 차 있어 그의 내향적 인간은 자연적 부패들로 색칠되어 있다. 영적 인간의 덕행은 영적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영이 그 행동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덕행은 영원에 그 목적을 두고 있어 영원한 존재로 남게 된다.
위와 같이 인간 행동 안에 있는 아름답고 선한 것의 진부를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면 이에 관한 좋은 예를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지닌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참 존재에 그것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은 우리들의 세계에 드리운 그분 날개의 그림자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룩하지 못한 열정의 불이 우리 마음에 뿌린 창백한 빛을 경감시킬 수 있다. 하느님이 완전하시듯 너희도 완전해져야 한다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듯 인간 품성의 모든 것은 신성의 어떤 것을 반사하는 바 우리는 완전한 분이 거하실 곳, 그분의 모양을 닮도록 자신을 가꿔가야 한다.
본 장의 사건은 24장의 사건과 세부 사항에서 다른 게 있다. 다윗은 바란 광야를 떠난 뒤 지브 광야에 처소를 두었다. 그러나 다윗의 피를 원하는 사울은 다시 정병 삼천을 거느리고 그를 찾아 나섰다. 지브 광야는 유다 지파의 영역에 있다. 하길라 지역은 과거 사울과 다윗이 마주 섰던 엔게디로부터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사막은 시험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특히 하길라는 어두움, 음침함이라는 뜻이다. 다른 세부사항도 암시하듯 여기서의 시험 상태는 의지 측면보다는 이해성 측면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해성과 의지라는 두 여건이 표현되는 말씀의 여타 부분에서도 서로 비슷하다 이것이 의지와 관련되면, 저것은 이해성에 관련되는데 마치 사랑과 믿음이라는 두 원리가 마음의 자질인 의지와 이해성에 거처를 두는 것과 같다. 이것들은 거듭남으로 따로따로 완전해진다. 다윗을 추격해온 사울의 군대가 진을 친 곳은 하윌라의 어두운 언덕이었다. 이곳에서 관대하고 참을성 많은 다윗의 모습이 강력하게 우리 마음에 부각되고 있다. 광야에 거하던 다윗은 사울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가 진을 친 곳에 접근했다. 사실 신성의 어떤 소리를 들었다거나 신성의 어떤 자극도 없이 삼 천 명의 군사로 에워 싼 사울의 중앙 진영에까지 다윗이 감히 접근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정말로 사울의 진영은 깊이 잠들어 있엇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정상적인 군대 진지가 아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상태, “야훼께서 그들을 모두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초자연적인 작용이 다윗에게도 있어져서 그로 하여금 감히 사울의 진영에 진입하게 했다. 그리하여 자기를 지겹게 추격하는 사울을 향한 분노를 내려놓고 추격자로 하여금 감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평화로운 승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고상한 사건으로 매듭짓게 된 것 역시 신성한 영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런 모습, 조건, 상황은 기독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위급한 때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분은 안전을 설비해 주신다. 다윗 스스로 기독인의 언어로 그가 당한 환난의 때에 대해 말한다. “비록 많은 무리가 나를 에워싼다 해도 내 마음은 두려울 게 없다. 비록 나를 죽이고자 일어선다 해도 내 믿음은 굳건하리라.” 우리의 순진을 끝까지 추격하는 사울과 그의 부하같은 적들이 우리 가슴에서는 어떻게 발견되고 있을까? 우리 심정에서의 전쟁은 육이 영에, 세상이 천국에, 자아가 하느님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에 반대하는 것이다. 자연적 마음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영적 마음은 자연적 마음에 내려와 복된 일을 수행한다. 이 일이 사울의 진영에서 일어나는 다윗의 일로 표현되어 있다. 잠들어 있다는 모습으로 표현된 마음의 특별한 상황은 자연적 마음의 욕구나 열정이 무활동의 상태에 놓일 때이다. 병고나 불행이 인간 위에 덮쳐 괴로움에 시달릴 때, 그러면서도 아직 그가 자연적 상태에 머므르고 있을 때 자연적 마음은 압박되어져 자아충족의 욕구나 세상적 추구에의 열정이 온순해진다. 이럴 때 영혼을 위해 과거 자기가 집요하게 요구해왔고 충족된 세상적인 것의 얼마를 포기하거나 영혼의 잘됨을 위해 맞바꾸고 싶은 바램이 일어난다.
돈, 명예, 학식같은 자연적 매체로 맞바꿀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잠이 자연적 마음을 덮칠 수도 있다. 죽음과 심판의 공포는 종교적 조건을 지닌 마음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이 종교적 조건이란 천국의 사랑이 아닌 지옥의 공포이다. 그래서 그의 양심은 변명을 들이대기 보다는 차라리 그를 질책한다. 이런 사람에게 성경이 심판을 말하면 전율을 느낀다. 이 때 그들 속의 반역적 움직임은 한 동안 꼼짝못한다. 자연적 욕구나 열정이 더 심오하게 깊은 잠에 빠지면 처벌의 두려움보다 더 깊은 수준, 즉 죄지은 자라는 느낌과 확신이 그의 마음을 내려누른다. 어떤 원인에 의해 생산된 열망의 잠듦은 주님으로부터이다. 그 이유가 인간을 이런 상태로 가져오는 게 그분의 섭리요 그분의 영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상태의 효과가 일시적일 수도 있다. 마치 본문의 사울같이 이전 상태로 환원될는지 모른다. 설사 통회함이 일시적이라 해도 무용지물이지만은 않다. 게다가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 조차에서도 이런저런 수준의 상태가 교차된다. 거듭나는 것은 죄짓고 회개하는 식의 삶은 아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자들도 혼란과 고요의 때들, 잠들고 깨어있는 때, 기쁨과 슬픔의 때는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을 가진 이들은 참으로 자신들에 특유한 상태나 체험들, 상반되는 두 삶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 여겨지는 때들을 가진다. 다시 말해 외향으로는 환난에 종속당하고 있는 반면 내향으로는 평화를 즐기고 있다. 바깥쪽 세계에서는 명암이 흐린 상태이지만 내향으로 밝은 빛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감각적 본성은 깊은 잠에 빠진 반면 영적 본성은 완전히 깨어 있다. 이를 광야에 머무르는 거듭나는 사람과 관련해보면 위 상태가 본문의 역사적 풍경으로 우리 마음에 그려져 있는 셈이다. 사울과 그의 군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반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 진영의 한가운데 까지 깊이 침투해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갈취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의 반역적 욕망이 소진될 때, 또는 주님의 섭리적 조치나 영적 어떤 작용으로 주님으로부터의 깊은 잠이 자연적 인간을 덮을 때 영적 인간은 그 마음 아래로 내려가 자연적 생각과 애정의 가장 깊은 속까지 조사해서 영적 생명에 피해를 입히는 어떤 것의 능력을 박탈하거나 자연적 마음과 하모니를 가져올 방도를 검증한다. 이런 기회에서 우리는 개선되지 않을까? 바깥쪽 즐거움이 거두어질 때, 동물적 수준의 영들이 압박당해 있을 때, 어떤 영적 원인이 자연적 마음의 악질인 것을 깊이 잠들게 할 때, 우리는 어두운 침묵 속에서 어떤 두려움 없이 자기 검증을 성실히 하는 기회를 잡지 않을까?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자기 반성이라는 우리의 의무가 성실하고 편견 없이 수행된다면 우리 영혼이 위를 향해 일보 전진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사울의 분노,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다윗의 용감성과 슬기와 자비로 인해 거두어졌다. 그리하여 사울은 자신의 삶이 보존되는 근본적 원인을 파악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앞 사건의 경우 같이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라고, 원수를 갚을 기회라고 부하가 권면했지만 그는 사울을 기름부워진 자로서의 존경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앞의 사건 같이 자기가 마음만 먹었으면 그를 죽일 수도 있었을 능력이 있음을 과시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을 떠받혀 주는 창과 물병을 집어 왔다. 이 두 가지는 사울의 목숨을 전쟁에서 받혀주는데 대단히 긴요한 도구이다. 사울이 깨었을 때 다윗은 가져온 이 두 가지 물품으로 자신의 능력과 자비를 베푼 증거로 보여 주었다.
위의 줄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었일까? 자기 검증(self-examination)이 성실하게 있어진다면 자연적 인간의 모든 능력이 영적 능력으로 바뀌는 기회가 될 것이고 더불어 자연적 인간의 생명과 모든 수단들은 영적 인간에 소속된 것임을 자각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울의 도포자락을 자를 때의 경우같이 본문의 다윗의 행동은 왕권의 미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예언적 행동이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이와 상응되는 행동들은 상존한다. 영적 마음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계속되는 행동들로 해서 자연적 마음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해간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왕국의 전체가 소유될 때까지는 지배권을 확실히 확보한 것은 아니다. 어쨋든 영적 마음의 모든 행동들은 영적 마음의 능력을 자연적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고 인정하기 까지 만들어 어느 정도는 복종하게 한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복종의 길을 준비하여 마지막으로 항복하게 한다. 창과 물병은 방어와 지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진리를 상징한다. 현재 자연적 인간을 지지하고 방어해주는 수단이 되어 있지만. 영적 인간에게도 방어와 지탱의 수단이 되어준다. 따라서 창과 물병의 진정한 소유는 영적 인간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마음이 지닌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은 영적 마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소속에 대한 인정 내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은 늘 싸우는 두 인간 본성이 서로 화목하고 하나 되기 까지,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진실로 하나 되어야 가능하다.
위와 같은 이상적인 결과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환난을 예상해야만 한다. 우리는 고난이 무었이든 시련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되 존경과 인내심, 성실함으로 그 고난을 맞이해야만 한다. 한가지 상상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시련들이 엄청난 재난 인듯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날들이 날마다 그런 시련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마다 우리의 특질, 인내심, 선행, 관용, 견딤 등등의 특질에 어떤 시련을 가져다 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원리들은 그 시련으로 테스트 받아 그 본성이 명백히 드러나고 많은 경우는 아니라 해도 때로 중요한 듯 여겨지는 문제도 발굴된다. 사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도 될 작은 사항들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작은 일을 성실히 처리하는 자가 큰 일도 성실히 처리한다는 말씀을 상념해야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하루라는 삶속에 놓인 자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인생 전체에 놓인 의무도 성실히 수행할 확률이 높다. 미미한 것이라 생각되는 자기 생각과 행동에 관심을 놓지 않는 사람은 가장 큰 자신의 생각과 행동도 같은 비중으로 처리할 것이다. 어쨋든 시련과 시험이 크고 작은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작든 크든 얼마나 성실하고 신뢰할만한 조치를 취했느냐 이다. 그 결과는 평화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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