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3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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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3장

다윗이 크일라를 구해주다

다윗이 은거한 아둘람의 동굴은 그의 비상 수단이 발동되기 시작한 거점으로 보인다고 앞장에서 거론한 바 있다. 이후 다윗은 더 이상 피신하는 쪽에 있지 않고 때로는 활기에 넘쳐 그의 용맹이 사울에 까지 미치도록 발휘하고 있다.
다윗이 도망가는 것을 협조한 아히멜렉에 대한 처벌로 사울이 성직자들을 살육한지 얼마 안 되어 “불레셋군이 크일라를 치고 타작마당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가고 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려 왔다.” 여호수아서를 참조하면(15:44) 크일라는 유다 지분으로 낙찰된 성읍 중의 하나이다. 이 성읍은 아둘람의 동굴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가 불레셋의 약탈 소식이 사울보다 다윗에게 더 빨리 알려졌기 때문에서이다. 불레셋이 타작하는 곡식을 강탈해가는 상황은 시급을 다투는 결정이 있어야 했다. 게다가 다윗이 이 성읍을 구출한 또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크일라 사람들은 유다 지파 소속이라는 것, 그들이 자기 지파에 속하는 다윗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다윗 역시 한 지파여서 동정심이 더욱 빨리 발동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또 한가지 보다 높은 이유도 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적과 싸운 작전 지역은 유다 지방 외의 다른 곳에서만 수행되었다. 유다 지파가 지닌 영적 의미는 아주 높은바 이를 표현하는 사람의 구출은 그와 대등한 의미를 표현하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윗은 현재 군림하여 세력을 쥐고 있는 사울보다 더 높은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내적 인간 속에 있는 생각과 애착들은 적의 습격, 그 적이 악이든 거짓이든 어떤 공격으로 부터서도 내적 선함과 진리의 힘으로만 구원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안쪽에 있는 영적 생각과 애착들을 볼 수가 없어 오로지 영적 빛을 수단으로 해야 한다. 이 빛 없이 우리는 반대 세력이 지닌 원리들을 밝히 볼 수 없다. 이 반대된 원리들은 우리 삶의 수단과 수고함을 강탈해 가고 끝내 우리로 포로가 되게 한다. 영적 수단만이 자연적 수준을 꿰뚫어 보아 자연적 수준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을 뿐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을 어떻게든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 상태와 필요함이 무엇인지 알아서 원조할 능력이 없는게 자연적 수준인 사울인 것이다.
크일라 주민이 곤경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려 왔지만 사실 그에게는 그 주민을 도웁기에는 너무 부족한 병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그 주민을 돕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했을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더 높은 권능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께 자신의 결정을 맡겼다. “야훼께 ‘제가 가서 이 불레셋군을 칠까요? 하고 여쭙자 야훼께서 ’가서 불레셋을 치고 크일라를 구해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이와같은 하느님의 명령 앞에서 어떤 주저함도 있을 수 없을 듯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안됩니다. 이 유다 지방에서 있는 것만도 가슴조리고 있는 처지인데 불레셋군을 치러 크일라로 가다니 말이 됩니까?’ 하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다윗이 야훼께 재차 여쭙자 야훼께서는 ’어서 크일라로 내려 가거라. 내가 불레셋군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고 분부하셨다.” 다윗의 부하들이 불레셋군을 두려워 하는 모습은 그것과 상응되는 상태 하에 놓인 우리의 느낌과도 정확히 같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하신 대목,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태 26:41)에서 표현된 상태와도 같다. 자연적인 것에 비중을 둔 우리의 수준 낮은 애착은 보다 높은 애착이 인도해 가는 곳, 더욱이 신성한 말씀이 직접 가르쳐 준다 해도 그 뒤를 선뜻 따라 나서기를 거절할 때가 많다. 자기 주위에서 보여지는 어떤 사건을 해결해 주려 참견하기에는 너무 힘들 것 같아 피해가려는 경우, 그러면서도 이에 대한 격려를 주님께 찾아야만 하는 경우일 것이다. 다윗이 두 번째 주님께 여쭙고 주님께서 “일어나 크일라로 내려 가거라”는 명령에 네 손에 불레셋을 붙이겠다는 확증까지 더해 주셨을 때 다윗의 부하들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이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끈덕지게 ane는 태도가 성공할 것이라는 신성한 약속이기도 하다. 두 번 여쭙듯이 반복함에는 이런 장점도 있다. 즉 목적을 강화시켜 주어 저항하고 있는 생각과 느낌들로 목적에 복종하게 하고 협동하게 한다. 행동이 두 번 있어짐은 어떤 힘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41장 32절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할 때 요셉이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꾸신 것은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어김없이 하시기로 정하셨고 또 지체없이 그대로 하시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윗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 두 번 말씀하신 것, 나는 들었사옵니다” (시편 62:11). 진리는 내적 측면의 인간 편에서 확증되어야 할 뿐 아니라 외적 측면의 인간 안에서도 확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윗이 두 번째 주님께 문의해 얻는 결과에서 위 결론은 쉽게 이해된다. 즉 첫 번째 문의는 자신에게 확증을 받았고 두 번째 문의는 그의 부하들에게 확증을 주었다. 특히 두 번째 명령에서의 “일어나라, arise”는 자연적 수준의 인간 측면에 대해 하시는 말씀인바 자연적 수준의 것에 비중을 두는 생각 너머로 마음을 들어 올리려면 두려움을 제거하고 용기를 흡입할 필요가 있다는 훈계가 담겨 있다.
불레셋군의 무차별한 독식 행위를 쳐부수게 하리라는 하느님의 보증을 받고 “다윗은 부하를 거느리고 크일라로 가서 불레셋을 치고 가축을 몰아 왔다. 불레셋을 크게 무찌르고 크일라 주민을 살려냈던 것이다.” 크일라는 그 이름 자체의 말 그대로 빗장 성문이 있는 요새화된 성읍이어서 그 곳을 정복하려면 강한 군대의 힘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육 백 여명의 부하만 거느린 다윗이 이 성읍에 진입한 불레셋을 타도했다는 것은 심정이 하느님을 향해 올바를 경우 작은 수단만 가지고도 어떻게 큰 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더불어 승자는 적군에게서 빼았은 전리품 덕분에 더욱 넉넉해진다. 이는 악이 극복될 경우 우리 마음은 선으로 더욱 윤택해짐을 가르치고 있다. 크일라 주민을 구해냄은 다윗의 진취성이 성취한 결과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관심을 쏟은 만큼 과업도 더 완성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크일라 주민 만을 떼어서 생각해 본다면 생명을 건진 그들인데도 만족함과는 거리가 멀어 있다. 즉 그들은 구조받았음에도 고마움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다윗이 자기들에게 베푼 은덕에 보답하는 그들의 태도는 본문 중간 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위 구절에 이어 말해지는 내용은 다윗에게 피신해 온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이 에봇을 자기 손에 들고 왔다는 것이다. 앞장의 끝 문단에서 아히멜렉 성직자 가문이 도엑의 칼에 몰살당하는 가운데 에비아달 만이 칼을 피해 다윗에게 도망쳐서 살아 남았다는 것, 다윗은 그를 영접해서 보호해 주겠노라고 그에게 약속하고 있다. 이 성직자의 아들이 이 문단에서 소개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표징적으로 가르쳐 주시고저 하는 사항이 있기 때문임은 의심할 바 없다. 즉 영적인 정복, 그리고 신앙 만으로 구원된다는 원리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한다는 거짓으로부터 구원되면 성직자로 표현되는 것, 즉 사랑과 선함의 원리가 우리에게 놓여진다는 것이다. 이 사제, 에비아달은 자기 손에 에봇을 들고 있다고 본문은 강조하는 듯 우리에게 비쳐지고 있다. 이 에봇은 현 구절에서 중요한 점이요 영적 의미에서도 그러한바 이제 에봇이 의미하는 것을 살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에봇(ephod)은 성직자의 옷 중에서 가장 바깥 부분이다. 이 옷 위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지칭하는 열 두 개의 보석이 박힌 가슴받이판이 있다. 성직자는 선을 표현하는바 성직자의 옷은 선을 옷입히는 진리, 또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인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성직자가 업무를 집행할 때 입는 가장 바깥 옷인 에봇은 가장 바깥쪽의 진리(outermost truth)를 표현한다. 이 진리에 모든 내적 진리가 종결되는바 이 진리 안에 모든 내적 진리가 담겨 있다. 이런 이유로 에봇은 성직자가 입은 어느 옷 보다 더 거룩했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은 안쪽에 있는 것 보다 더 거룩하다. 그 이유는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질서대로 포함하는 게 바깥 측면이기 때문이다. 바깥 측면은 형체와 연결이라는 모두를 함께 간직한다. 그러므로 만일 바깥 측면이 제거되면 안쪽의 것들은 흩어지고 말 것이다. 이 사항은 인간이 뜻하고 생각하고 행함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뜻하는 것이 순서상 첫 번째이고 생각함이 두 번째, 행함이 마지막이다. 어떤 사람이 행동하는 만큼 거기에는 그의 생각함과 뜻함이 포함되어 있듯 내면에 있는 것들도 형체와 연결됨 안에 모조리 간직되어진다.” 이런 사실로부터 인간은 그의 일에 따라 심판되어 진다고 성경에서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항은 일함이 빠진 신앙을 수단으로 구원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왔다. 이 걸림돌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표면상으로 반대되는 듯 여겨지는 두 서술이 일치되도록 편법을 시도하는 쪽으로 치닫게 해주었다. 그 편법이란 인간이 자기가 일한 것에 의해 의로워지고 자기의 일함으로 심판된다 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가 일한 것에 의거 판단받아진다는 말은 그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판단되어 진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일한 것은 의지와 생각이 체현된 형체 그 이상의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에봇의 의미가 위와 같은바 불레셋을 쳐부순 구절에 곧 이어서 성직자가 자기 손에 에봇을 들고 있다고 서술되고 있다. 행위 없는 신앙을 표현하는 게 불레셋군이고 이런 믿음은 각자 자신의 선한 일, 노력의 열매를 거두는 타작 마당을 강탈하는 바 이를 타도해 버리는 게 다윗 즉 신성한 진리임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적군을 무찌른 승리의 열매인 평화를 다윗은 오래 즐기지 못했다. 그의 승리의 소식, 즉 그가 크일라에 입성했다는 소문 때문이다. 사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느님께서 그놈을 내 손에 넘겨 주셨구나. 빗장 성문이 있는 성읍으로 들어갔으니 제 발로 함정을 찾아든 격이군…” 그래서 “그는 병력을 동원해 가지고 크일라로 쳐내려가 다윗의 부대를 포위하려 하였다.” 다윗은 사울이 크일라로 진격해서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계책을 눈치채고 성직자에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도록 지시한 다음 주님께 소문대로 정말 사울이 내려 올 것인지, 그럴 경우 크일라 주민들이 자기를 사울에게 넘길 것인지를 여쭈어 보았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래 그가 온다.” “그래 넘겨 준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쫒아 다니는 것은 과히 놀랄 사항은 아니다. 어쨋든 그들이 그렇게 하리라는 전능하신 분의 선포는 약할 뿐인 인간 본성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다. 자아 본성의 첫째가는 법칙은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이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법칙의 영향 밑에서 가장 크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면 아마 희생으로 바치는 것, 즉 제단에 자기 희생을 바치는 것일는지 모른다. 크일라 주민들이 사울의 권세에 다윗을 넘겨 준다고 생각해 보아도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높은 성직자의 부하에게 사로 잡히시자 그분을 버리고 도망했던 것 보다 더 배은망덕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실 크일라 주민들이 다윗을 사로 잡아 사울에게 내놓기 까지 테스트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배은망덕한 죄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고, 베드로의 경우 같이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맹세한 이후 세 번 부인하고 깊은 통회에 빠지는 상태를 이 주민들로부터 추측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다윗을 넘겨 준다는 예상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우리의 타락된 본성 속에는 크일라 주민 같은 경향 내지 약함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다행히 자비로운 그분의 섭리 덕분에 무르디 무른 인간 본성이 시험에서 보존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자신의 복지 향상에 일관되어 모든 시련과 시험을 피할 수 없다 해도 거기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피할 수 있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하느님의 응답이 다윗의 기도에 도달했을 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크일라를 벗어나 전에 다니던 곳으로 가서 돌아 다녔다. 다윗이 크일라를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울은 출동을 중지하였다.” 하느님의 중재는 크일라 사람을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울이 큰 죄를 범하는 일도 예방해 준 셈이었다. 물론 다윗도 목숨을 부지했는데 그들은 갈 데가 없어 이리저리 헤메고 있었다. 따라서 “다윗은 광야에서 살았다.” “다윗이 지브 광야 산 속에 살고 있는 동안 사울은 날마다 그를 찾았지만 하느님께서 다윗을 그의 손에 넘기시지 않으셨다.” 이렇게 사울이 사냥하듯 그를 찾고 있을 즈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호레스 까지 와서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요나단의 이 격려는 인간적 차원의 동정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운명, 하느님께서 다윗의 안전을 지키고 계신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 “걱정말게. 아버님의 손이 자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네. 결국은 자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일세. 그때 나를 자네 버금가는 자리에 앉혀주게. 아버님도 그리될 줄로 아신다네.” 요나단으로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확인 못하고, 또 자기가 나라의 둘째 자리에 앉는 것도 당장으로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들이다. 그럼에도 요나단의 심중에서는 기정 사실로서 굳혀져 있는 듯 보인다. 어쨋든 이런 대화는 과거 둘 사이에 맺은 약속의 일부로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요나단이 표현하는 영적 진리는 주님의 나라에서 볼 때 다윗으로 표현된 영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이다. 말씀 글자 속의 순수한 진리는 말씀의 영에 있는 순수한 진리에 둘째 간다. 진리의 이런 서열은 주님의 교회에 있는 진정한 교인의 마음 내지 그 나라의 원리에서도 같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마지막 만남에 해당된다. 마지막 대면치고 두 사람이 대면하는 분위기는 과거 사울이 다윗과 요나단 모두를 죽이겠다고 시도했을 때의 두 사람의 분위기 만큼 다정하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주님 앞에서 만들어지는 두 사람 간의 약속은 둘 사이에 무르익어온 헤어져서는 안 될 하나 됨에 대한 엄숙하고도 마지막에 해당되는 추인이다. 게다가 이 둘의 하나 됨이 표현하는 것들에 대한 표시도 되고 있다. 이제 다윗은 호레스(숲)에 남고 요나단은 집으로 돌아 갔다. 요나단은 집에서의 편안한 생활로 되돌아 갔지만 다윗의 경우는 계속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넘겨야만 했다. 사실 다윗은 불레셋 같은 적들로부터서 곤경을 당한 게 아니라 자기 나라, 자기 가문으로부터 쫒기는 신세가 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갖가지 일에 있는 섭리의 방법이기도 한데 이런 섭리를 본문의 역사 속의 인물을 통해 체험되어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지브 광야 숲 속에 은신하는 것도 과히 길지 못했다. 지브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와서 말했다. “다윗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여시온 남쪽, 험준한 하길라 산 위 호레스에 있습니다.” 지브 광야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지브 성읍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지브 성읍은 원래 유다 지분으로 할당된 산 중에 있는 열 성읍 중 하나이다. 지브 사람들은 다윗을 앞의 크일라 사람보다 더 적대시하고 있다. 그들은 사울의 수중에 다윗이 잡히도록 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시고 싶으면 오십시오. 언제든지 그를 왕께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들에게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를 빈다” 칭찬하며 이르기를 “이제 가서 분명히 알아 보아라. 숨을 만한 데는 샅샅이 뒤져 알아 오너라…그가 이 지방에 있는 이상 유다 부락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고야 말리라.” 지브 사람들은 사울에 앞서 먼저 갔는데 그 때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마온 광야에 머므르고 있었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 나섰다는 소식에 다윗은 마온 광야의 바위 틈에 내려가 숨어 있었다. 다윗이 몸을 숨긴 요새는 산 속의 동굴이었는데 그는 이런 동굴을 안식처로 삼고 있었다. 하윌라(hachilah)란 그 이름이 지닌 뜻과 같이 어두운 산이어서 자칫하면 발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산이다. 거기서 빛을 바라는 동안 그 빛이 변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되는 위험에 빠지고 있다 (예레미야 13:16). 이 사막에서 저 사막으로 도망 다니는 다윗, 시험과 외로움의 이 상태에서 또 다른 그런 상태를 견뎌야 하는 다윗, 적도 아닌 자기 동포가 적이 되어 피신하면 또 다른 동포가 적이 되어 공포로 몰아 넣고 있다. 이런 상황을 다윗은 시편 54편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나를 구하소서. 힘을 떨치시어 내 옳음을 밝히소서. 하느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이 입으로 아뢰는 말씀 귀담아 들으소서.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 거만하게 나에게 달려들며 포악하게 이 목숨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지금 나를 도우러 오시고 주께서 나를 돕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저 원수들로 하여금 제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야훼, 진실하신 이여, 저들을 없애 주소서. 진심으로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옵니다. 당신의 어지신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온갖 어려움에서 이 몸 건져주시고 원수들의 패망을 보게 하셨사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 시편은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 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연상하게 해준다. 다윗의 고뇌는 다윗으로 표현된 그분의 고뇌인 것이다. 역사 자체에서 다윗은 기독인이 당한 박해, 그리고 행복한 결과 즉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는 내향의 영적인 박해이고 이 박해는 악을 제거해주고 선함을 끌어내 확증되게 한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우리를 건져주시는 주님의 자비로움을 한껏 더 깊게 맛보게 한다. 우리의 시련이 때로 더 심각해지고 우리가 당하는 박해가 더 지독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있다면 당장은 아무 희망도 없는 듯 여겨질지라도 결국 그분은 우리를 구해주신다. 다윗이 마온 광야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사실 마온이란 이름의 뜻은 피난처인데 아마 다윗은 이곳에 숨어 사울의 위협을 피해 안전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예상치 못했던 지브 사람들의 밀고로 되려 더 위태로워진 것이다. “사울이 그를 추격하여 마온 광야로 들어섰다. 다윗은 자기가 부하들과 함께 있는 산의 맞은 편 산에 사울이 나타나자 사울을 피하여 도망쳤다.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부하를 거느리고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한 전령이 보고한다. ‘빨리 돌아 가십시오. 불레셋군이 전국에 밀어 닥쳤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다 말고 불레셋군을 맞아 싸우려고 발길을 돌렸다.” 하느님의 섭리는 어떤 악의 작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 악에 반작용하는 악을 허용하시기도 한다. 사실 이 악이 저 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마치 사탄이 사탄을 던져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 데까지는 가능하다. 그리고 떨어져 나간 악들이 다른 돌파구를 찾도록 해서 한동안이라도 우리 마음으로부터 떼어지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속의 세상 사랑이라는 악은 자아 사랑이라는 악을 일시적으로나마 떼어내거나 좀 더 완화되는 쪽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품위를 갖추어 맛을 보려는 악은 조잡하고 파렴치한 욕망을 자제시킨다. 예를 들면 명예를 사랑함이라는 악은 자아 사랑이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려 할 때 체면을 내세워 도덕적 품위를 어느 정도라도 갖추게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저런 것들이 당사자들의 행동 내지 지침을 변경되게 해줄지라도 그 근본이 바뀐 것은 아니다. 어쨋든 근본되는 원리가 변화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되질 않는다. 사울이 다윗의 추격을 포기하고 불레셋을 추격하러 돌아섰다고 해서 다윗을 증오하던 마음 상태가 중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의 바위를 갈림 바위 (the rock of division, sela-hammahlekoth)라고 불렀다. 바위, 바위 같이 튼튼함, 다윗이 은신처로 사용한 바위는 영원한 바위, 즉 신성한 진리를 상징한다. 이 바위는 박해 동안 기독인의 안전 장치이다. 시험이나 시련이 끝날 때 신성한 진리는 갈림 바위가 된다. 악과 선이 분리되고 갈라지는 결과가 있어진다는 말이다. 사울의 포위 작전이 해체되자 다윗은 거기를 떠나 엔게디 근방의 험준한 산에 머무른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다윗의 곤경은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다음 장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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