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2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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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2장

아둘람의 동굴에 있는 다윗; 사울이 성직자를 학살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쫒겨난 다윗은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 들로 나가 외딴 동굴로 가고 있다. 이후 이 굴은 아둘람의 동굴로 유명해졌다. 이 동굴은 유다 지역 아둘람 성읍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 이 곳은 다윗의 출신 지파와 그 가문의 거주지가 되고 있다. 이 동굴은 사 백 여명의 사람을 수용했을 것으로 미루어 쾌 큰 굴이었을 것 같다. 어쨋든 다윗의 추격자들은 그의 은신처인 이 동굴에 까지 즉각 따라 오지는 않았다. 이 때로부터 그는 방어 뿐만 아니라 공격 자세 까지 취하게 된다. 한편 그의 형제 친척들이 그에게로 왔다. “또한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밖의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 들었다. 다윗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수는 사 백 명 가량이나 되었다.” 다윗의 집안이 그와 합세해서 불행이든 행운이든 그와 동행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주변 환경이 우리에게 비치는 영적 교훈은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거듭나아 가는데 있어서 영적 원리들은 순수해지기 위해 고뇌의 용광로를 통과해 간다. 이 때 이 원리들은 더 광택있고 더 강해져 그만큼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영적 애정이 감각적 탐닉을 절제함으로 순수함을 획득하고 성소의 빵을 먹어 더 힘이 세지고 진리의 칼로 그 자체를 무장함으로 더 강력해질 때 이 애착주위에 자연적 애착들이 몰려와 복종할 자세를 갖춘다. 마치 다윗의 명령을 기다리는 사 백명 같다. 다윗의 형제나 그 가문의 친척들이란 영적 애착에 보다 가까운 자연적 애착을 말한다. 그 외 다윗 주변에 몰려 든 억눌렸던 자, 빚을 진 자, 불평있는 자들은 약간 의심이 가는 외형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된 배경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사울이 자기 성미로 자초한 일들로 미루어 보아 그의 통치는 지혜롭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바탕이라면 위와 같은 무리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바탕으로 인해 고통받는 일부 무리가 동굴에 머무르는 다윗에게로 갔다는 것은 과히 놀랄 일은 아니다. 사실 아둘람이라는 이름은 백성의 정의 라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은 그가 장차 옥좌에 오를 기름부워진 왕이라는 확신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실지의 권력자는 아니지만 진짜 권력자로서 간주했을는지 모른다. 다윗 주위에 모인 무리들을 영적으로 이해해본다면 그들은 자연적 수준의 목적물만을 추구해대는 규율에 불만족하고 맥이 빠지고 곤궁해진 자연적 수준의 생각이나 애착이다. 이것들의 바람은 영적 목적을 지향하는 통치, 영적 대상물을 추구하기를 바래는 사람들을 뜻한다.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통치함으로부터 영적 수준의 마음이 통치함에 이르는 각종 상태나 변화는 인간 전체에 해당된다. 억눌림은 의지 측면의 상태, 빚짐은 이해성 측면의 상태, 불평 있음은 생활 측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다윗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의 수령이 되었다는 것은 왕의 표시라기 보다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수준이고 기꺼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것을 함축할 뿐이다. 영적 수준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과 진리의 결합 또는 인간 안에 있는 자연적 수준과 영적 수준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이 상태는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다. 다윗의 부하는 사 백 명밖에 안된다. 이 숫자는 완성과 결합을 표현할만한 숫자에는 도달 못하고 있다.
다윗의 불완전한 상태는 부모를 위해 현재의 어둑컴컴하고 안락하지 못한 동굴보다는 더 안전하고 더 나은 장소를 물색하도록 그를 충동했다. 그래서 그는 “모압의 미스바로 가, 모압 왕에게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실지 알게 될 때 까지 내 부모를 맡아 주십시오’ 하고 청하게 되었다. 모압 왕은 이 청을 받아 들여 다윗의 부모를 맡아 다윗이 그 은신처에 있는 동안 줄곳 곁에 머물게 하였다.” 본문은 다윗과 모압 왕 사이에 있었던 개인적 유대가 어떠했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혈현적 측면에서의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자기 부모를 모압 왕의 보호 아래 있게 했는바 혈연 관계가 지닌 내용은 살펴볼만 하리라 생각된다. 이스라엘족과 모압족은 두 형제 아브라함과 롯의 후손이다. 물론 모압족의 혈연은 롯과 그의 장녀 사이의 근친 상간의 열매인바 그 가치는 손상되어 있다. 어쨋든 이 두 계보는 팔 백 년 동안 따로따로 내려왔었는데 이새의 아버지 오벳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 이유가 오벳은 모압 출신인 룻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만 본다면 오벳의 아버지요 룻의 남편인 보하즈는 다말이 낳은 계보에 속한 유다의 후손이다. 불순하게 흐른 모압의 계보를 포함해서 위 계보들은 메시아에서 결국 만나고 있다. 그래서 인간 속에 흐르는 성향들, 가장 나쁜 것에 이르는 모든 성향이 그분의 인성에 흐르게 되었다. 이런 불순함들이 그분에 의해 추방되어 인성의 완전을 이룩하시어 인간의 완전을 이룩하신 것이다. 모압이란 자연적 수준의 선함을 원리로 삼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 선함의 원리도 좋게 사용될 경우 내면의 선함과 진리를 보호하고 양육하는데 한 몫을 한다. 마치 모압 왕이 다윗의 편의를 봐주는 것과 같다. 다윗의 부모에 관해 언급되는 성서는 이 본문이 마지막이다. 유대 전통에 따른다면 모압 왕이 그들을 죽였다고 말하나 성서에 그런 언급은 없고 이런 죽음이 다윗 부모의 운명이었다고 암시하는 대목 조차 없다.
시기함으로끊는 사울의 행동과 모압 왕의 친절한 행동이 본문에 나란히 등장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언자 가드는 다윗에게 동굴에 머물지 말고 유다 지방으로 들어 가라고 일렀다. 컴컴하고 칩칩한 동굴로부터 다윗은 나왔지만 단번에 환히 트인 지역에로 건너 뛰지 않았다. 그는 하렛 숲으로 옮겼다. 그는 지독하게 희미한 상태에서 덜 지독한 상태로 옮긴 셈이다. 거기는 동굴보다 더 생명이 있고 희망도 더 있는 곳이다.
다윗의 행방을 잃어 버렸던 사울은 그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브아 산등성이 큰 나무 아래 앉아 있던 사울은 신하들을 이렇게 호되게 꾸짖고 있다. “…너희 중엔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놈과 결탁한 것을 알고도 나를 위해서 귀띔해주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내 아들놈이 내 신하를 충동하여 지금 반기를 들고 잠복하고 있는데도 귀띔해주는 놈이 하나도 없다.” 그때 에돔 출신 도엑이 말했다. “이새의 아들이 놉으로 아히톱의 아들 아히멜렉을 찾아 와서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야훼께 알아 본 다음에 성소의 떡과 골리앗의 칼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성직자 아히멜렉과 그의 집안 성직자까지 모두 불러 들여 문책했다. 그 문책 죄목은 다윗을 도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항의했다. 다윗은 왕이 신임하는 부하였고 그 부하가 자기에게 도움을 청해서 도와 주었을 뿐 그가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울은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고 정의로운 판단을 하고 싶은 기분도 내키지 않았다. 그저 그는 다윗을 잡아 죽이지 못해 허덕거릴 뿐이었다. 사울은 호위병들에게 주님의 성직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모두 주춤했다. 그러나 그가 도엑에게 명령하자 그는 선뜻 나서서 “에봇을 모시는 사람 팔십 오 명”을 쳐죽였다. 게다가 “그는 그 성직자들이 살던 놉의 성민 까지 칼로 쳐죽였다. 남자, 여자, 아이들, 젖먹이, 소, 나귀, 양 까지 모두 칼로 쳐죽였다.”
이 끔직하고 무차별한 살육은 사울의 잔인한 기질,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있는 무자비한 영이 어떤지에 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사건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구절이 사무엘상 2장 31-33절에 있다. 즉 “내가 네 기운, 네 가문의 기운을 꺽으리니 이제 네 집안에 늙은이 하나 남지 못 할 날이 오리라. 그 날이 오면 너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번영을 보고 속이 뒤틀릴 것이다. 그러나 네 집안에서는 두 번 다시 늙은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네 후손 가운데서 하나만 남겨 내 제단 일을 보게 하겠지만 그도 기운이 다하고 그의 후손마저 모두 사람들의 칼에 맞아 죽으리라.” 이 구절은 성직자 엘리의 가문에 선포된 형벌이다. 아히멜렉 성직자 가문의 파멸을 집행하도록 사울을 보낸 신성한 심판에 관해서는 본문에 국한해서 살펴보자. 그 이유가 한 가문 또는 인류 안에 근절될 수 없는 악이 있을 경우 이 사항은 진정한 섭리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악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깊은 본성 측면에 관련된다. 성경에 기록된 경우와 우리가 역사 안에서 발견하는 경우 사이에 유일하게 다른 점은 성경의 경우는 하느님의 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역사는 그 권능을 우리로 발견해보도록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을 밝히 알게 하고 역사는 우리로 그 연결을 추적하게 한다. 어떤 가문이나 국가의 파멸에 대해 성경에서 그 원인을 제공하는 것 중 일부는 종교적 바탕에서 도덕적인 것이 그리 부각되지 않고 단지 역사 사건으로 나타나는 듯 여겨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모든 도덕적 조건들의 뿌리는 영적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있는 영적 상태는 그 사람의 본성 중에서 가장 깊고 가장 잘 견뎌내지는 부분에 해당된다. 이것은 영원에 속하나 그외 다른 것은 모두 일시적일 뿐이다. 그의 영적 상태, 그리고 그 결과로 있게되는 영원한 조건은 제일 중요한바 이것만이 하느님의 보호 대상이다. 엘리의 경우 종교적 측면을 소홀히 한 결과 큰 도덕적 부패를 초래케 했다. 그의 아들들은 스스로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 엘리는 그들의 비행을 제지하지 못했다.
성직자 가문이 몰살 당한 것과 그들을 몰살시킨 사울의 표면상의 이유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을까? 우리가 본문 줄거리를 글자로만 살핀다면 그 글자들은 인간 본성의 부끄러운 모습만을 표현해 줄 뿐이다. 다윗은 높은 성직자에게 자기가 사울의 명을 받들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서 성직자 아히멜렉에게서 도움을 얻었다. 사울은 성직자를 죽였는데 그 이유는 다윗에게 협조했기 때문이다. 비록 성직자가 다윗을 도와 준 것은 다윗이 사울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 이라는 호소가 있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위 세 인물 중에서 가장 억울하고 참변을 당한 것은 성직자 였다. 이런 사항으로부터도 도덕적 교훈이 있을 것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이쪽 측면에서는 사기로, 저쪽 측면에서는 파렴치한 이기심으로 야기된 비참한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비록 본문과 완전히 공존하지 않는 듯 여겨질지 모르지만 위 교훈 보다 더 높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본문의 상황에 대한 영적 의미의 열쇠는 시편 52편이 가지고 있는 듯 여겨진다. 이 시편 머리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 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있다고 일렀을 때 지은 시” 라고 써있다. 이 시편 자체가 도엑에 관련된 것인지, 사울에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들이 분분하다. 그러나 본문의 줄거리에서 사제를 죽이라고 사울이 자기 신하들에게 명령했지만 누구도 그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들이 주님을 모시는 성직자 였기 때문이다. 이 명령이 도엑에게 떨어지자 그는 선뜻 나서 성직자들을 죽였을 뿐아니라 놉의 성민 까지 닥치는대로 더 죽였다. 시편 52편이 읊는 해악의 장본인은 도엑일 것으로 저자는 생각한다.
이 도엑은 에돔 출신이였다. 성경에서 에돔은 좋은 의미 내지 나쁜 의미 양쪽으로 언급되고 있다. 에돔은 말씀 안에서 여러 사건이나 여러 사람들에 적용되는 여건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가 교회 속의 선하고 참된 것이라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섞임(간음)으로 악해지고 왜곡되어 타락하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 에돔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선, 이 선에 진리의 교리가 부착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자아 사랑, 이 악에 거짓 원리들이 부착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에돔 출신 도엑이 본문에서 표현하는 품성은 나쁜 의미의 측면일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사울의 목부 중 힘센 자”인 그는 양의 가죽을 두른 늑대여서 아차하면 주님의 양떼를 지키는 목자에게 뒤돌아 덤벼들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죽이라는 사울의 명령을 즉각 수행한 자가 바로 도엑이다. 더욱이 그 명령이 있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도 도엑이였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증오하는데 대한 수단이 되어 준 게 도엑이었는데,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모든 성직자를 향한 분노가 도엑 속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도엑은 자아 사랑의 악이요 이 악이 거짓을 수단으로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시기하는 본성을 더욱 휘저어 들끓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내적 진리를 부양하는 내적 선을 파괴하도록 까지 유인해낸다. 비록 성직자의 몰살은 과거 엘리 가문에 내렸던 심판과 엇비슷하다 해도 어쨋든 성직자 직분 자체는 거룩하고, 설사 이 직분을 수행하는 자가 불순해 있다 해도 사울이 성직자를 반역죄로 몰아 부친 것은 성직자의 불순함보다 그 악의 심도가 더 지독한 상태이다.
절멸 당할 듯한 성직자들의 살육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몰살되지 않았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인 에비아달이 그 곤경을 빠져 나와 다윗에게로 달아 났다. 한 사람의 탈출로 완전한 전멸을 면하는 모습은 말씀 안에서도 몇 군데 더 발견된다. 아비멜렉이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을 살해할 때 가장 어린 요담만은 어딘가에 숨어 살아 남았다 (판관기 9:1-6). 아달리야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왕의 혈육을 모두 죽일 때 요하스 만은 그의 고모에 의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열왕기하 11:1-31). 이상의 사건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런 사건은 과거 헤로데가 두 살 이하의 사내를 살육 할 때 아기 예수가 피신해 살아 남은 것에 비하면 조그만 사건에 불과할 뿐이다. 한 인간이 정신이 뒤집힌 듯 완전한 끝장을 보겠다고 할 때 하느님께서 씨가 살아 있게 보존하신다. “만군의 야훼께서 조금이라도 살려 두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소돔 같이, 고모라 같이 되고 말았으리라” (이사야 1:9). 이 구절 같은 경우가 아기 구세주의 경우이다. 또한 이는 인간 마음 안에서나 세상에 있는 교회에서도 진정한 사실이다. 인간 의지에 의해 결과 될는지 모를 각종 파괴, 영적이고 영원한 삶의 원리가 파괴되는 경우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조금이라도” 살아 남아 있게 해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개인적 측면에서 볼 때 어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수준에 있는 마음 속의 원리들을 본문의 도엑 같이 파괴하려 들 때 주님께서 그의 영적 수준의 마음 안에 그 원리의 얼마를 보존되게 하시어 멸종을 면하게 하신다. 다윗이 에비아달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고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있도록 합시다. 당신 목숨을 노리는 자는 내 목숨도 노리고 있소. 내가 당신의 신변을 보살펴 주리다.” 다윗은 성직자 가문의 몰살 원인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영적 원인들은 때로 자연적 원인들이 죽을 정도 까지 활동한다. 이와 똑같은 의미를 지닌 대목이 예수께서 겪으신 시험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는 바 이는 성령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의 원인(occasion)이라고 언급하는 셈이다 (마태 4:1-11). 이런 특별한 원인(occasion)은 영적인 것과 함께 존재하고, 평범한 원인(cause)은 자연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영은 인도해서 끌어 올리고 육은 끌어 내린다. 이래서 영과 육 사이에는 다툼이 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승리(victory)는 사탄이 차지한 듯 여겨졌으나 부활은 승리(triumph)가 고통 받은 자에게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읊고 있다. “네 혀는 날카로운 면도날, 속임수의 명수로구나….하느님께서 너를 박살내어 영영 없애 버리시리라. 장막에서 너를 끌어 내어 인간 세상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시리라….나는 하느님의 집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올리브 나무 같이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영원히 믿고 살리라. 당신의 해주신 일 고마워 항상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 어지신 당신의 이름을 기리이리다 (시편 5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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