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요약

창세기 제 2 장

1절. 그리고 하늘들과 땅이 마무리되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든 군대.
이 구절은 이제 인간이 “여섯째 날”을 통과하여 영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늘”은 그의 내적 인간이고, “땅”은 그의 외적 인간이다. “그들의 군대”란 사랑, 신앙,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다. 이 세 가지는 앞 장에서 “큰 발광체”와 “별”로 의미되었었다.
인간이 “여섯째 날”이 되어갔을 때,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 속의 모든 군대”가 “마무리되어졌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때 사랑과 믿음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면 신앙이 아닌 사랑이, 바꿔말하면 영적 수준의 원리가 아닌 천적 수준의 원리가 그의 제일가는 원리가 된다. 즉 천적 (평면의) 인간(a celestial man)이 되는 것이다.

2,3절.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느님께서는 만들어 가시던 그분의 일을 끝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일곱째 날에 만드시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 3.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 주님께서 육 일 동안 일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으므로 주님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신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렇기에 일곱째 날은 성별되었고 안식일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일은 쉼을 의미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창조되었고, 형태를 갖추었고, 만들어졌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다는 것,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안식일이라 불렀다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신비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천적 인간의 본성에 관해 친숙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인간의 본성에 친숙한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친숙치 못한 결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본성은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취급되는 태고 교회는 이 교회 뒤를 이었던 모든 교회를 능가하는 주님의 안식일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에 뒤이어 있는 주님의 가장 깊은 (수준의) 교회 역시 안식일이다; 그리고 거듭나는 모두 각각의 인물도 천적 수준이 되어갈 경우, 역시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인물은 주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유대 교회 안에서 노동의 날들, 그리고 안식일이었던 일곱째 날을 수단으로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이 교회 안에 설립된 모든 것은 주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련한 표현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것이 전진하고 쉬었을 때의 궤에 의해서도 표현되어졌다. 그 이유가 광야에서 궤의 여행들은 전투들과 시험들을, 궤가 쉼은 평화의 상태가 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여섯째 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되기를 시작할 때, 이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고, 이것이 “안식일의 전야(eve)”로서, 유대 교회에서 (안식일 이전 날) 저녁으로부터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킴에 의해 표현되었다. 천적 인간은 이제 말해지게 되는 “아침”이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 또는 “쉼”인 이유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전투는 중지되기 때문이다. 이때 악령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 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접근한다; 이것이 표출되면 악령의 잔존은 가능치도 않아 멀리멀리 떠난다. 사실 전투를 수행한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닌 주님이셨는 바, 본문에서 주님께서 “쉬셨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영적 인간이 천적 수준이 될 때, 그는 “하느님의 일”이라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그를 위해 싸우시고, 창조하시고, 모양을 내시고 그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그분의 일을 마치셨다” 말해진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다”는 두 번 언급되고 있다. 예언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사람이 “여호와의 손가락의 일, 또는 손의 일”이라 일컫는 것이다.

4절. 하늘들과 땅의 태생은 이러하다. 즉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날, 그분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이다.
“하늘들의 태생과 땅의 태생”은 천적 인간을 형성함(formation)들이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형성함이 취급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풀잎이 아직 자라지 않는다는 점,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다는 점, 사람의 모양을 내신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신 점, 이 후에 그분은 모두 각각의 짐승과 하늘들의 새를 만드셨는데, 이 만드심은 이미 앞장에서 있었다는 점; 이런 앞뒤 상황으로 미루어 또다른 사람이 여기서 취급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 더 구별되는 점은, 영적 인간을 취급하는 앞 장에서는 주님이 단순하게 “하느님”으로 불리셨는데, 여기서는 처음 동안은 “여호와 하느님”으로 불리신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지금은 “지면” 그리고 “들판”이 언급되는 반면, 앞 장의 경우는 오직 “땅”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도 역시 “땅”에 앞서 “하늘”이 먼저 언급되고, 후에 “땅”이 먼저 언급된다; 이런 이유는 “땅”은 외적 인간을, 그리고 “하늘”은 내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영적 인간에서의 재형성(reformation)은 “땅”으로부터, 즉 외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반면, 여기서 취급되는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5,6절. 땅에는 들판의 관목이 아직 없었고, 그리고 성장하는 들판의 풀잎이 아직 없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6. 그리고 그분께서 땅으로부터 안개가 올라오게 하시자, 지면의 모든 얼굴은 적시워졌다.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을 수단으로 외적 인간이 생산하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두가 뜻해진다. 영적 인간의 수준에 남아있는 동안,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땅”이라 불리우나, 천적 (평면의) 인간이 될 때, 천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지면(ground)” 그리고 또한 “들판(field)”이라 불리운다. “비”, 이는 곧 이어 “안개”라 불리우는데, 전투가 중지될 때 있는 평화로부터의 고요함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포함하는 것을 지각함은 인간의 상태가 영적 수준으로부터 천적 수준으로 되는 동안의 상태를 알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깊게 감추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 수준인 동안, 그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순종하거나 내적 인간을 섬기는데 기꺼이 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전투는 상존한다; 그러나 그가 천적 수준이 될 때,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에의 순종과 섬김은 기꺼이 있는다. 그러므로 전투는 중지되고, 고요함이 결과된다 (87항 참조). 이 고요함이 “비”와 “안개”를 수단으로 의미되어진다. 이 둘은 비슷한 수증기여서, 이것으로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으로 물을 공급 받거나 적시어진다; 평화의 산물, 이 고요함이 “들판의 관목” 그리고 “들판의 풀잎”이라 불리는 것을 생산한다. 이것은 특별하게는 천적 수준으로부터의 영적 근원(a celestial spiritual orgin,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의 영적 근원. 역자주)으로부터의 기억 속의 것들과 합리적 마음 속의 것들이다.
전투의 정지, 또는 탐욕들과 거짓들로 야기된 쉼 없음의 정지에서 있는 외적 인간의 평화 속의 고요함에 대한 본성은 평화의 상태에 친숙해 있는 이들에게만 알려질 수 있다. 이 상태의 기쁨은 매우 깊은 수준이어서 기쁨이라는 여하한 생각의 범주를 넘는다: 이것은 전투의 정지 뿐 아니라 내면의 평화로부터 진행하는 생명이고, 감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의 방식 안에서 외적 인간에게 감명을 안긴다; 신앙으로부터의 진리, 사랑으로부터의 선, 이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그것들의 생명을 끌어내고, 그때 출생되어진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평화의 고요함을 선물받고,-비에 의해 새로워짐-그리고 악과 거짓인 것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된다.

7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지면으로부터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셨다(formed), 그리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들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지면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이 인간은 이전에는 사람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라고 말해졌었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숨을 그의 콧구멍 안으로 불어넣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에 의해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은 살아있게 만들어졌음이 의미되어 있다.
외적 인간의 생명이 여기서 취급되는데, 앞 두절에 있는 이해함 또는 신앙의 생명, 그리고 이 절에 있는 의지 또는 사랑의 생명이다. 지금까지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더불어 전투에 임함에서 기꺼이 내적 인간에 굴복하고 섬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외적 인간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적 (평면의) 외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지금, 내적 인간에 순종하고 섬기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람”을 만든다. 신앙의 생명이 그를 준비시키고,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의 콧구멍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셨다”에 관하여는 이러하다: 고대 시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콧구멍”을 수단으로 냄새 때문에 있는 감사히 여긴 것은 무엇이든, 이것은 지각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졌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여호와에 관련해 반복적으로 쓰여 있는 대목은, 태워바치는 제물로부터, 또는 그분과 그분의 왕국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그분은 쉼의 냄새를 맡으셨다”이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련되는 것들은 그분에게 최고로 감사해야 하는 바, “그분은 그분의 콧구멍을 통하여 생명들의 숨을 쉬셨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 즉 주님에 관하여 “콧구멍의 숨”이라 불리어진다 (애4:20). 그리고 주님 자신 “그분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면서” 이 구절과 같은 것을 의미해두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내뿜으시며 말하셨다,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생명이 “숨을 쉼”을 수단으로, 그리고 “숨”을 수단으로 묘사되어진 이유는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들을 수단으로 지각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들의 후손에서는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는 말해진 바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와 같은 것은 깡그리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고 교회인들은 이것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삶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교하는 것도 이런 흔적 때문이다.

8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에덴 안에 동쪽으로 동산을 창설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그분은 그분께서 만드신 사람을 두셨다.
“동산”에 의해 총명이, “에덴”에 의해 사랑이, “동쪽”에 의해 주님이 의미되어진다; 결과적으로 “동쪽 에덴의 동산”은 천적 인간의 총명이 의미되고, 이 총명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흐른다.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가 영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어서 일 경우, 비록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력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영적 (평면의) 인간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과 다툰다. 고로 마치 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기억력이나 추론력 안으로 흐르는 듯 나타난다. 그러나 천적 (평면의) 인간과 더불은 생명, 또는 생명의 질서는 주님이 사랑을 통하여 흘러들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이 그의 이해력, 추론력, 그리고 기억 속의 것들 안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에 다툼이 없는 바, 그는 이것이 실지로 그렇다고 지각한다. 고로 영적 인간과 더불어 거꾸로 되어 있어 왔던 질서가 천적 인간과 더불어 원위치를 찾은 바가 지금 묘사되어 있다. 이 질서, 또는 사람이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불리어진다. “동쪽에서 에덴 안에 여호와 하느님에 의해 창설된 동산”은 최고의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이시다. 가장 깊은 의미(inmost sense)에서, 마찬가지인 보편적 의미에서, 이는 주님의 왕국이다, 그리고 인간이 천적 수준이었을 때 그가 위치되는 천국이다. 이런 그 사람의 상태는 그가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있다. 마치 그들 사이에 하나의 천사인 듯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동시에 천국 안에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 안에서 그의 모든 생각들, 그리고 생각들로부터의 관념들, 그의 말들과 행동들에 이르기까지 열려있고, 주님으로부터조차도 열려있다. 그리고 그것들 안에는 천적 수준인 것과 영적 수준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런 것들의 각각 모두는 그것 내에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 그 사람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9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바라보기에 바람직하고 식품으로 좋은 모든 나무가 자라게 하셨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생명들의 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도 있었다.
“나무”는 지각을; “바라보기에 바람직한 나무”는 진리를 지각함을; “식품으로 좋은 나무”는 선을 지각함을;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즉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무”가 지각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이 취급되기 때문에서 이다. 그러나 주제가 영적 인간일 경우는 달라진다. 그 이유는 주제의 본성에 서술 부분이 의존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진리와 선인 것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어떤 내적인 감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태고 교회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지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완전한 바, 그것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리이고 선인 것에 관하여 알아채고 지식을 얻는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도, 그리고 자신으로부터의 것도; 뿐 아니라 자기들에 다가오는 누군가의 품질도 단지 그가 접근만 해도, 그의 사상들의 딱 하나만으로부터도 그의 품질을 알아챈다. 영적 인간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양심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각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생명들의 나무”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이다; “동산의 중앙에”는 내적 인간의 의지 안에 있다. 의지(will), 이는 말씀 안에서 “심정(heart)” 이라 불리우는데, 인간과 천사들과 더불어 주님의 제일가는 소유물(possession)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바, 설사 의지가 인간이라 단정할지라도, 의지, 또는 심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의지라 부르는 것인 탐욕은 인간의 것이다. 그 다음 의지가 “동산의 중앙에” 있고, 거기에 생명들의 나무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탐욕만 가지고 있기에, “생명들의 나무”는 주님의 자비이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오는 바,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이다.
그러나 “동산의 나무”의 본성, 또는 지각; “생명들의 나무”, 또는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신앙의 본성; 그리고 “지식의 나무”, 또는 감각적인 것만에서, 또는 기억 속의 지식만에서 근원되는 신앙의 본성은 뒤를 잇는 페이지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10절. 강이 에덴으로부터 나와서 동산을 적셨고, 거기서부터 갈라져서 네 머리가 되었다.
“에덴으로부터의 강”은 사랑으로부터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을 적시는 것”은 총명이 수여되는 것; “거기서부터 네 머리로 갈라졌다”는 것은 뒤 구절에 이어지는 바 같이 네 강들을 수단으로 총명을 묘사함이기 때문이다.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교할 때, 지혜 역시, 그리고 지혜에, “강들”에 관련되는 것들도 비교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단지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일컬었다. 그 이유가 이런 방법이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예언자들 안에도 똑 같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그것들을 비교했고, 때로는 그렇게 불렀다.

11,12절.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다. 이 강은 금이 있는 곳, 하윌라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12. 이 토지의 금은 선(good)이다. 거기에는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onyx stone)도 있었다.
“첫째” 강, 또는 “비손”은 사랑으로부터 있는 신앙으로부터의 총명을 의미한다; “하윌라 토지”는 마음(mind)을 의미한다; “금”은 선을 의미한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진리를 의미한다. “금”은 두 번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선과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벧엘리움과 호마노 돌”은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진리와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에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천적 인간이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바, 이것들을 서술해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지혜와 지혜로부터 파생된 총명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외적 인간들은 기억 속의 지식밖에는 거의 알지 못한 바, 그들은 총명과 지혜, 그리고 신앙을 기억 속의 지식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외적 인간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조차 없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의지력과 이해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개의 마음을 구성한다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의 각각은 구분된다, 그렇다, 아주 확실히 구분된다, 그리고 천국 전체는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에 의거 최고로 구분이 잘되는 방식 안에서 정돈되어 있다. 이것은 무수하기도 하다.
더 나아가 (천국 전체에) 알려져 있는 바,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지혜는 없다는 것,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어떤 총명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는 선은 없다는 것;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고로 주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이 실지로 이런 이름들에 의해 불려지는데, 그것들은 가짜이다.
말씀 안에서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금”을 수단으로 의미되고 표현되어진다는 것보다 더 공통적인 것은 없을지 모른다. (언약)궤에, 성전에, 금빛의 탁자에, 촛대에, 그릇들에, 그리고 아론의 의복 위에 있는 모든 금은 지혜로부터의 선 또는 사랑으로부터의 선을 의미했고 표현했다.
신앙으로부터의 진리가 말씀 안에서 귀중한 “돌들”에 의해 의미되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판단(judgment)의 가슴받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아론의 에봇의 어깨 위에서와 같다. 가슴받이에서, “금, 푸른색 (실), 빛나는 심홍색 (실), 두 번 물들인 진홍색 (실), 그리고 꼬아만든 고운 아마포”는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귀중한 “돌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에봇의 어깨 위, 두 개의 “기억함의 돌들”, 이는 호마노 돌인데, 금으로 박아 끼워 놓였다 (출 28:9-22).
태고 사람들은 “토지들”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것들에 의해 의미된 것을 이해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가나안의 토지나 시온 산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관념을 가지는 것과 같다. 태고인들은 이런 장소들이 언급될 때, 어떤 토지나 산 자체를 생각하는 비중보다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만에 더 생각이 쏠려 있었다. 이 구절의 “하윌라 토지”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는 창세기 25:18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해 말해지는 대목, 즉 그들은 “하윌라로부터 앗시리아로 향하는 , 이집트 앞 수르(Shur)에 이르기까지에서 거주했다” 이다. 천국의 관념 안에 있는 이들은 이런 말들로부터 총명, 그리고 총명으로부터 흐르는 것밖에 더 지각하는 것이 없다. 비손 강이 “하윌라의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에서 말한 “에워 쌈”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그들은 안으로 흐름을 지각한다; 이와 비슷한 모습이 아론의 어깨 위 호마노 돌들인데, 이 돌들은 금으로 에워싸 박아끼워져 있다 (출. 28:11). 그들은 사랑으로부터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흐른다는 것을 지각한다. 많은 다른 예들의 경우도 있다.

13절. 그리고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고. 구스 온 토지를 에워싸고 있다.
“둘째 강”은 “기혼”이라 불리우는데, 선한 것과 참된 것,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스의 토지”는 마음(mind) 또는 능력(faculty)을 의미한다. 마음은 의지력과 이해력으로부터 구성된다;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이해력에 속해 있다.
“구스의 토지”, 또는 에티오피아, 더 나아가, 금, 귀중한 돌들, 그리고 향신료들이 풍부함은 앞서 말했듯이, 선, 진리, 그리고 이 둘로부터 파생되는 감사히 여기는 것들, 말하자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의 것들 같은 것을 의미한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고, 이 강은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이다.
“힛데겔 강”은 추론함(reason)이다, 또는 추론으로부터의 명민함(clearsightness)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이다; “앗수르를 향하여 동쪽으로 가는 강”은 추론의 명민함은 주님으로부터 내적 인간을 통하여 외적 인간 속에 있는 합리적인 마음 안으로 옴을 의미한다; “브라데”, 또는 “유브라데”는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 지식은 최말단(ultimate), 또는 경계선(boundary)이다.
“앗수르”는 합리적인 마음, 또는 인간의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에 의해서와 같이 “유브라데” 역시 기억 속의 지식들, 또한 감각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기억 속의 지식들이 얻어진다.
천적 질서의 본성, 또는 생명 속의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는 이런 강들로부터 분명하다. 즉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지혜가 진행되고, 지혜를 통하여 총명이, 총명을 통하여, 추론함이, 추론함을 수단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은 생기 있어진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고, 천적 인간들은 이와 같은 바, 그들은 “슬기롭고, 총명하며, 그리고 지식이 있는 자”이다 (신. 1:13,15).

15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놓으셨다.
이미 상술했듯, “에덴의 동산”을 수단으로 천적 인간의 모든 것이 의미되었다; “이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는 것”을 수단으로 모든 것을 즐기도록 천적 인간에게 허락되어졌다가 의미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되었다.
천적 인간은 인정한다. 그 이유는 모든 것들, 일반적, 세부적 측면에서 모두는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도 천적 인간과 참으로 똑같게 인정하나, 그 인정은 입을 가지고서 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승인도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그는 그것이 자기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잃는 것은 자신을 멸하게 한다고 상상한다.
지헤, 총명, 추론, 지식은 인간으로부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두로부터 분명하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집주인, 즉 포도원을 창설하고, 그것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를 준 주인에 비유되고 있다 (21:33).

16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하시기를.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어도 된다.
“모두 각각의 나무를 먹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을 지각함으로부터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이미 주목했던 바 같이, “나무”는 지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은 계시들을 수단으로 진정한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가졌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님과, 그리고 천사들과 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환상과 꿈에 의해서도 가르쳐졌다. 이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자, 낙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지각을 가졌다, 하여 그들은 기억 안에 쌓아둔 것으로부터 꺼내 되새겨 봄으로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의 여부를 즉시 지각했고, 거짓된 어떤 것 자체가 표출될 때, 그것을 피할 뿐 아니라 공포가 엄습하는 바 그것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이것이 천사들의 상태이다. 후에, 태고 교회의 이 지각 대신, 이전에 계시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졌다, 그 후에는 말씀 안에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지식이 계승되어져 (지금까지에) 이르고 있다.

17절. 그러나 너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그 이유는 그것을 먹는 그 날에 너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설명해 온 것까지 취합해보면, 이 구절의 말들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다면 모두 각각의 지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참되고 선한 것과 친숙해지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감각으로부터의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다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이럴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천적 등급)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과 기억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사하고 싶은 바램(desire)이 다음 장에서 취급되듯이 태고 교회의 후손들이 타락하는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모두 각각의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이로부터서는 (생각에는) 거짓들만, 생활에는 악만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 심정에서 말한다. 만일 내가 신앙에 관해, 그리고 신앙에 관련한 모든 것에 관해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내가 보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고, 내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 속의 것들을 수단으로 했을 것이니,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반대되어져 있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자신을 확증한다. 고로 이 사람은 천적인 것과 신성인 것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가르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바램의 실현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이런 식을 수단으로 더 바랄수록 그는 더 눈먼 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수준, 급기야는 영적인 것, 영원한 생명, 어떤 것이든 믿지 않게 되고 만다. 이런 것은 당사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것이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로부터 먹는 것” 이다. 누군가가 이로부터 더 먹을 수록 그는 더 죽은 자가 된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슬기로워진 사람은 자기 심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반드시 믿어져야만 한다는 것, 즉 주님이 말씀에서 이야기 하신 것은 반드시 믿어져야 한다는 것,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그는 자기 생각들을 규율한다. 그는 (이 원리를 원칙으로) 추론으로부터의 것들, 지식으로부터의 것들, 감각으로부터의 것들, 자연으로부터의 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확증이 있지 않은 것들은 한쪽으로 내던진다.
인간은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들을 수단으로 통치되어진다는 것은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항이다. 이는 거짓된 것조차도, 그리고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함은 그의 원리들을 찬성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이유가 무수한 생각들은 자기 마음에 표출된 것을 지지하는 쪽으로 구부려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 고로 인간은 거짓된 것 안에서도 확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 보여지고, 이해될 때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원리로 당연시하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보여질 수 없고 상상 같은 것 가지고 마음에 품어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질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슬기로워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뒤를 따르는 것이다. 하여 그는 추론에 관한 문제들, 기억 속의 지식들에 관한 문제들조차도 계발되어진다. 그 이유가 과학들을 배우는 것이 금지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고 삶을 기쁘게 할 것이기 때문.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 원리로부터, 즉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부터 있어야 한다.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세상 지식 속의 친근해진 말 안에서 자연적 진리들을 수단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출발점은 주님이어야지, 자신이 아니다; 그 이유가 전자는 생명이고, 후자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동산”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속의 것들로부터 가진다; 자아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그의 “에덴”이다; 그의 “동쪽”은 서쪽, 또는 자신이다; 그의 “유브라데 강”은 그의 모든 기억 속의 지식이고, 이것은 정죄되어진다; 그의 “둘째 강”, “앗시리아”인 곳, 거짓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얼빠진 추론들이다; 그의 “셋째 강”, “유브라데”인 곳, 거기로부터 파생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원리들이다. 이것들이 그의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다; 그의 “네째 강”은 거기서 파생된 지혜이다. 이것은 말씀에서 “마술”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집트”-이는 기억 속의 지식을 의미하는데-후에 이 지식은 마술이 되었는 바, 그런 인간도 의미한다. 이는 말씀으로부터 알 것이다. 이 사람은 자아로부터 슬기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18절.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께서 말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리라.
“홀로(alone)”를 수단으로 의미된 바, 그는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자아, self)와 세상에 의해 인도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은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이것은 동시에 “여인으로 건축된 갈빗대”라 불리웠다.
고대 때에 천적 인간 같이 주님의 안내 아래 있었던 이들을 두고 “홀로 거주함”이라 말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은 악들, 또는 악령들에 의해 있는 (악과 거짓에) 감염됨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토지에서) (타)민족들을 몰아내었을 때, 그들 만이(alone) (그 토지에서) 거주함을 수단으로도 유대 교회 안에서 표현되어졌다. 이런 연유로, 이것이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에 관해 말해질 때 그녀는 “홀로”이다 하고 때로는 말해진다.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자기 자신의 본성, 그리고 뒤이어지는 것, 둘 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어쨌든 여기서 취급된 교회의 사람이 호의를 가졌던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에게 수여되었는데, 이런 종류의 자기 자신이 마치 그의 자기 자신 같이 나타났는 바,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라 말해졌다.
인간의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분하면, 육체적, 세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영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천적 인간과 더불은 인간의 자기 자신, 이런 것들의 본성을 (말로) 설명하려면 무수한 것들을 열거해야 할 지 모른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과 더불어서, 그의 자기 자신은 그의 모든 것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밖에 아는 것이 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인간은 만일 자기 자신을 상실하면 자기는 멸해지고 말 것이다 라고 상상한다. 영적 인간과 더불어서도 외관은 앞의 인간과 비슷하다. 그 이유가 비록 그가 주님이 모든 것의 생명이시다는 것, 지혜와 이해함을 주신다는 것, 결과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그는 자기 심정의 신조로부터라기보다는 입술로부터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두의 생명이시다는 것, 생각하고 행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식별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있음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기 자신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an own)이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이 자아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지각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행복과도 결합되어 있다. 천사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 안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최고 높은 평화와 고요함 안에 있는다. 그 이유가 그들의 자기 자신 안에 주님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은 그들의 자기 자신을 통치하시고, 그들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들을 통치하신다. 이 자기 자신은 더할나위 없는 천적 자체이다. 이에 반해 육체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이다. 이 자기 자신은 이후 더 취급할 것이다.

19,20절.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지면으로부터 들판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들을 만들어 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그에게 데려왔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살아있는 혼을 부르자,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20 그리고 사람은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새에게, 들판의 모든 야생 동물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할 도움은 발견되지 않았다.
“짐승들”을 수단으로 천적인 애착들이, 또는 의지 측면의 애착들, “하늘들의 새들”을 수단으로 영적 애착들이, 또는 이해함 측면의 애착들이 의미되어진다. “그가 그것들을 부르는 것을 보시기 위해 그것들을 그에게 데려 옴”에 의해 그 사람으로 그것들의 품질을 아는 것이 가능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들을 주는 것”은 그가 그것을 알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선에 대한 애착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애착함들의 품질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그의 자아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이 앞 절에서와 같은 표현, 즉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에 표현되어 있다.
“짐승들”과 “동물들”을 수단으로 고대에서는 애착들과 인간 안에 이와 비슷한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경우에서는 낯설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때의 사람들은 천적인 관념 안에 있었는 바, 그리고 이와 같이 동물들을 수단으로 영들의 세계에서 표현하였는 바, 그리고 사실상, 그들이 이런 동물과 닮았는 바, 그들이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밖의 것을 뜻하지 아니했다. 마찬가지로 짐승들이 언급되는 말씀 안에서도 일반적 측면이든, 특수적 측면이든, 위의 방식 외의 방법으로 의미를 뜻하는 곳은 없다. 예언적 말씀 전체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내적 의미를 포함하는 말씀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앞서 주시했던 바같이 짐승은 두 종류로 있다. 하나는 악하고 유해한 짐승들, 그리고 선하고 해가 없는 짐승들이 있다. 선한 짐승들에 의해서는 선한 애착이 의미되는데, 이런 짐승으로는 양, 어린 양, 비둘기 등등이다; 이것이 이미 취급한 천적 인간, 또는 천적인 영적 인간인 바, 같은 것이 여기서도 뜻해지고 있다.
“이름을 수단으로 부름”이 품질(quality)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이 “이름”을 수단으로 어떤 것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서이다. 그리고 “이름을 수단으로 보는 것과 부르는 것”에 의해 그들은 품질을 안 것을 이해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 딸들에게 의미된 것에 따라 이름들을 주었다. 그 이유는 모두 각각의 이름은 그것 안에 특유한 어떤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름으로부터, 이름을 수단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이들의 본성과 근원을 알런지 모른다. 이 부분은 미래의 책, 즉 야곱의 열 두 아들을 다루는 때 주님의 자비로부터 알게 될 것이다. 이름들이 이름 불러진 것의 근원과 품질을 함축하는 바, “이름으로 부름” 역시 같은 이해의 범주이다. 이것은 고대인들 사이에 말하는 관습적 양식이었으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에 의아해 할지 모른다.
말씀 안에서도 “이름”이 어떤 것의 본질을 의미했고, “이름으로 부르고 보는 것”에 의해서도 품질을 아는 것을 의미했다.
서술되어 왔었던 것으로부터, 의미된 것의 연결이 알려질런지 모른다. 18절에서,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에게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을 만들겠다”, 그리고 현재, “짐승”들과 “새들”이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이는 앞서 (1장에서) 취급되어졌었다, 그리고 즉시 반복되는 것은 “사람을 위해 그와 함께 있을 도움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다. 이는 비록 그가 선에 대한 애착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알게 허용되었을 지라도 그는 그의 자기 자신에 여전히 기울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자기들의 자기 자신인 것을 바라는 이들은 주님의 것들을 경멸하기 시작하고, 어쨌든 그들은 그것을 표현도 하고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21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깊은 잠이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자, 그는 잤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하셨고, 그 대신 그 곳을 살로 폐쇄하셨다(메우셨다). 가슴의 뼈인 “갈빗대”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뜻해진다, 이 안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으나 인간이 친애하는 자기 자신(an own)이다; “갈빗대의 자리에 있는 (빠져나간 갈빗대를 메우는) 살”에 의해 생명력이 있는 자기 자신(an own)이 뜻해진다; “깊은 잠”에 의해 그가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을 가진 듯 자신에게 비쳐지게 놓이는 상태가 뜻해진다. 이 상태는 잠이 든 것과 닮아있다. 그것 안에 있는 동안 그는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이 자신으로부터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할 때, 그러면 그는 마치 잠에서 깨듯 일어난다, 그리고 깨어 있는다.
인간의 자기 자신(그리고 실로 그가 친애하는 것)이 가슴의 뼈인 “갈빗대”라 불린 이유는, 고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이 선행(charity)을 의미했다는 것, 그리고 갈빗대는 심장과 폐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뼈는 천한 것을 의미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생명력이 조금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살(flesh)은 생명력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을 명시했다. 이 의미의 바탕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신비 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이후 살핀다.
말씀에서도 역시 인간의 자기 자신이 “뼈들”에 의하여 의미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실로 자아는 주님에 의해 생기가 있어 진다.
인간의 자기 자신, 천국으로부터 관조할 때, 전체적으로 뼈만 앙상한, 생명 없는 어떤 것 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매우 추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체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생기있어질 때, 그것은 살같이 보인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이나 되는 듯,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죽은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이다. 만일 이 생명이 철회된다면, 그는 돌 만큼이나 죽은 자 되어 내동댕이 쳐진다; 그 이유가 인간은 오직 생명의 기관(organ), 그리고 기관이라 말해주어야 할 정도, 그리고 생명의 애착 같은 것일 뿐이다. 주님만이 그분의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으시다.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되찾으셨다. 그리고 이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신다. 주님의 자기 자신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간의 자기 자신, 그 자체 죽은 것이지만, 살아있게 만들어진다. 주님의 자기 자신이 주님의 말들로부터도 의미되어지고 있다. 누가복음서에서: 영은 살과 뼈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너희가 보는 바대로 나는 가지고 있다 (눅. 24:39).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뼈는 부러뜨리지 않아야 한다에 의해서도 뜻해져 있다 (출. 12:46).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때, 또는 자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인간의 상태는 “깊이 잠듦”에 비교되어진다. 고대인들은 실지로 깊이 잠듦이라 불렀었다; 이사야 29:10의 경우, 그들은 “깊은 잠의 영을 그들 위에 쏟았다”, 그리고 예레미야 51:57의 경우,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sleep a sleep) 등등으로 말해지고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그 자체에서는 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로부터 생명을 가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져 왔었는 바, 거기서 자신들밖에 더 사랑하는 자가 없는 악령들,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 살고 있다고 억지 주장하는 악령들은 감지할 수 있는 경험에 의해 (그렇지 않음이) 확신시켜졌다, 그리고 자기들은 자신들로부터서는 살지 못함을 고백하도록 강요 당했다. 수 년 동안 나는 특별한 방법에서 인간의 자아와 더불어 있는 경우가 어떤지를 알도록 허락되어졌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생각 속의 모든 관념은 (우리에게) 흘러들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어디로부터 흘러드는지를 지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상상하는 인간은 거짓인 것 안에 있다; 그리고 자기는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것을 수단으로 악하고 거짓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만일 그의 믿음이 어떤 경우 속의 진짜의 진리에 일치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 되게 실행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2절.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부터 취한 갈빗대로 그분께서는 여자를 건축하셨고,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왔다.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는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갈비”를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살아있지 않다는 것; “여인”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은 주님에 의해 살았다는 것; “그분이 그녀를 사람에게 데려 옴”을 수단으로 그의 자기 자신인 것이 그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이 의미되어지고 있다. 이 교회의 후손은 자기들의 부모 같이 천적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 자신이 스스로 안내함 아래에서 있기를 원했는 바, 즉 이 후손들은 그들의 자기 자신으로 기울고 있는 바, (주님의) 자기 자신(an own)이 그들에게 수여되었고, 계속 이 자기 자신(an own)은 주님에 의해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인”이라 불리었고, 후에 “아내”라고 불리었다.
여인이 사람의 갈빗대로부터 만들어내지지 않았다라고 (글자로부터) 식별하는 것, 하여 이 대목에는 지금까지 누군가들이 알아채린 것보다 더 깊은 비밀들이 함축되어져 있다는 것을 식별하는 데는 주의력이 요구되지만 누군가의 경우들은 거의 이 대목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인”을 수단으로 사람의 자기 자신이 의미되어진다는 것은 (먹도록) 유혹되어진 자가 여인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알아질런지 모른다; 그 이유가 유혹하는 것은 그의 자기 자신, 똑 같은 것으로,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진다고 말해지고, 앞 장에서 거듭남이 취급될 때 사용한 단어인, “창조되어졌다”, 또는 “형성되어졌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가 본문의 여인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는 “건축하는 것”은 (땅에) 뒹굴고 있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 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구절을 찾아 읽으면, “건축”하는 것이 악들에 관해 서술되고, “일으켜 세우는” 것은 거짓들에 관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하는(renew)” 것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과 거짓을 빼면 자기 자신으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밖에 더 아니다. 이 대목은 인간 자아 속의 것들이 영계에서 관조하도록 표출되어졌을 때,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양 없이 나타나서 더 흉측하게 그려내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차이는 있는데, 눈에 보이게 진열된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공포를 일으켰다, 마치 악마로부터는 도망치고 싶듯, 자신으로부터 도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속의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의 천적인 것이 응용되는 생명에 따라 다양하게도 나타난다; 실로 선행을 증여받았던 이들, 또는 선행으로 해서 생명 있는 이들은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소년소녀들 같이 나타난다; 그리고 순진 안에 있는 이들, 벌거벗고 있는 유아들 같고, 그들의 가슴을 빙둘러 화환으로 꾸미고,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에서 살고 놀고 있다, 그리고 진짜 가장 깊은 데로부터 행복을 지각하고 있다.
“갈빗대가 여인으로 건축되어졌다”는 대목에는 누군가가 글자로부터 발견했다는 것 너머에 아주 깊게 감추인 것들이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깊은 내용은 주님 자신, 그분의 왕국, 이로부터 말씀의 모든 생명이 온다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 안에서 천국의 결혼을 중요시하고 있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 같은 본성 속에 존재하는 바, 이것은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운다. 고로 생기 있는 인간의 자기 자신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두를 지각한다, 결과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 자기 자신의 본성, 즉 주님의 “신랑과 아내”라 불리는 자기 자신은 간결하게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자신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 외에 달리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 주제에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고 있다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만을 이해함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천사들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부터 아주 조금만 떠나도 그들은 변화를 지각하는 애착의 본성을 지녔기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자기들의 평화와 행복을 향유함 속에 있다.

23절. 그리고 사람이 말했다. 지금 이는 지금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내라 불리울 것인데 그 이유는 그녀가 사람(남자, vir)으로부터 취해졌기 때문이다.
“뼈들 중의 뼈, 살 중의 살”은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뼈”라는 자기 자신은 생명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살”이라는 자기 자신은 생기 있어진 자기 자신이다. 더 나아가 사람(남자)은 내적 인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존재로부터(내적 인간으로부터) 외적 인간과 이렇게 짝을 이루는 바, 뒤이어지는 구절에서 이전에 “여인”이라 불리던 자기 자신이 여기서 “아내”라 명명되어졌다. “지금”은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때에 결과되었음을 의미한다.
“뼈들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내적 인간이 안에 있는 외적 인간의 자기 자신을 의미했던 연유로, 그들의 자기 자신이라 일컬을 수 있는 모든 이들, 나아가 한 가문 속의 이들, 한 가족 속의 이들, 꽤 가깝다 하는 이들까지도 “뼈들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일컬어 말했다.
남자가 내적 인간, 또한 총명하고 슬기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가 이해되고 있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어떻게 이런 것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지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천적 인간 안에서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실로 이 구분은 아주 잘되어 있어 천적 인간은 내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외적 인간에 속하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외적 인간이 주님에 의해 내적 인간을 통하여 통치하시는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후손의 상태는, 외적 인간에 속하는 그들의 자기 자신을 바란 결과로, 아주 바뀌어져, 그들은 외적 인간으로부터 구분되는 내적 인간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하여, 이 후손들은 내적 인간은 외적 인간과 하나이다고 상상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식의 지각은 인간이 그의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때 거행되기 때문이다.

24절.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한 몸이리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는 것”은 내적 인간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을 임신하고 낳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굳게 결합하는 것”은 내적 인간이 외적 인간 안에 있을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의 몸이다”는 것은 두 인간들은 거기서 함께 있다는 것; 이전에 내적 인간과 내적 인간으로부터의 외적 인간은 영(spirit)이었는데, 지금 그것들은 몸(육, flesh)이 되었다. 고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자아에 결합되어 있다, 하여 그것들은 하나로서 있을지 모른다.
태고 교회의 이 후손은 악은 아니었고, 여전히 선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외적 인간 안에서, 또는 그들의 자아 안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것 뿐이다; 어쨌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비로 거기 안에 주입되어져 있다.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로서 행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로서 나타나는지는, 이것이 저것 안으로의 유입(influx)이 알려지지 않으면, 알아질 수 없다. 이것에 대한 생각을 품어보기 위해 행동이라는 것을 예로 취해보자. 행동 안에 선행(charity)이, 즉 사랑과 신앙이, 그리고 이것들 안에 주님이 있지 않으면, 행동은 선행의 일, 또는 신앙의 열매 라고 불려질 수 없다.
진리와 올바름에 관한 모든 법칙들은 천적인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흐른다. 그 이유가 전체 천국은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 그리고 그분이 천국의 모든 것 안에 모두이시고 천적 인간이신 바, 이로부터 그들이 천적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진리와 올바름의 모두 각각의 법칙이 천적 시작들로부터, 또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바, 마찬가지로 특별한 방식에서 결혼의 법칙이 실행된다. 천적 결혼으로부터, 이 결혼에 의거, 땅 위 모든 결혼들이 파생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결혼은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천국, 또는 주님이 머리되는 하나의 교회와 같다. 이로부터 파생된 결혼의 법칙은 하나의 남편과 하나의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그들은 천적인 결혼을 표현하고, 천적 인간의 본보기이다. 이 법칙은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적 인간 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남자는 하나의 아내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구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내적 인간이기를 중단하고, 외적 인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 아내들과 결혼했다. 태고 교회의 사람들이 결혼 문제에서 천적인 결혼을 표현했기 때문에, 결혼의 사랑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기울었을 때, 그들은 결혼의 사랑에서 행복의 어떤 것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숫자로부터의 쾌락 안에 있었는데, 이 쾌락은 외적 인간의 즐거움이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심정의 완악함”이라 불려졌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여러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모세에 의해 허용되어졌다.

25절. 그리고 그들, 남자와 그의 아내 모두는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음”은 그들은 순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순진을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방지하시기 위해 그들의 자기 자신 안으로 순진을 주입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 앞서 서술했듯이, 단지 악이다, 그리고 관조해보도록 자아가 진열될 경우, 어떤 모양인지 알 길이 없는 그야말로 흉칙하다. 그러나 선행과 순진이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 주입될 때, 이 자기 자신은 선하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선행과 순진은 인간의 자기 자신(즉, 인간 안의 악하고 거짓인 것)을 너그러이 봐 줄 뿐아니라, 마치 그것이 철폐되기라도 한 듯 하여 있게 해준다. 이를 놓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보자. 어린 아이들 안에서 악과 거짓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부모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한, 감추여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즐거움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아적 순진은 그 자체를 보인다. 이로부터 그가 순진의 어느 수준이라도 소유하지 않으면 천국 안으로의 입장을 허락받을 자는 아무도 없는 이유를 알런지 모른다.
“벌거벗음으로부터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순진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이어지는 것을 수단으로 입증되어진다. 그 이유가 성실과 순진이 떠났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두고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숨겼다. 이와 같은 것이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현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그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를 원하여 자기의 죄없음을 증명할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순진을 증명하려고 벗은 자신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특별하게는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진의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하고 벗은 유아들로서 나타난다. 한편, 순진을 그리 많이 가지지 않은 이들은 그 (수준에) 어울리고 빛나는 의복 안에서 있는데, 이 천사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가끔 보여진 바 있다.
위의 예는 말씀의 이 장 안에 포함된 것들의 몇에 불과하다. 여기서 발표되는 것은 극히 적을 뿐이다. 천적 인간을 취급했는 바, 이 인간은 현재로서는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진 바 없기에, 여기서 설명하는 미미한 것 마저 불명료해 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만일 누군가가 각 구절에 얼마나 많은 신비가 포함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포함된 수많은 신비를 말하지 않고 지나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글자에 보여진 바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짧게 서술하기 위하여, 글자의 말들은,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영들의 세계 안에서 아름다운 질서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생생하게 표현된 것은 무엇이든 표현물 안에 있는 세세한 것들에 이르러 두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되어진다; 천사와 같은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세 번째 천국 안에 있는 천사들을 수단으로 형언할 수 없는 천사와 같은 관념 안에서 풍부하고 가득차게 지각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기쁨에 일치되어 끝없는 다양함 안에 있다. 이와 같음이 주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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