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37 장

창세기 제 37 장

1-3절.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했다. 2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십칠 세 된 요셉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여인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소년이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가져다 주었다. 3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아들보다 더 요셉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갈로 된 옷을 만들어 입혔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 가나안의 토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 일치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주함”의 의미가 사는 것이다로부터; 야곱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다로부터; 여기서 “아버지”인 이삭의 표현함이 선 측면에서 주님의 신성한 합리성이다로부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의 의미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로부터. 이상을 종합하면, “가나안의 토지에서, 그의 아버지가 체류한 토지에서 야곱이 거주한다의 의미는 주님의 자연 평면이 신성한 인간 안에서, 신성한 선 아래 일치되게, 또는 함께 살아감을 표시한다. 주님의 자연 평면은 앞에서 취급되었다 (창. 35:22-26에서); 즉 자연 평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지금 신성이었다; 그리고 (창. 35:27-29에서) 주님의 신성한 자연 평면이 그분의 신성한 합리성과 결합함. 여기서 결론적인 것이 이어진다: 신성한 자연 평면이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 이 선에 일치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위에서 “신성한 합리적 선 아래”라고 말한 이유는 자연 평면이 이것 아래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합리성(합리적 평면)은 높다, 내면이다, 또는 관습적 표현을 빌리면, (시간, 순서에서) 앞이다(prior), 상석(上席)이다, 중요하다 (prior) 인 반면, 자연 평면은 낮다, 외면이다, 결과적으로, (시간, 순서에서) 뒤이다(posterior) 이기 때문이다; 고로 후자는 전자에 종속된다. 게다가 그것들이 일치할 때의 경우, 자연 평면은 합리성의 일반적 측면밖에 더 아니다; 그 이유가 자연 평면이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합리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개별적인 측면과 그것들의 일반적인 측면, 또는 개별적 측면과 그것들의 형체 측면에 있다는 차이뿐이고, 이 안에서 낱개적인 것은 하나로서 나타난다. 학식자들이 아는 사항은 목적은 원인 안의 모두이고, 원인은 결과 안의 모두이다는 것이다; 고로 원인은 목적이 형체로 있는 목적이고, 결과는 원인이 형체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통째로 멸해지고, 만일 목적을 제거하면, 원인이 통째로 제거된다. 더 나아가 원인은 목적 아래, 결과는 원인 아래 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자연 평면과 합리적 평면이다.

이들은 야곱의 출생들이다. 이는 뒤따라오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출생들”의 의미가 교회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의 갈래들, 즉 선의 진리로부터의 갈래들, 또는 사랑의 신앙으로부터의 갈래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출생들의 다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어지는 것 안에서 취급된다, 그러므로 “야곱의 출생들”이 뒤따라오는 것들을 표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출생들”의 의미인 것은 이 말 뒤를 곧 이어 가계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해지는 것은 요셉- 그의 꿈들-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음모- 그가 이집트로 끌려가짐이기 때문이다.

요셉.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다에서 알게 된다. 주님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정도는 교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적인 요셉이 말해질 경우, 막연히 주님을 표현한다 외에 별다른 생각을 사람들이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무엇이 표현되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사항은 알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사항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평면은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영적 평면의 본질은 신성한 진리 외에 더 다른 것은 없다.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왕권적 측면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다른 말로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도 불리운다.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이집트에서 마치 왕인 듯 만들어져, 그에 의해 주님의 왕권으로부터 있는 것이 표현되어졌다.

십칠 년의 아들.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말씀에서 언급되는 나이들의 햇수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다른 숫자들 역시 어떤 것과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치 햇수, 또는 나이 속의 숫자들이 마치 숫자 계산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없는 듯 여겨지는 이유는 이것의 숫자는 여느 다른 숫자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후광으로 있어 역사성이 더 짙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숫자들 역시 어떤 것들과 상태들을 포함한다는 것은 이미 살폈다; 즉 창. 5장과 창. 17:1; 25:7에서, 그리고 창. 35:28에서 이다; 더욱이 천국의 것을 포함하지 않는 말씀의 어떤 역사물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다; 즉 말씀의 이런 숫자들을 읽는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당사자와 더불은 천사들은 그 생각을 건너가서 바뀌는 바, 천국에는 천사들로부터 말씀의 역사물의 영적 의미가 생산된다.
십칠 세 된 요셉에 의해 의미된 것은 말씀의 다른 구절에 있는 의미로부터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시작(beginning), 그러나 여기서는 요셉에 의한 표현의 시작이다. 더 나아가 일반적 측면과 잠재적 측면에서일 경우, 이 숫자는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가 “7”은 거룩함을, 그리고 “10”은 리메인스(remains, 아껴두신 것, 남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양떼를 기르고 있었다.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은 신앙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하면서 그들을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특히 교인들을 교리로부터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는 가르쳐진 이들과 현존함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은 자기 형제들과 더불어 양떼를 먹이고 있다”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는 이 장에서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기운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만으로 기울려 버린 교회, 고로 거짓들을 표현하는데, 이는 아래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소년이었다. 이는 처음에를 의미한다. 이는 “소년(boy)”이 새로운 교회를 서술할 경우, 이 교회의 처음에서 인 것, 또는 새로운 교회의 처음의 상태인 것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인생의 여러 단계들을 지나가듯, 교회도 유아, 소년, 성년, 노년의 단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 역시 인간들 같이 일반적 측면에서는 그렇게 불리운다. 특히 이 단계 중에서 소년이라 불리우는 이 (새로운) 교회에서, 이 교회는 아주 빠르게 (주님을) 외면해버린다. 즉 주님이 처음에는 가르치는 이들과 배우는 이들과 더불어 현존해 계시지만, 그 후에 그분은 이 새로운 교회에 의해 떠나보내지고 만다; 즉 이것이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쳐넣어지고 팔리워 멀리 보내짐을 당하는 것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모두 각각의 교회이지만,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는 아주 다르다. 신앙으로부터의 교회는 이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지시해줄 것은 이해력밖에 없다; 그런데 이해력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인 것밖에 없고, 인간의 유전적인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뿐이다. 이 사랑들이 이해력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확증할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보라고 설득하여 꼬드기고, 확증물이 안되는 말씀은 기막힌 아이디어로 이 말씀을 설명하여 교묘히 발뺌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선행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선이 이 교회의 지도자(director), 그리고 선 안에 계신 주님이 지도자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과 신앙 사이에 선행의 선과 사랑의 선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 중재하는 것 없이 영적 교통(교제, 왕래, communication)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악이 선의 장소 안에 있다면, 이 악은 주님을 몰아내는 바, 그분으로부터 있는 것, 고로 신앙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하든지, 악용하든지 한다. 그 이유가 제대로 말하자면, 신앙은 선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의 여인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이는 주님의 영적 평면에서의 신성한 인간이 그들에 의해 거절되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의 의미가 수단을 제공하여 도움을 주는 외면들과 보다 수준이 낮은 진리에 애착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로 “빌하의 아들들과 질바의 아들들과 더불어”는 “요셉”인 신성한 진리가 상대적으로 섬김 속에 있는 낮은 것들쪽으로 거절되어졌다를 의미한다. 신앙이 선행 앞에 놓여지는 때, 또는 신앙이 심정에서 제 일의 것이 되어 있는 때, 그리하여 선행이 그 다음 자리, 심정에서 둘째 자리에 있는 때, 신성한 진리가 낮은 쪽으로 거절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가 모든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고, 거기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만일 선으로부터 진리가 진행되지 않으면, 그는 주님 안에 있지 않다. 이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영의 거룩함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혜사(Paraclete, 중재자, 위안자),” 그리고 “진리의 영”이라 불리운다 (요. 14:16, 17).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나쁜 사건들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아버지”의 의미가 선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야곱에 의해 표현되는 고대 교회의 선이다. 이는 이 장의 끝부분에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쁜 사건”의 의미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 이들의 과실과 악덕이다로부터, 이들은 이미 말했듯 선과 진리로부터 돌아선 교회인들을 표시한다. 이는 이 단어들의 대략적인 내적 측면에서의 의미들이다. 즉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의미된 과실과 악덕은 그것들을 고대 교회의 선으로부터 주목해서 본다면 신성한 진리에 의해 나타나게 만들어지거나 눈에 보이게 노출되는 것이다; 또는 같은 말로, 이 진리(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나지는 것이다.
이것들에 주목하면 이런 경우이다: 교회의 거짓들과 악들 (즉,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거짓들과 악들)은 그것 안에 있는 이들에게 들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이 거짓들로부터, 악들이 악들로부터 보여지지 않기 때문, 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이 진리들을 완전하게 안개로 덮기 때문, 그리고 악한 생활이 진리들을 꺼져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거짓의 원리와 악한 생활 모두는 거짓들이 진리들이고 진리들이 거짓들이라고. 그리고 선이 악, 악이 선이라고 나타나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러한 것은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러나 교회, 또는 교회인들은 천국 안에서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 이유가 천국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가 있다, 그리고 천국 안의 신성한 진리는 빛이다, 그리고 이 빛 안에서 그들의 품질은 나타난다. 그 이유가 모든 이 각각은 자기의 혼, 또는 영의 측면에서는 어떤 사회 안에, 천국의 사회이든, 지옥의 사회이든 소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거기 있고, 그의 말함과 행동들은 거기에 있는 그의 생각들과 더불은 다양한 교류 안에서 인간 사이에 있다.
더 나아가 어떻게 교회인들의 품질이 신성한 진리에 의해, 또는 신성한 빛 안에서 나타나지게 만들어지는 가에 주목해보자. 최근 세상으로부터 있는 악한 영들이 자신들을 지옥으로 내던지기 앞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야말로 천국에 당연히 받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으로 받아들임에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품질에 관련되지 않고 그분의 은총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 따라서 그분의 은총이 있다면, 천국은 누구에게나 입장하도록 열려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하여 그들 중의 일부가 첫 사회들이 있는 곳, 즉 천국의 입구에로 들려졌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로 오자, 그들은 고통이 느껴지고, 질식될 지경이고, 그들의 생각함과 뜻함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만다; 즉 세상으로부터 있는 거짓의 원리로부터의 그들의 생각의 생명, 그리고 악한 생활로부터의 그들의 의지의 생명이 심통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거기 있는 빛 안에서 자신들을 쳐다볼 때, 그들은 악마들로, 송장으로, 괴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아래쪽으로 자신을 머리를 처박듯 내던진다; 그 빛으로부터 어두운 지옥의 안개 안으로 내던짐으로 거기서 이전의 자신들의 호흡을 되찾는다; 거기서 몽상으로부터 그들의 영이 악이 아닌 것으로 자신들에게 나타난다. 이런 방식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품질을 배운다. 이상의 경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로부터 그들의 품질이 나타남이 어떤 방식에서 인지가 분명해졌으리라 본다.

지금 이스라엘은 요셉을 그의 모든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다. 이는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자연 평면 속의 신성한 영적인 것과 결합함을 의미한다. 이는 야곱의 표현, 그가 “이스라엘”로 불리울 때, 자연 평면의 신성한 영적 부분, 또는 자연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요셉의 표현함이 합리적 평면의 신성한 영적 부분, 또는 합리성으로부터 영적 평면의 천적 부분이다로부터; 그리고 “사랑함”의 의미가 결합되어지는 것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사랑함은 영적인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스라엘이 요셉을 사랑함의 의미는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자연의 신성한 영적 평면과 결합함임이 분명해진다. 이 결합이 취급되기 때문에, 여기서 야곱은 1-2절에서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불리우는 것이다. 이름이 바뀜으로부터 어떤 비밀한 것들이 여기의 내적 의미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추리된다. 그러나 자연의 신성한 영적 평면과 합리성의 신성한 영적 평면의 결합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여기서 취급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후 자연스레 뒤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다음 장에서 어느 정도 나마 펼쳐 보여질 것이다. 이 장에서는 오직 이 정도에서, 즉 영적 평면이 합리성과 자연 평면의 모두에서 서술되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평면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 그리고 이 진리가 합리성 안에서, 또는 내적 인간 안에서 빛을 발할 때, 합리성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또는 외적 인간 안에서 빛을 낼 때, 이 진리는 자연의 영적 평면이라 불리운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고령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안에 있는 그것 자신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를 벗고, 새로운 상태를 입는 것, 또는 삶(생명)의 새로움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고령”은 나이가 많다를 의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내적 인간, 또는 인간의 영은 고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 또는 외적 인간이 늙게 될 때, 내적 인간은 삶의 새로움 안으로 건너가기에, 신체적 힘이 사그라들기에 나이를 수단으로 인간의 영은 완전해져 간다. 완전해져 감은 다른 삶에서도 있는 바, 천국에 있는 이들은 주님에 의해 더 완전한 삶 안으로 계속적으로 데려가진다. 그리고 결국 최고령에 죽은 이들조차, 젊은 이의 꽃피는 건강한 시절 안으로 데려가진다. 위로부터 “고령”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는 삶(생명)을 의미함을 알았으리라 본다. 그것 안에 있는 그것 고유의 생명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인간의 영 또는 내적 인간은 고령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 영이 육체 안에서 생각하고, 이 영으로부터 육체는 생명을 가진다. 영의 이 생각이 육체에 전달될 수 없는 이유, 고로 인간은 죽음 이후 자기가 산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그의 영이 육체 안에 남아 있는 한, 그는 자기의 자연적 인간이 빨아들이게 된 원리로부터밖에 더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리를 받는 것과 그것에 대한 확신은 신체가 살아 있을 때 만에서 이다는 것, 그리고 이 신체가 죽을 때, 인간의 모든 것은 죽는다고 결론을 가지기 때문에 이 진실성의 유입이 받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유입됨이 그 자체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후 자기들의 매장에 관하여, 동시에 사후인데도 자기가 찬사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현실, 게다가 좀 더 특별하다 싶은 이들은 자기들의 명성에 관하여 까지도 생전에 챙겨 놓고 죽음을 맞이하려 한다는 사실, 이런 사실의 확인은 그가 생전에 살아 있는 자들로부터 자기에 대한 기억이 멸해지지 않도록 하고 싶어 대단한 기념비나 화려한 기념물(건축물)을 세워두려 한다는 사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 안으로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에 관련하여 천국으로부터의 유입은 이 점에 별다른 신앙을 가지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도 있게 (섭리) 된다. 이런 유입마저 있지 않으면 사후 자기들의 기억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관련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무관심 상태에 있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만들어 입혔다. 이는 거기서부터 있는 진리의 나타남, 이것 때문에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된다. 이는 “웃옷(튜닉, tunic, 여성들이 멋으로 걸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웃옷)”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로부터, 이는 더 설명한다; 그리고 “여러 색깔”의 의미가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되게 하는 수단인 진리의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들이 “여러 색깔들”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도 이 세상과 같은 색깔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납득될 수 없다. 특히 거기서의 색깔은 이 세상의 색깔을 아름다움이든 다양함에서 이든 훨씬 능가한다. 그리고 이 색깔들의 근원을 알지 않으면 납득되지 못한다. 다른 삶에서 보여진 색깔들은 거기 있는 빛의 다양함으로부터 이다, 다시 말해 지혜와 총명이 변경된 것이다; 그 이유가 거기서 나타나는 빛은 주님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로부터, 또는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영적인 것, 같은 말로, 신성한 총명과 지혜이다; 이것이 천사들과 영들의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빛으로부터의 색깔들에 의해 의미된 것, 즉 진리의 품질들, 고로 진리의 나타남은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웃옷”이 자연 평면의 진리이다에 대하여는 이미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서 미처 살피지 않은 대목을 나는 여기서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증해보려 한다. 유태 교회에서 왕들은 신성의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왕들의 딸들은 여러 색깔로 지은 웃옷으로 입혀졌다, 그 이유가 “딸들”에 의해 선과 진리에 애착함들이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의미되었다; 이들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다윗의 딸, 다말 위에 다양한 색깔의 웃옷이 있었다(입혀졌다), 그 이유가 이런 도포는 처녀인 왕의 딸들에게 입혀진 의상이었기 때문이다 (삼하. 13:18).
대 성직자들이 신성의 천적 평면, 또는 신성한 선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에, 아론에게는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한 웃옷으로 입혀졌다; 그 이유가 신성한 선이 주님 안에 있고, 신성한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진행하기 때문, 그리고 이런 의복들에 의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모하셨을 때, 신성한 선은 태양으로 나타났고, 신성한 진리는 빛 같이 나타난 의복으로 표현되어졌다 (마. 17: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입혀진 의복들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너는 아론을 위해 고운 아마포로 튜닉(웃옷, tunic)를 만들어라, 그리고 고운 아마포 관을 만들어라, 그리고 너는 수를 놓는 자의 일로 벨트 (belt)를 만들어라.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너는 튜닉을 만들고, 그들을 위해 벨트들을 만들고, 그들을 위해 머리끈을 만들어라, 이는 영광과 장식을 위해서이다 (출. 28:39, 40).
여기서의 세부 사항들은 주님의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에 속하는 어떤 것이 의미되는데, 특히 “고운 아마포 튜닉”는 신성한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에서:
너는 의복들을 가져오라, 그리고 아론 위에 튜닉, 그리고 에봇의 도포, 그리고 에봇, 그리고 가슴받이를 놓아라 (입혀라), 그리고 그가 에봇의 허리띠를 두르게 하라; 그 후에 너는 그의 아들들에게 접근해서 그들 위에 튜닉을 놓을 것이다 (출. 29:5, 8; 40:14).
이런 세부 사항들에서 의미되는 것들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출애굽기 편에서 취급될 것이다.
예언자들 역시 튜닉으로 입혀졌는데, 그러나 머리에 관해서 이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에 의해 교리의 진리들 측면에 관련하여 주님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리의 진리들은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 속에 있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머리에 튜닉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머리털”이 자연 평면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튜닉(tunic)에 대한 역자의 지식이 짧아서 이에 대한 번역으로 긴 웃옷, 속옷 또는 영어 발음 그대로 옮기거나 하였는데 이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은 독자에게 맡긴다
“튜닉 (긴 속옷)”이 주님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신약 성서에서 “튜닉”이 언급된 구절로부터 더욱 명확해진다:
군인들은 그분의 의복들을 가져다가 각 군인에 한 부분씩으로 네 부분들로 만들었고, 튜닉 역시; 지금 튜닉은 솔기가 없이, 위로부터 통째로 짜깁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에게 말했다, 이것을 나누지 말자, 하여 성경이 말한 것, 즉 그들은 내 의복들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그리고 내 튜닉 위에 그들은 제비를 던졌다 하고 말한 것이 성취되어졌다 (요:19:23, 24). 위 구절을 읽는 이들의 경우, 이 구절 그대로 그들이 의복을 나누어 갖고, 튜닉은 제비뽑아 군인 누구 한 사람이 가져갔다 했는데, 제아무리 성경 구절들이 거룩하다 해도 이런 사건 세부사항에 이르러서까지 무슨 위대한 신비가 포함되었다고 상상조차 해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위 구절의 세부 사항은 신성으로부터의 어떤 것이 표현되고 의미되고 있다. 그 이유가 “튜닉”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의미되었기 때문, 이 진리는 유일한 하나(one only)이자, 선으로부터 있는 진리이기에 이 튜닉은 솔기 없다고, 통째로 위로부터 짜깁어져 있다고 표현되고 있다.
같은 것이 “아론의 튜닉”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즉 이 옷은 짜깁어진 옷, 짜는 사람의 일에 의한 옷이었다:
그들은 고운 아마포로 튜닉를, 짜는 사람의 일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위해 만들었다
(출. 39:27).
주님은 신성한 진리가 부분들로 교회의 수준 낮은 진리들을 가진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지듯 찢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신성한 선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진리가 유일한 하나이기 때문에, 왕국의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보내질 때, 두 벌의 튜닉을 지니지 않도록 명령되어졌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하기 위해 열 두 제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길을 위해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장대도 아니고, 자루도 아니고, 빵도 아니고, 은도 아니다; 각 사람이 두 벌의 튜닉을 가져가지 말라 (눅. 9:2, 3);
그리고 마가복음서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들은 길을 위해 지팡이만을, 그들의 벨트에 자루도, 빵도, 놋쇠도 가져가지 말라; 그러나 신발을 신어라; 그리고 두 튜닉을 입지 말라 (막. 6:8, 9);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
네 벨트에 금도, 은도, 놋쇠도 소유하지 말라, 길을 위해 자루도, 두 (벌의) 튜닉, 신발, 장대도 아니다 (마. 10:9, 10).
위의 모든 세부 사항들은 제자들로 전도하도록 보낸 주님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이다. 그들이 자신들과 더불어 금, 은, 놋쇠, 자루, 그리고 빵까지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이런 사항들이 주님만으로부터 있는 선들과 진리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금”은 선을 의미하고; “은”은 거기로부터 있는 진리를; “놋쇠”는 자연적 선을; “빵”은 사랑의 선, 또는 천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튜닉”와 “신발”은 위의 사항들을 입히는 진리들을; “지팡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의 힘을 의미한다. “튜닉”은 내면의 자연적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이중적으로 있어서는 안되고 단 하나로 있어야 하기에, 두 장대도, 두 벌의 신발도, 또는 두 벌의 튜닉을 가지는 것을 금하셨다. 이런 신비함들이 위 주님의 명령 안에 있다, 그리고 이 신비함들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알려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하신 모두와 각각은 신성한 사항들의 표현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의 왕국 속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고로 인간의 납득력에도 적합하고 동시에 영들과 천사들의 이해력에도 적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 이런 사항들은 온 천국을 채우고, 계속 채우고 있다. 따라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 그리고 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함이 분명해진다. 더 나아가 이 의미 없이 자기가 기뻐하는 독단적 주장이 무엇이든 말씀으로부터 확증할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의 나타남만 가지고 말한다면, 악 안에 있는 이들에게 글자 의미는 조롱할 빌미를 많이 제공한다, 하여 그들은 말씀이 신성하다라고 여기기는커녕 아예 어떤 요상한 발상을 하여 그것을 믿을 준비만 갖추고 있다.

4-11절.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5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6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바라건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7 그리고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소, 그리고 내 단이 일어났소, 그리고 직바로 섰소. 그리고 당신들의 단들이 내 주변에 왔소, 그리고 내 단에 절을 하였소.
8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네가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할 것이냐? 그리고 그들은 그의 꿈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한 말들 때문에 그를 더 더욱 미워했다. 9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보라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스스로 나에게 절을 했소. 10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그 꿈은 대체 무엇이더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너에게 와서 몸을 땅으로 구부려 절한다는 말이냐? 11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보았다. 이는 신앙 속에 있는 것들, 대략적 의미에서는 야곱의 후손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주목하고 이해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이 장에 있는 요셉은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선행으로부터 돌아서서 신앙쪽으로, 그 다음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에, 결국은 거짓들쪽에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 고로 여기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신앙 속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야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대략적 의미에서는 이 후손이 의미되는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의 모든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 신성한 자연 평면과 합쳐졌음, 대략적 의미에서는 “아버지”인 고대 교회와 합쳐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단어들이 등장했던 곳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고대 교회와 결합되어졌음이 의미된다; 이 교회가 “아버지”에 의해 뜻해진 이유는 이 의미에서 앞 항목에서,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후손이 의미되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에서 표현된 교회가 의미된다. 이런 사항들이 어떻게 이렇게 이해되는지는 이미 반복적으로 서술해왔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리즈를 위해 반복적이지만 다시 몇 마디 보탤까 한다.
홍수 이후 주님에 의해 건립된 고대 교회는 표현 교회였다; 그래서 이 교회 예배의 외적인 것 모두 그리고 각각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현했고,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신성한 것들 자체를 표현했다; 또한 예배의 내적인 것 모두와 각각은 선행에 관련되어 출생되고 있었다. 이 교회는 아시아쪽 세계로 대규모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거기 있는 많은 왕국들을 통하여 퍼져갔다; 비록 그들 사이에 신앙의 교리적인 것들에서는 차이점은 있지만, 여전히 교회는 하나였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각 부분에 있는 모든 것은 선행을 교회의 본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에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신앙을 교회의 본질로 만든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함”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교회는 우상숭배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집트, 바빌론, 그와 다른 장소들에서 마술로도 전락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행으로부터 퇴조했을 때, 천국 역시 그들로부터 퇴조했다, 그리고 천국 대신 그들을 인도했던 지옥으로부터 영들이 왔다.
이 교회가 황폐해졌을 때, 일종의 새로운 교회가 에벨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히브리 교회라고 불리웠다. 이 교회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했다, 또한 가나안의 몇몇 민족 사이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교회는 고대 교회와는 사뭇 달랐는데, 그 이유가 이 교회는 외적 예배의 본질을 제물을 바침에 두었기 때문이다. 실로 이 교회는 예배의 내적인 것은 선행이다고 인정은 했다, 그러나 이 인정함이 고대 교회의 경우 같이 심정 측면에서가 아니었다; 고로 이 교회 역시 우상 숭배로 전락했다.
마지막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으로부터 교회의 어떤 새로운
종류를 건립하시는 것, 그래서 고대 교회의 예배의 외적인 것들을 도입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민족의 특성상 그들은 교회의 어떤 내적인 것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은 선행에 완전 반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립되되 완전 껍데기만의 교회, 즉 표현 교회가 아닌 교회의 표현물이 그들 사이에 조직되었다.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이 대략적 의미에서 이런 교회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 그들의 아버지가 고대 교회를 의미한 이유이기도 하다. 말씀의 많은 장소들, 특히 예언서들에서 고대 교회가 “야곱”에 의해 뜻해진다; 또한 때때로 고대 교회가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즉 “아버지”는 선 측면에서, “어머니”는 진리 측면에서 고대 교회를 의미한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그들의 아버지가 모든 요셉의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가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고대 교회와 결합되어졌다를 의미한 이유를 알았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었다. 이는 경멸과 증오를 의미한다. 즉 요셉에 의해 표현된 신성한 진리를 경멸함과 그것을 증오함인데, 이는 “미워함”의 의미가 통상 미워하는 누군가가 지니는 미워한다가 아니다는 것, 그 이유는 경멸함, 증오함 같이 미워한다는 단어보다 더 센 표현도 천국에서는 좀 더 온순한 표현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천국은 미워함이 무엇인지, 경멸, 증오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한 표현인 경멸함이 미워한다는 수준에서 표현될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평화로이 말할 수 없다”의 의미가 아주 싫어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평화로이 말한다”가 누군가가 잘되기를 원한다를 뜻하기 때문, 하여 고대인들은 평화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내적 의미에서 그분의 왕국과 거기 안에서의 생명을, 또는 구원을, 그러나 외적 의미에서는 세상에서의 건강함과 안전함으로 이해했다. 이 의미의 반대가 누군가에 평화로이 말할 수 없음, 즉 그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음, 고로 아주 싫어하는 것,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를 아주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꿈을 꾸었다. 이는 그것에 관하여 설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꾸다”의 의미가 설교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꿈이 요셉을 취급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하여 설교함이 의미된다. 여기서 “꿈”이 설교함을 의미하는 이유는 요셉의 두 꿈 안에 요셉에 관련하여 설비되고 예견되는 모든 것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표현되는 교회, 또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 내에서 신성한 진리에 관련하여 설비되고 예견되는 모든 것들이 요약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성한 진리들은 꿈이든, 환상이든, 말함에 의해서이든 고대 시대에서 명명백백해졌다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설교함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씀에서는 “예언자”들에게 신성한 진리가 말함에, 환상에, 또는 꿈에 의해서 명명백백해졌고, 이들에 의해 진리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되었다, 그리고 추상적 의미에서 교리의 진리들이 의미되었다.
그러므로 같은 것이 “환상을 봄”, 그리고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된다. 즉:
나는 내 영을 모든 육 위에 쏟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은 예언할 것이다, 너희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너의 젊은 이들은 환상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 이 날에 나는 내 영을 쏟을 것이다 (욜. 2:28, 29);
위 구절에서 “그들 위에 영을 쏟는 것”은 진리들에 관하여 가르침이 있다를 표시하고, “예언하는 것”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리고 같은 것이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된다. “노인”은 슬기로운 자이다, “젊은 이”는 총명한 자, “종들”은 아는 이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여호와 체바욷께서 말하신다, 네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들을 경청하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든다, 그들은 자기들 심정의 환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입으로부터가 아니다. 나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다, 말하기를,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꿈을 가진 예언자는 꿈을 말하게 하라; 그러나 내 말을 가진 자는 진리 안에서 내 말을 말하게 하라. 보라 나는 거짓으로 꿈을 예언하는 그들에 맞서 있다,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그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내 백성을 그들의 거짓말로 내 백성을 타락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예. 23:16, 25, 28, 32);
위 구절에서 “예언한다”란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거짓말의 꿈으로부터, 이로부터 그들의 설교함이 있다.
이외 다른 구절로서 예레미야 29:8, 9; 스가랴. 10:2도 있다. 모세의 책에서:
너희 한가운데에서 예언자가 일어난다면, 또는 꿈을 꾸는 꿈장이가 일어난다면, 그가 너희에게 표시와 경이로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표시와 경이로움이 와서, 그것 가지고 그가 너희에게 말하기 를, 너희가 알지 못해왔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자, 그리고 그를 섬기자; 너희는 이 예언자, 또는 꿈장이의 말들에 순종하지 말라. 그리고 이 예언자, 또는 꿈장이를 너희는 죽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 너희 하느님에 맞서 반역질하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신. 13:1-3, 5);
위의 “예언자,” “꿈장이”는 가르치고 전도하는 자를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거짓들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선 교회, 또는 추상적 의미에서 신앙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그를 미워함을 추가했다”는 말이 이어지기 때문이고, 이 말에 의해 더 크게 경멸하고 증오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 주목하면, 이 교회의 시작에서는 선행이 설교되어졌다, 그러나 그나마 이론에 불과한 것, 즉 (생활은 없는) 교리만에 국한된 선행, 고로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있는 선행, 따라서 선행 자체로부터가 아닌, 애착으로부터가 아닌, 또는 심정으로부터가 아닌 선행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행과 애착이 심정에서 폐지되어지자, 신앙이 설교되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어떤 선행도 더 이상 있지 않고, 신앙만이 있고, 이 신앙은 일함 없이 구원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들은 선행의 일들이라 더 이상 말해지지도 않고, 신앙의 일들, 신앙의 열매들이라 말한다.
이런 방법에서 실로 인간들은 선행과 신앙이 결합하고는 있다, 그러나 교리만으로부터일 뿐, 생활로부터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의 생활에, 또는 선에 구원함의 어떤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오직 신앙만이 구원한다 라고 말했기에, 그들은 신앙이 구원하는 힘을 지닌다 라고 확정해버리는 가운데, 그들은 신앙이 열매라는 단어와는 거리를 두게 되면서 결국 일함이라는 단어는 천국 입장과는 슬그머니 무관하게 되고 만다. 어쨌든 진짜 확신함은 선 안에서가 아니면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가짜 확신이나 거짓 확신은 악 안에서조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더욱 분리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런 주장도 서슴치 않는다; 즉 딱 한 번의 확신, 즉 “예수를 인정함”만 가져도, 또는 죽기 직전 믿노라고 고백함만 가져도, 이전 삶은 어찌되었건 그는 구원되었다 라고 단정짓는 방식이다. 이들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결과에 따라 심판된다는 것, 사후 인간의 삶의 결과는 남아 있는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대목을 슬쩍 비껴가는 것 뿐이다. 이런 간단한 몇 마디 말만 생각해보아도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의 품질이 무엇일지, 신앙의 삶이 아닌 신앙만으로 만들어지는 교회의 품질이 어떨지 짐작될 것이다. 그들의 근원되는 것으로부터 흐르는 거짓들에 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음 페이지에서 더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더 미워하였다. 이는 경멸과 증오가 더 크게 보태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 앞에서 이미 살폈기에 생략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컨대 내가 꾼 꿈을 들어 보시오. 이는 설교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이는 “꿈을 꾸다”가 설교함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설교의 내용들인데, 그 이유가 그의 꿈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우리는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단을 묶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교리로부터 가르쳐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단을 묶다”의 의미가 교리로부터 가르쳐진다 이다; 그리고 “들판”의 의미가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들판의 한가운데”란 교회의 내면인 것, 고로 이것은 얼만가의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 이유가 “한가운데”가 내적 의미에서 내면인 것과 가장 내면(가장 안쪽)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한가운데, 또는 교회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이들은 선행 안에 있는 이들, 여기서는 어떤 선행의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과 더불어 주님께서 현존하신다, 그 이유는 주님은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신앙 안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미되는 이유는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요셉의 단이 일어났고, 그리고 다른 단들이 그것 주위를 빙둘러 일어났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의 단에 의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로부터의 교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단”이 교리를 의미하는 이유는 들판이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 그리고 들판에 서있는 곡식(corn)은 교회에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곡식이 있는 단은 진리가 있는 교리를 의미한다. 아래 구절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그들은 노래하며 수확할 것이다; 씨의 던짐을 낳으려 꼭 가고 우는 자, 그는 노래하며 올 것이고, 그의 단을 낳을 것이다 (시. 126:5, 6);
위는 영적 포로됨에 있다가 자유해진 이들에 관해서 말해진다. “씨의 던짐을 낳는” 것은 진리들로 가르침을 받는 것, “노래하며 오는” 것은 진리에 애착함으로부터의 기쁨을 표시한다, 그리고 “단을 낳는” 것은 이 진리로부터의 교리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그리고 보라, 내 단이 일어났다, 또한 직바로 서있었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일어남과 직바로 섬”의 의미가 통치할 최고의 존재, 그들이 숭배할 최고의 존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 존재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시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부터 분명해진다; 즉 열한 단들이 자신들을 이 단쪽에 엎드려 절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꿈에서,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을 엎드려 요셉에게 절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 이로 인해 통치할 최고의 존재, 그들이 경배할 최고의 존재가 의미되고, 또한 이 의미는 야곱이 말하기를,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실로 자신들을 땅쪽으로 구부려 네게 절하란 말이냐?”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미 말했던 바 같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이 진리의 최고의 존재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에서 최고의 사항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이다.
교리적인 사항들 속의 최고 사항의 경우는 이렇다: 태고 교회, 이 교회는 천적 (수준의) 교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이 교회는 사람이라 불리웠고, 무한한 존재를, 무한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온 파생물(deriverative)을 숭배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내적 인간 안에서 지각될 수 있는 것들과 자기들의 외적 인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로부터, 그리고 세상 안에서 (육체의 눈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로부터, 이 교회인들은 무한한 있음(존재, being)을 지각할 수 없었으나, 무한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온 파생물에 관하여는 어떤 지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무한한 있음이 있는 이 파생물을 숭배했다. 무한한 있음이 들어있는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을 그들은 신성한 사람으로 지각했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세상에 낳아졌다고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이 웅대한 사람이고, 인간 안에 있는 모두와 각각은 이 사람에 상응하기에, 그러므로 그들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에 관하여 신성한 사람 외에 더 다른 지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웅대한 사람으로서의 천국을 통과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기로부터 각각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형상(image)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런 천적 수준의 교회가 타락하기를 시작했을 때, 이들이 내다본 것은,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마음 안으로 유입되어질 수 없다는 것, 고로 인류는 멸해지고야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밝히 알려진 것은, 그분 자신 안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게 할 누군가가 태어나야 할 것이다는 것; 이 방법에서 전에 있어 왔었던 똑같은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이 되어 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서 전에 있어 왔었던 무한한 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주님에 관한 이 예언이 창세기 3장 15절에 있게 되었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의 아래 말씀에 서술되어 있다:
시작에서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이 하느님과 더불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이셨다. 동일하게 하느님과 더불어 시작에서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분 없이 만들어졌던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그리고 말씀이 육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거주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에 관하여 이고 은총과 진리가 가득하다 (요. 1:1-4, 14);
“말씀”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본질 측면에서 무한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에 출시된 무한한 있음, 그리고 주님의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 자신이시다. 이 인간 자체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가 지금 진행되어 천국 안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천국을 통하여 인간들의 마음 안으로도 흘러든다; 결과적으로 이 진리가 우주를 규율하고 통치하는데, 마치 영원으로부터우주를 규율하고 통치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가 이것은 무한한 있음과 하나이고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분은 인간을 신성과 결합되게 하셨기 때문, 이렇게 행해진 결과, 그분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을 신성으로도 만드신 것이다. 이로부터 신성으로부터의 진리의 최고인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교회의 신성한 사항 사이에서 최고인 것은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사항이다.

그리고 바라보니, 당신들의 단이 와서 둘러섰다. 이는 신앙 속에 있던 이들, 즉 얼만가의(약간의, some) 선행으로부터 있는 신앙 안에 있던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와서 빙둘러 섰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숭배하기 위해 접근함이다 인데,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이, “그들은 자신들을 구부려 그의 단에 경배했다”이기 때문에서 이고, 이를 수단으로 숭배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의 의미가 교리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교리의 모든 사항들, 또는 신앙의 모든 것들이다. 여기서 “단”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진짜 의미에서 신앙의 모든 것들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 꿈에서 야곱의 아들들 역활을 “단”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꿈의 무대가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이었는 바, 이는 내면인 것, 또는 교회의 내면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교회의 내면에 해당하는 것은 선행인 바,) 얼만가의 선행으로부터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와서 빙둘러 서고, 자신들을 구부려 요셉의 단에 절을 한” 것이다. 이것들이 한가운데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진 것, 또는 외면의 것을 뜻하지 않고 적당한 의미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뜻해짐이 분명한 이유는 진행되고 이어지는 말로부터 이다; 즉, 그들이 더욱 더 그를 미워했다, 즉 그를 경멸하고 증오심을 가졌다는 것; 즉 “미워함”, “평화로이 말하지 못함”, 그리고 “시기함” 같은 단어들이 그의 형제들에 대한 것이고, 이것이 경멸과 증오심을 의미하기 때문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부려 내 단에 절을 했다. 이는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들을 구부려 절을 함”의 의미가 굴종의 결과, 고로 숭배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단”의 의미가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고로 이것은 교회의 내면쪽에 있는 이들이 숭배하는 신성한 인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면에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은 숭배함으로부터 가능한한 멀리 있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결과를 빚는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은 선행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 그리고 선행을 통하여 신앙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은 결합되게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선이 없는 진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의지력 없는 지성은 무엇일까? 고로 선행 없는 신앙은 무엇일까? 확신함에서 그것의 본질 없이 맹목적 확신(믿습니다)함은 무엇일까?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전혀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품성을 지니고 기독교계로부터 다른 삶에 와서, 나와 이야기를 했던 많은 이들로부터 분명해졌다; 그 이유가 그 삶에서는 이 세상의 경우처럼, 즉 심정이 말하는데, 입이 말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거기서는 모든 이의 생각들이 이 세상의 어떤 말함 보다 더 명료하게 소통되어진다. 다시 말해 누구도 자기가 생각하고 믿는 대로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설교했던 이들 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을 통째로 부정한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지상에서 그분을 설교하고, 바깥쪽 형체일지언정 그분을 경배했는지를 물었더니, 자기들에게 직책의 의무로 지워진 것이기 때문이다는 것, 그 덕분에 명예와 소득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분을 고백했던 이들이 있어 물었더니, 자기들은 교회 안에서 출생했기에, 자동적으로 그런 분위기에 있게 되었고, 만일 이런 자기들이 태어나진 종교에 반대하면 “왕따” 당할 것이기에 고백했을 뿐이다고 응답했다. 기독교계로부터 온 대다수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분만이 천국과 우주를 규율하신다는 것을 거의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시다를 모르고 있다.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밝히 나타나질 수 없었던 이유는 기독 교회가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서리라는 것, 결과적으로 그분으로부터 그 자체 분리되리라는 것, 그리하여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거룩함을 모독하리라는 것이 주님에 의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은 이와 달리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분리되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교회들이 자기들의 독단적 주장들에 따라 서로를 분리하기 때문, 그리고 자기들의 주장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믿는 자들은 누구이든 자기들의 종교 단체로부터 축출하고 비방도 한다. 이들은 노골적이지 않을 뿐 타인의 (영적) 소유물을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갈취하려드는 날강도 같아서, 교묘하게 이웃의 선행의 일마저 폄하하여 영적 간음을 범한다. 그럼에도 자기 교회의 원칙만 준행하면 된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생활로부터가 아니라 교리만으로부터 이다. 신앙에 인접한 열매들은 자기들의 교리 안에만 있을 뿐, 그들의 마음 안에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돌아서고, 결국 선행으로부터 신앙을 분리한 교회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내면인 이들이 꿈에서의 “(곡식)단들”에 의해 의미되어진다. 요셉의 형제들이 이 교회를 표현하는 이유는 대략적 의미에서 그들이 교회의 표현물을 의미했기 때문, 또는 야곱의 후손 사이에 조직된 광신적 신앙을 의미했다. 이 후손들은 기독교회에서 이해된 신앙 같은 것은 전혀 아는 바 없었고, 오직 진리만 알았었다. 그들에게 진리는 기독인들에게 신앙과 견줄만하다. 더욱이 히브리어에서는 한 단어로 진리와 신앙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태 교회는 진리라는 단어를 십계명의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모세에 의해 내려받은 율법, 심판들, 증거들, 규례들 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그들은 진리의 내면들을 알지 못했다, 아마 알기를 원하지도 않았다가 더 적절할지 모른다.
기독 교회의 경우, 이 교회는 자기들이 말하는 교리적 주제들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주고, 이 신앙이 교회의 내면의 것들로 반드시 믿어져야만 하는 사항들로 굳혀놓았다. 그 이유가 신앙이라는 단어를 수단으로 보통의 사람들에서 이해되는 것은 교의들(신조들, creeds)이기 때문, 또는 신조들의 책들이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 또는 그것들에 관한 지식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고, 신앙의 생활 안에 있는 자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확신을 신앙이라 부른다. 이들은 보통의 사람 너머 있고, 타인들보다 더 학식이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보건대,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내적 의미에서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서 조직된 교회의 표현물일 뿐 아니라, 유태 교회에 이어지는 기독 교회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이기 때문, 일반적으로 모두 각각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아우른다고 납득되기 때문이다. 하여 주님에 의해서는 기독 교회이든, 유태 교회이든 공히 예견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유태 교회는 대략적 의미에서, 또는 내적 역사적 의미에서, 그리고 기독 교회는 내적 의미에서 취급된다.

네가 참으로 우리를 통치할 것이냐? 또는 네가 참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이냐? 이는 그들은 이해력과 의지력 속의 것들에 관하여 복종 당해지고 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통치함”이 이해력 속의 것들이 복종당해지는 것, “군림함”은 의지력 속의 것들이 복종 당해지는 것을 의미함에서 분명해진다. “우리를 통치함”과 “우리 위에 군림함”이 그들이 복종당해지고 말 것임을 표시할 뿐 아니라, 여기서 사용된 두 표현들은 이것은 이해력 측면에, 다른 하나는 의지력 측면에 관련되고 있다. 이런 표현은 말씀, 특히 예언서들에서 두드러진 표현들인데, 하나가 두 방법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 방법 안에 있는 신비함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런 표현이 아마도 강조를 위한 중복적 표현일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고, 말씀의 모두 각각의 세부적인 것 안에서도 천국의 결혼, 즉 진리가 선과, 선이 진리와 결혼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 안에서의 이해력과 의지력의 경우도 있다. 이 표현은 진리에 관련되고, 저 표현은 선에 관련된다; 고로 이것은 지성에, 그 이유가 지성은 진리에 속하기 때문, 저것은 의지력에, 그 이유가 이것은 선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씀에 있는 표현들은 이런 의미를 꾸준히 가지는 용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하나를 위해 두 표현들이 사용된 것 안에 감추인 비밀들이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여기서의 “우리를 통치함”과 “우리 위에 군림함”의 경우이다. 하여 “통치함(reigning)”은 이해력 속에 있는 진리와 관계되고, “군림함(having dominion)”은 의지력 속에 있는 선에 관련되고 있다. 아래 다니엘서에서도 “왕국”은 진리를 서술하고, “군림함”은 선을 서술하는데, 이 구절의 주제 역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다:
그분에게 군림하심과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다, 하여 모든 백성, 나라들, 그리고 언어들이 그분을 예배할 것이다; 그분의 군림하심은 영원히 지속되는 군림하심이다, 이 군림하심은 사라지지 않는 다, 그분의 왕국은 멸해지지 않는다 (단. 7:14);
그리고 다윗서에서:
당신의 왕국은 모든 영원함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군림하심은 모든 세대에 있습니다 (시. 145:13).

그리고 그들은 그를 그의 꿈과 그의 말들 때문에 더욱 미워하였다. 이는 진리에 관한 설교 때문에, 여기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설교 때문에 한층 더 강해진 증오와 경멸을 의미한다. 이는 “더욱…하였다(보탰다, added)”가 더욱 그러했다 임에서; 그리고 “미워함”의 의미가 경멸하고 증오하는 것이다로부터;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말들”의 의미가 진리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말들”이 진리들을 표시하는 이유는 천국에의 모두 각각의 단어는 주님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내적 의미에서 “말들”은 진리들을 의미하고, 일반적으로 “말씀”은 모든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주제 자체에 주목하면,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진리인 것,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진리이고, 이것을 특히 선행으로부터 분리한 신앙을 가진 교회가 경멸하고 증오한다. 고대 교회 속에 있던 이들, 그리고 신앙을 선행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이들은 우주의 하느님이 신성한 사람이셨다는 것을, 그분은 신성한 있음(being)이셨다는 것을 믿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분을 “여호와”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태고 교회로부터 이었다고 알았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의 형제들 중의 얼만가에게는 사람으로 나타나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또한 알았던 것은, 자기들의 교회의 모든 의식들과 외적인 것들이 그분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행에서 분리된 신앙 속에 있던 이들은 그렇게 믿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느냐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 또한 신성한 사랑이 이를 결과되게 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만 이유는 그들은 자기들의 외적 감각들을 통하여 받은 어떤 생각(관념)들로부터 납득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니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이런 대목을 소중하게 간직해버렸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지각의 내적 측면이 닫혀졌기 때문이다, 마치 이는 유입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의 것인 매체가 없는 경우와 같다.
이어져온 유태 교회는 여호와가 사람이셨다는 것, 또한 하느님이셨다는 것을 실로 믿었다, 그 이유는 그분이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 이런 이유로 유태인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모든 천사를 “여호와”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분에 관하여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가졌던 그 수준의 범주를 넘어서 생각하지를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 기적을 수행하신 여호와 하느님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가 말씀에 있는 “주님”이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의식들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표현한 것도 전혀 몰랐다. 그들이 지니는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모세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로 오시리라는 것, 또는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으로 오시어 엄청난 기적들을 가지고 자기들을 가나안의 토지 안으로 데려다놓으시리라는 것 뿐이다. 그들은 그분의 천국 왕국에 관하여 어떤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세상적인 것밖에 납득되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그들은 선행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인의 교회, 어쨌든 외적 예배에서 실로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서 숭배한다, 특히 성찬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빵은 그분의 몸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라고 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에서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신성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 사이에 구분이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 교회 역시 선행으로부터 신앙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마지막으로 신앙이 선행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인간은 신성이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넘어지거나 심정에서 그분을 부정하고 있다. 어쨌든 진리인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세상으로 출시된 신성한 있음이시다는 것이다. 이 두 분은 한 분이시다는 것을 주님께서 분명히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말하셨다, 내가 너희에 이토록 오래 있어 왔는데, 너희는 나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는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믿어라
(요. 14:9-11);
이 외에도 다른 구절들이 더 있다. 세상에 출시된 신성한 있음은 (본래의)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진행한 신성 자체, 그리고 형상에서는 사람이시다; 천국, 그 속의 모든 것은 웅대한 사람을 표현한다; 이 웅대한 사람에 관하여는 각 장의 끝에서 살펴왔다, 그 안에서 인간 안의 모든 것이 상응한다.
실로 주님께서는 또 다른 인간이신 것으로 태어나셨고, 어머니로부터 유약한 인간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 인간(human)을 주님께서는 통째로 내던지셨다, 하여 그분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되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 안의 인간(Human)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그분이 신성이 되심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또한 그분은 그분이 변모하심으로 그분이 신성한 사람이신 것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이셨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이는 다시 설교함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형제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는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표현함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내가 아직 더 꿈을 꾸었다. 이는 설교의 내용들을 의미한다.

바라보니, 해와 달. 이는 자연적인 선과 자연적인 진리를 의미한다. 이는 “해”가 천적 (평면의) 선, “달”은 영적 (평면의) 선, 또는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해”는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영적 사랑에 있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 해로 나타나시기 때문; 그리고 “달” 역시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을 의미한데, 그 이유는 그분은 영적 사랑에 있는 천국에 있는 이들에게 달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빛은 이 둘로부터 이다. 그러므로 해로부터의 빛에 의해 사랑의 천적 평면, 또는 선이 있다; 그리고 달로부터의 빛에 의해 사랑의 영적 평면, 또는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해”가 자연 평면의 선, “달”이 자연 평면의 진리인 이유는 여기서의 해와 달은 야곱과 레아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는 10절로부터 분명해지는데, 거기서 야곱이,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가 실로 와서 땅으로 자신을 굽혀 네게 절한다는 말이냐?” 라고 말하기 때문, 그리고 야곱과 레아는 자연 평면의 선과 자연 평면의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인데, 이는 앞에서 자주 언급해왔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함이 최고 의미에서 그분에 있는 신성이다; 그러나 관계적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의 신성이다.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선이 소위 천적 평면(수준)이고, 그분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는 소위 영적 평면(수준)이다. 합리성이 이를 받을 때, 의미되는 것은 합리적 평면의 선과 진리이다; 그러나 자연 평면이 이것들을 받을 때, 의미되는 것은 자연 평면 의 선과 진리이다. 여기서 해와 달은 자연 평면의 선과 진리인데, 그 이유는 야곱과 레아를 두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한 별들.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별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별”이 말씀에서 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별이 밤에 빛을 내는 작은 발광체로 어렴풋한 빛을 내보내기 때문, 마치 지식들이 선과 진리에 어렴풋한 빛을 내보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이 “별”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진다. 예레미야서에서:
고로 낮의 빛을 위해 태양을, 밤의 빛을 위해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시고, 파도들이 요동치는 바다를 휘저으시는 여호와께서 말하셨다 (예. 31:35);
위 구절은 새로운 교회가 취급된다, 그리고 “낮의 빛을 위해 태양을 주심”에 의해 사랑과 선행의 선이 의미된다, 그리고 “밤의 빛을 위해 달과 별들의 운행을 주심”에 의해 진리와 지식들이 의미된다.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큰 발광체들을 만드시고, 낮은 태양이 규율하고, 밤은 달과 별들이 규율하게 하셨다 (시. 136:7-9);
말씀의 내적 의미에 관해서 무지한 이들이 믿게 되는 것은, “태양”은 세상의 태양, “달과 별들” 또한 세상의 달과 별들이다는 그 이상은 없다; 하여 이로부터 영적이고 천국적 의미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씀은 모두 각각의 단어들에서 천국적일 뿐이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과 선행의 선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들, 이들에 관한 지식들 모두가 의미된다.
창세기서의 첫 장, 거기에서 천국 인간에 관한 새로운 창조에서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말하셨다, 낮과 밤이 구별되기 위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들이 있어라; 그리고 그것들로 표시를 위해서와 때들을 위해서, 그리고 날들과 햇수들을 위해서 있게 하자; 땅 위에 빛을 주기 위해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발광체를 위해 그것들로 있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두 큰 발광체를 만드셨다; 더 큰 발광체는 낮을 규율하도록, 작은 발광체는 밤을 규율하기 위해 있다; 그리고 별들이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땅위에 빛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낮을 규율하고, 밤을 규율하고,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하늘의 광활한 공간에 놓으셨다 (창. 1:14-18, 30-38항).
마태복음서에서:
이 날들의 환난 후에 즉시 태양은 어두워질 것이고, 달은 그녀의 빛을 주지 않을 것이고, 별들은 하늘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힘들이 흔들릴 것이다 (마. 24:29);
위에서 “태양과 달”에 의해 사랑과 선행이, 또는 선과 진리가 의미된다, 그리고 “별들”에 의해 지식들이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또는 교회의 마지막 상태가 여기서 취급되기에, “태양이 어두워짐과 달이 빛을 주지 않음”에 의해서는 그때에 사랑의 선과 선행의 선이 멸해짐이 의미된다; 그리고 “별이 하늘로부터 떨어짐”에 의해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역시 사멸함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이 의미되는 것은 위 구절 말고도 예언서들에서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에서 더 확인된다. 이사야서에서:
잘 보라 여호와의 날이 잔인하게 온다, 땅을 황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의 안에서 밖으로 죄인들을 파괴하실 것이다.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이 그들의 빛으로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그것의 떠오름에서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을 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13:9, 10).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있다. 태양과 달이 검게 되어졌다, 그리고 별들은 그들의 빛을 냄에서 철수했다 (욜. 3:14, 15).
에스겔서에서:
내가 너희를 꺼지게 할 때, 나는 하늘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부터의 별들을 검어지게 할 것이다; 나는 구름으로 태양을 가릴 것이다, 그리고 달은 그녀의 빛이 빛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빛의 발광체들을 나는 네 너머에서 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네 토지 위에 어둠을 놓을 것이다 (겔. 32:7, 8).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넷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태양의 삼분의 일 부분이 쳐부심을 당했다, 그리고 달의 삼분의 일 부분, 그리고 별들의 삼분의 일 부분; 그것들의 삼분의 일 부분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낮은 그것의 삼분의 일을 위하여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밤도 마찬가지 방식에서 이다
(계. 8:12).
더욱이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임이 아래 다니엘서에서 분명해진다:
숫염소의 뿔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광채를 더함을 향하여 극도로 자랐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군대와 별들에까지 이르게 자랐다; 그리고 군대와 별들의 얼마를 땅 아래로 내던졌고 그것들을 짓밟았다 (단. 8:9, 10);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꼬리를 가진 큰 용이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쪽으로 내던졌다 (계. 12:4).
위 구절들에 있는 “별들”이 자연계의 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되고도 남을 것이다. 위 다니엘서와 계시록서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서의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윗서에서:
여호와께서는 별들의 숫자를 세신다; 그분은 모든 것에 이름을 주신다 (시. 147:4).
다시:
너희 태양과 달이여 여호와를 찬양하라, 너희 빛의 별들아 그분을 찬양하라 (시. 148:3).
그리고 계시록서에서:
큰 표시가 하늘에서 보여졌다; 여인이 태양을 두르고, 달은 그녀의 발 아래에,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열두 별의 왕관이 있었다 (계. 12:1).
“별들”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하기에, 그것들은 교회의 교리물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이것들은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서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에 관한 교리물이 계시록서에서 별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셋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강들의 삼분의 일 부분 위에, 그리고 물의 샘들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별의 이름은 쑥이라 불리우고, 많은 이들이 물들로 인해 죽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쓰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계. 8:10, 11);
이 별에 의해 쓰게 만들어진 물들은 진리들이다, 그리고 “강들과 물들의 샘들”은 말씀으로부터의 총명과 지혜이다.

나에게 굽혀 절을 했다. 이는 숭배함을 의미한다. 이는 굽혀 절함의 의미가 숭배함이다로부터 알게 되는데 앞에서 살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그것이 알 수 있도록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나무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꾸었다는 꿈은 대체 무었이란 말이더냐? 이는 분개함을 의미한다. 이는 “나무램”의 의미가 분개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이 분개함의 원인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를 설교함 때문인데, 이것이 “꿈을 꿈”에 의해 의미되었다. 아버지와 요셉의 형제들은 고대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유태인의 종교를 표시한다. 이 종교의 외적 측면은 고대 교회의 외적 측면과 대부분 같다. 고대 교회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서는 그들의 외형물 안에 내적인 것이 있었으나, 유태인의 종교 속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떤 내적인 것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이는 지금의 경우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안쪽에 내적인 것이 있었다. 이렇게 내적인 것을 지닌 외적인 것이 여기서 “아버지”라고 불리우고,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이 “형제들”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이런 서술이, 즉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을 마음에 간직했다”가 뒤이어진다. 이어진 이 말의 앞 부분은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에 있는 이들의 증오함이, 뒤 부분에서는 진리가 아직은 그들의 종교 안에 남아 있었다가 의미된다.
이것은 기독 교회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 교회에서도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이들이 성찬식에 참석하여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나, 그들에게는 이 의식이 준행하라는 명령 때문에, 그리고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기에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참석을 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조금 더 나은 그들 중의 얼만가는 빵과 포도주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게 된 거룩함이 “빵”은 천국에 있는 사랑과 선행의 거룩함으로부터, “포도주”는 거기 있는 선행과 신앙의 거룩함으로부터 이다는 사실로부터 내려오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아예 그런 지식조차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에 반해, 외적 예배에 있되 동시에 내적 예배에도 있는 이들은 빵과 포도주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표현하는 주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그분으로 사랑의 거룩함, 선행의 거룩함,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의식을 준행하되, 교리로부터가 아닌 자신의 삶에 어울려진 사랑과 선행,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이다.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실로 와서 땅쪽으로 자신을 구부려 네게 절한다는 말이더냐? 이는 교회가 숭배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와서 절을 함”의 의미가 이제 막 숭배하려 드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여기서 “나”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교회, 여기서는 유태인의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했다. 이는 그들이 증오함을 의미한다. 이는 “시기함”이 증오함이다로부터, 이 의미는 앞에서 살핀 “미워함”, “평화로이 말하지 못함”과도 같다; 그 이유가 “시기함”이 원어에서 일 경우, 시기적이고 말다툼질을 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기하고 다툼은 미워함의 결과이기에 증오함이 같은 단어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간직하였다. 이는 이 진리가 그들의 광신적 신앙에 남아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의 의미가 고대의 것으로부터 파생된 유태인의 종교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간직함”의 의미가 내향적으로 보존함이다로부터, 고로 남아 있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말”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광신적 신앙에 남아 있는 진리에 의해 뜻해진 것은 앞의 항목을 살피면 된다.

12-17절. 그의 형제들은 세겜에서 그들의 아버지의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13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말했다, 네 형제들이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오너라,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너를 보낼 것이다. 14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양떼들의 평화를 보거라, 그리고 다시 나에게 그 말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15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바라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찾느냐? 16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고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17 그리고 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여기로부터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뒤쫒아 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양떼를 먹이러 밖으로 나갔다. 이는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의 의미가 신앙으로부터 있는 교회인들 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의 아버지의… 이는 고대인들의.., 그리고 원시 교회의…를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 또는 야곱의 의미가 고대 교회이다로부터, 또한 원시 기독 교회도 의미한다. 이 원시 교회는 시작에서 있었던 기독 교회를 뜻한다. 크게 네 교회가 말씀 안에서 취급되었다. 홍수 이전 존재했고, 사람이라 명명된 교회가 있었는데, 이는 태고 교회라고 불리운다. 다음은 홍수 이후에 존재한 교회로 고대 교회이다. 그 다음 야곱의 후손에게 이어진 교회인데, 실로 이 교회는 교회는 아니고 교회의 표현물이다; 이 표현물은 광신적 신앙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 이후 설립된 것, 이는 기독 교회라고 불리운다. 이 교회의 처음에서는 원시 교회라고 불리웠다.

세겜에서. 이는 첫 조짐들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의미가 고대의 신성한 지주로부터 파생된 진리이다, 그리고 교리 측면에서는, 여기서 신앙에 관한 교리의 첫 기본 원리이다; 그 이유가 이름의 서술은 시리즈에서 주제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첫 기본 원리는 교리물의 일반적인 사항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사항은 처음 받아진 것이고, 특별한 것들은 이어져서 받아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의 역사물에서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네 형제가 세겜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지 않느냐? 이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양떼를 먹임”의 의미가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세겜”의 의미가 신앙에 관한 교리의 첫 기본 원리(rudiments)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오너라, 그리고 나는 너를 그들에게 보낼 것이다. 이는 그것은 신성한 영적인 선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여기서 “보내짐”이라고 말해질 경우, 이는 신성한 영적 선들을 가르치는 것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보내지는” 것은 앞으로 나가는 것과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 또한 동시에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주님의 신성한 영적 평면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영적 선들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신성한 영적 선들은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신성한 영적 진리들은 거기로부터의 신앙 속에 있는 것들이다. 전자를 가르치는 이는 후자 역시 가르치고 있는 셈이 된다; 그 이유가 후자는 전자로부터 있고 전자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내적 의미에서 “보내어짐”이 진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임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분명해지고, 특히 주님의 경우에서, 그분은 아버지에 의해 “보내졌다”라고 말하신다,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으로 진행하셨다, 즉 신성한 선으로부터 진행하셨다가 의미된다; 또한 주님께서는 위로자 또는 진리의 영을 “보낸다”하고 말하신다; 이를 수단으로 거룩한 진리가 그분으로부터 진행한다가 의미된다. 예언자들 또한 “보내졌는데,” 이를 수단으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것을 가르쳤다가 의미된다. 보내지다 라는 말은 말씀에서 아주 많이 등장하기에 아마도 웬만큼 말씀을 읽은 이라면 이 의미의 확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보아라. 이는 확언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청컨대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보아라. 이는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에서, 그리고 (이 오심을) 지각함이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말함”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그리고 “평화”의 의미가 안전함이다로부터, 고로 어떻게 이것이 그들과 더불어 있는지를; 그리고 형제들의 의미가 여기서의 경우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로부터 명백한 바, 이 말들에 의해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지각함이 어떻게 있었는지 이다. 주님의 모두 각각의 오심 또한 의미되는 이유는 요셉에 의해 신성한 영적 평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서 네 형제들의 평화를 보라고 말해질 때, 주님의 오심이 의미된다. 모두 각각의 오심에 의해서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가 생각 안으로 흘러들 때면 언제든지가 뜻해진다.

그리고 양떼의 평화. 이는 어떻게 신성한 영적인 선들이 배움을 받고 있는 이들, 또는 교회와 있었는지를 의미한다. 이는 “평화”의 의미가 그들과 더불어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지 이다로부터; 그리고 “양떼”의 의미가 배우고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목자” 또는 양떼를 먹이는 자는 선행의 선을 가르치고 그쪽으로 인도하는 자를 표시한다; 그리고 “양떼”는 배우는 자, 인도받는 자를 표시하고, 교회 또한 표시한다.

나에게 다시 말을 가져오너라. 이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말을 다시 가져옴”의 의미가 사건들이 어떻게 되었나를 보고하는 것, 고로 지식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그리고 그는 그를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냈다. 이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이는 “보내어짐”의 의미가 진행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골짜기”의 의미는 아래쪽에 있는 이것, 저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헤브론”의 의미가 선 측면에서의 주님의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고로 이 말들에 의해 교회의 보다 낮은 것을 가르쳤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는 그들이 보다 높은 것들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선행 없이 신앙만을 가르치는 자는 교회의 보다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들에 주목할 수가 없다; 그가 그런 이유는 자기를 내면쪽으로 인도하는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이것이든, 저것이든 자기에게 명령되는 것은 신앙으로부터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행을 가르친다면, 그때 그는 선을 가진다, 그리고 선이 그에게 명령하고 인도한다; 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선으로부터 있고, 선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로, 신앙의 모든 것은 선행으로부터 있고, 선행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식적 수준에서도 아는 바는 교리의 모든 것이 (선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짜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말에 의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를 의미하는 것은 보다 높은 감각이다; 그 이유가 교회의 보다 낮은 것들이 주님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신성으로부터 있다 라고 말해지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주님 안에서 이런 것들이 보다 낮다 라는 말은 아닌데, 그 이유는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인간 안에서 모든 것은 무한이기 때문, 마찬가지로 그분은 각 본질 측면에서도 여호와 이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안에서 일 경우가 해당된다. 그 이유가 감각적인 인간은 주님 안에 있는 것, 그분으로 있는 것,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만 납득이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인간이라면 자연적으로만 만사가 납득될 뿐이다. 즉 받는 당사자의 품질 때문에 본문에서도 그렇게 의미된다. 천적 수준의 인간의 품질을 지닌 이다면, 그래서 진실로 합리적이다면, 그는 내면의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는 주님의 합리적 신성으로부터 가르쳐진다 라고 말해질 것이다. 이것은 말들에 의해 의미된 보다 높은 감각이다.
“골짜기”가 교회의 보다 낮은 것들을 뜻한다는 것은 다른 구절로부터도 분명해진다:
환상의 골짜기로부터의 예언이다. 네가 어쩌자고 지붕꼭대기까지 올라가느냐? 요동치는 날, 짓밟 힘의 날, 난감해지는 날이 환상의 골짜기에서 주 여호비 체바욷께 있다 (이. 22:1, 5);
“환상의 골짜기”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고로 보다 낮은 것들로부터 있는 영적인 것들에 관한 몽상들을 표시한다. 다시:
네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병거들로 가득하였다, 그리고 마병들이 성문에서 정렬하였다 (이. 22:7);
“아름다운 골짜기들”은 자연적,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선하고 참된 것들을 표시한다. 다시:
누군가의 음성이 광야에서 외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의 하느님을 위하여 작은 길을 열심히 편편하게 만들어라; 모두 각각의 골짜기가 찬양될 것이다 (이. 40:3, 4);
“골짜기”는 낮은 것들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나는 더럽게 하지 않았다, 나는 바알림을 따라 가지 아니했다 라고 말하느냐? 골짜기에 있는 네 길을 보아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인정하라 (예. 2:23);
위의 “골짜기”는 기억 속의 것들과 감각으로부터의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들은 보다 더 낮은 것들인데, 이를 가지고 그들은 진리들을 타락시킨다. 다시:
나는 너희에 맞서 있다 오 골짜기, 그리고 평지의 반석의 거주민아,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누가 말한다, 누가 우리에 맞서 내려올 것이냐? (예. 21:13)
“골짜기와 평지의 반석의 거주민”은 선행이 안에 없는 신앙을 표시한다. 다시:
황폐케하는 자가 모든 도성에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도성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평지는 파괴될 것이다 (예. 48:8);
이 구절도 앞 구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다시:
너는 골짜기들에서 자랑 못할 것이다; 네 골짜기는 흘러가 버렸다 오 성미가 비꼬인 딸들아 (예. 49:4);
“골짜기”는 예배에 있는 외적인 것들을 표시한다, 이것 역시 최고로 낮은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나는 곡에게 이스라엘에서 매장을 위한 장소를 줄 것이다,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 (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들은 곡과 모든 그의 무리들을 묻을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그것을 부를 것이다,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 (겔. 39:11, 15);
“곡”은 내적인 것 없이 외적 예배에 있는 이들을 표시한다, 이로부터 그의 매장할 장소는 “통과하는 그들의 골짜기”, 그리고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라고 불리운다. 다윗서에서:
그렇다, 내가 그늘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걸을 때, 나는 어떤 악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시. 23:4);
“그늘의 골짜기”는 보다 더 낮은 것들을 표시하는데, 통상 이것들은 그늘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골짜기들이 산들과 언덕들 사이에 있기에, 그리고 산과 언덕 아래에 있기에, “골짜기들”은 교회의 더 낮은 것, 또는 외면의 것이 의미되는데, 그 이유는 언덕과 산이 교회의 더 높은 것, 또는 내면의 것이 의미되기 때문, 하여 “언덕”은 선행 속의 것들을, “산”은 주님을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에 의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가 의미되기에, 그러므로 그것은 “산들과 골짜기들의 토지”라고 불리운다, 즉 하늘의 비로부터 물을 마시는 (토지)라고 불리운다 (신. 11:11). 여기서 요셉이 헤브론의 골짜기로부터 보내졌다고 말해진 이유는 선교가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친 이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신앙 안에 있되 선행 안에는 있지 않은 이들은 보다 낮은 것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더불어 신앙은 기억 안에, 이로부터 입 안에만 있고, 심정 안에, 그리고 일함 안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겜에 왔다. 이는 일반적 교리물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세겜의 의미가 첫 기본 원리, 또는 교리물들에서 일반적인 것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보니, 그는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는 그것들은 교회의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음을 의미한다. 이는 “들판에서 방황함”이 교회의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음을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들판”이 선 측면에서의 교회이기 때문, 그리고 “들판의 사람”이 교리물들로부터 있는 생활의 선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해진 “사람(남자, vir)”은 교회의 진리가 의미된다. 주님을 인정은 하나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 또한 신앙을 교회의 필수 요소로서 인정은 하나 선행을 필수 요소로 인정은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 진리로부터 멀어져 버렸다고 말해진다. 사실 이 두 필수 요소,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임, 선행이야말로 교회의 핵심 진리, 즉 일반적 진리(포괄적 진리, 또는 모든 교리를 아우르는 진리)이다; 다시 말해 (기독 종교의 어느 교파라고 자칭하든 그들이 내세운) 진리가 위 두 진리로부터 퇴각할 때, 이는 핵심 진리로부터 멀어져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이러면 그 기독 종교는 진정한 기독 종교(True Christian Religion)가 아니게 된다.) 이를 행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는 이내 특수적인 진리들로부터도 멀어지고 만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기발난 착상을 해서 출생된 거짓 원리로부터 출발해서, 그 원리로부터 연역하여 결말(중요한 것, 핵심)을 갖게되면, 이것 역시 거짓 원리로부터인 바, 거짓임이 틀림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짓 원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이는 예견을 의미한다.
이는 이 시리즈가 예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먹이는지 말해주십시오. 이는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대략적으로, 단어들에 따르면, 일반적 진리(핵심 진리)가 신앙으로부터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서 어떻게 있었는지, 그리하여 그들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 이유가 “형제들”에 의해 신앙으로부터 가르친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 (일반적 진리가) 가르친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있었는지는 “그들을 찾고 있음”, 또는 “그들의 평화를 보려함”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어디서”에 의해서는 상태가 의미된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천국에서) 장소에 관련되는 모든 것은 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이는 이들”은 가르치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들은 여기에서 떠났다, 그 이유가 나는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은 일반적인 교리(핵심 교리)로부터 특수한 어떤 교리로 자신들을 향하게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떠나다”의 의미가 자신들을 어디로 향하게 하다 이다로부터; 그들이 떠난 장소인 “세겜으로부터”의 의미가 교리의 일반적 사항 (핵심 사항)이다로부터; “도단”의 의미가 교리의 특수적 사항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도단”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이유를 말씀의 다른 구절로부터 확증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 이유는 도단이 언급되는 구절이 한 군데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하 6:13); 즉 시리아왕이 엘리사를 잡으려 도단으로 병거와 마병과 큰 군대를 보냈는데, 오히려 엘리사에 의해 군대들의 눈이 멀어 사마리아까지 이끌려와서 결국 자기 나라로 허겁지겁 도망하고 마는 역사에만 등장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모든 역사물들은 주님의 왕국의 천적, 영적 평면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바, 위 엘리사의 기적 사건도 예외는 아니다. 시리아 왕에 의해 진리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반대적 의미인바, 진리 아닌 것에 관한 지식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다; 엘리사에 의해서는 주님의 말씀이 표현되었다; 도단에 의하여는 말씀으로부터의 교리물들이 표현되었다; 시리아 왕이 보낸 병거와 마병과 큰 군대는 교리의 거짓들을 표현했다; 엘리사의 사환이 본 엘리사를 에워싼 산에 불병거와 말들이 가득함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리 속의 선하고 진정한 것들을 의미했다; 눈이 멀므로 해서 처부숨을 당해 시리아왕에게 되돌려 보내진 이들에 의해서는 거짓들 자체가 의미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엘리사에 의해 사마리아로 이끌려지고, 거기서 그들의 눈이 열려짐에 의해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가르침이 의미된다. 이상의 설명은 이 기적 사건에 대한 것인데, 이 사건 안에, 엘리사가 있었던 도단은 말씀으로부터 있는 선하고 진정한 것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이 의미된다. 본문의 도단 역시 이 의미와 거의 같아서, 교리의 특수적인 것들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특수적인 교리란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수적인 교리를 말한다, 그 이유는 취급되는 주제가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이기 때문, 이 교회의 특징은 교회의 시작 당시, 출발 당시, 애당초, 선행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형성되는 모든 교리물들에 풍미를 주는 것이 일반적 원리인데, 선행 없는 신앙이 이 교회에 (특별한) 맛을 내고 있다.
사실 모든 교회가 시작에서는 대체로 교리 속의 일반적 사항만 알고 출발한다. 다시 말해 지극히 단순함에서 출발하는데, 어린 아이 같다; 그러나 시간의 과정에서, 특별 사항들이 보태져 간다; 이 특별 사항은 부분적으로는 일반적 원리를 확증하는 사항일 수 있고, 어떤 사항은 일반적 원리에 반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상반되는 원리가 추가되기도 한다; 또한 명백히 일반 원리에 반대되는 특별 사항들을 추가하면서 이것이 일반 원리와 충돌하지 않도록 설명(변명, excuse)을 위한 사항이 겹친다. 어쨌든 이런 모든 것들이 거짓 원리로부터의 특별한 것들이다; 한 아버지로 일반적 원리를 인식하는 모든 교리 속의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가 동료, 친구, 동아리임의 관계에 있는데 마치 혈연이나 결혼을 통한 인척 관계 같이 끈끈하게 있다.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일반적 원리가 거짓일 때, 모든 것들은 거짓으로 맛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을 도단에서 찾았다. 이는 그들은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이한 것들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시다로부터; “그의 형제”의 표현함이 선행으로부터 신앙으로 돌아서버린 교회, 결국에는 분리되어 신앙만 있는 교회이다로부터; 그리고 “도단”의 의미가 거짓 원리로부터의 특별한 것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거짓 원리들로부터의 특수적인 것들에 관하여를 알기 위해 그것들의 몇 가지만이라도 예로 삼아 살피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즉 원리로서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의 교리물들은 이렇다. 신앙만으로 인간은 의롭다해짐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신앙만으로 그의 모든 죄는 씻어진다는 것, 설사 그가 죽기 몇 분전 일지라도 믿습니다 라는 고백만으로도 당사자의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천국 안으로 입장을 허가받는 것이다는 것, 또한 아이들은 신앙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이방인들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한다는 것; 이 외에 더 있으나 생략한다. 이런 것들이 신앙만으로 라는 원리를 지주로 하여 갈라져나온 특수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신앙의 생활을 원리로서 인정한다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주님을 사랑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행과 사랑의 일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면 앞에 열거한 신앙만으로에서 출발한 특수적인 것들은 산산조각되어 지고 말 것이다. 즉 의롭다 되어짐이라는 말 대신 거듭남을 인정한다, 하여 주님께서 “너희가 새로이 출생되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요. 3:3)라는 말씀을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는 거듭남이 신앙의 생활에 의해 결과된다는 것, 분리된 신앙에 의해서가 아님을 인정한다. 더불어 자신의 모든 죄들이 나로부터 씻어져 없어져 깨끗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분에 나로부터 나의 죄를 멀리 있게 억눌러주신다는 것,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선 안에, 이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도 있게 해주신다는 것; 고로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이다는 것, 모든 악은 자신으로부터 이다는 것도 인정한다. 단 한 번의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백 이후 꾸준한 신앙으로부터의 생활에 의해 내 안에 쌓여진 신앙에 의해서 이다는 것; 구원은 은총을 통하여 천국 안으로의 입장 허가증을 받듯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 그 이유가 천국은 주님에 의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으나, 그가 천사가 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을 갖추지 않으면, 그가 자신의 의지로 천국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신앙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에서 그들은 주님에 의해 선행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배운다는 것, 그렇게 해서 천국으로 받아진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되지 못한다가 아니라, 그들도 다른 이들 같이 자기들의 삶이 사후에도 남아 있고, 하여 서로의 사랑에서 살아온 이들은 신앙의 선들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여느 기독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천국 안으로 받아진다. 즉 생활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바라고 믿는 것과 같다.
원리로서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이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른다, 고로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의아히 여길 것이다. 즉 사후 삶의 행복과 천국에서의 기쁨은 타인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타인에게 선처하는 것 안으로 흐르는 신성이다는 것, 그리고 거기로부터의 행복과 복됨은 모든 지각을 능가한다는 것, 이 유입을 받음은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즉 선행의 선 안에 있어 오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들었을 때이다. 신앙의 생활이 구원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 31부터 끝절에 이르러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이외 많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아타나시안 신조라고 불리우는 신조(신경)도 끝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즉 “모든 이는 그의 일들의 결과로 보답받을 것이다; 선하게 산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고, 악하게 산 자는 영원한 불로 들어갈 것이다.”

18-22절.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19 그리고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20 그러므로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자, 그리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일지를 보게 되리라. 21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말했다,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22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피를 흘리게 하지 말자.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그러나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 이는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를 구출해서, 그의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해서 였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 저쪽에 있는 그를 보았다. 이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아주 다르게 지각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다”의 의미가 지각함이다로부터; “멀리 저쪽”의 의미가 아주 다르게(remotely) 이다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요셉이었는데,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측면의 주님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요셉”에 의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뜻해진 이유는 이것이 신성한 진리의 최고 원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두 핵심 원리 (일반 원리, 제 일의 두 원리)는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향한 선행이 교회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신성한 진리의 제 일 가는 것들이기에 이것이 요셉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 측면에서 신성한 진리를 표현하는 같은 인물이 신성한 진리의 특별한 것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표현한 것은 시리즈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 그들은 그를 죽이자고 음모를 꾸몄다. 이는 그들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영적 평면이 소멸되기를 원함을 의미한다. 이는 “음모함”이 타락된 마음으로부터 뜻하는 것이다로부터; “죽이자”의 의미는 소멸함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신성한 평면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다고 말해진다.
여기서의 경우는 이렇다: 천국 전체를 망나해 있는 신성한 진리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 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서는 진행되지 않는다. 신성 자체로부터 있는 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직접적으로 흐를 수 없는 이유는 신성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흐를 뿐이다. 이 사항이 주님의 이 말씀에 의해 뜻해진다: 즉 “여하튼 하느님을 본 자는 없다; 독생자,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자, 그분이 그분임을 분명히 하셨다(set forth, declared).” 이런 이유로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이 중보자(중재자, Mediator)라고도 불리우신다.
이 분 역시 영원으로부터 있으셨고, 신성한 있으심이기에, 천국을 통하여, 천국에서 신성이 밖으로 나타나심 없이 어떤 천사와도, 어떤 영과도, 어떤 인간과도 교통될 수 없었다. 신성 자체 측면에서의 주님이 신성한 있음이고,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신성의 밖으로 나타나심이다에 대하여는 앞에서 살핀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인간이 신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주님의 인간 자체는 신성한 있음으로부터 어떤 유입도 받을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신성을 받는 것은 반드시 신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알게 되는 바, 신성한 진리는 신성 자체로부터 직접 진행되지 않고,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사항을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고, 신앙만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소멸해버린다; 그 이유가 그들은 주님의 인간이 여느 평범한 인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으로 믿기 때문이다; 비록 입술로 주님을 고백하지만 이로 인해 그들은 주님의 신성을 많은 사항들로부터 부정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러나 신앙의 생활을 실현해가는 이들은 구세주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을 교리에서 따로 구분하지 않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찬에서도 그렇게 행한다. 이리하여 그들과 더불어서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 그들의 심정 안에 계신다.

그들은 남자 그의 형제에게 말했다. 이는 그들의 서로의 생각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하다”가 지각하다와 생각하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남자 그의 형제에게, man to his brother”의 의미가 서로적으로 (mutually)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고대인들이 서로적인 것을 의미할 때 쓴 관습적 말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다; 즉 “남자 그의 형제에게” 이다; 이런 관습적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남자(man, vir)”가 진리를 의미하고, “형제”가 선을 의미하고, 이 둘 사이에는 최고로 친밀한 서로의 관계가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와 선,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은 서로적으로, 상호적으로 거행되기 때문이다.

보라 꿈의 주인이 온다. 이는 이런 것들은 텅비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꿈”이 설교함을 의미한다로부터,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설교함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요셉에 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 측면에 관련되는 신성한 진리는 신앙만에 있는 이들에 의해 거절되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꿈”은 텅빈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런 인물들에게 거짓들은 진리들로, 진리들은 거짓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들로서가 아니다면, 텅빈 것들로서 이다; 그리고 “꿈의 주인”은 이에 대한 설교자이다. 신성한 진리가 이런 인물들에게 텅빈 것들로 나타나는 것은 많은 것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말씀은 거룩하다, 하여 말씀의 점 하나도 신성한 영감이 들어 있다, 이렇게 말씀이 신성하고 거룩한 이유는 말씀 안에 주님의 왕국의 천적이고 영적인 사항들이 표현되고 의미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것, 이런 사항들이야말로 신성한 진리이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즉 말씀이 내적 의미에서 열려질 때, 그리고 말씀의 세부 사항들이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신앙만에 있는 이들은 이런 것들이 텅빈 것, 즉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말하며 거절한다; 비록 이런 천적이고 영적인 사항들이야말로 외적 인간이 세상적, 물질적인 것으로 흠뻑 만족하는 수준의 기뻐함보다 훨씬 더 위대한 기쁨을 내적 인간에게 선물하는데도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오고 있으니 그를 죽이자. 이는 교리의 본질인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사항이 소멸됨을 의미한다. 이는 “죽이다”가 소멸시키다를 의미함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죽이기를 원했던 자, 요셉의 표현함이 주님의 신성한 진리, 특별하게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교리이다로부터, 이는 교리의 본질임에 관하여는 앞에 살폈다. 신앙만을 인정하는 교회가 이 본질되는 진리를 소멸시켰다는 것은 알려진 바이다; 그 이유가 그들 속의 어느 것이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신성이다고 믿는 것일까?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 자체로부터 돌아서지 못하는가? 그럼에도 고대 교회에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신 주님이 신성한 사람이시다는 것이 믿어졌고, 그분이 여호와라고 불리셨다는 것이 많은 말씀의 구절들에서 보여지지만, 여기서는 한 대목만 살펴보겠다:
광야에서 소리치는 자의 음성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작은 길을 평평하게 하라 (이. 40:3).
위 구절이 주님에 관하여 말해진다는 것, 그리고 세례자 요한에 의해 이 길이 준비되고, 작은 길이 그분을 위해 편편해졌다는 것은 복음서로부터 분명해진다 (마. 3:3; 막. 1:3; 눅. 3:4; 요. 1:23);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부터도 있다; 즉 그분은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그분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 또한 그분에게 하늘과 땅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심판은 그분에 속한다는 것 등등이다. 하늘과 땅의 권능, 심판에 관하여 조금만 아는 자라 해도 그분이 인간 측면 역시 신성이시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그분에게 있어질 수 없다는 정도를 모를리 없다.
신앙만으로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을 새로이 만드는 것, 또는 그를 정화하는 것, 더욱이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시는 것을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랑과 선행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이 인간을 새로이 만들고 정화한다는 것, 한편 신성한 사랑 자체가 주님을 신성으로 만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사랑이 인간의 있음 자체, 그러므로 그의 생활이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을 사랑 자체의 형상에 따라 모양을 만들어 낸다; 즉 사랑은 인간의 혼 같은 것, 그의 내면의 본질이어서 이것이 그 자체의 형상쪽으로 육체를 창조하고 모양있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런 방식에서 사랑은 그것이 뜻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게 육체를 수단으로 행동하고 감각작용을 가진다. 고로 육체는 결과로서 있고; 혼은 안에 목적이 있는 원인으로서 있다; 결과적으로 혼은 육체의 모든 것, 마치 목적으로부터의 원인이 결과에 있는 모든 것인 것과 같다. 혼이 여호와 자신이었던 그분의 인간은 신성으로밖에 더 달리 신성이 되실 수 없으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신 이후 그분의 인간을 여느 인간의 인간 같이 여기는 것은 얼마나 큰 실수인지 모른다.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천국에 있는 모든 지혜가, 모든 총명이, 또한 모든 빛이 진행된다. 그분으로부터 진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하다; 그리고 신성으로부터 이지 않은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를 구덩이 중 하나에 던지자. 이는 거짓들 사이에를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구덩이들”이 거짓들인 이유는 거짓의 원리들 안에 있어 왔던 이들이 사후 더 낮은 땅 아래 한동안 보관되면서 거짓들이 그들로부터 제거되어 마치 한쪽으로 거절되어 있는 듯 할 때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 장소들이 “구덩이들”이라 불리우고, 그것들 안으로 가는 자는 반드시 황폐됨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덩이들”은 추상적 의미에서 거짓들이 의미된다. 보다 더 낮은 땅은 발 아래 다음이고 짧은 거리에서 빙둘러 있는 구역이다. 여기에 사후 천국으로 들리우기 이전, 대부분의 인물들이 있다. 이 땅 또한 말씀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것 아래쪽에 황폐함의 장소들이 있다, 이것이 “구덩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것들 아래 적당한 넓이에서 지옥들이 있다.
이로부터 “지옥”에 의해 뜻해지는 것, “더 낮은 땅”에 의해 뜻해지는 것, 그리고 “구덩이”에 의해 뜻해지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고 말씀에서 언급되는 구절을 읽어보자:
너는 지옥으로, 구덩이의 측면으로 아래로 데려가졌었다. 너는 네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마치 역겨운 어린 가지, 검으로 찔리워 살해당한 자들의 의복 같고, 구덩이의 돌들에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 14:15, 19);
위는 바빌론의 왕에 관해서 말했다, 이 왕에 의해 진리를 모독함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왕”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빌론”은 모독이다. “지옥”은 저주받은 자가 있는 곳, 그리고 그들의 저주됨이 역겨운 어린 가지에, 그리고 검에 찔리워 살해당한 자들의 의복에, 구덩이의 돌에로 아래로 간 것에 비교된다. “살해당한 자의 의복”은 진리가 모독됨이다; “검으로 찔리움”은 자기 안에서 진리가 꺼져버린 이들이다; “구덩이”는 황폐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짓이다. “돌들”은 테두리들, 그러므로 그것들은 “측면들”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구덩이가 빙둘러 있는 곳이 지옥들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짐작되는 것은 위 구절이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이 구절이 뜻하는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짐이다.
구덩이가 등장하는 위와 비슷한 구절이 에스겔서에도 있다:
내가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너를 아래로, 시대의 백성에게로 데려갈 때, 그리고 너를 시대로부터 황무함에 있는, 더 낮은 구역의 땅에서 거주하게 만들 것이고, 하여 너는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과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산 사람의 토지에서 꾸밈을 놓을 것이다 (겔. 26:20);
“구덩이로 내려 간 그들”은 황폐함쪽으로 보내진 이들을 표시한다; “구덩이 안으로 간 그들과 거주하지 않음”은 거짓들로부터 배달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다시:
물들로부터의 모든 나무들의 어느 것도 자기의 키 때문에 자신을 뽐내지 못할 것이고, 자기의 가지를 뒤엉킨 굵은 가지 사이로 보내지 못하고, 자기의 높음 때문에 물들을 마시는 모든 자들, 그들 너머에 서지 못한다; 그들 모두는 죽음쪽으로, 인간들의 아들들 한가운데에 있는 더 낮은 땅으로,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배달될 것이다. 나는 민족들을 그의 황폐하는 소리에서 흔들게 만들 것이다, 이때 나는 그를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과 더불어 지옥 안으로 내려가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에덴의 모든 나무들, 레바논의 아름답고 제일 가는 것, 물들을 마시는 모든 것이 더 낮은 땅에서 위로될 것이다 (겔. 31:14, 16);
위는 이집트에 관해서 이다, 이를 수단으로 지식 자체로부터 신앙의 신비함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그렇게 들어간 이들이 의미된다.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이 구절의 의미도 짐작될 것이다; 즉 여기서 예언자에 의해 언급된 것인 “지옥”에 의해, “구덩이”에 의해, 그리고 “더 낮은 땅”에 의해 의미된 것이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 있는 “물들의 나무들”, “에덴의 나무들”, “뒤엉킨 굵은 가지들 사이로 보내진 가지”, “레바논의 아름답고 제 일 가는 것”, 그리고 “물들을 마시는 모든 것”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내적 의미로부터가 아니면 파악되지 않는다.
다시:
사람의 아들아, 이집트의 무리를 위해 소리내어 울어라, 그리고 그녀로 내려가게 하라, 그녀조차도, 그리고 당당한 민족들의 딸들, 더 낮은 지역의 땅으로, 구덩이 안으로 내려 간 그들과 더불어, 앗수르가 거기 있다, 이들의 무덤들이 구덩이의 측면들에 놓여 있다, 검으로 살해된 모두
(겔. 32:18, 22, 23);
위 구절의 의미는 앞의 구절의 설명에서 알려질지 모른다. 다윗서에서:
오 여호와여, 당신은 지옥으로부터 제 혼을 데려왔습니다; 당신은 저를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 사이로부터 살아있게 보존하셨습니다 (시. 30:3).
다시:
저는 구덩이로 내려간 그들과 더불어 세어졌습니다; 저는 힘이 없는 사람으로 세어졌습니다. 당신은 저를 더 낮은 구역에, 어둠에, 깊음에 놓으셨습니다 (시. 88:4, 6).
요나서에서:
나는 산들의 베어내짐 아래로 갔습니다; 땅의 빗장들이 제 위에 영원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구덩이로부터 제 목숨을 꺼내왔습니다 (욘. 2:6);
위에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이 겪으신 시험들, 그것들로부터 해방됨이다. “산들의 베어내짐”은 최고로 저주된 이들이 있는 곳, 그것들 빙둘러 나타난 어두운 구름들은 “산들”이다.
“구덩이”는 거짓의 황폐함이고, 추상적 의미에서 거짓인데, 아래 이사야서에서:
그들은 구덩이에 묶임 같이 정녕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잠금당해 있을 것이다; 날들이 많은 후에 그들은 방문받을 것이다 (이. 24:22).
다시:
궁핍함을 일으킨 자의 분노는 어디 있느냐? 전방으로 인도하던 자가 급하게 열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덩이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빵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51:13, 14).
에스겔서에서:
보라 나는 네 위에 낯선 자들을 데려올 것이다, 민족들의 광폭, 그가 네 지혜 위에 검을 빼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의 빛남을 모독할 것이다. 그들은 너를 구덩이로 내려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다들의 심장에서 찔려진 그들의 죽음들을 죽을 것이다 (겔. 28:7, 8);
위는 두로의 제 일인 자에 관해서이다, 이들로 해서 거짓의 원리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스가랴서에서:
크게 기뻐하라 오 시온의 딸아; 소리내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공정하시고, 가엾으시고, 그리고 나귀를 타신다, 그리고 암나귀의 망아지 위에. 네 언약의 피를 수단으로 나는 너의 묶인 자를 물이 없는 구덩이로부터 파견할 것이다 (슥. 9:9, 11);
위에서 “물이 없는 구덩이”란 진리가 전혀 없는 거짓을 표시한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요셉을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졌다와 같다 (24절). 다윗서에서:
당신에게 저는 소리칠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저의 반석이신 당신은 제게 잠잠하지 마소서, 그렇지 않고 당신이 제게 잠잠해 있으신다면, 저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 같이 보여집니다 (시. 28:1).
다시:
여호와께서는 황폐함의 구덩이로부터, 진흙 수렁으로부터 나를 꺼내 올리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 발을 반석 위에 놓으셨다 (시. 69:15).
다시:
그분은 그분의 검을 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들의 구덩이들로부터 그들을 구조하셨다 (시. 107:20);
“그들의 구덩이들로부터”란 거짓들을 표시한다. 다시:
서둘러, 저에게 대답해주소서, 오 여호와여; 제 영이 소진되어집니다, 당신의 얼굴을 나로부터 숨기지 마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그들 같을 것입니다 (시. 143:7).
“구덩이”는 거짓을 의미하고, “소경”은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소경의 소경 인도자들이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마. 15:14; 눅. 6:39). 요셉에 의해 표현된 것과 비슷한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에 의해 표현되었다, 즉:
그들은 예레미야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를 경비원의 뜰에 있는 구덩이 안으로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들을 끈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아래로, 물이 없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게 했다 (예. 38:6);
즉, 그들은 진리가 하나도 없는 거짓들 사이에서 신성한 진리들을 거절했다.

그리고 우리는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탐욕의 삶으로부터의 거짓말을 의미한다. 이는 “들짐승”이 애착과 탐욕을 의미함으로부터; 그 이유가 “들짐승”이 진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들짐승”은 여기서 탐욕들의 생활이 의미된다; 이것이 거짓말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과도 관련이 있다; 즉 거짓들 사이에서 신성한 진리는 탐욕의 생활로부터서는 거짓말에 불과하여 (즉 탐욕의 삶 안에 있는 자의 견해에서는 신성한 진리가 거짓말이므로) 그들이 거절한다는 것이다. 거짓의 근원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회의 교리, 또 하나는 감각들의 오류, 또하나는 탐욕의 삶이다. 교회의 교리로부터의 거짓은 대체로 인간의 지적 부분만에 달라붙어 있다. 이 거짓은 당사자의 유아 시절로부터 이것이 이렇다 하는 것을 권유받고 있다가 나중에 어떤 확증물을 통해 그 거짓을 견고하게 한다. 감각의 오류로부터 있게 되는 거짓 안에 있는 이들은 이해력으로부터의 통찰력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수준 낮고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의 삶으로부터 있는 거짓은 의지 자체로부터, 같은 말로 심정으로부터 튀어나온다 (솟구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심정으로부터 뜻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바라는 것, 즉 그의 소원 사항이라 말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 거짓은 셋 중에서 가장 지독하다, 그 이유는 그것은 본래부터 타고나기(inhere) 때문,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새 삶 (완전 거듭남, 완전 새 삶, 과거의 삶과 완전 다른 삶,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긴 것, 새 옷에 어떤 헌 옷이 깁어지지 않은 것, 요즈음의 스위든볼지언에게 요구되는 삶일지 모른다 역자 주.)이 아니면 그 뿌리는 뽑혀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널리 알고 있는 것, 즉 인간에게는 두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이해력과 의지력이다. 이해력이 흡수하거나 빨아들이는 것들은 의지 안으로 자동적으로 건너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의지가 흡수하는 것은 이해력 안으로 어렵지 않게 건너간다. 그 이유는 인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탐욕으로부터 악을 생각한다면, 그는 그 악을 생각하고 그 악을 확증한다. 생각함을 수단으로 악을 확증함이 탐욕들의 생활로부터의 거짓들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 거짓들은 당사자에게는 진리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가 자신 안에서 그것들을 확증했을 때, 진리들은 그에게 거짓들로 나타난다; 그 이유가 이때 그는 빛의 유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 안에서 이런 거짓들을 확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해력이 이전에 빨아드렸던 진리들이 이 거짓들에 저항하고 그것들이 확증되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꿈들이 무엇일지를 볼 것이다. 이는 그것에 관한 설교가 거짓일 것과, 그렇게 나타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꿈”의 의미가 설교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 이런 것들이 거짓으로 나타났기에, 그러므로 “꿈”에 의해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에 관한,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설교가 의미되는데, 이것이 그들의 견해에서는 거짓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말, “그의 꿈들이 무엇일지를 볼 것이다”에 의해 의미되어 있다. 주님의 신성한 설교에 관한 설교들이 나타났다는 것, 더욱이 그들에게 거짓으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하여는 방금 앞에서 살폈다; 그 이유가 탐욕의 생활로부터 확증한 것은 다른 나타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짓들이 탐욕의 생활로부터 확증된 것은 이런 원인으로부터도 있는다; 즉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지옥이 무엇인지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자기와 세상을 사랑함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에도 원인이 있다. 만일 그들이 이런 사항들을 알았다면, 또는 기꺼이 알려고 하기만 했어도 그들은 아주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말해주는 이웃을 향한 선행의 정의가 물질이 없어 가난한 이웃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 그가 악하든 선하든 관계없이 그들을 돕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선행의 교리는 거절되고 신앙만의 것을 얼싸안는다; 더 나아가 이들은 많은 것들을 수단으로 선행에 맞서 자신을 확증한다; 예를 들면, 자신은 죄들 안에서 태어났으니 자신으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설사 자신이 선을 행한다면 결국 그 공적을 자신 안에 놓아야 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가 한편에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탐욕의 생활로부터 생각한다, 하여 그는 신앙만으로 구원한다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 득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을 향한다. 하여 그가 거기 있을 때, 그는 선행의 일이 구원받음에 불필요하다고 믿을 때까지 자신을 더욱 더 굳힌다. 이런 것들이 방출될 때 그는 이런 새로운 관념에로 빠져 있는다; 즉 인간의 본성은 이렇기 때문에, 구원의 수단은 주님에 의해 설비되었는데, 이것이 신앙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임했다 해도, 그를 위해 고통받으셨던 아들을 생각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 사람 위에 자비를 가지신다는 신뢰, 확신을 고백하면 그때도 구원의 길은 그에게 열려있다고 말한다, 하여 요한복음(1:12, 13)에서, 그 외 많은 장소에서 말하신 대목으로 부터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추론으로 신앙만이 교회에 필수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곳에서 이 방식에서 인정되지 않는 이유는 교구 목사가 신앙만을 설교함으로 어떤 것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일들에 관한 설교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선행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가 알려져 있었다면 그들은 교리의 거짓 안으로 결코 추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행의 기본은 자신의 의무, 직장, 직업 등의 모든 것에서 올바르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악행자를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가 열정으로부터 이를 행하는 것, 그는 악행이 수정되기를, 그의 선을 기대하면서 재판을 한다. 또한 사회와 나라에 유용함을 기대하며 업무를 수행한다. 이것이 그에게는 일반적으로 이웃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별도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르우벤이 들었다. 이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으로부터의 고백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이해력 또는 교리에서의 신앙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는 거듭남의 첫 번째의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복합체에서 교리의 진리를 수단으로 생활의 선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바, 여기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바,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으로부터의 고백이 의미된다. 이 구절에서 르우벤이 중간에 끼여있는 격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회가 이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진리가 그 신앙 안에 남아있지를 않으면, 교회이기를 중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야말로 교회의 핵심 원리요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르우벤은 이 진리를 표현한 요셉을 살려 그의 형제의 손에서 빼내어 아버지에게 보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줄거리 속에는 교회를 위해서 이 진리를 요구하기를 원했다가 담겨 있다. 더욱이 르우벤이 구덩이로 되돌아갔을 때, 요셉이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그의 형제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 어디로 나는 가야 하는가? 라고 (29, 30절) 말했는데, 이것에 의해 더 이상 주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 고로 교회도 없다가 의미된다.
이 최고 또는 핵심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가 신앙만에 있는 교회에 있는 이들에 의해 부정되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주님 안에 신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는 지에 대하여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속성을 신성 본질과 인간 본질로 구분을 만들었다. 어쨌든 신앙의 생활 안에, 또는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하느님, 구세주로 주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경배함에서 그들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인간을 구분함 없이 생각한다, 고로 그들은 주님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성이다고 심정에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교리로부터 생각할 때, 그들 역시 교리로부터서는 어떻게 인간이 신성일 수 있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에 따라서 말한다.

그리고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려고. 이는 해방을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그 혼을 치지는 말자 라고 말했다. 이는 그것은 소멸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그것은 종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치다”의 의미가 소멸해버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혼”의 의미가 생명이다로부터, 여기서는 종교의 생명이다. 주님의 인간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것이 종교의 생명인 것은 앞에서 말해진 바로부터 분명해진다; 또한 인간에게는 이런 속성이 있다; 즉 자기가 지각할 수 있고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하기를 바란다는 것, 이는 감각적 인간조차도 그러해서 자기의 감각으로 어느 정도라도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예배해야 예배드린 느낌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자기가 지각하고 생각되는 어떤 것에 신성이 있지 않으면 기꺼이 예배하지 않는 속성을 인간이 지녔다는 사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이것은 인류에게 공통적이다. (더 부연 설명을 하면, 많은 이들이 관광을 할 때 흔히 목격하는 것은 과거 대단한 종교 건축, 그것이 불상이든, 교회 예배당이든 불가사이하다 말할 정도로 규모나 방법에서나 대단한 것들을 보게 된다. 현재의 경우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거대한 예배당, 세상에서 가장 큰 성가대, 어마어마한 헌금 액수 발표 등등을 심심찮게 듣고 목격한다.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이라 더욱 그 광고 파장은 대단하다. 한마디로 세력 과시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불러야 뭔가 신성이 와닿은 느낌, 또는 내 기도 소원이 성취될 것 같은 기대가 용트림 한다. 다시 말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마도 미래에도 인간이 신성을 생각하고 지각하는 각도는 변치 않을지 모른다. 역자주) 이런 이유로 이방인들은 우상들을 예배하고, 이 예배 안에 신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하게 어떤 신앙인들은 자기들이 신들, 또는 성인들이라고 믿어지는 죽은 인간들에 자신의 소원을 빌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예배한다. 이러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의 감각에 와닿는 어떤 것이 없으면 뭔가 허전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절뚝거리던 자가 어떤 목사의 기도 몇 마디에 벌떡 일어나 걸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며 예배를 보아야 세상을 다 삼킬 것 같은 믿음이 생겨 예배드린 맛을 느끼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역자주.)
최고 있음(존재)을 인정하면서도 이 최고 있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의 대부분은 하느님이 없다를 인정하고, 대신 자연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자연계는 오각을 통해 자신들에게 납득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의 배웠다 하는 많은 이들의 경우도 이런 오류에서 허우적대는데, 그 이유 역시 그들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자신을 신성으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옮겨다놓은 이들, 또는 지독하게 육체적이 되어간 이들이 자연계의 우람한 나무나 요상하게 우뚝 선 돌을 예배하지 않도록; 그들이 죽은 어떤 인간을 예배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가 하느님 자신이 아닌, 어떤 악마에게 들러붙지 않도록, 인간의 속성이 위와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분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것이, 교회와 더불어 인류가 멸해지고 말기에, 신성 자체가 인간인 체 하시기로 뜻하셨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옷(몸)을 입으시기로 뜻하셨다. 이 대목에서 학식자가 경청해야 할 것은, 그들은 신성이 입으신 인간, 즉 주님의 인간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신성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지 않고 주님의 인간의 신성을 부인해버리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장애물을 자기 앞에 두고 마는 바,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리고 르우벤은 그들에게 말했다. 이는 권면함을 의미한다. 대략적 의미에서, 이는 일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신앙이 자기들이 폭력을 행하지 말자고 권면하는 고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래에서 더 이어진다.

피를 흘리지 마라. 이는 그들은 거룩한 것에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피”의 의미가 거룩한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피를 흘린다”는 거룩한 것에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천국에 있는 모든 거룩함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도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에 폭력이 휘둘러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므로 성찬식이 주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 예식 안에서 빵은 그분의 살이고, 포도주는 그분의 피 이다는 말씀을 (열두 제자 이하 대부분의 인간이 위와 같은 인간 속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기에, 일부러, 또렷이 심정에 담아지기를 원하시어) 명백한 어조로 말하셨다. 고로 거룩함이 오는 근원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이심을 확실히 가슴에 담아두기를 뜻하신 것이다. 고대인들과 더불어, 살과 피는 인간의 자신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과 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께서 시몬에게, “너는 복되다, 그 이유는 살과 피가 네게 그것을 밝히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셨다 (마. 16:17). 살과 피, 그러므로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에 의해 의미된 살과 피는 주님의 인간 자신(Lord’s Human own)을 표시한다. 주님의 자신 자체 (Lord’s own itself), 즉 그분이 그분의 자신의 힘을 수단으로 자신에게 획득하신 주님의 자신 자체가 신성이다. 임신으로부터의 그분의 자신은 그분이 여호와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 이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 안에서 자신에게 획득한 자신은 신성이었다. (주님의) 인간(Human) 안에 있는 이 신성한 자신이 그분의 살과 피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살”은 그분의 신성한 선이고, “피”는 신성한 선으로부터의 신성한 진리이다.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 되신 이후, 또는 신성으로 만들어진 이후의 주님의 인간은 여느 자연계에 존재한 자연적 인간 수준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고, 인간 형체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으로만 생각되어야 한다. 이 생각은 천사들에게는 아주 대단해서 그들이 나에게 나타날 때, 그들은 인간 차림새를 한 사랑과 선행의 형체로서 이다. 그리고 이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지상 삶에서 지녀왔던) 천국의 사랑을 통하여 사후에도 그는 천사가 되고,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모양새 아래 사랑과 선행의 형체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의해, 천적 의미에서, 신성한 사랑 자체, 인류를 향한 사랑, 모든 이를 구원하여 영원히 복되고 행복하게 하시기를 뜻하시는 사랑, 당사자가 받을 수 있는 한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게 해주시는 사랑이 의미된다. 이 사랑과 주님에 대한 인간의 상호적인 사랑, 또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성찬식에 표현되고 의미되어져 있다; 즉 신성한 천적 사랑은 살, 또는 빵에 의해, 신성한 영적 사랑은 피, 또는 포도주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이로부터 주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에 의해 요한복음서에서 의미되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빵을 먹으면, 그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안에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내 살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마지막 날에 일으킬 것이다. 그 이유가 실로 내 살은 음식이고, 내 피는 실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그리고 나는 그 사람 안에 거주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요. 6:51-58).
“살과 피”는 이미 말한 대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있는 신성한 천적 평면과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하기에,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기에, “먹고 마심”에 의해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듦이 의미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과 선행의 삶에 의해, 또는 신앙의 삶에 의해 결과되어진다.
“피”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영적 평면을 의미하기에, 그러므로 진행되는 거룩함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가 거룩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신성한 진리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피”가 이 거룩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인되지만 아래 한 대목만 살펴본다:
고로 사람의 아들에게 주 여호비께서 말하신다, 하늘의 모든 새들에게 말하라, 들판의 모든 들짐승 에게 말하라, 네 자신들이 모이게 오너라; 사방으로부터 네 자신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제물 위에, 이스라엘의 산 위에 큰 제물조차 그러모으라, 하여 너희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실는지 모른다. 너희는 용사의 살을, 그리고 땅의 제 일인 자들의 피를, 숫양들로부터, 염소들로부 터, [어린 거세 수소로부터], 바산의 살진 그것들의 모두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가 배부를 때까지 지방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취할 때까지 피를 마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바친 내 제물로부터 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식탁에서 말과 병거와 강한 자와 전쟁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앉을 것이다 (겔. 39:17-21).
여기서 취급된 주제는 주님의 왕국으로 모든 이를 다 부르심이다, 그리고 특별하게는 이방인들 사이에 교회를 다시 설립하심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심”에 의해서는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듦, 고로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의미된다. 위 구절에서 “살”이 살을, “피”가 피를 뜻하지 않을 것은 두뇌가 수준 이하이지 않은 이상 누가 알지 못할까? 또는 용사의 살을 먹는다, 땅의 제 일인 자의 피를 마신다, 말과 병거, 강한 자, 전쟁의 모든 자와 더불어 식탁에 앉는다, 이런 것이 실제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을 자 어디에 있을까?
계시록서에서:
나는 태양에 서있는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큰 음성으로 외쳐, 하늘 사이를 나는 모든 새들에게 말하기를, 다 모여 위대한 하느님의 만찬에 오너라; 하여 너희는 왕들의 살을, 대장들의 살을, 그리고 강한 자의 살을, 그리고 말들의 살을, 그리고 그것 위에 앉은 그들의 살을, 모든 남자들의 살을, 자유한 자, 억매인 자, 작은 자, 큰 자 모두의 살을 먹을는지 모른다 (계. 19:17, 18);
위 구절을 이해하려면, “살,” “왕들,” “대장들,” “강한 자,” “말들,” “그 위에 앉은 자,” “자유한 자,” “억매인 자”의 단어들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다.
스가랴서에서:
그는 민족들에 평화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주권은 바다로 바다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강으로부터 땅의 끝에 까지 이를 것이다. 너에 관하여 말하면, 네 언약의 피를 통하여 나는 네 묶인 자를 구덩이로부터 파견할 것이다 (슥. 9:10, 11);
위는 주님이 말해진다; “너의 언약의 피”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하는 신성한 진리, 그리고 그분이 신성이 되신 이후 그분으로부터 나가는 거룩함 자체이다. 이 거룩함은 성령이라 흔히 불리운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만일 어떤 자가 목마르다면, 그로 하여금 나에게 오게 하라, 그리고 마시게 하라.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뱃속으로부터 살아 있는 물의 강들이 흐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으로부터의 그분을 말하셨다, 이것을 그분을 믿는 그들이 받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이 아직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신성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 7:37-39).
주님으로부터 진행하는 거룩함이 “영”이다는 것은 요. 6:63로부터도 알는지 모른다.
더욱이 “피”가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진행되는 거룩함인 것에 대하여:
사기와 폭행으로부터 그들의 혼을 도로 가져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피는 그분의 눈에서 귀중할 것이다 (시. 72:14);
“귀중한 피”는 그들이 받을 거룩함을 표시한다. 계시록서에서:
이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나온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도포를 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린 양의 피로 희게 만들었다 (계. 7:14).
그리고 다시: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용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의 증거의 말로 정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죽기까지에서 자기들의 혼을 사랑하지 않았다 (계. 12:11).
오늘날 교회가 아는 “어린 양의 피”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죽으심)을 의미한다는 것 뿐이다. 그렇게 믿는 그들의 이유인즉, 주님께서 이 고통을 당하심으로만 자기들은 구원되었다는 것, 이를 위해 그분이 보내졌다고 믿어서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이 시험을 정복해가시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고, 이를 수단으로 그분은 그분의 인간을 충분히 신성이 되게 하셨다 (눅. 24:26; 요. 12:23, 27, 28; 13:31, 32; 17:1, 4, 5); “어린 양의 피”는 신성한 진리와 같다, 또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거룩한 진행이다; 고로 방금 위에서 말한 “언약의 피”와 같다. 이에 관해 모세의 책에서:
모세는 언약의 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백성들의 귀에 읽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여호와께 서 말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행하고 들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피를 가져와서, 백성 위에 뿌렸다, 그리고 말했다, 잘 보라,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들 위에서 너희와 만든 언약의 피이다 (출. 24:7, 8);
“언약의 책”은 그때 당시 그들이 가졌던 신성한 진리였다, 이것이 그분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 이었음을 증명하는 피에 의해 확증되어졌다.
유태 교회의 의식에서 피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의 거룩한 진행밖에 더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성시되어졌을 때, 이것이 피를 수단으로 행해졌다;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신성시되어졌을 때, 피가 제단의 뿔 위에서 뿌려졌고,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밑부분에, 또한 오른쪽 귀 끝에, 오른 손의 엄지에, 그리고 오른 발의 엄지에, 그리고 그의 의복에 뿌려졌다 (출. 29:12, 16, 20; 레. 8:15, 19, 23, 30). 그리고 아론이 휘장 안쪽 자비석으로 들어갔을 때, 피는 동쪽을 향하여 일곱 번 손가락으로 자비석 위에 뿌려졌다 (레. 16:12-15). 또한 신성시 됨의 나머지 의식에서, 속죄함과 깨끗하게 함의 의식에서도 그러했다 (출. 12:7, 13, 22; 30:10; 레. 1:5, 11, 15; 3:2, 8, 13; 4:6, 7, 17, 18, 25, 30, 34; 5:9; 6:27, 28; 14:14-19, 25-30; 16:12-15, 18, 19; 신. 12:27).
“피”의 진짜 의미에 의해 거룩함이 의미되기에, 반대 의미에서는 “피”와 “피들”에 의해 그것에 폭력을 제공하는 것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는 순진한 자의 피를 뿌림에 의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함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생활 속의 사악한 것들과 예배의 모독적인 것들이 “피”라 불리운다. “피”와 “피들”이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을 아래 구절들로부터 확인해보자:
주님께서 심판의 영을 수단으로, 그리고 삭제함의 영을 수단으로 시온의 딸들의 배설물을 씻으실 때, 그리고 예루살렘의 피들을 씻으실 때 (이. 4:4).
다시:
디몬의 물들은 피로 가득하다 (이. 15:9).
다시:
너의 손은 피로 더러워 있다, 그리고 너의 손가락은 불법으로 (더러워 있다). 그들의 발은 악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들은 순진한 피를 흘리려 성급해 있다; 그들의 생각들은 불법의 생각들이다 (이. 59:3, 7).
예레미야서에서:
또한 네 치마에서 순진한 가난한 자의 혼의 피가 발견된다 (이. 2:34).
다시:
이것은 그녀의 예언자들의 죄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성직자들의 불법 (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 의 한가운데에서 의로운 자의 피를 뿌렸다. 그들은 거리들에서 눈멀어 방황했다, 그들은 피로 오염되었다; 그들이 [오염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의복을 가지고 접촉한다
(애. 4:13, 14).
에스겔서에서:
내가 네 옆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네 피 아래에서 짓밟힌 너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들 안에서 살아라, 그리고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들 안에서 살아라. 나는 물들로 너를 씻었다, 그리고 네 위로부터 네 피들을 씻었다, 그리고 나는 기름으로 기름부었다
(겔. 16:6, 9).
다시: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피들의 도성과 논쟁을 벌이려 하느냐? 그녀에게 그녀의 모든 역겨운 짓을 알게 만들어라. 너는 네가 흘린 피를 통하여 죄있게 되었다, 그리고 네가 만든 우상들을 통하여 더렵혔다.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을 잘 보라, 자기의 무장한 것에 따라 모든 이가 있어 왔고 피를 흘렸다; 중상자들이 피를 뿌리기 위해 네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네 안에서 그들은 산들에서 먹었다 (겔. 22:2-4, 6, 9).
모세의 책에서:
만일 누군가가 천막에서 제단 위에보다 다른 곳에서 제물을 바치겠다면, 그것은 피일 것이다; 그리고 마치 그는 피를 흘렸던 것처럼 (레. 17:1-9).
거짓되고 모독된 진리가 아래 구절에서 의미되어 있다:
나는 하늘과 땅에서 경이로움들을, 피, 그리고 불, 그리고 연기 기둥들을 놓을 것이다. 태양은 어둠으로 변해질 것이다, 그리고 달은 피로 변해질 것이다,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이다
(욜. 2:30, 31).
계시록서에서:
태양은 머리털로 짠 삼베옷 같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달 전체는 피 같이 되었다 (계. 6:12).
다시:
두 번째 천사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치 불로 타는 큰 산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 (계. 8:8).
다시:
두 번째 천사가 바다 안으로 그의 대접을 쏟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죽은 자의 것 같은 피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각각의 살아 있는 혼이 바다에서 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강들 안으로, 물들의 샘들 안으로 쏟았다, 그리고 거기는 피가 되었다 (계. 16:3, 4).
비슷한 대목이 출. 7:15-22에서도 말해진다, 즉 이집트의 강들과 연못들, 그리고 물들의 못들이 피로 변해진 것이다;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기억 속의 지식들, 이 지식 자체로 천국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 하여 이로부터 신성한 진리들을 악용함, 부정함, 모독함이 있다. 이집트에서의 모든 기적들은 신성이고, 아래와 같은 것을 포함했다: 즉 피로 변한 “강들”은 총명과 지혜로부터의 진리들이다; “물들”도 비숫한 의미이다, 그리고 “샘들”도 그렇다; “바다들”은 기억 속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복합체에 있는 진리들이다; “피로 변한다”고 말해진 “달”은 신성한 진리이다. 이상으로부터 분명한 바, 달, 바다, 샘, 물, 강이 피로 변함에 의해 거짓으로 되고 모독되어진 진리가 의미된다는 것이다.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지자. 이는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거짓들 사이에 한동안 감출 것임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간주할 것이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존속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교회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광야”의 의미가 진리가 없는 곳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단어 광야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토지라는 측면에서는 교화(계몽)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이 광야가 교회를 서술할 때는 선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진리가 없는 것을 표시한다. 고로 “광야에 있는 구덩이”는 여기서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거짓들을 뜻하다. 여기서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 라고 장황한 듯 하게 말한 이유는 누군가가 일함 없는 신앙이 구원한다고 믿을 때, 진리가 실로 존재할는지 모르나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 그 이유는 그가 선을 찾지 않기 때문에, 선으로부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살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것 안에 거짓의 원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진리를 가진 자의 진리는 그것을 통치하는 것으로부터 거짓밖에 더 아니다. 다른 한편, 진리들 같이 받아들여지는 거짓이 있다. 이는 그들 안에 선이 있을 때이다. 특히 이것이 순진의 선일 경우인데, 이는 교회 내에 있는 많은 이들, 이방인들과 더불어서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에게 손을 놓지 마라. 이는 그들은 그것에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를 의미한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출해서 그를 그의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려고. 이는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요구하도록을 의미한다. 이는 “그들의 손에서 구출함”의 의미가 자유하게 놓아둠이다로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냄”의 의미가 교회를 위해 요구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 이유가 야곱, 여기서 “아버지”인데, 고대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온 유태 종교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신성한 진리는 교회를 위해 요구되어야 마땅하였는데, 그 이유는 특별한 측면에서는 야곱에 의해 이 진리가 의미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에 더 주목해보자; 이 진리를 고대 교회가 인정했다는 것, 그리고 원시 기독교회도 그러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의 휘두름이 모든 인간의 혼들 위에 있게 되었을 때, 그리고 교황권 자체를 드높혔을 때, 마치 이사야서에서 바빌론왕에 관해 말해진 바 같이, “너는 네 심정에서 말한다, 나는 하늘의 별들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회합의 산에 앉을 것이다, 나는 구름의 높이 너머로 승강할 것이다, 나는 지극히 높은 자 같이 될 것이다”(14:13, 14)와 유사 했다; 그 다음 신성은 주님의 인간으로부터 거두어졌다, 즉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인간 사이에 구분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떤 회의에서 어떻게 포고되었는 지가 나에게 밝히 알려졌다. 어떤 영이 나에게 나타났는데, 그는 나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평평한 발바닥의 왼쪽으로의 앞에서 나타났고, 대화를 했으나, 내가 듣지 못했던 것에 관하여 이었다. 그때 내가 말한 영은 과거 주님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간에 관하여 포고문을 만든 회의를 주도했던 이들 중에 속했던 자들이었다. 지금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나에게 수여되었다. 그들이 말했다, 회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열 1, 2위에 있는 이들이 컴컴한 방에 함께 와서 결말을 본 것은, 신성과 인간 본질을 주님의 속성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있어야 하는 주된 것 중 하나는 그렇지 않고서는 교황의 권세가 유지되어질 수 없어서 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이 말하신 바 그대로 나는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이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교황이) 땅위에서 (그리스도의) 대목(대리자, vicar)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교황의 권세는 땅에 추락하고 사라지고 말아 종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날 것인 바, 신성과 인간을 분리함은 절대적이다 싶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발난 발명품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들은 말씀으로부터 확증될 구절들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나머지 포고령도 설득되게 했다.
영들이 내게 더 말했다, 이 포고령을 수단으로 그들은 하늘과 땅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마. 28:18에서) 주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는 바, 주님의 대리자가 교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분의 인간이 신성이다고 인정되어진다면, 어느 인간도 하느님과 동등하게 자신을 만들자는 없다는 것,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무식한 자도 다 아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이 그리스도(예수)의 대물림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간도 우리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 한마디로 주님의 신성과 인간 속성을 구분한 것은 교황의 절대 권력을 위해서 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늘과 땅에서 주님에게 주어진 권능 역시 신성이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주님께서 하늘의 열쇠를 (인간) 베드로에게 주셨다고… 이 열쇠가 베드로에 이어 교황에게…식으로 논리를 유도해간다. 그러나 마. 16:19에서의 베드로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을 뜻하고 인간 베도로가 아닌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것이다. 이 신앙은 주님만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주님만에 속한 권능인데, 이에 대하여 창. 22장의 서문을 다시 읽어보라.

23-30절.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벗겼다, 24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려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그리고 그 구덩이는 그 안에 물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25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눈을 들고 보았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는데, 그들은 낙타에 양념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26 그리고 유다가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의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27 가서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자,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 이유는 그는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28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이십에 팔았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29 그리고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 30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꼬?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왔을 때. 이는 그것이 이제 막 설교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으로부터의 진리,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그들에게 왔을 때”란 이것이 그들에게 설교되었을 때를 뜻한다; 그 이유가 그의 형제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고 이 교회에 이 진리가 설교된 것이다.

그들은 요셉에게서 그의 웃옷을 벗겼다. 그들은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벗김”의 의미가 여기서 “요셉”인 신성한 진리를 서술할 때, 쫓아버림과 절멸해버리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웃옷(튜닠, tunic)”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해버림은 진리 자체가 거절된 후에 거행된다; 그 이유가 진리 자체는 마음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멸되었을런지 몰라도 여전히 나타나는데, 특히 선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런 현상은 자신들 안에서 진리를 절멸시켜버리는 이들에 의해서도 보여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나타남들을 쫓아내고 절멸시키려 부단히 노력해댄다.
예를 들어 더 생각해보자: 남에게 호의적으로 뜻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독인의 생활의 핵심이다 라고 말한다면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이것이 선행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확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확언한 이들은 자기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조차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삶으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이다고 생각하는 이, 더 나아가 확신조차 하는 이들에 주목해보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자기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그 이유는 그들이 이것을 자취를 감추는 연기 같은 것 외의 다른 것으로는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신앙만으로와 이 교리로부터 확신함이 위와 같은 특성 속에서 진리의 나타남들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 특히 선한 자에게 나타나기에, 신앙만으로 확신하는 자는 이 신성한 진리의 나타남들에 가까이 접촉하는 무엇이든, 이 신성한 진리를 빙둘러 있는 무엇이든 껍질 벗기는 방식으로 이 진리의 나타남들을 쫓아버리고 절멸시키려 고된 노동도 서슴없이 해댄다. 이것이 요셉에 있던 그의 튜닉을 벗김에 의해 의미되고 있다.
위와 동일한 인물들이 믿는 바, 신앙만으로에 있는 자들은 여느 다른 이들보다 더 현명한 자이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독단적 교의가 무엇이었든 한 번 받아들였으면, 다양한 것들을 수단으로 그것을 확증하고, 다양한 추론들을 수단으로 요상한 교의도 진리같이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슬기로운 자의 몫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교묘함을 소유하는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직바른 자보다 더 기술적으로 해내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합리적 인간의 몫도 아니다. 합리적 인간은 확증하는 것이 거짓이든, 진리이든 위로부터 보아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간은 거짓을 무익한 것으로 확증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 아무리 지혜 자체의 학교로부터 가져왔다고 누군가가 그로 믿게 하려들어도 그에게는 우스개감 수준의 것, 텅빈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현자의 몫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어떤 것에 대해 진리인지를 보는 것, 그 다음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 합리적 인간, 내지 현자의 몫이다. 사실상 진리인 것을 보는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보는 것이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이다; 그러나 거짓인 것을 진리로서 보는 것은 얼빠진 빛으로부터 보는 것이고, 이것은 지옥으로부터 이다.

그가 입고 있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 이는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관한 나타남의 품질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들이다로부터, 이를 수단으로 자연 평면의 영적인 것이 알려지고 구별되어진다, 여기서는 나타남들의 품질이다; 그 이유로 여기서 튜닠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즉 “그들은 그의 튜닠,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을 요셉으로부터 벗겼다.” 나타남들의 품질이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따라서 있다는 것은 다른 삶에서, 천국의 빛에서 보여져 표출될 때, 진리의 나타남들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오는 빛 외의 다른 빛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사들의 눈 앞에서 빛으로 나타난다. 이 빛은 받는 그릇에 따라 모든 이와 더불어 다양해진다. 천사들의 모든 생각은 이 빛의 다채로움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인간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더불어 이 빛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그의 자연 평면, 또는 외적 인간인 물질적 형상들, 또는 생각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천국의 빛은 그의 지적인 빛과 시각이 그것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는 수준으로까지 희미해져 있다. 그러나 다른 삶에서, 눈의 시각은 세상의 빛에서는 더 이상 있지 않고 천국의 빛에 있기에, 그의 생각이 천국의 빛으로부터 근원함이 명백해진다.
이 빛이 천국으로부터 영들의 세계 안으로 건너갈 때, 거기서 다양한 색깔들 아래 표출되어진다, 이 색깔들은 아름다움에서, 다채로움에서 사랑스러움에서 세상의 빛으로부터 있는 색깔들을 무한정 능가한다. 다른 삶에서의 색깔들이 이 근원으로부터 있기에, 그것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외의 다른 근원은 없다. 그 이유가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는 진리 자체 안에 불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선으로부터 빛을 낸다, 그 이유는 선은 빛을 내보내는 불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 이러이러하면, 진리의 나타남도 이러이러하여 있다; 그리고 진리가 이러이러하다면, 같은 방식에서 진리는 선으로부터 빛을 낸다. 이상 살핀 바로부터, “다양한 색깔로 된 튜닠에 의해 내적 의미에서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에 관한 나타남의 품질이 의미됨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가 이 웃옷이 주인인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데리고 가서 구덩이에 그를 던졌다. 이는 거짓들 사이에가 의미된다. 이는 앞에서 살핀 것 가지고도 충분하므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어 텅 비어 있었다. 이는 그때에 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텅비어 있다”의 의미가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도 하나도 없다이다로부터; 그리고 “물”의 의미가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텅 비어 있음”이 선이 하나도 없기에 진리가 하나도 없다를 표시하는 것은 아래 구절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들의 큰 자들이 그들의 작은 자를 물을 위하여 보냈다; 그들이 구덩이들에 왔다, 그리고 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들을 빈채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수치스럼에 빠졌다, 그리고 자기들의 머리를 가렸다 (예. 14:3);
위의 “텅빈 그릇들”은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없는 진리들을 표시한다. 다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삼켰다, 그는 나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텅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그는 나를 꿀꺽 삼켰다 (예. 51:34);
위의 “텅빈 그릇”은 진리가 없는 곳을 표시한다; 그리고 “바빌론”, 황폐케 한 이들, 즉 다른 이들로부터 진리들을 빼앗은 이들이다. 다시: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 그것은 공허하고 텅빔이었다; 그리고 하늘들, 그리고 그것들은 빛을 가지지 않았다 (예. 4:23).
이사야서에서:
가마우지와 알락해오라기가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올빼미와 까마귀가 거기 안에 거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너머로 공허의 줄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텅빔의 낚시봉 (이. 34:11).
다시:
텅빔의 도성이 깨질 것이다; 모든 집이 닫힐 것이다, 하여 아무도 안에 오지 못할런지 모른다. 포도주 위 거리들에는 외침이 있다, 토지의 기쁨이 추방될 것이다, 도성에 남은 것은 황폐함일 것이다 (이. 24:10-12);
위의 “텅빔”의 단어가 원어에서는 다른 단어로 표현되고 있으나 어쨌든 비슷한 의미의 범주에 있다. “텅빔”은 선이 없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곳이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언급된 세부 사항에서 분명해진다; 즉 “도성”, “외침”, “포도주”, “거리들”이다. 에스겔서에서:
주 여호비께서 말하셨다, 이들의 도성에 화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난로를 크게 만들고, 뜨거워질 석탄 위에 텅빈 냄비를 놓는다, 그리고 그것의 놋쇠는 뜨겁게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기의 불결함이 그 안에서 녹여질는지 모른다, 거기의 더깽이가 태워질 것이다 (겔. 24:9, 11).
위에서 “텅 비다”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텅빈 냄비”는 그것 안에 더깽이와 불결한 것이 있다, 즉 악과 거짓이 있다.
마태복음서에서:
불결한 영이 인간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마른 장소들을 걷다가, 쉴 곳을 찾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오니, 그는 그것이 텅비고, 청소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는 나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일곱 영들을 자신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한다 (마. 12:43-45);
“불결한 영”은 인간에 있는 생명의 불결함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은 불결한 영들 또한 그렇다, 그 이유는 불결한 영들은 인간의 생명의 불결함에서 거주하기 때문이다; “마른 장소들”, 또는 물이 없는 곳은 진리들이 없는 곳을 표시한다; “텅빈 집”은 불결함으로, 즉 악으로부터의 거짓들로 다시 채워진 인간의 내면들을 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배고픈 자를 좋은 것들로 채우셨다, 그리고 부자를 그분은 텅 빈채로 떠나보냈다 (눅. 1:53);
“부자”는 많은 것들을 아는 이들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재물”이 영적 의미에서 기억 속의 지식들, 교리적인 것들,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아는데, 행하지 않기에 “텅빈 부자”라고 불리운다; 그 이유가 그들에게 진리들은 진리들이 아닌데, 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빵을 먹으려고 앉았다. 이는 거짓으로부터의 악을 제 것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먹다”의 의미가 자기 것이 되게 함이다로부터; 그리고 “빵”의 의미가 사랑의 선이다로부터,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모든 식품이다. 여기서는 “빵”의 의미가 반대적이어서 악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누구나 아는 바, 성찬에서 빵을 무가치하게 먹는 자는 자신에게 선이 아닌 악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자이다는 것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자기들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함께 식사를 함으로 허가됨이 의미되었다. 하여,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것이 되게 했다. 에스겔서에서:
잘 보라, 이스라엘의 제 일인 자들아, 자기 무력에 따라 모든 이가 너희 안에 있었고, 피를 흘렸다; 중상꾼들이 피를 흘리기 위하여 너희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너희 안에서 그들은 산에서 먹었었다 (겔. 22:6, 9).
다 잘 알려진 바, 일반적으로 악의 근원은 둘이다는 것, 하나는 생활로부터, 다른 하나는 교리로부터 이다. 거짓의 교리로부터 있는 악은 거짓으로부터의 악이라 불리우고, 이것이 여기서 뜻해지는 악이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들어 보았다. 이는 더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눈을 들어 올려 봄”의 의미가 의도함과 생각함인데, 여기서는 시리즈로부터 더 생각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바라보니 이스마엘 사람들의 집단이 길르앗으로부터 왔다.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데, 마치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방인들 같다. 이는 이스마엘 사람들의 표현이 생활에서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이로부터 교리 측면에서도 자연적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길르앗”의 의미가 외면의 선이다로부터, 인간이 거듭나질 때, 인간은 이 외면의 선에서 처음 거듭남을 시작한다. 이로부터 “길르앗으로부터 이스마엘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 이방인들과 더불어 있는 것과 같은 선, 즉 그런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됨이 분명해진다.
어떻게 이런 상황들이 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던 바에서 알는지 모르나 아래에서 조금 더 살핀다. 여기서는 이미 살핀 내용보다 조금 더 발전된 것일지 모른다: 교회 내에 있고, 자신을 신성한 진리들, 특히 이런 진리들,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의 일들이 구원에 기여한다는 진리에 맞서서 자신을 확증한 이들, 이들이 만일 교리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측면에서도 이렇게 확증한다면, 그들은 이 후에 자신들이 이 진리들을 받을 수 없는 상태쪽으로 그들의 내면들은 굳혀져 있다. 그 이유가 한 때 교리에 의해 확증된 것, 동시에 생활로 확증한 것은 영원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상상하는 것, 즉 제아무리 위의 진리들에 정반대로 확증해오고 있었다 해도, 그가 다시 깨닫게 되었다면, 위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일 것이냐고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삶에서 이런 인물들에 관련한 경험을 통해 나로 하여금 알도록 수여되었다. 교리에 의해 확증된 것은 무엇이든 지적 부분에 의해 흡수되어진다, 그리고 생활에 의해 확증한 것은 의지 부분에 의해 흡수된다; 그리고 인간의 양쪽 생명들 안에 뿌리내린 것, 즉 이해력의 생명과 의지력의 생명에 박혀진 뿌리는 뽑혀나갈 수 없다. 사후 살아가는 인간의 혼 자체는 이 두 생명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또한 이 생명은 거기서 멀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이런 근거로 해서,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교회 밖에 있는 이들보다 때로는 상황이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그 이유가 교회 밖에 있는 이들, 흔히 이방인이라 불리운 이들은 위의 진리들에 맞서서 자신들을 확증하지는 않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위의 진리들을 아예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류들은 서로의 선행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자연계가 아닌 다른 삶에서의 경우, 신성한 진리들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다 (2589-2604항).
[3] 이런 이유로 어떤 새로운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설립될 때,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이 아닌, 교회 밖, 이방인들과 세워지곤 했던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말씀에서 자주 취급되고 있다. 이 대목이 책의 머리말 형식 같이 놓여진 이유는 이 대목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 즉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내던져지고, 구덩이에서 미디안족에 의해 건져내지고, 이스마엘족들에 팔려지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함 때문이다. 그 이유가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 특히 두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하다는 것, 그리고 선행으로부터의 일들이 구원을 있게 한다는 진리, 그리고 이것을 교리 뿐만 아니라 삶에 의해서 자신을 굳힌 교회인들을 표현했기 때문; 그 반면, 이스마엘족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그리고 미디안 족들은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요셉을 구덩이로부터 끌어낸 것에, 전자는 요셉을 산 것에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관련되어 이어지는 것, 즉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오고, 이집트의 경호 대장에게 그를 파는 대목은 차후 거기서 살핀다.

그들은 낙타들에 양념(향료)과 수지(향유)와 소합향을 싣고 있었다. 이는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낙타들”의 의미가 영적인 것을 섬기는 자연적 인간 속의 것들이다로부터, 특히 자연적 인간에 있는 일반적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 그리고 “양념, 수지, 소합향”의 의미가 자연적 인간에 있는 선과 결합된 내면의 자연적 진리들인데, 아래에서 더 살핀다. 고대인들은 거룩한 예배에서 달콤하게 냄새를 풍기는 것과 냄새 좋은 것들을 사용했는데, 유향이나 향들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이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에도 혼합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의 제조 방법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고대인들이 예배에서 사용된 모든 것들은 천국들에 있는 영적이거나 천적인 것들에 근원을 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 통째로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을 천국의 것들로부터 대단히 멀리 옮겨 놓았다, 그 대신 자연적, 세상적, 육체적인 것들에는 대단히 가까이 옮겨 놓았다, 하여 인간은 영적, 천적인 존재에 관련하여서는 매우 희미함 안에, 심하게는 부정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유향과 향들이 고대인들 사이에서 거룩한 의식들에 사용된 이유는 냄새가 지각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긋한 냄새, 즉 다양한 종류의 향료들 같은 것은 선으로부터의 진리, 또는 선행으로부터의 신앙의 것을 지각함에서 가지는 감사함과 만족함에 상응한다. 하여 다른 삶에서 주님으로부터의 선한 기쁨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지각 자체가 냄새들로 바뀐다. “양념(향료), 수지, 소합향”에 의해 각각 의미함에 관한 것은 그것들이 언급되는 다른 페이지들에서 살필 것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모두에 공통되는 일반적 측면만 살피는데, 이것은 자연 평면에 있는 내면의 진리들을 의미하나 그것들 안에 있는 선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진리들 자체가 자연 평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들을 수단으로 선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 평면의 다양함들은 선과 결합된 진리의 품질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선의 품질에 따라서 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들로부터 선의 품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길르앗”은 외면의 선을 의미하는데, 이 선은 감각으로부터 있고, 쾌락(pleasure)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이집트”에 의해서는 좋은 의미에서일 경우, 외면의 선에 상응하는, 또는 이 선에 일치하는 자연적 인간의 외적 진리들인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이런 향품들을 낙타에 싣고 이집트로 운반하는 길르앗으로부터 오는 이스마엘 사람들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 고유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을 이집트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쪽으로 운반했다 이다. 내면의 진리들은 외면의 진리들로부터의, 또는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결말들이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의 기억 속의 지식들은 어떤 것에 관하여 결말들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들을 제공한다, 고로 내면의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 방법에서 우리들은 누군가의 용모에서 그의 마음을 바라본다, 또는 그의 눈빛의 파장 안에서, 그의 음성의 음질 안에서, 그의 제스츄어나 행동 안에서 그의 마음을 바라본다.
이런 진리들을 수단으로 인간의 자연 평면이 완전해지고 수정되기에, 이런 종류의 향료로 치료됨이 있다; 예레미야서에서 수지에 관하여:
길르앗에는 수지 나무(balsamic gum)가 있지 않던가? 거기에 의사가 있지 않던가? 그런데 왜 내 백성의 치료가 오르지 않는가? (예. 8:22).
다시:
길르앗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유향을 가져오라, 오 이집트의 딸아; 헛되이 너는 약들을 불렸다; 너를 위한 치료는 없다 (예. 46:11).
다시:
바빌론이 갑자기 붕괴되고 박살났다, 그녀 위에 아우성소리가 있다, 그녀의 고통을 위해 수지를 가져오라, 그렇게 하여 그녀는 치료될는지 모른다 (예. 51:8).
이와 같은 사항들이 영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계시록서에서:
그리고 땅의 상인들이 그녀를 위하여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상품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품은 금과 은, 그리고 귀한 돌과 진주들, 그리고 고운 아마포와 심홍색 (옷감), 그리고 비단과 주홍색 (옷감), 그리고 각종 향나무(thyine wood), 각종 상아 그릇, 귀한 재목, 그리고 놋쇠와 철,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든 그릇들. 그리고 계피와 향, 그리고 연고와 유향,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기름, 그리고 고운 곡식가루와 밀, 그리고 가축과 양, 그리고 말들, 그리고 병거, 그리고 인간의 몸들과 혼들이다 (계18:11-13);
위의 것들 각각이 주님의 왕국과 그분의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으면, 결코 이렇게 지루할 정도로 특별하게 일일이 열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 단어들은 의미 없이 나열된 상품 목록이 아니다는 말이다. 다 아는 바, “바빌론”은 주님을 예배함에서 비껴서서 자기를 예배하는 이들, 그리고 거룩한 외적인 것들을 예배하면서 한편으로 거룩한 내적인 것들을 모독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품들은 그들이 자기 숭배를 위해 교묘하고 끈질기게 창안한 것들, 그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악용한 말씀으로부터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교리들이다. 고로 여기서 언급되는 세부 사항들은 특별한 것들이 의미된다, “심홍색”, “향”, “연고”에 의해서는 선으로부터의 진리들이 의미되나, 여기서는 그것들에 관련하여 악용한 진리들과 악으로부터의 거짓들이 의미된다.
이와 비슷한 것이 에스겔서에서 두로의 상품에 관련하여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토지는 무역상들이다; 민닛의 밀, 과자(Pannag), 꿀과 기름, 수지인데, 이것으로 그들은 거래했다 (겔. 27:17);
위에서도 “수지(향유, balsam)”는 선으로부터의 진리가 의미된다. 그러나 모든 말씀 단어 하나하나, 점 하나도 모두 거룩하다 말하면서도 위와 같이 내적 의미의 설명을 들을 때, 그들은 말씀 속에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싶어 딴짓을 하는 이들에게, 위에 인용된 구절들에서 등장하는 단어들은 안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 벌거벗은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말대로 단어들은 거룩해서, 그 안에 신성이나, 천적인 것, 또는 영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을 이집트로 운반하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는 기억 속의 지식들 안에서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인 “양념, 수지, 소합향”에 의해서는 이방인 같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의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내면의 진리들이 의미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쪽으로 운반하여 감”은 가르침에 있는 것이다가 의미된다. 이에 대해 더 주목하면 이렇다: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는 기억 속의 지식들은 영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 그리고 이것들은 영적 진리들과 상응한다. 그 이유가 이전에는 고대 교회가 이집트 지역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술로 변해진 뒤, 영적인 것들을 악용한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이집트”에 의해 의미되었다. 이로부터 말씀 안에서 “이집트”는 좋은 의미에서와 반대적 의미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이 (시리즈에 따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좋은 의미에서 일 경우이다. 이집트에 의해 의미된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의 진리들은 진짜 교회로부터의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고로 이 지식들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단에 의해서가 아닌 여느 다른 수단으로는 정정되거나 건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는 선이다면 무엇이든지 반대하는 교회 안의 타락된 자를 의미한다. 이는 “유다”의 표현함이 좋은 의미에서는 천적인 사랑으로부터의 선, 그러나 반대 의미에서는 선이면 무엇이든 모든 선에 반대하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의 의미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유다에 의해 선이면 무엇이든 반대하는 이들이 표현되는 이유는 좋은 의미에서는 말씀에서 천적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천적 (수준의) 사랑은 주님을 사랑함과 이 사랑에서 파생된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과 최고로 가깝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안쪽의 천국 안에 있다; 이 천국은 순진의 상태 안에 있다, 고로 여기 있는 이들은 이런 순진의 상태로부터 어린 아이로서, 형체에서는 전체적으로 사랑들로서 여타 다른 천국들에게 나타난다.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보내어질 때, 그들은 다른 천사들에 의해 에워싸이게 된다, 이리하여 에워싼 이들을 수단으로 그들의 사랑의 기운은 경감되어지는데, 이렇지 않으면 정작 그들이 보내진 영역에 있는 이들이 그들로 해서 졸도해버리고 만다. 그 이유가 그들의 사랑의 기운은 뼈골까지 꿰뚫기 때문이다.
천적이라 불리우는 이 사랑, 또는 이 사랑의 선이 좋은 의미에서 유다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마찬가지로 반대 의미에서 천적인 선에 반대되는 이들이 표현되어진다, 고로 선이라면 무엇이든 반대하는 이들이 표현된다. 말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두 겹의 의미를 지닌다, 즉 좋은 의미와 이에 반대되는 의미이다. 좋은 의미로부터 이에 반대되는 의미 역시 알려진다; 그 이유가 반대 의미에서 포함되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의미의 것과 직반대되어 있다.
사랑으로부터의 선들은 일반적으로는 둘이 있다, 천적 사랑의 선과 영적 사랑의 선이다. 천적 사랑의 선에 직반대되는 것이 자기 사랑으로부터의 악이다; 그리고 영적 사랑의 선에 직반대되어 있는 것이 세상을 사랑함의 악이다. 이 악은 자기를 사랑함의 악 같이 모든 선에 직반대 되어 있지는 않다. 유다에 의해서는 반대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고,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이 표현된다. 이런 이유는 유다에 의해 주님의 천적 왕국이, 이스라엘에 의해서는 주님의 영적 왕국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지옥들 역시 위 두 사랑들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자기를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무슨 선이든 모두 반대하는 바, 가장 깊은 지옥 안에, 그러므로 가장 비통한 지옥들에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함에 있는 이들은 무슨 선이든 지에 꼭 반대하는 것은 아닌 바, 아주 깊은 지옥들 안에 있지는 않은 바, 상대적으로 덜 비통하다.
자기를 사랑함의 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외적 뽐냄인 교만이라 불리우는 정도가 아니고, 이웃을 향한 증오, 복수하려 불타는 바램, 잔인함으로 기뻐함이다. 이것들은 자기를 사랑함의 내면들이다. 이 사랑의 외면들은 자신과 비교해 타인을 경멸함, 영적 선 안에 있는 이들을 혐오함이고, 때로는 뽐냄, 교만으로, 때로는 이런 것 없이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증오심에서 이웃을 붙드는 자는 내면적으로는 자신 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웃과 하나로 결합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고로 그들은 자기로부터의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 안에서 이웃을, 이웃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6] 이와 같은 상태가 반대적 의미에서의 유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유태 국가는 처음부터 이런 사랑 안에 있어 왔다; 그들은 온 세상의 모든 이들을 천박한 노예들로, 그리고 자신들에 비교하건대 무가치한 자들로 간주했고; 그들을 증오함 안에서 붙들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를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이 상호적으로 결합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협회나 형제들까지 비슷한 증오로 박해했다. 이 기질은 이 나라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묵인 아래 외국의 토지들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그들의 사랑을 감추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 피를 덮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이는 만일 이것이 완전히 소멸된다 해도 이익도, 유명해지는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의 의미가 이득도 유명해질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살핀다; 그리고 “죽이다”의 의미가 여기서는 신성한 진리를, 특별하게는 여기서 “형제”인 요셉에 의해 뜻해진 것, 즉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피를 덮는다”의 의미가 통째로 거룩한 진리를 감추여지게 하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런 것들에 관련되는 경우가 어떠한지는 아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의 “이득(gain)”이 이익과 유명해짐 뿐만아니라, 또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가 이득과 유명해짐에 관하여 아무것도 있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것이 물욕, 또는 탐욕으로부터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득의 물욕과 탐욕은 그것 내부에 온 세상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약탈과 자기들을 위하여라면 누구이든 죽이기까지 하는 것도 바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실로 이를 방해하는 법들이 없다면 이런 물욕의 몰아침은 살인도 마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인간이 금이나 은을 소유하는 자신을 놓고서는 힘에서 가장 위대한 자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이런 자도 외형적 나타남에서는 자기 내부와는 다르게 나타날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것은 오히려 탐욕에 있는 것이 세상을 사랑함 뿐만아니라 자기를 사랑함, 심지어 자기를 사랑함의 가장 더러운 것까지도 보여준다. 심보가 더럽게 탐욕하는 이들 안에 있는 뽐냄, 교만은 바깥쪽으로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게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부를 나열하는데 별로 관심 없는 듯하게 때로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쾌락과 통상적으로 결합하는 자기를 사랑함의 종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은 육체에 관하여, 식품이나 의복에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의 것들로부터 통째로 있는 사랑, 돈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사랑, 여느 다른 것보다 돈을 소유함 자체를 믿는 것이 실제적이지는 않으나 잠재성으로 있는다. 이로부터 분명한 바, 탐욕 안에 가장 낮고 비열한 자기를 사랑함이 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다른 삶에서 탐욕자들은 돼지떼 사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선이면 무엇이든 반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짙은 어둠 안에 있어 그들은 선한 것과 진리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사후 인간에 속하는 어떤 내적인 것도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오히려 사후 삶을 말하는 이들을 그들은 심정에서 비웃는다.
유태 나라가 시작에서 이런 본성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어떤 내적인 것도 열리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는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를 사랑함의 가장 나쁜 종류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내면의 선들과 진리들을 더럽힌다, 고로 여느 사람보다 그것들을 더 모독한다, 고로 탐욕을 수단으로 그들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아주 멀리 있어야 하고, 그 덕분에 짙은 어둠에 싸여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만큼이라도 모독할 수 없게 해주기 위함에서 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 그들에 관해 말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로부터 악마이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의 바램을 너희는 행동하기를 뜻한다. 그는 시작으로부터 살인자였다.” (요. 8:44); 그리고 유다 이스가리옷 (가롯 유다)에 관하여, 그는 유태 교회를 표현했는데,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더냐? 그리고 너희 중의 하나는 악마이다” (요. 6:70). 이스가리옷 유다 역시 주님을 팔므로 해서 “가서 요셉을 팔자”라고 말한 본문의 유다와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가서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그것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이는 “판다”의 의미가 자신들로부터서는 멀리함(소원해짐), 고로 다른 이들에 의해서 받아지는 것이다로부터, 이것이 진리를 서술할 때, 여기와 같이 그들에 의해 인정되어짐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스마엘 사람들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알려진다.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 특히 주님의 신성한 인간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이는 그들은 책임질 일 없이 있을런지 모른다를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손을 놓지 않음”의 의미가 폭력을 제공하지 않음이다로부터; 그리고 폭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책임질 없이 있을런지 모른다를 표시하게 된다. 이것은 아래 구절에서도 의미되어진다.

그 이유가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살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로부터 있는 것이 받아졌기 때문에를 의미한다. 이는 “형제”의 의미가 선으로부터의 혈족 관계이다로부터; 그리고 “살”의 의미가 양쪽 의미, 즉 좋은 의미, 반대 의미 모두에서 누군가의 자기 자신, 고로 그것이 받아들여졌음 인데, 그 이유는 교회 속에 있는 이들로부터 이고, 이것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스마엘 사람들은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요셉의 형제들은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을 인정하고, 또한 인간이 구원되어지는 것은 선행의 일이 행해져야 하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이 앞에서 신앙만을 이라고 표면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단순한 선에 있는 이들 앞에서는 거의 주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상식적 논리 앞에서 감히 그들의 교리를 내놓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의 위엄과 이익 모두가 감소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런 진리들을 부정한다고 말할 것 같으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자가 그들을 두고 그들은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에 있는 이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로부터 분리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신앙을 옹호하는 논쟁은 일들에 반대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인간과 신성을 구분함에 관하여도 그들은 자기들이 납득 못하는 궤변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신앙만에 있는 이들이 자기들도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소극적 태도 안에 놓는 식으로 기꺼이 양보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그 이유가 이런 진리들이 소멸되는 것이야말로 자기들의 명예와 이득에 도움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은 그에게 귀기울였다. 이는 승낙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를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상인들이 지나갔다. 이는 이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 사람들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상인들”의 의미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진 이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것들은 영적 의미에서는 “부자”, “재물”,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사하는 것”은 이런 지식들을 포획하고 교통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경우는 선에 관한 지식들이 아니고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미디안 사람”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men, veri, 남자들)”이라 불리우기 때문, 이들 또한 진리들 안에 있는 이들이라 불리우기 때문이다. 역사적 시리즈로부터 보건대,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워졌는데,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낸 것은 미디안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 이집트에서 보디발에게 판 이들도 미디안 사람들이었다. 아마 성경을 읽는 많은 이들이 상상하는 것은 요셉을 이집트에서 판 이들이 이스마엘일 것이다는 것, 그러나 성경은 미디안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요셉, 즉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팔리울 수 없고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팔리워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그 구절로 미룬다.

그리고 그들은 구덩이에서 요셉을 끌어내 들어 올렸다. 이는 최소한 거짓 가운데에는 있지 않을 것 같은 그들로부터의 도움을 의미한다. 이는 “끌어내 들어 올림”의 의미가 자유해 있는 것, 고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로부터; 그리고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여기서 끌어내 들어 올림이 도움을 제공함인 이유는 진리는 선을 돕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힘은 진리쪽에 있기 때문, 하여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짓이 알려지는 수단이 진리이다, 고로 누군가가 거짓들 사이에 있지 않기 위하여 진리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린 이들은 미디안 사람들이고, 그를 산 이들은 이스마엘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는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 받아짐, 그리고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의 부분과는 멀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팔다”의 의미가 요셉의 형제인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의 측면에서는 멀어지고, 이스마엘 사람들인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의 측면에서는 받아지는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은 이십에. 이는 평가를 의미한다. 이는 “20”의 의미가 내면의 인간 안에 주님에 의해 저장된 선과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리메인스(remajns)라고 불리운다, 고로 거룩한 선 또는 진리, 여기서는 거룩한 진리인데, 그 이유가 “은 이십 조각”이라 말해지기 때문; “은”은 진리이다. 똑같은 숫자가 거룩하지 않은 것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말씀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양쪽 의미를 지니기 때문, 따라서 반대 의미인 경우, 신성한 진리를 멀리한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 진리를 받은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고로 요셉의 형제들 측면,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교회인들 측면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스마엘 측면, 즉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 측면에서는 거룩한 것을 표시한다. 이것이 평가에 의해 뜻해진 것들이다.
“20”이 거룩하지 않은 것도 의미하는 이유는 “20”은 리메인스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의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에 관한 리메인스를 가지지 않고, 그 대신 악과 거짓을 지닌 이들 안에서 이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고, 악과 거짓의 종류에 따라 더러운쪽이든지, 모독함쪽이든지 한다. “20”이 거룩하지 않은 것 역시 표시함을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보았는데, 날고 있는 두루마리가 바라보였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저는 날고 있는 두루마리를 봅니다; 그것의 길이는 20엘, 넓이는 10엘이다. 그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온 땅의 얼굴 너머로 가고 있는 저주이다 (슥. 5:1-3).
학개서에서:
누군가가 포도주즙틀로부터 50을 퍼올리려고 포도주즙틀에 왔다, 거기에 20이 있었다. 나는 폭파함으로 너를 칠 것이다, 그리고 흰가루병으로 네 손의 모든 일을 (칠 것이다)
(학. 2:16, 17).
위 구절들에서 “20”은 거룩하지 않은 것, 불결한 것, 모독한 것을 표시한다. 20세 이상의 모든 이들은 광야에서 죽게 된 것(민. 14:29; 32:11)은 햇수에서 20 이상인 것은 불경한 것을, 20 이하는 거룩한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이는 기억적 지식으로부터 상담함을 의미한다. 이는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로 가져다 놓일 때, 이것은 그것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앞에서 보여준 바대로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되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상담함에 의해 뜻해진 것에 관하여는 더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신성한 진리에 관하여 기억 속의 지식들로부터 상담하는 것은 그것이 그런지를 그것들로부터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은 양면을 지닌다. 먼저 진리가 진리임을 확인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이들은 기억 속의 지식들과 상담할 때 (즉 기억 속의 지식을 자료로 삼아 검토할 때), 그것들을 수단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바, 그들의 신앙은 강화된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발생한다; 즉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으로부터 상담할 때, (빌미를 교묘히 만들어) 진리를 더욱 거짓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지적 능력에 따라 있다. 만일 보다 높은쪽인 내면의 통찰력을 지니지 않은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의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그것들 안에서 진리의 확증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끌려가진다; 그러나 내면의 통찰력을 지닌 이들은 확증을 보게 되는데, 이들이 보는 방법이 상응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후 산다는 진리가 있다. 이 진리가 과연 진정한지를 놓고,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의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셀 수 없는 잡다한 생각들에 의해 이 진리에 반대되는 확증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짐승들도 별반 차이가 없이 산다는 것, 즉 감각을 지니고 행동하고, 때로는 이 감각이 인간의 것보다 더 정밀하기도 한다는 것; 인간이 일반 동물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이유는 그가 성숙해질 때 획득하는 것들 때문이다는 것; 따라서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동물의 한 종류일 뿐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그들의 생각이 더 있다. 어쨌든 이렇게 부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은 결국은 자신들을 거짓들 쪽으로 내던진다. 하여 끝내 그는 영원한 삶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리에 관하여 긍정적 측면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의 의견을 들을 때, 그는 그것들을 수단으로 자신을 확증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그 이유가 그들은 자연에 있는 많은 것들은 인간 아래 있다고 본다; 짐승들은 본능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한편 인간은 이성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 짐승들은 아래쪽만을 볼 수밖에 없으나, 인간은 위쪽을 볼 수 있고, 생각함을 수단으로 그는 영계의 것들을 납득하고, 그것들에서 감명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수단으로 하느님 자신과 결합되기까지 한다는 것, 그리하여 신성으로부터의 생명을 자신에게 어울리게,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는 것; 그리고 질서 안에서 인도되고 승강되는데, 아주 늦은 만숙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그는 자연에 속한 것 이 외의 모든 것에서도 확증을 발견한다, 마지막 그는 천국 왕국의 표현물을 보편적 속성 안에서 발견한다.
잘 알려진 공통적인 것은, 학식자들이 단순한 이들보다 사후 삶을 덜 믿는다는 것; 일반적으로 신성한 진리들에 대해서도 덜 명료하게 본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가 발생하는 것은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의견을 구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즉 학식자들이 단순한 자들보다 대부분이 더 많은 기억 속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 부정적인 견지를 구축하기가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더 높은, 또는 내면의 것으로부터의 통찰력을 자신들 안에서 파괴한다. 하여 그들은 천국의 빛으로부터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단지 세상의 빛으로만 볼 뿐이다; 그 이유가 기억 속의 지식들은 세상의 빛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것들이 천국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지 못하면, 그것들은 제아무리 자신들에게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어둠을 야기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단순한 이들은 주님을 믿었으나, 유태 나라에서 학식 있다는 부류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믿지 않았다. 즉:
그들이 이 말들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말했다, 이 분은 진정으로 예언자이시다. 다른 이들은 이분은 그리스도 (메사아)이시다고 말했다. 바리세인들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통치자들이나 바리 새인 중의 누가 그를 믿느냐? (요. 7:40, 41, 47, 48).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하셨다, 저는 오 아버지여, 하늘과 땅의 주님,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슬기롭고 총명하다는 이들로부터는 감추이게 하시고, 아기들에게 밝히 보이셨습니다 (눅. 10:21);
“아기(baby)”는 단순한 자를 표시한다. 마태복음서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비유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 13:13)

그리고 르우벤은 구덩이로 돌아 왔다. 이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교회 속의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일반적 측면에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함이다로부터; 그리고 “구덩이”의 의미가 거짓들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므로 르우벤이 구덩이로 되돌아 옴은 일반적인 교회의 신앙이 분리된 신앙에 속하는 거짓들을 바라보려고 왔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보라, 요셉이 구덩이에 있지 않았다. 이는 어떤 신앙도 더 이상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구덩이”로 의미된 거짓들 사이에서 나타날 때,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신앙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옷을 찢었다. 이는 크게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음”이 크게 슬퍼함, 즉 진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슬퍼함이다. 우리가 말씀에서 자주 읽게 되는 것 중 하나, 특히 역사적 부분에서, 어떤 인물이 옷을 찢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것의 근원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잃어진 진리 때문에 있는 슬퍼함의 표현물이다는 것은 더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미 말했던 바 대로, 이런 행동은 “옷”이 진리를 의미했다는 사실로부터 표현물이 되었다. 더욱이 이 장에서 야곱이 자기 아들의 웃옷임을 인식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34절); 하여 이를 수단으로 진리가 파괴되었음에 슬퍼함이 의미되어 있다. 또는 말씀의 다른 장소에서의 몇 사건을 말해보면, 아시리아왕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모욕을 퍼부었을 때, 이를 들었던 궁내대신 엘리야킴과 서기관 세바와 사관 요아가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일들을 히즈키야왕에게 말했고, 이를 들은 히즈키야왕도 옷을 찢고 베옷을 걸쳤다 (이. 36:22; 37:1; 왕하. 18:37; 19:1). 랍사게가 내뱉은 모욕은 하느님, 왕,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것인 바, 이는 신성한 진리를 향한 것임은 이 대목들의 내적 의미로부터 더 분명해진다.
여후디가 예레미야가 쓴 책을 왕 앞에서 읽었을 때, 왕은 그 책을 불에 던졌다, 그리고 이 말씀의 낭독을 들은 왕과 그의 종들은 자기들 옷을 찢지 않았다 (예. 36:23, 24); 그들이 옷을 찢지 않음은 신성한 진리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 슬퍼하지 않았다가 표시된 것이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둔네의 아들 갈렙이 가나안 토지를 염탐한 자들의 악한 보고에 맞서 말할 때 그들은 옷을 찢었다 (민. 14:6); 이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 이유가 가나안의 토지가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고, 이 토지에 맞서 말하는 것은 신성한 진리에 맞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궤가 불레셋인들에게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군인 중의 하나가 실로로 달려왔는데, 그는 자기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삼상. 4:11, 12); 이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선을 잃음에 통곡함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궤가 주님의 왕국을, 최고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표현하였기에, 이로부터 교회의 거룩함을 표현하였기에, 옷을 찢음은 신성한 진리를 잃음에 통곡함을; 머리에 뒤집어쓴 먼지는 신성한 선을 잃음에 통곡함이 의미되었다.
사무엘과 사울에 관해 이렇게 읽는다:
사무엘이 돌아서 갔을 때, 사울이 그의 웃옷 자락을 붙들자, 그것은 찢어져 나갔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 위로부터 이스라엘의 왕국을 찢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동료에게 주었다. 나는 네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여호와의 말들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왕 위로부터 당신을 거절하셨다
(삼상. 15:26-28);
사울이 사무엘의 웃옷 자락을 찢음은 사무엘이 말한 것, 즉 왕국은 그로부터 몰수되는 것,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더 이상 아닐 것을 표현했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에서 “왕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리고 마찬가지로 “왕”과 “왕권”도 그러하다; 특별히 왕국과 이스라엘의 왕에 의해서는 주님의 왕국이 표현되었다. 마찬 가지로 여로보암과 예언자 아히야에 관련한 대목도 있다:
여로보암이 예루살렘 밖으로 나갔을 때, 그리고 예언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때 그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둘만이 들판에서 있었다, 아히야가 새 옷을 붙잡고 열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가 여로보암에게 말했다, 당신이 열 조각을 가져가라; 그 이유가 고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께서 말하신다, 잘 보라 나는 솔로몬의 손으로부터 왕국을 찢을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열 지파를 줄 것이다 (왕상. 11:29-31).
사무엘하서로부터: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은 지 삼일 후 옷을 찢은 사람이 진영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들었을 때, 다윗은 그의 옷을 붙잡고 그것들을 찢었다; 그와 더불어 있던 그의 신하들도 그렇게 했다 (삼하. 1:1, 2, 11)
위 구절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내던져지고 잃은 것 때문에 슬퍼함이 표현되었다; 그 이유가 이미 말한 대로 신성한 진리가 왕권에 의해 의미되었다, 분리된 신앙에 있던 이들이 불레셋에 의해 표현되고, 그들을 수단으로 사울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같은 삼하 1장의 다윗의 애곡(17-27절)으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압살롬이 그의 형제 암논을 죽였을 때, 그리고 그 소식이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전해졌을 때, 다윗왕은 “자기 옷을 찢고, 땅위에 누웠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도 자기 옷을 찢으며 그 곁에 섰다” (삼하. 13: 28, 30, 31); 이 대목 역시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파괴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신성으로부터의 진리들이 내적 의미에서 왕의 아들들에 의해 의미된 것이다. 다윗이 압살롬 앞에서 도망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은 아렉 사람 후새를 만났다 (삼하. 15:32); 말씀에서 왕, 특히 다윗왕은 신성한 진리를 표현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말하여, 그는 그가 행했던 악 때문에 절멸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그의 살에 베옷을 걸쳤다 (왕상. 21:27).
옷을 찢거나 조각내는 것은 잃어진 진리 때문에 슬퍼함을 표현했다는 것이 아래 구절에 더 있다:
사제 힐기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율법의 책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사반이 왕 요시아 앞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왕이 율법책의 말들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옷을 찢었다 (왕하. 22:11).
위 구절은 말씀, 즉 신성한 진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잃어진 채로, 심정과 삶에서 말살되어 왔기 때문에 옷을 찢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나는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다고 고백하셨을 때,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기록 (마. 26:63-65; 막. 14:63, 64)은 대사제가 주님이 말씀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 그는 신성한 진리에 반대하여 말했다는 신앙 그 이상의 것은 없었음을 의미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안에서 올라갔을 때, 엘리사가 그것을 보았고, 그는 자기 옷을 붙잡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앞에 떨어진 엘리야의 웃옷을 추켜들었다, 그리고 물을 쳤다, 그리고 강물은 이쪽, 저쪽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건넜다 (왕하. 2:11-14); 이때 엘리사가 자기 옷을 두 조각으로 찢은 것은 말씀(신성한 진리)이 잃어진 것을 슬퍼함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엘리야에 의해 말씀,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웃옷 (튜닉)이 신성한 진리인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러므로 이런 슬픔에서 찢은 옷(garment)은 튜닠(tunic)이었음은 위에 인용한 구절들로 분명해진다. “옷”이 교회의 진리를, 최고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를 의미했기에, 그러므로 위와 같은 슬퍼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옷을 찢음으로 불명예가 표현되기도 했는데, 즉 다윗의 신하들이 암논의 아들의 왕 하눈에 의해 턱수염이 반으로 잘리우고, 옷이 궁둥이까지에서 잘린 사건이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다윗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삼하. 10:4, 5).

그리고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돌아 왔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분리된 신앙 속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신앙으로부터 가르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아이가 없다. 이는 그 안에 신앙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이”의 의미가 신앙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진리가 “아들”에 의해 의미되기 때문, 고로 “아이”에 의해, 여기서 요셉에 의해 신성한 진리가 표현된다. 고대 교회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새로운 교회에 의해서는 신앙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가 없다”에 의해서는 교회 안에 신앙이 없다가 의미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꼬? 이는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는 르우벤의 표현함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앙이다로부터; 그리고 르우벤이 자신을 두고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바, 이는 다른 표현으로 지금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천국적인 요셉이 있지 않는 곳에 교회는 없다는 것, 즉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 특별하게 말하면,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시다는 신성한 진리, 그리고 선행은 교회의 필수이다는 것, 결과적으로 선행의 일은 필수적이다는 신성한 진리가 없으면 교회가 없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누누이 살피고 강조되어 왔다.
만일 이 신성한 진리, 즉 주님의 인간이 신성이심이 받아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것은 삼위 (세 인물들)가 경배되어져야 하나, 그분의 인간은 경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성이 아닌 인간은 경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셋이 하나이다고 부른다 할지라도, 여전히 생각은 셋으로 구분하고 셋을 만든다, 오직 입만이 하나라고 말할 뿐이다. 그가 한분 하느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셋을 생각하지는 않는지를 그로하여금 자신 안에서 생각해보게 하자; 그리고 그가 아버지이신 하느님(성부님), 아들이신 하느님(성자님), 성령이신 하느님 (성령님)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이를 세 인물들로 구분하고 기능 측면에서도 구분하는데, 한 분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세 하느님들이 경배될 때, 교회는 어디 있는가?
그러나 주님만이 경배될 때, 주님 안에서 완전한 삼위가 있어, 그분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분 안에 있는 바, 그분 자신께서 말하신다: “비록 너희가 나를 믿지 않을지라도 일들을 믿어라; 하여 너희는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믿을런지 모른다” (요. 10:3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빌립보야,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어라” (요. 14:9-11);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보고 있다” (요. 7:45);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 그리고 당신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요. 17:10). 이때 기독인의 교회가 있다. 즉 주님께서 말하신 것 안에 거주할 때이다: 즉 “모든 명령들의 첫째이다, 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의 하느님은 한분 주님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네 모든 심정으로부터, 네 모든 마음으로부터, 네 모든 힘으로부터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다; 그리고 둘째는 같다, 즉 이것, 너희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위대한 명령은 없다” (막. 12:29-31). “주 우리의 하느님”이 주님이시다에 대하여는 다른 장소에서도 알는지 모른다 (마. 4:7, 10; 22:41-45; 눅. 1:16, 17; 요. 20:28), 또한 구약 성경의 “여호와”가 신약 성경에서는 “주님”이라 불리운다.
만일 이 신성한 진리가 교리에서와 생활에서 받아지지 않는다면, 즉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로부터 선행의 일들이 교회의 필수 요소가 되지 않는다면, 필수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교회에서 진정한 것을 생각하나 선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 교회인의 생각은 그 자체 반대적일는지 모른다; 즉 악인 것을 생각하며 동시에 진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고로 악마와 더불어 악인 것을 생각하며, 주님과 더불어 진리를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진리와 악은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무도 두 주인들을 섬길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는 이쪽을 미워하고 다른쪽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눅. 16:13). 분리된 신앙이 이것을 건립하고 생활에서 이를 확증할 때, 제아무리 신앙의 열매들을 말한들, 교회는 어디 있는가?

31-35절.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염소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그리고 웃옷을 피에 담그었다. 32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 지금 알아보십시오. 33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은 내 아들의 웃옷이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확실하다. 34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삼베옷을 둘렀다,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통곡했다. 35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과 그의 딸들이 그를 위로하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이 있는 무덤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 왔다. 이는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웃옷”, 즉 다양한 색깔의 웃옷(tunic)의 의미가 진리의 나타남이다로부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취급되는 주제는 그들이 범죄한 사악한 행위에 대해 무죄임을 증명함이다; 그리고 내적 의미에서 신성한 진리들에 맞서 거짓을 확증함, 그리고 이 확증함은 외관(나타남)들을 수단으로, 즉 이것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추론함으로 표출되고 있다.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에 의한 거짓의 모든 확증들은 나타남들 이고, 이로 인해 단순한 자들은 자칫 잘못 인도되기가 쉽고, 거짓이 진리로, 그리고 진리가 거짓으로 표출되는 것도 용이하다. 이 나타남들이 이어지는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서 취급되어진다.

그리고 염소들 중에서 숫염소를 죽였다. 이는 기쁨들로부터의 외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이는 말씀 안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의 의미가 자연적 진리들, 즉 생활의 기쁨들이 있는 외적 인간의 진리들이다로부터; 또한 외적 진리들은 기쁨들(delights)로부터 파생되어지는데 이후 살핀다. 외적 인간의 진리들, 이로부터 생활의 진리들이 있는데,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 같은 신성한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로부터 진짜 교회의 교리물들이 파생된다; 이 진리들이 여기서 “숫염소”에 의해 의미된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기쁨들은 “염소들”에 의해 의미된다; 고로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진짜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진리들 안에 있고, 그 진리들로부터의 기쁨들 안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 (즉 글자 의미로부터 파생된 진리의 나타남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이 진리들은 자기들 생활 속의 기쁨들과 일치하여 있다; 고로 자기의 육체의 기쁨들인데, 일반적으로 쾌락(육체적 기쁨, pleasure)이라 불리운다; 이 쾌락은 보다 낮은 마음의 기쁨들이다; 예를 들면 명예, 이득 같은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들이다. 이런 것에서 기쁨을 가지는 인물들이 반대적 의미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의미된다. 한마디로, 이 의미에 있는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선행으로부터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자기들 생활과 일치하는 것,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옹호하는 진리들만을 말씀으로부터 축출해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진리들 마저 해석이라는 것을 수단으로 자신이 선발한 진리들에 일치하도록 가져다 놓는다. 그러므로 거짓들이 진리가 나타난 듯 하여 표출되고 있다.
“염소들 속의 숫염소”가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구절은 아래에 있다:
보라 염소들 중의 숫염소가 온 땅의 얼굴들 위 서쪽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땅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숫염소는 그의 눈 사이에 괄목할만한 뿔을 가졌다. 네 뿔들 중의 하나로부터 작은 뿔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을 향하여, 그리고 동쪽을 향하여, 그리고 잘생김을 향하여 자랐다. 그렇다 그것은 하늘들의 군대에까지 자랐다; 그리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마가 땅으로 내던져졌 다, 그리고 그것들 위에서 짓밟았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땅으로 내던졌다
(단. 8:5, 9, 10, 12);
위에서 취급한 주제는 일반적인 교회의 상태인데, 이는 유태 교회 뿐만 아니라 이 교회의 뒤를 잇는 기독 교회의 상태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유태 교회의 측면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는 내적 진리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자기들의 사랑을 옹호하는 만큼에서 외적 진리들을 받아들인 이들을 의미한다. 이 진리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부유해짐으로 있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를 인식하되,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단순히 왕의 차원에서, 자신들에게 왕이 된 다음, 자신들을 온 세상에 있는 나라나 민족 위에 우뚝서게 하고, 자기들 아래 모든 사람들이 노예 같은 신하로 있게 만들어 주는 왕이었다. 이것이 메시아를 향한 자기들 사랑함의 근원이었다. 그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명예나 이득 같은 것을 나눈다는 차원에서 결합하는 정도에서 이웃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독 교회의 측면에서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기쁨들로부터 외적 진리들에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이들은 내적 진리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 즉 관심이 별로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들을 가르친다면, 성경 지식 차원에서 명성을 높이는 것, 하여 존경을 받는 것, 이득을 획득하는 만큼에서 일 뿐이다. (즉 맛보기 수준, 사탕발림의 수준이다는 말이다, 사실 그 이상은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역자주.) 즉 이 기쁨들이 자기들의 입에서 진리들이 있는 동안 자기들의 심정에서 있다. 더욱이 잘못된 해석들을 수단으로 그들은 진짜 신앙으로부터 있는 진리들마저 자기들의 사랑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향하게 밀어 붙인다. 이는 위의 다니엘서의 말씀들의 내적 의미에서 의미된 것들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즉 “염소들 중의 숫염소”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의미된다. 서쪽으로부터 오는 숫염소는 악으로부터 임을 표시한다. 온 땅의 얼굴 위에 오되 땅에 닿지 않음은 그가 온 교회 위에 왔다를 표시한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땅”은 교회가 있는 토지, 고로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뿔들”은 거짓으로부터의 힘들이다 (2832항). “눈 사이에 괄목할만한 뿔”은 신앙의 진리들에 관하여 추론함으로부터의 힘들이다. 이에 대하여는 눈에 관해 살핀 대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남쪽, 동쪽, 잘생김을 향하여 자란 뿔 하나”란 천국의 빛의 상태들인 것들을 향하여서 조차, 그리고 선과 진리의 상태들에 까지로 조차 뻗쳐가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의 힘이다. “남쪽”이 빛의 상태이다는 것; 그리고 “동쪽”이 선의 상태인 것; 그리고 “잘 생김”이 진리의 상태이다는 것도 말씀의 여기 저기로부터 알는지 모른다. 그것이 “하늘들의 군대에까지 자라고, 군대의 얼마, 별들의 얼마를 땅으로 내던졌다”란 그것(분리된 신앙)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를 표시한다. 이로부터 ”진리를 땅으로 내던짐“에 의해 뜻해진 것을 알게 된다, 즉 진짜 신앙, 즉 선행을 내던짐이다. 신앙은 선행을 중요시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이 선행으로부터 진행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에서 진리라고 불리운 것이 새로운 교회에서는 신앙이라 불리운다.
“숫염소”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에스겔서에서 읽어보자;
보라 내가 작은 가축과 작은 가축 사이를, 숫양들과 숫염소들 사이를 판결한다. 너희가 좋은 초장을 먹은 것이, 그리고 남은 풀밭을 짓밟은 것이 너희에게는 작은 것이더냐? 너희가 맑아진 물들을 먹고, 그 나머지 물을 너희 발로 휘저어 놓는다; 너희는 뿔들로 유약한 모든 자들을 받아서 그들이 해외로 흩으려질 때까지이다. (겔. 34:17, 18, 21);
이 구절에서도 “숫염소들”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 즉 생활 앞에 교리를 놓고, 결국 생활에 관하여는 주목하지 않는 이들이 의미된다; 그럼에도 생활, 그리고 교리가 분리되지 않을 때 인간을 만든다; 그리고 생활한 것은 사후 남는다, 그러나 교리는 그것이 생활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남지 않는다. 이로부터 그들은 “좋은 초장을 먹고, 남은 초장을 발로 뭉개었다”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맑아진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발로 휘젖는다”라고 말해진다; 또한 “유약한 자들이 흩으러질 때까지 그들을 뿔로 받는다”라고 말해진다.
이로부터 지금 “숫염소들”에 의해 뜻해진 이들, 그리고 “양들”에 의해 뜻해진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마태복음서에서:
그분 앞에 모든 민족들이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목자가 숫염소들로부터 양떼들을 분리하듯 서로로부터 그들을 분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오른 쪽에 양떼들을, 그러나 왼쪽에는 숫염소들을 놓으실 것이다 (마. 25:32, 33);
“양들”은 선행 안에, 이로부터 신앙의 진리에 있는 이들이고, “숫염소들”은 비록 신앙의 진리에는 있을지라도 선행 없이 있는 이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다는 것은 세부 사항들로부터 분명하고, 이 안에서 그런 인물들이 묘사되어져 있다
분리된 신앙에 누가 있는지, 무슨 품질을 지녔는지, 그리고 “숫염소들”에 의해 뜻해진 것은 이 두 구절로 한 번에 보여질는지 모른다; 즉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두 각각의 나무는 잘리워서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열매들을 수단으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주여, 주여,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들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들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들을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능력있는 많을 일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고 고백할 것이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 불법을 일한 자들아” (마. 7:19-23). 그리고 누가복음서에서: “그때 너희는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여소서;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여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서 있는지를 모른다; 나로부터 떠나라 너희 불법의 일꾼들아” (눅. 13:25-27). 그러나 “숫염소”가 좋은 의미에서 의미하는 것, 특히 제물로 사용될 경우, 때로는 예언서들에서의 경우에 대하여는 차후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부터 다시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옷을 피에 담갔다. 이는 그들은 그것을 악들로부터 온 거짓들로 더럽혔음을 의미한다. 이는 “피에 담그다”의 의미가 거짓들로 더럽히는 것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이유가 “피”는 반대 의미에서 거짓화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숫염소의 피인 바, 이를 수단으로 기쁨들로부터의 외적 진리들, 즉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가지는 진리들 같은 것이 의미되는 바, 이것이 악들로부터의 거짓들이 뜻해짐은 이어지는 구절의 야곱의 말들, 즉 “악한 짐승이 그를 삼켰다; 요셉은 정녕 갈기갈기 찢기운 것이 분명하다”로부터 확실하다; 그 이유가 이 말들에 의해 악의 물욕이 그것을 소멸되게 했다는 것, 고로 거짓들로부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가 의미되었기 때문이다. 거짓의 근원에는 셋이 있다; 즉 교회의 교리, 감각의 오류, 물욕으로부터의 생활인데, 마지막 것이 가장 지독하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을 보냈다. 이는 그러므로 해서 더럽혀져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는 “여러 색깔로 된 웃옷”의미가 나타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들이 더럽혀져 있었다는 것은 피에 웃옷이 담가짐에 의해 뜻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는 고대인과 원시 교회 속의 선들과 진리들과 비교해봄을 의미한다. 이는 여기서 “아버지”인 야곱의 표현함이 고대 교회, 또한 원시 교회, 즉 시작 당시의 기독 교회이다로부터 알려진다. 이와 같은 웃옷을 이 교회에 가져오는 것은 내적 의미에서 진짜 교회의 선들과 진리들에 왜곡된 선들과 진리들을 비교함을 실시하는 것이다. 위에서 야곱이 고대 교회와 더불어 원시 교회, 시작때의 기독교회를 표현한다고 말한 이유는 모두가 내적 측면에서는 같고 오직 외형에서만 다를 뿐이어서이다.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은 주님에 대한 표현물, 그리고 그분의 왕국의 영적, 천적인 것들에 대한 표현물, 즉 사랑과 선행, 이로부터 파생된 신앙에 대한 표현물이 전부이였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독 교회 속에 있다. 고로 고대 교회의 외적인 것들, 또한 유태 교회의 외적인 것들이 벗겨질 때, 즉 포장을 풀면, 기독 교회가 드러나진다. 이것이 성전의 휘장이 갈라짐으로도 의미되었다 (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런 이유로 아버지 야곱은 고대 교회, 뿐만아니라 원시 기독교회도 표현했다.

이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이는 이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난다를 의미한다. 이는 시리즈의 내적 의미로부터 알려진다; 그 이유가 그들은 이것이 요셉의 웃옷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발견했다고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아들의 것인지, 아닌지를 알도록 그 웃옷을 남겨두었다. 이로부터 이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이것이 당신의 아들의 웃옷인지 아닌지 알아 보십시오. 이는 거기에 비슷함이 있었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여부를 아는 것”은 그것이 무엇과 비슷할지를 의미함에서 알게 된다. 이것은 앞에 진행된 것과 관련이 있고, 그리고 그것 뒤를 잇는다, 즉 비교해봄이 교회의 진짜 선들과 진리들과 왜곡된 선들과 진리들 사이에 실시되는 것이다; 이는 피에 담근 웃옷을 아버지에게 가져옴의 의미와도 의미가 상통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당신의 아들의 웃옷인지를 알아보십시요”에 의해 그것이 무엇 같은지를 비교해보아야 함이 의미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았다. 이는 참으로 그것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의 웃옷을 가져 왔다란 그것은 교회 속의 진리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웃옷”의 의미가 교회 속의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더럽혀졌을 때, 그것은 [교회 속의 진리] 이었으나, 고대와 원시 교회의 것과 같은 진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것이었다라고 의미된다.

악한 들짐승이 그를 삼켰다. 이는 악 속의 탐욕들이 그것을 소멸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는 “악한 들짐승”의 의미가 탐욕들의 생명으로부터의 거짓말이다로부터; 결과적으로 탐욕들이다; 그리고 “삼키다”의 의미가 소멸시킴이다로부터, 그 이유는 교회의 진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핵심 진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제 일이 되는 것이다 (막. 12:29-31). 탐욕들이 이 진리를 소멸되게 한다; 그 이유가 탐욕의 생명에 있는 이들은 사랑과 선행의 생명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두 생명은 정확히 반대되기 때문이다. 탐욕들의 생명은 자기를 사랑함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로부터, 또는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면 이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생명 안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 안에 있는 선행을 소멸되게 한다; 그리고 선행을 소멸한 이들은 주님을 사랑함 또한 소멸되게 한다; 그 이유가 선행 외에 주님을 사랑하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선행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선행에 애착함은 천국의 애착함 자체이고, 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악의 탐욕들이 교회의 핵심 생명을 소멸되게 한다는 것, 이 소멸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신앙이 구원함이라는 교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행과 분리될 때, 진리 자체는 더럽혀진다, 그 이유가 이때는 선행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조차도, 결과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것이 무엇인지, 천국이 무엇인지 등등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의 내적인 것, 그리고 인간 안의 천국이 선행이기 때문, 즉 타인에게, 사회에, 나라에, 교회에, 주님의 왕국에, 주님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기꺼이 해보려 함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결말은, 필수적인 이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때, 그리고 이 필수적인 것들에 반대될 때, 또는 탐욕이 우리를 통치할 때, 교회의 진리의 품질이 무엇일 것인지에 대하여 이다. 탐욕들의 생명이 이런 진리들에 관하여 말할 때, 진리가 더 이상 인식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조차 더럽혀지지 않을까?
그가 선행의 선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는 선행의 애착에 감명받아져 있어야 한다; 감명된 자는 타인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고, 호의적 자세로 타인을 대한다. 선행에 있는 자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서 자신의 것이 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이들로부터 확실히 알았는데, 이들과 더불어 나는 대화하는 것이 허락되어졌다. 거기서는 모든 이가 자신들의 선행의 품질에 따른 선함과 아름다움과 더불은 선행의 형체들이다; 그들의 기쁨, 만족, 행복은 선의(호의, 친절, good-will)로부터 타인에게 선을 행할 수 있음으로부터 있게 된다. 선행으로부터 살아오지 않았던 이들은 천국과 천국의 환희(joy, 기쁨)가 호의적이려 애씀과 이로부터 적절히 잘 행함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천국은 자신에게 잘 해주려는 태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으로부터 타인에게 적절히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것이 지옥이다. 천국과 지옥은 이미 말한 대로 이런 사항으로부터 구별된다; 즉 천국은 선의로부터 선을 행함이고, 지옥은 악의(ill-will)로부터 악을 행함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이들은 선의로부터 선을 행한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악의로부터 악을 행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렇다, 즉 자신밖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 안에서 상대를 보는 만큼에서, 또는 상대 안에 자신이 들어 있는 만큼에서 타인을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이것들 안에 증오심을 담고 있어,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 퇴조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 증오심은 튀쳐나온다. 이것은 흡사 강도들 같다; 그들은 약탈함이 성공되면, 서로를 죽이려는 바램을 심정에 품고 있다.
이런 사항들로부터 알게 되는 것은, 천국이 무엇인지,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는 것; 지옥이 무엇인지, 그것은 자기를 사랑함이다는 것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모든 진리들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이 진리들에 감화되고 그 진리들을 자신으로 만든다; 그 이유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신앙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 천국도, 주님도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함 안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결코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옥이 자기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영예와 이익을 위하여서가 아닌 여하한 방법으로는 신앙의 진리를 받지를 않는다; 고로 그들이 신앙의 진리들로 감동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리 만무하다; 그들이 감동되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는 때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위한 형편상 입으로 신앙의 진리를 설파할 뿐, 심정으로는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 사후 산다는 것, 말씀으로부터 말해지는 모든 것, 고로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마저 믿지 않는다. 이들이 예배드릴 때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믿는다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들이 어릴적부터 이런 믿음이라는 분위기에서 양육되어 왔기에 몸에 배어서 자동적으로 느끼는 믿음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예배 분위기를 벗어나 자신 안에서 골몰해지면,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고로 자기 사랑이 좋아하는 것쪽으로 고안해낸 삶을 따라간다, 게다가 이런 삶의 원리들을 그는 진리들이라 부른다, 더 나아가 이런 자기 삶의 원리를 뒷받침할 근거를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찾거나, 뾰족한 수가 없으면, 글자들을 이리저리 꿰맞추기도 한다. 하여 얼핏보면 성경의 몇 장 몇 절로부터 등등을 나열한 듯 해도 실상 이것의 출발지는 거짓들이다. 이런 것들이 분리된 신앙에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사랑들 안에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가 사랑들이 생명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생명은 사랑들 안으로만 흐르고 있다; 고로 사랑이 이러이러하면, 생명도 이러이러하다, 그 이유는 사랑이 생명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천국의 생명을 받는다;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천국의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함 안에 지옥의 모든 것이 있다. 모든 것들이 사랑들 안에 있다는 것은 자연계의 많은 것들로부터도 예증될는지 모른다. 동물들, 땅 위를 걷든, 공중을 날든, 바다에서 헤엄을 치든, 모두는 자기들의 사랑들에 따라 재촉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즉 자기들의 생계, 거처, 출산,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그들의 사랑들 안으로 들어가 있는다. 그러므로 각 종류의 동물들은 자기들의 식품, 거처, 결혼에 관한 것, 즉 짝짓는 것, 둥우리를 짓는 것, 알을 놓는 것, 자기들의 새끼를 양육하는 것 등등을 알고 있다.
꿀벌 또한 작은 방을 어떻게 짓는지, 꽃으로부터 꿀을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를, 그것을 벌집에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겨울을 대비해 어떻게 꿀을 저장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여왕 아래 어떤 통치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 조차 알고 있다; 이 외에도 경이로움은 훨씬 많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사랑들 안으로 유입을 수단으로 결과되어진다; 생명의 결과는 그들의 애착들의 형체들을 수단으로 다양해진다. 인간 역시 이 범주에 있는 바, 천국의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 있을까? 천국 안에 있는 것이 지혜와 총명의 모든 것이 아닐까? 이로부터도 선행 안에 있는 자 외에는 천국에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 선행으로부터 그들은 모든 진리들을 받는 수용력과 이 진리들, 즉 신앙의 모든 것에 감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대적인 것은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 즉 얼마 만큼의 진리들 안에 있으나 선행 안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들은 자기들의 사랑,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받아들임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지옥들이다.

요셉이 찢겨진 것이 분명하다. 이는 모두가 거짓으로부터 임을 의미한다. “찢겨 지다”의 의미가 거짓들로 해서 사라지다, 또는 모든 것이 거짓들로부터임 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악으로부터의 거짓들, 또는 탐욕들로부터의 거짓들이 여기서 뜻해진 것이다; 이에 관하여는 앞에 살핀 것도 다시 보기 바란다.

그리고 [야곱은] 그의 옷을 찢었다. 이는 파괴된 진리 때문에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옷을 찢음”의 의미가 파괴된 진리 때문에 슬퍼함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그리고 삼베옷을 그의 허리에 둘렀다. 이는 파괴된 선 때문에 통곡함을 의미한다. 이는 “허리에 삼베옷을 두름”의 의미가 파괴된 선을 위하여 통곡함에 대한 표현이다로 알게 된다. 그 이유가 “허리”는 부부의 사랑, 그러므로 천적, 영적인 모든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응으로부터 이다; 그 이유가 모든 기관, 사지, 내장 등의 신체 부위는 웅대한 사람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각 장의 끝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허리도 웅대한 사람, 또는 천국과 상응하는데, 진짜 부부의 사랑 안에 있어 왔던 이들과 상응한다; 그리고 부부의 사랑이 모든 사랑들의 기초이고 근본되기에, “허리”에 의해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천적, 영적 사랑이 의미된다. 이로부터 고대인들은 파괴된 선을 두고 슬퍼할 때 허리에 삼베를 둘렀다, 그 이유가 모든 선은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슬픔을 증명하기 위하여 허리에 삼베를 두르는 것에 대하여 말씀의 역사, 예언 부분에서 읽어볼 수 있다. 아모스서에서:
나는 너희 축제를 슬퍼함으로, 그리고 모든 너의 노래들을 애곡함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고로 나는 네 허리에 삼베옷을 두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의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독생자를 잃은 슬픔 같이 만들 것이고, 거기로부터 결국 쓴 날들 같을 것이다 (암. 8:10);
위에서 “허리에 삼베옷을 두름”은 파괴된 선들 때문에 있는 슬픔을 표시한다; “모든 허리”는 사랑의 모든 선들을 표시한다. 요나서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삼베옷을 입었다. 그리고 말씀이 니느웨 왕에게 왔을 때, 그는 그의 왕좌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위로부터의 도포를 내려놓고, 자기를 삼베옷으로 덮었다, 그리고 재 위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사람과 짐승은 삼베옷으로 덮어지게 하라 (욘. 3:5-8);
위는 니느웨를 멸해지게 하는 악 때문에, 고로 파괴된 선 때문에 있는 슬픔을 표현하려는 표시임이 분명하다.
에스겔서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으로 네 위에 외쳐 발음할 것이다, 그리고 통렬하게 외칠 것이다, 그리고 먼지가 자기들 머리 위에 오게 할 것이다, 그들은 재에서 자신을 굴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희를 위하여 자신들을 대머리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삼베 옷으로 띠를 두를 것이다
(겔. 27:30, 31);
위는 두로를 두고 말해졌다, 세부 사항들은 거짓들과 악들을 위해 슬퍼함, 고로 파괴된 진리들과 선들 때문에 슬퍼함을 표현하고 있다. “외쳐 발음하고 통렬히 외치는 것”은 거짓, 또는 파괴된 진리 때문에 통곡함을 표시한다; “먼지가 머리 위에 오게 함”은 악 때문에 저주되었음을 표시한다; “재에서 자신을 굴림”은 거짓 때문에 지옥에 떨어짐을 표시한다; “자신을 대머리로 만듦”은 자연적 인간이 진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함을 표시한다; “삼베옷으로 자신에게 띠를 두름”은 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함을 표시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오 내 백성의 딸은 삼베옷으로 네 자신에 띠를 두르라, 그리고 재에서 네 자신을 굴려라; 너로 독생자의 슬픔을, 통렬하게 소리내어 울어라; 그 이유가 약탈자가 우리에게 갑자기 닥쳤기 때문이 다 (예. 6:26).
다시:
시온의 딸의 원로들이 땅에 앉을 것이다, 그들은 침묵할 것이다, 그들은 먼지가 자기들 머리에 오게 할 것이다, 그들은 삼베옷으로 자신들에 띠로 두를 것이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그들의 머리를 땅으로 내려가게 할 것이다 (애. 2:10);
위 구절 역시 파괴된 선과 진리의 종류에 따른 비슷한 표현들이다.
이사야서에서:
모압에 관한 예언이다; 그들은 울려고 바윗과 디본으로, 높게 해놓은 장소 안으로 올라갈 것이다; 모압은 느보 때문에, 므드바 때문에 소리내어 악쓸 것이다; 모든 그의 머리들은 대머리이다, 모두 각각의 턱수염이 밀어졌다. 그의 거리들에서 그들은 삼베옷으로 띠를 둘렀다, 지붕꼭대기와 그의 거리들에서 그는 완전히 소리내어 악쓸 것이다, 울면서 아래로 갈 것이다 (이. 15:2, 3);
“모압”은 선들에 섞음질하는 이들을 표시한다. “모압”에 의해 의미된 이 섞음질함 때문에 있는 슬퍼함이 이 종류의 악에 상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같은 것이 예레미야서에서 발생한다:
모든 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모든 턱수염은 밀려졌다; 손이 베어졌고, 삼베옷으로 허리를 둘렀다. 모압의 지붕꼭대기와 거리들에서 통째로 슬퍼함이 있다 (예. 48:37, 38).
히즈키야왕이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뱉은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자신을 삼베옷으로 덮었다 (이. 37:1; 왕하. 19:1);
그가 여호와를 향하여, 왕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슬퍼함이 있었다; 이것이 진리에 맞서 있었다는 것은 그가 자기 옷을 찢음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선을 향하여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삼베옷으로 덮었다에 의해 의미되었다. 그 이유가 말씀에서 진리가 취급되는 곳에서는 선 역시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세부 사항에서 선과 진리, 진리와 선의 천국의 결혼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서에서:
당신께서는 나의 슬픔을 춤추는 것으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내 삼베옷을 풀으시고, 나로 기쁨으로 띠를 두르게 하셨습니다 (시. 30:11);
위에서 “춤추는 것”은 진리들을, “기쁨”은 선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말씀의 다른 구절에서도 그러하다; 고로 “삼베옷을 푸는 것”은 파괴된 선 때문에 슬퍼함을 제거하는 것을 표시한다.
사무엘하서에서:
다윗이 요압에게, 그리고 자기와 더불어 있는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너희의 옷을 찢어라, 그리고 너자신을 삼베옷으로 띠를 두르라, 그리고 아브넬 앞에서 통곡하라 (삼하. 3:31);
선하고 참된 것에 맞서 범해진 사악한 행위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삼베옷으로 띠를 둘러야 한다고 다윗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합이 공평하고 정당한 것에 반대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그가 절멸할 것이라는 말을 엘리야에게서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옷을 찢고, 그의 살 위에 삼베옷을 놓고, 단식했고, 삼베 위에 누웠고, 천천히 걸었다 (왕상. 21:27).
삼베옷이 파괴된 선을 서술한다는 것은 계시록서에서 분명해진다:
그가 여섯째 봉인을 떼었을 때에, 오 큰 지진이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삼베옷 같이 검게 되었다, 그리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었다 (계. 6:12);
“지진”은 선과 진리에 관련하여 교회의 상태의 바뀜을 표시한다; “태양”은 사랑의 선을 표시한다, 그리고 이 선이 파괴되었을 때, 삼베옷이 이를 서술한다; “달”은 신앙의 진리를 표시한다; 이 달을 피가 서술한다, 그 이유는 “피”가 왜곡되고 모독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삼베옷을 입고 재에서 굴름이 악들과 거짓들 때문에 통곡함을 표현했기에, 이것은 면목 없음도 표현한다, 따라서 회개함도 표현한다; 그 이유가 면목 없음의 제일 가는 항목은 자신에게는 악과 거짓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것이 회개의 진정한 것이다, 이것은 면목 없음을 통하여서만 결과되어진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으로부터의 것이 고작 이런 본성 속에 있다는 것을 심정의 고백을 통하여 결과되어진다. 삼베옷을 두름이 면목 없음에 대한 표시이다에 대하여는 왕상. 21:27-29; 그리고 이것이 회개함 속에 있었다에 대하여는 마. 11:21; 눅. 10:13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표현물에 불과하고, 하여 오직 신체의 외적인 표시밖에 더 아무것도 없고, 심정으로부터의 내적인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는 이사야서에서:
이것이 그의 머리가 큰고랭이(갈대) 같이 아래로 숙이는 것, 삼베옷과 재에 눕는 것이냐? 너희는 이것을 단식이라 부르고 여호와께서 열납하는 날이라 부르느냐? 이것은 내가 선택한 단식이 아니잖느냐? 사악한 자에게 묶여 있는 자를 푸는 것, 굶주린 자에게 빵을 떼는 것이 내가 선택한 단식이 아니냐? (이. 58:5-7).

그리고 많은 날 동안 그의 아들 때문에 슬퍼했다. 이는 상태를, 즉 파괴된 선과 진리 때문에 슬퍼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들”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 특히 앞에서 살핀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날들”의 의미가 상태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크게 슬퍼함의 상태, 그 이유는 슬퍼함이 “많은 날”이라 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아들들. 이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들”의 의미가 진리들, 반대 의미로는 거짓들, 또는 진리들, 또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여기서는 거짓들에 있는 이들인데, 그 이유는 야곱의 아들들, 또는 요셉의 형제들에 의해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표현되었기 때문, 고로 신성한 진리를 소멸되게 한 이들, 고로 거짓들 안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딸들이…일어났다. 이는 악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는 “딸들”의 의미가 선들이다로부터, 반대적 의미에서는 악들이다로부터, 또는 선들, 또는 악들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를 위로하려고. 이는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위로함”의 의미가 어떤 것에 대한 희망을 수단으로 마음의 불편한 것, 슬픈 것을 가라앉히는 것, 여기서는 파괴된 선과 진리 때문에 슬퍼함, 또는 불편함이다; 그리고 이 슬퍼함이 말씀으로부터의 해석함들이 아니고서는 가라앉혀질 수 없기에,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과 딸들이 여기서 취급되기에, 이들에 의해 거짓들과 악들에 있는 이들이 의미되었기에, 그러므로 “위로함”에 의해서 글자의 의미로부터 만들어진 해석들이 의미된다. 그 이유가 글자 의미는 일반적인 것들을 가지기 때문, 이것들은 그릇들과 같아서, 진리 또는 거짓들로 채워질 수 있다; 고로 어떤 것을 옹호하기 위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바, 내적 의미로부터 빛을 가지지 않으면 너무나 희미하다; 그 이유가 내적 의미는 천국의 빛 안에 있기 때문, 그리고 내적 의미는 천사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자 의미는 세상의 빛 안에 있고, 인간을 계발해주는 주님으로부터의 천국의 빛 안으로 오기 이전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글자 의미는 내적 의미 안으로 들어와 계발이 개시되기 이전의 단순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에 의해 말씀이 어떤 것을 옹호하는 쪽으로 설명하게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흔히 우리 주변에서 듣고 목격되기도 하는 수많은 종류의 독단적 교조, 이교들도 성경의 글자로부터, 또한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증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분리된 신앙도 주님의 아래 말씀을 가지고 확증되어진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히 사랑하시어 그분은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하여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가진다 (요. 3:16);
위 구절로부터, 또는 다른 구절들로부터도 결말을 볼 수 있는 것은 일들 없이 신앙만으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만에 집착해버리면, 주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 그분을 사랑함에 관하여, 선행과 일들에 관하여를 더 이상 주의하지 않는 쪽으로 유도되고 만다, 고로 이 요한복음의 구절에서 말해진 것쪽으로는 아니다: 즉 “받아들인 많은 이들, 그들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조차 (주셨다). 이는 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진 것이다” (요. 1:12, 13). 인간이 선행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 라고 이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곧바로 이런 해석들 안에서 피난처를 가진다; 즉 율법은 폐지되었다는 것, 우리는 죄악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로부터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 실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공적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등이다; 또한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이런 사항들을 확증도 한다, 마치 바리새인 과 세리의 비유에서 말해졌던 것으로부터 (눅. 18:10-14)와 다른 구절로부터 이다; 비록 이런 사항들이 위 경우 모두에 적용되지는 않을지라도 들이댄다면 변명조항으로 사용은 가능하다.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았든 은총으로부터 천국 안으로 입장될 수 있다는 것말고는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고로 사후 인간과 더불어 남는 것은 신앙 뿐이다. 이것을 그들은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확증할 수 있다. 사실상 말씀의 영적 의미 자체로부터 논리를 편다면, 주님은 모든 이를 향하여 자비를 가지신다, 고로 만일 천국이 자비 또는 은총으로부터 있고,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과는 무관하다면, 모든 이가 구원된다는 논리가 됨에도 그들은 이에 대하여는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보일 뿐이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인즉, 그들이 천국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르는 이유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평화와 기쁨, 행복이 선행 안에 있는지를 알았다면, 그들은 천국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 이에 대한 지식들이 그들로부터 온통 감추여 있다.
다시,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이 육체와 더불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방식 외에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심판의 날에서 이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도 글자 의미에 따라 설명하는 말씀의 많은 구절로부터 확증도 한다, 이런 확증과 동시에, 주님께서 말하신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말씀(눅. 16:22-31), 또는 그분이 강도에게 말하신 것, 즉 “참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 이 외에 다른 구절들에 대한 생각을 전혀 곁들이지 않는다. 신앙만에 있는 이들이 이렇게 믿는 이유는 만일 그들에게 육체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이런 식의 부활이라면 모두 부정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적 인간을 알지 못하고 납득하지도 못하는 바, 사후 내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선행 안에 있는 이들이 구원된다는 것, 그 이유는 내적 인간이 선행 속에 있기 때문이다는 것 또한 모르고 납득도 못한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선행의 일이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 불구자를 돕는 것 등등에만 존재한다고 밖에 달리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것을 말씀의 글자로부터 확실히 확증해 쥐고 있다. 그러나 선행의 일들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선하고 참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또는 올바르고 공평한 것을 사랑함으로부터, 올바르고 공평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분리된 신앙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의 특별난 교조를 확증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내면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에 애착함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외적 시각, 또는 보다 낮은 통찰력만을 가지는 바, 이로부터서는 더 높은 것들을 보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어둠 같이 더 높은 것이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들은 거짓들을 진리들로, 진리들을 거짓들로 본다, 고로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으로 해서 그들은 푸른 초장(선한 풀밭)을 짓뭉개고, 말씀의 신성한 샘의 맑은 물, 또는 말씀을 더럽힌다, 이 말씀들 같이 이다:
너희가 푸른 초장을 먹은 것, 그리고 너희 발로 남은 너의 초장을 짓뭉갠 것이 너희에게는 작은 일이더냐? 너희가 맑아진 물들을 마시고, 너희는 나머지 물을 너의 발로 휘저은다; 너희는 너희가 모든 유약한 자들이 해외로 흩어질 때까지 그들을 너희 뿔들로 치고 있다 (겔. 34:18, 21).

그리고 그는 자신이 위로되는 것을 거절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었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는 통곡하면서 내 아들에게로, 무덤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이는 고대 교회는 멸해질 것이다를 의미한다. 이는 야곱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는데, 그가 고대 교회를 표현함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아들”인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영적 평면, 또는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그리고 “슬퍼하며 무덤으로 내려감”의 의미가 죽어짐이다. 그리고 이 죽어짐이 교회, 또는 신성한 진리를 서술할 때, 이는 멸해지다 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는 내면의 슬퍼함을 의미한다. 이는 “눈물을 흘림”의 의미가 마지막 수준까지 이른 슬픔이다로부터, 고로 내면의 슬픔이다. 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죽은 자를 놓고 외적 슬픔인 눈물을 흘림을 가지고 내면의 슬퍼함을 표현했다. 이에 대한 참고 구절로 아래를 읽어보자:
그들이 요단 건너인 아닷의 타작마당에 왔을 때, 그들은 크고 비탄에 잠겨 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는 칠일 동안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슬퍼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토지의 주민, 가나안족이 아닷의 마당에서 슬퍼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에게는 비탄에 잠기는 슬퍼함 이다 (창. 50:10, 11);
그리고 아브넬을 두고 다윗이 눈물을 흘림에 관하여:
그들은 헤브론에 아브넬을 매장했다; 그리고 왕은 그의 음성을 높혀 아브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울었다 (삼하. 3:32).

36절.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이집트,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그리고 미디안 사람들이 그를 이집트에 팔았다. 이는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어떤 진리 속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 의견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디안 사람”의 표현함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의 의미가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리고 “판다”의 의미가 멀리하다 이다로부터; 그리고 요셉의 표현함이 신성한 진리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이것이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에 있는 이들에 의해 “이집트”인 기억 속의 지식들에게 팔리운다, 또는 멀어지게 된다 라고 말해질 때, 이것은 그들이 그것들에 의견을 구했음(상담했음)을 표시한다; 그 이유가 단순한 선으로부터 진리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감각들의 오류들에 의해, 고로 이로부터 있는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해 아주 많이 인도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하면 이상한 교파, 즉 논리상 맞지 않는 교리, 얼토당토 않는 교리, 한마디로 제멋대로 지껄이는 부흥 설교인데도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이때의 이 인파의 대다수가 미디안 사람, 즉 단순한 선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는 자 일지 모른다. 역자주.)
28절에서 잠간 언급한 것은, 미디안 사람에 의해 요셉은 구덩이로부터 꺼내어졌고, 이스마엘 사람들에 팔리웠다; 이 정황으로 보건대, 요셉이 이집트에서 팔리려면 이스마엘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이 아니고, 미디안 사람에 의해 팔리웠다고 기록된 이유는 이스마엘 사람이 단순한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미디안 사람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요셉, 또는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는 팔리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에 의해서만 팔리울 수 있다; 그 이유가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신성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으로부터 알고 있으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인들은 대체로 두 종류로 구별된다; 즉 선 안에, 그리고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천적 부류들이고,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은 영적 부류들이다. 이 둘 사이는 큰 차이가 있다. 선 안에 있는 이들은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함에 애착하는 이들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로부터 자기들의 선행에 어떤 보답을 기대함이 심정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대하는 보답이라면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행함 안에서 환희(기쁨, joy)를 지각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이들 역시 선을 행함의 애착 안에 있다; 그러나 선 자체를 위하여서가 아니고, 선을 행함이 명령된 사항이기 때문에서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답을 기대한다; 그들의 환희는 이 보답으로부터, 그리고 영광됨으로부터 있어진다.
이상 살핀 결과, 분명해지는 것은, 선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내적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 한편, 진리로부터 선을 행하는 이들은 그것을 얼마의 외적 애착으로부터 행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차이가 분명해지는 것은, 전자는 내적 인간이다는 것, 후자는 외적 인간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인간인 이들은 요셉에 의해 표현되는 신성한 진리를팔 수 없다, 즉 멀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감각들의 오류들, 고로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인도당하지 못한다(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외적 인간인 이들은 그것을 팔 수 있고 멀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교리나 교리 선생들(목사들)로부터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기억 속의 지식에서 의견을 듣는다면, 그들은 오류들에 의해 한방에 자신들을 끌어가게 내놓는다; 그 이유가 그들이 내향의 명령(dictate)을 가지지 않고 있어서이다. 이런 이유로 요셉은 이스마엘에 의해 팔리우지 않고 미디안에 의해 팔린 것이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 이는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신하 (chamberlain, 시종)의 의미가 내면인 것이다로부터, 이는 아래에서 말한다; 그리고 “바로”의 표현함이 기억 속의 지식들이다로부터; 그 이유가 “이집트”에 의해 일반적 측면에서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의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역시 같은 의미 선상에 있다; 그 이유는 말씀에서 토지, 나라에 의해 의미되는 것은 거기의 왕에 의해서도 의미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기억 속의 지식들이 “바로의 신하”에 의해 의미되는 이유는 신하 (시종)의 업무가 왕의 내무적인 것들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신하들은 신하들 중 더 뛰어난 자들인데, 이는 원어에서의 이 단어의 의미로부터도 분명해진다.

친위대장. 이는 해석을 위해 제일에 속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제 일인 자(prince)의 의미가 제 일인 것이다로부터 알게 된다. 여기서 “친위 대장”이 해석을 위해 제일인 것을 표시하는 이유는 취급된 주제가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이 진리가 단순한 선으로부터의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기억 속의 지식들에 의견을 구함에 의해 팔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글자 의미로부터 해석함들 이다; 그리고 “친위대들(guards)”에 의해서는 섬기는 것들이 의미된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