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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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성한 말씀의 빛에 의해 안내된 스위든볽은 본질과 인물에서 하느님의 단일성을 보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인간성을 입으신 하느님이시고, 성령은 선인 것과 복된 것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무한한 힘이다. 이 진리는 건전한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명료하게 지각하지 않으면, 성경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는) 누군가는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수백만도 넘는 심정들이 동경해왔던 아름다운 인품-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이 없이 오히려 무한하게 드높이면서 한분 하느님을 즐겁게 흠모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인간 형체,
그가 이교도이든, 터키인이든, 또는 유대인이든
사랑하여야만 한다.
자비, 사랑, 그리고 동정이 살고 있는 곳
거기에 하느님 역시 살고 계신다.

위와 같은 주님에 관한 개념에 의해 영감받아 누리는 기쁨은 따뜻함, 빛, 활동이라는 세 겹의 영광을 지닌 태양과 비슷하다. 또는 누군가가 혼과 마음, 몸의 행복한 균형으로 이룬 아름다운 인간 존재를 바라보고 만족해 하는 것과도 견주어 볼 수 있다. 혹은 씨가 발아해서 꽃을, 그리고 꽃에서 감미로운 열매로 되는 연속의 완전함과도 비교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모든 것들의 본성에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얼마나 이해가 쉬운지…얼마나 온전한지…! 그렇지만 이 개념이 심어지고 자라며 풍성해지기까지 스위든볽의 수고는 얼마나 컷을까! 우선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널리 퍼진 이론과 믿음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관”이 야기하는 논쟁과 추론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뿌리째 뽑아냈다. 이는 마치 후렌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연역적 추리라는 학자들의 방식을 자연을 직접 관찰함이라는 것으로 대체한 것과 같다. 실로 스위든볽과 베이컨, 그들 모두 영원히 있는 진리의 부름에 순종했다. 그들 모두 새 시대 속에서 맞는 곤경과 고독함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들은 다가오는 세대들을 위해 더 신뢰되고 확고할 수 있는 안내서를 제공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 당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 내뱉는 적대 행위에 홀연히 맞서 자신들의 의견들을 떠받혔다. 그들은 “대중이 가장 애호하는 교리들은 말다툼을 즐기는 것이나 툭하면 싸우는 것, 혹은 허울좋은 것이나 텅빈 것들” 임을 발견했다. 동시에 “가장 지력있다는 자는 그 시대나 그 당시 대중의 판단에 동조함으로 명성을 끌어내는 쉬운 방식을 좋아하는 자들”임도 알았다.
베이컨과 더불어 스위든볽 역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 퇴보된 학문 종류(연역법)는 주로 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군림했었다. 이 학교 선생들은 날카롭고 강한 지력과 풍부한 여가 시간을 즐긴 자들이나 그들이 확보한 학문 재료는 부피로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적은 부피의 학문 재료에 갖은 지력을 다 쏟았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책들에 존재하는 땀흘린 학문의 거미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스위든볽이 제공한 하느님의 통일성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이 귀중한 이유는 이 생각이 말씀을 잘못 읽어 비롯되는 성경 글자로부터의 불쾌함, 그리고 과격한 사람이 그분에게 인간 속성을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세운 신론에서 진짜 신위(Deity)를 식별하는 통찰력을 주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은 그의 “진실된 기독 종교”로부터 추출하였는데, 이 글은 얼마나 그가 더 고상한 신앙으로 위 같은 비기독교도의 개념을 대신하려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그 이유는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그 외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의지는 하나이다. 그분은 선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선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하실 수 없다. 영계에서 그분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을 그들은 능력과 의지가 하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획득한다. 또한 하느님은 선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선을 행하시는 동안, 그분은 그분 자신 안에 계시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떠나가실 수 없다. 이로부터 명백한 것은 그분의 전능은 선이 확장되는 영역 내에서 진행되고 작용하는데, 이것은 무한이다.”
“하느님이 누군가를 정죄 하실 수 있고, 누군가를 저주하시고, 누군가를 지옥으로 던지시고, 누군가의 혼은 영원히 죽어야 한다고 미리 예정하시고, 상해자에게 되갚고, 화내고 벌 주실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믿고 나아가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지 명백해질 것이다. 그 이유가 그분은 인간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는 것, 또는 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것 조차 하실 수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전능은 마치 세상에서 자기가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좋을대로 할 수 있는 왕의 절대적 권력이 죄를 면제하기도하고, 정죄도 하고, 죄지은 자를 무고한 자로 만들고, 신뢰못할 자를 신뢰할 자로 선포하고, 무가치한 자를 높이 추켜세우고, 당연히 상받을만한 자 위에 당연히 상받지 않아야 할 자를 내세우는 왕의 권세; 그 뿐만이 아니라 무슨 핑계든 만들어 자기 신하들의 물품을 뺏고, 심지어 그를 죽음에 처하게 하는 왕의 권세와 같다고 말한다. 신성한 전능에 관련하여 있는 위 같은 불합리한 의견, 신앙, 교리로부터 이에 맞먹는 많은 거짓들, 오류들, 그리고 흉측한 망상들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었고, 그만큼 교회 안에는 신앙 문제들, 신앙 갈래들, 신앙 분열이 돌출되어졌다. 어쩌면 이런 오류와 망상이 큰 호수로부터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듯 철철 넘치고 있을지 모르고, 어쩌면 아라비아 사막에서 구멍으로부터 기어나와 햇볕에 몸을 녹이는 뱀들 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이런 오류나 망상은 전능과 믿음, 이 두 단어 밖에 더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설교나 신앙 강연은 사람들 앞에 육체의 감각들에 발생하는 추측과 우화와 하찮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 이유가 이성이 전능과 믿음이라는 단어 모두로부터 추방되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성이 추방되어지면, 인간의 생각은 자기 머리 위를 나는 새의 이성보다 과연 얼마나 더 수준이 높을까?”
그러나 스위든볽의 가르침들은 맑게 개인 하늘 아래서는 산 정상을 볼 수 있듯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성한 존재의 본성은 사랑과 지혜와 누군가에게 쓸모 있음(use)이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어느 때이든 누군가를 향해서이든 그분의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으시는 분이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좋은 사람이 되어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당사자가 자기 개선에 무능하기 때문임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자신만에 생각을 꾸준히 집중시키는 사람은 선견(vision)을 결코 가져 보지 못한다. 이들의 혼은 자기 주위에서 홍수 같이 일어나 자기 수준을 초과해 휩쓰는 실질적인 것(materiality)에 깊이 빠져 있다. 이들은 자기들 같이 어두운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들은 자신을 구원하는 것 또는 누군가를 돕는 것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책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포옹하는 영원한 사랑의 형상을 빛나게 하고, 더 깊은 죄로 빠지려는 자신을 억제하려 노력한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귀머거리요 소경이시다”라고 불리운 이유는 그분은 인간의 죄를 보지 않은 듯 계시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자기의 자녀를 꺽거나 징벌하시지 않고, 그들이 그분께 협력하고 감화 받는 한, 그들을 살짝이 구부려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교리가 있다.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됨 따위는 없다는 것, 모든 사람은 천국을 위해 태어난다는 것, 마치 씨가 꽃이 되기 위해 태어나듯, 작은 개똥지빠귀가 노래하는 새가 되도록 작정되어 있듯, 물론 이 모두가 생명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조건에서 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말을 바꾸어 보면, 모든 이는 구원의 섭리 속에 있어 왔다는 것, 모든 이는 거듭나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일 그가 천국으로부터 떠나 자신을 생각하고 살고 있다면 이는 그의 과오 이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고귀한 생각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그곳으로에 가고 있다; 그리고 그가 타인을 섬기는데에서 행복을 즐길 때 그는 거기에 머물고 있다 등등이다.
혹자는 다윈(Darwin)이 천국과 지옥에 관련하여 웃음거리를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저술에서 천국과 지옥은 웃음거리라는 단어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이것은 인간 당사자가 죄를 지을 수 있고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주제가 제 삼자의 견해 수준으로 밀려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의 저술을 통해 우리는 중세기 식의 지옥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악을 스스로 확증하여 사랑하는 자, 자기 심정에서 하느님을 고집적으로 부인하는 자가 가야하는 정신적 지옥이 있다. 이들이 글자 그대로의 불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너무 심하게 벌할 때, 하느님께서는 양심의 번민 조차도 거두어 가신다. 이렇게 조치를 취해주시므로 해서 이들은 천국적 느낌의 상태들 안으로 자신들을 놓도록 강제 당하는 일은 결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천국적 기쁨으로는 숨막힐 뿐이고, 자기들이 가진 유일한 쾌락들을 강도 당했다고 아우성이다. 오로지 이들은 지배욕과 이기적 본능들로 “불타고” 있다. 이들은 올빼미나 박쥐 같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있다. 이들은 토론하고 소송하고 싸운다; 이들은 마술을 끝도 없이 실시하여 “가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은 공기와 음식을 위해 고되게 노동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자는 언제나 나무를 자르고 풀을 깍기만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지상에서 이들은 보상을 위해 대단히 맹렬하게 일했기 때문이다. 구두쇠들은 자기들 심정에 상상의 돈자루를 꼭 껴안고 있다. 싸이렌(Siren, 바다의 요정)들은 자기들의 천한 모습을 미화하려 고통스럽게 애쓰며 석탄불의 침침한 빛에서 비쳐진 자기들의 형상을 즐기고 있다. 사기꾼들의 각 파들은 저마다 다른 사기파의 약점을 찌를 수 있다하여 온갖 재주를 다 발휘하면서, 적수에 대한 불길 같은 쾌락이 그들의 상처 있는 얼굴에서 소름끼치게 빛을 내고 있다. 잔인하고 어리석은 의견들을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그들은 자기들의 백치같은 성질과 바보같은 영혼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지꺼린다. 이들이 쓸데 없는 자기들의 노력 끝에 녹초가 되면, 모든 악귀, 땅신령, 마법사, 강도들은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마치 열병을 앓는 꿈인 미친 몽상이다.
위와 같은 불행한 존재들이라 해도 주님으로부터 경멸 받거나 주님께서 방치해두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그들을 외적인 질서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애착에 의해 인도함이 가능할 수 있는 한, 그분은 자기만 위함이 타인을 위함 속에 있어지도록 그들을 유도해보신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선일 뿐 아니라 피해야 할 것이 악임도 보게 하신다. 이들이 숭고한 목적인 공적인 복지 보다 오히려 명성과 영예에 관심을 둘 때 그들 안에 있는 야망의 불을 살아있게 해두신다. 빛의 자녀들이 한 사람이든 다수에 의해서이든 압제의 모든 형태와 야수같은 세력에 맞서 인간성을 수호하려는 것을 돕겠다면 필시 배워야만 하는 진리를 이들은 불쾌한 진리들이라고 자기들 마음을 날카롭게 세운다. 최악의 악마들 조차도 그분만이 자기들 가까이 계시고,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잘 배려해주는 신성한 은총을 가지신 것을 억지로 부인하면서도 그분을 향해 느껴지는 매혹적인 감각 만큼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자기 동료가 바보요 악행자라고 격분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설사 자기의 의로움을 증거까지 들이댈 수 있다해도 격분만큼은 하지 않게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발잨(Balzac)이 이렇게 주장했다. “하느님은 온유한 영혼들이 어쩌다 저지른 죄를 벌하시기 위해 원수 갚는 식의 잔인한 방법으로 영원토록 복수하신다는 비난으로부터 하느님이 빠져 나올 기틀을 스위든볽이 제공하였다.”
스위든볽의 모든 증거에 따르면, 사후 우리는 이 장소 저 장소를 가는 여행자 같이, 갖가지의 흥미있는 대상에 친해지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도중에 각 개인으로부터 뭔가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관찰하고, 판단하고, 비평하고, 그리고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의 말들을 듣기도 한다. 우리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 타인의 의견을 챙겨 가서 우리의 정신적 도가니에서 그것을 걸러내고 테스트도 한다. 각각의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지식의 더 세련된 종류와 모든 것의 자산인 더 진실된 지적 개념을 추출한다. 지상에서 인간은 비록 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경이로운 생각들을 지녔다 하더라도 듣는 자가 없기에 결코 말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저세상은 이와 많이 다르다. 모든 자는 함께 살고, 함께 배운다. 모든 영의 존재들은 좋은 존재이든 나쁜 존재이든 마음(mind)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의 경우 납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많은 부피의 생각들도 즉각적으로 서로 교통한다. 그리고 앞쪽으로 더 여행해서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무들을 선택하고, 흥미를 더하고 더 슬기로워지고 더 분별력 있어지고 더 행복해져 간다.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자연적 수준의 사실들에 의해 영혼의 날개가 부러진 이들에게 위와 같은 전망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대단한지! 드높은 우정 관계와 생명 있는 교제에 굶주린 이들에게 위 전망은 그 얼마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지! 내가 믿는 바, 천국에서도 지상에서와 같이 우정은 꾸준히 지속됨에 의해서, 또는 바뀌기도 함에 의해서 지탱해간다. 그 이유가 의식의 분야에 들어가는 생각이나 정서를 다양해지게 하고 생기를 주는 것이 우정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닮은 것에는 관심을 많이 두려하고 나와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천국에서, 때로는 여기 우리 사이에서도 영혼이 비슷한 친구들은 마치 태양의 떠오름에 있는 다양해지고 아름다운 색깔들 같이 서로를 차감계산하거나 메워 보충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그들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주고 받는다. 우리의 친지들이 유아 시절의 우리의 몸을 먹이고 입힐 때 같이 서로의 혼을 위해 일한다. 나는 내 경험으로부터 위 내용을 실감하여 가져 보았던 놀라운 느낌이 있다. 나는 과거 어둠과 침묵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감추어져 있게 되고 말았던 내 안에서 접히어 포개져 있었던 가능성의 선각자로 내 선생님과의 우정 관계를 만들었던 매우 드문 행복한 사람이다. 나와 선생님과의 생활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대목이 있다. 이것들은 땅을 초월하여,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 영원 속의 것을 미리 맛봄이 나로 명확하게 해준 것은 항구적이고 모두를 포옹하는 봉사가 우정에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천국에서 우리는 “우리의 수고함으로부터 쉰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슬픔이나 실패나 시험을 통하여 자기의 구원을 성취해 평화와 순진의 안식에 도달한 경우일 때를 뜻할 뿐이다. 우리가 쉬게 된다는 그 “수고함들”은 육 속의 장애물, 빵이나 옷, 안식처, 전쟁을 위한 투쟁, 그리고 소득과 권력을 위해 서로 물리쳐 이기려는 더러운 술책들 등등이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일의 거대한 분야와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열심을 내는 것과 끝이 없는 흥미가 이 세상에서 몇 개의 일에만 충실했던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천국은 유용함(use)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의 직종은 실로 방대해서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그것들은 무한하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라도 말해보자. 이타심 강한 부모같은 사랑을 지닌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온 어린아이들을 양자로 삼고 돌본다. 어떤 이는 소년소녀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배우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진지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방 국가의 모든 이는 그들이 지녔던 한정된 믿음들을 확대하고 더 세련되도록 새 진리들로 가르쳐진다. 죽음을 통하여 참 생명으로 일어나는 모든 이 각각을 돌보는 특별한 사회도 있다. 이 사회는 영들의 중간 영역으로 오는 신입자를 불친절한 악령들로부터 방어해주고, 지옥에 거주하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계속 안내를 맡고, 서로의 아귀다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어 가능한 한 신입자가 비참함을 덜 느끼게 해준다. 모든 인간 존재들은 자연계와 영적 왕국에 동시에 살기 때문에 천사들은 각 사회로부터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뽑혀지고, 천사들은 인간의 욕망과 생각의 나쁜 습관을 조금씩 거두어지게 하고 어두운 행위를 사랑했었던 것으로부터 빛의 행위의 기쁨 안으로 부드럽게 돌아설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 안의 내키지 않는 자세는 천사들이 사랑하여 섬기는 일을 제지하려든다. 그런 상황에서 조차도 천사들은 인내와 확고한 신앙이 있어 그들에게 되돌아 간다. 이 천사들이야 말로 신성한 충성스러움의 형상이요 그분의 메신저 아닐까? 이 천사들은 누군가의 과오를 거의 보지 않으며 더욱이 그 결점을 깊이 논하지도 않는다. 그대신 이 천사들은 마음 속의 아름다움들을 연구하고 반대 경향까지 선으로 해석해보려 한다. 이런 그들의 재능을 밀접하게 따라붙음으로 천사들이 되어져가는 남자와 여자는 계속적으로 더 고상한 업무를 담당하고, 그럴 때마다 있게 되는 새로운 상태는 그들에게 새 힘의 유입을 가져온다. 이것이 주님에 의한 약속, “충분히 채우고 흔들어 채우고, 눌러 담고, 넘치게 담아서” 라는 구절에 해당된다. 금빛의 하프들과 끝이 없는 찬양의 노래들 같은 말씀의 표현은 (성서 조소론자에게) 반대 논평을 불러 일으키는 근거를 제공했고, 게으른 성인들이라는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인상까지 주었지만 이는 그림으로 나타난 외관일 뿐, 천사의 일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만족스러워질 때 심정이 기쁨으로 부드럽게 수금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스위든볽의 가르침의 빛으로 볼 때, 천국의 삶은 진실된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모든 종류의 봉사, 가사일, 시민적, 사회적 일, 그리고 영감된 일 등등이 수행되고 그로 인해 즐거워하고도 있다.
우리에게 통보되는 것이 있다. 세 부류의 천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류의 주요한 흥미는 지식과 실제적 일, 즉 지옥의 침입에 맞서 천국의 전진 기지를 보호한다. 둘째 부류는 새 사상을 철학적으로 다루고 시작을 하게 하는 이들이다. 셋째는 추론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은 타인을 느낌으로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위치에 자신들을 놓되 지각의 힘과 빠르고 직접적으로 그 사람을 위해 행동한다. 이 마지막 째의 부류가 무화과 나무에 비교된다. 이 나무는 꽃 피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바 그것의 잎을 내고 동시에 열매 맺는다. 그곳에서 똑같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무수한 그룹들과 사회들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개의 천국이 있을 뿐이다. 또는 천국은 하나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수많은 세포나 기관, 수족, 혈관, 신경 내지 섬유 등등으로 구성되나 하나인 것과 같다. 보다 작은 모든 목적들은 공통의 선에 종속되어진다. 한마디로 모든 영광, 모든 이상향, 모든 높은 바램-가장 고상한 마음들의 꿈들이 귀에 속삭였었던 모든 것, 그리고 미처 생각에도 없었던 무한하게 많은 가능성들이 불멸의 영원한 햇빛에서 실질적인 실체가 되어간다.
천국에서 우리는 여인의 아름다움, 남자의 건장함, 섹스(sex)들 사이에 있는 이기심 없는 사랑,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 교우관계의 기쁨, 그리고 위로함과 감동함의 절묘한 감촉의 생생한 힘 등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물질적 한계로부터 자유해져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천국의 생활을 스위든볽이 명료하고 권위있게 밝혀주는 것이 참말일진대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거기서의 교육 목적에 대한 뚜렸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천국의 세계는 영체로 옷입혀진 혼들의 방대한 왕국이고, 모든 이들은 하나의 장대한 선용함 안에서 상호관계를 가지는 바, 함께 묶여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더 높은 발달, 그럼으로해서 모든 이의 더 큰 선을 위한 가능성이나 흥미, 그리고 발달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 많은 무리들 중에 단하나의 개개인도 없다. 그들은 이런 발달을 서로서로에게 의존하는 한편, 각각의 존재는 자기 고유의 길에서 더 완전하게 성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더욱 많이 수여된 행복에 더 응답하여간다.
만일 우리가 지상의 생활을 지적으로 검사한다면, 천국을 규율하는 선용의 법칙이 지상에서도 똑같이 규율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과학이 우리를 가르치는 바, 몸의 각각의 부분은 각각 다른 부분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연 안으로도 위와 꼭같은 법칙을 불어 넣어 두셨다. 광물 왕국은 연합하여 식물이 지탱하는 것을 섬긴다. 식물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리고 광물, 식물 둘 다는 인류를 섬긴다. 각자가 모두에게 그리고 모두가 각각에게 유익을 주는 이 법칙은 인간의 생활을 규율하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칙을 악용해서 타인의 두뇌와 수고함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빠르던 늦던 응보가 그들 뒤를 따라 간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인의 복리 증진이라는 선함의 제단에 섬김의 제물을 놓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있는 인간의 대열로부터 낙오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섬김의 제물은 세 가지 방법, 즉 손으로, 지성으로, 그리고 우리의 정서적이면서 미적 능력을 가지고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람을 주관적으로 관조한다면, 경우가 달라질지 모른다. 어떤 인물은 자기의 사용의 법칙을 그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망쳐놓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남아있게 되는 사실은 있다. 즉 객관적 차원에서, 우리의 전체 생활과 그 주변환경은 사용의 법칙을 가르친다는 것, 그리고 이 법칙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적절한 이상향을 현실화하는데 최선의 가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안내자 되는 이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방법은 배워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각자의 취미와 만족감을 채우면서도 자기 외 많은 사람의 선에 하모니를 이루는 특별한 활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다음 각자는 사용의 법칙 속의 영원한 삶 안에 자기의 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 이세상 또는 저세상 모두에서 살아가는 제대로된 방법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형태, 그리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지금 재촉하는 것은 이 사용의 법칙의 좋음을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 그 법칙에 우리 자신이 익숙해지게 하고, 이 법칙에 맞는 우리의 할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 체계는 이러할지 모른다. 즉 우리 주변을 에워싼 다양한 사용 법칙의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모두 가르치는 것, 동시에 실제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 그리고 우리가 돌려주어야 할 영적 섬김들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 뒤 각자는 자신을 매우 강력하게 끌어 당기는 업무를 선택하여 밀고 가는 것이다.
우리 생활의 모형으로 천국의 생활을 스위든볽이 내세우는 이유는 천국의 생활이 지상의 교육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항간에서 늘 말한 것은, 우리는 천국을 위해 준비하도록 지상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한바퀴 돌려 말하면 이런 진리도 발견된다. 즉 우리에게는 지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천국에 관한 지식이 주어진 것이다. 아름다운 환상이 나사렛 동네의 일터 안으로 와야만 한다. 나는 스위든볽이 천국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 지상의 학교들을 위해서도 적합하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서 어린이들은 주로 “표현물”을 수단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더 설명하면 가르치는 도구는 그림이나 교훈적인 연극, 그들이 방문하는 풍경 등으로 이것은 예증과 실예를 수단으로 가르치는 셈이다. 그들은 서로 돕는 일 중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일을 위하여 교육도 받도록 인도된다. 어쩌면 이 방법은 근대의 교수법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나 역시 이와 유사한 교육 방법으로 지식을 쌓고 성취감을 맛보아 행복했었다고 회상된다. 더 나아가 이 방법을 수정 보완한다면 일반적 교수 방법에도 커다란 효용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어렵지 않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있다. 저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만져서 알 수 있는 현상은 그곳의 거주민들의 정신적 상태가 직접 체현된 것이다고 스위든볽이 우리에게 알려준 대목이다. 우리가 근본이 되고 필수적인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천국의 가장 경이로운 광휘를 아는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항은 지상의 육체와 내적 자아가 분리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중간 영계는 그가 잘 아는 사물과 그에게는 너무나 신기하여서 알 수 없는 사물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거기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같고 또 언어가 표현하는 기초되는 많은 사실들을 습득하는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소름끼치는 꿈을 꾸며 자다가 깨어났을 때 무엇이 그에게 달콤한 편안함을 줄까?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웃는 얼굴이 깨어나는 자기를 바라볼 경우일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상황이 지상에서 잠들고 천국에서 깨어날 때와 거의 같을 것이라고 강력히 믿고 싶다. 또한 내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나의 친구 하나하나가 나로 하여금 이 세계와 아침의 저쪽 더 행복한 땅 사이를 연결 가능하게 하는 고리들이라고 믿는 내 신앙은 흔들려 본 적이 결코 없다. 한순간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들의 손의 감촉을 느끼기를 중단하거나 그들로부터의 상냥스런 말 듣기를 중단할 경우 내 혼은 슬픔과 더불어 고개를 떨군다; 그러나 내 신앙의 빛은 내 창공으로부터 흐릿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 그리고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잃은” 내 친구들이 자유한 것에 즐거워한다. 나는 누군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의 삶은 죽음 보다 더 잔인하다-삶 속에는 사람 사이를 쪼개지게 하는 것도 있고 이간질도 있게 한다. 그 반면 죽음은 실제로는 영원한 삶이고, 다시 합쳐지고 재회하게 해준다. 내가 믿는 바, 내 육체의 눈 속의 눈은 다가 올 세계에서 열릴 것이라고…나는 내 심정의 나라에서 의식하는 생활을 단순하게 꾸려 가리라는 것이다. 내 확고부동한 생각은 지상의 일시적인 것을 보고 말하는 물질의 눈을 거슬러 물질 세계 너머에 있는 시야를 뒤따르고저 일어나고 있다. 이미 가서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한 가지 사실에 반대할 이유가 많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지 않는가? 나는 내 의심함들이 먼저 간 영혼들을 슬프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실수라는 위험과 한 개의 주장만을 택하고 싶다. 내 택함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나중에 파악될 것이다. 불멸함이라는 한 가지 진리가 있기에 나는 나를 떠난 사람의 기쁨 위에 의구심이라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이곳에서 아래쪽을 더듬거리는 사람과 하느님의 빛에서 진실로 보기를 올바르게 배우는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한지에 대해 나는 가끔은 궁금해 한다. 보이지도 않는 태양에서 그림자를 추측만 하는 사람에게 어둠은 실로 어떠할까? 지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사랑해왔던 이들을 영적으로 접촉하는 노력은 그 얼마나 가치있는가! 확실한 것이 있다. 우리가 어떤 고귀한 애착이나 순수한 기쁨에 의해 접촉될 때, 우리는 죽은 사람을 아주 부드럽게 회상하고, 그들에게 강력하게 빨려드는 경험의 아주 달콤함이다. 신앙을 항상 이와같이 의식함은 죽어야 할 운명의 얼굴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불운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거두어진듯 여겨지는 기쁨을 계속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용기의 횃불을 제공한다. 우리가 천국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에 확신이 있을 경우, 저 세상이 “또다른 세상임” 같은 생각은 사그라든다. 우리가 아주 많이 주장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에 소망을 더해가는 것, 그리고 우리 주위의 어둠을 우리 속에 내재하는 천국의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 가자는 것이다. 특히 지금, 이곳에서 말이다
나는 험프리 다뷔(Humphrey Davy)경의 말을 감동을 가지고 읽었다. 그에게서 과학과 신앙과 이타심은 놀랄만한 수준에서 결합되고 있다: “나는 타인들에 있는 수준 높은 지성과 마음의 품질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천부적 재능, 능력, 지력, 공상력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나더러 가장 기쁜 것, 그리고 나에게 가장 유용하다고 믿어지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다른 축복 조항보다 확고한 종교적 신앙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가 확고한 신앙은 삶을 선량해지게 하는 훈련장으로 만들고, 지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려할 때 새 희망들을 창조하기 때문에, 그리고 부패와 존재의 파멸을 내던지고 모든 빛들의 가장 우아함을 드리우게 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서 조차도 생명을 일깨운다, 그리고 퇴폐와 부패로부터도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상기시킨다; 시달림과 치욕이라는 도구를 낙원에로 승강하는 사다리로 만든다; 지상의 희망들의 모든 결합들 넘어의 먼 곳, 즉 쾌락주의자와 회의주의자가 어둑어둑하고, 부패하고, 전멸되어짐과 자포자기라 하는 곳으로부터 종려나무와 시들지 않는 꽃에 관한 가장 즐거운 환상, 복됨의 동산들,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들이 보장되는 곳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인류를 사랑하는 자, 고요하고 과학적인 사람인 험프리 다뷔씨의 강한 손을 내 손에서 느끼는 것은 마치 오순절 다락방의 경험 같다. 그는 자기 생각을 후원하는 조정자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옛 믿음들 속에서 많은 모순들을 보았다. 처음에 그는 가난한 가운데 고생하며 지내왔는데도 (돈을 벌 수 있는) 그의 발명품인 안전등을 세상에 무료로 주었다. 그도 자연적 존재 인지라 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의 흔들리지 않는 교제를 간직했다.
진실로 나는 어둠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았었다. 그리고 그것에 평행하는 영향력을 산출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보다 영 안에 있는 나는 아침을 걷는 이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 마음의 어둡고 낙심된 분위기가 가을의 마른 잎 만큼이나 두껍게 내 길에 깔린 것을 뜻밖에 마주친다면 어떠할까? 다른 사람이 내 앞서 그 길을 여행했다. 나는 사막이 하느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가는데는 사막일지라도 푸르고 기운나게하는 들판과 열매 풍성히 열리는 과수원 만큼이나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또한 심오하게 부끄러워해 왔고, 광대한 창조 사이에서 나의 보잘 것 없음도 실감하기도 했었다. 더 배울 수록 덜 생각하려 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내 감각-경험을 더 이해할 수록 내가 더 지각하는 것은 그 경험이 생명의 기초로서 부적당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염세주의자와 낙천주의자의 견해의 요점이 아주 기술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내 앞에 자리잡는 때가 있다. 이럴 경우 나는 영의 순전한 힘만을 수단으로 실제적이고 함께 살 수 있는 생활 철학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의지를 사용한다,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인 허무는 거절한다. 에드윈 맠햄(Edwin Markham)은 그의 시, “너의 선택을 손에 잡으라” 안에 서로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와 오늘날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두 다른 신념을 이렇게 오묘하게 써내려 갔다:

장미나무의 큰 가지에 따끔따끔 찌르는 가시가 있다:
우아한 백합은 습지에서 살아야만 한다;
나비의 색깔들은 한번 호흡함에서 소멸하고 있다:
도로의 끝에 죽음의 집이 있다.

아니다, 아니다! 가시에 우아한 장미가 있다;
강의 습지에서 백합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나방도 잔디의 꽃 만큼 아름답다;
도로의 끝에 하느님께로 가는 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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