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증언하는 스위든볽

III
타인이 증언하는 스위든볽

누군가가 나를 두고 이런 말을 할런지 모른다. “그녀는 눈멀고 귀먹었는 바, 작은 집단에 갇혀진 의견이나 독단적 주장 내지 정치적 이상향을 지닌 이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 갈 것이다.” 세상에 발표되자 세상을 놀라게 한 스위든볽의 주장들을 생각하기 앞서, 나는 독자들 앞에 스위든볽의 작품들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잘 알려진 문인들을 소개하고 싶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스위든볽의 종교적 가르침들을 소중히 비축한 교회와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줄로 안다.
우선 에머슨(Emerson)이 그가 뽑아 내세운 “대표적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스위든볽을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그는 말한다:
“이 사람은 동 시대 사람들에게는 선견자요 달빛으로부터의 만병통치약으로 비쳐졌으나, 그 당시 세상에 있는 여느 사람보다 참다운 진짜 인생을 엮어 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거대한 혼을 지닌 그는 그 시대에는 아주 먼 해외에 살고 있는듯 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멀리 앞선 그를 보려면 먼거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 대단한 에머슨도 스위든볽이 말하는 지옥이나 성경의 상징성을 이해할 눈은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것을 여기에 덧붙이고 지나가고 싶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빈틈없는 스코트(Scot) 사람이어서 쉽게 남의 말에 이끌려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스위든볽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교양을 갖춘 사람, 그는 강하고 수학적 재능을 지닌 사람, 그리고 아주 경건하고, 마음이 천사의 마음으로 바뀐 사람; 아름다워 사랑해야 할 사람, 그리고 나에게는 비극적인 사람…여느 누구의 저술에 있는 진리보다 더 많은 진리가 그의 저술에 있다…마음의 실체 안에서 가장 고상한 마음을 지닌 이들 중의 한 사람…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빛을 비추는 영적 태양들 중의 한 사람.”
알버트 후바드(Albert Hubbard)가 스위든볽과 세잌스피어를 비교해 말한 대목은 특별한 흥미를 더해 준다. 그는 아주 딴판의 정신적 관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들 둘 다 타이탄(Titan)이다. 이런 거인 앞에서는 소인들은 시들어져지고 훅 불면 금방 날려질 것이다. 스위든볽은 영웅적 금형(틀)에 부어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사람 만큼 자신을 아주 많은 자연 과학물로 에워싸게 했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과학적 배경을 등에 지고 구름들 안으로 대담무쌍하게 항해한 사람도 없다. 통상 아주 높은 차원에 날아 오른 사람, 또는 또 다른 세계를 아주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연 과학에는 무지한 때가 많은데, 그는 이 대목에서 절대 예외이다. 아마 그 당시 스위든볽과 견줄 과학자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천국 왕국의 지도를 아주 세세하게 만들어 준 사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무도 없었다.”
“세잌스피어(Shakespeare)의 발은 지상을 떠나 본 적이 진짜로 없었다. ‘템페스트(The Tempest)’에서 있은 그의 (수학)여행은 붙잡은 벌룬(balloon, 기구) 안에서 일 뿐이었다. 그가 획득한 아리엘(Ariel)과 카리반(Caliban)은 옛 우화 책으로부터 였다.”
“세잌스피어는 물리학을 거의 몰랐다; 경제학과 사회학이 그를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는 라탄어를 조금 알았고 그나마 그맄어는 덜 알았다; 그는 먼 여행을 다녀보지 않았다, 그리고 암석들의 역사는 그에게는 백지 상태였다.”
“스위든볽은 많은 방법들에서 다윈을 앞질렀다; 그는 고전어를 알았고 근대어도 대부분 알았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용적인 경제 전문가였다. 그리고 그 시대 최고의 사회 공학자였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가 말했다: “이매뉴얼 스위든볽은 이 시대에 알려진 최고의 분별력에 아주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아주 딱 자르듯 이렇게 주창하였다; “스위든볽의 저술을 읽지 않았다면 19세기 신학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스위든볽의 가르침들에 의해 감명을 받은 이들이 남긴 흥미 있는 증거들 중 몇 개 더 살펴보자. 그것들 중에, 아름다운 혼과 우미한 시적 감각을 지녀 어디서나 칭송을 불러낸 여인 엘리자베스 바렡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의 증거이다. “나는 내 마음으로 다른 세계에 시선을 보내게 해준 단 하나의 빛을 스위든볽의 철학에서 발견하였다. 이 철학은 내가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영 백과 사전이 “가장 괄목할만한 시인들과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등기한 사무엘 테이러 콜릿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자기가 받은 이런 찬사를 누군가에 의해 미친 사람이라 성급히 불리운 사람에게 이렇게 돌리고 있다.
“내가 단연코 주장하고 싶은 것은 스위든볽은 도덕주의자로서 모든 찬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연주의자로서, 심리학자로서, 신학자로서 그는 감사와 감탄을 자아내는 전문적이고 철학적인 능력 위에 강력하고 다양한 주장을 한 사람이다….만일 오늘날의 학식 있는 선생들이 그와 같은 열정을 선물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아마 세배는 더 행복해졌을지 모른다.”
위와 같이 출중한 사람들에 의한 평가는 천재 스위든볽이 소유했던 개성과 위풍당당함에 관한 어떤 생각을 만들어 보는데 도움이 되었을 줄로 안다. 그분에 관한 내 자신의 판단에 있을런지 모르는 어떤 결함은 내 신체적 한계들로 인해 발생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 자신 학자인 이들과 영적 선물을 존중하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건대, 그는 놀라우리만큼 잘 훈련된 지성, 에머슨이 지적한 바, “천문학상의 정밀함을 가지고 일하는” 지성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제아무리 그의 체험이 경이롭다해도, 그의 주장이 제아무리 믿을만했다 해도, 그는 합법적인 질문 공세라는 인정 사정 없는 포열 사격 앞에 발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를 훨씬 앞서간 학자이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전공했다. 그는 바위의 조그만 이끼로부터 대단히 복잡한 뇌의 구조까지 자연의 경이로운 것을 많은 책으로 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홀로만 올라가야 했던 아득히 높은 학문의 경지에서도 훌륭한 균형을 언제나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남들 같이 대담함, 조용함, 침착함을 지니고, 영계의 깊음과 심연을 건너는 길들을 걸으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함을 감지하면서, 마음과 물질, 영원과 시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미묘한 연결들, 그럼에도 끊어질 수 없는 연결 고리를 겁내지 않는 권위로 밝히 알려주었다.
내 친한 친구들 중 세명은 그분에 관해 말했었다. 그들은 이것을 정신 이상이나 편협한 열광자 입장에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에드워드 에버렡 해일(Edward Everett Hale) 박사를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다. 그분은 만사에서 흥미를 새롭게 하고 주제가 다양해도 이를 깊이 숙고하셨는 바 나는 이를 언제나 감탄했다. 아래는 그분이 판단한 스위든볽이다.
“스위든볽지언이즘(Swedenborgianism)은 지난 세기에 자유를 선물하는 일을 완성되게 했다. 스위든볽이 시작한 이 파도와 같은 움직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종교에 관한 책들 속의 서술은 신학에 혁명을 가져왔다.”
비숍 브룩스(Bishop Brooks)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공식 강연이 얼마나 무게있고 의미심장한지를 실감한다. 스위든볽에 관한 그의 견해는 확실히 심사숙고 해 볼만 하다.
“나는 이매뉴얼 스위든볽의 인격과 업적에 최고로 심오한 경의를 표한다…나는 줄곳 그의 저서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 왔다. 아주 큰 주제를 짧은 몇 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진짜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새 빛과 새 희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과 새로운 교제를 하는 새 교회인(New Churchmen)이다”
친애하는 신비적인 시인 윗티어(Whitt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 삶에 바탕을 둔 장대하고 아름다운 생각이 스위든볽의 책 안에 있다.”
스위든볽을 평가해 볼 또다른 방법으로는 그를 세상의 여타 위대한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고대 시대로부터 흘러온 이런 이야기 하나가 있다. 어떤 왕이 피로에 지치고 낙담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 그는 화가 이리프(Iliff)를 불러서 이렇게 명령했다: “나에게 이런 참된 사람의 그림, 즉 은혜스럽고 슬기 있으며, 영웅들의 힘과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을 그려라. 그리고 그 그림을 나의 가장 깊은 방에 걸어 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피곤해 그 방에서 쉴 때 그 그림은 내 혼을 성스러운 불을 지니고 웅대함과 따뜻함으로 채울 것이다.” 이 그림은 그려져서 궁전 홀(hall)에 걸렸다. 그는 이 그림을 황홀한 기쁨 속에서 응시했는데, 돌연 그 그림은 자기를 당황하게 했고, 곧 이어 그는 당황해진 이유를 알았다. 이 그림의 외형은 각각 모두의 분야에서 완전한 가장 품위 있는 자기의 신하의 것이었지 않는가! 그 자세는 자기를 위하여 잔을 채운 겸손히 시중드는 신하의 것이었다; 그 이마는 거룩한 환상 속의 성직자의 이마였다; 그 눈은 자기의 피곤해진 영을 노래로 황홀케 하는 방랑의 음유 시인의 것이었다. 그 미소는 아주 달콤하고 변함 없는 자기 아내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각각 모두의 사람들의 매력들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고로 그 그림 속의 모든 이는 새로운 빛 안에서 영광 받은 셈이다. 이렇게 스위든볽의 그림도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로부터의 고상함의 빛을 그림 자체 안에 모아 놓은듯 여겨진다. 그 그림 안에 들어와진 사람들 또한 스위든볽과의 비교에서 새로운 의미심장함을 획득하고 있다. 과학, 문학, 철학에서, 자기가 처음의 광선을 붙잡은 새 날을 선포하면서 산 정상 위에서 선구자 처럼 서 있는 이들이 있다. 자기들 나라를 잔인한 멍에로부터 해방되게 한 애국자, 또는 백성들을 더 참다운 자유 쪽으로 이끈 사람도 있다. 땅의 보물들을 수색하고 빛과 열의 새로운 창고들을 발견한 사람도 있다; 셀 수 없는 별들과 먼 거리의 혹성들을 설명해준 사람도 있다. 많은 바다들을 항해하고 발견하되 북서쪽 항로가 아니고 오히려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에서 모범이 됨과 교훈을 수단으로 수백 만 명을 가르친 지도자도 있었다. 그들은 우상을 부수었고 미신과 위선으로부터 교회와 성전을 일깨웠다. 웨슬레(Wesley) 같은 사람은 물질적인 시대의 차가움 안으로 사랑을 쏟아부었다.
위와 같이 우리가 스위든볽을 잘 생각해 볼 때, 이 위대한 인물의 모습에 이어 저 위대한 인물의 품새가 연이어 나타난다. 미켈란젤로(Michael Angelo)는 돌에서 천사를 보고 자기가 그 환상을 붙잡을 때까지 많은 날카로운 칼자국으로 새겼다. 이에 비해 스위든볽의 내적 눈들은 살아 있는 천사들을 바라보도록 아예 열려졌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의 글자적 진리들의 범주를 넘어 말씀이라는 돌들에 그는 사랑의 천국 메시지를 새겨 하느님의 자녀들을 도왔다.
우리가 베토벤, 모차르트, 와그너를 생각할 경우 스위든볽의 초상화에 주어지는 또다른 감촉도 있다. 이들은 인간의 가슴을 하늘로 높게 올리는 하모니들을 세상에 쏟았던 사람들이다. 그 반면 스위든볽은 우주에 있는 신성한 하모니를 지각했다. 그래서 자기는 천사 집단이 노래한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실지로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때부터 나폴레온, 웰링톤, 와싱톤 그리고 그랜트 등등의 인격, 그리고 패배의 두려움이 가득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들의 이야기들에 친숙해 있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몫은 영계에서의 선과 악의 세력 다툼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천국의 무기인 말씀 속의 진리들과 지상의 검인 자연에 관한 진리들로 무장했던 바 그는 20세기 순수 기독교 신앙의 최고 참피온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는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미국의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종교의 성전 넘어에 “이제 믿음의 신비에 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졌다”라고 쓰인 것을 스위든볽은 보았다. 그는 인류에게 그들의 지성을 자유하게 하는 영적 철학을 주었고, 교회의 독재 권력을 뒤집었다.
아가시즈(Agassiz)가 동물학과 고생물학에서, 칼 막스(Karl Marx)가 경제학에서, 다윈(Darwin)이 진화론에서 했던 것을 스위든볽은 종교에서 했다. 부피가 큰 논쟁과 우레치는 증오를 가지고 그는 염세 사상과 정죄와 불성실한 대륙의 문학을 짓부수어 심연으로 내려보냈다.
아리스톨(Aristotle), 플라토(plato), 후렌시스 베이컨(Fransis Beacon), 칸트(Kant)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을 오랫동안 그리고 인내함으로 찾아나선 찬란히 빛나는 철학자들이었다. 우리의 선견자는 “스위든의 아리스톨”이라 불렸을 뿐아니라 그는 29년 동안 원인의 참 세계에 의식 있는채 들어가도록 허용되었고 그 빛에서 살았다고 선포했다.
콜럼버스의 불굴의 신념은 새 대륙의 발견으로 실감되어졌고, 코테즈(Cortez)는 그의 눈 앞에 광대한 태평양이 보이는 “다리엔(Darien)의 정상에 섰다. 지금 우리 앞에는 ”발견되지 않은 나라“를 여행하고, 자기 귀로 그 나라의 언어를 들었고, 그곳의 거주민들과 대화를 했고, 그곳의 생활과 기후와 문명을 우리의 세상에 서술해준 탐험가가 있다. 그의 탐험에 대한 예를 들면 이러한 바 그는 ”천국과 지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사후 인간의 행동들이 당사자에게 나타내질 때, 수색 작업을 담당하는 천사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그 수색은 온 몸, 즉 각 손의 손가락을 시작으로 전체적으로 더듬는 바, 온 몸의 수색으로 확대되어진다. 나는 이렇게 하는 이유에 궁금했었는데, 그 이유를 나로 알게 해주었다. 즉 생각과 의지 속의 모든 것은 뇌에 새겨진다는 것, 그 이유가 생각과 의지의 시작이 뇌였기 때문이다는 것, 이와 꼭같이 그것들은 온 몸에도 새겨진다는 것이다; 생각과 의지 속의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시작으로부터 저쪽으로 넓혀가는데 그 종결 지점은 온 몸이 된다는 것이다….이것들로부터 말씀에서 말하는 인간 생명의 책이 의미하는 것도 명백해질 것이다. 즉 인간이 생각했고 행동하였던 것은 몸 전체에 새겨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기억으로부터 불려내질 때, 그것들은 마치 책을 읽듯 되어지고, 영이 천국의 빛에서 보여질 경우 마치 지상의 눈에 나타나는듯 된다는 것이다.”
아이삭 뉴톤(Issac Newton)은 감정이 순수하고 경건하기로는 스위든볽을 닮았는 바, 그는 물질계에 인력의 법칙을 보도록 영감되어졌다. 스위든볽은 자연계에 인력의 법칙이 있듯이 영계에서는 사랑이 이와 상응하는 끌어당기는 법칙임을 지각했다. 그리고 그는 태양 같은 실지로 사랑을 방사하는 근원이 모든 영혼에 생명을 주고 모든 피조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라는 책으로부터 그가 내적 실체라 부르는 법칙과 사실들을 예증했는데 아래에 한, 두 문단을 인용해본다.
“자연계의 태양 외에 다른 태양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적인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 많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이 영적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영계가 있다는 것, 그 안에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것, 영계는 자연계와 다른 세계이다는 것을 모른다. 영계가 자연계에 있는 이들로부터 아주 깊숙이 감추여져 왔는 바, 주님께서는 내 영의 시야가 열리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 이유는 내가 자연계에서 보듯 영계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하시어 차후 나로 그 세계를 상술하게 하려는 그분의 목적 때문에서 였다. 이 작업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에서 있게 되었는데, 나는 그 책의 한 단원을 영계의 태양에 관한 것에 할애했다. 그 이유가 그 태양이 나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 태양은 자연계의 것과 크기가 같았고 맹렬히 불타는 것 역시 같았다. 그러나 더 붉게 이글거렸다. 그리고 천사들의 천국 전체가 이 태양 아래 있는 것이 나에게 보여졌다; 삼층 천국의 천사들은 이 태양을 언제나 보고 있고, 이층 천국의 천사들은 이 태양을 자주 보고, 첫 번째, 또는 가장 아래쪽 천국의 천사들은 가끔씩 이 태양을 보고 있었다.”
“사랑과 불이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사랑을 볼 수 없다. 사랑 대신 사랑에 상응하는 것들을 본다. 그 이유가 천사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적인 것은 생각하고, 사려분별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외적인 것은 느끼고, 보고, 말하고, 그리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 상응은 영적인 상응이지 자연적 상응은 아니다. 신성한 사랑 역시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 불 같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불이 언급될 경우 그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이스라엘 교회의 거룩한 불은 이 의미를 가졌다; 이 교회에서 하느님에게 기도할 때 관습적으로 천국의 불을 간구하였는데, 이는 신성한 사랑이 심정에서 불켜지기를 소망함이다.”
“인간은 그의 생각 속에서 자연계의 순수한 것 또는 자연계의 내면인 것 보다 더 깊은 것을 꿰뚫어 보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천사들과 영들의 거주지가 에테르(ether)에 있거나 별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처는 자연의 밖이나 그 넘어가 아닌 자연 안에 있었다; 허나 천사나 영들은 완전히 자연의 밖 내지 그 넘어에 있고, 그들의 세계는 또 다른 태양 아래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공간은 출현(appearance)이므로 그들이 에테르에 있다거나 별들에 있다고 말해질 수 없다; 그런 이유가 그들은 사람과 더불어 있고 자기 영 속의 애착과 생각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인간은 하나의 영이고 이 영으로부터 인간은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계는 인간이 있는 곳일 뿐 인간으로부터 떨어진 곳이 전혀 아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 각자의 내면들에 국한시켜 본다면 그는 이 세계 안에, 그곳 천사들과 영들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영계의 빛으로부터 생각하고, 영계의 열로부터 사랑한다.”
“천사들에게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은 천사들이 거주하는 토지 넘어 중간 고도인 약 45도 정도 각도의 높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세상의 태양이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듯, 그곳의 태양도 천사들로부터 먼데서 나타난다. 태양이 이 고도와 이 거리에서 언제나 나타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고로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로 나뉘어진 시간이 없다. 따라서 아침으로부터 정오를 통과하여 저녁으로 그리고 밤으로 들어가는 하루의 진행이 없다; 또한 봄으로부터 여름을 통하여 가을로 그리고 겨울 안으로 가는 일 년의 진행도 없다. 오로지 영구적인 빛과 영구적인 봄이 있다.“
끝으로 세상의 삶에 대한 사상에서 스위든볽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인류 속의 종교적 선생들을 상기해보면 도움이 우리에게 될 것 같다. 석가는 동양 사람 앞에서 모범을 비춘 자기의 품위 있는 인생을 살았다. 공자는 교훈을 수단으로 가르쳤다. 모하멭은 우상숭배에 빠진 토지에 불과 칼을 가지고 한분 하느님에 대한 자기 메시지를 운반했다. 스위든볽은 무지, 짐승 같은 무력, 그리고 종교를 압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의 속임수로부터 유일하게 종교를 보호할 수 있는 합리적 진리들-건전하고 명민한 신앙을 나누어주려 노력했다. 진지하고 열렬한 측면은 위 모두의 지도자들에게 공통점일 수 있으나 그들 모두는 과학 지식을, 인간의 동기들에 관한 지각을, 그리고 사회를 인간의 마음과 육체에 족쇄를 채움으로부터 예방할 수 있는 전투적 진리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미신적 관행에 항의를 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되었다. 웨스레(Wesley)는 형식에 억매인 영국 교회의 틀을 깨뜨렸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열렬한 봉사는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가르침들 속의 많은 부분들이 (옛것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수 년 전에 캐토릭 교회의 훌륭한 옹호자 카디날 뉴맨(Cardinal Newman)의 “변증론”을 주의깊게 읽었었는데, 그는 거기에 모든 신교도들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고야 말 불일치한 것을 적나나하게 적어 놓았다. 스위든볽은 기독교계의 모든 교파들에게 새로운 진리들을 풍부하게 가져다 주었다. 그는 새 처방(new dispensation)의 선구자였다. 이 점에 대해서라면 로마 캐토릭의 신학자요 교수인 요한 요셉 본 고레스(Johann Joseph von Gorres)의 논평을 읽어두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다:
“스위든볽의 많은 저서를 망라해 모든 것은 단순하고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특히 그가 쓴 필치의 어조에 관련해서 그러하다. 이 어조 안에는 가상적 능력들을 나열하려 애쓴 흔적이 없고, 과도한 표현도 없고, 몽상적인 것도 없다…과학을 계발해감에서, 심정의 진지함과 단순함은 지속적인 성공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요구 사항이다. 우리는 명성 높은 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빠지고야 말게 하는 자만심 같은 것을 그에게서는 관찰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잘 통솔되고 온건해진 마음을 간직해왔다; 그리고 성공적이든 또는 어떤 심각함에 의해서이든 언제나 자기의 정신적 균형을 잃지 않았다.”
스위든볽의 주장들에 관련해 독자들이 어떤 견해를 만들어 보든지 간에, 한 가지 명확한 것은 그의 경험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서 과학 분야에 능통했다는 여느 사람들 누구도 자기들이 인간 본래의 자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세기 이상 동안 또 다른 세계와 꾸준히 교류했노라 주장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느님과 생명에 관한 환상을 가졌다. 그를 통하여 유대인의 처방(Jewish dispensation)에 신성한 상징어로 된 말씀(모세 오경)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기 백성을 노예 신세로부터 새로운 문화 세계로 이끄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신성한 메시지가 인류를 위해 말씀 안에 뉘여 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예언자들 또한 환상을 가졌고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은 자기들이 모든 나라들에 상징적으로 운반하고 있는 더 높은 진리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들 대부분은 메시지의 좁은 의미인 역사적 의미만을 보았다.
사도 바울은 말씀 속의 많은 진리들을 영적으로 납득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다른 사도들의 것 보다 더 빛을 내는 듯하다. 그는 삼층 천국 안으로 붙들려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본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참으로 자기가 육체 안에 있었는지 또는 육체 밖으로 나갔었는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이런 예들은 이를테면 낮선 나라를 조금 알게 하는 매우 작은 사건들이다. 그 반면 스위든볽은 의식을 가진채 저 이상한 나라에 갔고, 오랜 동안의 관찰로 천국과 영계와 지옥의 법칙과 그곳의 생활을 알리는 준비를 했다. 사랑의 사도라 하는 요한은 환상 중에 기독교 세계의 미래 상태와 새로운 인간성의 영예를 바라보았다. 그가 상징으로 본 것을 스위든볽은 실제로 보았다. 그는 예언적 그림들의 성취에 목격자가 되었고, 그 광경을 설명했다. 그리하여 계시록은 더 이상 봉인된 책이 아니게 되었다; 이 책은 열려서 놓여 있다, 그 책의 봉인들은 떼어졌다. 그 책의 메시지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속의 화려함으로 빛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하고 누군가가 외치는 것을 나는 들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스위든볽의 주장은, 스트랕포드(Stratford) 출생의 어느 누가 정통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게다가 쓸만한 학력도 전무한데 그가 27권의 불멸의 연극 각본을 창출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와는 상황이 너무나 판이한 바, 최소한 나에게는 믿을 수 있는 주장이다. “방대하고 논의의 여지가 없는 교육 배경”을 지닌 이매뉴얼 스위든볽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는 섭리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 말씀 속의 비유들과 상징물들, 여타 다른 신비적인 것들의 해석자로 준비되었다는 것, 이는 우리가 가끔 아주 생생하게 “느끼는” 또 다른 세계의 영향력들을 인류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 그리고 삶의 사막을 의지의 새로운 생각들, 지혜, 능력, 기쁨을 가지고 윤택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을 예고하고 오셨음도 선포했는데, 이 오심은 참된 생각과 올바른 생활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선포가 믿을 수 없는 듯 여겨진다면, 회상해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정도의 말은 보통 사람의 상식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1880년도에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기계는 만들어질 수 있고 안전도 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매우 적은 사람들만이 그들의 말을 경청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일은 한 번도 있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적고 신실한 소수파가 주위의 비웃음을 받으며 노력한 끝에 결실을 보았지만 결국 그 성취는 느리게 왔다. 또 다른 지식의 축적이 건설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는 바, 세상에서 경제 체계를 잘 계획하면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것보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생산함에서 더 부유해지고, 더 자유해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동등한 확실함을 가지고 아는 바, 전체 교육 체계를 재 조직하면 대량의 사람들이 창조적 서비스를 위해 더 행복하게 준비되며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 우리 시대의 국제적 알력 다툼, 민족들의 적대감, 전쟁 위협, 등등은 인간성에 암시와 끈덕짐, 훈련, 그리고 순전한 헌신을 수단으로 바뀔 수 있는 정신적 개념들에 주로 기인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자기들이 보기 위해, 나누기 위해 살고 있다 하면서도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영적 발달에 기인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를 아는 작은 집단들은 투쟁하고, 학교나 법정, 일터나 사무실, 입법 활동 같은 분야에서 자기들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각자의 위치와 방법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신저가 아닌가?
세계의 사건들, 역시 막대한 의미심장함으로 차 있는듯 여겨진다.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서로에게 더 의존하는 바 전쟁은 지금까지의 미친짓 그 이상이 되었다. 외적 압력은 인류에게 평화의 형제애 안에서 살 필요를 보게 하고 있다. 약 1세기 전 인간은 대량의 상품을 만드는 공장과 이 상품을 바다와 철도로 수송하기 위해 석탄과 증기의 사용법을 발견했다. 이 뒤를 이어 전신전화, 그리고 각종의 기계들을 개량했다. 그리고 지금 라디오와 공기와 바다 아래를 통하여 움직이는 배가 나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주위에 석탄과 철 그리고 전기라는 세 개의 큰 받침을 뿌리셨는 바,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일의 형제애 안으로 휩쓸어 넣고 있다.
누군가가 다시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관찰해왔던 것에 반대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대담하고 특이한 그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을까?”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타당한 질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비평의 결과로 규칙이나 규범을 우리의 안내서로 받는다. 그런데 스위든볽의 경우 우리는 그로부터 거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경우의 참 본성으로부터 우리는 스위든볽 자신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가 통과해 간 심리적 상태들에 관하여 매우 조금 알거나 거의 알지 못한다. 스위든볽 자신의 증거가 할 수 만 있다면 우리를 확신시켜야만 한다.
나 스스로 내 경험을 새로이 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확신한다. 날마다 나는 눈과 귀를 가진 내 친구들의 말을 절대로 신뢰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감각에 현혹되어 엉뚱한 데로 자신을 끌고 가는 일이 자주 있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증거로부터 나는 내 세계를 건축하는 무수히 많은 귀중한 진리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수집된 진리들은 내 혼으로 하늘(sky)의 아름다움을 그려 볼 수 있게하고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은 침묵과 어둠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 안, 내 영에 음악과 빛남, 그리고 색깔이 있고 이것은 내 모든 생각들을 통하여 번개 같이 전달된다. 이렇게 나는 지상 맨 끝 넘어로부터 가져온 스위든볽의 증거로부터 나를 감금할 뿐인 진흙의 이 이상한 집(몸)을 떠날 때 내 영의 요구에 딱 어울리는 세계를 지금 세워나가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스위든볽의 주장들을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또다른 방법을 제시해 볼까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뇌 안에 있는 이상하고 어두운 아주 작은 방에 관해 말해준다. 이 방 안으로 태양과 별, 땅과 대양이 빛의 날개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뇌의 신비스러운 처소로부터 혼이 나오고, 몽롱한 상태에서 그것(세포)들은 함께 친하게 교제한다. 만물을 만드신 그분 만이 그것들의 베일이 벗겨진 영광을 직시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조절되지 않은 광채를 바라보고 생존할 수 없다. 이는 왜 인간이 어둑한 유리 같은 것을 통해 보고, 작고, 침침한 불이 밝혀지는 방에서 그림자만을 응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자기가 땅에 관하여 납득하는 것은 조금이고, 그나마 베일쳐진 감각 만으로 실지로 납득한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그는 천국의 “어둑한 신비”에 관하여 말하는가? 왜 평등한 자유를 가진 혼이 그것의 처소를 나와 육체의 조악한 렌즈를 폐기하고 진리의 망원경을 통하여 불멸이라는 무한의 도착 지점을 자세히 볼 수 없을까? 좌우간 위 두 질문은 스위든볽의 다른 세계에 관한 기록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주고 있다. 스위든볽은 말하기를, 내적 인간이 자기 주위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지각한다는 것, 이 내면의 근원으로부터만 느낌과 감각은 생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감각 경험이 인간의 바깥쪽에 있다는 망상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시되어 버려서 집중하는 수련이 아니고서는 그 망상을 제거할 수 없다. 특별히 나는 이런 망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생각과 상상에 내 정신을 쏟기 때문이다; 내가 꽃과 음악, 그리고 사랑스러운 경치에 관한 묘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현할 때, 오히려 그 놀라워함은 나에게 감각 경험은 그 근원이 몸 밖에 있지 않다를 입증해준다. 만지거나 냄새 맡는 능력에 관한 이 간단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진대, 이런 사람의 상황, 즉 육체적으로 보고 들을 뿐 아니라 자기의 영적 능력을 예외적인 수준에 사용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에워싼 좁은 고리(ring, 한계)를 거의 한계 없는 지평선으로 넓히는 사람(스위든볽)을 놓고 여러분은 어떤 근거에서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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