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육체가 없는 삶을 위한 도구이다

VIII
죽음은 육체가 없는 삶을 위한 도구이다

고생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벌-즉 거역하려들지 말고 깊은 신앙심을 발휘해서 지고 가야하는 짐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던 시대도 있었다. 불행의 희생자를 돕는 유일한 생각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그림자의 골짜기에서 묵상하며 가능한한 고생도 만족해하며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바, 포부가 없는 격리된 삶은 영을 약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의 경우에도 똑같다. 근육은 사용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여하튼 우리는 제한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기억, 이해함, 동정심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불활동적이 되어간다. 한계성, 시험들, 세상의 실패들과 싸울 때만이 각자의 가장 높은 가능성들에 도달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세상적인 것을 포기함이라고 스위든볽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픈 상태이든 건강하든, 소경이든, 보고 있든, 억매인 상태이든 자유하든, 우리는 어떤 목적에 충당되려고 여기 지금 존재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느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방법이 신앙의 힘에 의지해 뭔가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강력히 간구하는 기도를 수단으로 함이 아닌 유용한 행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가지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생활의 선이 성전이나 교회를 채우지 않으면 영적 측면에서 그것들은 텅 빌 것이다.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돌 벽이 아닌 교회 주위에서 빛을 발하는 용감한 혼의 빛이다. 제단은 거룩하다. 그러나 제단이 우리의 심정의 제단을 표현하고 우리가 언제나 바치도록 명령된 제물 만을 바칠 때 거룩하다. 그 제물은 미움보다 더 강한 사랑을, 의심을 극복하는 신앙이다.
하느님을 신성한 친구로서 느끼는 단순하고 어린이 같은 믿음은 땅이든 바다이든 우리에게 오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곤경들은 언제나 우리가 만나고야 만다. 이것은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 없다. 이것은 고난의 특성과 개개인의 특성을 결합시킨 결과이다. 고난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는 불멸하다는 것, 우리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지켜주시는 신성한 친구가 있다는 것, 만일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면 우리를 지켜주시고 안내해주신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 생각이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강하게 지반을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거의 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함도 제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끌어 안을 수 있는 우주의 모든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보탬이 되게 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상한 것을 위해 부드러운 동정심이라는 보답이 있다. 아픔으로부터 끈기와 달콤함의 제비꽃이 피어나고, 이사야의 입술에 닿아 그의 생명이 영 안에서 불켜지게 한 거룩한 불의 선견(vision)도 있게 되고, 저녁 별과 더불어 오는 만족함도 있는다. 만일 고난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다면 경이롭고 풍부한 인간 경험도 극복에 대한 보상인 기쁨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횡단해야만 할 어두운 계곡이 없는 등반이라면 언덕 꼭대기에서 즐기는 기쁨도 절반밖에 안될 것이다.
나의 한계점을 두고 나는 그것이 벌이나 사고라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렇다고 믿었다면, 나는 그것들을 극복할 힘을 결코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징벌을 받은 것 같으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들과 같이 취급하신다”가 있는데, 이 대목은 특별한 의미가 나에게 있는듯 여겨왔다. 스위든볽의 가르침이 내 생각을 받쳐주는 듯하다. 그는 징벌 또는 응징이란 단어가 크게 잘못 이해되었는 바, 이 단어는 혼의 단련, 훈련, 제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진정한 기독 종교”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에서의 신앙과 자주적 활동을 격려하는 것으로 가득해 있다. “신앙”과 “자유 의지”편은 우리는 불행이나 주위 환경 또는 우리의 과오들이 아무 희망도 없고 끌려가야 하는듯 굴복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손으로 깍아 만든 인형 조각 밖에 안되어서 하느님이 뭔가 조치를 취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 노예 상태로 되어가는 상황에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맞서야한다. 우리는 진취적 기상을 취해서,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찾아보고, 우리의 의지력을 발달시키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해 충분한 빛과 사랑을 주실 것이다.
모든 종류의 취약점은 자기 발달과 참 자유에 용기를 북돋아 주어 세련되게 하는 형체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안에서 더 높은 선물이 꼭꼭 감추이게 한 단단한 돌을 깍아 들추어 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연장들이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붙어있던 무관심의 붕대를 찢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이 운반하는 짐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동정심의 지령이 발동되면서 그들을 돕는 것을 배운다.
소경된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전 인생 훈련에 대한 예로 사용하면 대단히 구체적일 듯 싶다. 그가 시력을 잃은 처음에는 자기에게 남은 것이라곤 심적 고통과 자포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인간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닫혀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 삶은 다 식은 난로에 있는 재나 다름없다 판단한다. 야망의 불은 꺼져 있다. 희망의 빛은 어두워져 있다. 그가 한 때 기쁨을 취했던 대상들이 이제 자신이 더듬거려 길을 찾아갈 때 날카로운 모서리가 되어 자신을 찌를 것 같이 생각된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그가 더는 노동 같은 것으로 도와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도 무의식 중에 그의 느낌을 상하게 하는 때도 발생된다. 그럴 즈음 몇몇 슬기 있는 선생이나 친구가 그에게 와서 시력 대신 청력을 수준 높게 훈련하면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괴로움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그것을 믿지 않으려하고 심지어 자기를 조롱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를 구하려 뛰어든 사람인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그를 때리는 격이다. 그럼에도 고통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도로 앞을 향해 재촉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다시 놓여질 수 있다는 것, 인간으로서의 가치있는 업무 수행이 가능도 함을 한번 실감할 때, 그는 이전에 꿈꾸지 않았던 존재가 자신 안에서 그 자체 벗겨져 모습을 보인다. 그가 슬기롭다면, 그는 행복이란 바깥쪽 환경과 절대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끝내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빛 안에서 느꼈던 것 보다 더 확고한 의지로 그의 어두운 길을 밟아 간다.
“이 세상 시련의 용광로 안에서” 정신적으로 소경되어 왔던 이들도 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을 수 있고 찾아야만 하며, 행복으로의 새로운 방법들을 실행하려 자신을 밀어붙여야 한다. 때로 이들은 자기에게서 더 고상한 것을 기대하는 신의에 분함을 표출할런지 모른다. 그래서 내뱉는 말인즉, “나는 나 그대로, 그것이 멍청하고 야비하고 이기적인 것일지라도 그대로 인정해주면 만족할 것이야…”하기도 한다. 이런 그를 수긍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그리고 인간의 영원한 존엄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 안에는 아주 가까운 친구도 알지 못한 많은 것, 즉 도전적이거나 관심있어 신경 쓰거나 적나나하게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더 느끼고 더 힘있고 더 인간다운 것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적게 알고 있지 않던가! 우리는 자신의 내적 자아를 열기 위해, 우리의 무지를 내쫓기 위해, 가면을 찢어버리기 위해, 옛 우상들을 내던지기 위해, 거짓 표준들을 파괴하기 위해 취약점과 시험도 필요하다. 이런 거친 일깨움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언제나 강요하는 외적인 것을 떠나 덜 방해받고, 덜 조임을 당하는 장소에 거주하도록 인도되어진다. 이때서야 우리는 새로운 수용력을 발견하고 선량함과 아름다움과 진리의 진가도 발견한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누구를 보내든지 받는 사람은 나를 받는 사람이다”에 관한 경이로운 해석을 얻을런지 모른다. 우리가 극복한 취약점 안에, 우리가 도달한 이상향 안에 사랑과 지혜의 전체 왕국이 현존함을 알게 된다. 이런 방법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 성장 쪽으로의 진짜 방법은 우리의 한계점을 넘어 열망함에 의해, 위대한 것을 고상하게 원함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분투 노력함에 의해서이다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살고 있는 바깥쪽 생활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더 의식해감에 비례해 영적 성장도 한다.
눈은 특수한 물체를 보는 것을 더 배움으로 성장한다. 인간 육체의 눈에서 지구는 평평하게 보인다. 그리고 별들은 고대인에게 보여졌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보여진다. 이런 현상을 두고 과학은 무한히 새로운 경이로움과 영광들을 알 수 있게 했지 않았던가! 어린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 원치 않는 것을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뉴톤(Newton)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자연에 있는 보편적 힘의 표현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는 바, 그는 보통의 시야 훨씬 멀리 보고 있었다. 이는 우리 영에 관련해서도 똑같다. 우리는 매일 접촉되는 것 안에 감싸여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더 충분하게 인식할 때 (영적) 성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망각할 때, 감각들은 우리를 엉뚱한 쪽으로 인도한다. 이는 우리들 삶의 환경에서 제공된 내적 생명의 위대함을 우리로 알게 하는데,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우리로 보여지게 하는데, 취약점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이다.
스위든볽의 다음과 같은 생각들은 우리를 위해 꾸준히 봉사하고 있다. 모든 사건에서 그리고 모든 한계점에서 우리는 선택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선택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시련이 우리를 짓밟아 뭉개도록 놔두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는 우리가 시련들을 선에 속한 새 힘으로 개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 의견 내지 전통적인 것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내부 혼의 안내에 자신을 맡기고 진리를 향하여 용기있게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들이 진짜 복인 것인지 아닌지를 바깥쪽 근거들로부터는 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경험들 안으로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그것은 독이 든 잔이 되거나, 보약의 잔도 된다. 한계에 부딪치고 훼방받을 때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선택하기 앞서 어떤 원리로부터 행동할 것이냐의 선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땅은 분노의 장소인듯 하면서도 기쁨의 장소로도 설계되어 있다. 토양은 가시나무를 내고 장미도 가시를 가지고 있는데, 왜 인간의 삶에 시련이 없겠는가? 따라서 시련은 잔인한 것, 또는 이상한 것도 아니다. 시련은 땅의 한계 내에서는 성취되어질 수 없는 더 높은 운명을 위해 우리의 생활을 확장하고 강건하게 간직하도록 하시려고 우리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간절하심 이다. 우리 넘어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할 때만이 우리는 확장과 기쁨을 쟁취한다. 이제 각자가 가지는 취약점을 집어들자. 그리고 빛이 되고 영감을 주는 영향력이 되기 위해, 약하고 시험받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생각과 바램이 소통되도록 해주기 위해, 유약한 인간적 어깨 위에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분의 실예를 따라가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신비적(mystic)” 감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배워서 깨닫고 있다(지각, perceptive)는 것이다. (영적) 감각은 마치 머나 먼 거리에 있는 별이 내 문 앞에 있는듯 보는 식으로 소경의 인식 안에 먼 거리의 물체(object)를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영적) 감각은 나를 영계와 연결되게 한다. (영적) 감각은 나의 불완전한 촉각의 세계로부터 획득한 제한된 경험을 유심히 관찰하고 영적으로 바뀌도록 해주기 위해 내 마음에 관찰한 것들을 제출한다. (영적) 감각은 신성을 내 안에 있는 인간에게 밝히 보여 알게(계시) 한다. 영적 감각은 땅과 장엄한 저편을, 지금과 영원을, 하느님과 인간을 묶어준다. 영적 감각은 사색적이고, 직관적이고, 회상(추억)적이다. 세계에는 두 가지, 객관적 물질 세계와 객관적 정신 세계가 있다. 물질에 안과 밖이 있듯, 정신에도 안과 밖이 있다. 이 둘 각각은 실체를 위한 각각 고유의 위상(phase)을 가지고 있다. 물질이 그 내부 또는 그 위에 놓여 있는 정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채 사용될 경우를 제외하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생명에는 대립적인 것은 없다. 이 둘은 따로따로의 등차(discrete degrees, 불연속 등차)에 있다고 스위든볽은 설명하고 있다. 그는 더 설명하기를, 물질 세계를 위한 지각 장치가 우리에게 있듯, 정신 세계를 위해서도 지각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활은 세 가지 장애, 즉 눈멀고, 귀먹고, 그리고 불완전한 발표력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나는 내 경험들을 합리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과 사고 없이는 지극히 단순한 것도 행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바깥 세계를 이해해보려는 노력 없이 나의 신비적 감각을 꾸준히 고용했다면, 나의 발전은 저지되었을 것이고, 만사는 혼돈으로 빠져 있었으리라. 꿈과 현실, 또는 내가 적절하게 마음에 떠오르게 하지 못했던 물질과 정신을 혼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내적(영적) 감각 없이 나는 이 두 가지 세계를 분리시켜 간직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가 색깔, 소리, 빛, 그리고 만질 수 없는 현상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데 잘못들을 저지를 때 조차에서도 나는 나의 바깥쪽과 안쪽의 생활에 균형을 보존하려고 언제나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남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경험을 존중함 없이는 내 촉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엉뚱한 쪽으로 가 버리든지 둥근 원을 맹목적으로 빙빙 돌기나 할 것이다. 나는 스위든볽의 “천국의 비밀들”이라는 책의 아래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을 받아 왔었다:
“자기 밖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지각하는 내면의 인간이 있다. 이 내면의 근원으로부터 감각적 경험은 생명을 지닌다; 그 이유가 느끼고 감동하는 어떤 능력도 이 주관적 근원 외에 또 다른 근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각의 생명은 외부로부터 있다는 오류는 너무 일반화된 관계로 자연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 오류를 스스로는 제거할 수 없고, 합리적 수준의 마음을 지닌 사람 조차도 감각으로부터 알려진 내용을 간추리고 정리하여 핵심 만을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의식의 태양이 처음 내 위에서 비추어졌을 때, 어떤 기적이 보여졌는지! 사멸되었던 내 젊은 인생 나무의 밑동은 지식의 물에 적셔져 다시 자라나, 다시 싹을 내면서 어린시절의 꽃들로 다시 달콤해졌다. 내 존재의 깊음 아래로부터 나는 소리쳤다. “살아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두 손을 생명 쪽으로 내밀었다. 그 이후 내게 떠 맡겨졌던 말못함도 쓸데없는 침묵일 뿐이었다! 내가 깨어났던 세계는 아직 신비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과 희망과 하느님이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천국 안으로의 입장이 나의 이런 경험 같지 않을까?
몇년 후 내가 말하기를 배운 이후, 내 인생은 확대되어졌다. 나의 36년 전의 사건으로 인해 가졌던 흥분과 놀라움은 지금도 중단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아주 따로 독립적으로, 기적적인 일로, 나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도록 내 앞에 언제나 서있다. 한 밤중 같은 침묵 안에서 벙어리이고, 혼도 없는 공기가 언어로 변형되는 것을 생각해보라. 글자 뜻 그대로, 나는 언어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내 촉감은 말해지는 단어들의 수천의 세세한 진동들을 나에게 운반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각 없는 나로서는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듣게 하는 것 뿐아니라 나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최대 한도의 사고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지금의 경우에서도 내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내 말을 하려면 마음의 순전한 힘에만 의존해야 한다. 설사 내가 말을 잘하고 있는 때에도, 나는 내 입술로부터 나가는 어조를 하나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언어 구사가 꽤 완전한데도 그것을 수정하느라 어쩔줄 모르기도 한다. 사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내가 실패할 때가 아니라, 어렴풋이 의식하는 부분, 또는 영혼이 내 솜씨 없는 말에 끼어드는 것, 다시 말해 내 친구들이 “왜 너는 지난번 말 잘했듯이 지금 잘 할 수 없느냐?”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 같이 생각될 때이다. 만일 내가 이런 정신력을 더 충분히 발달시켰더라면, 보다 완전한 언어 구사가 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내가 견뎌낸 고통과 실망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자신과 바깥 세계와의 살아 있는 끈을 간수할 수 있게 해서 나에게 가져다 주는 기쁨을 위해 치룰만한 값이다. 내가 음절과 말하는 것 안에 느낌을 놓는 것을 배웠을 때, 나는 모든 시간과 영원의 기적-생각의 실체를 더욱 더 느끼게 되었다. 생각, 이로부터 책들이, 철학이, 문명들이, 그리고 인류의 기쁨과 화가 만들어지지 않던가! 컴컴한 밤중을 수년동안 여행했던 외로운 소경이 태양과 햇빛 세계의 모든 영광에 갑자기 노출되는 것 같은 상태가 나에게서는 이해성의 빛이 내 마음에 홍수로 밀려 들었을 때의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단어들이 지식, 생각, 행복의 귀중한 상징이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단어들의 사용에는 매우 친숙하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언제 단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기억 못한다. 나의 경험은 아주 다르다. 나는 일곱 살이 거의 다 되어서야 언어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경험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단어의 소리를 배우기 전 여러 해 동안은 손 감각으로 각 단어를 배웠다. 내 상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어의 의미는 소리를 들으면서 거의 동시에 지각할 것이다 이었다. 다시말해 생각-상응들의 의미가 갑자기 나에게 온 것이다.
내 선생님, 애니 맨스휠드 설리반(Anne Mansfield Sullivan)은 나와 함께 한달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 물체의 이름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물건들을 내 손에 놓고 자기 손가락에 물건의 이름들의 철자를 써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글자의 형체를 만드는 나를 도왔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렴풋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역시 모르고 있다. 단지 어떤 움직임을 통하여 가고, 이 위치에서 저 위치로 바뀌는 내 손가락의 촉감만 기억하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컵을 건네면서 단어의 철자를 썼다. 그런다음 그녀는 어떤 액체를 컵 안에 부었다. 그리고 글자 w-a-t-e-r 를 만들었다. 나중에 그녀는 말하기를, 그 당시 내가 어리둥절 하여 컵에는 물의 철자를, 물에는 컵의 철자를 혼동하면서도 그것이 맞다고 고집부렸었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화를 냈는데 그이유는 설리반 선생이 이 단어들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된 상태로 그녀는 나를 담쟁이덩굴로 덮혀 있는 펌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펌프하는 동안 펌프 물꼭지에 컵을 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또 한손으로 w-a-t-e-r 의 철자를 힘차게 썼다. 나는 조용히 서있었고, 내 온 몸의 주의력은 찬 물이 내 손 넘어 흐를 때 철자를 쓰는 그녀의 손가락의 동작에 모아져 있었다. 딱 한차례 내 안에 이상한 휘저음, 안개낀 의식이었고, 어떤 것의 느낌은 기억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삶으로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내 선생님이 자기 손가락으로 하던 무엇은 내 손 넘어 흐르는 찬 어떤 것을 뜻했다는 것, 이런 표시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함을 이해했다. 이 날은 경이로운 날,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내 앞뒤를 달려 다니는 생각들이 빠르게 나에게 왔다-내 두뇌에서 출발한 생각이 내 전체에 퍼져 갔다. 이것은 나의 정신적 깨어남이었다고 지금 생각들고 있다. 계시의 속성 안에 있는 경험도 이런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난 이 큰 변화를 여러 방법으로 즉시 그녀에게 보였다. 나는 내가 만지는 모든 물체의 이름들을 배우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밤이 오기 전까지 나는 서른 단어를 익혔다. 존재하지 않음은 나로부터 삭제되었다! 나는 내 취약점에 반비례되는 강함과 기쁨을 느꼈다! 상큼한 감정이 나를 통하여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가슴에서 잠궈져 있었던 달고 오묘한 어떤 것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첫 계시(밝히 앎)는 그동안 내가 어둡고 소리 없는 감옥에서 소비한 모든 세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단어 “물”은 태양이 꽁꽁 얼은 세상에 내려 쪼이듯 내 마음 안으로 떨어졌다. 이 최고도의 사건 이전, 내 안에는 먹고 입고 잠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내 하루 하루들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희망도 예상함도 없는, 흥미와 기쁨도 없는 그야말로 백지상태 그대로였다. 즉,

이전 나의 생활은 밤이 아니었다-낮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간을 빨아들이는 공허였다,
그리고 고정됨, 그런데 장소가 없다:
거기에는 별이 없고-땅도 없고-시간도 없고-
제지받음도 없고- 변화도 없고-선도 없고-죄지음도 없었다

나에게 온 이 변화는 자연의 경이로움으로부터 영의 경이로움으로 가는 한 계단에 불과했다. 스위든볽의 메시지가 나에게 밝히 알려졌을 때, 또 하나의 귀중한 선물이 내 삶에 보태졌다. 나는 이 감격을 말로 옷입히려 노력할 것이다. 이 감격은 마치 빛이 없던 곳에 빛이 온 것 같고, 만질 수 없는 세계가 확실히 있는 세계로 빛을 발하게 했다. 내 마음의 수평선은 동작을 더 빠르게, 전투는 더 강하게 치루는 머리가 좋은 인간 운명 쪽으로 넓혔다.
천국, 이는 방사된(radiant) 견해들을 수집한 곳이 아니라 실제로 살 수 있는 세계이다고 스위든볽은 초상화했다. 결단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것, 죽음은 삶의 끝장이 아니고 살아감의 경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삶을 경험하는 것일 뿐이다는 것이다. 내 생각들의 큰 침묵 안에는 내가 땅에서 사랑했었던 모든 이들, 그들이 가까운 사이었든지, 먼 사이 이었든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관계 없이 모두가 살고 있고, 그들 고유의 개성도 가지고 있고, 그들 자신의 습관과 매력도 잃지 않고 있다. 어떤 순간, 나는 외로움에 힘을 보태고 싶으면 내 주위로 그들을 데려올 수 있다. 만일 어떤 장벽이 그들이 나에게로 오는 사이에 있어 방해 한다면 내 가슴은 터질런지 모른다. 나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는 줄자로 잴 수 있고 규범이 지배하는 세계, 또 하나는 심정으로 느낄 수 있고 직관적 통찰이 있는 세계이다. 스위든볽은 나로 하여금 미래의 삶을 마음에 품어 보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바랄 수 있는 삶으로 만들어 주었다. 분리와 슬픔을 가지고 죽음의 힘을 만나야 하는 생명있는 사람에 주는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에서 불어오는 어떤 시원한 미풍처럼 되어 인간성의 가슴을 가로질러서 말끔히 청소해준다. 자연이 자신을 금색과 에머랄드색과 진홍색 옷으로 치장하고 죽음을 만나듯, 우리도 죽음을 만나되 가장 빛나는 생각들과 가장 빤짝이는 기대함으로 차려 입고 영광의 불꽃 안에서, 쾌활한 걸음으로 무덤으로 행진하여 마치 영원불멸을 나에게서 강탈하려는 죽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
사람이 위 사항을 믿기 힘든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그것이 입증 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자신이 불신하는 태도 때문에서 이다. 이기주의적 욕구는 영적 분투 노력을 궤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바꾸어 말해, 그의 내적 능력들이 의식하는 경험의 지점에까지는 아직은 도달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들의 내적 기능들이 결과를 가져다 주기에는 너무나 유약한 편이다는 말도 된다. 그는 과도하게 얻고자 하는 것(탐욕)이 자신의 품성에 얼마나 유해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실감할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영적 존재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물질적인 것만이 진짜라고 믿는다. 우리의 문명은 스위든볽 같은 철학자의 가르침이나 위대한 사상가의 선견에 무관심한 정도에 비례하여 실패하고 만다.
우주 같이 넓고 신중한 생각들을 지니고, 자기 손에 지혜를 쥔 스위든볽은 천사들이 영계의 이 구역으로부터 저 구역으로 인도하여 사후 우리가 맞는 삶과 불멸한 것들의 실체를 어떻게 자기에게 보였는가를 말하고 있다. 천사들은 그의 선생이요 안내자였다. 그는 천국에 자기 혼을 맡겼다; 그는 신성한 섭리의 방대함, 영원한 삶의 굉장한 환경을 감지했다. 그는 창공과 별들의 감겨지는 진로를 걷는 것도 허락되어졌다.
나도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실력있는 비평가는 나를 경멸의 자기들 수레바퀴에서 부수어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빈약한 철학을 그들의 날카로운 환락의 모루 위에서 과학으로부터 추려낸 이성의 망치로 수정하려 노력할 것이다. 즉 “모든 창조는 물질 속의 보이지 않는 원자 안에서 그 자체에게 왕관을 씌운다. 이것이 시작과 끝이다.” 아마….; 그러나 백합의 꽃받침(cup)에 이슬방울이 아직은 있다; 장미의 가슴에 향기가 있다, 그리고 나뭇잎 아래 새들이 날개를 접고 있다! 나는 죽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련한 신앙을 이해할 수 없다. 죽는 것을 보고 상처받는 신앙은 허물허물한 갈대에 (몸을) 기댄 것이나 흡사하다. 불변의 생각을 가지고 나는 보고있는 모든 것을 넘어야 보이는 것을 뒤쫓고 있다. 내가 영적 빛 안에 서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이다 ”라고 외칠 때 까지 나는 불변의 생각들을 뒤따를 것이다. 내 삶을 뒤돌아 볼 때, 나의 가장 값있는 은덕(obligation)은 내가 결코 보지 않았던 분들인 것 같다. 나의 아주 절친한 사람들은 지성(mind) 속에 있는 이들이고, 나의 충성스럽고 도움 주는 친구들은 영(spirit) 속에 있는 이들이다.
나는 종교 없는 나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만일 종교 없는 나를 말하는 것보다, 심장 없이 육체가 살아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출생 때부터 눈 멀고 귀 먹은 이들에게 영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정상적 사람에게는 영적인 것들이 거리도 먼 것 같고 어렴풋하듯, 나에게는 자연적인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나는 스위든볽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내 큰 점자책 안으로 내 손을 깊이 던져 넣는다. 그리고 이 책에서 물러날 때 내 가슴은 (밝히 안) 영계의 비밀들로 가득하다. 내적 감각(inner sense),(혹시 당신이 내적 감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냥 “신비적(mystic)” 느낌(sense)이라 말하고 싶다면 말해도 괜찮다) 이 감각은 (자연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미리 보게(선견, vision)해준다. 나의 신비한 세계 안에는 내가 결코 “보지 못했던” 나무와 구름과 별과 소용돌이 치는 시냇물이 사랑스럽게 있다. 자연계의 사물을 보고 있는 나의 동료들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는 그 곳에 아름다운 꽃들과 새들과 웃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는 것을 자주 의식한다. 내 동료들은 내가 “바다에도, 땅에도 있지 않았던 빛”을 보고 있다 하여 회의적 분위기에서 나를 대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 그들의 신비적 감각은 잠들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메마른 장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리 볼 수 있는(vision) 것들 보다 이미 보았던(fact) 것들을 선호한다. 그들은 과학적 증명을 원한다. 그들은 그 증명을 가질 수 있다. 지칠줄 모르는 인내가 그 속성인 과학은 인간의 뿌리를 원숭이에게 까지로 되돌아가 추적하여 인간의 뿌리를 증명해냈다고 만족해 한다. 그럴지라도 하느님은 이 원숭이로부터 미래의 삶을 미리 보고 깨닫고 사는 사람을 창조하신다. 삶이 죽음을 결국은 만나듯, 과학도 그렇게 영을 만난다. 그 이유가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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