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든볽의 사상을 만나다

II

스위든볽의 사상을 만나다

내가 18세기 스위든의 위대한 선견자의 저술에 처음 접촉되었을 때 받은 느낌을 말하려면 이는 30년 전의 사건인 바, 하느님에 관한 나의 최초 의문들로 되돌아 가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사건 같이 되어 버릴런지 모른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해진 답은 자연이 땅과 하늘과 물과 모든 생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어머니 자연이라 일컬었다) 한 동안 이 대답은 나를 만족시켰다. 그리고 나는 내 어머니의 정원의 장미 나무 사이에서, 강둑에서, 혹은 데이지(daisy)가 만개한 들판에서 마냥 행복했다. 이곳에서 나의 선생님은 나에게 씨와 꽃, 새와 곤충 그리고 강 속의 물고기에 관하여 진짜 “아라비안 나잍스(Arabian Nights)”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여느 아이들 같이 나도 내가 만졌던 모든 물건은 살아 있고 자아 의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머니 자연의 자녀라 상상했다. 그러나 내가 더 나이들어 갔을 때, 나는 내가 만질 수 있었던 자연의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하여 따져보기 시작했다. 자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성숙해진 단어들과 나이 많아진 이후 가진 생각들을 사용하여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인 손으로 더듬고, 엉성하여 적당히 둘러대던 것에 관한 인상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 존재들이 일을 한 것과 자연의 경이로움들이 만든 것 사이에 놓인 차이점에 주목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그녀의 뜨거운 케잌(cake)을 뒤섞는 것 같이, 강아지, 꽃, 돌, 아기, 폭풍 등이 함께 어우러진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를 당혹케 했던 나무와 들판에 있는 것들에 질서와 순서가 있었다. 동시에 나를 겁먹게 했던 자연력으로 해서 뒤숭숭한 때도 있었다. 아름다운 것이 까닭 없이 파괴되는 것, 못생긴 것, 쓸모 있는 것, 밉살스러운 것, 정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또는 지진과 홍수, 토네이도(tornado)에 의한 (파괴) 등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즉 무책임하게 힘을 과시하는 분별없는 집단이 어떻게 파괴된 것을 언제나 재생하면서 창조하고 살아 있게 간직하는지…!, 봄, 여름, 가을, 겨울, 파종과 수확, 낮과 밤, 밀물과 썰물, 이어져가는 인간 세대 등등을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나는 자연이 나와 내가 사랑한 것들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 파리나 작은 가지 보다 못한 것으로 여긴다고 느꼈다. 이 느낌은 나에게 분함 같은 어떤 것, 즉 ”자연의 혼은 자기의 거대한 요구를 교묘하게 빗대어 말함으로 일을 저지르고, 그리하여 자연 속의 사건들과 사물들을 통치할 특권을 가졌다고 선포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도 돌출되기도 했다.
이 결과 나는 자연이라는 것에서 돌아섰고, 대신 하느님에 관하여 묻기 시작했으나 다시 좌절을 맛보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하느님은 창조자이시다는 것, 그분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 그분은 모든 인간 삶에 필요한 것, 기쁨들, 슬픔들을 아신다는 것, 그분이 미리 아시고 섭리하심 없이 발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등등이었다. 관대한 성품을 지닌 어떤 사람이,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우시고, 그분의 태양을 정의로운자이든, 불의한자이든 공평히 비추이게 하신다고 말했다. 나는 이런 거룩하시고 사랑스러우신 존재에게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 관한 어떤 것을 이해하기를 정말로 갈망했다. 그 뒤 나는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를 만났는데, 그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만인의 빛이다” 라고 말하여 그분에 대한 중심되는 진리를 붙잡도록 나를 도왔는데, 이 간단한 몇 마디는 내 혼을 휘저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신성한 사랑과 물질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만들어 볼 수 없었다. 나는 불확실함과 그늘진 구석에 처박혀 나 자신을 잃었던 때가 많았다. 이 때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재 보증되어 주었던 참 빛과 눈 앞의 실제이기에 부인하기 힘든 자연의 어둠과 혼돈 사이를 이리저리 배회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빛나는 행복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느낌을 더 가깝게 가져오는 계기가 있었다. 나비가 누에고치로부터 나와, 태양에서 날개를 말리는 절묘함을 “내가 지켜 본 것”, 그 뒤 그 나비가 철쭉(arbutus) 더미 위에서 펄럭이는 것을 만졌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고대 이집트인들이 나비를 불멸의 상징으로 간주했었는지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기뻐하였다. 이런 생명의 형체들은 아직 더 사랑스러운 것들에 관한 교훈을 그것들 안에 가지고 있을 것인 바, 그것은 나에게도 의당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둥근 큰 톱(buzzsaw)이 계속 나를 괴롭혔는데, 이는 어느날 직관의 번쩍임이 나에게 무한한 경이를 밝히 보여주었던 때까지 였다.
내가 반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내 선생님에게 돌아서며 말했다.“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금 내내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방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헬렌?” 하고 그녀가 놀래면서 물었다. “그 이유가” 나는 소리쳤다. “나는 아테네에 있었다.” 이 말이 내 입으로부터 나왔을 때 빛나고 놀라게 하는 사실을 깨달음이 내 마음을 휘어잡고 불태우는듯 여겨졌다. 나는 내 혼(soul)의 실체(realness)를 지각했다. 동시에 혼은 육체와 공간이라는 조건들로부터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지각했다. 이렇게 지각한 이유는 내가 영(spirit)이었기 때문이고 영은 수천마일 떨어져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보고”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명료하게 했다. 공간이라는 것은 영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 개념에서 나의 새 의식은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것, 그분 자신이 영(Spirit)이셔서 순간적으로 모든 곳에, 단 번에 어디에나 거주하실 수 있는 창조자이시다는 진리로 번쩍거렸다. 따라서 내 조그만 영도 나의 소경되고 귀먹은 장애를 초월해 대륙과 바다를 건너 그리스에 도달할 수 있었구나 하는 사실은 또 하나의 기뻐날뛰는 감동으로 나에게 돌진해 들어 왔다. 나는 내 한계점들을 몽땅 부수었다. 그리고 내 촉감 안에서 눈을 발견했다. 나는 현인들의 생각들-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생명을 세세토록 살아남게 했던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동시에 그것을 나 자신의 일부로 소유할 수 있었다. 하느님, 환경 제약을 받지 않는 참 영은 자연 속의 상해들인 사고나 고통, 파괴를 취소되게 하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연락을 취하려 하신다.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이 진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 장애들은 내 인생의 외곽 영역으로 좌천 당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과정이 내 어린 시절의 마음과 더불어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어린 나이인지라 어렴풋했지만 나는 진짜 “나”, 즉 내적인 “나”가 도서관을 떠나 내가 원했던 장소를 정신적으로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나는 행복했다. 이것은 나의 조그만 씨였고, 이 씨로부터 영적 주제들에 관한 내 관심은 자라갔다.
이 때 당시 나는 성경의 이야기들에 관한 것들은 온유한 나사렛 사람의 이야기 빼고는 관심이 없었다. 창조 이야기, 특별한 과일을 먹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남, 대 홍수와 분노와 주님의 앙갚음은 내가 읽었던 그맄-로마 신화들과 매우 비슷한듯 나에게 비쳐졌다. 게다가 이런 신화들 안에도 내가 찬양을 보내고 싶은 신이나 여신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 역시 성경과 유사한듯 비쳐졌다.
나는 나의 착하신 아주머니(aunt)가 나에게 신성한 책으로 쥐어주었던 성경에서 빛나고 아름답고 온화한 얼굴을 지닌 존재의 모습을 내 심정 안에서 발견하지 못해 실망했었다. 그녀는 나에게 계시록의 이야기들을 말해 주었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도대체 나는 하느님과 용과 뿔달린 짐승 사이의 전쟁에서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받는 이들과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시다고 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천국은 산이나 들판, 대양, 달콤한 열매가 많은 땅, 피곤해진 발들이 쉬는 곳, 이런 장려함이 있는 곳이라 생각되는데, 왜 계시록에 있는 하느님의 성은 금으로 포장된 길과 성벽을 보석으로 지었는지 너무나 이상했다. 이와 달리 슬픈 자를 위로하고 아픈 자를 고쳐주시고 눈먼 자에게 새 빛을 주시고 벙어리 입술이 열변을 토하게 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감촉있는 이야기는 내 깊은 곳을 휘저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세 인물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예배할 수 있단 말인가? 세 인물을 인정하는 예배는 구약 시대라면 혹독한 처벌이 즉각 따른 거짓 예배의 한 종류가 아닌가?
위와 같이 성경에 대한 당혹감과 불만족이 내 마음을 점유하고 있을 즈음, 내 삶 안으로 쟌 힛즈(Mr. John Hitz)씨가 들어 왔다. 그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들 중의 한 분이었다. 그는 워싱톤에서 스위스 총영사직을 맡고 있었다. 후에 그는 벨 박사가 전화를 발명한 이유로 수상한 볼타(Volta) 상금으로 벨 박사가 설립한 볼타의 국장이 되어 있었다. 이 사무국은 귀먹은 이들에게 정보를 수집해 나눠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이 목적 실천의 일환으로 볼타 잡지(Volta Review)도 발행하고 있었다.
1893년, 나는 힛즈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때 내 나이는 13세 였던 것 같다. 이 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 넘치고 아름다운 친구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내 인생 속의 가장 귀중한 기억들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그분은 내가 했던 모든 것, 즉 내 공부, 소녀적인 나의 즐거움, 나의 꿈, 대학에서의 나의 노력, 맹인을 위한 나의 일, 등등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분은 내 선생님의 진가를 온전히 인정하시고 그녀의 일은 나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이에게도 중대한 일임을 인정해준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분 이시기도 했다. 그분의 편지들은 내 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선생님이 나에게 해준 것, 곧 이는 어두운 모든 장소에 드리운 빛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분은 보스톤(Boston)과 캠브릿지(Cambridge)에 있는 우리들을 자주 방문하셨다. 그리고 선생님과 내가 남쪽의 고향을 오고 갈 때는 와싱톤의 그에게 들려 머물었기에 우리의 여행은 늘 유쾌 했다.
내 선생님과 내가 매사츄세쓰 주의 렌샘(Wrentham)에 정착했을 때, 그분은 매 여름 우리들과 6주를 보냈는데, 이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이어졌었다. 그분은 이슬이 아직 풀과 나무에 놓여 있고 대기가 새들의 노래로 즐거워하는 이른 아침에 나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을 사랑하셨다. 우리는 나무들과 상큼하여 냄새 좋은 초원을 시간 가는 줄 모른채 왔다 갔다 하였고, 때로는 렌샘의 그림같은 돌벽을 지나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분은 나로 하여금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지닌 깊은 의미에 더 가까워지게 했다. 그분이 이야기 해줄 때 위대한 세상은 불멸의 영광 안에서 나를 위하여 번쩍였다. 그분은 자연에 대한 사랑에 나를 일깨워 주셨는데, 이 자연을 사랑함은 내 침묵에 음악으로, 내 어둠에 빛으로 아주 귀중한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그분과 함께 즐겼던 고요 속의 빛나고 향기나는 순간들, 웃고 있는 개울들과 꽃들을 회상하면 너무나 달콤할 뿐이다. 매일 나는 그분의 눈을 통하여 새롭고 매혹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그 풍경은 “절묘한 소낙비로 포장된” 상상 속의 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분은 대화를 자주 멈추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나무들이 흔들리며 기우는 것이나 꽃들의 구부림, 옥수수의 파도 물결 같이 흔들 거리는 것을 감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때 그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연 안으로 이 모든 생명을 놓는 바람은 하느님의 영에 대한 놀라운 상징이다”
내 14번째 생일에 그분은 자기가 30년 이상 차고 다녔던 금시계를 나에게 선물하셨다. 나는 그 시계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려고 스위스에 보냈던 때 말고는 내 품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 시계에 관련해 기묘한 것은 이 시계는 애당초 맹인을 위해 만들어진 시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시계는 한 때 독일 대사가 소유했었는데, 그는 자기가 아주 중요한 약속을 정확히 지키려고 이 시계를 다시 만들었다. 그는 카이서(Kaiser) 황제의 아주 높은 고관을 어쩔수 없이 방문해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이 고관을 방문하여 그를 기다리되 시계를 쳐다본다거나 그렇다고 너무 오래 거기에 머무른다거나 하는 것은 그 고관의 입장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이 대사는 궁리 끝에 보석 세공인에게 가서 자기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시간을 “감지”할 수 있도록 이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이 시계의 얼굴은 크리스탈(crystal)이고, 뒤쪽에 금 시계 바늘(hand)이 있는데, 이 바늘은 시계의 분침(minute hand)과 연결되어 있어, 뒤쪽의 바늘과 함께 서거나 가거나 한다. 그리고 시계의 둘레에는 시간을 말해주는 금 눈금들이 있었다. 나는 이 시계를 내 가슴 앞에 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계는 내 친구 자신이 나를 위해 일하고 사랑해주듯 충실하게 나를 위해 째깍째깍 소리를 내주었다. 내 앞에 자기의 사랑을 간직하게 한 그분이 작고하신지 근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시계의 째깍 소리는 나를 그분에게 더 가까이 데려다 주는 달콤한 의식을 늘 지니고 있다. 진실로 이 시계는 유한의 시간을 영원의 시간과 연결해놓는 값을 초월한 보물 아닌가!
힛즈씨와 나는 여러 해 동안 서신 왕래를 했었다. 그분은 나에게 자주 보낸 긴 편지들을 나 혼자 읽을 수 있도록 하려고 점자 철자법을 배우셨다. 이 편지들은 그분과 내가 영적 친척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내가 그분의 손을 만져보고 싶을 때나 내 일로 고민하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현자들의 말들에 갈급할 때 다시 읽게 해주어 나를 위로해준다. 나에 대한 그분의 첫 생각이자 마지막 생각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직면하는 장애물들을 줄여줄 수 있을까였다. 그분이 재빠르게 지각하신 것은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들과 관련있는 책에 얼마나 굶주려 하고 있는가에 비해 내가 읽기 가능한 점자책은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8년 동안 그분은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게 기쁨을 줄 것 같은 책들, 즉 이야기들, 위대한 사람의 전기들, 시집, 자연 연구, 그 무엇이든 타이핑하는데 바쳤다. “천국과 지옥”을 읽은 후 내가 스위든볽의 저술들에 관해 더 알고 싶다는 표현을 했을 때, 그분은 내 읽기가 촉진되도록 책들을 요약하고 편집도 하시는 등 수고를 많이 하셨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볼타 국장직과 여러 허드레 업무를 마친 뒤의 여가를 틈내어 해주신 것 아니던가! 그분은 편지에서, 그분이 나를 위하여 책을 베끼는 시간을 보낸 “아침 식사 전의 조용한 시간들”, 그리고 이 시간 “나의 사랑하는 헬렌과 마주 대하는 나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다. 많은 나의 친구들이 나를 위해 대단하게 일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힛즈씨가 그의 침묵의 여러 해들을 채워왔던 내적 햇빛과 평화를 나에게 나누어주려 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들에는 비교할 바 못된다. 해가 더할수록 나는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당겨져 갔고, 그분은 날들이 지날수록 더 꾸준하게 편지를 써주셨다. 그런데 큰 슬픔이 나에게 닥쳤다. 나는 내가 내 선생님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친구와 분리되어야 했다. 내가 고향의 어머니를 방문하고 랜샘으로 돌아가는 도중 평상 때와 같이 나는 와싱톤에 들렸고 힛즈씨는 나를 만나러 열차로 왔다. 그분은 나를 안고 기쁨이 가득한 채,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했었는지 모른다고 말하셨다. 그분은 나를 열차로부터 데리고 나가셨는데, 그 때 그분에게 갑자기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임종 직전까지 그분은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어두운 순간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분의 맥박을 느낀다. 만일 내가 이 분이 참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도 친절하시고 온유하신 친구를 잃은 것을 참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고귀한 철학과 장차 오게되는 삶에 대한 확실성은 나로 하여금 비록 그분이 떠났어도 우리는 내가 꿈꾸는 어떤 것 보다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세계에서 다시 만나고야 말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버티게 해주었다. 매우 드문 그분의 인물됨에 관한 기억은 언제나 나를 도우며 나와 더불어 있다.
그분은 고결한 인격과 나누어줄 영적 선물까지 지닌 분이셨다. 그분의 심정은 순수하고 따뜻했으며 그의 동료를 향하여 최선을 강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가득 찬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타인을 위하여서는 사랑스럽고 아껴주려는 어떤 배려함에서 언제나 행동하셨다. 그의 매사는 “네 몸 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기초되어 있었다. 80세의 연세인데 그분은 언제나 푸른 상태의 심정을 지니셨고, 즐거움으로부터 있는 그의 무진장한 힘은 그를 여느 보통의 인간성을 훨씬 넘게 들어 올려주었다. 그는 젊은이들과 더불어서는 젊은이였다. 그분은 나에게 나이 많은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분에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기 손가락 위에서 간신히 철자를 말했다. 그리고 그가 알아 듣는 것이 아주 힘들 때, 나는 내 불완전한 말솜씨의 문장을 여섯 번씩 반복해 말할 경우도 있었지만 끝내 들어주셨다. 우리의 사랑들은 이런 어려움들을 다 덮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교제는 노력의 댓가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웠을 때, 힛즈씨가 감지한 것은 문학에 대한 나의 배고픔이었다. 그분은 내가 특별히 흥미를 갖는 주제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그분 자신도 귀가 안 들리는 상태에서 성장했기에 그의 성장 배경은 감각 세계에 관한 나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빨리 감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분은 나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시각과 청각을 지닌 이들의 자리에, 그리고 사물로부터 그들이 받는 종교적 감명의 자리에 나 자신을 놓으려 노력한다면 그들의 감각은 나의 것과 하나로 연합할 것인 바, 바깥 세계에 관한 나의 즐거움은 경이롭게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떻게 내가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는지와 또 그들이 이해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가를 말해주기도 했다. 그분은 내 손에 점자로 된 스위든볽의 “천국과 지옥 ” 사본을 놓아 주셨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못하리라는 것도 자기는 알고 있다고 말하셨다. 그러나 이 독서는 내 마음을 위한 좋은 연습이 될 것이고, 내 마음에 계신 대단히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도 말해주었다. 그분은 나에게 이해가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에서 무엇이 진리이냐 보다는 무엇이 선이냐를 찾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 이유는 스위든볽도 말했다. 즉 “선은 빛을 주는 작은 불꽃 같은 바, 선은 인간으로 보게하고 지각하게 하고 그리고 믿게 한다.”
내가 “천국과 지옥”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과거 내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광장 계단에 있던 수년 동안 가져보았던 기쁨같이 내 삶 안으로 오고 있는 새로운 기쁨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였다. 독서를 사랑하는 어린 소녀가 호기심 만의 충동으로 무슨 책이나 마구 읽듯, 나는 이 큰 책을 열었는데, 보라 내 손가락들은 어둠을 지닌 눈먼 여인이 스위든볽의 저술 속의 아름다운 진리들로 계몽되었다는 서문의 한 문단 위에 불을 켰다. 그녀가 믿고 있는 바, 이 책은 잃어버린 지상의 빛 보다 더 많은 빛을 자기 마음에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결단코 의심치 않은 것은 물질적 몸 안에 완전한 감각들을 지닌 영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두운 얼마의 햇수가 지나면 자기 눈 안의 눈은 더 경이롭고, 완전하여 이 세계 보다 더 만족을 주는 세계에로 무한하게 열린다는 것이다. 나의 심장은 기쁨으로 마구 뛰었다. 바로 이 책에 내가 그토록 날카롭게 느꼈던 것을 강조하는 신앙이 있었다. 즉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다는 것, 전체로서 내가 그려보았던 실체는 한계있는 내 신체의 감각들이 매 번 만났던 불합리한 우발 사건과 미완성적인 것들의 혼돈과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내 자신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젊은 의지로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스위든(sweden)의 현자의 무게있는 생각들과 긴 단어들을 꿰맞추어 내려 노력했다. 여하튼 나는 한 분, 유일하신 분으로 내가 사랑했던 그분의 모습을 감지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해하기를 원했다. 사랑과 지혜라는 단어가 내 손가락들을 이 문단으로부터 저 문단으로 어루만져가게 하여 주는 것 같았다. 더불어 이 단어들은 나의 나태한 본성을 자극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가라고 종용하는 새 동력이 내 안에서 방출되게 했다. 나는 줄곳 책을 앞뒤로 오가면서 여기서 한 줄, 저기서 한 줄 하는 식으로 뽑아내어 “교훈에 교훈을” 보태면서 글자적 서술의 구름들에 감추여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또 다른 것을 한 웅큼 쥐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읽은 것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내 혼이 팽창되는듯 여겨졌고 나를 괴롭혔던 고민거리 한가운데에서 확신을 얻게 했다. 그 책의 다른 세계에 관한 묘사들은 나를 먼 곳, 측량 불가능한 먼 영역, 초인적인 아름다움과 경이함으로 가득채워진 곳으로 데려갔다. 이 곳에서는 천사들의 도포가 빛나고 있다. 이 곳은 위대한 생명들과 창의적 마음들이 가장 어두운 환경에 광채를 던지는 곳이다. 이 곳은 별난 대사건들과 내노라 하는 큰 전투들이 끊임없이 청소되는 곳이다. 이 곳은 하느님의 미소를 수단으로 밤이 영원의 낮으로 불 밝히는 곳이다. 이런 혼의 분위기에 앉아서 고상한 남녀가 위풍있는 행렬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때 내 마음은 통째로 빨갛게 탔다. 그 이유가 처음으로 불멸함이 나를 위해 알기 쉬움이라는 옷을 걸쳤고, 땅은 사랑스러움과 의미 있음이라는 새로운 곡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도성이 유리 길이나 사파이어 벽 등등으로 된 시시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생각들과 고귀한 감화력 등 슬기로움의 체계적인 보물 창고임을 발견하고 무척 기뻤다. 나는 성경을 과거 나를 괴롭게 한 책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귀중한 진리들을 파내기 위한 도구로서, 즉 내 영의 지고한 명령을 위해서라면 내 불완전하고 머뭇거리는 육체를 사용할 수 있듯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편협된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기독인들이 아니면 처벌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연히 내 혼은 불쾌했는데, 그 이유는 나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죽은 경이로운 사람들은 이교도 땅에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책 “천국과 지옥”에서 “예수”는 신성한 선을 뜻하고, 선은 행위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고 이 진리는 인간의 지성 안으로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내보낸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은 정죄되는 일이 결코 없다. 이런 개념 속에서 나는 성년의 여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칸래드(Conrad)가 까닭도 모르게 자기가 선택할 언어를 영어에서 발견해갔듯, 나도 모르게 새 교회 교리들을 내 종교로서 하나하나 더 받아들였다. 이 교리를 선택해감에서 나에게 용기를 돋구어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 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누군가 보다 더 설명을 잘 해낼 자신도 없다. 내가 오로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위든볽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미개한 신조들의 얼룩과 더러움에서 (내 혼을) 자유하게 했고, 즉시 그 말씀은 내 인생의 선과 환희가 되었다는 것, 더구나 내 선생님의 일에 대한 나의 증대하는 진가와 섬김을 위한 내 자신의 책임감, 투쟁과 외로움의 시간들, 아주 깊은 환희의 시간들, 정면으로 마주쳤던 거친 진리들, 쉽고 안심됨이라는 유쾌할듯한 미끼를 무는 것보다는 높은 꿈들을 더 귀중히 여겨 붙드는 것, 이런 등등과 경이롭게 연결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진리들은 마치 빛과 색깔, 음악이 눈과 귀에 밀접하게 관련있듯 내 정신 기능에 그러하였다. 이 진리들은 더 충만된 감각-생활을 탐낼듯 갈망한 나 자신을 내 안의 완전한 존재를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들어 올렸다. 날마다 가능함으로 가득한 두 손이 나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짧은 과정에서 나는 내 존재함 속의 모든 참인 것과 실재인 것, 축복이 자라나는 것, 행동에 따른 뿌듯함, 아름다운 영을 식별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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