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어떤 책인가?

IV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은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의 법에 일치하는 삶을 배우려는 인간 노력에 관한 기록이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순간적으로 가졌던 인간의 감명과 아주 빠르게 지나치고 바뀌기도 하는 그분의 세계에 대한 모습을 불변의 형체 안에 붙잡아두려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 노력의 과정에서 성경의 글자 의미 안에는 많은 모순들과 하느님의 본성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성경은 절룩거리며 걷기를 시작해서 그 걸음이 발달되어 급기야 그리스도-복음에서 완전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영적 “일리아드(Iliad)”라고 마음에 품어본다. 이 책은 수천 년의 시간으로 덮힌 책,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있고, 화려하되 얼룩얼룩해진 이야기, 어떤 지점에서는 영감 없는 한 개인의 상상들이나 물질주의의 어두운 시기들이 가로지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굴이 세상에 비칠 때 계몽된 시기들도 있다. 그리고 들판과 창공과 물 위에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빛이 있었다. 인간 체험의 혼돈을 빠져나온 어떤 한 개인이 때로는 영적 자각의 절정에 들려졌다. 인간이 발달되어 접혀 있던 그의 총명을 펼 때, 이들의 개인적 절정은 더 자주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엄밀히 보면 똑같지 않다. 각각 모두는 빛을 가져 온 자들이다; 그러나 빛은 (중간)매체에 의해 무한하였다 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 매체를 통해 때로는 신성한 근원을 지각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도 전달되고 말았다.
땅 위의 만물이 또다른 세계의 모든 실체들을 표현하고 묘사하듯이, 성경은 인간의 영적 모든 삶을 대표하는 권위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이 책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우리에게 오고 지나간다. 법을 준 사람, 왕들, 예언자들 등등이 여러 페이지를 통해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산과 시내, 세대들이 끝없는 과정 속에서 지나간다. 그들은 기도하고, 울고, 기뻐하는 소리로 성읍들을 채우고, 심정을 악한 상상으로 채우고, 새긴 우상을 자신들에게 만들고, 창검에 의해 죽고, 법을 위반했기에 포로신세에서 탄식하고, 자기들의 머리를 여호와 앞에 굽힌다. 그러자 그들의 적들 위에 저주가 퍼부어진다. 건설하고, 결혼하고, 파괴하고,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희생제를 바치고, 위로 받고, 그들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성경은 이 세대로부터 저 세대에까지 계속되면서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인 바, 불일치와 혼동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성경은 인간 영을 더듬어 보는데 있어 인류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찌꺼기와 금을 분리하는 것, 즉 인간의 말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분리하는 작업, 이 작업이 스위든볽이 감당한 몫이다. 그는 성경의 거룩한 상징성을 해석하는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마치 요셉이 포로된 땅에서 바로에게 꿈의 의미를 알려 주었을 때 그가 발휘했던 천부적 재능과 비슷하다. 스위든볽 시대 때 신학자들은 지식 없는 모호한 말들로 문의나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두운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들이 성당(Shrine)의 휘장 앞에서 도움을 주지 못할 때, 스위든볽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휘장을 한쪽으로 제끼고 모든 영광으로 차 있는 지성소를 밝히 보여 주었다.
지상의 교회는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거주하셨다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영감 있는 이야기들로부터 떠나 버렸다. 불가사의한 실체를 성직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물로 얽어맨 망상들로 대체했는 바, 결국 자신들도 구해낼 수 없었다. 신성한 인간성 속의 아름다운 진리는 찌그러지고 분리되어 인식을 넘어 해부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주님 자신은 치명적인 방언들 안에서 잊혀졌다. 스위든볽은 깨트려지고 부셔진 부분들을 모두 가져다가 정상적 형체와 의미를 주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은 새로운 교제”를 건립했다. 스위든볽은 파괴자가 아닌 신성하게 영감된 해석자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보낸 예언자였다. 그의 말 자체가 이를 더욱 확신 있게 해주기에, 후대의 똑똑한 여느 후배의 증언 보다 낫다. 우리는 그의 책에서 그의 힘찬 개성을 비켜가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메시지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이해함과 기쁨으로 채워진다. 그는 새로운 성경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새로이 했다. 그를 받아들일 경우 영적 재산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의 저술 모두를 망라해 있는 그의 첫 번째요 마지막 번째 되는 생각은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해석할 경우, 하느님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고상한 개념이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신학적 주제들을 저장하는 밀실이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그 주제의 중심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다. 허나 이 생각이 왜곡되고 잔인한 쪽일 경우 그것의 뒤를 잇는 모든 것은 논리적 연속성에 의해 똑같은 품질로 치닫게 된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것도 된다. 따라서 가장 깊은 것, 즉 중심되는 생각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믿음, 생각, 제도 등의 참 본질이다. 이 본질은 마치 영혼 처럼 모든 것을 만들고 형상이 되어 그 안으로 들어 간다; 왜곡된 본질일 경우 그것이 일상 생활이라는 평면으로 내려오면 마음에 있는 진리들을 붙들어 본질 속의 잔인함과 오류로 물들인다. 고대 인도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고위 지식층의 사람이 내놓은 원리인즉, 사람이 하느님 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애착과 의무와 (가족, 친척) 관계들을 모두 부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는 지독하리만큼 열정이 식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도, 흥미도 없게되는 바, 급기야 하느님 같이 되어져 무한 안으로 흡수되고, 또다른 세계를 위한 준비가 완료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인간성을 적으로 간주한 신조의 한 부류이다. 이와 연결해 생각되는 신념도 있다. 즉 가공된 어떤 특출함을 내세워 감정들을 불러일으켜 인류의 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예식 자체에 골몰하여 결국 가공된 특출함을 올바르고 유용한 삶과 대체해 놓는 경우이다. 이런 신조들은 모두 도덕성을 어둡게 하고, 도덕적인 것 마저 아첨으로 숭배해지게 하는 최고 존재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선한 자나 슬기 있는 자에게는 역겨운 짓일 뿐이다.
스위든볽이 그의 독자에게 자주 경고하는 위험함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애매모호한 생각이다. 그가 여러 번 말하는 바,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이나 영혼, 그리고 불멸함에 대하여 실수나 미신적인 점이 있을 수 있지만, 대단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창조나 자기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결국 거기에는 신성한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더 슬기 있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신앙인을 떠받쳐 주기 위한 예레미야의 아래 구절은 우리를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하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기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9:23-24)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방황하는 생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 생각은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하는 것, 따라서 이 생각은 이내 중지되고 멸해진다. 하느님을 영으로서 생각하고 영은 에테르(ether)나 바람일 거라고 생각하면 이는 텅빈 생각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람으로 생각할 경우 이는 올바른 생각이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이시기 때문, 모든 품질은 이 두 본질에 속하고 있는 바 이것들의 주체는 사람이고 에테르나 바람이 아니다.”
다시 더 그의 책을 읽어보자: “만일 누구가 신성한 사람에 대한 생각 없이 신성 자체를 생각한다면, 그는 모호한 것을 생각하고, 모호한 생각은 아무 것도 아닌 생각이다; 또는 그가 신성에 대한 생각을 경계 없는 우주로부터 품으면 이 생각은 희미함에서 끝나고, 이런 생각은 자연의 숭배자에 대한 생각과 하나를 만든다; 이것은 자연 안으로 떨어지고, 결국 생각 없는 것이 된다.”
인간 존재 속의 세겹 본성인 영과 지력, 그리고 육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경우, 인간이 지각하는 모든 형체는 상상 안을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혼은 상상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과 우주는 신성한 마음(Mind) 안에 그려져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이 창조를 인간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 특질로 각인된 생각-형체들을 자기의 마음과 육체와 세상에 내보낸다. 이는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페인트하기 전 먼저 그의 마음에 그림을 그려 본다는 것을 상상해보면 간단히 이해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은 사상(idea)들을 생각-형상(thought-image)들, 또는 상징들로 설계한다; 생각-형상들 내지 상징들은 보편적 언어, 유일한 진짜 언어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가 볼 수 있는 형체인 태양을 가지고 자신의 기쁨, 신앙, 내지 자기의 정신적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통상 많은 단어나 어구를 사용한 경우 보다 간단히 더 만족스럽게 전달될 것이다. 언제인가 나는 돋을 새김하여 만든 행복을 표현한 중국 상징화를 만지고는 소리친 적이 있다. 어쩌면 많은 언어로 행복을 묘사한 글을 읽는다 해도 소리칠 정도의 감동(effect)이 나에게서 발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어느 사람이 입을 꼭 다문채 벼농사 들판을 응시하는 그림이었다. 중국인들이 벼농사 작황에 지독하리만치 (생사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들판에 홍수라도 덮쳐 작물이 파괴될 경우 수많은 인간 존재가 굶주림에 시달릴 것임은 피할 수 없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내 마음에서 얼마나 사무쳤는지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말하기를, “단어들은 생각들을 감추기 위해 고용된다.” 러스킨(Ruskin)의 “참깨와 백합”에 웅변적인 문단이 있는데, 거기서 단어들은 마음의 진짜 문제(issue)들을 바깥으로 내모는 바, 마치 가면 같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성경은 보편적 언어로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인 역시 이것을 스위든볽 시대 전에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알기 어려운 말”이나 “비유”와 친숙하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들 같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알기 어렵다. 특히 “계시록”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구주시여” 라는 구절은 말씀에 감추어 놓인 진리가 있음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구름과 불기둥에서, 내지 그분의 권능의 지팡이를 통해서가 아니고는 그분을 알지 못했다. 그분이 자신을 지상 위 사람으로 보이셨을 때, 그분은 악마의 왕자와 동맹한 자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분 자신의 제자들 조차 그분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분의 왕국이 세워지면 누가 가장 큰 자가 되는지를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일을 정복이나 개인의 영화를 도모하는 일환으로 오판했다. 이렇게 그분의 모든 길을 가리운 어떤 것이 있지 않는가! 그분의 참 계시는 구름 안에서 가리운채 있었다. 우리에게 그분을 보이시려 공언한 말씀은 유한한 인간 본성의 한계로 그분을 옷입혀 놓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속성에 대한 가장 모순된 인상을 획득하고 있다. 그분은 무한과 영원이시다. 그럼에도 우리의 격정이나 무지를 그분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격분은 내 안에 없다.” “나는 성내지 않는다. 너는 네 자신에게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다.” 이렇게 그분은 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땅 위에 그분의 분노를 맹렬히 쏟으신다. 그분은 “후회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으로 표출되시고 있다. 그런데 그분은 후회하신다. 그분은 각자의 행적에 따라 (상,벌을) 각 사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분은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물으신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외관 상 모순되는 긴 시리즈도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조화되지 않은 생각의 혼돈 아래 깔려 있는 어떤 질서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사랑에 가치의 모든 무게를 두고 하느님을 믿을 경우, 우리는 성내시거나 변덕스러워 쉽게 변하시는 분으로서의 그분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모순의 발생이 생긴 연유에는 성경이 쓰여질 때의 시대 상황이 미개한 상태인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스위든볽은 이치에 맞는 신성한 계시에 관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과학 분야의 특성 같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새로운 사상에 관한 모든 계시는 그것을 받는 이들의 상태나 수용력에 알맞아야만 한다는 것을 스위든볽은 지적하고 있다. 그가 떠맡은 업무는 성경의 글자적 서술은 아주 단순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외고집인 사람들의 지성에 걸맞게 신성한 진리가 순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증명하기를, 글자 의미 안에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이 의미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진리를 읽고 생각하는 천사들이 지닌 더 높은 총명에는 잘 어울린다. 신성한 진리는 이런 상급의 의미에서 완성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가 내 말을 100% 글자대로 언제나 받는다면 결과는 어떠해지겠는가? 즉 지구는 평평하다…나에게 밤은 없다 등등의 내가 내뱉은 말을 단어 그대로 생각하면 나는 그에게 미친 사람 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다시 말해 내 친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대목은 의미를 운반하는 단어의 겉모습이 아닌 속 뜻이다는 것이다.
말씀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위와 비슷한 바, 스위든볽이 사용한 방법과 비슷하다. 만일 우둔한 사람, 또는 나쁜 성미를 지닌 사람이 성경에서 하느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화를 내신다는 대목을 읽는다면 그에게 하느님은 소심하고 비신성한 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분별력 있고 심정이 훈훈한 사람이 읽을 경우, 그것은 하느님의 겉모습일 뿐이다는 것, 우리는 그분 위에 덮어 씌운 서로에게 성내는 것이나 우리 자신이 자초한 벌을 벗겨 드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받아들인다. 이런 화냄도 있을 것이다. 의로운 자가 돌발적으로 화를 냈다가 가라 앉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는 그를 연마시키려는 사랑의 분노라고 이해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강경함 자체를 실행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부분을 누차 그분의 백성에게 말하시곤 하셨다. 우리가 신성한 말씀에 덮힌 가리개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꿰뚫어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더욱 가까운) 참되고 참된 말씀을 발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내쳐서 에덴에서 추방하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법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깨트리는 것을 보고, 그 죄과를 그분의 창조물에 전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경고는 하시나 그를 돌보지 않는다거나 지옥으로 내던지지 않으신다. 납득 가능한 언어로 계명을 주시어 실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댄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스윈버니(Swinburne)는 아래와 같이 글을 쓰다가 그분의 현존하심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나 아닌 신들을 향하여 너무도 충실한
오 나의 아들아,
내 아름다움이 다른 신들만 못하더냐?
네가 자유롭게 있고 싶은데 내가 너를 힘들게 하더냐?
잘보아라, 나는 너와 함께, 네 안에, 너 때문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내다 보라 그리고 깨달으라

아름다우시고, 모든 것을 참아주시는 신성 위에 집어 던져서 천국에 산더미 같이 쌓여진 혹독한 말들을 실감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분은 실지로 자신을 감추이지 않으신다; 결심 굳힌 이기심의 악한 언어가 그분을 감추어 놓는다.
내가 위와 같이 여러가지 것을 말한 이유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시종 일관하게 읽겠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관하여 구름 한점 없듯 매우 명료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 의거하면, 영적 의미는 혼 만을 집중적으로 취급한다는 것, 따라서 시대나 장소 개인적 인물이 아닌 혼에 필요한 것, 그 시련, 그것의 변화와 갱신 등등 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 강, 어린 양과 비둘기, 천둥과 번개, 금으로된 성과 보석 그리고 치료해주는 생명 나무의 잎과 같은 말들을 읽을 때, 이 말들은 그 말 뒤에 놓인 영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상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애착과 사상이 상징물(표현물)을 수단으로 의미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혼에 사용되는 것은 자연적 표현물이 육체에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해석의 이런 방식이 스위든볽에 의해 27년 동안 고용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의 첫 출판 서적에 있는 한 개의 서술까지도 되돌아가 고치거나 바꿀 필요를 못느꼈다.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같은 자연적인 것(단어)에 대체로 비슷한 영적 의미를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성경 어디서 응용되든 꼭 맞고 있다. 나도 꼭 맞는지 이 열쇠를 시험해본 적이 있다. 이것은 스위든볽이 상응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자연의 형체와 영의 형체 사이를 유추함이다. 성경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유한한 인간 수준에서 말하심, 뿐 아니라 세상에 관한 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스위든볽의 저서들 중 특히 “천국의 비밀들”은 잉거솔(Ingersoll)과 여타 성서 비평가들이 글자적인 서술은 신용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의 많은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런 성경 부분에 대한 가치 판단에서 그들의 판단에 잘못이 있다는 것도 역설하고 있다. 나는 성경 글자 의미가 근대 과학의 빛으로 보면 얼마나 결함이 있는지, 어떤 이야기들은 얼마나 이상한지, 안과 밖이 일치되지 않는 서술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를 배울 기회가 풍부했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주목한 것은 단어로는 읽혀질 수 없으나 상징 안에 들어 있는 의미, 즉 글자 아래 놓인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의미는 상징성이 발생되는 모든 부분들을 잘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래 시편 78편의 경우가 좋은 보기가 될 것 같다:
“나는 비유 안에서 내 입을 열 것이다; 나는 옛 것으로부터의 알기 어려웠던 전해 오는 말을 발음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들었었고 알았었던 말이고,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들이다.” 이 뒤를 이어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후손의 경험, 그리고 가나안으로의 그들의 순례기가 있다. 이 기록은 실지 역사이다; 그런데 위 시편은 말씀의 의미 파악의 방법을 깨달은 사람만이 확실히 납득할 수 있는 비유이다고 발표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에는 얼마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 역사는 물질주의와 무지로부터 탈출해서, 가나안의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 표현하는 것, 즉 더 행복한 삶을 향한 느리고 힘든 발전을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출애굽에 관련한 대단히 간략한 위 설명을 제시한 이유는 스위든볽이 성경을 신성한 진리의 수송 수단으로 어떻게 간주하고 있는지를 여러분께 예증해주려는 때문에서 이다.
1753년에 아스트맄(Astruc)이 모세 오경에 관련된 두 세 문서를 발견하여 일약 유명해지던 그즈음, 스위든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설명하는 “비밀들, Arcana”을 런던에서 익명으로 출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후자의 경우, 성경은 물질적 창조 또는 대홍수 같은 것과 무관하고, 창세기 첫 11장 까지에서도 아담과 노아로 명명된 어떤 개인들에 관련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 주제에 관한 그의 관심은 아주 다른 국면에서 였다. 그는 히브리어에 관한 공부와 그의 정신적 계몽을 수단으로 창세기의 첫 장으로부터 유대인 시대가 열리는 지점 까지는 인간 종족의 영적 생활이 고대의 우화적 스타일로 된 전말서(account)로 주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지적해주는 바, 창세기 첫 장은 인간 마음의 진화의 단계들을 포함한다는 것, 처음에 흑암과 혼돈 뿐인 마음이 단순한 진리와 행복의 에덴에 도달될 때 까지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자아 이익이 힘의 원천이 되고 어린 시절의 순진이 상실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잘못된 생각들이 세상을 홍수 같이 휩쓸었다. 그런 다음 인간들 중 명민한 종족, 즉 방주에 있는 노아로 나타냈는데, 이 종족이 새 시대를 시작했다. 총명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양심의 지팡이가 순수한 혼의 음성을 대신 했다. 상징물은 더 이상 에덴이 아닌 포도원 이었다. 인류는 대망을 품은 젊은 이 같아, 해마다 기록이 갱신되는 위대한 동쪽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시기의 문명은 광범위하게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타락되었다. 다신교와 우상 숭배가 존재 안으로 왔다. 전쟁과 폭력이 땅의 얼굴을 파멸로 덮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또 다른 처방(dispensation)이 내려져야만 했다. 이 처방이 유대 교회의 시작이었고, 이 교회는 시간이 차서 기독교가 세상에 도래할 때 까지 일신교를 살아있게 보존했다. 첫 기독 교회 또는 첫 기독 문명은 모세의 것이 연속된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임시변통하던 것, 즉 수지 양초라든가 몹시 거친 사회에나 걸맞을 깜박이는 횃불의 신앙 등등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고로 말씀의 가장자리의 여백이나 채워야 할 감각-그림이나 예식 광경이나 권위의 지휘봉 같은 것이 오히려 미신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정작 읽어 알아내야만 하는 신성한 의미는 읽히지도 못한채 밀려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외고집적인 세상의 성년기는 지나갔다. 그리고 감정에 지배되어 발발하는 것들을 계속 느낀다. 그리고 몰락하고 불행한 마음의 상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 더 계몽된 신앙의 서광이 인간 위에서 비치고 있다. 그리고 새 사람의 창조가 한걸음씩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모든 심정과 바깥 세계에서 평화의 안식이 도래하고 이기심의 지배와 맹목적 본능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의 광대한 영광스러운 비유로서 초상화되어져 있다. 성경을 읽는 자 누구이든 읽는 구절마다에서 그는 삶을 공부하고 현재의 자기 삶에 적합한 상황도 얻는다. 즉 인생 초기의 순진함, 유년기의 제멋대로 함, 중년기의 삶의 구원을 위한 전환, 그리고 계산할 수 없는 섬김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기쁨이다. 이것은 낙원으로부터 낙원 까지의 완전한 궤도-“주님께서 영원히 앉아 계시는 땅의 궤도”-이다. 지나간 오랜 세월 속의 한정된 단어와 불완전한 사고 방식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새롭고 더 높은 선물과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는 천국의 메시지의 겉모양일 뿐이다.
성경에 대한 더 높은 비평은, 스위든볽이 암시하듯, 성경의 본질적 의미를 조금이라도 거두어 가는 것은 아니고. 초기 유대교 저자들의 잘못된 견해들을 고친다.
이 관점의 경우, 고고학이나 지질학의 축적된 자료, 그리고 다른 (성경 관련) 문서들의 연구와 충돌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전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들려졌다. 그리고 거룩함으로 옷입혀져 있다. 옛 견해는 모든 혼들 속의 위대한 하느님을 대부분 무가치해지게 했다. 옛 견해 속에서는 이러했다. 즉 그분은 시나이 산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었던 분으로 상상되어 계셨다. 그분은 과학이 신앙과 어떤 마찰 없이 연구를 진행해 갈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았던 분으로 낙찰되어 계셨다. 즉 인류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은 좁고 배타적인 빛의 광선을 통하여 모세에게 있어 졌을 뿐이었다. 고로 그분의 섭리는 대체로 무정하고 소홀함들 뿐이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은 저주와 추방의 쓰라린 운명에 있었는 바 수백만의 사람들은 지옥 안으로 휩쓸려 졌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사랑받는 아들”이 중재했고, 이 아들은 파멸되고야말 인류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 다음 “아버지”와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아들”이 중보한 특별한 사람 만에 해당된다. 이런 저런 옛 견해는 스위든볽의 주된 적이었다; 그 이유가 이 견해는 학교에서 꾸준히 가르쳐져 왔고, 설교되었고, 최고의 열정과 웅변으로 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견해의 거인 같은 그림자는 아기의 요람 위에까지 누워 있고, 감옥과 죽음의 자리도 덮었고, 급기야 이것은 일상 생활의 작은 행동이나 흔한 언행에 까지 침투했다. 결국 회의론과 무신론이 사방에서 튀어 나온 것은 당연할 것이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은 과학과 철학을 내려누르고 모든 관대한 감정을 묵살할 것을 요구하는듯 보였다.
그러나 스위든볽은 성경의 진가를 재 발견하여 새 희망을 가져온 새 견해로 이 거인과 맞붙었다. 그와 동행한 하느님은 모든 국가들과 모든 시대의 하느님이시다. 무한하게 인내하시고 이타적일 뿐인 그분은 온 세상을 지켜보셨다. 애초에 그분은 아름다운 나무가 성장하는 법칙과 동일한 방법으로 어린아이 같은 인간을 인도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그를 에덴, 홍수, 포도원, 그리고 탑으로, 그후 모세의 책들과 예언서들로 가르쳤다. 지질학이나 과학으로부터의 그림들은 인간의 거듭남을 상징화하는데 사용되어졌다. 사람 사는 모든 토지에는 언제나 정의의 법칙이 있어왔다; 즉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무라비(Hammurabi) 법전 같은 경우가 있다. 이는 창세기 14장 1,9절에 등장하는 암라펠(Amraphel)이었다. 그러나 십계명이 시나이 산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수세기가 지나 지혜와 과학이 밝히 알려지게 할 영적 법칙들의 윤곽을 보이기 위함 때문이었다. 우리의 기억들에 도장찍혀 확실해진 생명의 그림을 수단으로해서만 우리는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을 살아있는 실체들로 만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신뢰해야 할 만인을 위한 십계명을 외면했을 때, 그들은 말씀을 책으로는 들고 있지 않지만 고결하고 지혜있는 심정에 금으로 된 글자로 새겨 지닌 다른 백성의 실예를 가지고 예리하게 견책되어졌다. 스위든볽은 기독교국이 응당 보여야할 진지함과 덕행의 실예로서 자기 시대에 있던 많은 이방인들을 내세우고 있다. 오! 그들은 지금도 형제애의 덕목을 실현하려 결심 굳힌 용기를 내보여 준다. 한편 우리는 다음 전쟁에서 상대를 죽이는데 가장 치명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해내고 있다. 진실로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고, 글자주의의 옛 하늘과 땅은 녹아 사라질 것이다.
진화는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다고 스위든볽의 가르침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먼저 있어야할 진화, 즉 내적인 것의 “진화” 없이 그 진화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도 그는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 또는 혼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손으로부터 있는 모든 것 안으로 혼의 형체를 놓을 수 밖에 없고, 혼은 물질을 붙잡아 그 혼에 하느님이 생각하셨던 어떤 것의 형상 안으로 형태를 잡는다. 플라토(Plato)가 말한 것, 즉 어떤 것이 없음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다. 그리고 총명은 존재의 다른 평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로부터 진화될 수 없다. 이는 아직도 진리이다. 비록 인간이 보다 낮은 수준의 모양으로부터 보다 높은 수준의 모양으로 발달해 나간 것은 사실이나 시작에서부터 그는 불멸하는 상태였다. 어쨌든 자기 안의 혼을 의식할 때까지 인간은 자기의 보다 높은 수용력을 즐기지 못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인간은 거대한 물질적 발전을 이룩해 갔지만 그 반면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진함으로부터 타락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길고 가파른 방법을 수단으로 하느님이 계신 높은 곳, “모든 혼들이 그분을 만나는 장소”로 되돌아 오고 있다고 말한다.
나로 하여금 밝히 알게 한 스위든볽의 가르침은 무덤으로부터 그 무덤이 주던 공포를 가져간다. 천국 안으로 들려지기 전,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미래의 삶이 궁금증을 넘어 어떤 공포들로 차있었다. 생명 또는 죽음 어느 것이 더 좋은 기회가 되는지, 즉 죽음은 삶의 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존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인지 라는 질문은 토론의 대상이었다. 더 크고 더 고상한 삶이 죽음 건너에 있다는 것은 지금은 확실해졌다. 어머니의 팔에서 죽은 아이가 견디기 힘든 억지 논리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아는 바, 달콤하게 향기를 품는 어린아이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빛나는 거처에서 천사는 그에게 말하는 것, 창의적인 사고를 생각하는 것, 그에게 꼭 맞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 그런 곳에서 그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어쩌면 지상에서 발휘할 능력 보다 더 많은 능력 발휘가 그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아는 바, 지상에서 방해받아왔던 진실된 모든 사랑은 저쪽 세계에서는 열배나 더 큰 기쁨을 누린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더 깊은 의식 안에서 사실들로 되어갔는 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직관적 확실함을 가지고 있다. 이 확증은 받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을 위해 이성이나 논쟁으로 추론된 절뚝거리는 지식으로부터가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 보는 지식만이 사물에 실재함을 준다. 그 이유가 실재함은 생명으로부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위든볽의 살아있는 증거의 빛이 우리 혼의 경험의 “구석진 곳”의 어둠에 비하면 처음에는 약한 빛일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멸하는 목적을 더듬거려 찾는 우리의 수고에 대담무쌍의 힘으로 보강해줄 것이다.
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그 멍청한 짓 없이 살려고 노력했으나 비극적 실패로 끝나버렸다. 우리 중의 극소수만이 그 길이 벗어난 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스위든볽은 이런 말을 받아 쓰라고 명령받았다.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들이 모든 능력을 가진다.” 주님이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부터 우리에게 영감을 주신다면, 정신적으로 삼손의 그 강한 힘이 우리 안을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수많은 인류의 발달 가능성의 문을 누르고 있는 엄청난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에머슨은 여러가지 신념에서 스위든볽과는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는 스위든볽이 이기심이 전혀 없는 마음가짐으로부터 근본적인 진리를 보았다하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의지의 약함은 그 개인이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하게하려 들 때 시작된다. 지성의 소경됨은 지성이 그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하게하려 들 때 시작된다.” 다시 말해 신성한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밖에는 세상을 구원할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
위 말은 “우리를 도우려 저 언덕들”로부터 오는 스위든볽의 메시지의 참 의미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영원불멸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과된 책임이었다. 그는 천사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목적 자체로서 간주하지 않고, 그의 이해성을 여는 수단으로 간주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해석, 그리고 이 해석을 인류의 공동 유산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삼았다.
따라서 우리는 지상을 떠난 영들과 교통할 가능성은 인정하되, 그들과 교통하려 허둥대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하는 대목이다. 예언자들, 사도들, 그리고 선견자들이 인간의 잠자는 심정을 깨울 필요가 있어졌을 때, 그들이 천사들이나 악마들과 제휴된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유용하다. 그 이유는 이런 경우 주님께서 친히 이 일을 감찰하시고 혼동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위와 같은 영적 교통은 인간을 큰 위험에 노출되게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약점을 아는 현혹하는 영들에게 쉽게 빨려들어 그것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위든볽이 서술하기를, 모든 인간 존재에게는 최소한 천국으로부터의 두 천사와 지옥으로부터의 나쁜 두 영이 동행한다는 것이다. 고로 마음의 평화와 삶의 질서가 있어짐은 우리가 의식 못하는 두 아군과 두 적군에 의존되어 평형을 유지한다고 서술한다. 쟌 웨스레는 말하기를, 계시 안에서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바, 우리는 그분의 안내와 보호하심을 신뢰하면서 주님 만을 따라가면 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정확히 그러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의 첫 절과 마지막 절에서 명명되어지고 있다; 이 분은 이 책의 중심되는 인물이시다. 이 분은 신약 성서의 예수이시다. 책 “계시록”은 지상 위 주님의 일, 그분의 십자가에 달리심, 그분의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복음서의 계속이다. 계시록은 어떻게 그분이 그분의 영광되신 인간성- 최고의 본보기 되심과 영감주시는 분의 힘 안에서 그분의 일을 계속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복음서에서 그분은 말하셨다. “보라, 나는 너와 함께 시대 끝날까지 언제나 있는다”; 그리고 그분은 아직도 인간들에게 가져다 주려는 위로함과 계몽에 관하여 자주 말하셨다.
위 약속은 무엇이 되어 있는가? 오순절 성령의 오심, 제자들이 잠깐 동안 이지만 느꼈던 가르칠 지혜와 용기와 기쁨을 제외한다면 그분의 약속은 아주 잊혀진듯 여겨진다.
그러나 스위든볽이 보여주는 바는, “계시록”은 이 약속을 취급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의 완성을 예언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상징을 수단으로 일어나신 주님의 본성을, 그리고 그분의 현존하심으로부터 흐르는 축복들,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는데 해야만 하는 것들을 애매한 점이 하나도 없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영광으로 현존하시는 그분 주위에서 별들 같이 빛을 내는 기독인의 삶의 이상향들을 충분하게 제공하고, 이런 이상향이 사도들에 의해서도 희미하지만 그런대로 윤곽을 보여 주었다는 것도 그려놓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이상향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될 수 있기 전 반드시 정복해야 하는 잔인한 신앙과 생활 속의 악들을 나열해놓고 있다. 이 책은 참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걸림돌도 보여준다, 그것은 선행 없는 신앙, 그리고 예식이나 미신적인 것들, 그리고 겁주는 것들을 수단으로 지배하려드는 탐욕이다. 바다와 바닥 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들은 위와 같은 정신적 괴물들, 즉 예정론, 지적인 속박, 세 하느님들에 관한 생각 같은 것을 표현한다. 특히 삼신론 같은 경우는 힌두교도의 말인 즉, 사람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하나를 향한” 행위가 불가능해지게 한다는 것. 그 이유가 이와같은 신관은 영적 집중의 모든 힘을 파괴하고, 균형 없는 정서를 낳고, 예의범절의 짜임새를 갈갈이 찢고, 하느님의 통일성에서만 생명이 있는 철학을 내몰아친다. “계시록”의 용은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교묘히 비트는 추론으로 헛되게 하려는 파렴치한 인간들의 모든 노력이다. 바빌론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른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자만심과 자부심이다.
계시록의 여러 장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있어지는 심판의 광경으로 가득하다. 봉인들이 떼어졌다, 그리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쇠퇴하는 교회 속의 어둠과 위선이 폭로됨을 뜻한다. 광경들 모두를 망라해 신성한 인성 안에 계신 주님이 움직이시고 있다. 즉 그분의 사랑의 힘, 그분의 지혜의 순수함, 그리고 그분의 섭리의 열정이 그분의 가슴 주위를 맨 금빛의 띠, 눈 같은 그분의 머리, 불꽃 같은 그분의 눈, 태양 같이 빛을 내어 영광으로 있는 그분의 얼굴이 상징되어 있다. 많은 물들 같은 그분의 음성은 새로운 생각들이 퍼져나감 그리고 더 높은 신앙들이 땅의 체계들 안으로 퍼져감이다. 그분은 이 책 안에서 그분의 현존이 지상에서 걸으셨던 그 이후 유한한 인간의 눈에 보여지기로는 왜 그렇게 작게 느껴졌는지, 그리고 왜 그분의 영으로부터의 위로가 이렇게도 작다고 느꼈었는지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지배함과 압제는 우리로부터 그분을 강탈했다. 과거 시대들 속의 교회는 아주 편협한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이 그분으로부터의 새로운 메시지를 위해 필요한 지식 수준에 이르는데 오래 걸리게 했다.
심판하심으로부터 그분은 그분의 미소로 하늘과 땅을 기쁘게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신다. 즉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오는 것-새 처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읽는다. “하느님의 성막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보았는데 그 안에 성전이 없다; 그 이유가 주 하느님 전능하신 분과 어린 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의 인간 본성이 “사람들과 더불은 하느님의 성막,” 그분의 현존하심의 성전이다.
거룩한 성의 치수는 가득하고 넉넉한 치수, 세상에서 주님에 의해 달성된 완전한 성년의 치수라고 스위든볽은 해석한다. 하느님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물들은 자기의 생활을 그분이 생활하셨던 것으로 진실로 통일되게 하는 이들을 위해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새롭게 해주는 풍부한 진리들이다. 그 이유가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인정함은 구약 성서, 비유들, 시편들, 예언들, 복음서들, 특히 오랫동안 봉해졌던 책 “계시록”에 있는 무진장한 진리를 알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될 때 그 얼마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일곱 촛대와 그 촛대 사이의 사람의 아들 같은 분에 대한 그림은 표지 그림으로 계시록의 책 권두에 서있다. 그리고 영감되어진 스위든볽의 마음은 이 책을 더 빛나게, 더 풍부해지게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이 책은 생명의 강과 모든 나라들을 위한 치료하는 잎을 가진 나무가 자라는 도성의 환상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주님 자신의 현존하심의 햇빛은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감추여지는 일은 결코 없다.
계시록을 설명하는 스위든볽의 두 권의 책은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던 예언, 즉 “힘과 영광을 지니고 구름들 안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 그분을 뵙는 것이 스위든볽의 지성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그 이유가 “본다”란 깨닫는 것, 이해하는 것이고, “하늘의 구름들”이란 성서 말씀의 글자이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란 성서 글자를 통하여 빛을 내는 영적 의미, 이 의미가 힘과 영광에서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 놓여졌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쓰였는데, 이 명패는 세 언어, 즉 히브리, 그맄, 라틴어로 쓰였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그분의 모습을 가지고 그분을 오래 갈망한 혼들을 만족하게 하셨을 그 때를 예시하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즉 그분의 모습은 구약 성서에서는 히브리어로, 신약 성서에서는 그맄어로, 이 두 언어로 된 책에 감추였던 의미를 밝혀주심에서는 라탄어로 되어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선용함으로 행복을 얻도록 하시려고 성경의 상징성을 실용적 생활의 원리들로 해석할 수 있도록 스위든볽을 가르치셨는데 그는 배운 것을 라틴어로 썼다. 그는 겸허하여 그의 여러 책들에 자기 이름을 적는 것 조차 하지 않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그의 필명이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천사들과 영들과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몽상이다 하고 많은 이들이 말하리라는 것, 게다가 나의 상태를 두고 그가 남의 신용을 얻으려 획책한 짓, 또는 이 사람은 이렇게…, 저사람은 저렇게… 생각 되는대로 말하리라는 것은 나자신도 족히 예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전말서에 그런 나에 대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보았었고, 들었었고, 만졌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리버 랃지(Oliver Lodge) 경과 같은 심령 생활 연구자들이 자기들이 다루는 주제와 비슷한 것을 많이 담고 있는 스위든볽의 부피 많은 책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을 의아히 여기며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오리버 랃지경은 그의 “죽은” 아들, 레이몬드(Raymond)와의 회견, 즉 영원 속의 거주민들이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어떻게 사는지, 그들은 어떻게 먹고 입고 있는지, 등등에 관한 대담 내용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빈약하고 단편적이었다. 그것은 매우 애써서 겨우 얻어낸 조금의 내용인데 비해 스위든볽의 것은 아주 다른 수준이다. 그의 책은 그가 천사들과 영인들과 정면에서 이야기한 것, 또는 초인적 균형 감각에서 듣고 본 것의 기록이다. 그는 다이아몬드 같이 반짝이는 눈에 보일 수 있는 진리들과 합리적으로 발생되는 것들의 많은 양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기억이란 것은 뼈같이 딱딱해짐을 보았다. 그는 악령들이 천국을 들여다 보니 그곳은 암흑이라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천사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자신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숨을 쉬지 못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마음과 몸 양쪽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상큼한 과일이 선행(charity)임을 보았다
우리가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가 가있는 보이지 않는 저 세계의 색깔있는 세부도를 가지는 것에 환호할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려 볼 때, 그들의 의문 많은 심정을 만족하게 해야 하는 것이 나의 거룩한 의무임은 분명하다. 175년 전, 잘 훈련된 과학자가 자기 진로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과는 무관하게, 또한 자기의 기대와 계획과는 정반대되는 쪽에서 홀연히 일어났고, 자신이 선각자임도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데도 영적 우주와의 뚜렷한 접촉의 상세한 내용을 27권의 두툼한 팔절판으로 제본하여 세상에 주었다. 그는 자기 주장에 직바로 섰고 세상 부귀나 명예는 뒤로 밀치고, 단순하게 살면서, 모든 그의 저작물들을 인쇄하여 겸손하나 위엄을 갖춘 태도로 그 책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자기가 했고 말했던 모든 것을 고찰하면서 침착함도 유지해갔다. 그는 초자연적 같은 상태로 야기되는 어떤 흥분이나 자극, 열정에 의해 괴로워 했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귀납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견지했고, 어떤 감각적 진리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놓고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에 냉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사명이 제아무리 비틀거리는 걸음 자세 같을지라도 일상 생활에서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즉각 그 요구에 응답했다. 그가 임종할 때, 그는 자기가 쓴 모든 것이 엄밀히 진리인가, 혹은 제외했으면 하는 대목이 있는지를 질문받았을 때, 그는 확고하고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응답했다. “나는 진리만을 썼다. 아마 당신이 주님께 더 가까이 있으려 노력하고, 그분만을 진실로 섬기고, 모든 종류의 악들을 그분에 반대되는 죄로서 금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찾는다면 이후 당신의 생애 내내 내 말이 진리임을 더 확증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세상에 전달하는 교리 속의 진리에 논의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낳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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