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사랑 속에 있다

VI

생명은 사랑 속에 있다

종교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동료되는 사람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내가 나에게 빚진 것 (나의 의무)에 관한 과학이라고 정의되어져 왔다. 기독교 신앙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이 종교는 사랑의 과학이다. 정녕 그렇다. 주님께서 육체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지상에 거주 하셨을 때, 죽어야 할 운명들에게 이 두 계명을 선포하셨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그리고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매달려 있다”는 것도 말씀하셨다. 누가 신성한 사명으로 가득차 있었던 다정한 나사렛 사람 만큼이나 심오하게 성경을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위 성경 내용을 향한 모든 인간의 생각을 알 수 있었을까? 그분은 복음서 모두를 망라해 사랑은 신성하게 필요함을 강조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다음의 구절들에 대한 불변의 의미이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니 유일한 참된 하느님,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아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 그러면 이런 모든 것(물질과 물질적 복)이 네게 보태질 것이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분께서는 미워함은 그것이 크든 작든, 모든 세세한 것에서이든 하느님에 반대되는 것임이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떠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지옥은 하느님에 의한 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미워함이나 불타는 욕망과 상처난 교만의 잔인한 고통과 심술궂은 자기 본위 안으로 자신들을 던지는 이들에게 되돌아 오는 피할 수 없는 악의 법칙에 따른 결과이다가 주님의 교훈에 담긴 의미이다. 그분이 어느 각도에서 시작하셨든지 상관 없이, 그분은 다음 사실들로 되돌아 가셨다. 즉 그분이 세상의 재건축을 맡기신 대상은 재물이 아니고, 특권 계급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학식도 아니었고, 그러나 인류의 더 나은 직관(instinct)에…-사람들의 더 고상한 이상향과 감정에…-의지의 운반자요 행동 속 동력의 힘인 사랑에 맡기셨다. 그분은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그분의 말씀을 바꾸어 말해오셨다. 그리고 의심자들에게 사랑은 선한 사랑이든, 악한 사랑이든 자기들 삶의 생명이다는 것, 자기들 생각 속의 연료이다는 것, 자기들 콧구멍 속의 숨이다는 것, 자기들의 천국 또는 파멸이다는 것, 등등을 확신하도록 모든 가능한 일을 해주셨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시다 이든, 그분은 무시무시한 분이시다 이든, 그분은 최고이신 분이다 이든…그 무엇에 있어서나 사랑의 복음이심에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고 예외도 없다.
그럼에도 이 천 년 동안 소위 믿는 자들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반복해왔다. 그러나 자신들을 자극하는 힘을 느껴봄도, 이 짧은 문장 안에 포함된 진리의 보편성을 감지함도 없이 구호에 그친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을 사실 상의 문제로 여겨 철학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고상한 주제인 “사랑이 생명이다”는 주제에는 불행하게 침묵이 있어 왔다. 그래서였는지 모르나 참으로 하느님이 그분 자신을 알게 하도록 어떻게 오셔야 했는지, 그러나 오신 그분 자신이 하느님 그분인 줄을 알지 못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주 전 5세기경 원자론을 주창한 그맄의 철학자 엠피도클스(Empedocles)는 자기가 사랑의 본성을 이해하려 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자각하고, 인간 각종 일에서 사랑의 진정한 위치를 인식하였다. 그는 세상이 구성된 요소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수단으로 각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는 그 요소 목록이 불, 물, 땅, 공기라고 명명한 다음,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고 그것들 사이 사이에 사랑이 있다. 그런데 사랑은 길이와 넓이가 같다. 너는 정신적 환상 안에 그녀를 고정해두고 멍청한 눈을 가지고 앉아 있지 마라. 죽을 운명의 부분들 안에 이식되어 있다고 생각된 그녀는 죽을 운명의 사람으로 쓸모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우호적인 행위들을 행하게 한다 그들은 그녀를 기쁨(Joy)과 아프로디테(Aphrodite)라 부르고 있다. 죽을 운명은 그녀에게 없는데도 세상의 요소들 사이에서 관찰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나 그리스에서 철학의 가장 빛나는 시대에서 플라토의 혼은 엠피도클스의 말들로 말마암아 진한 의분이 지펴졌다. 그래서 그는 열띤 웅변으로 그 시대 지식층의 무정함에 맞서 이렇게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신들은 그들의 영예로 만든 시나 찬양 노래를 가지고 있는데, 위대하고 영광되는 신, 사랑에게 예찬자가 없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현자들은 헤라클레스나 다른 영웅들의 미덕을 두고 긴 산문을 썼고, 소금의 유용함을 감동적 대화의 줄거리로 만들고, 하여 이런 저런 것들을 창조하는데 열의 있는 관심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사랑의 찬미를 노래하고저 대담하게 시도한 자는 아무도 없다. 고로 이 위대한 신은 매우 등한시되어 왔다.” 나는 용기를 취급한 그의 강연인 운명(Lachesis) 안에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 그 대상이 가장 천한 노예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과 우정관계 안에 있는 것들을 결합시킨 거룩한 인연(bond)을 모욕하는것이다고 말했다. 그런다음 신성한 사랑의 음성은 그것의 메시지를 미워함에 무딘 인간의 귀에 말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여기 저기 천국의 말투에 귀를 기울인 몇몇 용감한 지성과 사랑의 음성을 땅의 거친 말로 바꾸어 보려고 시도한 몇몇을 제외하면 이천 년은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켐피스(a` Kempis), 스피노자(Spinoza), 제이곱 보헤미(Jacob Boehme), 그리고 이외 여러 다른 신비주의자, 그리고 후렌시스 베이컨(Francis Beacon) 등등은 자기들 시대의 변두리에 용감하게 우뚝 서서, 이해되지 않은 말들의 어둠 아래에서 굴러다니는 광대하고 알려지지 않은 느낌의 바다 안을 깊이 응시했다. 그들은 사랑의 방식, 사랑의 일, 타인을 사랑함, 자기를 사랑함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졌다. 보헤미는 이기심의 불태우는 욕구와 바램을 “지옥의 어두운 벌레”라고 불렀다; 이 벌레를 성경은 “그것들의 벌레는 아직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불은 꺼져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성의 냉혹한 시대로부터 스위든 볽이 일어났을 때, 사랑은 교리 차원으로 승격되어 만물의 중심과 생명, 만물의 아름다움과 보존자로서 다시 빛을 발한다. 교리 차원의 사랑을 위한 근거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이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그의 책 “천국의 비밀들(Arcana Coelestia)”에서, 그리고 더 완전하고 체계있는 교리는 그의 책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서 이다. 그는 사랑의 상태들-사랑의 활동들, 힘들, 기능들, 사랑의 건설적, 예방적,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명령들 등등의 사랑의 용어를 가지고 인간 경험의 전체 세계를 해석하였다. 더 나아가 이 선각자가 발견한 바, 가장 탁월한 측면에서의 사랑은 신성 자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 “주님은 천사와 인간의 영 안으로 흘러든다”는 것, 물질적 우주는 하느님의 사랑이 생명의 사용에 알맞은 형체로 작업된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었다면, 인간이라는 모든 어린이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충만과 경이로움을 밝히 알려주는 책이다는 것, 등등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신성한 혼으로부터 무한을 통하여 여행하는 희미한 광선이 귀먹은 마음, 눈먼 인간성에 다달았다. 이러면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당신에게) 가까왔다.
생명에 관한 스위든볽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명과 실체(existence)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한다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명백한 목적을 위하여 각자에게 실체를 부여하신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은 그분을 창조자 되도록 재촉한다. 그 이유가 사랑은 사랑의 풍부한 선한 의지와 은혜를 줄 수 있는 대상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명인 사랑에서 우리는 창조의 근원을 발견한다. 그분의 무한히 원하심은 그분 자신의 행복을 담는 유한한 그릇일 수 있는 있음의 실체 외에 어떤 것으로도 만족되어질 수 없다. 동시에 이와 같은 있음들은 참된 자유와 참된 자유에 동반하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즉 인간에 대한 그분의 생명의 선물은 만일 이것이 인간 자신의 것이 되어진다면 이 선물은 자유와 합리성을 수단으로 자발적이고 사려 깊게 받아져야 함이 틀림없다. 이것이 인간 존재들이 두 개의 구분된 경험, 즉 실체 안으로 태어남과 생명 안으로 태어남을 통과하여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육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지독하게 무력하고 의존적일 뿐이나, 영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적극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실체로 태어날 때 실체를 위해 일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만들 수 있기 전, 실체가 있는 것이 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이와달리 생명 안으로의 출생은 선택의 문제인 바, 우리는 이 출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그 이유가 진짜 영적 생명은 우리의 의지에 반대하여 강제로 우리 안에 밀어 넣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그분의 사랑의 초대장을 꾸준히 보내 그분께 와서 생명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이는 또한 선택한 생명을 악이 강탈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하신 대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언제나 따뜻하고 순수한 심정을 간직할 때 만이 진실로 살아 있는다. 이런 재창조의 아름다운 일은 관찰함에 의해서가 아닌, 혼의 비공식 깊은 곳에서 작업되어진다. 이는 주님께서 말하신 바와 같다. 즉 “바람은 자기 좋아할 대로 분다, 그리고 너는 그로부터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너는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
전환(convers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이는 어느 특정한 신조를 받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지 말고, 넓고도 단순한 의미 즉 심정의 변화로 생각해야 하리라 여겨진다. 특히 지금 말하는 전환이란, 혼이 자아 이익만을 위해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유혹하는 비천한 본능들로부터 돌아서고, 대신 세상의 좋은 의견에 귀기울이고, 하느님의 이타적인 사랑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자신의 삶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쪽의 전환이다. 우리가 생명을 선택할 때 이런 기쁨이 있다. 즉 심정과 지성이 달콤하게 확장되는 기쁨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 차원에서는 애쓴 것만큼 손해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 태어남이 단 번에, 예를 들면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간단한 두마디에 성사되는듯 여기지기도 하지만, 나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중생은 우리가 신성한 십계명에 의거한 삶의 길을 희망하고 열망하고 유지보전해 갈 때, 우리에게 건너온다. 한동안 우리는 천사 같겠다고 결의를 굳혀보지만 막상 세상 문제에 부딪치면 옛 것으로 되돌아가 이전에 했었던 것을 곧바로 실행한다. 다시말해 평범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처지로 있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즉 우리가 늘 이렇게 해왔는데…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했는데…그리고 우리의 선조도 그렇게 했는데…그렇다고 나까지도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을 제기할 경우 어쩌면 절반 이상 전환은 성공의 길에 들어선 셈일 것이다. “길이요,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그분을 자신의 가장 높고 가장 도움주는 이상향으로 추구하면서 나 이외의 사람들을 돌봄을 수단으로 우리의 생활을 풍부히 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여지는 삶은 없다. 한 번 우리가 이것을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을 때, 모든 외적 환경과 한계는 우리 앞에서 길을 내어줄 것이다. 우리는 더 강한 심정, 동시에 생명과 행복의 더 밝은 미래를 확신하며 매일 십자가를 져야할 것이다.
스위든볽 자신의 마음은 더 높은 빛으로 천천히 팽창되어 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깊은 고통도 뒤따랐다. 그 시대 신학 체계는 모순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말해서 그 체계는 머리털을 길게 늘어뜨린 후 흐트러놓은 양상으로 꽉 차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출구를 찾지 못하는 동굴 같았다. 스위든볽은 진리, 혼, 의지, (심정)상태, 신앙 같은 중요한 핵심어에 정의를 내려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많은 단어들 역시 더 많은 영적 생각을 공통의 언어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사랑에 관한 그의 교리를 위하여 그는 특수한 어휘를 발견해야만 했다; 참으로 이런 노력은 마치 그가 다른 언어를 독학하는듯 보일 정도였다. 어떤 사람이 육체의 눈으로 본 것을 신뢰하는데 익숙해진 상태에서 아주 단단해진 감각적 사고를 깨트리려면 큰 용기가 요구되는 경우 같이 그도 생각의 습관들로 해서 좌절도 많이 겪었다. 그로서는 생명을 지탱시키는 영적 힘을 유리를 통하여 보는 것처럼 어둑하게 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본 것들을 아름다운 근원지인 사랑의 심장에 되돌아가 명백하게 추적해보고, 그것들을 냉정한 이성의 시대, 즉 논쟁적 신조들과 회의적 질문과 소통되게도 해야 했다. “그분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생각을 생각하라”는 케프라(Keplar)가 말했는데, 이는 초인간적인 과업이다. 여러분에게 스위든볽이 직면했던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을 줄 수 있는 나의 방법은 어떤 맹인이 자기와 같은 맹인을 돕고 싶을 때 마주쳐야 하는 굉장한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상상해보라 권하는 것이다. 그는 보는 사람에게 보지 못하는 사람의 필요한 것이 특별히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삶을 소비해야만 한다. 동시에 우정관계, 일, 그리고 행복을 가지고 맹인들의 부셔진 생활을 수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도 추구해야 한다. 어쨌든 한가지 놀라운 것은 맹인, 그들의 느낌, 바램, 가능성 등에 꽤 유식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조차도 맹인에 대한 무지함은 아직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맹인, 특히 귀멀고 눈먼 사람이 햇볕을 쬘 경우나 꽃피는 자연의 모습이 듣고 보는 자와 완전히 같지 않고, 그들의 느낌과 감정도 보는 자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고, 이들의 정신적 의식도 그들의 약점에 근본적으로 영향받았을 것이라고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더 실수하여 상상하는 것은 맹인들은 색깔, 음악, 그리고 형태 같은 모든 아름다움으로부터 닫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인은 아름다움, 질서, 형태, 비율(조화) 같은 요소들을 촉감으로 알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과 리듬은 감각 보다 더 깊은 영적 법칙의 결과이다는 것 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야만 겨우 납득이 가능하다. 어쨌든 듣고 보는 눈을 가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 진리를 가슴으로 받을까? 눈멀고 귀먹은 사람도 오관을 지닌 보고 듣는 사람으로부터 두뇌를 상속받았다는 사실, 그들의 영은 그들 자신의 햇빛과 하모니로 침묵의 어둠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듣는 이들이 자신에게 확인시키는데 얼마나 많은 곤란을 겪을까?
물질로 꽉 막히고 망상으로 채워진 그 시대 감각적 사람에게 선각자로서의 그의 감명을 운반해 주는데 위와 같이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곤경을 스위든볽은 가져야만 했다. 귀를 가진 귀머거리와 눈을 가진 소경의 취약점들이 아마도 인간의 무지와 무감각의 가장 어두운 장소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운반하는 수단일지 모른다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주제넘는 것은 단 한 조각도 있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어둠 안에서 가지는 삶의 체험을 남을 돕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마치 스위든볽이 자기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했던 두 세계의 경험을 구, 신약 성서의 감추인 의미들을 밝히는데 사용한 것 같이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 사랑의 창조물인 인간의 사랑의 잠재력, 이 잠재력은 나와 완전 격리된 세계 사이에 위치하는 바, 나의 불행이 타인에게 선한 의지와 도움을 주는 매체로 만드는 힘이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행복이라 생각된다. 스위든볽의 저서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의 서두에 있는 비극을 실감할 때마다 나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슬픔이 있다: “인간은 사랑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그리고 그가 사랑에 관한 생각의 어떤 관념을 자신에게 형성해보려 사랑을 곰곰이 생각할 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그것이 어떤 것도 아니다, 또는 보고 듣고 만지고, 또는 타인과의 교제로부터 흘러들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사랑이 참 생명이다는 것을 아예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의 전체 육체의 공통의 생명, 그리고 그의 모든 생각들의 공통의 생명, 뿐아니라 그것들의 세부적인 것들의 생명이기도 하다. 식별력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질 때, 즉 만일 당신이 사랑으로부터 있는 것인 애착을 제거한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도 사랑이 생명인지를 지각할 수 있다. 사랑으로부터인 애착이 식어지는 만큼 생각, 말, 행동도 식어지지 않던가? 그리고 이 애착이 따뜻하게 자라는 만큼 생각, 말, 행동도 따뜻해지지 않던가? 그러나 이런 경우를 식별력 있는 사람이 지각하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이지,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다는 이론적 지식으로부터는 아니다.”
사람들이 실수하는 대목은 말함, 미소, 흘긋 봄, 그리고 사랑의 온화한 행위가 사랑 자체인 줄 아는 것이다. 마치 내가 상상하기를, 두뇌는 그것 고유의 힘으로부터 생각하고, 몸은 저절로 행동하고, 음성과 혀는 자기들 고유의 진동이 있고, 내 손은 나와는 독립되게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위 모든 것이 의지와 마음에 의해 이리저리 작동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내 손을 아름다운 백합 위에 놓고 그것의 향기를 코로 마실 때, 그리고는 촉각과 후각이 꽃 안에 있다고 고집부리는 것, 실제는 이런 감정을 갖게 한 주체는 꽃이 아닌 내 피부가 아닌가? 이런 것을 외관(appearance)이라 하는데, 사랑, 생명, 그리고 정신적 활동들이 논의될 때 유의해야 하는 대목이다. 사랑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은 사랑은 인간의 바깥의 어떤 것-이리저리 표류하는 실재물-어렴풋한 감정-말하여질 수 없는 추상 작용의 하나이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랑은 딱 떨어지게 독립적으로는 생각되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든볽은 사랑은 원인, 주체, 또는 형체 없는 추상 작용이 아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랑은 영혼을 통하여 떠도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물체를 만지거나 볼 때 존재 안으로 와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고 이로부터 인간의 영적 유기체가 형성되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서 지각하는 것은 이 실체의 표시일 뿐이다. 사랑은 그것의 능력들을 살아 있게 간직한다. 마치 대기가 촉각, 후각, 미각, 시각, 그리고 청각이라는 감각들에 감각력이 있는 생명을 주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랑과 사랑의 표(token)사이를 구분해 보기 위해 예증을 들어보겠다. 그 이유가 이 둘은 자주 실수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의 실체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애착이 더 수준 높아지거나 우리의 기쁨이 더 증가되도록 사랑의 실체에 도달할 수 없고, 또한 그 실체를 바꾸거나 깊이 있게 하거나 순수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사악한 동아리 안에 있는 사랑 주변으로 가게 되고, 우리의 경향을 바꾸고, 나와 타인들을 재건축하겠노라고 노력해보면서 그 사랑 주위를 맴돈다. 한편 진짜 사랑은 쫓겨난채 흐느끼고 있다. 그나마 그 악한 사랑은 우리를 비웃고 그 자체 만족스럽게 기뻐하고 있다. 불완전한 언어와 더불은 나의 투쟁으로부터, 나는 이미 손상된 것을 고쳐 만드는데 따른 잘못되고 간접적일 뿐인 방법에 대한 나의 실예를 가지고 있다. 소리가 방출되면 그것은 공기를 통하여 떠도는 바, 떠도는 이 소리를 조작하여 내 음성을 개선하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 조작을 내 음성 기관들에서 먼저 연습하여야만 한다. 그나마 이것도 내가 나의 내적, 또는 정신적 언어 개념을 개선할 때까지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목소리는 본질적으로 신체에 속해 있지 않다. 그것은 생각이 그 자체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음성은 마음에 의해 글자 뜻 그대로 모양짓고, 색을 칠하고, 조절되는 것이다. (음성을) 실습함에서 내 최고도의 노력은 내 육체의 귀는 닫혀 있으므로 나의 내적 귀에 있었던 것과 같은 소리와 말들의 진짜 형상들을 얻는 것이다. 언어 도구로서 마음의 올바른 사용에 더 가까이 접근 할수록 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더 바르게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음성으로부터 사랑에 이르기까지인 바, 실예로 사용하기에는 먼 외침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원리는 정확히 똑같다. 생명은 그것의 모든 감동들, 즉 좋음, 싫어함, 흥미 있음, 흐름 등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깊은 속의 사랑에 의해 형상짓고, 착색되고, 최말단에서는 생명의 흥망 성쇠가 조절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더 고귀한 느낌들, 더 세련된 이상향들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행복으로의 그의 열망이 아주 애처러워 이를 만족하게 하겠다면, 그는 사랑의 진짜 정신적 개념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며, 그리고 능력을 명령하는 것으로 형성되도록 분투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혼 또는 기관, 자질, 기능과는 별개의 결과로서 관조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에는 의식 있는 생각, 의도, 목적, 노력, 동기, 그리고 충동 같은 몸 전체가 포함되고, 이것들은 흔히 억눌러져 있다. 그러나 언제나 잠재하여 있어 어느 순간 행동으로 그 자체를 체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랑은 능력들과 기관을 통하여 얼굴, 손, 발을 고용한다; 사랑은 일하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은 한 번 목적물을 향하여 움직이면 어떤 외적 환경에 의해서도 제지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진짜 거듭남은 당사자가 자기의 영적 능력들을 의식하게 될 때 인간 안에서 시작하는 변화와 더불어 온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별과 슬픔의 시기들 이후, 뿐아니라 당사자만이 알아채릴런지 모르는 경험 이후 거행된다. 이리하여 그의 눈의 흐림이 없을 때 그는 자신과 자기의 현 환경, 더 나아가 자기와 주어진 환경 등의 진정한 관계들에서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이기심의 저울 눈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그 자신의 생명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사람들이 거듭남에 관하여 아주 많이 썼었고 이야기도 아주 많이 했는데 비해 그 저자나 강연자들이 거듭남의 목적에 관련해서는 그 자료가 매우 빈약해 있는 형편인 것은 의아할 일이다. 자아 수양은 완전함의 모든 이상향을 위해 충분하다고 소리 높여 공포해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곳에서이든 최상의 남자나 여자에게 귀기울여 본다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꼭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답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지식의 방대한 보물을 축적했다, 그리고 과학이 가장 지독한 악들을 위한 치료(법)을 발견해냈을지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이들 중 가장 나쁜 것-인간 존재의 무감각을 위한 치료약을 찾지 못했다. (항간에서) 지적되어지는 것, 이는 스위든볽의 견해도 비슷한데, 사랑과 동정(심)에 관하여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짐승 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뿔과 꼬리만 없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풀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분별 없는 사색력으로 제멋대로 파괴한다. 그는 전쟁에서 그의 형제에게 손상을 입히고 죽이기 위하여 갈수록 더 흉측한 무기들을 발명한다; 그는 유행에 발맞는 스포츠를 위해 무기력한 동물을 병신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는 자기 지배를 넘어 서 있는 사람들의 흠이나 추문을 캐내려 안달을 한다. 여타 다른 악들도 그의 무지에서 추적할 수 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악들이 무지에서만 나와졌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의 구원은 자기 수련을 통하여 가되 올바른 바램이 꼭 필요하다.
인간은 환경의 변화로 크게 개혁되어질 수 있다는 논지를 붙들고 있는 선의의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논지도 그럴법하고 매혹적이기도 한 진리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논지는 환경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고, 이 논지는 나쁜 쪽으로 쉽게 응용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 존재를 바꾸는 것은 환경이 아니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힘이다. 소경, 귀먹어리, 양심을 위하여 죄수된 자, 심지어 건전한 이상향을 지닌 아주 가난한 사람까지도 포함해 모두가 입증한 것은 자기들은 바깥쪽 환경이 어찌됐든 자기들 바램에 더 가까이 생명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 같이 참지 못하는 속성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쉽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오, 만일 내가 운좋은 내 이웃들의 대열에 끼어 있다면, 나는 더 낫고, 더 행복하고, 더 유용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젊은 이들의 하소연 같은 말도 자주 듣는다. “만일 내가 내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나는 대단한 성공을 성취했을 것이다.” “내가 저런 저질의 녀석과 섞이지 않았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건재했을 것이다.” 이런 세 번째 탄식도 있다. “만일 내가 내 부유한 친구의 돈을 가졌더라면, 나는 세상의 향상을 위해 내 몫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필요 없는 가난과 타락하는 영향력에 맞서 여느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대쪽에서 팔을 들 것이다. 동시에 인간 경험이 가르치는 바, 즉 우리가 현 위치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다른 위치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 백합 같이 더러운 주위 환경 위에서도 순수하고 강하게 일어날 수 있지 않으면, 아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인 약한 사람일 것이다. 지금 있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어느 세상에 태어나도 마찬가지 이리라. 가장 중요한 질문은 처한 환경의 종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날마다 생각하는 종류가 무엇이냐, 내가 따라가고 있는 이상향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내가 어떤 사람이냐 이다. 아랍 속담에, “네 자신을 발견하는 그 곳이 네 세계 이다”는 실지 꼭들어 맞는다.
인간 존재는 자기 마음과 자존(만)심에 무서운 폭력이 가해짐이 없이 갑자기 거듭나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스위든볽 자신이 명백해졌을 때 그는 아래와 같은 다른 이론을 가졌다. 즉 인간 존재는 새로운 진리들의 눈부심을 견딜 수 있기 전, 그는 더 예리한 빛에 그의 내적 눈을 익숙해지게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쁨(delight)들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서는 선한 생활 쪽으로 돌아 서 질 수 없다. 그 이유가 그의 기쁨들이 그를 자유하도록 하고 결국은 선택할 힘도 그 기쁨이 주기 때문이다. 주님과 협동하고, 지칠줄 모르는 그분의 도움을 신뢰하면서, 말씀에서 더 많은 진리들을 이해하려고 공부하고, 터득한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선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런 것들이 옛 자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세계를 재건하겠다고 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mortal)들을 위한 유일하고 건전한 방법들이다. 주님의 공적들을 훔치고 싶어하고, 천국을 “보상” 차원에서 요구하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따라서 자신의 심정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이기심이라는 용을 몰아내야 더 고귀한 자기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물론 이 회개를 빠르게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회개 후 신앙은 천천히 성장한다는 것을 감지하되 즐거운 마음이 언제나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인격 속에 강건함도 함께 머물게 하지 못하고 만다. 실상, 인간은 이 세상이든, 다음 세상이든 거듭나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사랑하는 것, 더 알아가는 것, 더 완성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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