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기쁨 속에 있다

VII
생명은 기쁨 속에 있다

기쁨과 행복에 관련해 스위든볽이 말한 것은 마치 만개한 과일 나무의 꽃과 잎 만큼이나 많은듯 하다; 따라서 그가 선포한 인간의 생명은 그가 사랑한 것의 기쁨 안에 있다고 하는 대목에는 별로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흥미가 없으면 가슴도 차다. 그리고 자극 오는 것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인간의 행복은 작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기쁨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시간이 분과 초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려고 다섯 감각을 다 지닌 사람들이 멈추어 서는 일은 별로 많지 않은듯 하다. 게다가 자기에게 내려진 복을 세어 보려고 앉은 사람은 더욱 적은 것 같다. 다행히 세어 본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무에 충실하라는 듣기 싫은 소리도 귀를 매혹하는 음악처럼 그에게 들려와 그의 삶은 계속 분주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쾌락주의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가 쾌락주의는 목적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뿐, 유용성(쓸모 있음, usefulness)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우주는 혼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신성한 은혜에 의해 펼쳐진 식탁이다” 라고 말할 때, 이 책을 읽는 어느 진지한 사람에게 가벼이 느껴지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의 각각 모두의 능력, 그리고 육체의 모두 각각의 욕구는 각기 기쁨을 가지고 있다. 이 기쁨이 갱신과 재건설의 수단이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물질적, 정신적 각각 모두의 힘은 같은 성질이고 만족을 주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고, 선택된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한다. 흔히 상상해버리고 마는 것은 우리가 영적인 것을 얻을 수 있기까지, 자연적 쾌락은 단념해야 한다인데 그럴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가 내적 삶 안에서 일어나 사는 만큼 더 오묘하게 자연적인 것을 즐겨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보낸 포도 한송이는 그 얼마나 미묘한지! 둥글둥글함의 아름다움, 색깔, 시큼달큼한 향기, 이에 더하여 사랑이, 상상함이, 시적 구상까지 연달아 주렁주렁 매달려 있지 않는가? 두뇌를 활기 띄게 하고 심정으로부터 꽃을 피게 하는 기쁨을 향기 있는 꽃에서 발견하는 일은 그 얼마나 풍요하고 다채로운지! 창공과 물과 땅의 끝없는 변화는 우리의 신앙과 꿈의 중심이 되는 더 높은 세계의 사랑스러운 거울이 되어 우리 속에 간직되는 바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세상은 걱정과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은 부인 못하나, 칙칙한 주위 환경과 짜증나는 업무 안에 감추인 기쁨의 반짝이는 수정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는 은혜스러운 빚이다. 스위든볽 또한 매일 별 변화 없는 하루의 스케줄로 말미암아 짜증나서 그만두었을법 한데, 오히려 그는 그 속에서 무한정으로 저장된 기쁨의 창고들을 보았다. 그는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천국의 심정으로부터 “진정한 기독 종교”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랑으로부터의 기쁨(joy)들, 이것은 또한 선행(charity)으로부터의 기쁨들인데, 선인 것이 선이라 불리우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지혜로부터의 매력들, 이는 또한 신앙으로부터의 매력들인데, 참된 것을 참되다라고 불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 이유가 다양한 종류들의 기쁨과 매력이 그것들의 생명을 만들고, 그리고 이것들로부터의 생명 없이는 선들과 진리들은 생명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한 열매 없음과 같다.”
“본질이 선인 사랑의 기쁨은 태양의 열과 같아서 비옥한 토양 위에서, 과일 나무와 옥수수 들판에서 그것들을 번성하도록, 생기 있도록, 작용한다. 그래서 햇볕이 작용하는 곳에는 생산이 있다. 말하자면 낙원, 여호와의 동산, 그리고 가나안의 토지 같다; 그리고 진리로부터의 매력은 봄철의 태양의 빛과 같이,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를 발산하는 꽃을 담은 수정 그릇 안으로 흐르는 빛과 같다.”
이기심과 불평은 마음을 상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흐리게 한다. 반면 기쁨을 지닌 사랑은 상상력(vison)을 맑게 하고 또렸해지게 한다. 이 사랑은 과거 무디고 하찮게 여겨졌던 것 안에서 경이로운 것들을 보도록 지각에 섬세함을 준다. 이 사랑은 영감의 샘들을 다시 채운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쁨은 물질 만능으로 꽉 막힌 능력들을 꿰뚫고 흐르는 피와도 같이 생명의 새로운 강을 내보낸다.
즐거움(delight)은 가치 증대와 자아 개선 그리고 더 고상한 본능의 습득에 필수이다…가 사려 깊은 사람들 사이에 긍정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앎이 주는 기쁨 외에 어느 방법으로 어린아이를 공부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맛의 쾌락이 신체로 하여금 음식을 소화흡수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은 본체 만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는가? 자기를 꾀는 엘도라도(황금의 나라, Eldorado)에 자기의 내적 의지를 고정시키고, 자기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 사람은 그의 내적 의지와 더불어 무엇을 할까? 용감한 자와 모험가로 인간의 자연적 자원을 새로이 발견하고 불리는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얻을 기쁨을 미리 꿈꾸도록 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진리들을 이해함에서 느끼는 기쁨, 새로운 봉사를 타인에게 줄 수 있어 느끼는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다면 왜 과학자가 정신적 산고의 고통과 짜증나는 일들을 자주 견뎌야만 할까? 슬기로운 선생 또는 친구 또는 진정한 개혁자는 나쁜 행위자를 무력으로 올바른 길로 질질 끌고 가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고집센 의지를 부드럽게 하고 부루퉁한 마음이 올바른 생각에 매력을 두게 할 유쾌한 영향력을 가진 훈련을 기술적으로 병합한다. 누군가, 그가 자기 심정의 선함으로부터, 도움되는 말을 하고, 유쾌한 미소를 던지고, 또는 또 다른 길에 있는 거친 장소를 평탄해지게 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느끼는 즐거움이 자신의 일부임을 넌지시 암시받는 바, 그는 그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살아감을 눈치챈다. 한 때 제거 불가능인 것처럼 보였던 장애물을 넘어섬으로 가지는 기쁨, 그리고 성취함을 한걸음씩 성취함 쪽으로 더 전진하는 개척자의 추진력으로부터의 기쁨-이와 비슷한 기쁨이 어디에 또 있을까? 만일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잠깐 멈추어 서서 위 사항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실지로 경험하는 즐거움은 아침 꽃 위에 앉아 반짝이는 이슬방울이나 그들 발 아래 풀들 만큼 셀 수 없이 많음을 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 기쁨을 재산으로 실감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함에서 곁길로 멀리 간 것을 관찰할 때 나에게 그것은 이상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아주 이상한 장소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그들은 행복을 찾는 일환으로 왕과 여왕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굽신거린다; 그들은 여행이나 여흥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들은 행복이 감추여 있는 보물 안에 드러누워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땅 깊이 파헤치고 있다. 여러 많은 사람들은 종파나 대표자 회의, 또는 정당의 정책을 위하여 자기들의 지성을 미신에 사로잡히듯 족쇄를 채움으로 자신들로부터 기쁨을 강탈당하고 있다. 아마 가장 애처로운 것이라면, 자기의 심정과 지성에 복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달콤한 재산의 세계가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데 이것에 눈은 못 보게 하고, 귀는 못 듣게 하고, 배는 굶주려 허덕이게 한다. 각 사람 속의 이 재산은 하느님의 행복으로부터 나와 각자에게 나누어 준 그분의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남을 돕다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새로이 찾은 기쁨과 더불어 자신을 놀라게 한다. 그 이유가 즐거움은 자각의 수단으로도 일하기 때문이다. 스위든볽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즐거움들을 검사한다면,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자신의 삶을 모양짓는데 쏟고 있거나 자기의 사적 목적들을 위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참고 견디는 기쁨들은 타인을 위해 일하고 세상에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이타적 목적이 출생되도록 그를 몰아 부친다. 이기심 없는 즐거움들은 그에게 승인하라고 속삭인다. 그리하여 승인된 이후 그는 세 배나 더 강한 사람으로 일어난다. 그 이유는 그가 새 힘들과 새 자아 통찰력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영의 즐거움들의 고향으로 향한 자신의 영의 발자국을 밟고 갈 때 만이 당신은 자신의 형상과 얼굴을 바라볼 것이고 생명의 책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을 것이다.
그러나 스위든볽은 또 말한다. 만일 사랑스럽지 못한 즐거움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못된 즐거움을 인정하는 지적 정직함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뭔가 더 가치 있는 쪽으로 자신의 심정을 들어 올리려 진지하게 애쓴다면, 그는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고 실망하여서도 안된다. 옛 자기를 홀린 것을 빨리 떠나는 만큼, 순수한 행복들이 그의 혼 안으로 돌진해 올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주택의 문을 열 때 압도적인 센 기류가 빨려 드는 상태 같다. 그가 더 행복해질수록, 그는 더 강해져 그의 바램쪽으로 그의 바깥 환경도 개조될 것이다. 한 때 부셔졌던 성벽에서 깨진 틈만을 찾으려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각각의 두려움 대신, 그는 새 즐거움을 건설하고 호된 시련이 지나갈 때까지 그 즐거움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근대 사상에서는 “취미(hobby)”라는 단어로 풀어 말해진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불운한 남,녀들이 희망이 전혀 없는 악한 경향성으로부터 나와 미처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자기 발달로 도움을 얻었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천국이 주는 정신 요법이다. 죄를 용서받음이란 당사자가 나쁜 바램과 악한 생각들을 몰아내고, 선으로부터의 힘에 하모니를 이루어 일할 때, 상한 심정을 채우는 위로부터 있는 기쁨의 수원(well-spring)이다.
5분 만이라도 잠간 틈을 만들어 사랑스러운 꽃이나 구름, 별을 찾아보고, 혹은 시를 배운다든가, 또는 다른 사람의 지루한 업무를 빤짝이게 해줄 수 있다면, 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한 어떤 즐거움을 가지리라는 것은 하등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일 아름다움과 기쁨의 미소들을 주고 받는 것은 포기하고 넌더리나는 의무들과 이해 관계들에 언제나 집착한다면, 녹초가 되는 지경까지 지독하게 근면했던 것도 그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들이 아름답고 신선하고 영원한 존재를 자기들 생활 속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입장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천국으로부터의 문은 닫고 대신 회색 먼지가 그들 모든 존재 위에 내내 있게 될 것이다. 하늘(sky)이 땅 보다 더 빛남을 느끼려면 땅 자체도 진가가 인정되고 즐겨져야 한다. 땅 자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었어야 해돋이와 별들의 광선을 품을 권리도 있다.
성인들이나 천재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봤으면 하는 희망은 모든 사람 안에 언제나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흠모한 순수한 모든 즐거움은 “선한 의지의 중심점”이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거주하는 사랑스러운 모든 현장, 우리가 듣는 모든 하모니, 우리의 경건한 손으로 만져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것은 근심이나 가난이나 고통이 파괴할 수 없는 달콤한 생각들을 지닌 많은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기쁨은 결국에 가서는 “잘 하였다”라는 영원한 생명의 단어를 발음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소리이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스위든볽에 의해 설명되는 교리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 시대에서 그의 철학은 중세 시대의 고행주의나 철과 같이 냉랭함 뒤를 이어 나온듯 여기게 하는 철학의 새로운 분파였다. 그의 가르침 중 사람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즐거움의 보편성, 즉 즐거움은 생명을 섬긴다는 것이다. 결혼의 행복을 증대시키고 어린 시절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탁월한 신앙은 겁많은 불신용, 하급의 이상향, 어리석은 방법으로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 보다 훨씬 뛰어나다. 한마디로 진정한 삶은 기쁨을 가득채우는 심정의 수용 능력이다.
우리는 사랑의 기쁨의 위대함에 일치하는 고상한 생각들, 즉 스위든볽이 아주 큰 원 안에서 기술한 것 처럼 신성한 섭리를 지각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섭리는 여느 독단적 주장의 모순으로 인해서 어두워져 왔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특별히 소홀시함(neglect)들을 함축하는 특별한 설비(provison, 예정론) 안으로 자주 퇴화되었다. 그러나 스위든볽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의 나라, 쓸모 있음(use)들을 창조하는 나라(government)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생명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같은 양과 질이어야 하고, 그분의 사랑 역시 모든 이에게 다 같아야 하는 바, 그분의 섭리는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함이 필수이다.
소홀시함 중에서 늘 지적되곤 했던 것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축복으로부터 방대한 군중이 제외된 것이다. 어쨋거나 이 생각은 하느님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다른 양”도 가지고 있으시다는 더 편견 없는 이해에 길을 터주고 있다. 그분은 사방 각처에 여러 종류의 종교를 설비해주셨다. 그리고 올바른 생활이 이상향이고 그것에 신실하는 한, 무슨 인종이든, 무슨 신조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에 의해 기억되어야 하는 한 가지 원리는 종교는 교리를 살아내는 것이지 교리를 단지 믿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모하멭이 우상 숭배를 뒤엎으려고 일어난 것도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 이 위대한 예언자는 동양의 천성에 어울리는 종교 형태를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 신앙은 제국과 왕국에서 실행되었다. 종교 사상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증거도 없이 그냥 두시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나팔 소리로 외치고 있다.
전통적 예배 풍조가 있는 곳은 어디이든, 한 나라의 독단적 주장이 사악한 쪽으로 돌아서도, 이들에 의해서도 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단순한 선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순박한 사람들은 부패함에서 아주 먼 높은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에 있는 천국으로부터 신성한 섭리를 관조한다면, 과거의 경험들은 도움되는 것과 지혜의 귀중한 교훈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하모니를 느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방법을 우연이나 운수, 갈등 같은 세계로부터 찾는다면 우리는 그 교훈들을 엉뚱하게 이해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분께서는 마음에 들면 상을 주고, 비위에 거슬리면 복수나 벌을 주시는 하느님, 상과 벌을 임의적으로 분배하시는 분이다고 간주하고 만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분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대단찮은 애국심을 가지고 추정하고 자기 나라의 승리를 그분께 간구한다. 그러면 우리 각각은 서로 대립하는 분파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일 하느님이 계셨다면, 그분은 인간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도록 창조하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모두가 자동 인형이라도 되기를 원한 것처럼 비친다. 어쩌면 죄를 범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독재자 만 만족시킬지 모른다; 이런 개념 앞에서 영은 와들와들 떨지 않을까? 사실상, 하느님을 부인함은 자유와 인간성을 부인함에서 발견되고 만다. 믿음의 살아 있는 가치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얼마나 유익했는지에 의존된다; 위압적인 하느님의 큰 혜택(Beneficence)은 우리의 지식의 정당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있고, 문명(사회)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가르침으로도 있다. 이 혜택은 많은 선물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 (이익)만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힘의 선물, 어느 인간 안에 있든 고귀한 것은 내 것 되게 하는 힘을 향유하고 우주 안의 경이로움을 이해하는 힘의 선물 등등이다.
스위든볽의 “신성한 섭리”라는 책은 하느님께서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그분의 속성의 무한한 필요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진리에 대한 강력한 개인적 증거이다. 이 책은 너무나 멀고 접근 불가능한 신성을 믿는 것은 무익하고 속이 빈 신앙이다는 불평에 위안이 되는 말을 여러 문단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은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바라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선포한다. 어쩌면 이 선포가 신성한 섭리의 전체일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영적 재건 사업의 일에서 우리의 할당된 몫을 완성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취향에 발맞추어 따라가게 해서 자신을 (다시)태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섭리는 늘 변화하는 우리 생활에서 일시적인 복 만이 아닌 영원한 복지와 행복이 되는 것을 더 찾으신다. 그분은 우리 손을 거쳐가는 수도 없이 많은 작은 일들, 날마다 가지는 작은 기회들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자유하게 놓아두시고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 하신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분은 모든 이 각각이 이성에 따라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권리를 지키신다. 그 이유가 자유와 합리성은 그분이 인류에게 선물한 불멸함에 대한 표(token)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이기적으로 살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성을 상쇄할 뭔가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생활을 만들어 보려 선택하는 것은 그런 생활에 대해 사전에 어떤 지식이 있었다는 말이다. 만일 더 고상한 종류의 다른 경향성이 우리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가 동물 같이 되어가는 것으로부터 구해내 줄 수 있을까? 선과 악, 양쪽을 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을 위한 올바른 선택을 자유롭고 슬기있게 선택할 수 없다.
아래에서 말하려는 전부는 스위든볽의 교리, “유물(reliquiae)”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형상짓는데 강력한 요인이다. 이 단어는 흔히 “남아 있는 것(remains)”으로 번역되는데, 유아기 시절로부터 우리 안에 저장되어 인생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랑과 진리와 미에 대한 감명을 의미한다. 우리가 태어남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적 악한 경향성들은 어린 시절까지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천국에 가까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가끔은 천사들이 어린아이를 시중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어린아이의 천사는 천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얼굴을 언제나 바라보고 있다.” 진실로 어린아이는 어떤 다른 존재와 다른 특성과 잠재성을 가지고 “영광의 길게 늘어지는 구름들” 안에 온다. 어린아이는 주님만으로부터 선량함과 지혜의 수용능력을 받는다. 참 진정한 의미에서 천국은 어린아이를 태양의 햇빛 처럼 에워싼다. 스위든볽은 아름다운 순진과 신뢰를 어린아이로 설명한다. 우리는 어린아이 시절 속의 순진과 신뢰를 완전하게 잃는 일은 결코 없다. 쌓아두는 곳인 우리의 수용능력은 신성과 내가 친척 관계임을 느끼게 하는 거룩한 장소 이다. 이 거룩한 장소(holy place)는 희생(sacrifice)의 장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영원히 죽지 않는 운명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지식의 영역, 인생의 위대한 영적 전투를 수행하는 시련의 천막이다. 여기에 눈물과 고민과 겟세마니의 피나는 땀 흘림이 있다. “여기서, 역시, 승리하였다”하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기는 우리가 선택했던 삶의 성지(shri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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